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雁書)
雁:기러기 안. 書:글‧쓸‧편지‧책 서.
[동의어] 안찰(雁札), 안신(雁信), 안백(雁帛).
[참조] 인생조로(人生朝露). [출전]《漢書》〈蘇武專〉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가 먼 곳에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일컫는 말.
한(漢)나라 소제(昭帝)는 19년 전, 선제(先帝)인 무제(武帝) 때(B.C. 100)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匈奴)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억류당한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의 귀환을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현지에 도착한 특사가 곧바로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에게 소무의 석방을 요구하자 선우는 ‘소무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죽었다’며 대화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상혜(常惠)라는 사람이 은밀히 특사의 숙소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무를 따라왔다가 흉노의 내란에 말려 일행이 모두 잡힌 뒤 투항한 사람 중하나요. 그런데 그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소무는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당한 뒤 아직도 그곳에서 혼자 어렵게 살아가고 있소.”
이튿날 특사는 선우를 만나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황제께서 사냥을 하시다가 활로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기러기 발목에는 헝겊이 감겨 있었소. 그래서 풀어 보니 ‘소무는 대택(大澤:큰 못)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었소. 이것만 봐도 소무는 살아 있는 게 분명하지 않소?”
안색이 변한 선우는 부하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제가 잘 모르고 실언을 한 것 같소. 그는 살아 있다고 하오.”
꾸며댄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며칠 후 흉노의 사자(使者)가 데려온 소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의 손에는 한나라 사신의 증표인 부절(符節)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이 고사에 연유하여 그 후 편지를 안서라고 일컫게 되었다.
안중지정(眼中之釘)
眼:눈 안.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釘:못 정.
[동의어] 안중정(眼中釘). [출전]《新五代史》〈趙在禮專〉
눈에 박힌 못이라는 뜻. 곧 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의 비유. ② 몹시 싫거나 미워서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눈엣가시)의 비유.
당나라 말, 혼란기에 조재례(趙在禮)라는 악명 높은 탐관오리가 있었다. 그는 하북 절도사(河北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의 수하 무장이었으나 토색(討索)질한 재무를 고관대작에게 상납, 출세길에 오른 뒤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의 세 왕조에 걸쳐 절도사를 역임했다.
송주(宋州:하남성 내)에서도 백성들로부터 한껏 착취한 조재례가 영흥(永興) 절도사로 영전, 전임하게 되자 송주의 백성들은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 놈이 떠나가게 되었다니 이젠 살았다. 마치 ‘눈에 박힌 못[眼中之釘]’이 빠진 것 같군.”
이 말이 전해지자 화가 난 조재례는 보복을 하기 위해 1년만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조정에 청원했다. 청원이 수용되자 그는 즉시 ‘못 빼기 돈[拔釘錢(발정전)]’이라 일컫고 1000푼씩 납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미납자는 가차없이 투옥하거나 태형에 처했다. 이처럼 악랄한 수법으로 착취한 돈이 1년간에 자그마치 100만 관(貫)이 넘었다고 한다.
암중모색(暗中摸索)
暗:어두울 암. 中:가운데 중. 摸:더듬을 모. 索:찾을 색.
[준말] 암색(暗索). [동의어] 암중모착(暗中摸捉).
[유사어] 오리무중(五里霧中). [출전]《隋唐佳話》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찾는다는 뜻으로, 어림짐작으로 찾는다(혹은 추측한다)는 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였던 즉천무후(則天武后:690~705) 때 허경종(許敬宗)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경망한데다가 방금 만났던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할 적도로 건망증이 심했다. 어느 날, 친구가 허경종의 건망증을 비웃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자네 같은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이야 기억할 수 없지만 조식(曹植)이나 사령운(謝靈運) 같은 문장의 대가라면 ‘암중모색’을 해서라도 알 수 있다네.”
[주] 조식 :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 뛰어난 시재(詩才)를 시기하는 형 문제[文帝:후한을 멸하고 위(魏)나라를 세운 조비(曹丕), 220~226]의 명을 받고 지은〈칠보시(七步詩)〉는 특히 유명함.
사령운 : 남북조 시대 남송(南宋)의 시인. 별명 사강락(謝康樂).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치적(治積)을 쌓지 못하자 그의 글재주를 아끼는 문제(文帝:424~453)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 이후 막대한 유산으로 연일 수백 명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산야(山野)에서 호유(豪遊)하다가 반역죄에 몰려 처형됨. 서정(抒情)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문화 사상에 산수시(山水詩)의 길을 열어 놓음에 따라 ‘산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함.《산수시》《산거적(山居賊)》 등의 시집을 남김.(385~433).
양금택목(良禽擇木)
良:어질‧좋을 량. 禽:새 금. 擇:가릴 택. 木:나무 목.
[동의어] 양금상목서(良禽相木棲).
[출전]《春秋左氏專》〈衷公十八年條〉,《三國志》〈蜀志〉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춘추 시대, 유가(儒家)의 비조(鼻祖)인 공자가 치국(治國)의 도를 유세(遊說)하기 위해 위(衛)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세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 말고 좀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물려고 했으나 때마침 노(魯)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
약롱중물(藥籠中物)
藥:약 약. 籠:농 롱. 中:가운데 중. 物:만물 물.
[동의어] 약롱지물(藥籠之物). [참조] 양약고구(良藥苦口).
[출전]《唐書》〈狄仁傑專〉
약농 속의 약품이란 뜻으로, 항상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인물(심복)을 이르는 말.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628~683)의 황후였던 즉천무후(則天武后)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의 후궁이 된 그녀(무후)는 26세 때 태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재색(才色)을 탐낸 고종의 명예 따라 환속(還俗), 그의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655)에 황후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천후(天后)라 일컫고 수많은 명신(名臣)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중종(中宗:4대)‧예종(叡宗:5대)을 세웠으나 곧 폐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690~705)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가 출현한 이 정변을 무주 혁명(武周革命)이라고 한다.
그 무렵, 적인걸(狄仁傑:630~700)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잔인하고 명석한 무후를 직간(直諫),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조야(朝野)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원행충(元行沖)과 같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 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공(相公) 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良藥苦於口而利於病], 충언을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忠言逆於耳而利於行]’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로 내 얄롱중물일세[君正吾藥籠中物].’ 임,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不可一日無也].”
[주] 적인걸 : 산서성(山西省) 사람. 당나라 고종(高宗) 때 강남 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어 치적을 쌓은 뒤 위주 자사(魏州刺史)로 있을 때 거란(𤦲丹)의 침략군을 물리쳐 공을 세움. 재상으로 있을 때 즉천무후(則天武后)에게 직간하여 그녀의 친조카인 무삼사(武三思)로 하여금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대역(大逆)을 막고 당황실을 회복, 수호하는 데 힘씀. 이후 국로(國老)로 예우 받음. 예종(睿宗) 때 양국공(梁國公)에 추봉됨.(630~700).
양두구육(羊頭狗肉)
羊:양 양. 頭:머리 두. 狗:개 구. 肉:고기 육.
[원말] 현양두 매구육(懸羊頭賣拘肉).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유사어] 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매석(衒玉賣石).
[출전]《晏子春秋》,《無門關》,《揚子法言》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 곧 ① 거짓 간판을 내검. ②좋은 물건을 내걸고 나쁜 물건을 함. ③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음의 비유. ④ 겉으로는 훌륭하나 속은 전혀 다른 속임수의 비유.
춘추시대, 제(齊)나라 영공(靈公)때의 일이다. 영공의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 놓고 완상(玩賞)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晏嬰:晏子)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유행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면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을 내렸사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사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시오소서.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영공의 안영의 진언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양상군자(梁上君子)
梁:들보 량. 上:위 상. 君:임금‧군자 군. 子:아들‧사람 자.
[출전]《後漢書》〈陳寔專〉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 곧 ① 집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② (전하여) 천장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후한 말엽, 진식(陳寔)이란 사람이 태구현(太丘縣:하남성 내)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현민(縣民)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모았다.
그런데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나이가 몰래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인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그렇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룻바닥에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양약고구(良藥苦口)
良:좋을 량. 藥:약 약. 苦:괴로울‧ 쓸 고. 口:입 구.
[원말]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 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참조] 약롱중물(藥籠中物).
[출전]《史記》〈留侯世家〉,《孔子家語》〈六本篇〉.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
① 천하를 통일하고 동아시아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진(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천하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학정에 시달려온 민중이 각지에서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중 2세 황제 원년(元年:B.C. 209)에 군사를 일으킨 유방(劉邦:훗날의 한고조)은 역전(歷戰) 3년 만(B.C. 206)에 경쟁자인 항우(項羽)보다 한 걸음 앞서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했다.
유방은 3세 황제 자영(子嬰)에게 항복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호화찬란한 궁중에는 온갖 재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꽃보다 아름다운 궁녀들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원래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유방은 마음이 동하여 그대로 궁중에 머물려고 했다. 그러자 강직한 용장 번쾌(樊噲)가 간했다.
“아직 천하는 통일되지 않았나이다. 지금부터가 큰일이오니 지체없이 왕궁을 물러나 적당한 곳에 진을 치도록 하시오소서.”
유방이 듣지 않자 이번에는 현명한 참모로 이름난 장량(張良)이 간했다.
“당초 진나라가 무도한 폭정을 해서 천하의 원한을 샀기 때문에, 전하와 간은 서민이 이처럼 왕궁을 드실 수 있었던 것이옵니다. 지금 전하의 임무는 천하를 위해 잔적(殘敵)을 소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입정하시자 재보와 미색(美色)에 현혹되어 포악한 진왕(秦王)의 음락(淫樂)을 배우려 하신다면 악왕(惡王)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옵니다. 원래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忠言逆於耳利於行], 독약(양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毒藥苦於口而利於病]’고 하였나이다. 부디 번쾌의 진언을 가납(嘉納:권하는 말을 기꺼이 들음)하시오소서.”
유방은 불현듯 깨닫고 왕궁을 물러나 패상(霸上:함양 근처)에 진을 쳤다.
② 이 ‘양약고구’란 말은《공자가어(孔子家語)》에도 실려 있는데 요약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 은나라 탕왕(湯王)은 간하는 충신이 있었기에 번창했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따르는 신하만 있었기에 멸망했다.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이, 형이 잘못하면 동생이, 자신이 잘못하면 친구가 간해야 한다. 그리하면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는 법이 없고, 집안에 패덕(悖德)의 악행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어부지리(漁父之利)
漁:고기 잡을 어. 父:아비 부. 之:갈 지(…의) 利:이로울 리.
[동의어] 어부지리(漁父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견토지쟁(犬免之爭), 전부지공(田不之功),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출전]《戰國策》〈燕策〉
어부의 이득이라는 뜻으로, 쌍방이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을 챙긴다는 말.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燕)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연나라 소왕(昭王)은 종횡가(縱橫家)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온 소대(蘇代)에게 혜문왕을 설득해 주도록 부탁했다.
조나라에 도착한 소대는 세 치의 혀 하나로 합종책(合縱策)을 펴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했다.
“오늘 귀국에 돌아오는 길에 역수(易水:연‧조와 국경을 이루는 강)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蚌蛤(방합)]가 조가비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鷸(휼)]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 사납게 이곳을 지나가던 어부에게 그만 둘 다 잡혀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이옵니다. 연‧조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疲弊)케 한다면, 귀국과 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秦)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이옵니다.”
혜문왕도 명신으로 이름난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를 중용했던 현명한 왕인 만큼, 소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과연 옳은 말이오.”
이리하여 혜문왕은 당장 침공 계획을 철회했다.
여도지죄(餘桃之罪)
餘:남을 여. 桃:복숭아 도. 之:갈 지(…의). 罪:허물 죄.
[동의어] 여도담군(餘桃啗君). [출전]《韓非子》〈說難篇〉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죄’란 뜻으로, 애정과 증오의 변화가 심함의 비유.
전국 시대, 위(衛)나라에 왕의 총애를 받는 미자하(彌子瑕)란 미동(美童)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전갈을 받은 미자하는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는 사람은 월형(刖刑: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오히려 효심을 칭찬하고 용서했다.
“실로 효자로다. 어미를 위해 월형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또 한 번은 미자하가 왕과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먹어 보더니 아주 달고 맛이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제가 먹을 것도 잊고 ‘과인에게 먹이다[啗君]’니…‥.”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미자하의 자태는 점점 빛을 잃었고 왕의 총애도 엷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처벌을 받게 되자 왕은 지난 일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언젠가 몰래 과인의 수레를 탔고, 게다가 ‘먹다 남은 복숭아[餘桃]’를 과인에게 먹인 일도 있다.”
이처럼 한 번 애정을 잃으면 이전에 칭찬을 받았던 일도 오히려 화가 되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연목구어(緣木求魚)
緣:인연‧인할 연. 木:나무 목. 求:구할 구. 魚:고기 어.
[유사어] 지천사어(指天射魚). [출전]《孟子》〈梁惠王篇〉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 곧 ① 도저히 불가능한(가당찮은) 일을 하려 함의 비유. ② 잘못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려 함의 비유. ③ 수고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함의 비유.
전국 시대인 주(周)나라 신정왕(愼靚王) 3년(B.C. 318), 양(梁:魏)나라 혜왕(惠王)과 작별한 맹자(孟子)는 제(齊)나라로 갔다. 당시 나이 50이 넘는 맹자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인의(仁義)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유세(遊說)중이었다.
동쪽의 제나라는 서쪽의 진(秦)나라, 남쪽이 초(楚)나라와 함께 대국이었고 또 선왕(宣王)도 역량 있는 명군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그 점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왕도정치가 아니라 무력과 책략을 수단으로 하는 패도정치(覇道政治)였으므로, 선왕은 맹자에게 이렇게 청했다.
“춘추 시대의 패자(覇者)였던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패업(霸業)에 대해 듣고 싶소.”
“전하께서는 패도에 따른 전쟁으로 백성이 목숨을 잃고, 또 이웃 나라 제후들과 원수가 되기를 원하시옵니까?”
“원하지 않소. 그러나 과인에겐 대망(大望)이 있소.”
“전하의 대망이란 무엇이오니까?”
선왕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맹자 앞에서 패도를 논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는 짐짓 이런 질문을 던져 선왕의 대답을 유도했다.
“전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이, 아니면 아름다운 색이 부족하시기 때문이오니까?”
“과인에겐 그런 사소한 욕망은 없소.”
선왕이 맹자의 교묘한 화술에 끌려들자 맹자는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시다면 전하의 대망은 천하통일을 하시고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복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니오니까? 하오나 종래의 방법(무력)으로 그것(천하통일)을 이루려 하시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사옵니다.”
