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經 卷三
○ 孟子曰牛山之木이 嘗美矣러니 以其郊於大國也라 斧斤이 伐之어니 可以爲美乎아 是其日夜之所息과 雨露之所潤에 非無萌蘖之生焉이언마는 牛羊이 又從而牧之라 是以若彼濯濯也니 人見其濯濯也하고 以爲未嘗有材焉이라하니 此豈山之性也哉아 雖存乎人者라도 豈無仁義之心哉리오마는 其所以放其良心者ㅣ 亦猶斧斤之於木也에 旦旦而伐之하니 可以爲美乎아 其日夜之所息과 平旦之氣에 其好惡ㅣ 與人相近也者ㅣ 幾希어늘 則其旦晝之所爲ㅣ 有梏亡之矣니 梏之反覆則其夜氣ㅣ 不足以存이요 夜氣不足以存則其違禽獸ㅣ不遠矣라 人이 見其禽獸也而以爲未嘗有才焉者라하나니 是豈人之情也哉아 故苟得其養이면 無物不長이요 苟失其養이면 無物不消니라 孔子曰操則存하고 舍則亡하야 出入無時하야 莫知其鄕은 惟心之謂與저하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牛山의 木이 일찍이 아름다웠더니 그 大國에 郊됨으로써 斧斤이 伐하니 可히 써 美하랴. 이것이 그 日夜의 息한 바와 雨露의 潤한 바에 萌蘖의 生함이 없지 않컨마는 牛羊이 또 從하여 牧한지라 이로써 저와같이 濯濯하니, 사람이 그 濯濯함을 보고 써 호대 일찍이 材가 있지 않았다고 하나니, 이것이 어찌 山의 性이리요. 비록 人에게 存한 것이라도 어찌 仁義의 心이 없으리요마는 그 心을 放하는 바가 또한 斧斤이 나무를 旦旦마다 伐함과 같으니 可히 써 美가 되랴. 그 日夜의 息하는 바와 平旦의 氣에 好하고 惡함이 人으로 더불어 서로 近함이 幾希함은 그 旦晝의 한 바가 梏亡함이 있어서이다. 梏하기를 反覆하면 그 夜氣가 足히 存하지 못하고 夜氣가 족히 存하지 못하면 그 禽獸와 違함이 遠치 않게 된다. 사람이 그 禽獸임을 보고 써 호대 일찍이 才가 있지 않았다 하니 이 어찌 人의 情이겠는가. 故로 진실로 그 養을 得하면 物이 長하지 않는 것이 없고, 진실로 그 養을 잃으면 物이 消하지 않는 것이 없다. 孔子가 말하기를, ‘操하면 存하고 舍하면 亡하며 出入이 時가 없어 그 鄕을 알 수 없음은 오직 心을 이름인저’ 하니라.”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牛山의 나무가 본시 아름다웠는데 큰 齊國의 郊(邑外)가 되었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가 자꾸만 치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날과 밤으로 生息(息은 長)한 바와 비와 이슬이 적셔준 바에 싹과 순의 생긴 것이 없지 않으련만 그것마져도 소와 양이 뒤이어서 뜯어먹어버리기 때문에 저렇듯 민둥산(濯濯)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그 민둥산이 된 것을 보고 ‘본시 材木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어찌 山의 本性이겠는가. 비록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치더라도 어찌 仁義의 마음이 없으리요마는 그 良心을 버리게 하는 것이 또한 나무에 도끼와 자귀가 더해지는 것과 같아 아침마다 伐하니 美할 수가 있겠는가. 그 日夜에 자라나는 바와 平旦(밝은 아침)의 氣로 사람(人다운 人間)과 가까운 것이 幾希(僅少)한 것은 바로 그 아침과 낮에 한 바가 梏喪(해치고 없앰. 梏은 刑械)을 해서 그런 것이다. 梏(害)하기를 반복하면 그 夜氣(日夜所息과 平旦之氣)가 족히 남아있지를 못하고 夜氣가 족히 남아있지를 못하면 새 짐승과 차이가 멀지 않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새 짐승 같은 것을 보고 ‘이 사람은 본시 才(좋은 資質)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사람의 實情이겠는가. 그렇기에 진실로 그 養을 얻으면 자라나지 않는 것이 없고, 진실로 그 養을 잃으면 消(亡)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孔子가 말하기를, ‘잡으면 存해 있고 놔두면 亡(無)하여 나가고 들어옴이 때가 없으며 그 方向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하였다.”
△ 朱子曰孔子言心을 操之則在此하고 捨之則失去하며 其出入이 無定時하고 亦無定處라하니 孟子引之하야 以明心之神明不測하고 危動難安이 如此하니 不可頃刻失其養也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孔子가 말하기를, ‘心을 잡으면 여기에 있고 놔버리면 잃어버려 그 出入이 定해진 때가 없고 또한 定해진 곳이 없다.’ 하니, 孟子가 引據하여 心의 神明하고 헤아릴 수 없음과 危殆롭게 動하고 安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잠깐의 시각도 그 養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 程子曰心豈不有出入이리요 亦以操舍而言耳이라 操之之道는 敬以直內而已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이 어찌 出入이 있으리요. 또한 잡고 놔둠을 말한 것이다. 잡는 道는 敬하여 內를 直하게 할 따름이다.”
△ 范純夫之女讀孟子操存章하고 曰孟子ㅣ 不識心이로다 心豈有出入이리요하야늘 伊川先生이 聞之하고 曰此女ㅣ 雖不識孟子나 却能識心이로다하다
【解】范純夫(名 祖禹)의 女가《孟子》操存章을 읽고 말하기를, “孟子가 心을 알지 못하도다. 心이 어찌 出入이 있단 말인가.” 하니, 伊川先生이 듣고 말하기를, “이 女가 비록 孟子는 알지 못했지만 心은 능히 알았다.” 하였다.
※心이 出入이 있다 함은 생각을 가지고 말함이니 身外의 遠方 私物을 생각하면 그것을 出이라고 하고, 아무런 생각이 없이 自我로 돌아오면 그것을 入이라고 한다. 純夫의 女가 心이 어찌 出入이 있느냐고 한 것은 外物을 생각하든 思慮가 없이 自我로 돌아와 있든 心이 身의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孟子가 心을 몰랐다고 했으나 孟子가 孔子의 말을 引據했으니 心의 出入을 말한 분은 孟子가 아니라 孔子인 것이다.
△ 蘭溪范氏曰君子之學은 本於心하니 心不在焉則視簡不見하고 聽諷不聞이라 此其於口耳之學에도 猶莫之入也온 況窮理致知乎아 是以로 學者는 必先存心이니 心存則本立하고 本立而後에 可以言學이라 蓋學者는 覺也니 覺由乎心이라 心且不存이면 何覺之有리요 君子論心에 必曰存亡하니 亡者는 心非誠亡也라 以操舍言之耳라 人能知所以操之則心存矣라 孟子曰養心이 莫善於寡欲이라하니 養以寡欲하야 使不誘於外ㅣ 此存心之權輿也라
【解】蘭溪范氏(浚)가 말하기를, “君子의 學은 心에 本하니, 心을 存하지 않으면 책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깨우침을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口耳(入耳出口하는 小人의 學. 荀子)의 學도 들어갈 수 없거든 하물며 理를 窮究하고 知識을 이룩하겠는가. 그래서 學者는 반드시 먼저 心을 存하는 것이니, 心이 存하면 本이 서고 本이 선 뒤에 學을 말할 수 있다. 대저 學이란 覺이니 覺은 心으로 말미암는다. 心이 存하지도 않는다면 무슨 깨달음이 있겠는가. 君子가 心을 論하면 반드시 存亡을 말하는데 亡이란 마음이 진실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操와 舍로 말한 것이다. 사람이 능히 操할 바를 알면 마음이 存한다. 孟子가 말하기를, ‘心을 養함이 欲을 적게 함보다 좋은 방도가 없다.’ 했으니, 養하기를 寡欲으로써 하여 하여금 外에 誘引되지 않게 함이 이것이 存心하는 權輿(始)이다.”
【註】權輿 權은 저울의 추이고, 輿는 수레의 집이다. 저울을 만들려면 추부터 만들고, 수레를 만들려면 輿부터 만드므로 始의 뜻을 갖는다.
△ 朱子答石子重書에 曰孔子言操存舍亡出入無時莫知其鄕四句하고 而以惟心之謂一句로 結之하니 正是直指心之體用而言其周流變化神明不測之妙也라 若謂其舍亡으로 致得如此走作이면 則孔子言心體者ㅣ 只說得心之病矣라 聖人의 立言命物之意ㅣ 恐不如此오 兼出入兩字ㅣ 有善有惡하니 不可皆謂舍亡所致也라 又謂心之本體를 不可以存亡言이라하니 此亦未安이라 若所操而存者ㅣ 初非本體則不知所存者ㅣ 果爲何物而又何必以其存爲哉아 偶記胡文定公所謂不起不滅은 心之體요 方起方滅은 心之用이니 能常操而存則雖一日之間에 百起百滅이라도 而心固自若者ㅣ 自是好語라 但讀者ㅣ 當知所謂不起不滅者ㅣ 非是塊然不動하야 無所知覺也오 又非百起百滅之中에 別有一物不起不滅也라 但此心이 瑩然하야 全無私意면 是則寂然之動之本體요 其順理而起하고 順理而滅은 斯乃所以感而遂通天下之故者云爾라
【解】朱子가 石子重(名 墩 號 克齋)에게 答한 편지에 하였기를, “孔子가 ‘操하면 存하고 舍하면 亡하며 出하고 入함이 時가 없고 그 鄕(方向)을 알 수 없다.’는 四句를 말하고, ‘오직 心을 두고 말함이다.’라는 一句로 맺었으니, 바로 이는 心의 體와 用을 곧바로 가리켜 그 周流하고 變化함의 神明하고 헤아릴 수 없는 妙를 말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놔서 亡함으로 인해 이렇게 달리고 일고 하게 된 것이다.’라고 한다면 孔子가 心體를 말한 것이 다만 心의 病만 말한 셈이 된다. 聖人의 立言하고 物을 命名한 뜻이 이렇지 않을 듯하다. 兼하여 出入 兩字는 善이 있고 惡이 있으니 모두 舍하여 亡한 所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또 ‘心의 本體를 存亡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도 또한 未安한 말이다. 만약 操하여 存한 것이 당초 本體가 아니라면 存한 바가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또 그렇다면 어째서 반드시 存하려고 하겠는가. 우연히 기억이 나는데, 胡文定公(安國)이 말한 바 ‘起하지 않고 滅하지 않음은 心의 體요, 막 起하고 막 滅함은 心의 用이니, 能히 항상 操하여 存한다면 비록 一日의 사이에 百 번을 起하고 百 번을 滅할지라도 心은 실로 그대로인 것이다.’라고 한 말이 바로 좋은 말이다. 讀者는 마땅히 이른바 不起 不滅이란 그것이 우두커니 動치 아니하여 知覺하는 바가 없음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하고, 또 百起 百滅하는 中에 따로 一物이 있어 不起 不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다만 마음이 환하여 전혀 私意가 없으면 이것이 ‘寂然不動(고요하여 動하지 않음. 周易 繫辭語)’의 本體요, 그 理를 順하여 起하고 理를 順하여 滅함은 이것이 바로 ‘感而遂通天下之故(感하여 드디어 天下의 故(原因=理)를 통한다. 繫辭語)’라는 것이다.”
△ 朱子曰良心이 本有十分이라가 被他輾轉梏亡則他長一分에 自家ㅣ 止有九分이요 明日에 他又進一分하면 自家又退하야 止有八分이니 他日會進하고 自家日會退라 此章은 極力精微하니 非孟子면 做不得이라 別人은 縱有此意나 亦形容不得이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良心이 본시 十分이 있거늘 저(良心을 放케 한 것)에게 요모조모로 해치고 없앰을 당하여 저가 一分이 長하면 자기(良心)는 九分만 남아있게 되고, 明日에 저가 또 一分을 進하면 자기는 또 물러나 八分만 있게 되어, 저는 날로 進하게 되고 자기는 날로 물러나게 된다. 이 장은 아주 힘을 다해서 精微한 말을 한 것이니 孟子가 아니고는 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은 비록 이런 뜻이 있을지라도 形容하지를 못한다.”
△ 問人心紛擾時難把捉이니다 朱子曰眞箇是難이라 持把면 不能久하야 又被事物及閑思慮引將去니 孟子牛山之木一章을 最要看이니라 又曰這箇는 不干別人事라 雖是難이나 亦須着力하야 常惺惺이요 不要放倒라 覺得物欲來에 便着緊이요 不要隨他去니 若說把持不得勝他不去라하면 是自壞也라 更說甚이리요 爲仁由己니 而由人乎哉아
【解】묻노니,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고 요동칠 때에는 잡기가 어렵습니다.” 朱子가 말하기를, “그건 참으로 어렵다. 그렇다고 억지로 잡으면 오래가지 못하여 또 사물이나 부질없는 생각에 끌려가는 것이니 孟子의 牛山之木 一章을 가장 볼 필요가 있다.” 했다. 또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비록 어려울지라도 모름지기 힘을 써서 항시 정신이 깨어있어 방탕하고 쓰러져서는 안 된다. 物欲이 옴을 깨달았을 때에는 곧 긴장을 하여 그를 따라서 가지 않아야 한다. 만약 저를 이기고 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망치는 일이다. 다시 무슨 말을 하리요. 仁을 함이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 程子曰學者ㅣ 患心慮紛亂하야 不能寧靜하니 此則天下公病이라 學者ㅣ 只要立箇心이니 此上頭에 儘有商量이니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學者가 마음 생각이 시끄럽고 어지러워 寧靜치 못함을 근심하는데, 이는 천하 사람의 공통된 병이다. 學者가 다만 마음을 세우도록 할 것이니 이렇게 한 다음에야 참으로 뭔가를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 又曰人多思慮하야 不能自寧은 只是作心主不定이라 惟是止於事니 爲人君에 止於仁之類라 如舜之誅四凶에 四凶이 已作惡이어늘 舜이 從而誅之하니 舜何與焉이리요 人不止於事하고 只是攬他事면 不能使物各付物이라 物各付物則是役物이요 爲物所役則是役於物이라 有物必有則이니 須是止於事니라
【解】또 말하기를, “사람이 생각이 많아 能히 寧靜치 못함은 다만 心主 짓기를 定치 못함이라. 오직 事에 그쳐야 하니, 마치 人의 君이 되거든 仁에 그친다는 類다. 마치 舜이 四凶(共工, 驩兜, 三苗, 鯀)을 誅함 같음은 四凶이 이미 惡을 하였으므로 舜이 따라서 誅한 것이니, 舜이 어찌 與(干與)했으리요. 사람이 일을 따라 그치지 아니하고 다만 다른 일을 끌어넣으면 能히 物을 각기 物에 붙이지 못한다(事物을 그 事物의 理대로 處理함). 物을 각기 物에 붙이면 이는 物을 使役하는 것이요. 物의 役한 바가 되면 이는 物에게 使役되는 것이다. 物마다 반드시 法則이 있는 것이니, 모름지기 事에 그쳐야 한다.”
△ 又曰人心의 作主不定이 正如一箇翻車ㅣ 流轉動搖하야 無須臾停하고 所感萬端이니 若不做一箇主면 怎生奈何오 張天祺ㅣ 嘗言約數年을 自上著床으로 便不得思量이라하니 才不思量後에 須强把這心來制縛이어나 亦須寄寓在一箇形象이니 皆非自然이라 又曰君實이 常患思慮紛亂하야 有時中夜而作하야 達朝不寐하니 可謂良自苦라 人이 都來多少血氣완대 若此則幾何而不摧殘以盡也리요 其後에 告人曰近得一術하니 常以中爲念이라하니 則又是爲中所亂이라 中又何形이완대 如何念得也오 只是於名言之中에 揀得一箇好字니 與其爲中所亂으론 却不如與一串數珠之愈也라 夜以安身하고 睡則合眼이니 不知苦苦思量箇甚고 只是不以心爲主니라 又曰有謂因苦學而至失心者하니 學은 本是治心이어늘 豈有反爲心害리요 某는 氣不盛이나 然而能不病하고 無惓怠者는 只是一箇愼生不恣意하고 其於外事에 思慮儘悠悠니라 又曰司馬子微ㅣ 作坐忘論하니 是所謂坐馳也라 又曰人於夢寐間에 亦可以卜自家所學之淺深이니 如夢寐顚倒는 卽是心志不定하고 操存不固니라
【解】또 말하기를, “사람 마음의 主를 하옴이 定치 못한 것이 바로 하나의 飜車(揚水機)와 같아 流轉하고 동요하여 잠시도 멈추지 않아 感한 바가 만 가지니 만약 하나의 主를 하지 못하면 어떻게 무엇을 하겠는가. 張天祺(名 戩 橫渠弟)가 일찍이 말하기를, ‘約數年 동안 床(坐床)에 오르게 되면 곧 생각을 않기로 했다.’ 했는데, 그 생각을 안 할 때부터는 모름지기 억지로 이 마음을 잡아 억제하고 결박을 하거나 아니면 어떤 하나의 形象에 붙어있게 해야 할 것이니,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또 말하기를, “君實(司馬光의 字)이 항상 생각이 어지러움을 걱정하여 더러는 밤중에 일어나 아침까지 자지 못했다하니 참으로 自苦를 하였다.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혈기를 지녔기에 이렇게 한다면 얼마나 가서 절단이 나서 없어지지 않겠는가. 그 뒤에 그가 또 남에게 말하기를, ‘근일에 한 가지 術을 얻었으니, 항시 中을 생각한다.’ 했다는데, 그렇게 하면 또 中의 亂한 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中이 또 무슨 形態이기에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이는 다만 좋은 말 중에서 하나의 좋은 字를 골라낸 것이다. 그러니 中의 亂한 바가 되는 것보다는 도리어 한 꾸러미의 구슬을 세는 것만 못하다. 밤이면 몸을 편히 하고 잠이 오면 눈을 감을 것이지 괴롭게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마음으로 主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애써 학문을 함으로 인하여 失心(정신을 잃음)을 했다.’ 하는데, 학문이란 본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거늘 어찌 도리어 마음의 해가 되겠는가. 某는 氣가 盛치 못하지만 그래도 병들지 않고 倦怠치 않는 것은 다만 한 가지 위생을 삼가고 뜻을 방자하지 않고 外事에 대해서는 생각이 퍽 느긋하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司馬子微(名 承禎 唐玄宗時人)가 坐忘論(앉아서 忘却하는 論)을 지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坐馳(앉아서 생각이 달려나감)이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꿈꾸는 사이에서도 또한 자기 학문의 얕고 깊음을 짐작할 수 있으니, 만약 꿈속의 일이 顚倒(事理와 反對가 됨)된다면 바로 이것이 心志가 定해지지 못함이요, 操存(마음을 잡아 存케 함)이 堅固치 못한 것이다.”
