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 태극도설(第一 太極圖說)
[가] 태극도(太極圖)에 대한 주돈이(周敦頤)의 도설
우주 만유(萬有)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그 근원에는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으니(無極) 이름하여 태극(太極)이라 한다. 태극이 움직이면 양(陽)이 생긴다.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면 정지하고 정지하면 음(陰)이 생긴다. 정지가 극한에 이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정지함이 서로 근거가 되어 음과 양으로 갈라지는 두 모습<兩儀>이 성립하게 된다.
양이 변화하고 음이 이에 응하여 물(水), 불(火), 나무(木), 쇠(金), 흙(土)의 다섯 가지 기운이 생겨나며, 우주에는 다섯 가지 자연의 기운이 조화롭게 배열되고 네 계절이 돌고 돈다.
다섯 가지 자연의 기운은 음양이 하는 짓이요, 음양은 태극이 하는 짓이며 태극은 본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無極). 다섯 가지 성질이 생기면서 각각 그 나름대로의 성질을 가진다.
무극의 참됨과 음양오행의 정수는 신묘하게 화합하여 응결한다. 하늘의 원리로 남성(男性)이 이루어지고 땅의 원리로 여성(女性)이 이루어지며, 두 기운이 서로 감응하여 만물이 생겨난다. 만물이 나고, 나는 변화는 가(極)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난 기운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 육신이 생긴 뒤에 영(靈)은 차츰 의식을 갖게 된다. 오성(五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외부 현상에 접속하여 자극을 받아 움직여서 선악이 갈라지고 인간에 관한 모든 일이 생긴다.
성인은 알맞음(中), 바름(正), 어짊(仁), 의로움(義)에 따라 인간 만사를 정(定)하고 마음은 고요하게 하는 것(主靜)을 인간에 있어서 가장 큰 윤리의 표준(人格)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일치하고, 일월과 밝음이 일치하며, 사계절과 그 질서가 일치하고, 귀신과 그 길흉이 일치한다.<즉 情 理 兩面의 요구에 다 合當하다> 군자는 이것(中正人義)을 담아서 길하고 소인은 이것을 어겨서 흉하다.
그러므로 하늘의 원리는 음양이라 하고 땅의 원리는 부드러움과 굳셈이라 하며 사람의 도리는 어짊과 의로움(仁義)이라 한다. 또 시작과 끝의 순환하는 이치를 깊이 생각해 보면 죽음과 삶의 이치를 알 수가 있다. 크도다 ! 변화의 이치(易)여 !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진리다.
[나] 주희(朱熹)의 설명
주자(朱子)는 태극도설에서 말하기를 먼저 음양 변화의 근본적 원인을 말하였고 다음에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품성을 밝혔다.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남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는 것은 사람의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본성을 말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태극인 곳이다. 육신이 생기고 정신에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양이 움직이고 음이 멈추어 되어진 것이다.
오성(五性)이 느껴 움직인다는 것은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물, 불, 나무, 쇠, 흙의 성질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마치 남성의 요소와 여성의 요소가 이루어지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인간만사가 생겨나고 변화하는 것은 만물이 생겨나고 변화하는 모습과 같다.
“성인은 알맞음, 바름, 어짊. 의로움에 따라 그것을 정하고 마음을 평정하게 함을 인간의 모든 일 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윤리의 표준으로 삼는다”함은 인간이 태극 전체를 받아서 천지와 혼합하여 일치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 이어서 사람이 천지(天地), 일월(日月), 사시(四時), 귀신(鬼神)의 네 가지와 일치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했다.
또 성인은 수양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고, 여기에 아직 이르지는 못했을지라도 군자는 그것은 수양하여 길하게 되나 소인은 그것을 모르고 어겨서 흉하게 된다. 도덕율을 갈고 닦느냐 그것을 어기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근신하느냐 방심하느냐 하는 차이에 있을 뿐이다. 근신하면 욕심이 적고 사리가 밝아진다. 욕심을 주리고 줄여서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되면 고요할 때는 사욕이 비고, 움직이면 바르게 되어 성인이 되는 학문을 배우기에 적합하게 된다고 한다.
[다] 퇴계의 설명
태극도는 주렴계(周濂溪)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한 것이다. 섭평암(葉平巖)은 “이 그림은 주역의 계사(繫辭)에 ‘역에는 태극이 있고 이것이 음과 양을 낳고 사상을 낳는다’ 라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역에서는 괘효(卦爻)로 말하고 이 그림에서는 우주의 생성(生成)과 변화(變化)를 가지고 말했다는 것이다.
주자는 “이것이 도리의 대 원리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시대를 통하여 도(道)를 이해하는 근원"이라고 하였다.
이제 첫머리에 이 그림을 둔 것도 근사록(近思錄)에 이 설(說)을 첫머리로 삼은 의도와 같다. 대체로 성인이 되는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여기서 실마리를 찾아서 소학(小學) 대학(大學)등에서 제시하는 바를 힘써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 노력이 무르익어 도덕적 원리의 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끝까지 이르게 되면 이것이 이른바 이치를 탐구하여 인간의 착한 본성을 다 발휘하여 천명을 완수하는 것이며, 또 이른바 신묘한 세계를 탐구하여 그 조화를 알아서 덕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 제2 서명도(第二 西銘圖)
[가] 서명(西銘)
건(乾)을 아버지라 하고 곤(坤)을 어머니라 한다. 나는 매우 작은 존재로서 우주 안에 함께 섞여 존재한다. 따라서 천지를 채운 것 그것이 내 몸이고, 천지를 이끄는 것 그것은 내 본성이다.
사람들은 나와 한 핏줄이고 창조물은 나의 동반자이다. 대지배자(大支配者)는 우리 부모(天地)의 맏아들이며 대신이란 맏아들의 신하다. 나이 많은 분을 받드는 것은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것이요. 외롭고 약한 이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은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일치하고 현인은 천지에서 빼어난 존재이다. 무릇 천하의 늙고 병든 사람과 형제가 없는 사람, 자녀가 없는 사람, 홀아비와 과부 같은 사람들은 모두살기 어렵고 하소연할 데 없는 우리 형제다.
