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사전, 번역어 사전

조선 고종 때 인물 사전, 고종시대 인물, 한문사전, 인물사전

일이삼선생 2023. 6. 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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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주

1894(고종 31)~? 사회주의운동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빈농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부, 토목노동자로 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 러시아군대에 징집되어 서유럽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1917년 볼셰비키 당원인 P.노비코프와 교유하면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고 1918년에는 모스크바에서 한인 노동자단체 결성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정치조직화 하기 위하여 야로슬라블로 파견되었다가 이곳에서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다. 
1919년 러시아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 해 3월에 열린 코민테른 창립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가하였다. 모스크바 조선인노동자 단체의 대표자격이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만이 조선인 노동자와 농민들을 일본과 유럽 자본가들의 손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연설하였다. 
1919년 12월부터 적군에 입대하여 제5군부설 체카 특별부 전권위원, 오게페우 니콜스크-우스리스크 단원이 되었다. 1924년 적군에서 제대하고 연해주소비에트 집행위원회 감사관이 되었고 1926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소비조합 책임자가 되었다. 
1930년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 모스크바 전기기계 제조소, 스베르드로프스크 산업학원에서 공부했다. 1936년 채금장에서 일하였다. 1967년 소련정부로부터 레닌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뜨베이 김, 이준형 역, 역사비평사, 1990).

강진규

1817(순조 1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진오(晉五), 호는 역암(饑庵). 경상북도 봉화출생. 아버지는 필응(必應)이다. 이황(李滉)을 사숙하였다. 
1845년(헌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박사와 전적J13679(典籍J13679)을 지냈고, 1864년(고종 1) 사헌부장령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에도 금산사J06463(金山寺J06463)․태고사J32553(太古寺J32553) 등 사찰에 관한 내용이 많다. 
당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천주학에 대하여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1881년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를 지어 사학(邪學)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영남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내 연합전선을 펴면서 개화정책을 반대하다가 이만손J33602(李晩孫J33602)과 함께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역암문집≫ 12권이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饑庵文集.

고성겸

1810(순조 10)~1886(고종 2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치희(穉希), 호는 녹리(蓮里). 아버지는 몽찬(夢贊)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내성(來成)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정필규(鄭必奎)의 수제자였던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사서오경은 물론, 음양․성력(星曆)․하락(河洛)․율려J05217(律呂J05217) 등에까지 통달하였다. 1850년(철종 1) 청량정사강회(淸凉精舍講會)에 나가 재사의 이름을 얻었다. 
1855년 이휘병(李彙炳)과 함께 상경하여 장헌세자(莊憲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조신(朝臣)들이 국문J04944(鞫問J04944)할 것을 주장하자 수천명의 소유(疏儒)들이 사태가 위급함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혼자 굳건한 기상을 보여 세인의 기림을 받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나라의 정세가 날로 기울어져가자, 향리인 경상도 상주에 은거한채 선대의 유집 등을 간행하면서 지냈다. 경사(經史)에 두루 해박하고, 특히 악부체 시가에 능하였다. 〈한성악부 漢城樂府〉 28장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수많은 악부사(樂府詞)는 모두 우리 나라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저서로 ≪녹리문집≫ 14권 7책이 있다.  ≪참고문헌≫ 蓮里文集.

고원훈

1881(고종 18)~?. 민족항일기의 친일 정치인․체육인. 경상북도 문경 출생. 1910년 7월 일본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1911년 8월 조선총독부의 경부J22495(警部J22495)로 채용되었으며, 1913년 5월 보성전문학교 교수, 1922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1920년 조선체육회 결성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13일에는 조선체육회의 창립과 더불어 초대 이사장으로 피선되었다.
창립 후 회장 장두현과 더불어 체육의 실무를 맡아 발전에 기여하였고, 1921년 7월 23일부터 1923년 11월 27일 이임할 때까지 2․3․4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회장 재임시에는 제1회 전조선정구대회(1921.10.),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1922.2.) 등을 후원하였다.
1938년 조선체육회가 해체될 때는 일본의 체육탄압정책에 끝까지 항거하였다. 1924년 4월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그 해 12월 전라남도 참여관(全羅南道參與官), 1926년 경상북도 참여관, 1929년 평안남도 참여관을 거쳐 경기도 참여관, 1930년 4월 평안북도 참여관을 지냈고, 1932년 9월 전라북도지사가 되었다.
그 뒤 1937년 9월 경상북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내선 일체와 황도(皇道) 실천을 주장하는 강연을 하였고, 1938년 7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열린 총독부 후원의 시국대책강연회에서 󰡐일본의 수호신이 되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또한, 1940년 10월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동맹에서는 이사와 연성부(鍊成部) 연성위원 등의 직책을 맡았으며, 1941년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을 조직하여 상임위원이 되었는데, 이 단체의 결성식 때 좌장(座長)으로 선출되어 󰡐출전장병의 노고를 감사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를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평양과 춘천에서 당시 결성 예정이던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의 사명을 해설하는 강연을 하였으며, 이어 임전보국단을 결성하여 부단장이 되었다.
이즈음에 이른바 창씨 개명을 권유하는 강연을 행하면서 자신도 성을 고원(高元), 이름을 훈(勳)으로 고쳤다. 1945년 2월 대화동맹J44110(大和同盟J44110)을 만들어 심의원이 되었고, 같은 해 6월 대의당J32893(大義黨J32893)을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다.
한편, 일제의 침략 전쟁에 사용할 비행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김연수(金咎洙) 등과 더불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만들고 그 취체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문헌≫ 親日派群像(民族政經文化硏究所, 三省文化社, 1948), 民族正氣의 審判(革新出版社, 1949), 대한체육회사(대한체육회, 1970), 체육한국인(체육부, 1985), 친일파 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고윤식

1831(순조 31)~1891(고종 28).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덕현(德顯), 호는 태려(泰廬). 경상북도 문경출신. 일원(一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산유씨(豊山柳氏)로 순조(舜祚)의 딸이다. 
1876년 흉년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굶주리자 토지를 팔아서 빈민들을 구제하였고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평민으로서 국가와 사회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고, 천주교를 사교로 보고 배척하기 위하여 전국 유림에게 〈척화통문 斥和通文〉을 보내기도 하였다. 
경학과 사학에도 통달하였으며, 제자백가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심경≫을 깊이 연구하여 〈문심경 問心經〉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태려문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泰廬文集.

곽휘승

1872(고종 9)~1903.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현풍J14445(玄風J14445). 자는 성서(聖緖), 호는 염와(廉窩). 아버지는 종운(鍾雲)이며, 어머니는 광산이씨로 종박(宗樸)의 딸이다. 종덕(鍾德)에게 입양되었으며, 곽종석J08217(郭鍾錫J08217)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이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산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3년 스승을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가 참정대신 신기선J21146(申箕善J21146)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벼슬하기를 권유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갑자기 병사하였다. 그는 스승인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1894년 그가 스승과 문답한 내용을 차록(箚錄)한 글이 전하여진다. 저서로는 ≪염와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廉窩集.

김거복

생몰년 미상.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부안  출신. 헌종 때 태어나서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고종 때 65세로 사망하였다. 선천적으로 성량이 크고 고와서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 〈수궁가 水宮歌〉를 잘 하였는데, 특히 󰡐용왕탄식대목󰡑에 뛰어났다. 그의 소리는 서편제(西便制)에 속한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唱樂大綱(朴憲鳳, 國樂藝術學校出版部, 1966).

김계선

1891(고종 28)~1943. 젓대의 명인. 본관은 경주J27271(慶州J27271).구명(舊名)은 기선(基善), 호는 죽농(竹濃). 서울 출신. 조선 말기 젓대의 명인이었던 최학봉j05589(崔鶴鳳j05589)을 사사하여 대성하였다. 1906년 주전원내취(主殿院內吹), 1908년 장악원내취, 1911년 이왕직(李王職) 세악내취(細樂內吹), 1913년 이왕직 아악수로 봉직하다가 1939년에 사퇴하였다. 당적J03418(唐笛J03418)․생황 (笙簧)․단소에도 통달하였고, 양악기인 플루트․클라리넷․오보에․색소폰에 이르기까지 부는 악기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소리를 내고 어떤 곡조든 연주할 수 있는 귀재(鬼才)였으며, 성품은 겸허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평조회상 平調會相〉중 〈상영산 上靈山〉과 〈영산회상 靈山會相〉 합주 등의 음반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國樂槪要(張師勛, 精硏社, 1961), 韓國樂器大觀(張師勛, 韓國國樂學會, 1969).

김덕한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1894년(고종 31)에 형조․공조판서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학진(鶴鎭)이다. 학진의 아버지는 좌균(左均)이나, 명균(命均)에게 입양되었으므로 그의 손자가 되었다.
1894년 전시J08084(殿試J08084)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1900년에 비서랑(秘書郎)이 되었다가 1년 동안 유배를 당하였다. 1903년에 태의원소경(太醫院小卿)이 되었고, 그해 8월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칙임관 3등에 올랐다. 
그 뒤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종묘서제조(宗廟署提調)․의효전제조(懿孝殿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908년 10월에 ≪국조보감≫의 편찬위원에 임명되어, 이용원J57679(李容元J57679)․김윤식J33579(金允植J33579)․신기선J21146(申箕善J21146) 및 아버지 학진 등과 함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정서(淨書)의 책임을 가진 선사위원(繕寫委員)이 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감수를 맡는 감인위원(監印委員)에 임명되는 등 ≪국조보감≫ 편찬에 기여하였다. ≪국조보감≫을 완성한 1909년 10월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훈4등(敍勳四等)에 태극장J46129(太極章J46129)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備邊司謄錄, 國朝榜目, 高宗時代史 3~6(國史編纂委員會, 1970~1972).

김도명

1803(순조 3)~1873(고종 10). 한말의 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순백(純伯), 호는 외암(畏庵). 안동의 가야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로(星魯)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한운(翰運)의 딸이다. 처음에 유심춘J37707(柳尋春J37707)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뒤에 유태좌J45148(柳台佐J45148)의 문인이 되어 강마(講稜)와 논변(論辨)으로 학문을 성취시켰다. 
당시의 석학인 이한응J41652(李漢膺J41652)․이휘령J45242(李彙寧J45242)․유치명J19345(柳致明J19345) 등과 교유가 두터웠다. 권엽(權曄)의 유문(遺文)을 편집, 간행하였고, 주계서원J26001(周溪書院J26001)․용계서원J22086(龍溪書院J22086) 등에서 학규 14조를 작성하여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남전여씨향약 藍田呂氏鄕約〉을 모방하여 동약J23212(洞約J23212)을 만들어 마을의 기강을 바로 세움과 아울러 풍속을 바로잡는 데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외암문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畏庵文集.

김동철

1893(고종 30)~?. 체육인. 경상남도 마산 출생. 마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선린상업고등학교(지금의 선린정보산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기자로서 조선체육회 발기인회에 참가했으며,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정되어 조선체육회 창립을 위해 활약하였다. 그 해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자 상무이사, 조사․연구․선전․지방부 주임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체육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축구협회 발기위원으로 참가했으며, 축구협회 상무이사․경기도지부장, 전문대학학생연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그 밖에도 정구협회․농구협회․씨름협회․궁도협회․여자진흥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우리 나라 체육 발전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참고문헌≫ 대한체육회50년(사단법인대한체육회, 1970).

김동한

1892년(고종 29)~? 친일파. 함경남도 단천 출생. 만주국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활동을 했던 친일분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1909년 평양에서 3년제의 중학을 졸업한 뒤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18세에 만주로 건너가 이동휘(李東輝)․이청천(李靑天)․김좌진(金佐鎭)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한 때는 이동휘 밑에서 총참모(總參謀)를 역임한 적도 있었다. 
그 뒤 이동휘 등과 함께 러시아로 들어가 대정(大正) 5년(1916년)에 이르크츠크에서 2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4월 이르크츠크 보병 제27연대 사관(士官)으로서 민스크 전선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혁명을 맞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과 적군 조선혁명군 장교단장 등을 역임했고 트로츠키파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는 트로츠키에 의해 이르크츠크 고려(조선) 여단검사위원(旅團檢査委員)에 임명되었다. 동년 9월에는 하바로프스크 제2군단사령부정보과원(第二軍團司令部情報科員)으로, 동년 10월에는 적위군 소좌로써 로중국경방어군부대장(露中國境防禦軍部隊長)으로서 만주로 진공하기도 했으며, 후에 적색(赤色) 조선인혁명군 장교단장(將校團長)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소련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트로츠키파인 그는 1922년 당에서 제명되어 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 수감되었다. 석방 후 그는 중국의 군벌 오패부(吳佩孚)와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신병이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다. 
1925년 조선으로 건너온 그는 전향자로서 반공친일의 특무(特務, 스파이)가 되었다. 그는 1934년 9월 설립된 대표적인 친일조직인 󰡐간도협조회J03010(間島協助會J03010)󰡑의 회장을 맡아 항일유격대원․항일분자들에 대한 체포나 귀순공작에 적극성을 발휘하였다. 게다가 그는 간도협조회 내부에 󰡐의용자위단(義勇自衛團)󰡑과 󰡐협조의용단(協助義勇團)󰡑 같은 무장 조직을 조직해서 항일유격대에 대한 특수공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결국 1937년 12월 김동한은 치안공작반을 거느리고 동북항일연군 제11군 정치부 주임 김정국(金正國)을 귀순시키려고 제11군의 활동구역인 삼강성(三江省) 의란현(依蘭縣) 반전구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통하현 경찰대장, 경무국장 등 13명의 수행인원과 함께 김정국 부대에 의해 유인․사살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수많은 애국인사들을 검거․귀순․살해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친일조직을 결성해 애국인사들을 탄압하는 일에 적극성을 발휘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조선인 주축의 간도협조회를 기반으로 한 김동한의 친일활동은,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양 민족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참고문헌≫ 간도협조회의 죄행(리창역,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 봉화(민족출판사, 1989, 북경), 滿鮮日報(1939.12.13.).

김서규

1875(고종 12)~?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1902년 외부J16074(外部J16074) 견습생으로 구한국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 1903년 외부(外部) 주사, 1903년 함북 내무부 사무관을 지냈다. 병합 후, 일제시기의 한국인 관리는 크게 세 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구한국 관리 출신, 둘째는 대졸․고문 출신 등 일제의 엘리트 계층, 셋째는 순사․면서기에서 밟아 올라간 승진형이다. 구한국 관리 출신으로서 일제시기에 군수를 거쳐 도지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영흥군수를 지냈으며 1912년부터 1921년까지 안변군수를 지냈다. 3․1운동 때 함북 안변군수로 있던 그는 관내의 만세운동을 잘 진압하여 일제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으나, 반면에 상해임시정부로부터는 현상인물로 지목되었다. 
군수를 지낸 이후에 참여관으로 승진하는데, 일제시기의 참여관은 도지사의 자문기관이며 부지사와 같아서 지사로 나가기 전에 거치는 자리였다. 
각도의 정원 1명을 한국인으로 충당하였는데, 이들은 원칙적으로 도사무관이 맡는 각도의 부장직을 겸임했으며 총독부 산하의 각종 위원회, 예컨대 방공위원회․물가위원회․정보위원회․지원병전형추천위원회 등의 도지부 위원을 겸직하였다. 
김서규는 1923~27년에 함북 참여관, 1928년 평남 참여관을 거쳐 1929년에 전북지사, 1932~34년에 경북지사를 지냈으며, 1935년에는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朝鮮總督府, 各該當年度), 親日派群像(民族經濟硏究所 編, 三省文化社, 1948).

김성근

1835(헌종 1)~1919. 조선 말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원(仲遠), 호는 해사(海士). 판서 온순(蘊淳)의 아들이다. 186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검열에서 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88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88년 이후 공조․형조․이조․예조 등 각 판서직을 두루 거쳤다. 
1894년 개화파정권 성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98년 궁내부특진관으로 다시 등용되어 1900년에는 의정부참정, 1902년에는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883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에는 독직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곧 방면되었다. 
의정부참정으로 있을 때인 1900년에는 친일파이며 을미사변 때의 군부대신 안경수(安去壽)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일본에 도망가 있는 유길준J12738(兪吉濬J12738) 등을 체포해와서 처벌할 것도 주장하였다. 
또, 1905년에는 탁지부 고문으로 온 일본인 메카다(目賀田種太郎)가 이미 탁지부대신에서 물러나 있는 자신에게 지난날의 재정운용에 관하여 문책을 해오자, 이는 외국인이 내국인을 강핍하는 것이라고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때에는 일제에 의하여 자작이 수여되었다. 서예에 뛰어났고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로서, 유작으로는 사공도(司空圖)의 〈시품 詩品〉 중 제1항을 쓴 〈시품〉이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근역서화징≫에도 글씨가 전한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文品案, 槿域書怜徵(吳世昌, 協同硏究社, 1975).

김수현

1825(순조 2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경J35023(元卿J35023)․경일(景一)․원일(元一). 생부는 재창(在昌), 양부는 재겸(在謙)이다. 현령으로 1861년(철종 12) 정시J08087(庭試J08087)에 갑과로 급제하여 부사과와 대사간을 지냈다.
1864년(고종 1) 우승지가 된 뒤 이조참의․대사성․이조참판을 거쳐, 1866년 개성부유수로 재직중 치적이 뛰어나 임기가 연장되고 가자(加資)되었다. 뒤에 병조판서․한성부판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1872년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혼란한 대내외 사정을 알렸다.
그 뒤 지의금부사J14763(知義禁府事J14763) 등을 지내다가 1882년 임오군란 직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군란이 수습된 그해 10월에야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또, 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이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하였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후에 예조판서․공조판서․이조판서와 의정부의 좌우참찬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제1차 김홍집J06300(金弘集J06300) 내각에서 의정부좌찬성으로 활약하였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淸選考.

김시권

1884(고종 21)~?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창씨명(創氏名)은 국산시권(菊山時權). 1908년 관립(官立) 평양일어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해주 사립벽성의숙 부교관, 재무주사를 지냈다. 
병합 후 구한국 관리 출신으로서 총독부 군수와 도지사의 자문기관이며 지사로 나가기 전에 거치는 자리였던 참여관을 거쳐 도지사에까지 오른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1910년 함북 회령군 서기, 1919년 경원군수와 온성군수가 되었는데, 3․1운동 때는 온성(穩城) 군수로 만세운동을 진압해 일제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다. 1922년 함북 내무부 지방과 사회과장, 1928~1929년 함남 재무부 사무관, 1932~1935년 경북 참여관을 거쳐 1936년에는 전북지사, 이듬해에는 강원도지사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총독 미나미 지로오(南次郞)가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걸고 황민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일제말기인 1940년에 그는 󰡐내선일체의 철저, 황국신민화, 신도(神道)의 실천, 지역봉공에 의한 고도국방 국가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내세우고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J47903(國民總力朝鮮聯盟J47903)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이듬해인 1941년에는 황민화운동의 실천방책으로서 물자․노무공출의 철저강화, 국민생활의 최저 표준화, 전시봉공(戰時奉公)을 내세우며 결성된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의 상무이사(常務理事)를 역임하였다. 
그는 1941년 11월 7일 경신중학(景神中學)에서 󰡐지원보급 및 혈전대󰡑라는 주제로 강연했으며, 1942년 10월 2일에는 󰡐광영(光榮)의 징병제실시(徵兵制實施)를 앞두고󰡑를 ≪매일신보 每日新報≫에 기고해 일제의 동원체제를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朝鮮總督府, 各該當年度), 親日派群像(民族經濟硏究所 編, 三省文化社, 1948), 民族正氣의 審判(革命出版社, 1949).

김시연

1810(순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J08840(延安J08840). 자는 원초(元初). 대사헌 노(邱)의 아들이며, 궁내부특진관 완수(完秀)의 아버지이다.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2년(헌종 8)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이 되었다. 철종조에 들어와서는 이조참의․개성부유수․이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한 뒤, 외직으로 나가 1861년에 강원도․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국고를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864년(고종 1)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자자형J49303(刺字刑J49303)까지 받았다. 
그 뒤 고종의 특지(特旨)로 위리안치에서 풀려나 향리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1873년 좌승지가 되었다.
 또한, 1875년에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정사J11001(正使J11001) 이유원(李裕元)을 수행하여 청나라에 다녀 왔다. 같은 해 12월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강화도조약 체결로 민심이 어수선해져 조정을 비방하는 문자가 횡행하자 그 책임을 지고 이듬해 정월 파직당하였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김시풍

?~1894(고종 31). 조선 말기 무인. 전라북도 전주 출신. 전주감영(全州監營)의 장교로 일찍이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60세 가량의 기골이 장대한 노인으로 전주감영의 영장J14329(營將J14329)으로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막아 내라는 임무를 띠고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된 홍계훈J33639(洪啓薰J33639)이 5월 11일 전주성에 입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승승장구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관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라감사 김문현J39493(金文鉉J39493)과 의논, 전주성내에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사람 6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전주감영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 등과 같이 체포되었다. 같은 달 15일 목이 잘려, 16일 아침 역시 같은 혐의로 목이 잘린 김영배J47389(金永培J47389)․김용하(金用夏)․김동근(金東根)과 함께 전주 남문(南門) 밖 장터에 효수되었다. 
그런데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였다는 혐의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참고문헌≫ 續陰晴史, 東學亂記錄(國史編纂委員會, 1974), 東學農民蜂起(韓薄劤, 韓國史 17, 1977).

김영제

1883(고종 20)~1954. 국악이론가․가야금명인. 본관은 경주J27271(慶州J27271). 호는 괴정(槐庭). 충청북도 괴산 출신. 한말 초대 국악사장(國樂師長)을 지낸 종남(宗南)의 종손이다. 종남은 그의 양조부요, 피리의 명인 김준현(金俊鉉)의 외숙부가 된다. 
어려서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배웠고 1900년 전악J05547(典樂J05547)으로 장악원에 들어가 국악사(國樂師)․아악사를 역임하였으며, 1929년 명완벽(明完璧)의 뒤를 이어 제4대 아악사장이 되었다. 
할아버지 종표(宗杓)와 양조부 종남이 모두 가야금의 명수이었듯이 그도 가야금을 전문으로 하였는데, 특히 음악사․음악이론에도 밝아 악보를 편찬하였고, 악기개량 등에 공이 많았으며, 음악행정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피리의 최순영(崔淳永), 대금의 유의석(劉儀錫) 등과 불비한 관악보를 완성하였고, 함화진(咸和鎭)과 아악부원양성소를 개소하여 아악생을 양성함으로써 아악의 전통이 계속되게 한 공이 크다.  ≪참고문헌≫ 韓國樂器大觀(張師勛, 韓國國樂學會, 1969), 國樂入門(金琪洙, 한국고전음악출판사, 1972).

김영훈

1882~1974. 한의학자. 호는 청강(晴崗). 강화도 강화읍 관청리(官廳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나, 15세 되던 해에 눈병을 앓은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명의(名醫) 서도순(徐道淳)의 제자가 되어 의학을 공부하였다. 
1904년에 최초의 근대적 한의과대학인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가 설립되어 교수를 뽑자 이에 지원해서 수석 합격하여 도교수(都敎授)가 되었다.
뒤에 이 학교의 실제적 후원자였던 고종이 퇴위하여 동제의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전의J32488(典醫J32488) 출신이며 당시 한의학의 원로였던 홍철보J42762(洪哲普J42762)․장용준(張容駿)․최규헌(崔奎憲) 등과 함께 팔가일지회(八家一志會)를 만들어 한의학의 부흥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15년에는 전국의생대회(全國醫生大會)를 개최하여 전국 규모의 한의사단체를 결성했으며, 한의학 전문잡지인 ≪동의보감 東醫報鑑≫을 창간하였다.
1924년에는 학술단체인 동서의학연구회(東西醫學硏究會)를 조직하여 학술 진흥에 힘을 기울였고, 1937년에는 경기도립의생강습소(京畿道立醫生講習所)를 열어 한의학의 후진을 양성하는 등 일제시대 한의학 부흥에 앞장섰다.
광복 후에는 구왕궁(舊王宮) 명예전의(名譽典醫), 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서울한의과대학(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전신)의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 축하식전에서 건국국민훈장을 수여받았다. 1974년 7월 향년 93세의 일기로 작고하였다.
저서로는 ≪수세현서 壽世玄書≫가 있고, 그의 문인(門人)인 이종형(李鍾馨)이 유고를 모아 편한 ≪청강의감 晴崗醫鑑≫이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의학입문 醫學入門≫에 정통하여 현재까지도 ≪의학입문≫ 연구자로 이름이 높다. 유족으로는 포르투갈 대사․브라질 대사․로스앤젤레스 총영사 등을 역임한 김기수(金琦洙) 등 1남 3녀가 있다. ≪참고문헌≫ 韓國東醫學史(李鍾馨, 한국현대문화사대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7), 晴崗醫鑑(金永勳 저, 李鍾馨 편, 成輔社, 1984).

김용원

1892(고종 29)~1934.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대덕(지금의 대전광역시) 출생. 일명 김중옥(金仲玉). 호는 강산(剛山).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J12851(金九J12851) 아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이해 9월부터 1920년 6월까지 황푸군관학교(黃璵軍官學校)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고,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귀국하여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大同團)에 입단하여 의왕(義王, 李堈)의 탈출에 조력한 바 있었다. 
1919년 8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임시정부가 조직한 바 있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에 가담하여 군자금 조달에 앞장섰다. 1923년 7월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에 활약하다가,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8개월간 복역 후 병으로 인하여 형집행정지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일대에서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수형기록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34년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그러나 옥중에서의 병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죽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白凡逸志,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김용제

1878(고종 15)~1931. 독립운동가. 일명 용제(容濟). 황해도 안악 출신. 1906년 애국단체 면학회J07272(勉學會J07272)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J07311(安昌浩J07311)가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 활동하는 한편, 양산학교J08409(楊山學校J08409) 교사로서 애국청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총회J57560(海西敎育總會J57560)를 송종호(宋鍾昊)․김구J12851(金九J12851) 등과 결성하고 민족교육 진흥에 힘썼다. 1911년 일제가 우리 나라 민족지도자를 탄압하기 위하여 조작한 이른바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다.
1913년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피하며 동지들과 연락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조직을 목적으로 시행한 연통제J12735(聯通制J12735)에 가담, 안악군참사(安岳郡參事)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 2(國史編纂委員會, 1966), 독립운동사 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독립운동사자료집 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김용준

1881(고종 18)~1936. 독립운동가. 일명 용준(用俊). 경기도 수원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면(洪冕) 등이 전개한 수원군 송산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26일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1백여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고, 사강장날인 28일에도 홍면 등과 함께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일본경찰이 홍면 외 2명을 붙잡아 꿇어앉혀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홍면이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는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그 광경을 본 군중의 분노는 일시에 폭발하였고, 도주하는 일본경찰을 홍면의 동생 준옥(준玉)과 김명제 (金命濟)․김교창J47361(金敎昌J47361)․왕광연J44155(王光演J44155)․문상익J07731(文相翊J07731) 등과 함께 추격하기도 하였다. 
만세운동을 계속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김용진

1884(고종 21)~1937. 독립운동가. 황해도 안악 출신.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반일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김구J12851(金九J12851)․최명식J21186(崔明植J21186) 등 여러 동지와 함께 안악지구 신민회(新民會) 및 면학회J07272(勉學會J07272)를 설립하고 운영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1년 1월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미수라는 급조된 사건인 안명근사건J49765(安明根事件J49765)의 연루자로 김구․최명식 등과 같이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구와 최명식에게 여비 3백원을 주어 중국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하고 국내에 남아 있는 그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자신이 경영하는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의 자금으로 후원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최명식이 국내의 연통제J12735(聯通制J12735) 조직의 임무를 띠고 들어오자 황해도일대를 비밀리에 순방하면서 연통제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통제가 폐지될 때까지 연통제 조직을 확대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기밀문서의 전달 및 독립운동상황의 정보교환 등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白凡逸志, 崔明植略傳,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김유성

1849(헌종 1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J11680(淸風J11680). 자는 경소(景韶). 아버지는 형조판서 원식(元植)이며, 유행(裕行)의 동생이다. 1876년(고종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7년 정언(正言)이 되었고 1879년에는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가 되었다. 1890년에는 수재(水災)를 심하게 입은 함경도 영흥부사(永興府使)로 가서 위유사(慰諭使)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2년에는 대사성에 올랐으며, 1894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곧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개편된 지방관제에 따라 함흥부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중추원 1등의관이 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다. 
1899년에는 종2품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됨과 동시에 칙임관 4등을 받았다. 1907년 8월에는 다시 궁내부특진관․칙임관 3등에 올랐으며, 1910년 8월에는 규장각전제관(奎章閣典製官)에 있으면서 훈3등(勳三等)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備邊司謄錄, 國朝榜目, 高宗時代史 1~6 (國史編纂委員會, 1970~1972).

