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교양(사서삼경, 제자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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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삼선생 2023. 6. 20.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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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

禮記集說序

前聖繼天立極之道莫大於禮하고 後聖垂世立敎之書亦莫先於禮하니 禮儀三百과 威儀三千이 孰非精神心術之所寓리오 故能與天地同其節이어늘 四代損益이 世遠經殘하야 其詳을 不可得聞矣라 儀禮十七篇이오 戴記四十九篇이어늘 先儒表章庸學하야 遂爲千萬世道學之淵源하니 其四十七篇之文이 雖純駁不同이나 然義之淺深同異를 誠未易言也니라 鄭氏는 祖讖緯하고 孔䟽는 惟鄭之從하야 雖有他說이나 不復收載하니 固爲可恨이라 然其灼然可據者는 不可易也니라 近世應氏集解於雜記大小記等篇에 皆闕而不釋하니 噫라 愼終追遠이 其關於人倫世道가 非細故而可略哉아 先君子師事雙峯先生十有四年에 以是經으로 三領鄕書하야 爲開慶名進士하니 所得於師門講論이 甚多로대 中罹煨燼하야 隻字不遺라 不肖孤僭不自量하고 會萃衍繹하야 而附以臆見之言하야 名曰禮記集說이라하노니 蓋欲以坦明之說로 使初學讀之에 卽了其義니 庶幾章句通則縕奧自見이라 正不必高爲議論하야 而卑視訓故之辭也니라 書成에 甚欲就正于四方有道之士로대 而衰年多疾하야 遊歷良艱일새 姑藏巾笥하야 以俟來哲하노니 治敎方興하야 知禮者或有取焉이면 亦愚者千慮之一爾리라 後學東匯陳澔序하다
前聖이 하늘을 계승하고 표준을 세운 道가 禮보다 큰 것이 없고, 後聖이 세상에 전하고 가르침을 세운 글도 禮보다 앞선 것이 없으니, 禮儀 3백과 威儀 3천이 무엇이 정신과 마음에 맡기는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천지와 그 절도를 같이하니 4代의 손익이 세상이 멀고 經文이 없어져 그 상세함을 들을 수 없었다. 儀禮 17편과 戴記 49편에 先儒가 中庸과 大學을 표장하여 드디어 천만세의 도학의 연원을 삼았으니 그 47편의 글이 비록 순수하고 섞이어 같지 않으나 뜻의 淺深同異는 진실로 쉽게 말할 수 없다. 鄭氏(鄭玄)는 讖緯學을 본받아 서술하였고, 孔氏(孔安國)의 䟽는 오직 鄭氏를 따라 비록 다른 설명이 있으나 다시 거두어 싣지 않았으니 진실로 恨할 만 하다. 그러나 그 분명히 취할 만한 것을 바꿀 수가 없다. 근세에 應氏의 集解가 雜記·大小記 등편에 모두 빠져서 해석하지 않았으니 아! 愼終追遠이 人倫·世道에 관계된 것이 조그만 일이 아니기 때문이니 생략할 만 하겠는가? 부친이 雙峰 선생에게 師事한지 14년에 이 經으로 세 번 鄕試에 세 번 합격하여 開慶 年號에 이름난 진사가 되어 師門에서 얻은 講論이 매우 많았으되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불초한 내가 참람되게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서 모으고 演繹하여 내 소견의 말로 덧붙여 이름하여 「禮記集說」이라 하였으니 분명한 해설로 초학자로 하여금 읽을 때에 바로 그 뜻을 알게 하고자 하였으니 거의 장구를 통달하면 깊은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바로 議論을 높게 하고 訓誥의 말을 낮추어 보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글을 완성함에 심히 사방의 도가 있는 선비에게 나아가 질정하고자 하였으나 늙고 병이 많아 두루 다니기가 진실로 어려웠다. 우선 책상자에 넣어 뒤에 오는 哲人을 기다리니 政事와 가르침이 막 일어날 때에 禮를 아는 자가 혹 얻은 것이 있다면 또한 어리석은 자가 천번 생각함에 한 번 얻을 뿐이다.

曲禮上 第一

古經에 ‘曲禮는 3천이다.’ 하였으니 節目의 자세한 것이 이와 같이 많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옛 禮經의 篇名이니 後人들이 編簡이 많기 때문에 나누어 上下로 삼았다. ○張子가 말하길 ‘物我 둘을 극진히 함은 曲禮로부터 들어간다.’
曲禮曰毋不敬하야 儼若思하며 安定辭하면 安民哉인저
曲禮에 말하길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어 엄연히 생각한 듯 하며, 말을 안정되게 하면 백성들을 편안히 하리로다.’
毋는 禁止辭이다. ○朱子가 말하길 首章에 君子의 修身이 그 요점이 이 세 가지에 있는데 그 효과가 충분히 백성을 편안히 하여야 하니 바로 禮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첫째 편이다. ○范氏가 말하길 經禮 3백과 曲禮 3천에 한마디 말로써 덮을 수 있으니 毋不敬이다. ○程子가 말하길 마음이 안정된 자는 그 말이 편안하여 펴지고, 불안한 자는 그 말이 가벼워 빠르다. ○劉氏가 말하길 篇首 세 구는 曾子가 이른바 君子가 도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세 가지이니 세세한 일은 담당자가 있는 뜻과 같으니 우선 그 큰 것을 세웠다. 毋不敬하면 용모를 움직임에 포악하고 오만함이 멀어질 것이고 엄숙히 생각하듯이 하면 안색을 바르게 함에 곧 신실함에 가까울 것이고 말을 편안하게 하면 말의 기운을 냄에 비루하고 이치에 위배됨이 멀어질 것이니 세 가지는 修身의 요체이고 政事를 하는 근본이다. 이것이 君子가 敬으로써 자기를 닦으면 그 효험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에 이르는 것이다.
敖不可長이며 欲不可從이며 志不可滿이며 樂不可極이니라
오만함은 가히 키울 수가 없으며, 욕심은 가히 방종하게 할 수가 없으며, 뜻은 가히 가득차게 할 수가 없으며, 즐거움은 가히 극도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朱子가 말하길 이 편은 여러 책의 정밀하고 요긴한 말을 섞어 취하여 모아 편을 이루어 비록 대의가 서로 유사하나 글이 연속하지 않으니 예컨대 首章 네 구는 바로 曲禮 古經의 말이고 敖不可長 이하 네 구는 어느 책의 말인지 모르나 또 스스로 한 절이 되니 모두 禁戒의 말이다. ○應氏가 말하길 敬의 반대가 敖가 되고 情의 움직임이 欲이 되고 뜻을 자만하면 넘치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뒤집힌다.
賢者는 狎而敬之하며 畏而愛之하며 愛而知其惡하며 憎而知其善하며 積而能散하며 安安而能遷하나니라
어진 사람은 親狎하면서도 그를 존경하며,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하며, 사랑하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알며, 증오하면서도 그의 착한 점을 알며, 축적하되 능히 흩어주며, 편안한 仁을 편안히 여기되 능히 정의에 옮겨간다.
朱子가 말하길 이것은 賢者는 그 親狎하는 바에 능히 공경하고 그 두려워하는 바에 능히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바에 능히 그 악함을 알고 그 미워하는 바에 능히 그 선함을 알고 비록 재물을 쌓되 능히 흩어 베풀고 비록 편안한 것을 편안히 여기되 능히 의로운 데로 옮겨 법이 될 만함을 말하였으니 上下 글의 禁戒의 말과 같지 않다. ○應氏가 말하길 安安은 편안한 것을 따라 편안히 여기는 것이다. 安은 仁을 순히 함이고 遷은 義를 결단함이다.
臨財毋苟得하며 臨難毋苟免하며 狠毋求勝하며 分毋求多니라
재물에 임해서는 구차히 얻으려고 말며, 환란에 임해서는 구차히 모면하려고 말며, 싸움에는 이김을 구하려고 말며, 나눔에는 많은 것을 구하려고 말아야 한다.
毋苟得은 見利思義이고 毋苟免은 죽음을 지켜서 도를 선하게 함이고 狠毋求勝은 분함에 어려움을 생각함이고 毋求多는 적은 것을 근심하지 말고 균등하지 않음을 근심하는 것이다. 하물며 이기기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이길 수 없으며 많음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많을 수가 없고 한갓 자기 몸만 잃게 된다.
疑事를 毋質하야 直而勿有니라
의심스러운 일을 質正하지 말아 바로 말하고 고집스럽게 두지 말아야 한다.
朱子가 말하길 두 구의 연결된 설명이 옳으니 疑事毋質은 바로 少儀에 이른바 자신의 언어로 질정하지 말라는 것이고 直而勿有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진술해 주어 저 사람이 선택하게 하고 차지하고서 선입견을 두어 오로지 강변을 힘써서는 안되다는 것을 이르니 그렇지 않으면 이는 몸소 언어로 질정하는 것이다.
若夫坐如尸하며 立如齊니라
앉아 있을 적에는 尸童이 처럼 하며 서있을 적에는 齋戒하듯이 해야 된다.
孔䟽에 말하기를 尸童이가 神位(신의 자리)에 있을 적에 앉음에 반드시 씩씩하게(점잖게) 하나니 앉으는 법을 반드시 마땅히 尸童이가 앉은 것처럼 해야(尸童이 처럼 앉아야) 되고, 사람이 기대고 섰음에 대부분은 거만하여 공손하지 아니하니니 비록 재계하지 않을 적에라도 또한 마땅히 제사 지내는 앞에서 재계하듯이 해야 된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劉原父가 이르기를 이는 바로 大戴禮의 曾子事父母篇의 말인데 이르기를 효자는 오직 잘 변화하므로 부모께서 그를 편안히 여기나니 앉아 있을 적에는 尸童이 처럼 하며 서있을 적에는 재계하듯이 하며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아니하며 말할 적에는 반드시 얼굴빛을 엄숙히 하는 것은 이는 成人의 착한(좋은) 점이요, 사람 자식의 도리가 될는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편이 아마도 저 글(大戴禮)을 취택하면서 若夫 두 글자를 刪削해 버리는 것에 실수를 하였는데, 鄭氏가 그 그런 줄을 모르고 이에 이 둘 글귀는 丈夫의 일이다고 말하였으니 틀렸다.
禮는 從宜하고 使는 從俗이니라
禮는 時宜를 따라야 되고 사신간 사람은 그 나라의 풍속을 따라야 된다.
鄭氏가 말하기를 일이 가히 일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敬(공경)이라는 것은 禮의 떳떳한 것이니, 禮는 때에 맞는(때에 따라서 맞도록 하는) 것이 중대하고, 時(때)라는 것은 禮의 변화이니 떳떳한 것을 體行하고 변화한 것을 극진히 한다면은 천하에 이르러서도 周旋함이 무궁할 것이다. ○應氏가 말하기를 큰 것으로는 百王·百世에 바탕과 문채를 덜고 보태는 時宜이고, 적은 것으로는 한 일과 한 물건까지도 널리 응하여 酬酢하는 절차이다. 또 말하기를 五方(四方과 中國)이 모두 성품이 있고 千里에 풍속이 같지 아니하니 때문에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은 반드시 그 나라의 풍속을 묻어야 되는 것이다.
夫禮者는 所以定親䟽하며 決嫌疑하며 別同異하며 明是非也니라
대체 禮라는 것은 써 친근함과 소원함을 정하는 것이며 혐의와 의문을 결단하는 것이며 같고 다름을 구별하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이다.
孔䟽에 말하기를 五服(다섯 가지 喪服)의 안에 大功 이상으로써 상복이 거친 것이 친근함이 되고 小功 이하로써 상복이 가는 것이 소원함이 된다. 만약 첩은 女君(정실 부인)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거니와 女君은 첩을 위해서 만약에 복을 입어준다면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니 강등을 한다면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한 혐의가 있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전연 입지를 아니하나니 이것은 혐의가 결단(판가름)된 것이고, 孔子의 初喪에 문인들이 복입을 것을 의심하자, 子貢이 아버지를 여윈것처럼 하면서 상복이 없는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의문을 결단한 것이다. 본래는 같았는데 지금은 다른 것은 고모나 누님이나 누이가 그것이고, 본래는 다른데 지금은 같은 것은 世母(백모)와 숙모·子婦(며느리)가 그것이다. 禮를 얻음이(禮에 맞는 것이) 옳음이 되고 禮를 잃어버림이 그름이 되나니 만약 주인이 아직 小歛을 아니하였을 적에 子游가 갖옷을 벗어 조문한 것은 禮를 얻었으니 옳은 것이고, 曾子는 갖옷을 껴입고서 조문하였던 것은 禮를 잃어버린 것이니 잘못된 것이다.
禮는 不妄說人하며 不辭費니라
禮는 망령되이 남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며 말을 허비하지 않는다.
써 남을 기쁘게 함을 구하는 것이 이미 마음가짐의 올바름을 잃어버렸는데 더구나 망령되게 함에 있어서랴? 망령되게 남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면은 禮를 안다. 조급한 사람의 말은 수다스럽고 君子의 말은 뜻을 전달하면 그만두나니 말한 사람이 번거로우면(수다스러우면) 듣는 사람이 반드시 싫증을 내는 것이다.
禮는 不踰節하며 不侵侮하며 不好狎이니라
禮는 절도를 넘지 아니하며 침범하거나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친압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절도를 넘으면은 치욕을 불러들이고(초치하고) 침범하거나 업신여기면은 사양함을 잊어버리게 되고 친압함을 좋아하면 공경(존경함)을 잊게 되나니 세 가지 것은 모두 禮를 배반하는 일이다. 이처럼 하지 아니하면 써 그 씩씩하고 공경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정성을 가져(지녀서) 치욕을 멀리함이 있을 것이다.
修身踐言을 謂之善行이니 行脩言道禮之質也니라
몸을 닦고 말을 실천하는 것을 그걸 착한 행동이라고 이르나니 행실이 닦여지고 말이 道理에 합하는(맞는) 것이 禮의 본질이다.
사람이 써 사람이 되는 것은(까닭은) 말과 행실일 뿐이니 충성스럽고 신실한(성실한) 사람이라야 만이 가히 써 禮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禮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鄭氏가 말하기를 言道는 말이 道에 합치(부합)하는 것이다.
禮聞取於人이오 不聞取人이라 禮聞來學이오 不聞往敎니라
禮에 있어서 남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은 들었고 남을 끌어와 취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禮에 와서 배우는 것은 들었고 가서 가르쳐주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朱子가 말씀하시기를 이 말은 孟子의 남을 다스리고 남에게 다스림을 받으며 남을 먹여 살리고 남에게 먹여 살림을 받는다는 것과 말의 뜻이 서로 유사하니 取於人이라는 것은 남에게 取法(본보기가)되는 것이고 取人이라는 것은 남이 오지 않는데 내가 끌어당겨서 그를 취하는 것이니 와서 배우는 것과 가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道德仁義非禮不成하며
道와 德과 仁과 義가 禮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道는 길과 같으니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니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아야(따라가야·걸어가야) 할 바이다. 때문에 그것을 道라고 이른 것이다. 道를 실행하여(길을 걸어가) 몸에 얻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德이라고 이른다. 仁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자 사랑하는 원리이고 義라는 것은 마음의 制裁이자 일의 당연한 것이다. 네 가지 것이 모두 禮로 말미암아 들어가서 禮로써 이루어지게 되나니 대개 禮는 공경으로 근본을 삼으니 공경이라는 것은 德이 모이는 곳이다.
敎訓正俗이 非禮면 不備하며
가르치고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이 禮가 아니면 구비되지 않는다.
가르침을 위에서 세우고 가르침을 아래에 보여주는 것이 모두 써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나 그걸 禮로써 가지런히 하지 않는다면(함이 아니라면) 혹시 敎訓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禮가 아니면 구비되지 않는다.
分爭辨訟이 非禮면 不決하며
分爭을 분별하고 訟事를 분별하는 것이 禮가 아니면 판결나지 않는다.
朱氏가 말하기를 다툼(분쟁)은 일에서 나타나 曲直이 있으니 分爭을 분별하면은 曲直이 서로 엇갈리지 아니하고, 訟事는 말에서 나타나 是非가 있나니 訟事를 분별하면은 是非가 서로 대적하지 않게 되나니 禮는 써 曲直을 바로잡고 是非를 밝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두 가지 것이 禮가 아니면 능히 판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君臣上下와 父子兄弟非禮면 不定하며
임금과 신하와 윗사람과 아랫사람과 아버지와 아들과 형과 아우가 禮가 아니면 인륜이 定해지지 않는다.
하나는 의리를 위주로 하고 하나는 은혜를 위주로 하니 은혜와 의리가 禮가 아니면 능히 정해질 수 없다.
宦學事師가 非禮면 不親하며
벼슬살이 하고 배우는데 스승을 섬기는 것이 禮가 아니면 친근해질 수 없다.
宦은 벼슬함이다. 벼슬함과 학문하는 것이 모두 스승이 있나니 스승을 섬기는 것은 써 道를 밝히는 것이니 禮가 아니면 서로 친근하고 사랑할 수가 없다.
班朝治軍과 涖官行法이 非禮면 威嚴不行하며
조정에 반열을 정하고 군대를 다스림과 벼슬에 임하여 법을 시행하는 것이 禮가 아니면 위엄이 행해지지 않는다.
조정 上下(상관과 하관)의 位次를 반열매기며 군대 좌우의 등급을 다스리며 직책을 나누어서 관직에 임하며 지킴을 삼가히하여 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위엄스러우면 사람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엄격하면 사람이 감히 위반하지 못하나니 네 가지 것이 禮가 아니면 위엄이 행해지지 않는다.
禱祠祭祀하야 供給鬼神이 非禮면 不誠不莊이니라
기도하고 제사지내어 귀신에게 이바지해 드림이 禮가 아니면 정성스럽지 못하고 장중하지 못하다.
禱는 복을 구하는 것으로써 意를 삼고 祠는 화려함으로써 주장을 삼고 祭는 봉양함으로써 일을 삼고 祀는 신을 편안히 해 드리는 것으로써 도리를 삼으니 네 가지 것이 모두 써 귀신에게 이바지해 드리는 것이다. 정성은 마음에서 나오고 장중함은 용모에 나타나니 네 가지 것이 禮가 아니면 정성스럽지 못하고 장중(경건)하지 못하다. ○지금 살펴보건대 供給(이바지해 드리는)하는 것은 犧牲과 幣帛과 器皿 등을 받들어 올린 따위를 이른다.
是以君子는 恭敬撙節退讓하야 以明禮하나니라
이렇기 때문에 君子는 공손하고 공경하며 억제하고 절제하며 물러나고 양보하여 써 禮를 밝힌다.
是以는 윗 글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다. 撙은 억제함이니 禮는 그 감소함을 위주로 한다.
鸚鵡能言하나 不離飛鳥하며 猩猩能言하나 不離禽獸니 今에 人而無禮면 雖能言하나 不亦禽獸之心乎아 夫惟禽獸無禮라 故父子聚麀하나니라
앵무새가 말을 능히 잘하지마는 날으는 새에 벗어나지 못하며 猩猩이가 말을 능히 잘하지마는 禽獸에 벗어나지 못하나니 지금 사람으로서 禮가 없다면 비록 말을 잘할지라도 또한 새짐승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대체 새와 짐승은 禮가 없기 때문에 부자가 암컷을 공유하는 것이다.
鸚鵡는 새로서의 영리한 것인데 隴蜀과 嶺南 지방에 모두 그 앵무새가 있다. 猩猩은 사람 얼굴에 돼지 몸인데 交趾와 封谿 等處에서 나온다. 禽이라는 것은 새와 짐승의 총칭인데 새는 가히 짐승이라고 할 수 없거니와 짐승은 또한 가히 禽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鸚鵡는 짐승이라고 이르지 아니하였고 猩猩이는 통칭 禽이라고 말하였다. 聚는 共(함께함)과 같다. 짐승의 암컷을 麀라고 한다.
是故聖人이 作하사 爲禮以敎人하야 使人以有禮하야 知自別於禽獸케하시니라
이렇기 때문에 성인이 일어나서서 禮를 만들어서 사람을 가르쳐 사람으로 하여금 써 禮가 있게 하여 스스로 禽獸와 다름을 알도록 하시었다.
朱子가 말씀하기를 聖人作에서 글귀가 끊어져야 된다.
太上은 貴德하고 其次는 務施報하니 禮尙往來라 往而不來非禮也며 來而不往이 亦非禮也니라
가장 오래된 상고 시대에는 德을 귀중하게 여기었고 그 다음은 은혜를 베풀고 보답하는 것을 힘썼나니 禮는 가고 오는 것을 숭상하였다. 갔는데 오지 않는 것이 禮가 아니며 왔는데 가지 않는 것이 또한 禮가 아니다.
太上(가장 오래된 상고 시대)은 帝皇의 세상이니 그 때에는 다만 그 덕이 충분히 써 사람에게 미쳐가는 것만을 귀중하게 여기었고 그 보답은 귀중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其次(그 다음)는 三王의 세상이니 禮가 三王에 이르러서 구비되었다. 때문에 베풀고 보답하는 것으로써 숭상하였다.
人이 有禮則安하고 無禮則危하나니 故曰禮者는 不可不學也라하니라
사람이 禮가 있으면 편안하고 禮가 없으면 위태롭게 되나니 때문에 禮라는 것은 가히 배우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禮라는 것은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매어있는(관계되는) 바이니 天子로부터 庶人에게 이르기까지 禮가 없이 편안한 사람은 있지를 않다.
夫禮者는 自卑而尊人하나니 雖負販者라도 必有尊也커든 而況富貴乎아
대체 禮라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것인데 비록 짐을 짊어지고 장사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존중함이 있어야 하는데 더구나 부귀에 있어서랴?
짊어지는 사람은 힘에 종사하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익에 종사하나니 비록 비천한 것일지라도 가히 써 禮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富貴而知好禮하면 則不驕不淫하고 貧賤而知好禮하면 則志不懾이니라
부귀하면서(부귀를 누리면서) 禮를 좋아할 줄을 알면 교만하지 않으며 음탕하지 않고 빈천하면서도 禮를 좋아할 줄 알면 뜻이 두려워하지 않는다.
馬氏가 말하기를 부귀한 사람이 써 교만하고 음탕하는 것과 빈천한 사람이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는 것은 내면에 평소 정해진 구분이 없어서 남과 더불어 경중을 따지기 때문에서이니 禮를 좋아하면은 내면에 얻은 것이 있어서 밖에 있는 것이 능히 (그 사람의 지조를)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人生十年曰幼니 學이니라 二十曰弱이니 冠이니라 三十曰壯이니 有室이니라 四十曰强이니 而仕니라 五十曰艾니 服官政이니라 六十曰耆니 指使니라 七十曰老니 而傳이니라 八十九十曰耄오 七年曰悼니 悼與耄는 雖有罪라도 不加刑焉하나니라 百年曰期니 頤니라
사람이 태어나 10살을 먹으면은 幼(어린이)라고 하나니 배워야 된다. 20살을 弱이라고 하나니 冠禮를 한다. 30살을 壯이라고 이르나니 아내를 두게 된다. 40살을 强이라고 하나니 벼슬한다. 50살을 艾라고 하나니 官廳 政務를 담당한다. 60살을 耆라고 하나니 지시하여 시킨다. 70살을 老라고 하니 家事(집안 일)를 아들에게 물려준다. 80~90살을 耄라고 하고 7살을 悼(철부지)라고 하니 철부지와 노인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백살을 期라고 하니 부양해야 된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十年曰幼가 句絶(구두)가 되야 되고, 學字가 스스로 한 글귀가 되어야 되니 아래 百年曰期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 ○呂氏가 말하기를 50살을 艾라고 하는 것은 머리털의 蒼白(희끗희끗)한 것이 쑥의 색깔과 같은 것이다. 옛적에 40살에야 비로소 임명받아 벼슬을 하고 50살에야 비로소 임명받아 관청의 政務를 담당하였으니 벼슬하는 것은 선비가 되어서 사람을 섬기어 官府(관청)의 작은 일을 다스리는 것이고 관청의 政務를 담당하는 것은 大夫가 되어서 사람에게 우두머리가 되니 국가의 큰 일에 참여하여 듣는 것이다. 재능이 가히 쓸 만하면 그로 하여금 벼슬하도록 하여 덕이 이루어지면은 이에 임명하여 大夫를 삼는다. 耆라는 것은 오래된 칭호이니 스스로 힘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지시하여 사람을 시키고 명령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시하여 시킨다고 말하였다. 傳은 집안 일을 자식에게 물려줌을 이른다. 耄는 老昏하여 잊어버린 것이고, 悼는 사랑스러움이다. 耄라는 것은 늙어서 아는 것이 이미 쇠퇴하고, 悼라는 것은 어려가지고 지식이 미치지를 못하니 비록 혹간 죄가 있더라도 실정이 故意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사람 수명이 백년을 期로 삼는다. 때문에 期라고 말하였고, 음식과 거처와 동작이 부양에 기대지 아니한 것이 없다. 때문에 頤라고 말했다.
大夫는 七十而致事니
大夫는 70살이 되면 일을 그만두나니(돌려드리나니)
致는 그 직책의 일을 임금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若不得謝어든 則必賜之几杖하며
만일 允許를 얻지 못하면은 반드시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下賜해 준다.
不得謝는 임금께서 그 일을 되돌려 드림을 允許해 주지 않음을 이르니 예컨대 辭謝와 代謝가 또한 모두 물리치고 물러가는 뜻이다. 几(안석)는 써 기대는 것이고 杖(지팡이)은 써 짚으는 것이니 그걸 주는 것은 하여금 스스로 편안하고 알맞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行役에 以婦人하며 適四方에 乘安車하며
行役(役事를 巡行함)에 부인을 데리고 가도록(수행하도록) 하며, 사방에 갈 적에 편안한 수레를 타게 한다.
䟽에 말하기를 부인이 능히 사람을 부양하기 때문에 스스로 따라가도록 허락해 준다. 옛적에 네 마리가 끄는 수레는 서서 타는데 편안한 수레라는 것은 말 한 마리가 끄는 조그마한 수레니 앉아서 탄다.
自稱曰老夫라하고 於其國엔 則稱名하며
自稱曰老夫라고 하고 그 나라에서는 이름을 일컬으며
呂氏가 말하기를 老夫는 늙은 사람의 칭호이다. 자기 나라에서 이름을 일컫는 것은 부모의 나라에서는 감히 尊者로써 자처할 수가 없는 것이다.
越國而問焉이어든 必告之以其制하나니라
나라를 넘어와 물으면은 반드시 그에게 그 제도를 일러주어야 한다.
應氏가 말하기를 한 나라에 어진 사람이 있는 것이 여러 나라에서 우러러보는 바이다. 때문에 국경을 넘어와 물을 적에 문헌이 부족하면은 禮를 말해도 증거가 없게 된다. 때문에 반드시 그에게 그 제도로써 말을 해 주어야 되나니 말하자면은 나라의 옛일을 거론하여 그에게 대답해 주는 것이다.
謀於長者할새 必操几杖以從之니 長者問커시든 不辭讓而對非禮也니라
어른에게 상의드리러 갈 적에 반드시 안석과 지팡이를 가지고서 그를 따라야 되나니 어른이 물으면은 사양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禮가 아니다.
長者에게 모의하는(상의드리는) 것는 長者에게로 나아가서 할 바를 모의(상의)함을 이른다. 어른의 앞에서는 마땅히 겸허함을 잡아야(지켜야) 되나니 사양하지 않는 것이 어른을 섬기는 禮가 아니다. ○應氏가 말하기를 안석과 지팡이를 가지고서 따르는 것은 長者에게 없는 것을 이른 것이 아니라 弟子의 일을 집행함에 있어서 그 禮가 그러한 것이다.
凡爲人子之禮는 冬溫而夏凊하며 昏定而晨省하며 在醜夷不爭이니라
무릇 사람 자식이 되는 禮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어둔 밤에는 이부자리를 정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며, 同類와 平交간에 있어서는 다투지 않아야 된다.
따뜻함으로써 그 차가움을 막아드리며 서늘함으로써 그 시원함을 이루어드리고 그 이부자리를 정해 드리고 그 안부를 살피는 것이다. 醜는 同類이고 夷는 평교간이다. 하루 아침의 분노에 그 자신을 잊어버린다면은 해가 그 어버이에게 까지 미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과 동무 가운데에 있을 적에 한결같이 겸손하고 사양해야 된다.
夫爲人子者는 三賜에 不及車馬하나니 故州閭鄕黨이 稱其孝也하며 兄弟親戚이 稱其慈也하며 僚友稱其弟也하며 執友稱其仁也하며 交遊稱其信也니라
대체 사람 자식이 된 사람은 세 번째 하사받을 적에 車馬에는 이르지 아니하나니 때문에 州閭와 鄕黨이 그 효도를 칭찬하며 형제와 친척들이 그 자애로움을 칭찬하며 동료 친구들이 그 공손함을 칭찬하며 동무들이 그 인자함을 칭찬하며 교유하는 사람들이 그 신실함을 칭찬한다.
사람 자식이 됨이라고 말한 것은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를 이른다. 옛날의 벼슬하는 사람이 첫 번째 명령에 官爵을 받고 두 번째 명령에 官服을 받고 세 번째 명령에 수레와 말을 받게 되나니 수레와 말이 있게 되면은 존귀한 체모가 갖추어지게 된다. 지금 다만 세 번째 내려주는 임명만을 받고 車馬와 더불어 함께 받지를 않았다. 때문에 車馬에는 이르지 아니한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하사함이 있는 것은 써 그 신하를 예우하는 것이고, 자식이 받지 않는 것은 감히 어버이와 나란히 아니한 것이다. 25家가 閭가 되고 四閭가 族이 되고 5百家가 黨이 되고 2500家가 州가 되고 15000家가 鄕이 된다. 효도의 해당된 바가 크기 때문에 그 칭찬이 가장 넓으니 말하자면 慈·弟·仁·信이 모두 효도의 일이다. 僚友는 벼슬이 같은 사람들이고, 執友는 뜻이 같은 사람이니, 한 스승의 친구는 그 뜻 가짐이 동일하기 때문에 執友라고 이른 것이다. 交遊는 일반적으로 원근간에 왕래한 사람을 말한 것이다.
見父之執하고 不謂之進이어시든 不敢進하며 不謂之退어시든 不敢退하며 不問이어시든 不敢對니 此孝子之行也니라
아버지의 친구를 보고 앞으로 나오라고 이르지 아니하면은 감히 나가지 아니하며 물러가라고 이르지 아니하면은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며 묻지 아니하면은 감히 대답하지 않아야 되나니 이것은 효자의 행실이다.
아버지의 친구는 아버지의 뜻이 같은 친구이다. 謂之는 명령하는 것이다. 그를 존경하기를 아버지와 똑같게 하는 것이다.
夫爲人子者는 出必告하고 反必面하며 所遊를 必有常하며 所習을 必有業이니라
대체 사람 자식이 된 사람은 밖에 나갈 적에는 반드시 아뢰고 되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뵈어드리며(뵙고 인사를 드리며) 노는 바를 반드시 일정한 곳이 있어야 하며 익히는 바를 반드시 업이 있어야 된다.
밖에 나가면 가는 곳을 말씀드리고 되돌아오면 돌아온 것을 말씀드리되 또 밖에서 옴에 안색을 살피고 싶은 까닭 때문에 面이라고 말하였다. 놂에 일정한 곳을 두는 것은 몸이 다른 데로 가지 않는 것이고, 익힘에 業이 있는 것은 마음이 다른 데 쓰지 않는 것이다.
恒言에 不稱老니라
항상 말할 적에 늙었다고 일컫지 않아야 된다.
항상 말함은 평상시에 말하는 사이이다. 스스로 늙었다고 일컬으면은 높임이 부모와 똑같아 부모가 지나치게 늙음이 된다. 古人이 때문에 아롱진 옷을 입고 즐거이 장난하였던 것은 부모님 마음을 편안히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年長以倍어든 則父事之하고 十年以長이어든 則兄事之하고 五年以長이어든 則肩隨之니라
나이가 倍로써 많으면 아버지처럼 그를 섬기고, 10년으로써 많으면 형으로 그를 섬기고, 5년으로써 많으면은 그를 어깨 뒤에 따른다.
어깨 뒤에 따름은 나란히 걸어가면서 조금 물러난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어른과 젊은이의 次序를 말한 것이요, 친한 사람을 이른 것이 아니다.
羣居五人이어든 則長者必異席이니라
다섯 사람이 무리 지어 있으면은 어른이 반드시 자리를 따로 해야한다.
옛적에는 땅에다가 가로로 된 돗자리를 깔고서 네사람을 수용하였는데 어른이 자리의 앞부분에 앉게 되나니 만약 다섯 사람이 모이게 되면 어른 한사람은 자리를 따로 해야한다.
爲人子者는 居不主奧하며 坐不中席하며 行不中道하며 立不中門이며
사람 자식이 된 사람은 거처함에 아랫목을 차지하지 아니하며, 앉음에 자리 가운데 하지 아니하며, 다닐 적에는 길 가운데 하지 아니하며, 서있을 적에는 문 가운데 아니해야 된다.
방 서남 귀퉁이가 아랫목이 되는데 아랫목을 차지하고 자리 가운데 앉음은 모두 높은 사람의 도리이다. 길을 다닐 적에는 혹 왼쪽으로 다니기도 하며 혹 오른쪽으로 다니기도 하고 문에 서있을 적에는 문설주와 문지방 가운데를 피하는 것은 모두 감히 높은 사람의 다니는 바를 밟지 않는 것이다. 옛적에 남자와 여자가 길을 달리하여 길에는 각각 중앙이 있었고, 문 중앙에는 문지방이 있고 문지방 양 쪽에는 문설주가 있다.
食饗에 不爲槩하며
음식을 대접하며 祭享을 모심에 미리 한정하지 아니하며
食饗은 부모를 봉양하고 손님을 초빙하는 것과 제사지냄과 같은 따위가 모두 그것이다. 미리 한정하지 아니함은 어버이의 마음을 순종하여 감히 스스로 한정하고 조절하지 않는 것이다.
祭祀에 不爲尸하며
제사에 尸童이가 되지 아니하며
呂氏가 말하기를 尸童이는 주인의 아들 항렬을 취택할 뿐이니 만약에 주인의 아들이라면은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북쪽을 향하고서 그를 섬기도록 하는 것이니 사람 자식에 불안한 바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聽於無聲하며 視於無形하며
소리가 없는 데에서도 들으며 형체가 없는 데에서도 보아야 된다. 
부모님의 뜻에 앞서서 그 분의 뜻을 받드는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비록 들어보아도 부모님의 음성이 들리지 아니하며 비록 보아도 부모님의 형체가 보이지 않지마는 그러나 마음에 항상 상상을 하여 형체를 보고 소리가 들리듯이 하는 것은 부모가 장차 자기를 시킬 듯함이 있음을 이른 것이다.
不登高하며 不臨深하며 不苟訾하며 不苟笑니 孝子不服闇하며 不登危는 懼辱親也니라
높은 데 오르지 아니하며 깊은 데 임하지 아니하며 구차스럽게 남을 헐뜯지 아니하며 구차스럽게 웃지 않아야 되나니 효자는 어두운 곳에서 일을 하지 아니하며 위험한 곳에는 오르지 않는 것은 어버이를 욕되게 할까 두렵기 때문에서이다. 
孔䟽에 말하기를 어두운 데서 일을 하지 아니하는 것은 어두운 중에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갑자기 비상한 일이 있을까(닥칠까) 때문에서이고, 둘째는 사물의 혐의를 위주로 한 것이다.(발생하기가 좋기 때문에) 효자들은 그걸 경계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구차스럽게 헐뜯는 것은 참소에 가깝고, 구차스럽게 웃는 것은 아첨에 가깝고, 어두운 데서 일하는 것은 남이 보지 않는 바를 속이게 되고, 위험한 곳에 오르는 것은 위험함을 행하여 요행을 바라는 것이니 이는 어버이를 잊어버리는 셈이다. 다만 그 어버이를 잊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좋지 않은 명성이 장차 그 부모에게 까지 더하게 되리니 모두 욕되는 길이다.
父母存이어시든 不許友以死하며 不有私財니라
부모님께서 생존하시면 벗에게 죽음으로써 허락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재물을 두지 않아야 된다.
벗에게 죽음으로써 허락하지 아니함은 그 친구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지 않음을 이른다. 어버이가 생존해 계시는데(건재하시는데) 자신으로써 남에게 허락을 하면은 이는 어버이를 잊어버리는 마음이 있게 되고, 어버이가 건재하시는데 재물로써(재물을) 자기에게서 마음대로 한다면은 이는 어버이에게서 떠나는 뜻이 있는 것이다.
爲人子者는 父母存이어시든 冠衣를 不純素니라
사람 자식이 된 사람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면 冠과 옷을 흰 것으로 선두르지 않아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冠純(冠에 가장자리를 선두른 것)은 冠의 장식이고, 衣의 가장자리를 선두른 것은 深衣의 옷깃을 선두른 것이다.
孤子當室하얀 冠衣를 不純采니라
孤子(아버지를 여윈 큰 아들)가 집안을 담당하게 되면 冠과 옷을 채색으로 선두르지 않아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當室은 아버지의 後嗣(후계자)가 된 사람을 이른다. 問喪에 말하기를 童子는 흰 것으로 선두르지 아니하고, 오직 當室한 사람이라야 만이 선을 두른다고 하였으니 또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사람을 이른다. 이른바 채색으로 선두르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상복을 벗었더라도 그래도 흰 것으로 선을 두른 것이니, 오직 집안을 담당한 큰아들이어야 만이 그것을 시행하고, 當室者(큰 아들로서 집안을 담당한 사람)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
幼子를 常視毋誑이니라
어린 자식을(어린 자식에게) 항상 속이지 않는 것으로 보여 주어야 된다.
視는 示(보여줌)와 같다. 그 자식에게 가히 속일 수 없는 것으로써 보여준 것은 써 그 성실을 익히는 바이다.
童子는 不衣裘裳하며 立必正方하며 不傾聽하며
童子는 갖옷과 치마를 입지 아니하며, 설 적에는 반드시 방위를 바르게 하며, 머리를 기울여 듣지 않아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갖옷의 따뜻한 것은 童子에게 마땅한 바가 아니고 치마의 장식은 童子의 편리한 바가 아니다. 서 있을 적에는 반드시 향하는 바의 방향을 바르게 하는 것은 혹 동쪽으로 하기도 하고 혹 서쪽으로 하기도 하며 혹 남쪽으로 하기도 하고 혹 북쪽으로 하기도 하여 향하는 바를 치우치게(치우치게 향하는 바를 두지) 않는 것이다. 󰡔士相見禮󰡕에 이르기를 무릇 임금께 사사로이 뵈일 적에 반드시 임금의 남쪽으로 향하는 것을 바로잡아드려야 되나니 만약에 얻지를 못하면은(안되면은) 방향을 바르게 하는 것이지 임금에게 치우치게 향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으니 疑는 치우치게 향한 것을 이른다.
長者與之提攜어시든 則兩手奉長者之手하며 負劒辟咡詔之어시든 則掩口而對니라
어른이 그(어린이)와 더불어 이끌고가면은(데리고가면은) 두 손으로 어른의 손을 받들어 잡으며 칼을 차듯이 입가에 몸을 기울여 그에게 말씀을 하시면은 입을 가리고 대답해야 된다.
劉氏가 말하기를 어른이 혹간 童子의 등뒤로 부터서 머리를 숙이고 그와 더불어 말을 하면은 童子가 어른을 업은 듯 하고, 長者가 손으로써 童子를 겨드랑이 밑에 끼면은 칼을 차고 있는 것과 같다. 대개 어른이 구부려서 童子와 더불어(童子하고) 말할 적에 칼을 찬 형상이 있는 것이요, 참으로 칼을 찬 것이 아니다. 辟은 치우침(기울임)이요, 咡는 입가이고, 詔는 고하여 말한 것이다. 입을 가리고서 대답한 것은 童子가 마땅히 손으로써 입기운(입냄새)을 막고서 대답하여 감히 입냄새로 하여금 어른에게 닿지 않도록 함을 이른다.
從於先生할새 不越路而與人言하며 遭先生於道에 趨而進하야 正立拱手하야 先生이 與之言이어시든 則對하고 不與之言이어시든 則趨而退니라
선생을 따라갈(수행할·陪從할) 적에 길을 건너가서 사람과 더불어 말하지 아니하며, 선생을 길에서 만났을 적에는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바르게 서서 拱手하고서(손을 마주 잡고서) 선생이 그와 더불어 말씀을 하시면 대답을 하고 그와 더불어 말씀을 아니하시면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와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先生은 父兄의 칭호인데 德과 年齒(나이)가 있어서 가히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父兄과 같다. 때문에 또한 先生이라고 호칭하고 스승으로써 父兄을 삼는다면은 배운 사람은 스스로 子弟에게 비하여야 된다. 때문에 弟子라고 호칭한다.
從長者하야 而上丘陵이어든 則必鄕長者所視하며 登城不指하며 城上不呼니라
어른을 따라서(수행하여) 丘陵에 올라가게 되면 반드시 어른이 보는 곳을 향하며, 城 위에 올라가서는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아니하며, 城 위에서는 큰소리쳐 부르지 않아야 된다. 
높아서 向背(앞뒤)가 있는 것이 丘가 되고, 평평하여 사람이 가히 오를 수 있는 것이 陵이 된다. 어른이 보신 곳을 향하는 것은 아마도 질문이 있으면 보는데로 따라서 대답하려는 것인성 싶다. 城은 사람이 믿고서 편안하고 든든하게 여기는 것인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가 있으면은 보는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큰 소리쳐 부르는 것이 있으면은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先生은 나이와 道德이 모두 높고 또 능히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고, 長者(어른)는 다만 나이만 가지고 호칭한 것이다.
將適舍할새 求毋固하며
장차 여관에 가려고 할 적에 요구함에 있어서 굳이하지 말며
戴氏가 말하기를 여관에 나아가는 사람이 진실로 능히 주인에게 요구함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평일에 하고싶은 것을 고집하여 꼭 남에게서 구하려고 한다면은 손님된 도리가 아니다.
將上堂할새 聲必揚하며 戶外有二屨어든 言聞則入하고 言不聞則不入하며
장차 마루로 올라가려고 할 적에 소리를 반드시 내며, 문밖에 두 신발이 있으면은 말이 들리면은 들어가고 말이 들리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아야 된다.
上堂은 주인의 마루로 올라간 것이다. 그 소리를 내는 것은 안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도록 한 것이다. 옛 사람이 신을 벗음이 문밖에 있고 손님이 아무리 많더라도 신을 문안에 벗어놓는 사람은 오직 어른 한사람뿐이다. 두 신발이 있다고 말했을진댄 문안에 한 신발까지 아울러 합쳐서 세사람이 된다. 세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이 문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필시 비밀 모의일 것이므로 들어가지 않는다.
將入戶할새 視必下하며 入戶奉扃하며 視瞻毋回하며 戶開어든 亦開하며 戶闔이어든 亦闔호대 有後入者어든 闔而勿遂니라
장차 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적에 시선을 반드시 낮추며, 문에 들어갈 적에는 빗장을 받들며, 볼 적에 두리번거리지 말며, 문이 열렸으면은 또한 열어 놓으며, 문이 닫혔으면은 또한 닫으며, 뒤에 따라들어온 사람이 있으면은 닫되 다 닫지 않아야 된다.
문에 들어감은 주인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요, 視下(시선을 낮추는 것)는 눈을 들지 않는 것이다. 扃은 문 빗장 나무이니, 문에 들어갈 때에 두 손이 가슴에 닿아 빗장을 받들듯이 하는 것이다. 비록 보더라도 두리번거리지 않는 것은 남의 사사로움을 침범할까 혐의스럽기 때문에서이다. 열고 닫음을 모두 전처럼 해 놓은 것은 주인의 뜻을 어기지 않는 것이다. 遂는 다 닫는 것이다. 이것은 따라오는 사람을 거절함에(거절한 것으로) 혐의스럽기 때문에 다 닫지 않는 것이다.
毋踐屨하며 毋踖席하며 摳衣趨隅하야 必愼唯諾이니라
신을 밟지 말며 돗자리를 밟지 말며 옷을 걷어 올리고 귀퉁이로 종종걸음하여 반드시 應諾을 삼가해야 된다.
밑창이 이중으로 된 것을 舃이라고 하고, 밑창이 홑으로 된 것을 屨라고 한다. 신을 밟지 말라는 것은 뒤에 온 사람이 가히 먼저 들어간 사람이 벗어 놓은 신을 밟아서는 아니됨을 말한 것이다. 踖은 躐(밟음)과 같다. 󰡔玉藻󰡕에 말하기를 자리에 올라갈 적에 앞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 자리를 밟음이 된다 하였으니, 이는 자리에 올라갈 적에 마땅히 앞을 경유해야 되는 것이다. 摳는 걷어올림이니, 옷을 걷어올림은 󰡔論語󰡕의 옷자락을 걷어올리는 것과 더불어 뜻이 같으니 앉으는데 편리하게 하고 싶기 때문에 그 옷을 걷는 것이다. 귀퉁이로 종종걸음치는 자리의 모서리를 경유해서 올라가는 것이다. 唯諾은 모두 응대하는 말이니 이미 坐定하였음에 또 마땅히 응대하는 것을 삼가해야 된다.
大夫士出入君門할새 由闑右하고 不踐閾이니라
大夫와 士(벼슬아치)가 임금 대궐 문에 출입할 적에 문지방의 오른쪽을 경유하고 문턱을 밟지 않아야 된다.
闑은 문지방이니 문의 중앙에 해당한다. 문지방 동쪽이 오른쪽이 되니 주인은 문에 들어갈 적에 오른쪽으로 하고, 손님은 문을 들어갈 적에 왼편으로 하나니 大夫와 士가 오른쪽을 경유하는 것은 신하로써 임금을 수행하여 감히 손님으로써 주인과 맞먹지 않는 것이다.
凡與客入者每門에 讓於客이니 客이 至於寢門이어든 則主人이 請入爲席然後出迎客이니 客이 固辭어든 主人이 肅客而入이니라
무릇 손님과 들어가는 사람이 매번 문마다 손님에게 사양해야 되나니 손님이 침문에 이르면은 주인이 청하여 들어가서 자리를 편 뒤에 나와 손님을 迎接해야 되나니 손님이 굳이 사양을 하면은 주인이 손님에게 읍을 하고 먼저 들어간다. 
讓於客은 손님이 먼저 들어가게 함이다. 爲는 布와 같다. ○䟽에 말하기를 천자는 5문이고 제후는 3문이고 대부는 2문이다. 禮에 세 번 사양하는 것이 있는데 첫번째는 禮辭라고 이르고 두번째는 固辭라고 이르고 세 번째는 終辭라고 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肅客이라는(손님에게 읍한다는) 것은 손을 굽혀서 그에게 읍을 한 것이니 이른바 肅拜이다.
主人은 入門而右하고 客은 入門而左하며 主人은 就東階하고 客은 就西階니라 客若降等이어든 則就主人之階니 主人이 固辭然後에야 客이 復就西階니라
주인은 문에 들어갈 적에 오른쪽으로 하고 손님은 문에 들어갈 적에(들어가면서) 왼쪽으로 하며, 주인은 동쪽 섬돌로 나아가고 손님은 서쪽 섬돌로 나아가야 된다. 손님이 만약 등급이 낮으면은 주인의 섬돌로 나아가야 되나니 주인이 굳이 사양하여야 만이 그런 뒤에 손님이 다시 서쪽 섬돌로 나아가야 된다.
오른쪽으로 들어감은 써 동쪽 섬돌로 나아가는 것이고, 왼쪽으로 들어감은 써 서쪽 층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등급이 낮은 것은 그 등급과 반열이 주인보다 낮은 것이다. 주인이 굳이 사양한 것은 감히 손님이 자기를 존경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主人이 與客讓登호대 主人이 先登이어든 客이 從之니 拾級聚足하야 連步以上호대 上於東階則先右足하고 上於西階則先左足이니라
주인이 손님과 더불어 오름을 양보하되 주인이 먼저 오르면 손님이 그를 따라야 되나니 계단을 오르면서 발을 모아 걸음을 연속하여 써 올라가되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면 오른발을 먼저 올리고 서쪽 계단에 올라가게 되면 왼쪽 발을 먼저 올린다.
오름을 양보함은 손님이 먼저 오르게 하고자 한 것이니, 손님이 감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인이 먼저 올라가면 손님이 그를 뒤이어 따라간다. 拾級은 계단의 층급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요, 聚足은 뒷발이 앞발과 더불어 서로 합쳐지는 것이다. 連步는 걸음걸이가 서로 이어짐이다. 오른쪽을 먼저하고 왼쪽을 먼저함은 각각 문에 들어온 좌우를 따른 것이다.
帷薄之外에 不趨하며 堂上에 不趨하며 執玉不趨하며 堂上接武하고 堂下布武하며 室中不翔하며
장막과 발 밖에서는 종종걸음을 치지 아니하며, 마루 위에서는 종종걸음 치지 아니하며, 옥을 잡고서는 종종걸음 치지 아니하며, 마루 위에서는 발걸음을 붙이고, 마루 아래에서는 발걸음을 펴며, 방 안에서는 활개치지 아니한다. 
䟽에 이르기를 帷는 장막이요, 薄은 발이다. 接武는 발자취가 서로 연접된 것이다. ○陳氏가 말하기를 文이라는 것은 위의 도이고, 武이라는 것은 아래의 도이다. 때문에 발이 몸 아래 있는 것을 武라고 이르고, 거두는 것이 冠 밑에 있는 것도 또한 武라고 한다. 옥을 잡음에 종종걸음 치지 않는 것은 감히 종종걸음 치지 않는 것이고, 방 안에서 활개치지 않는 것은 가히 활개를 칠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고, 걸어 가면서 팔짱을 펴는 것을 翔이라고 한다. ○朱氏가 말하기를 장막과 발밖에는 사람이 없으니 반드시 종종걸음을 쳐서 공경을 보일 필요가 없고, 堂上은 장소가 좁고 방안은 장소가 더욱 좁기 때문에 종종걸음치지 않고 활개치지 않는다.
並坐不橫肱하며 授立不跪하며 授坐不立이니라
나란히 앉아있을 적에는 팔을 가로뻗지 아니하며, 서있는 사람에게 줄 적에는 무릎꿇지 아니하며, 앉아있는 사람에게 줄 적에는 서지 않아야 된다.
팔뚝을 가로 뻗으면은 나란히 앉은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 무릎꿇지 아니하고 서지아니함은 모두 받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이른 것이다.
凡爲長者糞之禮는 必加帚於箕上하야 以袂拘而退하야 其塵이 不及長者케하며 以箕로 自鄕而扱之니라
무릇 어른을 위하여 더러운 것을 쓸어내는 禮는 반드시 비를 쓰레받기 위에 얹져 소매로써 가리고 물러나와 그 티끌이 어른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며 쓰레받기로써 자신에게로 향하여 그 더러운 것을 거두어 담아내야 된다. 
糞은 더러운 것을 제거함이다. 󰡔少儀󰡕에 이르기를 자리 앞을 쓰는 것을 拚이라고 하였으니 뜻이 糞과 더불어 같다. 呂氏가 扱을 읽기를 揷音으로 한다. 그러나 무릇 호흡이 나가고 들어올 적에 내불면 흩어지고 들이마시면 모이게 되나니 지금 거둬들인 것으로써 뜻을 삼았을진댄 吸音이 옳다. ○孔䟽에 말하기를 처음 쓰레받기를 가지고 갈 적에 빗자루를 쓰레받기 위에 얹져서 두 손으로 쓰레받기를 들고 쓸 때를 당해서는 한 손으로는 빗자루를 잡고 한 손의 옷소매를 들어서 그로써 쓰레받기 앞에서 가리워 쓸면서 옮겨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리고서 물러간다고 말하였다. 扱은 거두어 담는 것이니 쓰레받기로써 자신에게 향하여 더러운 것을 거두어 담아 쓰레받기로써 어른에게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奉席如橋衡하며
자리 받들기를 다리처럼 높이하고 저울처럼 평평하게 해야 한다.
다리처럼 높게 하며 저울대처럼 평평하게 함은 바로 자리를 받드는 儀節(예의)이다.
請席何鄕하며 請衽何趾니라
자리를 펼 적에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여쭈어 보며 요자리를 펴드릴 적에는 어디로 발을 향할 것인지를 여쭈어 보아야 한다.
좌석을 설치해 드릴 적에는 얼굴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지를 여쭈어 보며 요자리를 설피해 드릴 적에는 발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가를 물어보아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앉은 것이 陽이 되고 향하는 것도 또한 陽이고 눕는 것이 陰이 되고 발도 또한 음이 되기 때문에 청한 바가 같지 않다.
席南鄕北鄕엔 以西方爲上하고 東鄕西鄕엔 以南方爲上이니라
자리가 남쪽을 향해 있거나 북쪽을 향하여 있을 적에는 서쪽으로 上位(윗자리)를 삼고 자리가 동쪽을 향하였거나 서쪽을 향하여 있을 적에는 남쪽으로 상위를 삼아야 된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동향·남향의 자리는 모두 오른쪽을 숭상하고(상위로 삼고) 서향·북향의 자리는 모두 왼쪽을 숭상한다.(상위로 삼는다)
若非飮食之客이어든 則布席호대 席間이 函丈이니라
만약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손님이 아니면 자리를 펴되 자리의 사이가 1丈쯤 띄어야 한다.(간격을 두어야 한다.)
술마시고 음식먹는 손님이 아니면은 이는 講說(강의)하는 손님이다. ○䟽에 말하기를 옛적에 음식을 먹으면서 연향을 베풀면은 손님의 자리는 방 밖 들창 앞에 있어서 자리를 펴가지고 남쪽을 향하여 주인과 서로 마주하지 않고 서로 마주하는 사람은 오직 강설하는 손님일 뿐이다. 자리의 제도가 3尺·3寸에 寸을 3分한 1이니 두 자리가 중간의 빈 땅까지 아울러 총 1丈(10尺)이 된다.
主人이 跪하야 正席이어든 客이 跪하야 撫席而辭하며 客이 徹重席호대 主人이 固辭니 客이 踐席에야 乃坐니라
주인이 무릎꿇어 자리를 바르게 하면은(깔면은) 손님이 꿇어앉아서 자리를 누르면서 사양하며 손님이 이중으로(포개서) 깐 자리를 거둬내되 주인이 굳이 사양해야 되나니 손님이 자리를 밟아야 만이 이에 앉는다.
꿇어앉아서 자리를 바르게 까는 것은 손님을 존경하는 것이다. 撫는 손으로 눌러 그 일을 저지하는 것이다. 손님이 감히 이중 자리에 앉을 수 없기 때문에 그걸 거둬내려고 하다가 주인이 굳이 사양하면은 그만둔다. 손님이 자리를 밟고 장차 앉으려고 하면 주인이 이에 앉는다.
主人이 不問이어든 客不先擧니라
주인이 묻지 아니하면 손님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야 된다.
앉은 자리가 이미 정해짐에 주인이 손님이 밖에서 온 까닭으로 마땅히 먼저 물은 바가 있어야 만이 손님이 이에 그에 대답을 하는 것이지 손님이 먼저 마땅히 말을 꺼내지 않아야 된다.
將卽席할새 容毋怍하며 兩手로 摳衣하야 去齊尺하며 衣毋撥하며 足毋蹶이니라
장차 자리로 나아가려고 할 적에 용모를 수줍어하지 말며, 두 손으로 옷을 거두어 올려 옷자락이 한 자쯤 땅에서 떨어지게 하며, 옷이 벌어지게 말며, 발이 꿈질거리지 말아야 된다.
劉氏가 말하기를 장차 자리로 나아가려고 할 적에 모름지기 상세히 살펴보고 느긋하게하여 容儀를 삼가해서 하여금 실수함이 있어 가히 부끄러움이 있도록 않아야 되고, 따라서 두 손으로 옷의 양쪽을 걷어올려 하여금 아래 옷자락이 땅에서 한 자쯤 떨어지도록하고서 앉아 써 起居에 편리하게 하여 밟아서 넘어져 容儀를 실수하는 것을 모면하도록 해야 한다. 앉은 뒤에는 다시 모름지기 앞쪽의 옷자락을 정연하게 개서 겹쳐서 하여금 벌어짐이 없도록 해야 된다. 또 옛사람이 무릎으로 앉아 오래되면은 무릎이 편치 않아서 쉽게 꿈질거려 움직이게 되나니 앉아서 발이 움직이는 것도 또한 容儀를 잃어버림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꿈질거리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管寧이 자리에 앉음이 햇수가 오래되면 오직 두 무릎이 닿는 곳만이 뚫어졌으니 이는 발이 움직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先生書策琴瑟이 在前이어든 坐而遷之하야 戒勿越이니라
선생의 書冊과 거문고와 비파가 앞에 놓여 있으면은 앉아서 그것을 옮겨 놓아 경계하여 넘어가지 말아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坐는 또한 꿇어 앉은 것이다. 제자가 장차 가려고 할 적에 만약 선생의 여러 물건을 만난 것이 혹 자기 앞에 당하게 되면은 무릎 앉아서 그 물건을 옮겨놓고서 경계하고 삼가하여 넘어가지 않아야 된다.
虛坐엔 盡後하고 食坐엔 盡前하며 坐必安하야 執爾顔하며 長者不及이어시든 毋儳言하며
빈자리에서는 뒤로 바짝 나가(다하여) 앉고 음식 자리에서는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앉을 적에는 반드시 편안하게 하여 네의 얼굴빛을 지키며(바르게 하며) 어른의 말이 끝나지 않았으면은 말을 뒤섞지 말아야 된다.
옛적에는 땅에 자리를 깔고서 俎豆가 그 앞에 있었다. 뒤에 바짝 나가 앉는 것은 겸양하는 것이요, 앞에 바짝 다가 앉은 것은 자리를 더럽힐까 두려워서이다. 儳은 갑자기이니 또한 섞어서 가지런하지 않는 모양이다. 長者가 일을 말하여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 다른 것에 미치지 않았으면은 젊은 사람이 가히 다른 일을 들어서 말하여 갑자기 어른의 말에 끼어들지 않아야 된다.
正爾容하며 聽必恭하며 毋勦說하며 毋雷同하고 必則古昔하야 稱先王이니라
너의 용모를 바르게 하며 들을 적에는 반드시 공손히 하며 남의 말을 표절하지 말며 뇌화부동하지 말고 반드시 옛날을 본받아 先王을 일컬어야(배워야·따라야) 된다.
위에서 ‘너의 안색을 잡아라.’라고 말한 것은 안색(낯빛)을 혹시도 바꾸어 달리함이 없어야 함을 이른 것이고, 여기에서 ‘너의 용모를 바르게 하라.’고 말한 것은 그 온 몸의 용모를 바르게 한 것이다. 들을 적에는 반드시 공손하게 함은 또한 어른의 말을 듣는 것을 이른다. 남의 말을 집어 가져 자기의 말로 삼는 것을 그걸 勦說이라고 이르고, 남의 말을 듣고 그에 附和하는 것을 그걸 雷同이라고 이르나니, 우레가 소리를 터뜨림에 만물이 함께 그에 응한 것과 같다. 오직 옛 것을 본받아 선왕을 칭술하여야 만이 이에 착함이 된다.
侍坐於先生할새 先生이 問焉이어시든 終則對하며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 선생이 질문하시면은 말이 끝나면 대답을 해야 된다.
질문이 끝난 뒤에 대답함은 질문한 바의 뜻을 다 듣고자 하고(들으려고 한 것이고) 또 감히 어른의 말에 뒤섞어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請業則起하고 請益則起니라
익힐 業을 물을진대 일어나고(자리에서 일어나서 묻고) 더 말씀해 주시기를 청할진대 일어나야 된다.
業을 청하는 것은 마땅히 익혀야 할 일을 청구하는 것이요, 더 말씀해 주기를 청하는 것은 재차 아직 못다한 쌓인 것을 물은 것이다. 일어남은 써 공경을 이루는 것이다.
父召어시든 無諾하며 先生이 召어시든 無諾하고 唯而起니라
아버지가 부르시면은 느리게 대답하지 말며 선생이 부르시면은 느리게 대답하지 말고 예하고서 일어나야 된다. 
아버지는 은혜로써 하고 스승은 道로써 하기 때문에 존경하는 바가 같다. ○呂氏가 말하기를 諾이라는 것은 허락해 놓고 가지 않는 것이다.
侍坐於所尊敬할새 無餘席이니 見同等하얀 不起하며
존경하는 바를(분을)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는 자리를 남겨두지 말아야되나니 동등한 사람을 보고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
尊敬하는 바는 先生과 長者 및 德이 있고 지위가 있는 사람을 이른다. 無餘席은 자기의 자리가 어른의 자리와 더불어 서로 가까우면 그 끝(앞쪽)에 앉아서 하여금 비어 남은 곳이 있지 않도록 해야 되니 가까우면은 응대하기가 상세하다. 동등한 사람은 자기와 더불어 높낮이가 없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그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燭至어든 起하며 食至어든 起하며 上客이어든 起하며
촛불이 들어오면 일어나며 음식이 당도하면 일어나며 上客이 오면은 일어나며
촛불이 들어오면(당도하면) 일어나는 것은 때가 바뀌었기 때문이고, 음식이 나오면 일어나는 것은 禮가 행해졌기 때문에서이고, 上客이 당도함에 일어나는 것은 그가 동등이 아니기 때문에서이다.
燭不見跋이니라
촛불은 밑동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跋은 밑동이다. 옛적에는 밀로 만든 촛불이 있지 않아 횃불로써 밤을 비췄는데 장차 다 타게 되면은 그 남은 바의 殘本(토막 뿌리)를 감춘 것은 손님이 그걸 보고 밤이 깊은 까닭으로 인사하고 물러가려고 할까 두려워서이다.
尊客之前에 不叱狗하며
존귀한 손님 앞에서는 개를 꾸짖지 아니하며
方氏가 말하기를 지극히 천한 것으로써 존귀한 사람의 듣는 것을 놀라게 않는 것이다.
讓食不唾니라
음식을 사양하면서 침뱉지 아니한다.
주인의 음식을 더럽게 여기고 싫어하는 것 같음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다.
侍坐於君子할새 君子欠伸하며 撰杖屨하며 視日을 蚤莫어시든 侍坐者請出矣니라
君子를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 君子가 하품하거나 기지개를 켜며 지팡이와 신을 쥐거나 가지며 해의 이르고 저뭄을 보시면은 모시고 앉아 있는 사람이 나가기를 청해야 된다.
기운이 다 떨어지면 하품을 하고 신체가 피곤하면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撰은 가짐(잡음)과 같다. 이 네 가지 것은 모두 싫증나고 고달픈 용모이니 君子가 편안한 데로 나아감에 방해가 될까 두렵기 때문에 물러나기를 청한다.
侍坐於君子할새 君子問更端이어시든 則起而對니라
君子를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 君子가 물음에 말이 변경되면은(끝나면은) 일어나서 대답해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질문이 말이 끝나면은(변경되면은) 일어나서 대답하는 것은 일이 변경되는 바가 있음으로 인하여 공경함을 일으키는 것이다.
侍坐於君子할새 若有告者曰少間이어시든 願有復也라커든 則左右屛而待니라
君子를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 만약 아뢰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조금 한가하면은 원컨대 사뢸 말씀이 있다.’고 하면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물러나 기다려야 된다. 
왼쪽에 있으면 왼쪽으로 물러나고 오른쪽에 있으면 오른쪽으로 물러난다. ○鄭氏가 말하기를 復은 사룀(아룀)이니 조금 틈이나 한가함을 기다려서 아뢰는 바가 있고자 함을 말한 것이다. 屛은 물러남과 같다. ○呂氏가 말하기를 물러나서 기다리는 것은 감히 그 사사로움에 간여하지(사사로움을 침범하지) 않은 것이다.
毋側聽하며 毋噭應하며 毋淫視하며 毋怠荒하며
귀를 기울이고 듣지 말며 외쳐서(큰소리로) 대답하지 말며 흘겨보지 말며 게으르고 거칠게 하지 말아야 된다.
위에서 들을 적에는 반드시 공손히 해야 된다고 말하였으니 귀를 기울이고서(갸우뚱하고서) 듣는 것은 공손함이 아니다. 응답하는 소리는 마땅히 和平스럽게 해야 되니 소리가 높거나 급한 것은 거슬리고 어긋남이 發露되는 것이다. 淫視는 눈동자를 이동시켜 흘겨보는 것이다. 怠荒은 용모와 擧止가 방종하고 태만함을 이른다.
遊毋倨하며 立毋跛하며 坐毋箕하며 寢毋伏하며
(이리저리) 걸어다닐 적에 거만하게 말며 서있을 적에는 치듣지 말며 앉아 있을 적에는 키와 같지 말며 잘 적에는 엎드리지 말며
遊는 걸어다님이요, 倨는 오만함이다. 서있을 적에는 마땅히 두 발을 정돈하여 가지런히 해야 되고 가히 치우치게 한쪽 발에만 맡겨둘 수 없는 것이다. 箕는 그 두 발을 둘다 펴서 모양이 키의 혀와 같음을 이른 것이다. 伏은 엎드림이다.
歛髮毋髢하며
머리털을 거두어 늘어뜨리지 말아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髢는 다리이니 드리워져서 다리와 같은 것이다. 옛날 사람은 머리를 소중히 여겨 머리 싸개로써 그 머리털을 싸 하여금 드리워지지 않도록 했다.
冠毋免하며 勞毋袒하며 暑毋褰裳이니라
冠은 벗지 말며 수고로워도 웃통을 벗지 말며 더워도 치마를 걷어 올리지 말아야 된다.
喪事에는 喪冠이 있고 吉事에는 吉冠이 있으니 마땅히 벗어야 할 때가 아니면은 가히 벗을 수 없는 것이다.(벗어서는 아니된다.) 웃통을 벗고서 그 웃옷을 드러내는 것이 있고 웃통을 벗고서 희생을 잡는 것이 있으니 수고로운 일을 인하여 웃통을 벗는다면은 설만함이 된다. 褰은 걷어 올림이니, 얕은 물을 건너면서 옷을 걷어 올리는 것은 괜찮거니와 덥다고 그 치마를 걷어 올리면은 또한 설만함이 된다.
侍坐於長者할새 屨不上於堂하며 解屨호대 不敢當階하며
어른을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 신을 신고 마루로 올라가지 아니하며 신을 벗되 감히 섬돌을 당하지(차지하지) 않아야 된다.
長者(어른)가 마루에 앉아 계심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감히 신을 신고서 올라가지 아니하나니 만약에 어른이 방안에 있다면은 신을 신고서 마루로 올라 갈 수는 있고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나니 문밖에 두 신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解는 벗음이니, 신에는 신끈이 있나니 풀어서 그 신을 벗되 감히 섬돌을 차지하지(섬돌에다 놓아두지) 않는 것은 뒤에 올라오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서이다.
就屨호대 跪而擧之하야 屛於側하며
신을 신되 꿇어 앉아서 그 신을 들고서 섬돌 옆으로 물러나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이는 모시는 사람이 혹간 홀로 잠깐 물러나올 때에 신을 신는 방법이다. 就는 신음과 같으니, 처음 마루로 올라갈 적에 벗어서 섬돌 옆에 놓아 두었다가 지금 마루를 내려와 그 신을 신을 적에는 먼저 섬돌 옆으로 가서 꿇어 앉아 그 신을 들어 집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을 신되 꿇어 앉아서 그걸 집는다(든다)고 말하였다. 옆쪽으로 물러가는 것은 물러나 섬돌을 차지하지 않는 것이다.
鄕長者而屨어든 跪而遷屨하야 俯而納屨니라
어른을 향하여 신을 신게 되면은 꿇어 앉아서 신을 옮겨 구부리고서 신을 신어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이는 젊은 사람이 禮가 끝나 물러갈 적에 어른의 전송하는 바가 되면은(어른이 전송을 하게 되면은) 섬돌 옆에서 꿇어 앉아 신을 집어 조금 그것을 옮겨 얼굴이 어른쪽으로 향하여 그 신을 신어야 됨을 밝혔다. 遷은 옮김이니, 섬돌 옆으로 나아가서 꿇어 앉아 신을 집어가지고 조금 옮겨서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구부리고서 신는 것은 이미 신을 집었으면은 따라서 몸을 구부리어 어른에게로 향하도록 하고서 발을 넣어 그 신을 신는 것이다.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무릎을 꿇으면은 발이 뒤로 향하여 불편하기 때문에 구부리고서 보고 신는다. 비록 아울러(다) 꿇지는 않지마는 또한 왼쪽 발로 앉아서 오른쪽 신을 신고 오른쪽 발로 앉아서 왼쪽 신을 신는다.
離坐離立이어든 毋往參焉하며 離立者에 不出中間이니라
둘이 붙어 앉아 있고 둘이 붙어서 서있으면은 가서 끼어들지 말며 둘이 나란히 서있는 사람에게 중간으로 뚫고 나가지 않아야 된다. 
方氏가 말하기를 둘이 서로 붙어있는 것을 離라고 이르고, 셋이 서로 이루는 것을 參(끼어든다)이라고 이른다. ○應氏가 말하기를 그 중간으로 뚫고 나가면은 서있는 사람이 반드시 흩어지게 되어 열을 이룰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君子가 그걸 조심하는 것이다.
男女不雜坐하며 不同椸枷하며 不同巾櫛하며 不親授니라
남자와 여자가 뒤섞어 앉지 아니하며, 횃대와 시렁을 함께 사용하지 아니하며, 수건과 빗을 함께 사용하지 아니하며, 친히 주지 않아야 된다.
󰡔內則󰡕註에 이르기를 심어진(박아진) 것을 楎(말뚝)라고 하고, 가로진 것을 椸(시렁)라고 한다. 枷(시렁)는 架와 더불어 같은 것이니, 의복을 놓아두는 기구이다. 수건으로써 깨끗함을 씻어내고, 빗으로써 머리를 손질한다. 이 네 가지 것은 모두 사사롭고 설만한 혐의를 멀리하는 것이다.
嫂叔이 不通問하며 諸母로 不漱裳이니라
형수와 시숙이 통하여 묻지를 아니하며, 여러 庶母로 하여금 치마를 빨도록 아니해야 된다.
통하여 묻지 않는 것은 문안하고 선물하는 것의 오고감이 없는 것이다. 諸母는 아버지 妾으로서의 아들을 둔 사람이다. 漱는 빰이다. 裳은 천한 옷인데, 庶母로 하여금 치마를 빨도록 아니한 것은 또한 아버지를 공경하는 길이다.
外言을 不入於梱하며 內言을 不出於梱이니라
사랑방의 말을 문지방 안에 들어오지 않게 해야 되며 안방의 말을 문지방 밖에 나가지 않도록 해야 된다.
梱은 문의 한계이니 안팎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남자는 안 일을 말하지 아니하고 여자는 바깥 일을 말하지 아니한다.
女子許嫁어든 纓이니 非有大故어든 不入其門이니라
여자가 출가를 허락하면은 목걸이를 걸게 되나니 큰 일이 있지 않으면은 그 문에 들어가지 않아야 된다.
출가를 허락하면 목걸이를 매는(거는) 것은 매이어 소속된 바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니 이것은 어렸을 때 찬 향주머니와 더불어 같지 않다. 大故는 큰 일이다.
姑姊妹와 女子子已嫁而反이어든 兄弟弗與同席而坐하며 弗與同器而食하며
고모·자매와 딸자식이 이미 출가하였다가 친정에 돌아오면은 兄弟間(오빠나 남동생)이 그와 더불어 자리를 함께하여 앉지 아니하며 그와 더불어 그릇을 함께하여 먹지 않아야 된다.
딸자식에 대하여 子를 거듭 말한 것은 남자와 구별한 것이다. 오로지 형제만을 말한 것은 동등의 혐의를 멀리한 것이다.
父子不同席이니라
아버지와 자식이 자리를 함께 앉지 않는다.
尊卑의 등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男女非有行媒어든 不相知名하며 非受幣어든 不交不親이니
남자와 여자가 중매장이가 오고감이 있지 않으면은 서로 이름을 알지 아니하며 폐백을 받음이 아니면은 교제하지 않고 친근히 지내지 않아야 된다.
行媒는 중매장이가 왔다갔다함을 이른다. 이름은 남자와 여자의 이름을 이른다. 예물을 받아야 만이 그런 뒤에 친히 지내고 사귀는 禮가 정해진다.
故日月로 以告君하며 齋戒하야 以告鬼神하며 爲酒食하야 以召鄕黨僚友하나니 以厚其別也니라
그렇기 때문에 혼인한 날짜와 달로써 임금에게 보고하며 재계하고서 귀신에게 고유하며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써 고을의 동료와 친구를 초청하나니 그 분별을 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날짜와 달은 부인에게 장가드는 시기이니 중매장이가 그것을 써서 임금에게 고한다. 그 분별을 두터이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윤리 질서를 신중히 하는 것이다.
取妻호대 不取同姓이니라
아내에게 장가들되(아내를 맞이하되) 同姓을 맞이하지 않아야 된다.(同姓에게는 장가들지 않아야 된다.)
鄭氏가 말하기를 그것이 새와 짐승에게 가깝기 때문에서이다.
故買妾호대 不知其姓이어든 則卜之니라
그렇기 때문에 첩을 구하되 그 姓氏를 모르면은 그에 대하여 거북점을 쳐보야 된다.
그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寡婦之子非有見焉이어든 弗與爲友니라
寡婦의 아들이 나타난(드러난) 것이 있지 않으면은 그와 더불어 벗을 삼지 않아야 된다.
드러남이 있는 것은 재능이 卓異한 것이다. 만약에 덕을 좋아한 실지가 있음이 아니면은 써 여자를 좋아한다는 혐의를 피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벗을 취택하는 사람이 그걸 삼가해야 된다.
賀取妻者는 曰某子使某로 聞子의 有客하고 使某羞라하나니라
아내를 맞이한 사람을 축하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아무개가 아무개를 시켜서 당신의 손님이 있다는 것(소식)을 듣고 아무개로 하여금 선물을 보낸다.”고 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축하하는 것은 물건을 사람에게 보내어 경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代를 나타내어 先祖의 후사가 되는 것은 사람 자식이 부득이한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또 축하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술과 음식을 만들어서 고을 동료와 친구들을 부를진댄 선물을 보내고 묻는 것을 가히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에 이르기를 당신에게 손님이 있다는 소식을 아무개를 시켜서 선물을 보낸다고 한 것이다. 혼례라고 말을 아니하고 그걸 손님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써 선물을 보내는 것은 그 음식 장만하는 비용애 도와줄 뿐인 것이요 축하가 아니다. 그런데 󰡔禮記󰡕를 만든 사람이 풍속의 명칭을 따라서 축하라고 일컬었다.
貧者는 不以貨財로 爲禮하며 老者는 不以筋力으로 爲禮니라
가난한 사람은 재물로써 禮를 행하지 아니하며, 늙은 사람은 筋力으로써 禮를 행하지 아니한다.
應氏가 말하기를 재물이 없으면 가히 써 기쁘게 할 수가 없지마는 재물이라는 것이 가난한 사람으로서는 능히 마련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강성하여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족히 써 禮를 행할 수 없지마는 강성하여 힘이 있는 것은 늙은 사람으로서 능히 억지로 힘쓰는 바가 아니다.
名子者는 不以國하며 不以日月하며 不以隱疾하며 不以山川이니라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은 나라 이름을 이용하지 아니하며, 해와 달을 이용하지 아니하며, 숨겨진 병을 이용하지 아니하며, 山川 이름을 이용하지 않아야 된다.
항상 말하여 쉽게 언급하면은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들을 이름짓는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아야 된다.
男女異長하며
남자와 여자가 맏을 달리해야 된다.
각각 伯·仲을 만든 것은 서로 침범하여 뒤섞이지 않는 뜻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男子二十이어든 冠而字니라
남자가 20살이 되면은 冠禮를 하고 字를 지어준다.
冠禮를 함에 그에게 字를 지어주는 것은 그 이름을 존경하는 것이다.
父前에 子名하고 君前에 臣名이니라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가정에는 두 높은 이가 없으니 비록 어머니일지라도 감히 써 그 아버지와 맞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어른과 어린이할 것 없이 모두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감히 그 어른에게 사사로운 존경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국가에 두 높은 이가 없나니 비록 아버지일지라도 가히 써 그 임금과 맞먹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貴賤과 尊卑할 것 없이 모두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감히 그 존귀한 바에 사사로운 존경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春秋에 鄢陵의 전쟁에서 欒書가 晉侯를 수레에 실으려고 하자, 그 아들인 鍼이 말하기를 ‘書는 물러가시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비록 아버지일지라도 또한 감히 맞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女子許嫁어든 笄而字니라
여자가 시집가기로 허락하였으면은 비녀를 꽂고 字를 지어준다.
시집가기로 허락하였으면은 15세에 비녀를 꽂고, 아직 시집가기로 허락을 아니하였으면은 20세에 비녀를 꽂는 것이니 또한 成人의 도리이기 때문에 그에게 字를 지어준다.
凡進食之禮는 左殽右胾하며 食居人之左하고 羹居人之右하며 膾炙處外하고 醯醬處內하며 葱渫處末하고 酒漿處右하며 以脯脩置者는 左胊右末이니라
무릇 음식을 드리는 禮는 뼈붙은 고기는 왼쪽에 놓고 저민고기는 오른쪽에 놓으며 밥은 사람의 왼쪽에 놓고 국은 사람의 오른쪽에 놓으며 회와 불고기는 바깥쪽에 놓고 육장과 간장은 안쪽에 놓으며 찐(데친) 파는 끝에 놓고 술과 미음장은 오른쪽에 놓으며 脯와 脩로써 놓는 것은 겹친 데를 왼쪽으로 놓고 끝을 오른쪽으로 놓는다. 
뼈에 살이 붙어있는 것을 殽라고 하고 순고기만을 저민 것을 胾라고 하니 뼈는 굳세기 때문에 왼쪽에 놓고 고기는 부드럽기 때문에 오른쪽에 놓는다. 밥은 왼쪽에 놓고 국을 오른쪽에 놓는 것은 마른 것과 습한 것을 나눈 것이다. 회와 불고기는 반찬이 다르기 때문에 殽胾의 밖에 놓고 육장과 간장은 음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殽胾의 안쪽에 놓는다. 葱渫은 찐(데친) 파이다. 또한 김치 종류이니 나무 접시에 담아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끝쪽에 놓는다. 酒漿은 혹 술이고 혹 미음이다. 국 오른쪽에 놓는데 만약 겸하여 두게되면 왼쪽에 술을 놓고 오른쪽에 미음을 놓는다. ○䟽에 말하기를 脯는 시초라고 訓釋하니 비로소 만들면은 바로 이루어지게 된다. 脩는 또한 脯이다. 脩는 治로 訓釋하이 그걸 다스려야(손질해야)만이 이에 만들어진다. 얇게 썰은 것을 脯라고 하고 두들겨서 생강이나 계피를 바른 것을 腶脩라고 한다. 胊는 가운데를 구부린 것(겹친 것)을 이르니 左胊(겹친 데를 왼쪽으로 놓는 것)은 겹친 데를 왼쪽에 놓는 것이다. 脯와 脩가 술의 왼쪽에 놓여있는 것은 건조함이 陽이 되기 때문에서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그 끝이 오른쪽에 있는 것은 먹기에 편리하기 때문에서이니 脯와 脩를 먹는 사람은 끝을 먼저 먹는다.
客若降等이어든 執食興辭호대 主人이 興辭於客이어든 然後客坐니라
손님이 만약 등급이 낮으면은 밥을 가지고 일어나 인사를 하되 주인이 일어나 손님에게 인사를 하면은 그런 뒤에 손님이 앉는 것이다.
등급이 낮음은 官爵과 年齒가 주인보다 낮음을 이른다. 감히 주인과 손님의 禮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이 이르면은 그 음식(밥)을 가지고서 일어나 주인에게 인사를 드리나니 주인이 손님이 일어나 인사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또 일어나서 손님에게 인사를 드리면은 손님이 이에 다시 그 자리로 나아가 앉는 것이다.
主人이 延客祭호대 祭食을 祭所先進하고 殽之序로 徧祭之니라
주인이 손님을 인도하여 제(감사)를 드리되 제드리는(감사드리는) 음식을 먼저 나오는 바대로 제를 드리고 음식의 차례대로 두루 제를 드린다.
옛날 사람이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아 언제나 음식을 먹을 적에는 반드시 각 종류마다 조금씩 덜어내어 나무 접기 사이의 자리에 놓아두어 써 先代에 맨처음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보답하는(감사드리는) 것을 祭라고 이른다. 延은 그를 인도함이다. 음식을 제드리는 禮가 주인이 먼저 내오는 것은 먼저 그걸 제드리고 뒤에 내오는 것은 뒤에 제드려 각각 음식의 차례대로 제드리기를 두루한다. ○朱子가 말씀하시기를 옛날 사람이 술은 땅에다가 제를 드리고 음식은 접시 사이에 제를 드리되 널판지가 있어서 그걸 담았다가 다 먹으면은 거두어 낸다.
三飯이어든 主人이 延客食酨니 然後에 辯殽니라
세 번 밥을 떠 먹으면은 주인이 손님을 인도하여 저민고기를 먹으나니 그런 뒤에 반찬을 두루 먹는다.
䟽에 말하기를 三飯은 세 번 떠 먹음을 이른다. 禮에 음식을 먹을 적에 세 번 떠먹고서 배부르다고 이야기하고 권고함을 기다려서 이에 다시 먹나니 세 번 밥을 떠먹음을 마치면은 주인이 이에 손님을 인도하여 저민고기를 먹도록 한다. 公이 大夫를 음식으로 대접하는 禮에 이르기를 손님이 세 번 밥을 떠먹으면서 국과 장을 이용한다고 하였는데, 鄭氏가 이르기를 매번 밥을 떠먹을 적에 국을 마시고 뼈붙은 고기로써 장에 적셔서 먹는 것이 바른 반찬이다고 하였다. 때문에 세 번 밥을 떠먹음을 이른 뒤에 이에 저민고기를 먹게 되는 것은 저민고기로써 첨가를 하였기 때문에 세 번 밥 먹기 전에는 먹지 않고 저민고기를 먹은 뒤에 이에 가히 반찬을 두루 먹을 수가 있다.
主人이 未辯이어든 客이 不虛口니라
주인이 말하지 아니하면은 손님이 입을 가시지 아니한다.
䟽에 말하기를 虛口는 음식을 먹음이 끝남에 술을 마셔가지고 입을 가시어 하여금 청결하게 하고 또 먹은 것을 편안히 하도록 함을 이른다. 漿을 쓰는 것을 漱라고 하나니 청결함으로써 義를 삼고, 술을 사용하는 것을 酳이라고 하는데 酳은 불어남이라고 訓釋하니 그 기운을 불리어 부양하는 것이다.
侍食於長者호대 主人이 親饋어든 則拜而食하고 主人이 不親饋어든 則不拜而食이니라
어른을 모시고 음식을 먹되 주인이 친히 권하면은 절하고서 먹고, 주인이 친히 권하지 아니하면은 절하지 않고 먹는다.
饋는 음식을 내옴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무릇 써 禮의 베풂에 알맞게 할 뿐인 것이다.
共食에 不飽하며 共飯에 不澤手하며
함께 음식을 먹을 적에는 배불리 먹지 아니하며, 함께 밥을 먹을 적에는 손에 땀내지 아니해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먹는 바가 한 종류가 아닌 것이요, 함께 밥을 먹는 것은 밥을 먹는 것에만 그칠 뿐이니, 함께 먹으면서 배부름을 구하는 것은 사양하는 도리가 아니다. 손에 땀을 내지 않는 것은 옛날에 밥을 먹은 사람이 손을 이용하였는데 남과 더불어 함께 밥을 먹을 적에 손을 문질러 땀이 있게 되면은 남이 장차 그것을 싫어하여 말하기 곤란한 것이다.
毋摶飯하며 毋放飯하며 毋流歠하며
밥을 뭉치지 말며 밥을 크게 뜨지 말며 들이마시지 말며
뭉치지 말라는 것은 孔䟽에 이르기를 만약 밥을 뜨면서 뭉치를 만들면은 쉽게 많이 떠지나니 이것은 배부름을 다투고자 한 것이다. ○朱氏가 말하기를 放은 먹기를 방자하게 하여 절제하는 바가 없음을 이르고 流는 마시기를 흘러가게 하여 그칠 줄을 모름을 이른다.
毋咤食하며 毋齧骨하며 毋反魚肉하며 毋投與狗骨하며 毋固獲하며
음식을 먹을 적에(먹으면서) 혀차지 말며 뼈를 씹지 말며 생선고기와 육류고기(어류와 육류)를 되돌려 놓지 말며 개에게 뼈를 던져주지 말며 굳이 얻으려고 하지 말며
咤食은 음식 먹을 때를 당하여 혀참을 이른 것이요, 孔䟽에 이르기를 혀로써 입속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고 하였으니 혀차지 말라는 것은 기운이 성냄과 유사할까 두려워한 것이요, 씹지 말라함은 그 소리가 들림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요, 魚肉을 되돌려 놓지 말라는 것은 남은 것으로써 그릇에 되돌려 놓지 않는 것이니, 鄭氏가 이르기를 이미 입에 거쳐 남이 더럽게 여기는 바이다고 하였다. 개에게 뼈를 던져주지 말라는 것은 감히 주인의 물건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구하기를 단단히(고집스럽게) 하는 것을 固라고 하고 얻기 어려운 것을 獲이라고 하니 固獲은 꼭 그것을 취하려고 함을 이른다.
毋揚飯하며 飯黍에 毋以箸하며
밥을 휘젓지 말며 기장밥을 먹을 적에는 젓가락을 이용하지 말며
揚은 손으로써 그 뜨거운 기운을 흩음(식힘)을 이른 것이니 먹고 싶음이 성급함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다. 젓가락을 이용하지 말라함은 그 수저가 편리함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毋嚃羹하며 毋絮羹하며 毋刺齒하며 毋歠醢니 客이 絮羹이어든 主人이 辭不能亨하며 客이 歠醢어든 主人이 辭以窶니라
국을 훅 들이마시지 말며 국을 간맞추지 말며 이를 쑤시지 말며 육장을 들이마시지 말아야 되나니 손님이 국을 간맞추면은 주인이 능히 요리되지 못함으로 사례(사과)하며 손님이 육장을 들이마시면은 주인이 가난함으로써 사례(사과)해야 된다.
국에 나물이 있는 것은 마땅히 젓가락을 사용해야 되고 마땅히 입으로써 들이켜서 가져다가 먹지 않아야 된다. 絮는 그릇 속에 나아가 간을 맞추는 것이다. 입의 용모는 그쳐야(다물고 있어야) 되니 마땅히 물건으로써 이를 쑤시지 않아야 된다. 육장은 마땅히 짜야 되는데 그걸 들이마시는 것은 그 맛이 싱겁기 때문에서이다. 손님이 혹시라도 국에 간맞춘 사람이 있으면 주인이 능히 요리되지 못한 것으로써 사례하고, 손님이 혹간 육장을 들이마시는 사람이 있으면은 주인이 가난하여 맛이 없음으로써 사례해야 된다.
濡肉으란 齒決하고 乾肉으란 不齒決하며 毋嘬炙니라
젖은 고기는 이로 끊고(절단하고) 마른 고기는 이로 절단하지 아니하며 불고기를 한 입에 넣지 말아야 된다. 
젖은 고기는 殽·胾의 종류이고 乾肉은 脯·脩의 종류이다. 決은 절단함이니, 이로 절단하지 않는 것은 마땅히 그것을 손으로 다루어야 되는 것이다. ○孔䟽에 말하기를 불로 구운 것을 炙라고 하니, 만약 불고기를 먹을 적에 한 번에 들어서 아울러 먹지를 않아야 되니 아울러 그걸 한 번에 먹는 것을 嘬라고 하니, 이것은 먹는 것을 탐하는 것이다.
卒食이어든 客이 自前跪하야 徹飯齊하야 以授相者니 主人이 興辭於客이어든 然後客坐니라
음식 먹음이 끝나면은 손님이 앞으로부터 꿇어앉아 밥그릇과 장그릇을 거두어 써 거드는 사람에게 주어야 되나니 주인이 일어나 손님에게 사례하면은 그런 뒤에 손님이 앉는 것이다.
自는 부터이다. 齊는 장의 등속(일종)인데, 밥과 장은 모두 주인이 직접 차린 것이다. 때문에 손님이 직접 치우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등급이 낮은 손님을 이른 것이다. 대등한 사람은 직접 치우지 아니한다.
侍飮於長者호대 酒進則起하야 拜受於尊所니 長者辭어시든 少者反席而飮호대 長者擧未釂이어시든 少者不敢飮이니라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시되 술이 나오면 일어나서 술동이 있는 곳에 가서 절하고 받아야 되나니 어른이 사양을 하시면은 젊은 사람이 제자리로 되돌아와서 마시되 어른이 술잔을 들어 다 마시지 아니하셨거든 젊은 사람이 감히 마시지 않아야 된다.
尊所는 술동이를 놓아두는 곳이다. 마시어 술잔을 다 비우는 것을 釂이라고 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고대의 술을 마실 적에는 귀한이나 천한이·어른이나 어린이가 미치지 아니함이 없어 고을에서 술을 마시는 禮에 있어서 堂下의 손님과 樂工 및 생황부는 사람이 참여하여 술을 드리지 아니함이 없고, 郊特牲·饋食禮에 손님과 형제간과 제자(조카)와 公의 有司와 私臣(家臣)이 참여하여 드리지 아니함이 없어서 그 드림이 모두 주인이 직접 술을 따라서 그들에게 주나니 이는 모시고 술을 마시는 사람은 또한 長者가 직접 술을 따라서 그에게 준다. 때문에 술동이 있는 곳에서 절하고 받는 예절이 있다. 오직 연향을 베푸는 禮만은 宰夫(요리사)로써 술잔을 드리는 주인을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은 직접 술을 따라주지 않는다. 鄕飮酒禮와 鄕射禮와 饋食禮에는 모두 방 문사이에 술동이를 놓아두어 손님과 주인이 그것을 함께이용하고, 燕禮와 大射禮에는 모두 두 기둥 서쪽에 술동이를 놓아두어 술동이의 앞면이 임금에게로 향하게하여 임금만이 그걸 전용한다. 燕禮와 鄕飮酒禮에 모두 술동이가 있는 곳에서 절하고 받는다고 이르지 아니한 것은 그 禮가 모시고 술을 마시는 것과 더불어 다르기 때문에서이다.
長者賜어시든 少者賤者不敢辭니라
어른이 주시면은 젊은 사람과 천한 사람이 감히 사양하지 않아야 된다.
사양한 뒤에 받는 것은 손님과 주인의 平交間의 禮이고, 젊은이와 천한이가 존귀한 분을 섬기는 도리는 아니다.
賜果於君前이어시든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
임금 앞에서 과일을 하사해 주시면은 그 씨가 있는 것은 그 씨를 품에 간직해야 된다.
임금의 하사한 것을 존경한 까닭에 감히 씨를 던지지 않는 것이다.
御食於君에 君이 賜餘어시든 器之漑者란 不寫하고 其餘란 皆寫니라
임금을 모시고 음식을 먹을 적에 임금이 나머지(대궁)를 하사해 주시면은 그릇의 씻을 수 있는 것은 다른 그릇에 쏟지 않고 그 나머지는 모두 쏟아야 된다.
임금을 모시고 음식을 먹는 것은 임금이 음식을 잡수실 적에 신하가 그 임금을 위하여 권해드리는 것이다. 임금이 음식의 나머지로서(남는 것을 가지고) 그 신하에게 하사해 주면은 만약 질그릇이나 혹은 나무그릇으로서 가히 써 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 먹고, 혹 그 그릇이 이 물억새나 대오리로 짠 것으로써 가히 씻을 수 없는 것은 다른 그릇에 옮겨 쏟아 그것을 먹어야 되니 이는 입 때가 더럽히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餕餘란 不祭니 父不祭子하며 夫不祭妻니라
남은(대궁) 음식으로 제사지내지 않아야 되나니 아버지일지라도 아들에게 제사지내지 아니하며 남편일지라도 아내에게 제사지내지 않아야 된다.
尸童이는 귀신의 나머지를 먹고 신하는 임금님의 나머지를 먹고 천한 이는 귀한 이의 나머지를 먹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윗사람의 나머지를 먹는 것이 모두 餕이다. 이는 제사를 돕는 執事가 혹은 尸童이가 되어서 얻은 대궁의 남은 고기로써 귀가하게 되었으면은 가히 그 남은 고기로써 그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된다. 비록 아버지의 존귀함으로서도 또한 그 남은 음식을 가지고 그 자식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되고, 남편의 존귀함으로서도 또한 그 남은 음식으로써 그 아내에게 제사지내지 않아야 되니 먹고 남은 음식물이 더럽기 때문에서이다. 일설에는 이 祭는 매 음식마다 반드시 祭(감사)를 드렸다는 祭이니 남의 나머지를 먹는 것과 및 자식이 아버지에게 음식을 드림과 아내가 남편에게 음식을 드림에 있어서 모두 제를 드리지 아니하고 먹어야 된다. 대개 주인의 음식을 존경한 까닭에 제를 드린 뒤에 먹는 것인데 남의 나머지를 먹으면서 제를 지낸다면은 설만한 것이고 낮은 사람에게 이것을 시행한다면은 높은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御同於長者하얀 雖貳라도 不辭하며 偶坐하얀 不辭니라
어른을 모시고 함께 앉아 있을 적에는 비록 음식을 더 내오더라도 사양하지 아니하며 나란히 앉아 있을 적에는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御는 모심이다. 貳는 음식을 더 내오는 것이다. 모시고 음식을 먹은 사람이 비록 음식의 중함(거듭 내옴)을 얻을지라도 그 많음을 사양하지 않는 것은 이 음식이 본시 어른을 위하여 차렸기 때문에서이다. 偶라는 것은 배우의(짝지은) 뜻이니 그 손님이 있음으로 인하여 자기도 또한 좌석에 짝하고(나란히 하고) 앉았다면은 또한 이 좌석이 오로지 자기만을 위하여 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羹之有菜者란 用梜하고 其無菜者란 不用梜이니라
국에 나물이 있는 것은 젓가락을 사용하고 그 나물이 없는 것은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
梜은 젓가락이다. 나물이 들어있지 않는 것은 국물일 뿐이니 바로 그 국물을 마시는 것도 괜찮다.
爲天子하야 削瓜者는 副之하야 巾以絺하고 爲國君者는 華之하야 巾以綌하고 爲大夫하야는 累之하고 士는 疐之하고 庶人은 齕之니라
天子를 위하여 외를 깎는 사람은 그 외를 네쪽으로 쪼개어 가는 갈포로써 덮어 올리고 나라의 임금을 위한 사람(위해서 외를 깎는)은 그 외를 절반으로 쪼개어 거친 갈포로 덮어 올리고 대부를 위해서 외를 깎는 사람은 그 외를 벌거벗긴 채로 올리고 士를 위해서 외를 깎는 사람은 꼭지를 제거해서 올리고 庶人은 그 외를 씹어 먹는 것이다. 
孔䟽에 말하기를 削은 깎음이요, 副는 쪼갬이요, 絺는 가는 갈포이니 그 껍질을 깎아 쪼개서 네조각으로 만들고 또 가로로 잘라서 가는 갈포 수건으로 덮어서 올린다. 華는 절반으로 쪼개는 것이요, 綌은 거친 갈포이니 제후는 禮가 강등하기 때문에 쪼개되 네쪽으로 쪼개지 아니하고 또한 가로로 잘라서 거친 갈포를 사용하여 그것을 덮어서 올린다. 󰡔爾雅󰡕에 외를 절반으로 쪼갠다고 하였는데 郭璞 註에 이르기를 먹을 적에 다듬어 선택하는 이름이다고 하였다. 累는 발가벗는 것이니, 수건으로 덮지 않는 것이다. 疐는 꽃이 떨어져 나간 곳 부분을 이르니, 疐之라는 것은 꼭지만을 제거할 뿐인 것이다. 齕은 씹어먹는 것이니, 그걸 씹어먹는 것은 가로로 자르지 않는 것이다. 이 등급이 동일하지 않는 것은 평상시의 일을 이른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임금의 뜰에서 예로 회합한 때이다. ○劉氏가 말하기를 大夫 이상에게는 모두 위한다고 말한 것은 담당 관리가 그를 위한 것이고, 士·庶人에게는 위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가는 갈포와 거친 갈포로써 덮는 것은 더위를 당해서 서늘함으로 귀함을 삼기 때문에서이다.
父母有疾이어시든 冠者不櫛하며 行不翔하며 言不惰하며 琴瑟을 不御하며 食肉을 不至變味하며 飮酒를 不至變貌하며 笑不至矧하며 怒不至詈니 疾止어든 復故니라
부모님께서 병환이 있으시면은 갓을 쓴 사람은 머리를 빗지 아니하며 걸어다닐 적에는 활개를 치지 아니하며 말할 적에는 한만하게 하지 아니하며 거문고와 비파를 타지 아니하며 고기를 먹을 적에 맛이 변함에 까지(물릴 때까지) 이르지 아니하며 술을 마시기를 얼굴색이 변함에 이르지 않아야 하며 웃을 적에는 잇몸이 드러남에 까지 이르지 않아야 하며 성을 내되 꾸짖음에 이르지 않아야 되니 병환이 나으면은 예전대로 돌아간다.
이는 부모님의 병환을 간호하는 禮를 말한 것이다. 머리빗지 아니함은 치장을 하지 않은 것이요, 활개치지 않는 것은 맵시를 내지 않는 것이요, 한만하지 아니함은 다른 일에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孔䟽에 이르기를 惰는 잘못되어 부정한 말이라고 하였다. 거문고와 비파를 타지(연주하지) 않는 것은 즐거운 생각이 없기 때문에서이다. 그런대로 가히 고기를 먹을 수는 있지마는 다만 물리어 입맛이 변함에 이르지 않는 것이요, 그런대로 가히 술을 마실 수 있지마는 다만 취하여 안색이 변함에는 이르지 않아야 된다. 이의 뿌리를 矧(잇몸)이라고 하니 웃으면서 잇몸이 드러나는 것은 이 크게 웃는 것이요, 성내어 꾸짖은 것을 詈라고 하니 성내어 꾸짖음에 이른 것은 이 대단히 성낸 것이니 모두 걱정을 잊어버림이 되기 때문에 그걸 경계한 것이다. 復故는 평상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有憂者는 側席而坐하고 有喪者는 專席而坐니라
걱정이 있는 사람은 단독 자리에 앉고 喪服이 있는 사람은 홑자리에 앉는다.
有憂는 부모의 질병을 이르나 혹은 다른 재화나 근심이다. 側은 홀로이니, 홀로 한 자리에 앉아 손님 대접할 자리를 깔지 아니하니 이것은 걱정이 있기 때문에서이다. 일설에 側席은 한쪽에 그 자리를 깔아 正席에 변함을 이른 것이다고 하는데 또한 말이 된다. 專은 홑이니, 귀한이나 천한이의 자리가 각각 겹치는 수가(이중 수효가) 있는데 喪中에 있을 적에는 아니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專席은 남과 더불어 함께 앉지 않는 것이다.
水潦降이어든 不獻魚鼈이니라
장마가 그치면은 물고기와 자라를 바치지 않는다.
물이 마르면은 물고기와 자라를 잡기가 쉬워 족히 귀하게 여길 것이 없기 때문에 바치지 않는다.
獻鳥者는 佛其首니 畜鳥者는 則勿佛也니라
새를 드리는 사람은 그 머리를 돌려놓으나니 새를 기르는 사람은 머리를 돌리지 아니한다.
佛은 그 머리를 돌려놓음을 이르니, 그 부리가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서이다. 기르는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니 그 성질을 따른 것이다.
獻車馬者는 執策綏하고
수레와 말을 드리는 사람은 말 채찍과 손잡이 끈을 가져다 올리고
䟽에 말하기를 策은 이 말 채찍이고, 綏는 이 수레에 올라가면서 잡는 손잡이 끈이니, 수레와 말은 마루에 올라갈 수 없으므로 다만 채찍과 손잡이 끈만을 가지고 그걸 바치면은 수레와 말이 있는 줄을 안다.
獻甲者는 執冑하고 獻杖者는 執末하고
갑옷을 드리는 사람은 작은 투구를 가지고서 올리고 지팡이를 올리는 사람은 끝을 가지고 잡는다.
孔䟽에 말하기를 甲은 갑옷이고 冑는 투구이니, 갑옷은 크고 투구는 작으니 작은 것은 들기가 쉬우므로 가지고서 바치는 것이다. 지팡이 끝이 땅을 짚어 깨끗하지 않으므로 가지고서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한 것이다.
獻民虜者는 操右袂하고
백성의 포로를 바치는 사람은 포로의 오른쪽 소매를 잡고
民虜는 정벌하여 사로잡은 사람이다. 그 오른쪽 소매를 잡는 것은 써 딴 마음을 방지하는 것이다.
獻粟者는 執右契하고 獻米者는 操量鼓하고
조를 바치는 사람은 오른쪽 書契(증서)를 가지고 쌀을 바치는 사람은 되를 가지고서 바친다.
䟽에 이르기를 契라는 것은 한 나무조각에 양쪽으로 써서 똑같게 그것을 나누나니 오른쪽 것은 먼저 써서 귀함이 된다. 鼓는 되 그릇 이름이다. 쌀에 있어서 되라고 말하였으면 조도 또한 되이고, 조에 書契라고 말하였으면 쌀에서도 또한 書契이지마는 다만 쌀은 가히 바로 먹어서 급하기 때문에 되를 말하였고 조는 가히 오래도록 저장하여 느긋하기 때문에 書契라고 이르니 書契가 되에 비하여 느긋하다.
獻孰食者는 操醬齊하고
익은 음식을 드리는 사람은 장을 가지고 가고
䟽에 이르기를 간장이 음식의 주체가 되므로 주체(간장)를 가지고 오면은 먹을 것을 가히 알 수가 있으니 예컨대 겨자장을 보면은 반드시 물고기 회를 바친 줄을 아는 따위와 같다.
獻田宅者는 操書致니라
밭과 집을 바치는 사람은 서류를 가지고 와야된다.
書致는 그 많고 적은 수를 상세히 기록해서 그걸 사람에게 전해줌을 이른다. ○呂氏가 말하기를 옛적에는 田土와 住宅이 모두 국가에 소속되어 백성이 소유할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여기에서 바친다고 한 것은 아마도 임금이 하사해 준 것으로써 가히 자기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니 采地와 같은 등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히 바칠 수 있었는가 싶다.
凡遺人弓者는 張弓으란 尙筋하고 弛弓으란 尙角이니 右手로 執簫하고 左手로 承弣하야 尊卑垂帨니 若主人이 拜어든 則客이 還辟辟拜하며
무릇 남에게 활을 주는 사람은 활시위가 얹져진 활은 시위를 위로 하고 시위가 풀어진 활은 뿔을 위로 해야 되나니 오른손으로 활고자를 잡고 왼손으로 줌통을 받들어 尊卑가 허리수건을 드리우나니 만약 주인이 절을 하면은 손님이 곧바로(얼른) 비켜서서 절을 피해야 한다.
활의 몸통이 뿔이 내면에 있고 활시위가 밖에 있나니 위로 감은 그로 하여금 위쪽에 있도록 한 것이니 모두 그 형세가 순함을 취한 것이다. 簫는 활고자이니 䟽에 이르기를 그걸 깎아서 조금 비스듬하게 하여 퉁소와 같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라고 했다. 弣는 중앙의 손잡는 부분이다. 帨는 차는 수건이다. 손님과 주인이 尊卑가 서로 동등하면은 주고받을 즈음에 모두 조금 경쇠처럼 허리를 구부려 그 수건이 드리워진 것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 때에는 활이 아직 손님의 손에 쥐어있기 때문에 주인의 절에 답할 수가 없어서 조금 뒷걸음쳐서 옮기어 그 절을 피하는 것이다. 辟은 비킴과 같으니 그 서있는 곳에서 떠남을 이른다. ○呂氏가 말하기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는 獻(드린다)이라고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는 賜(준다)라고 하고 대등한 사람에게는 遺라고 한다.
主人이 自受호대 由客之左하야 接下承弣하야 鄕이 與客並이니 然後受니라
주인이 스스로 받되 손님의 왼쪽으로부터 손 아래를 접하여 줌통을 받들어 향함이 손님과 더불어 나란히 해야 되나니 그런 뒤에 받는 것이다.
스스로 받는 것은 대등한 손님을 마땅히 사람을 시켜서 받도록 할 수 없기 때문에서이다. 由는 부터이니, 손님의 왼쪽으로 부터서 받는다면은 손님은 오른쪽에 있게 된다. 이 때에 주인이 왼손을 물리어 써 손님의 손아래를 접하여 그 줌통을 받들고 또 오른손을 감싸서 활의 아래 끝을 잡아가지고서 받으나니 이 때에는 주인과 손님이 나란히 서서 모두 남쪽을 향하게 된다. ○方氏가 말하기를 賓主가 등급이 다르면 주고 받음도 향함이 다르니 이는 賓主가 동등하므로 향함이 손님과 나란하다.
進劒者는 左首하고
칼을 주는 사람은 칼 머리를 왼쪽으로 하고
孔䟽에 말하기를 進은 또한 줌이다. 首(칼 머리)는 칼 손잡이의 고리이다. 손님은 오른쪽에 있고 주인은 왼쪽에 있어 칼 머리가 존귀하니 존귀한 부분으로써 주인에게 주는 것이다. 가령 마주대하고서 주게되면은 또한 칼 머리를 왼쪽으로 해야 되니 칼 머리가 존귀함에 왼쪽 또한 존귀함이 당연하다.
進戈者는 前其鐏하고 後其刃하고
창을 주는 사람은 그 창 물미를 앞으로 하고 그 칼날을 뒤로 하고
䟽에 말하기를 戈는 갈고리진 창이다. 칼날은 머리에 당하여 날카롭고 칼 물미는 꼬리 끝에 있어서 둔하니 칼날로 주지 않는 것은 존경하는 것이다.
進矛戟者는 前其鐓하고
세모진 창과 미륵창을 주는 사람은 그 고달을 앞으로 하고
䟽에 말하기를 矛는 鋌(작은 창)과 같으면서 모서리가 세 개이고, 戟은 오늘날의 戟(미륵창)이다. 鐓는 세모진 창과 미륵창의 자루가 되니 끝이 평평하니 평평한 부분으로 사람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다. 또한 응하여 아울러 주되 左右라고 이르지 않고 앞뒤라고 이른 것은 互文이니 만약 상대면 전후이고 만약 아울러 주면 좌우이다.
進几杖者는 拂之하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는 사람은 그것(먼지)을 털어버리고 주고
닦아가지고 먼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效馬效羊者는 右牽之하고
말을 드리거나(바치거나) 양을 드리는 사람은 그것을 오른손으로 끌고 가고
效는 드리는 것이다. 오른 손으로 그걸 끄는 것은 편리하기 때문에서이다.
效犬者는 左牽之하고
개를 바치는 사람은 왼손으로 그걸 끌고 가고
오른 손으로 그 씹고 물어뜯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執禽者는 左首하고
새를 바치는 사람은 머리를 왼쪽으로 하고
禽은 새이다. 머리가 높으니 주인이 왼쪽에 있기 때문에 가로로 받들어 머리를 주인에게 준다.
飾羔鴈者는 以繢하고
새끼 양과 기러기를 덮는 사람은 그림 그려진 베로써 하고
飾은 그걸 덮는 것이니, 베에다가 구름 모양을 그려가지고 그로써 새끼 양과 기러기를 덮어 서로 만나보는 폐백을 삼는다.
受珠玉者는 以掬하고
진주와 옥을 받는 사람은 두 손으로 움켜받고
두손으로 그걸 받음을 이른다.
受弓劒者는 以袂하고
활과 칼을 받는 사람은 옷소매로써 하고
옷소매로써 그것을 접수하여 손을 드러내지 않음을 이른다.
飮玉爵者는 弗揮니라
옥 술잔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뿌리지 않아야 된다.
가히 남은 찌꺼기를 흔들어 버리지 않아야 됨을 이르니 실수하여 떨어뜨릴까 두려워서이다.
凡以弓劒苞苴簞笥로 問人者는 操以受命호대 如使之容이니라
무릇 활과 칼·선물 꾸러미·대나무 상자로써 남에게 문안하는(문안하면서 선물로 보내는) 사람은 使者가 그 물건을 가지고서 명을 받되 사신의 용모와 같이 해야 된다.
苞라는 것은 魚肉의 등속을 싸는 것이고, 苴라는 것은 풀로써 그릇에 깔고서 물건을 담는 것이다. 簞은 둥글고 笥는 모나니 모두 대오리로 만든 그릇이다. 問(문안함)은 그에게 주는 것이다. 使者가 명령을 받을 때에 여러 물건을 가지고서 바로 그 威儀와 進退 익히기를 저 나라에 이르는 容儀와 같이하는 것이다.
凡爲君使者는 已受命하얀 君言을 不宿於家니라
무릇 임금을 위하여 사신가는 사람은 이미 명령을 받았으면은 임금의 말씀을 자기 집에서 잠재우지 않아야 된다.
명령을 받았으면은 곧바로 떠나가야 된다.
君言이 至커시든 則主人이 出拜君言之辱하고 使者歸어든 則必拜送于門外니라
임금의 말이 당도하게 되면은 주인이 밖으로 나가서 임금님 말의 욕보심에 대하여 절하고 使者가 돌아가게 되면은 반드시 문밖에서 절하고 전송해야 된다.
이르게 되면 명령에 대하여 절을 하고 使者가 돌아가면 절하고서 전송함은 모두 임금을 존경하는 것이다.
若使人於君所어든 則必朝服而命之하고 使者反이어든 則必下堂而受命이니라
만약 임금님 계신 곳에 사람을 보내게 되면은(심부름 보내게 되면은) 반드시 조회복으로서 그에게 명령을 하고 使者가 되돌아오면은 반드시 마루에서 내려가 명령을 받아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임금님 계신 곳에 사람을 심부름 보낼 적에는 마루에서 내려가지 아니하고 그가 되돌아오면 마루에서 내려가 명령을 받는 것은 당초에는 자기의 명령으로써 가게되고 마침내는 임금님 명령으로써 돌아오기 때문이니 使者가 되돌아온 뒤에 그 공경을 이루고 갈 적에는 아니한다.
博聞强識而讓하며 敦善行而不怠를 謂之君子니라
들은 것이 넓고 기억력이 강하되 겸양하며 착한 행동을 독실히 하여 게을리 아니하는 것을 君子라고 이른다.
들은 것이 넓고 기억력이 강하면서도 겸양하는 것은 이른바 있으면서도 없는 척 하고 꽉찼으면서도 빈 것처럼 하는 것이요, 선행을 돈독히 하여 게을리 아니함은 이른바 부지런히 부지런히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니 모두 君子의 도리이다. ○陳氏가 말하기를 견문과 식견은 밖으로부터 들어오고 선행은 중심으로부터 나오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은 채우기가 쉬우므로 텅 빔으로 처하고 중심을 말미암아 나오는 것은 게으르기가 쉬우므로 부지런함으로 이룬다.
君子不盡人之歡하며 不竭人之忠은 以全交也라
君子가 남이 내게 즐겁게 하는 것을 다하도록 아니하며 남이 내게 충성하는 것을 다하도록 아니하는 것은 사귐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남의 즐거움을 다하도록 하고 남의 충성을 다하도록 함은 모두 남에게 요구함이 많은 것이니 남에게 요구함이 많은데도 그에 호응이 없으면은 이는 교제가 써 온전하기 어려운 바이다. 歡은 나에게 좋게 함을 이른 것이요, 忠은 나에게 마음을 다함을 이른 것이니, 나에게 좋게하는 것을 바라기를 대단히 아니하고 나에게 마음 다하는 것을 그 꼭 이루는 것을 요망하지 않는다면은 계승하기 어려움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다.
禮에 曰君子는 抱孫코 不抱子라하니 此는 言孫可以爲王父尸오 子不可以爲父尸니라 爲君尸者를 大夫士見之則下之하고 君이 知所以爲尸者則自下之니 尸必式하며 乘必以几니라
禮에 말하기를 “君子는 손자는 안고 자식은 안지 않는다.”하였으니 이는 손자는 가히 써 할아버지의 尸童이 될 수가 있지마는 자식은 가히 써 아버지의 尸童이 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임금의 尸童이 된 사람을 大夫와 士가 그걸 보면은 수레에서 내리고 임금이 써 尸童이 되는 바를 알면은 스스로 그 수레에서 내려야 되나니 尸童에게는 반드시 경례를 하며(경의를 표하며) 수레에 타면은 반드시 안석을 이용해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天地와 社稷과 山川과 四方과 온갖 물건 및 七祀의 등속에 제사지낼 적에는 모두 尸童이가 있다. 외부의 신에 있어서는 同姓이나 異姓은 금하고 다만 거북점을 쳐서 길하면은 누구나 가히 尸童이가 될 수가 있고, 이긴 나라의 사직에 제사를 지낼 적에는 士師(法官)가 尸童이가 되고 오직 殤喪(장가가기 전에 죽은 사람)에 제사지낼 적에는 尸童이가 없다. ○呂氏가 말하기를 손자는 안고 자식은 안지 않는 것은 고대 禮經의 말이다. 曾子問에 말하기를 손자가 어리면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안도록 한다고 하였으니 손자를 안는다는 말은 손자가 어린데에서 생겨나고 또 尸童이는 반드시 손자로써 함을 밝힌 것이니 昭穆이 동일하기 때문에서이다. 옛날의 제사에는 반드시 尸童이 있었으니 尸童은 신의 상징이다. 주인이 尸童을 섬김은 자식으로써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다. 尸童은 반드시 점을 쳐서 정했으니 신에게 구하고 감히 제멋대로 하지 않는다. 재계가 끝나는 날(7일)에 혹 길에서 만남이 있으므로 尸童을 위하여 (수레에서) 내리는 禮가 있다. 大夫士는 본다고 말했고 君은 안다고 말한 것은 君이 혹 능히 다 알지 못한지라 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려서 그 공경을 다하는 것이다. 尸童은 임금에게 내리지 않고 式하는 것은 사당 문의 밖에 尸童의 높음이 온전하지 않아 감히 대등한 禮로 답하지 않으므로 式만할 뿐이니 禮가 대등하여 답하면 내린다. 만약 사당 가운데 있으면 주인이 절함에 답하지 않음이 없다. 옛날에 수레 가운데는 式으로 공경을 삼았으니 式은 수레 앞에 가로지른 나무이다. 기대어 남에게 예우함에 머리는 반드시 조금 구부려 이로써 공경을 삼았다. 式은 말의 꼬리를 보고 머리를 굽히는 절도이다. 几는 尊者가 의지하여 편안함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尸童이 수레를 탐에 쓴다.
齊者는 不樂不吊니라
재계하는 사람은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조문하지도 아니해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경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재계를 하니 재계하는 것은 精明한 덕을 이루는 것이다. 즐거워하면은 흩어져버리고 슬퍼하면은 동요되나니 모두 재계에 해가 있으니 즐거워하지 않고 조문가지 않는 것은 그 재계하는 뜻을 온전히하기 위해서이다.
居喪之禮는 毁瘠이 不形하며 視聽이 不衰하며 升降에 不由阼階하며 出入에 不當門隧니라
居喪하는 禮는 야위고 수척함이 뼈가 드러나지 아니해야 하며 시력과 청력이 감퇴되지 않아야 하며 올라가고 내려갈 적에 동쪽 섬돌을 경유하지 아니하며 드나들 적에 문의 중앙 길을 차지하지 않아야 된다.
門隧는 문의 중앙 길이다. ○䟽에 말하기를 居喪할 적에 파리하고 수척한 것은 허락하고 뼈가 드러나는 것은 허락하지 아니하니 뼈는 형체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뼈를 일러 드러난다고 하였다. ○呂氏가 말하기를 先王이 禮를 마련할 적에 수척해도 생명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수척하여 뼈가 드러나고 시력 청력이 감쇠하면은 생명을 잃어버림에 가까울 것이다.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은) 죽은 사람을 보내드리는 큰 일을 또한 장차 폐기하게 되어 그것을 행한 사람이 없게 된다면은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동쪽 섬돌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문 중앙 길을 차지하지 않는 것은 사람 자식의 禮를 집행하여 차마 폐기하지 못한 것이다.
居喪之禮는 頭有創則沐하고 身有瘍則浴하며 有疾則飮酒食肉호대 疾止어든 復初니 不勝喪은 乃比於不慈不孝니라
居喪하는 禮는 머리에 부스럼이 있으면 머리를 감고 몸에 부스럼이 있으면 몸을 씻으며 병이 있으면은 술을 마시고 고기도 먹되 병이 나으면 처음대로(예전대로) 되돌아가야 하니 喪禮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지 않고 효도하지 않는데에 비교한다.
목욕하는 것과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은 권도로서 마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이 나으면은 처음대로 되돌아가야 된다. ○朱子가 말씀하시기를 아래로는 족히 써 後嗣를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음에 비교하고 위로는 족히 써 선조 제사를 받들 수가 없기 때문에 不孝에 비하는 것이다.
五十엔 不致毁하고 六十엔 不毁하며 七十엔 唯衰麻在身이오 飮酒食肉하며 處於內니라
50살에는 극도로 야위지 않아야 되고 60살에는 야위지 않아야 되며 70살에는 오직 衰麻(喪服)이 몸에만 있고(喪服만 입고)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으며 안에서 거처해야 된다.
50살에는 비로소 노쇠하기 때문에 극도로 야위지 않아야 되고 60살에는 또 더 노쇠하기 때문에 가히 야위어서는 안되고 70살 나이에는 죽음과의 거리가 멀지 아니하니 그 居喪하는 禮를 생략하는 것은 써 쉬이 죽게되는 시기를 온전히 하는 것이다.
生與來日이오 死與往日이니라
산 사람의 일은 내일부터 세고 죽은 사람의 일은 돌아간 날부터 센다.
與는 셈과 같으니 성복하고 상장 막대기를 짚는 것은 산 사람의 일이다. 죽은 이튿날부터서 세가지고 삼일을 삼고 염하고 빈소차리는 것은 죽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죽은 날부터 세가지고 삼일을 삼으니 이 삼일에 성복하는 것은 바로 죽은 사람의 제 4일이다.
知生者는 吊하고 知死者는 傷이니 知生而不知死어든 吊而不傷하고 知死而不知生이어든 傷而不吊니라
산 사람을 아는 이는 조문하고 죽은 사람을 아는 이는 애도(상심)하나니 산 사람만 알고 죽은 사람은 모르면은 조문만 하고 상심(애도)하지 아니하고 죽은 사람만 알고 산 사람을 모르면은 애도는 하되 조문하지는 않는다.
方氏가 말하기를 산 사람을 모르는데 그를 조문하면은 그 조문이 아첨에 가깝고, 죽은 사람을 모르는데 그를 애도하면은 그 애도함이 거짓에 가깝다. ○應氏가 말하기를 조문하는 것은 禮가 밖에서 위문한 것이요, 상심하는 것은 정이 마음 속에서 애통해 하는 것이다.
吊喪호대 弗能賻어든 不問其所費하며 問疾호대 弗能遺어든 不問其所欲하며 見人호대 弗能館이어든 不問其所舍니라
喪事에 조문을 하되 능히 부의를 할 수가 없으면은 그 소비되는(비용쓰인) 바를 묻지 않아야 하며, 병 위문을 가되 능히 물품을 줄 수가 없으면은 그 하고싶은 바를 묻지 아니하며, 사람을 만나보되 능히 여관을 정해줄 수 없으면 그 유숙할 곳을 묻지 않아야 된다.
돈으로써 喪事에 도와주는 것을 賻儀라고 한다. 이 세 가지 일을 능히 할 수 없다면은 모두 묻지 않는 것은 그냥 묻는 것이 가히 부끄러움직함이 되기 때문에서이다.
賜人者는 不曰來取오 與人者는 不問其所欲이니라
남에게 주는 사람은 와서 가져가라고 이르지 아니하고, 남에게 주는 사람은 그 하고싶은 바를 묻지 않는 것이다.
賜라는 것은 君子이고, 與라는 것은 小人이다. ○朱氏가 말하기를 君子는 지키는 것이 있으니 반드시 禮로써 받들기 때문에 와서 가져가라고 이르지 아니하고, 小人은 싫어함이 없으니 반드시 禮로써 절제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 하고싶은 바를 묻지 않는다.
適墓호대 不登壟하며 助葬호대 必執紼하며
무덤에 가되 封墳에 올라가지 아니하며, 葬事를 돕되 반드시 상여줄을 잡아야 된다.
壟은 무덤의 무더기이니, 封墳인 거기에 올라가면 不敬함(不敬스러움)이 되고, 紼(상여줄)은 관을 끌어당기는 새끼(줄)이니 그걸 잡고서 힘을 쓴다.
臨喪不笑하며
喪事에 임하여서는 웃지 않아야 된다.
슬픔으로써 주장을 삼는다.
揖人호대 必違其位하며
사람에게 揖을 하되 반드시 그 자리를 비켜서서 하며
자리를 벗어나서 揖을 하는 것은 禮가 변경함으로써 공경을 삼는다.
望柩不歌하며 入臨不翔하며 當食不歎하며
널을 바라보고서는 노래부르지 아니하며, 哭하는 데에 들어가서는 활개치지 아니하며, 음식을 당해서는 한숨쉬지 않아야 된다.
不歌(노래부르지 아니함)은 不笑(웃지아니함)과 더불어 뜻이 같다. 臨은 哭함이다. 不翔(활개치지 아니함)은 맵시를 내지 않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적에는 근심을 잊는 것이니 한숨쉬는 장소가 아니다.
鄰有喪이어든 舂不相하며
이웃에 喪事가 있으면(초상이 났으면) 방아를 찧되 방아타령을 부르지 않아야 된다.
다섯 집이 이웃이 된다. 相이라는 것은 소리로써 서로 권하며 돕는 것이니, 대개 방아찧는 사람이 노래를 불러서 방아찧는 것을 돕는 것이다.
里有殯이어든 不巷歌하며 適墓不歌하며 哭日不歌하며
마을에 빈소가 있으면 골목에서 노래부르지 아니하며 묘소에 가서 노래부르지 아니하며 곡한 날에는 노래부르지 않아야 된다.
25 집이 里(마을)이 된다. 巷歌는 골목길에서 노래부르는 것이다.
送喪호대 不由徑하며 送葬호대 不辟塗潦하며 臨喪則必有哀色하며 執紼不笑하며
죽은 이를 보내드리되 지름길을 경유하지 아니하며 장례를 보내드리되 진흙과 길바닥 물을 피하지 아니하며 喪事에 임해서는 반드시 슬퍼하는 기색이 있어야 되며 상여줄을 잡을 적에는 웃지 않아야 된다.
不由徑(지름길을 경유하지 않음)은 구차스럽게 그 빠름을 취하지 않는 것이요, 不辟塗潦(진흙길과 길바닥 물을 피하지 않음)은 수고로움을 꺼리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다.
臨樂不歎하며
음악에 임해서는 탄식하지 아니하며
또한 탄식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서이다.
介冑則有不可犯之色이니 故君子는 戒愼하야 不失色於人하나니라
갑옷과 투구는 가히 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다. 그러므로 君子는 경계하고 조심하여 남에게 容色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 章은 揖人必違其位로부터 當食不歎臨樂不歎介冑則有不可犯之色의 네 구의 외는 모두 喪事의 예절이니 기록하는 자가 이와 같이 상세히 하였다. 매사에 경계하고 신중하면 失禮의 부끄러움이 없으니 갑옷을 입은 빛을 잃어서는 안될 뿐만이 아니다.
國君이 撫式이어시든 大夫下之하고 大夫撫式이어든 士下之니 禮不下庶人하며
나라 임금이 수레 앞턱에 가로댄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경의를 표하면은(경례를 하면은) 大夫는 그 수레에서 내려와야 되고, 大夫가 수레 앞턱에 가로댄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경의를 표하면은 선비는 그 수레에서 내려와야 되나니, 禮는 庶人에게 까지 내려가지(미치지) 아니한다.
임금과 大夫가 혹 길을 같이하여 출행할 적에 임금이 종묘를 지나다가 경의를 표하면은 대부는 수레에서 내려와야 되나니 선비가 대부에게 있어서 대부가 임금에 있어서와 같다. 庶人은 비천하고 또 빈부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經에서 庶人의 禮는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옛날의 禮를 제정한 것이 모두 선비로부터 시작되었다. 先儒가 말하기를 그 庶人이 일이 있게 되면은 선비의 禮를 빌려서 시행한다고 하였다. 一說에는 이는 서로 길에서 만나게 되면 임금이 수레 앞턱에 가로댄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大夫에게 경례를 하면은 大夫는 수레에서 내려와야 되고, 大夫가 수레 앞턱 가로댄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선비에게 경의를 표하면은 선비는 수레에서 내려야 되고 庶人은 아니한다. 그렇기 때문에 禮는 庶人에게 까지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刑不上大夫니라
刑은 대부에게 올라가지(가해지지) 않는다.
대부가 혹 죄가 있으면은 八議(여덟가지 의론)로써 그걸 결정하여 八議에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은 형벌을 받게 된다. 󰡔周官(周禮의 별칭)󰡕에 掌囚(죄수를 담당한 사람)가 무릇 官爵이 있는 사람과 왕의 동족은 받들고서 서울 법관에게로 가서 써 刑殺을 기다린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大夫에게는 가해지지 않는다고 이른 것은 대부의 형벌을 제정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庶人의 禮는 제정하지 않은 것과 같다.
刑人은 不在君側이니라
형벌을 받은 사람은 임금의 측근(곁)에 있지 않아야 된다.
임금은 마땅히 덕을 지닌 사람을 가까이 해야 되고 또 그 怨恨하여 변을 저지를까 염려스럽기 때문에서이니 문지기가 吳나라 왕 餘祭를 시해한 것은 형벌받은 사람이 곁에 있었던 재앙이다.
兵車엔 不式하며 武車엔 綏旌하고 德車엔 結旌이니라
兵車에서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하며 武車에서는 깃발을 드리우고 德車에서는 깃발을 묶어둔다.
䟽에 말하기를 兵車는 革輅(가죽으로 무장한 수레)이니, 武猛을 숭상하고 양보함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武車도 또한 革輅인데, 그 창과 칼날을 세움을 취해서는 바로 兵車라고 이르고, 그 위엄스럽고 사나움을 취해서는 바로 武車라고 이른다. 旌은 수레 위의 깃발이니, 威武를 숭상하기 때문에 깃발을 펴서 끈이 드리워진 것처럼(펄럭이게) 하고 玉輅·金輅·象輅·木輅의 네 輅車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德車라고 이르니, 덕의 아름다움이 안에 있어서 赫奕함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 깃발을 깃대에 묶어두는 것이다.
史는 載筆하고 士는 載言이니라
史官은 붓을 싣고 가고(휴대하고) 士는 말을 싣고 간다.
孔䟽에 말하기를 대쪽과 판자는 말하지 않고, 붓만 말한 것은 붓은 이 글의 주체이니 나머지를 싣고 가는 것을 가히 알 수가 있다. 言(말)은 맹약을 맺으면서 회담한 말을 이르니 옛 일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史는 나라의 史官이다. 載筆(붓을 싣고 간 것)은 장차 그로써 未然의(장래의) 일을 기록하려는 것이고, 載言은 그로써 이미 그러하였던 일을 열람하고자 한 것이다.
前有水어든 則載靑旌하고
앞에 물이 있으면 靑雀이 그려진 기를 들어 세우고
䟽에 말하기를 왕이 출행함에 마땅히 경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앞에 異變이 있으면은 유사한 것을 들어서 그걸 표시해 준다. 靑旌은 靑雀이니 이는 물새이다.
前有塵埃어든 則載鳴鳶하고
앞에 먼지가 있으면(일어났으면) 우는 솔개가 그려진 기를 들어 올리고
鳶은 솔개인데, 솔개가 울면 바람이 불고(일어나고) 바람이 일어나면은 먼지가 일어나게 된다.
前有車騎어든 則載飛鴻하고
앞에 車騎가 있으면은 날아가는 기러기가 그려진 기를 들어 세우고
鴻은 기러기인데, 기러기가 날아갈 적에 줄이 있어서 車騎와 더불어 서로 같다.
前有士師어든 則載虎皮하고
앞에 士師(군대)가 있으면은 虎皮가 그려진 기를 들어 세우고
호랑이는 위엄스럽고 사나우니 또한 군대의 형상이다. 士師는 마땅히 경계할 것이 아니로되 또한 유사한 것을 들어서 군중에게 보여준 것은 아마도 횡포를 금지하는 뜻인가 보다.
前有摯獸어든 則載貔貅니라
앞에 사나운 짐승이 貔貅(맹수)가 그려진 기를 들어 세운다.
摯獸는 호랑이와 이리의 등속이다. 貔貅는 또한 威猛이 있으니 이것이 그려진 기를 들어서 여러 군중으로 하여금 경비함을 알도록 한 것이다. 다만 그 가죽이 그려진 것을 실은 것인지 그 모양을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行에 前朱鳥而後玄武하며 左靑龍而右白虎하고 招搖在上하야 急繕其怒니라
행군할 적에 朱鳥旗를 앞에 세우고 玄武旗를 뒤에 세우며 靑龍旗를 왼쪽에 세우고 白虎旗를 오른쪽에 세우고 招搖旗는 위에 있어 다그쳐서 그 군사들의 성냄을(사기를) 진작시킨다.
行은 군대가 출동함이다. 朱鳥와 玄武와 靑龍과 白虎는 사방의 별자리 이름이니, 그로써 깃발의 문채를 만들되 그 깃발 수가 모두 감쇄되어 龍旗는 9개 드림이고 朱雀旗는 7개 드림이고 白虎旗는 6개 드림이고 龜蛇旗는 4개 드림이다. 招搖는 북두칠성인데 사방 별자리의 중앙에 있으니 군대가 출행할 적에 그걸 본받아서 이 기를 만들어 그것을 위에서 들어서 써 사방을 지휘 바르게하여 군대 진으로 하여금 정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옛적에는 繕을 읽기를 勁으로 하였으니 지금은 呂氏의 말을 따라서 본 글자와 같이 읽는다. 其怒(그 성냄)은 士卒들의 성냄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急은 그들을 다그침이요, 繕은 진작하여 그 성냄을 이루게 한 것이다. 先儒가 繕으로써 勁을 삼았는데 꼭 고칠 것이 없다.
進退有度하며 左右有局하며 各司其局이니라
전진 후퇴함이 법도가 있으며 좌우 부대에 分局이 있으며 각각 그 局을 맡는다.
䟽에 말하기를 전진 후퇴가 법도 있다는 것은 「牧誓」에 이르기를 6 걸음·7 걸음을 벗어나지 아니하여 이에 멈추어 가지런히 하고, 네 번 치고 다섯 번 쳐서 이에 멈추어 이에 가지런히 한다고 하였으니, 한 번 공격하고 한 번 찌르는 것이 1伐이 되나니 적은 것은 네 번 치고 많은 것은 다섯 번 침에 또 마땅히 멈추어서 줄을 가지런히 바르게 해야 된다. 좌우에 分局이 있다는 局은 部分이니 군대 좌우에 각각 部分이 있어 가지고 서로 월권하지 않는 것이다. 각각 그 分局을 맡는 것은 군대가 출행함에 감시 統領하는 것이다.
父之讎는 弗與共戴天하고 兄弟之讎는 不反兵하고 交遊之讎는 不同國이니라
아버지의 원수는 그와 더불어 함께 하늘을 이지 않아야 되고(한 하늘 밑에서 살 수가 없고) 형제의 원수는 무기를 거두어 들이지 아니하고(항상 차고 다니고) 친구의 원수는 나라를 함께하지 않는다.(한 나라에서 살지 않는다.)
무기를 거두어 들이지 아니함은 언제나 그를 살해할 수 있는 병기로써 스스로 휴대함을 이른다. ○呂氏가 말하기를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의 공통된 형벌이니 사람을 죽임에 정의로우면 죄가 없기 때문에 하여금 원수를 삼지 말도록 하나니 󰡔周禮󰡕 調人의 직책이 이것이다. 죽임에 정의롭지 못하면은 죽인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된다. 마땅히 담당자(법관)에게 말해 가지고 그를 죽여야 되나니 士師의 직책이 그것이다. 두 가지 것은 모두 복수에 종사할 것이 없다. 그러나 복수한다는 글이 經傳에 여기저기 뒤섞여 나타났으니 그 所以然을 고찰해 보건대 필시 그 사람이 형세가 융성하여 늦추면은 능히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그를 살해해 버리고 어느 겨를에 有司에게 보고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하늘이니, 능히 아버지 원수를 복수하지 못하면 우러러 써 皇天을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이다. 원수를 복수하는 뜻은 맹세코 원수와 더불어 함께 살지 않으려는 것이니 이는 써 함께 하늘을 이지 않는 것이다.
四郊多壘는 此卿大夫之辱也오 地廣大호대 荒而不治는 此亦士之辱也니라
사방 교외에 보루가 많은 것은 이 卿大夫의 치욕이고, 땅이 광대한데도 황폐하여 다스리지(경작하지) 않은 것은 이 또한 士(지방관)의 치욕이다.
四郊라는 것은 王城의 밖 사방에 近郊(가까운 교외)는 50里이고, 遠郊는 100里이다. 제후국도 또한 각각 사방 교외가 있는데, 里의 수는 각각 그 땅의 넓고 좁음에 따라서 원근을 삼는다. 壘(보루)라는 것은 군사가 주둔하는 성벽이니, 卿大夫가 능히 나라를 도모하지 못하여 자주 침략 정벌을 받았기 때문에 보루가 많은 것이고, 땅이 넓고 사람이 드물어서 황폐하여 다스리지 않은 것 이 두 가지 것은 진실로 모두 卿大夫의 책임이다. 士는 직위가 낮아서 참여하여 나라를 도모할 수 없지마는 田土와 마을의 일은 그의 직책이기 때문에 또한 士의 치욕이라고 말한 것이다.
臨喪不惰하며 祭服敝則焚之하며 祭器敝則埋之하며 龜筴이 敝則埋之하며 牲死則埋之니라
喪事에 임해서는 태만하지 않아야 되며 祭服이 낡으면은(헤어지면은) 그걸 태워버리며 祭器가 낡으면 그것을 묻으며 거북 껍질과 점대가 낡으면은 그것을 묻으며 희생이 죽으면은 그걸 묻어 준다.
呂氏가 말하기를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불사르니 불사르는 것은 陽이기 때문에서이고, 귀신이 사용하는 것은 묻어주나니 묻는 것은 陰이기 때문에서이다.
凡祭於公者는 必自徹其俎니라
무릇 임금에게서 제사를 돕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그 祭器(도마)를 거두어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이는 士가 임금의 제사를 도움을 이른다. 만약 대부 이상은 임금이 사람을 시켜서 그 도마를 보내주고 만약 대부 이하가 스스로 그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으면은 사람을 시켜서 賓俎를 보내준다. ○呂氏가 말하기를 신하의 공경을 집행하여 감히 손님에게 비견하지를 않기 때문에 스스로 그 제기를 거두어 가지고서 나가는 것이다.
卒哭乃諱니 禮에 不諱嫌名하며 二名은 不偏諱니라
卒哭을 지내고서야 이에 이름을 피하나니(부르지 아니하나니) 禮에 음이 같은 이름은 피하지 아니하며 두 글자로 된 이름은 한 글자는 피하지 않는다.
葬事지내고서 虞祭를 지내고 虞祭를 지내고서 卒哭祭를 지낸다. 무릇 卒哭을 지내기 전에는 아직까지 산사람을 섬기는 禮를 準用하기 때문에 卒哭을 지내고서야 이에 그 이름을 諱한다. 嫌名은 음이 같은 것이요, 不偏諱(한 글자는 諱하지 않는 것)는 가히 한 글자는 말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逮事父母어든 則諱王父母하고 不逮事父母어든 則不諱王父母니라
부모를 미처 섬겼으면은 조부모를 諱하고, 부모를 미처 섬기지 못하였으면은 조부모를 諱하지 않는다.
逮는 미침이다. 庶人은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면은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 이름을 諱하는 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그 할아버지를 諱하지 아니하나니 사당이 있어서 할아버지를 섬긴 사람은 그렇지 않다.
君所엔 無私諱하고 大夫之所엔 有公諱니라
임금이 계신 곳에서는 사사로이 諱함이 없고, 大夫의 곳에서는 공공히 諱하는 것이 있다.
私諱는 임금의 조정에서는 피하지 않는 것이고, 대부는 그 先君을 諱하는 것이다.
詩書不諱하며 臨文不諱하며
󰡔詩經󰡕과 󰡔書經󰡕에서는 諱하지 아니하며 글에 임해서는 諱하지 아니하며
諱함으로 인하여 󰡔詩經󰡕·󰡔書經󰡕의 글을 바꾸지 아니하며 행사의 말을 바꾸지 아니하니 대개 학자에게 현혹됨이 있고 받아 씀에 잘못됨이 있을까 두려워서이다.
廟中不諱니라
사당 안에서는 諱하지 않는다.
廟中에서 諱하는 것은 낮은 사람으로써 높은 이를 피하는 것이니, 만약에 고조에게 일이 있다면은(고조 제사를 지낸다면은) 증조 이하는 諱하지 않는다.
夫人之諱는 雖質君之前이라도 臣不諱也하며 婦諱는 不出門하며 大功小功은 不諱니라
夫人(왕비)의 諱는 비록 임금의 앞에서 대답할지라도 臣이 諱하지 아니하며 부녀의 諱는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며 大功·小功은 諱하지 않는다.
質은 대답함과 같다. 夫人의 諱와 부녀의 諱는 모두 그 집안 先世를 이른다. 門은 그 거처하는 집의 문이다. 大功 이하는 은혜가 가볍고 服이 降殺되기 때문에 또한 諱하지 않는다.
入竟而問禁하며 入國而問俗하며 入門而問諱니라
국경에 들어가서는 禁令을 물으며 국내에 들어가서는 풍속을 물으며 집문에 들어가서는 諱하는 것을 물어야 된다.
馬氏가 말하기를 禁令을 묻는 것은 임금에게 죄를 얻는 것을 염려한 것이요, 풍속을 물음은 대중에게 죄를 얻음을 염려한 것이요, 諱함을 물은 것은 주인에게 죄를 얻음을 염려한 것이다.
外事란 以剛日하고 內事란 以柔日이니라
외부의 일은 剛日을 이용하고 내부의 일은 柔日을 이용한다.
甲丙戊庚壬이 剛이 되고 乙丁己辛癸는 柔가 된다. 先儒가 外事로써 군대를 다루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나 그러나 巡狩와 朝聘과 會盟 따위가 모두 外事이다. 內事는 종묘의 제사와 冠禮 婚禮 같은 禮가 모두 그것이다.
凡卜筮日호대 旬之外曰遠某日이오 旬之內曰近某日이니 喪事란 先遠日이오 吉事란 先近日이니라
무릇 날짜를 거북점 치고 시초점 치되 열흘의 밖을 먼 아무 날이라고 하고, 열흘의 안을 가까운 아무 날이라고 이르나니, 喪事는 먼 날을 먼저 점치고 吉한 일은 가까운 날을 먼저 점친다.
䟽에 말하기를 이달 하순에 내달 상순을 시초점 치는 것은 이 열흘 밖의 날이다. 주인이 시초점 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먼 아무 날짜를 쓰고 싶다고 하니 이것은 대부의 禮이다. 士는 천하고 직책이 천하니 때가 닥쳐서 일이 한가하여 가히 써 제사지낼 수 있다면은 열흘 초에 바로 열흘 안의 날짜를 시초점 치되 주인이 시초점 치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가까운 아무 날짜를 쓰고 싶다고 한다. 天子와 諸侯는 여러 가지 제사가 있어서 혹은 열흘 안을 사용하기도 하며 혹은 열흘 밖을 사용하기도 하니 그 말이 모두 이와 같다. 喪事는 葬事와 二祥(大祥과 小祥)을 이르니, 이것은 슬픔을 빼앗아가는 뜻이다. 그러므로 효자가 하고싶은 바가 아니고 다만 부득이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먼 날로부터서 일어나니 마땅히 서두르지 아니하여 조금 효심을 펼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吉事는 제사와 관례와 혼례의 등속을 이르니 少牢에 이르기를 만약 吉事가 아니면은 遠日에 미친다고 하였으니, 이는 가까운 날을 먼저 점치는 것이다.
曰호대 爲日하야 假爾泰龜有常하며 假爾泰筮有常이라하나니 卜筮는 不過三하며 卜筮는 不相襲이니라
이르되 吉日을 가리기(택일을 하기) 위하여 네 큰 거북의 떳떳함이 있는 것에 의탁하며 네 큰 시초가 떳떳함이 있는 것에 의탁한다고 하나니, 거북점과 시초점은 세 번을 초과하지 아니하며 거북점과 시초점은 서로 중복하지 않는 것이다.
曰은 명령하는 말이다. 爲字는 去聲으로 읽어야 되니 吉日을 거북점 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爲日이라고 말하였다. 거북점을 치게 될 경우에는 거북에게 명령하기를 吉日을 택하기 위하여 네 큰 거북이 떳떳함이 있는 것에 의탁한다고 하고, 시초점을 칠 경우에는 시초에게 명령하기를 吉日을 택하기 위하여 네의 큰 시초가 떳떳함이 있는 것에 의탁한다고 한다. 假는 인함이며 의탁함이다. 泰라는 것은 높이고 올리는 말이다. 有常(떳떳함이 있음)은 그 길흉이 떳떳하여 가히 신빙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니, 이는 시초와 거북에게 명령하는 말이다. 不過三(세번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첫 번째 不吉하면은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러서 마침내 吉하지 아니하면은 중지하여 행하지 않는 것이다. 襲은 중복함이니, 거북점이 不吉하면은 그만두고 가히 인하여 다시 시초점을 칠 수 없는 것이며, 시초점이 不吉하면 중지하고 가히 인하여 다시 거북점을 칠 수 없는 것이다.
龜爲卜이오 筴爲筮니 卜筮者는 先聖王之所以使民으로 信時日하며 敬鬼神하며 畏法令也며 所以使民으로 決嫌疑하며 定猶與也니 故曰疑而筮之則弗非也하며 日而行事則必踐之하나니라
거북점을 卜이라 하고 시초점을 筮라고 하니 거북점과 시초점이라는 것은 先代 聖王이 써 백성으로 하여금 시일을 믿으며 귀신을 존경하며 법령을 두려워하도록 하는 바였으며, 써 백성으로 하여금 혐의를 결단하며 망설임을 결정하도록 한 것이니 때문에 의심이 나서 시초점을 쳤으면은 그르다고 말며 날짜를 점쳐서 일을 행하게 되면은 반드시 그것을 실천해야 된다.
筴은 시초이다. 舊說에는 踐을 읽기를 善字로 읽었으니 글 뜻이 대단히 우활하다.(사정이 맞지않다.) 孔䟽에 王氏 說을 인용함에 있어서는 踐은 밟음이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밟아서 그걸 실행한 것이니 마땅히 읽기를 본 글자대로 해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說文에 猶는 짐승 이름이요, 與도 또한 짐승 이름인데, 두 짐승이 모두 나아가고 물러감에 의심이 많으니 사람으로서 의심이 많은 사람이 그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猶與(망설임)라고 이른다. ○呂氏가 말하기를 무릇 모든 일에 있어서 거북점을 친 것이 不吉하면은 시초점을 치지 아니하고 시초점이 不吉하면은 거북점을 치지 아니하나니, 獻公이 驪姬를 맞아드린 것에 대하여 거북점을 쳤을 적에 길하지 않자, 公이 말하기를 시초점을 쳐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서로 중복된 것이다. 만약 大事에는 먼저 시초점을 치고 뒤에 거북점을 치나니, 洪範에 거북점이 길하고 시초점이 길하며 혹은 거북점이 길하고 시초점은 흉한 것이 있으니, 이는 거북점과 시초점을 병용한 것이고, 晉나라에서 襄王을 들여보내는 것을 위하여 거북점을 쳐서 黃帝가 阪泉에서 싸웠다는 점괘를 얻고 또 그에 대하여 시초점을 쳐가지고서 大有卦가 睽卦로 변한 것을 만났으니 또한 거북점과 시초점을 병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중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일을 믿는 것은 거북점을 치고 시초점을 쳐서 그 점괘를 준용하여 감히 고치지 않는 것이요, 鬼神을 존경하는 것은 사람의 도모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귀신에게 구하였으니 존경하는 바가 있음을 알아가지고 감히 기필하지 않는 것이요, 法令을 두려워하는 것은 임금이 법령에 의심이 있는 것을 거북점과 시초점에 결정을 하니 임금도 또한 감히 제마음대로 못하는데 더구나 下民이겠는가. 혐의라는 것은 물건이 두 개가 있어서 서로 비슷한 것이요, 망설이는 것은 일이 두 개가 있어서 결정을 못한 것이니, 예컨대 도읍을 세움에 있어서 某地가 가히 도읍을 할만 하고 某地도 또한 가히 도읍할만 한 것은 이는 의심스러운 것이고, 예컨대 싸움에 있어서 혹은 가히 싸울만하다고 이르기도 하고 혹은 가히 싸울만하지 못하다고 이르는 것은 이는 망설이는 것이다. 거북점을 치고 시초점을 쳐서 그걸 결정을 하고 그것을 확정을 하나니, 이는 先代 聖王이 神道로써 가르침을 베푼 것이다. 의심이 있음에 시초점을 치나니 이미 시초점을 치고서도 믿지를 않고 날짜를 물어서 거북점을 치나니 이미 거북점을 치고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면은 이는 不誠스러움이 되나니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능히 사람에게도 환심을 얻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가히 귀신에게 환심을 얻을 수 있겠는가.
君車將駕어든 則僕이 執策하야 立於馬前하고
임금님 수레가 장차 멍에 매우려고 하면 마부가 채찍을 가지고서 말 앞에 서있고
이 아래로는 수레타는 禮를 말하였다. 策은 말 채찍이니, 마부가 그걸 가지고서 말 앞에 서있는 것은 써 말이 달아남을 방지하는 바이다.
已駕어든 僕이 展軨效駕하며
이미 멍에를 매웠으면 마부가 굴대 빗장을 살펴보고 멍에 매워졌다고 아뢴다.
已駕(이미 멍에 매움)는 말에 멍에 매움이 끝난 것이다. 軨은 수레의 굴대 머리이니 수레가 굴러가는 것이 굴대에 말미암으니 마부가 굴대를 살펴보기를 두루하고 바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아뢰어 수레가 멍에 매움이 끝났다고 말한다.
奮衣하야 由右上하야 取貳綏하야 跪乘하며
옷에 먼지를 털고서 오른쪽으로부터 올라가서 둘째 손잡이 끈을 잡고서 꿇어앉아 타며
䟽에 말하기를 마부가 먼저 나가 수레에 향하여 수레 뒤에서 스스로 그 옷을 털어 먼지를 제거하고 오른편으로부터 오르니 올라갈 적에 반드시 우측으로부터 하는 것은 임금의 자리가 왼편에 있으니 임금의 빈자리를 피한다. 貳는 버금이다. 綏는 수레를 오르는 끈이니 正綏는 임금의 오름을 헤아리는 것이고 副綏는 마부 오른쪽을 오름을 헤아리는 것이니 마부가 먼저 수레를 시험할 때에 임금이 오히려 나오지 않았으므로 감히 평소대로 서지 않으니 무릎 꿇어 타서 공경을 삼는 것이다.
執策分轡하야 驅之하야 五步而立이니
채찍을 잡고 고삐를 나누어 쥐고서 그 말을 몰아 다섯 걸음만에 서나니(멈추나니)
䟽에 말하기를 轡는 말을 모는 새끼(고삐)이다. 수레가 한 끌채에 네 마리가 멍에를 매우나니 중앙에 두 말로써 끌채 양쪽에 있는 것을 服馬라고 이름하고 양쪽 가에 있는 것을 騑馬라 이름하며 또한 驂馬(곁말)라고 이름하니, 󰡔詩經󰡕에서 이르기를 두 服馬가 최상의 말이고 양쪽에 곁말이 기러기처럼 나란히 간다고 하였으니, 雁行이라는 것은 중앙의 服馬와 더불어 서로 차례를 지음을 말한 것이다. 말 한 마리마다 두 고삐가 있어서 네 마리 말에 8개 고삐이니 곁말 안쪽의 고삐로써 수레 앞턱 가로댄 나무 앞에 매우고 그 곁말 외부의 고삐는 두 服馬의 각각 두 고삐를 아울러서 합쳐가지고 6개 고삐는 손에 있나니 오른손은 채찍을 잡아 3개 고삐로써 빈 손안에 쥐고 3개 고삐로써 채찍을 쥔 손안에 둔다. 때문에 채찍을 쥐고 고삐를 나눈다고 하였다. 驅之(그 말을 모는 것)는 시험삼아 몰아 가는 것이다. 五步而立(다섯 걸음만에 멈추어 서는 것)은 꿇어앉아서 말을 몰아 써 다섯 걸음 가서 바로 멈추어가지고 서서 임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君出就車어시든 則僕이 幷轡授綏어든 左右攘辟니라
임금이 나와서 수레로 나아가시면은(수레에 나오게 되면은) 마부가 고삐를 아울러(한손에) 잡고 손잡이 끈을 드리면은 左右 陪臣들은 물러나 비킨다.
䟽에 말하기를 임금이 나와 수레로 향하시거든 마부는 6개 고삐 및 채찍을 아울러 한 손 중앙에 두고 한 손으로 正綏를 취해 임금에게 주어 수레에 오르게 하니 이에 좌우의 여러 신하는 수레가 진행하고자 함을 보고 모두 옮겨 물러나 수레를 피하여 수레의 행함을 방해하지 않게 함이다.
車驅而騶하야 至于大門하야 君撫僕之手而顧命車右하사 就車니 門閭溝渠엔 必步니라
수레를 몰아서 달려가 대문에 이르러 임금이 마부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돌아보며 수레의 오른쪽 勇士에게 명하여 수레에 오르도록 하나니 마을 문과 도랑에 있어서는 반드시 신하는 걸어간다.
䟽에 말하기를 수레 위에 임금은 왼쪽에 있고 마부는 중앙에 있고 勇士는 오른쪽에 있나니 이미 대문에 이르게 되면은 비상한 일이 있을까 두렵기 때문에 돌아보고서 수레 오른쪽 勇士에게 명령을 하여 수레에 오르도록 하나니 마을 문과 도랑에 이르러서 반드시 수레에서 내리는 것은 첫째는 君子는 十室(열 집이 사는 조그만 마을)을 속이지 아니하여 마을 문을 지나감에 반드시 경의를 표하나니 임금이 경의를 표하면은 신하는 마땅히 수레에서 내려야 되는 것이고, 둘째로는 도랑이 험하여 넘어짐이 있을까 두려워서이니 또한 모름지기 내려서 그 수레를 붙잡아야 된다. 마부는 내리지 아니한 것은 수레가 감이 마부에게 연유하나니 마부가 내리면은 수레를 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리지 않는 것이다.
凡僕人之禮는 必授人綏니 若僕者降等이어든 則受하고 不然則否하며
무릇 마부의 禮는 반드시 사람에게 손잡이 끈을 주어야 되나니 만약에 마부가 등급이 낮으면은 손잡이 끈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은 않는다.
무릇 수레의 마부가 된 자는 반드시 正綏로 남에게 주는 것이니 신하가 임금에게 그러할 뿐만이 아니다. 만약 僕의 등급이 낮으면 士가 大夫에 같은 류는 正綏를 줄 때에 다만 받을 뿐이고 사양은 없다. 강등이 아닌 자는 받지 않는다.
若僕者降等이어든 撫僕之手하고 不然則自下拘之니라
만일 마부가 등급이 낮으면은 마부의 손을 어루만지고 그렇지 아니하면은 마부의 손 아래로부터 그 손잡이 끈을 잡는다.
등급이 낮은 사람은 비록 마땅히 그 손잡이 끈을 받아야되지마는 그러나 그래도 그 손을 어루만져 멈추게하여 그 직접 받지 아니하려고 한 것 같이 하고서 그런 뒤에 그걸 받으나니 또한 겸양하는 도리이다. 등급이 낮지 아니한 사람은 자기야 비록 받고 싶지 않지마는 저 사람이 반드시 꼭 준다면은 손을 물려서 마부의 손 아래로부터 스스로 그것을 잡아야 된다.
客車는 不入大門하며 婦人은 不立乘하며 犬馬는 不上於堂이니라
손님의 수레는 대문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며 부인은 서서 수레를 타지 아니하며 개와 말은 마루에 올라가지 않는다.
馬氏가 말하기를 客車는 대문을 들어가지 않음은 주인을 공경하지 때문이고 주인이 대문을 나와 맞이하는 것은 손님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현하는 禮에 偏駕는 王門을 들어가지 않는다 하였고 公이 대부를 먹이는 禮에 손님은 수레를 타서 대문 밖 서쪽에 있는다 하였으니 만약 제후가 손님의 禮로 왕을 뵙지 않으면 墨車·龍旂로 조회한다 하였다. 부인은 安車를 타기 때문에 서서 타지 않고 犬馬는 마당에 늘어놓는 물건을 채우므로 堂에 오르지 않게 하는 것이니 犬馬를 사람에게 주면 고삐를 잡을 뿐이고 말을 폐백에 합하면 笏圭를 바칠 뿐이고 말을 받들어서 알현하면 남에게 줄뿐이니 모두 不上堂을 이른다.
故로 君子式黃髮하며 下卿位하며 入國不馳하며 入里必式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君子는 노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卿의 위치에서 수레에 내리며 서울 안에 들어가서는 말을 달리지 아니하며 마을에 들어가면 반드시 경의를 표해야 된다.
式黃髮은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고 下卿位는 대신을 공경함이다. 에에 임금이 나가면 卿大夫의 위치를 지나서 수레에 오르시고 들어가서는 卿位에 도달하지 않아서 수레에서 내리시는 것이다. 入國不馳는 車馬가 사람을 짓밟을까 두려워함이다. 十室에도 오히려 忠信이 있으니 25家의 가운데에 어찌 공경할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里門에 들어서는 반드시 절을 하는 것이니 이른바 十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鄭氏가 말하기를 첫 구에 故를 말한 것은 이는 여러 편의 섞인 말을 밝힌 것이다.
君이 命召어시든 雖賤人이나 大夫士必自御之니라
임금이 명령하여 부르면은 비록 천한 사람일지라도 大夫와 士가 반드시 스스로 그를 영접해야 된다.
御는 읽기를 迓로 해야 되니 영접함이다. 스스로 그를 영접한 것은 임금의 명령을 존경하는 바이다.
介者不拜는 爲其拜而蓌拜니라
갑옷 입은 사람이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절을 하면서 절을 속이기 때문에서이다.
介는 병사이다. ○朱子가 말하기를 蓌는 버티는 바가 있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屈伸에 불리한 것이다.
祥車엔 曠左니 乘君之乘車호대 不敢曠左하며 左必式이니라
祥車에는 왼쪽을 비워두나니 임금의 乘車를 타되 감히 왼쪽을 비워두지 아니하며 왼쪽에 탄 사람은 반드시 경의를 표한다.
䟽에 말하기를 祥은 吉함과 같으니, 吉車는 살아 있을 때 타는 바를 이른 것이니 葬事지낼 때에는 그걸 이용하여 魂車를 삼는다. 수레 위에는 왼쪽을 귀중하게 여기니 마부가 오른쪽에 있으면서 왼쪽을 비워두는 것은 神의 자리를 비기기 때문에서이다. 王者는 다섯 輅車인데, 玉輅·金輅·象輅·木輅·革輅이다. 왕이 스스로 한 輅車에 타고 나머지 네 輅車는 수행하는 신하들이 타나니 이 수레에는 감히 왼쪽을 비워두지 아니한다. 왼쪽을 비워두면은 祥車와 같으니 흉한 것이다. 왼쪽에 탄 사람이 반드시 경의를 표하는 것은 감히 스스로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기대고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乘車에는 임금이 모두 왼쪽에 있으니 만약에 兵車·戎車·革輅에서는 임금은 중앙에 있다.
僕이 御婦人호대 則進左手하고 後右手하며
마부가 부인을 모시되 왼손을 앞으로 내놓고 오른손은 뒤로 처지게 한다.
䟽에 말하기를 마부는 중앙에 있고 부인은 왼쪽에 있으니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가지고 고삐를 잡어 몸으로 하여금 살짝 서로 등지도록 한 것이니 혐의를 멀리한 것이다.
御國君호대 則進右手하고 後左手而俯니라
나라 임금을 위하여 수레를 몰되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왼손은 뒤로하여 몸을 구부려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임금을 위하여 수레를 모는 사람은 禮에 서로 향하는 것으로써 敬을 삼기 때문에 오른손을 앞으로 나가도록 하고 이미 수레를 몰 적에는 항상 경의를 표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허리를 구부리고서 공경을 한다.
國君은 不乘奇車하며 車上에 不廣欬하며 不妄指하며
나라 임금은 기괴한 수레를 타지 아니하며 수레 위에서는 크게 기침하지 아니하며 망령되이 손가락질을 하지 아니한다. 
奇車는 不正한 수레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크게 기침하지 않음은 소리 모양이 남이 들음을 놀라게 할까 염려해서이고 망령되이 가리키지 않음은 손 모양이 남이 봄에 놀라게 할까 염려해서이다.
立視五雟하며 式視馬尾하며 顧不過轂이니라
수레에 서있을 적에는 다섯 바퀴 정도의 앞을 보며 경의를 표할 적에는 말의 꼬리를 보며 뒤돌아볼 적에는 수레바퀴통을 벗어나지 않아야 된다.
立은 수레 위에 섬을 이른다. ○䟽에 말하기를 嶲는 規이니 수레바퀴가 한 번 돌아감이 一規가 된다. 乘車의 바퀴는 높이가 6척 6촌이니 지름 1에 둘레가 3이다. 1장 9척 5촌을 얻으니 5規는 99척이 된다. 6척이 步가 된다. 총 16보 잔이 된다. 수레 위에 있을 때에 보는 것은 앞의 16보 반이다. 말이 수레를 끌 때에 그 꼬리가 수레 난간에 가까우니 수레 위에서 式에 기대어 머리를 내릴 때에 멀리 볼 수가 없고 다만 말꼬리를 본다. 轂은 수레바퀴통이다. 만약 머리를 돌릴 때에는 수레바퀴통을 지나서는 안되니 論語에 ‘수레 안에서는 안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國中에 以策彗로 卹勿하야 驅塵이 不出軌니라
서울 안에서는 채찍비로써 먼지를 털어 먼지가 수레바퀴 자국에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서울 안에 들어가서는 말을 달리지 않기 때문에 채찍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만 대에 잎이 달린 것을 가지고 채찍을 삼아 그 모양이 대 빗자루와 같기 때문에 策彗라고 말한 것이니 살짝 말의 몸에 가까이 접근시켜서 그 말을 긁어준다. 卹勿은 긁어줌이다. 軌는 수레바퀴 자국이니 느리게 가기 때문에 먼지가 드날려 수레바퀴 자국에 벗어나지 않는다. ○朱子가 말하기를 策彗는 의심컨대 채찍의 비를 이르니 지금의 채찍 끝 가죽띠와 같을 뿐이다.
國君이 下齊牛하며 式宗廟하고 大夫士下公門하며 式路馬니라
나라 임금이 제사에 쓸 소에 대하여 수레에서 내리며 종묘에서 경의를 표하고 大夫와 士가 궁궐 문에서 수레에서 내리며 路馬(임금 수레를 끄는 말)에게 경의를 표해야 된다.
下는 수레에서 내림을 이른다. 熊氏說을 인용함에 이 문장은 잘못이니 마땅히 國君下宗廟式齊牛라 해야 한다.
乘路馬호대 必朝服이니 載鞭策하며 不敢授綏하며 左必式이니라
路馬를 타되 반드시 朝服을 입어야 되나니 채찍을 실으며 감히 손잡이 끈을 주지 아니하며 왼쪽에 타게 되면은 반드시 경의를 표해야 된다.
이는 신하가 예의의 절도를 익힘을 이른다. 路馬는 임금의 路車를 멍에하는 말이다. 이미 朝服을 입고 또 채찍은 다만 싣고서 사용하지 않으니 모두 공경함이다. 임금이 수레에 오르면 마부가 正綏를 주는 것이니 지금 신하가 예의를 익혀 왼편에 거하면 스스로 몰아서 가고 감히 수레 오른쪽으로 하여금 끈을 자기에게 주어서는 안된다. 左必式은 이미 높은 자리에 있으니 마땅히 式하여 공경을 보이는 것이다.
步路馬호대 必中道니 以足蹙路馬芻有誅하며 齒路馬有誅하니라
路馬를 步行시키되 반드시 길 가운데서 해야 되나니 발로써 路馬의 꼴을 밟으면은 벌이 있으며 路馬의 나이를 따지면은 벌이 있다.
步는 행보하면서 조련함을 이르니 반드시 길의 가운데를 당하게 하는 것은 곁은 낮고 더러워 不敬이기 때문이고 혹은 넘어진다. 蹙은 蹴과 같다. 芻는 풀이다. 齒는 연수를 평가하고 헤아림이다. 誅는 벌줌이다. ○馬氏가 말하기를 말의 힘을 살핌에 반드시 年으로 하고 말의 年을 셈은 반드시 이로써 하니 이는 임금의 물건을 오만이 여김을 경계함이다. 선왕이 禮를 제정함에 어려운 것은 그 쉬운 것에서 도모하였고 큰 것은 그 자잘한 것에서 하였으니 아직 나타나지 않은데에 속임을 그치게 할뿐이다.
 