때에 따라 하늘의 뜻을 보존하는 것이 내가 천지의 아들로서 천지를 공경하는 것이고 천명(父母)에 순종하여 즐겁게 살며 근심 하지 않는 것이 순수한 효의 본질에 따른 것이다. 천명을 어기면 덕을 거스르는 것이라 하고 인(仁)을 해치면 적(賊)이라 한다. 악을 만드는 자는 망나니고 천명을 따라 살아가는 이가 오로지 부모(乾坤)를 닮은 사람이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하늘(父母)의 사업을 잘 실천하게 되며 귀신을 잘 알면 하늘의 의지를 잘 이어 받게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운 것을 하지 않으면 부모에게 욕됨이 없다. 깨끗한 마음을 보존하고 천성을 기르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맛있는 술을 싫어함은 우(禹)임금이 어버이를 돌보기 위함이었고 뛰어난 인재를 기르는 까닭은 영고숙(穎考叔)같은 사람이 대를 이어 나기를 바라서다. 고통을 받아도 효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끝내는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으니 이는 순(舜)의 효도의 결실이며 도망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렸으니 이는 신생(申生)의 공손함이다. 부모가 주신 몸을 온전하게 하여 죽은 사람은 증참(曾參)이며 부모의 말씀을 용감히 따라 명령에 순종한 사람은 백기(伯奇)다.
부귀와 행복은 나의 생활을 풍부하게 할 것이며 빈천과 근심걱정은 인간을 완전(庸玉)하게 하여 성취케 하려는 것이다. 내 살아 있는 동안 하늘의 뜻을 순종하여 섬기고 죽을 때 편안히 죽으려 한다.
[나] 서명(西銘)에 대한 설명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명(西銘)은 정자(程子)에 의하면 이(理)는 하나이면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대체로 하늘(乾)로 아비를 삼고 땅(坤)으로 어미를 삼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라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이(理)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비롯하여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들은 각각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그 자식을 자식으로 키우고 있으므로 그 나눔이 어찌 여러 갈래가 아니겠는가?.
하나로 통일되면서도 만 가지로 서로 다른 까닭에 비록 천하가 한 집안이고 중국이 한 사람과 같다 하더라도 겸애(兼愛)의 폐단에 흐르지 않는 것이다. 만가지로 각기 서로 다르면서 하나로 꿰뚫어 있으므로 비록 친하고 먼 정의 차이가 있고 귀하고 천한 차등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위하는(爲我)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서명(西銘)의 대의(大旨)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미루어 “무아(無我)의 공(公)”을 키우고,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을 바탕으로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밝힌다. 어느 경우라도 이른바 “나누어져도 미루어 보면 이(理)는 하나”가 아님이 없다.
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서명의 앞부분은 바둑판과 같다. 그 뒷부분은 그 판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고 했다.
구산양씨(龜山楊氏)는 말하기를 “서명은 이(理)는 하나이면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 이가 하나임을 아는 것은 인(仁)을 실천하게 하는 까닭이며, 그 이가 여러 갈래로 나뉨을 아는 것은 의(義)를 실천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맹자가 “어버이를 잘 섬기고 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仁), 사람을 사랑한 다음에 사물을 아낀다(愛)”고 한 것과 같다. 그 여러 갈래로 나누임이 같지 않다. 그러니 차등 없이 베풀 수 있겠는가?.
쌍봉요씨(雙峰饒氏)는 “서명의 앞 일절은 사람이 천지의 아들임을 밝힌 것이며, 뒤의 일절은 사람이 천지를 섬기는 것을 마치 자식이 부모 섬기듯 해야함을 말한 것”이라 했다.
[다] 퇴계의 설명
오른쪽 서명은 횡거장자(橫渠張子)가 지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완(訂頑)이라 이름 붙였는데 정자(程子)가 이름을 바꾸어 서명이라 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임은정씨(林隱程氏)가 그렸습니다. 대개 성학의 목적은 인(仁)을 찾는데 있습니다. 모름지기 인의 뜻을 깊이 채득해야만 바야흐로 내가 천지만물과 한 몸이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이런 경지라야 합니다.
인에 대한 공부가 비로소 친숙해지고 재미있게 되어져서, 막막하여 손댈 바를 모르는 걱정이 없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을 자기로 잘못 아는 병폐도 없어져 심덕이 온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정자는 “서명이야말로 그 뜻이 지극히 온전히 갖추어졌으니 이것이 곧 인의 본질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하였고 또 “이 인이 가득 찼을 때 성인(聖人)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 제3 소학도(第三 小學圖)
제삼 소학제사(第三 小學題辭)
[가] 주희(朱熹)의 소학제사(小學題辭)
만유(萬有)가 나고(元), 자라고(亨), 열매 맺고(利), 도라 감(貞)은 변함 없는 자연의 법칙이고 어진 마음(仁), 올 바른 행동(義), 예에 맞고(禮), 슬기로움(智)은 인간 본성의 대원리다.
모든 사람의 인성은 그 처음부터 착하지 않음이 없다. 아름답게 잘 갖추어진 사단(四端)은 느낌에 따라 나타난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어른을 받드는 것은 다 본성이니 순리로서 강제함이 아니다.
오직 성인의 본성은 하늘과 같이 넓고 넓어 티끌만큼 보태지 않아도 모든 착함이 가득하다.
뭇 사람들은 어리석고 어두워 물욕으로써 착한 마음을 가리고 본 성품을 무너뜨리며 쉽게 자신을 버린다.
성인이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배움터를 세워 스승을 모시고 본성을 잘 키워 북돋우고 일상 생활에 펴나가게 하였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방법은 물 뿌리고 쓸고 청소하며 대인관계의 예절을 지키고 집에서 효도하고 어른께 공손하며 행동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한다.
이렇게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시(詩)도 외우고 책도 읽으며 노래 부르며 춤추고 즐기더라도 생각이 법도를 넘지 않도록 한다.
