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
서 동. 백제 성덕왕-법왕(579-599)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홀로 되어 집을 서울 남쪽 못가에 짓고 살았는데 못에 있는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며, 도량이 한없이 넓었다. 항상 마를 캐고 팔아서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왔다.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이내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번역
善化公主니믄
남 그으지 얼어두고
맛둥바알
바매 몰 안고가다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모든 신하들이 간청하여 공주를 먼 곳에 귀양보내게 되었다. 공주가 떠나려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였더니,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상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 하여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고 금을 모았는데 그것이 구릉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를 법상으로 하여 전, 탑, 낭, 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하였는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확실치 않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혜성가
융천사. 신라 진평왕(579-632)
제 5 거열랑, 제 6 실처랑(혹은 돌처랑이라 함), 제 7 보동랑 등 세 화랑이 금강산에 유람하려 했다. 그런데 혜성이 심대성을 범하는 일이 생기자 낭도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가지 않으려 했다. 그 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 부르자 혜성의 변괴가 없어지고 때마침 일본의 군대도 되돌아가 도리어 복이 되었다. 대왕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금강산에 보내어 유람하게 하였다. 노래는 이러하다.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遊鳥隱城叱肹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烽燒邪隱邊也
藪耶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叱所音叱彗叱只有叱故
해독
녜 새믌갓 乾達婆애
노론 잣할란 바라고
예ㅅ 軍두 옷다
燧살얀 갓 이슈라
三花애 오람보샤올 듣고
달두 바즈리 혀렬바애
길쁠 별 바라고
彗星여 살반여 사라미 잇다
아으 달 아래 떠갯더라
이 어우 므슴ㅅ 彗ㅅ기 이실꼬
[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옛날 동해 물가 ‘건달바가
놀던 성’일랑 바라보고
“왜군도 왔다!”고
봉화를 든 변방이 있어라!
세 화랑의 산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쓸 별을 바라보고
“혜성이여!” 사뢴 사람이 있구나!
아, 달은 저 아래로 떠갔더라
이 보아 무슨 혜성이 있을꼬
[삼국유사 권5 감통.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
풍요
노래 부른 이는 사녀. 신라 선덕여왕(632-647)
양지 스님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 없고, 오직 그 행적이 선덕왕 때에 보인다. 스님이 돌지팡이 끝에 베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알고 공양미를 넣어 자루가 차면 돌지팡이가 날아 절로 돌아왔으므로 석장사라 했다. 신기함이 대개 이러해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능통하여 신묘하기 비할 데 없었으며, 문장 또한 능숙하였다. 영묘사의 장육삼존, 천왕상과 전탑을 덮은 기와, 천왕사탑의 팔부신장,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의 금강신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고, 영묘사, 법림사의 액자도 썼다. 또한 일찍이 벽돌을 새겨 조그마한 탑을 만들고 불상 3천여 개를 만들어 그 탑에 봉안하여 절 안에 두고 예배했다. 영묘사 장육존상을 만들 때에는 스스로 마음을 모아 망상에서 벗어나는 경지로 대하며 불상을 빚었다. 이 때문에 장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풍요는 이러하다.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해독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
셔럽다 의내여
功德 닷가라 오다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모두 이것을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장육존상을 조성할 때의 경비로 곡식 2만 3천 7백석이 들었다(혹은 도금할 때 든 비용이라 한다). 평론하여말하건대, 스님은 재주가 많고 덕이 충만한 대방가(大方家)로서 지엽적 재주에 숨은 자라 하겠다. 찬을 하자면,
공양 뒤면 석장 짚고 뜰에서 노닐고
고요하면 화롯불에 전단향을 피운다
경을 읽고 끝낸 뒤 다른 일 없어
불상을 조성하고 합장하여 우러른다
[삼국유사 권4 의해. 양지사석]
원왕생가
광덕. 신라 문무왕(661-681)
문무왕 때에 불가의 도를 닦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광덕과 엄장이었다. 두 사람은 좋은 벗으로 항상 약속하기를 “누구나 먼저 극락세계로 가는 자는 꼭 서로 알리자.”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에 은거하여(혹은 황룡사에 서거방에 있다 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신 삼는 것으로 업을 삼고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남악에 짓고 농사일에 힘썼다.
