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解釋】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親을 新으로 고친다.) 하는데 있고, 지선(至善)에 머무르는데 있다.(제1절)
‘대학이란 것은 대인(大人)의 학이다.’
【解說】대학이 대인의 학이다. 라고 하는 대인은, 소자(小子-어린아이)에 대한 어른이란 뜻이다. 마찬가지로 대학을 대인의 학이라고 하면서도, 그 대인을 어린아이에 대한 어른이 아니고, 소인에 대한 대인으로 풀이하는 왕양명의 학설은, 첫머리서부터 주자학과 대립되어 있다.
즉 왕양명의 가장 만년의 글인《대학문(大學文)》첫머리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 선비(朱子)는 대학을 대인의 학이라고 했는데, 대인의 학이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는가. 이른바 대인이란 것은 천지만물로 일체(一體)를 삼는 사람이다. 그가 천하를 보는 것은 한 집안과 같고, 중국을 보기를 한 사람같이 한다. 그런데 육체적인 개별성을 고집하여 나와 너를 구별하는 사람은 소인에 다름없다. 대인이 천지만물을 일체로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의 인(仁)이 본래 천지만물과 하나로 되어있는 것이다. 소인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본래는 그러했던 것인데, 다만 소인은, 스스로 그것을 작게 하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일체의 인(仁)은 소인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있는 것이며, 하늘과 땅의 성품에 뿌리를 박아 스스로 신령하고 밝아 어둡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밝은 덕이라 말한다.”왕양명이 말하는 ‘만물일체의 인’은 정명도의 인설(仁說-주자는 이 仁說에는 비판적이었다.)을 이어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명(明)은 밝히는 것이다. 명덕(明德)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아, 그로써 뭇 이치를 갖추어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의 잡은 바와 인욕(人欲)이 가린 바가 되면 곧 때로 어두워진다. 그러나 그 본체(本體)의 밝음은 곧 일찍이 쉬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드디어 밝히고 그로써 그 처음에 돌아가야 한다.’
먼저 명명덕(明明德)을 풀이한다. ‘명은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명명덕>의 첫 <명>자를 동사로 읽으라는 뜻이다.
밝힌다는 것에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밝은 덕서부터는 주자학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규정을 내포하게 된다. 먼저 <명덕> 즉 밝고 빛나는 덕은 ①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받은 것,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것, ②허령하여 어둡지 않은 것, ③뭇 이치를 다 갖추고 있어 모든 일에 응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①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②의 ‘허령하여 어둡지 않다.’고 한<허(虛)>는, 일정한 고정적 내용에 의해 채워져 있지 않은 것, 즉 텅 비어있는 것을 뜻하며, 마음의 속성을 말할 때 자주 쓰여진다. 중국에서의 해부학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적어도 동물의 해부를 통해서 심장의 속이 비어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방촌지허(方寸之虛)>, 즉 사방 한 치의 텅 빈 것이라는 표현은 아주 널리 쓰이고 있다. 다음에 영(靈)이란 말도,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기능을 표현하는 말로 즐겨 쓰이고 있다. 신령하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그 기능이 불가사의한 것이다. 오늘날 영활(靈活)이니, 영교(靈巧)니 하는 말이 쓰이고 있듯이 어떤 장해에도 방해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동하는 것을 뜻한다. 원래 물질계에서 기운(氣)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마음은 <기운(氣)의 정상(精爽)>이란 점에서 마음에도 쓰인다.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신령하다. 어느 것을 모르며, 어느 것을 깨닫지 못하며, 어느 도리가 두루 갖춰져 있지 않겠는가.”(《朱子語類》). ‘어둡지 않다.’라는 것은 곧 <밝음(明)>이며, 다른 것이 없다. 마음은 오행(五行)으로는 불에 속해 있는 것으로, 광명, 즉 밝게 빛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자세하게 말하면, 마음은 성(性)과 정(情)의 통일체(朱子는 마음을 내용적으로 정의한 張橫渠의 말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거느린다.’를 절대적인 것으로 했다.)에 다른 것이 없다. 성이란 것은 구체적으로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오상(五常)이고, 정이란 것은 그것의 발현(發現)으로서의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에 다른 것이 없다. 하늘로부터 받은 <성(性)이라고 하는 이<빛나고 밝고 찬란한 것>, 그것이 마음에 내재해 있음으로 해서, 마음은 밝은 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 셋째로 마음이 뭇 이치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개물(個物)ㆍ특수(特殊)에 내재하는 이치를 <성>이라고 한다고 앞에 말한 것과 서로 응하게 된다. 주자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한 또 하나의 정의인 <성즉리(性則理), 程伊川의 말)>가 그것으로, ‘성품이 곧 이치다.’라는 것은, 이치의 한 부분이란 말이 아니고, 각 개체의 성품이 각각 통틀어 이치라는 것이다. 마음은 그 성품에 일체의 이치, 즉 뭇 이치(물론 그것은 혼연일체의 한 이치를 이루고 있다.)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체의 것에 능히 응할 수가 있다. 어떤 사상(事象)에 대해서도 바르게 행동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만물과는 똑같은 이치로 일관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에 뭇 이치가 갖춰져 있는 것. 그것이 곧 성품이요 밝은 덕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의 모든 경우 본래의 모습대로, 즉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그것은 가려지고 속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무엇에 가려지고 무엇에 속박되어 있느냐 하면, 기질(氣質)과 인욕(人欲)으로 속박되고 가려져 있는 것이다. 주자학의 가장 일반적인 존재론은 <이기설(理氣說)>인데, 그것을 인간학과 윤리학의 차원에서 번역해 말하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욕심에 대한 학설>에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로서의 기(氣)로 구성되어있는 이상, 이(理-性)는 <기>에 의한 방해를 받는다.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인욕의 방해를 받는다. 밝게 빛나는 이치와 성품이, 기질과 인욕의 막(膜)에 덮여, 그로 인해 불투명하고 흐릿해 있는 모습이 곧 <어둠(昏)>이다. 그 경우에도 본질적인 밝음과 빛남은 잃지 않고 있는 것이므로, 어떤 기회에 반드시 그 빛을 새어 내보내는 (<情>에 發한다.)일이 있다. 그 간신이 비추고 있는 광명, 그것에 의해, 그것을 손잡이로 해서 자꾸자꾸 잡아당겨 가며, 그 본래의 밝고 빛나는 것을 밝게 빛내간다. 그리하여 그 궁극에 가서, 그 본래의 즉 최초의 밝은 덕으로 복귀한다. 즉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이라고 하는 것의 기초적인 구조인 것이다.
‘말하는 바를 인하여 드디어 밝힌다.’라는 것은,《맹자》사단설(四端說)과 같은 이론이다.(《맹자》公孫丑上). 사단설에 있어서 측은(惻隱)의 마음은 인(仁)의 단(端)이요, 수오(羞惡)의 마음은 의(義)의 단이요, 사양의 마음은 예(禮)의 단이요, 시비의 마음은 지(智)의 단(《孟子》에는 信에 대한 말이 없다. 그래서 信이 없는 경우 四端, 信이 있는 경우 오상이 된다.)이라고 하는데, 단은 단서(端緖), 즉 실마리란 뜻이다. 인ㆍ의ㆍ예ㆍ지라는 <성품>은 마치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처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 실마리(측은해 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시비를 따지는 마음)가 상자 밖으로 내밀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손에 잡고 차츰 더듬어 들어가면 형이상학적 초감각적 성품의 존재도 명확하게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여기에 보이는 것도 최초에 빛나는 상태, 이어 빛나는 것의 상실, 마지막에 이 타락과 혼미를 극복한 최초에로의 복귀에 불과한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 배운다고 하는 것은, 위에 말한 복귀를 배우는 것이다. 주자학의 표어의 하나에 ‘기질(氣質)을 변화한다.’고 하는 것이 있는 것도, 성품이 기질에 덮여 방해받고 있는 상태에서, 그 기질의 방해 작용을 극복하고 배제하여 본래대로의 성품을 빛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천리를 두고(存天理) 인욕을 버린다(去人欲).’는 것도 그것이다.
한편 한 가지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주에 씌어있는 허령불매(虛靈不昧)란 말은 원래 불교의 말이다. 즉 한문 번역의《대지도론(大智度論)》에 있는 말이다. 또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복초(復初)>도 원래는《장자(莊子)》의 말이다. 그래서 공격을 받는 일이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 ‘뭇 이치를 갖추어 모든 일에 응한다.’고 이치와 일을 서로 대응시키고 있는 것도, 불교의 화엄(華嚴) 철학, 예를 들면<이사무애법계관(理事無礙法界觀)>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런 것들은 주자학 공격의 재료로서 되풀이해서 꺼내곤 하는데, 굳이 그것을 들어 논할 필요는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자의 학설을 헐뜯는데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밝은 덕을 밝힌다.’는 데 대해서는, 양명학과 주자학과의 차는 보통 별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만은 일단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의 철학에 있어서는 밝은 덕은 <마음=성품+감정>이라는 성품(마음의 본질) 부분에 관계되는 것인데, 양명의 <심즉리(心卽理)>의 입장은 성품과 감정이 나눠지지 않은, 본질이 곧 현상인 마음(이것이 良知다)을 그대로 통틀어 <밝은 덕>이라고 하는 것이다.(따라서 明明德은 致良知). 즉 양명의 입장에서는 감정까지를 포함한 마음에 대해 밝은 덕이 이야기되고 있다. 감정이 극단에 흐른 것을 사람의 욕심이라고 한다면, 어느 의미에서는 욕심을 긍정하는 데까지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신(新)이란 것은 그 옛것을 고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그 밝은 덕을 밝히고, 또 마땅히 미루어 그로써 사람에게 미쳐, 하여금 또 그로써 그 옛날 물든 더러움을 버림이 있게 하는 것이다.’
<재친민(在親民)>을 풀이하는 이 대목은, 주자학의 독특한 읽는 방법을 말하는 곳으로 양명학과 현저하게 대립되어 있는 한 대목이다. 즉 주자 이전의 원본인《예기》대학편의 정현(鄭玄)의 주석과 주자의《대학장구》에 반기를 들고 있는 왕양명의《고본대학(古本大學)》이, 이 <친(親)>이란 글자를 그대로 <백성을 친한다>라고 읽고 있는데 대해, 주자는 정자에 따라 <친(親)>은 <신(新)>을 잘못 쓴 것이라 하여, <백성을 새롭게 한다.>고 고쳐 읽는 것이다.
주자가 <친>을 <신>으로 고쳐 읽은 것은, 전(傳)제2장에 신민(新民)이니 유신(維新)이니 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인데, 주자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 학자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주자의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다.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이 한 대목은, 이미 자신의 밝은 덕을 밝게 한 군자가, 나아가 다시 그것을 남에게도 미루어 미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히게 한다. 즉 앞서 물든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어 자기 자신을 새롭게 고쳐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쪽에서 말하면 백성들을 새로 고쳐나가는 그것이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된다.
‘밝은 덕을 밝혀 자신을 새롭게 하고, 그로써 그 백성을 새롭게 한다.’(《語類》). 자기혁신은 다른 사람의 혁신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다행히 내게 있는 밝은 덕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다같이 밝은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빛나게 하지 못하고 있는 , 그리하여 낮고 더럽고 구차하고 천한 가운데 빠져 헤매고 있으면서, 스스로 만족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뭇 사람들을 보면, 아무라도 측은하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건져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밝은 덕을 밝힌 것을 남에게도 미루어 미치게 하여, 제가(齊家)에서 시작해서 치국(治國)을 거쳐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밝은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빛나게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스스로 빛나게 하여, 그 이전에 물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더해주거나 붙여주는 것은 아니다.’(《或問》)
한편 양명이 <친민(親民)>을 글자 그대로 백성을 <친한다.>고 읽는 것은, 그 <명명덕> (즉 致良知)의 해석에서 직선적으로 나온다. 마음의 본질(明德, 즉 良知)은 만물일체의 인(仁)이다. 그러므로 밝은 덕을 밝게 하는 것은, 당연히 백성을 친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밝은 덕을 밝게 하는 것은, 천지만물일체의 용(用)을 달(達)하는 것이다.’(《大學問》), ‘한 물건이라도 곳을 잃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내 인(仁)에 아직 못다한 점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따름이다.’(《傳習錄上)》
원본에 따라 말하더라도, 과연 전제2장에 작신민(作新民)이란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 <新民>은 주자도 말하고 있듯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백성>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신>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작(作)이란 글자는 동사로서, 맨 처음에 있는 재친민(在親民)으로 말하면 친(親)이란 글자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신(新)의 의미일 수는 없다.
뒤에 ‘군자는 그 어진이(賢)를 어질게 여기고 그 친한이(親)를 친하게 여긴다.’(제3장 제5절), ‘적자(赤字)를 보호함같이 한다.’(제9장 제2절), ‘백성의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는 이것을 백성의 부모라 이른다.’(제10장 제3절)고 한 것은, 모두 여기를 친(親)이란 글자 그대로 해야만 뜻이 서로 연관된다. 공자가 ‘몸을 닦아 그로써 백성을 편안히 한다.’(《論語》憲問)고 한 것도 <몸을 닦는다.>는 것은 밝은 덕을 밝게 하는 것이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것은 백성을 친하는 것에 다를 것이 없다. <백성을 친한다.>고 말하면 가르치는 것과 기른다는 뜻을 겸하게 되지만, <새롭게 한다.>고 하면 뜻이 한정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傳習錄》)
‘머무른다는 것은, 반드시 이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선(至善)은 곧 사리가 당연한 것의 극진함이다. 말하자면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다 마땅히 지선의 땅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반드시 그로써 천리의 지극함을 다함이 있고, 일호(一毫)의 인욕의 사사로움도 없는 것이다.’
‘지선에 머무른다.’의 ‘머무른다.’는 것은 어느 장소에 가 닿으면 거기서 다시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선>이란 것은 <사리당연의 극> 즉 사물의 이치-마땅히 그래야 할 규범-의 극치를 말한다. 모든 이적(理的)인 것은 <선(善)>으로 표현 될 수 있지만, 지금의 경우<선(善)>이란 글자는 가볍게 더해졌을 뿐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알기 쉽다. 즉 지극하다는 <지(至)> 한 글자로 생각하는 쪽이 이해하기 쉽다. 모든 사물에 있어서 <지>, 즉 극치의 곳(朱子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하면 <꼭 좋은 곳>)이 있을 것이므로, 그곳을 찾아 거기에 이르게 되면 그곳을 굳게 지켜 다시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극치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표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흡사 계기의 바늘이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사이를 심하게 흔들리던 끝에 마지막에 가 있어야 할 한 점에 서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한 점이 <극(極)>이요, <선>이다. ‘결코 인력이나 사사로운 뜻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지나쳐도 안 되고 미치지 못해도 안되는 그러한 한 개의 당연한 법칙….’ (《語類》) 당연한 법칙이란 것은, ‘사물에는 그래야만 될 까닭과 당연히 그래야 할 법칙이 있다. 그것이 이치다.’(《或問》)라고 하는 그 당연의 법칙이다. <명명덕>과 <신민> 둘에 있어서 반드시 이러한 극치의 곳에 이르러 다시는 물러나거나 옮겨가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경에 있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의미이지만, 물론 그것은 총괄적으로 말한 것으로, 세목에 걸쳐서 말하면 이러한 극치 즉 지선은 사물마다 ‘잇는 곳에 따라 있다. 수신 속에도 지선이 있고 제가 속에도 지선이 있어’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語類》) 임금으로서는 인(仁)에 머무르고, 신하로서는 경(敬)에 머무르고, 자식으로서는 효(孝)에 머무르고, 아비로서는 자(慈)에, 사람과 사람에 있어서는 신(信)에 머무르며, <신민>에 있어서는 <지선>에 머무르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진행은, 중국 철학의 기초개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오상>은, 다섯 가지가 일단 똑같은 서열로 손꼽히고는 있지만, 최후의 <신>과 <인ㆍ의ㆍ예ㆍ지> 넷과의 사이에는 말하자면 차원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해도 좋다. 즉 인이 참다운 인이 되고, 의가 참다운 의가 되고, 예가 참다운 예가 되고, 지가 참다운 지로 되는, 그런 것들을 각각 보증하는 원리가 신(참)인 것이다. 즉 원래는 인의예지 네 가지(《명자》에는 이 넷뿐이다.) 만으로 끝내면 끝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흡사 금ㆍ목ㆍ수ㆍ화ㆍ토<오행>에 있어서, <토(土))>는 결코 다른 네 가지와 똑같은 자격으로 있는 것은 아니고, 나무를 참으로 나무되게 만드는 계기, 불을 참으로 불되게 만드는 계기…, 그것이 바로 흙인 것과 같은 것이다.
<명명덕>, <신민>에 있어서 ‘지선에 머무른다.’는 것은, 다시 이를 요약해 말하면, 천리가 완전히 실현되어, 인욕이라고 하는 사사로운 것이 털끝만큼도 없는, 그러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천리의 극(極)을 다하여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주자학ㆍ양명학의 근본적인 표어로서, 그것들의 근본 동기, 혹은 궁극 목표는 천리 그것으로, 인욕의 섞임이 없는 그같은 인격에 도달하려는 것이며, 또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하는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 그 근본 신념이다. ‘배움은 그로써 성인에 이르는 길’, ‘성인은 배워서 이르게 된다.’라고 하는 말은, 송학(宋學)의 근본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도처에 되풀이되는 말이다. 명명덕ㆍ신민의 주장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自利)ㆍ이타(利他)>와 같은 관계가 역시 인정될 수 있는데, 그것들이 <지선에 머물러 있는>곳에, 주자는 인욕이 완전히 극복되고 천리가 드러나 있는 것 같은 성인의 경지를 본 것이다.
이미 말해 온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이 이상주의는 일종의 독특한 이상주의이다. 원리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그리고 어디까지고 추구해 마지않는 칸트주의, 먼 수평선에 확고부동하게 도달하려고 계속 쫓아 마지않는 항해자의 이상주의, 그러한 것과는 상당히 취지를 달리하고 있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무한추구의 이상주의이기보다는, 말하자면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中)의 파악과 유지의 이상주의다. 양명학과의 비교에서 말하면, 주자학 쪽이 칸트주의에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역시 칸트주의와의 사이에는 실상 이러한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일단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이른바 중국식 사유(思惟)라는 것의 특징을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지선에 머무른다.’에 관해서도, 주자의 학설과 양명의 학설은 크게 다르다. 양명학설에 의하면, 지선이란 것은 글자그대로 털끝만큼도 악이 없는 것, <마음의 본체(良知)>를 가리키는 것이고, 지선에 머무른다는 것은 <마음의 본연으로 돌아가는>것이다. 물론 <지어지선>이 명명덕ㆍ친민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자처럼 단순히 객관적으로만 말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하다. 주자의 지선은 이미 말한 것처럼, 지극히 착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극지(極至)라고 바꿔 말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사사물물 <곳곳마다 다 있는> 것이다. 주자학의 입장에 서면 다같이 이(理)라고 말해도 아비를 섬기는 효, 임금을 섬기는 충, 친구와 사귀는 신, 백성을 다스리는 인 등 갖가지 <이>가 존재해 있는 것이다.(양명이 말하는 것처럼) 지선을 단순히 마음에 찾는 것만으로는 천하의 사리를 다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이 참으로 당연한 의문에 대해 양명은 정면에서 대답했다. “마음이 곧 이치다. 천하에 또 마음 밖의 일, 마음 밖의 이치가 있겠는가.” 사사물물에 지선을 찾는 것은, 맹자의 이른바 <의외(義外)>에 다를 것이 없다. 예를 들면, <효>의 이치는 아버지의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만일 아버지의 몸에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가 죽고 난 뒤면 효의 이치는 없어지고 마는가. 유교에서 효도의 가장 큰 것이라고 하는 상(喪)ㆍ제(祭)와 같은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는가. 그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마음이 사사로운 욕심에 덮이지 않고 천리 그대로 있다면, 그것이 아비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면 효가 되고,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면 충이 된다. 겨울에 부모가 추워할 것을 생각하면 반드시 따뜻한 도리를 찾고, 여름에 부모가 더워할 것을 생각하면 반드시 시원한 도리를 찾는 것이다.
되풀이해 말하거니와, 양명의 지선이 명덕ㆍ친민과 관계없이 단순히 마음의 본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명명덕ㆍ친민 각자에 있어서 지선의 땅에 머무른다고 주자가 말하는 것은, 그것뿐이라면 양명도 다란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설이 ‘지선이란 것은 사리당연의 극이다.’라는 견해에 바탕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선은 사물에 대해서 말할 것이 아니고, 근원인 마음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傳習錄》)
‘이 셋은 대학의 강령(綱領)이다.’
이 셋이란 것은 명명덕ㆍ신민ㆍ지어지선 셋을 말한다. 하기는 나란히 같이 셋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앞의 둘과 마지막의 지어지선과는 성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앞에 말한 그대로다. 아무튼 이 첫머리의 셋은《대학》의 총괄적인 주제로서, 특히 3강령이라고 불린다. 강(綱)은 그물에 있어서 큰 줄, 즉 그 한 가닥을 끌어당김으로써 그물 전체의 눈이 달려 나오는 큰 줄을 말하고, 영(領)이란 것은 옷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중심적인 부분인 옷깃을 말한다. 이 셋을 특히 중요한 것으로 하는 것은 양명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3강령이란 말이 가끔 쓰이고 있다. 다만 주자학에서는, 먼저 명명덕을 하고, 그런 뒤에 비로소 신민에 나아간다는 단계적인 순서를 중시하는데 대해, 양명학에서는 어디까지나 그 동시성(同時性)-그보다도 구분정립적(區分定立的)인 단계주의의 부정-을 역설하고 있는 점이 대조적이다.
知止而后有定이오 定而后能靜이오 靜而后能安이오 安而后能慮요 慮而后能得이니라.
【解釋】머무름을 안 뒤에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능히 얻는다.(제2절)
이 1절은, 명명덕ㆍ신민이 <지선에 머물러야 할>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제2절의 중심은 결국 <지지(知止)→능득(能得)> 둘에 지나지 않는다
‘머무른다는 것은 마땅히 머물러야 할 땅, 즉 지선이 있는 곳이다. 알면 곧 뜻에 정향(定向)이 있다.’
【解說】밝은 덕을 밝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각각 지선에 머무르기 위해서이지만 그러나 먼저 그 지선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면,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활을 쏘는 사람은 물론 목표물을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최초로 목표물이 있는 곳을 알아두지 않으면, 맞출 곳을 파악하여 그것을 맞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머무름을 안다는 것은 머물러야 할 곳을 아는 것, ‘물(物)이 이르고 지(知)가 이르러’ 즉 먼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수속을 거친 뒤 천하의 일에 있어서 하나하나의 그 지선이 있는 곳을 아는 것,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을 알면, 방촌(方寸)의 사이 즉 마음속에 있어서 모든 사물이 일정한 이치를 갖게 된다. 다른 경우는, ‘능히 고요하고, 능히 편안하고, 능히 생각하고, 능히 얻는다.’라고, 전부 능히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는데, 이곳만 ‘정함이 있다.’라고 능히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예를 들면 <정(靜)>은 이(理)에 대해 말한 것이기 때문에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일정한 것으로 파악되게 되면, 즉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되면, 주체 쪽에 있어서의 지향은 일정한 것으로 된다. 즉 인욕을 극복하여 천리를 실현한다고 하는 곳으로 방향을 정하게 된다.
‘고요하다는 것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치가 일정한 것으로서 파악되고, 우리들의 존재 그것의 방향이 결정되게 되면, 마음을 움직일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고요해지게 된다.
‘편안하다는 것은, 있는 곳에서 편안함을 말한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어떤 처지에 있어서나 편안하다.《어류(語類)》에 의하면 편안한 것은 고요한 것이 한층 나아간 단계다.
‘생각한다는 것은 일에 있어서 정상(精詳)한 것을 말한다.’
어떤 상태에서고 안정되어 있게 되면, 일상생활에 있어서 항상 마음의 여유가 있어, 사물이 밖으로부터 닥쳐와도 그것을 대처하는데 있어서, 잘 짐작하고 따져 사려(思慮)를 충분히 다할 수 있다.
‘얻는다는 것은, 그 머무를 곳을 얻는 것을 말한다.’
잘 생각하게 되면 사사건건 그 하나하나에 있어서 각각 그 이치를 알아차리고, 깊이 미묘한 곳까지 연구하여 마침내 그 머물러있어야 할 지점을 파악하고, 거기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머무를 곳을 알면’, 거기서부터 ‘머무를 곳을 능히 얻기’까지는 다만 한 걸음의 거리 밖에 안되는 것으로, 지지(知止)와 능득(能得)의 중간에 있는 정(定)ㆍ정(靜)ㆍ안(安)ㆍ려(慮)의 넷은, 결코 시간적으로 이 네 가지를 하나하나 거쳐 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심리적, 논리적으로 각각 앞의 것이 뒤의 것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층계와 차례가 보이고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고, 지지→능득(이것은 시간적인 순서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 단순한, 아무런 구조도 없는 평면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즉 공자가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나서 ‘일흔에 마음에 좇는다.’까지와, 또 맹자의 선(善)과 신(信)에서 성(聖)과 신(神)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일생동안 경과하게 될 순서, 혹은 서로 많이 떨어져있는 여러 단계와는 전혀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或問》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하니 知所先後면 則近道矣니라.
【解釋】물(物)에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에 종(終)과 시(始)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곧 도에 가깝다.(제3절)
‘명덕을 본으로 하고, 신민을 말로 하며, 지지를 시로 하고 능득을 종으로 한다. 본과 시가 먼저 할 바요, 말과 종이 뒤에 할 바다. 이는 위의 글 두 절(節)의 뜻을 맺는다.’
【解說】이 1절은, 위 두 절을 끝맺음한 것이다. <물(物)>과 <일>이 서로 달리 쓰여지고 있는데, 바로 뒤에도 ‘물은 곧 일과 같다.’라는 주가 있듯이, 결국 일이란 의미에 다름없다. <물>이란 말은, 일과 상대가 되는 물건이란 뜻도 있지만, 그 밖에 인물(人物)이라고 할 경우의 <물>은 사람이란 뜻이 되고, <물아(物我)>와 같이 자기 이외의 사람ㆍ생물ㆍ물건 등을 모두 합쳐-많은 경우, 중심적으로 의식되어 있는 것은 역시 사람이지만 -말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주자학과 양명학에서는 일이란 뜻으로 쓰는 경우가 극히 많다.
<본말(本末)>이란 것은 명덕과 신민이 명덕은 안(內), 신민은 밖(外)이라고 말하듯이 <내외(內外)>가 상대하고 있는 것을 본말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미지로서는 나무의 근간(根幹)과 나뭇가지 끝이라고 하는 것이 되겠지만, 나중에 <본말>이니 <내외>니 하는 것은 함께 중국 사상의 중요한 기초적인 범주를 이루고 있다. 종시(終始)라는 것은, 지지-능득이 결국 처음의 지지와 끝의 능득이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는 단 한가지 일에 다를 바 없으므로, 그래서 종시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설명되고 있는 것과 같이 학문에 있어서의 단계와 순서를 중하게 여기는 것도 주자학의 현저한 특징이다. 주자가 항상 되풀이해 쓰는 말로 한다면 ‘엽등(躐等-등급을 뛰어넘는 것)을 꺼린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학문의 본말, 선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도에 이르는 것이 멀지 않아, 이윽고 도에 이를 수가 있고 진리를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양명의 설은, 특히 현저하게 주자의 설에 대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역시 여기서도(始終에 대한 것은 대체로 좋다고 하더라도) 본말을 둘로 만들어버린데 대한 불만을 말하고 있다. ‘명덕과 신민은 두 물건으로 내외 상대한다.’라고《대학혹문》에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 본말을 두 물건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무줄기가 본이고 가지가 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 물건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두 물건이라고 하면 본말이란 표현이 모순되기 때문이다. 명덕과 신민이라면 두 가지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덕과 친민은 다만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大學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는 先治其國하고 欲治其國者는 先齊其家하고 欲齊其家者는 先修其身하고 欲修其身者는 先正其心하고 欲正其心者는 先誠其意하고 欲誠其意者는 先致其知하니 致知在格物하니라.
【解釋】옛날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집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정성되게 하고, 그 뜻을 정성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앎을 이르게 한다. 앎을 이르게 하는 것은 물(物)에 이르는데 있다.(제4절)
이 한 대목은, 이른바《대학》의 8조목(條目)이다. 편의상 거꾸로 세어 나가면,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다섯은 3강령 중의 명명덕에 속한 일이고, 제가, 치국, 평천하(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는)의 셋은 신민에 속하는 일이다. 《대학》의 내용은, 앞에 있는 3강령과 이 8조목이 전부라고 해도 좋다.
격물치지는 지선이 있는 곳(머물러야 할 곳)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성의에서 평천하까지는, 지금은 격물치지에 의해 소대가 명백해진 지선을 얻어 거기에 머무르게 하는 항목일 따름이다. <옛날>이란 것은 여기서도 아마 삼대(三代) 때를 가리킨 것이리라.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은,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다 그로써 그 밝은 덕을 밝힘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解說】‘밝은 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은 먼저 자신이 자기의 빛나는 덕을 빛나게 하고, 뒤이어 그것을 미루어 미치게 하여 천하 사람들이다 그의 빛나는 덕을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밝은 덕을 밝게 한다.’와 ‘백성을 새롭게 한다.’를 통일적으로 말한 것이다. 천하 사람이 각각 자기의 밝은 덕을 빛내고 있는 이 상태가 바로 <천하태평>에 다름없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첫 머리의 3강령에 있어서 명명덕은 신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자기 스스로 밝게 하는 것인데 대해, 여기서는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힌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 밝은 덕은 단순히 자기의 밝은 덕만이 아니고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의 밝은 덕도 포함한다. 즉 여기의 명명덕(體)은 신민(用)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즉 이 대목에 있어서는 체(體)와 용(用)을 통일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천하가 아무리 크더라도, 나 <체>는 겸하지 않는 것이 없고, 사물이 아무리 많더라도 내 마음의 <용>은 꿰뚫지 않는 것이 없다.’(《혹문》)
천하를 고르게 하려는 사람은, <천하의 근본>인 나라를 먼저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 노(魯)나라, 제(齊)나라 등 나라를 합친 것은 천하에 다름없다. 나라의 근본은 물론 개인이 아니고 가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집을 가지런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齊란 글자는 고르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는 것으로 집의 경우에 특히 이 글자가 쓰여지고 있는 것은, 그 집이란 것이 이른바 대가족이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집의 근본은 물론 개인의 몸이다. 각 개인이 -아마 특히 가장인 사람이-그 몸을 닦는다는 것은, 오륜(五倫)의 길을 실천하여, 각각 그 친(親)을 친으로 하고, 그 장(長)을 장으로 한다는 것이다.(《맹자》離婁上) 몸의 주재자는 마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을 바르게 하려 하면, 마음의 발동인 뜻을 정성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뜻이 정성되지 못하면, 마음도 필연적으로 거기에 따라 방해를 받아 바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성이란 것은 진실하다는 뜻이므로, 뜻을 정성되게 하는 것은 바른 인식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되며(致知),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사물에 이르러(格一至), 그 이치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이란 것은 몸이 주(主)로 하는 것이다. 성(誠)은 진실(實)이다. 의(意)는 마음의 발(發)하는 곳이다. 그 마음의 발하는 바를 진실하게 하여, 그것이 반드시 스스로 마음에 쾌(慊-快)하여 스스로 속임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은 몸이 주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마음이 육체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대저 마음이란 것은, 몸의 주인이 되는 것, 하나로서 둘이 아닌 것, 주인으로 손이 되지 않는 것, 사물을 명령하고 사물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는 것,’(《朱子全集》卷67 觀心說).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은, 이것이 결코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을 뜻하지 않는 것이다. 주자에 있어서 마음은 육체-그 원리는 기운(氣)-와 전연 별개의 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같은 기운의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었다. ‘마음은 기운의 정상(精爽)’, 마음이 ‘지각한다고 하는 것도, 그것은 기운의 영(靈)이 그러는 것이다.’(《語類》) 물론 기운이 있는 곳에는, 이치가 반드시 그 기운을 타고 존재해 있는 것으로, 그러므로 주자가 즐겨 쓰는 정의에 의하면 ‘마음은 성품(곧 이치)과 감정을 거느린다.’는 것이 되는데, 아무튼 마음이 1차적으로는 기운의 원리에 서는 것임을 지적해 두고 싶다. 기운의 기능 가운데 가장 영묘한 것이 발휘되는 장소, 그것이 마음인 것이다. 그 경우의 마음을 ‘폐니 간이니 하는 오장의 마음’과 구별하여 ‘조사존망(操舍存亡)의 마음’ 즉 맹자가 말한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는 마음’으로 불리는 예도 있다.(《語類》)
‘의(意)는 마음의 발하는 곳’이란 것은 다소 불친절한 주다. 왜냐하면 마음의 발동은 반드시 <뜻>만이 그런 것은 아니고, <지(知)>도 <정(情)>도 역시 마음의 발동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뜻>의 특징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語類》) 실천적인 성격에 있다. 그것을 ‘정성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려 하는 의식-모든 실천은 궁극에 있어서 도덕적 실천이며, 도덕적 실천은 결국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에 있어서, 마치 ‘좋은 빛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傳제6장 제1절) 전일한 것을 말한다. 반성이 끼어들기 이전의 감각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자기기만도 없는 적나라한 그 만족(스스로 마음에 쾌한 것)만이 추구된다. 도덕적 의식도 바로 그와 똑같이 되려 하는 것이다. ‘성은 실(實)이다.’-《중용》의 주석으로 말하면 진실무망(眞實無妄)이다.-라는 것은 이런 뜻에 불과하다. ‘순(純)하면 성(誠)하고, 잡(雜)하면 망(妄)하다.’(《中庸或問》)는 것이다. 뜻은 마음이 발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상, 뜻에 대해 마음은 근본이어야 할 터인데 마음을 바르게 하려 하여 먼저 뜻을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바로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얼굴도 그림자도 없는 마음(발하지 않은 마음)이란 것을 붙들려 하면, 마음이 발한 곳으로부터 착수하는 이외에 방법은 없다.’고 설명한다.(《語類》)
한편 주자의 주석 가운데 ‘그것이 반드시 스스로 마음에 쾌하다.’는 <필자겸(必自慊)>이란 세 글자는, 원본에는 ‘선에 한결같이 한다.(-於善)’라고 되어있는 것을 다른 책에 의해 고쳤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실상경의 이 대목을 다시 고친 것, 즉 ‘선에 한결같다.(-於善)’를 ‘반드시 스스로 마음에 쾌하다.(必自慊)’로 고친 것을 말하는 것 같다.(夏炘의《述朱質疑》卷16)
‘이르게 한다는 것은 미루어 다하는(推極)것이다. 지(知)는 식(識)과 같다. 나의 지식을 미루어 다하고, 그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격(格)은 이르는(至) 것이다. 물(物)은 일(事)과 같다. 사물의 이치를 다해 이르러, 그 다한 곳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주석이 주자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자세한 것은 전(傳)제5장(이른바 格物補傳)에 미루기로 하고, 지금은 대충만 설명해 둔다.
‘앎(知)을 이르게 한다.’는 <지(知)>가 <식(識)>과 같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도리어 혼동을 느끼게 하는 주석이다.《논어》술이(述而)편의 <묵이지지(黙而識之)>에 대한 주자의 주에 ‘지(識)는 기(記)다.(記憶의 記)’라는 정면의 주석 외에 ‘식(識)은 지(知)다.’라는 것을 가꾸로 하면 여기 있는 ‘지(知)는 식(識)이다’로 된다. 그것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아는 것, 지식이라는 평범한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이르게 한다.>는 것은, 미루어 다한다, 극도의 지점까지 밀고 나가는 것, 즉 지식이 어느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 그 도달점에서 다시 밀고나가 다음 지점까지 도달하고, 거기서 다시 밀고나가 제3의 지점에 도달하는 식으로 해서, 지식을 궁극적으로까지 밀고 나아가는 것, 자기의 지식을 미루어 극도에까지 이르러, 그 아는 바 즉 지식 내용이 다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완벽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것이 <치지>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미 얻어진 지식을 토대로 해서 차츰차츰 깊게 해 가고 확대해 나가, 마지막에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어류》에는 또 ‘예를 들면 어두운 방 속에서 간신히 밝은 점을 발견하고, 그 밝은 점을 찾아 나아가는 동안, 문득 밖으로 나가 아주 밝은 것을 얻어 볼 수 있다.’고 하는 비유를 말하고 있는데, 결국 같은 의미인 것이다. 지(知)의 대상은 결국(사물에 있어서의) 이(理)에 지나지 않으므로, 치지는 또 이치를 다하는 <궁리(窮理)>로도 불린다.
<격물(格物)의 물(物)은 일과 같다고 한 데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다만 이 경우, 배타적으로 <일>의 의미라고 하기보다는 <물(物)>이란 글자의 본래의 의미 위에 다시 <일>이란 의미까지도 두드러지게 포함하게 된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바로 아래에 ‘사물의 이치’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에서도 그것은 알 수 있다. 문제는 격(格)을 어떻게 새기느냐에 있다. 옛날부터 <격물>의 해석에는 72개의 서로 다른 학설이 있다(언제부터 시작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明나라 末에는 벌써 이 말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주자의 격(格)은 이르는(至) 것이다.’라고 새기는 것이다 뒤에 왕양명은 ‘격은 바로잡는(正) 것이다.’라고 새김으로써 주자학에 반기를 들었다.
주자학과 양명학과의 서로 틀리는 점을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 오직 한 글자의 차이로 대답하라고 하면,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의 대립을 들어도 좋지만, 다시 그 근저에는 ‘격(格)은 이르는 것이다.’와 ‘격은 바로잡는 것이다.’의 대립 즉 경전 해석학상의 대립이 가로놓여있는 것이다. 주자가 말한 ‘격은 이르는 것이다.’라고 한 <이른다>는, 물론 흔히 말하는 그것은 아니다. 남검주(南劍州-朱子는 이 州의 尤溪縣에서 태어났다.)에서 건녕부(建寧府)로 가는데, 다만 건양현(建陽縣-建寧府의 일곱 縣 중의 하나)까지 도착한 정도로는 <이르렀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아무래도 부청에까지 가 닿아야만 참으로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지(至)인 것이다. 주자학에서 <격물>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에 다해 이르는(窮至事物之理)> 것, 각 사물에 대해 각 사물의 이치를 다하고, 그 이치의 궁극점에도 도달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식의 완성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격물치지>의 상세한 해설은 전제5장에 미루기로 하고, 지금 참고삼아, 이 대목을 부연한《대학혹문》의 말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소개해 두려 한다.
<지(知)는 마음의 신명(神明)이며, 중리(衆理)에 묘(妙)하여 만물을 주재하는 것, 누구 한 사람 그것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의 <지>가 안팎이 툭 틔어 다하지 못한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은미(隱微)한 점에 있어서 참(眞)과 거짓(妄)이 착잡하기 때문에, 노력해서 <정성(誠)>되려고 해도 좀체로 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뜻을 정성되게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지>를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치(致)>란 것은 미루어 이루는 것, ‘상(喪)에는 슬픔을 이르게 한다.’(《孝經》)고 한 그 <치(致)>로, 이를 수 없는 곳까지 가 닿는다는 의미다.
여기까지 말한 다음에 유명한 <이(理))>의 정의를 말한 구절이 나온다.
‘천하의 물(物)에는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과, 당연히 그래야만 될 법칙이 있다. 이것이 곧 이(理)다.’
<이>는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그렇게 된 근거, 둘은 당연히 실현될 법칙, 규범, 결국 모든 존재는 그 발뿌리 깊숙이 근거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머리 위 높이 또 당연히 해야 될 일을 맡고 있다. 둘은 한가지 이치인 것이다. 한편《혹문》의 다른 곳에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될 법칙이 있어서 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이른바 이치다.’라고 한 말이 있다. 이 ‘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성격도, 이치의 성격을 생각하는데 셋째 번으로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되나 다음에 말하기로 한다.
인간으로서 <지>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누구나가 그 <지>를 모든 경우에 걸쳐 남김없이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치에는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남고, 지의 어느 곳인가는 반드시 가려진 채 남게 된다. 아무리 노력하여 지를 이르게 하려 해도, 이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를 이르게 하는 방법은, 사물에 대해 이치를 보고, 이리하여 사물에 이른다고 하는 점에 있다. 격(格)은 극지(極知)의 의미, ‘문조(文祖)에 격(格)한다.’(《書經》舜典)는 격(格)으로 무엇인가를 다하여 그 극에 이른다는 의미다.