曲禮下 第二

凡奉者는 當心하고 提者는 當帶니라
무릇 물건을 받드는 것은 두손이 가슴과 대등해야 되고, 물건을 드는 것은 한손이 띠와 대등해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물건이 마땅히 받들어 가져야 할 것이 있으며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받들 것은 손을 올려서 가슴과 대등해야 되고 드는 것은 팔뚝을 구부려서 띠와 대등해야 되나니 띠는 深衣의 띠이다. 옛날 사람이 항상 深衣를 입었다.
執天子之器則上衡하고 國君則平衡하고 大夫則綏之하고 士則提之니라
天子의 器物을 받들 적에는 가슴과의 평형보다 올라가게 하고 나라 임금의 것은 가슴과 평형이 되게 하고 大夫의 것은 그 가슴에서 내려가게 하고 士의 것은 그 띠 높이에서 들어야 한다.
䟽에 말하기를 上은 높이는 것이요, 衡은 평형이니, 평형은 바로 가슴과 대등한 것이다. 天子의 器物을 마땅히 내려뜨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신하가 받들적에 모두 가슴보다 높게 하고 諸侯는 天子보다 강등되기 때문에 신하가 그 器物을 받들어 가질 적에 器物이 가슴과 평형이 되도록 하고 大夫는 諸侯보다 강등되기 때문에 그 신하가 그 器物을 받들 적에 가슴보다 내려가게 하나니 綏는 내려뜨림이다. 士提之(士의 것은 그 띠 높이에서 든다)는 또 늘어뜨림이 밑에 있는 것이다.
凡執主器호대 執輕如不克하며 執主器호대 操幣圭璧할새 則尙左手하며 行不擧足하야 車輪曳踵이니라
무릇 主君의 器物을 받들되 가벼운 것을 받들되 이기지 못할 듯이 하며, 主君의 器物을 받들되 폐백과 圭와 璧(둥근 구슬)을 잡을 적에는 왼손을 위로하며(위로 올리며), 걸어갈 적에는 발을 들지 아니하여 수레바퀴처럼 발뒤꿈치를 끌어야 한다.
大夫도 主君이라고 일컫나니 이는 上下와 貴賤을 통틀어서 말한 것이다. 如不克(이기지 못할 듯이 함)은 능히 이길 수 없듯이 한 것이니, 聘禮에 말하기를 上介(副士)는 옥을 받들되 무거운 듯이 해야 된다고 하였다. 尙左手(왼손을 위로 함)는 왼손이 위에 있음을 이른 것이니, 왼쪽은 陽으로서 존귀한 것이다. 踵은 발뒤꿈치이니, 器物을 받들고서 걸어갈 적에 다만 그 앞꿈치만 들고 그 뒤꿈치를 끌기를 수레바퀴가 땅에서 굴러가듯이 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레바퀴처럼 발뒤꿈치를 끌어야 된다고 말하였다. ○方氏가 말하기를 왼손이 오른손의 강한 것만 같지 못하니 왼손을 위로하는 것은 써 포용함이 되는 것이요, 오른손을 아래로 하는 것(아래에서 받치는 것)은 써 힘을 쓰는 것이다.
立則磬折垂佩니 主佩倚어시든 則臣佩垂하고 主佩垂어시든 則臣佩委니라
서있을 적에는 경쇠처럼 허리를 구부려 패옥을 드리우나니 主君의 패옥이 몸에 붙었으면(의지했으면)은 신하의 패옥은 드리워져야 하고 主君의 패옥이 드리워졌으면은 신하의 패옥은 땅에 닿게 드리워져야 한다.
구부리기를 경쇠의 등처럼하여 패옥이 양쪽에서 매달려 드리워지나니 이것은 서있을 때 용모의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에게 있어서 尊卑가 등급이 다르니 마땅히 그 임금 용모의 높낮이의 절도를 보아서 그 공경의 용모를 배로 극진히 하는 것이 옳다. 살짝 구부리면 몸에 붙어있고 조금 구부리면은 드리워져 있고 크게(많이) 구부리면은 패옥이 땅에 닿게 되나니 모두 패옥에서 그 절도를 보게 된다.
執玉호대 其有藉者則裼하고 無藉者則襲이니라
옥을 받들되 그 깔개가 있는 것이면 웃옷을 드러내고 깔개가 없는 것이면 웃옷 위에 껴입는다.
옛날 사람의 옷이 몸 가까이에 웃옷과 속곳이의 등속이 있나니 그밖에 갖옷이 있고 여름철에는 갈포옷을 입는데 혹은 갖옷을 입기도 하고 혹은 갈포옷을 입기도 하는 것이 그 위에 모두 웃옷이 있고 웃옷 위에 껴입는 옷이 있고 껴입는 옷 위에 항상 입는 옷이 있으니 皮弁服과 深衣의 등속이 그것이다. 가리워 열지 않은 것을 襲(껴입는 것)이라고 이르고, 만약 열어서 그 웃옷을 드러내면은 그걸 裼이라고 이른다. ○또 聘禮 주에 이르기를 曲禮에 이르기를 옥을 받들되 그 깔개가 있는 것이면 웃옷을 드러내고 깔개가 없는 것이면 웃옷 위에 껴입는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깔개가 없는 것은 圭璋은 특별히 통하여 비단에 올려놓지 아니하니 圭와 璋을 받들때를 당해서는 그 사람이 웃옷에 껴입음을 이른 것이고, 깔개가 있는 것은 璧과 琮은 비단위에 올려놓으니 璧과 琮을 잡을 때를 당해서는 그 사람이 웃옷을 드러냄을 이른다. 曲禮에서 이른 것은 오로지 圭와 璋은 특별히 통하므로 웃옷을 껴입고 璧과 琮은 비단에 올려놓아 웃옷을 드러낸다는 一條만을 주장하여 말하였는데 先儒가 이에 圭를 받들면서 옥받침대를 드리움으로써 有藉로 삼고 圭를 잡으면서 옥받침대를 구부리는 것으로써 無藉로 삼으니 이것은 그렇지 않다. 가만히 經文을 상세히 해 보건데 裼과 襲이 이 하나의 일이고 垂繅와 屈繅가 또 별도로 이 한가지의 일이니 혼합하여 一說로 간주할 수가 없다.
國君은 不名卿老世婦하고 大夫는 不名世臣姪娣하고 士는 不名家相長妾이니라
나라 임금은 卿老(上卿)과 世婦(媵妾)에 대하여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大夫는 世臣과 처질녀와 처제에 대하여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士는 家相(家臣)과 長妾(아들을 둔 妾)에 대해서는 이름을 부르지 아니한다.
不名은 이름으로써 그를 부르지 않는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上卿은 귀하기 때문에 卿老라고 이른다. 世婦는 두 媵妾인데 夫人에 버금가면서 여러 妾들보다는 귀하다. 世臣은 아버지 생존시의 늙은 신하이다. 姪은 이 아내의 오빠 딸이고, 娣는 이 아내의 누이동생이니, 아내를 따라서 온 사람이 妾이 된다. 大夫는 대대로 벼슬을 아니하되 여기에 世臣이 있는 것은 아들이 어질어서 아버지의 爵位를 계승한 것이다. 家相은 집안 일을 도와서 주관하는(아는 체하는) 사람이고, 長妾은 妾으로서 아들을 둔 사람이다.
君大夫之子不敢自稱曰余小子라하며 大夫士之子不敢自稱曰嗣子某라하며 不敢與世子同名이니라
임금과 大夫의 아들은 감히 스스로 일컬어 ‘나 小子’라고 이르지 아니하며, 대부와 士의 아들은 감히 자칭하여 ‘嗣子 某’라고 이르지 아니하며, 감히 世子와 더불어 이름을 동일하게 짓지 아니한다.
列國의 임금과 天子의 大夫는 그 아들이 모두 감히 자칭하여 ‘나 小子’라고 하지 않는 것은 天子를 계승하는 칭호를 피하는 것이요, 列國의 대부와 士의 아들이 감히 ‘嗣子 某’라고 자칭하지 않는 것은 諸侯를 계승하는(世子의) 칭호를 피한 것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世子는 임금의 맏아들이니 여러 신하의 아들들이 감히 그와 더불어 이름을 함께 짓지 않는 것은 또한 임금을 피하는 것이다. 만약 이름지음이 世子의 앞에 있었다면은 世子가 임금이 되어도 또한 피하지 아니하나니, 󰡔穀梁傳󰡕에는 말하기를 衛나라 大夫인 齊惡과 衛나라 임금 惡이 무슨 까닭으로 임금과 신하가 이름이 동일하였는가하면 君子(임금)는 남의 이름을 빼앗을 수 없고 사람의 어버이가 이름지어준 것을 빼앗지 않기 때문에서이다.
君使士射어시든 不能이어든 則辭以疾하야 言曰某有負薪之憂라하니라
임금이 士로 하여금 활을 쏘도록 하면은 능숙하지 못하면은 병으로써 사양하여 말하기를 ‘제가 땔나무를 짊어졌던 노고가 있다.’고 해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활쏘는 것은 남자가 일하는 것이 있는 바이니(남자로서의 종사함이 있는 것이니) 능숙하지 못하면 가히 병으로써 사양해야 되지 가히 능숙하지 못함으로서는 사양해서는 않된다. 땔나무를 짊어지는 것은 천한 일이니 士가 직접 종사하는 것이니 병이 있으면은 능히 땔나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땔나무를 짊어진 노고라고 말한다.
侍於君子에 不顧望而對非禮也니라
君子를 모시고 있을 적에 좌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답하는 것이 禮가 아니다.
呂氏가 말하기를 돌아본 뒤에 대답하는 것은 감히 남보다 앞서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應氏가 말하기를 남의 말을 관찰하고 남의 얼굴빛을 관찰하는 뜻이 있다.
君子行禮호대 不求變俗이니 祭祀之禮와 居喪之服과 哭泣之位를 皆如其國之故하야 謹修其法而審行之니라
君子가 禮를 행하되 고국(본국)의 풍속을 변경함을 구하지 아니해야 되나니, 제사지내는 예절과 居喪하는 服制와 哭泣하는 위치를 모두 그 고국의 옛 풍속과 같이하여 삼가 그 법을 닦아 살펴서 그것을 실행해야 된다.
말하자면 卿과 大夫와 士로서 다른 나라에 이주하여 사는 사람이 禮를 행하는 일을 가히 그 고국의 풍속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니 모두 마땅히 그 법을 삼가 수행하여 살펴서 그것을 실행해야 된다.
去國三世나 爵祿有列於朝하며 出入에 有詔於國하며 若兄弟宗族이 猶存이어든 則反告於宗後하고 去國三世나 爵祿無列於朝하며 出入에 無詔於國이어든 唯興之日에야 從新國之法이니라
본국을 떠난 지 3대가 되었지마는 일가 사람의 爵祿이 조정에 반열됨이(벼슬함이) 있으며 타국에 출입할 적에 본국에 알림이 있으며 만약 형제와 종족이 아직 본국에 남아있으면은 冠禮·婚禮·喪事에 돌아가서 宗孫(宗子)에게 알리고, 본국을 떠난 지 3대가 되었지마는 일가 사람의 爵祿이 조정에 반열됨이 없으며 타국에 출입할 적에 본국에 알림이 없으면은 오직 일어나 發身하여 벼슬한 날에야(출세한 뒤에야) 새나라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본국을 떠난 지 비록 이미 3세가 되었지마는 고국의 임금이 그래도 그 종족 사람들을 조정에 벼슬을 시켜 써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해 주고 이 사람이 타국에 왕래하여 출입할 적에 따라서 본국의 임금에게 알리고 그 종족과 형제간들이 아직까지 존재하면은 반드시 宗子가 있게되니 무릇 冠禮를 치르고 아내에게 장가를 듦에 있어 반드시 보고하고 사망함에 반드시 부고를 보내는 것은 친족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뜻이다. 만약에 고국을 떠난 지 3세가 되었지마는 고국 조정에 벼슬한 반열이 없고 출입할 적에 고국 임금과 더불어 서로 알리지 않는다면은 그 시일이 이미 오래되었고 그 의리가 이미 끊어졌으므로 가히 써 그 고국의 옛 풍습을 고칠 수 있지마는 그러나 그래도 반드시 發身하여 卿大夫가 됨을 기다려서야 이에 새나라의 법을 따르니 이것은 후함의 지극함이다.(대단히 후한 일이다.)
君子已孤하얀 不更名하며
君子가 이미 아버지를 여위었으면은 이름을 고치지 아니하며
이름이라는 것은 처음 태어난 3달이 된 시기에 아버지가 命名해 주는 것이니,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그 이름을 고치는 것은 효자가 차마 못하는 것이다.
已孤暴貴라도 不爲父作諡하나니라
이미 아버지를 여위고서 드러나(출세하여) 귀하게 되었더라도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짓지 아니한다.
文王이 비록 西伯이 되었지마는 古公과 公季를 위하여 시호를 지어드리지 아니하셨고 周公이 文王과 武王의 덕을 이루셨지마는 또한 감히 太王과 王季에게 시호를 올려드리지 않으셨다. ○呂氏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士가 되었고 자식이 天子·諸侯가 되었다면은 天子와 諸侯로써 제사는 지내되 그 시동이에게는 士의 의복을 입히나니 이는 가히 자기의 봉록으로써 그 어버이를 봉양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히 자기의 爵位로써 그 어버이에게 올려드릴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爵位가 낮아서 시호에 해당이 되지 않는데 자기의 爵位가 시호에 해당된 까닭으로 그 아버지 시호를 지어드린다면은 이것은 자기의 爵位로써 그 아버지에게 올려드리는 것이니 아버지를 높이려다가 도리어 그를 낮게하는 것이니 써 그 어버이를 존경하는 바가 아니다.
居喪未葬하얀 讀喪禮하고 旣葬하얀 讀祭禮하고 喪復常하얀 讀樂章이니 居喪하얀 不言樂하며 祭事엔 不言凶하며 公庭엔 不言婦女니라
居喪하여 아직 葬事를 지내지 아니하였을 적에는(葬禮 전에는) 喪禮를 읽고, 이미 葬事를 지냈으면 祭禮를 읽고, 居喪이 평상시로 되돌아갔으면은(服을 벗었으면은) 樂章을 읽으나니 居喪 중에는 음악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제사에는 凶事를 말하지 아니하며 公庭(조정)에서는 부녀(여자)에 대하여 말하지 않아야 된다.
復常(평상시로 되돌아감)은 喪服을 벗은 뒤이다. 樂章은 현악기를 타면서 노래부르는 詩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이 글을 읽는 것이 학업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이 때를 당해서 이 일을 모르면은 禮로써 그 어버이를 섬기지 않는 것이다. 吉凶의 일이 서로 간섭되지 않으니 슬프고 즐거운 감정이 가히 써 겹칠 수가 없기 때문에 喪事는 凶事이기에 음악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고 제사는 吉事이기에 凶事를 말하지 않는다. 公事와 私事가 가히 서로 간섭될 수가 없는 것이니 사사로운 일을 가히 조정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부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振書端書於君前이면 有誅하며 倒筴側龜於君前이면 有誅하니라
임금의 앞에서 문서의 먼지를 털고 문서를 정돈하면은 벌이 있으며, 임금의 앞에서 점대를 거꾸로 놓고 거북 껍데기를 엎어놓으면 벌이 있다.
사람의 신하가 직분의 안의 일로써 임금을 섬겨 每事를 마땅히 평소에 삼가해야 되나니 문서와 簿領(장부)를 이미 임금 앞에 이르러서야 이에 비로소 그 먼지를 털어 정돈을 하고 거북점을 치고 시초점을 치는 관원이 거북 껍데기와 점대가 그 받들고서 주선하는 것이 임금 앞에서 거꾸로 놓는 실상이 있다면은 이는 모두 그 직책을 공경히 아니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긴 것이므로 모두 벌이 있다.
龜筴과 几杖과 席蓋와 重素와 袗絺綌으로 不入公門하며
거북 껍데기와 점대와 안석과 지팡이와 돗자리와 일산과 의상이 모두 흰 것과 홑 것의 가는 갈포옷과 굵은 갈포옷으로 임금의 대궐문에 들어가지 않아야 된다.
거북 껍데기와 점대는 써 吉凶을 신에게 묻는 것이니 미리 도모함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요, 안석과 지팡이는 써 나이많은 분을 우대하는 것이니 스스로 높은 체함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다. 돗자리는 써 앉고 눕는 것이요, 일산은 써 해와 비를 가리는 것이다. 가는 갈포와 굵은 갈포 옷은 써 몸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다. 袗은 홑 것이니 홑 것은 신체가 드러나 설만하니(다 보이니) 이 세가지 것은 편안한 도구이다. 重素는 의상이 모두 흰 것이니 吉服이 아닌 까닭 때문에 또한 가히 써 대궐 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苞屨와 扱衽과 厭冠으로 不入公門하며
기름사초로 삼은 喪服 짚신과 앞자락을 띠에 꽂은 것과 厭冠(喪冠)으로 대궐 문에 들어가지 않아야 된다.
苞는 읽기를 藨로 해야 되니 기름사초의 풀로써 齊衰의 喪服 짚신을 삼는다. 扱衽은 深衣의 앞자락을 띠에 꽂은 것이니 대체 어버이가 막 돌아가셨을 때에 효자가 울부짖으며 뛰면서 밟는 것으로써 방해를 삼기 때문에 그걸 띠에 꽂는 것이다. 厭冠은 喪冠이니 吉冠은 머리싸개가 있고 梁(冠의 골)이 있으되 喪冠은 그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져서 늘어뜨려지나니 이것은 모두 凶服이기 때문에 가히 그것으로써 대궐 문에 들어갈 수 없다.
書方과 衰와 凶器를 不以告어든 不人公門하며
죽은 이를 보내드리는 물건을 기록한 네모진 판자와 衰服과 凶器(棺槨)를 써 (임금에게) 아뢰지 아니하였으면은 임금의 대궐 문에 들여놓지 않아야 된다.
方은 판자이니, 書方이라는 것은 죽은 이를 보내드리는 물건을 네모진 판자 위에 조목조목 기록한 것이다. 衰는 五服의 衰이다. 凶器는 內棺·外槨과 운삽과 明器와 같은 등속이다. 아뢰지 않았으면은 대궐 문에 들여놓을 수 없는 것은 아뢰었으면은 가히 들여갈 수 있음을 이른 것이니 대개 臣妾이 궁궐 문에서 죽은 사람이 있다면은 임금께서 또한 그 빈소를 차려 喪禮를 이루도록 允許를 해 준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보고하여야만이 이에 장차 들여갈 수가 있는 것이다.
公事를 不入私議니라
公事(國事)를 사사로이 논의하지 않해야 된다.
馬氏가 말하기를 季孫이 冉有로 하여금 田稅에 대하여 仲尼에게 묻도록 하니 仲尼께서 대답을 아니하시고 冉有에게 사사로이 말해 주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季氏가 田稅를 이용하는 것을 孔子가 능히 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冉有에게 사사로이 말해주는 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君子將營宮室호대 宗廟爲先이오 廐庫爲次오 居室이 爲後니라
君子가 장차 집을 지으려 하되 宗廟가 우선이 되고(제일 먼저 사당을 지어야 되고) 마굿간과 창고가 다음이 되고 사는 집이 최후가 된다.
君子는 지위가 있는 사람이다. 宗廟는 써 先祖를 받드는 바이기 때문에 먼저 그 사당을 짓고 마굿간으로써 말을 기르고 창고로써 물건을 저장하니 그 쓰임이 乏絶되지 않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을 다음에 짓고 居室(사는 집)은 몸을 편안히 하는 것 뿐이기 때문에 또 그것을 다음에 짓는 것이다. 
凡家造엔 祭器爲先이오 犠賦爲次오 養器爲後니라
무릇 가재 도구를 장만할 적에는 祭器가 우선이 되고 희생이 다음이 되고 자신을 봉양하는 식기가 최후가 된다.
犧賦(희생)를 또한 장만하는 것으로 말한 것은 예컨데 󰡔周官(周禮)󰡕에 牛人이 소와 희생의 고기를 매다는 시렁과 동이와 고기를 담는 대그릇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따위이니, 그 周禮의 鄭 註에는 말하기를 互는 오늘날 푸줏간의 고기를 매다는 시렁과 같고 동이로써 피를 담고 簝는 고기를 담는 대그릇이다고 하였다. ○䟽에 말하기를 家造는 대부가 비로소 가재 도구를 마련함을 이른다. 諸侯의 大夫는 少牢(양과 돼지)인데 여기에서 희생을 말하였으니 소이다. 天子의 大夫는 제사지낼 적에 邑民에게서 賦稅를 거두어 희생을 마련해 내기 때문에 犧賦라고 말하였다.
無田祿者는 不設祭器하고 有田祿者는 先爲祭服이니 君子雖貧이나 不粥祭器하며 雖寒이나 不衣祭服하며 爲宮室호대 不斬於丘木하나니라
田地와 俸祿이 없는 사람은 祭器를 설비하지 않고 田地와 俸祿이 있는 사람은 먼저 祭服을 만들어야 되니 君子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祭器를 팔지 아니하며 아무리 추워도 祭服을 입지 아니하며 집을 짓되 묘소의 나무를 베지 않아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祭器는 가히 빌릴 수 있거니와 祭服은 가히 빌릴 수가 없는 것이다. 丘木(묘소의 나무)는 써 묘소를 비호하는 것이니 집을 지으면서 그 묘소 나무를 벤다면은 이는 그 先祖를 업신여기어 나의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이다.
大夫士去國호대 祭器不踰竟이니 大夫寓祭器於大夫하고 士寓祭器於士니라
大夫와 士가 나라(고국)를 떠나가되 祭器를 국경을 넘기지 아니하나니 大夫는 祭器를 大夫에게 맡겨두고 士는 祭器를 士에게 맡겨둔다.
呂氏가 말하기를 신하가 써 宗廟와 祭器를 두어서 써 그 선조를 섬기는 것은 임금의 俸祿 때문인데 지금 벼슬에서 떠났는데도 이에 祭器를 가지고서 간다면은 이는 임금의 俸祿을 훔쳐가지고서 그 선조를 욕되게 한 것이니 이것이 祭器가 써 국경을 넘어갈 수 없는 까닭이다. 爵位와 等級이 동일한 사람에게 맡겨둔 것은 그로 하여금 가히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馬氏가 말하기를 微子가 祭器를 품에 안고서 周나라로 갔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君子가 자기를 위하는 것은 중하지 않고 남을 위하는 것은 가볍지 아니하므로 임금의 祭器를 안고가는 것은 괜찮거니와 자기의 祭器를 안고가는 것은 옳지가 않다.
大夫士去國호대 踰竟爲壇位하야 鄕國而哭하고 素衣하며 素裳하며 素冠하며 徹緣하며 鞮屨하며 素簚하며 乘髦長하며 不蚤鬋하며 不祭食하며 不說人以無罪하며 婦人不當御니 三月而後復服이니라
大夫와 士가 본국을 떠나되 국경을 넘으면은 壇位(祭壇)를 만들고서 본국을 향하여 哭을 하고 흰 상의를 입으며 흰 하의를 입으며 흰 갓을 쓰며 中衣의 채색으로 선두른 것을 떼어버리며 가죽신을 신으며 흰 개가죽으로 수레를 덮으며 갈기를 자르지 아니한 말을 타며 손톱이나 발톱을 깎지 아니하며 수염도 깎지 아니하며 음식을 먹을 적에 제드리지 아니하며 남에게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아니하며 婦人을 마땅히 접근하지 않아야 되나니 3개월이 지나서야 吉服을 다시 입는다.
壇位는 땅을 소제하고서 祭位를 만든 것이다. 鄕國은 그 본국을 향한 것이다. 徹緣는 中衣의 채색으로 선두룬 것을 떼어버리고 흰 것으로 선두른 것이다. 鞮屨는 가죽 신이니, 󰡔周禮󰡕 註에 이르기를 사방 오랑캐의 춤추는 사람이 신는 것이다고 하였다. 素簚은 素는 흰 개가죽이고 簚은 수레 덮개이다. 旣夕禮에 이르기를 주인이 열악한 수레를 타고 흰 개가죽으로 수레덮개를 만든다는 것이 그것이다. 髦長는 말의 갈기를 자르고 베어서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이다. 蚤는 손톱과 발톱을 깎는 것이요, 鬋는 수염을 깎는 것이다. 祭食은 음식에 반찬이 풍성하면 선대의 음식을 맨 처음 만든 사람에게 제를 드린다. 남에게 죄가 없다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비록 추방당하여 출국하였으나 스스로 죄가 없다고 남에게 해명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니 과오는 자기를 일컫는 것이다. 御는 모시고 잠자는 것이다. 무릇 이것은 모두 부모의 나라(조국)를 떠나는 것이니 친척을 버리고 조상의 묘소를 버리고 祿位를 잃어버린 것이 모두 한 집안의 변고이기 때문에 凶喪의 禮로써 자처한 것이다. 三月은 한 철이 되니 節序가 조금 변화하기 때문에 반드시 석달을 기다린 뒤에 그 吉服을 다시 입는다.
大夫士見於國君호대 君若勞之어시든 則還辟하야 再拜稽首하고
大夫와 士가 나라 임금을 알현하되 임금이 만약 그를 위로하면 돌아서 물러나 再拜하면서 머리를 조아려야 된다.
이는 말하자면은 大夫와 士가 출국하여 다른 나라로 사신가 主君을 알현할 적에 임금이 만약 그 도로의 노고를 위문하면은 돌아서서 물러나 피하여 이에 재배하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君若迎拜어시든 則還辟하야 不敢答拜니라
임금이 만약 맞이하여 절을 하면은 돌아서 물러나 감히 答拜하지 않아야 된다.
聘賓(사신)이 막 主國의 대궐 문밖에 이르렀을 적에 主君이 맞이하여 그에게 절을 하면 사신은 물러나 감히 答拜하여 賓主의 禮를 맞먹지 않아야 된다.
大夫士相見호대 雖貴賤不敵하나 主人敬客이어든 則先拜客하고 客敬主人이어든 則先拜主人이니라
大夫와 士가 서로 만나보되 비록 貴賤이 대등하지 않으나 주인이 손님을 존경하면은 먼저 손님에게 절을 하고 손님이 주인을 존경하면은 먼저 주인에게 절해야 된다.
존경하여 먼저 절을 하는 것은 大夫와 士가 다른 나라에 사신가서 그 나라의 卿·大夫·士를 만나보는 것을 이르니 同國에서는 그렇지 않다.
凡非吊喪이며 非見國君이어든 無不答拜者니라
무릇 喪事에 조문한 것이 아니며 나라 임금을 알현한 것이 아니라면은 答拜하지 않는 것이 없다.
喪事에 조문하면서 주인의 절에 답배하지 않는 것은 喪事의 여러 일들을 도와서 집행하기 위하여 온 것이요, 賓主의 禮를 행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士喪禮에 손님이 있으면 손님에게 절을 하되 손님은 답배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것이다. 士가 본국의 임금을 알현함에 尊卑가 멀리 동떨어지기 때문에 임금이 답배하지 아니하나니 이 두가지 것 이외에는 답배를 아니한 것이 없다.
大夫見於國君이어든 國君이 拜其辱하고 士見於大夫어든 大夫拜其辱하고 同國始相見이어든 主人拜其辱이니라
大夫가 나라 임금을 알현하면 나라 임금이 그 辱봄에 대하여 절하고 士가 大夫를 알현하면은 大夫가 그 辱봄에 대하여 절을 하고 同國 사람들끼리 처음 만나보면은 주인이 그 辱봄에 대하여 절하여 된다.
임금이 大夫의 욕봄에 대하여 절을 하고 大夫가 士의 욕봄에 대하여 절은 한 것은 모두 처음으로 大夫가 되고 처음으로 士가 되어서 와가지고 알현함을 이른 것이다. 이 뒤에 조회에 알현한 것은 일정한 禮가 있다. 士相見禮에 士가 나라 임금을 알현하면 임금이 답배한다는 것은 또한 그 처음으로 士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공경한 것이다. 주인이 욕봄에 대하여 절한 것은 그 먼저 시행(절)함에 답배한 것이니 이는 尊卑가 서로 대등한 사람을 이른다. 同國을 말하였을진댄 異國(타국)도 당연하다.
君於士에 不答拜也니 非其臣이어든 則答拜之하고 大夫는 於其臣에 雖賤이나 必答拜之하며
임금은 士에게 答拜하지 아니하나니 그 자기의 신하가 아니면 그에게 답배를 하고 大夫는 그 家臣에게 비록 천하지마는 반드시 그에게 답배하며
임금이 士에 대하여 비록 답배하지 않지마는 그러나 그로써 다른 나라의 士에게 시행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자기의 신하가 아니기 때문에서이니 大夫가 賤臣(家臣)의 절에 답배한 것은 나라 임금의 체통을 피한 것이다.
男女相答拜也니라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답배해야 된다.
남자와 여자는 혐의를 피하는 것이 또한 가지수가 많다. 그러나 절함에 서로 답배하는 것은 써 예를 행하는 것이니 어찌 예를 행하는 것으로써 혐의를 삼을 것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기록하는 사람이 그걸 분명히 말하였다.
國君이 春田에 不圍澤하며 大夫不掩羣하며 士不取麛卵이니라
나라 임금은 봄에 사냥할 적에 늪지대를 포위하지 아니하며 大夫는 새나 짐승의 무리를 엄습하지 아니하며 士는 사슴 새끼나 새알을 취급하지 않아야 된다.
春田은 봄에 사냥하는 것이다. 늪지대는 넓기 때문에 포위한다고 말하였고, 무리로 모여있기 때문에 엄습한다고 말하였다. 麛는 사슴 새끼인데, 무릇 짐승 새끼를 또한 통털어 그렇게 불린다. 사슴 새끼와 새알은 작기 때문에 취급한다고 말하였다. 임금과 大夫와 士가 지위가 등급의 차등이 있기 때문에 취하는 것이 각각 제한이 있으니 이는 王制의 글과 다르다. ○方氏가 말하기를 용도가 큰 사람은 취급함이 더욱 넓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금지가 더욱 엄격하다.
歲凶하야 年穀不登이어든 君膳不祭肺하며 馬不食穀하며 馳道不除하며 祭事不縣하며 大夫不食粱하며 士飮酒不樂이니라
해가 흉년들어 그 해의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였으면 임금의 수라에 짐승의 폐를 제드리지 아니하며(진수성찬을 올리지 않으며) 말이 곡식을 먹지 아니하며 임금 수레가 달리는 길을 소제하지 아니하며 제사에 懸歌樂을 설치하지 아니하며 大夫는 조를 먹지 아니하며 士는 술을 마시되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膳(수라)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음식의 명칭이다. 肺는 기의 주체가 되니 周나라 사람이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때문에 음식을 먹을 적에 반드시 먼저 폐로 감사를 드리나니 폐로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희생을 잡아서 풍성한 반찬을 만들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馳道는 人君이 車馬를 달리는 길이니, 소제하지 않음은 청소를 않는 것이다. 제사지낼 적에는 반드시 鍾과 경쇠의 懸歌樂이 있는데 지금 懸歌樂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음악을 연주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大夫는 기장과 피를 먹고 조로써 더하나니(조를 첨가해서 먹으나니) 임금이 大夫를 먹이는 禮에 있어서 正饌을 차린 뒤에 이에 쌀과 조를 더 차리니 이른바 첨가한 것이다. 임금으로부터 士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 일을 거론하였으되 높은 사람에게는 그 큰 것을 거론하고 낮은 사람에게는 그 작은 것을 거론하였으니 그 실지는 서로 통용된다.
君無故어든 玉不去身하며 大夫無故어든 不徹縣하며 士無故어든 不徹琴瑟이니라
임금이 연고가 없으면은 패옥을 몸에서 버리지 아니하며 大夫가 연고가 없으면 懸歌樂을 철거하지 아니하며 士가 연고가 없으면은 거문고와 비파를 철거하지 아니한다.
故는 災變과 喪事와 疾病 따위를 이른다.
士有獻於國君하고 他日에 君問之曰安取彼오커시든 再拜稽首而后對니라
士가 나라 임금에게 예물을 올림이 있고 뒷날 임금께서 그에게 下問하시기를 “어디에서 그 물건을 취득하였느냐?”고 하시면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린 뒤에 대답해야 된다.
安取彼(어디에서 저 물건을 취득했냐함은)는 어느 곳에서 저 물건을 얻었느냐고 말한 것과 같다.
大夫私行出疆할새 必請하고 反必有獻하며 士私行出疆할새 必請하고 反必告하며 君勞之則拜하고 問其行이어시든 拜而后對니라
大夫가 사사로이 출행하여 국경을 나갈 적에는 반드시 임금에게 奏請(신청)하고, 귀국하면 반드시 예물을 드림이 있어야 하며, 士가 사사로이 출행하여 국경을 나갈 적에 반드시 신청을 하고, 귀국하면 반드시 보고하며, 임금이 그를 위로하면은 절하고, 그 다닌 곳을 下問하면은 절한 뒤에 대답해야 한다.
大夫와 士가 개인적인 일로써 출행하여 국경을 나갈 적에 모두 임금에게 奏請하고 그 돌아와서는 大夫는 선물을 드림이 있고 士는 선물을 드리지 않는 것은 낮은 사람의 물건으로써 높은 君上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돌아온 것을 보고할 뿐이다. 그를 위로하는 것은 그 도로의 노고를 위로한 것이요, 그 다님을 물은 것은 그 두루 돌아다님의 이른 바를 물은 것이다. 먼저 절한 뒤에 대답한 것은 下問받은 은총에 급히 감사드린 것이다.
國君이 去其國이어시든 止之曰奈何去社稷也오하며 大夫엔 曰奈何去宗廟也오하며 士엔 曰奈何去墳墓也오하나니 國君은 死社稷하고 大夫는 死衆하고 士는 死制니라
나라 임금이 그 나라를 떠나가려고 하면은 그 임금을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社稷을 버리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며, 大夫에게는 말하기를 “어찌 宗廟를 버리려고 합니까?”라고 하며, 士에게는 말하기를 “어찌 墳墓(조상의 묘소)를 버리려고 합니까?”라고 하나니, 나라 임금은 社稷에 죽어야 하고, 大夫는 군중에 죽어야 하고, 士는 법제에 죽어야 하는 것이다.
사직에 죽음은 나라가 망하면 함께 죽어야 됨을 이른 것이요, 군중에 죽음은 죄를 토벌하고 적을 방어하여 패전하면은 그에 죽어야 됨을 이른 것이요, 법제에 죽음은 임금에게 명령을 받았으니 환난에 구차스럽게 모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나라 임금은 사직에 죽어야 한다고 말하였고, 大夫와 士에 있어서는 宗廟와 墳墓에 죽어야 된다고 이르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대체 그 떠나감을 만류한 것은 私情에 있고, 그 일에 죽는 것은 公義에 그친 것이다. ○趙氏가 말하기를 社는 써 五土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요, 稷은 써 五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니, 稷(피)이 흙이 아니면 써 생장할 수가 없고 흙이 稷이 아니면은 생생하는 효력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社神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 반드시 稷에게 까지 미치나니 그 功이 같고 이로움이 균일하여 인민을 부양한 까닭 때문에서이다. 󰡔周禮󰡕에 大司徒가 社稷의 祭壇의 담을 설치하나니, 壝라는 것은 흙을 쌓아서 높이 만드는 것이다. 집을 짓지 아니하고 壇을 쌓으나니, 社壇은 동쪽에 있고 稷壇은 서쪽에 있다.
君天下曰天子니 朝諸侯하며 分職하며 授政하며 任功엔 曰予一人이라하며
천하에 임금 노릇하는 것을 ‘天子’라고 이르나니, 天子는 諸侯에게 조회를 받으며 직책을 나누어 주며 政事를 맡겨주며 功效를 위임할 적에는 말하기를 ‘予一人(나 한사람)’이라고 이른다.
天子라는 것은 천하에 君臨하는 총칭이니, 臣民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게 일컬을 수 있고, 予一人은 天子만이 스스로 일컫는 것이다.
踐阼하야 臨祭祀엔 內事曰孝王某라하고 外事曰嗣王某라하며
주인의 동쪽 섬돌을 밟아 제사에 임하였을 적에는 內事(宗廟의 일)에는 ‘孝王 某’라고 이르고, 外事(郊祭나 社稷 제사 일)에는 ‘嗣王 某’라고 이른다.
踐는 밟음이요, 阼는 주인의 섬돌인데, 주인의 섬돌을 밟고서 행사를 하기 때문에 踐阼라고 하였다. 宗廟의 일이 內事가 되고, 郊祭와 社稷 祭祀의 일이 外事가 되니, 祝辭(축문)에 孝王 某라고 일컫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말이고, 嗣王 某라고 하는 것은 신을 섬기는 말이다.
臨諸侯하야 畛於鬼神엔 曰有天王某甫라하나니라
諸侯에게 임하여 귀신에게 交接할 적에는 이르기를 ‘有天王 某甫’라고 이른다.
天子가 巡守하여 제후의 나라에 이름에 반드시 祝辭(祝官)로 하여금 귀신으로써 마땅히 제사지내야 할 제사를 이루나니 직접 가지를 아니한 까닭 때문에 祝辭에 字를 일컬어 某甫라고 하니, 甫라는 것은 丈夫의 美稱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畛은 밭두둑이 서로 연접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 交際한다는 際와 뜻이 같다. ○方氏가 말하기를 望祭를 지내는 禮는 반드시 야외에서 한다. 그렇기 때문에 畛으로써 말하였으니, 畛은 밭사이의 길이다. 밭두둑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畛이라고 이른 것이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郊라고 이른 것과 같다. 天子가 諸侯에게 가는 것이 그 일정한 것이 아니고 대개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특별히 有를 말하였다.
崩曰天王崩이라하고 復曰天子復矣라하고 告喪曰天王登假라하고 措之廟立之主曰帝라하나니라
天子가 崩御하면 ‘天王이 崩하였다.’고 이르고, 呼復(招魂)하면서는 ‘天子 復矣’라고 이르고, 喪事를 訃告하면서는 ‘天王이 登假(昇遐)하였다.’고 이르고, 그 사당에 안치하여 그 神主를 세우고서는 ‘帝’라고 이른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崩이라고 이르나니, 또한 무너지는 칭호이다. 王者(天王)가 逝去하면은 史官이 역사책에 쓰기를 ‘天王이 崩하였다.’고 한다. 復이라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은 형체와 정신이 분리되므로 옛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옷을 가지고서 지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 하여금 體魄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나니 그 재차 소생하기를 바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復이라고 이른다. 天子 復이라는 것은 지붕에 올라가서 부르는 말이니, 신하가 가히 임금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부르기를 天子 復이라고 한다. 䟽에 이르기를 準例로써 말하자면은 王后가 죽음에 있어서도 또한 王后 復이라고 부른다. 告喪은 제후 나라에 訃告하는 것이다. 呂氏가 假를 읽기를 格音으로하여 왕이 사당에 이르렀다는 것과 와서 이르고 와서 흠향하였다는 것을 인용하였으니, 그 정신이 하늘에 올라가 이름을 말한 것이다. 나는 생각컨데 遐는 바로 먼 뜻이니, 登遐는 그 오르는 바가 높고 멂을 말한 것이니, 漢書에서 大行이라고 일컬은 것과 같으니, 行은 이에 循行한다는 行이다. 行은 去聲이니, 그 가서 되돌아오지 아니한 까닭 때문에 大行이라고 한 것이다. 措는 안치함이다. 그 神主는 세우는 것은 막 죽게되면은 뽕나무를 구멍뚫어서 重(假主)을 만들어서 신을 의지하도록 하다가 이미 虞祭를 지내고서는 그 假主를 매향하고 이에 밤나무 神主를 만들어서 신을 의지하도록 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禮經에서 고찰해 보건데 帝로써 부르는 것이 있지 않지마는 史記에 夏나라·殷나라 왕은 모두 帝로 이름하였으니, 아마도 殷나라 사람이 祔廟하고 帝라고 일컬은 성싶다. 司馬遷이 世本에 근거하였으니, 마땅히 고증한데가 있었을 것이다. 周나라에 이르러서는 諡號가 있었으므로 비로소 帝라고 이름하지 아니하였던 것인가 보다.
天子未除喪하사는 曰予小子라하나니 生名之하며 死亦名之하나니라
天子가 아직 喪服을 벗지 아니하였을 적에는 ‘予 小子(나 小子)’라고 이르나니, 살아있을 적에도 그 小子 王이라고 이름하며, 죽어서도 역시 그 小子 王이라고 이름한다.
鄭氏가 말하기를 살았을 적에도 그를 이름하여 이르기를 小子 王이라 하고, 죽어서도 또한 이르기를 小子 王이라고 한다. 晉나라에 小子 侯가 있었으니, 이는 참람된 호칭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春秋󰡕에 王子 猛이 卒하였다고 썼으니, 여기에 小子라고 말하지 아니한 것은 신하가 호칭하는 것이 역사책의 말과 다르기 때문에서이다.
天子有后하며 有夫人하며 有世婦하며 有嬪하며 有妻하며 有妾하니라
天子는 后가 있으며 夫人이 있으며 世婦가 있으며 嬪이 있으며 妻가 있으며 妾이 있다.
3夫人·9嬪·27世婦·81御妻니, 后 이하로부터 3으로 겹쳐서 그 수가 증가된다. 妾의 수는 듣지 못했다.
天子建天官호대 先六太니 曰太宰와 太宗과 太史와 太祝과 太士와 太卜이니 典司六典하니라
天子는 天官을 세우되(설치하되) 여섯 太官을 먼저하나니(임명하나니) 말하자면 太宰와 太宗과 太史와 太祝과 太士와 太卜인데, 여섯가지의 법전을 지켜 맡는다.
이 여섯 太라는 것은 天官의 소속이니, 그 관장한 바가 다른 직책보다 소중한 까닭 때문에 먼저라고 말하였다.
天子之五官은 曰司徒와 司馬와 司空과 司士와 司寇니 典司五衆하니라
天子의 五官은 말하자면 司徒와 司馬와 司空과 司士와 司寇니, 五官의 소속 관리들의 군중을 지켜 맡는다.
이 五官이 天官과 더불어 나열되어 六이 되나니 五衆이라는 것은 五官의 소속 관리들의 군중이다.
天子之六府는 曰司土와 司木과 司水와 司草와 司器와 司貨니 典司六職하니라
天子의 六府는 말하자면 司土·司木·司水·司草·司器·司貨니 여섯가지의 직책을 지켜 맡는다.
府라는 것은 물건을 간직하는 장소이니, 이 府는 여섯가지 물건의 조세(세금)를 주관하여 간직한다.
天子之六工은 曰土工과 金工과 石工과 木工과 獸工과 草工이니 典制六材하니라
天子의 六工은 말하자면 土工·金工·石工·木工·獸工·草工이니 여섯가지 재료를 맡아 이용한다.
이 六材는 六工이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典司라고 이르지 않고 典制라고 말하였다. 이상 4조를 舊說에는 모두 殷나라 제도로 간주하였는데 그 실지는 고증할 데가 없으니, 모두 臆說일 뿐이다.
五官致貢曰享이라하나니라
다섯 관원이 功積을 이루는 것을 ‘享’이라고 이른다.
呂氏가 말하기를 한 해가 끝나면 司徒이하 다섯 관원들이 각각 그 공적을 이루어 왕에게 바친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享(바친다)이라고 이르나니, 功은 功積이고, 享은 바침이다.
五官之長曰伯이니 是職方이니라 其擯於天子也엔 曰天子之吏라하며 天子同姓으란 謂之伯父오 異姓으란 謂之伯舅라하시며 自稱於諸侯曰天子之老라하고 於外曰公이라하고 於其國曰君이라하나니라
五官의 우두머리를 ‘伯’이라고 이르나니, 이들은 그 地方을 주관한다. 그 伯이 天子에게서 손님을 접대하게 되었을 적에는 ‘天子의 관리’라고 이르며, 그 伯이 天子와 同姓이면 그를 ‘伯父’라고 이르고, 異姓이면 그를 ‘伯舅’라고 이르시며, 그 伯이 諸侯에게 자칭하기를 ‘天子의 늙은 신하’라고 하고, 외국에 있어서는 자칭하기를 ‘公’이라고 이르고, 그 본국에 있어서는 자칭하기를 ‘君’이라고 이른다.
司徒 이하 五官의 우두머리는 天子의 三公이다. 伯이라는 것은 우두머리이고 크다는 명칭이다. 三公은 다른 직책이 없으니, 바로 六卿 중의 세사람이 그것을 겸직한다. 左右(보좌)의 직책을 맡는 것을 相(보좌관)이라고 이르나니, 아홉번 命하여 伯이 되었으면은 京畿 이외의 諸侯들을 나누어 주관하나니, 이를테면은 󰡔公羊傳󰡕에 이르기를 陝땅으로부터 동쪽 것은 周公이 주관하고, 陝땅으로부터 서쪽 것은 召公이 주관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職方이라는 것은 두 伯이 이에 그 다스린 바의 지방을 주관함을 말한 것이다. 天子의 관리라는 것은 손님을 접대한 사람의 말이다. 이 伯이 만약에 이 天子와 同姓間이면은 天子가 그를 호칭하기를 伯父라고 하고 만약에 異姓間이라면은 伯舅라고 호칭하나니 모두 그를 친근히 하는 말이다. 이 伯이 모두 采地를 둔 것이 天子의 京畿 이내에 있나니, 사사로운 땅 采地의 외부에서 자칭하게 되면은 公이라고 하고, 采地의 내부에서 자칭할 경우에는 君이라고 이른다.
九州之長이 入天子之國曰牧이오 天子同姓으란 謂之叔父오 異姓으란 謂之叔舅라하시며 於外曰侯라하고 於其國曰君이라하나니라
九州의 우두머리가 天子의 나라에 들어가면은 자칭하기를 ‘牧’이라고 이르고, 天子와 同姓間이면 天子가 그를 ‘叔父’라고 이르고, 異姓이면 그를 ‘叔舅’라 이르시며, 외국에 있어서는 자칭 ‘侯’라고 하고, 그 국내에 있어서는 자칭 ‘君’이라고 한다.
天下가 九州니 天子가 매 州안에서 諸侯의 어진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에게 一命을 더하여 하여금 한 州內의 여러 나라들을 주관하도록 하니, 下民을 부양한다는 뜻을 취택한 까닭에 牧이라고 이른다. 叔父와 叔舅는 伯父와 伯舅에 강등된다. 봉해진 나라 외부에 자칭할 경우에는 侯라고 이르고, 만약에 국내의 臣民과 더불어 말하게 되면은 자칭 君이라고 한다.
其在東夷北狄西戎南蠻하야는 雖大하나 曰子니 於內엔 自稱曰不穀이라하고 於外엔 自稱曰王老라하나니라
그 東夷·北狄·西戎·南蠻에 있어서는 아무리 大國일지라도 ‘子’라고 이르나니, 그들은 內國에 잇어서는 자칭하기를 ‘不穀’이라고 이르고, 외국에 있어서는 자칭하기를 ‘王老(왕의 늙은 신하)’라고 한다.
九州 이외에 子·男의 나라에 불과하니, 天子가 또한 어진 사람을 선발하여 牧을 삼되, 다만 그가 지위가 낮고 지역이 먼 까닭 때문에 牧으로 호칭하지 않고 또 父·舅로 호칭하지 않고 조회하여 알현할 때에 손님 접대하는 말이 오직 子라고만 이르고, 비록 혹간 공이 있어서 땅을 늘려주어 侯와 伯의 수에 이르렀더라도 그 爵位는 또한 子爵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강대국일지라도 子라고 말한다 하였으니, 예컨데 楚나라가 춘추 시대에 있어서 비록 강대국이었지마는 그 爵位는 子라고 호칭하였다. 穀은 착함이니, 內國에서도 그 臣民과 더불어 말하는 것이다. 外는 夷狄의 지역을 이른다. 자칭 王老라고 한 것은 天子의 늙은 신하임을 말한 것이다.
庶方小侯入天子之國曰某人이니 於外曰子라하고 自稱曰孤라하나니라
여러 방면의 小國 諸侯들이 天子의 나라에 들어가면 ‘某人(아무 나라 사람)’이라고 이르나니, 그들은 외국에 있어서는 ‘子’라고 이르고, 國內에 있어서는 자칭하기를 ‘孤’라고 이른다.
사방 소수 민족의 임금이 그 온 데가 거칠고 멀기 때문에 여러 방면으로 이름하였다. 庶는 많음이다. 某人은 牟나라 사람과 介나라 사람과 같은 따위이다. ○䟽에 이르기를 외국에 있어서는 子라고 이르는 것은 이 임금이 그 본국 외부 사방 오랑캐의 안에 있을 적에는 자칭 그 본래 爵位에 의거한 것이니, 男爵은 역시 男이라고 호칭한 것과 같다. 만약 스스로 제나라 臣民과 더불어 말할 경우에는 孤라고 호칭하나니, 孤라는 것은 孤立하여 德이 없다는 칭호이다.
天子當依而立이어시든 諸侯北面而見天子曰覲이라하고 天子當宁而立이어시든 諸公은 東面하고 諸侯는 西面曰朝라하나니라
天子가 依(병풍)에 당하여 서 계시면은 諸侯가 북쪽을 향하여 天子를 뵙는 것을 ‘覲’이라고 이르고, 天子가 宁(조회받는 곳)에 당하여 서 계시면 諸公들은 동쪽을 향하고, 諸侯들은 서쪽을 향하는 것을 ‘朝’라고 이른다.
鄭氏가 말하기를 봄에 조회할 적에는 조정에서 폐백을 받으며 사당에서 향연을 받고, 가을에 알현할 적에는 한 번은 그 향연을 사당에서 받으나니, 조회하는 것은 內廟에 위치하여 차례대로 알현하는 것은 사당 문 밖에 위치하여 차례대로 들어간다. ○䟽에 말하기를 依는 모양이 병풍과 같고 진홍색으로 바탕을 삼으니 높이가 8척이다. 동서쪽으로 문과 들창문 사이에 해당해 있고 수놓아 도끼 무늬를 만드니 또한 斧依라고도 이른다. 天子가 諸侯를 접견하게 되면은 의지하고 서서 그 병풍을 등지고서 남쪽을 향하여 써 諸侯들을 對面한다. 宁라는 것은 󰡔爾雅󰡕에 이르기를 문과 병풍의 사이를 宁라고 이르나니, 임금이 조회를 볼 적에 우두커니 서있는 곳이다 하였으니, 대체 우두커니 서서 諸侯들이 오는 것을 기다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宁에 당해서 서있는다고 말하였다. 諸侯가 봄에 알현하는 것을 朝라고 이르고, 가을에 알현하는 것을 覲이라고 이른다. 또 말하기를 무릇 天子가 세 번 조회받는 것이 첫 번째는 路門안에 있는데 그것을 燕朝라고 이르나니 太僕이 그 일을 관장하고, 두 번째는 이 路門 밖의 조회이니 그것을 治朝라고 이르는데 司士가 그것을 관장하고, 그 세 번째는 이 臯門 안과 庫門 밖이니 그것을 外朝라고 이르나니 朝士가 그걸 관장한다. 諸侯도 또한 이 세 조회가 있다.
諸侯未及期하야 相見曰遇라하고 相見於卻地曰會라하니라
諸侯가 아직 약정한 기일에 이르지 못하여 서로 만나보는 것을 ‘遇’라고 이르고, 서로 한가한 지역에서 만나보는 것을 ‘會’라고 한다.
未及期(기일에 미치지 못함)은 期日 이전에 있는 것이다. 卻地는 한가한 지역이다. 아래에서 서로 만나보았다고 말한 것은 期日에 미친 것이다. 간소하게 만날 적에는 간소하게 만나는 禮가 있고, 회합할 적에는 회담하는 禮가 있다.
諸侯使大夫問於諸侯曰聘이오
諸侯가 大夫로 하여금 諸侯에게 방문(문후)하도록 하는 것을 ‘聘’이라고 하고
매년마다 작은 규모로 聘問하고 3년마다 대규모로 聘問하나니, 小聘에는 大夫가 가고 大聘에는 卿이 간다.
約信曰誓오 涖牲曰盟이라하나니라
말로 약속하여 신의를 삼는 것을 ‘誓’라고 하고, 희생에 임하는 것을 ‘盟’이라고 이른다.
約信이라는 것은 말로써 서로 약속하여 신의를 삼는 것이니, 맹서하는 禮를 사용한다. 涖는 임함이다. 春秋에 써진 遇와 會와 盟과 聘이 모두 있되 오직 誓는 없다. 䟽에 이르기를 맹약을 체결하는 법이 우선 땅을 파서 방정한 구덩이를 만들고 희생을 그 구덩이 위에서 잡아 희생의 왼쪽 귀를 베어서 구슬 쟁반으로 담고 또 피를 받아서 옥쟁반으로 담아 피를 이용하여 맹약을 하고 글이 완성이 됨에 이에 피를 마시고서 그 맹약서를 읽고서 희생을 구덩이 속에 놓고 그 맹약서를 그 위에 얹져서 그걸 묻어버려 그걸 載書라고 이른다.
諸侯見天子曰臣某侯某라하고 其與民言엔 自稱曰寡人이라하고 其在凶服하얀 曰適子孤라하나니라
諸侯가 天子를 뵈일 적에는 ‘臣某侯某’라고 이르고, 그 백성들과 더불어 말할 적에는 자칭하여 ‘寡人’이라고 이르고, 그가 凶服(喪服) 중에 있으면은 ‘適子孤’라고 이른다.
臣某侯某는 예컨데 臣 齊나라 侯爵 임금 小白·臣 晉나라 侯爵 임금 重耳와 같은 따위이니,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이 天子에게 아뢰는 말이다. 무릇 스스로 호칭할 적에는 모두 寡人이라고 이르고, 유독 백성들과 더불어 말할 때 뿐만이 아니니, 이는 그것을 생략하여 말했을 뿐이다. 適子孤는 또한 擯者가 손님에게 알리는 말이다.
臨祭祀하얀 內事曰孝子某侯某라하고 外事曰曾孫某侯某라하고 死曰薨이라하고 復曰某甫復矣라하나니라
제사에 임하여서는 內事(종묘 제사)에 있어서는 ‘孝子某侯某’라 이르고, 外事(사직·산천 제사)에 있어서는 ‘曾孫某侯某’라고 이르고, 죽으면은 ‘薨’이라고 이르고, 呼復할 적에는 ‘某甫復矣’이라고 이른다.
內外 일은 前章에 나타나 있다. 曾孫은 晉平公이 河水에 기도를 하면서 曾臣 彪라고 일컬은 것과 같은 따위이다. 天子는 덕이 厚하고 흐름이 빛나기 때문에 外事에 있어서 嗣王某라고 호칭하고, 諸侯는 감히 繼嗣라고 말하지 못하고 처음 봉해진 임금을 미루어서 그를 조상으로 삼기 때문에 曾孫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薨이라는 말은 어두운 것이니, 어둡고 컴컴한 뜻이니 本國 역사책의 말이다. 呼復할 적에 임금의 字를 호칭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서이다.
旣葬하고 見天子曰類見이라하고 言諡曰類라하나니라
이미 葬事지내고서 天子를 뵙는 것을 ‘類見’이라고 이르고, 諡號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類’라고 이른다.
呂氏가 말하기를 先君의 덕을 계승하여 이에 나라를 받아서 天子를 뵙게 되기 때문에 類見이라고 이르고, 先君의 선행을 誄辭로 지어 天子에게 諡號를 奏請하기 때문에 또한 類라고 이른다.
諸侯使人使於諸侯어든 使者自稱曰寡君之老라하나니라
諸侯가 사람을 시켜 諸侯에게 사신가도록 하였으면 使者가 자칭하기를 ‘寡君의 老臣’이라고 이른다.
寡君의 老臣은 오직 上大夫라야 만이 가히 호칭할 수 있나니, 玉藻에 나타나 있다.
天子는 穆穆하고 諸侯는 皇皇하고 大夫는 濟濟하고 士는 蹌蹌하고 庶人은 僬僬하나니라
天子는 容儀가 깊으며 공경스럽고 諸侯는 容儀가 壯盛하며 顯明하고 大夫는 容儀가 整齊하며 專一하고 士는 容儀가 펴져서 양양하고 庶人은 용의가 촉망스럽다.
呂氏가 말하기를 穆穆은 그윽하고 깊으며 온화하고 공경한 모양이요, 皇皇은 장성하고 현명한 모양이요, 濟濟는 수식하여 專一한 모양이요, 蹌蹌은 빙 돌아 날고 펴저서 들날린 모양이다. 庶人이 임금께 알현할 적에 맵시를 내지 아니하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종종걸음으로 달리나니, 僬僬는 비록 고증할 데가 없지마는 대체 종종걸음으로 달림이 急促하여 맵시를 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天子之妃曰后라하고 諸侯曰夫人이라하고 大夫曰孺人이라하고 士曰婦人이라하고 庶人曰妻라하나니라
天子의 妃를 ‘后’라고 이르고, 諸侯의 妃는 ‘夫人’이라고 이르고, 大夫의 아내는 ‘孺人’이라고 이르고, 士는 ‘婦人’이라고 이르고, 庶人은 ‘妻’라고 이른다.
鄭氏가 말하기를 妃는 배필이다. 后라는 말은 뒤라는 뜻이고, 夫라는 말은 부축하는 뜻이고, 孺라는 말은 親屬한 뜻이고, 婦라는 말은 복종하는 뜻이고, 妻라는 말은 가지런하다(동등하다)는 뜻이다.
公侯有夫人하며 有世婦하며 有妻하며 有妾하니 夫人自稱於天子曰老婦라하고
公爵과 侯爵이 夫人이 있으며, 世婦가 있으며, 妻가 있으며, 妾이 있나니, 夫人은 스스로 天子에게 자칭하기를 ‘老婦’라고 이른다.
京畿 以內의 諸侯의 아내들이 王后에게 제사를 도와드림으로 인하거나 혹은 누에고치를 바치는 등속으로 인하여 그 때문에 天子를 뵐 수가 있다. ○陳氏가 말하기를 늙음으로써 호칭하지 아니하면 족히 써 그 일을 맡을 수가 없고, 婦人으로써 호칭하지 아니하면은 써 능히 사람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에 老婦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應氏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사람은 진실로 가히 老婦라고 호칭할 수 있거니와 갓 시집간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호칭해야 될 것인가? 또한 婦人이라고 이르고, 거기에 卑小한 명칭으로 배합해야 된다.
自稱於諸侯曰寡小君이라하고
公爵과 侯爵의 夫人은 다른 나라 諸侯에게 자칭하기를 ‘寡小君’이라 하고
䟽에 말하기를 이 諸侯는 다른 나라 임금을 이른다. 옛적에는 諸侯가 서로 향연을 할 적에 夫人도 또한 나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칭할 수가 있었다. 坊記에 이르기를 陽나라 侯爵 임금이 繆나라 侯爵 임금을 살해하고서 그 夫人을 훔쳐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큰 향연에 夫人이 참여하는 禮를 폐지해 버렸다. 임금의 아내를 小君이라고 이르나니, 寡라고 이른 것은 또한 임금을 따라서 겸손해야 한 것이다.
自稱於其君曰小童이라하나니 自世婦以下는 自稱曰婢子라하나니라
왕비가 그 임금에게 자칭하기를 ‘小童’이라고 이르나니, 世婦 이하로 부터서는 자칭하기를 ‘婢子’라고 이른다.
小童은 아직은 성인이 되지 못한 호칭이다. 婢라는 말은 낮음이다.
子於父母엔 則自名也하나니라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이름을 일컫는다.
스스로 그 이름을 일컫는다.
列國之大夫入天子之國曰某士라하고 自稱曰陪臣某라하고 於外曰子라하고 於其國曰寡君之老라하고 使者自稱曰某라하나니라
列國의 大夫가 天子의 나라에 들어가면은 ‘某士(아무 나라의 士)’라고 이르고, 자칭하기를 ‘倍臣某’라고 이르고, 외국에서는 ‘子’라고 이르고, 그 본국에서는 ‘寡君의 老臣’이라고 이르고, 사신은 자칭하기를 ‘某’라고 이른다.
某士는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이 그 列國의 사람을 일컫기를 아무 나라의 士라고 이른다. 晉나라 韓起가 周나라에 사신갔을 적에 접반사가 이르기를 晉나라 선비 起라고 하였으니, 대체 列國의 卿과 大夫가 그 명령한 숫자가 天子의 士와 더불어 동등하다. 陪는 거듭이니, 諸侯가 天子의 신하가 되고 자기 또한 諸侯의 신하가 된 것이다. 외국에 있어서는 子라고 이르는 것은 또한 접반사의 말이니, 타국에 있으면은 접반사가 그 姓을 일컬으면서 子라고 하니, 예를 들면 春秋 閔公 2년에 齊나라 高子가 와서 맹약을 맺었다고 하였으니, 高傒가 그것이다. 그 본국에 있어서는 寡君의 老臣이라고 이른 것은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남과 더불어 말할 적에는 이로써 스스로 호칭한다. 사신이 자칭하기를 某라고 하니, 某는 이름이다. 만약 사신이 되어서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저 나라의 임금과 말할 적에는 이름을 일컫는다.
天子는 不言出이오 諸侯는 不生名이니 君子不親惡이라 諸侯失地어든 名하며 滅同姓이어든 名하나니라
天子에게는 나갔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諸侯는 생전에 이름을 쓰지 아니하나니, 君子는 악한 것을 친근히 아니하므로 諸侯가 땅을 잃어버리면은 이름을 쓰며, 同姓 나라를 멸망시키면 이름을 쓴다.
䟽에 말하기를 君子가 악을 친근히 아니하는 것은 孔子께서 經 春秋를 쓰실 적에 天子의 큰 악을 보았을 적에는 出字를 써서 그를 끊어버리셨고, 諸侯가 큰 악을 저질렀을 적에는 이름을 써서 그를 끊어버리셨으니, 君子는 이런 악을 친근히 아니하기 때문에 出과 이름을 써서 그를 끊어 버린 것이다. ○呂氏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과 귀한 사람을 모두 그를 君子라고 이른다. 天子는 밖이 없나니 어찌 나갔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출국했다고 말한 것은 덕이 충분히 써 천하에 임금노릇할 수가 없지마는 位號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諸侯는 살았을 적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오직 죽어서 끝남을 알린 뒤에야 만이 그를 이름부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살아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덕이 충분히 써 君子라고 이름할 수 없지마는 位號만이 존재할 뿐이다. 때문에 天子는 나갔다고 말하지 않고 諸侯는 살아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君子가 악을 친근히 하지 않기 때문임을 이른다. ○陳氏가 말하기를 출국했다고 말한 것은 써 그를 도외시한 것이요, 생전에 이름을 쓴 것은 써 그를 천시한 것이요, 󰡔春秋󰡕에서 天王이 鄭나라로 나가서 거주했다고 쓴 것은 그를 기롱한 것이요, 蔡나라 侯爵 임금이 舞땅을 드림으로써 귀국했다고 쓴 것은 그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衛나라 侯爵 임금 燬가 邢나라를 불살라버렸다고 쓴 것은 그 同姓 국가를 멸망시켰기 때문에서이다. 대체 天子는 나갔다고 말하고 諸侯는 살아서 이름을 쓴 것은 모두 큰 악이 버릴 바에 해당함이 있기 때문에서이니 君子가 때문에 친근히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春秋󰡕에 天王이 아무 땅에 거주하고 있다고 쓴 것이 2인데도 나갔다고 말하지 아니하였고, 諸侯가 땅을 잃어버리고서 망명한 사람이 15이고, 同姓 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이 3이었는데도 그들 생전에 이름을 부르지 아니한 것이 있었으니, 이 나가서 거주한 것 아님이 없으되 일이 同異함이 있고, 땅을 잃어버리고 同姓 나라를 멸망시킨 것 아님이 없지마는 죄가 輕重이 있기 때문에서이다. 대개 諸侯는 의리가 나라를 보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仁은 친족을 親愛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나니, 능히 나라를 보전하지 못하고서 땅을 잃어버림에 이르고 능히 친족을 親愛하지 못하고서 同姓을 멸망시켜 버림에 까지 이르렀다면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爲人臣之禮는 不顯諫이니 三諫而不聽이어시든 則逃之하고
사람의 신하가 되는 禮는 드러내어 諫하지 아니해야 되나니 세 번 諫하여도 듣지 아니하시면은 그 나라에서 도망해야 된다.
陳氏가 말하기를 孔子께서 魯나라에 있어서와 百里奚가 晉나라에 있어서 일찍이 간하지 않고서 떠나갔고, 龍逢이 夏나라에 있어서와 比干이 殷나라에 있어서는 간하다가 죽어 떠나가지 않았던 것은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대개 일이 輕重이 있고 事勢가 可否가 있기 때문에서이니, 君子는 禮로써 지킴을 삼고 의리로써 실행하므로 흔적이야 비록 동일하지 않지마는 그 趨向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子之事親也는 三諫而不聽이어시든 則號泣而隨之니라
자식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세 번 諫하되 듣지를 아니하시면은 울부짖고 울면서 그 어버이를 따라 다녀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君臣間은 의리로 합하였고, 父子間은 天倫으로 합하였으니, 君臣이 그 합하였을 적에는 父子間과 더불어 같고 그 합하지 아니하였을 적에는 거기에서 떠나가야 되나니 父子間과 더불어 다르기 때문에서이다.
君이 有疾飮藥이어시든 臣이 先嘗之하며 親이 有疾飮藥이어시든 子先嘗之니 醫不三世어든 不服其藥이니라
임금께서 병환이 있어 약을 마시게 되면 신하가 먼저 그 약을 맛보며, 어버이께서 병환이 있어 약을 마시게 되면 자식이 먼저 그 약을 맛보아야 되나니, 의원이 3代가 되지 아니하였으면 그 약을 복용하지 않아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의원이 3世가 되면은(3代를 걸쳐 의원노릇 하면은) 사람을 치료함이 많고, 약물을 사용함이 익숙하다. 功程을 이미 시험하여 의심이 없으니 그런 뒤에 그 약을 복용하는 것은 또한 병을 조심하는 방법이다.
儗人호대 必於其倫이니라
사람을 비교하되 반드시 그 同類에서 해야 한다.
䟽에 말하기를 귀한 이를 천한 이에게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 不敬스럽기 때문에서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禹임금과 后稷과 顔回가 시대가 동일하지 않았지마는 孔子께서 모두 어진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을 道로써 비교한 것이고, 伯夷와 柳下惠와 伊尹이 발자취가 같지 않지마는 孟子께서 모두 성인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을 마음으로써 비교한 것이다. 子夏가 有若으로써 孔子같다고 한 것은 다만 그를 용모로써 비교하였을 뿐이니, 聖賢의 德이 동등이 아닌 것을 몰랐었고, 公孫丑가 管仲으로써 孟子에게 비교하였던 것은 다만 그를 지위로써 비교하였을 뿐이니, 王覇의 道가 동등하지 않은 것을 몰랐기 때문에서이다.
問天子之年이어든 對曰聞之호니 始服衣若干尺矣라하며
天子의 나이를 물으면은 대답하기를 “듣자하니 비로소 옷 약간의 尺數를 입는다.”고 하더라 하며
若은 같음이니, 未定한 말이다. 수가 1에서 시작되어 10에서 완성이 되고, 干字가 一을 따르고 十을 따랐다. 때문에 若干이라고 말한 것이다. 혹은 1같기도 하고 혹은 10같기도 함을 이른 것이니, 무릇 수가 未定된 것을 모두 가히 알 수 있다. 顔師古가 食貨志에 註를 내면서 이르기를 干은 낱개이니, 마땅히 이 갯수와 같음을 이른 것이다고 하는데, 뜻 또한 근사하다.
問國君之年이어든 長曰能從宗廟社稷之事矣라하고 幼曰未能從宗廟社稷之事也라하며
나라 임금님의 나이를 물으면은 임금이 장성하였으면 말하기를 “능히 종묘와 사직의 일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 어리면은 말하기를 “아직은 능히 종묘와 사직의 일에 종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나라를 다스리되 禮로써 하는데 禮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내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나니, 일이 이것보다 더 우선함이 없으므로 그걸 능히 할 수 있으면 그 장성하였음을 알 수 있고, 능히 할 수가 없으면 그 어림을 알 수가 있다.
問大夫之子어든 長曰能御矣라하고 幼曰未能御也라하며
大夫의 아들 나이를 물으면 그가 장성하였으면 말하기를 “능히 수레를 몰 수 있다.”고 하고, 어리면은 말하기를 “아직 능히 수레를 몰 수 없다.”고 하며
옛날에는 50이 되면 임명받아 大夫가 되었다. 때문에 그 나이는 묻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장성하고 어림을 물었다. 御는 수레를 몲을 이른다. 수레를 모는 것은 6藝의 하나이니, 어리면은 그것을 능히 할 수가 없다. ○䟽에 말하기를 御는 일을 주관함을 이른 것이다. 벼슬에 대대로 쌓은 功이 있으니, 자식은 아버지의 사업을 배우기 때문에 일을 주관하는 원인이 있다.
問士之子어든 長曰能典謁矣라하고 幼曰未能典謁也라하며
士의 아들 나이를 물으면 그가 장성하였으면 말하기를 “능히 손님의 안내를 맡을 수 있다.”고 하고, 어리면은 말하기를 “능히 손님의 안내를 맡을 수 없다.”고 하며
謁은 청함이니, 典謁이라는 것은 손님이 말하여 요청한 일을 주관하는 것이다. 士는 천하여 家臣이 없으니 스스로 안내를 맡는 것이다.
問庶人之子어든 長曰能負薪矣라하고 幼曰未能負薪也라하나니라
庶人의 아들 나이를 물으면은 장성하였으면은 말하기를 “능히 땔나무를 짊어질 수 있다.”고 하고, 어리면은 말하기를 “아직 땔나무를 짊어질 수 없다.”고 해야 한다.
땔감을 짊어지는 것은 庶人의 힘들여 노역하는 일이니, 장성하면은 그걸 능히 할 수 있다.
問國君之富어든 數地以對호대 山澤之所出로하고
나라 임금의 富를 물으면 토지를 계산하여 대답하되 산과 못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하고
토지를 계산함은 그 토지의 넓고 좁음을 거론한 것이니, 예컨데 100里·70里·50里인 것을 각각 말해야 된다. 산과 못에서 생산되는 것은 물고기·소금·큰조개·조개·금·옥·주석·돌과 같은 따위이다.
問大夫之富어든 曰有宰食力하야 祭器衣服을 不假라하고
大夫의 富를 물으면 말하기를 “邑宰가 있어서 賦稅의 힘을 먹고 살아(租稅로 생활하여) 祭器와 衣服(祭服)을 남에게 빌리지 아니한다.” 하고
宰는 邑宰이니, 邑宰가 있으면은 采地가 있다. 食力은 下民 부세의 힘을 먹고 삶을 이른다. 衣服은 祭服이다.
問士之富어든 以車數對하고
士의 富를 물으면은 수레의 대수로써 대답하고
上士는 세 번 명함에 車馬를 내려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士의 富를 물으면은 수레의 대수로써 대답한다.
問庶人之富어든 數畜以對니라
庶人의 富를 물으면은 가축의 수효를 세서 게산하여 써 대답한다.
庶人이 밭을 분배받음이 일정한 제도가 있으되 오직 가축을 기르는 것의 많고 적음은 사람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축을 세서 대답한다.
天子는 祭天地하며 祭四方하며 祭山川하며 祭五祀호대 歲徧하고 諸侯는 方祀하며 祭山川하며 祭五祀호대 歲徧하고 大夫는 祭五祀호대 歲徧하고 士는 祭其先하나니라
天子는 天地에 제사를 지내며 사방 신에게 제사지내며 산천 신령에게 제사지내며 五祀에 제사를 지내되 해마다 두루 지내고, 諸侯는 자기 지방에 제사를 지내며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五祀에 제사를 지내되 해마다 두루하고, 大夫는 五祀에 제사를 지내되 해마다 두루하고, 士는 그 선조에게 제사지낸다.
呂氏가 말하기를 이 章은 일반적으로 제사의 법도를 논하였다. 冬至日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夏至日에 땅에 제사지내며 四時에 각각 그 방위에 제사를 지내어 써 그 기운을 맞이하고, 또 각각 그 방위의 산천에 望祭를 지낸다. 五祀는 봄철에는 戶(문 신)에게 제사지내고 여름철에게 竈(竈王神)에게 제사지내고 늦여름에는 中霤(방 중앙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을에는 門(문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겨울에는 行(길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이것이 이른바 해마다 두루한다는 것이다. 諸侯는 나라를 소유하고 나라에는 반드시 지방이 있나니 그 거주하는 지방에 제사지낼 뿐이오, 거주하는 지방이 아니거나 산천이 국경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은 모두 제사를 지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方祀라고 말하였다. 「祭法」에 天子는 일곱가지 제사를 세우되 司命(궁중에 작은 귀신)과 泰厲(帝王으로서 후손이 없는 귀신)를 더하고, 諸侯는 다섯가지 제사를 세우되 司命과 公厲가 있고 戶·竈는 없고, 大夫는 세가지 제사를 설립하되 族厲가 있고 中霤와 戶·厲가 없고, 士는 두가지 제사를 설립하니 門神과 行神에 제사를 지낼 뿐이다고 하였으니, 이 법을 경전에 고찰해 봄에 모두 맞지 않다. 「曾子問」에 天子가 아직 빈소를 차리지 아니하였으면은 五祀의 제사를 거행하지 않고, 「士喪禮」에 五祀에 기도를 한다고 하였으니, 天子로부터 士에 이르기 까지 모두 五祀에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祭法」이 말이 괴이하고 망령되어 떳떳하지 못함에 관련이 되고 일컬은 바 사당 제도에 있어서도 또한 여러 經과 더불어 맞지가 않다.
凡祭는 有其廢之어든 莫敢擧也하며 猶其擧之어든 莫敢廢也하며 非其所祭而祭之를 名曰淫祀니 淫祀는 無福이니라
무릇 제사는 그 제사를 폐기함이 있었으면은 감히 거행하지 아니하며, 그 제사를 거행함이 있으면은 감히 폐기하지 않아야 되며, 그 제사지낼 바가 아닌 것에 그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淫祀(道에 지나친 제사)라고 이름하나니, 道에 지나친 제사는 복이 없다.
呂氏가 말하기를 폐기한 것을 감히 거행하지 않는 것은 이미 毁撤된 종묘와 변경하여 설치된 사직을 가히 다시 제사지낼 수 없는 것이고, 거행하였으면은 감히 폐기하지 않는 것은 예컨데 이미 제단을 수축해 놓고서 곧바로 毁撤하고 이미 昭穆을 바로 잡아놓고서 바로 변경한 것이고, 제사지낼 바가 아닌데 그에 제사지내는 것은 예컨데 법에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것과 마땅히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되는데 제사를 지낸 것이니, 魯나라가 武宮을 건립하고 煬宮을 건립한 것은 그 폐기된 것을 거행한 것이고, 僖公을 위로올려 제사지낸 것은 그 거행된 것을 페기함이요, 魯나라의 郊祭·禘祭와 文王에게 제사지내고 爰居에게 제사지낸 것은 마땅히 제사지내지 않아야 할 바에 제사지낸 것이다. 淫은 지나침이니, 지나침으로써 신을 섬긴다면 신이 흠향하지 않기 때문에 복이 없는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가히 폐기할 만해서 폐기한 것과 가히 거행할 만해서 거행하는 것은 의리에 있는 것이고, 폐기한 바를 따라서 감히 거행하지 않는 것과 거행할 바를 인하여 감히 폐기하지 않는 것은 禮에 있으니 대개 禮는 떳떳함이 있고 義는 權道가 있다.
天子以犧牛하고 諸侯以肥牛하고 大夫以索牛하고 士以羊豕니라
天子는 제사에 털 색깔이 純一한 희생 소를 이용(사용)하고, 諸侯는 살찐 소를 이용하고, 大夫는 구하여 얻은 소를 이용하고, 士는 양과 돼지를 이용한다.
털 색깔이 純一하여 뒤섞이지 않는 것을 犧라고 이르고, 씻어주는 데에서 기르는 것을 肥라고 하고, 구하여 얻어서 그걸 사용한 것을 索이라고 한다. ○䟽에 말하기를 이는 天子의 大夫·士를 이른 것이다. 만약에 諸侯의 大夫는 바로 少牢를 사용하고 士는 한 마리의 희생을 사용하고 그 喪事와 제사에는 大夫도 또한 소를 쓸 수가 있고 士도 또한 양과 돼지를 사용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雜記」篇에 이르기를 上大夫가 虞祭를 지낼 적에는 少牢를 사용하고, 卒哭 成事하고 祔祭를 지낼 적에는 모두 太牢를 이용하고, 下大夫의 虞祭에는 한 마리 희생을 사용하고, 卒哭 成事하고 祔祭를 지낼 적에는 모두 少牢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옳다.
支子는 不祭니 祭必告于宗子니라
支子(작은 아들들)는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나니,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宗子에게 말씀드려야 한다.
䟽에 말하기를 支子는 庶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당이 適子의 집에 있으니 庶子는 천하기 때문에 감히 곧바로 제사를 지낼 수가 없다. 만약에 宗子가 병이 있어서 제사를 담당할 수가 없으면은 庶子가 대행하는 것이 옳지마는 그래도 반드시 宗子에게 말씀을 드리고 그런뒤에 제사를 지내야 된다. ○呂氏가 말하기를 別子(諸侯의 庶子)가 할아버지가 되고 別子를 계승하는 것이 宗孫이 되니 백세토록 神主를 옮기지 않는 것은 大宗이고, 아버지를 계승하고 할아버지를 계승하고 증조를 계승하고 고조를 계승하여 五代가 되면은 神主를 옮기는 것은 小宗(작은 종손)이다. 宗子는 위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계승하니 族人과 兄弟들이 모두 그를 宗孫으로 존경하여 冠禮를 치르고 아내에게 장가들 적에 반드시 보고하고 죽으면은 반드시 부고를 보내야 되는데 더구나 제사에 있어서이겠는가. 宗子를 존경하는 사람이 모두 支子들이니, 支子는 감히 제사를 지낼 수가 없다. 예컨대 諸侯는 감히 天子를 조상으로 제사지낼 수가 없고, 大夫는 감히 諸侯를 조상으로 제사지낼 수가 없나니, 높은 사람의 제사는 낮은 사람이 감히 주관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宗子가 士가 되었고 庶子가 大夫가 되었다면은 上等의 희생으로써 宗子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祝文에 이르기를 ‘孝子(長子) 아무개가 介子(次子·庶子) 아무개를 위해서 그 떳떳한 일을 올립니다.’라고 하니 支子가 아무리 귀하게 되었더라도 가히 써 그 俸祿을 사용할 수 있을지언정 감히 그 일을 전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宗子가 고국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가 있으면은 支子가 주재자를 대신해서 제사는 지내되 그 禮가 감쇄함이 있다.
凡祭宗廟之禮는 牛曰一元大武오
무릇 종묘에 제사지내는 禮는 소에 있어서는 ‘一元大武(한마리 발굽이 큰 소)’라고 하고
이 이하로 통틀어 21가지 물건이다. 元은 머리(마리)이고, 武는 발자국이니, 소가 살찌면은 발자국이 크다.
豕曰剛鬣이오
돼지는 ‘剛鬣’이라고 이르고
돼지가 살찌면은 갈기가 빳빳하다.
豚曰腯肥오
작은 돼지는 ‘腯肥’라고 이르고
腯이라는 것은 충만하여 토실토실한 모양이다.
羊曰柔毛오
양은 ‘柔毛’라고 이르고
양이 살찌면은 털이 가늘고 부드럽다.
雞曰翰音이오
닭은 ‘翰音’이라고 이르고
翰은 긺이니, 닭이 살찌면은 울음소리가 길다.
犬曰羹獻이오
개는 ‘羹獻’이라고 이르고
개가 살찌면 가히 국을 끓어서 드릴 수가 있으니, 무릇 고기를 끓인 것을 모두 국이라고 이를 수 있다. 「特牲禮」에 이르기를 국을 끓인다 하였고, 󰡔春秋󰡕에 潁考叔이 이르기를 임금의 국을 아직 맛보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다.
雉曰䟽趾오
꿩은 ‘䟽趾’라고 이르고
꿩이 살찌면은 두 발이 벌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䟽趾라고 한다.
免曰明視오
토끼는 ‘明視’라고 이르고
토끼가 살찌면은 눈이 벌려져서 시력이 밝다. 그렇기 때문에 明視라고 한다.
脯曰尹祭오
포는 ‘尹祭’라고 이르고
尹은 바름이니, 건포는 펴서 베되 방정하게 하려고 해야 한다.
槀魚曰商祭오
건어물은 ‘商祭’라고 이르고
槀는 말림이오, 商은 헤아림이니, 그 건조와 습도의 適宜함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鮮魚曰脡祭오
생선은 ‘脡祭’라고 이르고
脡은 곧음이니(빳빳함이니), 생선의 신선한 것이 문드러지거나 부패하지 않았다면은 반듯하게 곧다.
水曰淸滌이오
물은 ‘淸滌’이라고 이르고
水는 玄酒(정화수)이니, 물은 가히 씻을 수가 있기 때문에 淸滌이라고 이른다.
酒曰淸酌이오
술은 ‘淸酌’이라고 이르고
옛날의 술이 모두 淸酒가 있고 지게미가 있는데, 아직 맑은 술이 않된 것이 지게미가 되고 이미 맑은 술이 된 것이 淸酒가 된다.
黍曰薌合이오
기장은 ‘薌合’이라고 이르고
기장이 익으면은 찰져서 모이어 흩어지지 않고 그 기운이 또 향기롭기 때문에 薌合이라고 이른다.
粱曰薌萁오
조는 ‘薌萁’라고 이르고
조는 곡식의 강한 것이니, 그 줄기와 잎이 또한 향기롭기 때문에 薌萁라고 한다.
稷曰明粢오
피는 ‘明粢’라고 이르고
稷은 피이니, 선명하면은 충분히 써 신과 교접할 수가 있다. 제삿밥을 粢盛이라고 이른다.
稻曰嘉蔬오
벼는 ‘嘉蔬’라고 이르고
蔬는 䟽와 더불어 같으니, 싹이 세워진 것이 성글면은(듬성듬성하게 심으면은) 무성하여 아름답다.
韭曰豐本이오
부추는 ‘豐本’이라고 이르고
그 뿌리가 풍성하다.
鹽曰鹹鹺이오
소금은 ‘鹹鹺’라고 이르고
鹹鹺는 짠 맛이 농후한 것이다(대단히 짠 것이다).
玉曰嘉玉이오
玉은 ‘嘉玉’이라고 이르고
瑕疵가 없는 玉이다.
幣曰量幣라하나니라
폐백은 ‘量幣’라고 이른다.
廣狹과 長短의 척도에 맞는 것이다. ○䟽에 이르기를 이런 것들의 여러 호칭은 만약 하나의 제사에 병합하여 있으면은 그 큰 것만을 거론하고, 혹간 개와 닭이 있거나 물고기와 토끼가 있게 된다면은 각각 그 호칭을 거론하게 되기 때문에 經에서 그 이름을 갖추어 기록하였다.
天子死曰崩이오 諸侯曰薨이오 大夫曰卒이오 士曰不祿이오 庶人曰死오 在牀曰尸오 在棺曰柩라하며 羽鳥曰降이오 四足曰漬오 死寇曰兵이라하나니라
天子가 죽는 것을 ‘崩’이라고 이르고, 諸侯는 ‘薨’이라고 이르고, 大夫는 ‘卒’이라고 이르고, 士는 ‘不祿’이라고 이르고, 庶人은 ‘死’라고 이르고, 침상에 있는 것은 ‘尸’라고 이르고, 棺에 있는 것은 ‘柩’라고 이르며, 깃달린 새가 죽는 것은 ‘降’이라고 이르고, 네발달린 짐승이 죽는 것은 ‘漬’라고 이르고, 外寇의 難에 죽는 것은 ‘兵’이라고 이른다.
䟽에 이르기를 卒은 끝마침이다. 士는 봉록으로써 농사지음을 대신하니, 不祿은 그 봉록을 끝마치지 못하는 뜻이다. 死라는 것은 잦아드는 것이니, 사라져 다하여 나머지가 없음을 이른 것이다. 尸는 진열함이니, 옛사람이 병이 위급하여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아니하였을 때에 내려놓아 땅바닥에 있다가 숨이 다 끊어진 뒤에 다시 침상 위로 돌아오게 되니 이렇게 한 까닭은 무릇 사람이 맨처음 출생하여 땅에 있었으니 병들어 장차 죽게된 까닭에 내려놓아 그 맨처음 출생함으로 되돌아가서 죽음에서 벗어나 거듭 되살아나기를 바란 것이니 만약에 그 되살아나지 아니하면 다시 본래 침상으로 되돌아가고 이미 殯所를 차리고 殮襲하지 아니하여 진열해서 침상에 있기 때문에 尸라고 말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柩는 오래감이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흙으로 하여금 피부에 접근함이 없도록 하기 때문에 棺에 있는 것이 그 오래가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깃털달린 새는 날으는 물건이니, 떨어져 하강하면은 죽게되고, 짐승은 능히 움직이는 물건이니, 부패하면 죽게된다. 漬는 그 형체가 부패하여 젖음을 이른다. 兵이라는 것은 外寇의 兵難에 죽은 칭호이다.
祭王父曰皇祖考오 王母曰皇祖妣오 父曰皇考오 母曰皇妣오 夫曰皇辟이라하나니라
王父(할아버지)에게 제사지낼 적에는 祝文에 ‘皇祖考’라고 이르고, 王母(할머니)에게는 ‘皇祖妣’라고 이르고, 아버지에게는 祝文에 ‘皇考’라고 이르고, 어머니에게는 ‘皇妣’라고 이르고, 남편에게는 ‘皇辟’이라고 이른다.
皇과 王은 모두 임금의 호칭으로써 그를 높이는 것이다. 考는 德을 이룬 것이요, 妣는 배필의 뜻이다. 辟은 법이니, 아내가 본받는 바이다. 그 종묘를 지어서 써 귀신으로써 그에게 제향을 드리니, 그 호칭을 다르게 아니할 수가 없다.
生曰父曰母曰妻오 死曰考曰妣曰嬪이오 壽考曰卒이오 短折曰不祿이라하나니라
생존에는 ‘父·母·妻’라고 이르고, 돌아가시면은 ‘考·妣·嬪’이라고 이르고, 장수하여 죽는 것은 ‘卒’이라고 이르고, 수명이 짧아 요절하는 것은 ‘不祿’이라고 이른다.
嬪이라는 것은 婦人의 美稱이다. 嬪은 賓과 같으니, 남편이 손님처럼 공경하는 바이다. 短折은 요절하여 비정상으로 죽는 것이다. 여기에서 卒과 不祿을 말한 것이 윗글의 大夫와 士의 호칭과 같은 것은 저기에서는 지위의 尊卑를 가지고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수명의 길고 짧음으로 말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데 呂氏의 말에 死寇曰兵의 아래 마땅히 이 두 글귀를 가지고 거기에 접속시켜야 되니, 아마도 뒤섞인 책장인 성싶다. ○謝氏가 말하기를 󰡔周易󰡕에 이르기를 아들이 있으면 아버지가 허물이 없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뜻이 아버지의 일을 계승한다고 하였고, 또 󰡔書經󰡕에서 말하기를 그 아버지와 그 어른을 섬긴다는 따위가 모두 죽은 뒤에 호칭한 것이 아니고 대개 옛날에는 통틀어 호칭하다가 후세에는 이에 그것을 달리하였는 성싶다.
天子視호대 不上於袷하며 不下於帶하고 國君엔 綏視하고 大夫엔 衡視하고 士엔 視五步니라
天子를 쳐다 볼 적에는 曲領에 올라가지 아니해야 되며, 띠에 내려가지 아니해야 되고, 나라 임금을 쳐다볼 적에는 시선을 얼굴 아래로 내려뜨리고, 大夫를 쳐다볼 적에는 시선을 얼굴과 평형을 하고, 士를 쳐다볼 적에는 五步까지 본다.
天子視는 天子를 쳐다봄을 이른다. 袷은 朝服과 祭服의 曲領이다. 妥는 내려뜨리는 모양이다. 임금을 쳐다보는 보는 사람이 눈이 얼굴을 평형으로(똑바로) 볼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얼굴 아래와 曲領 위를 보아야 된다. 衡은 수평이니, 大夫의 신하가 大夫를 쳐다볼 적에 그 얼굴을 평형으로 본다. 士가 五步를 보는 것은 士의 소속 관리가 士를 쳐다볼 적에 또한 얼굴에 높이 올라가나 띠에 내려갈 수는 없지마는 옆으로 좌우의 다섯 걸음의 사이 거리는 볼 수가 있다.
凡視上於面則敖하고 下於帶則憂하고 傾則姦이니라
무릇 보는 것이 시선이 얼굴에 올라가면은 거만하고, 띠에 내려가면은 근심스러워 보이고, 흘겨보면은 간사스럽다.
呂氏가 말하기를 얼굴보다 올라가는 사람은 그 기운이 교만하니, 그는 능히 써 남에게 낮출 수 없음을 알 수가 있고, 띠에 내려가는 사람은 그 정신이 뺏기나니, 그 근심이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고, 시선을 흘겨보면은 용모가 기울여지나니 반드시 부정한 마음이 가슴속에 있을 터이니, 이는 君子가 써 조심하는 바이다.
君命이어든 大夫與士肄호대 在官言官하고 在府言府하고 在庫言庫하고 在朝言朝니
임금이 명령을 하면은 大夫와 士가 그것을 익히되 그 일이 관아에 있으면 관아의 일을 말하고, 그 일이 재물 창고에 있으면 재물 창고의 일을 말하고, 그 일이 수레 창고에 있으면 수레 창고의 일을 말하고, 그 일이 조정에 있으면 조정의 일을 말해야 한다.
임금이 명령이 있으면은 大夫와 士가 서로 더불어 그 일을 익혀 그 일이 혹 관청에 있거나 혹 재물 창고에 있거나 혹 수레 창고에 있거나 혹 조정에 있다면은 그 있는 바에 따라서 그걸 모의해야 된다. 官이라는 것은 직분을 지키고 맡아 보존하는 것의 총칭이고, 府庫라는 것은 貨財와 器具를 저장하는 것의 딴 이름이다. 조정은 君臣이 회견하는 임금의 뜰이다.
朝言은 不及犬馬니라
조정에서 하는 말은 개나 말에 언급하지 않아야 된다.
개나 말은 미천하니 마땅히 그것을 조정에서 말하지 않아야 된다.
輟朝而顧는 不有異事면 必有異慮니 故輟朝而顧를 君子謂之固라하니라
조회를 끝마치고서 좌우를 돌아보는 것은 다른 일이 있지 아니하면은 반드시 딴 생각이 있는 것이니 때문에 조회를 끝마치고서 좌우를 돌아보는 것을 君子가 고루하다고 이른다.
조정의 거동은 마땅히 엄숙해야 되니, 마땅히 좌우로 돌아보는 것을 하지 않아야 된다. 異는 他와 같다. 공경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은 밖에 나타나게 되나니, 이것이 때문에 그 다른 일과 다른 생각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固(고루함)는 비루하고 야비해서 禮에 통달하지 못함을 이른다.
在朝言禮하며 問禮어든 對以禮니라
조정에 있으면 禮를 말하며 禮를 질문하면 禮로써 대답해야 된다.
조정의 위에서 무릇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은 禮이니, 한 번 질문하고 한 번 대답하는 것을 반드시 禮에 고찰해야 된다. 孔子께서 종묘와 조정에 계시면서 조리있게 말씀을 하시되 오직 삼가셨는데 이 도리를 다하신 것이다.
大享엔 不問卜하며 不饒富니라
큰 祭享에는 날짜를 점치지 아니하며 祭需를 풍요하게 장만하지 아니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冬至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夏至에는 땅에 제사지내니, 날짜와 달이 본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날짜를 점쳐 묻지 않는다. 지극한 공경은 제단을 쌓지 않고서 땅을 쓸고서 제사를 지내며, 희생은 송아지를 사용하며 술잔은 질그릇과 바가지를 사용하며 자리는 짚을 이용하나니, 천하의 물건을 봄에 써 그 德에 걸맞은 것이 없어 적은 것으로써 귀중함을 삼기 때문에 풍요롭게 아니한다.
凡摯는 天子는 鬯이오 諸侯는 圭오 卿은 羔오 大夫는 鴈이오 士는 雉오 庶人之摯는 匹이니 童子는 委摯而退니라 野外軍中에 無摯하니 以纓拾矢可也니라
무릇 폐백(예물)에 있어서는 天子는 울창주로 하고 諸侯는 圭로 하고 卿은 양 새끼로 하고 大夫는 기러기로 하고 士는 꿩으로 하고 庶人의 폐백은 오리로 하나니, 童子는 폐백을 놓아 두고서 물러나간다. 野外나 軍中에서는 폐백이 없나니 가슴걸이나 팔찌나 화살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摯는 贄와 더불어 같으니, 물건을 가지고서 서로 만나보는 禮를 삼는다. 鬯은 검은 기장과 기장을 빚어서 술을 만드는 것을 秬鬯이라고 이르고, 鬱金草를 섞으면은 鬱鬯酒라고 이르고, 鬱金草를 섞지 아니하면은 바로 그것을 鬯酒라고만 이르나니, 그 향내가 위아래로 분산하여 퍼짐을 말한 것이다. 天子는 손님되는 禮가 없는데 예물을 말한 것은 페백을 사용하여 禮로써 신에게 알현하는 것 뿐이다. 圭는 命圭이니, 公은 桓圭이고, 侯는 信圭이고, 伯은 躬圭이고, 子는 穀璧이고, 男은 蒲璧이니, 여기에서 璧을 말하지 않은 것은 생략한 것이다. 양 새끼는 그 무리지어 살면서 동류를 잃어버리지 않고 또 깨끗하게 흰 것을 취택한 것이고, 기러기는 그 철을 알고 또 날을 적에 대열이 있음을 취택한 것이고, 꿩은 그 성질이 전일하고 또 문채나게 꾸며짐을 취택한 것이다. 匹은 읽기를 鶩으로 하니, 물오리를 鳧라고 이르고, 집오리를 鶩이라고 이르나니, 능히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이 庶人이 마침내 밭갈이하여 농사지음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童子는 감히 어른과 더불어 禮를 행할 수가 없나니, 혹간 師友를 보고서 예물을 잡게되면은 그것을 땅에다 놓아두고서 스스로 그를 물러나 피해야 된다. 纓은 말의 繁纓(가슴걸이)이니, 바로 말의 가슴걸이이다. 拾은 활쏘는 팔찌이고, 矢는 화살이니, 혹은 야외에서나 혹은 군중에서 지니고 있는 것을 따라 그걸 사용하는 것이다.
婦人之摯는 椇榛脯脩棗栗이니라
부인의 폐백(예물)은 호깨나무 열매나 개암나무나 脯(말린 고기)와 脩(요리한 말린 고기)와 대추와 밤이다.
椇는 모양이 산호와 같고 맛이 달고 아름다운데 일명은 石李라고 부른다. 榛은 밤같으면서 작다. 脯는 바로 지금 건포이고, 脩는 고기를 데워서 손질하여 생강과 계피를 얹져서 말리는데 脯의 모양은 방정하고 脩의 모양은 조금 길다. 대추와 밤을 병합하여 여섯가지 물건이니, 며느리가 맨처음 시부모를 알현할 적에 이것으로써 폐물을 삼는다. 󰡔左傳󰡕에 여자의 폐물은 개암·밤·대추·脩로써 정성을 고함에 불과하다.
納女於天子曰備百姓이오 於國君曰備酒漿이오 於大夫曰備埽灑라하나니라
天子에게 딸을 바칠 적에는 “百姓 수효에 채웠다.”고 이르고, 나라 임금에게 딸을 시집보낼 적에는 “술과 미음을 장만하는 일에 갖추었다.”고 이르고, 大夫에게는 “쓸고 물 뿌리는 일에 보충했다.”고 말한다.
呂氏가 말하기를 감히 배필로써 서로 기약하지 않고 媵妾의 수효에 갖출 뿐임을 원한 것이니, 모두 스스로 낮추는 말이다.
 
