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의 탄생
한자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는 현단계로서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한자는 黃帝라는 아득한 옛날 帝王時代에 기록을 맡았던 창힐(蒼吉頁, 倉吉頁이라고도 쓴다)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에서 암시를 얻어 발명했다고 한다. 물론 글자라는 것은 민족 지혜의 결정이며, 긴 역사 속에서 발전하여 차츰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현대에서는 상식이라 해도 좋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한자를 발명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창힐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수많이 전해지는 聖人創造傳說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문화적인 조건을 개발하거나 개량하여 후세 민족의 전체로부터 숭배되는 인간 또는 신격화된 존재를 ‘문화영웅’이라 하는데, 창힐도 그러한 문화영웅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실제 한자의 시작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그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는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고고학이 탄생한 것은 금세기이므로 꽤 새로운 학문이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뒤에 고고학이 이룩한 성과에는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한 것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맨 처음의 큰 성과는, 1954년부터 57년에 걸쳐 다섯 번 행한 西安 교외의 半坡遺蹟 발굴이었다. 半坡遺蹟은 1950년 8월에 성립된 中國科學院 考古學硏究所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발굴에 몰두한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서, 그곳에서 출토된 많은 문물은 새로운 중국 고고학의 눈부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국내외에서 폭넓게 주목을 받았다. 半坡遺蹟의 陶文, 大汶口의 그림꼴 문자라는 보기 이외에도 그밖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도기의 표면에 새겨진 기호가 몇몇 발견되었는데, 어느 것이든 단독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에 문자열로는 볼 수 없으므로 확실한 글자로는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자열인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는 것은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로는 殷이라 불리는 시대가 되어야 가까스로 볼 수 있다. 殷代에는 유명한 갑골문자가 있는데, 이는 틀림없이 현대 한자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글자다.
▲ 갑골문자의 세계
현재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한자는, 실제로 있었다고 확인되고 있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王朝인 殷(또는 商이라 한다)의 말기(B. C 1300년 무렵 ~ B. C 1000년 무렵)에 사용된 甲骨文字다. 殷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정치형태를 취했는데, 전쟁과 농업생산 또는 사냥 등 국가의 매우 중대한 일을 할 경우는 물론이고, 왕족의 출산이나 질병, 바람이나 구름 등의 자연현상, 심지어 오늘밤 비가 올 것인가 하는 일기예측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와 현상에 대해 먼저 帝 또는 上帝라 부르는 天神, 아니면 주요한 자연신이나 조상신의 뜻을 물었다. 殷代의 사람은 자주 점을 친 뒤 거북껍질이나 뼈에 언제 누가 어떤 것을 점쳤는가를 기록했으며, 때로는 거기다가 임금이 그 잔금을 보고 판단한 길흉의 예측 및 결과로 생긴 사건 등을 글자로 새겼다. 그 문장에 사용된 글자를 甲骨文字라 한다. ‘甲骨’의 甲이란 거북의 껍질, 骨이란 소 등 짐승의 뼈를 뜻한다. 갑골에 기록된 것은 주로 점친 내용과 결과이므로, 그 문장을 또한 ‘卜辭’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갑골에 적혀 있는 문장은 모두가 점치기에 관한 내용뿐만이 아니고, 숫적으로는 적지만 예를 들면 曆으로서 사용된 干支表나 점치는 데 사용할 거북의 보관 등에 대해서 기록한 ‘記事刻辭’로 불리는 문장도 있으므로 ‘복사’라는 명칭은 갑골문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거북의 껍질이나 소 등의 뼈는 매우 딱딱하므로 그 표면에 글자를 새기는 데는 청동 등의 쇠붙이나 硬玉으로 만든 날카로운 칼날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또한 수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갑골의 표면에 먹〔墨〕 또는 붉은먹〔朱〕으로 문장을 쓴 보기도 발견되므로, 붓을 사용해 글자를 쓴 것도 당시 이미 어느 정도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 막 나온 갑골문자의 진가를 재빨리 알아채고 진지하게 연구를 한 학자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막 시작된 甲骨學(갑골문자에 관한 연구의 총칭)의 기초를 다지고 갑골문자의 학문적인 가치를 확립한 사람은 1911년 辛亥革命으로 멸망한 淸나라에 충절을 바쳤으며, 혁명 후 동란을 피해 한때는 일본 교토에 망명한 나진옥과 그보다 11살 아래인 그의 사위 왕국유 두 사람이었다. 갑골문자란 은을 통치했던 임금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국가나 왕실 내부에서의 행동방침을 점을 쳐 정하게 되면, 오로지 점을 친 내용이나 결과 등을 일부러 갑골에 새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땅 속에서 발견된 갑골은 굴 속 등에 뭉뚱그려 여러 장을 정중하게 묻은 것이 많아, 그것으로 추측하면 글자를 새긴 뒤에도 갑골은 대체로 보관되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갑골문자 가운데에는 글자를 새긴 홈에 붉은먹〔朱〕을 먹인 것도 있다. 붉은먹에는 악령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글자에 붉은먹을 더한 것도 아마 임금의 판단을 더욱더 신성화하여 악령이 그곳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막을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 글자란 임금의 신성성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며, 그 기록 자체도 신성한 행위였다.