‘잘못된 방법(무력)으론 목적(천하통일)은 이룰 수 없다’는 말을 듣자 선왕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토록 무리한 일이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하나이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일은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후난(後難)은 없나이다. 하오나 패도를 쫓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나라가 멸망하는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
선왕은 맹자의 왕도정치론을 진지하게 경청했다고 한다.
오리무중(五里霧中)
五:다섯 오. 里:마을‧이수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동의어] 오리무(五里霧). [출전]《後漢書》〈張楷專〉
사방(四方) 5리에 안개가 덮여 있는 속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행방이나 사태의 추이를 알 길이 없음의 비유.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 대고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장해는《춘추(春秋)》《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宿儒:학식과 명망이 높은 선비)들을 비롯하여 괴족‧고관대작‧환관(宦官)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자(字)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는 학문뿐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주]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말은 ‘오리무’에 ‘중(中)’자를 더한 것인데 처음부터 ‘중’자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함.
방술 : 신선의 술법을 닦는 방사(方士)의 술법.
오손공주(烏孫公主)
烏:까마귀 오. 孫:손자 손. 公:공변될‧귀인 공. 主:주인 주.
[참조] 요령부득(要領不得). [출전]《漢書》〈西域專〉
정략 결혼의 희생이 된 슬픈 운명의 여인.
오손은 전한(前漢) 때 서역(西域) 지방에 할거하던 터키계(系)의 유목 민족으로, 그 세력권은 천산(天山) 산맥 북쪽의 이시크를 호수 부근으로부터 이리하(伊犁河:일리 강) 유역의 분지를 포함하여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 강 상류의 나린 강 계곡에 있던 적곡성(赤谷城:본거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오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했던 흉노는 북방 몽골 땅을 근거지로 삼고 한나라를 끊임없이 침범했다. 그래서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는 흉노를 무찌르기 위해 건원(建元) 26년(B.C. 115) 장건(張騫)을 오손에 보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10년 후 무제의 형인 강도왕(江都王)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로 꾸며 오손왕에게 출가시킴으로써 동맹은 더욱 굳어졌다.
이리하여 흉노는 한나라와 오손의 협공에 견디지 못하고 서역은 물론 한나라의 변경으로부터 북방 멀리 쫓겨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서역 50여 이민족의 소국들은 한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이들 나라의 이반을 막기 위해 구자(龜玆:쿠차)에 감독‧사찰 기관으로서의 서역 도호부(西域都護府)를 두었다. 건국 이후 100년 이상 시달려 온 흉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먼 이국의 이민족에게 주어진 오손 공주는 망향의 노래를 부르며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五:다섯 오. 十:열 십. 步:걸음 보. 百:일백 백.
[동의어]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유사어] 대동소이(大同小異). [출전]《孟子》〈梁惠王篇〉
오십 보 도망친 사람이 백 보 도망친 사람을 비웃는다는 뜻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론 마찬가지라는 말.
전국 시대인 기원전 4세기 중엽, 위(魏)나라 혜왕(惠王)은 진(秦)나라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도읍을 대량(大梁)으로 옮겼다(이후 양나라라고도 불렸음). 그러나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도 늘 패하는 바람에 국력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혜왕은 국력 회복을 자문하기 위해 당시 제후들에게 왕도 정치론을 유세중인 맹자를 초청했다.
“선생이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이렇게 와 준 것은 과인에게 부국 강병(富國强兵)의 비책(秘策)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 아니겠소?”
“전하, 저는 귀국의 부국 강병과 상관없이 인의(仁義)에 대해 아뢰고자 왔나이다.”
“백성을 생각하라는 선생의 인의의 정치라면 과인은 평소부터 힘써 베풀어 왔소. 예컨대 하내(河內) 지방에 흉년이 들면 젊은이들을 하동(河東) 지방으로 옮기고, 늙은이와 아이들에게는 하동에서 곡식을 가져다가 나누어주도록 하고 있소. 그와 반대로 하동에 기근이 들면 하내의 곡식으로 구호하도록 힘쓰고 있지만, 백성들은 과인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것 같지 않고, 또 이웃 나라의 백성 수가 줄어들었다는 말도 못 들었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전하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서 아뢰겠나이다. 전쟁터에서 백병전(白兵戰)이 벌어지기 직전, 겁이 난 두 병사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사옵니다. 그런데 오십 보를 도망친 병사가 백 보를 도망친 병사를 보고 ‘비겁한 놈’이라며 비웃었다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나이까?”
“그런 바보 같은 놈이 어디 있소? 오십 보든 백 보든 도망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그걸 아셨다면 전하, 백성들 구호하시는 전하의 목적은 인의의 정치와 상관없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지향하는 이웃 나라와 무엇이 다르옵니까?”
혜왕은 대답을 못 했다. 이웃 나라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백성을 구호한 것을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해서 구호한 양 자랑한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주] 대량(大梁)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내 개봉(開封:카이펑).
오월동주(吳越同舟)
吳:오나라 오. 越:넘을‧월나라 월. 同:한가지 동. 舟:배 주.
[동의어] 오월지쟁(吳越之爭), 오월지사(吳越之思).
[유사어] 동주상구(同舟相救), 동주제강(同舟濟江), 호월동주(胡越同舟), 오월지부(吳越之富).
[참조] 와신상담(臥薪嘗膽). [출전]《孫子》〈九地篇〉
적대(敵對) 관계에 있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뜻. 곧 ① 서로 적의를 품을 사람끼리 같은 장소‧처지에 놓임. 원수끼리 함께 있음의 비유. ② 적의를 품은 사람끼리라도 필요한 경우에는 서로 도움.
《손자(孫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병서(兵書)로서 춘추 시대 오나라의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손무는 오왕(吳王) 합려(闔閭) 때 서쪽으로는 초(楚)나라의 도읍을 공략하고, 북방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손자》〈구지편(九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병(兵)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지(地)가 있다. 그 구지 중 최후의 것을 사지(死地)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필사(必死)의 지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활로(活路)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의 장(場)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용병술(用兵術)은 예컨대 상산(常山)에 서식하는 솔연(率然)이란 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은 평소의 적개심(敵愾心)을 잊고 서로 왼손‧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전차(戰車)의 말[馬]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당하지 않으려 해 봤자 최후의 의지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오합지중(烏合之衆)
烏:까마귀 오. 合:합할 합. 之:갈 지(…의). 衆:무리 중.
[동의어] 오합지졸(烏合之卒). [유사어] 와합지중(瓦合之衆).
[출전]《後漢書》〈耿弇專(경감전)〉
까마귀떼 같이 질서 없는 무리라는 뜻. 곧 ① 규율도 통일성도 없는 군중. ② 갑자기 모인 훈련 없는 군세(軍勢).
전한(前漢) 말, 대사마(大司馬)인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시해(弑害)하고 나이 어린 영(嬰)을 세워 새 황제로 삼았으나 3년 후 영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일컬었다(9년).
이처럼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유수(劉秀:후한의 시조)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왕망 일당을 주벌(誅伐)하고 경제(景帝)의 후손인 유현(劉玄)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에 천하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갔다(23년). 대사마가 된 유수가 이듬해 성제(成帝)의 아들 유자여(劉子與)를 자처하며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왕랑(王郞)을 토벌하러 나서자 상곡(上谷) 태수 경황(耿況)은 즉시 아들인 경감(耿弇)에게 군사를 주어 평소부터 흠모하던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케 했다. 그런데 유수의 본진을 향해 행군하던 경감의 군사는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갑자기 행군을 거부하는 바람에 잠시 동요했다.
“유자여는 한왕조(漢王朝)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오. 그런 사람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격노한 경감은 두 사람을 앞으로 끌어낸 뒤 칼을 빼 들고 말했다.
“왕랑은 도둑일 뿐이다. 그런 놈이 황자(皇子)를 사칭하며 난을 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장안[長安: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의 정예군과 합세해서 들이치면 그까짓 ‘오합지중’은 마른 나뭇가지보다 쉽게 꺾일 것이다. 지금 너희가 사리를 모르고 도둑과 한패가 됐다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하리라.”
그날 밤, 그들은 왕랑에게로 도망치고 말았지만 경감은 뒤쫓지 않았다. 서둘러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한 경감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에 임명되었다.
옥석혼효(玉石混淆)
玉:구슬 옥. 石:돌 석. 混:섞을 혼. 淆:뒤섞일 효.
[동의어] 옥석혼교(玉石混交), 옥석동가(玉石同架), 옥석동궤(玉石同匱).
[유사어] 옥석구분(玉石俱焚), 옥석동쇄(玉石同碎).
[출전]《抱朴子》〈外篇 尙專〉
옥과 돌이 뒤섞여 있다는 뜻. 곧 ① 훌륭한 것과 쓸데없는 것이 뒤섞여 있음. ② 선과 악, 현(賢)과 우(愚)가 뒤섞여 있음.
동진(東晉:317~420)이 도사(道士)인 갈홍(葛洪:호는 포박자, 283~343?)은《포박자(抱朴子)》〈외편(外篇)〉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경(詩經)》이나〈서경(書經)〉이 도의(道義)에 대해(大海)라 한다면 제자백가(諸子百家:춘추 전국 시대의 여러 학파)의 글[書]은 그것을 보강하는 냇물의 흐름이라 할 수 있으며 방법은 달라도 덕을 닦는 데는 변함이 없다. 옛사람들은 재능을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여 ‘곤륜산(崑崙山:중국 전설상의 산)의 옥이 아니라 해서 야광주(夜光珠)를 버리거나 성인(聖人)의 글이 아니라 해서 수양에 도움이 되는 말’은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漢)‧위(魏) 이래 ‘본받을 만한 좋은 말[嘉言]’이 많이 나와 있는데도 식견이 좁은 사람들은 자의(字義) 해석에만 사로잡혀 오묘한 점을 가볍게 보며 도외시한다. 또한 소도(小道)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거나 넓고 깊어서 사람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티끌이 쌓여 태산이 되고 많은 색깔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룬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또 천박한 시부(詩賦)를 감상하는가 하면 뜻 깊은 자서[子書:제자(諸子)의 서(書)]를 가볍게 여기며 유익한 금언(金言)을 하찮게 생각한다. 그래서 참[眞]과 거짓[僞]이 전도(顚倒)되고 ‘옥과 돌이 뒤섞이며[玉石混淆]’ 아악(雅樂)도 속악(俗樂)과 같은 것으로 보고 아름다운 옷도 누더기고 보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주] 갈홍 : 동진의 도사. 강소(江蘇) 사람. 자는 치천(雉川), 호는 포박자(抱朴子), 소갈선옹(小葛仙翁)이라 불리기도 함. 고학으로 유학(儒學)을 배웠으나 신선술(神仙術)에 통달한 재종조부(再從祖父:할아버지의 사촌 형제) 갈현(葛玄:별명-갈선인)의 영향을 받고 갈현의 제자 정은(鄭隱)으로부터 연단(煙丹)의 비술(祕術)을 전승함. 동진의 시조(元帝:317~322)가 진(晉:西晉)나라 승상으로 있을 때 무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짐. 만년에 교지(交趾:북베트남)에서 단가[丹砂:주사(朱砂)-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를 채광하여 선약(仙藥)을 만들었다고 함. 평소부터 갈홍을 흠모하던 광주 자사(廣州刺史) 등악(鄧嶽)이 “스승을 찾아 멀리 떠날까 하네.”라고 쓴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보니 앉은 채로 죽은 갈홍의 얼굴색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입관(入棺)할 때의 시체도 부드럽고 가벼웠다고 함. 그래서 세인은 61세로 세상을 떠난 갈홍이 껍데기인 시체만 남겨 놓고 신선이 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함. 저서로는 신선의 도를 설(說)한 내편(內篇)과 정치‧도덕을 논한 외편(外篇)의《포박자》《신선전(神仙專)》등이 있음.(283~343).
연단(煉丹) : 도사(道士)가 단사로 황금이나 선약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하는 연금술(鍊金術)의 한 가지.
온고지신(溫故知新)
溫:따뜻할‧복습할 온. 故:연고‧예 고. 知:알‧깨달을 지. 新:새 신.
[원말] 원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참조] 기문지학(記問之學), 구이지학(口耳之學).
[출전]《論語》〈爲政篇〉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안다는 뜻.
공자는《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남의 스승이 된 사람은 고전(古典)에 대한 박식(博識)만으로는 안 된다. 즉 고전을 연구하여 거기서 현대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예기(禮記)》〈학기(學記)〉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기문지학(記問之學:피상적인 학문)은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하다[記問之學 不足以爲師矣].”
지식을 암기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실로 ‘온고지신’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고전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고전의 현대적 의의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에 고전 학습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와각지쟁(蝸角之爭)
蝸:달팽이 와. 角:뿔 각. 之:갈 지(…의). 爭:다툴 쟁.
[원말]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
[동의어] 와우각상(蝸牛角上), 와각상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
[유사어] 만촉지쟁(蠻觸之爭). [출전]《莊子》〈則陽篇〉
달팽이 촉각 위에서의 싸움이란 뜻. 곧 ① 대국(大局)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작은(쓸데없는) 다툼의 비유. ② 하찮은 일로 승강이하는 짓의 비유. ③ 인간 세계의 비소(卑小:보잘 것 없이 작음)함의 비유.
전국시대, 양(梁:魏)나라 혜왕(惠王)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제(齊)나라 위왕(威王)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혜자(惠子)가 데려온 대진인(戴晉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진인은 현인(賢人)으로 이름난 도가자류(道家者流:도교를 믿고 닦는 사람)답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微物)이 있사온데 그것을 아시나이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촉씨(觸氏)라는 자가, 오른쪽 촉각 위에는 만씨(蠻氏)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나이다. 어느 날 그들은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15일 만에 전쟁을 멈추었다하옵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나이다. 전하, 이 우주의 사방 상하(四方上下)에 제한(際限)이 있다고 생각하시옵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이 왕래하는 지상의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량[大梁:개봉(開封)]이라는 도읍이 있사오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시옵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시려는 전하와 달팽이 촉각(觸角) 위의 촉씨‧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아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은 혜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인(聖人)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와신상담(臥薪嘗膽)
臥:누울 와. 薪:섶(땔)나무 신. 嘗:맛볼 상. 膽:쓸게 담.
[유사어] 회계지치(會稽之恥), 절치액완(切齒扼腕).
[출전]《史記》〈越世家〉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딤의 비유.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과 취리[欈李:절강성 가흥(浙江省嘉興)]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父王)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蠡)가 간(諫)했으나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獻策)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이때 오나라의 중신 오자서(伍子胥)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쳐야 한다’고 간했으나 부차는 백비의 진언에 따라 구천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귀국까지 허락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屬領)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상기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밭 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회계의 치욕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그 해(B.C. 482) 봄, 부차가 천하에 패권(覇權)을 일컫기 위해 기(杞) 땅의 황지[黃地:하남성 기현(河南省杞縣)]에서 제후들과 회맹(會盟)하고 있는 사이에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역전(歷戰)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姑蘇:소주(蘇州)]에 육박한 구천은 오와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甬東:절강성 정하(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그 후 구천은 부차를 대신하여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완벽(完璧)
完:완전할 완. 璧:둥근 옥 벽.