하루는 석양이 붉게 물들고 소나무 그늘에 어둠이 깔릴 때 엄장의 창 밖에 서 “나는 벌써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둘러보니 구름 밖에 하늘의 풍악 소리 나고 빛이 땅에까지 뻗쳤다. 다음 날 광덕이 머물던 곳을 찾아가 보니 그가 과연 죽은 것이었다. 이에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하였다. 장사를 다 마치고 광덕의 아내에게 말하되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이제 나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그 처가 “좋다.”고 하였다. 곧 밤에 머물러 자다가 정을 통하려 하자, 그의 처가 듣지 않고 하는 말이 “스님이 정토를 구하는 것은 가히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하였다. 엄장이 놀라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해로울 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 “남편은 동거한 지 10여 년이었지만 일찍이 한 자리에 눕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추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만 생각하였습니다. 혹은 16관을 하여 관이 이루어지면 밝은 달이 문에 들어올 때 그 빛에 올라 바르게 하고 앉았습니다. 정성을 이만큼 하고서야 서방정토로 아니 가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저 천 리를 가는 자는 첫 걸음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스님의 관은 동으로 간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서방정토는 알 수 없겠습니다.”하였다.
엄장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나 원효법사에게 나아가 정성으로 정도의 길을 물었다. 원효는 쟁관법을 만들어 권유하였다. 엄장이 이에 몸을 깨끗히 하고 뉘우쳐 한마음으로 관을 닦아서 또한 서방 극락세계로 올라갔다. 쟁관법은 원효대사의 본전과 해동승전 중에 있다. 그 여자는 분황사의 종이었는데 바로 관음보살 십구응신 중의 하나다. 일찍이 광덕의 노래가 있었다.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
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邪 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해독
하 이뎨
西方장 가샤리고
無量壽佛前에
닏곰다가 고샤셔
다딤 기프샨 尊어 울워리
두손 모도호
願往生 願往生
그릴사 잇다 고샤셔
아으 이몸 기텨 두고
四十八大願 일고샬까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달님이여, 이제
서방까지 가셔서
무량수불 전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짐(誓)깊으신 부처를 우러러
두 손을 모아 올려
‘원왕생 원왕생’
그리는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 이 몸을 남겨 두고
사십팔대원을 이루실까
[삼국유사 권5 감통. 광덕 엄장]
모죽지랑가
득오곡. 신라 효소왕(692-702)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만랑의 낭도 중에 득오실(한편 득오곡이라고도 한다.)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날마다 나와 정진하고 있었는데 열흘이 되도록 보이지 않자 죽만랑이 그 어머니를 불러서 “그대의 아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어머니가 “당전으로 있는 모량부의 익선 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차출시켜 급히 달려가느라 미처 낭에게 하직 인사를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죽만랑은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거기에 갔다면 찾아갈 것이 없지만 이제 공적인 일로 갔으니 찾아가서 대접해야겠소.”하고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가지고 좌인(방언으로는 개질지라 하니 종을 말함이다.)을 데리고 갔다. 낭도 1백 37명도 모두 의례를 갖추어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 있느냐?”하고 묻자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대로 부역하고 있습니다.”하였다. 죽만랑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대접하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같이 돌아오려 하나 익선이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에서 조세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정을 아름답게 여기고 변통성이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생각하여 거둔 벼 30석을 주며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진절 사지가 타던 말과 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이가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한 짓을 씻어주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하여 숨어 버려 대신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동짓달 극히 추운 날 성 안의 못에다 목욕시켜 얼어 죽었다. 대왕이 듣고 어명으로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쫓아 버리고 다시는 공적 기관에 들이지 않았고, 승복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승려가 된 자가 있어도 큰 절에는 들지 못하게 하였다. 또 사람에게 일러 간진의 자손을 평정호의 자손(枰定戶孫)으로 삼아 특별히 표창하게 하였다. 원측법사는 해동의 큰 스님이지만 모량리 사람이므로 승직을 주지 않았다.