나진옥은 갑골문자의 수집과 탁본 간행 등의 방면에서 크나큰 공적을 쌓았지만, 갑골문자 그것 자체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여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명확히 한 사람은 왕국유였다. 왕국유야말로 역사학과 문헌학 방면에서 금세기 중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천재 학자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 분야에서 이제까지 문헌을 중심으로 한 연구방법을 밑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갑골문자 등의 새로운 자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그 둘을 묶어서 이제까지의 주장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명하는 날카로운 논문을 하나하나 발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갑골문자 연구에서 은허의 재발굴 이외에 또하나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갑골문자가 小屯이외의 땅에서도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은이 小屯으로 옮기기 앞서 수도로 했던 하남성 정주 교외의 이리강 유적에서도 극히 적지만 갑골문자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보다도 시대적으로 앞선 글자이며,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극히 최근의 일이지만 서주시대 초기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갑골문자도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국고대사에서 큰 문제이면서도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던 은에서 주왕조로의 바뀜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로서 주목된다.
갑골문자는 지금부터 3천년 전 이상의 시대에 쓰인 글자인데, 발견된 뒤 겨우 몇십 년의 연구로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거의 해독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고대문자 해독의 역사에서 보면 실로 경이적이라 해도 좋을 만한 전진이다.
갑골문자가 이처럼 짧은 시간에 해독된 까닭은, 금세기 초 갑골문자가 갑자기 나타났을 즈음에 이미 說文解字를 중심으로 한 문자학 연구가 꽤 축적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국유나 동작빈 등 훌륭한 학자가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연구에 종사하여 착실하게 잇달아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유로써 한자가 수천 년의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용되었으며, 글자 그 자체 또는 글자와 함께 한 언어가 체계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갑골문자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한자 글씨체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한자의 오랜 역사와 그 심오함을 여실히 증명하고 남는다.
▲ 청동기의 글자
고대 중국에서 사용한 청동기는 종류가 매우 많은데, 크게 나누면 음식물을 담는 것, 술을 담는 것, 물을 담는 것, 악기 등으로 나누어지며, 갖가지 형상에 따라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것은 지금부터 3천년 이전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어서 참으로 고대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납을 넣은 것도 있다)인 청동으로 도구를 만드는 것을 생각한 인류는 무겁고 가공하기도 불편하여 도구의 종류도 한정된 석기의 부자유스러움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갖가지 문화를 낳았다. 그것은 바로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세계의 많은 고대문명이 철기시대로 옮아가기 전에 청동기문명을 거쳤다. 그러나 은주 시대의 중국만큼 훌륭하게 청동기를 만들어 그것을 활용한 문명은 유례가 없다.
청동기 가운데에는 가끔 안쪽 벽 등에 글자를 써놓은 것이 있는데, 이런 글자를 金文이라 한다. 금문은 청동기가 완성된 뒤에 새긴 것은 아니고 제작과정에서 거푸집에 새긴 뒤에 주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금문은 오래된 것으로는 은의 갑골문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것도 있으나, 갑골문자가 날카롭고 가는 직선을 조합한 것인데 반하여 금문쪽은 곡선이 많고 선도 굵어 얼핏 보아도 둘은 느낌이 꽤 다르다. 이렇게 글자체에서 받는 느낌의 차이는 소재와 필기용구의 차이가 글자에 비춰진 결과이며, 문자의 구조는 거의 같다.
은대에 만들어진 청동기의 銘文은 거의가 10자 미만인데, 그것도 제사의 대상으로 하는 조상신의 이름만을 적은 1자 또는 2자의 극히 짧은 것이 많다.
은은 날짜를 셀 때 간지를 사용했으며, 조상신에게는 각각 제사지내는 날이 정하여져 있었다. 조상신의 이름은 제사날의 십간을 붙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어떤 특정 조상을 제사지내기 위해 새로이 청동기를 만들 때는 그 청동기에 조상의 이름을 십간으로 써 넣었다.
은이 망하고 周의 시대가 되어서도 청동기는 변함없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주를 세운 부족은 본래 서쪽에서 유목과 농경에 종사했고, 문화 정도도 높지 않았으며, 그들은 고유문자나 청동기 문화도 가지지 못했다.
西周시대의 청동기에는 은이 술그릇을 중심으로 한 데 반하여, 정(鼎, ding)이나 대(敦, dui) 등 음식물을 담는 도구가 중심이 되었으며, 종류도 다양해졌다. 조형면에서도 서주 중기의 恭王時代에는 말을 매우 사실적으로 본뜬 준(尊 : 술통, 위쪽에 뚜껑이 있다)과 같은 것까지 만들어졌으며, 바깥쪽의 장식은 기괴함이 차츰 희박해져 양식화되고 갖가지 의장을 실시하여 화려한 것을 만들게 되었다.
청동기의 명문은 은대에서는 겨우 몇몇 글자가 새겨진 짧은 것이었지만, 주대가 되면 차츰 긴 문장을 적게 되었다. 무릇 청동기는 제사에 사용된 것인데, 씨족 내부의 제사를 모실 때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 도구의 유래나 용법 등은 당연히 알려져 있으며, 특별한 경우 외에는 글자를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은대의 청동기는 외면적인 장식에 중점을 두어 주술적인 효과를 거두려고 했었다.