檀弓上 第三

劉氏가 말하기를 「檀弓」의 篇 첫머리에 子游를 말하고 또 篇內에 그 子游를 많이 말하였으니, 의심컨대 이는 그 子游 門人이 기록한 말인 성싶다.
公儀仲子之喪에 檀弓이 免焉이러니 仲子舍其孫而立其子한대 檀弓曰何居오 我未之前聞也로다하고 趨而就子服伯子於門右하야
公儀仲子가 喪事를 당하였을 적에 檀弓이 免冠을 썼었는데, 仲子가 그 適孫子를 놓아두고 그 庶子를 후계자로 세우자, 檀弓이 말하기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아직까지 그런 일을 전에 듣지 못했오?”하고, 종종걸음으로 문 오른쪽에 子服伯子에게로 나아갔다.
公儀는 氏이고, 仲子는 字인데, 魯나라의 同姓이다. 檀弓은 魯나라 사람으로서 禮를 안 사람이다. 袒免(어깨를 드러내고 免冠을 쓰는 것)은 본시 五世의 服인데 친구로서의 타국에서 죽어 주관할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도 또한 그를 위하여 免冠을 써주니, 그 제도는 베 넓이 한치로써 목덜미 중앙으로부터 앞으로하여 이마에서 교차하고 또 도리어 뒤로 향해서 상투에다가 감아놓는다. 適子가 죽음에 適孫을 세워서 後嗣를 삼는 것이 禮이니, 檀弓이 仲子가 適孫을 놓아두고 庶子를 세운 까닭 때문에 禮에 지나친 免冠을 만들어 쓰고서 조문가서 그를 기롱하였다. 何居는 괴이하게 여기는 말이니, 무슨 까닭이냐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때에 아직 小歛을 하지 아니하여 주인이 동쪽 섬돌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아직까지 서쪽 섬돌아래에 있으면서 그 조문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檀弓이 조문이 끝나자 문 오른쪽으로 子服伯子에게로 나아가서 그걸 질문한다.
曰仲子舍其孫而立其子는 何也오 伯子曰仲子亦猶行古之道也로다 昔者에 文王이 舍伯邑考而立武王하시며 微子舍其孫腯而立衍也하니 夫仲子亦猶行古之道也로다 子游問諸孔子한대 孔子曰否라 立孫이니라
檀弓이 말하기를 “仲子가 그 適孫을 놓아두고 그 庶子를 후계자로 세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伯子가 말하기를 “仲子가 또한 여전히 옛날의 道를 실행한 것이도다. 옛적에 文王이 伯邑考를 놓아두고 武王을 세우셨으며, 微子가 그의 適孫 腯을 놓아두고 衍을 세웠는데, 대체 仲子도 또한 여전히 옛날의 道를 실행한 것이도다.” 子游가 그 일을 孔子에게 질문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길 “아니다. 適孫을 세워야 되는 것이다.”
曰은 檀弓이 질문한 것이다. 猶는 아직까지이니(여전히이니), 亦猶는 商量 議論하고 아직 결정하지 못한 말이다. 伯邑考는 文王의 큰 아들이다. 微子가 適孫 놓아두고 衍을 세운 것은 아마도 이 殷나라 禮인 성싶다. 文王께서 武王을 세운 것에 대해서는 先儒가 말하기를 權道라고 하고, 혹은 또한 殷나라 제도를 따랐다고 하는데, 모두 가히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은 德으로써 한 것이요, 나이 많은 것으로써 아니한 것이니, 또한 太王이 왕위를 季歷에게 전해 준 뜻과 같은가 보다. ○應氏가 말하기를 檀弓이 잠자코 다시 말하지 아니하자, 子游가 의심하여 다시 시정함을 구하였으니, 孔子께서 분명히 변별하여 보여준 것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適孫을 놓아두고 庶子를 세운 것이 잘못이 된 줄을 알겠는가?
事親호대 有隱而無犯하며 左右就養호대 無方하며 服勤至死하며 致喪三年하고 事君호대 有犯而無隱하며 左右就養호대 有方하며 服勤至死하며 方喪三年하고 事師호대 無犯無隱하며 左右就養호대 無方하며 服勤至死하며 心喪三年이니라
어버이를 섬기되 숨기는 것은(숨김은) 있고 범함이 없어야 되며 좌우로 나아가(이리저리) 봉양하되 일정한 방향이 없이하며 수고로운 일을 담당하여 죽음에 이르며(죽을 때까지 수고로운 일을 처리하며) 居喪을(喪服 입기를) 극진히 하기를 삼년동안 하고, 임금을 섬기되 범함이 있고(용안을 범하여 간함이 있고) 숨김이 없으며 좌우로 나아가 봉양하되 일정한 방향이 있으며 수고로운 일을 담당하여 죽음에 까지 이르며 居喪을 부모에 비견하여 삼년복을 입고 스승을 섬기되 범함도 없고 숨김도 없으며 좌우로 나아가 봉양하되 일정한 방향이 없으며 수고로운 일을 담당하여 죽음에 이르며 마음으로 居喪하기를 삼년동안 한다.
饒氏가 말하기를 左右의 音이 佐佑는 틀렸다. 左右는 바로 이 방향이니, 봉양이 음식의 봉양에만 그치지 않는 아니다. 말하자면 혹은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하여 일정한 방향이 없는 것이니, 자식이 부모에 대해 직책의 지킴을 구분하지 않고서 일일마다 모두 마땅히 이해해야 되고 가히 미루거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승을 섬기되 아버지 섬기듯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일정한 방향이 없다. 有方은 말하자면 왼쪽에서는 오른쪽으로 넘어갈 수가 없고 오른쪽에서는 왼쪽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 일정한 방향이 있는 것이니,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마땅히 각각 직책의 지킴을 다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방향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朱氏가 말하기를 어버이는 仁이 있는 바이기 때문에 숨김이 있고 범함이 없으며, 임금은 의리가 있는 바이기 때문에 범함이 있고 숨김이 없으며, 스승은 道가 있는 바이기 때문에 범함도 없고 숨김도 없다. ○劉氏가 말하기를 隱(숨기는 것)은 모두 간함으로써 말한 것이니, 父子는 은혜를 위주로 하니 범하여 간하면은 선을 책망하여 은혜를 손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은미하게 간하여 가히 얼굴을 범할 수 없는 것이고, 君臣은 의리를 위주로 하니 숨기면은 이는 위엄을 두려워하여 阿諛苟容하여 의리를 해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악을 바로잡아 구제하여 속이지 말고 범해야 되고, 선생과 제자는 恩義의 중간에 처하여 스승은 도가 존재하는 바이니 간함에 반드시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거만할 것이 없고, 과오는 반드시 의문해야 되고 반드시 숨기지 않아야 된다. 隱은 악을 가려준 것을 이른 것이 아니니, 만약에 악을 가리워 가히 사람에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은 세가지 것이 모두 당연한 것이니, 오직 史筆을 잡은 사람(史官)만이는 이 한계에 포함되지 않다. 就養은 가까이 나가서 봉양하는 것이다. 致喪은 그 슬퍼 야위는 예절을 극진히 하는 것이요, 方喪은 어버이 喪事에 비견하여 의리로써 은혜를 아우르는 것이요, 心喪은 몸에 衰麻의 喪服은 없지마는 마음에 슬퍼하는 심정은 있는 것이니, 이른바 아버지를 여윈 것처럼 하면서 喪服은 없는 것이다.
季武子成寢하니 杜氏之葬이 在西階之下러니 請合葬焉이어늘 許之한대 入宮而不敢哭이어늘 武子曰合葬이 非古也나 自周公以來로 未之有改也니 吾許其大하고 而不許其細면 何居오하고 命之哭하다
季武子가 寢殿을 완성하니(지으니) 杜氏의 葬事 지낸 묘소가 서쪽 섬돌 밑에 있었는데, 杜氏가 合葬을 하겠다고 요청하자 그것을 허락해 주었는데, 杜氏가 季武子의 집에 들어와서 감히 哭을 못하자, 季武子가 말하기를 “合葬하는 것이 옛날의 禮는 아니지마는 周公이래로부터 아직까지 그것을 고친 적이 있지 아니한데, 내가 그 큰 것(合葬하는 것)을 허락해 주고 그 작은 것(哭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은 무슨 의의가 있겠느냐?”하고 그에게 명령하여 哭하도록 하였다.
劉氏가 말하기를 寢殿을 지으면서 남의 묘소를 평탄하게 함이 不仁이고, 改葬하지 않고 또 合葬을 청하는 것이 또 효도가 아니고, 그 合葬을 허락하고 또 그에게 哭하도록 명령한 것이 기만과 거짓으로써 과오를 문채(미화)한 것이다. 그리고 寢殿이라는 것은 써 그 집안을 편안히 하는 것인데, 이에 그 집을 남의 무덤 위에 있게 한 것이 네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묘소라는 것은 써 그 先祖를 편안히 해 드리는 것인데, 이에 그 先祖를 남의 섬돌 밑에 있도록 하는 것이 그 능히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모두 人情에 가깝지 아니하니 禮아닌 것이 분명하다.
子上之母死而不喪한대 門人이 問諸子思曰昔者에 子之先君子喪出母乎잇가 曰然하니라 子之不使白也喪之는 何也잇고 子思曰昔者에 吾先君子는 無所失道하사 道隆則從而隆하고 道汚則從而汚어시어니와 伋則安能이리오 爲伋也妻者는 是爲白也母어니와 不爲伋也妻者는 是不爲白也母라하시니 故孔氏之不喪出母가 自子思始也니라
子上의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喪服을 입지 않자, 子思의 門人들이 그것을 子思에게 질문하기를 “옛적에 선생님의 先君子(孔子)께서 出母(축출당한 어머니)에 대하여 喪服을 입게 하였습니까?” 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였다.” 門人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은 선생님께서 白으로 하여금 그 어머니에 대하여 喪服을 입도록 아니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子思가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내 先君子께서는 도리를 잃어버린 것이 없으시어 도리에 높여야 할 것이라면 따라서 높이셨고 도리에 낮추어야(감쇄해야) 할 것이라면은 따라서 낮추셨지마는 나는 어찌 능히 그러할 수 있겠느냐? 나의 아내가 된 사람은 이 白의 어머니가 되거니와 나의 아내가 되지 아니한 사람은 이 白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렇기 때문에 孔氏 집에서 出母에 대하여 喪服을 입지 아니한 것이 子思로 부터 시작이 되었다.
子上의 어머니는 子思의 쫓겨난 아내이다. 禮에 축출당한 어머니를 위해서 喪服은 齊衰로 지팡이를 짚고서 一年服을 입되 아버지의 後嗣가 된 사람(큰 아들)은 服이 없고 마음으로 喪服을 입을 뿐이다. 伯魚와 子上이 모두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禮에 마땅히 服을 입지 않아야 할 것인데, 伯魚가 이에 期年이 지나서도 그 때까지 哭을 하니 夫子께서 그 곡소리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심하다(너무 지나치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뒤에 그 服을 벗었으니, 이는 어진 사람이 그 中道에 지나친 일이다. 子思께서 白으로 하여금 出母에 대하여 喪服을 입도록 아니하신 것은 바로 禮를 準用하려고 한 것 뿐이었는데, 門人들이 先君子(孔子)님의 일로써 질문하자, 子思께서 伯魚가 禮에 지나쳤다고 말하기가 곤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聖人(孔子)께서 道를 잃어버린 바가 없다는 것으로써 대답을 하셨으니, 聖人께서 伯魚에게 出母에 대하여 喪服을 입도록 들어(허락해) 주신 것은 道로써 禮를 헤아려 그 높이고 감쇄함을 이른 것인데, 오직 聖人이라야 만이 능히 道에 있어서 마땅히 더 높여야 할 바에 있어서는 따라서 높여주시고 道에 있어서 마땅히 강등하여 줄여야 할 바에 있어서는 따라서 감쇄하시었다. 汚는 감쇄함과 같다. 이는 先王의 禮에 있어서 짐작하는 바가 있어 때에 따라서 높이고 감쇄하여 써 中道에 따른 것인데, 나는 어찌 능히 이와같이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의 아내가 되었을진데 白이 마땅히 어머니를 위해서 服을 입어야 되거니와(입을 수 있거니와) 지금 이미 나의 아내가 되지 아니하였을진데 白은 아버지의 後嗣가 되어서 마땅히 服을 입지 않아야 된다 하셨으니, 子思는 이 떳떳한 禮를 지키고자하여 하여금 伯魚처럼 더 높이도록 하고자 아니한 것이다.
孔子曰拜而后에 稽顙은 頹乎其順也오 稽顙而后에 拜는 頎乎其至也니 三年之喪으란 吾從其至者호리라하시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절한 뒤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고분고분히 그 순서를 따르는 것이요, 이마를 조아린 뒤에 절한 것은 슬퍼하면서 그 공경을 극진히 하는 것이니, 三年의 喪禮에는 나는 슬퍼하면서 그 공경을 극진히 하는 것을 따르겠다.”고 하셨다.
이는 喪中에 절하는 次序를 말하였다. 拜는 손님에게 절한 것이다. 이마를 조아리는 것은 머리를 땅에 부딪히는(머리가 땅에 닿는) 것이니, 애통함의 지극한 것이다. 절을 하고서 손님에게 禮를 표하여 이마를 조아리면서 스스로 공경을 극진히 함을 順(그 순서를 따른 것)이라고 이른 것은 그 먼저 사람에게 공경을 가하고 그런 뒤에 자기에게 슬픔을 다한 것이 그 순서를 얻음을 이른 것이다. 頎이라는 것은 슬픔이 發露된 것이니, 그것을 지극히 함이라고 이른 것은 그 슬픔은 항상 어버이에게 있으면서 공경을 잠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스스로 다하는 도리를 극진히 함이 된다. 夫子께서 그 극진히 함을 따르신 것은 또한 그 喪事에 겉치레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된다는 뜻이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절한 뒤에 이마를 조아리는 것은 먼저 그 손으로써 땅에 엎드려 평상시와 같이하고 그런 뒤에 머리를 당겨서 앞으로 향하여 땅에 닿도록 한 것이요, 이마를 조아린 뒤에 절하는 것은 두 손을 벌려서 먼저 머리로 땅에 닿도록 하고 바로 손을 엇갈리게 하기를 평상시와 같이하는 것이다.
孔子旣得合葬於防하시고 曰吾는 聞之호니 古也엔 墓而不墳하더니 今에 丘也는 東西南北之人也라 不可以弗識也라하시고 於是에 封之하시니 崇이 四尺이러라
孔子께서 이미 防산에 부모님을 合葬해 드리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듣자하니, 옛적에는 무덤만 쓰고(埋葬만 하고) 封墳을 짓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나는 앞으로 동쪽·서쪽·남쪽·북쪽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므로 가히 써 표지해 두지 아니할 수 없다.”하시고, 이에 그 封墳을 지으셨는데 封墳 높이가 4척쯤 되었다.
孔子님의 아버지 묘소가 防산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喪을 받들고서 合葬을 해드렸다. 墓는 무덤이니, 흙을 쌓아서 언덕을 만드는 것을 封墳이라고 한다. 東西南北之人은 그 벼슬하여 떠돌아다녀 일정한 거처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識는 표지함이다. 封墳을 만듦은 써 표지를 해 둔 것이니, 하나는 남이 모르고서 잘못 침범할까 두렵기 때문에서이고, 하나는 자기가 혹간 잊어버리고서 찾기 어려울까 두렵기 때문에서이다. 그러므로 그 묘에 封墳을 만들셨으니 높이는 4척쯤 되었다.
孔子先反하시고 門人이 後러니 雨甚하더라 至커늘 孔子問焉曰爾來何遲也오 曰防墓崩일새니이다 孔子不應이어시늘 三한대 孔子泫然流涕曰吾는 聞之호니 古不脩墓라하니라
孔子께서 먼저 돌아오시고 門人들이 뒤떨어졌는데 비가 심하게 내렸다. 門人들이 돌아오자 孔子께서 질문하시기를 “너희들이 돌아오는 것이 어찌 더디었느냐?” 門人들이 말하기를 “防산의 묘소가 무너졌기 때문에서였습니다.” 孔子께서 응답을 아니하시자 門人들이 세 번 말씀드리니 孔子께서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기길 “나는 듣자하니 옛날에는 墳墓를 修築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더라.
비가 심하게 내리자 무덤이 무너지거늘 門人들이 修築한 뒤에 되돌아오니 孔子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스스로 그 능히 封墳을 쌓을 때에 삼가하지 못하여 써 무너짐에 이른 것을 상심하시었고, 또 옛날 사람이 써 무덤을 修築하지 아니한 바를 말씀하신 것은 공경하고 삼가하는 지극함에 修築함에 종사할 것이 없는 것이다.
孔子哭子路於中庭이어시늘 有人吊者어늘 而夫子拜之하시다 旣哭하시고 進使者而問故하신대 使者曰醢之矣라하야늘 遂命覆醢하시다
孔子께서 子路를 뜰 가운데에서 哭을 하시자, 어떤 사람이 조문을 오자 孔子께서 그에게 답배하시었다. 이미 哭을 하시고 使者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죽은 까닭(상황)을 물으니 使者가 말하기를 “그 子路를 肉醬 담갔다.”고 하시자, 마침내 명령하여 당신 집안의 肉醬을 엎질러버리도록 하였다.
子路가 衛나라 孔悝의 난리에서 죽어 마침내 衛나라 사람의 육장담그는 바가 되자 孔子께서 뜰 가운데에서 哭을 하셨으니, 이는 師友間의 禮이다. 使者의 말을 들으시고 집안의 육장을 엎질러버리도록 하신 것은 아마도 子路의 화를 애통스럽게 여기어 그 비슷한 것을 차마 먹을 수 없기 때문에서인 성싶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子路가 衛나라에서 벼슬한 실수는 前輩(선배)들이 논한 것이 많다. 그러나 子路는 바로 이 소견(식견)이 이르지 못한 것이요, 그 의리가 아닌 줄을 알고서도 구차스럽게 한 것은 아니다.
曾子曰朋友之墓에 有宿草而不哭焉이니라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친구의 묘소에는 묵은(1年이 지난) 풀이 있으면 哭을 아니하는 것이다.”
풀뿌리가 묵은 것이 이 一年이 벗어난 것이니 가히 哭을 않해도 된다.
子思曰喪은 三日而殯호대 凡附於身者를 必誠必信하야 勿之有悔焉耳矣니라 三月而葬호대 凡附於棺者를 必誠必信하야 勿之有悔焉耳矣니라
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喪事는 삼일만에 初殯하되(殯所를 차리되) 무릇 시신에 붙이는 것을 반드시 성실히 하고 반드시 신실히하여 그것이 후회가 있지 말도록 해야 된다. 석달만에 葬事를 지내되 무릇 棺에 딸리는 것을 반드시 성실히 하고 반드시 신실히하여 그것이 후회가 있지 말도록 해야 된다.
시신에 딸린 것은 襲하고 歛하는 襚衣와 이불의 도구이고, 棺에 딸리는 것은 明器와 用器의 등속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반드시 성실히 함은 죽은 사람에게 있어서 속이는 바가 없음을 이르는 것이요, 반드시 신실하게 함은 산사람에게 의심하는 바가 없음을 이른 것이다.
喪은 三年을 以爲極이니 亡이라도 則弗之忘矣니라 故君子는 有終身之憂하고 而無一朝之患이니 故忌日에 不樂하나니라
喪事는 삼년을 써 극한으로 삼으나니 葬事지내더라도 그 어버이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君子는 終身토록 근심함이 있고 하루 아침의(뜻밖의) 걱정이 없나니 때문에 忌日(부모가 돌아가신 날)에 풍악을 울리지 않는 것이다.
喪事는 삼년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이미 葬事지내는 것을 亡이라고 이르나니, 󰡔中庸󰡕에 말하기를 葬事지내 없는 이 섬기기를 생존한 분을 섬기듯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비록 이미 葬事를 지냈어도 그 어버이를 잊지 못하니 때문에 종신토록 걱정함이 되어서 忌日에는 풍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이다. 「祭義」篇에 말하기를 君子가 종신의 喪事가 있는데 忌日을 이른 것이다고 하였다. 무덤이 무너지는 것이 뜻밖에 나오나니 이른바 하루 아침의(뜻밖의) 근심거리이니, 오직 그 반드시 성실히 하고 반드시 신실히 하였기 때문에 하루 아침의(뜻밖의) 걱정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빈소를 차리고 葬事를 지내는 것이 모두 한 때의 일이므로 이 한 때에 삼가하지 않는다면은 후회가 있게 되나니 오직 그 성실하고 신실히 하였기 때문에 이 한 때에 삼가지 아니한 걱정이 없는 것이다.
孔子少孤하사 不知其墓하사 殯於五父之衢어시늘 人之見之者皆以爲葬也라하더니 其愼也는 蓋殯也러라 問於郰曼父之母오사 然後得合葬於防하시니라
孔子께서 어렸을 적에(어려서) 아버지를 여위고서(여위시어) 그 아버지 묘소를 모르시어 五父의 사거리에 어머니의 빈소를 차리게 되었는데(어머니를 빈소차렸는데) 사람들이 그 빈소를 본 이가 모두 葬事지내는 것으로 여기었는데 그 상여줄은 대체 빈소를 차린 것이였다. 郰曼父의 어머니에게 물어보고서야 그런 뒤에 防산에 合葬할 수가 있었다.
그 묘소를 모른 것은 아버지 묘소의 소재를 모른 것이다. 五父의 사거리에 빈소를 차린 것은 어머니의 喪事를 빈소차린 것이니, 禮에 집밖에다 빈소를 차릴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 이에 사거리에 빈소가 있게 하였으니 그에 대하여 先儒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의 의문을 招致하여(불러들여)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그에게 말해줌이 있게 하고자 한 것이다고 하였다. 사람이 널이 도로에 행하는 것을 보고 모두 葬事를 지낸다고 여기었다. 그러나 상여줄로써 보건데 초빈하는 상여줄에는 棺을 관 뚜껑으로 장식을 하고 葬事지내는 상여줄은 棺을 관 덮개와 운화삽으로 장식을 하니 이는 초빈하는 상여줄일 뿐이었다. 󰡔家語󰡕를 살펴봄에 孔子께서 탄생하신지 3살만에 叔梁紇이 사망하였으니, 이는 어려서 고아가 된 것이다. 그러나 顔氏가 사망하였을 적에는 孔子께서 성립하신지가 오래되었다. 聖人은 人倫의 극치이니, 어찌 어머니가 세상(일생)을 마치토록 아버지 葬事지낸 묘지를 찾아 구하지 않고서 어머니를 빈소차림에 이르러서도 아직까지도 아버지 묘소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또 어머니가 돌아가자(사망하자) 사거리 길에 빈소를 차린 것은 반드시 집이 없어서 도로에서 客死한 사람이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지, 聖人은 禮法의 宗主인데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司馬遷이 野合했다는 거짓말을 해서 顔氏가 숨겨가지고 말해주지 않했다고 하니, 鄭玄의 註에 그 말을 따라서 후세의 의혹을 불어나게하여 또 이를테면 堯舜과 瞽瞍의 일에 있어서 세속이 異論을 이겨내지 못하니, 孟子가 말씀하여 그걸 물리침이 아니었더라면 후세에 뭐라고 말하였겠는가? 이 經이 여러 사람들의 기록한 바에서 뒤섞여 나왔으니 그 사이에 가히 근거하여 사실을 삼을 수 없는 것이 많다.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孔子께서 만약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 癰疽와 內侍인 瘠環에게 주인을 삼았다면은 어떻게 써 孔子가 되겠느냐고 하셨는데, 나도 또한 이르기를 孔子가 종신토록 아버지의 묘소를 몰랐다면은 어떻게 써 孔子가 되겠느냐고 하였다. 그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기에 변론을 아니할 수가 없노라.
鄰有喪이어든 舂不相하며 里有殯이어든 不巷歌니라
이웃에 喪事가 있으면(이웃집에 초상이 났으면) 방아 찧을 적에 방아타령을 부르지 아니하며 마을에 빈소가 차려 있으면은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지 아니해야 한다.
설명은 「曲禮」에 나타나 있다.
喪冠은 不緌니라
喪中의 冠은 갓끈을 늘어뜨리지 않는다.
冠은 반드시 비녀가 있어서 그 冠을 꿰어 갓끈을 비녀에 매달아 턱을 따라서 밑에서 묶은 것은 纓이라고 이르고, 그 나머지 부분을 앞에 치렁치렁 드리우는 것을 緌라고 이른다. 喪中의 冠은 끈을 드리우지 않는 것은 대개 장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有虞氏는 瓦棺하고 夏后氏는 堲周하고 殷人은 棺槨하고 周人은 牆置翣하니라
有虞氏는 기와(오지로 만든) 棺을 사용하였고, 夏后氏는 벽돌로 棺의 壙中을 둘러쌓은 것을 사용하였고, 殷나라 사람은 內棺·外槨을 사용하였고, 周나라 사람은 棺옆의 널안에 운화삽을 넣었다.
瓦棺은 비로소 섶을 입히지 아니한 것이다. 堲周는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土周니, 堲이라는 것은 불에 타고 남은 것이니, 대개 흙을 다루어가지고 벽돌을 만들어 棺의 구덩이에 사방으로 둘러쌓은 것이다. 殷나라 세상에서는 비로소 內棺과 外槨을 만들어서 사용하였고, 周나라 사람은 또 棺을 장식하는 도구를 만들었으니, 또 대체 문채가 증가한 것이다. 牆은 棺 막이이다. 柳(棺 막이)은 모이는 것이니, 여러 장식품이 모이는 바이다. 이로써 널을 가리워 막는 것이 담장이 집안을 가리워 막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牆이라고 이른다. 翣은 부채 모양과 같은데, 黼가 되게 그리는 것이 있고 黻이 되게 그리는 것도 있고 구름 기운을 그린 것도 있는데 많고 적음의 수효는 貴賤의 등급에 따라서 한다.
周人은 以殷人之棺槨으로 葬長殤하고 以夏后氏之堲周로 葬中殤下殤하고 以有虞氏之瓦棺으로 葬無服之殤하니라
周나라 사람은 殷나라 사람의 內棺과 外槨으로써 長殤(16~19살에 일찍 죽은 사람)을 葬事지내 주었고, 夏后氏의 堲周로써 中殤(12~15살에 일찍 죽은 사람)과 下殤(8~11살에 일찍 죽은 사람)을 葬事지내 주었고, 有虞氏의 瓦棺으로 服이 없이 일찍 죽은 사람(7살 이전에 죽은 사람)을 葬事지내었다.
16~19살 까지가 長殤이 되고, 12~15살 까지가 中殤이 되고, 8~11살 까지가 下殤이 되고, 7살 이하는 服이 없는 殤이 되고, 태어난 지 아직 석달이 채 못된 것은 殤이 되지를 않는다.
夏后氏는 尙黑하야 大事에 歛用昏하며 戎事에 乘驪하며 牲用玄하고 殷人은 尙白하야 大事에 歛用日中하며 戎事에 乘翰하며 牲用白하고 周人은 尙赤하야 大事에 歛用日出하며 戎事에 乘騵하며 牲用騂하니라
夏后氏는 검은 색을 숭상하여 大事(喪事)에 大歛·小歛을 어둠을 이용하였으며 戎事(군사)에는 검은 말을 탔으며 희생은 검은 짐승을 사용하였고, 殷나라 사람은 흰 것을 숭상하여 大事(喪事)에 大歛·小歛을 한낮을 이용하였으며 군사에는 흰말을 탔으며 제사의 희생은 흰 짐승(희생)을 사용하였고, 周나라 사람은 붉은 색을 숭상하여 大事(喪事)에 大歛·小歛을 해가 돋아나올 때를 이용하였으며 군사에는 절따말을 탔으며 희생은 붉은 것을 사용하였다.
禹임금은 治水의 功으로써 천하를 얻었기 때문에 물의 색깔을 숭상하였고, 湯임금은 정벌로써 천하를 얻었기 때문에 쇠의 색깔을 숭상하였고, 周나라가 적색을 숭상한 것은 불이 金을 이긴 것을 취한 것이다. 大事는 喪事이다. 驪는 검은 색이요, 翰은 흰 색이니, 󰡔周易󰡕에서 말하기를 흰 말이 하얗다고 하였다. 騵(절따말)은 붉은 말로써 갈기와 꼬리가 검은 것이다.
穆公之母卒커늘 使人問於曾子曰如之何오 對曰申也는 聞諸申之父호니 曰哭泣之哀와 齊斬之情과 饘粥之食은 自天子達이니 布幕은 衛也오 縿幕은 魯也니라
魯나라 穆公의 어머니가 逝去하자, 사람을 시켜서 曾子의 아들에게 질문하도록 하기를 “어떻게 해야(葬事를 지내야) 되겠오?” 대답하기를 “申(나)은 申(나)의 아버지에게 듣자하니, 말씀하시기를 소리내어 哭하고 소리없이 우는 슬픔과 齊衰服과 斬衰服의 人情과 된죽과 묽은 죽을 먹는 것은 天子로부터 庶人에게 까지 공통되나니 삼베로 만든 장막은 衛나라 풍속이고, 흰 명주로 만든 장막은 魯나라의 풍속입니다.”
穆公은 魯나라 임금이고, 申은 曾子의 아들이다. 된 것을 饘이라고 하고, 묽은 것을 粥이라고 한다. 장막은 써 빈소의 棺 위를 덮는 것이다. 衛나라는 삼베로써 장막을 만들었으니 諸侯의 禮이고, 魯나라는 흰 명주로 장막을 만들었으니 아마도 天子의 禮를 僭用한 성싶다.
晉獻公이 將殺其世子申生이어늘 公子重耳謂之曰子는 蓋言子之志於公乎아 世子曰不可하니라 君이 安驪姬하시나니 是我傷公之心也니라
晉나라 獻公이 장차 그 世子 申生을 죽이려고 하자, 公子 重耳가 그 申生에게 일러 말하기를 “당신은 어찌 당신의 뜻을 임금(父王)에게 말씀드리지 아니하십니까?” 世子가 말하기를 “불가하오. 임금(父王)께서 驪姬를 편안히 여기고 계시는데 (내가 진실을 말하면은) 이는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은 상세한 것이 󰡔左傳󰡕에 나타나 있다. 重耳는 申生의 이복 동생인데, 바로 文公이다. 蓋은 어찌 아니함이다. 그 참소를 밝히면은 驪姬가 반드시 처형당하게 되리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편안히 여기는 바를 잃어버려 그 마음을 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曰然則蓋行乎아 世子曰不可하니라 君謂我欲弑君也라하시니 天下에 豈有無父之國哉리오 吾何行如之리오
重耳가 말하기를 “그렇다면은 어찌 떠나가지 않오?” 世子가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임금께서 내가 임금을 시해하려 한다고 여기시니, 천하에 어찌 아버지 없는 나라가 있겠오? 내가 어디로 간들 갈 수가 있겠오?”
重耳가 또 그 다른 나라로 달아날 것을 권고하였으되 申生이 따르지를 아니하였다. 何行如之는 떠나가되 장차 어디로 가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使人辭於狐突曰申生有罪하야 不念伯氏之言也하야 以至于死오이다 申生은 不敢愛其死어니와 雖然吾君老矣며 子少하고 國家多難이어늘 伯氏不出而圖吾君하나니 伯氏苟出而圖吾君이면 申生은 受賜而死라하고 再拜稽首乃卒하니 是以爲恭世子也라하니라
사람으로 하여금(사람을 시켜서) 狐突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申生이 죄가 있어서 伯氏(狐突)의 말을 유념하지 아니하여 써 죽음에 이르게 되었소이다. 申生(저)은 감히 그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거니와 비록 그렇지마는 우리 임금(아버지)께서 늙으셨으며 아들(奚齊)이 어리고 국가가 어려움이 많은데, 伯氏께서 出仕하여 우리 임금을 위하여 도모해 주지를 아니하니 伯氏가 만약 出仕하여 우리 임금을 위해 도모해 주신다면 申生은 은혜를 받고 죽겠습니다.”하고,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에 죽으니 이 때문에 恭世子(공손한 世子)라고 하였다.
狐突은 申生의 사부이다. 辭는 장차 떠나가려면서 가겠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대개 그와 더불어 영원히 작별하는 것이다. 申生이 스스로 목매어 죽어 아버지를 不義에 빠뜨렸으니, 효도가 될 수가 없다. 다만 諡號를 恭으로 얻었을 뿐이다. ○䟽에 말하기를 鄭玄의 註에 이르기를 伯氏는 狐突의 別氏라고 한 것은 狐가 이 總氏이기 때문에서이다. 伯仲은 이 형제의 字이니, 字가 伯인 사람을 伯氏라고 이르고, 字가 仲인 사람을 仲氏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傳에 이르기를 叔氏는 그 잊어버렸는가 하였고, 또 이 아래 글에서 이르기를 叔氏가 오로지 禮로써 사람에게 허락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한 사람의 몸이 字는 별도로 氏가 되는 것이다.
魯人이 有朝祥而莫歌者어늘 子路笑之한대 夫子曰由아 爾責於人이 終無已夫아 三年之喪이 亦已久矣夫니라 子路出커늘 夫子曰又多乎哉아 踰月則其善也니라
魯나라에 어떤 사람이 아침에 大祥을 지내고 저녁에 노래부르는 사람이 있자, 子路가 그를 비웃으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由야! 네가 남에게 責望하는 것이 마침내 너무하지 않느냐? 삼년의 喪服을 입은지가 또한 이미 오래되었구나.” 子路가 밖으로 나가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많이 있지 않느냐? 한달만 넘겼으면 그 좋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朝祥은 아침에 大祥 祭祀의 禮를 거행한 것이다. 아침에 大祥을 지내고 저녁에 노래부르는 것이 진실로 禮가 아님이 된다. 다만 禮敎가 衰廢할 시대에 이 사람이 홀로 능히 삼년의 喪服을 거행한 까닭 때문에 夫子께서 子路의 비웃음을 억제하셨으나 그러나 마침내 바른 禮는 아니었다. 학자들이 의심을 이룰까 두려웠기 때문에 子路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려 이에 그걸 바르게 말씀하셨으니, 그 뜻은 명칭은 삼년의 喪服이라고 하지마는 실지는 25개월이니, 지금 이미 24개월이 됐다. 지금 가히 노래부를 수 있는 달과의 거리가 또 어찌 날짜와 달이 많이 남아 있겠느냐? 다만 다시 한달만 넘기고서 노래를 불렀더라면은 착함(잘함)이 되었을 것이다고 하셨으니, 대개 聖人이 여기에서 비록 그에게 禮를 구비함으로써 책망하지는 않으셨지마는 또한 일찍이 그에게 變禮로써 허여해 주시지도 아니하셨다.
魯莊公이 及宋人으로 戰于乘丘할새 縣賁父御하고 卜國이 爲右러니 馬驚敗績하야 公隊어시늘 佐車授綏한대 公曰末之라 卜也여 縣賁父曰他日에 不敗績而今敗績하니 是는 無勇也라하고 遂死之하다 圉人이 浴馬하니 有流矢가 在白肉이어늘 公曰非其罪也라하시고 遂誄之하시니 士之有誄自此始也니라
魯나라 莊公이 宋나라 사람과 더불어 乘丘 땅에서 전쟁을 할 적에 縣賁父가 莊公의 수레를 몰고 卜國이 오른쪽에 타는 兵士가 되었었는데 말이 놀래어 패전하여 莊公이 수레에서 떨어지자, 佐車(예비 수레)에서 수레 손잡이 끈을 드리니, 莊公이 말하기를 “미약하구나. 卜이여” 縣賁父가 말하기를 “전일에는 敗績하지 않다가 오늘 敗績하였으니 이는 용맹이 없는 것이다.”하고 마침내 전투에서 죽었다. 그런데 말을 기르는 사람이 말을 목욕시키는데 빗나간 화살이 넓적다리의 흰 살속에 박혀 있자, 莊公이 말하기를 “그의 죄가 아니었다.”하시고, 마침내 그에게 誄辭(哀悼辭)를 지으셨으니, 士에게 誄辭가 있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乘丘는 魯나라 땅인데 전쟁이 莊公 10년에 있었다. 縣과 卜은 모두 氏이니, 무릇 수레 오른쪽에 타는 병사는 勇力이 있는 사람으로써 그를 삼는다. 크게 무너지는 것을 敗績이라고 한다. 莊公이 수레에서 떨어지자, 예비 수레에서 그에게 수레 손잡이 끈을 주어 올라갔으니 이는 예비 수레에 올라탄 것이다. 佐車는 副次 수레이다. 綏는 끌어 잡고서 수레에 올라가는 새끼(손잡이 끈)이다. 末之卜(미약하구나. 卜이여)이라는 것은 卜國이 微末하여 용기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두 사람이 마침내 전투에 달려들어 전사하였다. 圉人은 말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말을 목욕시킴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빗나간 화살이 말 넓적다리 사이의 살에 박혀(명중되어)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죄가 아닌 줄을 알았다. 살아서 官爵이 없으면은 죽어서도 시호가 없나니 殷나라에서는 大夫 이상이 官爵이 되었고 士는 비록 周나라의 官爵이지마는 지위가 낮아서 시호에 해당되지 않는데, 莊公이 의리로써 일어나서 마침내 그 적에 달려들어 죽은 功에 誄辭를 지어서 시호를 삼았다. ○方氏가 말하기를 誄辭의 의리는 선행의 실상을 나타내어 꾸미려고 아니한 것이니, 시호는 誄辭의 말을 인하여 별도로 지으나니 誄辭가 있으면은 시호도 있다.
曾子寢疾病이어시늘 樂正子春은 坐於牀下하고 曾元曾申은 坐於足하고 童子는 隅坐而執燭이러니
曾子께서 병으로 몸져 누워 위중하시게 되었는데, 樂正子春은 침상 아래에 앉아 있고, 曾元과 曾申은 발 밑에 앉아 있었고 童子는 방 구석에 앉아서 촛불을 잡고 있었는데
病이라는 것은 병이 심한 것이다.(위독한 것이다.) 子春은 曾子의 弟子이고 元과 申은 曾子의 아들이다.
童子曰華而睆하니 大夫之簀與인저 子春曰止하라 曾子聞之하시고 瞿然曰呼라 曰華而睆하니 大夫之簀與인저 曾子曰然하니라 斯는 季孫之賜也니 我未之能易也로소니 元은 起하야 易簀하라 曾元曰夫子之病이 革矣라 不可以變이니 幸而至於旦이어시든 請敬易之호리이다 曾子曰爾之愛我也不如彼로다 君子之愛人也는 以德하고 細人之愛人也는 以姑息하나니 吾何求哉리오 吾得正而斃焉이면 斯已矣니라 擧扶而易之하야늘 反席未安而沒하시다
童子가 말하기를 “화려하고 고우니 大夫의 대자리인가 봅니다.” 子春이 말하기를 “그만두라.(그런 소리 그만해라.)” 曾子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깜짝 놀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童子가 말하기를 “화려하고 고우니 大夫의 대자리인가 봅니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이 대자리는 季孫이 준 것인데, 내가 그것을 능히 바꿀 수가 없으니 元은 일어나서 대자리를 바꾸어라.” 曾元이 말하기를 “아버님의 병환이 위급합니다. 가히 써 바꿀 수가 없으니 다행히 내일 아침에 이르시면은 청컨대 공경히 그 대자리를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저 童子만 못하구나. 君子가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德으로써 하는 것이고, 小人이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그럭저럭한 것으로써 하는 것이니 내가 무엇을 구하겠느냐? 내가 바름을 얻고서 죽으면은 이에 그만이니라.” 그러자 들어 붙들고서 그 대자리를 바꾸어 드리자 돗자리로 돌아오셔서 미쳐 안정하지도 못하고서 운명하셨다.
華라는 것은 그림으로 장식한 것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요, 睆이라는 것은 마디와 눈이 평평하고 선명한 것이다. 簀은 대자리이다. 止는 童子로 하여금 말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瞿然은 놀라는 바가 있는 듯 한 것이다. 呼라는 것은 탄식하면서 호흡을 내쉬는 소리이다. 曰은 童子가 재차 말함이다. 革은 위급함이다. 變은 변동함이다. 彼는 童子를 이른다. 童子가 禮를 알고서 曾子께서 일찍이 大夫가 되지 아니하셨으니 어찌 가히 大夫의 대자리에 누워계실 수 있겠느냐고 하니 曾子께서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옳게 여기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 대자리는 魯나라 大夫 季孫이 준 것이다 하시고 이에 반드시 그것을 바꾸려고 하시어 그걸 바꾸고서 운명하셨으니 가히 바른 데에서 돌아가셨다고 이를 수 있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자리를 바꾼 것과 갓끈을 맺은 것이 모름지기 우열을 논할 수는 없지마는 다만 옛날 사람이 禮法에 대하여 삼가하여 죽고 사는 것의 變道로써 그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아니함이 이와 같았던 것을 본다면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한가지라도 의롭지 않는 것을 행하며, 한사람이라도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천하를 얻는다고 하더라고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갖도록 함이니, 이곳이 바로 긴요한 부분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季孫이 준 것과 曾子가 받은 것이 모두 非禮가 되는데 아마도 習俗대로 답습하여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는데 능히 바로잡지를 못하였을 뿐이다. 다만 그 병환이 위중하여 가히 써 바꿀 수 없을 때에 이르러서야 한 번 사람의 말을 들으시고 반드시 들어 부축하여서 그걸 바꾸도록 하셨으니, 大賢이 아니라면은 능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일의 切實하고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터럭끝만한 잠깐사이에 있다.
始死에 充充하야 如有窮하며 旣殯하얀 瞿瞿하야 如有求而弗得하며 旣葬하얀 皇皇하야 如有望而弗至하고 練而慨然하며 祥而廓然이니라
부모님이 처음 돌아가셨을 적에는 마음이 꽉 막혀 막다른 데에 다다름이 있는 것 같으며, 이미 빈소를 차리게 되면은 눈이 두리번거려져 찾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한 듯 하며, 이미 葬事 지내면 허둥지둥 기다림이 있는데도 이르지 아니한 듯 하고(오지 않는 것 같고), 練祥(小祥)을 지내면 개탄스러우며 大祥을 지내면 허전한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일이 다하고 이치가 屈하는 것이 막다름이 된다. 어버이가 돌아가심에 효자가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哭을 할 적에 마음과 몸이 꽉 막히고 구부려져서 급히 가는데 길이 막히어 다시 갈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 막다르고 급한 용모이다. 瞿瞿는 눈이 빨리 쳐다보는(두리번거리는) 모양이니, 잃어버린 것이 있어서 그걸 찾는데도 얻지 못한 듯 함과 같다. 皇皇은 栖栖(허둥지둥함)와 같다. 어버이가 草土로 돌아갔으니, 효자의 마음이 의탁할 데가 없어 그 분이 오기를 바램이 있는데 그 분이 오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다. 小祥에 이르면 다만 세월이 말이 달린 듯이 빠름을 개탄하고, 大祥에 이르면은 情意가 허전하여 즐겁지 않을 뿐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아래 편에 顔丁의 居喪함을 기록함에 있어서는 허둥지둥함을 부모님이 막 돌아가셨을 때에 말하였고, 개탄스러움을 이미 葬事지낼 때 말하였으며, 問喪에서는 허둥지둥함을 집으로 돌아와 哭함에서 말하였으니, 말한 바가 동일하지 않는 것은 대개 君子가 終身의 喪事가 있으니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찌 더하고 덜함이 있겠는가? 先王이 禮를 마련하심이 대략 그걸 조절할 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한 바가 꼭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邾婁復之以矢는 蓋自戰於升陘始也니라
邾婁 나라가 화살로써 呼復한 것은 대개 升陘에서 싸움으로부터 시작된 것인가 싶다.
魯나라 僖公 21年에 邾나라 사람과 더불어 升陘 땅에서 전쟁하였는데 升陘은 魯나라 땅이다. 邾나라 군대가 비록 승전하였지마는 사상자가 많아서 軍中에 의복이 없으니 呼復한 사람들이 화살을 사용하였다. 唐나라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이르기를 邾나라 사람이 邾를 부르는 소리가 婁라고 하기 때문에 邾婁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대체 사랑을 다하는 도리와 기도하고 보답 제사 지내는 마음으로써 효자가 능히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서 그 다시 소생하기를 바래나니, 병들어서 죽었을 적에는 그 呼復을 행하는 것이 가하거니와 칼날 밑에 肝과 腦가 땅바닥에 뿌려졌는데 어찌 다시 소생할 리가 있겠는가? 呼復을 할 적에 화살을 사용하는 것이 또한 거짓이 아닌가?
魯婦人之髽而吊也는 自敗於臺鮐始也니라
魯나라 婦人들이 북상투를 쪽지고서 吊問한 것은 臺鮐에서 패전함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吉할 때에는(평상시에는) 머리싸개로써 머리를 싸고 凶事가 있을 적에는 머리싸개를 제거하고서(벗고서) 그 상투를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북상투라고 이른다. 臺鮐의 전쟁은 魯나라 襄公 4年에 있는데 아마도 邾나라 사람에게 패전한 바가 된 것인 성싶다. 북상투로써 弔問을 아니하는 것인데 당시에 집집마다 喪事가 있었기 때문에 북상투를 틀고 서로 弔問한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화살은 써 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요 써 呼復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북상투는 써 喪禮에 시행하는 것이요 써 弔問에 시행하는 것이 아닌데 인습하여 고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南宮縚之妻之姑之喪에 夫子誨之髽曰爾毋從從爾하며 爾毋扈扈爾하라 蓋榛以爲笄호대 長이 尺이오 而總이 八寸이니라
南宮縚의 아내의 시어머니의 喪事에 孔子께서 그 姪女에게 북상투를 쪽지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쫑쫑이 하지도 말며 너는 넓적하게 하지도 말라. 대개 개암나무로써 비녀를 만들되 길이가 1자이고 묶은 머리가 8寸인 것이다.”
南宮縚의 아내는 孔子님의 형님의 딸이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심에 孔子께서 그에게 북상투를 트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從從은 높은 것이요, 扈扈는 넓은 것이니, 너의 북상투를 가히 너무 높게 할 수도 없으며 가히 넓게 할 수도 없음을 말한 것이다. 또 비녀만드는 것과 머리묶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笄는 바로 비녀이다. 吉禮의 비녀는 한자 두치이고 喪禮의 비녀는 한자이다. 斬衰의 비녀는 화살대를 사용하니 대나무의 작은 것이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모두 齊衰服 不杖期를 입는데 마땅히 개암나무로 비녀를 만들어야 된다. 머리묶는 것을 總이라고 이르니, 베로써 그 머리싸개를 만든다. 이미 그 밑과 끝을 묶어서 뭉뚱거리고 나머지 것은 상투 뒤에로 드리우니 그 길이가 8寸이다.
孟獻子禫에 縣而不樂하며 比御而不入한대 夫子曰獻子는 加於人一等矣라하시다
孟獻子가 禫祭를 지낸 뒤에 현악기를 달아 놓고 음악을 연주하지 아니하며, 부인과 동침할 수 있음에 이르러서도 안방에 들어가지 아니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孟獻子는 일반 사람보다 한 등급이 낫다.”고 하셨다.
孟獻子는 魯나라 大夫 仲孫蔑이다. 禫은 제사 이름인데, 禫이라는 것은 담담하게 평안한 뜻이다. 大祥 뒤에 한달을 띄어서 禫祭를 지내기 때문에 한달을 중간에 띄우고서 禫祭를 지낸다고 이른 것이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大祥 달의 가운데에 지낸다고 한 것이 틀렸다. 「小記」에 이르기를 一代 이상을 띄어서 合祔한다고 하였으니, 또한 一世를 띄운 것을 이른다. 禮에 大夫는 양쪽에 악기를 달아놓으나니 악기를 달아놓고서 연주하지 않는 것은 다만 그걸 달아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는 것이다. 부인과 동침할 수 있음에 이르러서도 안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비록 부인이 마땅히 모셔야하는 것에 차례가 이르렀으나 그래도 침실에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一說에 比는 미침이다. 어버이 喪服을 밖에서 벗었기 때문에 孔子께서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셨다.
孔子旣祥五日에 彈琴而不成聲하시고 十日而成笙歌러시니 有子는 蓋旣祥而絲屨組纓이러라
孔子께서는 이미 大祥을 지낸 뒤 5일만에 거문고를 탔는데 소리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셨고, 10일만에 笙簧과 노래가 이루어지셨는데, 有子는 아마 이미 大祥을 지내자 실로 신코를 장식한 신을 신고 오색실로 꼰 끈으로 갓끈을 만들었다.
有子는 孔子의 제자 有若이다. 禮에 이미 大祥을 지냄에 흰 신에 신꼬 장식이 없고 신 안에 흰 것으로 선을 두르고 신 끈의 무늬가 다섯가지 채색인데, 지금 바야흐로 大祥을 지내자 바로 실로써 신의 장식을 만들었고 오색 끈으로써 갓끈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옷의 吉한 것이다. 이 두가지 것은 모두 그 吉服으로 변함이 빠른 것을 기롱하였다. 그러나 蓋(아마)라는 것은 의심하는 말이니, 아마도 기록한 사람이 역시 이 전에 들은 것에서 얻은 것인 성싶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의문하였다. 孔子의 일을 인용한 것은 그로써 남은 슬픔이 잊혀지지 아니함을 나타낸 것이다.
死而不吊者三이니 畏와 厭과 溺이니라
사람이 죽음에 吊問가지 아니한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두려워하여 죽은 것과 눌려 죽은 것과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싸우는 전쟁터에서 용기가 없는 것이 효도가 아니니 그 두려워하여 죽은 사람이 있겠는가? 君子는 바위로 쌓은 담장 밑에는 서있지 아니하나니 그 눌려서 壓死당한 사람이 있겠는가? 효자는 배로 건너고 헤엄쳐 건너지 아니하나니 그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겠는가?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은 세가지 것은 모두 正命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先王이 禮를 제정함에 있어서 弔問하지 않는 바에 있다. ○應氏가 말하기를 情이 후한 사람은 어찌 弔問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말은 쉽게 이룰 수 없을 뿐인 것이다. 만약에 나라를 위하여 전쟁에서 죽었다면은 또한 弔問을 아니할 이치가 없나니, 예컨대 齊나라 莊公이 杞梁의 아내에 대하여 일찍이 弔問을 아니하지는 않았다. ○나는 先儒의 말을 듣자하니, 이치에 밝으면 가히 써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치를 봄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이 두려워하여 빠져나갈 줄을 모르고서 허다히 스스로 도랑 가에서 목매어 죽으니 이는 참으로 무서워함에서 죽는 것이다. 오로지 戰陳의 두려움만을 가리키기 어려운 성싶다.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싸우다가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함이다고 한다.
子路有姊之喪이러니 可以除之矣而弗除也한대 孔子曰何弗除也오 子路曰吾寡兄弟而弗忍也로이다 孔子曰先王制禮는 行道之人이 皆弗忍也니라 子路聞之하고 遂除之하니라
子路가 누님의 喪服이 있었는데, 가히 써 그 喪服을 벗을 만 한데도 벗지를 아니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服을 벗지 아니하는고?” 子路가 말하기를 “제가 형제간이 적어서 차마 벗지 못하겠습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先王께서 제정한 禮는 道를 행하는 사람이 모두 그 차마 벗지 못하는 것이다.” 子路가 그 말씀을 듣고 마침내 그 服을 벗었다.
道를 행하는 사람이 모두 어버이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침내 그 服을 벗는 것은 先王의 제도를 감히 어길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太公이 封於營丘하야늘 比及五世히 皆反葬於周한대 君子曰樂은 樂其所自生이오 禮는 不忘其本이니 古之人이 有言曰狐死正丘首는 仁也라하니라
太公이 營丘에 봉해졌는데 5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周나라로 되돌아가 葬事를 지냈다. 君子가 말하기를 “음악은 그 기인하여 태어남을 즐거워하는 것이요, 禮는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니,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여우가 죽음에 바르게 굴이 있는 언덕으로 머리를 향하는 것은 仁이다.’고 하였다.”
太公이 비록 齊나라에 봉해졌지마는 周나라에 머물러서 太師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자 마침내 周나라에 葬事를 지내니 자손들이 감히 그 근본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또한 齊나라로 부터서 周나라에 되돌아와 葬事를 지내어 써 先祖의 묘역에 따라서 5代만에 親誼가 다한 뒤에야 멈추었다. 삶을 즐거워하고 근본에 돈독히 함은 禮樂의 방도이다. 태어나서 여기에서 즐거워하였는데 어찌 가히 죽어서 이 근본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여우가 비록 하찮은 짐승이지마는 언덕은 그 굴을 파 은신하는 땅이니 이 또한 살아서 여기에서 즐거워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러서 오히려 그 머리를 바르게 해서 언덕으로 향하니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근본을 배반하고 처음을 잊어버리는 것은 仁한 사람의 마음씀이 아니기 때문에 仁으로써 그걸 지목하였다. ○䟽에 말하기를 周公이 魯나라에 봉해졌는데 그 자손들이 周나라로 反葬하지 아니한 것은 둘째 아들(君陳)이 周나라에 있으면서 대대로 그 采地를 지켰기 때문에서이니, 春秋에 周公이 그것이다.
伯魚之母死커늘 期而猶哭한대 夫子聞之曰誰與오 哭者여 門人曰鯉也로소이다 夫子曰嘻라 其甚也로다 伯魚聞之하고 遂除之하니라
伯魚의 어머니가 죽자 期年이 지났는데도 오히려(그때까지) 哭을 하자, 孔子께서 그 哭소리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구냐? 哭한 사람이.(哭한 사람이 누구냐?)” 門人이 말하기를 “鯉입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아 그 심하구나.” 그러자 伯魚가 그 말씀을 듣고 마침내 그 哭을 아니하였다.
伯魚의 어머니가 축출당하여 죽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심에 어머니를 위하여 期年服을 입고서 禫祭가 있고 쫓겨난 어머니에 대해서는 禫祭가 없다. 伯魚가 이에 夫子의 後嗣가 된 아들일진댄 禮에 服이 없으니 期年이 되었음에 가히 哭을 아니할 수도 있는데 그때까지 哭을 하였다. 孔子께서 그 때문에 그 심하게 탄식하시었다.
舜이 葬於蒼梧之野하실새 蓋三妃未之從也하니 季武子曰周公이 蓋祔하니라
舜임금이 蒼梧의 들에서 葬事지내질 적에 아마 세 왕비가 그에 따라서 祔葬되지 아니한 성싶은데, 季武子가 말하기를 “周公이 아마 祔葬한 성싶다.”고 하였다.
天子는 四海로써 집을 삼으니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崩御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蒼梧의 들에 葬事를 지냈다. 䟽에 이르기를 舜임금의 큰 왕비는 娥皇인데 아들이 없었고, 둘째 왕비는 女英인데 商均을 낳았고, 셋째 왕비는 癸比인데 두 딸을 낳았는데 宵明과 燭光이다. 三妃가 뒤에 모두 舜임금의 葬地에 祔葬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기록한 사람이 말하기를 合葬한 일이 古人은 있지 아니하였고 따라서 季武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周公 이래로 비로소 祔葬하였다고 했다. 󰡔書經󰡕에 승하하여 이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蔡氏가 말하기를 󰡔史記󰡕에는 舜임금께서 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하였고, 孟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鳴條 땅에서 승하하였다고 하셨으니, 누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지금 零陵 九嶷에 舜임금 무덤이 있다.
曾子之喪에 浴於爨室하니라
曾子의 喪事에 부엌에서 (시신을) 목욕을 시켰다.
「士喪禮」에 正寢의 방에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부엌에서 목욕시키는 문자는 없다. 舊說에 曾子께서 曾元이 대자리 바꾸는 것을 사양한 까닭으로 그를 겸양하고 검소함으로써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리에 되돌아와서 미처 안정하지도 못하고 운명하셨으니 반드시 말씀이 여기에 언급됨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과연 曾子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사람 자식된 사람이 또한 어찌 차마 禮아닌 것을 따라서 그 어버이를 천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억측한 말로써 단정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그걸 보류해 두어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大功엔 廢業이니 或曰大功엔 誦可也니라
大功服에는 학업을 정지해야 하나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大功엔 글을 외우는 것은 괜찮다.”고도 한다.
業이라는 것은 몸이 익히는 바이니, 예컨대 춤을 배우는 것과 활쏘기를 배우는 것과 거문고와 비파를 배움과 같은 따위이다. 그걸 정지하는 것은 그 슬픔을 잊어버릴까 두려워서이다. 외우는 것은 입으로 익히는 바이니, 조금 잠시동안 그걸 함은 또한 괜찮지마는 그러나 或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또한 확정되지 않은 말이다.
子張이 病하야 召申祥而語之曰君子曰終이오 小人曰死니 吾今日에 其庶幾乎인저
子張이 병이 위중하여 申祥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君子의 죽음은 終이라고 이르고 小人의 죽음은 死라고 이르나니, 내가 오늘에야 그 거의 하였나 보다.”라고 하였다.
申祥은 子張의 아들이다. 終이라는 것은 시초를 대하여 말한 것이다. 死는 다 소멸하여 남음이 없음을 이른다. 君子는 행실이 이루어지고 德이 성립되어 시초도 있고 끝마침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終이라고 이르고, 小人은 온갖 물건과 더불어 함께 썩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死라고 이르나니, 세상을 마치도록 명성이 일컬어지지 않는 걸 싫어한 것이 이 때문에서이다. 子張이 이(죽음)에 이르러서야 또한 그 君子에 가까움을 스스로 믿었던 것이다.
曾子曰始死之奠은 其餘閣也與인저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맨처음(막) 죽었을 때의 奠은 그 찬장에 남아 있는 것으로 해야하는 성싶다.”
막 사망하였을 적에 건포·육장·단술로써 시신의 침상에 나아가 시신의 동쪽에 차려놓아 사망한 사람의 어깨에 당하여 신으로 하여금 의지하는 바가 있도록 해야 된다. 閣(찬장)은 써 음식을 올려놓는 것이니, 대개 살았을 때에 찬장 위에 올려놓아 남은 건포와 육장으로써 奠을 삼는다.
曾子曰小功에 不爲位也者는 是는 委巷之禮也니라 子思之哭嫂也에 爲位하야 婦人이 倡踊하야늘 申祥之哭言思也에도 亦然하니라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小功服에 哭하는 位次를 만들지 아니한 것은 이 시골 마을의 禮이다. 子思의 형수에 대하여 哭을 할 적에 위치를 만들어 부인이 먼저 뛰었는데 申祥이 言思에 대하여 哭을 함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委는 굽음이다. 曲巷은 좁은 골목 마을이라고 이른 것과 같다. 細民(平民)들은 좁은 골목 마을에서 거주하여 禮儀를 보지 못하여 비루하고 질박하여 절도와 문채가 없기 때문에 小功에 哭하는 位次를 만들지 않는 것은 이 꼬불꼬불한 시골 마을 안의 禮라고 기롱하였다. 言思는 子游의 아들이요, 申祥 아내의 형제간이다. ○馬氏가 말하기를 무릇 哭을 할 적에 반드시 位次를 만드는 것은 써 親䟽 恩紀의 차이를 차례한 것이니, 형수와 시아주버니가 服이 없어서 哭하는 位次를 만들지 때문에 服이 없으면서도 位次를 만든다고 말한 것은 오직 형수와 시아주버니가 대개 服이 없는 것은 써 남녀 가까운 혐의를 멀리한 것이요, 位次를 만든 것은 써 형제 안의 喪事의 친분을 두터이한 것이다. 子思가 형수에 대하여 哭을 할 적에 位次를 만들고 부인이 먼저 뛴 것은 부인은 서로 손아래 동서와 손윗 동서가 되는 의리가 있어 감히 자기의 服이 없는 까닭으로 그 보다 앞설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申祥이 言思에 대하여 哭함에 이르러서도 또한 子思와 같이 하였으니 대개 禮가 아니다. 아내의 형제는 바깥 초상이기 때문에 이미 服이 없으니, 哭位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禮記󰡕에 이르기를 아내의 형제로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사람이 죽으면은 정침의 방에서 哭을 하되 아들이 주체가 되어서 오른쪽 소매를 벗고 免冠을 쓰고서 哭하며 뛰면은 남편이 문 오른쪽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은 아내의 형제에 대하여 哭을 할 적에 아들로써 주체를 삼은 것은 嫂叔의 喪과 다르기 때문에서이다. 아들로써 주체를 삼는다면은 부인이 마땅히 먼저 뛰지 않아야 된다.
古者엔 冠을 縮縫이러니 今也엔 衡縫하나니 故喪冠之反吉이 非古也니라
옛적에는 冠을 세로로 꿰맸었는데 오늘날에는 가로(옆)로 꿰매니 그렇기 때문에 喪冠이 吉冠과 반대가 되는 것이 古禮가 아니다.
䟽에 이르기를 縮은 곧음(세로)이다. 殷나라는 질박함을 숭상하여 吉冠과 凶冠을 모두 세로로 꿰매었으니 세로로 꿰맨 것은 주름잡은 것이 주름이 적기 때문에 낱낱이 전후에 세로로 꿰매었다. 衡은 가로이다. 周나라는 문채를 숭상하여 冠이 주름잡은 것이 많아 하나하나 세로로 꿰매지 않고 다만 많이 주름을 잡아서 아울러 가로로 그걸 꿰매었다. 만약 喪冠은 질박하기 때문에 오히려 성글게 주름잡아 세로로 꿰매니 이는 吉冠과 더불어 서로 반대가 된다. 당시 사람들이 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喪冠이 吉冠과 더불어 반대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기록한 사람이 그걸 해석하여 이르기를 古禮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 周나라 시대에 이와 같이 한 뿐이다. 고대에는 吉凶冠이 함께 세로로 꿰매었다.
曾子謂子思曰伋아 吾執親之喪也할새 水漿을 不入於口者七日호라 子思曰先王之制禮也는 過之者는 俯而就之하며 不至焉者는 跂而及之케하니 故君子之執親之喪也에 水漿을 不入於口者三日하야 杖而后能起하나니라
曾子께서 子思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伋아! 내가 어버이의 喪禮를 집행할 적에 물과 미음을 입에 한 모금도 넣지 아니한 것이 일주일을 하였구나!” 子思가 말씀하시기를 “先王이 禮를 제정한 것은 그걸 지나친 사람에 있어서는 구부려서 그에 나아가도록 하였으며 이르지 못한 사람은 바라보아 그에 미치도록 하였으니 때문에 君子가 어버이의 喪禮을 집행함에 있어서 물과 미음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사흘동안하여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능히 일어날 수 있었다.”
사흘은 알맞은 제도이니, 일주일동안은 생명을 잃어버림에 가깝다. 부축하여 일어난 사람이 있고 지팡이를 짚고서 일어난 사람이 있고 얼굴에 때가 묻은 사람도 있다.
曾子曰小功을 不稅하면 則是遠兄弟는 終無服也니 而可乎아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小功服을 追服입지 않는다면은 이는 멀리 거주하는 再從 兄弟는 마침내 喪服이 없게 되리니 옳겠는가?”
追服입는 것은 세월이 지나가버려 비로소 그 죽음을 듣고 추후하여 그를 위하여 服을 입도록 한 것이니, 大功 이상은 그렇게 하고 小功은 가볍기 때문에 追服을 입지 않는데 曾子께서 禮에 근거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이 小功의 服을 追服입어 주지 않는다면은 再從 兄弟가 죽었을 적에 먼 지방에 있는 사람이 사망 소식을 들음이 항상 제때에 뒤늦으니 마침내 服이 없게 되리니 그 옳겠는가라고 하셨다. ○䟽에 말하기를 이는 正服 小功을 근거한 것이다. 「小記」에 이르기를 降服하여 緦麻와 小功에 있는 사람은 追服을 입고 그 나머지는 아니한다고 하였다.
伯高之喪에 孔子之使者未至어늘 冉子攝束帛乘馬而將之한대 孔子曰異哉라 徒使我不誠於伯高로다
伯高의 喪事에 孔子의 賻儀를 전달하는 使者가 아직 당도하지 않았는데, 冉子가 한 묶음 비단과 네 필 말을 대신 마련하여 그걸 보내주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상하게 되었구나. 공연히 나로 하여금 伯高에게 성실하지 못하게 하였구나.”라고 했다.
攝은 대츨함이다. 10箇가 한 묶음이 되니 매 묶음마다 5필이다. 대개 40尺 비단으로써 양쪽 끝으로부터 각각 말아서 중앙에 이르면은 매 말이마다 20尺이 1箇가 된다. 束帛이 이 10箇가 20尺씩이니, 지금 5필이다. 乘馬는 네 마리 말이다. 徒는 공연히이다. 伯高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마는 생각에 필시 孔子와 더불어 후하게 지낸 사람인 성싶다. 冉子가 재물로써 禮를 행할 줄만 알았고 聖人의 마음은 그 정성으로써 하고 그 물건으로 아니한 것을 몰랐다. 비록 스스로를 나무라는 말씀같지마는 실지는 冉子를 대단히 나무라신 것이다.
伯高死於衛하야 赴於孔子어늘 孔子曰吾惡乎哭諸오 兄弟란 吾哭諸廟하고 父之友란 吾哭諸廟門之外하고 師란 吾哭諸寢하고 朋友란 吾哭諸寢門之外하고 所知란 吾哭諸野하노니 於野則已䟽하고 於寢則已重하니 夫由賜也하야 見我하니 吾는 哭諸賜氏라하시고 遂命子貢하야 爲之主曰爲爾哭也來者란 拜之하고 知伯高而來者란 勿拜也하라하시다
伯高가 衛나라에서 사망하여 孔子에게 訃告가 오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디에서 그를 哭해야 할거나? 兄弟에 대해서는 내가 그를 사당에서 哭하였고, 아버지의 친구는 내가 사당 문 밖에서 哭을 하였고, 스승에 있어서는 내가 正寢에서 哭을 하였고, 친구에 있어서는 내가 正寢 문 밖에서 哭을 하였고,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에 있어서는 내가 그를 들에서 哭하였는데, 들에서 하면 너무 소원하고 正寢에서 함은 너무 중하니 대체 賜로 연유하여 나를 보았으니 나는 賜氏의 집에서 그를 哭하겠다.”하시고, 마침내 子貢에게 명령하여 그 주인이 되게 하고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哭한 것 때문에 弔問한 사람에게는 그에게 답배를 하고 伯高를 알고서 弔問온 사람은 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죽음을 알리는 것을 赴라고 하니, 訃告와 같다. 已는 너무함이다. ○馬氏가 말하기를 형제간은 할아버지에게 나와 안으로 친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당에서 哭을 하고, 아버지 친구는 아버지로 연관하여 밖으로 친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당 문 밖에서 哭을 하고, 스승은 자기의 德을 이루어주어 그 친함이 아버지에게 비견되는 까닭 때문에 正寢에서 哭을 하고, 친구는 자기의 仁을 도와주어 그 친함이 형제간과 비견되는 까닭 때문에 正寢의 문 밖에서 哭을 하고, 그냥 알고 지내는 바에는 또 친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서로 따라 다니는 사람이 있기도 하며 서로 揖하는 사람도 있으며 서로 물은 사람도 있으며 서로 만나보는 사람도 있으니 모두 범연히 사귀는 사람들이다. 孔子께서 伯高를 哭함에 있어서 들로써 너무 소원하다고하여 子貢으로써 주인을 삼으셨으니 君子가 禮를 행함에 있어서 그 哭하며 소리없이 우는 위치를 상세히 함이 이와 같은 것은 이 그 써 은미함을 표명하신 것인가 보다. ○方氏가 말하기를 伯高가 孔子에게 있어서 다만 알고 지내는 뿐만이 아니라 子貢으로 연유하여 만나보기 때문에 子貢의 집에서 哭을 하시고, 또 子貢으로 하여금 주인이 되도록하여 써 은혜가 연유한 바가 있음을 밝히셨으니 子貢을 위하여 왔다면은 생존한 사람을 위문하는 禮가 子貢에게 있고 伯高를 알고서 弔問왔다면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禮가 伯高에게 있는 것이니, 혹은 절하기도 하고 혹은 절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 무릇 써 그 실정에 알맞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夫子께서 가르쳐주시기를 이와같이 하셨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爲爾哭也來者는 한 귀절이다.
曾子曰喪에 有疾하야 食肉飮酒호대 必有草木之滋焉이라하시니 以爲薑桂之謂也니라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居喪 중에 병이 있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반드시 草木의 맛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생강과 계피를 이른 것으로 여긴다.
喪 중에 병이 있음은 居喪하다가 병을 만난 것이다. 그 즐겨먹지 아니한 까닭 때문에 草木의 맛있는 것을 첨가하니 생강이나 계피를 이른 것으로 여긴다한 一句는 바로 기록한 사람이 草木의 맛있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 또한 혹시 曾子께서 禮書의 말을 일컬으면서 스스로 그 말을 해석한 것인 성싶다.
子夏喪其子而喪其明이어늘 曾子吊之曰吾는 聞之也호니 朋友喪明則哭之라하시고 曾子哭한대 子夏亦哭曰天乎아 予之無罪也니라 曾子怒曰商아 女何無罪也리오 吾與女로 事夫子於洙泗之間이라가 退而老於西河之上하야 使西河之民으로 疑女於夫子케하니 爾罪一也오 喪爾親호대 使民未有聞焉케하니 爾罪二也오 喪爾子호대 喪爾明하니 爾罪三也어늘 而曰爾何無罪與리오 子夏投其杖而拜曰吾過矣로다 吾過矣로다 吾離羣而索居亦已久矣니라
子夏가 그 아들을 잃고서 그 시력을 상실해 버리자, 曾子께서 그를 弔問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듣자하니, 친구가 시력을 잃어버리면 哭을 한다더라.”하시고, 曾子께서 哭을 하시니, 子夏가 또한 哭하면서 말하기를 “天命인가? 나는 죄가 없네.” 曾子가 화를 내면서 말씀하시기를 “商아! 네가 어찌 죄가 없단 말인가? 내가 너와 더불어 선생님을 洙水와 泗水의 사이에서 섬기다가 물러나서 西河의 물가에 늙으면서 西河의 백성들로 하여금 너를 선생님으로 의심하도록 하였으니 너의 죄가 첫째이고, 너의 어버이를 여위었으되 백성들로 하여금 효행을 들은 것이 없게 하였으니 너의 죄가 두 번째이고, 너의 아들을 잃었으되 너의 시력을 상실해 버렸으니 너의 죄가 셋째인데, 네가 어째서 죄가 없단 말이냐?” 그러자 子夏가 그 喪杖 막대기를 던져버리고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네. 내가 여러 벗들에게서 떠나와 흩어져 거주한지가 또한 이미 오래되었네.”
哭을 심히 한 까닭 때문에 시력을 잃어버렸다. 洙水와 泗水는 魯나라 두 물이름이다. 西河는 子夏가 거주한 곳이다. 索은 흩어짐이다. 오래도록 벗을 친근히 아니했기 때문에 죄가 있으면서도 스스로 모른 것이다. ○張子가 말하기를 子夏가 실명해 버린 것이 필시 이 어버이의 居喪 시기에는 아직까지 기력이 强壯하다가 그 아들이 죽었을 적에는 기력이 점점 老衰하였기 때문에 시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曾子의 꾸짖음을 어찌 회피할 수 있겠는가? 너를 夫子로 의심하도록 한 것은 子夏가 孔子를 推尊하지 아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孔子인 것으로 의심하도록 하면서 子夏와 다른 것이 없으니, 曾子께서 夫子를 推尊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聖人을 존경할 줄을 알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方氏가 말하기를 子夏가 스승에 대해서는 높이지 아니하고 자기에 대하여 높이고 어버이에게는 隆崇하게 아니하고서 자식에게는 隆崇하게 하였으되 그러고서도 죄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曾子께서 그에 대하여 화를 내신 것이다. 그러나 君子는 벗으로써 仁을 돕나니 子夏가 세가지 죄가 있음에 이르게 된 것은 또한 붕우의 무리에서 떠나 흩어져 거처함이 오래됨으로 연유한 것이니, 무리에서 떠난 까닭 때문에 흩어져 산 것이다.
夫晝居於內어든 問其疾이 可也며 夜居於外어든 吊之可也니 是故로 君子는 非有大故어든 不宿於外하며 非致齊也며 非疾病也어든 不晝夜居於內니라
대체 낮에 正寢 안에 거주하면은 그 병이 났는가 물은 것이 옳으며, 밤에 中門 밖에서 거처하면은 弔問하는 것이 좋다. 그렇기 때문에 君子는 큰 變故(喪事)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은 밖에서 자지 아니하며, 재계를 극진히 한 것이 아니며 병이 아니라면 낮이나 밤에 正寢 안에서 거주하지 않는 것이다.
안이라는 것은 正寢의 안이고, 밖은 中門 밖을 이른다. 낮에 正寢 안에 거주하는 것은 병이 있는 것 같고, 밤에 밖에 거주하는 것은 喪事가 있는 것 같다. ○應氏가 말하기를 致齊하면서 正寢 안에 있는 것이 방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 또한 방 깊숙한 안에 단정하니 거처하면서 깊게 거처하는 것이다.
高子臯之執親之喪也에 泣血三年하야 未嘗見齒하니 君子以爲難하니라
高子臯가 어버이의 喪禮를 집행함에 있어서 삼년 동안 소리없이 울며 피눈물을 흘려 일찍이 이를 나타내지(웃지를) 아니하니 君子가 어렵다고 하였다.
子臯의 이름은 柴인데, 孔子의 제자이다. ○䟽에 말하기를 사람의 눈물이 나오는 것이 슬픈 울음소리로 인하여 나오게 되나니 피가 나오는 것은 소리를 연유하지 않는다. 子臯가 슬퍼하며 소리가 없으되 그 눈물이 또한 나오게 된 것이 피가 나오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泣血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크게 웃으면 잇몸이 드러나고 중간쯤 웃으면 이가 드러나고 빙그레 웃으면은 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衰與其不當物也론 寧無衰니 齊衰로 不以邊坐하며 大功으로 不以服勤이니라
衰服이 그 물건이 알맞지 아니한 것 보다는 차라리 衰服이 없어야 되나니 齊衰服으로 가장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大功服으로 수고로운 일을 服務하지 않아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物은 새와 올 및 法制와 長短과 幅數를 이른다. 邊坐는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喪服을 마땅히 공경하여 앉고 일어나는 것을 반드시 단정히 하고 가히 衰服을 입고서 한쪽에 치우치게 앉을 수 없는 것이다. 齊衰는 輕服인데도 이미 치우치게 앉지 않는데, 斬衰는 重服이므로 말하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다. 大功이 비록 가벼운 服이지마는 또한 衰服을 입고서 수고로운 일을 할 수가 없다. ○馬氏가 말하기를 衰服이 물건이 합당하지 않다면은 先王의 제도를 혼란시켜서 후세에 그 전함을 의심하게 되리니 衰服이 없으면은 禮는 비록 시행되지 않더라도 그 제도는 하나에 정해져가지고 그런대로 가히 써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물건이 합당하지 않는 것 보다는 차라리 衰服이 없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孔子之衛하사 遇舊館人之喪하사 入而哭之哀하시고 出하사 使子貢으로 說驂而賻之한대 子貢曰於門人之喪에도 未有所說驂이러시니 說驂於舊館이 無乃已重乎잇가 夫子曰予鄕者에 入而哭之할새 遇於一哀而出涕호니 予惡夫涕之無從也하노니 小子는 行之하라
孔子께서 衛나라에 가시어 옛날 여관 주인의 喪事를 당하여 들어가서 哭을 슬피하시고 밖으로 나오셔서 子貢으로 하여금 곁말을 벗겨내어 그 여관 주인 喪事에 賻儀하도록 하니, 子貢이 말하기를 “門人의 喪事에서도 곁말을 벗겨낸 바가 있지 않았었는데 옛날 여관 주인에게 곁말을 벗겨내는 (벗겨내어 賻儀하는) 것이 아마 너무 중하지 않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까 들어가서 哭을 할 적에 한 번 슬퍼함을(哀悼함에) 당하여 눈물이 나왔는데 내가 눈물이 유래가 없는 것을 싫어하노니 小子는 그대로 시행할지어다.”
舊館人은 예전에 여관의 주인이다. 수레를 멍에 매우는 사람이 가운데 두 마리 말이 服馬가 되고 양쪽 곁에 각각 한 마리 말이 驂馬(곁말)가 된다. 한 번 哀悼함을 만나 눈물이 나온 것은 人情이 또한 후한 것이다. 人情이 후한 것은 禮를 가히 야박하게 할 수 없는데 곁말을 벗겨내어 써 그를 위하여 賻儀를 하셨으니 무릇 그로써 人情에 알맞게 한 것 뿐이니 나그네로 떠돌아 다님에 다른 재물이 없기 때문에서이다. 눈물이 유래가 없음을 싫어한다는 從은 부터(유래)이다. 지금 만약 賻儀를 아니한다면은 이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옛 친구의 人情이 없어 이 눈물이 유래없이 나온 것이다. 그 이와같은 것을 싫어하므로 때문에 반드시 마땅히 부조의 禮를 행해야 된다. 舊說에는 孔子께서 주인이 한 번 슬퍼한 것을 만나 그것을 보고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하니, 말하자면 주인이 孔子가 온 것을 보고 슬픔이 대단하였다. 이는 후한 은혜로써 孔子를 대접한 것이다. 때문에 孔子가 그를 위하여 賻儀를 하였다. 그러나 윗글에 이미 들어가서 哭을 슬피하였다고 말하였을진댄 또 어찌 꼭 그 말을 에둘러가지고 주인의 슬픔을 만났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孔子在衛하실새 有送葬者어늘 而夫子觀之曰善哉라 爲喪乎여 足以爲法矣로소니 小子는 識之하라 子貢曰夫子何善爾也시니잇고 曰其往也엔 如慕하고 其反也엔 如疑로다 子貢曰豈若速反而虞乎리잇고 子曰小子는 識之하라 我未之能行也호라
孔子께서 衛나라에 계실 적에 葬禮를 보내는(葬事를 지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孔子께서 그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잘하는구나. 喪事를 치름이여. 족히 써 본보기가 될 만하니 小子들은 그것을 기억해 두려무나.” 子貢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무엇을 잘한다고 하십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葬事지낼 적에는 사모한 듯 하였고 그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의심한 듯 하였구나.” 子貢이 말하기를 “어찌 일찍 돌아와서 虞祭를 지낸 것만 하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小子는 그것을 기억해 두거라. 나도 그것을 능히 행하지를 못하였구나.”
葬事지내러 갈 적에는 사모하듯이 하고 葬事지내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의심하듯이 한 것은 이는 효자가 그 어버이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 지극한 人情이다. 子貢이 말하기를 의심하듯이 하면 오히려 귀가함이 더디니 속히 돌아와서 虞祭의 禮를 지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禮의 떳떳한 것만 알고 그 人情의 지극한 것을 몰랐던 것이다. 孔子께서 小子는 그것을 기억해 두라고 거듭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도 그것을 능히 실행하지를 못하였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顔淵之喪에 饋祥肉한대 孔子出受之하사 入彈琴而后에 食之하시다
顔淵의 喪事에 大祥 고기를 보내오자, 孔子께서 밖으로 나가서 그 고기를 받아가지고서 방안으로 들어와 거문고를 타신 뒤에 그 고기를 잡수셨다.
거문고를 타신 뒤에 잡수신 것은 대개 和平한 소리로써 감회가 있어 傷心된 심정을 흩어버린 것이다.
孔子與門人立하실새 拱而尙右하신대 二三子亦皆尙右어늘 孔子曰二三子之嗜學也여 我則有姊之喪故也라한대 二三子皆尙左하니라
孔子께서 門人들과 더불어 서 계실 적에 두 손을 맞잡으면서(拱手하시면서) 오른손을 위로 얹히자, 그러자 두 세 제자들이 또한 모두들 오른손을 위로 얹히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세 제자들이 배우기를 좋아함이여. 나는 누님의 喪事가 있었기 때문이다.”고 하시니, 두 세 제자들이 모두 왼손을 위로 얹혔다.
吉한 일은 왼손을 위로 얹히니 陽이기 때문이고, 凶事는 오른손을 위로 얹히니 陰이기 때문에서이다. 이는 대개 拱手하고 서있으면서 오른손이 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孔子蚤作하사 負手曳杖하사 消搖於門하사 歌曰泰山이 其頹乎인저 梁木이 其壞乎인저 哲人이 其萎乎인저 旣歌而入하사 當戶而坐어시늘 子貢이 聞之曰泰山이 其頹하면 則吾將安仰이며 梁木이 其壞하며 哲人이 其萎하면 則吾將安放고 夫子殆將病也로다하고 遂趨而入한대
孔子께서 어느 날 일찍 일어나시어 손을 뒤로 맞잡고(뒷짐을 쥐고) 지팡이를 끌면서 문 밖에서 이리저리 거닐면서 노래부르시기를 “泰山이 그 무너지려나 보구나. 들보나무가 그 부러지려나 보구나. 哲人이 그 시들려나(죽으려나) 보구나.” 이미 노래를 부르고 방으로 들어가시어 문을 마주하고 앉아 계시었는데, 子貢이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泰山이 그 무너진다면은 우리들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볼 것이며 들보나무가 그 부러지며 哲人이 그 돌아가신다면은 우리들은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선생님께서 아마도 장차 병환이 나시려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종종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가니,
作은 일어남이다. 손을 뒷짐지고서 지팡이를 끎은 손을 돌려 뒤로 물리어(젖히어) 써 그 지팡이를 끈 것이다. 消搖는 너그럽게 풀어 스스로 흡족하게 하는 모양이다. 泰山이 여러 산의 우러러보는 바가 되고 들보나무가 또한 여러 나무가 우러러보아 의지하는 바가 되는 것이 哲人이 여러 사람들의 우러러 바라보는 바가 되어 의지하고 본받음이 되는 것과 같다.
夫子曰賜아 爾來何遲也오 夏后氏는 殯於東階之上하니 則猶在阼也오 殷人은 殯於兩楹之間하니 則與賓主로 夾之也오 周人은 殯於西階之上하니 則猶賓之也라 而丘也는 殷人也로니 予疇昔之夜에 夢坐奠於兩楹之間호니 夫明王이 不興이어니 而天下其孰能宗予리오 予殆將死也라하더시니 蓋寢疾七日而沒하시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賜야. 네가 옴이 어찌 그리도 더디는가? 夏后氏는 동쪽 섬돌 위에 빈소를 차렸으니 이는 아직 동쪽 섬돌에 있음을 표시한 것이요, 殷나라 사람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를 차렸으니 이는 賓主와 더불어 그것을 끼고 있음을 표시한 것이요, 周나라 사람은 서쪽 섬돌 위에 빈소를 차렸으니 아직 그를 손님으로 여긴 것이다. 나는 殷나라 사람인데 내가 어제 밤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奠을 받는 것을 꿈꾸었으니 대체 현명한 王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天下가 그 누가 나를 높이겠는가?(존경하겠는가?) 나는 아마도 장차 죽겠구나.” 하시더니만 대략 병으로 누우신지 7日만에 돌아가시었다.
아직 阼階에 있고 아직 그를 손님으로 여긴다는 것은 효자가 차마 그 어버이를 돌아가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그를 여기에 빈소를 차려 아직도 동쪽 섬돌에 있으면서 주인이 되고 있고 아직 서쪽 섬돌에 있으면서 손님이 된 것을 보여준(표시한) 것이다. 두 기둥 사이에 있으면은 이는 주인과 손님이 그를 양쪽에서 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與(더불어)라고 말하고 猶(아직)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孔子는 그 先代가 宋나라 사람이었으니, 成湯의 후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殷나라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疇는 말을 꺼내는 어조사이다. 예전의 밤은 어제 밤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奠드리는 일을 보시고 이것이 凶徵임을 아셨던 것은 殷나라의 禮에 빈소가 두 기둥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니 孔子께서 殷나라 사람으로서 殷나라의 禮를 흠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장차 죽을 줄을 아시고, 또 스스로 奠 꿈꾼 점을 풀이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明王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천하가 누가 능히 나를 높이어 하여금 南面하고서 높은 자리에 앉도록 하겠느냐? 이는 반드시 빈소차리는 조짐이라고 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본다면은 萬世의 王祀가 또한 그 照應이다.
孔子之喪에 門人이 疑所服하더니 子貢曰昔者에 夫子之喪顔淵에 若喪子而無服하시며 喪子路에 亦然하시니 請喪夫子호대 若喪父而無服이니라
孔子의 喪事에 門人들이 喪服입을 것을 의심하자, 子貢이 말하기를 “옛적에 선생님께서 顔淵에 대하여 喪禮를 치를 적에 아들을 여윈 것 같이 하시면서 喪服이 없으셨으며, 子路를 喪事 치름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셨으니, 청컨대 선생님에 대하여 喪禮를 치루되 아버지를 여윈 것 같이 하면서 喪服은 없이 합시다.”
後章의 두 세명 제자들이 環絰을 끼고 외출한 것으로써 말할진댄 이것은 이른바 服이 없는 것이니, 대개 吊服(조문하는 복장)에 加麻(삼으로 만든 環絰을 쓴 것)한 것이다. 䟽에 이르기를 士의 吊服은 疑衰요, 麻는 環絰을 이른 것이다. 五服의 首絰·腰絰은 모두 두 가닥으로 만들되 오직 環絰만은 한 가닥으로 만든다. 뒷 장의 從母의 남편(이모부)의 䟽에 이르기를 무릇 吊服은 喪服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고 했다. ○方氏가 말하기를 아버지를 여윈 듯이 하면서 服이 없음은 이른바 心喪(마음으로 喪服을 입는 것)이다.
孔子之喪에 公西赤이 爲志焉호대 飾棺牆하고 置翣하며 設披하니 周也오 設崇하니 殷也오 綢練設旐하니 夏也라
孔子의 喪事에 公西赤이 드러내어 표지를 하되 棺 옆의 판자를 장식하고 운불삽을 설치하며 棺을 당기는 줄(執紼)을 설치하였으니 周나라 제도이고, 崇牙(깃봉)을 설치하였으니 殷나라 제도이고, 흰 비단으로 깃대를 감싸고 거북과 뱀을 그린 기를 설치하였으니 夏나라 제도이다.
公西는 氏이고 赤은 이름이고 字는 子華이니, 孔子의 제자이다. ○䟽에 이르기를 孔子의 喪事에 公西赤이 棺을 장식하는 것으로써 孔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렸다. 그렇기 때문에 융성한 禮를 만들어 三王의 제도를 구비해서 써 나타내어 표지한 것이다. 이에 흰 비단으로써 棺 덮개를 만들고 棺 덮개 밖에 판자를 설치하였으니, 상여 옆에 운불삽을 놓았고 상여가 기울어질까 염려스러워서 끈으로써 좌우에서 그걸 유지해 두었으니, 이는 모두 周나라 제도이다. 그 葬禮를 치를 적에 사람이 타는 수레에 세우는 깃발에 있어서 비단에 그림을 그려서 崇牙의 장식을 삼았으니 이는 殷나라의 제도이고, 또 깃발의 장대에 흰 비단으로써 동여서 싸고 깃대 꼭대기에 길이가 여덟 자 되는 깃발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夏나라의 禮이다. ○󰡔詩經󰡕에 종틀설주에 종을 매다는 널과 들쭉날쭉한 崇牙가 있다고 하였는데, 䟽에 이르기를 쇠북과 경쇠를 매다는 곳에 채색으로써 大牙를 만들어 그 형상이 융성하니 그것을 일러 崇牙라고 한다. 練은 흰 비단이다. 緇布는 넓이가 終幅이고 길이가 여덟 자이니 깃발의 제도이다.
子張之喪에 公明儀爲志焉호대 褚幕丹質하고 蟻結于四隅하니 殷士也라
子張의 喪事에 公明儀가 표지를 하되 棺을 덮는 막을 붉은 바탕의 베로 만들고 사방 모서리에 왕개미를 엇갈리게 그렸으니 殷나라 선비의 葬禮의 것이다.
䟽에 이르기를 褚라는 것은 棺을 덮는 물건이니, 만약 大夫 이상은 그 모양이 장막과 같고 선비는 棺 덮개가 없는데 公明儀가 그의 스승을 높인 까닭에 특별히 棺 덮개를 만들고 장막은 만들지를 아니하였으니 다만 장막의 모양과 같은 까닭 때문에 褚幕이라고 하였으니, 붉은 바탕의 베로써 그걸 만든다. 또 棺 덮개의 네 모서리에 왕개미의 형상을 그려서 엇갈리게 왕래하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방 모퉁이에 왕개미를 엇갈리게 그렸다고 했으니, 이는 殷나라에서 선비의 葬禮 장식이다.
子夏問於孔子曰居父母之仇호대 如之何잇고 夫子曰寢苫枕干하야 不仕하며 弗與共天下也하며 遇諸市朝어든 不反兵而鬪니라
子夏가 孔子에게 질문하기를 “父母의 원수에 대하여 대처하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적자리에서 자고 방패를 베고서 벼슬을 하지 아니하며 그 원수와 더불어 天下를 함께하지 아니하며 그를 시장이나 조정에서 만나면은 집으로 돌아가 무기를 찾지 아니하고 바로 싸워야 한다.”
不反兵은 돌아가서 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니, 말하자면 항상 무기로써 스스로 따라다니게 한 것이다.
曰請問居昆弟之仇호대 如之何잇고 曰仕弗與共國하며 銜君命而使어든 雖遇之라도 不鬪니라 曰請問居從父昆弟之仇호대 如之何잇고 曰不爲魁오 主人이 能이어든 則執兵而陪其後니라
子夏가 말하기를 “여쭙건대 형제간의 원수에 대해서 대처하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벼슬함에 있어서 그와 더불어 나라를 함께하지 아니하며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서 사신을 가게 되면은 비록 그 원수를 길에서 만나더라도 싸우지 않는 것이다.” 子夏가 말하기를 “여쭙건대 종형제의 원수에 대해서 대처하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두머리가 되지 말고 主人이 능히 원수를 갚으면은 무기를 가지고서 그 뒤를 도와주어야 된다.”
䟽에 이르기를 조정은 대궐 문 안에 있으니 문지기가 中門의 금지를 관장하고 있으니 무기가 다만 中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그 여러 서민들에게 크게 하문하는 것이 臯門의 안에 있으니 들어갈 수가 있다. 조정을 설치하는 것이 혹은 야외에 있기도 하며 혹은 縣이나 鄙나 鄕이나 遂에 있기도 하니 다만 公事가 있는 곳을 모두 그것을 조정이라고 이른다. 무기라는 것은 또한 佩刀 이상을 말한 것이니, 꼭 요컨대 이 창만이 아니다. ○方氏가 이르기를 시장이나 조정에서도 오히려 집에 돌아가 무기를 찾지 않는다면은 가는 데마다 무기를 가지지 아니함이 없다. 「曲禮」에 이르기를 형제의 원수는 집에 돌아가 무기를 찾지 않는다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만나도 싸우지 않아야 된다고 말한 것은 저 「曲禮」의 것은 벼슬하지 않는 사람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孔子之喪에 二三子皆絰而出하니 羣居則絰이오 出則否니라
