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심경心經, 심경 번역, 심경 해설, 심경 권1, 심경 권2, 심경 원문

일이삼선생 2024. 3. 4. 21:56
반응형


心經 卷一 
○ 帝曰人心惟危하고 道心惟微하니 惟精惟一하야사 允執厥中하리라
【글풀이】帝가 말하기를, “人心은 오직 危하고 道心은 오직 微하니, 오직 精하고 오직 一하여야 진실로 그 中을 執하리라.”
【뜻풀이】舜帝가 禹에게 天下를 전하려 하면서 이르기를, “人欲의 마음은 오직 위태로운 것이고 道義의 마음은 오직 隱微하니, 오직 精하게 살피고 오직 專一하여야만 진실로 適中한 道를 執持할 수 있는 것이다.” 했다.
【註】이 말은《書經》大禹謨篇에 있다. 
  人心이란 形氣의 欲求로 생기는 마음이니, 작게는 衣食住의 欲求에서 크게는 利權의 欲, 功名의 欲, 王座의 欲까지가 모두 이에 속한다. 이 마음은 늘 위태로워 不安하고 罪惡을 犯하기가 쉬우므로 위태롭다는 것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일순간에 잘못을 저질러 一平生 돌이킬 수 없는 大罪를 범하는 수도 있다.道心이란 道理의 마음이니, 흔히 말하는 理性의 感情이다. 예컨대 孝親 敬長 忠君 愛國이나 救貧 恤窮 같은 마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微를 朱子는 “微妙해서 보기 어렵다.”로 풀이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微弱’으로 풀이한 데도 있어 ‘理弱氣强’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사람의 마음이 形氣에 의해서 나오는 人心은 비교적 强力하고 理義의 마음은 비교적 微弱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二說이 모두 通하는 말이다.
精一 精은 精密이니, 精密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當하여 動하는 자기의 마음이 지금 人心인지 道心인지를 첫째로 살펴야 하고, 다음으로 事物에 對處할 方途를 精密하게 살피라는 것이니, 道心을 主로 하고도 中을 잃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一은 專一이니, 이런 마음이 언제나 持續되고 間斷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執中 中은 適中한 道理니, 事物에 對處함에 너무 過하거나 未及함이 없이 恰好하고 適當한 方途를 執守 施行함을 말한다. 이 말의 歸結點은 이 執中 二字에 있다. 그러기에 堯가 舜에게 天下를 傳할 때는 ‘允執其中’만을 말했고 舜은 禹에게 다시 執中할 수 있는 方法을 일러준 것이다. 

△ 五峰胡氏曰天理人欲이 同行異情이라 朱子曰道心雜出於人心之間하야 微而難見故로 必須精之一之而後에 中可執이라
【解】五峯胡氏(名 宏 字 仁仲 宋人)가 말하기를, “天理와 人欲이 한가지로 行하며 情이 다르다.” 주자가 말하기를, “道心이 人心의 사이에 雜出하는데 微하여 見하기 어려우니 故로 반드시 精하고 一한 뒤에 中을 執할 수 있다.”
 △는 明孝宗時人 程敏政의 附註를 選錄하고 附解했음. 下同.

△ 陸子靜云舜若以人心으로 爲全不好則須說使人去之어늘 今止說危者는 不可據以爲安耳라 精者는 欲其精察而不爲所雜也라
【解】陸子靜(名 九淵 號 象山 諡 文安公)이 말하기를, “舜이 만약 人心을 전혀 좋지 않은 것이라 했다면 모름지기 사람으로 하여금 버리도록 말했을 것이거늘 이제 危하다고 말하는데 그쳤으니, 이를 據하여 써 安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精이란 그 精하게 살펴 雜한 바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 莊子云其熱焦火요 其寒凝冰이니 凡苟免者는 皆幸也라 
【解】莊子(名 周 戰國時宋人)가 말하기를, “(人心은) 그 熱할 때는 타는 불이요, 그 寒할 때는 언 얼음이니, 무릇 진실로 禍를 免한 者는 모두 요행이다.”(熱은 怒 寒은 懼)

△ 問聖人도 亦有人心이라하니 不知亦危否아 朱子曰聖人은 全是道心主宰故로 其人心이 自是不危라 若只是人心은 也危故로 曰惟聖이라도 罔念이면 作狂이라하니라
【解】묻노니, “聖人도 또한 人心이 있다고 하니 또한 危한지 모르겠습니다.” 朱子가 말하기를, “聖人은 全혀 道心이 主宰가 되므로 그 人心이 자연 危하지 않다. 만약 人心만을 말하자면 危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聖일지라도 念하지 않으면 狂을 作한다.’고 한 것이다.

○ 詩曰上帝臨女하니 無貳爾心하라 又曰無貳無虞어다 上帝臨女니라 
【글풀이】詩에 말하였기를, “上帝가 女를 臨하니 爾의 心을 貳치 말라.” 또 말하였기를, “貳치 말고 虞치 말라. 上帝가 女를 臨한다.”
【뜻풀이】《詩經》大雅 大明篇에 하였기를, “너의 마음을 두가지로 먹지 말라. 上帝(天神)가 너를 내려다 보신다.” 했고, 또《詩經》魯頌 閟宮篇에 하였기를, “두가지로 먹지 말고 걱정을 하지 말라. 上帝가 너를 내려다 보고 있다.” 했다. 여기서는 章을 끊어 義를 取한 것이니, “하늘이 내려다 보니 너의 本心을 변하지 말라.”는 뜻이다.《詩經》本旨와는 取義가 다르다.

△ 程子曰毋不敬이면 可以對越上帝니라
【解】程子(伊川)가 말하기를, “敬치 않음이 없으면 가히 上帝께 對할 수 있다.”
△ 龜山楊氏曰道無顯微之間하니 愼其獨이 所以對越在天也라 
【解】龜山楊氏(名 時 字 中立 諡 文靖公)가 말하기를, “道는 나타난 데와 隱微한 데의 間隔이 없으니, 그 獨知處를 삼가함이 하늘에 있는 上帝를 對할 수 있는 바다.”

○ 詩曰視爾友君子하니 輯柔爾顔하야 不遐有愆가호대 相在爾室하니 尙不愧于屋漏아 無曰不顯이라 莫予云覯라하라 神之格思를 不可度思온 矧可射思아
【글풀이】詩에 하였기를, “네가 君子를 友함을 보니 네 顔을 輯柔하여 어찌 愆이 있지 아니한가 하되 네 室에 있음을 視하니 거의 屋漏에 愧함이 없는가? 顯치 않아 나를 覯한 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神의 格함을 可히 度할 수 없으니 하물며 可히 射하랴.”
【뜻풀이】《詩經》大雅 抑篇에 하였기를, (衛武公 自警의 말) “네가 君子들과 벗을 할 때를 보면 顔色을 온화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여 혹시라도 잘못이 있을까 하지만 네가 네 방안에 있을 때를 보면 행여 깊은 구석 은밀한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 ‘이곳은 드러나지 않는 곳이라서 나를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귀신이 이르러 옴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神을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衛武公의 姓은 姬, 名은 燬. 春秋時 衛의 賢君. 

○ 易乾之九二에 子曰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야 閑邪存其誠이니라
【글풀이】易 乾의 九二에 子 말하기를, “庸言을 信하며 庸行을 謹하야 邪를 閑하고 그 誠을 存해야 한다.”
【뜻풀이】周易의 乾卦 二爻에 對한 孔子의 文言에 하였기를, “平常한 말도 信實히 하고 平常한 行爲도 謹愼히 하여 邪惡이 들어옴을 막고 眞實함을 保存할지니라.”
【註】易《易經》. 
乾 六畫이 모두 陽인 卦名. 
九 老陽의 數, 少陽은 七. 二爻는 下爻부터 세어 올라가 두 번째 爻. 
文言 孔子가《周易》의 解說을 위해 쓴 十翼 中의 一. 
庸 平常. 
閑 둘러 막아 외부에서 못 들어오게 함이니, 마치 짐승을 기르는 우리와 같은 뜻. 

△ 程子曰庸信庸謹은 造次必於是也라 又曰閑邪則誠自存이니 不是外面에 將一箇誠하야 來存着이라 又曰如何是閑邪오 非禮勿視聽言動이면 邪斯閑矣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庸言을 信하고 庸行을 謹함은 造次(다급할 때)라도 반드시 이대로(忠信) 하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邪를 막으면 誠이 자연 存해지는 것이니, 그것이 外面에서 一箇의 誠을 가지고 와서 存着한 것이 아니다.” 또 말하기를, “어떻게 함이 邪를 閑한 것인가? 禮가 아닌 것을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動하거나 하지 않으면 邪가 막아지는 것이다.”

○ 易坤之六二에 曰君子ㅣ 敬以直內하고 義以方外니 敬義立而德不孤라 直方大하야 不習이라도 無不利하니 則不疑其所行也라
【글풀이】易의 坤의 六二에 하였기를, “君子ㅣ 敬하야 써 內를 直하게 하고 義하야 써 外를 方하게 하나니, 敬과 義가 立함에 德이 孤치 않다. 直하고 方하고 大하여 習치 않아도 利치 않음이 없나니, 그 行할 바를 疑치 않으니라.”
【뜻풀이】周易 坤卦의 六二爻에 하였기를, “君子가 敬하여 속을 곧게 하고 義하여 밖을 方正하게 하는 것이니, 敬과 義가 서면 德이 孤單하지 않아 直하고 方하고 大하여 익히지 않아도 모든 일을 順利하게 못함이 없으니, 이는 그 行하는 바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註】坤《周易》에 六爻가 모두 陰인 卦名. 
六 老陰의 數. 少陰은 八. 
敬 마음이 一을 主하고 헷갈림이 없는 상황. 
內 속이니, 즉 마음을 말함. 
直 正直. 
義 마음을 옳게 裁制함. 
方 方整. 
外 言動. 
德不孤 心德이 외롭고 좁지 않음. 
直方大 즉 正直․方整․廣大. 
不習無不利 事物에 對處할 行爲를 미리 練習하지 않고도 날카롭게 잘 處理하지 못함이 없음. 
不疑其所行 그 行할 바에 自信이 있어 의심하지 않음.  

△ 伊川先生曰敬立而內直하고 義形而外方이니 義形於外요 非在外也라 又曰主一之謂敬이니 直內는 是主一之義라 至於不敢欺와 不敢慢과 尙不愧于屋漏는 皆是敬之事也라 但存此하야 涵養久之면 自然天理明이니라
【解】伊川先生이 말하기를, “敬이 立함에 內가 直하고 義가 形함에 外가 方하니, 義가 外에 나타남이요 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말하기를, “一을 主함을 敬이라 이르나니, 內를 直케 함은 바로 一을 主하는 뜻이다. 감히 속이지 아니함과 감히 거만하지 아니함과 행여 屋漏에 부끄럽지 않을까 함이 모두 敬의 일이다. 다만 이를 存하여 涵養(가라앉혀 保養함)하기를 오래하면 자연히 天理가 밝아지는 것이다(道心이 主가 된다는 말).”

△ 程子曰敬義立而德不孤는 至于聖人도 亦止如是요 更無別途니 穿鑿繫累는 自非道理라 故로 有道有理는 天人이 一也라 更不分別이니 浩然之氣ㅣ 乃吾氣也라 養而不害則塞乎天地요 一爲私心所蔽則欿然而餒하야 知其小也라 思無邪毋不敬只此二句를 循而行之면 安得有差리오 有差者는 皆由不敬不正也라 又曰敬義夾持면 直上達天德이 自此니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敬과 義가 立함에 德이 孤치 않음은 聖人에 이르러도 또한 이와 같음에 止한다. 다시 別 길이 없다. 穿鑿(억지를 팜)을 하고 繫累(一에 拘係됨)함은 본시 道理가 아니다. 故로 道가 있고 理가 있음은(理는 体 道는 用) 天과 人이 一이다. 다시 分別되지 않는 것이다. 天地間에 浩然(廣大)한 氣는 바로 나의 氣니, 養하고 害치지 않으면 天地에 꽉 차고, 私心의 蔽한 바가 되면 홀쭉 쭈그러들어 그 작아졌음을 알 수 있다. 思無邪(생각이 邪가 없음)와 無不敬(敬치 않지 말라)의 이 二句만을 따르고 行하면 어찌 錯誤가 있으리오. 錯誤가 있는 것은 모두 敬치 않고 正치 않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말하기를, “敬과 義가 夾하여 持하면(안팎으로 끼어 잡아줌) 곧바로 올라가 天德(聖德)에 도달함이 이로부터 되는 것이다.”

△ 問丹書의 敬勝怠者는 吉하고 怠勝敬者는 滅하며 義勝欲者는 從하고 欲勝義者는 凶하노이다 朱子曰敬便竪立하고 怠便放倒하며 以理從事는 是義요 不以理從事는 是欲이라 這敬義는 是體用이니 與坤卦說로 同이라
【解】“丹書(《呂氏春秋》에 文王 時에 赤烏가 丹書를 啣하고 周社에 앉았다고 했다.)에 하였기를, ‘敬이 怠를 勝하는 者는 吉하고 怠가 敬을 勝하는 者는 滅하며 義가 欲을 勝하는 者는 從(順)하고 欲이 義를 勝하는 者는 凶하다.’ 함을 묻습니다.” 朱子가 말하기를, “敬하면 곧 竪立이 되고 怠하면 곧 꺼꾸러진다. 道理로써 從事를 하면 그것이 義요 道理로써 從事치 않으면 그것이 欲이다. 이 敬과 義는 體와 用이니, 坤卦 文言의 말과 같다.”

△ 朱子又曰敬以直內는 是無纖毫私意하야 胸中이 洞然하야 徹上徹下하야 表裏如一이요 義以方外는 是見得是處에 決定恁地하고 不是處는 決定不恁地하야 截然方方正正하야 須是自將去做工夫니라
【解】朱子가 또 말하기를, “敬하여 써 內를 直케 함은 오라기 털끝만한 私意도 없어 가슴 속이 훤하여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며 겉과 속이 한결같음이요, 義以方外란 옳은 것을 봄에 決定하여 그렇게 하고 옳지 않은 것은 決定코 그렇게 하지 않아 철저히 모나고 正直하게 함이니, 모름지기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 朱子堂旁의 兩夾室을 名其左曰敬齋라하고 右曰義齋라하야 記之曰嘗讀易而得其兩言하니 曰敬以直內와 義以方外라 以爲爲學之要 無以易此而未知所以用力之方也러니 及讀中庸에 見所論脩道之敎而必以戒愼恐懼로 爲始하고 然後에 得所以持敬之本이요 又讀大學하야 見所論明德之序而必以格物致知로 爲先하고 然後에 得所以明義之端호라 旣而觀夫二者之功이 一動一靜으로 交相爲用하니 又有合乎周子太極之論이라 然後에 知天下之理ㅣ 幽明鉅細와 遠近淺深이 無不貫乎一者라 樂而玩之하야 足以終吾身而不厭이니 又何暇夫外慕哉아
【解】朱子의 堂곁 두 夾室을 그 左를 名하여 敬齋라 하고 右를 義齋라 하여 記하기를, “일찍이《易經》을 읽어 그 兩言을 얻었으니, 敬以直內와 義以方外다. 생각하기를, ‘學을 하는 要가 이를 바꿀 것이 없다.’ 했으나, 力을 用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니,《中庸》을 읽음에 論한 바 修道의 敎에 반드시 戒愼하고 恐懼함으로써 始를 삼은 것을 보고나서야 敬을 持한 바의 本을 얻었고, 또《大學》을 읽다가 論한 바 德을 밝히는 序에 반드시 物을 格하고 知를 致함으로써 先을 삼음을 보고나서야 義를 밝히는 端을 얻었다. 이윽고 보니, 二者의 功이 一은 動이요 一은 靜으로 사귀어 서로 用이 되니, 또 周子의 太極의 論과 合致가 되었다. 그래서야 天下의 理가 幽明, 鉅細, 遠近, 深淺이 一로 貫通되지 않음이 없음을 알고 樂하며 玩賞하여 足히 써 내 몸을 終하도록 厭치 않노니, 또 어찌 外를 사모할 겨를이 있으리오.”

△ 程子曰主一之謂敬이요 無適之謂一이라 又曰整齊嚴肅則心自一이니 一則無非僻之干矣니라 又曰嚴威儼恪이 非敬之道나 但致敬을 須從此入이니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一을 主함을 敬이라 이르고 適(헷갈림)함이 없음을 一이라 이른다.” 또 말하기를, “몸가짐을 整齊하고 엄숙히 하면 마음이 스스로 一해지니, 一해지면 그릇되고 간사함의 간범함이 없게 된다.” 또 말하기를, “엄하고 위엄 있고 儼然(威貌)하고 씩씩함이 敬의 道는 아니지만 단 敬을 이룩함은 모름지기 이로 쫓아 들어가는 것이다.”

△ 上蔡謝氏曰敬是常惺惺法이라
【解】上蔡謝氏(名 良佐 字 顯道 上蔡人)가 말하기를, “敬은 바로 늘 惺惺(정신이 번쩍 들어 있는 상태)해 있는 法이다.”

△ 和靖尹氏曰敬者는 其心이 收斂하야 不容一物之謂라
【解】和靖尹氏(名 焞)가 말하기를, “敬이란 그 心이 收斂하여 一物도 용납치 않음의 이름이다.” 

△ 問敬莫只是涵養이며 義便分別是非잇가 朱子曰不須恁地說이라 不敬時便是不義니라
【解】묻노니, “敬은 이 涵養이 아니며 義는 이 是非를 분별함이 아닙니까?” 朱子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敬치 않은 때는 곧 不義인 것이다.” 

