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언 [賈公彦 ?~?]
갈홍 [葛洪 283~343?]
강번 [江藩 1761~1831]
강성 [江聲 1721~1799]
경방 [京房 BC 77~BC 37]
경상자 [庚桑子 ?~?]
고동고 [顧棟高 ?~?]
고염무 [顧炎武 1613~1682]
고자 [告子 ?~?]
고헌성 [顧憲成 1550~1612]
공광 [孔光 BC 65~AD 5]
공광삼 [孔廣森 1752~1786]
공손룡 [公孫龍 BC 320 ?~BC 250 ?]
공손홍 [公孫弘BC 200~BC 121]
공양고 [公羊高 ?~?]
공영달 [孔穎達 574~648]
공융 [孔融 153~208]
공자 [孔子 BC 552~BC 479]
곽상 [郭象 252 ?~312]
곽태 [郭泰(太) 128~169]
구양현 [歐陽玄 1273~1357]
구준 [邱濬 1420~1495]
귀곡자 [鬼谷子 ?~?]
김인산 [金仁山 1232~1303]
나광 [羅光 1911~]
나여방 [羅汝芳 1515~1588]
나윤 [羅倫 1431~1478]
나정암 [羅整庵 1465~1547]
나종언 [羅從彦 1072~1135]
나홍선 [羅洪先 1504~1564]
노래자 [老萊子 ?~?]
노문초 [1717~1795]
노자 [老子 ?~?]
뇌차종 [雷次宗 386~448]
누일재 [婁一齋 1422~1491]
능정감 [凌廷堪 1757~1809]
단성식 [段成式 ?~863]
단옥재 [段玉裁 1735~1815]
담감천 [湛甘泉 1466~1560]
담사동 [譚嗣同 1865~1898]
담조 [啖助 730?~777?]
대진 [戴震 1723~1777]
동중서 [董仲舒 BC 170 ?~BC 120 ?]
등석 [鄧析 ?~?]
랴오핑 [廖平(료평) 1852~1932]
량치차오 [梁啓超(양계초) 1873~1929]
량수밍 [梁漱溟(양수명) 1893.10.18~1988.6.23] ->양수명
류스페이 [劉師培(유사배) 1884~1919]
마융 [馬融 79~166]
만사대 [萬斯大1633~1683]
만사동 [萬斯同1638~1702]
맹자 [孟子 BC 372 ?~BC 289 ?]
모기령 [毛奇齡 1623~1716]
모자 [牟子 165?~251?]
모진 [毛晉 1599~1659]
묵자 [墨子 BC 480~BC 390]
방이지 [方以智 1611~1671]
방효유 [方孝孺 1357~1402]
범녕 [范寧 339~401]
비밀 [費密 1623~1699]
사상채 [謝上蔡 1050~1103]
사양좌 [謝良佐 1050~1130]
상앙 [商鞅?~BC 338]
석개 [石介 1003~1043]
설경헌 [薛敬軒 1389~1464]
섭적 [葉適 1150~1223]
세석 [世碩 ?~?]
소옹 [邵雍 1011~1077]
손기봉 [孫奇逢 1584~1675]
손명복 [孫明復 992~1057]
손자 [孫子 ?~?]
순자 [荀子 BC 298?~BC 238?]
아이쓰치 [艾思奇(애사기) 1905~1966]
안균 [顔鈞 ?~?]
안원 [顔元 1636~1704]
안회 [顔回 BC 521~BC 490]
양계초[梁啓超, 1873 ~1929]
양시 [楊時 1053~1135]
양왕손 [楊王孫 ?~BC 133]
양자호 [楊慈湖 1141~1226]
양주 [楊朱 BC 440 ?~BC 360 ?]
양천 [楊泉 ?~?]
여염 [呂枏 1479~1542]
여조겸 [呂祖謙1137~1181]
염약거 [閻若 1636.11.11~1704.7.9]
열자 [列子 ?~?]
옌푸 [嚴復(엄복) 1854.1.8~1921.10.27]
오강재 [吳康齋 1391~1469]
오자 [吳子]
오초려 [吳草廬 1249~1333]
완원[阮元 1764.2.21~1849.11.27]
왕염손 [王念孫1744~1832]
왕명성 [王鳴盛 1720~1797]
왕부 [王符 ?~?]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왕선겸 [王先謙 1842~1917]
왕심재 [王心齋 1483~1540]
왕양명 [王陽明 1472~1528]
왕용계 [王龍溪 1498~1583]
왕인지 [王引之 1766~1834]
왕충 [王充 30?~100?]
왕통 [王通 584~617]
우위 [吳虞(오우) 1874~1949]
우징헝 [吳敬恒(오경항) 1865.3.25~1953.10.30]
웅백룡 [Xiong Bolong, 熊伯龍 1617~]
위백양 [魏伯陽 ?~?]
위원 [魏源 1794~1857]
유봉록 [劉逢祿 1776~1829]
유안 [劉安 BC 179 ?~BC 122]
유월 [兪 1821~1906]
유인 [劉因 1249~1293]
유즙산 [1578~1645]
유흠 [劉歆 BC 53?~BC 25]
육가 [陸賈 ?~?]
육농기 [陸짱其 1630~1692]
육상산 [陸象山 1139~1192]
이고 [李 772~841]
이공 [1659~1733]
이옹 [1627~1705]
이탁오 [李卓吾 1527~1602]
자공 [子貢 BC 520 ?~BC 456 ?]
자로 [子路 BC 543~BC 480]
자사 [子思 BC 483?~BC 402?]
자하 [子夏 BC 507~BC 420?]
장둥쑨 [張東蓀(장동손) 1886~1973]
장식 [張 1133~1180]
장자 [莊子 BC 369~BC 289?]
장존여 [莊存與1719~1788]
장횡거 [張橫渠 1020~1077]
장후 [長侯 1455~1514]
전대흔 [錢大昕 1728~1804]
전덕홍 [錢德洪 1496~1574]
정이 [程 1033~1107]
정현 [鄭玄 127~200]
정호 [程顥 1032~1085]
조광 [趙匡 ?~?]
좌구명 [左丘明?~?]
주돈이 [周敦 1017~1073]
증자 [曾子 BC 506~BC 436]
진례 [陳澧 1810~1882]
진헌장 [陳獻章 1428~1500]
진확 [陳確 1604~1677]
초순[焦循: 1763~1820]
추연 [鄒衍 ?~?]
칠현 [七賢]
탕용퉁 [湯用 (탕용동) 1893~1964]
펑유란 [馮友蘭(풍우란) 1894~1990]
포경언 [鮑敬言 ?~?]
하휴 [何休 129~182]
한비 [韓非 BC 280?~BC 233]
한비자 [韓非子]
한유 [韓愈 768~824]
허노재 [許魯齋1209~1281]
허신 [許愼 30~124]
헉슬리 [Huxley, Julian Sorell 1887.6.22~1975.2.15]
혜강 [ 康 223~262]
혜동 [惠棟 1697~1758]
혜시 [惠施 BC 370?~BC 309?]
호거인 [胡居仁 1434~1484]
호안국 [胡安國 1074~1138]
환담 [桓譚 BC 24~AD 56]
황종염 [黃宗炎 1816~1886]
황종희 [黃宗羲 1610~1695]
후지쓰카 지카시 [藤塚 (등총린) 1879~1948]
가공언 [賈公彦 ?~?]
중국 당(唐)나라의 학자.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영년(永年)
주요저서 : 《주례소(周禮疏)》(50권) 등
허베이성[河北省] 영년(永年) 출생. 고종연간(高宗年間: 650~665) 태학박사(太學博士) ·홍문관학사를 지냈고, 예학(禮學)에 정통하여 공영달(孔潁達) 등과 《예기정의(禮記正義)》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가려낸 《주례소(周禮疏)》(50권)와 《의례소(儀禮疏)》(50권)는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들어가며, 그 중에서도 《주례소》는 주자(朱子)가 “오경소(五經疏) 중 가장 좋은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밖에 《예기소(禮記疏)》(80권) 《효경소(孝經疏)》(5권) 《논어소(論語疏)》(15권) 등이 있다.
갈홍 [葛洪 283~343?]
중국 진(晉)나라 때의 학자 ·도사 ·연단가(煉丹家).
호 : 포박자(抱朴子)
별칭 : 자 아천(雅川), 관내후(關內侯)
국적 : 중국 진(晉)
활동분야 : 도학자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쥐룽현[句容縣]
주요수상 : 관내후(關內侯)
주요저서 : 《포박자(抱朴子)》 《신선전(神仙傳)》등
자 아천(雅川), 호 포박자(抱朴子). 장쑤성[江蘇省] 쥐룽현[句容縣] 사람으로 순수한 강남 귀족 출신이다. 종조부(從祖父)인 갈현(葛玄)의 제자 정은(鄭隱)에게 선도(仙道)를 배웠다.
석빙(石氷)의 난(303) 때 공을 세워 열후(列侯) 바로 아래가 되는 제2위의 작위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 또 그는 역사에 재능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정되어 산기상시대저작(散騎常侍大著作)으로 추천되었으나, 노령을 이유로 사퇴하고, 교지구루(交趾句漏: 베트남 북방 경계)의 영(令)의 자리를 지원하여 임지로 부임하던 중 광주자사(廣州刺史) 등악(鄧嶽)의 지우(知遇)를 받고,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저술과 연단에 전념하였다. 방대한 저서를 남겼는데, 주요한 것으로 《포박자(抱朴子)》 《신선전(神仙傳)》등이 있다.
강번 [江藩 1761~1831]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
호 : 정당(鄭堂)
별칭 : 자 자병(子屛)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감천(甘泉)
주요저서 : 《국조한학사승기》(8권) 《국조송학연원기》 《주역술보》 등
자 자병(子屛), 호 정당(鄭堂). 장쑤성[江蘇省] 감천(甘泉)에서태어났다. 오파고증학(吳派考證學)의 혜동(惠棟) ·강성(江聲) ·여소객(余蕭客)에게 사사한 문장가로 경사(經史) ·시문에 뛰어났다. 학술사인 《국조한학사승기(國朝漢學師承記)》(8권)에서 청대 한학의 원류를 밝혔으며, 한학일존(漢學一尊)의 오파(吳派)를 특히강조하였다. 저서에 《국조송학연원기(國朝宋學淵源記)》 《주역술보(周易述補)》 등이 있다.
강성 [江聲 1721~1799]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
호 : 간정(艮庭)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
호 간정(艮庭), 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에서 태어났다. 35세 때 혜동(惠棟)에게 사사하여 《서경(書經)》 비판을 배웠고 10여 년에 걸쳐 《상서집주음소(尙書集注音疏)》(12권)를 저술하였다. 동진(東晋) 때 위작된 고문상서(古文尙書) 이전의 한유학설(漢儒學說)을 철저하게 복원하였으나, 그와동시에 오파고증학(吳派考證學)이 갖는 한학일존(漢學一尊)의 독단적인 경향도 엿볼 수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신봉하여 모두 전서(篆書)로 저술하였다.
경방 [京房 BC 77~BC 37]
중국 전한(前漢) 때의 사상가.
본명 : 이방
별칭 : 자 군명
국적 : 중국 한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돈구
주요저서 : 《경씨역전(京氏易傳)》
자 군명(君明). 돈구(頓丘) 출신. 본래의 성은 이씨(李氏)였는데, 스스로 경씨로 고쳤다. 양(梁)나라 사람 초연수(焦延壽)에게서 역학(易學)을 배웠으며, 효렴(孝廉)으로 관리가 되었다. 재이설(災異說)에 밝았으므로 원제(元帝)의 총애를 받았고, 나중에 위군(魏郡)의 태수(太守)가 되었으나, 재이점후(災異占候)에 대하여 자주 상주(上奏)하였기 때문에 석현(石顯)·오록충종(五鹿充宗) 등의 미움을 사서, 하옥된 후에 살해당하였다.
저서에는 《경씨역전(京氏易傳)》 3권이 있다. 그는 또한 당시의 음악이론가였으며, 음률(音律)을 연구하였다. 그는 그때까지의 율관(律管)에 의한 12율(律)의 산정법(算定法)이 불합리함을 알고, 새로이 현(絃)에 의한 음률측정기인 준(準)을 발명함으로써 60률을 산정하였다.
경상자 [庚桑子 ?~?]
중국 도가(道家)의 사상가.
별칭 : 항창자·항상자
국적 : 중국
항창자(亢倉子) 또는 항상자(亢桑子)라고도 한다. 노자(老子)의 제자라고 하나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장자(莊子)》 잡편 중 〈경상초편(庚桑楚篇)〉에 의하면 공자학파의 본거지인 노(魯)나라 외루(畏壘)의 산속에 살면서 노자에게 배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을 오로지 실천하였다고 한다. 이 〈경상초편〉의 경상자와 그 제자 남영추(南榮蔔), 그 스승 노자와의 문답은 남송의 주자(朱子:朱熹)가 "경상초(庚桑楚) 1편이 모두 선(禪)이다"라고 감탄하였을 만큼 선에 가까우며, 훗날 도교는 여기에 실린 노자의 말을 중요한 교리로 삼고 있다.
고동고 [顧棟高 ?~?]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
별칭 : 자 복초(復初) ·진창(震滄)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
주요저서 : 《대유수어(大儒粹語)》 《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 《모시유석(毛詩類釋)》 《상서질의(尙書質疑)》
자 복초(復初) ·진창(震滄).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 출생. 진사(進士)가 된 후 내각중서(內閣中書)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 ·국자감 좨주(祭酒)를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송(宋) ·원(元) ·명(明) 제유(諸儒)의 학설을 섭렵하고, 춘추(春秋)에 능하였으며, 특히 ‘이기설(理氣說)’과 ‘이일원론(理一元論)’으로 대립하였던 주자(朱子)와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절충하였다. 저서에 《대유수어(大儒粹語)》 《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 《모시유석(毛詩類釋)》 《상서질의(尙書質疑)》가 있다.
고염무 [顧炎武 1613~1682]
중국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사상가.
호 : 정림(亭林)
별칭 : 자 영인(寧人)
국적 : 중국 명(明)·청(淸)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중국 장쑤성[江蘇省] 쿤산[崑山]
주요저서 :《일지록(日知錄)》《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음학오서(音學五書)》
자 영인(寧人). 호 정림(亭林). 장쑤성[江蘇省] 쿤산[崑山] 출생. 명(明)나라 말기, 당시의 양명학(陽明學)이 공리공론을 일삼는 데 환멸을 느끼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實學)에 뜻을 두었다. 명나라가 망한 후 만주족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용군에 참가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청의 지배하에 들어가서도 죽을 때까지 이민족(異民族)의 군주를 섬기지 않았다. 다년간 화중(華中) ·화북(華北)을 돌아다니면서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각지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이는 명나라의 회복을 꾀한 일이었다고 전한다.
저서는 경학(經學) ·사학(史學) ·문학 각 분야에 걸쳐 매우 많으며, 대표작으로 《일지록(日知錄)》《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음학오서(音學五書)》 등이 있다. 이들 저서는 모두 강한 실천적 정신과 독자적인 사론(史論)으로 일관되었다. 따라서 널리 증거를 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실증적(實證的) 학풍은 청조의 고증학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고자 [告子 ?~?]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본명 :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국적 : 중국 제(齊)
활동분야 : 철학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맹자(孟子: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인성(人性)에 관하여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맹자와의 논의는 《맹자》 <고자(告子) 상편(上篇)>에 수록되어 있다.
고헌성 [顧憲成 1550~1612]
중국 명나라 말의 학자.
호 : 경양(涇陽)
본명 : 고숙시(顧叔時)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주자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1580년(만력 8) 진사(進士)가 되었다. 장거정(張居正)에게 반대한 정의파 관료에 속하였으며, 셋째 황자(皇子)를 편애하여 장자 상락(常洛:光宗)의 태자(太子) 책봉을 연기하려는 신종(神宗)의 처사에 반대하다가 면직, 고향으로 내려갔다. 무석(無錫)에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설립하고, 초야의 동지들과 강학활동(講學活動)에 전념하였으며, 강한 실천적 의욕으로 정치문제를 논하여 조야(朝野)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성립된 것이 동림당(東林黨)으로 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것은 명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 주자학으로써 양명학(陽明學) 말류(末流)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공광 [孔光 BC 65~AD 5]
중국 한(漢)나라의 유학자, 정치가.
본명 : 공자하(孔子夏)
별칭 : 시호 간렬후(簡烈侯)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학문, 정치
공자의 14대 손으로, 패(覇)의 아들이다. 대대로 박사(학자의 관직)를 배출한 유학의 종가에서 태어나 경학(經學)에 능통하였고, 원제(元帝) 때 관문에 들고 성제(成帝) 때 박사가 되었으며, 마침 유학이 융성한 시운(時運)을 만나 더욱 중용(重用)되어 상서(尙書)를 지냈다. 평제(平帝) 즉위 뒤 왕망(王莽)의 권력전횡을 우려, 은퇴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고사(故事)와 한나라의 제도 및 법령에 밝아 어사대부(御史大夫) ·승상(丞相)을 두 번 역임하였다. 원제·성제·애제(哀帝)·평제의 4황제 아래에서 벼슬하고, 태부(太傅) ·태사(太師)에 이르러 박사후(博士侯)에 봉해졌다.
공광삼 [孔廣森 1752~1786]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
별칭 : 자 중중 ·휘약, 호 손헌
국적 : 청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산둥성 취푸현
자 중중(衆仲)·휘약(遇約). 호 손헌(荻軒). 공자의 68대손. 산둥성 취푸현[曲阜縣] 출생. 1771년(건륭 36)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원검토(翰林院檢討)가 되었다. 얼마 뒤 어머니가 죽자 사임하고, 서재(書齋) 의정당(儀鄭堂)을 세워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대진(戴震)에게 사사하였으며, 삼례(三禮)와 공양학(公羊學)에 밝았다. 음운학(音韻學)에서는 고운(古韻)을 18부(部)로 나누어, 음성(陰聲)과 양성(陽聲)이 서로 대전(對轉)한다는 설을 정립하였고, 산학(算學)에도 통달하였다.
변문(폿文) 흥륭기의 대표작가로서, ‘변문 8대가’에 꼽힌다.저서에 《춘추공양통의(春秋公羊通義)》 《대대례기보주(大戴禮記補註)》 《시성류(詩聲類)》 등이 있다.
공손룡 [公孫龍 BC 320 ?~BC 250 ?]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사상가.
별칭 : 자 자병(子秉)
국적 : 중국 조(趙)
활동분야 : 철학
자는 자병(子秉). 그의 행적은 《장자(莊子)》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유향별록(劉向別錄)》 《양자법언(楊子法言)》 등에서 볼 수 있다. 저서는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誌)>에 14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적부편(跡府篇)> <백마편(白馬篇)> <지물론(指物論)> <통변론(通變論)> <견백론(堅白論)> <명실론(名實論)> 의 6편뿐이다. 이 6편이 위작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마도 14권의 잔본일 것이다. <적부편>은 후세 사람이 첨가한 공손 룡의 약전이다. 따라서 나머지 5편이 공손 룡이 쓴 것이다.
<백마편> <견백편>은 다 같이 물체와 속성,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의문제, <지물론>은 지시와 지시의 대상에 관한 문제, <통변론>은 명칭 ·개념과 사물 ·실질과의 변화문제, <명실론>은 명과 실의 일치문제를 다루었다. 보통 그는 명가(名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또한 그의 논술을 궤변이라고 하나, 단순한 궤변이 아니라, 당시의 혼란한 사회를 질서 있는 사회로 돌이키려고 하는 의욕을 찾아볼 수 있다.
공손홍 [公孫弘BC 200~BC 121]
중국 전한(前漢) 때의 재상(宰相).
별칭 : 자 계, 평진후
국적 : 전한
활동분야 : 정치
출생지 : 중국 산둥성 등현
자 계(季). 산둥성[山東省] 등현(웽縣) 설(薛) 출생.
집안이 가난하여 40세로 《춘추》를 익히고, BC 140년(무제 1) 현량(賢良)에 추천되어 박사(博士)에 올랐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BC 130년(元光 5) 다시 현량으로 추천되고, 문학시험에 장원하여 박사에 임관되었다. 내사(內史)·어사대부(御史大夫)를 역임하여, BC 124년(元朔 5) 승상(丞相)이 되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해졌다. 최초의 승상봉후(丞相封侯)였다.
BC 122년(元狩 1) 회남왕(淮南王)·형산왕(衡山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책임을 지고 사임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유임하였다. 이듬해 병사하였다.
공양고 [公羊高 ?~?]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학자.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유학
주요저서 : 《외전(外傳)》등
자하(子夏)의 제자로, 《외전(外傳)》 50편을 저술하였다. 《공양전(公羊傳)》은 그가 전술(傳述)한 것이 4대(代)까지 이어져 내려와 현손(玄孫)인 수(壽)와 그의 제자 호모생(胡母生) 등이 완성한 것으로, 《공양전》은 《좌씨전(左氏傳)》 《곡량전(穀梁傳)》과 함께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불린다. 청(淸)나라 때 장존여(莊存與)는 《공양전》을 학문으로 일으켜 공양학이 청나라 말까지 크게 번창하였다.
공영달 [孔穎達 574~648]
당(唐)나라 초기의 학자.
본명 : 공중달(孔仲達)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형수(衡水)
주요저서 : 《수서(隋書)》 및 《오경정의(五經正義)》 170권 공동편찬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관계에 나갔으나, 양제가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암살하려 하였다. 당나라의 태종(太宗)에게 중용되어 국자박사(國子博士)를 거쳐 국자감의 좨주(祭酒) ·동궁시강(東宮侍講) 등을 지내고,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 문장 ·천문 ·수학에 능통하였으며, 위징(魏徵)과 함께 《수서(隋書)》를 편찬하였다. 왕명에 따라 고증학자 안사고(顔師古) 등과 더불어 오경(五經) 해석의 통일을 시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 170권을 편찬하였다.
공융 [孔融 153~208]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
별칭 : 자 문거
국적 : 중국 후한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노나라
주요저서 : 《공북해집》(10권), 《이형천표》
자 문거(文擧). 공자의 20대 손. 노(魯)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문필에도 능하여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헌제(獻帝) 때 북해(北海)의 재상이 되어 학교를 세웠으며, 동탁(董卓)의 횡포에 격분하여 산둥에서 황건적(黃巾賊) 평정에 힘썼으나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조조(曹操)를 낱낱이 비판 조소하다가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시문 《공북해집(孔北海集)》(10권)은 조비(曹丕)가 칭찬하였으며, 지금은 《문선(文選)》에 《이형천표(쌥衡薦表)》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공자 [孔子 BC 552~BC 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본명 : 구(丘)
별칭 : 자 중니(仲尼)
국적 : 중국 노(魯)
활동분야 : 교육, 철학
출생지 :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謖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공자는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성은 숙량(叔梁), 이름은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였다.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다. 그러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 ·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다.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공자는 춘추 말기에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19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곽상 [郭象 252 ?~312]
중국 진대(晋代)의 사상가.