처음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가 되어서 장차 임명받은 곳으로 가려하니 때마침 삼한에 병란이 일어나 기병 3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고개의 길을 닦고 있어 공이 보고 찬미하였는데,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혁혁함을 좋게 여겨 서로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술종공이 부임지에 간 지 한 달이 되었는데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랍고 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었더니,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고 하였다. 돌아와 말하니 죽은 그 날이 꿈꾼 날과 같았다. 공이 생각하되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하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세웠다. 그 아내가 꿈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자라서 벼슬에 나아가 유신공과 함께 부원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무의 4대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다.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兒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해독
간봄 그리매
모것 우리 시름
아 나토샤온
즈 살쯈 디니져
눈 돌칠 이예
맛보디 지리
郞이여 그릴 녀올길
다봊 잘밤 이시리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간 봄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이 시름하는데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에 주름살 지려 하옵니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기회를 만드리라
죽지랑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까
[삼국유사 권2 기이. 효소왕대 죽지랑]
헌화가
노옹. 신라 성덕왕(702-737)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지금 명주) 태수로 가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옆에 병풍같은 바위 벽이 있어 바다에 맞닿았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옆 사람들에게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자 그 누구뇨?” 하니 모시는 사람들이 모두 “사람이 발 붙일 곳이 못 됩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 곁에 늙은 노인이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노래를 지어 바쳤으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다시 이틀 길을 가다가 바닷가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용이 홀연히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이 기절하여 땅을 쳐 보았지만 아무 방법이 없었다. 한 노인이 있다가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하였는데 지금 바다 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당장 이 경내의 백성을 불러서 노래를 부르며 몽둥이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바다에서 부인을 데리고 나와 바쳤다. 공은 부인에게 바닷 속의 사정을 물었다. 부인은 “칠보 궁전에 음식이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가 있고 깨끗하여 세상의 익히거나 삶은 음식이 아니더라.”하였다. 옷에도 향기가 배어 세상에서 맡는 향기가 아니었다. 수로의 자색과 용모가 절대가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에게 잡히었다. 여럿이 부른 해가의 가사는 이러하다.
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悖逆不出獻
入網捕掠燔之喫
번역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놓아라
남의 부녀 약탈한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약 거역하고 내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내어 구워 먹겠다
노인이 꽃을 바치며 부른 노래는 이러하다.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힐不喩慙肹伊賜等
花힐折叱可獻乎理音如
해독
딛배 바회
자온손 암쇼 노시고
나 안디 븟리샤
곶 것가 받리이다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자줏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받치오리다
[삼국유사 권2 기이. 수로부인]
원가
신충. 신라 효성왕 1(737)년
효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현명한 신하 신충과 궁중 뜰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며 말하였다. “다음 날 내가 결코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을 이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리다.” 하니 신충은 일어나 절을 했다. 몇 달이 지나 왕이 즉위하고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줄 때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못했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잣나무가 갑자기 누렇게 되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나무에서 노래를 찾아내어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일이 너무 복잡하고 바빠서 공신을 잊었구나.”하고 불러서 벼슬을 주었다.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物叱好支柏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모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後句亡
해독
자시
안 이우리 디매
너 엇뎨 니저 이신
울월던 치 겨샤온
그림제 녯 모샛
녈 믌결 애와티
라나
누리도 아쳐론 뎨여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뜰의 잣(栢)이
가을에 아니 이울어지매
너를 어찌 잊으리오?”하신
우러르던 낯이 계시온데
달 그림자가 옛 못(淵)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얼굴이야 바라보나
누리도 싫은지고!