이치를 끝까지 탐구하고 몸을 닦는 것은 큰 배움의 길이다. 이와 같이 학문을 닦으면 밝은 명(天命)이 온 세상에 환하게 비치니 안과 밖이 없다.
덕행을 숭상하고 업적을 넓혀야 인간 본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공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옛날에는 무언가 특별히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물며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보다 완벽하여 이와 같은 배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세월은 오래되어 성인도 가시니 경전도 묻혀지고 가르침도 느슨해졌다. 어릴 적 배움이 단정치 못하면 커서는 더욱 경박하고 사치해진다.
향촌에는 미풍 양속이 살아지고 세상에는 어진 재목을 찾을 길이 없구나. 이익과 욕심으로 뒤엉켜 싸우며 이단(異端)의 가르침으로 시끄럽게 떠든다.
다행히도 이 착한 본성이 천지가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을러니 이제 내가 옛 말씀을 모아서 후예들을 깨우칠까 한다.
어여쁘다 젊은이들아, 이 책을 잘 받들어라. 이 늙은이의 가벼운 말로 여기지 말고 다 성현의 말씀이니 본 받을지어다.
[나] 주자(朱子)의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 인용한 글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그대는 대학의 큰 가르침을 말하려고 할 때면 늘 소학을 참고하려고 하는데 뭇은 까닭인가?” 라고 물었다.
이에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움에 있어 본래 대소의 차이는 원래 있다. 그러나 진리에로 향하는 길은 한가지인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려서 소학의 가르침을 익히지 아니하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아, 그 덕성을 길러, 장차 대학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바탕이 되지 못할 것이다. 또 자라서 대학의 가르침을 터득하지 아니하면, 의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적도구(知的道具)를 갖추지 못하고 이들 의리를 실제 삶에 적용하지 못하며, 소학에서 이룬 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이제 어려서 배움 길에 들어선 사람이 주위를 정돈하고 청소하며 어른 말씀을 잘 듣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을 잘 분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며, 예법(禮)과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읽고 쓰기(書), 셈하기(數)를 익히게 해야 한다. 자란 뒤에는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최선의 경지에 머물게 하는 것이 학문을 닦는 순서로써 당연한 것인데 왜 실천하지 못 하겠는가?
또 누가 주자에게, “만약 장성한 뒤에도 이제 선생님 말씀과 같이 소학, 대학을 배워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지나간 세월이야 어쩔 수 없지만 공부하는 순서와 내용들은 늦더라도 배워서 보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일찍 ‘경(敬)’ 이 한 글자에 기록한 학문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모든 요체가 들어있다고 들었다. 소학을 배우는 사람일지라도 ‘경’ 공부에 의거하지 않으면 인간의 근본 성품을 몸에 익숙토록 길러내고, 주위를 정돈하고 청소하며, 대인 관계에 있어 예의바르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도와 또 이른바 육예(六藝)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학을 배우는 사람도 역시 ‘경’ 공부에 의거하지 않으면 총명을 개발하고 덕행을 실천하며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온 사회에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하는 공헌을 최대한으로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불행히 때를 놓쳐 뒤늦게 배우는 만학도일지라도 진실로 ‘경’ 공부에 힘쓸 수 있고, 나아가 대학 공부를 하면서 소학 공무도 아울러 보충하게 되면, 학문의 기초가 없어 스스로 목표 달성을 할 수 없다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 퇴계(退溪)의 설명
위 소학도(小學圖)는 옛날에 없었던 것인데 삼가 신이 소학 목록에 의하여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학도를 다음에 나오는 대학도(大學圖)와 대비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또 주자의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학과 소학관계에 관한 통론을 인용하였는데, 그것은 소학과 대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힘써 공부하는데 적용할 일반적인 접근방법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보통 소학과 대학은 서로 의존해서 배움을 성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학과 소학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문(或問)에서 이 둘을 한꺼번에 통틀어 논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이 두 그림이 함께 구비되어 있어야 올을 것입니다.
◎ 제4 대학도(第四 大學圖)
[가] 대학경문(大學經文)
대학의 원리는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최고의 선에 이르러 머무는데 있다.
(大學之道 는 在明明德 하며 在新民 하며 在止於至善 이니라)
멈출 곳을 안 뒤에 목표가 정해지고 목표가 정해진 뒤에 라야 마음이 평정되고, 마음이 평정된 뒤에 라야 편안해질 수가 있으며, 마음이 편안해 진 뒤에 깊이 생각할 수가 있게 되며, 깊이 생각한 뒤에 최고 의 선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물(物)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알게되면 도(道)에 가까워 질 것이다.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사람은 먼저 자기 나라를 잘 다스렸다. 자기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한 사람은 먼저 자기 집안을 공정하게 잘 이끌었다. 자기 집안을 공정하게 이끌고자 한 사람은 먼저 스스로 수양했으며, 스스로 수양하고자 한 사람은 먼저마음을 바르게 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했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앎(知)의 경지를 최상에 이르게 했다. 앎의 경지를 최상에 이르게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캐서 밝히는데(格物致知) 있다.
사물의 이치가 끝까지 밝혀진 뒤에 앎의 경지가 최상에 이르게되고, 앎의 경지가 최상에 이른 뒤에 뜻이 정성스럽게 되며, 뜻이 정성스럽게 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된다.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수양되며, 몸이 수양된 뒤에 집안이 공정하게 이끌어지고, 집안이 공정하게 이끌어진 뒤에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 나라가 잘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태평하게 되는 것이다.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수신으로 근본을 삼는다. 그 근본이 잘 되지 않고서 말단이 잘 이루어지는 법은 없고, 그 두텁게 한 것이 엷게 되거나, 엷게 한 것이 두텁게 되는 경우는 없다.