대학의 교정(校程)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 각 조목도 결코 언제나 명백한 것은 아니다. 성현이 서로 전하여 학문의 과정을 가르친 이《대학》의 조목은 사실 상세하게 완비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그런데도 한위(漢魏) 이후-《대학》이《예기》에 편입되어 그 존재를 명백히 한 것이, 또 유교가 국교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 한대(漢代)다.-학자의 의논이 이 점에 언급하였던 것을 듣지 못했다. 당나라 때에 들어와 한유(韓愈)가《원도(原道)》를 지어《대학》을 인용한 것은 일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나, 그래도 그 인용은 다만 <정심성의(正心誠意)>까지로, <치지격물(致知格物)>에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다. 이것도 또 ‘택한 것은 정밀하지 못하고, 말한 것은 자세하지 못하다.’는 결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순자와 양웅(揚雄)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택한 것은 정밀하지 못하고, 말한 것은 자세하지 못하다.’는 것은 한유가《원도》가운데서 순자와 양웅을 비난해서 한 말이다.
<격물치지>에 대한 양명의 학설이 주자와 정면으로 대립해 있는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 점은 뒤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지금은 그보다도 <경(敬)>에 대해 해설을 해 두려 한다.
주자에 있어서는 격물치지→성의의 <성의>는 꼭 그렇게 강조되어 있지 않고, 그보다《대학》에는 원래 없는-없다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친 말일지 모르나(제3장 제3절 참조)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중심적인 의미는 갖지 않고 있다.-<경(敬)>이란 개념이《대학혹문》속에 특히 끼어들어, 격물치지(窮理)와 경이, 말하자면 수레의 양쪽 바퀴 같은 뜻을 갖게 되어있는 것은 철학사상 한 상식으로 되어있다.(양명은 敬을 말하지 않고 誠意를 강조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혹문》에 서술되어있는 <경>에 대한 학설을 요약해서 소개해 두는 것은 주자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경>이란 무엇인가? 정자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 정의하고, 또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고 설명했다. <주일무적>은 자세하게 말하면 <하나를 주(主)로 하는 것>이며, 그 <하나>라는 것은 <감(適)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즉 마음을 아무 곳에도 가게 하지 않고 전일(專一)한 상태로 계속 보존하는 그것이 경이라는 것이다. 또 경의 상태를 설명하여 정제엄숙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몸과 마음을 거두어 들여 정제순일(整齊純一)하게 하고, 방종하지 않게 하면 이것이 경이다.’라는 것이다. 정자와 주자에 있어서의 <경>의 특징은, 그 무엇인가에 대해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만 마음을 거두어들여 고도의 집중된 상태를 지속하는 것에 있다. 물론 ‘성현은 결코 경이란 글자를 목적어 없이 쓴 일은 없었다. 어버이를 공경한다. 임금을 공경한다. 어른을 공경한다. 라고 하는 경우에만 경이란 글자를 썼다.’고 하는 논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어리석은 말은 없다. <몸을 닦기를 공경으로써 한다.> <공경하여 잃음이 없다.>(《논어》) <성경(聖敬)이 날로 오른다.>(《시경》) 등 모두 목적이 없이 쓰였다. 만일 임금과 어버이와 어른이라는 대상이 있어야만 공경하게 된다고 하면, 임금과 어버이와 어른이 없는 경우는 공경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일을 만났을 때도 또한 아같이 하고, 일이 없을 때도 또한 이같이 한다.’(《어류》) 물론 ‘걸터앉아 있으면서 마음이 공경해질 수는 없다.’는 점으로 보아 단순히 내적인 것만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며, <경>의 대상으로서 예를 들어 도덕을 일반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명도의 말에 “나는 글자를 쓸 때, 대단히 공경한다. 그것은 특별히 잘 쓰려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학문이란 것이기 때문이다.” (《近思錄》)라고 쓰인 예를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너무 한정적인 것이리라. 주자학의 경의 특징으로서 무대상성(無對象性)을 드는 설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 밖에 경의 유명한 정의로서는, 정자와 제자인 사량좌(謝良佐, 號 上蔡)의 ‘상성성법(常惺惺法)’과 윤돈(尹惇, 號 和靖)의 ‘그 마음이 수렴(收斂)되어 한 물(物)도 넣지 않는다.’ 등이 있는데, 사량좌의 설은 의식을 언제나 잠깨어 있게 해 두는 것이 경이라는 것이고, 윤돈의 설은 단 한 가지 물건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극도로 수렴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가 경이라는 것이다. 이런 여러 설을 깊이 생각해보면 경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이 그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학문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첫머리에 <명덕>이 설명되어 있을 뿐 <경>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해 있지 않은 것은,《소학》쪽에 자세히 설명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소학》이 없어졌기 때문에 정이천은《대학》쪽에 <경>을 부대적(附帶的)으로 보충해 두었다.’《어류》단순한 출발점만은 아니다. ‘경이란 한 글자는 성학(聖學)의 처음이요 끝이다.’ 소학을 배우는 사람이 경에 말미암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대학》을 배우는 사람도 이것에 말미암지 않으면, 총명을 개발하고 덕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아 명명덕ㆍ신민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정자가《대학》의 근본이 되는 격물에 대한 그의 뛰어난 설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경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거꾸로 또 불행이 적당한 시기에 소학 공부를 할 기회를 잃은 학문하는 사람도, 이 경을 참으로 실천하는 것에 의해《대학》공부로 나아간다면, 소학 쪽도 아울러 보충되는 셈이다. 아무튼 ‘성학의 처음이 되고 끝이 되는 까닭’이라는 그 처음이 되는 쪽은 문제가 없다 치고, 그럼 그 끝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경은 한 마음의 주재인 동시에 모든 일의 근본’, 소학이 학문의 처음이라는 것이 정말로 경에 의거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말한 것으로도 곧 이해될 수 있듯이,《대학》이 학문의 끝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이 경에 의거하는 것에 의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성학이 ‘하나로써 꿴(一以貫之)’(《논어》)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격물치지로써 사물의 이치를 다하는 것, 성의ㆍ정심으로 몸을 닦는 것, 나아가서는 제가ㆍ치국ㆍ평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경에 뒷받침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단 하루라도 경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없다. 정말 경 한 글자야말로 성학의 끝과 처음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혹문》과《어류》에 의해 요약한 <경>에 대한 학설의 개요다.《혹문》은 대학장구 서에 대해 어떤 사람이 물은 부분인데, 원래 대학장구 서에는 경이란 글자는 전연 나오지 않으므로, 뭐니 뭐니 해도 당돌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경에 대해 몇 대목을 써서 넣지 않을 수 없었던 주자의 태도는, 주자학의 전 체계에 있어서 경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여덟은 대학의 조목이다.’
8조목을 헤아리는 방법은 보통, 격물ㆍ치지ㆍ성의…치국ㆍ평천하의 순서로 한다.
物格而后知至하고 知至而后意誠하고 意誠而后心正하고 心正而后身修하고 身修而后家齊하고 家齊而后國治하고 國治而后天下平하니라.
【解釋】물이 격한 뒤에 지가 이르고, 지가 이른 뒤에 뜻이 정성되고, 뜻이 정성된 뒤에 마음이 바르고, 마음이 바른 뒤에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 집이 가지런해지고, 집이 가지런한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해진다.(제45절)
더 이상 해설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나 예에 의해 주자의 주를 들어 둔다.
‘물에 이른다는 것은, 물의 이치의 다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지가 이른다는 것은 내 마음의 아는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지가 이미 다하면 뜻이 진실(實)하게 되고, 뜻이 이미 진실되면 마음도 바르게 된다.’
【解說】‘물에 이른다.’는 것은, 대상적으로 말해서 하나하나의 사물에 있어서의 이치가 지에 의해 모두 궁극점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 ‘지가 이른다’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쪽에 대해 마음에 있어서의 지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 ‘내 마음의 아는 바’라고 하면, 마음이 아는 대상, 즉 마음에 의해 알게 되는 대상인 것처럼 읽게 되는데, 차라리《혹문》에 말한 것처럼 ‘앎이 내게 있는 것’이란 뜻으로 보아야 될 것이다.
‘수신서부터 위는 명명덕의 일이고, 제가서부터 아래는 신민의 일이다.’
‘물이 격하고 지가 이르면 곧 머무를 곳을 안다. 의성서부터 아래는 곧 다 머무를 곳을 얻는 차례다.’
머무를 곳을 안다. 머무를 곳을 얻는다는 것은, 물론 제2절 맨 첫대목<지지(知止)>와 맨 뒤의 대목<능득(能得)>을 가리킨다. 차례는 순서. 즉 지식으로 얻어진 <머무르는 곳>이 실천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순서다.
自天子以至於庶人이 壹是皆以修身僞本이니라.
【解釋】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다 수신으로써 근본을 삼는다.(제6절)
【解說】‘일시(壹是)는 일체(一切)다. 정심서부터 위는 다 그로써 몸을 닦는 것이다. 제가서부터 아래는 곧 이를 들어 둘 뿐이다.’
‘일시는 일체다.’라는 것은, 예외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새기면<일시>는 ‘하나같이’로 된다.《어류》에서는《한서(漢書)》평제기(平帝紀)에 있는 <일체(一切)>에 대한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칼로써 물건을 끊는 것과 같다.’고 있는 것을 인용하여 ‘그 정제(整齊)함을 취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칼로 싹 벤 것처럼 내밀고 들어간 데가 없이 똑같은 것을 말한다.
정심서부터 위라는 것은,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 넷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결국 수신의 전제, 혹은 기초로 생각해서 좋은 것이며, 제가서부터 아래, 즉 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세 가지도(수신으로부터의 당연한 귀결이니까) 결절점(結節點)인 수신만 되면, 그것을 집과 나라와 천하에 그대로 옮겨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대목은 8조목을 실천적인 관점에서 요약하면 수신이라는 하나에 총괄된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이 천자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수신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에, 유교 혹은 주자학의 커다란 특징이 있다. 이 점에 관해《혹문》에 주목해야 할 의논이 있으나, 편의상 다음 절 뒤에 붙여두기로 한다.
其本亂而末治者는 否矣며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는 未之有也니라.
【解釋】그 근본이 어지럽고 끝이 다스려지는 일이 없고, 그 후하게 할 바에 박하고 그 박하게 할 바에 후한 일은 있지 아니하다.(제7절)
【解說】‘근본이란 것은 몸을 말한다. 후하게 할 바는 집을 말한다. 이 두 절은 위의 글 두 절의 뜻을 맺는다.’
이 절이 앞의 절의 ‘수신으로써 근본을 삼는다’라는 것을 이어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천하 국가에 대해서 말하면, 몸은 근본이요 천하 국가는 끝이다. 몸이 닦아지지 않으면 천하와 국가가 다스려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몸은 천자나 임금의 몸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이른바 ‘군자가 독공(篤恭)하면 천하가 평하다.’는 것을 뒤집어 말한 것에 불과하다.(《중용》제33장 제5절, 보통 이 군자는 극히 일반적인 의미로 풀이되고 있다.)
‘그 후할 바에….’라는 것은,《예기》정현(鄭玄)의 주에서는 여기에 주가 없고,《예기정의(禮記正義)》는 다만 ‘근본이 어지럽고 끝이 다스려지는 일이 없다.’를 다른 말로 되풀이한 것으로 하고 있다. 주자의 ‘후하게 할 바는 집을 말한다.’고 한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몸과 집이 나라와 천하에 대해 보다 직접적이고 보다 근본적이며, 따라서 보다 깊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 이같은 주로 된 것이리라, 박하게 할 바란 것은 당연히 나라와 천하 둘을 가리키게 된다. 집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등한이 해 두고, 나라와 천하가 고루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제6, 제7 두 절은, 제4, 제5의 두 절을 끝맺음 한 것이다. 제가까지를 수신 속에 넣어 생각하게 되면, 최후의 끝맺음에 강조되어 있는 것은 수신이란 것이 된다.
이상으로경 1장의 해설을 전부 마치게 되는데, 끝으로 제6, 제7절에 관한 것으로서《혹문》의 한 절을 덧붙여 두려 한다. 그것은 먼저, ‘치국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 경대부 이하(士, 庶民)에게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지금《대학》은, <밝은 덕을 천하에 밝게 하는) 것을 일률로 타당한 것으로 들고 있는데, 그것은 <생각이 그 지위에 벗어나지 않는다.>(《논어》혹문)고 한 가르침을 깨뜨리는 것이며, 분수를 벗어나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자신을 위해 하는 학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설문을 내걸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반박해 간다.
‘삶을 가진 사람은 다같이 하늘의 명을 받아 태어난 것으로, 천명은 자기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확연대공(廓然大公)-程明道의 말)>해서 그의 천하를 보는 것은, 어느 하나도 내 마음이 마땅히 사랑할 바 아닌 것이 없다. 내 직분(職)이란 것은 직업이나 관직의 뜻은 아니다. 임무로서 당연히 할 바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필부(匹夫)라는 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임금을 요순 같은 임금으로까지 되게 하고, 백성을 요순시대의 백성으로까지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분수 안에 속하는 일이다. 필부(즉 서민)에 있어서까지 이렇다고 한다면, 더구나 대학은 천자의 태자와 여러 아들, 그리고 공과 후와 경과 대부와 사의 적자 및 서민의 자제 중 준수한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들은 결국 불가피적으로 천하 국가의 책임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평소부터 가르치고 길러두기 위한 사항이 천하 국가를 자기의 당연한 임무라고 알고, 그 근본의 맑고 바른 것을 미리 추구하여(수신에 노력하는 것) 준비해 두지 않고 될 것인가. 대체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천하 일을 자기의 당연히 할 일로 알고 하게 되면, 군사, 재정, 제사 등 이른바 <유사(有司)의 일>이라 하더라도(《논어》泰伯), 그것은 모두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 되며,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 하게 되면 아무리 도덕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남을 위해 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를 위하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논어》헌문(憲問)편에 있는 ‘옛날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하고, 지금 배우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한다.’고 한 말에 근거한다.
‘장남헌(張南軒,朱子의 친구인 張拭)의 말에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바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말로서, 오늘날까지 어떤 학자도 아직 말한 일이 없을 정도로 깊고 절실한 뜻을 머금고 있다. 학문하는 사람이 이 말에 의해 날마다 날마다 반성하게 되면, 선(善)과 이(利)를 털끝만한 착오도 없이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장남헌의 이 말은, 한나라 동중서(董仲舒)의 “그 의(義)를 바르게 하고 그 이(利)를 꾀하지 않으며, 그 도(道)를 밝게 하고, 그 공(功)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한 말과 함께, 반공리주의의 표어로서 주자에 의해 항상 인용되고 있었다. 이윽고 명대(明代)에 들어와 왕양명의 제자인 이지(李贄-李卓吾)라는 일찍이 없었던 과격 사상가가, 이 반공리주의의 위만성(僞瞞性)을 공격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 다른 화제가 될 것이다.
大學 傳
여기서부터 전(傳)이 시작된다.
‘전의 문장은, 각 장이 다 여러 경전을 인용하고 있다. 얼른 보아 통일성이 없는 것 같으나, 그러나 문장의 줄거리는 연속되어 있고, 사상도 일관되어 있으며, 옅은 데서 깊은 곳으로, 처음에서 끝으로 옮겨가는 것도 아주 정밀하다. 이런 것은 조용히 음미하는 가운데 언젠가는 인식될 것이므로, 지금 이《대학장구》에서는 일일이 구석에서 구석까지 주석을 하지 않고 대체적인 주석에 그쳐 둔다.’
이것은 주자가 맨 앞에 적어 둔 말인데,전제10장 뒤에, 즉《대학장구》전체의 마지막 끝에도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고 있다. ‘모두 10장의 전 가운데, 처음 4장은 3강령의 취지를 종합적으로 논하고 있고, 다음 6장은 8조목의 공부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5장은 선(善)의 인식에 대한 제요(提要)이고 제6장은 몸을 정성되게 하는 근본을 말한 것으로, 처음 배운 사람으로서 먼저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비근하다고 해서 등한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傳 제 1 장
이 장은 3강령 중 <명명덕>을 풀이한다.
康誥曰 克明德이라 하고
大甲曰 顧諟天之明命이라 하며
帝典曰 克明峻德이라 하니
皆自明也라
【解釋】강고에 말하기를 ‘능히 덕을 밝게 한다.’고 했다.(제1절)
【解說】‘강고(康誥)라는 것은,《서경(書經)》《상서(尙書)》라고도 한다)강고편을 말한다.《서경》은 요순(堯舜)서부터 주대(周代)까지의 거룩한 천자들(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들)의 말을 모은 것으로,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商은 殷과 같다), 주서(周書)로 나뉘어 있다. 강고는 이 중 주서에 속해 있는 한편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아우인 강숙(康叔)을 은나라 유민들의 땅인 위(衛) 나라에 제후로 봉할 때 내린 훈계의 말이다. 하기는 이 편은 옛날 주석, 즉 한나라 공안국(孔安國)의 주석에서는 성왕(成王)이-성왕은 아직 어리고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은 주공이-강숙에게 준 훈계의 말로 되어 있으나, 주자는 호굉(胡宏)-號는 五峯) 등의 말에 의해 그것을 틀렸다고 하고 무왕의 글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서 무왕과 주공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의 덕을 칭찬하여, 문왕이 능히 노력해서 덕을 빛나게 한 것을 말한 부분에 나와 있는 말이다. “오직 위대하신 아버지 문왕은, 능히 덕을 밝게 하고 벌을 조심하여, 감히 홀아비와 홀어미를 업신여기지 않으셨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덕을 빛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빛나게 하려고 원하고 있다. 그러나 기품과 물욕에 얽매이고 가리어 결국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문왕은 성인이기 때문에, 그 마음은 혼연히 하늘의 이치 그대로여서, 새삼 밝히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미 밝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능히>라는 말을 쓴 것은, 문왕만이 능히 밝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능히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능히 밝게 하지 못한 사람은 능히 라기 위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解釋】태갑에 말하기를 ‘이 하늘의 밝은 명(命)을 돌아본다.’했다.(제2절)
【解說】태갑(大甲)의 대(大)는 태(泰)와 같은 음으로 읽는다. 즉 태갑(太甲)으로,《서경》상서(商書) (태갑(大甲)편, 즉 은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이윤(伊尹)이 탕왕(湯王)의 손자인 태갑을 훈계한 말이다. 즉 “선왕(先王)께서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고, 그로써 위아래의 하늘 신(神)과 땅의 신(祇)을 받들어 사직과 종묘를 공경하고 엄숙하지 않음이 없다.”로 시작되는 최초의 한 글귀다. 시(諟)는 시(是)의 옛날 글자인데, 혹자는 말하기를 살핀다(審)는 뜻으로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고 살핀다>라고 읽는다고 한다. 주자 자신도 분명히 그같이 읽은 곳이 있다. 그러나 주자학의 보통 학설에서는 <이것>이란 의미로 읽는다.
<하늘의 밝은 명>이란 것은, 사람 쪽에서 말하면 사람의 밝은 덕에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사람의 마음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성품, 그것은 사람으로 말하면, 하늘에 의해 명령된 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광명 찬란하게 빛나는 덕>이 되지만, 하늘로부터 말하면, 하늘이 사람에게 준 빛나는 명령에 다를 것이 없다. 성인 천자이신 탕임금은 항상 이 하늘의 빛나는 명령을 지켜보며 계셨다는 것이다. 돌아본다는 것은 항상 눈이 거기에 있는 것.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도둑맞지 않을까 하고 두 눈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다.’(《어류》) 시선을 항상 그곳에 쏟고 있으면, 그것은 잠시도 빛나지 않는 일은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中)을 얻어 태어났다.’(《좌전》成公13年) 사람의 밝은 덕은 하늘의 밝은 명이며, 지선(至善)이란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하늘의 밝은 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금 그것을 넓은 입장에서 말하면 결국 도(道)요 이(理)이지만, 그 도와 이의 이른바 <전체대용(全體大用)>, 즉 도의 완전한 체(體)와 그 위대한 용(用)이, 한 시각의 끊임도 없이 일상생활에 스스로 나타고 있는 이 근원적인 사실을 주시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의욕에 덮여있는 인간에 있어서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만일에 능히 그곳에 시선을 계속 쏟아, 마침내는 ‘서 있으면 곧 그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수레에 있으면 곧 가로나무에 있는 것을 본다.’(《논어》衛靈公)고 말한 것처럼, 도와 이를 역력히 볼 수 있게까지 되면, ‘이룩된 성품이 있고 있어서 도의(道義)가 나온다.’(《주역》繫辭傳上), 즉 혼연히 본래부터 완성된 성품이 나고 또 나가기를 마지않아, 일체의 도의는 거기서부터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무릇 언어와 동작과 보고 듣는 것은 모두 하늘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어도 하늘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語類》)
【解釋】제전에 말하기를 ‘능히 큰 덕을 밝게 한다.’고 했다.(제3절)
【解說】제전이란 것은《서경》우서(虞書) 요전(堯典)편으로《서경》맨 첫머리에 있는 편이다. 거기에는 성인 천자인 요임금이 <능히 큰 덕을 밝게 하여 그로써 구족(九族)을 친하고, 구족이 이미 화목하여 백성을 평장(平章)하면, 백성이 소명(昭明)하여 만방(萬邦)을 협화(協和)한> 위대한 덕을 말하고 있다. 준(峻)은 크다는 뜻이다. 요임금이 큰 덕을 밝게 했다고 한 것은,강고(康誥)에서는 자기의 밝은 덕을 말하고,태갑(大甲)에서는 하늘의 밝은 명을 말하고 있는데 대해, 여기서는 이 둘을 함께 포함하여 큰 덕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解釋】다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제4절)
【解說】《서경》에서 인용된 세 말을 한데 묶어, 그것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혀 빛나게 하는 것에 귀착된다는 것이다.
《강고》에서는 다만 자신의 덕을 밝게 하는 것만을 말하고,태갑은 하늘이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하늘이란 것을 말하고,제전은 밝게 한다는 출발점에 있어서의 덕이 아니고, 결과로서 완벽하게 밝게 빛나는 데 이른 덕, 즉 완성된 덕의 넓고 큰 것을 말한다. 옅은 데서 깊은 데로의 순서를 볼 수 있다.
傳 제 2 장
【解釋】이 장은 3강령중 <신민>, 즉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풀이한다.
湯之盤銘曰. 苟日新이면 日日新하고 又日新이라 하고
康誥曰 作新民이라 하며
詩曰. 周雖舊邦이나 其命惟新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無所不用其極이니라.
【解釋】탕(湯) 임금의 반명(盤銘)에 말하기를 “진실로 하루 새로워지면, 날로날로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다.(제1절)
【解說】반(盤)이란 것은 목욕하는 반이라고 되어있다. 이 <반>이란 글자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밥상>의 뜻도 되고, 세수하는 대야의 뜻도 되고, 목욕하는 통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여기 있는 <반>이 세숫대야냐 목욕통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할 수 있지만, 주자의 주는 목욕하는 반이라고 했다.《주자어류》에 ‘반명은 목욕(원래 沐은 머리 감는 것이고, 浴은 몸을 씻는 것이다.)에서 뜻을 취했다. 대개 아침에 세수를 하더라도 저녁에는 또다시 때가 생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목욕이란 것이 꼭 목욕통에 들어가서 몸을 씻는 그런 뜻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원문에 있는 날로날로 새롭다는 말과 아울러 생각해 볼 때, 역시 아침저녁으로 쓰는 세숫대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자의 목욕이란 뜻도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는 그런 뜻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도덕적 자기혁신에 대한 비유로서는 전신적 목욕 쪽이 더 적당할 것으로도 생각되며, 목욕이란 말은 물수건 같은 것으로 온몸을 닦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주자는 역시 매일 아침의 몸단장을 위한 세수-물론 그것은 전신 목욕의 상징일 수 있다.-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는지.
그 대야는 아마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은나라 왕실의 무덤 같은 데서 파낸 청동그릇이, 다시 그 같은 것을 볼 수 없을 만큼 발달된 극히 정교한 것임은 너무도 유명하며, 그중에는 대야 같은 것도 많이 있다.(목욕을 할 정도의 큰 대야도 전국시대 유물 속에는 없지 않다.) 명(銘)이란 것은 그릇에 새겨 둔 말-뒤에는 두고두고 보기 위해 특별히 쓴 것이면 붓으로 종이에 쓴 것도 이 명이란 말을 썼다. 좌우명(座右銘)과 같은 것이 좋은 예다.-로, 그 실물은 오늘날도 많이 남아있다. 가족에게 전할 교훈의 말이나 기념이 될 말을 새겨 두는 것이다. 구(苟)는 성(誠)과 같은 뜻으로 <진실로>라고 새긴다.
사람이 그 마음을 씻고 악을 떨어 없애는 것은, 마치 몸을 씻음으로 때를 떨어 없애는 것에 비유된다. 그래서 탕임금은 자기가 쓰는 대야에 이같은 말을 새겨두었던 것이다. 그 뜻은, 전에 묻어있던 때를 씻어 정말 자신을 새롭게 하는데 단 하루라도 노력해서 성공을 하게 되면, 그 다음은 이미 새로워진 것을 바탕으로 삼고 계기로 삼아 하루하루 새롭게 해 나가고, 그 위에 다시 더 날마다 새롭게 해서 하루도 쉬는 일이 없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본 장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풀이한 것이라면서, 이 대목이 철두철미하게 자기 스스로 새롭게 하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면 이상하기도 하다. 그러나 <신민>은 반드시 스스로 새로워지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의심하는 것은 부당하다.
【解釋】강고에 말하기를 ‘새롭게 하는 백성을 일으킨다.’고 했다.(제2절)
【解說】작(作)은 고무진작(鼓舞振作)한다는 <작>이다. 즉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백성들을 격려해서 떨쳐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다.강고는 앞에 말한 대로 무왕이 그의 아우 강숙을 은나라 유민들의 땅인 위나라에 제후로 봉할 때 내린 훈계의 말이다. 은나라 유민들은 주왕(紂王)의 음란무도한 정치 밑에서 더러운 풍속에 물들어 본래의 마음을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고무하고 진작시켜, 악을 버리고 선으로 옮겨가고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다만 그럴 경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안으로부터의 자발적인 자기혁신이 아니면 안되는 점으로, 밖으로부터의 명령이나 말로서는 도저히 안되는 것이다.
【解釋】시에 말하기를 ‘주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나, 그 명은 새롭다.’했다(제3절)
【解說】《시경》대아(大雅) 문왕(文王)편에 나오는 글귀다. 주(周)나라는 시조인 후직(后稷)이 하(夏)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제후로 봉해진 뒤로, 은나라 말기 창(昌-文王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천년 이상이나 된 오랜 나라이지만, 이 문왕에 이르러 능히 자기의 덕을 날로 새롭게 하여 마침내 성인의 덕에까지 이르게 되고 그것을 다시 백성들에게까지 미루어 미치게 한 결과, 백성들도 크게 변화하여 모두 스스로 새로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새로 천명을 받게 되었다. 즉 지금까지의 제후로서가 아니고, 천자로서 천하를 다스리게끔 하는 하늘의 명령이 내린 것이다.
명(命)이 새롭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기는 문왕이 곧장 천자가 되었다고 하면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위배되는 일이지만, 그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 와서 사실상의 천자가 되므로 비록 문왕의 몸은 천자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지만, 사실상으로는 문왕 때에 이미 천자로서의 실력과 덕화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임금의 덕이 새로워지면 백성의 덕도 반드시 새로워지고, 백성의 덕이 새로워지면 그 순간 하늘의 명도 새로워지는 것이다.
【解釋】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그 극(極)을 쓰지 않는 바가 없다.(제 4절)
【解說】이 한 대목은 물론 인용이 아니다. 탕임금의 반명과강고와 시, 이 셋을 전을 지은 사람이 합쳐 끝맺음을 한 것이다. 반명에는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하고, 강고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문왕의 시는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한 극치를 말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극을 쓰지 않는 일이 없다고 매듭지은 것이다. <극>이란 것은 극치, 즉 지선(至善)을 뜻한다. 그 극을 쓴다는 것은, 지선에 머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으로’라는 말은 엄격하게 풀이하지 않는 편이 옳다. 스스로 새로워지고 그 다음 백성을 새롭게 하고, 그리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극치로 나아오는 점에서 생각하면, 이한 대목은 결국, ‘군자는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데 있어서나, 지선에 머무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것이리라.
傳 제 3 장
【解釋】이 장은 3강령 가운데 <지선(至善)에 머무른다>를 풀이한다.
詩云 邦畿千里여 惟民所止라 하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방기 천 리는 이 백성의 머무르는 곳이다.’라고 했다(제1절)
【解說】《시경》상송(商頌) 현조(玄鳥)편이다. 방기(邦畿)는 천자의 도읍을 중심으로 똑같은 아홉 개의 정방형을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정방형은 도읍에서 동서남북으로 각각 5백리, 즉 사방 천리, 이것을 왕기(王畿)라고 한다.(《周禮》夏官 職方氏) 이 시에 있는 <방기>는 곧 <왕기>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즉 왕실에서 직접 지배하고 있는 지역, 천자의 도읍이 있는 천하의 중심을 말한다.
지(止)는 거(居)라고 주에 말하고 있다. 즉 ‘머무른다는 것은 거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란 뜻이다. 천자가 직접 거느리는 왕기에 백성들이 즐겨 살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에게는 각각 머물러 살아야 할 곳이 일정해 있는 것으로, 천하의 아홉 지방(畿) 가운데 이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왕기야말로 백성들이 당연히 머물러 살아야 할 곳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한편 <시왈(詩曰)>이라고 쓴 곳과 <시운(詩云)>이라고 쓴 곳이 있는데, 이 <왈(曰)>과 <운(云)>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역시 통일성이 없다. 새김으로는 <왈>을 <가로대>로, <운>을 <이르대>로 각각 달리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모두 <말한다>로 통일해 두었다.
詩云緡蠻黃鳥여 止于丘隅라 하거늘 子曰. 於止知其所止로니 可以人而不如鳥乎아
【解釋】시에 말하기를 ‘면만한 황조여 구우에 머물렀다.’하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머무르는데 그 머무를 곳을 아는도다. 사람으로서 새만 같지 못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제2절)
【解說】이 시는《시경》소아(小雅) 면만(綿蠻)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면만(緡蠻)은《시경》에는 면만(綿蠻)으로 되어있다. <면만>은 황조, 즉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모방한 소리라고 한다. 구우(丘隅)란 것은 잠울지처(岑蔚之處), 즉 순한 산 한쪽 귀가 갑자기 푹 솟아올라 있고, 나무들도 울창해 있는 그런 곳을 말한다. 즉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는 꾀꼬리는, 그가 살고 있는 곳으로 쉽게 위험을 당하지 않을 가장 좋은 곳을 골라 살고 있다는 것이 시의 뜻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子曰)’서부터는, 시의 글 뜻을 풀이하는 형식으로 공자가 자기의 사상을 말한 것, 공자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할 때,《시경》《서경》에 있는 글귀들을 교묘히 인용하며, 그것에 의해 자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꾀꼬리 같은 새도 그가 머물러 살 곳을 올바로 고를 줄을 알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을 모르고 있으니, 사람이 어떻게 새만 못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이란 어떤 곳일까?
詩云 穆穆文王이여 於緝熙敬止라 하니 爲人君엔 止於仁하시고 爲人臣엔 止於敬하시고 爲人子엔 止於孝하시고 爲人父엔 止於慈하시고 與國人交엔 止於信하시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목목한 문왕이여, 오오, 이어 밝게 경하여 머무른다.’하니,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무르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르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머무르고, 남의 아비가 되어서는 사랑에 머무르고, 나라 사람과 더불어 사귐에는 신(信)에 머무른 것이다.(제3절)
【解說】시는《시경》대아(大雅) 문왕(文王)편, <목목(穆穆)>이란 것은 덕이 심원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시의 뜻은, ‘목목히 심원한 덕을 가진 문왕이여, 오오! 끊임없이 그 덕을 빛내시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머무를 곳에 머물러 계시도다.’하는 것이 된다. <오(於)>는 <오오!>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로, 이 경우는 <어>라고 발음하지 않고 <오>라고 발음한다. 즙(緝)은 계속 이어나간다는 뜻이다. 희(熙)는 광명(光明) 즉 밝다는 뜻이다. ‘공경하여 머무른다.’는 것은 어느 곳 어느 때를 막론하고 공경하지 않는 일이 없고 언제나 머무를 곳에 편안히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지선(至善)이 있는 곳에 머물러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과히 마음에 썩 들지 않는 해석인 것 같기는 하나,전을 지은사람(曾子의 門人들)이 시에 있는 <지(止)>란 글자에 특수한 의미를 인정하려 하고, 그리고 주자가 이 경우 그것에 따라 주석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시전(詩傳)》(朱子가 지은《詩經》의 註釋書)에는 이 <오즙희경지(於緝熙敬止)>의 지(止)를 별로 뜻이 없는, 단순히 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쓰이는 어조사(語助辭)인 것으로 되어있다.
‘옛날 사람이 시에 있는 말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그 본래의 뜻에 의해, 인용하는 것은 아니고, 단장취의(斷章取義), 즉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말을 빌어쓰며, 자기가 주장하는 뜻에 맞도록 이용하는 것이다.’《或問》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부터 아래는, 아마 증자의 해설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리라. 문왕의 시를 인용한 것은 성인의 <머무름>이 모든 경우에 지선(至善)인 것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부터는 머무른 곳과 내용과의 주요한 것 다섯을 들고 있다. 즉 문왕은, 남의 임금으로서는 인(仁)이란 것에 머무르고, 또 남의 신하로서는(이 때 문왕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천자에 대해서는 신하에 지나지 않았다.) 경에 머물렀다. 여기에 있는 경(敬)은 시에 있는 경지(敬止)의 경과는 뜻이 틀리는, 보다 보통인 존경한다는 뜻의 경이다. 또 남의 자식으로서는 효도하는 곳에 머물러 있었고 남의 아비로서는 사랑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으며, 나라사람 즉 일반 백성들과의 접촉에 있어서는 신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위에 말한 이 다섯 가지가 성인인 문왕이 머물러 있는 지선의 자세한 내용이었는데, 학문하는 사람이 거기에 내포되어있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연구하고, 또 모든 사물에 대해 이치를 미루어 다한다면, 보다 정돈된 지선의 모든 범주(人倫)에 도달하여, 천하의 모든 일에 있어서 당연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詩云 瞻彼淇澳한데 菉竹猗猗로다. 有斐君子여 如切如磋하며 如琢如磨라. 瑟兮僩兮며 赫兮喧兮니 有斐君子여 終不可喧兮로다 如切如磋者는 道學也오 如琢如磨者는 自修也오 瑟兮僩兮者는 恂慄也오 赫兮喧兮者는 威儀也오 有斐君子終不可喧兮者는 道盛德至善을 民之不能忘也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저 기욱을 보니 녹죽이 의의하도다. 비(斐)한 군자에, 절(切)하는 것 같고, 차(磋)하는 것 같으며, 탁(琢)하는 것 같고, 마(磨)하는 것 같다. 슬(瑟)하고 한(僩)하며, 혁(赫)하고 훤(喧)하니, 비한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다.”고 하니, 절하는 것 같고 차하는 것 같다는 것은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탁하는 것 같고 마하는 것 같다는 것은 스스로 닦는 것이다. 슬하고 한하다는 것은 준율(恂慄)이요, 혁하고 훤하다는 것은 위의요, 비한 군자여 마침내 잊을 수 없다는 것은, 성덕과 지선을 백성이 능히 잊지 못하는 것을 이른 것이다.(제4절)
【解說】시는《시경》위풍(衛風) 기욱(淇澳)편의 시다. 기(淇)는 위(衛)나라의 강 이름이고, 욱(澳)은 물굽이, 즉 강이 굽어든 곳을 말한다. 저기 강물이 굽어든 곳을 바라보니 녹죽, 즉 푸른 대나무가 의의(猗猗-무성해 있는 모습)하게 무성해 있구나, 하고 노래를 시작한 다음, 그 푸르고 무성한 대나무를 바라보는 순간 교양이 높은 군자를 연상하게 되어, 주제를 그리로 옮겨간다. 즉 시경의 용어로 말해서 흥(興)의 수법이다. <녹(菉)은 무의(武毅)에는 녹(綠)으로 되어있다. 결국 같은 글자다. 비(斐)는 문체가 찬란한 모습, 즉 학문과 교양이 넘쳐흐르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유비(有斐)의 유(有)는 있다는 뜻으로 새겨 안될 것은 없지만 보통 별 뜻이 없다하여 새기지 않는다.
절차탁마(切磋琢磨)란 말은 그대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절(切)은 칼이나 톱으로 끊는 것, 탁(琢)은 망치와 끌로 쪼는 것, 어느 쪽이나 끊어서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또 차(磋)는 줄과 대패로 문지르고 깎아 곱게 하는 것, 마(磨)는 모래와 돌로 문질러 가는 것, 즉 어느 쪽이나 광택을 내는 것이다. 뼈나 뿔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은 먼저 끊은 다음 갈게 되고, 옥과 돌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은 먼저 쪼아낸 다음 갈게 된다. 결국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어 차츰차츰 정밀하게 해 들어간다고 말한 것으로 군자가 학문에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하여 비유한 것이다.
찬란하게 교양미가 넘쳐흐르는 군자는, 마치 뼈와 뿔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끊어 낸 다음 다시 깎고 갈고 하는 것처럼 학문에 힘쓰고, 또 옥과 돌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쪼아 낸 다음 다시 문지르고 갈고 하듯이 자기수양에 힘쓰고 있다. 그렇게 바른 순서를 밟아 학문과 자기수양에 힘쓰는 군자는 ‘슬하고 한하며, 혁하고 훤하다.’고 하는 것은, 절차탁마가 간접적인 형용이었던 것과는 달리 직접적인 형용이다. 슬(瑟)은 엄밀(嚴密)한 모습, 한(僩)은 무의(武毅)의 모습, 혁(赫)은 빛나게 드러나는 모습, 훤(喧)은 성대(盛大)한 모습이라고 주자는 풀이하고 있다. 즉 이같은 군자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시의 대강 뜻이다.
그 가운데 절차라는 것은 학문하는 것을 비유해서 한 말이고, 탁마라는 것은 자기수양을 비유해 말한 것이다. 학문이란 것은 글을 배우고, 읽고 토론하는 것을 말하고, 자기수양이란 학문한 것을 바탕으로 자기 혼자서 반성해가며 결점을 극복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준율(恂慄)은 부들부들 떨며 무서워하는 것, 아마 내적인 도덕률 앞에 무서워 떠는 것이리라. 위의(威儀)라는 것은 남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위엄과 남의 모범이 되는 태도와 행동을 외부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준율이란 말과, 주자가 주에서 말한 무의(武毅)라는 말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에 대해서는,《어류》에 설명하기를 ‘사람이 두려워 떠는 마음을 품게 되면 곧 반드시 제장엄숙(齊莊嚴肅)해진다. 또 무엇이 감히 범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준율이란 속에 있는 엄경(嚴敬), 위의란 밖에 나타나는 광채다.’라고《혹문》에는 말하고 있다.
시에 말한 ‘끝내 잊을 수 없다.’는 것은, 군자가 지니고 있는 그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을 백성들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위풍 기욱편에 있는 이 시를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명명덕이 자신에 마무르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학문적인 연구(始)와 도덕적 수양(終)을 나눠서 해석하여 이른바 <능득(能得-경제2절)>, 즉 머무를 곳을 얻기 위한 수단을 말하고, 준율과 위를 지적하여 그 도덕적인 상태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성대한 것을 말하고, 최후로 그 실질(實質-盛德至善)을 지적해서 감탄해 말한 것이다.
결국, 위에 인용한 현조(玄鳥)의 시, 면만(緡蠻)의 시, 문왕의 시 등으로 <지선에 머무르는> 일반론은 이미 말했으나 다만 어떻게 해서 지선에 머무른데 이를 것인가,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해설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욱의 시를 인용하여 그 점을 명확히 하려고 한 것이다.
절차탁마는, 이른바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아’(《중용》제20장 제17절) 날로 나아가고 달로 나아가 지선에 머무르는 것을 얻는데 이르는 그 과정과 방법이다. <준율> <위의>는 ‘수연(晬然)이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넘쳐 사체(四體)에 미친다.’(《맹자》盡心上)고 하는 지선에 머무른 효과를 말하는 것이다.
‘성덕과 지선을 백성이 능히 잊지 못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즉 성인도 결코 일반 사람과 다를 것은 없지만, 다만 성인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이상으로 하는 것.(성덕과 지선)을 누구보다도 먼저 실현한 것이며, 그리고 그 위의로서 나타나는 것도 이토록 성대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모두 이 성덕과 지선을 가진 성인을 우러러보며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덕이란 것은 군자가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하고, 지선이란 것은 군자가 파악한 이치가 궁극적인 것임을 말한다. 절차탁마는 결국 여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詩云於戲라 前王不忘이라 하니라. 君子賢其賢而親其親하고 小人樂其樂而利其利하나니 此以沒世不忘야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오호라, 전왕을 잊지 못한다.’하니, 군자는 그 어진 것을 어질게 여기고, 그 친한 것을 친하게 여기며, 소인은 그 즐거운 것을 즐겁게 여기고, 그 이로운 것을 이롭게 여기니, 이로써 세상을 마치도록 잊지 못하는 것이다.(제5절)
【解說】시는《시경》주송(周頌) 열문(烈文)편에 있는 시다. 오호(於戲)는 감탄하는 말로 어희(於戲)라 읽지 않고 오호(嗚呼)와 같은 뜻 같은 음으로 읽는다. 전왕(前王) 즉 앞의 임금은 문왕과 무왕을 말한다. 주송 열문의 시는 13구 60자로 되어있는데 여기 인용된 것은 끝맺음의 한 구절이다.