(후구는 없어짐)
이로부터 두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경덕왕(효성왕의 아우) 22년 계묘에 신충이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악으로 들어가 두 번씩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산에 숨어 대왕에게 복을 바치겠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영정이 금당 뒷벽에 있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삼화상전에 보면 신충의 봉성사가 있는데 여기와는 서로 틀린다. 그러나 신문왕 때와 계산하면 경덕왕과는 이미 백여 년의 거리가 있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과거세의 인연이 있다 함은 이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잘 알아 밝혀야겠다.)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했다)이 일찍부터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출가하여 절을 지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 50이었다.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들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 장로라 하였다. 절에 살기 20년 만에 죽었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두 기록을 다 두어 의아한 점을 덜고자 한다. 찬을 하자면,
공명은 끝이 없고 귀밑머리 희어지니
임금의 사랑 많다 해도 평생에 바쁘구나
언덕 너머 산 그림자 꿈에 자주 그려
향화를 받들어 우리 임금 축복한다
[삼국유사 권5 피은. 신충 괘관]
도솔가, 제망매가
월명사. 신라 경덕왕(742-765)
경덕왕 19년 경자 4월 초하룻날에 해가 둘이 떠서 10여 일간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은 “인연 있는 스님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지으면 예방이 되리라.”하였다. 이에 조원전에 단을 깨끗이 모시고 청양루에 행차하여 인연 있는 스님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월명사가 천백사의 남쪽 길로 지나가므로 왕이 사람을 시켜 불러들여 단을 열고 계청을 지으라 명했다. 월명사는 “저는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오직 향가만 알고 범패 소리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왕은 “이미 인연 있는 스님으로 정하였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다.”고 하였다. 월명이 이에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가사는 이러하다.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해독
오 이에 散花 블어
고자 너는
고 命ㅅ 브리디
彌勒座主 뫼셔롸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오늘 이에 ‘산화’의 노래 불러
뿌리온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심부름하옵기에
미륵좌주를 모셔라!
시로 다시 풀어보면
청운에 한 떨기 꽃 던져 보냈네
은근히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
멀리 도솔천의 큰 선가(仙家)를 맞았네
지금 세속에선 이것을 산화가라 하나 잘못된 것이고 도솔가라 함이 마땅하다. 산화가는 따로 있으나 문장이 길어 싣지 못한다. 곧 두 해의 괴변이 사라져 왕이 가상히 여기고 차 달이는 기구 한 벌과 수정 염주 백 여덟 개를 주었다. 홀연 모습이 정결한 동자가 있어 무릎 꿇고 차와 구슬을 바치면서 서쪽의 작은 문에서 나왔다. 월명사는 궁중 안의 심부름하는 아이라 하고 왕은 대사의 시중을 드는 아이라 하였으나 서로 증거를 대보니 모두가 아니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추적하게 하였는데, 동자는 내원의 탑 속에 숨어 버리고 차와 구슬은 남쪽에 그려 놓은 미륵보살의 성상 앞에 놓여 있었다. 월명대사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이 지성(至聖)에게 밝게 가탁된 것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온 나라에서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고 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창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님을 위하여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추모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지전을 서쪽으로 날려보내 사라지게 했다. 노래는 이러하다.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해독
生死路
예 이샤매 저히고
나 가다 말ㅅ도
몯다 닏고 가닛고
어느 이른 먜
이에 저에 딜 닙다이
가재 나고
가논곧 모온뎌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 내
道닷가 기드리고다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해독
生死 길흔
이에 이샤매 머믓그리고,
나 가다 말ㅅ도
몯다 니르고 가닛고,
어느 이른 매
이에 뎌에 러딜 닙,
가지라 나고
가논 곧 모론뎌.
아야 彌陀刹아 맛보올 나
道 닷가 기드리고다.
[金完鎭, 鄕歌解讀法硏究, 서울대학교出版部, 1991.]