서주 초기의 이런 청동기를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大盂鼎이다. 대우정은 청대 도광년간(1821~50)에 주를 건국한 부족이 본래 살았던 岐山(섬서성 소재)의 기슭에서 발견된 鼎인데, 높이 102.1cm, 상부의 구경 78.4cm, 무게 153.5kg인 웅장한 것이다.
제작 시기는 주가 건국되고, 곧이어 싸움도 멎고 나라 힘이 가장 충실했던 康王時代(B. C 1000년경)로 추정되며, 시대의 기풍을 반영했는지 그것은 정말 힘이 넘쳐흘러 보는 이를 압도하는 박력있는 鼎이다.
대우정의 내벽에는 거침없는 필치로 쓴 19행, 모두 291자가 되는 긴 글이 새겨져 있으며, 강왕이 뛰어난 장군이었던 盂(사람 이름)에게 조상의 관직을 잇도록 명하고, 수레, 말, 옷가지 등과 함께 모두 1,700명이 넘는 백성을 준 기념으로 우가 이 정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대우정이나 毛公鼎의 명문처럼 긴 문장을 청동기에 쓴 것은 청동기의 내구성에 착안하면 문장을 언제까지나 보존하려고 한 것이다. 결국 대우정이나 모공정의 명문은 신이나 조상의 영혼에게 바치는 말은 아니고 제작자의 자손 등에게 읽히고 후세에 전하기 위한 기록문서다.
따라서 문체는 고대의 성인이나 왕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하는 書經 가운데서도 주대에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 여러 편의 문장과 매우 비슷하다. 무릇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고대 문헌의 직접적인 원형은 실로 이같은 청동기의 명문이었다.
문서로서의 청동기의 명문은 고대의 역사, 특히 해명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 주대의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땅 속에서 고대의 청동기가 출토된 것은 漢代 무렵부터 문헌에 기록되었지만, 그 무렵은 신비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며, 이 명문에 주의를 기울여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金文學이 비롯된 것은 宋代의 일이다. 금문학은 그 뒤 수많은 청동기가 발견됨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량의 연구가 축적되었으나, 과거 금문연구의 기초가 된 청동기는 모두 우연한 발견이거나 무덤 등에서 몰래 파낸 것이므로 정확한 출토지나 매장 상황이 알려져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 춘추전국시대의 문자문화
춘추전국시대에 한자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역시 최근의 고고학적인 성과를 통해 자세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은대 및 서주시대와 견주어 이 시대의 글자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 시대에는 광대한 중국의 이곳저곳에서 문화가 독자적으로 전개되었으므로 한자에 대해서도 은이나 서주 초기처럼 단일한 양상을 띠지 않았으며, 글자 자체도 꽤 지엽적인 특질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하나의 특징은 앞 시대의 글자가 갑골에 새기거나 청동기에 주조된 것인데 반하여, 이 시대에는 글자를 적은 소재의 종류가 증가하고 글자를 갖가지 물건에 써넣었던 것이다. 제나라에서 사용된 글자는 서주의 금문과 비교하면 선이 가늘고 세로로 긴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淸末에 산서성에서 출토된 「齊子中姜鎛」은 제의 영공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명문의 글자는 거침없이 크게 쓰여진 것으로, 필획은 선을 새긴 것처럼 가늘고 또한 세로로 길게 쓰여져 있다.
또한 欒書罐 명문의 글자체는 서주의 금문에 가깝게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명문의 작성법은 서주의 청동기처럼 주조된 것은 아니고 금상감이라 불리는 기법인데, 금속 표면에 미리 마련해둔 홈집 모양에 실같은 금줄을 대고 위에서 세게 두드려 집어넣은 것이다. 명문을 그릇의 바깥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그것도 금문자로 적은 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다. 구천 검의 명문 글자는 이 무렵 남쪽의 나라들에서 흔히 사용된 글자체로서, 필획이 매우 복잡하며 곳곳에 새의 머리를 도안화한 것같은 형이 있으므로 이런 서체를 鳥書體 또는 鳥篆이라 한다.
조서체는 남쪽 특유의 것으로 1978년 호남성 익양현 초의 유적에서 출토된 초왕의 銅戟에도 같은 꼴의 장식적인 글자로 ‘敓作楚王戟’의 5글자가 명문에 새겨져 있다. 초나 오․월이 있었던 장강 유역은 본래 기후 등의 자연조건과 자원의 혜택을 많이 받는 지역이므로 거기에서 생긴 문화는 황하유역의 땅 기운같은 장중함을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화려한 것이었다. 조서체는 바로 그 문화가 글자에 반영된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500년에 이르는 군웅할거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전국을 통일한 것은 秦이었다. 진은 지리적으로 서쪽 끝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원 여러 나라의 뛰어난 문화와의 접촉도 늦고, 그들로부터 모든 면에서 후진국으로 다루어졌으나, 전국시대의 孝公(재위 B. C 361~B. C 338) 때에 급속히 강대해져 동쪽으로 진공하여 중원에 있었던 작은 나라를 병합하면서 차츰 영토를 확대했다.