[나] 퇴계(退溪)가 인용한 주자의 ‘대학혹문(大學或問)’의 말
어떤 사람이 “경(敬)은 어떻게 힘을 씁니까?” 라고 물었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자는 일찍이 ‘마음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게 하는 것(主一無適)’이라고 했으며, ‘외모를 단정히 하고 엄숙히 하는 것(整齊嚴肅)’이라고도 말했다. 정자의 제자 사(謝)씨는 ‘언제나 마음이 깨어 있게 하는 법(常惺惺法)’이라 설명했으며, 윤(尹)씨는 ‘마음을 모아 다른 것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고 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경(敬)이란 일심(一心)을 주재하는 것이고 모든 일의 근본이다. 만약 힘써 노력할 방법을 알면 소학을 경(敬)에 근거하여 착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소학을 경에 근거하여 착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대학을 경(敬)에 근거하여 완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로 꿰여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체로 이 마음이 확립된 뒤에 이것에서 비롯하여 사물의 이치가 끝까지 밝혀지고 앎이 최상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사물의 이치가 모두 밝혀져서 이른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뜻이 정성스럽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되어 그 몸이 수양되어지면, 이것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확립하면 작은 것이 그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집안을 공정하게 이끌고 나라를 잘 다스리어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데 까지 이르면, 이것이 곧 나를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돈독하고 공손히 하여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루도 경(敬)에서 뗘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敬) 한 글자가 어찌 성학(聖學)을 시작하고 끝내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나] 퇴계(退溪)의 설명
오른쪽 글은 공자가 남간 첫째 장입니다. 조선조 초 권근(權近)이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장(章)의 아래에 인용한 ‘혹문(或問)’의 글은 대학과 소학의 뜻을 통틀어 논한 것입니다. 이 글은 소학도 아래에 설명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논설만 통하여 볼 것이 아니라 아래 위 여덟 그림도 모두 이 두 그림과 통하기 때문에 함께 보아야 됩니다. 대개 위 두 그림은 단서를 찾아내어 이를 넓히고 채워, 하늘의 이치를 구현하여 도를 완성하는 지극한 경지인데 이것은 소학과 대학의 궁극적 목표와 근본을 나타내었습니다.
아래의 여섯 개의 도표(六圖)는 선(善)을 밝히고 자신을 성실하게 하며 덕을 높이고 과업을 넓혀 힘쓰는 것을 다루었으며, 이것은 소학 대학의 기본 바탕과 힘써 이루어야 할 바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경(敬)이란 아래위를 통한 것이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결과를 거두어야 하므로 마땅히 노력을 해야하고 이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주자의 설도 이와 같으므로, 따라서 이 십도(十圖)는 모두 경(敬)으로 으뜸을 삼은 것입니다. (태극도 설에서는 정(靜)울 말하고 경(敬)을 말하지 않았으나, 주자는 주(註)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경(敬)을 말했다.)
◎ 제5 백록동규도(第五 白鹿洞規圖)
제오 동규후서(第五 洞規後敍)
[가] 백록동규에 대한 주희(朱熹)의 후서
내가 옛날의 성현(聖賢)이 학문에 뜻을 두도록 사람들을 가르친 까닭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신의 수양을 위하여 의리를 설명하고 밝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양이 이루어지면, 그 영향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읽고 외는데 힘쓰고 글 짓는 것을 일삼음으로써 명예를 구하고 자신의 이익이나 녹을 구하려 행서는 안 된다. 오늘날 학문을 한다는 자는 그 반대다.
그러나 성현께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경전에 다 갖추어져 있다. 뜻 있는 선비는 마땅히 경전을 숙독하고 그 뜻을 깊이 생각해서 의문 나는 점을 묻고 그 것을 분별해야 한다. 진실로 이치의 당연함을 알아서 그 자신을 꾸짖어 반드시 그렇게 한다면 어찌 여러 도덕적 규범을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기를 기다려서 그것을 지키려 할 필요가 있겠는가? 요즈음에도 학문을 하는데는 규범이 있으나 그 규범들은 학문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다루는데 소홀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이 제시한 규범들은 옛 성현들의 생각과 반드시 들어맞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학당에서 제반 규범들을 다기 꺼내 놓지 않고 오히려 여러 성현들이 사람을 가르치고 학문을 하게 하는 요체를 취하여 오른쪽과 같이 조목별로 나열하여 문 지도리(楣間) 위에 걸어 놓겠다.
제군은 서로 조목들을 논의하여 의미를 밝히고 지키며 그것을 몸에 익힐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도록 하라. 그러면, 삼가고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저들의 규칙보다 엄격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켜야 할 바를 어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고 이를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제군들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 퇴계(退溪)의 설명
오른쪽의 규약은 주자가 지어 백록동서원의 학생들에게 계시한 것입니다. 이 백록동은 남강군(南康軍)북쪽, 여산(廬山)남쪽에 있는데 당의 이발(李渤)이 여기에 은거하여 흰 사슴을 기르며 지냈으므로 백록이라는 것이 그 동의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남당(南唐: 937~975)때에 서원을 지어 국상(國庠)이라 불렀고 배우려고 오는 자들이 언제나 수백 명씩 되었습니다.
송(宋) 태종(960~976)은 서적을 나누어주고 동주(洞主)에게는 관직도 주어 아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점차 황폐해졌습니다. 주자가 남강(南康)의 지사(知事)로 봉직하였을 때 조정에 청하여 그 서원을 다시 고쳐 세웠고. 학생들을 모으고 규율을 세웠으며, 도학(道學)을 널리 밝혔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 서원에서의 가르침은 천하에 성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이 이제 삼가 규약에 담겨 있는 기본 되는 목차에 의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 전하께서 보시고 그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원래 당우(唐虞)시대 요순의 가르침은 오품(五品)에 있었고, 삼대(三代)의 학문은 전적으로 인륜을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규약에 담겨 있는 원리를 끝까지 탐구하고 힘써 실천하는 것도 모두 이 오륜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왕의 학문에서 그 지켜야 할 규범과 금지하는 구체적 사항이 전적으로 일반 학생들과 같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오륜이나 인륜 같은 인간관계에 근본을 두고 끝까지 탐구하고 애써 실천하는 것이 마음을 갈고 닦는데 있어서 적절한 방법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과 함께 이 그림을 바쳐 전하께 아침저녁으로 아뢰는 설어(暬御: 임금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신하의 충고나 권유)의 보탬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의 다섯 그림은 천도(天道)에 근본을 두고 있는데, 이것의 활용은 오륜을 밝히고 애써 덕을 닦는데 있습니다.