[동의어] 완조(完調).
[유사어] 화씨지벽(和氏之壁), 연성지벽(連城之壁).
[출전]《史記》〈藺相如列傳〉,《十八史略》〈趙篇〉
① 흠이 없는 구슬[壁:환상(環狀)의 옥(玉)]. 결점 없이 훌륭함. ② 빌려 온 물건을 온전히 돌려보냄.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화씨지벽(和氏之壁)이라는 천하명옥(天下名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어떻게든 화씨지벽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城) 15개와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혜문왕에게는 실로 난처한 문제였다. 제의를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 올 것이고 화씨지벽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아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혜문왕은 중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했다.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강자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 하여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혜문왕은 중신들에게 물었다.
“사신으로는 누가 적임자일 것 같소?”
그러자 대부인 목현(繆賢)이 말했다.
“신의 식객에 지모와 담력이 뛰어난 인상여(藺相如)라는 자가 있사온데 그 자라면 차질 없이 중임을 완수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리하여 사신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고 화씨지벽을 바쳤다. 화씨지벽을 손에 들고 살펴보던 소양왕은 감탄하여 희색이 만면했으나 약속한 15개 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인상여는 조용히 말했다.
“전하, 그 화씨지벽에는 흠집이 있사온데 그것을 외신(外臣)에게 주시면 가르쳐 드리겠나이다.”
소양왕이 무심코 화씨지벽을 건네주자 인상여는 그것을 손에 든 채 궁궐 기둥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양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약속하신 15개 성을 넘겨주실 때까지 이 화씨지벽은 외신이 갖고 있겠나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화씨지벽은 외신의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깨지고 말 것이옵니다.”
화씨지벽이 깨질까 겁이 난 소양왕을 일단 숙소로 돌려보냈다. 인상여는 숙소에 돌아오자 화씨지벽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귀국시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양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인상여를 잡아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죽였다가는 신의 없는 편협한 군왕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 그대로 곱게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화씨지벽은 ‘온전한 구슬[完璧]’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인상여는 그 공으로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요동지시(遼東之豕)
遼:멀‧나라 이름 요. 東:동녘 동. 之:갈 지(…의). 豕:돼지 시.
[준말] 요시(遼豕). [동의어] 요동시(遼東豕).
[출전]《文選》〈朱浮書〉,《後漢書》〈朱浮專〉
‘요동의 돼지’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고 오만한 탓에 하찮은 공을 득의 양양하여 자랑함의 비유.
후한(後漢) 건국 직후,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이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자 대장군(大將軍) 주부(朱浮)는 그의 비리를 꾸짖는 글을 보냈다.
“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옛날에 요동 사람이 그의 돼지가 대가리가 흰[白頭] 새끼를 낳자 이를 진귀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려고 하동(河東)까지 가 보니 그곳 돼지는 모두 대가리가 희므로 크게 부끄러워 얼른 돌아갔다.’ 지금 조정에서 그대의 공을 논한다면 폐하[光武帝]의 개국에 공이 큰 군신 가운데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팽총은 처음에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반군(叛軍)을 토벌하기 위해 하북(河北)에 포진(布陣)하고 있을 때에 3000여 보병을 이끌고 달려와 가세했다. 또 광무제가 옛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했을 때에는 군량 보급의 중책(重責)을 맡아 차질 없이 완수하는 등 여러 번 큰공을 세워 좌명지신(佐命之臣:천자를 도와 천하 평정의 대업을 이루게 한 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오만 불손한 팽총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일컫고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2년 후 토벌 당하고 말았다.
요령부득(要領不得)
要:종요로울‧구할 요. 領:옷깃‧요소 령. 不:아니 불. 得:얻을 득.
[출전]《史記》〈大宛專〉,《漢書》〈張騫專〉
사물의 중요한 부분을 잡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이나 글의 요령을 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
전한(前漢)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의 일이다. 당시 만리장성 밖은 수수께끼의 땅이었다. 그러나 영맹한 흉노는 동쪽 열하(熱河)에서부터 서쪽 투르키스탄(중앙 아시아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펴고 빈번히 한나라를 침범 약탈했다. 그래서 무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흉노에게 쫓겨 농서[隴西:감숙성(甘肅省)]에서 서쪽 사막 밖으로 옮겨간 월지(月氏:大月氏)와 손잡고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월지에 다녀올 사신을 공모한 결과 장건(張騫:?~B.C. 114)이란 관리가 뽑혔다.
건원(建元) 3년(B.C. 138), 장건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쪽 이리(伊犁:위구르 자치구 내)란 곳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월지를 찾아 장안[長安:서안(西安)]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농서를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흉노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장건은 활짝 트인 성격으로 해서 흉노에게 호감을 사 장가도 들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탈출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포로가 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장건은 처자와 일행을 데리고 서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우뚝 솟은 천산(天山) 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타림 분지를 횡단한 그들은 대완국(大宛國)‧강거국(康居國)을 거쳐 마침내 아무 강 북쪽에 있는 월지의 궁전에 도착했다.
장건은 곧 월지의 왕을 알현하고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의 대답은 의외로 부정적이었다.
“월지는 서천(西遷) 이후 기름진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왔소. 그러니 백성은 이제 구원(舊怨)을 씻기 위한 그런 쓸데없는 전쟁은 원치 않을 것이오.”
장건은 여기서 단념하지 않고 당시 월지의 속국인 대하국(大夏國)까지 찾아가 월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 이 일을 사서(史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끝내 사명으로 하는 월지의 ‘요령을 얻지 못한 채[要領不得]’ 체류한 지 1년이 지나 귀국 길에 올랐다.”
장건은 귀국 도중에 또 흉노에게 잡혀 1년 넘게 억류되었으나 부하 한 사람과 탈출, 13년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B.C. 126). 그로부터 3년 후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진 장건은 계속 서역(西域) 사업에 힘썼는데 그의 대여행은 중국 역사에 많은 것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동서의 교통이 트이면서 서방으로부터 명마(名馬)‧보석‧비파(琵琶)‧수박‧석류‧포도 등이 들어오고 한나라로부터는 금과 비단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실크 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주] 대완국 : 중앙 아시아 페르가나 지방에 있었던 작은 나라.
강거국 : 아랄해 동쪽 시르강 하류의 키르기스 초원에 있었던 터키계(系) 유목 민족의 작은 나라.
대하국 : 일명 박트리아 왕국. 힌두쿠시 산맥의 계곡, 아무 강 상류의 좁은 지역에 있었던 나라.
우공이산(愚公移山)
愚:어리석을 우. 公:귀 공. 移:옮길 이. 山:메 산.
[유사어] 마부작침[磨斧作針(鍼)], 수적천석(水適穿石), 적토성산(積土成山).
[출전]《列子》〈湯問篇〉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큰 일이라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짐의 비유.
춘추 시대의 사상가 열자[列子:이름은 어구(禦寇)]의 문인들이 열자의 철학 사상을 기술한《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
먼 옛날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玉山) 사이의 좁은 땅에 우공(愚公)이라는 90세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 700리에 높이가 만 길[仞]이나 되는 두 큰 산이 집 앞뒤를 가로막고 있어 왕래에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우공은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이렇게 물었다.
“나는 너희들이 저 두 산을 깎아 없애고, 예주(豫州)와 한수(漢水)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아니, 늙은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저 큰 산을 깎아 없앤단 말예요? 또 파낸 흙은 어디다 버리고?”
“발해(渤海)에 갖다 버릴 거요.”
이튿날 아침부터 우공은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갖다 버리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 돌아오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어느 날 지수(知叟)라는 사람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정말 망녕’이라며 비웃자 우공은 태연히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아들을…‥. 이렇게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속하면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오겠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두 산을 지키는 사신(蛇神)이었다. 산이 없어지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사신은 옥황 상제(玉皇上帝)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우공의 끈기에 감동한 옥황상제는 역신(力神) 과아(夸娥)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각각 두 산을 업어 태행산은 삭동(朔東) 땅에, 왕옥산은 옹남(雍南) 땅에 옮겨 놓게 했다. 그래서 두 산이 있었던 기주(冀州)와 한수(漢水) 남쪽에는 현재 작은 언덕조차 없다고 한다.
원교근공(遠交近攻)
遠:멀 원. 交:사귈 교. 近:가까울 근. 攻:칠 공.
[참조] 누란지위(累卵之危). [출전]《史記》〈范雎列傳〉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정책.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책사(策士)인 범저(范雎)는 제(齊)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모함에 빠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진(秦)나라의 사신 왕계(王稽)를 따라 함양(咸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진나라는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累卵之危]’고 자국(自國)의 정사를 혹평한 범저를 환영하지 않았다. 따라서 범저는 소양왕에게 자신의 장기인 변설(辯舌)을 펼쳐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소양왕 36년(B.C. 271), 드디어 범저에게 때가 왔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소양왕의 모후인 선태후(宣太后)의 동생 양후(穰侯)가 재상으로서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제나라를 공략하여 자신의 영지인 도(陶)의 땅을 확장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안 범저는 왕계를 통해 소양왕을 알현하고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한(韓)‧위(魏) 두 나라를 지나 강국인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은 득책(得策)이 아닌 줄 아옵니다. 적은 병력을 움직여 봤자 제나라는 꿈쩍도 않을 것이옵고, 그렇다고 대군(大軍)을 출동시키는 것은 진나라를 위해 더욱 좋지 않사옵니다. 가능한 한 진나라의 병력을 아끼고 한‧위 두 나라의 병력을 동원코자 하시는 것이 전하의 의도인 듯하오나 동맹국을 신용할 수 없는 이 마당에 타국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옵니다. 지난날 제나라의 민왕(湣王)이 연(燕)나라의 악의(樂毅)장군에게 패한 원인도 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초(楚)나라를 공략하다가 과중한 부담을 안게 된 동맹국이 이반(離反)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때 덕을 본 것은 이웃 나라인 한나라와 위나라이온데, 이는 마치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借賊兵(차적병)] 도둑에게 식량을 갖다 준 꼴[齎盜糧(재도량)]’이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나이다.
지금 전하께서 채택하셔야 할 계책으로는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이 상책(上策)인 줄 아옵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촌토(寸土)이옵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척지(尺地)가 아니옵니까? 이해득실(利害得失)이 이토록 분명 하온데 굳이 먼 나라를 공략하는 것은 현책(賢策)이 아닌 줄 아옵니다.”
이 날을 계기로 소양왕의 신임을 얻은 범저는 승진 끝에 재상이 되어 응후(應侯)에 봉해졌고, 그의 지론인 원교근공책은 천하 통일을 지향하는 진나라의 국시(國是)가 되었다.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
遠:멀 원. 水:물 수. 不:아니 불. 救:구원할 구. 近:가까울 근. 火:불 화.
[출전]《韓非子》〈說林篇〉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는 뜻으로, 먼 데 있으면 급할 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
《한비자(韓非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목공(穆公)은 아들들에게도 진(晉)나라와 형(荊)나라를 섬기게 했다. 그 무렵 노나라는 이웃 나라인 강국 제(齊)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위급할 때 진나라와 형나라 같은 강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에서였다. 목공의 그런 속셈을 이서(梨鉏)가 간했다.
“사람이 물에 빠진 경우, 먼 월(越)나라에서 사람을 청해다가 구하려 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사오며, 또 집에 불이 난 경우, 발해(渤海)와 같이 먼바다에서 물을 끌어다가 끄려 한다면 바닷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때는 역시 늦사옵니다.
이처럼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遠水不救近火]’고 했듯이 노나라가 이웃 제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먼 진나라와 형나라가 강국이긴 해도 노나라의 위난은 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원입골수(怨入骨髓)
怨:원망할 원. 入:들 입. 骨:뼈 골. 髓:골수 수.
[원말] 원입어골수(怨入於骨髓).
[동의어] 원철골수(怨徹骨髓), 한입골수(恨入骨髓).
[출전]《史記》〈秦本紀〉
원한이 뼈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마음 속 깊이 맺혀 잊을 수 없다는 말.
춘추시대 오패(五霸)의 한 사람인 진(秦)나라 목공(繆公)은 중신 백리해(百里奚)와 건숙(蹇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 장군에게 정(鄭)나라를 치라고 명했다. 진나라 군사가 주(周)나라의 북문에 이르렀을 때 마침 이곳에 소를 팔러 온 정나라의 소장수인 현고(弦高)는 진나라 장군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정나라 주상(主上)께서는 장병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소생에게 소 12마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진 세 장군은 공격 목표를 바꾸어 진(晉)나라의 속령(屬領)인 활(滑)로 쳐들어갔다.
당시 진나라는 문공(文公)이 죽어 국상(國喪)중에 있었으나 태자[太子:후의 양공(襄公)]는 즉시 용장(勇將)을 파견하여 침략군을 섬멸했다. 포로가 된 세 장군은 태자 앞에 끌려 나왔다. 그러자 목공의 딸인 태자의 모후(母后)는 그들의 구명을 청원했다.
“저들을 죽이면 강국인 진나라 목공은 ‘원한이 뼈에 사무쳐[怨入骨髓]’ 반드시 이 나라를 칠 것이오. 그러나 저들을 살려 보내는 게 좋겠소.”
태자는 모후의 말을 옳게 여겨 세 장군을 모두 풀어 주었다.
월단평(月旦評)
月:달 월. 旦:아침 단. 評:평론할 평.
[준말] 월단(月旦). [동의어] 월조평(月朝評).
[출전]《後漢書》〈許劭專〉
‘매달 첫날의 평’이란 뜻으로, 인물에 대한 비평을 일컫는 말.
후한(後漢) 말, 12대 황제인 영제(靈帝:167~189) 17년(184)에 일어난 ‘황건(黃巾)의 난(亂)’ 때 큰 공을 세운 조조(曹操)가 아직 두각을 나타내기 전 일이다.
그 무렵, 여남(汝南:호북성 내) 땅에 허소(許劭)와 그의 사촌 형 허정(許靖)이라는 두 명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달 첫날[月旦]’이면 허소의 집에서 향당(鄕黨:향-1만 2500집, 당-500집)의 인물을 뽑아 비평했는데 그 비평이 매우 적절함으로 해서 평판이 높았다. 그래서 당시 ‘여남의 비평’으로 불리던 이 비평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조조가 허소를 찾아와서 비평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난폭자로 소문난 조조의 청인지라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 조조가 재촉하자 허소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태평한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리이되,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간웅(姦雄)이 될 인물이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황건적(黃巾賊)을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월하빙인(月下氷人)
月:달 월. 下:아래 하. 氷:얼음 빙. 人:사람 인.