김윤식

1835(헌종 1)~1922. 조선 말기의 관료․문장가. 본관은 청풍J11680(淸風J11680).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서울 출신. 증 이조판서․좌찬성 익태(益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숙부인 청은군(淸恩君) 익정(益鼎)의 집이 있는 양근J07185(楊根J07185)에서 성장하였다. 유신환J45138(兪莘煥J45138)․박규수J12728(朴珪壽J12728)의 문인이다.
1865년(고종 2) 음관(蔭官)으로 출사하여 건침랑(健寢郎)이 되었다.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암행어사․문학․시강원 겸 사서․부응교․부교리․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정부의 개항정책에 따라 영선사J12736(領選使J12736)로서 학도와 공장J12684(工匠J12684) 38명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들을 기기국(機器局)에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였다. 한편, 연미사를 위하여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7차에 걸친 회담을 하고, 그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청나라 체류 중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J21149(魚允中J21149)과 상의,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흥선대원군을 제거할 수 있는 방략 등을 제의, 청나라의 개입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오장경(吳長慶)․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된 후인 그 해 9월 종사관 김명균J48529(金明均J48529)과 함께 재차 청나라로 건너가 학도․공장 들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또한 각종 기기를 도입, 기기창J08237(機器廠J08237)을 설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군란 수습 후 중용되어 호군J13876(護軍J13876)․강화부유수에 임명되고, 규장각직제학을 겸임하였다. 강화부유수로 있을 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도움으로 500명을 선발하여 진무영J14768(鎭撫營J14768)을 설치하였다. 이 영군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중국식으로 훈련되었으며, 갑신정변 때 상경하여 궁중 수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통리내무아문J26609(統理內務衙門J26609)이 설치되자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協辦統理內務衙門事務)로 임명되었고, 그 뒤 이 아문의 이름이 바뀌자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로 임명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J06300(金弘集J06300)․김만식j00764(金晩植j00764)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친군좌우영병(親軍左右營兵)이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 정변을 끝냈다. 
정변 이후 병조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대외 관계를 담당하였다. 독판 재임중 민씨 척족과 친일 급진 개화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도모하여 실현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새로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부임하자 그의 친청노선(親淸路線)은 한층 굳어졌다.
1886년 4월부터 반대파의 모략이 거세져 어려운 입장에 처했는데, 1887년 5월 부산첨사 김완수(金完洙)가 일상사채(日商私債)에 통서(統署)의 약정서를 발급하였다는 죄목으로 면천J03879(沔川J03879)으로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지내야 했다. 1894년 석방되었고, 강화부유수로 임명된 것은 그 다음해 6월이었다.
그가 등용된 것은 청일전쟁 직전으로, 일본 세력의 지원으로 민씨 척족 세력이 제거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 등용되어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갑오경장에 간여하였고 독판교섭통상사무에 임명되었다. 그 해 7월 정부기구의 개편에 따라 외무아문대신(外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다.
갑오경장의 입안자로 참여하는 한편, 일본에 의해 국권이 잠식당하는 굴욕적인 모든 조약이나 조처에 순응하였다. 1896년(건양 1) 2월(이하 양력임.) 아관파천사건이 일어나자 외무대신직에서 면직되었고, 을미사변과 관련해 탄핵을 받고 제주목(濟州牧)으로 종신 정배되었다.
1898년 1월 제주목에 유배되었으나, 그 뒤 민당(民黨)과 천주교인의 대립으로 민요(民擾)가 일어나자 1901년 6월 다시 지도J61121(智島J61121)로 이배되었다. 
1907년 7월 일진회J12744(一進會J12744)의 간청과, 정부의 70세 이상자에 대한 석방 조처에 따라 10년 만에 해금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뒤 황실제도국총재(皇室制度局總裁)․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등을 맡아 보았다. 1908년 정부가 주는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다.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강구회J47321(講舊會J47321)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이 회가 주최가 되어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가지는 등 정치 활동도 하였다. 
한편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해지자 기호학회(畿湖學會) 회장, 흥사단J53047(興士團J53047) 단장, 그리고 교육구락부(敎育俱樂部) 부장, 대동교총회(大同敎總會) 총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반도강점 후 일제가 중추원부의장직과 작위, 연금 등을 주었으나 이를 거절, 후에 고종과 순종의 권유에 따라 작위는 받았다. 1916년에는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두문 불출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었을 때 위호의정(位號議定)에 있어서 일본측이 󰡐전한국(前韓國)󰡑이라는 󰡐전(前)󰡑자를 고집하자 이에 항의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용직J44280(李容稙J44280)과 더불어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 對日本長書〉를 제출하여 저항하였다. 
저서로는 ≪운양집≫을 비롯해 ≪임갑령고 壬甲零稿≫․≪천진담초 天津談草≫․≪음청사 陰晴史≫․≪속음청사 續陰晴史≫ 등이 있다. ≪참고문헌≫ 高宗時代史(國史編纂委員會, 探求堂, 1970), 領選使行에 대한 一考察-軍械學造事를 中心으로-(權錫奉, 歷史學報 17․18, 1962), 大院君被囚問題에 대한 再檢討 上․下(權錫奉, 人文學硏究 3․4, 1976․1977), 金允植全集解題(權錫奉, 金允植全集, 亞細亞文化社, 1980), 친일파 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김윤정

1869(고종 6)~? 일제강점기의 관리. 서울 출신. 한말 학부 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1903년 콜로우드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뒤 주미공사관의 서기생(書記生)․참서관 (參書官)․대리공사 등을 거쳤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주미공사관이 폐쇄됨에 따라 귀국하여 태인군수․인천부윤을 지내고, 퇴관 후에는 인천실업학교장을 맡았다. 1910년 전라북도참여관에 임명되었으며, 1921년에 경기도참여관으로 전임되었다. 
1925년 고등관 2등 충청북도지사, 곧이어 고등관 1등으로 승급한 뒤 이듬해 도지사직에서 물러났다. 이해에 중추원칙임참의에 임명되어 1945년까지 6회를 중임하고, 1945년 6월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한편, 실업계에서도 활동하여 조선상사주식회사의 사장을 지냈고, 1940년 10월 전시 황민화정책 때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에 임명되었다. 
김규식(金奎植)․하난사J23561(河蘭史J23561) 등과 같은 시대의 도미유학생으로서 한말의 개화인이었으며, 딸 윤고라(尹高麗)는 한말 학무국장 윤치오j03551(尹致旿j03551)의 부인으로 한국 최초의 양장여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舊韓國官報, 總督府官報.

김이직

1875(고종 12)~1920. 독립운동가. 일명 이직(利稷). 서울 출신. 1900년 고향에서 명신학원(明新學院)을 설립하여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1904년 한국군관으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독립운동 근거지의 하나인 노령 연해주(露領沿海州) 니콜라예프스크로 망명하였다. 
니콜라예프스크에 정착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출신인 나성오(羅成五) 등을 초빙하여 동포들의 보건을 위한 자선사업을 실천하는 한편, 그의 아들 인성(麟聲)으로 하여금 젊은 독립운동가와 혈맹을 맺어 항일무력항쟁에 정진하도록 하였다. 
군자금 모금과 무기입수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를 뒷받침해준 사람이 최재형J47589(崔在亨J47589)이었다. 또한, 니콜라예프스크재류 한인민단(韓人民團)의 초대단장을 역임하면서 교육구제사업에 힘을 다하는 한편, 민족사상고취에도 진력하였다. 
그러나 1918년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대에 의해 최재형․엄주필J49910(嚴柱弼J49910)․황경섭(黃景燮) 등과 함께 붙잡혀서 1920년 4월 7일 총살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獨立新聞(上海版), 韓國獨立運動之血史,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김정길

1875(고종 12)~1964. 판소리의 명창 겸 창극명인. 전라남도 영광 출생. 정창업(丁昌業)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조선 말기 판소리의 가선(歌仙)으로 꼽히던 박기홍(朴基洪)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닦았다. 
1907년에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910년 해산된 뒤에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그는 매우 뛰어난 명창이었지만, 지방에 묻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심청가〉와 〈적벽가〉에 매우 능하였으며, 특히 〈적벽가〉에서 󰡐조자룡이 장판교싸움에서 신출귀몰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소리를 이어받은 제자는 없다.  ≪참고문헌≫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唱劇史硏究(朴晃, 白鹿出版社, 1976).

김정길

1875(고종 12)~1964. 판소리의 명창 겸 창극명인. 전라남도 영광 출생. 정창업(丁昌業)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조선 말기 판소리의 가선(歌仙)으로 꼽히던 박기홍(朴基洪)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닦았다. 
1907년에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910년 해산된 뒤에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그는 매우 뛰어난 명창이었지만, 지방에 묻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심청가〉와 〈적벽가〉에 매우 능하였으며, 특히 〈적벽가〉에서 󰡐조자룡이 장판교싸움에서 신출귀몰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소리를 이어받은 제자는 없다.  ≪참고문헌≫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唱劇史硏究(朴晃, 白鹿出版社, 1976).

김주현

1844(헌종 6)~?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재연(在衍)의 아들로 재현(在顯)에게 입양되었다. 1880년(고종 19)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 세자익위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홍문관응교로서 민비의 장례를 준비하고 흥선대원군 하야에 반대하였으나, 섬에 유배된 박우현J42389(朴遇賢J42389)을 석방하라는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반대하였다. 
민씨정권이 다시 수립되었지만, 등용되지 못하다가 1880년대 후반에야 이조참의․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관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건양․광무연간에 이르러 궁내부특진관․봉상사제조․장례원경 등에 임용되었다. 1902년 내부대신이 되어 의정 윤용선J16864(尹容善J16864) 등과 함께 이용익J17452(李容翊J17452)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음해 10월까지 내부대신으로 재직하였지만, 의정 이근명(李根命)이 수령 임명을 주의하라는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70여 자리를 두고 물의가 분분하자 파면할 것을 주청하였다가 면관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김찬수

1882(고종 19)~?.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대한제국시대에 참위(參尉)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대한제국시대의 장교를 영입하기 위하여 파견한 이성규(李成奎)를 따라 북간도로 망명하여, 1920년 8월 20일 경 북로군정서에 입영하였다. 
1920년 9월 대대장 김사직(金思稷) 휘하의 제3 중대장에 선임되어, 1920년 10월 21일 아침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천수동(泉水洞)에서 사령관 김좌진 휘하의 제3중대장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동월 26일까지 전개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9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獨立有功者功勳錄 14(國家報勳處, 2000).

김창환

1854(철종 5)~1927. 조선 고종․순종 때의 판소리 명창.전라남도 나주 출생. 명창이었던 이날치j05539(李捺致j05539)․박기홍j04253(朴基洪j04253)과는 이종간이다. 어려서부터 함평에서 서편제(西便制)의 명창인 정창업j05241(丁昌業j05241)에게서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1908년 7월 원각사가 설치되자 주석J57505(主席J57505)으로 있으면서 많은 가객들을 거느리고 창극을 공연하였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J25665(議官J25665) 벼슬을 제수받았다. 1909년 11월 원각사가 폐쇄되자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전라도 출신의 명인 및 명창을 규합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기자 방성통곡하고 경상남도 남해에서 협률사를 해산하여 단원들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1919년 고종이 죽자 고향집에서 후원에 사당을 신축하여 고종의 사진을 모시고 근신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74세로 죽었다.
각종 고전에 정통하였고 그 이전 명창들의 법제J19033-00(法制J19033-00)에 대한 견문도 많았다. 또한, 소리는 서편제인 만큼 애원처절(哀怨悽絶)하여 감상적인 계면조를 주로 한 판소리를 했으며, 소리도 잘했지만 풍채가 좋고 발림을 잘하여 관중들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더늠(판소리 명창이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짠 대목)으로는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가 있는데, 음악적인 구성이 뛰어나 오늘날 여러 명창들이 이 대목을 그의 더늠으로 부르고 있다. 
소리는 오수암(吳壽巖)․김봉학(金奉鶴)․조몽실j05243(曺夢實j05243)에게 이어졌는데, 오늘날에는 정광수(丁珖秀)가 〈춘향가〉와 〈흥보가〉를 이어받고 있다. 
판소리 중 〈흥보가〉의 󰡐제비노정기󰡑․󰡐집터 닦는 대목󰡑, 〈춘향가〉 중 󰡐과거장󰡑, 그 밖에 〈농부가〉와 〈성주풀이〉가 음반으로 남아 있는데, 이 음반은 서편제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 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김채만

1865(고종 2)~1911. 조선 고종․순종 때의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에서 태어났고, 뒤에 광주 속골(지금의 효덕동)에서 살았다. 철종 때 명창으로 이름이 높던 이날치(李捺致)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본래 목이 좋지 못하였으나 끈질긴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명창이 되었다. 1907년 창극단 협률사J23588(協律社J23588)에 참가하여 창극을 한 적도 있으나 판소리에 주력하였다.
 소리에서는 극도로 장식적인 선율을 구사하는 정교한 기법을 썼다. 시원시원하게 청중을 휘어잡는 송만갑J04660(宋萬甲J04660)과는 대조적으로 쉰 목소리와 같이 컬컬하게 나오는 수리성에 양성이 낀 성음으로 극단적인 서편제(西便制)의 판소리를 개척하였으나, 47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일부밖에 전승되지 못하였다.
그의 장기는 〈심청가〉로 당대 독보였다. 특히 〈심청가〉의 첫머리인 󰡐심봉사를 소개하는 대목󰡑은 그의 특장으로, 박화섭 (朴化燮)을 통하여 한승호(韓承鎬)에게 그 더늠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김정문(金正文)․한성태(韓成泰)․박종원(朴宗元)․공창식(孔昌植)․박동실(朴東實)․박화섭 등이 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3),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1).


김택영

1850(철종 1)~1927.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화개J14801(花開J14801).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경기도 개성 출생. 개성부J17186(開城府J17186) 분감역(分監役) 익복(益福)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소년시절부터 고문과 한시를 공부해서 17세에는 성균초시(成均初試)에 합격했다. 20대 전후에 이건창J21157(李建昌J21157)과 교유를 가지면서 문명(文名)을 얻기 시작했다. 34세인 1883년(고종 20) 김윤식J33579(金允植J33579)의 추천으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첸(張騫)과 알게 되었다. 장첸은 그의 시문을 격찬했다. 
1891년(고종 28)에 42세로 진사가 되고,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지내고 이듬해 낙향했다. 1903년 다시 홍문관 찬집소(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 속찬위원(續撰委員)으로 있으면서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5년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이 해 겨울에 사직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양쯔강(揚子江) 하류 난퉁(南通)에서 장첸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창작활동과 병행해서 한문학에 대한 정리․평가와 역사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승만(李承晩) 등과 관계가 있어 중화민국정부에 우리 나라 독립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썼다.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장핑린(章炳麟)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김택영은 한문학사의 종막을 장식하는 대가로서 시에서의 황현J22627(黃玹J22627)과 문(文)에서의 이건창과 병칭된다. 그는 고문가(古文家)로서 문장일도(文章一道)를 주장하였으며, 우리 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이것이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崇≫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화려하여 신운(神韻)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중국 망명 이후에는 주로 우국적인 시작품을 많이 썼다. 특히, 망국의 한을 작품 속에 담아 내어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 하였다. 〈오호부 嗚呼賦〉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문은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과 박지원J32097(朴趾源J32097)의 문장을 좋아하여 웅혼한 기상이 있다. 저서로는 ≪한국역대소사 韓國歷代小史≫․≪한사경 韓史炬≫․≪교정삼국사기 校正三國史記≫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창강고 滄江稿≫와 ≪소호당집 韶濩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近韓漢文學에 對한 一考察(權五惇, 人文科學 5), 開化期의 漢文學(閔丙秀, 국어국문학 68․69, 1975), 寧齋 李建昌과 滄江 金澤榮의 古文觀(金都鍊, 한국학논총 3, 국민대학교, 1980), 창강 김택영론(오윤희, 동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1), 김택영전 연구(이상필, 한국정신문화연구원부설한국학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82).

김한

1888(고종 25)~? 사회주의운동가. 일명 제관(霽觀), 자홍(子弘), 상엽(相燁). 서울 출신. 대한제국에서 탁지부 주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1912년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후 상해(上海), 텐진(天津) 등지에서 반일 운동에 참가했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법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산하 임시사료편찬소 위원이 되었다.
1920년 5월 서울에서 원우관(元友觀) 등과 함께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을 결성했고 다음해 5월에 󰡐조선공산당󰡑 활동을 재개했다. 이 무렵 천도교의 핵심 인물인 최동희(崔東曦)를 중심으로 일어난 천도교 혁신운동에도 관여했다. 1920년 6월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 사교부원이 되었다. 1921년 1월에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2년 1월 󰡐조선공산당󰡑의 합법 사상 단체로 무산자동지회를 결성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김윤식(金允植) 사회장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2월 2일 원우관 등과 함께 재동경신인동맹(在東京新人同盟) 명의로 〈민중의 격(檄):소위 김윤식 사회장이란 유령배(幽靈輩)의 참칭(僭稱) 사회장을 매장하라〉라는 글을 발표했고 다음날에는 ≪조선일보≫에 〈고김윤식 씨 사회장 반대에 즈음하여 이 글을 일반민중에게 보낸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으나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다.
같은 해 3월 사상단체 무산자동맹회 결성에 참여했다.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사기(詐欺)공산당󰡑 사건 관련자를 제명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되자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탈퇴했다. 이무렵 공산주의 단체 통일 운동에 참가해 그 결과 결성된 󰡐중립당󰡑의 위원이 되었다. 9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0월 조선인 출가(出稼)노동자조사회 결성에 참여했고 12월에는 경성양화직공 파업을 지원했다.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27년 4월 출옥했다. 1928년 말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 결성에 참여했다.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 겸 혁명자후원회(모쁠)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신간회 복대표(複代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2월 소비에트러시아로 갔으나 그 뒤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고 사형당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창작과비평사, 1996),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의 형성(임경석, 역사와 현실 28, 1998).

남궁영

1888(고종 25)~? 친일파. 일제시기 도지사 경력자 42명 중 엘리트 출신 7~8명 가운데 한 사람인 대표적인 관료 출신이다. 한말 국비생으로 1914년에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정치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 진도 군수를 초임직으로 하여, 1921~1926년에 이르기까지 총독부 학무국과 식산국 사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에 민정시찰 사무관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소수이지만 조선인 관리들이 총독부 사무관으로 중앙부서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즉 1921년 2월 총독부 당국은 관제를 고쳐서 감찰관직과 민정시찰 사무관직을 설치하면서 여기에 조선인 고등관을 특별 임용하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바로 이때 당시 함평(咸平) 군수로 있던 남궁영도 본부 사무관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이 때에 남궁영 외에도 장헌식J44343(張憲植J44343)․이범익(李範益)․홍승균(洪承均)․이종국(李鍾國) 등이 총독부 사무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1927~1930년까지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참여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남궁영은 1931년에 충청북도 도지사를 거쳐서, 1935~1939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일제의 조선인 고급 관료로서는 가장 높은 직책까지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일제침략과 친일파(임종국, 청사, 1982 청사), 일제하의 한국인 관리들(이기동, 신동아 2월호 1985), 제1공화국의 일제친일세력 충원(오성진, 친일파Ⅲ, 학민사, 1993), 일제하 조선인 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문영수

1867(고종 4)~? 서도소리의 명창. 평양 출신. 이정화(李正華)와 함께 평양 날탕패의 주역이었다. 서울에 와서 서도소리를 퍼뜨려 박춘재(朴春載)․최정식(崔貞植)․박인섭(朴仁燮)․김태운(金泰運)․유개똥〔柳開東〕․김경호(金慶鎬)․원경태(元慶兌) 등 경기소리의 명창들이 그에게 서도소리를 배웠다, 
이들은 그뒤 경․서도창(京西道唱)의 명창들이 되었다. 그는 또 원각사J23457(圓覺社J23457)에서 박춘재와 함께 재담 서도소리로 이름을 떨쳤다. 천부적인 높은 청으로 서도소리 된목을 들고 나가는 데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文藝總鑑(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6).

민영환

1861(철종 12)~190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J33340(驪興J33340).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서울 출신. 호조 판서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J59854(童蒙敎官J59854)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J48312(正字J48312)․검열․설서J00512(說書J00512)․수찬J42633(修撰J42633)․검상J28555(檢詳J28555)․사인J33705(舍人J33705)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1882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전환국 총판(典珤局總辦)․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내무 협판․개성 유수․해방 총관(海防總管)․친군연해 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한성 우윤(漢城右尹)․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상리국 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 판서․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85년 명성황후J12727(明成皇后J12727)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그는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J21151(尹致昊J21151)․김득련(金得鍊)․김도일(金道一) 등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上海)․나가사키(長崎)․동경J04186(東京J04186)․캐나다․뉴욕․런던․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이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그 뒤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897년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손병균(孫炳均)․김병옥(金秉玉)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 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여행으로 각국 특히 구미제국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교J18097(鄭喬J18097)는 지금 정부 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J13648(韓圭卨J13648)과 민영환밖에 없므으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까지 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내부 대신 겸 군부 대신을 지냈으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J26312(皇國協會J26312)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참정 대신․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그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J16077(元帥府J16077)의 회계국 총장(會計局總長)․장례원경(掌禮院卿)․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헌병사령관을 등을 역임하였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잠시 참정 대신․외무 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 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J17421(趙秉世J17421)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J15532(批答J15532)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 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 육의전)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J46507(洪萬植J46507), 학부 주사 이상철J13446(李相喆J13446),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후하게 예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 관작이 추증되었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비원 앞으로 옮겨졌다. 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천추범 海天秋帆≫․≪사구속초 使歐續草≫․≪천일책 千一策≫ 등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疏)․차(箚)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閔忠正公遺稿, 大韓每日申報, 韓國季年史, 梅泉野錄, 騎驢隨筆, 大韓帝國官員履歷書.
박기홍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 고종 때의 판소리 명창. 나주 출신. 명창 이날치(李捺致)와 김창환J00253(金昌煥J00253)과는 이종간이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자라면서 박만순(朴萬順)으로부터 배우다가, 뒤에 정춘풍(鄭春風) 밑에서 다년간 판소리를 수학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학식이 있고 재주가 있어서 판소리뿐만 아니라 정악J10547(正樂J10547)도 잘하였고, 거문고와 가야금․피리․젓대도 일가를 이루었다. 서울에 올라와 대원군의 인정을 받아 오수경(烏水鏡)을 하사받았고 참봉의 직계를 받았다. 
학식과 여러 음악에 정통하였으므로 판소리 또한 동편제(東便制)의 전통인 우아하고 정대한 소리를 하여 󰡐가선(歌仙)󰡑의 칭호를 받았으나, 그의 소리를 이은 제자들이 많지 않았다.
동편제 명창으로서 동편제의 전통을 끝까지 지킨 종장(宗匠)이지만, 최후의 소리가 전하여지는 것이 없고 음반으로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순종 때의 명창인 김봉문(金奉文), 후의 김정길(金正吉)․박녹주(朴綠珠)․조학진(曺學珍) 등은 그의 문도(門徒)의 길을 거쳐간 명창들이다. 일생을 신선같이 온화하고 근엄하게 살았다 한다.  〈춘향가〉와 〈적벽가〉를 잘하였고, 특히 〈적벽가〉 중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장판교대전(長板橋大戰)󰡑은 신출귀몰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박덕업

1889(고종 26)~1972. 〈동래야류 東萊野遊〉의 명연희자(名演戱者). 동래 출신으로 서당에서 글을 배웠고, 20세 전후부터 노인들을 따라 탈춤을 배웠으며, 30세부터 본격적으로 연희하였다고 한다. 
그는 특히 말뚝이역의 덧뵈기춤의 마지막 명수였고, 한때 〈수영야류 水營野遊〉의 말뚝이춤 명수였던 조두영(趙斗榮)으로부터도 말뚝이춤을 배웠다고 전한다. 1967년 〈동래야류〉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될 때 말뚝이역의 예능보유자로 함께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韓國의 假面劇(李杜鉉, 一志社, 1979).

박동환

1888(고종 25)~1965. 〈양주별산대놀이〉의 명연희자. 농부의 아들로 양주구읍에서 출생하였고, 무학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박준섭(朴俊燮)과 동배로서 주로 석성묵(石性黙)과 이윤서(李允西)로부터 산대춤을 배운 그는 특히 훤칠한 키에 노장과 취발이역을 잘 하였다. 
1957년 11월 한국연극학회 주최로 이화여자고등학교 노천극장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하였을 때 김성태(金星泰)․박준섭과 더불어 명연희자로서의 솜씨를 보였다. ≪참고문헌≫ 韓國假面劇(李杜鉉, 文化財管理局, 1969).

박만순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 헌종~고종 때의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고부군(古阜郡)출신. 당시의 명창인 최승학(崔昇鶴)과는 동서간이다. 
당시 8명창으로 꼽히던 주덕기(朱德基)에게 판소리를 잠깐 배우다가 명창 가운데 제일의 가왕(歌王)으로 치던 송흥록J04666(宋興祿J04666)에게 10여년간 판소리를 배우고 나서 수년간 수련 끝에 전주대사습에 나가서 소리한 뒤부터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송흥록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창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순조 때의 8명창 이후로 첫손 꼽히는 명창으로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선달J08059(先達J08059)이 제수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양성(陽聲)으로 맑고 밝은 성음이며, 소리는 우조J05535(羽調J05535)를 주로 하여 짧고 진중하고 정대한 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진중한 아래 음역뿐만 아니라 매우 높은 음역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였고, 발림과 같은 것이 뛰어나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였다 한다. 
당시 그 앞에서 감히 소리로 겨룰 명창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뛰어나지 않은 대목이 없으나, 특히 〈춘향가〉 가운데 󰡐사랑가󰡑․󰡐옥중가󰡑와 〈적벽가〉 가운데 󰡐화용도J24331(華容道J24331)󰡑와 󰡐장판교대전(長板橋大戰)󰡑대목을 잘하였다. 
그의 더늠 가운데 󰡐옥중가󰡑 중의 󰡐춘향의 몽유(夢遊)󰡑대목이 송만갑J04660(宋萬甲J04660)․정정렬J10552(丁貞烈J10552)에 의해서 방창(倣唱)하여 전하고, 〈수궁가〉 중의 󰡐토끼화상 그리는 대목󰡑은 그의 제자인 김찬업(金贊業)을 통해서 송만갑․전도성J10533(全道成J10533)․신명학(申明鶴) 등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그의 다른 제자로는 고종 때의 명창인 오끗준․유공렬(劉公烈) 등이 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1).

박사화

1880(고종 17)~1912. 조선 말기의 의병장. 전라남도 나주출신. 1908년 전라남도 함평(咸平)에서 일어난 심남일(沈南一)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 그는 1908년 10월 전라남도 능주J17290(綾州J17290)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909년 1월 말 나주군 욱곡면(郁谷面) 구천동(九川洞)과 흥동(興洞)에서 영산포 제1․제2 兩區聯合討伐隊와 접전하였고, 동년 6월에는 영암군 북이종면(北二終面) 이목동(梨木洞) 등지에서 영산포와 나주 분견소의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09년 여름 1909년 여름 일본군의 전라도지역 의병에 대한 대토벌 때문에 군세(軍勢)가 약화되고 활동이 여의치 않자 동년 7월 영산포 분대장 오하라(大原)대위에게 편지를 보내 회견을 요청한 후, 부하들의 구명을 위해 자수하였다. 
그러나, 의병항쟁의 계속을 위해 곧 탈출한 그는 이후 전라남도 노구^영암 부근에서 부하 50여명을 이끌고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9년 10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4월 13일 광주지청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동년 5월 19일 공소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1912년 순국하였다. 199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2집(국가보훈처), 조선독립운동 제1권(김정명, 국가보훈처), 獨立有功者功勳錄(국가보훈처, 2000).