△ 張子曰心이 淸時少하고 亂時多하니 其淸時엔 視明聽聰하고 四體ㅣ 不待羈束而自然恭謹하고 其亂時엔 反是는 何也오 蓋用心未熟하야 客慮多而常心少也며 習俗之心이 未去而實心이 未完也라 人又要得剛이니 剛則守得定하야 不回하고 進道勇敢이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마음이 淸할 때가 적고 亂할 때가 많으니, 그 淸할 때는 보기를 밝게 하고 듣기도 밝게 하고 四體(手足)도 묶지 않아도 자연 공손하고 삼가는데, 그 亂할 때는 이와 반대가 되니 어째서일까? 그것은 마음을 씀이 익숙하지 못하여 客慮가 많고 常心이 적으며 習俗(습관의 俗行)의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진실한 마음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또 剛해야 하는 것이니, 剛하면 지켜 定해져 흔들리지 않고 道에 나아가기를 용감하게 하는 것이다.”
△ 朱子曰李先生이 說人心中의 大段惡念은 却易制伏이로대 最是那不大段의 計利害로 乍往乍來底念慮ㅣ 相續不斷을 難爲驅除라하더니 今看得來是如此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李先生(李延平 侗)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 속의 대단한 나쁜 생각은 쉽사리 억제하여 굴복시킬 수 있지만 그 대단치 않은 利害의 계교와 잠깐 왔다 잠깐 가고 하는 생각이 이어지고 끊기지 않는 것은 가장 驅除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보았다.”
△ 謝顯道ㅣ 從明道先生於扶溝에 明道ㅣ 一日에 謂之曰爾輩ㅣ 在此相從에 只是學某言語라 故로 其學이 心口不相應하나니 盍若行之오 請問焉한대 曰且靜坐하라 伊川先生도 每見人靜坐하면 便歎其善學하더라
【解】謝顯道가 明道先生을 扶溝에서 從遊할 적에 明道가 하루는 이르기를, “너희들이 여기에 있어 相從을 하면서 다만 某의 言語만 배우기 때문에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지 않으니, 어찌 행해보지 않는고.” 하였다. 묻기를 청한대, “우선 조용히 앉으라.” 하였다. 伊川先生도 매양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음을 보면 문득 그 학문을 잘함을 감탄했다.
△ 邵康節先生이 於百原山中에 闢書齋하고 獨處其中이러니 王勝之ㅣ 常乘月訪之하면 必見其燈下에 正襟危坐러니 雖夜深이라도 亦如之러라
【解】邵康節先生(名 雍 字 堯夫)이 百原山中에 書齋를 開設해 놓고 홀로 그 속에 處하더니, 王勝之(名 益柔)가 언제나 달밤에 찾아가면 반드시 등불 아래 옷깃을 단정히 하여 꿇어앉아 있음을 보았는데, 아무리 깊은 밤중이라도 그러했다.
△ 朱子曰主靜은 夜氣一章에 可見이라 問程子ㅣ 常敎人靜坐는 如何오 曰亦是他見人要多慮하야 且敎人收拾此心耳니 初學이 亦當如此니라 又曰延平先生이 嘗言道理는 須是日中理會하고 夜裏에 却去靜處하야 坐地思量이라야 方始有得이라하므로 某依此說去做하니 眞箇是不同이로라 又曰今人이 皆不肯於根本上理會하니 如敬字를 只是將來說하고 更不做將去하야 根本이 不立이라 故로 其他零碎工夫ㅣ 無湊泊處라 明道延平이 皆敎人靜坐하니 看來須是靜坐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靜을 主함은 夜氣一章에서 볼 수 있다.” 묻노니, “程子가 늘 사람에게 靜坐할 것을 가르쳤는데 어떻습니까?”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 분이 사람들이 생각함이 많은 것을 알고 우선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마음을 수렴하게 한 것이니, 初學은 마땅히 그와같이 해야한다.” 또 말하기를, “延平先生이 일찍이 말하기를, ‘道理는 모름지기 日中에 알아보고 밤에는 모름지기 고요한 곳에서 앉아 생각을 해보아야 비로소 소득이 있다.’ 했는데, 某가 그 말대로 해보았더니 참으로 달라졌다.”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이 모두 根本에서 살필 줄을 모른다. 예를들어 敬字도 다만 가지고 이야기할 뿐이고 다시 해보지를 않아 근본이 서지 못한 때문에 그 밖의 자잘한 공부가 집결되어 정박할 곳이 없다. 明道와 延平이 모두 사람에게 靜坐를 하라고 가르쳤는데, 보아오니 모름지기 靜坐를 해야겠다.”
△ 朱子問伯羽如何用工한대 曰且學靜坐하야 痛抑思慮하노이다. 曰痛抑也不得이니 只是放退可也라 若全閉眼而坐라도 却有思慮矣니라 又言也不可全無思慮니 無邪思耳니라 又曰心未嘗遇事時에 須是靜이요 臨事에 方用이라야 便有氣力이니 如當靜時에 不靜하야 思慮散亂이면 及至臨事에 已先倦了니라 伊川이 解靜專處云不專一則不能直遂라 閒時에 須是收斂이라야 做事에 便有精神이니라
【解】朱子가 伯羽(姓 童 名 蜚卿)에게 묻기를, “어떻게 공부를 하는고?” 하니, 대답하기를, “우선 靜坐를 하여 思慮를 痛抑(대단히 억제함)합니다.” 하거늘, 말하기를, “痛抑이 되지를 않는 것이니, 다만 놔서 물러가게 해야한다. 만약 눈을 완전히 감고 앉아 있어도 곧 思慮가 생기는 것이다.” 했다. 또 말하기를, “전혀 思慮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니, 다만 邪한 생각이 없어야할 따름이다.” 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 일을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모름지기 靜해야 하고 일을 臨하여 바야흐로 用心을 할지라야 문득 기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마땅히 靜해야 할 때에 靜하지를 못하고 思慮가 散亂하면 일을 臨하게 되었을 때에 이미 먼저 倦怠해져버리는 것이다. 伊川이 靜專의 대목을 풀이하기를, ‘專一하지 않으면 능히 直遂(心性이 곧바로 遂行해짐)하지 못한다.’ 했으니, 한가할 때에 모름지기 收斂을 해야만 일을 함에 精神이 있게 되는 것이다.”
△ 程子曰入道는 莫如敬이니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라 今人이 主心不定하야 視心如寇賊而不可制하니 不是事累心이라 乃是心累事니 當知天下에 無一物是合少得者라 不可惡也니라 又曰大凡人心을 不可二用이니 用於一事則他事不能入者는 事爲之主也라 事爲之主도 尙無思慮紛擾之患커든 若主於敬이면 又焉有此患乎아
【解】程子가 말하기를, “道에 들어감은 敬과 같음이 없으니, 能히 致知를 하면서 敬에 있지 않는 자가 없다. 이제 사람이 主心이 定해지지 못하여 心을 보기를 寇賊을 制치 못하는 듯이 하니 이는 事가 마음을 잡음이 아니라 마음이 事를 잡음이니, 마땅히 天下에 一物도 없어야할 것이 없어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말하기를, “대범 사람의 마음을 두 가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니, 한 가지 일에 쓰면 다른 일이 들어올 수 없다. 그것은 일이 主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일이 主가 되어도 오히려 思慮가 어지러운 근심이 없거든 만약 敬으로 主를 하면 또 어찌 그런 근심이 있겠는가.”
△ 橫渠先生이 嘗言吾十五年學箇恭而安호대 不成이라하야늘 明道先生曰可知是學不成하야 有多少病在로다 又曰學者ㅣ 敬守此心하야 不可急迫이니 當栽培深厚하야 涵養於其間이니 然後에 可以自得이라 若急迫求之면 只是私已니 終不足以達道니라
【解】橫渠先生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十五年간 ‘恭而安(恭하되 安함. 論語)’을 배우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하자, 明道先生이 말하기를, “이는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아 多少의 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學者가 모름지기 敬하여 이 마음을 지키되 急迫하게 하지 말고 栽培하기를 深厚하게 하고 그간에 涵養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니, 만약 급박하게 求하면 다만 私己일 뿐이니 끝내 道에 이르지 못한다.”
△ 朱子曰敬乃聖門第一義니 徹頭徹尾히 不可頃刻間斷이니라 又曰敬은 所以抵敵人欲이니 人常敬則天理自明하고 人欲이 上來不得이라 又曰敬是箇扶策人底道理니 人當放肆怠惰時에 才敬이면 便扶策得此心起라 常常恁地면 雖有些放僻邪侈意思라도 也自退聽이니라 又曰今人이 將敬來하야 別做一事하니 所以有厭倦하고 爲思慮引去라 敬은 只是自家一箇心이 常惺惺이 便是니 不可將來別做一事라 又豈可指擎跽曲拳하고 塊然在此而後에 爲敬이리요
【解】朱子가 말하기를, “敬은 聖門에 제1의 義니 철두철미하게 잠깐도 間斷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敬은 人欲을 대적하는 것이니, 사람이 항상 敬하면 天理가 자연 밝아지고 人欲이 올라오지를 못한다.” 또 말하기를, “敬은 사람을 붙잡고 깨우쳐주는 道理니 사람이 放肆하고 怠惰할 때에 막 敬만 하면 곧 이 마음을 붙잡아 깨우쳐 일으키게 된다. 늘 그렇게 하면 비록 약간의 放僻하고 邪侈한 생각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곧 물러나버린다.”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이 敬을 가지고 별스럽게 한 가지의 일인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일에 싫증을 내는 수도 있고 思慮에 끌려가는 수도 있다고들 하는데, 敬이란 다만 자기의 一箇 마음이 늘 깨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따로 一事를 삼을 것이 없다. 어찌 拱手를 하고 꿇어앉고 허리를 굽히는 따위와 우두커니 여기에 앉아있는 등의 일을 가리켜 敬이라 하겠는가.
△ 程子曰人心은 常要活이니 則周流無窮而不滯於一隅니라 又曰呂與叔이 疑養氣爲有助히니 蓋爲前日에 思慮紛擾라가 今要虛靜故로 以爲有助요 前日의 思慮紛擾ㅣ 又非義理며 又非事故니 如是則只是狂妄人耳니 懲此以爲病故로 要得虛靜이나 其極은 欲得如槁木死灰하니 又却不是라 蓋人은 活物也니 又安得槁木死灰리요 旣活則須有動作이요 須有思慮라 忠信이 所以進德者는 何也오 閑邪則誠自存이니 誠者는 存斯忠信也라 如何是閑邪오 非禮勿視聽言動이면 邪斯閑矣라 以此言之면 又幾時에 要身如枯木이며 心如死灰리요 又如絶四後에 畢竟如何오 又幾時에 須如枯木死灰리요 敬以直內則須君則是君이요 臣則是臣이니 凡事如此면 大小大直截也오
【解】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항시 살아있어야 한다. 그러면 두루 흐르고 한 곳에 막혀있지 않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呂與叔이 養氣(修養家의 鍊氣)를 함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심을 하는데 그것은 前日에 思慮가 어지러웠으므로 이제 虛靜코자 하니 그래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요, 전일에 어지럽게 생각한 바가 또 의리도 아니고 또 事故(當面한 事故)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되면 이는 광망한 사람일 뿐이다싶어져서 이를 病이라고 자신을 懲戒하여 虛靜해지기를 要한 것인데, 그 결과는 마른 나무와 죽은 재(灰)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는 또 옳지 않다. 대저 사람이란 살아있는 物이다. 또 어떻게 마른 나무나 죽은 재(灰)처럼 될 수가 있겠는가. 이미 살아있으면 모름지기 動作이 있는 것이요, 모름지기 思慮도 있는 것이다. 忠信(誠)이 德을 進케하는 바란 무엇인가? 邪를 막으면 誠이 스스로 存해짐을 말하는 것이니, 誠이란 忠信을 存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邪를 막는 것인가? 禮가 아닌 것을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邪가 바로 막아진다. 이렇게 말한다면 언제 몸이 枯木처럼 되고 마음이 死灰처럼 될 때가 있겠는가. 또 四(非禮勿視聽言動)를 끊은 뒤에 필경 어떻게 되는가. 또 언제 枯木 死灰처럼 될 때가 있겠는가. 敬하여 써 속을 直하게 한다면 모름지기 君은 君 노릇을 하고, 臣은 臣 노릇을 할 따름이니, 이렇게 하면 얼마나 크게 直截(快)한가.”
△ 張子曰言有敎하고 動有法하고 晝有爲하고 宵有得하고 瞬有養하고 息有存이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말은 敎됨이 있어야 하고, 행동은 法됨이 있어야 하고, 낮에는 하옴이 있어야 하고, 밤에는 생각하여 얻어짐이 있어야 하고, 一瞬間도 德을 養함이 있어야 하고, 一息間도 存心함이 있어야 한다.”
△ 上蔡謝氏曰事至應之하고 不與之往이 非敬乎아 萬物變而此常存이니 奚紛擾之有리요 夫子曰事思敬이라하니 正謂此耳라
【解】上蔡謝氏(良佐)가 말하기를, “일이 이르면 응하고 더불어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이 敬이 아닌가. 萬物이 변해도 이 마음은 항상 存해 있는 것이니 어찌 어지러움이 있으리요. 夫子(孔子)가 말하기를, ‘일은 敬하기를 생각하라.’ 하니,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 朱子答楊子直書에 曰身心內外ㅣ 初無間隔이라 所謂心者는 固主乎內而凡視聽言動과 出處語黙之見於外者도 亦卽此心之用이니 未嘗相離也라 今於其空虛不用之處則操而存之하고 於其流行運用之實則棄而不省이면 於此心之全體에 雖得其半而失其半矣라 然其所得之半도 又必待有所安排布置然後에 能存이라 故로 存則有揠苗助長之患하고 否則有舍而不耘芸之失하니 是則其所得之半도 又將不足以自存而失之라 孰若一主於敬而此心이 卓然하야 內外動靜之間에 無一毫之隙과 一息之停哉아
【解】朱子의 楊子直(名 方)에게 答한 편지에 하였기를, “몸과 마음의 內와 外가 당초 간격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心이란 실로 內에 主한 것이지만 무릇 視, 聽, 言, 動이나 出, 處, 語, 黙의 外에 나타나는 것도 또한 이 마음의 用으로서 일찍이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제 그 空虛하고 用치 않는 곳(內)은 操하여 存하고, 그 流行하고 運用하는 實(視聽言動)은 버리고 살피지 않는다면 이 마음의 全體에서 비록 그 半은 얻으나 그 半은 잃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얻은 바의 半도 또 반드시 按排布置(놔두고 배열하고 펴고 두고 함)를 한 뒤에라야 能히 存하기 때문에 存하려면 마치 苗를 뽑아올려 억지로 자라기를 돕는 듯한 병통이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마치 苗를 버리고 김을 매주지 않는 듯한 잘못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얻은 바의 절반도 또 스스로 存하지를 못하고 잃어버릴 것이니, 어찌 한결같이 敬에만 主하고 이 마음이 卓然하여 內外와 動靜의 사이에 一毫의 틈이나 一息의 멈춤도 없음만 하겠는가.”
△ 問敬通貫動靜而言이나 然靜時少하고 動時多하니 恐易得撓亂이니이다 朱子曰如何都靜得이리요 有事에 須著應이라 人在世間에 未有無事時節하야 自早至暮히 有許多事하니 不成說事多撓亂하니 我且去靜坐라 敬은 不是如此니 若事至前而自家却要主靜하야 頑然不應이면 便是心都死了라 無事時에 敬在裏面하고 有事時에 敬在事上이라 有事無事에 吾之敬은 未嘗間斷也라 故로 程子說學到專一時方好라하니 蓋專一則有事無事에 皆是如此라 程子의 此段這一句ㅣ 是緊要處라
【解】묻노니, “敬은 動과 靜을 통하여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靜할 때가 적고 動할 때가 많으니 쉽사리 흔들리고 어지러워질 듯합니다.” 朱子가 말하기를, “어찌 순전히 靜할 수만 있겠는가.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應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世間에 있음에 일이 없는 時節이 없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다한 일이 있는데, 그렇다고 ‘일이 많아 요란스러우니 나는 조용한 데로 가서 앉아 있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敬이란 그런 것이 아니니, 만약 일이 앞에 이르렀는데도 자기가 靜을 主코자 하여 頑然(頑固)히 응하지 않고 있으면 이는 마음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다. 일이 없을 때에는 敬이 裏面에 있고 일이 있을 때에는 敬이 일 위에 있다. 그러니 일이 있고 없고간에 나의 敬은 일찍이 間斷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程子가 말하기를, ‘學이 專一함에 이르면 바야흐로 좋다.’ 하였으니, 이는 專一하게 되면 일이 있고 없고간에 모두 그와같이 되기 때문이다. 程子의 이 대목 이 一句가 바로 긴요한 곳이다.”
△ 問一向把捉이라가 待放下에 便覺恁衰颯하니 不知當如何오 曰這箇는 也不須只管恁地把捉이라 若要去把捉이면 又添一箇心이라 公若知得放下不好면 提掇起來便是敬이라 曰靜坐久之에 一念이 不免發動하니 如何오 曰須看一念이 是要做甚麽事하라 若是好事當做면 須去幹了하고 或此事思量未透어든 須著思量敎了하며 若是不好底事어든 便不要做니 自家ㅣ 纔覺得如此면 這敬이 便在這裏니라
【解】묻노니, “한결같이 마음을 잡고 있다가 놔두게 되면 문득 그렇게도 쇠약하고 쌀쌀해져버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렇게 움켜잡으려고만 할 것이 아니다. 만약 움켜잡으려고 하면 또 하나의 마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公이 만약 놔둬버림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거든 곧 이끌어 일으킬 것이니, 바로 이것이 敬이다.” 말하기를, “靜坐를 오래하고 있으면 一念일 發動함을 免치 못하니 어찌합니까?” 대답하기를, “모름지기 그 一念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보라. 만약 그것이 좋은 일이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모름지기 그것을 하도록 하고, 혹 어떤 일을 생각하여 通透하지 못했거든 모름지기 그것을 생각하여 끝내도록 하라. 그리고 만약 좋지 않은 일이거든 곧 하지를 않으면 된다. 자기가 막 이렇게 깨달았다면 이 敬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 問當官에 事多하야 膠膠擾擾하니 奈何오 曰他自膠擾에 我何與焉고 濂溪云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이라하니 中與仁은 是發動處요 正은 是當然定理處요 義는 是截斷處요 常要主靜은 豈可只管放出하고 不收斂이리요 截斷二字가 最緊要니라
【解】묻노니, “官을 당함에 일이 많아 뒤엉키고 요란스럽고 하니 어찌하면 됩니까?” 대답하기를, “저 일이 스스로 엉키고 요란스럽다고 내가 어찌 상관이 있겠는가. 濂溪가 말하기를, ‘定하기를 中正仁義로써 하되 靜을 主한다.’ 하였으니, 中과 仁은 發動하는 곳이요, 正은 當然한 定理의 곳이요, 義는 截斷의 곳이요, 항상 靜을 主한다는 것은 어찌 다만 마음을 放出만 하고 收斂을 하지 않겠는가. 그 중에도 截斷(끊어 斷定지음) 二字가 가장 긴요하다.