[동의어] 월하로(月下老), 빙상인(氷上人), 빙인(氷人).
[유사어] 적승(赤繩). [출전]《續幽怪錄》,《晉書》〈索耽篇〉
월하로(月下老)와 빙상인(氷上人)이 합쳐진 것으로, 결혼 중매인을 일컫는 말.
①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太宗)때의 이야기이다. 위고(韋固)라는 젊은이가 여행 중에 송성(宋城:하남성 내)에 갔을 때 ‘달빛 아래 한 노인[月下老]’이 손에 빨간 끈을[赤縄]을 든 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위고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지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끈으로 한 번 매어 놓으면 어떤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맺어진다네.”
“그럼, 지금 제 아내 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음, 이 송성에 있구먼, 성 북쪽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진(陳)이란 여인네 어린아이야.”
위고는 약간 기분이 언짢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상주(相州:하남성 내)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위고는 그곳 태수(太守)의 딸과 결혼했다. 아내는 17세로 미인이었다. 어느 날 밤 위고가 아내에게 신상(身上)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실은 태수님의 양녀입니다. 친아버지는 송성에서 벼슬을 다니시다 돌아가셨지요. 그 때 저는 젖먹이였는데, 마음씨 착한 유모가 성 북쪽 거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면서 저를 길러 주었답니다.”
② 진(晉)나라에 색탐(索耽)이라는 점쟁이가 있었다. 어느 날 영고책(令孤策)이라는 사람이 몽점(夢占)을 치러 왔다.
“꿈속에서 나는 얼음 위에 서서 얼음 밑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색탐은 이렇게 해몽했다.
“얼음 위는 곧 양(陽)이요, 얼음 밑은 음(陰)이니 양과 음이 이야기했다는 것은 ‘얼음 위에 선 사람[氷上人]’인 그대가 결혼 중매를 서게 될 조짐이오. 성사(成事)시기는 얼음이 녹는 봄철이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과연 영고책은 태수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들과 장(張)씨의 딸을 중매 서서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은감불원(殷鑑不遠)
殷:은나라 은. 鑑:거울 감. 不:아니 불. 遠:멀 원.
[원말]~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 [동의어] 상감불원(商鑑不遠).
[유사어] 복차지계(覆車之戒), 복철(覆轍). [참조] 주지육림(酒池肉林), 맥수지탄(麥秀之嘆). [출전]《詩經》〈大雅篇〉
은(殷)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멸망의 선례는 먼데 있지 않다는 뜻으로, 남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는 말.
고대 중국 하(夏)‧은(殷)‧주(周)의 3왕조 중 은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 온 달기(妲己)라는 희대의 요녀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를 기울여 시설한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음주음락(飮酒淫樂)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와, 충간자(忠諫者)를 처형하기 위한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일삼는 악왕(惡王)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간 주왕의 포학을 간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는 처형당하고 서백[西伯:훗날 주문왕(周文王)이 됨]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의 시조인 탕왕(湯王:주왕의 28대 선조)에게 주벌당한 하왕조의 걸왕(桀王:주왕과 대동 소이한 폭군음주)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간하다가 화를 당했는데 그 간언(諫言)이《시경(詩經)》〈대아편(大雅篇)〉‘탕시(湯詩)’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殷鑑不遠 在夏侯之世(은감불원 재하후지세)]
삼공에 이어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미자(微子:주왕의 친형, 망명)‧기자(箕子:왕족, 망명)‧비간(比干:왕자, 처형당함)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를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이반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발[發:주왕조의 시조 무왕(武王)]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
泣:울 읍. 斬:벨 참. 馬:말 마. 謖:일어날 속.
[출전]《三國志》〈蜀志 諸葛亮專〉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 곧 ①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의 비유. ②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없이 버림의 비유.
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자는 중달(中達), 179~251]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亭:한중 동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명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는가?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적을 유인해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가 끊겼다. 마속은 전병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용장인 장합(張郃)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228)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張埦)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대의(大義)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의심암귀(疑心暗鬼)
疑:의심할 의. 心:마음 심. 暗:어두울 암. 鬼:귀신 귀.
[원말]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유사어] 절부지의(竊斧之疑), 배중사영(杯中蛇影). [출전]《列子》〈說符篇〉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오는 듯이 느껴진다는 뜻. 곧 ①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이 잇달아 일어나 불안해짐. ② 선입관은 판단을 빗나가게 함.
① 어떤 사람이 소중히 아끼던 도끼를 잃어버렸다. 도둑 맞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래도 이웃집 아이가 수상쩍다. 길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슬금슬금 도망갈 듯한 자세였고 안색이나 말투도 어색하기만 했다.
‘내 도끼를 훔쳐 간 놈은 틀림없이 그 놈이야.’
이렇게 믿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저번에 나무하러 갔다가 도끼를 놓고 온 일이 생각났다. 당장 달려가 보니 도끼는 산에 그대로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웃집 아이를 보자 이번에는 그 아이의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별로 수상쩍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② 마당에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본 이웃 사람이 주인에게 말했다.
“집안에 말라죽은 오동나무가 있으면 재수가 없다네.”
주인이 막 오동나무를 베어 버리자 그 사람이 또 나타나서 땔감이 필요하다며 달라고 했다. 주인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이제 보니 땔감이 필요해서 날 속였군. 이웃에 살면서 어떻게 그런 엉큼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목지신(移木之信)
[동의어] 사목지신(徙木之信). [반의어] 식언(食言).
[출전]《史記》〈商君列專〉
위성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뜻. 곧 ① 남을 속이지 아니한 것을 밝힘. ② 약속을 실행함.
진(秦)나라 효공(孝公) 때 상앙(商鞅:?~B.C. 338)이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펴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했다.
한 번은 상앙이 법률을 제정해 놓고도 즉시 공포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믿어 줄지 그것이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앙은 한 가지 계책을 내어 남문에 길이 3장(三丈:약 9m)에 이르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렇게 써 붙였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십금(十金)을 주리라.”
그러나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오십 금(五十金)을 주겠다고 써 붙였더니 이번에는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었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은 조정을 믿고 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주] 상앙 : 전국 시대, 진나라의 명재상. 제자 백가(諸子白家)의 한 사람. 별명은 공손앙(公孫鞅). 상군(商君).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 일찍이 형명학(刑名學)을 공부하고 진나라 효공(孝公)을 섬김. 법치주의(法治主義)에 입각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단행하여 진나라의 국세(國勢)를 신장시킴. 효공이 죽자 그간 반감이 쌓인 귀족들의 참소(讒訴)로 사형 당함. (?~B.C. 338).
이심전심(以心傳心)
以:써 이. 心:마음 심. 傳:전할 전.
[동의어] 염화미소(拈華微笑).
[유사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출전]《五燈會元》〈傳燈錄〉,《無門關》,《六祖壇經》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말.
송(宋)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法語)를 기록한《전등록(傳燈錄)》에서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보제(普濟)의《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抩華].’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妙德-매우 뛰어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煩惱)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아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 불립문자(不立文字 敎外別傳:모두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 곧, 진리는 마음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주]《오등회원》:《전등록》외 4부의 ‘등록’을 합친《오등록(五燈錄)의 초본》
인생조로(人生朝露)
人:사람 인. 生:날‧살 생. 朝:아침 조. 露:이슬 로.
[원말]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 [유사어] 인생초로(人生草露).
[참조] 안서(雁書), 구우일모(九牛一毛). [출전]《漢書》〈蘇武專〉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다는 말.
전한 무제(武帝) 때(B.C.100)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는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내란에 말려 잡히고 말았다.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는 한사코 항복을 거부하는 소무를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하겠다’며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했다. 소무가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하던 어느 날, 고국의 친구인 이릉(李陵) 장군이 찾아왔다.
이릉은 소무가 고국을 떠난 그 이듬해 5000여의 보병으로 5만이 넘는 훙노의 기병과 혈전을 벌이다가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참패한 뒤 부상, 혼절(昏絶)중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이릉은 선우의 빈객으로 후대를 받았으나 항장(降將)이 된 것이 부끄러워 감히 소무를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선우의 특청으로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이릉은 주연을 베풀어 소무를 위로하고 이렇게 말했다.
“선우는 자네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고, 꼭 데려오라며 나를 보냈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고생 그만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人生如朝露]’고 하지 않는가.”
이릉은 끝내 소무의 절조를 꺾지 못하고 혼자 돌아갔다. 그러나 소무는 그 후(B.C.81) 소제(昭帝:무제의 아들)가 파견한 특사의 기지(機智)로 풀려나 19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일거양득(一擧兩得)
一:한 일. 擧:들 거. 兩:두 량. 得:얻을 득.
[준말] 양득(兩得). [동의어] 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 일거양실(一擧兩失). [참조] 조명시리(朝名市利).
[출전]《春秋後語》,《戰國策》〈秦策〉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 이익을 거둔다는 뜻.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은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霸業)’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富)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옵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 지는 법이옵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하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蜀)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이옵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周)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韓)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齊)나라와 조(趙)나라를 통해서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오며, 더욱이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이옵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이옵니다.”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혔다.
[주] 구정 : 우왕(禹王) 때에 당시 전 중국 대륙인 아홉 고을[九州]에서 바친 금(金, 일설에는 구리)으로 만든 솔. 하(夏)‧은(殷) 이래 천자(天子)에게 전해 오는 상징적 보물이었으나 주왕조(周王朝) 때에 없어졌다고 함.
일망타진(一網打盡)
一:한 일. 網:그물 망. 打:칠 타. 盡:다할 진.
[준말] 망타(網打). [출전]《宋史》〈人宗紀〉,《東軒筆錄》
한 번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다 잡는다는 뜻. 곧 범인들이나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잡는다는 말.
북송(北宋) 4대 황제인 인종(仁宗)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契丹:요(遼)]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중국의 일부였던 안남(安南)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치(內治)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전한(前漢) 5대 황제인 문제(文帝)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文治)를 폄으로써 이른바 ‘경력(慶曆:인종의 연호)의 치’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성세(聖世)를 이룩했다.
이 때의 역사적인 명신으로는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脩)‧사마광(司馬光)‧주돈이(周敦頣)‧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頣)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조의(朝議)를 같이하다 보니 명론탁설(名論卓說)이 백출(百出)했고 따라서 충돌도 잦았다. 결국 조신(朝臣)이 양 당으로 나뉘어 교대로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간에 내각이 17회나 바뀌었는데, 후세의 역사가는 이 단명 내각의 시대를 가리켜 ‘경력의 당의(黨議)’라 일컫고 있다.
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相臣)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內降)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정도(政道)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태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聖旨)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하여 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인 소순흠(蘇舜欽)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御史:검찰총장) 왕공진(王拱辰)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모고했다.
“범인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했습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 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주] 안남 : 인도차이나 동쪽의 한 지방, 당나라의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에서 유래한 명칭이어서 베트남인들은 쓰지 않는다고 함.
일의대수(一衣帶水)
一:한 일. 衣:옷 의. 帶:띠 대. 水:물 수.
[유사어] 일우명지(一牛鳴地), 일우후지(一牛吼地), 지호지간(指呼之間).
[출전]《南史》〈陳後主紀〉
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이나 바닷물이라는 뜻. 곧 ① 간격이 매우 좁음. ② 강이나 해협을 격한 대안(對岸)의 거리가 아주 가까움.
서진(西晉:265~317) 말엽, 천하는 혼란에 빠져 이른바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되었다. 북방에서는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 일컫는 흉노(匈奴)‧갈(羯)‧선비(鮮卑)‧강(羌)‧저(氐)등 5개 이민족이 세운 열 세 나라와 세 한족국(漢族國)이 흥망을 되풀이했고, 남방에서는 송(宋)‧제(齊)‧양(梁)‧진(陳:557~589) 등 네 나라가 교체되었다.
북방의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577~580)를 물려받아 수(隋:581~618)나라를 세운 문제(文帝:581~604)는 마침내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나라를 치기로 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진왕(陳王)은 무도하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도다. 이제 짐(朕)은 백성의 어버이로서 어찌 ‘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一衣帶水]’ 따위를 겁내어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으랴.”
양자강은 예로부터 천연의 요해(要害)로서 삼국 시대의 오(吳)나라 이후 남안(南岸)의 건강(建康:南京)에 역대 남조의 도읍이 있었다. 문제의 명에 따라 52만의 수나라 대군은 단숨에 양자강을 건너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일자천금(一字千金)
一:한 일. 字:글자 자. 千:일천 천. 金:쇠 금.
[유사어] 일자백금(一字百金). [출전]《史記》〈呂不韋列傳〉
한 글자엔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아주 빼어난 글자나 시문(時文)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전국 시대 말엽,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상국(相國:宰相)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政: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B.C.235, 정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음)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 가거(奇貨可居)’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
이 무렵, 각국에서는 많은 책을 펴내고 있었는데 특히 순자(荀子)가 수만어(語)의 저서를 내었다는 소식을 ㄸ자 여불위는 당장 식객들을 시켜 30여만 어에 이르는 대작(大作)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천지만물(天地萬物), 고금(古今)의 일이 모두 적혀 있는 오늘날의 백과 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작은 나 말고 누가 감히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양양해진 여불위는 이 책을 자기가 편찬한 양《여씨춘추(呂氏春秋)》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여씨춘추》를 도읍인 함양(咸陽)의 성문 앞에 진열시킨 다음 그 위에 천금을 매달아 놓고 방문(榜文)을 써 붙였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한 자라도 덧붙이거나 빼눈 사람에게는 천금을 주리라.”
이는 상혼(商魂)이 왕성한 여불위의 우수 식객 유치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
自:스스로 자. 暴:사나울 포. 棄:버릴 기.
[준말] 자포(自暴), 포기(暴棄), 자기(自棄). [출전]《孟子》〈離婁篇〉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돌보지 아니함.
전국 시대를 살다간 아성(亞聖) 맹자(孟子)는 ‘자포’‘자기’에 대해《맹자》〈이루편(離婁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스스로를 버림)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을 헐뜯는 것을 자포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仁)이나 의(義)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원래 선(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은 편안한 집[安宒]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주] ‘자포자기’란 말은 맹자가 어느 때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학대(虐待)하고 돌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음.
전전긍긍(戰戰兢兢)
戰:무서워 떨‧싸움할 전. 兢:조심할 긍.
[준말] 전긍(戰兢). [동의어] 전전공공(戰戰恐恐).
[유사어] 소심익익(小心翼翼). [출전]《詩經》〈小雅篇〉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는 모양.