별칭 : 자 자현(子玄)
국적 : 중국 진(晋)
활동분야 : 철학
자 자현(子玄). 관직을 역임한 후, 만년에 사마 월(司馬越:동해왕)의 대부주부(大傅主簿)가 되어 권세를 잡았다. 자신이 추구한 장자(莊子)의 근본원리에 따라서 《장자주(莊子注)》(33권)를 정리해서 주석을 하였는데, 그 해석을 통하여 계층적 신분질서를 천리(天理)로 인정한 명교자연론(名敎自然論)을 전개하였고, 고립하여 산재(散在)하는 각자는 경우의 변화에 무한히 응할 수 있는 ‘성분(性分)’이나 ‘위계(位階)’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득(自得)’한다고 하는 육조귀족제 사회(六朝貴族制社會)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곽태 [郭泰(太) 128~169]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별칭 : 자 임종(林宗)
국적 : 중국 후한(後漢)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자 임종(林宗).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출생. 높은 학문과 덕으로 일세의 숭앙을 받았다. 굴백언(屈伯彦)에게 사사하여 전적(典籍)에 통달하고 뤄양[洛陽]에 가서 당시 하남윤(河南尹:뤄양 지방 장관) 이응(李膺)과 깊이 교제하며 명성을 떨쳤다. 향리에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수가 수 천명에 달하였다. 외척과 환관이 전횡(專橫)하는 세상에서도 절조를 굽히지 않았으나 언행이 신중하여 당고(黨錮)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문선(文選)》에 곽옹(郭邕)이 만든 곽태의 묘지명(墓誌銘) 《곽유도비문(郭有道碑文)》이 나와 있다.
구양현 [歐陽玄 1273~1357]
중국 원(元)나라의 학자.
호 : 호 규재
별칭 : 자 원공
활동분야 : 학문
출생지 : 후난성 류양
주요저서 : 《규재문집》(15권)
1315년(연우 2) 진사, 누진(累進)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경세대전(經世大典)》 《사조실록(四朝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요사(遼史)》 《금사(金史)》 《송사(宋史)》의 찬수총재관(撰修總裁官)이 되었다. 문집에 《규재문집(圭齋文集)》(15권)이 있다.
구준 [邱濬 1420~1495]
중국 명(明)나라의 유학자·정치가.
본명 : 구중심
별칭 : 시호는 문장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정치·학문
출생지 : 중국 광둥성충산현
주요저서 :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지음, 《영종실록(英宗實錄)》과 《헌종실록(憲宗實錄)》편찬
광둥성[廣東省] 충산현[瓊山縣] 출생. 1454년(경태 5) 진사가 되었다. 서길사(庶吉士)에서 차차 벼슬이 올라 효종(孝宗) 때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고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를 겸하여 정무에 참여하였다. 상서로서 내각에 들어간 것은 그가 처음이다.
경세지재(經世之才)를 가지고 시폐(時弊)를 직언(直言)하여 황제를 잘 보필하였으며, 주자학에 정통하고 전고(典故)에도 밝았다. 《영종실록(英宗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증보하여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지었다
귀곡자 [鬼谷子 ?~?]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사상가.
별칭 : 귀곡자
국적 : 중국 초(楚)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귀곡자》
성명과 행적(行蹟)이 모두 알려지지 않았다. 영천(潁川) ·양성(陽城)의 귀곡지방에 은둔하였기 때문에 귀곡자라고 하였다. 진(秦) ·초(楚) ·연(燕) ·조(趙) 등 7국이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시대에 권모술수의 외교책을 우자(優者)의 도(道)라고 주장한 종횡가(縱橫家)이며,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도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천지간의 현상은 천지를 생성하는 도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는 일정한 법칙에 지배된다고 보았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동정변화(動靜變化)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저서로서 《귀곡자》 1권이 전해지며, 소진의 가탁(假託)으로 간주되었다. 현행본은 내용도 천박하고, 문장 자체도 전국시대의것이 아니어서 위서(僞書)임이 명백하다.
김인산 [金仁山 1232~1303]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유학자.
본명 : 이상(履祥)
별칭 :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인산선생
국적 : 중국 송(宋)ㆍ원(元)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주요저서 :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이름 이상(履祥).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출생. 인산선생(仁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군서(群書)에 통달하였다. 장년이 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왕노재(王魯齋) ·하북산(何北山)에게 사사하고, 주자(朱子) ·황면재(黃勉齋)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송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책(奇策)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며, 송나라가 멸망하자진화산[金華山]에 숨어 살았다. 문집에 《인산집(仁山集)》, 주요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나광 [羅光 1911~]
중국의 철학자, 가톨릭 대주교.
별칭 : 세례명 스타니슬라오, 자 작소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중국 후난성[湖南省] 헝양[衡陽]
중국 후난성 출신의 대주교이자 철학자이다. 세례명은 스타니슬라오. 로마의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철학·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라테란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우르바노대학교 교수, 중화민국 보인대학교 및 문화대학교 철학연구소 교수, 보인대학교 총장(1978∼1992), 대남교구 교구장(1961∼1966),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교위원회 부의장(1962∼1966), 대북대교구 교구장(1966∼1968), 아시아주교단 의장(1974∼1978), 중국주교단 의장(1983∼1992)을 역임하고, 아울러 중국 철학회 이사장, 선산(船山)학회 이사장, 공맹(孔孟)학회이사 등을 지냈다.
그는 초기에 스콜라 철학을 연구하고 후에는 중국철학을 가르치면서 스콜라 철학의 관점에서 중국철학을 재조명하여 이른바 생명철학을 주장하였다. 그의 생명철학은 스콜라철학과 유가철학, 역철학을 비교 연구하여 얻은 결론으로, 양자의 형이상학적 이론이 서로를 부정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서로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양과 중국의 철학 정신이 차이가 나는 것은 그 양자의 철학적 연구 추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서양철학은 초월적 개념인 유(有:being)의 의의와 그 특성을 철학적 토대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재원칙을 수립하려 하였기 때문에 철학정신이 앎과 진리를 구하는 데 진력하여 과학의 발달을 이루었다. 반면에 중국의 철학은 ‘유’의 본성을 직접 관찰하여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 본성을 철학적 토대로 삼았다. 그는 이를 ‘생(生)’이라 하였는데, 중국철학은 이 생의 의의와 원칙을 탐구하고 인성의 발전과 온전한 삶을 추구하였는바 이러한 인문정신이 중국철학으로 하여금 윤리 도덕에 편중토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보완하는데, 서양철학이 ‘유’를 연구하여 학술적 기본 원칙을 수립하면 이를 중국의 학술 연구에 적용할 수 있고, 중국철학이 ‘생’을 연구하여 형이상학적 원칙을 확립하고 이를 인생에 응용하면 이 역시 서양의 윤리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이런 사상이 중국철학의 객관화에 기여할 것임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천주교 사상의 유교 사상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다.
나여방 [羅汝芳 1515~1588]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사상가.
호 : 근계(近溪)
별칭 : 자 유덕(惟德)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江西省]
주요저서 : 《근계집(近溪集)》
호 근계(近溪). 자유덕(惟德). 장시성[江西省] 출생. 왕용계(王龍溪)와 더불어 2계(溪)라 하였다. 26세 때 안균(顔鈞)의 감화를 받아 양명학 좌파(陽明學左派)의 사상을 흡수하였다. 그후 진사(進士)로 출사하여 윈난[雲南] 부사에서 참정(參政)으로 전직하였으나 장거정(張居正)의 미움을 사서 퇴직하였다. 그 뒤 강학(講學)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명나라 말기의 사상 ·학술계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설은, 공맹(孔孟)의 가르침은 효제(孝悌)에 귀착한다고 하여 효제가 본격적으로 구비된 적자(赤子)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이를 홍무제(洪武帝)의 육유(六諭)와 결부시켜 농촌교화에 힘썼다. 문집에 《근계집(近溪集)》이 있다.
나윤 [羅倫 1431~1478]
중국 명나라의 학자.
호 : 일봉
별칭 : 자 이정,시호 문의
국적 : 중국 명(明)
출생지 : 중국 장시성융평현
주요저서 : 《일봉집》(10권)
자 이정(彛正), 호 일봉(一峰), 시호 문의(文毅). 장시성[江西省] 융평현[永豊縣] 출생. 35세에 진사에 급제한 뒤 한림수찬(翰林修撰)·남경공직(南京供職)을 지내다가 2년 만에 사퇴하였다.
금우산(金牛山)으로 들어가 학문활동과 저술(著述)에 전념하여 많은 문객(文客)이 그를 따랐다. 의(義)를 중요시하였으며 청렴하여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문집에 《일봉집》 10권이 있다.
나정암 [羅整庵 1465~1547]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
호 : 정암
본명 : 흠순(欽順)
별칭 : 자 윤승(允升)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江西省] 타이허[泰和]
주요저서 : 《곤지기(困知記)》(5권) 《정암존고(整庵存稿)》(20권)
호 정암. 이름 흠순(欽順). 자 윤승(允升). 장시성[江西省] 타이허[泰和] 출생. 주자학의 입장에서 왕양명(王陽明)의 신설을 비판하고 논쟁하였으나, 순수한 주자학자로 볼수는 없다. 주자는 만물은 기(氣)로 성립된다고 보고, 그 기를 통제하는 것을 이(理)로 생각하며 이는 기에서 독립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나정암은 기를 떠난 이는 없다 하여 이기일체론(理氣一體論)을 제창하였다. 이를 ‘기의 철학’이라고 하며, 주자의 ‘이(理)의 철학’의 수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환관 유근(劉瑾)에 의해 자리를 빼앗겼다가, 후에 남경이부상서(南京吏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에까지 이르렀다. 저서에 《곤지기(困知記)》(5권) 《정암존고(整庵存稿)》(20권)가 있고, 《정의당전서(正誼堂全書)》에 《나정암집》(2권)이 수록되어 있다.
나종언 [羅從彦 1072~1135]
중국 북송(北宋) 말기, 남송 초기의 유학자.
별칭 : 자 중소(仲素),시호 문질(文質), 예장선생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푸젠성[福建省] 난젠[南劍]
주요저서 : 《예장문집(豫章文集)》(16권) 《준요록(遵堯錄)》
자 중소(仲素). 시호 문질(文質). 푸젠성[福建省] 난젠[南劍] 출생. 예장선생(豫章先生)이라고 불렸다. 동향(同鄕)의 선배 양시(楊時)의 가르침을 받았고, 두 정자(程子:程明道 ·程伊川 형제)의 학문을 동향의 후배 이연평(李延平)에게 전하여 주자에 이르렀으므로, 난젠의 3선생이라 불렸다. 1130년 광둥[廣東] 보뤄[博羅]의 주부(主簿)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서 퇴직한 후에는 뤄푸산[羅浮山]에 들어가 온종일 단정히 앉아 학문에 정진, 마침내 구산문하(龜山門下)의 제1인자가 되었다. 문집에 《예장문집(豫章文集)》(16권), 저서에 《준요록(遵堯錄)》 등이 있다.
나홍선 [羅洪先 1504~1564]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
호 : 염암(念菴)
별칭 : 자 달부(達夫)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江西省]
주요저서 : 《염암집》
호 염암(念菴). 자 달부(達夫). 장시성[江西省] 출생. 1529년 진사(進士) 제1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한림수찬(翰林修撰)을 제수받았으나, 1539년 직을 내놓고 관직에 대한 뜻을 버렸다. 그후 왕양명(王陽明)의 가르침에 독창(獨創)을 가미하여 사욕을 버리고 ‘일체의 인(仁)’을 깨달아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집에 《염암집》이 있다.
노래자 [老萊子 ?~?]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학자.
국적 : 중국 초(楚)
공자와 같은 시기의 사람이다. 난세(亂世)를 피하여 몽산(蒙山) 기슭에서 농사를 지었다. 초왕이 그가 현재(賢才)임을 듣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강남(江南)에 머물렀다. 그가 거처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락을 이루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서(書) 15편을 저술하였는데, 일설에는 그가 노자(老子)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노문초 [1717~1795]
중국 청나라의 학자.
별칭 : 자 소궁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학자
출생지 : 중국 저장성 위야오현
주요저서 : 《포경당총서(抱經堂叢書)》
자 소궁(紹弓). 저장성 위야오현[餘姚縣] 출생. 관리였으나 후반생은 교육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전의 교정과 교열에도 힘써 《포경당총서(抱經堂叢書)》를 출판하였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저술도 들어 있다.
노자 [老子 ?~?]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본명 : 이이
별칭 : 노담, 자 담
국적 : 중국 초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초나라 고현
주요저서 : 《노자》
성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허난성[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 ·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 ·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뇌차종 [雷次宗 386~448]
중국 남북조시대 송(宋)나라의 유학자(儒學者).
별칭 : 자(字) 중륜(仲倫)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
자 중륜(仲倫).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 출신. 어려서부터 노산(盧山)에 들어가 중 혜원(慧遠) 밑에서 배웠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특히 《삼례(三禮)》 《시경》 등에 정통하였다. 438년 문종(文宗)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계룡산(鷄龍山)에 학관(學館)을 개설하고 100여 명의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이어서 종산(鍾山)의 서암(西巖) 밑에 초은관(招隱館)을 세워 제왕과 태자에게 《상복경(喪服經)》 등을 강(講)하였으며, 그 곳에서 63세로 죽었다. 문집(文集)이 있다.
누일재 [婁一齋 1422~1491]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
호 : 일재(一齋)
본명 : 양(諒)
별칭 : 자 극정(克貞)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江西省] 상자오현[上饒縣]
주요저서 : 《일록(日錄)》 《삼례정와(三禮訂訛)》
호 일재(一齋). 이름 양(諒). 자 극정(克貞). 장시성[江西省] 상자오현[上饒縣] 출생. 과거 보는 학문을 싫어하여 정주학자(程朱學者) 오강재(吳康齋)를 따르고 마침내 그 제자가 되었다. 동문 호경재(胡敬齋)에게 이교(異敎:禪)에 들어갔다는 평을 들었듯이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도습하지는 않았으며, 또 왕양명(王陽明)을 가르친 적도 있어서 명나라 때 심학(心學)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존재이다. 저서에 《일록(日錄)》 《삼례정와(三禮訂訛)》 등이 있으나, 일찍 분실되었다.
능정감 [凌廷堪 1757~1809]
청나라의 학자.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학자
출생지 :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주요저서 : 《교례당문집(校禮堂文集)》
안후이성[安徽省] 출신의 강영(江永) ·대진(戴震)의 학(學)을 기본으로 하여 경학에 전념하였다. 완원(阮元)과도 교분이 있었고,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에 《교례당문집(校禮堂文集)》 《교례당시집(校禮堂詩集)》 《연락고원(燕樂考原)》 《원유산연보(元遺山年譜)》 등이 있다.
단성식 [段成式 ?~863]
당(唐)나라 때의 학자.
별칭 : 자 가고(柯古)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학자
주요저서 : 《유양잡조(酉陽雜俎)》(20권) 《속집(續集)》(10권)
자 가고(柯古). 박학(博學)이라는 영예를 안으면서 연구에 정진하여, 비각(秘閣)의 책은 모두 읽었다고 전한다. 상서랑(尙書郞) ·강주자사(江州刺史) ·태상소향(太常少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주요저서에 《유양잡조(酉陽雜俎)》(20권) 《속집(續集)》(10권)이 있다. 《유양잡조》는 당대를 주로 한 괴이한 사건, 언어와 그리고 풍속 따위를 기술한 책이다.
단옥재 [段玉裁 1735~1815]
중국 청나라 때의 학자.
호 : 무당(茂堂)
별칭 : 자 약응(若膺)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학자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주요저서 : 《고금상서찬이》(32권) 《춘추좌씨경》(12권)
자 약응(若膺). 호 무당(茂堂). 장쑤성[江蘇省] 출생. 대동원(戴東原)의 제자로서 왕염손(王念孫)과 더불어 대씨(戴氏)의 ‘단왕이가(段王二家)’라고 불린다. 설문학(說文學)의태두(泰斗)이며, 한(漢)나라의 허신(許愼)이 지은 자서(字書)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주서 30권을 저술함으로써 난해한 설문 주석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고금상서찬이(古今尙書撰異)》(32권) 《춘추좌씨경(春秋左氏經)》(12권) 등이 있다.
담감천 [湛甘泉 1466~1560]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
호 : 감천
본명 : 약수(若水)
별칭 : 자 원명(元明)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광둥성[廣東省] 정청[增城]
주요저서 : 《심성도설(心性圖說)》 《격물통(格物通)》 《준도록(遵道錄)》 《감천집》
호 감천. 이름 약수(若水). 자 원명(元明). 광둥성[廣東省] 정청[增城] 출생. 진백사(陳白沙)에게 배워 정좌침잠(靜座沈潛)의 수련을 쌓아 사관(仕官)의 소망을 세웠으나 어머니의 명으로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에 들어가 40세 때 진사에 급제, 서길사(庶吉士)에 뽑혀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가 되었다. 이부(吏部)에 있던 왕양명(王陽明)에 공명하여 그와 함께 유학을 연구한 것은 그 무렵이다. 1522년에는 시독(侍讀)이 되었고, 남경국자감좨주(南京國子監祭酒) ·예부시랑(禮部侍郞), 이어 남경이부(南京吏部) ·예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그 동안에 성학(聖學:儒學)을 일으킬 뜻을 상주문 등에 썼고, 70세를 넘어 사직하였다.
그는 진헌장(陳獻章)의 영향을 받아 치양지설(致良知說)을 내세우는 왕양명과 논란(論難)하여 양보하는 일이 없었고, 당시의 학자는 왕 ·담의 2파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또 이르는 데마다 반드시 서원을 세워 진헌장을 모셨고, 문하생은 널리 여러 곳에 있었다. 저술은 대단히 많아 《심성도설(心性圖說)》 《격물통(格物通)》 《준도록(遵道錄)》, 문집에 《감천집》 등이 있다.
담사동 [譚嗣同 1865~1898]
중국 청(淸)나라의 사상가.
별칭 : 자 부생(復生)호 장비(壯飛)
국적 : 중국 청(淸)
출생지 : 후난성[湖南省] 료우양[瀏陽]
주요저서 : 《인학(仁學)》
자 부생(復生). 호 장비(壯飛). 후난성[湖南省] 료우양[瀏陽] 출생이다. 아버지는 진보적 사상을가진 고급관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문에 뛰어나, 시문 저작은 30세 때까지 16종 24권에 이른다. 1884년 이래 가끔 과거(科擧)에 응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했고, 청일전쟁 뒤에는 이른바 신학에 공명하여 당재상(唐才常) 등과 함께 남학사(南學社)를 열고 《상보(湘報)》를 발행하였다.
이후 변법자강운동에서는 후난성의 중심 인물이었고, 캉유웨이[康有爲]보다도 한층 진보적인 변법론을 전개,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주의에 접근하고 있었다. 저서 《인학(仁學)》은 묵자(墨子)·불교 및 서구사상에 의하여 유교의 도(道)를 되살리려고 한 것으로, 모든 차별·불평등의 타파를 위해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캉유웨이·량치차오[梁啓超] 등은 도망하였으나, 그는 도망을 거부하고 처형된 일에서도 사상의 실천성을 엿볼 수 있다.
담조 [啖助 730?~777?]
중국 당(唐)나라의 유학자(儒學者).
별칭 : 자 숙좌(叔佐)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자오현[趙縣]
주요저서 : 《춘추집전(春秋集傳)》
자 숙좌(叔佐). 허베이성[河北省] 자오현[趙縣] 출생. 뒤에 관중(關中:지금의 陜西省)으로 옮겨 살았다. 임해위(臨海尉) ·단양주부(丹陽主簿) 등의 벼슬을 지낸 후, 은둔생활로 청빈을 즐기면서《춘추(春秋)》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삼전(三傳)을 연구한 지 10년 만에, 이들 책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지적, 《춘추》의 진의는 경(經)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종래의 한(漢) ·당(唐)의 전(傳)을 중심으로 한 춘추학에 반대하였다. 그가 내놓은 《춘추집전(春秋集傳)》은 춘추학의 혁신을 촉진시킨 공적이 크다.
대진 [戴震 1723~1777]
중국 청(淸)나라의 고증학자.
별칭 : 자 동원(東原)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고증학
출생지 :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시우닝현[休寧縣]
주요저서 :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고공기도(考工記圖)》
자 동원(東原). 안후이성[安徽省] 시우닝현[休寧縣] 출생. 강영(江永)에게 사사하였으며, 음운·훈고(訓뭍) ·지리·천문·산수·제도·명물(名物) 등 여러 분야에 통달하였다. 표음(表音)문자로 훈고를 구하고, 훈고로 의리를 탐구함으로써 편견 없이 실증적으로 진리를 탐구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수관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로 있으면서 경서의 객관적 연구법인 엄박(淹博)·식단(識斷)·정심(精審)을 제창하였고, 교감(校勘)·문자음성·제도·지리·역법 등의 보조학을 중시하여 고증학의 방법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을 저술하였다. 왕염손(王念孫)·단옥재(段玉裁)를 가르쳤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한 학파를 환파(晥派)라 한다. 저서에 《고공기도(考工記圖)》 《굴원부주(屈原賦注)》 등이 있다.
동중서 [董仲舒 BC 170 ?~BC 120 ?]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
국적 : 중국 한(漢)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광촨현[廣川縣]
주요저서 : 《동자문집(董子文集)》 《춘추번로(春秋繁露)》
허베이성[河北省] 광촨현[廣川縣] 출신. 일찍부터 《공양전(公羊傳)》을 익혔으며 경제(景帝) 때는 박사가 되었다. 장막(帳幕)을 치고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제자도 있었다. 3년 동안이나 정원에 나가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고,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에 참획(參劃)하게 되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고, 국가 문교의 중심이 유가(儒家)에 통일된 것은 그의 헌책(獻策)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뒤에 자신의 학설로 말미암아 투옥되는 등 파란 많은 생애였다. 저서에 《동자문집(董子文集)》 《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
등석 [鄧析 ?~?]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의 학자.
국적 : 중국 정(鄭)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등석자(鄧析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윤문자(尹文子) ·공손 룡(公孫龍)과 더불어 명가(名家:詭辯學派)의 학자로 올려놓았으나, 법가(法家:法治主義學派)의 학설을 주로 다룬 것으로 추정된다. 《열자(列子)》에는 그가 정나라 사람들을 선동해서 송사(訟事)를 일으키는 것을 일삼아 국정을 문란하게 하였고, 또한 자주 자산(子産:公孫僑)의 정치를 비난해서 처벌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회남자(准南子)》에는 그의 능변(能辯)으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등 그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기록하였다. 저서《등석자(鄧析子)》는 <무후(無厚)> <전사(轉辭)>의 2편으로 이루어지는데, 주로 법가의 학설을 담았다.
랴오핑 [廖平(료평) 1852~1932]
중국 청말(淸末)의 유학자.
호 : 학재(學齋)
별칭 : 자 계평(季平) ·등연(登延)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쓰촨성[四川省]
주요저서 : 《오경주소(五經注疏)》 《육역관총서(六譯館叢書)》
자 계평(季平) ·등연(登延), 호 학재(學齋). 쓰촨성[四川省] 출생. 광서연간(光緖年間:1875∼1907)에 과거에 합격해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관리가 되지 않고, 청두[成都]에서 공교부론사(孔敎扶論社)를 조직하여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처음에는 송학(宋學)을 배우고 훈고고증학(訓뭍考證學)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연구하여 청말 공양학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1887년 《금고학고(今古學考)》를 저술하고, 금학(今學)과 고학(古學) 양쪽의 가치를 인정하는 경학적(經學的) 입장을 취하였으나, 다시 금문학(今文學)의 길을 택하여 《벽유편(闢劉篇)》 및 《지성편(知聖篇)》을 저술하였다. 그 즈음(1889∼1890)에 만난 대학자 캉유웨이[康有爲]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후에 캉유웨이의 학설은랴오핑학설의 표절이라는 정평(定評)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입장이 끊임없이 변하여 그의 학설을 5, 6회나 바꾼 탓으로 당시의 사상계를 이끌지는 못하였다. 중화민국 수립 후에 청두의 국학원(國學院) 원장을 지냈다. 저서에 《오경주소(五經注疏)》 《육역관총서(六譯館叢書)》 등이 있다.
