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정일기歸程日記
저자 : 이원호(李源祜, 1790~1859)
동생 이원조(李源祚, 1792~1871 : 季令)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할 적에 제주도에 따라갔다가, 구관(舊官)과 함께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쓴 일기.
○ 1842년 3월 초3일
오늘은 바로 친기일親忌日이다. 객관客館에 차려놓은 허위虛位에 번호攀號하며 매우 애통해 하였다[靡及]. 식사 후에 포구로 내려갔는데, 진헌鎭軒에는 구舊 판관判官이 먼저 들어갔고, 나에게는 김광철金光哲 집의 사랑채[外室]를 임시 숙소[下處]로 정해주었는데, 자못 깨끗하고 깔끔하였다. 모든 군교와 이서들이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중청中廳에 바쳤으며, 또한 이별 선물[餞需]도 있었다. 종일토록 시끌벅적하였다. 바닷물[汐水]을 보았을 때 배를 탈 희망이 있을 듯하였기 때문에 길을 떠날 때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전부 챙겨서 실어놓았다. 막냇동생[季令 : 李源祚]은 신시가 지난 뒤[申後 : 오후 5시]에 나왔는데, 바람의 기세가 결국 불리하여서 출항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횃불을 들고 관아로 돌아갔고, 중청中廳의 모든 관원들, 향장鄕將과 아전[吏] 등도 모두 물러가겠다고 아뢰었다. 나랑 사질舍侄만 그대로 묵었다.
○ 초4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돛을 올릴 가능성이 없었다. 날씨는 맑고 환하였다.
○ 초5일
건조한 기운[旱氣]이 일기 시작하자,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비는 올 것 같지 않으나, 바람도 결코 불지 않을 것이라, 출항하는 일이 매우 걱정되고 답답하다.”라고 하였다. 4경(更, 새벽 1~3시)쯤에 뱃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새벽 사이에 동풍東風이 점차 불어올 듯하니, 마땅히 급히 달려 상영上營에 고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급히 일어나서 보니, 온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고, 바다의 물결은 요동 없이 잔잔하였다. 급히 짐을 챙겨서 정리하였다. 이 날 밤에 사질舍侄도 또한 관아로 들어가서, 나 혼자 중방中房과 함께 묵었다. 만약 막냇동생[季令] 부자父子에게 기별을 하여 알려서 서로 얼굴을 본 후에 배를 타면, 너무 지체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장鎭將을 말려서 급히 달려가서 알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였다. 목이 터져라 마부[僕夫]를 재촉하고, 노졸櫓卒들에게 독촉하여서 먼저 마필馬匹을 싣고, 후에 작은 배에 타고 가서, 큰 배로 옮겨 탔다. 재촉하여 돛을 빨리 올리라고 하였는데, 구舊 판관判官이 탈 배도 횃불을 켜고 짐을 다 꾸렸으나, 아직 배에 오르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횃불을 바라보니, 동문東門 밖에 화살촉처럼 서 있었다. 계령季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황급히 달려 나왔는데, (배는 출발하여) 선감관[船監]이 먼저 와서 부두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에 우리 형제가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재촉하여 출발하는 것만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잠깐 사이에 배가 이미 석성石城 밖을 벗어났다. 마을의 새벽닭이 어지럽게 울어댔으며, 동쪽에서는 날이 밝아오려고 하였다. 배가 몇 리쯤 가기도 전에 멀리서 붉고 둥근 해가 먼 바다로부터 떠오르는 것이 보였는데, 그 해돋이 풍경이 기이함을 자아냈다. 멀리 공북정拱北亭 주변이 보였는데, 등불과 횃불들은 그림과 같았고, 떠들썩한 소리들은 우레와 같았다. 거리는 지척咫尺처럼 가까우나 길이 없어 천리千里인 듯 멀어 서로 통할 수 없으니, 필시 계령季令의 부자와 중청中廳의 각 관원들이 그리움과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내는 소리였을 것이다. 배가 큰 바다로 나가니, 바람이 점차 잔잔해졌으나, 배의 출렁임은 더욱 심해졌다. 비록 어지럼증은 견디기 어려웠으나, 죽음을 참고 앞으로 나아갔다. 돌아가 정박하지 않을 바에는, 돌아가려는 마음을 화살처럼 빨리 날려버려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둥근 해가 점차 높이 오르니, 해수면이 마치 거울처럼 비췄다. 타루柁樓에 높이 올라 앉으니, 사방의 크고 작은 섬들이 뚜렷하게 보여서 손으로 가리킬 수 있을 정도였으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천리千里의 깊고 넓은 바다는, 맑은 바람이 천천히 불어와도 한 줄기 갈대로 건너는 것[一葦抗之]은 불가능하여 마땅히 돌아가 정박해야 한다. 하지만 선주船主 김광철金光澈은 믿음직하고 착실한 사람이며, 곁꾼[格軍] 수십 인들도 모두 노련하고 능숙하게 노를 젓는 자들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자연의 힘을 이겨내어 용맹하게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오후에 어지러운 증세가 매우 심해져서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는데, 물마루[水宗]는 오히려 멀리 있었다. 한낮의 해가 약간 기울어질 때쯤 겁이 덜컥 나기 시작하였으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고 뒤로 물러나지 않는 것을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막 미시[未初 : 오후 1시]가 되었을 무렵 갑자기 동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몇 시간에 걸쳐 순풍이 불어주었다. 