전전(戰戰)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兢兢)이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인《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의 ‘소민(小旻)’이라는 시(詩)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謀臣)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暴虎(불감포호)]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不敢憑河(불감빙하)]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人知其一(인지기일)]
그 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莫知其他(막지기타)]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戰戰兢兢(전전긍긍)]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臨深淵(여림심연)]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하네 [如履薄氷(여리박빙)]
[주] 요즈음에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적발당할까봐 쩔쩔매는 경우’에 이 말이 흔히 쓰이고 있음.
전차복철(前車覆轍)
前:앞 전. 車:수레 차‧거. 覆:엎어질 복. 轍:바퀴자국 철.
[준말] 복철(覆轍). [대응어]~후차지계(後車之戒).
[동의어] 전차복 후차계(前車覆後車戒), 후차지계, 복거지계(覆車之戒).
[유사어] 답복철(踏覆轍), 답복차지철(踏覆車之轍), 전철(前轍).
[참조] 은감불원(殷鑑不遠).
[출전]《漢書》〈賈誼專〉,《說苑》〈善說〉,《後漢書》〈竇武專(두무전)〉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 곧 ① 앞사람의 실패. 실패의 전례. ②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
① 전한 5대 황제인 문제(文帝)때 가의(賈誼:B.C. 168~210)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문제가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역사에 인군(仁君)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 크게 기여한 공신인데, 당시 그가 상주한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속담에 ‘앞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前車覆轍]’은 뒷수레를 위한 교훈[後車之戒]이란 말이 있사옵니다. 전 왕조인 진(秦)나라가 일찍 멸망한 까닭은 잘 알려진 일이 온데, 만약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前轍)을 밟게 될 뿐이옵니다. 국가 존망, 치란(治亂)의 열쇠가 실로 여기에 있사오니 통촉하시오소서.”
문제는 이후 국정 쇄신(國政刷新)에 힘써 마침내 태평 성대를 이룩했다고 한다.
② 이 말은《설원(說苑)》〈선설(善說)〉에도 실려 있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어느 날 중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취흥(醉興)이 도도한 문후가 말했다.
“술맛을 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한 잔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모두들 찬동했다. 그런데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그러자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인 공손불인(公孫不仁)이 술을 가득 채운 큰잔을 문후에게 바쳤다. 문후가 계속 그 잔을 받지 않자 공손불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차 복철은 후차지계’란 속담이 있사온데, 이는 전례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규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규약을 지키지 않는 전례를 남기신다면 누가 그 규약을 지키려 하겠나이까? 하오니, 이 잔을 받으시오소서.”
문후는 곧 수긍하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공손불인을 중용했다고 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
轉:구를 전. 禍:재화 화. 爲:할‧위할 위. 福:복 복.
[대응어]~인패위공(因敗爲功). [동의어] 인화위복(因禍爲福).
[유사어] 새옹지마(塞翁之馬). [출전]《戰國策》〈燕策〉
① 화(禍)를 바꾸어 오히려 복(福)이 되게 함.
②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됨.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6국, 곧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의 재상을 겸임했던 종횡가(縱橫家:모사) 소진(蘇秦)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功)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주] 소진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주(周)나라의 도읍 낙양[洛陽:산서성(山西省) 내] 사람. 근처의 귀곡(鬼谷)에 은거하던 수수께끼의 종횡가 귀곡 선생[鬼谷先生:제반 지식에 통달한 인물로서 종횡설을 논한《귀곡자(鬼谷子)》3권을 지었다고 함]에게 배웠음. 따라서 소진이 죽은 뒤 연횡책(連橫策)을 펴 합종책을 깨뜨린 장의(張儀:?~B.C. 309)와는 동문이 되는 셈. 제(齊)나라에서 살해됨.(?~B.C. 317).
절차탁마(切磋琢磨)
切:끊을‧자를 절. 磋:탄식할‧찬탄할 차. 琢:쫄 탁. 磨:갈 마.
[원말]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 [준말] 절마(切磨).
[출전]《論語》〈學而篇〉,《詩經》〈衛風篇〉
뼈‧상아‧옥‧돌 따위를 깎고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 곧 ① 수양에 수양을 쌓음의 비유. ② 학문‧기예 따위를 힘써 갈고 닦음의 비유.
언변과 재기가 뛰어난 자공(子貢)이 어느 날 스승인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으며[貧而無諂] 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富而無驕]. 그건 어떤 사람일까요?”
“좋긴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貧而樂道]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富而好禮].”
공자의 대답에 이어 자공은 또 이렇게 물었다.
“《시경(詩經)》에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상아(象牙)를 잘라서 줄로 간 것[切磋]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硏磨]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선생님이 말씀하긴 ‘수양에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일까요?”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이제 너와 함께《시경》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과거의 것을 알려주면 미래의 것을 안다고 했듯이, 너야말로 하나를 듣고 둘을 알 수 있는 인물이로다.”
정중지와(井中之蛙)
井:우물 정.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蛙:개구리 와.
[원말] 정중와 부지대해(井中蛙不知大海). [준말] 정와(井蛙).
[동의어] 정와(井蛙), 정중와(井中蛙), 정저와(井底蛙), 감정지와(坎井之蛙).
[유사어] 촉견폐일(蜀犬吠日), 월견폐설(越犬吠雪).
[참조] 망양지탄(望洋之嘆), 득롱망촉(得隴望蜀).
[출전]《後漢書》〈馬援專〉,《莊子》〈秋水篇〉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으로, 식견이 좁음의 비유.
①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세운 신(新)나라 말경, 마원(馬援)이란 인재가 있었다. 그는 관리가 된 세 형과는 달리 고향에서 조상의 묘를 지키다가 농서[隴西:감숙성(甘肅省)]에 웅거하는 외효(隗囂)의 부하가 되었다.
그 무렵, 공손술(公孫述)은 촉(蜀) 땅에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외효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마원을 보냈다. 마원은 고향 친구인 공순술이 반가이 맞아 주리라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공손술은 계단 아래 무장한 군사들을 도열시켜 놓고 위압적인 자세로 마원을 맞았다. 그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옛 우정을 생각해서 자네를 장군에 임명할까 하는데, 어떤가?”
마원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천하의 자웅(雌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공손술은 예를 다하여 천하의 인재를 맞으려 하지 않고 허세만 부리고 있구나. 이런 자가 어찌 천하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마원은 서둘러 돌아와서 외효에게 고했다.
“공손술은 좁은 촉 땅에서 으스대는 재주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였습니다.”
그래서 외효는 공손술과 손잡을 생각을 버리고 훗날 후한(後漢)의 시조가 된 광무제(光武帝:25~27)와 수호(修好)하게 되었다.
② ‘정중지와’란 말은《장자(莊子)》〈추수편(秋水篇)〉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북해(北海)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황하(黃河)의 하신(河神)인 하백(河伯)에게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구애하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가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여름 한 철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과 도(道)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배운 것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강지처(糟糠之妻)
糟:술재강 조. 糠:겨 강. 之:갈 지(…의). 妻:아내 처.
[원말] 조강지처 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
[출전]《後漢書》〈宋弘專〉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
전한(前漢)을 찬탈한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씨(劉氏) 천하를 재흥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일이다. 건원(建元) 2년(26), 당시 감찰(監察)을 맡아보던 대사공(大司空:御史大夫) 송홍(宋弘)은 온후한 사람이었으나 간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광무제는 미망인이 된 누나인 호양공주(湖陽公主)를 불러 신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 의중을 떠보았다. 그 결과 호양 공주는 당당한 풍채와 덕성을 지닌 송홍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 놓고 송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런 질문을 했다.
“흔히들 고귀해지면 (천할 때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가난할 때의) 아내를 버린다고 하던데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소?”
그러자 송홍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 하며[貧賤之交 不可忘],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들었사온데 이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나이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와 호양 공주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조명시리(朝名市利)
朝:아침‧조정 조. 名:이름‧이름날 명. 市:저자 시. 利:이로울 리.
[유사어] 적시적지(適時適地). [참조] 일거양득(一擧兩得).
[출전]《戰國策》〈秦策〉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市場]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라는 말.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 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는 어전에서 ‘촉(蜀)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므로,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며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종횡가(縱橫家) 출신의 재상 장의(張儀)는 그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우선 위(魏)‧초(楚)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한(韓)나라의 삼천(三川) 지방으로 출병한 후 천하의 종실인 주(周)나라의 외곽을 위협하면, 주나라는 스스로 구정[九鼎: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보물]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그 보물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천하에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나이까? 이것이 패업(霸業)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변경의 촉을 정벌해 봤자 군사와 백성을 피폐(疲弊)케 할 뿐 무슨 명리(名利)가 있겠나이까?
신(臣)이 듣기로는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에서 다툰다[朝名市利]’고 하옵니다. 지금 삼천 지방은 천하의 저자이옵고 주나라 황실(皇室)은 천하의 조정이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것을 다투려 하지 않고 하찮은 오랑캐의 촉을 다투려 하시옵니다. 혹, 패업을 멀리하시려는 것은 아니옵나이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주] 장의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위(魏)나라 사람. 합종책(合縱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과 함께 수수께끼의 종횡가인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종횡의 술책을 배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을 받아 진나라의 재상이 됨. 소진이 제(齊)나라에서 살해되자(B.C. 317) 6국을 순방, 유세(遊說)하여 소진의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連橫策)을 성사시켜 6국으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함. 혜문왕이 죽은 후 참소(讒訴)를 당하여 위나라에서 객사(客死)함. (?~B.C. 309).
조삼모사(朝三暮四)
朝:아침 조. 三:석 삼. 暮:저물 모. 四:넉 사.
[준말] 조삼(朝三). [동의어] 조사모삼(朝四暮三).
[출전]《列子》〈黃帝篇〉,《莊子》〈齊物論〉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 곧 ① 당장 눈앞의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의 비유. ②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狙)란 원숭이를 뜻한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가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하나같이 화를 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 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朝四暮三]씩 주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좌단(左袒)
左:왼 좌. 袒:옷 벗어 멜 단.
[출전]《史記》〈呂后本紀〉
웃옷의 왼쪽 어깨를 벗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편들어 동의함을 이르는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황후인 여태후(呂太后)가 죽자(B.C. 180) 이제까지 그녀의 위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유씨(劉氏) 일족과 진평(陳平)‧주발(周勃) 등 고조의 유신(遺臣)들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한 조왕(趙王) 여록(呂祿), 남군(南軍)을 장악한 여왕(呂王) 여산(呂産)을 비롯한 외척 여씨(呂氏) 타도에 나섰다.
그간 주색에 빠진 양 가장했던 우승상(右丞相) 진평은 태위(太尉) 주발과 상의하여 우선 여록으로부터 상장군의 인수(印綬)를 회수하기로 했다. 마침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역기(酈寄)가 여록과 친한 사이임을 안 진평은 그를 여록에게 보냈다. 역기는 여록을 찾아가 황제의 뜻이라 속이고 상장군의 인수를 회수해 왔다. 그러자 주발은 즉시 북군의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한실(漢室)의 주인은 유씨이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여씨가 유씨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는 한실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 상장군 주발은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여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우단(右袒)하고, 나와 함께 유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좌단(左袒)하라.”
그러자 전군(全軍)은 모두 좌단하고 유씨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로 돌아갔다.
주지육림(酒池肉林)
酒:술 주. 池:못 지. 肉:고기 육. 林:수풀 림.
[동의어] 육산주지(肉山酒池). [유사어] 육산포림(肉山脯林).
[참조] 은감불원(殷鑑不遠).
[출전]《史記》〈殷本紀〉,《帝王世紀》,《十八史略》
술로 못[池]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주연(酒宴)을 일컫는 말.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妺喜), 달기(妲己)라는 희대의 요녀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 사치와 주색에 탐닉하다가 결국 폭군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 말았다.
하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에 빠졌다. 걸왕은 그녀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 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기도 했다.
또 무악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뭇 둘레에는 고기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은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이 같은 사치음일(奢侈淫佚)의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주벌(誅伐)당하고 말았다.
또한 은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탕왕으로부터 28대째)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 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의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 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주지육림’을 만들었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북리무악(北里舞樂)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몰아(沒我)의 황홀경(怳惚境)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광연(狂宴)이 주야장천(晝夜長川)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
이같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광태(狂態)를 보다못해 충신들이 간하면 주왕은 도리어 그들을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불충자로 몰아 가차없이 포락지형(炮烙之刑)에 처하곤 했다. 포락지형이란 기름칠한 구리 기둥[銅柱]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일종의 잔인 무도한 사형 방법인데, 미끄러운 구리 기둥에서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 죽은 희생자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모습까지도 잔인한 달기의 음욕(淫慾)을 돋우는 재료가 되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주(周)나라 시조인 무왕(武王)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죽마고우(竹馬故友)
竹:대나무 죽. 馬:말 마. 故:예‧연고 고. 友:벗 우.
[동의어] 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 기죽지교(騎竹之交), 죽마지호(竹馬之好).
[출전]《世說新語》〈品藻篇〉,《晉書》〈殷浩專〉
어릴 때 같이 죽마(대말)를 타고 놀던 벗이란 뜻. 곧 ① 어렸을 때의 벗. 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의 오랜 친구.
진(晉: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준조절충(樽俎折衝)
樽:술통 준. 俎:도마 조. 折:꺾을 절. 衝:충돌할 충.
[유사어] 준조지사(樽俎之師). [출전]《晏子春秋》〈內篇〉
‘술자리[樽俎(間)]에서 유연한 담소(談笑)로 적의 창끝을 꺾어 막는다[折衝]는 뜻으로, 외교를 비롯하여 그 밖의 교섭에서 유리하게 담판하거나 흥정함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이 신하인 최저(崔杼)에게 시해되자 동생이 뒤를 잇고 경공(景公)이라 일컬었다. 경공은 최저를 좌상(左相)에 임명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는 죽이기로 맹세까지 했다. 이어 모든 신하가 맹세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안영(晏嬰:晏子)만은 맹세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좋으련만.’
이윽고 최저가 살해되자 경공은 안영을 상국(相國)에 임명했다. 안영은 온후박식(溫厚博識)한 인물로서 ‘한 벌의 호구(狐裘: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으로 만든 갖옷)를 30년이나 입었을[一狐裘三十年]’정도로 검소한 청백리이기도 했다. 한 번은 경공이 큰 식읍(食邑)을 하사하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욕심이 충족되면 망할 날이 가까워지나이다.”
당시 중국에는 대국만 해도 12개국이나 있었고 소국까지 세면 100개국이 넘었다. 안영은 이들 나라를 상대로 빈틈없이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제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안영의 외교 수완에 대해 그의 언행을 수록한《안자 춘추(晏子春秋)》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술통과 도마 사이[樽俎間:술자리]를 나가지 아니하고 1000리(里) 밖에서 절충한다 함은, 그것은 안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 준조 사이 : ‘술통과 도마 사이’란 뜻으로, 술자리(연회석)를 가리키는 말.
