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처 [可居處]
위치 ·풍토 ·인심 ·산물 등의 생활조건이 살기에 알맞은 장소.
풍수지리설에 의한 복거사상(卜居思想)으로, 전란·사화(士禍) ·기근 등으로 삶에 지친 백성이 바라던 낙토(樂土)를 말한다. 조선 21대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와 23대 순조 때 서유구(徐有而)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그런 기록이 보인다.
가례 [家禮]
가정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예법.
고대 중국에서는 예악(禮樂)으로써 나라를 통치한다고 할 만큼 예(禮)를 중요시하였다. 모든 제도가 어느 정도 정비된 주(周)나라 때에 주공(周公)이 국가 통치의 방편으로서 예법을 제정하였는데, 그 후 역대의 왕조가 이것을 보강하였다. 그러나 이 예법은 ‘치국(治國)’에 필요한 것일 뿐, 국가 성립의 기본이 되는 가정을 다스리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제가(齊家)’를 위한 예법이 필요하여 가례를 제정하였다. 주나라 이후 많은 학자들이 가례를 저술하였는데, 송(宋)나라 때에 이것을 집대성한 것이 《주자가례(朱子家禮)》이다. 《주자가례》의 편자는 주희(朱熹), 즉 주자인데, 이에 대해서는 후세의 학자가 주자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는 이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의 학자 유계(兪棨)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술하였고, 김장생(金長生)이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지었다. 그런데 《가례원류》의 저자에 대해서는, 유계의 초고(草稿)를 윤선거(尹宣擧)가 읽어 보던 중 두 사람이 다 죽었으므로,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와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尹拯)이 각기 자기 문중에서 지은 것이라 하여 분규가 일어났다.
이 밖에도 인조(仁祖)의 증손인 이혁(李爀)이 편찬한 《사례찬설(四禮纂說)》이 있고, 영조(英祖) 때의 이재(李縡)가 편찬한 《사례편람(四�둥�)》, 이것을 고종(高宗) 때의 황필수(黃泌秀) ·지송욱(池松旭)이 증보한 《증보사례편람》, 선조(宣祖) 때의 이항복(李恒福)이 편찬한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이 책들은 주로 《예기(禮記)》 또는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하여, 각 가정의 관례 ·혼례 ·상례 ·제례 등을 규정한 것이다. 나라의 예법과 가례를 존중하는 사상이 조선시대에 더욱 강조되었는데, 이것이 당쟁(黨爭)과 관련되어 현종(顯宗) ·숙종(肅宗) 때 남인(南人) ·서인(西人) 사이의 ‘예송(禮訟)’을 초래하였다.
가상 [家相]
한 집안의 운세를 좌우한다고 하는 집의 지세(地勢) ·위치 ·방향 ·구조.
음양오행설行說)을 근거로 입지조건 ·방향 ·터잡기 등에 관해서 길흉을 판단하는 속신(俗信)이다. 음양오행에서 나온 방위설(方位說)은 방향에 길흉이 고정되어 있는 경우와 역일(曆日)의 순환이나 사람의 운세에 따라 그 길흉이 변동한다는 경우가 있는데 가상설(家相說)은 고정된 방향의 길흉을 적용한다. 음양가들이 가상을 보는 데는 방위를 수효(數爻)에 배치하여 택일 ·풍수(風水)의 길흉 등을 점치는 구성(九星)에, 중궁(中宮)과 후천팔괘(後天八卦) 및 팔문(八門)을 배합하여 그 운행하는 아홉 방위의 자리, 곧 9궁(宮)으로서도 판단하고, 8방위를 1방위마다 셋으로 세분한 24방위 등으로도 판단한다. 집터는 사신(四神)이 상응하는 가장 귀한 지상(地相)이라는 ‘사신상응(四神相應)’의 터를 제일로 꼽았다. ‘사신상응’이란 왼쪽인 동쪽에 유수(流水)가 있는 청룡(靑龍),오른쪽인 서쪽에 대도(大道)가 있는 백호(白虎), 정면인 남쪽에 오지(擄地)가 있는 주작(朱雀), 뒤쪽인 북쪽에 구릉(丘陵)이 있는 현무(玄武)를 말한다.
방위에 있어 특히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북동방[鬼方]을 귀신이 드나든다고 하여 꺼렸으며, 문은 동과 남 중앙에 있으면 가업이 번영하는 길상(吉相)이라 하였다. 귀족 사대부층의 외출이나 이사에 따른 방위의 금기(禁忌)와 함께 이러한 가상설도 음양가를 매개로 하여 일반 서민층에 널리 침투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사가(私家)는 물론 관아(官衙)도 방위설에 우선해서 건축할 때 정침(正寢)이나 정랑(正廊)을 남향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동향이나 서향, 혹은 북향을 택하였으니, 그것은 국왕만이 남향할 수 있고 신하가 국왕과 같이 남면(南面)한다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라는 충군사상(忠君思想)이 하나의 불문율이 된 것 같다. 중종(中宗) 이후 사치해지고 예도(禮道)를 넘는 풍조 속에 남향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나 음양설의 관념 때문인지 사가(私家)는 자좌오향(子坐午向)인 정남향만은 피하여 오늘날 잔존하는 고가(古家)들의 남향집은 약간 동쪽 또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음양오행에 의한 가상설은 시대가 흐르면서 경험과 지식을 보태어 재해의 위험이 적고 볕이 잘 들며, 배수가 잘 되는 조건 등을 가리게 되어, 모든 것이 근거 없는 미신이라고만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미선(尾先), 곡구(谷口), 궁전(宮前)’과 같은 말은 산을 등에 지는 지형, 계곡의 입구, 궁전 앞과 같은 곳은 집터로서 부적당한 장소임을 가리키는 등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가인괘 [家人卦]
육십사괘중 하나.
육십사괘(六十四卦) 중 손괘(巽卦:∴)와 이괘(離卦:∞)가 겹쳐서 √의 형상을 이룬 괘. 불에서 바람이 남을 상징하며, 괘사(卦辭)에 “마음이 곧아야 이롭다”고되어 있다.
간괘 [艮卦]
팔괘(八卦) 중의 7번째 괘.
간상연(艮上連)이라고 하며 산을 상징하여 7간산(艮山)이라고 통칭하고 고유 숫자는 7이다.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동북의 괘로 만물의 이루어짐이 끝나고 새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시작되므로 성취의 결말이자 시작이기 때문에 결실 성취를 얻는다고 하였다. 성정(性情)의 의미로 보면 멈추는 것이며 짐승의 형상으로 보면 개이다.
신체에 비유하면 팔이고 집안으로 말하면 막내아들이라고 한다. 《설괘전》 10절에 8괘의 각 괘가 상징하는 것들이 나와 있는데 간괘는 연못이요, 지름길이요, 작은 돌이요, 궁궐 같은 곳의 문이요, 나무와 풀의 열매요, 대문을 지키는 하인이요, 손가락이라 하였다.
또한 개이고 쥐이며 검은 부리를 가진 무리들이고 나무에 있어서는 단단하고 마디가 많은 마른 것이라고 하였다. 계절로 보면 겨울에서 봄까지를 말하며, 시간은 오후 3시경을 뜻한다.
간괘 [艮卦]
육십사괘 중 하나.
육십사괘 중, ′가 둘이 겹쳐서 ∨의 상형을 이룬 괘. 아래위에 산이 거듭됨을 상징하며, 평정(平靜)을 뜻하므로 유자(儒者)들은 자기 본마음을 찾는다는 뜻에서 좋은 괘로 보았다.
간룡 [看龍]
풍수지리설에서 산과 관련된 상지법으로 진혈을 찾는 법.
풍수지리설에서 산과 관련된 상지법((相地法)으로 산맥을 용(龍)으로 보고, 감추어진 정기가 흘러 다니는 통로로 여겨 용을 체(體)로,
맥을 용(用)으로 하여 진혈(眞穴)을 찾는 방법이다.
맥이란 사람의 몸안으로부터 혈류(血流)가 나누어져 표피까지 흐르는 것과 같이 땅속의 용의 생기흐름이 나뉘어 지표면 부근에서 흐르는 것이며, 그 형체를 보아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용은 그 고저를 기준으로 농룡(壟龍)과 지룡(支龍), 대소를 기준으로 간룡(幹龍)과 지룡(枝龍), 용의 원근을 기준으로 태조(太祖), 소조(少祖), 부모(父母)로 나눈다. 용의 모습에 따라 정룡(正龍)과 방룡(傍龍), 진룡(眞龍)과 가룡(假龍), 귀룡(貴龍)과 천룡(賤龍)으로 용의 종류가 나누어 진다.
정룡은 바르고 곧게 뻗었으며 중앙에 위치하여 안정되고 조화로운 모습을 가진 산이고, 방룡은 용맥이 편중되어 기울어져 정룡에 대하여 보조하는 역할을 하므로 좋은 형세가 아니다. 진룡은 용세가 장막을 펼친 듯하고 용신이 생기가 있어 수려한 형세를 가진 산을 말하며, 가룡은 형세는 비슷하나 격에 맞지 않아 아름답지 못하다.
용맥이 중앙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화와 균형 속에서 변화와 생기를 띤 산을 귀룡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산을 천룡이라 한다. 또한 용을 길룡과 흉룡으로 구분하여 석산(토양이 없는 산)·단산(산의 맥이 단절되어 있는 산)·괴산(산맥이나 지맥이 지나치게 과한 산)·독산·동산(초목이 자라지 않는 산) 등을 흉룡이라 하여 좋지 않게 생각한다.
용의 세력에 따라 생룡(生龍)·사룡(死龍)·강룡(强龍)·약룡(弱龍)·순룡(順龍)·역룡(逆龍)·진룡(眞龍)·퇴룡(退龍)·복룡(福龍)·병룡(病龍)·겁룡(劫龍)·살룡(殺龍) 등 1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에서 생룡·강룡·순룡·복룡 등 5개는 길하고 나머지 7개는 흉하다.
간방 [間方]
방위(方位) 중 정동(正東) ·정남(正南) ·정서(正西) ·정북(正北) 4방위의 각 사이를 가리키는 방위. 즉, 건(乾) ·곤(坤) ·간(艮) ·손(巽)의 방위를 말한다.
간좌 [艮坐]
묏자리나 집터 등이 간방(艮方)을 등지고 앉은 자리.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 말하는 방위(方位)의 하나로, 흔히 간좌곤향(艮坐坤向)이라 하여 간방을 등지고 곤방을 바라보는 위치를 말한다. 때로 약간 비뚤어지게 잡은 자리나 방향을 비유하기도 한다.
감괘 [坎卦]
팔괘 중의 하나.
팔괘 중 ℃의 상형(象形)을 이루는 괘. 팔괘(乾·兌·離·震·巽·坎·艮·坤)는 《주역(周易)》에서 자연계·인사계(人事界)의 모든 현상에 음양(陰陽)을 겹쳐서 8가지의 상(像)으로 나타낸 것인데, 감괘는 하나의 양(陽)이 두 음(陰) 속에 빠져서 험난함을 나타내고 물을 상징한다.
감괘 [坎卦]
육십사괘 중 29번째 괘.
육십사괘 중 감괘(坎卦)가 상(上)과 하(下)에 있는 괘로서 감위수(坎爲水)라고도 한다. 원문에 따르면 유부(有孚)면 유심형(維心亨)이니 행(行)하면 유상(有尙)이리라. 믿음이 있으면 마음은 형통하고 행하면 숭상함이 있다.
1효(爻)는 물이 겹쳐진 곳에 들어가니 흉(凶)하니라. 험난한 상태에서 나오려 하나 더욱 험난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2효는 구덩이에 빠져 위험하니 원하는 것을 조금 얻을 수 있다. 3효는 나아가도 난관, 물러서도 난관이니 결국은 험난함뿐이니 허둥거리지 말고 침착하게 있어야 한다.
4효는 술과 제물을 약속을 지켜 창문으로 보내니 끝내는 허물이 없으리라. 성의와 진심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5효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멈추어 수평을 유지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역경을 극복하였다고는 하나 모두 사라진 상태는 아니므로 내실을 기하는 데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6효는 튼튼한 밧줄에 묶여 가시덤불에 갇혀 있으니 3년이라도 얻어지는 게 없어 흉(凶)하니라. 앞으로도 한참을 어려움에서나오기가 힘드니 급하게 이득을 구하려 하면 재난에 빠지게 된다. 이 괘는 전체적으로 역경이 거듭된 상태를 말하며 인간이 고난이나 역경에 처했을때 거기서 벗어나는 일에 대한 교훈을 알려준다.
감중련 [坎中連]
팔괘(八卦) 중 6번째 괘.
감괘(坎卦)를 부르는 말로 중간만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을 상징하여7감수(坎水)이라고 통칭하고 고유숫자는 6이다.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정북(正北)방의 괘로 물이 쉬지 않고 흐르니 수고한다고 하는 것이며 겨울을 뜻하니 만물의 활동이 중지되고 감추어지게 되는 바 고생스럽다고 하였다.
성정(性情)의 의미로 보면 빠지는 것이며 짐승의 형상으로 보면 돼지이다. 신체에 비유하면귀이고 집안으로 말하면 가운데 아들이라고 한다. 《설괘전》 10절에 8괘의 각 괘가 상징하는 것들이 나와 있는데 감괘는 물이요, 개천과 도랑이요, 숨어 엎드려 있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굽은 것을 바로 잡음이고, 활과 수레바퀴요, 사람에 있어서는 근심을 더하는 것이고, 마음이 병드는 것이고, 귀가 아픈 것이며, 피를 나타내는 괘의 붉은 것이요, 말[馬]에 있어서는 등이 아름답고, 성급한 마음이요, 머리를 숙이는 것이요, 얇은 말굽이요 끄는 것이다.
수레라 하면 재앙이 많은 것이고 통하는 것이요, 달이요, 도적이며 나무에 있어서는 단단하고 심이 많은 나무이다. 계절로 보면 겨울을 말하며, 시간은 밤11시부터 1시까지를 말한다.
갑 [甲]
십간(十干)의 첫째.
갑과(甲科)·을과(乙科)와 같이 등급을 매길 경우는 첫째를 나타내며, 갑제(甲第)·갑족(甲族)과 같이 최상·일류를 나타내기도 한다. 방위(方位)로는 정동에서 15° 북쪽을 중심으로 한, 즉 동북동(東北東)에 해당하며(甲方), 시각으로는 24시의 여섯째로 오전 4시 반∼5시 반[甲時]을 나타낸다.
갑기야반생갑자 [甲己夜半生甲子]
음력으로 일진(日辰)의 천간(天干)이 갑(甲)이나 기(己)로 된 날의 첫 시각(時刻)은 갑자(甲子)로 시작된다는 말.
예를 들어 일진이 갑인일(甲寅日) 혹은 기묘일(己卯日)일 경우, 그 날의 첫 시각은 반드시 갑자시(甲子時)가 된다는 것이다. 기야반이라고 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날의 시간은 야반(夜半)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갑기지년병인두 [甲己之年丙寅頭]
음력으로 태세(太歲)의 천간(天干)이 갑(甲)이나 기(己)로 된 해는, 그 해 정월의 월건(月建)이 병인(丙寅)이라는 말.
매년 정월의 월건은 반드시 인월(寅月)이 되는데, 그 해의 태세가 갑(甲)자 또는 기(己)자로 시작될 때, 예를 들면 갑자년, 혹은 기미년의 경우, 그 해의 정월의 월건은 모든 인월 중 반드시 병인월(丙寅月)이 된다는 것이다.
갑좌 [甲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 말하는 방위(方位)중 집터나 묏자리가 갑방(甲方)을 등지고 앉은 좌향 또는 그 자리.
흔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라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 이것은 갑방을 등지고 경방(庚方)을 바라보는 좌향이다.
강일 [剛日]
음양설(陰陽說)에서 나온 양일(陽日).
척일(隻日)이라고도 한다. 일진(日辰)의 천간(天干)이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의 양(陽)에 해당하는 날이라 하여, 이날을 택하여 바깥일을 하면 잘된다고 하였다.
이와 상대되는 날을 유일(柔日)이라고 하며, 을(乙)·정(丁)·기(己)·신(辛)·계(癸)의 음일(陰日:雙日)이다.
거문성 [巨門星]
방위(方位)를 괘효(卦爻)에 배치하여 길흉을 점치는 구성(九星)의 2번째 별.
탐랑성(貪狼星)의 다음, 녹존성(綠存星) 위에 있다. 이흑성(二黑星)이라고도 하며 구성의 남서쪽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건괘 [乾卦]
팔괘(八卦) 중 첫번째 괘.
건삼련(乾三連)이라고도 하며 하늘을 상징하여 1건천(乾天)이라 통칭하고 고유 숫자는 1이다. 우주만물 중에서 하늘이 맨 처음 생겼다는 관념에서 주역 팔괘의 첫 괘가 되었다.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서북의 괘여서 천지 자연의 위대함이 경쟁하고 다툰다고 하였다.
성정(性情)의 의미로 보면 튼튼한 것이고, 짐승의 형상으로 보면 말이다. 신체에 비유하면 머리이며 집안으로 말하면 만물을 머금은 하늘이니 아버지라 한다. 《설괘전》 10절에 8괘의 각 괘가 상징하는 것들이 나와 있는데 하늘이요, 둥근 것이요, 임금이고, 아버지라 하였다.
또한 보석으로는 옥과 금이며 추위요, 얼음이요, 아주 붉은 것이요, 좋은 말[馬]이요, 늙은 말이요, 야윈 말이요, 얼룩말이요, 나무의 열매라 하였다. 계절로 보면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이며 시간으로는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를 말한다.
건괘 [乾卦]
육십사괘 중 첫 번째 괘.
육십사괘 중 건괘(乾卦)가 상(上)과 하(下)에 있는 괘로서 건위천(乾爲天)이라고도 한다. 원문에 따르면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정(貞)하다. ≤을 둘 포갠 Å 형상을 이룬다. 하늘이 거듭됨을 상징하며 괘사(卦辭)는 ‘크게 형통한다, 일이 옳고 곧다’이다.
건괘 [蹇卦]
육십사괘 중 39번째 괘.
육십사괘 중 감괘(坎卦)가 상(上)에 있고 간괘(艮卦)가 하(下)에 있는 괘로서 수산건(水山蹇)이라고도 한다. 원문에 따르면 이서남(利西南)하고 불리동북(不利東北)하며 이견대인(利見大人)하니 정(貞)이면 길(吉)하리라.
서남쪽은 이롭고 동북쪽은 불리하며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고 곧으면 좋을 것이다.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에는 참고 기다리면 극복할 수 있지만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낭패하게 된다. 여기서 서북쪽은 해가 지는 음의 방향이고 동북쪽은 해가 뜨는 양의 방향이다.
1효(爻)는 가면 절뚝거리게 되고 돌아오면 명예롭다. 전진하면 위태로워지고 자중하고 물러서면 이로움을 얻게 된다. 2효는 왕의 신하들이 절뚝거리는 것은 신하들의 몸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이해를 위한 욕심을 버리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해야 한다.
3효는 전진하면 절뚝거리고 물러서면 상황이 반전된다. 내실을 다지고 뒤로 물러서면 기쁨을 얻으리라. 4효는 전진하면 절뚝거리게 되고 돌아오면 연결될 것이다. 무리하게 나아가지 않고 물러서면 협력할 동지를 구하게 된다. 5효는 크게 절뚝거리니 벗이 찾아온다. 큰 고난 중에서도 스스로 중용을 지키면 주위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6효는 전진하면 절뚝거리나 돌아오면 큰 성과가 있어 길하니 대인을 봄이 이롭다. 앞으로 나아가면 낭패가 있으나 물러나서 뜻을 안에 두면 큰 성취를 얻게 될 것이다. 이 괘는 주역 육십사괘 중 4대 난괘(難卦)의 하나로 험난함이 크므로 물러서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라는 데에 교훈이 있다.
건좌 [乾坐]
묏자리 ·집터 같은 것의 방향.
건방(乾方), 곧 북서방(北西方)을 등진 좌향(坐向)을 말한다.
겁살 [劫煞]
삼살(三煞)의 하나.
대살(大煞)이라고도 하며, 재살(災煞)·세살(歲煞)과 함께 삼살을 이룬다. 살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작용하여 흉살 중의 흉살로 꼽는다. 한 마디로,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빼앗길' 명운의 소지이다. 이 살이 끼면 살해·겁탈·재물손실·사고를 당할 수 있다. 또한 노력에 비해 결과가 미미하고, 관재구설에 말려들 수도 있다. 이 살을 타고난 사람은 대체로 자기주장이 강하지 못하고 기가 약한 편이다.
생년에 겁살이 있으면 일찍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돌아다니게 되고, 늘 열심히 일하지만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월에 겁살이 있으면 부모나 형제자매와의 인연이 박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거나 생이별할 수도 있다. 생일에 겁살이 있으면 부부금슬이 좋지 않아 같이 사는 시간이 매우적을 명이며, 같이 산다고 하더라도 제각기 쓸쓸히 살아가게 된다. 또한 생시에 겁살이 있으면 자손운이 없어서 자손이 병약하거나 키우기 어려울 명운이다.
즉 이 살성이 정확하게 행사를 하면 불행한 일을 당할 요인이 된다. 이처럼 이 살이 흉하게 작용하면 커다란 재앙이 따라오지만 길하게 작용하면 대부대귀(大富大貴)하게 된다. 또 겁살이 귀인이나 천월덕 등과 같이 있으면 꾀가 많고 두뇌가 좋다.
사주 감정(鑑定) 때 많이 응용하는 신살법(神殺法)에서 보면, 삼살방은 일년에 한번씩 시계방향으로 돌기 때문에 신(申)·자(子)·진(辰)생은 사(巳)에서, 인(寅)·오(午)·술(戌)생은 해(亥)에서, 해(亥)·묘(卯)·미(未)생은 신(申)에서, 사(巳)·유(酉)·축(丑)생은 인(寅)에서 겁살이 시작되어 순행(順行)으로 짚어가면 된다.
견갑골점법 [肩胛骨占法]
동물의 껍데기나 뼈를 불에 구워서 그 갈라지는 금을 가지고 길흉(吉凶)을 점치는 고대점법.
부여(夫餘)의 우제점법(牛蹄占法)이 이에 속한다. 이것은 소를 죽여서 그 굽의 합불합(合不合)으로 치는 점법이다. 이 때 굽이 합쳐지면 길하고 벌어지면 흉하다고 여겼는데, 이 점법은 고구려 때도 있었다 한다.
겸괘 [謙卦]
육십사괘 중 곤괘와 간괘가 겹쳐서 형상을 이루는 괘.
육십사괘 중 곤괘(坤卦:°)와 간괘(艮卦:′)가 겹쳐서 ※의 형상을 이루는 괘를 말한다. 지산겸(地山謙)이라 하며, 땅 밑에 산이 있음을 상징한다.
경 [敬]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것’이라는 뜻.
처음에는 ‘경건함’,‘공경하다’ 등의 뜻으로 쓰였다. 고대의 ‘일을 경건하게 처리하다(敬事)’,‘귀신을 공경하다(敬鬼神)’,‘형을 공경하다(敬兄)’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본디는 동사로 많이 쓰였다. 이것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경건함을 가지고 자기를 닦는다(修己以敬).”고 하고,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에서 “겅건함을 가지고 마음 속을 곧게 만든다(敬以直內).”고 하여 수양의 수단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한다. 이때의 경의 의미는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것’이 된다.
경(敬)이 수양의 수단으로 사용되게 된 철학적 배경에는 성선사상(性善思想)이 전제된다. 이것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므로 마음이 처음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남을 사랑하고 돕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생각이나 헤아림이 이기적으로 작용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나 헤아림자체를 중지시키면 악한 마음으로 변질되지 않기 때문에 착한 마음을 계속 보존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중국 송나라 때 성리학(性理學)이 발생하여 유학이 철학적으로 심화되었는데 이때 경이 다시 수양의 요체로서 부각되었다. 본연의착한 마음을 회복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체계인 성리학에서는 착한 마음을 회복하는 2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경을 간직함으로써 악한 마음으로 변질되는 요인을 제거한다는 거경(居敬)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미루어 간접적으로 자신의 본질인 착한 마음을 인식한다고 하는 궁리(窮理)의 방법이다. 정이(程燎: 1033~1107)는 경의 내용에 ‘마음을 한 가지에만 집중시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主一無適)’을 포함시켰다. 한국 성리학에서는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고유한 사상에 힘입어 궁리보다 거경에 치중하는 경중심의 수양철학이 발달하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경 [庚]
십간의 일곱째.
순서·등급을 매길 때 기(己) 다음의 일곱째를 나타낸다. 방위로는 24방위의 하나로 정서(正西)로부터 남쪽으로 15°되는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 각도 안, 서남서(西南西)에 가깝다.
시각으로는 24시의 18째 시이며, 오후 5∼6시이다.
경세치용 [經世致用]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유학상(儒學上)의 주장.
중국 명(明)나라 말에서 청(淸)나라 초의 동림학파(東林學派)와 그들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등이 주창하였다. 명나라 중기 이후 유학이 정치적 ·사회적혼란 속에서 객관적 실증성을 떠난 주관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자 그에 반대하여 이 주장이 일어났다. 이것은 청나라 초기에는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으나 차츰 고증(考證)만을 위주로 하는 학풍에 밀려 안원(顔元) ·이공(李夷) 등의 학파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경세학 [經世學]
정치적 실천을 핵심으로 하는 학문.
유학의 목적 개념인 경세관념은 공언(空言)이 아닌 실질적인 학문을 뜻하는 실학 개념의 구체적인 의미이다. 이러한 관념은 유학의 성립 이후부터 존재했다. 송·명시대 실학인 성리학과양명학에서는 개인의 도덕 수양을 사회 및 우주적 질서와 일체시켰다. 더욱이 성리학과 양명학에서는 정치보다는 도덕을 경세의 기초로 보았다. 주자학자들이 송대의 왕안석(王安石)과 엽적(葉適) 등의 개혁론자들을 이단으로 평가한 것도 개혁론자들이 정치면만 강조하여 공리주의적 실천으로 흘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명말 청초 이후 경세학은 도덕과 공리 두 측면의 가능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세와 다르다. 아울러 두 요소의 타협에서 학설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리적 측면이 청대 경세학의 핵심이다. 청대 경세학은 한편으로는 주지적(主知的) 박학과 고증방법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물론 명나라 중기에 형성한 신사층내의 사회분화의 결과 정치적으로 소외된 재야 지식층이 학문을 통해 정치를 연구한 것이다.
