석림수필
석림수필石林隨筆
석전石顚 사문沙門 정호鼎鎬 지음
유인有引
어째서 석림수필石林隨筆이라 하였는가. 사문沙門 석전石顚이 근대 선시禪詩에서 일어나는 감흥의 경계에서 느낀 것을 손이 가는 대로 쓴 것이란 뜻이다. 우뚝 솟은 장엄한 산속에서 해질 무렵의 풍경 속에 더욱 심해진 안화眼華가 가시질 않은 채 몇 개월이 지나도록 발걸음을 옮기지 아니하고 산속 암자에 누워서 창가를 바라보며 고요히 생각에 잠기니, 어둡고 고요한 호산湖山과 크고 환한 홍월虹月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항시 아른거린다. 일찍이 이곳에 오고가는 발걸음들과 찾아오는 헛기침 소리의 흔적은 물소리와 산빛 속에 사라진다. 선창한 것은, 어렴풋하게 ‘소매를 나란히 하며 일제히 죽지가를 부르며 지나가니(齊唱竹枝聯袂過) 성안 가득 안개 속 은은한 달빛 마치 양주 같네(滿城煙月似楊州)’라는 시의 글귀요, 이에 화답한 것은, 분명하게 ‘서리 내린 새벽녘에 목어소리 일어나니(霜天欲曉鯨音起) 만 골짜기 울린 소리 어디에서 찾으리오(万壑聲從何處求)’라는 말이로다. 희미한 것은, 위산潙山의 천오백 선중禪衆이요, 경산徑山의 천칠백 법려法侶들이 성대하고 엄정하게 승복(伽黎)을 입고서, 비 그쳐 달이 떠오른 때에 법어法語를 자세히 듣는 듯하다. 이는 가히 선재동자善財童子와 함께 미륵각彌勒閣 앞에 참배하는데, 한 손가락 튕기는 잠깐 사이에 전부터 내려오는 선지식善知識을 터득한 법문法門을 단박에 잊는 것과 같도다. 고요히 생각하건대, 만수삼매曼殊三昧를 받들어 뵙고자 하는 경치와 물상이, 거울끼리 서로 비추고 구슬끼리 서로 밝혀서, 주체와 객체가 거듭하여 서로 막힘이 없는 것이로다. 그러한 것이 바로 수필隨筆의 체제이니, 어찌 반드시 고문古文이 아니어야 되며 어록語錄이 아니어야 된다는 것에 구애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시화詩話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치 한 마리 누에고치의 실마리를 뽑아서 고치의 실이 다하면, 실마리가 이내 끝나는 것과 같으니, 마음속에 하고자 하는 말들을 재미나게 풀어내어 쓰면 그만인 것이다. 어찌 중니仲尼가 이른바 “말한 것이 문채가 나지 않으면(言之不文) 멀리 전해질 수 없다(行而不遠)”라고 한 것만을 본받고자 한단 말인가.
계미癸未년 6월 5일
石林隨筆
石顚沙門 鼎鎬 撰
有引
云何以石林隨筆。沙門石顚隨近代禪詩境。感而筆之者也。自以崦嵫晚景。重添眼華未霽。數月來。跬步不移。頹步臥山窻。而靜思之。則黯憺湖山。輪奐虹月。闔眼也着。開眼也着。曾所往來之步屧。警欬之痕。隱約乎水聲山光之中。所唱也。恍若齊唱竹枝聯袂過。滿城煙月似楊州。所喁也。的歷霜天欲曉鯨音起。万壑聲從何處求。于且依俙者。潙山之千五百禪衆。徑山之千七百法侶。濟濟着伽黎。諦聽法語于雨止月上之際。是可與善財童子參彌勒閣前。一彈指頃。頓忘前來善知識所得法門。悄然而思欲奉覲曼殊三昧之景象。鏡鏡相印。珠珠互映。主伴重重。互相無碍者。與然則隨筆之軆製也。何必拘得非古文非語錄。亦不合詩話云者。直若抽一繭之緒。繭若盡。緒乃已。娓娓書胸中欲言者。足矣。豈欲效仲尼所云。言之不文行也不遠乎哉。
癸未六月五日
1. 한마디 말이 잘못 전해지면 그 피해는 홍수보다도 크다(一言訛傳害溢洪水)
옛날에 위산潙山이 앙산仰山에게 말하길 “다만 자네의 바른 안목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지(只貴子眼正), 자네의 행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네(不說子行履)”라고 하였는데, 근래 광선狂禪에 빠진 무리들은 ‘말하지 않다(不說)’는 말을 바꾸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不貴)’라 잘못 알고 있다. 그래서 선배가 ‘다만 자네의 도안道眼이 밝고 바른 것만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말만을 인용하여서, 마치 음행·살생·절도·망동 등의 못된 짓을 마음대로 저질러도 아무 걸림이 없는 당연한 일이라 여기니, 이것이 바로 ‘삿된 사람(邪人)이 정법正法을 말하면 정법이 모두 삿된 길로 돌아간다’고 한 것이로다. 그리하여 잘못 전하는 말들이 선문禪門에 두루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이에 “자네의 청정한 안목만을 귀하게 여길 뿐, 자네의 행실에 대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는 자들은, 그것을 잘 살피지도 않고, 그저 의심 없이 수긍하며 그림자처럼 따라서, 그 방자한 태도와 행실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선단禪團이 와해되어 그 피해가 홍수의 범람보다도 크다고 하겠다.
내(石生)가 예전에 그 말을 듣고 의심을 품고 말해보겠다. 선사禪師의 공안公案은, 상식을 뒤집어 표현하여서 진리를 보여주는 경우(反常合道)가 많다. 이와는 다르게 동산洞山 화상이 운암雲岩 선사先師의 기일에 제사를 차려놓고 말하기를 ‘나는 선사의 도덕道德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선사께서 나에게 설파해주지 않은 것을 잊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의 뜻이 내심 풀리지 않았다. 이윽고 『전등록』과 『염송』의 본장本章을 상세히 검토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어느 날 위산潙山이 앙산仰山에게 묻기를 “『열반경(涅槃經)』 40권은 얼마가 부처님의 말씀(佛說)이며, 얼마가 마구니의 말(魔說)이더냐?”라고 하니, 앙산이 답하여 말하길 “모두가 마구니의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가 말하길 “이후에 자네를 어찌할 사람이 없음을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하니, 앙산이 말하길 “어느 날 한 때의 일이니, 그 행실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사가 말하길 “다만 자네의 바른 안목을 귀하게 여길 뿐, 자네의 행실은 말하지 않겠네”라고 하였던 것이다.【자세한 해설은 『각운설화覺雲說話』 중에 있다.】 위의 설화는 잘못된 것에 의거하여 반대로 한 듯하니, 이에 대해 분명하게 할 말이 있다.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위산潙山은 무종武宗의 회창會昌 때에 사태沙汰의 화禍를 만나서 머리를 기르고 속세로 내려갔다. 오래지 않아 선종宣宗 대중大中 초에 불교가 부흥이 되자, 문도들이 위산 선사를 모시러 와서 다시 사문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법당에 올라서 예전과 같이 말하길 “만약에 한 마리 물소(水牯牛)를 위산潙山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면, 그 정안正眼이 다시 행리行履의 정당함을 찾은 것이 깊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귀하게 여기는 바가 단지 정안正眼에만 달려 있어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다시 노盧 행자行者에 대해 말하자면, 노 행자는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러서, 바람과 깃발의 공안(風幡案)으로 인하여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니, 인종印宗 법사法師가 삼사칠증三師七證의 고덕 스님(阿闍梨)을 모아서, 행자의 머리를 축발하여 사문이 되었다. 이후 보림사寶林寺로 옮겨가 머무르게 되면서 남종南宗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다만 안목이 바른 것만을 귀하게 여긴 노 행자라면, 어찌 소매를 떨치고 나가서 사냥꾼 무리에 섞이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위의를 갖추어서 승가僧伽에 숫자 하나를 더했겠는가. 또한 행리行履가 정당한 것에 처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 그러한 것이다.
우선 이에 대해서는 미뤄두고(姑舍是) 본장本章에서 “그대의 행리를 말하지 않겠다(不說子行履)”라 분명히 말한 것은, 다만 말의 이치 측면에 나아가서 해석한 것이다. 올라온 위산潙山이 하는 말은 모두 저 앙산仰山의 안목이 바라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앙산이 다시 물어 말하길 “지난번에 제(慧寂)가 드린 것은 한 때의 일이니, 이와 같이 하여서도 행리에 합당합니까?”라고 하니, 위산이 명백하게 말해주기를 “지난번에 허락한 것은 단지 그대의 안목이 바르다는 것이요, 애초에 그대의 행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네”라고 하였다. 이는 안목과 행리를 둘 편으로 분명히 나누어 말한 것이니, 이른바 “화악을 때려 쪼개도 천 봉우리 고요하고(劈開華岳千峰靜) 황하를 틔워 놓아도 한 물결은 맑디맑네(放出黄河一派清)”란 것이로다. 『열반경涅槃經』 전반에 걸쳐 언급한 ‘마구니의 말(魔說)’이란 것은, 단지 불조佛祖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말한 것이지, 제자들의 일상적인 행리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아, 안타깝도다. 소자小子들이여. 높이 날고 멀리 달리지 않을지언정 어찌 세속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 하는가. 행리行履의 종문宗門은 이류異類이며, 또한 능히 세속의 평범함을 따르는 것은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말은 이러한 한계에 있지 않으니, 위산과 앙산이 서로 만나는 접점은 절로 미묘함이 있으니,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然。語不在此限。而且潙山與仰山之相見處。自有微妙。吾不能說焉。
一、一言訛傳害溢洪水
昔。潙山謂仰山曰。只貴子眼正。不說子行履。近有狂禪軰。改不說。訛爲不貴。且引說先軰之只貴道眼明正。以若行履之恣行婬殺盜妄。爲無碍之當然。是可謂邪人說正法。正法悉歸邪者歟。仍以訛傳。通行于禪門。曰只貴子眼淨。不貴子行履處。聽之者。不察。惟惟影從。隨好其放恣行履。禪團瓦解。害甚洪水之濫焉。石生。向來聞之。懷疑曰。禪師公案。有多反常合道者。將無同洞山和尙爲雲岩先師諱日營齋。而語之曰。我不重先師道德。不忘先師爲我不說破者耶。內不釋然。已而詳檢傳燈及拈頌本章。有曰一日。潙山問仰山曰。涅槃經四十卷。多少佛說。多少魔說。仰山答云。摠是魔說。師云。己後無人奈子何。仰山曰。某甲一期之事。行履在什麼處。師云。只貴子眼正。不說子行履(解在覺雲說話中)。右話。若依訛而反之。灼有說焉。單刀直入而語之曰。潙山在武宗會昌之際。値沙汰禍。而長髮下野。未幾而宣宗大中初。復興佛敎。門徒迎師。復沙門而上堂如舊云。以若不妨喚作一頭水牿牛之潙山。正眼復尋行履之正當者深。以所貴處。只在正眼而然乎。更向盧行者而道之。盧行者轉至法性寺。因風幡案。以露眞相。印宗法師。會三師七證阿闍梨。祝行者髮。而爲沙門。移住寶林寺。作南宗開祖。只貴眼正之盧行者。何不拂袖而去襍獵士隊中。堂堂飾圓頂方袍之威儀。加僧伽一數哉。又貴行履處正當然矣。姑舍是。本章明言不說子行履。只就言理路而解之。上來潙山。滿口許佗仰山之眼正。仰山復問曰。向以慧寂之所呈。是一期之事。如是而可合行履與否。潙山明言之曰。向之許佗。只貴子眼正。初不說子行履。判爲眼行之兩便。是可謂劈開華岳千峰靜。放出黄河一派淸者乎。謂是涅槃經全部總爲魔說也。只爲口吞佛祖之所悟處。不可說爲子之尋常行履處矣。嗟嗟小子。寧能高飛遠走。不在隨俗之人間耶。行履之宗門異類。亦能隨俗平常可耳。然。語不在此限。而且潙山與仰山之相見處。自有微妙。吾不能說焉。
2. 한 구절이라도 고치면 그 영향이 매우 크도다(一句改造影響殊重)
현재 유행하는 법보단경法寶壇經은 원元 사문 종보宗寶가 증보하고 교정한 판본이다. 노 행자盧行者가 게송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보리의 나무는 본래 없고 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역시 실상이 아니네 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었거니 本來無一物
어디서 티끌이 일어날까 何處惹塵埃
돈황석실墩煌石室의 사본寫本에는 본래 “불성은 항상 청정하니(佛性常淸淨)”라는 구절이었는데, 그것을 고쳐서 “본래 한 물건도 없었거니(本來無一物)”【송宋 소흥紹興 연간에 흥선사興善寺의 판본부터 고쳐서 간행하였다.】라고 하였다. 단지 시문의 구법句法의 깔끔한 전개를 위하여 이와 같이 고쳐서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는 또한 걸음마다 연꽃 위를 밟고 가는데(步步行躡蓮華上) 나도 몰래 나의 몸이 진흙탕에 빠져 있네(不覺身倒草泥中)라는 것과 같도다. 대개 육조단경 내용 중에 5조祖가 노 행자가 방앗간(碓坊)에서 문답을 나누고 나서, 깊은 밤에 노 행자가 5조의 방으로 들어가, 그 ‘응무소주應無所住’의 기연機緣을 서술하고, 이에 깨달은 바를 서술하여 바치기를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하고, 자성이 본래 생사 없으며, 자성이 본래 저절로 갖춰져 있는 줄 내 어찌 알았으랴”라고 하였다. 이에 5조가 인가印可하고는, 그에게 의발을 건내주고 남쪽으로 가도록 하였다. 법을 전할 때에 이르러서, 어느 날 6조 혜능이 회양懷讓이 ‘설사 하나라고 말씀드린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라고 한 구절에 대하여 묻기를, “그렇다면 앞으로 더 닦고 깨달을 것이 있더냐?”라고 하니, 회양이 답하길 “더 닦고 깨닫을 것이 없지는 않지만, 오염이라 해도 괜찮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6조 혜능이 말하길 “이 오염되지 않는 것은 위로 부처님으로부터 조사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니,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라고 하였다. 또 어느 날 6조 혜능은, 행사行思의 답변인 “성스러운 진리(聖諦)도 오히려 하지 않습니다. 성제도 하지 않았거늘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인해, 그가 깊은 법기임을 알았다고 하였다.
6조 혜능이 깨달은 바를 내보이고 법을 전하는 말을 살펴보건대,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佛性常淸淨)”는 원래 구절은 진실로 옳은 점이 있다. 이에 반해 “본래 한 물건도 없었거니(本來無一物)”라는 구절은 상련上聯에 이어서 입에 붙는 말로 깔끔하게 만들어, 시격詩格에 좋은 시구절을 하나를 합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도법道法의 원묘圓妙함이 아니니, 만약에 “한 물건도 없다(無一物)”라는 구절이 옳다고 한다면, 이는 깨달은 바가 중도에 폐하는 것(半塗) 수준인 것이다. 그 도법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는, 행사行思의 “감정에 해당할 만한 어느 한 법도 없다(無一法可當情)”라는 것은 바른 전법이다. 희천希遷이 “제성諸聖도 흠모하지 않고 기령己靈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로 드러낸 것에, 어찌 회양懷讓을 긍정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청원靑原의 돌도끼(鈯斧子)를 구한단 말인가. 주금강周金剛이 『금강경소金剛經疏』를 불태우고, 고봉孤峯에 앉아서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는 것은 다시 제2의 것이 없음이로다. 이 뿐만 아니라, “본시 한 물건도 없다(本無一物)”는 말은, 대체로 남종南宗에 실망한 무리가 보여지는 것을 등지고서, 스스로 천진함만을 믿고 광성狂性으로 방자한 자들이니, 어찌 그 말에 한정이 있겠는가. 이에 멋대로 말하길 “예를들어 진晋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이나 당唐의 음중팔선飲中八仙의 무리와 같은 이들이 어찌 남종南宗 선문禪門의 선각자先覺者가 아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돈황석실墩煌石室의 판본이 출토되어 실제 근거가 있으니, 후세에는 마땅히 이를 따라 말해야 할 것이다.
二、一句改造影響殊重
現行法寶壇經。元沙門宗寶增正本也。盧行者偈云。菩提本無樹。明鏡亦非臺。本來無一物。何處惹塵埃。墩煌石室寫本。自是佛性常淸淨者。改爲本來無一物也(宋紹興間興善寺本始改也)。但爲句法之爽利。如是而改傳后世。是亦步步行躡蓮華上。不覺身倒草泥中也與。盖惟壇經中。五祖與行者碓坊問答已。夜深。行者入五祖室中。叙其應無所住機緣。呈述所悟云。何期自性本自淸淨。本不生滅。本自具足云云。五祖印可。付衣鉢而南爲。及若傳法。一日六祖。因懷讓之對云說似一物卽不中之句曰。還可脩證否。對曰脩證則不無。染汚則不得。祖曰是此不染汚。從上佛祖亦如是。吾亦如是。又一日六祖。因行思之答云。聖諦尙不爲。落何階級之有。而深器之云。按其六祖呈所悟及傳法之語。佛性常淸淨之元句。諒有是處。本來無一物之造句。承上聯而口氣爽利。合好詩格之一章。然不是道法之圓玅矣。如以無一物爲是。不惟所悟猶在半塗。及其所傳也。行思之無一法可當情。爲正傳。希遷之不慕諸聖不重己靈之呈見。胡不爲懷讓之肯容。而還求靑原之鈯斧子哉。周金剛之燒金剛經疏。坐孤峯而呵佛罵祖者。更無第二乎。不寧唯是。本無一物之語。易爲南宗失意軰之背鏡。自恃天眞而狂性自恣者。何限。蔽諸曰。若晋之竹林七賢。若唐之飲中八仙軰。豈非南宗禪門之先覺者乎。墩煌石室本之出土實據。后當說之。
3. 상승선의 경지에 이르면 시와 선이 하나로다(及到上乘詩禪一揆)
중국 남송 시대 때 엄창랑嚴滄浪의 시화詩話에 시詩는 선禪과 같다고 논한 부분이 있다. 단지 삼당三唐만을 준칙으로 삼아서, “성당盛唐의 시는 마치 대승선大乘禪과 같고, 중만中晚 이하는 소승승小乘禪과 같다”고 하였다. 중국 송宋 때에 이르러서는 논한 것이 없고, 있더라도 거의 성리학에 따른 시론만을 형성하였다. 그러다가 중국 명나라 때 고병高棅이 지은 『당시품휘唐詩品彙』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가詩家가 고금의 본령本領을 초월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며, 오직 당시만을 거론하고 송시에 대한 것은 없어서, 실로 판자를 어깨에 멘 사람(擔板漢)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당시唐詩가 선禪과 같다는 이야기도 또한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깨달은 바의 경지를㘞地 보이지도 못하였으며, 결국 신을 신고서 발을 긁는 것(隔靴搔痒)을 면하지 못하는 꼴이 되었으니, 이는 창랑滄浪이 선도禪道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石生)는 사문沙門이 되고서, 선도禪道를 즐겨 높였으며, 또한 시 짓기를 수십 년간 행하여서, 대략 시와 선에 대한 담론을 할 수 있는 견문이 생겼다. 그러므로 일찍이 초의草衣 선사의 비문 뒷에 대략 시선일규詩禪一揆의 뜻을 서술하였으나, 같은 불도를 닦는 자들과 서로 보며 한 번 웃을 정도의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혹 선백시인禪伯詩人이 각기 그 말류末流에 의거하게 된다면, ‘선禪과 시詩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으며(風馬牛不相及), 그것을 하나로 합하여 보는 자는 미친 것이 아니라면, 멍청한 것이다’라 할 것이다. 이는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에서 언급한 것이니, 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어찌 괴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개 생각건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후에 초당初唐에는 천제天際 선종禪宗이 처음 세워졌고, 중당中唐에 이르면서 마조대사馬祖大土가 강서江西에서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주창하였으며, 석두대사石頭大士가 형양衡陽에서 홀로 현풍玄風을 일으켰으니, 격외格外의 선학禪學이 크게 이루어졌다고 할 만하였다. 한편 시율詩律에 있어서는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 이르러서 또한 성하였다고 할 만하였다. 왕맹위유王孟韋柳가 극도의 담아함으로 도에 합치하는 경향의 시를 이어었으니, 실로 변주(汴州)ㆍ항주(杭州) 양송兩宋 때 염송拈頌 선가禪家의 운격韻格을 열게 되었다. 대략 몇 수의 시를 예로 들어서 밝히면, 다음과 같다.
왕우승(王右丞 : 王維)
사람 한가한데 계수나무 꽃 떨어지고 人閒桂花落
밤은 고요하고 봄산은 비었구나 夜靜春山空
달빛이 비추어 산새를 놀래키니 月出驚山鳥
때때로 봄 골짜기에서 울어대네 時鳴春澗中
맹양양孟襄陽
올린 배 타고 몇 천 리를 오면서도 挂席幾千里
이름난 산들 모두 보지 못했네 名山都未逢
심양성 바깥 양자강 변에 정박하고 泊舟潯陽郭
비로소 여산의 향로봉을 바라보네 始見香爐峯
동림사가 여기서 가까운데 東林不可見
해가 저물어 종소리만 들려오네 日暮但聞鐘
위소주韋蘇州
한 표주박의 술을 가지고 가서 欲持一瓢酒
멀리 비바람 치는 밤을 위로하고 싶으나 遠慰風雨夕
떨어진 잎새만 빈산에 가득하거니 落葉滿空山
그 어디서 종적을 찾는단 말인가 何處尋行跡
유유주柳柳州
어부는 저녁에 서암 곁에서 잠을 자다가 漁翁夜傍西巖宿
새벽엔 맑은 물 길어 초죽으로 밥을 짓네 曉汲淸湘燃楚竹
안개 걷히고 해가 떠도 사람들은 간데없고 煙消日出無人見
뱃노래 한 곡조에 산수가 다 푸르르네 欵乃一聲山水綠
위의 시들은 자연주의 시풍(天籟詩)을 이루어서 선시의 시격을 도모하지 않았으나, 진실로 임제臨濟 문정門庭의 사조용四照用 등의 법과 합치된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마조馬祖 대사가 제자들과 함께 달 밝은 뜰 앞에 모여 있다가, 돌아보며 말하길 “달이 참으로 밝은 때에 어찌 그 뜻을 말하지 않는 것이냐?”라고 하자, 서당 장西堂藏 선사가 이르길 “참으로 공양하기 좋은 때입니다”라고 하였고, 백장 해百丈海 선사는 “참으로 수행하기 좋은 때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남전 원南泉願은 옷소매를 떨치고 바로 가버렸다. 이에 마조 대사가 말하길 “경經은 장藏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해海에게 돌아갈 것이며, 오직 보원普願만이 홀로 사물 밖으로 초탈했구나”라고 하였다. 이러한 마조 대사의 기상氣象은 맑은 물결(淸波)조차 일으키지 않아서 그 뜻이 저절로 남들과 다르니, 『시품詩品』에 “한 글자도 쓰지 않고서 풍류를 모두 얻었구나”라고 한 것과 그윽하게 합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말하길 “상승선에 다다르면(及到上乘) 시와 선이 하나다(詩禪一揆)”라고 한 것이다.
송宋·원元·명明·청淸 시대 같은 경우에는 혹 그 시품이 오히려 약간 다르지만, 상승上乘의 시詩·선禪을 어찌 성당盛唐만을 추중한단 말인가. 창랑滄浪의 무리는 그것을 미처 몰랐다 해도, 소동파가 지은 <나한송羅漢頌>은 구절마다 진제의 면모를 드러냈고, 왕양명王陽明의 시 “은자는 달이 뜰 때마다 홀로 거니는데(幽人月出每孤往) 잠자던 새들은 빈산에서 일시에 지저기네(棲鳥山空時一鳴)”라는 구절과 “밤은 고요한데 바닷 물결은 삼만리(夜靜海濤三萬里) 달 밝은데 석장 날려 바람 타고 내려서네(月明飛錫下天風)”라는 구절은 어찌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하지 않으리오. 그렇기 때문에 원자재袁子才 가 또한 말하길 “강과 바다가 비록 크지만, 소상瀟湘이 없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 아래의 것을 다 거론하면 말이 길어지니, 그것은 후일에 맡기노라.