중과부적(衆寡不敵)
衆:무리 중. 寡:적을 과. 不:아니 불. 敵:대적할‧원수‧적수 적.
[출전]《孟子》〈梁惠王篇〉
적은 수효가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
전국 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王道論)을 역설하던 맹자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말했다.
“전하 스스로는 방일(放逸)한 생활을 하시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천하의 패권(覇權)을 잡으려 드시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사옵니다.”
“아니, 과인의 행동이 그토록 나쁘단 말이오?”
“가령, 지금 소국인 추(鄒)나라와 대국인 초(楚)나라가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기겠나이까?”
“그야, 물론 초나라가 이길 것이오.”
“그렇다면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衆寡不敵]’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지금 천하에는 1000리(里) 사방(四方)의 나라가 아홉 개 있사온데 제나라도 그중 하나이옵니다. 한 나라가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결코 소국인 초나라가 대국인 초나라를 이기려 하는 것과 같지 않사옵니까?”
이렇게 몰아세운 다음 맹자는 예의 왕도론을 설파했다.
“왕도로써 백성을 열복(悅服)시킨다면 그들은 모두 전하의 덕에 기꺼이 굴복할 것이오며 또한 천하는 전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옵니다…‥.”
중석몰촉(中石沒鏃)
中:가운데‧맞을 중. 石:돌 석. 沒:잠길 몰. 鏃:화살 촉.
[원말] 석중석몰촉(射中石沒鏃).
[동의어] 석석음우(射石飮羽), 석석몰금음우(射石沒金飮羽), 웅거석호(熊渠射虎).
[유사어] 일념통암(一念通巖),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출전]《史記》〈李將軍專〉,《韓詩外專》〈卷六〉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①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은 영맹한 흉노족의 땅에 인접한 농서[隴西:감숙성(甘肅省)] 지방의 무장 대가(武將大家) 출신으로, 특히 궁술(弓術)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장이었다. 문제(文帝) 14년(B.C. 166), 이광은 숙관(肅關)을 침범한 흉노를 크게 무찌를 공으로 시종 무관이 되었다. 또 그는 황제를 호위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큰 호랑이를 때려잡아 천하에 용명(勇名)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이광은 숙원이었던 수비 대장으로 전임되자 변경의 성새(城塞)를 전전하면서 흉노를 토벌했는데 그때도 늘 이겨 상승(常勝) 장군으로 통했다. 그래서 흉노는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며 감히 성해를 넘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황혼 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다. 화살은 명중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꼼짝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화살이 깊이 박혀 있는 큰돌이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쏘았으나 화살은 돌에 명중하는 순간 튀어 올랐다. 정신을 한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한시외전(韓詩外專)》에도 초(楚)나라의 웅거자(熊渠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射石飮羽]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중원축록(中原逐鹿)
中:가운데 중. 原:근원‧들‧벌판 원. 逐:쫓을 축. 鹿:사슴 록.
[준말] 축록(逐鹿). [동의어] 각축(角逐).
[유사어] 중원장리(中原場裡), 중원석록(中原射鹿).
[출전]《史記》〈淮陰侯列傳〉
중원[天下]의 사슴[帝位]을 쫓는다는 뜻. 곧 ① 제위(帝位)를 다툼. ② 정권을 다툼. ③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함.
한(漢)나라 고조(高祖) 11년(B.C. 196), 조(趙)나라 재상이었던 진희(陳豨)가 대(代:산서성)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그 틈에 진희와 내통하고 있던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도읍 장안(長安)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여후(呂后:고조의 황후)와 재상 소하(蕭何)에게 모살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는 여후에게 물었다.
“한신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괴통(蒯通)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고 하더이다.”
괴통은 제(齊)나라의 언변가로서 고조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제왕(齊王)이었던 한신에게 독립을 권했던 사람이다. 그 후 고조 앞에 끌려 나온 괴통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당당히 말했다.
“그때 한신이 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폐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고조는 크게 노했다.
“저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그러자 괴통은 이렇게 항변했다.
“폐하, 신은 전혀 삶겨 죽을 만한 죄를 진 적이 없나이다. 진(秦)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각지에 영웅 호걸들이 일어 났사옵고, 진나라가 사슴[鹿:帝位]을 잃음으로 해서 천하는 모두 이것을 쫓았던[逐] 것이오며, 그중 키 크고 발빠른 걸물(傑物:고조 유방을 가리킴)이 이것을 잡았던 것이옵니다. 그 옛날 대악당인 ‘도척(盜跖)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었다[跖狗吠堯]’고 해서 요 임금이 악인이라 짖은 것은 아니옵니다. 개란 원래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온데 당시 신은 오직 한신만 알고 폐하를 몰랐기 때문에 짖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난세에 폐하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렸다 해서 삶아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시옵기를…‥.”
빈틈없는 항변에 할 말을 잃은 고조는 괴통을 그냥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 요 : 중국 고대의 이상적 성군(聖君).
도척 : 춘추 시대,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함.
지록위마(指鹿爲馬)
指:손가락‧가리킬 지. 鹿:사슴 록. 爲:할‧위할 위. 馬:말 마.
[출전]《史記》〈秦始皇本紀〉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한다는 뜻. 곧 ① 윗사람을 농락하여 마음대로 휘두름의 비유. ② 위압적으로 남에게 잘못을 밀어붙여 끝까지 속이려 함의 비유.
진(秦)나라 시황제갸 죽자 측근 환관인 조고(趙高:?~B.C. 208)는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오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 그밖에 많은 구신(舊臣)들을 죽이고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馬]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오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지어지앙(池魚之殃)
池:못 지. 魚:고기 어. 之:갈 지(…의). 殃:재앙 앙.
[동의어] 앙급지어(殃及池魚). [출전]《呂氏春秋》〈必己篇〉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란 뜻. 곧 ① 화(禍)가 엉뚱한 곳에 미침. ② 상관없는 일의 재난에 휩쓸려 듦의 비유. 언걸 먹음.
춘추 시대 송(宋)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司馬:大臣) 벼슬에 있는 환퇴(桓魋)라는 사람이 천하에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보석을 가지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환퇴의 보석 이야기를 듣고 탐이 난 왕은 어떻게든 그 보석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측근 환관에게 속히 환퇴를 찾아내어 보석을 감춰 둔 장소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환관이 어렵사리 찾아가자 환퇴는 서슴없이 말했다.
“아, 그 보석 말인가? 그건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 속에 던져 버렸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신하에게 그물로 연못 바닥을 훑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다 쳐낸 다음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연못의 물을 퍼 없애는 바람에 결국 애꿎은 물고기들만 다 말라죽고 말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百戰不殆)
知:알 지. 彼:저 피. 己:몸‧자기 기. 百:일백 백. 殆:위태하 태.
[출전]《孫子》〈謀攻篇〉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 곧 상대방과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알아보고 승산(勝算)이 있을 때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말.
춘추 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패업(霸業)을 도운 손무(孫武)는 전국 시대에 초(楚)나라의 병법가로서《오자(吳子)》를 쓴 오기(吳起)와 더불어 병법의 시조라 불리는데 그가 쓴《손자(孫子)》〈모공편(謀攻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아니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리고 적의 실정은 모른 채 아군의 실정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또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실정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만 번에 한 번도 이길 가망이 없다.”
[주] 여기서 말하는 ‘백(百)’이란 단순한 숫자상의 ‘100’이 아니라 ‘삼(三)’‘칠(七)’‘구(九)’‘천(千)’‘만(萬)’등과 같이 ‘많은 횟수’를 가리키는 것임.
징갱취제(懲羹吹虀)
懲:징계할 징. 羹:국 갱. 吹:불 취. 虀:냉채 제.
[동의어] 징갱취채(懲羹吹菜), 징갱취회(懲羹吹膾).
[유사어] 징선기여(懲船忌輿), 오우천월(吳牛喘月).
[출전]《楚辭》〈七章 惜誦〉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후후 불고 먹는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 한 데 데어서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의 비유.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초(楚)‧제(齊) 두 나라뿐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재상 장의(張儀)는 초‧제 동맹의 강화론자(强化論者)인 초나라의 삼려 대부[三閭大夫:소(昭)‧굴(屈)‧경(景) 세 왕족의 족장(族長)] 굴원[屈原:이름은 평(平), B.C. 343?~277?]을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렸다. 이윽고 초나라 회왕(懷王)의 총회(寵姬) 정수(鄭袖)와 영신(佞臣) 근상(勤尙) 등이 굴원을 증오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장의는 곧 그들을 매수하여 굴원의 실각 공작을 폈다. 드디어 굴원이 조정으로부터 축출되자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면 진나라의 국토 600리를 할양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했으나 장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을 안 회왕은 분을 참지 못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패하고 도리어 접경 지역의 국토까지 빼앗겼다. 회왕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굴원을 다시 등용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B.C.299) 어느 날 진나라로부터 우호 증진이란 미명 아래 회왕을 초청하는 사신이 왔다. 굴원은 믿을 수 없는 진나라의 초청에 응해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방대했다. 그러나 회왕은 왕자 자란(子蘭)의 강권에 따라 진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그 이듬해 객사하고 말았다.
초나라에서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동생인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란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도리어 참소(讒訴)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 또다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 후 10년간 오직 조국애에 불타는 굴원은 망명도 하지 않고 한결같이 동정호(洞庭湖) 주변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울분이 복받친 나머지 멱라(汨羅:동정호 남쪽을 흐르는 강)에 몸을 던져 수중 고혼(水中孤魂)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의 넋을 ‘멱라의 귀[汨羅之鬼]’이라 일컫고 있다.
《초사(楚辭)》에 실려 있는 굴원의 작품 중 대부분은 이 방랑 시절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는 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걱정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영신을 미워하며 그의 고고한 심정을 정열적으로 노래했는데 ‘징갱취제’는《초사》〈9장〉중 ‘석송(惜誦)’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체까지 불고 먹는데 [懲於羹者 而吹虀兮(징어갱자 이취제혜)]
어찌하여 그 뜻(나약함)을 바꾸지 못하는가 [何不變此志也(하불변차지야)] ‥‥‥‥‥‥
‘석송’은 굴원이 자기 이상으로 주군(主君)을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을 분노하며 더욱이 어쩔 수 없는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그 절조만은 변절하지 않겠다는 강개지심(慷慨之心)을 토로한 시이다.
창업수성(創業守成)
創:비롯할‧시작할 창. 業:업 업. 守:지킬 수. 成:이룰 성.
[원말] 이창업 난수성(易創業難守成).
[출전]《唐書》〈房玄齡專〉,《貞觀政要》〈君道篇〉,《資治通鑑》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
수(隋:581~619)나라 말의 혼란기에 이세민(李世民)은 아버지인 이연(李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했다. 이듬해(618) 2세 양제(煬帝)가 암살되자 이세민은 양제의 손자인 3세 공제(恭帝)를 폐하고 당(唐:618~907) 나라를 ‘창업’했다.
626년 고조(高祖) 이연에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태종(太宗)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고, 외정(外征)을 통해 국토를 넓히고, 제도적으로 민생 안정을 꾀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후세 군왕이 치세(治世)의 본보기로 삼는 성세(盛世)를 이룩했다. 이 성세를 일컬어 ‘정관의 치[貞觀之治:태종 정관 연간(627~649)의 치세]’라고 한다.
‘정관의 치’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좌복야(左僕射) 두여회(杜如晦), 기획력이 빼어난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 강직한 대부(大夫) 위징(魏徵) 등과 같은 많은 현신들이 선정(善政)에 힘쓰는 태종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은 이들 현신이 모인 자리에 이런 질문을 했다.
“창업과 수성은 어느 쪽이 어렵소?”
방현령이 대답했다.
“창업은 우후 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아나이다.”
그러나 위징의 대답은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옵니다. 그런 만큼 수성이 어려운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방공(房公)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 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魏公)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싹트는 교사(驕奢:교만하고 사치함)와 방심에서 오는 화란(禍亂)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수성에 힘쓸까 하오.”
천고마비(天高馬肥)
天:하늘 천. 高:넢을 고. 馬:말 마. 肥:살찔 비.
[원말] 추고마비(秋高馬肥). [동의어]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
[유사어] 천고기청(天高氣淸). [출전]《漢書》〈匈奴專〉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 곧 ① 하늘이 맑고 오곡 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는 가을을 형용하는 말. ② (흉노에게 있어, 전하여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활약(동)하기 좋은 계절을 이르는 말.
은(殷)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는 주(周)‧진(秦)‧한(漢)의 삼왕조(三王朝)를 거쳐 육조(六朝)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북방 변경의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범 약탈해 온 표한(剽悍)한 유목 민족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늘 고심했는데 전국시대에는 연(燕)‧조(趙)‧진(秦)나라의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기존의 성벽을 수축(修築)하는 한편, 증축 연결(增築連結)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북방의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흉노에게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을 살아야 할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지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戰戰兢兢)했다고 한다.
천려일실(千慮一失)
千:일천 천. 慮:생각할 려. 一:한 일. 失:잃을 실.
[원말] 지자천려 필유일실(智者千慮必有一失).
[동의어] 지자일실(智者一失). [반의어] 천려일득(千廬一得).
[참조] 배수지진(背水之陣). [출전]《史記》〈淮陰侯列傳〉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책이 있을 수 있다는 말.
한나라 고조의 명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조(趙)나라로 쳐들어간 한신(韓信)은 결전을 앞두고 ‘적장 이좌거(李左車)를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지덕(知德)을 겸비한 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전 결과 조나라는 괴멸했고, 이좌거는 포로가 되어 한신 앞에 끌려 나왔다.
한신은 손수 포박을 풀어 준 뒤 상석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어 위로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천하 통일에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 있는 연(燕)‧제(齊)에 대한 공략책을 물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한 장수는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敗軍將 兵不語]’이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신이 재삼 정중히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장이 듣기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실책이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得]고 했습니다. 그러니, 패장의 생각 가운데 하나라도 득책이 있으면 이만 다행이 없을까 합니다.”
그 후 이좌거는 한신의 참모가 되어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천재일우(千載一遇)
千:일천 천. 載:실을‧해 재. 一:한 일. 遇:만날 우.
[동의어] 천재일시(千載一時), 천재일회(千載一會), 천세일시(千歲一時). [유사어] 맹귀부(우)목[盲龜浮(遇)木].
[출전]《文選》〈袁宏 三國名臣序贊>
천 년[千載]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란 뜻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이르는 말.