孔子의 喪禮에 두 세명 제자들이 모두 環絰을 끼고 외출을 하였는데, 여러 제자들끼리의 服은 거처할 적에는 環絰을 끼고 있고 외출할 적에는 끼지 않는다.
吊服에 加麻한 사람이 외출하게 되면은 그것을 바꾸어 입는 것인데 지금 외출하면서 環絰을 벗지 아니하였으니 써 스승을 높인 것이다. 羣이라는 것은 여러 제자들이 서로 친구의 服을 입어준 것이다. 󰡔儀禮󰡕 註에 이르기를 친구는 비록 親誼는 없지마는 道가 같은 은혜는 있다. 서로 緦麻服의 띠를 입어주니 또한 吊服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갈 적에는 그것을 벗는 것이다.
易墓非古也니라
묘역에 벌초하는 것이 옛 풍속이 아니다.
䟽에 이르기를 易는 초목을 베고 손질하여 하여금 우거져 더럽지 않도록 함을 이른다. 옛적 殷나라 이전에는 무덤만 쓰고 봉분을 만들지 아니하였으며 벌초하여 치장하지 아니하였다.
子路曰吾는 聞諸夫子호니 喪禮는 與其哀不足而禮有餘也론 不若禮不足而哀有餘也며 祭禮는 與其敬不足而禮有餘也론 不若禮不足而敬有餘也라하더시다
子路가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께 듣자하니, 喪禮는 그 슬픔이 부족하면서 예절이 여유있는 것 보다는 예절은 부족하더라도 슬픔이 여유있는(넉넉한) 것만 같지 못하며, 祭禮는 그 경건함이 부족하면서 禮가 여유있는 것 보다는 예절은 부족하더라도 공경이 여유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시더라.
그 예절은 있는데 그 재물이 없으면 禮가 혹시 부족한 바가 있겠거니와 슬픔과 공경은 가히 스스로 극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夫子의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議論이니 또한 차라리 검소해야 되고 차라니 슬퍼해야 된다는 뜻이다.
曾子吊於負夏어시늘 主人이 旣祖라가 塡池하고 推柩而反之하야 降婦人而后에 行禮한대 從者曰禮與잇가 曾子曰夫祖者는 且也니 且胡爲其不可以反宿也리오
曾子가 負夏땅에 弔問을 가셨는데 主人이 이미 祖奠을 지내다가 祖奠을 치우고 棺을 물리어 안으로 되돌려 들어가서 婦人들을 내려보낸 뒤에 禮를 거행하자, 曾子를 배종한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이 禮입니까?”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체 祖라는 것은 잠시이니, 또 어찌 그 가히 써 되돌아가 묵을 수 없겠느냐?”고 하였다.
劉氏가 이르기를 負夏는 衛나라의 땅이다. 葬事지내기 하루 전에 曾子가 가서 弔問하시니 당시에 주인에 이미 祖奠을 지내고서 부인들이 양쪽 계단의 사이로 내려가 있었는데 曾子가 당도하시니 주인이 그걸 영광스럽게 여기어 마침내 祖奠을 철거하고 널을 물리어 되돌아가 안으로 향해가서 조문을 받았으니 죽은 사람이 장차 출행하려다가 손님이 온 것을 당하여 그를 위해서 잠깐 되돌아 간 것이다. 또한 葬事지내 없는 이 섬기기를 생존한 분을 섬기듯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禮는 아니다. 널이 이미 되돌아옴에 부인이 다시 마루로 올라가서 널을 피했다가 이튿날에 이르러 이에 다시 棺을 되돌려 밖으로 향하고 부인을 섬돌 사이로 내려오게 한 뒤에 遣奠의 禮를 거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종한 사람이 널이 처음에 이미 옮겨졌다가 다시 물려 되돌아옴에 부인이 이미 내려갔다가 또 마루에 올라가는 것이 모두 禮가 아님을 보았기 때문에 그걸 질문하자, 曾子께서 대답하시기를 祖라는 것은 잠시이니, 이는 잠시 널을 옮겨서 장차 떠나가려는 시초가 되고 아직 이에 실지로 떠나간 것이 아니니 또 어찌 가히 다시 되돌아가서 하루밤을 넘기고 이튿날에 이르러서야 이에 棺을 되돌려 遣奠禮를 지내고 마침내 떠나갈 수가 있겠는가? 䟽에 이르기를 그 주인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보고 그 잘못한 실수를 지적하고 싶지 않아서 설명해 주어 배종한 사람에게 대답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보통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大賢을 엿본 것이다. 그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가히 알 수가 없고 그 뜻을 또한 억지로 해석하기가 어려우니 아마도 기록한 사람이 빠트렸거나 그르친 것이 있을 성싶다. 써 奠을 옮겨둔 것은 奠이 널 서쪽에 있으니 널을 물리어 되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철거한 뒤에 가히 돌려 돌아가게 하였다. 부인이 동쪽 섬돌 사이에 내려가 있을 적에 또한 奠이 상여의 서쪽에 있는 까닭 때문에 상여 뒤에 섰다가 지금 널이 되돌아온 까닭에 또 올라가서 피한 것이다.
從者又問諸子游曰禮與아 子游曰飯於牖下하고 小歛於戶內하고 大歛於阼하고 殯於客位하고 祖於庭하고 葬於墓는 所以卽遠也라 故喪事는 有進而無退하니라 曾子聞之曰多矣乎予出祖者로다
배종한 사람들이 또 子游에게 질문하기를 “禮입니까?” 子游가 말하기를 “남쪽 들창문 밑에서 飯唅하고 문 안에서 小歛을 하고 동쪽 섬돌에서 大歛을 하고 손님의 자리인 서쪽 섬돌에 빈소를 차리고 뜰에서 祖奠을 지내고 묘역에 葬事를 지내는 것은 써 먼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喪事는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이 없는 것이다.” 曾子가 그 말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子游의 그 말이 내가 말한 나가서 祖奠을 지낸다는 것보다 낫다.”
배종한 사람이 曾子의 말을 의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또 子游에게 질문하였다. 남쪽 창문 아래에서 飯唅하는 것은 시신을 목욕시킨 뒤에 쌀 및 화폐를 시신의 입속에 채우는 것이다. 이 때에 시신이 서쪽 방 남쪽 들창문 밑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머리를 둔다. 士喪禮에 小歛에는 옷이 19벌이고 大歛에는 30벌이다. 歛이라는 것은 싸서 거두어 감추는 것이다. 小歛은 문 안에 있고 大歛은 나가 동쪽 섬돌에 있으니 그 주인되는 위치를 차마 떠나지 못한 것이다. 주인이 시신을 받들어 널에 거두면은 빈소가 서쪽 섬돌에 있게 된다. 서쪽 섬돌 위에 구덩이를 파고 안치하나니 肂은 안치하는 것이니, 시신을 구덩이에 안치함을 이른다. 구덩이 안에 널을 안치하고서 거기에 흙을 바르는 것을 빈소라고 이르니, 빈소를 열고서 장차 葬事지냄에 이르러서는 祖奠을 조상의 사당 뜰 가운데에서 설치한 뒤에 행하나니 남쪽 창문 밑으로부터 문 안에서와 동쪽 섬돌에서와 손님의 위치에서와 뜰에서와 묘소쓰는 것이 모두 한 절차가 한 절차보다 멀어지니, 이것이 나아가 가는 것만 있고 물러나 되돌아옴이 없는 것이니 어찌 가히 널을 물러가지고 안으로 되돌아올 수 있겠는가? 나의 나가서 祖奠을 지내는 것보다 낫다는 多는 勝(나음)과 같다. 曾子가 그 말을 듣고 바야흐로 자기 말의 그릇됨을 깨닫고서 이에 말씀하시기를 子游가 말한 出祖의 일이 내가 말한 出祖보다 낫다고 하였다.
曾子는 襲裘而吊하고 子游는 裼裘而吊하더니 曾子指子游而示人曰夫夫也爲習於禮者니 如之何其裼裘而吊也오 主人이 旣小歛하고 袒括髮이어늘 子游趨而出하야 襲裘帶絰而入한대 曾子曰我過矣로다 我過矣로다 夫夫是也로다하시다
曾子는 검은 갖옷에 껴입고서 조문을 하고 子游는 검은 갖옷을 드러내놓고서 조문하더니 曾子께서 子游를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말씀하시기를 “대처 저 분이 禮에 익숙한 분인데 어떻게 그 검은 갖옷을 드러내놓고서 조문을 하는고?” 主人이 이미 小歛을 하고 어깨를 드러내놓고 머리를 묶자 子游가 종종걸음으로 나가서 검은 갖옷에 葛帶와 環絰을 끼고서 들어가니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잘못하였구나. 내가 잘못하였구나. 대체 저 분이 옳다.”고 하시었다.
䟽에 말하기를 무릇 喪事에 조문하는 禮는 주인이 아직 옷을 바꿔 입지 않기 전에는 조문간 사람이 吉服을 입으나니, 吉服이라는 것은 검은 갖옷에 검은 관을 쓰고 검은 옷에 흰 바지를 입는다. 또 웃옷을 벗어버리고서 옷을 드러내나니 이는 검은 갖옷을 드러내놓고서 조문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주인이 이미 옷을 바꿔 입은 뒤에는 조문간 사람이 비록 朝服을 입었더라도 吉冠의 갓끈에 環絰을 끼니, 武는 吉冠을 묶는 갓끈이다. 또 그 웃옷을 덮고 만약에 이 붕우라면은 또 葛帶를 끼니 이것은 갖옷에 껴입고 葛帶와 環絰을 끼고서 들어간다는 것이 이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曾子께서 다만 喪事가 凶禮가 된 줄만 알고 막 사망하였을 때에는 아직 吉禮를 따를 줄을 모르셨다. 이것이 써 맨 처음에 子游를 비난하다가 마침내는 잘한다고 하신 것이다.
子夏旣除喪而見이어늘 予之琴하신대 和之而不和하며 彈之而不成聲이러니 作而曰哀未忘也언마는 先王制禮라 而弗敢過也로이다 子張이 旣除喪而見이어늘 予之琴하신대 和之而和하며 彈之而成聲이러니 作而曰先王制禮라 不敢不至焉이로이다
子夏가 이미 喪服을 벗고 孔子를 뵙자 그에게 거문고를 주시니, 그 거문고 줄을 고르되 골라지지 아니하며 그 거문고를 타되 소리가 이루어지지 않더니, 일어나서 말하기를 “슬픔이 아직 잊혀지지 아니하였지마는 先王이 제정한 禮이므로 감히 초과하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子張이 이미 喪服을 벗고서 孔子를 뵙자 그에게 거문고를 주시니, 그 거문고 줄을 고르되 골라지며 그 거문고를 타되 소리가 이루어지더니, 일어나서 말하기를 “先王이 제정한 禮이므로 감히 이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균일하게 喪服을 벗었는데도 거문고가 골라지고 아니 골라진 차이가 있는 것은 대개 子夏는 이 그 禮에 초과한 사람이므로 구부려 그 禮에 나아가서 애써서 함에 나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슬픔이 아직 잊혀지지 않아서 능히 소리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고, 子張은 이 이르지 못한 사람이므로 발돋움하여 그 禮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이 이미 다하여 능히 소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司寇惠子之喪에 子游爲之麻衰牡麻絰한대 文子辭曰子辱與彌牟之弟로 游하시고 又辱爲之服하시니 敢辭하노이다 子游曰禮也니라
司寇 惠子의 喪事에 子游가 그를 위하여 麻衰(삼베로 만든 衰)에 숫삼 首絰을 끼고서 조문하니, 文子가 사양하기를 “당신이 욕되게(과분하게) 彌牟(나)의 동생과 더불어 교유하시고 또 욕되게 그를 위하여 服을 입어 주시니 감히 사양합니다.”라고 하자, 子游가 말하기를 “禮이다.”고 하였다.
惠子는 衛나라 장군 文子 彌牟의 동생이다. 惠子가 適子 虎를 폐위하고 庶子를 책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子游가 특별히 禮가 아닌 喪服을 입고서 그를 기롱하였으니, 이는 또한 檀弓이 公儀仲子에게 免冠을 쓴 것과 같은 뜻이다. 麻衰는 吉服의 삼베로써 衰를 만든 것이다. 牡麻絰은 숫삼으로 首絰을 만든 것이다. 麻衰는 이에 吉服 15새의 베이니, 吊服보다 가볍다. 吊服의 首絰은 한 가닥으로 빙두르니, 지금 숫삼을 사용하여 首絰을 꼬았으니 齊衰의 首絰과 똑같다. 鄭 註에 이르기를 重服은 首絰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文子가 처음에 말하기를 욕되게 그를 위하여 服을 입어주시니 감히 사양한다는 것은 그 服을 사양한다는 것이다.
文子退하야 反哭이어늘 子游趨而就諸臣之位한대 文子又辭曰子辱與彌牟之弟로 游하시고 又辱爲之服하시고 又辱臨其喪하시니 敢辭하노이다 子游曰固以請하노이다 文子退하야 扶適子하야 南面而立曰子辱與彌牟之弟로 游하시고 又辱爲之服하시고 又辱臨其喪하시니 虎也敢不復位아한대 子游趨而就客位하니라
文子가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가 哭을 하자, 子游가 종종걸음으로 家臣의 위치로 나아가니, 文子가 또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욕되게 彌牟의 동생과 더불어 교유하시고 또 욕되게 그를 위하여 服을 입어주시고 또 욕되게 그 喪事에 왕림하여 주셨으니 감히 사양합니다.” 子游가 말하기를 “굳이 그로써 요청하옵니다.” 文子가 물러가 適子를 붙들고서 남쪽을 향하여 서서 말하기를 “당신이 욕되게 彌牟의 동생과 더불어 교유하시고 또 욕되게 그를 위하여 服을 입어주시고 또 욕되게 그 喪事에 왕림하여 주셨으니 虎가 감히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子游가 종종걸음으로 손님의 위치로 나갔다.
다음에 감히 사양한다고 말한 것은 그가 家臣의 위치에 서있음을 사양한 것이다. 이 때에도 아직 子游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子游가 말하기를 굳이 그로써 청한다고 말함에 이르러서는 文子가 그를 기롱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適子를 붙들고 나와서 喪主의 위치를 바로잡았으니 子游의 뜻이 관철된 것이다. 종종걸음으로 손님의 위치로 나간 것은 禮의 바른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大夫의 손님의 위치는 문의 동쪽에 있으면서 북쪽에 가깝고, 家臣의 자리는 또한 문의 동쪽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문에 가까우니 모두 북쪽을 향하는 것이다.
將軍文子之喪에 旣除喪而后에 越人이 來吊어늘 主人이 深衣練冠으로 待于廟하야 垂涕洟한대 子游觀之曰將軍文氏之子其庶幾乎인저 亡於禮者之禮也에 其動也中이로다
將軍 文子의 喪事에 이미 喪服을 벗은 뒤에 越나라 사람이 와서 조문을 하자, 主人이 深衣와 練冠으로 사당에서 그를 기다리어 눈물과 콧물을 흘리자, 子游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將軍 文氏의 아들이 그 禮에 가깝구나. 禮에 없는 禮에 있어서 그 거동이 禮에 맞았구나.”
將軍 文子는 바로 彌牟이다. 주인은 文子의 아들이다. 禮에 사람을 喪服을 벗은 뒤에 조문하는 것이 없고 또한 喪服을 벗은 뒤에 사람의 조문을 받는 것이 없다. 深衣는 吉事나 凶事에 가히 써 통용할 수 있다. 小祥 練服의 冠은 순전히 吉하지도 않고 또한 순전히 凶하지도 않다. 사당은 神主가 계신 곳이니, 조문온 사람을 기다리고 영접하지 않는 것은 조문을 받는 禮이다. 哭을 하지 않고서 눈물만 흘린 것은 哭할 때가 이미 지났지마는 슬픈 감정은 아직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庶幾는 가까움이다. 子游가 그 禮의 變處에 처리한 것을 좋게 여기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를 文氏의 아들이 그 禮에 가깝구나. 비록 이러한 禮는 없지마는 그런 禮를 행하였으니 그 거동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深衣는 바로 「間傳」에 말한 麻衣이니, 제도가 深衣와 같은데 삼베로써 갓을 두른 것을 麻衣라고 하고 흰 베로 갓을 두른 것을 長衣라고 이르고 채색 베으로써 갓을 두른 것을 深衣라고 한다. 練冠이라는 것은 大祥 전의 冠이니 만약 大祥 제사에는 흰 冠을 쓴다. 처음 사망함에서 練祥에 이르기까지 와서 조문하는 것은 이 禮文에 있는 禮이고, 大祥 뒤에 와서 조문하는 것은 이 禮文에 없는 禮이니, 말하자면 文氏의 아들이 거의 禮文에 없는 禮를 행할 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動은 거동이다. 中은 禮의 變節에 합당함이다.
幼名하며 冠字하며 五十에 以伯仲하며 死諡가 周道也니라
어려서는 이름을 부르며 冠禮를 하면 字를 부르며 50살에 伯氏와 仲氏로 부르며 죽으면 諡號를 부르는 것이 周나라의 道이다.
䟽에 말하기를 무릇 이런 일이 모두 周나라의 道이다. 또 殷나라 이상에서는 生時의 칭호가 있어 그대로 죽은 뒤의 칭호가 되고 다시 별다른 시호가 없었으니, 堯·舜·禹·湯의 전례가 그것이다. 周나라는 죽은 뒤에 별도로 시호를 세웠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儀禮󰡕 賈公彦 䟽에 이르기를 젊었을 때에는 바로 伯某甫라고 호칭하다가 50살에 이르러서는 이에 某甫는 빼버리고 전적으로 伯氏·仲氏만을 호칭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옳다. 예컨대 오늘날 사람들이 어른에게 있어서 감히 字를 부르지 못하고 몇째 어른이라고 이르는 따위이다.
絰也者는 實也라
絰이라는 것은 충실한 뜻이다.
삼이 머리에 있거나 허리에 있음에 모두 絰이라고 이르나니, 그것을 나누어 말한다면 머리는 首絰이라고 이르고 허리는 要絰이라고 이른다. 絰을 實이라고 말한 것은 효자가 충실한 마음을 가진 것을 밝힌 것이다. 首絰은 緇布冠의 목덜미 끈이 없는 것을 닮았고, 要絰은 큰 띠를 닮았고, 또 絞帶가 있는데 혁대를 닮았다. 齊衰 이하는 삼베를 사용한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首絰은 크기가 한 줌이니, 이는 엄지손가락과 차례 두 번째 손가락과 한 번 에워싸는 것이요, 要絰은 비교적 작고, 絞帶는 또 要絰보다 작다. 要絰은 큰 띠를 닮았는데 양쪽 끝이 길게 드리워져 내려가고, 絞帶는 혁대를 닮았는데 한쪽 끝에 고리가 있어서 한쪽 끝을 가운데에 꿰어서 그걸 묶는다.
掘中霤而浴하고 毁竈로 以綴足이니라
방 안을 파고서 시신을 목욕시키고 부엌을 헐어낸 벽돌로써 발을 잇닿게(이어지게) 해야 된다.
䟽에 말하기를 中霤는 방 안이다. 사망하면은 방 안의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평상을 구덩이 위에 걸쳐놓고서 시신을 평상 위에서 목욕시켜 하여금 목욕물이 구덩이 속으로 스며들어가도록 한다. 죽은 사람이 차갑고 뻣뻣하여 발이 비틀려서 가히 신을 신킬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엌을 헐어낸 벽돌을 사용하여 죽은 사람의 발을 잇닿게 해서 하여금 반듯하게하여 가히 신을 신을 수 있도록 한다.
及葬하야 毁宗躐行하야 出于大門이 殷道也니 學者行之하나니라
葬禮에 미쳐서 사당의 담을 헐고 넘어가 大門으로 나가는 것이 殷나라의 道인데 學者가 그것을 시행한다.
䟽에 말하기를 毁宗은 사당의 담을 허무는 것이다. 殷나라 사람이 사당에 빈소를 차렸다가 葬事에 이르러 널이 나갈 적에 사당 문 서쪽 담장을 헐고 대문으로 나간다. 길 귀신의 위치가 사당 문 서쪽에 있어 사당 담을 헌 밖에 해당하니 生時에 출행할 적에는 祭壇에 올리는 폐백을 만들어 길 귀신에게 告由하고 告由가 끝나면 수레가 祭壇을 넘어가서 나가 하여금 道中에서 편안하도록 함이 祭壇에 있는 것 같이 하나니 지금 사당 벽을 헌 곳을 향하여 나가 그대로 이 祭壇을 넘어가기를 生時에 나가듯이 하는 것이다. 孔子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였으니 이것은 殷나라 禮를 본받은 것이다.
子柳之母死커늘 子碩이 請具한대 子柳曰何以哉오 子碩曰請粥庶弟之母하노라 子柳曰如之何에 其粥人之母하야 以葬其母也리오 不可하니라 旣葬하고 子碩이 欲以賻布之餘로 具祭器한대 子柳曰不可하니라 吾는 聞之也호니 君子는 不家於喪이라하니 請班諸兄弟之貧者하라
子柳의 어머니가 죽자 子碩이 喪事의 기물을 마련할 것을 청하자, 子柳가 말하기를 “무엇을 가지고 하겠느냐?” 子碩이 말하기를 “청컨대 庶弟의 어머니를 팝시다.” 子柳가 말하기를 “어떻게 남의 어머니를 팔아가지고서 그 어머니를 葬事지낼 수 있겠느냐? 不可하다.(옳지 않다)” 이미 葬事를 지내고 子碩이 賻儀 돈의 나머지를 가지고 祭器를 마련하려고 하니, 子柳가 말하기를 “不可하다. 나는 듣자하니 君子는 喪事에서 집안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청컨대 그것을 兄弟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게.”
子柳는 魯나라 叔仲皮의 아들인데, 子碩의 兄이다. 具(도구)는 喪事에 마땅히 사용해야 할 기물을 이른다. 何以哉(무엇을 가지고 하겠느냐 함)은 무엇을 가지고 사용하겠느냐고 말한 것이니 그 재물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鄭氏가 이르기를 粥은 그를 改嫁시킴을 이른다. 妾은 천하니 그걸 취하는 것을 買(산다)라고 이른다. 布는 돈이다. 喪事에서 집안을 이롭게 하지 아니함은 죽은 분을 인하여 이로움을 삼는 것을 싫어한 것이다. 班은 나누어줌과 같다. 庶弟의 어머니를 팔지 아니한 것은 의리이고, 형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은 仁이다. 대체 庶弟의 어머니를 팔아서 써 葬禮를 치르려고 하였을진댄 재물에 궁핍한 것을 가히 알 수가 있고, 喪事에서 집안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확고하게 變易할 수가 없었으니 옛날 사람이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면서 禮를 지켰던 것이 대개 이와 같다.
君子曰謀人之軍師하다가 敗則死之하며 謀人之邦邑하다가 危則亡之니라
君子가 말하기를 “남의 軍師를 도모하다가 패전하면은 그 일에 죽어야 하며, 남의 국가를 도모하다가 위태로우면은 그 직위에서 도망가야 한다.”
鄭氏가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죽음에 의리상 차마 혼자 살 수가 없으니 어찌 죽지 아니할 수가 있겠으며, 나라가 위태로움에 몸이 가히 홀로 보전할 수가 없는 것이니 어찌 도망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公叔文子升於瑕丘어늘 蘧伯玉이 從이러니 文子曰樂哉라 斯丘也여 死則我欲葬焉하노라 蘧伯玉曰吾子樂之어든 則瑗은 請前하노라
公叔文子가 瑕丘에 올라가자 蘧伯玉이 그를 수행하였는데 文子가 말하기를 “즐겁구나. 이 언덕이여. 죽으면 내가 葬事지내고 싶구나.” 蘧伯玉이 말하기를 “우리 그대가 그것을 즐거워한다면은 나는 청컨대 앞에 떠나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衛나라의 大夫인데, 文子의 이름은 拔이고, 伯玉의 이름은 瑗이다. ○劉氏가 말하기를 伯玉이 앞에 떠나가겠다고 청한 것은 대체 처음에는 文子의 뒤를 따라갔다가 文子의 말을 들음에 이르러서는 그가 장차 남의 땅을 빼앗아서 스스로 몸이 죽은 뒤의 계책을 삼으려고 한 것을 증오하여 마침내 그를 기롱하여 말하기를 우리 그대가 이것을 즐거워한다면은 나는 청컨대 앞에 가서 써 그대에게서 떠나가겠다고 하였으니, 그 일에 참여하여 듣고 싶지 아니함을 보여준 것이니 가히 풍자하여 일깨워줌에 뛰어났다고 이를 수 있다.
弁人이 有其母死而孺子泣者어늘 孔子曰哀則哀矣나 而難爲繼也로다 夫禮는 爲可傳也며 爲可繼也니 故哭踊이 有節하니라
弁 땅의 사람이 그 어머니가 죽자 어린아이처럼 우는 이가 있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슬프기는 슬프지마는 계승하기가 어렵구나. 대체 禮는 가히 전할 수가 있어야 하며 가히 계승할 수가 있어야 하니 그렇기 때문에 哭하며 뜀이 節度가 있는 것이다.”
弁은 땅 이름이다. 어린아이처럼 우는 것은 그 울음소리가 어린아이와 같아 長短과 高下의 節度가 없는 것이다. 聖人이 禮를 제정하심은 기어이 사람들로 하여금 가히 전할 수 있으며 가히 계승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哭하고 뛰는 것이 모두 그 節度가 있나니 만약에 節度가 없다면은 가히 전해주고 계승할 수가 없는 것이다.
叔孫武叔之母死커늘 旣小歛하야 擧者出하야 尸出戶어늘 袒하고 且投其冠하고 括髮한대 子游曰知禮온여하니라
叔孫武叔의 어머니가 죽자, 이미 小歛을 하고서 시신을 든 사람이 문을 나와 시신이 문 밖으로 나오자 어깨를 드러내놓고 또 그 冠을 벗고 머리털을 묶자, 子游가 말하기를 “禮를 아는구려.”
禮에 사람이 막 죽으면 장차 斬衰服을 입을 사람은 비녀를 꽂고서 머리를 싸고, 장차 齊衰服을 입을 사람은 흰 冠을 쓰고 있다. 小歛이 끝나면은 휘장을 걷고 주인 喪主는 머리를 묶고 동쪽 방에서 어깨를 드러내놓으며 부인은 방안에서 쪽(북머리)을 튼다. 든 사람이 나가는 것은 시신을 들고서 나가는 것이다. 머리를 묶는 것이 마땅히 小歛 뒤 시신이 마루로 나가지 전에 있어야 되니 주인이 장차 시신을 받들려고 하기 때문에 어깨를 드러내놓고 머리털을 묶는 것인데, 지금 武叔이 시신이 문 밖으로 나감을 기다려서 그런 뒤에 어깨를 드러내놓고 갓을 벗고 머리털을 묶었으니 예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註에 子游가 禮를 안다는 말로써 그를 조롱한 것이다고 하였다. ○馮氏가 말하기를 經文에 戶出戶로 쓰여 있는데 위의 戶字는 바로 尸字의 잘못이다. 鄭註에 이르기를 시신이 문에 나가면 이에 옷을 바꾸어 입는다고 하였으니, 그러나 註文에 尸字가 또한 잘못되어 戶字로 되어 있다. 마침내 해석이 통하지 않는다.
扶君할새 卜人師扶右하고 射人師扶左하나니 君薨에 以是로 擧니라
임금을 부축해 드릴 적에는 卜人의 우두머리는 오른쪽을 부축해 드리고 射人의 우두머리는 왼쪽을 부축해 드리나니 임금이 昇遐하게 되면 이대로 시신을 든다.
임금이 병환이 들어 있을 적에 僕人의 우두머리는 그 오른쪽 몸을 부축하고 射人의 우두머리는 그 왼쪽의 몸을 부축해 드리니, 이 두 사람은 모두 평일에 의복과 위치를 도와 바르게 해 드리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昇遐하여 시신을 옮길 때를 만나면은 그대로 이 사람을 쓴다. 方氏는 師를 해석하되 여러 사람으로 하였고, 馮氏는 卜人을 거북점치고 시초점치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從母之夫와 舅之妻와 二夫人이 相爲服을 君子未之言也니 或曰同爨은 緦라하니라
從母(이모)의 남편(이모부)과 외삼촌의 아내(외숙모) 두 사람들이 서로 위하여 服입어줄 것을 君子가 그에 대하여 말을 아니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함께 밥지어 먹은 사람에게는 緦麻服을 입는다.”고 하였다.
從母는 어머니의 언니와 누이이고, 외삼촌은 어머니의 오빠나 남동생이다. 이모부가 외숙모에게 服이 없나니 때문에 禮經에 싣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君子가 그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당시에 우연히 생질이 외가에 가서 이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함께 살던 사람이 喪事가 있었는데, 禮文에 가히 근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한솥밥을 먹고살면은 緦麻服을 입어준다는 말을 해서 그 일을 처리하였으니, 이도 또한 그 人情에 가히 그만둘 수 없는 것에 근원하였지마는 극히 禮의 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이모부와 외숙모가 모두 服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先王이 禮를 제정함에 있어서 아버지의 겨레붙이가 넷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올라가서 族曾祖父(從曾祖父)를 위해서 緦麻服을 입어준 것과 고모의 아들·누님이나 누이의 아들·딸자식의 아들이 모두 아버지로 말미암아서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겨레붙이가 셋인데, 어머니의 아버지·어머니의 어머니·어머니의 형제이니 은혜는 외삼촌에서 그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모부와 외숙모는 모두 服을 입어주지 아니하나니 미루어 갈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아내의 겨레붙이가 둘인데, 아내의 아버지·아내의 어머니이다. 얼핏보면은 난잡하여 기강이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은 모두 의리가 존재한다.
喪事는 欲其縱縱爾오 吉事는 欲其折折爾니 故喪事는 雖遽라도 不陵節하고 吉事는 雖止라도 不怠니 故騷騷爾則野하고 鼎鼎爾則小人이니 君子는 蓋猶猶爾니라
喪事는 그 바삐바삐하려고 하고 吉한 일은 그 느긋느긋하게 하려고 해야 되나니 그렇기 때문에 喪事는 비록 급하더라도 절차를 뛰어넘을 수 없고 吉事는 비록 정지하더라도 게을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란스럽게 하면은 野鄙하고 질질끌면은 小人이니 君子는 대개 적절히 한다.
縱縱은 일에 달려감을 급히하는 모양이요, 折折은 從容스럽게 禮에 맞는 모양이다. 喪事는 아무리 급하더라도 가히 그 절차를 뛰어넘을 수 없고 吉事는 비록 서서 일을 기다리는 때가 있지마는 가히 게으름에 실수할 수가 없는 것이니 만약에 소란스럽게 너무 빨리하면은 野鄙하고 질질끌면서 너무 느긋하면은 小人의 하는 짓이다. 적절히하여 느긋하고 급한 中道를 얻는 것이 君子가 禮를 행하는 道이다.
喪具를 君子恥具하나니 一日二日而可爲也者는 君子弗爲也니라
喪事의 도구를 君子가 미리 구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나니 하루나 이틀만에 가히 마련할 수 있는 것은 君子가 미리 마련하지를 아니한다.
喪事의 도구는 棺이나 襚衣의 등속이다. 君子가 일찍이 그것을 만들어 도구를 구비해 두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오래사는 것으로써 그 어버이에게 기대하지 않음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60살에는 해마다 마련하며 70살에는 철마다 마련하며 80살에는 달마다 마련하며 90살에는 날마다 마련하는 것은 대개 갑작스러운 변고에 염려하는 것이다. 하루나 이틀에 가히 마련할 수 있는 물건은 君子가 미리서 그것을 만들지 아니하나니, 이른바 絞布(殮布)와 홑이불과 이불과 가리개같은 것은 죽은 뒤에 마련하는 것이다.
喪服에 兄弟之子를 猶子也는 蓋引而進之也오 嫂叔之無服也는 蓋推而遠之也오 姑姊妹之薄也는 蓋有受我而厚之者也니라
喪服에 있어서 兄弟의 아들을 내 작은 아들과 같이하는 것은 대개 끌어당기어 그를 올린 것이요, 형수와 시아주버니간에 服이 없는 것은 대개 밀어내어 그를 멀리한 것이요, 고모와 누님과 누이의 服이 가벼운 것은 대개 나에게서 받아가 그들에게 후하게 服입어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서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형제의 아들이 비록 달리 출생하였지마는 그러나 은혜에 있어서는 가히 親愛할 만하기 때문에 끌어당겨 그를 올려서 작은 아들과 더불어 똑같이 服을 입어주고, 형수와 시숙의 구분이 비록 함께 살았지마는 그러나 의리에 있어서 가히 혐의스럽기 때문에 밀쳐내어 그를 멀리하여 서로 服을 입어주지 않는 것이다. 고모와 누님과 누이가 친정 집에 있거나 형제가 낳은 조카를 모두 不杖期服을 입어주고 出後하거나 시집가면은 모두 服을 강등하여 大功服을 입어서 가벼움에 따른 것은 대개 나에게서 받아간 사람이 服을 그를 위해서 중하게 입어주기 때문에서이다. 말하자면 그 남편이 그 누님이나 누이를 받아가서 服입어 주기를 그를 위해서 杖期服을 입어주어 그에게 후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本宗(친정)에서는 서로 위해 줄 적에 모두 한 등급을 강등한다.
食於有喪者之側하실새 未嘗飽也러시다
喪事가 있는 사람의 곁에서 음식을 먹을 적에 일찍이 포식하지 않으셨다.
應氏가 말하기를 食字의 위에 의심컨대 孔子 글자가 탈락된 성싶다.
曾子與客으로 立於門側이어시늘 其徒趨而出한대 曾子曰爾將何之오 曰吾父死할새 將出哭於巷하노이다 曰反哭於爾次하라하시고 曾子北面而吊焉하시다
曾子께서 손님과 더불어 문 옆에 서 계셨는데, 그 門徒(제자)가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장차 어디로 가려느냐?” 대답하기를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에 장차 골목길로 나가서 哭을 하려고 합니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거처하는 館舍로 돌아가 哭하라.” 하시고, 曾子께서 북쪽을 향하여 조문하시었다.
그 門徒는 門下 弟子이다. 次는 그 사람이 寓居하고 있는 館舍이다. 「士喪禮」에 주인은 서쪽을 향하고 손님은 문 동쪽에서 북쪽을 향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曾子께서 써 북쪽을 향하여 그를 조문하신 것이다.
孔子曰之死而致死之는 不仁이라 而不可爲也며 之死而致生之는 不知라 而不可爲也니 是故竹不成用하며 瓦不成味하며 木不成斲하며 琴瑟은 張而不平하며 竽笙은 備而不和하며 有鐘磬而無簨虡하니 其曰明器는 神明之也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이를 보내드리되 극진히 죽은 이로 대우하는 것은 仁이 아니므로 가히 행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드리되 극진히 생존한 이로 대우함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므로 가히 행할 수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대그릇은 사용하게끔 만들지 아니하며 질그릇은 광택을 내지 아니하며 나무그릇은 조각 무늬를 이루지 아니하며 거문고와 비파는 벌여놓으되 줄을 고르지 아니하며 피리와 생황은 갖추어놓기만 하고 조화를 이루어놓지 아니하며 종과 경쇠가 있으되 거는 틀이 없나니 그렇기 때문에 明器는 그를 神明으로 대우하는 것이다고 한다.”
劉氏가 말하기를 之는 보냄이니, 죽은 이를 보내드림은 禮로써 죽은 사람을 보내드림을 이른다. 죽은 사람을 보내드리되 지극히 죽은 사람의 禮로써 그를 대우하는 것은 이는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不仁함이 되기 때문에 가히 행할 수 없는 것이요, 죽은 사람을 보내드리되 지극히 산 사람의 禮로써 그를 대우한 것은 이는 道理에 조명하는 밝음이 없는 것이니, 지혜롭지 못함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가히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써 先王께서 明器를 만들어가지고 죽은 사람을 보내드리는 것이니, 대그릇은 가장자리(테)를 동여매는 것이 없어 그 사용을 이룰 수가 없고, 질그릇은 거칠고 질박하여 그 검은 광택의 윤기가 이루어지지 않고, 나무그릇은 질박하여 그 조각한 무늬를 이루지 않고, 거문고와 비파는 비록 줄은 벌여놓더라도 골라놓지 아니하니 가히 탈(연주할) 수가 없고, 피리와 생황은 비록 구비되었더라도 조화를 이루어놓지 아니하니 가히 불 수가 없고, 비록 종과 경쇠는 있지마는 걸어내는 틀이 없으니 가히 칠 수가 없나니, 무릇 이것은 모두 극진히 죽은 이로 대우하지 않고 또한 극진히 산 분으로 대우하지 아니하여 앎이 있고 앎이 없는 중간으로써 죽은 사람을 대운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물건을 구비하기만 하고 가히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건을 구비하였을진댄 지극히 죽은 사람으로 대우할 것이 없고, 가히 사용할 수 없을진댄 또한 지극히 산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니, 그 明器라고 이른 것은 대개 神明의 도리로써 그를 대우한 것이다.
有子問於曾子曰問喪於夫子乎아 曰聞之矣로다 喪欲速貧하며 死欲速朽라하더시다 有子曰是는 非君子之言也로다 曾子曰參也는 聞諸夫子也호라 有子又曰是는 非君子之言也로다 曾子曰參也與子游聞之호라 有子曰然하다 然則夫子有爲言之也로다 曾子以斯言으로 告於子游한대 子游曰甚哉라 有子之言이 似夫子也여 昔者에 夫子居於宋하실새 見桓司馬自爲石槨호대 三年而不成하시고 夫子曰若是其靡也인댄 死不如速朽之愈也라하시니 死之欲速朽는 爲桓司馬言之也시니라
有子가 曾子에게 질문하기를 “벼슬자리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선생님께 들었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었오. 실직하면은 빨리 가난하려고 하며 죽으면 빨리 썩으려고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有子가 말하기를 “이는 君子의 말씀이 아니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생님께 들었오.” 有子가 또 말하기를 “이는 君子의 말씀이 아니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子游와 함께 그 말을 들었오.” 有子가 말하기를 “그렇겠습니다만 그렇다면은 선생님께서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오.” 曾子가 이 말로써 子游에게 말하니, 子游가 말하기를 “대단하구나. 有子의 말이 선생님 같구려. 옛적에 선생님께서 宋나라에 거주하실 적에 桓司馬가 스스로 石槨을 만들되 3年토록 완성하지 못한 것을 보시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처럼 사치할진댄 죽으면 빨리 썩음의 좋은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셨으니, 죽으면 빨리 썩으려고 해야 된다는 것은 桓司馬 때문에 이리 말씀하신 것이다.”
벼슬하다가 자리를 잃어버린 것을 喪이라고 한다. 桓司馬는 바로 桓魋이다. 靡는 사치함이다.
南宮敬叔이 反할새 必載寶而朝한대 夫子曰若是其貨也인댄 喪不如速貧之愈也라하시니 喪之欲速貧은 爲敬叔言之也시니라
南宮敬叔이 귀국할 적에 반드시 보화를 싣고 와서 조회를 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처럼 그 뇌물을 바칠진댄 실직하면은 일찍 가난해진 것의 나음(좋음)만 같지 못하다.”고 하셨으니, 실직하면은 빨리 가난하려고 해야 된다함은 敬叔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
敬叔은 魯나라의 大夫인 孟僖子의 아들 仲孫閱이다. 일찍이 벼슬자리를 잃어버리고서 魯나라를 떠나갔다가 뒷날 귀국할 적에 보배를 싣고서 조회하여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에 복직됨을 구하려고 하였다.
曾子以子游之言으로 告於有子한대 有子曰然하다 吾固曰非夫子之言也라호라 曾子曰子何以知之오 有子曰夫子制於中都하실새 四寸之棺과 五寸之槨하시니 以斯로 知不欲速朽也호라 昔者에 夫子失魯司寇하시고 將之荊하실새 蓋先之以子夏하시고 又申之以冉有하시니 以斯로 知不欲速貧也호라
曾子께서 子游의 말로써 有子에게 말하니, 有子가 말하기를 “그럴 것입니다. 내가 본시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다고 했잖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그걸 알았오?” 有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中都에서 棺槨의 제도를 제정하실 적에 4寸의 內棺과 5寸의 外槨으로 하셨으니, 이로써 빨리 썩고 싶지 아니한 것을 알았오. 옛적에 선생님께서 魯나라 司寇를 실직하시고 장차 荊나라로 가시려고 할 적에 대체 거기에 子夏를 먼저 보내시고 또 거기에 冉有를 재차 보내셨으니 이로써 빨리 가난해지고 싶지 않는 것을 알았오.”
定公 9年에 孔子께서 中都邑의 지방관이 되셨다. 제도는 內棺과 外槨의 법제이다. 4寸고 5寸은 두껍고 얇은 척도이다. 장차 楚나라로 가시려면서 먼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가보도록 한 것은 아마도 楚나라의 가히 벼슬할 만한가의 여부를 관찰하여 그 가히 있을 만한 벼슬자리를 도모하고자 하신 것인 성싶다.
陳莊子死커늘 赴於魯한대 魯人이 欲勿哭하더니 繆公이 召縣子而問焉한대 縣子曰古之大夫는 束脩之問도 不出竟하더니 雖欲哭之인들 安得而哭之리잇고
陳나라 莊子가 죽자 魯나라에 부고를 보내오니, 魯나라 사람이 哭을 아니하려고 하더니 繆公이 縣子를 불러서 질문하니, 縣子가 말하기를 “옛날 大夫는 한 묶음 脯의 선물도 국경을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그에 대하여 哭을 하고 싶은들 어찌 그에 대하여 哭을 할 수 있겠습니까?”
大夫가 다른 나라의 임금에게 부고를 보낼 적에는 이르기를 ‘임금의 외부 신하 寡德한 大夫 아무개가 죽었다.’고 한다. 莊子는 齊나라의 大夫인데, 이름이 伯이다. 齊나라는 강성하고 魯나라는 미약하니 그 부고에 대하여 소략히 할 수가 없기에 縣子가 禮를 안다고 이름난 까닭으로 불러서 그 禮를 물었다. 脩는 건포인데, 열 조각이 한 묶음이 된다. 問은 선물을 보냄이다. 사람의 신하가 된 사람이 외국과 교제가 없는 것은 감히 임금을 둘씩 섬길 수 없기 때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한 묶음의 하찮은 禮일지라도 또한 그로써 국경을 나갈 수 없는 것이다.
今之大夫는 交政於中國하나니 雖欲勿哭인들 焉得而弗哭이리잇고 且臣은 聞之호니 哭有二道하니 有愛而哭之하며 有畏而哭之하니이다 公曰然하다 然則如之何而可오 縣子曰請哭諸異姓之廟하소서 於是에 與哭諸縣氏하시다
“그런데 오늘날 大夫들은 中國에서 政事로 외교를 하니 비록 哭을 아니하고 싶지마는 어찌 哭을 아니할 수 있겠오? 그리고 臣은 듣자하니 哭이 두 가지 방도가 있는데 사랑해서 그에 대하여 哭을 한 것이 있으며 두려워서 그에 대하여 哭을 한 것이 있습니다.” 公이 말하기를 “그렇겠오.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오?” 縣子가 말하기를 “청컨대 他姓의 사당에서 哭을 하십시오.” 이에 신하와 더불어 縣氏의 사당에서 哭을 하였다.
交政於中國은 말하자면 당시에 임금은 미약하고 신하는 강성하여 大夫가 會盟하는 일을 제마음대로하여 나라의 임금과 더불어 서로 교접(교제)을 하였으니, 이는 變禮의 유래이다. 사랑해서 哭을 하는 것은 능히 그만둘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요, 무서워서 哭을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니, 縣氏에게서 伯高에 대하여 哭을 한 것은 의리가 존재했던 바이고, 縣氏에게서 莊子에 대하여 哭을 한 것은 세력의 핍박한 바이다.
仲憲이 言於曾子曰夏后氏는 用明器하니 示民無知也오 殷人은 用祭器하니 示民有知也오 周人은 兼用之하니 示民疑也니라 曾子曰其不然乎인저 其不然乎인저 夫明器는 鬼器也오 祭器는 人器也니 夫古之人이 胡爲而死其親乎리오
仲憲이 曾子에게 말하기를 “夏后氏는 明器를 사용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죽은 이가 앎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요, 殷나라 사람은 祭器를 사용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죽은 이가 앎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요, 周나라 사람은 그 明器와 祭器를 겸용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죽은 이가 앎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함을 보여준 것이다.”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을 거야. 그것은 그렇지 않을 거야. 대체 明器는 귀신의 그릇이고, 祭器는 사람의 그릇인데, 대체 옛날 사람이 어찌해서 그 어버이를 앎이 없는 것으로(그 어버이를 죽은 이로) 대우하였겠는가?”
仲憲은 孔子의 弟子 原憲이다. 백성들에게 무지함을 보여준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죽은 사람이 무지함을 알도록 한 것이니, 그 죽은 분이 아는 것이 없는 까닭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기물로써 그를 보내주고, 그 앎이 있는 까닭 때문에 祭器의 가히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써 그를 보내주고, 의심하는 것은 앎이 있다고도 여기지 않고 또한 앎이 없다고도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周禮󰡕에 오직 大夫 이상이라야만이 두 가지 그릇을 겸용할 수가 있고, 士는 오직 鬼器만을 사용할 수 있다. 曾子께서 그 말이 그른 까닭으로 이에 말씀하시기를 그 그렇지 않을거야라고 하셨으니, 재차 그걸 말씀하신 것은 대단히 그렇게 여기지 아니한 것이다. 대개 明器와 祭器가 진실로 이 사람과 귀신으 동일한 것이 아닐 것이지마는 夏나라와 殷나라의 사용한 바가 동일하지 않은 것은 각각 이 時王의 제도에 文質이 변한 것 뿐이요, 앎이 있고 앎이 없음을 이른 것이 아니다. 만약에 原憲의 말과 같다면은 夏后氏가 무엇 때문에 차마 앎이 없는 것으로써 그 어버이를 대우하였겠는가?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3代에 葬禮를 보내드리는 도구가 질박함과 문채남이 서로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 동일하지 않았던 것이요, 그 뜻이 앎이 없고 앎이 있음과 백성들에게 의심스러움을 보여줌에 있지 않다. 仲憲의 말이 모두 틀렸기에 曾子께서 그것을 그르게 여기시고 종말에 유독 그 夏后 明器를 말한 것을 기롱하셨으니 대개 그 실수의 심한 것을 거론하신 것이다.
公叔木有同母異父之昆弟死커늘 問於子游한대 子游曰其大功乎인저 狄儀有同母異父之昆弟死커늘 問於子夏한대 子夏曰我는 未之前聞也호니 魯人則爲之齊衰라하야늘 狄儀行齊衰하니 今之齊衰는 狄儀之問也니라
公叔木가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죽자 子游에게 질문하니, 子游가 말하기를 “그 大功服을 입어주어야 할 성싶소.” 狄儀가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죽자 子夏에게 질문하니, 子夏가 말하기를 “나는 그에 대해서 전에 듣지 못하였으니 魯나라 사람은 그를 위해서 齊衰服을 입어줍니다.”라고 하자, 狄儀가 齊衰服을 입어주었으니 오늘날 齊衰는 狄儀가 질문한 것에서 기인하였다.
公叔木는 魯나라 公叔文子의 아들이다. 부모가 같은 형제는 期年服을 입어주고 이 어머니가 같으면서 아버지가 다른 사람은 마땅히 강등하여 大功服을 입어주어야 된다. 그러나 禮經에는 그런 문자가 없기 때문에 子游가 의심하는 말로써 그에 대답을 하였고, 魯나라 사람이 齊衰服을 입어준 것은 시행한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子夏가 그걸 들어서 狄儀에게 답해 주었는데 기록한 사람이 말하기를 狄儀의 이 질문으로 인하여 지금 모두 그 齊衰服을 입어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두 사람이 禮를 말한 것이 동일하지 않음을 기록하였다. ○鄭氏가 말하기를 大功服이 옳다.
子思之母死於衛커늘 柳若이 謂子思曰子는 聖人之後也라 四方이 於子乎觀禮하리니 子는 蓋愼諸리오 子思曰吾何愼哉리오 吾는 聞之호니 有其禮오 無其財어든 君子弗行也하며 有其禮하며 有其財호대 無其時어든 君子弗行也니 吾何愼哉리오
子思의 어머니가 衛나라에서 사망하자, 柳若이 子思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聖人의 후손이므로 사바에서 그대에게서 禮를 관찰할 터인데, 그대는 어찌 그 喪禮를 삼가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엇을 삼가하겠는가? 나는 듣자하니 그 禮가 있고 그 재물이 없으면 君子가 행하지 아니하며, 그 禮가 있으며 그 재물이 있는데도 그 시기가 없다면은 君子가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삼가하겠오?”
柳若은 衛나라 사람이다. 伯魚가 돌아가자 그 아내가 衛나라로 시집을 갔었다. 그 禮가 있음은 禮에 할 수 있는 바를 이른다. 그러나 재물이 없으면은 가히 행할 수가 없고 禮는 시기가 중대한데 禮가 있고 재물이 있으되 시기가 가히 행할 수 없다면은 또한 그 禮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縣子瑣曰吾는 聞之호니 古者에 不降하야 上下各以其親하더니 滕伯文이 爲孟虎하야 齊衰하니 其의 叔父也오 爲孟皮하야 齊衰하니 其叔父也니라
縣子瑣가 말하기를 “나는 듣자하니 옛적에 降服하지 아니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각각 그 親屬으로써 하더니 滕나라 伯爵 임금 文이 孟虎를 위하여 齊衰服을 입어주었으니 그의 叔父때문이었고, 孟皮를 위해서 齊衰服을 입어주었으니 그가 叔父이기 때문에서였다.
縣子의 이름은 瑣이다. ○䟽에 말하기를 古者는 殷나라 때이다. 󰡔周禮󰡕에는 귀한 사람으로써는 천한 사람에게 降服을 하며 適子로써 庶子에게 降服을 하였고 오직 正親에게는 降服을 아니하였는데 殷나라 세상 이상에서는 비록 귀하더라도 천한 사람에게 降服을 아니하였으니 상하가 각각 그 親屬으로써 함은 降服하지 않는 일이다. 윗사람은 旁親인 族曾祖·從祖 및 伯叔의 반열을 이르고, 아랫사람은 從子·從孫의 따위를 이른 것이니, 저들이 비록 천하지마는 자기가 높음으로써 그들에게 降服하지 않고 그대로 각각 本屬의 친분 경중에 따라서 그들의 服을 입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각각 그 親屬으로써 服을 입어준다. 滕國의 伯爵 임금 이름이 文이다. 孟虎를 위해서 齊衰服을 입어준 것은 虎가 이 文의 叔父이기 때문에서이고, 또 孟皮를 위하여 齊衰服을 입어준 것은 文이 이 皮의 叔父이기 때문에서이니, 말하자면은 滕나라 伯爵 임금이 위로는 叔父를 위하고, 아래로는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모두 齊衰服을 입어주었다.
后木曰喪을 吾聞諸縣子호니 曰夫喪은 不可不深長思也니 買棺호대 外內易라하니 我死則亦然하라
后木이 말하기를 “喪禮를(喪禮에 대해서) 내가 縣子에게 듣자하니, 그가 말하기를 ‘대체 喪禮는 가히 深長(깊고 길게)하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니 內棺을 사되 밖과 안(겉쪽과 안쪽)이 평이해야(잘 손질해 가지고 반드러워) 된다.’고 하였으니, 내가 죽으면 또한 그렇게 하라.”
后木은 魯나라 孝公의 아들 惠伯鞏의 후손이다. ○馮氏가 말하기를 이 조목은 중요함이 深長하게 생각해야 된다는 一句에 있다. 內棺을 살 때에 겉쪽과 안쪽이 모두 정밀하고 좋은 것을 요구해야(구해야) 되나니 이것은 바로 효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이 부모가 미리서 부탁할 것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하였으니, 禮를 기록한 사람이 그가 실언함을 기롱한 것이다.
曾子曰尸未設飾이라 故帷堂이라가 小歛而徹帷하나니라 仲梁子曰夫婦方亂이라 故帷堂이라가 小歛而徹帷하나니라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막 初喪났을 적에 시신이 아직 치장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루에 휘장을 쳤다가 小歛을 하면 휘장을 걷는 것이다.” 仲梁子는 말하기를 “夫婦가 위치(방위)가 문란하기 때문에 마루에 휘장을 쳤다가 小歛을 하면은 휘장을 걷는 것이다.”
사람이 막 죽었을 적에 죽은 사람의 옷을 벗기고 歛하는 이불을 사용하여 그 시신을 덮어 목욕을 기다리고 이미 呼復한 뒤에는 치아에 쐐기를 물리고 발을 연이어 묶는 것이 끝나면 포와 육장의 奠을 갖추나니 일이 비록 조금 정해졌지마는 그러나 시신은 아직 歛襲을 아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치장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휘장을 마루에 설치한 것은 사람이 그 시신을 더럽히게 하고자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小歛이 끝나면 이에 휘장을 걷는다. 仲梁子가 夫婦가 위치가 문란하다고 이른 것은 哭하는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서이다. 두 사람이 각각 禮의 뜻을 말하였다. 鄭氏가 이르기를 歛하는 것은 시신을 동요시키는 것이고, 堂에 휘장을 치는 것은 사람에게 더럽혀지기 때문에서이니, 위치가 문란하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仲梁子는 魯나라 사람이다.
小歛之奠을 子游曰於東方이라하고 曾子曰於西方이니 歛斯席矣라하시니 小歛之奠이 在西方은 魯禮之末失也니라
小歛의 奠을 子游는 말하기를 “시신의 동쪽에 해야 한다.”고 하였고, 曾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시신의 서쪽에서 해야 한다. 小歛할 적에는 이에 돗자리에 奠을 설치한다.”고 하셨으니, 小歛의 奠이 西方에 있는 것은 魯나라의 禮가 말엽에 잘못된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儀禮󰡕에 小歛의 奠을 동방에 설치하고 奠올릴 적에 또 돗자리가 없는데, 魯나라의 쇠퇴한 말엽에 서쪽에 奠을 올리고 또 돗자리가 있었으니 이것은 曾子께서 당시에 이와 같이한 것을 보시고 장차 禮로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쪽에서 小歛을 한다고 하셨다. 斯는 이것인데, 그 小歛할 때에는 이 돗자리 위에다가 奠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한 사람이 그걸 시정하여 이르기를 小歛의 奠이 써 서쪽에 있게 된 것은 이 魯나라 사람이 禮를 행한 것이 말세에 그 禮儀를 잃어버린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 󰡔儀禮󰡕를 살펴보건대 문 안에 돗자리를 편다고 하였는데, 그 註에서 이르기를 有司가 歛席을 펴는 것이 小歛의 전에 있다고 하였고, 大歛의 옷을 진열하는 奠에 이르러서는 이르기를 奠席이 음식 북쪽에 있고 歛席이 그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註에 이르기를 大歛할 적에 奠을 하면서 돗자리가 있는 것은 더욱 그 죽은 이를 신으로 섬긴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에 근거한다면은 小歛 奠에는 돗자리가 없다.
縣子曰綌衰繐裳이 非古也니라
縣子가 말하기를 “거친 갈포로 衰服을 만들고 가늘고 설핀 삼베로 치마를 만드는 것이 옛 제도가 아니다.”
方氏가 말하기를 칡대가 거칠면서 틈이 있는 것을 綌이라고 이르고, 삼베가 가늘면서 설핀 것을 繐라고 이른다. 五服이 한결같이 삼베를 이용하되 각각 새 수가 있나니 만약 굵은 갈포로써 衰服을 만들고 가늘고 설핀 삼베로써 치마를 만든다면 그 가볍고 서늘한 것만을 취택할 뿐이니 옛날의 제도가 아니다.
子蒲卒커늘 哭者呼滅한대 子臯曰若是野哉아한대 哭者改之하니라
子蒲가 사망하자 哭한 사람이 죽은 이의 이름인 滅을 부르자, 子臯가 말하기를 “이처럼 야비(무식)할 수 있는가?” 라고 하니, 哭한 사람이 그것을 고치었다.
滅은 子蒲의 이름이다. 呼復할 적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거니와 哭할 적에야 어찌 가히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는가? 野哉는 그 비루하고 촌스러워서 禮에 통달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子臯는 孔子의 弟子 高柴이다.
杜橋之母之喪에 宮中이 無相하더니 以爲沽也라하니라
杜橋의 어머니의 喪事에 집안에 禮를 돕는 이(相禮)가 없었는데 거칠다고 하였다.
䟽에 말하기를 沽는 거칠고 소략함이다. 효자가 어버이를 여윔에 비통하고 혼미하여 다시 스스로 알지 못하여 禮節과 事儀를 모두 사람이 도와 인도해 주는 것을 기다리는데(필요로 하는데) 杜橋의 집이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집안에서 禮를 도와 뫼시는 사람을 세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가 禮에 있어서 거칠고 소략했다고 말했다.
夫子曰始死에 羔裘玄冠者는 易之而已라하시니 羔裘玄冠으로 夫子不以吊하시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막 죽었을 적에 검은 갖옷과 검은 갓을 쓴 사람은 그것을 바꿀 뿐이다.”고 하셨으니, 검은 갖옷과 검은 갓으로 孔子께서는 써 조문가지 아니하셨다.
䟽에 말하기를 병을 간호하는 사람은 朝服을 입으나니, 검은 갖옷과 검은 갓을 바로 朝服이다. 사람이 막 사랑하게 되면은 朝服을 벗고 深衣를 입는 것인데 당시에 바꾸어 입지 아니한 사람이 있고 또 小歛한 뒤에 검은 갖옷으로 조문간 사람이 있으니 기록한 사람이 따라서 孔子께서 禮를 행하신 일을 인용하여 그 禮를 말하였다.
子游問喪具한대 夫子曰稱家之有亡니라 子游曰有無에 惡乎齊니잇고 夫子曰有라도 毋過禮니 苟亡矣어든 歛首足形하야 還葬호대 縣棺而封한들 人豈有非之者哉리오
子游가 初喪치르는 도구에 대하여 질문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안 재정의 있고 없음에 알맞게 해야 된다.” 子游가 말하기를 “있고 없음에 있어서 어떻게 알맞게 재량해야 되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돈이 있더라도 禮를 초과하지 말아야 되나니 만약 재정이 없다면은 머리와 발과 형체를 거두어 곧바로 葬事를 지내되 손으로 끈을 매잡고서 下棺을 하여 묻더라도(무덤을 쓴들)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비난한 사람이 있겠는가?”
喪具는 죽은 이를 보내드리는 의식 물건이다. 어떻게 재량해야 됩니까한 것은 무엇으로 厚薄을 재량할 것이냐고 말한 것이다. 禮에 초과하지 말라는 것은 가히 富者인 까닭에 禮를 넘어서 후하게 葬事지낼 수 없는 것이다. 곧바로 葬事를 지냄은 歛이 끝나면 곧바로 葬事를 지내고 빈소를 차리어 달과 날짜의 시기를 기다리지 않음을 이른다. 사람이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 것은 재물이 없으면은 가히 禮를 구비할 수 없기 때문에서이다.
司士賁이 告於子游曰請襲於牀하노라 子游曰諾다 縣子聞之曰汰哉라 叔氏여 專以禮로 許人이로다
司士 賁이 子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평상에서 歛襲을 하겠습니다.” 子游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시오.” 縣子가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자긍심이 대단하구나. 叔氏여. 오로지 禮에 있는 것을 가지고 사람에게 허락하는구나.”
賁은 司士의 이름이다. 禮에 사람이 막 사망하면은 평상을 폐기하고 시신을 땅바닥에 두었다가 呼復을 하였는데도 되살아나지 않음에 이르면은 시신이 다시 평상으로 올라오게 된다. 襲이라는 것은 그 시신을 옷으로 거두는 것이다. 목욕한 뒤에 商祝이 祭服과 褖衣를 입히고서 평상 위에 시신을 삼베로 덮어놓는다. 飯含한 뒤에는 襲牀위에 시신을 올려놓고서 그것을 입히나니 歛襲하는 것은 禮이고, 후세에 禮가 상실되어 땅바닥에서 襲을 한 것은 褻慢한 것이다. 司士가 禮를 알고서 子游에게 묻자 子游가 禮를 일컫지 아니하고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였으니 써 縣子의 기롱을 야기시킨 것이다. 汰는 자긍심이 큰 것이다. 말하자면 무릇 禮事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禮에 근거해서 대답을 해주어야 되는 것인데 子游가 오로지 바로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여 禮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뽐낸 것이 대단한 것이다. 叔氏는 子游의 字이다.
宋襄公이 葬其夫人할새 醯醢百甕이러니 曾子曰旣曰明器矣로대 而又實之온여
宋나라 襄公이 그 夫人을 葬事지낼 적에 초와 육장이 일백 항아리나 되었는데,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明器라고 하였는데 또 그것에 실물을 채웠구려.”
夏나라의 禮는 오로지 明器를 사용하여 그 절반은 채우고 그 절반은 비워두었고, 殷나라 사람은 온전히 祭器만을 사용하였으되 또한 그 절반을 채웠고, 周나라 사람은 두 그릇을 겸용하여 人器는 채웠고 鬼器는 비워두었다.
孟獻子之喪에 司徒가 旅歸四布한대 夫子曰可也라하시다
孟獻子의 喪事에 司徒가 旅(下士)로 하여금 사방에서 들어온 賻儀 돈을 되돌려 보내도록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괜찮다.”고 하시었다.
䟽에 말하기를 죽은 사람을 보내드리는 일이 이미 끝남에 賻儀 돈이 여유가 있으니, 그 家臣인 司徒가 주인의 뜻을 받들어 旅인 下士로 하여금 사방에서 賻儀를 한 주인들의 돈을 되돌려 주었으니, 당시에 모두 탐욕을 부렸건마는 獻子의 집안만이 유독 능히 이와 같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괜찮다고 하셨으니 그 능히 청렴함을 좋게 여기셨다. 󰡔左傳󰡕에 叔孫氏의 司馬 鬷戾라고 하였으니, 이는 家臣이 또한 司徒와 司馬가 있는 것이다.
讀賵을 曾子曰非古也니 是再告也니라
車馬 扶助를 읽는 것에 대하여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禮가 아니다. 이는 재차 보고한 것이다.”
扶助를 車馬로 한 것을 賵이라고 하니, 賵이라는 것은 써 주인의 葬禮보내드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미 받았으면은 그 사람의 성명과 그 물건을 모난 널판지 위에 써두었다가 葬事지낼 때에 널이 장차 떠나가려고 할 적에 주인의 史書가 이 모난 판자에 써진 車馬 扶助를 청하여 읽으나니, 대개 널 동쪽에서 앞쪽의 동쪽에 당하여 서쪽을 향하여 이것을 읽는다. 옛적에는 그것을 올려놓고서 읽지를 아니하였는데 周나라에서는 이미 올려놓고 또 읽었다. 그렇기 때문에 曾子께서 재차 보고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成子高寢疾이어늘 慶遺入請曰子之病이 革矣니 如至乎大病이어든 則如之何오
成子高가 병으로 누워있자, 慶遺가 들어가서 묻기를 “당신의 병이 위급하니, 만약 큰 병환(사망함)에 이르게 된다면은 어떻게 해야 되겠오?”
成子高는 齊나라의 大夫 國伯高父인데, 시호는 成이다. 遺는 慶封의 종족이다. 革은 亟과 더불어 같은데, 위급함이다. 큰 病은 죽는 것이니, 그것을 忌諱한 말이다.
子高曰吾는 聞之也호니 生有益於人하며 死不害於人이라호니 吾縱生無益於人이나 吾可以死害於人乎哉아 我死則擇不食之地而葬我焉하라
子高가 말하기를 “나는 듣자하니 살아서는 사람들에게 有益함이 있어야 되며 죽어서는 사람을 해치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는데, 내가 비록 살아서는 사람들에게 有益함이 없었지만 내가 가히 죽음으로써 사람들을 해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으면은 농사짓지 않는 땅을 가려서 나를 葬事지내다오.”
不食之地는 밭갈이하여 개간하지 않는 땅을 이른다.
子夏問諸夫子曰居君之母와 與妻之喪하얀 如之何잇가 夫子曰居處言語飮食이 衎爾니라
子夏가 孔子께 질문하기를 “임금의 어머니와 임금 아내의 喪事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居處와 言語와 飮食이 화평하고 적절해야 한다.”
임금의 어머니와 임금의 아내가 비록 모두 小君으로서 모두 齊衰·不杖期服을 입지마는 그러나 恩義는 얕기 때문에 그 喪事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자처하기를 이와 같이해야 한다. 衎爾는 화평하고 적절한 모양이다. 이 章은 文勢로 미루어보건대 喪字 밑에 마땅히 如之何夫子曰 글자가 있어야 된다. 舊說에는 기록한 사람이 생략한 것이다고 하는데 또한 혹시 글을 누락시켰는가보다. 또 아니라면은 問字는 마땅히 聞字로 되어야 되겠다.
賓客이 至하야 無所館이어늘 夫子曰生於我乎館하고 死於我乎殯이라하시다
손님이 와서 머무를 곳이 없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살아서는 내 집에 머무르도록 하고 그가 죽으면은 내 집에서 빈소를 차리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살아서 이미 그를 머무르게 하였으므로 죽으면은 마땅히 빈소를 차려주어야 되는 것이다. ○應氏가 말하기를 붕우는 의리로써 합한 것인데, 그를 손님이라고 이른 것은 그가 먼 지방으로부터 왔기 때문에서이다.
國子高曰葬也者는 藏也니 藏也者는 欲人之弗得見也니라 是故衣足以飾身하며 棺周於衣하며 槨周於棺하며 土周於槨이니 反壤樹之哉아
國子高가 말하기를 “葬禮라는 것은 감춰주는 것이니, 감춰주는 것은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옷은 충분히 써 시신을 치장할 수가 있어야 하며 內棺은 옷을 두루 담을 수 있어야 하며 外槨은 內棺을 두루 감싸주어야 하며 흙은 外槨을 두루 덮게 해야 되나니 도리어 封墳을 짓고 거기에 나무를 심을 것이 있겠는가?”
國子高는 바로 成子高이다. ○䟽에 말하기를 子高의 뜻은 사람이 죽으면 가히 혐오스럽기 때문에 衣衾과 棺槨으로써 갖추어 치장하는 것은 그 깊히 묻어가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 이에 도리어 다시 흙을 쌓아서 封墳을 만들어 나무를 심어가지고서 그 무덤을 표지해야 되겠는가? 國子의 뜻은 儉朴함에 있으니 周나라의 禮는 아니다.
孔子之喪에 有自燕來觀者舍於子夏氏러니 子夏曰聖人之葬人與아 人之葬聖人也니 子何觀焉고
孔子의 喪事에 燕나라로부터 와서 참관하는 사람이 子夏氏에게서 머무르게(子夏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子夏가 말하기를 “聖人(孔子)께서 일반 사람을 葬事지내는 것입니까? 보통 사람이 聖人을 葬事지내는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볼 것이 있겠습니까?”
延陵 季子가 그 아들을 葬事지낼 적에 孔子께서 오리혀 가서 그것을 참관하셨으니, 지금 孔子의 葬事에 燕나라 사람이 와서 참관하려 한 것이 또한 그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子夏의 뜻은 聖人이 사람을 葬事지내는 것에 있어서는 일이 모두 禮에 부합하거니와 일반 사람이 聖人을 葬事지냄에 있어서는 꼭 모두 禮에 합하지 못할 것으로 여기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말하기를 당신은 聖人이 사람을 葬事지내는 것으로 여기는가? 바로 일반 사람이 聖人을 葬事지내는 것인데 또 어찌 참관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였으니 대체 겸손한 말이다.
昔者에 夫子言之曰吾見封之若堂者矣며 見若坊者矣며 見若覆夏屋者矣며 見若斧者矣로니 從若斧者焉이라하시니 馬鬣封之謂也니 今에 一日而三斬板而已封하니 尙行夫子之志乎哉인저
옛적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封墳이 집 모양처럼 생긴 것도 보았으며, 제방 모양처럼 생긴 것도 보았으며, 기와로 이은 夏나라의 가옥 모양처럼 생긴 것도 보았으며, 도끼 모양처럼 생긴 것도 보았는데, 도끼 모양처럼 생긴 것을 따르겠다.”고 하셨으니, 馬鬣封을 이른 것이다. 지금 하루만에 세 번 판자를 자르고서 이미 封墳이 이루어졌으니, 거의 孔子님의 뜻을 시행하였는가 싶습니다.
이는 흙을 쌓음이 이 네 가지 것의 모양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封은 흙을 쌓아서 封墳을 만든 것이다. 집과 같은 것은 집의 터가 사방이 모나고 높은 것과 같은 것이다. 坊은 제방인데, 제방과 같은 것은 위는 평평하며 옆은 좁아지면서 남북이 긴 것이다. 기와로 이은 夏나라 지붕 모양같다는 것은 옆이 넓으면서 낮은 것이다. 도끼와 같다는 것은 위는 좁아가지고 칼날과 같은 것인데, 비교하건대 위의 세 가지 것은 모두 공을 씀에 힘이 많이 들고 이루기가 어렵고, 이것은 검소하여 성취하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에서 馬鬣封이라고 이르나니, 말이 갈기 위에가 그 살이 얇으니 封墳 모양이 그와 같은 것이다. 지금 하루만이라는 것은 지금 孔子의 封墳을 쌓는 것은 많은 시간을 빌리지 않고 하루의 사이에 세 차례 판자를 자르고서 바로 쌓음이 끝나면 이미 그침을 이른다. 그 방법은 구덩이의 양쪽에 판자를 옆으로 대서 노끈을 사용하여 판자를 묶고 이에 흙을 안에 들여 넣어 쌓아서 흙과 판자가 평평해지면 판자를 묶은 노끈을 잘라 끊고서 이 판자를 흙을 쌓은 곳의 위에 올리고 또 흙을 그 속에 채워 쌓으나니 이와 같이하기를 세 번하면 封墳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 판자를 자르고서 이미 封墳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尙은 거의이다. 乎哉는 의심하는 말이고 또한 겸손히 감히 질문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
婦人은 不葛帶하나니라
婦人은 칡 띠를 띠지 아니한다.
禮에 婦人의 腰帶는 숫삼으로 본 바탕을 꼬아 만드는데 卒哭에 大夫는 麻帶를 벗어버리고 葛帶를 띠고 首絰은 바꾸지 아니하고, 婦人은 칡으로 首絰을 만들어 머리의 麻絰을 바꾸어 버리고 麻帶는 바꾸지 아니하니 이른바 葛帶를 띠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練祥을 지내면 남자는 首絰을 벗고 婦人은 腰帶를 벗으나니 婦人은 머리는 가볍고 허리가 중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러나 이 婦人은 齊衰와 斬衰의 服을 입은 사람이 이와 같음을 이른 것이니, 大功 이하의 가벼운 服 같은 것은 卒哭에 이르면 모두 바꾸어서 칡으로 만들어 남자와 더불어 같다.
有薦新이어든 如朔奠이니라
새로운 것을 빈소에 올림이 있으면 朔奠과 같이 한다.
朔奠이라는 것은 매달 초하루의 奠이다. 아직 葬禮지내지 않았을 때에 大夫 이상은 초하루와 보름에 모두 奠이 있고 士는 朔奠일 뿐인데, 만약에 제철의 새로운 맛과 혹은 五穀이 새로 영글어서 그것을 올리게 될 경우에는 그 禮가 또한 朔奠의 의식과 같다.
旣葬하고 各以其服除니라
이미 葬事를 지내면 각각 그 喪服을 벗거나 바꾸어 입는다.
석달만에 葬事를 지내고, 葬事를 지내면 虞祭를 지내고, 虞祭를 지내고 卒哭을 지내나니, 친의가 무겁고서 마땅히 麻衰를 바꾸어야 할 사람은 그것을 바꾸어 입고, 그 마땅히 服을 벗어야 할 사람은 곧바로 스스로 그 服을 벗고, 주인이 卒哭을 지내고 服을 바꾸어 입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池視重霤하나니라
상여으 낙수물받이는 重霤를 본떠서 만든다.
䟽에 말하기를 池라는 것은 상여의 낙수물받이이다. 重霤라는 것은 집의 낙수물받이인데, 나무로 그것을 만들어 지붕 처마에 대어서 낙수물이 이 나무 홈통 속으로 들어가 또 나무의 홈총 속을 따라서 땅에 떨어지기 때문에 重霤라고 하였다. 天子의 지붕은 사방에서 낙수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사면에 모두 重霤가 있고, 諸侯는 사방에서 낙수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낙수물받이는 뒷면의 것은 제거하고, 大夫는 오직 전후면에 두 개뿐이고, 士는 오직 한 개만이 전면에 있는데, 살아 생전에 지붕에 重霤가 있었기 때문에 죽었을 때에 상여에 또한 집을 모방해 가지고 낙수물받이를 상여에 설치하여 상여 뚜껑의 아래와 담같은 휘장 위에 덮으니 대개 대오리를 엮어서 그것을 만들되 모양이 새장 같아 푸른 베로 겉을 입혀가지고 써 鼈甲 밑에 대니, 그것을 이름하여 낙수물받이라고 하니 重霤를 본받았기 때문이다. 사방 면의 수효는 각각 生時의 重霤를 비한다.
君이 卽位어시든 而爲椑하야 歲一漆之하야 藏焉하나니라
임금이 卽位하게 되면은 內棺을 만들어서 해마다 한 번씩 그 內棺에 옻칠을 하여 그 속에 물건을 넣어둔다.
䟽에 말하기를 임금은 諸侯이다. 人君은 나이가 적고 많음을 막론하고 몸체가 높음에 물건을 구비해야 하니 즉위식을 가짐에 바로 시신이 가까이 닿는 內棺을 만드나니, 바로 백양나무 內棺이다. 옻칠을 하면 견고하고단단함이 탵탱글탱글하기 때문에 椑라고 명명한 것인데, 매년 한 번씩 칠한 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처럼 표시한 것이다. 그 속에 물건을 간직해 둔다는 것은 그 속을 비워두고 싶지 않아서 급히 기다림이 있는 것처럼 하기 때문에 그 속에 물건을 간직해 두는 것이다. 一說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內棺을 간직해 둔다고 하였다.
復과 楔齒와 綴足과 飯과 設飾과 帷堂을 並作하나니라
呼復하는(혼을 부르는) 것과 치아에 쐐기질하는 것과 발을 잇닿게 하는 것과 飯含하는 것과 단장을 설치하는 것과 마루에 휘장을 치는 것을 일시에 거행한다.
사람이 막 죽어서 招魂한 뒤에는 뿔 수저를 사용해서 시신의 치아에 괴어 하여금 벌어지게하여 飯含할 때에 닫히지 않도록 하고, 또 형상시 안석을 사용해서 시신의 양쪽 발을 당겨서 잇대어 반듯하게하여 하여금 신을 신을 때에 비틀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飯含이라는 것은 쌀과 패옥을 시신의 입 속에 채우는 것이다. 단장을 설치하는 것은 시신을 歛襲하는 것이다. 帷堂은 마루 위에 휘장을 설치하는 것이다. 作은 일어나서 하는 것이니, 呼復으로부터 帷堂에 이르기까지 여섯가지 일이 일시에 나란히 거행되기 때문에 並作이라고 하였다. 󰡔儀禮󰡕에는 또한 총괄해서 하나의 그림에 나타나있다.
父兄이 命赴者하나니라
父兄이 부고할 사람을 명령한다.
䟽에 말하기를 살아 생전에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앎이 있는 사람이 지금 죽으면은 그 가정에서 마땅히 사람을 시켜서 가 서로 부고해야 되나니, 「士喪禮」에 효자가 스스로 부고할 사람은 명령하되 만약 大夫 이상은 父兄이 그 명령을 한다고 하였다.
君은 復於小寢과 大寢과 小祖와 大祖와 庫門과 四郊하나니라
임금은 小寢(高祖 이하의 正寢)과 大寢(太祖의 正寢)과 小祖(高祖 이하의 사당)와 大祖(太祖의 사당)와 城郭 門과 사방 郊外에서 呼復을 한다.
天子의 城郭 門을 臯門이라고 한다. 「明堂位」에 말하기를 魯나라의 庫門은 바로 天子의 臯門이다고 하였으니, 이 庫門은 城郭 門이다. ○䟽에 말하기를 君은 王侯이다. 앞은 사당이라고 이르고, 뒤는 正寢이라고 이르는데, 방이 동서 곁방이 있는 것을 廟라고 이르고, 동서 곁방은 없고 방만 있는 것을 寢이라고 이른다. 小寢은 高祖 이하의 正寢인데, 王侯가 같다. 大寢은 天子 始祖의 正寢이요, 諸侯 太祖의 正寢이다. 小祖는 高祖 이하의 사당인데, 王侯가 같다. 大祖는 天子 始祖의 사당이요, 諸侯 太祖의 사당이다. ○馬氏가 말하기를 正寢은 거처하는 곳이고, 祖는 일이 있는 곳이고, 門은 드나드는 곳이고, 郊는 일찍이 이르렀던 곳이니, 임금을 呼復할 때에 반드시 여기에서 하는 것은 대개 魂氣(넋)가 가는 것이 또한 일찍이 생시에 익숙한 곳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서이니 이것을 본다면은 死生의 말을 가히 알 수가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馬氏는 小寢·大寢으로 燕寢·正寢을 삼았으니, 舊說과 다르다.
喪不剝奠也與는 祭肉也與인저
喪事에 奠物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은 祭肉인 성싶다.
剝은 수건으로 덮지 않는 것이다. 脯醯의 奠은 먼지를 혐오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가히 수건으로 덮지 않을 수 있나니, 무릇 덮는 것은 반드시 그 祭肉이 있기 때문에서이다.
旣殯하고 旬而布材與明器하나니라
이미 빈소를 차리고 열흘만에 널 재목과 明器를 벌여놓고 말린다.
材는 外槨을 만드는 나무이다. 布(벌여놓은 것)는 구분해서 벌여놓아 햇볕에 쬐어 말리는 것이다. 빈소를 차린 뒤 열흘만에 바로 이 일을 다룬다. 禮에 빈소를 찬 문 밖에 재목을 바친다고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明器으 재목이라도 하였으니, 여기에서는 널 재목과 明器라고 이른 것은 대개 두가지 것의 재목을 모두 말리는 것이다.
朝奠으란 日出하고 夕奠으란 逮日하나니라
아침에 올리는 奠은 해가 돋을 적에 거행하고, 저녁에 올리는 奠은 해가 지기 전에 미쳐서 거행한다.
逮日은 해가 아직 지기 전에 미친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朝奠은 아침 때의 식사를 모방한 것이고, 夕奠은 저녁 때의 식사를 모방한 것인데, 효자가 사망한 이를 섬기되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한 것이다.
父母之喪에 哭無時하며 使어든 必知其反也니라
父母의 喪中에 哭을 無時로 하며 사신가게 되면은 반드시 그 돌아옴을 아시도록 해야 한다.
빈소를 차리지 아니하였을 적에는 哭이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빈소를 차린 뒤에는 비록 朝夕 哭할 때가 있지마는 그러나 여막 속에서 생각이 나면은 哭을 하고 小祥 뒤에는 슬픔이 이르면 哭을 하나니 이것이 모두 哭이 일정한 때가 없는 것이다. 사신가는 것은 임금이 임명하여 시킨 것을 받는 것이다. 小祥 뒤에 임금이 일이 있어서 그를 사신으로 시키면은 가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돌아오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고 告由하여 어버이의 신령으로 하여금 그가 이미 돌아옴을 알도록 해야 되나니 또한 생전에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여쭙고 돌아오면은 반드시 뵈인다는 뜻이다.
練에 練衣를 黃裏하고 縓緣하며
練祥에 마전한(빤) 中衣를 황색으로 안을 받치고 연분홍 빛으로 옷과 소매를 선둘러야 하며
䟽에 말하기를 練은 小祥인데, 小祥을 지내고 練冠(마전한 冠)과 練中衣(마전한 中衣)를 입기 때문에 練이라고 말하였다. 練衣라는 것은 빤 것으로써 中衣를 만들고, 黃裏라는 것은 누런 색이 中衣의 속이 되는 것이다. 正服은 가히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니, 中衣는 正服이 아니고 다만 衰服에 받쳐입을 뿐이다. 縓은 얕은 홍색이다. 緣은 中衣의 옷깃 및 소매를 선두름을 이른다.
葛要絰하며 繩屨無絇하며
칡 要絰을 띠며 노끈으로 삼은 신을 신되 신코의 장식은 없으며
小祥에 남자는 머리의 麻絰을 제거하고 오직 나머지는 허리의 칡 띠이기 때문에 칡 要絰을 띤다고 하였다. 繩屨는 어버이의 初喪에는 왕골로 삼은 신을 신고, 卒哭에 齊衰服을 받아 기름사초의 풀로 삼은 신을 신고, 小祥에 大功服을 받아 노끈으로 삼은 신을 신는다. 無絇는 신의 머리에 장식이 없음을 이른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菅屨와 䟽屨를 지금 가히 고찰할 수 없는데, 지금 대략 輕重으로 미루어보건대 斬衰服에는 지금 짚신을 사용하였고, 齊衰服에는 삼으로 삼은 신을 사용하는 것이 괜찮으니 麻鞋는 지금 병사들이 착용한 것이다.
角瑱하며
뿔 귀막이를 사용하며
瑱은 귀막이이니, 吉한 때에는 임금과 大夫와 士가 모두 귀막이가 있으니 써 귀를 가리는 것이다. 임금은 옥을 사용하여 그 귀막이를 만드나니 初喪時에는 장식을 제거하기 때문에 귀막이가 없고, 小祥 뒤에는 조금 치장을 하기 때문에 뿔을 사용해서 그 귀막이를 만든다.
鹿裘를 衡長袪이니 袪하고 裼之可也니라
사슴 갖옷을 소매의 가로가 넓고 길이가 길게 선을 둘러야 되나니 소매에 선을 두르고 웃옷을 입는 것이 좋다.
䟽에 말하기를 겨울철에는 吉凶의 옷이 속에 모두 갖옷이 있으니 吉할 때에는 貴賤의 차이가 있고 喪事에는 동일하게 사슴 가죽을 사용해서 그 갖옷을 만들되 小祥 전에는 갖옷이 좁으며 짧고 소매 또한 선두름이 없다가 小祥을 지내면은 조금 장식을 하기 때문에 바꾸어 가로로 넓고 큰 것을 만들고 또 길게 하고 또 그 소매에 선을 두르는 것을 설치한다. 裼이라는 것은 갖옷 위의 옷인데, 吉할 때에는 모두 있나니, 初喪을 당한 뒤에는 凶한 바탕이 있기 때문에 웃옷이 있지 않다가 小祥 뒤에는 점점 吉함으로 향하기 때문에 웃옷을 가하는 것이 좋다. 살펴보건대 이와 같은 글은 小祥 시기 이외에는 衰服이 있고 衰服의 안에 練中衣가 있고 中衣 안에 裼衣가 있고 裼衣 안에 사슴 갖옷이 있고 사슴 갖옷 안에 스스로 항상 입는 襦衣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지금 살펴보건대 袪라는 것은 소매인데, 여기에 이른바 袪는 이 다른 물건으로 소매의 선을 두른 것이다. 이미 소매에 장식을 하였기 때문에 웃옷을 입는 것이 좋다.
有殯에 聞遠兄弟之喪하면 雖緦라도 必往이니 非兄弟면 雖鄰이라도 不往이니라
빈소가 있을 적에 먼 兄弟의 喪事를 들으면은 비록 緦麻服일지라도 반드시 가야 되나니 兄弟가 아니라면은 비록 이웃이라도 가지 않아야 된다.
삼년의 喪事가 빈소에 있을 적에는 나가 조문할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형제에 있어서는 恩義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緦麻服을 입어주는 형제로써 다른 지방에 거처하여 멀리 있더라도 또한 마땅히 가서 그 喪事에 哭을 해야 되고 만약 형제가 아니라면 비록 가깝더라도 가지 않아야 된다.
所識에 其兄弟不同居者라도 皆吊니라
알고 지내는 바에 있어서 그 兄弟로서 함께 살지 아니한 사람일지라도 모두 조문가야 된다.
馮氏가 말하기를 위의 두 句는 이미 생전에 주인삼은 사람은 나가서 조문하고 가서 哭하는 것이 의리가 되니 아래 한 句의 글의 뜻과 마땅히 같다. 所識이 마땅히 句가 되어야 되나니, 만약 알고 지내는 바를 이른다. 죽은 사람을 이미 내가 알고 지내는 바이라면 그 형제가 비록 죽은 사람과 함께 살지 아니하였더라도 내가 모두 마땅히 그를 조문해야 되나니 왕래의 情義를 이루는 것이다.
天子之棺은 四重하야 水兕革棺을 被之호대 其厚三寸이오 杝棺一과 梓棺二니 四者를 皆周하나니라
天子의 內棺은 사중으로하여 물소와 외뿔소의 가죽으로 만든 棺을 그 위에 입히되(씌우되) 그 두께가 3치이고, 피나무로 만든 內棺 하나와 가래나무로 만든 內棺이 둘이니, 네가지 것을 모두 두루 밀봉한다.
물소와 외뿔소의 가죽이 습기를 견뎌내기 때문에 그로써 몸에 닿는 內棺을 만드니 두 가죽이 합해서 입혀 가지고 한 겹이 된다. 피나무도 또한 습기를 견뎌내기 때문에 가죽에 다음가니 바로 前章에 이른바 椑이다. 가래나무로 만든 棺이 둘이니, 하나는 부속이 되고 하나는 큰 棺이 되는데 杝棺의 밖에 屬棺이 있고 屬棺 밖에 또 大棺이 있다. 네 가지 거슬 두루 밀봉한다는 것은 네 겹의 棺이 상하 사방을 모두 두루 밀봉함을 말한 것이다. 오직 外槨만은 밀봉하지 아니하니 아래에는 깔개가 있고 위에는 抗席(먼지를 받아내는 자리)이 있기 때문에서이다.
棺束은 縮二衡三이니 衽은 每束에 一이니라
棺의 묶음은 세로가 두 번하고가로로 세 번하니, 나비은장 이음은 매 묶음마다 하나씩이다.
옛적에는 棺에 못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오직 가죽끈으로써 세로로 묶기를 두 번하고 가로로 묶기를 세 번한다. 衽(나비은장 이음)은 형체가 지금은 은혈 못과 같은데, 두 끝은 크고 가운데는 작다. 漢나라 때에는 그것을 小要라고 불렀으되 무슨 물건으로 그걸 만든 것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또한 나무인 성싶다. 옷의 봉합한 곳을 衽이라고 하는데, 小要로써 棺과 뚜껑의 사이를 연합하기 때문에 또한 衽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먼저 나무를 파서 衽을 안치한 뒤에 가죽으로 묶으니 매 묶은 곳마다 반드시 하나의 나비은장 이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衽은 매 묶은 곳마다 한 번씩 한다고 하였다.
柏槨은 以端이니 長六尺이니라
柏槨은 밑둥을 이용하니 길이가 6尺이다.
天子는 잣나무로 外槨을 만든다. 端은 밑둥과 같으니, 잣나무 밑둥을 사용해서 그걸 만드니 그 길이가 6尺이다.
天子之哭諸侯也에 爵弁絰紂衣니라
天子가 諸侯에 대하여 哭을 할 적에 爵弁에 紂衣를 입는다.
○鄭氏가 말하기를 絰은 쓸데없는 글자이다. 󰡔周禮󰡕에 왕이 諸侯에 대하여 조문갈 적에 弁과 絰과 緦麻服에 衰服이다. ○䟽에 말하기를 天子는 지극히 높기 때문에 시신과 널이 보이지 아니하면 吊服을 입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멀리서 그를 哭하기 때문에 緦麻服에 衰服을 입지 아니하고 爵弁에 紂衣를 입는다.
或曰使有司哭之라하니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有司를 시켜서 그 諸侯에 대하여 哭을 한다.”고 하였다.
鄭氏가 말하기를 틀렸다. 애도하는 일은 가히 헛되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爲之하야 不以樂食이니라
그 죽은 諸侯를 위해서 음악으로써 수라를 들지 않는다.
䟽에 말하기를 이것은 기록한 사람의 말이 옳으니, 어떤 사람의 설명은 틀렸다.
天子之殯也엔 菆塗龍輴을 以槨하고 加斧于槨上하고 畢하고 塗屋이 天子之禮也라
天子의 빈소에는 棺 주위에 나무를 놓아 백토를 바르고 상여에 용을 그리어 槨처럼 만들고 도끼 무늬를 수놓은 棺衣를 外槨 위에 올려놓고 그걸 마치고 그 지붕을 백토로 바르는 것이 天子의 禮이다.
䟽에 말하기를 菆은 무더기이다. 菆塗는 나무를 棺 주위에 쌓아 사면을 바름을 이른다. 龍輴은 빈소를 차릴 적에 상여를 사용하여 널을 싣고 끌채에 용 무늬를 그린 것이다. 以槨은 이 쌓아놓은 나무가 外槨의 모양을 닮았다. 棺을 덮는 옷에 도끼 무늬를 수놓음이다. 먼저 사면에 나무를 쌓아 槨처럼하여 윗면과 棺이 가지런하게하여 위는 오히려 열려있도록하여 이 棺衣로써 外槨 위로부터 棺에 넣어 덮기 때문에 加斧于槨上이라고 하였다. 畢은 다함이다. 도끼 무늬를 수놓은 棺衣를 덮기를 이미 마침에 또 사방에서 낙수물이 떨어지는 지붕처럼하여 위에서 아래로 사면을 덮어 모두 바른다. ○지금 살펴보건대 菆塗龍輴은 이 상여도 또한 빈소를 차리는 중에 있는데 상여를 떼어버리고 빈소와 棺만 있는 것은 아니다.
唯天子之喪에 有別姓而哭이니라
오직 天子의 喪事에는 異姓을 구별하여 哭을 한다.
諸侯가 天子에게 조회하여 알현할 적에는 爵位가 같으면 그 위치가 동일하지마는 지금 喪禮에 있어서는 同姓과 異姓과 庶姓을 구별하여 하여금 각각 서로 따라서 位次를 만들어 가지고 哭을 하도록 한다.
魯哀公이 誄孔丘曰天不遺耆老하야 莫相予位焉하니 嗚呼哀哉라 尼父여
魯나라 哀公이 孔丘에게 誄文을 지어 이르기를 “하늘이 老成한(늙은) 이를 남겨두지 아니하여 나의 왕위를 돕는 이가 없게 되었으니 아아! 슬프구나. 尼父여.” 하였다.
시호를 짓는 사람이 먼저 그 생전의 행실을 나열하여 그걸 誄文이라고 이른다. 大聖의 행실을 어찌 다 나열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하늘이 이 老成한 이를 남겨두지 아니하여 나의 왕위를 돕는 이가 없게 했다고 하여 써 그 상심하고 애도하는 뜻을 표현하였을 뿐이다. 孔丘라고 일컬은 것은 君臣間의 말이니, 이는 󰡔左傳󰡕의 말과 더불어 같지 않다. ○鄭氏가 말하기를 尼父는 그 字를 따라서 그 시호를 삼은 것이다.
國亡大縣邑이어든 公卿大夫士皆厭冠으로 哭於太廟三日하고 君不擧니 或曰君擧而哭於后土니라
한나라가 큰 縣邑을 잃어버리면은 公·卿·大夫·士가 모두 厭冠으로서 太廟에서 哭하기를 3日동안 하고 임금은 풍악을 울리며 수라를 들지 아니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금이 풍악을 울리면서 后土에 哭을 한다.”고 한다.
厭冠은 喪冠인데, 설명이 「曲禮」에 보인다. 풍성한 음식에 풍악으로써 먹는 것을 권유하는 것을 擧라고 한다. 后土는 社稷이다. ○應氏가 말하기를 太廟에서 哭하는 것은 祖宗·基業이 虧損된 것을 상심한 것이요, 后土에 哭하는 것은 土地·封疆이 깍인(침탈당한) 것을 상심한 것이다. 풍성한 음식을 들지 않는 것은 스스로 貶損한 것이다. 君擧라고 말한 것은 틀렸다.
孔子는 惡野哭者하더시다
孔子께서는 들에서 哭하는 것을 싫어하시었다.
알고 지내는 바에 있어서 내가 그를 위하여 들에서 哭을 하는 것은 孔子께서 일찍이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대개 그 알고 지내는 바를 哭을 함에 반드시 位次를 설치해 놓고서 그 자리를 휘장을 쳐서 써 禮를 이루나니, 이 싫어하는 것은 혹 郊野의 사이와 도로의 사이가 哭하는 것이 그 적합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서이고, 또 갑자기 그런 哭을 시행함에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하고 놀라도록 하기 때문에 그걸 싫어하신 것이다. 方氏가 설명하기를 哭한 사람이 죽은 이의 이름인 滅을 부르자 子臯가 말하기를 이처럼 야비할 수 있는가라고 하니, 孔子께서 싫어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그렇지만은 않다.
未仕者는 不敢稅人이니 如稅人인대 則以父兄之命이니라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은 감히 남에게 물건을 주지 못하나니(선물을 주지 아니하나니) 만약에 남에게 선물을 줄진댄 父兄의 명령으로써 해야 된다.
稅人은 물건으로써 남에게 준 것이다.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아직 존귀하고 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가히 가정 재물을 제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고, 밖으로는 가히 은혜를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이다. 혹간 情義가 부득이해서 마땅히 물건을 보내야할 바에 있어서는 어른의 명령을 일컬으면서 그걸 시행해야 된다.
士備入어든 而后에 朝夕踊이니라
선비가 모두 들어오면은 그런 뒤에 朝夕으로 哭踊을 한다.(哭하면 뛴다.)
나라 임금으 喪事에 여러 신하가 아침 저녁으로 哭하면서 뛰는 禮가 있으니 哭할 적에 비록 차례에 의해서 제자리에 있어야 하지마는 뛸 적에는 반드시 서로 보면서 節度를 삼고 先後가 있을 수 없다. 士가 직위가 낮으니 그 들어오는 것이 항상 뒤에 처진다. 士가 모두 들어왔으면은 자리에 없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士가 들어옴이 끝나야 그런 뒤에 뛰는 것이다.
祥而縞하며 是月에 禫하고 徙月에 樂이니라
大祥을 지내고 縞冠(흰 冠)을 쓰며 이 달에 禫祭를 지내고 이 달을 넘겨서 음악을 연주한다.
䟽에 말하기를 祥은 大祥이다. 縞는 縞冠을 이르니, 大祥날에 그 縞冠을 쓴다. ○馬氏가 말하기를 大祥과 禫祭의 제도가 3年의 喪事에 시행하면 그 달수가 똑같고, 期年의 喪事에 시행하면 그 달수가 다르다. 「雜記」에 말하기를 11개월만에 練祥을 지내고 13개월만에 大祥을 지내고 15개월만에 禫祭를 지내니 이는 期年喪이다. 아버지가 계실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셔 服을 입을 경우에 아버지가 屈하는 바가 있다. 3年이 써 표준이 되어 25개월에 이른 것은 그 禮가 가히 초과할 수 없고, 3年의 사랑으로써 期年으로 결단하는 것은 그 情이 그런대로 가히 펼 수 있는 것이다. 禫祭 지내는 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남에게서 듣는 것이고, 달을 넘겨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자기에게서 연주하는 것이다.
君이 於士에 有賜帟이니라
임금이 士에게 장막을 주는 것이 있다.
帟은 장막의 작은 것인데, 빈소 위에 설치하여 써 먼지를 받는다. 大夫 이상은 有司가 그것을 제공한다. 士는 직위가 낮고 또 스스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이 士의 빈소에 장막을 그에게 하사해 준다.
 