군자라는 것은, 문왕ㆍ무왕의 자손인 대대의 주나라 천자들과 어진 사람들을 말하고, 소인이란 것은 문왕ㆍ무왕의 시대로부터 후세의 일반 백성들을 말한다. 군자와 소인을 서로 대조해서 쓸 때는, 군자는 지배계급, 소인은 피지배계급으로 하는 것이 보통 쓰이는 방법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성인군자가 나타나서, 백성을 새롭게 하여 지선에 머무르게 하고, 천하 후세의 백성들도 한 사람도 그곳을 얻지 못한 사람이 없게 한다. 문왕ㆍ무왕의 자손인 후세 군자들은, 자기들의 어진 분(문왕ㆍ무왕)의 어진 것을 듣고 알아 그 성대한 덕업(德業)을 우러러 본다. 또 자기들의 친족(문왕ㆍ무왕의 자손들)을 보호하고 사랑하여 문왕ㆍ왕의 은덕을 사모한다. 이것이 ‘그 어진 것을 어질게 여기고, 그 친한 것을 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한편 또 소인 즉 일반 백성들은 ‘그 즐거운 것을 즐겁게 여기고’ 즉 편안하게 살며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고, ‘그 이로운 것을 이롭게 여긴다.’ 즉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하루하루의 물질생활을 편안히 누린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선왕(先王)의 성덕과 지선의 끼친 덕택으로, 그 선왕이 죽은 뒤에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사모해 마지않는 것이다.
위풍 기욱의 시를 인용한 앞의 절과 주송 열문의 시를 인용한 이 절은, 감탄하는 정이 넘쳐흘러 참으로 뜻이 깊고도 멀다. 읽는 사람은 모름지기 되풀이해 읽으며 뜻을 잘 새겨 음미해야 할 것이다. 기욱의 시는 명명덕이 머무르는 곳을 얻는 점을 말하고 신민에로의 전개를 보이며, 열문의 시는 신민이 머무르는 곳을 얻는 점을 말하여 명명덕의 효과를 명시한 것이다.
한편 현(賢)과 친(親)을 대립시켜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중용》제20장 제5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傳 제 4 장
지금까지 전의 제1, 제2, 제3장에서 3강령을 풀이하여 끝마치고, 이 장은 ‘물에 본말이 있고 일에 종시가 있다.’고 한 본말을 풀이한다. 그런데 <본말>에 관한 전만 있고 <종시>에 관한 전이 아무데도 없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으나 그 점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이 경전의 주석을 할 경우, 반드시 하나하나를 필요 이상으로 주석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장 바로 뒤에 곧 말하게 되듯이 빠진 글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혹은 <종시>에 대한 전도 원래는 있었던 것이 일찍 없어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或問》)
子曰 聽訟吾猶人也나 必也使無訟乎인져 無情者不得盡其辭는 大畏民志니 此謂知本이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송사를 듣는 것은 나도 남과 같지만, 반드시 송사를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정(情-實)이 없는 사람이 그 말을 다할 수 없는 것은, 크게 백성의 뜻을 두렵게 함이니, 이것을 근본을 안다 말한다.
【解說】여기 나와 있는 공자의 말씀은, 이미《논어》안연(顔淵)편에 나와 있는 것이다. 송사를 듣는다는 것은, 소송사건에 대한 재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재판을 통해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것은 나라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만일 정치를 한다면 소송을 제기하고 죄를 범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 공자의 말이다.
‘정이 없는 사람’의 정(情)은 정실(情實)이라고 할 때의 정으로 진실, 실상이란 뜻이다.《맹자》에 ‘물(物)이 같지 않은 것은 물의 정(情)이다.’ 즉 다‘양성이야말로 존재계의 진상이다’라고 한 그 정이다. 이《대학》전을 지은 사람이 공자의 말을 풀어 말하기를, 나의 밝은 덕이 밝게 빛나게 되면 거짓 소송을 하려는 사람도 그 밝은 덕에 절로 두려운 생각이 들어, 그 거짓 내용을 끝까지 주장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은 자기의 하는 말이 당초 계획한대로 앞뒤가 꼭 맞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완전히 꾸며대지 못한다는 뜻이다.
결국 소송 그 자체도, 별로 그것을 듣고 재판할 것도 없이 자연히 없어지고 말도록 백성이 새로워지는 이것이 곧 ‘근본을 안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즉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끝이며,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밝은 덕을 밝게 하는 것이 근본으로 먼저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경의 ‘물에 본말이 있다.’고 한 본말은 ‘명덕이 근본이고 신민이 끝’이라고 주를 하고 있는데, 이 전의 경우는, 백성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다시 말해 양심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근본이고,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백성들로 인해 일어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건들을 옳게 처리하는 것이 끝이란 말이 된다. 그러나 근본 뜻에서는 별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傳 제 5 장
이 장은 8조목의 최초의 둘인 <격물(格物)ㆍ치지(致知)>를 풀이한 곳이어야 할 터인데, 다만 마지막 끝맺음의 한 구절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주자의 견해다. 즉
<차위지본(此謂知本)>이며 차위지지야(此謂知至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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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열 자(字)가 아마 전의 제 5장의 남은 조각에 해당되는데, 이 중에 다시 처음에 있는 <차위지본(此謂知本)>이란 네 글자가 연문(衍文-필요치 않는 글자가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해 끼어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정자가 지적한 그대로이므로, 결국 그 다음 여섯 글자만이 제 5장의 남은 부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주자의 견해에 따르면, <격물치지>야말로《대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교설이므로, 그 전이 빠져있다는 것은《대학》의 원본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주자는 정자의 의견을 참조해가면서 감히 대담하게 이 없어진 부분을 기워 넣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만들어내려 했다. 그것이 유명한 격물치지에 대한 주자의 보전(補傳)(格物補傳)으로 불리는 것이다. 즉
‘오른 쪽은 전의 5장이다. 대개 격물치지의 뜻(義)을 풀이한 것인데, 지금은 없다. 요즘 일찍이 가만히 정자의 뜻을 취하여 이를 기워 말하기를’
하는 머리말에 이어, 다음 1백34 글자를 든 것이 그것이다.
所謂致知在格物者는 言欲致吾之知인댄 在卽物而窮其理也라 蓋人心之靈이 莫不有知오 而天下之物이 莫不有理언마는 惟於理有未窮이니 故로 其知有不盡也나. 是以로 大學始敎에 必使學者로 卽凡天下之物하야 莫不因其已知之理 而益窮之하야 以求至乎其極하나니.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이 無不明矣리니 此謂物格이며 此謂知之至也니라.
【解釋】이른바 지를 이르게 하는 것이 물을 격하는데 있다는 것은, 나의 지를 이르게 하고자 하면, 물에 대하여 그 이치를 다하는데 있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신령한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물이 이치가 없는 것이 없지만, 다만 이치에 다하지 못함이 있는 까닭에 그 지가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이로써 대학의 처음 가르침은,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천하의 물에 대해, 그 이미 아는 이치로 인하여 더욱 다하고, 그로써 그 극에 이르기를 구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한다. 힘을 쓰는 것이 오래되어 하루아침에 활연히 관통하는데 이르면, 곧 모든 물의 표리(表裏)와 정조(精粗)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고,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을 물이 격한다. 이르고, 이것을 지의 이름이라 이른다.
【解說】이 격물보전(格物補傳)이 주자학의 격물치지(窮理) 이론을 가장 간결하게 서술한 훌륭한 문장이란 것은 이미 정평이 있다. 다 알다시피 <경(敬)>과 <격물치지>는 주자학의 두 기둥으로,《대학혹문》에서 억지로 꾸며가며<경>에 대해 긴 해설을 더한 주자는, <격물치지>에 관해서도, 또《혹문》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전체의 약 5분의 1)을 이 설명에 충당하고 있다. 즉 우선 첫째는 ‘차위지본(此謂之本)’을 연문이라고 하는 이유, 다음에 ‘차위지지지야(此謂知之至也)’에 관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학설에 대한 비판, 셋째로 그 여섯 글자가 격물치지의 끝맺는 말이며, 그리고 그 앞에 빠진 글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넷째로 주자가 보전의 머리말로 ‘일찍이 가만히 정자의 뜻을 취하여…….’라고 말하는 그 정자의 말을 열거하여, 자기의 격물치지설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다섯째로 격물치지를 중심으로 한 주자학 체계의 제요(提要)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을 들고, 여섯째로 주자의 격물치지설은 안으로 구하지 않고 밖에서 구하는 것이어서 지리(支離)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뒷날 왕양명이 제기한 것과 같은 의문을 스스로 제기하여 그것에 대답하고, 일곱째는 사마광(司馬光) 즉《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인 사마온공(司馬溫公)의 격물에 대한 설 및 그 계통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비평하고, 여덟째로 격물이 곧 궁리(窮理)라고 하는 정자의 설에 대한 정자학파의 여러 설을 들어 그것을 비평하고, 끝으로 격물치지의 학문과 세상에서 말하는 박물흡문(博物洽聞)의 학문 즉 박학(博學)이란 것과의 차이를 설명한다. 위에 말한 아홉 항목에 걸쳐 참으로 간절정녕(懇切丁寧)한 해설이 베풀어져 있는 것이다.
우선 이 중에서 다섯째 번 항을 들어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소개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 글은 분명하게 격물보전을 차례로 주석한 것으로, 보전의 해설로서는 다시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4항에 정자의 설 16개조(18개조?)를 열거한 뒤에 ‘그러면 나의 의견도 또 다 들을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을 두고,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서 격물치지론을 전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듣고 있다. 천도(天道)가 유행(流行)하여 조화발육(造化發育)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 첫머리는 불교경전의 <여시아문(如是我聞)>과 비슷한 말이지만, 특별히 불교경전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고, 옛날부터 쓰여 온 말투다. 천도가 유행한다는 말은, 곧 자신을 우주적 생산 활동으로서 동적으로 전개하여, 만물을 낳아 길러 간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이것은 주자학의 크고 작은 제요적(提要的)인 서술에 으레 등장하는 주춧돌이라 해도 좋다.
‘모든 얼굴ㆍ모양ㆍ소리ㆍ빛을 가지고 천지 사이에 충만해 있는 것은 모두 <물건(物)>이다. 물건이 있으면 이 물건의 물건 된 까닭으로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당연의 법칙이 각각 있으며, 그것은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서 사람의 작위에 의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가깝고 절실한 것에 대해 말하면, 먼저 <마음>이라고 하는 물건은 몸의 주인으로, 인ㆍ의ㆍ예ㆍ지라는 성품을 체(體)로서 가지고 있고,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라는 감정을 용(用)으로서 갖는다. 그것들이 마음속에 홀연히 한데 섞여 포함되어 있으면서 감각에 따라 응한다. 즉 외부로부터의 작용이 있을 때마다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때 결코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무엇인가가 지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 몸에 갖춰져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 입과 코와 눈과 사지로서의 씀(用)이 있고, 다시 그 다음에 몸이 접촉하는 것으로서는 군신ㆍ부자ㆍ부부ㆍ장유ㆍ붕우라고 하는 떳떳함(常)이 있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어째 볼 수 없는 당연의 법칙, 즉 이른바 이치(理)다. 자신에서 밖으로 나아가면 먼저 마주치는 것이 사람인데, 사람의 이치도 내 이치와 똑같다. 멀리 나아가면 물건에 부딪치게 되는데, 물건의 이치도 사람의 이치와 똑같다. 극히 큰 것으로는 하늘과 땅의 운행, 예와 지금의 변화, 그것도 이치 밖일 수는 없다. 극히 작은 것으로는 하나의 티끌이라는 미세한 것, 한 차례 호흡이라는 짧은 시간, 그것도 이치를 떠나 있을 수는 없다. 이치라는 것은 <상제(上帝)가 내려준 충(衷)>(《서경》에 나오는 말), 증민(烝民)의 가진 바 떳떳함(彛)(《시경》에 있는 말, 모든 사람에게 본래부터 있는 道德性), 유자(劉子)의 이른바 <하늘과 땅의 중심)(《좌전》성공(成公)13년), 공자의 이른바 <성(性)과 천도(天道)>(《논어》에 있는 말), 자사(子思)의 이른바 <하늘이 명한 성품)(《중용》), 맹자의 이른바 <인의의 마음>, 정자의 이른바 <천연으로 절로 있는 중(中)>, 장횡거(張橫渠)의 이른바 <만물의 한 근원>(《正蒙》), 소강절(邵康節)의 이른바 <도의 형체(形體)>(《擊壤集》序), 그것들은 모두 같은 이치를 가리키고 있다. 다만 기질에 청탁(淸濁)과 정편(正偏)의 차이가 있고 물욕에 천심(淺深)과 후박(厚薄)의 차별이 있으므로, 거기서부터 사람과 물건, 현(賢)과 우(愚)라는 절대적인 차이와 상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즉 이치와 동일성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천하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지만, 그러나 기품의 차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이치를 충분히 다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치에 다하지 못한 점이 있으므로 해서 지(知)에도 다하지 못하고 완성되지 못한 점이 있고, 지에 다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意)도, 순수한 이의(理義) 그것으로 물욕이라는 사사로운 것이 섞여들지 않을 수는 도저히 없다. 뜻이 정성되지 않고, 마음이 바르지 않고, 몸이 닦아지지 않고, 천하 국가가 다스려지지 않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옛날 성인은 이점을 걱정하여, 그 교화의 첫 단계로서 소학을 만들어주고, 거기서 성(誠)과 경(敬)을 익히게 했다. 이리하여 방심(放心-《맹자》에 있는 말)을 거두고, 덕성(德性-《중용》에 있는 말)을 기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다시 대학에 나아가면, 사물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발판으로, 미루어 연구하여, 각각 이치의 극치에까지 도달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내 지식도 빠지고 샌 것이 없고, 정밀하고 적절하여 완벽하게 된다. 그 실제의 방법으로서는, 혹은 행동이라는 현저한 현상의 연구에서부터 하고, 혹은 사유(思惟)라는 은미한 작용의 통찰로부터 하며, 혹은 문장 속, 강론하는 사이에 추구하는 식으로 하여, 몸ㆍ마음ㆍ성품ㆍ감정의 덕과 인륜(人倫)ㆍ일용(日用-日常)의 떳떳함에서 천지와 귀신의 이변(異變),새, 짐승과 초목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에서도, 당연히 어째 볼 수 없는, 또 그래야만 될 이유로서 바꿀 수 없는 것(理)을 보고, 어디까지나 그 표리와 정조를 다하며, 또 그 순서를 차례로 미루어나가 같은 예를 주연(周延)시켜, 마침내 어느 날 탁 트이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물건에 있어서 모두 그 이치를 궁극에까지 연구하게 되고, 또 나의 총명예지도 남김없이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은 내가 전 제5장의 빠진 글을 깁게 된 취지다. 모두가 다 정자의 설에 따른 것은 아니나, 대체의 중요한 뜻은 거의 합치되고 있다. 독자들의 깊은 연구와 파악이 있기를 기대한다.’
주자는 보전 머리말에서도 ‘가만히 정자의 뜻을 취하여ㆍㆍㆍㆍㆍㆍ.’라고 쓰고 있다. 그 정자의 말 몇 가지를 앞에 말한《혹문》제4항에 의해 다음에 뽑아두기로 한다. 이들 말에 대해 주자는 극히 조술자(祖述者)의 충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주자 자신의 말이라고 보아 좋을 정도다.
‘성경(誠敬)은 원래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먼저 알지 않으면 또한 능히 힘써 행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대학》의 순서는 치지를 먼저 하고 성의를 뒤로 했다. 그 순서는 넘을 수 없는 것이다. 대저 사람의 성품은 원래 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치에 따라 행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아는 것이 이르지 않아서, 단순히 힘을 가지고 하려 한다. 이로써 그 어려움에 고생하고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알아 이르게 되면, 곧 이치에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고, 이치에 따르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어찌 고생스럽게 이치에 따르지 않고, 그로써 내 즐거움을 해치겠는가.’
여기에 이어 유명한 <참앎(眞知)>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사람이 호랑이 이야기를 했을 때, 전에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만은 얼굴빛이 변했다. 호랑이의 두려움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아는 것에는 참과 참 아닌 것이 있다. ‘착하지 못한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때로 이것을 하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닌 것이다.’라는 유명한 한 대목이 전한다. 이상은 격물치지가 우선 가장 처음이 아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격(格)은 이르는 것이다. 무릇 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한 이치가 있다. 다하여 이르는 것이 이른바 격물이란 것이다. 그러나 격물도 또 한 가지만이 아니다. 혹은 글을 읽어 도의를 강(講)하여 밝히고, 혹은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고, 혹은 사물에 응접해서 그 당부(當否)에 대처하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궁리(窮理-格物)다.’
우리는 격물이란 것을 너무 현대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시 <독서(讀書))>-물론 경전을 읽는 것이다.-혹은 일상의 생활 실천이란 것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예를 들면 자연과학적인 연구와 같은 것은 그 관심의 주요 부분이 아니었다. ‘군자는 널리 앞의 말과 지나간 행동을 알아 그 덕을 쌓는다.’(《주역》大畜卦에 있는 말)고 하는 사대부(士大夫-讀書人)의 기본 태도에, 주자학은 조금도 저촉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물건이 격하여 만 가지 이치가 통하는 것은 안자(顔子)라 하더라도 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오늘 한 물건이 격하고, 내일 또 한 물건이 격하여, 쌓고 익힌 것이 이미 많고, 그런 뒤에 탈연(脫然-豁然)히 관통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궁리(窮理)라는 것은,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모조리 다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만 한 가지 이치를 다하게 되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쌓고 또 쌓은 뒤에 절로 탈연히 깨닫는 바가 있는 것이다.’
다음의 한 대목은 얼른 보아 전혀 반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으나, 반드시 꼭 그렇지도 않다. ‘격물은 천하의 물건을 모조리 밝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일을 밝혀 다하고, 그 나머지는 그로서 미루어 알 수 있다. 대개 만물은 각각 한 이치를 갖추고 있고, 만 가지 이치는 같이 한 근원에서 나온다. 이것을 미루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물건과 내가 한 이치다. 저것에 겨우 밝게 되면 곧 이것에 밝아진다. 이것이 안과 밖을 합하는 길이다. 그 큰 것을 말하면 하늘과 땅이 높고 두터운 까닭, 그 작은 것을 말하면 한 물건의 그렇게 된 까닭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다.’
‘한 풀과 한 나무도 또한 다 이치가 있다.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치지의 요(要)는 마땅히 지선이 있는 바를 알아야 한다. 아비는 사랑에 머무르고, 자식은 효도에 머무르는 것과 같다. 만일 이것을 힘쓰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만물의 이치를 보려고 하면, 본 부대를 떠난 한 기병이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려 해도 돌아올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위는 격물치지의 실제의 과정에 대해 말한 것이다. 물론 송학(宋學)이라고 하는 극도의 도덕적인 학문이, 단순한 격물을 위한 격물, 단순한 지식의 추구라고 하는 식의 생각에 서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다. 치지의 지(知)도 궁리의 이(理)도, 바로 오늘의 그것으로 풀이되어서는 안된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이치를 살핀다고 하는 것도, 천도의 유행과 조화 발육에 의해 만물이 모두 그 성명(性命)을 바로 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자의 설 가운데 그 점 가장 큰 영향을 주자에 준 것은 이른바 <경(敬)>의 설로서 다음 한 대목은 너무도 유명하다.
“함양(涵養)은 모름지기 경(敬)으로써 해야 한다. 배움에 나아가는 것은 곧 치지에 있다.”
경은 이 경우, 치지의 이른바 분모(分母)로 생각되고 있는 것으로, 격물치지의 보다 근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격물은 대학에서 처음으로 실시되는 과정(?)인데 대해, 경은 소학에서 이미 시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경 대신에 만일 성(誠)을 가져오게 되면, 역시 이론상 격물치지→성의라는 순서로 되는 것을 어디까지나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주자가 격물치지→성의로 하는데 있어서는 단순히 정자만이 근거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중용》에도 ‘선(善)을 밝힌다.’ ‘선을 택한다.’는 것이 ‘굳게 잡는다.’고 한 앞에 놓여있고(제20장),《맹자》에도 ‘성(性)을 알고 하늘을 안다.’고 한 것이 ‘두고……기르고……섬긴다’고 한 앞에 놓여있다.(盡心上)
《대학》의 가르침에 있어서 처음에 있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격물치지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자가 없어진 글을 감히 기워 넣은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코 증거도 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자기 글을 성현의 경전 속에 나란히 넣어 두려고 하는 불손한 짓을 한 것은 아닌 것이다.
주자는 또 자기의 격물치지의 학설이 받게 될 <지리(支離)>하다는 비난-일찍이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이, 뒤에는 또 왕양명이 주자학에 대해 던진 비난-을 ‘너의 학문은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 형식을 먼저 취해 두고, 격물치지의 공부는 사물에 이른다고는 하지만, 그저 단순히 밖을 위주로 하고 많은 것을 자랑할 문인, 세상의 이른바 널리 보고 많이 듣는 공부와 결코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몸에 돌이킨다는(《맹자》盡心上) 점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주자의 격물설을 한층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주자 이외의 격물설을 소개하기로 한다.
<격물>에 72가(家)의 다른 설이 있다고 하는, 그 72의 내용이 각각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 사상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격물설로서는, 한나라 정현(鄭玄), 송나라 주자, 명나라 왕양명의 세 학설을 드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다.
가장 오랜 정현의 설은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을 풀이하여 ‘격(格)은 오는 것이다. 물(物)은 일과 같다. 그 선(善)을 아는 것이 깊으면 곧 선한 것을 오게 하고, 그 악을 아는 것이 깊으면 악한 것을 오게 한다. 일은 사람의 좋아하는 바에 따라 오는 것을 말한다.’고 주를 하고,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의하면 ‘선한 일은 사람이 선을 행하는데 따라와서 응하고, 악한 일은 사람이 악을 행하는데 따라와 응한다.’ 결국 ‘선과 악이 오는 것은 사람이 좋아하는 바에 의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정현의 설을 어떻게 성격을 지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튼 송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8백 년 동안 격물-대체로 이 기간에 있어서 <격물>이 사상계의 중심 논제로 된 일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지만-에 대한 권위적인 해석은 이 정현의 설이었고, 정자ㆍ주자의 격물설은 이 정현에 대해 그 권위와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백년, 주자학은 이제 왕양명의 비판 앞에 놓이게 된다.
양명에 의하면, 격물치지는 다음과 같이 새겨지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물(物)>이 일이라는 것은 주자와 같으나, 양명은 그 일이란 것을 다시 한정하여 ‘뜻이 있는 것’으로 한다. 뜻이 어버이를 섬기는데 있을 때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곧 일, 즉 <물>인 것이다. <격>은《맹자》의 ‘대인(大人)은 임금의 마음을 격(格)한다.’고 한 격이다.즉 바르게 하는 것이다. 주자가 말한 것처럼 이르는 것은 아니다. <지(知)>는《맹자》에 말한 <양지(良知)>로서 주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외연적(外延的)인 지식은 아니다. <치(致)>는《논어》의 ‘상(喪)은 슬픔을 이르게 한다.’는 <치>다. 이 점만은 주자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결국 대학의 ‘치지는 격물에 있다.’고 한 것은 <양지>를 극도에까지 미루어 나아가려 하고, 양지를 완전히 실현시키려고 하면, 일 즉 의념(意念)의 발동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된다. ‘자기 의념이 있는 곳에 즉시 그 바르지 못한 것을 버리고 본래의 바른 것을 온전히 하여, 모는 장소 모든 시간에 있어서 천리를 지니도록 하는’(《傳習錄》), 그것이 격물이다. ‘내가 말하는 치지격물은, 내 마음의 양지를 모든 사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양지는 이른바 천리다. 내 마음의 양지인 천리를 모든 사물에 이르게 할 때는, 곧 모든 사물이 다 그 이치를 합해서 하나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주자의 입장은,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사물의 이치를 나누어 둘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자의 격물은 ‘물에 대해 그 이치를 다한다.’는 것으로, 즉 내 마음을 가지고 이치를 사물 속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치를 사물에서 찾는 것은, 효도의 이치를 어버이에게 찾으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경우 어버이가 죽으면 효도의 이치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상사와 제사 같은 중대한 일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천하에 마음 밖의 일이 없고, 마음 밖의 이치가 없다. 마음이 곧 이치인 것이다.(《傳習錄》答人論學書)
대관절 주자가 말한 것처럼, 천하의 모든 사물에 대해 하나하나 다 이르게 한다는 것이 사실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루아침 활연히’라는 것은, 과연 어느 때의 일이겠는가. 설령 한 그루 나무, 한 포기 풀의 이치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이 뜻을 정성되게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주자가 아무리 자기의 격물설이 <안팎이 없는> 것이라고 억지 변명을 하지만, 결국 <밖>에 의해 <안>을 메우려 하는 것, 결국 <안>에 대한 불신(不信)을 표명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다시 또 격물치지를 이런 식으로 주지적(主知的)으로 풀이하고 또 격물치지→성의라는 단계적 순서를 고정화 하면, 도덕 철학으로서 전혀 망망탕탕(茫茫蕩蕩)한 것이 되어, 결국은 <경(敬)>과 같은 사족(蛇足→陸象山이 朱子의 <敬>에 대한 設을 평한 말)을 끌어오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誠意>를 主로 하면 이같은 不自然은 피하게 된다.)
도대체 공자의 문에서 배운 철인들이 그토록 소중한 <경>이란 글자를《대학》속에 써 넣는 것을 잊는다는 일이, 그리고 천 몇백년 뒤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 의해 기워넣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각될 수 있겠는가?(《傳習錄》)
격물의 다른 설로서는 물론 또 여러 가지가 있다.《혹문》은 송나라 시대에 있어서 정자 이전의 유력한 설로서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설을 들고, 이어서 격물이 곧 궁리하고 풀이하는 정자의 설이 달라진 것으로서, 정자 제자들의 여러 설을 열거하여 논평하고 있다.
여기서는 사마온공의 ‘격(格)은 한(扞)이고 어(禦)이다. 능히 바깥 물건을 막고 막은 뒤에라야 능히 지도(至道)를 안다.’고 한 말과, 그 계통으로서 어느 학자의 설 ‘바깥 물건의 유혹을 막아버리면, 본래의 선은 절로 밝아진다.’고 한 데 대한 주자의 비평을 소개해 둔다. 이 말이 중요한 말이어서라기보다 주자의 논평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증민(烝民)을 낳으니 물(物)이 있으면 칙(則-道)이 있다.(《시경》) 물과 도는 결코 각각 떨어진 것은 아니다. 만일 바깥 것을 막은 뒤에 비로소 지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부자의 관계를 끊은 뒤에 사랑과 효도를 알 수 있는 것이 되고, 군신 관계를 떠난 뒤에 비로소 인(仁)과 경(敬)을 알 수 있게 되는데, 그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또 만일, 바깥 것이 온다는 것은 착하지 못한 것이 유혹하는 것을 말한 것으로 군신 부자와는 다른 문제라고 한다면, 사람을 유혹하는 바깥 물건으로서 음식과 남녀에 대한 욕심처럼 큰 것은 없다.(食欲과 性欲을 <바깥 것>으로 보고 있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 근본을 미루면, 이 두 가지는 사람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것, 없을 수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 사이에 자연 천리와 인욕의 구별이 있으므로 그것의 구별은 엄밀히 행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것은 어찌 되었든, 단순히 사물이 자신을 유혹하는 것을 미워하여 일체를 막아 이를 버리려 하게 되면, 결국 먹는 것을 끊고 굶은 뒤에 비로소 음식의 바른 것을 얻게 되고, 자손을 낳는 것을 그만 둔 뒤에 비로소 부분의 별(別)을 온전히 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랑캐들의 임금을 업신여기고 아비를 업신여기는 가르침에 그 같은 설을 적용시킬 수는 없다. 하물며 그러한 것이 성인의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와 신동(神童)으로 불리는 강희장(江希張)은 그의 나이 열 아홉 살에 지은《사서백화(四書白話)》라는 현대어 주석 가운데, 격물의 격을 물리쳐 없앤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물을 물욕(物欲)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사람의 본심이 물욕에 가리어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말끔히 씻어버리면 본래의 깨끗한 마음이 거울처럼 나타난다. 이것이 곧 격물치지라는 것이다.
그는 또 격물을 하기 위한 첫 공부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성의(誠意)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격물치지에 대한 장은 원래부터 있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로서는 성의장(誠意章) 첫머리가 그 다음 장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른바 성의가 치지에 있다는 것은(所謂誠意在致知者)’하고 시작하지 않고, 바로 ‘이른바 그 뜻을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所謂誠其意者)’하고 시작한 것으로 분명하다고 했다. 대체로 왕양명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傳 제 6 장
이 장은 8조목 가운데 <성의>를 풀이한다.《중용》첫장 제3절과 관련이 있고《대학장구》로서는 제5장(格物補傳)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전이다. 격물은 몽(夢)→각(覺)의 관문, 성의는 악(惡)→선(善)의 관문으로도 불린다.(《語類》), 하기는 양명학과의 비교에서 말하면, 주자학으로서는 제5장에 대해 중요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왕양명에 있어서는 ‘《대학》의 요(要)는 성의뿐’(大學古本序)으로 되어 있는데 대해, 주자에 있어서는 격물치지가《대학》의 요로 되어 있고,《혹문》에서는 그 위에 다시 <경>의 개념까지 끌고 들어와 있는 것이므로, <성의>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가벼워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주자학파로부터 크게 반대를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장의 주자 주의 끝맺음 말로서 한 번은 있어야 할 ‘이것은 대학 한 편의 추요(樞要)다.’라는 글귀(《語類》)가 결국 깎여나간 사실은, 한편으로 격물치지에 대한 열의와 아울러 생각할 때, 역시 시사적(示唆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주자학에 있어서 <성(誠)>의 가장 보통 뜻은 실(實), 진실불망(眞實不妄)이 되겠는데(《中庸》제20장 제17절 참조), 이 대목은 그것이 철두철미하게 주관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경에 <그 뜻을 정성되게 하고자 하면 먼저 그 지를 이르게 한다.> <지가 이른 뒤에 뜻이 정성된다.>고 말했다. 이같이 성의 앞에 치지를 가지고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지가 아직 이르지 못하고, 마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밝음(明察力)이 아직 완전히 다 밝아 있지 않으면, 마음이 발하여 뜻의 단계에 나아가도 사실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적당히 자기를 속이는 것이 안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설령 밝음이 이미 밝아졌다 하더라도 거꾸로 다음 단계인 <성의>라고 하는 점에 세심하지 못하면, 모처럼 밝아진 밝음도 자신과 유리된 존재로밖에 되지 않아, 덕의 진보를 위한 기초로는 되지 못한다. 결국 이 장의 취지는, 앞장의 격물치지와의 맥락(脈絡)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못하면 실천의 시발점과 종점-치지→성의의 불가역성(不可逆性)과 성의의 불가결성(不可缺性)-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語類》)
所謂誠其意者는 毋自欺也니 如惡惡臭하며 如好好色을 此之謂自謙이니라.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解釋】이른바 그 뜻을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같이 하고,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같이 한다. 이것을 자겸(自謙-自慊)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간다.(제1절)
【解說】그 뜻을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닦는(自修) 것의 첫걸음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선을 하고 악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발동해서 뜻의 단계에 나아갔을 경우 아직 참되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뜻이 참되지 못하다는 것은, 선을 하려는 뜻이 아무래도 순일하게 되지 못하고, 뜻이 둘로 분열해서 악을 하려는 뜻이 안에서 견제하는 상태를 뜻하며, 그것이 자기(自欺), 즉 자기 기만에 다를 것이 없다. 이 자기 기만을 없애는 것이 성의다. 그 원인은 치지가 참으로 이루어져 행해지지 않는 데 있다. <자기>라는 것은, ‘반쯤 알고 반쯤 모르는 것’, ‘악을 미워하는 것이 참되지 못하고, 선을 하는데 용감하지 못하며, 밖은 그러나 속은 그렇지 않고, 혹은 어떤 목적을 위해 하고, 혹은 처음은 부지런히 하고 끝에는 게을리 하며, 혹은 구분(九分)의 선을 하면서 일분의 구차한 마음이 있는’(《語類》) 것이다. 겸(謙)은 여기서는 겸(慊)이란 글자로 읽어야 한다. 겸(慊)은 마음이 기쁘고 만족스런 것을 말한다. 속이 시원하다는 그런 어감일 것이다.<홀로(獨)>라는 것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그런 경계(境界)를 말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함께 있어도, 사람은 충분히 혼자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닦고자 하는 사람이 선을 하고 악을 버려야 할 것을 알고 있으면, 그 실천에 노력하여 자기기만을 그만두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후각(嗅覺)이 본능적으로 악취를 싫어하여 기어이 제거하려고 하는 것처럼 악을 버리려 하고, 마치 시각이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빛을 좋아하여 기어이 얻으려고 하듯이 선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의 반대인 스스로의 만족을 찾는 것에 다름없다. 한갓 한 때만의 속임수를 쓰고, 밖의 것만을 표준으로 하며, 남을 위해 하는 것과 같은 일은 그 경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뜻을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도덕적 의식이 마치 감각적 본능적 의식처럼 되고 마는 것을 말한다. 뜻을 정성되게 한다. 즉 마음의 발하는 것을 참되게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참되냐 참되지 못하냐 하는 것은,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남은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런 자기 혼자만의 상태인 <홀로>의 경지에서 삼가고 조심하여, 그 기(幾-靜에서 動으로 옮기려 하는 순간에 있어서의 意識과 事象의 微分)를 면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도덕 의식은 다른 것을 예상하는 경지, 즉 공리성(功利性)에 있어서가 아니고, 홀로의 경지-앞에서 말한 대로 물리적인 혼자를 뜻하지 않고, 또 그것은 다른 사람을 예상하는 입장에서 말하면, 반 공리적이고, 내적이고, 원리적인 입장으로 된다.-에서만 갈고 닦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악취를 싫어하듯 하고, 좋은 빛을 좋아하듯 한다.’고 하는 말을 가장 즐겨 쓴 것은 왕양명이었다. ‘사람이 다만 선을 좋아하기를 좋은 빛을 좋아하듯 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이 악취를 싫어하듯 하면 그것으로 벌써 성인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학문은 다만 이 한 가지 성(誠)뿐이다.’(《傳習錄》) 그런데 성이란 것은 결국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대학》에서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같이 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같이 한다는 것은, 지행(知行)의 참모습을 설명한 것에 다름없을 것이다. 대개 좋은 빛을 좋아하기 전에 좋은 빛을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없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좋은 빛을 보는 것은 지(知)에 속하고,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은 행(行)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그 좋은 빛을 보았을 때 실은 벌써 좋아하고 있는 것으로서, 먼저 보고,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참모습은 아니다.’ 지와 행이 나눠질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지와 행의 본체(本體-良知)로서, 그것의 분리는 이 본체가 사사로운 욕심으로 막혀 끊어지는 데서 일어난다.’(《傳習錄》) 결국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 같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은 양지(良知)의 성격을 말한 것일 따름이다. 양명의 양지는, 지와 행의 통일과 자와 타의 통일이라는 이중의 통일 원리였다고 생각되는데, 이 뒤의 것을 나타내는 정식(定式)으로서 애용된 것이 ‘만물일체 인(仁)’(程明道의 말), 앞의 그것이 ‘여호호색(如好好色) 여오악취(如惡惡臭)’였던 것이다.
小人閒居에 爲不善호대 無所不至타가 見君子而后엔 厭然揜其不善하고 而箸其善하니라. 人之視己이 如見其肺肝然이니 則何益矣리오 此謂誠於中이면 形於外하나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解釋】소인이 한가히 있으면서 불선을 하여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가, 군자를 본 뒤에 암연(厭然)히 그 불선을 가리고 그 선을 나타낸다. 사람이 자기를 보는 것이, 그 폐와 간을 보는 것같이 그러하니, 곧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것을 가리켜 속에 정성되면 밖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조심한다.(제2절)
【解說】한가히 있다는 것은 혼자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은 보통 한(閑)으로 쓴다. 암연이란 것은 소저폐장(逍沮閉藏)의 모양, 즉 기가 콱 죽어서 싸서 감추는 것, 엄(揜)은 엄(掩)과 같은 글자로 덮어 가리는 것. 즉 소인(군자의 반대)은 남이 보지 않는 그늘에서는 착하지 못한 행동을 하여 못하는 것이 없지만, 일단 군자 앞에 나가면 기가 콱 꺾여, 자기의 착하지 못한 것을 감추고, 착한 것을 표면에 나타내려고 한다. 즉 아무리 악한 짓을 하는 사람도, 선을 해야 하고 악은 버려야 한다는 것은 모를 리는 없다. 다만 실제로 행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같이 악한 일을 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덮어 감추려 해도, 사람들은 마치 허파나 간을 뚫고 들여다보듯 이쪽 속을 역력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안에 정성이 있으면 밖에 나타난다는 것은 이 점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조심한다. 홀로를 조심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예상하는 이른바 명리(名利)에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자신의 내적인 도덕성에 대한 것으로서 자기만을 문제로 하고, 그 같은 자신에 있어서 도덕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안에 정성되면 밖에 나타난다.’고 한 것은, 속담이나 무엇이었던 듯한데《중용》제23장 첫머리에도 ‘정성되면 나타난다.(誠則形)’는 말이 있다.
曾子曰. 十目所視며 十手所指니 其嚴乎인져.
【解釋】증자가 말씀하시기를 ‘열 눈의 보는 바요, 열 손의 가리키는 바니, 그 엄한저’라고 하셨다.(제3절)
【解說】이 증자의 말을 인용한 것은, 윗글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아무리 그 착하지 못한 것을 덮고 그 착한 것을 드러내려고 해도 그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가령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혼자만이 있는 상황에 있더라도 그가 하고 있는 착한 일, 악한 일은 절대로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엄한저’라는 것은 심히 두렵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숨은 곳에서 한 행동도, 그것은 많은 사람의 눈에 보이고 많은 사람의 손이 가리키게 되는 완전히 공개된 상태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특색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증자의 말을 한낱 비유로 풀이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해석이었는데, 앞에 쓴 신동 강희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로 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마음에 어떤 생각을 하면, 그것은 곧 파동(波動)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음파가 소리를 전하듯이 만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파(心波)가 영파(靈波)로서 천지신명에게 알려지게 된다. 남이 보는 앞에서 무심코 저지른 잘못을 신명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혼자 가만히 남모르게 계획하는 일일수록, 그것은 보다 강한 파동으로 상하팔방(十方)에 있는 천지신명에게 똑똑히 전해지게 된다. 열 눈이 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킨다는 것은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있는 신명의 눈을 속일 수 없고, 신명의 생각을 거역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과 신명과의 신비로운 관계를 말한 것이다.’
富潤屋이오 德潤身이라 心廣體胖하나니 故로 君子는 必誠其意니라.