三、及到上乘詩禪一揆
南宋嚴滄浪詩話。有論詩如禪。而只以三唐爲凖。謂盛唐詩如大乘禪。中晚已下。如小乘禪。及宋也。無論焉。言或成理。而乃開高▼(禾+秉)撰唐詩品彙之先河者也。然未達詩家超古今之本領。惟唐無宋之見。實攸擔板漢者非與。且其唐詩如禪之話。亦似影響。而不見㘞地之所悟。終不免隔靴搔痒者矣。滄浪不知禪道故已。石生爲沙門。而悅禪道尙矣。亦從詩班輒數十年。粗有談詩禪之管見。故曾於草衣禪師碑后。畧叙詩禪一揆之旨。然可與同道者相見一笑而已。如或禪伯詩人各據其末流。謂禪與詩。猶若風馬牛不相及。而爲合一揆者。非狂則愚。此孫過庭書譜所云。彼不知者。曷足怪焉。蓋惟佛敎入中國以後。初唐。則天際禪宗始建。至若中唐。馬祖大土。唱大機大用於江西。石頭大士。獨造玄風於衡陽。格外禪學。可謂大成矣。抑于詩律。則至若開元天寶中。亦云盛矣。李杜大家以外。王孟韋柳。繼極澹雅合道之調。寔開汴杭兩宋拈頌禪家之韵格。略揭數章以明之。王右丞之人閒桂花落。夜靜春山空。月出驚山鳥。時鳴春澗中。孟襄陽之挂席幾千里。名山都未逢。泊舟潯陽郭。始見香爐峯。東林不可見。日暮但聞鐘。韋蘇州之欲持一瓢酒。遠慰風雨夕。落葉滿空山。何處尋行跡。柳柳州之漁翁夜傍西巖宿。曉汲淸湘燃楚竹。煙消日出無人見。欵乃一聲山水綠等。天籟詩成。不謀諸禪。而允合臨濟門庭之四照用等法也。一夕馬祖與弟子等。會于明月堂前。顧謂曰。月正明。盍言其志。西堂藏云。正好供養。百丈海云。正好脩行。南泉願。拂袖以去。馬祖曰。經入藏。禪歸海。惟普願。獨超物外。這馬祖氣象。不動淸波。意自殊。悠然合詩品之不著一字盡得風流者。非耶。余故曰。及到上乘。詩禪一揆。及若宋元明淸之代。詩或品尙小異。然上乘詩禪。何獨專推于盛唐。滄浪軰不及知之。東坡羅漢頌句句見諦。王陽明詩之幽人月出每孤𨓹。好鳥山空時一鳴。夜靜海濤三萬里。月明飛錫下天風者。得不爲最上乘禪乎。是以袁子才亦云。江海雖大不無瀟湘也。然而向下文長。付在佗日。
4. 추사가 담계를 광대교주로 추중하다(秋推覃磎爲廣大敎主)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만호晚號가 완당阮堂으로, 조선 정조正祖 병오(1786)년에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 초정楚亭은 근세의 4대 명문가 중 하나로, 북학北學에 매우 해박하고 조예가 깊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업을 받은 기초 학문이 이로부터 전수가 되어서, 그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으며, 다른 양반집[紈袴] 자제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나이 24세 되던 기사(1809)년에 단지 진사進士 출신으로, 아버지 유당酉堂을 따라서 중국 연경燕京의 사신 행렬에 함께하였다. 중국의 명가名家를 두루 방문하는 가운데, 오직 원대芸臺 원운阮元과 담계覃磎 옹방강翁方綱과는 매우 깊은 유대를 가지고 교유를 맺었으며, 마침내 담계의 문하에 들어가 예물을 올려 그의 제자가 되었다. 추사가 처음 담계를 배알한 것은, 마치 소자유蘇子由가 경사京師에서 과거급제를 하고서 육일 거사六一居士를 찾아뵙고 절을 올린 것을 방불케 하였다. 생각해보자니 천하의 문장文章이 이 경상景象에 모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부터 3년 후인 임신(1812)년 가을에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북경(薊北)에 갈 때에 추사가 담계를 소계하면서 그를 지극히 존칭하며 ‘광대교화주廣大敎化主’라고 하였으며, 옹담계 선생 한 사람을 찾아 뵙는 것이 그 이외에 다른 명가를 다 만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추사의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담계는 관직의 등계가 각학閣學에 이르렀고, 일곱 번 전문형典文衡을 지냈다. 나이가 70여 세에 이르자, 벼슬에서 물러나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에 머물렀다. 당시 세간의 뛰어난 유자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어서, 그 명예와 지위가 높이 드러났다. 청조淸朝 건륭·가경(乾嘉) 연간에 문운文運이 융성해지기 시작하여서, 학문과 문장을 두루 갖춘 명가名家가 당송唐宋 때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담계를 평가하며 말하길 “담계는 이학理學 분야에 있어서는 논하기에 부족하고, 오직 사장詞章에 있어서는 명가名家라고 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문文은 동성파桐城派나 양호파陽湖派에 미치지 못하고, 시詩는 심귀우沈歸愚와 원袁·조趙·장蔣 3가家를 넘어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담계의 시평은 신성파新城派의 사조를 내용이 없고 허술하다고 여겼으며, 특히나 ‘기리肌理’라는 두 글자를 들어 시평의 기준으로 삼아서, 실제를 고증하여서 문학의 허구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문의 구절마다 실제를 검증하는 것은 또한 시가詩家의 바른 규범이 아니니, 마치 박사博士가 경經을 해석하길 마음에 얻는 것이 없이 하는 것과 같이 한 것이다.
오직 추사만 그를 돈독히 좋아하였으니, 그가 말하길 “옹담계의 『복초재집復初齋集』은 과연 읽기 어려운 책이다. 경예經藝·문장文章·금석金石·서화書畫를 통틀어 한 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니, 식견이 얕은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유의하여 읽어가노라면 노선路線과 맥락脈絡이 찬연히 갖추어 나타난다. 마치 간과諫果가 단 맛이 돌아오고 감자甘蔗가 점점 맛이 좋아지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추사가 담계의 안방 아랫목(室奧)에 너무나 깊이 들어가 있으니, 천 명의 성인이 아무리 불러도 되돌릴 수 없음을 알 만하다. 고증학에 있어서 담계의 학문적 깊이를 보더라도, 또한 원운대阮芸臺·전신미錢辛楣·손이양孫詒讓 등의 대가들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였다. 생각건대 담계는 다만 금석학金石學과 서도書道에 있어서는 청조淸朝 4대가 중에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추사가 이에 대해 말하길 “담계 노인의 정서正書는, 솔경率更에게서 그 둥근 곳을 얻고, 하남河南에게서 그 예隸의 뜻을 얻었으며, 팔만 권 금석의 기운이 팔목 아래로 쏟아져서 왕성하게 서가書家의 용과 코끼리가 되었다. 당唐으로 말미암아 (晉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이를 버리고는 딴 것이 없으며, 석암石菴이 조금 비할 만하고 성친왕成親王 이하는 다 일주一籌를 사양하게 된다. 고동선생古東先生이 이를 들어 근일 서법의 제일이라 여기는데, 이는 천하의 정론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서가에는 또한 등완백산인鄧完白山人이 있었으니, 해서와 행서에 있어서는 그 품격을 논하지 않더라도, 전서와 예서 같은 경우에는 독보적이라 할 만하였다. 이는 담계를 포함한 4가家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니, 『광예주집廣藝舟集』에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리고 신자하申紫霞는 추사보다 나이가 17살이 많았으니, 담계 문하에 들어가서 제자가 되었을 때 사제 간의 나이 차이가 3살에 불과하였는데, 함께 성추하벽星秋霞碧 4제弟의 반열에 들어갔다. 이는 마치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라는 칭호와 같으니, 참으로 보소재寶蘇齋를 그대로 본받은 것이었다. 만약 추사의 문학文學를 평가한다면, 문文은 대산臺山 김매순과 연천淵泉 홍석주에 미치지 못하고, 시詩는 사가四家나 자하紫霞에 뒤쳐진다. 그 서독書牘 서체는 소식·황정견(蘇黄)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제발題跋의 문장은 동진東晉의 도연명 문하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특히 금석서도金石書道는 담계로부터 가르침을 이어 받았다. 능히 구양수·저수량(歐褚)의 사이를 드나들 경지에 이르러서, 실로 반도의 서학대가書學大家라 할 만하니, 이는 담계로 부터 사사 받은 은혜가 깊다고 하겠다. 도한 보소재寶蘇齋 풍류와 운법에 영향을 받고, 불교 정전(內典)에도 마음 깊이 익혔으며, 선가禪家 어구語句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백파白坡 선사나 초의草衣 선사와 같은 스님과도 친우의 관계를 맺으니, 이는 실로 소황蘇黃의 유풍을 방불케 하였다. 그 문생인 강추금姜秋琴이 추사의 제문祭文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 우리 스승님을 世以吾師
노파에게 비교하기를 比於老坡
신묘함은 못 미친 듯하나 神似不及
품격은 넘어섰다 하네 而品則過
과주의 눈내리는 날 果州之雪
청계의 언덕에서 淸磎之阿
세 번 호곡하고 나오니 三號而出
산하가 다 호탕하네 浩蕩山河
그 풍운風韻을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영도(瀛島 : 제주도)로 귀양을 가고 북쪽으로는 청해靑海로 은거를 하였으니, 그 생애의 말로가 동파東坡가 겪은 만년의 처지와 같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동파가 바다를 지나면서, 자신의 초상화에 제문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요 心似已灰之木
몸은 매이지 않은 배로다 身如不繫之舟
네 평생의 공업이 무엇인가 問汝平生功業
황주와 혜주, 담주라네 黃州惠州儋州
추사와 담계에 관한 것이 어찌 이뿐이겠냐만은, 노파老坡가 지은 초상화의 제문을 끝으로 이만 줄이려 한다.
四、秋推覃磎爲廣大敎主
金秋史正喜。晚號阮堂。生乎朝鮮正祖丙午。童年。受業于朴楚亭齊家之門。楚亭者。近世四名家之一。而博雅於北學。故其所受基礎學問。盖有自來。發足不凡。異佗紈袴子弟。年二十四己巳。但以進士出身。隨家嚴酉堂。爲燕京使後。博訪名家中。惟以阮芸臺元翁覃磎方綱。爲深知結交。然止竟執贄於覃磎門下。秋史之始見覃磎處。彷彿乎蘇子由得第于京師。拜見六一居士。想見天下文章。盡在於此之景象。是故。粵三年壬申秋。申紫霞緯。以書狀官。出使薊北。秋史紹介覃磎。極稱其廣大敎化主。見訪一翁以外。不足多於諸名家云。是秋史之主觀爾。夫覃磎也。官階閣學。七典文衡。而年今七旬餘。退老於七十二鷗草堂。當世碩儒多出其門。名位高顯。然淸朝乾嘉之間。文運方盛。彬彬名家。凌過唐宋以上。故有傍評覃磎者。云覃磎。於理學之藪。不足論。惟其詞章。足爲名家。而文不及桐城與陽湖派。詩遜于沈歸愚及袁趙莊三家。惟覃磎詩也。病夫新城派之流爲空疎。特拈肌理二字。欲以徵實救虛。然言言徵實。亦非詩家正軌。猶如博士解經。苦無心得已。惟秋史篤好之。其曰。復初齋集果難讀。經藝文章。金石書畫。打成一團。非淺人所得易解。然細心讀過。線路脈絡。燦然具見。猶如諫果之回甘蔗境之漸佳耳。其所深入覃磎之室奧。千聖喚回難得。可知已。若其考證之邃學。亦不及阮芸臺錢辛楣孫詒讓等大家者。遠矣。惟覃磎。特以金石學書道。占得淸朝四大家之首位。秋史有曰。覃磎老人。正書。於率更得其圓處。於河南得其隸意。八萬卷金石之氣。注於腕下。蔚然爲書家龍象。由唐入晋之徑路。舍是無二。石菴。差可比擬。成親王以下。皆遜一籌。古東先生。以爲近日書法之第一。是天下之定論耳。然當時書家。亦有鄧完白山人。楷行。則莫論其品。而篆若隸。可爲獨步。有過於覃磎等四家之上。廣藝舟集云爾。且申紫霞。長於秋史十七年。執贄覃磎之門者。差後三歲。俱入星秋霞碧四弟之班。擬如蘇門四學士之稱。眞寶蘇齋之受影矣。若評秋史之文學也。文不倫淵泉臺山。詩有遜四家及紫霞。其爲書牘。浸沁蘇黄。題跋欲窺東晋門風。特以金石書道。傳鉢于覃磎。有能出入歐褚之間。實爲半島書學大家。是其受覃磎之恩。深也歟。又被寶蘇齋流韵。潜心內典。好禪家語句。又與白坡草衣諸上人。爲空門之友。寔仿蘇黃之餘風。其門生姜秋琴。祭文曰。世以吾師。比於老坡。神似不及。而品則過。果州之雪。淸磎之阿。三號而出。浩蕩山河。不惟襲其風韵。南遷瀛島。北竄靑海之末路生涯。有似東坡之晚景。東坡過海。而自題像曰。心似已灰之木。身如不繫之舟。問汝平生功業。黄州惠州瓊州。且有秋史與覃磎。豈唯是哉。及夫老坡自題像。觀止於此。
5. 완당이 백파를 대하는 것에 처음과 끝이 서로 모순된다(阮對白坡始終似矛盾)
상인上人 백파白坡와 초의草衣은 모두 완당阮堂가 방외方外에서 친교를 맺은 분들이니, 초의는 완당과 병오(1786)년 생 동갑이고, 백파는 그보다 19살이 더 많다. 기연機緣이 어그러져 서로 헤어지게 되어서 결국 침상을 바꾸어 가까이 지내며 온정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서찰(魚雁)로만 서너번 왕복할 수 있었을 뿐이다. 백파白坡가 열반한 이후에는, 완당이 “대기대용大機大用의 비문”을 짓고, 그 글씨를 썼다. 그런데 예전 서찰 중에 말의 내용과 비문에 있는 말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다.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완당이 영도瀛島에 귀향을 가서, 계묘(1843)년 4월에 <선문십오조망증禪門十五條妄證>이란 글을 지어서 영구산 구암사에 주석하던 백파에게 편지로 보냈는데, 그 글이 장황하고 번잡하여서 일일이 거론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완당이 유배지에서 홀로 무료하게 보내던 중에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禪에 대해 설하며 황당한 말로 묻는 글을 지어서, 백파가 어떻게 답을 할지 떠본 것이니, 진실로 의도를 가지고 백파의 설을 논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서, 이와 같이 한 것이다. 서면 상으로 내보인 것을 볼 거 같으면, 실상을 징험한 것은 극히 적은데, 망령된 것을 드러낸 것은 절반이 더 되었다. 백파가 그 말이 망령된 것을 알고서도 조목마다 답변을 하였으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꽂는 격(圓鑿方枘)이니, 어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문답이 번잡하여, 진정 놀이삼아 펼친 논법에 불과하여서, 후세에 몇 글자라도 교훈으로 전하기에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서찰의 끝맺는 말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백파 노인이 이 서찰을 보자, 분기가 산더미처럼 치밀어오르니, 세 번 힘껏 멀리 뛰고 세 번 힘껏 높이 뛰었다’고 여긴다”라고 하였다. 이는 높은 베개를 베고 누워서 어린 아이 장난을 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 웃음을 머금은 바이니, 하나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요, 그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자만하여 태만한 습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완당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서찰에 이르기를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는, 산을 넘어뜨리고 바다를 거꾸로 돌릴 만하지만, 오히려 동향광董香光의 면면약존緜緜若存에 못 미치니, 이러한 경지에 있어서는 모르는 자와 더불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공력으로써 왜 형산衡山이나 지지枝指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고 우뚝히 바로 산음山陰에 접할 망상을 일으켰는지, 이 역시 동인東人들의 공연히 높은 척하는 습기習氣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서찰의 끝 구절을 비교해 보자면, 그 기상은 같지 않으나, 동인東人이 교만한 습기를 가졌다는 것은 한결 같은 의견이니, 이는 스스로 자신이 교만한 습기가 있다고 주창한 것이로다.
임자(1852)년 백파가 열반한 후에, 병진(1856)년 3월에 이르러 백사대선사비白坡大師碑를 지어 말하길 “특히 사람들이 그 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ㆍ활ㆍ기ㆍ용을 들어 백파의 구집(拘執)한 착상(着相)으로 삼는 것은 이야말로 다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격이다. 이 어찌 백파를 안다 할 수 있으랴.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고 변란(辨難)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한 곳은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아무리 만 가지로 입이 닳게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다 해오(解悟)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사(師)를 일으켜 와서 서로 마주앉아 한번 웃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완당이 청계산 아래에 있을 때에, 연경燕京의 성두도인雪峯道人이 지두화指頭畫로 그린 달마상達摩像을 가지고 仍作白坡像。屬之靈龜山中。而頌曰。
멀리 바라보면 달마와 같은데 遠望似達磨
가까이 보면 바로 백파로구려 近看卽白坡
차별이 있음을 가지고서 以有差別
둘이 아닌 문에 들어갔네 入不二門
흐르는 물은 오늘이라면 流水今日
밝은 달은 전신이로세 明月前身
한 사람의 백파白坡에 대하여, 혹은 성내기도 하고 혹은 기뻐하기도 하니, 모순과도 같다. 완당阮堂을 옹호하여 해석한다면, 완당은 바다와 같이 넓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터득하여서 성내거나 좋아하는 것이 모두 불사佛事라고 할 것이요, 완당을 비판하여 해석한다면, 중간에 이에 대해 상당부분 알려준 자가 완당으로 하여금 철저히 반성하게 하여서 처음과 끝에 변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어찌 그렇단 말인가.
五、阮對白坡始終似矛盾
上人白坡。與草衣。俱爲阮堂之方外交者。而草衣與阮堂。同是丙午生也。白坡長其十九歲也。以機緣睽違。竟不能借榻叙蘊。只以魚雁。往復數四。及若白坡沒后。阮堂爲作大機大用碑文。而書之。其於平昔書中語意。及若碑文語意。似乎始終矛盾者已。蓋謂院堂謫居瀛島之癸卯四月。以禪門十五條妄證書。寄于龜山之白坡。其書煩冗。難以枚擧。槪惟阮堂。孤坐無憀之中。排悶無路。故爲說禪說慌之問書。要見白坡之答得如何。寔不欲有意刺破。而如是。然以若書面見之。徵實者殆少。而徵妄者過半。白坡知其妄說。而條條答辯。然圓鑿方枘。豈能中難也。問答紜紜。諒不過游戱論法。不足爲後世垂訓之有數文字矣。獨其書結語曰。人皆以爲白坡老人。及見此書。氣踊如山。距踊三百。曲踊三百。此高枕臥看兒戱一法。其所含笑。而故作游戱語歟。不爾。披露貢高之慢習也。阮堂嘗與人書云。韓石峯摧山倒海之氣。反不如董香光綿綿若存。胡不屈膝於文衡山。妄欲躐等山陰磎徑。此東人貢高之習氣云。較此書末對。象雖不同。東人貢高之習氣。一也。是自唱自家貢高之習氣歟。及乎壬子。白坡沒后。至丙辰三月。撰白坡大師碑。有曰。特人不知此義。妄以殺活機用。爲白坡拘執著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與白坡。頗有往復辨難者。卽與世人所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雖萬般若口說。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先是。阮堂在淸溪山下。以燕京雪峯道人指頭畫達摩像。仍作白坡像。屬之靈龜山中。而頌曰。遠望似達摩。近看卽白坡。以有差别。入不二門。流水今日。明月前身。對一白坡。而或嗔或喜。似乎矛盾者。和阮堂而觧之。阮堂深入佛海者。以嗔以喜。俱爲佛事。彈阮堂而解之。中有多少紹介者。令阮堂浸膚受。而變換始終云。豈其然乎。
6. 세 사람이 마주벌려 앉아서 각기 삼교를 조종으로 삼다(鼎坐詩班各祖三敎)
영재寧齋 이건창의 시화詩話에 이르기를 “근세의 시인 가운데 감산甘山의 작품이 단연 최고이다. 우리 종친인 오당峿堂 징군徵君은 강고환姜古歡과 함께 한 시대의 명가名家이다. 감산은 선학仙學에 심취하였고, 고환은 불리佛理에 뛰어났으며 오당峿堂은 오로지 성리학(洛閩)의 가법家法만을 고수하여서 마침내 조정의 부름(弓旌之招)을 받게 되었다. 그 시에 있어서는, 또한 아름다운 시문(菁華)을 널리 수집하여, 말과 이치가 모두 뛰어나니, 거의 정절靖節이나 자앙子昂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견문으로 봐서는 앞의 평가와 조금 다르다. 오당峿堂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인으로, 성리학의 가법을 지켜서 조정으로부터 진선進善을 내려받았다. 그 제자 윤병수尹秉綬·신정희申正熙 등이 그 경학의 스승을 잘 달래고 권하여서 명직名職에 천거하였는데, 연로한 나이를 핑계로 물러나서 상당산上黨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이오당李峿堂의 이름은 상수象秀이다. 그는 원래 파주坡州에 있는 시골 글방의 생원生員이었는데, 잠계梣磎 윤정현尹定鉉에게 찾아가서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잠계의 손자인 병수秉綬과 신위당申威堂의 맏아들 정희正熙을 비롯하여 기타 이름난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들에게 경학經學을 가르쳤다. 오당峿堂은 일찍이 시문을 익혀서 보통 수준을 멀리 넘어섰다. 그래서 병수秉綬이 오당의 시문을 가지고 그 할아버지 잠계공梣磎公에게 바쳤다. 잠계공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말하길 “오당峿堂은 우리들의 스승이로다, 너희의 스승일 뿐만이 아니구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오당峿堂은 잠계공에게 인정을 받아서 서로 진정 마음을 나누는 교우를 맺게 된다. 잠계梣磎는 정조正祖 명신名臣 윤행임尹行恁의 손자이다. 문장과 학문이 모두 뛰어났으며, 그 품계가 보국수록대부(輔國)에 올랐다. 오당峿堂이 그에게 예물을 가져와서 제자의 예를 행하자, 그 문인들이 서로 그를 치켜세워주고 추천하여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그리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마침내 창창대로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산림에 은거하는 징군徵君이 되었으니, 그는 태생부터 시인詩人이었던 것이다. 매천梅泉이 애사哀詞에서 말하길 “유산의 가곡이요 진천의 문장이여(遺山歌曲震川文) 강학하는 사람 중에 익히 없던 인물이네(講學家中未古聞)”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당峿堂의 <중향초에 이어 낙산사루에 올라(續衆香艸登洛山寺樓)>라는 시를 보고는, 감탄하며 말하길 “나는 죽어서 천계天界의 도산(道山)에서 신선이 되길 원하지 않으니, 다만 흰 갈매기가 되어서 훨훨 날아 낙산사와 경포대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이면, 만족하노라”라고 하였다. <유점사 산영루楡岾寺山影樓>의 좋은 구절에서는 “부처께서 서쪽으로 온 까닭이 무엇인고(如何是佛西來意) 높은 누각 홀로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네(獨上危樓看落暉)”라 하였고, <만물초萬物肖>의 좋은 구절에서는 “산봉우리 서로 솟아 싸울듯이 흘겨보네(峯驚拔地爭相睨) 성난 바위 불쑥 올라 하늘 위를 날 듯하네(石怒騰空盡欲飛)” 등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성리학의 가법만을 구수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시 구절이란 말인가. 펄럭이는 날개를 등에 달고 신선이 된 이의 신품神品이며 시선詩仙이로다. 이번 여정에 표훈사表訓寺에 들어갔는데, 비 때문에 길이 막혀 3일 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때 우연히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을 만났는데, 처음 보았는데 구면인 듯 웃고 이야기하며 풍류를 즐겼다. 속세 밖의 경계에서 거닌 것이니, 어찌 두건을 쓰는 자의 습기習氣가 남아 있어서 손발을 드러낸 것이겠는가. 이것에서 오당峿堂이 천생 시인의 성품을 타고난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감산李甘山은 고려 이백운李白雲의 먼 후예로서, 두 사람은 시에 있어서 각기 뛰어난 품격이 있었다. 백운白雲은 평담平澹을 주장하였고, 감산甘山은 기초奇峭를 중요하게 여겼다. 단학丹學에 매우 심취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룬 것은 없었다. 이공과 강공의 나이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시에 있어서는 둘 다 신선의 흥취와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하는 성향이 있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붉은 해가 조선팔도에 일렁이고 紅日盪朝鮮
금강산은 바다와 하늘에 솟았네 金剛出海天
개는 복숭아꽃 이고 나오고 犬戴桃花出
꾀꼬리는 폭포수에서 지저귀네 鶯臨瀑水啼
새가 쪼는 소리 빈 산에 울리고 鳥啄空山響
구름은 번쩍이는 오랜 돌로 돌아가네 雲歸老石明
위와 같은 싯구들은 청아하면서도 고상하다. 기타 웅혼雄渾·침울沈欝·함축含蓄 등은 대가들의 정식 규정에 따르면, 두 선생에 비하여 오히려 부족하다. 고환古歡 강위姜瑋는 영재寧齋 이건창이 스스로 시詩 제자라 하였다. 유연幽燕에 이르러 축대 공사臺役를 행할 때 그를 초빙하여 시 스승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돌아와서는, 시를 짓는 것이 약간 교정되었으니, 이에 대한 것은 실제로 기록된 사실이다. 매천梅泉의 애사哀詞에 이르길 “구태 초탈한 두 눈동자는 만리에 다 통하고(局外雙瞳通萬里) 글을 강론한 한 치 혀는 뭇 선비를 꺾었었지(書中寸舌破群儒)/ 문장에 깨달음 있어 결국 부처에 귀의했고(文章有悟終依佛) 경세제민 여의치 않아 만년엔 시에 의탁했네(經濟違心晚託詩)”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진실한 표현이겠는가(豈其眞相乎)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이가 그 초상화에 제문을 지어 말하길 “탐라의 돛단배 그림자에 노인이 괴이여기고(耽羅帆影老人怪) 지달의 나막신 소리에 천불이 놀라네(枳怛屐聲千佛驚) 세간에 도를 아는 최고의 영웅호걸이(知道世間最雄傑) 늙은 몸으로 돌아와 서생을 가벼이 보네(龍鍾還是藐書生)”라고 하였으니, 그의 행실과 모습을 잘 형용하였다.
스스로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서 이르길 “몇 번인가 중이 되려하다가(幾度欲爲僧) 중을 보니 마음 다시 느슨해지네(見僧心更慢) 문득 상백봉을 바라보고(忽瞻常白峯) 대나한께 고개를 숙이네(稽首大羅漢)”라고 하였으니, 시가 비록 고상하고 옛스러우나, 이 얼마나 협소하단 말인가.
<금강경야보송金剛經冶父頌>에 붙이는 글에 이르길 “유교경전 색과 냄새에 여여함을 증득하고(儒經色臭證如如) 선백의 껄껄 웃음에 어색한 회 화목해지네(禪伯呵呵和會疎) 팔만의 대장경 가운데 진실의 상(八萬藏中眞實相) 희노애락 드러냄은 애초부터 없던 일이네(只揚喜怒未生初)”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불리佛理에 뛰어난 자의 유형이란 말인가. 다만 그 체구軆句만을 다루었고, 그 용구用句를 보이지 않았으니, 오히려 야보冶父에게 부끄럽도다.
<야보송冶父頌>에 이르기를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鶯吟燕語皆相似) 전삼삼과 후삼삼은 묻지 말지어다(莫問前三與后三)/ 도화는 붉고 오얏꽃은 희며 장미꽃이 붉은 것을(桃紅李白薔薇紫) 동군東君에게 물어보매 다 알지 못하더라(問著東君自不知)”라고 한였으니, 이는 크게 사용하거나 전체를 드러내지 않고서 곧바로 무한한 것을 얻은 것이로다.
그 만경晚景을 읊은 구절에 “우주에 홀로 와서 다시 홀로 가지(宇宙獨來還獨去) 문장이 치우침이 적기도 하고 또한 많기도 하네(文章褊少亦褊多)”라고 하였는데, 상구上句가 어찌 속된 것에서 벗어나서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는 모습이며, 하구下句는 문장의 많고 적음을 감탄하고 있으니, 불을 지피며 사는 세속인의 습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 저 문장은 물외을 알지 못하고 마구 떠들었으니, 그저 한바탕 헛웃음만 날 뿐이로다.