경세학은 19세기 후반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유교 경세학의 마지막 형태인 캉유웨이[康有爲]의 공양학에 이르러서는 정교(政敎) 합일적 교학체계(敎學體系)로서의 유교 자체가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유교 경세학의 역사적 사명은 서구화 변법운동의 좌절로 끝났다.
경학시대 [經學時代]
중국사상사(中國思想史)의 시대구분으로, 유학존중(儒學尊重)시대를 말함.
펑유란[友蘭]의 《중국철학사》에 의하면,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의한 유학존중(BC 135) 이전을 상고(上古)로 하고, 그 이후부터 중화민국 성립 때까지를 중고(中古)로 하여 전자를 자학시대(子學時代), 후자를 경학시대라고 하였다.
자학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파가 각기 평등한 지위에서 자유롭게 자기의 학설을 주장한 시대이다. 이에 대하여 경학시대는 경학이 성립하여 가장 정통적 학문으로 인정받고 경서가 절대신성시(絶對神聖視)되었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유교가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확실히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지지하는 학자도 있으나, 이 경학시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당(漢唐)의 훈고학(訓詁學), 송 ·명(宋明)의 성리학(性理學), 청조(淸朝)의 고증학(考證學)과 같이 시대에 따른 세 경향(傾向)을 구별하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 [癸]
십간(十干)의 마지막.
순서·등급을 매길 때 임(壬) 다음의 열째를 나타내며, 육십갑자에서는 갑년(甲年)으로 이어진다. 방위(方位)로는 24방위의 하나로, 정북(正北)에서 동쪽으로 15°되는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 각도 안, 북북동(北北東)에 가까우며 시각으로는 24시의 둘째시, 오전 1∼2시이다.
계도직성 [計都直星]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 운명을 맡아본다는 9직성 중 흉한 직성.
남자는 16세에, 여자는 17세에 처음 든다고 하는데, 이것은 9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고 한다.
고갑자 [古甲子]
고대 중국에서 쓰던 간지(干支)의 옛 이름.
갑(甲)은 알봉(閼逢), 을(乙)은 전몽(卯蒙), 병(丙)은 유조(柔兆), 정(丁)은 강어(强戟), 무(戊)는 저옹(著雍), 기(己)는 도유(屠維), 경(庚)은 상장(上章), 신(辛)은 중광(重光), 임(壬)은 현익(玄瘻), 계(癸)는 소양(昭陽), 자(子)는 곤돈(困敦), 축(丑)은 적분약(赤奮若), 인(寅)은 섭제격(攝提格), 묘(卯)는 단알(單閼), 진(辰)은 집서(執徐), 사(巳)는 대황락(大荒落), 오(午)는 돈장(敦茉), 미(未)는 협흡(協洽), 신(申)은 군탄(상灘), 유(酉)는 작악(作轎), 술(戌)은 엄무(企茂), 해(亥)는 대연헌(大淵獻)이다.
《통감외기(通鑑外紀)》에 보면 천황씨가 비로소 간지의 이름을 만들어서 해[年]를 차례로 표시하는 기호를 정하였다고 하고, 위의 고갑자를 열거하여 놓았다. 또 황제(黃帝)가 대요(大橈)에게 명하여 갑자를 만들게 하여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를 간(幹),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지(支)로 하고 이것을 차례로 배합, 날[日]의 기호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사물기원(事物紀原)》 〈천지생식부(天地生植部) 십이진(十二辰)〉에는 황제가 12지를 만들어서 달[月]의 기호를 정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것으로보아서 고갑자가 현재의 갑자로변하고, 처음에 해의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 차차 발전하여서 날과 달 그리고 시간의 기호가 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 속에서는 고갑자로 연대를 표시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갑자년일 경우에는, 알봉 곤돈 ∥월 ∥일로 되어 있다. 처음 고갑자가 만들어졌을 당시는 아직 육십갑자가 생기기 전이니, 알봉부터 해를 표시하여 대연헌에서 끝나서 22년을 1주갑(周甲)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괘 [蠱卦]
육십사괘 중 간괘와 손괘가 겹쳐서 상형을 이룬 괘.
육십사괘 중 간괘(艮卦:′)와 손괘(巽卦:∴)가 겹쳐서 ○의 상형을 이룬 괘를 말한다. '蠱'의 글자 구성(構成)이 그릇 위에 벌레 세 마리가 올라앉았으니, 음식물이 부패하여 벌레가 쏟아져 나오는 형상이다. 곧 질서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면 다시 바로잡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래서 크게 형통한다는 괘사(卦辭)가 나왔다. 그리고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모험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판단이 나왔다.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중국 청(淸)나라 때에 편찬된 백과사전.
구분 : 백과사전
시대 : 1725년
정식 명칭은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이다.
강희제(康熙帝) 때의 진몽뢰(陳夢雷)가 시작한 것을 옹정제(雍正帝) 때의 장정석(蔣廷錫)이 이어받아 1725년에 완성하였다.
총 권수 1만 권, 목록 40권. 천문(天文)을 기록한 역상휘편(曆象彙篇), 지리·풍속의 방여휘편(方輿彙篇), 제왕·백관의 기록인 명륜휘편(明倫彙篇), 의학·종교 등의 박물휘편(博物彙篇), 문학 등의 이학휘편(理學彙篇), 과거·음악·군사 등의 기록인 경제휘편 등의 6휘편으로 되어 있다.
이를 다시 32전(典) 6,109부(部)로 세분하였다.각 부는 휘고(彙考)·총론·도표·열전(列傳)·예문(藝文)·선구(選句)·기사(紀事)·잡록(雜錄) 등으로 구분된다. 고금의 서적에서 사항별(事項別)로 뽑아 수록한 책인데, 이를 이용하려면 원본을 찾아보아야 한다.
중국 최대의 백과사전으로, 당시에는 이를 유서(類書)라고 하였다. 원판은 구리활자판인데 매우 희귀하며, 현재 이용되는 유포본(流布本)은 1884년 상하이 도서집성국[上海圖書集成局]에서 간행된 것으로 오류가 많다.1890년 상하이 동문서국[上海同文書局]이 영인한 것에는 고증이 첨부되어 있어 유포본보다는 비교적 정확하다.
색인으로 《고금도서집성 분류목록》(1912년 일본 문부성편, 1책), 《An Alphabetical Index to the Chinese English Encyclopaedia》(1911년 대영박물관 간행, L.자일스 편저) 등이 있다.
고문학 [古文學]
금문학(今文學)과 대조되는 말.
여기서 말하는 고문이란 중국의 진(秦)나라 이전에 쓰던 문자의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한(漢)나라 중엽인 무제(武帝:재위 BC 141∼BC 87) 때 ‘공벽(孔壁)’, 즉 공자의 자손 집 벽에서 발견된 죽찰제(竹札製)의 문헌에 나타난 문자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설문해자(說文解字)》나 위(魏)나라 때 만들어진 《정시석경(正始石經)》 등에 의하여 그 대체적인 모양을 알 수 있다. 본래 선진(先秦)시대의 학문은 모두 고문학이라 할 수 있으나, 고문학이라 할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공벽에서 발견된 경서나, 한무제 때 하간(河間)의 헌왕(獻王)이 수집한 고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고문의 원전(原典)으로는 ①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의례(儀禮)》 《논어》 《효경》 등과 같이 금문학에도 그원전이 있는 것과, ②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주례(周體)》 등과 같이 금문학에는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도 자구(字句)나 학설에 약간의 상이점이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비교할 금문학의 원전조차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학설도 금문학 계통의 그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으므로 가장 큰 문제가 된다. 후세에 이르러 이 2책에 대해서는 한나라 때의 위작(僞作)이라고 의심하는 학자도 나타났으나, 이 위작설은 아직 인정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서경》은 금문과 고문이 따로 있는데, 고문 《서경》은 한(漢)나라 ·위(魏)나라 때 이미 분실되었고, 현재 고문 《서경》이라고 일컬어지는 책은, 4세기 진(晉)나라 때의 위작임이 논증되었다.
고문학의 역사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금문학보다도 뒤에 시작되었다. 공벽의 고문이 발견되었을 때, 당시의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이를 독해한 이래 학문적인 전승은 있었지만 학계(學界)는 금문학 일변도였다. 전한(前漢) 말경, 유흠(劉歆)의 의견에 따라 비로소 고문학의 박사(博士)를 두었는데, 이로부터 고문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금문학과 고문학의 학설상의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후한(後漢) 말경에 대유(大儒)인 정현(鄭玄)의 노력으로 양자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청나라 중기 이후 금문학파가 일어났을 때 다시 금문파와 고문파의 대립이 생겼는데, 경학(經學)에 있어서 종래 압도적이었던 고문학파에 대해 금문학파가 일방적으로 논란을 퍼부은 느낌이 있었다.
현재 이 양자의 대립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고문학자로서 저명한 사람은 전한시대의 유흠, 후한시대의 정흥(鄭興) ·정중(鄭衆) ·가규(賈逵) ·마융(馬融) ·정현(鄭玄) 등이다.청나라 때는 특히 고문학자로 불리는 사람은 없으나 건륭(乾隆) ·가경(嘉慶:1735∼1820)경까지 학자는 대부분 후한의 정현의 학문을 존중 ·계승했다는 뜻에서 고문학 계통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고증학 [考證學]
중국의 명(明)말 ·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이기(理氣)니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뭍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 ·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뭍],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揖) ·호위(胡謂) ·모기령(毛奇齡) ·만사대(萬斯大) ·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椀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 ·훈고 ·수학 ·천문학 ·지리학 ·수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증학은 영 ·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김정호(金正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而)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곡례 [曲禮]
《예기(禮記)》 중의 한 편(篇).
곡례의 본래의 뜻은 행사(行事)의 경우 등에 몸가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설명한 예법(禮法)을 말한다. 이러한 예법을 총괄한 것이 《예기(禮記)》이다.
788년(신라 원성왕 4)에 신라에서는 처음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여 그 성적으로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것이 한국 과거제도의 효시이다. 삼품이란 상 ·중 ·하품(上中下品)을 말하는 것인데, <곡례편(曲禮篇)>과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읽은 자는 중품, <곡례편>과 《효경》을 읽은 자는 하품으로 인정했다.
곤괘 [困卦]
육십사괘의 하나.
육십사괘 중 태괘(兌卦:≥)와 감괘(坎卦:℃)가 겹쳐서 ⊂의 상형(象形)을 이루는 괘를 말한다. 몸에 물이 없음을 상징하므로 매우 어려운 상태를 뜻한다.
곤괘 [坤卦]
팔괘(八卦)의 마지막 괘.
상형(象形)은 °, 땅을 상징하는 음(陰)의 괘로, 유순하고 사물을 성장시키는 덕을 나타낸다.
곤괘 [坤卦]
육십사괘 중 2번째 괘.
'°(팔괘의 끝괘)' 둘을 겹친 것으로, 땅 아래에 땅이 거듭됨을 상징하는 순음(純陰)의 괘이며, 땅은 하늘 다음에 생겼다 하여 육십사괘에서는 건(乾:하늘) 다음의 괘이다. 괘사(卦辭)는 "크게 형통한다, 암말의 곧음이 이롭다, 갈 데가 있을 때 먼저 가면 방황하고, 뒤에 가면 주인을 얻어서 이롭다"고 되어 있다.
곤좌 [坤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 말하는 방위(方位).
묏자리나 집터가 곤방(坤方)을 등지고 앉은 좌향. 흔히 곤좌간향(坤坐艮向)이라고 하여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한 위치를 일컫는다.
부모의 유해를 좋은 자리에 좋은 좌향으로 모시고 집터를 좋은 곳에 잡아야,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사상이 역학(易學)과 결부되어 오늘날까지도 좌청룡(左靑龍)이니 우백호(右白虎)니 하는 풍수지리설이 나돌고 있다.
골상 [骨相]
얼굴이나 두개골 등 골격에 나타난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상(相).
골상에 관한 연구는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골상에 관한 전문서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옛 문헌 속에서 골상에 관한 기록은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북사(北史)》 <조작전(趙綽傳)>에 “임금이 늘상 조작에게 이르기를 짐(朕)이 경(卿)에 대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다. 다만 경은 몸이 귀히 될 골상이 못 된다고 하였다(上每謂趙綽曰朕于卿無所愛惜 但卿骨相不當貴耳)”는 말이있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제갈 량(諸葛亮)이 죽을 때 마대(馬垈)에게 유언하기를, “위연(魏延)은 반골(反骨)이 있으니,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죽이라”하며, 그 계책을 일러 준 기사가 있는 것 등이다.
한국의 기록에서도 간혹 ‘반골’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골이란 임금에게 반역할골격의 모양새를 말하며, 이런 경우에는 머리 부분의 골격이 그 대상이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점들로 보아 과거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골상이 비록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후세에 전하지는 않았지만 그 연구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공양학 [公羊學]
구경(九經) 가운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중시하여 연구하는 학문.
서한(西漢) 초기에 생긴 금문학파(今文學派)는 공자(孔子)를 정치가로, 그가 편성한 육경(六經)을 공자의 정치이론서라고 생각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춘추공양전》에 그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서한의 대학자 동중서(董仲舒)와 공손룡(公孫龍)이 중심이 되어 이 공양학을 창설하였다.
또 중국은 하나라는 사상인 이른바 대일통(大一統)사상이 공양전 속에서 강조되자, 이 학문 정치에 큰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한나라 무제가 정치이론서로 선택하고 또 공손홍을 승상으로 등용하자 공양학은 매우 번창하였다. 후한(後漢) 때는 학자 하휴(何休)가 《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뭍)》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矮)》 《곡량폐질(穀梁廢疾》 등을 지어 더욱 발전시켰다.
이 학문이 극성기를 맞은 것은 청(淸)대였다. 청대에 강소(江蘇), 절강(浙江)지방에서 이 학문이 다시 번창하여 장존여(莊存與)와 장유가(莊有可) 등이 상주학파(常州學派)를 결성하여 정치이론학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청말엔 추평(쫏平)·캉유웨이[康有爲]·담사동(譚嗣同)·양계초(梁啓超) 등이 공양학을 정치이론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또 1891년에 캉유웨이가 간행한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는 고문파의 경학을 호되게 비판한 금문경학(今文經學)의 집대성으로 평가된다.
공문십철 [孔門十哲]
중국 고대의 성현인 공자(孔子)의 뛰어난 10명의 제자들.
흔히 사과(四科)십철이라 한다.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공자가 진채(陳蔡)의 들판에서 위난을 당하였을 때 함께 있던 제자들 10명의 이름을 들었다.
그는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騎伯牛)·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騎有)·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또 여기에 나오는 덕행·언어·정사·문학을 사과(四科)라고 한다.
과보 [果報]
과거의 업인(業因)에 따른 결과.
앞서 행동했던 선한 행위[善業]에 의해 낙과(樂果)를 받고, 악한 행위[惡業]에 의해 고과(苦果)를 받는다는 사상이다.
인도 고대사상에서 업은 우주론적 필연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업론(業論)은 우주론적 제약이 희박해지고인간의 자유의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후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의 현실주의적 관심에 의하여 철저히 인과응보를 설하게 되어 숙명론으로 오해되었다.
따라서 업론의 근본사상은 실천윤리적 범주를 벗어나 다시금 기계론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불교의 이상을 해탈(解脫)이라 할 때, 업론은 해탈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관괘 [觀卦]
육십사괘 중의 한 괘.
육십사괘 중 손괘(巽卦:∴)와 곤괘(坤卦:°)가 겹쳐서 ◎의 상형을 이루는 괘이다. 바람이 땅 위로 행함을 상징하며, 괘사(卦辭)는 ‘아랫사람이 믿고 우러러본다’고 되어 있다.
관상학 [physiognomy, 觀相學]
인상(人相)을 관찰하여서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고 그 얻어진 결론을 가지고 피흉추길(避凶趨吉)의 방법을 강구하는 학문.
관상학은 현실에 근거를 두고 통계학적 방법에 따르는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전해지는 다른 점술(占術)과는 근본적으로 그 유례를 달리한다.
【유래】 이 학문은 본래중국에서 일어났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晋)나라 사람 고포자경(姑布子卿)이 공자(孔子)의 상을 보고 장차 대성인(大聖人)이 될 것을 예언하였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위(魏)나라 사람 당거(唐擧)도 상술(相術)로 이름이 높았으나 상법(相法)을 후세에 남긴 것은 없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인도에서 달마(達磨)가 중국으로 들어와 선종(禪宗)을 일으키는 동시에 '달마상법'을 후세에 전하였다. 그후 송(宋)나라 초기에 마의도사(麻衣道士)가 '마의상법'을 남겼는데, 관상학의 체계가 이때에 비로소 확립되었다. '달마상법'과 '마의상법'은 관상학의 쌍벽을 이룬다. 관상학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이며, 고려시대에는 혜징(惠澄)이 상술로 이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끊임없이 유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관상의 구분】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⑴ 기본인상(基本人相):① 머리·이마·눈·코·입·이·귀 등 중요한 부위를 관찰한다. ② 얼굴을 3등분하여 위에서부터 상정(上停)·중정(中停)·하정(下停)으로 나누어 관찰한다.
⑵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얼굴을 십이궁으로 나누어 관찰하는 것으로 명칭은 복록궁(福祿宮)·명궁(命宮)·천이궁(遷移宮)·형제궁(兄弟宮)·복덕궁(福德宮)·처첩궁(妻妾宮)·전택궁(田宅宮)·남녀궁(男女宮)·질액궁(疾厄宮)·재백궁(財帛宮)·노복궁(奴僕宮)·상모(相貌:전체적인 것)이다.
⑶ 찰색(察色):얼굴 각 부위의 혈색을 관찰한다.
⑷ 얼굴 이외의 부분:① 주름살·사마귀·점·모발·신체의 각 부분 등을 관찰한다. ② 동작(動作)으로 언어·호흡·식사·걸음걸이·앉은 모양·누운 모양 등을 관찰한다. 위에 열거한 것 이외에도 그 사람의 일상생활의 이모저모 등 관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 많다.
괘 [卦]
주역점(周易占)의 기본.
양효(陽爻)와 음효(陰爻)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여서 나타내는 형상으로, 점치는 데 사용된다. 괘는 3효로 성립되는데, 양효는 '-' 모양으로 표시하여 '구(九)'로 이름붙이고, 음효는 '- - '로 표시하여 '육(六)'으로 이름 붙인다. 《사기(史記)》 〈삼황기(三皇紀)〉에 보면 복희(伏羲)가 비로소 8괘를 만들었다고 하고, 《경전석문(經典釋文)》 〈서록(序錄)〉에는 복희가 비로소 8괘를 만들고 이어 괘를 2개씩 겹쳐서 64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8괘란,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 의 여덟 괘로, 이처럼 3효로된 것은 그대로 괘 또는 소성(小成)의 괘라고 하고, 8괘 중에서 어느 두 괘를 위 아래로 겹쳐 만든 괘를 중괘(重卦) 또는 대성(大成)의 괘라고 한다.
중괘는 위에 있는 것을 상괘(上卦) 또는 외괘(外卦)라고 하고, 밑에 있는 것을 하괘(下卦) 또는 내괘(內卦)라고 한다. 괘효(卦爻)는 반드시 밑에서부터 위로 그어 올라가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이(離)가 상괘가 되고 감(坎)이 하괘가 되는 중괘 狽는 처음 그은 맨 밑의 획이 음(陰)의 표시이고, 음은 육(六)이 되어서 초륙(初六), 두 번째 획은 양(陽)의 표시이고, 양은 구(九)가 되어서 구이(九二), 세 번째 획은 음이 되어서 육삼(六三), 네 번째 획은 양이 되어서 구사(九四), 다섯 번째 획은 음이 되어서 육오(六五), 맨 위의 획은 양이 되어서 상구(上九)의 명칭을 얻게 된다. 점을 칠 때에는 중괘의 6효를 가지고 길흉화복을 판단한다.
《주역(周易)》에 보면, 괘마다 전체의 괘상(卦象), 상괘와 하괘의 관계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 괘사(卦辭)와 효마다 그 위치를 보아서 판단한 효사(爻辭)가 있어서 누구도 점쳐서 믿는 괘의 풀이를 할 수 있다. 괘사를 단(彖), 효사를 상(象)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괘사는 주(周)나라의 문왕이 만들고, 효사는 문왕의 아들인 주공(周公)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주의할 것은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에 한하여 6효의 효사 이외에 '용구(用九)'와 '용륙(用六)'의 효사가 있는 것이다.
괘기 [卦氣]
괘의 기후배합(氣候配合).
전한(前漢)의 학자 맹희(孟喜)·경방(京房) 등에서 시작된 역리(易理)의 학설(學說)이다. 진(震:∧)·이(離:←)·태(兌:佩)·감(坎:→)의 4괘를 4계절에 배속시키니, 진은 동방이되어서 봄, 이는 남방이 되어서 여름, 태는 서방이 되어서 가을, 감은 북방이 되어서 겨울에 속한다. 4괘의 24효(爻)를 다시 1년의 24절기(節氣)와 관련지었다.
12소식괘(消息卦)를 12월에 배속시키니, 복(復:■)은 11월,
임(臨:●)은 12월, 태(泰:∇)는 1월, 대장(大壯:〓)은 2월, 쾌(릎:∈)는 3월, 건(乾:Å)은 4월,구(뺙:∋)는 5월, 둔(遯:↔)은 6월, 비(否:≡)는 7월, 관(觀:◎)은 8월, 박(剝:□)은 9월, 곤(坤:¢)은 10월이 된다. 복괘에서 1양(陽)이 생기고 건괘에 6양이 되어 양의 전성(全盛)을 이루니, 복괘에서 건괘까지 6괘를 식괘(息卦), 구괘에서 1음(陰)이 생기고 곤괘에 이르러 6음이 되어서 음의 전성을 이룬다. 구괘에서 곤괘까지의6괘를 소괘(消卦)라고 한다.
소식괘의 순환(循環)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12소식괘의 72효를 다시 1년의 72절후(節候)에 맞춘다. 이와 같이 괘를 기후에 결부시키는 것은 천인일체(天人一體)의 사상에 근거를 두어 만들어진 것으로, 한대(漢代) 역학(易學)의 주류(主流)를 이룬다.
24절기란, 15일마다 절기가 바뀌어서 1달에 2절기, 1년에 24절기를 이루는 것이니, 봄의 입춘(立春)·우수(雨水)·경칩(驚蟄)·춘분(春分)·청명(淸明)·곡우(穀雨), 여름의 입하(立夏)·소만(小滿)·망종(芒種)·하지(夏至)·소서(小暑)·대서(大暑), 가을의 입추(立秋)·처서(處暑)·백로(白露)·추분(秋分)·한로(寒露)·상강(霜降), 겨울의 입동(立冬)·소설(小雪)·대설(大雪)·동지(冬至)·소한(小寒)·대한(大寒)이다.
72절후란, 자연현상의 변화를근거로 하여 5일마다 절후가 바뀌어서 1달에 6절후, 1년에 72절후를 이루는 것이니,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명칭이 보인다. 24절기는 오늘날에도 농촌에서 농사일에 참고가 된다.
괘사 [卦辭]
점괘(占卦)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풀어 놓은 글.
원래 점괘는 뜻이 어려우므로 그 내용을 해설하여 글로 써서 점보러 온 사람에게 준다.
괘상 [卦象]
중국의 철학서 《주역(周易)》의 골자를 이루는 64괘의 형상.
괘상은 음양(陰陽)에 의하여 형성되며, 4상(四像)에서 8괘로, 8괘에서 64괘로 발전하였다.
교감학 [校勘學]
경전(經典)의 문장 ·문자 등의 오기(誤記) ·오전(誤傳) 등을 다른 책과 대조하여 바로잡으려는 고증학(考證學)의 한 분과.
이와 관련된 직종으로 고려시대에는 임금에게 학문을 강(講)하던 청연각(淸燕閣), 왕실도서관인 어서원(御書院) ·비서성(秘書省) ·보문각(寶文閣)의 문첩소(文牒所), 제찬(制撰) ·사명(詞命)을 맡아보던 예문관(藝文館)에 9품관의 교감(校勘)을 두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보던 승문원(承文院)에 종4품의 교감을 두어 맡아보게 하였다.
구괘 [ 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건괘(乾卦:≤)와 손괘(巽卦:∴)가 겹쳐 ∋의 상형을 이루는 괘. 하늘 아래 바람이 있음을 상징하며, 소식괘(消息卦)에 속하여 만난다는 뜻이 있다. 괘사(卦辭)는 “1음(陰)이 5양(陽)을 만난다” 하여 “한 여자가 다섯 남자를 상대한다”라고 풀이한다.
구궁 [九宮]
《낙서(洛書)》에서 발전한 방위(方位)의 자리.
낙서에 응한 일백(一白) ·이흑(二黑) ·삼벽(三碧) ·사록(四綠) ·오황(五黃) ·육백(六白) ·칠적(七赤) ·팔백(八白) ·구자(九紫)의 구성(九星)에 중궁(中宮)과 건(乾) ·감(坎) ·간(艮) ·진(震) ·손(巽) ·이(離) ·곤(坤) ·태(兌)의 8괘를, 휴(休) ·사(死) ·상(傷) ·두(杜) ·개(開) ·경(驚) ·생(生) ·경(景)의 팔문(八門)에 배합을 하여, 그 운행하는 9방위의 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안장(安葬)할 경우 장혈(葬穴)의 깊고 얕음을 볼 때는 8문 대신에 탐랑(貪狼) ·무곡(武曲) ·파군(破軍) ·거문(巨門) ·우필(右弼) ·문곡(文曲) ·좌보(左輔) ·염정(廉貞) ·녹존(祿存)의 구성(九星)을 붙인다.