○ 損之象에 曰山下有澤이 損이니 君子以하야 懲忿窒慾하나니라
【글풀이】損의 象에 하였기를, “山아래 澤이 있음이 損이니, 君子ㅣ 以하야 忿을 懲하고 慾을 窒한다.”
【뜻풀이】《周易》損卦의 象辭(周公이 써놓은 말)에 하였기를, “山下에 澤이 있음이 損卦의 象이니, 君子가 이 뜻을 취하여 분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는 것이다.”
【註】山의 솟아 있음이 忿怒의 솟음같고 澤의 받아들임이 慾心부림과 같다. 그래서 山의 象을 보고 솟은 忿怒를 懲戒하고 澤의 象을 보고 慾情을 窒塞한다.

△ 伊川先生曰脩己之道에 所當損者ㅣ 惟忿與慾이니 故로 懲戒其忿怒하고 窒塞其意欲也라
【解】伊川先生이 말하기를, “己를 脩하는 道에 마땅히 損할 바인 者는 오직 忿과 慾이니, 故로 그 忿怒를 懲戒하고 그 意欲을 窒塞해야 한다.”

△ 明道先生이 謂張子曰人之情이 易發而難制者ㅣ 惟怒爲甚하니 第能於怒時에 遽忘其怒而觀理之是非면 亦可見外物之不足惡요 而於道에 亦思過半矣리라
【解】明道先生이 張子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情이 發하기 쉽고 制하기 難한 者 오직 怒가 甚함이 되니, 다만 能히 怒한 때에 문득 그 怒를 잊고 理의 是非를 보면 또한 外物의 足히 惡하잘 것이 없음을 볼 것이요, 道에 또한 思가 半을 過하리라.”

△ 伊川先生曰人之爲不善은 欲이 誘之也라 誘之而不知則至於滅天理而不反이라 故로 目欲色 耳欲聲으로 以至鼻之於香과 口之於味와 四支之於安佚에 皆然하니 此皆有以使之也라 然則何以窒其欲고 曰思而已矣라 學者ㅣ 莫貴於思니 惟思而能窒慾이라 曾子三省은 窒慾之道也라 又曰吾以忘生徇欲으로 爲深恥호라
【解】伊川先生이 말하기를, “사람의 不善을 함은 欲이 誘한 것이다. 誘하는데 알지 못하면 天理를 滅함에 이르고 反하지 못하니, 故로 目의 色을 欲함과 耳의 聲을 欲함으로 鼻의 香에와 口의 味에와 四肢의 安佚에 모두 그러하니, 이는 다 써 使함이 있어서이다. 그런즉 어찌해야 그 慾을 窒할꼬? 思할 따름이다. 學者 思보다 貴함이 없으니, 오직 思함에 능히 慾을 막는다. 曾子의 三省(忠, 信, 傳習)은 慾을 窒하는 道이다.” 또 말하기를, “나는 生(衛生)을 잊고 欲을 따름을 깊은 부끄러움으로 삼았다.”

△ 五峯胡氏曰氣感於物에 如奔霆하야 狂不可制니 惟明者는 能自反하고 勇者는 能自斷이니라
【解】五峯胡氏가 말하기를, “氣가 物에 感함에 奔한 우레와 같아 狂하여 制할 수 없으니, 오직 明한 者는 能히 스스로 反하고 勇한 者는 能히 스스로 斷한다.”

△ 朱子曰向見呂伯恭說少時에 性氣粗暴하야 嫌飮食不如意하면 便打破家事러니 後日久病에 只將一冊論語하야 早晩閑看이라가 至躬自厚而薄責於人하야 忽然覺得意思ㅣ 一時平了하고 遂終身無暴怒라하니 此可謂變化氣質法이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전에 呂伯恭(名 祖謙)을 보았더니, 말하기를, ‘少時에 性氣가 粗暴하여 飮食이 뜻에 맞지 않음을 嫌하면 문득 家事(家具)를 打破하곤 했는데, 뒷날 오래 病들어 다만 一冊의《論語》를 가지고 아침 저녁으로 한가히 보다가「몸소 스스로 厚히 하고 남에게 薄하게 責하라」는 대목에 이르러 忽然히 意思가 一時에 平해짐을 覺하고 드디어 終身토록 暴怒하지 않았다.’ 하니, 이는 氣質을 變化하는 法이라고 할 수 있다.”

○ 益之象에 曰風雷益이니 君子ㅣ 以하야 見善則遷하고 有過則改니라
【글풀이】益의 象에 하였기를, “風雷가 益이니, 君子가 以하야 善을 見하면 遷하고 過가 있으면 改하니라.”
【뜻풀이】《周易》益卦의 象辭에 하였기를, “風(☴)雷(☳)가 合해진 象이 益이니, 君子가 이런 뜻으로 써 善을 보면 옮겨가고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것이다.”
【註】우레가 진동하는데 바람이 일면 그 위력이 더해지므로 益이란 卦名을 얻은 것이요, 善을 보면 재빨리 옮기고 過가 있으면 재빨리 고치기를 風雷처럼 한다는 것인데, 또 그것이 나에게는 莫大한 益이 된다는 것이다.

△ 程子曰見善能遷則可以盡天下之善이요 有過能改則無過矣니 益於人者ㅣ 莫大於是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善을 보고 能히 遷하면 可히 써 天下의 善을 다할 수 있고 過가 있어 能히 고치면 過가 없게 되리니, 人에게 益되는 것이 이보다 大한 것이 없다.”
△ 明道先生曰子路는 人이 告之以有過則喜하니 亦百世之師라 又曰予年十六七時에 好田獵이러니 旣而自謂已無此好라하야늘 周茂叔曰何言之易也오 但此心이 潛隱未發하야 一日萌動이면 復如初矣니라하더니 後十二年에 暮歸在田野間하야 見田獵者하니 不覺有喜心일세 方知果未也호라
【解】明道先生이 말하기를, “子路(仲由, 孔子弟子)는 남이 過가 있음으로 告하면 喜하였으니, 또한 百世의 師다.” 또 말하기를, “내가 나이 十六七時에 사냥을 좋아하다가 이윽고 스스로 이르기를 이미 좋아함이 없다고 했더니, 周茂叔이 말하기를, ‘어찌 말하기를 쉽게 하는고. 다만 이 마음이 潛隱하여 發하지 않다가 一日에 싹이 터 動하면 다시 처음과 같게 된다.’ 하였다. 그後 十二年만에 저물녘에 돌아가며 田野間에서 사냥하는 者를 보고 喜心이 있음을 覺치 못하여 바야흐로 과연(喜心이 없지) 못함을 알았다.”

△ 伊川先生曰罪己責躬이 不可無나 然亦不當長留在心胸爲悔니라
【解】伊川先生이 말하기를, “己를 罪하고 躬을 責함이 可히 없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또한 마땅히 길게 心胸에 머물러 있게 하여 悔를 하지 않아야 한다.”

△ 朱子曰遷善을 當如風之速이요 改過를 當如雷之猛이라 又曰遷善字는 輕하고 改過字는 重하니 遷善은 如滲淡之物을 要使之白이요 改過는 如黑之物을 要使之白이니 用力이 自是不同이라 遷善者는 但見人做得一事强我하고 心有所未安하야 卽便遷之요 若改過는 須是大段勇猛이라야 始得이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善에 遷하기를 마땅히 風의 速함 같이 하고 過를 改하기를 마땅히 雷의 猛함과 같이 한다.” 또 말하기를, “善에 遷한다는 字는 輕하고 過를 改한다는 字는 重하니, 善에 遷함은 마치 滲淡(희멀건 빛)한 物을 하여금 白케 하려는 것이요, 過를 改함은 마치 黑한 物을 하여금 白케 하려는 것과 같아 본시 같지 않다. 遷善은 다만 남이 一事를 함이 나보다 나은 것을 보고 마음에 不安한 바가 있어 곧 옮겨 감이요, 改過는 모름지기 대단히 勇猛스러워야 되는 것이다.”

○ 復之初九에 曰不遠復이라 无祗悔라 元吉이라하니 子曰顔氏之子ㅣ 其殆庶幾乎저 有不善이면 未嘗不知하고 知之면 未嘗復行也니라
【글풀이】復의 初九에 하였기를, “遠치 않아 復한지라, 悔에 祗하지 않으니 크게 吉하다” 하니, 子가 말하기를, “顔氏의 子가 그 거의할진저. 善치 않음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아니치 않고, 알면 일찍이 다시 行하지 아니하니라.”
【뜻풀이】復卦의 初九 爻辭에 하였기를, “잘못을 오래가지 않아 회복하여 후회함에 이르지 아니하니 크게 吉하다.” 했는데, 孔子가 말하기를, “顔氏의 子(回)가 아마도 여기에 가까우리라. 그는 자기에게 잘못이 있으면 일찍이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없고, 알고나면 일찍이 그런 잘못을 두 번 다시 행하는 일이 없었다.” 했다.

△ 程子曰如顔子地位에 豈有不善이리오 所謂不善者는 只是微有差失이니 才差失이면 便能知之요 知之면 便更不萌作이니 顔子는 大率與聖人皆同이요 只這便有分別이니 若無則便是聖人이라 曾子의 三省은 只是緊約束이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顔子같은 地位에 어찌 不善이 있으리오. 이른바 不善이란 것은 다만 약간 差失이 있음이니, 겨우 差失을 하면 곧 능히 알고 알면 곧 다시 싹이 作하지 않으니, 顔子는 대체로 聖人과 같고 다만 여기가 문득 분별이 있으니, 이것이 만약 없으면 문득 聖人이다. 曾子의 三省(忠, 信, 傳習)은 다만 긴요하게 묶음이다.”

△ 邵子曰言之於口ㅣ 不若行之于身이요 行之于身이 不若盡之于心이니 言之于口는 人得而聞之요 行之于身은 人得而見之요 盡之于心은 神得而知之라 人之聰明도 猶不可欺온 況神之聰明乎아 是知無愧于口ㅣ 不若無愧于身이요 無愧于身이 不若無愧于心이니 無口過는 易나 無身過는 難하고 無身過는 易나 無心過는 難이니라
【解】邵子(名 雍 字 堯夫 諡 康節)가 말하기를, “입으로 말함이 몸으로 行함만 못하고 몸으로 行함이 마음으로 다함만 못하다. 입으로 말함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몸으로 행함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마음으로 다함은 神이 알 수 있다. 사람의 듣고 봄도 오히려 속일 수가 없거든 하물며 神의 듣고 봄이랴. 이래서 입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몸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만 못하고 몸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입의 잘못이 없기는 쉬우나 몸의 잘못이 없기는 어렵고 몸의 잘못이 없기는 쉬우나 마음의 잘못이 없기는 어렵다.”

△ 朱子曰屛山先生病時에 熹ㅣ 以童子侍疾하야 一日에 請問平昔入道次第한대 先生이 欣然告曰吾於易에 得入德之門焉하니 所謂不遠復者ㅣ 乃吾之三字符也라하다 又曰今人이 只知顔子의 知之未嘗復行이 爲難하고 殊不知有不善未嘗不知ㅣ 是難處라 今人이 亦有說道知得這道理호대 及事到面前에 又却只隨私欲做去하야 前所知者ㅣ 都自忘了하나니 只爲是不曾知라 有不善에 未嘗不知하고 知之未嘗復行은 直是顔子天資好니 如至淸之水ㅣ 纖芥必見이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屛山先生(姓 劉 名 子翬 字 彦仲 朱子少時師)이 病들었을 때에, 熹(朱子 名)가 童子로써 疾을 모시다가 一日에 平昔의 入道한 次第를 묻자, 先生이 欣然히 告해주시를 ‘내가《易經》에서 德에 들어간 門을 얻었으니, 이른바 不遠復이란 것이 바로 나의 三字 符節(守令이나 將帥가 항시 차고 있는 信標)이다.’ 했다.”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이 다만 顔子의 ‘知하면 다시 行하지 않음’이 難한 줄만 알고, 자못 ‘不善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아니치 않음’이 어려운 곳임을 알지 못한다. 지금 사람이 또한 이 道理를 안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나 일이 面前에 이름에 미치면 다시 곧 私慾을 따라 가버려 前에 알았던 바를 모두 잊어버리니, 다만 일찍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不善이 있음에 일찍이 알지 아니치 않고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하지 않음은 바로 顔子의 天資가 좋음이니, 마치 지극히 맑은 물이 자그마한 풀잎도 반드시 보임과 같다.”
△ 南軒張氏曰夫習之有斷絶者는 心過ㅣ 有以害之也라 心過ㅣ 尤難防이니 一萌于中이면 雖非視聽所及이나 而吾時習之功이 已間斷矣니 察之緩則滋長矣라 惟人이 安於故常하야 以爲微而忽焉하나니 此豈可使之熟也哉아 今日一念之差를 而不痛以求改則明日에 茲念이 重生矣오 積而熟이면 時習之功이 銷矣요 不兩立也라 是以로 君子懼焉하야 萌于中이면 必覺하고 覺則痛懲而絶之를 如分桐葉然하야 不可復續이니 如此則過境이 自踈하고 時習之功이 專하야 以至於德以凝道라 顔子之不貳는 一絶不復生也라
【解】南軒張氏(名 栻 字 敬夫)가 말하기를, “무릇 習(學而時習)의 斷絶이 있는 것은 心의 過가 써 害함이 있음이다. 心過를 더욱 防하기 難하니, 한 번 속에 싹트면 비록 視聽의 及한 바가 아니지만 나의 時習한 功이 이미 틈이 나고 끊어져 살피기를 더디하면 불어나고 자란다. 오직 사람들이 옛 平常함에 편히 여겨 隱微하다고 소홀히 여기나니, 이를 어찌 하여금 익혀지게 하리오. 오늘 一念의 差를 아프게 고치기를 求하지 않으면 明日에 이 생각이 거듭 생기고 쌓여서 익어지면 時習의 功이 녹아 버리고 兩으로 立하지 못한다. 그래서 君子가 懼하여 속에 싹트면 반드시 깨닫고 깨달으면 아프게 징계하여 끊기를 마치 桐葉을 나누듯하여 다시 이어질 수 없게 한다. 이렇게 하면 過의 지경이 자연 멀어지고 時習의 功이 專해져 德으로써 道를 凝함에 이른다. 顔子의 不貳過는 한 번 끊으면 다시 생기지 않은 것이다.”
【註】如分桐葉 唐의 李懷光이 叛했다가 降伏하기를 請하자 德宗이 받아들이려 하거늘, 李泌이 桐葉을 들고 와서 쪼개가지고 말씀드리기를, “懷光은 陛下에게 君臣의 分이 이 桐葉과 같습니다.” 했다. 다시 이어지지 못함을 뜻함.

○ 子는 絶四하시니 毋意毋必毋固毋我러시다
【글풀이】子는 四를 絶하니, 意를 毋하고 必을 毋하고 固를 毋하고 我를 毋하였다.
【뜻풀이】孔子는 네 가지를 끊어버렸으니, 意圖的임이 없고 期必的임이 없고 固滯함이 없고 我私的임이 없었다.
【註】毋는 勿字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無字의 뜻으로 풀이를 함.

△ 朱子曰意는 私意也오 必은 期必也오 固는 執滯也오 我는 私己也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意는 私意요 必은 期必이요 固는 執滯(고집 막힘)요 我는 私己(私的 利己心)다.”

△ 有人說無心한대 程子曰無心이 便不是하니 只當云無邪心이니라
【解】人이 無心을 말한 이가 있거늘, 程子가 말하기를, “心이 無함은 옳지 않으니, 다만 마땅히 邪心이 없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 顔淵이 問仁한대 子曰克己復禮ㅣ 爲仁이라 一日克己復禮면 天下ㅣ 歸仁焉이니 爲仁由己라 而由人乎哉아 顔淵曰請問其目하노이다 子曰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顔淵曰回雖不敏이나 請事斯語矣리이다
【글풀이】顔淵이 仁을 묻는데, 子ㅣ 말하기를, “己를 克하고 禮를 復함이 仁을 함이니라. 一日에 己를 克하고 禮를 復하면 天下ㅣ 仁을 歸하나니, 仁을 함이 己로 由하니 人으로 由하랴.” 顔淵이 말하기를, “請컨대 그 目을 묻노이다.” 子ㅣ 말하기를, “禮ㅣ 아니면 視치 말고 禮ㅣ 아니면 聽치 말고 禮ㅣ 아니면 言치 말고 禮ㅣ 아니면 動치 말라.” 顔淵이 말하기를, “回 비록 敏치 못하나 請컨대 이 말을 事하리이다.”
【뜻풀이】顔淵(名 回)이 仁을 묻자, 孔子가 대답하기를, “己私를 이기고 禮를 復(履行)함이 仁을 함이다. 하루라도 己私를 이기고 禮를 履行하면 天下 어디서든지 남들이 仁을 함을 歸(許與)하게 된다. 그러나 그 仁을 함이 自己로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느냐.” 顔淵이 다시 “청컨대 그 行할 條目을 묻겠습니다.” 하자, 孔子가 말하기를, “禮가 아닌 것은 보려고 하지 말고 禮가 아닌 것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禮가 아닌 것을 말하지 말고 禮가 아닌 행동은 하지를 말라.” 하니, 顔淵이 말하기를, “回가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청컨대 이 말씀을 일삼겠습니다.” 했다.
【註】克己復禮의 復字를 古今에 모두 回復의 復으로 解釋하고 있으나 筆者는 斷然 踐履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論語》에 ‘有子曰 信近於義면 言可復也’의 復을 朱子註에 ‘復 踐言也’라 하여, 이 復字를 踐意로 풀이한 바 있고,《周易》大壯卦 象辭에 ‘君子以非禮弗履’란 말이 있으니, 復禮는 바로 禮를 踐履한다는 뜻이다. 만약 回復의 復으로 풀이하면 語意가 通하지 않으니, 復禮가 當初 禮의 狀態로 되돌아 가라는 뜻이 된다. 學者가 어찌 當初 禮대로 言行을 하고 있었던가. 己만 克하면 곧 禮란 말이 苟且한 抑說이니, 私가 없다 해서 어찌 꼭 禮節에 맞겠는가.