량치차오 [梁啓超(양계초) 1873~1929] ->양수명
중국 청말(淸末) 중화민국(中華民國)초의 계몽사상가이자 문학가.
호 : 임공, 음빙실주인
별칭 : 자 탁여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정치, 문학
출생지 : 광둥성
주요저서 : 《음빙실총서》 《청대학술개론》 《중국근삼백년학술사》
자는 탁여(卓如), 호는 임공(任公) 또는 음빙실주인(飮氷室主人) 이며, 광둥성[廣東省] 신후이[新會]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교육을 받았으나, 상하이[上海]에서 세계 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志略)》과 서양 서적을 보고는 생각이 크게 바뀌었고, 이 해 캉유웨이[康有爲]를 처음 만나 그에게 육왕심학(陸王心學)과 서학(西學)을 배우고 공양학(公羊學)을 익혔다.
1895년 캉유웨이와 함께 베이징[北京]에 강학회(强學會)를 설립하고, 상하이에 강학회 분회를 설립하여 여러 나라 서적의 번역, 신문·잡지의 발행, 정치학교의 개설 등 혁신운동을 펼쳐 나갔다. 1895년 이후에는 탄쓰퉁[譚嗣同]과 함께 변법자강운동에 진력하였다.
베이징의 《만국공보(萬國公報)》와 상하이 《시무보(時務報)》의 주필로 명성을 떨쳤으며, 마카오[澳門]에서도 《지신보(知新報)》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계몽적인 잡지를 발간하여 서양의 신사상을 소개하고 구사상을 배격하며 애국주의를 고취하여 중국 개화에 공헌하였다. 그의 수많은 정치 논설들은 늘 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1918년말, 유럽을 방문하면서유럽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병리 현상을 직접 둘러보게 되어 귀국 후 서양문명이 이미 파산하였음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문학, 사학, 철학, 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었다.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 《음빙실총서(飮氷室叢書)》《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등의 방대한 저술이 있으며, 《음빙실전집》에는 36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량수밍 [梁漱溟(양수명) 1893.10.18~1988.6.23]
중국의 사상가.
별칭 : 자 환딩[煥鼎]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광시성[廣西省] 구이린현[桂林縣]
주요저서 : 《동서문화와그 철학》(1921)
자 환딩[煥鼎]. 광시성[廣西省] 구이린현[桂林縣] 출생. 베이징[北京]의 순톈[順天]중학을 졸업하고 청말(淸末) 1910년 혁명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7년 베이징대학교 인도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9년의 5 ·4운동 때부터 신청년파와 대립, 1921년 신유교적(新儒敎的) 입장에서 《동서문화와 그 철학》을 출판, 중국 사상계의 주목을 끌었다. 1924년부터 산둥성[山東省] 등지에서 향촌(鄕村)건설운동을 시도한 이래 줄곧 이 운동에 헌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민참정원(國民參政員), 민주동맹파의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 때는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공산당 정권 수립 후에는 전국 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되었으나, 1955년 정부의 농업협동화 정책에 반대하였다가 1956년 비판을 받았다. 저서에 《중국민족 자구운동(自救運動)의 최후 각오》(1933) 《향촌건설 이론》(1937) 등이 있다.
류스페이 [劉師培(유사배) 1884~1919]
청나라 말·중화민국 초의 유학자.
호 : 좌암·광한
별칭 : 자 신숙·무외·소보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장쑤성 양저우
주요저서 : 《춘추좌씨전략》 《일례고》 《주례고주집소》
자(子) 신숙(申叔)·무외(無畏)·소보(少甫). 호 좌암(左錢)·광한(光漢).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 출생. 4대에 걸친 양저우학파의 학자 가문 출신이다. 1905년 《국수학보(國粹學報)》가 창간되자 이에 관여하였고, 이후 청나라 말의 국수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국수주의의 혁명사상가로 알려졌다. 1911년 신해혁명 때에는 한때 체포된 바 있었으나 용서를 받고 석방되어, 장빙린[章炳麟]의 추천으로 청두[成都]의 고등사범학교 교사가 되었다.
중화민국 수립 후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제정(帝政)에 참여하였으나, 제정이 실패하자 은둔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지조가 없었으나 학자로서는 유가(儒家)의 경전에 정통하고, 《춘추좌씨(春秋左氏)》에 특히 능통하였다. 《춘추좌씨전략(傳略)》 《일례고(佚禮考)》 《주례고주집소(周禮古註集疏)》 등 많은 저서가 있으며, 《유신숙유서(劉申叔遺書)》에 수록되어 있다.
마융 [馬融 79~166]
중국 후한(後漢)의 유가(儒家).
별칭 : 자 계장(季長)
국적 : 중국 한(漢)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산시성[陜西省] 마오링[茂陵]
주요작품 : 《춘추삼전이동설(春秋三傳異同說)》
자 계장(季長). 산시성[陜西省] 마오링[茂陵] 출생. 안제(安帝) 및 환제(桓帝)에 사관(仕官)하여 태수가 되었다. 수경(數經)에 통달하여 노식(盧植), 정현(鄭玄) 등을 가르쳤다. 《춘추삼전이동설(春秋三傳異同說)》을 짓고, 《효경》 《논어》 《시경》 《주역》 《삼례》 《상서》 《열녀전》 《노자》 《희남자》 《이소(離騷)》를 주석했다. 문집 21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단편(斷片)만이 남아 있다.
만사대 [萬斯大1633~1683]
중국 청나라 때의 경학자.
호 : 파옹(跛翁)·갈부선생(褐夫先生)
별칭 : 자 충종(充宗)
국적 : 중국
주요저서 : 《학춘추수필》(10권) 《학례질의》(2권) 《주관변비》(2권) 등
자 충종(充宗). 호 파옹(跛翁)·갈부선생(褐夫先生). 동생 만사동(萬斯同)과 함께 황종희(黃宗羲)에게 사사하였다. 특히 춘추학과 예학을 깊이 배워, 《학춘추수필(學春秋隨筆)》(10권) 《학례질의(學禮質疑)》(2권) 《주관변비(周官辨非)》(2권) 등을 저술하였다.
만사동 [萬斯同1638~1702]
중국 청나라 때의 역사가.
별칭 : 자 계야(季野)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역사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주요저서 : 《명사고》 《역대사표》 《석경고》 《유림종파》 등
자 계야(季野). 저장성[浙江省] 출생. 형인 만사대(萬斯大)와 함께 황종희(黃宗羲)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명(明)나라의 사실(史實)에 밝아, 청왕조(淸王朝)의《명사고(明史稿)》 편찬에 초빙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서민의 신분으로 명사관총재(明史館總裁)의 고문이 되었으며, 각 편찬관이 쓴 원고를 통일하여 《명사고》 편찬에 큰 공적을 남겼다. 저서에 《역대사표(歷代史表)》 《석경고(石經考)》 《유림종파(儒林宗派)》 《곤륜하원고(崑崙河源考)》 《묘제도고(廟制圖考)》 《성운원류고(聲韻源流考)》 등이 있다.
맹자 [孟子 BC 372 ?~BC 289 ?]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
본명 : 가(軻)
별칭 : 자는 자여(子輿)·자거(子車)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 추(趨)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있었던 추(趨)에서 출생하였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 ‘공맹지교(孔孟之敎)’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
모기령 [毛奇齡 1623~1716]
중국 청나라의 학자.
호 : 서하(西河)
별칭 : 자 대가(大可)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학자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주요저서 : 《사서개착(四書改錯)》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 등
자 대가(大可). 호 서하(西河). 저장성[浙江省] 출생. 1679년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응시하였으며, 한림원검토(翰林院檢討)에 임명되어 명사(明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양명학 영향을 받았으나 고증학(考證學)을 좋아하여, 경학(經學) ·역사 ·지리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자(朱子)를 비판한 《사서개착(四書改錯)》, 염약거(閻若據)의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반박한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 등이 있다. 박식하나 당파의식이 강하여, 편파적인 의론을 좋아하였다.
모자 [牟子 165?~251?]
중국의 불교서 《이혹론》의 저자.
국적 : 중국
주요저서 : 《이혹론》
《이혹론》은 《홍명집(弘明集)》에 수록된 것으로, 불교를 중심으로 유가(儒家) ·도가(道家)의 사상을 혼합한 삼교조화론적(三敎調和論的)인 책이다. 불사(不死)의 관념이나 신선술(神仙術)에는 비판적이다. 《홍명집》에는 모자를 후한의 모융(牟融)이라 하였으나 잘못된 것이다. 일설에는 창오태수(蒼梧太守) 모자박(牟子博)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저술 연대도 후한 말에서 남조의 송(宋) ·제(齊) 시대까지의 여러 설이 있다.
모진 [毛晉 1599~1659]
명나라 말기의 학자, 장서가.
호 : 잠재(潛在)
별칭 : 자 자진(子晉) 초명 봉포(鳳苞)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유학자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상숙(常熟)
자 자진(子晉). 호 잠재(潛在). 초명 봉포(鳳苞). 장쑤성[江蘇省] 상숙(常熟) 출생. 전겸익(錢謙益)에게 사사하였다. 급고각(汲古閣) 목경루(目耕樓)를 세워 수만 권의 서적을 수장, 많은 선본고서(善本古書)를 복각(復刻)하였다.
묵자 [墨子 BC 480~BC 390]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본명 : 적(翟)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이름은 적(翟).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한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漢書)》지(志)에는 71편으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은 한(漢)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겸애란 사람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尙同論)이 있으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天志論)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下]은 윗사람[上]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인일의(一人一義) 십인십의(十人十義)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尙同)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賢者)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天子)가 있다”는 것이다. 명귀론(明鬼論)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非命論)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命: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編)과 비공론(非攻論)에서 출발한 방어술(防禦術) ·축성술(築城術)에 관한 편도 있다.
방이지 [方以智 1611~1671]
중국 명말 청초의 사상가.
호 : 만공(曼公)
별칭 : 자 밀지(密之)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자
출생지 :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퉁청현[桐城懸]
주요저서: 《계고당문집(稽古堂門集)》 《부산전집(浮山全集)》
호는 만공(曼公), 자는 밀지(密之). 안후이성[安徽省] 퉁청현[桐城懸] 출생. 중국 전근대 최대의 자연철학자이다. 역학(易學)을 가업으로 하였으며 동림당(東林黨)에 참가한 선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동림일복사(東林一復社)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강한 관심과 의문을 가졌다. 그에 따르면 질측(質測:자연과학)은 통기(通幾:철학)를 담고 있어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자연과학도 철학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여러 사물과 그들의 관계를 관통하는 근본원리인 자연계의 근본원칙을 탐구하여 그것을 ‘교륜지기(交輪之幾:철학을 말함)’라고 이름지었다.
즉 허실(虛實), 동정(動靜), 음양(陰陽), 형기(形氣), 주야(晝夜), 생사(生死), 도기(道器), 유명(幽明) 등과 같이 세계는 모두 둘로 나뉘어 있으며 이 둘이 서로 엇바뀌거나 대립하고 원인이 되는 관계를 이루는 ‘하나’인 것으로 보았다. 물리, 지리, 역사, 천문, 문학 등 여러 방면에 관하여 연구하였으며 명나라가 망하자 새로운 왕조인 청나라에 협조하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주요저서로는 당시에 나온 과학의 여러 성과를 모아서 박물지 성격으로 쓴 《통아(通雅)》와《물리소식(物理小識)》이 있으며, 《계고당문집(稽古堂門集)》 《부산전집(浮山全集)》 《부산후집(浮山後集)》 《동서균(東西均)》 등이 있다.
방효유 [方孝孺 1357~1402]
중국 명나라 초기의 학자.
호 : 손지(遜志)
별칭 : 방정학(方正學), 자 희직(希直) ·희고(希古)
국적 : 중국 명(明)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하이현
주요저서 : 《주례변정》 《손지재집》(24권) 《방정학문집》(7권) 등
자 희직(希直) ·희고(希古). 호 손지(遜志). 저장성[浙江省] 닝하이현[寧海縣] 출생. 방정학(方正學)이라고도 한다. 송염(宋濂)의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떨쳤다. 평소부터 왕도(王道)를 밝히고 태평(太平)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세속적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혜제(惠帝)를 섬겨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02년 연왕(燕王: 뒤의 永樂帝)이 황위(皇位)를 찬탈한 뒤, 그에게 즉위의 조(詔)를 기초하도록 명하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하였다. 연왕은 노하여 그를 극형에 처하였고, 일족과 친우 ·제자 등 847명이 연좌되어 죽었다고 한다. 저술에《주례변정(周禮辨正)》 등 몇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영락제에 의해 소각되고, 《손지재집(遜志齋集)》(24권) 《방정학문집(方正學文集)》(7권)이 전할 뿐이다.
범녕 [范寧 339~401]
중국 동진(東晉)의 학자.
별칭 : 자 무자(武子)
국적 : 중국 동진(東晉)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허난성[河南省]
주요저서 : 《집해(集解)》 12권
자 무자(武子). 허난성[河南省] 출생.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때 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었으며, 관리의 신분이 불안정한 시대여서 지방관청으로 좌천되었다. 지방장관을 지내면서 학교를 세우고 경학(經學)에 힘써, 청담(淸談)이 유행한 당시의 경박한 풍조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또 이와 같은 풍조의 근저에는 왕필(王弼) ·하안(何晏)의 영향이 있다고 주장하여, 그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평소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좋은 주석(註釋)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겨, 그 《집해(集解)》 12권을 저술하여 호평을 받았다.
비밀 [費密 1623~1699]
중국 청나라 때의 학자.
호 : 연봉(燕峰)
별칭 : 자 차도(此度)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 쓰촨성[四川城]
주요저서 : 《홍도서(弘道書)》《녹봉집(鹿峰集)》《연봉집(燕峰集)》
자는 차도(此度), 호는 연봉(燕峰)이다. 1623년(명 천계 3) 신번(新繁:지금의 四川城)에서 출생하였다. 경우(經虞)의 아들이다. 어려서 장헌충(張獻忠)의 난을 만나 집을 버리고 도사(道士)의 길을 걷다가, 태주(泰州)에머무르면서 시(詩)를 공부하였다. 후에 손기봉(孫奇逢)을 사사(師事)하면서 학문이 더욱 순정(純正)해지고 시의 뜻이 깊어졌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3권 15편으로 이루어진 《홍도서(弘道書)》외에 《녹봉집(鹿峰集)》《연봉집(燕峰集)》 등의 문집이 있고, 당나라 때의 규방 시를 묶은 《당궁규시(唐宮閨詩)》가 있다.
사상채 [謝上蔡 1050~1103]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
본명 : 양좌
별칭 : 자 현도, 시호 문숙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난성 상채현
주요저서 : 《논어설》
이름 양좌(良佐). 자 현도(顯道). 시호 문숙(文肅). 허난성[河南省] 상채현(上蔡縣) 출신. 1085년 진사에 급제, 성품이 강직한 탓으로 관직은 주현(州縣)의 지사(知事)를 오랫동안 역임하였으나 후에 구화(口禍) 때문에 서민이 되었다. 두 정자(程子)인 정호(程顥)·정이 형제에게서 학문을 수학하였고, 특히 정호의 학풍을 존숭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유조(游酢) ·여대림(呂大臨) ·양시(楊時)와 함께 4선생(四先生)으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논어설(論語說)》이 있어 세상에 널리 행해졌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의 설은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많이 인용되었고 그의 사상은 제자들이 편집한 《상채선생어록(上蔡先生語錄)》(3권)에서밖에 볼 수 없으나 송대(宋代)의 신유학 형성을 위하여 큰 힘이 되었다.
사양좌 [謝良佐 1050~1130]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
별칭 : 자 현도(顯道), 상채(上蔡) 선생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유학
자 현도(顯道). 상채(上蔡) 선생이라고도 한다. 정호(程顥) 문하의 수제자 네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우주의 근원적 이법(理法)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따른다는 정호학설을 이어받아 발전시킴으로써, 남송(南宋)의 육상산(陸象山) 심학(心學)의 선구가 되었다.
상앙 [商鞅?~BC 338]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의 정치가로서 위앙(衛 ) 또는 공손 앙(公孫 )이라고도 한다. 성은 공손(公孫)씨이며, 이름은 앙이다. 위(衛)나라 공족(公族) 출신으로 일찍부터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하여 조예가 깊었다. 위(魏)나라에 사관(仕官)하려 하였으나 받아주지 않아, 진(秦)나라로 가서 효공(孝公BC 381~BC 338)에게 채용되었다. 즉, 효공이 "초현령(招賢令)"을 반포하여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효공의 측근 환관 경감(景監)의 주선으로 효공을 알현한 상앙은 먼저 "제도(帝道)"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효공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자 "왕도(王道)"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효공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상앙이 "패도(覇道)"를 이야기하자 진 효공은 크게 기뻐하였다. 패도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효공은 여러 날을 듣고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당시 진 효공에게 가장 급선무는 부국강병이며, 이것은 결코 "제도"나 "왕도"의 범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때 상앙이 주장한 변법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낡은 봉건 영주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둘째, 농전(農戰)정책을 추진하여 진나라의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
그리하여 효공은 상앙을 좌서장(左庶長)이라는 요직에 발탁하여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보수파(保守派:儒家)와 투쟁하면서 형법(刑法)·가족법·토지법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후일 진제국(秦帝國) 성립의 기반을 세웠다.
상앙의 변법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다. 제1차 변법은 진 효공 6년(BC 356)부터 시작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호적을 작성하고 "십오(什五)연좌제"를 시행하였다.
"십오연좌제"란 다섯 가구를 오(伍, 5인조), 열 가구를 십(什, 10인조)으로 하는 제도를 정하고 인민을 서로 감시 고발케 하여 조(組)끼리 연좌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즉 범죄인임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하고, 고발한 자에게는 적의 목을 벤 것과 같은 상을 내리기로 하였다. 또 어느 집에서 범죄인을 숨기면 그 집에 속하는 "십오(什伍)"는 똑같이 죄에 연좌하고 적에 항복한 것과 같은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또 여인숙에 숙박할 경우에는 누구는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2) 신상필벌(信賞必罰) 제도를 반포하였다.
즉 전공을 올린 자에게는 그 정도에 따라 작위를 부여하고, 개인적인 다툼에는 그 정도에 따라 형을 과하였다. 그리고 공족이나 귀족과 같은 명문집안일지라도 전공이 없는 자는 그 신분을 박탈하였다.모든 작위의 등급을 전공에 의해 규정하고 그 등급에 따라 전답과 가옥의 넓이나 가신, 노비의 수, 의복 등도 단계적으로 정했다. 이것은 바로 기존 귀족계급의 세습 특권을 박탈하여 전공을 기준으로 새로운 등급제도를 확립하려고 한 것이다.
3)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에 관한 법령 등을 제정하였다.
개혁의 철저를 기하기 위하여 효공 12년(BC 350)부터 제2차 변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때는 제1차 변법보다 더욱 진취적이었다.
1) 봉건 영주의 토지 소유제를 폐지하였다.
즉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하고 원전제(轅田制)를 채용하였다. 정전제란 사방 1리의 토지를 "정(井)"자로 9등분하여 그 경계에 논두렁을 만들어 구분한 것인데, 한가운데의 1구획은 공전(公田)으로 수확을 왕후에게 헌납하고, 주위의 8구획은 전부 노예주 귀족계급이 영유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원전제는 서민들이 직접 경지를 소유하고 자유 매매도 가능한 것이었다.
2) 현제(縣制)를 시행하여 군왕 직속의 현급 행정기구를설치하였다.
종래의 향(鄕), 읍(邑), 취(聚=촌락) 등의 지방 행정단위는 각각 노예주인 귀족계급이 영유하여 그들의 자의적인 통치에 맡겨져 왔다. 상앙은 그러한 제약을 무너뜨리고 현급 행정기구를 신설함으로써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3) 조세를 직접 징수하고 호구에 따라 병역세를 징수하였다.
4)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5)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하였다.
즉 서쪽의 오랑캐 민족의 풍속인 부자형제의 동실 거주를 금지했다.
상앙은 두 차례에 걸친 변법의 시행을 통하여 진나라를 중앙집권국가로 변모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로써 봉건 영주의 경제력은 점차 약화되고 중앙권력이 나날이 견고해졌으며, 농업 노동력이 증가하고 경지가 확충되어 농업생산이 날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정이 중앙으로 집중됨으로써 국가의 재정수입이 풍부해지고, 농전정책의 추진으로 군사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다시 말하면 상앙의 변법이 지향하는 바는 바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의한 부국강병이었으며, 그것을 내용적으로 보면 농본주의와 법치주의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상필벌 정책은 법가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으로, 모든 것을 법으로 다스려 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는 원칙을 공평하게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앙은 이러한 법을 시행하기 전에 먼저 높이 30척의 나무를 함양의 남문에 걸어두고, 그 옆에 만약 누구든지 목패를 북문에다 옮기면 상금으로 금 열 돈을 준다는 방을 붙였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백성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길 뿐 선뜻 나서서 그 목패를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관에서는 다시 상금을 금 50돈으로 올렸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고, 상앙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사람에게 금 50돈을 상금으로 주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졌고, 백성들은 조정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또한 상앙은 법의 집행에 있어서 엄격하였으며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태자가 사형 판결을 받은 공족의 한 사람을 숨겨주었다. 범인을 숨긴 자는 범인과 동죄라고 하는 신법에 의하면 태자가 사형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상앙은 태자를 법에 따라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차마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상앙은 효공과 상의하여 태자의 시종장(侍從長)인 공자(公子) 건(虔)에게 대신 형을 주어 코를 깎았고, 교육을 맡고 있는 공손가(公孫賈)를 문신의 형으로 다스렸다. 전통적인 규범으로는 대부(大夫) 이상의 귀족에게는 형을 가하지 않는 것이었으나, 상앙은 그러한 전통적인 규범을 깨뜨리고 법 앞에는 귀족도 서민도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성들은 모두 법을 준수하여 아무도 감히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못했다.
국내의 법률을 확고히 다진 후 국외로 시선을 돌린 상앙은 진 효공에게 세력이 약해진 위(魏)나라를 정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상앙이 군대를 인솔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위나라는 공자 앙(央)이 5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성(吳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상앙은 앙에게 화의를 청하는 거짓 편지를 보낸 다음 방심한 틈을 타서 그들을 공격하여 일거에 오성을 점령하였다. 이 공로로 상앙은 열후(列侯)로 봉해져 상군(商君)으로 칭해지고, 옛날 위나라 영토였던 하남성 상읍(商邑)을 비롯한 15개의 읍을 봉토로 받았다.