전국시대 진의 유물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石鼓가 있다. 석고란 10개로 된 큰북같은 형의 돌에 1구 4문자의 시가 각각 1편씩 새겨진 것인데, 뒤에 유행한 석비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옛날 石刻이다. 돌은 화강암질로 상부는 둥글고 평평한데, 크기는 각각 높이 90cm, 지름은 약 60cm다.
전국시대 진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는 병기 이외에는 출토된 예가 매우 드무나, 숫적으로 적은 祭器의 하나로 진공궤가 있다. 이것은 1923년 감숙성에서 발견된 식품을 담는 용기로 진의 景公(재위 B. C 596~B. C 537)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명문에는 秦․公․不․朕․皇․祖 등 모두 12가지 글자가 각각 두번씩 사용되었는데, 그들 글자를 뽑아 내어 겹쳐보면 각 글자의 필획과 크기가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똑같은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명문은 청동기를 주조하기 위한 거푸집이 아직 물렁물렁할 동안에 활자같은 것을 억눌러서 만든 것으로 추측되며, 넓은 뜻으로 활자 사용의 기원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당시 이미 인감이 사용되었다고 하면, 인감의 사용을 청동기 문명의 거푸집에 응용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하여튼 청동기 명문 가운데에서는 매우 드문 보기다.
▲ 진시황의 문자 통일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정치의 방법이나 제도가 각 나라에 따라 갖가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진이 통일제국이 됨으로써 지역에 따라 제도가 다른 상태를 고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에 李斯라는 인물이 진시황의 정치 고문으로 활약했다. 이사는 법률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한비자와 함께 순자에게 배웠으며, 법가의 사상에 따라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잇달아 참신한 정책을 제창했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뒤 행한 많은 정책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글자의 통일이었다. 앞장에서 기술한 것처럼 그때까지의 시대에서는, 예를 들면 齊 등 동쪽의 나라에서는 세로로 긴 글씨체가 사용되고, 남쪽에서는 장식적인 조서가 사용되는 등 각지역에서 사용된 글씨체는 갖가지였다.
그런데 전국이 통일되고 관료가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가 되자, 실제의 행정에서 매우 많은 양의 문서가 필요하게 되어 각지방에서 사용된 글씨체가 달라 여러 가지 장애가 생겼다. 그래서 진시황은 온 나라가 표준으로 할 수 있는 글씨체를 만들도록 이사에게 명했다. 이때 이사가 제정한 것이 소전이란 글씨체인데, 소전은 본래 진의 지역에서 사용된 대전(大篆, 또는 주문이라 한다)을 간략화한 것이라고 한다.
소전은 황제의 명으로 제정된 국가의 표준글씨체이므로 황제의 조칙같은 정식문서에는 물론 그 글씨체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소전은 원래 곡선이 많아 쓰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짧은 시간에 많은 글자를 써야 할 경우에는 꽤 불편한 글씨체다. 그래서 소전의 字形 구조를 간단하게 하고, 곡선을 직선으로 고쳐 보다 빠르게 쓰기 위해 궁리한 글씨체가 고안되었다. 그것이 예서다.
▲ 隸書의 시대
武帝시대의 적극적인 군사정책으로 서역의 군사기지에서 쓰여진 漢簡에 대해서 길게 적었는데, 무제가 내정면에서 행한 정책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그 대표적인 것은 儒敎를 國敎로 한 것이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뒤에도 유가의 학자는 진나라의 학문 기관에 설치된 박사관에 등용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황제의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에 이사가 ‘焚書’를 제기하여 유가는 큰 타격을 받았다.
한나라가 되어 焚書令이 해제되자 한때는 회의적인 상황에까지 돌입했던 유가의 학문이 조금씩 세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한나라를 건국한 高祖와 무장들은 본래 학문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출신이므로 유가가 말하는 文化政治 등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 고조는 유학자를 매우 싫어하여 유학자가 관을 쓰고 오면 관을 벗겨 그 속에 오줌을 누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유교가 국교화되기 조금 전에 經書의 학문에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야기는 무제 앞의 景帝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동에 있었던 노나라의 공왕은 궁전을 세우는 것이 취미였는데, 어느 날 자기 나라의 영내에 있는 공자의 옛집을 자신의 궁전으로 하려고 개축을 시작했을 때, 벽 속에서 옛 글자로 쓴 경서가 대량으로 나온 것이다. 이때 발견된 경서는 진나라의 분서를 피하려고 당시의 유학자들이 벽 속에 감추어 후세에 전하려 한 것이라고 말한다.
벽 속에서 나온 經書에 사용된 글자는 漢代에 사용된 예서보다도 옛 시대의 것이므로, 그 글씨체를 ‘古文’이라 부르고, 그 경서를 ‘고문경서’라 한다. 그에 반해 그때까지 사용된 경서는 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예서, 결국 당시로 보아 현대의 글자로 쓴 경서라는 의미로 ‘금문경서’라 부른다. 고문과 금문 경서의 차이는 단순히 글씨체의 차이에만 머무르지 않고, 경서 그 자체의 종류도 다르므로 고문경서의 발견은 경서의 학문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漢代 經學면에서 큰 문제였던 고문과 금문의 경서는, 문장은 현존 경서로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로 어떤 글자로 적혀 있는가라는 글씨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後漢 초기에 만들어진 許愼의 설문해자 속에 허신이 ‘고문’으로 인용한 글씨체와 삼국시대 魏의 正始 연간에 세워진 ‘三體石經’에 고문으로 싣고 있는 글씨체가 공자의 옛집에서 발견된 경서의 글자라고 부르고 있어, 그것으로 조금은 고찰할 수가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文字學書로 알려진 허신의 설문해자(B. C 100년 완성)도 본래는 경서 연구의 일환으로, 고문과 금문의 해석상의 차이를 정리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경서는 聖人의 저술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글자로 쓴 책이다. 따라서 글자를 한 자 한 자 정확히 이해하면 경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허신은 글자의 정확한 이해라는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경서의 올바른 해석을 해보려고 한 것이다.