△ 伊川先生曰天地儲精에 得五行之秀者ㅣ 爲人이니 其本也ㅣ 眞而靜하고 其未發也에 五性이 具焉하니 曰仁義禮智信이라 形旣生矣에 外物이 觸其形而動其中矣니 其中이 動而七情이 出焉하니 曰喜怒哀懼愛惡欲이라 情旣熾而益蕩이면 其性이 鑿矣니 故로 覺者는 約其情하야 使合於中하야 正其心養其性而已라 然이나 必先明諸心하야 知所往然後에 力行以求至焉이니 若顔子之非禮勿視聽言動不遷怒貳過者則其好之篤而學之得其道也라 然이나 其未至於聖人者는 守之也오 非化之也니 假之以年則不日而化矣리라 今人은 乃謂聖本生知요 非學可至라하야 而所以爲學者不過記誦文辭之間하니 其亦異乎顔子之學矣라
【解】伊川先生이 말하기를, “天地가 精氣를 儲畜함에 五行(水火金木土의 氣)의 빼어난 기운을 얻은 者가 人이 되었으니, 그 本初는 眞實하고 靜定하여 그 感情이 發하지 않았을 때에 五性이 갖추었으니, 그것은 仁義禮智信이다. 形이 이미 生함에 外物이 그 形에 부딪혀 그 속을 動하게 하나니, 그 속이 動하여 七情이 나오니, 그것은 喜怒哀懼愛惡欲이다. 情이 이미 불타 더욱 放蕩해지면 그 性이 鑿(傷)해진다. 故로 이를 깨달은 者는 그 情을 要約하여 하여금 中道에 合하게 하여 그 心을 正하고 그 性을 養(保護)할 따름이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心을 밝혀 갈 바를 안 뒤에 힘써 行하여 至하기를 求하나니, 마치 顔子의 ‘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怒를 옮기지 않고 過를 두 번 하지 않음’ 같은 것은 그 好함이 독실하여 學함이 그 道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 聖人에 이르지 못한 것은 守한 것이요 化하지 못한 것이다. 年으로써 假했더라면 日이 못되어 化했으리라. 今人은 이에 이르기를, ‘聖人은 본시 生而知之한 것이요 學하여 可이 至한 것이 아니다.’ 하여, 써 學을 하는 바가 記誦 文辭의 사이에 지나지 않으니, 그 또한 顔子의 學하는 바로 더불어 다른 것이다.”

△ 張子曰天體物而不遺ㅣ 猶仁體事而無不在也니 禮儀ㅣ 三百과 威儀ㅣ 三千이 無一物之非仁也며 昊天曰旦에 及爾出王하며 昊天曰旦에 及爾游衍이 無一物之不體也니라 又曰學者ㅣ 且須觀禮니 蓋禮者는 滋養人德性이요 又使人으로 有常業하야 守得定이니 非禮勿言非禮勿動이 卽是養之之術이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天이 物에 體되어 빠뜨림이 없음이 仁이 事의 體되어 在치 않음이 없음과 같다. 禮儀(經禮) 三百과 威儀(曲禮) 三千이 一物도 仁이 아님이 없고(《詩經》에)‘하늘이 밝아짐에 너와 함께 가고 있으며 하늘이 아침이 됨에 너와 함께 노닐고 있다.’ 한 것이 바로 (天理가) 一物도 體가 되지 않음이 없음이다.” 또 말하기를, “學者가 모름지기 禮書를 볼지니, 원래 禮란 사람의 德스런 성격을 길러준 것이며, 또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한 業이 있게 하여 지킴이 定해지게 한다. 禮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바로 (性을) 養하는 術이다.”

△ 朱子曰顔子의 克己는 如紅爐上一點雪이라 又曰孔子ㅣ 告顔子以克己復禮ㅣ 語雖切이나 看見不似告樊遲의 居處恭執事敬與人忠의 更詳細니 蓋爲樊遲의 未會見得箇己是甚이며 禮是甚하야 只分曉說하야 敎恁地做去니라 又曰如有一條大路에 又有一條小路하야 明知合行大路나 然小路面前에 有箇物引着自家하야 不知不覺하야 行從小路去하고 及至前面에 荊棘蕪穢하면 又却生悔니 此便是天理人欲의 交戰之機라 須是遇事之時에 便與克下요 不得苟且放過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顔子의 己를 克함은 붉은 화로 위에 一점의 눈(雪)과 같다.” 또 말하기를, “孔子가 顔子에게 克己復禮로써 告해줌이 말은 비록 간절하나 보기에 樊遲에게 告해준 ‘居處를 恭히 하고 일 잡기를 敬히 하고 人을 與(待)하기를 忠(盡心)으로 하라.’ 한 말의 더욱 詳細함만 못하다. 그것은 樊遲가 己가 무엇인지 禮가 무엇인지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다만 분명하게 말하여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마치 一條의 大路가 있는데 다시 一條의 小路가 있어 분명 大路로 가야 함을 알면서도 小路의 面前에 어떤 물건이 있어 나를 끌어당김으로써 不知不覺하여 小路쪽으로 行해가다가 面前에 가시덤불이 묵어 있음에 이르면 다시 문득 후회를 함과 같으니, 이것이 곧 天理와 人欲이 交戰을 하는 機會다. 모름지기 이런 일을 만났을 때에 곧 이겨 치워야 하고 苟且스럽게 그냥 放心하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

△ 又曰人而不仁則自其一身으로 莫適爲主而事物之間에 顚倒錯亂하야 益無所不至矣라 己者는 人欲之私也요 禮者는 天理之公也라 一心之中에 二者ㅣ 不容並立하야 出乎此則入乎彼하고 出乎彼則入乎此니 其克與不克과 復與不復이 如手反覆하며 如臂屈伸이라 誠欲爲之면 其機在我而已니 豈他人所得與哉아 且非禮勿視聽者는 防其自外入而動於內者也요 非禮勿言動者는 謹其自內出而接於外者也니 內外交進에 爲仁之功이 不遺餘力矣라 自是而反則爲天理요 自是而流則爲人欲이며 自是而克念則爲聖이요 自是而罔念則爲狂이니 可不謹其所操哉아
【解】또 말하기를, “사람이 仁하지 않으면 그 一身으로부터 莫(拒否) 適(專主)이 主가 되어 事物의 사이에 顚倒되고 錯亂하여 더욱 이르지 않을 바가 없다. 己는 人欲의 私요, 禮는 天理의 公이다. 一心의 中에 二者가 並立함을 용납지 못하니, 此에서 出하면 彼에 入하고 彼에서 出하면 此에 入하나니, 그 克하고 克치 못함과 復하고 復치 못함은 마치 手의 反覆과 臂의 屈伸과 같다. 진실로 (仁을) 하고자 한다면 그 機가 나에게 있을 따름이다. 어찌 他人의 干與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또 非禮를 視聽치 않음은 그 外로부터 入하여 內를 動함을 막는 것이요, 非禮를 言動치 않음은 그 內로부터 出하여 外를 接함을 삼가는 것이다. 內와 外로 사귀어 나아감에 仁을 하는 일이 餘力을 남김이 없다. 이로부터 反하면 天理가 되고 이로부터 流하면 人欲이 되며, 이로부터 능히 생각하면 聖이 되고 이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狂이 되는 것이니, 可히 그 操한 바를 謹하지 아니하랴.”

○ 仲弓이 問仁한대 子曰出門如見大賓하며 使民如承大祭하고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 在邦無怨하며 在家無怨이니라 仲弓이 曰雍雖不敏이나 請事斯語矣리이다
【글풀이】仲弓이 仁을 묻는대, 子ㅣ 말하기를, “門을 나감에 大賓을 보듯 하며 民을 使하되 大祭를 承하듯 하고 己의 欲치 않은 바를 人에게 施치 말지니, 邦에 있어 怨할 이 없으며 家에 있어 怨할 이 없느니라.” 仲弓이 말하기를, “雍이 비록 敏치 못하나 請컨대 斯語를 事하겠나이다.”
【뜻풀이】仲弓(冉雍의 字)이 仁을 行할 방도를 묻자, 孔子가 대답하기를, “문 밖을 나서면 언제나 大賓을 보듯이 공경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大祭를 받들 듯 삼가고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 그렇게 하면 나라에서도 나를 원망할 사람이 없고 집에서도 나를 원망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니, 仲弓이 말하기를, “雍이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만 청컨대 이 말씀을 일삼겠습니다.” 했다.

△ 朱子曰敬以持己하고 恕以及物則私意ㅣ 無所容而心德이 全矣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敬(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으로써 몸을 갖고 恕(己所不欲勿施於人)로써 物(人)에 及하면 私意가 용납될 바 없고(克己) 心德이 全해진다(仁).”

△ 程子曰孔子言仁에 只說出門如見大賓하고 使民如承大祭하니 看其氣象컨대 便須心廣體胖하야 動容周旋이 中禮니 唯愼獨이 便是守之之法이니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孔子가 仁을 말함에 다만 ‘門을 나감에 大賓을 보듯 하고 民을 부림에 大祭를 받들 듯 하라.’고 말하니, 그 氣象을 보건대, 곧 모름지기 心이 廣하고 體가 胖하여 容을 動하고 周旋함이 禮에 中함이라. 오직 獨을 愼함이 이 지키는 法이다.”

△ 問出門使民之時엔 如此可也어니와 未出門使民之時엔 如之何오 程子曰此는 儼若思時也라 有諸中而後에 見於外하나니 觀出門使民之時에 其敬이 如此則前乎此者의 敬을 可知矣니 非因出門使民然後에 有此敬也라 
【解】묻노니, “門을 나가고 民을 부릴 때에는 이와 같이 함이 可하거니와 門을 나가고 民을 부리지 않았을 때에는 어찌하리오?” 程子가 말하기를, “이는 ‘儼하여 생각하듯 한다(曲禮中語).’의 때이다. 속에 있은 뒤에 外에 나타나는 것이니, 出門 使民의 때에 그 敬이 이와 같음을 보면 이에 앞서서 敬하였음을 可히 알 수 있으니, 出門 使民을 因한 然後에 이 敬이 있는 것이 아니다.”

△ 問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 是恕닛가 朱子曰伊川이 云恕字는 須兼忠字說이라하니 蓋忠是盡己라 盡己而後에 爲恕라 今人이 不理會忠而徒爲恕하니 其弊ㅣ 只是姑息이라 張子韶의 中庸解에 云聖人이 因己之難克而知天下皆可恕之人이라하니 卽是論之면 因我不會做하야 皆使天下之人으로 不做니 如此則相爲懈怠而已니 此言이 最害理라
【解】묻노니, “己의 하고자 아니한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아니함이 恕입니까?” 朱子가 말하기를, “伊川이 말하기를, ‘恕字는 모름지기 忠字를 兼하여 說해야 한다.’ 했으니, 대저 忠은 자기의 도리를 다함이다. 자기의 도리를 다한 뒤에 恕도 되는 것이다. 지금 사람은 忠을 제대로 알지를 못하고 恕를 하므로 그 폐단이 다만 姑息(우선의 방침)이 된다. 張子韶가 쓴《中庸解》에 하였기를, ‘聖人이 己의 克하기 難함으로 因하여 天下가 모두 恕할 사람임을 안다.’ 했으니, 이대로 말하자면 내가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천하의 사람을 모두 하지 않게 함이니, 이렇게 되면 서고 게을러질 따름이니, 이 말이 가장 道理에 해롭다.”

△ 問克己復禮와 主敬行恕를 何以分乾道坤道오 朱子曰公看顔子多少大力量고 一克己服禮便了하고 仲弓은 只是循循做將去底니 如何有顔子之勇이리오 譬如賊來에 顔子는 是進步與之廝殺이요 仲弓은 是堅壁淸野하고 截斷路頭하야 不敎賊來라 又克己復禮는 是一服藥에 打疊了這病이요 主敬行恕는 是漸漸服藥하야 消磨了這病이라
【解】묻노니, “己를 克하여 禮를 復함과 敬을 主하고 恕를 行함을 어찌 써 乾道와 坤道로 分합니까?” 朱子가 말하기를, “公이 보기에 顔子가 얼마나 큰 力量인고? 한 번 己를 克하고 禮를 復하면 곧 끝내는 것이요, 仲弓은 다만 循循(序를 따름)히 해가는 것이니, 어떻게 顔子같은 勇이 있겠는가. 비하자면 賊이 옴에 顔子는 나아가서 싸우고 죽이는 사람이요, 仲弓은 城壁을 굳게 지키고 들판을 치워 길목을 끊고 적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克己復禮는 이 한 번 약을 먹어 병을 打疊(解決지음)함이요, 敬을 主하고 恕를 行함은 점점 약을 먹어 병을 녹여내는 것이다.”

○ 中庸에 曰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니라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라 致中和면 天地位焉하며 萬物育焉이니라
【글풀이】《中庸》에 하였기를, “天이 命한 것을 性이라 이르고 性을 率한 것을 道라 이르고 道를 修한 것을 敎라 이른다. 道란 것은 可히 須臾도 離치 못할지니, 可히 離하면 道가 아니다. 이런 故로 君子는 그 睹치 않은 적에 戒하고 愼하며, 그 聞치 않은 적에 恐懼하니라. 隱보다 見함이 없으며 微보다 顯함이 없나니, 故로 君子는 그 獨을 삼가는 것이다. 喜怒哀樂의 發하지 않은 적을 中이라 이르고 發하여 다 節에 中함을 和라 이르니, 中이란 天下의 大本이요, 和란 天下의 達道다. 中和를 致하면 天地가 位하고 萬物이 育하니라.”
【뜻풀이】《中庸》에 하였기를, “하늘이 萬物에게 命해준 理를 性이라고 하고 그 性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道라고 하고 그 道를 修(낱낱이 調節해줌)해줌을 敎라고 이른다. 道란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떠나도 된다면 道가 아니다. 그런 고로 君子는 보지 않은 적부터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은 적부터 두려워하는 것이다. 숨은 데만큼 나타남이 없으며 작은 일만큼 드러남이 없으니, 그래서 君子는 그 혼자만의 대목을 삼가는 것이다. 喜, 怒, 哀, 樂의 情이 發하지 않았을 적을 中이라 이르고 그 情이 發하여 모두 節度에 맞음을 和라고 이르는 것이니, 中이란 天下萬事의 큰 근본이 되는 것이요, 和는 天下에 통한 道理이다. 中과 和를 이룩하면 天地가 位를 제대로 찾고 萬物이 제대로 育成되는 것이다.”
【註】天命之謂性 天은 大自然의 原理. 命은 賦與해줌. 性은 物에게 주어진 理니, 즉 하늘이 준 理를 性이라고 한다는 말. 形으로 말하면 手의 執持와 足의 行步와 口의 言語, 鼻의 呼吸 등이 모두 天命之性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心으로 말하면 情의 惻隱, 羞惡, 辭讓, 是非함이 모두 天命之性인 仁義禮智로 말미암은 것이다.
率性之謂道 性 그대로 따라서 行하는 것이니, 仁義禮智의 性에 따라 愛親, 忠君, 敬長, 信友하는 것 등이 道란 뜻이다. 食色의 欲도 天性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心性이 重하고 形性은 여기에 聽命을 해야 하는 것이니 輕하다.
修道之謂敎 修는 朱子가 ‘品節之’라고 풀이를 했으니, 낱낱이 調節한다는 뜻이다. 즉 위에서 말한 愛親 忠君의 道를 낱낱이 行할 節目과 方途를 마련해주는 것이니, 經禮三百, 曲禮三千 등이 그것이다.
不可須臾離 須臾는 一日의 三十分之一이니, 잠깐의 뜻. 잠깐도 떠나서는 안된다는 말이니, 떠날 수 없다로 풀이를 하면 誤釋이다. 세상에는 道를 떠나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戒愼乎不睹 恐懼乎不聞 눈이 物을 보지 않았을 적에도 戒愼하고 귀가 聲을 듣지 않았을 적에도 恐懼한다는 말이니, 이는 靜時의 工夫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 愼其獨也 隱僻한 데만큼 나타남이 없고 微細한 일만큼 顯著함이 없으므로 君子는 그 혼자만의 곳을 더욱 삼간다는 말이니, 이는 動時의 工夫다.
中和 中은 마음이 偏치 않고 倚(繫)치 않아 中正함이니 靜工夫의 效果요, 和는 和平이니 動工夫의 效果다.
天地位萬物育 天地位는 나의 德이 定立되어 秩序가 整然함을 말하고 萬物育은 對處하는 物마다 거스림이 없어 和悅함을 말한다. 이도 靜工夫의 效果와 動工夫의 效果다.

△ 朱子曰子思ㅣ 首明道之本原의 出於天而不可易과 其實體ㅣ 備於己而不可離하고 次言存養省察之要하고 終言聖神功化之極하니 蓋欲學者ㅣ 於此에 反求諸身而自得之하야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이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이는 子思가 맨먼저 道의 本原이 天에서 나와 可히 易할 수 없음과 그 實體가 己에 備하여 離하지 못함을 밝히고, 다음으로 存養(靜工夫) 省察(動工夫)의 要를 말하고, 마침내 聖人 神人의 功化의 極致를 말하였으니, 대저 學者로 여기에서 身에 돌이켜 求하여 스스로 얻어 써 外誘의 私를 버리고 그 本然의 善을 充케 하고자 함이다.”