【解釋】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 마음이 넓으면 몸이 편안하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정성되게 한다.(제4절)
【解說】반(胖)은 안서(安舒), 즉 편안하고 여유있는 것. 지금은 이 반이란 글자가 몸이 뚱뚱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도 다분히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의 뜻은, 재산이 넉넉하면 자연 집에 윤기가 나타나듯이, 즉 여러 가지 도구나 장식으로 집안이 훤하고 아름다워지듯이, 덕은 그 자신의 몸에 윤기가 나타나게 한다. 마음에 아무 부끄러울 것이 없으면 마음은 자연 크고 넓어져서, 모든 일에 너그럽고 아무 근심 걱정이 없기 때문에, 육체는 항상 병이 없이 편안하게 된다. 그것은 몸이 덕에 윤택해진 결과인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선이 안에 충실한 결과로 밖에까지 나타난 것이 된다. 그래서 앞의 2절은 ‘신독(愼獨)’으로 끝맺음을 한 것에 대해, 여기서는 경에 있는 말로 ‘그 뜻을 정성되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신독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는 방향인데 대해, <성의>는 오히려 선을 행하는 적극적인 방향을 표현한 것이 된다. 이상을 합쳐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혹문》)
‘천하의 도는 둘이다. 선과 악뿐인 것이다.’ 그 중 선은 천명에 의해 부여받은 본연의 것인 데 대해 악은 결국 물욕에서 생겨난 것,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떳떳한 성품으로서는 선만이 있을 뿐 악은 없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이 가진 본래의 성격으로서는 반드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육체라고 하는 방해하는 것이 있고, 그 위에 기품에도 간섭을 받게 되기 때문에-결국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기품이란 것은 심적 현상과 같은 것이나 성격과 같은 것, 즉 <기(氣)>의 현상 중 비교적 미세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그래서 물욕이라고 하는 <사사로운> 것이 천명의 본연인 것을 덮어 가리어 드러나지 못하게 하여, 그 결과 사물의 이치에 대해 전혀 선과 악이 어떤 것인 줄을 모르는 사람과, 설령 대체로 알고는 있다. 하더라도 선은 좋아해야 할 것이고, 악은 싫어해야 할 것인 줄을 참으로 알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나게끔 되었다. 선이 참으로 좋은 것인 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선을 좋아하려 해도 자기 안에 선을 좋아하지 않는 요소의 존재를 허락하게 되어, 그 결과 안에서 거부하는 일이 있게 된다. 악이 참으로 미운 것인 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악을 미워하려 해도 자기 안에 악을 미워하는 요소의 존재를 허락하게 되어, 그 결과 안에서 제지를 당할 염려가 있다. 이리하여 결국, 미봉적으로 자기기만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마음의 발한 바(뜻)가 정성되지 못하게 된다. 대체 선을 좋아해도 그것이 참되지 못하면, 참다운 의미에서 선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을 해치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다. 악을 미워해도 참되지 못하면, 참다운 의미에서 악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을 더하게 하는 일까지 있게 될 것이다. 성인은 이 점을 걱정하여《대학》에서도 먼저 최초로 <격물치지>를 가르쳐서 그 심술(心術)을 열어 밝히고, 선과 악의 소재(所在) 및 미워하고 혹은 좋아하는 것의 필연성을 인식시킨 다음, 비로소 <뜻을 정성되게 하는> 설에 의해 그를 전진하게 하는 것인데, 그 경우, 사람의 눈이 미치지 않는, 혹은 인간의 내부의, 유독은미(幽獨隱微)한 점을 조심함으로써, 그 미봉적인 자기기만의 발생을 금절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발동해서 선을 좋아하게 될 경우, 그것은 반드시 안에서부터 밖에까지 좋아하지 않는 일은 털끝만큼도 없게 될 것이며, 악을 미워하게 될 경우, 반드시 안에서 밖에까지 미워하지 않는 일은 털끝만큼도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눈이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경우처럼, 또 코가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경우처럼, 결코 ‘남을 위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다만 눈과 코가 자기로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내면적인 본성에 의해 그것의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발동이 이같이 진실되고, 그리고 한순간 한순간, 미소의식(微小意識)에 있어서도 그것이 끊임없이 지속되어, 한순간의 중단도 없게 되면, 여기에 내외와 표리가 융합하고 징철(澄徹)해서, 마음은 바르지 않은 일이 없고 몸은 닦아지지 않는 일이 없는 상태에 한없이 가까워질 것이다. 그런데 소인과 같은 사람은 남이 보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는 착하지 못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착한 척 외면치례를 하려 한다.
그것은 선악의 소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순 없더라도, 다만 선을 좋아해야 하고 악은 미워해야 할 것임을 참다운 의미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 홀로 있을 때를 근신하여 미봉적인 자기기만을 끊어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타락하게 되고, 그리고 그것에 무자각했음에 다름없는 것이다.
위에 말한 대로 이 전 6장의 말한 바는 자수(自修)에 있어서의 선결문제이며, 그리고 참다운 지식을 얻어두지 못하면, 그 좋아하고 미워하는 실을 거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도 <그 뜻을 정성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앎이 이른 뒤에 뜻이 정성되다.>고 가르치고 있다.
《대학》공부가 시종일관 순서를 따라 나아가, 이단적인 비유교적 요소를 섞지 않고 있는 것은 여기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주자는 무엇이고 둘로 나누고, 양명은 무엇이고 하나로 합친다는 말이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誠意)>의 관계는 그 전형적인 한 예일 것이다.
傳 제 7 장
이 장은 8조목 가운데 정심(→수신)을 풀이한다. 뜻이 정성되면 진실로 선이 있고 악이 없다. 마음을 두어 몸을 조종함은 그것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뜻을 정성되게 하는 것을 알 뿐, 이 마음이 있고 없는 것을 감찰하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을 곧게 하고 몸을 닦을 수는 없을 것이다.
所渭修身在正其心者는 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하고 有所恐懼則不得其正하고 有所好樂則不得其正하고 有所憂患則不得其正이니라.
【解釋】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있다는 것은, 마음이 분치(忿懥)하는 바가 있으면 곧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공구하는 바가 있으면 곧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호요(好樂)하는 바가 있으면 곧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우환하는 바가 있으면 곧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제1절)
【解說】분치(忿懥)의 <분>과 <치>는 다 노여움이란 뜻이다. 호요(好樂)의 요(樂)는 <낙>이라 읽지 않고 <요>라 읽는다. 음악이라고 할 때는 <악>으로 발음하고, 즐겁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낙>으로 읽고, 좋아한다는 동사의 경우는 <요>로 읽는다. 여기서는 호(好)와 합쳐서 <좋아함>이라는 동명사로 쓰이고 있다. 이 분치, 공구, 호요, 우환의 네 가지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람에게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맡겨 둘 뿐, 감독 관찰하고 음미하는 대상으로 할 수가 없으면 정이 이기고, 욕심이 움직여-사람의 마음은 정적(靜的)인 <성(性)>과 동적인 <정(情)>의 통일체로 정이 극도에 달한 경우가 욕심-즉 정이 욕심이 되어 망령되이 움직임으로써, 마음의 용(用), 즉 마음의 현상면은 중정(中正=正常)을 잃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몸을 닦는> 것도 방해를 받게 된다. 한편 신유소분치(身有所忿懥)의 신(身)은 정자에 따라 마음(心)으로 고쳐 읽는다. 그러나 몸이 마음이란 뜻으로 쓰일 수 있으므로 마음으로 풀이만 하면 될 것이다.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하며 聽而不聞하며 食而不知其味니라.
【解釋】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제2절)
【解說】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마음이 확고히 서 있지 않으면, 그 몸을 통솔하는 것이 없게 되어, 보고, 듣고, 먹고 하는 신체의 기능도 올바르게 움직일 수 없다. 군자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감찰의 대상으로 하고 ‘경(敬)에 의해 바르게 한다.’(《주역》그런 다음에야 이 마음이 일정한 정상 위치에 있게 되고, 몸도 항상 닦아지게 된다. 한편 ‘마음이 있지 않으면(心不在焉)’의 언(焉)은 별로 다른 뜻은 없으나 단정적으로 말하는 어감을 주는 것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此謂修身이 在正其心이니라.
【解釋】이것을 일러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한다.(제3절)
【解說】기뻐하고, 성내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면 마음은 중정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 기뻐도 말고 슬퍼도 말고 마치 마른 나무와 죽은 재(灰)처럼, 즉 말라죽은 나무처럼 생명도 없고, 불이 꺼진 차가운 재처럼 타오를 수도 없는 상태로 있어야만 비로소 마음은 중정을 얻는 것일까.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원래 사물에 응접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 장에 대한《혹문》은 이같이 묻고,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뚜껑을 연 거울, 반듯한 거울처럼 담연(湛然)하고 허명(虛明)하다. 그러한 것으로서 몸의 주인인 것은 물론 외물(外物)과의 관계에 들어가기 이전에 있어서의, 그 본질적 본래적인 모습, 이른바 체(體)이지만, 그것이 이윽고 외물로부터의 작용에 대해 기쁨ㆍ노여움ㆍ걱정ㆍ두려움으로서 반응하고, 온갖 표현형태를 갖는 것도, 이것 또한 마음에 필연적인 현상, 이른바 용(用)이다. 그러므로 아직 작용을 받지 않고 있을 때는, 그 이른바 뚜껑을 연 거울, 반듯한 거울과 같이 지허지정(至虛至靜)한 몸(體)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서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심원한 존재로서, 중정 그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또 이같은 몸이 외물에 대해 느낀, 즉 외물로부터의 작용을 받는 경우도 마음이 응하는 것은 모두 절(節)에 맞는 것이므로, 거울과 저울로서의 용(用)도, 정대하고 광명하여 자유자재로 발휘된다. 이것이, 바로 용이 이른바 ‘천하의 달도(達道)’(《中庸》首章)로 되는 것이다.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평소에 마음에 감찰을 더하고 있지 않으면, 사물이 <밖>으로부터 작용해왔을 경우 이에 중정하게 응하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사물과 함께 밖으로 나가버릴 수도 있다. 즉 안에 기쁨ㆍ노여움ㆍ걱정ㆍ두려움이 움직인 다음에 비로소 마음의 용이 바름을 얻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지만 그것은 반드시, 마음이 사물에 응하는 그 자체가 곧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서, 마른 나무, 죽은 재처럼 되어야 비로소 바름을 얻게 된다고, 전(傳)을 지은 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령한 이 마음이 그 바름을 얻어 어디까지나 몸에 있게 되면, 귀ㆍ눈ㆍ코ㆍ입ㆍ사지백해(四肢百骸)가 모두 그 명령을 들어 그 직무를 다하게 되는 것으로, 동정(動靜), 오묵(語黙), 출입, 기거를 내 생각대로 구사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몸은 여기에 있으면서 마음은 딴 뜻으로 달리게 되어 혈육의 몸에 관리자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얼굴을 들고 탈하여 새를 보며, 머리를 돌려 잘못 사람을 대하게 될’(새에게 눈이 팔려 사람과의 응대를 제대로 못하고, 외물에 마음이 사로잡혀 올바른 몸가짐이 되지 않는다.) 뿐인 것이다. 공자의 이른바 ‘잡으면 있고, 버려두면 없어진다.’(《맹자》), 맹자의 이른바 ‘그 놓은 마음을 찾는다.’ ‘그 큰 체(體)에 따른다.’(《맹자》)고 한 말은, 모두 이 점을 말한 것에 다름없다 운운. 주자의 설(性ㆍ本ㆍ內ㆍ體……)이 정(靜)의 주장인 것은 주자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지만, 그것은 이와 같은 내용이다.
傳 제 8 장
이 장은 수신ㆍ제가ㆍ, 특히 제가의 근본으로서의 수신을 풀이한다.
所謂齊其家在修其身者는 人之其所親愛而辟焉하며 之其所賤惡而辟焉하며 之其所畏敬而辟焉하며 之其所哀矜而辟焉하며 之其所敖惰而辟焉하나니 故로 好而知其惡하며 惡而知其美者는 天下鮮矣니라.
【解釋】이른바 그 집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 그 몸을 닦는 데 있다는 것은, 사람이 그 친애하는 바에 편벽되고, 그 천오(賤惡)하는 바에 편벽되고, 그 외경하는 바에 편벽되고, 그 애긍하는 바에 편벽되고, 그 오타하는 바에 편벽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 악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천하에 적다.(제1절)
【解說】사람이란 것은 모든 사람의 뜻. <지(之)>는 여기서는 <어(於)>와 같이 새긴다. <벽(辟)>은 벽(僻), 즉 편벽의 뜻. 여기 말한 친애ㆍ천오ㆍ외경ㆍ애긍ㆍ오타의 다섯 가지에는 원래 당연한 법칙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그 대상에 이끌리는 대로 되어 음미를 더하는 일이 없으면, 반드시 중용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결과에 빠지게 되고, 몸이 닦아지지 않게 된다. 즉 이 장의 뜻은, 경(經)의 ‘그 집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는다.’고 한, 즉 <수신>이란 것의 뜻을 설명한다.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그 친애하는 대상,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대상,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대상, 슬퍼하고 가엾어하는 대상, 거만을 피우고 업신여기는 대상, 그런 것에 있어서 반드시 편애(偏愛)와 편증(偏憎) 같은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경우라도 동시에 그 대상의 좋지 못한 면까지도 냉정히 인식하고, 어떤 대상을 미워할 경우도 동시에 그 대상의 아름다운 점까지도 냉정히 인식할 일이다. 그같은 사람은 천하에 참으로 드물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에만 빠지지 말고, 어디까지나 이성적으로 그때그때의 경우에 있어서 <당연의 법칙>을 찾게 되면, 거기에 수신의 근본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친애ㆍ천오ㆍ외경ㆍ애긍 이 네 가지는 사람의 마음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지만, 다만 한 가지 <오타>만은 좋지 못한 악덕이다. 그런데 마음에 본래적으로 이 같은 법칙(당연의 법칙)이 내재(內在)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혹문》은 이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오타가 나쁜 덕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미리부터 거만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어, 지금 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되는 대로 마구 거만을 피우기 때문이다. 거만한 태도를 가져야 할 사람에 대해 거만한 태도를 갖는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심리에 속하는 것으로 이치에 당연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친한 정도, 서로 아는 정도도 <친하고 사랑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 지위도 덕도 <두려워하고 공경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의 빈궁도 <가엾어 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 악도 <천하게> 여길 정도는 아니다. 즉 그 말에는 찬성과 반대를 표명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것도 없고, 그 행위에는 비판을 가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것도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에 대해, 단순히 길 가는 사람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語類》에 말하는 오타라는 것은 그러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관심한 일로서 악덕은 아니다.) 거기서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 저 공자가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를 불렀다.’(《論語》陽貨)는 것과, 맹자가 ‘책상(几)을 기대고 누웠다.’(《孟子》公孫丑下)는 것은 역시 상대방에게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만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쪽에 고의로 거만을 부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가볍게 오타가 곧 나쁜 덕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장의 취지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주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타하는 바가 있으면’ 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쓰고 있으나 그 뜻은 곧, 그런 점에 음미와 반성을 더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설령 오타가 당연할 경우라도, 감히 오타의 마음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없다.
故로 諺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하며 莫知其苗之碩이라 하니라
【解釋】그러므로 속담에 있어 말하기를 ‘사람이 그 자식의 악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곡식 큰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제2절)
【解說】여기서는 당시의 속담을 이용하여,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고, 이익을 탐하는 사람은 만족하는 일이 없다. 사랑하는 내 자식의 장점을 아는 사람이 적고, 자기 밭 곡식이 다른 사람 곡식보다 더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싫어할 줄 모르는 욕심으로는, 남의 곡식만이 크고 탐스럽게 생각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편파(偏跛)라고 하는 것에는 이러한 해독이 붙어있기 마련으로, 이렇게 되면 물론 집안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수신이란 것은 내용으로는 결국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에 다름없으나, 지금 제가의 근본으로서의 수신이 특히 공평이란 것을 중심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아마 그 배후에는 중국의 대가족제도라는 것이 있어, 거기에 있는 족장(族長) 혹은 가장의 덕으로서, 공평이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을 것이다.
此謂身不修면 不可以齊其家니라.
【解釋】이것이 이른바, 몸이 닦아지지 않으면 그로써 그 집을 가지런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제3절)
【解說】해설할 필요 없을 것이다.
傳 제 9 장
이 장은 제가와 치국을 풀이한다.
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는 其家不可敎而能敎人者無之니라 故로 君子는 不出家而成敎於國하나니 孝子는 所以事君也요. 弟者는 所以事長也요. 慈者는 所以事衆也니라.
【解釋】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집을 가르칠 수 없으면서 능히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집을 나오지 않으면서 가르침을 나라에 이룬다. 효도란 것은 그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공손이란 것은 그로써 어른을 섬기는 것이요, 사랑이란 것은 그로써 뭇사람을 부리는 것이다.(제1절)
【解說】몸이 닦아지지 않으면 집을 가르칠 수가 없다. 집을 가르친다. 교화한다 하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효도, 아우로서의 공순(恭順), 아비로서의 사랑, 그것은 자기 몸을 닦는 덕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닦아 몸에 지니게 되면 (가장으로서) 한 집안까지도 감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닦는 것이 곧 가르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온 집안에 그러한 덕을 가르치고, 교화할 정도의 사람이어야만 비로소 한 집을 넘어서서 세상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군자가 실천하는 부모에 대한 효도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효도의 모범이 되는 것은 물론, 다시 이를 미루어 임금에 대한 도덕(충성)이 된다. 형을 섬기는 공순은, 이를 미루어 넓히면 일반적으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덕이 된다. 아비의 자식에 대한 덕인 사랑은, 일반 백성들을 부리는 인애(仁愛)의 덕이 된다. 백성들이 다 교화를 입어 도덕적으로 자각하게 되면, 즉 백성이 새로워지게 되면, 그것이 곧 다스려지는 것이 된다. 이것이 ‘군자가 집을 나가지 않아서 가르침을 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집이 위로 가지런해지면 가르침이 아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군자가 독공(篤恭)하면 천하가 고르게 된다.’(《중용》제33장). ‘사람 각자가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하여 천하가 평하게 된다.’(《맹자》離婁上) 천하태평이란 것은 결국 군자들 사이에 각각 제가가 실현되는 것과 다름없다. 중국의 교육 칙서로 불리는 명나라 태조나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성유(聖諭)도 효제(孝悌)와 향당(鄕黨)의 도덕을 강조했을 뿐, 천자나 국가에 대한 충성은 전혀 언급이 없다.
康誥曰 如保赤子라 하니 心誠求之면 雖不中이나 不遠矣리니 未有學養子而後嫁者也니라.
【解釋】강고에 말하기를 ‘적자(赤子)를 보호하듯 한다.’고 했다. 마음에 정성으로 구하면, 비록 맞지 않아도 멀지는 않은 것이니, 자식 기르는 것을 배운 뒤에 시집가는 사람은 있지 않다.(제2절)
【解說】이 1절은, 앞 절 마지막의 ‘사랑이란 것은 그로써 뭇사람을 부리는 것이다.’란 것을 풀이한다. 즉 인간 대중을 부리고 통치하는, 본질론적으로 말하면 가르침을 세우고 인민에게 도를 가르쳐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는 것의 근본은,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보호하여 기르며 사랑한다고 하는 가정에 있어서의 자연적인 실천을 실마리로 하여 그것을 미루어 넓히고, 전진 확대시켜 나가면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즉 <사랑>을 한 예로 하여, 이 장 전체의 주제인 <집의 도덕→나라의 도덕>을 말하는 것도 되는 것이다. 미리 아이를 낳고 기르는 방법을 배우고 나서 시집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의 양육이나 교화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 정자가 말한 것처럼, 갓난아이는 그가 생각하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오게 되면, 갓난아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찾아, 비록 적중시키지 못한 경우라도 전혀 거리가 먼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없다. 배우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백성은 갓난아이처럼 생각하는 것을 말할 능력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백성을 부리는 사람으로서 그들 마음을 잘못 파악하는 일이 가끔 있는 것은, 원래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한데서, 아무래도 통찰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여 앞 절의 ‘사랑은 그로써 뭇사람을 부리는 것이다.’를 설명했다. 뭇사람을 부리는 길은 어머니의 갓난아이에 대한 사랑을 단서로 하여, 그것을 미루어 넓혀 가면 된다. 어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밖으로부터 와서 녹여 붓는 것.’(《맹자》告子上)이 아니고, 의도적인 작위를 기다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임금을 섬기는 효도, 어른을 섬기는 공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一家仁이면 一國興仁하고 一家讓이면 一國興讓하며 一人貪戾하면 一國作亂하나니 其機如此하니라. 此謂一言僨事며 一人定國이니라.
【解釋】한 집이 인(仁)하면, 한 나라가 인에 일어나고, 한 집이 사양하면, 한 나라가 사양에 일어나고, 한 사람이 탐려(貪戾)하면 한 나라가 난을 짓는다. 그 기틀이 이와 같다. 이것을 일러 ‘한 말(言)이 일을 깨뜨리고, 한 사람이 나라를 정한다.’고 한다.(제3절)
【解說】이 한 대목은, 앞의 한 대목이 가르침을 세우는 근본을 설명한 것에 대해, 가르침이 한 나라에 완성된(혹은 완성되지 않은) 경우의 효과를 말한 것이다. 집을 잘 가르친 결과, 한 집에 인(仁)의 도(道)가 실현되도록 하면 나라 전체가 인에 분발하여, 인의 도가 왕성하게 일어난다.(興에 대해서는 제10장 참조.) 한 집에 서로 겸양하는 덕이 실현되게 되면, 나라 전체가 이 겸양의 덕을 따라 배워 겸양하는 덕이 왕성하게 일어나게 된다. 거꾸로 만일 오직 한 사람(임금)이 탐려, 즉 탐욕스러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면(온 나라가 따라 탐욕스러워지고 도리에 어긋나게 되어) 난을 일으키게 된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도, 어지러워지는 것도, 그것이 발동하게 되는 계기와 상관관계는 이런 것이다. 주에 기(機)는 발동이 붙어 오는 바라고 했다.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발동해 오는 것, 결국 태엽을 감아주면 시계 전체가 돌아가고, 톱니바퀴가 잘못되면 기계 전체가 못쓰게 되는 것과 같은, 작은 원인의 계기가 전체의 기능을 발휘토록 하기도 하고 마비시키기도 하는 그런 장치를 말한다. ‘(군자의) 단 한마디가 국가의 큰 일을 실패로 돌아가게도 하고, 군자 단 한 사람이 국가를 안정시키기도 한다.’고 한 말(아마 속담)은 위에서 이른 것을 말한 것에 다름없다.
분(僨)은 못쓰게 만드는 것. <인(仁)>과 <양(讓)>의 경우는 집 전체로서 말하고, 탐려(貪戾)의 경우에는 한 사람을 가지고 말한 것은 선은 반드시 쌓고 쌓은 뒤에 비로소 완성되는 것인데 대해, 악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옛 사람은 그 점을 깊이 훈계한 것이다.
한편 위에서부터 내려오며, 천자 혹은 나라 임금으로 풀이하면 아주 수월하게 내려가는 경우에도, 천자니 임금이니 분명히 말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군자(君子) 전체에 관한 것처럼 주석하는 것이 주자의 태도였는데, 이 절의 ‘한 사람이 탐려하면’의 한 사람에 대해서는 결국 ‘임금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堯舜帥天下以仁하신대 而民從之하고 桀紂帥天下以暴한대 而民從之니라. 其所令이 反其所好면 而民不從이니라 是故로 君子는 有諸己 而後求諸人하며 無諸己 而後非諸人하니라. 所臧乎身不恕나 而能喩諸人者는 未之有也니라.
【解釋】요순이 천하를 거느리기를 인으로써 하나 백성이 따르고 걸주가 천하를 거느리기를 포(暴)로써 하니 백성이 따랐다. 그 시키는 바가 그 좋아하는 바에 반(反)하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내게 있은 뒤에 사람에게 구하고, 내게 없은 뒤에 사람을 그르다 한다. 몸에 지닌 바가 서(恕)가 아니면, 능히 사람을 깨우칠 사람이 없다.(제4절)
【解說】이 1절도 앞 절 끝의 ‘한 사람이 나라를 정한다.’고 한 것을 이어받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 선을 가지고 있은 다음에 비로소 사람에게 선을 하라고 권할 수 있고, 자기 자신 악이 없은 다음에 비로소 남의 악을 바로잡을 수 있다. 어느 경우도 자신을 미루어 사람에게 미치는 것, 즉 서(恕)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하고, 군자의 명령이 자신이 평소에 뜻하는 바와 상반되어 있으면, 즉 평소에 악한 짓만을 즐겨 행하면서 백성들에게 선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그 같은 명령에 백성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요ㆍ순이 천하에 솔선해서 어진 일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따라서 어진 일을 실천했다. 이것에 반해, 하(夏)나라 걸(桀)임금이나 은(殷)나라의 주(紂)임금과 같은 포학한 천자는 천하에 솔선해서 포학한 짓을 실천했기 때문에 백성들도 따라서 포학한 짓을 했다. 결국 걸과 주의 경우는, 그의 행정명령이 그가 평소에 좋아하는 포학과는 서로 틀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 같은 행정명령에 따르지 않고 포학한 짓을 즐겨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이 먼저 행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그것을 남에게 하라고 요구하고, 무엇인가를 극복하여 그 자신 그런 일이 없은 뒤라야 비로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을 나무라게 된다.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서(恕)가 아니면’ 하는 말은 나 자신을 미루어 남을 알고 남을 대하는 덕을 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하는 뜻이다. 즉 그 같은 덕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남을 깨우쳐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선에 따라야 하고 악을 물리쳐야 할 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줄 힘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유(喩)는 효(曉), 즉 깨우쳐 준다, 알게 한다는 뜻이다.
물론 ‘내게 있은 뒤에 사람에게 구하고, 내게 없은 뒤에 사람을 그르다 한다.’고 하는 것을, 윗사람의 행동을 아랫사람이 본뜨게 되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이 장 전체의 문맥대로 읽지 않았고, <구한다> <그르다 한다>에 힘을 주어, 권고하고 격려하고 감독한 뒤에 비로소 아랫사람은 화(化)하게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되며, 그리고 또, 자기가 수양을 끝낸 즉시 사람들도 다 자기처럼 되라고 요구하거나, 자기가 겨우 어떤 결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해서 남들도 다 그런 결점에서 벗어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내가 아직 선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남에게도 선을 바라지 않고, 내가 아직 악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남의 악을 비난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곧 서(恕), 즉 ‘몸을 마칠 때까지 행할 수 있는’(《논어》衛靈公) 그 <서>란 것이 될 수 있을까. 서(恕)란 글자는 <마음과 같이 한다(如心)>는 뜻, 즉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남을 다스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결코 그때그때마다 임시로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궁리(窮理)에 의해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사랑하는(治己愛人) 지반을 바른 상태에 두고, 그런 다음에 비로소 서(恕)-남에게 미루어 미치는 것-를 논할 단계에 이른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대학》전에도 맨 끝의 제9, 제10의 두 장에 이르러 비로소 <서>에 언급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의 실천적 순위(順位)의 높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사람을 다스리라고 하는 이 장에서도 결국 자신을 다스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근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다름없다. 대개 능히 자신을 다스리는데 노력하게 되면, 해시계 기둥이 반듯하게 서 있으면 그것이 던지는 그림자도 바르고,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깨끗해지는 도리와 같이,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다스리는 도도 완전히 다해지게 되는 것이다. <몸을 마치도록> 끊임없이 힘쓰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지금 그것과는 반대로, 자기의 착하지 못한 몸을 곧장 표준으로 삼아 당연히 자기가 다스리고 가르쳐야 할 일을 등한히 취급하고, 타이르고 깨우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하 사람들을 모두 자기와 똑같이 착하지 못하게 만들고 똑같이 타락시키려 하는 것이 된다. 이같은 것은 천하를 크게 어지럽게 하는 길로서, 이른바 ‘몸을 마치도록 행할’ <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범중엄(范仲淹)의 아들 범순인(范純仁, 두 사람 다 北宋의 名臣)의 말에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남을 꾸짖을 때만은 총명하고,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용서할 때는 어둡고 어리석다. 진실로 사람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반드시 성인이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독후(篤厚)에 가까운 말이라 할 수 있으며, 세상에서도 이 말을 칭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서>라는 말은 원래 ‘남에게 대하기를 자신의 마음처럼 대한다.’는 뜻이다. 밖으로 남을 향해 밀고 가는 것으로, 안으로 향해 거두어들이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이 되지만 자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그 점, 張橫渠의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나를 꾸짖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한다.’는 말이 훨씬 낫다) 지금 자신을 용서할 때는 어둡고 어리석다고 말한 것은 그 점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어둡고 어리석음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남도 어디까지나 자기처럼 어둡고 어리석게 만들려고 하는 것에 다름없다. 이러한 방법으로 성현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틀린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 말이 단순히 자신의 마음을 뒤집어 (방향을 거꾸로 해서) 남에게 미루어 미치게 한다는 것이라면, 다음 제10장의 ‘사람을 사랑한다.’(제15절)는 곳의 해설로 쓰일 수는 없겠지만, 이 장처럼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취지로 하는 대목, 및《중용》의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제13장 제2절)는 설과는 맞지 않는다. <서>라는 말은 같지만, 하나는 사람에게 미친다는 점에 중점이 있고, 하나는 자기를 다스리는 점에 중점이 있다. 이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야말로, 학문하는 사람이 깊이 통찰하고 변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확실히 어진 임금이었다. 그런데 죄도 없는 아내 곽황후(郭皇后)를 폐하고 말았다. 그때 유학(儒學)하는 신하 질운(郅惲)은 대의(大義)를 역설하여 광무제의 잘못을 건지려 하지는 못하고, 공연히 먼 말로 돌려서 달랬을 뿐이었다.(《後漢書》列傳 제19) 광무제는 이 질운의 말을 “자신을 잘 서(恕)하여 임금을 헤아린다.(善恕己量主)”고 말했는데, 결국 이른바 ‘3년 복은 제대로 입지 않은 주제에 석 달 복이나 다섯달 복은 알뜰히 따지고, 밥을 흩고 국을 흘려 마시면서 마른 고기 물어뜯는 것을 나무란다.’(《맹자》盡心上)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질운은 신하 된 사람으로 어려운 것을 책(責)하고 착한 것을 말하는 도리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임금을 해친다고 하는 죄악의 선례(先例)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자라도 그 뜻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이런 화(禍)가 되기도 한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상《或問》)
故로 治國在齊其家니라.
【解釋】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그 집을 가지런히 하는데 있다.(제5절)
【解說】위에 있는 몇 절을 끝맺음한 것이다.
詩云桃之夭夭여 其葉蓁蓁이로다. 之子于歸여 宜其家人이라 하니 宜其家人而后에 可以敎國人이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복숭아의 요요(夭夭)함이여, 그 잎이 진진(蓁蓁)하도다. 이 사람이 시집가면, 그 집 사람에게 잘 하리라.’했다. 그 집 사람을 좋게 한 뒤라야 나라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제6절)
【解說】시는《시경》주남(周南) 도요(桃夭)편이다. 요요(夭夭)는 젊고 아름다운 모양. 진진(蓁蓁)이란 것은 아름답고 무성한 모양. 지자(之子)라는 것은《시경》에만 특별히 쓰인 말인데, 시자(是子), 즉 이 사람이 여자라는 뜻으로 시집가는 처녀를 가리킨 것이다. 귀(歸)란 것은 여자가 시집가는 것. 의(宜)는 선(善)과 같은 뜻.
이 시도 ‘흥(興)으로 싱싱한 복숭아나무, 번들번들하고 무성한 그 잎’이라는 눈앞에 보이는 경치에서 연상을 일으켜, 여기 지금 시집가는 이 아가씨를 노래하여, 그녀가 시집을 가게 되면, 시집 식구들과 원만히 지내게 되리라고 축복을 보낸 것이다. 전을 지은 사람은 ‘그 집 사람에게 잘한다.’는 한 글귀를 끌어다가, 그 집 사람과 원만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만 비로소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다는 논지의 받침으로 삼은 것이다.
詩云 宜兄宜弟라하니 宜兄宜弟이후에 可以敎國人이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형에게 잘하고 아우에게 잘한다.’고 했다. 형에게 잘하고 아우에게 잘한 뒤에라야, 그로써 나라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제7절)
【解說】시는《시경》소아(小雅) 육소(蓼蕭)의 시다. ‘아우는 형과 사이좋게 지내고, 형은 아우와 사이좋게 지낸다.’ 이리하여 집이 가지런히 되어야만 나아가 나라 사람들을 교화시킬 수가 있다.
詩云 其儀不惑이니 正是四國이라 하니 其爲父子兄弟族法而后에 民法之也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그 의(儀)가 어긋나지 않은지라, 이 사국(四國)을 바르게 한다.’고 했다. 그 부자와 형제가 족히 본받음직한 뒤에야 백성이 본받는다.(제8절)
【解說】시는《시경》조풍(曹風) 시구(鳲鳩)편이다. ‘그 의가 어긋나지 않다.’는 것은 군자의 위의(威儀)가 법칙에 벗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야만 될 법칙에 맞는다는 뜻이다. 특(忒)은 차(差)와 같다고 했다. 군자 자신의 행동거지와 예의범절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어야, 그 자신이 본보기가 되어 사방의 나라들을 바로잡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국(四國)은 사방의 모든 나라들을 뜻한다.《시경》에 있는 이 시를 인용하여, 군자 자신의 가정이 부자의 관계에 있어서나 형제의 관계에 있어서나 모두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있어야만 자연 온 국민들이 따라 자기 가정에서 착한 아버지 착한 아들 우애있는 형제가 되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온 나라가 제대로 잘 다스려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此謂治國 在齊其家니라.
【解釋】이를 일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그 집을 가지런히 하는 데 있다고 한다.(제9절)
【解說】<이>라는 것은 위에 인용한 세 시를 말한다. 그것들은 모두 그 앞의 제5절의 뜻과 내용을 노래한 것으로 인용된 것인데, 그것에 대한 매듭으로 ‘이를 일러 …….’라고 하는 여덟 글자를 둔 것이다.
한편 이 장에서, 후반에 시를 셋이나 인용한 것은 벌써 그 앞에서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그 집을 가지런히 하는 데 있다.’는 말로 일단 매듭을 지은 뒤이므로 다소 중복되는 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중복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의 저술 체제로서, 어떤 주장을 한 뒤에 반드시《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매듭을 지은 것이다.(《烈女傳》이 그 두드러진 例다.) 그것은 원래 시란 것은, 단순한 말 이상으로 차탄(嗟嘆)하고 영가(詠歌)하는 것, 즉 지혜로서 천착(穿鑿)하는 성질의 것이기 보다는, 우유염옥(優遊厭飫), 즉 마음 편히 그 경지에 머물러 그 정서를 싫도록 즐기는 성질의 것,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작용을 갖는 것으로, 인용하는 것도 그 점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단순히 시의 글귀를 가져다가 자기 말을 증명하기 위해 쓰는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실 이전의 제9장에서 논하고 있는 제가치국은, 문장이나 취지나 제5절까지로 일단 완결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시 세수를 인용한 것은 조금도 거기에 새로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되풀이해 읽으며 음미를 하게 되면 그 뜻은 깊고 길고, 이치는 더욱 훤하여, 읽는 사람의 심정을 시의 철리(哲理)와 완전히 융합시키고 말아, 차탄, 영가뿐만 아니라, 절로 손이 쳐들어지고 발이 굴러지는 것을 모른다는, 문학적 도덕적 황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수시》의 大序에 있는 말이 인용되고 있다.) 시의 인용이란 것은 이같은 효과를 갖는다. 단순히 여기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시를 인용하고 있는 모든 경우는 다 이런 식으로 보아 가면, 인용한 사람의 사상도 알 수 있고 시의 효용도 알 수 있을 것이다.(《惑問》)
한편 이 세 시는 그저 아무렇게나 벌여놓은 것은 아니다. 맨 처음의 시가 집 사람에 대해 말하고, 다음 시는 형제에, 마지막에 사방 나라에 언급해 있는 것은, 결국《시경》대아(大雅) 사제(思齊)의 시에 말하는 ‘과처(寡妻)에 본받아 형제에 이르고, 그로써 가방(家邦)에 미친다.’는 뜻에 다름없는 것이다.
傳 제 10 장
마침내 마지막 장이다. 치국ㆍ평천하를 풀이한다. 백성들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같이 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일이 없도록 힘쓴다는 것이 대체의 취지인데, 결국 <혈구(絜矩)의 도>를 미루어 넓히는 것에 다름없다. 능히 그것에 성공하면, 어진 사람을 친하게 여기고 이익을 즐기며, 각각 다 그 곳을 얻어, 천하가 평하게 될 것이다. 이 장의 특징은 혈구의 도를 <재용론(財用論)>, 즉 경제론에까지 전개시켜 논하고 있는 점으로, 그 점에서는 유교 경전 중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는 上老老而民興孝하며 上長長而民興弟하며 上恤孤而民不倍니라 是以로 君子有絜矩之道也니라.
【解釋】이른바 천하를 평하게 하는 것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위가 늙은이를 늙은이로 하여 백성이 효도에 일어나고, 위가 어른을 어른으로 하여 백성이 공순에 일어나고, 위가 외로움을 불쌍히 하여 백성이 배반하지 않는다. 이로써 군자는 혈구(絜矩)의 도가 있다.(제1절)
【解說】늙은이를 늙은이로 한다는 것은,《맹자》양혜왕(梁惠王)편에 이르는 ‘내 늙은이를 늙은이로 하여’와 같은 말이다. 즉 내집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여 정성껏 섬긴다는 말이다. 백성이 효도에 일어난다고 하는 흥(興)은, 감동한 바 있어 흥기(興起)하는, 즉 제9장 제3절의 ‘한 나라가 인(仁)에 일어난다.’,《논어》태백(泰伯)편의 ‘시(詩)에 일어난다.’,《맹자》진심(盡心)편의 ‘호걸(豪傑)의 선비는 비록 문왕(文王)이 없어도 일어난다.’고 한 <흥>이다. 고(孤)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모든 외로운 사람을 대표해서 하나를 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배(倍)는《중용》제27장의 ‘윗사람이 교만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은 배반하지 않는다.(不倍)’고 한 배반, 즉 복종하지 않는 마음을 품는 것. 혈구(絜矩)의 구(矩)는 네모나게 하는 것. 즉 네모난 물건을 그리기 위한 도구, 즉 곡척(曲尺)을 말한다. 혈(絜)은 도(度), 즉 자로 재는 것. <혈구>라는 것은, 곡척을 대고 90도 직각으로 되어있나 없나 비뚤어지지는 않았나 하는 것을 재는 것이다. <혈구지도>는 <격물치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시《대학》의 교설로서 유명한 것이다. <혈구>의 혈이 잰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은,《장자》에 이른바 이것을 재(絜)면 백 아름(圍)(《장자》內篇), 가의(賈誼)의 ‘긴 것을 재고(度), 큰 것을 잰다.(絜)’고 한 <혈>로, 정현(鄭玄)이 이런 전례들을 무시하고, 설(挈) 즉 가지고 다닌다로 새긴 것은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선배의 설에 암시를 받아 잰다고 풀이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이 부분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자는 말한다. 대개 혈은 잰다는 뜻이고, 구는 곡척이다. 내 마음을 곡척으로 하여 남의 마음을 재고, 남이 싫어하는 것도 나의 그것에 다름이 없다. 꼭 일치한다는 것을 알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이 한 절의 의미는 늙은이를 늙은이로 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하고, 외로운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제가에 속한)세 가지 일에 있어선, 위에 선 사람이 행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본보는 민감함은, 형체를 따라 그림자가 생기고, 소리를 따라 울림 일어나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고 민감하다. 위에 있는 사람의 집이 다스려져 있어야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것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거기에서 사람의 마음이(위고 아래고) 보편적으로 똑같다는 것, 그리고 <얻지 못하는) 사람을 비록 천한 한 사람이라도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중용》에 있는 말)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사람의 마음이 똑같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자기의 마음을 비추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제가→치국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 널리 모든 사람에게 각각 그 분에 맞는 바람을 이루어 주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곡척으로 네모를 그린 것처럼 상하 사면이 다 곧고 각도가 달라 똑같이 바른 네모꼴로 된다. 그것이 바로 ‘천하가 평하게’되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앞 장에서 제가 치국의 도를 논했을 때 이미 효도ㆍ공순ㆍ사랑을 가지고 설명했다. 지금 이 장에서 치국ㆍ평천하의 도를 논함에 있어, 다시 한 번 그것(老老ㆍ長長ㆍ恤孤)을 들게 되는 것은 어째선가. 그것은 이 셋이 사람의 도리를 큰 끝(大端), 즉 단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누구의 마음에나 똑같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집→나라, 나라→천하라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의 도리는, 결국 이같은 것에 다름없다. 다만 앞 장은 오로지 내 마음을 미루어 미치게 하여 다른 사람이 그것에 동화되는 것을 주제로 했다. 이 장은 그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함으로써, 모든 사람에 있어서 똑같고, 그리고 그만둘 수 없는 사람 마음의 성격을 보여준 것인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군자는 단순히 교화하는 수단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다시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마음의 본질은 결국은 똑같다 하더라도 현실 문제로서는 지위에 귀천의 차별이 있고, 기품에는 현우의 차별을 면하기 어렵다. 적어도 위에 선 군자가 참다운 인식과 실천을 가지고 제창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리 본질에 있어서 군자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아래 있는 사람들이 감분 흥기하는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설령 다행이도 제창하는 사람이 있어 흥기했다 하더라도, 그 경우 역시 위에 있는 사람이 그의 마음을 통찰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그를 대우하는 방법을 그르치면(이상에 불타) 흥기했던 마음도 결국 만족을 주지 못하고, 거꾸로 불균형을 한탄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마음의 동일성의 통찰에서 혈구의 도란 것을 파악하여 모든 대우하는 방법을 세운다. 이리하여 인민들의 모처럼 흥기된 도의심을 어디까지나 남김없이 이루어 주는 것이라 하고, 다음 절에서, 혈구의 도를 행하는 방법을 말하려 한다. ‘능히 사람을 흥기시키는 것은 성인의 마음이다. 능히 사람의 흥기한 것을 이루는 것은 성인의 정사(政事)다.’(《語類》)
所惡於上으로 毋以使下하며 所惡於下로 毋以事上하며 所惡於前으로 毋以先後하며 所惡於後로 毋以從前하며 所惡於右로 毋以交於左하며 所惡於左로 毋以交於右니라. 此之謂絜矩之道也니라.