△ 黃直卿이 勸先生且謝賓客하고 數月將息病한대 先生曰天生一箇人에 便須著管天下事니 若要不管인댄 須是如楊氏爲我라야 方得이니 某却不曾去學得這般學호라
【解】黃直卿(榦)이 先生에게 권하기를, “잠시 賓客사절하고 數月간만 病을 療養하시지요.” 한대, 先生이 말하기를, “하늘이 하나의 사람을 태어냄에 모름지기 天下의 일을 관리하게 하는 것이니, 만약 관리하지 않기로만 하면 모름지기 楊氏(朱)처럼 爲我(나만 爲함)를 해야 할 것이다. 某는 일찍이 그런 학문은 배우지를 않았다.”
△ 朱子答許順之書에 曰來諭欲棲心淡泊하야 與世少求하고 玩聖賢之言하야 以資吾神하며 養吾眞者ㅣ 無一字不有病痛이라 夫人心은 活物이라 當動而動하고 當靜而靜하야 不失其時則其道光明이니 是乃本心의 全體大用이라 如何須要棲之澹泊然後에 爲得이리요 且此心이 是箇什麽오 又如何其可棲也邪아
【解】朱子가 許順之(名 升)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보내온 말에, ‘마음을 淡泊한데 두어 世로 더불어 求함을 적게하고 聖賢의 말을 구경하여 나의 神에 도움이 되게 하고 나의 眞을 養하겠다.’는 것이 一字도 병통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活物이니 動해야 할 때에 動하고 靜해야 할 때에 靜하여 그 때를 잃지 않으면 그 道가 光明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本心의 全體요 大用이다. 어찌하여 淡泊한데 둔 뒤에야 된단 말인가. 또 이 마음이 무엇이길래 어떻게 어디에 둔단 말인가.”
△ 答張敬夫書에 曰來諭에 謂靜則溺於虛無라하니 此二字ㅣ 如佛老之論이면 誠有此患이어니와 若以天理로 觀之則動之不能無靜이 猶靜之不能無動也오 靜之不可不養이 猶動之不可不察也라 但見一動一靜이 互爲其根하고 敬義夾持하야 不容間斷之意則雖下靜字라도 元非死物이라 至靜之中에 自有動之端焉하니 是乃所以見天地之心者而先王之所以至日閉關이라 蓋當此時則安靜以養乎此耳라 固非遠事絶物하고 閉目兀坐而偏於靜之謂라 但未接物時에 便有敬以主乎中則事至物來에 善端이 昭著하니 所以察之者ㅣ 益精明耳라 又謂某言以靜爲本이 不若遂言以敬爲本이라하니 此固然也라 然이나 敬字工夫는 貫動靜而必以靜으로 爲本하니 今若遂易爲敬이면 雖若完全이나 却不見敬之所施ㅣ 有先有後하니 亦未爲的當也라 必如所謂要須靜以涵動之所本하고 察夫動하야 以見靜之所存하야 動靜相須하고 體用不離而後에 爲無滲漏也는 此數語ㅣ 卓然하야 意語俱到하니 當書之座右하야 出入觀省하리라
【解】張敬夫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來諭(來書)에 말하기를, ‘靜하면 虛無에 빠질 수 있다.’고 했는데, 이 二字(主靜二字)가 佛老의 말이라면 실로 이런 病이 있지만 만약 天理로써 본다면 動의 靜이 없지 못함이 靜의 動이 없지 못함과 같고, 靜의 養치 않아서는 안 됨이 動의 察치 않아서는 안 됨과 같다. 다만 一動一靜이 서로 그 根이 되고 敬과 義가 夾持하여 間斷을 용납하지 못하는 뜻을 본다면 비록 靜字를 놓을지라도 원래 死物이 아니요 지극히 靜한 속에 본시 動의 端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天地의 心을 본다는 것이요, 先王이 冬至日에 關門을 닫는 것이다. 대저 이 때를 당하면 安靜하여 이 陽을 養해야 하는 것이다. 본디 일을 멀리하고 物을 끊고 눈을 감고 우두커니 앉아 靜에만 偏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物을 接하지 않았을 때에 敬으로 中에 主함이 있으면 일이 이르고 物이 왔을 때에 善의 端이 밝게 나타난다. 그래서 察하는 바가 더욱 精하고 분명해진다.” 또 말하기를, “某가 靜으로 本을 삼는다고 말한 것이 바로 敬으로 本을 삼는다고 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는데, 이는 실로 그렇다. 그러나 敬字의 공부는 動靜을 貫通하는 것이요, 반드시 靜으로써 本을 삼는 것이거늘 이제 만약 곧바로 바꾸어 敬을 만들면 비록 완전할 것 같지만 문득 敬을 함에 先이 있고 後가 있음을 볼 수가 없으니 또한 적당치가 않다. 꼭 말씀하신 바 ‘모름지기 靜하여 動의 本할 바를 涵養하고 動을 살펴 靜의 存한 바를 본다. 動과 靜이 서로 도움을 주어 體와 用이 떠나지 아니한 뒤에야 물샐 틈이 없게 된다.’란 몇 마디가 卓然하여 말과 뜻이 모두 到底하니 마땅히 座의 右에 써 두고 출입하면서 보고 自省하겠다.
△ 南軒張氏曰程子의 敎人以敬은 卽周子의 主靜之意라 又曰一二年來에 頗專於敬字上勉力이러니 愈覺周子主靜之意爲有味라 程子謂喜怒哀樂未發之前에 更怎生求리요 只平日涵養이 便是라하니 此意를 當深體之也라
【解】南軒張氏(栻)가 말하기를, “程子가 사람을 가르치기를 敬으로써 함이 바로 周子(濂溪)의 靜을 主한 뜻이다.” 또 말하기를, “一二年 이래로 자못 敬字에 오롯이 힘을 쓰다보니 더욱 周子의 靜을 主함이 맛이 있음을 깨달았다. 程子가 말하기를, ‘喜怒哀樂이 發하기 전에 어떻게 求하리요. 다만 平日에 涵養을 하는 것이 옳다.’ 했으니, 이 뜻을 마땅히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 孟子曰仁은 人心也오 義는 人路也라 舍其路而不由하고 放其心而不知求하나니 哀哉라 人有雞犬이 放則知求之하되 有放心而不知求하나니 學問之道는 無他라 求其放心而已矣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仁은 人心이요, 義는 人路이다. 그 路를 舍하여 由치 않고, 그 心을 放하여 求치 않으니, 哀하다. 사람이 鷄犬이 放함이 있으면 求할 줄을 알지만 心을 放하고 求할 줄을 알지 못하니, 學問의 道는 他가 없다. 그 放心을 求할 따름이다.”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仁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義란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놔두고 그리로 다니지를 않고, 그 마음을 내놓고 찾아들일 줄을 모르니, 슬픈 일이다. 사람이 닭이나 개가 나가 있으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내놓고 찾아들일 줄을 모르니, 學問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나가있는 마음을 찾아들이는 것뿐이다.”
△ 程子曰心本善而流於不善하니 所謂放也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은 본시 善한데 不善으로 흐르기도 하니, 이것이 이른바 放이다.”
△ 朱子曰仁者는 心之德也라 程子所謂心은 譬如穀種이요 生之性이 乃仁也ㅣ 卽此意也라 然이나 但謂之仁則不知其切於己故로 反而名之曰人心則可見其爲此身酬酢萬變之主而不可須臾失矣라 義者는 行事之宜니 謂之人路則可見其爲出入往來必由之道而不可須臾舍矣라 又曰至貴在我而失之하니 是可哀已라 又曰學問之事ㅣ 固非一端이나 然이나 皆以求夫不失本心之正而已오 無他道也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仁은 心의 德이다. 程子가 말한 바 ‘心은 비유하자면 곡식의 씨요, 그 生하는 性이 바로 仁이다.’ 함이 바로 이 뜻이다. 그러나 다만 仁이라고만 하면 그것이 나에게 切實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돌이켜서 名하기를 人心이라고 했으니, 그것이 이 몸의 수작하고 萬變하는 主가 되어 잠깐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義는 行事의 適宜함이니, 사람의 길이라고 했은즉 이것이 出入 往來할 때에 반드시 경유할 길이어서 잠시도 버려서는 안 됨을 볼 수가 있다.” 또 말하기를, “지극히 貴함이 나에게 있거늘 잃어버리니 이는 슬픈 일이다.” 또 말하기를, “학문의 길이 실로 한 가지가 아니지만 그러나 모두가 本心의 正을 잃지 않기를 求할 따름이요 다른 길이 없다.”
△ 程子曰聖賢의 千言萬語ㅣ 只是欲人將放之心約之하야 使反復入身來하야 自能尋向上去하야 下學而上達也니라 又曰此章은 孟子指示學者用力之方最爲深切하니 學者所宜服膺而勿失也라 又曰心은 要在腔子裏니라 又曰若不能存養이면 只是說話니라 又曰今之學者ㅣ 往往以游夏로 爲小不足學이나 然이나 游夏는 一言一事ㅣ 却總是實이러니 後之學者는 好高ㅣ 如人游心千里之外나 然이나 自身은 却只在此니라 又曰解義理하되 若一向靠書冊이면 何由得居之安資之深이리요 不惟自失이라 兼亦誤人이니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聖賢의 千言萬語(言은 自言, 語는 語人)가 다만 사람으로 이미 放한 心을 잡아 約하여 하여금 反復해서 身에 들어오게 하여 스스로 능히 上을 向하여 감을 찾아서 下로 (人事를) 學하고 上으로 (聖賢에) 達케 하려 함이니라.” 또 말하기를, “이 章은 孟子가 學者에게 用力의 方을 指示하기를 가장 深切하게 한 것이니 學者가 마땅히 가슴에 붙여두고 잃지 말아야 한다.” 또 말하기를, “ 마음은 모름지기 腔子(腹腔) 속에 있어야 한다.” 또 말하기를, “만약 存心 養性을 못하면 다만 說話일 뿐이다.” 또 말하기를, “지금의 學者가 왕왕 子游(言偃)와 子夏(卜商)를 작다 하여 배우잘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子游 子夏는 모두가 實地였다. 그런데 後世의 學者들은 높은 것만 좋아하여 마치 사람이 마음은 千里밖에 놀리면서 自身은 문득 여기에 있음과 같다.” 또 말하기를, “義理를 알기를 만약 한결같이 書冊에만 매달린다면 어떻게 居하기를 편히 하고 資益하기를 깊이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공부는 스스로 잘못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남까지도 그르치는 것이다.”
△ 朱子曰學問之道를 孟子斷然說在求放心하니 學者ㅣ 須先收拾這放心이라 不然하야 此心이 放了면 博學也是閑이요 審問也是閑이니 如何而明辨이며 如何而篤行이리요 蓋身如一屋子하고 心如一家主니 有此家主然後에 能灑掃門戶하고 整頓事務라 若是無主則此屋이 不過一荒屋爾니라 又曰或者錯看明道之語하야 謂是收拾放心을 遂如釋氏의 守箇空寂하니 不知其意ㅣ 謂收心은 只要存得善端하야 漸能充廣이요 非如釋氏의 徒使空寂而已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학문의 道를 孟子가 단연 放心을 求하는데 있다고 말하였으니, 학자가 모름지기 먼저 이 放心을 수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마음이 放해지면 博學도 부질없는 것이요 審問도 부질없는 것이니 어떻게 明辨을 하며 어떻게 篤行을 하겠는가. 대저 몸은 하나의 집과 같고 마음은 하나의 집 주인과 같으니, 집 주인이 있어야만 능히 門戶를 灑掃하기도 하고 事務를 整頓하기도 한다. 만약 주인이 없다면 이 집은 황폐해진 빈 집에 불과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或者가 明道의 말을 잘못보고 말하기를, ‘放心을 수습함이 바로 釋氏의 空寂을 지킴과 같다.’ 하니, 그 뜻(明道의 뜻)이 ‘마음을 수습함은 다만 善端을 存하여 점점 능히 확충하고 넓혀가라.’는 것이지, 釋氏의 한갖 空寂하게만 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모른 것이다.”
△ 又謂門人曰自古聖賢이 敎人에 也只就這理上用功이니 所謂放心者는 不是走作向別處去라 瞬目間에 便不見이요 纔覺得에 便又在面前이니 不是苦難收拾이라 公且去提撕하면 便見得하리라 又曰如今要下工夫댄 且須端莊存養하야 獨觀昭曠之原이요 不須枉費工夫하야 鑽紙上語니 待存養得此中하면 昭明洞達하야 自覺無許多窒礙리니 恁時에 方取文字來看則自然有意味하고 道理도 自然透徹하야 遇事時에 自然迎刃而解하고 皆無許多病痛하리라
【解】또 門人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聖賢이 사람을 가르침이 다만 이 理에 나아가 功을 쓰게 한 것이니 이른바 放心이란 달려서 別處를 向해서 간 것이 아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금방 보이지 않았다가도 막 깨달으면 금방 또 面前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힘들고 收拾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公은 우선 이끌어 보면 곧 알 수 있으리라.” 또 말하기를, “지금 공부를 해보려면 우선 모습을 단정히 하고 씩씩하게 하며 存心養性을 하여 홀로 昭曠(환하고 툭 트임)한 原(本)을 보도록 하라. 부질없이 엉뚱한 工夫를 하여 紙上의 言語를 파고들 것이 아니니 이 속(心性)을 存養해 얻게 되면 밝아지고 훤이 터져 자연 허다한 막힘이 없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렇게 된 때에 비로소 文字를 가져다 보면 자연 意味가 있고 道理도 자연 투철해져서 일을 당했을 때에 자연 칼날을 맞는 竹節이 저절로 쪼개지듯 하고 허다한 병통이 모두 없으리라.”
△ 又曰學者爲學에 未問眞知與力行하고 且要收拾此心하야 有箇頓放處니 若收斂都在義理上安頓하고 無許多胡思亂想則久久에 自於物欲上輕하고 於義理上重하리라 又曰學者工夫는 只在喚醒上이니라 又曰人이 常須收斂箇身心하야 使精神으로 常在這裏하야 似擔百十斤擔相似하야 須硬着筋骨擔이니라 又謂一學者曰今公이 掀然有飛揚之心하야 以爲治國平天下를 如指諸掌하고 不知自家一箇身心을 都安頓未有下落하니 如何說功名事業이리요 古時의 英雄豪傑은 須先立其本하고 方以次推及其餘러니 今公問學은 都倒了라 緩其所急하고 先其所後하니 少間에 使得這身心飛揚悠遠하야 全無收拾處리라 而今에 人이 不知學底는 他心雖放이나 然猶放得近이어늘 今公은 雖曰知爲學이나 却放得遠이라 少間에 會失心去하리니 不可不覺이니라
【解】또 말하기를, “學者의 學을 하옴이 眞知와 力行을 말할것은 없고 우선 이 마음을 수습하여 놔둔 곳이 있어야만 한다. 만약 수렴하여 완전히 義理위에 놔두고 허다한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면 오래 오래 가면 자연히 物欲에는 가볍고 義理에는 무거워지리라.” 또 말하기를, “學者의 공부는 다만 喚醒(정신을 불러 깨움)上에 있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항상 身心을 수렴하여 정신으로 하여금 항시 이 속에 있게하여 마치 百十斤이나 되는 짐을 지고 있듯이 筋骨을 단단히하고 짊어져야 한다. 또 한 學者에게 이르기를 이제 公이 掀然(가볍게 날리는 모습)하게 飛揚하는 마음을 두어 생각하기를 治國 平天下를 손바닥 가리키듯 하는데 자기의 한 身心을 전혀 整頓시켜 주저앉히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에 어떻게 功名과 事業을 말하겠는가. 古時의 英雄豪傑은 먼저 그 本(德)을 세우고 나서야 바야흐로 차례로 그 밖에 미루어나갔거늘 이제 公의 학문은 완전 거꾸로 되어 그 急한 바는 늦추고 그 뒤에 할 바는 먼저하고 있으니 조금만 지나면 이 身心으로 하여금 날리고 멀리 치달아 전혀 수습이 되지 않으리라. 지금 사람들이 학문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마음이 비록 放해도 오히려 가깝게 放하거늘 이제 公은 비록 學을 할줄 안다지만 放하기를 멀리하고 있어서 조금 지나면 失心이 되어가리니 이를 깨닫지 않아서는 안된다.”
○ 孟子曰今有無名之指ㅣ 屈而不信이 非疾痛害事也언마는 如有能信之者면 則不遠秦楚之路하나니 爲指之不若人也라 指不若人則知惡之호대 心不若人則不知惡하나니 此之謂不知類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이제 無名의 指가 屈하여 信치 아니함이 있다면 疾痛하고 일을 害함이 아니언마는, 만약 能히 信할자 있다면 秦楚의 路를 멀다하지 않으리니 指가 남과 같지 않음을 爲함이니라. 指가 남과 같지 않으면 惡할 줄을 알되 心이 남과 같지 않으면 惡할 줄을 알지 못하니 이를 類를 알지 못한다 이르니라.”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이제 無名指(손의 第 四指)가 굽어 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프거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능히 펴주는 사람이 있다면 秦에서 楚까지의 머나먼 길도 멀다않고 찾아갈 것이다. 그것은 손가락이 남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남과 같지 않으면 싫어할 줄을 알면서도 마음이 남과 같지 않으면 싫어할 줄을 모르니 이것을 類(大小의 類)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 程子曰人於外物奉身者에 事事要好호대 只有自家一箇身與心을 却不要好하나니 苟得外物好時에 却不知道自家身與心이 已自先不好了也니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外物(衣食등)의 몸을 받들어주는 것엔 事事마다 좋기를 요구하되 다만 자기의 하나 身과 心은 문득 좋기를 要하지 않으니, 진실로 外物 좋은 것을 얻을 時는 자기의 身과 心이 이미 먼저 저절로 안좋아짐을 말할줄 모른다.”