△ 問莫見乎隱 莫顯乎微는 何也오 程子曰人이 只以耳目所見聞者로 爲顯見하고 所不見聞者로 爲隱微나 然不知理却甚顯이라 且如昔人이 彈琴에 見螳螂捕蟬而聞者ㅣ 以爲有殺聲하니 殺在心이어늘 人聞其琴而知之하니 豈非顯乎아 人有不善에 自謂人不知之나 然天地之理ㅣ 甚著하니 不可欺也라
【解】묻노니, “隱보다 見함이 없고 微보다 顯함이 없다 함은 무슨 뜻입니까?” 程子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다만 耳目의 보고 듣는 것으로써 드러나고 나타난 것이라 하고, 보이고 들리지 않은 것은 隱微한 것이라고 하는데, 理는 심히 드러남을 알지 못함이다. 마치 옛사람이 거문고를 퉁기면서 螳螂(사마귀 벌레)이 매미를 잡으려는 것을 보았는데, 듣는 자가 殺聲이 있다고 했으니, 殺은 心에 있었거늘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알았으니, 어찌 드러남이 아닌가. 사람이 不善이 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남이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天地의 理는 심히 나타나는 것이어서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 道鄕鄒氏曰愼獨이 最爲入道之要니 所謂獨者는 非獨閒居靜處而已라 萌於心之謂獨이니 能於此에 著力이면 無由有過擧라
【解】道鄕鄒氏(名 浩 字 志完 諡 文忠)가 말하기를, “獨을 삼감이 가장 道에 드는 要가 된다. 이른바 獨이란 홀로 한가히 居하고 고요히 處함 뿐이 아니라, 마음에 싹트는 것을 獨이라 한다. 능히 여기에 힘을 쓰면 잘못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다.”

△ 問求中於喜怒哀樂未發之前이 何如잇고 程子曰旣思於喜怒哀樂未發之前에 求之면 又却是思也라 旣思면 卽是已發이니 言存養於未發之時則可커니와 若言求中於未發之前則不可니라 或問喜怒哀樂之前에 下動字닛가 下靜字닛가 曰謂之靜則可나 然靜中에 須有物이라야 始得이니라 這裏便是難處니 學者ㅣ 莫若且先理會得敬이라 能敬則自知此矣리라
【解】묻노니, “喜怒哀樂이 發하기 前에 中을 求함이 어떠합니까?” 程子가 말하기를, “이미 喜怒哀樂의 未發의 前에 求하기를 생각하면 또 이것이 생각함이다. 이미 생각하면 바로 이미 發함이니, 未發의 時에 存養(存心養性)을 한다고 말함은 可커니와 만약 未發의 前에 中을 求한다고 말하면 不可하다.” 或이 묻기를, “喜怒哀樂의 前에 動字를 놓으리까? 靜字를 놓으리까?” 말하기를, “靜이라고 말함은 可하나 그러나 靜의 속에 모름지기 物이 있어야 비로소 得한다. 여기가 어려운 곳이니, 學者가 우선 敬을 연구해 알아야 한다. 능히 敬하면 자연 이를 알게 된다.”
【註】靜中有物 조용한 속에 惺惺한 精神이 있어야 함.

△ 或曰當靜坐時에 物之過乎前者를 還見이닛가 不見이닛가 程子曰看事如何라 若是大事如祭祀면 前旒蔽明하고 黈纊充耳에 凡物之過者를 不見不聞也어니와 若無事時엔 目須見하고 耳須聞이니라 又曰未發에 更怎生求리오 只平日涵養이 便是니 涵養久則喜怒哀樂이 發而中節이니라
【解】或이 말하기를, “靜坐할 때를 당하여 物의 앞에 지나는 者를 보는 것입니까? 못보는 것입니까?” 程子가 말하기를, “일이 어떠함을 볼지니, 만약 大事로 祭祀 같으면 前에 旒(면류관 줄)가 눈을 가리우고 黈纊(귀를 가리운 솜)이 귀를 막아 모든 物의 지나는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거니와 만약 일이 없을 때에는 눈이 모름지기 보고 귀가 모름지기 들어야 한다.” 또 말하기를, “마음의 發하지 않았을 때에 다시 어떻게 (中을) 求하는가? 다만 평일에 涵養(마음을 가라앉혀 修養함)함이 옳으니, 涵養하기를 오래하면 喜怒哀樂이 發함에 節에 맞는 것이다.”

△ 延平李先生이 與朱子書曰某曩時에 從羅先生學問이러니 終日相對靜坐하고 某時未有知하야 退入室中에 亦只靜坐而已러니 先生이 令靜中에 看喜怒哀樂未發之謂中의 未發이 作何氣像하라하더니 此意가 不惟於進學에 有力이라 兼亦是養心之要라 元晦가 偶有心恙하니 不可思索이요 更於此句內에 求之하야 靜坐看如何하라 往往不能無補也리라
【解】延平 李先生(名 侗 字 愿仲 諡 文靖公)이 朱子에게 준 書에 하였기를, “某가 전일 羅先生(名 從彦 字 仲素 諡 文質公)에게 學問을 하며 終日 상대하여 靜坐를 하고 某가 당시 아는 바가 없어 물러나 室中에 들어서도 다만 靜坐만 했는데, 先生이 하여금 靜中에 喜怒哀樂未發을 中이라 이른다는 未發이 어떤 氣像(象)을 作하는지를 보라고 하셨다. 이 뜻이 오직 進學에만 有力한 것이 아니라 또한 養心의 要도 된다. 元晦(朱子 初字)가 우연히 心恙이 있으니 思索을 해서는 안 되니, 다시 이 句의 內에서 求하고 靜坐를 함이 어떠한가? 가끔 도움이 없지 않으리라.”

△ 朱子曰戒愼恐懼를 不須說太重이라 孟子曰操則存이라하니 亦不是着力把持라 只是操니 一操면 便在這裏라 如人之氣ㅣ 呼便出하고 吸便入이라 所不睹所不聞은 不是閉耳合眼時라 只是萬事皆未萌芽에 自家ㅣ 便先恁地戒愼恐懼라 不睹不聞之時는 便是喜怒哀樂未發處니 常要提起此心在這裏하야 防於未然이니 所謂不見에 是圖是也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戒愼恐懼를 너무 重하게 말할 것이 아니다. 孟子가 말하기를 ‘操하면 存한다.’고 했으나 또한 힘을 들여 잡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잡는 것이니, 한 번 잡으면 곧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氣가 내쉬면 나가고 들이쉬면 들어옴과 같다. 보지 않은 바와 듣지 않은 바는 귀를 막고 눈을 감는 때가 아니라, 다만 만사가 모두 싹트지 않았을 적에 자기가 먼저 그렇게 戒愼하고 恐懼를 한 것이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은 때는 곧 喜怒哀樂이 發하지 않은 곳이니, 항상 이 마음을 잡아 일으켜 이 속에 있게 하여 未然에 막는 것이니, 이른바 ‘보지 않은 적에 도모한다.’는 것이다.”

△ 胡氏季隨曰戒懼者는 所以涵養於喜怒哀樂之前이요 愼獨者는 所以省察於喜怒哀樂已發之後라
【解】胡氏季隨(名 大時 胡宏의 子)가 말하기를, “戒懼란 써 喜怒哀樂의 前에 涵養을 하는 바요, 愼獨이란 써 喜怒哀樂이 이미 發한 뒤에 省察을 하는 바다.”
 ※이는 潘友恭(字 恭叔)의 말이니, 程篁墩(程敏政 號)이 偶然히 照管을 잘못한 것이다.=退溪(李滉)

○ 詩云潛雖伏矣나 亦孔之昭라하니 故로 君子는 內省不疚하야 無惡於志니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惟人之所不見乎저 詩云相在爾室호니 尙不愧于屋漏아하니 故로 君子는 不動而敬하며 不言而信하니라 
【글풀이】詩에 이르기를, “潛하여 비록 伏하였으나 또한 심히 昭하다.” 하니, 故로 君子는 內로 省하여 疚치 아니하여 志에 惡함이 없나니, 君子의 可히 及치 못할 者는 그 오직 人의 見치 아니한 바인저. 詩에 이르기를, “네 室에 있음을 보건대 행여 屋漏에 愧치 아니한가.” 하니, 故로 君子는 動치 아니한 적에 敬하고 言치 아니한 적에 信하니라.
【뜻풀이】《詩經》小雅의 正月篇에, “고기가 물에 잠겨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환히 보인다.” 했다. 그래서 君子는 안으로 자신을 살펴 疚(悔恨)치 않아 心志에 싫음이 없는 것이니, 君子의 미칠 수 없는 것(가장 어려운 것)은 오직 남이 보지 않은 대목(을 잘함)인저. 또 大雅의 抑篇에, “너의 室에 있음을 보건대 행여 屋漏(집의 깊고 으슥한 곳)에 부끄럽지 않느냐?” 했으니, 故로 君子는 動하지 않을 적부터 敬하고 말하지 않을 적부터 信한 것이다(마음 자세를 敬하고 信케 함).

△ 程子曰學始於不欺暗室이니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학문은 어두운 방에서도 自身의 良心을 속이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한다.”

△ 司馬溫公이 嘗言吾無過人者오 但平生所爲ㅣ 未嘗有不可對人言者耳라
【解】司馬溫公(名 光 字 君實 封溫國公 諡 文正)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다만 평생 한 바가 남을 대해 말하지 못할 것이 있지 않다.”

△ 朱子曰三國朱然이 終日欽欽하야 如在行陣하니 學者持此則心常不放矣리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三國(蜀 魏 吳) 때 朱然(吳人)이 종일 欽欽(긴장한 모습)하여 마치 行陣에 있는 듯했다 하니, 學者가 이런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항상 방탕하지 않으리라.”

△ 西山眞氏曰人心이 至靈하야 毫髮之微라도 少有自欺하면 必有不能慊於中者하니 此所謂疚也며 此所謂惡也라 惟夫處幽如顯하며 處獨如衆하야 反之於己에 無所惡焉은 此君子之所以大過人而人之所不能及也라 又引詩하야 謂處室之時에 當無愧於屋漏니 故로 君子는 靜而常敬하고 嘿而常信하야 不待動作言語而後에 見也라 存養之功이 至此는 非盛德이면 其孰能之乎아
【解】西山眞氏가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이 지극히 신령하여 털끝만큼 작은 일이라도 조금만 자신을 속임이 있으면 반드시 속이 시원하지 못함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疚며 이른바 惡다. 오직 幽한 데 處해도 顯한 데와 같이 하고 獨에 處해도 衆과 같이 하여 己에 反해서 싫은 바가 없음은, 이것이 君子의 써 크게 人보다 過한 바며 人의 능히 미치지 못한 바다. 그리고 또 詩를 引하여 이르기를, ‘室에 處한 때에 마땅히 屋漏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으니, 故로 君子는 靜함에 항상 敬하고 嘿함에 항상 信하여 動作이나 言語를 기다린 뒤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存心 養性의 功이 이에 이름은 盛德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하리오.”

心經 卷二
○ 大學曰所謂誠其意者는 毋自欺也니 如惡惡臭하며 如好好色을 此之謂自謙이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小人이 閒居에 爲不善호대 無所不至하다가 見君子而後에 厭然揜其不善하고 而著其善하나니 人之視己ㅣ 如見其肺肝然이니 則何益矣리오 此謂誠於中이면 形於外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曾子曰十目所視며 十手所指니 其嚴乎저 富潤屋이요 德潤身이라 心廣體胖하나니 故로 君子는 必誠其意니라
【글풀이】《大學》에 하였기를, “이른바 그 뜻을 誠하게 함은 스스로 欺치 마는 것이니, 惡臭를 惡하듯 하고 好色을 好하듯 함을 이 스스로 謙함이라 이르나니, 故로 君子는 반드시 그 獨을 愼하니라. 小人이 閒居할제 不善을 하되 至하지 않은 바가 없다가 君子를 본 뒤에 厭然히 그 不善을 揜하고 그 善을 著하나니, 人의 己를 視함이 그 肺肝을 見한 듯 하나니 무슨 益이리오. 이래서 中에 誠하면 外에 形한다 이르나니, 故로 君子는 반드시 그 獨을 삼간다. 曾子가 말하기를, ‘十目의 視하는 바며 十手의 指하는 바니, 그 嚴한저.’ 富는 屋을 潤케 하고 德은 身을 潤케 하나니, 마음이 넓고 몸이 펴지는 것이다. 故로 君子는 반드시 그 意를 誠히 한다.”
【뜻풀이】《大學》書에 하였기를, “經文에서 말한바 ‘그 뜻을 誠實히 한다.’는 말은 自身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뜻이니, 그것은 마치 고약한 냄새를 싫어하고 좋은 女色을 좋아하듯 眞心이고 거짓이 없음이니, 이것을 自謙(스스로 快히 함)이라 한다. 그래서 君子는 반드시 남이 안 보는 혼자만의 대목을 삼가는 것이다. 그런데 小人은 그렇지 않아 혼자만 한가하게 있을 때는 不善의 짓을 하되 못할 짓이 없다가 君子를 상대하여 본 뒤에는 슬쩍(厭然:音 안연) 그 不善을 감추고 그 善한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데, 남이 나를 보기를 허파와 간까지 들여다 보듯 해버리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래서 속에 들어 있으면 밖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니, 그래서 君子는 반드시 그 혼자만의 곳을 삼가는 것이다. 曾子(名 參)가 말하기를, ‘혼자만 있어도 열 눈이 보는 바요,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무서운 것이다.’ 했다. 富해지면 집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요, 德이 있으면 몸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니, 몸이 윤택해진다 함은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君子는 반드시 그 意를 誠히 하는 것이다.”

△ 程子曰有天德이라야 便可語王道니 其要는 只在謹獨이니라 又曰有人이 胸中에 常若有兩人焉하야 欲爲善에 如有惡以爲之間하고 欲爲不善에 又若有羞惡之心者하니 本無二人이라 此正交戰之驗也니 持其志하야 使氣不能亂이니 此ㅣ 大可驗이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天德(天然의 全德)이 있을지라야 곧 王道를 말할 수 있으니, 그 要는 다만 獨을 謹하는 데 있다.” 또 말하기를, “사람 중에는 가슴 속에 항상 두 사람이 있는 듯하여 善을 하고자 함에 마치 惡이 있어 끼어든 듯하고 不善을 하고자 함에 또 마치 羞惡(부끄러워하고 惡을 미워함)의 마음이 있는 듯하니, 본시 二人이 없다. 이는 바로 善惡이 交戰을 하는 證驗이니, 그 心志를 가지고 形氣의 欲이 混亂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크게 證驗을 할 수가 있다.”

△ 劉忠定公이 見溫公하고 問盡心行己之要ㅣ 可以終身行之者한대 公曰其誠乎저 又問行之何先이릿고 公曰自不妄語始니라 劉ㅣ 初甚易之러니 及退而自檃括日之所行與凡所言한대 自相掣肘矛盾者ㅣ 多矣라 力行七年而後에 成하니 自此로 言行이 一致하야 表裏相應하고 遇事坦然하야 常有餘裕러라
【解】劉忠定公(名 安世 字 器之 世稱元城先生)이 溫公(司馬光)을 보고, 心을 다하고 己를 行하는 要ㅣ 可히 終身토록 行할 者를 묻는데, 公이 말하기를, “그 誠인저.” 하였다. 또 묻기를, “行하기를 무엇을 먼저하릿까.” 하자, 公이 말하기를, “妄語를 안 함으로부터 비롯해야 한다.” 하였다. 劉가 처음에 甚히 쉽게 여겼는데, 물러나옴에 이르러 스스로 날로 行한 바와 말한 바를 檃栝(바로잡음)해보니, 스스로 掣肘(팔을 끌어 당김)가 되고 矛盾(서로 相反이 됨)이 된 것이 많았다. 힘써 行하기를 七年을 한 뒤에 이루워지니, 이로부터 言行이 一致가 되어 겉과 속이 서로 응하고 일을 만나면 坦然(태연함)하여 항시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註】掣肘 魯君이 宓子賤으로 單父邑의 守令을 삼자, 善書者 二人을 請하여 데리고 가서 글을 쓰이면서 그 팔뚝을 끌어당기고 글씨를 못쓴다고 꾸짖었다. 二人이 돌아가 魯君에게 말하자, 魯君이 깨닫고 宓子賤의 行政에 일체 간섭을 안해 單父邑이 大治해졌다. 言行의 相反을 意味함. 
 矛盾 창과 방패, 창은 사람을 傷하고 방패는 사람을 보호하니 相反의 뜻. 또 옛날 창을 파는 者가 외치기를, “이 창으로 찌르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하고, 또 “이 방패로 막으면 뚫는 것이 없다.” 하자, 사람들이 “그대의 창으로 그대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느냐?” 하자, 대답을 못했다 한다. 이도 앞뒤가 저촉됨을 뜻한다.

△ 朱子ㅣ 問劉棟호대 看大學自欺之說如何오 曰不知義理하고 却道我知義理ㅣ 是自欺니이다 曰自欺는 是箇半知半不知底人이 知道善은 我所當爲호대 却又不十分去爲善하고 知道惡은 不可作호대 却又是自家所愛ㅣ 舍他不得이 這便是自欺라 不知不識은 只喚做不知不識이요 却不喚做自欺니라
【解】朱子가 劉棟에게 묻기를,󰡒《大學》에 自欺의 說을 어떻게 보는가?󰡓하자, 말하기를, “義理를 알지 못하면서도 내가 義理를 안다고 말하는 것이 自欺입니다.” 했다. 朱子가 말하기를, “自欺는 半이나 알고 半이나 모르는 사람이 ‘善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또 十分 가서 善을 하지는 않고, ‘惡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좋아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自欺다. 모르는 것은 다만 모른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이지 自欺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했다.