방소(方所)를 보는 데는 낙서의 수에 천록(天祿) ·안손(眼損) ·식신(食神) ·징파(徵破) ·귀(鬼) ·합식(合食) ·진귀(進鬼) ·관인(官印) ·퇴식(退食)의 이름을 붙인다.
구성 [九星]
9개의 별에 의한 운명판단.
고대 중국의 음양가(陰陽家:천문 ·점술 등을 연구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구성이란 일백(一白) ·이흑(二黑) ·삼벽(三碧) ·사록(四綠) ·오황(五黃) ·육백(六白) ·칠적(七赤) ·팔백(八白) ·구자(九紫)의 9개의 별인데, 이것을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오행(五行)과 10간(干) 12지(支)에 배당해서 별마다 주인이 되는 해가 있게 하였다. 예를 들면, 삼벽의 해에 태어난 사람은 삼벽의 지배하에서 일정한 성질과 운세(運勢)를 타고나게 되니, 그 해를 보아서 그 사람의 운세와 방위의 길흉(吉凶)을 점친다.
구성을 팔괘(八卦)에 배당해서 그 본궁(本宮)을 정하였다. 예를 들면, 일백은 수성(水星)이 되어 북방을 본궁으로 하고, 이흑은 토성(土星)이 되어 남서방을 본궁으로 하며, 삼벽은 목성(木星)이 되어 동방을 본궁으로 하는 것 따위이다. 구성은 해마다 역행(逆行)하여 중앙의 별이 이동하고 교체한다. 어떤 사람의 별이 중앙에 자리잡았을 때, 이것을 본명성(本命星)이라고 하며, 이 해에는 팔방이 적살(的殺:흉한 방위)이 된다. 별이 남방에 있을 경우에는 북방을 적살로 보아서 삼가야 한다. 어떤 별이 중앙의 중궁(中宮)에 자리잡았을 때 다른 인접한 별이 대신 그 본궁을 차지한 것을 암검살방(暗劍殺方)이라고 하여 매우 흉한 방위로 보는 것 등이 있다. 구성으로서, 탐랑(貪狼) ·신문(臣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 ·좌보(左輔) ·우필(右弼)을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원리(原理)에서는 대체로 마찬가지이다.
【유래】 고대 중국에서는 별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다. 별은 부족(部族)의 수호신(守護神)이 되기도 하고, 왕자(王者)의 조상신(祖上神), 또는 유명한 인물의 신령(神靈)으로 숭배되어 왔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여러 나라에서는 각각 그 분야의 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별에 대한 제사는 천하의 통치자인 천자만이 거행할 수 있었다. 후에 와서 유가(儒家)의 합리주의적(合理主義的)인 성격에서 단순히 의례적(儀禮的)인 행사로 취급되었지만, 민간신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후한(後漢) 초기의 이지적(理智的)인 학자 왕충(王充)까지도 그의 저서인 《논형(論衡)》에서 모든 사람은 여러 별의 정기를 타고났으며, 그 별의 지위에 따라 신분 ·빈부(貧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전한(前漢) 말기에 유행된 위서(緯書: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글)에는 민간신앙이 다분히 포함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역위건착도(易緯乾鑿度)》라는 책 속에 ‘태일구궁법(太一九宮法)’이 나와 있다. 이것은 팔괘(八卦)를 그 방위대로 배열(配列)하고 거기에다 1에서 9까지의 수를 맞추어 놓았는데 사방의 합계가 꼭 들어맞으며, 북극성(北極星)의 신(神)인 태일(太一)이 차례로 구궁(九宮)을 돈다고 하였다. 신비수(神秘數)의 개념(槪念)과 천문의 지식을 결부시킨 것으로서 구성의 수의 배열이 이것과 일치된다. 구성은 중국 수나라 때에 태일구궁법을 인용하고 거기에다 오행설(五行說)과 잡점(雜占)의 법술(法術)을 혼합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구자 [九紫]
구성(九星) 중의 하나로 음양가(陰陽家)가 화성(火星)을 이르는 말.
9성에서는 방위(方位)를 괘효(卦爻)에 배치하여 택일(擇日) ·풍수(風水)의 점을 치는데, 방위에서는 남쪽인 이방(離方)이며, 팔문(八門)에서는 길하다는 경문(景門)에 해당된다.
국 [局]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말하는 이른바 '혈(穴)'과 '사(砂)'가 합하여 이룬 자리.
혈은 음택(陰宅)인 경우에 관(棺)이 들어갈 자리, 즉 무덤이 되고, 양택(陽宅)인 경우에는 집의 가장 중심자리가 된다.
또한 사는 혈의 둘레의 형세를 말하는데, 혈 후면에서 반월형(半月形)으로 둘러싼 언덕진 부분에 해당된다.
따라서 국은 풍수의 가장 중심부분이 된다. 풍수에서는 전체적인균형도 중요하지만 특히 국이 완전무결해야 한다. 풍수지리에서 국은내룡(來龍), 즉 종산(宗山)에서 뻗은 생기(生氣)가 가장 왕성한 부분이 된다.
군자 [君子]
유덕자(有德者: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와 유위자(有位者: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를 이르는 말.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많이 써 온 말이며, 유위자를 군자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학덕이 있는 훌륭한 사람이 벼슬을 얻어 정치하는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군자불입위방(君子不入危方)',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지교담약수(君子之交淡若水)' 등의 표현은 군자의 몸가짐이 어떠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고결함과 청결함이 군자와 같다 하여 대나무를 군자라 하고, 연꽃과 국화를 군자의 꽃이라고도 한다. 또 매화·난초·국화·대를 사군자(四君子)라 일컫는다.
궁리학 [窮理學]
중국 송(宋)나라의 거유(巨儒) 정이가 제창하고 주희(朱熹)가 완성시킨 학문의 방법.
사물의 하나하나의 도리를 밝히고 여기에 일관하는 천리(天理)를 구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주학(程朱學)에서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같다.
한국 학자들은 물론 일본에서도 에도[江戶]시대부터 메이지[明治]시대에 걸쳐 많은 학자들이 이 학문에 대한 해석을 하였으며, 궁리학의 본질을 오늘날의물리학에 견주기도 한다.
궁합 [宮合]
혼인 때 신랑 신부의 사주(四柱)를 오행(五行)에맞추어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 방법.
사주와 오행에 살(煞)이 있으면 불길하다고 하여 예부터 혼사에는 궁합을 반드시 보는 풍습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유풍이 남아 있다. 점문(占文)의 내용은, 술서(術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나 일반적으로 쓰는 궁합풀이는 다음과 같다. 남토여토(男土女土)면 유자부귀(有子富貴) ·개화만지(開花滿枝), 남토여수(男土女水)면 부귀장수(富貴長壽) ·음주비가(飮酒悲歌), 남토여목(男土女木)이면 단명반흉(短命半凶) ·고목봉추(枯木逢秋), 남토여화(男土女火)면 장명부귀(長命富貴) ·어변성룡(魚變成龍), 남토여금(男土女金)이면 의식풍족(衣食豊足) ·조변성응(鳥變成鷹), 남목여목(男木女木)이면 반길반흉(半吉半凶) ·교변위룡(蛟變爲龍), 남목여금(男木女金)이면 빈곤대흉(貧困大凶) ·와우부초(臥牛負草), 남목여수(男木女水)면 다자부귀(多子富貴) ·조변성응(鳥變成鷹), 남목여화(男木女火)면 재록자손(財祿子孫) ·삼하봉선(三夏逢扇), 남목여토(男木女土)면 질병사망(疾病死亡) ·입동재의(入冬裁衣), 남화여화(男火女火)면 사망대흉(死亡大凶) ·용변위어(龍變爲魚), 남화여수(男火女水)면 생리사별(生離死別) ·노각도교(老脚渡橋), 남화여토(男火女土)면 천록장명(天祿長命) ·인변성선(人變成仙), 남화여금(男火女金)이면 무자반흉(無子半凶) ·용실명주(龍失明珠), 남화여목(男火女木)이면 복록자손(福祿子孫) ·조변성학(鳥變成鶴), 남수여수(男水女水)이면 빈고대흉(貧苦大凶) ·병마봉침(病馬逢針), 남수여토(男水女土)면 장명의식(長命衣食) ·만물봉상(萬物逢霜), 남수여목(男水女木)이면 득관재록(得官財祿) ·교변위룡(蛟變爲龍), 남수여화(男水女火)면 의식관명(衣食官命) ·화락봉서(花落逢暑), 남수여금(男水女金)이면 사사대길(事事大吉) ·삼객봉제(三客逢弟), 남금여금(男金女金)이면 무자무의(無子無依) ·용변위어(龍變爲魚), 남금여수(男金女水)면 빈고차흉(貧苦且凶) ·사마득타(駟馬得馱), 남금여화(男金女火)면 자손충효(子孫忠孝) ·수마중타(瘦馬重馱), 남금여목(男金女木)이면 반흉반희(半凶半喜) ·유어실수(遊魚失水)이다.
위에 열거한 궁합풀이를 보기 위한 60갑자(甲子) 및 납음법(納音法)은, 갑자 ·을축(甲子 ·乙丑)은 해중금(海中金), 병인 ·정묘(丙寅 ·丁卯)는 노중화(爐中火), 무진 ·기사(戊辰 ·己巳)는 대림목(大林木), 경오 ·신미(庚午 ·辛未)는 노방토(路傍土), 임신 ·계유(壬申 ·癸酉)는 검봉금(劍鋒金), 갑술 ·을해(甲戌 ·乙亥)는 산두화(山頭火), 병자 ·정축(丙子 ·丁丑)은 간하수(澗下水), 무인 ·기묘(戊寅 ·己卯)는 성두토(城頭土), 경진 ·신사(庚辰 ·辛巳)는 백랍금(白蠟金), 임오 ·계미(壬午 ·癸未)는 양류목(楊柳木), 갑신 ·을유(甲申 ·乙酉)는 천중수(泉中水), 병술 ·정해(丙戌 ·丁亥)는 옥상토(屋上土), 무자 ·기축(戊子 ·己丑)은 벽력화(霹靂火), 경인 ·신묘(庚寅 ·辛卯)는 송백목(松栢木), 임진 ·계사(壬辰 ·癸巳)는 장류수(長流水), 갑오 ·을미(甲午 ·乙未)는 사중금(沙中金), 병신 ·정유(丙申 ·丁酉)는 산하화(山下火), 무술 ·기해(戊戌 ·己亥)는 평지목(平地木), 경자 ·신축(庚子 ·辛丑)은 벽상토(壁上土), 임인 ·계묘(壬寅 ·癸卯)는 금박금(金箔金), 갑진 ·을사(甲辰 ·乙巳)는 복등화(覆燈火), 병오 ·정미(丙午 ·丁未)는 천하수(天河水), 무신 ·기유(戊申 ·己酉)는 대역토(大驛土), 경술 ·신해(庚戌 ·辛亥)는 차천금(鑄釧金), 임자 ·계축(壬子 ·癸丑)은 상자목(桑綾木), 갑인 ·을묘(甲寅 ·乙卯)는 대계수(大溪水), 병진 ·정사(丙辰 ·丁巳)는 사중토(沙中土), 무오 ·기미(戊午 ·己未)는 천상화(天上火), 경신 ·신유(庚申 ·辛酉)는 석류목(石榴木), 임술 ·계해(壬戌 ·癸亥)는 대해수(大海水) 등과 같다.
귀문 [鬼門]
귀성(鬼星)이 있다는 방위.
귀방(鬼方)이라고도 한다. 점술가(占術家)들이 귀신이 드나든다 하여 매사에 꺼리는 방위로서, 동북방을 가리킨다.
규괘 [ 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못[池] 위에 붙어 있음을 상징하며 이괘(離卦:∞), 태괘(兌卦:○)가 겹쳐 ∽의 상형을 이루는 괘를 의미한다. 괘사(卦辭)는 '작은 일은 형통한다'고 되어 있다.
극기 [self-control, 克己]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로, 욕망과 정념(情念)을 누르고 이상과 목적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는 일.
윤리학(倫理學)에서는 셀프컨트롤(자기 제어)로 번역하고 있다.
극기는 어느 경우나 덕(德)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상의 방법이며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에서 볼 수 있다.
즉, 욕망을 누르고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입장과 욕망을 누른다는 것 자체가 이상이 되는 소극적인 입장이 그것이다. 전자는 용기·정진(精進)과 같은 덕이 되고, 후자는 절제(節制)·평정(平靜)과 같은 덕과 연결된다.
금 [金]
우주 만물을 생성한다는 오행의 추(秋) ·서(西)에 해당되는 원기(元氣).
오행설에 있어 여러 가지 사물(事物)에 적용하는 금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① 오행이 서로 이기는 이치[五行相剋]로는 목(木)에 이기고[金剋木], 화(火)에 진다[火剋金].
② 오행이 서로 순환해서 생(生)하여 주는 이치[五行相生]로는 금에서 수(水)가 생하고[金生水], 토에서 금이 생한다[土生金].
③ 오성(五星)에서는 금성(金星),
④ 오시(五時)에서는 추(秋),
⑤ 오방(五方)에서는 서(西),
⑥ 오색에서는 백(白),
⑦ 오성(五聲)에서는 상(商),
⑧ 오상(五常)에서는 의(義),
⑨ 오수(五數)에서는 구(九),
⑩ 오미(五味)에서는 신(辛),
⑪ 오제(五帝)에서는 백제(白帝),
⑫ 오정(五情)에서는 노(怒),
⑬ 오장(五臟)에서는 폐(肺)에 해당된다.
금극목 [金剋木]
오행(五行)의 운행에서 금은 목(木)을 이긴다는 말.
'극(剋)'으로는 금극목(金剋木)·목극토(木剋土)·토극수(土剋水)·수극화(水剋火)·화극금(火剋金) 등 5가지가 있다.
흔히 궁합을 볼 때에 극이 나오면 싫어하는 풍습이 있으며, 이 극의 반대로 '생(生)'이 나오면 길(吉)하다 하여 될 수 있는 한 극을 피하고 생을 취하여 왔다.
금문학 [今文學]
중국철학에서 고문학(古文學)의 반대개념의 용어.
금문은 한대(漢代)의 문자로,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제정한 예서(隸書)를 말한다. 따라서 금문학이란 이 금문으로 쓰인 문헌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뜻이다.
금고문학 [今古文學]
중국의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
한(漢)나라 때 사용된 글씨체인 예서(隸書)로 쓴 것을 금문이라 하고, 진(秦)나라 이전의 글씨체인 고주(古譜)로 쓴 것을 고문이라 한다. 양자는 글씨체가 다를 뿐이었으나 어느 계통의 텍스트로 학설을 세우느냐에 따라 학풍(學風)을 달리하였다.
금문학은 전한(前漢) 때 성행하였으며, 14박사(博士), 즉 《역(易)》은 시수(施讐) ·맹희(孟喜) ·양구하(梁丘賀) ·경방(京房)의 4가(家), 《시(詩)》는 노시(魯詩) ·제시(齊詩) ·한시(韓詩)의 3가, 《서(書)》는 구양생(歐陽生) ·대하후(大夏侯) ·소하후(小夏侯)의 3가, 《예(禮)》는 대대(大戴) ·소대(小戴)의 2가, 《춘추(春秋)》는 공양(公羊)의 엄팽조(嚴彭祖) ·안안락(顔安樂)의 2가가 학관(學官:漢代 이후의 대학강좌)으로 세워졌다.
전한 말(前漢末)의 평제(平帝) 때에는 유흠(劉歆)이 고문학을 학관으로 세울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고문상서(古文尙書)》 《모시(毛詩)》 《일례(逸禮)》 《좌씨춘추(左氏春秋)》가 학관으로 세워졌으며, 또 왕망(王莽) 때에는 《주례(周禮)》도 세워져서 고문학이 진출하였다. 금문학은 사설(師說)을 잘 지키고,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참위설(讖緯說) 등을 내세웠는데, 이에 비해서 고문학은 훈고학(訓뭍學)적인 실증(實證)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후한(後漢) 때에이르러 양자간의 논쟁이 활발해졌으며, 장제(章帝) 때(79)에는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의 동이(同異)’가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마융(馬融) ·정현(鄭玄) 등이 양학을 고문학 중심으로 겸수절충(兼修折衷)하였다. 동진(東晋)의 원제(元帝) 때 금문학은 완전히 없어지고 고문학만이 성행하였는데, 청나라 때의 도광제(道光帝)와 함풍제(咸豊帝) 이후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중심으로 한 금문학이 다시 일어나, 장존여(莊存與) ·유봉록(劉逢祿) ·공자진(벅自珍)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담사동(譚嗣同)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캉유웨이는 이 금문학의 대가였다.
금박금 [金箔金]
육십갑자(六十甲子)의 30 병납음(竝納音) 중 20번째.
임인(壬寅)과 계묘(癸卯)의 납음으로서, 주로 점을 치는 데 쓴다.
금성 [金姓]
오행(五行)의 하나인 금(金)에 해당하는 성(姓).
김(金)·한(韓)·황(黃)·안(安)·강(康)·유(柳)·장(張)·백(白)·신(申)·서(徐)·배(裴)·왕(王)·용(龍)·방(方)·성(成)·온(溫)·문(文)·경(慶)·남(南)·양(楊)·유(兪)·노(盧)·원(元)·채(蔡)를 말한다.
기 [氣]
만물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물질의 근원 및 본질.
중국철학 용어로 모든 존재현상은 기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 및 생명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는 호흡을 하는 숨[息], 공기가 움직이는 바람[風]을 뜻하는 가벼운 의미에서 시작하였으나 도가(道家)인 노자 ·장자가 우주의 생성 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뜻을 가지는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한(漢)시대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기의 이론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우주 자연의 운행 천문 지리, 그리고 양생(養生) 의학 및 길흉 화복과 관련되는 일상생활에까지 기를 적용하여 모든 것을 설명해 나갔다.
송(宋)대에 와서는 유가(儒家)에서 이(理)의 존재를 생각하게 됨으로써 그 이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기를 다루어 나간다. 모든 존재의 원인 또는 이치로서 형이상(形而上)의 보편자를 이라 하였고, 기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현상으로 생각하여 이기(理氣)철학의 중요개념으로 다루었다.
이 이기철학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주요 심성론(心性論)으로 전개되는데, 도덕적 근거가 되는 선악(善惡)의 문제를 마음속의 성정(性情)에서 찾고 있어 이와 기를 주로 가치론적으로 다루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사칠(四七)논변과인물성논쟁(人物性論爭)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성(性)을 이, 정(情)을 기로 보는 데 그치고 있으나 한국철학에서는 성론(性論)을 다시 이기문제로, 그리고 정론(情論) 또한 이기와 관련하여 문제삼으면서 선악 및 모든 가치(도덕적 가치)의 근거를 마련하려는데서 이와 기를 가치론적으로 보려는 특색이 있다.
이는 선(善)의 근거, 그리고 기는 악(惡)의 근거로 삼았다고 하겠으나 이는 언제나 선한 존재요 기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선과 악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도 하여 어려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의 선도 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므로 선과 악이 모두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것은 기라고 보고 가장 실질적인 요소로 문제삼는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것에서 진리를 찾아 들어가는 조선 후기의 실학(實學)은 바로 이 기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것이다.
그 밖에 한국에서 가지는 일반적인 기의 의미는 “이 산세(山勢)는 기가 세다”라고 할 때와 같은 형세 ·기운 ·조짐, 그리고 양생(養生)과 관련하여 신체상의 생명력 ·힘 ·정기 및 생체에너지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기문둔갑 [奇門遁甲]
음양의 변화에 따라 몸을 숨기고 길흉을 택하는 용병술(用兵術).
병법 술수의 하나로, 하도(河圖:주역 팔괘의 근본이 되는 55개점의 점)·낙서(洛書:중국 우왕 때 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있었던 9개의 무늬)의 수(數) 배열원리 및 이를 이용한 《주역》 건착도(乾鑿度)의 구궁(九宮)의 법이 그 원형이다. 둔갑술(遁甲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도·낙서는 원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적용한 것으로 수의 배열은 음수와 양수로 되어 있고, 포진법(布陣法)은 동서남북 및 중앙으로 되어 있어서 음양의 화합과 오행의 상생을 이루도록 만들어져 있다. 후대에는 이런 간단한 원리에 많은 이론을 첨가하여 복잡한 은신술(隱身術)로 변형되었다.
기문둔갑의 시작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따르면 헌원황제(軒轅皇帝)가 치우천왕(蚩尤天王)과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을때 우연히 꿈에 천신(天神)에게서 부결(符訣)을 받았고, 이를 풍후(風后)가 명을 받아 문자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와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더욱 발전시켜 병법에 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당(唐)나라 태종 때 이정(李靖)이 기문둔갑을 병법과 정치에 활용하여 당나라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이것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금서(禁書)로 정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조(金庾信條)에 따르면 김유신의 고손(高孫)인 암(巖)이 당나라에 유학가서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터득한 뒤 이를 응용한 육진법(六陣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제괘 [旣濟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겹쳐 牌의 상형을 이룬 것으로, 불 위에 물이 있음을 상징하는 괘. 괘사(卦辭)에 ‘조금 형통한다. 처음에는 길하지만 나중에는 어지럽다’고 되어 있다.
기품 [氣稟]
사람의 ‘천성’에 관한 중국 사상의 특유한 견해.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사람은 누구나 천지의 기(氣)를 받고[稟] 태어나는데, 수명의 장단, 행운과 불행, 어질고 어리석음은 타고난 기가 강한가 약한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하였다. 송(宋)나라의 주자(朱子)처럼, 사람의본성을 절대선(絶對善), 즉 ‘이(理)’에서 구하는 보다 깊은 사고방식에서도, 개개의 성질이나 재능의 설명에는 역시 ‘기’를 인용하였다.
남좌여우 [男左女右]
음양설(陰陽說)에서, 남자는 왼쪽이 소중하고 여자는 오른쪽이 소중하다는 말.
음양설에서, 왼쪽이 양이고 오른쪽을 음이라 하였다. 따라서 사람에게도 이것이 적용되어, 남자는 왼쪽이 소중하고 여자는 오른쪽이 소중하다고 하였다. 또한맥이나 손금, 자리 같은 것을 볼 때에도 남자는 왼쪽을, 여자는 오른쪽을 취하였다.
내룡 [來龍]
내맥(內脈).
풍수지리학에서 쓰는 말로, 종산(宗山)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뜻한다.
흔히 묘(墓)의 뒷산을 두고 이르는데, 이와 같은 형세의 묘터는 용맥(龍脈)의 정기가 모인 자리라고 하여 최고의 묏자리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명당이다.
네오오리엔탈리즘 [Neo Orientalism]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선(禪)·요가(yoga), 크리슈나 숭배운동 등에 의한 탄트리즘(Tantrism)·도교(道敎)·역경(易經) 등 동양에서 기원된 종교나 사상에 대한 관심 및 이것들을 바탕으로 한 실천운동의 총칭.
‘네오(새로운)’라는 말을 붙인 것은, 19세기에 이미 R.W.에머슨과 H.D.소로 등의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들에게 영향을 끼친 동양사상(東洋思想)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소수의 지식인들에게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1960년대에 확산된 동양의 제 사상과 제 종교는 몇 백만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었다.
이 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의 다수가 중산계급(中産階級)의 백인 출신 청년들이다. 1960년대에 학원쇄신과 사회참여를 부르짖어 온 미국을 뒤흔든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 인종평등 ·군비철폐 ·불간섭주의를 제창한 ‘신좌익(新左翼: New Left)’의 좌절을 체험한 청년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하는 거점을 이러한 사상이나 종교에서 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각 종파(宗派)는 그 모체인 동양종교(東洋宗敎)와는 다른, 이른바 ‘미국판’이 되었다. 청년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것으로는 새로운 체험, 타인과의 만남, 권위에의 욕구 등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자아(自我)의 멸각(滅却)을 주장하는 불교를 단순히 이기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양종교 이외에도 예수 프리크(Jesus freak)나 신(新)펜테코스테(Pentecoste) 등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시(異端視)된 조류(潮流), 예컨대 해방신학(解放神學)과 같은 기성교회에서의 혁신, 또 사이엔톨로지(scientology)와 같은 현대과학에 기초한 조류, R.슈타이너와 G.I.구르지예프의 신비주의에서부터 점성술(占星術) 등의 오컬티즘(Occultism)의 유행에 이르기까지 1960년대에는 광범위한 종교부흥의 기운이 세차게 일어났다.
서유럽 정신의 중심의 하나인 신(神), 자아와 자연의 분절화(分節化)를 부정하고, 이것들의 융합을 지향하는 이 운동이야말로 현대문명에의 커다란 도전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노복궁 [奴僕宮]
종복(從僕)을 가리는 점복(占卜)의 성좌(星座).
사람의 사주(四柱: 生年 ·月 ·日 ·時)에 의해서 배정된 12성좌 중의 하나이다. 명궁(命宮) ·형제궁(兄弟宮) ·처궁(妻宮) ·자궁(子宮) ·재백궁(財帛宮) ·질액궁(疾厄宮) ·천이궁(遷移宮)·관궁(官宮) ·전택궁(田宅宮) ·복덕궁(福德宮) ·부모궁(父母宮)의 성좌 중에서, 노복궁은 종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에 대한 것을 점치는 기본 자리이다.
노중화 [爐中火]
육십갑자에서 병인(丙寅) ·정묘(丁卯)의 납음(納音).
오행법(五行法)으로 보아 병인생(丙寅生)과 정묘생(丁卯生)은 화(火)가 되기 때문에 혼인에 있어 상생(相生) ·상극법(相克法)으로 궁합을 본다. 화는 목(木)이나 토(土)와의 결합을 이상(理想)으로 한다.
니티 [N砲 ti]
산스크리트로 인도(引導)한다는 말.