동진(東晉)으 학자로서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역임한 원굉(袁宏)은 여러 문집에 시문 300여 편을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거슨《문선》에 수록된〈삼국 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이다. 이것은《삼국지》에 실려 있는 건국 명신 20명에 대한 행장기(行狀記)인데, 그중 위(魏)나라의 순문약(荀文若)을 찬양한 글에서 원굉은 ‘대저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면 천 년이 지나도 천리마[驥] 한 필을 찾아내지 못한다[夫末遇伯樂則 千載無一驥]’고 적고, 현군과 명신의 만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만 년에 한 번의 기회는 이 세상의 통칙이며
[夫萬歲一期 有生之通途(부만세일기 우생지통도)]
천 년에 한 번의 만남은 현군과 명신의 진귀한 해후다
[千載一遇, 賢智之嘉會(천재일우 현지지가회)]
[주] 순문약 :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의 참모로 활약했으나 조조에게 역심이 있음을 알고 반대하다가 배척당한 강직한 인물.
백락 : 주(周)나라 시대에 준마(駿馬)를 잘 가려냈다는 명인.
철면피(鐵面皮)
鐵:쇠 철. 面:낯‧겉 면. 皮:가죽 피.
[동의어] 후안무치(厚顔無恥).
[유사어] 면장우피(面帳牛皮), 강안여자(强顔女子).
[출전]《北夢瑣言(북몽쇄언)》,《虛堂錄》
① 얼굴에 철판을 깐 듯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사람. ②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름. 또 그런 사람. ③ 낯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음. 후안무치(厚顔無恥).
왕광원(王光遠)이란 사람이 있었다. 학재가 뛰어나 진사(進士)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출세욕이 지나쳐 그는 고관의 습작시를 보고도 ‘이태백(李太白)도 감히 미치지 못할 신운(神韻: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감도는 시’라고 극찬할 정도로 뻔뻔한 아첨꾼이 되었다.
아첨할 때 그는 주위를 의식하지 않았고 상대가 무식한 짓을 해도 웃곤 했다. 한 번은 고관이 취중에 매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를 때려 주고 싶은데, 맞아 볼 텐가?”
“대감의 매라면 기꺼이 맞겠습니다. 자 어서…‥.”
고관은 사정없이 왕광원을 매질했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동석했던 친구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질책하듯 말했다.
“자네는 쓸개도 없나? 만좌(滿座) 중에 그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어쩌면 그토록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잘 보이면 나쁠 게 없니.”
친구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광원의 낯가죽은 두껍기가 열 겹의 철갑(鐵甲)과 같다.”
청담(淸談)
淸:맑을 청. 談:말씀 담.
[유사어] 청언(淸言), 청담(淸譚).
[출전]≪晉書≫ <郄超傳(극초전)> <王衡傳>.
≪宋書≫ <蔡郭傳論>. ≪顔氏家訓≫
① 명리(名利)‧명문(名聞)을 떠난 청아(淸雅)한 이야기. 고상한 이야기. ② 위진 시대에 유행한 노장(老莊)을 조술(祖述)하고 속세를 떠난 청정무위(淸淨無爲)의 공리공론(空理空論).
위진 시대(魏晉時代:3세기 후반)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사회가 혼란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난세였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자와 그에 추종하는 세속적 관료들의 횡포도 극심했다. 그래서 당시 사대부(士大夫) 간에는 오탁(汚濁)한 속세를 등지고 산림에 은거(隱居)하여 노장(老莊)의 철학이라든가 문예 등 고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죽림 칠현(竹林七賢), 곧 산도(山濤)‧완적(阮籍)‧혜강(嵇康)‧완함(阮咸)‧유령(劉伶)‧상수(尙秀)‧왕융(王戎)은 도읍 낙양(洛陽) 근처의 대나무 숲에 은거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술에 취한 채 ‘청담’-청신기경(淸新奇警:산뜻하고 기발함)한 이야기, 곧 세속의 명리(名利)‧명문(名聞)‧희비(喜悲)를 초월한, 고매한 정신의 자유 세계를 주제로 한 노장(老莊)의 철학-을 논하며 명교(名敎:儒敎) 도덕에 저항했다.
청천백일(靑天白日)
靑:푸를 청. 天:하늘 천. 白:흰 백. 日:날 일.
[출전]《唐宋八 家文》〈韓愈 與崔群西〉,《朱子全書》〈諸子篇〉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빛나는 해라는 뜻. 곧 ① 맑게 갠 대낮. ② 뒤가 썩 깨끗한 일. ③ 원죄가 판명되어 무죄가 되는 일. ④ 푸른 바탕의 한복판에 12개의 빛살이 있는 흰 태양을 배치한 무늬.
당나라 중기의 시인‧정치가인 한유[韓愈:자는 퇴지(退之), 768~824]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인데 그에게는 최군(崔群)이라는 인품이 훌륭한 벗이 있었다. 한유는 외직(外職)에 있는 그 벗의 인품을 기리며 〈최군에게 주는 글[與崔群書]〉을 써 보냈는데 명문(名文)으로 유명한 그 글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있을 터인데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모두 자네를 흠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봉황(鳳凰)과 지초[芝草:영지(靈芝)]가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며 ‘청천 백일’이 맑고 밝다는 것은 노예인들 모를 리 있겠는가?”
[주] 여기서 ‘청천백일’이란 말은 최군의 인품이 청명(淸明)하다는 것이 아니라 최군처럼 훌륭한 인물은 누구든지 알아본다는 뜻임.
당송팔대가 : 당(唐:618~906)나라와 송(宋:北宋, 960~1127)나라 시대의 여덟 명의 저명한 문장 대가(大家). 곧 당나라의 한유(韓愈:韓退之) 유종원(柳宗元:柳子厚),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歐永叔) 왕안석(王安石:王介甫) 증공(曾鞏:會子固) 소순(蘇洵:蘇明允) 소식(蘇軾:蘇東坡) 소철(蘇轍:蘇子由). 당송 팔가, 팔대가라고도 일컬음.
청천벽력(靑天霹靂)
靑:푸를 청. 天:하늘 천. 霹:벼락 벽. 靂:벼락 력.
[원말] 청천비벽력(靑天飛霹靂).
[출전] 육유(陸游)의《劍南詩稿》〈九月四日鷄未鳴起作〉
맑게 갠 하늘의 벼락(날벼락)이란 뜻. ① 약동하는 필세(筆勢)의 형용. ② 생각지 않았던 무서운 일. ③ 갑자기 일어난 큰 사건이나 이변(異變)의 비유.
이 말은 남송(南宋)의 대시인 육유[陸游:호(號)는 방옹(放翁)]의《검남시고(劍南詩稿)》〈9월4일 계미명기작(九月四日鷄未鳴起作)〉에 나오는 오언절구(五言絶句)의 끝 구절이다.
방옹이 병으로 가을을 지내고 [放翁病過秋(방옹병과추)]
홀연히 일어나 취하여 글을 쓰니 [忽起作醉墨(홀기작취묵)]
정히 오래 움츠렸던 용과 같이 [正如久蟄龍(정여구칩룡)]
푸른 하늘에 벼락을 치네 [靑天飛霹靂(청천비벽력)]
청출어람(靑出於藍)
靑:푸를 청. 出:날 출. 於:어조사 어(…에,…에서,…보다). 藍:쪽 람.
[준말] 출람(出藍).
[동의어] 출람지예(出藍之譽), 출람지재(出藍之才), 후생각고(後生角高), 출람지영예(出藍之榮譽).
[출전]《荀子》〈勸學篇〉
쪽[藍]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이르는 말.
이 말은 전국 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學不可以已(학불가이이)]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靑取之於藍(청취지어람)]
쪽빛보다 더 푸르고 [而靑於藍(이청어람)]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氷水爲之(빙수위지)]
물보다도 더 차다 [而寒於水(이한어수)]
[주]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지해서는 안 되며 청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
逐:쫓을 축. 鹿:사슴 록. 者:놈 자. 不:아니 불. 見:볼 견. 山:메 산.
[동의어] 축수자목불견태산(逐獸者目不見太山).
[출전]《淮南子》〈說林訓篇〉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 곧 ① 명예와 이욕(利慾)에 미혹(迷惑)된 사람은 도리도 저버림. ② 이욕에 눈이 먼 사람은 눈앞의 위험도 돌보지 않음. 또는 보지 못함. ③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
전한(前漢)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중앙 정권에 대항적인 입장을 취했던 왕족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 ? ~ B.C.122)은 문하(門下) 식객(食客)의 도움을 받아 많은 서책을 저술했는데, 그중 특히 도가(道家)사상을 중심으로 엮은《회남자(淮南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逐鹿者 不見山(축록자 불견산)]
돈을 움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攫金者 不見人(확금자 불견인)]
치인설몽(癡人說夢)
癡:어리석을 치. 人:사람 인. 說:말씀 설, 달랠 세. 夢:꿈 몽.
[원말] 대치인몽설(對癡人夢說).
[동의어] 치인전설몽(癡人前說夢).
[출전]《冷齋夜話》〈卷力〉,《黃山谷題跋》
바보에게 꿈 이야기를 해준다는 뜻. 곧 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의 비유. ② 종작없이 지껄이는 짓의 비유. ③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이해되지 않음의 비유.
남송(南宋:1127~1279)의 석혜홍(釋惠洪)이 쓴《냉재야화(冷齋夜話)》〈권9(卷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나라 시대, 서역(西域)의 고승인 승가(僧伽)가 양자강과 회하(淮河) 유역에 있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지방을 행각(行脚: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할 때의 일이다. 승가는 한 마을에 이르러 어떤 사람과 이런 문답을 했다.
“당신은 성이 무엇이오[汝何姓]?”
“성은 하가요[姓何哥].”
“어느 나라 사람이오[何國人]?”
“하나라 사람이오[何國人].”
승가가 죽은 뒤 당나라의 서도가(書道家) 이옹(李邕)에게 승가의 비문을 맡겼는데 그는 ‘대사의 성은 하 씨(何氏)이고 하나라 사람[何國人]이다’라고 썼다. 이옹은 승가가 농담으로 한 대답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석혜홍은 이옹의 이 어리석음에 대해《냉재야화》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는 곧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한 것이다[此正所謂對癡說夢耳].’ 이옹은 결국 꿈을 참인 줄 믿고 말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주] ‘치인설몽’이란 말은 요즈음에는 본뜻과는 반대로 바보(치인)가 ‘종작없이 지껄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음.
이옹 : 일명 이북해(李北海), 678~747.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생전에 쓴 비서(碑書)가 800여에 이른다고 함.
칠보지재(七步之才)
七:일곱 칠. 步:걸음 보. 之:갈 지(…의). 才:재주 재.
[동의어] 칠보재(七步才), 칠보시(七步詩).
[유사어] 의마지재(倚馬之才), 오보시(五步詩).
[출전]《世說新語》〈文學篇〉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삼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위와(魏王) 조조(曹操)는 문장 출신이었지만 건안(建安)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비(丕:186~226)와 셋째 아들인 식(植)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놓고 식으로 하여금 후사(後嗣)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후한(後漢)의 헌제(獻帝:189~226)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220~226)라 일컫고 국호를 위(魏)라고 했다.
어느 날, 문제는 동아왕(東阿王)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번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핍박(逼迫)하는가’라는 뜻의 칠보시(七步詩)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주] 이후 ‘자두연두기’ 약하여 ‘자두연기(煮豆燃萁)’는 ‘형제 혹은 동족간의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음.
타산지석(他山之石)
他:다를 타. 山:메 산. 之:갈 지(…의). 石:돌 석.
[원말] 타산지석 가이공옥(可以攻玉).
[유사어] 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출전]《詩經》〈小雅篇〉
다른 산의 거친(쓸모 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 곧 ①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됨의 비유. ② 쓸모 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의 비유.
이 말은《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학명(鶴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일부)의 한 구절이다.
‥‥‥‥‥
즐거운 저 동산에는 [樂彼之園(낙피지원)]
박달나무 심겨 있고 [爰有樹檀(원유수단)]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 [其下維穀(기하유곡)]
다른 산의 돌이라도 [他山之石(타산지석)]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 [가이공옥(可以攻玉)]
[주]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돌[石]을 소인(小人)에 비유하고 옥(玉)을 군자(君子)에 비유하여 군자도 소인에 의해 수양과 학덕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르는 말.
태산북두(泰山北斗)
泰:클 태. 山:메 산. 北:북녘 북. 斗:말‧별자리 두.
[준말] 泰斗(태두). 山斗(산두). [동의어] 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출전] ≪唐書≫ 〈韓愈傳贊〉
태산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말. 곧 ① 권위자. 제일인자. 학문‧예술 분야의 대가. ②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러러 받듦을 받거나 가장 존경받는 사람.
당나라 때 사대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자는 퇴지(退之)]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779~805)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파직(罷職) 당했다가 재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24년).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자는 자후(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당서(唐書)》〈한유전(韓愈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태산북두’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주] 태산 : 중국 제일의 명산. 산동성(山東省)의 태안(泰安)에 있는 오악(五嶽) 중의 하나인 동악(東嶽)으로, 중국에서는 옛부터 태산을 성산(聖山)으로 추앙해 왔음.
북두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리키는 말. 북두칠성이 모든 별들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에 비유하고 있음.
토사구팽(免死狗烹)
免:토끼 토. 死:죽을 사. 狗:개 구. 烹:삶을 팽.
[원말] 교토사 양구팽(狡免死良狗烹)
[동의어] 야수진 엽구팽(野獸盡獵狗烹)
[유사어] 고(비)조진 양궁장[高(飛)鳥盡良弓藏].
[출전]《史記》〈淮陰侯列傳〉,《十八史略》,《韓非子》〈內儲說篇〉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 삼걸(三傑)의 한 사람인 한신(韓信:?~B.C.196)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고조는 지난날 그에게 고전한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에게 ‘한신은 반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제후는 초(楚) 땅의 진(陳:하남성 내)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을 진에서 포박하든가 나오지 않으면 제후(諸侯)의 군사로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를 들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활한 가신(家臣)이 한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가져가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한신이 이 이야기를 하자 종리매는 크게 노했다.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고조에게 가겠다면 당장 내 손으로 잘라 주지. 하지만 그땐 자네도 망한다는 걸 잊지 말게.”
종리매가 자결하자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당하자 그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져)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狡免死良狗烹(교토사양구팽)],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高鳥盡良弓藏(고조진양궁장)],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敵國破謀臣亡(적국파모신망)]고 하더니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종에게 죽게 되었구나.”
고조는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킨 뒤 주거를 도읍인 장안(長安)으로 제한했다.
[주]《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고조(高鳥)가 비조(飛鳥)로, 양구(良狗)가 주구(走狗)로 나와 있으나 뜻은 같음.