【解釋】위에 싫은 것은 그로써 아래에 쓰지 말고, 아래에 싫은 것은 그로써 위를 섬기지 말고, 앞에 싫은 것은 그로써 뒤에 먼저 하지 말고, 뒤에 싫은 것은 그로써 앞에 좇지 말고, 오른쪽에 싫은 것은 그로써 왼쪽에 사귀지 말고, 왼쪽에 싫은 것은 그로써 오른쪽에 사귀지 말라. 이것을 혈구의 도라 이른다.(제2절)
【解說】(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하는 일로(자기에게) 싫었던 일은, 그것으로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써서는 안 된다. 아랫사람이 내게 해서 싫었던 일은 그것을 가지고 웃사람을 섬겨서는 안 된다. 앞에 있는 사람이 내게 해서 싫은 일은, 그것을 가지고 뒤의 사람에게 내가 먼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뒤에 있는 사람이 내게 해서 싫은 일은 그것을 가지고 그대로 뒷사람에게 해서는 안 된다. 오른쪽 사람이 해서 싫었던 일을 왼쪽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 왼쪽 사람이 해서 싫었던 일은 그것을 오른쪽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곧<혈구의 도>인 것이다.
이 1절은, 혈구라는 두 글자를 다시 한 번 거듭해 해석한 것이다. 오(惡)는 싫은 것. 만일 웃사람이 내게 무례한 대우를 하는 것이 싫으면 그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같은 무례한 방법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않는다. 또 아랫사람으로부터 불충(不忠)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마음으로 웃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같은 불충으로 웃사람을 감히 섬기지 않는 것이다. 전후 좌우 어느 곳에 대해서도 모두 그같이 하여,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 대해서도 하지 않는다.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다는 지경에까지 달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하 사면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 분수를 얻어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고,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지보(地步)의 길이와 넓이가 모두 균평하고 동일해서 (나와 같이) 정방형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혈구다. 물론 천자ㆍ제후ㆍ대부ㆍ사ㆍ서인이라는 신분의 한계가 있는 현실 사회에 있어서는, 자로 재는 것 같은 획일적인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렇다. 그러나 혈구의 도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위와 아래의 분한을 똑같이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섬기는 것을, 균평하게 하여, 위나 아래가 다 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에 다름없다.’(《語類》) 대체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때 마음을 가지는 법과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이런 곳에서부터 출발하기만 하면, 천지 사이에 어느 것 하나 그 곳을 얻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효도와 공순과 배반하지 않는 것을 실천하려 하는 사람은 모두 그 마음을 다할 수 있어, 불균평하다는 탄식은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고도 천하가 평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군자가 능히 이럴 수 있는 것은 결코 외면적이거나 작위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물이 이르고 지가 이르렀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의 마음과 뜻에 통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도 자기 한 사람의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며, ‘뜻이 정성되고 마음이 바르기’ 때문에 자기의 사사로움을 극복하여 내 한 사람의 마음을 천만 사람의 마음과 일치시키는데 성공한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거기에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이 말하자면 엷은 막이 되어 중간에 끼어, 안(내 마음)과 밖(모든 사람의 마음)이 서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혈구를 하려 해도 중간에 있는 막에 방해되어 통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저 조유(趙由)가 군수가 되어서는 도위(都尉-警察署長)를 업신여기고, 도위가 되어서는 군수를 업신여긴 것과(《史記》酷吏列傳), 왕숙(王肅-魏나라 學者)이 웃사람을 섬기는 데는 강직했으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첨받는 것을 좋아한 것은 바로 이점에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것을 하나하나 들기로 말하면, 걸주와 도척 같은 포학 무도한 행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결국 혈구의 도란 것은, 극히 집약적인 원칙이기는 하나 그 영향이 미치는 곳은 실로 넓어, 그야말로 천하를 평하게 하는 요도(要道)인 것이다. 이 제10장의 내용은 모두 이 사실을 원점으로 하고 있다.(《或問》《語類》)
한편, 여기서 당연히 생기는 의문은 <혈구의 도>와 <충서(忠恕)> 아니 <서(恕)>라는 한 글자는 같은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만 한 가지라고만 말해 둔다.(《중용》제13장 참조) 단 하나, <서>의 경우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풀과 나무가 무성한 것은 하늘과 땅의 서(恕)요, 하늘과 땅이 닫혀 어진 사람이 숨는 것은 하늘과 땅의 불서(不恕)’라고 말한 정자의 말이 있듯이, 넓은 의미의 해석도 색다른 것은 아니지만(淸나라 초기의 金聖嘆의《水滸傳》批評本 序에는 格物-忠恕는 문학론의 원리인 걸로 되어 있다.) <혈구의 도>에는 그와 같이 쓰여지는 일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을 지적해 둔다.
詩云 樂只君子여 民之父母라 하니 民之所好를 好之하며 民之所惡를 惡之니라. 此之謂民之父母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즐거운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했다. 백성의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의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는 이것을 일러 백성의 부모라 한다.(제3절)
【解說】시는《시경》소아(小雅) 남산유대(南山有臺)편이다. 낙지(樂只)의 지(只)는 아무 뜻이 없는 어조사(語助辭)다. 시의 뜻은, ‘즐겁게 보이는 저 군자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부모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결국 앞 절에서 말한 혈구의 도를 다하여, 백성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고, 백성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하여, 백성의 좋아하는 것은 자꾸자꾸 쌓아 그들에게 주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이것을 베풀지 않는다. 즉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게 되면, 백성들 쪽에서도 부모처럼 이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백성의 부모라는 것은《맹자》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 그것은 천자의 경우에도 지방 장관의 경우에도 말한다.
詩云 節彼南山이여 維石巖巖이로다. 赫赫師尹이여 民具爾瞻이라 하니 有國者不可以不愼이니 辟則爲天下僇矣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절(節)한 저 남산이여, 돌이 암암(巖巖)하도다 혁혁한 사윤(師尹)이여, 백성이 함께 너를 본다.’고 했다. 나라를 둔 사람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나니, 벽(辟)하면 곧 천하의 육(僇)이 된다.(제4절)
【解說】시는《시경》소아 절남산(節南山)편이다. 절(節)은 깎아질러 높이 솟은 모양, 암암(巖巖)은 돌이 쌓이고 쌓여있는 모양. 혁혁(赫赫)이란 것은, 위세가 당당한 모양. 사윤(師尹)은 주(周)나라 태사(太師)였던 윤씨(尹氏)를 말한다. 태사라는 것은 주나라 왕조의 가장 높은 벼슬인 삼공(三公)의 첫 자리다.벽(辟)은 벽(僻)으로 곧 편벽된 것. 육(僇)은 곧 육욕(戮辱)의 육(僇)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 시의 뜻은, ‘저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남산은 마치 돌을 쌓아올린 듯 우뚝해 있다.’하는 눈앞의 광경에서 예의 <흥>의 수법으로 주나라 왕조의 당시 최고 권력자인 태사 윤씨에게로 화제를 돌린다. 그 남산처럼 혁혁한 위세를 보여주고 있는 태사 윤씨여, 백성들은 모두 당신을 주목해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 시를 인용한 뜻은 나라를 가진 사람, 여기서는 아마 임금이나 천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백성들이 우러러보고 있는 임금은 특히 근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했다. 만일 <혈구>하는 것이 되지 않아 천자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함께하지 못하고, 편벽된 자기 한 개인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사로잡히게 되면, 내 몸은 죽게 되고 나라는 망하게 되어, 하(夏)나라 걸왕, 은(殷)나라 주왕, 주(周)나라 여왕(厲王), 유왕(幽王)처럼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육(僇)은《맹자》의 ‘부모의 육(戮)이 된다.’(離婁下)고 한 육(戮), 그 주자 주에 ‘육은 치욕(恥辱)이다.’라고 한 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질적으로는 살육(殺戮)의 육, 즉 쫓겨나거나 피살되는 것을 말한 것이리라. 또 나라와 천하는 단계적인 구별을 분명히 의식하고 쓰는 경우와, 실질적으로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본절과 다음 절은 같은 의미로 쓴 예다.
詩云 殷之未喪師엔 克配上帝러니 儀監于殷이어다. 峻命不易라 하였으니 道得衆則得國하고 失衆則失國이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은나라가 아직 무리를 잃지 않아서는 능히 상제에 배(配)했다. 마땅히 은나라에 볼지어다. 큰 명은 쉽지 않다.’고 했다. 뭇사람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뭇사람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 것을 말한 것이다.(제5절)
【解說】《시경》대아(大雅) 문왕(文王)편에 있는 시다. 사(師)는 무리(衆)의 뜻으로 곧 민중을 말한다. 배(配)는 대(對), 즉 서로 어울려 상대가 되는 것. 의(儀)는 의(宜)와 같이 쓰인 것, 즉 마땅히 해야 한다는 뜻. 준명(峻命)의 준(峻)은《시경》원문에는 준(駿)으로 되어있는데 결국 크다는 뜻이다. 시의 뜻은, 은나라가 아직 대중의 지지를 잃지 않고 있을 때는, 은나라 천자는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을 상대하는 제왕으로서의 덕을 지니고 있었다. 임금이나 천자가 된 사람은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로 삼을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은나라도 덕을 닦으며 스스로 반성하기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마침내 천자 자신은 죽음을 당하고 나라는 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명을 끝까지 지켜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인금이 밝은 덕의 마음을 계속 지니고 있어 잃지 않게 되면 <혈구(絜矩)>에 의해 백성들과 <욕망을 같이 하려는) 생각이 절로 마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백성은 그를 부모로서 사모하게 된다. 즉 인민 대중의 마음을 얻어 나라를 얻게 될 것이다. 은나라가 망한 것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문왕의 시를 인용하여 이같이 말한 것은, 위에서 남산유대와 절남산에서 인용한 두 절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을 매듭지어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편 아래 있는 제11절은 본절의 취지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是故로 君子는 先愼乎德이니라. 有德此有人이오 有人此有土요 有土此有財요 有財此有用이니라.
【解釋】이런 까닭에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간다. 덕이 있으면 이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이에 땅이 있고, 땅이 있으면 이에 재물이 있고, 재물이 있으면 이에 씀이 있다.(제6절)
【解說】먼저 덕을 삼가는 것은, 제4절의 ‘나라를 가진 사람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을 받아 ‘그 근신해야 할 첫째 것은 덕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덕은 이른바 밝은 덕, 그것을 삼간다는 것은 지금의 경우,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ㆍ수신ㆍ제가에 의해 삼가는 것이다.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앞 절에 이른바 뭇사람을 얻는 것. 즉 인민의 마음을 얻는 것. 땅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라를 얻는 것. 덕을 삼가면 민심이 그 사람에게 열복(悅服)되고, 민심이 열복되면 국토가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손에 잡히게 되고, 나라가 완전히 손에 잡히게 되면 물론 세금과 그 밖의 수입에 의해 나라 창고에 재물과 돈이 풍부해지고, 돈과 재물이 풍족하면 그것이 여러모로 쓰이게 되어, 이른바 이용 후생(利用厚生) (《書經》대우모(大禹謀))이 왕성하게 행해진다. 여기서 10절까지가 일련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혈구의 도에 입각한 재용론ㆍ경제론이 전개되는데, 그것에 대해《어류》에 다음과 같은 한 대목이 있다.
‘혈구의 뜻(義)이 어찌하여 다만 재리(財利)를 말하는가?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결국 사람은 재리에 관여하는 비율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고 기르는 것도, 죽이고 해치는 것도 이것이다. 오늘날 관청은 혈구를 하지 않는다. 자기가 술을 팔 생각으로 백성들이 파는 것을 금하고, 소금을 전매하려 하여 백성들이 파는 것을 금한다. 이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주자는 전매제도에 대해서는 항상 비판적이어서, 이 같은 말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德者는 本也요 財者는 末也니라.
【解釋】덕은 근본이며 재물은 끝이다.(제7절)
【解說】물론 앞 절의 ‘먼저 덕을 삼간다.’를 받고 있다. 유교적 경제론의 기초 정리(定理)다.
外本內末이면 爭民施奪이니라.
【解釋】근본을 밖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하면, 백성을 다투게 하여 앗는 것을 베푼다.
【解說】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끝이다. 그런데 임금이 근본인 덕을 외적인 것(2차적인 것)으로 알고, 끝인 재물을 내적인 것(1차적인 것)으로 알게 되면, 백성에 대해 가렴주구(物欲主義)를 일삼게 되고 나아가서는 물욕주의에 감화된 백성들로 하여금 재물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게 만든다. 왜냐하면, 재물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다같이 바라는 것인데, 혈구를 하지 못하고 자기만이 그것을 독점하려고 하게 되면, 백성들도 또 일어나 서로 다투고 앗고 하는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是故로 財聚則民散하고 財散則民聚니라.
【解釋】이런 까닭에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이 모인다.(제9절)
【解說】근본을 밖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하기 때문에 재물은 모인다. 백성을 다투게 만들고 앗는 일을 베풀기 때문에 백성은 흩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 반대의 일을 행하면, 덕을 간직하게 되고 백성들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是故로 言悖而出者는 亦悖而入하고 貨悖而入者는 亦悖而出하니라.
【解釋】이런 까닭에 말이 거슬러 나간 것은 또한 거슬러 들어오고, 재물이 거슬러 들어온 것은 또한 거슬러 나간다.(제10절)
【解說】패(悖)는 역(逆)이라고 했다. 즉 도리와 법칙에 위배되는 것. 말이 몸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입으로 나가고 귀로 들어오는 것), 그 말의 출입이라는 것으로 재물의 출입을 말했다. 위의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간다.’(제6절)에서부터 여기까지의 대목은 결국 재물을 예로 들어, 혈구를 실천하는 사람과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득실을 설명한 것이다.
이 한 대목이 재용에 지나치게 노력하게 되면 백성을 잃는다고 강조한 것은 어째서일까? 덕이 있고 사람이 있고 땅이 있으면, 재용의 결핍이라는 염려도 있을 수 없다. 다만 그 경우 근본과 끝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또 혈구의 마음이 없으면 반드시 백성을 다투게 만들고, 백성에게 겁탈이란 것을 가르치는 결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주역》계사전(繫辭傳)에 ‘무엇으로써 사람은 모으는가, 말하여 재물이라고 한다.’고 하고,《국어(國語)》에도 ‘남의 임금된 사람은 장차 이(利)를 인도하여 위와 아래에 펴려 하는 사람이다.’(周語上)라고 했다.
재물이 오로지 위에만 모이게 되면 아래 백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재물이 인민들 사이에 고루 흩어져 있게 되면 백성은 윗사람에게 심복하여 돌아오게 된다. 도리에 어긋난 말을 내뱉게 되면, 그 되받음으로 도리에 어긋난 말이 귀로 돌아오게 된다.(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우리 속담과 똑같은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리에 어긋나게 내 품에 들어온 재물은, 반드시 또 도리에 어긋나게 흘러나가고 만다.
정현(鄭玄)의 주에, ‘임금에게 거슬린 명령이 있으면 곧 백성에게 거슬린 말이 있고, 위가 이를 탐하면 아랫사람이 침반(侵叛)한다.’고 한 것은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다.(《或問》) 정현의 주의 뜻은, 임금이 도리에 어긋나는 행정명령을 내리게 되면, 백성들 쪽에서도 임금에 거슬리는 말을 하며 임금의 명령에 거역하게 된다. 윗사람이 되를 무시하고 이익만을 탐하게 되면 아랫사람도 위를 배반하고 위를 침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康誥曰 惟命不于常이라 하니 道善則得之하고 不善則失之矣니라.
【解釋】강고에 말하기를 ‘오직 명은 떳떳지 않다.’고 했다. 선하면 곧 얻고, 선하지 못하면 곧 잃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제11절)
【解說】시위에 문왕의 시를 인용하여 ‘뭇사람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뭇사람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고 말한(제5절)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풀이한 것이다. 천명 즉 하느님의 명령이란, 떳떳한 즉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덕을 근본으로 그것을 본받아 행동하면, 즉 착하면, 이른바 ‘덕이 있으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뭇사람을 얻을 수가 있다. 뭇사람을 얻는다는 것. 즉 백성들 마음이 내게로 돌아온다는 것은, 곧 천명을 얻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고, 그 반대는 천명을 잃는 것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명이 떳떳하지 않은 것은(천명을 잃는 일이 있는 것은), 그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만드는 것뿐이다.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문왕의 시를 인용한 부분의 취지를 이같이 알뜰히 되풀이한 것은, 그것이 천명이라는 중대한 주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천명이니 명이니 하는 것은, 중국 사상사에서는 옛날부터 논의되어 온 중대한 주제로서 주자도《어류》의 도처에서 언급하고 있다.
楚書曰 楚國無以爲寶요 惟善以爲寶라 하니라
【解釋】초서에 말하기를 ‘초나라 가지고 보배로 삼는 것이 없다. 오직 선만을 가지고 보배로 삼는다.’고 했다.(제12절)
【解說】《초서(楚書)》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이것에 해당되는 책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 초나라의 옛날 연대기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선>이라고 한 것은 선한 사람의 뜻이다. 금이니 옥이니 하는 것을 보배로 하지 않고, 착한 사람을 보배로 귀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은, 바로 앞 절에서 말한 것처럼 ‘선하면 곧 얻게’되기 때문이다.
舅犯曰 亡人無以爲寶요 仁親以爲寶라 하니라
【解釋】구범이 말하기를 ‘망인(亡人)은 가지고 보배로 삼을 것이 없고, 어버이를 인(仁)하는 것을 가지고 보배로 삼는다.’고 했다.(제13절)
【解說】구범(舅犯)이란 것은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외삼촌 자범(子犯)을 말한다. 구(舅)는 외삼촌이란 말이고 범(犯)은 자범(子犯)의 자(字)를 약한 것이다. 자범은 호언(狐偃)의 자(字)다. 망인(亡人)은 도망간 사람, 즉 망명한 사람이란 뜻으로 곧 진나라 문공을 가리킨다. 문공은 아버지 헌공(獻公)의 사랑하는 여희(驪姬)의 참소를 만나 외국에 망명해 있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문공이 망명해 있는 곳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도와 본국에 돌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해 줄 뜻을 비추었으나 구범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같은 말로 간곡히 거절하게 했던 것이다. 망명한 사람에게 있어 귀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만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된다고 한 것이다. 인(仁)을 어질게 한다는 뜻으로 효도란 뜻, 즉 사랑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어버이를 사랑한다. 효도한다고 말한 것은, 문공이 망명해 있던 중 아버지 헌공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중에 군사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불효가 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예기》단궁(檀弓)편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제12, 제13의 두 절은 결국 근본을 밖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이다.
秦誓曰 若有一个臣이 斷斷兮無他技나 其心休休焉이면 其如有容焉이라. 人之有技를 若己有之하며 人之彦聖을 其心好之하야 不啻若自其口出이면 寔能容之니 以能保我子孫黎民이면 尙亦有利哉인저. 人之有技를 媢嫉以惡之하며 人之彦聖을 而違之俾不通하면 寔不能容이니 以不能保我子孫黎民하며 亦曰殆哉인저.
【解釋】진서에 말하기를 “만일 한 사람의 신하가 있어, 단단(斷斷)하여 다른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휴휴(休休)한지라, 그 받아들임이 있을 것 같다. 남의 재주 있는 것을 내가 가질 것같이 하며, 남의 언성(彦聖)을, 그 마음에 좋아하는 것이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을 뿐만 아닌지라, 참으로 능히 받아들여 그로써 우리 자손과 여민(黎民)을 보존한 것이니, 오히려 또한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남의 재주 있는 것을 시기하여 그로써 미워하고, 남의 언성을 어기어 그로 하여금 통하지 못하게 하면, 참으로 능히 받아들일 수 없는지라, 그로써 능히 우리 자손과 여민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니, 또한 위태롭다 말하겠다.”라고 했다.(제14절)
【解說】진서(秦書)는《서경》주서(周書) 맨 마지막 편이다. 이 제14절은, 전체가 진서의 인용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한 사람의 신하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람은 단단해서(斷斷은 참되고 한결같은 모양) 그 밖에 아무 남다른 재주는 없지만, 그 마음은 휴휴해서 (休休는 솔직해서 착한 것을 좋아하는 모양) 다른 사람의 착한 것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특별한 재주가 있으면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이 그 특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시기하는 기색도 없이 당장 그것을 받아들여 쓰게 된다. 다른 사람의 언성(彦은 훌륭한 것, 聖은 通明한 것)을 보았을 때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말로 칭찬하는 것 이상으로 좋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그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아가서는 내 자손과 인민 대중을 잘 보전해 나가게 된다. 틀림없이 임금과 백성을 위해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남에게 어떤 특기가 있을 경우에는 이를 시기하고 미워하며, 훌륭하고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훌륭하고 뛰어난 점을 방해하여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남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는 우리 자손이나 인민 대중을 보전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니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 현재 쓰이고 있는《서경》원문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으나 새삼 지적해 말할 것 까지는 없다. 한편 여기서 제17절까지가 한데 붙은 것이다.
唯仁人放流之하야 迸諸四夷하야 不與同中國이니라. 此謂唯仁人爲能愛人이요 能惡人이니라.
【解釋】오직 어진 사람만이 방류(放流)하여, 사이(四夷)에 물리쳐, 더불어 중국에 같이 있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일러 오직 어진 사람만이 능히 사람을 사랑하고,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고 한다.(제15절)
【解說】방(放)과 유(流)는 다같이 먼 곳으로 추방하는 것을 말한다. 병(迸)은 병(屛)과 같은 뜻으로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에는 쫓는다(逐)와 같다고 했다. 결국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인간이 있어, 착한 사람을 방해하고, 나라에 손해를 주게 될 경우, 어진 사람은 그것을 깊이 미워하여 단호히 끊어 통하지 못하게 한다. 그 같은 사람을 내쫓아 멀리 귀양을 보내고, 중국 밖으로 내몰아 중국에서 같은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한다. 어진 사람만이 제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또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어진 사람, 즉 유교에서 가장 높은 덕으로 불리는 인(仁)을 체득한 사람, 다시없이 공평무사하기 때문에 이같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중정(中正)을 얻을 수가 있어, 단호한 행위가 필요할 때는 능히 그 같은 행위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어진 사람이 시기하는 사람을 이토록 미워하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 너무 심하면 어지러워진다.’(《논어》泰伯)고 한 것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이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물론 소인들이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오직 시기하는 한 가지 일만이 미워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어진 사람이 특히 이 점을 이토록 깊이 미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착한 사람을 방해하고, 또 백성들로 하여금착한 사람의 은택을 입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즉 그 해독이 훨씬 후세에까지 끝없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 죽인 강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형에까지 처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쫓아 귀양을 보내는데 그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깊이 생각해보면, 지역은 비록 다르더라도, 인민들의 싫어하고 좋아하는 감정에는 다를 것이 없다. 지금 이 악한 사람을 추방하므로 이쪽은 해를 면하게 되었다 치더라도, 그들이 쫓겨가 있는 지역 백성들은 아무 죄도 없이 이 악한 사람의 해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 어진 사람은, 반드시 멀리 사람 없는 곳에 있게 하고, 이매요괴(魑魅妖怪)를 막도록 하여, 겨우 낙착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단순히 착한 사람을 보전하여 해를 입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 나쁜 사람을 탄압 굴복시켜 그 악을 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상의 선악에 의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서로 틀리기는 하지만, <인(仁)>을 하는 참뜻은 어디까지나 거기에 관철되어 있는 것이다. 난(亂)을 막는 조치는 완벽해서, 난을 불러일으킬 염려는 없다.(亂은 위에 말한《논어》의 亂), 어진 사람에 있어서는 사사로운 욕심 같은 것이 싹트는 일이 없고, 천하의 <공(公)>, 즉 최대한의 세계적인 공을 자기 속에 완전히 갖추고 있다. 공정하기 때문에 옳고 그른 판단에 있어서 틀림이 없고, 행동도 일에 따라 맞게 한다. 어진 사람만이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참으로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見賢而不能擧하며 擧而不能先은 命也요 見不善而不能退하며 退而不能遠은 過也니라.
【解釋】현(賢)을 보고도 능히 들지 못하고, 들어도 먼저 하지 못하는 것이 게으른 것이요, 불선을 보고도 능히 물리치지 못하고, 물리쳐도 능히 멀리 못하는 것이 허물이다.(제16절)
【解說】정현은 명(命)은 만(慢)이 잘못 쓰여진 것이라고 하고, 정자는 태(怠)의 잘못이라고 했는데, 주자는 어느 쪽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만이나 태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다같이 <태만>이란 뜻이다. 주자는 정현의 <만>을 게으르다는 뜻이 아닌 거만하다는 뜻으로 본 것 같다. 어진 사람(賢)이 있어도 그를 들어 쓰지 못하고, 설령 쓴다 해도 즉시 들어 쓰지 못하는 것은(先은 早의 뜻) 태만한 것이다. 또 착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도 이를 물리쳐 벼슬을 그만두게 하지를 못하고, 설사 그만두게 한다 해도 멀리, 즉 완전히 관계를 끊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해 마땅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랑하고 미워해야 할 점, 즉 어느 것을 사랑하고 어느 것을 미워해야 하느냐 하는 점을 잘 알고 있으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도리, 즉 그 방법을 충분히 올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즉 군자이기는 하나 아직 인(仁)에까지는 달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好人之所惡하며 惡人之所好를 是謂拂人之性이니 菑必逮夫身이니라.
【解釋】사람의 미워하는 바를 좋아하고, 사람이 좋아하는 바를 미워하는, 이것을 일러 사람의 성품에 거스른다고 한다. 재앙이 반드시 몸에 미친다.(제17절)
【解說】불(拂)은 역(逆), 즉 거스른다는 뜻. 재(菑)는 재(災)의 옛날 글자.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그 본성에 거스른다는 것은, 어진 사람의 하는 일이 아니다. 어질지 못한 것이 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여기에서 사람의 미워하는 바, 사람의 좋아하는 바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미워하는 것, 다른 사람의 좋아하는 것이란 뜻이 아니고, 무릇 사람인 이상, 사람의 성품이 본래 요구하고 있는 미워하고 혹은 좋아하는 것으로 주자는 풀이한다. 그 경우, 사람이면서 사람의 본성에 역행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하면, 어질지 못한 사람은, 아부하여 당파적인 결탁을 하게 되고, 시기로 인해 미워하는 것 같은 일로부터 자기 마음을 빠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미워하는 점에 있어서는, 좋아해서는 안 될 것을 좋아하고, 미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미워하는 것 같은, 정상적인 인간의 성품에 거스르게 된다. 그리하여 ‘백성의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미워하는 바를 미워하는’ <백성의 부모>(제3절)와 정 반대의 사람이 되어 마침내는 재앙을 만나게 되고 천하의 육(僇)이 될 것이다. 그렇게 안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겨 혈구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절의 사람의 미워하는 바, 사람의 좋아하는 바라는 것을, 주자의 주는 앞에 말한 대로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으나,《혹문》에서는 ‘백성의 부모가 능히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 즉 본장 3절에 의하면 ‘백성의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의 미워하는 바를 미워하는 것.’ 결국 현실의 구체적인 인민이, 현실로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있고,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그것을 좋아하고 미워한다.) 뜻으로 풀이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이 주자가 해석을 고친 게 아니고 절로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백성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원래 인간인 이상 좋아해야 하고 미워해야 할 것이었던 것이다.
위 <진서(秦書)>의 인용(제14절)에서 여기까지는 모두 호(好)ㆍ오(惡)ㆍ공(公)ㆍ사(私)라는 것이 그 극한 상태에서 어떤 사태를 불러일으키느냐 하는 것을 거듭 말하고, 동시에 또 그 앞 남산유대의 시와 절남산의 시를 인용한 취지를 다시 설명한 것이다.
是故로 君子有大道하니 必忠信以得之하고 驕泰以失之하니라.
【解釋】이런 까닭에 군자에 큰 도가 있으니, 반드시 충신으로써 얻고, 교태로서 잃는다.(제18절)
【解說】군자라는 것은, 이 경우 지위를 가지고 말했다. 즉 덕이 있는 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 혹은 정치적인 위치와 지위로서 말한 것. 지배계급에 속한 신사. <큰 도(大道)>의 도(道)는, 그 지위에 있어서 자신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 술(術). 충(忠)은 자기를 드러내어 스스로 다하는 것, 신(信)은 사물에 좇아 어김이 없는 것, 교(驕)는 자랑하고 높은 체 하는 것, 태(泰)는 자기 멋대로 하는 것. 얻고 잃는다는 것은 위에 있는 <강고(康誥)>의 얻고 잃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을 얻고 잃는다는 뜻일 것이다. 군자의 큰 도란 것은, 충신에 의해 백성을 얻고, 교태에 의해 백성을 잃는다는 것이 큰 도의 내용이 될 것이다. 이 절은 위의 문왕의 시를 인용한 제5절 및 강고를 인용한 제11절을 바탕으로 말한 것이다. 즉 여기까지 세 번 얻고 잃는다는 말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 말은 거듭할수록 더욱 절실함을 더하여, 이 절에 와서는 천리(天理)가 존속하고 없어지는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충신이란 것은 자기 마음을 다하여 대상에 따르는 것, 즉 혈구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며, 교태라는 것은 욕망에 대한 억제가 없는 자기중심주의 즉 사람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같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生財有大道하니 生之者衆하고 食之者寡하며 爲之者疾하고 用之者舒하면 則財恒足矣니라.
【解釋】재물을 낳는데 큰 도가 있으니, 낳은 사람은 많고, 먹는 사람은 적으며, 하는 사람은 빠르고, 쓰는 사람은 천천히 하면, 곧 재물은 항상 넉넉하다.(제19절)
【解說】여대림(呂大臨-程子 및 張橫渠의 弟子, 朱子는 그의 說을 늘 존중하고 있다.) 이 대목을 해석한 말에 “나라에 노는 백성이 없으면 생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조정에 하는 일없이 놀고먹는 자리가 없으면 그만큼 먹는 사람이 적어진다. 농사철을 앗지 않으면 자연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만들고 하는 것이 빠르게 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게 되면, 쓰는 것은 자연 더디게 되어 언제나 여유가 있다.”고 했다. 결국 이 말은 위에 말한 ‘땅이 있으면 재물이 있다.’(제6절)는 것을 바탕으로 말한 것이다.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길은, 당연히 재용에 관한 문제가 되는데, 그 요점은 근본인 덕에 노력하여 쓰는 것을 존절히 하고 지출을 억제하는데 있다. 근본을 밖으로 하고, 끝은 안으로 해서 재물이 모이는 것이 아니란 것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끝까지는 모두 이 뜻을 설명한다.
위에는, 제9절 등에서 이미 재용이 오히려 백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데, 지금 또 재물을 낳는 도를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바로 ‘땅이 있으면 재물이 있다.’(제6절)는 것이다.《서경》홍범(洪範) 팔정(八政)에도 식(食)과 화(貨)가 맨 앞에 나와 있고 자공(子貢)이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은 역시 ‘먹는 것을 넉넉히 한다.’는 것을 첫째로 말하고 있다.(《논어》顔淵) 백성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성인이 가벼이 할 리가 없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다만 이익을 추구하여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백성들을 짜내어 자기 생활에 쓰게 되어, ‘거슬러 들어온 것은 거슬러 나간다.’는 재앙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를 심각하게 지적하여 경계를 보낸 것이다. 근본(德)을 숭상하고 쓰는 것을 절약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사람(임금)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근본 정책이다. 그것은 결코 아랫사람에게 후히 은혜를 베풀어주고, 백성의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 즉 재물을 무시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씨의 설은, 이 뜻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약(有若)은 말했다. ‘백성이 넉넉한 것은 곧 임금이 넉넉한 것이다.’(《논어》顔淵) 맹자가 ‘정사가 없으면 재용은 부족하다.’(《맹자》盡心)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물론 맹자가 말한 <정사(政事)>라는 것은 결코 후세의 정치처럼 나와 내 입과 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만족할 줄 모르는 착취를 멋대로 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다.
仁者는 以財發身하고 不仁者는 以身發財니라.
【解釋】어진 사람은 재물로써 몸을 발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몸으로써 재물을 발한다.(제20절)
【解說】발(發)이란 것은 이 경우 일으킨다(起)는 뜻이다. 어진 사람은 재물에 의해 몸을 일으킨다. 즉 재물을 흩어 그것으로 백성을 얻는다.(임금의 지위를 튼튼히 한다.)(제9절). 어질지 못한 사람은, 몸을 망쳐가며 재물을 불린다. 어진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자기 한 사람의 것이라 하여 독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재물을 흩어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그의 몸은 존경을 받아, 천자와 제후라는 높은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것과는 반대로 어질지 못한 사람은 오직 이익만을 탐하여 마침내는 화를 불러오고 목숨을 잃게 되는 것마저 돌보지 않고 재물만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다만 이 한 절은 일단 재물이란 것을 전제한 위에 그 효과를 논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진 사람이 실제로 재물을 가지고 몸을 일으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孟獻子曰 畜馬乘은 不察於鷄豚하고 伐氷之家는 不畜牛羊하고 百乘之家는 不畜聚歛之臣이니라. 如其有聚歛之臣인댄 寧有盜臣이라 하니라. 此謂國 不以利爲利요 以義爲利也니라.
【解釋】맹헌자가 말하기를 “마승(馬乘)을 기르면 닭과 돼지를 살피지 않고, 얼음을 저장했다가 쓰는 집은, 소와 양을 기르지 않고, 백승의 집은 거둬들이는 신하를 기르지 않는다. 그 거둬들이는 신하를 두는 것 보다는 차라리 도둑하는 신하를 두라”고 했다. 이것을 일러, 나라는 이를 가지고 이로 삼지 않고, 의를 가지고 이를 삼는다 한다.(제22절)
【解說】맹헌자는 노(魯)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공손멸(公孫蔑)로, 공자보다 조금 전 사람이다. 마승(馬乘)을 기른다는 것은, 사(士)의 계급에 있던 사람이 처음 대부에 취임한 것을 말한다. 대부에 취임하게 되면 수레를 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승(乘), 즉 수레를 끌기 위한 네 마리 말을 집에서 기르게 된다. 이렇게 대부의 지위에 오르게 되면, 닭이나 돼지를 길러 이익을 얻기 위해 일반 백성들과 다투는 일은 하지 않는다. 또 얼음을 저장했다가 쓰는 집, 즉 장례 때나 제사 때 얼음을 쓰게 되는 경(卿)과 대부 이상의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은 소나 양을 길러 백성들과 함께 이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또 백승(百乘)의 집, 즉 일조에 일이 생겼을 때는 전쟁에 쓰는 수레 백 대를 가지고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되는 집, 즉 백승을 낼 수 있는 영토를 임금으로부터 받고 있는 집(卿의 집), 그러한 집에서는 가신(家臣)을 두게 되는데, 그럴 경우 거둬들이는 신하, 즉 백성들로부터 세금이나 물품을 짜내기만 하려는 그런 신하를 두어서는 안 된다.
백성들을 착취하는 신하를 집에 둘 바엔 차라리 주인의 집 재물을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맹헌자는 말을 했다는데, 군자란 차라리 자기 자신의 재물을 도둑맞을지언정 백성들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에 있어서 이익이 되는 것은, 단순한 이익만이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의야말로 참다운 이익이 되는 것이다.
닭ㆍ돼지ㆍ소ㆍ양은 백성들이 길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이미 신하로서 임금의 녹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백성들의 세금에 의해 살고 있는 이상, 이제 백성들과 이를 다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하다. 노나라 명재상 공의휴(公儀休)가 내 집 밭 아욱을 뽑아버리고, 내 집 베 짜는 여자를 내보낸 것은,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백성들의 이익을 앗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였다.(《史記》循吏列傳). 한나라의 대학자인 동중서(董仲舒)가 ‘(하늘은) 엄니를 준 것으로부터는 뿔을 거둬들이고, 날개를 붙여 주었을 경우는 다리는 두 개만을 주는 데 그쳤다.’고 하는 비유의 이야기를 한 것도(《漢書》董仲舒傳), 역시 같은 의미로서, 모두 혈구의 원리에 의한 것과 다름이 없다. 거둬들이는 신하는 백성의 기름과 피를 짜내어 위에 바치는 것이므로 백성들은 그 해를 입는다. 도둑질하는 신하는 주인의 창고에서 훔쳐내어 자기 주머니에 넣게 되지만, 그 화는 아래로 미치는 것은 아니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지성(至誠)스럽고 인애(仁愛)하고 측달(惻怛)해서, 차라리 내 자신의 재물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한다. 거둬들이는 신하를 둘 바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라고 하는 것은 거기서부터 나온 것으로, 이것 또한 혈구의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니다. 옛날 공자는 장문중(臧文仲)이 첩에게 자리를 짜게 한 것을 (백성들과 이익을 다툰다고 해서) 어질지 못하다고 지적한 일이 있으며, 또 제자 염구(冉求)가 계씨(季氏)를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거둬들인 것을 노여워하여, 북을 울려 그를 꾸짖도록 한 일이 있다.(《논어》先進) 도량이 넓고 커서 포용력이 있고, 온량(溫良)하고 박애(博愛)한 성인으로서도, 장문중과 염구 두 사람을 조금도 사정 두지 않고 심각 통절하게 꾸짖고 있는 것을 보면, 성인의 생각은 분명하다.
‘나라는 이로써 이를 삼지 않고, 의로써 이를 삼는다.’고 하는 것은, 이익을 가지고 이익으로 하게 되면 ‘위와 아래가 함께 이만을 구하여’ ‘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는다.’(《맹자》梁惠王), 즉 이익 추구를 위한 야비한 투쟁으로 떨어지고 마는 데 대해, 의로써 이익을 삼으면, 즉 도의에만 마음 편히 머물러 있게 되므로, 그 곳에 참다운 의미에서의 이익이 있는 것이다. 정자가 “성인은 의로써 이익으로 한다. 의가 편안한 곳, 즉 이익이 있는 곳이다.”라고 말한 것은, 모두 여기에 바탕한 것이다. 정자의 말은 송학적(宋學的)인 <이(利)>의 정의로서 항상 인용된다.
長國家而務財用者는 必自小人矣니라 彼爲善之하야 小人之使爲國家면 菑害並至리라. 雖有善者라도 亦無如之何矣니라. 此謂國 不以利爲利요 以義爲利也니라.
【解釋】국가의 장이 되어 재용을 힘쓰는 것은 반드시 소인에 말미암는다.(저가 잘한다. 하나) 소인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면 재해가 아울러 이르는 지라, 비록 착한 사람이 있어도 또한 어찌 할 수 없다. 이것을 일러 나라는 이로써 이를 삼지 않고, 의로써 이를 삼는다 한다.(제23절)
【解說】나라의 우두머리로서 있으면서 재물에만 힘을 기울이는 것은 틀림없이 소인들의 조종에 의해 그런 것이다. <피위선지(彼爲善之) 네 글자는 뜻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주자는 이 글귀 위나 아래에 문장이 탈락해 있거나, 아니면 글자가 잘못 쓰여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가 잘한다 하나>, 즉 ‘제깐엔 잘한다고 하지만’ 하는 뜻으로 풀이하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런 소인을 신임하여 나라의 정치를 맡기게 되면, 재난과 해독이 한꺼번에 밀어닥치게 되므로, 뒤늦게 착한 사람을 등용시켜 이를 수습하려 해도 이미 때가 늦어 손을 쓸 도리가 없게 된다. 이익만을 이익으로 아는 해독을 심각히 지적하고, 나라는 이익을 가지고 이익으로 하지 않고, 의를 가지고 이익으로 한다는 앞 절의 말을 거듭 되풀이하여 끝매듭을 짓고있는 것을 가리켜 ‘그 자세한 뜻이 간절하다.’고 하는 것이《대학장구》주해에 있어서의 주자의 마지막 말이다. 다음에 전례에 의해《혹문》을 인용해 둔다.
‘재해가 함께 이르러 어찌 해 볼 수 없다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에 원한이 맺혀 있어 도저히 일조일석에 풀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인인 공자, 현인인 증자는, 그런 현실을 깊이 꼬집어 내어 어찌 해 볼 수 없다고 극단의 말을 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미리 사리를 충분히 파악시켜 두고, 물을 엎지르고 난 다음의 후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한 것이다. 이토록 예비조치를 이미 해 두었는데도 역사상 상홍양(桑弘羊), 공근(孔僅), 우문륭(宇文融),양긍(楊矜), 진경(陳京), 배연령(裵延齡) (桑과 孔은 漢나라의, 나머지는 唐나라의 主로 財政에 能한 官僚들)과 같은 무리를 등용하여, 그로 인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임금들이 역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육선공(陸宣公, 唐나라 名宰相 陸䞇)은 “백성은 나라의 뿌리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상하게 되면 그 뿌리도 상하게 된다. 그 뿌리가 상하면 가지와 잎은 말라 떨어지고, 뿌리는 뽑혀 넘어지고 만다.”고 말했고, 여정헌공(呂正獻公, 宋나라 名臣 呂公著)도 “소인이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여 임금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임금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으로만 생각할 뿐 그것이 종국에 가서 나라를 해치는 것인 줄을 모른다. 그 소인이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칭찬할 뿐, 사실은 크게 불충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소인이 백성들의 원한을 혼자 받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그 원한이 오래지 않아 위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떨어진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공(公)의 말은, 이 전 제10장의 취지를 깊이 파악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를 가진 사람은 깊이깊이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大學》―終―
中 庸
中庸章句 序
中庸은 何爲而作也오. 子思子 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시니라.