산스크리트로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이 원뜻으로부터 행위, 또는 정책·처세술·도덕·윤리에 관한 학문을가리키게 되었고, 때로는 정치학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담일청허지기 [湛一淸虛之氣]
성리학 이기론(理氣論)에서 기의 근원성을 가리키는 말.
‘담(湛)’은 ‘맑고 깊음’을 뜻하고 ‘일(一)’은 ‘오로지 하나, 근원적 통일성’을 뜻하며 ‘담일청허지기’는 ‘맑고 깊으면서 비어 있는 듯 하나 존재의 근원이 되는 기’라는 뜻이다.
장재(張載) 주저 《정몽(正蒙)》에서 ‘태허(太虛)’라고 하는 무형(無形)의 것을 기의 본체라고 하고, 그 기는 항상 활발한 운동을 되풀이하는 본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태허 중의 만물은 ‘변형의 임시 모습’으로, 기가 모이면 모양이 생기고 흩어지면 소멸하는 것이 얼음의 물에 비유할 수 있는 것과 같아 ‘무(無)’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경덕(徐敬德)도 장재와 같이 기의 취산(聚散)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그의 제자 박순(朴淳)은 동일한 개념을 담일허명지기(湛一虛明之氣)라 하여 기의 ‘밝음’을 강조하고 본원적 기는 음양으로 표현한다면 음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이를 비판하고 현상의 역동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기를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유학사의 논란은 담일청허지기에 대하여도 그 해석이 복잡하고 다양하였다.
대과괘 [大過卦]
육십사괘 중 28번째 괘.
육십사괘 중 태(兌)가 상(上)에 있고 손(巽)이 하(下)에 있는 괘로서 택풍대과(澤風大過)라고도 한다. 원문에 따르면 동요(棟撓)라, 이유유왕(利有攸往)이니 형(亨)하니라. 큰 것이 너무 지나침을 의미하며 기둥이 휘어지는 것은 근본과 말초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강함이 많지만 중용을 지키고 유순하고 기쁘게 행동하며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크게 발전하고 형통할 수 있다.
1효(爻)는 자리를 까는 데 흰띠풀을 사용하니 허물이 없느니라. 사물의 근본을 경건하게 정돈하고 정중한 마음으로 행동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2효는 마른 버드나무에 싹이 돋아나니 늙은 홀아비가 아내를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니 늦은 감이 있어도 신속하게 대처를 하면 이롭다. 3효는 대들보가 휘니 흉하니라. 아주 힘든 상황에 놓여 어떠한 대처도 늦은 시점이다.
4효는 대들보가 우뚝 서서 길하나 다른 마음을 품으면 곤경에 빠지게 된다. 이득을 여럿이 나누어야 하며 이기적인 사고나 행동은 어려움을 부른다. 5효는 마른 버드나무가 꽃을 피우고 늙은 할머니가 장부를 얻는 양상이다. 이득도 없고 명예도 없다. 외관상으로는 무난하나실질적인 이득은 없다.
6효는 지나치게 건너다가 이마를 다치니 흉하긴 하나 허물은 없으리라. 무리하여 움직이다가 다치게 되니 자신의 역량을 살펴보고 일을 도모해야 한다. 괘상으로 볼 때 불길한 상이긴 하나 이런 불길한 운을 넘기기 위하여 조심성 있게 기다리거나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싸워 극복할 수밖에 없으므로 난관에 대처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데 이 괘의 교훈이 있다.
대동세계 [大同世界]
중국 전국시대에서 한(漢)나라 초 사이에 유가학파(儒家學派)들이 주장한, 일종의 이상사회.
사람이 천지와 만물과 서로 융합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는 말이었는데, 유가학파들은 논리적 근거를 경서인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 둔다. 큰 도[大道]가 행해지고 어진 사람과 능력있는 자가 버려지지 않으며, 가족주의에얽매이지 않고, 노인은 자기의 생을 편히 마치고, 젊은이는 모두 일할 수 있으며, 노약자 ·병자 ·불쌍한 자들이 부양되며, 길에 재물이 떨어져도 줍지 않는 세상이 바로 대동세계라는 것이다.
이 대동사상은 청말에서 민국초에 이르는 정치가 ·사상가들, 홍수전(洪秀全) ·캉유웨이[康有爲]·담사동(譚嗣同) ·쑨원[孫文]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캉유웨이는 《대동서(大同書)》에서 대동사회를 방해하는 요인은 바로 이기심(利己心)이라고 보고 이기심을 타파하려면 먼저 가족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한국에서도 이익(李瀷)이 대동풍속을 이루려면 각자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고, 심정진(沈定鎭)은 《성본연대동설(性本然大同說)》에서 인간의 본성은 누구든지 다 갖고 있는 보편성이라고 주장했으며, 최한기(崔漢綺)는 구성원 개개인의 사회적인 자각이야말로 대동사회 구현의 필수요건이라 하였다.
명칭만 다를 뿐 이상사회를 나타내는 말로 ‘요순(堯舜)시대’ 요순지치라는 말이 유학자들에게 널리 쓰였다. 요순시대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임금을 통해서 실현하는 이른바 왕도정치관이었으므로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은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며, 조정의 경연석에서의 강의나 저서 ·상소를 통하여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운동은 좋은 예가 된다.
대역토
육십갑자에서 무신(戊申)과 기유(己酉)에 붙이는 납음(納音).
대유괘 [大有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이괘(離卦:∞)와 건괘(乾卦:≤)가 겹쳐서 §의 형상을 이루는 괘이다. 불이 하늘 위에 있음을 상징한다. 만물이 모두 돌아오고, 군주가 만백성을 거느린 형상이니, 괘사(卦辭)에는 크게 형통한다고 되어 있다.
대장괘 [大壯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에서 진괘(震卦:″)와 건괘(乾卦:≤)가 겹쳐서 〓의 형상(形象)을 이루는 괘이다. 우레가 하늘에 있음을 상징한다. 이 괘는 양(陽)이 성(盛)하는 상(象)으로서 소식괘(消息卦)이며, 만사형통의 괘이다.
대축괘 [大畜卦]
육십사괘 중 간괘와 건괘가 겹쳐서 이루는 괘.
육십사괘 중 간괘(艮卦:′)와 건괘(乾卦:≤)가 겹쳐 ▲의 형상을 이루는 괘를 말한다. 하늘이 산 가운데 있음을 상징한다. 괘사(卦辭)에 “집에서 먹지 않는 것이 좋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 하였으니, 크게 벼슬을 한다는 뜻이다.
대학 [大學]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통(正統)으로 나타내는 사서(四書) 중 중요한 경서(經書).
구분 : 경서(經書)
저자 : 공자
본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던 것을 송(宋)의 사마 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따로 떼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를 만들었다. 그 후 주자(朱子)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어 경(經) 1장(章), 전(傳) 10장으로 구별하여 주석(註釋)을 가하고 이를 존숭(尊崇)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졌다.
주자는, 경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기술(記述)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경에서는 명명덕(明明德: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지선(止至善: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하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八條目)으로 정리하여 유교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실천과정으로서는 8조목에 3강령이 포함되고, 격물 즉 사물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평천하의 궁극 목적과 연결된다는 것이 대학의 논리이다. 전은 경의 설명이라는 뜻이다.
주자는 본문에 착간(錯簡)과 오탈(誤脫)이 있다 하여 교정하고, 또 ‘격물’의 전을 보충하였다.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주자학을 비판하면서부터 주자의 《대학장구》, 특히 그 보전(補傳)은 유학자간의 논쟁(論爭)의 중심문제가 되었다. 왕양명은 대학고본(大學古本)에 의거하여 대학고본방석(大學古本旁釋)을 지었다.
덕치사상 [德治思想]
도덕에 의한 교화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는 동양 정치사상.
공맹학(孔孟學)의 중심사상인데, 맹자는 공자의 인(仁)에서 비롯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걸음 발전시켜 덕치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것은 한(漢)나라 이후의 중국을 비롯하여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 각국에서 치자(治者)의 으뜸 정치사상이 되어 왔다.
덕치사상은 치자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심성이 착하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이 점에서 전국시대 말기의 군권강화사상(君權强化思想)에서 나온 순자(荀子)의 성악설과는 대비가 된다. 또 이것이 덕치사상이 패권사상과 상치되는 연유이기도 하며, 동양정치사상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는 기본개념이 되고 있다.
덕치사상은 맹자의 왕도론에서 구체화되었는데, 맹자는 인간본성(성선설)에 바탕을 둔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실천하는 치자의 덕치를 주장하였다. 사욕에 의한 강권지배를 배격하며, 치자의 지위는 민심의 향배에 따르는 것이라는 민본주의적 혁명시인론(革命是認論)을 전제로 하였다. 또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일상생활을 보장해 주면서 백성을 장악하는 정전법(井田法), 신분계층적인 분업설, 유가(儒家) 본래의 이념인 예질서(禮秩序)를 유지하기 위한 효제적(孝悌的) 교육론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봉건시대가 끝난 현대에 와서도 유교권 여러 나라 사람들의 정치적 관념 속에 잠재해 있어 선거 때 입후보자의 평가나 외교문제에 대한 일반 논평 등에서 나타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도 [道]
동양의 도덕이나 예술에서 그 중심을 흐르는 것으로 생각되어온 가장 근원적인 원리·원칙.
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부도덕(不道德)이며, 예술작품으로서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였다. 본래 사람이 걷는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이 글자가 추상적인 의미로 바뀌어 인간의 행위에 꼭 따라야 할 기준과 원칙의 의미로 되었다. 도덕적으로는 유교(儒敎), 예술적으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그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어느 경우나 도는 우주 인생을 가로질러 세계 속의 만물을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유교의 정통사상에서는 천명(天命)인 인간의 선(善), 즉 본성에 따라 인의(仁義) 등의 덕목(德目)을 실천하는 것이 도의 실현이라 하였다. 인간도덕으로서의 ‘인도(人道)’를 밟고 행하는 것이 그대로 ‘천도(天道)’의 실현이 된다고 생각하는 데에 유교도덕의 도덕으로서의 깊이가 있다.
그러나 노장(老莊)에서는 ‘사람’의 입장을 버리고 형상의 밑바닥에 숨는 것으로 생각한 자연의 ‘도’에 합일하는 것이 이상(理想)이라 하였다. 그 길은 만물을 만들어 내는 모체(母體)로서의 실재임과 동시에 잡다한 현상을 가로질러 만물을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법칙이기도 하였다. 세계의진리는 거기에 있고 현상은 이 도의 발현으로서 뜻이 있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은 이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현실의 피상적인 차별이나 변화를 떠나 절대불변의 입장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게 되고 예술의 세계는 거기서부터 열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훌륭한 예술작품도 이 도의 구현으로서 비로소 태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참사상 [圖讖思想]
예언을 믿는 사상.
도참은 세운(世運)과 인사(人事)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며 은어(隱語)를 많이 사용한다. 중국 고대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허강[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하도(河圖)의 도(圖)와 참(讖)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로 보이며, 참위(讖緯)라는 말보다 먼저 생겼다. 중국 주(周)나라 말기, 천하가 오래도록 혼란에 빠지게 되자,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渴求)하며 살길을 찾아 방황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의 욕구에 호응하여 일어난 것이 도참사상이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부서설(符瑞說)·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등을 혼합하여 천변지이(天變地異)를 현묘(玄妙)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기(史記)》 <노자전(老子傳)>에, 주(周)나라 태사(太史) 담(앍)이 진(秦)나라의 헌공(獻公)을 만난 자리에서 도참을 진언(進言)하기를 “진나라가 처음에 주나라와 합치고, 합쳤다가 떨어졌는데, 500년 후에 다시 합치게 되고 그 때부터 17년이 경과하면 패왕(覇王)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것이 도참설의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그 예언이 적중하여 진나라의 소왕(昭王)이 주나라를 멸하고 그로부터 17년 후에 시황제(始皇帝)가 6국을 통일하여 패업(覇業)을 성취하였다.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도사(道士)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도참을 진언하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입니다”라고 했다. 진나라 시황은 그 말을 믿고 군사를 보내어 흉노족(匈奴族)을 격파하고 북쪽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그러나 실지로 진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시황의 작은 아들 호해(胡亥)의 학정(虐政)이었다.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득세했을 때, 우물 속에서 꺼낸 흰 돌에 “안한공 망에게 알린다. 황제가 되리라(告安漢公莽爲皇帝)”는 8글자가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왕망은 이것을 근거로 야심(野心)을 성취하였고, 그 후부터 제왕(帝王)이나 제왕이 되고자 하는 자가 이것을 많이 모방했다. 도참의 폐해(弊害)가 커졌기 때문에 위(魏)나라의 고조(高祖), 수(隋)나라의 문제(文帝), 송(宋)나라의 태조(太祖), 원(元)나라의 세조(世祖) 등이 모두 이를 금하였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도참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보면, 660년(의자왕 20)에 귀신 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라고 연거푸 외치고 나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자리를 파게 하니, 길이 90cm쯤 들어가서 거북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는 참언(讖言)의 구절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참설이 구체화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도선국사(道詵國師) 때부터이다.
고려의 건국과 관련된 도참설로는 《삼국사기》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 최치원이 지은 “계림은 누른 잎이고 송악은 푸른 소나무(鷄林黃葉 松嶽靑松)”란 참언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현종(顯宗)은 조상의 건국사업을 은밀히 도왔다고 하여, 동왕 11년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증직(贈職)하고, 13년에는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 또 《고려사》 <태조세가(太祖世家)>에도 철원(鐵圓:태봉의 도읍)의 고경참(古鏡讖)이나온다. 그것은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철원에서 이상한 노인에게 거울을 사서 벽에 걸었더니 햇빛에 비치어 147자(字)의 참문(讖文)이 보였는데,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이 참문은 고려 일대(一代)를 두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그의 <훈요10조(訓要十條)>에서 이것을 강조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중 신돈(辛旽)이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송도기쇠설(松都氣衰說)>을 이용하여 충주로 천도(遷都)하기를 주청(奏請)하기도 하였다. 현재 민간에 돌아다니는 유일한 비기(秘記)로 풍수(風水)와 도참을 결부시켜 새 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정감록(鄭鑑錄)》이 있는데,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나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과거에는 《정감록》에 현혹되어 10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
도화살 [桃花煞]
동양의 점술학 용어.
사람이나 물건을 해치는 독하고 모진 기운을 살이라고 하며, 남자든 여자든 이 도화살이 끼면 과도하고 잘못된 성욕으로 재앙을 당하게 된다고 믿고 이를 꺼린다. 이 도화살이 낀 여인은 얼굴 한 부분이 홍조를 띤다는 속설이 있다. 이런 여자는 한 남자로는 음욕을 채우지 못하여 여러 번 개가하게 되며,이런 여자를 만난 남자는 몸이 쇠약하여 죽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주(四柱)에 도화살이 있는지 철저하게 따지는 풍습이 있었다.
따지는 법은 생년이나 생일에 12 간지(十二干支)의 신 ·자 ·진(申 ·子 ·辰)이 있으면 유(酉)가 든 사주가 도화살이며, 인 ·오 ·술(寅 ·午 ·戌)은 묘(卯)가, 사 ·유 ·축(巳 ·酉 ·丑)은 오(午)가, 해 ·묘 ·미(亥 ·卯 ·未)는 자(子)가 도화살이라 하여 이런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금기하였다.
또 신 ·자 ·진 중 어느 한 좌향에 쓴 묘가 있고 유방(酉方)으로부터 이 묘쪽으로 흘러드는 물길이 있었는데 그 묘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재앙이 자주 일어났다는 설화도 있다. 이것은 여기서 따지는 12지가 꼭 연 ·월 ·일 ·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된다.
동서문화논쟁 [東西文化論爭]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논의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우열에 관한 논쟁.
이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투쟁과도 결부된 것이었다. 청말(淸末)에는 중학(中學), 구학(舊學)과 서학(西學), 신학(新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신해혁명 후에 데모크라시와 사이언스를 표방하는 급진적 5 ·4문화혁명이 전개되었을 때,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어난 것이 ‘동서문화’ 논쟁이었다. 량치차오[梁啓超]의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1919)과 량슈밍[梁漱溟]의 《동서문화급기철학(東西文化及其哲學)》(1922)이 그 대표적 저술이었으며, 이들 저술에서는 중국의 정신문화, 특히 그 핵심을 이루는 유교사상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이어 이 논쟁은 1923년에 ‘과학과 인생관’의 논쟁으로 발전하였으며, 형이상학 대 과학, 유심론 대 유물론의 싸움으로 바뀌었는데, 그 후에도 중국본위(中國本位) 문화운동이나 신생활운동이 있을 때마다, 전통문화의 온존을 위한 주장이 계속되었다.
돈점
옛날 엽전(葉錢)으로 치던 점.
돈을 던져서 점친다 하여 척전법(擲錢法)이라고도 한다. 엽전이나 주화(鑄貨) 3개를 가지고 한쪽 면은 양(陽), 한쪽 면은 음(陰)으로 정한다. 1번 던져 1효(爻)를 얻으므로 6효를 얻으려면 6번 던져야 한다.
효는 《주역(周易)》에 보이는 점치는 기호(記號)인데, 양은 ―, 음은 --의 모양으로 각각 표시한다. 3효로 괘를 이루고, 2개의 괘를 겹쳐 중괘(重卦)가 되어서 6효가 성립되어야만 비로소 일의 길흉을 판단하게 된다. 1번에 주화 3개를 던져서 1양, 2음이면 효는 음--이 되고, 1음 2양이면 양 ―이 되며, 3양이면 양동음(陽動陰) ∥이 되고, 3음이면 음동양(陰動陽) ×가 된다. 양동음이란 양이 변하여 음이 되는 것이고, 음동양이란 음이 변하여 양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6효가 모두 동(動)이 되는 경우가 있고 1효의 동도 없는 경우가 있다.
동양사상 [東洋思想]
유럽대륙과 영미(英美)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사상에 대응하여 중국 ·동아시아 ·인도 등에서 가꾸어 온 사상을 이르는 말.
서양문물이 동양에 전해질 때 반대로 동양의 고전(古典)이 유럽에 소개되고, 특히 B.러셀 같은 철학자가 중국에 다녀간 후 자신의 철학사(哲學史)에 '웨스턴(western)'이라는 제한어(制限語)를 붙임으로써 간접적으로 동양사상의 고유성(固有性)과 독자성이 인정되어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근래에 동양사상이라고 할 때에는 인도사상을 제외하고 중국사상과 그 영향권 안에 있는 철학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1. 역사와 성격
1.1 중국사상
중국인들은 선진시대(先秦時代)부터 인문(人文) 중심의 가치철학(價値哲學:儒家)을 바탕으로 존재철학(存在哲學:道家)과 방법철학(方法哲學:墨家)의 세 전통을 형성하였다. 사회정치사상으로서의 법가(法家)와 논리학파(論理學派)로서의 명가(名家) 등은 이 전통 위에 서 있으며, 뒤에 전래된 인도의 불교도 여기에 용해되어 법화(法華) ·화엄(華嚴) ·선종(禪宗) 같은 중국불교로 변모하였다. 송(宋)나라 이후 이른바 신유학(新儒學:理學 ·心學)이나 고거학(考據學)들은 이 전통들을 유가(儒家)를 중심으로 일원화시켰던 새로운 창조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상의 일반적 특성은 ① 우주 및 자연과, 인간 및 만물(萬物)을 언제나 유기적 관계로 이해했다는 점이다(이른바 天人合一, 道卽萬物, 一而多, 理卽事 등이 좋은 예이다). ② 본체(本體)를 설명함에 있어 공간적 단위상(單位像)보다는 시간적 변화상(變化像)을 중시하였다. 즉, 본체의 존재론적 측면보다는 생성변화론적 측면에 관심을 두었다(一氣 즉 本體, 聚散 즉 變化運動으로 설명하는 일반적 방식이 좋은 예이다). ③ 인륜(人倫) 또는 인문과 도덕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을 그들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되 바람직한 관계형식을 심성(心性)과 연관시켜 정립하려 하였다(諸性論과 諸規範의 발달이 그 좋은 예이다). ④ 동양사상의 마지막 특징은 그 방법이 직관적(直觀的)이고 그 성격이 예술적이라는 점이다. 사유(思惟)의 단계적 과정이나 논리적 추론보다는 본질을 밝혀내어 깨닫는 것[覺]을 중요시하고, 사실의 과학적 세계보다 미적 경지(美的境地)를 지향하는 경향은 동양사상의 일반적 특성임에 틀림없다.
1.2 인도사상
인도사상의 역사는 자연계의 구성요소와 그 현상(現象)을 신격화하여 찬양하던 리그베다(Rgveda)의 종교시대로부터 우주의 창조원리인 브라만(Brahman)과 인격적 개체원리인 아트만(Atman)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논하는 우파니샤드(Upanisad)시대를 거쳐 불교시대 또는 육파(六派) 불교시대로 전개되어 나갔다. 결국 인도사상은 힌두교(Hinduism)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브라만교·불교·자이나교·시크교 등 인도에서 발생하고 전개된 종교·철학·문화를 총칭하는 그들의 정신적 결정체(結晶體)를 일컫는 말이다.
인도사상의 공통된 특징은 ① 철학과 종교, 생활과 사상이 합일되었다는 점, ② 진리탐구 또는 실천방법이 명상적(瞑想的:yoga 的)이라는 점, ③ 절대의 세계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부정적 방법(neti neti 法)을 즐겨 사용한다는 점 등이며, ④ 끝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절대·절대자의 성격이 합리적이고 법칙적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1.3 한국사상
한국인은 역사의 여명기 때부터 신시(神市)의 시민의식, 곧 선민의식(選民意識) 안에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인간애를 제창하였다. 그 뒤에는 중국사상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재창조하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민족의 주체적자각을 통하여 사상적 독립을 천명한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實學)과 '인내천(人乃天)'의 동학(東學) 종교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상은 ① 민족주의적이면서 호국사상(護國思想)의 특징을 나타냈고 ② 범신론적(汎神論的) 자연관을 가졌으며 ③ 온정적(溫情的)이고 예술적인 성격이 농후하였고 ④ 외부 사상의 수용태도에 있어 개방성과 보수성이라는 일견 모순적인 특징을 나타내었다.
2. 특징
동양사상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서양의 개인주의적이며 논리적 ·분석적 ·2원적(정신 ·물질)이고 진취적인 특성과의 대비(對比)에서, 전체주의적이며 직관적 ·종합적 ·정신주의적이고, 과거지향적 또는 정태적(靜態的)이라는 점이 곧잘 언급되었다. 그러나 온당한 동양사상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 수 있겠다.
① 예술적이고 정적(情的)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② 자연과 인간을 대립 ·대결의 투쟁 관계로 보지 않고 유기적 일원체로 이해하였다(이 점에서 동양사상은 융합적 성격을 가졌다고 하겠다). ③ 관용과 조화의 정신이 전반(全般)에 넘쳐 흐른다(이는 人間理解에 있어 일반적으로 性善說에 서 있었기 때문에 內的 能力의 涵養과 敎化의 방법을 사랑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밖에도 달리 말하자면, 동양사상은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신뢰하는 입장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동양정치사상 [東洋政治思想]
동양, 특히 중국 전래의 정치사상.
동양의 정치는 도덕적이고 문화적이며, 안정되고 정체적이어서 변경되거나 잘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서양의 정치는 권력적이고 공구적(工具的)이며 동적(動的)이고 전진적이어서 좋은 대비가 된다.
동양정치사상의 도가
도가(道家)의 정치사상은 이상적인 백성을 완전한 무지(無知)의 상태라고 본다. 백성이 완전히 무지하다면 그들은 악을 행할 능력이 없으며, 이러한 백성이 굶주린다면 그 이유는 정치하는 지도층이 세금을 수탈하기 때문이고, 백성을 다스리기가 어렵다면그것은 지도층이 어떤 일을 도모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란 그 근본이 무위정치(無爲政治)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백성 모두가 절약한다면 사회생활은 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며, 정권이나 무력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사람마다 자기를 철저히 다스리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신경을 쓴다면 이는 바로 자치(自治)가 되는 것이고, 개인 각자가 천하에 해를 끼치지 않는데 어째서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가의 정치사상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가 된다. 즉, 일종의 공상적이고 소극적인 사회주의 이론에 해당한다.
동양정치사상의 묵가
묵가(墨家)는 유가의 정치사상에는 실용성이 없다 하여 반대한다. 묵가의 근본적 주장은 겸애(兼愛)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하여 그 비중을 똑같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난세(亂世)는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신하와 자식이 군주와 부모에게 충성하고 효도하지 않으면 어지러움이 생긴다고 한다. 또한 아우인 자가 그 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역시 여기서도 어지러움이 일어난다고 하였으며 이 모든 현상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도적도 이와 같은 논리에서 생긴다. 즉, 도적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대부가 서로 다투고 제후가 서로 전쟁을 하는 이유도 같으며, 천하의 모든 것이 여기에서 연유된다고 하였다. 이들을 요약하면 세 가지의 병폐가 도출된다. ① 자기 몸만을 사랑하고 남의 몸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도적질이나 살인을 하게 된다. ② 자기 집안만을 사랑하고 남의 집안을 사랑하지 않으면 찬탈의 현상이 나타난다. ③ 자기 나라만 사랑하고, 남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전쟁의 현상이 나온다. 그러므로 인류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리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면, 일체의 죄악은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묵가의 정치사상은 겸애 외에도 실리(實利)를 중요시한다. 대다수에게 해당되는 것이 이(利)이며, 사회 전체의 이(利)이다. 위정자는 마땅히 천하의 이를 일으키고, 천하의 해(害)는 제거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곧,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또 묵가는 현인정치(賢人政治)를 중요시하였다.
동양정치사상의 법가
법가(法家)는 신상필벌(信賞必罰)로써 예제(禮制)를 보충한다는 기본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법은 백성의 부모와 같으며, 법은 천하의 가장 좋은 도(道)이고,성군(聖君)의 실용(實用)이다. 법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우선하는 것이며 법의 작용은 백성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고,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며, 공(功)을 쌓도록 하고 난폭함을 억제시킨다. 각자의 본분을 지키게 하며, 서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주장이다.