△ 朱子曰誠於中形於外는 那箇形色氣貌之見於外者ㅣ 決不能欺人이요 祗自欺而已라 這樣底는 永無緣做得好人이니 爲其無爲善之地也라 又曰學者ㅣ 須是爲己니 譬如喫飯에 寧可逐些喫하야 令飽가 爲是乎아 寧可鋪攤放門外하야 報人道我家에 有許多飯이 爲是乎아 近來學者는 多是以自家合做底事로 報與人하야 只是將義理하야 略從肚裏過하고 却飜出許多說話하니 如此者는 只是不爲己圖好看이라 如南越王이 黃屋左纛으로 聊以自娛耳라 又曰誠意는 是人鬼關이니 過此一關이라야 方會進이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中에 誠하면 外에 形한다.’ 함은 그 形色과 氣貌의 밖에 나타난 것이 결코 사람을 속이지 못하고 다만 自身을 속일 따름이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好人이 될 수가 없으니, 그것은 善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學者가 모름지기 自己를 爲할지니, 비유하자면 마치 밥을 먹음에 조금씩 먹어서 배가 부르게 해야 하겠는가, 아니 문 밖에다 버려놓고 남에게 ‘우리집에 이렇게 많은 밥이 있다.’고 알려야 되겠는가? 근래의 學者들은 허다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만 알려 다만 義理를 약간 창자 속을 지나게 하고 뒤집어내서 허다한 말만 내놓으니, 이런 사람은 다만 자기가 좋아지기를 도모하지 않음이니, 마치 漢時의 南越王 趙佗가 天子의 黃屋(車盖)과 左纛(天子儀仗)을 使用하고 文帝에게 ‘그냥 스스로 즐겨보았습니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말하기를, “意를 진실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人과 鬼(邪)의 갈림길이 되는 關門이니, 이 一 關門을 지나야만 비로소 前進이 되는 것이다.”

△ 趙致道曰周子云誠은 無爲요 幾는 善惡이라하니 此는 明人心未發之體而指已發之端이라 蓋欲學者ㅣ 致察於萌動之微하야 知所決擇而去取之하야 以不失乎本心之體而已라 善惡이 雖相對나 當分賓主요 天理人欲이 雖分泒나 必省宗蘖이니 自誠之動而之善則如木之自本而榦하고 自榦而末하야 上下相達者則道心之發見이요 天理之流行이니 此心之本主요 而誠之正宗也라 其或旁榮側秀하야 若寄生疣贅者는 此雖亦誠之動而人心之發見이요 私欲之流行이니 所謂惡也라 非心之固有요 蓋客寓也며 非誠之正宗이요 蓋庶蘖也라 苟辨之不早하고 擇之不精則客或乘主하고 蘖或代宗矣라 學者能於萌動幾微之間에 察其所發向背하면 凡直出者는 爲天理요 旁出者는 爲人欲이며 直出者ㅣ 爲善이요 旁出者ㅣ 爲惡이니 而於直出者엔 利道之하고 旁出者엔 遏絶之하야 功力이 旣至則此心之發이 自然出於一途而保有天命矣라 於此에 可見未發之前에 有善無惡而程子所謂不是性中에 元有此兩端이 相對而生者ㅣ 蓋謂此也라 若以善惡으로 爲東西相對하야 彼此角立則是天理人欲이 同出一原하야 未發之前에 已具兩端이니 所謂天命之性이 亦甚汙雜矣니 此胡氏同體異用之說也라 朱子曰得之라
【解】趙致道가 말하기를, “周子(濂溪)가 말하기를, ‘誠은 爲함이 없고 幾(微動)는 善하기도 惡하기도 하다.’ 하였으니, 이는 人心의 發하지 않은 體(誠)를 밝히고 己發의 端(幾)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學者로 萌動하는 微細한 데를 살펴 決擇할 바를 알아 去하고 取하여 本心의 體를 잃지 않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善과 惡이 비록 相對가 되지만 마땅히 賓主를 나누어야 하고, 天理와 人欲이 비록 分派가 되지만 반드시 宗과 蘖을 살펴야 한다. 誠이 動하여 善으로 가면 마치 나무가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끝으로 上下가 서로 통한 것이니, 이는 道心의 發見이요 天理의 流行이니, 이는 心의 本主요 誠의 正宗이다. 혹시 옆으로 피어나고 곁으로 뻗어나와 마치 寄生을 하는 혹이나 사마귀 같은 것은 그것도 誠의 動한 것이지만 人心의 發見이요 私欲의 流行이니, 이른바 惡이다. 心의 본디 있는 것이 아니라 客으로 붙여 있는 것이며, 誠의 正宗이 아니라 이는 庶蘖인 것이다. 진실로 辨하기를 일찍하지 않고 擇하기를 精하게 하지 않으면 客이 혹 主를 타오르고 庶蘖이 혹 宗을 代할 수도 있다. 學者가 能히 싹이 트고 動하는 幾微의 사이에 그 發한 바의 向背를 살피되, 直出한 者는 天理요 旁出한 者는 人欲이며 直出한 것은 善이요 旁出한 것은 惡이니 直出한 者는 順利롭게 인도를 하고 旁出한 者는 막고 끊어 功力이 이미 지극해지면 이 마음의 發함이 자연 한 길로 나와 天命을 保有할 수 있다. 여기에서 未發의 전에는 善만 있고 惡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程子가 말한 ‘性 속에 원래 이 두 가지가 있어서 相對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함이 이를 말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만약 善惡으로 東西에서 相對하여 彼此가 角이 선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天理와 人欲이 一原에서 함께 나와 未發의 前에 이미 두 가지가 갖추어진 셈이니, 이른바 天命의 性이 또한 심히 汙雜한 것이다. 이것이 胡氏의 同體 異用의 말이다.” 하니, 朱子가 말하기를 ‘옳게 보았다.’ 했다. 
 ※이 文에는 欠이 없지 않으니, ‘人心의 發見, 私欲의 流行이 이른바 惡이다.’ 한 대목이 그것이다. 人心은 形氣로 因해서 생긴 마음이니, 聖人도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옷을 겹쳐 입고 싶은 것이다. 이 마음을 어찌 꼭 私欲의 流行이고 惡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舜도 人心을 危하다고 하는데 그쳤으니, 생각해 볼 바이다.

○ 所謂脩身이 在正其心者는 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하고 有所恐懼則不得其正하고 有所好樂則不得其正하고 有所憂患則不得其正이니라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하며 聽而不聞하며 食而不知其味니라 此謂脩身이 在正其心이니라 
【글풀이】이른바 身을 修함이 그 心을 正하는 데 있다 함은 身(心)에 忿懥한 바가 있으면 그 正을 얻지 못하고 恐懼한 바가 있으면 그 正을 얻지 못하고 好樂(요)한 바가 있으면 그 正을 얻지 못하고 憂患한 바가 있으면 그 正을 얻지 못한다. 心이 在치 않으면 視하여도 見치 않고 聽하여도 聞치 않고 食하여도 그 味를 알지 못한다. 이래서 身을 修함이 그 心을 正하는 데 있다고 이르니라.
【뜻풀이】經文에서 이른바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로 잡는 데 있다.” 한 것은 마음에(本文 身字는 心字의 誤=程子) 분해 하는 바가 있으면 그 用心이 正道를 얻지 못하게 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正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正을 얻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正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어떤 감정에 쏠려 있게 되면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 않고 무엇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게 된다. 이래서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로 잡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 朱子曰四者는 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라 然이나 一有之而不能察則欲動情勝하야 而其用之所行이 或不能不失其正矣라 又曰心有不存則無以檢其身이니 是以君子ㅣ 必察乎此而敬以直之니 然後에 此心常存而身無不脩也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四者는 모두 心의 用이니 人의 없지 않은 者다. 그러나 한결 두기만 하고 察하지 못하면 欲이 動하고 情이 勝하여 그 用의 行하는 바가 혹 能히 그 正을 잃지 아니치 못한다.” 또 말하기를, “心이 存하지 않음이 있으면 써 그 身을 檢할 수 없으니, 이로써 君子는 반드시 이를 살펴 敬하여 直케 한 뒤에 이 마음이 항상 存하여 身이 修치 않음이 없다.”

△ 程子曰中有主則實이니 實則外患이 不能入하야 自然無事라 又曰有主則虛니 虛는 謂邪不能入이요 無主則實이니 實은 謂物來奪之라 又曰心不可有一事라 又曰閱機事之久에 機心이 必生이라 蓋方其閱時에 心必喜니 旣喜則如種下種子니라 又曰疑病者는 未有事至時에 先有疑端在心하고 周羅事者는 先有周事之端在心하니 皆病也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中(心)에 主함이 있으면 實(차 있음)하니, 實하면 外患이 능히 入하지 못하여 자연 무사하다.” 또 말하기를, “主함이 있으면 속이 비워져 있으니, 비워져 있다 함은 邪가 능히 들어오지 못한단 말이다. 主함이 없으면 實하니, 實하다 함은 物이 들어와 心의 자리를 빼앗음을 말한다.” 또 말하기를, “마음에는 一事도 담겨져 있어서는 안 된다.” 또 말하기를, “機巧한 일을 보기를 오래하면 機巧의 마음이 반드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보고 있을 때에 마음이 반드시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면 마치 씨를 심는 것과 같다.” 또 말하기를, “疑病이 든 사람은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의심하는 바가 마음에 있게 되고, 일을 周羅(두루 챙김)하는 者는 먼저 일을 周羅하는 바가 마음에 있으니, 이 모두가 病이다.”

△ 張子曰正心之始에 當以己心으로 爲嚴師하야 凡有動作則知所懼니 如此一二年間에 守得牢固則自然心正矣라 又曰定然後에 有光明이니 若常移易不定이면 何由光明이리오 易은 大抵ㅣ 以艮爲止하니 止乃光明이라 故로 大學에 定而至於能慮라 人心이 多則無由光明이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心을 正하는 始에 마땅히 나의 마음으로 엄한 스승을 삼아 무릇 動作이 있음에 두려워 할 바를 알지니, 이와 같이 一二年間을 하여 지킴이 굳어지면 자연 마음이 바로잡혀지리라.” 또 말하기를, “定한 然後에 光明이 있으니, 만약 항상 移易하고 定하지 않으면 어찌 光明할 수 있으리오.《周易》은 대저 艮卦를 止라고 하는데, 止해야만 光明한 것이다. 故로《大學》에 定함으로 能히 慮하는 데 이르니, 사람이 마음(思)이 많으면 光明할 수가 없는 것이다.”

△ 朱子曰古人言志帥心君하니 須心有主張이라야 始得이니라 又曰人이 只有箇心하니 若不降伏得이면 更做甚麽人이리오 又曰世俗之學이 所以與聖賢不同者는 聖賢은 直是眞箇去做요 今之學者는 但將聖賢許多說하야 諷誦而已라 或掇拾言語하고 綴緝時文하니 如此爲學이면 却於自家身上에 有何交涉이리오 今之朋友ㅣ 終不能去世俗之陋者는 只是志不立耳니 學者大要立志라 纔學에 便做聖人이 是也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고인이 ‘志帥’니 ‘心君’이니를 말했으니, 모름지기 心에 주장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다만 하나의 心이 있는데, 이를 降伏(주저앉힘)해내지 못한다면 다시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또 말하기를, “世俗의 學이 聖賢과 다른 것은 聖賢은 곧바로 참으로 나아가 하였고 지금의 學者는 다만 聖賢의 言語를 흥얼대고 외울 따름이다. 혹 言語를 따모으기도 하고 혹 時文(科文)을 엮기도 하니, 이렇게 학문을 하면 자기의 身上에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지금의 朋友가 끝내 世俗의 陋를 버리지 못한 것은 다만 뜻이 서지 못해서이니, 學者의 크게 重要함은 志를 세움이다. 막 學하면 곧 聖人이 되려고 함이 그것이다.”

△ 朱子曰念慮攪擾는 只是不敬이니 敬은 是常惺惺法이라 以敬爲主則百事ㅣ 皆從此做去어늘 今人이 都不理會라 我底ㅣ 自不知心所在하고 都要理會他事하며 又要齊家治國平天下하니 心者는 身之主也라 撑船인댄 須用篙요 喫飯인댄 須使匙니 不理會心이면 是不用篙不使匙之謂也라 攝心이 只是敬이니 才敬이면 看做甚麽事니 登山에 亦只這箇心이요 入水에 亦只這箇心이니라 又曰此心之正이 却如秤一般이니 未有物時에 秤無不平이라가 纔把一物在上面하면 便不平了라 鏡中에 先有一人이 在裏面하면 別一箇來에 便照不得이니라 這心未有物之時에 先有箇主張하야 說道我要如何處事하면 便是不正이라 且如今人이 說我做官하면 要抑强扶弱이라하야 及遇着當强底事에 也去抑他면 這便是不正이라 或問公私之別한대 曰譬如一件事ㅣ 若係公衆이면 便心下不大管하고 若係私己면 便只管橫在胸中하야 念念不忘이면 只此便是公私之辨이니라
【解】주자가 말하기를, “생각이 요란스러운 것은 다만 敬치 않음이니, 敬은 다만 항상 惺惺(정신이 또렷함)하는 법이다. 敬으로써 主를 하면 百事를 모두 이로 인해 할 수 있거늘 지금 사람이 도무지 살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마음의 所在를 알지 못하고서 모두 다른 일만 알려고 하며 또 齊家 治國 平天下를 하려고 하니, 心이란 몸의 主다. 배를 밀려면 모름지기 삿대를 써야 하고 밥을 먹으려면 모름지기 수저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니, 마음을 살피고 챙기지 않으면 이는 삿대를 쓰지 않고 수저를 사용하지 않는단 말과 같다. 마음을 잡아두는 것이 바로 敬이니, 敬을 하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그것을 볼 수 있으니, 산에 올라도 다만 이 마음이요, 물에 들어도 다만 이 마음인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이 마음이 正하면 마치 저울대가 物이 없을 때에 平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막 一物이 上面에 있게 되면 곧 平치 못한 것이다. 또 거울 속에 먼저 一人이 裡面에 있으면 딴 하나가 와도 비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이 마음이 物이 있지 않을 때에 먼저 主張이 있어 ‘내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겠다.’ 하면 곧 不正인 것이다. 또 마치 今人이 말하기를, ‘내가 벼슬을 하면 强者를 누르고 弱者를 붙잡겠다.’ 하고 나중에 當然히 强할 일을 강하게 할 경우에 봉착하여 애써 그를 누른다면, 이것이 곧 不正인 것이다.” 或이 公과 私의 구별을 묻자,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一件의 일이 만약 公衆과 관계된 일이라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만약 자기의 私와 관계가 있다면 애써 관심을 두고 가슴 속에 담아두어, 생각을 늘 하고 잊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公과 私의 구분이다.”

△ 問憂患恐懼四字는 似一般이니다 朱子曰不同이라 恐懼는 是目下逼來得緊底하야 使人恐懼失措요 憂患은 是思慮預防將來有大禍福利害라 又問忿懥好樂는 在我之事니 可以勉强不做어니와 如憂患恐懼는 是外面來底니 不由自家니이다 曰都不得이라 便是ㅣ 外面來底라도 須是自家ㅣ 有箇道理하야 處置得下하면 恐懼憂患이 只是徒然이니라 孔子의 畏匡人과 文王의 囚羑里에 死生이 在前了나 聖人이 處之恬然하니 只看此便是라 要見得道理分明하면 自然無此患이니라 
【解】묻노니, “憂患恐懼의 四字는 일반인 듯 싶습니다.” 하자, 朱子가 말하기를, “같지 않다. 恐懼는 目下에 긴박하게 다가와 사람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 것이고, 憂患은 장래에 있을 큰 禍福과 利害를 생각하고 예방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忿懥와 好樂는 나에게 있는 일이니 애써 안 할 수도 있지만, 憂患과 恐懼 같은 것은 外面에서 오는 것이니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하자, 대답하기를, “모두 그렇지가 않다. 비록 外面에서 온다고 해도 모름지기 자기에게 道理가 있어 처치해내면 恐懼나 憂患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마치 孔子가 匡人에게 위험을 당하고 文王이 羑里獄에 갇혔을 때에 死生이 앞에 있었으나 聖人이 處하기를 태연히 하였으니, 다만 이를 보면 된다. 모름지기 道理를 보기를 분명히 하면 자연 이런 患(恐懼憂患)이 없는 것이다.”

△ 伊川先生曰呂與叔이 有詩云學如元凱方成癖이요 文似相如殆類俳라 獨立孔門無一事하니 只輸顔氏得心齋라하니 古之學者는 惟務養性이요 其他則不學이러니 今爲文者는 專務章句하야 悅人耳目이라 旣務悅人이면 非俳優而何오
【解】伊川先生이 말하기를, “呂與叔이 詩를 짓기를, ‘學이 元凱(晉의 杜預字 左傳癖이 있었음) 같으면 바야흐로 癖(짙은 버릇)을 이루고 文이 相如(漢의 司馬相如) 같으면 거의 俳優와 같다. 홀로 孔子의 門에 서서 一事도 없었으니, 다만 顔氏(回)의 心齊(心志의 整齊) 얻음만 못한 것이다.’ 했다. 옛날의 學者는 오직 性을 養할 것을 힘쓰고 그 밖은 배우지 않았는데 지금 文을 하는 者는 專혀 章句만을 힘써 사람의 耳目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 이미 사람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면 俳優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問獨處一室커나 或行闇中에 多有驚懼는 何也오 程子曰只是燭理不明이라 若能燭理則知所懼者妄이니 何懼焉고 有人雖知此나 然不免有懼心者는 只是氣不充이라 須是涵養久則氣充하야 自然物動不得이라 然有懼心이면 亦是敬不足이니라 
【解】묻노니, “혼자 一室에 處하거나 혹 어두운 속을 行하면 놀래지고 두려워짐이 많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程子가 말하기를, “다만 理를 보기를 밝게 못함이다. 만약 능히 理를 보았다면 두려워한 바가 妄임을 아나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비록 그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함을 면치 못하니, 그것은 다만 氣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氣를) 涵養(가라앉혀 길러냄)할지니, 오래가면 氣가 充하여 자연 外物이 動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은 敬의 공부가 不足해서이다.”