【解釋】중용은 무엇을 위해 지었는가. 자사자가 도학이 그 전함을 잃을까 걱정하여 지은 것이다.(제1절)
【解說】《대학장구》의 서문이 그러했듯이, 이《중용장구》의 서문도 대단한 힘을 쏟아 쓴 것으로 유명하다.《논어집주(論語集註)》《맹자집주》의 서문이 단순한 해설, 그것도 과거 학자들의 말을 늘어놓는 것으로 끝난 것과는 달리, 주자의 사상적 입장을 정면으로 내세운 힘찬 문장으로 되어있다. 이 두 편의 문장, 특히 이 중용장구서는 말하자면 주자학 개론 중의 한 장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학자들은 이 서문을 정신통일을 위한 한 경문(經文)처럼 생각하고 이를 외고 다녔고, 심지어는 사귀(邪鬼)와 맹수를 물리치는 힘을 가졌다 하여 깊은 산 속이나 밤길을 갈 때면 이 중용장구 서문을 왼다는 전설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이 서문은, 먼저《중용》이 어떤 목적에서 지어진 것이냐 하는 물음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이른바 도통(道通)의 의논을 전개한다. 주자의 문장 가운데서, 도통에 관한 설을 가장 정리된 형태로 말하고 있는 것이 이《중용장구서》라고 해도 좋다.《중용》이란 책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도학의 전통이 끊어지고 말 것을 두려워하여 지은 것이다. <도학>.이라는 말은, 말 그 자체는 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송나라에 있어서는 그것에 특수한 의미가 주어져, 처음은 정명도ㆍ정이천(程伊川), 즉 이정자(二程子) 계통의 학문을 부르는 말이었다. 뒤에는 주염계(周㾾溪)ㆍ이정자ㆍ장횡거를 거쳐 주자에 이르러 크게 이룩된 학문체계의 칭호로서, 주자에 의해 자각적으로 쓰이게끔 되었다. 그것이 지금은 멀리 자사와 자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자사자(子思子)의 <자(子)>는 물론 공자 맹자 할 때의 <자>다. 위에다 <자>를 하나 더 둔 것은 정자를 <자정자(子程子)>라고 한 것과 같은 예다.
蓋自上古聖神이 繼天立極으로 而道統之傳이라. 有自來矣는 其見於經 則允執厥中者라 堯之所以授舜也요 人心惟危하고 道心惟微하니 惟精惟一이어야 允執厥中者는 舜之所以授禹也라.
【解釋】대개 상고에 성신이, 하늘을 이어 극(極)을 세움으로부터 도통의 전함으로부터 옴이 있다. 그 경에 보이는 것은, 곧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고 한 것은, 요가 그로써 순에게 준 것이요, ‘사람의 마음은 이에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이에 미(微)하니, 이에 정밀하고 이에 한결같아,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고 한 것은, 순이 그로써 우에게 준 것이다.(제2절)
【解說】자사(子思)가 잃을까 걱정했다는 도학의 전통, 혹은 도의 전통, 즉 <도통(道通)>이란 것은, 멀리 고대에 성인이 하늘의 도를 계승하여, 극(極), 즉 표준, 법칙(도덕적인)을 백성을 위해 세워 보인, 즉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된 것에 근원을 둔다. 성신(聖神)이란 말은《맹자》에 이른바 <미(美)ㆍ대(大)ㆍ성(聖)ㆍ신(神)>의 성신으로 신(神)은 성(聖)의 극치, 결국 성인을 말한다. 성인(즉 天子)을 첫 근원으로 하여, 두의 전통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고 하는 생각은 주자학처럼 성인을 성인천자와 분리시킨 뒤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유교의 본래적인 관념의 하나였다. 보통 말하는 <도통>은 한유(韓愈)의《원도(原道)》이래 요(堯)에서부터 세기 시작하게 되어 있으나, 여기에 있는 상고의 성신이란 것은 다음에 나오는 요순 이전의, 예를 들면 복희, 신농 등을 가리킨 것이리라. 여기서의 뜻은 아마 도는 성인과 함께 오래고, 역사와 함께 오래다. 다만 그것이 경전에 말로서 실려 있게끔 된 것이 요 이후의 일이란 것이리라. 즉《논어》堯曰편의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라고 한 것이 그것으로 이러한 형태로 요는 순에게 준 것이다. 그 다음의 네 글귀는, 요에게서 받은 말을, 순이 다시 자세한 표현으로 하여, 우에게 준 것이다. ‘순에게 주었다.’ ‘우에게 주었다.’고 하는 준 내용은, 이를 깊이 캐고 들어가 따지게 되면, 제1차적으로는 천하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써 준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천하를 주는 방법이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하고, 혹은 ‘사람의 마음은…… 그 중을 잡으라.’하고 훈계하는 형식으로 주었다는 것이리라. 특히 뒤의 네 글귀(虞庭傳心訣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는 상고의 성인서부터 전해진 도의 내용을 명확하게 표현한 말로서, 송학에서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 성구(聖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이 실려 있는《서경》대우모(大禹謨) 편이 실은 요순시대의 기록이 아니고, 훨씬 후세의 위작(僞作)이란 것을 청나라 고증학자가 증명했을 때, 그것이 송학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 말에 의하면 이른바 도통의 내용은 가장 요약해서 말하면, ‘진실로 그 중이란 것을 잡고 있으라.’고 한 <중>이란 것에 다를 것이 없고, 그것을 보다 주도(周到)한 말로 하면 다음의 네 글귀로 되는 것이다. 그 네 글귀의 뜻은,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인욕이 섞인 마음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즉 벗어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도의 마음>이란 그 도 자체와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미(微)한 것이다. <미>는 현(顯)의 반대 개념으로 너무도 미세하고 은미해서 .감각과 지각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한쪽에서 보면 <사람의 마음>.이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또 어디까지나 <도의 마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감각적 지각적 능력을 작용시키는 이상으로 <이에 정밀하고 이에 한결같아>, 즉 정밀한 관찰력과 일관된 도덕성을 가지고 <중(中)>이라는 원리, 즉 중용의 도를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정(精)>은 조(粗)의 반대 개념으로 섬세하고 정밀한 것에 해당 되는데, 이것 역시 <미(微)>와 마찬가지로 초감각적, 형이상학적인 것에 속하는 철학 용어로서, 육조시대 이후로 애용되어 왔다.
堯之一言이 至矣盡矣而舜復益之以三言者는 則所以明夫堯之一言은 必如是而後에 可庶幾也라.
【解釋】맹요의 한 말이 지극하고 다했는데 순이 다시 더하기를 세 말로써 한 것은 그것으로써 요의 한 말이 반드시 이같이 한 뒤라야 거의 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제3절)
【解說】원래 요의 그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고 한 말은, 더 할 수 없이 극진한 말이다. 일체의 진리는 완전히 이 한 글귀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순이 그 위에다 다시 ‘사람의 마음은 이것이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이것이 미하다. 이에 정밀하고 이에 한결 같아라.’하는 세 글귀를 더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이같은 말로 풀이를 해야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蓋嘗論之컨대 心之虛靈知覺은 一而已矣니라.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는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하고 或原於性命之正而所以爲知覺者不同하나니 是以로 或危殆而不安하고. 或微妙而難見耳니라.
【解釋】대개 논할 것 같으면, 마음의 허령지각은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그로써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이 혹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고, 혹 성명(性命)의 바름에 바탕함으로써 그로써 지각을 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써 혹은 위태하여 편안치 못하고, 혹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울 뿐이다.(제4절)
【解說】이상으로 중용이 지어진 목적과, 도통에 있어서의 <도>의 내용이 가장 집약적으로 말하면 <중(中)>이고, 그것을 부연하면 <인심ㆍ도심ㆍ정ㆍ일ㆍ중>이라는 항목으로 되는 것을 다 제기해 두었다. 이 뒤로는 <대개 논할 것 같으면>하는 형식으로, 주자학의 근본 이론이 이야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개상론지(蓋嘗論之)>라든가 <상시론지(嘗試論之)>라든가는, 정리된 논술을 시작할 때 쓰는 머리말, 상(嘗)은 보통 ‘일찍이’라고 새기는데 여기서는 ‘시험 삼아’라는 뜻이 강하다. 즉 ‘해볼 것 같으면’ 하고 약간 겸손한 어조로 말을 꺼낸 것이다.
허령지각(虛靈知覺,《대학》경 제1절 주석 참조)한 마음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단 하나의 마음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하나인 마음속에 인심, 즉 사람의 마음과 도심, 즉 도의 마음이 서로 구별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모든 존재는 기운(氣)으로 되어있는데, 기운이 있다는 것은 그것에 곧 이치(理)가 있다는 것에 다름없는 것, 둘째, 마음은 기운, 즉 형체(形)의 원리(그것은 理에 대해서 말하면 私的인 것이다.)에 서 있다는 두 전제를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은 기운으로 되어있지만(心的現象은 氣의 作用이다.), 그 기운이 탁한 기운일 경우는 이치(命ㆍ性)의 발현을 방해하고(흐린 물과 그 바닥에 있는 보석과의 관계), 맑은 기운일 경우는 중정한 이치-그것은 기운에 대해 통치력을 갖고 있다.-의 발현을 방해하는 일이 없다. 기형(氣形)의 원리와 명성(命性)의 원리, 그 어느쪽이 우월한가에 의해 마음이 지각으로서의 작용을 하는 방법에 차이가 생긴다. 앞에 말한 네 글귀의 위태롭다든가, 미묘해서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는, 서로 틀리는 점은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然이나 人莫不有是形이니 故로 雖上智라도 不能無人心이오 亦莫不有是性이니 故로 雖下愚라도 不能無道心이라. 二者雜於方寸之間이나 以不知所以治之면 則危者愈危하고 微者愈微하야 而天理之公이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라.
【解釋】그러나 사람이 이 얼굴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는지라, 그러므로 비록 상지(上智)라도, 능히 사람의 마음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성품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는지라, 그러므로 비록 하우(下愚)라도 능히 도의 마음이 없을 수 없다. 둘은 비록 방촌 사이에 섞이었으나, 가지고 다스리는 바를 알지 못하면 곧 위태로운 것이 더욱 위태롭고, 미한 것이 더욱 미하여, 천리의 공(公)이 마침내 그것으로써 인욕의 사(私)를 이길 수 없다.(제5절)
【解說】사람이 이 얼굴, 즉 이 육체란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최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운이 형체로 되는 원리에 바탕한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없을 수 없고, 거꾸로 또 사람이 <성품>이란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최하의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타고난 것이 곧 성품이요 이치가 곧 성품이라는 원리 위에 성립하는 <도의 마음>이란 것이 없을 수 없다. 이 사람의 마음과 도 의 마음 둘이 사방 한 치 되는 공간(심장) 속에 섞여 있고,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위태로운 사람의 마음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희미한 도의 마음은 더욱 희미해져서, 그 결과 천리라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이 결국에는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게 된다. 즉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라는 분류법은《논어》陽貨에서 공자가 ‘상지와 하우는 옮기지 않는다.’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한편 오늘날 우리가 두뇌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러 기능을 심장이 하는 줄로만 알아왔고, 그 심장(心臟)이 <방촌(方寸)>, 즉 사방 한 치라는 말로 표현되어 온 것은 널리 알려지고 있는 일이다.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요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니라. 從事於斯하야 無少間斷하고 必使道心으로 常爲一身之主하며 而人心으로 每聽命焉이면 則危者安하고 微者著而動靜云爲이 自無過不及之差矣라.
【解釋】정밀하면 곧 그 둘 사이를 살펴 섞이지 않게 하고, 한결같으면 그 본 마음의 바름을 지켜 떠나지 않게 한다. 여기에 종사하여 조금도 단순함이 없이, 반드시 도의 마음으로 하여금 한 몸의 주인이 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이 매양 명령을 듣게 하면, 곧 위태로운 것이 편안해지고, 희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어 동정운위(動靜云爲)가 스스로 과불급(過不及)의 차가 없게 되리라.(제6절)
【解說】시<유정유일(惟精惟一)>의 <정>이란 것은, 이 도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 둘의 구별을 정밀하게 살펴 둘을 혼동시키지 않는 것, <일>이란 것은 마음의 본래 상태, 즉 도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상태를 어디까지고 지키고 있어 거기서 벗어나거나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 <정>과 <일>을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끊어지는 일이 없이 실천하여, 도의 마음이 항상 내 몸의 주인이 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그 명령에 따르도록 하게 되면,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것은 분명히 나타나 인식하기 쉽게 되어, 기거ㆍ동정ㆍ언어ㆍ동작 등 하나에서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거나 하는 잘못은 자연 없어지게 된다. 즉 <중(中)을 잡(執)는> 일이 실현되게 되는 것이다.
夫堯舜禹는 天下之大聖也요 以天下相傳은 天下之大事也라 以天下之大聖으로 行天下之大事而其授受之際에 丁寧告戒 不過如此하시니 則天下之理에 豈有以加於此哉아
【解釋】대저 요와 순과 우는 천하의 큰 성인이요, 천하를 가지고 서로 전하는 것은 천하의 큰 일이다. 천하의 큰 성인으로서 천하의 큰 일을 행하며, 그 주고받을 즈음에, 정녕히 일러 훈계한 것이, 이같은 데 지나지 않았으니, 곧 천하의 이치가 어찌 씀에 이에서 더할 것이 있으리오.(제7절)
【解說】요와 순과 우는 모두 천하의 큰 성인이다. 또 천하를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한 사람의 손으로 넘겨준다는 것은 천하에 그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다. 그런데 이들 천하의 큰 성인이 천하를 넘겨주는 중대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간곡히 타이르고 교훈을 내린 것이, 요의 경우 <그 중을 잡으라.>는 한 마디였고, 순의 경우 그것을 부연한 네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간단한 말 속에는 실로 심원한 뜻이 들어있을 것이며, 천하의 이치로서 이 이상의 심원한 이치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치와 역사의 원리는 극도로 내적(內的)인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한편 요는 당(唐)이라는 왕조의 천자였고, 순은 우(虞)라는 왕조의 천자였으나 다같이 한 대(代)로서 다른 사람에게 천하를 넘겨주었고, 자손 대대로 천하를 전한 참다운 뜻에서의 왕조는 우가 세운 하(夏)의 왕조에서 시작된다.
自是以來로 聖聖相承하사 若成湯文武之爲君과 皐陶伊傅周召之爲臣이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하시니라. 若吾夫子는 則雖不得其位나 而所以繼往聖開來學하시니 其功反有賢於堯舜者니라.
【解釋】이로부터 오며, 성인과 성인이 서로 이어, 성탕과 문ㆍ무 같은 임금된 사람과 고요와 이ㆍ부ㆍ주ㆍ소 같은 신하가 된 사람이 이미 다 이것을 가지고 도통의 전함을 이어받았다. 우리 부자와 같은 경우는, 곧 비록 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나, 그로써 지나간 성인을 잇고 오는 배움을 연 것은, 그 공이 도리어 요순보다 나은 것이었다.(제8절)
【解說】순이 우에게 전한 네 글귀-요가 순에게 전한 한 글귀는 그 속에 포함된다.-는 그 뒤로 성인으로부터 성인에게로 이어져갔다. 예를 들면 임금, 즉 천자로 말하면 성탕, 즉 은나라 탕임금과, 문무, 즉 주나라 문왕, 무왕 같은 사람이, 신하로 말하면 고요(舜의 賢臣)와 이윤(伊尹-湯王의 名臣)과 부열(傅說-殷나라 高宗의 名臣)과 주공ㆍ소공(周公ㆍ召公-다 武王의 아우로 名臣) 같은 성인이 모두 다 이 네 글귀에 의해 통을 이어받았다. 즉 도통의 계승자 속에 이름이 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 공자와 같은 분은 천자가 되지도 못했고, 혹은 천자를 보필하는 재상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즉 성인으로서 당연히 차지해야 할 지위에 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옛 성인의 도를 이어받고,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열어 도통을 전한 점에 있어서는 그 공적이 ‘요순보다 더하다.’(《맹자》公孫丑上)고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한편 공자가 그 직위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마치 예수가 원래는 신(神)이었으면서도, 현상적(現象的)으로는 사람의 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뒷날 공자를 논하는데 있어서 온갖 이론적인 무늬를 짜내는 근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해 둔 바 있다.
然이나 當是時하야 見而知之者는 惟顔氏 曾氏之傳이 得其宗하시고 及曾氏之再傳而復得夫子之孫子思시나 則 去聖遠而異端起矣라.
【解釋】그러나 이 때를 당하여, 보고 안 사람은 오직 안씨와 증씨의 전한 것이 그 종(宗)을 얻었더니 증씨가 다시 전하여, 다시 부자의 손자 자사를 얻음에 미쳐서는, 곧 성인을 지남이 멀어 이단이 일어났다.(제9절)
【解說】공자가 살아계시는 동안에 <보고서 안 사람>(《맹자》盡心下), 즉 공자에게 직접 접촉하여 그 사상에 통해있던 사람들 중에는 오직 안회(顔回)와 증삼(曾參)이 전한 것만이 공자의 올바른 사상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 증삼의 제자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자사가 나타났을 때는 벌써 공자 같은 성인이 죽은 지 이미 오랜 뒤라, 성인의 참 도가 아닌 사사로운 주장을 하는 <이단(異端)>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시대는 벌써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로 들어와 있었다.
子思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시니라. 於是에 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하시고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하야 更互演繹하야 作爲此書하사 以詔後之學者하시니라. 蓋其憂之也深하니 故로 其言之也切하고 其慮之也遠하니 故로 其說之也詳하니라. 其曰天命率性은 則道心之謂也요 其曰擇善固執은 則精一之謂也요 其曰君子時中은 則執中之謂也니라. 世之相後이 千有餘年而其言之不異가 如合符節이라 歷選前聖之書하야 所以提挈綱維하며 開示蘊奧이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니라.
【解釋】자사가 그것이 오랠수록 더욱 그 참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요순 이래로 서로 전해 온 뜻을 미루어 바탕으로 하고, 바로잡기를 평일에 들은 바 부사(父師)의 말로써 하고, 다시 서로 연역하여, 이 글을 지어 만들어 뒤의 학자에게 일렀다. 대개 그 걱정하는 것이 깊은지라, 그러므로 그 말하는 것이 간절하고, 그 염려하는 것이 먼지라. 그러므로 그 말하는 것이 자세했다. 그 천명과 솔성(率性)을 말한 것은 곧 도심을 이른 것이고, 그 택선과 고집을 말한 것은 곧 정일(精一)을 이른 것이요. 그 군자의 시중을 말한 것은 곧 집중을 이른 것이다. 세상이 서로 뒤진 것이 천여 년이 되는데 그 말의 다르지 않은 것이 부절을 합친 것 같다. 전 성인의 글을 역선(歷選)하여, 그로써 강유(綱維)를 잡아끌고, 온오(蘊奧)를 열어 보인 것이, 아직 이같이 그 밝고 또 다한 것이 없었다.(제10절)
【解說】시대는 바야흐로 제자백가의 시대에 들어와 있다. 도가, 법가, 묵가(墨家) 등 사상가들이 자기들의 사상을 주장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 사상 시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사상의 자유경쟁이 활기 넘치는 시대로서 오늘날 다 같이 인정을 하고 있지만,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진리가 있는 곳이 명확하지가 않고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학설이 횡행하는 시대, 참으로 개탄할 암흑시대였다. 적어도 한(漢) 이후 2천년, 청나라 말기 19세기 끝 무렵이 되어, 서양 사상의 빛에 의해 제자백가를 재검토하는 기운을 맞이하기까지는 그렇게 보는 것이 정통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자사는 성인으로부터의 시간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성인의 도의 참모습이 그만큼 잃어져 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요순 이래 차례로 전해 이어 온 도의 뜻과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평소에 아버지(여기서는 할아버지인 孔子를 말한 것일 것이다. 아버지 鯉는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와 스승에게서 얻어들은 말에 의해 그것을 검토하여, 그 양쪽에서 이를 연역해서 이《중용》이란 책을 지어 만들고, 그것으로 후세의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전해 보인 것이다. 그 걱정하는 것이 깊기 때문에 그 말은 자연 통절하고, 그 생각하는 것이 멀기 때문에 자연 그 말은 자세하다.《중용》첫머리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품이라 말하고, 성품에 따르는 것을 도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바로 순이 말한 도심(道心)을 말한 것이다. 또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제20장)고 말한 것은, 바로 순이 말한 <유정유일>의 <정일(精一)>을 말한 것이고, ‘군자는 시중한다.’(제2장)고 말한 것은 바로 요와 순이 말한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는 <집중(執中)>에 해당하는 것이다. 요순시대에서 자사가 있던 시대까지는 천년을 넘어 지나 있었는데도, 양쪽이 말한 것은 마치 부절을 마주 합친 것처럼 일치해 있다. 지난 날 성인의 책들을 하나하나 골라 보아도, 도의 큰 줄기를 잡아들고, 그 깊은 뜻을 밝혀 보인 점에서는 이《중용》이란 책처럼 명확하고 또 완전한 것은 얻어 볼 수가 없다.
自是而又再傳, 以得孟氏하야 爲能推明是書하야 以承先聖之統이러니 及其沒而遂失其傳焉이라. 則吾道之所寄는 不越乎言語文字之間, 而異端之說이 日新月盛하야 以至於老佛之徒出하야는 則彌近理而大亂眞矣라.
【解釋】이로부터 또 다시 전하여, 그로써 맹씨를 얻었다. 능히 이 글을 미루어 밝혀 그로써 신성의 통(統)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의 죽음에 미쳐 드디어 그 전함을 잃은지라, 곧 우리 도의 의지하는 바가 언어와 문자 사이를 넘지 못하고, 이단의 설은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성해져서, 그로써 노불(老佛)의 무리가 나옴에 이르러서는 곧 더욱 이치에 가까워 크게 참을 어지럽혔다.(제11절)
【解說】자사(子思)에서 다시 한 번 더 맹자가 나타났다. 맹자는 자사의 제자에 해당한다. 맹자는 이《중용》이란 책을 추구하여 밝게 했다. 즉 연구하여 그 이전의 성인들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의 죽음과 동시에 그 전통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우리 성인의 도는 이제 단순히 글자와 말 사이, 즉 책 속에 담겨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은 데 대해, 제자백가의 <이단>(《논어》爲政)의 설은 갈수록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내어 날로 왕성해 갔고, 마침내는 이단의 극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 노장의 도교와 불교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 노장학파와 불교의 학설은 그것이 얼른 보아 진리에 더욱 가까운 그만큼, 실상 진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상으로 요순에서 맹자에 이르는 동안 <도통(道通)>의 존재를 구상한 것이 한유의《원도》이며, 지금 여기에 말하는 것이 그 계승인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다만 그 도통의 <도>의 내용으로서 저 네 글귀를 생각한 것은 송학의 독창이다.
然而尙幸此書之不泯이니 故로 程夫子兄弟者出하사 得有所考하사 以續夫千載不傳之緖하시고 得有所據하야 以斥夫二家似是之非하시니라. 蓋子思之功이 於是爲大而微程夫子면 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니라.
【解釋】그러나 오히려 다행히 이 글이 없어지지 않은지라, 그러므로 정부자 형제가 나와, 상고하는 바가 있어 그로써 천년이나 전하지 못한 끝을 이을 수 있었고, 의지하는 바가 있어 그로써 두 집의 옳은 것 같으며 그른 것을 배척할 수 있었다. 대개 자사의 공은 여기에서 크게 된 것이다. 정부자가 아니면 곧 또한 능히 그 말로 인해 그 마음을 얻을 수 없었다.(제12절)
【解說】제자백가를 뒤이어 노장의 도교와 불교에 의해 성인의 도는 심한 어지럽힘을 입게 되었으나 다행이도 이《중용》이란 책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었다.《예기》속의 한 편으로서 아무튼 대대로 전해져 왔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 송나라 왕조가 건설되어 도학이 다시 일어나게 되자, 정명도ㆍ정이천 두 형제가 그로써 맹자 이후 천년에 걸쳐 끊어져 있었던 도의 전통을 다시 이을 수가 있었고, 또 분명한 근거에 의해 불교와 도교의 두 거짓<도>를 배척할 수 있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자사의 사업의 위대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사가 후세를 위해 이《중용》을 지어 남겨 둔 공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정자 형제 같은 대 철학자가 나타나지 않았던들,《중용》에 기재된 말을 실마리로 그 말의 핵심, 즉 도의 전통을 올바르게 해설한 자사의 생각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무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정자 앞에 주염계(周㾾溪), 이름은 敦頣)가 있어, 주자ㆍ주자학에서는 보통 도통을 다시 일으킨 것을 이 주자(周子)라고 한다. 다만 주염계에게는《중용》에 대한 학설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바로 아래 있는 석씨(石氏)의 글에 의해정자를 든 것이리라. 또 당나라 중엽을 지나, 이고(李翶)가《복성서(復性書)》란 것을 써서 송학의《중용》부흥의 선구가 된 것도, 한유의《대학》부흥과 함께 주자가 지적한 뒤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惜乎라 其所以爲說者不傳하고 而凡石氏之所輯錄이 僅出於其門人之所記라 是以로 大義雖明而微言未析하고 至其門人所自爲說하야는 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이나 然이나 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이 亦有之矣라.
【解釋】아깝게도 그 가지고 설명한 것은 전하지 않고, 그리고 무릇 석씨가 집록한 것은 겨우 그 문인이 기록한 것에서 나왔다. 이로써 큰 뜻은 비록 밝으나 미한 말이 풀어지지 못했다. 그 문인이 스스로 설명한 것에 이르러서는, 곧 자못 자세하고 곡진하여 발명한 것이 많으나, 그러나 그 스승의 말에 배반되고 도교와 불교에 빠진 것이 또한 있다.(제13절)
【解說】정명도ㆍ정이천 형제가 말한 것, 즉 중용 해석과 그 주석은 아깝게도 주자 당시에는 벌써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명도의 경우는 끝내 저술 같은 것을 하지 않았던 것 같고, 이천의 경우는 한 번 저술을 하기는 했으나 뒤에 그 원고를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주자 당시의 석돈(石墩)이란 학자가《중용집해(中庸集解)》2권을 지어, 두 정자와 그 제자들의《중용》주석과 혹은 연구한 것들을 모았을 때, 그 두 정자의 말은 물론 직접 정자의《중용》주에서 취할 수가 없어, 문인들의 기록에서 모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 원리는 파악할 수 있어도, 세밀한 점은 제대로 분석이 안되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두 정자의 문인들 스스로가 한 주석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자세하고 깊이 파고들어 새로 발명해 낸 점도 적지는 않았으나, 반면 두 정자의 본래의 주장과는 서로 배치되고 오히려 노장사상과 불교 교리에 빠져있는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한편 대의(大義)니 미언(微言)이니 하는 말은 유교, 특히 춘추학(春秋學)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데, 여기서는 큰 뜻이니 미세한 말이니 하는 보통 말로 쓰인데 불과하다.
熹自蚤歲로 卽嘗受讀而竊疑之하야 沈潛反復이 蓋亦有年이러니 一旦恍然하야 似有以得其要領者라. 然後乃敢會衆說而折其中하야 旣爲定著章句一篇하야 以俟後之君子而一二同志로 復取石氏書하야 刪其繁亂하야 名以輯略하고 且記所嘗論辯取捨之意하야 別爲或問하야 以附其後라. 然後此書之旨이 支分節解하고 脈絡貫通하야 詳略相因하고 巨細畢擧하야 而凡諸說之同異得失이 亦得以曲暢旁通而各極其趣하니 雖於道統之傳엔 不敢妄議나 然이나 初學之士이 或有取焉이면 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라.
淳熙己酉春三月戊申 新安朱熹 序
【解釋】희는 어릴 때부터 곧 일찍이 받아 읽고 가만히 의심하여, 침잠반복한 것이, 대개 또 여러 해였는데 하루 아침에 황연히 그 요령을 얻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뒤에야 이에 감히 여러 말을 모아 그 중(中)을 절했다. 이미 위해 정하여《장구》한 편을 짓고, 그로써 뒤의 군자를 기다린다. 그런데도 한두 동지가 다시 석씨의 글을 취하여, 그 번란한 것을 깎고,《집략》으로써 이름하고 또 일찍이 논변취사(論辯取捨)한 바의 뜻을 기록하여, 따로 혹문을 만들어 그로써 그 뒤에 붙였다. 그런 뒤에 이 글의 뜻이 사지가 나눠지고 마디가 풀리고, 맥락이 관통하여 자세한 것과 간략한 것이 서로 인하고, 큰 것과 가는 것이 다 들려 무릇 모든 설의 같고 다르고 얻고 잃음이, 또한 그로써 곡창방통(曲暢旁通)하여 각각 그 뜻을 다함을 얻었다. 비록 도통의 전함에 있어서 감히 망령되이 이야기하지 못하나, 그러나 처음 배우는 선비가 혹 취함이 있으면, 곧 또한 멀리 가고 높이 오르는 한 도움이 될 것으로 안다. 순희 기유 봄 3월 무신에, 신안의 주희는 서(序)한다.(제14절)
【解說】희(熹)는 주자의 이름. 따라서 ‘나는……’하고 써내려 간 것이다. 조(蚤)는 조(早),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이《중용》을 받아 그것을 공부하며,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의심나는 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혼자 가만히 되풀이 생각하며 연구하기를 여러 해 거듭한 결과, 하루 아침에 문득 가슴이 확 열리며,《중용》의 핵심사상을 깨닫는 바가 있게 되었다. 황연은 갑자기 활짝 밝아지는 모습이다. 이렇게 스스로 마음에 깨달음을 얻은 뒤에 많은 다른 사람들의 학설을 모아 그 중에서 올바르게 풀이한 것을 추려 동지, 즉 친구들이(대개의 경우 제자들을 말한다.) 다시 앞에 말한 석씨의《중용집해》를 가져다가, 그 번잡한 부분을 깎아버리고《중용집략》이란 책으로 만들고, 또 지금까지 주자가 여러 선배들의 학설을 취사선택하여 비평하고 변론한 것들을 기록하여 그것을《중용혹문》이라 이름을 붙여《집략》뒤에 부록으로 해 두었다. 이리하여 비로소《중용》이란 책의 사상은 팔다리와 뼈마디가 해부에 의해 분해 되듯이 분석되고, 동시에 육체의 온갖 부분을 꿰뚫고 있는 경맥ㆍ낙맥(經脈ㆍ絡脈-中國醫學 特有의 循環系)과 같은 것이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자세한 부분과 간략된 부분이 서로 뒷받침되고, 큰 것과 작은 것이 빠짐없이 다 지적되고, 모든 학설의 다른 점, 같은 점, 옳은 점, 그른 점이 또한 세밀하게 전개되어 자세히 설명됨으로써 각각 그 지향하는 바가 남김없이 다 추구되었다. 물론 주자의 말처럼 이 ‘보잘 것 없는’《중용장구》나 그밖의 것에 의해, 저 도통을 전하는 문제에 대해 감히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학문에 처음 뜻을 둔 사람이 만일 이 책을 읽어 준다면,《중용》에 말한바 ‘멀리 가는 것은 가까운 데서부터 하고, 높은 데 오르는 것은 낮은 데서부터 한다.’는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바라고 끝을 맺는다.
서문을 쓴 날짜인 순희 기유는, 남송(南宋) 효종(孝宗)의 순희 16년. 서기로는 1189년이다. 주자의 나이 60세 되던 해 봄 3월 무신일 즉 3월 18일에 지은 서문이다.《대학장구》의 서문을 지은 날과는 겨우 한 달 사이밖에 안된다.
中 庸
중(中)이란 것은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것을 이름이다. 용(庸)은 평상(平常)이다.
이 제명(題名)《중용》이란 두 글자의 해석에 대해서도《중용혹문》에는 참으로 세밀한 의논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낱낱이 소개하지는 않는다. 중(中)을 불편(不偏), 즉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라 한 것은 정자였고, ‘자나친 것도 못 미친 것도 없는 것’, 즉 과불급이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은 여대림(呂大臨)이었다. 주자는 그것을 합쳐서 이렇게 주석한 것이다. <중>은 중국 철학에서는 극히 중요한 근본 개념이다. 요→순→우의 저 한 구와 네 구에서부터 시작해서,《중용》《맹자》이래로 이에 대한 의논은 계속 이어져 왔다. 중(中)과 권(權-權이란 것은 經에는 反해도 道에는 合致되는 것)을 결부시켜 논한《맹자》(盡心上)의 말은 가장 유명한 것이다. 중 혹은 중용에 대해, 우선 단 두 가지 점만을 예비적으로 지적해 두려 한다. 첫째, 중용이 단순히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닌 그런 소극적인 것은 결코 아니고 아주 적극적인 개념, 예를 들면 <용(庸)>이 <평상(平常)>이라고 주해될 때, 그 평상이란 것은 ‘군신부자, 일용의 떳떳함에서부터 이를 미루어나가, 요순의 선양(禪讓)과 탕무(湯武)의 방벌(放伐) 등 한없는 변례(變例)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에도 평상 아닌 것은 없다.’(《혹문》)고 하는 것과 같은 거의 뜻밖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사태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상이란 것은 ‘사리(事理)가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중은 ‘시중(時中)의 중’(제2장)과 ‘미발(未發)의 중’(제1장 제4절) 둘로 분류할 수 있다. 후자가 불편불의(따라서 <在中>의 中이라고도 한다.)라면, 전자는 과불급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중>은 원래,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것에 유의할 일이다.
한편《대학》에서도 그러했지만, 표제 다음 본문 앞에 짧은 서론이 놓여있다.
자정자(子程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말하고, 바꿔지지 않는 것을 용이라 말한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바른 길이요, 용이란 것은 천하의 정한 이치다. 이 편은 곧 공문(孔門)에서 전수(傳授)한 심법(心法)으로, 자사가 그것이 오래되어 틀릴 것을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글로 써서 그로써 맹자에게 주었다. 그 글은 처음에 한 이치를 말하고, 중간에 흩어져 만 가지 일이 되고, 끝에 다시 합하여 한 이치가 된다. 놓으면 곧 육합(六合)에 차고, 말면 곧 밀(密)에 퇴장(退藏)되어 그 맛이 다함이 없다. 모두 실학(實學)이다. 잘 읽는 사람이 완색(玩索)하여 얻음이 있으면, 곧 종신토록 써도 능히 다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글은 주자가 가장 숭배하는 정명도ㆍ정이천 형제, 이른바 이정자(二程子-많은 경우 무차별로 다만 程子라고만 한다.)의 말을 인용하여《중용》전체에 대한 서론으로 한 것이다. 어느 것이 명도의 말이고 어느 것이 이천의 말인지는《중용집략》을 참조하기 바란다.
<바른 길(正道)>이란 것은, 정통적인 길, 정면에 있는 똑바른 큰 길, <정한 이치(定理)>란 것은 일정불변한 도리.《중용》이란 책은 공자학파에서 전승된 심법서(心法書), 즉 인간의 이 마음에 대한 문제를 둘러싼 실천 철학에 관한 책이다. 그것이 이같이 책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내려가며 차츰 이에 관한 틀린 견해가 생겨나게 될 것을 두려워한 자사가, 그것을 막기 위해 이같은 모양으로 정리해서 맹자에게 주었던 것이다.(사실《맹자》에는《중용》과의 공통점이 아주 많다.) 이《중용》이란 책은, 최초에 단 한 개의 이치를 들고, 즉 먼저 <천명(天命)이 곧 성(性)이란 것을 설명하고, 중간에는 그 한 가지 이치를 전개하여 오만가지 사상(事象)을 취급하고, 마지막에는 또 ‘합해서 단 한 가지 이치로 된다.’, 즉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제33장 제6절)이라는 초감각적 형이상적 원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끝매듭을 짓고 있다.
이것을 확 펼쳐 두면 육합, 즉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꽉 차게 되고, 이것을 말아 넣으면 전혀 보이지 않는 깊은 비밀 장소로 감추어지게 된다. <만다(卷)>라는 말은《논어》(衛靈公)에, <밀(密)에 퇴장한다> 라는 말은《주역》에 있는 말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새로운 맛이 나고 깊은 맛이 난다. 철두철미한 실학, 즉 참된 학문이다. 참다운 독서력을 가진 사람이 자세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며 그 얻는 바는 평생을 두고 실생활에 활용해도 부족한 데가 전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은 <실학(實學)>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를 들면 이씨조선 중엽 이후부터 새로 등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관한 학문을 가리켜 <실학>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즉 철학적인 학문에 대한 실증적인 학문, 인문과학적인 학문에 대한 자연과학적 기술학적 혹은 법적 경제적인 학문을 가리키는 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원 학문의 실학도 그런 뜻이었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어로서의 원래의 용법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여기 있는 예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주자나 주자학에 반대한 왕양명이나, 다같이 자기 학문을 <실학>(참된 내용의 학문)이라고 주장했고, 주자학ㆍ왕양명과 같은 형이상학에 반대해서 일어난 청나라의 고증학도 역시 <실학>을 주장했다. <실학>이란 똑같은 말이 시대에 따라 각각 달리 쓰여지고 있는 데에서 그 시대의 특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제 1 장
이 제1장(首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주자에 의하면 이 제1장은 자사가, 자기가 전해 받은 사상을 <서술하여(述)>, 즉 자기의 독창적인 사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스승이 가르치고 전해준 그대로를 충실하게 조술(祖述)하여, 포괄적인 명제를 한 것이다. 먼저 첫째로 그것은, <도(道)>의 근원이 하늘로부터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하늘에 근거한 것이면서 개개의 사람 속에 완전무결한 본질(本質)로서 내재(內在)해 있는 것으로, 사람은 한 순간이라도 그것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다음 둘째로는 존양(存養-戒愼恐懼와 같은 天理와 道德性의 培養), 성찰(省察-愼獨과 같은 道德的 反省과 人欲의 克服)의 필요를 말하고, 마지막 끝맺음으로서 성인의 사업, 즉 덕화(德化)가 어느 정도까지의 규모에 달하는가를 말한다. 유교에 있어서, 특히 주자학에 있어서는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늘이 준 성품을 스스로 깨달아, 철학적 사색과 도덕적 수양을 쌓은 극치에 이르면 성인이 되는 것이며, 그때 그 덕화는 천지만물에까지 미친다.《중용》이 그 첫장에서 먼저 이러한 자기 철학의 강요(綱要)를 든 것은, 학문하는 사람이 원리를 자기 내부에서 찾고 파악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외(外)>적인, <사(私)>적인 것의 유혹을 물리쳐, 그 본래의 선(善)을 충실히 지켜가게 하고, 학문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노력하게 만들려 하는 것에 이 책의 커다란 목표가 있는 것이다. 양귀산(楊龜山-程子의 弟子)의 이른바《중용》전편의 휴요(休要-精粹)란 것이다.
《대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첫 장만은 주자의 주에 대한 충실한 새김을 더하기로 한다.
天命之謂性이오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解釋】하늘이 명한 것을 성품이라 말하고, 성품에 따르는 것을 도라 말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말한다.(제1절)
【解說】먼저 성(性)ㆍ도(道)ㆍ교(敎)라는 세 가지 기초 개념을 내세운다.
‘명(命)은 명령(命)과 같다. 성품(性)은 곧 이치(理)다. 하늘은 陰陽五行을 가지고 만물을 화생한다. 기운(氣)이 그로써 얼굴을 이루고, 이치가 또한 주어지는(賦) 것이 명령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사람과 만물의 남이, 각각 그 주어진바 이치를 얻음으로 인해, 그로써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을 삼는 것이 이른바 성품이란 것이다.