법은 치도(治道)의 근본임에 틀림없으나, 그 정치사상의 중심은 부국강병에 있다. 대외적으로는 존왕양이(尊王壤夷), 즉 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침을 목표로 하고, 종국적으로는 패도주의(覇道主義)를 달성함에 있다. 법의 적용범위는 가깝고 친하다고 하여 회피하여서는 안 되며, 군주와 신하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정치사상의 유가
유가(儒家)의 정치사상은 그 출발점이 인생철학에 있다. 정치와 윤리는 서로 결합하여야 하며, 정치의 원동력은 윤리에 있다고 본다.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안에 있다는 가족의 윤리를 가장 중요시한다. 유가의 인생철학은 진화적인단계로서 두 가지의 단계가 있다. 첫번째 단계는 인(仁)을 중심으로 하는 인생철학이다. 인이라는 것은 모든 덕(德)을 총괄하는 뜻이며, 완성된 인격을 뜻한다. 인은 내 몸을 중심으로 삼으며, 인의 참뜻은 일종의 동정심이다. 인애(仁愛)란 이러한 동정심의 표현이며, 인을 중심으로 하여 자애(慈愛)가 싹튼다. 따라서 인이란 모든 윤리의 근본이고, 민족의 미덕이라고 본다.
두번째 단계의 인생철학은 효(孝)와 그것이 확대된 개념인 충(忠)이다. 충과 효는 인류결합의 근본요소인데, 효는 직접적인 혈통관계에서 생성되는 결합요소이고, 충은 효가 확대되어 간접적인 혈통관계까지 관계를 맺어 사회 전체에 보급되는 결합 요소이다. 따라서 충은 사회를 이루게 하는 힘이 된다. 유가에서는 이러한 윤리관념을 출발점으로 하여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치의 '정(政)'자는 정(正)을 뜻하며, 자기 몸이 올바르면 어떤 명령이 없어도 잘 행해지고 몸이 올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이 있다 하여도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백성, 즉 건전한 백성이 없으면 건전한 정치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란 천하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유가는 이와 같이 인성적(人性的) 정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책도 이에 준하게 된다.
1 정명사상
유가의 정명주의(正名主義)는 유가학설의 중심적 사상이다. 정명이란 각자의 지위를 바르게 한다는 것으로, 천자(天子), 제후(諸侯), 대부(大夫), 서인(庶人), 모두가 자기의 직책에 맞게 모든 힘을 쏟는다는 것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각자 자기의 명분을 지키고 침범하지 않으면 사회의 질서는 확립된다는 생각이다.
2 덕치사상
위정자(爲政者)는 덕(德)을 중요시하여 덕으로써 인심을 감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이를 하늘에 떠 있는 별에 비유한다면 위정자는 북극성이고, 백성은그 둘레를 도는 별과 같은 형상이다. 준엄한 형벌로써 인민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도덕적인 감화를 통해서 백성이 심복하여 국법을 준수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법치주의(法治主義)라 한다면, 이는 바로 인치주의(人治主義)를 뜻한다.
3 예치사상
예는 정(政)의 근본으로서, 예치(禮治)의 목적은 백성을 합리적인 습관에 젖도록 양성시키는 데 있다고 한다. 유가의 이상적인 정치론은 국가 영토의 확장 및 이를 유지하는 데 있지 않고, 이상적인 생활과 도덕생활을 실현하는 데 있다. 유가의 이상정치의 목적은 우선 교화시키고, 다음에 사회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다. 교화는 백성의 정신을 행복하게 해주며, 사회정책의 실현은백성을 물질적으로 행복하게 해준다.
백성들의 물질적 수요충족은 사회의 분배과정에 정의가 있을 때 실현되는 것으로 이는 사회의 질서와 관계있는 것이다. 교화는 인류의 이성을 함양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익하므로, 결국 교화란 유가의 이상정치의 중요목적이 되는 것이며 군주의 덕화(德化)의 중심이 된다. 유가의 이상정치의 궁극은 소강(小康)에서 출발되는 대동(大同)의 상태이다. 소강은 천하가 모두 한 집안인 상태, 대동은 천하가 모두 공(公)인 상태이다(天下爲家天下爲公).
동양정치사상의 특징
동양정치사상의 근본은 종법사회제도(宗法社會制度)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신권주의사상(神權主義思想)을 첫번째 특징으로 한다. 종법이란 부계(父系)·부권(父權)·부치(父治)의 씨족제도를 뜻한다. 씨족은 혈통으로 유대관계를 맺는 사회조직을 뜻하는데, 족장은 그 종족의 주사(主祀)이며 정치적인 우두머리이다. 따라서 정교합일(政敎合一)의 부락을 이루기 때문에 하늘을 존경하는 일과 가족의 관념이 서로 결합되어, 정치조직의 뿌리는 하늘을 존경하는 것에 기초를 두면서 정치적 우두머리인 족장이 하늘의 부탁을 받아 부락민을 책임지는 상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두 번째 특징은 가족 본위의 정치사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느 곳의 인류에게나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나 동양에서는 여기에 효(孝)의 관념이 더해져, 동양인의 독자적인 윤리관념이 되었다. 동양인의 인생관념의 가치표준은 중용(中庸)의 덕(德)에 중점을 두게 되어 항시 조화된 사상과 행동을 보이려 애썼고, 중(中)을 근본정신으로 삼았다.
그러자 이 사상의 결점이 드러나, 현대의 의미로서 침략당하는 식민국가로 전락되고 말았다.그러한 결점은 다음과 같다. ①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습관에 빠져 들었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면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우주진화(宇宙進化)의 논법에 적당하지 못하였다. ② 타성에 젖어들었다. ③ 세계라는 사상을 가졌다 해도 국가관념(國家觀念)이 없었고, 가족 본위에 편중되었다. 결국 집안과 국가의 연결관계는 일종의 윤리적 정치를 형성하였고, 가족본위적인 정치사상은 가족이 확대되어 국가가 되고, 가족도덕이확대되어 국가도덕이 되는 특수한 상태가 되었다.
동인괘 [同人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건괘(乾卦:≤)와 이괘(離卦:∞)가 겹쳐 ‘≒’의 형상을 이룬 괘를 말한다. 하늘 아래 불이 있음을 상징하는 동지상집(同志相集)의 괘이다. 괘사(卦辭)에 “동인(동지)을 널리 구하면 형통한다.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고 되었다.
둔괘 [屯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감괘(坎卦:℃)와 진괘(震卦:″)가 겹쳐서 △ 의 상형을 이룬다. 우뢰가 구름 밑에 있어서 아직 진동할 만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양(陽)과 음(陰)이 처음으로 교감(交感)하여 새로운 것을 낳는 때의 고통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움직이는 힘은 점차 확대하여 간다.
둔괘 [遯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건괘(乾卦:≤)와 간괘(艮卦:′)가 겹쳐서 ↔의 형상을 이루는 괘를 말한다. 하늘 아래에 산이 있음을 상징한다. 은둔을 뜻하는 괘로서, 군자(君子)가 그 지위에서 물러나 세상을 피해서 산다는 뜻이 있다.
만두캬카리카
베단타학파의 학자 가우다파다(Gaudapada:640∼690년경)가 저술한 우파니샤드 문헌.
구분 : 인도철학
저자 : 가우다파다
발간연도 : 7세기
베단타(Vedanta)란 본래 '베다(Veda)의 끝(anta)'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베다 성전의 내용상 끝이라는 뜻으로 우파니샤드(Upanisad)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은 가우다파다가 당시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저술한 것으로 쇠퇴하던 인도의 정통사상이 소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불교에 치우친 내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아가마샤스트라(Agama-sastra)》라고도 하고 《가우다파디야카리카(Gaudapadiya-karika)》라고도 하며, 《아가마샤스트라》를 《성전론(聖傳論)》이라고도 한다. 성전장(聖傳章)·허망장(虛妄章)·불이장(不二章)·선화적정장(旋火寂靜章)의 4장 215송(頌)으로 되어 있다. 1장과 2장 이후의 내용이 다르고, 각 장이 독립된 체제와 사상을 담고 있어서 가우다파다 한 사람의 저술로보기는 어렵고 가우다파다가 우파니샤드의 여러 사상을 종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책은 곳곳에서 불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제1장에는 공관(空觀) 사상과 종자(種子) 개념·이체설(二諦說) 등이 나오며, 제2장 이후는 대승불교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제4장은 불교서적이나 다름없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불타라고 하고, 대승을 뜻하는 최상승(最上乘) 등의 불교용어가 많이 나오며, 인도철학의 일반용어가 불교용어로 대체된 경우도 있다. 또한 무론쟁(無論諍) 등은 《묘법연화경》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우파니샤드의 여러 사상을 담고 있어 후대에는 이 책 전체를 《우파니샤드》로 간주하기도 하였고, 특히 베단타학파에서는 이책을 《브라흐마수트라》와 함께 매우 중시하였다. 주석서로는 샹카라와 아난다즈냐나 등이 저술한 것이 있다. 불교와 베단파학파의 관계를 연구한 것으로는 나카무라 겐[中村元]의 《베단타철학의 발전》(1955년)이 유명하다.
명이괘 [明夷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곤괘(坤卦:°)와 이괘(離卦:∞)가 겹쳐서 ≫의 형상을 이루는 괘를 말한다. 양을 상징하는 이(離)가 곤[땅] 밑으로 들어가니 밝음이 사라지고 어둠의 상태, 즉 명이가 된다. 온 세상이 어두우니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자세를 바르게 가져 유순한 마음으로 대처하라는 괘이다.
목 [木]
오행(五行) 중 한 가지 원기.
목은 오행에서 5성(星)의 목성, 5시(時)의 봄, 5방(方)의 동(東), 5색(色)의 청(靑), 5성(聲)의 각(角), 5상(常)의 인(仁), 5수(數)의 8, 5미(味)의 산(酸), 5제(帝)의 청제(靑帝), 5정(情)의 희(喜), 5장(臟)의 간(肝)에 해당한다.
목성 [木姓]
5행(行)의 목(木)에 해당하는 성(姓).
성자(姓字)를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5음(音)으로 구분하여 5행에 나누어 붙임. 김(金) ·조(趙) ·박(朴) ·최(崔) ·유(兪) ·공(孔) ·고(高) ·차(車) ·강(康) ·유(劉) ·염(廉) ·주(朱) ·육(陸) ·홍(洪) ·동(董) ·주(周) ·연(延) ·추(秋) ·간(簡) ·조(曺) 등의 성이 이에 속한다. 한편, 이(李) ·박(朴) ·임(林) ·두(杜) ·송(宋) 등 목(木)자가 들어 있는 성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목직성 [木直星]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 운명을 맡아본다는 9직성의 마지막 직성.
9년마다 한 차례씩 돌아오는 길(吉)한 직성으로, 남자는 18세에, 여자는 11세에 처음으로 목직성이 돌기 시작한다.
몽괘 [蒙卦]
육십사괘 중의 하나.
육십사괘 중 간괘(艮卦:′)와 감괘(坎卦:℃)가 겹쳐서 ¥의 형상을 이루는 괘를 말한다. 산 아래에 물이 있음을 상징하며, 험난하여 갈 바를 모르고 멈춰 있는 상태를 뜻한다.
박문약례 [博文約禮]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공자의 말.
“博學於文 約之以禮”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는 《논어(論語)》 <옹야(雍也)> 편에서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요약한다면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지식은 넓을수록 좋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으로만 그치고 행위와는 무관하게 되지 않기를 경계한 말이다. 이 때의 예는 도덕적 행위규범을 말한다. 공자는 넓은 지식의 추구와 예의에 맞는 행동을 아울러 강조하였다.
《논어》 <자한(子罕)>에도 공자를 칭송한 안자(顔子: 이름은 回)의 말에 “공부자께서는 사람을 친근하게도 잘 이끄시어 문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셨고 예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주셨다”고 한 말이 있으며, 주석(註釋)에 학문을 먼저 가르치고 예로써 요약하게 하여 주는 것은 공자의 교육 순서라고 하였다.
병가 [兵家]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일파로 춘추전국시대와 한대(漢代)에 많이 출현한 병법가(兵法家) ·병학자(兵學者)의 일군(一群).
주(周)나라의 손자(孫子) ·오자(吳子) ·위료(尉쫍)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고대의 사마직(司馬職)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용병(用兵)방법을 설명하였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병서략(兵書略)에서는 이것을 병권모(兵權謀) ·병형세(兵形勢) ·병음양(兵陰陽) ·병기교(兵伎巧)의 4종류로 분류하여, 병가의 서(書), 53가(家) 790편(編), 도(圖) 43권으로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후세에는 무경칠서(武經七書)라 하여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쫍子)》 《삼략(三略)》 《육도(六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가 대표적 병서로 불리었다. 이들이해설한 바는 유가(儒家)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단순히 전략 ·전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등 처세 전반에 걸친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어, 병술만을 해설한 서유럽의 병서와는 그 내용이 크게 달랐다.
복서 [卜筮]
고대 중국에서 주로 행해졌던 점법(占法).
복(卜)이란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을 불에 태워서 그것이 갈라지는 금의 모양을 보고 점을 치던 방법을 말한다. 은대(殷代)는 신정(神政) 시대였기 때문에 모든 일의 결정에는 조상신의 의향을 물어서 행해야만 한다고 믿어 그 방법으로서 복점(卜占)이 성행하였으며, 따라서 복관(卜官)의 지위도 높았다.
서(筮)는 산가지의 조작에 의해서 얻어진 수(數)로 길흉의 점을 치는 방법으로 주대(周代)에 복을 대신하여 유행하였다. 즉, 《역경(易經)》의 성립과 함께 서가점의 주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술로서의 권위의 절대성은 이미 춘추시대에 잃었다. 그것은 공자(孔子)가 인간 행동의 기준을 신의(神意)에 두지 않고, 인간 자신의 의지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단설 [四端說]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맹자(孟子)가 주창한 인간 도덕성에 관한 설.
인간은 태어나면서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선악의 판단)의 4가지 품성을 가지고 있어 이것이 인(仁)· 의(義)·예(禮)·지(智)라고 하는 덕(德)이 된다고 하였다.
'단(端)'을 '본원(本源)의 뜻'(朱子說)으로 해석하는가 '단서(端緖)'라는 뜻으로 해석하는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나, 맹자의 주장은 전자에 속한다.
사상 [四象]
《주역(周易)》의 술어.
《주역》의 변화 원리인 음(陰)과 양(陽)을 짝지우면 4가지 형(型)이 생긴다. 그 상징적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사계(四季)처럼 음양의 성쇠(盛衰)를 나타내는 것이어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팔괘(八卦) 또는 육십사괘(六十四卦)가 이루어진다.
사서 [四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의 네 가지 경서(經書).
구분 : 유교경전
《대학》과 《중용》은 원래 각각 《예기(禮記)》 속의 한 편(編)이었으나, 유교 교설의 뛰어난 개론으로서 주목되어 주자(朱子)가 그것을 빼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라 부르고, 사서야말로 공문(孔門)의 사제전수(師弟傳授)의 도통(道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자가 여기에 베푼 주석 가운데 《대학장구(大學章句)》 《논어집주(論語集注)》 《맹자집주(孟子集注)》 《중용장구(中庸章句)》는 그의 다른 여러 주석과 함께 신주(新注)로 불리며, 한(漢) ·당(唐)의 고주(古注)에 비해 새로운 학문의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唐) 이전의 오경(五經)을 대신해서 주자 이후에는 사서가 유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유행되어, 나중에 한국에서는 사서오경이라 하면 중국의 고전 및 문화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사서오경 [四書五經]
중국에서 유가(儒家)의 기본적 경전(經典)의 총칭.
구분 : 유교경전
사서(四書)란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말하는데, 그 중 《대학》 《중용》은 원래 《예기(禮記)》 중의 두 편(編)을 각각 독립시켜 별책으로 한 것이다. 송학(宋學)에서는 모든 경서류에 앞서서 배워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다시피 하여, 주희(朱熹)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의해 그 지위가 확정되었다.
오경(五經)이란 한대(漢代)에 중시된 《시(詩)》 《서(書)》 《역(易)》 《예기(禮)》 《춘추(春秋)》 5서에서 기원된 것이다. 당시 《서(書)》는 《금문상서(今文尙書)》, 《예(禮)》는 《의례(儀禮)》, 《춘추(春秋)》는 《공양전(公羊傳)》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그 후 오경은 《모시(毛詩)》 《고문상서(古文尙書)》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5서로 한정되었다. 당대(唐代)의 공영달(孔穎達) 등에 의한 관찬 주석서 《오경정의(五經正義)》의 성립으로 오경의 내용은 앞의 5서, 즉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로 확정되었다.
삼경 [三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주역이라고도 함)》의 총칭.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등의 사서(四書)와 함께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서 한국의 사대부 사이에서 널리 애독되었다. 과거시험의 문제들이 주로 사서 ·삼경에서 출제되었기 때문에 이 책의 독자는 더욱 광범위하게 되었다. 《시경》은 공자가 편찬하였고, 《서경》은 하(夏) ·은(殷) ·주(周) 등 이른바 3대 사관(史官)의 기록을 수집한 것이라는 설이 있고 《역경(주역)》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 ·주공(周公), 그리고 공자 등이 편찬한 책이다.
삼역 [三易]
중국의 세 종류의 역(易).
하(夏) ·은(殷) ·주(周) 3대에 걸친 것으로 하의 역은 연산(連山), 은의 역은 귀장(歸藏), 주의 역은 주역(周易)으로서 이것을 3역이라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주례(周禮)》의 <춘관(春官)의 태복(太卜)>에 보이나 주역만 지금까지 전할 뿐, 연산 ·귀장의 2역은 사실 존재하였는지의 여부가 의심스럽다.
연산은 간괘(艮卦)를 머리로 하고 귀장은 곤괘(坤卦)를 머리로 하며 주역은 건괘(乾卦)를 머리로 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순서를 달리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으로 다같이 8괘를 겹쳐서 64괘가 있고 각 괘에 괘사(卦辭)가 있어 구조는 똑같다.
《좌전(左傳)》에 남아 있는 옛 요사(繇辭)는 2역의 것은 아니며 주역을 편집할 때에 누락된 것으로, 주역의 괘상(卦象)으로 해명되는 점으로 보아 주역이 나온 후에 하 ·은에 가탁(假託)하여 연산 ·귀장이라 부른 것으로여겨진다.
삼재 [三才]
중국의 고대 사상에서 우주의 3가지 근원을 뜻하는 말.
삼재(三材) ·삼극(三極)이라고도 하며, 천(天) ·지(地) ·인(人)을 가리킨다. 《역(易)》의 <계사전(繫辭傳)>에 괘(卦)에 6개의 효(爻)가 있는 이유를 설명하여 “천도(天道)가 있고, 지도(地道)가 있고, 인도(人道)가 있으며, 삼재(三才)를겸하여 이를 둘로 한다. 그래서 6”이라 하였다.
중국 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은 천지자연과 대립해서 이를 정복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 또한 스스로 만물을 기르는 천지의 작용에 참가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지의 움직임은 무한한 조화와 목적이 있는 법칙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 세계에도 공통되는 것이다.
삼재는 이와 같은 철학을 언외(言外)에 품고 있는 개념이다.
삼전 [三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의 3춘추전(春秋傳)을이르는 말.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고도 한다.
《춘추》는 노(魯)나라의 역사서로, 공자(孔子)가 노나라 242년 간의 사적에 대하여 선악(善惡)을 논하고 명분과 대의를 밝혀, 천하 후세에 존왕(尊王)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5경(經) 및 13경의 하나로서, 편년체(編年體) 서술의 시조(始祖)라고 일컫는다. 이 《춘추》를 해석한 것에 좌씨 ·공양 ·곡량 ·추씨(鄒氏) ·상씨(爽氏)의 5가(家)가 있었으나, 추씨 ·상씨의 2전은 없어지고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이 전한다.
《공양전》《곡량전》은 석경(釋經)에 주력하여 의리(義理)에서 앞섰으며, 《좌씨전》은 기사(記事)에 주력하여 사학적(史學的) 가치가 높다. 삼전의 우열론은 전한(前漢)의 무제 이후 계속되었으나, 《좌씨전》이 우세하였다.
상산학파 [象山學派]
중국 송(宋)나라의 철학자 상산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따르던 학파.
독서 ·궁리(窮理)를 중요시한 주자학(朱子學)에 대립해서 간명 직절(簡明直截)한 사상을 내걸고 실천궁행(躬行)을 중요시하였으며, 인성 일원설(人性一元說)을 주장하였다.
양자호(楊慈湖) ·서광평(舒廣平)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명(明)나라의 왕수인(王守仁: 陽明)에 이르러 대성(大成)하였다.
선서 [善書]
중국 송대(宋代) 이후,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쓴 도덕서(道德書)의 총칭.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가르치는 책이라는 뜻이다. 유불도(儒佛道)의 삼교일치(三敎一致)의 민간신앙(民間信仰)이 성행되었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민중의 신앙이나 도덕상의경전이 되었다. 명말(明末)에서 청초(淸初)에 걸쳐 가장 성행하였다.
성론 [性論]
중국철학 용어로, 사람이 타고난 소질에 대한 논의.
인생관,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주요 과제로 하는 중국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성(性: 마음)’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였다.
고대에는 성선설(性善說:맹자), 환경변화설(告子), 성악설(性惡說: 荀子), 성명설(性命說: 소박한 자급자족의 생명 유지, 子華子) 등이 있었으나, 한대(漢代) 이후, 사람에 따른 성(性)의 차이가 고려되어, 한유(韓愈)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이 잘 알려졌다. 송대(宋代)에는 완전한 선천성(본연의 성)과 악계기(惡契機)를 갖는 후천성(기질의 성)을 생각하게 되었다(朱子).
성삼품설 [性三品說]
중국 철학의 성론 중 인간의 본성에는 상 ·중 ·하의 3등급이 있다는 설.
상은 가르치지 않아도 선한 것, 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악이며, 중은 교도(敎導)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으나, 이것이 성론(性論)으로서 확립된 것은 후한(後漢) 이후이다. 당(唐)나라의 한유(韓愈)가 그의 저서 《원성(原性)》에서 이 설을 강조하였고, 후한의 순열(荀悅)도 그의 저서 《신감(申鑒)》의 잡언(雜言) 하편에서 거론하였다.
심즉리 [心卽理]
중국 남송(南宋)의 육상산(陸象山)이 제창하여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한 학설.
주자(朱子)가 주장하는 ‘성즉리(性卽理)’(인간의 本性은 곧 天理로서 도덕적 善이라는 사상)에 대항하여 제창한 것으로 주자가 마음(心)에는 성(性)과 정(情)의 두 요소가 있으며 정을 억제하고 본성(本性)으로 돌아가라는 엄격한 수양법을 주장하는 데 대하여, 육상산은 정이란 말하자면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므로 본심(本心:本性)이 곧천리(天理)임을 믿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은 곧, 엄격한도덕주의에 대한 낙천적인 도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왕양명은 이 ‘심즉리’의 입장을 더욱 진전시켜 천리, 즉 도덕적인 원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과정을 포함한 마음 전체의 모습이 천리라고 주장하였다.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한 ‘심즉리’는 인간의 정욕(情慾)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측면이있으며, 주자학(朱子學) 비판에서는 육상산의 입장보다 한결 강렬하였다.
심학 [心學]
중국의 정주학(程朱學)과 대립되는 ‘심즉리(心卽理)’의 학문체계.
넓은 뜻으로는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유교 전체를 말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송(宋)나라 때의 육상산(陸象山), 명(明)나라 때의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학문을 일컫는다.
왕양명은 정주학을 비판하는 한편, 육상산을 높이 평가하여 ‘성인(聖人)의 학문은 심학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심즉리’를 근본 명제(命題)로 하고 손쉬운 실천방법을 내세웠다.
그러나 정주학파로부터는 선학(禪學)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윽고 ‘심학횡류(心學橫流)’라는 폐단을 낳아 마침내 쇠퇴하였다. 이 심학이 유(儒) ·불(佛) ·도(道) 3교(敎)의 융합과 전위도덕으로부터의 해방 및 학문의 서민화(庶民化) 등에 끼친 영향은 크다.
십삼경 [十三經]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서(經書) 13종.
《역경(易經:周易)》 《서경(書經:尙書)》 《시경(詩經:毛詩)》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뮤梁傳)》 《논어(論語)》 《효경(孝經)》 《이아(爾雅)》 《맹자(孟子)》의 13종이다.
이들 경서는 각기 해당 학파에 따라 별도로 발달한 것이지만, 후에 유교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생겨, 총괄적으로 '십삼경'으로 명명(命名)하게 되었다.
악 [樂]
고대 중국, 특히 주(周)나라 때 ‘예(禮)’와 더불어 정치상 중요시하였던 개념.
‘예’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지닌 것인 데 비하여,‘악’은 인심을 감화(感化)하는 효용을 지닌 것이라고 하였다. 주공(周公)은 특히 ‘예악’을 강조하여 예악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는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다고 전한다. ‘악’은 또한 이 시대의 대학 교과였던 6예(六藝)의 하나에 끼었는데, 그 중에서도 ‘예’와 더불어 가장 중요시되었다. ‘악’의 바탕을 이루었던 《악경(樂經)》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예기(禮記)》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악기(樂記)>에서 어느 정도의 윤곽을 찾아볼 수 있다. ‘악’의 제도는 매우 복잡하지만 《의례(儀禮)》 《주례(周禮)》로써 거의 알 수 있다.
안리학파 [顔李學派]
중국 청(淸)나라 초기의 한 학파.
대개 안원(顔元)과 그의 제자 이공(李弛)의 학풍을 합쳐서 안리학파라 부른다. 이공은 안원의 철저한 반정주학적(反程朱學的) 실학(實學)을 학계에 보급하는 데 공을 세운 학자로, 왕원(王源)·정정조(程廷祚) 등도 이 학파에 속한다. 안리학파는 병농예악(兵農禮樂)을 내걸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을 본지(本旨)로 하여 청나라 초기 사상계에서는 특이한 학파였다. 그후 학계에서 그 존재가 잊혀졌다가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대망(戴望)이 안원의 사상을 현창(顯彰)한 것을 계기로 재차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20년에는 안리학파의 이름을 딴 학회들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오경 [五經]
유교의 5가지 경서.