六、鼎坐詩班各祖三敎
寧齋詩話有云。近世詩人。唯甘山李黃中之作。爲最高。吾宗峿堂徵君。與姜古歡。亦一時之名家也。甘山邃於仙學。古歡長於佛理。而峿堂專守洛閩家法。終至弓旌之招。至其詩。則又博采菁華。辭理俱勝。大似靖節子昂。然以余所見聞。小異於前。峿堂。是天禀詩人也。守洛閩家法。而至徵進善者。其弟子尹秉綬申正熙等。慫惥其經學之師。以薦名職。而投老上黨山下者也。李峿堂象秀。元是坡州村塾生員。來聘尹梣磎定鉉之塾師。梣溪孫秉綬。申威堂胤正熙。其佗名宦家子。受經學已。峿堂早嫺詩文。逈出常品。故秉綬。將其詩文。呈其祖梣磎公。梣磎驚異之曰。峿堂。是吾軰師。非唯汝等師云。故峿堂。得與梣磎。爲知己之交。梣磎者。正祖名臣尹行恁之孫。而文學俱勝。已陞輔國之階也。是以峿堂。執贄。行弟子禮。而其門人等。互相吹嘘。出身進士科。擬欲登第于文科。竟爲進顯一路。而至若山林徵君。然本色詩人也。梅泉哀詞有曰。遺山歌曲震川文。講學家中未古聞。及見峿堂之續衆香艸。登洛山寺樓。喟然嘆曰。吾之后身。不願天界道山。但作白鷗。栩然朅來于洛山鏡浦之間。足矣。楡岾寺山影樓佳句云。如何是佛西來意。獨上危樓看落暉。萬物肖佳句云。峯驚拔地爭相睨。石怒騰空盡欲飛等云者。豈守洛閩家口氣。翩若羽化之神品詩仙矣。是行。入表訓寺。殢雨三日。偶逢趙又峰熙龍。一面似舊。談笑風流。消搖于物外。豈有頭巾習氣。而露出手脚哉。於斯。盡見峿堂之天然詩性本色已。李甘山者。高麗李白雲之遠裔。詩各殊品。白雲主平澹。甘山主奇峭。篤深丹學。而竟無成焉。年稍長於李姜二公。而詩則褊於仙趣佳句。有云。紅日盪朝鮮。金剛出海天。犬戴桃花出。鶯臨瀑水啼。鳥啄空山響。雲歸老石明等。淸且高矣。其佗雄渾沈欝含蓄等。大家正規。猶比二公之不足矣。惟其姜古歡瑋者。寧齋。自署爲詩弟子。至幽燕行臺役也。聘爲詩師。自茲以還。作詩之見稍正。是爲實錄也。梅泉哀詞有曰。局外雙瞳通萬里。書中寸舌破群儒。文章有悟終依佛。經濟違心晚託詩。豈其眞相乎。金山泉命喜。題其像曰。耽羅帆影老人怪。枳怛屐聲千佛驚。知道世間最雄傑。龍鍾還是藐書生。是善形容行與貌。而止。自登白頭絕頂云。幾度欲爲僧。見僧心更慢。忽瞻常白峯。稽首大羅漢。詩雖高古。趣何狹少。題金剛經冶父頌曰。儒經色臭證如如。禪伯呵呵和會疎。八萬藏中眞實相。只揚喜怒未生初。是其長於佛理者類歟。然但領其軆句。不見其用句。猶有愧於冶父矣。冶父頌云。鶯吟燕語皆相似。莫問前三與后三。桃紅李白薔薇紫。問著東君自不知等。是不爲大用全彰。而直得無限者與。及其晚景句云。宇宙獨來還獨去。文章褊少亦褊多。上句何其脫灑無着。而下句感嘆文章多少。竟未脫煙火人氣習。噫彼文章。不知憂患物。而呶呶道之。可發啞然一笑。
7. 개구와 개증으로 어찌 원각을 얻는가(皆具皆證何得圓覺)
『대혜어록大慧語錄』<답손지현答孫知縣> 장에서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규봉 밀圭峯密 선사가 『원각경소초(圓覺疏鈔)』를 지으면서 『원각경』 가운데 ‘일체 중생이 모두 원각을 증득한다(一切衆生皆證圓覺)’라고 한 부분에서, 규봉 선사가 ‘증證’자를 ‘구具’자로 고치고서, ‘이 부분은 번역자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훗날 늑담 진정泐潭眞淨 화상이 『개종론皆證論』을 짓고서 규봉 선사를 매우 꾸짖어 말하길 ‘파계한 범부이며, 누린내 풍기는 놈이라, 만약 일체 중생이 모두 원각을 갖추기만 하고 증득하지 못한다면 축생畜生은 영원히 축생이 되고, 아귀餓鬼는 영원히 아귀가 되어서, 온 시방세계가 한낱 구멍 없는 쇠방망이인지라, 다시 한 사람도 참됨을 일으켜 근원으로 돌아가는 이가 없으며, 범부도 또한 해탈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일체 중생이 모두 원각을 갖추기만 하고 증득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석생石生이 대신 말해 보겠다. 무상대원각無上大圓覺의 원圓은 태허太虛와 같아서, 모자름도 없고 남음도 없다. 하나를 잡아서 말한다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으니, 들어갈 문도 없고 물러날 길도 없어서, 네 가지 논리적인 분별(四句)도 여의고, 온갖 상대적 개념(百非)도 끊어진 것이다. 네 가지 논리적인 분별도 여의고 온갖 상대적 개념도 끊어진 것이라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이가 마조馬祖 대사에게 물었는데, 대사는 두통을 핑계로 대답할 줄 수 없다고 하고는, 서당西堂에가 가보라 하고, 백장百丈에게 가보라고 하였는데, 그들도 역시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마조 대사가 말하길 “서당 지장의 머리는 희고, 백장 해회의 머리는 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네 개의 눈으로 서로 쳐다보며 역대의 조사들이 말없이 묵묵한 가운데 비로서 얻은 것이다.
만약 방행放行으로 한다면, 동서남북의 조주문趙州門을 팔자八字로 활짝 열어 놓은 것과 같으니, 곳곳마다 푸른 버드나무에 말을 맬만 하고(處處綠楊堪繫馬) 집집마다 문밖이 장안으로 통한다(家家門外透長安). 여기에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께서 항상 백호광(毫光)을 내뿜으며,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손뼉을 치며 껄껄 웃는 시절이다.
그러하니 일체의 중생이 모두 원각圓覺을 갖췄다는 것도 낱낱이 분명하며, 모두 원각을 증득한다는 것도 낱낱이 분명하니, 어느 곳에 옳은 것이 있으며, 옳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이는 향상向上 종체宗體의 논일 뿐이다.
다음으로 경전의 말씀(聖言量)으로 증명하면, ‘모두 원각을 갖췄다(皆具圓覺)’는 것은, 『화엄경華嚴經』 「출현품出現品」에 이르길 “내가 이제 일체 중생을 두루 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어 있으되, 단지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모두 원각을 증득한다(皆證圓覺)’는 것은, 『대반열반경大涅槃經』에 이르기를 “무릇 마음이 있는 이는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설 모두 부처님 말씀(金言)의 증거가 있으니, 어찌 우열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 아무개는 옳다고 하고, 아무개는 또한 옳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공정하게 논해보겠다. ‘모두 원각을 증득한다(皆證圓覺)’는 것은, 이치로도 맞고 증거도 있는데, 기존의 역경본을 어찌하여 굳이 고칠 필요가 있는가. 아, 규봉圭峯의 잘못(漏逗)이 적지 않음이로다. 그리고 ‘모두 원각을 갖췄다(皆具圓覺)’는 것도 또한 이치로도 맞고 증거도 있는데, 어째서 모두 증득한다(皆證)는 논리를 펴서 통렬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는가. 아, 늑담泐潭의 잘못이 적지 않음이로다.
대혜大慧는 종문宗門의 정안正眼을 갖춘 분이다. 늑담이 규봉의 한 부분을 통렬히 비판하는 것을 잠시 차용하여서, 손지현孫知縣이 망령되게 경문을 고쳐서 사사로이 의견을 낸 것을 막은 것이다. 그 ‘개구皆具’와 ‘개증皆證’의 논리에 대해 묵인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후학들로 하여금 늑담이 규봉을 통렬히 비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서 통쾌하게 여길 수 있으니, 아, 대혜의 잘못이 적지 않음이로다.
그러나 늑담이 규봉을 통렬히 비판하며 말하길 “파계한 범부이며, 누린내 풍기는 놈이다”라고 한 것은 너무나 과한 언사요, 반드시 갑甲에게 화난 것을 을乙에게 푸는 감정적 대응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속세를 초탈한 화상이 법문法門에 작은 차이가 있다고 하여서 이렇듯 추한 행태를 부렸겠는가. 그때 시대에 선사가 꾸짖고 욕하는 말버릇은 덕산德山과 운문雲門의 무리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단도직입單刀直入의 종풍을 일으켜서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도가 답변하는 말버릇이 매번 과하게 대응하는 면이 있었으니, 늑담이 통렬하게 비판한 것은 그 한 지류를 이은 것일 뿐이다.
이외에 그 불평하는 근거와 이유를 추론해보면, 규봉圭峯이 『별행록別行錄』에서 하택荷澤과 홍주洪州의 종지宗旨를 분명하게 분별하며 말하길 “하택荷澤의 ‘지知’ 한 글자는 온갖 오묘함이 나오는 문(衆妙之門)이며, 텅 비어 고여하며 신령스러운 지혜(空寂靈知)를 갖추어서, 그 자체로 자성自性의 체용體用이 있다. 홍주洪州의 언어동작語言動作은 곧바로 심성心性을 드러내어서, 단지 기연에 따라서 쓰인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홍각범洪覺範의 『임간록林間錄』에서 규봉을 부셔버리고 홍주洪州와 우두牛頭의 종지를 받들어 드러냈으며, 황룡 사심수黃龍死心叟가 반대로 ‘지知’ 한 글자를 세워서 온갖 재앙이 들어오는 문(衆禍之門)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혜大慧가 말하길 “규봉과 하택을 맛보는 것은 쉽지만, 황룡 사심을 맛보는 것은 어렵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꼭 방편을 뛰어넘는 안목(超方眼)을 갖추어야 하나니,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들 얻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준들 얻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운문雲門이 말하길 ‘대체로 화두에 대답하는 것은 마치 문 앞에서 칼을 쥐고 있는 것과 같으니, 한 구절의 말 끝에 몸을 빼낼 길을 두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말이 끝나자마자 죽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라 했다.
차호嗟乎아, 운문雲門과 사심死心 등의 말은 한 층 더 높은 것(高一着)이 아니며, 가풍을 편 것(展家風)이 아니겠는가. 규봉이 말한 ‘얻으면 속히 성스러움을 이루어서 조속히 보리를 증득하지만, 잃으면 삿됨을 이루어서 신속히 도탄에 빠진다’다고 한 것이 이것에 해당되도다.
대개 늑담泐潭도 또한 황룡黃龍 문하의 선류禪流라서 그 사심수死心叟가 종지로 삼는 바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하택荷澤과 규봉圭峰에 대해 마치 드센 적수를 대하듯이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운을 표출하는 데 사정을 두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규봉圭峯은 또한 『선원제전집도서(禪源集序)』에서 이르기를 “달마가 이곳에 이르지 아니한 때, 예로부터 제가(諸家)가 해석한 바는 모두 이 앞의 4선禪·8정定이며, 여러 고승들이 이를 닦아 모두 공용功用을 얻었다. 남악南嶽과 천태天台가 3제(諦)의 이치에 의해 3지止·3관觀을 닦게 한 교의敎義가, 비록 가장 원만하고 오묘하지만, 그 문호에 나아가 들어가는 차제次第도 또한 단지 이 앞에 제선諸禪의 행상行相이었을 뿐이다. 오직 달마 조사께서 전한 것만 문득 부처님의 본체와 같아 여러 문과 매우 다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조리가 바르고 분명하여서, 달마 문하의 바른 식견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천태문天台門의 불평不平은 만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천태종天台宗 사문沙門 지반志磐이 남송南宋 시대 때 편찬한 『불조통기佛祖統記』에서 인도선종印度禪宗이 止사자존자師子尊者에서 그쳤을 뿐이라면,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애초에 중국으로 건너오지 못했다고 역설하였다. 중국 명나라 말기 우익藕益 법사는 본래 천태학天台學을 존숭하던 이가 아니었는데, 부득이하게 만년에 천태종天台宗을 계승하였다. 규봉을 높이는 말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하였데, 그 말에 조리가 있었다. 아, 규봉의 필화筆禍가 영원히 한결같은 것이 이와 같구나.
七、皆具皆證何得圓覺
大慧語錄。答孫知縣章。引云。圭峯密禪師。造圓覺疏鈔。以圓覺經中一切衆生皆證圓覺。圭峰改證爲具。謂譯者之訛。後來泐潭眞淨和尙。撰皆證論。痛罵圭峯。謂之破凡夫臊臭漢。若一切衆生。皆具圓覺。而不證者。畜生永作畜生。餓鬼永作餓鬼。盡十方世界。都盧是個無孔鐵鎚。更無一人發眞歸元。凡夫亦不須求解脫。何以故。一切衆生。皆已具圓覺。亦不須求證故。石生代曰。無上大圓覺。圓同太虛。無欠無餘。若以把定也。猶銀山鐵壁。入無門。退無路。而離四句。絕百非。祗這離四句絕百非者。有問馬祖。祖賴以頭痛不可說。之西堂。之百丈。皆以緘口不能說。馬祖竟曰。藏頭白。海頭黑。是爲十方諸佛。四目相觀。歷代祖師。嘴都盧。始得也。若以放行也。東西南北趙州門。八字打開。處處綠楊堪繫馬。家家門外透長安。於是乎毘盧遮那。常放毫光。寒山拾得。撫掌呵呵時節也。則一切衆生皆具圓覺。一一端的。皆證圓覺。一一端的。何處有可。而有不可。此向上宗軆之論爾。次以聖言量。而證之。皆具圓覺者。華嚴經出現品有曰。我今普見一切衆生。具有如來智慧德相。但以妄想執着。而不能證得。皆證圓覺者。大涅槃經有云。凡有心者。皆當得成阿耨菩提。二說俱有金言之證。何能左右袒。以某也云可。某也不可。然則平心而論之。皆證圓覺者。有理而有證。已譯經本。何須改正。咄圭峯漏逗不少。旣而皆具圓覺者。亦有理而有證。何須撰皆證論。而痛罵之爲。咄泐潭漏逗不少。且大慧。具宗門正眼者。但以泐潭之痛罵圭峰之一段。暫借用之。遮護孫知縣之妄改經本。而撰私見而已。其於皆具皆證之論理。默認無語。令諸后學。盲隨泐潭之痛罵。爲快然。咄大慧漏逗不少也夫。抑于泐潭之痛罵圭峯云。破凡夫臊臭漢之過當口氣。必有怒于甲而移于乙之氣色。不爾。以若出世和尙。遭若是法門小異。而發露醜態耶。當代禪師。罵詈之口弊。肇自德山雲門軰。對揚單刀直入之宗風。呵佛罵祖。爲尋常。故其徒。接響口氣。每每過當。泐潭之痛罵。承其一流者與。此外。推其不平之根由。圭峰明辨荷澤洪州之宗旨於別行錄云。荷澤之知之一字。衆玅之門。具空寂靈知。自有自性軆用。洪州之語言動作。卽顯心性。只爲隨緣用云云。故洪覺範林間錄。翻破圭峯。而扶顯洪州牛頭宗旨。黃龍死心叟。反立知之一字。衆禍之門。大慧云。要見圭峯荷澤。則易。要見死心。則難。到這裡。須具超方眼。說似人不得。傳與人不得也。是以雲門云。大凡下語。如當門按劍。一句之下。須有出身之路。若不如是。死在句下。嗟乎。雲門死心等語。莫是高一着耶。展家風耶。圭峯所謂得卽成聖疾證菩提。失卽成邪速入塗炭者。近是也歟。蓋惟泐潭。亦爲黃龍門下禪流。承其死心叟之所宗。對於荷澤圭峰。猶如勁敵。故放些氣息。無忌憚者。必然爾。圭峯又於禪源集序云。達摩未到。古來諸家所解。皆是前四禪八定。諸高僧修之。皆得功用。南岳天台。令依三諦之理。修三止三觀。敎義雖圓玅。其趣入門戶次第。亦只是前之諸禪行相。唯達磨所傳者。頓同佛軆。逈異諸門。是言。條理明正。足爲達磨門下哲見。然易逢天台門之不平。故天台宗沙門志磐。南宋時。集佛祖統記力說印度禪宗。止師子尊者而已。菩提達磨。初不渡中國云云。明季藕益法師者。不是褊崇天台學者。而不得已。晚承天台宗也。對上圭峯語。峻抗。說之有理。噫圭峯之筆禍。終古斷斷也。如是夫。
8. 석실본이 세상에 나오고 하택의 입지가 올바르게 밝혀짐(石室本出世荷澤立地明正)
현재 세간에 유행하는 『육조법보단경(法寶壇經)』에서 6조祖가 대중에게 훈시하며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되,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며, 항상 움직이고 쓰이는 가운데 있으되, 그곳에 있으면서 거두어 찾으려 해도 얻지 못하니, 너희들은 이것을 무엇이라 하겠는고?”라고 물었다. 이에 신회神會가 대중 가운데 나와서 말하길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이 하택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라고 답했다. 6조가 말하길 “나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어찌 근원이니 불성이니 하는 것이냐? 너는 향후에 법회를 열어 가르치더라도, 한낱 지해종도知解宗徒 밖에 되지 않을 것이로다”라고 하였다.【위의 한 단락은, 여러 판각본과 인용문에 따라 그 글자수의 증감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발견된다. 그런데 모두 중국 원나라 종보본宗寶本 때 더하여 들어간 것으로, 후에 여러 판본이 10종에 이를 정도였는데, 송나라 때 소흥본紹興本에는 또한 이 한 단락이 없다. 】
돈황석실墩煌石室의 사본寫本은 근세에 출토되었는데, 이 ‘시중示衆’ 한 단락이 어째서 있는 것인가.【이 외에 ‘제자연기弟子機緣’ 편 중에 행사行思와 회양懷讓 두 대사의 내용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된다.】 생각건대 남악南岳과 청원靑原 두 대사의 문하로부터 원元 종보증정본宗寶增正本에 이르는 사이에 위의 한 단락이 더하여 들어간 것이니, 후에 현행본에도 많은 부분은 첨가되어서, 그 종류가 십수 종에 이르렀다. 이 ‘시중示衆’ 한 단락이 더하여 들어간 후에, 이른바 ‘한 사람이 거짓을 퍼뜨리면 뭇사람이 사실로 퍼뜨린다’와 같은 경우이니, 그러므로 이를 비판하는 자가 말하길 “신회神會는 단지 6조의 서얼(孽子)일 뿐인데,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 견강부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회가 깨달은 바는 임제臨濟의 3구句 중에 제3구를 알아차린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니, 스스로 구하는 일도 끝내지 못했는데 시끄럽게 떠들면서 그냥 두지 않은 것이다. 하택 신회荷澤神會는 입적 후에 身後立命地。墮在南宗門外也已。
규봉圭峯이 찬술한 <신회행략神會行略>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회神會는 기골이 일반 사람보다 뛰어났고, 총명함과 분별력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우선 북종北宗의 신수를 섬기다가, 3년 후에 드디어 조계문하로 갔다. 혜능이 ‘머무름이 없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無住爲本)’는 것과 ‘깨달음이 그대로 성품이다(見卽是性)’라는 답변을 가지고 차례로 여러 난제를 시험하였고, 밤에 불러 심문하고는 두 마음이 서로 계합하여, 이윽고 스승과 제자의 도가 합치하게 되었다.【중략中略】
혜능 대사가 입적 후 20년에 조계의 돈지頓旨가 남쪽 형오荆吳에서 가라앉고 폐한 반면, 숭악嵩岳의 점문漸門은 북쪽 진락秦洛에서 치성하게 솟아올랐다. 이때 신수의 제자인 보적普寂 선사가 본인을 7조라 거짓으로 칭하였으니, 두 경사의 법주(二京法主)이자 세 황제의 문사(三帝門師)였던 그에게 누가 감히 맞서겠는가. 남종의 문도들은 무너지고 망해가는 것을 그저 따를 수 밖에 었었으니, 전수해온 비문碑文조차도 두 번이나 바뀌고 갈아 없애는 것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혜능 대사로부터 친히 부촉을 받은 하택荷澤이 어찌 이것을 그대로 따를 수 있었겠는가. 곧바로 동도東都로 들어가서, 북조(北祖 : 보적)를 직접 대면하고 항의하였으니, 이것은 용의 비늘을 건드리고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격(龍鱗虎尾)이어서, 목숨을 바치고 몸을 내던지는 위험한 일이었으니, 협객俠客과 현관縣官의 일로 3번이나 거의 죽을 뻔하였으며, 상인의。三度幾死。장사꾼의 복장을 하고 다니며 온갖 고난을 겪었다. 달마 대사가 현기懸記한 “6대 후에 목숨이 마치 실에 걸린 듯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에 드디어 증험된 것이었다.
회수에서 기도에 감응하여 일어난 상서로움과 숯에서 지초가 자라난 기인한 현상을 백성들 모두 목격한 일로 인하여, 드디어 왕명으로 사찰【하택사荷澤寺】을 건립하게 하였다. 물러나거나 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자, 천보天寶 4년(745)에 병부시랑兵部侍郎이 신회 선사를 청하여 동도東都에 들어왔다. 이에 조계曺溪의 요의了義가 낙양洛陽에 크게 전파되었으며, 하택荷澤의 돈지頓旨가 천하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북종北宗 문하門下의 세력이 하늘에 닿을 듯 높을 때라, 여러 무리로부터 참소를 당하여서 왕령에 의해 익양弋陽으로 내쫓겼다가, 또 무당武當으로 옮겨갔다. 천보 13년에 이르러 양주襄州로 양이量移하였고, 그해 7월에 이르러 형주荆州 개원사開元寺로 옮겼으니, 이 모든 것이 북종北宗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건원乾元 원년元年(758) 5월에 이르러 입적하였으니, 세수는 75세였다. 대력大曆 5년(770)에 이르러 황제가 선사에게 당액堂額을 하사하였으니, 그 호號는 “진종반야전법지당眞宗般若傳法之堂”이었다. 대력 7년(772)에는 “반야대사지탑般若大師之塔”이라는 탑호를 하사하였다. 정원貞元 12년(796)에는 황태자皇太子에게 칙명을 내려 여러 선덕禪德을 모아서 선문禪門의 종지宗旨를 확정하여서, 신회神會 선사를 제5조로 삼게 하였다. 칙령으로 신룡사神龍寺에 비기碑記를 하사하였으며, 또한 어제御製 7조찬문七祖讚文도 하사하였으니, 현재까지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하택荷澤의 행략行略을 살펴보니, 하택은 진실로 6조의 정식 전수자이며, 남종南宗 건립에 마음을 다한 공신功臣이다. 6조가 입적한 후 수십 년간 남양 충南陽忠이나 영가 각永嘉覺 등과 같은 인물이 도道가 비록 높고 오묘하였지만, 추후에 법은 이은 자는 남악南岳과 청원靑原 두 대사의 문하였다. 그리고 마조馬祖와 석두石頭 두 선걸禪傑이 강서江西와 호남 등지에서 종풍을 크게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일이다. 당시에 만약 하택이 목숨을 버리고 몸을 내던지는 각오로 노력하지 않았다면, 남종의 돈지頓旨가 어찌 성립하였겠으며, 어찌 전파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택을 찬송하고 존숭하기 이전에, 두 대사의 문도들이 별도로 손을 써서 문밖 맨땅에 그를 밀어내어 자빠트린 것은 진실로 어떤 마음이던가?