상앙이 각종 개혁을 엄격하게 집행하면서 진나라의 정치는 점점 본궤도에 들었으나, 반대로 그의 개혁에 의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기도 했다. 상앙이 법을 집행함에 있어 가혹할 정도로 엄정했기 때문이다. ≪사기≫의 작자 사마천이 상앙을 일러 "그 천성이 각박하여 복이 적다"고 평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BC 338년 진나라 효공이 병으로 세상을 뜨고 태자가 혜왕(惠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변법으로 피해를 입은 많은 왕족과 귀족 대신들은 일제히 상앙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혜왕도 태자 시절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여 사부의 코를 벤 상앙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상앙을 바로 파면하였다. 상앙이 사직하고 상읍으로 돌아가는데 혜왕은 다시 군대를 보내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상앙은 재빨리 국외로의 탈출을 꾀했다. 간신히 국경의 함곡관(函谷關)에 닿아 어떤 여인숙에 들어갔다. 물론 여인숙 주인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는 "상앙 어른께서 정하신 법률에 따라 증명서가 없는 사람을 재울 수가 없습니다. 저까지 죄책을 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제서야 상앙은 자신이 제정한 법률이 너무도 가혹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상앙은 위나라로 도망가려고 하였으나,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을 속임수로 격파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상앙은 자신의 봉토인 상(商)으로 가서 세력을 규합하여 재기하려 했으나 뒤를 추격해온 공손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진 혜왕은 상앙을그가 정한 법률에 따라 거리에서 사지를 찢는 거열(車裂)이라는 극형에 처하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통일국가 형성기에 관한 귀중한 사료인 그의 저서 《상군서(商君書)》는 각 편마다 성립연대가 달라 전국시대 말기 여러 법가(法家)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귀중한 역사적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석개 [石介 1003~1043]
중국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별칭 : 조래선생, 자 수도
국적 : 중국 송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연주
주요저서 : 《조래집》
자 수도(守道). 연주(沂州) 출생. 젊었을 때부터 큰 뜻을 품었으며 성격은 바르고 강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중윤(太子中允)에 임명되었으나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조래산(徘徠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역경(易經)》을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래선생이라 불렀다.
일찍이 문장의 폐(弊)와 불교, 노장사상의 폐해를 우려하여, 《괴설중국론(怪說中國論)》을 써서 이를 비판하였고, 또 《당감(唐鑑)》을 써서 간사함을 경계하였다. 호안정(胡安定), 손태산(孫泰山:손명복)과 함께 뛰어난 유학자로꼽히고 있으며, 저서로는 《조래집(徘徠集)》이 있다.
설경헌 [薛敬軒 1389~1464]
중국 명나라 떄의 유학자.
호 : 경헌(敬軒), 시호 문청(文淸)
본명 : 선(瑄)
별칭 : 자 덕온(德溫)
국적 :중국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산시성[山西省] 허둥[河東]의 허진[河津]
주요저서 : 《독서록》 《종정명언》 《설자도론》 《문집》 등
자 덕온(德溫). 호 경헌(敬軒). 이름 선(瑄). 산시성[山西省] 허둥[河東]의 허진[河津] 출생. 1421년 진사,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으로부터 누진(累進)하여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오강재(吳康齋)와 함께 정주학(程朱學)을 닦은 뒤에 이를 주창하고 복성(復性: 내 자신을 수양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수기교인(修己敎人)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복귀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였으며, 제자도 많아 하동학파(河東學派)라는 일파를 이루었다. 평생을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규약에 따라 역행(力行)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독창성이 적지만 각고실천(刻苦實踐)한 유학자이며, 사후에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받고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에는 《독서록(讀書錄)》 정(正) ·속(續) 24편 외에 《종정명언(從政名言)》 《설자도론(薛子道論)》 《문집(文集)》 등이 남아 있다.
섭적 [葉適 1150~1223]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호 : 수심(水心)
별칭 : 자 정칙(正則),시호 충정(忠定)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 《수심집(水心集)》,《학습기언(學習記言)》
자 정칙(正則). 호 수심(水心). 시호 충정(忠定). 순희(淳熙) 연간의 진사(進士)로, 태학정(太學正) ·박사(博士) ·통의대부(通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송나라 조정의 난국에 있는 힘을 다하였으나, 재상인 한탁주(韓祗胄)의 탄핵으로 직(職)을 잃자 저작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문장은 웅건하고도 빼어난 데다 재기가 넘쳐 ‘문(文)의 대종(大宗)’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저서로는 《수심집(水心集)》(29권) 《학습기언(學習記言)》(50권) 등이 있다.
세석 [世碩 ?~?]
중국 고대 진(陳)나라의 사상가.
국적 : 중국 고대 진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난성
주요저서 : 《세자》(21편)
진(陳)나라(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사람.그의 스승이 공자(孔子)의 제자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BC 5세기경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에 그의 저서 《세자(世子)》(21편)가 기록되어 있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는 세석의 설(說)이라 하여 "사람의 성(性)에는 선(善)과 악(惡)이 섞여 있어 선을 기르면 선인이 되나 악을 조장(助長)하면 악인이 된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성에 대한 논술(論述)로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옹 [邵雍 1011~1077]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시인.
호 : 안락선생(安樂先生)
별칭 : 자 요부(堯夫),시호 강절(康節)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호 안락선생(安樂先生). 자 요부(堯夫). 시호 강절(康節). 소강절(邵康節)이라 불릴 때도 많다. 허난[河南]에서 살았으며, 주염계(周濂溪)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 ·천문(天文) ·역수(易數)를 배워 인종(仁宗)의 가우연간(嘉祐年間:1056∼1063)에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洛陽]에 숨어살았다.
사마 광(司馬光)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주염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역(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 ·양(陽) ·강(剛) ·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W.F.라이프니츠의 2치논리(二値論理)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2편에서 허심(虛心),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詩體)의 시집(詩集)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20권)의 작품이 있고, 《어초문답(漁樵問答)》(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손기봉 [孫奇逢 1584~1675]
중국 명말 청초의 사상가.
호 : 종원(鍾元)
별칭 : 자 계태(啓泰),샤펑선생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사상가
출생지 : 허베이성[河北省] 룽청[容城]
주요저서 : 《이학종전》(26권) 등
자 계태(啓泰). 호 종원(鍾元). 허베이성[河北省] 룽청[容城] 사람. 17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사람)이 되었다. 1625년 환관(宦官)인 위충현(魏忠賢)이 권력을 쥐고 동림당(東林黨)의 좌광두(左光斗) 등을 체포하자 녹정(鹿正)·장과중(張果中)과 함께 그들의 구출에 힘썼으나 실패하고 좌광두 등은 옥사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하여 범양(范陽: 北京)의 3렬(三烈)이라 불렸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허난성[河南省]의 샤펑[夏峯]으로 이거한 뒤 청나라 조정의 초빙도 사양하고 학문을 강학하며 생애를 마쳤으므로 샤펑선생이라고도 부른다. 고결한 인격과 깊은 학문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탕빈(湯斌)을 비롯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저서인 《이학종전(理學宗傳)》(26권)은 오늘날의 철학사에 해당된다.그 밖에 《독역대지(讀易大旨)》 《사서근지(四書近指)》 등이 있다.
손명복 [孫明復 992~1057]
중국 북송(北宋) 초기의 유학자.
호 : 태산
본명 : 복
별칭 : 자 명복
국적 : 중국 송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진주
주요저서 :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
호 태산(泰山). 이름 복(復). 자 명복(明復). 진주(晋州平陽:湖南省桂陽縣) 출생. 과거에 낙제한 뒤 타이산[泰山]에 은퇴하여 강학(講學)에 힘쓰다가, 범중엄(范中淹)·부필(富弼) 등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이 되고, 전중승(殿中丞)으로 벼슬을 물러났다.
범중엄·호원(胡瑗)과 함께 송초(宋初)의 3선생이라 불렸는데, 그의 학풍은 당대(唐代) 이래의 주소학(注疏學)을 물리치고 직접 육경(六經)에 대하여 그 본의(本義)로 복귀하여 통경치용(通經致用)의 실학(實學)으로 삼았다. 저서에는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 12편이 있다.
손자 [孫子 ?~?]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략가.
국적 : 중국 춘추전국시대
활동분야 : 군사
출생지 : 중국 러안
주요저서 : 《손자》
본명 손무(孫武). 러안[樂安:山東省] 출생. 제(齊)나라 사람. BC 6세기경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를 섬겨 절제·규율 있는 육군을 조직하게 하였다고 하며, 초(楚)·제(齊)·진(晋) 등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려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가 저술하였다는(그의 후손 孫의 저술이라고도 함) 병서(兵書) 《손자(孫子)》는 단순한 국지적인 전투의 작전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要旨), 승패의 기미(機微), 인사의 성패(成敗) 등에 이르는 내용을 다룬 책이다. 그는 "싸우지 아니하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은 착한 자의 으뜸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순자 [荀子 BC 298?~BC 238?]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본명 : 순황(荀況)
별칭 : 순경(荀卿) ·손경자(孫卿子)
국적 : 중국 전국시대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순자》
성 순(荀). 이름 황(況). 조(趙)나라 사람. 순경(荀卿) ·손경자(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고, 진(秦)나라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였다. 제나라의 왕건(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 ·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 철학사(哲學史)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飴)’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분수’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 ·합목적적 격률(合目的的 格律) ‘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天]’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왕제(王制)’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위(僞)’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學)’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 ·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 ·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 ·한초(秦漢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아이쓰치 [艾思奇(애사기) 1905~1966]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철학계몽가.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윈난성[雲南省]
주요저서 : 《대중철학》(1936)
윈난성[雲南省] 출생. 1930년대의 유물론 철학의 해설자로 알려졌다. 잡지 《독서생활(讀書生活)》의 편집자이며 신계몽운동의 주창자로 활약하였고, 특히 그의 저서 《대중철학》(1936)은 중국의 민족적 위기감에 입각한 민중적 유물론 철학을 논술한 획기적 계몽서로서 중판(重版)되었다. 중일전쟁 중에는 《해방일보》 부주필(副主筆)로 사상문화면에 활약이 컸으며, 중공정권 수립 후에는 정무원 문화교육위원, 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신철학론집(新哲學論集)》(1935) 《실천과 이론》(1939) 《변증유물주의 강과제강(辨證唯物主義講課提綱)》 등이 있다.
안균 [顔鈞 ?~?]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서민사상가(庶民思想家).
별칭 : 자 산농
국적 : 중국 명
출생지 : 중국 장시성 길안현
자 산농(山農). 장시성[江西省] 길안현(吉安縣) 출생. 양명학(陽明學) 좌파(左派)의서파석(徐波石)에게 사사(師事)했다. 인간의마음은 그 자체가 뛰어난 가치를 지니는 것인만큼 지식의 집적이나 개인적 수양은 필요하지 않으며, 고인(古人)의 학설이나 규범은 장해가 될 뿐이라는 학설을 내세웠다. 그의 언동은 보수파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문장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등의 조롱을 받기도 했으나 학자들 중에도 열렬한 지지자가 있었다.
안원 [顔元 1636~1704]
중국 명(明)나라 말기에서 청(淸)나라 초기의 사상가.
호 : 습재
별칭 : 자 혼연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 보예
자 혼연(渾然). 호 습재(習齋). 허베이성[河北省] 보예[博野] 출생. 그의 학문은 양명학(陽明學)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이에만족하지 않고 극단적인 공리주의(功利主義)·실리주의(實利主義)를 제창하였다. 즉, "의(誼)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곧 이(利)를 도모하는 것이며, 도(道)를 밝힌다는 것은 곧 공(功)을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독서나 저술은 사람의 정신을 손상시키고 육체를 허약하게 하는 것이므로 백해무익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실무(實務)에 재능이 있는 자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실리실행(實利實行)을 존중하였으며, 장년 시절에는 농경에 종사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청나라의 전반적인 학풍과 상충되었으며, 이공(李弛)·왕원(王源) 등의 제자에 의하여 그 학문이 계승되었을 뿐 널리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공의 학문과 합쳐서 안리학파(顔李學派)라 부른다. 1871년 공양학자(公羊學者)인 대망(戴望)이 《안씨학기(顔氏學記)》(10권)를 간행하면서 그를 상찬(賞讚)하자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후 중화민국이 세워지고 쉬스창[徐世昌]의 노력으로 안원과 이공의 유저(遺著)가 함께 수록된 《안리총서(顔李叢書)》가 출판되었다.
안회 [顔回 BC 521~BC 490]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별칭 : 자 연(淵)
국적 : 중국 노(魯)
활동분야 : 철학
자 연(淵).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이며, 공자보다 30세 연소(年少)이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학문과 덕이 특히 높아서, 공자도 그를 가리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칭송하였고, 또 가난한 생활을 이겨내고 도(道)를 즐긴 것을 칭찬하였다. 은군자적(隱君子的)인 성격 때문인지 그는“자기를 누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든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장자(莊子)와 같은 도가(道家)에게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저술(著述)이나 업적은 남기지 못했으나 《논어(論語)》에 <안연편(顔淵篇)>이 있고, 그 외에몇몇 서적에도 그를 현자(賢者)와 호학자(好學者)로서 덕행(德行)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전하는 구절이 보인다.
양계초[梁啓超, 1873 ~1929]
근대사상가, 무술유신운동을 이끈 영수의 한 사람. 자(字)는 탁여(卓如), 호(號)는 임공(任公), 음빙실주인(飮氷室主人) 등. 광동 신회(新會) 사람. 어려서부터 집에서 전통교육을 받았으며 1889년 거인(擧人)이 됨.
1890년 북경 회시(會試)에 낙방함. 귀로에 들린 상해에서 세계 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志略)>과 상해 기기국이 펴낸 서양 서적을 보고는 생각이 크게 바뀜. 이 해 강유위(康有爲)를 처음 만나 그 문하생이 됨.
1891년 강유위가 개설한 만목초당(萬木草堂)에서 학습을 시작함. 이후 강유위의 사상과 학설을 받아들이면서 개량과 유신의 길을 걷게 됨. 당시 이들 사제를 "강양(康梁)"이라 일컬음.
1895년 봄 재차 북경 회시에 응시하는 데 이때 그는 강유위를 도와 거인 연명(連名)의 청원 활동인 "공거상서(公車上書)" 운동을 전개한다. 유신 운동 기간, 그의 활약은 눈부심. 곧 북경 <만국공보(萬國公報)> (나중 <중외기문(中外紀聞)> 이 됨) 와 상해 <시무보(時務報)> 의 주필로 명성을 떨침. 동시에 마카오(오문, 澳門)에서 <지신보(知新報)>를 발간하기도 함. 그의 수많은 정치 논설은 늘 사회에 파장을 불러 일으킴.
1897년, 장사(長沙) 시무학당의 교무장을 맡아 호남(湖南)에서의 변법사상(變法思想)을 진작하게 됨. 1898년 북경에 다시 온 그는 "백일유신(百日維新)" 에 적극 참여하고 이를 고무함. 7월 3일(음력 5월 15일),광서제를 알현하고 자신이 쓴 <변법통의(變法通議)>를 봉정함. 광서제는 그에게 6품직을 주었는데 이는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의 역서국 사무를 관장하는 것임. 9월 무술정변으로 일본으로 급히 피신함. 일본에 망명한 그는 한때 손중산(孫中山)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와 교류하기도 함.
그는 저명한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叢報)> 를 잇달아 발간하고 이를 통해 개량사상을 고취하면서 혁명사상에는 반대함. 또 서양의 각종 정치 사회 학설을 폭넓게 받아들여 이를 크게 선전함. 또한 당시 지식인에 사상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함. 1905~1907년간, 개량파와 혁명파의 논전이 최고조에 이를 때, 그는 개량파의 주장(主將)으로, 혁명파에대항함.
1906년, 청 정부가 "예비입헌"을 반포하자, 이를 환영하고 이어 1907 년 10월 동경에서 "정문사(政聞社)" 를 설립함. 그는 청 정부가 군주입헌(君主立憲)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며 이를 촉구하나 청 정부는 본래 헌정 실시에는 뜻이 없음. 청 정부는 상해로 본사를 옮긴 정문사에 폐쇄 조치를 취하니, 정문사는 해체됨. 무창기의 (武昌起義) 후, 그는 한때 "허군공화(虛君共和)" 를 내세워, 혁명파와 청 정부 간에 타협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함.
또 민국 초년에는 원세개(袁世凱)를 지지함. 그는 원세개의 뜻을 받아 민주당, 공화당, 통일당을 하나로 묶어 진보당을 결성하고 국민당과 권력 투쟁을 벌임. 1913년 진보당의 "인재내각(人才內閣)"의 성립과 함께 사법총장에 취임함. 그러나 원세개의 제제(帝制) 획책이 노정되면서 원세개와 차츰 소원해짐.
1915년 8월, 마침내 그는 <이상하도다, 소위 국체문제라는 것〔異哉所謂國體問題者〕>을 발표, 원세개의 제제 획책을 맹렬히 공격함. 아울러 제자 채악(蔡鍔)과 함께 반원(反袁) 무력 항쟁을 계획함. 1915년말, 호국전쟁이 운남(雲南)에서 폭발함. 1916년 그는 양광(兩廣) 으로 가 반원 무력 투쟁을 직접 지휘함. 이렇게 하여 그는 호국전쟁의 발발과 전개에 지대한 공헌을 함.
원세개 사후, 그는 단기서(段祺瑞)에 의부함.또한 일부 정객을 모아 헌정연구회를 조직함. 곧 여원홍(黎元洪)을 지지하는 헌정상각회와 맞서게 됨. 1917년 7월, 단기서가 북양정부의 대권을 장악함. 양계초도 재정총장이 되어 염무총서(鹽務總署)의 장을 겸함. 9월 손중산이 호법(護法) 전쟁을 발동함. 11월 단기서 내각은 붕괴함. 양계초도 이때 사직하고 정계를 떠남.
1918년말, 유럽 방문 길에 나선 그는 유럽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병리 현상을 직접 둘러 보게 됨. 귀국해서는 서양문명이 이미 파산하였음을 선언함. 이후 그는 전통문화의 선양에 나서 "동양의 고유한 문명으로써 세계를 구하자"고 역설함.
그는 저명한 학자로 그 학문 세계는 넓고, 지식은 심오했음. 특히 문학, 사학, 철학, 불학(佛學) 에 조예가 깊음. 1901~1902년 그는 <중국사서론(中國史敍論)>, <신사학(新史學)>을 차례로 발표, 봉건사학을 비판하고 "사학 혁명"을 제기한 바 있음.
유럽 방문 후에는 주로 교육과 문화, 그리고 학술 연구 분야에 몰입, 학술 가치가 매우 높은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중국근3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등을 남김. 그의 저술은 실로 방대함. 문집으로는 총 148권, 1천여만자의 <음빙실합집(飮氷室合集)>을 남김.
양시 [楊時 1053~1135]
중국 북송(北宋) 말의 유학자(儒學者).
호 : 구산
별칭 : 자 중립
국적 : 중국 북송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푸젠성 장러
주요저서 : 《구산집》 《구산어록》 《이정수언》
자 중립(中立). 호 구산(龜山). 푸젠성[福建省] 장러[將樂] 출생. 정호(程顥)·정이(程燎) 형제에 사사(師事)했는데, 특히 형 정호의 신임을 받았다. 동생 이천(伊川)이 귀양지에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의 대부분이 영락한 가운데, 오직 구산과 상채(上蔡)만이 학문에 장족(長足)의 진보를 보였다고 칭찬하였다. 정호가 구산을 중히 여기고, 정이가 상채를 중히 여긴 까닭은 그의 기질(氣質)이 자기와 닮았기 때문이라 일컬어진다.
구산은 장수(長壽)하면서 이정자(二程子:정호·정이)의 도학을 전하여 낙학(洛學:이정자의 학파)의 대종(大宗)이 되었으며, 그 학계(學系)에서는 주자(朱子)·장식(張煎)·여조겸(呂祖謙) 등 뛰어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저서에 《구산집(龜山集)》(42권), 《구산어록(龜山語錄)》(4권), 《이정수언(二程粹言)》(2권) 등이 있다.
양왕손 [楊王孫 ?~BC 133]
중국 서한(西漢) 때의 철학자.
국적 : 중국 한(漢)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 산시성[陝西省]
주요저서 : 《논나장서(論裸葬書)》
한중 성고(漢中城固:지금의 陝西省) 출신으로,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행적 또한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고, 《한서(漢書)》 본전(本傳)에 약간의 기록만이 전해진다. 일찍이 황로술(黃老術)을 익히고 양생법(養生法)을 닦아 상당한 경지에 올랐으나, 귀신은 믿지 않았다.
나장(裸葬:장례를 지낼 때 부장품을 넣지 않고 시신만을 묻는 간소한 장례)을 주장해 자신의 집안이 부유함에도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자 자식들에게 나장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자식들은 후장(厚葬:후하게 치르는 장례)의 풍습을 지키고자 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기후(祁侯)에게 의견을 청하니, 기후는 양왕손에게 글을 보내 후장할 것을 권하였다. 양왕손이 글을 보고 난 뒤 후장의 무익함을조목조목 따져 《논나장서(論裸葬書)》를 지었는데, 기후도 이를 읽고 감탄하였다. 마침내 그 자식들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장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중국 철학사상 처음으로 무귀신론을 주장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양자호 [楊慈湖 1141~1226]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호 : 자호
본명 : 간
별칭 : 자 경중
국적 : 중국 남송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 주치
호 자호(慈湖). 이름 간(簡). 자 경중(敬仲). 저장성[浙江省] 주치[慈溪] 출생. 육상산(陸象山)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인간이 올바른 본심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물욕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50여 년 동안 지방관리로서 여러 가지 정책을 입안(立案)하는 한편 상산(象山)의 학문을 보급시켰다. 저서도 많았으나현존하는 것이 없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구가(舊家)에 자호서원(慈湖書院)이 세워졌다.
양주 [楊朱 BC 440 ?~BC 360 ?]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
별칭 : 자 자거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자가 자거(子居)라는 설이 있으며, 그 전기는 명확하지 않고 겨우 《장자》 《열자》에 그 언행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맹자가 "양주·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충만하였다"고 그 이단성(異端性)을 지적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이 학파는 대단히 융성한 것 같다. 중심사상은 자기 혼자만이 쾌락하면 좋다는 위아설(爲我說), 즉 이기적인 쾌락설인데, 지나침을 거부하고 자연주의를 옹호하였다. 이것은 노자사상(老子思想)의 일단을 발전시킨 주장이었다.
양천 [楊泉 ?~?]
중국 오(吳)나라에서 서진(西晋)에 걸친 자연철학자.
국적 : 중국 오(吳)·서진(西晋)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물리론(物理論)》
설명
왕충(王充) 이후의 유물주의(唯物主義) 학설을 계승, 합리적인 자연관·인간관을 전개하였다. 만물의 근본인 물에서 갖가지 성질을 지닌 ‘원기(元氣)’가 생기고, 그것이 자연현상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 기(氣)의 일원적 자연관(一元的自然觀)으로부터, 육체가 없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노장파(老莊派)의 현학(玄學)을 비판하기도 하고, 농·공업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등 그 자세 또한 실제적이었다. 주요저서인 《물리론(物理論)》은 천문 ·지리·공예·농업·의학에 관하여 연구한 것으로 현재는 부분적으로만 전한다.
여염 [呂枏 1479~1542]
명나라의 학자.
호 : 경야
별칭 : 자 중목, 시호 문간
국적 : 중국 명
출생지 : 중국 고릉
자 중목(仲木). 호경야(涇野). 시호 문간(文簡). 고릉(高陵: 陝西省) 출생. 사사암에게 사사하고, 설경헌(薛敬軒)의 학통을 이었다. 한때 유근(劉瑾)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뒤에 남경예부우시랑(南京禮部右侍郞)에 이르렀다. 왕양명(王陽明)의 양지설(良知說)은 개괄적인 면에 치우쳐 각 개인에 대한 실제적 교조(敎條)는 될 수 없다고 비판하여 지선행후(知先行後)의 설을 취하였으며, 지행일치론(知行一致論)에 반대한 점은 정통적 주자학(朱子學)과 같지만, 성(性)과 이(理)의 합일이 아니라 성과 기(氣)의 일치를 설한 점에서는 주자학의 새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여조겸 [呂祖謙1137~1181]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
호 : 동래
별칭 : 자 백공
국적 : 중국 남송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 진화
주요저서 : 《동래좌씨박의》 《여씨가숙독지기》 등
자 백공(伯恭). 호 동래(東萊).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 출신. 상서우승(尙書右丞) 호문(好問)의 손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책을 접할 수 있었으며, 훌륭한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 주자(朱子)·장남헌(張南軒)·육상산(陸象山) 등과 더불어 강학(講學)에 힘써 대성하였다. 주자와 육상산 두 사람의 아호사(鵝湖寺)에서의 회합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뒤 주자와 함께 북송(北宋) 도학자의 어록(語錄)을 편집하여 《근사록(近思錄)》을 찬하였다. 저서에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25권, 《여씨가숙독지기(呂氏家塾讀持記)》 32권 등이 있다.