檀弓下 第四

君之適長殤엔 車三乘이오 公之庶長殤엔 車一乘이오 大夫之適長殤엔 車一乘이니라
임금의 適子로서 長殤(16~19살 사이에 죽은 사람)에는 수레가 3대이고, 公의 庶子의 長殤에는 수레가 1대이고 大夫의 適子로서 長殤에는 수레가 1대이다.
이는 殤喪(일찍 죽은 사람)을 보낼 적에 遣車의 禮를 말한 것이다. 君은 나라 임금을 이른데, 또는 더러는 땅을 소유한 大夫도 통틀어 君이라고 호칭할 수가 있다. 公은 전적으로 五等(公侯伯子男) 諸侯를 이른다. 16살로부터 19살 까지가 長殤이 된다. 이 長殤을 葬事지낼 때에 널이 사당에 뵈인 일을 끝마치고 장차 떠나가려 할 적에 遣奠禮를 베풀어서 그에 奠을 올리고 희생의 몸을 분해해서 싸서 이 수레를 이용하여 그 牲體를 싣고서 죽은 사람을 보내준다. 그렇기 때문에 遣車라고 이름하였다. 수레의 제도가 매우 작아서 써 外槨 안 네 귀퉁이에다가 놓아두니 크게 그 수레를 만들 수가 없다. 禮에 中殤(12살~15살 사이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위에 따른다고 하였으니, 임금의 適長子가 수레가 3대이면 中殤도 또한 수레 3대이다. 下殤(8살~11살 까지에 일찍 죽은 사람)은 수레가 1대이다. 公의 庶子로서 長殤이 수레가 1대이면 中殤도 또한 1대이고, 下殤에는 없다. 大夫의 適長子로서의 長殤은 수레가 1대이면 中殤도 또한 수레가 1대이고 下殤 및 庶人의 殤喪에는 모두 없다.
公之喪에 諸達官之長이 杖이니라
임금의 喪事에 모든 達官의 우두머리는 喪杖을 짚는다.
方氏가 말하기를 임금에게서 임명을 받은 사람은 그 성명이 임금에게 보고되기 때문에 그를 達官이라고 이르나니, 만약 府史(지방 관청의 아전들) 이하는 모두 장관이 스스로 임명하면은 가히 그들더러는 達官이라고 이를 수가 없다. 임금에게서 임명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가 깊기 때문에 임금의 喪事에 오직 達官의 우두머리만이 喪杖을 짚게 된다. ○지금 살펴보건대 무릇 관원이 모두 우두머리와 부관이 있는데 여기에서 장관으로써 말하였으면 부관에는 미치지 않는 것이다.
君於大夫에 將葬할새 吊於宮하시고 及出하야 命引之하야시든 三步則止니 如是者三이오 君退니 朝亦如之하며 哀次亦如之니라
임금이 大夫에 있어서 장차 葬事를 지내려할 적에 殯宮에서 조문을 하시고 영구가 나감에 이르러 그 영구를 끌어당기도록 명령을 하시면은 세 걸음만에 멈추어 서야 되나니 이와 같이하는 것이 세 번을 하고 임금이 물러가나니 사당에 뵈일 적에도 또한 그와 같이하며 哀次에서도 역시 그와 같이해야 된다.
궁중에서 조문함은 그 殯宮에서 한 것이다. 出(나감)은 널이 이미 떠나간 것이다. 효자가 부여잡고 울부짖으면서 차마하지 못하니 임금이 그 영구를 끌어당기도록 명령한 것은 그 情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끌어당긴 사람이 세 걸음 가서 바로 멈추니 임금이 또 명령하여 그 영구를 끌어당기도록 하니 이와 같이하는 것이 세차례만에 영구가 마침내 떠나가면은 임금은 바로 물러난다. 임금이 납실 때에 꼭 항상 殯宮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혹은 널이 사당에 알현할 때를 당하였으면은 또한 그와 같이하고, 혹은 이미 영구가 대문을 나가서 평일에 賓客을 대우하는 집의 근처에 이르러서 효자가 슬퍼서 잠깐 영구를 멈추도록 하였으면은 또한 그렇게 한다.
五十에 無車者는 不越疆而吊人이니라
50살에 수레가 없는 사람은 국경을 넘어가서 사람을 조문하지 않는다.
비로소 老衰하는 年歲이니, 가히 筋力으로써 禮를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季武子寢疾이어늘 蟜固不說齊衰而入見曰斯道也將亡矣로다 士唯公門에 說齊衰라한대 武子曰不亦善乎아 君子는 表微라하더니 及其喪也하야 曾點이 倚其門而歌하니라
季武子가 병으로 누워있자, 蟜固가 齊衰服을 벗지 않고 들어가서 뵙고 말하기를 “이 道(禮)가 장차 없어지려고 하구나. 士가 오직 임금 대궐 문안에서만이 齊衰를 벗는 것이다.”라고 하자, 武子가 말하기를 “또한 좋지 않는가? 君子는 미세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오.” 하더니, 그의 初喪에 이르러서 曾點이 그 문에 기대고서 노래를 불렀다.
季武子는 魯나라 大夫 季孫 夙이다. 蟜固는 사람의 성명이다. 點의 字는 晳인데, 曾子의 아버지이다. 武子가 병으로 누워있을 적에 蟜固가 마침 齊衰의 喪服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凶服(喪服)을 입고가서 문병을 하고 또 말하기를 大夫의 문에서는 마땅히 凶服을 벗지 않아야 되는 것이고, 오직 임금의 문에서만이 이에 벗을 뿐인 것인데 이러한 예의가 장차 없어지게 생겼으니 내가 凶服으로써 온 것은 그로써 이 장차 없어지려는 예의를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자, 武子가 그 말을 좋게 여기어 말하기를 禮를 상실해 버린 것으로서 뚜렷히 나타난 것은 사람들이 모두 가히 알 수 있지마는 만약 조그마한 失禮는 오직 君子라야만이 이에 능히 그것을 表明할 수가 있다. 武子는 정권을 장악하였으니 사람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바이다. 蟜固가 이 짓을 한 것은 그로써 당시 사람들의 보고 듣는 것을 바꾸고 싶어서 禮에 근거하여 실행한 것이니, 武子가 비록 유감스럽게 여겼지마는 그를 죄줄 수는 없었다. 만약 문에 기대고서 노래부른 것은 禮가 아니다. 그 또한 뜻이 큰 것의 一端인 성싶다. 기록한 사람이 대체 蟜固의 禮를 보존한 것은 좋게 여기고 曾點이 禮를 폐기한 것은 기롱한 것이다.
大夫吊當事而至則辭焉이니라 吊於人이어든 是日에 不樂이니라 婦人은 不越疆而吊人이니라 行吊之日엔 不飮酒食肉焉이니라
大夫가 조문함이 일을 당하여 오면은 설명해(말해) 주어야 한다. 사람에게 조문을 갔으면은 그 날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아야 된다. 婦人은 국경을 넘어서 사람에게 조문가지 아니한다. 조문을 간 날에는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아야 된다.
大夫가 조문함은 士에게 조문한 것이다. 大夫가 비록 높지마는 그러나 주인이 小歛·大歛 혹은 빈소를 차리는 일이 있음을 당하여 왔으면은 빈소를 차리는 사람이 그 일로써 그에게 말해주어야 되나니, 辭는 말해줌과 같다. 만약에 일을 당한 때가 아니라면은 효자가 마루를 내려가서 그를 영접해야 된다. 부인은 외부의 일이 없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가서 조문하지 않는 것이다. 이 조문간 날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과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모두 남은 슬픔이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서이다.
吊於葬者는 必執引이니 若從柩及壙하얀 皆執紼이니라
葬事지낼 적에 조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여줄을 잡아야 되나니 만약에 널(상여)를 따라서 무덤에 이르렀으면은(葬地까지 갔으면은) 모두 널 줄을 잡아야 된다.
引은 상여를 끌어당기는 새끼이다. 紼은 內棺을 끌어당기는 새끼이다. ○鄭氏가 말하기를 그 葬事지내는 것을 힘으로 도와줌을 보이는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葬禮에 조문하는 것이 본시 일을 집행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도와서 영구를 끌어당겨야 되나니 무릇 상여 줄을 잡아 당김에 사람을 쓰는 것이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숫자가 있으니 숫자가 넉넉하면은 남은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걸어가 영구를 따라가고 下官하여 무덤을 만들 때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숫자를 한정하지 않고서 모두 다 널 줄을 잡는다. 引이라는 것은 長遠한 명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여에 있으니 상여 수레가 가는 것이 멀고, 紼은 이 끌어서 드는 것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棺에 있으니 棺은 끌어서 드는 것이요, 멀리 가지 않는 것이다.
喪에 公이 吊之하야시든 必有拜者니 雖朋友州里舍人이라도 可也니라 吊曰寡君이 承事라하야시든 主人曰臨이라하니라
타국(외국)에서 죽은 사람의 喪事에 외국의 임금이 그를 조문오면은 반드시 절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나니, 비록 친구나 한 고을·마을사람이나 집을 관리하는 사람일지라도 괜찮다. 조문하러 온 使者가 말하기를 “寡君(우리나라 임금)이 喪事를 받들어 도우라고 했다.” 하면은 主人이 말하기를 “왕림해 주신데 감사하다.”고 해야 된다.
이는 나라 임금이 그 여러 신하의 喪事에 조문함을 이른다. 조문한 뒤에는 주인이 마땅히 친히 가서 절하고 감사를 드려야 되는데, 喪家에서 만약 後嗣를 주관할 사람이 없다면은 반드시 다음 가는 소원한 친척으로 하여금 가서 절하도록 하고, 만약에 소원한 친척이 없다면은 죽은 사람의 친구 및 한 고을이나 한 마을 및 초상집의 집을 맡아보는 사람일지라도 가서 절하는 것이 또한 좋다. 寡君承事는 말하자면은 와서 喪事에 받들어 돕는 것이니, 이는 임금이 使者에게 말하여 명령을 전하여 써 들어가도록 하는 말이니, 주인이 말하기를 왕림해 주심에 감사하다는 것은 욕되게 왕림한 것의 정중함에 감사드린다는 것이다.
君이 遇柩於路어든 必使人吊之니라
임금이 길가(도중)에서 상여를 만나면은 반드시 사람을 시켜서 그를 조문하도록 해야 된다.
蕢尙이 집을 그려놓고서 조문을 받은 것이 杞梁의 아내가 禮를 아는 것만 같지 못한데 여기에서는 도중에서 조문을 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官爵이 있는 사람은 喪事는 마땅히 禮로써 조문을 해야 되는 것이고, 이는 臣民의 미천한 사람을 이른 것이니, 禮는 庶人에게 까지는 내려가지 아니한다. 말하자면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조문가도록 한 것은 이는 일반적으로 일반 사람들의 초상을 말한 것이다.
大夫之喪에 庶子不受吊니라
大夫의 喪事에 庶子가 조문을 받지 않는다.
大夫의 喪事에 큰 아들이 喪主가 되어서 손님에게 절을 해야 되나니, 혹간 다른 연고로써 있지 않더라도 庶子가 감히 조문을 받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감히 비천한 신분으로써 爵位가 있는 喪事의 喪主가 될 수 없는 것이다.
妻之昆弟爲父後者死커든 哭之適室호대 子爲主하야 袒免哭踊이어든 夫入門右하야 使人入於門外하야 告來者어든 狎則入哭이니 父在커든 哭於妻之室이오 非爲父後者어든 哭諸異室이니라
아내의 오빠나 동생으로서 아버지의 後嗣가 된 사람이 죽으면은 適室(正寢)에서 哭을 하되 아들(甥姪)이 주인이 되어 가지고 어깨를 드러내고 免冠을 쓰고서 哭하며 뛰면은 남편이 문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사람으로 하여금 문 밖에 서서 조문온 사람을 알리도록 하면은 친절한 사이이면 들어가서 哭을 해야 된다. 아버지가 계시면은 아내의 방에서 哭을 해야 되고 아버지의 後嗣가 된 사람이 아니면은 다른 방에서 哭을 해야 된다.
이는 아내의 오빠나 남동생의 초상 소식을 듣고 아직 가서 조문하지 못하였을 때의 禮이다. 父在(아버지가 계심)는 자기의 아버지이다. 爲父後(아버지의 後嗣가 됨)는 아내의 아버지이다. 문 밖에 사람이 조문온 사람으로써 말을 하되 만약에 이 교유하여 친절한 사람이라면 바로 들어가서 哭을 해야 되니 인정과 의리가 그러한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딸자식으로서 딴 사람에게 시집간 사람이 오빠나 남동생으로서 아버지의 後嗣가 된 사람을 위해서는 降服을 입지 아니하니 그 바른 까닭 때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매의 남편이 그를 위해서 適室의 뜰 가운데에서 哭을 하고 그 아들이 喪主가 되는 것은 甥姪이 外叔에게 緦麻服을 입어준다. 그렇게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명해서 주체가 되도록하여 조문을 받고 손님에게 절을 하도록 한 것이다. 어깨를 드러내고 免冠을 쓰고서 哭하며 뛰는 것은 冠의 尊貴한 것이 살을 드러낸 위에다가 쓰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먼저 갓을 벗고 免冠을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릇 哭을 할 적에 슬프면은 뛰고 뛰면은 반드시 먼저 어깨를 드러내고 어깨를 드러내면 반드시 免冠을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깨를 드러내놓고 免冠을 쓰고서 哭하며 뛰는 것이다. 夫入門右(남편이 문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는 이 아들의 아버지를 이른 것이니, 바로 아내의 오빠나 남동생에 대하여 哭을 한 사람이다.
有殯에 聞遠兄弟之喪이어든 哭于側室하고 無側室이어든 哭于門內之右니 同國則往哭之니라
빈소가 있을 적에 먼 兄弟의 喪事를 들으면은 옆방에서 哭을 하고 옆방이 없으면은 문안의 오른쪽에서 哭을 해야 되나니 한 나라이면은 가서 그에 哭을 해주어야 된다.
側室이라는 것은 한가로이 자는 옆방이다. 門內는 대문의 안이다. 윗 편에 말하기를 빈소가 있을 적에 먼 형제간의 喪事를 들으면 비록 緦麻服을 입어주는 형제간일지라도 반드시 가야된다고 하였으니 그 또한 한 나라를 이른 성싶다. ○方氏가 말하기를 옆방에서 哭을 하는 것은 그 殯宮에서 멀리하고자 한 것이다. 문 안의 오른쪽에서 하는 것은 주인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여 그를 위해서 변동함을 보여준 것이다. 한 나라이면 조문간 것은 그 멀지 않기 때문에서이다.
子張이 死커늘 曾子有母之喪하더시니 齊衰而往哭之한대 或曰齊衰엔 不以吊니라 曾子曰我吊也與哉아
子張이 사망하자 曾子께서 어머니의 喪服이 있으셨는데 齊衰服을 입고서 가서 그에게 哭을 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齊衰服을 입을 적에는 그로써 조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조문한 것인가?” 하셨다.
어머니를 여윈 喪服으로써 친구의 喪事에 哭을 하였으니 禮에 지나침이 너무나도 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그를 만류하자, 曾子의 생각은 이르기를 ‘내가 子張의 죽음에 있어서 어찌 일반적인 禮로 조문할 뿐이겠는가?’라고 하셨다. 지금 이 曾子의 뜻을 상세히 해 보건데 다만 友義가 두터운 까닭으로써 가히 가서 그에 哭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또 가히 喪服을 벗고 갈 수 없는 것이니, 다만 가서 哭만하고 弔禮는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렇기 때문에 ‘내가 조문하였던 것이냐?’라고 하였다. ○劉氏가 말하기를 曾子께서 일찍이 묻기를 ‘3년의 喪中에 조문갈 수 있는 것입니까?’ 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3년의 喪中에 小祥을 지내고는 여럿이 서있지 아니하고 여럿이 걸어가지 아니하나니 君子는 禮로써 人情을 꾸미나니 三年의 喪中에 조문을 가 哭하는 것이 또한 虛禮가 아니냐?’고 하셨는데, 曾子가 이미 이 가르침을 듣고 또 어머니의 喪服으로써 친구에게 조문간 것이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經中에 曾子께서 실례한 일을 말한 것을 가히 다 믿을 수가 없으니 여기에서 또한 가히 볼 수가 있다.
有若之喪에 悼公이 吊焉커시늘 子游擯호대 由左하니라
有若의 喪事에 魯나라 悼公이 조문오자, 子游가 안내를(손님을 접대하되) 왼쪽에서 하였다.
悼公은 魯나라 임금인데, 哀公의 아들이다. 擯은 禮事를 협찬하여 돕는 것이다. 서있는 사람은 오른쪽을 높이는데, 子游가 公의 왼쪽에서 하였을진댄 公이 오른쪽에 있어 존귀하기 때문이다. 「少儀」에 이르기를 詔勅의 말은 오른쪽으로부터 한다는 것은 임금의 조칙 명령을 전달하게 된다면은 조칙의 명령이 존귀함이 되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이 오른쪽에 있게 됨을 이른 것이다. 당시에 喪禮를 도운 사람이 또한 허다히 오른쪽에서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子游가 그것을 바로하였다.
齊穀王姬之喪이어늘 魯莊公이 爲之大功이러니 或曰由魯嫁라 故爲之服姉妹之服이라하며 或曰外祖母也라 故爲之服이라하다
齊나라에서 王姬의 喪事를 부고해 오자, 魯나라 莊公이 그를 위하여 大功服을 입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魯나라를 경유하여 시집갔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姉妹의 喪服을 입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外祖母이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服을 입었다.”고도 하였다.
穀은 읽기를 告으로 한다. 齊나라 襄公의 夫人인 王姬가 逝去한 것이 魯나라 莊公의 2年에 있다. 魯나라에 부고를 보내니 그 王姬가 당초에 魯나라를 경유하여 시집을 갔기 때문에 魯나라 임금이 그를 위해서 출가한 자매의 大功服을 입어주었으니, 이는 禮이다. 어떤 사람이 이미 이 王姬는 바로 魯나라 莊公의 외숙의 아내인 줄을 모르고 외조모라고 하였고, 또 외조모의 服은 小功인 줄을 모르고서 大功으로써 외조모의 服을 삼았으니, 그 또한 망령되었도다. ○鄭氏가 말하기를 󰡔春秋󰡕에 周나라의 王女(공주)가 魯나라를 경유하여 시집을 가서 逝去하면은 그에 服을 입어주기를 內國의 公女(공주)와 같이 자매의 服으로 입어준다는 것이 이것이다. 天子는 그를 위해서 服이 없고, 왕의 후손에게 시집을 가야만이 이에 服을 입어준다.
晉獻公之喪에 秦穆公이 使人吊公子重耳하고 且曰寡人은 聞之호니 亡國이 恒於斯며 得國이 恒於斯니 雖吾子儼然在憂服之中이나 喪亦不可久也며 時亦不可失也니 孺子는 其圖之하라
晉나라 獻公의 喪事에 秦나라 穆公이 사람을 시켜서 公子 重耳에게 조문하도록 하고 또 말하기를 “寡人은 듣자하니 나라를 잃어버림도 항상 이 때이며 나라를 얻음이 항상 이 때이니 비록 우리 그대가 엄연히 걱정하는 喪服 중에 있지마는 지위를 상실함도 또한 가히 오래할 수 없는 것이며 시기도 또한 가히 놓칠(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니 孺子는 그것을 도모하시오.”라고 하였다.
獻公이 逝去하였을 때에 重耳가 난을 피하여 오랑캐의 땅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穆公이 사람을 시켜서 가가지고 그를 조문하도록 하였으니, 조문하는 것은 正禮가 되기 때문에 且曰로써 아래의 말을 일으켰다. 寡人聞之(과인은 듣자하니)라는 것은 이는 使者가 穆公의 말을 전달한 것이다. 恒於斯(항상 이 때라는 것)는 말하자면 항상 이 死生이 교체하는 즈음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儼然은 端靜하게 持守한 모양이다. 喪은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다. 지위를 잃어버림을 가히 오래할 수가 없으며 시기도 가히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은 그 喪事일에 달려가 귀국하여 써 왕위를 계승할 것을 도모하도록 권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孺子는 그 그것을 도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이 때에 秦나라가 이미 그를 들여보내려는 뜻이 있었다.
以告舅犯한대 舅犯曰孺子는 其辭焉하라 喪人은 無寶오 仁親以爲寶니라 父死之謂何오 又因以爲利면 而天下其孰能說之리오 孺子는 其辭焉하라
그 말로써 舅犯에게 말씀드리니, 舅犯이 말하기를 “孺子는 그 사양(거절)하시오. 지위를 상실하는 사람은 보배로 여길 것이 없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으로써 보배를 삼아야 된다. 父王이 逝去한 것이 어떠한 일이라고 여기는가? 또 따라서 써 이로움을 삼는다면 天下가 그 누가 능히 그에 대하여 말해줄 수 있겠는가? 孺子는 그 사양하시오.”라고 하였다.
舅犯은 重耳의 외삼촌인 狐偃인데, 字는 子犯이다. 公子가 이미 使者의 말을 듣고 들어가서 子犯에게 말하니 子犯이 말하기를 마땅히 사양하여 받지 않는 것이 좋소이다. 지위를 잃어버리고 나라를 떠난 사람은 써 보배로 삼을 것이 없고, 오직 仁愛하여 어버이를 사모하는 것이 바로 그 보배이다. 父王이 사망한 것이 이 어떠한 일이냐고 여기는가? 바로 이 凶禍의 큰 일인데 어찌 가히 또 이 凶禍를 인해서 써 나라에 돌아가려는 이로움을 삼을 수 있겠으며 천하 사람이 누가 능히 내가 죄가 없다고 말해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써 마땅히 그 귀국하도록 서로 도와주는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公子重耳對客曰君惠吊亡臣重耳어니와 身喪父死에 不得與於哭泣之哀하야 以爲君憂하니라 父死之謂何오 或敢有他志하야 以辱君義아 稽顙而不拜하며 哭而起호대 起而不私하니라
公子 重耳가 使者에게 대답하기를 “秦나라 임금께서 은혜롭게 망명한 신하 重耳를 조문해 주셨거니와 자신은 지위를 잃어버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 哭하며 우는 슬픔에 참여할 수가 없어 써 임금의 걱정이 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것을 뭐라고 이릅니까? 혹시라도 감히 딴 뜻을 가져 써 임금의 의리를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서 머리를 조아리기만 하고 절을 하지 아니하며 哭을 하고 일어났으되 일어나서는 사사로이 말하지 아니하였다.
公子가 이미 子犯의 말을 듣고 이에 나가서 使者에게 대답하였다. 惠吊亡臣重耳(은혜롭게 망명한 신하 重耳에게 조문한다는 것)은 그 와서 조문한 것에 대하여 감사드린 것이다. 不得與哭泣之哀(哭泣의 슬퍼함에 참여할 수 없음)는 출국 망명하여 외국에 있어 喪次에 거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以爲君憂(임금의 걱정이 된다는 것)는 임금이 나를 걱정하여 염려해 줌을 이룬 것이다. 他志(다른 뜻)는 왕위를 구하는 뜻을 이른다. 辱君義(임금의 의리를 욕되게 함)는 임금께서 은혜롭게 조문해 주신 의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不私(사사로이 말하지 않은 것)는 재차 使者와 더불어 개인적인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子顯이 以致命於穆公한대 穆公曰仁夫인저 公子重耳여 夫稽顙而不拜하니 則未爲後也라 故不成拜하니 哭而起는 則愛父也오 起而不私는 則遠利也니라
子顯이 그로써 穆公에게 復命을 하니, 穆公이 말하기를 “仁하구나. 公子 重耳여. 대체 머리만 조아리고 절을 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後嗣가 되지 못한 까닭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을 이루지 아니하였으니 哭을 하고 일어난 것은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요, 일어났으되 사사로이 말하지 않은 것은 이익을 멀리한 것이다.”
鄭註에 󰡔國語󰡕를 이용하여 使者가 公子 縶이 된 줄을 알았으니, 그의 字는 子顯이다. 그렇기 때문에 顯을 읽기를 韅으로 해야 된다. 喪禮에 먼저 머리를 조아린 뒤에 절을 하는 것을 成拜라고 이르나니, 後嗣가 된 사람이 절을 완성하는 것은 써 弔禮의 정중함에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公子는 아직 後嗣가 되지 못한 까닭 때문에 절을 이루지 못하였다. 愛父는 그 아버지를 애통해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사사로이 使者와 더불어 말하지 않은 것은 이는 귀국하려는 뜻이 없는 것이니 이는 이익을 멀리한 것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익을 멀리함이 모두 仁한 사람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일컬어 말하기를 어질구나. 公子 重耳여라고 하였다.
帷殯이 非古也니 自敬姜之哭穆伯始也니라
빈소에 휘장이 드리운 것이 古禮가 아니다. 敬姜이 穆伯을 哭함으로 부터서 비롯되었다.
禮에 아침 저녁으로 빈소에서 哭을 할 때에 반드시 그 휘장을 걷어서 여는 것인데, 敬姜이 그 남편 穆伯의 빈소에서 哭을 할 적에 이에 혐의를 피한 까닭으로 다시 휘장을 걷지 아니하였으니 이후로 부터서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본받았기 때문에 기록한 사람이 古禮가 아니다고 하였다. 穆伯은 魯나라 大夫 季悼子의 아들인 公甫靖이다.
喪禮는 哀戚之至也라 節哀는 順變也니 君子는 念始之者也니라
喪禮는 슬픔의 지극함이다. 슬픔을 절제함은 심정을 따라서 변하도록 한 것이니 君子는 그 낳아준 분을 생각한다.
효자의 슬픔이 天性의 지극함에서 발로되었으니 어찌 가히 막을 수 있겠는가마는 聖人이 禮를 제정하여 써 그 슬픔을 절제시켰으니 대개 따라서 그 슬픔을 변하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효자의 슬픈 심정을 따라서 써 점점 변하여 輕減하도록 한 것이다. 始는 낳음과 같으니,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인데, 야위어서 생명을 죽인다면은 이는 나를 낳아주신 분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復은 盡愛之道也니 有禱祠之心焉이오 望反諸幽는 求諸鬼神之道也오 北面은 求諸幽之義也니라
혼을 부르는 것은 사랑을 극진히 하는 도리인데 五祀에 회생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요, 저승에서 되돌아오시기를 바라는 것은 鬼神에게서 기도하는 도리이고, 북쪽을 향하여 하는 것은 저승에 기도하는 뜻이다.
五祀에 기도를 드리되 능히 그 삶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러기에 또 그를 위해서 혼을 부르니 이는 그 어버이를 사랑하는 도리를 다해서 五祀에 기도하는 마음이 아직까지 혼을 부를 때까지 잊지 못한 것이다. 望反諸幽는 그가 저승으로부터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귀신이 어두운 데에 있는데 북쪽은 바로 어둡고 음침한 방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의 어두움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북쪽을 향한다.
拜稽顙은 哀戚之至隱也니 稽顙은 隱之甚也니라
절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슬픔이 지극히 애통스러운 것인데 머리를 조아림은 애통함이 심한 것이다.
隱은 애통함이다. 稽顙(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머리를 땅에 부딪히는 것이니 다시 禮의 용모가 없다. 절과 머리를 조아림에 나가서 말을 할진대 모두 지극히 애통함이 되지마는 머리를 조아리는(부딪히는) 것은 더욱 애통함이 심한 것이다.
飯用米具는 弗忍虛也니 不以食道라 用美焉爾니라
飯含할 적에 쌀과 조가비를 사용하는 것은 차마 입안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서이니, 음식먹는 방도를 이용하지 아니하므로 아름다운 것을 사용한다.
쌀과 조가비를 죽은 사람의 입안에 채워드리는 것은 차마 그 입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서이니 이는 이 음식의 도리를 쓴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아름답고 깨끗한 물건을 이용하여 써 그 입안에 채워줄 뿐이다.
銘은 明旌也니라 以死者爲不可別已일새 故以其旗識之니 愛之라 斯錄之矣며 敬之라 斯盡其道焉耳니라
銘旌은 神明의 깃발이다. 죽은 사람을 가히 구별하여 볼 수 없는 것으로 여긴 까닭에 그 깃발로써 그를 표기한 것이니, 그를 사랑하므로 이에 그를 기록하며 그를 공경하므로 이에 그 도리를 극진히 다하는 것이다.
士喪禮에 銘旌을 某氏某之柩라고 해서 처음에는 처마 밑 서쪽 섬돌 위에 놓아두었다가 重(假主)을 만듦이 끝남에 이르면은 重 위에 놓아두고 빈소를 차리고서 마침내 백토를 바르게 되면은 비로소 관을 묻는 구덩이 동쪽에 세워둔다고 하였는데, 䟽에 이르기를 士는 銘旌 길이가 3尺이고 大夫는 5尺이고 諸侯는 7尺이고 天子는 9尺이고, 만약 임명을 받지 못한 士는 검은 베를 이용하여 길이가 半幅이고, 붉은 끝이 길이가 온 폭이니 넓이는 3寸이다. 半幅은 1尺이고, 終幅은 2尺이니, 이는 총 길이가 3척이다. 대체 사랑하여 그 이름을 기록하고 공경하여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曰愛曰敬이 형식적인 글이 아니다.
重은 主道也니 殷主는 綴重焉하고 周主는 重徹焉하니라
重(假主)은 神主의 방도이니, 殷나라에서는 神主를 만들면 假主를 묶어서 매달아놓고 周나라에서는 神主를 만들면 假主를 거두어 埋香하였다.
󰡔禮記󰡕 註에 이르기를 士의 假主는 나무 길이가 3尺이다고 하였으니, 막 죽었을 적에 假主를 만들어서 신을 의지하게 하나니 비록 神主는 아니지마는 神主의 방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主道라고 말하였다. 殷나라의 禮는 비로소 빈소를 차릴 때에 殯廟의 뜰에 假主를 놓아두었다가 虞祭 新株를 만듦에 이르면은 이 假主를 묶어서 새로 사망한 사람의 빈소차린 사당에 매달아놓고, 周나라 사람은 虞祭를 지내고서 神主를 만들면은 假主를 거두어서 그걸 埋香하였다.
奠以素器는 以生者有哀素之心也니라 唯祭祀之禮는 主人이 自盡焉爾니 豈知神之所饗이리오 亦以主人이 有齊敬之心也니라
奠에 소박한 그릇을 쓰는 것은 생존한 사람이 애통하고 소박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서이다. 오직 祭祀의 禮만은 主人이 스스로 극진히 해야 되나니 어찌 神이 歆饗하는 바를 알겠는가? 또한 主人이 재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鄭氏가 말하기를 哀素는 애통하여 꾸밈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무릇 물건이 꾸밈이 없는 것을 素라고 이르나니, 슬픔에는 소박한 것을 이용하고 공경함에는 꾸밈을 이용하나니, 禮는 人心을 따를 뿐인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士喪禮에 素俎가 있고, 士虞禮에 素几가 있는데 모두 그 슬퍼서 꾸미고 싶지 않기 때문에서이다. 喪禮와 葬禮는 凶禮이므로 이와 같이하고, 祭祀의 吉禮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스스로 극진히하여 써 그 꾸밈을 이루기 때문에 오직 제사의 禮만은 주인이 스스로 극진히 해야 된다. 그러나 주인이 스스로 극진히 하는 것이 또한 어찌 신이 歆饗하는 바가 반드시 여기에 있음을 알겠는가? 또한 그 마음을 표시할 뿐이다.
辟踊은 哀之至也니 有筭은 爲之節文也니라
가슴을 치면서 뛰는 것은 슬픔의 지극함이니, 계산이 있음은 그 節文을 삼는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이 辟이 되고 뛰는 것이 踊이 되니, 이는 애통함이 지극한 것이다. 만약에 슬픔을 제한하지 아니하면은 그 생명을 손상시킬까 두렵기 때문에 계산이 있어서 그 기준 절도를 삼으나니, 매번 한 차례 뛸 적마다 세 번씩 도약하고 세 번 뛰면서 아홉번 도약을 하는 것으로 한 절도를 삼는다. 士는 3日동안에 세 차례 뛰는 것이 있고, 大夫는 4日동안에 다섯 차례 뛰고, 諸侯는 6日동안에 일곱 차례 뛰고, 天子는 8日동안에 아홉 차례 뛴다. 그렇기 때문에 그 節文을 삼는다고 하였다.
袒括髮은 變也오 慍은 哀之變也라 去飾은 去美也니 袒括髮은 去飾之甚也라 有所袒하며 有所襲은 哀之節也라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털을 묶는 것은 변형한 것이고, 분함은 슬픔이 변한 것이다. 장식을 제거함은 아름다운 것을 제거한 것이니,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털을 묶는 것은 장식을 버리는 것이 심한 것이다. 어깨를 드러내는 바가 있으며 옷을 입는 바도 있는 것은 슬픔을 절제하는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털을 묶는 것은 形貌가 변한 것이요, 슬프고 분함은 슬픈 감정이 변한 것이다. 그 평상시 吉한 때의 服飾을 제거하는 것은 이 그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제거한 것이니, 꾸밈을 제거함이 비록 가지가 많지마는 오직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털을 묶는 것만이 또 장식을 제거하는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이다. 이치에 응당 항상 어깨를 드러내놓아야 할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어깨를 드러낼 때가 있고 옷을 입을 때가 있는가? 대체 슬픔이 심하면 어깨를 드러내놓고 슬픔이 가벼우면 옷을 입는 것이 슬픔의 限度와 節度이다.
弁絰葛而葬은 與神交之道也니 有敬心焉하니라 周人은 弁而葬하고 殷人은 冔而葬하니라
爵弁에 葛絰을 끼고서 葬事를 지내는 것은 神明과 더불어 교접하는 도리이니,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 周나라 사람은 爵弁으로 葬事를 지냈고 殷나라 사람은 冔冠으로 葬事를 지냈다.
居喪할 때에 冠服이 모두 순전히 凶하게 하다가 葬禮에 이르러서 나의 어버이가 몸을 땅속에 의탁하게 되면은 마땅히 禮敬의 마음으로써 산천의 신과 교접을 해야 된다. 이에 흰 명주로 弁(고깔)을 만들되 爵弁의 제도와 같이 하고 칡으로 環絰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서 葬禮를 보내드리니, 감히 순전히 凶한 복장으로써 신과 교접하지 않는 것은 공경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歠主人主婦室老는 爲其病也니 君命食之也니라
主人과 主婦와 늙은 家臣에게 죽을 마시도록 하는 것은 그 병이 날까 때문에서이니 임금이 거친 밥을 먹도록 명령한다.
䟽에 말하기를 어버이 喪事에 죽을 먹는 때이다. 主人은 亡者의 아들이요, 主婦는 亡者의 아내이니, 亡者의 아내가 없으면은 主人의 아내이다. 室老는 집안의 우두머리 보좌관이니, 이 세 사람이 모두 이 大夫의 집안에 귀한 사람이다. 그 죽을 마시다가 병이 나 지칠까 하는 까닭 때문에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명령을 하니, 食은 거친 밥이다. 만약 士의 喪事에는 임금이 명령하지 않는다. 「喪大記」에 主婦가 거친 밥을 먹는다고 말한 것은 이미 빈소를 차린 뒤를 이르고, 이 主婦가 먹는다는 것은 아직 빈소를 차리지 아니한 이전을 이른다.
反哭升堂은 反諸其所作也오 主婦入于室은 反諸其所養也라
집으로 돌아와 哭하면서 대청마루로 올라가는 것은 그 평생에 行禮하시던 곳에 돌아온 것이요, 主婦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평생에 봉양하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마루와 방은 모두 사당 안을 이른다. 봉분을 쓰는 것을 마치고 돌아옴에 이에 되돌아와서 선조 사당에서 哭을 하니, 그 두 사당은 선조와 아버지 사당이다. 禮를 행하는 곳은 평생에 제사와 관례와 혼례에 대하여 禮를 행하던 곳이요, 봉양하는 곳은 음식을 드리고 공양하는 곳이다.
反哭之吊也는 哀之至也라 反而亡焉이라 失之矣니 於是爲甚하니라
집으로 되돌아와 哭함에 조문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하기 때문에서이다. 집으로 돌아와 봄에 어버이가 없으므로 그 어버이를 잃어버린 것이니 이에 슬픔이 심한 것이다.
손님으로서 조문온 사람이 서쪽 섬돌로부터 올라와 말하기를 어찌하겠습니까하면 주인이 절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나니 이 때를 당해서 어버이가 없으시고 어버이를 잃어버렸으므로 가히 다시는 우리 어버이를 볼 수가 없게 되리니 애통함이 이에 심하게 된다. 손님이 조문을 끝내고 밖으로 나감에 주인이 문밖에 전송을 하고 마침내 殯宮으로 가게 되나니 바로 先代때 빈소를 차렸던 正寢의 대청마루이다.
殷은 旣封而吊하고 周는 反哭而吊러니 孔子曰殷은 已慤하니 吾從周호리라
殷나라에서는 이미 봉분을 끝마치면 조문을 갔고 周나라에서는 집으로 되돌아와 哭을 하면 조문을 갔었는데,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殷나라의 禮는 너무 질박하니 나는 周나라의 禮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殷나라의 禮는 봉분을 만듦이 끝남에 손님이 묘소로 나가서 주인에게 조문하였고, 周나라의 禮는 주인이 집으로 되돌아와 哭을 한 뒤를 기다려서 조문을 갔었는데,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殷나라의 禮는 너무 질박하다고 한 것은 대개 어버이가 흙 속에 있는 것이 진실로 가히 슬프지마는 어버이를 평생에 거처하던 곳에서 찾다가 얻지 못함에 그 슬픔이 더욱 심함이 된 것만 같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묘소에서 조문하는 것이 집에서 조문하는 것이 진실과 文飾이 겸하여 다한 것만 같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周나라를 따르겠다고 하신 것이다.
葬於北方北首는 三代之達禮也니 之幽之故也니라
北方에 葬事지내면서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는 것은 3代의 통용된 禮이니 저승으로 가기 때문에서이다.
北方은 나라의 북쪽이다. 빈소를 차릴 적에는 아직 남쪽으로 머리를 향하도록 한 것은 차마 귀신으로써 그 어버이를 대접할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고, 葬事를 지내면은 죽은 일이 끝마치기 때문에 葬事를 지내면서는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도록 하니 3代에 이 禮를 통용하였다. 南方은 밝고, 北方은 어두우니, 어두운 곳으로 가는 것은 써 북쪽으로 머리를 두는 뜻을 해석하였다.
旣封하고 主人이 贈이어든 而祝宿虞尸니라
이미 봉분을 만들고 主人이 검은 비단의 폐백을 주면은 祝이 虞祭의 尸童을 나오게 한다.
널이 떠나가 城門에 이르면은 宰夫로 하여금 검고 붉은 비단 한 묶음을 주었다가 이미 무덤을 다 쓰고나면은 이 玄纁을 사용하여 묘소 들에서 죽은 이에게 주도록 한다. 이 때에 祝이 먼저 돌아가 虞祭의 尸童을 나오도록 한다. 宿은 읽기를 肅으로 하는데, 나오게 함이요, 虞는 편안히 함과 같다. 葬事가 끝나면은 영혼을 맞이하여 집으로 되돌아가 한낮에 그를 殯宮에서 제사지내어 그 영혼을 편안히 해 드린다. 남자의 喪事에는 남자가 尸童이 되고, 여자의 喪事에는 여자가 尸童이 되니, 尸라는 말은 주체이다. 葬事를 지내면은 어버이의 形容을 볼 수가 없어 마음이 메일 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尸童이를 세워서 그로 하여금 죽은 이의 의복을 입도록 한 것은 써 효자의 마음으로 하여금 여기에 주체가 되도록 한 것이다. 禫祭 이전에는 남녀가 尸童이를 달리하고 안석도 달리하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은 여자의 尸童은 없고 안석 또한 한가지이다. 「少牢禮」에 이르기를 某妃가 配享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남녀가 尸童이를 함께 한 것이다.
旣反哭하고 主人이 與有司로 視虞牲하면 有司以几筵으로 舍奠於墓左하고 反커든 日中而虞니라
이미 집으로 되돌아와 哭을 하고 主人이 有司와 더불어 虞祭에 쓸 희생을 살펴보면 有司가 안석과 자리로써 묘소 왼쪽에 펴놓고 되돌아오면은 한낮에 虞祭를 지낸다.
士의 禮에 있어서 虞祭의 희생은 한 마리 돼지이다. 안석은 써 신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요, 자리는 신을 앉게하는 돗자리이니, 자리가 깔아진 것을 筵이라고 한다. 효자가 먼저 돌아와서 희생을 살펴보고 별도로 有司로 하여금 펴놓고서 地神에게 禮를 올리도록 하니, 어버이가 몸을 여기에 의탁하기 때문에서이다. 舍는 읽기를 釋으로 해야 되고, 奠이라는 것은 놓아두는 것이니, 이 제사 음식을 놓아두는 것이다. 묘소의 길이 남쪽을 향하고 있으니 동쪽으로써 왼쪽을 삼는다. 이 有司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바로 한낮때에 虞祭를 지낸다.
葬日에 虞는 弗忍一日을 離也일새니라
葬事지내는 날에 虞祭를 지내는 것은 차마 하루라도 떨어지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鄭氏가 말하기를 차마 그 어버이의 영혼이 돌아갈 데가 없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是日也에 以虞易奠이니 卒哭曰成事라하니라
이 날 虞祭로써 奠을 대체하고 卒哭에는 成事라고 이른다.
맨 처음 죽었을 때에 小歛奠·大歛奠·朝夕奠·초하루 奠·朝祖奠·부의의 따위가 모두 喪奠이다. 이 虞祭지내는 날에는 虞祭로써 대체하고 喪奠을 제거하니 그렇기 때문에 虞祭로써 奠을 바꾼다고 말했다. 卒哭에는 成事라고 이른 것은 대개 祝辭에 이르기를 成事(길한 일)를 슬피 올린다고 한다. 제사는 길함으로써 이룸을 삼나니 卒哭의 제사는 바로 吉祭이기 때문에서이다.
是日也에 以吉祭易喪祭니 明日에 祔于祖父니라
이 날 吉祭(卒哭)로써 喪祭를 대체하는데 그 이튿날 祖父에게 祔祭를 지낸다.
吉祭는 卒哭의 제사이고 喪祭는 虞祭이다. 卒哭이 虞祭 뒤에 있기 때문에 吉祭(卒哭)로써 喪祭(虞祭)와 교체를 한다고 말하였다. 祔라는 말은 붙이는 것이니, 祔祭라는 것은 그 조부에게는 마땅히 다른 사당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고유하고, 새로 죽은 사람에게는 마땅히 이 사당에 들어와야 된다고 고유한 것이다. 禮에 이르기를 卒哭지낸 그 날 그 昭穆의 반열로써 祔祭를 지낸다고 하였으니, 明日이라는 것은 卒哭의 다음 날이다. 卒哭지낼 때에 새 神主에 고유하기를 ‘哀子 아무개가 내일 당신을 당신의 皇祖(祖父) 아무개에게 올려서 祔祭를 지내겠습니다.’라고 하고, 그 때(虞祭는 지내는 날)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神主를 받들고 祖父의 사당으로 들어가서 아울러 고유하기를 ‘당신의 皇祖 某甫에게 가서 써 당신의 손자 아무개를 올려 虞祭를 지내옵니다’라고 하니, 손자를 반드시 조부에게 祔祭하는 것은 昭穆의 위치가 같기 때문에서이니, 이른바 그 반열로써 한다는 것이다. 虞祭의 제사 일이 끝마쳐짐에 虞主(새로 돌아간 神主)는 정침으로 돌아가고 三年 喪禮가 끝나면은 四時의 吉祭를 만난 뒤에 神主를 받들고서 사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虞祭는 하루를 띄어서 지내지마는 卒哭과 祔祭는 날짜를 띄우지 않는다.
其變而之吉祭也는 比至於祔히 必於是日也接이니 不忍一日末有所歸也일새니라
그 변고가 있어서(渴葬을 하고) 吉祭(卒哭)로 넘어감에(감에) 있어서는 祔祭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이 날에 卒哭과 祔祭가 연접이 되나니(연이어서 지내나니) 차마 하루라도 돌아갈 데가 없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서이다.
윗 글에서 말한 것은 모두 正禮에 근거한 것이니, 여기에서 變禮를 말한 것은 그 常禮를 變易하였기 때문에서이다. 변함이 있는 것은 다른 연고가 있는 까닭으로 葬事의 시기에 미치지 못하여 곧바로 葬事를 지내는 것이다. 士禮에 근거함에 빨리 葬事를 지내고 빨리 虞祭를 지낸 뒤에와 卒哭을 지내기 전에는 그 날짜가 아직 머니 가히 제사가 없을 수가 없다. 之는 감(넘어감)이다. 虞祭에서 吉祭(卒哭)에 가 이르기까지 그 禮가 어떠한가 하면 말하자면 虞祭 뒤에 祔祭에 이르기까지 剛日을 만나서 그 제사가 연접되니 만약에 丁日에 葬事를 지냈다면은 巳日에 再虞를 지내고 뒤에 虞祭를 다시 剛日을 사용하였다면은 庚日에 三虞祭를 지낸다. 이 뒤에 剛日을 만나면은 卒哭祭를 지내고서 祔祭에 이른 뒤에 끝나나니, 이는 효자가 차마 그 어버이로 하여금 하루도 歸依할 데가 없도록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殷은 練而祔하고 周는 卒哭而祔러니 孔子善殷하시니라
殷나라에서는 練祭(小祥)를 지내고서 祔祭를 지냈고 周나라에서는 卒哭를 지내고서 祔祭를 지냈는데 孔子께서는 殷나라 것을 좋게 여기셨다.
󰡔孝經󰡕에 말하기를 그 종묘를 건립하여 귀신으로써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는데, 孔子께서 殷나라의 祔祭를 좋게 여기신 것은 그 어버이를 귀신으로 섬김에 서두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서이다.
君이 臨臣喪에 以巫祝桃茢하며 執戈는 惡之也일새니 所以異於生也니라 喪有死之道焉하니 先王之所難言也니라
임금이 신하의 喪事에 임함에 무당과 祝에게 복숭아 나무와 갈대 비를 가지도록(이용하도록) 하며, 小臣에게 창을 잡도록 한 것은 凶事스러운 기운을 증오하기 때문에서이니, 써 산사람과 다른 것이다. 喪事에는 죽은 이에 대한 도리가 있는데 先王이 말하기를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복숭아 나무 성질이 사악한 것을 물리쳐 귀신이 그 복숭아 나무를 두려워하니 王莽이 漢 高祖 사당 신령을 증오하여 복숭아 나무를 끓인 물로 그 사당 벽을 세척하였다. 茢은 갈대 비이니, 써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당은 복숭아 나무를 잡고 祝은 갈대 비를 잡고 小臣이 창을 잡는 것은 대개 그 凶邪한 기운이 가히 증오스러움직 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물건으로써 그것을 물리쳐 없애버린 것이다. 산사람에게 임하게 되면(신하에게 거동할 경우에는) 오직 창만 잡도록 할 뿐인데, 지금 복숭아 나무와 갈대 비를 추가하였기 때문에 산사람과 다르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부림에 禮로써 해야 되는데 죽으면은 그를 싫어하는 것이 어찌 禮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이에 그를 싫어하기 때문에 喪禮에 실지로 죽은 사람을 싫어하는 도리가 있나니 先王이 차마 말을 못하는 바이다.
喪之朝也는 順死者之孝心也니 其哀離其室也일새니라 故至於祖考之廟而后에 行하나니 殷은 朝而殯於祖하고 周는 朝而遂葬하나니라
喪禮에 棺을 조상의 사당에 뵈이는 것은 죽은 사람의 孝心을 따른 것이니, 그 방에서 떠나감을 슬퍼할 것이기 때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祖考의 사당에 이른 뒤에 葬地로 떠나가게 되나니 殷나라는 사당에 뵙고 조상 사당에 빈소를 차렸고 周나라는 사당에 뵙고서 마침내 葬事를 지냈다.
자식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나갈 적에는 반드시 말씀드리고 집에 되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뵈이나니, 지금 장차 葬事를 지내려면서 널을 받들고서 조상에게 뵙도록 한 것은 진실로 죽은 사람의 효심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마음에서 찾아본다면은 영혼도 역시 반드시 스스로 그 잠자고 거처하던 寓居(이승)을 떠나서 영원히 泉壤(저승)의 아래로 영원히 버려짐을 슬퍼하여 또한 祖考의 사당에 이르러서 결별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殷나라는 질박함을 숭상하여 귀신을 존경하면서 그를 멀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大歛한 뒤에 바로 널을 받들고 조상에 뵙고서 마침내 사당에 빈소를 차렸고, 周나라 사람은 정침에 빈소를 차렸다가 葬事때에 이르면 조상의 사당에 뵙도록 했다.
孔子謂爲明器者는 知喪道矣니 備物而不可用也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明器를 만드는 사람은 喪禮의 도리를 안 것이니, 물건을 갖추기는 하되 가히 사용할 수는 없다.
이는 孔子께서 夏나라가 明器를 사용하여 葬事에 딸려보냄을(부장품으로 사용한 것을) 좋게 여긴 것이다.
哀哉라 死者而用生者之器也여 不殆於用殉乎哉아
슬프구나.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그릇(祭器)을 사용함이여. 殉葬法을 사용함에 가깝지 아니한가?
이는 孔子께서 殷나라 사람들이 祭器를 사용해서 葬事에 딸려보냄을 그르게 여긴 것이다. 사람으로써 따라 죽게하는 것을 殉葬이라고 한다. 殆는 가까움이다. 그 祭器를 사용하면은 사람을 쓰는 것에(殉葬시킴에) 가깝다.
其曰明器는 神明之也라 塗車芻靈이 自古有之하니 明器之道也라 孔子謂爲芻靈者善이라하시고 謂爲俑者不仁이니 不殆於用人乎哉아하시다
그 明器라고 이르는 것은 그 부모를 神明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塗車(진흙으로 만든 수레)와 芻靈(짚으로 만든 인형)이 自古로부터 있었으니 明器의 방도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芻靈(허수아비)을 만든 사람이 잘하였다.’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허수아비(인형)를 만든 사람이 仁하지 못하니 이것은 사람을 씀에(殉葬시킴에) 가깝지 아니한가?’ 하시었다.
그걸 明器라고 이른 것은 이를 神明의 道로써 그를 대우한 것이다. 塗車는 진흙으로 수레를 만든 것이다. 풀을 묶어서 인형을 만들어 죽은 사람을 따라가서 호위하는 것을 만드는 것을 그걸 芻靈이라고 이르니, 그 모양이 대략 인형과 비슷할 뿐이니 또한 明器의 종류이다. 中古 時代에는 나무 인형을 만들어 그걸 俑(허수아비)이라고 불렀는데, 얼굴과 눈과 기계 발동이 있어서 너무나도 사람과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孔子께서 그걸 不仁하다고 증오하셨으니, 末流의 폐단이 반드시 사람으로써 殉葬시킬 사람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서이다. ○趙氏가 말하기를 나무 인형으로써 葬禮를 보내드릴 적에 기계를 설치하여 능히 뛸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命名하여 俑이라고 하였다.
穆公이 問於子思曰爲舊君反服이 古與잇가 子思曰古之君子는 進人以禮하고 退人以禮라 故有舊君反服之禮也니이다 今之君子는 進人호대 若將加諸膝하고 退人호대 若將隊諸淵하나니 毋爲戎首不亦善乎잇가 又何反服之禮之有이리잇고
穆公이 子思에게 질문하기를 “옛날(예전에 섬겼던) 임금을 위하여 귀국하여 服을 입는 것이 古禮입니까?” 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의 君子(임금)는 사람을 등용함에도 禮로써 하였고 사람을 퇴진시킴에 있어서 禮로써 하였기 때문에 옛날 임금에게 귀국하여 服을 입는 禮가 있었습니다. 지금 君子(임금)는 사람을 등용하되 장차 그를 무릎 위에 올려놓을 듯이 하고 사람을 물리칠 적에는 장차 그를 연못에 떨어뜨릴 듯이 하고 있으니 그 해직당한 신하가 침입하는 괴수가 되지 아니한 것만도 또한 착하지 않습니까? 또 어찌 귀국하여 服을 입어주는 禮가 있겠습니까?”
穆公은 魯나라 임금인데, 哀公의 曾孫이다. 옛날 임금을 위하여 服을 입는 것이 󰡔儀禮󰡕 齊衰章에 나타나 있다.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가지 禮가 있으면은 그 임금을 위하여 服을 입어주나니 원수에 대해서는 그 무슨 服을 입을 것이 있겠느냐고 하셨으니, 이 章의 뜻과 같다. 그를 연못으로 떨어뜨림은 죽는 땅에 방치해 둠을 말한다. 戎首는 침입하여 난을 일으키는 괴수가 되는 것이다.
悼公之喪에 季昭子問於孟敬子曰爲君何食고 敬子曰食粥이 天下之達禮也어니와
悼公의 喪事에 季昭子가 孟敬子에게 질문하기를 “임금을 위하여 무엇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敬子가 말하기를 “죽을 먹는 것이 天下의 공통된 禮이거니와
悼公은 魯나라 哀公의 아들이고, 昭子는 康子의 曾孫인데, 이름은 强이다. 敬子는 武伯의 아들인데, 이름은 捷이다.
吾三臣者之不能居公室也를 四方이 莫不聞矣니 勉而爲瘠則吾能이어니와 毋乃使人疑夫不以情居瘠者乎哉아 我則食食호리라
우리 三家의 신하라는 자들이 능히 公室(왕실)에 있으면서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 것을 四方에서 듣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데, 애써서 수척하여 지는 것을 내가 능히 할 수는 있지마는 아니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수척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밥을 먹겠습니다.”라고 하였다.
三臣은 仲孫·叔孫·季孫氏의 三家이다. 敬子가 말하기를 우리 三家들이 능히 왕실에 있으면서 신하의 禮로써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것을 사방이 모두 그걸 알고 있는데, 애써서 억지로 죽을 먹으면서 수척한 모양을 하는 것을 내가 비록 능히 할 수는 있지마는 그러나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슬퍼하는 진정으로써 이렇게 수척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도록 않겠느냐? 禮를 위반하고서 밥을 먹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應氏가 말하기를 季子의 질문은 君子가 과오를 보완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盟氏의 대답은 가히 小人으로써 忌憚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다.
衛司徒敬子死커늘 子夏吊焉호대 主人未小歛이어늘 絰而往하고 子游吊焉호대 主人旣小歛이어늘 子游出絰反哭한대 子夏曰聞之也與아 曰聞諸夫子호니 主人이 未改服則不絰이라하더시다
衛나라 司徒 敬子가 죽자 子夏가 조문을 하되 主人이 아직 小歛을 못하였는데 子夏가 環絰을 끼고 갔고, 子游는 조문을 하되 主人이 이미 小歛을 하자 子游가 나와서 環絰을 끼고서 되돌아가 哭을 하자 子夏가 말하기를 “그것을 들었는가?” 말하기를 “선생님께 듣자하니 主人이 아직 옷을 고쳐입지 아니하였으면 環絰을 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司徒는 官職으로써 姓氏를 삼는다. 주인이 아직 小歛을 못하였으면은 옷을 바꾸어 입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문가는 사람이 環絰을 끼지 아니해야 되나니 子夏가 環絰을 끼고서 가 조문한 것은 잘못이다. 그 때에 子游도 역시 조문을 갔으되 그 喪主가 小歛한 뒤에 옷을 바꾸어 입기를 기다렸다가 이에 밖으로 나와서 環絰을 끼고 돌아가서 그에 哭을 하였으니 이것은 禮에 맞는다.
曾子曰晏子可謂知禮也已니 恭敬之有焉이로다 有若曰晏子一狐裘三十年하며 遣車一乘이며 及墓而反하니라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晏子는 가히 禮를 알았다고 이를 수 있나니 恭敬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有若이 말하기를 “晏子는 한 여우 갖옷을 30年동안 입었으며 사망한 이를 보내드리는 수레가 1대였으며 무덤을 다 씀에 이르러서 곧바로 돌아왔다.”
晏子는 齊나라의 大夫인데, 曾子께서 그가 禮를 안다고 칭찬하신 것은 禮는 공경으로써 근본을 삼음을 이른다. 有若의 말은 말하자면은 여우 갖옷은 귀함이 가볍고 새로운 것에 있는데 이에 30년토록 바꾸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에게 儉朴하였고, 돌아간 이를 보내드리는 수레가 1대임은 그 어버이에게 儉朴한 것이고, 禮에 봉분을 마친 뒤에는 손님에게 절을 하고 손님을 전송해 드리는 등의 禮가 있는 것인데, 晏子는 봉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돌아왔으니 손님에게 儉朴한(소홀히 한) 것이다. 이 세가지 것은 모두 그 儉朴함으로써 失禮한 것이다.
國君은 七个라 遣車七乘이오 大夫는 五个라 遣車五乘이니 晏子焉知禮리오
나라 임금은 희생 고기를 싸는 포장이 7개이므로 遣車가 7대이고 大夫는 희생 고기를 싸는 포장이 5개이므로 遣車가 5대이니, 晏子가 어찌 禮를 알리오?
遣車의 수가 天子는 9대이고 諸侯는 7대이고 大夫는 5대이고 天子의 士는 3대이고 諸侯의 士는 遣車가 없다. 大夫 이상은 모두 太牢이고, 士는 少牢이다. 个는 싸는 것이니, 무릇 희생을 싸는 것을 모두 下體를 절취하는데, 매 한 희생마다에서 세 토막 下體를 절취하되 앞 정강이에서는 팔뚝과 팔꿈치를 절취하고 뒷 정강이에서는 넓적다리의 뼈를 절취한다. 少牢는 2마리 희생이니, 6體이므로 나누어 3개를 만들고 太牢는 3마리 희생이니, 9體이다. 大夫는 9體를 나누어서 15토막으로 만들어서 3토막씩으로 1包를 만드니 통털어 5包이고, 諸侯는 나누어 21토막을 만드니 무릇 7包이고, 天子는 나누어 27토막을 만드니 무릇 9包이다. 매양 遣車 1대마다 1包씩을 싣는다.
曾子曰國無道어든 君子恥盈禮焉하나니 國奢則示之以儉하고 國儉則示之以禮니라
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에 道가 없으면은 君子가 禮를 다 채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나니, 나라가 사치하면은 그 국민들에게 儉朴함으로써 보여주어야 되고 나라가 儉朴하면 그들에게 禮로써 보여주어야 되는 것이다.”
曾子는 權道를 주장하였고 有子는 經道를 주장하였는데 이 때문에 두 가지의 의론이 합치하지 않는다.
國昭子之母死커늘 問於子張曰葬及墓하야 男子婦人이 安位오 子張曰司徒敬子之喪에 夫子相이러시니 男子는 西鄕하고 婦人은 東鄕하니라
國昭子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子張에게 질문하기를 “葬事지낼 적에 묘소에 이르러서 男子와 婦人이 어떻게 위치를 정해야 합니까?” 子張이 말하기를 “司徒 敬子의 喪事에 선생님께서 禮를 도와주셨는데, 男子는 서쪽을 향하고 婦人은 동쪽을 향하였습니다.”
國昭子는 齊나라의 大夫인데, 그 어머니의 葬禮에 子張이 禮를 도왔기 때문에 그에게 질문한 것이다. 夫子는 孔子님이다. 주인의 집에서 남자는 모두 서쪽을 향하고 부인은 모두 동쪽을 향하니 남자의 손님은 여러 주인의 남쪽에 있고 여자의 손님은 여러 부인들의 남쪽에 있는 것이 禮이다.
曰噫라 毋하라 曰我喪也에 斯沾이니 爾專之하야 賓爲賓焉하고 主爲主焉이라하야늘 婦人이 從男子하야 皆西鄕하니라
國昭子가 말하기를 “아아! 그렇게 하지 마시오.” 말하기를 “내가 喪事를 치름에 모두 와서 보게 되리니 당신이 그 喪事를 전담하여 손님은 손님이 되게 하고 주인은 주인이 되도록 하시오.”하자 婦人이 男子를 따라서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昭子가 子張의 말을 듣고 탄식하면서 그를 저지시켜 말하기를 내가 大夫가 되었으니 齊나라에서 현달한 집안이다. 지금 喪禮를 치름에 있어서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와서 볼 것이니 마땅히 변경하여 사람들에 보여줌이 있어야 된다. 어찌 마땅히 한결같이 옛 禮만을 따를 수 있겠느냐? 당신은 마땅히 그 일을 전적으로 주관하여 손님들로 하여금 스스로 손님이 되도록 하고 주인은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오 라고 하니, 이에 昭子의 집안에 부인들이 이미 남자와 더불어 함께 주인의 위치에 있으면서 서쪽을 향하고, 여자 손님은 또한 남자 손님과 더불어 함께 손님의 위치에 있으면서 동쪽을 향하였다. 斯는 다함이다. 沾은 읽기를 覘으로 해야 된다. 이는 禮儀가 변함을 기록한 것이다.
穆伯之喪에 敬姜이 晝哭하고 文伯之喪에 晝夜哭한대 孔子曰知禮矣라하시다
穆伯의 喪事에 敬姜이 낮에만 哭을 하고 文伯의 喪事에는 밤낮으로 哭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禮를 안다.”고 하시었다.
남편에게는 禮로써 哭을 하였고 자식에게는 인정으로써 哭을 하였으니 節度에 맞았기 때문에 孔子께서 그를 아름답게 여기셨다.
文伯之喪에 敬姜이 據其牀而不哭曰昔者에 吾有斯子也에 吾以將爲賢人也라하야 吾未嘗以就公室이러니 今及其死也하야 朋友諸臣은 未有出涕者오 而內人은 皆行哭失聲하니 斯子也必多曠於禮矣夫인저
文伯의 喪事에 敬姜이 그 평상에 기대고 哭을 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내가 이 자식을 둠에 내가 장차 어진 사람이 될 것으로 여겨 내가 일찍이 써 公室(직무실)에 가보지를 아니하였더니 지금 그 죽음에 이르러서 친구와 여러 신하들은 눈물을 흘린 사람이 없고, 오직 內人(妻妾)들만이 모두 걸어가면서 哭을하여 목이 메이고 있으니 이 자식이 예의에 소홀함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고 하였다.
어진 사람이 될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어진 사람은 반드시 禮를 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릇 내가 평일에 公室에 출입함에 있어서 일찍이 그와 더불어 함께해서 그 행하는 바를 관찰하지 않았더니 대개 그가 어질어서 禮를 알 것으로 믿었다가 죽음에 이르러서 그가 禮에 소홀히 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걸 恨歎한 것이다. ○鄭氏가 말하기를 季氏는 魯나라의 으뜸 卿이니, 敬姜이 만나보는 禮가 있다.
季康子之母死커늘 陳褻衣한대 敬姜曰婦人不飾이면 不敢見舅姑니라 將有四方之賓이 來어늘 褻衣何爲陳於斯오하고 命徹之하다
季康子의 어머니가 죽자 褻衣(속옷)을 진열해 놓자, 敬姜이 말하기를 “婦人은 몸을 치장하지 아니하면은 감히 시부모님도 뵙지 못하는 것이다. 장차 사방의 손님이 오게 되는데 속옷을 무엇 때문에 여기에 진열해 놓을 수 있단 말이냐?”하고 명령하여 그 속옷을 치우도록(거두도록) 하였다.
敬姜은 康子의 從祖母이다. ○應氏가 말하기를 敬姜의 森然한 法度의 말이다.
有子與子游立하야 見孺子慕者하고 有子謂子游曰予는 壹不知夫喪之踊也하야 予欲去之久矣러니 情在於斯其是也夫인저
有子가 子游와 더불어 서서 어린아이가 울부짖으며 사모하는 것을 보고 有子가 子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전혀 喪事에 무엇 때문에 踊躍하는 것을(뛰는 줄을) 모르고서 나는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은지 오래였는데 슬픈 眞情이 이 뛰는 것에 있음이 이와 같구려.” 하였다.
有子가 말하기를 喪禮에 뜀이 있는 것을 나는 항상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를 몰랐다. 壹이라는 것은 專一한 뜻이니, 항상과 같다.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었는데, 지금 孺子가 울부짖으며 사모함이 이와 같음을 보니 슬픈 정이 이 뜀에 있는 것이 또한 이 어린아이의 사모함과 같구나 라고 하였다.
予游曰禮有微情者하며 有以故興物者하니 有直情而徑行者는 戎狄之道也니 禮道則不然하니라
予游가 말하기를 “禮는 감정을 減殺(절제)시키는 것도 있으며 써 일부러 물건으로 감정을 일으키는 것도 있는데 감정을 솔직하게 하여 곧바로 행하는 것은 오랑캐의 道이니 禮의 道는 그렇지 않다.”
子游가 말하기를 先王께서 禮를 제정하심이 어진 사람으로는 하여금 구부려서 그에 나아가도록 하고 不肖한 사람은 발돋움하여 그에 따라가도록 하였으니, 어진 사람은 감정에 지나칠까 염려스럽기 때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哭하고 뛰는 절차를 定立하여 써 그 감정을 감쇄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禮는 감정을 절제하는 것도 있다고 하였으니, 微는 감쇄시킴과 같다. 不肖한 사람은 情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그 슬픈 감정을 일으키는 衰絰의 물건을 만들어 그로 하여금 喪服을 보고 슬픔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써 일부러 물건으로 감정을 일으키는 것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두가지 것이 모두 禮를 만든 사람이 인정을 참작해서 그것을 만든 것이다. 만약에 곧바로 자기의 감정을 멋대로하여 경솔하게 감정대로 실행하여 혹은 슬퍼하기도 하고 혹은 슬퍼하지도 아니하여 한만하게 절제가 없다면은 이는 오랑캐의 도리이다. 중국 禮義의 도는 그렇지 않다.
人이 喜則斯陶하고 陶斯咏하고 咏斯猶하고 猶斯舞하고 舞斯慍하고 慍斯戚하고 戚斯歎하고 歎斯辟하고 辟斯踊矣니 品節斯를 斯之謂禮니라
지금 사람들이 기쁘면 이에 울적하고 울적하면 이에 노래부르고 노래부르면 이에 몸을 흔들고 몸을 흔들면 이에 춤을 추고 춤을 추면 이에 화가 나고 화가 나면 이에 슬프고 슬프면 이에 한탄하고 한탄하면 이에 가슴을 치고 가슴을 치면 이에 뛰는데, 이것들을 등급매기고 절제하는 것을 이것을 禮라고 이른다.
이는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은 슬픈 감정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다만 춤을 추면 이에 화가 난다는 한 句는 끝내 이 가히 의심할 만하니, 지금 또한 䟽에 근거한다. 劉氏는 흔들면 이에 춤을 춘다는 아래에 矣字 하나를 증가하고 舞斯慍 세 글자를 刪削하려고 하는데, 지금 또한 감히 따를 수 없다. ○䟽에 말하기를 기쁜 것은 외부의 환경이 마음에 맞는 것을 이른다. 斯는 어조사이다. 陶는 울적함을 이르니, 마음이 막 기뻐서 유쾌하지 못한 뜻이다. 울적한 감정이 펴지면은 입으로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부족하여 점점 신체를 움직이고 흔듦에 이르러서 이에 일어나 춤을 추어 발을 덩실거리고 손을 저음에 까지 이르니 즐거움의 극치이다. 外境이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慍이라고 이르니, 무릇 기쁨과 화냄이 서로 상대가 되며, 슬픔과 즐거움이 서로 발생하나니 만약에 춤이 節度가 없어서 몸이 피곤하여 싫증나고 게을러져서 일이 마음과 더불어 위배가 된다면 써 화가 발생하게 되니 화가 발생함이 춤을 춤이 극에 달함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曲禮」에 이르기를 즐거움을 가히 극에 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통틀어 아홉 글귀이니, 첫머리와 끝 각 넷 글귀는 이 슬픔과 즐거움이 상대된 것이고 중간에 舞斯慍 한 글귀는 이 슬픔과 즐거움이 相生된 것이다. 화가 나면 이에 슬픈 것은 노여움이 와서 마음에 접촉하여 분노한 끝에 變轉하여 근심과 슬픔이 되고 근심과 슬픔이 더욱 깊어짐에 따라서 탄식이 일어나고 탄식을 하여도 발설되지 아니함에 마침내 가슴을 침에 이르고 가슴을 쳐도 발설되지 아니함에 이에 뛰면서 분하여 가슴을 치니 또한 슬픔의 지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랑캐는 예의가 없어서 아침에 빈소를 차려놓고서 저녁에 노래를 부르고 어린아이는 감정대로하여 갑자기 울다가 갑자기 웃나니 지금 만약 이 두 길을 등급매기고 절제하여 하여금 뛰고 춤추는 것이 禮數가 있도록 한다면은 능히 오래갈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禮라고 이른다. 品은 등급이요, 節은 절제하여 절단하는 것이다. ○孫氏가 말하기를 마땅히 사람들이 기쁘면 이에 울적하고 울적하면 이에 노래부르고 노래부르면 이에 몸을 흔들고 몸을 흔들면 이에 춤을 추고 춤을 추면 이에 뛰며, 사람들이 슬프면 이에 화가 나고 화가 나면 이에 슬프고 슬프면 이에 한탄하고 한탄하면 이에 가슴을 치고 가슴을 치면 이에 뛴다가 되어야 한다. 대개 喜로부터 蹈에 이르기까지 무릇 여섯 번 변하였고, 悲로부터 踊에 이르기까지 또한 여섯 번 변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어린아이가 울부짖으며 사모하는 솔직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춤을 추면서 뛰고 가슴을 치면서 뛰는 것은 모두 이 인정에 근본하는데 聖人께서 이에 그 때문에 절제하였다.
人이 死커든 斯惡之矣며 無能也라 斯倍之矣니라 是故制絞衾하며 設蔞翣은 爲使人勿惡也니라
사람이 죽으면 이에 그를 싫어하며 능력이 없으므로 이에 그를 등진다. 이렇기 때문에 絞布와 이불을 만들며 棺 덮개와 운삽을 설치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싫어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죽음으로써 그를 싫어하며, 그 능력이 없음으로써 그를 등진다. 아마도 太古의 예의가 없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와 같이하였다. 이에 聖人께서 써 禮를 제정하신 원래의 뜻을 推原한 것은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싫어하지 말고 등지지 말도록 하였을 뿐이다. 絞布와 이불로써 그 시체를 장식하고 棺 덮개와 운삽으로써 그 棺을 장식한다면은 죽은 사람의 혐오스러운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다.
始死에 脯醢之奠이오 將行에 遣而行之하고 旣葬而食之하나니 未有見其饗之者也언마는 自上世以來로 未之有舍也니 爲使人勿倍也라 故子之所刺於禮者는 亦非禮之訾也니라
비로소 죽었을 적에 肉脯와 肉醬의 奠을 만들어 올리고 장차 널이 떠나가려고 할 적에 遣奠으로 그를 떠나보내고 이미 葬事지내고 그에게 虞祭를 지내나니 그 虞祭를 歆饗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직까지 있지 않지마는 上世로부터 이래로 그것을 폐지한 사람이 있지 않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등지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적용하는 禮에 대하여 풍자하는 것은 또한 禮의 하자가 아니다.
사람이 막 사망하였을 적에는 바로 肉脯와 肉醬의 奠을 만들어 올리고 장차 葬事를 지내려할 적에는 희생의 下體를 싸서 遣奠함이 있고 이미 葬事를 지내면 虞祭의 제사가 있나니 어찌 일찍이 죽은 사람이 그 虞祭를 歆饗함을 보았겠는가마는 그러나 上世에 禮를 제정한 이래로부터 그걸 버리고서 하지 아니한 사람이 있는 것을 듣지를 못했으니 이것을 하면은 뿌리에 보답하고 시초를 推原하는 생각이 저절로 능히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다시 그를 등지는 뜻이 있겠는가? 先王이 禮를 제정함에 있어서 그 깊은 뜻이 대개 이와 같으니 지금 그대가 喪事의 뛰는 것을 풍자하면서 그걸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 또한 禮의 병이 될 수는 없다.
吳侵陳하야 斬祀殺厲하고 師還出竟이어늘 陳大宰嚭가 使於師한대 夫差謂行人儀曰是夫也多言하니 盍嘗問焉이리오 師必有名이니 人之稱斯師也者則謂之何오
吳나라가 陳나라를 침략하여 사당 나무를 베어버리고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죽이고 군대가 돌아가 국경을 나가자 陳나라 大宰 嚭가 군대 중으로 사신을 가니, 夫差가 行人(외교관) 儀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말을 잘하니 어찌 시험삼아 물어보지 않겠는가? 出師함에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이 번 出師에 대하여 일컫는 것이 무어라고 이르는가?”
魯나라 哀公 元年에 吳나라 군대가 陳나라를 침략하였다. 斬祀는 사당의 나무를 베어버린 것이요, 殺厲는 역병에 걸린 사람을 죽인 것이다. 大宰와 行人은 모두 벼슬 이름이다. 夫差는 吳子의 이름이다. 是夫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大宰 嚭를 가리킨다. 多言은 말을 잘함과 같다. 盍은 어찌 아니함이다. 嘗은 시험함이다. 군대는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하자면 군대를 출동시켜 남을 정벌함에 있어서 반드시 저 나라의 죄를 얻어서 써 우리가 군대를 출동하는 명분을 나타내야 한다. 지금 여러 사람들이 우리 이 군대를 일컫기를 무슨 이름으로 이르는가?
大宰嚭曰古之侵伐者는 不斬祀하며 不殺厲하며 不獲二毛러니 今斯師也殺厲與인대 其不謂之殺厲之師與아 曰反爾地하며 歸爾子하야든 則謂之何오 曰君王이 討敝邑之罪하시고 又矜而赦之하시면 師與有無名乎아
大宰 嚭가 대답하기를 “옛날의 침략하여 정벌하는 사람은 사당 나무를 베어버리지 아니하며 역병에 걸린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며 머리가 斑白이 된 사람을 포로로 잡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이 군대는 역병에 걸린 사람을 죽인진댄 그 군대를 역병에 걸린 사람을 죽인 군대라고 이르지 않겠는가?” 行人 儀가 말하기를 “당신의 땅을 되돌려주며 당신의 臣子들을 송환해 준다면은 그것을 무어라고 이르겠는가?” 大宰 嚭가 말하기를 “君王께서 敝邑의 죄를 토벌하시고 또 가엾게 여겨 그를 사면해 주신다면 군대를 출동시킴이 명분이 없겠는가?”
二毛는 斑白의 사람이다. 子는 사로잡은 臣民을 이른다. 그 침략한 땅을 되돌려 주고 그 사로잡은 백성들을 석방해 준 것은 이를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준 것이다. 어찌 가히 또 명분이 없는 군대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는 大宰 嚭가 말을 잘한 까닭으로 능히 敗亡한 재앙을 구제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이 때에 吳나라에도 또한 大宰 嚭가 있었으니 어떤가?
顔丁이 善居喪이라 始死에 皇皇焉如有求而弗得하고 及殯하얀 望望焉如有從而弗及하고 旣葬하얀 慨焉如不及其反而息하더라
顔丁이 居喪하기를 잘하였다. 부모님이 처음 돌아가셨을 적에는 허둥지둥하여 찾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한 듯 하고, 이미 빈소를 차리게 되면은 望望然히 따르는 것이 있는데 미치지 못한 듯 하고, 이미 葬事지내면 慨然히 그 돌아올 때에 미치지 못하여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
顔丁은 魯나라 사람이다. 皇皇은 栖栖와 같고, 望望은 가고 돌아보지 않는 모양이다. 慨는 感悵하는 뜻이다. 처음 돌아가셨을 적에는 형체를 가히 볼 수 있고, 이미 빈소를 차렸을 적에는 널을 가히 볼 수 있고, 葬事지내면 보이는 바가 없다. 따르는 것이 있는데 미치지 못한 듯함은 따를 만한 곳이 있을 듯 함이요, 葬事지낸 뒤에는 다시 따를 바가 없으므로, 다만 그 미치지 못하는 듯이 여긴다고 한 것이다. 또 而息이라고 말한 것은 息은 待(기다림)와 같으니, 그 부모를 결연히 잊지 못해서 오히려 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면서, 그 부모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것이다. 대개 葬事라는 것은 가서 돌아오지 않으나 그러나 효자가 영혼을 맞이하여 되돌아올 때에 그래도 의심하는 바가 있는 듯 한 것이다.
子張이 問曰書云高宗이 三年不言이나 言乃讙이라하니 有諸잇가 仲尼曰胡爲其不然也리오 古者에 天子崩커시든 王世子聽於冡宰三年하더니라
子張이 질문하기를 “󰡔書經󰡕에서 이르기를 ‘高宗이 (父母服을 입는) 3年동안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나 말을 하면 이에 기뻐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런 사실이 있습니까?” 仲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그 그러하지 아니하였겠느냐? 옛적에는 天子가 崩御하시면은 王世子가 冡宰에게 政事를 듣도록 하기를 3年동안 하였다.”
言乃讙(말하면 이에 기뻐하였다는) 것은 명령이 반포되는 바에 있어서 인민들의 마음이 기뻐한 것이다.
知悼子卒하야 未葬이어늘 平公이 飮酒할새 師曠李調侍하야 鼓鍾이러니 杜蕢自外來하야 聞鍾聲曰安在오 曰在寢이니이다 杜蕢入寢하야 歷階而升하야 酌曰曠아 飮斯하라 又酌曰調아 飮斯하라하고 又酌하야 堂上北面坐하야 飮之하고 降하야 趨而出한대
知悼子가 사망하여 아직 葬事를 지내지 않았는데, 平公이 술을 마실 적에 師曠과 李調가 임금을 모시고서 종을 두들기고 있더니 杜蕢가 밖에서 들어와 종소리(풍악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임금님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문지기가 말하기를 “路寢에 계십니다.” 하니, 杜蕢가 路寢으로 들어가 계단을 지나서(성큼성큼 밟고) 올라가서 술잔에 술을 부어 말하기를 “師曠아. 이 술잔을 마셔라.” 또 술잔에 술을 부어 말하기를 “李調아. 이 술잔을 마셔라.” 하고, 또 술잔에 술을 부어 마루 위에서 북쪽을 향하여 앉아서 그 술잔을 마시고 내려와 종종걸음으로 나가버렸다.
知悼子는 晉나라 大夫인데, 이름은 罃이고, 平公은 晉나라 諸侯 彪이다. 무릇 세 번 술잔에 술을 부은 것은 이미 두 사람에게 벌을 주고 또 스스로 벌을 준 것이다.
平公이 呼而進之曰蕢아 曩者에 爾心이 或開予라 是以不與爾言호니 爾飮曠은 何也오 曰子卯不樂이니 知悼子在堂하니 斯其爲子卯也大矣어늘 曠也太師也로대 不以詔할새 是以飮之也호이다
平公이 불러서 그를 앞으로 나오도록 하고서 말하기를 “蕢아. 아까 네 마음이 혹시 나를 계도해 줄 것으로 여기었다. 이 때문에 너와 더불어 말을 하지 아니하였는데 네가 師曠에게 술을 마시도록 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던고?” 杜蕢가 말하기를 “子日과 卯日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인데, 知悼子의 殯所가 마루에 있으니 이것은 그 子卯日이 됨이(子卯日) 보다 더 중대한 것인데, 師曠이 太師인데도 그로써 말씀을 드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 罰酒를 마시도록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네가 처음 들어올 적에 내의 생각에는 네가 반드시 간하고 가르치는 바가 있어서 나에게 개발해 줄 것으로 여기었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너와 더불어 말을 아니하였었는데 이에 세 번 술잔에 술을 부은 뒤에 마침내 말도 아니하고 나가버렸으니 네가 師曠에게 罰酒를 마시게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이냐? 蕢가 말하기를 桀이 乙卯日로 죽었고 紂는 甲子日에 죽었으니, 그 날을 疾日(忌日)이라고 이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그 날을 풍악을 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마루에 있음은 殯所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임금이 卿大夫에 대하여 葬禮에 이르기까지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卒哭에 이르기까지는 풍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인데, 悼子가 殯所에 있는데도 가히 음악을 연주하면서 연회를 벌여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桀과 紂는 시대가 다른 임금이고, 悼子는 體가 같은 신하이다. 그렇기 때문에 子卯日보다 더 중대하다고 하였다. 詔는 고함이니, 그 고하지 않은 죄를 벌준 것이다.
爾飮調는 何也오 曰調也는 君之褻臣也니 爲一飮一食하야 忘君之疾이라 是以飮之也호이다
平公이 말하기를 “네가 李調에게 罰酒를 마시도록 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던고?” 杜蕢가 말하기를 “李調는 임금의 褻臣(측근 신하)인데도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을 위하여 임금의 과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 罰酒를 마시도록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李調가 가까이 모시어 친숙한 신하가 되는데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에 탐욕되어 임금께서 禮를 위반하는 과실을 잊어버렸다. 이 때문에 그에게 罰酒를 들게 했다.
爾飮은 何也오 曰蕢也宰夫也로대 非刀匕是共하고 又敢與知防이라 是以飮之也호이다
“네가 罰酒를 마신 것은 무슨 까닭이었던고?” 杜蕢가 말하기를 “저는 宰夫(임금 수라요리를 주관하는 사람)인데도, 칼과 숟가락 일에 이에 이바지하지 아니하고 또 감히 방지함에 참여하여 아는 체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 罰酒를 마신 것입니다.”
非는 아니와 같다. 宰夫는 직책이 칼과 숟가락에 있는데, 지금 이에 칼과 숟가락의 직책에 오로지 이바지하지 아니하고 감히 간하고 방지하는 일에 참여하여 아는 체 하였으니, 이는 관직을 침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罰酒를 마셨다.
平公曰寡人이 亦有過焉하니 酌而飮寡人하라 杜蕢洗而揚觶어늘 公謂侍者曰如我死라도 則必毋廢斯爵也라하시니 至于今히 旣畢獻하고 斯揚觶하야 謂之杜擧라하나니라
平公이 말하기를 “寡人도 또한 과실이 있으니 잔에 술을 부어 寡人에게도 罰酒를 마시도록 하라.” 杜蕢가 잔을 씻어서 술잔을 올리자 平公이 侍者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이 술잔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그 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燕禮에 이미 술잔드린 것을 끝마치고 이에 술잔을 임금에게 들어 올려 그것을 杜擧라고 이르고 있다.
揚觶는 술잔을 드는 것인데, 손을 씻고 술잔을 씻은 뒤에 드는 것은 깨끗하고 공경함을 이루는 것이다. 平公이 스스로 그 과오를 알고서 이미 蕢에게 下命하여 써 술잔에 술을 붓도록 하고 또 이 술잔으로써 후세에 경계를 삼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한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날까지 晉나라가 燕禮를 거행함이 끝남에 있어서 반드시 이 술잔을 들어올리면서 그것을 杜擧라고 이른 것은 이 술잔이 바로 옛날에 杜蕢가 들어올린 것을 말한 것이다. 󰡔春秋傳󰡕에는 屠蒯로 쓰여있는데, 문자가 또한 같지 않다.
公叔文子卒커늘 其子戌가 請謚於君曰日月有時라 將葬矣니 請所以易其名者하나이다
公叔文子가 사망하거늘, 그 아들인 戌가 임금에게 시호내려줄 것을 奏請하면서 말하기를 “날짜와 달이 시기가 있으므로 장차 葬禮를 지내려하니, 청컨대 써 그 이름을 바꾸어줄 것을 奏請하옵니다.”
文子는 衛나라 大夫인데 이름은 拔이고, 임금은 靈公이다. 大夫와 士는 석달만에 葬事를 지내니 시기가 있음은 수가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죽으면 그 이름을 諱하니 때문에 그를 위하여 시호를 내려주는 것은 써 그 이름을 대체하는 것이다.
君曰昔者에 衛國이 凶饑어늘 夫子爲粥하야 與國之餓者하니 是不亦惠乎아 昔者에 衛國이 有難이어늘 夫子以其死衛寡人하니 不亦貞乎아 夫子聽衛國之政할새 脩其班制하야 以與四隣交하야 衛國之社稷이 不辱케하니 不亦文乎아 故謂夫子貞惠文子라하노라
임금(靈公)이 말하기를 “옛적에 衛나라가 흉년이 들자 夫子가 죽을 쑤어서 국가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닌가? 옛적에 衛나라가 變亂이 있자 夫子가 그 죽음으로써(죽음을 무릅쓰고) 寡人을 보위하였으니 또한 貞忠(충성)이 아닌가? 夫子가 衛나라의 政事를 다스릴 적에 그 반열과 제도를 脩飭하여(닦아·정돈하여) 써 이웃 사방나라들과 교제하여 衛나라의 社稷이 욕되지 않도록 하였으니 또한 文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夫子를 貞惠文子라고 이른다.” 하였다.