설문해자에는 모두 9,353자가 실려 있는데, 허신은 모든 글자에 대해서 ‘六書’로 글자의 내력을 설명하고, 아울러 그 글자가 만들어진 때의 처음의 의미〔本義〕를 적었다. 자형의 해석에는 소전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공자의 옛집 벽에서 발견된 경서에 사용된 ‘고문’과 서주의 宣王시대에 書記官이었던 주가 만들었다는 ‘주문’으로 보충 설명을 하여 풀이의 정확을 기했다(또한 극히 드물지만 秦의 刻石의 글자를 인용한 곳도 있다).
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일찍이 石鼓와 진시황의 각석의 예가 있으나, 그것이 널리 보급되어 여기저기에 석비가 세워지게 된 것은 後漢 이후의 일이다.
석경도 넓은 의미에서는 석비의 일종이나 석비 중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은 공적을 쌓은 인물을 기리려고 문장을 돌에 새긴 것이다. 진시황의 각석은 황제의 업적을 스스로 기린 것이나, 후한 이후에 유행한 석비에는 史書에 傳記도 보이지 않는, 이른바 이름없는 인물에 관한 것도 많지만, 그것은 당시의 정치․경제․문화의 상황을 전하는 同時資料이므로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후한의 석비에는 거의 예서를 쓰고 있다. 다만 한마디로 ‘예서’라 부르는 글씨체도 출토된 木簡이나 竹簡, 또는 이제까지 알려진 이름난 석비에 적힌 글자를 비교해보면, 字形의 구조는 기본적으로는 같지만 글자가 풍기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조전비는 명나라 萬曆年間(1573~1620)에 섬서성에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碑面이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청나라 때에 균열이 생겨 몇 글자가 손상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한나라 때의 석비 가운데서는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씨체는 극도로 세련되었고, 예술적으로 완성의 극치에 달한 예서라고 옛날부터 평판이 높다.
▲ 위․진 남북조시대의 문자문화
조조는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소박하고 아끼는 것을 북돋웠으며, 그 무렵 유행한 화려한 장례식을 금했으며, 또한 개인의 공적을 기리는 석비의 건립도 금지했다. 위왕조도 석비 건립의 금지령을 계속했으며, 새로이 西晋의 무제 때에도 고친 금지령이 나와 후한시대에 크게 유행한 석비가 삼국시대에는 거의 건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석비를 세우는 대신에 사람들은 이번에는 고인의 생애를 적거나 생전의 공적을 기린 문장 등을 돌에 새겨 무덤 앞에 놓거나 무덤 속에 묻게 되었다. 이것이 남북조시대에 한창 만들어진 墓誌銘의 기원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조조시대부터 서진에 걸친 무덤이나 유적에서의 석비 발견은 매우 적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조의 금지령은 꽤 엄격히 이행되었다고 상상된다.
사마예가 建業에서 晋을 부흥했을 때에 그를 도와 신왕조 건설을 지도한 사람은 琅邪 출신 王導(267~330)였다. 왕도는 서진 무제 때 신하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王祥을 조상으로 하는 문벌 귀족의 한 사람으로 이름난 집안이란 말을 들었던 ‘낭야의 왕씨’ 출신이다. 그 일족은 동진 초기의 중요한 자리를 거의 독점했으며, 그 권세는 세상에서 비길 자가 없었다.
그 왕도의 사촌동생의 아들이 ‘書聖’이라 일컫는 王羲之(307~65)다. 왕희지도 낭야의 왕씨에 속하는 귀족의 한 사람으로 곧 회계(지금의 절강성 소흥)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4년 동안 관료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계는 경치가 빼어나고 날씨도 따뜻하여 수많은 명사들이 그곳에 별장을 지었다.
永和 9년(353) 3월 3일 왕희지는 당시의 명사 41명을 회계 교외의 명승지 蘭亭에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다. 잔치의 취지는 뜰의 꾸불꾸불한 물길에 참가자가 각각 마주 앉아서, 위에서 흘러오는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주어진 詩題의 시를 짓는 것인데, 짓지 못한 사람은 벌로 술을 마시게 되어 있었다. 결국 16명이 벌주를 마셨다고 한다.
이렇게 지은 시를 한 권으로 묶어 난정집을 만들었으며, 왕희지가 머리말을 썼다. 그때 왕희지 나이 47살, 이미 글로 이름을 날렸던 왕희지로서도 그 글씨는 자기 마음이 흐뭇할 정도로 잘된 작품이었다. 이것이 왕희지의 이름을 후세에 날리도록 한 「蘭亭序」다.