공자(孔子)가 편찬 및 저술에 관계했다고 하여 존중되는 경서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禮)》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중국의 전통적 정신문화의 정수(精粹)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찍이 여기에 논술된 사항은 모두 영원불변의 규범으로서 정치나 윤리의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학문의 기본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서(四書)와 함께 한국의 사상이나 학문에 미친 영향은 크다.
오덕종시설 [五德終始說]
중국 전국(戰國)시대의 추연(騶衍)이 주창한 설(說).
천지개벽 이래 왕조는 오행(五行)의 덕에 의해 흥폐(興廢)하거나 경질(更迭)되며, 그 경질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어, 정치가 잘 행해질 때는 서상(瑞祥)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 5덕(五德)의 전이(轉移)는, 물은 불과 상극이고, 불은 금(金)과 상극이라는 것과 같은 토목금화수(土木金火水)의 오행상극(五行相剋)의 순서이다. 그리하여 진(秦)을 수덕(水德)으로하고 그 이전의 4조(朝)를 황제(皇帝:土德) ·하(夏:木德) ·은(殷:金德) ·주(周:火德)로 알맞게 배당하였다. 이것을 오행상극설이라고 한다.
진(秦)을 수덕이라고 한 것은 진을 최후의 왕조라 하여, 진의 영구성과 절대성을 말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상생(相生)의 순서에 의한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이 있으나 한(漢)을 화덕으로 하여 각 왕조에 오덕을배당하고 그 교체설을 주장한 것은 유향(劉向) ·유흠(劉歆) 부자(父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위서설(緯書說)은 이것을 이어받아, 한은 같은 화덕 요(堯)의 말예(末裔)로 보고, 감생제설(感生帝說)과 관련시켜 화덕 한왕조(漢王朝)의 절대성과 신권성(神權性)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위서 [緯書]
유가(儒家)의 경전인 경서(經書)에 대칭되는 시위(詩緯)·역위(易緯)·서위(書緯)·예위(禮緯)·악위(樂緯)·춘추위(春秋緯)·효경위(孝經緯) 등 7위서(緯書).
공자의 저작이라고 전하는 위서(僞書)로 유교에 바탕을 두고 길흉화복을 예언한다. 전한(前漢) 말에서 후한(後漢)에 걸쳐 성행했고 당시 유행하던 음양오행(陰陽五行) 등 신비사상에 의해 경서를 해석한 책이다.
위서라고 하면 일곱 가지 위서 외에도 《상서중후(尙書中候)》 《논어참(論語讖)》 《하도(河圖)》 《낙서(洛書)》 등을 총칭하는데 그 대부분은 흩어져 없어지고 《고미서(古微書)》 《칠위(七緯)》 《위서집성(緯書集成)》 등 여러 책에 일문(逸文)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이 예언적이므로 혁명설(革命說)과 결부되고 전한(前漢)·신·후한의 왕조혁명에 이용되었다. 특히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위서를 천하에 공포하여 성행시켰기 때문에 후한의 사상계를 풍미하였고 위서 사상에 의해 경서를 해석한 학자도 많았다.
유가사상 [儒家思想]
공자를 개조(開祖)로 하여 발전해 온 중국의 대표적 철학사상.
유가사상은 흔히 유교(儒敎)와도 혼동되나 엄밀하게 말하면유교는 한대(漢代)에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유학을 성교(聖敎)로 추앙하여 탄생한 일종의 정치성과 종교성을 띤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철학사상으로서의 유가사상 또는 유학과 구별된다. 공자(BC 551∼BC 479)가 태어난 춘추시대는 주(周)나라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제후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자칭타칭으로 왕을 칭하고 나온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이며 변혁기였다. 공자는 이러한 시대를 문제로 인식, 이것의 해결을 과제로 삼아 당시를 무도한 세계[無道之界]로 규정하여 도가 있는 세상[有道之界]으로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는 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예(禮)와 악(樂)의 조화로 잘 통치되었던 주대(周代)의 문물제도를 되살리는 데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춘추시대를 되돌릴 수는 없었으므로 불가불 다른 방법을 보완적으로 또는 근원적으로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기에서 공자철학의 중심개념인 인(仁)이 제시되었다. 예(禮)를 대(對) 사회적인 질서형식으로 본다면 예를 욕구하는 인간의 내면적 근거를 어짐[仁]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이것은 주례(周禮)라는 용(龍) 그림에 인이라는 눈을 그려넣은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한편 공자는 사인강학(私人講學)을 시작하여 많은 제자를 가르침으로써 교육의 보편화를 이룩하였고 이전의 고전들을 정리하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한 많은 저술작업을 통하여 명실상부한 문화정리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여기에서 전통의 인습과 창조라는 유가적 학문방법을 확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나아가서 하늘[天]의 문제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서의 유학을 정립하였다.
공자는 인간 본질로서의 어짐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하였고 이 사랑의 기본이 되는 것을 효(孝)라 하여 인을 행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한편 이 도덕적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것을 사욕(私慾)이라고 보아 이것을 초극하여 공공질서의 실천을 요구하였는데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는 정치에서도 그 이상형태를 강제적인 것보다 감동과 감화를 줌으로써 순화시키는 방법으로 나아갔으며, 통치자가 도덕적 수양을 쌓을 때 백성은 그를 향하여 모일 것이라 하였다. 한편 공자는 하늘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하늘의 명령, 즉 뜻을 믿었다. 그러나 그의 하늘은 종전의 주재(主宰)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인간도덕의 초월적 표현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천명(天命)과 천도(天道)의 의미다.
인간을 섬기는 것[事人]이 귀신을 섬기는 것[事鬼]보다 중하고, 삶을 아는 것[知生]이 죽음을 아는 것[知死]보다 중하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자가 깎고 다듬은 고전(詩 ·書 ·禮 ·樂 ·易) 가운데 우주와 인생의 변화를 다룬 《주역(周易)》은 유가적 형이상학의 방향을 결정해 주었다. 우주본체인 태극(太極)에서 생성의 두 대대(對待)원리인 음양의 작용이 생기고 그것은 하늘과 땅[乾坤]으로 대표된다. 이 두 원리에 의하여 우주는 생생(生生)되어 가며 이 생생하는 것이 변화[易]의 정체이다. 그의 《춘추(春秋)》는 이 생생사관에 입각한 역사서였다.
1. 선진유가사상
맹자는 유추법 등을 사용하여 공자의 인을 인간의 본성으로 확정시켰다. 이것이 곧 성선설(性善說)이며 성동설(性同說)이다. 그는 인간의 원초적인 도덕적 심정, 즉 4단(四端:惻隱 ·羞恥 ·恭敬 ·是非之心)을 근거로 4성(四性:仁義禮智)의 고유성 ·본래성을 확정하여 이것을 양지양능(良智良能)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인 문제도 도외시하지 않고 이 바탕 위에 도덕적 자아를 실천하라고 하였다. ≪중용(中庸)≫에 이르러 도덕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거대한 도덕형이상학이 완성되었으니 그 첫 구절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육이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고 한 것은 이를 나타낸 말이다.
≪대학≫은 ≪중용≫에서 완성된 도덕형이상학을 실천할 수 있는 유가적 방법론을 서술하였다. 자신의 가슴에 빛나는도덕성을 밝혀내고[明明德], 인간을 새롭게 해주며[親民], 지극히 성실한 우주의 운행질서를 돕는 데서 그친다는[止於至善] 3강령과, 격물(格物)로 시작하여 평천하(平天下)에서 끝나는 8조목은 곧 유가적 이상실현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2. 신유가사상
선진유가사상을 대표하는 4서(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가 확정된 것은 송대(宋代) 신유학에 이르러서였고 이것은 신(新)유학이 유가사상을 철학으로써 확립시켰음을 말해준다. 사실송 이전 한대의 유학은 정치적 이념으로서는 많은 발달이 있었으나, 철학적으로는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고,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경학(經學)의 정통성 문제만을 논하는 일종의 고증학(훈고학)으로 머물러 있던 것이다. 이 사이에 도교와 불교는 각각 기론(氣論)과 성론(性論)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하여 유가는 새로운 각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신유학 즉 이학(理學)과 심학(心學)이 대두하게 되었고, 신유가는 전통유가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였다.
신유학은 두 대립된 철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학과 심학이 그것이다. 주돈이(周敦燎)로부터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에 이르기까지 송학은 우주의 생성방식과 원리를 논하고 도덕적 인간 존재를 이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는 길을 달리하여, 명도는 인간 도덕성의 초월적 근거를 우주론에서도 확립하고자, 인(仁)과 성(誠)을 우주생성의 주체로 보게 되었고, 이천은 우주생성의 객관적 원리를 추구하여 그것으로부티 인성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규정하였다.
그후 육상산(陸象山)과 주희(朱熹:朱子)는 각각 마음이 곧 우주요, 이(理)라는 심론(心論)과, 마음은 기(氣)이고 마음이 갖춘 성(性)은 이(理)라고 하는 이기론(理氣論)이 대립하게 되었다. 주희는 존재원리로서의 이와 원리실현의 기체로서의 기는 결코 같지 않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가를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고 하였다. 또한 이 원리체득의 방법과 도덕성 발현의 방법을 각각 궁진법(窮盡法)과 거경법(居敬法)이라 칭하고,이 둘은 사람의 두 다리와 같아 상보적(相補的)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육상산은 궁진법을 비판하고 이 둘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여 형이상학적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공자 이후 제2의 문화정리가로 일컬어진 주희는 이를 사실법칙과 당위(當爲)법칙, 그리고 소이연리(所以然理)로 나누고 생생하는 태극일리(太極一理)인 이 소이연리가 앞의 두 원리에 관통할 뿐만 아니라 우주에 관통하는 근거원리라 하였다. 인간도 이 원리로 생겨난 존재이며 인간에게도 관통하고 있어 이것이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였다.
한편 육상산의 심학은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는 주자의 궁진법으로서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그 근거이론으로서의 성즉리설(性卽理說)에 반대하고 이른바 전통유학의 근본문제를 심론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학의 격물을 일을 바르게[正]하는 방법이라고 재해석하고, 바르게 하는 주체는 마음에 타고난 양지(良知)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지를 이루어(致良知), 마음의 뜻[意]이 발하면 일체의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뿐이라 단정한다.
3. 청대기철학과 실학사상
이학과 심학은 각각 나흠순(羅欽順)과 전서산(錢緖山) 등이 이어받아 연구하였으나 청초(淸初)에 이르러 경세치용(經世治用)의 물결이 밀어닥쳐 신유학은 수정되거나 비판되면서 고증학과 기철학(氣哲學), 그리고 중국적 실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우주론이나 인성론에 있어 청학의 개조인 고염무(顧炎武)가 이학의 실천자로 나선 것을 제외하고 방이지(方以智)와 왕부지(王夫之) 등은 기화유행(氣化流行)의 본체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는 기에 내재한 조리(條理), 즉 과학적 법칙으로서만 인정하여 주희의 기에 대한 이의 형이상학적 선재설(先在說)에 반대하였다. 한편 청유(淸儒)들의 정치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매우강하여 그들은 전제정치에 반대하고 원칙적으로 유가의 전통정신인 민본적 민주정치의 정립을 주장하며 기존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역사의 이해에 있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중심으로, 역사는 합리적으로 발전하여 대동사회(大同社會)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가꾸었는데, 이러한 사상은 청말, 캉유웨이[康有爲]에 이르러 집성되었다.
4. 현대중국
서구의 과학문명의 충격을 직접 여러 측면에서 겪었던 중국의 현대사상가들 중에는 중국철학의 중추를 이루어온 유학의 현대적 역할에 대하여 회의를 품는 사람이 많이 나타났다. 류스페이[劉師培] ·정원장[丁文江] ·후스[胡適] 등은 서구의 과학사상과 사회 및 정치이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반(反)형이상학의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혹자는 유물론적 입장으로 나아갔다. 여기에공산주의철학이 들어오면서 유학에 대한 회의는 공자비판으로까지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변혁기에 있어 중국의 전통철학들을 계승하되 새시대 새이념이 될 수 있도록 재창조하려는 사조도 일어났고 그 중의 하나가 쑨원[孫文]의 삼민주의였다. 이 회오리가 지나간 뒤 중국의 철학자들은 유가사상을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정주이학(程朱理學)의 입장에서 중국철학을 재정리한 탕쥔이[唐君毅], 정주철학을 재편성한 역사학자 첸무[錢穆], 서양에 중국철학을 소개한 천룽제[陳榮捷] 등은 현대중국의 유가철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으며 한편 모우중싼[牟宗三] 등 많은 현대철학가들은 양명심학(陽明心學)을 깊이 연구하고 있다.
5. 본질
유가사상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인본주의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 유가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좋은 것(善)으로 보고 이것을 계발(啓發)하는 이론을 정립해 왔다. 성악설(性惡說)을주장한 순자(荀子)도 선인(善人)이 목표였고 그것을 이룩할 수 있는 인위(人爲)의 능력을 인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본주의로 나아갔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와 인간중심적 사상은 유가의 본질이다. ②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일원적 사유를 기본으로 한다. 천인합일은 우주와 인간의 원리를 일관된 것으로 보는 것, 즉 이 둘을 유기적 전체로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잘못 이해하면 인간중심적 가치원리를 존재의 세계로까지 확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유가의 기본입장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역할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유가는 나와 다른 사람, 인간과 만물, 인간과 우주를 언제나 조화적 발전단계로 보는 존재이해의 기본방식을 형성하였다. ③ 모든 문화현상을 실천적으로 다루는 실천철학의 성격을 띤다. 유가사상은 문화철학 ·정치철학으로 여겨질 만큼 서양철학과는 달리 문화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실천적 관심을 보여왔다. 이것은문화가 인간의 산물이며 유가는 인간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갖고 관계중심으로 생각하는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④ 유가는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창조를 조화 있게 이룩해 간 철학이다.
공자가 일찍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역사나 문화의 전개가 극복적(克復的) 혁명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고, 언제나 인습과 창조의 조화 속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인간이 추구하는 바는 유행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요, 그 실천에 있으며, 이 진리의 체득과 실천은 물리적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기본입장의 반영이기도 하다. 즉 과거의 진리를 천명하고 실천한 철인(哲人)과 시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언제나 계승되어야 한다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유교 [儒敎]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1. 한대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을 읽도록 요청하여 유교는 왕조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한(前漢) 때는 어떤 1경(經)에만 치중하는 학풍이 일더니 후한시대에는 여러 경서를 종합 검토하고 그것을 주석(註釋)하는 훈고학(訓뭍學)이 성행하여 이것이 당대(唐代)로 계승되었다.
2.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 ·주자학(朱子學)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燎) ·정호(程顥) ·정이(程燎)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논어 ·맹자 ·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3. 몰락
청대(淸代)에 이르자 유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대두하여 공허한 이론에만 치중하는 송학(宋學:주자학 ·양명학)을 물리치고 고정(考訂) ·교감(校勘) ·훈고를 통하여 고전(古典)의 참뜻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유교는 종말기를 맞이하였다. 열강의 침략, 청조(淸朝)의 부패에 궐기한 중국인은 많은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그 중에서 공양학파(公羊學派)인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유교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주장하여 근대국가로의 탈피를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그 후 유교는 밀려드는 근대과학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이후 전개된 근대화운동은 봉건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여, 유교도 그 정신적 지주였다는 뜻에서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운동의 열기가 식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전통문화가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유교도 앞으로의 문화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4. 한국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燎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 ·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 ·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 ·이귀(李貴) ·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 ·이진상(李震相)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 ·물(物) ·성(性)에 대한 이론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이준(李儁) ·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 ·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유학 [儒學]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
통상 유교와 같은 뜻으로 해석되나 원칙적으로는 유교를 성립시키는 학문이며 교학적(敎學的) 의미가 짙다. 실천적 도의(道義)에 입각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실현을 본지(本旨)로 삼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준봉(遵奉)하는 학문이다. 공자가 죽은 후 맹자는 인의(仁義)를 내세워 성선양기(性善養氣)를 설하는 동시에 인정(仁政)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예(禮)를 주장하여 성악설을 내세우는 동시에 권학(勸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이 학문은 쇠퇴하였다.
다시 진시황(秦始皇: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소멸하는 듯하였으나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러 다시 부흥하여 교학으로서의 태세를 갖춤으로써 유학이 성립되었다. 국학으로 채택되어 정치적으로 지지를 받는 체제 속에서 유지되어온 학문으로 전한(前漢)시대에는 경세치용(經世致用:정치적 실용)의 학문으로, 후한(後漢)시대에는 훈고학(訓뭍學)으로 발달하였고, 당(唐)나라때에는 정의(正義)의 학으로, 송(宋)나라 때에는 성리학(性理學:朱子學)으로, 명(明)나라 때는 심학(心學), 청(淸)나라 때는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바탕한 고증학(考證學)으로 변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육경 [六經]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의 6가지 경서.
경(經)이란 상(常)을 뜻하며, 사람이 항상 좇아야 할 도리를 말한다. 《장자(莊子)》의 천운편(天運篇)에 공자가 노자(老子)에게 한 말 가운데 공자가 이 육경을 공부한 유래가 적혀 있다. 육경의 명칭이 보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공자 생존 당시에 과연 육경으로서 정리되어 있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공자시대에는 시·서·예·악이 사대부(士大夫)의 교양을 위해 필수적인 학습내용이었으나, 후세에 역과 춘추가 부가되어 육경의 형태가 된 것 같다. 전하는 말로는 이 육경이 모두 공자의 산정(刪定)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에 와서 유가(儒家)의 경전으로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또한 육경은 그 순서를 역·서·시·예·악·춘추의 순으로 잡을 때도 있다. 이 순서는 《한서(漢書)》에 의한 것으로, 육경 하나하나의 제작연대에 따른 것이다. 한편 역이 다른 경서의 근저를 이룬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육례 [六禮]
인론(人倫)의 여섯 가지 예법.
그 기원은 중국이며 몇몇 육례가 있다. 즉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에는 관례(冠禮:成人禮)·혼례(昏禮:결혼)·상례(喪禮:葬禮)·제례(祭禮:宗廟祭)·향례(鄕禮:謝禮·飮酒禮)·상견례(相見禮:公式 初對面禮)의 육례를 들었으며, 《주례(周禮)》 〈춘관조(春官條)〉에는 제후(諸侯)가 4계절과 수시로 천자를 배알(拜謁)하는 예로서 조례(朝禮:봄)·종례(宗禮:여름)·근례(覲禮:가을)·우례(遇禮:겨울)·회례(會禮:수시)·동례(同禮:일제히)를 들었다.
그 밖에 종묘 제사의 육례도 있다.
음양오행설 [陰陽五行說]
우주나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
음양이란 사물(事物)의 현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記號)라고 할 수 있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에다 모든 사물을 포괄·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인 본질(本質)을 양면으로 관찰하여 상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오행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元氣), 곧 목·화·토·금·수를 이르는 말인데, 이는 오행의 상생(相生)·상극(相剋)의 관계를 가지고 사물간의 상호관계 및 그 생성(生成)의 변화를 해석하기 위해 방법론적 수단으로 응용한 것이다.
① 오행상생(五行相生):오행의 운행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낳는 관계이며, 곧 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금생수(金生水)·수생목(水生木)이 된다.
② 오행상극(五行相剋):상극에는 억제(抑制)·저지(沮止)의 뜻이 내포되었고, 그 상호관계는 목극토(木剋土)·토극수(土剋水)·수극화(水剋火)·화극금(火剋金)·금극목(金剋木)으로 되었다.
1. 한방의학
음양오행설은 한방의학의 중요한 기초이론이다. 한방의학의 자연관(自然觀)과 인체의 생리(生理)·병리(病理)에 대한 원리·진단·치료·약물 등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이는 한방의학의 발상지인중국의 고대 의학자들이 음양오행설을 응용하였기 때문이다.
음양을 인체에 적용시켜 보면 외(外)는 양이고 내(內)는 음이며, 장(臟)은 음에 속하고 부(腑)는 양에 속한다. 인체의 생리기능상혈압상승, 분비액의 증가 등은 양적(陽的) 현상이며, 혈압강하·분비액의 저하 등은 음적(陰的) 현상이다. 인체에서 이 음양의 조화가 깨어지면 병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한방의학은 양과 음의 과다(過多)와 부족을 조화시켜 깨어진음양의 균형을 되찾도록 해주는 치료학이라 하겠다.
한방의학에서는 오행의 생극(生剋)의 이치를 운용하여 인체에 있는 내장(內臟)의 상호자생(相互資生)·상호제약(相互制約)의 관계를 설명하며, 오행의 귀납법(歸納法)으로 인체의 각 부위간(部位間)의 상호연관을 설명한다.
인체는 오장(五臟), 즉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과, 육부(六腑) 즉 담(膽)·위(胃)·소장·대장·방광·삼초(三焦), 오체(五體) 즉 피모(皮毛)·기육(肌肉)·혈맥·근(筋)·골수(骨髓), 오관(五官) 즉 귀·눈·입·코·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인체 외부의 자연환경이란 계절의 변화(春·夏·秋·冬), 오기(五氣:風·暑·寒·濕·燥), 오색(五色:靑·赤·黃·白·黑), 오미(五味:酸·苦·甘·辛·鹹) 등을 가리킨다.
한방의학에서는 이러한 체내·체외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들을 오행의 고유한 특성에 맞추어 분류하고, 그 속성(屬性)이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을 각각 오행에 배속시켰다. 오장을 예로 들면 간(肝)은 목(木)에, 비(脾)는 토(土)에, 심(心)은 화(火)에, 폐(肺)는 금(金)에, 신(腎)은 수(水)에 각각 배속시킨다. 인체를 오행과 결합시키는 데는 오장을 위주로 하고, 이를 통해서 육부·오체·오관·오색 등과 결합시키며, 여기에 일련의 관계가 형성된다. 즉, 일례를 들면 봄철과 간(肝)은 목(木)이므로 이 관계에 의해 담(膽)·목(目)·근(筋)·산(酸)·청(靑)·풍(風)·생(生)과 일련의 발전과정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오행에 연관지어진 계절의 변이를 통해서 오기의 변화와 발전과정, 그리고 오미·오색 등을 결합시켜 이들 자연현상과 속성을 인체의 오관에 비유하고 있으며, 다시 육부·오체 등을 연결시켜 자연 현상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인체 장기(臟器) 간의 생리적인 현상을 계통적으로 해석·관찰한다. 간에 관해서 좀더 설명한다면 간은 담과 표리관계(表裏關係)이며, 심장과 상호자생의 관계에 있다(木[肝]生火[心]의 관계이므로).
한방의학에서는 이렇듯 오행생극(五行生剋)의 제약(制約)과 화생(化生)의작용을 운용함으로써 장부(臟腑) 사이의 생리적인 상호협조와 제약관계 및 그 평형현상을 설명하며 또 장부의 병리변화(病理變化)를 추정·해석한다. 따라서 오행설은 질병의 한방적 치료 및 진단에 중요한 준거이론(準據理論)이라 할 수 있다.
이 [理]
중국철학 특히 정주학(程朱學)의 근본개념.
이(理)의 형이상학적 개념화는 당대(唐代)에서의 화엄교리(華嚴敎理)의 사리무애법계관(事理無弓法界觀)의 영향도 있으나, 전통적인 유교도덕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려는 요청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렇게 하여 또한 인륜을 부정하는 도불(道佛) 두 교(敎)를 비판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정이(程燎)는만유(萬有)를 생성케 하는 음양 이기(二氣)의 작용 속에 그 작용의 원인으로서의 도(道), 즉 이를 보고, 또한 이 이(理)가 일체의 차별적 사상(事象)으로 하여금 차별적 사상이게 하는 근거라고 생각하였다.
이 이(理)는 원래 기(氣)나 차별적 사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형이상적·초감각적이기는 하지만 차별적 사상에 내재현시(內在顯示)하여, 보편적 일자(一者)이면서 자신을 무한히 특수화한다. 그래서 만물에는 일리가 있는 동시에 일물(一物)에 일리(一理)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중에 주자는 정이를 계승하여 기(氣)에 대한 이의 형이상적 존재성을 더욱 명확히 하여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으로 분석하고, 이의 존재론적 성격과 도덕적·법칙적 성격을 밝혔다.
육상산(陸象山)은 우주에 충색(充塞)하는 것은 일리뿐이라고 주장하고 이일원론(理一元論)을 내세웠으며,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은 기에 중점을 두고 이를 기가 구비하고 있는 조리(條理)라고 보았다. 또한 정주학에서는 '물(物)에대하여 이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이기론 [理氣論]
이(理)와 기(氣)의 원리를 통해 자연 ·인간 ·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체계.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기(氣)의 개념을 사용하여 사물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했는데, 기라는포괄적 개념이나 음양(陰陽)·오행(五行)이라는 좀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사물의 발생과 변화를 설명하고 다양한 사물을 분류, 체계화했다. 송나라 때 성리학이 성립하면서 이(理) 개념이 이러한 설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와 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이기론이 확립되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이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와 기를 결합한 이론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인물로는 주돈이(周敦燎)를 들 수 있으며, 실제로 성리학에서 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기론을 체계화한 사람은 이정자(二程子 : 정호·정이 형제)라고 할 수 있다.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라는 개념을 통해 한편에서는 이가 자연법칙을 가리키며 또 한편에서는 정치적 질서 및 윤리도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이(程燎)는 ‘이일분수(理一分殊)’, ‘성즉리(性卽理)’ 등의 명제를 통해 이기론적 세계관의 기본틀을 확립했다. 주희(朱熹)는 이러한 철학적 성과를 계승하는 한편 장재(張載)의 기철학과 인성론을 재해석하여 이기론에 바탕을 둔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완성했다.