△ 伊川의 涪陵之行에 過灩澦하야 波濤洶湧이어늘 舟中之人이 皆驚愕失措호대 獨伊川이 凝然不動하니 岸上에 有樵者하야 厲聲問曰舍去如斯아 達去如斯아하므로 欲答之而舟已行하다 
【解】伊川이 涪陵으로 갈 때에(宋 哲宗 紹聖 四年에 伊川을 涪州로 流配시켰음) 灩澦(夔州府 瞿塘峽口)를 만나 파도가 사나워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홀로 伊川만이 가만히 있어 動하지 않거늘 언덕위에서 나무하던 사람이 소리를 높여 묻기를, “목숨을 버릴 작정을 해서 그런 것인가? 道理를 통달해서 그런 것인가?” 하였다.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배가 이미 가버렸다.

△ 伊川이 歸自涪州에 氣貌容色髭髮이 皆勝平昔이어늘 門人이 問何以得此오한대 曰學之力也라 大凡學者는 學處患難貧賤이니 若富貴榮達은 卽不須學이니라 
【解】伊川이 涪州로부터 돌아와 氣貌와 容色과 수염, 머리털이 모두 平昔보다 낫거늘, 門人이 묻기를, “어떻게 해서 이럴 수가 있었습니까?” 하자, 대답하기를 “학문의 힘이다. 대범 학문이란 患難과 貧賤에 處함을 배울지니, 富貴 榮達같은 것은 배울 것이 없다.” 하였다.

△ 朱子曰某之氣質이 有病하니 多在忿懥라 王幼觀曰先生이 一日에 說及受贓者에 怒形於言하야 曰某見此等人에 只與大字面配去리라하다
【解】朱子가 말하기를, “某의 氣質이 病이 있는데, 忿懥에 많이 있다.” 王幼觀(名 過 朱子門人)이 말하기를, “先生이 一日에 뇌물을 받은 者를 말함에 이르러 怒가 言에 나타나 ‘某가 이런 사람을 보면 그 面에 大字로 (受贓者라고) 새겨서 귀양을 보내겠다.’고 했다.”

△ 又曰某舊時에 亦要無所不學하야 出入時에 無數文字를 事事有兩冊이러니 一日에 忽思之曰且慢하라 我只有一箇渾身이어늘 如何兼得許多리오하고 自此로 逐時去了호라 大凡人이 知箇用心處하면 自無緣及得外事니라
【解】또 말하기를, “某가 舊時에 또한 모든 것을 다 배우려 하여 出入을 할 때면 무수한 文字에 事事(事는 件과 같다)마다 兩冊씩(元本과 抄本) 두었더니 하루는 忽然히 생각하기를, ‘아니 이러지 말자. 나에게는 다만 하나의 全身이 있을 뿐인데 어떻게 許多한 것을 겸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부터 때를 따라 없애버렸다. 대범 사람이 마음을 쓸 줄을 알게 되면 자연 外事에 미쳐갈 수가 없는 것이다.”

△ 又曰風俗이 尙鬼하야 如新安等處는 朝夕如在鬼窟이라 鄕里에 有所謂五通廟하야 最靈怪라 某初還에 被宗人의 煎迫令去호대 不往이러니 是夜에 會族人하야 往官司打酒할새 有灰하야 乍飮에 遂動臟腑終夜하고 次日에 又偶有一蛇在階旁이어늘 衆人이 鬨然하야 以爲不謁廟之故라하므로 某告以臟腑는 是食物不著이니 關他甚事오 莫枉了五通이라하더니 中有某人이 是向學之人이라 亦來勸往하야 云亦是從衆이라하므로 某以從衆何爲오 不意公亦有此語로다하다
【解】또 말하기를,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新安 같은 곳은 아침 저녁으로 마치 鬼窟에 있는 듯하였다. 그곳 향리에 五通廟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가장 靈하다는 怪物이다. 내가 처음 그곳에 돌아갔을 때(新安은 古婺源이니 朱子의 祖父가 居한 곳. 朱子가 建․劒 二州에 寓居하다가 丘墓를 살피러 돌아갔다.) 宗人들이 성가시게 윽박질러 그 廟에 다녀오라고 했으나 가지 않았더니, 그날 밤에 族人들과 모여서 官司(官의 專賣處)에 가서 술을 든 것이 술에 회가 들어가 막 마시자 곧 臟腑가 부글거려 밤새껏 연하였고, 다음날에는 또 우연히 뱀 한 마리가 섬돌 가에 나왔으니 뭇 사람들이 법석을 떨어 五通廟에 인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臟腑에 탈이 난 것은 음식물이 맞지 않아서인데 그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五通廟의 신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 했다. 그 중에 某人은 학문을 한 사람인데 역시 와서 갔다오라고 권하면서, ‘이도 衆을 따르는 일이다.’ 하므로, 某가 말하기를, ‘衆을 따르면 어쩌자는 것인고? 公마져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 했다.”

△ 僞學黨作에 或勸先生散學徒하고 閉戶省事하야 以避禍者어늘 先生曰禍福之來는 命也라 其黙이 足以容은 只是不去擊鼓訟寃이 便是黙이요 不成屋下合說底話도 亦不敢說이니라 有一朋友ㅣ 微諷云先生이 有天生德於予底意思하고 却無微服過宋之意니이다 先生曰某又不曾上書自辨하고 又不曾作詩謗訕이요 只是與朋友로 講習古書하고 說這道理니 更不敎做하면 却做何事오 論語首章에 言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하고 斷章에 言不知命이면 無以爲君子라하야늘 今人이 開口에 亦解說一飮一啄이 自有定分이라하나 及遇小小利害에 便生趨避計較之心이라 古人은 刀鉅在前하고 鼎鑊在後라도 視之如無物者는 蓋緣只見得這道理하고 都不見那刀鉅鼎鑊이라 如今朋友ㅣ 都信不及하니 覺見此道日孤하야 令人意思不佳로다
【解】僞學黨(韓侂冑가 朱子를 僞學黨首로 誣陷했음)의 설이 일어났을 때에 或人이 先生더러 學徒를 흩어보내고 문을 닫고 일을 줄여 禍를 피하라고 권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禍福의 옴은 命이다. 孔子가 南容더러 ‘나라에 道가 없을 때에 그 黙함이 足히 용납할 만하다’라고 한 것은 다만 가서 登聞鼓를 치고 원통함을 호소하지 않은 것이 바로 黙이지 屋下에서 할 만한 말도 감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했다. 어떤 朋友가 살며시 깨우치기를, “先生이 孔子가 ‘하늘이 나에게 德을 生하였다.’라고 하는 뜻만 있고, 孔子가 微賤한 服으로 宋을 지나 桓魋의 禍를 피한 뜻은 없습니다.” 하자, 先生이 말하기를, “某가 일찍이 書를 올려 스스로 辨하지 않고, 또 일찍이 詩를 지어 남을 비방하지도 않았다. 다만 朋友로 더불어 古書나 강습하고 그 도리나 말하는데, 그것마져도 하지 말라고 한다면 다시 무엇을 하란 말인가.《論語》의 首章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했고, 마지막 章에 ‘命을 알지 못하면 君子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 지금 사람도 입만 열면 ‘一飮과 一啄도 본시 定해진 분수가 있다.’라고 하면서도 小小한 利害만 만나면 금방 달려가고 피하는 계교의 마음이 생긴다. 古人은 칼 톱이 앞에 있고 가마 솥이 뒤에 있을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았으니, 그것은 다만 道理만을 보고 전혀 칼 톱 가마 솥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朋友는 전혀 믿음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니 그래서 이 道가 날로 孤單해짐을 느끼게 되어 사람의 意思가 좋지 않게 한다.” 하였다.

○ 樂記에 曰君子曰禮樂은 不可斯須去身이라하니 致樂以治心則易直子諒之心이 油然生矣오 易直子諒之心이 生則樂하고 樂則安하고 安則久하고 久則天하고 天則神이라 天則不言而信하고 神則不怒而威니 致樂은 以治心者也라 致禮以治躬則莊敬하고 莊敬則嚴威라 中心이 斯須不和不樂이면 而鄙詐之心이 入之矣오 外貌斯須不莊不敬이면 而易慢之心이 入之矣니 故로 樂也者는 動於內者也오 禮也者는 動於外者也라 樂極和하고 禮極順하야 內和而外順則民瞻其顔色而弗與爭也하고 望其容貌而民不生易慢焉이라 故로 德輝動於內而民莫不承聽하고 理發諸外而民莫不承順이니 故로 曰致禮樂之道ㅣ 擧而錯之天下ㅣ 無難矣니라
【글풀이】樂記에 하였기를, 君子가 말하기를, “禮樂은 斯須도 身에서 去치 않는다.” 했으니, 樂을 致하여 心을 治한즉 易하고 直하고 子하고 諒하는 心이 油然하게 生하고, 易直子諒의 心이 生하면 樂하고, 樂하면 安하고, 安하면 久하고, 久하면 天하고, 天하면 神하니라. 天하면 言치 않아도 信하고 神하면 怒치 않아도 威하나니, 樂을 致함은 써 心을 治하는 것이다. 禮를 致하여 써 躬을 治하면 莊敬하고 莊敬하면 嚴威한다. 中心이 斯須라도 和치 않고 樂치 않으면 鄙詐한 마음이 入하고 外貌가 斯須라도 莊치 않고 敬치 않으면 易慢의 心이 入하나니, 故로 樂이란 內에 動하는 것이요, 禮란 外에 動하는 것이다. 樂이 和를 極하고 禮가 順을 極하여 內가 和하고 外가 順하면 民이 그 顔色을 보고 더불어 爭하지 않고, 그 容貌를 望하고 民이 易慢을 生치 않는다. 故로 德輝가 內에 動함에 民이 承聽치 않는 이 없고, 理가 外에 發함에 民이 承順치 않는 이 없나니, 故로 禮樂을 致하는 道ㅣ 擧하여 天下에 錯함에 어려움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뜻풀이】樂記(禮記 篇名)에 하였기를, 君子는 “禮와 樂을 잠시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音樂을 하므로써 마음을 다스리면 平易하고 正直하고 仁慈하고 信實한 마음이 은연중에 생기고, 易直子諒의 마음이 생기면 즐겁고, 즐거우면 편하고, 편하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天然스러워지고, 天然스러워지면 神通해진다. 天然하면 말하지 않아도 믿게되고, 神通해지면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생긴다. 樂을 함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요, 禮를 함은 몸을 다스리는 것이니, 씩씩해지고 공경해지는 것이다. 씩씩하고 공경하면 엄하고 위엄이 생긴다. 中心이 잠깐만 和치 않고 樂치 않으면 鄙陋하고 奸邪한 마음이 들어가는 것이요, 外貌가 잠깐만 莊하고 敬하지 않으면 輕易하고 怠慢한 마음이 들어가는 것이다. 故로 音樂이란 內에 動하는 것이요, 禮란 外에 動하는 것이다. 樂으로 和를 極히 하고 禮로 順을 極히 하여 內가 화하고 外가 順하면 民이 그 顔色만 보고도 더불어 다투지 않으며 그 容貌만 바라보고도 輕易 怠慢을 生하지 않는다. 그래서 德의 빛이 속에서 動함에 民이 받들어 聽從하지 않는 이 없고, 道理가 밖으로 發現함에 백성이 받들어 順從하지 않는 이 없다. 그래서 禮와 樂을 하는 道를 들어서 天下에 놓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다.

△ 程子曰古者에 玉不去身하고 無故어든 不撤琴瑟하야 自成童으로 入學하여 四十而出仕토록 所以敎養之者ㅣ 備矣라 理義以養其心하고 禮樂以養其血氣하니 故로 其才高者는 爲聖賢하고 下者는 亦爲吉士하니 由養之至也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옛적에는 玉을 身에서 버리지 않았고, 故(喪祭等)가 없거든 琴瑟을 철거하지 않아 成童(十五歲)으로부터 入學하여 四十에 出仕할 때까지 敎養하는 바가 完備하였다. 理義로써 그 心을 養하고 禮樂으로써 그 血氣를 養했기 때문에 그 才가 높은 자는 聖賢이 되고 낮은 자도 吉士가 되었으니, 養하기를 지극히 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張子曰有潛心於道라가 忽忽爲他慮引去者는 此氣也라 舊習이 纏繞하야 未能脫灑면 畢竟無益이라 但樂於舊習耳니 古人이 欲得朋友與琴瑟簡編은 常使心在於此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道에 마음을 두었다가도 홀홀히 딴 생각에 끌려가는 수가 있음은 이 氣다. 옛 습관이 얽히어 시원히 벗어나지 못하면 필경 有益함이 없는 것이요, 다만 옛 습관만 즐길 따름이다. 옛사람이 朋友와 거문고 비파 서책을 얻고자 하는 것은 늘 마음이 여기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 朱子曰聖賢之敎ㅣ 無一言一句不是入德門戶라 如所謂禮樂不可斯須去身者는 尤爲深切이니 眞當佩服存省하야 以終其身也라 又曰心은 要平易하고 無艱深險阻니 所以說不和不樂則鄙詐之心이 入之矣오 不莊不敬則易慢之心이 入之矣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聖賢의 敎가 一言一句도 德에 드는 門戶가 아님이 없다. 마치 이른바 ‘禮樂은 잠시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함은 더욱 깊고 간절하니, 참으로 마땅히 몸에 붙여두고 살펴 終身을 해야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은 모름지기 平易해야지 어렵거나 깊고 험하고 막혀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말하기를, ‘不和 不樂하면 鄙詐한 마음이 들어가고, 不莊 不敬하면 易慢한 마음이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 明道先生이 終日端坐ㅣ 如泥塑人이러니 及至接人하얀 渾是一團和氣러라 書字甚敬하고 云非要字好라 只此是學이며 只此求放心이니라
【解】明道先生이 종일 단정히 앉아 진흙 偶像과도 같다가 사람을 접함에 이르면 전연 한 덩어리의 和氣였다. 글씨를 쓸 때에는 심히 공경하고 말하기를, “글씨를 좋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학문이요, 이것이 放心을 求(收拾)하는 것이다.” 했다.

△ 藍田呂氏曰橫渠先生이 終日危坐一室하야 左右簡編을 俯而讀하고 仰而思하야 有得則識之호대 或中夜起坐하야 取燭以書하니 其志道精思ㅣ 未始須臾息하고 亦未嘗須臾忘也러라
【解】藍田呂氏(名 大臨 字 與叔)가 말하기를, “橫渠先生이 종일 一室에 꿇고 앉아 左右의 책을 굽어보아 읽고 우러러 생각하여 얻어짐이 있으면 기록을 하되 혹 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촛불을 밝히고 썼으니, 그 道에 뜻하고 정하게 생각함이 일찍이 잠깐도 쉬지 않았고 일찍이 잠깐도 잊지를 않았다.”

△ 程子曰學者ㅣ 須恭敬이나 但不可令拘迫이니 拘迫則難久니라 又曰朱公掞이 在洛에 有書室하야 兩旁에 各一牖요 牖各三十六


이러니 一書天道之要하고 一書仁義之道하고 中以一榜으로 書毋不敬思無邪하고 中處之하니 此意亦好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學者가 모름지기 공경을 해야 하지만 단 拘迫(억지로 다그침)해서는 안 되니, 拘迫하면 오래가기 어렵다.” 또 말하기를, “朱公掞(名 光庭 程子門人)이 洛陽에 있을 적에 書室이 있어 양쪽에 각기 一牖(봉창)가 있고 牖마다 각기 三十六


(


은 間條)이었는데, 一에는 天道의 要를 썼고 一에는 仁義의 道를 썼고 中의 一榜(板面)에 毋不敬 思無邪를 써 놓고 中에서 거처했으니 이런 뜻도 좋다.”

△ 朱子曰和靖尹公이 一室을 名三畏齋하니 取畏天命畏大人畏聖人之言之意라 晩歲에 片紙에 手書聖賢所示治氣養心之要하야 粘之屋壁하야 以自警戒하니 熹竊念前賢의 進修不倦하야 死而後已하야 其心炯炯을 猶若可識이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和靖尹公(名 焞)이 一室을 三畏齋라 이름하였으니, 天命을 畏하고, 大人을 畏하고, 聖人의 言을 畏한다(論語 孔子語)는 뜻을 取한 것이다. 말년에 片紙에다 聖賢이 알려준 氣를 다스리고 心을 養하는 요긴한 말을 손수 써서 벽에 붙여놓고 스스로 깨우쳤다. 熹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前賢이 進德修業을 게을리하지 않아 죽은 뒤에야 그만뒀던 炯炯(明貌)한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 先生이 病中에도 接應不倦이어늘 左右ㅣ 請少節之한대 先生이 厲聲曰儞懶惰하고 敎我也懶惰아하다
【解】先生이 病中에도 사람을 接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거늘 좌우 사람이 조금 調節을 하라고 청하자, 先生이 소리를 가다듬어 “네가 게으르면서 나더러 게으르라고 가르치느냐.” 했다.