내가 두 번 세 번 생각하봐도 余惟再三思。而如睡夢覺。第一忌點者。勅立神會。爲禪宗第七祖。是忍俊不禁之萬矢一的。破綻乃已。其次圭峯別行錄中。荷澤洪州宗旨之偏正批判。又因風吹火。而視諸荷澤圭峰。甚於寃頭一層耳。嗚呼。石室寫本壇經。傳布中外。後學者之視線。驟換。而抑于石室寫本之元撰者。神會禪師主筆之論(胡適主論)。牢不可破。自茲以還。先是數百年來神會之伸枉。如披雲覩日。其亦社會的歷史見地。有數變換之實錄。再見。可不重與。且爲荷澤。以深感者。猗彼荷澤門下龍象。如凌五宗門下之軰出。提唱空寂靈知之宗軆。荷澤禪師永作天下禪宗第七祖。有何不可。不幸而門下。不競如是而止。然宗承不絕。而及遠至雲捿祩宏大師。禪敎並進。占得明代四大和尙之一位。獨惟圭峯禪師。禪宗則雖讓佗門。敎承華嚴宗統。竟爲華嚴宗第七祖。其宗輪。連亘中華。末葉。曾與半島震域。同聲唱和。于今不衰。可謂源遠而流長也夫。
八、石室本出世荷澤立地明正
現行法寶壇經。有六祖示衆云。有一物。無名無字。無頭無尾。上柱天。下柱地。常在動用中。動用中收不得。汝等諸人。喚作什麼。神會出衆云。諸佛之本源。神會之佛性。祖云。我喚作一物。尙自不中。那堪喚作本源佛性。汝佗后。設有把茆蓋頭。只作得個知解宗徒。(右一段。諸刻本及引文。多有增减字數。然皆是元宗寶本添入。后諸本。有十種之多。而宋紹興本中。亦無此一段。)墩煌石室寫本。近世出土也。此示衆一段。烏有焉。(此外弟子機緣中。無有行思懷讓二大士。而爲問題。)想是南岳靑原二大士門下。至元宗寶增正本中。添入右一段。後爲現行本之多。至十數種矣。這示衆一段添入後。所謂一人傳虛。萬人傳實。故有批者云。神會。唯爲六祖孽子。愈況愈下。而傅會者云。神會所得。可當臨濟三句中。第三句薦得。自救不了。曉曉不置。荷澤神會。身後立命地。墮在南宗門外也已。及見圭峯撰神會行略云。神會者。骨氣殊衆。聰辯難測。先事北宗秀。三年。遂往曹磎門下。答無住爲本。見卽是性。歷試諸難。夜喚審問。兩心旣契。師資道合(中略)。能大師沒后。二十年中。曹磎頓旨。沈廢於荆吳。嵩岳漸門。熾盛於秦洛。普寂禪師。謬稱七祖。二京法主。三帝門師。誰敢當衝。嶺南宗徒。甘從毀滅。傳受碑文。兩遭磨換。荷澤親承付囑。詎敢因循。直入東都。面抗北祖。龍鱗虎尾。殉命亡驅。俠客縣官。三度幾死。商旅縗服。百種艱難。達磨懸記六代之後命如懸絲者。遂驗於此矣。因淮上祈瑞感。炭上生芝草。士庶咸覩。遂命建立(荷澤寺)。無退屈心。天寶四載。兵部侍郎。請入東都。於是。曹磎了義。大播於洛陽。荷澤頓旨。派流於天下。然北宗門下。勢力連天。天寶十一載。被譖聚衆。勅黜弋陽。又移武當。至十三載。量移襄州。至七月。又移荆州開元寺。皆北宗所致。至乾元元年五月。示寂。年七十有五。大曆五年。勅賜祖堂額。號眞宗般若傳之法堂。七年。勅賜般若大師之墖。貞元十二年。勅皇太子。集諸禪德。楷定禪門宗旨。遂立神會禪師。爲第七祖。內神龍寺。勅賜碑記。又御製七祖讚文。現行於世。觀夫荷澤行略。荷澤實爲六祖正傳。而南宗建立之盡心功臣者也。六祖沒后數十年間。若南陽忠。永嘉覺等。道雖高竗。追后繼法者。南岳靑原二大士門下。有馬祖石頭二禪傑。大振宗風于江西湖南等地。且在三十年后事也。則當時。若非荷澤殉命亡軀之勞力。南宗頓旨。何以成立。而傳播乎哉。然而頌詠荷澤。而尊崇之外。二大士門徒。別用手腕。擠倒於門外地者。是誠何心焉。余惟再三思。而如睡夢覺。第一忌點者。勅立神會。爲禪宗第七祖。是忍俊不禁之萬矢一的。破綻乃已。其次圭峯別行錄中。荷澤洪州宗旨之偏正批判。又因風吹火。而視諸荷澤圭峰。甚於寃頭一層耳。嗚呼。石室寫本壇經。傳布中外。後學者之視線。驟換。而抑于石室寫本之元撰者。神會禪師主筆之論(胡適主論)。牢不可破。自茲以還。先是數百年來神會之伸枉。如披雲覩日。其亦社會的歷史見地。有數變換之實錄。再見。可不重與。且爲荷澤。以深感者。猗彼荷澤門下龍象。如凌五宗門下之軰出。提唱空寂靈知之宗軆。荷澤禪師永作天下禪宗第七祖。有何不可。不幸而門下。不競如是而止。然宗承不絕。而及遠至雲捿祩宏大師。禪敎並進。占得明代四大和尙之一位。獨惟圭峯禪師。禪宗則雖讓佗門。敎承華嚴宗統。竟爲華嚴宗第七祖。其宗輪。連亘中華。末葉。曾與半島震域。同聲唱和。于今不衰。可謂源遠而流長也夫。
9. 진귀 조사에 대한 난제에 답변해보다(眞歸祖師準擬答難歟)
청허淸虛 노사老師는 『선교석禪敎釋』 중에 범일梵日 국사國師가 진성여왕(眞聖女主)이 선교禪敎의 극의極義를 묻는 것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길 “세존世尊께서는 밝은 별을 보고서 도를 깨닫고는, 스스로 증득하였음을 사유하고 오히려 그 극치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수십 일 동안 돌아다니다가 총림의 방안에 이르러 조사祖師를 방문하고 비로소 지극히 현묘한 종지를 전하여 얻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 대사가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귀조사가 설산에 계시면서 眞貴祖師在雪山
총목방에서 석가를 기다렸네 叢木房中待釋迦
임오년에 조사의 심인을 전하니 傳持祖印壬午歲
같은 날에 조사의 종지를 얻었네 心得同時祖宗旨
이 한 단락을 이루는 약간의 말이 실로 우리나라(震域) 총림叢林의 선술禪述 중에 이른바 여래서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의 유일한 원본(藍本)이다. 중국(支那)에서 찬술한 고금의 선장禪藏 중에는 위와 같은 글이나 인용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 내용을 한 번 쯤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석생石生이 한번 제멋대로 이에 대해 말해볼테니, 그냥 한번 흘려 듣기를 바란다. 무릇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하는 것은, 규산(圭山 : 圭峰)의 『선원제전집도서(都序)』에 이르기를 “이는 최상승선最上乘禪이 되며, 또한 이름하여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고 하니, 달마 대사가 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만 해도 여래선은 조사선祖師禪과 그 이름과 뜻이 분명하게 나뉘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앙산仰山이 향엄香嚴의 깨달은 바를 시험하는 것에 이르러, 향엄이 말하길 “작년의 가난은 가난도 아니요(去年貧未是貧) 금년의 가난이 진정한 가난이네(今年貧是爲貧)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去無立錐地)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구나(今爲錐也無)”라고 하였다. 이에 앙산이 말하길 “여래선은 알았다고 인정하겠으나(如來禪唯師弟會),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본 소리를 하는구나(祖師禪未夢見在)”라고 하였다. 향엄이 다시 게송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我有一機
눈을 깜박이며 그에게 보이겠네 瞬目視伊
그래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若人不會
이번엔 따로 사미를 부르리라 别喚沙彌
항산이 이에 말하길 “사제가 조사선을 알았으니 기쁘구나”라고 하였다. 다른 날에 앙산이 위산潙山을 마주대하며 말하길 “마조馬祖의 일갈一喝에 백장百丈은 대기大機를 얻었고, 황벽黃蘗은 대용大用을 얻었는데, 그 나머지 80여 용상龍象과 같은 대중은 말로만 떠들어대는 무리(唱導師)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바로 조사선祖師禪이 갖추고 있는 바다. 무릇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말을 살펴보건대, 이는 애초에 위의 한 단락에서 언급한 여래가 깨달은 것이나 조사가 전한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마치 옥돌 이름을 ‘춘수春水’나 ‘추산秋山’과 같이 각자 언어로 표현하여 정한 것이다.
생각건대 앙산이 언급한 여래선과 조사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경계가 모두 없는 극치나 평상적인 것을 뛰어넘는 경지를 지칭한 것이로다. 주어도 사람이 갖지 못하고 말해도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이름하여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천의무봉天衣無縫과 같이 완전무결하고 공중누각空中樓閣처럼 실체가 없는 것에 나아가서, 억지로 그 검푸른 색을 찍어서 표시하나 하나의 물건도 용납함이 없는 것을 혹 ‘대기大機’라고 이름하는 것이요, 버들 그늘지고 꽃이 활짝 핀 곳에 자재하게 풍류가 있는 것을 혹 ‘대용大用’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실로 여래如來의 진여삼매眞如三昧 중에는 체軆나 용用에 나아가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지음知音처럼 통하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서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눈을 깜빡이는 짧은 순간에 서로 깨달아 알되,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 동쪽 나라(震域) 총림叢林의 고덕古德만이 조사선祖師禪이라는 별도의 명목을 문득 보고는, 두통을 일으키고 절절한 노파심을 내어서, 바뀌지 않는 한 단락의 철안鐵案을 은밀히 모방하여서 지어내어 만일에 일어날 의난疑難에 대비한 것이다. 저 의난疑難이란 것은, 어떤이가 말하길 “불교佛敎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佛之敎)이고, 선禪도 또한 수행의 방편문(行門) 가운데 하나인데, 어찌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하면서 별도로 하나의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위없는 여래의 진여법(無上如來眞如法)을 깔보게 하는 것이냐. 빨리 말해봐라, 어서 빨리 말해봐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알 수가 없는 것이니, 조용히 설산雪山의 근원지로 향하는 것만 못하다. 장차 여래如來와 조사祖師라는 한두 가지 판별하기 어려운 어구를 가지고 답하기 어려운 것을 준비하는 것이, 어찌 타당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여래如來와 조사祖師의 위치가 돌고 돌아 서로 바뀌어 수많은 다른 의견들이 생겨날 것이로다. 또한 명철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 듯이 밝혀주길 기대해 보겠다.
九、眞歸祖師準擬答難歟
淸虛老師禪敎釋中。引梵日國師。對眞聖女主。問禪敎之極義云。世尊見明星悟道。思惟自所證悟。猶未臻極。經行數十日。至叢木房中。訪祖師。始傳得玄極之旨矣。故達磨有偈曰。眞歸祖師在雪山。叢木房中待釋迦。傳持祖印壬午歲。心得同時祖宗旨。此多少一段語。實爲震域叢林禪述中。所謂如來禪祖師禪之惟一藍本。然支那撰述古今禪藏中。絕不見引用如右本文處。故至今學者間。不能不謂一疑案爾。石生妄欲說之。惟冀妄聽之。夫爲如來禪云者。圭山都序有云。是爲㝡上乘禪。亦名如來淸淨禪。達磨所傳者。此也。當是時。不分祖師禪之名義。及若仰山試香嚴所悟。香嚴曰。去年貧未是貧。今年貧是爲貧。去無立錐地。今爲錐也無。仰山云。如來禪唯師弟會。祖師禪未夢見在。香嚴復有頌云。我有一機。瞬目視伊。若人不會。别喚沙彌。仰山乃曰。且喜師弟會祖師禪也。他日仰山。對潙山而語云。馬祖一喝。百丈得大機。黃蘗得大用。其餘八十龍象。不過爲唱導師。大機大用。是祖師禪之所具者也。按夫如來禪祖師禪之語。初不關乎上一段之如來所悟底。祖師所傳底。猶乎春水秋山。各自安立者矣。蓋惟仰山。道之如來禪祖師禪云者。稱其人境俱亡之極歟。向上平常之展歟。呈似人不得。說與人不得者。强名祖師禪。又就天衣無縫空中樓閣上。點其靑黯。然無容一物處。或名大機。柳暗花明自在風流處。或名大用。然實惟如來眞如三昧中。若軆若用之進顯也。知音相會。揚眉瞬目間。互相證知。而無別語而已。惟吾震域叢林古德。忽見祖師禪之別目。爰起頭痛。婆心殊切。密擬作一段不易之鐵案。備護萬一之疑難者也。彼疑難者。有云。佛敎者。佛之敎也。禪亦行門之一方便。安有祖師禪云者。別置向上一位。貶視無上如來眞如法乎哉。速道速道。且未可知已。不若從容向雪山源頭。擬將如來與祖師。一二難辨之語句。準備答難。豈不妥當。不爾。如來與祖師。位置回互。多生異見者歟。且竢明人之標月指。
10. 열상 노인의 시화 중 전할 만한 몇 가지(洌上老人可傳詩話數則)
열상 노인洌上老人은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만년 때 호 중에 하나이다. 그는 정조正祖 시대 때 명신名臣으로, 관직은 불과 정3품에 이르렀지만, 실학(樸學)을 전념하여 연구하여서 반도의 제일가는 실학자가 되었다. 시문詩文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며, 불교에 대해서는 크게 배척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심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순조純祖 때에 이르러 남당南黨의 서학西學에 연좌되어서,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만 17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는 강진의 만덕산萬德山과 대둔산大芚山을 산책하는 즐거움에 빠졌으며, 연파蓮坡·완호玩虎·체경掣鯨 상인上人 등과 함께 방외方外의 교유를 맺었다. 그는 그곳에서 『흠흠신서欽欽新書』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하였으며, 이외에 『만덕사지萬德寺誌』·『대둔사지大芚寺志』와 『해동선교고海東禪敎考』도 집필하였으니, 후세 승사僧史의 표준(圭臬)이 되었다.
다산의 시 가운데 <둘 위에 흐르는 물가에서 물고기를 관찰하며 읊다(石磵觀魚吟)>라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물은 맑고 돌 줄기가 냉랭하여 水淸石骨冷
지난 해에 물고기 크지 않았네 不大去年魚
비가 내려 동쪽으로 흘러내려간 得雨東流下
검푸른 바다 너의 조상 사는 곳이네 滄溟爾祖居
그 구법句法이 고상하고 오묘할 뿐만 아니라, 그 글귀에 담긴 내용에 운치가 있어서, 옛 성당盛唐의 유운遺韻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동년배 친구인 죽리竹里 김이교金履喬가 귀양이 풀려서 전원으로 돌아가던 차에, 다산茶山을 방문하였다. 이에 칠언율시를 지어서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에게 부쳐주었다. 풍고도 또한 같이 공부한 사이로서, 그때 관직이 집정執政었다. 그 시의 2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자의 신선 됨이 어찌 부럽지 않으랴 班子昇仙那可羨
이릉이 본국으로 돌아감은 기약 없네 李陵歸漢亦無期
유사에서 함께하며 글 짓던 일 잊을 수 없고 莫忘酉舍揮毫日
경신년의 임금님 별세 그 슬픔 어찌 말하랴 忍說庚年墮劍悲
이 싯구절에 담긴 감정이 비통하면서도 절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를 받은 풍고楓皐가 깊이 감동하여서, 임금께 귀양살이를 풀어줄 것을 아뢰었다고 한다.
다른 날에 다산이 칠구지七俱胝 산인山人에게 시화수칙詩話數則을 부쳐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서法書와 명화名畵를 도첩이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서, 비록 크게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벽에는 중화인中華人의 주련柱聯 글씨 너댓 짝을 걸어두고, 추사秋史 김정희와 자하紫霞 신위의 글씨,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단원檀園 김홍도의 그림, 초정楚亭 박제가와 냉재冷齋 유득공의 시詩를 걸었놓아야 하니니, 무릇 세상에 이름난 작품들이 적어서는 안 된다. 또한 벽에는 단금短琴 1장張을 걸어두는데, 7현弦은 11휘暉, 5현은 9휘로 하며, 악기의 기러기발(柱)은 있는데 괘卦는 없어야 한다. 괘卦라고 하는 것은 거문고(玄琴)의 옛 낡은 제도이니, 이른바 거문고 기러기발에 아교를 칠하여 고정하고 연주하려는 것이다. 매번 솔향이 퍼지고 달빛이 밝게 비출 때 이슬에 옷이 젖은 채 정결히 하고서, 음절音節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손으로 어루만져 연주하며 혼자 즐긴다면 괜찮을 것이다. 담장 위에는 양봉養蜂 서너 통을 두고, 가끔 고기(割脾)가 생긴다면 살생을 경계하는 헛된 나무람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중수의 꿀과 사총의 거문고(蜜殊琴聰)가 어찌 집집마다 돌면서 쌀을 구걸하는 늙은 두타승만 못하겠는가. 흥취가 발동하여서 고시古詩 몇 장章과 근체시 서너 수首를 짓는다. 매번 봄날 곡우糓雨를 전후하여 새로 돋는 차잎을 채취하고, 여법하게 찌고 덖어서, 시고詩稿와 함께 싸서 봉하여 열상 노인洌上老人인 나의 무리에게 보내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승려의 시(僧詩)는 기녀의 시(妓詩)와 같으니, 세상에 유명하지기 쉽다. 첫째, 무릇 그들 시의 바탕이 되는 것은 오직 산림山林의 기운과 규방閨房의 정감뿐이요, 승려(緇衣)와 기녀(紅袖) 모두 그 본신本身이 안쪽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발언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쉽다. 둘째, 시인들이 호기롭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시를 읊으며 한바탕 질탕하게 노는데, 색목인(色目人 : 외국인)이 그 자리에 있어서 기이함이 평소보다 배가 되기에, 그들의 시를 추천하고 칭찬하는 것이 매번 과하다. 셋째, 시인들은 무리지어 노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기를 넘어서는 자가 있으면, 이를 매우 치욕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방외方外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뛰어나도 자신을 압도한다는 걱정을 하지 않으며, 또한 시의 온축된 내용이 매번 부족하더라도, 용서하여 심하게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혜원惠遠과 지둔支遁의 현미玄微, 관휴貫休와 영철靈澈의 청경淸警, 참료參寥와 석옥石屋의 영수靈秀, 감산憨山과 자백紫柏의 웅준雄俊이 바로 그것이니, 비록 그들이 총림叢林의 인물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사문斯文에 참여할 만한 자격이 있다. 예를들어 고려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의 시는 가히 전우산錢虞山이나 우서당尤西堂과 어깨를 나라니 할 만하니, 이와 같은 수준을 목표로 해야 이와 같게 되는 것이다. 외진 시골이라, 서책이 없어서 책을 널리 많이 읽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만, 『염송설화(拈頌)』와 『전등록(傳燈)』에서 인용한 시구詩句 중에는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시문이 많으며, 진정국사의 시는 또한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그리고 이따금 북쪽인 서울로 놀러 와서 수집해 돌아간다면, 어찌 견문이 넓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이것은 그가 쓴 시화詩話의 아주 일부분(一斑)인데, 만약 이로써 솥 전체의 고기 맛(全鼎之臠)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거기까지인 것이다.
다산茶山의 두 아들에는, 유산酉山 학연(學淵, 1783~1859)과 운포雲逋 학유(學游, 1786~1855)가 있는데, 실학(樸學)의 깊이가 비록 그 아버지(尊甫)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시詩에 있어서는 세상에 이름을 날려서 아버지를 뛰어넘었다(跨竈)는 평이 지배적이다. 두 아들의 시는 초의선사의 『일지암시집一枝庵詩集』에 많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다 기록할 필요는 없지만, 그 가운데 유산酉山이 초의草衣 선사에게 부친 율시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리나 머나먼 한강 가에 사람 와서 千里人來洌水頭
연꽃의 가을에 선방 소식 전해주네 禪房消息藕花秋
우스워라 우리 정씨 두 노인의 풍상이여 風霜笑我雙丁老
어여뻐라 우리 공의 회갑 맞은 법랍이여 夏臘憐公一甲周
남방에서 탄 것을 후회한 지둔의 말이요 蜑地悔乘支遁馬
고래 물결 안온히 돌아온 달마의 배로다 鯨濤穩返達磨舟
강관에 누워서 하늘 끝 얼굴 떠올리니 江關臥憶天涯面
빈 숲의 지는 달에 시름 더욱 깊어지네 落月空林万疊愁
이에 앞서 초의 선사가 유산과 함께 아름다운 시구절을 지었는데, “빈 숲엔 하늘 끝 달이 비쳐 들어오고(空林照入天涯月)/ 들 물엔 눈 온 뒤 산 빛이 밝게 잠겼네(野水明涵雪后山)”라고 하여서, 말련末聯에 이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진실로 시붕詩朋의 지허支許로다.
十、洌上老人可傳詩話數則
洌上老人者。丁茶山若鏞。晚老之一号也。素以正祖時名臣。官不過正三品。專究樸學。爲半島第一流也。詩文非專攻家。及若佛敎。不務排斥。然內自不喜者爾。至乎純祖時。坐南黨西學之干連。謫居康津。奄經十七歲。散策流連於萬德大芚山中。與蓮坡玩虎掣鏡[鯨]上人等。爲方外交。故正著欽欽新書。牧民心書以外。旁述萬德寺誌。大芚志。及海東禪敎考。爲後世僧史之圭臬焉。有石磵觀魚吟云。水淸石骨冷。不大去年魚。得雨東流下。滄溟爾祖居。不惟句法高玅。含容有趣。以存盛唐遺韻矣。適次同年友金竹里履喬。解配歸園。來訪茶山。乃撰七律一首。贈寄金楓皐祖淳。楓皐亦同研生。而時執政者矣。其二聯云。班子昇仙那可望。李陵歸漢亦無期。莫忘酉舍揮毫日。忍說庚年墮劍悲者。情境悲切。故楓皐。深感而上奏。解歸云爾。他日茶山。寄七俱胝山人。詩話數則。有云。法書名畵。或帖或幅。雖不能大備。不可全缺。壁上。揭中華人柱聯書四五對。秋史紫霞之筆。沈師正玄齋檀園之畵。楚亭冷齋之詩。凡名世之作。不可少也。壁上。掛短琴一張。七弦則十一暉。五弦則九暉。有柱而無卦。卦者。玄琴之陋制。所謂膠柱而皷之也。每松月舒輝。衣露潔淨。雖不解音節。手拊以自樂。可矣。墻頭。養蜂三四筩。時至割脾。無拘戒殺之虛喝也。蜜殊琴聰。不若沿門乞米之老頭陁知識耶。興意所到。作古詩數章。近軆三四首。每春至糓雨前后。取芽茶。蒸曬如法。幷詩稿。封裹以寄洌上老人軰。亦好事也。僧詩如妓詩。易於名世。一。凡詩所資。惟山林之氣。閨房之情耳。緇衣紅袖。皆其本身。與在這裡。所以發言。易以動人。二。詩家好奇。觴詠跌宕之場。有色目人在座。奇異倍常。所以推獎每過也。三。詩家好同隊。有勝己者。心實病之。方外擅場。不患壓己。且其所蘊每寡。恕之不深咎也。若余所望於若者。不止於是也。惠遠支遁之玄微。貫休靈澈之淸警。參寥石屋之靈秀。憨山紫柏之雄俊。雖非叢林。必當得與於斯文。又如高麗眞靜國師天頙之詩。可與錢虞山尤西堂。比肩對頭。有爲者亦若是矣。僻鄉。患無書册。無所博覽。卽拈頌傳燈所引詩句。多是絕唱。眞靜詩。亦合模楷。時游北方。蒐而歸之。何患聞見之不博也。此其詩話之一斑。不能窺全鼎之臠。而止矣。茶山之二子。有酉山學淵。雲逋學游。樸學之邃。雖不及其尊甫。以詩鳴世。多有跨竈之稱。二子之詩。多載一枝庵詩集中。不必備錄。但鈔酉山之寄草衣一律。千里人來洌水頭。禪房消息藕花秋。風霜笑我雙丁老。夏臘憐公一甲周。蜑地悔乘支遁馬。鯨濤穩返達磨舟。江關臥憶天涯面。落月空林万疊愁。先是草衣。與酉山。共賦佳句云。空林照入天涯月。野水明涵雪后山。故末聯及之。眞詩朋之支許也夫。
11. 완당의 시평에 감히 정침을 꽂다(阮堂詩評敢下頂鍼)
완당의 시화평詩話評에 이르기를 “시도詩道로 말하면 어양漁洋ㆍ죽타竹坨가 문경門徑이 잘못되지 않았는데, 어양의 경우는 순수하게 자연에서 나와 마치 천의무봉天衣無縫과 같고, 또 마치 화엄루각華嚴樓閣을 한 손가락으로 튕겨서 열어버린 것과도 같아서 자취를 찾아내기 어렵고, 죽타의 경우는 인력人力으로 정진하여 하나하나의 단계를 밟아 올라서 비록 태산의 정상까지라도 한걸음 한걸음으로 차츰 올라갈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모름지기 죽타를 위주로 하고 어양을 참작해서 한다면, 색色ㆍ향香ㆍ성聲ㆍ미味가 완전하여 흠결이 없게 될 것이다.
목재牧齋에 이르러서는 기백은 대단히 크지만 끝내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를 면치 못하여서 가장 보지 않아야 될 것이니, 오로지 어양ㆍ죽타를 좇아서 착수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또 사초백査初白이 있는데, 그는 어양ㆍ죽타 양가兩家 이후로 문경이 가장 잘못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니 이 삼가三家 : 왕사정ㆍ주이준ㆍ사신행)로부터 시작하여 원유산元遺山ㆍ우도원虞道園으로 나아가서, 다시 동파東坡ㆍ산곡山谷으로 거슬러 올라가 두보杜甫로 들어가는 준칙으로 삼는다면, 공이 이루어지고 소원이 성취되어 견불見佛이라는 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석생石生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완당의 시평은 비록 당시를 존숭하고 두보를 전공하여 변화없이 지키기만 하는 곡사曲士의 견해와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원유산ㆍ우도원으로 나아가서, 다시 동파ㆍ산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두보로 들어가는 준칙으로 삼는다”라고 한 것은, 다만 장강長江의 긴 연원만을 보고 황하의 거대함은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속시품續詩品』에서 “두보만을 감싸고 한유만을 존숭하면(抱杜尊韓) 권위자에게 기생하게 된다(托足權門)”라고 경계한 부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소식과 황정견(蘇黃)도 또한 초당草堂의 시의 위대함을 인정하였지만, 자신만의 안목을 평가를 하였으니, 어찌 소릉(少陵 : 두보)의 뒤만을 졸졸 따르고자 했겠는가. 당당한 기풍과 정신으로 장엄함에 절로 정토淨土가 되니, 이를 비로존毘盧尊이라 칭한다. 복초재復初齋의 치아 뒤에 찌꺼기(牙後慧)를 본받지 말고, 또한 코를 막고서 참은 숨을 풀어놓아라. 완당은 한 층 더하여서 무리無理하며 헐뜯는 말로 우산虞山을 저주하며 말하길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를 면치 못하여서 가장 보지 않아야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자기 마음속의 생각을 그대로 내밷은 것이며, 다른 불편한 사항을 가지고서 함께 부추겨 비평한 것이로다.
청조사淸朝史의 공론公論을 소개하며 말하길 “청조 초기의 시인인 가운데 전겸익錢謙益과 오위업吳偉業이 최고이다. 두 사람 모두 명나라 말기 신하로, 일찍이 청렴하게 벼슬살이를 하였으며, 그 시는 천계와 숭정(啓禎) 연간에는 실로 대가大家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였으며, 곧 청조 때에 시인들 중에도 또한 혹시라도 그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다. 목재牧齋 전겸익은 명明 나라 말기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으며,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수행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郎 겸兼 비서원학사秘書院學士를 지냈다. 그러다가 병을 핑계로 고향인 강남江南으로 돌아가서 10여 년을 더 살았다. 그 시는 이백·두보·한유·백거이·소식·육유·원호문·우집(李杜韓白白蘇陸元虞)의 사이를 출입하였고, 그 타고난 재능은 풍부하고도 강건하였으며, 학문은 깊고도 넓었다. 저서로는 《초학집初學集》과 《유학집有學集》이 있었는데, 청나라 건륭제 때 조칙을 내려 그 문집을 훼손하여서, 신하들의 절조를 독려하였다. 그러므로 심귀우沈歸愚의 「청시별재淸詩別裁」에는 기휘忌諱를 이유로 그의 시를 한 수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겸익의 시는 침울하면서도 화려하였으며, 고아한 정취와 뛰어난 흥취가 있었다. 혹은 매촌梅村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시를 읊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벽성碧城 진문술陳文述이 몽수蒙叟 전겸익의 일시逸詩을 외워서 전한 시구절은 다음과 같다.