성리학은 자연·인간·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만물이 생성·소멸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한편 이는 만물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의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성리학에서 이와 기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명제로 ‘이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는 말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주자학의 영향으로 이기론이 등장한 이후 조선시대에 서경덕(徐敬德)의 태허설, 이언적(李彦迪)의 태극설을 거쳐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 의해 보편적 사회사상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이를 더욱 중요시한 이황은 이와 기의 차별성, 즉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을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을 편 데 반해, 이이는 이를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기의 법칙성으로 이해하여 이와 기의 통일성, 즉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을 전개하여, 이후 성리학의 커다란 두 흐름으로 계승·발전되었다.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정이(程燎)가 주창하였고 주희(朱熹:주자)가 완성하였다. 성리학의 발생시기는 불교의 폐해가 노출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던 당나라 말기였다. 한유(韓愈)는 오륜(五倫) 등을 강조하는 유교의 사회철학적 입장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배척하였으며, 이고(李묾)는 불교의 장점인 해탈의 논리를 유교의 이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불교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이고가 재구성한 유교적 해탈의 논리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이고 불변적인 요소인 성(性)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인식하기 어렵다.
이고를 계승한 송나라의 주돈이(周敦燎)는, 바깥의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자와 자신의 성이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바깥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돈이는 음양오행으로 구성된 만물의 내면에는 무극(無極)과 태극이라고 하는 불변자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뒤를 이은 장재(張載)는 기(氣)가 잠시 모여서 형성된 형태가 만물의 현상태이고 기가 흩어진 상태인 태허(太虛)가 만물의 본질태라 파악함으로써 만물의 불변적인 본질을 확인하였다.
그뒤 정이는 만물의 현상태인 음양오행 등을 기로 수렴하고 무극, 태극, 태허 등의 불변하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수렴함으로써 이기론을 완성하였는데 이 이기론은 주희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성리학의 중심적인 이론이 되었다. 정이와 주희에 의하여 완성된 이기론은 원래 인간의 불변적 본질인 성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된 것이므로 만물의 변하는 요소인 현상태를 대변하는 기와 불변하는 요소인 본질태를 대변하는 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삶의 작용, 인간의 감정 등 인식 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요소는 기이다. 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일되는 요소는 이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의 입장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유교철학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기이원론을 수용하지만, 퇴계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입장 때문에 이를 중시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철학에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기를 강조하였다.
인 [仁]
중국 유교사상에서 가장 중심 덕목(德目).
공자가 처음으로 강조한 "효제(孝悌)는 인의 근본이다"라는 혈연적인 가족 결합의 윤리를 중시하여 거기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스런 애정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仁'자는 본래 등에 짐을 진사람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인이란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여 사랑을 바탕으로 삼은 조화된 정감(情感)에 의거한 덕이며 그것을 가까운 혈연에서 비롯하여 멀리 미치게 함으로써 사회적·국가적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맹자(孟子)는 그것을 본래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남의 불행을 좌시하지 못하는 동정심'의 발전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완성하여 정치에 미치는 왕도론(王道論)을 말하였다. 이와 같이 인의 덕은 원래 정의적(情意的)이어서 주관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뒤에 이지적(理智的)인 면을 보충하는 것으로서 의(義)·예(禮)·지(智)·신(信) 등의 덕목이 추가되어 오상(五常)의 덕이 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인은 넓은 뜻으로는 그것들을 포섭하는 최고의 덕으로 삼고, 좁은 뜻으로는 애정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면서 넓은 뜻에서는 유교 윤리의 모두를 포괄하는 왕좌에 앉았다.
한대(漢代)부터 시작한 이 사상은 그대로 후세까지 유지되지만 주자학(朱子學)은 또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가하였다. 즉, '인은 성(性)이며 사랑은 정(情)이다'라고 현실적인 애정과는 구별하여, 정을 낳게 하는 본성(本性)으로서의 고차적(高次的)인 입장에서 고찰하여 '인이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이(理)다'라고 하였다. 인은 여기에서 이념적인 성격을 강화해서 체계적인 유교 윤리철학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인극 [人極]
인간의 최고의 존재상태.
이 말은 수(隋)나라의 왕통(王通)이 《문중자(文中子)》 〈술사(述史)〉에서 "우러러 천문(天文)을 보고 굽어 보아 지리를 살펴서 그 가운데에 인극을 세운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의 삼재설(三才說)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늘의 운행원리와 땅의 존재양상과 인간의 삶의 이치는 원래 하나로 연결된 것이므로 하늘의 운행원리 및 땅의 존재양상과 일치하는 삶이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송나라의 주돈이(周敦燎)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성인(聖人)이 중정인의(中正仁義)를 가지고 표준을 정하고 주정(主情)공부를 통하여 인극을 세웠다"고 하였다.
하늘의 운행원리 및 땅의 존재양상에 해당하는 사람의 삶의 이치가 바로 중정인의이며, 이 중정인의를 실천하는 삶의 형태가 인극인데, 성인이 사람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를 제시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에서 보면 인극은 인간존재의 표준인 성인의 삶의 형태가 된다. 그러므로 주돈이는 《통서(通書)》에서 "성인의 도는 인의중정일 뿐이다"라고 명언하였다. 주자는 극을 '표준극지(標準極至)'라고 설명하여 '인간의 표준이 되는 최고의 상태'라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인성론 [人性論]
중국에서의, 사람이 타고난 성(性:품성)을 어떻게보는가에 관한 논의.
중국 사상사(思想史)에서 사람의 성이 선(善)이냐 악(惡)이냐 하는 것이 자주 논의되었으며, 공자(孔子)는 인간성에 신뢰를 두고는 있으나, 상지(上知)·중인(中人)·하우(下愚)와 같은 표현으로 사람의 소질을 단계적으로 보았다. 전국시대(戰國時代:BC 403∼BC 221)에는 인간 일반의 기준을 발견하려는 경향이 있어,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등 외에, 고자(告子)는 물이 어느 쪽으로도 흐를 수 있는 것처럼, 수양 방법에 따라서는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세석(世碩)·밀자천(密子賤) 등은 선악의 양요소(兩要素)가 있다고 하였다.
한대(漢代:BC 202∼AD 220)에는 이것들을 합치거나 음양사상(陰陽思想)을 혼합한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동중서(董重舒)는 성(性)의 선악은 하늘에 음양이 있는 것과 같아서, 교화에 의해 완전한 선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으며, 유향(劉向)은 선악의 구별은 외계의 자극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왕충(王充)은 선을 상인(上人), 악을 하인(下人)과 결부시켰고, 양웅(楊雄)의 선악 혼성(混成)을 중인(中人)과 3단계에 적용하였다. 이와 비슷한 견해로, 순열(荀悅)·문중자(文中子), 당(唐)의 한유(韓愈) 등은 상·중·하의 삼품(三品)이 있다고 하였다.
송대(宋代) 이후에는 이기설(理氣說)에 의해 그때까지의 설(說)이 통합되었다. 장재(張載)·정이(程燎) 등의 뒤를 이어 주자학(朱子學)을 창시한 주희(朱熹:주자)는, 사람에게는 우주의 본체인이(理)에서 생긴 본연의 성과 기(氣)에서 생긴 기질의 성이라는 두 요소가 있고, 선악의 구별은 후자가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재이사상 [災異思想]
인간 행위의 선·악에 따라 자연이 재앙(災殃)이나 이변(異變)을 가져온다는 중국의 사상.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자연과 인간, 곧 하늘과 사람 사이에 내면적인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상이 있었는데 이것이 더욱더 발전해서 인간의 행위가 자연현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른바 천인상관(天人相關)의 사상을 낳기에 이르렀다. 재이사상은 이 천인상관설의 하나이다.
그 발생은 《서경(書經)》의 〈홍범(洪範)〉 등에서 싹텄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사상은 한대(漢代)에 이르러 널리 유행하였다. 한대에 국가 공인의 학문이 되었던 유학(儒學)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라든가 재이설(災異說)을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서 일식·홍수·지진 등의 재앙이 있으면 모두가 통치자의 실정(失政)이 불러일으킨 것이라 하여, 상서(上書)로써 시정(施政)의 득실(得失)을 논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대의 재상 가운데는 재앙·이변을 이유로 면직된 사람이 종종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재이사상은 군주권력의 무궤도한 행사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졌다고도 생각된다. 이 사상은 한대를 지나면서 점차 쇠퇴하였으나 아직도 상당한 여세로 오늘에 이른다.
전 [傳]
중국에서 '경(經)'과 상대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
경의 주석, 또는 해설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서경(書經)》에 공안국(孔安國)이 붙인 주석을 《공전(孔傳)》이라 하고, 모장(毛望)의 《시경(詩經)》에 관한 주(注)를 《모전(毛傳)》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어구의 해석이다. 한편 《역경(易經)》에 붙여진 《치전(彖傳)》 《상전(象傳)》 이하의 이른바 '십익(十翼)', 《춘추(春秋)》에 붙여진 《좌씨전(左氏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의 '3전' 등은 단순한 자구의 해석이 아니다. 전자는 《역(易)》의 특수한 상징의 의미해설, 《역(易)》의 철학적 이론부여이며, 후자는 독특한 역사기술법인 '춘추의 필법'에 의해 씌어진 《춘추》에 관해서 그 이면의 사실을 들어 거기에 해설을 가한 것이다.
전성보진 [全性保眞]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양주(楊朱)의 근본사상.
맹자(孟子)는 양주를 평하여 '위아(爲我)'라고 하였으나, 《회남자(淮南子)》에서는, 그가 묵자(墨子)에 대한 반명제(反命題)로서 전성보진을 제기했다고 했다. 따라서, 이 말은 양주의 개인주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양주는 정신과 육체의 일체적(一體的) 구조로서의 인간의 생(生:性)에 지상(至上)의 가치를 부여하고, 무엇에 의해서도 그 순수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선천적 소여(所與)의 완전한 보존과 실현을 꾀하였다. 생을 손상케 하는 사회적 관계나 실천에서 후퇴하여 자기의 폐쇄적 세계 안에 파묻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적·감성적 욕구는 생에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충족되어야 하지만, 그것이생의 부정으로 전화(轉化)할 때만은 그것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정명론 [定命論]
중국 사상사에서 제기되는 운명론(運命論) ·숙명론.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위 ·존재를 포함하여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미리 정해져서 모든 사상(事象)의 진행에 인간의 의지 ·지력(知力)은 전혀 무력하다고 본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명(命)’은 대명(大命)을 가리킨 것으로 문자 그대로 하늘의 명령을 받는다는 뜻이다. 본래 천(天)은 초월적인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었으나 춘추(春秋) 이후 천이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이법(理法)으로서 객관화됨에 따라 천명(天命)도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인간의 행위 ·존재를 외적으로 결정짓는 힘, 즉 ‘운명(運命)’의 뜻으로 바뀌었다.
개인 ·집단 ·국가의 빈부(貧富), 승패(勝敗) ·치란(治亂)이라는 인간사회 전반에 걸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넘어 숙명적으로 오는 힘으로서 동란에 휩싸인 전국(戰國)의 운명을 인정한 사람(道家)이 있는 반면, 인위노력(人爲努力)을 믿고 천명을 부인하는 비명설(非命說)도 나타났다(墨家). 인위를 믿고 동시에 명도 인정하는 설(儒家)은 현실 대처에 뛰어났다. 전국 말에는 명 그 자체의 운동에서 자율적 합법칙성(自律的合法則性)을 발견하려고 오덕종시(五德終始)의 순환론(循環論)이나 음양설(陰陽說)을 정립(定立)하여 자연과 역사현상의 추이를 해석하였다. 명수(命數) ·시운(時運)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천도(天道)는 인위로부터 독립되어 운행하는 사상(事象)인 자연현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 합법칙적 자연에 인사(人事:특히 治績)를 대응시킨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 성행한 것은 과학적 객관화의 과정을 걸어은 천도(天道:자연법칙)에 인간지배의 원리를 유비(類比)시켜서 세계통치의 합리성 부여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한편 이 합리성을 자각하면서 그 필연적인 상태에 따라 순응하는 ‘개인의 운명과 합치된 자연무위(自然無爲)의 인간존재’라는 사상이 유력해졌다(莊子). 그리고 그 운명의 작용으로서 개인심리나 집단동향을 미리 알아내는 방술(方術)도 유행하였다(黃老思想과 兵略 ·외교 등의 술책). 이것은 한대(漢代)의 술수나 비법에 연관되어 어느 것이나 운명의 지배에 대처하는 방책이었다.
후기 도가(道家)들은 ‘명’을 생명으로 보고 태어나면서부터 개인에게 부여된 다양한 ‘성(생리적인 성질이나 도덕적 성품)’과 함께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라고 보고 인성(人性)과 수명(壽命)의 이합(離合)을 문제로 삼았다. 이 ‘성명(性命)’의 관념은 한대(漢代) 이후 정통수학(正統數學)에도 영향을 주어 운명과 개성의 관계에 대한 반성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켜 경학상(經學上)의 주요개념이 되었다. 후한(後漢)에서 시작되는 결정적인 운명론은 사상적인 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것으로, 후천적으로 바꿀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강조함으로써 중국 중세의 귀족적 계층사회의 차별을 인정하는 관념을 마련했고, 또한 무력을 한탄하는 사조는 문예 방면에 깊이 침투해 갔다.
제자백가 [諸子百家]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말은 제선생이란 뜻이고, 백가란 수많은 파별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 중에서 옛 서적을 분류했을 때의 명칭으로, 그 제자의 파별은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論理學派)·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外交術派)·잡가(雜家)·농가(農家) 등 9류에다가 또 소설가를 부록으로 한 것이다.
이 중에서 공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는데, 그 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 ·장자 등의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나서 사상계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할만큼 극히 활발한 상황을 나타냈다.
중국사에서도 특색이 있지만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와도 비교된다. 그 발흥된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기운(機運)에 의한 것으로서 주왕조(周王朝)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로 보아야 한다.
좌씨전 [左氏傳]
중국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해석한 책.
저자 : 좌구명 해석
시대 : BC 722∼BC 481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좌씨춘추(左氏春秋)》 《좌전(左傳)》이라고도 한다. BC 722∼BC 481년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국어(國語)》와 자매편이다. 《춘추》와는 성질이 다른 별개의 저서로서,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과 함께 3전(三傳)의 하나이다. 원본은 전국시대에 되었으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전한(前漢) 말기 유흠(劉歆) 일파가 편찬한 것이다. 다른 2전(二傳)이 경문(經文)의 사구(辭句)에 대한 필법(筆法)을 설명한 것에 비하여 이 책은 경문에서 독립된 역사적인 이야기와 문장의 교묘함 및 인물묘사의 정확이라는 점 등에서 문학작품으로도 뛰어나 고전문의 모범이 된다.
주례 [周禮]
주대의 관제를 기록한 책.
구분 : 경전
저자 : 주공 찬
시대 : 중국 주대
주관(周官)이라고도 한다. 유교 경전의 하나로 6편(篇)으로 되어 있다. 주공(周公:BC 12세기)이 찬(撰)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공이 예(禮)를 제정했다는 설에 갖다 맞춘 것이라 하여, 옛날부터 그 진위(眞僞)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의례(儀禮)》 《예기(禮記)》와 합쳐 삼례(三禮)라 불리고,가장 기본적인 예를 설명한 것으로 여겨지나 그것이 이루어진 것은 한대(漢代)로 간주되어 삼례 중 가장 늦다.
천지사계(天地四季)를 천관(天官) ·지관(地官) ·춘관(春官) ·하관(夏官) ·추관(秋官) ·동관(冬官)으로 직제를 나누고, 각 관 아래에 속관을 두어 388관이 된다. 중국 역대의 관제는 이것을 규범으로 삼은 것이 많다. 한국에서는 고려 예종 때에 구인재(求仁齋)에서 주요 유교경전으로 가르쳤으며, 조선 세종 때에 단행본으로 간행되어 일반에 보급되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
주자가 유가(儒家)의 예법의장(禮法儀章)에 관하여 상술한 책.
구분 : 유가의 예법의장서
저자 : 주자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한다. 5권. 부록 1권. 그러나 이것은 후인(後人)의 의탁(依托)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에 전해진 《주자가례》는 명(明)나라 성화(成化)연간에 구준(丘濬)이 위의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여기에 의절고증(儀節考證)·잡록(雜錄)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으로 만든 것이 고려 말기 주자학과 함께 전래되었다.
관(冠)·혼(婚)·상(喪)·제(祭)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로서의 이 《주자가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확립되면서 그 준행(遵行)이 강요되어 처음에는 왕가와 조정 중신에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으로, 다시 일반서민에까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루어진 이 가례가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아 많은 예송(禮訟)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주자학과 함께 조선이 세계문물에 뒤지는 낙후성(落後性)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예학(禮學)과 예학파의 대두는 예와 효(孝)를 숭상하는 한국의 가족제도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주자대전 [朱子大全]
중국 송대(宋代)의 성리학자 회암(晦庵) 주희(朱熹)의 문집.
구분 : 목판본
저자 : 주희
시대 : 1165년(중국 송)
목판본(木板本). 본편 100권, 별집 11권, 속집 10권. 책의 크기는 24.8 X18.4cm, 10행 22자. 1771년 간사(刊寫)되었는데, 간사지 및 간사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회암선생주문공문집(晦庵先生朱文公文集)》 《주자문집》 《주자문집대전》이라고도 한다. 저자가 일생을 두고 저작한 모든 학설을 주로 하고 여러 학자들의 질의(質疑)에 대해 회답한 편지들과 시(詩) ·기(記) ·명(銘) ·비문(碑文) ·묘지(墓誌) 등 문예에 관한 저작들을 함께 모은 방대한 저작이다. 주희 사후 그의 문인(門人)들이 편찬한 것으로, 본편 100권은 보존되어 오던 것을 모은 것이고, 별집 11권은 그의 문인 여사로(餘思魯)가 모은 것인데, 속집 10권은 누구의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것들을 모아 완전히 편찬한 것은 송 도종(度宗) 함순(咸淳) 원년(1165)이며 저자의 후손 옥(玉)이 교정하여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는 이름으로간행하였다.
본서의 별집 다음에 있는 유집(遺集) 2권은 1771년(영조 47) 본서를 간행할 때저자의 시문 중 흩어져 있는 것들을 모아 우리나라에서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부록(附錄) 12권에는 도통원류(道通源流), 세계원류(世系源流), 부사유언(父師遺言), 유상(遺像), 송사본전(宋史本傳), 문인서술(門人敍述), 제문(祭文), 행장(行狀), 연보원본(年譜原本), 연보별본(年譜別本), 택사서원정방(宅祠書院亭坊), 사원기제(祠院記題), 제편서발(諸編序跋), 편저서목(編著書目), 묵적유기(墨蹟類記), 제명록(題名錄), 당금록(黨禁錄), 변무록(辯誣錄) 등 저자에 관한 후인들의 문장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1543년(중종 38)에 이미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바 있고, 1575년(선조 8)에도 역시 을해자로 간행하였으며, 그 뒤 각 지방에서도 몇 번 간행한 적이 있다. 비록 후기의 지방간본(地方刊本)이긴 하지만 ‘만기(萬機)’, ‘홍제(弘薺)’라는 정조의 인기(印記)가 있어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나라에서도 《주자대전차의》 등 《주자대전》의 주석서가 여러 편 편찬되었다.
주자어류 [朱子語類]
주자의 어록을 집대성한 책.
구분 : 주자의 어록을 집대성한 책
저자 : 여정덕
시대 : 중국 남송(1270)
정식명칭은 《주자어류대전(朱子語類大全)》이다. 140권. 1270년 간행. 중국 남송(南宋)의 주자학자 여정덕(黎靖德)이 편찬하였다. 같은 이름의 책이 몇 종류 있으나 여정덕의 편찬으로 된 이 책이 가장 많이 알려졌다.
내용은 주자와 문인 사이에 행하여진 문답의 기록을 분류 ·편찬한 것으로 100명이 넘는 기록을 모았다. 주자의 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문헌이나 주자의 설과 모순되는 대목도 적지 않다. 문인들에 의한 이런 종류의 책은 주자가 죽은 후 11∼12년이 경과하여 나오기 시작하였다. 《주자어록》(1215) 《주자어속록》(1238) 등이 그것이며, 황토의(黃土毅) 편찬의 《주자어류》(1220)는 이 책의 선구적인 체재를 갖춘 것이다. 그 밖에 《주자어속류》(1252) 《주자어류대전》(1603) 등 많은 어류가 있다.
중국사상 [中國思想]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전개된 사상의 전체.
이것이 특히 문제시되는 것은 그 발상(發祥)이 고대 그리스나 인도와 같이, 극히 오랜 옛날부터 독자성을 가진 전통을 형성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 제국(諸國)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특수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중국철학이라는 명칭으로 연구대상이 되나 그 실태는 전통사상에 치중하고 있어, 현대 중국연구는 별도로 행해지기도 한다.
1. 사상의 성격
일반적으로 중국사상은 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사고(思考)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현실의 실재세계에서 뚜렷하게 분별하는 관념철학으로서의 사고는 부족하다. 예컨대유교사상과 노장(老莊)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전통사상으로서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유교에서 말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과 정치를 중심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현실과 밀착된 형태에서 사고하였다. 노장에서는 현실의 근저에 있는 도(道) 사상이나 정치사회 밖으로 나가는 은일(隱逸) 사상 등을 보면 마치 초월적인 사고가 행해지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역시 개인생활의 평안이라는 현실적인 관심이 중심을 이루었다.
인도에서 전해 온 불교도 그 진여(眞如)의 세계가 본래의 순수한 형태로서보다는 ‘입처즉진(立處卽眞:현실세계가 그대로 진실세계)’이라는 형태로 이해되었다는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이 현실주의적 경향은 실은 일반적인 감각중시의 입장에서 온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확실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추상적 사고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거부되었다. 이 감각중시의 입장은 과학적 ·유물론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였다. 개체(個體)의 객관적 관찰보다는 다양한 현상의 형식적 종합을 추구하는 경향이 한편으로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강한 감각중시의 경향은 현상의 다양과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약을 갈구했을지도 모른다. 음양(陰陽) ·오행(五行:木 ·火 ·土 ·金 ·水)에 의한 우주론과 그 밖의 정리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형식 또는 원칙의 존중이라는 경향이 생겨난다. 유교에서의 예(禮)의 존중이 바로 그것이다.
잡다한 현상을 잡다한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면 그 잡다한 현상에 관한 통일의 원리를 추구함직도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가기보다는 형식적 원리에 의한 질서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 질서원리와 현실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그것은 그것대로 허용된다. 원칙은 원칙으로서 중요하지만,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관용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이른바 ‘중용(中庸)’의 사상, 현실에서의 조화(調和) 존중의 사상과 연결된다. 중국사상의 현실주의적 경향을 주축으로 한 성격규정은 이상과 같으며 이러한 사상에서는 신과 악마,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절대적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자(絶對者)와 개체,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원래 인생론적이고 조화의 철학이며, 예술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중국사상에서는 ‘천(天) 사상’도 중요하다.
천은 자연 그 자체라고 생각되었고 권위 있는 명령자 ·통솔자로 생각되었으며, 또한 우주와 인생을 관찰하는 이상적인 질서원리로 생각되었고, 운명을 좌우하는 근원자(根源者)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존재로서의 천과 사람의 깊은 관련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국사상의 주류를 차지하는 정통적 경향이다. 이에 대하여, 천을 자연 그 자체로 보고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단적(異端的) 사상이다. 이단사상은 각 시대를통하여 그 나름대로 강세를 보였지만 정통사상의 광범한 보급에는 결국 미치지 못하였다. 인생론적인 중국사상은 인간의 현실생활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하면서도 인간존재의 유한성(有限性)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역사적 변천
중국 사상사의 시대구분은 4기(期)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주초(周初)에서 한초(漢初)까지(BC 21∼BC 2세기)로 황허문명[黃河文明]의 정신문화가 순조로운 발달을 이루어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 만개(滿開)했던 시대이다. 제2기는 한왕조(漢王朝)의 체제가 확립되어 당말(唐末) 5대까지(BC 2∼AD 10세기)로 왕조체제와 결부된 유교의 권위가 확립되고 마침내 고정화되면서 불교와 도교(道敎)가 대두하게 된다. 제3기는 송초(宋初)에서 청말(淸末)까지(10∼19세기)로 유교가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생명을 찾은 시대이다. 송학(宋學) 즉 주자학(朱子學)과 명학(明學) 즉 양명학(陽明學)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시대이다. 제4기는 청말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세계의 충격에 의해 전통사상이 근본적 변혁을 강요당하게 된다.
2.1 고대
중국사상이 그 후의 전통과 같은 관계를 가진 것으로서 처음으로 분명해진 것은 주왕조(周王朝) 초기부터이다. 그 이전의 은대(殷代)의 사상은 그 종교적인 상황을 다소 엿볼 수는 있지만,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조상신(祖上神)이나 잡다한 자연신(自然神)을 중심으로 하여 제(帝)라고 하는 최고의 인격신(人格神)이 있어, 그것이 주초(周初)의 천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은나라 대신 들어선 주나라 사람들은 그 왕조 교대라는 사실을 단순한 무력(武力)의 제압이라 생각하지 않고, 천명(天命)에 의한 것으로, 그 근원은 백성을 평안케 하는 왕자(王者)의 덕(德)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경우 천은 그래도 종교적 ·초월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덕이라는 인간 문제에 치중하여 생각하는 점에 이미 중국사상의 두드러진 특색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 종교의례를 인간적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상응하는 것으로 마침내 춘추(春秋) 말기의 공자의 유교가 탄생하였다.