염약거 [閻若 1636.11.11~1704.7.9]
청나라 초기의 고전학자(古典學者).
호 : 잠구(潛邱)
별칭 : 자 백시(百時)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유학
출생지 :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주요저서 : 《상서고문소증》 《사서석지》 《잠구차기》 등
자 백시(百時). 호 잠구(潛邱).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출생. 어렸을 때에는 우둔하고 말더듬이었으나, 15세 때 발분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고 모든 것을 빨리 깨닫게 되는 현명한 인물이 되었다. 20세 무렵 오경(五經)의 하나인 상서(尙書)의 문헌에 의구심을 품고 30년 동안 연구한 끝에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 8권을 저술하여, 고문 25편 및 《상서공전(尙書孔傳)》이 동진(東晉) 사람의 위작(僞作)임을 실증적인 방법에 의해 면밀히 논증하였다.
그 저술에 의해 청나라 고거학(考據學)의 위대한 선구자가 되었으나, 문헌비판 면에서 정주학(程朱學)의 근저를 흔들어 놓은 결과가 되었다.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등과 교우관계가 있었지만 그들의 학문이 폭넓은 것에 반하여 그는 고전학 연구에만 생애를 바쳤다. 그 외에도 《사서석지(四書釋地)》 《잠구차기(潛邱箚記)》 등의 저술이 있다.
열자 [列子 ?~?]
중국 전국시대 도가(道家)의 사상가로서, 전설적으로 전하는 인물.
본명 : 어구(禦寇)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이름은 어구(禦寇). BC 400년경 정(鄭)나라에 살았다고 전하나 《사기(史記)》에는 그 전기가 보이지 않고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篇)>에 ‘열자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장자’가 허구로 가정한 인물로 추정된다.
옌푸 [嚴復(엄복) 1854.1.8~1921.10.27]
중국 청(淸)나라 말기의 사상가.
호 : 기도 ·유야노인
별칭 : 자 우릉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푸젠성 후관
자 우릉(又陵). 호 기도(幾道) ·유야노인(癒絶老人). 푸젠성[福建省] 후관(侯官) 출신.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일환으로 세워진 푸저우 선정학당[福州船定學堂]에서 공부하고 영국에 유학하였다. 그는 유학 당초의 목적인 해군관계의 학술보다는 오히려 서유럽 학술 ·사상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의 총교습(總敎習)으로 있으면서 통청파[桐城派]의 문인 우루룬[吳汝倫]에게 문장을 공부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서유럽의 학술 ·사상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논진(論陣)을 펴 중국의 위기를 호소하고 변법운동(變法運動)을 비롯하여 청말(淸末)의 개혁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그가 번역 ·소개한 작품 가운데에는 T.H.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C.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A.스미스의 《국부론》 등이 있으며, 특히 진화론은 열강침략하의 중국의 위기를 이해시키는 이론적 매개가 되었다. 진화론은 동시에 새로운 역사인식을 가져왔지만, 역사에서의 ‘진화’의 주체가 명확하지않고 일종의 발전단계설에 빠져들어 혁명론과 대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국 초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지지하여 특히 젊은 지식층으로부터 심한 반감을 샀다.
오강재 [吳康齋 1391~1469]
중국 명(明)나라 초기의 유학자.
호 : 강재
본명 : 여필(與弼)
별칭 : 자 자부(子傅)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江西省] 충런[崇仁:撫州]
주요저서 : 《강재집》(2권)
호 강재. 이름은 여필(與弼). 자 자부(子傅). 장시성[江西省] 충런[崇仁:撫州] 출생. 아버지는 국자사업(國子司業) 오부(吳溥)였다. 성인(聖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과거(科擧)를 위한 공리적 학문을 버리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일관하여 마음의 수양과 실행을 설파하였다. 특히 정호(程顥)의 학풍에 흥미를 가지고 열중하여 명나라 정주학의 시조가 되었다.
본성이 신변을 꾸미지 않았고, 스스로 밭을 갈며 제자들과 생활을 같이하였다. 그의 문인 중에서 순수한 주자학자 호거인(胡居仁)과, 선(禪)에 가깝고 양명학(陽明學)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 진헌장(陳獻章)이 이끄는 두 학파가 생겼다. 이것은 그의 학문의 폭이 넓었음을 뜻한다. 저서에 《강재집》 2권이 있다.
오자 [吳子]
중국 전국시대의 병법서.
구분 : 병법서
시대 : 중국 전국시대
1권 6편. 《손자(孫子)》 와 함께 일컬어지는 명저이다. 그 저자에 관하여는 오기(吳起:吳子) 자신의 찬이라는 설, 그의 문인들이 찬하였다는 설, 전혀 위찬(僞撰)이라는 설 등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통상 오기와 그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도국(圖國) ·요적(料敵) ·치병(治兵) ·논장(論將) ·응변(應變) ·여사(勵士)의 6편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손자》에 비하여 그 정채(精彩)가 뒤진다 하겠으나 지론(持論)이 곧고, 예의를 존숭하여 교훈을 밝힌 점은 유교(儒敎)를 곁들인 병법서라 할 수 있으며 예로부터 널리 읽히고 있다. 명나라 유인(劉寅)의 《오자직해(吳子直解)》, 물조래(物徘徠)의 《오자국자해(吳子國字解)》 등의 주해서가 있다.
오초려 [吳草廬 1249~1333]
중국 원(元)나라의 유학자.
본명 : 징(澄)
별칭 : 자 유청(幼淸),시호 문정(文正)
국적 : 중국 원(元)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江西省] 충런현[崇仁縣]
주요저서 : 《오경찬언(五經纂言)》 《초려정어(草廬精語)》
이름은 징(澄). 자 유청(幼淸). 시호 문정(文正). 장시성[江西省] 충런현[崇仁縣] 출생. 처음에 초옥(草屋)에서 기거하였는데, 정문해(程文海)가 이에 초려라고 이름하였으므로 학자들이 그를, 초려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벼슬은 송(宋)나라 영종(英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원나라의 경연강관(經筵講官)의 요직을 지냈으며, 《영종실록(英宗實錄)》을 감수하였다. 허노재(許魯齋)와 함께 남북의 2대 유학자라 불린다. 주자사전(朱子四傳)의 제자로 정주학(程朱學)을 받들어 도문학(道問學)을 설파하였다.
한편 동향의 선배인 육상산(陸象山)의 덕행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하여 주육(朱陸)의 합일(合一)을 주장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왕양명(王陽明)의 선구가 되었다. 또 독단적이기는 하지만 경전의 비판도 시도하였고, 고고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오경찬언(五經纂言)》 《초려정어(草廬精語)》 등이 유명하며, 문집 53권을 남겼다.
완원[阮元 1764.2.21~1849.11.27]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 ·정치가 ·서예가 ·문학자.
호 : 운대(芸臺)
별칭 : 자 백원(伯元), 시호 문달(文達)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정치, 문학
출생지 : 장쑤성[江蘇省] 이정현[儀徵縣]
주요저서 :《국사유림전(國史儒林傳)》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彛器款識)》
자 백원(伯元). 호 운대(芸臺). 시호 문달(文達). 장쑤성[江蘇省] 이정현[儀徵縣] 출생.1789년 진사가 되고,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학정(學政) ·순무(巡撫) ·총독으로서 지방행정에 치적을 올렸고, 회시총재(會試總裁)를 지내기도 하였다. 벼슬길에 있을 때 학자를 육성하고 학술 진흥에 힘썼다. 광둥[廣東]에 학해당(學海堂), 항저우[杭州]에 고경정사(뭍經精舍)를 설립하고, 학자를 모아 《경적찬고(經籍纂뭍)》(1799)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註疏校勘記)》(1806)를 편집하였다. 또 청나라 여러 학자의 경학에 관한 저술을 집대성하여 《황청경해(皇淸經解)》(1829, 1,408권)를 편찬하였다.
한(漢)나라 시대의 학문을 이상(理想)으로 하여 훈고(訓뭍)를 주로 한 고대의 제도 ·사상의 탐구를 목표로, 독특한 사적(史的) 방법론을 전개한 《국사유림전(國史儒林傳)》을 지었다. 또 금석문 연구인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彛器款識)》 등의 뛰어난 찬술을 하여,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을 집대성하였다. 서론(書論)에 시문집인 《연경실집(摺經室集)》에는 청나라 서풍(書風)에 큰 영향을 끼친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송학(宋學)의 해석을 비판한 《성명고훈(性命古訓)》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의 저서에 《주인전(疇人傳)》 《회해영령집(淮海英靈集)》 《양절유헌록(兩浙量軒錄)》 《광릉시집(廣陵詩集)》 《증자주(曾子註)》 등이 있다. 변체문(騈體文)을 창도한 문필론 등은 한학파의 문학론을 대표하는 것이다.
왕염손 [王念孫1744~1832]
중국 청(淸)나라의 훈고학자.
호 : 석구
별칭 : 자 회조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 가오유
주요저서 : 《광아소증》,《독서잡지》
자 회조(懷租). 호 석구(石뾔). 장쑤성[江蘇省] 가오유[高郵] 출생. 아버지 왕안국(王安國)은 이부상서(吏部尙書)였다. 1755년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된 후, 일단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다시 부름을 받고 공부도수사(工部都水司) 주사가 되어 치수에 노력하였다. 1810년 영정하(永定河)가 범람한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로는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단옥재(段玉裁), 공광삼(孔廣森) 등과 함께 대진(戴震)에게 사사하여 훈고음운(訓뭍音韻)의 기초학을 배웠다. 그 방법론은 고음(古音)에 의해 고의(古義)를 구하기 때문에 확고한 기초학 위에 널리 군서(群書)를 치밀하게 비교 ·검토하여 그 결론을 간소하게 표현하였다. 그 때문에 세간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 대진 ·단옥재, 아들인 왕인지(王引之)와 함께 ‘대단2왕(戴段二王)’의 학문이라 일컬어졌다. 주저에 《광아소증(廣雅疏證)》(20권) 《박아음(博雅音)》(10권) 《독서잡지(讀書雜志)》(82권), 유고로 《운보합운보(韻譜合韻譜)》가 있다.
왕명성 [王鳴盛 1720~1797]
인물 > 문학 > 중국문학
지역 > 아시아 > 중국 > 장쑤성
역사와 지리 > 역사 > 중국사 > 청대
청(淸)나라의 고증학자 ·시인.
호 : 예당 ·서장 ·서지
별칭 : 자 봉개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 자딩현
주요저서 : 《상서후안》,《서장시존고》
자 봉개(鳳량). 호 예당(禮堂) ·서장(西莊) ·서지(西沚). 장쑤성[江蘇省] 자딩현[嘉定縣] 출생. 당시 시단의 중진이던 심덕잠(沈德潛)의 제자가 되어 당시(唐詩)의 작풍을 좋아하여 시재를 칭찬받았고, 경학(經學)은 한(漢)나라의 학설에 중점을 둔 혜동(惠棟)과 사귀어 그의 영향을 받았다. 1754년 우수한 성적으로 진사에 급제하고, 내각학사(內閣學士) 겸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그러나 광록시경(光祿寺卿)으로 좌천되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뒤 쑤저우[蘇州]에서 세상 일과 인연을 끊고 30년간 독서에만 열중하였다고 한다.그의 학문은 청나라의 ‘고증사학(考證史學)’이라 부르며, 거의 같은 시대의 전대흔(錢大昕) ·조익(趙翼) 등과 비견되는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저서는 여러 방면에 걸쳤으며 《상서후안(尙書後案)》 《십칠사상각(十七史商떼)》 《아술편(蛾術編)》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서장시존고(西莊始存稿)》 《서지거사집(西沚居士集)》 등이 있다.
왕부 [王符 ?~?]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사상가.
별칭 : 자 절신(節信)
국적 : 중국 한(漢)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안정군(安定郡) 임경(臨涇:간쑤성[甘肅省] 鎭原의 서쪽)
주요저서 : 《잠부론(潛夫論)》
자 절신(節信). 안정군(安定郡) 임경(臨涇:甘肅省 鎭原의 서쪽) 출생. 가문이 미천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았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마융(馬融) ·두장(竇章) ·장형(張衡) ·최원(崔瑗) 등과 친하였다. 절개를 굳게 지켰고, 농민폭동 속에서 계속되는 세속에 분개하여 숨어 살면서 30여 편의 책을 썼다.
그의 천도천명관(天道天命觀)은 도가(道家)의 자연관과 순자(荀子)의 자연법칙설을 섭취한 것이었다. 천명설은 이원론적 경향을, 인식론은 유물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또 도덕과 법률에도 중세적 평등관에 입각한 비판을 가하고, 인민을 현혹시키는 종교에 반대하는 등 사회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이름을 나타내기 싫어하여 그의 대표작인 저서도 《잠부론(潛夫論)》이라 이름붙였다. 《잠부론》(현행본 10권)은 민간의 저작인데도, 《후한서(後漢書)》에서 왕충의 《논형(論衡)》 및 중장통(仲長統)의 《창언(昌言)》과 동류로 취급하는 것으로 보아도, 그 가치가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왕부지[王夫之: 1619-1692]
호남성 형양 출신의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청나라 군대가 호남 지방에 들어오자 군사를 일으켜 대항했다. 그러나 싸움에서 패하고 달아나 반청 운동의 기회를 계속 엿보았고, 이후 42세부터는 은둔하기로 결심하고 형양의 석선산(石船山) 자락에서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이에 따라 왕부지를 선산(船山) 선생이라 일컫기도 한다. 명나라 말기의 혼란과 그에 뒤이은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겪어야 했던 왕부지는 특히 명 왕조에 대한 대의명분 의식이 남달랐다.
이민족인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몹시도 싫어했던 왕부지는 중국 민족과 오랑캐를 엄격하게 구별하고자 했다. 그는 심지어 오랑캐는 그 모양만 사람일뿐 금수나 다름없는 존재이며,인의 도덕을 오랑캐들에게 적용할 수도 없다고까지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이 오랑캐를 섬멸해도 불인이 되지 않고, 오랑캐를 속여도 불신이 되지 않으며, 그 땅을 개간하고 빼앗아도 불의가 되지 않는다. 그들을 섬멸하여 우리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야말로 인이며, 그들을 속이고 그들이 나쁘다고 보는 것을 행함이 신(信)이고, 그들의 풍속을 중국의 문화로 바꾸고 그들의 땅과 자원을 빼앗아 우리 백성의 힘을 키우는 것이 의이다."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를 반영하는 셈이다. 왕부지는 중화 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화이론(華夷論)의 입장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왕부지의 역사관은 {독통감론}(讀通鑑論)과 {송론}(宋論)에 나타나 있다. 왕부지의 역사관은 중국이 고대의 전설적인 임금 황제 시대 이전에는 오랑캐의 상태에, 복희 이전에는 금수의 상태에 있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요컨대 그런 상태에서 점차 고도로 발전한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이 역사라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왕부지의 역사관을 진화론적인 역사관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왕부지는 선진 시대의 세습적인 봉건제도로부터 진한 시대 이후의 관료제적인 군현제로의 이행을 역사의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문물제도가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고 보았던 그는 특정의 제도를 만고불면이라고 보는 선왕주의(先王主義)혹은 복고주의를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선왕주의는 고정된 틀에 살아 있는 현실을 끼워 맞춤으로써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태에 불과하다. 왕부지가 {주례}(周禮)에 의거하고 있는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왕부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관념적인 개혁에 불과하며 현실을 단순화시키는 처사이다.
왕부지는 북송 시대 장재의 사상에 공감하여 기 중심의 사상을 전개했다. 왕부지는 리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리는 다만 기 가운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역경} 계사전에 나오는 '형이상의 것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器)라 한다'는 말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도가 무형인 것, 즉 리이고, 기(器)가 구체적인 사물, 즉 기(氣)라고 할 때, 리는 기(氣) 혹은 기(器)에 종속되는 것이고, 구체적인 사물에서 벗어난 추상적인 도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기(器)에 비해서 도를 우위에 두었던 이전 유학자들의 견해와는 사뭇 다르다. 기(器)를 우위에 두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기(氣)를 우위에 두는 입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리는 음양의 묘를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氣)야말로 음양의 실질이다. 기의 선한 움직임에 따르는 것이 리이며, 기밖에 독립한 리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왕부지는 집안이 가난해서 자신의원고를 책으로 출간할 수 없었다. 때문에 왕부지와 그 사상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동시대에 미친 영향도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그의 사후 약 170년 뒤에 호남 출신인 증국번(曾國藩), 증국전(曾國筌) 형제에 의해 {선산유서}(船山遺書)가출간되었고, 청나라 말기에는 오랑캐를 배척하는 민족주의가 혁명가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보다 더 훗날에는 모택동에게도 사상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선겸 [王先謙 1842~1917]
중국 청(淸)나라 말기의 학자.
호 : 규원(葵園)
별칭 : 자 익오(益吾), 나중 이름 둔(遯)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후난성[胡南省] 창사[長沙]
주요저서 : 《한서보주(漢書補註)》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순자집해(荀子集解)》
호 규원(葵園). 자 익오(益吾). 후난성[胡南省] 창사[長沙] 출생. 1865년 진사가 되고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등을 역임하였다. 1889년 관직을 사임한 후 향리에서 인재양성에 진력하였으며, 그 후 내각학사(內閣學士)의 직위를 수여하였다. 그의 학문은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종합한 것으로서 다방면에 걸친 저술활동을 하였다. 신해혁명 후에는 이름을 둔(遯)으로 고치고 이름과 같이 은둔생활(隱遁生活)로 일관하였다. 《동화록(東華錄)》 《동화속록(東華續錄)》 《황청경해속편(皇淸經解續編)》 등을 편집하였으며, 《한서보주(漢書補註)》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순자집해(荀子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왕심재 [王心齋 1483~1540]
중국 명(明)나라 중기의 유학자.
호 : 심재
본명 : 간(艮)
별칭 : 자 여지(汝止)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타이저우[泰州]
주요저서 : 《왕심재전집》(5권)
호 심재. 이름 간(艮). 자 여지(汝止). 장쑤성[江蘇省] 타이저우[泰州] 출생. 염업노무자(鹽業勞務者)로 평생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상인으로서 천하를 주유하였다. 1520년 왕양명(王陽明)의 문하생이 되어, 후에 왕용계(王龍溪)와 함께 2왕(二王)으로 불린 왕문좌파(王門左派)의 영수로 태주학파(泰州學派)의 시조가 되었다.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을 내세워, 일신과 천하국가와는 일물(一物)로서 일신은 본(本), 천하국가는 말(末)이며, 일신을 가지고 천하국가를 도모하는 것이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터득함)이라는 개인주의적인 안신설(安身說)을 전파하였다. 기행(奇行)으로도유명하였으나, 서민 학자로서 전도에 열정을 기울여 많은 사상가 ·실천가를 양성하였다. 저서에는 《왕심재전집》(5권)이 있다.
왕양명 [王陽明 1472~1528]
중국 명(明)나라 중기의 유학자.
호 : 양명
본명 : 수인(守仁)
별칭 : 자 백안(伯安), 시호 문성(文成)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여요(餘姚)
호 양명. 이름 수인(守仁). 자 백안(伯安). 시호 문성(文成). 저장성[浙江省] 여요(餘姚) 출생이다. 관직에 나간 부친을 따라 베이징[北京]에서 자랐고,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학문적으로는 당시의 관학이었던 주자학(朱子學)을 배웠으나 만족하지 않았고, 선(禪)이나 노장(老莊)의 설에 심취한 때도 있었으나 도우(道友)인 담감천(湛甘泉)을 만난 무렵부터 성현(聖賢)의 학을 지향하게 되었다. 35세에 병부주사(兵部主事)로 있을 때 환관 유근(劉瑾)의 노여움을 사 귀주용장(貴州龍場)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된 것이 학문적 전기가 되었다.
원래가 병약한 몸으로 기후불순한 만지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내던 어느날 밤 석관(石棺) 속에서 깨친 것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였다. 이 용장에서의 득도(得道)는 37세 때의 일로서, 그 후 중앙으로 소환되어 순조로운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장시[江西]·안후이[安徽]·저장[浙江] 각성의 지방관으로 있었는데, 비적의 토벌과 영왕(寧王) 신호(宸濠)의 난 평정에서 활약하였다. 격무 중에도 항시 강학(講學)을 멈추지 않았으며, 각처에 학교를 설치하여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49세에 처음으로 치량지(致良知: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선천적인 판단력이나 논리적인 감수성 등을 실현하는 일)의 설을 제창하고 강학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그 일문은 더욱 융성해졌다. 왕심재(王心齋)·전서산(錢緖山)·왕용계(王龍溪)가 입문하였고, 《전습록(傳習錄)》이 계속 간행되어 《양명문록(陽明文錄)》의 간행을 보게 되었으며, 양명서원이 건립되었다. 양명학파로서 명대(明代)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56세 때 광둥 ·광시의 묘족(苗族)이 반란을일으켰기 때문에 그는 병든 몸으로 출전하여 진압한 후 돌아오는 길에 과로와 고열로 죽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발 전야에 양명학의 진수를 논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4구결(四句訣)이 있는데, “無善無惡是心之體(무선무악시심지체), 有善有惡是意之動(유선유악시의지동), 知善知惡是良知(지선지악시량지), 爲善去惡是格物(위선거악시격물):마음의 본체는 본래 선과 악이 없는 것이지만,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意]의 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나타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바로잡음)이다”가 그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 왕문우파(王門右派)인 전서산의 견해를 4유설(四有說)이라 하는데, 의(意)에 선악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실천 수행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왕문 좌파인 왕용계의 견해를 4무설(四無說)이라 하며, 마음의 본체가 무선무악이면 의(意)도 무선무악이며, 의에 선악이 있으면 마음의 본체에도 선악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이는 스승인 양명의 한때의 언사일 뿐, 철두철미한 이론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설(兩說)에 대하여 양명은 양자 모두가 상호보완(相互補完)하여야 한다는 양가상자(兩可相資)의 설로 답하고 있으나, 우파는 스승의 설(說)을 계승(繼承)·조술(祖述)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좌파는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들 제자와의 토론을 모은 《전습록(傳習錄)》(3권)이 있으며, 여기에다 시문·주소(奏疏:상주문)·연보(年譜) 등을 더한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38권)가 전서산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왕용계 [王龍溪 1498~1583]
중국 명(明)나라 중기의 유학자.
호 : 용계
본명 : 기(畿)
별칭 : 자 여중(汝中)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산인[山陰]
주요저서 : 《왕용계전집》(20권)
호 용계. 이름 기(畿). 자 여중(汝中). 저장성[浙江省] 산인[山陰] 출생. 1523년 진사에 합격하였고, 왕양명(王陽明)에게 사사하여 전서산(錢緖山)과 병칭되는 양명 문하의 준재(俊才)가 되었다. 이렇다 할 관직에 나가지도 않고 스승의 사후에도 사설(師說)의 강구(講究)와 보급에 전념하였다.