봄날에 복숭아 잎 망국의 한처럼 흐날리고 桃葉春流亡國恨
가을에 옛 궁전에 홰나무 꽃 밟고 지나가네 槐花秋蹈故宮煙
양주 땅의 안개 속에 달빛 비춰 꿈속같고 煙月揚州如夢寐
건업 땅의 강산들은 또한 맑고 환하구나 江山建業又淸明
의관 갖춰 남쪽 왔으나 옛 내 나라 아니요 南渡衣冠非故國
안개가 낀 서호의 물은 맑디 맑게 흐르네 西湖烟水是淸流
아침 시장 상전벽해로 바뀌어 새로 열리고 滄桑朝市開新局
봉화 올린 변방 관문에 옛 바둑판 엎었구나 烽火邊關覆舊棋
옥쇄가 새 황실로 돌아감을 귀신도 근심하고 神愁玉璽歸新室
동인이 한족과 이별함을 하늘도 통곡하네 天哭銅人别漢家
문장 논한 금마문엔 서리 같은 눈물 흘리고 文章金馬霜前淚
옛 나라의 구리 낙타 뒷 사람을 위협하네 故國銅駝刧后人
늙어서는 애타는 심정 불화와도 같은데 老有心情依佛火
궁벽하여 신주에 뿌릴 눈물조차 없구나 窮無涕淚灑神州
집안 대대로 살아온 홍난리에 구름 멈추고 停雲家世紅闌里
풍류 있는 백하문에 피리 소리 멀리 들리네 邀笛風流白下門
이어서 말하길 “구법句法이 깊고 넓으며 매우 미려하여서 족히 한 세대를 압도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우리 한반도에 이르러, 근대에 자하紫霞 신위와 영재寧齋 이건창도 또한 기이한 문장을 좋아하였는데, 모두 우산虞山 전겸익의 시문을 끊임없이 배웠다. 생각건대 자하는 시와는 상관 없는 절의를 잃었다는 비방을 싫어하고 장황한 비난을 외면하여서, 오로지 소동파의 문체만을 연구하여 기본 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안목을 갖춘자가 그 장법章法을 살펴보면, 싯구를 선택하는 안목의 폭넓음과 미려함이 우산虞山의 것과 같은 것이 매우 많고, 동파東坡와 비슷한 것은 매우 적다는 것을 알 것이다. 생각건대 영재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청조의 기휘를 어긴 것을 인정하고 목재牧齋 전겸익이 향이 퍼지는 것을 막기 어려운 판향瓣香과도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자는 그것이 참말이 아니며, 동감을 표시한 것일 뿐이라 여길 것인, 그러한가.
오호라, 시를 논하는 자가 명교(名敎 : 유교)의 죄인을 싫어하여서, 그 작가를 폄하하여서 동등하게 평가하지 않으니不齒, 종기실鍾記室이 어찌 간웅 조맹덕曹孟德의 시를 상품에 놓았겠는가. 충신 이릉李陵과 소무蘇武를 오언시五言詩의 원조라고 아울러 칭송하지 않았다. 초당初唐의 심전기와 송지문(沈宋)은 근체시의 원조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고요히 생각해보면, 문장의 한 가지 도(文章一道)는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의 한 가닥 길(名敎一路)과는 크게 다르며, 동쪽과 서쪽의 국경에는 틈이 없다. 그런데 박학한 견문을 가진 완당과 같은 인물이 시를 평가하는 견해가 바로 서지 못하여 허둥되고, 제나라 동쪽 사람의 말(齊東分野)처럼 허황되니, 이는 마치 같은 편은 도와주고 다른 편은 공격하는 것(黨同伐異)과 같은 크나큰 폐단이니, 진실로 한 번의 큰 탄식을 할 만한 일이로다.
十一、阮堂詩評敢下頂鍼
阮堂詩話評曰。詩道之漁洋竹坨。門徑不誤。漁洋。純以天行。如天衣無縫。如華嚴樓閣。一指彈開。難以摸捉。竹坨。人力精到。攀緣梯接。雖泰山頂上。可進一步。須以竹坨爲主。參之以漁洋。色香聲味。圓全無虧。至如牧齋。魄力特大。然終不免天魔外道。㝡不可看。專從漁洋竹坨。下手爲妙。下此。又有查初白。是爲兩家后。門徑㝡不誤者也。由是三家。進以元遺山虞道園。溯洄於東坡山谷。爲入杜準則。可謂功成願滿。見佛無怍矣。石生評曰。阮堂詩評。雖少異於尊唐專杜之曲士守墟。然進以元遺山虞道園。溯洄於東坡山谷。爲入杜準則云者。但見長江之遠。而不顧黄河之大。亦不免續詩品所云。抱杜尊韓。權門托足之一流矣。蘇黄。亦許草堂詩之大成。然自家之眼光。豈欲追少陵之後塵而已。堂堂風神。莊嚴自淨土。而稱毘盧尊也。竊勿效復初齋牙後慧。而又放掩鼻之氣息矣。加一層。以無理之毀言。詛呪虞山云。不免天魔外道。最不可看。諒是自家胸臆中流出與。比佗不平黨之同嗾與。紹介淸朝史之公論。有云。淸初詩人。以錢謙益吳偉業。爲㝡。二人皆明遺臣。而嘗仕淸。然其詩。在啓禎之際。寔可稱爲大家。卽淸詩人中。亦未能或之先也。牧齋。明末。爲禮部尙書。仕淸。爲禮部侍郎。兼秘書院學士。已而。以疾歸江南。十餘年。其詩。出入李杜韓白蘇陸元虞之間。才力富健。學問鴻博。所著有初學有學二集。乾隆朝。詔毀其集。以勵臣節。故沈歸愚。淸詩別裁。忌諱而不錄其一首。然其詩。沈鬱而藻麗。高情逸致。或以爲在梅村之右。固不可以人廢言也。陳碧城文述。誦傳蒙叟逸詩。桃葉春流亡國恨。槐花秋蹈故宮煙。煙月揚州如夢寐。江山建業又淸明。南渡衣冠非故國。西湖烟水是淸流。滄桑朝市開新局。烽火邊關覆舊棋。神愁玉璽歸新室。天哭銅人别漢家。文章金馬霜前淚。故國銅駝刧后人。老有心情依佛火。窮無涕淚灑神州。停雲家世紅闌里。邀笛風流白下門。繼云。句法沈博絕麗。足以壓倒一世也。及於半島。近代。申紫霞李寧齋。亦好奇。而俱學虞山不已。惟紫霞。嫌佗失節之誚。外張皇。而專究蘇軆。爲前提。然具眼者。檢其章法。句眼之博麗。似虞山者尤多。似東坡者殆尠。惟寧齋。和此露面以不諱。至有難掩瓣香爲牧齋。然知者。謂非其眞。表示同感而已。其然乎哉。嗚呼。論詩者。嫌名敎罪人。貶夫作家。而不齒。何以曹孟德之詩。鍾記室。品於上中。李陵與蘇武。非可以並稱五言詩祖。初唐之沈宋。不足稱近軆之元祖也。靜言思之。文章一道。逈異名敎一路。無間乎東西國界。博學見聞。如阮堂也。而評詩之見。亦立瞿瞿然。齊東分野。猶有黨同伐異之蓬蔽。誠可發浩歎一遭。
12. 세 가지 정점에 이르러, 쉬고 또 쉬어라(到極三頂且爲休歇)
옛부터 전해지는 명언名言에 이르기를 “온갖 형상이 펼쳐진 공간은 하늘에 이르러 극치를 이루고, 삼교三敎의 현인과 성인은 부처님에 이르러 극치를 이루며, 일체의 불교 경전(契經)은 원각경에 이르러 극치를 이루니, 이것을 ‘삼극三極’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는 ‘삼정三頂’이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다르니, 첫째 상백봉常白峰은 모든 산악의 정점이고, 남화경南華經은 백가서의 정점이며, 참선화參禪話는 온갖 수행의 정점이다. 모두 이 극치에 이르고서, 다시 그 위로 향하여 더 나아가기 어려우니, 또한 쉬고 또 쉬는 경지를 비로소 얻게 된다.
무릇 상백봉常白峯이라고 하는 것은, 백두산白頭山의 꼭대기(絕頂)이다. 천하의 동북쪽 분야分野에 자리하고서, 청평天坪의 고원高原에 드넓게 펼쳐져 있고, 삼강三江의 수원지에 드높이 솟아 있다. 강과 산이 동남으로 뻗고, 이어져서 서북쪽에 이르러서, 그 산맥을 따라 여러 산들이 우거진 숲을 이루니, 어느 누가 모든 산악의 정점이라고 하지 않으랴. 또한 뛰어난 경치에 구경하는 것에 대해 논하건대, 우리나라(震域)의 명산名山은 천하에서 제일 많다. 가파르게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산등성이(岡巒)는 관동關東의 풍악(楓岳 : 금강산)만한 것이 어찌 있겠으며, 웅장하고 깊은 골짜기와 계곡(洞府)은 교호嶠湖의 두류(頭流 : 지리산)만한 것이 어찌 있겠는가. 그리고 계곡물과 폭포수가 이루는 장엄한 절경은 묘향산만한 곳이 없고, 바다와 구름이 아득히 펼쳐진 광경은 한라산만한 것이 없는데, 상백봉은 위 항목을 혼자 다 차지하고 있도다. 그러나 뭇 산악들에게도 각기 더 나은 장점이 있으니, 상백봉의 정상은 혹 그 장점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독보적으로 홀로 뛰어난 점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겠다.
석생石生이 최후에 명승지를 찾아나섰을 때에, 수백의 무리와 섞여서 노숙을 하며 수백 리를 가는 동안 사람이라곤 아무도 살지 않는 지역이었고, 7~8일이 지나 험준한 길을 건너고 나무숲을 헤치며 갔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고생한 것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른다. 그런 연후【일승一勝】 겨우 꼭대기에 도착하였는데, 비바람이 거치고 맑게 갠 하늘의 빛이 새어나왔다. 내려다보니 천 척尺 밑으로 천지天池가 있었는데, 마치 하늘 한가운데 머문 듯하였다. 그 둘레가 몇 유순由旬이나 되었으며, 해와 구름이 번갈아 들락날락 하는 것이 마치 장난을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이승二勝】. 발길을 돌려서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내려오니, 녹음綠陰이 바다와 같아서, 마치 파도가 들어갔다 솟아오르지 않은 채 끝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삼승三勝】. 꼭대기 좌우에는 바위절벽이 있었는데, 마치 아라한상阿羅漢相처럼 떡하니 섰고, 수 천에 이르는 암석이 치솟아 둘러싸서 서 있으니, 이는 다른 산악에는 없는 것이다. 어찌 승경지를 구경하는 절정이라 하지 않겠는가. 조금 후에 찬송餐松 거사居士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50여 일 동안 혼자 천지의 주변에서 묵었는데, 기이한 들짐승들이 물을 마시고 날짐승들이 무리지어 울어대는 것을 만나보게 되어서, 그곳으로 가서 비룡폭포飛龍瀑㳍의 뛰어난 경관을 감상하게 되었다. 폭포수의 수량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떨어지면서 일으키는 물보라가 수십 리에 이를 정도였으니, 여량呂梁의 소문을 능가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남화경南華經』은 제자백가의 서책 가운데 정점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선배들이 이미 의견을 정한 바이다. 다시 사족을 덧붙일 수 없으니,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알려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당시기사唐詩紀事』에 이르기를 “장경(長慶) 연간에 원미지元微之·유우석劉禹錫·위초객韋楚客이 백낙천白樂天의 집에 모여, 각자 <금릉회고金陵懷古>라는 시를 짓기로 하였다. 유우석이 먼저 시를 지어 읊기를 ‘왕준의 군선이 익주로 내려가니(王濬樓船下益州)/ 금릉의 왕기가 슬그머니 끝이 났네(金陵王氣黯然收)/ 천 만 개의 쇠사슬을 강바닥에 깔았어도(千尋銕鎻鑽沉江底)/ 한 폭의 항복 깃발 석두성에 나부꼈네(一片降幡出石頭)’라고 하자, 백낙천이 말하길 ‘네 사람이 검은 용을 찾다가, 자네가 먼저 그 여의주를 얻었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용의 비늘과 발톱을 지어서 뭘 하겠는가’라고 하자, 나머지 세 사람이 마침내 붓을 멈추고 시 짓기를 그쳤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안公案과 서로 같다.
가령 전국시대 때 여러 학파의 학자 수십 인이 우연히 여관(逆旅)에 모여 한 곳에서 자기 학파의 글을 각기 품평하기로 한 것과 같다. 장자莊子가 먼저 「소요유逍遙遊」 편을 읽기를 “북쪽 바다(北冥)에는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크다. 이 물고기가 변화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는데, 붕새의 등 넓이는 또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넓다. 훌쩍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을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라고 하니, 일시에 좌중의 공기가 마치 나뭇잎이 다 떨어져서 산이 텅 비고 천지에 쌀쌀한 가을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읽기를 “하늘이 푸른 것은 원래 그렇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다를 수 없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위에서 내려다 보아도 또한 같을 것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니, 온 좌석의 사람들이 입을 허벌래 벌리고 정신이 나가 있거나,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할 말이 더 있어서 이어 읽어나가길 “묘고야산藐姑射山에 신인神人이 살고 있는데, 살결이 빙설氷雪과 같고 가냘픈 몸매가 처자處子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호흡하며 이슬을 마신다. 구름을 타고 비룡을 몰아 사해의 밖에서 노닌다. …생략… 그는 먼지와 때(塵垢) 그리고 쭉정이와 겨(秕糠)와 같이 하찮은 같은 것을 가지고도 요순堯舜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빚어낼 수 있는 분인데, 무엇 때문에 세속의 일에 마음을 쓰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모인 사람 중에 한 명이 일어나서 발언하길 “오늘 벌인 한바탕 논쟁은 모두 선생이 독차지하였오. 우리들은 그냥 물러가는 것이 좋겠오”라고 하였다. 장자가 못 들은 척하며 「소요유」를 다 읽고서, 다시 「제물론齊物論」을 펼쳐서 읽으려고 사방을 둘러보니,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어지럽게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들이 마치 해질녘 강가에 단풍과 억새풀이 풀죽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하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의관을 정돈하고 당황하지도 서두리지 않고서, 말에 올라 채찍질을 한 후에 말하길 “일부러 뒤에 가려는 것이 아니다. 말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라고 하고는, 제자인 공손추公孫丑와 만장萬章을 손으로 불러서 갔는데, 식자識者는 그가 맹가(孟軻 : 맹자) 자여씨子輿氏라고 하였다.
참선화參禪話는 온갖 수행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중니(仲尼 : 공자)가 “천하와 국가와 집안을 고르게 다스릴 수도 있으며, 흰 칼날을 밟고 죽을 수도 있지만, 중용의 도는 제대로 행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중용은 세간世間에서 조용히 중정中正을 실천하는 것인데, 성인조차 제대로 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하물며 참선화參禪話는 출세간出世間의 일로서, 본성을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見性成佛)이니,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야보冶父 염송에 이르길 “어렵고 어렵고 어려움이여(難難難)/ 땅에서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고(如平地上靑天)/ 쉽고 쉽고 쉬움이여(易易易)/ 옷 입은 채 한숨 자고 깸과 같도다(如和衣一覺睡)”라고 하였다. 그러나 ‘옷 입은 채 한숨 자고 깨는 것’은, 그러한 사람을 천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우나, ‘땅에서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고금을 통틀어 벼나 마(稻麻)처럼 너무나도 많다.
고봉高峯 선사가 말하길 “한 번 선을 수행하는 대중(禪衆)을 만나고 도道를 깨닫지 못한 것은, 그 허물이 갖가지 견해見解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이 자리잡은 병(膏肓之病)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서까래 세 개짜리 좁은 선방 아래(三條椽下) 일곱 자짜리 작은 자리 앞(七尺單前)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간화看話의 부류가 아니요, 참선을 수행하는 자의 병통을 바로 보여준 것이다. 그 병통이란 단지 형식만을 고수하고, 몸소 간화看話를 실천함이 없는 것이니, 정수리에 침을 꽂는다고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대저 조주趙州 노선사의 “묻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귀의 똥(驢糞)으로 그 눈알(眼珠)을 바꿔 준다”고 한 것이 이른바 ‘선화禪話’라는 것이니, 이 구절에서 곧바로 이해를 했는가, 이 구절을 떠나서 이해를 했는가. ‘뜰 앞에 잣나무(庭前柏樹子)’라는 화두 자체에 깨달아 앎이 있도다. 또한 쉬고 또 쉴 것이니, 다만 여자의 출정(女子出定) 이야기의 송頌을 읊겠노라.
구름 덮인 뭇 봉우리 품고서 앉았노라니 坐擁群峯覆白雲
깊은 골에 꾀꼬리 울어도 봄소식 모르네 鶯啼深谷不知春
바위 앞에 꽃비가 어지럽게 떨어지니 嵒前花雨紛紛落
꿈속에서 깨어나 옛 친구를 알아보네 夢覺初回識故人
十二、到極三頂且爲休歇
有古名言之傳曰。森羅萬象。至空而極。三敎賢聖。至佛而極。一切契經。至圓而極。是爲三極者也。余謂三頂。異於上所稱。謂常白峰。衆岳之頂。謂南華經。百家之頂。參禪話。萬行之頂。俱到斯極也。更難向上進步。且爲休歇地。始得。夫常白峯者。白頭山絕頂也。處於天下東北分野。曠漠于天坪之高原。磅礴于三江之源頭。流峙東南。連亘西北。孫裔之衆山。森翠。其誰不曰衆岳之頂。且論覽勝。震域名山。多於天下者已。奇峭岡巒。孰若關東之楓岳。雄邃洞府。孰若嶠湖之頭流。泉瀑壯絕。何似妙香。海雲縹緲。何似漢拏者。而獨擅常白之項乎。然衆岳。各有勝長。則常白之頂。或不著其長。而逈然獨勝者。别有在焉爾。及若石生之最后探勝也。襍於數百之群。露宿數百里無人之境。經七八日。涉險披樾。以進以止。困楚何甚。然后(一勝)纔到絕頂。風雨始霽。天光穿漏。俯瞰千尺底天池。猶居天半。周匝數由旬。雲日遞換。猶如狡獪(二勝)。回顧踏來陂陁。綠陰如海。波伏不興。無有邊際(三勝)。頂上左右。巖障。以儼然阿羅漢相。至十百崢嶸。拱立者。是爲衆岳之所無。曷不爲覽勝之絕頂乎。稍後。得聞餐松居士所言。五十日餘。孤宿天池之畔。逢見異獸奇禽。飲水群鳴。進觀飛龍瀑㳍之勝狀。水量絕多。流沫數十里之長。凌過呂梁之所聞云爾。南華經。爲百家之頂。先軰已有定議。不能更添蛇足。而且將一例。以喩之可乎。唐詩紀事云。長慶中。元微之。韋楚客。劉禹錫。會于白樂天之居。各賦金陵懷古。劉先唱云。王濬樓船下益州。金陵王氣黯然收。千尋銕鎻鑽沉江底。一片降幡出石頭云云。白公曰。四子探驪龍。吾子先得其珠。其餘鱗爪。何所用也。遂閣筆罷唱者。是謂相似公案矣。假如戰國際。諸子數十人。偶會逆旅。一處期圖品評自家文矣。莊子先讀其逍遙遊曰。北冥有魚。其名曰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爲鳥。其名曰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云云。一座空氣。如木脫山空。天地始肅。讀至天之蒼蒼。其正色耶。其遠而無所至極耶。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一座。或口呿喪神。或氣色不定。將欲有言。讀至藐姑射之山。有神人居焉。肌膚若氷雪。綽約若處子。不食五穀。吸風飲露。乘雲氣。御飛龍。而游乎四海之外。乃至是其塵垢秕糠。將猶陶鑄堯舜者也。孰肯以物爲事云云。座中一人。起立發言。今日一局。總輸乎子。則吾軰退席。可矣。若不聞而讀了。更欲提齊物論。爲之四顧。一座紛然出席。其象。若日暮江頭。楓荻蕭瑟。其中一人。齊整衣冠。而不慌不忙。鞍馬策後曰。未敢后也。馬不進也。手招公孫丑萬章而去。識者。謂孟軻子輿氏。至若參禪話。爲萬行頂也。仲尼曰。天下國家可均也。白刃可蹈也。中庸不可能也。是爲世間之從容履中正者。聖人之所難能矣。况復參禪話。爲出世間。而見性成佛者。豈可容易爲之哉。冶父拈云。難難難。如平地上靑天。易易易。如和衣一覺睡。然和衣一覺睡者。千載難見其人。平地上靑天者。古今稻麻。高峯禪師有云。一會禪衆。未見道者。過不在多般見解。膏肓之病。在什麼處。三條椽下。七尺單前。此句。非看話類。直示禪者之病。但守形式。而無親實看話矣。針加頂上。有幾効果。大抵趙州老子。驢糞逢人換眼珠之所謂禪話云者。卽此句以會耶。離此句以會耶。庭前柏樹子。自有證知矣。且爲休歇。而只誦女子出定話頌曰。坐擁群峯覆白雲。鶯啼深谷不知春。嵒前花雨紛紛落。夢覺初回識故人。
13. 여우 이야기는 교학의 뜻와 선학의 뜻으로 해석된다(野狐話釋有敎意祖意)
백장百丈의 여우 이야기(野狐話)는 『염송설화拈頌說話』 중에 있는데, 대개 교학의 뜻(敎意)와 선학의 뜻(祖意)의 두 해석으로 나뉜다. 이른바 ‘교학의 뜻’이라는 것은, 상식 선에서 해주는 설명하여서 전前의 백장百丈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잘못 대답한 것과 같다. ‘떨어지지 않는다(不落)’는 뜻이 사구死句에 치우쳐서 인과를 물리쳐 없애는 것(撥無因果)에 귀착된 것이다. 후後의 백장百丈이 말을 바꾸어서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고 했는데, ‘어둡지 않다(不昧)’는 뜻은 활구活句를 원만히 갖춰 궁극적으로 인과를 분명하게 밝힌 것(了明因果)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선학의 뜻’이라는 것은 인과의 상(因果相)을 초탈하여 그 뜻이 격외格外에 있는 것이다. 앞에 백장의 허물은 의심의 덩어리(疑雲)가 풀리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설사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라고 답하였다 해도 또한 여우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뒤에 백장의 말은 깨달은 뒤에 깨달음의 경지(見地)에 이었으니, 만약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 말하였어도 또한 여우의 탈을 벗어나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석이 교학의 뜻에서는 쉽지만, 선학의 뜻에서는 어렵다. 하나의 공안公案을 예로 들어서 증명하도록 하겠다. 옛날에 측則 감사監寺라는 자가 법안法眼 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하길 ‘파참(罷參)’이라 하였다. 어느 날 법안 선사가 묻기를 “그대는 것에 의하여 깨달아 들어갔느냐?”라 하자, 측 감사가 답하길 “제가 일찍이 한 존숙尊宿께 묻기를 ‘어떤 것이 학인學人의 자기自己입니까?’라 했더니, 존숙께서 답하길 ‘병정丙丁의 동자가 불을 구하러 왔느니라’고 하였는데, 그 말끝에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사가 말하길 “너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였는냐?”라 하니, 감사가 답하길 “병정은 불에 속하니, 불을 가지고 불을 구함이요, 자기를 가지고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선사가 그를 꾸짖으며 말하길 “네가 알기는 뭘 안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이에 측 감사가 위의威儀를 다시 고쳐 정리하고서, 별도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선사가 말하길 “네가 한번 물어보거라”라 하였다. 이에 “어떤 것이 학인의 자기입니까?”라고 하자, 선사가 답하길 “병정의 동자가 불을 구하러 왔느니라”라고 하였다. 측 감사가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운靈雲 선사와 향엄香嚴 선사의 견성見性이, 복사꽃 날리는 모습과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께서 도를 깨달음도 또한 샛별(明星)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냥 하나의 깨달음일 뿐이니, 여러 조사祖師의 공안公案에서 “한쪽 눈만을 갖추었다(具一隻眼)”하는 것이 과한 말이 아니다.
十三、野狐話釋有敎意祖意
百丈野狐話。在拈頌說話中。然槪有敎意祖意二釋之別。夫謂敎意者。如常途之有說。謂前百丈錯答之不落因果也。不落之義。偏在死句。而歸著撥無因果。後百丈一轉語之不昧因果也。不昧之義。圓於活句。而究竟了明因果者也。謂祖意者。超脫因果相。而意在格外。前百丈過。在疑雲不决處。設有答不昧因果。亦未免野狐類。后百丈話。在悟后見地。如有道不落因果。亦不妨解脫門者也。然在敎意。則易。在祖意。則難。證一例公案。以明之。昔有則監寺者。在法眼和尙會下。自號罷參。法眼。問曰。子於何處。得個入頭。則曰。我嘗問一尊宿。如何是學人自己。宿曰。丙丁童子來求火。我於言下。有個入處。眼曰你作麼生會得。則曰。丙丁是火。又來覓火。只是以自己覓自己也。眼訶之曰。你恁麼會。爭得。則乃重整威儀。別求開示。眼曰。你試問將來。則迺問曰。如何是學人自己。眼曰。丙丁童子來求火。則於言下大悟云爾。不寧唯是。靈雲香嚴之見性。不在桃花與擊竹。至若世尊悟道。亦不在明星。而一例見得。諸祖師公案。謂具一隻眼。未是過矣。
14. 승가에서 명가의 반열에 오른 이를 꼽자면 근래의 인물 가운데 초엄과 초의 선사이다(上人名家近稱草广草衣)
고려 시대 때 상인上人 천봉 만우千峯卍雨은 이목은李牧隱과 공문空門의 벗으로 지냈으며, 조선 세종世宗 때에 이르러서는 비해당匪懈堂의 <소상팔경도시瀟湘八景圖詩>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나이가 86세에 이르자, 말끔히 세속과 단절하여 고요히 지냈으니, 중국 송초구승宋初九僧의 기풍이 있었는데, 그의 전집全集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함허涵虛 상인上人의 오가해 서문(五家解序)은 진실로 명품名品이며, 그가 지은 『금강경오가해설의(說誼)』는 뭇 대가들보다도 매우 뛰어났으니, 그를 조선 초기의 상인명가上人名家라 생각된다.
선조宣祖 중엽에는 청허淸虛 노사老師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온 세상의 도성들은 바글거리는 개밋둑이요 萬國都城如蟻垤
저 수많은 호걸들은 우글거리는 초파리로다 千家豪傑若醯鷄
밝은 달빛 창문 아래 잡념 없이 누웠더니 一窻明月淸虛枕
끝없는 솔바람 소리 오락가락 들려오네 無限松風韻不齊
이 시는 세간에 널리 알려져서, 거의 임금으로부터 벌을 받을 뻔하였으나,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선실宣室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문장(翰墨)으로 맺어진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연로한 몸을 이끌고서 임금이 피난을 간 용만(龍灣)의 행재소行在所로 찾아가서 배알하였다. 이후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등에게 격문을 보내 임금을 위한 의병승을 일으키게 하였다. 『청허전집淸虛全集』 중에 위의 시만큼 기백이 웅대하며 말이 맑고 속되지 않은 것은 없다.
조선 효종과 현종 때에 백곡 처능白谷處能 상인은 그의 시 <백마강회고白馬江懷古>가 『동문선東文選』에 실렸으며, 척불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문은 세간에 전해져서 승가의 문장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문詩文은 실제 문장가에는 미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영조英祖 때에 영남(嶠南) 석남사石南寺의 월하月荷 상인은 『서경書經』 읽기를 좋아하여 수천 번이나 읽어서, 『가산고伽山集』라는 문집을 저술하였는데, 그 문체가 삐걱거릴 정도로 너무 드세고 굳세다.