‘하늘이 내린 명령, 그것이 성품이다.’라고 한 <성품>은 보다 일반적인 말로 바꾼다면 <이치>-만물은 이치와 기운으로 된다.-만물이 하늘로부터 생겨나올 때, 만물의 형체(肉體), 즉 물질적인 방면을 형성하는 것은 음양ㆍ오행, 결국 기운과 다를 것이 없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기운에 의해, 기운이 모이고 한데 엉겨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있는 것은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있어야만 하게끔 되어있는 것이란 점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것은, 아무 까닭없이 그저 높고 낮은 것은 아니다. 원래 높아야만 되고 낮아야만 되기 때문에, 높게, 낮게 있는 것이다. 하늘이 높은(高) 것은 높은(尊) 것이요 땅이 낮은(低) 것은 낮은(卑) 것이다. 모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기운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다름아닌 이치다. 즉 기운에 의해 만물이 물질적 육체적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거기에 이치도 (마치 명령이 내려진 것처럼) 주어져 있다는 것이 되는데, 그 개개의 존재에 배당되어 있는 이치를 특히 성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에 있어서의 이치가 소의 성품이요, 개에 있어서의 이치가 개의 성품이다. 하는 혹은 하늘다운 것(《주역》에서 말하는 乾)이 <건(健)>의 덕(德)을 가지고 있고, 땅 혹은 땅다운 것(坤)이 <순(順)>의 덕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이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이른바 오상(五常)의 덕을 갖고 있는 것도, 하늘ㆍ땅ㆍ사람이 각각 이치를 안에 갖고 있는, 즉 각각 <성품>을 받아 가지고 있는 점에 바탕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 둘 일이 있다. 첫째, 이치가 주어져 있다. 즉 할당되어 있다는 점에서, 갑(甲)에 대해서는 이러이러한 분량의, 혹은 성질의 이치를 할당하고, 을(乙)에 대해서는…… 이치를 할당한다는 식의 사태를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치가 사람과 만물에 자신을 할당시키는 것은, 주자의 비유를 빌면, 달이 크고 작은 그릇의 물에 자기 모습을 나눠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치는 어떤 사람, 어떤 물건, 어떤 일에나 말하자면 똑같이 통체로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천지 만물의 이치를 합친 그 통체(統體)>를 태극(太極)이라 부르는 일이 많은데, 그 경우 ‘하나하나의 물건은 각자가 하나의 태극을 완전히 똑같이 갖고 있다.’(《어류》) 결국 전형적인 <대우주↔수우주>의 설인 것이다. 다음에 주의할 점은, ‘하늘이 명했다.’고 한 첫머리 두 글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주자의 주도, 명을 명령으로 풀이하고, 또 ‘하늘이 만물을 화생한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과연 글자대로의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예를 들면 어느 최근 사람의 주해에 <종교적인 우주의 주재자><천지만물 창조의 신>과 같은 말이 보이는데 그것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는지.-《중용》제26장 제10절에 인용한 시 ‘하늘의 명(命)은 오오 목(穆)하여 마지 않는다.’를 해석하여 여대림(呂大臨)이 “하늘의 하늘 된 바는 그 명을 그치지 않는 것이요, 성인의 성인 된 바는 그 덕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중용집략》)라고 말한 것을 주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말하려는 취지는 틀리지 않으나 표현에는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천도(天道)와 성인이 그치지 않는 것은 모두 <참된 이치의 자연>(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으로,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명을 그치지 않는다><그 덕을 그치지 않는다>고 하면, 의지적으로 그만두지 않는 것이 된다. 그래서는 <성인과 천도의 자연>을 밝히는 것이 못된다.”
또《시집전(詩集傳)》의 그 시에 대해서는 ‘천명은 곧 천도(天道)다.’ ‘천도는 다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물론 도덕적인 경건(敬虔)의 극치는 종교적인 그것과 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천지만물 창조 의 신이라는 방향으로 풀이할 수는 없는 일로, 천도의 자연이라는 방향으로 해석해야 될 것이다. 적어도 주자학의 이론으로서는 그렇다는 것을 곧 제16장의 ‘귀신(鬼神)’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명료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솔(率)은 따르다(循)다. 도는 길(路)과 같다. 사람과 만물이 각각 그 성품의 자연에 따르면, 곧 그 일용 사물(日用事物) 사이에 각각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곧 이른바 도다.’
거느린다는 솔(率)은 여기서는 따른다는 순(循)의 뜻이다. <도(道)>는 곧 걸어가는 길과 같은 뜻이다. 사람 혹은 만물이 각각 하늘로부터 명령된, 즉 각자에게 할당된 성품의 자연에 따르게 되면, 하루하루의 생활 실천, 사물과의 접촉에 있어서, ‘당연히 걸어가야만 할 길’이란 것이 각각 있다는 것을 발견(自覺)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도>다.
‘수(修)는 품절(品節)하는 것이다. 성품과 도가 비록 같지만 기품(氣禀)이 혹 다르다. 그러므로 지나치고 미치지 못한 차가 없을 수 없다. 성인이 사람과 만물의 마땅히 걸어갈 바에 따라 품절하여, 그로써 천하에 법을 삼으면, 곧 가르침(敎)이라 이른다. 예악(禮樂)과 형정(刑政) 등속이 이것이다.’
<수란 것은 품절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친족관계에 있어서 친등(親等)에 의해 관혼상제를 치르는데 후박(厚薄)과 경중(輕重)의 차별을 두고 하는 것이 품절이다. 도를 품절한다는 것은, 사람은 형이상학적으로, 즉 이치를 근거로 하여, 성품과 도가 만인 공통으로 똑같이 주어져있는 것과 동시에 형이하적으로는 기운을 근거로 해서 천차만별의 형체가 주어져 있다. 즉 기운을 받고 있는 점에서는 서로 틀리는 점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성품을 물에 잠기어 있는 달그림자에 비유했었는데, 그 경우 물은 기품이다. 그보다 물 밑에 있는 보석과 물-흐린 물이냐 맑은 물이냐-의 관계에 비유하는 쪽이 보다 적절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밝게 빛나는 성품(본연의 성품)도, 기품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기질의 성품). 그 기품의 차이에 의해 지나치고 미치지 못한 것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성인은 기품의 차이에 바탕을 두고, 사람과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만 할 길을 여러 가지로 품절하여, 법도적인 것, 실천규칙적인 것을 만들었다. 그것이 <교(敎)>, 즉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즉 예악이니 형정이니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대개 사람이 자기의 성품 있는 것은 알아도 그것이 하늘에서 나온 것임을 알지 못하고, 일이 도가 있는 것은 알아도 그것이 성품에서 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임은 알아도 그것이 나의 본래 있는 바를 따라 만든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사가 여기서 첫머리에 펴서 밝혔다. 동자(童子)의 이른바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도 또한 이 뜻이다.
대체로 사람은 자기에게 <성품>이란 것이 내재해 있는 것은 알고 있어도 그것이 <하늘>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또 일상의 실천에 있어서 하나하나 정당한 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그것이 <성품>에서 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또 성인이 <가르침>을 세우는 것은 알고 있어도 그것이 실은 나 자신의 고유의 것(性)에 바탕을 두면서 거기에 손이 더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
‘성ㆍ도ㆍ교는 그 근본은 모두 하늘에서 나왔지만 실은 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혹문》). 그래서 자사는 먼저 그 점을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한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 하늘도 변하지 않고 도도 변하지 않는다.”라는 것도 같은 뜻이다.
한편,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 대해 정현(鄭玄)의 주는 “천명이란 하늘이 산사람(生人)에게 명한 것. 그것을 성명(性命)이라고 한다. 목신(木神)은 인(仁), 금신(金神)은 의(義), 화신(火神)은 예(禮), 수신(水神)은 신(信) 토신(土神)은 지(知)…….”라고 말하고 있다. 청나라 고증학자들이 좋아하는 한 대목이기도 하고, 또 주자도 대단히 흥미를 보이기는 했으나, 물론 여기에서 말할 것은 못된다.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나 可離면 非道也니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解釋】도란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다.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그 보지 않는 바에 계신하고, 그 듣지 않는 바에 공구한다.(제2절)
【解說】‘도란 것은 일용사물의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 모두 성품의 덕으로 마음에 갖춰져 있어 물건으로서 있지 않은 것이 없고,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로써 잠시(須臾)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떠날 수 있다면, 어찌 성품을 따른다고 말하겠는가. 이로써 군자의 마음은 항상 경외(敬畏)를 두어, 비록 보고 듣지 않아도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로써 천리의 본연을 두어 잠시 사이라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도는 이미 말했듯이,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천과, 모든 사물과의 접촉에 있어서 사람이 마땅히 지나가야만 할 길 즉 이치이며, 성품의 덕으로서 마음에 갖춰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어떠한 것에도, 어떠한 때에도, 존재하지 않는 일은 없다. 도에서 떠난다는 것은 잠시(須臾)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일 도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거기로부터 떠나는 그 무엇인가가 여전히 본래대로의 그 무엇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같은 것은 사람의 힘이나 사사로운 지혜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성품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바깥 물건(外物)>으로서 도는 아니다. 거기에는 도덕적 긴장의 이완(弛緩)이 있으며, 그것은 곧 .인욕이 어느 사이엔가 숨어들어와 원시통일(原始統一)을 파괴한 것으로, 사람과 도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개의 물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같은 인간은 사람의 얼굴은 하고 있지만 짐승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 가리(可離)ㆍ불가리(不可離)의 가(可)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가능(可能)하다는 뜻의 가(可)다(《혹문》). 가능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이며,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다. 군자는 마음에 항상 도에 대한 경외(敬畏)를 가지고 있다.
도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한층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고 조심하여 전전긍긍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같이 비로소 자각적(自覺的)으로 천리의 본연(본래대로의 천리)을 유지하여, 단 한순간이라도 도(천리)에서 떠나지 않을(거꾸로 말하면 인욕을 발생시키지 않을)수가 있는 것이다.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니라.
【解釋】숨은 곳보다 나타나는 것이 없고, 미(微)한 것보다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혼자를 조심한다.(제3절)
【解說】‘은(隱)은 어두운 곳이다. 미(微)는 작은 일이다. 독(獨)은 사람이 알지 못하여서 나만 혼자 아는 곳이다. 그윽하고 어두운 속, 미세한 일은 그 자취는 비록 나타나지 않아도 그 기(幾)가 이미 움직여, 사람은 비록 알지 못해도 나 혼자 알고 있으면, 곧 천하의 일이 저현 명현(著見明顯)한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이미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지만, 여기에 더욱 더 삼간다. 그로써 인욕이 장차 움트려 하는 것을 막고, 그것이 은미한 가운데 가만히 불어나고 몰래 자라, 그로써 도를 떠난 것이 먼 데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은(隱)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 미(微)는 아주 작은 일. 현(見)은 현(現)으로 나타나는 것, 독(獨)은 아직 남은 모르고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상황과 위치, 이 한절의 의미는, 어두운 속, 또 미세한 일은, 어느 것이나 외형적으로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른바 ‘도는 떠날 수 없는 것’으로 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과 때는 없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벌써 기(幾-發動)가 움직이고 있어서 설령 다른 사람이 알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자기만은 그것을 알고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므로,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드러나 있고 명백한 사상(事象)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혼자만이 아는 장소와 시간에 극도로 더 삼가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인욕이 싹트려 할 그 지점에서 인욕을 억압하여, 그것이 은미한 가운데 생장해서 마침내는 사람을 멀리 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이 신독(愼獨)을 앞의 절의 ‘보지 않는 곳에 조심하고, 듣지 않는 곳에 두려워한다.’를 달리 바꾸어 말한 것이라 하여, <신독(愼獨)>의 <독(獨)>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不睹不聞)’이며 신(愼)은 <계신공구(戒愼恐懼)>라고 하는 해석은, 아주 알기 쉬운 것이긴 하지만, 주자는 단호히 반대한다. 말하기를 계신공구란 것은 천리를 두는 것이고, 신독은 인욕을 막는 것이다. 즉 하나는 적극적인 것이고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다. 또 말하기를, ‘능히 천리를 두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신독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문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천리를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발(發)하게 될 때는 역시 이를 점검(點檢)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데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중용》의 면밀한 곳이다. 천리를 둔 것뿐이라면, 중(中)만으로 화(和)가 없다. 또 말하기를, 계구는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이전에 <함양(涵養)>하는 것이며 신독은 희로애락이 이미 발할 때에 있어서 <성찰(省察)>하는 것이다. 이때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되면 인욕에 흐르고 만다. 의(義)와 이(利)의 구별은 참으로 이 순간에 걸려 있는 것이다. 한쪽은 정적인 공부고, 한쪽은 동적인 공부다……(《대학》전제6장 참조) <현(顯)ㆍ미(微)>는 여기 있는 주자의 주에서는 어디까지나 연속적인 것으로, 단순히 간각적인 파악의 가능성에 대한 정도 문제,예를 들면 <미>란 것은 극히 곤란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감각적 파악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주자학에서 현ㆍ미라는 말은 범주적 대립을 보여 주는 말로서, <현>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 현상계적인 일, <미>는 초감각적 <형이상학>적 본체계적(本體界的)인 일에 대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주자 주의 ‘여기서 더욱 더 삼간다(於此尤加謹焉).’고 한 근(謹)은 신(愼)이란 글자가 효종 황제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신(愼)>을 피하고 <근>을 쓴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오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라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解釋】희로애락의 발하지 않는 것은 중이라 이르고, 발하여 다 절(節)에 맞는 것을 화라 이른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것은 천하의 달한 도다.(제4절)
【解說】‘희로애락은 정(情)이다. 그것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은 곧 성(性)이다. 편의(偏倚)한 바가 없는지라 그러므로 중이라고 말한다. 발하여 다 절에 맞는 것은 정(情)의 바른 것이다. 괴려(乖戾)한 바가 없는지라 그러므로 화라 말한다. 큰 근본이란 것은 하늘이 명한 성품으로서, 천하의 이치가 모두 여기로부터 나오는 도(道), 체(體)다. 달도(達道)라는 것은 성품에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천하 고금이 함께 말미암는바 도의 용(用)이다. 이것은 성정(性情)의 덕을 말하여, 그로써 도의 떠날 수 없는 뜻을 밝힌 것이다.’
유명한 <미발(未發)의 중(中)>을 말한 절이다. 이 절에서 나온 <미발(未發)> <기발(旣發)>의 개념은 주자학의 독특한 범주로서, 유교에 있어서의 철학적 사변의 발전과 심화에 비상한 공헌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목은 중국 철학사상 손꼽히는 이름난 곳으로 헤아릴 수 있다.
주자가 ‘전박불파(顚撲不破), 즉 넘어지고 두들겨 맞아도 절대로 깨지는 일이 없다.’는 형용구를 덧붙여 언급한 두 개의 명제-하나는 정자의 <성즉리(性卽理)>, 하나는 장횡거의 ‘마음과 성품은 정(情)을 거느린다.’-가운데, 지금은 특히 뒤쪽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하기는 그 의미는 결코 고정적인 성품과 고정적인 정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결합해서 마음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희로애락은 <정>이지만, 성품이 아직 정으로 나타나기 이전(논리적인 의미에서의 이전), 마음은 고요한 본래의 상태에 있다. 이 고요한 <성품>의 본래 모습은 불편불의이기 때문에 <중>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설령 정이 현상ㆍ발동하더라도(성품이 감정이라는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당연히 그래야 할 절도에 꼭 맞아, 지나치거나 혹은 미치지 못한 데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 정상 상태로서 이치, 즉 도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이 <화>로 불린다.(마음을 물이라고 하면, 성품은 고요함, 정은 물의 흐름 욕심은 물의 파란.) 중이 천하의 큰 근본이란 것은 이른바 하늘이 명한 성품으로서, 일체의 이치는 여기서부터 나온다. 즉 도의 <체>인 것이다. 달도는 성품에 따르는 도로서, 달이라고 말한 것은 공간적으로는 온 천하, 시간적으로는 고금을 통해, 그 어느 것도 이 도를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래서 달이라고 말했다.(자세한 것은 제20장 제7절 참조.) 체와 용의 범주로서 말하면, 도의 <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은 ‘마음과 성품과 정의 통일체’라고 하는 주자학의 근본 명제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중이라는 성품의 덕과, 화라고 하는 정의 덕을 지적하여, 도의 떠날 수 없는 성질을 말한 것이다.
결국 미발의 중이라는 것은 생각이 아직 싹트지 않은, 털끝만한 사욕도 없는 것이므로, 자연 그 결과로서 어떠한 치우침도 없다. 이른바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주역》繫辭傳上)을 말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시중>의 중의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인 데 대해 말하는 것으로, 동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서쪽, 남쪽, 북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꼭 한 복판이라고 하는 공간적이고 정적인 이미지다. 발하지 않은 중은 그 같은 <재중(在中-중앙에 위치한)>의 중이지만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은, 미발ㆍ기발ㆍ재중ㆍ시중이란 것이 따로따로 떨어진 별개의 고정적인 두 영역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항상 서로 섞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학문하는 사람이, 매일 반나절을 정(靜)의 실천(공부)에 충당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실은 이 점을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어류》) 위의 제2절에서 존양(存養)을 말하고, 제3절에서 성찰을 말한 것은, 지금의 용어로 말하면, 전자는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고, 후자는 이미 발했을(최초의 순간) 때의 일이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이전에 있어서 바르게 존양(存心養成의 준말, 또 涵養이라고도 한다.)하는-그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경(敬)이다. 경은 단순히 발하지 않았을 때만의 일은 아니지만-것만이 ‘발해서 절에 맞기’ 위한 최대의 조건이다. 발해서 절에 맞는 화란 것은, 예를 들어 기쁨과 노여움에 대해 말하면3분쯤 기뻐해야 할 것을 4분쯤 기뻐한다거나, 4분쯤 노여워해야 할 것을 3분밖에 노여워하지 않거나 하는 것의 반대를 말한다. 한편 미발ㆍ기발은 우주적인 의미에서도 물론 말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致中和면 天地位焉하며 萬物育焉하니라.
【解釋】중과 화를 이르게 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하고 만물이 자란다.(제5절)
【解說】‘이른다(致)는 것은 미루어 다하는 것이다. 자리한다는 것은 그곳을 편안히 하는 것이다. 자란다는 것은 그 삶을 이루는 것이다. 계구(戒懼)로부터 약(約)하여, 그로써 지극히 고요함 속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치우침 없이 그 지킴을 잃지 않으면, 곧 그 중을 다하여 하늘과 땅이 자리한다. 혼자를 삼가는 일로부터 정밀(精)하여, 그로써 사물에 응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조그마한 차류(差謬)도 없고, 가서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면, 곧 그 화를 다하여 만물이 자라게 된다. 대개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 몸이다. 내 마음이 바르면 곧 천지의 마음도 바르다. 내 기운이 순하면 곧 천지의 기운도 또한 순하다.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같은 데 이른다. 이것은 학문의 지극한 공이고, 성인이 능히 하는 일로서, 처음부터 밖에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도를 닦는 가르침도 또한 그 속에 있다. 이것은 그 한 체와 한 용이 비록 움직이고 고요한 다름은 있으나 반드시 그 체가 서 있는 뒤에라야 용이 그로써 행함이 있는 것이다. 곧 그 실상인즉 두 가지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합해서 말하여 위의 글 뜻을 끝맺은 것이다.’
치(致)란 것은 미루어 궁극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 위(位)란 것은 위치가 안정되어 있는 것, 육(育)이란 것은 삶의 전 과정을 완수하는 것이다. 계신공구(戒愼恐懼)에서부터 약(約, 集約)해서, 정(靜)의 극치인 치우치지 않은 <중>에까지 도달하여, 중을 간직하여 지키는 데 성공을 거두게 되면, 이제야 중은 그 극도에 이르러, 그 결과로서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 위치와 질서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안정하게 된다. 또 신독으로부터 정밀히 하여, 사람과 사물을 접촉하고 처리하는 데 조그마한 실수도 잘못도 없고(和), 어떤 경우에서나 능히 그와 같을 수 있다면, 이윽고 화는 극치에 이르게 되고 그 결과로서 만물은 옳게 자라나 각각 자기 고유의 삶을 완전히 실현한다. 즉 우주적인 규모에서의 성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는 것으로, ‘천지만물은 원래 나와 한 몸인 것.’(程明道의 말)이므로, 내게 있어서 중이 이루어지고 내 마음이 바르게 되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천지의 기운도 조화를 얻게 되어, 만물은 올바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효험도 결국 학문의 궁극적인 공적으로, 학문에 의해 도달하게 되는 성인이 능히 하는 일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적인 원리에 입각한 것으로 밖으로부터의 보완(補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상 성ㆍ도 둘의 개념만을 들었으나, 그것은 <교(敎)>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고 한 교는 실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천지만물은 인간에 대해 커다란 가르침의 무대다.) 한쪽은 체(體)ㆍ정(靜), 다른 쪽은 용(用)ㆍ동(動)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먼저 체가 서 있는 뒤라야 용은 그 작용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그 둘이 서로 관계없는 두 가지 일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관련시켜 이 장을 매듭지었다.
최후로《혹문》에서 한 대목을 뽑아 둔다. 물었다. 천지가 자리하지 못하고 만물이 자라지 않을 때, 성현이 나타나 중화를 이루어 재해를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인가. 대답했다. 감통(感通-덕(德)에 의해 천지에 感應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능력 여하에 제한을 받는다. 저 지위와 덕을 겸한 성인인 요순으로서도 불가능한 일이 있었으니까(《논어》雍也), 지위를 얻지 못했을 경우, 아무리 성현이라 할지라도 재이(災異-罰로서 하늘이 내린 재해)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기 한 몸에 있어서 능히 중화를 이루게 되면, 천하는 어지러워도 내 몸의 천지만물은 여전히 안태(安泰)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을 능히 할 수 없으면, 천하가 아무리 다스려져 있어도, 내 몸의 천지만물은 여전히 혼란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한 집이나 한 나라나 모두 마찬가지라고 했다.
제 2 장
여기서부터 제11장까지의 열 장은, 모두 <중용>이란 것을 명제로 하여 제1장(이른바 首章)의 사상을 부연해서 해석한다. 한 장에서 다음 장으로 옮겨가는 것은 문장으로서는 반드시 잘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나, 뜻과 내용은 잘 연결되어 있다. 첫장에서는 <중ㆍ화>로서 논해지고 있는데, 이 제2장에서부터는, <중용>이란 말로 바뀌어져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정자(程子)의 제자인 유작(游酢), 즉 유정부(游定夫)가, <중화(中和)>라고 할 때는 성정(性情)의 면에서, 즉 <중은 성(性), 화는 정(情)>이라는 철학적 원리론에 의해서 말한 것이고, <중용>이라고 말할 때는 덕행, 즉 실천적 덕목(德目) 면에서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맞는다. 즉 중영이라고 할 때의 <중>은, 중ㆍ화 둘의 의미를 겸하고 있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첫장에 의하면, 중화의 <중>이란 것은 도의 체를 가리킨 말이기 때문에, 결국 중용의 중이 중과 화의 의미를 겸해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의 <체>와 <용>의 양면을 통일적으로 표현한 말에 다름없는 것이다. 한 편의 제목을 <중화>라고 하지 않고 <중용>이라고 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다. 그 경우 <용>이란 글자는 결국 중을 강조한 것뿐인 말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점을 주자가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 가운데, 맨 뒤의 <신>을 다른 넷과 대등하게 독립된 대목이면서, 보다 많이 오히려 다른 넷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원리라고 하고, <목ㆍ화ㆍ토ㆍ금ㆍ수> 오행에 대해서는 그 중의 <토(土)>가, ‘나무(木)를 나무일 수 있게 하고, 불을 불일 수 있게 하고……하는 원리’라는 것과 같은 생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용의 용은 중의 <중>된 성질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는지.
中尼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解釋】중니가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고 하셨다.(제1절)
【解說】중용이란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지나친 것도 못 미친 것도 없고, 평상인 도리를 말하는데, 그것은 천명으로 마땅히 그래야 할, 즉 하늘이 만물에 그 실현을 명령한 규범으로서, 정미(精微)의 극치라고 주자는 말한다. 정(精)은 ‘유정유일(惟精惟一)해서 그 중(中)을 잡으라’는 정, 미는 제1장에 현(顯)과 미(微)를 대(對)로 들고 있는 그 미, 즉 초감각적,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보이는 말. 그러한 것은 물론 군자-여기서는 단순히 덕이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의 뜻-에게는 체득과 실천이 가능한 것으로, 소인은 중용의 덕에 배반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한편 첫머리의 ‘중니 말씀하시되’에 대해서, 손자인 자사(子思)가 공자를 말하며 그의 자(字)를 부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옛날에는 자란 것이 오늘의 호와 마찬가지로 아랫사람들이 부르는 것이었다. 특히 첫머리에 <중니>란 말을 내세운 것은 말하는 사람과의 사적인 관계를 떠나 천하의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한 신중성과 객관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효경(孝經)》에도 맨 첫머리에 ‘중니 한가히 계시거늘……’하고 시작된다.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反]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니라.
【解釋】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을 하는 것이요, 소인의 중용에 [반하는] 것은, 소인으로 기탄이 없는 것이다.(제2절)
【解說】공자의 말은 제1절의 두 글귀뿐으로, 이 네 글귀는 그것에 대해 자사가 내린 해석이라고 하는 설이 보통 행해지고 있는데, 주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형적(形迹)은 없다. 제11장까지의 여러 장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장 전체가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이 글 가운데 제3구의 ‘소인지중용야(小人之中庸也)’는 위(魏)나라 왕숙(王肅)이 본 책에는 ‘소인지반중용야(小人之反中庸也)’로 되어 있어서, 정자도 그것을 옳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주자도 <반(反)>이란 글자를 넣어서 읽는다. 군자가 중용을 실천하고, 소인은 중용과 반대되는 일을 실천한다는 것은, 군자는 군자다운 덕을 가지고 그 위에 다시 때에 따라 중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소인은 소인 특유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조금도 싫어하거나 꺼리는, 즉 도덕과 법칙에 대해 어려워하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것은, 원래 <중(中)>이란 것이 정체(定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중이 <중용>이란 말로 변해 평상의 이치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뜻에 다름없는 것이다. 정자의 비유에 따르면, 우(禹)가 치수 공사에 몸을 바쳐 ‘내 집 문앞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우에 있어서 시중이며, 안연(顔淵)이 ‘누항(陋巷)에 있던’ 것은 안연에 있어서의 시중이었다. 군자는 <중>에는 일정한 실체 같은 것이 없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을 조심하고 듣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어떤 때에도 중 아닌 것이 없도록 힘쓰며, 소인은 그러한 도리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욕심을 멋대로 부리며 닥치는 대로 아주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제 3 장
子曰 中庸은 其至矣乎인저 民鮮能久矣니라.
【解釋】공자 말씀하시기를, “중용은 그 지극한저, 백성이 능히 함이 적은 지 오래다.”라고 하셨다.
【解說】중용의 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물론 <중>일 수가 없고, 조금만 미치지 못해도 물론 <중>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의 덕은 <지극한 것>, 즉 궁극적인 덕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렇긴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원래 그것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다같이 하늘에서 얻어 가진 것으로 거기에 도달하여 거기에 그것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학문-본래 그것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이 쇠퇴해져서 백성들이 도덕에 떨쳐 일어나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중용에의 능력이 결핍된 상태가 벌써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선능구의(民鮮能久矣)’를 정현(鄭玄)은 ‘사람이 능히 오래 행하는 일이 드물다.’라고 주하고 있다. 즉 ‘능함이 적은 지 오래다.’가 아니고, ‘능히 오램이 적다.’라고 새기는 것이다. 이것은 제7장에 ‘한 달도 능히 지키지 못한다.’고 한 것과 관련시켜 풀이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주자는 두 장은 각각 독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 장은 앞 장의 ‘소인은 중용에 반한다.’를 받고 있으므로 ‘능히 함이 적은 지 오래다.’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 대목은 거의 그대로의 모양으로《논어》옹야(雍也)편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능(能)이란 글자가 없다.
제 4 장
子曰 道之不行也를 我知之矣로다. 知者는 過之하고 愚者는 不及也니라. 道之不明也를 我知之矣로다. 賢者는 過之하고 不肖者는 不及也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한다. 도가 밝아지지 않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어진 사람은 지나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미치지 못한다.”(제1절)
【解說】이 장은 앞 장의 ‘백성이 능함이 적은 지 오래다.’를 받아, 공자의 다른 말을 들고 있다. 먼 옛날부터 <도>가 사람들에게 실천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고 있는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나 어진 사람은 지나치는 잘못을 범하기가 일쑤고, 어리석은 사람과 착하지 못한 사람은 미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도>란 것은, 천리의 당연히 그래야만 되는 것, 즉 <중>에 다름없다. 지혜와 어리석음, 착함과 착하지 못함이 지나치고 미치지 못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즉 그들이 타고난 기운에 지나침과 미치지 못한 차가 있는 데서, <중>을 잃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는 것에 있어서 지나친 정도에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행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보게 된다. 인식만이 과도로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경시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는 것에 있어서 미치지 못한다. 즉 인식이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실천을 해야 좋을지를 모른다. 도가 실천, 즉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 어진 사람은 행하는 것에만 지나치게 힘을 기울이기 때문에, 도를 알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착하지 못한 사람은 행하는 일에 있어서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을 탐구하려고도 않는다. 도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이 언제나 이러한 과오를 범한다고는 볼 수 없다. 불교와 노장 같은 경우는 지혜가 지나친 경우의 예가 되겠지만, 그러나 저 순(舜)과 같은 경우는, 몸은 성인이면서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으므로’ 지혜로운 사람의 지나침과는 관계가 없고, ‘두 끝을 잡아 그 중(中)을 썼다.’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의 미치지 못함도 아니다.(제6장 참조) 또 안회(顔回)가 어진 사람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래도 능히 ‘중용을 택했다.’고 했으므로 어진 사람의 지나침은 아니며, ‘복응(服膺)하여 잃지 않은’ 점을 보면, 착하지 못한 사람의 미치지 못한 것도 아니다.(제8장 참조)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면 반드시 잘못에 빠져, 도에 누를 미치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人莫不飮食也나 鮮能知味也니라.
【解釋】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맛을 아는 사람이 적다.(제2절)
【解說】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마시고 먹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참으로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적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성품>을 속에 간직하고 있어 <도>를 떠난다는 것은 한순간 한시각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백성은 날로 쓰면서 알지 못한다.’(《주역》繫辭上) 우리는 그것에 젖어버려서, 자각도 없고 반성도 하지 않는다. 지나치고 미치지 못하는 과오는 여기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난다.
제 5 장
子曰 道其不行矣夫인저.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도는 행해지지 않는구료.”
【解說】이 장은 앞 장을 이어받아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들어, 이것을 실마리로 다음 장으로 옮겨가는 역할을 한다.
앞 장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나는 안다.’고 한 것을 거듭 탄식한 것이다. <의부(矣夫)의 의(矣)는 단정(斷定), 부(夫)는 감탄하는 기분을 나타낸다. ‘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맛을 아는 사람이 적다.’라는 것으로,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알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그런 것이다. 제4장에서는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결국 자각이 없는 것, 즉 맛을 알지 못하는 것에 바탕한, 그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행해지지 않는> 일이 이끌려 나오게 되며, 그 행해지지 않는 것을 단서로 해서, 이번엔 거꾸로 제6장의 <아는> 일이 이끌려 나온다고, 어느 주자학자는 해설하고 있다.(《大全》)
제 6 장
子曰 舜其大知也與신저. 舜好問而好察邇言하시고 隱惡而揚善하시니라 執其兩端하사 用其中於民하시니 其斯以爲舜好이신저.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순(舜)은 그 대지(大知)인저, 순은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말을 살피기 좋아하며,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나게 하여, 그 두 끝을 잡아 그 중(中)을 백성에게 쓰니 이것을 가지고 순이라 하는 것인가.”
【解說】순이 위대한 지혜를 가진 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지혜에 맡겨 멋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받아들여, 온 천하의 지혜를 합쳐 한 사람의 지혜로 삼은 점에 의한 것이었다. 가까운 말이란 것은, 뜻이 알기 쉽고 우리가 항상 보고 듣고 하는 말, 즉 도리의 아주 비근한 말을 말한다. 순은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이를 좋아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을 잘 살펴 음미하고 고찰하기를 좋아했다. 그러고 보면, 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 착한 점을 놓치거나 지나쳐 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즉 그 어느 사람의 어떠한 좋은 점 좋은 말이라도 모두 다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좋지 못한 것은 이를 숨겨두고 입 밖에 내는 일이 없고, 좋은 것은 숨겨두는 일 없이 널리 이를 알린다. 순의 덕은 이같이 넓고 크고 밝게 빛나는 것이었으므로, 누구나가 순에게 선을 일러주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 끝>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틀린 경우, 결국 그것을 정리하고 압축시킨 형태에서 파악하면 갑(甲)과 갑에 반대되는 양쪽 끝, 즉 두 극단에 귀착되고 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논어》자한(子罕)편에 ‘두 끝을 두들겨 다한다.’고 한 그 두 끝이다. 무릇 모든 것은 다 크고 작고, 후하고 박하고……하는 것과 같은, 말하자면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것의 두 끝이 있다. 그 경우 중이란 것은 결코 기계적으로 한 복판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이른바 ‘하나의 꼭 좋은 곳’, 즉 꼭 알맞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를 들면 후하고 박한 것의 중이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 당연히 후해야 할 곳에 후하고, 당연히 박해야 할 곳에 박한 것은 역시 <중>임에 다름이 없을 것이다. 순이 모든 수단을 다해 거두어들이려고 했던 선, 이 선이란 것에도 물론 두 끝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두 끝을 잡아 잘 헤아려서 <중>인 곳을 찾아내고 파악하여, 그것을 백성들에게 적용한다. 그렇게 하면 선택-중을 마침내 골라내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타당한 것으로, 그 결과로서의 실천은 정말 완벽한 것이 될 것이다. 다만 이 경우 우리들에게 있어서, 말하자면 계기가 정밀하고 고장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지혜는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을 면하게 되고, 도는 참으로 행해지게 된다. 순이 순다운 점, 성인다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장에서는 유교다운 사고 방법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순이 성인인 까닭으로, 세론(世論)의 존중, 특히 비근한 말의 존중, 또 다른 사람의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낸다고 하는, 말하자면 처세술적인 마음가짐, 그런 점들은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에 있어서까지 두 끝이란 것이 상정(想定)된다고 하는 한 가지 일은 특히 지적해 두고 싶다. 선에 있어서까지 두 끝을 인정하고, 그 <중>-이 중도 결코 고정적인 그것이 아니고 이른바 시중(時中)이다.-을 골라내려고 하는 태도는 유교적인 생각으로서 가장 주목할 일이다.《예기(禮記)》에 ‘직정괴행(直情怪行)은 戎狄의 도다.(檀弓下)’라고 한 말이 있는데, 선을 실천하는데 있어서까지 열광적인 이상주의가 아니고 두 끝을 헤아려 그 중을 잡는다고 하는 냉정한 태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 7 장
子曰 人皆曰予知로되 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 而莫之知辟也라 人皆曰予知로되 擇乎中庸 而不能期月守也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다 내가 지혜롭다 말하나, 몰아 그물과 우리와 함정 속에 넣어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고, 사람이 다 내가 지혜롭다 말하나, 중용을 골라 능히 기월(期月)을 지키지 못한다.”
【解說】이 장은 앞 장의 ‘순은 대지’라고 한 <대지>를 이어받고 있다. 앞 장에서 지에 대해 <대지>라고 하는 최고의 곳까지 말했으므로, 지금은 방향을 바꾸어, 지혜가 있다고 자칭하면서도 참다운 지혜가 되기 위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한 예를 들고 있다. 동시에 또 밝지 못하다는(不明) 주제까지를 가지고 나와, 다음 장에 옮겨가는 실마리를 삼고 있다.
고(罟)는 그물, 화(擭)는 절로 잠기도록 된 우리, 함정은 땅 속으로 떨어지게 만든 구덩이, 어느 것이나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한 것이다. 새나 짐승을 뒤쫓아 그물과 우리와 구덩이에 걸리거나 빠지게 할 경우, 새와 짐승은 피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자기 자신은 화(禍)가 어떤 것인가 그것이 어떻게 해서 찾아오는가를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화에 대해 아무리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그 화를 피할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피하지 못하거나 하면, 참다운 지혜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한 것은 물론 아래의 말을 꺼내기 위한 비유다. 즉 아무리 자기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또 지나치고 미치지 못한 두 끝 가운데서 중용을 골라 낼만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중용을 기월(期月), 즉 한 달 동안도 제대로 지니고 있을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지혜롭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知)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중용에 관한 일이다. 어떤 지혜라도 중용을 실천하는 점에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참다운 지혜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제 8 장
子曰 回之爲人也는 擇乎中庸하야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회(回)의 사람됨이, 중용을 택하여 하나의 선을 얻으면 곧 권권복응하여 잃지 않는다.”
【解說】회(回)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 안연(顔淵)의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자(字)라고 하는 것이 있어 보통 남이 부를 때나 제삼자로 언급이 될 경우는 자를 쓰게 되어 있었다. 중간에 와서는 자 외에 호(號)란 것이 또 있어, 호가 옛날 자와 같은 구실을 했고, 지금은 자는 없고 호만이 있어, 옛날 자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어려서는 이름을 부르고, 학식과 덕망이 있으면 호를 부르는 까다로운 구별이 있었다. 그러나 옛날이든 뒤에서든 아무리 자가 있고 호가 있어도 임금과 스승과 부모만은 이름을 부르게 되어있었다.《논어》에도 일반적으로는 안연(顔淵)과 같이 자를 쓰고 있는데 공자가 부르거나 공자 앞에서 말할 경우는 회(回)라고 이름을 부르게 되어있다.
안회란 어떤 인물인가. 우선 무엇보다도 중용을 선택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중용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그런데 안회의 경우, 단순히 중용을 선택하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중용의 선을 하나 선택하게 되면 그것을 꼭 잡고 가슴 깊이 간직하여 끝까지 굳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권권(拳拳)은 두 주먹에 꼭 쥐어잡고 행여나 놓칠세라 조심해서 받들고 있는 모양, 복응(服膺)의 복(服)은 입는다, 갖는다 하는 뜻, 응(膺)은 가슴, 즉(한 가지 선, 즉 중용을) 공손히 두 손에 잡고 가슴(심장) 속에 꼭 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일선(一善)의 뜻을 주자는 주석을 하지 않고 있는데,《혹문(或問)》에 인용한 여씨(呂氏)의 설에 준하여 생각하면 단순히 하나의 착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선(즉 중용)을 말하는 것 같다. 안자는 참으로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선택하는 것만이 아니고, 또 잘 지켰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알기만 한 것이 아니고 실천까지 한 것이다. 이러면 이 실천은 곧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것을 면한 중용의 실천으로, 이래야만 도는 밝게 된다. 즉 참다운 의미에서 파악되어 빛나게 되는 것이다.
제 9 장
子曰 天下國家도 可均也며 爵祿도 可辭也며 白刃도 可蹈也로되 中庸은 不可能也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천하와 국가도 고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도 사양할 수 있고, 흰 칼날도 밟을 수 있으나,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
【解說】앞 장에서 안자와 같은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물을 찍어내어 중용의 어려움을 말한 것을 이어받아, 이 장은 중용이 ‘평상의 도리’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것의 인식과 실천은 실상 대단히 어려운 것임을 강조한다. 균이란 것은 고르게 하는 것으로, 정치를 고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세상을 균등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집과 나라와 천하를 불공평함이 없이 고르게 다스리는 것, 그것은 유교의 입장에서 말해 이상적인 정치이기는 하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작위와 봉록을 사퇴하는 것, 그것도 불가능할 것은 없다. 날카로운 칼날 위를 맨발로 지나가는 것, 그것마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용이라고 하는 것만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 나와 있는 천하 국가 운운과 작록 운운과 흰 칼날 운운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범주에서 말하면, 지(知)ㆍ인(仁)ㆍ용(勇)(제20장 제7절)에 각각 해당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천하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란 것도 또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 지극히 어려운 것이기는 하나, 반드시 중용에 합치시킬 필요는 없으며, 타고난 성질이 지, 인, 용 어느 것에 접근해 있으면, 노력 여하로 고르게 할 수도 있고, 밟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용은 알기가 어렵다거나 행하기가 어렵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얼른 보아 이 셋처럼 어렵지 않을 것처럼 보이나, 실상인즉 인(仁)이 성숙되고 의가 정밀하지 못하면, 달리 말해서 인욕(人欲)이라는 사사로움(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반드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능히 하는 일이 적다.’(제3장)고 하는 것은 여기에 이유가 있다. 중용을 능히 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강(强)>을 말하는 제10장으로 옮겨간다. 다만 이같이 설명하는 것에서 오해를 해서는 안 될 것은, 중용은 이 세 가지 외에 따로 중용이라고 하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셋을 꼭 맞게 해낼 수 있으면, 그것이 곧 중용이다.’(《어류》)
한편 이 대목에 대한 주자의 주는 책에 따라 같고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뜻에 있어서는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는 들지 않는다.
제 10 장
子路問强하니
【解釋】자로(子路)가 강(强)을 물었다.(제1절)
【解說】이 장은 앞 장에서 중용을 택해서 지켜 나가는 것이 극도로 곤란하다는 것을 말하고, 그 극도로 곤란한 것을 극복하여 중용의 실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강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사(示唆)한 그것을 이어받아 <강(强)>의 갖가지 모양과 참다운 강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서는 ‘용기를 좋아한’ 인물로 유명한 자로(子路-本名은 仲田. 字路는 그의 字)의 “강이란 어떤 것입니까?”하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
子曰 南方之强與아 北方之强與아 抑而强與아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남쪽의 강이냐, 북쪽의 강이냐, 아니면 너의 강이냐.”(제2절)
【解說】그러나 강이라고 하더라도 똑같은 것이 아니다. 남쪽과 북쪽 즉 중국 남쪽 지방의 강과 북쪽 지방의 강은 서로 틀리며, 또 너의 즉 자로 자신의 과제로서의 강이란 것을 따로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이강(而强)>의 이(而)는 너(汝)라는 뜻으로, 너의 강이란 자로를 포함한 일반 학문하는 사람, 도를 배우는 사람, 즉 참으로 사람이 되려고 자각적으로 사색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寬柔以敎하고 不報無道함은 南方之强也니 君子居之니라.