◎ 제6 심통성정도(第六 心統性情圖)
[가] 상도(上圖)에 대한 정복심(程復心)의 말
임은정씨(林隱程氏)는『이른바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솔(統率)한다”는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오행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 세상에 태어난다. 그 빼어난 기운을 바탕으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다섯 다지 성품이 갖추어 진다. 그 빼어난 기운이 움직임에 따라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등의 일곱 가지 감정이 나오게 된다. 무릇 성(性)과 정(情)을 다 함께 통솔하는 주체는 심(心)이다.
그러므로 고요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 상태가 성(性)이요, 마음이 현실적 사물을 느껴 두루 통하는 것이 정(情)이요, 마음의 작용이다. 장재(張載)는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솔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마음이 성(性)을 통솔하기 때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性)이 되고 ‘인의의 마음’이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정(情)을 통회(統會)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 잘못을 부끄러이 여김, 미워함, 사양함, 옳고 그름을 분별함이 정이 되며, 또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사양하며 미워하기도 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성(性)을 통솔하지 못한다면 중(中)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게 되어서 성(性)이 훼손되기 쉽다. 성(性)이 정(情)을 통솔하지 못한다면 나타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화(和)를 이룰 수 없어 정(情)이 방탕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은 이런 사실을 알아 반드시 먼저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정(情)을 기르고 그 정(情)을 절제한다면 배우는 도리를 얻었다 할 것이다.』
<신이 삼가 생각하옵건대 정자의 호학론(好學論)에는 “감정을 알맞게 절제한다” 는 말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性)을 기른다”는 말 앞에 있는데 여기서는 도리어 뒤에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솔한다고 말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치를 따져 말한다면 당연히 정자의 논리가 그 순서에 맞을 것입니다. 그림에 온당치 못한 곳이 발견되어 고쳤습니다.>
[나] 중하도(中下圖)에 대한 퇴계의 설명
위 삼도 가운데 상도(上圖)는 임은정씨(林隱程氏)가 만들고 자기 스스로 설명을 붙인 것입니다. 중과 하 두 그림은 성현이 하신 좋은 말씀과 훌륭한 가르침을 펴신 뜻을 미루어 생각해서 신이 외람 되게 만든 것입니다.
가운데 그림(中圖)은 임간이 받은 기품(氣稟)중에 내재되어 있는 본연의 성(性)은 기품(氣稟)과는 섞이지 않음을 지적한 말입니다. 자사(子思)의 ‘천명(天命)의 성(性)’이라든가, 맹자(孟子)의 ‘성선(性善)의 성(性)’이라든가, 정자(程子)의 ‘이(理)의 성(性)’ 장자(張子)의 ‘천지(天地)의 성(性)’이라는 것이 ‘본연(本然)의 성(性)’입니다.
성(性)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성(性)이 나타나 정(情)이 되는 것도 모두 착함을 가리켜 한 말이니, 자사(子思)의 ‘중화로써 절제된 정(情)’, 맹자의 ‘사단(四端)의 정(情)’, 정자(程子)의 ‘어찌 착하지 아니한 정(情)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라고 할 때의 정(情)’, 주자(朱子)의 이른바 ‘성(性) 중에서 흘러 나왔으니 원래 착하지 않음이 없다는 정(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아래 그림(下圖)은 이(理)와 기(氣)를 통합하여 말한 것이니, 공자(孔子)의 ‘인간 각자의 성(性)은 서로 비슷하다’라든가, 정자(程子)의 ‘성(性)은 기(氣)이고 기(氣)는 성(性)’이라든가, 장자(張子)의 ‘기(氣)를 바탕으로 한 성(性)’, 주자(朱子)의 ‘비록 현실 속에 있어도 기(氣)는 기(氣)대로 성(性)은 성(性)대로 서로 섞이지 않는 성(性)’이라 할 때의 성(性)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性)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성(性)이 나타나 정(情)이 되는 것은 이(理)와 기(氣)가 서로 돕기도 하고 서로 모순되어 방해하기도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단(四端)의 정(情)은 이(理)가 나타날 때, 기(氣)가 그것을 따르면 저절로 선(善)만 있고 악(惡)은 없으나, 이(理)가 나타나더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氣)에 가려지게 되면, 착하지 못함에 흐르게되는 것이 필연적인 사실인 것이며, 칠정(七情)의 정(情)은 기(氣)가 나타날 때, 이(理)가 그것을 인도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약 기(氣)가 나타나더라도 알맞게 조절하지 못해 이(理)가 소멸되면, 인간의 마음이 방탕하여 악(惡)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性)과 정(情)에 대한 이치가 이와 같기 때문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性)을 논함에 있어 기(氣)를 논하지 않으면 완벽한 이론이라 할 수 없으며, 기(氣)를 논함에 있어 성(性)을 논하지 않으면 밝은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기(氣)와 성(性)을 둘로 갈라놓으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맹자(孟子)와 자사(子思)가 이(理)만을 지적하여 말한 것일지라도 이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기(氣)를 함께 말하면 성(性)이 본래 착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이(理)만을 지적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中圖)의 뜻입니다.