정조正祖 때에 해양海陽 대둔사大芚寺의 연파蓮坡 상인은 『주역周易』을 수십 년 동안 즐겨 읽어서, 내지덕來知德의 주석을 발췌하여 초록한 것이 있는데, 문장이 졸렬하기가 한이 없다. 칠원율시 한 수를 지어서 옹담계翁覃溪에 보여주어 인정받았고, 사후에는 정다산丁茶山으로부터 비명碑銘을 얻었으며, 선진先進의 명사名士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몇몇의 문장들이 있다.
헌종과 철종 때에 고성固城 옥천사玉泉寺의 초엄草广 상인은 법명이 변오釆五이다. 어릴 적에 박만성朴晚醒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강고환姜古懽으로부터는 시문을 사사받았으며, 뭇 사람들로부터 명가名家로 인정을 받았다. <광산사에서 읊다(唫匡山寺)>라는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담장 깊이 붉은 매화, 방에 있는 초록 파초 紅梅深院綠蕉房
엷은 안개 땅에 깔려 이들 아래 받쳐주네 委地輕陰取次長
가는 비에 짤막한 수양버들 흩날리고 細雨欲飛人柳短
온통 푸른 여산에 부처님 몸 시원하네 廬山一碧佛軀凉
이는 그의 시의 아주 일부분(一斑)이다. 그 문文의 경우, <지리산문수암기智異山文殊庵記>와 <묘향산내원암기妙香山內院庵記>은 모두 명작이다. 그이 자서전 격인 <삼화자전三花子傳>를 보면, 『원각경圓覺經』을 읽던 중에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깨달아서, 저 환몽幻夢과 같은 세상의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만년에는 산길과 바닷가를 유유히 다니면서, 큰 소리로 시를 지어 읊고 혼자서 웃곤 하였다. 그러던 중 통영統營에 이르렀는데, 그때 통제사인 신위당申威堂와 급속도로 친해져 방외方外의 교유를 맺었다. 이윽고 함께 서울로 올라가던 중에 서로 이별하였다. 그 후 동쪽으로는 금강산의 비로봉毘盧峯 정상을 밟았고, 서쪽으로는 묘향산의 법왕대法王臺를 올라갔으며, 북쪽으로는 백두산의 상백봉常白峯 등을 올랐다. 그리고 천풍산(天風)을 오르내렸으니, 만년에 신세가 쓸쓸하였다. 말년에 지은 시에 이르길 “읊조리며 내려오니 천 가옥에 달이 떴네(行吟下界千家月)/ 나 혼자서 바다 건너 만 리 유람 가볼까나(孤渡滄波万里津)”라고 하였으니, 매천梅泉이 이른바 “사람들이 기이하다 부르짖는 모든 일은(萬事被人叫得奇)/ 스스로 받은 끝이 없는 고통에서 나온다네(自家枉受無量苦)”라고 한 것이던가. 드디어 막북漠北 지역으로 건너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근래에 석생石生이 약간의 시문을 수집하였는데, 그의 시는 서악西岳이나 백련白蓮과 같이 제일류의 대열에 합류하였으며, 제전濟顚·한산자寒山子과 같은 시품을 지녔다.
해양海陽의 초의草衣 상인은 두륜산頭輪山에서 도를 닦으며, 사대부나 명사들과 왕래하였으니,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도림道林이나 혜원惠遠이라고 칭하였다. 저서로는 『일지암집一枝庵集』이 있다. 강추금(姜秋琴 : 姜瑋)이 그의 비명을 지었는데, “초엄 상인과 함께 근세의 2대명가大名家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 문文은 초엄 상인에게 혹 뒤쳐진다는 평가를 받지만그가 지은 『동다송東茶頌』 1편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견줄 만한 것으로,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청정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듯하였다.
동시대에 보연普演 상인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송경(松京: 開城)의 인근 산들을 두루 다니며 시 몇 수를 지었다. 그것을 김창강金滄江에게 보였더니, 보연을 「시승전詩僧傳」에 등재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일찍이 실망스러워하던 중에 그 내력을 진응震應 상인으로부터 듣게 되었는데, “보연이란 승려는 쌍계사雙溪寺 사문으로, 초엄草广과 고환古懽 사이에서 시를 배웠으며, 시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하였다.
十四、上人名家近稱草广草衣
高麗上人千峯卍雨。爲李牧隱之空門友者。而及見朝鮮世宗時。和匪懈堂瀟湘八景圖詩。年至八十六。淸恬絕俗。有宋初九僧之風。恨不見其全集也。涵虛上人。五家解序。眞名品。而說誼之作。逈出諸家。是謂朝鮮初上人名家者也。至宣祖中葉。淸虛老師有詩云。萬國都城如蟻垤。千家豪傑若醯鷄。一窻明月淸虛枕。無限松風韻不齊者。播于人世。以是幾爲見罪于至尊。轉爲招待于宣室。有翰墨之緣。故扶老而進謁龍灣之蒙塵行在所。後起惟政處英等。勤王之役者也。淸虛全集。無如上詩之魄力雄大。口氣淸逸焉。孝顯之際。白谷處能上人。以白馬江懷古詩。入于東文選。擬廢釋疏。傳于世間。至稱僧文章。然其實詩文。不及作家耳。及夫英祖際。嶠南石南寺月荷上人。以好讀書經數千遍。故著爲伽山集。然文軆戞戞倔强而已。正祖時。海陽大芚寺蓮坡上人。好讀周易數十載。至抄來知德註。拙拙不已。著七律一首見知于翁覃溪。沒后。得受碑銘於丁茶山。其或見賞于先進名士。有數存乎哉。憲哲之際。固城玉泉寺草广上人。法名釆五。玅年。學文于朴晚醒。鍊詩于姜古懽。衆許爲名家。有唫匡山寺云。紅梅深院綠蕉房。委地輕陰取次長。細雨欲飛人柳短。廬山一碧佛軀凉者。其詩之一斑也。其文。有智異山文殊庵記。妙香山內院庵記。皆名作也。見其自敍三花子傳。於圓覺經中。悟得第一義諦。若彼幻夢世事。不足介懷。晚年。優游山徑海際。放吟自笑。轉至統營。時制使申威堂。輒爲方外交。已而。具上洛中。而分離。東躡毘盧峯頂。西上香山法王臺。北登常白峯等。上下天風。身世蒼凉。末路有句云。行吟下界千家月。孤渡滄波万里津。梅泉所云。萬事被人叫得奇。自家枉受無量苦者耶。遂渡漠北以終古。近者石生。蒐得畧干詩文。詩若西岳白蓮一流行履。濟顚寒山子同品也。海陽草衣上人。修道頭輪山中。往來搢紳名士。當世稱爲道林惠遠者矣。著有一枝庵集。姜秋琴。撰其碑銘。可與草广上人。爲近世二大名家也。其文。或遜于草广。而其爲東茶頌一篇。追配陸羽之茶經。則讀未了。而淸風習習焉。同時有普演上人。旅游松京近山。著詩數章。見賞於金滄江。至登詩僧普演傳。余曾惘然其所從來。聞夫震應上人。則普演者。雙溪寺沙門。學詩乎草广古懽間。詩名藉藉云爾。
15. 옥보대 아래의 다풍이 크게 무너짐(玉寶臺下茶風大壞)
『다경茶經』에 이르길 “차茶라는 것은 남쪽 지방의 아름답고 진귀한 나무이다. 그 나무는 과로(瓜蘆 : 苦丁茶)와 비슷하고, 잎은 치자桅子와 같다. 꽃은 흰 찔레꽃(白薔薇)과 같고, 꽃술은 노란 황금색이며, 가을에 꽃이 피는데, 맑은 향이 은은하다. 열매는 종려나무(栟櫚)와 같고, 줄기는 정향丁香과 같으며, 그 뿌리는 호두(胡桃)와 같다”라고 하였다.
『당서唐書』 「은일전隱逸傳」에 이르길 “당나라 숙종肅宗 상원上元 연간(760~761)에 육우陸羽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는 홍점鴻漸이다. 뛰어난 문장력과 학식이 있었으며 차를 좋아하여서, 『다경茶經』 3편을 저술하였다. 그 책에서는 차의 유래와 차 달이는 법과 차에 딸린 도구를 설명하면서, 다도의 형식을 상세히 갖추었다. 그리하여 천하에서 더욱 많은 사람이 차 마실 법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다경』에 이르기를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九難)이 있다. 그 첫째는 만들기[造]가 어려운 것이고, 둘째는 식별[別]이 어려운 것이며, 셋째는 알맞은 다기[器]를 사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넷째는 불[火] 다루기가 어려운 것이고, 다섯째는 물 끓이는 것[煮]이 어려운 것이며, 여섯째는 차를 덖는 일[炙]이 어려운 것이고, 일곱째는 가루 만들기[末]가 어려운 것이다. 여덟째는 차를 다리는 것[煮]이 어려운 것이고, 아홉째는 마시는 일[飮]이 어렵다. 흐린 날에 차를 따거나 밤에 말리는 것은 차를 만드는 법에 어긋나는 것이고, 씹어서 맛을 보거나 코에다 대고 냄새를 맡아서 가려내는 것은 올바른 식별법이 아니다. 노린내 나는 솥이나 비린내 나는 찻잔은 다기로 쓸 수 없고, 진이 나는 덜 마른 나무나 덜 탄 숯으로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 급하게 쏟아지는 물이나 장맛비가 고인 물은 찻물로 쓸 수 없다. 겉만 익고 속이 설익은 것은 제대로 구운 것이 아니며, 푸른 가루가 먼지처럼 날리는 것은 제대로 만든 가루차가 아니다. 조급하게 서둘러 휘젓는 것은 차를 끓이는 법이 아니고, 여름에는 신이 나서 마시다가 겨울에는 안 마시는 것은 차를 마시는 바른 법이 아니다.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말하길 “차에는 참된 향기(眞香)가 나는 것, 난초 향기가 나는 것(蘭香), 맑은 향기가 나는 것(淸香), 순수한 향기가 나는 것(純香)이 있다. 겉과 속이 똑같은 것은 순향이고, 설익지도 너무 익지도 않은 것이 청향이며, 불기운이 고르고 균일한 것은 난향이며, 곡우穀雨 이전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것을 진향이라고 한다. 이것이 차의 네 가지 향기(四香)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초의 선사의 『동다송東茶頌』에 이르기를 “또한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九難)과 네 가지 향기(四香)가 현묘하게 작용하는데, 옥보대玉寶臺 아래서 좌선하는 무리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라고 하고는, 스스로 주석하기를 “지리산 화개동花開洞 40∼50 리 모두가 차가 자라는 자갈밭이다. 화개동 위에 옥보대가 있고, 대 아래에 칠불선원七佛禪院이 있는데, 이곳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이 항상 늦게 늙은 찻잎(老葉)을 따서 햇볕에 말리고 솥에 넣어 달이기를 마치 나물국(菜羹) 끓이듯 하니, 그 형색이 매우 탁하고 빛깔이 붉다. 맛은 매우 쓰고 떫으므로, 내가 항상 말하기를 ‘천하에 좋은 차를 속된 솜씨로 버려놓았다’고 했다”라 하였다.
『동다송』에서는 그 대강만을 말하였을 뿐이다. 지리산은 차가 자라나는 산지니, 오직 화개동만 뿐만 아니라, 산의 서남쪽으로 수백 리 땅에서 차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양면岳陽面·화개면花開面·와룡면臥龍面 등과 같은 마을은 비록 남쪽의 구석진 농촌이지만, 차를 끓여 아침저녁으로 식사 후에 늘 마시지 않는 집이 없다. 뿐만 아니라, 차를 탕약湯藥으로 인식하여서, 눈 내리는 겨울철에 감기에 걸리면 차를 복용하여 땀을 내는 약제로 사용할 정도이니, 이른바 ‘다풍이 크게 무너졌다(茶風大壞)’는 말로 어찌 다법茶法을 다 논하겠는가. 그러나 석생石生이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이곳은 차가 워낙 많이 생산되기에 다른 방초芳草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예를 들어 수선화水仙花는 꽃 가운데 제일 귀한 신품神品이어서, 서울에 풍류가 있는 사람의 책상에 놓고 마치 보물인 냥 애지중지하는 한다. 그러나 저 제주도(瀛洲島)에 산밭과 물가에는 모두 수선화로 가득하기에 도리어 농사에 침해가 되어 새벽에 호미질을 하는 농사꾼에게는 골칫거리일 뿐이니, 완당阮堂의 시부에 일찍이 이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산창山窓에 길게 자란 대나무는 아끼고 좋아하지 않음이 없으니,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물로 만드네(無竹令人俗)’라는 시 구절을 읊기에 이른 것이다. 소장공(蘇長公 : 蘇軾)이 문호주文湖州에게 보내준 시는 다음과 같다.
한천현의 긴 대나무 쑥대처럼 지천이니 漢川脩竹賤如蓬
도끼 들고 어찌 그냥 죽순들을 버려둘까 斤斧何曾赦籜龍
생각건대 청빈하며 식탐 있는 태수께선 料得淸貧饞太守
위수 가의 넓은 대밭 가슴속에 가득하리 渭濱千畝在胸中
이 시는 문호주를 포복절도하게 만들었으니, 죽순이 책상에 가득하다고 할 정도로 대나무가 많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형초세시기荆楚歲時記』에 이르기를 “형산荆山의 사람들은 옥돌을 던져서 까치를 잡는다”고 하였으며, 중니(仲尼 : 공자)가 “기린麒麟이란 동물이 나타나면 성인聖人이 탄생한다”고 하였더니,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았다[西狩麒麟]는 말에 『춘추春秋』를 절필하고 다시 글을 쓰지 아니하였다. 창려昌黎 한유가 지은 <획린해獲麟解>에 이르기를 “기린은 영물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 성인聖人은 반드시 기린을 알아보며, 기린은 과연 상서롭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보면, 아프리카(阿非洲) 내에 사슴 무리 중에 기린과 비슷한 동물이 매우 많으며, 곰·돼지·개·양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진짜 비슷하니 어찌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다풍이 크게 무너졌음(茶風大壞)’을 덧붙여 논한 후에 감회가 거듭 깊어졌다.
十五、玉寶臺下茶風大壞
茶經云。茶南方嘉木。樹如瓜蘆。葉如桅子。花如白薔薇。心黃如金當秋開花。淸香隱然。實如栟櫚。蔕如丁香。根如胡桃。唐書隱逸傳云。肅宗上元間。有陸羽。字鴻漸。有文學。嗜茶。著茶經三篇。言茶之原之法之具。尤備。天下益知飲茶矣。經云。茶有九難。一曰造。二曰別。三曰器。四曰火。五曰水。六曰炙。七曰末。八曰煮。九曰飲。陰采夜焙。非造也。嚼味嗅香。非別也。羶鼎腥甌。非器也。膏薪庖炭。非火也。飛湍壅潦。非水也。外熱內生。非炙也。碧粉飄塵。非末也。操艱攪迯。非煮也。夏興冬廢。非飲也。萬寶全書云。茶有眞香。有蘭香。有淸香。有純香。表裡如一。曰純香。不生不熟。曰淸香。火候均停。曰蘭香。雨前神具。曰眞香。是謂四香也。草衣禪師東茶頌。有曰。又有九難四香玄竗用。何以敎得。玉寶臺下坐禪衆。自註云。智異山花開洞四五十里。皆是茶生之石田。洞之上。有玉寶臺。臺下。有七佛禪院。坐禪者。常晩採老葉。曬乾煎鼎。如烹菜羹。濃濁色赤。味甚苦澀。故余常云。天下好茶。爲俗所壞。東茶頌。惟其槪言之耳。智異山。茶生之地。不唯花開洞。山之西南數百里之地。無非產茶。而若其岳陽花開臥龍等面。雖蜑戶農村。以煎茶湯。不唯朝暮飯后之飲。認爲湯藥。雪候感冒。用作發汗之劑。所謂茶風大壞者。何論茶法。石生。抑有說焉。產茶之多。與佗芳草。無別故耳。夫爲水仙花者。花之神品也。京洛韵人之案。護若重寶。然于彼瀛洲島。山田水涯。都是水仙花。故還爲侵晨。荷鋤者。所病焉。阮堂賦。嘗言之矣。且山窻脩竹。非不愛好。而至吟無竹令人俗之句。及見蘇長公。贈文湖州詩云。漢川脩竹賤如蓬。斤斧何曾赦籜龍。料得淸貧饞太守。渭濱千畝在胸中。令湖州。絕倒。嘖筍滿案。以其竹多。故不貴者爾。荆楚歲時記。有云。荆山之人。以玉抵鵲。仲尼之所稱麒麟者。爲聖人而生者。故魯哀公。西狩得麒麟云。絕春秋筆於獲麟。及若昌黎。撰獲麟解道。麟之爲靈也。昭昭。乃至聖人者。必知麟。麟之果不爲不祥也。然至于今。阿非洲內鹿群中。似麒麟者。甚衆。與熊豕犬羊無異云。眞似。誰能辨之。附論茶風大壞後。而重有感焉。
16. 한 종의 시 형식은 저절로 반도의 체제가 됨(一種詩式自爲半島體製)
무릇 시詩라고 하는 것은, 문예文藝 전체 가운데 하나의 작은 형식이라서, 실로 도道를 갖추고 있는 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컨대 시의 측면에서 보면, 우주 사이에 맑고 깨끗한 기운으로부터 흘러나와 드러나는 것이 시詩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안광眼光은 달과 같이 밝아서 천고千古에 빛나며, 덧없는 세상의 공명功名을 하찮게 보는 것이다. 시를 말하면서, 어찌 운율과 가락이 없는 것을 가지고 조물주(化工)가 내는 자연의 소리(天籟)에 합하려 하는가.
시는 『시경』 300수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운율이 있었으며 문장을 이루었다. 그러던 것이 한漢·당唐 시대에 이르러서는, 운자에 맞춰 시를 짓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마치 혼자 읊는 것처럼 운자를 맞추는 것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모여서 함께 시를 짓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운자를 맞추는 데 규칙이 생겼으니, 혹은 하나의 압운을 따라서 통일하여 짓거나, 혹은 한정된 압운을 정하여 별도로 지었으며, 혹은 운자를 나누어서 짓기도 하고, 구절을 이어가면서 짓기도 하였다. 그들이 이룬 시 모임(詩會)에 따라 각기 그 규칙을 정하여 행하였으니, 하나로 정해진 법례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반도半島에 이르러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한정된 운자로 시를 짓는 한 형식만을 행하게 되었으니, 가히 천장일례千場一例요, 천편일률千篇一律이라 할 만하였다. 이에 운자를 지어내고 시평을 짓지 못하는 것을 조롱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일컬어 ‘우리 반도 자체의 체제가 된 것이다’라 한 것의 첫 번째이다.
고시古詩와 근체시近體詩는 초당初唐의 심송沈宋으로부터 아울러 행하여져서, 서로 위배되지 않았으며, 이백·두보·이백·두보·한유·백거이·소식·육유·원호문·우집(李杜韓白白蘇陸元虞)와 같은 이들의 작품에 이르러 근체시가 명품名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시古詩에도 능하여서, 그들을 대가大家로 추앙하였다. 그런데 우리 반도에 이르러서는, 고시古詩를 짓는 자가 극히 적었다. 오직 근체시 중에 칠언율시와 칠언절구만을 지어서 서로 주고받는 것을 정종正宗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원정王阮亭의 『채풍록採風錄』에 이르기를 “조선의 시인들은 거의 다 근체시만을 짓고, 고시를 짓는 사람은 극히 적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일컬어 이를 일컬어 ‘우리 반도 자체의 체제가 된 것이다’라 한 것의 두 번째이다.
생각건대 칠언율시에서 시의 기구(起句 : 제1,2구절)가 제일 중요하니, 마치 집을 지을 때 지면을 살펴서 주춧돌을 놓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함련(頷聯 : 제3,4구절)으로 잇고 경련(頸聯 : 제5,6구절)로 전환하니, 마치 자재를 잘 다듬어 각기 균등하게 만들어 집의 기본 틀(間架)이 가지런히 놓인 것과 같다. 낙구(落句 : 제7,8구절)로 마무리하여 생각과 마음을 완수하는 것은 마치 집을 완성함에 목수(梓人)가 마무리를 잘하는 것과 같다. 고금의 명가들이 지은 작품들은 이렇듯 기승전락起承轉落의 규칙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우리 반도에 이르러서는, 어떻게든 빨리 시를 짓기 위한 하나의 비책을 마련하길, 운자韻字를 얻은 후에 함련과 경련 두 연을 먼저 짓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기구起句를 모색한 후에, 마지막으로 결구結句를 지어서, 문장을 이룬다. 이렇듯 시를 지으니, 중련中聯은 그나마 볼 만한데, 한 편 전체가 삐거덕거리며 맞지 않아서, 말의 앞뒤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제각기 따로 논다. 이를 어찌 규범에 맞고 운율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일컬어 ‘우리 반도 자체의 체제가 된 것이다’라 한 것의 세 번째이다.
칠언율시의 시작은 명가마다 각기 달라서 같지 않으나, 대개 힘차고 거침없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당나라 때 시를 예로 들면, “낙성일별사천리洛城一别四千里” “정현정자간의빈鄭縣亭子磵之濱” “봉황대상봉황유鳳凰臺上鳳凰游” “한문황제유고대漢文皇帝有高臺” “왕준루선하익주王濬樓船下益州” 등이 있고, 송나라 때 시를 예로 들면, “만리가산일몽중萬里家山一夢中” “백만호로사이공百萬胡盧事已空”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우리 반도는 근대에 이르러 많고 많은 명가名家들이 어찌 말엽 시류詩流의 폐단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이 또한 어쩔 수 없었을 뿐이로다. 영재寧齋 이건창이 이에 대해 말하길 “근세에 자하紫霞 신위 선생이 이 기승起承의 비결의 이해했으니,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동원의 나무들 바람과 이슬에 말끔해져 東園風露洗脩木
밤사이 잠 못 이뤄 그저 잠시 올라왔네 夜不能眠聊小登
지는 달은 뉘엿뉘엿 반쯤 깨져 가련하고 落月亭亭憐半破
가을 산은 우뚝우뚝 높은 봉을 선보이네 秋山簇簇見高稜
다듬이질 먼 소리에 절구질로 화답하고 遙砧響答抑揚杵
흔들리는 먼 불빛에 등불이 오르내리네 遠火光搖升降燈
저 아득한 새벽빛을 어찌 직접 바라보랴 曙色迢迢那可望
붉은 담장 한쪽 면에 강이 붉게 물들었네 紅墻一面絳河澄
이 시에는 마음에 남아 있는 감정이 거의 없으니, 그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는 더욱이 첫 구절과 두 번째 구절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영재寧齋 이건창의 소감인데, 그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라고 한 것은 진실로 믿지 못하겠다. 나도 또한 강고환姜古懽이 지은 <풍악영랑봉楓岳永郎峰>이란 작품이 진실로 기승起承의 작법에 합치한다고 생각하니, 청아한 시운과 고매한 정취가 자하紫霞 신위를 능가하는 것 같다. 위 시는 다음과 같다.
중향성의 첩첩 산들 바라보니 우뚝 솟아 香城百疊望崔嵬
손가락 튕기는 사이 화엄각이 열리려 하네 彈指華嚴閣欲開
해는 비춰 쌍대에는 푸른 학이 서서 있고 日照雙臺靑鶴立
만 골짜기 구름 생겨 불 뿜는 용 돌아가네 雲生萬壑火龍迴
산과 바다 일찍부터 서로 알며 기뻐하는데 海山懽喜曾相識
대지 홀로 고립되어 쓸쓸하게 왕래하네 大地蕭廖獨徃來
남은 삶을 보내려고 이곳저곳 살피다가 欲把餘生尋位置
사년 동안 세 번이나 봉래산에 이르렀네 四年三度到蓬萊
令人遺속세의 때(煙火) 신세를 잊으려 읊을 만하고 개탄스러워할 만하다. 매천梅泉 황현이 일찍이 겸산兼山 백낙륜白樂倫의 시를 평론하길 “겸산의 율시는 단지 중련中聯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종종 아름다운 시 구절이 당唐 때의 수준에 이른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결起結 양 연의 경우에는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내놓는 것과 같이 어색한 경우가 많았으니, 또한 세속인의 시류詩流가 몸에 밴 것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향엄 상인을 금강산으로 보내며(送香嚴上人之楓岳)>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옛 산중의 법좌에서 무탈하게 계실 적에 法筵無恙舊林邱
관청에서 꾼 꿈에선 바닷가를 배회했네 官夢徘徊海上幽
천리 먼 길 술잔 타고 비로 자주 적셔주며 千里渡杯頻見雨
오년 동안 가르치다 이제 가을 다 되었네 五年指月正逢秋
흐르는 물은 몸을 장차 세속을 여의게 하고 流水身將人境出
이름난 산은 마음에 부처님 향 풍기게 하고 名山心與佛香浮
일만 이천 산봉우리 온 산 가득 단풍나무 萬二千峯楓萬樹
그대 홀로 보내어서 정양루에 올라가네 送君獨上正陽樓
중련中聯은 잘 지었으나, 기구起句는 내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대로 봐줄 만하다. 그러나 결련結聯은 어떤 의미도 없이 그저 입으로만 억지로 읊어낸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겸산兼山은 근세기 사단詞壇의 뛰어난 인물(翹楚)인데도 오히려 이러한데, 그 아래 수준의 사람들이랴.