△ 永嘉鄭氏曰覽鏡하야 面目에 有汙則必滌之하고 振衣而領袖에 有垢則必濯之하고 居室而几案窓壁에 有塵則必拂之하나니 不如是則不能安焉이라 至於方寸之中하야는 神明之舍어늘 汙穢垢塵이 日積焉而不知滌濯振拂之하니 察小而遺大하고 察外而遺內라 其爲不能充其類ㅣ 不亦甚乎아
【解】永嘉鄭氏가 말하기를, “거울을 보고 面目에 더러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씻고, 옷을 털다가 領(동정)이나 소매에 때가 있으면 반드시 빨고, 室에 居하면서 几나 책상이나 窓 壁에 먼지가 있으면 반드시 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方寸(心)의 속은 神明의 깃든 곳이거늘 더럽고 때묻고 먼지끼고 함이 날로 쌓이는데 씻고 빨고 털 줄을 알지 못하니, 작은 것을 살피고 큰 것을 버리며 밖을 살피고 속을 버림이니 그 類(더러움을 싫어한 類)를 擴充하지 못함이 또한 甚하지 않은가.”
○ 孟子曰人之於身也에 兼所愛니 兼所愛則兼所養也라 無尺寸之膚를 不愛焉則無尺寸之膚를 不養也니 所以考其善不善者는 豈有他哉아 於己에 取之而已矣라 體有貴賤하며 有小大하니 無以小害大하며 無以賤害貴니 養其小者ㅣ 爲小人이요 養其大者ㅣ 爲大人이니라 今有場師ㅣ 舍其梧檟하고 養其樲棘則爲賤場師焉이오 養其一指而失其肩背而不知也則爲狼疾人也니라 飮食之人을 則人이 賤之矣나니 爲其養小以失大也라 飮食之人이 無有失也則口腹이 豈適爲尺寸之膚哉리요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몸에 愛한 바를 兼하니 愛한 바를 兼한즉 養한 바도 兼한다. 尺寸의 膚를 愛치 아니함이 없은즉 尺寸의 膚를 養치 않음이 없다. 그 善하고 善치 않음을 考할 바는 어찌 他가 있겠는가. 己에 取할 따름이다. 體에 貴賤이 있고 小大가 있으니 小로써 大를 害치 말며 賤으로써 貴를 害치 말지니 그 小를 養한 者ㅣ 小人이 되고 그 大를 養한 者ㅣ 大人이 되니라. 이제 場師가 있어 그 梧檟를 舍하고 그 樲棘을 養하면 賤한 場師가 될것이요 그 一指를 養하고 그 肩背를 失하여 알지 못한즉 狼疾의 人이 되리라. 飮食의 人을 곧 人이 賤히 여기나니 그 小를 養하고 大를 잃음을 爲함이다. 飮食의 人이 失함이 없으면 口腹이 어찌 適히 尺寸의 膚만 되리요.”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몸에 대하여 두루 아끼는 바니 두루 아낀 바라면 두루 보호를 하는 바이다. 尺寸의 살도 아끼지 않은 데가 없은즉 尺寸의 살도 保護치 않은데가 없을 것이다. 그 보호를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를 아는 방도는 내마음에 취해보면 된다. 왜냐면 몸에 작고 큰 것이 있고 귀하고 천한 것이 있으니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하고 천한 것 때문에 귀한 것을 해치면 안된다. 작은 것을 보호하는 者는 小人이 되고 큰 것을 지키는 者는 大人이 된다. 비유를 하자면 庭園師가 좋은 梧檟같은 나무를 버리고 몹쓸 樲棘같은 나무를 기른다면 형편없는 庭園師가 되고 말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그 손가락 하나를 보호 하려다가 그 어깨나 등을 잃는다면 마치 늑대가 병이 들어 돌아보지 못한 것과도 같은 사람인 것이다. 음식밖에 모르는 사람을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것은 작은 口腹을 채우기 위하여 큰 체통을 잃기 때문인 것이다. 음식만 아는 사람이 실수를 함이 없다면야 口腹이 어찌 다만 尺寸의 살만 되겠는가.”
△ 張子曰湛一은 氣之本이요 攻取는 氣之欲이라 口腹於飮食과 鼻口於臭味에 皆攻取之性也나 知德者는 屬厭而已요 不以嗜欲으로 累其心하나니 不以小害大하고 末로 喪本焉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湛然(平淡)하고 한결같음은 氣의 근본(初)이요 攻取(犯하여 取함)함은 氣의 欲求다. 口腹의 음식에 대해서나 코 입의 냄새 맛에 대해서나 모두가 攻取하려는 性을 갖고 있다. 그러나 德을 아는 사람은 만족하게 되면 그만이고 嗜好의 欲으로 그 마음을 累(얽매임)치 아니하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해치지 아니하고 末로 本을 잃지 않는다.”
【註】小와 末은 口腹 飮食, 大와 本은 心德
△ 武夷胡氏曰治心修身을 以飮食男女로 爲切要니 從古聖賢이 自這裡做工夫하니 其可忽乎아
【解】武夷胡氏가 말하기를,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음을 飮食 男女로 切要함을 삼나니 예로부터 聖賢이 여기에다 공부를 하였으니 그 소홀히 하면 되겠는가.”
○ 公都子問曰鈞是人也로대 或爲大人하고 或爲小人은 何也잇고 曰從其大體ㅣ 爲大人이요 從其小體ㅣ 爲小人이니라 曰鈞是人也로대 或從其大體하고 或從其小體는 何也잇고 曰耳目之官은 不思而蔽於物하나니 物이 交物則引之而已矣니라 心之官則思하니 思則得之하고 不思則不得也니 此天之所與我者라 先立乎其大者면 則其小者ㅣ 弗能奪也니 此爲大人而已矣니라
【글풀이】公都子가 묻기를, “鈞히 사람이로대 或은 大人이 되고 或은 小人이 됨은 어째서입니까?” 말하기를, “그 大體를 從하면 大人이 되고 그 小體를 從하면 小人이 된다.” 말하기를, “鈞히 사람이로대 或은 그 大體를 從하고 或은 小體를 從함은 어째서입니까?” 말하기를, “耳目의 官은 思치 못하고 物에 蔽하는 것이니 物이 物과 交하면 引할 따름이요, 心의 官은 思하나니 思한즉 得하고 思치 않은즉 得치 못하니 이는 天의 我에게 餘한 者다. 먼저 그 大者를 立하면 그 小者가 能히 奪치 못하나니 이가 大人이 될 따름이다.”
【뜻풀이】公都子가 묻기를, “똑같은 사람인데도 혹은 대인이 되고 혹은 소인이 됨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그 大體를 따르면 大人이 되고 그 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되는 것이다.” 말하기를, “똑같은 사람이거늘 혹은 그 大體를 따르고 혹은 小體를 따름은 어째서입니까?” 말하기를, “귀와 눈의 官(맡은 것)은 생각지 못하고 외물에 가리워진 것이니 외물이 이 物(耳目)과 交接하면 끌어갈 따름이다. 그러나 心의 官은 생각을 하니 생각을 하면 (道理를)얻고 생각지 않으면 (道理를)잃으니 이는 하늘이 나에게 준 바다. 먼저 그 큰 것(心理)을 세워버리면 그 작은 것(耳目의 欲)이 능히 (心德을)빼앗지 못하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大人이 될 따름인 것이다.”
△ 荀子曰耳目口鼻ㅣ 能各有接而不相能也니 夫是之謂天官이요 心居中하야 虛以治五官하니 夫是之謂天君이라 聖人은 淸其天君하고 正其天官이니라 又曰虛一而靜을 謂之淸明이요 心者는 形之君也而神明之主也라 出令而無所受令이니라
【解】荀子(荀况)가 말하기를, “耳 目 口 鼻가 능히 각기 接함이 있고 서로 能을 (같이하지)못한다. 이것을 天官이라 하고 心은 中에 있어 虛하여 五官(耳目口鼻欲)을 다스리니 이것을 天君이라고 한다. 聖人은 그 天君을 淸케 하여 그 天官을 正히 한다.” 또 말하기를, “虛하고 一하고 靜함을 淸明하다고 이른 것이요 心이란 形의 君이며 神明의 主니 令을 내는 것이지 令을 받을 바가 없다.”
△ 朱子曰心은 元有思라 須是人이 自家主張起來니 此最要緊이라 又曰心之虛靈이 無有限量하니 如六合之外를 思之卽至하고 前乎千百世之已往과 後乎千萬世之方來가 皆在目前이라 人爲利欲所昏이라 所以不見此理니라 又曰孟子說先立乎其大者하니 此語ㅣ 最有力이라 且看他下一箇立字하라 昔에 有人이 問譙先生爲學之道한대 譙曰某ㅣ 只是先立乎其大者라하니 他之學이 亦自有要라 卓然竪起自心이 便是立이니 所謂敬以直內也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心은 원래 思가 있다. 사람이 스스로 주장하여 일으켜야 하니 이것이 가장 긴요하다.” 또 말하기를, “마음의 虛하고 靈함이 한량이 없으니 마치 六合(上下四方)의 外도 생각하면 곧 이르러 오고, 앞으로 千百世의 이미 지난 일과 뒤로 千萬世의 미래도 모두가 눈 앞에 와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利欲에 어두워졌기 때문에 이런 理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孟子가 먼저 그 큰 것을 立하라고 했으니 이말이 가장 힘이 있다. 우선 이 분의 立자를 놓은 것을 보라. 옛날 어떤 사람이 譙先生(名定字天授)에게 學을 하는 道를 묻자 譙가 말하기를, ‘某는 다만 먼저 그 大者를 세웠다’고 했다 하니 그의 학문도 要緊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卓然하게 자기의 心을 세워 일으킴이 바로 立이니 이른 바 ‘敬하야써 內를 直케 함’이다.”
○ 孟子曰飢者甘食하고 渴者甘飮하나니 是未得飮食之正也니 飢渴이 害之也라 豈惟口腹이 有飢渴之害리요 人心이 亦皆有害하나니 人能無以飢渴之害로 爲心害면 則不及人을 不爲憂矣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飢한 者ㅣ 甘하게 食하고 渴한 者ㅣ 甘하게 飮하나니 이는 飮食의 正을 얻지 못하니 飢渴이 害함이라. 어찌 오직 口腹만 飢渴의 害가 있으리요. 人心도 또한 모두 害가 있나니 사람이 能히 飢渴의 害로써 心의 害가 되게 하지 않으면 人에게 미치지 못함을 憂치 않으리라.”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배고픈 사람은 먹기를 달게 하고 목 마른 사람은 마시기를 달게 하는 것이니 이는 음식의 正味를 얻지 못한 것이요, 그것은 배고프고 목마름이 害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어찌 口腹만 배고프고 목마른 害가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도 모두 害를 봄이 있는 것이니(事理의 분별을 못함) 사람이 능히 배고프고 목마른 害로 마음의 害가 되지 않게 한다면 남에게 미치지 못할 걱정을 안해도 된다.”
△ 朱子曰人心亦皆有害一句를 趙氏謂人心이 爲利欲所害라하니 此說이 甚善이라 盖飢渴이 害其知味之性則飮食이 雖不甘이나 亦以爲甘하고 利欲이 害其仁義之性則所爲雖不可나 亦以爲可也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人心亦皆有害의 一句를 趙氏(名岐字邠卿漢人)가 말하기를, ‘人心이 利欲의 害한 바가 된다.’고 했으니 이 말이 甚히 좋다. 대저 飢渴이 그 맛을 아는 性을 害하면 음식이 비록 甘하지 않아도 甘하다 하고, 利欲이 그 仁義의 性을 害한즉 하는 바가 비록 옳지 않아도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飢渴이 甚하면 飮食맛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마시고 먹듯이, 사람이 貧窮이 極하여 飢渴이 甚하면 爵祿에 對해 그것을 받아야 하는지 안받아야 하는지 是非를 돌아보지 못하고 받음으로써 心害가 되는 수도 많다는 것이 孟子의 本旨다. 趙氏說도 좋지만 本旨와는 다른 듯하다.
○ 孟子曰魚도 我所欲也며 熊掌도 亦我所欲也언마는 二者를 不可得兼인댄 舍魚而取熊掌者也오 生도 亦我所欲也며 義도 亦我所欲也언마는 二者를 不可得兼인댄 舍生而取義者也라 生亦我所欲也언마는 所欲이 有甚於生者라 故로 不爲苟得也하며 死亦我所惡언마는 所惡ㅣ 有甚於死者라 故로 患有所不辟也니라 如使人之所欲이 莫甚於生則凡可以得生者를 何不用也며 使人之所惡ㅣ 莫甚於死者則凡可以辟患者를 何不爲也리요 由是則生而有不用也하며 由是則可以辟患而有不爲也라 是故로 所欲이 有甚於生者하고 所惡ㅣ 有甚於死者하니 非獨賢者ㅣ 有是心也라 人皆有之언마는 賢者ㅣ 能勿喪耳니라 一簞食와 一豆羹을 得之則生하고 弗得則死호대 嘑爾而與之하면 行道之人도 弗受하고 蹴爾而與之하면 乞人도 不屑也니라 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하나니 萬鍾이 於我에 何加焉고 爲宮室之美와 妻妾之奉과 所識窮乏者ㅣ 得我與저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宮室之美하야 爲之하고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妻妾之奉하야 爲之하며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하니 是亦不可以已乎아 此之謂失其本心이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魚도 나의 欲한 바요 熊掌도 내가 欲한 바이지만 二者를 兼하지 못한다면 魚를 舍하고 熊掌을 取할 者요, 生도 나의 欲한 바요 義도 나의 欲한 바이지만 二者를 兼하지 못한다면 生을 舍하고 義를 取할 者다. 生도 나의 欲한 바이지만 欲하는 바가 生보다 甚한 者가 있는지라 故로 苟히 得함을 하지 않고, 死도 내가 惡한 바이지만 惡하는 바가 死보다 甚한 者가 있는지라 故로 患을 피하지 않은 바가 있다. 만약 人의 欲한 바가 生보다 甚함이 없다면 무릇 生을 得한 者를 어찌 用치 않으며 人의 惡한 바가 死보다 甚함이 없다면 무릇 可히 患을 辟할 者를 어찌 하지 않으리요. 이로 말미암은즉 生하옴에 用치 않음이 있고 이로 말미암은즉 可히 患을 辟하되 하지 않음이 있다. 이런 故로 欲하는 바가 生보다 甚한 者 있고 惡하는 바가 死보다 甚한 者가 있으니 홀로 賢者만 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 있건마는 賢者는 能히 喪치 않을 뿐이다. 一簞의 食와 一豆의 羹을 得하면 生하고 得치 못하면 死할지라도 嘑히 주면 行道의 人도 받지 않고 蹴히 주면 乞人도 屑하지 않는다. 萬鍾인즉 禮義를 辨치 않고 받으니 萬鍾이 나에게 무엇을 加하는가. 宮室의 美와 妻妾의 奉과 識한 바 窮乏한 者가 我를 得함을 爲함인저. 鄕에 身을 爲함에는 死하여도 받지 않다가 이제 宮室의 美를 爲하여 하며, 鄕에 身을 爲함에는 死하여도 받지 않다가 이제 妻妾의 奉을 爲하여 하며, 鄕에 身을 爲함에는 死하여도 받지 않다가 이제 識한 바 窮乏한 者가 我를 得함을 爲하여 하니 이 또한 말지 못하는가. 이를 그 本心을 잃었다고 이른 것이다.”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생선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곰의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義를 取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삶을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지 않고,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 싫은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患難을 피하지 않는 수가 있다. 만약 사람의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 모든 살 수 있는 수단을 어찌 쓰지 않겠으며, 사람의 싫어한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 모든 患難을 피하는 짓을 어찌 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살 수 있는 수단을 쓰지 않는 수가 있고 이 때문에 患難을 피하는 짓을 하지 않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있고 싫어한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는 것이니 홀로 賢한 자에게만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두고 있는 것이지만 賢者만 능히 잃지 않는 것이다. 한 대바구니의 밥과 한 木器의 국을 얻으면 살 수 있고 얻지 못하면 죽게 된 판국일지라도 소리를 꽥 지르면서 준다면 길 가는 사람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받지 않을 것이요, 발로 차듯이 준다면 거지도 싫어할 것이다. 그런데 萬鍾(一鍾은 八十斗)의 재물은 禮義를 분별하지 않고 받으니 萬鍾이 나에게 무엇을 더해주는가. 宮室의 아름답게 꾸밀 수 있음과 妻妾에게 줄 수 있음과 親知의 궁핍한 자가 나에게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위해서 이리라. 전에 자신만을 위해서는 죽어도 예의없이 주는 것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는 宮室을 아름답게 하기를 위하여 하고, 전에 자신만을 위해서는 죽어도 예의 없이 주는 것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는 妻妾에게 호강 시켜주기 위해서 하고, 전에 자신만을 위해서는 죽어도 예의 없이 주는 것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는 친지의 궁핍한 사람이 나에게 혜택을 얻게하기 위하여 하니 이것을 안할 수는 없는가. 이를 보고 그 본심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다.”
△ 朱子曰本心은 謂羞惡之心이니 羞惡之心은 人所固有라 然或能決死生於危迫之際하고 而不免計豐約於宴安之時라 是以로 君子ㅣ 不可頃刻而不省察於斯焉이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本心은 羞惡의 마음을 말한다. 羞惡의 마음은 사람의 본디 두고 있는 바이지만 그러나 혹 능히 危迫한 즈음에 死生을 決斷하기도 하고 한가하고 편안한 때에는 많고 적음을 계교함을 면하지 못하는 수가 있으니 그래서 君子는 경각의 사이라도 여기에 살피지 않아서는 안된다.”
△ 謝良佐ㅣ 問於伊川先生曰邢恕ㅣ 久從先生에 想都無知識하야 後來極狼狽니이다 曰謂之全無知識則不可라 只是義理ㅣ 不能勝利欲之心하야 便至於此니라
【解】謝良佐가 伊川先生에게 묻기를, “邢恕가 오래 先生을 從遊했으나 생각건대 전혀 지식이 없어서 뒤에 극히 낭패를 한 듯 합니다.” 하자 말하기를,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義理가 利欲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그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했다.