「난정서」는 행서로 쓰여 있으며, 왕희지는 그밖에도 해서나 초서를 사용하여 편지 등도 썼다. 三國이나 서진시대까지 사용된 예서는 귀족들에게는 소박하고 고풍스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나, 동진에 오면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고 대신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유려한 선으로 쓴 행서나 그것을 흘린 초서 아니면 자형 전체에 균형을 잡은 해서였다.
「천자문」은 모두 1,000가지 글자를 4자 1구 모두 250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익히기 쉽도록 韻을 맞추어 운율적으로 만든 문장이다. 곧 한자로 쓴 ‘가나다라 노래’ 같다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중국에서는 아이들이나 글자를 모르는 어른에게 한자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교과서를 이른 시대부터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前漢 말엽에 史游가 만든 「急就篇」이 널리 사용되어, 居延같은 변경의 군사기지에서도 그 문장을 쓴 木簡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기술하였다.
그러나 「천자문」은 「급취편」 등보다도 내용이 훨씬 쉽고, 또한 최소한의 교양으로서 알 수 있는 고사나 성어 등도 많이 실은 실용적인 것이므로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칠 때 사용하는 교과서로서 「급취편」 대신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거기에 사용된 글자 수가 1,000자라는 것도, 현실적인 문자 사용으로는 좀 적다고 해도 일상생활에서 최소한 필요한 것만으로 되어 있어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알맞다.
▲ 수․당시대의 문자문화
隋代에 궁정에서 쓴 사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무렵에는 이미 楷書가 보통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해서로 알려진 것으로 ‘미인동씨묘지’가 있다. 이것은 양광의 동생인 양수를 섬긴, 19살의 나이로 죽은 여관 동씨의 묘지명으로, 문장은 그녀의 남편이었던 양수가 지었으며, 이 멋진 해서를 쓴 인물의 이름은 안타깝게도 적혀 있지 않다.
더구나 이 묘지는 淸의 도광년간(1821~50)에 발견되었는데, 태평천국의 난으로 잃어버려 지금은 비가 존재했던 시대에 떴던 약간의 탁본으로 그 글자를 볼 수 있을 뿐이다.
태종시대에는 유학도 크게 발전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정치적인 혼란과 불교문화의 침투로 사상계가 다양화했으며, 유학에도 갖가지 학파가 나타났다. 당나라 초기의 유학은 남북조시대의 혼란한 상태를 그대로 계승했으나, 수나라에서 시작된 시험에 의한 관리채용제도를 유지하고 또한 확고하게 해나가는데 경서 해석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태종은 학자들에게 명하여 먼저 오경의 정본을 만들고, 다음에 믿을 만한 주석을 바탕으로 종래의 해석을 취사선택하여 가장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경서의 해석을 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것이 五經正義 180권이다. 과거에서 경서의 시험은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출제했으므로, 오경정의는 이후 지식인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책으로 되었다.
경서의 본문과 해석은 이렇게 해서 통일되었으나, 과거시험을 순조롭게 행하는 데는 또하나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는 같은 楷書로도 한 글자에 몇가지 서법이 있는 것, 곧 이체자가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체자란 글자의 발음과 의미가 똑같은데 자형이 다른 것, 예를 들면 ‘略’과 ‘畧’, 또는 ‘跡’과 ‘蹟’ 같은 것을 가리키는데 통상 흔히 쓰는 쪽의 글자를 정체자, 그다지 쓰이지 않는 글자를 이체자라 한다.
당나라 중엽부터는 이미 있던 해서의 이체자를 정리했으며, 유서깊은 글자와 그렇지 않은 글자를 구별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런 학문을 正字學이라 한다.
그런 최초의 작업은 오경의 본문에서 같고 다름을 조사하여 정본을 만들 때 顔師古(581~645)가 이체자를 600자쯤 뽑아 써서 정속의 구별을 판정한 안씨자양이다.
간록자서는 민간에서 쓰이는 속자까지 싣고 있는 실용서인데, 이체자를 정리하여 올바른 자형을 정한 것은 본래 경서의 학문에서의 요청이었는데, 이윽고 순수하게 그런 입장에서 자형을 바로잡은 저술이 만들어졌다. 大曆 11년(776)에 장참이 만든 오경문자와 태화 7년(833)에 당현도가 만든 구경자양이 그것이다.
오경문자는 설문해자나 희평석경 등을 자료로 하여 경서에 나타나는 주요한 글자 3,253자에 대해서 자음과 출전을 注記하고, 이체자가 있는 것은 그 자형을 들어 내력을 설명한 책이다.
▲ 송나라와 주변국가의 글자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872~926)는 건국 후 이윽고 神冊 5년(920)에 한자의 筆劃과 구조를 참고하여 자신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한 글자 契丹文字를 만들었다.
야율아보기가 만든 거란문자는 한자와 같이 1자가 한 낱말을 표시하는 표의문자였는데, 거란어는 중국어와는 체계가 달라서 그 글자는 실제로 자신의 언어를 표기하는 데에는 꽤 불편했다. 그래서 태조의 동생인 迭刺가 위구르인으로부터 표기법을 배워 새로운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거란문자에는 이처럼 2종류가 있으며, 처음 아보기가 만든 것을 거란대자, 뒤에 만들어진 표음문자를 거란소자라 한다.