박영철

1879(고종 16)~1939.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전라북도 전주 출신. 본관은 충주(忠州). 전주삼남학당에서 일어를 배우다가 고지마 학당장의 권유로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구한국 학부유학생으로 도일하였다. 
토쿄(東京) 세이죠(成城)학교를 마친 후 일본 근위기병연대에 있다가 1902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이듬해인 1903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근위기병연대 견습사관을 거쳐 동연대 제2중대 통역으로 러일전쟁에 종군하고 1904년 3월에 육군 기병참위에 임명되었다. 그 뒤 육군무관학교와 유년학교 교관을 역임했고, 1906년에 구한국 기병참령이 된 후 시위혼성여단 참모, 군부대신 부관, 시종무관을 역임했다. 그 뒤 구한국 군부 소속으로 복직이 되어 일본군 헌병대에 복무하였다. 
강제병합 이후에 일본군 기병소좌로 편입된 후 1912년에 예편하였다.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1917년에 익산군수로 재직할 당시에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자 전북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함북 참여관을 지냈으며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전북 참여관을 거쳐 1925년에는 강원도지사가 되었다. 1927년에 함북지사를 지낸 후 퇴관한 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삼남은행장을 지냈다. 
삼남은행이 상업은행으로 흡수되자 상업은행에서 부은행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미곡창고조선철도․조선맥주회사 취체역․산업은행 두취, 경성상공회의소 특별 평의원을 역임했다. 
또한 1927년에 퇴관한 이후 친일단체인 동민회J04028(同民會J04028)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38년에 조선총독부가 제2의 중추원으로써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총 97명 가운데 조선인 위원은 11명이었다. 이 때 박영철은 박중양(朴重陽), 김연수(金咎洙) 등과 함께 위원이 되어 총독의 자문사항을 심의했다. ≪참고문헌≫ 실록 친일파(임종국, 돌베개, 1991), 친일파99인 1(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1993),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박영철

1879(고종 16)~1939.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전라북도 전주 출신. 본관은 충주(忠州). 전주삼남학당에서 일어를 배우다가 고지마 학당장의 권유로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구한국 학부유학생으로 도일하였다. 
토쿄(東京) 세이죠(成城)학교를 마친 후 일본 근위기병연대에 있다가 1902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이듬해인 1903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근위기병연대 견습사관을 거쳐 동연대 제2중대 통역으로 러일전쟁에 종군하고 1904년 3월에 육군 기병참위에 임명되었다. 그 뒤 육군무관학교와 유년학교 교관을 역임했고, 1906년에 구한국 기병참령이 된 후 시위혼성여단 참모, 군부대신 부관, 시종무관을 역임했다. 그 뒤 구한국 군부 소속으로 복직이 되어 일본군 헌병대에 복무하였다. 
강제병합 이후에 일본군 기병소좌로 편입된 후 1912년에 예편하였다.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1917년에 익산군수로 재직할 당시에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자 전북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함북 참여관을 지냈으며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전북 참여관을 거쳐 1925년에는 강원도지사가 되었다. 1927년에 함북지사를 지낸 후 퇴관한 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삼남은행장을 지냈다. 
삼남은행이 상업은행으로 흡수되자 상업은행에서 부은행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미곡창고조선철도․조선맥주회사 취체역․산업은행 두취, 경성상공회의소 특별 평의원을 역임했다. 
또한 1927년에 퇴관한 이후 친일단체인 동민회J04028(同民會J04028)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38년에 조선총독부가 제2의 중추원으로써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총 97명 가운데 조선인 위원은 11명이었다. 이 때 박영철은 박중양(朴重陽), 김연수(金咎洙) 등과 함께 위원이 되어 총독의 자문사항을 심의했다. ≪참고문헌≫ 실록 친일파(임종국, 돌베개, 1991), 친일파99인 1(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1993),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박영효

1861(철종 12)~1939. 조선 말기의 정치가. 본관은 반남J04461(潘南J04461).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경기도 수원 출신.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고, 큰형은 영교(泳敎), 작은형은 영호(泳好)이다. 1872년(고종 9) 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J26836(上輔國崇祿大夫J26836)에 봉해졌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J12728(朴珪壽J12728)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J12737(吳慶錫J12737)․유홍기J12739(劉鴻基J12739)․이동인J33601(李東仁J33601) 등 실학자,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J12721(金玉均J12721)․서광범J24628(徐光範J24628) 등과 개화당J01838(開化黨J01838)을 조직하였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
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 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 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 초 귀국한 뒤 한성 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J26580(博文局J26580)․순경부(巡警部)․치도국(治道局) 등을 설치하여 신문 발간과 신식 경찰제도의 도입, 도로 정비 사업, 유색의복(有色衣服) 장려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J25643(閔台鎬J25643)․김병시J00769(金炳始J00769)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삼국(三局)은 폐쇄되고 광주 유수 겸 수어사(廣州留守兼守禦使)로 좌천되었다.
이 때 수어영에 연병대(鍊兵隊)를 신설하여 신식 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수구파가 이를 문제삼자 같은 해 12월 사임하였다. 그러나 1883년 그의 노력으로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창간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정계 진출이 계속 좌절되자, 1884년 2월 미국 유람을 계획하였으나, 역시 이뤄지지 못하였다. 이 때 개화당 인사들이 정권 장악을 기도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먼저 미국에 협조를 얻고자 접촉하였으나 미국의 불응으로 어렵게 되자, 다시 일본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군사적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아냈다. 
같은 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親淸守舊派)를 숙청하고 혁신 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 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본국 정부의 집요한 송환 기도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냉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1888년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해 13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상소문에서 봉건적인 신분 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 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 독립과 부국 강병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그의 개화 정치에 대한 이상이 설계되어 있으며, 그 뒤 그가 시행한 개혁 정치는 그것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1893년 말 후쿠자와(福澤諭吉) 등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동경에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사립 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이때 조선 정부의 밀명을 맡고 이일직J27102(李逸稙J27102) 등이 박영효를 암살하고자 친린의숙에 잠입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894년 봄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그 해 8월 귀국하였다. 그 뒤 조선 정부에 친일 세력을 부식하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제2차 김홍집내각의 내부 대신으로 입각하였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은 근대적인 내각 제도의 도입, 지방 제도의 개편, 새로운 경찰․군사제도의 확립 등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조선의 부국 강병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이노우에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 7월 역모를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상소를 통해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1898년에 접어들면서 독립협회J08247(獨立協會J08247)가 강력한 정치 단체로 부상함에 따라 본국에 이규완(李圭完)․황철J30224(黃鐵J30224)․이정길(李鄭吉) 등의 심복을 밀파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자신의 정계 복귀를 기도하였다. 그 결과 독립협회의 신진 소장파가 중심이 되어 그의 소환서용운동(召喚敍用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은 오히려 이를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계획을 바꿔 1900년 7월 본국에 밀파되어 있던 이규완 일행에게 의화군 강(義和君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 음모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음모도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그의 정계 복귀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고, 궐석재판결과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 궁내부 고문 가토(加藤增雄)와 접촉, 공작하여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을 제수받았을 뿐 아니라 성대한 환영식과 연회로 정계 복귀를 할 수 있었다. 
이어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어, 통감 이토(伊藤博文)와 이완용J17416(李完用J17416) 내각의 고종 양위 압력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뒤 군부J15592(軍部J15592)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통모,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국권이 늑탈된 뒤 일제가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조선귀족회회장, 1918년 조선은행이사를 역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J44170(維民會J44170)․동광회J04026(同光會J04026)․조선구락부J46469(朝鮮俱樂部J46469)․민우회(民友會) 등 친일 내지 개량주의적 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 使和記略≫이 있다.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修信使記錄, 韓國痛史(朴殷植, 大同編譯局, 1915), 韓國獨立運動血史(朴殷植, 維新社, 1920), 使和記略(朴泳孝, 釜山大學校史學會, 1958),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細井肇 編, 日韓書房, 1910), 朴泳孝와 그의 上疏硏究 序說(田鳳德, 東洋學 8, 1978), 朴泳孝の民本主義․新民論․民族革命論(靑木功一, 朝鮮學報 80․81, 1976․1977).

박유전

1835(헌종 1)~1906. 조선 말기 철종․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에서 살았다. 목청이 뛰어나게 고와서, 타고난 명창의 소리인 천구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서 선달J08059(先達J08059) 벼슬을 받았고 오수경(烏水鏡)과 금토수를 하사받았다 한다. 그는 판소리 선율을 세마치장단과 여러 장단을 운용하여 정연하고 변화 있는 부침새의 기교를 부려 정교하게 짜아 새로운 양식을 개발하였는데, 뒤에 그의 호를 따서 강산제J00884(江山制J00884)라 불렀다. 
그런데 이 󰡐강산󰡑이라는 말은 그가 살던 마을 강산리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흥선대원군이 그의 소리를 󰡐제일강산(第一江山)이다.󰡑라고 평하고 호를 󰡐강산󰡑이라 내린 데서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 
섬진강 서쪽의 광주․나주․보성․장흥 등에서 불린 주로 계면조의 맑고도 높으며, 아름답고도 슬픈 기운을 띤 서편제(西便制) 소리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전해질 만큼 판소리 발전에 공이 크다 하겠다. 
제자로 이날치(李捺致)․정재근(鄭在根)이 있는데, 이날치는 그의 소리를 계승한 뛰어난 명창이다. 〈적벽가〉와 〈심청가〉를 잘하였고, 또 〈춘향가〉중에서 〈이별가〉와 〈새타령〉을 뛰어나게 잘하였다. 
그의 소리는 이날치․김채만(金采萬)․공창식(孔昌植)에게 전하여졌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강산제의 소리가 정재근-정응민(鄭應珉)-정권진(鄭權鎭)에 의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박재홍

1892(고종 29)~?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1911년에 판임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충남 노성군 서기로 부임했다. 1924년에 함남 풍산군수를 거쳐 1934년에는 함남 내무부 산업관 이사관을 지냈다. 1939년에는 산업부 상공과 과장을 지냈다. 그뒤 충북지사와 충남지사 등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박종기

1880(고종 17)~1947. 조선 말기와 민족항일기 초기에 활약한 대금산조의 명인. 전라남도 진도 출신. 대금산조를 맨 먼저 지었다고 전한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젓대 시나위를 배운 뒤, 수련을 쌓아 신접한 경지에 이르러, 젓대를 불면 산새가 날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당시 민속악의 명인․명창들과 극장공연을 많이 하였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J05553(朝鮮聲樂硏究會J05553)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민속음악단체를 따라다니며 창극반주를 하는 등 많은 연주활동을 하였다. 
후배 강백천(姜白川)과 친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 대금산조를 짰는데, 그는 김창조(金昌祖) 가야금산조나 백낙준j00217(白樂俊j00217) 거문고산조의 경우와 같이 판소리에 나오는 우조J05535(羽調J05535)․계면조J00921(界面調J00921)․설렁제(드렁조) 등 여러 조를 도입하고, 그것을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장단에 얹어서 체계를 세워 짰다. 
대금산조는 지금까지 음악적으로 보아서 다른 분야의 어떤 산조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산조는 한주환J61701(韓周煥J61701)에게 이어졌으며, 민족항일기에 그의 대금산조를 담은 음반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방공연중에 죽어, 그의 소원대로 진도섬 길가 언덕에 묻혀, 오가는 행인들에게 무언의 위로를 주고 있다.  ≪참고문헌≫ 散調의 系譜와 그 傳來(朴錦愛, 空間 108, 1976).

박중양

1874(고종 11)~?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경기도 양주 출신. 본관은 반남J04461(潘南J04461). 1897년에 관비장학생으로 도일해 1900년에 토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토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 실습했다. 
이어서 1903년에는 동경부기학교에서 은행업무를 익힌 후 졸업했는데, 이 당시에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했다. 
이듬해에 귀국해 일본군의 고등통역관 대우가 되어 러일전쟁에 참전해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였다. 1905년에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 1년간 거처하였다. 1년 후 군부기사가 되어 의친왕이 일본을 방문할 때 수행원(통역)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대구군수 겸 경북 관찰사 서리가 되었다. 
1907년에는 평남 관찰사로 영전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경북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충남 장관을 거쳤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자제단을 발기해 단장을 맡고, 만세반대운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황해도 지사를, 1923년부터 이듬해까지는 충북 지사를 역임했다. 1927년에는 퇴관한 후 1939년까지 중추원 칙임 참의를 지냈다.
1938년에 조선총독부가 제2의 중추원으로써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총 97명 가운데 조선인 위원은 11명이었다. 박중양은 박영철(朴榮喆), 김연수(金咎洙) 등과 함께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총독의 자문사항을 심의했다.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출범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J46486(朝鮮臨戰報國團J46486)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일본이 싱가폴을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싱가폴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친일 활동의 결과, 1945년 4월 3일에 박상준(朴相駿) 등 6명과 함께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9년 1월에 반민특별위원회에 의해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며칠 후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병원에서 몇 개월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참고문헌≫ 親日派群像(민족경제연구소, 삼성출판사, 1948), 실록 친일파(임종국, 돌베개, 1991), 친일파99인 1(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1993),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박지원

1737(영조 13)~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J04461(潘南J04461).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J14759(知敦寧府事J14759)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성장 과정〕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필균이 양육하였다. 1752년(영조 28) 전주 이씨(全州李氏) 보천(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보천의 아우 양천(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으며,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북학사상의 형성과 현실 개혁론〕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으며 이후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J32068(朴齊家J32068)․이서구J28762(李書九J28762)․서상수J29515(徐常修J29515)․유득공J37624(柳得恭J37624)․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J31143(洪大容J31143)․이덕무J38997(李德懋J38997)․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J33224(利用厚生J33224)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J47643(洪國榮J47643)이 세도를 잡아 벽파J32845(僻派J32845)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J24860(朴明源J24860)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와 위의 책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특히 ≪열하일기≫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이 때는 명(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J10578(淸)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이 속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했으나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인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개선책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역대 중국인들이 우리에게 갖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도 서술하였다. 
그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가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그가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J28528(朱子學J28528)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창이었으나 과감한 개혁 의지의 한 표출로 나타났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을 집약한 것이 곧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正德)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는 정덕을 이룬 뒤에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방법과 비교할 때 발상의 일대전환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창하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 제시한 것들은 자기 주장의 완성을 위한 방도이다. 그 방도의 구체적 현상은 정치․경제․사회․군사․천문․지리․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나타났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는 토지개혁정책․화폐정책․중상정책(重商政策) 등을 제창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미래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문학 작품〕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의 사고가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이루며, 문학 작품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시속문(時俗文)의 인정을 의미하며 그렇다고 문승질박한 비평소품(批評小品)을 찬양한 것은 아니다. 고법(古法)을 버리는 이유는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학을 창조하는 데 있었기에 새롭기 위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의 운용, 사실적인 표현 등은 그가 생각한 당대의 현실과 문학과의 관계를 연결짓는 방법들이었다. 이는 그의 문집 속에 수록된 당시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의 문집서(文集序)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일련의 한문 단편(漢文短篇)들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초기에 쓴 9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의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양반전〉의 경우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의 계급이 가지는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다. 다음으로 북경을 여행한 이후에 쓴 두 편의 단편은 여행기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역시 그의 실학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 중에서 〈허생전 許生傳〉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와 함께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한 실례가 될 것이다.  〔저서〕 그의 저술은 모두 ≪연암집 燕巖集≫에 수록되었다. 그가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서, 실제로 1900년 김만식j00764(金晩植j00764) 외 23인에 의해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그의 문집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다. 그의 손자 박규수J12728(朴珪壽J12728)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문집 내용이 갖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그의 저술에서 특이한 점은 문집 대부분이 논설을 중심으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며, 시는 각체를 합해 42수가 전부이다. 이 점에 대해 아들 종간(宗侃)은 〈영대정잡영 映帶亭雜半〉(권제4) 말미에 붙인 부기에서 유실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교유한 문인들의 문집 속에도 그가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하고 있어, 이 역시 유실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이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작품으로는 〈허생전〉․〈민옹전 閔翁傳〉․〈광문자전 廣文者傳〉․〈양반전〉․〈김신선전 金神仙傳〉․〈역학대도전 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 鳳山學者傳〉 등이 있다. 1910년(순종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燕巖集, 燕巖小說硏究(李家源, 乙酉文化社, 1965), 韓國小說硏究(李在秀, 宣明文化社, 1969), 韓國文學思想史試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8), 熱河日記硏究(姜東燁, 一志社, 1988), 朝鮮後期 文化運動史硏究(鄭玉子, 一潮閣, 1989), 燕巖小說의 近代的 性格(金一根, 慶北大學校論文集 1, 1956), 燕巖朴趾源의 生涯와 思想(李家源, 思想界, 1958.10.), 燕巖 朴趾源과 實學思想(柳影黙, 漢陽 1~6, 漢陽社, 1962), 朴趾源-兩班社會의 諷刺家-(朴魯春,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5), 燕巖 朴趾源의 經濟思想(宋柱永, 亞細亞硏究 10~11,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北學派의 實學思想-洪大容의 科學精神과 朴趾源의 實用精神―(琴章泰, 精神文化 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1), 北學思想의 形成과 그 性格-湛軒 洪大容과 燕巖 朴趾源을 中心으로-(유학봉, 韓國史論 8, 서울大學校, 1982), 熱河日記와 淸朝學藝(金明昊, 韓國學報 53, 一志社, 1988), 燕巖 朴趾源の敎育觀-李朝敎育十八世紀相へのその位置てけのたぬに試論-(渡部學, 朝鮮學報 36, 朝鮮學會, 1965), 燕巖 朴趾源の敎育觀-千字文不可讀說とその他にみらねる敎育法思想の進展-(渡部學, 近世朝鮮敎育史硏究, 雄山閣, 1969).

박지홍

1889(고종 26)~1961. 판소리의 명창. 전라남도 나주 출신. 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 박기홍(朴基洪)의 종제이다. 어려서부터 대명창 김창환J00253(金昌煥J00253)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고, 처음에는 박기홍의 고수J01707(鼓手J01707)로 따라다니며 소리를 익혔다. 
뒤에 소리로 전향하여 명창이 되었으나, 지방에서 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기량에 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다. 1920년 이후에는 주로 대구의 권번J00204(券番J00204)에서 판소리 교육에 종사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이었고, 18세 총각 때에는 16세의, 이방J27943(吏房J27943)의 딸과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참고문헌≫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박춘금

1891(고종 28)~? 친일파. 경상남도 밀양(密陽) 출신. 천자문을 읽었을 뿐 무학이다. 한말 가난을 이기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용살이와 자전거 직공, 탄광 갱부, 노무자 등으로 전전하다 거물 폭력배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기반에서 흑룡회(黑龍會) 계열의 장사배(壯士輩 : 낭인) 거두인 도야마(頭山滿)와 알게 되어, 1920년 동경에서 상애(相愛)․공존 공영 정신에 입각한 일선 융화를 표방하며 노동단체 상애회J44125(相愛會J44125)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였다.
상애회는 재일조선인 노무자의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일본 경보(警保) 당국과 총독부 등이 사주, 후원하여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인 노무자의 교화․구제를 위해 직업 소개, 인사 상담, 공동 숙박소 건설 등을 사업으로 표방했으나, 일본인 기업주편에서 노무자를 학대, 압박한 폭력․착취 단체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동경을 비롯한 일대가 폐허가 되자, 일본 치안 당국은 폭동방지책으로 조선인 내습설(朝鮮人來襲說)을 암암리에 유포시킴으로써, 조선인학살사건을 일어나게 하였다. 갈고리․죽창․일본도․낫․곤봉 등 온갖 흉기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조선인 6,000명 내외를 눈에 뜨이는 대로 학살했던 것이다.
이 소동이 가라앉을 무렵 그는 조선인 노무자 300명으로 노동봉사대를 결성하고, 경시총감 아카치(赤池濃)와의 연락하에 시체 처리와 조선인 노무자 색출 및 수용 등의 작업에 종사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일본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기반을 쌓았다. 1928년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확충하고, 전직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재단이사장으로 영입하였다.
한편, 그는 조직을 조선에까지 확대하여, 1924년 4월 지부격인 노동상애회를 서울에 조직하였다. ≪동아일보≫가 친일 각파 유지연맹을 비난하자 송진우J12906(宋鎭禹J12906)를 납치해 폭행하였으며, 1924년 7월의 하의도(荷衣島) 소작쟁의에서도 농민층 청년회를 습격하였다.
이러한 폭력적 기반 위에서 1932년 동경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이후에도 몇 차례 재당선되었다. 조선으로 드나들면서 춘만광산(春滿鑛山) 등 이권사업을 경영하였으며, 중일전쟁 이후 󰡐동양 평화를 위하여󰡑 등의 황민화 시국강연을 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필승 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야마토동맹(大和同盟)을 조직, 이사에 취임했으며, 시간극복대강연회(時艱克服大講演會) 등을 주최해 필승사상을 고취하였다. 그가 당수로 있던 대의당J32893(大義黨J32893)은 광복 50일 전인 1945년 6월 24일에 결성된 것인데, 항일․반전(反戰) 사상을 깨트릴 목적으로 결성된 폭력 단체로 전해진다.
이 단체가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1945.7.24., 부민관)에 강윤국(康潤國)․유만수J09963(柳萬秀J09963)․조문기(趙文紀) 등 세 청년 의사가 장치한 폭탄이 터짐으로써 항일 의거의 마지막 장을 빛나게 하였다. 광복 후에는 일본에 남아서 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朝鮮日報, 민족정기의 심판(革新出版社, 1949).
박춘재

1881(고종 18)~1948. 한말과 민족항일기에 활약한 경기․서도 소리의 명창. 서울 출신. 창배(昌培)의 아들이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으나 자라면서 소리를 좋아하여 처음 홍필원(洪弼元)․홍필광(洪弼光) 형제를 사사(師事)하여 잡가와 선소리를 배웠다.
뒤에 박춘경(朴春景)으로부터 시조와 잡가를, 조기준(曺基俊)으로부터 가사J00866(歌詞J00866) 등을 배워 시조와 잡가 및 선소리로써 대성하였고, 재담의 제1인자이었다. 1900년 궁내부가무별감에 임명되어 어전연주의 특전을 얻었다. 
화려하던 광무대J23355(光武臺J23355) 시절에는 특유의 재담과 가무, 탈놀이의 하나인 발탈〔足假面〕 기예로 명성을 높였다. 그의 소리는 박천복(朴天福)․오영근(吳英根)․김경호(金慶浩)로 이어졌는데, 특히 박천복에 의하여 8․15 광복 후 그의 소리가 전해져 오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歌昌大系(李昌培, 弘人文化社, 1976), 文藝總鑑(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6).

박팔괘

1882(고종 19)~1940. 가야금산조의 명인. 충청북도 청원 출신. 초창기에 독자적인 충청제(忠淸制)의 산조가락을 만들었고, 가야금 병창으로도 유명했다. 
전라남도의 김창조(金昌祖)에서 비롯된 정통적인 가야금 산조의 틀과 판이한 특색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으며, 박상근(朴相根)의 충청제 가락에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國樂槪要(張師勛, 精硏社, 1961), 國樂槪論(張師勛․韓萬榮, 韓國國樂學會, 1975).

박효관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고종 때의 가객J00856(歌客J00856).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 가곡J00857(歌曲J00857)의 명인 장우벽(張友璧)의 법통을 오동래(吾東萊)를 통하여 계승받은 명인이다. 
1876년(고종 13) 제자 안민영(安玟英)과 함께 3대 가집의 하나인 ≪가곡원류≫를 편찬하여 가곡 창(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시하였다. 
남달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운애라는 호를 대원군에게서 하사받았다. 그의 작품 13수가 ≪가곡원류≫에 전하며, 그를 전후한 창의 계보는 [그림]과 같다.  ≪참고문헌≫ 歌曲源流, 韓國傳統音樂의 硏究(張師勛, 寶晉齋, 1975).

배설향

1895(고종 32)~1938. 판소리의 여류명창. 전라북도 남원 출생. 장판개(張判介)의 부인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익혔고 목소리가 아름다워 촉망받았는데, 장판개를 스승으로 모시고 5년간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1915년 장안사J23479(長安社J23479)와 연흥사(演興社)의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창극 〈춘향전〉에서는 춘향역을, 〈흥보전〉에서는 흥보처역을 맡아 창극의 주연명창으로 활동하는 한편 송만갑J04660(宋萬甲J04660)․이동백J05218(李東伯J05218) 같은 대명창들의 실연(實演)을 보고 견문을 넓혔다. 
성량이 풍부하고 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굵직한 음성을 타고난 데다, 장판개와 같은 뛰어난 명창의 지도를 받은 만큼 이화중선(李花仲仙)․김초향(金楚香)과 같은 당시 최고 여류명창들과 어깨를 겨루었으나 43세로 죽었다.  〈흥보가〉 중 특히 󰡐박타령󰡑을 잘 불렀다. 취입한 음반으로는 〈춘향가〉 중 󰡐추월강산(秋月江山)󰡑 등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唱劇史硏究(朴晃, 白鹿出版社, 1976).

백낙준

1876(고종 13)~1930. 거문고산조의 창시자. 본명은 학준(鶴準). 충청남도 강경(江景) 출신. 선달J08059(先達J08059)의 아들이다. 1896년 20세 되던 해 아버지 선달이 부른 판소리 가락과 시나위 가락을 처음으로 거문고에 옮겨 탄주하였고, 뒤에 독주음악으로 체계를 확립시켰다. 
그는 율객(律客)으로서 삼남일대를 돌며 거문고산조의 보급에 힘썼다. 죽을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배운 율객 중 김종기J27882(金宗基J27882)․박석기(朴錫基)․신쾌동(申快童) 등이 유명하다.  ≪참고문헌≫ 玄琴散調의 原型과 現行型(曺偉敏, 李惠求博士頌壽紀念音樂學論叢, 韓國國樂學會, 1969).

백경순

생몰년 미상. 조선 철종․고종대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부안 출생. 구체적인 전승계보와 활동내용은 알 수 없으나, 서편제 명창으로서 특히 부침새에 명인기를 지녔던 명창이다.  〈춘향가〉를 잘 불렀고 〈수궁가〉 중에서 토끼가 수궁을 빠져나오면서 부르는 󰡐가자, 어서가󰡑 대목이 그의 특장(特長) 노래로 꼽힌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백일진

1883(고종 20)~1921. 독립운동가․교육자․종교인. 평안북도 의주출신. 기독교 전도사로서 1904년 김관근(金灌根)과 함께 의주에 양실학교(養實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 의주군내 사립학교 연합대운동회에서 일본의 침략정책과 그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1910년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석방되어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김승만J47386(金承萬J47386)․여순근(呂淳根) 등과 함께 중국 안둥(安東)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계통단체인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결성하여서 청년단장으로 활약하던 중, 1921년 일제에 의하여 붙잡혔다. 같은 해 병보석으로 출감되었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獨立運動史資料集 7-臨時政府史資料集-(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1981),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벽산선생창의전말

조선 말기 김도현J00759(金道鉉J00759)이 자신의 항일 의병 투쟁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창의록(倡義錄). 의병 봉기를 모의하던 1895년(고종 32) 12월 1일부터 의병진을 해체한 1896년 9월 9일(음력)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일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양․예천․순흥․봉화일대는 한말에 초기 의병이 일어나 기세를 크게 떨쳤던 곳이다. 김도현도 1895년 12월 민비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안동 의병진의 주요 인물들인 권세연(權世淵)․김흥락J57609(金興洛J57609)․유지호(柳止鎬) 등과 거의(擧義)를 논의한 뒤 곧 유시연J17400(柳時淵J17400)과 함께 청량산에서 의진을 편성하였다. 
자료는 의진 편성 과정을 비롯하여 그 뒤 봉화․영천․진보․강릉․삼척 등 경상북도 지역과 동해안 일대의 여러 고을을 행군하면서 허훈J52184(許薰J52184)․김도화J27482(金道和J27482) 등 여러 우국 지사들을 찾아가, 토적구국(討賊救國)의 방책을 논의한 것과, 또 도처에서 일본군과 전개했던 대소규모의 항전 등을 생생하게 수록하고 있다. 
특히 다른 문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안동 의병진의 도총(都摠) 유난영(柳蘭榮), 좌익장 이상오(李相五), 중군장 권문팔(權文八), 선봉장 이원여(李元汝) 등의 행적을 비롯하여 안동 의병진의 활동 전모가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영남 의병과 다른 지역 의병간의 연합 작전 수행 과정도 밝혀주고 있어 특히 주목된다. 유인석J08293(柳麟錫J08293)의 제천 의병진의 소모장 서상렬J46386(徐相烈J46386)이 영남으로 남하한 뒤 안동․예안․예천․순흥․풍기․영천․봉화 등지의 7의병진과 연합, 상주 태봉(台峰)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영해․영덕 등지로 남하하여 이곳 의병진과 연합한 김하락J13606(金河洛J13606) 의병진의 활동 상황, 김도현 의병진이 강릉으로 북상하여 민용호J46370(閔龍鎬J46370)의 관동 의병진과 합세, 항전하던 상황 등을 수록한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경상북도 지역의 초기 의병 항쟁의 전개 과정과 각지 의병진간의 연합 작전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서백일

1893(고종 30)~1966. 종교인. 증산교단의 한 분파인 용화교(龍華敎)의 창시자. 전라남도 구례 출생. 11세 때 출가하여 15년간 수도생활을 하면서 전국의 사찰을 두루 돌아다녔다. 
1931년 구례군 간문면 구고미에서 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라는 간판을 걸고 미륵불교를 포교하였다. 이어 1933년에는 구례군에 구성사(九聖寺)를 짓고 각지에 포교소를 설치하였으며, 1947년에는 지리산에 상불사(上佛寺)를 짓고 용화교를 창립했다. 
1950년에는 전주시 완산동에 원각사J31828(圓覺寺J31828)를 세우고 완주군 우전면에는 남일사(南一寺)를 세웠다. 특히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 용화사(龍華寺)를 건립하고 전국의 신도들에게 후천개벽시에 살아 남을 곳이 이곳을 중심으로 한 30리 안이라고 설교하여, 경상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수백 세대의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미륵불로 태어난 강증산J48176(姜甑山J48176)이 신비한 죽음을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어서 지리산 등지에서 자신에게 도통을 전수하였으며, 곧 다시 출세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자신을 신격화해서 장차 용화세계를 주도할 인물이라고 선전하였다. 
또 그는 용화세상이 오기 전에 인류는 괴병과 병겁 때문에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될 것인데, 갑진(1964)년에서 무신(1968)년 사이에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교세가 급성장하자 금품 사취와 부녀자 농락 등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1961년에는 여신도들의 고발로, 보호자 간음죄로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결국 그는 소윤하(蘇潤夏)라는 젊은 신도의 칼에 맞아 1966년 3월에 사망했다. 교주가 죽자 대부분의 신도들은 흩어진 것으로 보이며, 용화세계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려는 나머지 신도들이 교명을 대한불교용화종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신종교조사연구보고소(한국종교연구회, 1996),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서백일의 용화교(김홍철, 원광 1988년 2월호).

서재승

1876(고종 13)~1915.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달성J18805(達城J18805). 자는 성서(聖瑞), 호는 죽림 (竹林). 경상북도 영주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탁지부 주사의 직을 사임하고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군량모집 등에 활약하였다. 
그 뒤 1909년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수 년간에 걸쳐 항일전을 계속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영주군에 피신하였다. 1915년 친일첩자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해가던 중 고문을 심하게 받다가, 그 해 7월 기주(基州 : 지금의 풍기)에서 총살당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忠義孝烈誌, 韓國懿蹟誌, 續文苑,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2).

서정주

1883(고종 20)~1978.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인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의 예능보유자.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고,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살았다. 서당을 다니다가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산대놀이를 배워 취발이를 잘하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양주별산대놀이〉 취발이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유경섭(柳景燮)을 후계자로 두었다. ≪참고문헌≫ 重要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楊州別山臺놀이-(文化財管理局, 1970).