魯나라 昭公 20年에 도적이 衛侯의 형 縶을 살해하자 이 때에 齊豹가 난을 일으켜 靈公이 死鳥로 갔는데 이는 衛나라의 변란이다. 반열이라는 것은 尊卑의 차등이고, 제도라는 것은 多寡의 節度이니 옛 법전을 따라서 그것을 脩飭 擧行한 것이다. 先後에 의거하면은 惠가 앞에 있고 大小를 논하면은 貞忠이 소중함이 된다. 때문에 惠貞이라고 이르지 않고 貞惠라고 말했다. 이 세 글자가 시호가 되는데 오직 文子라고만 호칭한 것은 鄭玄이 이르기를 文이 충분히 그 두가지 것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石駘仲이 卒하니 無適子하고 有庶子六人이어늘 卜所以爲後者할새 曰沐浴佩玉則兆라한대 五人者皆沐浴佩玉이어늘 石祁子曰孰有執親之喪하야 而沐浴佩玉者乎리오하고 不沐浴佩玉하니 石祁子兆커늘 衛人이 以龜爲有知也라하니라
石駘仲이 卒하니, 適子가 없고 庶子 여섯 사람만이 있었는데 써 후계자될 사람을 거북점치려고 할 적에 말하기를 “沐浴하고서 玉을 차면은 吉兆를 얻는다.”고 하니, 다섯 사람들이 모두 沐浴을 하고서 玉을 찼는데, 石祁子는 말하기를 “누가 어버이의 喪禮를 집행하면서 沐浴하고서 玉을 차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고, 沐浴하고서 玉을 차지 아니하니 石祁子가 吉兆를 얻자 衛나라 사람들이 거북이가 아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駘仲은 衛나라 大夫이다. 沐浴하고서 玉을 차면 吉兆를 얻게 된다고 함은 거북점치는 사람의 말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조짐이 또한 흉한 것이 있지마는 점치는 사람이 吉兆를 구하는 것으로써 주장을 삼기 때문에 經에서 兆로써 吉을 말하였다.
陳子車死於衛커늘 其妻與其家大夫로 謀以殉葬하야 定而后에 陳子亢이 至커늘 以告曰夫子疾에 莫養於下하니 請以殉葬하노라
陳子車가 衛나라에서 사망하자 그 아내가 그 家大夫(家臣)들과 더불어 산사람으로써 殉葬시킬 것을 상의하여 결정이 난 뒤에 陳子亢이 당도하자 그 사실로써 알리기를 “夫子께서 병환이 있을 적에 그 아래에서 봉양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생존한 사람으로써 殉葬하려고 한다.”
子車는 齊나라 大夫이다. 子亢은 그 형제인데 바로 孔子님 제자 子禽이다. 병환이 났을 때에 집에 있지 않았으니 집안 사람들이 써 그 봉양을 이루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그 아래에서 봉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산사람을 죽여서 殉葬시키려고 하니 定은 이미 죽일 사람을 의논하여 결정됨을 이른 것이다.
子亢曰以殉葬이 非禮也니라 雖然이나 則彼疾當養者는 孰若妻與宰리오 得已인댄 則吾欲已어니와 不得已인댄 則吾欲以二子者之爲之也하노라하니 於是弗果用하다
子亢이 말하기를 “산사람으로써 殉葬시키는 것이 禮가 아니다. 비록 그렇지마는 그 분이 병환이 났을 적에 마땅히 봉양해야 할 사람은 누가 그 아내와 家臣만 하겠습니까? (殉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면은 나는 그만두고 싶거니와 그만둘 수가 없다면은 나는 두 사람으로써 그 殉葬을 하고 싶습니다.” 하니, 이에 과연 殉葬을 쓰지 아니하였다.
宰는 바로 家大夫(家臣)이다.  두 사람은 아내와 家臣이다. 子亢이 만약 다만 殉葬이 非禮라고만 말한다면 반드시 능히 그 일을 저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마땅히 봉양할 사람으로써 마땅히 殉葬해야 된다고 하니 그 저지함을 기약하지 아니하고서도 저절로 중지되어 버렸다.
子路曰傷哉라 貧也여 生無以爲養하며 死無以爲禮也로다 孔子曰啜菽飮水나 盡其歡을 斯之謂孝오 歛手足形하야 還葬而無槨이나 稱其財를 斯之謂禮니라
子路가 말하기를 “슬프구나.(속상하구나) 가난함이여! 부모님이 생존시에는 무엇으로써 봉양할 수가 없었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적에는 무엇으로써 禮를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콩죽을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그 기쁘게 해 드림을 다하는(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을 이것을 효도라고 이르는 것이고, 머리와 발의 형체를 염습하여 곧바로 葬事지내어 外槨이 없더라도 그 재산에 알맞게 하는 것을 이것을 禮라고 이르느니라.”
세상에 세 짐승으로 봉양했지마는 능히 즐겁게 해 드리지 못한 사람이 있고, 또한 후하게 葬事를 지내어 보기에 아름다움을 하였지마는 그것이 참람된 禮의 죄에 빠진 줄을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 이런 것을 안다면은 효도와 禮를 가히 다할 수가 있으니 또 어찌 반드시 그 가난함을 상심할 것이 있겠느냐? 還葬은 설명이 윗 篇에 나타나 있다.
衛獻公이 出奔이라가 反於衛할새 及郊하야 將班邑於從者而后入이어늘 柳莊曰如皆守社稷이면 則孰執羈靮而從이며 如皆從이면 則孰守社稷이리오 君反其國而有私也니 毋乃不可乎아한대 弗果班하니라
衛나라 獻公이 출국 망명하였다가 衛나라로 되돌아올 적에 郊外에 이르러 장차 따라다닌 사람(수행자)들에게 邑을 나누어준 뒤에 都城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柳莊이 말하기를 “만약 모두들 社稷을 지킨다면 누가 굴레와 고삐를 잡고서 따라다니겠습니까? 만약에 모두 따라다닌다면 누가 社稷을 지키겠습니까? 임금께서 그 나라에 되돌아오시면서 私心이 있으시니 아니 불가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과연 邑을 나누어주지 아니하였다.
獻公이 魯나라 襄公 14年에 齊나라로 망명하였다가 26年에 衛나라로 되돌아갔다. 羈는 써 말의 얼굴을 덮는 것이고, 靮은 써 말을 재갈물리는 것이다. 柳莊의 뜻은 거주한 사람과 수행한 사람이 균등하게 나라를 위한 것이니, 마땅히 유독 수행한 사람에게만 상을 주어서 사사로운 은혜를 보이지 않아야 됨을 이른 것이다.
衛有大史하니 曰柳莊이라 寢疾이어늘 公曰君疾革하거든 雖當祭라도 必告하라하더니 公이 再拜稽首하야 請於尸曰有臣柳莊也者는 非寡人之臣이라 社稷之臣也어늘 聞之死라 請往이라하시고 不釋服而往하사 遂以襚之하시고 與之邑裘氏와 與縣潘氏하야 書而納諸棺曰世世萬子孫이 毋變也라하시다
衛나라에 大史가 있었는데 말하자면 柳莊이었다. 그가 병으로 몸져 누워있자, 衛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병이 위급하면은(위급하게 되면은) 내가 비록 제사를 당하였더라도(지내고 있는 중이더라도) 반드시 보고하도록 하라.” 하더니, 柳莊이 죽자 公이 再拜 稽首하고서 尸童이에게 청하기를 “신하에 柳莊이라는 사람은 寡人의 신하가 아니라 社稷의 신하인데, 그가 죽음을 들었으므로 청컨대 가보겠다.” 하시고, 祭服을 벗지도 않고서 가서 마침내 그에게 그로써 그에게 襚衣로 주시고, 그에게 裘氏 邑과 潘氏 縣을 주고서 文券을 써서 그것을 棺에 넣기를 ‘代代로 萬代의 子孫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의복으로써 죽은 사람에게 주는 것을 襚라고 한다. 裘와 縣潘은 두 邑 이름이다. 萬子孫은 柳莊의 후세를 이른다. 柳莊이 병이 났을 적에 公이 일찍이 그 집안 사람들에게 명령하기를 만약에 병환이 위급한 때를 당하게 되면은 내가 비록 제사를 지낸 중에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입궐하여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더니만 그가 막상 죽음에 이르러서 과연 公이 제사를 거행하는 즈음을 당하였었는데, 마침내 祭服을 벗지도 않고서 가 따라서 祭服을 벗어가지고서 그에게 襚衣로 주었고, 또 그에게 두 邑을 주었으니 이는 비록 나라 임금이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뜻을 보였으나 그러나 제사를 버리고서 끝마치지도 아니하고 諸侯의 命服으로써 大夫에게 襚衣를 주었고 封邑의 文券을 써가지고 그걸 棺속에 넣어 두었으니 모두 禮가 아니다.
陳乾昔이 寢疾하야 屬其兄弟而命其子尊己曰如我死어든 則必大爲我棺하야 使吾二婢子夾我하라하더니 陳乾昔이 死커늘 其子曰以殉葬이 非禮也커든 況又同棺乎아하고 弗果殺하니라
陳乾昔이 병으로 몸져 누워있으면서 그 형제간들을 모아놓고서 그 아들인 尊己에게 遺命하기를 “만약 내가 죽게되면은 반드시 나의 棺을 크게 만들어서 내 두 婢子(妾)로 하여금 나를 좌우에서 끼고 있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陳乾昔이 죽자 그 아들이 말하기를 “산사람으로써 殉葬시키는 것도 禮가 아닌데, 더구나 또 한 棺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과연 결국 죽이지 아니하였다.
屬은 󰡔周禮󰡕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법령을 읽는다는 屬과 같으니, 회합함과 같으며 모임과 같다. 기록한 사람이 尊己가 正道를 지켜 그 아버지의 혼란한 遺命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좋게 여기었다.
仲遂卒于垂어늘 壬午에 猶繹호대 萬入去籥한대 仲尼曰非禮也니라 卿卒不繹이라하시니라
仲遂가 垂땅에서 죽었는데, 壬午日에 魯나라 宣公이 여전히 繹祭를 지내되 萬舞는 들어가고(사용하고) 籥舞는 제거하니, 仲尼께서 말씀하시기를 “禮가 아니다. 卿이 죽으면 繹祭를 지내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仲遂는 魯나라 莊公의 아들 東門 襄仲인데, 魯나라 卿이 되었다. 垂는 齊나라 땅 이름이다. 종묘에 제사지낸 이튿날 또 祭禮를 베풀어서 써 어제 제사를 찾아 연이은(계속한) 것을 繹祭라고 이르나니, 殷나라에서는 그것을 肜祭라고 말하였다. 壬午日이라고 말하였을진댄 바른 제사는 辛巳日이다. 萬舞는 방패를 가지고서 춤을 춘 것이고, 籥舞는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춘 것이니, 萬舞는 들어가고 籥舞는 제거한 것은 말하자면 이 繹祭를 지낼 때에 仲遂가 죽은 까닭으로 다만 소리없는 干舞(武舞)만을 사용하여 들어가고 소리가 있는 籥舞는 제거하여 쓰지 아니한 것이다. ○陳氏가 말하기를 春秋의 법에 제사를 당해서 卿이 죽게되면은 음악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이튿날에는 繹祭를 지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叔弓이 죽었을 적에 昭公이 풍악을 제거하고서 제사일을 마쳤으니 君子가 禮라고 말을 하였고, 仲遂가 죽었을 적에는 宣公이 여전히 繹祭를 지내어 萬舞는 들어가고 籥舞는 제거하니 聖人이 禮가 아니다고 하셨다. ○詩記에 말하기를 萬舞는 두 춤의 총칭이니 干舞라는 것은 武舞의 딴 이름이고, 籥舞라는 것은 文舞의 딴 이름이니 文舞는 또 그것을 羽舞라고 이른다고 했다. 鄭氏가 󰡔公羊傳󰡕에 근거해서 萬舞로 干舞를 삼았으니, 잘못이다. 󰡔春秋󰡕에 萬舞는 들어가고 籥舞는 제거했다고 썼으니 말하자면 文武의 두 춤이 다 들어갔으되 그 소리 있는 것은 제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籥舞는 제거했다고 하였는데, 公羊은 이에 萬舞로써 武舞를 삼아 籥舞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말하였으니 經의 뜻을 상실해 버렸다. 만약에 萬舞가 武舞가 됨에만 그친다면은 이 詩에 무엇 때문에 유독 萬舞만을 말하고 文舞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左傳󰡕에 仲子의 사당이 낙성됨에 장차 萬舞를 사용하려고 했다 하였으니 부인의 사당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유독 武舞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은 萬舞가 두 춤의 총칭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詩緝󰡕 簡兮篇의 註에 나온다. ○나는 살펴보건대 󰡔左傳󰡕에 楚나라 令尹인 子元이 文夫人을 유혹시키고 싶어서 그 文夫人의 궁전 옆에 집을 지어놓고서 萬舞를 공연하니 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소리없이 울면서 말하기를 先君은 이 춤으로써 戎備(군비)를 연습하였었는데, 지금 令尹은 원수를 찾지 아니하고 미망인 옆에서 萬舞를 추도록 하는 것이 또한 이상하지 않느냐고 하였으니, 이에 근거한다면은 萬舞는 참으로 武舞가 된 것인데 呂氏가 어찌 우연히 그걸 잊어버렸단 말인가?
季康子之母死커늘 公輸若이 方小러니 歛에 般이 請以機封한대 將從之러니 公肩假曰不可하니 夫魯有初하니라
季康子의 어머니가 죽자, 公輸若이 바야흐로 나이가 어렸는데 歛할 적에 般이 기계로써 봉할 것을 奏請하니 季康子가 장차 그 말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公肩假가 말하기를 “不可하니, 대체 魯나라에 先例가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公輸는 氏요, 若은 이름인데, 匠師(도편수)가 되었다. 方小(바야흐로 어림)는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이다. 歛은 內棺을 外槨 속에 내려놓는 것이다. 般은 公輸若의 종족인데 평소에 技巧가 많았었다. 公輸若이 歛하는 일을 맡았는데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그를 대신하여 자기의 기교를 시험하여 쓰려고 한 것이다. 機窆은 기관이 있어서 굴러 움직이는 기계로써 棺을 壙中으로 내리고 碑와 동아줄을 사용하지 않음을 이른다. 魯有初는 魯나라에 본시 故事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公室은 視豐碑하고 三家는 視桓楹이니라
公室(왕실)은 큰 비석에 비견하여 쓰고, 三家는 桓楹(이정표 기둥)에 비견하여 만들어 쓴다.
豐碑는 天子의 제도이고, 桓楹은 諸侯의 제도이다. ○䟽에 말하기를 무릇 視라고 말한 것은 비견하는 말이다. 豐은 큼이니, 말하자면 큰 나무를 사용하여 碑를 만들고 碑 가운데의 나무를 뚫어서 깎아내어 하여금 구멍이 나도록 하고 구멍 사이에 鹿盧(도르레)를 장착하여 양쪽 끝이 각각 碑 나무에 들어가도록 하고, 동아줄의 한 끝을 가지고는 棺을 묶은 끈에 묶고 한 끝으로는 도르레를 휘감아서 이미 그 일이 끝나면은 사람들이 각각 碑木을 등지고서 동아줄 끝머리를 어깨에 메고 북소리를 들으면서(장단에 맞추어서) 차츰차츰 뒤로 걸어가면서 그 棺을 내려놓는다. 桓楹은 碑 같지 않고 모양이 큰 기둥과 같을 뿐인데, 통틀어서 그걸 말하면 또한 碑라고도 한다. 󰡔說文󰡕에 桓은 郵亭(역)의 표말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다리 옆의 表柱(이정표)와 같다. 諸侯는 두 碑인데, 두 기둥이 한 碑가 되어서 도르레를 설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鄭氏는 이르기를 네 군데에 기둥을 세운다고 하였다.
般아 爾以人之母로 嘗巧則豈不得以리오 其母以嘗巧者乎인댄 則病者乎아 噫라한대 弗果從하니라
“般아! 네가 남의 어머니로써 기교를 시험해 보려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없겠는가? 그 남의 어머니로써 기교를 시험해 보지 않는다면 병이 날 것인가? 아이고!” 하니, 과연 따르지 아니하였다.
䟽에 말하기를 嘗은 시험함이다. 말하자면 네가 남의 어머니로써 자기의 기교의 일을 시험해 보려고 하니, 누가 네게 강제로 핍박한 사람이 있길래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느냐? 어찌 그만둘 수 없는 것이냐? 또 그에게 말하기를 그 남의 어머니로써 자기의 기교를 시험하지 않는다면은 네게 병이 날 것이 있느냐? 말하자면은 기교를 시험하지 못하면은 어찌 너에게 병이 되는 바가 있게 되겠느냐? 假의 말이 끝나자 이에 다시 아이고하면서 상심 탄식을 하니 이에 여러 사람들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一說에는 豈不得以其母以嘗巧者乎로써 한 글귀를 삼으니, 말하자면 네가 다른 사람의 어머니로써 기교를 시험하여 그 마땅히 準用해야 할 禮를 폐지해 버린다면은 또 어찌 스스로 자기의 어머니로써 기교를 시험해 보지 않고 禮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냐? 이것은 네의 마음에 또한 병되게(불만족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어서 미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그로 하여금 그 마음에 돌이켜 찾아보아 자기로써 남을 헤아려 그 不可함을 알도록 한 것이다. ○應氏가 말하기를 周나라가 쇠퇴하여 禮가 폐기되어 諸侯들이 天子의 禮를 참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公室의 棺을 무덤 씀에 있어서 天子의 豐碑에 비견하였고, 大夫가 諸侯의 禮를 참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三家가 棺을 무덤 씀에 이르러서 桓楹에 비견하였으니, 그 능멸하여 답습한 폐단이 유래가 있었다.
戰于郞할새 公叔禺人이 遇負杖入保者息하고 曰使之雖病也며 任之雖重也나 君子不能爲謀也며 士弗能死也면 不可하니라 我則旣言矣라하고 與其隣重汪踦로 往하야 皆死焉커늘 魯人이 欲勿殤重汪踦하야 問於仲尼한대 仲尼曰能執干戈하야 以衛社稷하니 雖欲勿殤也나 不亦可乎아
郞邑에서 전쟁할 적에 公叔禺人이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서 城邑으로 들어가 保身한 사람들이 휴식하는 것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賦役이 시킴이 비록 병이 나며 賦稅를 거둠이 비록 무거울지라도 君子(卿大夫)가 능히 도모하지 못하며 선비가 능히 國難에 죽지를 못한다면 不可한 것이오. 나는 이미 말했다.” 그 이웃의 동자인 汪踦와 더불어 전쟁터로 가서 모두 전사하자, 魯나라 사람들이 동자인 汪踦를 殤喪으로 치르지 않고 싶어서 仲尼에게 질문하니, 仲尼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자가 능히 방패와 창을 가지고서 社稷을 보위하였으니 비록 殤喪으로 치르지 않고자 하지마는 또한 옳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戰于郞은 魯나라 哀公 11年에 齊나라가 魯나라를 정벌하였다. 禺人은 昭公의 아들 公爲이다. 魯나라 사람이 齊나라 군대를 피하여 城邑으로 들어가서 保身한 사람들이 피곤한 나머지에 그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서 길가에 쉬고있는 것을 보고, 禺人이 이에 그걸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부역의 번거로움이 비록 능히 감당할 수가 없으며 조세 거두어들이는 수량이 비록 후함에 지나치더라도 만약에 위에 있는 사람들이 協心하여 써 外敵의 난을 막는다면 그런대로 가히 책임을 메꿀 수 있건마는 지금 卿大夫들이 능히 계책을 기획하지 못하고 선비가 능히 몸을 버리고서 國難에 죽지를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는가? 대단히 불가하다. 나는 이미 이런 말을 꺼냈으니 가히 내가 했던 말을 실천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이에 그 이웃의 동자인 汪踦와 함께 가서 싸우다가 적에게 죽었으니, 魯나라 사람들이 踦가 성인의 행적이 있다고하여 성인의 喪禮로써 그를 葬事시켜 주려고 하니, 孔子께서 그 權禮의 타당함을 좋게 여기셨다.
子路去魯할새 謂顔淵曰何以贈我오 曰吾聞之也호니 去國則哭于墓而后行하고 反其國不哭하고 展墓而入이니라하더라 謂子路曰何以處我오 子路曰吾聞之也호니 過墓則式하며 過祀則下라하더라
子路가 魯나라를 떠나가려고 할 적에 顔淵에게 일러 말하기를 “무엇으로써 나에게(내게 무슨 말을 해) 주려오?” 顔淵이 말하기를 “나는 듣자하니 나라를 떠나게 되면은 부모의 묘소에서 哭한 뒤에 떠나가고 그 나라로 되돌아와서는 哭을 아니하고 展墓(省墓)하고서 성안으로 들어간다고 합디다.” 子路에게 일러 말하기를 “무엇으로써 나를 대우하려오?(무얼가지고 나를 처우하려오?)” 子路가 말하기를 “나는 듣자하니 남의 묘소를 지나게 되면 경의를 표하며 제사지내는 단을 지나게 되면 수레에서 내린다고 합디다.”
哭墓(묘소에서 哭을 함)는 묘소의 주인이 없음을 슬퍼한 것이다. 무덤이 주인없는 것을 차마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나라로 되돌아오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떠나간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말해주고, 墓所와 社壇은 사람이 쉽게 소홀히 여기는 바인데, 능히 거기에 공경을 더한다면은 가는데마다 나의 공경을 쓰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공경하면은 가는데마다 편안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거주한 사람을 위해서 말한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무릇 물건이 펴놓으면은 가히 살펴볼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省(살피는 것)을 展이라고 이른다.
工尹商陽이 與陳棄疾로 追吳師할새 及之러니 陳棄疾이 謂工尹商陽曰王事也니 子手弓而可니라 手弓이어늘 子射諸인저 射之하야 斃一人하고 韔弓이어늘 又及하야 謂之한대 又斃二人하니 每斃一人에 揜其目하고 止其御曰朝不坐하며 燕不與어늘 殺三人하니 亦足以反命矣라하야늘 孔子曰殺人之中에도 又有禮焉이라하시니라
工尹 商陽이 陳弃疾과 더불어 吳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그들을 따라잡았는데, 陳棄疾이 工尹 商陽에게 일러 말하기를 “王事이니, 그대는 손에 활을 잡는 것이 좋겠오.” 하였다. 그가 손에 활을 잡자 “그대는 그를 쏘아 맞추시오!” 하니, 그를 쏘아 맞추어서 한 사람을 죽이고 활을 활집에 넣자, 또 그 군대를 따라잡아 그를 쏘아 맞추라고 이르니, 그가 또 두 사람을 죽였는데 매번 한 사람을 죽일 적마다 그 눈을 가리고 그 수레모는 사람을 정지시키고서 말하기를 “조회에서 앉지도 못하며 燕饗에 참석하지도 못하는데 지금 세 사람을 죽였으니 또한 충분히 써 復命할 만하다.”고 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죽이는 중에도 또한 예의가 있었다.”고 하셨다.
工尹은 楚나라의 벼슬 이름이다. 吳師를 추격함은 사실이 魯나라 昭公 12年에 있다. 子手弓而可가 글귀가 되니 그로 하여금 활을 잡도록 한 것이다. 手弓은 商陽의 활이 손이 있는 것이다. 韔은 활집이다. 謂之는 재차 그에게 말한 것이다. 눈을 가리고서 차마 보지 못하고 수레모는 사람을 정지시켜 차마 몰지 않은 것은 측은한 마음이 있어서이다. 商陽이 스스로 말하기를 지위가 낮고 禮가 박하니 이와 같이 한 것이 또한 가히 써 책임을 메꿀 수 있다고 하였다. 孔子께서 그가 예의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패배하는 군대가 본시 궁지에 몰리기 쉬운데 商陽이 이에 능히 그 맘껏 죽이는 마음을 절제하였으니, 이는 仁한 생각과 예절이 나란히 행해진 것이요 임금을 섬기는 禮가 이에 그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패배한 군대를 추격함에 있어서 잘한 것을 취택한 것 뿐이요, 또한 적에 임해서 결정하지 못하고서 차마 사람을 죽이지 못함을 이른 것은 아니다. ○䟽에 말하기를 조회와 연향이 모두 路寢에 있으니 만약 路門 밖에의 正朝라면은 大夫 이하는 모두 서있고, 만약 燕朝가 路寢에 있다면은 大夫는 위에 앉게 된다. 예컨대 孔子께서 아래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서 마루로 올라갔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마루로 올라가게 되면은 앉게 된다. 연향 역시 路寢에 있는데, 연향하는 酒禮에 술잔을 卿大夫에게 드린 뒤에 西階上에서 士에게 드리고 마루로 올라갔다는 문자는 없으니 이는 士는 堂下에 서있는 것이다. 鄭註에 활을 쏘는 사람은 왼쪽에 있고 창과 방패를 가진 사람은 오른쪽에 있고 수레를 모는 사람은 중앙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兵車에 임금을 모시고 타는 법을 이른 것이니 이는 일반 전투 병사를 이른다. 만약 이 元帥라면은 중앙의 북 아래에 있고 수레를 모는 사람은 왼쪽에 있고 창과 방패를 가진 사람은 또한 오른쪽에 있으며, 만약 天子와 諸侯가 친히 장수가 되었다면은 역시 북 아래에 있게 되나니 만약에 元帥가 아니라면 모두 왼쪽에 있고 수레를 모는 사람이 중앙에 있고 만약에 전차가 아니라면은 높은 사람이 왼쪽에 있는 것이다.
諸侯伐秦할새 曹桓公이 卒于會어늘 諸侯請含한대 使之襲하다
諸侯들이 秦나라를 정벌할 적에 曹나라 桓公이 모인 곳에서 죽자, 諸侯들이 飯含할 것을 주청하니 曹나라 사람들이 그들로 하여금 염습까지 하도록 하였다.
曹伯이 죽은 것은 魯나라 成公 13年이다. 염습하는 것은 천한 사람의 일인데 諸侯들이 그걸 따랐으니 禮를 모르는 것이다.
襄公이 朝于荊할새 康王이 卒커늘 荊人曰必請襲하노라 魯人曰非禮也니라 荊人이 强之어늘 巫先拂柩한대 荊人이 悔之하다
魯나라 襄公이 荊(楚)나라에 조회갔을 적에 康王이 죽자, 荊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襄公이 康王을 염습하기를 요청하노라.” 하자, 魯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禮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荊나라 사람이 그 일을 강요하자 魯나라 巫祝이 복숭아 나무와 갈대 빗자루로 먼저 널의 부정한 기운을 털어내니 荊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후회하였다.
荊은 禹貢의 州 이름인데, 楚나라가 나라를 세운 본래의 칭호이다. 魯나라 僖公 元年에 비로고 楚나라라고 호칭하였다. 魯나라 襄公이 28年에 楚나라에 조회가서 마침 楚나라 子爵 임금 昭의 喪事를 만났는데, 魯나라 사람이 염습하는 것이 禮가 아닌 줄을 알았지마는 능히 楚나라의 요구를 위반할 수가 없어서 이에 임금이 신하의 喪事에 임한 禮로써 그에게 先手를 쓰니 그들이 그걸 깨달음에 미쳐 후회하였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이는 그 魯나라가 權變의 適宜함에 맞게 한 것이니 충분히 써 수치를 씻을 만하다.
滕成公之喪에 使子叔敬叔吊하고 進書할새 子服惠伯이 爲介러니 及郊하야 爲懿伯之忌不入이어늘 惠伯曰政也라 不可以叔父之私로 不將公事라하고 遂入하다
滕成公의 喪事에 子叔·敬叔으로 하여금 조문가도록 하고 위문서를 드릴 적에 子服 惠伯이 副士가 되었는데 郊外에 이르러서 懿伯의 忌祭 때문에 國都로 들어가지 아니하자, 惠伯이 말하기를 “국가의 政事이므로 가히 叔父의 사사로운 忌祭로써 公事(國事)를 봉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國都로 들어갔다.
滕나라 成公의 喪事가 魯나라 昭公 3年에 있었다. 敬叔은 魯나라 桓公의 7世孫이고, 惠伯은 桓公의 6世孫이니, 世次에 있어서 敬叔이 惠伯을 호칭하여 숙부라고하고 懿伯은 惠伯의 숙부이고, 敬叔의 5從祖이다. 進書는 魯나라 임금 위문서를 奉進한 것이다. 介는 버금이다. ○이하 생략
哀公이 使人吊蕢尙한대 遇諸道하야 辟於路하야 畫宮而受吊焉한대
哀公이 사람을 시켜서 蕢尙을 조문하도록 하였는데 그 蕢尙을 도로에서 만나자 (蕢尙이) 도로를 闢除를 하고서 집을 그어놓고서 조문을 받았다.
哀公은 魯나라 임금이다. 辟於路의 辟은 읽기를 闢으로 해야 되는데, 도로를 闢除하고서 궁실의 위치를 그어놓고서 조문을 받음을 이른다.
曾子曰蕢尙이 不如杞梁之妻之知禮也로다 齊莊公이 襲莒于奪할새 杞梁이 死焉커늘 其妻迎其柩於路而哭之哀하더니
曾子께서 말하기를 “蕢尙이 杞梁의 아내가 禮를 아는 것만 같지 못하다.” 齊나라 莊公이 좁은 길로 莒나라를 습격할 적에 杞梁이 전사하게 되었는데 그 아내가 그 남편의 널을 길에서 맞이하여 哭을 슬피하였는데,
魯나라 襄公 23年에 齊나라 侯爵 임금이 莒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습격이라는 것은 작은 병력으로 그 대비하지 않음을 엄습하여 그를 공격한 것이다. 󰡔左傳󰡕에 杞植·華還이 갑옷을 수레에 싣고 밤에 且于邑의 좁은 길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且于는 莒나라 邑 이름이다. 隧는 좁은 길이다. 鄭氏가 이르기를 혹은 兌가 된다고 하였으니, 때문에 奪을 읽기를 兌로 해야 된다. 梁은 바로 杞植인데, 전사한 까닭으로 아내가 그 널을 맞이하였다.
莊公이 使人吊之한대 對曰君之臣이 不免於罪인댄 則將肆諸市朝而妻妾執이어니와 君之臣이 免於罪인댄 則有先人之敝廬在하니 君無所辱命하소서
莊公이 사람을 시켜서 그를 조문하도록 하니, 그 아내가 대답하기를 “임금님의 신하가 罪를 모면하지 못하였을진댄(제 남편이 죄를 짓고 죽었다면은) 장차 그 시신을 시장과 조정에 진열해 놓고서 妻妾이 구금되겠거니와 임금님의 신하가 罪를 모면하였을진댄(아무 죄가 없이 전사하였다면) 先人의 낡은 집이 있아오니, 임금께서는 명령을 욕되게 하는 바가 없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肆는 시신을 진열해 놓은 것이다. 妻妾執은 그 아내와 첩을 拘執(구금)하는 것이다. 󰡔左傳󰡕에 말하기를 齊나라 임금이 그를 그 집에서 조문하였다고 하였다.
孺子享黃之喪에 哀公이 欲設撥하사 問於有若한대 有若曰其可也니 君之三臣猶設之하니이다 顔柳曰天子는 龍輴而槨幬하고 諸侯는 輴而設幬호대 爲楡沈이라 故設撥하나니 三臣者廢輴而設撥하니 竊禮之不中者也어늘 而君何學焉이니잇고
孺子享黃의 喪事에 哀公이 상여줄을 설치하려고 하면서 有若에게 下問하니, 有若이 말하기를 “그 괜찮습니다. 임금님의 三家 신하들도 오히려 그 상여줄을 설치하였습니다.” 顔柳가 말하기를 “天子는 상여 수레의 끌채에 용을 그리며 떨기나무로 外槨 모양을 만들어 덮개를 덮고, 諸侯는 상여 수레에 덮개만 설치하되 느릅나무의 즙을 만들어 땅에 뿌린다. 그렇기 때문에 상여줄을 설치하는 것인데, 三家의 신하들이 상여 수레는 폐기하고 상여줄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禮를 참람되게 한 것으로써 알맞지 아니한 것인데 임금께서 어찌 그것을 배우시려고 합니까?”
享黃은 哀公의 작은 아들이다. 舊說에 撥로 상여줄을 삼았는데,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三臣은 魯나라의 三家이다. 顔柳가 말하기를 天子의 빈소에는 輴車를 사용해서 널을 실어 끌채에 그림을 그려서 용을 만들고 槨幬라는 것은 떨기나무로 外槨 모양을 만들어서 그 위에 덮는 것이니, 앞에서 도끼 모양을 外槨 위에 덮는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이하 생략>
悼公之母死커늘 哀公이 爲之齊衰한대 有若曰爲妾齊衰가 禮與잇가 公曰吾得已乎哉아 魯人이 以妻我하니라
悼公의 어머니가 죽자, 哀公이 그를 위하여 齊衰服을 입으니 有若이 말하기를 “妾을 위해서 齊衰服을 입는 것이 禮입니까?” 哀公이 말하기를 “내가 그만둘 수(服을 안입을 수) 있겠는가? 魯나라 사람들이 내 아내로 여기고 있다.”고 하였다.
以妻我(써 나의 아내로 삼음)는 나의 아내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哀公이 애정에 빠진 일이고 과오를 꾸며대는 말이다. ○䟽에 말하기를 天子와 諸侯는 旁親의 期年服은 단절하니 妾에 있어서는 服이 없고 오직 大夫만이는 貴妾을 위해서 緦麻服을 입어준다.
季子臯葬其妻할새 犯人之禾어늘 申祥이 以告曰請庚之하라 子臯曰孟氏不以是罪予하며 朋友不以是棄予하리니 以吾爲邑長於斯也라 買道而葬이면 後難繼也니라
季子臯가 그 아내를 葬事지낼 적에 남의 벼를 침범하자, 申祥이 그 사실로 말하기를 “청컨대 그것을 배상해 주시오.” 子臯가 말하기를 “孟氏가 이로써 나를 죄를 주지 아니하며 친구도 이로써 나를 버리지 아니하리니 내가 이 成邑에 邑長이 된 까닭으로 길을 사가지고서 葬事를 지낸다면은 뒷날에는 계승하기가 어려울 것이오.”라고 하였다.
劉氏가 말하기를 季子臯는 孔子의 제자 高柴이다. 孔子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高柴는 우직하다고 하였다. 󰡔家語󰡕에서 일컬은 바를 관찰해 보고 및 이 經에 기록한 바 피눈물로 3年을 울었다는 것과 및 成邑 사람이 齊衰服을 입어주었다는 일로써 관찰해 본다면은 高柴가 어짐을 가히 알 수 있다. 이 아내를 葬事지내면서 남의 벼를 침범한 것이 또한 成邑의 邑宰가 되었을 때의 일이니, 이런 사실이 있고 없는 것은 진실로 가히 알 수 없지마는 그러나 孟氏가 이로써 나에게 죄를 주지 아니하고 친구가 이로써 나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한 것은 남의 벼를 범한 실수는 작고 길을 사서 葬事지내는 해는 크기 때문이다. 왜냐? 내가 邑宰가 된 까닭으로써 오히려 길을 매입하여 葬事를 지낸다면은 뒷날 반드시 선례가 되어서 계승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니 이 또한 우직하면서 지나치게 염려한 一端이다. 그러나 이것이 誠心에서 나온 것이요, 형식적으로 꾸며댄 말은 아니다. <이하 생략>
仕而未有祿者는 君有饋焉曰獻이라하며 使焉曰寡君이니 違而君薨이어든 弗爲服也니라
벼슬은 하되 아직 俸祿이 있지 아니한 사람은 임금이 물건을 줌이 있음에 獻(드린다)고 말하고 사신가서는 寡君이라고 말하나니 나라를 떠나가서 임금이 죽으면은 喪服을 입지 않는다.
「王制」에 이르기를 직위가 정해진 뒤에 그에게 俸祿을 준다고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처음으로 벼슬하여 士가 되어서 아직 俸祿을 받지 아니한 사람인 성싶으니 임금에게서 물건을 줌이 있으면 드린다고 호칭하고 다른 나라로 나가 사신가게 되면은 寡君이라고 호칭하게 되나니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群臣과 더불어 마찬가지지마는 유독 떠나간 뒤에 임금이 逝去하면은 옛 임금을 위해서 服을 입어주지 않는 것 이것은 群臣과 더불어 다르니 그렇한 까닭은 그가 일찍이 임금의 俸祿을 받아먹지 아니하였기 때문에서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湯임금이 伊尹에게 있어서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으니 바야흐로 그 배울 적에는 그를 손님으로 대우하고 그를 신하로 삼지 않은 것이니, 이 이른바 벼슬은 하되 아직 俸祿이 있지 않다는 것은 孟子께서 齊나라에 있음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오직 그 그를 손님으로 대우하고 신하로 삼지 않기 때문에 물건을 줌이 있음에 하사한다고 이르지 않고 드린다고 이르고 왕명을 봉행하는 사신이 임금이라고 이르지 아니하고 寡君이라고 이르나니 대개 獻은 윗사람에게 바치는 말이고 寡君은 스스로 겸손스럽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서이다. 그 손님과 주인의 도리는 있고 임금과 신하의 禮는 없는 까닭 때문에 떠나간 뒤에 임금이 서거하면은 服을 입지 아니하나니 그 떠나갔다고 말하였을진댄 그 나라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진실로 그에 服을 입어주는 것이다.
虞而立尸하고 有几筵이니라
虞祭를 지낼 적에는 尸童이를 세우고 几筵이 있다.
아직 葬事를 지내지 아니하기 전에는 산사람의 禮로써 섬기고 葬事를 지내면은 어버이의 형체가 감추어졌기(매장되었기) 때문에 虞祭에는 시동이를 세워서 신을 상징한다. 筵은 자리이다. 大歛의 奠에 있어서는 비록 자리는 있지마는 안석이 없는데, 이 때에는 안석을 설치하여 자리와 더불어 서로 짝이 되게 한다.
卒哭而諱는 生事畢而鬼事始已니라
卒哭을 지내고 이름을 諱하는 것은 산사람으로 섬기는 禮가 끝나고 귀신으로 섬기는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卒哭을 지내고서 그 이름을 諱함은 대개 산사람으로 섬기는 禮가 이미 끝나고 귀신으로 섬기는 일이 비롯되었기 때문에서이다. 已는 어조사이다.
旣卒哭하고 宰夫執木鐸하야 以命于宮曰舍故而諱新이라하야 自寢門至于庫門이니라
이미 卒哭을 지내고 宰夫(요리사)가 木鐸을 잡고서 궁중에 명령하기를 “옛 고조 할아버지의 諱는 버리고(취소하고) 새로 사망한 분의 이름을 諱한다.”고 하면서 寢門으로부터 庫門에 까지 이른다.
󰡔周禮󰡕에 大喪(왕과 왕비의 喪事)과 小喪(부인 이하의 喪事)에 宰夫가 그 명령을 관장하기 때문에 卒哭지낸 뒤에 宰夫로 하여금 쇠로 만든 입에 나무 혀가 달린 木鐸을 가지고서 그것을 진동시켜 궁중에 명령하는 것이다. 그 명령하는 말에 이르기를 옛 분은 놓아두고 새로 사망한 분을 諱한다고 하였으니 故는 高祖의 아버지로서 마땅히 옮겨야 분을 이른다. 諱할 분이 많으면은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옛 諱는 놓아두고 새로 사망한 분의 이름을 諱하도록 한다. 그 친의가 다한 까닭 때문에 가히 諱하지 아니할 수 없다. 庫門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니, 또한 臯門이라고도 한다.
二名을 不偏諱니 夫子之母名徵在러시니 言在不稱徵하시며 言徵不稱在하더시다
두 글자로 된 이름을 한 글자만은 諱하지 아니하나니, 孔子님의 어머니 이름이 徵在이셨는데, 在를 말할 적에는 徵을 일컫지 아니하셨으며 徵을 말하실 적에는 在를 일컫지 아니하셨다.
二名은 두 글자로 이름을 만든 것이니, 이는 避諱하는 禮를 기록하였다.
軍有憂어든 則素服으로 哭于庫門之外니 赴車不載櫜韔이니라
군대가 걱정(패전)함이 있으면은 임금이 素服으로 庫門 밖에서 哭을 하나니, 패전을 보고하는 수레에는 갑옷 전대와 활집을 싣지 아니한다.
櫜는 갑옷이고 韔은 활집이다. 갑옷을 갑옷 전대에 넣지 않고 활을 활집에 넣지 않는 것은 재차 사용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方氏가 말하기를 전쟁에 승리하고서 돌아오는 것을 개선이라고 이르나니 패전을 걱정이라고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 素服으로 哭을 함은 喪禮로써 그걸 처리한 것이다. 반드시 庫門 밖에서 한 것은 종묘에 가깝기 때문에서이다. 군대가 출동함에 있어서 조상 종묘에게 명령을 받으나니 戰功이 없으면은 조상의 명령에 욕이 된다. 赴車는 부음을 나라에 알리는 수레이니, 무릇 喪事를 알리는 것을 赴車라고 이르니 패전을 보고함으로써 이름한 것이 素服과 더불어 뜻이 같다.
有焚其先人之室이어든 則三日哭이니 故曰新宮火어늘 亦三日哭이라하니라
그 선조의 사당에 불이 남이 있으면은 3日동안 哭을 하나니 그렇기 때문에 새로 지은 사당에 불이 나자 또한 사흘동안 哭하였다고 했다.
先人의 집은 종묘 사당이다. 魯나라 成公 3年에 宣公의 사당에 불이 났는데 神主가 처음 사당으로 들어간 까닭에 新宮(새로 지은 사당)이라고 했다. 󰡔春秋󰡕에 기록되기를 2月 甲子日에 새로 지은 사당에 불이 나니 사흘동안 哭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註에 이르기를 그것을 禮에 맞음을 쓴 것이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고 말한 것은 󰡔春秋󰡕의 글을 이른다.
孔子過泰山側하실새 有婦人이 哭於墓者而哀어늘 夫子式而聽之하시고 使子路問之曰子之哭也壹似重有憂者하다 而曰然하이다 昔者에 吾舅死於虎하며 吾夫又死焉이어늘 今吾子又死焉하이다 夫子曰何爲不去也오 曰無苛政일새니이다 夫子曰小子아 識之하라 苛政이 猛於虎也로다
孔子님께서 泰山 옆을 지나실 적에 어느 婦人이 묘소에서 哭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슬프게 하자, 孔子께서 수레 앞턱 가로나무에 몸을 기대고서 경의를 표하시고서 그 哭소리를 들어보시고 子路로 하여금 그 婦人에게 물어보도록 하기를 “당신의 哭소리가 대단히 중첩된 걱정이 있는 것 같소이다.” 이에 婦人이 대답하기를 “그렇소이다. 옛적에 내 시아버님께서 호랑이에게 돌아가셨으며 내 남편도 또 호랑이에게 죽었는데 이번에는 내 자식이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孔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해서 이 곳을 떠나가지 않오?” 婦人이 대답하기를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에서입니다.” 孔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小子들아. 이것을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사납도다.”라고 하셨다.
그 哭소리를 듣고 경의를 표하고서 그 哭소리를 들으신 것은 齊衰服입은 사람을 보시면은 비록 親狎한 처지일지라도 반드시 變貌하였는다는 뜻과 동일하니, 聖人의 공경하는 마음의 發露된 바가 대체로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고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 있다. 壹似重有憂라는 것은 대단히 중첩적으로 근심 괴로움이 있는 것 같음을 말한 것이다. 而曰은 乃曰이다. 호랑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倉卒間에 나와서 면할 수가 없는 것이고, 가혹한 정치가 해침은 비록 죽음에는 이르지는 않지마는 아침 저녁으로 근심의 괴로움이 있으니 일찍 죽은 것의 나음만 같지 못하다. 이것이 때문에 호랑이보다 더 사나운 것이니, 사람의 윗사람이 된 사람은 가히 이것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魯人이 有周豐也者러니 哀公이 執摯하사 請見之한대 而曰不可하니이다 公曰我其已夫인저하시고 使人問焉曰有虞氏는 未施信於民호대 而民信之하며 夏后氏는 未施敬於民호대 而民敬之하니 何施而得斯於民也오 對曰墟墓之間엔 未施哀於民호대 而民哀하며 社稷宗廟之中엔 未施敬於民호대 而民敬하고 殷人이 作誓而民始畔하며 周人이 作會而民始疑하니 苟無禮義忠信誠慤之心以涖之면 雖固結之라도 民其不解乎잇가
魯나라 사람 중에 周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哀公이 폐백을 가지고서 그를 만나보기를 청하니, 그가 이에 말하기를 “不可합니다.(뵈일 수 없습니다.)” 哀公이 말하기를 “내가 그 그만두겠도다.” 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질문하도록 하기를 “有虞氏는 백성들에게 신의를 베풀지 아니하였으되 백성들이 그를 믿었으며, 夏后氏는 공경을 백성들에게 베풀지 아니하였으되 백성들이 그를 공경하였으니, 어떻게 베풀었기에 이런 것을 백성들에게 얻었던고?” 대답하기를 “폐허와 무덤 사이에서는 백성들에게 슬픔을 베풀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슬퍼하며, 社稷과 宗廟의 안에서는 공경을 백성들에게 베풀지 아니하여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殷나라 사람이 맹서를 만듦에 백성들이 비로소 배반하였으며, 周나라 사람들이 회합을 만듦에 백성들이 비로소 의심을 하였으니, 만약 禮義와 忠信과 誠慤의 마음으로써 그들에게 임함이 없다면은 비록 그 백성들을 굳게 맺어줄지라도(단결시킬지라도) 백성들이 그 와해되지(풀어지지) 않겠습니까?”
周豐은 필시 어질면서 은거한 사람인 성싶다. 그렇기 때문에 哀公이 자기 몸을 굽혀가지고 그를 만나보려고 하였는데, 그가 이에 말하기를 不可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옛적에는 신하가 되지 아니하면은 임금을 만나보지 않기 때문에 감히 임금이 왕림하여 만나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我其已夫(내가 그 그만두겠도다)의 已는 멈추는(그만두는) 것이니, 그 원하지 않는 바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유심코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이 무심코하는 감동되고 믿은 것만 같지 못하니, 그 말이 비록 대단히 바르지마는 다만 大禹가 苗邑을 정벌할 적에 이미 일찍이 군사에게 맹서를 하였으니 맹서가 殷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禹임금이 諸侯를 塗山에서 회합시켰으니 회합 또한 周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맹서를 함에 배반하고 회합함에 의심했다고 말한 것은 殷나라·周나라에 비롯된 것이다.
喪不慮居하며 毁不危身이니 喪不慮居는 爲無廟也오 毁不危身은 爲無後也니라
喪事에는 사는 집을 걱정하지 않아야 되며, 야위어 몸을 위태롭게 하지 않아야 되나니, 喪事에 사는 집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사당이 없게 되기 때문에서이고, 야위어 몸을 위태롭게 아니하는 것은 후사가 없게 되기 때문에서이다.
劉氏가 말하기를 喪禮는 집안의 있고 없는 것에 알맞게 해야 되니, 가히 억지로 厚葬을 해가지고 집안을 패망시키는 염려가 있음에 이를 는수 없는 것이니, 집안이 패망하면은 종묘가 능히 써 홀로 보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야위어서 생명을 잃지 아니함은 가히 지나치게 슬퍼하고 야위어서 몸을 죽이는 위태로움이 있음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니, 죽음으로써 생명을 손상시킨다면 君子가 그걸 후사가 없는 것이다고 이른다. 이 두가지 것은 모두 어진 사람이 禮에 지나치는 것을 방지하는 바이다.
延陵季子適齊러니 於其反也에 其長子死커늘 葬於嬴博之間하더니 孔子曰延陵季子는 吳之習於禮者也라하시고 往而觀其葬焉하시니
延陵季子가 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 귀국할 적에 그 큰 아들이 (齊나라에서) 죽자, 嬴邑과 博邑의 사이에 葬事를 지내게 되었는데,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延陵季子는 吳나라에서 禮에 익숙한 사람이다.” 하시고 가셔서 그 葬禮를 관람하시었다.
吳나라 公子 札이 나라를 양보하고서 延陵에 거주하니 때문에 延陵季子라고 하였다. 嬴博은 齊나라 두 邑이름이다.
其坎深이 不至於泉하며 其歛以時服하며 旣葬而封하니 廣輪揜坎하며 其高可隱也러니 旣封하고 左袒하야 右還其封하야 且號者三하고 曰骨肉이 歸復于土는 命也어니와 若魂氣則無不之也며 無不之也라하고 而遂行한대 孔子曰延陵季子之於禮也에 其合矣乎인저하시니라
그 壙中의 깊이는 샘물이 솟아오르는데 까지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그 歛은 당시에 입었던 의복을 이용하였으며, 이미 葬事지내고 封墳을 만들었는데 너비와 길이는 壙中을 덮었으며, 그 높이는 가히 손을 기댈(뻗을) 만 하였는데 이미 封墳을 마치고 왼쪽 어깨를 드러내놓고서 오른쪽으로 그 封墳을 돌면서 부르짖는 것을 세 번 하고, 말하기를 “뼈와 살이 흙으로 되돌아간 것은 天命이거니와 만약 넋은 가지 않는 데가 없으며 가지 않는 데가 없느니라.” 하고, 마침내 떠나가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延陵季子가 禮에 있어서 그 합당한가 싶다.” 하시었다.
샘물에 이르지 아니함은 얕고 깊음의 適宜함을 얻음을 이른다. 時服은 죽을 때 추위와 더위에 맞추어 입었던 옷을 따른 것이다. 封은 흙을 쌓아서 封墳을 만든 것이다. 가로를 廣이라고 하고, 세로를 輪이라고 한다. 아래로는 겨우 족히 써 壙中을 덮을 만 하고, 위로는 겨우 가히 손을 기댈만 함에 이른 것이 모두 검소한 제도이다. 왼쪽 어깨를 드러내놓음은 써 陽의 변함을 보여준 것이요,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써 陰의 돌아감을 보여준 것이다. 骨肉이 흙으로 돌아간 것은 陰이 내려간 것이요, 넋이 가지 아니함이 없는 것은 陽이 올라간 것이다. 陰陽은 기운이니, 命이라는 것은 기운이 모이는 곳이다. 季子가 骨肉이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써 天命을 삼은 것은 이는 精氣가 물건이 된 것은 다함이 있는 것이고, 넋은 가지 않는 데가 없다고 이른 것은 이는 흩어진 혼이 變이 된 것은 일정한 방위가 없다는 것이다. 장수하고 일찍 죽음은 출생함이 있는 시초에 얻게 되니 가히 써 天命이라고 말할 수 있고, 넋은 이미 죽은 뒤에 흩어지니 가히 써 天命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혼은 가지 못한 데가 없다고 재차 말한 것은 이별함을 가엾이 여기고 傷心한 至情으로써 그 넋이 자기를 따라서 귀국하기를 바란 것이다. 다만 객지에서 葬禮의 예절에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이승과 저승의 일을 통달하였으니 夫子께서 좋게 여기신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의심하는 말을 하시고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으신 것은 대개 季子가 이에 때에 따라서 中에 처한 도리이니, 그 있고 없음에 알맞게하여 모두 禮에 구애받지 아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孔子께서 바로 季子가 禮에 있어서 합당하였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其乎 두 글자를 더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말미암아 그 뜻을 터득하도록 하였으니, 읽는 사람이 그걸 상세히 해 보아야 된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還은 環과 같다.
邾婁考公之喪에 徐君이 使容居來吊含한대 曰寡君使容居坐含하야 進侯玉케하시니 其使容居以含하라한대
邾婁나라 考公의 喪事에 徐나라 임금이 容居로 하여금 邾婁나라에 와서 조문하고 飯含하도록 하니, 容居가 말하기를 “寡君께서 容居(나)로 하여금 꿇어앉아서 飯含하여 諸侯의 옥을 드리도록 하였으니, 그 容居(나)로 하여금 옥으로써 飯含하도록 해 주시오.”
考公의 喪事에 徐나라 임금이 그 신하 容居로 하여금 와서 조문하도록 하고 또 珠玉의 飯含을 이루도록 하니, 容居가 말하기를 寡君이 나로 하여금 친히 꿇어 앉아서 飯含을 행하여 諸侯의 옥을 邾나라 임금에게 드리도록 하였다고 하니, 侯玉이라는 것은 徐나라가 스스로 天子에게 비견하고 邾나라 임금으로써 자기의 諸侯를 삼은 것이니, 侯氏(諸侯)에게 옥을 드림을 말한 것이다. 그 容居로 하여금 飯含을 하도록 하라는 것은 容居가 바로 飯含의 禮를 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무릇 飯含의 禮를 거행함에 있어서 歛을 하기 전에는 士는 주인이 친히 飯含을 하고 大夫 이상은 바로 사람을 시켜서 飯含을 하도록 한다. 만약에 歛한 뒤 빈소를 차리고 葬事지냄에 이르러서 와가지고 飯含을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은 직접 스스로 둥근 구슬을 널과 빈소의 위에 바치는 것을 친히 飯含하는 것이라고 이르고, 만약에 다만 명령만 전달하고 둥근 구슬을 주인에게 주면은 주인이 그걸 받는 것을 친히 飯含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른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坐는 마땅히 跪(꿇어앉음)로 해석해야 된다.
有司曰諸侯之來辱敝邑者易則易하고 于則于하나니 易于雜者는 未之有也니라
邾婁나라의 有司가 말하기를 “諸侯國으로서 敝邑에 와서 욕보는 것이 大夫가 와서 일이 간략하면은 간략한 禮를 행하고 임금이 와서 일이 광대하면은 광대한 禮를 행하나니, 간략한 禮와 광대한 禮가 뒤섞인 것은 아직 그런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邾나라 有司가 그걸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諸侯로서 邾나라에 욕되게 온 사람의 신하가 와가지고 그 일이 간략하면은 사람 신하의 간략한 禮를 거행하고, 임금이 와서 그 일이 광대하면은 임금의 광대한 禮를 행한다고 하였다. 于는 迂와 같은데, 廣遠한 뜻이 있다. 지금 사람의 신하가 와서 임금의 禮를 행하려고 하니, 이는 간이한 禮와 광대한 禮가 서로 뒤섞인 것이니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이런 것이 있지 않다.
容居對曰容居는 聞之호니 事君호대 不敢忘其君하며 亦不敢遺其祖라하니라 昔我先君駒王이 西討하실새 濟於河하사 無所不用斯言也하시니 容居는 魯人也라 不敢忘其祖호라
容居가 대답하기를 “容居(저)는 듣자하니, 임금을 섬기되 감히 그 임금을 잊지 아니하며, 또한 감히 그 선조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적에 우리 선대 임금 駒王이 서쪽으로 토벌나갈실 적에 黃河를 건너가서 이 王이라고 칭하는 말을 사용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셨습니다. 容居는 노둔한 사람이므로 감히 그 조상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容居가 또 대답하여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감히 그 임금을 잊을 수 없나니, 내가 명령받듦이 이와 같은데 지금 능히 거행하지를 못하면 이는 우리 임금을 잊어버리는 것이니, 사람의 자손이 되어서 마땅히 선대의 교훈을 지켜야 된다. 때문에 또한 감히 우리 선조를 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容居는 아마도 徐나라의 公族인 성싶다. 또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先君 駒王이 黃河를 건너가 서쪽으로 토벌하실 적에 한 곳에서도 이 왕이라고 칭하는 말을 사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그 강토가 광대하여 오랫동안 이미 王者의 禮를 행하였던 것을 말한 것이요, 또 스스로는 말하기를 내가 기만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는 노둔한 사람이니 이 때문에 감히 우리 선조를 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邾나라 사람이 그 말을 믿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徐나라의 君臣들의 참람된 것을 드러냈고, 또 邾나라 有司가 능히 끝내 당시의 참람됨을 바로잡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子思之母死於衛커늘 赴於子思한대 子思哭於廟하더시니 門人이 至曰庶氏之母死커늘 何爲哭於孔氏之廟乎잇가 子思曰吾過矣며 吾過矣라하시고 遂哭於他室하시다
子思의 어머니가 衛나라에서 돌아가자, 子思에게 訃告가 오니 子思께서 사당에서 哭을 하셨는데 門人이 와서 말씀드리기를 “庶氏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孔氏의 사당에서 哭을 하십니까?” 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잘못했으며, 내가 잘못했다.” 하시고 마침내 다른 방에서 哭을 하시었다.
伯魚가 돌아갔을 적에 그 아내가 衛나라의 庶氏에게로 시집을 갔으니, 改嫁한 어머니는 종묘·사당과 族屬이 단절되기 때문에 그 사당에서 哭할 수가 없는 것이다.
天子崩커시든 三日에 祝先服하고 五日에 官長服하고 七日에 國中男女服하고 三月에 天下服하나니라
天子가 崩御하시면은 3日만에 祝이 먼저 喪杖 막대기를 짚고, 5日만에 장관들이 喪杖 막대기를 짚고, 7日만에 수도 서울안의 男女들이 齊衰服을 입고, 3個月만에 天下 諸侯들의 大夫가 繐衰服을 입는다.
䟽에 말하기를 祝은 大祝과 商祝이다. 服은 喪杖 막대기를 짚는 것이다. 이는 喪服의 禮數이기 때문에 喪杖 막대기를 부르기를 服이라고 한다. 祝이 飯含과 歛을 도와서 먼저 병이 나기 때문에 먼저 喪杖 막대기를 짚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太子도 또한 3日만에 喪杖 막대기를 짚는 것이고, 官長은 大夫와 士인데 병이 祝의 뒤에 있기 때문에 5日만에 喪杖을 짚는다. 수도 서울안의 男女들은 京畿 안의 백성 및 庶人으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을 이르니, 齊衰服을 입고서 벗는다. 꼭 일주일을 기다리는 것은 天子는 일주일만에 빈소를 차리니, 빈소를 차린 뒤에 嗣王이 服을 입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도 成服을 할 수 있다. 석달만에 天下 諸侯의 大夫들이 服을 입는다는 것은 諸侯의 大夫를 이른 것이니, 왕을 위해서 繐衰服을 입고서 이미 葬事를 지내고 벗으나니 가까운데에 있는 사람은 또한 석달을 기다리지 않지마는 지금은 먼데있는 사람을 의거해서 말했을 뿐이다. 무슨 까닭으로 그 혹은 喪杖을 짚고 혹은 衰服을 입는 줄을 아는가? 「喪大記」 및 「喪服四制」를 살펴봄에 그리그리 말하였다. 그러나 四制에 이르기를 일주일만에 士에게 喪杖을 준다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5일만에 士가 喪杖을 짚는다고 이른 것에 대해서는 崔氏가 말하기를 여기는 조정의 士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고, 「四制」에는 邑宰의 士를 말한 것이다고도 했다.
虞人이 致百祀之木可以爲棺槨者斬之호대 不至者를 廢其祀하며 刎其人하나니라
虞人이 모든 神社의 나무로써 가히 써 內棺과 外槨을 만들만 한 것을 보내려고(바치려고) 그것을 베되 재목이 오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는 그 神社를 폐지하며 그 虞人을 목베어 죽인다.
虞人은 山林과 川澤을 관장하는 벼슬아치이다. 天子의 內棺은 네 겹으로써 外槨이 두루 감싸는데 또 어찌 많은 재목으로 만들겠는가? 畿內의 수많은 고을의 神社가 그 나무가 가히 쓸 만 한 것을 모두 베어가지고 보내는 것이 아니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京畿 안의 아름다운 재목이 진실로 乏絶되지 아니할 터인데, 어찌 유독 神社에서만 그것을 벨 것인가? 그 神社를 폐지하고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또한 무슨 법이 그리도 峻嚴한가? 그것을 禮制가 이와 같으니 그 말을 상세히 모르겠다. 一說에는 이르기를 반드시 虞人에게 명령해서 나무를 보내도록하여 명령을 準用하지 아니한 사람이라야만이 나라에서 일정한 형벌이 있는데, 虞人이 한 사람이 아닌데 반드시 다 그들에게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도 한다.
齊大饑커늘 黔敖爲食於路하야 以待餓者而食之하더니 有餓者蒙袂輯屨하야 貿貿然來어늘 黔敖左奉食하고 右執飮曰嗟라 來食하라하니 揚其目而視之曰予唯不食嗟來之食이라 以至於斯也호라하야늘 從而謝焉호대 終不食而死하니라 曾子聞之曰微與인저 其嗟也엔 可去어니와 其謝也엔 可食이니라하시니라
齊나라가 크게 흉년이 들자, 黔敖가 길가에서 밥을 지어(음식을 만들어가지고) 써 굶주린 사람을 기다려가지고 그들에게 먹이더니, 어느 굶주린 사람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신을 신고서 맥없이(힘없이) 걸어오자, 黔敖가 왼손으론 밥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마실 것을 들고서 말하기를 “아이고! 와서 먹어라.” 라고 하니, 그 사람이 눈을 치켜올려 그 黔敖를 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직 아이고, 와서 먹어라하는 것을 먹지 아니하였기에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자, 黔敖가 나아가 사과하였으되 그가 마침내 먹지 않고 죽어버렸다. 曾子께서 그 사실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하찮은 일이구나!(아무것도 아니다.) 그 아이고할 적에는 가히 떠나갈 수 있거니와 그 사과할 적에는 가히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蒙袂는 소매로써 얼굴을 가린 것이다. 輯屨(신을 벗어듦은) 그 발을 벗는 것이니, 피곤하여 걸음걸이가 절뚝거림을 말한 것이다. 貿貿는 머리를 떨구고 기운을 잃은 모양이다. 嗟來食(아이고! 와서 먹어라고 한 것)은 탄식하고 가엾게 여기면서 하여금 와서 먹도록 한 것이다. 從은 나아감이다. 微與는 작은 일과 지엽적인 절차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말하자면은 아이고 오라고 한 말이 비록 불경스럽지마는 그러나 또한 큰 잘못이 아니다. 때문에 그 아이고 하였을 적에는 비록 가히 떠나갈 수 있으나 사과하였을 적에는 가히 먹을 수 있는 것이다.
邾婁定公之時에 有弑其父者어늘 有司以告한대 公이 瞿然失席曰是寡人之罪也로다 曰寡人은 嘗學斷斯獄矣로니 臣弑君이어든 凡在官者殺無赦하며 子弑父어든 凡在宮者殺無赦니라 殺其人하며 壞其室하며 洿其宮而豬焉이니 蓋君踰月而后擧爵이니라
邾婁나라 定公 시대에 그 아버지를 시해한 사람이 있었는데, 有司(刑獄 官吏)가 그 사실로써 보고하니 定公이 깜짝 놀라 자리를 잃고서(坐不安席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寡人의 잘못이다.” 말하기를 “寡人이 일찍이 이런 獄事를 처단(판결)하는 것을 배웠는데,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면은 무릇 관직에 있는 사람은 그를 죽여서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며,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면은 무릇 집에 있는 사람은 그를 죽여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을 죽이며 그 집을 파괴해버리며 그 집터를 웅덩이로 만들어 물을 채우나니 대개 임금은 한달을 넘긴 뒤에야 술잔을 드는 것이다.”
瞿然은 놀라 괴이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벼슬에 있는 사람은 여러 신하들이고, 집안에 있는 사람은 집사람들이다. 天下의 惡이 이보다도 더 큰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써 그를 죽일 수 있어 그를 용서해 주는 이치가 없는데 오직 아버지가 이런 죄가 있다면은 자식이 가히 그 아버지를 토벌할 수 없는 것이다. 임금이 술잔을 들지 않는 것은 人倫의 대변고가 또한 교화가 밝지 못한 所致인 까닭으로 상심하고 슬퍼하여 스스로 貶下한 것이다. ○䟽에 말하기를 豬는 이 물이 모여드는 이름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註䟽本에 子弑父凡在宮者殺無赦로 쓰여 있으니 옳음이 된다.
晉獻文子成室이어늘 晉大夫發焉하더니 張老曰美哉라 輪焉이여 美哉라 奐焉이여 歌於斯하며 哭於斯하며 聚國族於斯로다 文子曰武也得歌於斯하며 哭於斯하며 聚國族於斯하면 是全要領하야 以從先大夫於九京也라하고 北面再拜稽首한대 君子謂之善頌善禱라하니라
晉나라의 獻文子가 집을 낙성하자, 晉나라 大夫들이 禮를 갖추어 축하를 하더니, 張老가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웅장함이여! 아름답구나. 찬란함이여! 여기에서 제사지내면서 노래부르며 여기에서 居喪하면서 哭하며 여기에서 國賓과 宗族들을 모아 연회하겠도다.” 文子가 말하기를 “武(내)가 여기에서 노래부를 수가 있으며 여기에서 哭할 수가 있으며 여기에서 國賓과 宗族들을 모을 수 있다면은 이는 허리와 목(생명)을 보전하여 써 先大夫들을 九京으로 따라갈 것이다.” 하고, 북쪽으로 향하여 再拜하고서 머리를 조아리니, 君子가 말하기를 頌祝도 잘하고 祈禱도 잘하였다고 했다.
晉獻은 舊說에 이르기를 晉나라 임금이 드리는 것이니, 축하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신하에게 줌이 있을 적에 어찌 드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의심컨대 獻文 두 글자는 모두 趙武의 諡號인데, 貞惠文子와 같은 따위이다. 여러 大夫들이 禮를 갖추어 가서 축하할 적에 기록한 사람이 張老의 말을 인하여 기록하였다. 輪은 웅장함이니, 높고 큰 것이요, 奐은 찬란함이니, 많은 것이다. 歌는 제사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哭은 喪事에 哭하며 우는 것이다. 聚國族은 연회에 國賓을 모으고 宗族을 회합하는 것이다. 頌이라는 것은 그 일을 아름답게 여기면서 그 福을 축원하는 것이요, 禱라는 것은 기도하여 재앙을 모면하는 것이다. 張老의 말은 頌을 잘하였고, 武子의 대답한 바는 기도를 잘하였다. ○鄭氏가 말하기를 晉나라 卿大夫의 묘지가 九原에 있었다. ○䟽에 말하기를 領은 목이니, 옛적에 죄가 무거우면은 허리를 베었고 죄가 가벼우면은 머리를 베었다. 先大夫는 文子의 父祖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여기에서 노래부름은 제사에 노래부르고 풍악을 울림을 이른 것이니, 大夫는 제사에 풍악이 없는 것인데, 춘추시대에는 아마도 그것이 있었나 보다.
仲尼之畜狗死커늘 使子貢埋之曰吾는 聞之也호니 敝帷不棄는 爲埋馬也오 敝蓋不棄는 爲埋狗也라호라 丘也는 貧하야 無蓋호니 於其封也에 亦予之席하야 毋使其首陷焉이라하시다
仲尼께서 기르던 개가 죽자, 子貢으로 하여금 그 개를 묻어주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듣자하니, 해진(낡은) 휘장을 버리지 않는 것은 말을 묻기 위해서이고, 낡은 수레의 日傘을 버리지 않는 것은 개를 묻어주기 위해서이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지금 가난해서 수레의 낡은 日傘이 없으니 그 개를 묻어줄 적에 또한 돗자리로 싸주어서 그 개머리로 하여금 흙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어라.” 라고 하시었다.
개나 말이 모두 사람에게 봉사함이 있기 때문에 특히 은혜를 보여준 것이다.
路馬死커든 埋之以帷하나니라
임금의 타는 말이 죽으면은 그 말을 휘장으로써 묻어준다.
임금의 타던 말이 죽으면은 특별히 새 휘장으로 그 말을 묻고 그 낡은 휘장을 사용하지 않음을 이른다. ○方氏가 말하기를 魯나라 昭公의 타던 말이 해자에 빠져서 죽자 새 휘장으로 그 말을 싸서 묻었다.
季孫之母死커늘 哀公이 吊焉하더시니 曾子與子貢吊焉이어늘 閽人이 爲君在弗內也한대 曾子與子貢으로 入於其廏而脩容焉하야 子貢先入이어늘 閽人曰鄕者已告矣라하고 曾子後入이어시늘 閽人이 辟之하다
季孫의 어머니가 죽자, 哀公이 조문 가셨는데 曾子께서 子貢과 더불어 조문을 가자, 문지기가 임금이 계시는 까닭으로(계신다고 해서) 들여 보내주지 아니하니, 曾子께서 子貢과 더불어 그 마굿간으로 들어가서 용모를 修飾하고서 子貢이 먼저 들어가자, 문지기가 말하기를 “아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曾子께서 뒤따라 들어가시니, 문지기가 그를 避諱하였다.
아까 이미 말했다는 것은 앞서 이미 주인에게 말함을 말한 것이다.
涉內霤한대 卿大夫皆辟位하며 公降一等而揖之하니 君子言之曰盡飾之道는 斯其行者遠矣라하니라
문간채 처마 밑을 통과하니 卿大夫들은 모두 자리를 피해주며, 哀公은 한 계단을 내려와서 그들에게 揖을 하니, 君子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용모 수식을 극진히 하는 도리는 이에 그 감동시키는 것이 크다.”고 하였다.
內霤는 문간채의 뒤 처마이다. 行者遠은 감동이 크다고 말한 것과 같다. ○劉氏가 말하기를 이 章은 가히 의심스럽다. 두 분이 卿 어머니의 喪事에 조문갔을 적에 반드시 스스로 禮를 다하여 써 그 문에 나아가야지 마땅히 문지기의 거절을 기다린 뒤에 용모를 수식하여 꾸밈을 극진히 하지 않아야 되고, 또 이미 가가지고 문지기가 거절하면은 혹 마땅히 문지기에게 재청해야 될 것이고, 만약에 끝끝내 통과할 수가 없을진댄 물러감이 옳은데 어찌 威儀로써 송구스럽게 그를 감동시켜서 들어가기를 구할 것이 있겠는가? 그 들어갔을 적에 임금과 卿大夫들이 그를 존경한 것은 平日에 그가 어짊을 알았기 때문에서이고, 평소에 서로 모르다가 비로소 그 容飾의 아름다움을 보고서야 공경을 가한 것이 아닌데, 君子가 이에 말하기를 꾸밈을 다하는 도리는 이에 그 감동시킨 것이 크다고 하였으니, 이 두 사람의 德行이 충분히 써 감동시킴이 크지 못하고 오직 하찮은 외모 수식이 이에 족히 써 감동시킴이 컸단 말이냐?
陽門之介夫死커늘 司城子罕이 入而哭之哀한대 晉人之覘宋者反報於晉侯曰陽門之介夫死커늘 而子罕이 哭之哀한대 而民說하니 殆不可伐也로소이다
陽門의 갑옷입은 수비병이 죽자, 司城子罕이 들어가서 哭을 슬프게 하니 晉나라 사람으로서 宋나라를 정탐하는 사람이 되돌아가서 晉侯에게 보고하기를 “陽門의 갑옷입은 수비병이 죽자 子罕이 哭을 슬피하자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으니 아마도 가히 정벌할 수 없을 성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陽門은 宋나라의 수도 성문 이름이다. 介夫는 甲士로서 성문을 지켜 호위하는 사람이다. 宋나라의 武公은 諱가 司空이다. 그 관직 이름을 고쳐가지고 司城이라고 하였다. 子罕은 樂喜인데, 戴公의 후손이다. 覘은 엿보는 것이다.
孔子聞之曰善哉라 覘國乎여 詩云凡民有喪에 扶服救之라하니 雖微晉而已나 天下其孰能當之리오
孔子께서 그 사실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잘하였도다. 적국을 정탐함이여. 󰡔詩經󰡕에 이르기를 ‘무릇 백성들이 喪事가 있음에 손발로 기어가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하였는데, 비록 晉나라가 정벌하는 우환이 없겠으나, 天下에 그 누가 능히 그 宋나라를 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었다.
孔子께서 그를 좋게 여기신 것은 그가 다스리는 체통을 알았기 때문에서이다. 詩는 邶風 谷風의 篇이다. 扶服은 힘을 쏟는 뜻이다. 微는 없음이다. 孔子께서 󰡔詩經󰡕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기를 宋나라가 비록 子罕이 人心을 얻은 까닭으로 가히 晉나라의 걱정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천하가 또한 누가 능히 그 宋나라를 당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으니, 人心이 족히 믿을 만 함을 대단히 극도로 말한 것이다. 一說에는 微는 미약함이니, 비록 다만 晉나라의 강성함을 미약하게 만들어 하여금 감히 정벌을 못하도록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뜻을 미루어 나간다면은 백성들이 이미 기쁘게 복종하여 반드시 능히 그 윗사람을 친근히 하고 그 어른을 위해서 죽어 온 천하가 능히 그 당해낼 수 없다고 하는데, 前說이 옳다.
魯莊公之喪에 旣葬하고 而絰不入庫門하며 士大夫旣卒哭하고 麻不入하니라
魯나라 莊公의 喪事에 이미 葬事지내고 葛絰로 庫門에 들어오지 아니하였으며, 士·大夫들은 이미 卒哭을 지내고 麻絰로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莊公이 子般에게 시해당하여 慶父가 난을 일으키니 閔公이 이 때에 나이 8歲였다. 絰은 葛絰이다. 諸侯는 爵弁에 葛絰을 끼고서 葬事를 지내는데, 葬事가 끝나자 閔公이 바로 喪服을 庫門 밖에서 벗어버리고 吉服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葛絰로 庫門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士大夫는 그대로 麻絰을 끼고 바로 卒哭을 기다리고서 이에 麻絰로 庫門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대체 閔公이 이미 吉服을 입고 虞祭와 卒哭의 제사에 참여하지 아니한 까닭에 群臣들이 卒哭에 이르러서 喪服을 벗어버렸으니, 禍亂이 위협하고 협박하여 禮가 때문에 폐지된 바를 기록하였다.
孔子之故人曰原壤이니 其母死커늘 夫子助之沐槨한대 原壤이 登木曰久矣라 予之不託於音也여하고 歌曰貍首之斑然이로소니 執女手之卷然이로다하야늘 夫子爲弗聞也者而過之한대 從者曰子未可以已乎잇가 夫子曰丘聞之호니 親者엔 毋失其爲親也하며 故者엔 毋失其爲故也라호라
孔子님의 친구가 말하자면은 原壤인데, 그 어머니가 죽자 孔子님께서 그를 도와 外槨을 손질하였는데, 原壤이 그 外槨 木材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오래되었구나. 내가 흥을 노래에 기탁하지 못하였다.” 하고, 노래부르기를 “너구리 머리처럼 아롱다롱하니, 여인의 손을 잡은 것처럼 매끄럽도다.” 하자, 孔子님께서는 못들은 것처럼 하시고서 그 곳을 지나가니 수행한 사람들이(제자들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가히 써 그와 絶交할 만하지 않습니까?” 孔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듣자하니, 친척에게는 그 친척되는 情分을 잃지 말아야 하며, 친구에게는 그 친구되는 交分을 잃지 말아야 된다고 하더라.”
어떤 사람이 朱子에게 질문하되 原壤이 外槨 나무에 올라가서 노래부를 적에는 孔子께서 못들은 척 하시고서 그 곳을 지나가셨으니 그를 대우함이 스스로 좋았거니와, 그가 쭈그리고 앉아서 孔子를 기다림에 이르러서는 지팡이로써 정강이를 두들기셨으니 너무나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말이 문득 틀렸다. 예컨대 原壤이 노래부름과 같은 것은 바로 이 큰 잘못이니 만약에 요컨대 이해하려고 하면은 가히 다만 절교할 뿐만이 아니고 다만 우선 그만두었을 뿐이고, 그가 걸터앉아서 기다릴 때에 이르러서는 가히 가르쳐주지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그를 나무라시고 다시 그 정강이를 지팡이로 두들기셨으니 스스로 마땅히 이와같이 하신 것이다. 만약 지금 말과 같다면은 이는 요컨대 그를 간섭하지 않는 것이니 도리어 붕우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胡氏가 말하기를 그 어머니가 죽었을 적에 노래부른 것을 죄를 센다면은 原壤을 마땅히 절교해야 되고, 그 쭈그리고 앉아 기다린 정강이를 두들겼을진댄 原壤이 그래도 친구일 뿐이다. 훌륭한 德이 禮에 맞음이 周旋에서 나타난 것을 여기에서 또한 가히 볼 수 있다. ○馮氏가 말하기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적에 노래를 불렀으니 악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절교해야 되는데 절교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평생의 옛 친구로써 사건이 一時에 뜻밖에서 나온 것이 이와 같으니, 좋도다. 朱子의 말씀에 이르기를 만약에 그 일을 요컨대 이해하려고 할진댄 가히 다만 절교할 뿐만이 아니라 다만 우선 그만두었을 뿐이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이 써 聖人의 그 난처한 바를 처리함을 깊게 터득하였다. ○생략
趙文子與叔譽觀乎九原하더니 文子曰死者如可作也인대 吾誰與歸오
趙文子가 叔譽와 더불어 九原을 순시하게 되었는데, 文子가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만약 가히 일어날(부활할) 수가 있다면은 내가 누구와 더불어 從遊해야 되겠오?”
文子는 晉나라 大夫인데, 이름은 武이다. 叔譽는 叔向이다. 말하자면 卿大夫가 죽어서 여기에 葬事지낸 사람이 많은데, 가령 가히 써 다시 살아나 일어날 수 있다면은 내가 여러 大夫들 중에서 누구와 從遊해야 되겠느냐? 文子가 대개 이 말을 가설하여 叔向과 더불어 前人의 어진지의 여부를 함께 논하고자 한 것이다.
叔譽曰其陽處父乎인저 文子曰行幷植於晉國하야 不沒其身하니 其知不足稱也니라
叔譽이 말하기를 “그 陽處父인가 봅니다.” 文子가 말하기를 “권력을 독점하고 剛强하여 고집세움을 晉나라에 행하여 그 몸이 좋게 죽지 못하였으니, 그 지혜를 족히 일컬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處父는 晉나라 襄公의 사부이다. 幷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일을 자기에게 兼職한 것이니, 이는 권력을 독점한 것이다. 植라는 것은 剛强하여 스스로 서는 뜻이다. 행한 바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狐射姑에게 죽임을 당하여 그 몸을 잘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其舅犯乎인저 文子曰見利하고 不顧其君하니 其仁不足稱也니라
叔譽가 말하기를 “그 舅犯인가 봅니다.” 文子가 말하기를 “이익을 보고 그 임금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仁을 족히 칭찬할 것이 없느니라.
叔譽가 또 子犯이 가히 歸依할 만하다고 일컫자, 文子가 말하기를 子犯이 文公을 외국에서 19年 동안 따라다니다가 귀국하면서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마땅히 그를 보좌해서 입국해 가지고 써 그 일을 안정시켰어야 되는데, 이에 黃河에 이르러서 璧玉을 주면서 사양하였으니 이는 대개 뒷날 높은 官爵과 厚한 俸祿의 계책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로써 임금을 협박하여 이익을 구하였다고 말하니 어찌 그 임금의 安危를 돌아보았겠는가? 이는 仁하지 않다.
我則隨武子乎인저 利其君호대 不忘其身하며 謀其身호대 不遺其友라한대 晉人이 謂文子知人이라하니라
나는 武子를 따를까 보다. 그는 그 임금을 이롭게 하되 그 몸을 잊지 아니하였으며, 그 몸을 도모하되 그 벗을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晉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文子는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文子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歸依(從遊)를 원하는 바는 오직 武子를 따르는 것 뿐이오. 武子는 士會인데, 隨 땅에서 食邑하였다. 󰡔左傳󰡕에 말하기를 夫子의 집안 일이 다스려졌으며, 晉나라에 말함에 있어서 情을 숨김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 몸을 잊지 않고서 도모함은 지혜로움이요, 그 임금을 이롭게 하고 그 벗을 버리지 아니함은 모두 仁이다.
文子는 其中退然如不勝衣하며 其言吶吶然如不出諸其口언마는
文子는 그 신체가 간들간들 옷을 이기지 못한 듯 하였으며, 그 말이 어눌어눌 그 입에서 나오지 못한 듯 하였지마는
中은 몸인데, 󰡔儀禮󰡕 「鄕射記」에 나타나 있다. 退然은 겸손하고 낮추며 겁먹고 약한 모양이다. 吶吶은 음성이 낮고 말이 느린 것이다. 如不出諸其口는 능히 말하지 못함과 같음이다.
所擧於晉國에 管庫之士七十有餘家로대 生不交利하며 死不屬其子焉하니라
晉나라에 등용한 바에 있어서 창고에 자물쇠를 관장한 자가 70餘家나 되었으되, 살아서는 財利로 사귀지 아니하였으며 죽어서도 그 아들을 그들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管은 鍵이다. 바로 오늘날의 자물쇠이니, 창고의 물건 간직함을 자물쇠로써 열고 닫는 한계를 삼는다.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은 賤職이다. 그가 어진 줄을 알고서 그들을 천거하였으니 바로 벗을 잊어버리지 않는 실지이고, 비록 등용하는 은혜가 그들에게 있었지마는 살아서는 그들과 더불어 이익으로 사귀지 아니하였고, 장차 죽을 적에도 또한 그 자식을 그들에게 부탁하지 않았으니 청렴하고 깨끗함의 지극함이다.
叔仲皮學子柳하더니 叔仲皮死커늘 其妻는 魯人也로대 衣衰而繆絰이러니 叔仲衍이 以告하야 請繐衰而環絰曰昔者에 吾喪姑姉妹에 亦如斯호대 末吾禁也러라하야늘 退使其妻繐衰而環絰하니라
叔仲皮가 그 아들 子柳를 가르쳤는데 叔仲皮가 죽자, 그 子柳의 아내는 노둔한 사람이었으되 齊衰服을 입고서 繆絰을 끼었는데, 叔仲衍이 그 일로써 말하여 繐衰服을 입고 環絰을 띠도록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옛적에 내가 고모와 누나와 누이를 여위었을 적에 또한 이와같이 하였으되 나는 금지한 사람이 없었다.” 하니, 子柳가 물러가서 그 아내로 하여금 繐衰服을 입고 環絰을 띠도록 하였다.
繆는 꼼이니, 두 가닥을 서로 꼼을 이른 것이니, 五服의 絰은 모두 그렇게 하되 오직 吊服의 環絰은 한 가닥으로 만든다. ○생략
成人이 有其兄死호대 而不爲衰者러니 聞子皐將爲成宰하고 遂爲衰한대 成人曰蠶則績이어늘 而蟹有匡하며 范則冠이어늘 而蟬有緌하며 兄則死어늘 而子皐爲之衰라하니라
成邑 사람이 그 兄이 죽었는데도 衰服을 입지 아니한 자가 있었는데, 子皐가 장차 成邑의 邑宰가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衰服을 입으니, 成邑 사람이 말하기를 “누에는 고치실을 토하는데 게는 광주리가 있으며, 벌은 冠이 있는데 매미는 갓끈이 있으며, 兄이 죽었는데 子皐를 위하여 衰服을 입었다.”고 하였다.
成은 魯나라 邑 이름이다. 匡은 등 껍질이 광주리와 같은 것이다. 范은 벌이다. ○생략
樂正子春之母死커늘 五日而不食曰吾悔之하노라 自吾母而不得吾情이면 吾惡乎用其情이리오
樂正子春의 어머니가 돌아가자, 5日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서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후회하노라. 내 어머니로부터 내 眞情을 얻지 못한다면은 내가 어디에 그 眞情을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子春은 曾子의 弟子이다. 거짓으로 제도에 지나친 禮를 행하여 그 진실한 情을 어머니에게 쓰지 않는다면은 다른 데에 그 實情을 쓸데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뉘우친 것이다.
歲旱커늘 穆公이 召縣子而問然曰天久不雨할새 吾欲暴尫하노니 而奚若고
해가 가물자, 魯나라 穆公이 縣子를 불러서 下問하기를 “하늘이 오래도록 비를 내리지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천상바라기 病者를 햇볕에 드러내놓고 싶은데 어떻겠오?”
󰡔左傳󰡕 註에 이르기를 尫이라는 것은 수척하여 병이 든 사람으로 그 얼굴이 위로 향하고 있는데 그를 햇볕에 드러내놓으려 한 것은 하느님이 그를 불상히 여기어 비를 내려주기를 바란 것이다.
曰天則不雨어늘 而暴人之疾子虐이 毋乃不可與잇가
縣子가 말하기를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자 사람의 병든 자식을 햇볕에 드러내놓고서 학대하는 것이 아니 불가하지 않습니까?”
이는 가혹하게 학대하는 일이 써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바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然則吾欲暴巫하노니 而奚若고
“그렇다면은 내가 무당을 햇볕에 드러내놓고 싶은데 어떻겠오?”
무당은 능히 신과 접할 수가 있으니 신이 그를 가엾게 여기어 비를 내려주기를 바랜 것이다.
曰天則不雨어늘 而望之愚婦人하야 於以求之가 毋乃已䟽乎잇가
縣子가 말하기를 “하느님이 비를 내리지 않자 어리석은 婦人에게 바래어 이에 써 그 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 너무나도 迂闊하지 않습니까?”
於以求之는 이에 그걸 구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已䟽는 대단히 迂闊함을 말한 것이다.
徙市則奚若고 曰天子崩커시든 巷市七日하고 諸侯薨커시든 巷市三日하나니 爲之徙市가 不亦可乎아
“시장을 옮기면 어떻겠오?” 縣子가 말하기를 “天子가 崩御하면은 마을에서 시장열기를 7日동안 하고, 諸侯가 逝去하면은 마을에서 시장열기를 3日동안 하나니, 그 비를 위해서 시장을 옮기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徙는 옮김이다. 시장 옮김을 말하고 또 마을에 시장 엶을 말한 것은 교역하는 물건을 마을로 옮김을 이른다. 이는 庶人이 나라의 大喪(國喪) 때문에 근심한 나머지 시장을 파했으되 날로 사용하는 것에 필요한 것을 또 가히 결핍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장을 마을로 옮긴 것인데, 지금 가묾에 있어서 시장을 옮기려하는 것은 임금을 여윈 禮를 행하면서 自責한 것이다. 縣子가 그가 자기에게서 구하고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한 까닭 때문에 그 말을 괜찮게 여겼으나 그러나 어찌 僖公이 큰 가뭄 때문에 무당과 천상바라기를 불태워 죽이려다가 藏文仲의 말을 듣고 중지하였던 것을 듣지 못하였단 말인가? 縣子가 능히 그 말을 거론하여 穆公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시장을 옮기는 것을 일러 좋다고 하였으니 또한 이미 소홀하였도다.
孔子曰衛人之祔也는 離之러니 魯人之祔也는 合之하니 善夫인저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衛나라 사람들의 合葬禮는 그 棺들을 격리시켰는데, 魯나라 사람들이 合葬하면은 그 棺을 합하였으니 좋도다.(잘하였도다.)”
살아서 이미 방을 함께 사용하였으니 죽어서도 마땅히 壙中을 함께 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魯나라 것을 좋게 여기셨다. ○생략