※當時에 小人들이 程子와 門人들을 배척하자 邢恕가 그 禍를 免하려고 하루는 御前에 進講을 하면서 말하기를, “程某를 비록 萬端으로 斬해도 臣이 恨하지 않겠습니다.” 했다. 謝의 말은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 朱子曰某嘗見一種人이 汲汲營利하고 求官職하니 不知是句當甚事라 後來思量孟子說所欲有甚於生者하고 所惡有甚於死者하니 非獨賢者ㅣ 有是心也라 人皆有之언마는 賢者能勿喪耳라하니 他元來亦有此心이나 只是他自失了라 所以不見義理라 或云雖是如此나 想羞惡之心이 亦須萌動이리다 曰只是如此면 濟甚事리요 今夜에 愧恥어든 明日에 便不做라야 方是니 若愧恥後에 又却依舊면 何濟於事리요
【解】朱子가 말하기를, “某가 일찍이 一種의 사람이 利를 경영하기를 서두르고 관직을 구함을 보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줄을 알 수가 없었다. 뒤에 생각을 해보니 孟子가 말하기를, ‘원하는 바가 生보다 심함이 있고 싫어하는 바가 死보다 심함이 있으니 홀로 賢者만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있건만 賢者는 능히 잃지 않은 것이다.’ 했으니 그들도 원래 이런 마음이 있었으나 다만 그가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義理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或이 말하기를, ‘비록 그래도 아마 부끄러운 마음은 역시 생겨 동할 것입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다만 그러기만 하면 뭘 하겠는가. 오늘밤에 부끄러워 했다면 내일은 당장 하지 않아야 하는데 만약 부끄러워한 뒤에 다시 옛과 같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했다.”
△ 南軒張氏曰嘑爾而不受하고 蹴爾而不屑은 此其羞惡之心也라 人之固窮에 其欲이 未肆故로 其端이 尙在나 至於爲萬鍾所動則有不復顧者矣라 曰萬鍾이 於我何加焉고하니 人能深味此言而得其旨則亦可見外物之無足慕矣라
【解】南軒張氏가 말하기를, “嘑하여 받지 않고 蹴하여 不潔하게 여김은 이것이 그 羞惡의 마음이다. 사람이 곤궁할 적에는 그 욕심이 방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端(情)이 오히려 있지만 萬鍾의 動한 바가 됨에 이르면 다시 돌아보는 것이 없다. ‘萬鍾이 나에게 무엇을 더해 주는가.’ 했으니 사람이 능히 깊이 이 말을 음미하여 그 뜻을 얻으면 또한 外物이 족히 사모하잘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리라.”
心經 卷四
○ 孟子曰鷄鳴而起하야 孶孶爲善者는 舜之徒也오 鷄鳴而起하야 孶孶爲利者는 蹠之徒也니 欲知舜與蹠之分인댄 無他라 利與善之間也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善을 하는 者는 舜의 徒요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利를 하는 者는 蹠의 徒니, 舜과 蹠의 分을 알고자 할진댄 他 없다. 利와 善의 間이다.”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舜같은 聖人쪽의 무리요,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利만을 찾는 일을 하는 사람은 蹠같은 도둑쪽의 무리니, 舜과 蹠의 분간을 알고자 한다면 다른 방도가 없다. 오직 利와 善의 사이가 있을 뿐이다.”
△ 或이 問鷄鳴而起하야 若未接物이면 如何爲善고 程子曰只主於敬이 便是爲善이니라 又曰董仲舒有言호대 正其義不謀其利하고 明其道不計其功이라하니 此仲舒所以度越諸子니라
【解】或이 묻기를, “닭이 울어 일어나서 만약 物을 接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善을 합니까?” 程子가 말하기를, “다만 敬에 主함이 바로 善을 함이다.” 또 말하기를, “董仲舒가 말하기를, ‘그 義를 바르게 하고 그 理를 꾀하지 않으며 그 道를 밝히고 그 功을 計치 않는다.’ 했으니 이것이 仲舒의 諸子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점이다.”
△ 上蔡謝氏曰透得名利關이라야 方是小歇處니 今之士大夫는 何足道리요 能言이 眞如鸚鵡也니라
【解】上蔡謝氏가 말하기를, “名利의 關門을 통과해야만 바야흐로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士大夫는 어찌 족히 말하리요. 말만 능하여 참으로 앵무새와 같다.”
△ 問利與善之間한대 朱子曰不是冷水면 便是熱湯이니 無那中間溫呑煖處也라 又曰天理人欲之分이 只爭些子라 故로 周先生이 只管說幾字라 然이나 辨之를 又不可不早라 故로 橫渠ㅣ 每說豫字하니라
【解】묻노니, “利與善의 間이란 어떤 말입니까?” 朱子가 말하기를, “冷水가 아니면 곧 熱湯이니 중간의 미지근한 곳은 없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天理와 人欲의 분간은 다만 약간을 다투는 것이니 그래서 周先生도 다만 幾字를 말했다(幾는 動의 微). 그러나 辨하기를 빨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그래서 橫渠도 매양 豫(미리 함)字를 말한 것이다.”
△ 問事有合理而有意爲之면 如何오 曰事雖義而心則私라 如路를 好人이 行之라도 是路요 賊이 行之라도 亦是路나 合是如此者는 是天理요 起計較면 便不是니라 又曰利與善之間은 若纔有心要人知하고 要人道好하고 要以此求利祿이면 皆爲利也라 這箇極多般樣하니 雖所爲皆善이라도 但有一毫歆慕外物之心이면 便是利了라 如一塊潔白物事에 上面에 只着一點黑하면 便不得爲白矣라 又曰世間喩於義者則爲君子하고 喩於利者는 卽是小人而近年에 一種議論이 乃欲周旋於二者之間하야 回互委曲하야 費盡心機호대 卒旣不得爲君子하고 其爲小人도 亦不索性하니 可謂誤用其心矣라
【解】묻노니, “일이 理에 合하되 뜻이 있어 하면 어떻습니까?” 대답하기를, “일은 비록 옳을지라도 마음은 私다. 마치 길을 好人이 行해도 길이요 賊이 行해도 길이지만 마땅히 그렇게 해야함은 그것이 天理요 계교의 마음을 내면 옳지 않은 것이다.” 또 말하기를, “利와 善의 사이는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남이 알아주기를 요하여’ 라든가 ‘남이 좋다고 말해주기를 要하여’ 라든가 ‘이로써 利祿을 求하기를 要하여’ 하는 생각을 둔다면 모두 利를 위함이다. 이런 일이 극히 많으니 비록 하는 바가 모두 善할지라도 다만 一毫의 外物을 흠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利인 것이다. 마치 한덩어리 결백한 물건이 있는데 그 위에다 一點의 검은 것을 묻힌다면 곧 白이 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또 말하기를, “世間에 義를 잘 아는 者는 君子가 되고 利를 잘 아는 者는 바로 小人인데 近年에, 一種의 議論은 二者의 중간에서 서성거리고자 하여 얽히고 구부리고 하여 心機(謀)를 극진히 허비하고 끝내는 君子도 못되고 小人도 제대로 되지 못하니 그 마음을 잘못 썼다고 할 수 있다.”
△ 南軒張氏曰學者ㅣ 潛心孔孟하야 必求其門而入이니 愚以爲莫先於明義利之辨이라 盖聖賢은 無所爲而然也니 無所爲而然者는 命之所以不已요 性之所以不偏이요 而敎之所以無窮也라 凡有所爲而然者는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이니 此義利之分也라 自未知省察者로 言之면 終日之間에 鮮不爲利矣라 非特名位貨殖而後에 爲利也라 意之所向이 一涉於有所爲면 雖有淺深之不同이나 其爲徇己自私는 一而已라 是心이 日滋則善端이 遏塞이니 欲邇聖賢之門墻하야 以求自得이나 豈非却行而望及前人乎아 學者ㅣ 當立志以爲先하고 持敬以爲本하야 而精察於動靜之間하야 毫釐之差에 審其爲霄壤之判則有以用吾力矣라 孔子曰 古之學者는 爲己러니 今之學者는 爲人이라 하니 爲人者는 無適而非利요 爲己者는 無適而非義라 曰利則雖在己之事나 皆爲人也오 曰義則施諸人者亦莫非爲己也라 嗟乎라 義利之辨이 大矣라 豈特學者治己之所當先이리요 施之天下國家도 一也라
【解】南軒張氏가 말하기를, “學者가 孔子 孟子에 뜻을 두었다면 반드시 그 門을 구해서 들어가야 하는데 愚는 무엇보다도 우선 義利의 분간을 먼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저 聖賢은 爲(目的)하는 바가 없이 한다. 爲하는 바가 없이 함은 天命이 그치지 않은 바요 性이 偏하지 않은 바요 敎가 다함이 없는 바다. 무릇 爲한 바가 있어서 하는 것은 모두가 人欲의 私요 天理의 存한 바가 아니다. 이것이 義利의 분간이다. 省察할 줄을 모르는 者로부터 말하자면 終日토록 하는 일이 利를 위함이 아닌 것이 적다. 특히 名位나 貨殖(財産 增殖)만이 利가 된 것이 아니다. 뜻의 向하는 바가 한번 爲하는 바에 들게 되면 비록 淺深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자기의 욕심을 따르고 스스로 私를 함은 한가지이다. 이런 마음이 날로 불어나면 善의 端(情)이 막혀버리는 것이니 聖賢의 門墻을 가까이 하여 自得을 하려고 해도 거꾸로 물러가면서 앞사람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나 같지 않겠는가. 學者는 마땅히 立志를 먼저하고 敬을 함을 근본을 삼고 動靜의 사이를 精하게 살펴 털끝만한 差誤가 하늘과 땅의 달라짐이 된다는 것을 살핀다면 나의 힘을 쓸수가 있을 것이다. 孔子가 말하기를, ‘옛 學者는 자기를 爲했는데 지금의 學者는 남을 爲한다.’고 하였으니 남을 爲하는 者는 가는 데 마다 利 아님이 없고 자기를 爲하는 者는 가는 데 마다 義 아님이 없다. 利라면 비록 나에게 있는 일일지라도 모두가 남을 위함이요 義라면 남에게 베푸는 것이 모두가 나를 위함이다. 아! 義利의 분간이 크다. 어찌 특히 學者의 몸을 다스리는 데만 먼저할 바이겠는가. 天下 國家에 施行함도 마찬가지다.”
△ 象山陸氏曰君子는 喩於義하고 小人는 喩於利의 此章은 以義利로 判君子小人이나 苟不切己觀省이면 亦恐未能有益也라 人之所喩는 由其所習이요 所習은 由其所志니 志乎義則所習者ㅣ 必在於義니 所習이 在義면 斯喩於義矣요 志乎利則所習이 必在於利니 所習이 在利면 斯喩於利矣라 故로 學者之志를 不可不辨也라 今爲士者ㅣ 固不能免場屋之得失이나 顧其技ㅣ 與有司로 好惡如何耳라 非所以爲君子小人之辨이나 而今世以此相尙하야 使汨沒於此而不能自拔則終日從事者ㅣ 雖曰聖賢之書나 而要其志之所鄕則有與聖賢으로 背而馳者矣라 推而上之則又惟官資崇卑와 祿廩厚薄을 是計니 豈能悉心力於國事民隱하야 以無負於任使之者哉아 從事其間하야 更歷之多하고 講習之熟에 安得不有所喩리요 顧恐不在於義耳라 誠能深思是身을 不可使之爲小人之歸면 其於利欲之習에 怛焉爲之痛心疾首하고 專主乎義而日勉焉하야 博學審問謹思明辨而篤行之니 由是而進於場屋하면 其文이 必皆道其平日之學과 胸中之蘊하야 不詭於聖人이요 由是而仕하면 必皆供其職勤其事하야 心乎國하고 心乎民而不爲身計리니 其得不謂之君子乎아
【解】象山陸氏(名九淵)가 말하기를, “君子는 義를 잘 알고 小人은 利를 잘 안다는 이 章은 義와 利로써 君子와 小人을 판별한 것인데 진실로 내 몸에 절실히 살펴보지 않으면 또한 有益하지 못할 듯 싶다. 사람이 잘 아는 바는 그 익히는 바로 말미암고 익히는 바는 그 뜻하는 바로 말미암는다. 義에 뜻을 두면 익히는 바가 반드시 義에 있을 것이니 익히는 바가 義에 있으면 곧 義를 잘 알수 있을 것이요, 利에 뜻을 두면 익히는 바가 반드시 利에 있을 것이요 익히는 바가 利에 있으면 곧 利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學者의 뜻을 분별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지금의 선비된 자가 실로 場屋(科擧마당)의 得失을 免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재주가 有司(試官)로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함이 어떠냐에 달려 있으니 (이 得失이) 君子와 小人의 분별이 될 바가 아닌데도 지금 세상이 이것을 모두 숭상하여 여기에 골몰하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니 종일토록 從事한 것이 비록 聖賢의 書라고 하지만 그 뜻이 향한 바를 찾아본다면 聖賢으로 더불어 배치되는 바가 있다. 그리고 이를 미루어 올라가면 또 오직 벼슬의 높고 낮음과 祿俸의 많고 적음만을 계교하게 될것이니 어떻게 國事와 백성의 아픔에 心力을 다하여 맡긴 분을 저버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사이에 從事하여 지내기를 많이하고 講習하기를 익숙히 하면 어찌 잘 아는 바가 없겠는가. 다만 義에 있지 않음이 두려운 것이다. 진실로 능히 깊이 생각하기를, ‘이 몸을 小人이 되게해서는 안되겠다’고 한다면 그 利欲의 익힘에 깜짝 놀라고 마음이 아프며 머리가 아파 專的으로 義를 主하고 날로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널리 배우고 살펴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여 독실히 行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場屋에 나아가면 그 文이 반드시 모두 그 平日에 배운 바와 가슴속에 쌓여있는 바를 말하고 聖人에 틀리지 않을 것이요, 그렇게 하여 벼슬을 하면 반드시 모두 그 職을 받들고 그 일에 부지런하여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여 자신을 위한 계책을 하지 않으리니 이러면 君子라고 하지 않겠는가.”
※宋 淳熙六年에 朱子가 南康軍의 任所로 갔는데 八年 二月에 象山이 찾아왔다. 朱子가 僚友와 諸生을 거느리고 그와 함께 白鹿洞 書院으로 가서 象山 보고 講席에 오르기를 청하였던 바 象山이 上記의 강연을 하였다. 朱子는 學者의 깊은 속 고질병에 약이 되는 절실한 좋은 말이라고 했다.
○ 孟子曰養心이 莫先於寡欲이니 其爲人也ㅣ 寡欲이면 雖有不存焉者라도 寡矣요 其爲人也ㅣ 多欲이면 雖有存焉者라도 寡矣니라
【글풀이】孟子가 말하기를, “心을 養함이 欲이 적음보다 善함이 없으니 그 人되옴이 欲이 적으면 비록 存치 않은 者 있을지라도 寡하고, 그 人되옴이 欲이 많으면 비록 存한 者 있을 지라도 寡니라.”
【뜻풀이】孟子가 말하기를, “마음을 修養함이 욕심이 적은 것보다 좋은 방도가 없으니 사람 되옴(타고난 성격)이 본시 욕심이 적으면 그 本心(良心)이 存하지 않은 수가 있더라도 그런 때가 적고 存할 때가 많은 것이고, 그 사람 되옴이 본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비록 그 本心이 存할 때가 있을지라도 그런 시간은 아주 적고 存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다.”
△ 程子曰不必沈溺然後에 爲欲이라 但有所向則爲欲이라 又曰 人於天理에 昏者는 只爲嗜欲이 亂着他니 莊子言其嗜欲深者는 其天機ㅣ 淺이라하니 此言이 却最是라
【解】程子가 말하기를, “반드시 거기에 빠저야만 欲이 된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로 向한 바만 있으면 欲이 된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天理에 어두운 者는 다만 嗜欲이 그를 어지럽게 해서 그런 것이다. 莊子가 말하기를 ‘그 즐긴 욕심이 깊은 자는 그 天機(天性의 情)가 얕다’고 했으니 이 말이 옳다.”
△ 南軒張氏曰多欲則百慮紛紜하야 其心이 外馳하니 尙何所存乎아
【解】南軒張氏가 말하기를, “욕심이 많으면 온갖 생각이 어지러워 그 마음이 밖으로 달리는데 어찌 存하는 바가 있겠는가.”
△ 張子曰仁之難成이 久矣라 人人이 失其所好라 盖人人이 有利欲之心하야 與學正相背馳라 故로 學者는 要寡欲이니라
【解】張子가 말하기를, “仁의 이루워지기 어려움이 오래다. 사람마다 그 좋아해야할 바(仁)를 잃은 것이다. 대저 사람마다 利欲의 마음이 있으니 學으로 더불어 正히 서로 배치가 된다. 그래서 學者는 모름지기 욕심이 적어야 한다.”
△ 或問謝氏호대 於利에 如何오 曰打透此關十餘年矣라 當初에 大段做工夫하야 揀難捨底하야 棄却이러니 後來에 漸漸輕하야 至今日하얀 於器用之類에도 置之를 只爲合用하고 更無健羨底心호라 問於外間에 一切放得下否아 曰實就上面做工夫來라 凡事는 須有根이니 屋柱無根하야 折却便倒요 樹木은 有根하야 雖剪枝條라도 相次又發이라 如人要富貴는 要他做甚고 必須有用處니 尋討要用處하야 病根을 將來斬斷이면 便沒事니라
【解】或이 謝氏에게 묻기를, “利에 어찌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 관문을 통과한지 십여년이 되었다. 당초에는 대단한 공부를 하여 버리기 어려운 것을 골라서 버렸는데 뒤에는 점점 쉬워져서 지금은 器用같은 것도 꼭 필요한 것만 놔두고 다시는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다.” 묻기를, “그밖에 外間의 것도 버릴 수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실로 거기에 공부를 해왔다. 모든 것이 반드시 뿌리가 있으니 마치 집의 기둥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꺽으면 곧 넘어지지만 나무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비록 가지를 베어도 차근 차근 또 뻗어 올라온다. 마치 사람이 富貴를 구함에 그것을 구해가지고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반드시 그것을 쓸 데가 있을 것이니 그 쓰려는 곳을 찾아서 病의 뿌리를 잘라 버리면 곧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 問養心이 莫善於寡欲이라하니 養心은 也是中虛니잇가 朱子曰固是나 若眼前事事要時엔 這心이 便一齊走出了니 所以伊川이 敎人에 直是都不去他用其心하니 也不要人學寫字하고 也不要人學作詩文하니 這不是僻이라 道理是合如此라 人이 只有一箇心이어늘 如何分做許多去리요 若只管去閒處用了心하면 到得合用處하야 於這本來底에 都不得力이라 要得寡欲存這心이 最是難이라 以湯武聖人으로도 孟子猶說湯武는 反之也라하니 如不邇聲色과 不殖貨利는 只爲要復此心이라 觀旅獒之書에 一箇犬을 受了에 有甚大事而反復諫切고 於此에 見欲之可畏하야 無小大히 皆不可忽이라 又曰人最不可曉니 有人이 奉身을 儉嗇之甚하야 充其操면 上食槁壤하고 下飮黃泉底나 却只愛官職하고 有人이 奉身淸苦而好色하니 他只緣私欲不能克하야 臨事에 只見這箇重了라 或云似此等人도 分數ㅣ 勝己下底라하니 曰不得如此說이라 才有病이면 便不好니 更不可以分數論이라 他只愛官職하면 便殺父與君도 也敢이니라
【解】묻노니, “心을 養함이 欲을 적게함보다 善함이 없다하니 養心이란 속을 비운 것입니까?” 朱子가 말하기를, “그 말이 옳지만 만약 눈 앞에 일들이 있어 마음을 써야하게 되면 이 마음이 곧 일제히 달려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伊川이 사람을 가르치면서 곧바로 전혀 그리로가서 마음을 쓰지 못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글씨 쓰는 것도 배우지 말라 하고 詩文을 짓는것도 배우지 말라고 한것이니, 이것이 성격이 괴팍해서 그런것이 아니고 도리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만 하나의 마음이 있거늘 어떻게 나누어서 허다한 데로 가는가. 만약 긴요치 않은 데다가 마음을 쓰고 있다가 막상 참으로 마음을 써야할 데에 이르면 이 근본적인 것에는 전혀 힘을 얻어내지 못하게 된다. 要는 욕심이 적어 이 마음을 存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湯과 武王같은 聖人도 孟子가 오히려 ‘湯武는 反(되찾음)하였다’ 했으니 마치 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고 貨利를 增殖하지 않아야 함도(書經 仲虺之告의 文) 다만 이 마음을 도로 찾기 위한 것이다. 旅獒의 書(周書篇名 西旅가 獒를 바치자 召公이 書를 지어 成王을 戒하였다)를 보면 한마리의 개를 받은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반복해서 諫하기를 간절히 했으니 여기에서 欲이 무섭고 小大없이 경홀히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볼수가 있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란 가장 알 수 없으니 어떤 사람은 몸가짐을 아주 儉嗇하게 하여, 그대로 나간다면 마치 지렁이의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 黃泉을 마시듯 할 것 같은데 문득 벼슬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몸가짐을 淸苦하게 하면서도 色을 좋아한다. 그것은 다만 私欲을 이기지 못하여 일을 임하면 다만 그것이 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或이 말하기를, “이런 사람은 分數(人格의 等)가 그래도 자기 아래의 사람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하자 말하기를,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병이 있다면 바로 안좋은 것이니 다시 分數로 말해서는 안된다. 그가 다만 관직을 좋아한다면 곧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도 감히 할 사람인 것이다.”