번역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가노라”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질 나뭇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이 항상 사천왕사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문 앞 큰 길에서 피리를 불며 지나가자 달님이 그 소리에 수레를 멈추었다. 그 때문에 그 길을 월명리라 했고 월명사도 이로 인해서 이름이 났다. 월명사는 능준대사의 문하인이다. 신라에서 향가를 숭상하는 이가 많았는데 대개 시나 송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둘이 아니다. 찬을 하면,
바람이 돈을 날려 떠나간 누이에게 보내고
피리 소리 밝은 달을 흔들어 항아를 머물게 했다
도솔천이 멀다고 말하지 말라
큰 스님 꽃 한 가지 한 곡의 노래로 맞았네
[삼국유사 권5 감통. 월명사 도솔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충담사. 신라 경덕왕(742-765)
(앞 부분에 빠진 부분이 있음) 덕경 등을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재위한 것이 24년간이었고 오악(五岳)이나 삼산(三山)의 신(神)들이 때때로 궁전 뜰에 나타나 모시기도 하였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문루에 행차하셔서 좌우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누가 나가서 영복한 스님을 얻어 오겠느냐?”하였다. 마침 큰 스님 한 분이 위풍이 정결하고 당당하게 지나가자 좌우 신하들이 모셔다 뵙게 하였다. 왕은 “내가 말하는 영복한 스님이 아니다.” 하고 보내었다. 다시 한 스님이 헤어진 장삼을 입고 앵통을 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이 기뻐하여 문루 위로 맞아들이고 통 속을 보니 차 달이는 기구를 담았을 뿐이었다. “네가 누구냐?”고 묻자 “충담입니다.”하였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하니 “소승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오늘도 벌써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하였다.왕이 “과인에게도 한 잔 나눌 수 있느냐?”고 묻자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차 맛이 특이하고 그릇에서도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은 “짐이 듣건대 대사가 기파랑을 기려서 사뇌가를 지었고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고 묻자 “그렇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노래를 짓도록 하라.” 월명사는 곧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가상히 여겨 왕사를 봉하려 하니 재배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遺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해독
君은 어비여
臣은 샬 어여
民 얼아고 샬디
民이 알고다
구믈ㅅ다히 살손 物生
이흘 머기 다라
이 리곡 어듸갈뎌 디
나라악 디니디 알고다
아으 君다이 臣다이 民다이
나라악 太平니잇다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 아이로다!’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이
이를 먹어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시렵니까?’ 한다면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 것입니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찬기파랑가는 이렇다.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적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해독
열치매
나토얀 리
구룸 조초 가 안디하
새파 나리여
耆郞 즈 이슈라
일로 나리ㅅ
郎 디니다샤온
좇누아져
아으 잣ㅅ가지 노파
서리 몯누올 花判이여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쫓고파라’
아, 잣 가지 드높아
서리를 모르올 화랑장이여!
왕의 옥경(玉莖)이 8치여서 아들이 없었다. 첫 왕비는 폐하여 사량부인을 봉하고, 후비 만월부인의 시호는 경수태후인데 의충 각간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덕에게 칙령을 내리되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하니 원컨대 대덕께서는 하느님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달라.” 하였다. 표훈이 하느님께 청하여 고하고 돌아와 “하느님께서 딸을 구하면 가하나 아들은 당치 않다고 합니다.” 하자, 왕이 “딸을 아들로 바꾸기 원한다.”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하였다. 하느님께서 “할 수는 있으나 만일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하여 표훈이 내려오려 하자 하느님께서 다시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 사이에는 서로 난잡할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 스님이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면서 천기를 누설하니 이후로는 다시 통래하지 말라.”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하느님이 말한 대로 이야기하니 왕은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사내를 얻으면 족하다.” 하였다. 달이 차서 태자를 낳았는데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혜공대왕이다. 너무 어리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에 나섰다. 정치가 잘 되지 않아 도적이 봉기하여 방어하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어린 임금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 때부터 즉위하기까지 항상 여자들과 장난을 하고, 비단 주머니를 차기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노니 나라에 큰 변란이 있어 왕은 끝내 선덕과 김양상에게 죽었다. 표훈대사의 뒤로는 성인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맹아득안가
희명. 신라 경덕왕(742-765)
경덕왕 때에 한기리의 여자 희명의 아기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분황사의 왼쪽 법당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서 아기를 위하여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눈이 밝아졌다. 노래는 이러하다.