전서산이 인간의 마음은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고 생각한 데 대하여, 그러한 주장은 사설에 대한 철저한 논(論)이 아니라고 반대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은 본래 무선무악(無善無惡)이라고 단정함으로써 종래의 성선설(性善說)의 전통에 대결하였다. 그는 자증자오(自證自悟)를 중시하였고, 반드시 사설에 충실하지만은 않아서 정통파인 전서산의 학통에 비해 좌파로 불렸으나, 그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크다. 저서로 《왕용계전집》(20권)이 있다.
왕인지 [王引之 1766~1834]
중국 청(淸)나라의 훈고학자.
호 : 만경(曼卿)
별칭 : 자 백신(伯申),시호 문간(文簡)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가오유[高郵]
주요저서 : 《경전석사(經傳釋詞)》,《경의술문(經義述聞)》
자 백신(伯申). 호 만경(曼卿). 시호 문간(文簡). 장쑤성[江蘇省] 가오유[高郵] 출신. 왕염손(王念孫)의 아들이다. 1799년 진사에 합격하여 대리시경(大理寺卿) ·시학(視學)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을 역임하여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또한 어려서부터부친의 학업를 계승하여 문자음운(文字音韻)의 학문, 즉 소학(小學)에 통달하는 한편 9경 3전(九經三傳:9경은 周禮 ·儀禮 ·禮記 ·左傳 ·公羊傳 ·穀梁傳 ·周易 ·詩經 ·書經, 또는 주역 ·시경 ·서경 ·예기 ·春秋 ·효경 ·論語 ·孟子 ·주례의 9가지 경서, 3전은 춘추의 좌전 ·공양전 ·곡량전)과 진한(秦漢)의 문헌을 널리 섭렵(涉獵) ·연구하여 그 의의를 밝혔으며, 그 방법이 과학적이어서, 부친의 학문과 함께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라 일컬었다. 또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및 부친과 함께 ‘대단2왕(戴段二王)’의 학문으로 불리었다. 주저인 《경전석사(經傳釋詞)》(10권)는 고전에 나타나는 허자(虛字:助詞)에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며, 《경의술문(經義述聞)》은 경서에 관한 고래의 주해를 비교하여 단정한 것이다.
왕충 [王充 30?~100?]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별칭 : 자 중임(仲任)
국적 : 중국 한(漢)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회계상우(會稽上虞:저장성[浙江省])
주요저서 : 《논형(論衡)》(85편)
자 중임(仲任). 회계상우(會稽上虞:저장성[浙江省]) 출생. 관료로서는 평생 불우하여 지방의 한 속리로머물렀으나, 뤄양[洛陽]에 유학하여 저명한 역사가 반고(班固)의 부친 반표(班彪)에게 사사하였다. 가난하여 늘 책방에서 책을 훔쳐 읽고 기억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한 반속정신(反俗精神)의 소유자로, 그 독창성에 넘치는 자유주의적 사상은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다듬어진 한대적(漢代的) 사상을 타파하고 언론의 자유를 내세우는 위진적(魏晉的) 사조를 만들어 내었다. 사상적 전환기에 선 선구자로서 그가 중국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크다.
대표적 저서에 전통적인 당시의 정치나 학문을 비판한 《논형(論衡)》(85편)이 있다. 그 밖에 《양생서(養生書)》 《정무서(政務書)》 등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후에 다시 관직에 나가 장제(章帝)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왕통 [王通 584~617]
중국 수(隋)나라의 사상가.
별칭 : 자 중엄(仲淹), 시호 문중자(文中子)
국적 : 중국 수(隋)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난[河南]
자 중엄(仲淹). 시호 문중자(文中子). 허난[河南] 출생. 당나라 왕발(王勃)의 조부이다. 어려서부터 준민(俊敏)하여 시 ·서 ·예 ·역(易)에 통달, 스스로 유자(儒者)임을 자부하고 강학(講學)에 힘을 쏟음으로써 문하에서는 당의 명신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등이 배출되었다. 문제(文帝)에게 《태평10책(太平十策)》을 상주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다음 양제(煬帝)로부터는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은 채 《문중자(文中子)》(10권)를 세상에 남겼다. 《당서(唐書)》 《구당서(舊唐書)》에는 이렇게 전하나 청대(淸代)의 요제항(姚際恒)이 《문중자》의 의경설(擬經說)을 주장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여 송의 정자(程子)나 주자(朱子) 등은 그를 견유(犬儒)로 평가한다.
우위 [吳虞(오우) 1874~1949]
중국 근대의 사상가.
호 : 사금당
별칭 : 자 우릉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쓰촨성 청두
주요저서 : 《우위문록》(2권)
호 사금당(師今堂). 자 우릉(又陵).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출생. 1906년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의 일본이 부강한 것을 보고, 중국이 쇠퇴하여진 원인이 유교사상 및 가족제도의 속박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귀국 후에 동서의 법철학을 연구한 뒤 한층 더 유교가 중국의 장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반(反)유교 풍조를 부채질하였다. 그 때문에 청(淸)나라 정부의 압박을 받고 한때 고향인 쓰촨으로 피하였다가, 《성군보(醒群報)》의 주필이 되어 신사조(新思潮)를 고취하였다.
1915년 천두슈[陳獨秀]가 잡지 《신청년》을 창간하자 이 잡지에 기고하여, 그의 반(反)공자사상과 신사상을 호소하였으며, 5·4신문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뒤 베이징대학교[北京大學校]과 쓰촨대학교[四川大學校]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에 《우위문록[吳虞文錄]》 2권이 있다.
우징헝 [吳敬恒(오경항) 1865.3.25~1953.10.30]
중국의 사상가·국민당원.
별칭 : 자 치휘, 백발의 젊은이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 우진
주요저서 : 《신신앙의 우주관과 인생관》(1924), 《우치휘전집》 《상하고금담》
자 치휘(稚暉). 장쑤성[江蘇省] 우진[武進] 출생. 청(淸)나라 말기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거인(擧人)이며, 1901년 일본에 유학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청나라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단체 광복회에 참가하였으나, 1903년 쑤바오사건[蘇報事件]으로 영국·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907년 파리에서 잡지 《신세기》를 발간하여, P.크로폿킨 등의 무정부주의를 중국에 소개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직후에 귀국하여 탕산[唐山]대학 학장이 되었으나, 위안스카이의 탄압을 받아 1913년 다시 유럽에 망명하여 프랑스에 유학한 중국 학생들을 돕는 단체에 관계하였다.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의 중심인물이며, 후스[胡適]와 함께 서양문명의 전면적 수용과 과학지상주의를 주창하여 낡은 사상을 공격하였고, '백발의 젊은이'라 불렸다. 아이궈학사[愛國學社]·중파[中法]대학 등을 창설하여, 교육으로 중국을 혁신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국어독음통일회(國語讀音統一會) 회장으로서 국어운동에도 활약하였다.
1924년 이후 국민당 우파를 대표하는 원로로서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반대하였고, 1948년 총통부 자순위원(諮詢委員)이 되었으며, 국민정부와 함께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신신앙의 우주관과 인생관》(1924), 《우치휘전집(吳稚暉全集)》 《상하고금담(上下古今談)》 등이 있다.
웅백룡 [Xiong Bolong, 熊伯龍 1617~]
중국 청나라 초기의 학자·무신론자.
호 : 새재(塞齋)·종릉(鍾陵)
별칭 : 자 차후(次侯)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 후베이성[湖北省] 한양(漢陽)
주요저서 : 《무하집(無何集)》《적봉설(適逢說)》《귀변(鬼辯)》
자는 차후(次侯), 호는 새재(塞齋)·종릉(鍾陵)이다. 1617년(만력 45) 후베이성[湖北省]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1649년(순치 6) 진사가 된 이후 국사관(國史館) 편수(編修),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 한림비서시독(翰林秘書侍讀), 내각학사(內閣學士) 겸 예부시랑(禮部侍郞) 등을 지냈다.
박학다재(博學多才)하고, 성품이 웅혼하면서도 단아하였으며, 일찍이 유자장(劉子壯)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함께 묶어 웅유(熊劉)로 통칭하였다. 고문(古文)뿐 아니라 서양의 천문과 산법(算法)에도 두루 통하였는데, 특히 부귀빈천과 수요화복(壽夭禍福)은 우연한 현상에 불과하며, 정신 활동 또한 형체에 근거할 뿐이라고 하여 귀신이나 천당·지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무신론(無神論) 사상을 중점적으로 다룬철학서 《무하집(無何集)》이 있다. 그 밖에도 미신(迷信)에 반대해 쓴 《적봉설(適逢說)》《귀변(鬼辯)》《신론(神論)》 등이 있고, 문집인 《이의당시문집(貽毅堂詩文集)》 외에 많은 저서가 있다.
위백양 [魏伯陽 ?~?]
중국 후한 때의 철학자.
호 : 운아자(雲牙子)
국적 : 중국 후한
활동분야: 철학(도교)
출생지 : 저장성
주요저서 :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
호는 운아자(雲牙子)이다. 회계상우(會稽上虞:지금의 浙江省 동쪽) 출신으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천성이 도술(道術)을 좋아하여 일찍이 3명의 제자와 함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신단(神丹)을 만들었다. 신단이 완성되자 제자들의 마음이 곡진하지 않음을 알고, 그들을 떠보기 위해 직접 신단을 입에 넣고 죽은 척하였다. 한 제자가 다시 신단을 취하여 복용하니 또한 죽었다.
그러자 나머지 두 제자는 신단을 복용하지 않고 드디어 함께 산을 내려가 버렸다. 두 제자가 산을 내려간 뒤 위백양은 죽은 제자를 일으켜 세우고, 이후 오행이 서로 통한다는 등의 내용을 다룬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를 지었다. 학설은 《주역》과 유사해, 《주역》에 나오는 효상(爻象)의 원리를 그대로 빌려와 신단을 만드는 방법과 과정을 논하였다. 신비주의 색채가 강하면서도 당시로서는 과학적인 방식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과학기술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기공 수련과 신단 등을 통해 생명을 연장시키고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학설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위원 [魏源 1794~1857]
중국 청조(淸朝) 후기의 사상가.
별칭 : 자 묵심(默深)
국적 : 중국 청(淸)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후난성[湖南省]
주요저서 : 《성무기(聖武記)》 《해국도지(海國圖志)》
자 묵심(默深). 후난성[湖南省] 출신. 처음에는 송학풍(宋學風)의 학문을 닦았고, 후에 유봉록(劉逢祿)에게 사사하여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익혀 금문학파(今文學派)의 대표자가 되었다. 전한의 동중서(董仲舒)의 학문을 존중하고 경서(經書)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탐구하여 이상을 논하였다. 또한, 아편전쟁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태동되는 긴박한 사회정세에서도 의욕적인 정치적 이론을 제창하였으며, 특히 서구열강의 압력에대처하는 방안을 고구(考究)하였다. 노자(老子)와 손자(孫子)의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만년에는 정토불교(淨土佛敎)를 신봉하였다. 저서에 《성무기(聖武記)》 《해국도지(海國圖志)》 《시고미(詩古微)》 《서고미(書古微)》 《원사신편(元史新篇)》 《고미당내외집(古微堂內外集)》 등이 있고,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20권)을 편집하였다.
유봉록 [劉逢祿 1776~1829]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
별칭 : 자 신수(申授)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학자
출생지 : 장쑤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
주요저서 : 《춘추공양경하씨석례(春秋公羊經何氏釋例)》《논어술하(論語述何)》
자는 신수(申授)이다. 장쑤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에서 태어났다. 장존여(莊存與)의외손자이다. 관직은 예부의제사주사(禮部儀制司主事)에 그쳤지만, 학자로서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장존여와 숙부 장술조(莊述祖)로부터 이어받은 상주(常州)의 공양학(公羊學)을 발전시켜 《공양전(公羊傳)》의 하휴(何休)의 주석에 있는 바와 같이 삼과구지(三科九旨) 설을 규명하였고, 삼세진화(三世進化)의 설을 포함하는 청말 개혁파의 이른바 공양학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종래의 공양학자는 구태어하휴의 주석에 의하여 《공양전》을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유봉록은 적극적으로 하휴의 설을 받아들였다.
대표적 저서인 《춘추공양경하씨석례(春秋公羊經何氏釋例)》와 《춘추공양하씨해고전》《답난(答難)》《발묵수평(發墨守評)》
《곡량폐질신하(穀梁廢疾申何)》 등이 하휴의 주석에 의거한 저작이다. 또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원래 《춘추경(春秋經)》과는 관계가 없는 사서에 불과하며 유흠(劉歆)의 위작이라고 단정하는 등 그 이전의 청대(淸代) 학술사가 후한(後漢)의 경학(經學)을 존중하는 고증학이었던 것을전한(前漢)의 금문 경학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자에 공자진(벅自珍)·위원(魏源)이 있으며 이 학파에서 이윽고 캉유웨이[姜有爲]·량치차오[梁啓超]가 나왔다.
저서에 《춘추공양경하씨석례》(10권) 외에 《논어》를 공양가(公羊家)의 설에 의하여 해석한 《논어술하(論語述何)》(2권), 《유례부집(劉禮部集)》(11권) 등이 있다
유안 [劉安 BC 179 ?~BC 122]
중국 전한(前漢) 때 학자.
국적 : 중국 전한(前漢)
주요저서 : 《회남자(淮南子)》
한(漢)나라 고조의 손자. 회남왕(淮南王)이되어 수춘(壽春: 安徽省 壽縣)에 도읍하였다.문학애호가로 많은 문사와 방사(方士)를 식객으로 모아,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빈객들과 함께 저술한 《회남자(淮南子)》는 <내편(內篇)>(8권) <외편(外篇)>(19권) <중편(中篇)>(8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내편 일부분만이 현존한다. 사상적으로 노장을 주축으로 여러 파의 사상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도가사상에 의거한 통일된 이론으로 당시 유교 중심의 이론과 대항하려 하였다. BC 122년 무제(武帝) 때 반역을 기도하였다가 실패, 자살하였다.
유월 [兪 1821~1906]
청(淸)나라 말기의 학자.
호 : 곡원(曲園)
별칭 : 자 음보(蔭甫)
국적 : 중국 청(淸)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주요저서 :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
자 음보(蔭甫). 호 곡원(曲園). 저장성[浙江省] 출생. 30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 편수(編修)가 되었다. 향시시험 출제문제로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서원의 학장으로 있으면서 면학에 정진하였다. 전집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 가운데 <군경평의(群經平議)> <제자평의(諸子平議)>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가 가장 유익한 내용으로 평가된다. 또 쑤저우성[蘇州省] 밖의 한산사(寒山寺)의 장계시비(張繼詩碑)의 필자로도 유명하다.
유인 [劉因 1249~1293]
중국 원대(元代)의 유학자.
호 : 정수
별칭 : 자 몽길, 시호 문정
국적 : 중국 원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
주요저서 :《정수문집》
자 몽길(夢吉). 호 정수(靜修). 시호 문정(文靖). 허베이성[河北省] 출신. 처음에는 훈고학(訓뭍學)을 공부하였으나, 후에 주자학(朱子學) 계통의 조강한(趙江漢)으로부터 송대(宋代)의 주염계(周濂溪)에서 주자에 이르기까지의 도학(道學)을 익히고, 이에 전념하였다.
1291년 원의 세종으로부터 집현학사(集賢學士) 가의대부(嘉議大夫)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고사(固辭)하였다. 큰 업적은 없으나, 원대의 거유(巨儒)로서 오초려(吳草廬)·허노재(許魯齋)등과 병칭되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정수문집》(30권)을 저술하였다.
유즙산 [1578~1645]
중국 명대(明代) 말기의 유학자.
호 : 염대
본명 : 종주
별칭 : 자 기동, 즙산선생
국적 : 중국 명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
주요저서 : 《유자전서》(40권)
호 염대(念臺). 이름 종주(宗周). 자 기동(起東). 즙산에서 강의하여 학자들은 즙산선생이라고 불렀다. 저장성[浙江省] 출생. 24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관직이 좌도어사(左都御史)에 이르렀다. 그 사이 동림당(東林黨)을 변호하고 환관(宦官) 위충현(魏忠賢)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항저우[杭州]가 청(淸)나라의 수중에 들어가자 단식(斷食)으로 순국(殉國)하였다.
그의 학문은 정주학(程朱學)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나중에 양명학(陽明學)으로 전향하여 '성의(誠意)', '신독(愼獨)'을 강조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황종희(黃宗羲) 등의 거유(巨儒)를 배출하였다. 명대 최후를 장식하는 사상가로서 저서 《유자전서(劉子全書)》(40권)를 남겼다.
유흠 [劉歆 BC 53?~BC 25]
중국 전한(前漢) 말기의 유학자.
별칭 : 자 자준(子駿), 나중 이름 수(秀), 나중 자 영숙(穎叔)
국적 : 중국 한(漢)
활동분야 : 철학
자 자준(子駿). 나중에 이름을 수(秀), 자를 영숙(穎叔)으로 고쳤다. 아버지 유향(劉向)과 궁정의 장서(藏書)를 정리하고 육예(六藝)의 군서(群書)를 7종으로 분류하여 《칠략(七略)》이라 하였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체계적인 서적목록(書籍目錄)의 최초의 것으로 현존하지는않지만,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가 대체로 그에 의해서 엮어졌다. 《좌씨춘추(左氏春秋)》 《모시(毛詩)》 《일례(逸禮)》 《고문상서(古文尙書)》를 특히 존숭하여 학관(學官)에 이에 대한 전문박사(專門博士)를 설정하기 위하여 당시의학관 박사들과 일대 논쟁을 벌였으나 성사하지 못하고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전출되었다. 그 후 왕망(王莽)이 한왕조(漢王朝)를 찬탈한 후 국사(國師)로 초빙되어 그의 국정에 협력하였다. 만년에는 왕망의 포역(暴逆)에 반대하여 모반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자살하였다.
육가 [陸賈 ?~?]
중국 전한(前漢)의 유학자.
국적 : 중국 한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신어》
변설(辯說)이 능한 학자로서 고조(高祖)의 중국통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문무병용(文武倂用)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의 저서 《신어(新語)》는 도기(道基)·술사(術事)·보정(輔政)·무위(無爲)·변혹(辨惑)·신미(愼微)·자집(資執)·지덕(至德)·회려(懷慮)·본행(本行)·명계(明誡)·사무(思務) 등 12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덕에 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존중하고,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배격하여 정치의 요도(要道)는 수신(修身)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육농기 [陸짱其 1630~1692]
중국 청초(淸初)의 유학자.
별칭 : 자 가서, 시호 청헌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
주요저서 : 《삼어당문집》 《사서강의곤면록》 《송양강의》
자 가서(稼書). 시호 청헌(淸獻). 저장성[浙江省] 출생. 1670년(강희 9) 진사에 급제하고 가정(嘉定)과 영수(靈壽)의 현령(縣令)을 거쳐 쓰촨[四川]의 감찰사(監察使)가 되었다. 정주학을 신봉하고 양명학(陽明學)·불교·노장사상을 배격하였으며 일상수양에서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주장하였다.
청초 성리학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사후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에 《삼어당문집(三魚堂文集)》 《사서강의곤면록(四書講義困勉錄)》 《송양강의(松陽講義)》가 있다.
육상산 [陸象山 1139~1192]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호 : 존재(存齋) ·상산(象山), 시호 문안(文安)
본명 : 육구연(九淵)
국적 : 중국 남송(南宋)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주요저서 : 《상산선생 전집》(36권)
호 존재(存齋) ·상산(象山). 시호 문안(文安). 이름 구연(九淵). 저장성[浙江省] 출생.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관직에 올랐으나 곧 물러나 귀계(貴溪:江西省廣信府)의 상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당시 유일한 석학이었던 주자(朱子)와 대립하여 중국 전체를 양분(兩分)하는 학문적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사상적계보로는 모두 정호(程顥:明道) ·정이(程燎:伊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다만 주자가 정이천의 학통에 의한 도문학(道問學:問學第一)을 보다존중한 데 반하여, 상산은 정명도의 존덕성(尊德性:德性第一)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이설(性卽理說)을 제창하였고, 상산은 치지(致知)를 주로 한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제창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유심론(客觀的唯心論)과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으로 불린다. 주 ·육(朱陸)의 교유는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권고로 아호사(鵝湖寺:江西省 鉛山縣)에서 처음 이루어져 평소의 강학(講學) 요점에 대한 논변(論辨)을 벌였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을 존중하여 도의적 교유는 변하지 않았다. 상산의 학문은 그의 제자 양자호(楊慈湖) 등에 의하여 장시[江西] ·저장[浙江] 각지에서 계승 ·성행하였다. 한때 주자학에 의하여 압도되기도 하였으나,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 이르러 다시 계승 ·발전하였다. 주요저서에 어록(語錄) ·서간(書簡) ·문집(文集)을 수록한 《상산선생 전집》(36권)이 있다.
이고 [李 772~841]
중국 당대(唐代) 중기의 유학자.
호 : 시호 문공(文公)
별칭 : 자 습지(習之)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농서
주요저서 : 《복성서(復性書)》 《이문공집(李文公集)》
자 습지(習之). 시호 문공(文公). 농서(짱西:陝西省) 출생. 스승 한유(韓愈)를 따라 고문(古文)을 배웠고, 진사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까지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재상 이봉길(李逢吉)을 대면한 자리에서 그의 잘못을 논박하다가 한때는 여주자사(廬州刺使)로 좌천된 적도 있다. 사상적으로는 스승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것과는 달리, 그는 불교사상을 채택하여 심성(心性)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였다. 저서 《복성서(復性書)》는 한유의 《원성(原性)》과 더불어 인간의 본성을 논한 것으로 송대(宋代)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밖에 《이문공집(李文公集)》 18권이 있다.
이공 [1659~1733]
중국 청대(淸代) 초기의 학자·사상가.
호 : 서곡
별칭 : 자 강주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 바오딩
주요저서 : 《대학변업(大學辯業)》 《논어전주(論語傳註)》 《의태평책(擬太平策)》 《평서정(平書訂)》
호 서곡(恕谷). 자 강주(剛主).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保定] 출생. 아버지의 명으로 안원(顔元)에게서 예(禮)를 배웠으며, 금(琴)·어(御)·병법(兵法)·서(書)·수(數)까지 익힌 뒤, 저장[浙江]으로 가서 모기령(毛奇齡)에게 악(樂)을 배웠다. 당시 안원은 학계에서 고립하여 독서와 고증을 가볍게 여겼으나, 이공은 고증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경서(經書)에 주석을 달며, 예에 관한 저서도 펴냈다. 안원의 수제자로서 안리학파(顔李學派) 형성의 중추가 되었다.
학문의 시야는 안원보다 넓어 실학(實學)에 근거를 두면서도 경서고증(經書考證)과 독서에 힘을 기울였다. 대진(戴震)의 철학의 선구가 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저서에 《대학변업(大學辯業)》 《논어전주(論語傳註)》 《의태평책(擬太平策)》 《평서정(平書訂)》 등이 있다.
이옹 [1627~1705]
중국 명말·청초의 유학자.