노졸櫓卒들은 놀라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돛은 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 날이 아직 저물기도 전에 추도楸島 앞바다를 빠르게 지나갔다. 바람이 또한 잦아들고 파도의 출렁임이 전과 같아지자, 노졸 등이 작은 배를 이용하여 앞에서 밧줄로 끌어당기며 인도하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끌어당겨 이동하여서, 겨우 소안도[素安] 앞바다로 들어가서 쉴 수 있었는데, 이미 2경(更, 밤 9시∼11시)쯤에 이르렀다. 바람이 거세지고 큰비가 내렸으며, 밤이 칠흑처럼 깜깜하였다. 만약 그때까지도 얕은 바다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이러한 상황을 당하여 반드시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신명께서 도우시어 비로소 살 길을 찾았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드디어 돛을 내리고 닻을 내렸다. 배 안에서 밤을 지새웠는데, 섬마을[島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또한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우리 배보다 뒤에 출발한 여러 배들은, 처음엔 멀리서 언뜻언뜻 그 모습이 보였는데, 오후가 되자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드시 배를 돌려 다시 정박했을 것이다. 선실[船房]은 사방이 막혀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었고, 두꺼운 요[重裀]를 깔아놓고 덮을 수 있는 두터운 이불[厚衾]이 있어서, 의관을 벗고 편하게 잠을 잤다. 긴긴 밤에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바다의 물결치는 소리가 베개 자리 아래에서 은은하게 들리니, 또한 하나의 기이한 체험이었다.
○ 초7일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비가 올 조짐이 농후하였고,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나아갈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배에서 내렸다. 섬마을에 한韓 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쉬다가, 그대로 머물러 묵었다. 갑자기 일본사람[扶桑人]을 만났다. 집에서 보낸 편지를 가지고 경기[圻]에서 왔는데, 보니까 지난 달 23일에 보내온 것이었다. 이와 같이 험난한 시기를 당하여, 양쪽 집안이 모두 무탈하여 기뻤지만, 해산 소식[娩報]만은 실망스러웠다. 비록 매우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또한 어찌하리오. 제주로 가는 배가 이 섬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서 곧 출발을 한다고 하기에, 제주 관아에 편지를 부쳤다.
○ 초8일
음산한 비가 내리다가 날이 쾌청하게 개었다. 서북쪽에서 바람이 한참 불어왔다. 바람을 기다리고 있던 선박 중에 제주로 돌아가려는 배가 조수를 타고 출항하였는데, 경쾌하게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날아가는 듯하였다. 제주 관아에서는 오늘 안으로 반드시 이 행차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곳에서 이진梨津으로 가려면, 반드시 동풍東風을 기다려야 했기에, 우선 그대로 체류하게 되었다.
○ 초9일
뱃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비록 바람은 없지만, 노를 저어서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식사 후에 다시 배에 올랐다. 서풍四風이 잔잔하게 불어서 제주도로 돌아가는 배들이 오늘도 또한 배를 띄우고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진梨津 행은 배를 출발시키기 어려울 듯하였는데, 내가 재촉하는 바람에 노졸櫓卒 등도 드디어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 조금 나아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기를 몇 시간 동안 거듭하니, 출항했는데도 서로 육지를 바라볼 정도의 거리까지밖에 나아가질 못했다. 막 오시[午初 :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동풍이 갑자기 신도薪島 연안에서 불어와, 드디어 돛을 올려 바람을 맞으며 쏜살처럼 배가 나아갔다. 내가 타루柁樓에 앉아 좌우의 풍경을 감상하니, 요동치는 상황이 조금도 생기지 않아서 아주 잠시나마 상쾌하고 즐거웠다. 양쪽 겨드랑이에 바람을 쐬고 싶었는데, 오후 1시경[未初] 이진梨津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김준거金俊擧의 집으로 가서, 길 떠나는 데 필요한 짐들을 챙기고 정리하였다. 정의㫌義에 새로 부임하는 수령의 행차 편에 또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보니, 29일 보낸 것이었다. 우선 아무 일도 없다고 하였다. 정의현에 새로 부임하는 수령인 장두형張斗衡은 야동冶洞 보성령寶城令의 종손從孫이다. 이웃고을의 오랜 친구를 하늘 끝 먼 변방에서 만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 초10일
이진梨津에 머물며 정의현 신입 수령의 임시 처소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포勿浦의 벗 윤종석尹鍾奭이 찾아와서 함께 묵었다.
○ 11일
늦게 출발하여, 45리 떨어진 강진康津 성문城門의 객점에서 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