선우순

1891(고종 28)~1933. 친일파, 전도사. 평안남도 평양이 원적이나 학력과 초기 경력은 확실하지 않다. 1915년 일본조합기독교회 산하 기성기독교회(箕城基督敎會)의 전도사가 되면서 친일 행위를 시작하였다.
1919년 4월 이 교파의 조선순회교사인 다카하시(高橋鷹藏)와 같은 교파인 동 황주교회(黃州敎會) 전도사 혼마(本間淸) 등과 함께 배역유세단을 조직, 황해도․평안남도 일대에서 만세진무운동을 벌였다.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이 같은 배역운동은 함경도를 제외한 전 조선에서 전개되었는데, 그는 유일선J31108(柳一宣J31108)․신명균J16959(申明均J16959)․차학연(車學淵)과 함께 조선인측 중심 인물로 참가하였다.
그 뒤 1920년 10월, 평안도 지방에 발흥한 독립사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평안남도지사 시노다(篠田治策)의 사주와 지원으로 평양에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의 공존공영을 표방한 대동동지회는 기관지 월간 ≪공영 共榮≫을 발간하면서, 평양을 중심한 일대의 강연회에서 친일 여론 조성과 정책 선전에 열을 올렸다.
이후 민원식J46371(閔元植J46371)과 막상막하로 1920년대 최대의 친일파가 된 그는 당국의 비호와 후원으로 동경을 드나들며 정계․재계의 거물급과 접촉하였다. 수상 하라(原敬)에게는 동화정책 강화와 독립반대를 역설했고, 재계의 거물 시부자와(澁澤榮一)에게는 조선인의 󰡐사상 선도󰡑를 위한 자금 원조를 요청하였다. 1920년대에 조선에서 󰡐내선일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도 그라고 전해진다.
평양부협의원이요 ≪대동신문 大東新聞≫ 사장이기도 했던 그는 그러한 친일 활동의 결과로 1921년 중추원참의가 되었다. 이러한 위세를 이용해, 1922년 2월 독립단 안주J38680(安州J38680)지단장 홍이도(洪彛道) 외 수명의 가출옥을 미끼로 금품을 뜯어냈다가 사기죄로 피소되었다. 이것을 두둔하기 위해 총독부는 담당검사를 일본인으로 교체한 끝에 마침내 불기소처분을 하고 말았다.
1927년의 중추원 개선에서 참의로 유임되었고, 그 뒤 1933년까지 모두 5차를 중임함으로써 전후 13년을 중추원참의로 있었다.
대동동지회는 그 반민족적 성격 때문에 일반인이 등을 돌려, 1923~1924년 무렵부터는 거의 유명 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이 회는 선우순이 사망한 뒤 선우현(鮮于鉉)을 회장으로 앉히고 중일전쟁 이후부터 시국운동을 재개했다. 1940년의 정기총회에서는 ① 창씨제도 시행에의 감사, ② 화북지방(華北地方)에의 지부 설치, ③ 기관지 ≪대동신문≫의 확충, ④ 󰡐성전(聖戰)󰡑 적극 협력 등 기타 수개 조항이 결의되었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每日新報, 朝鮮總督府官報.

손영목

1888(고종 25)~?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1909년에 밀양군 사립연성학교를 졸업하고 내부 지방국 군주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경남 내무부 서기가 되었고, 1918년부터 1921년까지는 경남 고성군수를 역임했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울산군수를 지냈고, 이듬해에는 중추원 통역과 서기관을 지냈다. 1931년에는 도지사의 자문기관이며 부지사격에 해당하는 강원도 참여관을 역임했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 강원도 지사를 지냈고, 1937년부터 이듬해까지 전북지사를 지냈다. 
1941년 8월 25일, 윤치호J21151(尹致昊J21151) 계열의 인물들이 결성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의 경기도 지도원으로 임명되었다. 황국(皇國)정신의 고양을 강령으로 삼은 흥아보국단은 국민정신총력연맹 사무국통상 기와이시(川岸文三郞)의 주선으로 최린J47588(崔麟J47588) 등이 만든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와 통합하여 1941년 10월 22일에 조선임전보국단J46486(朝鮮臨戰報國團J46486)으로 재편되었다. 
이 때 부민관에서 출범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감사로 선임되었다. 1943년부터는 시국계몽단체로서 임전태세 확립운동을 전개하던 국민정신총력연맹(國民精神總力聯盟) 이사로 일했다. 
국민정신총력연맹에서는 후생부장 겸 징병사업부장으로 징병활동을 담당했다. 박춘금J33586(朴春琴J33586)이 조직한 대의당J32893(大義黨J32893) 결성식이 1945년 6월 25일에 부민관에서 열릴 때 참석하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참고문헌≫ 반민자 죄상기(백엽문화사, 1949), 민족정기의 심판(혁신출판사, 1949),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손자수

1869년 (고종 6) 조희순J27254(趙羲純J27254)이 쓴 중국의 병서 ≪손자 孫子≫를 주해한 책. 1책. 영인본. 책머리에 고종 때 공조판서․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낸 김학성J21534(金學性J21534)의 서와 조희순의 자서, 그리고 좌참찬 등을 역임한 남상길(南相吉)의 서문과 목록이 실려 있다. 
조희순은 자서에서 병서 중 으뜸이 되는 ≪손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주석서의 잘못을 규명하여 그 정수(精髓)를 밝히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시계(始計)․작전(作戰)․모공(謀功)․군형(軍形)․병세(兵勢)․허실(虛實)․군쟁(軍爭)․구변(九變)․행군(行軍)․지형J10306(地形J10306)․구지(九地)․화공(火功)․용간(用間)의 순으로 13개 항목을 각각 서너 구절로 나누어 원문을 적고 주석을 단 다음 각 항의 끝에 부록이라 하여 자신의 안설(案說)을 수록하였다. 
안설에는 오자(吳子)․이위공(李衛公)․왕세정(王世貞) 등 30여명에 이르는 역대 병가(兵家)의 논술을 인용하고 있다. 1409년(태종 9) ≪십일가주손자 十一家註孫子≫를 인출하고, 양성지J36622(梁誠之J36622) 등이 1460년(세조 6)에 ≪손자주해≫를 교정하였다. 
임진왜란 뒤인 1600년(선조 33)에 ≪손자≫를 다시 인출하고, 1717년(숙종 43)에는 ≪손무자직해 孫武子直解≫를 간행하는 등 ≪손자≫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왔는데, ≪손자수≫는 이러한 주석작업의 맥락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增補文獻備考, 韓國圖書解題(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71).
송만갑

1865(고종 2)~1939.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 때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 당시 다섯 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전라남도 구례읍 봉북리(鳳北里)에서 태어났다. 순조 때 가왕(歌王)으로 칭호를 받던 흥록(興祿)의 종손이며, 철종 때 명창 우룡(雨龍)의 아들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천재적 재질이 있어 13세 때에는 소년 명창으로 이름이 자자하였다. 아명(兒名)이 밤쇠였는데 어린 나이로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에 나가 성인들을 무색하게 하였다.
전라감사한테서 참봉직을 받았고, 원각사J23457(圓覺社J23457) 시절에는 여러 차례 어전에서 소리를 하여 고종한테서 감찰직(監察職)을 제수 받았으며, 원각사 폐쇄 뒤에는 궁내부(宮內部)의 별순검J09941(別巡檢J09941)의 직을 3개월 정도 수행하였다.
어느 때 서편제(西便制) 선배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소리를 듣고 뜻한 바 있어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고매한 동편제(東便制)에 새로운 통속적인 소리조를 가미하여 불렀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 객지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서울에 올라와 김창환J00253(金昌煥J00253)과 함께 원각사 간부로 있으면서 판소리와 창극공연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에 이동백J05218(李東伯J05218)․정정렬J10552(丁貞烈J10552)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J05553(朝鮮聲樂硏究會J05553)를 조직하여 제자양성과 창극공연에 힘쓰다가 74세로 죽었다.
생전에 많은 제자를 길러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김정문(金正文)․박봉래(朴奉來)․박녹주(朴綠珠) 등 쟁쟁한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의 제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소리가 많이 전승되지 못하였다.
그의 소리는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나 아니리가 부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판소리교육과 더불어 창극공연을 많이 하였으며 이때 취입한 음반도 많이 남아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잘 하였고, 특히 〈춘향가〉․〈심청가〉․〈적벽가〉를 잘 하였다. 일제 때의 음반 중 〈수궁가〉의 󰡐고고천변J00925(皐皐天邊J00925)󰡑, 〈춘향가〉의 이별가J51805(離別歌J51805) 󰡐날다려가오󰡑, 단가J03408(短歌J03408) 중 󰡐진국명산J05570(鎭國名山J05570)󰡑 등은 걸작이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 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1).

송우룡

생몰년 미상. 조선 헌종~고종 때 활약한 판소리의 명창. 전라남도 구례(求禮) 출신. 판소리 명창인 광록(光綠)의 아들이다.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워 대명창이 되었으나, 중년에 성대가 상하여 고향에 은거하며 그의 아들 만갑(萬甲)을 비롯하여 유성준j00174(劉成俊j00174)․이선유(李善裕)․전도성J10533(全道成J10533) 등 많은 명창을 길러내었다. 〈수궁가〉를 잘 하였고, 특히 󰡐용궁에서 토끼가 기변(奇辯)하는 대목󰡑에 능하였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신방초

생몰년 미상. 조선 고종 때 풍류잡가의 명인. 전라남도 옥과J08941(玉果J08941) 출신. 풍류를 하던 율객(律客)으로 동생 영초(榮草)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사당패들이 부르던 〈사거리〉 뒤에 󰡐화초염불󰡑을 지어서 〈화초사거리〉를 지어냈다. 〈화초사거리〉는 중모리장단으로 되었는데 전반의 󰡐긴염불󰡑 대목은 남사당패의 〈사거리〉와 같이 경토리로 되어 있고, 후반은 󰡐화초염불󰡑이라 하는데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긴염불󰡑 부분은 불규칙한 세마치장단으로 된 〈사거리〉를 그가 중모리장단으로 짠 것 같다. 그가 〈화초사거리〉를 짓자 많은 소리꾼들이 불러서 세상에 널리 퍼졌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장판개(張判介)․조진영(趙進榮)․한똑똑〔韓獨得〕과 같은 명창들이 〈화초사거리〉를 잘 불러 유명하였고, 〈화초사거리〉가 널리 불려지자 남쪽지방에서 본래 사당패들이 부르던 〈사거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화초사거리〉는 경토리와 육자배기토리를 융합시켜 멋들어진 가락으로 짜여져 있는데, 뒤에 잡가 소리꾼들은 그의 공을 흠모하여 그전까지 부르던 󰡐방초(芳草)는 연년록(年年綠)이요󰡑라는 노래에 방초라는 말이 들었다 하여 이 대목은 부르기를 삼갔다고 한다.  ≪참고문헌≫ 民謠․雜歌․立唱(李輔亨․韓萬榮, 文藝總覽, 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6).

신석린

1866(고종 3)~?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1899년에 오사카(大阪)시립상업학교 한어교원을 거쳐 같은 해에 궁내부 참리관을 지냈다. 1909년에는 경남 창원부 부윤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경남 참여관을, 1911년부터 1921년까지 경북 참여관을 지냈다.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경북지방 토지조사위원회위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자제단을 발기하여 만세반대운동을 벌였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찬의를, 1927년부터 1929년까지는 충남지사를 역임했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41년 6월에 시국계몽단체로서 임전태세 확립운동을 전개하던 국민정신총력연맹(國民精神總力聯盟)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참고문헌≫ 민족정기의 심판(혁신출판사, 1949), 실록 친일파(임종국, 돌베개, 1991), 친일파99인 1(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1993),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신석린

1866(고종 3)~?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1899년에 오사카(大阪)시립상업학교 한어교원을 거쳐 같은 해에 궁내부 참리관을 지냈다. 1909년에는 경남 창원부 부윤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경남 참여관을, 1911년부터 1921년까지 경북 참여관을 지냈다.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경북지방 토지조사위원회위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자제단을 발기하여 만세반대운동을 벌였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찬의를, 1927년부터 1929년까지는 충남지사를 역임했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41년 6월에 시국계몽단체로서 임전태세 확립운동을 전개하던 국민정신총력연맹(國民精神總力聯盟)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참고문헌≫ 민족정기의 심판(혁신출판사, 1949), 실록 친일파(임종국, 돌베개, 1991), 친일파99인 1(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1993),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안재홍

1891(고종 28)~1965. 정치가․사학자. 본관은 순흥J07081(順興J07081).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 윤섭의 아들로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J20227(皇城基督敎靑年會J20227)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J17409(李商在J17409)․남궁 억(南宮檍)․윤치호J21151(尹致昊J21151)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J18086(李會榮J18086)․신채호J16068(申采浩J16068) 등이 조직한 동제사J27549(同濟社J27549)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 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를 지도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시대일보 時代日報≫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이 동안에도 1925년에는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조선사정연구회․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같은 해 재만주동포옹호동맹(在滿洲同胞擁護同盟) 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동포조난문제협의회의 조사․선전부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되었다. 이후 ≪여유당전집 與猶堂全集≫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 동안 복역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1944년 틈나는 대로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 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에도 정진하였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으며, 1945년 4월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J13165(呂運亨J13165)이 일본과 조국의 치안권인수문제에 관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 대안으로 민족대회의 결의를 받자는 주장을 폈다. 
8․15광복과 동시에 생겨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같은 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J10101(國民黨J10101)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J12917(韓國獨立黨J12917) 중앙위원․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한성일보사(漢城日報社) 창립 사장․비상국민회의 의원․민주의원 의원․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J05134(民政長官J05134)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 朝鮮上古史鑑≫․≪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참고문헌≫ 民世安在鴻選集 Ⅰ․Ⅱ(安在鴻選集刊行會 編, 知識産業社, 1981), 韓國現代人物史論(宋建鎬, 한길사, 1984), 朝鮮民族獨立運動史(坪江汕二, 巖南堂書店, 1966).

양기탁

1871(고종 8)~1938. 독립운동가․언론인. 초명은 의종(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시영(時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J49450(儒林J49450)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 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J17409(李商在J17409)․민영환J04039(閔泳煥J04039)․이준J21160(李儁J21160)․이상설J12742(李相卨J12742)․이동휘J57667(李東輝J57667) 등과 개혁당 조직 운동에 가담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기간에 일제가 조선에게 삼림․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 운동에 참가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방해 책동으로 해산되자,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고 지방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7월 18일 영국인 기자 배설(Bethell,E.T., 裵說)과 제휴, 국한문 혼용체의 일간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그때 신문사의 총무 겸 주필로 근무하면서, 다음해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의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와 이토(伊藤博文)를 공격하고 배일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신문 사설을 썼다. 또한 장지연J12745(張志淵J12745)이 ≪황성신문≫에 쓴 〈시일야 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즉각 게재하였다. 그리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코리아 데일리 뉴스≫지에 실어 전세계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사들이 일제의 〈신문지법〉에 의해 애국계몽운동 및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는 등의 제약을 받고 있을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형식상 사장이 외국인이어서 법의 저촉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한매일신보≫는 모든 한말 국권 회복 운동의 대변지로 발전되어 갔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 통감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는 국채 보상금 횡령(國債報償金橫領)이라는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다. 그 뒤 사장 배설이 공소 사실의 허위 조작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자 무죄로 출감하였다. 
1908년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J07311(安昌浩J07311)․전덕기J47136(全德基J47136)․이회영J18086(李會榮J18086)․이동휘․이동녕J12740(李東寧J12740)․이갑J25667(李甲J25667)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J10981(新民會J10981)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봄 그의 집에서 개최된 신민회 전국 간부 회의에서는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의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1910년 8월 자신이 직접 그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이동녕과 이회영을 만주로 보내어 신흥무관학교J18067(新興武官學校J18067)와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안명근J09954(安明根J09954)에 의한 군자금 모금 사건이 일어나자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또, 그해 9월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이른바 󰡐데라우치 (寺內)암살음모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언도받았으나 항소심에서 6년형으로 감형되어 4년간 복역하다가 1915년 2월에 석방되었다. 이듬해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에 노력하다가 톈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국으로 압송되어 2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유근J44167(柳瑾J44167)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 해 봄 통천교(統天敎)라는 종교를 창교(創敎)하여 교리를 선포하였는데, 표면으로는 종교 운동을 펼치고 내면으로는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1년 미국 의원단 36명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 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었다가 어머니의 별세로 가출옥되었다. 이때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1923년 만주에서 편강렬J33621(片康烈J33621)․남정(南正) 등과 의성단 (義成團)을 조직하여, 국내의 친일파 암살 및 관공서 시설 파괴 등을 지휘하였다. 
또, 1925년 1월 오동진J17395(吳東振J17395)․김동삼J00760(金東三J00760) 등과 의성단․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광정단J06287(匡正團J06287)․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통합하여 정의부J17419(正義府J17419)를 조직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하여 일제를 공격하였다. 1926년 4월 주진수(朱鎭洙)․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 등과 정의부의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혁명당J08216(高麗革命黨J08216)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국무령(國務領) 이상룡J12741(李相龍J12741)의 사임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였으나, 1934년 의정원 회의에서 법무 담당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 2월 2일 가흥J02280(嘉興J02280)에서 국무원이 개설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 해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해 의열단․신한독립단(新韓獨立團)․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의 5당통일회의가 개최되고 이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J12061(朝鮮民族革命黨J12061)이 조직되자, 김규식J12852(金奎植J12852)․조소앙J13484(趙素昻J13484)․최동오J24699(崔東旿J24699)․유동열J13171(柳東說J13171) 등과 이에 가담하여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길당암(吉堂庵)에서 선도(仙道)를 닦다가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獨立血史 第一․二卷合本(大韓文化情報社, 1956),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獨立運動大事典(李康勳 編著, 大韓民國光復會後援, 1985), 梁起鐸의 民族運動(金必子, 地球文化社, 1988)

엄복동

1892(고종 29)~1951. 체육인. 서울 출생. 아버지는 선양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당시 자전거 판매상인 일미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중, 1913년 4월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와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가 인천(12일)․용산(13일)․평양(27일) 등에서 공동 주최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우승하였다. 
특히, 27일 평양역전 광장에서 한국인 2명과 일본인 4명으로 실시된 조․일일류선수 연합경기에서는 엄복동과 황수복(黃壽福)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함으로써, 당시 일제의 침략 야욕 앞에 국운이 쇠퇴해 가던 상황에서 국민들의 환호와 감격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 뒤 1922년 5월 31일부터 2일간 평양 윤업회(輪業會) 주최로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 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도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말년에 극히 불우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후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던 중, 6․25전쟁 당시 동두천 부근의 어느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숨졌다.
대한사이클연맹 자문위원인 박성렬(朴成烈)은 엄복동과 같이 선수생활을 할 때 찍은 사진과 그가 탔던 자전거를 비장하고 있다가 공개한 바 있다. 이 자전거는 박성렬의 형이 엄복동의 후계 선수인 조수만(趙壽萬)에게서 당시 500원(현 시가로 500만~600만 원 상당)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영국 라지(Large)회사 제품인 이 자전거는 한․영 우호 및 제품 선전을 위해 보낸 두 대 중 한 대라고 한다. 엄복동은 비록 자전거경기라는 제한된 부분이었지만,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그의 우승으로 인한 민족적 일체감과 자긍심은 대단하여 국민적 영웅이라는 칭송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대한사이클연맹은 불우한 처지에서도 사이클 선수로 대성하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 준 그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해, 1977년 이후 엄복동배쟁탈 1㎞ 도로대회를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운동경기사(나현성, 보문사, 1958), 대한체육회50년(대한체육회, 1970).

오수관

1875(고종 12)~? 조선 말기 가야금병창의 명인․명고수. 전라도 낙안J15275(樂安J15275) 출신. 가야금병창의 대가 오태석(吳太石)의 아버지이며, 명고수이고 기악의 명인인 오성삼(吳聖三)의 사촌형이다. 
집장사령을 지냈고, 판소리 북장단을 잘 쳐서 10여 년간 고수로 활약하였다. 뒤에 김창조(金昌祖) 문하에 들어가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을 배워 병창의 명인으로 꼽혔다. 그의 가야금병창제는 아들 태석에게 이어졌다.  ≪참고문헌≫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판소리鼓法 Ⅲ(李輔亨, 文化財管理局, 1979).

유공렬

1864(고종 1)~1927. 조선 말기의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익산 출신. 어려서 판소리를 배워 8, 9세에 판소리를 뛰어나게 잘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15세 때 박만순(朴萬順)의 문하에 들어가 몇년간 판소리를 배워 동편제 판소리의 법통소리를 터득하였다.
그뒤 5년간 남원․운봉 등지의 명산 대찰을 찾아다니며 홀로 판소리를 닦았다. 1893년 전라도 전주 통인청대사습장(通人廳大私習場)에 나가 그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니, 비로소 대명창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김세종J03335(金世宗J03335)․이날치(李捺致)․정창업(丁昌業)과 같은 선배명창을 따라다니며 현장학습을 하였다. 
1900년에 상경하여 김창환J00253(金昌煥J00253)․송만갑J04660(宋萬甲J04660)과 함께 원각사J23457(圓覺社J23457) 창극공연에 참가하였다. 1907년 광무대J23355(光武臺J23355)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1908년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 공연에 참가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춘향가〉․〈심청가〉를 잘하였고, 특히 〈춘향가〉 중에서도 이별가에 출중하였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唱劇史硏究(朴晃, 白鹿出版社, 1976).

유만겸

1889(고종 26)~?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1917년 동경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19년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농무과 소속되면서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에는 경북 문경군수, 1921년 경북 도이사관, 192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종교과 과장 및 사무관, 1928년 평북 참여관, 1931년 경북 참여관, 1932년 학무국 사회과장, 1934년 평남 참여관, 1936~38년 충남 참여관 등을 거쳐 1939년 충북지사로 승진하였다. 
일본 유학시절에 일본의 대륙침략 이데올로기였던 아시아주의에 찬동했고,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문명화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교육과 식산흥업을 강조했는데, 이 점은 그가 총독부의 지방관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경북 산업부장 시절에는 면작장려, 사방공사계획 등을 행했고, 사회과장 때는 조선 의례를 중추원의 자문에 의해 실시하기도 하였다. 
일제말기인 1940년 10월에 󰡐내선일체의 철저, 황국신민화, 신도(神道)의 실천, 지역봉공에 의한 고도국방 국가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J47903(國民總力朝鮮聯盟J47903) 평의원이 되었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준비위원에도 경기도 대표로 참여했으며,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경학원 부제학의 자격으로 1941년 12월 17에 󰡐유림의 전승기원제(戰勝祈願際)󰡑를 거행하였다.
또한 경학원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는데, 경학원 구성원들은 󰡐우리 반도 200만 유림은 대동단결, 대미(對美)․대영(對英) 선전포고에 관한 칙소의 어성지(御聖旨)를 봉대(奉戴)하고 결사보국 모든 힘을 국가에 바치어 총후국민(銃後國民)의 책무를 완수하기를 기함󰡑이라는 선전문을 결의하였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朝鮮總督府, 各該當年度), 친일파 99인(돌베개, 1993), 民族正氣의 審判(革命出版社, 1949), 九年星霜(兪萬兼, 學之光 13).

유성준

1874(고종 11)~1949.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김정문(金正文)의 외숙이 되며, 김창룡J09834(金昌龍J09834)․신명학(申明鶴)과 동배(同輩)이다. 
젊어서 송우룡(宋雨龍) 밑에서 판소리를 배웠고, 한때 정춘풍(鄭春風)과 김세종J03335(金世宗J03335)에게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판소리 이론으로 첫손을 꼽던 명창 김세종에게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이론에 밝았고 고종으로부터 참봉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당시 판소리 이론과 실기가 뛰어났던 명창 전도성J10533(全道成J10533)과 쌍벽을 이루는 이론가였다. 가끔 서울에서 공연한 때도 있었으나 주로 진주에서 제자들에게 판소리를 교육하는 데 힘써왔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많은 명창이 나왔다.
그는 〈수궁가〉와 〈적벽가〉를 잘하였고, 〈수궁가〉는 당시에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특히,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가 만나는 대목과 토끼 신세를 그리는 대목을 잘 불렀다. 
그의 〈수궁가〉는 임방울(林芳蔚)․김연수J23373(金演洙J23373)․정광수(丁珖秀)․박동진J29480(朴東鎭J29480)․박녹주(朴綠珠)․박귀희(朴貴姬) 등에게 전해졌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유영준

1892(고종 29)~? 독립운동가․정치가. 〔생 애〕 평안남도 평양 출신. 1910년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제 합병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여학교(北京女學校)를 다니면서 안창호J07311(安昌浩J07311)의 지도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에 귀국했다가 3․1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를 다니면서 동경유학생여자강연단으로 고국에서 주로 부인의 의식을 일깨우고 위생관념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며 전국을 순회하기도 하였다.
1923년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머물다가 1925년 귀국하여 김약수J12867(金若水J12867)․이여성(李如星) 등이 동경에서 조직한 사회주의 단체인 일월회(一月會:북성회의 개칭)의 발회 기념강연에서 󰡐무산계급과 교육문제󰡑라는 강연을 하는 등 사회주의운동에도 관여하였다. 국내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의로 일하면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했지만 주로 여성운동에 주력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J12719(槿友會J12719)에 창립부터 참여하여 1929년까지 창립준비위원․서기․중앙집행위원․중앙집행위원회 정치연구부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계속해서 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사회운동에 참여하다가 1934년 말에는 안재홍(安在鴻)․이종린(李鍾麟)․여균(呂均) 등과 함께 국내에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교섭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5년경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2월 22일에는 좌익 진영의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좌익단체의 총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장단 부의장 및 상임위원․사회정책연구위원을 역임하고, 조선공산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중앙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47년에 좌익 진영에 대한 경찰의 탄압이 강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49년 조국전선의장단 의장, 1956년 적십자사 부위원장, 1958년 경공업성 부상 등을 역임하다가, 1962년 노령으로 인하여 요양소생활을 하였다. ≪참고문헌≫ 朝鮮年鑑-1947-(朝鮮通信社, 1946),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南勞黨硏究(金南植, 돌베개, 1984).

유옥겸

1883(고종 20)~1922. 한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본관은 기계J15270(杞溪J15270). 서울 출신. 생원 회준(會濬)의 아들이다. ≪서유견문록 西遊見聞錄≫의 저자이며 개화 선각자로 유명한 길준(吉濬)이 큰삼촌이다. 한말에는 법률가로, 일제강점기에는 정치가로 활약한 성준(星濬)이 작은삼촌이다. 
그는 두 삼촌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전문학교를 마친 후에는 법률 역사교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한국 최초의 법률서인 ≪법학통론 法學通論≫을 낸 유성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옥겸은 교과서 편찬에 주력하여 많은 교과서를 저술, 편찬하였다. 역사교과서 외에도  교수법J56964(敎授法J56964)에 교육학에 관한 저술도 많다.  
18세에 ≪중등외국지리 中等外國地理≫(1900)를 편찬하기 시작해 26세부터는 본격적으로 교과서 편찬에 주력하였다. 그가 편찬한 역사교과서로는 ≪증등동양사 中等東洋史≫(1908), ≪동양사교과서 東洋史敎科書≫(1908), ≪대조서양사연표 對照西洋史年表≫(1909), ≪서양사교과서 西洋史敎科書≫(1910) 등이 있다. 
특히 ≪서양사교과서≫는 서양사에 대한 책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사립 고등학교 교원용 교과서로 교열자는 유성준이다. 
당시 번역서가 서양의 인명․지명을 중국식으로 표기했던 반면, ≪서양사교과서≫는 대영백과사전에 의거해 영국 발음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교과서의 서술양식과 체제를 근대화시켜 교육의 효과를 배가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근대적 교육의 효과에 대해 고심했던 그는 일련의 교육학과 교수법 관련 저서들을 남겼다. ≪간명 교육학 簡明敎育學≫(1908), ≪소학교수법 小學敎授法≫(1908), ≪서양교수법 西洋敎授法≫(1909) 등이 있다. 이 밖에는 ≪정선법학통론 精選法學通論≫(1911)이 있다.

유주목

1813(순조 13)~1872(고종 9).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산(淵山). 자는 숙빈(叔斌). 호는 계당(溪堂). 상주 출신. 유성룡의 9세손. 아버지는 좌의정 후조(厚祚)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로 부사 이재연(李載延)의 딸이다. 
15~16세 무렵에는 경사자집J00408(經史子集J00408)에 두루 통달했으며, 특히 역사 부분에 재능을 보였다. 이에 할아버지 유심춘(柳尋春)이 순수 학문을 지향할 것을 경계하자 이때부터 위기지학J33763(爲己之學J33763)에 전념하였다. 
1834년(순조 34) 유심춘이 사망하자 정이(程蓬)의 〈사물잠 四勿箴〉과 주희(朱熹)의 〈경재잠 警齋箴〉의 후잠(後箴)을 지어 학문과 행실의 지표로 삼았다. 1835년에는 과거응시를 위해 상경했다가 남한산성․삼전도․갑곶진을 탐방하고는 분격한 심정을 시(詩)로 표현하였다. 1842년(헌종 8)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과장(科場)의 부정을 목격하고는 상주 시리(柴里)에 계당(溪堂)을 건립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판사 정윤우(鄭允愚)의 요청으로 의병장이 되었으나 적이 물러나 곧바로 의진을 파하였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동몽교관, 1868년에는 장악원주부․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868년에는 계정(溪亭)에 선비들을 모아 ≪소학≫과 〈백록동규 白鹿洞規〉를 강하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해 사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유주목은 성리학․예학․역사학․보학에 두루 통달했으며, 문장과 서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전례유집 全禮類輯≫은 사례J01427(四禮J01427)․오례J02715(五禮J02715)․사상례(士相禮)․거가잡의(居家雜儀)를 두루 참고해 완성한 예학의 집대성이다. ≪사칠논변 四七論辨≫은 성리학에 대한 선유들의 견해를 취합하여 편찬한 것이다. ≪조야약전 朝野約全≫은 당쟁에 대한 글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해동보 海東譜≫는 씨족의 계보를 밝힌 40책 분량의 역작이다. 이 밖에 문집으로 ≪계당집 溪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溪堂集.