禮運 第九

이 「禮運」篇은 帝王·禮樂의 因革(改革)과 陰陽·造化가 유통하는 이치를 기록하였는데, 의심컨대 子游의 門人들의 기록한 바에서 나온 성싶다. 간간히 格言이 있지마는 「禮運」篇 첫머리에 大同·小康의 말은 孔子님의 말이 아니다.
昔者에 仲尼與於蜡(乍)賓이러시니 事畢에 出遊於觀之上하사 喟然而嘆하시니 仲尼之嘆은 蓋嘆魯也러시다 言偃이 在側曰君子何嘆이시니잇고 孔子曰大道之行也와 與三代之英을 丘未之逮也나 而有志焉호라
옛적에 仲尼께서 蜡 祭事의 손님으로 참여하셨었는데, 제사 일이 끝나자 나와서 대문의 樓觀 위에서 노시면서 아아하고 탄식하셨으니(한숨을 쉬셨으니), 仲尼의 탄식하심은 아마도 魯나라에 대하여 탄식하신 것인 성싶다. 言偃이 그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君子(선생님)께서는 어찌 탄식하십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道가 시행되는 것과 3代(夏·殷·周)의 英傑(英賢한 인물)들을 내가 그것을 미처 보지는 못하였지마는 뜻은 있노라.
蜡禮는 상세한 것이 「郊特牲」篇에 나타나 있다. 孔子께서 魯나라에 계시면서 魯나라의 蜡 祭事에 손님으로 참여함이 되시고 그 일이 끝나자 樓關 위에서 놀면서 쉬셨으니, 樓關은 대궐문 집이다. 두 樓關이 대궐문 양쪽에 있는데, 국가의 典章(法典)의 말을 그 위에 걸어놓아 써 인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喟然은 탄식하는 소리인데, 써 魯나라에 대하여 탄식하신 것은 혹은 祭事 일이 失禮를 하였거나 혹은 옛 典章을 봄으로 인하여 古代를 생각하신 것일 것이다. 言偃은 孔子의 弟子 子游이다. 그 탄식한 까닭을 질문하니, 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고대의 큰 道가 천하에 행해졌던 것과 3代의 英賢스러운 신하들이 써 때를 얻어가지고 道를 행하였던 융성한 말을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비록 이러한 세상의 융성함을 미처 보지는 못하였지마는 3代의 英賢한 분들이 하였던 바에는 뜻이 있다고 하셨으니, 이도 또한 꿈에 周公을 뵈인 뜻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五帝의 세상으로써 大同(대 평화 시대)을 삼고, 禹임금·湯임금·文王·武王·成王·周公으로써 小康의 시대를 삼은 것은 老氏의 뜻이 있는데, 鄭玄의 註에 또 그걸 인용하여 그걸 실증하였고, 또 禮를 일러 忠信이 衰薄해진 것이라고 한 것은 모두 儒者의 말이 아니다. 이른바 孔子曰이라는 것은 기록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大道之行也엔 天下爲公하야 選賢與能하며 講信脩睦하더니 故人不獨親其親하며 不獨子其子하야 使老有所終하며 壯有所用하며 幼有所長하며 矜寡孤獨廢疾者皆有所養하며 男有分이오 女有歸하며 貨惡其棄於地也언정 不必藏於己하며 力惡其不出於身也언정 不必爲己니 是故謀閉而不興하며 盜竊亂賊而不作이라 故外戶而不閉니 是謂大同이니라
큰 道가 시행되었을 적에는 天下를 공공의 것으로 삼아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물려주며 誠信을 講習하고 화목을 수행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독 그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섬기지 아니하며, 유독 그 자기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사랑하지 아니하여 늙은이로 하여금 여생을 편히 마치는 바가 있도록 하며, 장성한 사람으로 하여금 힘쓰는 바가 있도록 하며, 어린이로 하여금 자라나는 바가 있도록 하며,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와 독신과 廢疾에 걸린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부양하는 바가 있도록 하였으며, 남자로 하여금 직분이 있도록 하였고 여자로 하여금 시집감이 있도록 하였으며, 재화가 그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할지언정 꼭 자기에게만 간직하지 아니하였으며, 노력은 그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싫어할지언정 꼭 자기만을 위하지 아니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간사한 음모가 닫혀서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며, 竊盜와 亂賊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때문에 바깥 문을 닫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을 大同(대 평화)이라고 이른다.
천하를 공공한 것으로 삼음은 말하자면은 천하의 큰 것으로써 그 자손에게 사사로이 물려주지 않고, 천하의 賢聖과 더불어 그 천하를 공정하게 공유한 것이 예컨대 堯임금께서 舜임금에게 물려주시며 舜임금께서는 禹임금에게 물려주시어 다만 어질고 능력이 있어서 가히 선발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은 곧바로 그에게 넘겨준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강습하였던 것은 誠信(성실)이고 수행하였던 것은 화목이었다. 이 때문에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겨(親愛하여) 써 남의 어버이에게까지 미쳐가고 그 자식을 자식으로 사랑하여 써 남의 자식에게까지 미쳐가 늙은이·장성한 이·어린이들로 하여금 각각 그 제자리를 얻도록 하고, 곤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써 부양됨이 있지 않음이 없도록하여 남자는 각각 士農工商의 직분이 있도록 하고, 여자는 참으로 훌륭한 집안으로 시집가도록 하였으며, 재화는 백성들이 의뢰하여서 사용하는 것이니 만약에 땅에 버리고서 제때로써 거두어 저축해 두지 않는다면은 폐기되고 무너져버려 쓸모가 없게 되리니, 때문에 그 땅에 버려지는 것을 증오한 것이다. 지금 다만 능히 거두어 저축하여 써 세상의 사용에 도움된 것이 있다면은 족하지 꼭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 자기에게만 사사로이 감추려고 해서는 않된다. 世間의 일이 노력을 아니하고서 능히 성공한 사람이 있지 않다. 그렇지마는 인정이 거짓이 많아가지고 일을 함께하게 되면 자기는 편안히 하고 남을 노고시키고자 하여 즐거이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그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증오한 것이다. 지금 다만 각각 그 힘을 다해서 써 천하의 일을 함께 이루어내면 족하지 꼭 그 힘을 써가지고 유독 자기 일만을 경영하지 않는다. 풍속이 이와 같았다. 이 때문에 간사한 꾀가 닫혀져 가지고 일어나지 아니하고, 竊盜와 亂賊의 일이 끊어지고 사라져 일어나지 않아 저문 밤에 걱정이 없어 바깥 문을 가히 써 닫지 않을 수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公道로 大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一說에는 外戶라는 것은 문을 바같에 설치하고 닫는 것은 안으로 향한다고도 한다.
今大道旣隱하야 天下爲家하야 各親其親하며 各子其子하며 貨力爲己하며 大人世及以爲禮하며 城郭溝池以爲固하며 禮義以爲紀하야 以正君臣하며 以篤父子하며 以睦兄弟하며 以和夫婦하며 以設制度하며 以立田里하며 以賢勇知하며 以功爲己니 故謀用是作하야 而兵由此起하나니라 禹湯文武成王周公은 由此其選也시니 此六君子者未有不謹於禮者也니라 以著其義하며 以考其信하며 著有過하며 刑仁하며 講讓하야 示民有常하시니 如有不由此者면 在埶者去하야 衆以爲殃하나니 是謂小康이니라
지금은 大道가 이미 은미하여 天下를 사사로운 가정으로 삼아 각각 그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섬기며 각각 그 자식만을 자식으로 사랑하며 재화와 노력은 자기의 것으로만 삼으며, 大人(天子와 諸侯)은 부자간에 세습하고 형제간에 미쳐가 그로써 禮를 삼으며, 內城·外郭과 垓字로써 견고함을 삼으며, 禮義로써 기강을 삼아 그 禮義로써 君臣을 바르게 하며, 禮義로써 부자간을 돈독히 하며, 禮義로써 형제간을 화목하게 하며, 禮義로써 부부간을 조화롭게 하며, 禮義로써 制度를 설정하며, 禮義로써 田土와 마을을 설립하며, 禮義로써 용기있고 지혜있는 사람을 어질게 여기며, 功積으로써 자기의 것을 삼으니 때문에 음모가 이로써 일어나 전쟁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禹임금·湯임금·文王·武王·成王·周公은 이 禮義로 말미암아 그 높이 뛰어나신 것이니, 이 여섯 君子분이 禮에 삼가하지 아니한 분이 없으셨다. 禮로써 그 의리를 나타내며, 禮로써 그 信實함을 이루어내며, 과오있는 사람을 드러내며, 仁을 행하는 사람을 본받으며, 겸양을 강구하여 백성들에게 떳떳한 법이 있음을 보여주시니 만약에 이를 따르지 아니한 사람이 있다면은 권세에 있는 사람을 제거하여 민중들이 재앙으로 여기나니, 이것을 小康이라고 이른다.”
天下로 사사로운 가정을 삼음은 천하로써 사사로운 가정의 물건으로 간주하여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大人은 天子와 諸侯이다. 부자간에 서로 물려준 것이 世가 되고, 형제간이 서로 물려주는 것이 及이 된다. 紀는 기강이다. 용기있는 사람과 지혜있는 사람을 어질게 여김은 용기있고 지혜있는 사람으로써 어진 사람을 삼은 것이다. 𣵠鹿의 전쟁과 苗族을 정벌하였던 것이 전쟁이 後王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남을 말한 것이니, 湯임금·武王의 일을 들어서 말했을 뿐이다. 著는 밝음이요, 考는 이룸이다. 刑仁은 사랑하는 도리를 본받음을 이른 것이요, 講讓은 겸양하는 도리를 강설함이다. 백성들에게 떳떳함이 있음을 보여줌은 말하자면 6君子가 禮를 삼가하여 의리를 나타낸다는 이하의 다섯가지 일을 실행하여 백성들에게 떳떳한 법이 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在埶는 君主者의 勢位(권력과 지위)에 있는 것이 말하자면 천하의 임금이 되어가지고서 禮로써 이 다섯가지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은 천하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재앙을 끼치는 君主로 여기어 함께 그를 폐위·축출시키는 것이다. 이는 小小하게 편안한 세상이 大道로 大同한 세상만 같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陳氏가 말하기를 禮家가 이르기를 太上의 세상에는 도덕을 귀중하게 여기었고, 그 다음 세상에서는 베풀고 보답함이 가고 옮을 힘썼다. 때문에 말하기를 大道로 공공을 삼은 세상에는 禮에 얽매이지 않으나니, 禮는 바로 도덕이 쇠퇴하고 忠信이 衰薄해 진 것이다고 하였으니, 대략 老子와 莊子의 견해에서 나온 것이요, 先聖의 격언은 아니다.
言偃이 復問曰如此乎禮之急也잇가 孔子曰夫禮는 先王이 以承天之道하시며 以治人之情이니라 故失之者死하고 得之者生하나니 詩曰相鼠有體어늘 人而無禮아 人而無禮는 胡不遄死오하니 是故夫禮는 必本於天하며 殽(效)於地하며 列於鬼神하며 達於喪祭射御冠昏朝聘이라 故聖人이 以禮示之하시니 故天下國家를 可得而正也니라
言偃이 다시 질문하기를 “이처럼 禮가 긴급한 것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체 禮는 先王께서 그로써 하늘의 道를 받들셨으며, 그로써 사람의 情을 다스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禮를 상실한 사람은 죽게되고 그 禮를 얻은 사람은 살게 되나니, 󰡔詩經󰡕에서 말하기를 ‘쥐를 보아도 몸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禮가 없을 수 있는가? 사람으로서 禮가 없는 이는 어찌 일찍 죽지 아니하리오?’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대체 禮는 반드시 하늘에 근본하며 땅을 본받으며 귀신에 나열되었으며, 喪禮·祭禮·射禮·御禮·冠禮·昏禮·朝禮·聘禮에 까지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聖人이 禮로써 그 天理의 節文과 人事의 儀則을 보여주셨으니, 때문에 天下 國家를 가히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禮가 하늘에서 근본함은 天理의 節次와 文飾이다. 殽는 본받음이니, 땅을 본받음은 山澤의 높낮이의 형세를 본받아가지고 상하의 등급을 만든 것이다. 뒷 章의 殽以降命 이하에서 이에 그걸 상세히 말하였다. 귀신에 나열됨은 禮가 五經이 있는데, 제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喪祭 이하의 여덟가지 일은 人事의 儀禮와 規則이다.
言偃이 復問曰夫子之極言禮也를 可得而聞歟잇가 孔子曰我欲觀夏道라 是故之杞나 而不足徵也오 吾得夏時焉하며 我欲觀殷道라 是故之宋이나 而不足徵也오 吾得坤乾焉호니 坤乾之義와 夏時之等을 吾以是觀之하노라
言偃이 다시 질문하기를 “선생님께서 禮에 대하여 지극히(극도로) 말씀하시는 것을 가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夏나라의 道를 관찰하고 싶었다. 이 때문에 杞나라로 갔지마는 충분히 증거할 수가 없고 내가 夏나라의 曆書만을 얻었으며, 내가 殷나라의 道를 관찰하고 싶었다. 이 때문에 宋나라로 갔었지마는 충분히 증거할 수 없고 내가 坤乾의 易書만을 얻었으니, 坤乾의 易에 대한 뜻과 夏나라 曆書의 等列을 내가 이것으로써 그 夏나라와 殷나라의 禮를 관찰하였노라.
杞는 夏나라의 후예이고, 宋은 殷나라의 후예이다. 徵은 증거함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夏나라와 殷나라의 道를 관찰하여 상고해 보고 싶었다. 때문에 두 나라로 가서 그것을 구하였으니, 그 先代의 옛 典籍과 故家의 남은 풍속이 그런대로 보존된 것이 있을 줄로 생각하였는데 이에 모두 가히 징험할 만한 것이 없고, 겨우 杞나라에서는 夏나라의 曆書만을 얻었고 宋나라에서는 坤乾의 易書만을 얻었을 뿐이다. 夏時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바로 지금 夏小正이고, 坤乾은 歸藏이라는 商나라의 易에 첫머리에 坤이 있고 다음에 乾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坤乾의 의리와 夏時의 等列은 내가 다만 이 두가지 책으로써 그걸 관찰했을 뿐이니, 두 시대에서 천하를 다스렸다는 道를 어찌 가히 다 들을 수 있겠는가? 󰡔論語󰡕에서 말하기를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坤乾으로써 󰡔周禮󰡕의 歸藏에 합한 것은 또 󰡔魯論󰡕에 언급하지 아니한 것이 있는데, 아마도 漢儒들이 모방하여 그것을 만든 것인 성싶다. 참으로 그 말대로라면 夏小正의 책과 坤乾이 어떻게 충분히 써 禮를 증거할 수가 있겠는가? 註에 徵字의 뜻풀이를 成이라고 하였으니, 더욱 잘못이다. 近儒들이 도리어 이걸 인용해서 󰡔魯論󰡕을 해석한 사람이 있는데 잘못된 것이 심한 것이요, 󰡔中庸󰡕에도 역시 이런 말이 없으니, 대개 이 대목은 魯論을 모방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夫禮之初는 始諸飮食하니 其燔黍捭(百)豚하며 汙尊而抔(掊)飮하며 蕢桴(浮)而土鼓猶若可以致其敬於鬼神이니라
대체 禮의 시초는 飮食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기장을 익히고 돼지고기를 찢어서 익히며, 웅덩이를 파서 동이처럼 만들어 손으로 움켜 마시며, 흙덩이로 북채를 만들고 흙 북을 만든 것이 그런대로 가히 써 그 공경을 鬼神에게 극진히 할 수 있는 것 같다.
燔黍는 기장쌀을 달군 돌 위에 얹어서 올려놓아 그것을 구워서 하여금 익도록 한 것이고, 捭豚은 돼지고기를 찢어서 달군 돌 위에 얹어서 그걸 익힌 것이다. 汙尊은 땅을 파서 웅덩이의 구덩이를 만들어서 물을 담아둔 것이다. 抔飮은 손으로써 움켜서 그 물을 마시는 것이다. 蕢桴는 흙덩이를 뭉쳐서 북을 치는 채를 만드는 것이다. 土鼓는 흙을 쌓아서 북을 만든 것이다. 上古 시대에는 人心이 거짓이 없어서 비록 간소하고 비루함이 이와 같았지마는 또한 스스로 가히 써 귀신에게 공경을 극진히 할 수가 있었다.
及其死也하얀 升屋而號하야 告曰皐某復하고 然後飯腥而苴孰하나니 故天望而地藏也니 體魄則降하고 知氣在上일새니라 故死者北首하고 生者南鄕하나니 皆從其初니라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지붕에 올라가서 큰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아아! 아무개는 돌아오시오.”라고 하고, 그런 뒤에 날쌀(생쌀)로 飯含을 하고 익힌 고기를 싸서 遣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면서 혼을 부르고 땅에 體魄을 묻으나니, 體魄은 땅으로 내려가고 知氣(혼)는 하늘 위에 있기 때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머리가 북쪽을 향하고 산 사람은 남쪽을 향하게 되나니, 모두 그 上古의 시초를 따른 것이다.
써 지붕으로 올라간 것은 혼의 기운이 하늘 위에 있기 때문에서이다. 皐라는 것은 소리를 길게 빼는 말이다. 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인데, 이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서 하여금 그 다시 體魄에 합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니, 이와 같이 했는데도 살아나지 않는다면 이에 죽은 일을 거행하는 것이다. 날쌀로 飯含하는 것은 上古 時代에 아직 불로 변화시키는(요리하는) 있지 않음을 이용하여 생쌀로써 飯含한 것이요, 익힌 고기를 싸서 遣奠하는 것은 中古 時代에 불로 요리한 이로움을 이용을 해서 익힌 고기를 싸서 보내드리는 奠을 삼은 것이다. 天望地藏은 맨처음 사망하였을 적에 하늘을 바라보면서 혼을 부르고 體魄은 땅에 葬事지내 묻음을 이른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體魄은 내려서 밑으로 가고 知氣(혼)은 올라서 위로 가기 때문에서이다. 죽은 사람의 머리는 북쪽으로 향하고 산 사람의 거처는 남쪽을 향함과 이상의 죽은 사람을 보내드리는 여러 일들은 후세에서 비로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두 이 上古 時代에 초기부터 있었던 禮를 따른 것이다.
昔者先王이 未有宮室이라 冬則居營窟하시고 夏則居橧(曾)巢하시며 未有火化라 食草木之實과 鳥獸之肉하며 飮其血하고 茹(如)其毛하며 未有麻絲라 衣其羽皮하더니
옛적에 先王이 아직 집이 있지 않았으므로 겨울철에는 토굴에서 살으시고 여름철에는 층층으로 된 둥지에서 살으셨으며, 불로 변화시키는(요리하는) 것이 없어서 풀과 나무의 열매와 새와 짐승의 날고기를 먹었으며 그 피를 마시고 그 털까지도 먹었으며, 삼과 명주실이 없었으므로 그 새 깃털과 짐승 가죽을 입었다.
營窟이라는 것은 그 흙을 쌓아서 써 굴을 만든 것이다. 지대가 높으면은 땅 속에 굴을 파고, 땅이 낮으면 땅위에서 흙을 쌓아 올려가지고 굴을 만든다. 橧巢라는 것은 땔나무를 층으로 모아서 써 둥지의 거처를 만든 것이다. 그 털까지도 먹게 된 것은 아직 불로 요리하는 것이 있지 않았으므로 털을 제거함이 능히 다하지 못하여 그 털까지 아울러 먹은 것이다.
後聖이 有作하사 然後脩火之利하야 范金合土하야 以爲臺榭宮室牖戶하며 以炮(庖)以燔하며 以亨(烹)以炙(隻)하며 以爲醴酪(洛)하며 治其麻絲하야 以爲布帛하야 以養生送死하며 以事鬼神上帝하니 皆從其朔이니라
後代의 聖人이 일어남(탄생함)이 있으시어 그런 뒤에야 불의 이로움을 이용하여 금속을 거푸집에 넣어 기구를 만들고 흙을 혼합하여 기와와 벽돌들을 만들어서 그것으로써 臺와 정자와 집과 방과 들창과 외짝문을 만들었으며, 불로써 싸서 굽기도 하고 불로써 불위에서 구우기도 하며, 불로써 솥에서 삶기도 하고 불로써 꼬챙이에 꿰서 구우기도 하며, 불로써 단술과 타락을 만들며, 그 삼과 명주실을 다루어 써 그것으로써 베와 비단을 짜 그 물건으로써 생존한 이를 봉양하고 사망한 이를 보내드리며, 그 물건들로써 귀신과 上帝를 섬겼으니, 모두 그 시초(上古 時代)를 따른 것이다.
范字는 마땅히 竹을 따라야 된다. 韻註에 이르기를 흙을 이용하는 것을 型이라고 이르고, 금속을 이용하는 것을 鎔이라고 이르고, 나무를 이용하는 것을 模라고 이르고, 대나무를 이용하는 것을 笵이라고 이르나니, 모두 기구를 주조하는 틀이다. 笵金은 모양 거푸집을 만들어서 금속 기구를 주조하는 것이고, 合土는 진흙을 혼합하여 질그릇을 만든 것이다. 싸서 굽는 것을 炮라고 하고, 불위에 얹져서 굽는 것을 燔이라고 하고, 솥에서 삶는 것을 亨이라고 하고, 꼬챙이에 꿰어서 불위에 놓아두는 것을 炙이라고 한다. 酪은 醋이다. 治는 마전하고 물들인 따위이다. 이 이상의 여러 일은 모두 불의 이로움이니, 지금 세상에서 계승·이용하여 그 물건들을 만든 것이 모두 이 지나간 성인에게서 법을 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그 시초를 따랐다고 하였으니, 朔은 시초이다.
故玄酒在室하고 醴醆在戶하며 粢醍(體)在堂하며 澄酒在下하며 陳其犧牲하며 備其鼎俎하며 列其琴瑟管磬鍾鼓하며 脩其祝嘏하야 以降上神과 與其先祖하야 以正君臣하며 以篤父子하며 以睦兄弟하며 以齊上下하며 夫婦有所니 是謂承天之祜니라
그렇기 때문에 祭事에 玄酒는 방안에 진설되어 있고, 단술과 막걸리는 문옆에 진설되어 있으며, 붉은 빛을 띤 술은 마루 위에 진설되어 있으며, 찌꺼기가 침전된 술은 마루 밑에 진설되어 있으며, 그 犧牲을 진설하며, 그 솥과 도마를 구비하며, 그 거문고와 비파와 피리와 경쇠와 종과 북을 진열하며, 그 祝辭와 嘏辭를 다듬어서 써 하늘 위에 계시는 神과 그 先祖를 내려오게하여 그 禮로써 君臣을 바르게 하며, 그 禮로써 父子를 돈독히 하며, 그 禮로써 兄弟를 화목하게 하며, 그 禮로써 上下를 정제하며, 夫婦가 제자리가 있게 되니, 이것을 하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이른다.
太古 時代에 술이 없어서 물을 이용해서 祭禮를 지냈는데, 後王이 上古 時代 것을 소중하게 여긴 까닭에 그걸 높여서 이름하여 玄酒라고 하였으니, 제사지낼 적에는 방 안에 진설하여 북쪽에 가깝게 둔다. 醴는 體와 같다. 술이 하루 저녁 잔 것을 󰡔周禮󰡕에 그것을 醴齊라고 말하였다. 醆은 바로 󰡔周禮󰡕의 盎齊인데, 盎은 뜻이 翁과 같으니, 술이 완성됨에 새하얗게 파 밑동처럼 하얀 색깔이다. 이 두가지 것은 後世에서 만든 것으로써 그것을 賤視하여 진열함이 비록 방안에 있지마는 조금 남쪽에 있어 문에 가깝기 때문에 醴醆은 문에 진설되어 있다고 하였다. 粢醍는 바로 󰡔周禮󰡕의 醍齊인데, 술이 완성됨에 紅赤色을 띠니 또 그것을 낮게 여기어 마루 위에 진설되어 있다고 하였다. 澄酒는 바로 󰡔周禮󰡕의 沈齊인데, 완성됨에 찌꺼기가 침전되어 또 마루 밑에 있었다. 이 다섯가지는 각각 등급으로써 강등하여 그걸 진설하였다. 祝은 주인이 신에게 아뢰는 말이 되고, 嘏는 시동이가 주인에게 복을 내려주는 말이 되니, 설명이 「曾子」篇에 나타나 있다. 上神은 하늘에 계신 신이다. 「祭統」에 이르기를 임금은 희생은 맞이하고 시동은 맞이하지 않음은 혐의를 구별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君臣의 의리를 바르게 한 것이고, 아버지가 북쪽을 향하고서 그 아들 항렬인 시동이를 섬기는 것은 써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는 도리를 밝힌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父子를 돈독히 한 것이고, 형제간에 화목하는 것은 주인이 長兄弟 및 여러 형제들에게 술잔을 드리는 것이고, 上下를 가지런히 정제하는 것은 술잔을 드리는 것과 데궁을 먹는 것이 각각 次序가 있어서 빠뜨림이 없는 것이고, 夫婦가 제자리가 있는 것은 임금이 동쪽 섬돌에 계시면은 부인은 방에 있거나 술잔을 바치는 따위이다. 禮를 행함을 이와 같이 하면은 신이 이르고 귀신이 흠향하게 되리니 어찌 上天의 복을 받지 않겠는가?
作其祝號하야 玄酒以祭할새 薦其血毛하며 腥其俎하며 孰其殽하며 與其越(活)席하며 䟽布以冪하며 衣其澣帛하며 醴醆以獻하며 薦其燔炙호대 君與夫人이 交獻하야 以嘉魂魄이니 是謂合莫이니라 然後退而合亨(烹)하야 體其犬豕牛羊하며 實其簠簋籩豆鉶(刑)羹하야 祝以孝告하며 嘏以慈告하나니 是謂大祥이니 此禮之大成也니라
그 祝辭의 칭호를 지어(만들어서) 玄酒로써 제사지낼 적에 그 희생의 피와 털을 바치며, 그 도마로 날고기를 올리며, 그 뼈있는 體位를 데치며, 그 부들자리를 펴며, 거친 베로써 술동이를 덮으며, 그 삶아서 염색한 비단 祭服을 입으며, 단술과 막걸리로써 올리며, 그 구운고기와 간적을 올리되 임금과 夫人이 교대로 술잔을 올리어 써 魂魄을 좋게 해(즐겁게) 드리나니, 이것을 어두운 중에 합한 것이라고 이른다. 그런 뒤에 물러나와 데친 고기를 합해서 삶아 그 개·돼지·소·양고기를 體位別로 나누며, 그 簠와 簋와 籩과 豆와 鉶羹을 채워서 祝史는 孝로써 告하며, 嘏史는 慈로써 告하나니, 이것이 큰 吉祥이라고 이르나니, 이는 禮가 크게 이루어진 것이다.
󰡔周禮󰡕에 祝號가 여섯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신에 대한 호칭이고, 둘째는 鬼에 대한 호칭이고, 셋째는 땅귀신에 대한 호칭이고, 넷째는 희생에 대한 호칭이고, 다섯째는 기장에 대한 호칭이고, 여섯째는 폐백에 대한 호칭이다. 그 祝號를 만드는 것은 귀신 및 희생과 패옥에 대한 아름다운 칭호의 말을 만든 것이다. 神號는 昊天上帝와 같은 것이고, 鬼號는 皇祖伯某와 같은 것이고, 祗號는 后土地祗와 같은 것이고, 牲號는 一元大武와 같은 것이고, 齍號는 稷을 明粢라고 이른 같은 것이고, 幣號는 폐백을 量幣라고 이른 것과 같으니, 祝史가 그것들을 일컬어 귀신에게 아뢴다. 언제나 제사를 지낼 적에 반드시 玄酒를 진설해 놓지마는 그 실지는 그것을 사용하여 잔에 따르지 아니하고, 그 피와 털을 올림은 희생을 잡을 때에 피와 털을 가지고서 들어가서 방안에서 신에게 아룀을 이른다. 그 도마로 날고기를 올림은 희생을 이미 잡았을 적에 도마로 고기를 담아가지고 시동이 앞에 갖다 드림을 이른다. 玄酒로 제사지내는 것과 피와 털을 올리는 것과 도마로 날고기를 올리는 것 이 세가지 것은 이 上古 時代의 禮를 본받은 것이고, 그 뼈있는 體位를 데친 이하는 이 中古의 禮이다. <이하 생략>
孔子曰嗚呼哀哉라 我觀周道호니 幽厲傷之하니 吾舍魯何適矣리오마는 魯之郊禘非禮也니 周公其衰矣온여 杞之郊也는 禹也오 宋之郊也는 契也일새니 是天子之事守也라 故天子는 祭天地하고 諸侯는 祭社稷이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아! 슬프도다. 내가 周나라의 道를 관찰해 보니, 幽王과 厲王이 그것을 손상시켜 버렸으니 내가 魯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마는 魯나라의 郊祭와 禘祭가 禮가 아니니, 周公의 道가 그 쇠미하여졌구려! 杞나라가 郊祭를 지내는 것은 禹임금의 후예이기 때문에서이고, 宋나라가 郊祭를 지내는 것은 契의 후예이기 때문에서이니 이는 天子의 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天子는 天地에 제사를 지내고 諸侯는 社稷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幽王·厲王 이전에 周나라 道가 이미 쇠미해졌지마는 그 크게 무너진 것은 幽王·厲王 시대에 있었다. 魯나라는 周公의 나라이다. 孔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그 魯나라는 가히 한 번만 변혁하면 道에 이른다고 하셨으니, 魯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는가? 그러나 魯나라의 郊祭와 禘祭가 禮가 아니었다. 禹임금은 三代의 훌륭한 임금이 되시기 때문에 杞나라가 써 郊祭를 지낼 수가 있고, 契은 殷나라의 始祖가 되기 때문에 宋나라가 써 郊祭를 지낼 수가 있다. 오직 이 두나라만이 가히 대대로 天子의 일을 지켜서 그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가 있는 것이고, 周公은 비록 聖人이지마는 신하였다. 成王이 下賜해 준 것이 진실로 잘못되었거니와 伯禽이 그걸 받아들인 것도 더욱 잘못이다. 周公께서 禮를 제정하고 음악을 만들어 萬世토록 변혁할 수 없는 법전이 되었는데, 자손들이 이와 같으니 이는 周公의 가르침이 자손들의 禮를 참람되게 함으로 인해서 쇠퇴해져 버린 것이다. 天地와 社稷에 대한 제사는 늠름하게 가히 넘을 수가 없는 것인데, 일찍이 사람의 신하로서 가히 天子의 禮를 참람되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이 一章은 참으로 孔子님의 말씀인데, 註에서 능히 그 뜻을 밝히지 못하였다. 天子는 天地에 제사를 지내고, 諸侯는 다만 가히 社稷에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것이다. 杞나라와 宋나라의 郊祭는 이 王者의 후예이므로 天子의 일을 지키는 것이니, 禮에서 허락한 바가 되거니와 魯나라로서 郊祭를 두었던 것은 이 周公이 제작하였던 禮를 배반한 것이니, 杞나라와 宋나라하고 같지 않다.
祝嘏를 莫敢易其常古하면 是謂大假니라
祝辭와 嘏辭를 감히 그 일정한 옛 법을 고치지 아니하면, 이는 큰 복이라고 이른다.
祭禮에 시초에 祝辭를 읽고 종말에 嘏辭를 읽는데, 禮가 완성되는 것이다. 常古는 떳떳한 일로 옛 법이다. 감히 변혁하지 않음은 貴賤이 禮를 행할 적에 한결같이 古制를 따름을 이른다. 假는 또한 마땅히 嘏로 써져야 되는데, 윗 章의 大祥의 뜻과 같다. 말하자면 당연한 禮를 실행하면은 자연의 복이 있게 되리니 그 복이 크다.
祝嘏辭說을 藏於宗祝巫史가 非禮也니 是謂幽國이니라
祝辭와 嘏辭의 말을 宗人과 祝官과 무당과 史氏에게서 소장하는 것이 禮가 아니니, 이는 어두운 나라라고 이른다.
祝辭와 嘏辭의 말은 禮의 文字인데, 글이 없으면은 禮를 행할 수가 없다. 󰡔周禮󰡕에 大宗伯이 여섯가지 칭호를 아뢰는 일을 관장하고 있는데, 그 일을 중시한 것이다. 그런데 衰世에 君臣들을 禮를 소홀히하여 오직 宗人과 祝官과 무당과 史氏들이 익혀서 그것을 기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두운 나라라고 이른 것이다. 그 禮에 어두워서 써 정치를 밝힐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醆斝를 及尸君이 非禮也니 是謂僭君이니라
醆과 斝를 諸侯 임금의 尸童이에게 미쳐 사용하는 것이 禮가 아니니, 이는 참람된 임금이라고 이른다.
醆은 夏나라의 술잔이고, 斝는 殷나라의 술잔이다. 尸君은 임금의 시동이이다. 杞나라와 宋나라는 두 왕의 후예이니 사용하여 시동이에게 술을 드릴 수 있거니와 그 나머지 列國들은 오직 時王의 그릇을 써야 하는데 지금 나라 임금들이 모두 醆·斝를 사용하여 尸君에게 미쳤으니, 禮가 아니다. 이는 위 것을 僭用한 임금일 뿐이다.
冕弁兵革을 藏於私家非禮也니 是謂脅君이니라
冕旒冠과 皮弁과 무기와 갑옷을 개인 집에 간직하는 것이 禮가 아니니, 이는 협박당한 임금이라고 이른다.
冕은 祭服의 冠이고, 弁은 皮弁이다. 大夫는 家라고 칭하나니, 大夫가 조정의 높은 官服과 국가의 호위하는 무기로서 사사로운 집에다가 간직한다면은 가히 그가 强盛하여 멋대로함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이 나라 임금이 바로 强盛한 신하에게 협박당한 임금이다.
大夫具官하며 祭器不假하며 聲樂皆具가 非禮也니 是謂亂國이니라
大夫가 家臣의 官員을 구비하며, 祭器를 빌리지 아니하며, 聲樂을 모두 구비하는 것이 禮가 아니니, 이는 紊亂한 나라라고 이른다.
家臣은 능히 官員을 구비할 수가 없어서 한 사람이 항상 여러 가지 일을 겸하는데, 具官은 이 참람되게 비견한 것이다. 祭器는 오직 三公과 三孤의 이상이라야만이 전부를 구비할 수가 있고, 大夫로서 田祿이 없는 사람은 祭器를 설치하지 아니하나니 그 가히 빌려 쓸 수 있기 때문이고, 田祿이 있는 사람도 祭器를 또한 완전히 구비할 수가 없어 모름지기 빌려주는 바가 있다. 빌리지 않는 것은 또한 참람되게 비견한 것이다. 󰡔周禮󰡕에 大夫는 判縣(양쪽에 종과 경쇠를 달아놓는) 음악이 있고, 「少牢饋食」 禮에 음악을 연주하는 글이 없으니, 이는 大夫가 제사지낼 적에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혹간 임금이 下賜해 주어야만이 이에 그 음악을 소유할 수 있나니, 聲樂이 모두 구비된 것이 또한 참람되게 비견한 것이다. 尊卑가 등급이 없는 것이 亂國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故仕於公曰臣이오 仕於家曰僕이니 三年之喪과 與新有昏者를 期(基)不使하나니 以衰(催)裳入朝하며 與家僕雜居齊齒가 非禮也니 是謂君與臣同國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임금에게서 벼슬하는 것을 臣이라고 이르고, 大夫 집에서 벼슬하는 것을 僕이라고 이르나니, 三年의 喪服 입은 사람과 새로 혼인함이 있는 사람을 一年동안 부리지 아니하나니, 衰服 의상으로써 조정에 들어가며, 家僕과 더불어 동등한 반열에 뒤섞여 있는 것이 禮가 아니니, 이는 임금과 신하가 국가를 함께함이라고 이른다.
臣이라는 것은 임금에 대한 칭호이고, 僕이라는 것은 服役하는 명칭이다. 大夫에게서 벼슬하는 사람이 自稱 僕이라고 하면은 더욱 賤한 것이다. 사람의 신하가 三年의 喪服이 있거나 혹 신혼을 하였다면은 一年동안 임금이 그를 부리지 아니하나니 써 人情을 體察한 것이다. 두가지 것에 나아가서 논한다면은 喪禮가 더욱 昏禮보다 소중한데, 지금 이에 집에서 居喪하지 않고 衰服 의상으로써 조정에 들어간다면은 이는 임금 朝廷 보기를 자기의 집처럼 생각한 것이니, 이는 임금이 그 신하와 더불어 이 나라를 함께한 것이다. 卿大夫에게 나아가서 말한다면은 僕은 또 그 신하인데, 지금 卿大夫가 이에 그 집의 僕과 더불어 동등한 반열에 뒤섞여 있으면서 貴賤의 구분이 없다면은 또한 이 임금과 신하가 이 나라를 함께 공유한 것이다.
故天子有田하사 以處其子孫하시며 諸侯有國하사 以處其子孫하시며 大夫有采하야 以處其子孫하니 是謂制度니라
그렇기 때문에 天子는 田地를 두어 써 그 子孫들을 처우하시며, 諸侯는 나라를 두어 써 그 子孫들을 처우하시며, 大夫는 采地을 두어 써 그 子孫들을 처우하니, 이는 制度라고 이른다.
王의 子弟가 功德이 있는 사람은 封하여 諸侯를 삼고, 그 나머지들은 畿內의 田地를 분배해 주고, 諸侯의 자손은 임명하여 卿大夫로 삼고, 그 功德이 있는 사람에게는 역시 采地를 하사해 주고, 이른바 官員이 대대로 功이 있으면은 官族이 있고, 邑도 또한 그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大夫는 지위가 낮으니 마땅히 采地를 분할해서 자손에게 주어서는 아니되고, 다만 그들을 采地의 祿으로써 부양할 뿐이니, 이것은 先王의 제도이다.
故天子適諸侯하사 必舍其祖廟하시나니 而不以禮籍入하면 是謂天子壞(怪)法亂紀니라
그렇기 때문에 天子가 諸侯에게 가서 반드시 그 諸侯 先祖의 사당에서 머무르시나니 만약 禮籍(禮書)을 가지고 들어가지 아니하면, 이는 天子가 법을 무너뜨리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이른다.
종묘가 조정보다 높기 때문에 天子가 거기에서 머무른다. 그러나 반드시 太史가 簡記를 가지고 그 악을 받들어 隱諱하는 것은 감히 天子의 높음으로써 남의 종묘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니하면 이는 법도를 무너뜨리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諸侯非問疾吊喪이어늘 而入諸臣之家하면 是謂君臣爲謔이니라
諸侯가 問病하고 弔喪하는 것이 아닌데, 여러 신하들의 집에 들어간다면은 이는 임금과 신하가 희롱(장난)하는 것이라고 이른다.
諸侯가 그 신하에 대하여 問病하고 弔喪하는 禮가 있는데, 이런 일이 아니고서 간다면은 이는 장난한 것이다. 禮를 무너뜨리는 재앙이 항상 반드시 여기에서 緣由한다.
是故禮者는 君之大柄也니 所以別嫌明微하며 儐(賓)鬼神하며 考制度하며 別仁義니 所以治政安君也니라
이렇기 때문에 禮라는 것은 임금의 큰 자루(權威)이니, 써 혐의를 구별하고 은미한 것을 밝히며, 귀신을 대접하며, 제도를 考定하며(상고해서 정하며), 仁義를 분별하는 것이니, 때문에 政事를 다스리고 임금을 편안히 하는 것이다.
국가에 禮가 있는 것이 그릇에 자루있는 것과 같으니, 능히 이 자루를 잡는다면은 국가를 가히 다스릴 수 있다. 손님을 대접하되 禮로써 하는 것을 儐이라고 하나니, 鬼神을 접함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儐이라고 말하였다. 制度는 禮樂과 衣服과 度量과 權衡과 같은 따위이니, 상고하여 그걸 바로잡아서 하여금 다름이 있지 않도록 해야 된다. 仁은 사랑을 위주로 하고, 義는 裁斷을 위주로 하니, 구별하여 그럴 써가지고 반드시 그 適宜함에 합당하도록 해야 한다.
故政不正하면 則君位危하고 君位危하면 則大臣倍하고 小臣竊하며 刑肅而俗敝하면 則法無常하고 法無常하면 而禮無列하나니 禮無列하면 則士不事也오 刑肅而俗敝하면 則民弗歸也니 是謂疵(慈)國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政事가 바르지 아니하면 임금 자리가 위태롭게 되고, 임금 자리가 위태롭게 되면은 大臣이 배반하고 小臣은 도적질하며(횡령을 하며), 형벌이 준엄하고 풍속이 퇴폐하면은 법이 떳떳함이 없게 되고, 法이 떳떳함이 없게 되면은 禮가 질서가 없게 되나니, 禮가 질서가 없으면은 士가 일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형벌이 준엄하고 풍속이 퇴폐하면은 백성들이 歸依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병든 나라라고 이른다.
倍는 윗사람을 위반하고서 사사로움을 행한 것이니, 혹은 또 배반하고서 그 사람에게서 떠나감을 이르기도 한다. 小臣竊은 이른바 도적질하는 신하이다. 肅은 준엄하고 급박함이다. 俗敝는 사람들이 염치가 없어서 풍속이 퇴폐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림에 禮가 없기 때문에 형벌이 준엄하고 풍속이 퇴폐함에 이르나니, 임금된 사람이 다만 자기를 방자하게 하고 형벌을 사용하여 마침내 떳떳한 법을 폐기해 버린다면은 법이 폐기되어 가지고 禮가 상하의 질서가 없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士는 직책을 수행하지 아니하며 民心은 離叛하게 되리니 어찌 병든 나라가 아니겠는가?
故政者는 君之所以藏身也니 是故夫政은 必本於天하야 殽(效)以降命하나니 命降于社之謂殽地오 降于祖廟之謂仁義오 降於山川之謂興作이오 降於五祀之謂制度니 此聖人所以藏身之固也니라
때문에 政事라는 것은 임금이 써 몸을 편안히 하는 바이니, 이렇기 때문에 대체 政事는 반드시 天理에 근본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써 명령을 내려야 되나니, 社의 제사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殽地(땅을 본받음)의 政事라고 이르고, 先祖의 종묘 제사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仁義의 政事라고 이르고, 山川의 제사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興作(공사를 일으키는)의 政事라고 이르고, 명령을 五祀의 제사에서 내리는 것을 制度의 政事라고 이르나니, 이는 聖人이 써 몸을 편안히 함을 견고히 하는 것이다.
藏은 편안함과 같다. 임금이라는 것은 政治가 부터 나오는 바이기 때문에 政事가 바르지 아니하면은 임금의 자리가 위태롭게 되나니, 󰡔書經󰡕에서 말하기를 하늘의 일을 사람이 그 대신한다고 하였다. 法典을 天叙라고 이르고, 禮를 天秩이라고 이르나니, 이는 임금의 政事가 반드시 天理에 근본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아래 백성들에게 명령을 반포한 것이다. 社는 后土에 제사지내는 것이다. 社에 제사지냄으로 인하여 명령을 냄은 이는 땅을 본받는 政事이고, 조상의 종묘에 일이 있으면서 명령을 냄은 이 仁義의 政事이고, 山川에 일이 있으면서 명령을 냄은 이 興作(공사를 일으키는)하는 政事이고, 五祀에 일이 있으면서 명령을 냄은 이 제도의 政事이니, 땅을 본받는 것은 그 땅의 높낮이의 형세를 본받아가지고 尊卑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오, 仁義라는 것은 仁은 사모함으로써 말한 것이요, 義는 親䟽로써 말한 것이니, 사모하는 마음이 한이 없고 親䟽의 減殺(등급)이 일정함이 있으며, 또 어버이를 친애함은 仁이고, 높은 이를 존경함은 義인데, 仁으로부터 어버이를 따라 등급매겨서 올라가서 선조에 까지 이르러 높은 이를 높이는 의리가 높고, 義로 부터서 선조를 따라가지고 순응해서 내려가 아버지에게 까지 이르러 친한 이를 친히하는 仁이 돈독해 진다. 공사를 일으키는 일은 資材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산천에서 하고, 제도가 일어남은 궁실에서 시작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五祀에서 근본한다. 대체 윗사람을 편안히 하고 백성을 다스림이 禮보다도 더 좋은 것이 없다. 聖人의 떳떳한 禮의 政事가 이와 같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고 나라를 가히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故聖人이 參於天地하시며 並於鬼神하사 以治政也니 處其所存은 禮之序也오 玩其所樂(洛)은 民之治也라 故天生時而地生財하며 人其父生而師敎之하나니 四者를 君以正用之니라 故君者는 立於無過之地也니라
그렇기 때문에 聖人은 天地에 참여하시며, 鬼神과 나란히 하시어 써 政事를 다스리나니, 그 天地·鬼神의 존재하는 바에 처하는 것은 禮가 次序 매겨지는 것이고, 그 天地·鬼神의 즐거워하는 바를 玩賞하는 것은 백성들이 다스려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사계절을 낳고 땅은 재화를 생산해 내며, 사람은 그 아버지가 낳고 스승이 그를 가르치나니, 네가지 것을 임금이 바른 것으로써 운용해야 된다. 때문에 임금이라는 것은 과오가 없는 지경에 서야 될 것이다.
이는 윗 章을 이어서 정치의 일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聖人의 써 天地의 道를 參贊하는 것과 鬼神과 나란히 하는 일이 무릇 써 政事를 다스리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天地와 鬼神의 존재한 바에 처한다면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萬物이 흩어져 각기 다름을 聖人이 본받으시니 이것이 禮가 차례매겨지는 것이고, 天地와 鬼神이 즐거워하는 바를 玩賞한다면은 유행하여 멈추지 아니하며 합동해서 변화하는 것을 聖人이 본받으시나니 이는 백성들이 써 다스려지는 것이다. 四時가 하늘에 근본을 하고 온갖 재화가 땅에서 생산되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나 덕은 스승에게서 이루어지나니, 이 네가지 것을 임금이 바른 정도로써 그걸 사용해야 되나니, 임금이 몸을 닦고 덕을 닦아서 하늘의 때를 順應하고 땅의 이로움을 인해서 그 道를 財成해 주고 그 適宜함을 輔相해서 써 백성들을 도와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이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初喪치루어 드림에 유감이 없도록 해야 만이 그런 뒤에 庠과 序와 학교의 가르침을 설치하여 거기에서 효도와 공손함으로써 거듭 강조한다면은 써 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그들을 교육시킴이 있어서 다스리는 방도가 얻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요체는 임금이 스스로 그 몸을 바르게 하여 과오가 없는 처지에 선 뒤에야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니, 능히 그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면은 남을 바르게하는 데에 있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
故君者는 所明(讀爲則)也오 非明(則)人者也며 君者는 所養也오 非養人者也며 君者는 所事也오 非事人者也니 故君明(則)人則有過하고 養人則不足하고 事人則失位니라 故百姓은 則(如字)君以自治也하며 養君以自安也하며 事君以自顯也하나니 故禮達而分定이니 故人皆愛其死而患其生이니라
이렇기 때문에 임금이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이지 남을 본받는 것이 아니며, 임금이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봉양을 받는 것이지 人民을 봉양하는 것이 아니며, 임금이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이지 人民을 섬기는 것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남을 본받으면은 과오가 있게 되고, 남을 봉양하면은 부족함이 있게 되고, 남을 섬기면은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임금을 본받아서 스스로 다스리며, 임금을 봉양하여 써 스스로 편안히 하며, 임금을 섬기어서 써 스스로 드러나게 하나니, 때문에 禮가 통달되고(천하에 공통되고) 직분이 정해지나니,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의롭게 죽는 것을 사랑하고 그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을 걱정한다.
이는 윗 章의 임금은 과오가 없는 처지에 서야된다는 것을 이어받아 말하였다. 舊說에는 말하기를 明은 존경함과 같다. 때문에 則君 읽기를 明君으로 하였는데, 지금 이 章의 세 明字 정하기를 모두 則字로 읽는다면은 상하의 글 뜻이 평탄하게 서로 호응하게 되리니 꼭 그 말을 우회할 것이 없다. 임금이라는 것은 몸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서 臣民의 본받는 바가 되는 것이지 人民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臣民들이 임금을 봉양하는 바가 되는 것이지 人民을 봉양하는 것이 아니고, 臣民이 임금을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지 임금이 人民을 服事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으로서 남을 본받으면은 이는 자신이 충분히 써 남의 본받는 바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남에게 본받게 되나니 과오가 없는 경우에 서있는 것이 아니고, 임금으로서 남을 봉양한다면은 한사람의 몸이 어찌 능히 억조 창생의 먹을 것을 제공해 줄 수 있겠는가? 반드시 부족할 것이고, 임금으로서 人民을 섬긴다면은 높은 지위를 강등하여 써 낮은 사람을 섬기게 되어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오직 백성들은 임금을 본받아서 스스로 그 몸을 다스리나니, 이는 이른바 文王과 武王이 일어나게 되면 백성들이 선을 좋아한다는 것이고, 임금을 봉양하여 스스로 편안히 한다함은 힘을 다해서 賦稅를 바치면은 농사지어 식생활하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 편안함이 있음을 이른 것이요, 임금을 섬겨 스스로 드러나게 함은 충성을 다하고 직분을 다하면은 벼슬을 주는 영광이 있음을 이른 것이다. 禮의 가르침이 통달되어 명분이 넘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의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을 사모하고,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은 부끄럽게 여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이 대목은 모두 孔子님의 말씀이 아니다.
故用人之知하고 去其詐하며 用人之勇하고 去其怒하며 用人之仁하고 去其貪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는 이용하고 그 거짓은 버리며, 사람의 용기는 이용하고 그 怒氣는 버리며, 사람의 仁은 이용하고 그 탐욕은 버려야 한다.
말하자면 임금이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마땅히 그 장점인 바는 취택하고 그 단점인 바는 버려야 되나니, 대개 중등 사람들의 재주가 장점이 있으면은 단점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去는 버림과 같다. 智謀가 있는 사람은 詐欺에 흘러가기가 쉽다. 때문에 사람의 智謀를 사용함에 마땅히 그 詐欺를 버려서 나무라지 않아야 되고, 굳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사나움에 이르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용기를 사용함에 있어서 마땅히 그 사나운 과오는 버려야 된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仁은 다만 이 사랑하는 것 뿐이니, 사랑만 하고 의로서 그걸 제재함이 없다면은 바로 일일마다 모두 사물을 좋아하게 될 것이고, 官爵을 좋아하게 되리니, 愛는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일일마다 좋아하여 모두 좋아함은 써 탐욕내는 것이니, 때문에 사람의 仁을 씀에 있어서 마땅히 그 탐욕의 결점을 버려야 한다.
故國有患이어든 君死社稷을 謂之義오 大夫死宗廟를 謂之變(讀爲辨)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 患難이 있으면은 임금이 社稷에 죽는 것을 義라고 이르고, 大夫가 宗廟에 죽는 것을 變(올바름)이라고 이른다.
大夫가 종묘를 위하여 죽음은 임금의 종묘를 보위하면서 죽음을 바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종묘도 또한 본국에 있으니, 임금의 종묘를 버리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자기의 종묘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舊說에는 變은 읽기를 辨으로 하니, 辨은 바름과 같다 하였고, 一說에는 그 죽음이 분별이 있어서 가히 써 죽지 않을 만 한데서 죽는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故聖人이 耐(能)以天下爲一家하며 以中國爲一人者는 非意之也라 必知其情하야 辟於其義하며 明於其利하며 達於其患하시나니 然後能爲之니라 何謂人情고 喜怒哀懼愛惡欲이니 七者는 弗學而能이니라 何謂人義오 父慈子孝하며 兄良弟弟하며 夫義婦聽하며 長惠幼順하며 君仁臣忠이니 十者를 謂之人義오 講信脩睦을 謂之人利오 爭奪相殺을 謂之人患이라하나니 故聖人之所以治人七情하며 脩十義하며 講信脩睦하며 尙慈讓去爭奪을 舍禮면 何以治之리오
그렇기 때문에 聖人이 능히 天下로써 한 집안을 삼으며, 中國으로써 한 사람을 삼은 것은 그것을 억측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情을 알아서 그 의리에 트였으며(환하며), 그 이로움에 밝았으며, 그 환난에 통달하셨으니, 그런 뒤에야 능히 그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사람의 情이라고 이르는가 하면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하는 것이니, 이 일곱가지는 배우지 않고서도 능히 하는 것이다. 무엇을 사람의 義라고 이르는가 하면 아버지는 인자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형은 선량하고 아우는 공경하며, 남편은 정의롭고 부인은 순종하며, 어른은 은혜롭고 어린이는 유순하며, 임금은 사랑하고 신하는 충성하는 것인데, 이 열가지 것을 사람의 올바른 의리라고 이르고, 誠信을 강습하고 화목을 수행하는 것을 사람의 이로움이라고 이르고, 다투고 빼앗으면서 서로 죽이는 것을 사람의 환난이라고 이르나니, 때문에 聖人이 써 사람의 七情을 다스리며, 열가지 의리를 수행하며, 誠信을 강습하고 화목함을 수행하며, 仁慈와 謙讓을 숭상하고, 爭奪을 제거하는 것을 禮를 버린다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다스리겠는가?
非意之는 사사로운 뜻으로써 臆度하여 그걸 하는 것이 아님을 이른 것이니, 반드시 이 그 七情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 十義의 길에 트여서 하여금 그것을 따르도록 하고, 그 이로움과 환난이 있는 바를 분명히 통달해서 하여금 지향하는 바를 알고 피하는 바를 알도록 하여야 만이 그런 뒤에 능히 그들로 하여금 한 집안을 삼고 한 사람으로 삼을 수 있다. 七情은 배우지 않도서도 능하니, 禮로써 그 七情을 다스린다면은 사람의 의리와 사람의 이로운 것이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될 것이고, 禮가 폐기되어 버리면은 사람의 환난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다. ○사랑함과 하고자함이 어떻게 구별됩니까라고 질문하자,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이 일반적으로 저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고자함은 꼭 얻으려는 데에 뜻이 있어 바로 가져옴을 요구하는 것이다.
飮食男女에 人之大欲이 存焉하고 死亡貧苦에 人之大惡存焉하니 故欲惡者는 心之大端也니라
飮食과 男女에 있어서 사람의 큰 욕망이 존재하고, 死亡과 貧苦에서 사람의 큰 증오가 존재하나니, 그렇기 때문에 욕망과 증오라는 것은 마음의 큰 단서이다.
사람 마음이 비록 七情이 있지마는 총괄하여 말한다면은 이 욕망과 증오 두가지 것에 그친다. 때문에 大端이라고 말한 것이다.
人藏其心이라 不可測度也며 美惡이 皆在其心이라 不見(現)其色也니 欲一以窮之인댄 舍禮면 何以哉리오
사람이 그 마음을 숨기고 있으므로 가히 헤아릴 수가 없으며, 아름답고 악한 것이(善惡이) 모두 그 마음속에 있으므로 그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나니, 하나하나 써 그것을 궁구하고자 할진댄 禮를 버린다면 무엇으로써 하겠는가?
욕망과 증오하는 마음이 내면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으니, 다른 사람이 어찌 능히 그것을 헤아릴 수 있겠으며, 하고픈 바의 선악과 증오하는 바의 선악을 어찌 가히 얼굴빛에서 그걸 연구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요컨대 일일이 궁구하여 살펴 알려고 할진댄 그것을 禮에서 찾지 아니하면은 불가능하다. 대개 七情이 節度에 맞으며 十義가 純熟하게 되면은 행동거지가 자연히 禮에 맞을 것이고, 만약에 七情이 어긋나고 편벽하여 人倫이 무너짐이 있다면은 言動의 사이에 모두 떳떳한 법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은 반드시 밖(외모)에 나타나게 되나니, 만약 禮를 모른다면 써 그 情義의 動作과 威儀의 사이에서 잘잘못한 것을 관찰할 수가 없을 것이다.
故人者는 其天地之德이오 陰陽之交며 鬼神之會며 五行之秀氣也니라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은 그 天地의 德이오, 陰陽의 交合이며, 鬼神의 會合이며, 五行의 빼어난 기운이다.
天地와 鬼神과 五行은 모두 陰陽이다. 德은 實利를 가리켜 말한 것이오, 交는 變合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오, 會라는 것은 妙合하여 응결된 것이다. 형체가 생겨남에 정신이 발로되는 것이 모두 그 빼어나 가장 신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五行의 빼어난 기운이다고 말하였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이 말이 가장 精粹하다.
故天秉陽하야 垂日星하고 地秉陰하야 竅於山川이니라 播五行於四時하야 和而後月生也하나니 是以三五而盈하고 三五而闕하나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陽을 잡고서 해와 별을 드리우고, 땅은 陰을 잡고서 山川에 기운이 통하고 있다. 五行을 四時에 운행시켜 順和한 뒤에 달이 생기나니, 이로써 달은 三五日(15日)에 가득차고 三五日(15日)에 이지러진다.
山川에 기운이 통함은 山澤이 通氣되는 것이다. 五行은 하나의 陰陽인데, 그 바탕은 땅에 갖추어져 있고 기운은 하늘에서 운행한다. 봄의 木과 여름의 火와 가을의 金과 겨울의 水가 각각 그 일을 주관하여 써 四時節을 이루어낸다. 달이 가득차고 이지러지는 것이 태양의 가깝고 먼데 연유하니, 四時의 次序가 順和하여 태양이 운행하면서 궤도를 따른 뒤에야 달의 밝은 빛을 냄이 시기와 같이 되나니, 보름에 가득차고 그믐에 사라져 그믐달과 초하룻달의 착오가 없게 된다.
五行之動이 迭相竭也니 五行四時十二月이 還(旋)相爲本也오
五行의 운행(움직임)이 번갈아가면서 서로 다하나니(끝이 나나니), 五行과 四時와 十二月이 돌아가면서 서로 근본이 되고,
動은 운행함이오, 竭은 다함이며 끝남이오, 本이라는 것은 시초이다. 五行이 四時에 운행됨에 있어서 번갈아가면서 서로 끝나고 선회하면서 서로 시작이 되어 끝나면은 시초가 있는 것이 고리가 끝이 없는 것과 같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비로소 오면은 봄이 여름의 근본이 되고, 봄이 다하고 여름이 오면은 여름이 또 가을의 근본이 되나니, 已往의 것은 현재의 것으로서의 끝난 바가 되고, 현재의 것은 바야흐로 미래 것의 근본이 되나니, 五行·四時·十二月이 모두 그렇지 아니함이 없다.
五聲六律十二管이 還相爲宮也오
五聲과 六律과 十二管이 선회하면서 서로 主宮이 되고,
五聲은 宮商角徵羽이다. 六律은 陽聲은 黃鐘은 子·太蔟는 寅·姑洗은 辰·㽔賓은 午·夷則은 申·無射는 戌이고, 陰聲은 六呂라고 이르는데, 大呂는 丑·應鐘은 亥·南呂는 酉·林鐘은 未·仲呂는 巳·夾鐘은 卯이다. 六律과 六呂는 모두 이 候氣管名이다. 律은 법인데, 또 述이라고 이르고, 呂는 도움인데, 陽을 도와서 기운을 폄을 말한 것이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모두 가히 律이라고 호칭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月令」에서는 十二月을 모두 律이라고 호칭하였다. <이하 생략>
五味六和十二食이 還相爲質也오
五味와 六和와 十二食이 선회하면서 서로 바탕이 되고,
시고 쓰고 맵고 짠 것에 매끄럽고 단 것을 첨가하니 이것이 五味에 六和이고, 一年 열두달 동안 먹는 것이다. 還相爲質은 예컨대 봄철 석달동안에는 신 것으로써 바탕을 삼고, 여름 석달동안에는 쓴 것으로써 바탕을 삼아서 여섯가지 조화시키는 맛이 모두 서로 쓰임이 된다.
五色六章十二衣가 還相爲質也니라
五色과 六章과 十二衣가 선회하면서 서로 바탕이 되고 있다.
五色은 푸르고 붉고 누르고 희고 검은 것이니, 하늘의 검은 빛깔을 합쳐서 六章이 되고, 12개월의 옷은 예컨대 「月令」에 봄에는 푸른 옷을 입고 여름에는 붉은 옷을 입는다는 따위이다. 선회하면서 서로 바탕이 됨은 그림그리는 일이 그 시절의 한 색깔을 위주로하여 나머지 색깔이 사이에 뒤섞이는 것이다.
故人者는 天地之心也며 五行之端也니 食味別聲被色而生者也니라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은 天地의 마음이며, 五行의 단서이니, 맛을 먹고 소리를 구별하고 색깔을 입고서 사는 것이다.
天地의 마음은 이치로써 말한 것이요, 五行의 단서는 기운으로써 말한 것이다. 다섯가지의 맛을 먹고 다섯가지의 소리를 구별하고 다섯가지의 색을 입는 것은 그 중간에 모두 五行으로 배합된 것이 있어서 性情에 능히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天地의 마음이다는 것에 대하여 여쭙겠습니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컨대 天道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음탕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내리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니, 착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음탕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재앙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른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교화는 모두 이 사람이 하는 것이니, 이 이른바 사람이라는 것은 天地의 마음이다.
故聖人作則하사대 必以天地爲本하시며 以陰陽爲端하시며 以四時爲柄하시며 以日星爲紀하시며 月以爲量하시며 鬼神以爲徒하시며 五行以爲質하시며 禮義以爲器하시며 人情以爲田하시며 四靈以爲畜하시니 以天地爲本이라 故物可擧也며 以陰陽爲端이라 故情可睹也며 以四時爲柄이라 故事可勸也며 以日星爲紀라 故事可列也며 月以爲量이라 故功有藝也며 鬼神以爲徒라 故事可守也며 五行以爲質이라 故事可復也며 禮義以爲器라 故事行有考也며 人情以爲田이라 故人以爲奧也며 四靈以爲畜이라 故飮食有由也니라
때문에 聖人이 법칙을 제작하시되, 반드시 天地로써 근본을 삼으시며, 陰陽으로써 단서를 삼으시며, 四時로써 자루를 삼으시며, 해와 별로써 기강을 삼으시며, 달로써 한량을 삼으시며, 鬼神으로써 반려를 삼으시며, 五行으로써 질정을 삼으시며, 禮義로써 그릇을 삼으시며, 人情으로써 밭을 삼으시며, 四靈으로서 가축을 삼으시나니, 天地로써 근본을 삼으시기 때문에 사물을 가히 거행할 수 있으며, 陰陽으로써 단서를 삼았기 때문에 선악의 情을 가히 볼 수가 있으며, 四時로써 자루를 삼았기 때문에 일을 가히 권면할 수 있으며, 해와 별로써 기강을 삼았기 때문에 일을 가히 진열할 수가 있으며, 달로써 한량을 삼았기 때문에 功이 세워짐이 있으며, 鬼神으로써 반려를 삼았기 때문에 일을 가히 지킬 수 있으며, 五行으로써 질정을 삼았기 때문에 일을 가히 회복할 수 있으며, 禮義로써 그릇을 삼았기 때문에 일의 행하는 것이 이루어짐이 있으며, 人情으로써 밭을 삼았기 때문에 사람이 써 아랫목의 주체가 되며, 四靈으로써 가축을 삼았기 때문에 飮食이 쓸데가 있다.
이 章은 통털어 10條인데, 天地로부터 人情에 이르기 까지 9條는 모두 이 前章의 여러 일들을 되풀이 말한 것이다. 萬事와 萬物의 이치가 天地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聖人께서 법칙을 제작하시되, 天地로써 근본을 삼으셨으니 사물의 이치를 모두 가히 거행할 수 있다. ○情의 선한 것은 陽에 소속되고, 악한 것은 陰에 소속이 되니 그 단서를 陰陽에서 찾아보시니 선악을 가히 볼 수가 있다. ○柄은 권세와 같다. 四時가 각각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당시의 권세를 가지고서 백성들을 가르쳐서 일을 세우도록 하시니 일이 가히 권면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해와 별로 기강을 삼음은 낮길이가 절반(春分)이고 초저녁에 별은 朱雀星이 뜨는 것과 낮이 길고(夏至) 초저녁에는 별이 大火星이 正南方에 뜬다는 것과 같은 따위이니, 써 시절의 이르고 늦음을 기강삼은 것이다. 나열함은 12개월의 일을 상세히 나열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量은 한량인데, 12개월의 한계를 이른다. 한계가 넘지 않으면 하는 것이 모두 그 제때를 만나게 된다. 때문에 事工의 불어남이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이하 생략>
何謂四靈고 麟鳳龜龍을 謂之四靈이니라 故龍以爲畜이라 故魚鮪(偉)不淰(審)하며 鳳以爲畜이라 故鳥不獝하며 麟以爲畜이라 故獸不狘하며 龜以爲畜이라 故人情不失이니라
무엇을 四靈(네 靈物)이라고 이르는가 하면 기린과 봉황과 거북과 용을 四靈이라고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용으로써 가축을 삼기에 작은 물고기와 큰 물고기들이 놀라 흩어지지 아니하며, 봉황으로써 가축을 삼기 때문에 새들이 놀라 달아나지 아니하며, 기린으로써 가축을 삼기 때문에 짐승들이 놀라 달아나지 아니하며, 거북으로써 가축을 삼기 때문에 人情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鮪는 고기의 큰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말하였다. 淰은 떼로 지은 대열이 놀라서 흩어지는 모양이다. 獝은 놀라서 날아가는 것이요, 狘은 놀라서 달아나는 것이다. 세 靈物이 이미 길들여져서 가축과 같으니, 그 同類들이 모두 그를 따라서 비록 사람이 보더라도 또한 그 때문에 놀라서 날아가거나 달아나지 않는다. 거북은 능히 앞서서 아는데, 사람이 결단한 바가 있어서 써 可否를 안다. 때문에 그 情의 바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위의 세 물건은 모두 음식이 연유함으로 인하여 말하였으되 거북만은 유독 介蟲의 同類로 호응한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의심을 결단하는 보배가 되니, 가히 음식의 물건으로 그에 비례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四靈으로써 가축을 삼은는 것은 부연하여 이에 이른 것이 의미가 없이 너무나 우활하고 소원하니 어느 곳인들 거북이 없겠는가?
故先王이 秉蓍龜하시며 列祭祀하시며 瘞(曀)繒하시며 宣祝嘏辭說하시며 設制度하시니 故國有禮하시며 官有御하시며 事有職하시며 禮有序니라
때문에 先王이 시초와 거북을 잡으시며, 祭祀를 진열하시며, 명주비단의 폐백을 묻으시며, 祝史와 嘏史의 辭說을 선양하시며, 制度를 설립하시니, 때문에 나라에 禮(典禮)가 있으시며, 관직은 다스려짐이 있으시며, 일은 직책이 있으시며, 禮는 질서가 있었다.
瘞은 묻음이다. 繒은 폐백이다. 「祭法」에 이르기를 泰折(북녁 郊外에 있는 제단)에 묻음은 땅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고 하였다. 繒이라는 말은 줌이니, 폐백을 묻고 신에게 아뢰는 것이 또한 폐백으로써 신에게 드린다. 宣은 선양함이다. 先王이 祭事를 중히 여기기 때문에 期日을 시초와 거북에게서 정하여 제사의 禮를 진열하고 制度를 설립하여 만듦이 이처럼 그 상세하셨으니, 제도가 한 번 정해지면 국가에는 典禮가 있어 가히 지킬 수 있으며, 벼슬은 다스려지는 바가 있으며, 일은 그 직책이 있으며, 禮는 그 질서를 얻게 된다.
故先王이 患禮之不達於下也라 故祭帝於郊는 所以定天位也오 祀社於國은 所以列地利也오 祖廟는 所以本仁也오 山川은 所以儐(擯)鬼神也오 五祀는 所以本事也라 故宗祝在廟하며 三公在朝하며 三老在學하며 王前巫而後史하시며 卜筮瞽侑皆在左右어든 王中心無爲也하야 以守至正이니라
때문에 先王은 禮가 아래에 통달하지 아니한 것을 걱정한다. 때문에 남쪽 郊外에서 上帝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써 하늘의 자리를 정하는 것이요, 國中에서 社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써 땅을 이로움을 진열한 것이요, 조상 종묘에 제사지내는 것은 써 仁에 근본한 것이요, 산천에 제사지내는 것은 써 鬼神을 대접하는 것이요, 五祀에 제사지내는 것은 써 일에 근본하는 것이다. 때문에 宗人과 祝官이 종묘에 있으며, 三公이 조정에 있으며, 三老가 太學에 있으며, 王은 앞에 무당이 있고 뒤에 史官이 있으시며, 卜司와 筮人과 瞽曚과 侑人들이 모두 左右에 있으면은 왕은 그 중앙에서 마음에 하는 것이 없어 앉아서 써 지극히 바른 것을 지킨다.
天子가 하늘을 높이는 禮를 극진히 하면은 천하가 임금 존경하는 禮를 알게 된다. 때문에 하늘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음식과 재화의 바탕되는 것이 모두 땅에서 나오니, 天子가 친히 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바로 땅의 이로움을 표출·나열하여 천하로 하여금 근본에 보답하는 禮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仁의 실상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그것이니, 임금이 자식의 禮로써 시동이를 섬기는 것은 써 仁義의 가르침을 아래 백성들에게 통달하게 하는 것이다. 鬼神을 禮로 대접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일에서 근본하여 五祀에 제사지내는 것은 모두 이 禮敎로 하여금 사방으로 통달되도록 한 것이니, 이 또한 前章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뜻이다. 종묘에는 宗人과 祝人이 있고, 조정에는 三公이 있고, 太學에는 三老와 五更이 있으니, 禮敎를 밝혀 써 천하를 착하게 아니함이 없다. 무당은 弔臨(弔問가서 臨哭)하는 禮를 주관하여 앞에 있고, 史官은 임금 언동의 실상을 쓰면서 뒤에 있으며, 瞽曚은 악사가 되고 侑는 四輔가 되어서 혹은 聲樂을 구별하기도 하고 혹은 임금의 威儀를 도와드리면은 왕은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이 마음은 무엇을 하겠는가? 임금 도리의 지극히 바른 것을 지킴에 불과할 뿐이니, 이 또한 이 人君이 禮로써 스스로 막아가지고 천하에 가르침을 보여주는 것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무당은 제사 때에야 바야흐로 이용하고, 卜人과 筮人은 일이 있어야만이 바야흐로 묻는 것인데, 항상 좌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故禮行於郊면 而百神受職焉하며 禮行於社면 而百貨可極焉이며 禮行於祖廟면 而孝慈服焉이며 禮行於五祀면 而正法則焉이니 故自郊社祖廟山川五祀는 義之脩而禮之藏也니라
때문에 禮가 郊祭에서 거행되면은 하늘의 온갖 신들이 직책을 받으며, 禮가 社祭에서 거행되면 온갖 재화를 가히 다 이용할 수 있으며, 禮가 선조 사당에서 거행되면은 효도와 사랑이 실행되며, 禮가 五祀에서 거행되면 法則이 바르게 되나니, 때문에 본시 郊祭와 社祭와 祖廟와 山川과 五祀는 義가 수행되고 禮가 간직된 창고이다.
이는 윗 글의 남쪽 郊外에서 上帝에게 제사지내는 따위의 禮를 이어서 말한 것이다. 百神受職은 바람과 비가 節序에 맞고 추위와 더위가 제때에 맞아 잘못된 징조가 없음을 이른 것이요, 百貨可極은 땅이 보물을 아끼지 아니하고 물건은 이로움을 빠트림이 없음을 이른 것이요, 孝慈服은 천하가 모두 孝慈의 도리를 服行할 줄을 앎을 이른 것이요, 正法則은 貴賤의 禮가 각각 제도가 있어서 감히 참람되게 넘음이 없음을 이른다. 聖王의 정성스럽게 지낸 제사에 감격함이 그 효험이 이와 같으니, 이로 말미암아서 관찰해 본다면 郊社와 祖廟와 山川과 五祀가 모두 義가 수식되고 禮가 간직된 창고이다. 앞에서는 산천이 일으켜줌이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그걸 말하지 않은 것은 법칙의 일이 그걸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서이다.
是故夫禮는 必本於大(太)一하나니 分而爲天地하며 轉而爲陰陽하며 變而爲四時하며 列而爲鬼神하나니라 其降曰命이니 其官於天也니라
이렇기 때문에 대체 禮는 반드시 太一(太極·天理)에서 근본하나니, 나뉘어서 天地가 되며, 회전하여 陰陽이 되며, 변화하여 사시사철이 되며, 배열하여 鬼神이 된다. 그 내리는 것을 명령이라고 이르는데, 그것은 하늘의 일을 본받음을 위주로 한다.
지극히 큰 것을 太라 하고, 아직 나뉘지 않은 것을 一이라고 한다. 太極은 天地人 三才를 포함하여 하나가 되는 이치이다. 나뉘어 天地가 되면은 높고 낮으며 귀하고 천한 등급이 있고, 회전하여 陰陽이 되면은 吉凶과 刑賞의 일이 있고, 변화하여 四時가 되면은 세월의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고, 배열되어 鬼神이 되면은 근본에 보답하고 시초에 보답하는 情이 있다. 聖人께서 禮를 제작하심이 모두 여기에 근본하여 써 그 명령을 내리는 것이니, 이는 모두 하늘을 본받는 것을 위주로 한다. 官이라는 것은 주장하는 뜻이다.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禮家가 󰡔周易󰡕에 太極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하나의 太一을 뒤집어 냈는데, 그대로 이것은 諸子의 말이다. 其官於天也 한 구절은 윗 글을 결론지은 것이니, 官天地는 마땅히 莊子의 뜻과 같아야 된다.
夫禮는 必本於天하야 動而之地하며 列而之事하며 變而從時하며 協於分藝하니 其居人也曰養(義)라 其行之엔 以貨力辭讓飮食과 冠昏喪祭射御朝聘이니라
대체 禮는 반드시 하늘(天理)에 근본하여 움직여서 땅으로 가서 본받으며, 배열하여 일에 가서 근본하며, 변화하여 四時를 따르며, 12개월의 구분과 일이 세워짐에 부합하니,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말하자면 義이다. 그 禮를 행할 적에는 財貨와 筋力과 辭讓과 飮食과 冠禮와 昏禮와 喪禮와 祭禮와 射禮와 御禮와 朝禮와 聘禮로써 한다.
이도 또한 앞 章의 하늘에 근본하고 땅에 본받는 뜻에 근본하였다. 움직여서 땅으로 감은 바로 땅을 본받는 것이요, 배열하여 일로 감은 바로 五祀는 써 일에 근본한다는 것이요, 변화하여 四時를 따름은 바로 四時로써 자루를 삼는 것이다. 協은 合함이다. 分은 달로써 限量을 삼음을 이른 것이요, 藝는 바로 일이 세워짐이 있는 것이다. 위에서 義가 수행되고 禮가 간직된 창고를 말하였기 때문에 이 또한 처음에는 禮를 말하고 나중에는 義를 말하였다. 居人은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禮가 비록 성인이 제작한 것이지마는 모두 人事의 당연한 의리에 근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는 말하자면 義라고 하였다. 冠婚 이하 여덟가지 것은 모두 禮이다. 그러나 禮를 행하는 것이 반드시 재화의 자본과 근력의 건강함과 사양하는 예절과 음식의 물품이 있어야 되니, 이 또한 모두 당연한 의리이다.
故禮義也者는 人之大端也니 所以講信脩睦하며 而固人肌膚之會와 筋骸之束也며 所以養生送死하며 事鬼神之大端也며 所以達天道하며 順人情之大竇也니라 故唯聖人이아 爲知禮之不可以已也하시나니 故壤(怪)國喪家亡人은 必先去其禮일새니라
때문에 禮義라는 것은 사람의 큰 단서이니, 써 信實을 강습하고 화목을 수행하며, 사람의 살과 살갗의 회합과 힘줄과 뼈의 결속을 튼튼히 하며, 써 생존한 이를 봉양하고 사망한 이를 보내드리며, 鬼神을 섬기는 큰 단서인 바이며, 써 天道를 통달하며, 人情을 순응하는 큰 방도이다. 때문에 오직 聖人이라야 만이 禮義를 가히 써 폐기할 수 없음을 아시나니, 때문에 나라를 무너뜨리고 집안을 망치며 몸을 망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禮를 버렸기 때문에서이다.
살과 살갗이 모여있는 것과 힘줄과 뼈가 연속됨이 튼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禮로써 그것을 묶고 단속함이 없다면은 태만하고 기울어진 용모가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반드시 禮로써 그것을 튼튼히 해야 된다. 竇는 구멍의 가히 출입할 수 있는 것이니, 禮義를 따르면은 통달하게 되고 禮義를 따르지 아니하면은 막히게 된다. 때문에 구멍으로써 그걸 비유하였다. 聖人이 능히 天理를 통달하고 인정에 순응하는 것은 그 禮를 가히 써 폐기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서이다. 저 나라를 무너뜨린 임금과 집안을 망가뜨린 임금과 몸을 망치는 사람이 모두 먼저 그 禮를 버린 까닭 때문에서이다.
故禮之於人也에 猶酒之有糵也니 君子는 以厚오 小人은 以薄이니라
때문에 禮가 사람에게 있어서 술에 누룩이 있는 것과 같으니, 君子는 써 禮에 후하게 하고, 小人은 써 禮에 박하게 한다.
사람이 禮로써 德을 이루하는 것이 술이 누룩으로써 맛을 이루는 것과 같으다. 君子는 禮에 후하게 하기 때문에 君子가 되고, 小人은 禮에 박하게 하기 때문에 小人이 되나니, 또한 술에 진한 술과 묽은 술이 있는 것과 같다. 
故聖王이 脩義之柄과 禮之序하사 以治人情하시나니 故人情者는 聖王之田也니 脩禮以耕之하며
때문에 聖王이 義의 자루와 禮의 次序를 講明하시어 써 사람의 情을 다스리시나니, 때문에 사람의 情이라는 것은 聖王의 밭이니, 禮를 수행하여 써 그 人情을 간다.(다스린다.)
劉氏가 말하기를 脩라는 것은 講明함이다. 柄이라는 것은 사람이 잡는 것이다. 聖王이 義의 있는 바를 講明을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가지고 따라 일의 適宜함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義를 요체를 잡아 써 禮의 次序에 처한다면은 情의 發露된 것이 모두 節度에 맞게 되니 때문에 가히 써 사람의 情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禮라는 것은 人情을 방지하는 範圍이니, 도를 닦는 가르침이 禮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때문에 사람의 情을 다스림에 있어서 禮로써 먼저 힘쓰는 것을 삼아야 되나니, 밭을 가꾸는 사람이 반드시 먼저 쟁기와 보습으로써 그 밭을 가는 것과 같다.
陳義以種之하며
義를 진열하여 써 그 밭에 심으며,
義라는 것은 사람의 情을 제재하는 것이니, 일을 따라서 適宜하게 처리하여 때에 맞게 조치하기를 밭의 適宜함에 따라서 마땅히 심어야 할 것을 심는 것과 같다.
講學以耨之하며
학문을 강론하여 써 그 밭을 김매며,
禮義는 진실로 가히 情으로 하여금 節度에 맞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혹은 氣質과 物欲이 그걸 가리워버려 사사로운 뜻이 발생하게 되면은 잡초가 아름다운 곡식을 해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학문을 강론하여 써 이치와 욕심의 구분을 밝히어 그른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은 보존하기를 농사지을 적에 김을 매어 써 잡초는 제거하고 곡식 싹은 기르는 것과 같이 해야 된다.
本仁以聚之하며
仁에 근본하여 써 그 밭의 곡식을 수확하며,
학문을 강론하여 김매는 것은 널리 하나가 아닌 善을 구하는 것이니, 써 근본은 하나이면서 만가지로 다른 이치를 얻는 것이요, 仁에 근본하여 모으는 것은 요약하여 그 만가지 다른 이치를 지극히 하나인 이치에 회합시키는 것이니 써 만가지로 다른 이치가 근본은 하나인 奧妙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에 이르면은 수만가지 이치를 회합하여 한 이치가 되어서 本心의 德이 온전하게 되니, 이것은 곡식이 여묾에 그걸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다.
播樂以安之니라
음악을 宣播(연주)하여 써 그 사람의 情을 편안히 한다.
모으는 것은 仁을 탐하는 일이니, 능히 仁을 편안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반드시 하여금 읊고 노래부르며 춤추고 덩실거리어 써 그 德性을 수양하도록 하고, 그 찌꺼기를 녹혀 융화시켜서 하여금 도덕에 順和하도록 한다면은 조용하여 자연스러운 지역에 나아가게 되리니, 이것은 그 음식을 먹어서 물린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 것은 聖王이 도를 닦아 가르침이 조리를 시작하고 끝맺음이 이와 같아 講學이 그 안에 있으면서 써 前後에 通貫하고 있으니, 禮로 밭갈이하고 義로 심는 것은 대개 덕에 들어가는 공부이니 학문이 조리를 시작하는 것이고, 仁으로 수확하고 음악으로 편안히 함은 덕을 이룬 효험이니 학문이 조리를 끝맺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仁義와 禮樂에 있어서 강론하지 않은 바가 없어 그 성공함에 이르면은 禮義의 功이 앞에 나타나고 仁樂의 효험이 뒤에 나타나게 된다.
故禮也者는 義之實也니 協諸義而協이어든 則禮雖先王未之有하시나 可以義起也니라
그렇기 때문에 禮라는 것은 義의 열매이니, 禮가 義에 부합하여 당연히 할 것에 맞으면은 禮가 비록 先王이 그것을 두지 못하였더라도 가히 義로써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實이라는 것은 일정한 제도이니, 禮라는 것은 義가 제정되는 것이고, 義라는 것은 禮의 저울과 자이다. 禮는 일정하여 바뀌지 아니하고, 義는 때에 따라서 適宜하게 제재하니, 그렇기 때문에 義에 부합하여 마땅히 할 것에 맞다면은 비록 先王이 이런 禮를 두지 않았더라도 가히 義에 참작을 해서 그 禮를 창작할 수 있으니, 이것이 써 三代의 損益이 서로 답습하지 않았던 것이다.
義者는 藝之分이며 仁之節也니 協於藝하며 講於仁하야 得之者强이니라
義라는 것은 일의 分限이며, 仁의 品節(등급)이니, 사리에 부합하며 仁에 대하여 강구하여 그 義를 얻는 사람은 굳세게 된다.
藝는 일로 말한 것이요, 仁은 마음으로 말한 것이니, 일의 밖에서 처리하는 것은 義로써 分限의 適宜함을 삼고, 마음의 안에서 발동되는 것은 義로써 品節의 제재를 삼는다. 사리에 부합하는 것은 그 사리의 適宜함에 합한 것이요, 仁에 대하여 강구하는 것은 그 사랑하는 마음의 親䟽와 厚薄을 헤아려서 行事의 大小와 輕重에 합하여 한결같이 義로써 그 제재를 삼은 것이니, 윗사람이 義를 좋아하면은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아니하는 없기 때문에 義를 얻는 사람은 굳세게 된다.
仁者는 義之木也며 順之體也니 得之者尊이니라
仁이라는 것은 義의 근본이며, 和順의 體質이니, 그 인을 얻는 사람은 尊貴하게 된다.
仁이라는 것은 본심의 온전한 덕이기 때문에 義의 근본이 되니, 이것은 바로 온갖 和順의 體質이다. 元이라는 것은 善의 우두머리이니, 仁을 體行하면은 충분히 써 사람에게 어른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仁을 얻는 사람은 존귀하게 된다. 윗 글에서는 禮라는 것은 義의 열매라고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仁이라는 것은 義의 근본이라고 말하였으니, 열매는 흩어진 體로 말한 것이고, 뿌리는 전체로써 말한 것이니, 동일한 이치이다. 張子가 말하기를 큰 禮 3백 가지와 작은 禮 3천 가지가 한 일도 仁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나무와 같다. 뿌리로부터 枝葉에 까지 모두 사는 뜻이니, 이는 전체의 仁이다. 그러나 한 뿌리로부터 千枝萬葉에 이르기 까지 先後와 大小가 각각 그 次序가 있으니 이는 散體의 禮이고, 그 뿌리로부터 枝葉에 이르기 까지 한 가지·한 잎사귀가 각각 한 이치를 갖추고 있어 때에 따라서 무성하고 시들어 각각 그 適宜함을 얻은 것은 義이다. 
故治國호대 不以禮면 猶無耜而耕也오 爲禮호대 不本於義면 猶耕而弗種也오 爲義而不講之以學이면 猶種而弗耨也오 講之以學而不合之以仁이면 猶耨而弗穫也오 合之以仁而不安之以樂이면 猶穫而弗食也오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되 禮로써 아니하면은 보습도 없이 밭갈이하는 것과 같고, 禮를 행하되 義에 근본하지 아니하면 밭을 갈아놓고서도 파종하지 아니한 것과 같고, 義를 행하되 그것을 학문으로써 강론하지 아니하면 파종은 해 놓고서 김매지 아니한 것과 같고, 그것을 학문으로써 강론하되 그것을 仁으로써 취합하지 아니하면 김은 매놓고서 수확하지 아니한 것과 같고, 그것을 仁으로써 취합하였으되 그걸 음악으로써 편안히 하지 않는다면 수확해 놓고서 먹지 아니한 것과 같다.
이는 반복 비유하여 써 前段의 것을 거듭 밝혔으니, 성인 학문의 교양하는 일이 시초가 있고 종말이 있어서 그 次序를 가히 문란시킬 수 없고 공부를 가히 빠트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安之以樂而不達於順이면 猶食而弗肥也니 四體旣正하고 膚革充盈은 人之肥也오 父子篤하며 兄弟睦하며 夫婦和는 家之肥也오 大臣法하고 小臣廉하야 官職相序하며 君臣相正은 國之肥也오 天子以德爲車하시고 以樂爲御하시며 諸侯以禮相與하시며 大夫以法相序하시며 士以信相考하며 百姓以睦相守는 天下之肥也니 是謂大順이니 大順者는 所以養生送死하며 事鬼神之常也니라
그 禮를 음악으로써 편안히 하되 和順함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곡식을 먹고서도 살찌지 아니함과 같으니, 四體가 이미 바르고 피부가 풍만함은 사람이 살찌는 것이요, 부자간이 돈독하며 형제간이 화목하며 부부간이 화락함은 집안이 살찌는 것이요, 大臣이 법을 지키고 小臣이 청렴하여 관직이 서로 질서가 있으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바로잡아 줌은 나라가 살찌는 것이요, 天子는 德으로써 수레를 삼고 음악으로써 마부를 삼으며, 諸侯는 禮로써 서로 교제하시며, 大夫는 법으로써 서로 질서를 지키며, 士는 신의로써 서로 이루어주며, 百姓은 화목으로써 서로 지킴은 天下가 살찌는 것이니, 이를 大順이라고 이른다. 大順이라는 것은 써 생존한 이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보내드리며, 鬼神을 섬기는 바의 떳떳한 도리이다.
前章은 음악을 宣播하여 편안히 한다함에 이르러서 멈추었고, 여기에서는 또 화순함에 도달하지 못하면은 먹고서도 살찌지 아니한 것과 같다는 一節을 증익한 것은 대개 음악으로써 편안히함 이전은 모두 이 자기를 이루는 功이니 󰡔大學󰡕의 明德을 밝히는 일이요, 화순함에 도달한 이후는 바로 이 남을 이루어주는 효험이니 󰡔大學󰡕의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때문에 사람의 몸이 살찜으로써 비유를 설정하여 집안과 나라와 천하의 살찜을 말하였으니 이에 이르러서는 바로 이 聖學의 지극한 功이요, 자기를 이루고 남을 이루어줌이 內外를 합한 방도이니 󰡔大學󰡕의 몸이 닦아지고 집안이 가지런하고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태평해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大順이라고 이르나니, 크게 화순하면은 하는 것 없이 다스려지게 된다. 때문에 살아있는 이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보내드리며 귀신을 섬기는 것이 각각 그 떳떳한 도리를 얻게 된다. 이상은 모두 劉氏의 말이다. ○大臣이 법받음은 신하의 도를 다하는 것이요, 小臣이 청렴해짐은 지키는 바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요, 德으로써 수레를 삼음은 仁義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요, 음악으로써 마부를 삼음은 움직임에 화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요, 禮로서 서로 교제삼음은 조회와 빙문을 제때로써 하는 것이요, 법으로써 서로 질서를 지킴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핍박하지 아니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僭用하지 아니한 것이요, 신의로써 서로 이루어줌은 오래된 약속을 잊지 아니하는 것이요, 화목으로써 서로 지킴은 나가고 들어올 적에 서로 동반하며 지키고 망봄에 서로 협조하며 질병이 듦에 서로 붙잡아 주는 것이다. 살찐다는 것은 풍만하여 부족함이 없는 뜻이다.
故事大積焉而不苑(伊)하며 並行而不謬하며 細行而不失하며 深而通하며 茂而有間하며 連而不相及也하며 動而不相害也하나니 此順之至也라 故明於順이라야 然後能守危也니라
그렇기 때문에 일의 큰 것이 쌓이어도 막히지 아니하며, 나란히 행해져도 어긋나지 아니하며, 미세한 行事(行動)라도 실수하지 아니하며, 깊어도 통하며, 빽빽하여도 사이가 있으며, 연접하되 서로 미치지(침범하지) 아니하며, 움직여도 서로 해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和順함의 극치이다.(지극한 것이다.) 때문에 和順에 밝어야만이 그런 뒤에 능히 위태로움을 지킬 수 있다.
이 이하로 篇이 끝남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이 大順의 말을 발명한 것이니, 말하자면 이 大順의 道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면은 비록 일의 큰 것이 포개져 쌓이어 앞에 있더라도 또한 막힘에 이르지 아니하고, 비록 일의 동일하지 않는 것이 일시에 나란히 행해져도 또한 어긋남에 이르지 아니하고, 비록 작은 일의 행해진 것일지라도 또한 그 미세함으로써 실수함이 있지 않고, 비록 깊고 으슥하여도 가히 통할 수 있고 비록 무성하고 빽빽하여도 사이가 있나니, 가운데에 사이가 있음을 이른다. 두 물건이 연접하여 서로 미치면은(침범하면은) 彼此에 다툼이 있게 되고, 두 일이 한 때에 함께 움직이게 되면 利害의 다툼이 있게 되는데, 서로 침범하지 않고 서로 해치지를 않는다면은 다툴 것이 없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은 임금이 천하의 일을 다스림이 큰 것도 있고 미세한 것도 있으며, 깊은 것도 있고 빽빽한 것도 있으며, 연접한 것도 있고 움직이는 것도 있으되, 그것이 자연적으로 각각 그 分理를 얻은 것은 하나의 화순함의 지극함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순함에 밝여야만이 그런 뒤에 능히 危亡의 경계를 지켜서 危亡함에 이르지를 않게 된다.
故禮之不同也에 不豐也와 不殺也는 所以持情而合危也니 故聖王所以順山者를 不使居川하시며 不使渚者로 居中原하사 而弗敝也하며 用水火金木飮食호대 必時하시며 合男女하며 頒爵位호대 必當年德하시며 用民必順하시니 故無水旱昆蟲之灾하며 民無凶饑妖孽之疾이니라
때문에 禮가 동일하지 않음에 있어서 풍부하게 아니할 것과 減殺하지(줄이지) 않을 것은 써 人情을 유지하고 위태로움을 保合하는 것이다. 때문에 聖王이 산에 순응한 사람을 하여금 하천에서 살지 않도록 하시며, 물가에 산 사람으로 하여금 中原(평원) 가운데서 살도록 아니하시어 피폐하게 아니하며, 물과 불과 금과 나무와 음식을 이용하되 반드시 제때에 하시며, 男女를 결합시켜 주시며, 爵位를 나누어 주되 반드시 나이와 德에 합당하게 하시며, 백성들을 부리되 반드시 順理로 하셨으니, 때문에 수재와 한발과 곤충의 재해가 없었으며, 백성들은 흉년들어 굶주림과 妖孽의 질병이 없었다.
貴賤이 등급이 있기 때문에 禮制가 동일하지 아니하니, 응당 검박하게 해야 할 것은 가히 풍부하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응당 융성하게 해야 할 것에 있어서는 가히 감쇄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써 人情을 유지하여 그로 하여금 교만하고 방종하지 않도록 하고, 상하를 保合하여 그로 하여금 危亂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聖王이 써 백성들의 情에 순응하는 것이 만약 산에서 편안히 살고 있으면은 그들을 이주시켜서 시냇가에서 살지 않도록 하고, 물가에서 편안히 살고 있으면 그들을 이주시켜 평원에서 살지 않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곤궁하여 피폐되지 않는다. 수달이 물고기로 제사를 지내야 그런 뒤에 虞人이 연못과 魚梁에 들어가는 것과 봄에는 자라와 대합조개를 바치고 가을에는 거북과 물고기를 바치는 따위는 이는 물을 이용하되 반드시 제때에 하는 것이다. 봄철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의 불씨를 채취하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살구나무의 불씨를 채취하고, 늦여름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의 불씨를 채취하고, 가을철에는 떡갈나무와 종참나무의 불씨를 채취하고, 겨울에는 회나무와 박달나무의 불씨를 채취하고, 또 󰡔周禮󰡕에 늦봄에 불씨를 꺼내서 쓰고 늦가을에 불을 금지하는 따위는 이는 불을 이용하되 반드시 제때에 하는 것이다. 卝人이 제때로써 쇠와 옥과 주석과 돌을 채취하는 것과 및 「月令」에 늦봄에 五庫의 수량을 살펴보되 쇠를 우선으로 삼는 것은 이 쇠를 사용하되 반드시 제때로써 하는 것이다. 동짓달에 陽木을 베고 오월달에는 陰木을 베는 것은 이 나무를 이용하되 반드시 제때로 하는 것이다. 음식은 예컨대 밥의 알맞음은 봄철에 비견하고 국의 알맞음은 여름철에 비견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男女를 결합시키되 반드시 그 나이에 알맞게 하고, 爵位를 나누어 주되 반드시 그 덕에 알맞게 하고, 백성을 부리되 반드시 농한기에 하니, 무릇 이것은 모두 이 順理로써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天地의 조화로움을 感召해서 가물거나 물이 넘침과 螟蝗의 재해가 없게 된다. 凶饑는 그 해가 흉년들어서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이다. 妖는 의복과 가요와 초목의 괴이함을 이른 것이요, 孽는 禽獸와 벌레의 괴이함을 이른 것이니, 史家의 五行志에 실려있는 대대로 있는 疾患이다.
故天不愛其道하며 地不愛其寶하며 人不愛其情하나니 故天降膏露하며 地出醴泉하며 山出器車하며 河出馬圖하며 鳳皇麒麟이 皆在郊棷(藪)하며 龜龍이 在宮沼하며 其餘鳥獸之卵胎를 皆可俯而闚也니 則是無故라 先王이 能脩禮以達義하시며 體信以達順오니 故此順之實也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그 道(조화)를 아끼지 아니하며, 땅은 그 보화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람은 그 人情을 아끼지 아니하나니,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기름진 이슬을 내리며, 땅에서는 醴泉이 솟아나오며, 산에서는 寶器와 수레가 나오며, 黃河에서는 龍馬의 八卦圖가 나오며, 봉황과 기린이 모두 郊外의 숲에 있으며, 거북과 용이 궁궐의 연못에 있으며, 그 나머지 새나 짐승의 알과 胎를 모두 가히 몸을 구부리고 볼 수가 있나니, 이는 다른 까닭이 없다. 先王이 능히 禮를 수행하여 써 義를 表達하시며, 誠信을 體行하여 써 순응을 表達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이는 天理와 人情을 順應한 실지이다.
舊說에 器는 은항아리·붉은 시루가 되고, 車는 山車가 드리워져 굽은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구부리어 손질함을 기다리지 않고서 자연적으로 둥글고 굽은 것을 이른다. 晉나라 때에 恒山의 큰 나무가 스스로 뽑혀졌는데, 그 뿌리 밑에 둥근 구슬 70개와 직사각형 구슬 73개가 있었으되, 모두 빛깔이 정교하고 기이하여 보통 옥과 달랐고, 또 張掖郡 柳谷의 돌이 八卦 璜玦의 형상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또한 이런 따위이다. 棷는 藪와 같다. 용의 변화를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 꼭 궁중의 연못에 그 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또한 지극히 순응함이 감응하여 불러들인 것의 卓異함을 극도록 말한 것이니, 말로써 본 뜻을 해치지 않는 것이 좋다. 禮를 수행하여 義를 表達하는 것은 이 禮를 닦아서 가르침을 삼아 천하에 表達시켜서 適宜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요, 誠信을 體行하여 順을 表達시키는 것은 자신을 반성하여 성실히 해서 천하에 表達시켜서 順應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極致의 功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결론하기를 이것은 順應의 실지이다고 하였다. ○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君子가 몸을 닦되 敬으로써 하고 공손함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태평해지나니 오직 상하가 공경에 한결같이 하면은 天地가 스스로 자리가 잡히고, 만물이 스스로 길러져서 네가지 영물이 다 오게 되리니, 이는 體信達順의 도리이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信은 이 實理이고, 順은 이 和氣이니, 體信은 이 中을 극진히 함이요, 達順은 이 和를 극진히 함이다. 이 道를 몸에서 실지로 體行한다면은 자연히 발동함에 節度에 맞아서 천하에 미루어 나감에 통하지 아니한 것이 없을 것이다.

禮器 第十

器가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이 禮를 배우는 사람이 德器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는 이 禮를 행하는 사람이 用器의 제도를 밝히는 것이다.
禮는 器니 是故大備하니 大備는 盛德也니라 禮는 釋回하고 增美質이라 措則正하고 施則行하나니 其在人也에 如竹箭之有筠(勻)也며 如松栢之有心也하니 二者居天下之大端矣라 故貫四時而不改柯易葉하나니 故君子有禮면 則外諧而內無怨이라 故物無不懷仁하며 鬼神饗德하나니라
禮는 기구이니, 이 때문에 크게 갖추나니, 크게 갖춤은 융성한 德이다. 禮는 사특함을 녹여버리고 아름다운 材質을 증익하고(늘려주고), (그 禮를) 몸에 시행하면은 바르게 되고, 베풀면은 행하여지나니 그 사람에게 있어서 대나무와 이대의 푸른 껍질이 있는 것과 같으며, 소나무와 잣나무의 圓心(둥근 속)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 두가지 것은 천하의 大端(大節)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四時를 관통하면서 가지를 고치거나 잎을 바꾸지 아니하나니 그렇기 때문에 君子가 禮가 있으면은 외부가 화협하고 내부에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仁을 생각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鬼神은 德을 흠향한다.
禮로써 몸을 다스리는 기구를 삼기 때문에 능히 그 成人의 행실을 크게 갖출 수가 있나니 크게 갖춤에 이르게 되면 그 德이 훌륭하게 된다. 禮의 쓰임 됨이 능히 사람의 사특한 마음을 녹혀버리고 그 材質의 아름다움을 증익시켜 줄 수 있나니, 그것을 몸에 시행하면은 가는 데마다 바르지 아니함이 없고, 그것을 일에 베풀면은 가는 데마다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사람의 한몸으로 말할진댄 대나무와 이대가 푸른 껍질이 있는 것과 같아 족히 써 밖에 꾸밈을 이룰 수가 있으며, 소나무와 잣나무가 원심이 있어서 충분히 써 내면에 곧고 견고하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箭은 대나무의 작은 것이고, 筠은 대나무의 푸른 껍질이다. 大端은 大節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두 물건이 다른 초목에 비교함에 이런 大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四時를 관통하고 있으되 가지와 잎이 바뀌는 바가 없다. 君子의 사람만이 오직 그 이 禮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외부 사람의 疎遠한 이가 화협하지 아니함이 없고, 내부 사람으로서 親近한 이가 원망하고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가 없어 사람들이 그 仁을 許與하며 신은 그 덕을 흠향한다.
先王之立禮也有本有文하니 忠信은 禮之本也오 義理는 禮之文也니 無本이면 不立하고 無文이면 不行하나니라
先王이 禮를 정립하심이 근본이 있고 문식이 있는데, 忠信은 禮의 근본(뿌리)이고, 義理는 禮의 문식이니, 근본이 없으면 禮가 서지 못하고 문식이 없으면 禮가 행하여지지 않는다.
先王이 禮를 제정하심이 광대하고 정미하니, 오직 충신스러운 사람이라야 만이 능히 그 禮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섬세하고 자상한 사이에 모두 義가 있고 모두 이치가 있으니, 충신이 없다면은 禮가 가히 설 수가 없고, 의리에 어둡다면은 禮가 가히 행해질 수 없다. 반드시 內外가 겸하여 구비되고 本末이 갖추어 거행되어야 만이 문식이 근본에 인하여 그걸 꾸미는 것이 지나침이 되지 않고, 근본이 문식에 인하여 그걸 씀이 그 節度에 맞을 것이다.
禮也者는 合於天時하며 設於地財하며 順於鬼神하며 合於人心하야 理萬物者也라 是故天時有生也며 地理有宜也며 人官有能也며 物曲有利也니 故天不生하며 地不養이어든 君子不以爲禮하며 鬼神弗饗也하나니 居山호대 以魚鼈爲禮하며 居澤호대 以鹿豕爲禮를 君子謂之不知禮라하나니라
禮라는 것은 하늘의 시절에 합치하며 땅의 재물에 設施하며 鬼神에 순응하며 人心에 부합하여 萬物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天時가 생산함이 있으며 地理가 적의함이 있으며 사람의 執事官이 능숙함이 있으며 물건의 하나하나가 이로움이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내지 아니하며 땅이 기르지 아니하면은 君子가 써 禮를 행하지 못하며 鬼神이 흠향하지를 아니하나니, 山에 살면서 물고기와 자라로써 禮를 행하며 못가에 살면서 사슴과 돼지로 禮를 행하는 것을 君子가 그더러 禮를 모른다고 이른다.
天時에 합함은 天時가 냄이 있는 것이니, 四時에 각각 생산해내는 바의 물건이 있으니 그걸 취택함을 마땅히 그 시절에 합하게 해야 됨을 이른 것이고, 땅의 재물에 設施하는 것은 地理가 적의함이 있나니 禮를 행하는 물건을 設施하는 것이 모두 땅에서 생산해내는 財利임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토지가 각각 적의한 바의 생산이 있으니, 가히 그 땅에 없는 것을 강요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은 자연히 귀신에 순응하며 人心에 부합하여 만물이 각각 그 이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人官有能은 제사를 돕는 집사 관원을 각각 그 능숙함에 따라서 그에게 맡겨야 됨을 이르니, 대개 사람마다 각각 능숙한 것이 있고 능숙하지 못한 것이 있다. 물건 하나하나가 이로움이 있다는 것은 물건의 하나하나가 각각 이로운 바가 있음을 이르니, 예컨대 누룩은 술과 단술을 만드는데 이로우며, 오동나무와 대나무는 거문고와 생황을 만드는데 이로운 따위이다. 하늘이 내지 않는 것은 제철이 아닌 물건을 이른 것이고, 땅이 기르지 아니함은 산의 물고기·자라와 연못의 사슴과 돼지 따위이다.
故必擧其定國之數하야 以爲禮之大經하나니 禮之大倫은 以地廣狹이오 禮之薄厚은 與年之上下니 是故年雖大殺하나 衆不匡懼는 則上之制禮也節矣일새니라
이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 나라를 定立(成立)한 賦稅 數量을 들어서 써 禮의 큰 떳떳한 법을 삼으나니, 禮의 큰 次序는 땅의 넓고 좁음으로써 정하고, 禮의 박하고 후한 것은 그 해의 上下(풍년·흉년)와 더불어 정하나니, 이렇기 때문에 그 해가 비록 크게 減傷(흉년)되더라도 민중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禮를 제정함이 節度가 있었기 때문에서이다.
定은 이룸과 같고, 數는 부세가 들어오는 수량이다. 「王制」에 말하기를 제사는 세입 수량의 나머지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禮가 재물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이 수량으로써 禮를 행하는 떳떳한 법을 삼는다. 禮의 큰 次序는 땅의 廣狹으로써 한다는 것은 天子와 諸侯와 卿大夫가 땅이 넓고 좁음이 있기 때문에 禮의 次序와 종류가 동일하지 않아 땅이 넓은 사람은 禮가 갖추어지고 땅이 좁은 사람은 禮가 減殺된다. 禮之薄厚은 그 해의 풍년·흉년과 더불어 등급을 매기나니, 「王制」에서 말하기를 풍년이라고 해서 사치를 하지 않으며, 흉년이라고 해서 검박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祭禮를 말한 것이요, 여기서는 諸禮를 겸하여 말했을 뿐이다. 大殺은 그 해가 흉년이 들어 세금의 수입이 크게 감쇄됨이 있음을 이른다. 匡은 恇과 더불어 통용되니, 두려워함이다. 민중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도랑과 구렁에서 나뒹구는 걱정이 없음을 이른 것이니, 이는 그 禮를 제정함이 節度가 있고 재물을 지나치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禮는 時爲大하고 順次之하고 體次之하고 宜次之하고 稱次之니라 堯授舜하며 舜授禹하며 湯放桀하며 武王伐紂는 時也니 詩云匪革(棘)其猶라 聿追來孝라하니라
禮는 때를 따름이 가장 크고, 윤리를 순응함이 그에 다음가고, 형체를 따름이 그에 다음가고, 적의함에 따름이 그에 다음가고, 알맞게 함이 그에 다음간다.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물려주며, 舜임금이 禹임금에게 물려주며, 湯임금이 桀을 추방하며, 武王이 紂를 정벌하였던 것은 때에 따른 것이니, 󰡔詩經󰡕에 이르기를 ‘그 계책을 이루는데 급히 한 것이 아니라 先代의 사업을 뒤이어서 장래의 효도를 이루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때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큼이 되는데, 堯임금·舜임금·湯임금·武王의 일이 동일하지 않았던 것은 각각 그 때를 따랐기 때문에서이다. 聖王이 天命을 받아 천하를 얻음에 있어서 반드시 一代의 禮制를 정하여 혹은 전에 것을 인습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기도 하는 것을 각각 때의 적의함에 따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를 따름이 큼이 된다고 하였다. 順體宜稱 네가지 것은 아래 글에서 그것을 분석하였다. 詩는 「大雅」 文王有聲의 篇이다. 革은 급함이다. 猶는 猷와 통용되는데, 계책이다. 聿는 오직이다. 말하자면 文王이 豐邑을 만든 것이 당초에 자기의 계책을 이루는데 급히 서두른 것이 아니라 오직 先人의 일을 뒤이어서 그 바야흐로 오는 효도를 이루어가지고 先業을 떨어뜨리지 아니하려고 하였던 것 뿐이다. 지금 󰡔詩經󰡕의 글에는 匪棘其欲遹追來孝로 쓰여 있다.
天地之祭와 宗廟之事와 父子之道와 君臣之義는 倫也니라
天地의 제사와 宗廟의 일과 父子의 도리와 君臣의 의리는 윤리이다.
王者는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고 땅을 어머니로 섬긴다. 그렇기 때문에 天地와 宗廟와 父子와 君臣 네가지 것은 바로 자연의 질서이기 때문에 윤리라고 한 것이고, 질서를 가히 어지럽힐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따르는 것이 다음간다.
社稷山川之事와 鬼神之祭는 體也니라
社稷과 山川의 일과 鬼神의 제사는 형체이다.
社稷·山川·鬼神의 禮가 각각 그 형체의 輕重에 따라서 禮의 융숭함과 감쇄를 삼게 되나니 그렇기 때문에 형체가 그에 다음간다고 말하였다.
喪祭之用과 賓客之交는 義也니라
喪禮와 祭禮의 비용과 손님과의 교제는 의리이다.
이미 의리에 그렇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반드시 일에 따라 적의함에 합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적의함이 그에 다음간다고 말하였다.
羔豚而祭에 百官皆足하며 大牢而祭에 不必有餘니 此之謂稱也니라 諸侯는 以龜爲寶하며 以圭爲瑞하고 家不寶龜하고 不藏圭하며 不臺門은 言有稱也니라
작은 양과 작은 돼지로 제사지냄에 온갖 執事官들이 모두 넉넉히 祭肉을 받아가며, 大牢로 제사를 지냄에 반드시 남음이 있지 않으나니 이것을 알맞음이라고 이른다. 諸侯는 거북껍데기로써 보배를 삼으며 圭壁으로써 祥瑞를 삼고, 大夫 집은 거북껍데기를 보배로 삼지 아니하고 圭壁을 소장하지 아니하며 문옆에 臺를 쌓지 않는 것은 말하자면 알맞음이 있는 것이다.
諸侯는 나라를 소유함에 있어서 마땅히 吉凶을 점쳐서 상세히 할 줄을 알아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거북껍데기로써 보배를 삼는다. 家는 大夫를 이른다. 大夫는 지위가 낮으니 마땅히 거북껍데기를 보배로 삼아 소장하지 않아야 하고, 五等의 諸侯들은 각각 圭壁을 두어가지고서 상서로운 符信으로 삼되 또 天子가 하사한 것으로써 상서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써 상서를 삼고, 大夫는 임금의 사신됨이 아니라면은 그걸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그걸 집안에 소장하지 않는다. 臺門이라는 것은 문 양쪽 옆에 흙을 쌓아 臺를 만들고 그 臺 위에 집을 지으나니, 大夫가 그렇게 아니함은 각각 그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맞게 함이 그에 다음간다고 하였다.
(이하 생략)
禮有以多爲貴者, 天子七廟, 諸侯五, 大夫三, 士一.
天子之豆二十有六,
諸公十有六,
諸侯十有二,
上大夫八, 下大夫六.
諸侯七介, 七牢, 大夫五介, 五牢,
天子之席五重, 諸侯之席三重, 大夫再重.
天子崩, 七月而葬, 五重, 八翣, 諸侯五月而葬, 三重, 六翣. 大夫三月而葬, 再重, 四翣. 此以多爲貴也.
有以少爲貴者, 天子無介, 祭天特牲.
天子適諸侯, 諸侯膳以犢, 諸侯相朝, 灌用鬱鬯, 無籩豆之薦. 大夫聘禮以脯醢,
天子一食, 諸侯再, 大夫士三, 食力無數,
大路繁纓一就, 次路繁纓七就.
圭璋特,
琥璜爵.
鬼神之祭單席.
諸侯視朝, 大夫特, 士旅之. 此以少爲貴也.
有以大爲貴者. 宮室之量, 器皿之度, 棺槨之厚, 丘封之大, 此以大爲貴也. 有以小爲貴者. 宗廟之祭, 貴者獻以爵, 賤者獻以散, 尊者擧鱓, 卑者擧角. 五獻之尊門外缶, 門內壺. 君尊瓦甒. 此以小爲貴也.
有以高爲貴者. 天子之堂九尺, 諸侯七尺, 大夫五尺, 士三尺. 天子諸侯臺門, 北以高爲貴也.
有以下爲貴者. 至敬不壇, 埽地而祭. 天子諸侯之尊廢禁, 大夫士棜禁. 此以下爲貴也.
禮有以文爲貴者. 天子龍袞, 諸侯黼, 大夫黻, 士玄衣纁裳, 天子之冕朱綠藻, 十有二旒, 諸侯九, 上大夫七, 下大夫五, 士三. 此以文爲貴也.
有以素爲貴者, 至敬無文, 父黨無容. 大圭不琢, 大羹不和, 大路素而越席, 犧尊, 䟽布鼏, 樿杓. 此以素爲貴也.
孔子曰禮不可不省也니 禮不同하나 不豐不殺라하시니 此之謂也니 蓋言稱也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禮를 가히 살피지 아니할 수가 없나니, 禮가 동등하지 아니하나 풍서하여 넘치지 아니하고 감쇄하여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이니, 대체 알맞음을 말한 것이다.
省은 살핌이다. 禮의 등급이 비록 등일하지는 않지마는 각각 당연한 법칙이 있으니, 풍성하게 하면 넘치고 감쇄하면 미치지 못하니 오직 알맞음만이 좋은 것이 된다.
禮之以多爲貴者는 以其外心者也니라 德發揚하야 詡(許)萬物일새니 大理라 物博이니 如此則得不以多爲貴乎아 故君子樂其發也니라
禮가 많은 것으로써 귀함을 삼는 것은 그 마음을 外方에 쓰기 때문에서이다. 이는 天地의 德이 發揚하여 萬物에 두루 미침을 보았기 때문이니, 이치의 포괄된 것이 크므로 사물을 이룸이 넓으니, 이와 같으면 많은 것으로써 귀함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君子는 그 禮가 밖에 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을 써서 물건을 갖춘 祭享을 이룬다면 마음이 물건에 있기 때문에 外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써 물건이 구비된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聖人이 대개 天地의 德이 發揚하여 밖에 드러나 성대하게 만물에 두루 미침을 보았기 때문에서이니, 이는 그 이치의 포괄된 것이 크기 때문에 사물의 이루어진 것이 넓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많은 것으로써 귀함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禮를 제정하는 君子가 써 그 外方에 마음을 써가지고서 써 물건 갖춤을 이루는 것을 즐거워한 것이다.
禮之以少爲貴者는 以其內心也니라 德産之致也精微하니 觀天下之物이 無可以稱其德者일새니 如此則得不以少爲貴乎아 是故君子愼其獨也니라
禮가 적은 것으로써 귀함을 삼는 것은 그 마음을 內面에 쓰기 때문에서이다. 이는 天地의 德이 만물을 생산함이 치밀하고 精微하니, 天下의 물건이 가히 써 그 德에 알맞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서이니, 이와 같이하면은 적은 것으로써 귀함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君子는 그 홀로를 삼가한다.
<생략>
古之聖人은 內之爲尊하고 外之爲樂(洛)하며 少之爲貴하고 多之爲美니 是故先王之制禮也엔 不可多也며 不可寡也라 唯其稱也니라
古代의 聖人은 內面을 존중하고 外面을 즐거워하며, 적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많은 것을 아름답게 여기나니, 이렇기 때문에 先王이 禮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적게 할 데에 있어서) 가히 많게 할 수 없으며, (많게 할 데에 있어서) 가히 적게 할 수가 없으므로 오직 그 알맞게만 하였다.
尊은 󰡔中庸󰡕에 德性을 높인다는 尊과 같으니, 공경스럽게 받드는 뜻이다. 그 內面에 있는 誠敬을 높이기 때문에 적은 물건이라도 또한 족히 써 귀함이 될 수 있고, 그 밖에 있는 儀物을 즐거워한다면은 반드시 물건이 많아야만이 이에 가히 써 아름다워지나니 마땅히 적게 할 것을 가히 많게 할 수 없고, 마땅히 많게 할 것을 가히 적게 할 수 없으므로 혹은 그 內面에 알맞게 하기도 하고 혹은 그 外面에 알맞게 하기도 한다.
是故君子大牢而祭를 謂之禮오 匹士大牢而祭를 謂之攘이니라
이렇기 때문에 君子가 大牢로 제사지내는 것을 禮라고 이르고, 匹士가 大牢로 제사지내는 것을 훔치는 것이라고 이른다.
禮라고 이른 것은 알맞은 것이요, 훔쳤다고 이른 것은 알맞지 않은 것이다. ○생략
管仲이 鏤簋朱紘(宏)하며 山節藻梲(拙)한대 君子以爲濫矣라하고
管仲이 簠簋에 조각을 하고 면류관 끈을 붉게 하며, 斗栱에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 水草를 그리니, 君子가 참람하다고 하였다.
管仲은 齊나라 大夫이다. 鏤簋는 簠簋에 조각한 장식이 있는 것이다. 紘은 면류관의 끈인데, 명주실 끈으로 그것을 만들어 턱 아래에서 구부려가지고 위로 양쪽 옆의 비녀에 연속시켜 나머지를 드리워가지고 갓끈을 삼는다. 天子는 붉은 것으로 하고, 諸侯는 푸른 것으로 하고, 士大夫는 검은 것으로 한다. 山節은 기둥 위의 斗栱에 산을 조각한 것이다. 藻는 水草이다. 藻梲은 水草를 들보 위의 동자기둥에 그린 것이니, 이는 모두 管仲이 禮를 참람되게 한 일이다. 濫은 참람함이다.
晏平仲이 祀其先人호대 豚肩不揜豆하며 澣衣濯冠以朝한대 君子以爲隘矣라하니라
晏平仲이 그 先人에게 제사지내되 돼지의 어깨가 나무 접시를 덮지 못하며, 세탁한 의복과 세탁한 冠으로써 조회를 하니, 君子가 器局이 좁다고 하였다.
晏平仲은 또한 齊나라 大夫이다. 大夫는 제사에 少牢(양·돼지)를 쓰나니 돼지를 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周나라 사람은 어깨를 귀하게 여기어 어깨는 도마에 있고 나무 접시에 있지 않는 것인데, 이는 다만 그 극히 적은 것을 비유하였으니, 작은 돼지의 양쪽 어깨를 합쳐도 또한 족히 써 나무 접시를 가릴 수가 없기 때문에 나무 접시를 빌려서 말하였다. 위에서는 不豊不殺를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管仲과 晏子의 일을 거론하여 그걸 밝혔으니, 管仲은 풍성하게 해서 알맞지 않았고, 晏子는 줄여가지고 알맞지 않은 것이다. 隘는 좁음이다.
是故君子之行禮也에 不可不愼也니 衆之紀也라 紀散而衆亂하나니라
이렇기 때문에 君子가 禮를 행함에 있어서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나니, 여러 사람들의 기강이 되므로 기강이 흩어지면은 여러 사람들이 문란해진다.
<생략>
孔子曰我戰則克하고 祭則受福이라하시니 蓋得其道矣일새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싸우면 이길 것이고, 제사지내면 福을 받는다.”고 하셨으니, 대체 그 禮를 행하는 도리를 얻었기 때문에서이다.
기록한 사람이 孔子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해석하기를 孔子께서 써 이 두가지를 능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대개 그 禮를 행하는 도리를 얻었기 때문에서이다.
君子曰祭祀不祈하며 不麾(揮)蚤(早)하며 不樂(洛)葆(保)大하며 不善嘉事하며 牲不及肥大하며 薦不美多品이니라
君子가 말하기를 “祭祀에 福을 祈求하지 아니하며, 일찍 지내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지 아니하며, 祭器와 幣帛이 큰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아름다운 일을 좋게 여겨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며, 희생은 비대함에 이르지 아니하며, 올리는 것은 식품이 많음을 아름답게 여기지 아니한다.”
<생략>
孔子曰臧文仲이 安知禮리오 夏父弗綦(忌)逆祀而弗止也하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臧文仲이 어찌 禮를 알리오? 夏父弗綦가 거꾸로 제사를 지내되 저지하지 못하였다.”
臧文仲은 魯나라 大夫 藏孫辰이다. 夏父弗綦는 사람의 성명이다. 魯나라 莊公이 逝去하자 適子 閔公을 세우고, 閔公이 逝去하자 僖公을 세웠는데 僖公은 莊公의 庶子요, 閔公의 庶兄이었다. 그런데 僖公이 죽자, 아들 文公이 즉위하여 2年 8月에 太廟에서 祫祭를 지낼 적에 夏父弗綦가 宗伯이 되어서 禮를 관장하였으되 閔公을 옮겨가지고 僖公의 밑에다 놓았으니, 이는 신하가 임금의 위에 있어가지고 尊卑를 거슬려 어지럽힌 것이니, 불가함이 큰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文仲으로써 禮를 안다고 하자 孔子께서 그가 大夫가 되었음으로서도 능히 거꾸로 제사지낸 사실을 저지하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禮를 앎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시었다.
燔(煩)柴於奧(爨)하니 夫奧者는 老婦之祭也니 盛於盆하며 尊於甁이니라
부뚜막에서 폐백과 희생을 올려놓은 섶을 불살랐으니, 대체 부뚜막이라는 것은 (先代에 밥짓는 방법을 개발했던) 老婦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니, 이 제사에는 동이에 밥을 담으며, 병에 술동이처럼 술을 담는 것이다.
<생략>
禮也者는 猶體也니 體不備면 君子謂之不成人이니라하나니 設之不當이 猶不備也니라 禮有大有小하며 有顯有微하니 大者不可損이오 小者不可益이며 顯者不可揜이오 微者不可大也니라 故經禮三百과 曲禮三千이 其致一也니 未有入室而不由戶者하니라
禮라는 것은 신체와 같으니, 신체가 구비되지 아니하면 君子가 그를 완성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이르나니, 禮를 設施함의 타당하지 않는 것이 신체가 구비하지 아니함과 같다. 禮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드러난 것도 있고 은미한 것도 있으니, 큰 것은 가히 감소시킬 수 없는 것이요, 작은 것은 증익시킬 수 없으며, 드러난 것은 가릴 수 없는 것이요, 은미한 것은 가히 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禮 3백가지와 소소한 禮 3천가지가 그 극치는 하나이니, 방에 들어가면서 문을 경유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생략>
君子之於禮也에 有所竭情盡愼하야 致其敬而誠若하며 有美而文而誠若이니라
君子가 禮에 있어서 情을 다하고 삼가함을 다하여 그 공경을 극진히하여 성실한 바가 있으며, 아름답고 문채나 성실함이 있다.
<생략>
(이하 생략)
君子之於禮也, 有直而行也, 有曲而殺也, 有經而等也, 有順而討也, 有摲而播也. 有推而進也, 有放而文也, 有放而不致也, 有順而摭也.
三代之禮一也, 民共由之, 或素或靑, 夏造殷因.
周坐尸, 詔侑武方, 其禮亦然, 其道一也.
夏立尸而卒祭, 殷坐尸,
周旅酬六尸, 曾子曰, “周禮其猶醵與.”
君子曰, “禮之近人情者, 非其至者也. 郊血, 大饗腥, 三獻爓, 一獻孰.
是故君子之於禮也, 非作而致其情也, 此有由始也. 是故七介以相見也, 不然則已慤. 三辭三讓而至, 不然則已蹙.
故魯人將有事於上帝, 必先有事於頖宮. 晉人將有事於河, 必先有事於惡池. 齊人將有事於泰山, 必先有事於配林. 三月繫, 七日戒, 三日宿, 愼之至也.
故禮有擯詔, 樂有相步, 溫之至也. 禮也者, 反本修古, 不忘其初者也. 故凶事不詔, 朝事以樂.
醴酒之用, 玄酒之尙, 割刀之用, 鸞刀之貴. 莞簞之安而稿鞂之設.
是故先王之制禮也, 必有主也, 故可述而多學也.
君子曰, “無節於內者, 觀物弗之察矣. 欲察物而不由禮, 弗之得矣. 故作事不以禮, 弗之敬矣. 出言不以禮, 弗之信矣. 故曰, “禮也者, 物之致也.
是故昔先王之制禮也, 因其財物而致其義焉爾. 故作大事必順天時, 爲朝夕必放於日月, 爲高必因丘陵, 爲下必因川澤. 是故天時雨澤, 君子達亹亹焉.
是故昔先王尙有德, 尊有道, 任有能, 擧賢而置之, 聚衆而誓之. 是故因天事天, 因地事地. 因名山升中于天, 因吉土以饗帝于郊, 升中于天而鳳凰降, 龜龍假, 饗帝於郊而風雨節寒暑時. 是故聖人南面而立而天下大治.
天道至敎, 聖人至德. 廟堂之上, 罍尊在阼, 犧尊在西. 廟堂之下, 縣鼓在西, 應鼓在東. 君在阼, 夫人在房, 大明生於東, 月生於西, 此陰陽之分, 夫婦之位也. 君西酌犧象, 夫人東酌罍尊, 禮交動乎上, 樂交應乎下, 和之至也.
禮也者, 反其所自生. 樂也者, 樂其所自成. 是故先王之制禮也以節事, 修樂以道志. 故觀其禮樂而治亂可知也. 蘧伯玉曰, “君子之人達.” 故觀其器而知其工之巧, 觀其發而知其人之知. 故曰, “君子愼其所以與人者.
太廟之內敬矣. 君親牽牲, 大夫贊幣而從. 君親制祭, 夫人薦盎. 君親割牲夫人薦酒.
卿大夫從君, 命婦從夫人, 洞洞乎其敬也, 屬屬乎其忠也, 勿勿乎其欲其饗之也.
納牲詔於庭, 血毛詔於室, 羹定詔於堂. 三詔皆不同位, 蓋道求而未之得也.
設祭于堂, 爲祊乎外, 故曰, “於彼乎? 於此乎?
一獻質, 三獻文, 五獻祭, 七獻神.
大饗, 其王事與, 三牲魚腊, 四海九州之美味也. 籩豆之薦, 四時之和氣也. 內金, 示和也. 束帛加璧, 尊德也. 龜爲前列, 先知也. 金次之, 見情也. 丹漆絲纊竹箭, 與衆共財也. 其餘無常貨, 各以其國之所有則致遠物也. 其出也, 肆夏而送之, 蓋重禮也.
祀帝於郊, 敬之至也. 宗廟之祭, 仁之至也. 喪禮, 忠之至也. 備服器, 仁之至也. 賓客之用幣, 義之至也. 故君子欲觀仁義之道, 禮其本也.
君子曰, “甘受和, 白受采. 忠信之人可以學禮, 苟無忠信之人則禮不虛道, 是以得其人之爲貴也.”
孔子曰, “誦詩三百, 不足以一獻. 一獻之禮不足以大饗. 大饗之禮不足以大旅. 大旅具矣, 不足以饗帝. 毋輕議禮!”
子路爲季氏宰. 季氏祭, 逮闇而祭, 日不足, 繼之以燭. 雖有强力之容, 肅敬之心, 皆倦怠矣. 有司跛倚以臨祭, 其爲不敬大矣.
他日, 祭, 子路與, 室事交乎戶, 堂事交乎階, 質明而始行事, 晏朝而退. 孔子聞之, 曰, “誰謂由也而不知禮乎!”