△ 廖晉卿이 請讀何書한대 朱子曰公心이 放已久하니 可且收斂精神하고 玉藻의 九容處를 子細體認하야 待有意思하야 却好讀書니라 又曰辨姦論에 謂事之不近人情者ㅣ 鮮不爲大姦慝이라하니 每常嫌此句過當이러니 今見得亦有此樣人이라 某向年에 過江西하야 與陸子壽로 對語而劉淳叟ㅣ 獨去後面角頭하야 學道家打坐라가 被某罵云便是某與陸丈言이 不足聽이라도 亦有數年之長이어늘 何故로 恁地作怪오하다
【解】廖晉卿이 “무슨 글을 읽어야 합니까?” 하고 청한대, 朱子가 말하기를, “公의 마음이 방탕해진지 이미 오래니 우선 정신을 수렴하여 玉藻(禮記 篇名)에 있는 九容(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대목을 자세히 살펴 알고 意思가 생기기를 기다려 글을 읽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辨姦論(蘇洵作)에 말했기를, ‘일의 人情에 가깝지 않은 者는 큰 姦慝이 되지 않는 수가 적다.’ 했기에 매양 이 句가 지나치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도 이런 사람이 있음을 보았다. 某가 前年에 江西를 지나다가 陸子壽로 더불어 對話를 하는데 劉淳叟가 혼자서 뒤쪽 구석지로 가서 道家의 앉아있는 짓을 하고 있으므로 내가 ‘아무리 某와 陸丈의 말이 듣잘것이 없다손치더라도 또한 數年의 長이 되거늘 어찌 그렇게 괴상한 짓을 한단 말인고.’ 하고 꾸짖었다.”

△ 葉賀孫이 請問에 語聲의 末後가 低하야 先生이 不聞하고 因云公仙鄕人은 何故로 聲氣ㅣ 都恁地하야 說得箇起頭하고 後面이 懶將去오 孔子曰聽其言也厲라하니 公이 只管恁地면 下梢에 見道理不分明하야 將漸入於幽暗하야 含含胡胡하고 不能到得正大光明之地리라 說話는 須是一字是一字요 一句是一句하야 便要見得是非니라
【解】葉賀孫(字 味道 諡 文修)이 청하여 물음에 말소리의 끝부분이 낮아서 先生이 듣지 못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公의 仙鄕(貴鄕과 같은 말) 사람들은 어째서 소리 기운이 모두 그모양으로 말을 하면 첫머리만 치켜오르다가 뒤에 가서는 처져버리는고. 孔子가 말하기를, ‘그 말을 들으면 가다듬는다.’ 하지 않았는가. 公이 그렇게만 했다가는 결국에 道理 보기를 분명하게 하지 못하고 장차 점점 어두운데로 들어가 어물어물하고 光明正大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다. 말이란 모름지기 一字는 一字가 되고 一句는 一句가 되어 옳은지 그른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했다.

○ 君子ㅣ 反情以和其志하고 比類以成其行하나니 姦聲亂色을 不留聰明하며 淫樂慝禮를 不接心術하며 惰慢邪僻之氣를 不設於身體하야 使耳目鼻口와 心知百體로 皆由順正하야 以行其義니라
【글풀이】君子가 感情을 反省하여 그 뜻을 和하게 하고 類와 比合하여 그 행실을 이룩하나니, 간특한 소리와 음란한 色을 聰明(耳目)에 머무르지 않으며, 淫한 음악과 사특한 禮를 心術에 접하지 아니하며, 惰慢하고 邪僻한 氣를 身體에 베풀지 아니하여 耳目鼻口와 心知百體로 하여금 모두 順하고 正함으로 말미암게 하여 써 그 義를 행하는 것이다.
【뜻풀이】君子는 外物에 느껴 發하는 情을 돌이켜 살펴 그 心志를 和平케 하고 착한 類들과 가까이 하여 그 善行을 이룩하는 것이니, 君子는 간특한 소리와 어지러운 빛을 귀와 눈에 머물러두지 않으며, 음란한 음악과 사특한 禮를 심술에 接하지 아니하며, 게으르고 간사하고 괴벽한 기운을 신체에 베풀지 않아 귀 눈 코 입과 마음 지각과 百體로 하여금 모두 順하고 正함으로 말미암아 그 義를 行하도록 하는 것이다.

△ 張子曰戱言이 出於思也며 戱動이 作於謀也라 發於聲하며 見乎四支어늘 謂非己心이 不明也니 欲人無己疑나 不能也리라 過言이 非心也며 過動이 非誠也라 失於聲하며 謬迷其四體어늘 謂己當然이 自誣也라 欲他人己從이면 誣人也라 或者ㅣ 以出於心者로 歸咎爲己戱하고 失於思者로 自誣爲己誠하야 不知戒其出汝者하고 歸咎其不出汝者하니 長敖且遂非ㅣ 不知孰甚焉고
【解】張子가 말하기를, “戱言이 생각에서 나오며, 戱動도 謀함에서 作해진다. 聲에 發하고 四肢에 나타나거늘 己의 마음이 아니라 이름은 明치 못함이니, 남이 나를 의심치 않기를 欲하나 能치 못할 것이요, 실수한 말이 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실수 한 행동이 誠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聲에 失하고 그 四體가 잘못 움직였거늘 己의 당연함이라 이름은 자신을 속임이다. 他人이 己를 따르기를 欲하면 人을 속임이다. 或者는 心에서 나온 것(戱言 戱動)을 자기의 戱라고 허물을 돌리고, 생각을 실수한 것(過言 過動)을 스스로 속여 자기의 誠心이라고 하여, 그 汝에게서 나온 것(戱言 戱動)을 戒하고, 그 汝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過言 過動)에 허물을 돌릴 줄을 알지 못하니, 傲慢함을 자라게 하고(戱) 非를 이룩함(過)이 무엇이 이보다 甚한지 모르겠다.”

△ 又曰戱謔이 不惟害事라 志亦爲氣所流니 不戱謔이 亦是持氣之一端이라
【解】또 말하기를, “戱謔이 오직 일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志도 또한 氣의 流蕩시키는 바가 되는 것이니, 戱謔을 안 하는 것이 또한 氣를 잡는 한가지가 된다.”

△ 朱子曰非禮勿視勿聽이 卽所謂姦聲亂色을 不留聰明하고 淫樂慝禮를 不接心術이니 非是耳無所聞하고 目無所見이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禮가 아니면 듣지 마는 것이 바로 이른바 姦聲 亂色을 聰明에 머무르지 않음이니, 이는 귀에 들리는 바가 없고 눈에 보이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다.”

△ 南軒張氏曰古人이 衣冠容止之間에 不是要作意矜持라 只是循他天則에 合如是니라 爲尋常因循怠弛故로 須著勉强自持니 外之不肅而謂能敬於內ㅣ 可乎아 又曰詳考從古聖賢의 論下學處에 莫不以正衣冠肅容貌로 爲先하니 蓋必如此然後에 得所存而不流於邪僻하니 易所謂閑邪存其誠과 程氏所謂制之於外하야 以養其中者ㅣ 此也라
【解】南軒張氏(栻)가 말하기를, “古人이 衣冠과 용모 행동을 일부러 장엄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천연의 법칙을 따르자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냥 보통때에 옛 습관대로 게을러 풀어져 있기 때문에 모름지기 애써 자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니 외모를 엄숙히 하지 않고서 속을 敬할 수가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옛부터 聖賢이 下學(下學人事)을 논하는 곳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모두가 衣冠을 바르게 하고 용모를 엄숙히 함으로써 우선을 삼았으니,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한 뒤에 存(存心)한 바를 얻어 邪僻에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周易》에 이른바 ‘邪를 막아 그 誠함을 存한다.’ 함과 程氏의 이른바 ‘外에 억제하여 그 中을 養하라.’는 것이 이것이다.”

△ 西山眞氏曰君子之所以自養者는 無他라 內外交致其功而已라 故로 姦聲亂色을 不留聰明者는 所以養其外也오 淫樂慝禮를 不接心術者는 所以養其內也라 外無聲色之誘則內亦正矣오 內無淫慝之惑則外亦正矣라 惰慢之氣는 自內出者也오 邪僻之氣는 自外入者也니 二者를 不得設於身體라 如是則外而耳目鼻口와 四肢百體와 內而心知ㅣ 皆由順正하야 以行其義니 自養之功이 畢矣라
【解】西山眞氏가 말하기를, “君子가 스스로 養하는 바는 다름이 없다. 內와 外가 사귀어 그 功夫를 할 따름이다. 그래서 姦聲과 亂色을 聰明에 머물지 않는 것은 그 外를 養하는 바요, 淫樂 慝禮를 心術에 接하지 않는 것은 그 內를 養하는 바다. 外에 亂色의 誘가 없으면 內도 正해지고, 內에 淫慝의 惑에 없으면 外도 正해진다. 惰慢의 氣는 內로부터 나온 것이요, 邪僻의 氣는 外로부터 들어간 것이다. 두 가지를 身體에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와같이 하면 外로 耳目鼻口와 四肢 百體와 內로 心知가 모두 順正으로 말미암아 그 義를 行하니 自養의 功이 다한 것이다.”

○ 君子는 樂得其道하고 小人은 樂得其欲하나니 以道制欲則樂而不亂이요 以欲忘道則惑而不樂이니라
【글풀이】君子는 그 道를 얻음을 즐거워하고 小人은 그 欲을 얻음을 즐거워하나니, 道로써 欲을 制하면 樂하여도 亂치 않고, 欲으로써 道를 忘하면 惑하여 樂치 못한다.
【뜻풀이】君子는 자기가 行할 道를 얻게 된 것을 즐거워하고 小人은 자기의 貪欲대로 된 것을 즐거워한다. 道義로써 탐욕을 抑制하면 즐거우면서 亂하지 않고, 탐욕 때문에 道義를 망각하게 되면 眩惑하여 즐겁지 못한 것이다.

△ 程子曰人雖不能無欲이나 然當有以制之니 無以制之而惟欲之從則入於禽獸矣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비록 欲이 없지 못하나 마땅히 억제함이 있어야 하니, 억제함이 없고 오직 欲만 따른다면 禽獸에 들어간다.”

△ 呂與叔曰嘗有一朝士ㅣ 久不見伯淳하고 謂曰以伯淳如此聰明으로 因何許多時에 終不肯回頭來오 伯淳이 答云蓋恐回頭錯耳라
【解】呂與叔이 말하기를, “일찍이 한 朝士(조정의 官人)가 오랫동안 伯淳(程明道의 字)을 보지 못했다가 (만나서) 이르기를, ‘伯淳이 그렇게 총명하면서 어찌하여 허다한 시일을 그냥 보내고 끝까지 머리를 돌려 (조정으로) 오지를 않는고?’ 하자, 백순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고개를 잘못 돌릴까 두려워서다.’라고 했다.” 

△ 有人이 勞伊川先生曰 先生이 謹於禮四五十年하니 亦甚勞且苦矣로다 先生曰吾ㅣ 日履安地하니 何勞苦之有리오 他人은 日踐危地하니 乃勞苦也니라
【解】어떤 사람이 伊川先生을 위로하기를, “선생이 禮를 삼가한지 四五十年이니 또한 심히 수고롭고 괴로웠겠습니다.”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날마다 편안한 땅을 밟으니 무슨 勞苦가 있겠는가. 他人은 날마다 危地를 밟으니 그게 勞苦인 것이다.” 했다.
△ 朱公掞이 爲御史에 端笏正立하야 嚴毅不可犯이라 班列이 肅然이어늘 蘇子瞻이 語人曰何時에 打破這敬字오
【解】朱公掞(光庭 程子 門人)이 御史가 되어 笏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서니 엄하고 씩씩하여 범할 수가 없어 班列이 숙연해지거늘 蘇子瞻(名 軾 號 東坡)이 人에게 말하기를, “언제 저 敬字를 打破해버릴고.” 했다.

△ 王信伯이 曰伊川先生이 一日에 偶見秦少游하고 問天若知也和天瘦ㅣ 是公詞否아한데 少游ㅣ 意伊川이 稱賞之하고 拱手遜謝한대 伊川이 云上穹이 尊嚴이어늘 安得易而侮之오하니 少游ㅣ 面色이 騂然하다
【解】王信伯(名 蘋)이 말하기를, “伊川先生이 하루는 우연히 秦少游(名 觀)를 보고 묻기를, ‘<하늘이 만약 안다면 하늘도 瘦瘠(야위어짐)해지리라>란 글이 公이 지은 詞인가?’ 하자, 少游가 伊川이 칭찬을 한줄로 생각하고 拱手를 하고 겸손의 말을 하자 이천이 말하기를, ‘윗 하늘은 尊嚴하거늘 어찌 함부로 모욕을 한단 말인고.’ 하니, 少游가 얼굴빛이 빨갛게 되었다.”
【註】少游가 妓女에게 詩를 주기를, “玉佩丁東別後悵 佳期參差難”이라 하고, 또 “天還知道 和天也瘦 花下重門 柳邊深巷 不堪回首”라 했다.

△ 張子曰鄭衛之音은 悲哀하야 令人意思留連하고 又生怠惰之意하며 從而致驕淫之心이라 雖珍玩奇貨라도 其始感人也ㅣ 亦不若是切이라 從而生無限嗜好하니 故로 孔子ㅣ 必放之하니 亦是聖人이 經歷過라 但聖人은 能不爲物所移耳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鄭과 衛의 음악은 슬퍼서 사람의 생각으로 하여금 거기서 오래 머물러 있게 하고, 또 게으른 뜻이 생기게 하며, 따라서 교만하고 음란한 마음이 일게 한다. 아무리 기이한 놀이개와 보화라 하더라도 처음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를 이렇듯 간절하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무한한 嗜好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그래서 孔子가 (鄭衛의 音을) 반드시 내쳐야 한다고 한 것이니, 이 또한 聖人이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다만 聖人은 능히 外物에게 옮겨가지 않는 것이다.”

△ 武夷胡氏曰左氏傳에 公孫敖ㅣ 奔莒하니 從己氏也라하니 男女는 人之大欲이 存焉이라 寡欲者는 養心之要니 欲而不行이 爲難이라 然이나 欲生於色而縱於淫하고 色出於性이라 目之所視ㅣ 有同美焉하야 不可掩也오 淫出於氣하니 不持其志則放辟趨蹶을 無不爲矣라 夫以志徇氣하야 肆行淫欲하고 而不能爲之帥하야 至於棄其家國하고 出奔而不顧하니 此는 天下之大戒라 春秋에 謹書其事하니 於敖與에 何誅리요 使後人으로 爲鑑하야 必持其志하니 修身窒欲之方也라
【解】武夷胡氏(名 安國 字 康侯 諡 文定)가 말하기를,󰡒《左氏傳》(左丘明의 春秋傳)에 하였기를, ‘公孫敖(魯 大夫)가 莒로 出奔했으니 己氏(莒女)를 따라간 것이다.’ 했다. 男女란 사람의 大欲이 있는 것이니 欲을 적게 함이 養心을 하는 要요, 欲을 부리지 않기란 어렵다. 그러나 欲이 女色에서 생겨 淫에 방종하는 것이요, 色欲은 天性에서 생긴 것이다. 눈으로 보는 바에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어 가리울 수가 없다. 淫이란 氣에서 나온 것이니, 그 氣를 잡지 않으면 방탕하고 편벽하고 달려가고 엎어지고 하여 못할 짓이 없다. 무릇 志로 氣를 따르면 淫欲을 방사하게 行하여 帥(孟子 志는 氣의 帥다)가 되지 못하므로 그 집과 나라까지 버리고 不顧함에 이르니, 이는 天下의 大戒다. 敖야 어찌 나무라잘 것이 있으리요마는 後人으로 하여금 鑑戒를 삼아 반드시 그 志를 가지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몸을 닦고 欲을 막는 방도다.
【註】公孫敖는 字가 穆伯이다. 魯 文公 七年에 莒國女를 娶하니 戴己요 文伯을 生했고, 그 娣(同嫁해온 妻妹) 聲己가 惠叔을 生했다. 戴己가 죽자 다시 莒國에 聘(娶妻)하기를 求하자 莒國이 聲己가 있지 않느냐고 사절을 하므로 자기의 弟 襄仲을 爲해 聘하겠다고 하고 冬에 敖가 莒에 갔는데, 鄢陵에 이르러 城에 올라 바라보고 美色이므로 스스로 娶해버렸다. 襄仲이 敖를 攻하려 하자 文公이 말리고 襄仲더러 莒女를 버리게 하고 敖더러 莒女를 돌려보내게 했다. 文公 八年에 敖가 周에 가서 弔喪을 하게 되었는데, 周에 이르지 않고 그 幣를 가지고 莒로 도망가버렸다. 胡氏의 말은 이를 논한 것이다.

△ 致堂胡氏曰惟酒無量不及亂은 亂者는 內昏其心志하고 外喪其威儀요 甚則班伯所謂淫亂之原이 皆在於酒也라 聖人은 飮無定量이나 亦無亂態니 蓋從心所欲不踰矩라 是以如此라 學者는 未能然하니 當知戒可也라
【解】致堂胡氏(名 寅 字 明仲)가 말하기를, “‘술이 量이 없으나 亂에 미치지 않았다.’(孔子事) 함의 亂이란 안으로 그 心志를 昏케 하고 밖으로 그 威儀를 잃음이요, 甚하면 班伯(漢成帝時人)이 말한바, ‘淫亂의 原이 모두 酒에 있다.’는 것에 이른다. 聖人은 술을 마심이 定해진 量이 없으되 또한 亂한 態가 없으니 이것이 ‘마음이 欲하는 바를 따라도 矩에 넘지 않는다.’란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學者는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하니 마땅히 戒할 줄을 알아야 한다.”