호 : 이곡
별칭 : 자 중부
국적 : 중국 명ㆍ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산시성
주요저서 : 《사서반신록》 《이곡집》
산시성[陝西省] 출신. 호 이곡(二曲). 자 중부(中孚).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전사하여 집안이 빈곤하므로 경서(經書)·사서(史書)·제자백가(諸子百家)를 독학으로 섭렵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조가 일어나자 조정의 초빙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는 정좌(靜坐)에 의하여 과오를 반성하고 시정하며, 스스로 새롭게 하는 것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아 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의 학설로 학문의 대본(大本)을 세우고, 그후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주자(朱子) 및 명대의 주자 학자들의 책을 읽도록 독려하였다. 저서에는 《사서반신록(四書反身錄)》 《이곡집(二曲集)》 등이 있다.
이탁오 [李卓吾 1527~1602]
중국 명대(明代)의 유학자.
호 : 탁오
본명 : 지
별칭 : 별호 굉보
국적 : 중국 명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분서》(6권), 《장서》(68권)
호 탁오(卓吾). 이름은 지(贄). 별호 굉보(宏甫). 관직은 운남요안부지사(雲南姚安府知事)까지 지냈다. 당시, 전통적인 권위에 맹종(盲從)하지 않고 자아(自我) 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한 왕양명(王陽明)이 있었다. 그 분파(分派)인 '진주학파(秦州學派)'는 더욱 급진적이고, 금욕주의 ·신분차별을 강요하는 예교(禮敎)를 부정하고, 인간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본능(本能)을 긍정하였다. 그는 이 진주학파에서도 가장 극좌적(極左的)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의 '동심설(童心說)'은 '독서 견문(讀書見聞)'으로 물들지 않은 아동의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며, 도가적(道家的)인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마음이 존중되어야 하고, 인욕(人慾)은 가식 없이 그대로 긍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육경(六經)은 모두가 사서(史書)라고 보는 생각도 그에 의하면 '경사일물(經史一物)'이라 해석되어, 각 시대에 따라서 '길'도 변화하며, '지금'과 '옛날'은 등가치(等價値)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작품인 《서상기(西廂記)》와 《수호전(水滸傳)》 같은 백화(白話:口語) 문학도 '경사(經史)'와 나란히 고금을 통한 최고문학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른바 도학자적인 기풍을 싫어하고 불교나 도교(道敎)에도 가까이하며, 머리를 깎고 불승(佛僧) 모양을 하는 등의 태도로 딱딱하기만 한 유학자(儒學者)들을 비판하였다. 또한 공자(孔子)의 시비(是非)의 판단도 현재의 기준은 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시비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하며 독자적인 사론(史論)을 전개하였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도 천고(千古)의 으뜸가는 황제였다고 칭찬하고, 오대(五代) 때의 풍도(馮道)와 같은 절개 없는 인물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남녀평등론'도 주장한 바 있으며, 그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교설(敎說) 때문에 자주 정부당국의 박해를 받아, 마지막에는 장문달(張問達)의 탄핵을 받고 투옥되어 옥중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저서로는 《분서(焚書)》(6권), 《속분서(續焚書)》(5권), 《장서(藏書)》(68권), 《속장서(續藏書)》(27권)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각 책에 대한 독특한 평어(評語)를 붙여서 편집한 다수의 서적이 있다.
자공 [子貢 BC 520 ?~BC 456 ?]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유학자.
본명 : 단목사
국적 : 중국 춘추시대 위
활동분야 : 문학
성 단목(端木). 이름 사(賜).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재아(宰我)와 더불어 언어에 뛰어났다고 한다.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치려고 할 때, 공자의 허락을 받고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설득하여 노나라를 구함과 동시에 월을 패왕(覇王)으로 하여 네 나라의 세력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이재가(理財家)로서도 알려져 공문의 번영은 그의 경제적 원조에 의한 바가 컸다고 한다. 공자가 죽은 뒤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가서 벼슬하였으며, 제나라에서 죽었다.
자로 [子路 BC 543~BC 480]
중국 고대의 유학자.
본명 : 중유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변
자로는 자(字). 성명은 중유(仲由). 변(卞:山東省) 출신. 공자(孔子)의 문하생이었다. 공자보다 9세 아래였고 제자 중에서는 최연장자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본디 무뢰한이었는데 공자의 훈계로 입문(入門)하여 곧고 순진하여 헌신적으로 공자를 섬겼다. 공자도 그를 매우 사랑한 듯하며 《논어》에 그 친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성미는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용기가 있어 가르침을 받으면 실천에 옮기는 인물이었다. 공자는 그를 가르침에 있어, 도의를 표준으로 했을 때라야 비로소 용기의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여 그의 남보다 앞서는 용기와 적극성을 교정하였다. 뒤에 위(衛)나라에서 벼슬했는데, 내란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도의적 입장에서 전사(戰死)를 택하였다. 내란 소식을 들었을 때 공자는 그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한다.
자사 [子思 BC 483?~BC 402?]
중국 고대 노(魯)나라의 학자.
본명 : 급(伋)
국적 : 중국 노(魯)
활동분야 : 문학,철학
주요저서 : 《중용(中庸)》,《자사자(子思子)》
이름 급(伋). 자사는 자(字)로서 공자의 손자이며, 4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로 전한다. 전 생애를 주로 고향인 노나라에 살면서 증자(曾子)의 학(學)을 배워 유학의 전승에 힘썼다. 맹자는 그의 제자의 제자이며,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이 학통(學統)은 송학(宋學)에서 특히 존중된다. 자사학파의 사상을 전하는 책으로 《자사자(子思子)》가 있다. 과불급(過不及)이없는 중용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일상 윤리가 그의 사상의 중심이다.
자하 [子夏 BC 507~BC 420?]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
본명 : 복상(卜商)
국적 : 중국 위(魏)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산시성[山西省]
성명은 복상(卜商). 산시성[山西省] 출생. 출생에 이설도 있다. 공자의 제자로 공문10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이며, 공자가 죽은 뒤에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으나 공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실명(失明)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은 시와 예에 통하였으며, 공자의 《춘추(春秋)》를 전하여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의 원류(源流)를 이루었다. 주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장둥쑨 [張東蓀(장동손) 1886~1973]
중국의 철학자 ·평론가.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평론
도쿄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제1혁명에 참가하였다. 《상하이 시사신보(上海時事新報)》 총편집, 잡지 《대중화(大中華)》 주필, 그리고 광화[光華]대학·옌징대학교[燕京大學校]·베이징대학교[北京大學校]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플라톤, I.칸트, H.베르그송 등 서구철학 소개에 힘썼고, 철학진영의 중진이 되었다.
또 1931년 국가사회당을 결성하고 그 혁신파로서 항일전쟁 후 중국사회민주당을 주도하였고, 민주동맹에 참가한 후 중국공산당을 지지하였다. 중공정권 성립 후 민주동맹 간부,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위원, 옌징대학교 교수를 겸하였는데, 1951년 이후에는 공적인 활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장식 [張 1133~1180]
중국 송(宋)나라 때의 철학자.
호 : 남헌
본명 : 식
별칭 : 자 경부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광한
주요저서 : 《남헌역설》 《수사언인》
자 경부(敬夫). 호 남헌(南軒). 이름 식(煎). 광한(廣漢:四川省) 출생. 형양(衡陽:湖南省)에 살았으며 호오봉(胡五峯)의 학문을 이어받아 성리학에 관한 지식이 깊고 경(敬) 문제에 관해서는 주자와 자주 논쟁을 벌여 그 학문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명문 출신으로 주(州)의 지사(知事)를 역임하고 이부랑(吏部郞)을 지냈다. 저서에는 《남헌역설(南軒易說)》 《수사언인(洙泗言仁)》 《논어설(論語說)》 《맹자설(孟子說)》 등이 있다.
장자 [莊子 BC 369~BC 289?]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
본명 : 주(周)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송나라 몽읍(蒙邑:허난성[河南省] 商邱縣 근처)
주요저서 : 《장자》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사상】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 ·지역 ·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 ·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한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 ·가라지 ·기왓장 ·똥 ·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한다. 물(物)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스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老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영향】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야학(般若學)과 당나라 때 융성한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종(玄宗)은 그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송(宋) ·명(明) 이학(理學)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전기에 이단(異端)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산림(山林)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장존여 [莊存與1719~1788]
청(淸)나라의 학자.
별칭 : 자 방경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우진현
주요저서 : 《춘추정사(春秋正辭)》,《미경재유서(味經齋遺書)》
자 방경(方耕). 장쑤성[江蘇省] 우진현[武進縣] 출생. 인품이 근엄하고 강직하였으며, 벼슬은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다. 고증학(考證學)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로서는 이질적인 학풍으로 어언(語言)이나 문자를 넘어서 성현의 미묘한 말의 본뜻을 찾고자 하였다. 또 《서경(書經)》에 있어서도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빼놓지 않았다.
저서 《춘추정사(春秋正辭)》는 공양(公羊)의 의(義)로 일관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공양학(公羊學)이 조카 술조(述祖)와 유봉록(劉逢祿)·송상봉(宋翔鳳) 등 두 생질에게 이어져 양호학파(陽湖學派)라고 일컬어진다. 문집에 《미경재유서(味經齋遺書)》가 전해진다.
장횡거 [張橫渠 1020~1077]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학자.
본명 : 재(載)
별칭 : 자 자후(子厚)
국적 : 중국 북송(北宋)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장안(長安)
주요저서 : 《경학이굴》 《정몽》 《서명》
자 자후(子厚). 이름 재(載). 장안(長安) 출생. 38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뒤 기주(祁州)의 사법참군(司法參軍)에서 시작하여, 12∼13년 간 관직에 있었으나 불우하였다. 그러나 학자로서는 《경학이굴(經學理窟)》 《정몽(正蒙)》 《서명(西銘)》 등의 저서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정몽》에서는송나라 최초로 ‘기일원(氣一元)’의 철학사상을 전개하여, 우주의 만유(萬有)는 기(氣)의 집산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이기의 본체는 태허(太虛)로서, 태허가 곧 기라고 설파하였다. 젊어서 범중엄(范仲淹)을 만나 《중용(中庸)》을 읽도록 권유받았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불교와 노장(老莊)에서 깊은 뜻을 찾고자 하였다. 그 뒤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역경(易經)》을 논하면서 그 학문의 깊이에 감복하여, 모든 이학(異學)을 버리고 《역경》 《중용》에 따라 송나라 유학(儒學)의 기초를 세웠다. 사상적인 배불론자(排佛論者)로도 알려져 있다.
장후 [長侯 1455~1514]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儒學者).
별칭 : 자 정실
국적 : 중국 명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광둥성 난하이
주요저서 : 《백사유언찬요》 《동죽문집》 《남해잡영》
자 정실(廷實). 광둥성[廣東省] 난하이[南海] 출생. 관직은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뒤, 호부주사(戶部主事)를 지내고, 뒤에 남경통정사참의(南京通政司參議)에 이르렀다. 진헌장(陳獻章)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장후의 학풍은 사물의 모든 근원을 자연에 두고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을 중히 여겼으며 무욕(無欲)을 지상(至上)으로 삼았다.
저서에 《백사유언찬요(白沙遺言纂要)》 《동죽문집(東竹文集)》 《남해잡영(南海雜詠)》 등이 있다.
전대흔 [錢大昕 1728~1804]
중국 청(淸)나라의 유학자·고증학자.
호 : 죽정
별칭 : 자 효징·신미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철학, 고증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의 자딩
주요저서 : 《잠연당전서》
호 죽정(竹汀). 자 효징(曉徵)·신미(辛楣). 장쑤성[江蘇省] 자딩[嘉定] 출생. 어렸을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렸고, 15세 때 제생(諸生)이 되었다. 1751년 건륭제(乾隆帝)가 남쪽 지방에 순행하였을 때 부(賦)를 바쳐 거인(擧人)으로 천거, 내각중서(內閣中書)로 임용되었다. 이듬해에는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서양의 수학·천문학과 중국의 역산서(曆算書)를 연구하여 《삼통술연(三統術衍)》을 저술하였다. 1754년 처남인 왕명성(王鳴盛)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하였고, 한림원(翰林院)의 벼슬을 역임하며 《열하지(熱河志)》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속통지(續通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등 칙찬서(勅撰書) 편찬에 참가하였다.
한때 과거의 시험관이 되기도 하였고, 1774년에는 광둥[廣東]의 학정(學政)으로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아버지의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77세로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장닝[江寧]의 종산서원(鍾山書院)과 쑤저우[蘇州]의 자양서원(紫陽書院) 등의 원장으로서, 2,000명에 이르는 제자를 가르쳤다.
그는 역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사기(史記)》로부터 《원사(元史)》까지의 역대 정사(正史)에 교정을 가하여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攷異)》 100권을 저술하였다. 특히 《원사》는 전면적인 개서(改書)를 시도하였으며, 그 중 《원사씨족표(元史氏族表)》 《원사예문지(元史藝文志)》가 남아 있다. 또한 그는 금석학·경학(특히 음운학)·지리학·천문학의 지식을 역사학에 도입하는 등 고증을 중요시하는 청조풍 역사학을 창립하였다.
그 밖의 저서에는 학문상의 수상을 적은 《십가재양신록(十駕齋養新錄)》, 금석문을 연구한 《금석문발미(金石文跋尾)》, 고전에 실린 속어류(俗語類)를 모아 고증한 《항언록(恒言錄)》 등 청조고증학의 대표적 저작이 많다. 그는 시에도 뛰어나, 젊었을 때 심덕잠(沈德潛)에게 배운 왕명성·왕창(王昶) 등과 '오중칠자(吳中七子)'라 불렸다. 그의 작품은 《잠연당전서(潛硏堂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전덕홍 [錢德洪 1496~1574]
중국 명대(明代) 중기의 학자.
호 : 서산
별칭 : 자 홍보
국적 : 중국 명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 위야오현
호 서산(緖山). 자 홍보(洪甫). 저장성[浙江省] 위야오현[餘姚縣] 출생. 왕양명(王陽明)의 수제자로 그와 동향이며 그 정통파의 계승자이고, 벼슬은 형부시중(刑部侍中)에 이르렀다. 양명학(陽明學)의 보급에 노력하였고, 양명학 좌파의 왕기(王畿)와 병칭(倂稱)된다.
《전습록(傳習錄)》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 편집의 중심이 되었으며, 온건 독실한 학풍을 전하였다. 왕수인·왕기와 함께 토론한 《천천증도문답(天泉證道問答)》이 유명하다.
정이 [程 1033~1107]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호 : 이천(伊川)
별칭 : 자 정숙(正叔),시호 정공(正公)
국적 : 중국 북송(北宋)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주요저서 : 《역전(易傳)》
자 정숙(正叔). 호 이천(伊川). 시호 정공(正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이천백(伊川伯)에 봉하여졌으므로 이천 선생이라 존칭된다. 형 정호(程顥:程明道)와 함께 주돈이(周敦燎:周濂溪)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철종(哲宗) 초에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 등의 추천으로 국자감 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당화(黨禍)를 입어 쓰촨성[四川省] 푸저우[헴州]로 귀양간 일도 있다.
학자로서의 그는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가 특히 깊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지미(至微:隱)한 것은 이(理:本體)요 지저(至著:顯)한 것은 상(象:氣·用)이라 하여 일단 양자를 구별하고, 체(體)와 용(用)은 근원이 같으며 현(顯)과 미(微)에 사이가 없다”고 상관관계를 설명한 점에 특색이 있다. 그의 철학은 주자(朱子)에게 계승되어,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나타나 있다.
학문의 방법도 형은 오직 정좌(靜座)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경(敬)’을 중히 여겨 ‘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썼다. 이와 같은 일도 주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송대(宋代)의신유학인 정주학의 주축이 되었다. 저서에 《역전(易傳)》 4권이 있으며, 그의 학설은 형의 학설과 함께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되었다. 또 그의 전기는 주자가 지은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 실려 있다.
정현 [鄭玄 127~200]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 경학(經學)의 대성자(大成者).
별칭 : 자 강성(康成)
국적 : 중국 후한(後漢)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산둥성[山東省] 고밀(高密)
자 강성(康成). 북해(北海:山東省) 고밀(高密) 출생. 시종 재야(在野)의 학자로 지냈고,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訓뭍學)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처음에 향색부(鄕嗇夫)라는 지방의 말단관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뤄양[洛陽]에 올라가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그 후 마융(馬融) 등에게 사사하여, 《역(易)》 《서(書)》 《춘추(春秋)》 등의 고전을 배운 뒤 40세가 넘어서 귀향하였다. 그가 뤄양을 떠날 때, 마융이 “나의 학문이 정현과 함께 동쪽으로 떠나는구나”하고 탄식하였을 만큼 학문에 힘을 쏟았다. 귀향 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가르쳤으나, 44세 때에 환관들이 학자 등 반대당을 금고한 ‘당고(黨錮)의 화’를 입고, 집안에 칩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4년 뒤에 금고가 풀리자 하진(何進) ·공융(孔融) ·동탁(董卓) ·원소(袁紹) 등의 초빙과, 만년에는 황제가 대사농(大司農)의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연구와 교육에 한평생을 바쳐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일대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고문 ·금문에 다 정통하였으며, 가장 옳다고 믿는 설을 취하여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 경서의 주석을 하였고, 《의례》 《논어》 교과서의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또 하휴(何休)가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矮)》 《곡량폐질(穀梁廢疾)》의 3부작을 펴내자, 그는 《발묵수(發墨守)》 《침고황(鍼膏矮)》《기폐질(起廢疾)》의 3부작을 지어 반박함으로써 하휴를 경복시켰다. 그의 저서 중 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은 《모시》의 전(箋)과 《주례》 《의례》 《예기》의 주해뿐이고, 그 밖의 것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잔여부분은 청나라 원균(袁鈞)의 《정씨일서(鄭氏佚書)》에 실렸다. 또 그의 《논어》 주석의 일부가 근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의 당나라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정호 [程顥 1032~1085]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호 : 명도(明道)
별칭 : 자 백순(伯淳),시호 순(純)
국적 : 중국 북송(北宋)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주요저서 : 《정성서(定性書)》,《식인편(識仁篇)》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존칭으로 명도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程燎:伊川)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程珦)이 남안(南安:江西省 大庾縣)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周敦燎:濂溪)를 한번보고 아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 26세 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陝西省] 후셴현[且縣]의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澤州:山西省) 진청현[晉城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에 입각하여 혼일적(渾一的)으로 천지의 생의(生意)를 체험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제자(諸子)·노장(老莊)·불교도 공부하였으나, 결국 유학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순응하여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저서에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 시에 《추일우성(秋日偶成)》 등이 있다. 그의 전기는 주자의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서, 유저(遺著)는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볼 수 있다.
조광 [趙匡 ?~?]
중국 당(唐)나라 대력(大曆)·정원(貞元) 무렵(766∼804)의 유학자.
별칭 : 자 백순
국적 : 중국 당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산시성 허둥
자 백순(伯循). 산시성[山西省] 허둥[河東] 출생. 산시성[盈西省] 양현[洋縣]의 자사(刺史)를 지낸 일도 있다. 육순(陸淳)과 함께 담조(啖助)에게 배우고, 그의 학풍을 이어받아 《춘추(春秋)》에 대한 종래의 삼전묵수(三傳墨守) 태도에 비판적이었으며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송(宋)나라 때 경서(經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선구로 알려졌다.
좌구명 [左丘明?~?]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노(魯)나라 학자.
별칭 : 맹좌(盲左)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산둥성[山東省]
주요저서 : 《좌씨전(左氏傳)》 《국어(國語)》
산둥성[山東省] 출생. 공자(孔子)와 같은 무렵의 노(魯)나라 사람이다. 일설에 의하면 성이 좌구, 이름이 명이라고도 한다. 《좌씨전(左氏傳)》 《국어(國語)》의 저자로 일컬어진다. 《논어(論語)》 <공야장편(公冶長篇)>에 “원망을 숨기고서 그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기더니, 나도 또한 부끄러워 하노라”라는 공자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좌씨전》 좌씨에 결합되어 《좌씨전》의 저자라고 하게 된 것 같다.
한편 《논어》의 이 이야기에서 좌구명이 공자의 선배일 것이라며, 《논어》의 좌구명은 《좌씨전》의 저자가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나왔다. 후세에 이 두 가지 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론(議論)이 있는데 후자 쪽이 온당할 것으로 본다.‘좌구실명(左丘失明)’이라는 사마 천(司馬遷)의 말에 의하여 후세 사람은 그를 가리켜 맹좌(盲左)라고도 한다.
주돈이 [周敦 1017~1073]
중국 송(宋)나라의 유학자.
호 : 염계(濂溪)
별칭 : 자 무숙(茂叔)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도주(道州:湖南省 道營縣)
주요저서 : 《태극도설(太極圖說)》,《통서(通書)》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주(道州:湖南省 道營縣)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태극(太極:無極)으로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도해(圖解)하여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태극→음양(陰陽)의 이기(二氣)→오행(五行:金·木·水 ·火·土의 五元素)→남녀→만물의 순서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논하고, 인간만이 가장 우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정(中正) 인의(仁義)의 도를 지키고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의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본래 하나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저서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가 있으며, 수필 《애련설(愛蓮說)》에는 그의 고아한 인품이 표현되었다. 남송의 주자(朱子)는 염계가 정호(程顥)·정이(程燎) 형제를 가르쳤기 때문에 도학(道學:宋代의 新儒敎)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증자 [曾子 BC 506~BC 436]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유학자.
본명 : 삼(參)
별칭 : 자 자여(子輿)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산둥성[山東省]
이름은 삼(參). 자 자여(子輿). 산둥성[山東省]에서 출생하였다. 증점(曾點)의 아들이다. 공자(孔子)의 고제(高弟)로 효심이 두텁고 내성궁행(內省躬行)에 힘썼으며, 노(魯)나라 지방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주력하였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고 말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의 참뜻을 몰라 생각에 잠겼으나, 증자는 선뜻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효경(孝經)》의 작자라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현재 전하는 《효경》은 진한시대(秦漢時代)에 개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증자의 사상은 《증자(曾子)》 18편(篇) 가운데 10편이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남아 전하는데, 효(孝)와 신(信)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한다. 그는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사상(儒敎思想史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양 5성의 하나이다.
진례 [陳澧 1810~1882]
중국 청(淸)나라 때의 유학자(儒學者).
호 : 동숙
별칭 : 자 난보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광둥성 판위현
주요저서 : 《동숙독서기》
자 난보(蘭甫). 호 동숙(東塾). 광둥성[廣東省] 판위현[番濤縣] 출생. 진사(進士) 시험을 치르기 6번,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사관(仕官)하여 허위안현[河源縣] 훈도(訓導)가 되었으나, 두 달 만에 사직하고 귀향하여 학해당(學海堂) 학장, 만년에는 국파정사(菊坡精舍)를 겸영하였다.
그 학풍은 정현(鄭玄)과 주자(朱子)를 모두 중히 여겼으며,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은 서로 같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저서 《동숙독서기(東塾讀書記)》는 일종의 학술사(學術史)이다.
성명도덕(性命道德)에 관한 어의(語義)를 푼 《한유통의(漢儒通義)》 외에 《성률통고(聲律通考)》 《절운고(切韻考)》(9권, 1842∼1879) 《동숙집(東塾集)》 《한지수도도설(漢志水道圖說)》 등 음악·음운(音韻)·지리·천문·산학(算學)에 걸친 저술을 남겼다.
진헌장 [陳獻章 1428~1500]
중국 명(明)나라의 유학자.