유홍렬

1911~1995. 역사학자. 본관은 문화J04436(文化J04436), 호는 혜암J38873(惠庵J38873). 경기도 장단 출신. 
장단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와 1930년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1935년 대학 졸업 후 진단학회에 가입, 한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듬해 천주교에 입교한 뒤 1938년부터 해방 때까지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해방 직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 1966년까지 재직하는 동안 문학부장, 교무처장, 상대학장서리, 총장서리를 역임하였다. 1966년부터 이듬해까지 대구대학장을 지냈으며, 1968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뒤 1970년부터 7년간 대학원장을 맡았다. 1974년 이래 인하대학교와 세무대학의 초빙교수로 말년까지 후학을 양성하였다. 
학회 활동도 활발히 해 진단학회 이사, 한국사학회 회장, 백산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미국무성 초빙교수로 하바드대학에 유학한 이래 국제동양학자회의, 국제역사학회의 등 구미 각지에서 개최되던 여러 국제회의에 참가, 외국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국학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한편 천주교 신앙인으로서도 두드러진 족적을 남겨 1967년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세계천주교평신도회의에 참석하였고, 1968년 한국가톨릭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장, 1969년 가톨릭 군종후원회(軍宗後援會) 부회장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그의 국사 연구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조 사회사상, 이념에 대한 구명작업에서 시작,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종합적 이해와 정리에 집중되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천주교 유입과정과 배경에서부터 천주교 박해, 교세 성장과정, 그리고 초기 신앙인들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걸쳐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학자로서의 면모 외에 1965년 일본 북알프스 등정시 등반대장을 맡았을 정도로 전문 산악인이었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1960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정회원을 거쳐 1982년 원로회원에 피선되었다. 1962년 삼일문화상, 1966년 학술원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적 저서로는 ≪조선독립사상사고 朝鮮獨立思想史攷≫․≪한국문화사 韓國文化史≫․≪한국천주교회사 韓國天主敎會史≫․≪고종치하(高宗治下) 서학수난(西學受難)의 연구(硏究)≫․≪나의 인생관J55140(人生觀J55140)≫․≪한국사회사상사논고 韓國社會思想史論攷≫ 등이 있다. ≪참고문헌≫ 史學硏究 36-惠庵柳洪烈博士古稀紀念論叢(한국사학회, 1983), 韓國學硏究人名錄(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윤기현

1889(고종 26)~? 체육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재학중이던 1909년 1월 변희준 (邊熙駿)․장순익(張淳翊)․유동수J37622(柳東秀J37622)․윤교중J59665(尹敎重J59665)․어윤빈(魚允斌) 등과 함께 동경유학생들로 구성된 대한흥학회J16055(大韓興學會J16055)를 조직, 학회내에 운동부를 두어 동경유학생들의 체육활동을 통한 단합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하계방학을 이용하여 일시 귀국, 25명의 대한흥학회 운동부원들과 함께 운동부장으로서 서울의 각 학교에서 운동을 지도하였다. 대한흥학회 운동부는 순수 학생들만의 단체였으며, 운동단체의 활동을 통하여 민족애를 높인 대표적 집단이었다.
1920년 6월 인사동 명월관 지점(전의 태화관)에서 열린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 발기인회에서 창립준비위원으로 선발되었으며, 조선체육회 초대 이사로서 대한체육회의 발전에 발아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전조선야구대회와 전조선경기대회의 야구심판으로 활약하는 등 국내 야구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韓國體育史(羅絢成, 敎學硏究社, 1981), 스포츠시리즈-야구-(유정무․정청희, 동양문화사, 1982).

윤시병

1860(철종 11)~1931. 친일파. 일찍이 무과J07839(武科J07839)에 등과(登科)하여 무관으로 출사(出仕)하여 충청병사까지 지냈다. 그는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898년 11월 29일에는 유맹(劉猛), 최정덕J22614(崔廷德J22614),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협회 출신으로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며 개화파들에 의한 내각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에 의한 독립협회 해산과 간부체포 때, 정부의 추적을 피해 미국인 집으로 피신하여 체포․투옥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해 들어오자, 송병준J49693(宋秉畯J49693)과 의기투합하여 1904년 8월 20일 유신회의 명칭을 일진회J12744(一進會J12744)로 바꾸고 자신이 회장자리에 앉았다.
이후 러일전쟁 때, 연 11만4500명의 함경도 지방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여 일본군 군수물자의 수송을 맡았으며, 일본군을 위한 첩보활동을 벌이는 한편 일본군의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에 긴요한 철도부설 공사를 돕기 위하여 연인원 14만9114명을 동원하였다.
일진회의 이러한 공로로 그는 일제로부터 일훈욱일4등장(日勳旭日四等章)을 받았다. 일진회는 󰡐을사조약󰡑를 체결하기 위해 이토(伊藤博文)가 내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한발 앞서 1905년 11월 6일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09년 송병준과의 갈등으로 일진회를 떠난 그는 조선노동협회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고 이 단체를 이끌면서 한일합병 공작을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韓國紳士名鑑(牧山耕將, 1911), 朝鮮紳士寶鑑(田中正則, 1913), 元韓國一進會歷史(李寅燮, 文明社, 1911), 친일파 99인(돌베개, 1993).

이기동

1885(고종22)~? 체육인. 서울 출생. 육군무관학교J22537(陸軍武官學校J22537)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 체육교사를 역임하였다. 육군무관학교 동창생인 조원희(趙援熙) 등과 함께 당시 우리나라의 각급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체조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이론적․실천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일본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체조의 이론적 발전과 보급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일본인 요코지(橫地捨次郎)와 공저로 보통학교 체조과 교원용 도서인 ≪최신체조교수서 最新體操敎授書≫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원희․김성집(金聲集) 등과 주동이 되어 보성중학교에서 체조연구회를 조직, 학교체조와 일반국민의 체육보급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당시 비조직적인 체육을 지도 및 개선, 진작시킴으로써 국민의 심신을 강건하게 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병식체조(兵式體操)를 학교체육에 적합하게 반영하도록 시도하였다. 1920년에는 조선체육회 창립총회 발기인 70여명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참고문헌≫ 大韓體育會50年史(大韓體育會, 1970), 韓國體育史(羅絢成, 敎學硏究社, 1981).

이기용

1889(고종 26)~?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흥선대원군의 맏형 흥녕군(興寧君) 창응(昌應)의 장손으로 고종J01797(高宗)의 생가 종질(從姪)이며, 완림군(完林君) 재원의 아들. 1902년 융릉참봉(隆陵參奉), 1905년 시강원(侍講院) 시종관(侍從官)에 임명되었다. 
1906년 사립 돈명의숙J59605(敦明義塾J59605) 정치전문과(政治專門科)에 입학, 1907년에는 수학원J08400(修學院J08400) 초등과에 입학하였다. 1908년 돈명의숙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수학원을 졸업하고 심수학원(尋修學院) 중등과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0년 병합 때, 왕족으로서 일제로부터 자작(子爵) 작위와 수작금(受爵金)으로 3만원을 받았다. 이후 노름 등으로 소일하다가 1926년에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가나스기에게서 채권 61,647원에 대한 파산신청을 당하였다. 1930년 11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파산이 선고되었으나 경성지방법원의 강제화의인가 결정으로 1933년 1월 25일 종결되어 작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1937년 조중헌(남작), 민병삼(자작) 등이 중심이 되어 국방열 보급을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국방협회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한국인으로서 일제의 작위를 갖고 있던 귀족 59명이 망라되어 조직한 동요회(同曜會)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그는 1945년 4월 󰡐정치 처우개선󰡑으로 직선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9년 1월 반민법 제2조 위반혐의로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다. ≪참고문헌≫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1910), 反民者大公判記(金永鎭 編, 漢豊出版社, 1949), 民族正氣의 審判(革命出版社, 1949).

이날치

1820(순조 20)~1892(고종 29). 조선 말기 판소리 명창. 자는 경숙(敬淑). 후기 8명창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하였다. 명창 김창환J00253(金昌煥J00253)과는 이종간이다. 
젊어서는 줄타기를 하였는데 날치와 같이 날쌔게 줄을 탄다고 하여 날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수로 행사하다가 판소리에 뜻을 두어 박유전(朴裕全) 문하에 들어가 수제자가 되었다. 박유전․정창업(丁昌業) 이래 서편제의 제일 명창으로서, 당시 동편제의 대명창으로 알려진 박만순(朴萬順)․김세종J03335(金世宗J03335)과 겨루었다. 
소리솜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음량이 매우 커서 그가 소리를 하면 10리밖까지 들렸다 한다. 또, 쉰목소리와 같이 컬컬하게 나오는 소리인 수리성에 풍부한 성량으로 관중을 웃고 울리는 데 있어서는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 
박유전에게 배운 〈새타령〉을 노래하면 정말 새가 그의 노래를 듣고 날아들었다 한다. 모든 판소리에 능했으나 특히 〈춘향가〉․〈심청가〉를 잘하였고, 〈춘향가〉 중 󰡐망부사(望夫詞)󰡑가 그의 더늠이었다. 박유전의 서편제 소리를 이어 김채만 J00254(金采萬J00254) 등에게 전해주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6),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1).

이도중

1784(정조 8)~1872(고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능창대군파(綾昌大君派)로 병원(秉源)의 아들이다. 동생 구(球)가 은신군J53594(恩信君J53594) 진(所)에게 입양되어 흥선대원군J34016(興宣大院君J34016) 하응(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J51854(南延君J51854)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종친J02785(宗親J02785)으로서 벼슬길에 올라, 8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864년(고종 1) 호조 참의로 특제(特除)되고, 공조 참판으로 특별 발탁된 뒤, 1865년(고종 2) 지돈녕부사J14759(知敦寧府事J14759), 공조 판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한성부 판윤을 거쳐 1870년(고종 7) 다시 공조 판서, 판종정경J50271(判宗正卿J50271) 등을 역임하였다. 
1872년에 그가 사망하자 조정에서 관(棺)과 기본 부의금 외에 돈 5백냥, 포목(布木) 각 1통(同)을 보내고, 성복일(成服日)에 승지J14302(承旨J14302)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는 등 극진한 조의를 표하였다. 1875년(고종 12) 시호J09698(諡號J09698)로 효헌(孝憲)을 추증(追贈)하였고, 1876년(고종 13년)에 다시 시호 숙헌(肅獻)을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이도철

?~1895(고종 32) 조선 말기의 무관. 1895년 10월 육군 참령(參領)으로서 시종(侍從) 임최수J42481(林最洙J42481), 전 전주진위대(全州鎭衛隊) 중대장 이민굉(李敏宏), 전 위원(委員) 이충구(李忠求), 탁지부 사계국장(司計局長) 김재풍(金在豊), 사과J00485(司果J00485) 이세진(李世鎭)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친일개화파를 몰아내려는 정변인 춘생문사건J25680(春生門事件J25680)을 기도하다 체포되었다.  ≪대한계년사 大韓季年史≫에서는 시종원경(侍從院卿) 이재순(李載純)으로부터 고종의 밀칙(密勅)을 전달받고 거사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11월 법부J07772(法部J07772) 특별법원에서 모반률(謀反律)로 교수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1896년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망명으로 친일개화파 정권이 몰락하자 관련된 인사들은 석방되고 이미 처형된 이도철과 임최수의 관작이 복구되었다. 
같은 해 4월 내각J05966(內閣J05966)의 주청(奏請)에 따라 가족들에게 휼금(恤金)이 지급되었고, 군부 협판의 관직과 충민(忠愍)이라는 시호J09698(諡號J09698)가 추증되었으며, 1898년에는 그 아들에게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1901년(광무 5)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J26673(白性基J26673)의 상소에 따라 장충단J47566(獎忠壇J47566)에 모셔졌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大韓季年史.

이돈응

1812~? 조선 말기의 문신. 초명(初名)은 세기(世器)이고, 1868년(고종 5)에 개명(改名)하였다. 1870년이래 이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병조참판, 사간원대사간, 호조참판, 경연청지경연, 오위도총부도총관,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춘추관지춘추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3년 오하영(吳夏泳), 윤주현(尹冑鉉), 강범수(姜凡秀) 등과 함께 원악도(遠惡島)․삼배도(三倍道) 안치(安置)의 처벌을 받았다가 다음해인 1884년 특사 방면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大韓帝國官報.

이동백

1867(고종 4)~1950. 조선 말기 판소리 5명창 중의 한 사람. 〔생애 및 활동상황〕 본명은 이종기(李鍾琦), 아명은 동백(東白).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J04580(庇仁J04580) 출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김정근(金正根)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J03335(金世宗J03335)에게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전후에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하였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오자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는 동안 명창으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J00253(金昌煥J00253)․송만갑J04660(宋萬甲J04660)과 함께 원각사J23457(圓覺社J23457)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J23355(光武臺J23355)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였다.
1933년 송만갑․정정렬J10552(丁貞烈J10552)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 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정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9년에 부민관에서 은퇴공연을 하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는 김세종에게 짜임새 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J28133(通政大夫J28133)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저 술〕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 이후 첫손을 꼽고 있다. 제자는 많지 않으나 강장원(姜章沅)이 그의 소리 일부를 이어받았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 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 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6),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1).

v이만운

181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J10316(眞寶J10316). 자는 규오(奎五). 아버지는 휘정(彙廷)이다. 영남만인소의 소두(疏頭)인 이만손(李晩孫)의 친족이다. 
1843년(헌종 9) 생원J08053(生員J08053) 감시J60031(監試J60031)에서 장원을 하였고, 184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사간원대사간, 이조참의, 승정원좌승지, 오위도총부부총관, 이조참판,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1874년 경주부윤 시절의 잘못으로 무주에 유배되었다가 1877년 다시 사간원대사간으로 기용되었다. ≪참고문헌≫高宗實錄, 日省錄, 大韓帝國 官報.

이만유

182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J10316(眞寶J10316). 자는 도여(道汝).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휘명(彙明)이다. 영남만인소의 소두(疏頭) 이만손(李晩孫)의 친족이다. 1858년(철종 9) 전시J08084(殿試J08084)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이후 승정원 지, 영해부사(寧海府使), 사간원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영남만인소 때 정부의 회유로 만인소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大韓帝國官報.

이만인

1834(순조 34)~1897(광무 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보J10316(眞寶J10316). 자는 군택(君宅). 호는 용산(龍山). 초명은 만호(晩濩). 안동 출신. 이황의 11세손. 아버지는 통덕랑 휘교(彙喬)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로 병주(秉周)의 딸이다. 영양 주실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842년(헌종 8) 단산(丹山) 군수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효순(孝淳)을 시종하면서 학업에 열중해 12~13세 무렵에는 경사에 통달하였다. 1846년(헌종 12) 승지 김두흠(金斗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850년 도산서원 고강(考講)에서 ≪서경 書經≫을 강해 이휘령(李彙寧) 등 좌중의 원로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한동안 과업에 종사했으나 1872년(고종 9)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77년 원근의 선비들이 수학하기를 거듭 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제생들에게 강학하였다. 이 해에 선공감J00506(繕工監J00506)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81년(고종 18)에는 영남만인소의 소본(疏本)을 기초했으며, 1890년에는 동종을 회합해 향음주례J42054(鄕飮酒禮J42054)를 시행하는 한편, 이만도(李晩燾) 등과 더불어 향음주례 의절을 강론하여 정하였다. 1892년에는 예천의 오천사(讓川擄)에서 ≪대학≫을 강하고, 1893년에는 영주향교에서 ≪소학≫을 강하였다.
이후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1895년의 을미사변J19366(乙未事變J19366)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세가J49889(世家J49889)의 후손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이휘령․이휘재(李彙載)․이만각(李晩慤)․금익명(琴翼明)․김재숙(金載琡) 등 당시 안동․예안 유림의 원로들을 두루 종유하였다.
특히 스승인 이휘재와는 서면을 통해 이황의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깊이 토론했으며, 금익명과는 ≪중용≫․≪대학≫의 의문점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이만인은 이황의 학설을 금과옥조로 여겨 이와 배치되는 이이의 사칠주기설(四七主氣說)과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용산문집 龍山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龍山文集, 西坡集.

이백초

1895(고종 32)~? 사회주의운동가. 서울 출신. 인텔리 집안 출신으로 법학교육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의 10월혁명으로 고무되었으며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러시아 문학과 사회사상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과학적 공산주의를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서울에서 출간되었던 잡지 〈형평〉에 시와 논문을 기고하였다. 그는 그의 활동으로 위협을 느꼈으며 1921년 초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 아무르 자유시로 가서 극동공화국소속 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1922년 그는 제5군 정치부 부설 양성소를 졸업하였고 5월에는 러시아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내전 이후에 그는 한글신문 ≪선봉≫의 주필이 되었으며 출판사에서 일하였다. 그는 소련에 살고 잇는 조선인들의 일반적인 문화와 정치교육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뜨베이 김, 이준형 역, 역사비평사, 1990).

이범익

1883(고종 20)~?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본관은 전주(全州). 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졸업하고, 1903년에 외국어학교 부교관과 이듬해 학부 사무견습을 통해 1906년에는 탁지부 번역관보를 역임하였다. 
1907년에 농상공부 서기를 지냈고, 1911년에는 조선총독부 지방국 지방과에 소속되었다. 1912년에 춘천군수와 1916년에 경북 달성군수를 거쳐, 1917~1919년에는 예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917년에 예천군수로 재직할 당시에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자 1년간 경북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뒤 황해도 내무부 부장을 거쳐 1924년에 사무관을 지냈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도지사의 자문기관이며 부지사격에 해당하는 경남 참여관을 지냈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강원도 지사를, 그리고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충남지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이병성

1909~1960. 가곡의 명창. 본관은 경주J27271(慶州J27271). 호는 두봉(斗峯). 서울 출생. 고종 때의 거문고 대가인 수경(壽卿)의 아들이다. 1922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하여 피리를 전공하였으며, 양금J04698(洋琴J04698)을 겸공하였다. 이주환(李珠煥) 등과 함께 하규일(河圭一)에게 가곡을 배워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92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한 뒤 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하였다. 1939년 아악부를 퇴직하고 1950년 구왕궁아악부 촉탁과 195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지냈다. 1960년 국악진흥회로부터 국악상을 수상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취입한 가곡 음반 및 녹음 테이프 일부가 남아 있고 그의 가곡은 장남 동규(東圭)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國樂槪要(張師勛, 精硏社, 1961), 國樂入門(金琪洙, 韓國古典音樂出版社, 1972).

이봉래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관리. 시종원시종, 궁내부전선사장, 궁내부비서원승, 한성부판윤, 한성부재판소수반판사,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 출근을 태만히 하였다 하여 견책의 처벌을 받았다. 
1904년에는 봉상사 제조 송규헌(宋奎憲)이 그를 지목하여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천류(賤類)가 높은 자리에 올라 불법을 저지르므로 쫓아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이 후에도 내부협판, 봉상사제조, 궁내부제실회계심사국장 등의 관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1906년 서훈3등 태극장J46129(太極章J46129)을 받았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大韓帝國 官報.

이선길

1893(고종 30)~1971. 체육인. 1928년 일본 고도관(講道館)에 입관하여 유도를 수업하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우리나라 유도계의 선구자이다. 1932년 제3회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 일반 장년부에서 우승하고, 1938․1939년에 개최된 제 7․8회 대회에서도 연승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인의 기개와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965년에는 대한유도회의 공인 9단 자격을 획득한 바 있다.

이선유

1872(고종 9)~? 판소리 명창. 경상남도 진주 출생. 10세 때부터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였고, 15세 때에 송우룡(宋雨龍)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뒤 혼자 독공을 하다가 30여세 때 김세종J03335(金世宗J03335)에게 공부한 뒤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성량(聲量)은 풍부하지 못하였으나 동편(東便)소리의 고제(古制)를 점잖게 잘 불렀다. 1933년 판소리 다섯마당의 사설(辭說)을 엮어 ≪오가전집 五歌全集≫이라는 판소리사설집을 내었다. 이 ≪오가전집≫은 판소리장단을 넣어 채록하여 출판한 최초의 판소리사설집으로 판소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판소리를 잘 하여, 〈수궁가〉 몇 대목이 음반으로 나온 바 있다. 박봉술 (朴奉述)이 그에게서 수년간 판소리를 배웠다. 여러 종의 그의 판소리 음반은 ≪오가전집≫ 사설과 함께 송만갑J04660(宋萬甲J04660) 이전의 동편제(東便制) 소리의 특성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이세정

1895(고종 32)~1972. 교육자․체육인. 호는 일해(一海). 서울 출신. 1911년에 매동(梅洞)고등보통학교, 1914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를 졸업하였다.
191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20년에 매동고등보통학교 교원과 경기도교원양성소 강사, 1923년에 경기공립상업학교 교사를 거쳐 1925년부터 36년간 진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한 뒤 정년퇴임하였다.
그 뒤 1972년까지 일성학원 설립자로서 일성고등공민학교 교장으로 근무했으며, 은석학원․숙명학원․인창학원․경기학원․화산학원․인하학원․향림학원․송산학원․문성학원․명성학원․강문학원․대동학원․동도학원 등의 학교법인 운영에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서울특별시교육회․대한교육연합회․교원공제조합․문교재단연합회․중앙교육위원회․중앙교육연구소․국정교과서주식회사․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연합회․사학진흥위원회․서울대학교기성회․세계교육자대회 등 각종 교육단체에 설립자 또는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한글학회 임원․국어심의위원․세종대왕기념사업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체육활동으로는 정구인의 단체인 금강구락부 창설을 비롯하여 1925년에 조선정구협회를 조직하였고, 1945년에는 조선체육동지회를 구성하여 조선체육회(지금의 대한체육회)를 재건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대한연식정구협회장을 역임하면서 연식정구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60년 10월 아시아연식정구대회에 단장으로 참가하였고, 문교부체육심의위원․올림픽대책위원․서울신문사체육상 심사위원장․체육장학위원회 부위원장․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학교체육 및 사회체육 발전에 힘썼다. 1957년에 교육공로표창상(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1969년에 대한민국체육공로상, 1971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大韓體育會史(大韓體育會, 1965), 韓國體育百年史(韓國體育百年史編纂會, 1981).

이수경

1882(고종 19)~1955. 거문고의 명인. 본관은 경주J27271(慶州J27271). 자는 치일(致一), 호는 송사(松史). 서울 출신. 헌종 때 피리의 명인인 이인식(李寅植)의 장손이고, 역시 고종 때 피리의 명인인 이원근(李源根)의 맏아들이며, 가곡의 명창 이병성(李炳星)의 아버지이다.
1892년(고종 29) 장악원J05238(掌樂院J05238)에 입사(入仕)하였으며, 1901년 진연(進宴) 때는 방향J04287(方響J04287), 1902년 진연 때는 편경J10591(編磬J10591)을 담당하였다. 1903년 3월에 가전악(假典樂)이 되었고, 1913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거쳐 아악사(雅樂師)에 승진하였다. 1939년 이왕직 아악부를 사임할 때까지 김영제(金嶇濟)․함화진(咸和鎭)․최순영(崔淳永)과 더불어 아악의 보존과 육성에 공헌이 컸다.
특히, 영산회상(靈山會相 : 일명 거문고회상)과 도드리의 연주가 절묘하였다. 1892년 11세 때 무동J11343(舞童J11343)이었던 관계로 궁중정재(宮中呈才)에도 뛰어나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는 춤은 모두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고, 종묘대제 때 추는 일무J11904(佾舞J11904) 악장J21318(樂章J21318)도 대부분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다.  ≪참고문헌≫ 進宴儀軌, 國樂槪要(張師勛, 精硏社, 1961).

이수만

185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수(景壽). 아버지는 두영(斗永)이다. 선파인(璿派人)으로서 전시J08084(殿試J08084)에 직부(直赴)되는 혜택을 입어 1869년 정시J08087(庭試J08087)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수찬․지평․교리, 사간원헌납, 승정원승지 등을 역임하다가 1880년 임피(臨陂)로 유배되었다. 1889년부터 다시 의금부도사, 성균관대사성, 성천부사, 궁내부비서감 승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日省錄, 大韓帝國官報.

이순익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초명(初名)은 구익(九翼). 1865년(고종 2) 이후 순익으로 개명(改名)하였다. 1857년(철종 8) 전시J08084(殿試J08084)에 직부(直赴)하여 급제하였다. 
이 후 규장각직각,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승정원승지, 형조참판, 호조참판, 공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이조참판, 한성부우윤, 예조참판, 한성부좌윤, 형조판서, 공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예문관제학,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홍문관제학,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궁내부 봉상사제조, 중추원의관, 궁내부장례원경,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2년 정1품 보국(輔國)에 올랐다. 1875년과 1888년에 각각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 兼 謝恩副使)와 진하 겸 동지사은정사(進賀 兼 冬至謝恩正使)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日省錄, 大韓帝國 官報.

이승만

1875(고종 12)~1965.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 출신.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J36613(讓寧大君J36613)의 16대손이고, 아버지는 경선(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생애 및 활동상황〕 1877년 서울에 이사하여,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과거 지향의 한학을 공부하다가 1894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듬해 4월 배재학당J53931(培材學堂J53931)에 입학, 영어와 신학문을 연마하였다. 1895년 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J15606(徐載弼J15606)이 배재학당 내에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그 뒤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그 주필과 사장직을 맡아 활약하였고, 독립협회 산하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이러한 개혁운동을 벌이던 끝에 1898년 11월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종9품)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의원이 된 다음 그는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J04040(朴泳孝J04040)를 영입하여 강력한 내각 중심제 정부를 조직하고 고종 황제를 양위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 결과 고종 측의 노여움을 사 1899년 1월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지 20일만에 탈옥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평리원 재판에서 종신형 언도를 받고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 수감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반 이상 영어(囹圄)생활을 하였다. 옥중에서 그는 ≪청일젼긔 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졍신≫을 저술하였으며, ≪신영한사전≫을 편찬하면서 ≪뎨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을 계기로 석방된 그는 1904년 11월 민영환J04039(閔泳煥J04039)과 한규설J13648(韓圭卨J13648)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함께 1905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회견하고 러․일전쟁 종결 후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는 데 힘써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외교에 실패한 그는 1910년까지 5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및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이수한 끝에 1910년 7월에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0년 8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으로 귀환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학감(學監)직을 맡아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전국적으로 청년회 조직망을 구축하던 중 1912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때 그는 감리교 선교부 동북아 총책 해리스(M.C.Harris) 감독의 도움으로 (1912년 3월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 감리회 4년총회의 한국대표로 참가한다는 명목하에) 출국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당시 뉴져지주(州)의 지사(知事)이고 은사인 윌슨(Woodrow Wilson)을 찾아가 󰡐105인사건󰡑에 연루된 한국기독교인들의 구명운동을 펼쳤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네브라스카에서 옥중 동지 박용만(朴容萬)을 만나 상의한 다음 1913년 2월 하와이의 호놀루루로 건너가서 한인중앙학원(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을 인수, 운영하면서 〈태평양잡지〉(1930년에 태평양주보로 개제)를 창간하였으며, 1918년에는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외교를 통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던 그는 박용만의 무력양성론에 반대하였고,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재정문제로 박용만파와 대결함으로써 미국 내 교포사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회장:안창호)로 부터 정한경J57476(鄭翰景J57476)․민찬호(閔燦鎬)와 함께 파리 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임명된 그는 워싱턴에서 백악관 및 국무성을 상대로 파리행 여행권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여행권 발급 거부통보를 받기 이틀 전(3월 3일)에 그는 정한경과 공동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하에 한국을 신설될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파리행을 포기한 그는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14~16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여 독립방략을 논의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3월 10일에야 전하여 들은 그는 4월과 5월에 3월 21일에 선포된 노령의 임시정부에서 국무급(及) 외무총장으로, 4월 10일에 구성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그리고 4월 23일에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로 임명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6월에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의 명의로 각국 정부수반과 강화회의 의장에게 한국의 독립을 통고하는 한편, 8월 25일에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치하고 외교활동과 독립자금 모집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9월 6일 상해의 임시정부(약칭 임정) 의정원으로부터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그는 상해로 건너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상해 임정 내의 반대세력들의 협조거부로 대통령직을 원만히 수행하지 못한 그는 1921년 10월에 개최될 워싱턴 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 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인의 독립문제를 의제로 상정시키려는 외교활동을 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간 그는 다시 언론․교육․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에서 그는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상해 임정의 의정원에서 1925년 3월 탄핵함으로써 그는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한성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세우며 임시정부 대통령임을 자처하였고, 구미위원부를 활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33년 초 그는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열강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를 환기시켰다. 회의 종결 후,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미국으로 귀환한 그는 뉴욕에서 1934년 10월에 제네바에서 만났던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과 결혼하였다.
이승만 부부는 1939년 11월에 호놀루루를 떠나 워싱턴에 자리잡고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라는 영문저서 집필에 몰두한 끝에 이 책을 1941년 여름에 출판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사건을 계기로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경(重慶)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D.Roosevelt)와 국무성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그는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항일 게릴라전 계획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리고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 총회에서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 임정 대표의 참석권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폈다.
1945년 8월 광복 후 10월에 귀국한 그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미․소 등의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 거부 등 반탁과 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자, 그는 1946년 6월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 방문 기간중(19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의 대 소(對蘇) 봉쇄 및 반공주의적인 트루만 독트린은 그의 반공․단정노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총선거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한 다음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1948년 5월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된 다음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그는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으로서 그는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그는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각급 학교를 증설하여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이는 한편,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외교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미외교를 통하여 미군의 신속한 개입, 파병을 실현시키고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였다. 전쟁중 무력통일을 실현시키려했던 그는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의 휴전협상에 강력히 반대하다가 1953년 6월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 2만 7000여 명을 유엔군 측의 사전 양해 없이 석방하였다.
같은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미국이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고 10월에 그 조약을 실현시킴으로써 휴전 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확약받았다.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에 피난해 있던 1951년 12월 정치안정과 장기집권을 위하여 자유당(自由黨)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4년임기의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1954년 국회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3선금지를 면제해 주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과시켰다. 1956년의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J12908(申翼熙J12908)가 투표 몇 일 전에 사망하여 유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 번째 당선되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선거전에 사망하여 그의 4선이 확실시되었으나, 자유당은 부통령후보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선거부정을 감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4․19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4월 2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같은해 5월 휴양차 하와이로 떠난 그는 후속 정권에 의해 귀국을 허락받지 못하고 호놀루루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서거하였다. 유해는 하와이에서 국내로 옮겨 와 가족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 서〕 저서로는 ≪독립졍신≫․≪한국교회핍박≫․≪撈청일젼긔 淸日戰紀≫․≪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Japan Inside Out 일본내막기≫ 등이 있고, 한시J62064(漢詩J62064)모음 ≪체역집 替役集≫을 남겼다. ≪참고문헌≫ 李承晩博士傳(徐廷柱, 三八社, 1949), 亡命老人 李承晩博士를 辯護함(金麟瑞, 독학협회출판사, 1963), 人間李承晩(李元淳. 新太陽社出版局, 1965), 李承晩과 金九(孫世一, 一潮閣, 1970), 雩南李承晩(許政, 太極出版社, 1976), 雩南實錄-1945~1948-(雩南實錄編纂會, 悅話堂, 1976), 뭉치면 살고… 언론인 이승만의 글모음(1898-1944)(원영희․최정태 편, 조선일보사, 1995), 거대한 생애:이승만 90년 〈상〉․〈하〉(이한우, 조선일보사, 1995), 이승만과 한미외교(한표욱, 중앙일보사, 1996), 이승만의 삶과 꿈-대통령이 되기까지-(유영익, 중앙일보사, 1996), 이승만 연구(유영익 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Robert T.Oliver, New York:Dodd Mead and Co., 1954), Korea's Syngman Rhee(Richard,C.Allen, Rutland,Vermont & Tokyo, Japan:Charles E.Tuttle Co., 1960), Embassy at War. Ed. with Introduction by Frank Baldwin(Harold J.Noble, Seattle and London: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75),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Robert T.Oliver, Seoul:Panmun Book Co. Ltd., 1978), The Fall of Syngman Rhee(Quee-Young Kim,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83),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rough War and Peace〈1943~1960〉(Henry Chung, Seoul:Yonsei Unviersity Press, 2000), Syngman Rhee:A Portrait of the Early Years(Chong-Sik Lee, Seoul:Yonsei University Press, 2000), 開化期 李承晩의 思想形成과 活動〈1875~1904〉(高珽烋, 歷史學報 109, 1986), 구한말 이승만의 활동과 기독교〈1875~1904〉(서정민, 한국기독교사연구 18, 1988), Syngman Rhee  The Political Entrepreneurship of a Conservative(Sung-joo Han, 亞細亞硏究 22  2, 1979).