膝肹古召며
二尸掌音毛乎支內良
千手觀音叱前良中
祈以支白屋尸置內乎多
千隱手□叱千隱目肹
一等下叱放一等힐除惡支
二于萬隱吾羅
一等沙隱賜以古只內乎叱等邪
阿邪也 吾良遺知支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
해독
무루플 고조며
둘 바당 모호누아
千手觀音ㅅ 前아
비 두누오다
즈믄손ㅅ 즈믄눈흘
노 더디
둘 업는 내라
그 고티누옷다라
아으으 나애 기티샬
노 慈悲여 큰고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전에
비옵니다
천 손에 천 눈을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겠사옵기에
둘 없는 내라
하나야 그윽이 고치올러라
아, 내게 끼쳐주시면
놓되 쓰올 자비여 얼마나 큰가!
찬을 하면,
죽마 총생이 맥진에 놀더니
하루 아침에 두 눈이 멀었도다
대사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던들
헛되이 양화를 보냄이 몇 해던고
[삼국유사 권3 탑상. 분황사 천수대비 맹아득안]
우적가
영재. 신라 원성왕(785-798)
영재 스님은 천성이 활달하여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향가를 잘하였는데 늙은 나이에 남악에 은거하려 했는데 대현령에 이르러 60여 명의 도적을 만났다. 죽이려 했지만 영재는 칼날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없이 태연히 맞섰다. 도적들이 괴이하게 여겨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 하였다. 도적들이 본래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口口口 명하여 노래를 짓게 했다. 노래는 이러하다.
自矣心米
皃史毛達只將來呑隱日
遠島逸□□過出知遺
今呑藪未去遺省如
但非乎隱焉破□主
次弗□□史內於都還於尸郞也
此兵物叱沙過乎
好尸曰沙也內乎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㵛陵隱
安支尙宅都乎隱以多
해독
제 매
모렷단 날
머리 □□ 디나치고
열 수메 가고쇼다
오직 외온 破戒主
저플 즈 외 돌려
이 잠 디내온
됴날 새누옷다니
아으 오지 이오맛 善은
안디 새집 외니다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제 마음에
모든 형상을 모르려 하던 날은
멀리 口口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승을
두려워할 모습으로 (내 어찌) 다시 또 돌아가리오?
이 칼이야 지내고 나면
좋은 날이 새리라 여겼더니
아, 오직 요만한 선은
새 집이 아니 되느니라
도적이 그 뜻에 감격하여 비단 두 필을 주었으나 영재가 웃으며 사양하기를 “재물이 지옥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장차 피하여 깊은 산에 숨어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찌 감히 받겠느냐?” 하고 땅에 던졌다. 도적이 또 그 말에 감동하여 모두 창과 칼을 던지고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 세상을 엿보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는 90이었고 원성대왕 때에 있었다. 찬을 하면,
지팡이 짚고 산을 찾는 뜻이 점점 굳은데
비단이나 주옥이 어찌 그 마음 다스리랴
숲 속의 군자들아 주려고 생각마소
지옥이 따로 없다 촌금(寸金)일 뿐이다
[삼국유사 권5 피은. 영재 우적]
처용가
부른 이는 처용. 신라 헌강왕 5년(879)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乙何如爲理古
해독
긔 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 자리 보곤
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 내해다마
아 엇디릿고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번역
서울 밝은 달 아래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 와 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처용랑 망해사]
도이장가
예종(1105-1122). 고려 예종 15(1120)년
主乙 完乎白乎
心聞 際天乙 及昆
魂是 去賜矣中
三烏賜敎 職麻 又欲
望彌 阿里刺
及彼可 二 功臣良
久乃 直隱
跡烏隱 現乎賜丁
[平山申氏 姓普. 太師開國壯節公行狀]
해독
니믈 오오
하 밋곤
넉시 가샤
사샨 벼슬마 져
라며 아리라
그 두功臣여
오라나 고
자 나토샨뎌
[梁柱東, 麗謠箋注, 乙酉文化社, 1987.]
번역
님의 목숨을 온전하게 하신
마음은 하늘 가에 미치고
넋은 가셨지만
내려주신 벼슬은 또 대단하구나
바라보면 알리라
그 때의 두 공신이여
오래 되었으나
(거룩한) 자취는 나타나시도다
[평산신씨 성보. 사개국장절공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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