○ 周子의 養心說에 曰孟子曰養心은 莫善於寡欲하니 其爲人也ㅣ 寡欲이면 雖有不存焉者라도 寡矣요 其爲人也ㅣ 多欲이면 雖有存焉者라도 寡矣라하니 予謂養心이 不止於寡而存耳라 蓋寡焉하야 以至於無니 無則誠立明通이라 誠立은 賢也오 明通은 聖也니 是聖賢이 非性生이라 必養心而至之니 養心之善이 有大焉如此하니 存乎其人而已라
【글풀이】周子의 養心說에 하였기를, “孟子가 말하기를, ‘心을 養함이 欲을 寡히 함보다 善함이 없으니 그 爲人이 欲이 寡하면 비록 存하지 않음이 있을지라도 寡하고 그 爲人이 欲이 많으면 비록 存함이 있을지라도 寡하다.’ 했는데 나는 이르기를 ‘心을 養함에, 寡하여 存함에 止하지 않고 寡하여 無에 至해야 한다’고 한다. 無하면 誠이 立하고 明이 通하나니 誠이 立함은 賢이요 明이 通함은 聖이다. 이는 聖賢이 性으로 生함이 아니라 반드시 養하여 至하는데 養心의 善함이 大가 있기를 이와 같으니 그 人에 있을 따름이다.”
【뜻풀이】周子(濂溪)의 養心說에 하였기를, “孟子가 말하기를, ‘마음을 養(保存)함이 욕심을 적게하는 것보다 좋은 방도가 없으니 그 人品이 욕심이 적다면 存心이 안된 때가 있을 지라도 그런 때가 적을 것이요 그 人品이 욕심이 많다면 비록 存心이 된때가 있을지라도 그런 때가 적을 것이다.’ 했는데 나는 말하기를 ‘養心을 함에 욕심이 적어서 存心이 됨에 그칠것이 아니라 적어져서 없어짐에 이르러야 한다’고 한다. 욕심이 없으면 誠(眞實)이 서고 明(神明)이 通하게 된다. 誠이 서면 賢人이요 明이 通하면 聖人이다. 이는 聖賢이 天性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心을 養하여 이르는 것이요 養心의 좋은 要法은 크게 이와같은 것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 달려있을 따름이다.”
【註】濂溪가 張宗範의 亭을 養心亭이라고 名하고 이렇게 說을 지어주었다.
△ 朱子曰周子言寡欲以至於無하니 蓋恐人이 以寡欲으로 爲便得了故로 言不止於寡而已오 必至於無然後에 可라 然이나 無底工夫則由於能寡欲到니 無欲은 非聖人이면 不能也라 又曰誠立은 謂實體安固요 明通則實用流行이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周子가 말하기를, ‘欲이 적어 無에 이르러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사람들이 欲이 적음으로써 곧 되었다고 여길까 봐서 ‘욕심이 적은데 그칠것이 아니라 반드시 無에 이르러야 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無의 공부는 능히 欲이 寡함으로 말미암아 이르는 것이니 無欲은 聖人이 아니면 能치 못한다.” 또 말하기를, “誠이 立함은 實體가 安定되어 堅固함이요 明이 通함은 實用이 流通되어 行해짐이다.”
○ 周子通書에 曰聖可學乎아 曰可니라 有要乎아 曰有하니라 請問焉하노이다 曰一爲要하니 一者는 無欲也라 無欲則靜虛動直이니 靜虛則明하고 明則通이요 動直則公이니 公則溥라 明通公溥면 庶矣乎저
【글풀이】周子의 通書에 하였기를, “‘聖을 可히 學하랴?’ ‘可하니라.’ ‘要가 있는가?’ ‘있다.’ ‘묻기를 청한다.’ 말하노니, ‘一이 要가 된다. 一은 欲이 없음이다. 欲이 없으면 靜에 虛하고 動에 直하나니 靜에 虛하면 明하고 明하면 通한것이요 動에 直하면 公하고 公하면 溥한다. 明 通 公 溥하면 거의한저.’”
【뜻풀이】周子의 通書에 하였기를, “ ‘聖人을 배울수 있는가?’ ‘있다.’ ‘要法이 있는가?’ ‘있다.’ ‘청하여 묻노라.’ 말하겠노니, ‘一(專一)이 要法이 된다. 一이란 욕심이 없음이니 욕심이 없으면 靜했을 적에 虛하고 動했을 적에 直한다. 靜할적에 虛하면 속이 밝고 밝으면 通하는 것이요 動했을 적에 直하면 公平하고 公平하면 溥(廣大)한 것이니 明하여 通하고 公하여 溥하면 聖人에 가까우리라.’”
△ 朱子曰一者는 無欲이라하니 今試看無欲之時에 心豈不一이리오 人이 只爲有欲하야 此心이 便千頭萬緖라 又曰周先生이 說一者는 無欲也라하니 然這話頭高하야 卒急難湊泊하니 尋常人이 如何便得無欲이리오 故伊川이 只說箇敬字하야 敎人只就這敬字上捱去하야 庶幾執着得定하야 有箇下手處하고 縱不得이라도 亦不至失하니 要之皆只要人於此心上에 見得分明하야 自然有得耳라 然이나 今之言敬者는 乃皆裝點外事하고 不知直截於心上求功하야 遂覺累墜不快活하니 不若眼下於求放心處에 有功則尤省力이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 ‘一이란 無欲이다’ 하니 이제 시험삼아 無欲한 때를 보라. 마음이 어찌 一치 않으리요. 사람이 다만 欲이 있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千頭 萬緖가 되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周先生이 말하기를 ‘一이란 無欲이다’ 했으나 그러나 이 話頭가 높아서 갑자기 이르러 가기가 어려우니 보통 사람이 어떻게 欲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伊川이 다만 敬字만을 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다만 이 敬字上에서 밀고나가 혹시 執着해 安定되어 손을 쓸 곳이 있게하고, 비록 얻지를 못할지라도 또한 잃지는 않게 한 것이다. 要는 모두가 이 心의 上에 보기를 분명히 하여 자연히 얻어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敬을 말하는 者는 모두가 外事만을 꾸미고 곧바로 心上에서 공부를 찾지 않으니 그래서 드디어 쌓아 올리다가 쓰러지다가 하며 쾌활하지 못하니 눈앞에서 당장 放心을 求하는 곳에 힘을 쓰는 것만 못하다. 그러면 더욱 힘이 적게 드는 것이다.”
【註】得은 得道, 失은 失己.
△ 龜山楊氏曰 凡學者ㅣ 以聖人으로 爲可至則必以爲狂而竊笑之라 夫聖人을 固未易至나 若舍聖人而學이면 是將何所取則乎아 以聖人爲師는 猶學射而立的然이라 的立於彼然後에 可視之而求中이니 其中不中則在人而已라 不立之的이면 何以爲準이리요
【解】龜山楊氏(名時)가 말하기를, “무릇 學者는 聖人에 이르러 갈 수가 있다고 말을 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하며 몰래 비웃는다. 원래 聖人을 실로 이르러 가기가 쉽지 않으나 만약 聖人을 놔두고 배운다면 어디서 법칙을 取하겠는가. 聖人으로써 스승을 삼는다는 것은 마치 활쏘기를 배우며 과녁을 세우는 것과 같다. 과녁을 저기에 세운 뒤에 보고 맞추기를 求하는 것이니 그것을 맞추고 못맞추고는 사람에게 달려있을 따름이다. 과녁을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기준을 삼겠는가.”
△ 又語羅公仲素云今之學者ㅣ 只爲不知爲學之方하고 又不知學成에 要何用하니 此事體大라 須是曾着力來라야 方知不易라 夫學者는 學聖賢之所爲也라 欲爲聖賢之所爲댄 須是聞聖賢所得之道라 若要博古通今하고 爲文章하고 作忠信愿慤不爲非義之士而已則古來如此等人不少라 然이나 以爲聞道則不可라 且如東漢之衰에 處士逸人과 與夫名節之士ㅣ 有聞當世者ㅣ 多矣나 觀其作處하고 責以古聖賢之道則略無毫髮髣髴相似하니 何也오 以彼於道에 初無所聞故也라 今時學者ㅣ 平居則曰吾當爲古人之所爲나 才有一事到手면 便措置不得하니 蓋其所學이 以博古通今으로 爲文章하고 或志於忠信愿慤하야 不爲非義而已라 由是觀之면 學而不聞道면 猶不學也니라
【解】또 羅公仲素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學者는 다만 學을 하는 방도를 모르므로 또 학문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쓰이는 지를 모른다. 이 事體가 크니 모름지기 일찍이 힘을 써보았을지라야 바야흐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릇 배움이란 聖賢의 한 바를 배운 것이다. 聖賢의 한 바를 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聖賢의 얻은 바 道를 들어야 한다. 만약 古事를 널리 알고 今事를 通하며 文章이나 짓고 忠信(성실)하고 愿慤(厚하고 質樸함)하여 非義나 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로 한다면 古來로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道를 들었다 함은 불가하다. 마치 東漢이 衰했을 때에 處士, 逸人(隱者)과 名節을 지킨 士로써 當世에 알려진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의 하는 짓을 보고 옛 聖賢의 道로써 責한다면 털끝만큼도 방불하게나마 같지를 않으니 어째서인가. 그들이 道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學者가 평상때에는 ‘내가 옛 사람의 한 바를 하겠다’ 하지만 막상 一事가 손에 오면 곧 어떻게 조치하지를 못하니 그것은 그 배운 바가 古今을 널리 통하여 문장이나 짓고 忠信하고 愿慤하여 非義나 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에 배우면서 道를 듣지 못했다면 배우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朱子曰凡人이 須以聖賢으로 爲己任이니 世人이 多以聖賢으로 爲高而自視爲卑라 故로 不肯進하나니 抑不知稟性이 與常人一同이라 安得不以聖賢으로 爲己任이리요 自開闢以來로 生多少人이로대 求其盡己者면 千萬人中에 無一二하고 只是滾同하야 枉過一世라 詩曰天生烝民하니 有物有則이라하니 今世學者ㅣ 往往有物而不能有其則이라 中庸의 尊德性而道問學數句는 乃是徹首徹尾라 人性本善이나 只爲嗜欲所迷와 利害所逐하야 一齊昏了니라 或問明性을 須以敬爲先이닛가 曰固是나 但敬亦不可混淪說이라 須是每事上에 點檢이니라 論其大要하면 只是不放過耳라 大抵爲己之學는 於他人에 無一毫干預니 聖賢의 千言萬語ㅣ 只是使人으로 反其固有而復其性耳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모름지기 聖賢으로써 자기의 任을 삼아야 한다. 世人이 흔히 聖賢을 높다하고 자신을 낮게 여기기 때문에 즐겨 나아가지 않는데 그것은 性을 타고 난 것이 常人과 똑같다는 것을 모르는 탓이다. 어찌 聖賢으로써 나의 任을 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났는가 마는 자기의 性을 다한 자를 찾아보면 千萬人의 속에 一二人도 없고 거개가 다만 휩쓸려서 한세상을 그릇 지내버린다. 詩에 하였기를, ‘하늘이 여러백성을 났음에 物이 있으면 법이 있다.’ 했는데 지금 세상의 學者는 왕왕 物만 있고 則(法)이 있지를 못한다. 中庸의 ‘德性을 높이고 問學을 道로 한다’는 數句는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통하는 것이다. 사람의 性은 본시 善하거늘 다만 嗜欲의 혼미한 바와 利害에 쫓기는 바가 되어 一齊히 어두워져 버린다. 或이 묻기를, ‘性을 밝히려면 모름지기 敬으로 우선을 삼아야만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 말이 옳지만 다만 敬도 混淪(분간없이 混合的임)하게 말해서는 안되고 모름지기 每事에서 낱낱이 살펴야 한다. 그 大要를 논하자면 다만 放過(아무렇게나 지냄)하지 않을 따름이다. 대저 己를 위한 학문은 他人에게는 一毫도 간여함이 없다. 聖賢의 千言萬語가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그 固有한 것을 되찾아 그 性을 회복할 따름이다.’”
○ 程子曰顔淵이 問克己復禮之目한대 子曰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하라하니 四者는 身之用也라 由乎中而應乎外하나니 制於外는 所以養其中也라 顔淵이 事斯語하니 所以進於聖人이니 學者ㅣ 宜服膺而勿失也니라 因箴以自警하노라 其視箴에 曰心兮本虛하니 應物無迹이라 操之有要하니 視爲之則이라 蔽交於前하면 其中則遷하나니 制之於外하야 以安其內하라 克己復禮면 久而誠矣리라 其聽箴에 曰人有秉彝는 本乎天性이어늘 知誘物化하야 遂亡其正이라 卓彼先覺은 知止有定이라 閑邪存誠하야 非禮勿聽하니라 其言箴에 曰人心之動이 因言以宣하나니 發禁躁妄이라야 內斯靜專하나니라 矧是樞機라 興戎出好하나니 吉凶榮辱이 惟其所召니라 傷易則誕이요 傷煩則支하며 己肆物忤하고 出悖來違하나니 非法不道하야 欽哉訓辭하라 其動箴에 曰哲人은 知幾하야 誠之於思하고 志士는 勵行이라 守之於爲하나니 順理則裕오 從欲惟危라 造次克念하야 戰兢自持하라 習與性成하면 聖賢同歸하리라
【글풀이】程子가 말하기를, “顔淵이 己를 克하고 禮를 復할 目을 묻는데 子ㅣ 말하기를 ‘禮 아니면 視치 말고 禮 아니면 聽치 말고 禮 아니면 言치 말고 禮 아니면 動치 말라’ 하였으니 四者는 身의 用이다. 中으로 由하여 外로 應하나니 外에 制함은 써 그 中을 養함이라. 顔淵이 이 말을 일삼으니 써 聖賢에 進한 바라 學者는 마땅히 膺하여 잃지 말지니라. 因하여 箴하여 써 스스로 警하노라. 그 視箴에 말하노니, ‘心이여 본시 虛하니 物에 應함이 迹이 없다. 操함이 要 있으니 視가 則이 된다. 前에 蔽하여 交하면 그 中이 곧 遷하나니 外에 制하여 써 그 內를 安케 하라. 己를 克하고 禮를 復하면 久하면 誠해진다.’ 그 聽箴에 말하노니, ‘人이 秉한 彛가 있음은 天性에 本하였거늘 知가 物에 誘되어 化하여 드디어 그 正을 잃는다. 卓한 저 先覺은 止할데를 알아 定함이 있는지라 邪를 閑하고 誠을 存하여 禮가 아니면 聽치 않나니라.’ 그 言箴에 말하노니, ‘人心의 動이 言으로 因하여 宣하나니 發함에 躁와 妄을 禁할지라야 內가 이에 靜하고 專하니라. 하물며 이 樞機라 戎을 興하고 好를 出하나니 吉 凶 榮 辱이 오직 그 召한 바라, 易에 傷하면 誕하고 煩에 傷하면 支하며 己가 肆하면 物이 忤하고 出이 悖하면 來가 違하나니 法이 아니면 道치 아니하여 訓辭를 欽할지어다.’ 그 動箴에 말하노니, ‘哲人은 幾를 알아 思에 誠하고 志士는 行을 勵하여 爲에 守하나니 理를 順하면 裕하고 欲을 從하면 오직 危하니 造次에도 능히 念하여 戰兢하여 스스로 持하라. 習이 性으로 더불어 成하면 聖賢과 同歸하리라.’”