이승수

180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유(景猷). 아버지는 유명(惟命)이다. 1845년(헌종 11) 감제J07802(柑製J07802)에서 전시J08084(殿試J08084)에 직부(直赴)하여 다음해 식년시J08066(式年試J08066)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충청좌도암행어사, 홍문관수찬 및 교리, 이조참의,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종정경J14739(宗正卿J14739),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51(철종 2)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진주사은사(陳奏謝恩使) 김경선(金景善)을 수행하여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1881년(고종 18) 효헌(孝憲)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이연응

18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연수(蓮壽). 흥선대원군J34016(興宣大院君J34016)의 아버지인 남연군J51854(南延君J51854) 구(球)의 사촌인 화중(禾重)의 아들로 백부(伯父)인 낙중(樂重)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선파유무응제부(璿派儒武應製賦)로 전시J08084(殿試J08084)에 직부(直赴)하여 같은 해 별시J08042(別試J08042)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66년 홍문관부수찬이 된 이래 종친으로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승정원동부승지, 이조참의, 종정경,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효정J40370(孝靖)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가, 1910년 다시 효정(孝貞J40370)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이연응

18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연수(蓮壽). 흥선대원군J34016(興宣大院君J34016)의 아버지인 남연군J51854(南延君J51854) 구(球)의 사촌인 화중(禾重)의 아들로 백부(伯父)인 낙중(樂重)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선파유무응제부(璿派儒武應製賦)로 전시J08084(殿試J08084)에 직부(直赴)하여 같은 해 별시J08042(別試J08042)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66년 홍문관부수찬이 된 이래 종친으로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승정원동부승지, 이조참의, 종정경,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효정J40370(孝靖)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가, 1910년 다시 효정(孝貞J40370)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이용선

1863~?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지(元之). 아버지는 병문(秉文)이다.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박사, 규장각대교, 세자시강원사서, 이조좌랑, 성균관대사성, 승정원동부승지, 궁내부특진관, 장례원소경, 궁내부 봉상사제조, 충북관찰사, 궁내부협판, 농상공부협판, 평안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에는 영국․독일․러시아․벨기에․프랑스 5국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않아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大韓帝國官員履歷書, 國朝榜目, 大韓帝國 官報.

이용진

1884~1943. 한말 피리의 명인. 구명은 용진(龍眞 또는 用振). 본관은 전주(全州). 서울 출생. 고종 때 장구의 명수인 이창업(李昌業)의 아들이며, 해금을 전공한 이덕환(李德煥)의 사촌형이다. 
1898년 11월 장악원J05238(掌樂院J05238)의 악공으로 임명되었고, 1901년 진연(進宴) 때 무동J11343(舞童J11343)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8월 1일 아악부(雅樂部) 아악수(雅樂手)가 되었으며, 1915년 4월 제사과(祭祀課)에 근무하였다. 각종 연주에서 수석주자인 목피리를 담당하여 높은 기교를 발휘하였고, 당피리의 다스름 연주에 특별히 뛰어났다.  ≪참고문헌≫ 高宗辛丑進宴儀軌.

이우규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실학자. 본관은 한산J14003(韓山J14003). 자는 성천(聖天), 호는 아주(鴉州). 참판 교식(敎植)의 아들이다. 1890년(고종 27) 과천현감(果川縣監)을 거쳐 후일 나주군수를 지냈으며 실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잠업에 식견이 높아 1884년에 ≪잠상촬요 蠶桑撮要≫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친한 벗 김사철(金思轍)의 권유에 의해서였다.김사철은 1878년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비롯, 수많은 현직(顯職)을 거쳐 도승지․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한 사람으로 잠상에 관한 농서를 엮고자 수많은 잠상 서적을 모았다.
그러나, 관직에 바빠 이를 모두 실학에 밝은 이우규에게 주면서 잠상서(蠶桑書)를 쓰도록 권하였다. 이래서 이루어진 것이 ≪잠상촬요≫인바, 100여년 전에 편찬된 이 농서의 잠상기술은 최근의 잠상기술과 대차없을정도로 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뽕나무의 품종판별이나 정지법(整枝法 : 나뭇가지를 가꾸는 법)의 도해설명, 각종 잠구(蠶具)의 그림 등은 종래 농서에서 볼 수 없는 사실적 풀이를 가하고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되어 있다. 그는 1880년대 개화기 때 중국의 잠상기술을 도입한 실학자로, 또 이를 실천에 옮긴 일선의 권업행정가로 우리나라 잠상기술개선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蠶桑撮要, 增補蠶桑撮要(金思轍, 1884),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이용학

181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J27633(廣州J27633). 자는 이습(而習). 아버지는 봉래(鳳來)이다. 선조 때의 원상J33201(院相J33201)이었던 준응(浚應)의 사손(祀孫)으로서 1864년(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동부승지로 특제(特除)되었다. 
사간원대사간을 지내다가 1867년 승지 시절의 잘못이 드러나 정배되었으나 곧 특별 석방되었다. 1869년부터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876년에는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서 정사J11001(正使J11001) 심승택J49708(沈承澤J49708)을 수행하여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이원근

1850 철종 1~1918. 한말 피리의 명인. 본관은 경주J27271(慶州J27271). 자는 경재(景哉). 서울 출신. 피리의 대가인 이인식(李寅植)의 아들이다. 1860년 2월 장악원J05238(掌樂院J05238) 악공이 되었고, 1869년 12월 가전악(假典樂), 1906년 1월 악사J10460(樂師J10460), 1908년 7월 전악(典樂), 1913년 8월 이왕직의 아악수장(雅樂手長)을 지냈다.
 1915년 4월에는 제사과(祭祀課)에 근무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피리주자로 활동하였으며, 맏아들 수경(壽卿)은 거문고의 명인이고, 넷째아들 수억(壽億)은 관악기를 전공하였다.  ≪참고문헌≫ 典樂先生案, 高宗辛丑․壬辰進宴儀軌

이응익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관리. 1883년에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된 기기국의 사사를 지냈고,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공조 참의로 특제(特除)되어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후 승정원승지, 학무아문참의, 학부학무국장, 한성사범학교교장, 외국어학교교장, 법부참서관, 법률기초위원, 법부민사국장, 한성재판소판사, 홍주군수, 중추원의관, 외부교섭국장, 거창군수, 창원감리, 궁내부 장례원전례 등을 역임하였다. 1906년에 훈4등 태극장J46129(太極章J46129)이 수여되었고, 1910년 정2품이 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大韓帝國官報.

이인기

1804년(순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요장(堯章). 기연(紀淵)의 아들이다. 참봉(參奉)으로 1839년(헌종 5)에 정시J08087(庭試J08087) 병과(丙科)에 합격, 출사(出仕)하였다. 1865년 3월 강화부J17184(江華府J17184) 유수J00740(留守J00740)에 임명되어 부내의 진(鎭), 보(堡), 성채, 행궁(行宮) 등의 시설물 일체와 정족산성J12630(鼎足山城J12630) 선원각(璿源閣)을 정비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J08266(丙寅洋擾J08266)가 발발하게 되어 8월에 1차로 침공한 프랑스군함 2척이 한강을 거슬러 염창(鹽倉)을 지나 서울의 초입인 서강(西江)까지 진출하였고, 이어 9월에는 프랑스군의 2차 침공을 받아 8일 강화부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강화부를 방어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당해 중군J13708(中軍J13708) 이용회(李龍會)와 함께 파직, 유배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文科榜目, 韓國史講座-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4).

이인섭

1888(고종 25)~1979. 사회주의운동가. 평안남도 평양근교 출신. 평양 광성학교를 졸업하였다. 1907~1910년 평남 양덕 맹산 일대에서 유인석이 이끈 반일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1910년 일제의 한일합방 이후 의병대의 해산을 피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서 남만주 임강현으로 이주했으며 그 곳에서 부대는 해체되고 무장해제되었다. 대원들은 정치적 망명자들이 되었고, 그는 1913년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17년 그는 옴스크로 가서 그 곳에서 지방의 볼셰비키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이 때에 그는 사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2월혁명을 겪으며 볼셰비키와 친교를 맺고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 해 여름 그는 예카테린부르그에서 연해주로 파견되어 가는 김 알렉산드라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함께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12월 극동소비에트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8년 4월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창립대회에 참가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을 담당하였다. 그 해 가을 하바로프스크가 백군 칼呱코프에게 점령당하자 그는 옴스크로 이동해 러시아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했고 옴스크 소재의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의 시베리아국 고려부에서 일하였다. 1920년 봄부터 이 단체의 기관지 〈새벽북〉 발행에 참가했고, 그 후 모스크바로 가서 10월 러시아공산당 모스크바당위원회 중국인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1921년 극동공화국 외무인민위원회에 파견되어 일했고, 1922년에는 치타에서 통역 및 정보관으로 일하면서 정치군사과정을 수료하고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참모부에 근무하였다. 
1922년 말 내전 후 그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당위 소수민족부에 있었고, 1924~1925년에는 동 시의 제9소비조합 당세포 서기로 있었다. 1925~2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공산당 연해주위 선전선동부원으로 일했으며 1929년 중동선 철도분쟁시에 소련군 연해주군단 참모부에서 근무하면서 산차고우 전투, 미쉬안시 점령전에 참가하였다. 
1932년까지 국경수비군 참모부에 근무했고 1933~1936년 소련군 극동특립군 참모부가 설립한 사관학교 수학하였다. 국경수비대 감시소 소장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9월 강제 이주 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이주했고 1952년 우즈베키스탄 안디쟌으로 이주하였다. 이 후 빨치산 참가자의 회상기 전투기를 수집하는 일에 노력하였다. 1967년 10월혁명 50주년에 소련정부로부터 적기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뜨베이 김․이준형 역, 역사비평사, 1990),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 성대경 편, 창작과 비평사, 1996).

이인식

생몰년 미상. 조선 헌종․고종 때의 악사J10460(樂師J10460). 본관은 경주J27271(慶州J27271).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가전악(假典樂), 1876년(고종 13) 7월 전악(典樂)이 되었고, 1877년과 1892년의 진찬(進饌) 때에는 집사악사(執事樂師)로 활약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j05224(李壽卿j05224)의 할아버지이고, 가곡J00857(歌曲J00857)의 명인 이병성(李炳星)의 고조부이다. 전공은 피리인데 이수경 외에 이 집안은 한결같이 피리가 전공이었다. 세습적인 궁중악인이다. ≪참고문헌≫ 典樂先生案, 進宴儀軌, 國樂槪要(張師勛, 精硏社, 1961), 韓國樂器大觀(張師勛, 韓國國樂學會, 1969).

이재극

1864(고종 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예조판서 연응(沇應)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동몽교관J59854(童蒙敎官J59854)이 주어지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민비의 장례시 종척집사(宗戚執事)를 맡았으며, 1893년 유학J13808(幼學J13808)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가주서J05263(假注書J05263)를 거쳐 1895년 비서감우비서랑(秘書監右秘書郎)․왕태자궁우시독관(王太子宮右侍讀官)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규장원교서(奎章院敎書)․경연원시독(經筵院侍讀)․장례원장례(章禮院章禮) 등을 지냈다. 
1897년 규장각직각․비서원승을 지내며 원구고제시(珤丘告祭時)에는 선표관장례(宣表官章禮)를 맡았고, 이듬해 흥선대원군 상례 때 지문서사관(誌文書寫官)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추원의관․시강원부첨사(侍講院副詹事)․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등을 거쳐 칙임관 4등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가, 홍릉제조(洪陵提調)․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시강원첨사․종정원경 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 경효전 전작례시(奠酌禮時)는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여하여 가자되었고, 칙임관 3등 내부협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서리내부대신사무(署理內部大臣事務)를 맡았다가, 칙임관 2등 의정부참찬으로 임명되어 시강원첨사를 겸임하였다. 
1900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서 외직에 나갔다가, 이듬해 궁내부특진관을 거친 뒤 비서원경을 지냈다. 1902년 칙임관 1등 의정부찬정에 오르고 궁내부특진관․비서원경․장례원경․태의원경(太醫院卿)․시종원경(侍從院卿)․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법부 대신에 임명되어 의정(議政) 윤용선J16864(尹容善J16864) 등과 함께 내장원경 이용익J17452(李容翊J17452)의 탄핵을 상주하였다. 
1903년 법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규장각학사․시강원일강관․비서원경 등을 겸하였다. 이듬해에도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 등을 겸임하였으며, 법부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김종한J33581(金宗漢J33581)․임건상(林建相) 사건 등을 심리하고 왕명을 받아 여러 차례에 걸쳐 특사를 시행하였다. 
이 해 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경상북도 관찰사를 맡은 뒤 의정부찬정․임시서리법부대신․평리원재판장사무 등을 거쳐 학부 대신에 기용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유학생에 학자금을 보낼 수 없게 되자 유학생을 전원 소환하였다. 그리고 일본시찰학문상제도급사무(日本視察學問上制度及事務)로서 일본 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일본 천황에게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그 밖에도 종정원경․관제이정소의정관(管制釐正所議定官)․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 등을 겸임하였다. 1905년에는 제실제도정리국의정관과 동국 총재(總裁)를 겸임하였고, 그   훈이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이 주어졌으며 임시서리내부대신사무․예식원장례경 등을 지내고 궁내부 대신이 되어 훈일등팔괘장(勳一等八掛章)이 서훈되었다. 
을사조약 체결시에는 왕실의 종친으로 궁내의 동정을 탐지하여 친일파에게 제공하는 등 조약 체결에 협조하여 지탄을 받았다. 1906년 부묘도감제조(欖廟都監提調)로 활약하여 가자되었다. 
그리고 궁내부 대신으로서 태극장을 수여하였으며 경효전제조에 임명되어 표훈원의정관․시강원첨사 등을 겸하였고 이어 수학원장이 되어 경효전제조․임시서리적십자사총재사무(臨時署理赤十字社總裁事務)․제실재정회의의원(帝室財政會議議員)․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등을 겸임하였다. 
1907년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궁내부대신․수학원장․표훈원총재 등을 지냈으며, 대원비신도비문서사관(大院妃神道碑文書寫官)을 맡기도 하였다. 그 해 나철J45385(羅喆J45385) 등이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려고 할 때, 매국노로 지목을 받아 서태운(徐泰運) 외에 수명의 결사대가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합방 후 일본 정부에 의하여 남작이 주어졌다. 1919년에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에 임명되어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文品案, 大韓季年史.

이정

1895(고종 32)~1943. 종교인․독립운동가. 대종교인(大倧敎人)으로 만주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에 본영을 둔 북로군정서J04046(北路軍政署J04046)에 가입하여 막빈(幕賓)의 임무를 맡아 활약하는 한편,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 각 지방에 출동하여 군자금모집에 힘썼다. 
1920년 10월 청산리독립전쟁에 참가한 뒤 대한독립군단J27518(大韓獨立軍團J27518)의 일원으로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에 갔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와 만주 각처에 대종교를 전교하면서 민족정신 함양에 노력하였다. 1942년 만주 동경성(東京城)에 천전J53366(天殿J53366)을 건축하기로 계획한 사업에 열중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壬午十賢殉敎實錄(大倧敎總本司, 1971),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2).

이창업

생몰년 미상. 조선 고종 때의 장구악사. 장악원J05238(掌樂院J05238)의 악공직에 있으면서 1877년(고종 14)․1887․1892․1901․1902년에 있었던 진찬 및 진연에서 장구자비〔杖鼓差備〕를 하였다.
1895년에는 의료선교사 알렌(Allen,H.N.)의 주선으로 강재천(姜在天)․이경룡(李景龍)․이지행(李枝行)․최을룡(崔乙龍)․이수동(李壽同)․안백룡(安伯龍)․신흥석(申興錫)․정기룡(鄭奇龍)․이재룡(李在龍) 등 9명의 장악원 국악연주단 일행을 인솔하여 시카고에서 개최한 만국박람회에 처음으로 우리 나라 전통음악을 세계에 소개하였다.  ≪참고문헌≫ 高宗丁丑․丁亥․壬辰進饌儀軌, 高宗辛丑進宴儀軌.

이창윤

생몰년 미상.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영암출신. 이날치(李捺致)에게 판소리를 배워 서편제(西便制)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심청가 沈淸歌〉를 출중하게 잘하였다. 특히, 〈심청가〉에서 심청이 공양미 300석에 남경J42529(南京J42529) 선인들에게 팔려가게 되자 심봉사가 통곡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 한다. 황호통(黃浩通)․성창렬(成昌烈)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이채연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이봉(以鳳)의 아들이다. 1887년(고종 24) 8월 주차 미국전권대신(駐箚 美國全權大臣) 박정양이 도미(渡美)할 때 번역관(洞譯官)으로 수행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기관으로 승진하였다. 1894년(고종 31) 4월에 실시된 문과 전시J08084(殿試J08084)에서 갑과(甲科)로 합격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농상협판(農商協辦)이 되고 이듬해에는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가 되었다. 이어 농상공부협판을 거쳐 한성부관찰사가 되었고 1896년에는 감독경인철도사무가 되고, 재차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1898년 2월에는 한성부재판소수반판사(漢城府裁判所首班判事)를 겸임하였고, 귀족원경(貴族院卿), 양지아문부총재관(量地衙門副摠裁官)을 지냈다. 그 외 시종원경(侍從院卿)을 거쳐 1900년에는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國朝榜目.

이천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을 역임하였다. 1256년(고종 43) 6월 몽고군을 막기 위하여 수군 200여명을 인솔하고 남도로 내려가 온수현(溫水 縣 :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에서 적군 수십명을 죽이고 납치된 백성 100여명을 구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李彦忠墓誌, 東賢號譜.

이탁

1889(고종 26)~1930. 독립운동가. 본명은 제용(濟鏞). 일명 동우(東雨)․춘우(春雨). 자는 태연(跆然), 호는 동우(東愚, 東禹). 평안남도 평원 출신. 대지주 용규(龍奎)의 맏아들이다. 
1908년 평양 대성학교J20916(大成學校J20916)에 입학해 재학중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였으며, 1909년 신민회 특사로 남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군기지를 물색하였다. 
1910년 만주로 망명, 유하현(柳河縣)에서 이시영J16873(李始榮J16873) 등을 도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 독립군 자금으로 썼다. 
1912년 신흥학교유지회(新興學校維持會)를 조직하여 신흥학교 운영기금을 모금했으며, 1913년 유하현 일신학교(日新學校) 교장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7년 의병장 이진룡J18082(李鎭龍J18082)이 잡히자 그의 부하들을 재규합하여 독립군부대로 편성하였다.
1919년 이완용J17416(李完用J17416)을 포함한 매국 7적을 주살하기 위해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를 조직, 결사대대장으로 서울에 왔다. 
그 해 3월 고종의 국장행렬이 지나갈 때 매국노를 사살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 가까이에 있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7적 성토문과 격문만 배포한 뒤 만주로 돌아갔다. 한족회J19402(韓族會J19402) 간부로서 활동하며, 이 해 11월 관전현(寬甸縣)에서 59개 단체가 모여 만든 항일무장운동 단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의 교육부장이 되었다. 1920년 6월 효율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 광복군총영J48516(光復軍總營J48516)을 결성하고 참모장이 되었다. 
이후 대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일제 경찰과 친일 주구배를 사살하고 일제기관을 폭파하는 투쟁을 계획하고 지도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동삼성 외교위원부(東三省外交委員部) 위원장이 되었다. 이 해 7월 미국 의원단이 조선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광복군총영의 오동진J17395(吳東振J17395)과 협의, 3개 결사대를 국내에 보내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게 하여 미국 의원들에게 우리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파견된 동지들이 붙잡힘에 따라 1921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1921년 신익희J12908(申翼熙J12908) 등과 한중호조사J21193(韓中互助社J21193)를 조직하고, 문서과 부주임이 되어 한국과 중국 양국의 공동 투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2월 상해 대한적십자사 감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주비회(國民代表大會籌備會)가 조직되자 서기로 임명되어 대회를 준비했으며, 평안남도 대표로 대회에 참석해 재정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표들 간의 의견 대립으로 대회가 난항을 거듭하자 독립운동단체 대표자들로 시사책진회J16062(時事策進會J16062)를 조직해 의견 해소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가서 만주에 있는 한국인의 생활 안정을 위해 토지를 구입, 개간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제각기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자는 3부통일안(三府統一案)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만주, 간도지방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武裝獨立運動煉史(蔡根植, 大韓民國公報處, 1949),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2․3․4․5․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6), 독립운동사자료집 9․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1976),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獨立有功者功勳錄 5(國家報勳處, 1988),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이한영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1880년(고종 17) 무과J07839(武科J07839)에 합격하였다. 1898년에는 친위연대(親衛聯隊) 제2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1900년에는 군부협판(軍部協辦) 칙임관 3등이 되었다. 이 해 10월부터는 군부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로 근무하였으며, 1901년에 다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어 한성부재판소수반판사(漢城府裁判所首班判事)를 겸임하였다. 
1902년에 군부협판을 거쳐 1903년에는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 법부협판(法部協辦)을 역임하였다. 1904년에 군부협판을 거쳐 철도원감독(鐵道院監督)을 지냈다. 1905년에는 시종원경(侍從院卿)으로 근무하였으며, 1906년에는 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임명되고 칙임관 2등관이 되었다. 같은 해 말에 다시 군부협판이 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이한호

1895(고종 32)~1960. 외교가․체육인. 함경남도 원산 출생. 경신(怯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스위스의 취리히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소 신체건강과 호신의 목적으로 유도기술을 습득하여 취리히대학에서 유도클럽을 조직하여 기술지도와 유도인 양성 등으로 유도보급을 시작하였다.
그뒤 오스트리아․프랑스․네덜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유도를 지도하여 체육을 통한 우리나라의 국위선양에 힘썼다. 광복 후 초대 서독총영사를 거쳐 경제사절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5년 7월 스웨덴유도유단자회장을 역임할 때 우리나라의 유도발전을 위하여 최초로 해외원정경기를 주선하였다.
구체적 활동으로는 대한경찰상무회의 원조로 약 3개월간 스웨덴․오스트리아․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서독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국제시합 및 순회지도로 한국유도를 서구에 소개하고 국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1957년 40년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서독에 건너가 본에서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체육회50년(대한체육회, 1970).

이항의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1878년(고종 15)에 경상도 흥해J14875(興海J14875) 군수로 있었으며, 1893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J01548(兵馬節度使J01548)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96년에는 진주부관찰사(晉州府觀察使)를 거쳐 경상남도 관찰사가 되었다. 1897년에는 중추원J13579(中樞院J13579) 1등의관에 임명되었으며, 1898년 경상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901년 중추원 의관, 1904년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근무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이해승

1890(고종27)~?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조부는 궁내부대신을 지낸 청안군(淸安君) 재순(載純)이며, 부는 풍선군(豊善君) 한용(漢鎔)이다. 1902년(광무6)에 예릉참봉(睿陵參奉)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07년에는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이 되었고 이듬해 청풍도정(淸豊都正)이 되었다. 
1909년 4월에는 수학원J08400(修學院J08400) 제1회생으로 졸업하였다. 1910년 6월에 종2품이 되었으며, 청풍군(淸豊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8월에는 자헌대부J27946(資憲大夫J27946)에 올랐다. 일제(日帝)로부터 후작(侯爵)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大韓帝國官員履歷書, 朝鮮紳士名鑑(日本電報通信社京城支局, 明治44年).

이현익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1867년(고종 4) 4월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으며, 1869년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1871년에는 승정원 예방승지(禮房承旨), 1873년 우승지가 되었다. 1875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1882년에는 좌승지로 근무하였다. 
1883년 특별 발탁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거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84년에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886년에는 예조판서, 1889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0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재차 예조판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9년에는 정2품으로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이휘중

?~1888(고종25). 조선 말기의 문신. 1864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1866년에는 황해도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재임하였다. 1871년 종정경J14739(宗正卿J14739)이 되었고, 같은 해 2월에는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지종정경J61422(知宗正卿J61422)이 되고, 1878년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1882년 한성부판윤이 되고 판종정경J50271(判宗正卿J50271)이 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임기준

1868(고종 5)~1940. 가사와 시조의 명창. 서울 출신. 1939년 6월부터 9월까지 이왕직아악부 임시촉탁으로 부임하여 이름난 가인(歌人) 하규일(河圭一)이 부르지 않던 12가사 중 〈수양산가 首陽山歌〉․〈처사가 處士歌〉․〈양양가 襄陽歌〉․〈매화타령〉의 네 곡과 사설지름시조․수잡가J09735(首雜歌J09735) 등 30여곡을 전수하였다.
현재 전창되고 있는 네 곡의 가사와 사설지름시조의 대부분은 임기준의 전창에 속하고, 장사훈J10523(張師勛J10523)에 의하여 1939년에 채보된 악보가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歌詞集 2(張師勛採譜), 時調集 2, 時調音樂論(張師勛, 韓國國樂學會, 1973).

장두현

1874(고종 11)~1938. 실업가․체육인. 서울 출신. 한말에는 주로 농상공부의 관계에서 관직을 맡아오다가 국권상실 후 실업계에 투신하였다. 조선취인소(朝鮮取引所) 이사를 거쳐 1920년에 조진태(趙鎭泰) 등과 함께 민족자본형성을 위하여 천일은행(한국상업은행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이어 같은 해 동양물산주식회사(東洋物産株式會社), 1923년 흥일사(興一社), 1924년 서울고무합자회사를 건립하여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또한, 언론활동의 주역으로 동아일보사․시대일보사․중앙일보사 등의 중역을 맡아 활동하였으다.
중앙보육학원(지금의 중앙대학교 전신)과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운영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 교육 및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경제․문화․언론․예술․교육 등의 다방면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던 중, 1920년 7월에는 70여명의 발기인이 모인 조선체육회 발기대회에서 초대회장에 추대되어 7월 23일부터 1921년 7월 22일까지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지냈다. 
암울한 시대에 우리 민족의 경제․문화․언론․교육․체육 등의 다방면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조선체육회의 초대회장으로서 민족의 장래 기둥이 될 청장년들의 체육발전과, 일본인들이 조직한 체육단체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의 자립정신 고취를 위하여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위타지학(爲他之學)의 실천가였다. ≪참고문헌≫ 大韓體育會 50年史(大韓體育會, 1970), 체육한국인(체육부, 1985).

장직상

1883(고종 20)~?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창씨명(創氏名)은 장원직상(張元稷相). 1903년 경기전참봉으로 구한국 정부의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 감조관 해임을 역임하였다. 
병합 후, 일제시기의 한국인 관리들은 크게 세 층으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구한국 관리 출신, 둘째는 대졸․고문 출신 등 일제의 엘리트 계층, 셋째는 순사․면서기에서 밟아 올라간 승진형이다. 장직상은 구한국 관리 출신으로서 조선총독부의 관료로 승계된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총독부 신녕J07093(新寧J07093) 군수가 된 후, 하양J17384(河陽J17384), 선산J59124(善山J59124) 군수를 거쳐 1916년에 퇴관하며, 그 사이 1915년에 경북지방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맡은 바 있었다.  왜관J27938(倭館J27938) 금융창고주식회사 대표 취체역이던 그는 1924년에 경북도 평의원, 1926년에 대구상업회의소 회두(會頭)를 지내고 1930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후, 해방되기까지 15년간 그 직(職)을 6회 중임했다. 
일제말기인 1940년 10월 󰡐내선일체의 철저, 황국신민화, 신도(神道)의 실천, 지역봉공에 의한 고도국방 국가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 되었다. 
1941년에는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와 대책 결의, 근로부국 강행을 내세우며 결성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황도공민 자질의 향상, 결전체제의 강화, 내선동포의 정신적 단결 촉진, 증산․공출책의 완수를 목표로 박춘금이 중심이 되어 1945년 2월 11일에 조직된 대화동맹J44110(大和同盟J44110)의 심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朝鮮總督府, 各該當年度), 親日派群像(民族經濟硏究所 編, 三省文化社, 1948), 民族正氣의 審判(革命出版社, 1949).