요컨대 이(理)와 기(氣)를 겸하고 성(性)과 정(情)을 통솔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성(性)이 나타나 정(情)이 될 한 마음의 기미는 모든 변화의 근본 요인이 되고, 착함과 악함이 갈라지는 시발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진실로 경(敬)의 태도를 갖도록 전념해야 합니다. 이(理)와 욕(欲)을 분별함에 어둡지 않고 더욱 (敬의 태도를 지니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직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 때 마음을 보존해서 성(性)을 기르는 공부를 깊게 한다면, 마음이 나타날 때 능숙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살피게 될 것입니다. 참되게 공부를 쌓아 오래도록 노력하여 끊이지 않으면, 이른바 정성껏 한결같이 진실로 중(中)을 잡는 성학(聖學)과 마음의 본체를 잘 보존하고,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심법(心法)을 모두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이 여기에서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제7 인설도(第七 仁說圖)
[가] 인설(仁說)
주자(朱子)가 말하였습니다.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이 그것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은 것이다”
아직 나타나기 전에 사덕(四德)이 갖추어져 있는데 오직 인(仁)만은 네 가지를 다 포괄한다. 그러므로 인은 네 가지 덕(德)들을 통합하며, 통달함으로써 온전한 덕이 되어 널리 펴지고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른바 자라는 성(性)과 사랑의 원리가 인(仁)의 체(體)이다.
마음이 나타날 때는 사단(四端)이 드러나는데 오직 측은(惻隱)만은 사단(四端)에 다 통해있다. 그러므로 두루 작용하여 꿰뚫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른바 성(性)의 정(情)과 애(愛)의 나타남은 인(仁)의 작용이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나타나지 않음은 본체(體)요, 이미 나타난 것은 작용(用)이다. 부분적으로 말하면 인(仁)은 본체요, 측은(惻隱)은 작용이다.
공정성이란 것은 인(仁)을 체득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니 ‘자기를 극복하여 예(禮)에 돌아가면 인(仁)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개 공정하면 인(仁)해지고, 인(仁)해지면 사랑하게 되니, 효도하고 공경(悌)하는 것이 인(仁)의 작용이고, 용서함은 인(仁)을 베푸는 것이며, 지각(知覺)하는 것은 인(仁)을 아는 일이다.
[나] 주희(朱熹)의 설명
또 주자는 말했습니다. “천지의 마음에는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의 네 가지 덕이 있는데, 원(元)은 이것들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운행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차례로 되는데, 여기서도 봄의 생동하는 기(氣)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도 덕이 네 가지가 있으니 바로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인데, 인(仁)은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나타나서 작용하면 사랑[愛], 공손함[恭], 마땅함(宜), 분별(別)의 정(情)이 되는데, 여기서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대개 인(仁)이 도(道)가 된다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 만물에 갖추어져 있음이다.
정(情)이 나타나기 전에 이 본체가 이미 갖추어 있고, 정(情)이 이미 나타나면 그 작용이 무궁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것을 체험하여 보존하면 모든 선(善)의 원천과 백가지 행위의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공문(孔門)의 가르침에서 반드시 배우는 사람들에게 인(仁)을 구하도록 힘쓰게 하는 까닭이다.
여기에 관련된 공자의 말씀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를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면 인(仁)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天理)에 돌아가면, 이 마음의 본체가 거기에 있지 않음이 없고 이 마음의 작용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또한 공자의 말씀에 ‘일상생활에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인(仁)을 처리할 때는 마음을 집중해서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이 말 역시 이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또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을 공경으로 섬기며,’ 사람과 사물에게 사랑으로 대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 또한 이 마음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가? 천지에 있어서는 한없이 넓은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에게 있어서는 따뜻이 남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덕(四德)을 포괄하고 사단(四端)에 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대의 말과 같다면 정자(程子)가 말한 사랑은 정(情)이요, 인(仁)은 성(性)이어서 사랑을 인(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틀인 말인가?”
주자(朱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정자(程子)가 아니라고 한 것은 사랑이 나타난 것을 인(仁)이라고 한 것이요, 내가 말한 것은 사랑의 이치를 인(仁)이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성(性)과 정(情)이란 것은 비록 나누어진 영역은 다르지만 맥락이 통하여 각각 특수한 바가 있는 것이니 어찌 딱 떨어져 서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있으리요.
“나는 배우는 사람들이 정자(程子)의 말을 외우기만 하고 뜻을 추구하지 않아서 드디어는 사랑을 완전히 떠나서 인(仁)을 말하게 된 것을 염려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특별히 논해서 정자(程子)가 남긴 뜻을 밝힌다. 그대가 정자(程子)의 성(性)과 내 주장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정자(程子)의 제자 가운데 만물이 나와 하나됨을 인(仁)의 체(體)라고 하는 자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으로 인(仁)의 개념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잘못된 것인가?”
주자(朱子)가 말하였습니다.“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인(仁)은 사랑이 아님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나, 인(仁)의 본체의 참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또한 마음에 지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인(仁)이 지(智)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지만 그것이 인(仁)이라고 이름을 붙이게된 참된 이유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
공자(孔子)가 “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면 인(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은 자공(子貢)에게 대답한 말과, 정자(程子)가 ‘깨달음을 인(仁)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을 보면 그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대가 어찌 이것으로 인(仁)을 논할 수 있는가!”
[다] 퇴계(退溪)의 설명
위의 인설(仁說)은 주자(朱子)가 짓고 아울러 스스로 그림을 만든 것인데 인도(仁道)를 남김없이 밝힌 것입니다. 대학전(大學傳)에 이르기를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을 계속해서 실천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옛 제왕들의 마음을 전하고 인(仁)을 체득한 묘법을 구하려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제8 심학도(第八 心學圖)
[가] 정복심(程復心)의 설명
임은정씨(林隱程氏)가 말하였습니다. “어린이의 마음(赤子心)은 욕심에 아직 어지럽혀지지 않은 양심이요, 인심(人心)은 곧 욕심에 눈 뜬 마음이요, 대인의 마음(大人心)은 의리가 잘 갖추어진 본심이요, 도심(道心)은 곧 의리를 깨달은 마음이다,”
이것은 두 가지 모양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형기(形氣)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으며, 동시에 성(性)과 명(命)에 근원을 두었기 때문에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다. <성명(性命)에 근원하면 도심(道心)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을 순수하고 전일하게(精一: 惟精惟一)하고 선을 택하여 굳게 지킨다는 것(擇執: 擇善而固執之者也), 그 이하는 인욕을 막아서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군자는 홀로 아는 그곳을 삼간다는 것(愼其獨;中庸)<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愼獨;大學)>”이하는 인욕(人欲)을 막는 공부이니, 반듯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不動心)에까지 이르러야 “부귀로 해서 타락하지 않을 수 있고, 가난과 천함으로 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며, 위험과 무력애도 굽히지 않을 수 있어서 그 道가 밝아지고 德이 확립됨을 볼 수 있게 된다,(孟子; 滕文公下)”
또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戒懼) 이하는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이니, 반드시 마음에 따라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從心)<論語.爲政;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곧 본체요, 욕(慾)이 곧 작용이며, 본체가 곧 도(道)요, 작용이 곧 의로운 것이요, 소리내는 것이 조화롭게 되고 행동함에 법도가 있게 되어, 생각하지 않고도 얻고,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게 됨을 볼 수 있게 된다.