【뜻풀이】程子가 말하기를, “顔淵이 己(私)를 이기고 禮를 실천(復)할 조목을 묻자 孔子가 말하기를, ‘禮가 아닌 것은 볼려고 말고, 禮가 아닌 것은 들으려고 말고, 禮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禮가 아닌 일에 動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 네가지(視聽言動)는 몸의 用이다. 中(心)으로 말미암아 外에 應하는 것이니 外에 억제를 함은 그 中(心性)을 養(保全)하는 바다. 顔淵이 이 말로 일을 삼았으니 그것이 聖人에 나아가는 바다. 學者는 마땅히 가슴에 새기고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箴(警辭)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노라. 그 視箴을 짓노니 ‘마음은 본시 비어 있나니 外物에 應함이 흔적이 없다. 잡는 要法이 있으니 보는 것에 법칙이 있다. 물건이 앞을 가리우고 사귀면 그 속(心)이 옮겨 가나니 밖을 억제하여 그 안을 편안케 하라. 己(私)를 이기고 禮를 復(踐履)하면 오래가면 誠(眞實)해지는 것이다.’ 그 聽箴을 짓노니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떳떳한 마음이 있는 것은 天性에 근본한 것이지만 知覺이 外物에 誘引되어 化하여 드디어 드 正道를 잃게 된다. 높은 저 先覺者는 止할데(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等)를 알아 定함이 있다. 邪念을 막고 誠心을 存하여 禮가 아니면 듣지 않았다.’ 그 言箴을 짓노니 ‘人心의 動함이 말로 인하여 나타나나니 말을 發할때에 조급함과 망녕됨을 금할지라야 속이 安靜되고 專一해진다. 하물며 이것(言)은 門의 樞와 弓弩의 機 같은 것이니 이로 인해 兵端이 일어나기도 하고 和好도 나올 수 있다. 吉凶과 榮辱이 오직 이것(言)의 부르는 바다. 쉽사리 하다 過하면 虛誕하게 되고 번거로움이 過하면 지루하며 내가 방자하게 말하면 남이 내 뜻을 거슬러 말하고 나에게서 나간 말이 어긋나면 오는 말도 도리에 틀린 말이 온다. 법이 아니거든 말하지 말고 聖人의 訓辭를 공경할 지어다.’ 그 動箴을 짓노니 ‘哲人(事理에 밝은 사람)은 幾(分岐點)를 알아 생각하기를 誠心껏하고 志士(志操가 있는 선비)는 行實을 가다듬어 行爲에 서 지키나니 道理를 順하면 餘裕가 있고 欲心을 따르면 위태롭기만 하다. 造次(다급할 때)에도 능히 생각하여 무서워하고 조심하여 자신을 가지라. 익혀감이 心性과 굳어져 成熟되면 聖賢과 같이 되리라.’”
△ 朱子曰四箴을 舊見只是平常說話러니 近乃覺其旨意精密하니 眞所謂一棒一條痕이요 一摑一掌血者라 又曰四箴은 意思ㅣ 都該括得盡이라 四箇箴에 有說多底하고 有說少底하니 多底는 減不得이요 少底는 添不得이라 只是須要自家ㅣ 下工夫하야 實見是如何라야 看這意思라 都克去己私면 無非禮之視하고 無非禮之聽하고 無非禮之言하고 無非禮之動이니 這是甚縻氣象고 這便是渾然天理니 這便是仁이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四箴을 옛날에는 다만 平常한 말로 보았는데 근일에야 그 뜻이 정밀함을 깨달았으니 참으로 이른 바 한번 막대로 친 데서 한줄기의 흔적이 생기고 한번 손으로 친 데에 한손바닥의 핏발이 선다는 격이다.” 또 말하기를, “四箴은 뜻이 모두 포괄되어 다해있다. 四箴에 말을 많이 한데가 있고 말을 적게 한데가 있는데 많은데는 줄일 수 없고 적은데는 보탤 수 없다. 이는 다만 자기가 공부를 해보아 실지로 어떻다는 것을 보았을 지라야 이런 意思를 알게되는 것이다. 己私를 완전히 이겨버리면 非禮를 봄이 없을 것이요 非禮를 들음이 없을 것이요 非禮를 말함이 없을 것이요 非禮로 움직임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떤 기상이겠는가. 이는 곧 완전한 天理이니 여기가 바로 仁인 것이다.”
○ 范氏心箴에 曰茫茫堪輿ㅣ 俯仰無垠이라 人於其間에 眇然有身하니 是身之微여 太倉稊米로대 參爲三才는 曰惟心爾라 往古來今에 孰無此心이리오마는 心爲形役하야 乃獸乃禽이라 惟口耳目과 手足動靜이 投間抵隙하야 爲厥心病이라 一心之微를 衆欲攻之하니 其與存者ㅣ 嗚呼幾希로대 君子는 存誠하야 克念克敬하나니 天君이 泰然하야 百體從令하니라
【글풀이】范氏의 心箴에 하였기를, “茫茫한 堪輿ㅣ 俯하고 仰함에 垠이 없다. 사람이 그 間에 眇然히 身이 있으니 이 身의 微함이여 太倉의 稊米로대 參하여 三才가 됨은 心이 있음이로다. 往한 古와 來한 今에 누가 이 心이 없으리요마는 心이 形에 役하여 獸이고 禽이로다. 오직 口와 耳와 目과 手와 足의 動靜이 間에 投하고 隙에 抵하여 그 心의 病이 되는도다. 一心의 微함을 衆欲이 攻함에 그 與하여 存한 者 아 幾希하지만 君子는 誠을 存하여 능히 念하고 능히 敬하니 天君이 泰然하여 百體가 令을 從하니라.”
【뜻풀이】范氏(名浚)의 心箴에 하였기를, “아득한 하늘과 땅이여 내려다보고 처다보니 끝이 없다. 사람이 그 사이에 조그맣게 몸이 있으니 이 몸의 작음이여 큰 창고에 싸라기 쌀만 하다. 그런데도 天地에 끼어 三才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옛날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누가 이 마음이 없으리요마는 마음이 形氣에 부려져서 짐승이 되고 새가 되는도다. 오직 입이나 귀나 눈이나 손 발의 動하고 靜함이 마음의 틈새에 뛰어들고 틈새를 비집고 들어 그 마음의 병이 된다. 한 마음의 미약한 것을 여러 욕심이 공격을 하니 이를 위하여 보존한 자가 아 근소하도다. 君子만은 誠(眞實)을 간직하여 능히 생각하고 능히 敬(主一無適)하나니 그래서 天君(心)이 泰然하고 百體가 그 命令을 따르는 것이다.”
△ 問所載范箴하노니 不知范從誰學고 朱子曰不曾從人이요 他自見得到하야 說得此件物事如此好라 向見呂伯恭하니 甚忽之러라 問似恁地說話는 人也多說得到어늘 須取他則甚고 曰正爲少見有人能說得如此者하니 此意ㅣ 蓋有在也라
【解】묻노니, “(孟子養心章前註에)실은 바 范浚의 心箴은 이를 지은 范이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朱子가 말하기를,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보기를 거기까지 하여 이 일을 이렇게 좋게 말하였다. 전번에 呂伯恭(祖謙)을 보았더니 이 글을 심히 輕忽히 여겼었다.” 묻노니 “이 정도의 말은 사람들이 흔히 말할 수 있는데 꼭 그 글을 취해야 할것이 뭡니까?” 대답하기를, “바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음을 보기가 드물어서 실은 것이니 이 글을 실은 뜻이 있는 것이다.”
△ 或이 問佛者ㅣ 有觀心之說하니 然乎아 曰心者는 人之所以主於身者也니 一而不二者也오 爲主而不爲客者也오 命物而不命於物者也라 故로 以心觀物則物之理ㅣ 得이요 今復有物하야 以反觀乎心則是此心之外에 復有一心而能管乎此心也라 然則所謂心者ㅣ 爲一耶아 爲二耶아 爲主耶아 爲客耶아 爲命物者耶아 爲命於物者耶아 此亦不待較而審其言之謬矣라 或曰若子之言則聖賢所謂精一과 所謂操存者는 皆何爲哉아 應之曰此는 言之相似而不同이니 正苗莠朱紫之間而學者之所當辨者也라 夫謂人心之危者는 人欲之萌也오 道心之微者는 天理之奧也라 心則一也나 以正不正而異其名耳라 惟精惟一則居其正而審其差者也오 絀其異而反其同者也라 能如是則信執其中而無過不及之偏矣라 非以道爲一心하고 人爲一心而又有一心以精一之也라 夫謂操而存者는 非以彼操此而存之也오 舍而亡者는 非以彼舍此而亡之也라 心而自操則亡者存이오 舍而不操則存者亡耳라 然이나 其操之也는 亦曰不使旦晝之所爲로 得以梏亡其仁義之良心云爾요 非塊然兀坐하야 以守其炯然不用之知覺而謂之操也라 大抵聖人之學은 本心以窮理而順理以應物을 如身使臂하고 如臂使指하야 其道ㅣ 夷而通하고 其居ㅣ 廣而安하고 其理ㅣ 實而其行이 自然이라 釋氏之學은 以心求心하고 以心使心하니 如以口齕口하고 以目視目이라 其機ㅣ 危而迫하고 其途ㅣ 險而塞하고 其理ㅣ 虛而其勢ㅣ 逆이라 蓋其言이 雖有若相似者而其實之不同이 蓋如此也라 然이나 非夫審思明辨之君子면 其亦孰能無惑於斯耶아
【解】或이 묻기를, “佛者가 ‘心을 본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것인가?” (朱子가)대답하기를, “心이란 사람의 身에 主가 되는 바니 一이고 二가 아니요, 主가 되고 客이 되지 아니하고, 物을 命하고 物에 命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心으로써 物을 보면 物의 理를 얻는 것이어늘 이제 다시 物이 있어서 心을 돌이켜 본다면 이는 이 마음의 外에 다시 하나의 마음이 있어 능히 이 마음을 管理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른 바 心이란 一인가 二인가, 主인가 客인가, 物을 命하는 것인가 物에게 命되는 것인가, 이 또한 계교 할 것도 없이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或者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대로라면 聖賢이 말한 바 精一이나 말한 바 操存이란 것은 모두 어떻게 되는가?” 대답하기를, “이는 말이 서로 비슷하지만 같지 않은 것이니 바로 苗와 莠(苗같은 草), 朱와 紫(二色이 비슷함)의 사이로서 學者가 마땅히 분별을 해야 할 바다. 무릇 人心을 危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人欲의 싹이 트기 때문이요 道心을 微(隱微)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天理의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心은 一일 뿐이지만 正과 不正으로써 그 이름을 다르게 한 것이다. 精하고 一하라함은 그 正에 居하여 그 差誤를 살피는 것이요 그 異함을 내치고 그 同함으로 돌리는 것이다. 능히 그렇게 하면 참으로 그 中을 잡아 過와 不及의 偏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道心으로 一心을 삼고 人心으로 一心을 삼고, 또다시 一心이 있어 精一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操하면 存한다는 것도 저로써 이를 操하여 存한다는 것이 아니요 舍하면 亡한다는 것도 저로써 이를 놔서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스스로 操하면 亡한 것이 存해지고 놔두고 操하지 않으면 存한 것이 亡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操한다는 것도 또한 아침 낮의 하는 바로 하여금 그 仁義의 良心을 해치고 亡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 그냥 우두커니 앉아서 그 환하고 쓰지 않은 知覺을 지키는 것을 操라고 한 것이 아니다. 대저 聖人의 學은 心에 근본하여 理를 궁구하고 理를 順하여 物을 응하기를 마치 몸이 팔을 부리듯 하고 팔이 손가락을 부리듯 하여 그 道가 평탄하며 통하고 그 居한 바가 넓고 편안하고 그 理가 진실하고 그 行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釋氏의 學은 心으로써 心을 찾고 心으로써 心을 부리니 마치 입으로 입을 물어뜯음과 같고 눈으로 눈을 보는 것과 같아 그 機(用)가 위태로우며 절박하고 그 길이 험하면서 막혀있고 그 理는 虛하고 그 勢는 逆하다. 그러니 그의 말이 비록 (吾道와) 서로 비슷한 데가 있지만 그 實의 다르기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살펴 생각하고 밝게 분별한 君子가 아니면 어찌 능히 여기에 현혹되지 않겠는가.”
○ 朱子敬齋箴에 曰正其衣冠하고 尊其瞻視하야 潛心以居하야 對越上帝하라 足容必重하고 手容必恭하야 擇地而蹈하야 折旋蟻封하라 出門如賓하며 承事如祭하야 戰戰兢兢하야 罔敢或易하고 守口如甁하며 防意如城하야 洞洞屬屬하야 罔敢或輕하라 不東以西하며 不南以北하야 當事而存하야 靡他其適하며 弗貳以二하고 弗參以三하야 惟心惟一하야 萬變是監하라 從事於斯ㅣ 是曰持敬이니 動靜弗違하면 表裡交正이라 須臾有間에 私欲萬端이라 不火而熱하며 不冰而寒이라 毫釐有差에 天壤이 易處라 三綱이 旣淪하고 九法이 亦斁라 於乎小子아 念哉敬哉어다 墨卿司戒하야 敢告靈臺하노라
【글풀이】朱子의 敬齋箴에 하였기를, “그 衣冠을 正히 하고 그 瞻視를 尊히 하며 心을 潛하여 居하여 上帝께 對하라. 足의 容을 반드시 重히 하며 手의 容을 반드시 恭히 하여 地를 擇하여 蹈하여 蟻封에도 折하여 旋하라. 門을 나가면 賓을 보듯 하고 事를 받들면 祭를 받들 듯 하여 戰戰하고 兢兢하여 敢히 혹 易케 하지 말고 口를 지킴을 甁같이 하고 意를 막기를 城같이 하여 洞洞하고 屬屬하여 혹시라도 輕하지 말라. 東하여 써 西치 말고 南하여 써 北치 말아 事를 當해 存하여 他로 가지 말고 貳하여 써 二치 말고 參하여 써 三치 말아 心을 一케 하여 만번 변해도 이를 監하라. 이에 從事를 함을 바로 敬을 持한다 하나니 動과 靜에 違치 않으면 表와 裡가 사귀어 正하나니라. 須臾만 間이 있어도 私欲이 萬端이라 火 아니어도 熱하며 冰아니어도 寒하고 毫釐만 差가 있어도 天壤이 易하여 處한다. 三綱이 이미 淪하고 九法이 또한 斁한다. 아! 小子아! 念하고 敬할 지어다. 墨卿으로 戒를 司하니 敢히 靈臺께 告하노라.”
【뜻풀이】朱子가 지은 敬齋箴에 하였기를, “그 衣冠을 바르게 하고 그 보기를 尊重히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居하여 上帝(天神)를 대한 듯 하다. 발옮긴 모습은 반드시 무겁게 하고 손놀림의 모습은 반드시 공손히 하며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집 만큼 작은 지점에서도 꺽어서 돌도록 하라. 문을 나서면 大賓를 보듯이 하고 일을 행할 때에는 大祭를 모시듯 하여 무서워 하고 조심하여 혹시라도 輕易하게 하지 말고, 입을 지키기를 甁입 막아두듯 하고 뜻을 막기를 城 지키듯 하여 조심하고 연이어서 혹시라도 가볍게 하지 말라. 東으로 가면서 西에 마음두지 말고 南으로 가면서 北에 마음두지 말아 일을 당한데서 마음을 두어 다른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두갈래로 하여 둘이 되게 말고 세갈래로 하여 셋이 되게 말고 마음은 하나가 되게 하여 만번을 변해도 이를 살펴 보도록 하라. 여기에 從事하면 이것을 敬을 가짐이라하나니 動하나 靜하나 어기지 않으면 겉과 속이 서로 바로 잡아진다. 잠깐만 틈이 생기면 私欲이 만가지로 생긴다. 불이 아니어도 뜨겁고 얼음이 아니어도 차갑다(熱은 怒, 寒은 懼). 털끝 만큼이라도 差誤가 나면 하늘과 땅이 位를 바뀌어 處하게 된다. 三綱도 무너지고 九法(洪範九疇)도 무너진다. 아! 小子들아! 생각하고 敬할지어다. 墨卿(먹)으로 戒를 맡게하여 敢히 靈臺(心)에게 告한다.”
△ 問敬齋箴한대 朱子曰此是敬之目이니 說有許多地頭去處라 又曰須臾之間은 以時言이요 毫釐之差는 以事言이라
【解】敬齋箴을 묻자 朱子가 말하기를, “이는 敬의 條目이니 말이 여러 대목으로 미처갔다.” 또 말하기를, “잠깐의 사이란 時로써 말한 것이고 털끝 만한 差誤란 事로써 말한 것이다.”
△ 問敬齋箴의 後面에 少些從容不迫之意하니 欲先生添數語하노이다. 曰如何解迫切고 今未曾下手하고 便要從容不迫하면 却無此理니라. 除非那人이 做工夫를 大段迫切然後에 勸他勿迫이니 如人相戰에 未曾交鋒하고 便要引退라 今未曾做工夫하고 便要開後門이로다 然이나 亦不解迫切이요 只是不曾做니 做着時에 不患其迫切이라 某는 但常覺得寬緩底意思多耳라
【解】묻노니, “敬齋箴의 後面에 조금 從容不迫(차분하고 急迫하지 않음)의 뜻이 모자란 듯 하니 先生께서 몇마디 더했으면 합니다.” 대답하기를, “어떻게 迫切한줄을 아는가. 이제 해보지도 않고 금방 從容不迫하기를 원하니 그런 理는 없다. 모름지기 사람이 공부를 하기를 대단히 迫切하게 해 본 뒤에 다른 사람보고 박절하지 말라고 권해야 한다. 마치 사람이 戰爭을 할 때에 미처 交鋒도 하기전에 물러갈것부터 생각함과 같다. 이제 공부도 해보지 않고 문득 後門을 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迫切이 무엇인지도 모른 것이요 다만 일찍이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니 하게 되면 迫切을 걱정하지 않고 다만 너무 늦춰진 意思가 많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西山眞氏曰敬之爲義ㅣ 至是無復餘蘊하니 有志於聖學者는 宜熟復之니라
【解】西山眞氏가 말하기를, “敬의 뜻을 여기에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니 聖學에 뜻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익숙해지도록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 求放心齋銘曰天地變化에 其心孔仁이라 成之在我하니 則主乎身이라 其主伊何오 神明不測이라 發揮萬變에 立此人極이라 晷刻放之면 千里其奔이니 非誠曷有며 非敬曷存고 孰放孰求며 孰亡孰有오 詘伸在臂하고 反覆惟手라 防微謹獨이 茲守之常이요 切問近思로 曰惟以相이라
【글풀이】求放心齋의 銘에 하였기를, “天地가 變化함에 그 心이 심히 仁하다. 成하여 我에 있으니 곧 身에 主한다. 그 主가 어떠한고, 神明하여 測할 수 없다. 發揮하여 萬變함에 이 人極을 立한다. 晷刻이라도 放하면 千里나 그 奔한다. 誠이 아니면 어찌 有하며 敬이 아니면 어찌 存할꼬. 누가 放하고 누가 求하며 누가 亡하고 누가 有한고. 詘伸이 臂에 있고 反覆이 오직 手다. 微를 防하고 獨을 謹함이 이 守의 常이요 切問과 近思로 도운다.”