정교원

1887(고종 24)~?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창씨명(創氏名)은 오천교원(烏川僑源). 1906년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대(明治大) 법과 교외생으로 수학한 뒤, 귀국해 1906년 탁지부 주사, 1908년 재무감리국 주사, 1909년 탁지부 임시재산정리국 총무과 주사, 1910년에는 임시토지조사국 서기를 역임하였다. 
병합 후, 일제시기의 한국인 관리들은 크게 세 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구한국 관리 출신, 둘째는 대졸․고문 출신 등 일제의 엘리트 계층, 셋째는 순사․면서기에서 밟아 올라간 승진형이다. 정교원은 구한국 관리 출신으로서 총독부 군수․참여관을 거쳐 지사에 까지 오른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1918년에 경남 거창군수에 올랐으며, 1921~1924년에는 경남 이사관, 1925~1929년에는 총독부 내무국 사무관과 중추원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931~1932년에는 전남 참여관을 거쳐 1933~1937년 황해도지사, 1938년에는 충남도지사를 지냈으며 1939년에는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일제 말기인 1940년 10월 󰡐내선일체의 철저, 황국신민화, 신도(神道)의 실천, 지역봉공에 의한 고도국방 국가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내세우고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와 사무국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8월 20일경, 최린․김동환 계열의 인물들은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했으며, 윤치호 계열의 인물들은 동년(同年) 8월 25일 별도로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때 정교원은 흥아보국단 위원 중의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941년 10월 22일 두 단체가 통합되어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되었는데, 정교원은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1941년 11월 7일에는 보성전문학교에서 이성환과 함께 󰡐지원병보급설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朝鮮總督府, 各該當年度), 親日派群像(民族經濟硏究所 編, 三省文化社, 1948), 民族正氣의 審判(革命出版社, 1949).

정연기

1891(고종 28)~?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창씨명은 초본연기(草本然基). 일제시기의 한국인 관리들은 크게 세 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구한국 관리 출신, 둘째는 대졸․고문 출신 등 일제의 엘리트 계층, 셋째는 순사․면서기에서 밟아 올라간 승진형이다. 대졸․고문 출신 등 일제의 엘리트 계층에 속한 인물로서 동경제대를 졸업한 이후, 농상공부, 식산국 관리를 거쳐 전북지사에 발탁된 인물이다. 
1911년 경성관립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졸업한 뒤, 총독부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여 1914년 동경제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8년 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기수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921년에 총독부 식산국 근무, 1924년 강원도 삼척군수를 지냈으며 1938년부터 39년까지 전라북도 참여관을 거쳐 도지사가 되었다.
1944년 10월 16일 경성(京城) 부민관에서 개최된 국민동원총진회전선확대위원회(의장 이성근(李聖根))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국민정신총진회는 조선 청장년들의 전선 동원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이듬해에는 황도공민 자질의 향상, 결전체제의 강화, 내선동포의 정신적 단결 촉진, 증산․공출책의 완수를 목표로 박춘금이 중심이 되어 1945년 2월 11일에 조직된 대화동맹J44110(大和同盟J44110)에서 심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朝鮮總督府, 各該當年度), 民族正氣의 審判(革命出版社, 1949.2.).

정창업

1847 헌종 13~1919. 판소리 명창. 후기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본관은 금성J15265(錦城J15265). 전라남도 함평 출생. 명창 정학진(丁學珍)은 그의 아들이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인 정광수(丁珖秀)는 손자이다. 천부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음악적 재능이 있어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하였다. 
박유전(朴裕全)에게 5년간 배웠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젊었을 때 전주대사습놀이에 참가하여 실수로 낙방한 뒤, 열심히 독공(獨工)하고, 신재효J14982(申在孝J14982) 밑에서 2년간 지도를 받고 다시 대사습놀이에 출연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다. 〈심청가〉의 한 대목을 너무 슬프게 불러서 좌중이 눈물을 손으로 닦아 비석에 뿌렸더니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에 󰡒정창업의 소리에는 비석도 운다. 󰡓는 말이 나왔다.  그는 서편제(西便制)로 소리하였고, 계면조J00921(界面調J00921)를 주로 하여 소리하되 상하성(上下聲)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표현하였다. 
또한 〈흥보가〉를 잘하였고, 특히 그의 더늠으로 전하는 중타령이 유명하다. 고종으로부터 통정대부J28133(通政大夫J28133)의 직계를 제수받았다. 제자로는 원각사J23457(圓覺社J23457) 시절에 활약한 김창환J00253(金昌煥J00253)과 그뒤의 정정렬J10552(丁貞烈J10552)․김정길(金正吉) 등이 있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정용근

1873(고종10)~1938. 종교인. 자는 문진(文振), 천도교의 도호(道號)는 양암(樑菴), 두채(斗采)․양채(亮采). 본관은 하동(河東). 
아버지는 순경(淳敬),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전북 익산군(益山郡) 북일면 신리(北一面 新里)에서 태어났다. 1893년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부친과 외당숙 김국현(金國炫) 등의 영향을 받아 1894년 3월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대접주(大接主) 김방서(金方瑞)의 휘하에서 도집겸접사(都執兼接司)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한 뒤 잠시 피신 생활을 하다 1896년에는 대접주 장경화(張敬化)의 휘하에 들어가 동학 교단의 재건 활동에 참가하였다. 
1897년에는 별중정(別中正)이 되었고, 1900년에는 전주 출신 대접주 이병춘(李炳春)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동학 재건 활동을 벌이고 있던 손병희J24631(孫秉熙J24631)와 연결되었다. 1901년에는 재입교 절차를 거쳐 손병희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1903년에는 대정J25163(大正J25163)이 되고, 1904년에는 대접주(大接主)가 되었다. 1900년 10월에는 상경해 판서 이지용(李址鎔) 등과 교류해 궁내부 전화과(電話課) 주사가 되기도 했으나, 곧 사직하였다. 
1904년 태인J11734(泰仁J11734) 전주(全州)․익산(益山) 등지의 동학 교도를 집결시켜 진보회J44423(進步會J44423)를 조직해 정부개혁을 주장하는 민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실패하였다. 
특히 1905년 3월에는 전라북도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진보회 운동을 주도했던 외당숙 김국현(金國炫) 등 8인의 동학 교도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진보회를 중심으로 한 혁신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한편, 1909년 1월부터는 천도교 중앙총부 임시의사원(臨時議事員)에 임명되었으며, 1914년 중앙총부 공동전수심법(共同傳授心法)에 참가하였다.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일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1922년 4월에는 종법원 포덕사(宗法院 布德師), 이듬해에는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1933년 4월에는 감사관정(監査觀正)이 되었다. 1938년 가을 호남 지방 시찰 후 10월 3일에 사망하였다. 학명덕존J58007(學明德尊J58007) 9권이란 문집을 남겼으며,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에도 다수의 글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東學接主 鄭瑢根全集, 天道敎會月報, 學明德尊, 舊韓國官報, 鄭瑢根의 생애와 동학사상(盧鏞弼, 한국근현대사연구 2, 1995).

정춘풍

생몰년 미상. 판소리 명창. 조선 헌종 때 충청도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소과에 합격, 진사가 되었으나 판소리를 익혀 명창이 되었다. 스스로 호를 춘풍이라 하고 판소리를 즐기며 한 세상을 살았는데, 학식이 있어 판소리 이론정립에도 공이 크다. 
자기 이념대로 새로운 판소리를 개척하였는데, 사설(私說)을 정비하고 소리를 우조J05535(羽調J05535) 중심으로 짜서 매우 품위 있는 판소리로 이끌어나갔고, 이 점이 대원군에게 인정을 받아 대원군과 가깝게 지냈다. 
그의 판소리는 고종 때의 명창 박기홍(朴基洪)과 조기홍(趙起弘)에게 이어졌으나, 그뒤로는 끊어졌다. 〈적벽가〉를 특히 잘하였고, 단가 〈소상팔경〉이 그의 더늠으로 전해진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정태현

1882(고종 19)~1971. 식물학자. 호는 하은(霞隱). 경기도 용인 출신. 일찍이 시에 능하였고, 13세에 이미 사숙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24세에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면서 한말 농상공부 임업권농모범장의 기수로 임명되었다. 
식물학, 특히 분류학분야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주요한 업적은 한국산 자생식물의 분류연구로서 16종류의 신종, 넓은 앞산조팝나무, 가는잎 구절초 등 4개의 신변종과 3개의 신품종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나라 식물구계(植物區系)를 밝히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밖에도 우리 나라 고유식물의 하나인 줄댕강나무의 학명 Abelia taihyoni Nakai에는 그의 이름이 헌명되었다. 1956년 필생의 업적의 하나인 ≪한국식물도감≫을 펴내 학술원상을 받았다. 
광복 후 전남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후진양성에도 힘썼으며, 한국생물학회장과 한국생물과학협회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학술원회원으로 선임되었다. 
문화포장․국민훈장 모란장, 그리고 5․16민족상 학예부문본상을 수상하였다. 1968년 하은생물학상(霞隱生物學賞)을 제정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식물도감≫․≪한국삼림식물도감≫․≪한국동식물도감≫ 등이 있다. ≪참고문헌≫ 韓國科學技術人名事典(玟友社, 1971), 韓國科學技術 30年史(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1980).

조동식

1887(고종 24)~1969. 교육가. 본관은 임천J09581(林川J09581). 호는 춘강(春江). 전사관(典祀官) 한우(漢佑)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평소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 1908년 4월 동원여자의숙(東媛女子義塾)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기호흥학회J12720(畿湖興學會J12720)를 조직하여 사립기호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도 학생으로 입학하여 자기완성에 힘썼다. 당시 동원여자의숙의 학생은 모두 11명이었으며, 학비는 전액 무료로 하여 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권회복을 꾀하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1909년 4월에는 동덕여자의숙과 병합하여 동덕여자의숙으로 새출발하였으며, 그 뒤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동덕학원(同德學園) 건설에 헌신하였다.
1912년에는 동덕여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는데, 심한 재정난으로 곤란에 처하였을 때 손병희J24631(孫秉熙J24631)․이상재J17409(李商在J17409)․이석구(李錫九) 등의 적극적인 협찬으로 교세를 바로잡아 계속적인 발전이 있었다. 광복 후 1950년 5월에는 동덕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에 취임하였으며, 그 뒤 동덕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하였다.
이 밖에도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참여,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상명여자대학․한성여자대학․덕성여자대학․성신여자대학 등의 이사로 활약하였다.
그 뒤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비롯하여 문교재단연합회장,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대한문교서적주식회사 사장, 한국인쇄주식회사 취체역 회장, 중앙학원 감사, 교육특별심의회 위원, 중앙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전국사립중등학교연합회 회장, 국립서울대학교평의회 부회장 등 수많은 요직을 맡아 우리 나라 교육계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69년 11월 제1회 영신(永信)아카데미 교육본상이 수여되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국가와 겨레가 발전하려면 가정을 경영하고 자녀의 양육을 담당하는 여성의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우리 나라 여성교육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春江趙東植先生古稀記(同進會, 1956), 春江趙東植先生傳記(春江趙東植先生 記念事業會, 1979).

조병옥

1894(고종 31)~1960. 독립운동가․정치가. 〔생 애〕 초명은 병갑(炳甲). 호는 유석(維石). 충청남도 목천(木川:지금의 천안) 출생. 인원(仁元)의 아들이다. 공주소학교를 거쳐 1909년 평양숭실중학교와 1914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18년 미국 와이오밍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신간회J33973(新幹會J33973)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 광주학생운동․신간회사건․수양동우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5년에 걸치는 옥중생활을 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일보사 경영에도 한때 가담하였다. 그 뒤 광복이 되기까지 야인생활을 하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으나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혼란기의 치안을 맞게 되자 정치일선에서 한때 물러났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특사로 우방을 순방하고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신임을 얻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남침해온 북한군에 밀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할 때 내무부장관으로 등용되어 대구방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나, 이듬해 5월 독재화되어가는 이승만(李承晩)정권에 실망하고 대통령 이승만에게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탄생하였으므로 반드시 민주국가로 발전, 성장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낸 뒤 물러났다.
1953년에는 반공포로석방에 반대하는 견해를 취하다가 테러를 당하고 잠시 투옥되는 변을 당하였다.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55년 민주당 조직에 참여하여 최고위원, 1958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추대되면서 자유당 독재정치에 항거하는 반독재투쟁을 선도하였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수술 끝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정치관은 매우 폭이 넓고 거시적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사오입개헌으로 이승만정권의 독재화가 노골화되자 민주당을 창당하여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빈대를 잡기 위하여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다.󰡓고 하는 국가관과 정당관을 남겼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조원희

생몰년 미상. 체육인․교육자. 서울 출신. 우리 나라 근대 체조를 학교체조로 발전시킨 체조지도자이며 이론가이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보병 참위(參尉)에 임관되어 휘문의숙(徽文義塾) 체육교사를 겸임하였고, 뒤에는 학감을 역임하였다.
1895년 2월 고종이 공포한 〈교육조서 敎育詔書〉에 의하여 모든 학교가 체조를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체조는 대부분 군인들이 지도하여 그 내용도 딱딱하고 형식적인 병식체조 중심이었다. 이에 늘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1910년 1월 ≪신편체조법 新編體操法≫을 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이전의 형식적인 병식체조가 신체 발육기에 있는 어린이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익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어린이에게는 즐겁고 흥미 있고 부드러운 체조법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전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방법에서 탈피, 몸의 균형을 꾀하고 교정적 효과까지 노린 이 ≪신편체조법≫은 당시 많은 학교에 의해 채택되었다.
학교체육뿐만 아니라 국민 체위 향상에도 끊임없는 관심을 쏟던 중 1909년 10월에는 분산된 여러 체조단체를 규합, 체조의 기술과 이론연구 및 국민의 체위 향상을 위해 당시 각급 학교 교사인 김성집(金聲集)․이기동(李基東) 등과 함께 조선체조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주로 체육의 실제면에서 제기되는 기술과 이론을 연구하고, 비조직적인 체육을 지도, 개선, 진흥시킴으로써 국민의 심신을 강건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학교의 병식체조를 학생들에게 적합한 학교체조로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 ≪참고문헌≫ 韓國體育史(羅絢成, 文泉社, 1969), 皇城新聞(1909, 제2983호), 大韓民報(1909.10.23.).

조응순

1884(고종 21)~? 사회주의운동가. 함경남도 갑산 회사면 도화리 출신. 1905년 원산 일대에서 행상을 하다가 1906년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1907년 의병 전재익 부대에 입대하여 회령에서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1908년 10월 연해주 연추 근교에서 안중근 등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에 참가하였다. 1917년 나자구 동림무관학교 건립을 위하여 우랄로 가서 노동하였으며 1918년에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20년 12월 치타에서 열린 상해 연해주 당원대회에 참가하여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결성하고 후보위원이 되었다. 상해파 공산당의 일원으로 고려공산당 창립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파와 분파투쟁을 벌였다.
1920년 10월에서 1921년 5월까지의 결정적인 시기에 그는 이동휘를 지지하고 상해에 있으면서 노령의 치타와 상해를 연결하는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9월 북간도 11개 반일단체가 연명으로 서명한 자유시사변 성토문에 노농회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받았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편, 창작과 비평사, 1996).

지석영

1855(철종 6)~1935. 의사․국어학자. 〔생 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학J29580(西學J29580)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Jenner,E.)의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그 해 수신사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어 그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래서 박영선은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종두귀감 種痘龜鑑≫을 얻어다 전해주었다. 〔행 적〕 그 뒤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묘의 공급이 잘 안 되었으므로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J06300(金弘集J06300)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송아지)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 50병(柄)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한성순보 漢城旬報≫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신설 牛痘新說≫을 지어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나온 우두법에 관한 저서로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채장법이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같은 해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지방을 순회,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 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J59469(薪智島J59469)에 유배되어서도 여전히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叛堂)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떳떳하게 우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승지를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임지에서도 우두를 실시하기를 잊지 않았다.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였고,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1902년 그의 제창으로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의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그는 ≪황성신보 皇城新報≫에 〈양매창론 楊梅瘡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봄철에 유행하는 급성전염병)․전염병․양매창(楊梅瘡:악성 매독으로 인한 발진)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됨과 함께 학감에 취임하였다. 1910년에 사직하였으니 11년 동안 의학교육에 헌신한 셈이다. 〔업 적〕 그의 업적은 근대의학의 도입에만 그치지 않았다. 1882년에 올린 상소에서 급속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하여 일종의 훈련원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당시의 세계정세를 알 수 있는 책과 외국의 과학기술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물을 수집하여 전국에서 뽑아온 젊은이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자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시야를 넓혀갔다.
다른 회원들이 대부분 서양문물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쏠려 있던 때 좀 다른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예컨대, 그는 음력을 주로 쓰되 그 옆에 양력을 아울러 표시하자는 의견이었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J21258(周時經J21258)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 字典釋要≫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 많이 받아들여졌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J46129(太極章J46129)․팔괘장J25689(八卦章J25689)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을 당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요청이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살다가 80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우리 나라 痘瘡의 流行과 種痘法의 實施(金斗鍾, 서울大學校論文集 人文社會科學 4, 1956), 近代醫學과 科學技術導入의 先驅者(朴星來, 技術人力 6, 1979), 種痘法實施의 科學史的意義(宋相庸, 한독소식 104, 1979), 朝鮮種痘史(三木榮, 醫事新誌 293, 1935).

채정

?~1217(고종 4). 고려 후기의 문관. 충청북도 음성의 이속 출신으로 학문에 힘써 문과에 급제하였고, 동도(東都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장서기J37253(掌書記J37253)를 거쳐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는데 7재(齋)의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신종 때에는 진양목사에 올랐고, 동도와 영천지방에 난이 일어나 안무사J14312(安撫使J14312)를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 적임자를 얻기 어려웠는데, 그가 동도유수부사(東都留守副使)가 되자 난적(亂敵)이 스스로 해산, 안정되었다. 
1211년(희종 7) 대사성으로 국자감시를 관장하였고, 1214년(고종 1)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동지공거J39551(同知貢擧J39551)를 역임하였다. 고종초에 서도유수(西都留守)로 보직되었다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적도(賊徒)를 평정한 공으로 나라에서 장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최경식

1876(고종 13~1949). 조선말기와 민족항일기에 활약한 가곡․가사․시조의 명창. 
현재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출신으로 일찍부터 소리를 좋아하여 청파사계(靑坡四契)축의 소리꾼 조기준(曺基俊)으로부터 사설지름시조와 가사를 배웠고, 박춘경(朴春景)으로부터 잡가를 배워 가사며 시조․잡가 등을 정확하고 원숙한 창법으로 불러 대가를 이루었다. 
서울의 남녀 소리선생은 거의 그로부터 시조나 가사․잡가를 배웠다고 할 정도로 많은 제자들을 두었고, 사례를 받지 않고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광복 후에는 함화진(咸和鎭)․박헌봉J00213(朴憲鳳J00213) 등과 대한국악원을 결성, 민요부장으로 활약하였고, 국악가무연구회(國樂歌舞硏究會)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소리는 유개동(柳開東)․김태운(金泰運)․이명길(李命吉)․엄태영(嚴泰泳)․최정식(崔貞植)․정득만J60781(鄭得晩J60781)․이창배(李昌培) 등에 의하여 전수되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歌唱大系(李昌培, 弘人文化社, 1976), 國樂總鑑(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6).

최남선

1890(고종 27)~1957. 문화운동가․작가․사학자. 본관은 동주(東州 : 지금의 鐵原).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 서울 출신. 아버지는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인 헌규(獻圭)이며, 어머니는 강씨(姜氏)이다. 
1895년(고종 32)부터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며,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였고, 1904년 10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석 달 만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6년 3월 사비생(私費生)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6월 이 학교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문제를 의제로 내걸자 격분한 일군의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이 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J07903(新文館J07903)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하고,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였다.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문학과 문화․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문관의 설립․운영과 ≪소년≫․≪붉은 저고리≫․≪아이들 보기≫․≪청춘 靑春≫ 등의 잡지 발간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교도를 꾀하는 한편, 창가․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에 새로운 시가 양식이 발붙일 터전을 닦았다. 당시까지 창가․신체시를 제작, 발표한 사람은 이광수J31944(李光洙J31944)가 있었는데 양과 질에서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 
둘째, 그때까지 쓰여온 문장들이 대개 문주언종(文主言從)의 한문투가 중심이었는데 이것을 새 시대에 맞도록 구어체로 고치고 그와 동시에 우리말 위주가 되게 하여 여러 간행물과 잡지 매체를 통해서 그것을 선전, 보급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이전까지 우리 주변의 지배적 경향인 문어체 문장이 지양, 극복되고, 아울러 낡고 고루한 말투가 없어지는 등 문장개혁이 이루어졌다. 
셋째, 민족문화가 형성, 전개된 모습을 한국사․민속․지리연구와 문헌의 수집․정리․발간을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족사의 테두리를 파악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바닥에는 한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탐구하고 현양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나아가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시킨 󰡐조선정신(朝鮮精神)󰡑을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업적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한국사에 대한 연구로, 이는 ≪청춘≫ 1918년 6월호에 발표한 〈계고차존 稽古箚存〉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당시로 보아서는 상당 수준의 논문으로 그 내용이 단군시대에서부터 부여․옥저․예맥 등에 걸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조선역사통속강화 朝鮮歷史通俗講話〉․〈삼국유사해제 三國遺事解題〉․〈불함문화론 不咸文化論〉․〈단군신전(檀君神典)의 고의(古義)〉등을 발표하였고, 1930년대 이후에 ≪역사일감 歷史日鑑≫․≪고사통 故事通≫ 등 방대한 규모의 작업을 이룩하였다.  ② 문화유산의 발굴․정리 및 그 평가 시도로 이는 다시 조선광문회J21173(朝鮮光文會J21173)․동명사J21051(東明社J21051)․계명구락부J06277(啓明俱樂部J06277) 등의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선광문회 단계에서는 우리 고전소설인 〈춘향전〉․〈옥루몽〉․〈사씨남정기〉․〈흥부놀부전〉․〈심청전〉․〈장화홍련전〉․〈조웅전〉 등을 정리, 발간하였고, 동시에 ≪동국통감 東國通鑑≫․≪열하일기 熱河日記≫ 등 한문 고전들도 복각, 보급하였다. 
동명사 때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을 기도하였으며, 이는 계명구락부 때로 이어졌다. 이때 한글 연구가의 한 사람인 박승빈J03587(朴勝彬J03587)과 제휴하여 사전편찬사업을 구체화시켜나갔다. 또한, ≪삼국유사≫의 주석정리 해제를 하고 ≪금오신화≫의 보급판도 간행하였다.  ③ 국토 산하 순례예찬과 그 현양 노력은 ≪심춘순례 尋春巡禮≫․≪백두산근참기 白頭山勤參記≫․≪송막연운록 松漠燕雲錄≫ 등으로 대표된다. 이 글들을 통하여 한반도 전역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소․고적들을 더듬고 거기서 우리 민족의 옛날을 되새겼다.  ④ 시조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운동은 시조의 창작 활동과 그 이론을 다진 일들로 대표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족적 시가 양식으로서 시조가 재정리, 창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카프의 계급지상주의에 맞서 다수의 작품을 제작, 발표하였다.
이것의 집대성이 창작시조집 ≪백팔번뇌 百八煩惱≫이다. 또한,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시조 태반으로서의 조선민성(朝鮮民性)과 민속〉등을 발표하여 시조부흥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⑤ 민속학에 대한 연구는 ≪동국세시기≫ 등 당시까지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집,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단군론 檀君論〉․〈신라 경문왕과 희랍의 미다스왕〉 등의 발표로 나타났으며, 〈불함문화론〉 등은 민속학적으로 주목되는 논문이다.
그는 단군을 건국의 시조인 개인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신앙에 근거를 둔 종교적 제사장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불함문화권으로 주장한 동북아시아계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신앙, 즉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단군신화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우리 신화와 문화에 대한 최초의 민속학적 연구 시도로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문화운동사에 높은 봉우리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구금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뒤 계속 일제의 감시․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 수행 과정에서 생긴 한국사 연구기구인 조선사편수회에 관계를 가졌고, 이어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는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복 후에는 민족정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비난과 공격의 과녁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보면 유능한 계몽운동자였고,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죽은 뒤 1958년 말년에 기거한 서울 우이동 소원(素園)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75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육당최남선전집≫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六堂崔南善(趙容萬, 三中堂, 1964), 六堂崔南善全集(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玄岩社, 1975), 韓國의 民俗學硏究(李杜鉉, 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韓國近代詩史(金容稷, 학연사, 1986).

최보순

1162(의종 16)~1229(고종 1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예부상서를 지낸 균(均)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의 장서기J37253(掌書記J37253)를 거쳐 소부감J42608(小府監J42608)이 되었다. 1208년(희종 4) 금나라의 황제 즉위 축하문을 잘못 썼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이부시랑(吏部侍郎)이 되고, 1212년(강종 1) 우간의대부J35010(右諫議大夫J35010)로 과거를 주관하여 위대여(魏大輿) 등을 시취J49219(試取J49219)하였다. 이듬해 동지공거J39551(同知貢擧J39551)로서 지공거가 되어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이주장(李柱長)과 함께 허수(許受) 등을 시취하였다.
1222년(고종 9) 참지정사J37028(參知政事J37028)로서 또 지공거를 맡았으며,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中書侍郎平章事判兵部事)를 거쳐 이듬해 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修文殿大學士同修國史)를 역임하였다.
1227년 감수국사J04059(監修國史J04059)가 되어 수찬관J00521(修撰官J00521) 김양경J49535(金良鏡J49535)․임경숙J35851(任景肅J35851)․유승단J35766(兪升旦J35766) 등과 함께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수태사 판이부사(守太師判吏部事)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金石總覽.

최상욱

1878(고종 15)~1951.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가사․시조의 명창. 서울출생. 잡가J22230(雜歌J22230)의 박춘재(朴春載) 등과 더불어 한말에 가무별감J00865(歌舞別監J00865)을 지냈다. 
가무별감은 장악원의 악공J10456(樂工J10456)과는 달리 왕의 측근에서 가무로써 왕을 위로하던 소임으로 액정서J09700(掖庭署J09700)에 소속되어 있었다. 같은 가무별감이면서 박춘재는 잡가가 장기였으나 최상욱은 가사와 시조가 특기였다. 
그의 가사는 모두 12가사 중에서 6곡이 전하고 있는데, 이 숫자는 하규일(河圭一)이 전한 8곡보다는 적은 것이다. 만년에는 인왕산 밑 필운대(弼雲臺)에서 후진양성을 하면서 자적하였다. 
서울 우대〔樓上洞〕에서 개발한 우조시조J06559(羽調時調J06559)․우조지름시조에 뛰어났으며, 가사에도 독특한 창제(唱制)를 자랑하였는데, 그 제를 홍원기J60877(洪元基J60877)가 전수하여 보급시키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歌唱大系(李昌培, 弘人文化社, 1976), 文藝總鑑(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6).

최순영

1864 고종 1~1940. 피리의 명인.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순용(淳用, 淳龍). 자는 경화(景和). 서울 출신. 1875년(고종 12) 장악원 악공J10456(樂工J10456)이 되었고 전공은 피리였다. 1887년․1892년․1901년 진연(進宴) 때 피리잡이로 활약하였으며, 1907년에 전악J05547(典樂J05547), 1913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거쳐 1932년 아악사(雅樂師)를 지냈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사범으로서 후진양성에 공헌하였으며, 김태섭(金泰燮)이 그의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典樂先生案, 高宗 丁亥․壬辰․辛丑 進饌儀軌 및 進宴儀軌.

최수보

생몰년 미상. 고종 때 활약한 가곡J00857(歌曲J00857)의 명창. 가성(歌聖) 장우벽(張友璧)의 제자인 오동래(吳東萊)에게 가곡을 배워 대성하고,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당대를 풍미한 명창이었다. 박효관․정중보(鄭仲甫)의 가곡은 후계가 끊긴 데 비하여 최수보의 가통(歌統)이 현재까지 잘 전승되고 있는 것은 최수보의 제자인 하중곤(河仲鯤)에게 배운 명창 하규일(河圭一)이 이왕직아악부에서 가곡 전수활동을 많이 펼친 까닭이다.  ≪참고문헌≫ 朝鮮(朝鮮總督府, 1929.11.).

최응두

1892(고종 29)~1971.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연출 지휘 기예능보유자. 경상남도 창원 출신.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4년 진동국민학교(鎭東國民學校) 3년을 수료하고 진동중학을 거쳐 1907년에 진동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성오광대〉를 배운 뒤에 이에 관여하다가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고성오광대〉 연수에 힘쓰고 또 전승발전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重要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李杜鉉․金千興, 文化財管理局, 1964), 韓國의 假面劇(李杜鉉, 韓國假面劇硏究會, 1973).

최정식

1886(고종 23)~1951.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시조․가사․경서도소리의 명창. 서울출신. 
경기소리의 중시조(中始祖)라 칭하는 최경식(崔景植)과 최상욱(崔相旭)을 사사하여 경서도창에 능하였다. 작곡과 작시에도 재질이 있어 〈금강산타령〉․〈풍등가 豊登歌〉를 작사, 작곡하였으며, 제전J10556(祭奠J10556)을 축소 개편하여 세련화시켰다. 
예기학원(藝妓學院)이었던 조선권번(朝鮮券番)에서 잡가를 가르쳤기 때문에 여류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정경파(鄭瓊坡)․묵계월(墨桂月)․안비취J60838(安翡翠J60838)․조백조(趙白鳥) 등이 그들이다. 광복 후에는 함화진(咸和鎭)과 함께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참고문헌≫ 民謠․雜歌․立唱(李輔亨․韓萬榮, 文藝總鑑, 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6).

최창로

1880(고종 17~1966). 대금․단소․시조의 명인. 경상북도 경주출신. 일찍이 거문고와 단소를 익혀 풍류에 탁월한 기량이 인정된 뒤 시조와 젓대에도 정진하여 호남․영남 일대에서 거장이 되었다. 
거문고의 명인 최윤(崔潤)과 더불어 쇠잔하여가는 경주지방의 율방(律房)을 지키던 중심인물이었다. 만년에 80세의 노구로 동도국악원(東都國樂院)을 이끌어 후진양성에 전념하였고, 이를 기려 후학들이 경주국악원을 창설하였다.  ≪참고문헌≫ 國樂入門(金琪洙, 古典音樂出版社, 1972).

최학봉

1856(철종 7~?) 조선 말기 대금의 명인. 서울출생. 장악원J05238(掌樂院J05238)의 악공으로 출사하여 뒤에 아악부(雅樂部)의 아악수로 있었다. 
특히, 가곡 반주에 뛰어났다고 한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 중에서도 김계선(金桂善)을 들 수 있다. 1901년과 1902년 진연 때 대금 자비〔差備〕, 1913년에 이왕직 아악대의 아악수가 되었다.  ≪참고문헌≫ 高宗辛丑․壬寅進宴儀軌, 國樂入門(金琪洙, 古典音樂出版社, 1972).