十六、一種詩式自爲半島軆製
夫若詩者。文藝之小品。固非有道者。所屑屑。然要以詩觀之。宇宙間淸淑一氣。流露爲詩云。故詩人眼光。如月之曙。照映千古。芥視浮世功名者矣。言詩也。豈率諸無韻節。而合於化工之天籟哉。詩自三百之始。有韻成章。流及漢唐之際。韻語大成。其若獨吟也。拈韻自由。及夫會同之作。自有拈韻之式。或隨一韻之通。或定限韻之別。或令分韻。或令聯句。逐其詩會。一境以行之。無一定之單例。至于半島也。從何時而獨行限韻一式。可謂千場一例。千篇一律。至以嘲作韻。不作詩之評。是謂半島之自爲軆製者。一也。古詩與近軆。自初唐沈宋以來。並行。而不相悖耳。至若李杜韓白蘇黃陸元之作。非唯近軆名品。長於古詩。故而推爲大家者也。及于半島也。著古詩者。甚少。唯以近軆中。七言律絕。爲酬唱之正宗。故王阮亭採風錄。有言。朝鮮詩人。殊多近軆。絕少古詩云。是謂半島之自爲軆製者。二也。夫惟七言律者。以起句㝡重。如造屋之審面成定礎也。承以頷聯。轉以頸聯。如攻材均當。間架井井。終以落句。完遂意者。如屋之成。梓人能事畢矣。古今名家之品。用以起承轉落之規矩。及若半島也。謀諸速達之一訣。拈得韻字後。先構頷頸兩聯而再尋冒頭起句。取次結句。而成章。則設有中聯之可觀。一篇軋軋。無照應。各立。是可謂正規合律乎哉。是謂半島之自爲軆製者。三也。七言律之起首。名家。殊自不同。然大抵以雄渾。爲貴。如唐之洛城一别四千里。鄭縣亭子磵之濱。鳳凰臺上鳳凰游。漢文皇帝有高臺。王濬樓船下益州。宋之萬里家山一夢中。百萬胡盧事已空之類。是也。半島近代。濟濟名家。其有不知末葉詩流之弊哉。是亦喚奈何。而止矣。寧齋有言。近世紫霞。會此起承之訣。如東園風露洗脩木。夜不能眠聊小登。落月亭亭憐半破。秋山簇簇見高稜。遙砧響答抑揚杵。遠火光搖升降燈。曙色迢迢那可望。紅墻一面絳河澄。此詩。幾無遺憾。而其難及處尤在第一二句耳。此寧齋之所賞。然其難及處。諒未信矣。余且以姜古懽楓岳永郎峰作。允合起承法。而淸韻逸趣。似勝紫霞者也。香城百疊望崔嵬。彈指華嚴閣欲開。日照雙臺靑鶴立。雲生萬壑火龍迴。海山懽喜曾相識。大地蕭廖獨徃來。欲把餘生尋位置。四年三度到蓬萊。令人遺煙火。而忘身世。可誦可慨已。梅泉嘗論白兼山樂倫詩云。兼山之律。但注重於中聯。故種種佳句。及于唐者。不少。起結兩聯。如出他人手者。多矣。亦不薰俗士詩流乎。如送香嚴上人之楓岳詩云。法筵無恙舊林邱。官夢徘徊海上幽。千里渡杯頻見雨。五年指月正逢秋。流水身將人境出。名山心與佛香浮。萬二千峯楓萬樹。送君獨上正陽樓。中聯。是佳作。而起句疎照應。尙可爲也。結聯不用意。而口頭竟成。分明矣云爾。若兼山。近世詞壇之翹肖。而尙爾。况其下乎。
17. 깨달음도 또한 온갖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 아니겠는가(悟亦不爲衆禍門乎)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오늘 날의 처사處士들은 순전히 헛된 명성을 훔치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할까 싶었는데, 우리 반도의 말세에 이르러서, ‘아무개 산림山林’이라 하며, ‘아무개 징군徵君’이라고 하여서, 마치 비 온 뒤에 죽순처럼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실제로 도학道學과 지식을 두루 갖추어서 세상을 구제하는 뛰어난 인물(舟楫)로서, 당시의 임금이 스승으로 모실 만한 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고쳐서 아름다운 명성을 이룬 자들만이 많았을 뿐이다. 이들은 또한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평소에는 말을 잘하지만 등용하면 위배되고 외모만 공손하다[靜言庸違象恭]”와 같은 부류로다.
이것이 운수납자의 집안(塢雲家)에 이르러서는, 말엽에 이른바 ‘도를 깨쳤다(悟道)’라고 하는 이들이 삼씨나 좁쌀보다도 많아졌으니, 누가 이것을 제어하리오. 옛날에 세존께서 샛별(明星)을 보고 도를 깨달은 후에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고, 증득한 대로 설법하였다. 그것이 바로 『화엄경』 오주인과五周因果의 법문이니, 이는 원래 높고 멀어서 다 오르지 못하고, 크고 넓어서 다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세간에서 제아무리 말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한 자라도, 전생 인연이 성숙된 보살만이 감당할 수 있는 근기라고 미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로부터 500년 후에 오탁악세의 중생들이 모두 믿음의 방편문(信門)만을 의탁하고서, ‘감히 그 경지에는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러, 바람 없이 물결이 일어나듯 느닷없이 나타나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와서, 9년 간 면벽 수행을 하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직관하여 불성의 깨달아 부처를 이루게 되는 최상승의 선법禪法을 펼치니, 이것이 그 후에 불교를 배우는 견해의 첫 번째 변화이다.
이후에 전하고 전하여 혜능 대사에 이르렀는데, 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렁이에 남쪽 해안가 촌구석에 살던 자였다. 그러던 중 『금강경金剛經』 한 구절을 듣고 상승上乘의 선법을 깨달아서, 황매산黃梅山의 5조 홍인 대사에게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는, 드디어 선종의 6조가 되었다. 그 명성이 서울의 궁궐에까지 자자했으니, 이 또한 평범한 사람도 대장이 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불교를 배우는 견해의 두 번째 변화이다.
6조 문하에서 법을 계승한 자들 중에 먼저 4대 제자를 언급하면, 바로 지성志誠·지도志道·지상智常·신회神會이다. 그리고 이어서 영가 각永嘉覺·청원 사靑原思·남악 양南岳讓 등이 있는데, 직접 법을 전한 것에 있어서는 오히려 어구語句의 법에 의지하였다. 그런데 남악 회양이 마조馬祖에게 법을 전하고, 청원 행사가 석두石頭에게 법을 전한 이후에는, 이른바 ‘어구語句’라고 하는 것을 또한 추구蒭狗로 여겼다. 다만 ‘방할기용棒喝機用’ ‘진금포잡화포眞金舖雜貨舖’ 등으로 격외格外의 종풍宗風을 삼았으니, 이것이 불교를 배우는 견해의 세 번째 변화이다.
이후로 『전등록』에 드러난 것을 보면, 가히 ‘천 가지 등불이 천 가지로 비춘다’고 할 정도로 다양하였으니, 도를 깨닫는 기연機緣에 일일이 응대하고 접대할 겨를이 없었다. 당시 세상에서 ‘갑자기 멱살을 움켜잡거나(驀胸擒住) 문을 닫고 발을 손상시키는 것(閉戶傷足)’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 명료하다 하고, ‘복숭아꽃을 본 것(見桃花)과 대나무 소리를 들은 것(聞竹聲)’으로 다시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돌아갈 곳을 알고 있어서 전어轉語를 내려,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정한 것이었다. 이에 안목을 갖춘 종사宗師는 핵심을 바로 파악하여서(左右逢原) 서로 증득하여 알게 된 것이니, 그 또한 한 때 총림에서 극히 왕성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총림의 성웅聖雄이 세상을 떠나고 선걸禪傑이 드물게 나오게 되자, 이후부터는 화두話頭를 전문으로 하고 염송拈頌을 다투어 부르짖게 되었다. 이에 향상向上의 종풍宗風이 쇠퇴하여 사라지고(式微),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는 자(截斷衆流者)들이 점차 새벽 별처럼 사라졌다. 이 때문에 그에 따른 형식과 규칙들이 생겨나고, 말로만 나불대는 선풍禪風이 매우 성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에도 정도로 나아가는 진실한 말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선사와 같은 이는 참정參政 이병李邴이 깨친 후에 보낸 서신에 답하여 말하기를 “보내온 글에서 ‘도성으로 돌아온 이후 입을 입고 밥을 먹으며, 자식을 안고 손자와 노는 등 낱낱의 일들이 모두 옛날 그대로지만, 얽매이고 막힌 감정이 이미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특하다고 여기지도 않으며, 그 밖에 숙세의 습기(宿習)나 오랜 업장(舊障)도 또한 점차 가벼워지고 미미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 내용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읽고는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를 배워 나타난 영험입니다. 만약 헤아릴 수 없이 큰 인물이 한 번 웃는 가운데에 백 가지를 이해하고 천 가지를 감당하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불가에 과연 전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중략中略…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쉽다고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부끄러움을 내어야 비로소 옳습니다. 간혹 근기가 수승하고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힘을 들이지 않고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이것을 보고 쉽게 생각해 수행을 하지 않다가는 눈앞의 경계에 끄달림을 당하여서, 결국 주재하는 마음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질수록 미혹에 빠져 벗어나지 못해, 도력道力이 업력業力을 이기지 못하게 되니, 마구니의 그 틈을 타서 마니가 하라는 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결국 죽을 때에 이르러서도 또한 힘을 얻지 못하니,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기억할 일입니다. 지난 날 말씀에 ‘이理는 곧 단박에 깨닫게 되어 깨달음에 올라서 모두 소멸되거니와, 사事는 단박에 없어지는 게 아니라 차제에 따라 다하는 것이다【능엄경楞嚴經】’라고 하였으니,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생활에서 절대 잊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이는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못과 쇠를 자르듯(斬釘截鐵) 과감히 결단하게 하기 위한 긴요한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참선하는 무리들은 한번 깨친 후엔 다시는 수행의 일이 없이 망령되이 거침없는 일만을 벌리니,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말하는 깨달음의 삿되고 바름과 깨달음의 깊고 얕음을 누가 있어 바로잡겠는가. 태연하게 유유히 깊은 산 큰 골짜기를 떠나니, 마치 용이 없어지고 호랑이가 떠나가자,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춤을 추고 여우와 살쾡이가 울부짖는 것과 같은 탄식이 있을 뿐이로다.
원元나라 때 고봉高峰과 중봉中峰 두 대사의 어록과 명明나라 때 초석 기楚石琦․감산 청山德淸․자백 관紫栢觀․운서 굉雲棲宏 4대사의 어록 등을 어찌해 참관參觀하지 않고, 스스로 상인법上人法을 얻었다고 하면서, 한번 깨친 후에 수행함이 없이 증상만增上慢과 마구니의 권속이 되기를 좋아하는가. 이는 가히 불쌍한 중생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 때문에 석생石生은 근래에 ‘깨달음도 또한 온갖 재앙의 문이 아니겠는가’라는 하나의 안을 제창한 것이다.
옛날 하택荷澤 화상이 ‘지知’라는 한 글자는 온갖 묘리로 들어가는 문(衆妙之門)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원묘함을 이루지 않았으리오. 그러나 그 후에 선종禪宗에서 간파하여 알음알이(知見)에 해당하는 ‘지知’라고 이해하여 사구死句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황룡 사심死心과 같은 이가 ‘지知’라는 한 글자는 온갖 재앙의 문(衆禍之門)이라고 한 것은, 간화看話의 활구活句라 여기니, 이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말한다.
당나라 때의 위산僞山 선사가 이르기를 “법리法理를 깊이 연구하여 깨우침으로서 법을 삼는 것은 선가禪家의 표준이다. 그러나 나성羅星에 잘못 깨닫기도 하고 귀포歸泡에 진실로 깨치기도 한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에 내가 ‘깨침이라는 것도 또한 온갖 재앙의 문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하나의 안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람 때문에 그 말까지 버리지 말기를 매우 바라고 바랄 뿐이로다.
十七、悟亦不爲衆禍門乎
後漢書有曰。今之處士。純盜虛名。其然乎哉。流塵。及于半島叔世。曰某山林。曰某徵君。如雨後生筍。然實蘊道學智識。爲濟世舟楫。爲時君師事者罕見其儔。傅會一時權門。以成美名者。甚衆。是亦書傳云。靜言庸違象恭之類與。至若塢雲家。末葉所謂悟道之流。多於麻粟。孰能制之乎。粵若世尊之見明星。悟道後。則不離樹下。如證而說。華嚴經五周因果法門。元是高逈莫攀。廣博難擬。故雖世間辯聰者。不得不推爲宿世緣熟菩薩之所當機。至于後五百年。濁世衆生都付信門矣。不敢生叨濫上流云云。曁夫菩提達磨。無風起浪。而渡海西來。九年面壁。直指人心。見性成佛之㝡上乘禪法。後學佛之見。一變矣。轉之于能大士。以若目不識丁。南海蜑戶者流。聞一句金剛經。而超悟上乘。得傳黄梅心印。遂爲禪宗六祖。名動京闕。是亦不謂人皆以爲得大將者乎。學佛之見。二變矣。六祖門下嗣法者。先稱四大弟子曰。志誠志道智常神會焉。續有永嘉覺。靑原思。南岳讓等。然其於親傳也。猶資語句之法矣。讓傳馬祖。思傳石頭。以後所謂語句者。亦付蒭狗。特以棒喝機用。眞金舖雜貨舖等。爲格外宗風。學佛之見。三變矣。自茲以還。見于傳燈者。可謂千燈千照。悟道機緣。應接不暇。然當世之驀胸擒住。閉戶傷足。徹見了了。見桃花。聞竹聲。更無擬疑云者。皆有知歸。而下轉語。以判正之。具眼宗師。左右逢原。以互相證知焉。其亦一時叢林極盛哉。俄而。聖雄已沒。禪傑罕作。已自話頭專門也。拈頌競唱也。向上宗風。式微。截斷衆流者。漸若晨星。故形式規矩。生焉。口頭禪風。熾然矣。然此際。猶傳就正之眞實語。如大慧杲禪師。答李參政邴之悟后書。曰示諭。自到城中。著衣喫飯。抱子弄孫。色色仍舊。旣亡拘滞之情。亦不作奇特之想。宿習舊障。亦稍稍輕微。三復斯語。歡喜踊躍。此乃學佛之驗也。儻非過量大人。於一笑中。百了千當。則不能知吾家果有不傳之玅(中略)。此事。極不容易。須生慚愧。始得。徃徃利根上智者。得之不費力。遂生容易心。便不脩行。多被目前境界奪將去。作主宰不得。日久月深。迷而不返。道力不能勝業力。魔得其便。定爲魔所攝持。臨命終時。亦不得力。千萬記取。前日之語。理則頓悟。乘悟併消。事非頓除。因次第盡(楞嚴經)。行住坐臥。切不可忘了云云。是爲悟后人之斬釘截鐵之要語。其如何敎得今世禪流。一悟之後。更無事。而妄作無碍事者乎。然而其人之所謂悟之邪正。悟之淺深。有誰黜之。有誰正之。悠然而發深山巨壑。龍亡而虎逝。則舞鰌鱔。而號狐貍之感嘆也已。若元之高峯中峯。二大士之語錄。若明之楚石琦。憨山淸。紫柏觀。雲棲宏。四大士之語錄等。胡不參觀。而自稱得上人法。一悟無事。而好作增上慢。魔眷屬。可謂憐悶生爾。是故石生。近唱悟亦不爲衆禍之門乎一案。昔日荷澤。倡知之一字。衆妙之門。豈不成圓玅。其后禪宗。看破。恐有知見立知之解。謂歸死句。以若死心之知之一字。衆禍之門者。謂看話之活句。至今道之。唐之潙山云。研窮法理。以悟爲則。爲禪家之標準。然妄悟羅星。實悟歸泡。今日。悟亦不爲衆禍之門乎一案。可乎否乎。母其以人廢言。幸甚矣。
18. 천뢰와 인뢰가 화합해야 시도가 원만해짐(天籟叶人籟詩道方圓)
천뢰天籟와 인뢰人籟라는 말은 비록 『장자莊子』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지금은 그 말의 뜻이 바뀌어서 조금 다르게 사용된다. 천뢰天籟라는 것은 그 신운神韻을 나타낸 것으로, 순전히 천행天行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마치 천화天花가 달라붙지 않는 것과 같고, 물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으며, 거울에 형상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인뢰人籟라는 것은 그 정공精工을 나타낸 것으로, 인력人力으로 이르는 것이니, 마치 태산泰山에 오르되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서 꼭대기에 올라가 주변의 산들이 작은 것을 한 번 보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소영빈蘇穎濱이 다른 사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평소에 ‘문장은 배워서 잘 지을 수 없고, 기운이란 길러서 이룰 수가 있다’라고 여겼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 문장을 보면, 너그럽고 두터우며 크고도 넓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어 그 기운의 크기와 어울립니다. 태사공(太史公 : 사마천)은 천하를 두루 다니며 온 세상의 유명한 산과 큰 강물을 구경하고, 연燕나라 조趙나라 지방의 호걸준사들과 교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이 소탕하여 매우 기이한 기운이 있습니다. 이들 두 분이 어찌하여 붓을 잡고 이렇듯 훌륭한 문장을 짓게 된 것인가. 그 기운이 그분들의 가슴속에 가득 차서 그 용모에 넘쳐흐르고, 그 말을 움직여 그분들의 문장으로 드러나면서도, 정작 그분들은 스스로 그러한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뢰의 신운神韻을 증험한 말이라 하겠다.
원수원袁隨園이 다른 사람에게 지어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말 탄 채로 문장 빨리 짓는다고 훌륭하다 하지 마라倚馬休夸速藻佳
사마상여 결국에는 추양이나 매승을 다 압도했네 相如終竟壓鄒枚
사물이란 모름지기 드물어야 귀하듯이 物須見少方爲貴
시는 되레 느긋해야 재능 더욱 펼친다네 詩到能遲轉是才
청각 소리 고아해서 연주 쉽게 할 수 없고 淸角聲高非易奏
우담바라 좋은 까닭 쉽게 피지 않아서네 優曇花好不輕開
모름지기 극락의 신선 경지 알아야 하니 須知極樂神仙境
많고 많은 수련과 고심 끝에 이루어지네 修煉多從苦處來
이는 인뢰의 정공精工을 증험한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예로부터 시인의 품성은 남달라서, 어떤 이는 신운神韻으로 뛰어난 경지(飄逸)를 드러내고, 어떤 이는 정공精工으로 깊고 오묘함(深妙)을 드러냈는데, 그 바라밀波羅蜜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물가의 난초나 울타리의 국화가 저마다 향기를 내는 것과 같다. 당․송 때와 같은 경우로 미루어 보면, 이청련(李靑蓮 : 李白)과 소동파(蘇東坡 : 蘇軾)는 천행(天行)이 뛰어났고, 두소릉(杜少陵 : 杜甫)와 황산곡(黄山谷 : 黃庭堅)은 인력人力이 뛰어났는데, 그들의 공력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면 어느 것인들 비로자나毘盧遮那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 짓는 것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고 공력을 쏟아 연마할 때 천뢰와 인뢰 가운데 하나를 정하는 것은, 또한 공중에 떠다니는 털(毛道)과 같이 기반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운神韻에 치우쳐 완성시키지 못하면, 글에 내용이 없고 구성이 허술하며 공허한 말로 흐르게 되어서 솥 전체의 고기 맛(鼎臠)을 맛보지 못하게 된다. 산동山東의 왕완정王阮亭 명가名家가 아님이 없지만, 그를 추종하여 배운 자들은 허술하고 공허한 문장의 구덩이에 쉽게 빠지게 된다. 한편 정공精工에 치우쳐서 완성시키지 못하면, 가볍고 세속적이며 세세한 기교에만 빠져서 상승上乘을 초탈하지 못하게 된다. 강남江南의 원간재袁簡齋는 명가가 아님이 없지만, 그를 추종하여 배운 자들은 세세한 기교를 부리며 화려하게 꾸미는 문장의 그물에 쉽게 걸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왼쪽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오른쪽으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대방가의 시규詩規를 따르려면, 어찌 천뢰가 인뢰와 화합한 연후에 시도詩道가 비로서 원만해지는 요결要訣을 주창하지 않으리오. 어찌 이것뿐이랴. 시도詩道가 쇠퇴하고 미약해진 것은 또한 선종禪宗이 공허해지고 거짓되어 간 것과 같으니, 그저 흉내만 내면서 의관만을 갖추는 자들이 가까운 주변만 하여도 자못 많아졌다. 그러므로 『속시품續詩品』에서 이르길 “두보만을 감싸고 한유만을 존숭하면(抱杜尊韓) 권문세족에게 기생하게 되고(托足權門), 도연명과 위응물만을 고수하게 되면(苦守陶韋) 빈천하면서 교만을 떨게 된다(貧賤驕人)”라고 하였으니, 어찌 시가詩家에서 유행하는 폐단에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조선 근대의 시인 중에 개성開城의 박천유朴天游라는 사람이 당시唐詩의 구절을 모았는데, 시의 양이 수 권에 이르렀다. 이 시들의 목록을 모아서 책을 만들어 놓고, 그 책 상자에 이름을 붙이길 ‘박죽존朴竹尊’이라고 하였다. 일생동안 중국의 두보로부터 조선의 조추재趙秋齋 등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하였으니, 어찌 옛것에 박식한 명가名家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실로 그가 지은 시詩의 품격을 엿보면, 성당盛唐의 의관을 빌려 입은 듯하고, 두초당(杜草堂 : 杜甫)의 빈집에 머문 사람과 같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유(朴貞蕤 : 朴齊家)가 말하길 “요즘에 이른바 두보를 배운다는 자(學杜者)들의 시는 하품下品이고, 당시를 배우는 자(學唐者)의 시는 차상次上이며。당․송․원․명을 겸하여 배우는 자들의 시는 상품上品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다만 견문이 좁은 것과 널리 통하여 아는 것에 대해서만 말한 것으로,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홍북강洪北江의 『시화詩話』에 이르기를 “괴이한 것은 고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칠 수 없고, 난삽한 것은 고칠 수 있으나 매끄러운 것은 고칠 수 없다. 손가지孫可之의 문장과 노옥천盧玉川의 시문을 괴이한 것이라고 부를 만하고, 번종사樊宗師의 기記와 왕반산王半山의 가歌는 납삽하다고 할 만하니, 나머지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근래의 시인들이 백향산(白香山 : 白居易)와 소옥국(蘇玉局 : 蘇軾)의 시풍을 좋아하여 거의 열에 아홉은 이를 배우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시에서 저속하고 매끄러운 것만을 보았을 뿐이다. 이는 백향산과 소옥국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잘못 배우는 사람들의 잘못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길 “왕유와 맹호연의 시를 흉내 낸 것을 보지 않고, 소식의 시를 흉내 낸 것을 보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심지心地가 명료하고 기량이 조금 협소한 자는 반드시 왕유와 맹호연의 시를 배우고 흉내 내며, 기질과 성품이 민첩하고 재기才氣가 약간 넉넉한 자는 반드시 소식의 시를 배우고 따라하기 때문이다. 만약 시에 대해 말한다면, 이 두 가지 허물을 범하지 말아야 하니, 반드시 또 다른 수완과 안목을 갖추게 되면, 스스로 성정性情에 따라서 짓게 될 것이니, 이런 점을 나는 빨리 보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고자 한 바는, 수완과 안목을 갖추고서 자신의 성정性情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은 보기 드물고, 의관을 빌려 쓰고서 스스로 과대하다고 하는 사람은 실컷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선종의 암두巖頭 선사가 설봉雪峰에게 보이기를 “남의 문을 따라 들어간 자는 자신의 보배가 아니로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천뢰와 인뢰를 천부적인 재능(天才)과 후천적 노력(人功)이란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도 또한 가할 것이다. 비록 천부적 재능이 있더라도 후천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지극한 경지를 이룰 수 없다. 예를 들어 중승中丞 장순張巡이 하루에 수만 마디의 말을 외워서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 능력이나 창려昌黎 한유가 글짓기를 완숙하게 연습한 것과 같다. 그 문장의 형식과 내용을 두루 갖추고서 일찍이 글짓기에서 아름다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 진역震域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일찍이 그 지혜가 평범함을 뛰어 넘어서서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 불렸으나, 지금 『매월당집梅月堂集』를 보건대 그 천재라는 소문과 걸맞지 않은 이유는, 산림으로 숨어 들어가서 문장을 연마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글을 연마하는 데만 부지런히 힘쓰고 천부적인 재능의 한계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찌 몇 사람의 작가를 볼 수 있었겠는가. 豈能見幾人之作家乎。
근세기에 이영재(李寧齋 : 李建昌)가 18세 때 높은 곳에 올라 지은 시에 이르길 “아래에는 구름 날고 하늘 위는 늘 맑은데(雲飛在下天常淨) 끝없는 서쪽 해안가엔 해가 길게 기우네(海坼無西日正長)”라고 하였으니, 그 어릴적 영리함을 알 만하다. 그 대가大家에 미쳐서는 오히려 지극한 경지를 이루기 어려우니,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與人書)에 이르기를 “내가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매일 물심양면으로 10중 5〜6을 시詩에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비록 간간히 고문古文을 연습하기도 하고 또한 간간히 송宋 유가儒家의 말을 익히기도 하였지만, 이는 모두 시를 연마하고 남는 틈을 이용한 것일 뿐입니다.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이 뒤바뀐 것은 따지지 않더라도 시에 전념한 것이 이와 같으나, 시도 또한 결국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매번 우림于霖【창강滄江】의 고아하고 오묘함과 운경雲卿【매천梅泉】의 정밀하고 예리함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과 같아서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타고난 재능의 한계가 있음에도, 전념하지 않음이 없는 과오이니, 이 또한 부끄러울 만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어찌 문장의 천뢰와 인뢰에만 국한된 것이겠는가. 삼교三敎 도학道學에 있어서도, 이것을 말미암지 않을 수 없다. 더 말하고자 하나 번잡할까 두려워 이만 줄이노라.