공자도 또한 천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의 내면의 윤리적인 문제로서 공자 자신의 한계상황에서 말한 것이어서 주초에서처럼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니었다. 공자의 최대 관심은 인간세계의 새로운 질서 수립에 있었다. 춘추시대까지의 사회는 혈연적 일족(一族)으로 지켜진 세습적 영주(領主)가 중심이 되었으나, 말기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 해체되기 시작하여, 경지(耕地)와 농민을 확보한 새로운 지주세력이 옛 영주를 뒤엎는, 이른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가 되었다. 이 세력은 일반 민중의 대두를 촉진하고, 따라서 활발한 사상의 개화(開花)를 위한 토양이 형성되었다. 공자는 우선 이 혼란한 사회를 혈연의 연대의식에서 배운 새로운 도덕질서에 의해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인(仁)의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공자에 이어 나타난 묵자(墨子)는 겸애교리(兼愛交利) 즉 나의 몸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상을 내세워, 유교의 인이 가족애(家族愛)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임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주관적 측면을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묵가(墨家)와 대항하기 위해 인과 함께 의(義)의 덕을 강조하여 사랑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인간 본성을 선(善)한 것[性善說]이라 하여 윤리의 내면적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펴 유교의 정비를 이루었다. 같은 무렵 이러한 현실적 입장에서, 인간만을 관찰하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현상의 안쪽을 주시(注視)하고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을 보려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이 나타났다. 세속을 초월한 입장에서 현실을 고쳐봄으로써 정신의 평안과 사태의 처리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그 중심은 도의 자연성과 통일성의 강조였다. 유가(儒家)의순자(荀子)는 이에 반발함으로써 같은 유가의 맹자와 대립되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는 선이란 인간의 작위(作爲)이다.
내면의 자연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이 제정한 외적 ·객관적인 예제(禮制)를 좇아야 한다 하고, 인간본성은 악(惡)이라 하였다[性惡說]. 그러면서도 인간의 지능을 속박하는 천은 부정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예(禮)의 강조는 앞으로 올 통일제국(統一帝國)의 이론으로서 준비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한비(韓非)의 법가사상(法家思想)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목적과 합치하였다. 그것은 엄격한 상벌(賞罰)에 의해 객관적 ·형식적인 법의통계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강한 인간불신(人間不信)을 바탕으로 한 지배의 철학이었다. 순자의 예사상과 한비의 법사상으로 통일제국의 이론적 준비는 끝났다.
2.2 중세
한제국(漢帝國)의 지배이론은 동중서(董仲舒)의 유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신비적인 음양사상과 결부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었다. 인간계의 사건과 자연계의 변이(變異)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어 천의(天意)가 거기에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천명(天命)을 받은 왕권을 수식하였다. 유교는 여기에 신비적인 색채를 가하여 한왕조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화(化)한 사상은 부질없이 신비적 ·미신적 경향을 조장하였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사적(意思的)인 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를 기(氣)의 운행에 의한 물리적 자연이라 생각하여 미신타파에 노력하였으나 그 비판적 합리주의는 개인의 운명을 인정하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도 미미하였다. 그러나 후한의 정치권력이 붕괴되자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노장사상이 번성하게 된다.
3∼4세기의 위(魏) ·진(晉) 시대에는 유교적인 예교(禮敎)에 얽매인 신사를 이[功]에 비유하거나 사관(仕官)을 떳떳치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높아,유교의 성격도 한대(漢代)와는 다른 자유롭고 절충적인 것이 되었다. 노장의 도사상은 마침내불교의 이해를 도와 특히 반야(般若)의 공사상(空思想)에 관한 깊은 철리(哲理)를 깨닫게 되어 현실적인 중국사상도 이 인도사상과의 교류로 더욱 폭을 넓히고 심화되었다. 그러나 인도의사변적(思辨的) ·피안적(彼岸的) 불교는 끝내 주류가 되지 못하고, 수(隋)·당(唐)에 와서 성립된 천태(天台) ·화엄(華嚴) ·선(禪), 그 밖에 중국불교의 제파(諸派)는 모두가 피안보다 현실을, 번잡한 것보다 간이직절(簡易直截)한 것을, 사변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중국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불교의 형성과정을 모방하여 노자를 조사(祖師)로 하는 도교가 민간의 미신을 포섭하여 성립되었으나, 종교사상으로서는 저속한 것이었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사상적으로는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당말(唐末)에 와서 한유(韓愈)가 이러한 풍조에 반대하여 유교의 복고적(復古的) 혁신운동을 주장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송학(宋學)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2.3 근세
송대(宋代)에는 정치의 중심적 담당자가 세습적인 귀족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으로 과거에 급제한 신흥(新興) 인재들이었다. 사상계가 활발해진 것은 이런 사실과 관계가 있다. 당나라 한유도 이러한 신흥 인재였다. 여기서는 불교의 철리에 대항하여 유교의 입장에서 새로운 인생철학을 확립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고, 그것은 송학 또는 이학(理學)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 그리고 장횡거(張橫渠) 등의 사상가에 의해 이(理)의 철학, 기(氣)의 철학 또는 화엄(華嚴)의 철학을 응용한 근본의 이와 현상을 일치시킨 철학 등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입각한인생철학, 특히 심성(心性)의 이론이 발전하여, 그것들이 마침내 주자(朱子)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주자학(朱子學)으로, 우주 존재의 근본은 태극(太極)으로서의 이(理)라는 설이다. 그러나 존재가 현상(現象)하기 위해서는 기(氣)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세계는 이와 기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인간에 있어 이는 본연의 성(性)으로서 선(善) 그 자체이지만, 기는 그 물질성에 의해 정욕(情欲)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이 인욕(人欲)을 누르고 천리(天理)를 발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 심성을 가다듬어 내성(內省)하는 동시에 내외를 관철하는 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계의 사물 하나하나에 관한 이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 방법을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자학의 흐름 외에 북송의 구양 수(歐陽修)의 실증주의나 왕안석(王安石), 남송(南宋)의 영가학파(永嘉學派) 등에서 볼 수 있는 실리적 공리주의 사상 등도 있었으나, 송대는 대체로 보아 존재의 근원과 심성의 본질을 생각하는 내성적 ·사변적 사상이 지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학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육상산(陸象山)의 심학(心學)이 있다. 그 사상은 마침내 명대(明代) 중기의 왕양명에게서 완성되었다. 주자에게서는 이가 외계의 사물에도 객관적으로 널리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왕양명에게서는 심(心)이 바로 이(理)로서 심 외에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을 인지(認知)함으로써 이가 생겨난다. 뿐만 아니라 그 지(知)는 행(行), 즉 체험을 통해서만 확실해진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자학의 형식화에 따른 사회나 정치의 질서 원리로서만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이의 성격을 바꾸어 자유로운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양지(良知)를 이루다’ 즉 본래적인 심정을 충분히 발휘하는 일, 그러기 위해 ‘사상(事上)에서 마련(磨練)한다’고 하는 수양론(修養論)에 의해 양명학은 완성되었다. 명말(明末)이 되면서 이 주관적 경향은 한층 심해져 이탁오(李卓吾)처럼 인욕(人欲)을 긍정하고 거짓 없고 솔직한 동심(童心)을 존중하여 기성질서에 반역하는 사상도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양명학의 실천적 면을 이어받아 17세기 명말 청초(明末淸初)에는 일종의 실학적 경향이 활발하였다. 황종희(黃宗羲)나 고염무(顧炎武)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 경향은 청조(淸朝)의 한인(漢人) 압박으로 세력을 잃고 훈고고증(訓뭍考證)의 학술로 바뀌어 사상계에서는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2.4 근대
중국은 아편전쟁(1841∼1842)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사상계에서 그것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은 공양학파(公羊學派) 사람들이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이론을 재생시킴으로써 어려운 시국에 대처하는 개혁사상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이른바 변격이론(變格理論)으로서 청일전쟁(淸日戰爭:1894∼1895) 후의 캉유웨이[康有爲]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침입은 한편 중국의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문물을 이용함으로써 복리를 얻으려고 하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을 일으켰는데, 또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사상을 고양하여 멸만흥한(滅滿興漢)의, 혁명사상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하여 오랜 왕조체제에서 민국(民國)으로 전환하는 신해혁명(辛亥革命:1911∼1912)을 맞이하게 되며, 그 지도자 쑨원[孫文]은 최초의 서양적 사상가이다. 그의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확실히 데모크라시의 이론을 주축으로 한다. 이러한 데모크라시와 사이언스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중국사상은 봉건적 사상이라 하여 이제 통렬한 비판대상이 되었다. 5 ·4운동(1919)의 문화혁명 시기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마오쩌둥[毛澤東] 이 후의 상황은 얼핏 보기에 전통적인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위에서 말한 역사를 돌이켜 보고 그 사상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 사상은 지금도 강하게 존속하며, 또한 미래에도 존속할 것이다.
중용 [中庸]
중국 유교 경전의 하나.
구분 : 유교 경전
저자 : 자사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 알려졌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있는 <중용편(中庸篇)> 이 송(宋)나라 때 단행본이 된 것으로,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불리고 있으며, 송학(宋學)의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여기서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庸’이란 평상(平常)을 뜻한다.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이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다. 이 궁리를 교(敎)라고 한다. 《중용》은 요컨대 이 궁리를 연구한 책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誠)일진대, 사람은어떻게 하여 이 성으로 돌아가는가를 규명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주자(朱子)는 《중용장구(中庸章句)》라고 하는 주석서(注釋書)를 지었는데, 여기서 주자는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을 위해 《중용》을 썼다고 말하였다.
중용론 [中庸論]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적인 사상의 하나로서 덕(德)은 과잉과 과소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에 존재한다는 설.
예를 들면, 쾌락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방탕과 무감각이지만 그 중간에는 절제(節制)의 덕이 있다. 또한 금전의 수수(授受)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낭비와 인색에 있지만 그 중간에는 대도(大度)의 덕이 있다. 여러 가지 덕목(德目) 중에서 그 중간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은 양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양적(量的)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 극단은 ‘적당한 정도(程度)’로서의 중간을 기준으로 하여 그 곳으로부터의 일탈(逸脫)로서 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적당한 정도는 행위자인 인간의 존재에 의거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중용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있어 한층 원리적인 존재론(存在論)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개념을 초과와 부족에 대한 균제(均齊)라 하고 또 산술적인 비례중항(比例中項)으로 대표되는 것과 같은 사항 그 자체에서의 중용과, ‘우리들(지식층)에게서의 중용’으로 구별하여 후자를 윤리적인 덕의 본질적 속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중용을 본성(本性)으로 하고 최선(最善)으로 하는 덕(진실)에 대하여는 초과(진실에 대한 虛飾)도 부족(卑下)도 악덕(惡德)이 된다.
중체서용론 [中體西用論]
청(淸)나라 때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이후 일어난 양무(洋務) 운동의 기본사상.
청왕조 말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이 주도한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이운동의 기본사상은, 중국의 전통적 유교도덕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의 과학기술과 그 성과를 도입, 강화해 가는 것으로서 ‘중국의 학문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학문을 용(用)으로 한다’는 것이 ‘중체서용론’이다. 청일전쟁이 그 빛을 잃은 이후에도 장지동(張之洞)은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당시의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을 비판한 《권학편(勸學篇)》을 써서 ‘중체서용론’을 내세워 국민에게 강한 이념을 심어주었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중국 명대(明代) 중기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지식과 행위에 관한 근본 명제.
주자(朱子)나 육상산(陸象山) 등이 주장한 ‘선지후행(先知後行)’설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그 후 왕양명의 중심적 주장으로 간주되었다. 이 명제는 흔히 지식[知]과 행위[行]가 분열되어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알면 반드시 행하고 지행을 합일시켜야 한다는 당위(當爲)를 뜻하는 실천강조의 명제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그의 ‘심즉리(心卽理)’설의 논리를 지식과 행위라는 도덕의 영역으로 연역(演繹)한 것으로서 단순한 실천강조론이라기보다는 깊은 철학적 논리인 것이다. ‘심즉리’설에서는 이(理) 또는 양지(良知)는 처음부터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계(外界)로부터 지식의 획득은 필요치 않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즉 우선 규범[知]을 알지 못하는 행위의 타당성은 보증할 수 없다는 ‘선지후행’설에는 반대이며, 규범은 이미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행위는 그 표현에 지나지 않고 양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인 것이다.
왕양명은 이와 같은 지(知)를 또한 ‘진지(眞知)’라고도 불렀으며 지(知)가 ‘진지’가되지 못하고 지행(知行)이 분열되는 것은 ‘사욕(私慾)’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현실적으로 지행합일의 필요조건으로서 ‘사욕’의 배제를 들었다. 이 때 지행합일의 문제는 당연히 풀리는 것이다.
직하지학 [稷下之學]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도읍의 서문(西門)인 직문(稷門) 근처에 모인 학자들의 학문.
전국시대에는 각국의 유력한 왕후(王侯)들이 많은 학자와 유세가(遊說家)들을 고용하여 문운(文運)이 크게 일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장관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전국 7웅(七雄)의 하나인 제나라에서는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때부터 양왕(襄王) 때에 걸쳐서(BC 4세기 중엽∼BC 3세기 중엽), 때로는 수백 명에 이르는 제자(諸子)가 모여들어 서로 논진을 폈기 때문에, 그 당시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이 토론하던 곳이 직문 옆의 학궁(學宮)이었으므로 직하지학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곳에는 맹자(孟子)를 비롯하여 추연(騶衍) ·순우 곤(淳于멎) ·신도(愼到) ·전변(田폿) ·추석(騶奭) 등 각국의 선비들이 출입하였으며, 모두 상대부(上大夫)의 녹을 받았다고 한다. 또 순경(荀卿)도 직하지학의 장로가 되었다 한다.
천 [天]
중국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우주 운행을 관장하는 원리.
각 시대의 철학사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자 그대로 하늘이며, 천지라는 말로 자연계를 나타내듯이 그러한 자연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지만, 거기에 의지적인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합리적인 이법성(理法性)을 인식하였다. 때로는 신비로운 불가지(不可知)의 존재로서 운명의 근거로 삼기도 함으로써,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중요한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은왕조(殷王朝)를 타도한 주(周)나라 사람들이 왕조교체를 천명에 의한 것이라 선전한 것이 ‘천’의 개념의 시초이며, 아마도 이는 오랜 천신신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천’을 최고의 궁극적 결정자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그 후 공자(孔子)는 자신의 종교적 심성으로 ‘천’을 숭배 ·경외하였으며, 이를 윤리의 근원으로 삼았다.‘천’은 여의치 않은 운명으로 인간능력을 제약하는 동시에, 이로써 인간존재를 보증하며, 특히 인간의 도덕활동을 강하게 지지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오래도록 유지되어 나가는데, 공자의 ‘천’ 숭배는 공자 자신의 내면적 문제였고, 또 유교윤리를 지키는 근원이었으나, 공자는 ‘천’ 숭배를 사람들에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공자의 유교가 종교로 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노장(老莊) 사상에서는 ‘천’이 윤리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으며, 자연으로만 파악되었다. 그러나 그자연성에 이념적인 가치를 찾아내고, 거기에 명합(冥合)하는 것을 인간생활의 이상으로 여긴 점에서는, 역시 ‘천’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중국사상의 주류는 ‘천’을 근거로 하고 모범으로 삼는 ‘천’과 ‘인(人)’의 합일사상이었다. ‘천’을 우위에 두는 이러한 천인합일의 사상은 한대(漢代) 이후 정치사상으로서 완성된다. 한대에서 ‘천’은 신비적인 존재로서, ‘천’의 아들인 천자(天子)의 절대적 권위를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정치를 감시하고 정치의 선악에 따라서 서조(瑞兆)와 재이(災異)를 내린다고 생각하였다.
송대(宋代)에는 이러한 미신적 신비성은 거의 없어지고,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되는 새 유학에서는 ‘천’을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중심인 궁극절대(窮極絶對)의 이치와 결부시켜 설명하고있다. 즉 천리(天理)라는 말은 이를 함축한 것이다. 이는 윤리적으로는 인욕(人慾)과 대조되는 것으로, ‘인욕을 억눌러 천리로 돌아감’을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라고 여겼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정치적으로는 천자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사상에서 ‘천’은 백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에 대한 백성의 반항을 도와주는 ‘천’도 있다. ‘천’을 대신하여 주벌(誅罰)한다는 반란의 구호는 이를 의미한다. ‘천’은 원래 왕조의 교체를 인정하는 존재이며, 따라서현재의 왕조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덕하고 나쁜 권력자는 ‘천’의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구호가 생긴 이유이다.‘천’은 여기서는 소박하기는 해도 건강한 생명을 전한다. 다만 여기서도 ‘천’이 불가지의 존재로서 일종의 초월성을 가지고 사람 위에 군림하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천’을 부정하는 사상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사상은 순자(荀子)로부터 시작되어 각 시대로 흩어졌으며, ‘천’을 단순한 자연으로서만 파악하려고 했다. 이는 중국사상의 역사에서는 이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천’을 자연으로서 추방할 뿐이지, 사상가들이 이를 자연으로서 탐구하려는 자세는 대체로 미흡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천’을 보편적 ·초월적 존재로 보고천자가 전하를 통치한다는 사상은 옛 중국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이것이 중국인의 정신생활을 강하게 규정하였다.
천명 [天命]
중국 사상, 특히 유가(儒家)의 중요한 관념.
단순히 ‘명(命)’이라고도 한다.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령에 따라 땅위의 성현(聖賢)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정치사상으로 유교에서 나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논의를 거쳐 정치원리(政治原理)가 되었다.
전의(轉義)하여 운명과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인생의 종국은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고, 결국은 하늘의 명령에 따르게 되는 것을 깨닫는 도리밖에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논어(論語)》에 ‘오십에 천명을 안다(五十而知天命)’ ‘우리를 아는 것은 하늘인가’라는 말을 비롯하여 ‘사람의 할 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盡人事而待天命)’는 말이 있다.
천연론 [天演論]
청조(淸朝) 말기의 사상가 옌푸[嚴復]가 줄리언 헉슬리의 저술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번역하여 여기에 해설(解說)을 가한 책.
구분 : 번역서
저자 : 옌푸
시대 : 중국 청조 말기
그 해설에는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스펜서, J.로크, D.흄, R.데카르트, I.칸트 등의 학설이 여기저기 인용되어 청말(淸末) 동란기(動亂期) 중국인 사상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다.
천연(天演)이란 인간을 포함한 지상(地上)의 생물은 무형(無形)의 경쟁을 계속하여 저절로 진화(進化)한다는 뜻이다.
체용 [體用]
사물(事物)의 본체와 작용 ·현상(現象).
중국의 송 ·명학(宋明學)에서 사용되는 철학용어. 체는 본체적 존재로 형이상적(形而上的) 세계에 속하고, 용은 그것의 자기 한정적인 작용 및 현상으로 형이하적(形而下的)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양자는 표리일체(表裏一體)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체를 떠나 용이 있을 수 없고 또 용이 없다면 체는 생각할 수 없다. 정이(程燎)가 주장하는 우주의 근본으로서의 이(理)와 그 발로(發露)로서의 사상(事象), 장재(張載)의 태극(太極)과 기(氣), 주자(朱子)가 말하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갖추어진 성(性)과 그것이 외면(外面)에 나타난 정(情)과의 관계 등은 모두 체용의 개념이다.
태극 [太極]
중국 고대의 사상으로, 만물이 생성 전개되는 근원.
음양(陰陽)의 이기(二氣)가 태극의 일원(一元)에서 생성했다고 하는 사상은《주역(周易)》의 〈계사상(繫辭上)〉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태극을 일원으로 보는 사상은 진한(秦漢) 때의 제서(諸書)에서 볼 수 있으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대악편(大樂篇)〉에는 음악의 근원을 태일(太一)에 있다 하고, 이 태일에서 양의(兩儀)와 음양이 생성한다고 풀이하였다. 또한 《예기(禮記)》의 〈예운편(禮運篇)〉에는 예의 근원을 대일(大一)에 있다 하고, 이 대일에서 천지·음양·사시(四時)가 생성한다고 하였다. 《순자(荀子)》의 〈예론편(禮論篇)〉에 나오는 것은 《예기》와 마찬가지여서, 중국 고대의 전통사상에서는 만물이 생성 전개하는 근원을 일원으로 보고, 이것을 태일·대일·태극 등으로 일컬었으며, 이 일원에서 이기·오행(五行)·만물이 화생(化生)한다고 설명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태일사상이 가장 오래되었고, 태극사상은 후에 정리되어 역사상(易思想)에 도입되었다.
태을 [太乙]
중국 고대사상으로 천지만물의 출현 또는 성립의 근원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
태일(太一:泰一)이라고도 한다. 도교(道敎)에서는 천제가 상거(常居)한다고 믿는 태일성(太一星:北極星)을 말한다. 또 음양도(陰陽道)에서는 해와 달은 1년에 12번 서로 만나며 그 중 7월에 만나는 곳이 태을로 사방위(巳方位)에 해당된다.
태허 [太虛]
중국 사상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로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장자(莊子)》의 〈지북유편(知北遊篇)〉에 있는 말로 역(易)의 '태극(太極)'과 거의 같은 말로 천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무형(無形)의 도(道)의 뜻으로 사용된다.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라 불렀다.
'태허'가 기의 본체를 가리킨다고 한 사람은 송(宋)의 장횡거(張橫渠)로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라 하고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한학 [漢學]
한국에서 흔히 국학(國學)이나 양학(洋學)에 대한 한문학, 즉 중국학의 뜻.
원래 송학(宋學)에 대한 한대(漢代)의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시(漢詩)를 포함하지 않는 윤리도덕적인 학문으로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한 여러 경서와 제자(諸子)의 학이었으나 오경을 중심으로 한 경서만의 학문을 특히 유학(儒學)이라 부르게 되자 후에는 유학이 한학과 동의어로 쓰일 때도 있었다. 한학과 한시를 합쳐 부를 때는 한문학이라 한다.
혁명설 [革命說]
중국에서 왕조의 교체와 정치의 개혁을 설명, 예언하기 위하여 고안된 학설.
처음 맹자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이론을 세워 오랫동안 중국 정치사상을 지배하였으며,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왕조의 교체를 오행(五行)의 순환에 따라 설명한 오행설이다. 여기에는 화(火) → 수(水) → 토(土) → 목(木) → 금(金)으로 후자가 전자를 이기는 원칙에 입각한 오행상극설(五行相剋說)과, 목 → 화 → 토 → 금 → 수로 후자가 전자에서 생(生)하는 원칙에 입각한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이 있다. 전한(前漢) 중기 이후에는 상생설이 보편화되어 각 왕조는 반드시 자신을 오행 중 어느 것에든 결부시켜서 천명(天命)의 왕조임을 선전하였다.
오행설 이외에도 문(文)과 질(質)의 2요소의 교체를 주장하는 것, 또는 흑(黑)·적(赤)·백(白) 3요소의 순환을 내세운 3통설(統說) 등도 있었다. 또 전한 말부터 참위사상(讖緯思想)의 발달에 따라 60년마다 돌아오는 신유년(辛酉年)에는 혁명(革命)이, 갑자년(甲子年)에는 혁령(革令)이, 무오년(戊午年)에는 혁운(革運)이 있다는 설이 신봉되어 이에 해당되는 해에는 개원(改元)으로 그것을 면하려고 하였다.
형이상 ·형이하 [形而上形而下]
주역의 계사전상(繫辭傳上) 중 형상(形象) 이전의 것인 도(道)와 형상 이후의 것인 기(器)에서 유래됨.
주역(周易)의 계사전상 중 "형상(形象) 이전의 것을 도(道)라고 한다", "형상 이후의 것을 기(器)라고 한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형이상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초월한 정신, 도를 가리키고 형이하는 형상을 가진 물질 또는 그런 속성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형이상은 사물이 형체를 갖기 이전의 근원적인 본모습이며, 형이하는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뜻한다. 송대(宋代)의주희(朱熹)는 "형이상자는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라고 하고 도를 이(理), 성(性)이라고 해석하였고 "형이하자는 실상도 있고 모양도있다"라고 하여 기를 기(氣)라고 해석하여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인간과 사물이 생성될 때 이(理)를 먼저 받은 후에 본성을 갖게 되고 기를 받은 후에 형태를 갖추게 된다고 하였다. 이전에는 형이상인 이가 형이하인 기보다 논리적으로 우선한다고 하였으나 이기의 관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이상적인 존재이고 기는 형이하적 존재로서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불리부잡(不離不雜)에 있지만 현상적 실재물에서는 이를 따라서 기가 있고 기를 떠나서 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기가 운동성을 갖는 데 반하여 이는 무위이고 기의 운동에 따르며 거기에 질서를 부여할 뿐이다.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는 이와 기로 해석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동시에 통합될 수 없는 관계로, 그 관계를 파악하는 이해방법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학설들의 전개와 발전이 이루어져 왔다.
훈고학 [訓詁學]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학문.
중국의 경서(經書) 연구로부터 일어났으며, 좁은 의미로는 한(漢) ·당(唐) 및 청대(淸代)의 훈고학을 일컫는다. ‘訓’은 언어라는 뜻, ‘뭍’는 옛 언어를 말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고전은 어려워지게 마련이지만, 특히 중국에서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 213∼BC 212) 사건과, 한초(漢楚)의 흥망(BC 209∼BC 202), 그리고 진(秦)에서 한초(漢初)에 걸쳐 한자(漢字)의 일대 변혁이 있어 짧은 기간 동안 문학상의 큰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한 시대 전의 서적을 읽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게 되어, 전한(前漢:BC 202∼AD 8)에서는 1경전문(一經專門)의 훈고학이 생겼다.
《시경(詩經)》의 〈모전(毛傳)〉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아(爾雅)》는 자전(字典)의 원시적인 것으로서 문자의 학문인 소학(小學)의 전문서이다. 후한(後漢:25∼220)에서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져 마융(馬融) ·정현(鄭玄) ·가규(賈逵) 등이 나타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한의 훈고학의 흐름은 삼국 ·육조(六朝)를 거쳐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칙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집하므로(640) 일단 큰 성과를 올렸다. 그 후 유심적(唯心的)경향이 강한 송학(宋學)의 유행으로 훈고학은 일시 쇠퇴하였으나 청(淸:1644∼1911)에 이르러는 서양과학의 영향도 받게 되어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이 일어났으며, 한학 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다.
청의 훈고학 특징은 《설문해자》를 기초로 하는 소학을 존중한 점에 있으며,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유월(兪荳)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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