한규복

1875(고종 12)~? 친일파. 창씨명은 정원규복(井垣圭復). 일제시기 도지사 경력자 42명 가운데 엘리트 출신 7~8명중 한 명으로서 대표적 친일 관료이다. 한말 국비생으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탁지부 서기관과 주임관을 지냈다. 
1910년 합병 이후 초임직으로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감사관을 역임했다. 1916년 진주(晉州) 군수를 시작으로 동래J23082(東萊J23082)군수를 거쳐, 1921년 충남 참여관과 경북 참여관을 지냈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각각 충북지사와 황해지사를 지내다가, 1934년부터 1939년에 이르기까지 중추원 참의를 수차 중임하였다. 
구체적 친일 행각을 살펴보면, 우선 중일전쟁 이후 위문행사 및 국방헌금 등의 모집을 위해서 시국강연회 등 황민(皇民)의식 선동 행사에 1937년 7월부터 한규복 등 중추원 참의 9명을 동원한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또, 같은 해 조선인들에 대한 전쟁 경비 부담을 위한 소득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여기에 경성서 관내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1938년 8월 설치된 총독부내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97명 가운데 한규복은 김연수(金秊洙)․박영철(朴榮喆)․박중양(朴重陽)․박흥식J56819(朴興植J56819)․윤덕영J44184(尹德榮J44184)․이기린(李基燐)․이승우(李升雨)․최린J47588(崔麟J47588)․한상룡J57549(韓相龍J57549)․현준호J09158(玄俊鎬J09158) 등과 함께 조선인 위원 11명 가운데 1명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같은 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시행되는 과정에서 한규복은 윤치호․이승우․조병상․조성근 등과 함께 지원병제 축하회 구성을 위한 타협발기인회를 열고 실행위원진을 구성하였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된 후, 한규복이 부단장으로 있던 조선임전보국단J46486(朝鮮臨戰報國團J46486)에서는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5월 15일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 김연수․박흥식․윤치호J21151(尹致昊J21151)․이성근(李聖根)․한상룡(韓相龍) 등이 포함된 12명 가운데 1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일제침략과 친일파(임종국, 청사, 1982), 일제하의 한국인 관리들(이기동, 신동아 2월호, 1985), 제1공화국의 일제친일세력 충원(오성진, 친일파Ⅲ, 학민사, 1993), 일제하 조선인 관료 연구(박은경, 학민사, 1999).

한용운

1879(고종 16)~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응준J26877(應俊J26877)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J31525(五歲庵J31525)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J16532(百潭寺J16532)에서 연곡J08833(連谷J08833)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 ≪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J47588(崔麟J47588)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J33587(白龍城J33587)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J58651(崔南善J58651)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J33973(新幹會J33973)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J10771(權相老J10771)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J31017(多率寺J31017)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J55266(尋牛莊J55266)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J16873(李始榮J16873)․김동삼J00760(金東三J00760)․신채호J16068(申采浩J16068)․정인보J47572(鄭寅普J47572)․박광(朴珖)․홍명희J33961(洪命熹J33961)․송월면(宋月面)․최범술J38783(崔凡述J38783)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불교사상〕 그의 혁신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불교행정조직혁신론 : 한용운이 활약하던 1910년 초에는 친일적 색채를 띤 원종j07340(圓宗j07340)이라는 불교종파가 생겼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 불교의 원류가 하나임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동화정책에 교묘하게 영합하였다. 그는 그들에 대항하는 길은 사찰 중심의 현재 조직이 전교(傳敎)와 행정에 있어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사적 원류로 보아 일본 불교는 종파적 특색을 가진 데 비해 한국 불교는 선교 융합적 특색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일제의 〈조선사찰령〉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에 넘어갈 추세였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규약․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일제의 야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고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이후에 김법린J10786(金法麟J10786)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결실된 것이다. 비록, 대다수 승려들의 개혁적인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큰 실효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탁견(卓見)이었다. 
오늘날에는 조계종․태고종․천태종․진각종 등 한국 불교의 대부분 종단은 이 총무원제도와 본사제도를 병행하는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다.  ② 사원운영의 혁신론 : 불교가 시대를 계도(啓導)하려면 그 운영과 조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유신의 골자이다. 
사원 운영에 있어서 첫째로 염불당J23693(念佛堂J23693)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근본 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변재(遍在)한 법신불J26634(法身佛J26634)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둘째로 불교의식의 개혁이다. 많은 다라니J23633(陀羅尼J23633)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 대부분의 다라니가 산스크리트(Sanskrit) 음역(音譯) 위주로 암송되고 있어서 그의 한글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셋째로 승려의 취처(娶妻)이다. 생활 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③ 청년불교의 제창 : 엄밀한 의미로 한국 근대불교에 있어서 불교청년회를 조직한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친일적 경향의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한 것은 1914년이었다. 
그 강령을 보면, 첫째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 불교통일, 셋째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이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모체(母體)를 청년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 해외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중국 등지에 해외 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④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다. 한국 불교는 그 동안 오교구산J13550(五敎九山J13550)이니 선교 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듯이 오도(誤導)하여왔다. 
그러나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선원J13528(禪院J13528)이나 강원J13401(講院J13401)의 지도 이념이나 실수(實修)에 있어서 외전(外典)을 첨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한국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여야 한다고 보았다. ⑤ 경전의 한역 :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이다. 현대 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쓴 ≪불교대전≫은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이 책은 요즈음에 간행되는 ≪불교성전≫의 효시인 셈이다. 그의 노력은 광복 후에 결실을 보아 한글대장경 사업을 촉진시켰으며, 불교 근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불교학 진흥을 위하여서는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상적 의의〕 한용운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주장은 90여 년 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탁월한 불교개혁책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현실화되었는데 종단행정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곧 총무원으로 나타났고, 승려 자질 향상은 오늘날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국역(國譯)의 중요성 강조는 숱한 불교성전의 편찬과 함께, 역경원(譯經院) 등의 발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과격한 부분이 없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첫째, 사원 운영의 조직에서 염불당 및 불필요한 법당을 타파하라는 주장인데, 그것은 이상론이다. 불교의 근본 교리로도 무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다양한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다. 오히려, 그 사상성을 고양(高揚)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단순히 지난 과오를 매도하는 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둘째, 승려의 대처(帶妻)에 관한 주장인데,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청정한 교단은 독신 수행승에 의하여 주도하여온 것이 우리 불교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취처(娶妻)를 합법화시키는 일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이른바 이판(理判)이니 사판(事判)이니 하는 승려의 자격 기준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적절한 개혁책이었지만, 보편타당한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결심으로 이 󰡐불교유신󰡑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무질서한 불교교단의 통제를 주장하였고, 이른바 불교현대화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실천적 불교정신의 응결이 바로 청년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비록 다소간 혁신적 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독창적이었고 위대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또, 불교인의 일반적 신앙자세를 탈피하여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히려 1960년대 이후부터 빛을 발하여 현대불교의 이론적 근거로서, 또 실천윤리의 강령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한용운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혁신론자로서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예언자적 가치를 부여받기에 충분한 불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세계와 문학사적 위치〕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시 도처에는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즉 󰡐못한다․아니한다․없다․말라󰡑 등의 부정적 종지법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인식은 그가 당대 사회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며, 이에 대한 타파와 극복만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일관된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다. 이별이 더 큰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였던 것과 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과 생성을 이룩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항시로서 만해의 시의 참된 면모가 드러난다. 
한편, ≪님의 침묵≫의 또 다른 특징은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님의 침묵≫의 전편을 통독하면 많은 시구가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준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와 같이 신성 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것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님의 침묵≫에는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 바로 이 지점에 참된 민중시로서의 만해의 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님의 침묵≫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체는 물론 여성운이 활용되고 여성적인 상관물(相關物)들이 등장하는 등 여성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한시․가사․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정철J55585(鄭澈J55585)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應戰) 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저항정신 및 극복정신과 조화되어 한국 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의 시의 저항시로서 가치를 가지며, 또한 전통시와 상관관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아울러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시의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의 것보다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밖에 그는 현대시 〈님의 침묵〉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죽음〉․〈흑풍〉․〈박명〉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하여 참으로 값진 교훈이라 하겠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 확실하다.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한진희

1895(고종 32)~1976. 체육인․교육자.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당시 청년지도자 이상재J17409(李商在J17409)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청년들의 체력단련이 중요한 것을 강조하자, 1919년 5월부터 1923년 8월까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유도사범으로 활동하면서 청년들의 체력향상에 힘썼다. 
1923년 10월 신상동(愼相東)․변태현(卞太鉉) 등 17명의 제자들과 함께 조선강무관(朝鮮講武館)이라는 유도장을 개설하여 유도의 보급과 선수 및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진급․승단 시합의 심판진으로서, 또한 강무관을 주축으로 1924년 7월에 실시된 전국무도순회주최자로서 우리 나라의 초창기 유도발전에 공헌하였다. 
1927년경에는 강낙원(姜樂遠)․서상천(徐相天) 등과 함께 우리나라 씨름의 실태를 조사하고 조선씨름협회를 창설함으로써 현대적 경기로서의 씨름을 태동시켰다. 
광복 전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동성상업학교 등의 교사를 역임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학대학J59846(國學大學J59846) 교수와 외국어대학 강사 등으로 30여년간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1945년 조선유도연맹(대한유도회 전신) 창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초대부회장을 비롯하여, 1957․1960․1973년 등 네 차례에 걸쳐서 대한유도회 회장서리 또는 회장직을 지냈다. 1955년 유도학교(용인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직을 역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대한유도회는 유도 10단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韓國柔道史(李洪鍾, 漢江文化社, 1984).

한창걸

1892(고종 34)~? 사회주의운동가.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군 얀치헤 마을(지금의 하산 구역) 출생. 빈농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러시아 고등보통교육을 이수하고 1915년 징집되어 1916년 11월까지 독일전선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1917년 5월까지 키에프 군사학교 부설 강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 준위로 임관되어 시베리아저격연대에서 복무하였다. 1918년 2월 제대한 후 올가군 니콜라예프카 마을(지금의 파르티잔스크 구역)로 이주하였다. 그 해 조직된 니콜라예프카 촌 소비에트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자위대를 조직하고 일류호프 부대와 엽합해 백위군과 맞서 전투하였다. 그는 36명의 대원으로 1919년 4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몇 달 뒤에는 대원수가 80명으로 늘어났다. 
한창걸의 부대는 뻬레치노 마을에서 콜차크의 부대와 전투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이 때에 승리를 거두었다. 또 카잔카에 들어온 미국개입군과도 전투를 벌였다. 그는 1919년 여름 콜차크 백우파 정권에 반대하는 봉기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일본군에 인도되었지만 1920년 1월 빨치산이 도시를 점령하자 풀려났다. 
그 후 그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라조와 일류호프의 지시를 받고 한인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부대를 제1극동연대 산하 대대로 개편하고 수청 올가 지역에서 참전했으며, 1922년 4월 올가만 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9월 노령에 흩어져 있는 한인빨치산 부대를 망라해 고려혁명군정청이 구성되자 위원이 되었으며 군정청 직속 제2고려혁명군의 지휘를 맡았다. 내전 후 농업코뮤나 󰡒붉은 별󰡓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 후 체카, 내무부기관에 근무하였다. 비로비잔 유대인 자치주 내무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1930년대 후반 숙청당하였다. ≪참고문헌≫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뜨베이 김, 이준형 역, 역사비평사, 1990),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편, 창작과 비평사, 1996).

홍승목

1847(헌종 13)~?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J17383(豊山J17383). 자는 경희(敬熙). 서울 출신. 1875년(고종 12) 경과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직후 승정원가주서에 임명되었다. 1877년 수찬․사서․장령, 1878년 부응교, 1879년 형조참의․병조참의, 1880년 부승지, 1881년 대사간, 1883년 대사성, 1884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89년 예조참의, 1890년 형조참판․병조참판, 1892년 한성부좌윤, 1893년 좌승지․한성부우윤, 1900년 궁내부특진관, 1901년 장례원소경,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1906년 중추원찬의에 이르렀다. 
이무렵부터 사회단체를 조직, 활동하였다. 1907년 3월 신기선J21146(申箕善J21146)․서상훈J26266(徐相勛J26266) 등과 함께 신구학문연구(新舊學問硏究)를 표방하는 대동학회J29162(大東學會J29162)를 조직, 부회장을 맡은 것이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이토(伊藤博文)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조직된 친일유림단체였다. 
1908년에는 일본인을 고문으로 하며 󰡐농상공(農商工) 발달하여 생산력을 증진하게 하여 국가부강 기초를 작성함.󰡑을 목적으로 하는 제국실업회(帝國實業會)의 회장으로, 교육․위생․환난상구(患難相救)를 목적으로 하는 관진방회(觀鎭坊會)의 인사부장으로 각각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가 되어 친일활동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國朝榜目, 大韓帝國官員履歷書, 韓國開化史의 諸問題(李光麟, 一潮閣, 1986), 舊韓末 政治․社會․學會․會社․言論團體 調査資料(李鉉淙, 亞細亞學報 2, 1966), 朝鮮紳士名鑑(牧山耕藏, 日本電報通信社京城支局, 1911).

허계

1798(정조 22)~1866(고종 3).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양천J08797(陽川J08797). 자는 이숙(而肅). 할아버지는 통제사 임(任)이며, 아버지는 군수 즙(城)이다. 1814년(순조 14) 천거로 선전관이 되고, 1815년 무과에 급제, 1835년(헌종 1)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83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841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거쳐,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랐다. 
이어 1846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51년(철종 2)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을 세 번이나 역임한 뒤 1858년 금위대장을 지냈다. 1865년 조두순J45289(趙斗淳J45289) 내각에서 공조판서․어영대장으로 경복궁 건영도감(建營都監)의 제조J48314(提調J48314)가 된 뒤 판의금부사․도총관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嘉梧藁略.

허금파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 판소리의 명창. 철종 때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김세종J03335(金世宗J03335) 문하에서 판소리를 공부하여 진채선(陳彩仙)에 이어 여자 판소리 명창의 선구자가 되었다. 
뒤에는 신재효J14982(申在孝J14982)로부터 판소리의 지도를 받아 대명창이 되어 고종 때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00년 광무대J23355(光武臺J23355) 협률사J23588(協律社J23588)공연에 참가하였고, 1903년 원각사J23457(圓覺社J23457) 창극공연에 참가하여 〈춘향전〉에서 월매역을 하였다 한다. 원각사 공연 이후에는 가정에 묻혀 살았다.  〈춘향가〉를 잘 불렀고, 특히 〈춘향가〉 가운데 󰡐옥중상봉󰡑 대목이 더늠(장기)이라 한다. 김세종의 소리제를 이어받았고 신재효로부터 이론적 지도를 받은만큼 매우 품위 있는 소리를 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 唱劇史硏究(朴晃, 白鹿出版社, 1976).

허득선

생몰년 미상. 조선말기에 활약한 서도소리의 명창이며 비조(鼻祖). 평양출신으로 김관준(金寬俊)과 함께 서도소리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학식이 있어서 서도잡가의 사설을 다듬고 좋은 사설에 가락을 얹어 부르는 재주가 있었다. 서울․경기 선소리의 시조라는 의택이와 종대가 평양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을 때 이를 듣고 배워서 서도 선소리를 만들었고, 널리 유행시켰다. 
그의 의발(衣鉢)은 김관준이 이어받았다. 그뒤 그의 소리는 문영수(文泳洙)․이정화(李正華) 등 서도명창에 의하여 서울에서도 유행하게 되었고, 서울의 잡가명창들도 다투어 배웠다. 그 결과, 경서도창(京西道唱)이 생겨서 요즈음에는 경기명창들은 으레 서도소리를 부르게 되었다. 
고종과 민비 앞에서 〈기밀경〉 등 서도가무를 열연하여, 민비의 주선으로 1882년 왕세자비 책봉 때 총순(總巡) 벼슬이 하사되었다. 〈기밀경〉은 제자인 김칠성(金七星)을 거쳐서 김옥선(金玉仙)에게 전하여졌으나 지금은 아는 자가 없다.  ≪참고문헌≫ 國樂大全集(신세기 레코드주식회사, 1968), 山打令에 관한 硏究(韓萬榮, 音大學報 5, 서울大學校音樂大學, 1971), 民謠․雜歌․立唱(李輔亨․韓萬榮, 文藝總鑑, 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6).

현철

1891(고종 28)~1965. 근대극운동의 선구자. 〔생애 및 활동〕 본명은 희운(僖運). 필명은 현당(玄堂)․효종(曉鍾)․효종생(曉鍾生)․세류옹(世瘤翁)․해암(海巖). 부산 출신. 개화기에 일본어 역관을 지낼 만큼 매우 개화가 빠른 집안 출신이었다. 1911년 보성중학(普成中學)을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의학공부에 뜻을 두었으나 󰡒민족적 의력(醫力)이 발달되지 못한 나라는 연극이 발달되지 못하였다.󰡓는 어느 책 구절을 읽고 감분〔感奮:감격하여 분발함〕된 바 있어, 민족의 의력을 찾고자 연극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13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재학중 일본 신극의 선구자 시마무라(島村抱月)가 경영하는 게이주쓰좌(藝術座) 부속연극학교로 적을 옮겼다.
시마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예술좌의 관서지방 공연에 연구생으로 따라나선 것이 연극공부의 시작이었다. 그 해 12월 데이코쿠극장(帝國劇場)에서 상연한 예술좌의 〈살로메〉에 단역으로 처음 출연하였다.
이어 1914년에 입센(Ibsen,H.J.)의 〈바다의 부인〉, 체호프(Chekhov,A.P.)의 〈곰〉, 톨스토이(Tolstoi,L.N.)의 〈부활〉, 나카무라(中村吉藏)의 〈조소 嘲笑〉, 주더만(Sudermann,H.)의 〈고향〉, 1915년 투르게네프(Turgenev,I.S.)의 〈그 전야(前夜)〉, 나카무라의 〈반 飯〉 등에 계속해서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1917년 연극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적어도 새로운 연극운동을 일으키려면 중국의 경우를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중국의 신극배우 오우양셰첸(歐陽豫瘦)을 알게 되었고, 그가 주재하는 싱지연극학교(星綺演劇學校)를 견학하면서 돕기도 하였다.
그 뒤 1919년 2월 귀국하여 1920년 2월 서울 서대문 근처에 예술학원(藝術學院)을 설립, 연극반과 무용반을 두고 연극인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 종합잡지인 ≪개벽 開闢≫이 창간되자 학예부장으로 들어간 그는 왕성한 필력을 발휘하는데, 희곡론에서부터 소설론․연극론․문화시론에 이르기까지 수십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때의 글 중 대표적인 것은 〈소설개요〉․〈소설연구법〉․〈소위 신시형과 몽룡체〉․〈문학에 표현되는 감정〉․〈연극과 오인의 관계〉․〈희곡개요〉․〈현당극담〉․〈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비평을 알고 비평을 하라〉 등이다.
그 뒤 예술학원이 내분으로 1년도 못 가서 문을 닫고 말자, 1923년 10월 민중극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벌이기 위해 동국문화협회(東國文化協會)를 발족하고 이듬해 12월 조선배우학교 설립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종로구 와룡동 소재 변사 김덕경(金德經)의 집 2층을 빌려 시작하였으며, 1925년 2월에 창신동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한국사람의 형편으로서는 문화사업에서 제일 급한 것이 의지력을 기르는 것과 인간을 알게 하는 것이고, 의지력을 배양하는 것과 인간을 알게 하는 것은 연극사업이다.󰡓라는 취지 밑에 동국문화협회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한 1년 만인 1926년 2월에 제1기생을 졸업시켰다.
같은 해 9월 입센의 〈인형의 집〉으로 시연회를 열고 졸업생으로 극계현문까지 형성하려 하였으나, 조선배우학교도 결국 내분으로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조선일보 기자생활도 하였고, 1927년 6월부터는 몇 달 동안 조선극장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박승희J05672(朴勝喜J05672)와 함께 토월회J04793(土月會J04793) 후신인 태양극장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곧 포기하고, 창극진흥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한때 그는 화장품 제조에도 손을 댄 적이 있다. 광복 후 동국문화협회를 통하여 ≪한국 급 한국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한 적이 있으며, 배우학원을 다시 열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말년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화접리에서 쓸쓸하게 보냈다.  〔업 적〕 그는 단역배우로 출발해서 최초의 연극학교를 세웠으며, 3․1운동 직후 외국문화사조와 외국작가 및 작품, 문학․연극 이론을 소개, 번역한 선구자였다. 번역작품으로는 투르게네프의 〈그 전야〉를 비롯하여 셰익스피어(Shakespeare,W.)의 〈햄릿〉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입센과 독일의 표현주의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도 그였다.
그것이 비록 일본을 통한 간접 소개였다고 하더라도 표현주의 소개는 대단히 앞선 생각이었다. 그는 또 극작가이기도 하였다. 비록 희곡은 모작의 성격을 띤 단막극 〈견〉 한 편이지만, 초창기에 그와 같은 사실적 작품을 썼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최대업적은 문학론과 연극론의 전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개벽≫에 발표한 〈소설개요〉와 〈소설연구법〉은 우리 나라에서 소설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논의한 최초의 이론으로, 개화기에 단편적으로 소설을 이야기한 이해조J31563(李海朝J31563)나 김동인J58444(金東仁J58444)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소설론을 전개하였다.
희곡이론과 연극론은 더욱 뛰어난데, 〈희곡의 개요〉에서는 희곡의 구조를 설명하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로부터 프라이타크(Freytag,G.)에 이르는 서양의 희곡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후진국에서의 연극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문학비평이라든가 문예사상론을 펴서 민중계도에 앞장섰다. 특히 민중극운동을 제창하여 롤랑(R
olland,R.)처럼 민중의 의력을 일으키려 한 것은 주목된다. 그는 우리 나라 근대연극사상 신파극으로부터 정통적인 근대극으로 넘어가는 데 징검다리 구실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新劇史硏究(李杜鉉, 서울大學校 出版部, 1966), 韓國文學의 比較文學的 硏究(金軟東, 一潮閣, 1972), 玄哲硏究 Ⅰ~Ⅲ(鄭德俊, 韓國演劇, 韓國演劇社, 1977).

혜명

1861(철종 12)~1937. 승려. 성은 신씨(申氏). 호는 혜월J38880(慧月J38880). 충청남도 예산 출신. 1871년(고종 8) 덕숭산 정혜사(定慧寺)로 출가하여 안수좌(安首座)의 제자가 되었고, 1884년에 경허J10734(鏡虛J10734)로부터 보조국사J11270(普照國師J11270)의≪수심결 修心訣≫을 배우다가 깊은 뜻을 깨달았으며, 1901년 오도하여 경허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1908년부터 도리사J31048(桃李寺J31048), 파계사J32561(把溪寺J32561) 성전(聖殿), 울산 미타암(彌陀庵), 통도사, 천성산 내원사(內院寺) 등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특히, 무소유(無所有)와 천진J40194(天眞J40194)으로 생애를 일관하여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파계사 성전에 있을 때에는 함께 있는 동승(童僧)에게 󰡐큰 스님󰡑이라 부르면서 존대하였고, 내원사에 있을 때에는 승려들에게 포식을 시키기 위하여 소를 판 뒤, 소를 찾는 주지 앞에서 발가벗고 소걸음을 흉내내며 소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또한, 평생 동안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一日不作一日不食󰡑의 생활을 준수하였고, 가는 곳마다 불모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만공J12087(滿空J12087)의 사찰건축, 용성(龍城)의 역경(譯經), 그의 개간사업을 높이 받들어, 이들 세 고승을 당대의 3대걸승이라 하였다. 내원사에 있을 때에는 손수 산 2,000여 평을 개간하여 훌륭한 논으로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세 마지기의 논을 마을사람의 요청으로 팔게 되었다. 
대금을 받아 돌아왔으나 그 돈이 두 마지기 값밖에 되지 않자 제자들이 힐책하였다. 이 때 󰡒논 세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 두 마지기 값이 있으니 다섯 마지기가 아니냐! 욕심이 없는 승려의 장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보시를 행하고 꾸밈없이 행동하며, 근면탈속의 탐욕이 끊어진 근래의 희유한 승려로 평가받고 있다. 1937년 부산 범일동 안양암J31481(安養庵J31481)에서 제자 운봉(雲峰)에게, 󰡒일체의 변하는 법은 본래 진실한 모습이 없다.
그 모습의 뜻이 무상임을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견성이라 한다(一切有爲法 本無眞實相 於相義無相 卽名爲見性).󰡓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韓國佛敎所依經典硏究(李智冠, 寶蓮閣, 1973), 韓國高僧評傳(金正休, 弘法院, 1982).

홍해성

1893년(고종 30)~1957. 연출가. 본명은 홍재원(洪在遠). 대구 출생. 1920년 봄에는 김우진J08347(金祐鎭J08347)․조명희J60714(趙明熙J60714)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이 회원들이 주동이 된 동우회순회연극단의 일원으로서 조명희가 쓴 〈김영일J01403(金英一J01403)의 사(死)〉의 연출을 맡았다.
전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김우진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인 연극인이 되기 위해 일본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자퇴하고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로 적을 옮겼고, 동시에 일본 신극의 선구자 오사나이(小山內薰)의 문하생이 되었다. 1924년에 일본 신극의 산실인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이 서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극장의 전속배우가 되었다.
쓰키지소극장의 단역 배우로 있으면서, 1926년 5월에는 ≪조선일보≫에 김우진과 공동집필한 논문 〈우리 신극운동의 첫길〉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토월회의 실패를 분석하고, 또한 1920년대 신극운동의 문제를 다룬 중요한 평문(評文)이다.
김우진과 함께 서울에 연극전문극장을 짓고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일 것을 설계하였으나, 김우진이 자살하자 실의에 빠져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1929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윤백남J23465(尹白南J23465)․박승희J05672(朴勝喜J05672) 등과 경성소극장을 조직하였으나 곧 유산되었고, 그 해 10월에는 극예술협회 회원이었던 고한승(高漢承)의 자금지원을 받아 극단 신흥극장을 조직하고 창립공연으로 〈모란등기 牡丹燈記〉(단성사, 1930.11.)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이 공연은 번역과 연출이 좋지 않아 실패하였다. 
1930년 12월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실에서 체호프(Chekhov,A.P.)작 〈벚꽃동산〉을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1년에는 일본에서 가져 온 연극․영화관계 자료를 모아 해외문학파 회원들의 협조를 얻어 전람회를 열었다.
이 전람회를 계기로 하여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가 조직되자 창립동인으로 참여하였고, 강연․작품평․작품해설․연출 등 이론과 실제적 행동을 통해서 연극의 저변확대와 정통적 근대극 수립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였다.
극예술연구회에서는 무대수련을 쌓은 유일한 연출가였기 때문에 창립공연인 〈검찰관〉으로부터 제7회 공연까지 계속 연출하였는데, 1934년 말까지의 홍해성 연출 전담시기가 바로 극예술연구회의 제1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유치진J23462(柳致眞J23462)․서항석J23427(徐恒錫J23427)․허남실(許南實)․이서향(李曙鄕) 등이 그에게서 연출을 배웠다.
1935년에는 생활고로 지두한(池斗漢)이 이끌던 직업극단인 조선연극사J23490(朝鮮硏劇舍J23490)로 옮겨 〈개화전야 開化前夜〉 등 대중극을 연출하였다. 1935년 11월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이 극장의 전속연출가가 되었고, 여기서 개량신파극을 리얼리즘기법으로 연출하려고 노력하였다. 1942년에는 과로로 인한 병때문에 동양극장을 그만두었다.
광복 후 1955년 7월에는 극단 민극(民劇)이 그를 위한 회갑기념공연을 시공관에서 열었고,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여 연출과 연기를 가르쳤다. 1957년 7월에는 국립극장의 환도기념공연인 쉔헤르(Sch─ nherr,K.)작 〈신앙과 고향〉을 마지막으로 연출하였다.
그는 배우로 출발하여 연출면에서 우리 나라 근대극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극예술연구회를 통해서 스타니슬라브스키(Stanislavsky,K.S.)의 사실주의적 연출기법을 정립했고, 동양극장시대에는 신파극에 리얼리즘 연출기법을 도입해 토착화시키는 데 지대한 구실을 한 선구적 연출가이다. ≪참고문헌≫ 韓國新劇史硏究(李杜鉉, 서울大學校 出版部, 1966).

황하일

1895(고종 32)~1977. 사회주의운동가. 연해주 올가군 노보리토프스크면 타우데미 마을출생. 농민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6년 러시아군대 징집되어서 20보병사단의 77젠킨스크연대에 근무했다.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자 제대하고 스몰렌스크에서 적위대에 입대하였다. 내전이 발발하자 적위대는 전선에 서게 되었으며 첫 전투는 스몰렌스크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벨璟이에서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지휘하다가 후에는 대대장이 되었다. 그동안에 황하일은 적군 지휘관 과정에서 공부하여 제3군 연대장의 지위에 올랐다. 제3군은 페름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거기에서 콜차크와 싸우게 되었다. 
그는 퇴각하는 콜차크 군대를 쫓아서 이르쿠츠크까지 갔다. 1920년 1월 이마노박스크지구에서 400여명의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백위군과 맞서 싸웠는데 적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거나 적후방의 철교를 파괴하였다. 
그 해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0~1921년 사이에는 세묘노프군 격퇴작전에 참가하였다. 1921년 봄 부대를 거느리고 자유시로 가서 오하묵이 이끌던 한인보병 자유대대와 연합하였다. 
5월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어 자유시에 주둔하자 그 산하 제2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내전 후 1924년에 제대하였다. 스탈린의 숙청시기에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7년 석방되었다가 복권되었다. 1967년에 적기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뜨베이 김, 이준형 역, 역사비평사, 1990),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편, 창작과 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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