별칭 : 호 백사·석재, 자 공보
국적 : 중국 명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광둥성 백사
호 백사(白沙)·석재(石齋). 자 공보(公甫). 광둥성[廣東省] 백사(白沙) 출생. 오강재(吳康齋)에게 사사하고, 송대(宋代) 육상산(陸象山)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정좌(靜坐)에 의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천리(天理)를 체인(體認)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교경전의 자질구레한 해석에 몰두하는 명대(明代)의 주자학에 반발하고 실천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왕양명(王陽明)의 선구적 사상가로 보인다. 천리(天理)와 일체(一體)의 심경(心境)을 그의 많은 시작(詩作)에서 음미(吟味)할 수 있는 시인적 유학자로 높이 평가된다.
진확 [陳確 1604~1677]
중국 명말·청초의 사상가·유물론자.
본명 : 도영(道永)
별칭 : 자 현비(玄非)·건초(乾初)
국적 : 중국 명(明)·청(淸)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주요저서 : 《대학변(大學辨)》
본명은 도영(道永), 자는 현비(玄非)이나, 명(明)이 망한 뒤 이름을 확, 자를 건초(乾初)로 고쳤다. 1604년(만력 32)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가난해 가형(家兄)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20세 이후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산수를 유람하며 방랑 생활을 하다가 45살 때 유종주(劉宗周:유즙산)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마음을 두지 않은 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에 중점을 두고 독립적인 철학사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특히 《대학변(大學辨)》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주자(朱子:朱熹)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선지후행(先知後行)에 관한 오류를 비판하는 등 당시의 권위와 전통과 편견을 타파하려는 대담한 주장을 폈다.
1677년 사망하였고, 죽은 지 121년 만인 1798년 진경장(陳敬璋)에 의해 《진건초선생선집(陳乾初先生選集)》이 편찬된 이후 《장서(葬書)》(1854), 《해창총재(海昌叢載)》《건초선생 문초(文褻 )》 《시초(詩褻 )》(1887) 등이 간행되었다. 1978년에는 그의 글을 집대성한 《진확집》이 출간되었다.
초순[焦循: 1763~1820]
焦循字理堂,江蘇甘泉?今揚州市?人,嘉慶六年?人,他的數學成就主要是對算術中的基本運算律的討論。 (談天三友:焦循、汪萊、李銳- 嘉慶年間,由於中算書?刻本和西學編譯本的增多,?起了?究數學的高潮,其中成就特別卓越的有三個著名數學家──焦循、汪萊和李銳。這三位著名數學家彼此又十分友善,時人稱?「談天三友」。
学人列传焦 循
焦循(1763~1820),字里堂,江苏甘泉人。
少颖异,事父母以孝闻,服丧尽礼。乾隆辛酉举于乡。尝从阮元游浙江。闭户著书,葺其老屋曰“半九书塾”,复构楼曰“雕菰”,有湖光山色之胜。足不入城市者十余年。庚辰七月卒,年五十有八。
先生博闻强记,识力精卓,于学无所不通,于经无所不治,而于《周易》《孟子》专勒成书,其于《易》本世传家学,尝疑一“号咷”也,何以既见于《旅》又见于《同人》;一“拯马壮”也,何以既见于《复》又见于《明夷》;“密云不雨”之象,何以《小畜》与《小过》同辞;“甲庚三日”之占,何以《蛊》象与《巽》象同例;乃遍求说《易》之书读之,撰述成帙。甲子,复精研旧稿,悟得洞渊九容之术实通于《易》,乃以数之比例:求易之比例,于是撰拟《通释》一书。丁卯病危,以《易》未成为恨。病廖,屏他务,专治此经,遂成《易通释》二十卷。自谓所得悟者,一曰“旁通”,二曰“根错”,三曰“时行”。《易通释》既成,复提其要为《图略》八卷。凡图五篇,原八篇,发明旁通相错时行之义。论十篇,破旧说之非。复成《章句》十二卷。总称《雕菰楼易学三书》,共四十卷。先生易经既成,随笔记录二十卷,曰《易馀籥录》。凡友朋门弟子所问答及于易者复录存二卷,曰《易话》。自癸酉立目录,自稽所业,得三卷,曰《注易日记》。又有《易广记》三卷。先生易学,不拘守汉魏各师法,惟以卦爻经文比例为主。
先生又著《孟子正义》三十卷,疏赵岐之注,兼系近儒数十家之说,而以己意折衷,合孔孟相传之正指。又作《周易王氏注补疏》二卷,《尚书孔氏传补疏》二卷,《毛诗郑氏笺补疏》五卷,《春秋左传社氏集解补疏》五卷,《补记郑氏补疏》三卷,《论语何氏集解补疏》二卷,合之,为《六经补疏》二十卷。
先生游浙,因阮元考浙江原委以证《禹责》三江,乃撰《禹贡郑注释》一卷,专明班氏郑氏之学。谓王伯厚《诗地理考》繁杂无所融贯,作《毛诗地理释》四卷。又仿戴东原《孟子字义疏证》,撰《论语通释》一卷凡十王篇:曰圣,曰大,曰仁,曰一贯,曰忠恕,曰学,曰知,曰能,曰权,曰义,曰礼,曰仕,曰君子小人。又撰《群经宫室图》二卷,为图五十篇。《毛诗鸟兽草木虫鱼释》十一卷,《陆璣疏考证》一卷。又录当世通儒说《尚书》者四十一家,书五十七部,仿卫湜《礼记》之例,以时之先后为序,得四十卷,曰《书义丛钞》。
先生思深悟锐,尤精历算之学。撰有《释弧》三卷,《释轮》二卷,《释椭》一卷,《加减乘除释》八卷,《天元一释》二卷,《开方通释》一卷,又命其子琥作《益古演段开方补》以附《里堂学算记》之末。当时算学名家李锐、汪莱、钱大昕等,皆与讨论而叹服焉。
先生善属文,最爱柳宗元。表章先正,作《北湖小志》六卷。又掇拾扬州杂文旧事,为目录二卷,名曰《足征录》。又成《邗记》六卷。每得一书,必识其颠末,有所契,则手录之。如是者三十年,成《里堂道听录》五十卷。又举清人著述三十二家,作《读书三十二赞》。文集手订者,曰《雕菰楼集》二十四卷,词三卷,诗话一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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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 [鄒衍 ?~?]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별칭 : 추연(騶衍)
국적 : 중국 제(齊)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추자(鄒子)》 《추자시종(鄒子始終)》
추연(騶衍)이라고도 한다. 맹자보다 약간 늦게 등장하여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제창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은 토(土) ·목(木) ·금(金) ·화(火) ·수(水)의 오행상승(五行相勝) 원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고, 이에 의하여 역사의 추이(推移)나 미래에 대한 예견(豫見)을 하였다. 이것은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과 더불어 중국의 전통적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추자(鄒子)》 49편, 《추자시종(鄒子始終)》 56편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칠현 [七賢]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일곱현인.
백이(伯夷) ·숙제(叔齊)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소련(少連) ·유하혜(柳下惠) 등이다.
탕용퉁 [湯用 (탕용동) 1893~1964]
중국의 불교사학자이자 철학자.
호 : (자) 석여
출생지 : 중국 후베이성
주요저서 :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 《수당불교사고》
주요업적 : 현대불교사학과 개설
자는 석여(錫予)로, 후베이성[湖北省] 출신이다. 청화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하여 산스크리트와 팔리어·서양 근대철학을 배웠다. 귀국 후 동남대학교와 남개대학교·중앙대학교·베이징대학교·서남연합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베이징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중국철학사와 불교사를 연구하였으며, 현대불교사학과 개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는 중국불교의 초기 역사를 기술한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와 수·당 시대의 불교사를 기술한 《수당불교사고》를 비롯하여 《인도철학사략(印度哲學史略)》 《왕일잡고(往日雜稿)》 《강부찰기(康復札記)》등이 있다.
펑유란 [馮友蘭(풍우란) 1894~1990]
중국의 철학자.
별칭 : 자 지생
국적 : 중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허난성 탕허현
주요저서 : 《중국철학사》(1934), 《신학리》(1939), 《중국철학사신론》 《인생철학》(1926), 《신세훈(》(1940), 《신원도》(1945), 《중국철학논문집》(1958), 《40년의 회고》(1959)
자 지생(芝生). 허난성[河南省] 탕허현[唐河縣] 출생. 베이징대학교를 나온 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를 졸업하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옌징대학교·중산대학교·칭화대학교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최초로 중국인에 의한 《중국철학사》(1934)를 완성하였으며, 그뒤 《신학리(新學理)》(1939) 등을 발표하여 송학(宋學)을 정리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3년에는 영국의 초청을 받아, 영국의 각 대학에서 중국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중공정부 성립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향하였고, 196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 입장에서 구저(舊著)를 고쳐 쓴 《중국철학사신론》을 발간했으며, 또한 철학유산의 계승문제 등을 논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에 그의 철학사 연구는 지주계급과 봉건제도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민주동맹대표), 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등으로 있었다.
그 밖의 저서에는 《인생철학》(1926), 《신세훈(新世訓)》(1940), 《신원도(新原道)》(1945), 《중국철학논문집》(1958), 《40년의 회고》(1959) 등이 있다.
포경언 [鮑敬言 ?~?]
중국 서진(西晉) ·동진(東晉) 무렵의 사상가.
국적 : 중국 서진(西晉) ·동진(東晉)
활동분야 : 철학
노장사상(老莊思想)으로 군주제도를 비판하였다. 완적(阮籍) 등의 유교비판을 발전시켜, 군주를 사회의 혼란과만민이 곤궁하게 된 원인이라 하고 군주가 없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오랜 옛날에는 통치가 없는 자연적 ·조화적 상태였는데, 거기에 지자(知者) ·강자가 나타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견해에 있었다. 그의 의론은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 <힐포편(詰鮑篇)>에 갈홍과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는데, 원시상태를 이상화하고 사회발전을 무시한다는 약점을 비판받았다.
하휴 [何休 129~182]
중국 후한(後漢) 말의 사상가.
별칭 : 자 소공
국적 : 중국 후한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산둥성 지닝현
주요저서 : 《춘추공양해고》
자 소공(邵公). 산둥성[山東省] 지닝현[濟寧縣] 출생. 소박 근엄한 학자로, 젊어서 관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각고(刻苦) 15년 만에 명저 《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뭍)》를 완성하였다. 당시에는 마융(馬融)·정현(鄭玄)을 중심으로 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성행하고 《춘추》의 기사(記事)를 사실(史實)로서 상술(詳述)하는 학풍이 성행하였는데, 하휴는 《춘추공양전》을 거론하여 그 기사의 사상적 의미를 취하고 이를 공자의 정신을 잇는 것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하휴의 공양학은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의 박사(博士) 호모생(胡母生)에서 비롯되어 동중서(董仲舒)를 거쳐 그에게 이어진 것으로, 후에 청나라 말에 이르러 금문공양학(今文公羊學)으로서 개화하였다.
한비 [韓非 BC 280?~BC 233]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국적 : 중국 전국시대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 《한비자(韓非子)》
한(韓)의 왕족으로, 젊어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배워 뒷날 법가(法家)의 사상을 대성하였다.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는 타고난 말더듬이였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미칠 바 못 되었다. 진의 시황제는 한비의 고분(孤憤) ·오두(五웝)의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하였다 한다. 한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누누히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진의 공격을 받자 화평의 사신으로서 진나라로 갔다.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에 머물게 하려 하였으나,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황에게 참언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유저에 《한비자(韓非子)》가 있다.
한비자 [韓非子]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280?∼BC 233)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구분 : 논저
저자 : 한비
시대 : 중국 전국시대 말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로, 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오두(五웝)> <현학(顯學)> <고분(孤憤)>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군주는 측근 ·중신 ·유세가(遊說家) ·학자 ·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난(難)> <난일(難一)∼난사(難四)> <난세(難勢)> <문변(問辨)> <문전(問田)> <정법(定法)>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난세>와 <정법>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 ·신자(申子) ·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설림(說林)> <내외저설(內外儲說)> <십과(十過)> 등의 제편(諸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유도(有度)> <이병(二柄)> <팔간(八姦)> 등은 오래된 것이고, <심도(心度)> <제분(制分)>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주도(主道)> <양각(揚떳)> <해로(解老)> <유로(喩老)>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육반(六反)> <충효>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初見秦)> <존한(存韓)>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 ·법가 ·명가(名家) ·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 ·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한유 [韓愈 768~824]
중국 당(唐)나라의 문학자 ·사상가.
별칭 :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문학, 철학
출생지 :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河南省)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河南省) 출생.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수도(首都)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陽山縣:廣東省)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潮州:廣東省)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올랐다.
문학상의 공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병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허노재 [許魯齋1209~1281]
중국 원(元)나라의 유학자.
호 : 노재
별칭 : 자 중평(仲平)
국적 : 중국 원(元)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산시성[山西省] 화이저우[懷州]
주요저서 : 《허노재전서(許魯齋全書)》
자 중평(仲平). 호 노재. 이름 형(衡). 산시성[山西省] 화이저우[懷州] 출생. 원나라의 주자학을 대표하였으며, 사서(四書) 외에 주자가 편찬한 《소학》을 특히 중시하였다.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이 두터워 경조제학(京兆提學) ·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의 요직을 맡았으며, 후에 병을 이유로 물러나 제자들에게 실천도덕을 주로 한 강학을 계속하였다. 저서에 《허노재선생심법(許魯齋先生心法)》(1권) 《허노재전서(許魯齋全書)》(7권) 등이 있다.
허신 [許愼 30~124]
중국 후한(後漢)의 경학자(經學者).
별칭 : 자 숙중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여남군 소릉
주요저서 : 《설문해자》(30권)
자 숙중(叔重). 여남군 소릉(汝南郡召陵:河南省) 출생. 고전학자 가규(賈逵)에 사사하여 널리 유가(儒家)의 고전에 정통하였으며, '오경무쌍(五經無雙)의 허숙중'으로 세간에 이름이 났다. 학파로는 선진(先秦)의 고서체(古書體)에 의한 원전(原典)을 중시하는 고문가(古文家)에 속한다. 상세하고 정치한 학풍은특히 문자학에 대한 깊은 조예에서 특색을 발휘하였으며, 《설문해자(說文解字)》(30권)는 한자의 형(形)·의(義)·음(音)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최초의자서(字書)로서 불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오경의 해석에 관한 이설(異說)을 집성한 《오경이의(五經異義)》(10권)도 있었으나 산일(散逸)되어 전하지 않는다.
헉슬리 [Huxley, Julian Sorell 1887.6.22~1975.2.15]
영국의 생물학자.
국적 : 영국
활동분야 : 생물학
출생지 : 영국 런던
주요저서 :《진화란 무엇인가》(1953)
런던 출생. T.H.헉슬리의 손자이며, 문학가 A.L.헉슬리의 형이다.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쌀연구소에서 일하였다. 귀국 후 런던대학교 교수, 왕립과학 연구소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 유네스코 사무국장직을 맡아보았고, 1958년에는 나이트(기사) 작위를 받았다. 유전학과 진화학 또는 상대생장에 관한 이론 등을 연구하였다. 또한, 많은 과학 계몽서를 출판하였는데, 문장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화론에서는 정통이론의 중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 《진화란 무엇인가 Evolution in Action》(1953) 등이 있다.
혜강 [ 康 223~262]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시인·철학자.
별칭 : 자 숙야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위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 《고사전》 《성무애악론》
자 숙야(叔夜). 초국질(洩國蛛:安徽省 북부) 출생. 위의 왕족과 결혼하여 중산대부(中散大夫:侍從職)로 승진하였으나 부정을 용서하지 않는 성격과 반유교적사상(反儒敎的思想)으로, 당시 권력층의 미움을 받았으며, 친구가 일으킨 사건에 말려들어 처형되었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로 《양생론(養生論)》 《산거원(山巨源)》에 주는 절교서(絶交書) 등 수많은 철학적·정치적 논문과 서간문을 썼다. 그 속에서 그는 전통적 유교사상과 인생관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인간 본래의 진실성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참신하고 기발한 발상으로 논쟁을 벌이는 한편, 자손에게 주는 문장(가훈)에서는 상식적이고 건전한 훈계를 남겼다. 거문고의 명수로 《금부(琴賦)》가 있는 것 이외에도, 시인으로서는 당시 주류를 이루어가던 오언시(五言詩)가 아니라, 《시경(詩經)》 이래의 사언시를 사랑하여 철학적 사색을 노래하는 것으로 일관하여 완적(阮籍)과 더불어 이름이 높았다. 주요저서로는 《고사전(高士傳)》 《성무애악론(聲無哀樂論)》 《석사론(釋私論)》 등이 있다.
혜동 [惠棟 1697~1758]
청나라 중기의 고전학자.
별칭 : 자 정우(定宇) ·송애(松崖)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장쑤성 우셴[吳縣]
주요저서 : 《주역술(周易述)》
자 정우(定宇) ·송애(松崖). 장쑤성 우셴[吳縣] 출생. 조부 혜주척(惠周三)으로부터 아버지 혜사기(惠士奇)에로 전래한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주역》 《상서(尙書)》 등의 경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한나라 때 경학(經學)의 복원에 힘을 기울였다. 《주역술(周易述)》 《역한학(易漢學)》 《역례(易例)》 《명당대도록(明堂大道錄)》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 《구경고의(九經古義)》 등의 저작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주역술》은 미완이기는 하나 30년의 노력을 기울인 저작으로서, 종래 애매하던 한대 역학의 실태를 정확하게 표출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평판이 높다.
청나라의 경학은 학파상으로 오파(吳派)와 완파(晥派)로 크게 나뉘는데, 그는 오파의 제1인자이며, 제자인 왕창(王昶) ·강성(江聲) ·여소객(餘蕭客) ·왕명성(王鳴盛) ·전대흔(錢大昕) 등도 저마다 특색 있는 학문을 발전시켰다.
혜시 [惠施 BC 370?~BC 309?]
중국 전국시대 송(宋)의 사상가.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철학
명가(名家)에 속하는 학자로서 장자(莊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고, 공손 룡(公孫龍)보다 약간 앞 시대의 사람이다. 양(梁)의 혜왕(惠王) ·양왕(襄王)을 섬기어 재상이 되었으나 종횡가(縱橫家) 장의(張儀)에게 쫓겨 초(楚)로 갔다가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생애를 마쳤다. 박학한사람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저서는 수레로 다섯이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없다. 그의 주장은 《장자》에서 가끔 찾아볼 수 있으며, 명가 중에서 궤변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형식과 현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치세(治世)의 이상상(理想像)을 설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호거인 [胡居仁 1434~1484]
명나라의 유학자(儒學者).
호 :경재(敬齋)
별칭 : 자 숙심(叔心)
국적 : 중국 명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장시성 야오저우[饒州]
주요저서 : 《거업록(居業錄)》,《경재집》
장시성 야오저우[饒州] 출생. 자 숙심(叔心). 호 경재(敬齋). 집안은 농업을 가업으로 삼았으나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사람됨이 근엄하여 성인(聖人)의 학문에 뜻을 두고, 선배인 오강재(吳康齋)의 문하에 들어가 정주학(程朱學)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성인의 학문은 경(敬)에 있다 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을 강술하였다. 백록서원(白鹿書院)과 동원서원(洞源書院)의 초청을 받아 강의하였고, 또 회왕(淮王)의 초청으로 《역(易)》을 강의하여 큰 대우를 받았다. 저서에 《거업록(居業錄)》 8권, 《경재집》 3권 등이 있다.
호안국 [胡安國 1074~1138]
중국 송(宋)나라의 유학자.
별칭 : 자 강후(康侯), 시호 문정(文定)
국적 : 중국 송(宋)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푸젠성[福建省] 충안[崇安]
주요저서 : 《춘추호씨전》(30권) 《자치통감거요보유》(100권) 《문집》(15권)
자 강후(康侯). 시호 문정(文定). 푸젠성[福建省] 충안[崇安] 출생. 벼슬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명예와 이익을 외면하고 고종(高宗) 때 급사(給事)에서 관을 떠났다. 출처진퇴(出處進退)가 엄격하고 도(道)를 굳게 지켰으며 이정자(二程子:程明道 ·程伊川) 중 특히 정이천을 사숙(私淑)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을 중히 여겼다. 정문(程門)의 제자 사상채(謝上蔡) ·양구산(楊龜山) 등과 친분을 맺었고 정문의 학문을 명확히 구명하는 데 힘썼다. 왕안석(王安石)이 《춘추(春秋)》를 폐하여 학관(學官)의 대열에 끼지 못한 데서 《춘추》의 학문이 쇠퇴한 것을 탄식하고, 이 책을 연구하는 데 20여 년을 보내며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30권을 저술하였다.그 밖에 《자치통감거요보유(資治通鑑擧要補遺)》 100권, 《문집(文集)》 15권이 있다.
환담 [桓譚 BC 24~AD 56]
중국 한(漢)나라 때의 유학자.
별칭 : 자 군산
국적 : 중국 한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안후이성
주요저서 : 《신론》
자 군산(君山). 안후이성[安徽省] 출생. 거문고에 능하였고 오경(五經)에 밝았으며, 고학(古學)을 좋아하여 유흠(劉歆)·양웅(楊雄)에게서 배웠다. 왕망(王莽)이 천하를 찬탈하였을 때 장악대부(掌樂大夫)와 중대부(中大夫)가 되었으며, 광무제(光武帝) 때 의랑급사중(議郞給事中)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광무제가 참(讖)을 이용하여 정사를 펴자 이것을 유학의 입장에서 저지하려다 노여움을 사, 육안군(六安郡)의 승(丞)으로좌천되어 부임 중에 죽었다.
고대(古代)를 이상(理想)으로 하여 현재를 바로잡고, 그 입장에서 정치를 행하기 위하여 《신론(新論)》 29편을 지었다. 이것은육가(陸賈)의 《신어(新語)》, 유향(劉向)의 《신서(新序)》를 이어받고, 왕충의 《논형(論衡)》을전개한 것으로, 한대(漢代) 유가사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황종염 [黃宗炎 1816~1886]
중국 청(淸)나라 후기의 경학자(經學者).
호 : 자고
별칭 : 자 회목
국적 : 중국 청
활동분야 : 경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 위야오
주요저서 :《우환학역》
자 회목(晦木). 호 자고(隣뮈). 저장성[浙江省] 위야오[餘姚] 출생. 송나라 주돈이(周敦燎)의 태극도(太極圖)가 도가(道家)의 무극도(無極圖)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송나라 역학(易學)의 근저를 뒤흔들어 놓았다.
저서에 《우환학역(憂患學易)》이 있다.
황종희 [黃宗羲 1610~1695]
중국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사상가.
호 : 남뢰(南雷)·이주(梨洲)
별칭 : 자 태충(太沖)
국적 : 중국 명(明) ·청(淸)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위야오[餘姚]
주요저서 : 《명유학안》 《명이대방록》
호 남뢰(南雷)·이주(梨洲). 자 태충(太沖). 저장성(浙江省) 위야오[餘姚] 출생. 아버지인 황존소(黃尊素)는 동림당(東林黨)의 명사로, 동림당 탄압 때 옥사하였다. 황종희는 숭정연간(崇禎年間:1628∼1644)에 당시의 문학적 결사 ‘복사(復社)’에 가맹하여 환관파(宦官派)를 배척하는 정치운동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고향의 젊은이 수백 명을 모아 의용군을 조직하였고, 또한 명나라 유왕(遺王)인 노왕(魯王)을 따라 만주(滿洲)에서 청군(淸軍)에 저항하였다. 후에 고향에 돌아가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청나라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평생토록 이민족의 군주를 섬기지 않았으며, 명사(明史)의 편찬시에는 아들과 제자를 명사관(明史館)에 보내어 고국의 역사를 남기려고 힘썼다.
그의 학문은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는데, 명대(明代)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특히 《명이대방록》은 청말(淸末) 혁명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