퇴고(推敲)
推:밀 퇴‧옮을 추. 敲:두드릴 고
[출전]《唐詩紀事》〈卷四十 題李凝幽居〉
민다, 두드린다는 뜻으로,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을 이르는 말.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자는 낭선(浪仙),777~841]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면서〈이응의 유거에 제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웃이 드물어 한거하고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풀숲 오솔길은 황원에 통하네 [草徑入荒園(추경입황원)]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고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그런데 마지막 구절인 ‘중은 달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敲]’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렸다. 그래서 가도는 ‘민다’‘두드린다’는 이 두 낱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중 타고 있는 말이 마주 오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무례한 놈! 뭣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다.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다. 그러자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
이를 계기로 그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주] 가도 : 당나라의 시인. 하북성 범양(河北省范陽) 사람. 자는 낭선(浪仙). 일찍이 불문(佛門)에 들어감. 법명(法名)은 무본(無本). 한유(韓愈)와의 사귐을 계기로 환속(還俗)한 후 시작(詩作)에 전념함.
파죽지세(破竹之勢)
破:깨뜨릴‧깨어질 파. 竹:대나무 죽. 之:갈 지(…의). 勢:기세‧형세 세.
[동의어] 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如破竹).
[출전]《晉書》〈杜預專〉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 곧 ① 맹렬한 기세. ② 세력이 강대하여 적대하는 자가 없음의 비유. ③ 무인지경을 가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군함의 비유.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를 진(晉)이라고 했다(265년).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년) 2월(음력),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업[建業:남경(南京)]으로 쇄도(殺到)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주] 두예 : 진(晉)나라 초엽의 명장‧정치가‧학자. 자는 원개(元凱).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오(吳)를 정벌하고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무공을 세움.《춘추(春秋)》《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도 유명함. 저서로는《좌전집해(左專集解)》《춘추석례(春秋釋例)》등이 있음. (222~284).
포호빙하(暴虎馮河)
暴:사나울 폭(관용)‧포. 虎:범 호. 馮:탈 빙. 河:물 하
[동의어] 포호빙하지용(暴虎馮河之勇)
[참조] 전전긍긍(戰戰兢兢). [출전] ≪論語≫ 〈述而篇〉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걸어서 황하를 건넌다는 뜻. 곧 무모한 행동.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용기의 비유.
공자의 3000여 제자 중 특히 안회(顔回)는 학재(學才)가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라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이를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노하거나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안회에게 어느 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왕후(王侯)에게 등용되면 포부를 펴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를 가슴 깊이 간직해 두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나와 너 두 사람 정도일 것이다.”
이 때 곁에서 듣고 있던 자로(子路)가 은근히 샘이 나서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도를 행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만약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임할 때 선생님은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무용(武勇)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자로는 ‘그야 물론 너지’라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대했으나 공자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거나 황하를 걸어서 건너는 것[暴虎馮河]과 같은 헛된 죽음을 후회하지 않을 자와는, 나는 행동을 같이하지 않을 것이다.”
풍성학려(風聲鶴唳)
風:바람 풍. 聲:소리 성. 鶴:학 학. 唳:학울 려.
[출전] ≪晉書≫ ≪謝玄載記≫
바람 소리와 울음소리란 뜻으로,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이나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의 비유.
동진(東晉:317~420)의 9대 효무제(孝武帝) 때인 태원(太元) 8년(383)의 일이다.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전진(前秦)의 3대 임금인 부견(苻堅:338~385)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효무제는 재상 사안(謝安)의 동생인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 사석(謝石)과 조카인 전봉도독(前鋒都督) 사현(謝玄)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우선 참모인 유로지(劉窂之)가 5000의 군사로 적의 선봉을 격파하여 서전을 장식했다.
이 때 중군을 이끌고 비수(淝水)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부견은 휘하 제장(諸將)에게 이렇게 명했다.
“전군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적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하라.”
그러나 이는 부견의 오산이었다. 일단 후퇴 길에 오른 전진군(前秦軍)은 반격은커녕 멈춰 설 수도 없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동진군은 사정없이 전진군을 들이쳤다. 대혼란에 빠진 전진군은 서로 밟고 밟혀 죽는 군사가 들을 덮고 강을 메웠다. 겨우 목숨을 건진 군사들은 겁을 먹은 나머지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風聲鶴唳]’ 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추격군이 온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주] 부견 : 전진(前秦)의 3대 임금. 이름은 문옥(文玉), 자는 영고(永固). 시호(諡號)는 세조(世祖). 저족(氐族) 출신. 2대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법제(法制)를 정비‧확립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씀. 376년 화북(華北:황하 중‧하류 지방)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음. 국력이 신장되자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 383년 동진을 쳤으나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함.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음. (338~385, 재위 357~385).
학철부어(涸轍鮒魚)
涸:마를 학. 轍:수레바퀴 자국 철. 鮒:붕어 부. 魚:고기 어.
[준말] 학부(涸鮒), 철부(轍鮒).
[동의어] 철부지급(轍鮒之急), 학철지부(涸轍之鮒), 학철부어(涸轍鮒魚).
[유사어] 우제지어(牛蹄之魚). [출전] ≪莊子≫ 〈外物篇〉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란 뜻으로, 매우 위급한 경우에 처했거나 몹시 고단하고 옹색함의 비유.
전국 시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했던 장자(莊子)의 이야기이다. 그는 왕후(王侯)에게 무릎을 굽혀 안정된 생활을 하기보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그는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장자는 굶다 못해 감하후(監河侯)를 찾아가 약간의 식대를 꾸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감하후는 친구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핑계를 댔다.
“빌려주지. 2,3일만 있으면 식읍(食邑)에서 세금이 올라오는데 그때 삼백 금(三百金)쯤 융통해 줄 테니 기다리게.”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2,3일 뒤에 거금(巨金) 삼백 금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체면 불고하고 찾아온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장자는 내뱉듯이 말했다.
“고맙군. 하지만 그땐 아무 소용없네.”
그리고 이어 장자 특유의 비아냥조(調)로 이렇게 부연했다.
“내가 여기 오느라고 걷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부르지 않겠나.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붕어가 한 마리 있더군[涸轍鮒魚].’‘왜 불렀느냐’고 묻자 붕어는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물 몇 잔만 떠다가 살려 달라’는 겨야. 그래서 나는 귀찮은 나머지 이렇게 말해 주었지. ‘그래. 나는 2,3일 안으로 남쪽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로 유세를 떠나는데 가는 길에 서강(西江)의 맑은 물을 잔뜩 길어다 줄 테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랬더니 붕어는 화가 나서 ‘나는 지금 물 몇 잔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기다리라고 하니 이젠 틀렸소. 나중에 건어물전(乾魚物廛)으로 내 시체나 찾으러 와 달라’고 하더니 그만 눈을 감고 말더군. 자, 그럼 실례했네.”
[주] ‘涸’이란 글자는 원래 ‘학’자인데 이 경우 ‘확’으로 읽어 ‘확철부어’라고도 함.
한단지몽(邯鄲之夢)
邯:땅 이름 한. 鄲: 땅 이름 단. 之:갈 지(…의). 夢:꿈 몽.
[동의어] 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粱之夢)
[출전] 심기제(沈旣濟)의 ≪枕中記≫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榮華)의 헛됨의 비유.
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하북성(河北省)내]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서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서울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 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은 포박 당하는 자리에서 탄식하여 말했다.
“내 고향 산동에서 땅뙈기나 부쳐먹고 살았더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걷던 때가 그립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칼을 들어 자결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년 후 원죄(冤罪)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는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고하고 하단을 떠났다.
호가호위(狐假虎威)
狐:여우 호. 假:거짓 가. 虎:범 호. 威:위엄 위
[준말] 가호위(假虎威). [동의어] 가호위호(假虎威狐)
[출전] ≪戰國策≫ 〈楚策〉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다른 짐승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림에 비유.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초(楚) 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선왕은 위(魏:梁)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을(江乙)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나이까. 전하, 혹 ‘호가호위’란 말을 알고 계시옵니까?”
“모르오.”
“하오면 들어 보시오소서. 어느 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나이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와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였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초나라의 군세(軍勢), 즉 전하의 강병(强兵)이옵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貶)하는 이유는 아부로 선왕의 영신(佞臣: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
浩:넓을 호. 然:그럴 연. 之:갈 지(…의). 氣:기운 기.
[준말] 호기(浩氣). [동의어] 정대지기(正大之氣). 정기(正氣).
[출전] ≪孟子≫ <公孫丑篇)
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 ②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③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전국 시대의 철인(哲人) 맹자(孟子)에게 어느 날, 제(齊) 나라 출신의 공손추(公孫丑)란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어 도를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틀림없이 천하의 패자(覇者)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선생님도 역시 마음이 움직이시겠지요?”
“나는 40 이후에는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없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용(勇)’이다. 자기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고, 이것이야말로 ‘대용(大勇)’으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최상의 수단이니라.”
“그럼,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告子)의 부동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고자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다’고 논박한 맹자의 논적(論敵)이다.
“고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애써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는 소극적이다. 나는 말을 알고 있다[知言]는 점에서 고자 보다 낫다. 게다가 ‘호연지기’도 기르고 있다.”
‘지언’이란 피사(詖辭:편벽된 말), 음사(淫辭:음탕한 말), 사사(邪辭:간사한 말), 둔사(遁辭:회피하는 말)를 간파하는 식견을 갖는 것이다. 또 ‘호연지기’란 요컨대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를 말하는 것으로서 천지간에 넘치는 지대(至大), 지강(至剛)하고 곧으며 이것을 기르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천지까지 충만 한다는 원기(元氣)를 말한다. 그리고 이 기(氣)는 도와 의(義)에 합치하는 것으로서 도의(道義)가 없으면 시들고 만다. 이 ‘기’가 인간에게 깃들여 그 사람의 행위가 도의에 부합하여 부끄러울 바 없으면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도덕적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호접지몽(胡蝶之夢)
胡:오랑캐‧어찌 호. 蝶:나비 접. 之:갈 지(…의). 夢:꿈 몽.
[유사어] 장주지몽(莊周之夢) [출전] ≪莊子≫ 〈齊物篇〉
나비가 된 꿈이란 뜻. 곧 ① 물아 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물아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심경.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④ 꿈.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이름은 주(周), B.C. 365~290]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物)의 시비(是非)‧선악(善惡)‧진위(眞僞)‧미추(美醜)‧빈부(貧富)‧귀천(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그 나비인 자기가 꿈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장자(莊子)》의 이런 우화(寓話)는 독자를 유현(幽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주]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요즈음에도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음.
유현 : 사물(事物)의 이치(理致) 또는 아취(雅趣)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음.
홍일점(紅一點)
紅:붉을 홍. 一:한 일. 點:점‧점 찍을‧흠 점.
[출전] ≪唐宋八家文≫ 〈王安石 詠石榴詩〉
① 여럿 가운데서 오직 하나 이채를 띠는 것. ② 많은 남자들 틈에 오직 하나뿐인 여자. ③ 여러 하찮은 것 가운데 단 하나 우수한 것.
북송(北宋) 6대 황제인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란 재상이 있었다. 당시 신법당(新法黨)의 지도인 왕안석은 재상에 임명되자 부국강병을 위한 이른바 ‘왕안석의 개혁’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구양수(歐陽脩)‧사마광(司馬光)‧정이[程頤:호는 이천(伊川)]‧소식(蘇軾) 등 유명한 문신들이 주축이 된 구법당(舊法黨)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중단 없이 실행되었다.
왕안석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그의〈영석류시(詠石媹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많은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
[萬綠叢中 紅一點(만록총중 홍일점)]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 많은들 무엇하리
[動人春色 不須多(동인춘색 불수다)]
화룡점정(畵龍點睛)
畵:그림 화. 龍:용 룡. 點:점 찍을 점. 睛:눈동자 정.
[유사어] 입안(入眼). [출전] ≪水衡記≫
용을 그리는데 눈동자도 그려 넣는다는 뜻. 곧 ①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킴. 끝손질을 함. ② 사소한 것으로 전체가 돋보이고 활기를 띠며 살아남의 비유.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인 양(梁)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立身)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
어느 날, 장승요는 금릉[金陵:남경(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은 구름을 헤치고 당장이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는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화서지몽(華胥之夢)
華:빛날 화. 胥:서로 서. 之:갈 지(…의). 夢:꿈 몽.
[유사어] 화서지국(華胥之國). 유화서지국(遊華胥之國).
[참조] 호접지몽(胡蝶之夢). [출전] ≪列子≫〈黃帝篇〉
화서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이나 낮잠을 이르는 말.
먼 옛날 중국 최초의 성천자(聖天子)로 알려진 황제[黃帝:공손헌원(公孫軒轅)]는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놀러 가 안락하고 평화로운 이상경(理想境)을 보았다.
그곳에는 통치자도 신분의 상하도 연장(年長)의 권위도 없고, 백성들은 욕망도 애증(愛憎)도 이해(利害)의 관념도 없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도 초연하다. 또 물 속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않으며, 공중에서 잠을 자도 침대에 누워 자는 것과 같고 걸어도 땅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또한 사물의 미추(美醜)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도 보행을 어렵게 하지 않는다. 형체를 초월한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 충만한 이상경인 것이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번뜻 깨닫는 바 있어 중신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지난 석 달 동안 방안에 들어앉자 심신 수양에 전념하며 사물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려 했으나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소. 그런데 짐은 이번에 꿈속에서 비로소 그 도(道)하는 것을 터득한 듯싶소.”
그 후 황제가 ‘도’의 정치를 베푼 결과 천하는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화씨지벽(和氏之璧)
和:화할 화. 氏:각시 씨. 之:갈 지(…의). 璧:둥근 옥 벽.
[준말] 화벽(和璧). [동의어] 변화지벽(卞和之璧)
[유사어] 완벽(完璧). 연성지벽(連城之璧)
[참조] 완벽(完璧). [출전] ≪韓非子≫ 〈卞和〉
천하 명옥(天下名玉)의 이름.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월형(刖刑: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그러안고 궁궐 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렸다.
후생가외(後生可畏)
後: 뒤 후. 生:날 생. 可:가히 가. 畏:두려울 외.
[출전] ≪論語≫ 〈子罕篇(자한편)〉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 곧 젊은 후배들은 선인(先人→先生)의 가르침을 배워 어떤 훌륭한 인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히 두렵다는 말.
춘추 시대의 대철학자‧사상가인 성인(聖人) 공자는 말했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 장래에 그들이 지금의 우리를 따르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焉知來者之不知今也]? 그러나 40세, 50세가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바 없느니라.”
[주] ‘후생가외’는 공자가 제자 중 학문과 덕행이 가장 뛰어난 안회[顔回:자는 자연(子淵), B.C. 521~490]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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