遼는 자신의 문자를 만들었지만, 한자를 완전히 폐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거란문자는 요대를 통하여 한자와 함께 병용되었으며,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도 잠시 금에서도 사용했는데, 뒤에 금이 칙명으로 거란문자의 사용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는 쓰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며, 마침내 죽은 글자로 되었다.
서하와 요는 북방의 양대 세력이었는데, 요는 유목생활을 버리고 도시화함과 아울러 정치가 어지럽게 되고 국력도 쇠약해 갔다. 이때 요의 북쪽에서 일어난 퉁구스계의 女眞族이 있었다.
여진(또는 女直이라고도 한다)은 요의 지배 하에서 수렵과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완안부의 아골타(1068~1123)가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요의 지배에 저항하여 금을 세웠다. 요가 새로 일어난 금과 싸웠지만 크게 패하자, 금은 그 기세를 몰아 요의 본거지를 쳐들어가 황제를 사로잡고 요를 멸망시켰다.
여진도 건국 초기에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었다. 여진문자의 제작자는 완안희윤이란 인물인데, 그의 전기에 따르면 본래 여진에는 고유문자가 없어 금은 처음에는 이웃 여러 나라와 교류할 때 거란문자를 사용했는데, 뒤에 태조가 완안희윤에게 명하여 자기 나라의 글자를 만들도록 했다. 희윤은 한자의 해서체를 모방하고, 또 거란문자를 참고하여 1119년에 여진문자를 완성했다.
그 뒤 다시 1138년에는 희종 완안단이 새로운 여진문자를 만들었는데, 앞서 희윤이 만든 문자와 아울러 사용했다. 희윤이 만든 문자를 여진대자라 하고, 뒤에 희종이 만든 문자를 여진소자라 한다.
▲ 근대화와 문자개혁
당나라가 되자 과거제도가 정비되고, 문자면에서도 그 일환으로 楷書의 字形이 정리된 것은 앞에서 기술했다. 바로 그 직후 무렵부터 중국에서는 인쇄가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먼저 曆이나 종교관계의 지폐 등이 인쇄되어 판매되었다.
그런데 인쇄술이 활기를 띨 무렵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글씨체는 해서였다. 그 무렵 해서 이외의 글씨체는 石碑의 글씨 등의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인쇄에는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해서가 사용되었다. 또한 해서는 그밖의 글씨체와 견주어서 보면 필획에 직선이 많아 목판인쇄의 版木에 조각칼 등으로 글자를 새기는 데에도 편리한 글씨체였다.
이렇게 해서 인쇄에는 거의 해서가 사용되게 되었으며, 인쇄의 보급과 함께 그밖의 글씨체는 서도 등 예술적인 분야 이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중국은 서적의 인쇄에 사용하는 해서와, 글자의 심미적인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해서 이외의 글씨체가 여러 방면에서 대량으로 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송부터 그 뒤 明과 淸나라 때에도 유교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어 황제의 명령으로 대규모 서적이 수많이 편찬되었다. 특히 청대에는 정밀한 문헌비판에 입각하여 고대의 언어와 사상의 해명을 겨냥한 考證學이 발전되어 뛰어난 학술서가 많이 저작되었다.
그들 서적이 지닌 문화적인 의의나 학문적인 가치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큰 것이었으며, 중국 학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한자의 역사’ 곧 한자 그 자체의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언제나 해서로 쓴 것으로 한데 묶을 수 있으며, 당나라 때에 완성된 해서문화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그때까지 문화가 낮고 야만적인 국가로 경멸했던 유럽 나라들의 참 실력을 알았다. 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유교를 국교로 한 마지막 왕조 淸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으로 되자, 근대국가를 세우기 위해 국가정책으로 언어나 문자를 정비하고 고칠 필요성을 논하게 되었다.
근대 유럽뿐만 아니라, 이전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계속하여 받아들였던 일본까지 明治維新을 계기로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기 시작하여 강국으로 되어 가는 것을 봤을 때, 중국의 선각자들은 그들이 발전하는 원인의 하나가 교육의 보급에 있으며, 국민 대다수가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이 세계에서 늦게 깬 상황을 회복하고 근대국가로 재출발하려면 초등교육을 보급하고 문맹이 될 수 있는 한 줄이는 것이 급선무이나, 한자는 너무나도 어려워 교육보급의 큰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먼저 누구든 한자를 읽고 쓸 수 있도록 하려고 한자에 대응하는 표음문자의 제작을 기획했다.
중국인 가운데서도 서양인의 영향을 받아 자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표음문자를 만든 인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인이 만든 맨처음의 표음문자는 盧戇章이 만든 中國第一快切音新字인데, 그는 그 문자로 一目了然初階라는 독본을 만들어 1892년에 출판했다. 노당장은 싱가포르에서 영어를 배운 뒤 귀국해서부터는 厦門에서 영국인 선교사가 만드는 漢英사전 편찬을 도왔다.