요컨대 공부하는 요령은 하나의 경(敬)애서 떠나지 않는데 있다. 대개마음이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요, 경(敬)은 또한 한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 “마음을 모아 흩어짐이 없게 해야한다(主一無適)”는 설과 “외모를 반듯이 하고 태도를 엄숙히 해야한다(整齊嚴肅)”는 설과 “그 마음을 수렴한다(心收斂)”는 설과 “항상 깨어 있게 한다(常惺惺)”는 설에 대하여 익숙히 탐구해 보면 공부가 다 되어 충분히 성인의 영역에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나] 퇴계(退溪)의 설명
심학도는 임은정씨(林隱程氏)가 성현들께서 심학을 논한 명언들을 모아서 만든 것입니다.
그림에서 분류 대치시키기를 많이 한 것을 피하지 않을 것은, 성현의 심법(心法)이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배열한 것은 다만 얕고 깊음과 생소하고 익숙한 점을 들어 대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것이 있다는 것일 뿐이요, 공부의 과정과 절차에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처럼 선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의심하기를 이미 대체적으로 서술한 “흩어진 마음을 찾는다(求放心)”고 한 것은 공부의 시작이니 만큼 “마음을 둔다(心在)”고한 것의 뒤에 놓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신(臣)은 생각하옵기를 “흩어진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얕게 말하면 물론 재일 먼저 해야할 것이지만, 그 깊은 경지에 나아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한 순간에 한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마음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안자(顔子)도 석달 뒤에는 인(仁)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으니,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곧 방심(放心)의 상태에 들어선 것입니다.
다만 안자(顔子)는 잘못이 있자 금방 이것을 알아차리고, 알고 난 뒤 곧 다시는 싹트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도 “흩어진 마음을 찾는” 방법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정씨(程氏)의 그림을 이렇게 차례 지운 것입니다.
정씨(程氏)의 자(字)는 자견(子見)이요 신안 사람인데, 은거하여 벼슬을 아니하고 행실과 의리가 매우 잘 갖추어졌습니다. 늙도록 경서를 탐구하여 깊이 얻은바가 있었고 사서장도(四書章圖) 세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원(元)의 인종(仁宗)조에 천거에 의해 불리워져서 임용하려 했으나, 자견(子見)이 원하지 않아서 향군박사(鄕郡博士)를 시켰더니 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됨이 이러하오니 어찌 소견이 없이 함부로 그림을 지었겠습니까?
◎ 제9 경재잠도(第九 敬齋箴圖)
[가] 경(敬)에 대한 잠언 (朱子의 敬齋箴)
의관을 바로 하고 존경하는 눈빛을 띄도록 하라.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上帝)를 앞에 모시고 살 듯 하라.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고 손의 자세는 공손하게 하라. 땅을 골아 밟되 개미둑(蟻封)에서도 피해 돌아가듯 하라.
문을 나서면 손님 대하듯 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제사를 드리듯 하라.(論語,顔淵; 出文如見大賓.使民如承大祭) 조심조심 두려워하여 잠시도 안이하게 말라.
입을 지키기를 병 입을 막듯 하고, 뜻 지키기를 성문 지키듯 하라. 성실하고 진실하여 감히 잠시도 경솔히 하지 말라.
동에 머물면서 서로 가지 말며 북에 머물면서 남으로 가지 말라. 일에 당하여 마음을 집중하고 다른 데로 마음이 가지 않도록 하라.
두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두 갈래로 하지말고, 세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세 갈래로 하지 말라.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라.
이와 같이 일에 임하는 것이 敬을 지니는 것이다. 움직일 때나 멈추어 있을 때 그 사이에도 서로 어기지 말고 밖이나 안이나 서로 바르게 하라.
잠시라도 마음에 틈이 나면 만가지 사욕이 일어난다. 불길이 없어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어도 차가와 진다.
털끝만큼이라도 틀림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그 자리가 뒤바뀐다.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구법(九法; 洪範九疇)이 없어진다.
오오! 소자여 생각하고 조심하라. 먹으로 써서 경계를 삼아 마음(心靈)에 고하노라.
[나] 敬齋箴에 대한 설명
주자(朱子)가 말하였습니다. 주선(周旋)이 규(規)에 맞는다고 함은 회전할 때 그 원(圓)이 표준에 맞는 것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꺾을 때 구(矩)에 맞는다고 함은 꺾어 돌 때 그 모서리가 직각자에 맞는 것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의봉(蟻封)이란 개미 둑이다. 옛말에 ‘말을 타고 개미 둑 사이로 굽어서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것은 개미 둑 사이의 골목길이 꼬부라지고 좁아서 그 사이를 말을 타고 절도를 잃지 않으며 꼬불꼬불 달려 돌아간다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말한 것이다.
입 조심하기를 병(甁)마개 막듯이 한다는 것을 말을 망령되게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고, 뜻을 막기를 성(城)을 지키듯 한다는 갓은 사악한 생각이 들어옴을 막는다는 것이다.