學記 第十八

石梁王氏가 말하기를 六經에서 學字를 말한 것이 「說命」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이 「學記」篇은 先王의 학교 제도와 가르치는 사람·배우는 사람에 대한 법을 상세히 말하지 않고 대부분 이 일반적으로 논하였으니, 󰡔大學󰡕의 篇에 가르침은 이 무엇을 가르치며, 배움은 이 무엇을 배우는 것인 것만 같지 못하다.
發慮憲하며 求善良은 足以謏(小)聞이어니와 不足以動衆이며
생각을 발동함이(생각을 함이) 법칙에 맞으며, 善良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충분히 써 조금 명성을 이룰 수는 있거니와 충분히 써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發慮憲은 그 생각을 이루어서(극진히 해서) 써 법칙에 맞음을 구한 것을 이르고, 善良한 사람을 구함은 어진이를 친근히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 것은 가히 써 조금 명성을 이룰 수는 있거니와 능히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就賢體遠은 足以動衆이어니와 未足以化民이니
어진 사람에게로 나아가며 䟽遠한 신하를 내 몸처럼 體察해 주는 것은 충분히 써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있거니와 충분히 써 백성들을 感化시키지는 못하나니,
어진 사람에게로 나아감은 어질고 덕이 있는 선비에게 禮로 낮추는 것이니, 王이 孟子에게로 나아가서 만나보려고 했다는 就와 같고, 體는 󰡔中庸󰡕에 여러 신하들을 내 몸처럼 體察한다는 體와 같으니, 가설적으로 자신으로써 그 신하 처지에 처하여 그 마음을 살펴봄을 이른 것이요, 遠은 䟽遠한 신하이다. 이 두가지 것은 가히 써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있거니와 능히 온 국민들을 感化시킬 수는 없다.
君子如欲化民成俗인댄 其必由學乎인저
君子가 백성들을 感化시키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고자 할진댄 그 반드시 학문을 緣由해야 할까 보다.
백성들을 감화시키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룸은 반드시 唐나라와 虞나라처럼 아아! 변화하여 이에 화목하여야만이 이에 지극함이(극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은 학문을 버린다면은 무엇으로써 하겠는가? 이 학문은 바로 󰡔大學󰡕의 방도이니, 明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하는 일이다.
玉不琢하면 不成器하고 人不學하면 不知道하나니 是故古之王者建國君民하사 敎學爲先하시니 兌(說)命曰念終始典于學이라하니 其此之謂乎인저
玉이 磨琢하지 않으면은 그릇을 이룰 수 없고,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은 道를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古代의 王者가 나라를 세우고 국민들에게 임금이 되시어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우선을 삼으셨으니, 「兌命」에 말하기를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항상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은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인 성싶다.
建國君民은 국가를 건립하여 써 국민들에게 君長노릇함을 이르고, 敎學爲先은 가르침을 세우고 배움을 세움으로써 우선의 일을 삼는 것이다. 兌命은 商書이다. 典은 항상이다.
雖有嘉肴하나 弗食하면 不知其旨也하며 雖有至道하나 弗學이면 不知其善也하나니 是故學然後知不足하며 敎然後知困이니 知不足이라야 然後能自反也하며 知困이라야 然後能自强也니 故曰敎學相長也니 兌命曰學(效)學半이라하니 其此之謂乎인저
아무리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르며, 아무리 지극한 도리가 있지마는 배우지 않으면은 그 좋음을 알 수 없나니, 이렇기 때문에 배운 뒤에야만이 부족함을 알며, 가르친 뒤에야만이 곤욕스러움을 알게 되나니, 부족함을 알아야만이 그런 뒤에 능히 스스로 반성할 수 있으며, 곤욕스러움을 알아야만이 그런 뒤에 능히 스스로 힘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 伸長시켜준다고 이르나니, 「兌命」에서 말하기를 ‘남을 가르침이 배움의 절반이 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인가 보다.
배운 뒤에야 부족함을 앎은 남에게 스승으로 섬겨 의뢰를 받아야만이 바야흐로 자기가 이르지 못한 바를 알게 됨을 이른 것이요, 가르친 뒤에야 곤욕스러움을 앎은 써 남의 요구에 부응할 수가 없으면은 스스로 곤욕스러움을 알게 됨을 이른 것이요, 스스로 반성함은 돌이켜 구할 줄을 아는 것이요, 스스로 힘씀은 노력하여 갑절이나 더 앞으로 나아가는 뜻이 있는 것이요, 敎學相長은 내가 남을 가르치는 것과 남에게 의뢰받는 것이 모두 서로 長進시켜 도와줌이 있음을 이른 것이다. 「說命」의 남을 가르침이 배우는 것의 절반이 된다고 함을 인용한 것은 劉氏가 말하기를 남을 가르치는 공부가 내 자신의 학문하는 절반을 차지한다. 대개 처음에 자기를 닦음은 써 그 本體를 세우는 것이니, 이것이 한 절반쯤 되고, 마침내 남을 가르치는 것은 써 그 쓰임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또 한 절반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써 終始토록 학문에 마음을 항상 두는 바이다. 자기를 성취하고 남을 성취시켜서 안팎의 道를 합해야만이 그런 뒤에야 학문의 온전한 功이 되는 것이다.
古之敎者家有塾하며 黨有庠하며 術(當爲州)有序하며 國有學하더니 比年入學이어든 中年考校하야 一年에 視離經辨志하고 三年에 視敬業樂羣하고 五年에 視博習親師하고 七年에 視論學取友하나니 謂之小成이오 九年에 知類通達하야 强立而不反하나니 謂之大成이니라
古代에 가르쳤던(교육을 시켰던) 사람이 집에는 書塾(書堂)이 있었으며, 黨에는 庠이 있었으며, 州에는 序가 있었으며, 國都(서울)에는 太學이 있었는데, 매년마다 학교에 들어가면 해를 띄어서(間年해서) 고찰 조사하여 1年만에 經書의 句讀를 떼고 뜻을 구별하는 것을 살펴보고, 3年만에 학업에 공경히 하고(專心하고) 여러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고, 5年만에 학습을 널리하고 스승을 친근히 하는 것을 살펴보고, 7年만에 학문을 논하고 벗을 取擇하는 것을 살펴보나니, 이것을 작은 성취라고 이르고, 9年만에 類推할 줄을 알아서 通達하여 굳굳하게 자립하여 道를 위반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큰 성취라고 이른다.
옛적에는 25戶가 閭가 되는데, 함께 한 마을에 있으면서 마을 앞에 문이 있고 문 옆에 서당이 있었는데, 백성으로서 집에 있는 사람이 朝夕으로 서당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500戶가 黨이 되는데, 黨의 학교를 庠이라고 이르나니, 마을 서당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가르친다. 術은 마땅히 州가 되어야 되나니, 12,500戶가 州가 된다. 州의 학교를 序라고 하는데, 󰡔周禮󰡕에 鄕大夫가 봄가을에 禮로써 백성들을 회합시켜 州의 序 學校에서 활쏘기를 연습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序는 黨의 학교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가르친다. 天子가 도읍한 바와 諸侯 수도서울 안의 학교를 國學이라고 이르나니, 써 天子의 큰아들·여러 아들들과 卿大夫와 士의 아들과 올라온 준수하게 뽑힌 선비들을 가르친다. 比年은 매년인데, 매년마다 모두 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中年은 1年을 띄운 것이니, 「小記」에 하나 이상을 띄운다는 中과 더불어 같으니, 언제나 間一年해서 그 才藝의 진취여부를 고찰한 것이다. 離經은 經書의 句讀를 떼는 것이요, 辨志는 그 趨向의 사특함과 바름을 구별하는 것이다. 학업에 공경을 하면은 익히는 바에 있어서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함이 없게 되고, 여러 사람들과 즐거이 잘 어울리면은 친구간에 반목함이 없을 것이요, 학습을 널리하면은 程度로써 제한을 삼지 않고, 스승을 친근히 하면은 가르침에 있어서 좋아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論學은 학문의 깊은 것을 講求하는 것이요, 取友는 유익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와 벗하는 것이다. 능히 이와 같이하면은 이는 학문이 조금 성취될 것이다. 9年에 이르면은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가 정밀하여 종류에 따라서 長進하여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어서 우뚝하게 자립하는 행실이 있어 외부의 물건이 써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을 터이니, 이것은 크게 성취하는 것이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몇 글귀가 모두 이 위의 두 글자는 배우는 것을 말하였고, 아래의 두 글자는 소득처를 말한 것이니, 예컨대 經傳의 句讀를 뗌은 바로 이 배우는 것이요, 뜻을 구별함은 이 소득처이니, 다른 것도 이와 같다.
夫然後足以化民易俗하야 近者說服하고 而遠者懷之니 此大學之道也니라 記에 曰蛾子時術之라하니 其此之謂乎인저
대체 그런 뒤에야 충분히 써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변혁시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기뻐하여 복종하고, 먼데 있는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게 되리니, 이것은 대학교의 방도이다. 옛 기록에 말하기를 ‘개미의 새끼가 때때로 그 흙을 물어 나르는 것을 학습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인가 보다.
앞에서 成俗을 말함은 그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것이요, 여기서 易俗을 말한 것은 그 더러운 풍속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크게 성취한 선비로써 벼슬로 그를 시킨다면은 그 功效가 이와 같으니, 이것은 이른바 대학교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도이다. 개미 새끼는 벌레로서의 작은 것인데, 또한 때때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학습하여 큰 개미둑을 이루어내나니, 이로써 學者가 배움을 축적함으로 말미암아 큰 道를 성취함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옛 기록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용하여 그 말을 증명하였다.
大學始敎에 皮弁祭菜는 示敬道也오
大學校에서 처음으로 가르칠 적에 皮弁을 쓰고 先聖(先代의 聖人)·先師(先代의 스승)에게 나물로 제사지내는 것은 道를 존경함을 표시한 것이다.
비로소 가르침은 學者가 입학한 초기이다. 有司가 皮弁의 옷을 입고 先師에게 마름과 水草의 나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 입학자에게 도덕의 예능을 존경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宵雅肄(異)三은 官其始也오
「小雅」에 3篇 詩를 학습하도록 하는 것은 그 始初에 벼슬살이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나물로 제사지내는 때를 당하여 하여금 「小雅」 中의 鹿鳴篇과 四牡篇과 皇皇者華篇 3篇을 노래부르면서 그것을 익히도록 하니, 이 3詩는 모두 임금과 신하가 연회를 벌여 즐거워하면서 서로 위로하는 말이니, 대개 벼슬살이하여 임무를 받은 아름다움으로써 그 처음의 뜻을 유도하여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始初에 벼슬살이하는 것을 일깨워준다고 하였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聖人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合下(본래·본시) 바로 그 쓸 것을 要望하여 바로 요컨대 어진이를 등용하여 써 어질지 못한 사람을 다스리며,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여 써 유능하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니, 때문에 公卿大夫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각각 그 직책 거행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入學鼓篋은 孫其業也오
대학교에 입학함에 북을 쳐서 책상자를 열도록 하는 것은 그 학업을 공손히 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한 때에 大胥의 官員이 북을 쳐가지고서 學士들을 소집하여 學士들이 오게되면은 책상자를 열어서 그 書籍 따위의 물건을 꺼내도록 하니, 이는 그들을 북소리로 일깨워가지고 하여금 공손한 마음으로 그 학업을 진취시키는 것이다. 󰡔書經󰡕에서 말하기를 배움은 뜻을 遜順히 해야 된다고 하였다.
夏楚二物은 收其威也오
개오동나무와 가시나무 두 물건은 그 威儀를 收斂하도록 하는 것이다.
夏는 개오동나무이고, 楚는 가시나무이니, 개오동나무 모양은 둥글고, 가시나무 모양은 모나니, 두가지 물건으로써 종아리채를 만들어 써 그 태만하고 소홀한 사람을 일깨워 그로 하여금 威儀를 수렴하도록 하는 것이다.
未卜禘하야 不視學은 游其志也오 時觀而弗語는 存其心也오 幼者聽而弗問은 學不躐等也니 此七者는 敎之大倫也니라 記에 曰凡學은 官先事오 士先志라하니 其此之謂乎인저
아직 거북점을 쳐서 禘祭를 지내지 않고서는 대학교를 시찰하지 않는 것은 그 뜻을 놀려주는 것이요, 때때로 보고 느끼도록만 하고 이치를 말해주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도록 한 것이요, 어린 사람이 듣기만하고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학문이 등급을 뛰어넘지 않는 것이니, 이 일곱가지 것은 가르침의 큰 질서이다. 옛 기록에 말하기를 ‘무릇 학문은 관리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선비는 뜻을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인가 보다.
禘는 5年만에 지내는 큰 祭禮이니, 5年이 되지 않으면은 대학교를 시찰나가지 아니함은 써 학자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놀려주는 것이니, 이것은 또 仲春과 仲秋에 학교를 시찰하는 禮가 아니다. 하여금 보고서 마음에 느끼도록 만 하고 말하여 써 그 이치를 다 말해주지 아니하여 그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어린 사람은 반드시 능히 질문할 수가 없고, 질문해도 또한 반드시 요체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스승의 말을 듣고서 받아들이기만 하고 질문하는 바가 없나니, 또한 長幼의 등급이 마땅히 이와 같이하여 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劉氏가 말하기를 皮弁을 쓰고 나물로 제사지낸다는 것으로부터 듣기만 하고 질문하지 않는 것에 이르기까지 통틀어 일곱가지는 모두 대학교에서 교육하는 큰 질서이니, 大倫은 큰 節次라고 말한 것과 같다. 官員은 일을 우선으로 하고, 선비는 뜻을 우선으로 함은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官員은 이 이미 벼슬한 사람이고, 선비는 이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이니, 이미 벼슬을 해가지고서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그 직분의 일이 급한 것을 우선으로 해야 되고, 아직 벼슬하지 않고서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행사에 나타난 일을 못하기 때문에 그 뜻을 숭상하는 바를 우선으로 함을 이른다. 子夏가 말하기를 벼슬하면서 넉넉하면 배워야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벼슬살이하면서 학문을 하는 것이요, 王子 墊이 질문하기를 선비는 무엇에 종사하는 것입니까?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뜻을 숭상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아직 벼슬을 않고서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뜻을 숭상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大學󰡕의 방도는 明德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할 뿐인 것이니, 뜻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써 明德을 밝히는 바이고, 일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이니, 일곱가지 일에 있어서 위의 글귀는 모두 가르치는 사람의 일이고, 아래의 글귀는 모두 배우는 사람의 뜻이다.
大學之敎也란 時敎必有正業하며 退息에 必有居學이니 不學操縵이면 不能安弦이오 不學博依면 不能安詩오 不學雜服이면 不能安禮오 不興其藝면 不能樂學이니 故君子之於學也에 藏焉하며 脩焉하며 息焉하며 遊焉이니라
대학교의 교육은 四時의 가르침이 반드시 정상적인 학업이 있으며, 물러나와 쉴 적에는 반드시 燕居하는 학문이 있는데, 거문고와 비파의 현을 가지고 노는 것을 배우지 아니하면은 능히 현에 편안할 수가 없고(손에 익숙하지를 못하고), 詩의 말이 널리 의탁한 것을 배우지 아니하면은 능히 詩에 편안할 수가 없고, 잡다한 禮服를 배우지 아니하면은 능히 禮에 편안할 수가 없고, 그 예능에 흥기하지 아니하면은 능히 학문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君子가 학문에 있어서 간직하며, 닦으며, 휴식하며, 노는 것이다.
舊說에는 大學之敎也時에서 句絶이 되었고, 退息必有居에서 句絶이 되었는데, 지금은 읽을 적에 時字는 下句에 연속시키고, 學字는 윗 글귀에 연속시켰다. 四時의 가르침이 각각 정상적인 학업이 있음을 이른 것이니, 예컨대 봄과 가을에는 禮와 음악으로써 가르치고, 겨울과 여름에는 󰡔詩經󰡕과 󰡔書經󰡕으로써 가르치고, 봄에는 시를 외우고 여름에는 현악기를 타는 따위가 그것이다. 물러나와 한가로이 휴식할 적에 반드시 燕居하는 학문이 있나니, 예컨대 물러나가자 그 사사로이 거처함을 살펴보니 또한 충분히 써 발휘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현악기와 시와 禮는 이 四時에 가르치는 정상적인 학업이고, 현을 가지고 놀고 널리 의탁하고 잡다한 禮服은 이 물러나와 휴식하는 燕居의 학문이다. 무릇 학문하는 방도가 능히 편안함을 귀중하게 여기나니, 편안하면은 마음이 이치와 더불어 융합하여 성숙하게 된다. 그러나 편안함에 이르지를 못하면은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아 가히 하다가 중단함이 있을 수 없음에 있다. 操縵은 거문고와 비파의 현을 가지고 노는 것이니, 처음 배우는 사람이 손과 현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물러나가 쉬더라도 때때로 또한 반드시 그 현을 가지고 놀아서 폐지하지 않아야만이 이에 능히 익숙하여 현에 편안할 수가 있다. 詩人의 比와 興의 말이 대부분 사물의 이치에 의탁하였으니, 사물의 이치가 지극히 넓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배우는 사람이 다만 그 시를 학교에서만 강습하고 물러나와 쉬는 사이에 物理의 의탁하고 있는 것을 널리 구하지를 않는다면은 무엇으로써 그 실제를 징험할 수가 없어서 시의 말에 있어서 반드시 의심스럽고 위태로워 능히 편안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雜服은 冕弁과 衣裳 땅위이니, 先王이 제작함에 있어서 禮가 각각 복식이 있어 지극히 번잡하니, 학자들이 다만 그걸 학교에서만 강습하고 물러나와 쉴 때에 禮를 거행하는 사람의 잡다한 복식을 이리저리 관찰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그 제도를 다 알 수 없어서 禮의 형식에 있어 반드시 어렴풋하여 능히 편안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興이라는 것은 뜻이 興起되어 능히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요, 藝는 바로 세가지 것의 학문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물러나와 쉴 때에 만약 이 세가지 것의 예능에 흥기하지를 않는다면 그를 능히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君子가 학문함에 있어서 간직하고 수행하는 때에 반드시 정상적이 학업이 있다면은 익히는 것이 전일하여 뜻이 분산되지 않을 것이고, 쉬고 노는 즈음에 반드시 燕居의 학문이 있다면은 기르는 것이 순수하여 예능이 더욱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학문이 쉽게 성취된다. ○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이 의복이 각각 등급이 있었으니, 만약에 여러 가지의 의복을 이해한다면은 禮에 있어서 생각이 절반쯤은 지날 것이다.
夫然이라 故安其學而親其師하며 樂其友而信其道하나니 是以雖離師輔而不反也니라 兌命曰敬孫務時敏이면 厥脩乃來라하니 其此之謂乎인저
대체 그러하기 때문에 그 배움을 편안히 하고 그 스승을 친근히 하며, 그 벗을 좋아하고 그 道를 믿으나니, 이렇기 때문에 비록 스승과 도와주는 친구를 떠나있더라도 道를 위반하지 않는다. 「兌命」에서 말하기를 ‘공경하고 공손하여 때때로 민첩함을 힘쓴다면은 그 수행이 이에 오게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인가 보다.
윗 글을 이어서 말하되 간직하고 닦고 놀고 쉼이 학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히 여기고 친근히 하고 좋아하고 믿어서 비록 스승과 벗을 떠나있더라도 또한 道를 위반하지 않는다. 時敏은 때마다 민첩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요, 厥脩乃來는 그 나아가 닦음의 유익함이 물이 끊임없이 흘러온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今之敎者, 呻其佔畢, 多其訊言, 及于數進, 而不顧其安, 使人不由其誠, 敎人不盡其材, 其施之也悖, 其求之也佛. 夫然, 故隱其學而疾其師, 苦其難而不知其益也. 雖終其業, 其去之必速. 敎之不刑, 其此之由乎!
大學之法, 禁於未發之謂豫, 當其可之謂時, 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摩. 此四者, 敎之所由興也.
發然後禁, 則扞格而不勝. 時過然後學, 則勤苦而難成. 雜施而不孫, 則壞亂而不修. 獨學而無友, 則孤陋而寡聞. 燕朋逆其師. 燕辟廢其學. 此六者, 敎之所由廢也.
君子旣知敎之所由興, 又知敎之所由廢, 然後可以爲人師也. 故君子之敎喩也, 道而弗牽, 强而弗抑, 開而弗達. 道而弗牽則和, 强而弗抑則易, 開而弗達則思. 和易以思, 可謂善喩矣.
學者有四失, 敎者必知之, 人之學也, 或失則多. 或失則寡, 或失則易, 或失則止, 此四者, 心之莫同也. 知其心, 然後能救其失也. 敎也者, 長善而救其失者也.
善歌者使人繼其聲, 善敎者使人繼其志. 其言也, 約而達, 微而臧, 罕訾而喩, 可謂繼志矣.
君子知至學之難易而知其美惡, 然後能博喩, 能博喩然後能爲師, 能爲師然後能爲長, 能爲長然後能爲君. 故師也者所以學爲君也. 是故擇師不可不愼也. 記曰, “三王四代唯其師.” 此之謂乎.
凡學之道, 嚴師爲難. 師嚴然後道尊, 道尊然後民知敬學. 是故君之所不臣於其臣者二. 當其爲尸, 則弗臣也. 當其爲師, 則弗臣也. 大學之禮, 雖詔於天子, 無北面, 所以尊師也.
善學者師逸而功倍, 又從而庸之. 不善學者師勤而功半, 又從而怨之. 善問者如攻堅木, 先其易者, 後其節目, 及其久也, 相說以解. 不善問者反此. 善待問者如撞鐘,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 待其從容, 然後盡其聲. 不善答問者反此. 此皆進學之道也.
記問之學不足以爲人師, 必也其聽語乎. 力不能問然後語之. 語之而不知, 雖舍之可也.
良冶之子必學爲裘. 良弓之子必學爲箕. 始駕馬者反之, 車在馬前. 君子察於此三者, 可以有志於學矣.
古之學者, 比物醜類.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學無當於五官, 五官弗得不治. 師無當於五服, 五服弗得不親.
君子曰 “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察於此四者, 可以有志於本矣.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樂記 第十九

凡音之起, 由人心生也. 人心之動, 物使之然也. 感於物而動, 故形於聲. 聲相應, 故生變, 變成方, 謂之音. 比音而樂之, 及干戚羽旄, 謂之樂.
樂者, 音之所由生也, 其本在人心之感於物也. 是故其哀心感者, 其聲噍以殺. 其樂心感者, 其聲嘽以綏. 其喜心感者, 其聲發以散. 其怒心感者, 其聲粗以厲. 其敬心感者, 其聲直以廉. 其愛心感者, 其聲和以柔. 六者非性也, 感於物而后動.
是故先王愼所以感之者. 故禮以道其志, 樂以和其聲, 政以一其行, 刑以防其姦. 禮樂刑政, 其極一也, 所以同民心而出治道也.
凡音者, 生人心者也. 情動於中, 故形於聲, 聲成文, 謂之音. 是故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聲音之道與政通矣.
宮爲君, 商爲臣, 角爲民, 徵爲事, 羽爲物. 五者不亂則無怗懘之音矣.
宮亂則荒, 其君驕. 商亂則陂, 其官壞. 角亂則憂, 其民怨. 徵亂則哀, 其事勤. 羽亂則危, 其財匱. 五者皆亂, 迭相陵, 謂之慢. 如此則國之滅亡無日矣.
鄭衛之音, 亂世之音也, 比於慢矣. 桑問濮上之音, 亡國之音也, 其政散, 其民流, 誣上行私而不可止也.
凡音者, 生於人心者也. 樂者, 通倫理者也. 是故知聲而不知音者, 禽獸是也. 知音而不知樂者, 衆庶是也. 唯君子爲能知樂. 是故審聲以知音, 審音以知樂, 審樂以知政, 而治道備矣. 是故不知聲者不可與言音, 不知音者, 不可與言樂, 知樂則幾於禮矣. 禮樂皆得, 謂之有德. 德者, 得也.
是故樂之隆, 非極音也. 食饗之禮非致味也. 淸廟之瑟朱弦而䟽越, 壹倡而三歎, 有遺音者矣. 大饗之禮, 尙玄酒而俎腥魚, 大羹不和, 有遺味者矣. 是故先王之制禮樂也, 非以極口腹耳目之欲也, 將以敎民平好惡而反人道之正也.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物至知知,
然後好惡形焉. 好惡無節於內, 知誘於外, 不能反躬, 天理滅矣. 未物之感人無窮, 而人之好惡無節, 則是物至而人化物也. 人和物也者, 滅天理而窮人欲者也. 於是有悖逆詐僞之心, 有淫泆作亂之事. 是故强者脅弱, 衆者暴寡, 知者詐愚, 勇者苦怯, 疾病不養, 老幼孤獨不得其所, 此大亂之道也.
是故先王之制禮樂, 人爲之節. 衰麻哭泣, 所以節喪紀也. 鐘鼓干戚, 所以和安樂也. 昏姻冠笄, 所以別男女也. 射鄕食饗, 所以正交接也. 禮節民心, 樂和民聲, 政以行之, 刑以防之. 禮樂刑政, 四達而不悖, 則王道備矣.
樂者爲同, 禮者爲異. 同則相親, 異則相敬. 樂勝則流, 禮勝則離. 合情飾貌者, 禮樂之事也. 禮義立, 則貴賤等矣. 樂文同, 則上下和矣. 好惡著, 則賢不肖別矣. 刑禁暴, 爵擧賢, 則政均矣. 仁以愛之, 義以正之. 如此則民治行矣.
樂由中出, 禮自外作. 樂由中出, 故靜. 禮自外作故文. 大樂必易, 大禮必簡. 樂至則無怨, 禮至則不爭. 揖讓而治天下者, 禮樂之謂也. 暴民不作, 諸侯賓服, 兵革不試, 五刑不用, 百姓無患, 天子不怒. 如此則樂達矣. 合父子之親, 明長幼之序, 以敬四海之內. 天子如此則禮行矣.
大樂與天地同和, 大禮與天地同節. 和故百物不失. 節故祀天祭地. 明則有禮樂, 幽則有鬼神. 如此, 則四海之內合敬同愛矣. 禮者, 殊事合敬者也. 樂者, 異文合愛者也. 禮樂之情同, 故明王以相沿也. 故事與時並, 名與功偕.
故鐘鼓管磬, 羽籥干戚, 樂之器也. 屈伸俯仰, 綴兆舒疾. 樂之文也, 簠簋俎豆, 制度文章, 禮之器也. 升降上下, 周還裼襲, 禮之文也. 故知禮樂之情者能作. 識禮樂之文者能述. 作者之謂聖, 述者之謂明. 明聖者, 述作之謂也.
樂者, 天地之和也. 禮者, 天地之序也. 和故百物皆化. 序, 故羣物皆別. 樂由天作, 禮以地制, 過制則亂, 過作則暴. 明於天地, 然後能興禮樂也.
論倫無患, 樂之情也. 欣喜歡愛, 樂之官也. 中正無邪, 禮之質也. 莊敬恭順, 禮之制也. 若夫禮樂之施於金石, 越於聲音, 用於宗廟社稷, 事乎山川鬼神, 則此所與民同也.
王者功成作樂, 治定制禮. 其功大者其樂備, 其治辯者其禮具. 干戚之舞, 非備樂也. 孰亨而祀, 非達禮也. 五帝殊時, 不相沿樂. 三王異世, 不相襲禮. 樂極則憂, 禮粗則偏矣. 乃夫敦樂而無憂, 禮備而不偏者, 其唯大聖乎.
天高地下, 萬物散殊, 而禮制行矣. 流而不息, 合同而化, 而樂興焉. 春作夏長, 仁也. 秋歛冬藏, 義也. 仁近於樂, 義近於禮. 樂者敦和, 率神而從天. 禮者別宜, 居鬼而從地. 故聖人作樂以應天, 制禮以配地. 禮樂明備, 天地官矣.
天尊地卑, 君臣定矣. 卑高已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小大殊矣. 方以類聚, 物以羣分, 則性命不同矣. 在天成象, 在地成形. 如此則禮者, 天地之別也.
地氣上齊, 天氣下降, 陰陽相摩, 天地相蕩, 鼓之以雷霆, 奮之以風雨, 動之以四時, 煖之以日月, 而百化興焉. 如此則樂者天地之和也.
化不時則不生, 男女無辨則亂升, 天地之情也.
及夫禮樂之極乎天而蟠乎地, 行乎陰陽而通乎鬼神, 窮高極達而測深厚. 樂著大始, 而禮居成物. 著不息者天也, 著不動者地也. 一動一靜者, 天地之間也. 故聖人曰,“禮樂”云.
昔者舜作五弦之琴, 以歌南風. 夔始制樂, 以賞諸侯. 故天子之爲樂也, 以賞諸侯之有德者也. 德盛而敎尊, 五穀時塾, 然侯賞之以樂. 故其治民勞者, 其舞行綴遠. 其治民逸者, 其舞行綴短. 故觀其舞, 知其德. 聞其謚, 知其行也.
大章, 章之也. 咸池, 備矣. 韶, 繼也. 夏, 大也. 殷周之樂盡矣.
天地之道, 寒暑不時則疾, 風雨不節則饑, 敎者, 民之寒暑也, 敎不時則傷世. 事者, 民之風雨也, 事不節則無功. 然則先王之爲樂也, 以法治也, 善則行象德矣.
夫豢豕爲酒, 非以爲禍也, 而獄訟益繁, 則酒之流生禍也. 是故先生因爲酒禮. 壹獻之禮, 賓主百拜, 終日飮酒而不得醉焉. 此先王之所以備酒禍也. 故酒食者, 所以合歡也. 樂者, 所以象德也. 禮者, 所以綴淫也. 是故先王有大事, 必有禮以哀之. 有大福, 必有禮以樂之. 哀樂之分皆以禮終. 樂也者, 聖人之所樂也. 而可以善民心. 其感人深, 其移風易俗, 故先王著其敎焉.
夫民有血氣心知之性, 而無哀樂喜怒之常, 應感起物而動, 然後心術形焉. 是故志微噍殺之音作, 而民思憂.
嘽諧慢易繁文簡節之音作, 而民康樂.
粗厲猛起奮末廣賁之音作, 而民剛毅.
廉直勁正莊誠之音作, 而民肅敬.
寬裕肉好順成和動之音作, 而民慈愛.
流辟邪散狄成滌濫之音作, 而民淫亂.
是故先王本之情性, 稽之度數, 制之禮義, 合生氣之和, 道五常之行, 使之陽而不散, 陰而不密, 剛氣不怒, 柔氣不懾, 四暢交於中, 而發作於外, 皆安其位而不相奪也. 然後立之學等, 廣其節奏, 省其文采, 以繩德厚, 律小大之稱, 比終始之序, 以象事行, 使親䟽貴賤長幼男女之理皆形見於樂. 故曰“樂觀其深矣.”
土敝則草木不長, 手煩則魚鼈不大, 氣衰則生物不遂, 世亂則禮慝而樂淫. 是故其聲哀而不莊, 樂而不安, 慢易以犯節, 流湎以忘本, 廣則容姦, 狹則思欲, 感條暢之氣, 而滅平和之德. 是以君子賤之也.
凡姦聲感人而逆氣應之, 逆氣成象而淫樂興焉. 正聲感人而順氣應之, 順氣成象而和樂興焉. 倡和有應, 回邪曲直, 各歸其分, 而萬物之理各以類相動也.
是故君子反情以和其志, 比類以成其行. 姦聲亂色, 不留聰明, 淫樂慝禮, 不接心術, 惰慢邪辟之氣不設於身體, 使耳目鼻口心知百體皆由順正以行其義,
然後發以聲音, 而文以琴瑟, 動以干戚, 飾以羽旄, 從以簫管, 奮至德之光, 動四氣之和, 以著萬物之理. 是故淸明象天, 廣大象地, 終始象四時, 周還象風雨, 五色成文而不亂, 八風從律而不姦, 百度得數而有常, 小大相成, 終始相生, 倡和淸濁, 迭相爲經. 故樂行而倫淸, 耳目聰明, 血氣和平, 移風易俗, 天下皆寧.
故曰, “樂者, 樂也.” 君子樂得其道, 小人樂得其欲. 以道制欲, 則樂而不亂. 以欲忘道, 則惑而不樂.
是故君子反情以和其志, 廣樂以成其敎, 樂行而民鄕方, 可以觀德矣.
德者, 性之端也. 樂者, 德之華也. 金石絲竹, 樂之器也, 詩言其志也. 歌, 詠其聲也. 舞, 動其容也. 三者本於心, 然後樂器從之. 是故情深而文明, 氣盛而化神, 和順積中, 而英華發外, 唯樂不可以爲僞.
樂者, 心之動也. 聲者, 樂之象也. 文采節奏, 聲之飾也. 君子動其本. 樂其象, 然後治其飾. 是故先鼓以警戒, 三步以見方, 再始以著往, 復亂以飭歸, 奮疾而不拔, 極幽而不隱. 獨樂其志, 不厭其道. 備擧其道, 不私其欲. 是故情見而義立, 樂終而德尊, 君子以好善, 小人以聽過. 故曰, “生民之道樂爲大焉.”
樂也者, 施也. 禮也者, 報也. 樂, 樂其所自生, 而禮反其所自始. 樂草德, 禮報情反始也.
所謂大輅者, 天子之車也. 龍旂九旒, 天子之旌也. 靑黑緣者, 天子之寶龜也. 從之以牛羊之羣, 則所以贈諸侯也.
樂也者, 情之不可變者也. 禮也者, 理之不可易者也. 樂統同, 禮辨異. 禮樂之說, 管乎人情矣.
窮本知變, 樂之情也. 著誠去僞, 禮之經也. 禮樂偩天地之情, 達神明之德, 降興上下之神, 而凝是精粗之體, 領父子君臣之節.
是故大人擧禮樂, 則天地將爲昭焉. 天地訢合, 陰陽相得, 煦嫗覆育萬物, 然後草木茂, 區萌達, 羽翼奮, 角觡生, 蟄蟲昭蘇, 羽者嫗伏, 毛者孕鬻, 胎生者不殰, 而卵生者不殈, 則樂之道歸焉耳.
樂者, 非謂黃鐘大呂弦歌干揚也, 樂之末節也, 故童者舞之. 鋪筵席, 陳尊俎, 列籩豆, 以升降爲禮者, 禮之末節也, 故有司掌之. 樂師辨乎聲詩, 故北面而弦. 宗祝辨乎宗廟之禮, 故後尸. 商祝辨乎喪禮, 故後主人. 是故德成而上, 藝成而下, 行成而先, 事成而後. 是故先王有上有下有先有後, 然後可以有制於天下也.
魏文侯問於子夏曰, “吾端冕而聽古樂, 則唯恐臥. 聽鄭衛之音, 則不知倦. 敢問古樂之如彼何也? 新樂之如此何也?” 子夏對曰, “今夫古樂, 進旅退旅. 和正以廣, 弦匏笙簧, 會守拊鼓, 始奏以文, 復亂以武, 治亂以相, 訊疾以雅. 君子於是語, 於是道古. 修身及家, 平均天下. 此古樂之發也. 
今夫新樂, 進俯退俯, 姦聲以濫, 溺而不止, 及優侏儒, 獶雜子女, 不知父子. 樂終不可以語, 不可以道古, 此新樂之發也.
今君之所問者, 樂也, 所好者, 音也. 夫樂者與音相近而不同.” 文侯曰, “敢問何如?” 子夏對曰, “夫古者天地順而四時當, 民有德而五穀昌, 疾疢不作而無妖祥, 此之謂大當. 然後聖人作爲父子君臣以爲紀綱, 紀綱旣正, 天下大定. 天下大定, 然後正六律, 和五聲, 弦歌詩頌, 此之謂德音, 德音之謂樂. 詩云, ‘莫其德音, 其德克明, 克明克類, 克長克君. 王此大邦, 克順克俾. 俾于文王, 其德靡悔. 旣受帝祉, 施于孫子.’ 此之謂也.
今君之所好者其溺音乎?” 文侯曰, “敢問溺音何從出也?” 子夏對曰, “鄭音好濫淫志, 宋音燕女溺志, 衛音趨數煩志, 齊音敖辟喬志. 此四者, 皆淫於色而害於德, 是以祭祀弗用也.
詩云, ‘肅雍和鳴, 先祖是聽.’ 夫肅肅, 敬也. 雍雍, 和也. 夫敬以和, 何事不行,
爲人君者, 謹其所好惡而已矣. 君好之則臣爲之, 上行之則民從之. 詩云, ‘誘民孔易.’ 此之謂也.
然後聖人作爲鞉鼓椌楬壎箎, 此六者, 德音之音也. 然後鍾磬竽瑟以和之, 干戚旄狄以舞之. 此所以祭先王之廟也, 所以獻酬酳酢也, 所以官序貴賤各得其宜也, 所以示後世有尊卑長幼之序也.
鍾聲鏗, 鏗以立號, 號以立橫, 橫以立武. 君子聽鍾聲, 則思武臣.
石聲磬, 磬以立辨, 辨以致死. 君子聽磬聲, 則思死封疆之臣.
絲聲哀, 哀以立廉, 廉以立志. 君子聽琴瑟之聲, 則思志義之臣.
竹聲濫, 濫以立會, 會以聚衆. 君子聽竽笙簫管之聲, 則思畜聚之臣.
鼓鼙之聲讙, 讙以立動, 動以進衆. 君子聽鼓鼙之聲, 則思將帥之臣. 君子之聽音, 非聽其鏗鎗而已也, 彼亦有所合之也.”
賓牟賈侍坐於孔子, 孔子與之言及樂, 曰, “夫武之備戒之已久, 何也?” 對曰, “病不得其衆也.”
“咏歎之, 淫液之, 何也?” 對曰, “恐不逮事也.”
“發揚蹈厲之已蚤, 何也?” 對曰, “及時事也.”
“武坐, 致右憲左, 何也?” 對曰, “非武坐也.”
“聲淫及商, 何也?” 對曰, “非武音也.” 子曰, “若非武音, 則何音也?” 對曰, “有司失其傳也. 若非有司失其傳, 則武王之志荒矣.” 子曰, “唯丘之聞諸萇宏, 亦若吾子之言是也.”
賓牟賈起, 免席而請, 曰, “夫武之備戒之已久, 則旣聞命矣. 敢問遲之遲而又久, 何也?” 子曰, “居! 吾語汝. 夫樂者, 象成者也. 總干而山立, 武王之事也. 發揚蹈厲, 大公之志也. 武亂皆坐, 周召之治也.
且夫武始而比出, 再成而滅商, 三成而南, 四成而南國是疆, 五成而分, 周公左, 召公右, 六成復綴, 以崇天子.
夾振之而駟伐, 盛威於中國也.
分夾而進, 事蚤濟也. 久立於綴, 以待諸侯之至也.
且女獨未聞牧野之語乎? 武王克殷反商, 未及下車而封黃帝之後於薊, 封帝堯之後於祝, 封帝舜之後於陳, 下車而封夏后氏之後於杞, 投殷之後於宋, 封王子比干之墓, 釋其子之囚, 使之行商容而復其位. 庶民弛政, 庶士倍祿.
濟河而西, 馬散之華出之陽而弗復乘, 牛散之桃林之野而弗復服. 車甲*흔而藏之府庫而弗復用. 倒載干戈, 包之以虎皮. 將帥之士使爲諸侯, 各之曰建櫜. 然後天下知武王之不復用兵也.
散軍而郊射, 左射貍首, 右射騶虞, 而貫革之射息也. 裨冕搢笏, 而虎賁之士說劒也. 祝乎明堂, 而民知孝. 朝覲, 然後諸侯知所以臣. 耕藉, 然後諸侯知所以敬. 五者, 天下之大敎也.
食三老五更於大學, 天子袒而割牲, 執醬而饋, 執爵而酳, 冕而摠干, 所以敎諸侯之弟也. 若此則周道四達, 禮樂交通. 則夫武之遲久不亦宜乎?”
君子曰, “禮樂不可斯須去身. 致樂以治心, 則易直子諒之心油然生矣. 易直子諒之心生則樂, 樂則安, 安則久, 久則天, 天則神. 天則不言而信, 神則不怒而威, 致樂以治心者也.
致禮以治躬則莊敬, 莊敬則嚴威. 心中斯須不和不樂, 而鄙詐之心入之矣. 外貌斯須不莊不敬而易慢之心入之矣.
故樂也者, 動於內者也. 禮也者, 動於外者也. 樂極和, 禮極順. 內和而外順, 則民瞻其顔色而弗與爭也. 望其容貌而民不生易僈焉. 故德煇動於內而民莫不承聽. 理發諸外而民莫不承順. 故曰, “‘致禮樂之道, 擧而錯之天下, 無難矣.’
樂也者, 動於內者也. 禮也者, 動於外者也. 故禮主其減, 樂主其盈. 禮減而進, 以進爲文. 樂盈而反, 以反爲文. 禮減而不進則銷, 樂盈而不反則放, 故禮有報而樂有反. 禮得其報則樂, 樂得其反則安. 禮之報, 樂之反, 其義一也.
夫樂者, 樂也, 人情之所不能免也. 樂必發於聲音, 形於動靜, 人之道也. 聲音動靜, 性術之變盡於此矣. 故人不耐無樂, 樂不耐無形, 形而不爲道, 不耐無亂. 先王恥其亂, 故制雅頌之聲以道之, 使其聲足樂而不流, 使其文足論而不息, 使其曲直繁瘠廉肉節奏足以感動人之善心而已矣, 不使放心邪氣得接焉. 是先王立樂之方也.
是故樂在宗廟之中, 君臣上下同聽之, 則莫不和敬. 在族長鄕里之中, 長幼同聽之, 則莫不和順. 在閨門之內, 父子兄弟同聽之, 則莫不和親. 故樂者, 審一以定和, 比物以飾節, 節奏合以成文, 所以合和父子君臣, 附親萬民也. 是先王立樂之方也.
故聽其雅頌之聲, 志意得廣焉. 執其干戚, 習其俯仰詘伸, 容貌得莊焉. 行其綴兆, 要其節奏, 行列得正焉, 進退得齊焉. 故樂者, 天地之命, 中和之紀, 人情之所不能免也.
夫樂者, 先王之所以飾喜也. 軍旅鈇鉞者, 先王之所以飾怒也. 故先王之喜怒皆得其儕焉. 喜則天下和之, 怒則暴亂者畏之, 先王之道, 禮樂可謂盛矣.
子贛見師乙而問焉, 曰, “賜聞聲歌各有宜也. 如賜者宜何歌也?” 師乙曰, “乙賤工也, 何足以問所宜?” 請誦其所聞而吾子自執焉. 寬而靜柔而正者宜歌頌, 廣大而靜䟽達而信者宜歌大雅, 恭儉而好禮者宜歌小雅, 正直而靜廉而謙者宜歌風, 肆直而慈愛者宜歌商, 溫良而能斷者宜歌齊. 夫歌者. 直己而陳德也, 動己而天地應焉, 四時和焉, 星辰理焉, 萬物育焉.
故商者, 五帝之遺聲也. 寬而靜柔而正者宜歌頌. 廣大而靜, 䟽達而信者, 宜歌大雅. 恭儉而好禮者宜歌小雅. 正直而靜, 廉而謙者, 宜歌風. 肆直而慈愛, 商之遺聲也. 商人識之, 故謂之商. 齊者, 三代之遺聲也, 齊人識之, 故謂之齊. 明乎商之音者臨事而屢斷. 明乎齊之音者見利而讓. 臨事而屢斷, 勇也. 見利而讓, 義也. 有勇有義, 非歌孰能保此.
故歌者, 上如抗, 下如隊, 曲如折, 止如槀木, 倨中矩, 句中鉤, 纍纍乎端如貫珠. 故歌之爲言也長言之也. 說之故言之. 言之不足, 故長言之. 長言之不足, 故嗟歎之. 嗟歎之不足, 故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也.” 子貢問樂.

<祭義第二十四>

祭不欲數, 數則煩, 煩則不敬. 祭不欲䟽, 䟽則怠, 怠則忘. 是故君子合諸天道, 春禘, 秋嘗. 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 樂以迎來, 哀以送往, 故禘有樂而嘗無樂.
致齊於內, 散齊於外. 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
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嘆息之聲.
是故先王之孝也, 色不忘乎目, 聲不絶乎耳, 心志嗜欲不忘乎心. 致愛則存, 致慤則著. 著存不忘乎心, 夫安得不敬乎?
君子生則敬養, 死則敬享, 思終身弗辱也.
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
唯聖人爲能饗帝, 孝子爲能饗親. 饗者鄕也, 鄕之然後能饗焉. 是故孝子臨尸而不怍. 君牽牲, 夫人奠盎. 君獻尸, 夫人薦豆. 卿大夫相君, 命婦相夫人. 齊齊乎其敬也. 愉愉乎其忠也. 勿勿諸其欲其饗之也.
文王之祭也, 事死者如事生, 思死者如不欲生, 忌日必哀, 稱諱如見親, 祀之忠也. 如見親之所愛, 如欲色然, 其文王與. 詩云, “明發不寐, 有懷二人.” 文王之詩也. 祭之明日, 明發不寐, 饗而致之, 又從而思之. 祭之日樂與哀半, 饗之必樂, 已至必哀.
仲尼嘗, 奉薦而進, 其親也慤. 其行也趨趨以數, 已祭, 子贛問曰, “子之言祭齊齊漆漆然. 今子之祭無濟濟漆漆, 何也?” 子曰, “濟濟者, 容也遠也. 漆漆者, 容也自反也. 容以遠, 若容以自反也, 夫何神明之及交? 夫何濟濟漆漆之有乎? 反饋樂成, 薦其薦俎, 序其禮樂, 備其百官, 君子致其濟濟漆漆, 夫何慌惚之有乎? 夫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也.”
孝子將祭, 慮事不可以不豫, 比時具物, 不可以不備, 虛中以治之. 宮室旣修, 牆屋旣設, 百物旣備, 夫婦齊戒沐浴, 盛服奉承而進之. 洞洞乎! 屬屬乎! 如弗勝, 如將失之, 其孝敬之心至也與! 薦其薦俎, 序其禮樂, 備其百官, 奉承而進之. 於是諭其志意, 以其慌惚以與神明交, 庶或饗之. 庶或饗之, 孝子之志也.
孝子之祭也, 盡其慤而慤焉, 盡其信而信焉, 盡其敬而敬焉, 盡其禮而不過失焉. 進退必敬, 如親聽命, 則或使之也.
孝子之祭可知也, 其立之也敬以詘, 其進之也敬以愉, 其薦之也敬以欲. 退而立, 如將受命, 已徹而退, 敬齊之色不絶於面, 孝子之祭也立而不詘, 固也. 進而不愉, 䟽也. 薦而不欲, 不愛也. 退立而不如受命, 敖也. 已徹而退無敬齊之色, 而忘本也. 如是而祭, 失之矣.
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 孝子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如弗勝, 如將失之. 嚴威儼恪, 非所以事親也, 成人之道也.
先王之所以治天下者五. 貴有德, 貴貴, 貴老, 敬長, 慈幼. 此五者, 先王之所以定天下也. 貴有德何爲也? 爲其近於道也. 貴貴, 爲其近於君也. 貴老, 爲其近於親也. 敬長, 爲其近於兄也. 慈幼, 爲其近於子也. 是故至孝近乎王, 至弟近乎覇. 至孝近乎王, 雖天子必有父. 至弟近乎覇, 雖諸侯必有兄. 先王之敎, 因而弗改, 所以領天下國家也.
子曰, “立愛自親始, 敎民睦也. 立敎自長始, 敎民順也. 敎以慈睦, 而民貴有親. 敎以敬長, 而民貴用命. 孝以事親, 順以聽命, 錯諸天下, 無所不行.”
郊之祭也, 喪者不敢哭, 凶服者不敢入國門, 敬之至也.
祭之日, 君牽牲, 穆答君, 卿大夫序從. 旣入廟門, 麗于碑, 卿大夫袒而毛牛尙耳, 鸞刀以刲取膟膋, 乃退. 爓祭祭腥而退, 敬之至也.
郊之祭, 大報天而主日, 配以月. 夏后氏祭其闇, 殷人祭其陽, 周人祭日以朝及闇. 祭日於壇, 祭月於坎, 以別幽明, 以制上下. 祭日於東, 祭月於西, 以別外內, 以端其位. 日出於東, 月生於西, 陰陽長短, 終始相巡, 以致天下之和.
天下之禮, 致反始也, 致鬼神也, 致和用也, 致義也, 致讓也. 致反始, 以厚其本也. 致鬼神, 以尊上也. 致物用, 以立民紀也. 致義, 則上下不悖逆矣. 致讓, 以去爭也. 合此五者以治天下之禮也, 雖有奇邪而不治者則微矣.
宰我曰, ““吾聞鬼神之名, 不知其所謂.” 子曰, “氣也者, 神之盛也, 魄也者, 鬼之盛也. 合鬼與神, 敎之至也.”
“衆生必死, 死必歸士,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 焄蒿悽愴, 此百物之精也, 神之著也. 因物之精, 制爲之極, 明命鬼神以爲黔首則, 百衆以畏, 萬民以服.
聖人以是爲未足也, 築爲宮室, 設爲宗祧, 以別親䟽遠邇, 敎民反古復始, 不忘其所由生也, 衆之服自此, 故聽且速也. 二端旣立, 報以二禮. 建設朝事, 燔燎羶薌, 見以蕭光, 以報氣也, 此敎衆反始也. 薦黍稷, 羞肝肺首心, 見間以俠甒, 加以鬱鬯, 以報魄也. 敎民相愛, 上下用情, 禮之至也.
君子反古復始, 不忘其所由生也. 是以致其敬, 發其情, 竭力從事以報其親, 不敢弗盡也. 是故昔者天子爲藉千畝, 冕而朱紘, 躬秉耒, 諸侯爲藉百畝, 冕而靑紘, 躬秉耒, 以事天地山川社稷先古, 以爲醴酪齊盛, 於是乎取之, 敬之至也.
古者天子諸侯必有養獸之官, 及歲時齊戒沐浴而躬朝之. 犧牷祭牲, 必於是取之, 敬之至也. 君召牛, 納而視之, 擇其毛而卜之, 吉然後養之. 君皮弁素積, 朔月月半, 君巡牲, 所以致力, 孝之至也.
古者天子諸侯必有公桑蠶室, 近川而爲之, 築宮, 仞有三尺, 棘牆而外閉之. 及大昕之朝, 君, 皮弁素積, 卜三宮之夫人世婦之吉者, 使入蠶于蠶室, 奉種浴于川, 桑于公桑, 風戾以食之. 歲旣單矣, 世婦卒蠶, 奉繭以示于君, 遂獻繭于夫人. 夫人曰, “此所以爲君服與.” 遂副褘而受之, 因少牢以禮之. 古之獻繭者, 其率用此與? 及良日, 夫人繅, 三盆手, 遂布于三宮夫人世婦之吉者, 使繅, 遂朱綠之, 玄黃之, 以爲黼黻文章. 服旣成, 君服以祀先王先公, 敬之至也.
君子曰, “禮樂不可斯須去身. 致樂以治心, 則易直子諒之心, 油然生矣. 易直子諒之心生則樂, 樂則安, 安則久, 久則天, 天則神. 天則不言而信, 神則不怒而威, 致樂以治心者也. 致禮以治躬則莊敬, 莊敬則嚴威. 心中斯須不和不樂而鄙詐之心入之矣. 外貌斯須不莊不敬而慢易之心入之矣. 故樂也者, 動於內者也. 禮也者, 動於外者也. 樂極和, 禮極順, 內和而外順, 則民瞻其顔色而不與爭也. 望其容貌而衆不生慢易焉. 故德煇動乎內而民莫不承聽. 理發乎外而衆莫不承順. 故曰‘致禮樂之道而天下塞焉, 擧而錯之無難矣.’ 樂也者, 動於內者也. 禮也者, 動於外者也. 故禮主其減, 樂主其盈. 禮減而進, 以進爲文. 樂盈而反, 以反爲文. 禮減而不進則銷, 樂盈而不反則放, 故禮有報而樂有反. 禮得其報則樂, 樂得其反則安. 禮之報, 樂之反. 其義一也.”
曾子曰, “孝有三. 大孝尊親, 其次弗辱, 其下能養.” 公明儀問於曾子曰, “夫子可以爲孝乎?” 曾子曰, “是何言與. 是何言與. 君子之所爲孝者, 先意承志, 諭父母於道. 參直養者也. 安能爲孝乎?” 曾子曰, “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 事君不忠, 非孝也. 涖官不敬, 非孝也. 朋友不信, 非孝也. 戰陳無勇, 非孝也. 五者不遂, 災及於親, 敢不敬乎? 亨孰羶薌, 嘗而薦之, 非孝也, 養也. 君子之所謂孝也者, 國人稱願, 然曰, “‘幸哉有子如此.’ 所謂孝也已. 衆之本敎曰孝, 其行曰養. 養可能也, 敬爲難. 敬可能也, 安爲難. 安可能也, 卒爲難. 父母旣沒, 愼行其身, 不遺父母惡名, 可謂能終矣, 仁者, 仁此者也. 禮者, 履此者也. 義者, 宜此者也. 信者, 信此者也. 强者, 强此者也. 樂自順此生, 刑自反此作.” 曾子曰, “夫孝置之而塞乎天地, 溥之而橫乎四海, 施諸後世而無朝夕, 推而放諸東海而準, 推而放諸西海而準, 推而放諸南海而準, 推而放諸北海而準. 詩云, ‘自西自東, 自南自北, 無思不服.’ 此之謂也.” 曾子曰, “樹木以時伐焉, 禽獸以時殺焉. 夫子曰, “‘斷一樹, 殺一獸, 不以其時, 非孝也.’ 孝有三, 小孝用力, 中孝用勞, 大孝不匱. 思慈愛忘勞, 可謂用力矣. 尊仁安義, 可謂用勞矣. 博施備物, 可謂不匱矣. 父母愛之, 嘉而不忘. 父母惡之, 懼而無怨. 父母有過, 諫而不逆. 父母旣沒, 必求仁者之粟以祀之. 此之謂禮終.”
樂正子春下堂而傷其足, 數月不出, 猶有憂色. 門弟子曰, “夫子之足瘳矣, 雖月不出猶有憂色何也?” 樂正子春曰, “善如爾之問也. 善如爾之問也. 吾聞諸曾子, 曾子聞諸夫子, 曰, “‘天之所生, 地之所養, 無人爲大. 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 故君子頃步而不敢忘孝也.’ 今予忘孝之道, 予是以有憂色也. 壹擧足而不敢忘父母, 壹出言而不敢忘父母. 壹擧足而不敢忘父母, 是故道而不徑, 舟而不游, 不敢以先父母之遺體行殆. 壹出言而不敢忘父母, 是故惡言不出於口, 忿言不反於身. 不辱其身, 不羞其親, 可謂孝矣.”
昔者有虞氏貴德而尙齒, 夏后氏貴爵而尙齒, 殷人貴富而尙齒, 周人貴親而尙齒. 虞夏殷周, 天下之盛王也, 未有遺年者. 年之貴乎天下久矣, 次乎事親也.
是故朝廷同爵則尙齒. 七十杖於朝, 君問則席, 八十不俟朝, 君問則就之, 而弟達乎朝廷矣.
行, 肩而不倂, 不錯則隨, 見老者則車徒辟, 斑白者不以其任行乎道路, 而弟達乎道路矣.
居鄕以齒, 而老窮不遺, 强不犯弱, 衆不暴寡. 而弟達乎州巷矣.
古之道, 五十不爲甸徒, 頒禽隆諸長者, 而弟達乎獀狩矣.
軍旅什伍, 同爵則尙齒, 而弟達乎軍旅矣.
孝弟發諸朝廷, 行乎道路, 至乎州巷, 放乎獀狩, 修乎軍旅, 衆以義死之, 而弗敢犯也.
祀乎明堂, 所以敎諸侯之孝也. 食三老五更於大學, 所以敎諸侯之弟也, 祀先賢於西學, 所以敎諸侯之德也. 耕藉, 所以敎諸侯之養也. 朝覲, 所以敎諸侯之臣也. 五者天下之大敎也.
食三老五更於大學, 天子袒而割牲, 執醬而饋, 執爵而酳, 冕而摠干, 所以敎諸侯之弟也. 是故鄕里有齒, 而老窮不遺, 强不犯弱, 衆不暴寡, 此由大學來者也.
天子設四學, 當入學而大子齒.
天子巡守, 諸侯待于竟, 天子先見百年者. 八十九十者東行, 西行者弗敢過, 西行東行者弗敢過. 欲言政者, 君就之可也.
壹命齒于鄕里, 再命齒于族, 三命不齒. 族有七十者弗敢先. 七十者, 不有大故不入朝, 若有大故而入, 君必與之揖讓而后及爵者.
天子有善, 讓德於天. 諸侯有善, 歸諸天子. 卿大夫有善, 薦於諸侯. 士庶人有善, 本諸父母, 存諸長老.
祿爵慶賞, 成諸宗廟, 所以示順也.
昔者聖人建陰陽天地之情, 立以爲易. 易抱龜南面, 天子卷冕北面, 雖有明知之心, 必進斷其志焉, 示不敢專, 以尊天也. 善則稱人, 過則稱己. 敎不伐以尊賢也.
孝子將祭祀, 必有齊莊之心以慮事, 以具服物, 以修宮室, 以治百事. 及祭之日, 顔色必溫, 行必恐, 如懼不及愛然. 其尊之也, 容貌必溫, 身必詘, 如語焉而未之然. 宿者皆出, 其立卑靜以正, 如將弗見然. 及祭之後, 陶陶遂遂, 如將復入然. 是故慤善不違身, 耳目不違心, 思慮不違親. 結諸心, 形諸色, 而術省之, 孝子之志也.
建國之神位, 右社稷而左宗廟.

<祭統第二十五>

凡治人之道, 莫急於禮. 禮有五經, 莫重於祭. 夫祭者, 非物自外至者也, 自中出生於心也. 心怵而奉之以禮, 是故唯賢者, 能盡祭之義.
賢者之祭也, 必受其福. 非世所謂福也, 福者, 備也. 備者, 百順之名也. 無所不順者謂之備, 言內盡於己而外順於道也. 忠臣以事其君, 孝子以事其親, 其本一也. 上則順於鬼神, 外則順於君長, 內則以孝於親, 如此之謂備. 唯賢者能備, 能備然後能祭. 是故賢者之祭也, 致其誠信與其忠敬, 奉之以物, 道之以禮, 安之以樂, 參之以時, 明薦之而已矣, 不求其爲. 此孝子之心也. 祭者, 所以追養繼孝也. 孝者, 畜也. 順於道, 不逆於倫, 是之謂畜.
是故孝子之事親也, 有三道焉, 生則養, 沒則喪, 喪畢則祭. 養則觀其順也, 喪則觀其哀也, 祭則觀其敬而時也. 盡此三道者, 孝子之行也.
旣內自盡, 又外求助, 昏禮是也. 故國君取夫人之辭曰, “請君之玉女與寡人共有敝邑, 事宗廟社稷.” 此求助之本也. 夫祭也者, 必夫婦親之, 所以備外內之官也. 官備則具備. 水草之菹, 陸産之醢, 小物備矣. 三牲之俎, 八簋之實, 美物備矣. 昆蟲之異, 草木之實, 陰陽之物, 備矣. 凡天之所生, 地之所長, 苟可薦者莫不咸在, 示盡物也. 外則盡物, 內則盡溱志, 此祭之心也. 是故天子親耕於南郊以共齊盛, 王后蠶於北郊以共純服. 諸侯耕於東郊亦以共齊盛, 夫人蠶於北郊以共冕服. 天子諸侯非莫耕也, 王后夫人非莫蠶也, 身致其誠信, 誠信之謂盡, 盡之謂敬, 敬盡然後暇以事神明. 此祭之道也.
及時將祭, 君子乃齊. 齊之爲言齊也, 齊不齊以致齊者也. 是以君子非有大事也, 非有恭敬也, 則不齊. 不齊則於物無防也, 耆欲無止也, 及其將齊也, 防其邪物, 訖其嗜欲, 耳不聽樂. 故記曰, “齊者不樂.” 言不敢散其志也. 心不苟慮, 必依於道. 手足不苟動, 必依於禮. 君子之齊也, 專致其精明之德也. 故散齊七日以定之, 致齊三日以齊之. 定之之謂齊, 齊者, 精明之至也, 然後可以交於神明也. 是故先期旬有一日, 宮宰宿夫人, 夫人亦散齊七日, 致齊三日. 君致齊於外, 夫人致齊於內, 然後會於大廟. 君純冕立於阼, 夫人副褘立於東房. 君執圭瓚祼尸, 大宗執璋瓚亞祼. 及迎牲, 君執紖, 卿大夫從. 士執芻, 宗婦執盎從, 夫人薦涗水. 君執鸞刀, 羞嚌, 夫人薦豆. 此之謂夫婦親之.
及入舞, 君執干戚就舞位. 君爲東上, 冕而摠干, 率其羣臣以樂皇尸. 是故天子之祭也, 與天下樂之. 諸侯之祭也, 與竟內樂之. 冕而摠干, 率其羣臣以樂皇尸, 此與竟內樂之之義也.
夫祭有三重焉. 獻之屬莫重於祼, 聲莫重於升歌, 舞莫重於武宿夜. 此周道也. 凡三道者, 所以假於外而以增君子之志也. 故與志進退, 志輕則亦輕, 志重則亦重. 輕其志而求外之重也, 雖聖人弗能得也. 君子之祭也, 必身自盡也, 所以明重也. 道之以禮以奉三重而薦諸皇尸, 此聖人之道也.
夫祭有餕, 餕者, 祭之末也, 不可不知也. 古之人有言曰, “善終者如始. 餕其是已. 古之君子曰, “尸亦餕鬼神之餘也.” 惠術也, 可以觀政矣. 是故尸謖, 君與卿四人餕. 君起, 大夫六人餕, 臣餕君之餘也. 大夫起, 士八人餕, 賤餕貴之餘也. 士起, 各執其具以出陳于堂下, 百官進, 徹之, 下餕上之餘也. 凡餕之道, 每變以衆, 所以別貴賤之等而興施惠之象也, 是故以四簋黍, 見其修於廟中也. 廟中者, 竟內之象也. 祭者, 澤之大者也. 是故上有大澤則惠必及下, 顧上先下後耳, 非上積重而下有凍鮾之民也. 是故上有大澤, 則民夫人待於下流, 知惠之必將至也, 由餕見之矣. 故曰“可以觀政矣.”
夫祭之爲物大矣, 其興物備矣. 順以備者也, 其敎之本與, 是故君子之敎也, 外則敎之以尊其君長, 內則敎之以孝於其親. 是故明君在上, 則諸臣服從. 崇事宗廟社稷, 則子孫順孝. 盡其道, 端其義, 而敎生焉. 是故君子之事君也, 必身行之, 所不安於上, 則不以使下, 所惡於下則不以事上. 非諸人, 行諸己, 非敎之道也. 是故君子之敎也, 必由其本, 順之至也, 祭其是與? 故曰, “祭者敎之本也已.”
夫祭有十倫焉. 見事鬼神之道焉, 見君臣之義焉, 見父子之倫焉, 見貴賤之等焉, 親疎之殺焉, 見爵賞之施焉, 見夫婦之別焉, 見政事之均焉, 見長幼之序焉, 見上下之際焉. 此之謂十倫.
鋪筵, 設同几, 爲依神也. 詔祝於室, 而出于祊, 此交神明之道也.
君迎牲而不迎尸, 別嫌也. 尸在廟門外則疑於臣, 在廟中則全於君. 君在廟門外則疑於君, 入廟門則全於臣, 全於子. 是故不出者, 明君臣之義也.
夫祭之道, 孫爲王父尸, 所使爲尸者於祭者子行也. 父北面而事之, 所以明子事父之道也. 此父子之倫也.
尸飮五, 君洗玉爵獻卿, 尸飮七, 以瑤爵獻大夫. 尸飮九, 以散爵獻士及羣有司. 皆以齒, 明尊卑之等也.
夫祭有昭穆. 昭穆者, 所以別父子遠近長幼親䟽之序, 而無亂也. 是故, 有事於大廟, 則羣昭羣穆咸在, 而不失其倫. 此之謂親䟽之殺也.
古者明君爵有德而祿有功, 必賜爵祿於大廟, 示不敢專也. 故祭之日, 一獻, 君降立于阼階之南, 南鄕, 所命北面, 史由君右, 執策命之, 再拜稽首, 受書以歸, 而舍奠于其廟. 此爵賞之施也.
君卷冕立于阼, 夫人副褘立于東房. 夫人薦豆執校, 執醴授之執鐙. 尸酢夫人執柄, 夫人授尸執足. 夫婦相授受不相襲處, 酢必易爵, 明夫婦之別也.
凡爲俎者, 以骨爲主. 骨有貴賤. 殷人貴髀, 周人貴肩. 凡前貴於後. 俎者, 所以明祭之必有惠也. 是故貴者取貴骨, 賤者取賤骨. 貴者不重, 賤者不虛, 示均也. 惠均則政行, 政行則事成, 事成則功立. 功之所以立者不可不知也, 俎者所以明惠之必均也. 善爲政者如此, 故曰“見政事之均焉.”
凡賜爵, 昭爲一, 穆爲一, 昭與昭齒, 穆與穆齒. 凡羣有司皆以齒. 此之謂長幼有序.
夫祭有畀煇胞翟閽者, 惠下之道也. 唯有德之君爲能行此. 明足以見之, 仁足以與之. 畀之爲言與也, 能以其餘畀其下者也. 煇者, 甲吏之賤者也. 胞者, 肉吏之賤者也. 翟者, 樂吏之賤者也. 閽者, 守門之賤者也. 古者不使刑人守門, 此四守者, 吏之至賤者也. 尸又至尊, 以至尊旣祭之末, 而不忘至賤, 而以其餘畀之, 是故明君在上, 則竟內之民無凍餒者矣. 此之謂上下之際.
凡祭有四時. 春祭曰礿, 夏祭曰禘, 秋祭曰嘗, 冬祭曰烝. 礿禘, 陽義也. 嘗烝, 陰義也. 禘者, 陽之盛也. 嘗者陰之盛也. 故曰, “莫重於禘嘗.” 古者於禘也, 發爵賜服, 順陽義也. 於嘗也, 出田邑, 發秋政, 順陰義也. 故記曰, “嘗之日, 發公室, 示嘗也.” 莫艾則墨, 未發秋政, 則民弗敢草也. 故曰禘嘗之義大矣, 治國之本也, 不可不知也. 明其義者, 君也, 能其事者, 臣也. 不明其義, 君人不全. 不能其事, 爲臣不全. 夫義者, 所以濟志也, 諸德之發也. 是故其德盛者其志厚, 其志厚者其義章, 其義章者其祭也敬, 祭敬則竟內之子孫, 莫敢不敬矣. 是故君子之祭也必身親涖之, 有故則使人可也. 雖使人也, 君不失其義者, 君明其義故也. 其德薄者其志輕, 疑於其義而求祭, 使之必敬也, 弗可得已. 祭而不敬, 何以爲民父母矣.
夫鼎有銘, 銘者自名也, 自名以稱揚其先祖之美, 而明著之後世者也. 爲先祖者, 莫不有美焉, 莫不有惡焉, 銘之義稱美而不稱惡. 此孝子孝孫之心也. 唯賢者能之. 銘者, 論譔其先祖之有德善, 功烈勳勞慶賞聲名, 列於天下, 而酌之祭器, 自成其名焉, 以祀其先祖者也. 顯揚先祖, 所以崇孝也, 身比焉, 順也. 明示後世, 敎也. 夫銘者, 壹稱而上下皆得焉耳矣. 是故君子之觀於銘也, 旣美其所稱, 又美其所爲. 爲之者, 明足以見之, 仁足以與之, 知足以利之, 可謂賢矣. 賢而勿伐, 可謂恭矣. 故衛孔悝之鼎銘曰, “六月丁亥, 公假于大廟, 公曰, “‘叔舅! 乃祖莊叔, 左右成公, 成公乃命莊叔隨難于漢陽, 卽宮于宗周. 奔走無射, 啓右獻公. 獻公乃命成叔纂乃祖服, 乃考文叔興舅耆欲, 作率慶士, 躬恤衛國. 其勤公家, 夙夜不解. 民咸曰休哉.’ 公曰, “‘叔舅! 子女銘, 若纂乃考服.’ 悝拜稽首, 曰, “‘對揚以辟之, 勤大命, 施于烝彝鼎.’ 此衛孔悝之鼎銘也. 古之君子, 論譔其先祖之美, 而明著之後世者也, 以比其身, 以重其國家如此. 子孫之守宗廟社稷者, 其先祖無美而稱之, 是誣也, 有善而弗知, 不明也, 知而弗傳, 不仁也, 此三者, 君子之所恥也.
昔者周公旦有勳勞於天下, 周公旣沒, 成王康王追念周公之所以勳勞者而欲尊魯, 故賜之以重祭, 外祭則郊社是也, 內祭則大嘗禘是也, 夫大嘗禘升歌淸廟, 下而管象, 朱干玉戚以舞大武, 八佾以舞大夏, 此天子之樂也, 康周公, 故以賜魯也, 子孫纂之, 至于今不廢, 所以明周公之德, 而又以重其國也.

<哀公問第二十七>

哀公問於孔子曰, “大禮何如? 君子之言禮何其尊也?” 孔子曰, “丘也小人, 不足以知禮.” 君曰, “否. 吾子言之也.” 孔子曰, “丘聞之, 民之所由生, 禮爲大. 非禮無以節事天地之神也, 非禮無以辨君臣上下長幼之位也, 非禮無以別男女父子兄弟之親昏姻䟽數之交也. 君子以此之爲尊敬然. 然後以其所能敎百姓, 不廢其會節. 有成事然後治其雕鏤文章黼黻以嗣. 其順之, 然後言其喪算, 備其鼎俎, 設其豕腊, 修其宗廟, 歲時以敬祭祀, 以序宗族, 卽安其居, 節醜其衣服, 卑其宮室, 車不雕幾, 器不刻鏤, 食不貳味, 以與民同利. 昔之君子之行禮者如此.” 公曰, “今之君子, 胡莫行之也?” 孔子曰, “今之君子好實無厭, 淫德不倦, 荒怠敖慢, 固民是盡, 午其衆以伐有道, 求得當欲不以其所. 昔之用民者由前, 今之用民者由後. 今之君子莫爲禮也.”
孔子侍坐於哀公, 哀公曰, “敢問人道誰爲大?” 孔子愀然作色而對, 曰, “君之及此言也, 百姓之德也. 固臣敢無辭而對, 人道政爲大.” 公曰,““敢問何謂爲政?” 孔子對曰, “政者, 正也. 君爲正, 則百姓從政矣. 君之所爲, 百姓之所從也. 君所不爲, 百姓何從?” 公曰, “敢問爲政如之何?” 孔子對曰, “夫婦別, 父子親, 君臣嚴, 三者正則庶物從之矣.” 公曰, “寡人雖無似也, 願聞所以行三言之道, 可得聞乎?” 孔子對曰, “古之爲政, 愛人爲大. 所以治愛人, 禮爲大. 所以治禮, 敬爲大. 敬之至矣, 大昏爲大, 大昏至矣. 大昏旣至, 冕而親迎, 親之也. 親之也者親之也. 是故君子興敬爲親, 舍敬是遺親也. 弗愛不親, 弗敬不正. 愛與敬其政之本與.” 公曰, “寡人願有言然. 冕而親迎不已重乎?” 孔子愀然作色而對, 曰, “合二姓之好以繼先聖之後以爲天地宗廟社稷之主, 君何謂已重乎?” 公曰, “寡人固, 不固, 焉得聞此言也? 寡人欲問不得其辭. 請少進.” 孔子曰, “天地不合, 萬物不生. 大昏, 萬世之嗣也, 君何謂已重焉?” 孔子遂言曰, “內以治宗廟之禮, 足以配天地之神明. 出以治直言之禮, 足以立上下之敬. 物恥足以振之, 國恥足以興之. 爲政先禮, 禮其政之本與.”
孔子遂言曰, “昔三代明王之政必敬其妻子也有道. 妻也者, 親之主也, 敢不敬與? 子也者, 親之後也, 敢不敬與? 君子無不敬也, 敬身爲大. 身也者, 親之枝也, 敢不敬與? 不能敬其身, 是傷其親. 傷其親, 是傷其本. 傷其本, 枝從而亡. 三者, 百姓之象也. 身以及身, 子以及子, 妃以及妃, 君行此三者, 則愾乎天下矣, 大王之道也. 如此則國家順矣.”
公曰, “敢問何謂敬身?” 孔子對曰, “君子過言則民作辭, 過動則民作則. 君子言不過辭, 動不過則, 百姓不命而敬恭. 如是則能敬其身, 能敬其身則能成其親矣.”
公曰, “敢問何謂成親?” 孔子對曰, “君子也者人之成名也. 百姓歸之名謂之君子之子, 是使其親爲君子也, 是爲成其親之名也己.” 孔子遂言曰, “古之爲政, 愛人爲大. 不能愛人, 不能有其身. 不能安土. 不能安土, 不能樂天. 不能樂天, 不能成其身.”
公曰, “敢問何謂成身?” 孔子對曰, “不過乎物.”
公曰, “敢問君子何貴乎天道也?” 孔子對曰, “貴其不已. 如日月東西相從而不已也, 是天道也. 不閉其久, 是天道也. 無爲而物成, 是天道也. 已成而明, 是天道也.”
公曰, “寡人憃愚, 冥煩子志之心也.” 孔子蹴然辟席而對, 曰, “仁人不過乎物, 孝子不過乎物. 是故仁人之事親也如事天, 事天如事親. 是故孝子成身.”
公曰, “寡人旣聞此言也, 無如後罪何?” 孔子對曰, “君之及此言也, 是臣之福也.”

<坊記第三十>

子言之, “君子之道辟則坊與? 坊民之所不足者也. 大爲之坊, 民猶踰之, 故君子禮以坊德, 刑以坊淫, 命以坊欲.”
子云, “小人貧斯約, 富斯驕. 約斯盜, 驕斯亂. 禮者, 因人之情而爲之節文, 以爲民坊者也. 故聖人之制富貴也, 使民富不足以驕, 貧不至於約, 貴不慊於上, 故亂益亡.”
子云, “貧而好樂, 富而好禮, 衆而以寧者, 天下其幾矣. 詩云, ‘民之食亂, 寧爲荼毒.’ 故制國不過干乘, 都成不過百雉, 家富不過百乘. 以此坊民, 諸侯猶有畔者.”
子云, “夫禮者所以章疑別微以爲民坊者也. 故貴賤有等, 衣服有別, 朝廷有位, 則民有所讓.”
子云, “天無二日, 土無二王, 家無二主, 尊無二上, 示民有君臣之別也. 春秋不稱楚越之王喪, 禮君不稱天, 大夫不稱君, 恐民之惑也. 詩云, ‘相彼盍旦, 尙猶患之.’”
子云, “君不與同姓同車, 與異姓同車不同服, 示民不嫌也. 以此坊民, 民猶得同姓以弑其君.”
子云, “君子辭貴不辭賤, 辭富不辭貧, 則亂益亡. 故君子與其使食浮於人也寧使人浮於食.”
子云, “觴酒豆肉, 讓而受惡, 民猶犯齒. 衽席之上讓而坐下, 民猶犯貴. 朝廷之位讓而就賤, 民猶犯君. 詩云, ‘民之無良, 相怨一方. 受爵不讓, 至于己斯亡.’”
子云, “君子貴人而賤己, 先人而後己, 則民作讓. 故稱人之君曰君, 自稱其君曰寡君.”
子云, “利祿先死者而後生者, 則民不偝. 先亡者而後存者, 則民可以託. 詩云, ‘先君之恩, 以畜寡人.’ 以此坊民, 民猶偝死而號無告.”
子云, “有國家者, 貴人而賤祿, 則民興讓. 尙技而賤車, 則民興藝. 故君子約言, 小人先言.”
子云, “上酌民言, 則下天上施. 上不酌民言, 則犯也. 下不天上施, 則亂也. 故君子信讓以涖百姓, 則民之報禮重. 詩云, ‘先民有言, 詢于芻蕘.’”
子云, “善則稱人, 過則稱己, 則民不爭. 善則稱人, 過則稱己, 則怨益亡. 詩云, ‘爾卜爾筮, 履無咎言.’”
子云, “善則稱人, 過則稱己, 則民讓善. 詩云, ‘考卜惟王, 度是鎬京. 惟龜正之, 武王成之.’”
子云, “善則稱君, 過則稱己, 則民作忠. 君陳曰, “‘爾有嘉謀嘉猷, 入告爾君于內, 女乃順之于外, 曰, “此謀此猷惟我君之德. 於乎! 是惟良顯哉!.’”
子云, “善則稱親, 過則稱己, 則民作孝. 大誓曰, “‘子克紂, 非予武, 惟朕文考無罪, 紂克予, 非朕文考有罪, 惟予小子無良.’”
子云, “君子弛其親之過而敬其美. 論語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高宗云, ‘三年其惟不言, 言乃讙.’”
子云, “從命不忿, 微諫不倦, 勞而不怨, 可謂孝矣. 詩云, ‘孝子不匱.’”
子云. “睦於父母之黨, 可謂孝矣, 故君子因睦以合族, 詩云, ‘此令兄弟, 綽綽有裕. 不令兄弟, 交相爲瘉.”
子云, “於父之執, 可以乘其車, 不可以衣其衣, 君子以廣孝也.”
子云, “小人皆能養其親, 君子不敬何以辨?”
子云, “父子不同位, 以厚敬也. 書云, ‘厥辟不辟, 忝厥祖.’”
子云, “父母在不稱老, 言孝不言慈, 閨門之內戲而不歎. 君子以此坊民, 民猶薄於孝而厚於慈.”
子云, “長民者朝廷敬老則民作孝.”
子云, “祭祀之有尸也, 宗廟之有主也, 示民有事也. 修宗廟, 敬祀事, 敎民追孝也. 以此坊民, 民猶忘其親.”
子云, “敬則用祭器, 故君子不以菲廢禮, 不以美沒禮. 故食禮主人親饋則客祭, 主人不親饋則客不祭. 故君子苟無禮雖美不食焉. 易曰, “‘東鄰殺牛, 不如西鄰之禴祭寔受其福.’ 詩云, ‘旣醉以酒, 旣飽以德.’ 以此示民, 民猶爭利而忘義.”
子云, “七日戒, 三日齊, 承一人焉以爲尸, 過之者趨走, 以敎敬也. 醴酒在室, 醍酒在堂, 澄酒在下, 示不淫也. 尸飮三, 衆賓飮一, 示民有上下也. 因其酒肉, 聚其宗族. 以敎民睦也, 故堂上觀乎室. 堂下觀乎上, 詩云, ‘禮儀卒度, 笑語卒獲.’”
子云, “賓禮每進以讓, 喪禮每加以遠. 浴於中霤, 飯於牖下, 小歛於戶內, 大歛於阼, 殯於客位, 祖於庭, 葬於墓, 所以示遠也. 殷人吊於壙, 周人吊於家, 示民不偝也.”
子云, “死, 民之卒事也, 吾從周. 以此坊民, 諸侯猶有薨而不葬者.”
子云, “升自客階, 受吊於賓位, 敎民追孝也. 未沒喪不稱君, 示民不爭也. 故魯春秋記晉喪, 曰‘殺其君之子奚齊及其君卓.’ 以此坊民, 子猶有弑其父者.”
子云, “孝以事君, 弟以事長, 示民不貳也. 故君子有君不謀仕, 唯卜之日稱二君. 喪父三年, 喪君三年, 示民不疑也. 父母在, 不敢有其身, 不敢私其財, 示民有上下也. 故天子四海之內無客禮, 莫敢爲主焉. 故君適其臣, 升自阼階, 卽位於堂, 示民不敢有其室也. 父母在饋獻不及車馬, 示民不敢專也. 以此坊民, 民猶忘其親而貳其君.”
子云, “禮之先幣帛也, 欲民之先事而後祿也. 先財而後禮則民利. 無辭而行情則民爭. 故君子於有饋者弗能見則不視其饋. 易曰, “‘不耕穫, 不菑畬, 凶.’ 以此坊民, 民猶貴祿而賤行.”
子云, “君子不盡利以遺民. 詩云, ‘彼有遺秉, 此有不歛穧, 伊寡婦之利.’ 故君子仕則不稼, 田則不漁, 食時不力珍, 大夫不坐羊, 士不坐犬. 詩云, ‘采葑采菲, 無以下體. 德音莫違, 及爾同死.’ 以此坊民, 民猶忘義而爭利以亡其身.”
子云, “夫禮坊民所淫, 章民之別, 使民無嫌, 以爲民紀者也. 故男女無媒不交, 無幣不相見, 恐男女之無別也. 以此坊民, 民猶有自獻其身. 詩云, ‘伐柯如之何? 匪斧不克. 取妻如之何? 匪媒不得. 蓻麻如之何? 橫從其畝. 取妻如之何? 必告父母.’”
子云,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故買妾不知其姓則卜之. 以此坊民, 魯春秋猶去夫人之姓曰吳, 其死曰孟子卒.”
子云, “禮, 非祭, 男女不交爵. 以此坊民, 陽侯猶殺繆侯而竊其夫人. 故大饗廢夫人之禮.”
子云, “寡婦之子, 不有見焉, 則弗友也, 君子以辟遠也. 故朋友之交, 主人不在, 不有大故, 則不入其門. 以此坊民, 民猶以色厚於德.”
子云, “好德如好色, 諸侯不下漁色, 故君子遠色, 以爲民紀. 故男女授受不親, 御婦人, 則進左手, 姑姊妹女子子已嫁而反, 男子不與同席而坐, 寡婦不夜哭, 婦人疾, 問之, 不問其疾. 以此坊民, 民猶淫泆而亂於族.”
子云, “昏禮壻親迎, 見於舅姑, 舅姑承子以授壻, 恐事之違也. 以此坊民, 婦猶有不至者.”

<緇衣第三十三>

子言之曰, “爲上易事也, 爲下易知也, 則刑不煩矣.
子曰, “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 則爵不瀆而民作愿, 刑不試而民咸服. 大雅曰, “儀刑文王, 萬國作孚.”
子曰, “夫民敎之以德, 齊之以禮, 則民有格心. 敎之以政, 齊之以刑, 則民有遯心. 故君民者子以愛之則民親之. 信以結之則民不倍. 恭以涖之則民有孫心. 甫刑曰, “苖民匪用命, 制以刑, 惟作五虐之刑曰法.” 是以民有惡德, 而遂絶其世也.”
子曰, “下之事上也, 不從其所令, 從其所行. 上好是物, 下必有甚者矣. 故上之所好惡不可不愼也, 是民之表也.” 子曰, “禹立三年, 百姓以仁遂焉, 豈必盡仁?” 詩云, “赫赫師尹, 民具爾瞻.” 甫刑曰, “一人有慶, 兆民賴之.” 大雅曰, “成王之孚, 下土之式.”
子曰, “上好仁則下之爲仁爭先人. 故長民者章志貞敎, 尊仁以子愛百姓, 民致行己以說其上矣. 詩云, ”有梏德行, 四國順之.“
子曰, “王言如絲, 其出如綸. 王言如綸, 其出如綍. 故大人不倡游言. 可言也不可行, 君子弗言也. 可行也不可言君子弗行也, 則民言不危行而行不危言矣. 詩云, 淑愼爾止, 不諐于儀.”
子曰, “君子道人以言而禁人以行, 故言必慮其所終而行必稽其所敝, 則民謹於言而愼於行. 詩云, ”愼爾出話. 敬爾威儀.“ 大雅曰,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子曰, “長民者衣服不貳, 從容有常, 以齊其民, 則民德壹. 詩云, “彼都人士, 狐裘黃黃. 其容不改, 出言有章. 行歸于周, 萬民所望.”
子曰, “爲上可望而知也, 爲下可述而志也, 則君不疑於其臣, 而臣不惑於其君矣. 尹吉曰, “惟尹躬及湯咸有壹德.” 詩云, “淑人君子, 其儀不忒.”
子曰, “有國者章善癉惡以示民厚, 則民情不貳. 詩云, “靖共爾位, 好是正直.”
子曰, “上人疑則百姓惑, 下難知則君長勞. 故君民者章好以示民俗, 愼惡以御民之淫, 則民不惑矣. 臣儀行, 不重辭, 不授其所不及, 不煩其所不知, 則君不勞矣. 詩云, “上帝板板, 下民卒癉.” 小雅曰, “匪其止共, 惟王之邛.”
子曰, “政之不行也, 敎之不成也, 爵祿不足勸也. 刑罰不足恥也. 故上不可以褻刑而輕爵. 康誥曰, “敬明乃罰.” 甫刑曰, “播刑之不迪.”
子曰, “大臣不親, 百姓不寧, 則忠敬不足而富貴已過也. 大臣不治而邇臣比矣. 故大臣不可不敬也, 是民之表也, 邇臣不可不愼也, 是民之道也. 君毋以小謀大, 毋以遠言近, 毋以內圖外, 則大臣不怨, 邇臣不疾, 而遠臣不蔽矣. 葉公之顧命曰, “毋以小謀敗大作, 毋以嬖御人疾莊后, 毋以嬖御士疾莊士大夫卿士.”
子曰, “大人不親其所賢, 而信其所賤, 民是以親失, 而敎是以煩. 詩云, “彼求我則, 如不我得. 執我仇仇, 亦不我力.” 君陳曰, “未見聖若己弗克見. 旣見聖亦不克由聖.”
子曰, “小人溺於水, 君子溺於口, 大人溺於民, 皆在其所褻也. 夫水近於人而溺人, 德易狎而難親也, 易以溺人. 口費而煩, 易出難悔, 易以溺人. 夫民閉於人而有鄙心, 可敬, 不可慢, 易以溺人. 故君子不可以不愼也. 太甲曰, “毋越厥命以自覆也.” “若虞機張, 往省括于厥度, 則釋.” 兌命曰, “惟口起羞, 惟甲冑起兵, 惟衣裳在笥, 惟干戈省厥躬.” 太甲曰, “天作孽, 可違也. 自作孽, 不可以逭.” 尹吉曰, “惟尹躬天見于西邑夏, 自周有終, 相亦惟終.”
子曰, “民以君爲心, 君以民爲體. 心莊則體舒, 心肅則容敬. 心好之, 身必安之. 君好之, 民必欲之. 心以體全, 亦以體傷. 君以民存, 亦以民亡. 詩云, “昔吾有先正, 其言明且淸. 國家以寧, 都邑以成, 庶民以生. 誰能秉國成? 不自爲正, 卒勞百姓.” 君雅曰, “夏日暑雨, 小民惟曰怨, 資冬祁寒, 小民亦惟曰怨.”
子曰, “下之事, 上也身不正言不信則義不壹行無類也.”
子曰, “言有物而行有格也, 是以生則不可奪志, 死則不可奪名. 故君子多聞質而守之. 多志質而親之. 精知略而行之. 君陳曰, “出入自爾師虞, 庶言同.” 詩云, “淑人君子, 其儀一也.”
子曰, “唯君子能好其正, 小人毒其正. 故君子之朋友有鄕, 其惡有方. 是故邇者不惑而遠者不疑也. 詩云, “君子好仇.”
子曰, “輕絶貧賤而重絶富貴, 則好賢不堅而惡惡不著也. 人雖曰不利. 吾不信也. 詩云, “朋友攸攝, 攝以威儀.”
子曰, “私惠不歸德, 君子不自留焉. 詩云, “人之好我, 示我周行.”
子曰, “苟有車必見其軾. 苟有衣必見其敝. 人苟或言之必聞其聲. 苟或行之必見其成. 葛覃曰, “服之無射.”
子曰, “言從而行之, 則言不可飾也. 行從而言之, 則行不可飾也. 故君子寡言而行以成其信, 則民不得大其美而小其惡. 詩云, “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小雅曰, “允也君子, 展也大成.” 君奭曰, “昔在上帝周田觀文王之德, 其集大命于厥躬.”
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爲卜筮.” 古之遺言與? 龜筮猶不能知也, 而況於人乎? 詩云, “我龜旣厭, 不我告猶.” 兌命曰, “爵無及惡德, 民立而正事純, 而祭祀是爲不敬. 事煩則亂, 事神則難.” 易曰, “不恒其德, 或承之羞.” “恒其德偵, 婦人吉, 夫子凶.”

<儒行第四十一>

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鄕. 丘不知儒服.”
哀公曰, “敢問儒行?” 孔子對曰, “遽數之不能終其物, 悉數之乃留. 更僕未可終也.”
哀公命席, 孔子侍, 曰, “儒有席上之珍以待聘, 夙夜强學以待問, 懷忠信以待擧, 力行以待取. 其自立有如此者.
儒有衣冠中, 動作愼. 其大讓如慢, 小讓如僞. 大則如威, 小則如愧. 其難進而易退也, 粥粥若無能也. 其容貌有如此者.
儒有居處齊難. 其坐起恭敬. 言必先信, 行必中正. 道塗不爭險易之利, 冬夏不爭陰陽之和. 愛其死以有待也, 養其身以有爲也. 其備豫有如此者.
儒有不寶金玉, 而忠信以爲寶. 不祈土地, 立義以爲土地. 不祈多積, 多文以爲富. 雖得而易祿也, 易祿而難畜也. 非時不見, 不亦難得乎. 非義不合, 不亦難畜乎. 先勞而後祿, 不亦易祿乎. 其近人有如此者.
儒有委之以貨財, 淹之以樂好, 見利不虧其義. 劫之以衆, 沮之以兵, 見死不更其守. 鷙蟲攫搏不程勇者. 引重鼎不程其力. 往者不悔, 來者不豫. 過言不再, 流言不極. 不斷其威, 不習其謀. 其特立有如此者.
儒有可親而不可劫也, 可近而不可迫也, 可殺而不可辱也. 其居處不淫, 其飮食不溽, 其過失可微辨而不可面數也. 其剛毅有如此者.
儒有忠信以爲甲冑, 禮義以爲干櫓. 載仁而行, 抱義而處. 雖有暴政, 不更其所. 其自立有如此者.
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 易衣而出, 井日而食. 上答之不敢以疑, 上不答不敢以諂. 其仕有如此者.
儒有今人與居, 古人與稽. 今世行之, 後世以爲楷. 適弗逢世上弗授下弗推. 讒詔之民, 有比黨而危之者, 身可危也, 而志不可奪也. 雖危, 起居竟信其志, 猶將不忘百姓之病也. 其憂思有如此者.
儒有博學而不窮, 篤行而不倦. 幽居而不淫, 上通而不困. 禮之以和爲貴, 忠信之美, 優游之法. 擧賢而容衆, 毁方而瓦合. 其寬裕有如此者.
儒有內稱不辟親, 外擧不辟怨, 程功積事, 推賢而進達之, 不望其報. 君得其志, 苟利國家不求富貴. 其擧賢援能有如此者.
儒有聞善以相告也, 見善以相示也. 爵位相先也, 患難相死也. 久相待也, 遠相致也. 其任擧有如此者.
儒有澡身而浴德, 陳言而伏. 靜而正之, 上弗知也. 麤而翹之, 又不急爲也. 不臨深而爲高, 不加少而爲多. 世治不輕, 世亂不沮. 同弗與, 異弗非也. 其特立獨行有如此者.
儒有上不臣天子, 下不事諸侯. 愼靜而尙寬, 强毅以與人, 博學以知服. 近文章, 砥厲廉隅. 雖分國, 如錙銖, 不臣, 不仕. 其親爲有如此者.
儒有合志同方, 營道同術. 並立則樂, 相下不厭. 久不相見聞流言不信. 其行本方立義, 同而進, 不同而退. 其交友有如此者.
溫良者, 仁之本也. 敬愼者, 仁之地也. 寬裕者, 仁之作也. 孫接者, 仁之能也. 禮節者, 仁之貌也. 言談者, 仁之文也. 歌樂者, 仁之和也. 分散者, 仁之施也. 儒皆兼此而有之, 猶且不敢言仁也. 其尊讓有如此者.
儒有不隕穫於貧賤, 不充詘於富貴. 不慁君王, 不累長上, 不閔有司, 故曰儒. 今衆人之命儒也妄, 常以儒相詬病.”
孔子至舍, 哀公館之, 聞此言也, 言加信, 行加義, 終沒吾世, 不敢以儒爲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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