△ 朱子曰樂記에 云好惡ㅣ 無節於內하고 知誘於外하야 不能反躬이면 天理滅矣라하니 此는 言情所以流而性之所以失也라 情之好惡ㅣ 本有自然之節이어늘 惟其不自覺知하고 無所涵養而大本이 不立이라 是以로 天則이 不明於內하고 外物이 又從而誘之하니 此所以流濫放逸而不自知也라 苟能於此에 覺其所以然者而反躬以求之則其流를 庶乎其可制也라 不能如是而惟情是徇則人欲熾盛而天理滅息이 尙何難之有哉아 此一節이 正天理人欲之機의 間不容息處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樂記에 말했기를, ‘好惡를 안으로 절제함이 없고 知가 밖에서 誘引하여 능히 그 몸에 反省하지 못하면 天理가 滅한다.’ 했으니, 이는 情의 流하는 바와 性의 失하는 바를 말한 것이다. 情의 好惡가 본시 自然의 節度가 있거늘 오직 스스로 깨달아 알지를 못하고 涵養을 하지 못하여 大本(心의 不偏不倚)이 서지 못한지라, 이로써 天則(自然의 법칙)이 안으로 밝지 못하고 外物이 또 따라서 誘引을 하니, 이래서 흐르고 넘치고 방탕하고 달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진실로 여기서 그 까닭을 알고 몸에 반성하여 찾아보게 되면 그 흐름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못하고 감정대로만 한다면 人欲이 불타 盛해지고 天理가 멸하여 없어지기가 어찌 어렵겠는가. 이 한 대목이 참으로 天理와 人欲의 機關으로서 그 사이가 一息도 용납하지 못하는 곳이다.

○ 孟子曰人皆有不忍人之心하니라 先王이 有不忍人之心하야 斯有不忍人之政矣니 以不忍人之心으로 行不忍人之政이면 治天下는 可運之掌上이니라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는 今人이 乍見孺子ㅣ 將入於井하고 皆有怵惕惻隱之心하나니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며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며 非惡其聲而然也니라 由是觀之컨대 無惻隱之心이면 非人也오 無羞惡之心이면 非人也오 無辭讓之心이면 非人也오 無是非之心이면 非人也니라 惻隱之心은 仁之端也오 羞惡之心은 義之端也오 辭讓之心은 禮之端也오 是非之心은 智之端也니라 人之有是四端也ㅣ 猶其有四體也니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는 自賊者也오 謂其君不能者는 賊其君者也라 凡有四端於我者를 知皆擴而充之矣면 若火之始然하며 泉之始達하야 苟能充之면 足以保四海오 苟不充之면 不足以事父母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先王이 人에게 不忍하는 心을 두어 이에 人에게 不忍하는 政을 두었으니, 人에게 不忍하는 마음으로써 人에게 不忍하는 政을 행하면 天下를 治함은 가히 掌上에 運할 수 있다. 써 사람마다 人에게 不忍하는 心이 있다 함은 이제 人이 잠깐 孺子가 장차 井에 入함을 보고 다 怵惕하고 惻隱한 心이 있나니, 孺子의 父母에게 交를 內하려는 바가 아니며, 鄕黨 朋友에게 譽를 要함이 아니며, 그 聲을 惡하여 그럼도 아니다. 이로 由하여 본다면 惻隱의 心이 없다면 人이 아니요, 羞惡의 心이 없다면 人이 아니요, 辭讓의 心이 없다면 人이 아니요, 是非의 心이 없다면 人이 아니다. 惻隱의 心은 仁의 端이요, 羞惡의 心은 義의 端이요, 辭讓의 心은 禮의 端이요, 是非의 心은 智의 端이다. 人의 이 四端을 둠이 그 四體를 둠과 같으니, 이 四端을 두고도 스스로 能치 못한다 이름은 스스로 賊하는 者요, 그 君을 能치 못한다 이르는 者는 그 君을 賊하는 者다. 무릇 나에게 四端을 둔 것을 知하여 다 擴하여 充하면 마치 火의 처음 然하고 泉의 처음 達함과 같아, 진실로 能히 充하면 四海를 保하고 진실로 充치 못하면 족히 써 父母도 섬기지 못한다.”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사람은 모두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인자한 마음이 있다. 先世의 王이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어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仁政을 行했으니,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政事를 行한다면 天下를 다스리기는 손바닥 위에서 돌리는 것과 같이 쉽다. 사람마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사람이 잠깐 어린애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려고 함을 보았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애처럽게 여기는 생각이 나는 것이니, 그것이 그 어린애의 부모와 親交를 맺으려는 것도 아니고, 고을이나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자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救하지 않았다는 惡한 소리를 듣기가 싫어서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惻隱(애처럽게 여김)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요, 羞惡(惡을 부끄러워하고 惡을 미워함)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요, 辭讓(辭避와 讓與)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요, 是非(옳고 그름을 가림)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惻隱의 마음은 仁(仁의 性)의 端(部分)이요, 羞惡의 마음은 義의 端이요, 辭讓의 마음은 禮의 단이요, 是非의 마음은 智의 端이다. 사람이 이 四端의 情을 두고 있는 것이 마치 四體(手足)를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이 四端의 情을 두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仁義禮智의 道를 行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自害를 하는 것이요, 자기의 임금을 仁義禮智의 道를 行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임금을 害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四端이 나에게 있음을 알아서 모두 擴大해 나가 그 分量을 충분히 채운다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름과 샘물이 처음 터져나옴과 같아, 진실로 능히 확충을 하면 족히 四海(天下)를 保護할 것이요, 진실로 확충을 못한다면 父母도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朱子가 말하기를, “惻隱이 바로 不忍人의 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情의 發이 或 理를 主하고 或 氣를 主하니, 氣의 發은 七情(喜怒哀懼愛惡欲)이 그것이고, 理의 發은 四端이 그것이다. 그러나 天下에 理 없는 氣가 없고 또한 氣 없는 理가 없으니, 四端은 理가 發하여 氣가 隨한 것이요, 七情은 氣가 發하여 理가 乘한 것이다. 理에 氣의 隨가 없으면 될 수가 없고, 氣에 理의 乘이 없으면 利欲에 빠져 禽獸가 된다. 이는 바꿀 수 없는 定理이다. 만약 합쳐서 말한다면 未發時의 中이 大本이 되고 七情이 大用이 되니, 程子의 好學論과 中庸의 首章이 그것이요, 孟子의 이 章은 홀로 理만 主하여 말한 것이다. 人心은 七情이 그것이요, 道心은 四端이 그것이니, 兩箇의 道理가 있는 것이 아니다.”
   栗谷(李珥)이 말하기를, “人心과 道心은 或 形氣를 爲하고 혹 道義를 爲한 것이니, 그 原은 비록 一이지만 그 流가 이미 갈라졌으니 실로 兩邊으로 分하여 說明할 수 있다. 그러나 四端과 七情은 그렇지 않다. 四端은 바로 七情의 善一邊이요, 七情은 四端의 總會이다. 一邊을 어찌 總會와 相對해서 兩邊으로 나눈단 말인가. 대저 發하는 것은 氣요, 써 發하는 바는 理니, 氣가 아니면 能히 發하지 못하고 理가 아니면 發할 바가 없다. 先後도 없고 離合도 없으니 서로 發한다고 말할 수 없다.”
  高峯(奇大升)이 말하기를, “孟子의 喜하여 寐치 못함도 喜요, 舜의 四凶을 誅함도 怒요, 孔子의 哭을 慟히 함도 哀요, 閔子․子路·冉有·子貢이 侍側을 함에 子가 樂함도 樂이니, 이것이 어찌 理의 本體가 아닌가. 또 尋常한 人에게도 天理가 發見한 곳이 있으니, 그 父母 親戚을 보고 欣然히 기뻐함과 남의 死喪을 보고 惻然히 슬퍼하는 것이 또 어찌 理의 本體가 아니겠는가. 이 몇 가지가 만약 모두 形氣를 爲함이라면 이는 形氣와 性情이 相干하지 않음이니 可하다고 하겠는가.”

△ 朱子曰此章所論人之性情心之體用이 最爲詳密하니 讀者ㅣ 宜深味之니라 又曰孔子는 不說心하고 只就事實上說이러니 孟子ㅣ 始說心하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이 章에서 人의 性情과 心의 體用을 論한 바가 가장 자상하고 세밀하니 讀者가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한다.” 또 말하기를, “孔子는 心을 말하지 않고 다만 事實上에 나아가 말을 했는데, 孟子가 비로소 心을 말했다.”

△ 問人心이 陷溺之久에 四端이 蔽於利欲之私하야 初用工夫ㅣ 亦未免間斷이니다 朱子曰固是나 然義理之心이 纔勝則利欲之心이 便消하나니 如惻隱之心이 勝則殘虐之意ㅣ 自消요 羞惡之心이 勝則貪冒無恥之意ㅣ 自消요 恭敬之心이 勝則驕惰之意ㅣ 自消요 是非之心이 勝則含胡苟且頑冥昏繆之意ㅣ 自消니라 又曰孟子曰學問之道는 無他라 求其放心而已라하고 又曰有是四端於我者를 知皆擴而充之라하니 孟子之言이 甚善이라 人之一心의 在外者를 要取入來하고 在內者를 又要推出去하니 孟子一部書ㅣ 無非此意라
【解】묻노니, “사람의 마음이 물욕에 빠진지 오래되어 四端이 利欲의 私에 가리워져 처음 공부를 함에 間斷이 됨을 면치 못합니다.” 朱子가 대답하기를, “본디 그런 것이다. 그러나 義理의 마음이 이기게 되면 利欲의 생각이 곧 없어지는 것이니, 마치 惻隱의 마음이 勝하면 殘忍 暴虐한 뜻이 저절로 없어지고, 羞惡의 마음이 勝하면 貪慾 冒行 無恥의 뜻이 저절로 없어지고, 恭敬의 마음이 勝하면 驕慢 怠惰의 뜻이 저절로 없어지고, 是非의 마음이 勝하면 어물거리고 구차하게 하려는 멍청하고 캄캄한 잘못된 뜻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다.” 했다. 또 말하기를, “孟子가 말하기를, ‘學問의 道는 다름이 없다. 그 放心을 求할 따름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 四端이 나에게 있는 것을 알아서 모두 擴하여 充해야 한다.’ 했으니, 孟子의 말이 甚히 善하다. 사람의 一心을 外에 있는 것은 取하여 들어오게 하고, 속에 있는 것은 또 미루어 나가게 하였으니《孟子》一部 글이 이런 뜻이 아닌 것이 없다.”

△ 勉齋黃氏曰人莫不有是氣則莫不有是理요 莫不有是體則莫不有是用이니 此天之所以予我而人之所以爲人者也라 天下에 倀倀然於覆載之間하야 亦嘗反諸吾身而思之乎아 飢食而渴飮하고 趨利而避害則知之矣로대 至於天之予我而人之所以爲人者하얀 乃反不知焉은 何哉오 孟子憫斯人之愚而莫之覺也라 故로 爲之反覆開示之하니 旣啓之以孺子入井之端하고 又告之以火然泉達之始하야 知是理而充之則足以保四海하고 不充之則不足以事父母라하니 充不充之間而功用의 遼絶이 乃如此라 其敎人之意ㅣ 亦切矣라
【解】勉齋黃氏(名 榦)가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이 氣를 두었은즉 모두 이 理를 두었고, 모두 이 體를 두었은즉 모두 이 用을 두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나에게 준 바요, 사람의 사람이 되는 바다. 천하에 覆載(天覆地載)의 사이에서 의지할 데 없이 살면서 일찍이 내 몸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는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利에 나아가고 害를 피할 줄은 알지만 하늘이 나에게 준 것과 사람의 사람이 되는 바는 도리어 알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孟子가 이 사람들의 어리석어 깨닫지 못함을 민망하게 생각하여 반복해서 開示를 하였으니, 이미 孺子가 우물에 들어감의 端으로써 啓하였고, 또 火가 然하고 泉이 達한 始로써 고하여 이 理를 알아 充하면 족히 四海를 保하고 充치 못하면 족히 父母도 섬기지 못한다고 했으니, 充하고 充하지 않는 사이에 功用(效果)이 아주 동떨어짐이 이와 같다. 그 사람을 가르치는 뜻이 또한 간절하다.

○ 孟子曰矢人이 豈不仁於函人哉리요마는 矢人은 惟恐不傷人하고 函人은 惟恐傷人하나니 巫匠도 亦然이라 故術不可不愼也니라 孔子曰里仁이 爲美하니 擇不處仁이면 焉得智리오하니 夫仁은 天之尊爵也며 人之安宅也어늘 莫之禦而不仁하니 是不智也라 不仁不智하야 無禮無義면 人役也니 人役而恥爲役은 由弓人而恥爲弓하며 矢人而恥爲矢也니라 如恥之댄 莫如爲仁이라 仁者는 如射하니 射者는 正己而後에 發하야 發而不中이라도 不怨勝己者오 反求諸己而已矣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仁치 않으리요마는 화살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傷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傷할까 두려워하나니 巫와 匠도 또한 그러하니, 故로 術을 愼치 아니치 않아야 한다. 孔子가 말하기를, ‘里가 仁함이 美가 되니, 擇하여 仁에 處하지 않으면 어찌 智할 수 있으리요.’ 하였으니, 무릇 仁은 天의 尊爵이며, 人의 安宅이거늘 禦하지 않는데도 仁치 않으니 이는 智치 못함이라. 不仁 不智하므로 禮도 없고 義도 없으면 人이 役하나니 人이 役함에 役하옴을 耻함은 弓人으로 弓하옴을 耻하며 矢人으로 矢하옴을 耻함과 같다. 만약 耻할진댄 仁을 함만 같음이 없으니, 仁이란 射와 같다. 射하는 者는 己를 바로한 뒤에 發하고, 發하여 中치 않아도 己를 勝한 자를 怨치 않고 己에 돌이켜 求할 따름이니라.”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화살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어찌 꼭 갑옷을 만들어 파는 사람보다 그 마음이 仁厚하지 않으리요마는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그 화살이 사람을 傷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면서 만들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그 갑옷이 화살이나 창 같은 것을 막아내지 못하여 사람을 상하게 될까 염려하면서 만든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그 用心에 仁과 不仁의 差가 있다. 이것은 사람의 병에 빌어주어 목숨을 救해주려는 巫人과 사람이 죽으면 棺을 만들어 주고 利得을 보는 匠人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生活手段인 技術業種도 신중히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孔子가 말하기를, ‘마을이 仁厚함이 아름다운 것이니, 가리어 仁한 데 處하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리요.’ 하였으니, 무릇 仁이란 하늘의 높은 벼슬이요, 사람의 편안한 집이다. 아무도 막지 않거늘 仁하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仁치 못하고 智치 못하여 禮도 없고 義도 없으면 남이 부려먹게 된다. 남이 부려먹으면 부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이는 마치 활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드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드는 것을 부끄러워함과 같은 것이다. 만약 부끄러워한다면 仁을 하는 것만 같음이 없다. 仁을 하는 것은 마치 활쏘는 것과 같으니, 활쏘는 사람은 몸을 바르게 한 뒤에 쏘고 쏘아서 맞추지 못했을 지라도 자기를 이긴 者를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 자신에게서 패한 원인을 찾아볼 뿐인 것이다.”

△ 朱子曰此亦因人愧恥之心而引之하야 使志於仁也라 不言智禮義者는 仁該全體하니 能爲仁則三者ㅣ 在其中矣라 問仁兼四端意한대 曰上蔡ㅣ 見明道先生하고 擧史書成誦한대 明道ㅣ 謂其玩物喪志라하니 上蔡ㅣ 汗流浹背하고 面發赤色이어늘 明道云此便是惻隱之心이라하니 且道上蔡聞過慚惶이 自是羞惡之心이어늘 如何却說惻隱고 是有惻隱之心이라야 方會動이요 動了라야 始有羞惡하고 有恭敬하고 有是非하니 動處ㅣ 便是惻隱이라 若不會動이면 却不成人이라 天地生生之理로 這些動意ㅣ 未嘗止息이라
【解】주자가 말하기를, “이 또한 사람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因하여 仁에 뜻을 두게 함이다. 智 禮 義를 말하지 않은 것은 仁이 全體에 該하니, 能히 仁을 하면 三者는 그 중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仁이 四端을 兼한 뜻을 묻는데 대답하기를, “上蔡(謝良佐)가 明道先生을 뵙고 史書를 들먹이면서 모두 외우거늘 明道가 ‘物을 玩好하여 志를 잃었다.’고 하니, 上蔡가 땀을 흘려 등을 적시고 얼굴에 빨간 빛이 發하였다. 明道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惻隱의 마음이다.’ 했다. 생각을 해보라. 上蔡가 過를 듣고 부끄러워한 것은 이것이 羞惡의 마음이거늘 어찌하여 惻隱이라고 말했겠는가? 그것은 惻隱의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動하는 것이요, 動해야 비로소 羞惡도 있고, 恭敬도 있고, 是非도 있는 것이다. 動하는 곳이 바로 惻隱이니, 만약 動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수 없다. 天地의 生生하는 理이기에 이 動하는 뜻이 일찍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 孟子曰大人者는 不失其赤子之心者也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大人이란 그 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者니라.”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偉大한 사람(聖賢)이란 그 갓난애 때의 本心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 朱子曰大人은 智周萬物하고 赤子는 全未有知하니 其心이 疑若甚不同矣라 然其不爲物誘而純一無僞則未嘗不同也라 故言其所以爲大人者ㅣ 特在於此라 又曰赤子는 無所知하고 無所能하니 大人者는 是不失其無所知無所能之心이라 若失了此心하고 使些子機關하고 計些子利害하면 便成箇小底人了라 大人은 心下에 沒許多事니라
【解】주자가 말하기를, “大人은 智가 萬物을 두루 알고 赤子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甚히 같지 않을 듯하지만, 그러나 그 物에 誘引되지 않고 純하고 一하여 僞가 없음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 大人이 된 바가 특히 여기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赤子는 아는 바가 없고 能한 바가 없으니, 大人이란 그 아는 바가 없고 能한 바가 없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을 잃어버리고 조금만 機關(꾀)를 부리고 조금만 利害를 계교한다면 곧 작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大人의 마음에는 그런 허다한 事가 없는 것이다.
【註】機關 機는 弓弩의 發動하는 대목이고, 關은 門을 開閉하는 빗장이니 心의 營謀를 비유한 말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