중화민국이 성립되자 새로운 표음문자의 작성은 새 정부에 그대로 인계되었다. 중화민국 교육부는 1913년에 전국에서 통용할 공통어를 제정하려고 讀音統一會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전국의 표준음을 나타내기 위해 표음문자로서 채용된 것이 注音字母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부터는 한자의 세계에도 잇달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주어진 한자문화’에서 ‘창조해 내는 한자문화’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간의 열의와 국가의 정책이 맞아 떨어진 가운데, 1954년에는 國務院에 중국문자개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정부의 핵심기관에 문자와 언어에 관한 사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서가 설치된 것은 중국의 오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국가의 문자와 언어개혁의 주요 목적은 표준어의 제정,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새로운 표음문자의 작성, 한자의 간략화 등 3가지에 있었다.
표준어 제정의 시행은 해방후 중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고, 淸代에는 ‘官話’로 불리는 공용어가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중화민국정부는 북경의 발음과 어휘를 기준으로 한 표준어를 제정했다(그것을 國語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발음과 어휘를 조금 고쳐 새로운 표준어를 만들어 그것을 ‘普通話(putonghua)’라 불렀다.
이 보통화의 보급추진과 表裏 관계에 있는 것이 중국어의 발음을 표기하려고 만든 한어병음방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문자개혁에서는 새삼스럽게 한자의 주음체계를 연구하여 종래의 것에서 장점과 단점을 감안하여 완전히 새로운 주음체계를 개발했다. 이것이 1958년 2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승인된 한어병음방안(‘拼音’이란 음을 잇다, 음소를 결합하여 한 음절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한자에 대한 갖가지 주음체계의 집대성이며, 알파벳 이외의 문자나 부호는 일체 쓰지 않는다.
한어병음방안은 전국의 학교와 민간에서 표준어 보급 교육과 글자 배우기 교육에 사용되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정밀한 한자의 발음주기 체계로서 효과를 발휘하여 보통화 보급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고, 보통화 보급에 이바지하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글자로서 만든 것이지, 그대로 한자를 대신해 전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표음문자는 아니다.
해방 후 언어문자정책 가운데에서 한자 그 자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자의 간략화다. 과거에 압도적 다수의 인민이 문맹이었던 것은 한자의 자형이 복잡하여 익히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정부는 한자의 간략화에 적극적으로 몰두하여, 복잡한 글자의 획(字劃)을 간단하게 한 글자(簡體字라 한다)를 정식문자로 채용하고, 간략화된 한자를 인쇄나 기록에 사용하도록 지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간체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맨처음 규정한 것은, 1956년의 漢字簡化方案이다.
이 방안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종래부터 私的인 기록 등에 자주 사용되어 이 방안이 제정되었을 때에는 이미 신문이나 잡지 등에도 사용되고 있었던 간체자로, 이것에 대해서는 이 방안이 시행되는 것과 동시에 종래의 자형 - 간체자에 반해서 繁體字라 한다 - 의 사용을 멈추는 것(다만 고전서적의 출판 등 특수한 경우는 제외), 둘째 부분은 신중을 기하려고 먼저 이 방안으로 간략화한 글자를 시험적으로 사용하여 사회의 반응을 보도록 하는 것, 셋째는 한자를 구성하는 偏旁의 간략화표로서 보다 많은 간체자를 만들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간체자가 사회의 공식문자로 등장했다. 정부는 처음에는 꽤 신중한 자세를 취했는데, 한자의 간략화는 사회로부터 예상 이상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간체자는 그 이후 정규문자로서 공식문서를 비롯해 신문과 잡지, 또는 서적인쇄에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1965년 정부는 정규문자로 인정한 간체자를 모두 모아 「簡化字總表」를 공포하고, 또한 인쇄물에 사용하는 간체자의 자형을 통일하려고 「印刷通用漢字字形表」를 발행하여 고전출판물 이외는 모두 그 자형에 준하도록 지시했다.
간체자는 곳곳에서 사용하게 되었으며, 사람들 사이에 완전히 정착했다. 간체자의 제작과 사용이 완전히 궤도에 오른 문자개혁의 움직임은 본래 민중이 지닌 폭발적인 힘과 함께 진전을 계속하여, 실제 중국의 거리에는 정부가 공인한 간체자 이외에도 민중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간체자가 물결을 이루는 것이 현실이다.
해방 후 중국은 문자개혁의 대전제로서 노신과 모택동이 주장한 한자의 완전폐지와 표음문자의 國字化를 먼 장래에 실현하고자 그것을 國是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에 의한 문자개혁의 첫걸음으로서 만든 병음문자는 어디까지나 한자에 대한 보조적인 도구로서의 역할이 주어졌을 뿐 한자를 대체하려고 하는 글자는 아니었다. 한자를 대체할 글자는 일찍이 중국에서는 만들어진 적이 아직 없으며, 중국의 정식문자는 현재도 여전히 한자다.
사회가 근대화함에 따라 기계문명이 점점 발달하여 글자도 기계가 읽고 쓰는 시대가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한자를 그런 상황에 대응시키려고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착실히 성과를 달성하고 있다. 한자는 이제 확실히 계속 근대화되고 있으며 폐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중국이 낳은 위대한 한자문화는 유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으므로 지금도 힘찬 숨결을 계속 내뿜고 있으며,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중국문명의 한복판에 자리잡아 계속해서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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