또 말하였습니다. “경(敬)은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본래 하나가 있던 곳에 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고, 본래 하나가 있던 곳에 두 개를 더하면 곧 세 개를 이룬다. 잠깐 사이란 시간을 가지고 말함이고, 터럭 끝만큼의 차이란 일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임천오씨(臨川吳氏)는 말하였습니다. “이 잠(箴)은 모두 열 장(章)으로 되었는데 한 장은 사구(四句)식이다. 첫째 장은 조용하게 있을 때에 어김이 없을 것을 말한 것이고, 둘째 장은 움직일 대에 어김이 없을 것을 말한 것이다. 셋째 장은 겉모습의 바름을, 넷째 장은 속마음의 바름을 말한 것이다. 다섯째 장은 마음을 바로 잡아 일을 잘 처리할 것을 말하였으며, 여섯째 장은 일에 집중하되 마음에 근본을 둘 것을 말하였다. 일곱째 장은 앞의 여섯 장을 총괄한 것이며, 여덟째 장은 마음의 흩어짐의 병폐를 말한 것이다. 아홉째 장은 일을 하는데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병폐를 말한 것이며, 열째 장은 이 한 편(篇)을 총괄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서산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경(敬)에 대한 뜻풀이는 여기서 더 이상 보태어 말할 것이 없다. 성학(聖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익히고 반복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 퇴계(退溪)의 설명
경재잠(敬齋箴) 제목 아래에 주자(朱子)가 스스로 설명하여 말하기를 “장경부(張敬夫)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그 남긴 뜻을 모아 경재잠을 지어 재실(齋室)의 벽에 써 붙이고 스스로 경계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이것은 경(敬)의 조목(目說)인데 여러 관점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기에 “지두(地頭)란 말이 실제 경(敬)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좋은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화(金華)의 왕로재 백(王魯齋栢)이 여러 가지 조목을 배열하여 이 도형을 만들었고 모든 것이 명백하고 짜임새 있게 하여 제자리에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일상생활을 하며 살펴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생각하는 동안에 스스로 체험하고 터득함이 있으면 경(敬)이 성학(聖學)의 시작과 끝이 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 제10 숙흥야매잠도 (第十 夙興夜寐箴圖)
[가] 숙흥야매잠명(夙興夜寐箴銘)
닭이 울 때 깨어나면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찌 그사이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때로는 지난 허물을 반성하고 때로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서 얻는다. 이런 경우에 차례로 조리를 세워 묵묵히 명쾌하게 생각할지어다.
근본이 섰으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차리고 단정히 앉아 자세를 바로 한다.
이 마음을 다잡아 밝기를 떠오르는 태양같이 하라. 태도를 엄숙하게, 겉모습을 단정히 하여 마음을 비워 밝게 하고 조용히 하기를 한결같이 한다.
바야흐로 책을 펴고 성현을 마주 대하듯 한다. 공자(孔子)께서 자리에 계신 듯, 안자(顔子) 증자(曾子)가 앞뒤에 계신 듯 한다.
위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몸소 간절히 경청(敬聽)하고,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묻고 따지는 말을 반복해서 참고하여 바로 잡으라.
일이 생기면 그 일에 대응하라. 그리고 그 실제를 통하여 배운 바를 체험할지어다. 환하게 밝은 하늘의 명에 항상 눈을 두어야 한다.
사물(事物)에 대한 응접(應接)이 끝나면 전과 같이 되돌아간다. 마음(方寸)을 맑게 하여 정신을 모아 생각을 쉬게 한다.
움직임과 멈춤이 순환할 때 마음이 이를 살핀다. 멈출 때는 마음을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행동을 살피어 두 갈래 세 갈래로 하지 말라.(主一無適)
독서 하다가 쉬는 여가에 간간이 마음을 풀고 쉬어라. 정신을 푸근하게 하여 성정(性情)을 휴양(休養)하라.
해가 저물면 사람은 지쳐 혼미한 기운이 타기 쉽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떨쳐 밝혀라.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때 손발을 가지런히 해여 한다.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을 잠들게 하라.
깨끗하고 맑은 밤 기운을 길러 저축하면 새로운 기운(貞)이 생긴다. 생각을 언제나 여기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할지어다.
[나] 퇴계(退溪)의 설명
위의 잠(箴)은 남당 진무경(南塘 陳茂卿:名은 栢)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금화 왕노재(金華王魯齋)가 태주(台州)의 상채서원(上蔡書院)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아 볼 때 오로지 이 잠(箴)으로써 가르쳤으며,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마다 외우고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삼가 노재(魯齋)의 경재잠도(敬齋箴圖)를 본떠서 이 도형을 만들어 그의 도형과 상대(相對)하게 하였습니다.
대개 경재잠(敬齋箴)에는 경(敬)을 실천(工夫)하는데 적용할 수 있는 여러 주제(地頭)가 있으므로, 그 주제(地頭)에 따라 배열하여 도형을 만들었습니다,
이 箴에도 하루 중에 시간대에 따라 경(敬)을 적용(工夫)하도록 제시하였고, 도형도 시간대에 따라 정리(排列)하여 만들었습니다.
무릇 도(道)는 일상생활 어디에나 있어 가는 곳마다 유행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이(理)가 없는 곳이란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서라고 공부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도(道)는 잠시이라도 정지할 수 가 없으므로, 이(理)가 순식간(瞬息間)도 없는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를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말씀하기를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道)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삼가고 남에게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가장 은밀한 것만큼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가장 희미한 것만큼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군자는 홀로 아는 그곳을 삼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번 움직이고 한번 멈추는(一動一靜) 경우에나 어느 곳 어느 때에도 마음을 보존하여 성품을 기르고 잘 살펴서 서로 번갈아 공부를 힘쓰게 하는 방법입니다.
과연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상황에서나 털끝만 한 어김도 없을 것이요, 어느 시점에서도 일순(一瞬)의 중단도 없을 것입니다.
이 두 잠(箴)을 가지고 아울러 정진하면 성인이 되는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다섯 그림은 심성에 근원한 것으로서, 그 요점은 일용생활에 힘쓰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敬畏)을 높이고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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