【뜻풀이】求放心齋의 銘(朱子가 程端蒙을 爲해 지었다)에 하였기를, “천지가 변화함에 그 마음이 심히 仁하다. 性을 이룩하여 나에게 있으니 곧 몸의 主가 된다. 그 主가 어떠한가. 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다. 發揮(用)하여 만가지로 변함으로써 이 사람의 법도를 세운다. 잠깐의 시각이라도 놔버리면 千里나 달려간다. 誠(眞實無妄)이 아니면 어찌 있게 되며 敬(主一無適)이 아니면 어찌 存하리요. 누가 放(放散)하고 누가 求(收拾)하며 누가 亡(無)케하고 누가 有케 하는가. 詘伸(오그리고 폄)함이 팔뚝에 있고 反覆(되짚고 엎음)함이 오직 손이다(放 求 亡 有가 모두 心의 自作이란 뜻). 細微함도 막고 獨處를 삼가함이 이를 지키는 常法이요 切實히 묻고 가까이 생각함도 그것을 도운 것이다.”
△ 朱子謂學者曰自古로 無放心底聖賢이니 一念之微도 所當深謹이라 心不專靜純一이라 故로 思慮不精明이니 要須養得此心虛明專靜하야 使道理로 從此流出이라야 乃善이라
【解】朱子가 學者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放心을 한 聖賢이 없다. 一念의 작은 것도 마땅히 깊이 삼가야 한다. 마음이 專靜하고 純一하지 않으므로 思慮가 精明하지 못하니 모름지기 이 마음을 養하여 虛明하고 專靜하여 道理로 하여금 여기에서 流出케 해야 善한 것이다.”
△ 與呂子約書에 曰孟子言學問之道ㅣ 惟在求放心而程子도 亦言心은 要在腔子裡라하야늘 今에 一向耽着文字하야 令此心으로 全體ㅣ 都奔在冊子上하고 更不知有己면 便是箇無知覺不識痛癢之人이니 雖讀得書라도 亦何益於吾事耶아
【解】呂子約에게 준 書에 하였기를, “孟子가 말하기를 ‘학문의 道는 오직 放心을 求하는데 있다.’ 하고 程子도 말하기를 ‘心은 모름지기 腔子의 속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거늘 이제 한결같이 文字만을 탐내어 이 마음으로 하여금 全體가 모두 冊子 위로만 달려가 있고 다시는 자기가 있다는 것을 모르니, 이는 곧 지각이 없어 아픈지 가려운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록 글을 읽은들 또한 나에게 무슨 益이 되겠는가.”
△ 答何叔京書에 曰因良心發見之微하야 猛省提撕하야 使心不昧則是做工夫底本領이라 本領이 旣立이면 自然下學而上達矣라 若不察於良心發見處면 卽渺渺茫茫하야 無下手處也라 多識前言往行은 固君子之所急이니 某向來所見도 亦是如此라 近因反求하야 未得箇安穩處하고 却始知此未免支離라 如所謂因諸公하야 以求程氏하고 因程氏하야 以求聖人은 是隔幾重公案고 曷若黙會諸心하야 以立其本而其言之得失이 自不能逃吾之鑒耶아
【解】何叔京에게 (朱子가) 答한 書에 하였기를, “良心이 발하여 나타나는 隱微함을 因하여 猛省을 하고 이끌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어두워지지 않게하면 이것이 공부를 하는 本領이다. 本領이 서고 나면 자연 下學을 하여 上達을 할 수 있다(下學人事 上達天理). 만약 良心이 發한 곳에서 살피지를 않는다면 곧 아득하기만 하고 손을 쓸 곳이 없다. 前言과 往行을 많이 아는 것은 실로 君子가 서두를 바요, 某도 전에는 所見이 역시 그랬는데 근일에 돌이켜서 찾아보니 安穩한 곳이 없어 비로소 이것이 支離를 면치 못함을 알았다. 이른 바 ‘諸公(程門人 呂 楊 謝 尹 등의 人)을 因하여 程氏를 求하고 程氏를 因하여 聖人을 求한다’는 것은 이것이 몇겹의 公案이 막혀있는 것인가. 그 보다는 차라리 心을 알아서 本을 세움으로써 그 말의 得失이 자연 나의 거울을 벗어날 수 없게 함이 더 낫지 않겠는가.”
△ 勉齋黃氏曰心者는 神明之舍라 虛靈洞徹하야 具衆理而應萬物者也라 然이나 耳目口鼻之欲과 喜怒哀樂之私ㅣ 皆足以爲吾心之累也라 此心이 一爲物欲所累則奔逸流蕩하야 失其至理而無所不至矣라 是以로 古之聖賢이 戰戰兢兢하야 靜存動察호대 如履淵冰하고 如奉槃水하야 不使此心으로 少有所放則成性存存하야 而道義行矣라 此孟子ㅣ 求放心之一語ㅣ 所以警學者之意ㅣ 切矣라 自秦漢以來로 學者所習이 不曰詞章之富則曰記聞之博也라 視古人存心之學에 爲何事哉아 及周程하야 倡明聖學하야 以繼孟子不傳之緖라 故로 其所以誨門人者ㅣ 尤先於持敬하니 敬則此心이 自存而所以求放心之要旨歟저
【解】勉齋黃氏가 말하기를, “마음이란 神明의 집이다. 虛하고 靈하고 훤히 통하여 衆理를 갖추고 萬物을 應하는 것이다. 그러나 耳 目 口 鼻의 欲과 喜 怒 哀 樂의 私가 모두 足히 내 마음의 累가 된다. 이 마음이 한번 物欲의 累(얽매임)가 되면 달려가고 방탕하여 그 至理를 잃고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 그래서 옛날의 聖賢은 무서워하고 조심하여 靜함에 存하고 動함에 살펴 연못과 얼음에 臨하듯 하고 소반에 물을 받들 듯 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조금도 放함이 없게 하였다. 그러면 成해진 性이 存해지고 存해져 道義가 行해진다. 이는 孟子의 求放心이란 一語가 學者를 깨우치는 뜻이 간절하다. 秦 漢으로부터 지금까지 學者의 익히는 바는 祠章의 富함이 아니면 記聞의 博함이다. 古人의 存心하는 학문에 비해보면 무슨 일이 되겠는가. 周濂溪와 程明道 程伊川에 이르러 聖學을 主倡하고 밝혀 孟子 뒤로 이어지지 않은 계통을 이었다. 그래서 그 門人들을 가르치는 바가 더욱 敬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敬하면 이 마음이 자연 存하는 것이요 이것이 放心을 수습(求)하는 要法이리라.”
○ 尊德性齋銘에 曰惟皇上帝ㅣ 降此下民이라 何以予之오 曰義與仁이라 維義與仁은 維帝之則이라 欽斯承斯라도 猶懼弗克이어늘 孰昏且狂하야 苟賤汙卑오 淫視傾聽하야 惰其四支하야 褻天之明하고 嫚人之紀하야 甘比下流하니 衆惡之委라 我其鑒此하야 祗栗厥心하야 有幽其室에 有赫其臨이라 執玉奉盈을 須臾顚沛하야 任重道悠에 其敢或怠아
【글풀이】尊德性齋의 銘에 하였기를, “위대한 上帝가 이 下民을 降하심에 무엇을 予했는고. 義와 仁이다. 義와 仁은 帝의 則이다. 이를 欽하고 이를 承하여도 오히려 克치 못할까 懼하거늘 누가 昏하고 또 狂하여 苟히 賤하고 汙하고 卑한고. 淫視를 하고 傾聽을 하여 그 四支를 惰하여 天의 明을 褻하고 人의 紀를 嫚하는 도다. 下流와 比함을 甘케 여기니 衆惡의 委함이로다. 내가 그 이를 鑒하여 그 心을 祗栗하여 幽한 그 室에서도 赫하게 그 臨함이 있음을 알아 玉을 執하듯 盈을 奉하듯 함을 須臾와 顚沛에도 하라. 任이 重하고 道가 悠하니 敢히 或 怠할 수 있으랴.”
【뜻풀이】尊德性齋의 銘에(朱子의 內弟=朱子祖母 程氏의 親家 從孫=程允夫의 齋에 朱子가 命名하고 銘을 지어주었음) 하였기를, “위대한 上帝(天神)가 이 下民을 내리시며 무엇을 주었는가. 그것은 義와 仁이다. 이 義와 仁은 上帝의 法則이니 이를 공경하고 이를 받들지라도 오히려 능히 못할까 두렵거늘 그 누가 어둡고 狂하여 구차하고 賤하고 더럽고 낮아지는가. 흘겨보고 갸웃하여 듣고 그 四支(手足)를 게을리하여 하늘의 明命(性)을 함부로하고 사람의 倫紀를 어지럽혀 下流들과 같기를 甘受하니 모든 惡名이 모여든다. 내가 이것을 보고 경계하여 이 마음을 조심하고 엄숙히 하여 깊숙한 방안에서도 赫然히 내려다보는 上帝가 있음을 생각한다. 玉을 잡듯이 가득찬 그릇을 받들 듯이 하기를 잠깐의 사이 위급한 처지에서도 해야한다. 짐은 무겁고 길은 머니 감히 잠시라도 게을리 하랴?”
△ 朱子曰尊德性而道問學과 博我以文約我以禮의 兩邊工夫를 都不偏이니라 又曰若於道理上에 看未精이면 便須於尊德性上에 用功이요 若德性上에 有不足이면 便須於講學上에 着力이니 二者幷行이면 庶互相發明하야 可到廣大光輝之地리라 又曰學者工夫는 惟在居敬窮理二事하니 此二事ㅣ 互相發이라 能窮理則居敬工夫ㅣ 日益進이요 能居敬則窮理工夫ㅣ 日益密이니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德性을 尊하되 問學을 道로 함과 나를 文으로 博識케하고 나를 禮로 約하는 두가지 공부를 모두 偏만 해서는 안된다.” 또 말하기를, “만약 道理上에 보기를 精하게 하지 못했거든 곧 尊德性에 공부를 해 봐야 하고 만약 德性上에 不足함이 있으면 곧 講學上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니 二者가 竝行되면 거의 서로 發明이 되어 廣大하고 高明한 지경에 이를 수 있으리라.” 또 말하기를, “學者의 공부는 오직 居敬과 窮理의 二事에 있으니 이 二事가 서로 發해주게 된다. 능히 窮理를 하면 居敬의 공부가 날로 더욱 나아갈 것이요 능히 居敬을 하면 窮理의 공부가 날로 더욱 密해 지리라.”
△ 答馮作肅書에 曰居敬窮理二者를 不可偏廢니 偏廢則德孤하야 無所利矣라 答孫敬甫書에 曰程夫子言涵養을 必以敬而進學則在致知라하니 此兩言者는 如車兩輪이며 如鳥兩翼하야 未有廢其一而可行可飛者也라 其間에 蓋有全出於異端而猶不失於爲己者하고 其他則皆飾私反理而不足謂之學矣라 答王子充書에 曰今日之弊ㅣ 務講學者는 多闕於踐履하고 專踐履者는 又遂以講學으로 爲無益하니 殊不知因踐履之實하야 致講學之功이라 使所知益明則所守日固하야 與彼區區口耳之間者로 固不可同日語矣라
【解】馮作肅(名允中)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居敬(敬에 마음을 둠)과 窮理(道理를 硏究함)의 두가지는 어느 하나를 폐할 수 없으니 하나를 폐하면 德이 孤單해져 行에 순조롭지 못하다.” 孫敬甫(名自脩)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程夫子가 말하기를, ‘涵養(마음을 가라앉혀 修養함)은 반드시 敬(主一無適)으로써 하고 進學은 致知에 있다.’ 하였으니 이 兩言은 車의 兩輪과 같고 鳥의 兩翼과 같아 그 一을 廢하고는 行할 수도 나를 수도 없다. 그 간에 완전히 異端에서 나온 말을 하면서도 自己를 爲함은 잃지 않은 者가 있는가 하면 그 밖의 학문을 한다는 사람은 모두가 私를 꾸미고 理에 反하여 족히 學이라고 하잘 것이 없다.” 王子充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오늘의 폐단은 講學을 힘쓰는 者는 흔히 踐履가 없고 專혀 踐履를 하는 자는 또 講學을 無益한 것이라 하니 자못 踐履의 實로 因하여 講學의 공부를 할 줄을 모른다. 아는 바가 더욱 밝아지면 지키는 바가 날로 굳어지는 것이니 저 구구하게 口耳의 학문(入耳出口)만 하는 자와 비교해 보면 실로 同日에 말할 수 없다.”
△ 朱子曰痛理會一番을 如血戰相似然後에 涵養將去라 因自云某如今에 雖便靜坐라도 道理自見이니 若未能識得이면 涵養箇甚이리요 又曰萬事ㅣ 在窮理하니 經不正理不明이면 看如何地持守리요 也只是空이니라 問致知涵養의 先後하노이다 曰須先致知하고 後涵養이니라 問伊川이 言未有致知而不在敬이라하니 如何잇고 曰此是大綱說이니라 又曰某不敢自昧하노이다 實以銖累寸積而得之라
【解】朱子가 말하기를, “단단히 한번 살펴 알기를 마치 血戰을 하듯한 뒤에라야 涵養을 해 갈 수 있는 것이다. 因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某가 지금은 비록 靜坐를 하고 있을 지라도 道理가 저절로 보이니 만약 능히 알지 못하면 무엇을 涵養하겠는가.’” 또 말하기를, “萬事가 理를 연구함에 있으니 經(常道)이 바르지 못하고 理가 밝지 못하면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지키리요 다만 空일 뿐인 것이다.” 묻노니, “致知와 涵養의 先後를 어떻게 합니까?” 대답하기를, “먼저 致知를 하고 뒤에 涵養을 하는 것이다.” 묻노니, “伊川이 말하기를 ‘致知를 하면서 敬에 있지 않은 者 없다’ 했으니 어떻습니까?” 대답하기를, “이는 대강의 말인 것이다.” 또 말하기를, “某가 감히 스스로 감추지 않노니 실로 銖(八銖가 錙, 二十四錙가 兩)를 포개고 寸을 쌓아서 얻었다.”
△ 答汪太初書에 曰嘗聞學之雜者ㅣ 似博하고 約者ㅣ 似陋라하나 惟先博而後約然後에 能不流於雜而不揜於陋也라 故로 中庸에 明善이 居誠身之前하고 大學에 誠意ㅣ 在格物之後하니 此聖賢之言의 可考者然也라 答趙氏表書에 曰古人之學은 以致知로 爲先하니 致知之方은 在乎格物이라 格物云者는 河南夫子所謂或讀書하야 講明義理하고 尙論古人하야 別其是非하며 或應接事物而處其當否ㅣ 皆格物之事也라 格物知至則行無不力而遇事에 不患其無立矣라 答劉公度書에 曰天下事物之理와 方冊聖賢之言을 皆須子細反覆究竟이요 至於持守하야는 却無許多事니 若覺得未穩이면 只有黙黙加功하야 着力向前耳라 今聞廢書不講而反以持身之事로 爲講說之資라하니 是乃兩失其宜라 下稍에 弄得無收殺하야 只成得杜撰捏合而已라
【解】汪太初(名楚材)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일찌기 들으니 學의 雜한 者가 博識같고 約한 者가 陋한 것 같다 하는데 오직 博을 먼저하고 約을 뒤에한 연후에야 능히 雜으로 흐르지 않고 陋에 가리워지지 않는다. 그래서《中庸》에도 明善이 誠身의 前에 있고《大學》에도 誠意가 格物의 뒤에 있다. 이는 聖賢의 말의 상고할 수 있는 것이다.” 趙民表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古人의 學은 致知로써 먼저를 삼았고 致知의 방법은 格物에 있다. 格物이라고 하는 것은 河南 夫子(程子)가 말한대로 혹 글을 읽어 義理를 講明하거나 古人을 尙論하여 그 是非를 분별하거나 혹 事物을 應接하여 그 當否를 處함이 모두 格物의 일이다. 事物을 窮格하여 知가 지극해지면 行을 힘쓰지 않음이 없고 일을 만나도 自立함이 없을까 근심치 않으리라.” 劉公度(名孟容)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天下 事物의 理와 方冊에 있는 聖賢의 말을 모두 모름지기 자세히 반복해서 연구해야 하고 持守(몸가짐과 지킴)에 이르러는 허다한 일이 없다. 만약 온당치 못함을 느꼈거든 다만 묵묵히 공부를 加하여 힘써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이제 들으니 書를 폐하여 講하지 않고 도리어 持身할 일로 講說의 資를 삼는다 하니 이는 兩으로 그 宜를 잃은 것이다. 그러다가는 나중에 점점 희롱하여 收殺(收合)가 되지 않고 다만 杜撰(實없는 논의)이나 捏合(주워맞춤)함만 되고 말 것이다.”
△ 答范文叔書에 曰尹和靖門人이 贊其師云丕哉聖謨와 六經之編을 耳順心得하야 如誦己言이라하니 要當至此地位라야 始是讀書人耳라 答劉定夫書에 曰要得學者ㅣ 息却許多狂妄身心하고 除却許多閒雜說話하고 著實讀書라 初時엔 儘且尋行數墨이나 久之면 自有見處라 最怕人이 說學不在書라하야 不務佔畢하고 不專口耳하야 下稍說得張皇하야 都無收拾하고 只是一場大脫空이니 直是可惡라 答劉季章書에 曰趁此光陰未至晩暮之時하야 做些著實基址하야 積累將去하라 只將排比章句하고 玩索文理底工夫하야 換了許多杜撰計較別尋路脉底心力하고 須是實有用力處하라 久之면 自然心地平夷하야 見理明徹하리니 庶幾此學이 有傳하야 不至虛負平生也리라
【解】范文叔(名仲黼)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尹和靖(尹焞)의 門人이 그 스승을 贊하기를, ‘큰 聖人의 가르침과 六經의 編을 耳에 順하고 心에 得하여 자기의 말을 외우듯 하였다.’ 했으니 모름지기 이런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글을 읽은 사람인 것이다.” 劉定夫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모름지기 學者가 許多한 狂妄의 身心을 멈추고 허다한 閒雜한 說話를 除去하고 착실히 글을 읽어야 한다. 처음에는 우선 글줄이나 찾고 글자나 세는 정도를 하여도 오래가면 자연 보이는 바가 생기게 된다. 가장 두려운 바는 사람이 말하기를 학문이란 책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책 보기를 힘쓰지 않고 입으로 읽고 귀로 들음을 專的으로 하지 않아 나중에는 장황한 말만 하여 전혀 수습이 안되고 다만 一場의 큰 허황된 짓만 할까 싶은 것이니 바로 이것이 밉다.” 劉季章(名黼廬)에게 答한 書에 하였기를, “이 光陰이 暮年에 이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착실한 基址를 마련하고 쌓아가도록 하라. 다만 章句를 排列해 맞추고 文理를 살피고 찾는 공부를 하여, 허다한 실없이 계교하고 따로 길을 찾던 心力을 바꾸어 진실하게 힘쓰는 곳이 있어야 한다. 오래가면 자연히 心地가 평탄해지고 理를 보기를 明徹하게 하리라. 그러면 행여 이 學이 傳해짐이 있어 平生을 헛되이 저바리지 않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