十八、天籟叶人籟詩道方圓
天籟人籟。雖見莊子。今轉其語。而用義稍異。天籟者。示其神韻。純以天行。如天花不著。如水中月。鏡中像者。是也。人籟者。示其精工。致以人力。如登泰山。步步躋頂。一覽衆山小者。是也。蘇穎濱。與人書云。文不可以學而能。氣可以養而致。孟子曰。我善養吾浩然之氣。今觀其文章。寬厚宏博。充乎天地之間。稱其氣之小大。太史公。行天下。周覽四海名山大川。與燕趙間豪俊交游。故其文。竦蕩。頗有奇氣。此二子者。豈嘗執筆。爲如此之文哉。其氣充乎其中。而溢乎其貌。動乎其言。而見乎其文。而不自知也。是可以證天籟之神韻也。袁隨園。贈人詩曰。倚馬休夸速藻佳。相如終竟壓鄒枚。物須見少方爲貴。詩到能遲轉是才。淸角聲高非易奏。優曇花好不輕開。須知極樂神仙境。修煉多從苦處來。是可以證人籟之精工也。然從古詩人之稟性殊别。或顯神韻以飄逸。或顯精工以深玅。及其婆羅蜜。猶如汀蘭籬菊。各自馨香。以若唐宋。而抽觀。李靑蓮。蘇東坡。以天行勝。杜少陵。黄山谷。以人力勝。其若功成願滿。孰非毘盧遮那。然詩道之入門用功也。立命之地。夫定。亦如空中毛道。故褊於神韻。而未成。則流乎空疎與膚廓。而未嘗鼎臠。山東王阮亭。非不名家。學之者。易墜空疎之坑而已。褊於精工。而未成。則流乎輕俗與纖巧。而未超上乘。江南袁簡齋。非不名家。學之者。易罹綺靡之網而已。是以。不落左不落右。蹈大方之詩規。豈不唱天籟叶人籟。然後詩道方圓之要訣乎。不寧唯是。詩道之衰微。亦如禪宗之虛僞。效嚬而假衣冠者。攬近殊多。故續詩品。有曰。抱杜尊韓。權門托足。苦守陶韋。貧賤者驕人。豈非的中詩家之流弊歟。朝鮮近代詩家。有開城朴天游。集唐詩句。詩至若數卷。以韻府書簏稱名之朴竹尊。畢生學杜之趙秋齋等。豈非博古之名家。寔窺其所作詩品。則盛唐之假衣冠。杜草堂之隙宇人而已。是以。朴貞蕤有云。近日所謂學杜者。詩之下品。學唐者。詩之次上。兼學唐宋元明者。詩之上品。但就寡聞與博通者。而言之。有理耳。洪北江詩話云。怪可醫俗不可醫。澀可醫。滑不可醫。孫可之文。盧玉川詩。可云怪矣。樊宗師之記。王半山之歌。可云澀矣。非餘子所能及。近時詩人。喜學白香山。蘇玉局。幾於十人而九。然吾見其俗耳。吾見其滑耳。非二公之失。不善學者之失也。又云假王孟詩不看。假蘇詩不看。何則。心地明了。而邊幅稍狹者。必學假王孟。質性開敏。而才氣稍裕者。必學假蘇詩。若言詩。能不犯此二者。必另具手眼。自寫性情矣。是又余所急欲觀者也。此皆罕見具手眼。而流露性情。厭看假衣冠。而自大者。如禪宗巖頭。示雪峰云。從佗門入者。不是自家珍者歟。且天籟人籟。示具天才人功之對象。而言之。亦可矣。雖有天才。不由人功。不見克成。若張中丞巡。日誦數萬言。終身不忘。昌黎。敍之熟矣。未聞其文章之彬彬。曾未嫺操觚之功故也。震域之金梅月堂。夙慧超凡。至稱五歲神童。然今觀梅月堂集。不稱其所聞者。以遯入山林。而不遑治文故矣。惟其攻文之孜孜。不顧天才之有限者。豈能見幾人之作家乎。近世李寧齋。十八歲。登高詩云。雲飛在下天常淨。海坼無西日正長。其夙慧。可知已。然及其大家。猶難克成。故與人書。有云。自二十時。至今又二十餘年。其間日力與心力。十之五六未嘗不費之于詩。雖嘗間習爲古文。又間治宋儒家言。而皆詩之餘隙耳。無論本末輕重之倒置。而專於詩如此。而詩亦竟不工。每視于霖(滄江)之高竗。雲卿(梅泉)之精利。羡企如異世人。而不可及。斯則天分之有限。又非不專之過也。斯又可愧焉已。豈惟文章之天籟人籟。進於三敎道學。莫不由之。欲言憚煩而止。
19. 선종의 불립문자의 공로보다는 과실이 많음(禪之不立文字功不補過)
고어古語에 이르길 “한마디 말로 나라 전체를 흥하게 할 수도 있고, 한마디 말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영원히 남을 명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연히 선가禪家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존숭하게 된 것도 또한 위에서 언급한 명언의 한 예라고 칭할亦稱一例想。攸大法之有數歟。실로 불립문자라 하는 것은 조사祖師께서 친히 말한 것이 아니라, 선가禪家의 한 유파에서 전하여 펴진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과 같은 하나의 공안일 뿐이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점차 오래되자, 결국 몰상식한 무리들의 호신부護身符가 되고, 못나고 변변치 못한 이들의 신통한 주문(大白傘蓋)이 되었다.
이에 대해 상세히 논해보면, 초조初祖인 달마達摩 대사가 갈대를 꺾어 타고서 강을 건너와, 중국 숭산嵩山 소림굴少林窟 안에 머물면서, 9년 동안 면벽수행을 하며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불립문자의 기원인 듯하다. 그러나 초조가 2조에게 심인을 전할 때에 『능가경楞伽經』 4권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불심佛心의 요체로서 그 사행론四行論을 드러낸 것이니, 이는 진실로 불립문자가 아니다.
또한 6조 혜능 대사의 경우에도, 그는 해남南海 신주新州의 시골 사람으로, 나이가 25세에 이르렀으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정도로 배움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경문 한 구절 읽는 것을 듣고는, 활연히 단박에 깨달아서 마침내 5조 홍인 대사에게 법인을 받았고, 조계산에 가서 드디어 선종의 6조가 되었다. 이후 5조가 무진無盡 비구니에게 해준 법어法語에 이르길 “불법의 오묘한 이치(佛法妙理)는 문자에 있지 않다(不在文字)”라고 한 것이 불립문자와 비슷하다. 그러나 『금강경金剛經』의 구절로 인하여 도를 깨닫는 기연機緣과 대중에게 설법을 할 때 말로서 『금강경』을 해설해 주는 것을 보면, 어찌 이를 불립문자라 하겠는가.
임제(臨濟, ?~867) 대사가 비록 “불법에 많은 문자가 필요하던가(佛法無多子)?”라고 하였지만, 그 종문宗門의 세가 최고로 성하게 되자 여러 종사들의 어록語錄과 게송偈頌이 엄청나게 쌓여서 마치 바다와 같았다. 그 양이 거의 교장敎藏의 수량과 비등하였으니, 어째서인가. 蔽諸而 그 불립문자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면, 지혜로운 자나 우둔한 자를 막론하고 모두 말하길 “이는 조사祖師께서 말씀하신 것이나, 조사께서 어디 곳에서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라고 하니, 이 또한 거짓을 쌓아서 진실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리고 불립문자의 공로와 과실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선문오종禪門五宗이 각기 남방에서 다투어 생길 적에 마조馬祖와 석두石頭 두 대사는 간생間生의 기氣로써 격외格外의 종지宗旨를 주창하였으니, 이른바 동산洞山의 『보경삼매寶鏡三昧』와 강서江西의 방할기용棒喝機用이 그것인데, 이는 인도의 가르침과 방편에는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뛰어난 근기(上根)를 지닌 범부로 하여금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곧바로 향상向上의 관문을 뛰어넘게 한 것이 약간 있었으니, 불립문자의 큰 공로가 조금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앙산仰山이 위산潙山을 대하며 말하길 “마조馬祖의 한 마디 할喝에 백장百丈은 대기大機를 터득했고, 황벽黃蘗은 대용大用을 터득했으나, 그 나머지 80명의 용상龍象과 같은 승려들은 일일이 말로 가르쳐서 이끌어야 되는 부류(唱導之流)에 불과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 일일이 말로 가르쳐서 이끄는 것(唱導)을 어찌 불립문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불립문자라는 것은 못나고 변변치 못한 이들을 보호해줄 흰 일산(白傘蓋)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왕 어리숙한 자(顢頇者)들이 방장方丈에 웅크리고 머물면서 오종五宗의 정전正傳을 부르짖으며 가르쳐 그 문도門徒는 우왕좌왕 허둥대니, 그 내실을 두루 돌아보면 참된 성품(眞性)에 대해서는 흐리멍덩할 뿐, 더 무엇이 있으리오. 그 가운데 한 부류가 무성한 숲을 이루듯 커지게 되면, 강론하는 이들을 얕잡아보게 되니, 비록 당나라 때 청량淸凉이나 규봉圭峰, 송나라 때 장수長水나 심진鐔津에 있더라도, 잘못을 지적하며 문외한의 무리라고 할 것이니, 그 허물을 일일이 다 가르칠 수 있으리오. 『오등록五燈錄』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러 선사禪師들이 낱낱이 여래지如來地를 넘어섰으나, 모두 조사관祖師關에 웅크리고 있도다.
석생石生이 15전 전에 교우校友 뒤를 따라서 중국 강남江南의 강소성와 절강성(蘇浙) 사이에 있는 사원을 두루 찾아갔었다. 대개 함풍(咸豐, 1851∼1861) 연간에 일어난 홍양洪楊의 전란 이후에 사원들이 한번 큰 겁화를 겪어서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습들이 전에 들은 바와는 많이 달랐다. 이른바 율사律寺․강사講寺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 듯 없는 듯하였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또한 유명무실하여서, 간신히 그 이름만 보존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예전에 『화엄경』을 강의하고 『능엄경』과 『능가경』을 연구하던 곳은 씻은 듯이 없어져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시방선원十方禪院만이 곳곳마다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방장方丈 화상들은 다들 찾아오는 손님을 꺼리고서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았으며, 간혹 나와 보는 자가 있더라도 어리석은 범부에 불과하였다. 서로 만나볼 수 있는 자들은 지객知客을 담당하는 승려였는데, 단지 안부인사(寒暄)나 말할 뿐 그 외에 견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선원의 경우에는, 남북의 산악에 총림叢林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중에 선사들 또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호신부護身符를 가지고서, 그저 묵묵히 고목나무처럼 좌선을 하기만 할뿐, 이외에 종지로 삼는 조사祖師 공안公案의 어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중봉광록中峰廣錄』․『운서법휘雲棲法彙』․『자백어록紫栢語錄』․『감산몽유집憨山夢游集』 등과 같은 책들을 꿈에서라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한 이들에게 묻기라고 하면, “나는 불성을 깨달은 자다, 불성을 깨달은 것이 어찌 평범한 일이던가”라 한다.
오호라, 이것이 모두 불립문자의 과실이 아니겠는가. 당나라 때 규봉圭峯 선사가 노파심으로 절실하게 선禪․교敎를 화회和會시키면서 탄식하길 “본래 부처님께서는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를 말씀하셨고, 선종에서는 돈문頓門과 점문漸門을 열어두었으니, 2교敎과 2문門은 서로 부계符契와 같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강론하는 자는 점교漸敎만을 밝혀 드러내고, 참선하는 자는 돈문頓門만을 전파하니, 서로 만나면 마치 호월胡越의 간격만큼이나 동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담긴 논조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선사禪師들은 그 선․교의 전성기 때에 의거하여서 그 치우친 견해를 화회하고, 원만하고 오묘함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선․교가 쇠퇴하고 미약하여 화회할 여지마저도 없다. 참선을 한다고 하는 자들은 이제 고목나무나 다 식은 재(死灰)처럼 한 자리에 머물러 가만히 있으면서, 함께 말하길 “내 성교에서는, ‘강론하는 자들은 금칠로 글을 쓴 불경(金文貝葉)을 시렁에 묶어두고 다른 길로 달아났다’고 한다”라 하니, 불해佛海의 찌꺼기가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는 한낱 불립문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 이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인가.
十九、禪之不立文字功不補過
古語云。有一言可以興邦。有一言可以興戎。是可不謂終古之銘言乎哉。偶然禪家所宗不立文字者。亦稱一例想。攸大法之有數歟。實惟不立文字。直非祖師親言者。而禪家一流。傳演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一段公案。歲月沿深。遂作沒識軰之護身符。藏拙藪之大白傘蓋也。蓋詳論之。初祖達摩。折蘆渡江。棲息于嵩山少林窟中。面壁九年。默無言說者。似乎不立文字之源。然初祖傳心二祖時。示其楞伽經四卷。是佛心要。著其四行論等。固非不立文字也。又若六祖能大師。以南海新州之子。年丁二十五歲。目不識丁。而因人誦經一句。豁然頓悟。竟受五祖法印。至曹溪。而遂爲禪宗六祖。及謂無盡比丘尼法語云。佛法玅理。不在文字者。似乎不立文字。然觀夫因金剛經句。而悟道機緣。示衆有日。以口訣。解金剛經。曷云不立文字乎。臨濟大師。雖云佛法無多子。其宗門風。最盛。諸師語錄。偈頌。廣積如海。幾與敎藏之多。等比者。何也。蔽諸而問其不立文字所由來。則無論智愚。而僉曰。是祖師所言。不記祖師那處言之。其亦積僞成眞也夫。且若功過而言之。禪門五宗。競立於南方。爾時。馬祖石頭兩大師。以間生之氣。主唱格外宗旨。所謂洞山之寶鏡三昧。江西之棒喝機用。印度敎乘之所無者也。遂令上根凡夫。不落階級。而直超向上關者。其數若干。則是多不立文字之偉功歟。然仰山對潙山云。馬祖一喝。百丈得大機。黃蘗得大用。其餘八十龍象。不過唱導之流。其曰唱導。曷謂不立文字。蓋惟不立文字者。藏拙藪之白傘蓋也。故往往顢頇者。盤踞方丈。而唱導五宗正傳。門徒紜紜。環顧其中。儱侗眞性外。何所有也。其所一類。蔚然成林。藐視講論家。雖在唐之淸凉圭峰。在宋之長水鐔津。指斥爲門外軰流。其過尙何可喻。披觀五燈錄中。諸禪師。個個超如來地。而俱踞祖師關乎。石生十五年前。隨校友後。周巡江南之蘇浙間諸寺院。蓋自咸豐年間。洪楊戰役以後。寺院一經刧灰。故所見者。異前所聞。所謂律寺講寺者。若存若亡。而若存者。亦無其實。徒保其名。前日之講華嚴。究二楞處。掃地無餘。惟其十方禪院。隨處多有。而其爲方丈和尙者。多忌客不見。或有見者。痴呆凡夫也。相逢者。知客沙門。徒叙寒暄外。無補見聞也。至若吾邦禪院。南岳北山。叢林無幾。其中禪師。亦擔不立文字之護身符。墨守枯禪以外。所宗祖師公案語句。漫不省之。况復近代。中峰廣錄。雲棲法彙。紫栢語錄。憨山夢游集等。夢未及參。問其人。則吾見性者也。見性者。何多尋常。嗚呼。是皆不爲不立文字之過乎。有唐圭峯禪師。婆心切於和會禪敎。而歎曰。原夫佛說頓敎漸敎。禪開頓門漸門。二敎二門。互相符契。今也講者。偏彰漸敎。禪者。偏播頓門。禪講相逢。胡越之隔。竊觀語勢。禪師。據其禪敎全盛時期。和會其偏見。而欲成圓竗。沿至數百年后。今日也。禪敎衰微。無可和會餘地。謂禪者。株守枯木死灰。而俱曰。余聖謂講者。束閣金文貝葉。而奔趍異徑。佛海之流滓。曷有斯極。非徒不立文字而已。可勝痛恨哉。
20. 세존께서는 과연 임금에게 부촉하여 법을 전했을까(世尊果囑世主而傳法乎)
자여씨(子輿氏 : 孟子)가 일찍이 말하길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다 믿어서는 안 되니, 책에 씌인 사실을 모두 믿는다면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음미할 만한 말이로다. 생각건대 우리 내전內典의 구절에도 또한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다분히 견강부회한 것이랴. 『열반경涅槃經』 「후분後分」에 이르길 “세존께서 열반하실 때 국왕과 대신들에게 불법佛法을 널리 전파하라고 부촉하셨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다면, 이는 실로 대도大道의 본래 뜻을 거스른 것이니, 결코 세존께서 출가하신 본의가 아니다. 태허太虛와 같이 원만하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 지극한 도(至道)가 어찌 가려내고 분별하여 임금에게 부촉한 것에 거짓이 없단 말인가. 세존께서 출가할 적에 천자의 자리(萬乘)를 헌신짝처럼 버렸는데, 더구나 열반하실 때 구구하게 가르쳐서 그냥 두지 않았단 말인가. 이와 같이 세속의 정을 가까이 하여서 말을 남긴 자 중에 노담(老聃 : 老子)와 중니(仲尼 : 공자)도 말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위없는 법왕(無上法王) 같은 분이랴. 이는 견강부회하여 번역하는 자가 내용을 덧붙인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도다.
아, 명리名利를 벗어나지 못한 사문沙門이 견강부회하여 명리를 얻을 기회로 삼아서 국존國尊의 왕사王師가 되기를 구하는 자들이 많았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바르지 못한 길을 찾아서 긴밀하게 환관이나 궁첩宮妾들과 서로 내통하여서, 삼삼오오 머리를 쳐들고 팔을 휘저으면서 의기양양 거들먹거리며 대중의 영수領首가 되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신라와 고려 이후에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조某祖나 모종某宗의 원찰願刹이라 이름하는 것들에서 모사某寺의 승통총섭僧統摠攝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모두 이것이니, 대개 부처님께서 임금에게 부촉했다고 하는 것의 영향이로다.
일찍이 한 좌주座主 스님의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가 말하길 “우리 불법佛法의 성쇠가 당세 임금의 향배向背에 달려 있으니, 불법佛法은 정치가에 부속된 하나의 법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혹 일리가 있지만, 또한 지극한 도의 상품常品을 듣지 못한 것이니, 어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몸소 지극한 도를 이해하고 수행하여 증득한 자가 몇 명이던가. 『열반경』 「후분後分」에 이르길 “세존께서 열반하신 지 7일 후에 존자尊者 가섭迦葉이 계족산鷄足山으로부터 뒤늦게 도착하여서, 여래께 그 예로서 애절하게 청하자 세존께서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셨으며, 이에 광명이 삼천대천세계에 밝게 비추었다”라고 하였다. 『염송설화拈頌說話』의 저자는 이것을 가리켜서 여래如來의 세 번째 전심처傳心處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런 주장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삼처전심三處傳心은 예로부터 많은 설이 있었는데, 원오圓悟 대사가 승勝 수좌首座에게 설법하여 그 기준에 대해 말하길 “석가모니께서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주셨으니 이미 이 법인法印을 비밀히 전해 준 것이고, 그 뒤에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니(拈花), 이는 제2의 공안公案이다”라고 하였다. 끝내 곽시쌍부槨示雙趺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니, 이는 한 사람이 거짓을 전하여 모든 사람이 그것을 진실로 알고 전한 격이라서, 절대로 도를 아는 자와 함께 나눌 말이 아니다. 과연 곽시쌍부의 설과 같다면, 이것이 기독교의 교주(景敎主)가 3일 만에 부활했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겠는가. 『전등록傳燈錄』에 대해 한 선사가 아무개 상인上人에게 설법하여 말하길 “그대가 만약 입멸 후에 사리舍利가 비오듯 내려서 한 가마니[斛]를 가득 채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일전어一轉語에 대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조문祖門의 진실된 말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떠든다면, 석생石生이 눈썹을 아끼지 않고 무대응할 것이로다 。不惜眉毛。以無對。
二十、世尊果囑世主而傳法乎
子輿氏嘗曰。書不可盡信。盡信書不如無書。旨哉言乎。惟吾內典之句節。亦有不足盡信。况多傅會者哉。涅槃經後分。有云。世尊臨涅槃時。付囑國王大臣。流傳佛法。果如所云。寔違大道本旨。切非世尊出家本懷焉耳。圓同太虛。無欠無餘之至道。何有揀擇。以付囑世主。得無妄諸。世尊之出家也。視萬乘其脫屣。况喩區區。以不置哉。如是近世情遺言者。老聃仲尼之所不道。以若無上法王乎。是爲傅會傳譯者。所加。明明無疑矣。嗟夫。不脫名利臼之沙門。以傅會。爲奇貨。求作國尊王師者。居多。而愈况愈下。尋夫曲徑。密勿相通乎宦官及宮妾。三三五五。擡頭揚腕。而蘧蘧然。作大衆領首。惟吾羅麗以還。及夫鮮代。名爲某祖宗願刹。冒爲某寺之僧統摠攝。皆是也。蓋爲佛囑世主之影響歟。曾聞一座主上人。有云吾佛法之盛衰。係佗當世主之向背。佛法。是政治家付屬一法云爾。言或成理。而亦不聞至道之常品。曷足與論至道。嗚呼。東西古今。體會至道。以行證者。有幾。又有涅槃經後分云。世尊涅槃后七日。尊者迦葉。自鷄足山。而後至。請如來示其禮處。世尊槨示雙趺。光明照曜三千世界。拈頌說話主。指此爲如來第三處傳心。未知據何而作此說也。三處傳心。古有多說。及其圓悟示勝首座法語。爲準云。而其法語。只云如來。於多子塔前。分半座。已密授此印。靈山會上擧拈花。此是第二重公案云云。竟無槨示雙趺處。一人傳虛。萬人傳實。而斷斷。可與知道者言耳。果如槨示雙跌之說。是與景敎主三日復活。何異哉。傳燈錄。有一禪師。對某上人法語云。爾若示滅后。舍利雨下滿斛。不如對我一轉語。爲是。豈非祖門眞實語。如有他人之呶呶。石生。不惜眉毛。以無對。
21. 지금 시대의 문인들이 서로 헐뜯는 것을 매우 탄식함(深嘆今世文人之相詆)
문文이라는 것은 도를 밝히는 도구(貫道之器)이니, 어찌 도를 떠난 것을 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 혹 문文에 능하다 하더라도 군자君子라고 부르기 어려우니, 그러한 이는 재빠르게 소인小人의 길로 달려 들어갈 것이다. 만약 문인文人으로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없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어 자기 뜻대로만 한다면, 그런 사람이야 어찌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말[古語]에 이르기를 “문인들은 서로 경시하는 풍조가 있는데(文人相輕), 이는 예로부터 이미 그러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한 시대에 격한 말로 증험함이 있다고 하여서 천하의 법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리고 세상의 무의巫醫와 악사樂師와 백공百工의 사람들은 그 동종업의 친한 지인을 만나게 되면, 애틋하게 서로 아끼는 정이 마음 깊이 느껴지고 얼굴에 순수하게 드러나니,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과 같지 않다. 하물며 저 성현의 책을 읽는 문인文人이랴. 그들은 기타 부류들보다 뛰어나며, 그 인류 중에서도 빼어나니, 들짐승들 가운데 기린이요, 날짐승들 가운데 봉황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아는 이들끼리 대하는 것을 관찰해 보면, 서로 경시할 뿐만 아니라,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까지 더하여서 서로 헐뜯으니, 실로 오늘날 세상에 널리 유행하는 폐단이다. 그 사람들이 공부한 것에 대해 물어보면 성현의 도를 읽혔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시정잡배와 다를 것이 없다. 도리어 서너 집 밖에 없는 촌구석에 일자무식인 범부만도 못하니, 순수하게 양심을 보전하여서 허다한 기교와 거짓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옛날에 있었던 일을 듣지 못하였는가. 종자기(鍾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무료하여 거문고의 줄을 끊었으며, 혜시惠施가 죽었다고 하자 장자莊子가 ‘나의 바탕을 다시 볼 수 없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과연 지금 세상의 문인들이 서로 헐뜯는 것과 같은가. 백아와 장자는 무슨 이유로 거문고 줄을 끊고 탄식을 한 것인가.
아, 저 서로 헐뜯는 자들은 스스로 문장을 지으면서 기세등등하게 자부심을 갖고는, 시詩는 이백이나 두보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능하며, 문文은 한유나 유종원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누가 그것을 알아주랴. 과연 그 문장과 학문이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서 그냥저냥 억지로 홀로 지어내고는, 저 문자도 모르는 뭇사람들 대하니, 이는 흡사 장님을 모아놓고서 단청의 화려한 광경을 널리 드러내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귀머거리를 불러놓고 북소리와 종소리를 비평하게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깊이 이해하는 자를 만났으니, 나의 어진 붕우들은 이에 신을 거꾸로 신고(倒屣) 나를 맞이하였다. 한 방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도 하고, 육체 밖에서 마음대로 놀기도 하였는데, 늙음이 장차 닥쳐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오히려 추로鄒魯가 서로 싸워서 결코 그치지 않으니, 이것이 진실로 어떤 마음이란 말인가. 청련(靑蓮 : 李伯)과 소릉(少陵 : 杜甫)의 허여한 마음은 생사가 갈리어도 변치 않으며, 창려(昌黎 : 韓愈)와 유주(柳州 : 柳宗元)의 돈독한 우정은 오히려 죽은 뒤에 남은 가족을 맡길 정도였으니, 그 당시에 서로 경시하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 그대 어진 이들이여, 그 명예를 좋아한다면 好其名。則盛唐之賢士。顧其行。則外夫先賢。而自我殊勝。이것이 어찌 그림책을 뒤져서 천리마를 찾는다는 것과 다르리오. 不知能千里行者。在乎驪黄之外也。以若所爲。求若所欲。전에 어진 자 가운데 채찍을 잡고 있는 자도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몇 길이나 되는 담장을 보고 있으면서 그 문정門庭에 들어가겠는가. 아하하阿呵呵 인仁을 도모하는 자는, 눈보라가 치는 세모歲暮에 다시금 성현의 글을 읽고서, 30년 후에 서로 만나 한 번 웃을 수 있을런지.
二十一、深嘆今世文人之相詆
文者。貫道之器也。可離道。而能爲文。文或雖能。難爲稱君子者。而駸駸然流入小人之途。可以文人。而及若無所敬恕。剛愎自用。其人何足道哉。古語云。文人相輕。自古已然。諒是一時。有所徵以激言。不足爲天下之法也。且世之巫醫。樂師。百工之人。遇其同工之知友。藹然相愛之情。感于中。而粹于面。不與他等。况爾讀聖賢書之文人。拔乎其萃。出乎其類。麒麟之於走獸。鳳凰之於飛鳥。可以喩也。觀對相知者。不惟相輕。而加嫉心。以相詆。實攸今世流弊者也。問諸其人之所學。曰聖賢之道。觀其言行。則無間市井之徒。反不如三家村裡。不識字凡夫。純葆良心。無有許多巧僞之爲愈也。可勝喟然深嘆哉。古不聞乎。鍾期化去。伯牙無聊而絕弦。惠施云亡。莊子興歎吾之質。不可復見。果如今世文人之相詆。伯牙與莊子。由何而絕弦興歎也哉。噫彼相詆者。自爲文章。沾沾自負。詩能李杜。而不讓。文追韓柳。而並鑣。然有誰知之者。果其文學。超凡品。以戞戞獨造。則對彼不省文字之衆人。恰與聚瞽者。而宣揚丹碧之觀。又與招聾者。而批評鍾鼓之音。千萬有幸。而得遇深知。我之良朋。於是乎倒屣而迎之。晤言一室之內。放浪形骸之外。曾不知老之將至。今也不然。猶如鄒魯相鬨。而斷斷不止。是誠何心哉。且若靑蓮少陵之許心。死生不渝。又其昌黎柳州之友篤。猶托身後之孤。曾不聞當時相輕之言詞。嗟爾仁者。好其名。則盛唐之賢士。顧其行。則外夫先賢。而自我殊勝。是何異於按圖索驥。不知能千里行者。在乎驪黄之外也。以若所爲。求若所欲。爲前賢之執鞭者。猶不能得。況夫望數仞墻。而入其門庭乎哉。阿呵呵。爲謀仁者。歲暮風雪。更讀聖賢書。三十年後。相逢一笑。始得。
석림수필 마침
石林隨筆(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