【解釋】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을 가지고 가르쳐, 무도한 것을 갚지 않는 것은 남쪽의 강이니, 군자가 거(居)한다.(제3절)
【解說】너그럽고 부드럽다는 것은 남을 포용하는 넓은 도량과 겸손하고 온순한 것을 말한다. 그것을 가지고 가르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가르쳐 인도해 주는 것. 무도(無道)를 갚지 않는다는 무도는 포악무도하다고 할 경우의 무도니, 도리를 무시한 억지를 말한다. 갚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가 그러한 무도한 짓을 해 오더라도 오로지 그것을 받을 뿐, 결코 포악은 포악으로 갚는다는 식의 보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국 남쪽 지방은 사람들의 기풍이 부드럽고 순하기 때문에, 포용력과 인내력으로 남을 이기는 것을 강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군자(이 경우의 군자는 제5절의 군자와는 달리, 단순한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의 뜻.)인 사람이 몸을 두고 있어야 할 강은, 이와 같은 남방적인 강이 아니면 안 된다.
袵金革하야 死而不厭은 北方之强也니 而强者居之니라.
【解釋】금혁(金革)을 깔고, 죽어도 싫다고 하지 않는 것은 북쪽의 강이니, 강한 사람이 거한다.(제4절)
【解說】이와는 달리 기풍이 강경한 중국 북부 지방에서의 강은 금혁, 즉 무기인 쇠와 갑옷, 투구 등의 가죽을 깔고 덮는 이부자리처럼 알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며, 싸우다 죽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거나 꺼리지 않는 그러한 강이다. 즉 과감한 힘으로 남을 이기는 것이, 북쪽에서는 강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같은 강을 강으로 하는 것은 단순한 강자만이 하는 짓이다.
이 둘은 어느 것이나 ‘이의(理義)의 강’은 될 수 없다.(《어류》) 남방의 강은 말하자면 <미치지 못한 것>이고, 북방의 강은 <지니친 것>에 속하는 것이리라.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이의의 강, 즉 단순한 기풍에 규정된 기질에만 바탕한 강이 아니고, 도리에 입각한 강(학문에 의해 도달되는 강), 그것만이 너의 과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어류》의 이의의 강에 관해서는 ‘혈기의 노여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을 참고삼아 인용해 둔다.(《맹자》梁惠王下의 集註에 인용한 張栻의 말.)
또 남족과 북쪽에 대한 당(唐)나라의《예기정의(禮記正義)》의 이 대목은 ‘남쪽이란 것은 형양(荊陽)의 남쪽, 그곳은 양(陽)이 많고, 양기는 서산(舒散)해서 사람의 감정은 너그럽고 느리고 화하고 유하다.’ ‘북쪽이란 사막의 땅, 그 땅은 음(陰)이 많고, 음기는 편급(褊急)하기 때문에 사람은 날 때부터 강맹(剛猛)해서 항상 싸움을 좋아한다.’고 주석한다. 형양의 남쪽이란 지금의 광동성 근처를 지적한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충청도 성질과 평안도 성질이, 여기 말한 남쪽의 강과 북쪽의 강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故로 君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여 中立而不倚하니 强哉矯여 國有道면 不變塞焉이니 强哉矯여 國無道면 至死不變하니 强哉矯여.
【解釋】그러므로 군자는 화하여 흐르지 않나니, 강하도다 교함이여, 중립하여 기울지 않나니, 강하도다 교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니 면색(塞)을 변하지 않나니, 강하도다 교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않나니, 강하도다 교함이여.(제5절)
【解說】이 한 대목은 네가 장차 목표로 해야 할 강을 말한다. 군자란 것은, 제3절의 ‘군자가 거한다.’의 군자가 극히 가벼운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의 뜻인데 대해, 여기 있는 군자는 정통적인 유교의 이상적 인격으로서의 군자다. 너, 군자로서 목표로 삼아야 할 강은 아래 네 가지 점에 있다고 한 것이다. ‘강하도다 교함이여!’라고 한 <교(矯)>는《시경》노송(魯頌) 반수(泮水)편에 있는 ‘교교(矯矯)한 호신(虎臣)’의 교로, 강한 것을 형용하는 말, 즉 교하게 강하다는 뜻이다. 군자다운 사람의 강은, 남쪽의 강도 북쪽의 강도 아니고, 우선 첫째로, 화하여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화하여 흐르지 아니한다.’는《논어》의 ‘화하여 동(同)하지 않는다.(子路)’와 같은 표현으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다른 사람과의 화(和-和合)라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일 수 있지만, 다만 그 경우 화가 자칫 자기 입장을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남에게 이끌려 흐르기 쉽다는 점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화하면서도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비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로, 중립하여 기울지 않는 중립은 글자 그대로 한 가운데 서는, 전후좌우의 한 가운데 서는 것, 기울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말을 바꾸어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가운데 서면 어느 쪽으로든 기울기 쉬운 것을 의지적으로 중립을 유지한다. 한가운데 계속 서 있는 것은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셋째로, 나라에 도가 있으면 색(塞)을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색은 막힌 때란 뜻으로, 아직 출세를 하지 못하고 집에서 수양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 나라에 도가 실현되어있을 경우는, 과거에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때의 지조를 변치 않는다. 즉 높은 지위에 올라 있더라도 부귀에 물드는 일이 없이 평소의 참된 생활을 그대로 지켜나가고, 넷째로, 나라에 도가 없어 어지러운 세상일 경우에는, 벌써 부귀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군자로서 도저히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그러나 그 경우라도 평소에 지니고 있던 지조를 끝까지 지켜나간다. 이상 말한 네 경우는 이른바 ‘중용은 능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낼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것을 ‘택하고 지킨다.’는 것은 도저히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군자의 강이란 것은 중용에 다름이 없다. 중용의 강보다 나은 강은 없다. 공자가 이 넷을 자로에게 말한 것은, 자로의 혈기(血氣)의 강을 누르고, 그로 하여금 덕의(德義)의 용맹에 나아가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나라에 도가 없으면……, 천하에 도가 있으면……천하에 도가 없으면……, 다스려지면……어지러우면…….’하는 식의 말은 유교의 경전에는 아주 많은 표현으로 각각의 경우에 처세의 태도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유교적인 인간론의 극히 주목해야 할 특징으로 생각된다.
제 11 장
자사(子思)가 제2장에서부터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제1장의 설명을 해온 것은 일단 제11장으로 끝을 맺게 된다.
子曰 素隱行怪를 後世 有述焉이나 吾弗爲之矣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숨은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것을, 후세에 말하는 사람이 있겠으니, 나는 하지 않는다.”제1절)
【解說】소은(素隱)은《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이 한 대목을 인용한 곳에서는 색은(索隱)으로 되어있다. 아마 그것이 바른 것으로,<소(素)는 색(索)과 글자모양이 흡사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리라. ‘숨은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한다.’는 것은 숨은 까다로운 이치, 즉 보통은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독특한 도리를 억지로 찾아내기도 하고(知),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行). 그러면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칠 수 있기 때문에, 뒷세상에 혹 이런 것을 말하며 그것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공자가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같은 일을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같은 것은 지(知)라고 하는 점에서 보면 앎이 지나친 것이 되고, <선을 택하지> 않는 것이 되며, 행(行)의 관점에서 말하면 행동의 지나친 것이 되고, <중을 쓰지> 않는 것에 다름없다. 힘쓰지(强) 않을 것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성인이 할 리가 없다.
한편 ‘색은(索隱)’을 해석하여 ‘깊이 은벽(隱僻)한 이치를 찾는다.’고 한 것은, 한대(漢代)의 학자들이 재이(災異)를 말하는 따위를 가리키는 것이냐는 질문에 주자는 “한나라 때 선비들의 재이에 대한 설은 그래도 당연한 곳이 있다. 전국시대 추연(鄒衍)의 오덕(五德-五行)의 설, 후한의 참위설(讖緯說) 같은 것이야말로 은벽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다만 여기서 설명은 약한다.
君子, 遵道而行타가 半途而廢하나 吾弗能已矣니라.
【解釋】군자가 도를 따라 행하다가, 반도에서 그만두나니, 나는 능히 그만두지 못한다.(제2절)
【解說】‘색은행괴’가 지나친 경우에 대해서, 이번엔 반도, 즉 중도에서 그만두는 미치지 못한 경우다. 세상 군자들은 도를 따라 행한다. 즉 도를 실천하고 있다. 즉 능히 ‘선을 택하기는’ 하나, 도중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힘이 부족한 때문인 것이다.(《논어》雍也) 여기 말한 군자는 앞의 장 제3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의미의 군자다. <반도(半塗)>의 도(塗)는 도(途)와 같다. 반도는 가던 도중이란 말이다. 지금의 경우는 아는 면에서는 충분하여 미치고 있으나, 행하는 면에서는 힘이 부족하여 불충분하고 미치지 못해 있다. 즉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힘써야 할 일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만 둘 수가 없다고 공자는 말하는 것이다. 하기는 공자의 경우는 도중에 그만두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여 힘쓰는 그런 것은 아니다. 성인은 그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지성(至誠)으로 쉬는 일이 없어’(제26장), 절로 그만둘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 성인의 ‘지성으로 쉬는 일이 없는 것’은 실은 ‘하늘의 도가 건(健)해서 쉬는 일이 없다.’(《주역》乾卦)는 것에 대응해 있는 것으로, 중국에 있어서의 성인이란 것을 생각함에 있어 그 위에 주의해야할 시점(視點)이다. 여기에는 말하자면 자연주의적 이상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도는 몸이 없는 성인이요, 성인은 몸을 가진 도다.’(《朱子語類》)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하나니 唯聖者, 能之니라.
【解釋】군자는 중용에 의지하여, 세상을 숨어 앎을 보지 못해도 뉘우치지 않나니 오직 성자만이 능히 한다.(제3절)
【解說】이리하여 숨은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것을 일삼지 않게 되면 자연 중용에 의지하게 될 것이며, 즉 중용을 표준으로 하게 될 것이며, 어떤 곤란에 부딪치더라도 도중에 그만두는 일이 있을 수 없게 되면, 그같은 군자는(물론) 이 경우도 앞절에 있는 군자와 다른 참다운 군자) 세상을 피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활을 하며 후회를 하지 않게 될 수밖에 없다. 즉 세상에서 버림을 당해도 후회가 없는 중용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중용의 덕의 완성이며, 지(知)와 인(仁)의 극치로 용(勇)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여유작작인 것으로, 이거야말로 공자 자신에 다름없다. 그러나 공자는 감히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다.”(《大全》)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2장부터 제11장까지의 요지는, 중용의 덕을 논하면서(제2장 참조) ‘그 방법이 지인용(智仁勇)의 세 달덕(達德)의 도에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말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먼저 순과 안연과 자로를 끌어내어 그것을 증명했다. 순은 지, 안연은 인, 자로는 용, 셋 중에 하나만 빠져도 도에 도달하여 덕을 완성할 수는 없다. 한편 제2장에서 제11장에 관련된 것은 제20장으로, 그것은 앞의 것의 보유 혹은 완성으로서 읽을 수가 있다.
제 12 장
이 장은 자사(子思) 자신의 말로서 첫장의 ‘도는 떠날 수 없다.’고 말한 점을 해명한 것이다. 계속되는 여덟 장, 즉 제20장까지도 공자의 말을 인용하는 등 이 점의 설명에 힘쓴다.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解釋】군자의 도는 비(費)하고 은(隱)하다.(제1절)
【解說】‘비(費)란 것은 용(用)이 넓은 것이고, 은(隱)이란 것은 체(體)의 미(微)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주자의 주다. 물론 여기서 체니 용이니 하는 것은 도의 체와 용으로, 군자가 밟고 지나가야 할 도는 은(隱)하다. 즉 체가 미(微)하다는 것은, 은은 현(見-現)의 반대로, 도의 본질, 본체는 감각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용은 참으로 넓고 여러 가지다. 용이란 것은 형이하학적인 것, 오늘의 말로 현상(現象), 작용을 말한다.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되 及其至也하야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知焉이라. 夫婦之不肖로도 可以能行焉이로되 及其至也하야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能焉이라 天地之大也도 人猶有所憾이라. 故로 君子語大면 天下莫能載焉이오. 語小면 天下莫能破焉이니라.
【解釋】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함께 알 수 있으나,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부부의 착하지 못함으로도 능히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능히 못하는 바가 있다. 하늘과 땅의 큰 것으로도, 사람은 오히려 안타까워하는 바가 있나니,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가 능히 받아들일 수가 없고,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가 능히 깰 수 없다.(제2절)
【解說】여기서는 도의 역설성(逆說性)을 다시 강조한다. 부부를 정현의 옛 주에서는, 필부필부(匹夫匹婦), 즉 천한 한 명의 남자, 천한 한 명의 여자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주자는 부부거실(夫婦居室), 즉 남편과 아내가 부부로서 같이 생활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군자가 밟고 지나가야 할 도는 가장 가깝게는 부부의 생활에서부터, 가장 멀리는 성인도 다 알 수 없고, 하늘도 다 덮을 수 없고, 땅도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물의 다수성과 다양성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즉 도의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가까운 것으로는 부부생활이라는 비근한 곳에 나타나 있는 것이므로, 따라서 아무리 무지한 부부라도 함께 알 수가 있고, 함께 그 인식에 참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똑같은 도는 용(用-現象面)의 극치에 있어서는 성인으로서도 완전히 다 들 수가 없고 완전히 다 인식할 수가 없다. 도란 것은 또, 아무리 못난 부부라도 그것을 실천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현상적인 극치의 전개를 논하면, 성인이라 하더라도 완전히는 다 실천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단순히 성인만이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하늘과 땅은 도(道) 그 자체로써 다시 없이 큰 것이지만, 그 하늘도 만물을 낳고 덮을 수는 있어도 실을 수는 없는 것이며, 땅은 모양을 만들고 실을 수는 있지만 이를 덮을 수는 없는 것이며, 나아가 천지의 작용으로서 음양과 한서(寒暑), 길흉과 재상(災祥) 등이 올바로 나타나지 않는 일이 자주 있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 있어서도 도가 완벽하게 다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도의 용, 즉 현상 혹은 작용으로서의 도의 모습은 이토록 광대무변하다. 참으로 도를 파악하고 있는 군자의 눈으로 보면 도의 현상의 광범위함은 그보다 더 밖의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큰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또 도의 현상의 작은 것으로 말하면, 그 작은 것은 이제 그보다 더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것이어서, 그것을 깨고 나눌 능력을 가진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많은 것에서부터 지극히 작고 지극히 적은 것에 걸쳐 전개하고 있는 현상과 작용의 다양하고 무수한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비(費)>인 것이다. 즉 도의 용이 광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의 현상의 ‘그러한 까닭’이 되어 있는 이치(道)는, 누구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숨어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광대무변한 현상계를 떠나는 일이 없이 어디까지나 존재해 있다. 어디까지고 용에 따라 체는 존재해 있는 것이다. <비하고 은하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말하자면 도의 용 가운데서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전체를 꺼내 말한다면 즉 낱낱이 들어 말한다면, 아무리 성인이라도 그것을 완전히 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지극함에 있어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고, 능히 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그 뜻이다. 이 지극(至)이란 것은 제26장 제9절의 <무궁(無窮)>과 마찬가지로 질적으로 풀이할 것이 아니고, 양적으로 외연적(外延的)으로 풀이해야 된다. 즉 전부를 하나하나 다 들어 나가게 되면 그 끝에 가서는 성인으로도 알지 못하는 부분, 행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정자의 제자 후사성(侯師聖)의 설에, 성인이 알지 못하는 것이란,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배운 것이라든가 공자가 담씨(郯氏)로부터 관직(官職)에 관한 것을 배웠다든가 하는 것(《左傳》昭公 十七年)이 그것이며, 또 성인이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이란, 공자가 지위를 얻지 못했다든가, 요순이 <널리 베푼다>는 점에서 결함을 면치 못한(《논어》雍也)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런 점은 중국에 있어서의 성인이란 것을 생각하는 데 극히 흥미있는 점이다. 성인이 하느님이 아니고 전지전능이 아니라는 점은, 여기에는 논해지고 있지 않은 성인의 복수성(復數性)과 함께 주의할 필요가 있다. 주자는 성인을 오로지 하늘의 이치에 순수하고 사람의 욕심이 섞이지 않은 인격이라고 정의내리고, 그 전형으로서 공자를 생각했다. 그러나 성인의 역사적 복수성, 능력적인 제한성과 그 정의와의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것을 행한 것은 명나라 왕양명으로, 그는 이윽고 유명한 ‘거리 안(街中)이 성인(聖人)이다.’라는 대담한 명제를 제시했다.(《傳習錄》上下) 한편 성인으로서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는 예로, 공자가 지위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어류》에 다음과 같은 한 대목이 있다. 물었다. 녹과 지위와 이름과 수명은 사람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것, 즉 하늘이다. 성인이라고 능히 얻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답했다.《중용》에는 분명히, 큰 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는다.(제17장)고 규정되어 있다. 공자는 큰 덕을 가진 분이었는데, 지위를 얻지 못했다. 분명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자가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은 이미 말했듯이 후세의 공자론을 이론적(?)으로 상당히 다채롭게 하고 있는데, 그 경우, 그것을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어찌해볼 수 없는 천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자의 이 대답은 상당히 대담하다고 할 수 있다.
詩云 鳶飛戾天이어늘 魚躍于淵이라 하니 言其上下察也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가 못에 뛴다.’고 하였다. 그 위와 아래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 것이다.(제3절)
【解說】시는《시경》대아 한록(旱麓)편이다. 여(戾)는 이른다(至)다. 찰(察)은 밝게 드러난다(明著)는 저(著)의 뜻이다. 똑똑하고 분명한 것을 말한다. ‘솔개가 하늘로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고기는 못에서 뛰논다.’고 하는 이 글귀를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것을 시에 의해 요약했다. 도, 즉 천리가 우주 사이를 유행하여 만물을 생생화육(生生化育)하는 모습은, 숨은 곳 없이 하늘에도 땅에도 명명백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도의 용>에 다름없는, 이른바 <비>인 것이다. 다만 그 경우 하늘에서는 솔개, 땅에서는 고기-아니, 다시 사람의 일에까지 미쳐서 말하면, 일상생활 가운데 부부가 알고 할 수 있는 것, 성인도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 두루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는 <용>도, 그 내부에는 반드시 ‘그것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까닭의 것, 체(體)’가 있는 것으로, 다만 시각 청각 등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이른바 <은(隱)>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말 밖의 뜻으로 읽어 알지 않으면 안된다.
정자는 “이 한 절은 자사가 끽긴(喫緊)하게 사람을 위해서 한 곳으로 활발발지(活潑潑地-生氣潑剌)하다.”고 말하고 있다. 끽긴하게 사람을 위해서 한다는 것은 다 두고라도 우선 이것만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사의 깊은 생각의 발로라고 말한 것이다. 도라는 것은 공중에 솔개가 날고 냇물에 고기가 뛰놀고 있는 그것이라고 하지만, 까다롭게 따진다면 역시도 그것은 아니고 도의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용은 필경 뒤집어 놓으면 체다. 도는 활기가 발달한 것이다.
이 시는 우주적인 대긍정(大肯定)의 기분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뒤에 애용되고 있는데, 결국 “선종(禪宗)에서 청청(靑靑)한 녹죽(綠竹)은 진여(眞如) 아닌 것이 없고, 찬찬(粲粲)한 황화(黃花)는 반야(般若) 아닌 것이 없다.‘고 한 것과 아무런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불교에 있어서는 그 발현(發現)이 전혀 질서를 무시한 것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모두 일정 불변한 분(分)이 있는 것을 무시하고, 자식의 분(分)에 있으면서 아비를 버리고 출가(出家)하고, 신하의 분에 있으면서(중으로서) 임금의 절을 받고 하는, 그곳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語類》) 한편 이 <활발발지>란 말에 대해서 주자는 이것은 선종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고 보통 속어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유학자인 정자가 그것을 했다고 해서 안될 까닭은 조금도 없다고 변명을 하고 있는데 이 변명을 억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활발발지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살아 펄펄하다는 뜻이다.
지(地)는 적(的)과 마찬가지로 <디>로 발음이 되기 때문에 서로 통용되고 있는데, 어떤 말을 형용사로 만들거나 부사로 만들거나, 또 소유격으로 만들 때 쓰이는 것이다. 결국 일반이 쓰고 있는 말을 반대학파나 종교에서 먼저 썼다고 해서, 이를 써서 안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주자의 견해인데, 그런 용어에까지 배타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형식주의적 학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君子之道는 造端乎夫婦나 及其至也하야는 察乎天地니라.
【解釋】군자의 도는 끝을 부부에서 짓나니,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제4절)
【解說】이것은 결국 이 한 장을 총괄한 것이다. 군자가 밟아야 할 길은, 그 실마리는 부부생활에서 먼저 형성이 되는 것이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인륜(人倫) 가운데 가장 친밀한 것으로, 그 부모나 형제에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내에게는 말하게 된다.’ 그처럼 가장 가깝고 가장 직접적인 곳에서 먼저 도는 발현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극도로 전개되면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 즉 전 우주에 명명백백하게 펼쳐진다.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의 지극(至)도 제2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양(量)의 극지(極至)>를 말한다. 즉 이 제12장은 최초의 일곱 글자를 제외하고는 표면상 전장(全章)이 모두 비(費) 만을, 즉 도의 현상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제 13 장
앞 장의 머리말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서 잠시 도의 떠날 수 없는 성질이 여러모로 설명되고 있는데 주자가 그것에 주석을 할 때 앞 장 첫머리의 ‘비하고 은하다.’고 하는 규정을 이용하는 일이 많다. 이 장은 도의 ‘떠날 수 없고 사람에게 멀지 않다.’는 점을 <비(費)>의 면에서 말한다.
子曰 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게 멀지 않다. 사람이 도를 하되 사람에게서 멀면, 그로써 도라 할 수 없다.”(제1절)
【解說】도란 것은 첫 장에도 있듯이 성품에 따르는 것이다. 성품은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깝기로 말하면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고, 뭇사람이 잘 알 수 있는 것, 잘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 것이다. 도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 비근한 것을 싫어하여 종사할 것이 못된다고 보고, 반대로 높고 멀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려고 힘쓰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같은 것은 도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장은, 맨 첫구의 ‘도는 사람에게 멀지 않다.’고 한 취지를 여러모로 설명하며 도가 떠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詩云 伐柯伐柯여 其則不遠이라. 執柯以伐柯하되 睨而視之하고 猶以爲遠이라. 故로 君子는 以人治人하다가 改而止하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도끼자루를 베는 것이여, 도끼자루를 베는 것이여, 그 법이 멀지 않다.’고 했다. 도끼자루를 잡고 그로써 도끼자루를 베어도, 흘겨보며, 오히려 그로써 멀다고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려, 고쳐야 그만둔다.(제2절)
【解說】《시경》빈풍(豳風) 벌가(伐柯)의 시다. 가(柯)는 도끼자루. 칙(則)은 법칙. 예(睨)는 비스듬히 곁눈으로 바라보는 것. 시의 뜻은, ‘도끼자루를 만들 생각으로 나뭇가지를 자를 경우, 그 길이와 굵기를 정하는 기준과 만드는 법칙은 아무것도 멀리 구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려고 할 경우 베는 것은 다름아닌 도끼자루를 쥐고 베는 것이므로, 조금만 눈을 돌려 손에 잡은 도끼자루를 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기가 베려고 하는 나뭇가지, 즉 곧 만들어야 할 그 도끼자루와 지금 바로 그가 손에 잡고 있는 법으로 삼아야 할 이 도끼자루와는 여전히 각각 다른 것임을 면치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는 사람으로 말하면 여전히 둘 사이는 <떨어져> 있어서, 역시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비유로써 손에 쥐고 있는 도끼자루보다도 더 사람에게 가까운, 가깝다기보다 사람 그 속에 내재해 있는 법(則), 즉 도의 <멀지 않음>을 강조했다. 만일 사람을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는, 즉 어느 사람이 같은 사람인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꾸짖을 경우,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렇게 하게 되면, 사람이 된 까닭의 도는 그 사람의 몸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리와 구별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릴 때는 ‘그 사람의 도를 가지고 돌이켜 그 사람의 몸을 다스린다.’는 방법을 취하게 되는 것으로, 그 사람이 올바로 고치게 되면 그것으로 그만두고 더 이상 다스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를 책할(누군가에게 요구할) 경우, 그 사람이 능히 알 수 있는 것,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을 책한다는 것이며, 사람에게서 먼(인간성을 무시한) 곳에 도를 상정(想定)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장횡거(張橫渠)가 “뭇사람을 가지고 사람에게 바라면 따르기 쉽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뭇사람, 즉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람에게 바라게 되면, 그 사람은 쉽게 이쪽이 바라는 것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란 뭇사람의 도이며, 뭇사람이 능히 알고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문(經文)에 ‘고쳐야 그만둔다(改而止).’고 일부러 써 둔 것은, 무릇 도덕의 세계는 오직 선과 악이 대립해 있는 세계로서, 선하지 않으면 곧 악이요, 악하지 않으면 곧 선이기 때문에 능히 고치면 그것이 바로 선인 것으로, 새삼 다시 선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忠恕는 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遠을 亦勿施於人이니라.
【解釋】충서(忠恕)는 도를 떠남이 멀지 않다. 내게 베풀어 원하지 않으면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제3절)
【解說】충서라는 것은《논어》이인(里仁)에 나오는 유명한 말인데, 충이란 것은 내 마음을 다하는 것, 서라는 것은 나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 그러나 충서라고 붙여서 말한 경우는, 오히려 서의 뜻 쪽이 무겁고 충은 말하자면 서의 뒷받침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도를 떠난다는 위(違)의 뜻은 멀리 떠나버린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것과 저것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도를 떠난다는 도는, 맨 처음에는 ‘사람에게 멀지 않다.’고 한 그 도를 가리킨다. 내게 베풀어 원치 않거든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고 한 베푼다(施)는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에 대해 남이 해서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그런 일은, 나도 남에 대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논어》의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논어》衛靈公)와 같은 것으로,《논어》에는 그것이 서(恕)라고만 되어있는데, 그것이 여기서는 <충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충>이란 글자의 뜻이 가볍고, 뜻의 중심이 <서>에 있는 것은 이것으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마음을 가지고 남의 마음을 헤아릴 경우, 피차 아무런 틀리는 점이 없다고 하는 점에서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前節)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해선 안된다는 것도, 역시 사람에게서 먼 곳에 도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냄이다. 장횡거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면 인(仁)을 다하게 된다.’고 말한 것은 그런 뜻이다. 장횡거가 여기서 ‘인을 다한다.’고 말하여 <인>이란 글자를 내놓고 있는 것은, 충서는 ‘도에서 멀지 않다.’ 즉 얼마만큼은 역시 도와의 사이에 거리가 있긴 하지만, 실천에 의해 다음 단계로 인에 들어가 여기서 ‘인을 다한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충서라면, 다만 성(誠)이라든가 인(仁)이라든가 말할 수 있을 뿐, <다한다>든가, 나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미룬다(推)>든가 하는 말을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성인이 아닌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하든가 미루든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어류》)
君子之道四에 丘未能一焉이라. 所求乎子로 以事父를 未能也요 所求乎臣으로 以事君을 未能也요 所求乎弟로 以事兄을 未能也요 所求乎朋友로 先施之를 未能也니라.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야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어든 不敢盡하야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胡不慥慥爾리오.
【解釋】군자의 도가 넷인데, 구(丘-孔子의 이름)는 하나도 능히 하지 못한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을 가지고 아비를 섬기는 것을 능히 하지 못하고 신하에게 바라는 것을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것을 능히 하지 못하고, 아우에게 바라는 것을 가지고 형을 섬기는 것을 능히 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바라는 것을 가지고 먼저 베푸는 것을 능히 하지 못한다. 떳떳한 덕을 행하고 떳떳한 말을 조심하여, 부족한 것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아니치 못하고,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하여, 말은 행하는 것을 돌아보고, 행하는 것은 말을 돌아본다. 군자가 어찌 조조(慥慥)치 않으리요.(제4절)
【解說】군자가 밟아가야 할 도가 넷이 있는데 나는 그 중 하나도 제대로 충분히 실천할 수가 없다고 공자가 탄식하는 것이다. 구(丘)는 공자의 이름, 이 네 가지 도를 아래에 열거한다. ‘먼저 첫째로,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고 내가 자식에게 바라는 그대로 내가 부모를 섬기는 것이 내게는 아직 잘 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신하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내 신하에게 바라고 있는 그대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내게는 아직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내가 내 아우에게 바라고 있는 그대로 내 형을 섬기는 것이 아직 나로서는 잘 되지 않는다. 친구에게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친구에게 행하는 것을 나는 아직 제대로 못하고 있다. 도란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모두 도로서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 즉 인간으로서의 이상이며 규범이다. 그러므로 남에게라는 것을 방향을 거꾸로 하여 자신에게 요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로서, 나는 아직도 이것을 생각대로 잘하지 못한다.’고 공자는 겸손한 말을 한 것이다.《논어》에서도 공자는 “군자의 도가 셋인데 나는 능히 하는 것이 없다.”(《논어》憲問)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말을 계속하여, “떳떳한 덕을 실천할 것, 그리고 많은 말 가운데 떳떳한 말을 골라내어 그것을 진지하게 지켜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떳떳한 덕이라는 용덕(庸德)의 용(庸)과, 떳떳한 말이라는 용언(庸言)의 용(庸)은, 중용이라는 용과 같은 뜻으로 일상생활에 늘 행하고 말하는 당연한 것들을 의미한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그러나 변하지 않는 정통적인 특성을 지닌 덕과 말, 그것이 떳떳한 덕이고 떳떳한 말이다. 만일 덕에 충분치 못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완전히 하려고 힘쓰기 때문에, 행동은 더욱 더 노력적으로 된다. 지나친 것으로 흐를 염려가 있는 말에 대해서는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토해버리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므로, 조심하는 것은 더욱 더 완전하게 된다. 조심하는 것의 극치는, 말이 행위를 돌아보아 말이 제멋대로 혼자 달려 나가지 않고 계속 행동하는 쪽으로 시선을 보내어 말이 행위와 일치하게끔 되고, 행하는 것에 노력하는 결과는 행동이 멋대로 혼자 달리지 않고 말과 일치하게끔 된다. 조조(慥慥)란 것은 독실한 모양. 즉 말과 행동이 이와 같은 군자는 참으로 독실하지 않은가 하고 찬미하는 말로써 말을 마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도를 사람에게 먼 것으로 생각지 않는 것을 말한 것임에 다를 것이 없다. 장횡거가 “사람을 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책하면 도를 다한다.”고 말한 것은 그런 뜻이다. 원래 유교사상의 한 특징으로서, 비근한 것의 강조와 굳게 잡는다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 장은 그 대표적인 하나가 될 것이다. 비근(卑近)이란 것은 주자학과 양명학에서 즐겨 쓰는 말로 말하면 <일용(日用)><백성(百姓)의 일용>(《주역》繫辭上)으로 끊임없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이 되려 하는 반면, 자칫하면 단순한 상식주의, 습속(習俗)주의에 그치려 하는 유교의 좋은 점과 좋지 못한 점을 동시에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상이 제13장이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은 앞 장의 이른바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능히 하는 것’이고, ‘내가 하나도 능히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즉 ‘성인도 능치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비하고 은하다’의 비의 면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면(裏面)에는 역시 그것의 그래야만 되는 까닭, 극도로 <은(隱)>한 것의 존재가 들어 있는 것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다음 장에서부터도 대개 이와 같은 이해의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제 14 장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오 不願乎其外니라.
【解釋】군자는 그 자리에 바탕하여 행하고, 그 밖을 원하지 않는다.(제1절)
【解說】이 장이 <공자 말씀하시되(子曰)>로 시작되어 있지 않은 것은, 곧 자사 자신의 말인 것을 보여준다. 소(素)는 바탕이란 뜻이다. 주자는 현재(見在-現在)와 같다고 주석을 했다. 소(素)의 목적어인 <그 자리>, 즉 그 지위가 현재 자기가 있는 위치를 뜻하게 되므로, 바탕한다는 뜻 속에는 현재의 뜻이 들어있음을 말한 것이리라. 바꾸어 말하면 <그 자리>라는 것이 <소(素)>로 인해 현재의 자리란 뜻이 되는 것이다. 군자인 사람은 ‘다만 현재 있는 위치에 따라, 그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할’ 뿐으로, 그 이외의 것을 바라는 마음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리(位)는 위치, 지위, 경우. 이른바 <때(時)와 곳(處)과 위치(位)다. 그러나 이 위(位)의 뜻에는 때와 곳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군자는 생각이 그 위(位)를 나가지 않는다.’(《논어》)는, 이 대목의 주석으로 꼭 좋을 것이다. 이른바 분수(分)의 사상인데, 그것이 한쪽으로는 비상한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됨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어떤 주석에서는 이 부분의 예로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국궁진췌(鞠躬盡瘁)하여 죽은 뒤에 그만두고, 성패와 이둔(利鈍)에 이르러서는, 신의 밝음이 능히 역도(逆睹)할 바가 아닙니다.’(《後出師表》)라는 것을 들고 있다.
素富貴하얀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얀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얀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얀 行乎患難이니 君子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解釋】부귀에 바탕하여는 부귀를 행하고, 빈천에 바탕하여는 빈천을 행하고, 이적에 바탕하여는 이적을 행하고, 환난에 바탕하여는 환난을 행한다. 군자는 들어가 자득(自得)하지 않는 것이 없다.(제2절)
【解說】이 절은 ‘그 자리에 바탕하여 행한다.’고 하는 것을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자인 경우 지위가 높은 처지에 있을 때는 부하고 지위 높은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가난하고 천한 위치에 있을 때는 또 그 위치에 맞게끔 행동한다. 오랑캐 땅에 있을 때는 오랑캐 땅에 있는 사람으로서 행동하고, 근심 걱정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또 그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행동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라도 자득하지 않는 일은 없다. 자득은 스스로 만족해한다는 뜻으로, 그것은 어떤 상태를 강요당한 것으로서 마지못해 참고 견디는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자신이 자진해서 택한 것으로서 만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在上位하야 不陵下하며 在下位하야 不援上이니라. 正己而不求於人이면 則無怨이니 上不怨天하며 下不尤人이니라.
【解釋】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래를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위를 당기지 아니하며, 나를 바르게 하여 남에게 구하지 않으면, 곧 원망이 없으리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제3절)
【解說】앞 절이 ‘그 자리에 바탕하여 행한다.’는 것을 부연한 것인데 대해, 이 절은 ‘그 밖을 바라지 않는다.’를 부연한 것이다. 그 밖을 바라지 않는 것만으로 말하면, 느낌으로는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지위보다 높은, 보다 좋은 방향에의 바람을 삼가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나,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을 이 첫째 구는 말하고 있다. 자기의 위치보다 높은 위치만이 바라서는 안될 <밖>의 것이 아니고 자기 위치보다 낮은 위치도 또한 바라서는 안될 <밖>인 것이다. 즉 위를 당기는 것도 밖이요, 아래를 업신여기는 것도 밖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자기의 현재의 위치에 충실하지 못한 일이며,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짓밟고 하는 것도 자기의 위치를 충실히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모두 ‘그 밖을 바라지 않는다.’는 원칙에 벗어나 있는 것이다. 모든 점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갖고,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려, 다른 사람에 대해 요구하는 일이 없게 되면 자연 남을 원망하게 되는 일은 없게 된다.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남인 하늘을 원망할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
故로 君子는 居易以俟命하고 小人은 行險以徼幸하니라.
【解釋】그러므로 군자는 쉬운 데 있어서 그로써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험한 일을 행하여 그로써 다행을 바란다.(제4절)
【解說】이(易)는 펀펀하고 반듯하다는 뜻, 즉 쉬운 곳, 편한 곳이란 뜻이 된다. 쉬운 데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 바탕하여 행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해 무리가 없는 수월한 위치에 서서(그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그보다 높은(혹은 낮은)일을 바라지 않고, 다만 천명(天命)에 맡긴다.
즉 ‘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 밖을 원하지 않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편 쉬운 데 있다는 거이(居易)란 두 글자가 지금 설명한 것처럼 수월하고 무리가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군자가 어떤 위치에 있으면 ‘그 밖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그 위치가 군자에 있어서 쉬운 것, 즉 수월하고 마음 편한 것이 된다는 식으로 풀이하는 쪽이 우리에게는 이해되기가 쉽다. 한문에는 이러한 표현방법이 비교적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아래 소인 운운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것과 반대의 경우가 소인으로, 군자가 쉬운 데 있는 것에 대해 소인은 ‘험한 것을 행한다.’, 즉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는 일이 없이, 위험하고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고, 다행하게 되기를 바란다. 다만 여기에 있는 다행은 ‘당연히 얻어질 수 없는 것을 얻게 되는 것’, 즉 의지와 지혜와 힘을 무리하게 작위적(作爲的)으로 발동하여, 당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 혹 어쩌다가 얻어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즉 이른바 요행(僥倖)의 행(倖)인 것이다.
子曰 射有似乎君子하니 失諸正鵠이면 反求諸其身이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시기를, “활쏘는 것은 군자와 같은 것이 있다. 정곡을 잃으면 돌이켜 그 몸에 찾는다.”고 하셨다.
【解說】자사는 여기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 지위에 바탕하여 그 밖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는 취지를 요약하는 것이다. 활쏘는 것은, 여기서는 사례(射禮)라는 행사때의 활쏘는 것을 말한다. 사례에서의 활을 쏘는 마음가짐은 군자의 마음가짐과 같은 점이 있다. 정(正)은 베(布)로 만든 과녁(的), 곡(鵠)은 가죽으로 만든 과녁을 말하는데, 그보다도 정은 베로 만든 과녁의 중앙 표준점, 곡은 가죽으로 만든 과녁의 중앙 표준점을 말한다. 활을 쏘는 도와 군자의 도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은, 정곡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을 경우라도,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다른 것에서 찾지 않는 점이다.
군자의 도를 활쏘는 것에 비유한 것은《논어》에도 있다.
제 15 장
君子之道는 辟如行遠必自邇하며 辟如登高必自卑니라.
【解釋】군자의 도는, 비유하면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하는 것과 같고, 비유하면 높은 데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하는 것과 같다.(제1절)
【解說】비(辟)는 비(譬)와 같다. 즉 비유하는 것이다.
詩曰 妻子好合이 如鼓瑟琴하며 兄弟旣翕하야 和樂且耽이라. 宜爾室家하며 樂爾妻帤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처자가 좋아하여 합하는 것이 슬(瑟)과 금(琴)을 치는 것 같고, 형제가 이미 합하여 화락하고 또 즐거우니, 너의 실가(室家)를 좋게 하고, 너의 처노(妻帤)를 즐겁게 하리라.’ 했다.(제2절)
【解說】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어떠한 도도 반드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도리를 설명하기 위해, 예에 따라《시경》을 인용한다. 이 시는《시경》소아의 상체(常棣)라는 편이다. 한 집안의 아내와 자식이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이좋게 잘 어울리는 것이 마치 큰 거문고(瑟)와 거문고(琴)가 서로 조화하는 것과 같고, 형제도 조화하여 조용히 기뻐 즐기고 있다. 그같이 형제가 화목한 너의 가정이란 것은 참으로 더 바랄 것이 없고 너의 아내와 자손(帤)들도 참으로 즐겁게 해주고 있다. 슬(瑟)은 스물다섯 줄(23絃), 27絃이라고도 한다.)이나 되는 큰 거문고, 금(琴)은 일곱줄(혹은 다섯줄)인 보통 거문고로,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연주되기 때문에 이른바 <금슬상화(琴瑟相和)>라 하여 모든 조화의 비유에 쓰이고 있다. 흡(翕)도 합(合)과 같은 뜻으로, 즉 조화 속에 있는 것. 담(耽)은《시경》에는 담(湛)으로 되어있는데, 즐긴다는 뜻이다. 노(帤)는 아들과 손자를 합해서 말하는 글자다.
子曰 父母는 其順矣乎인저.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부모는 그 순하리라.”(제3절)
【解說】공자가 이 시를 읊고 처자와 화합하고 형제가 서로 화목해 있으면, 부모는 참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그 시의 뜻을 비유해서 한 말이다. 순(順)은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순한 것, 즉 마음에 아무런 걸리는 것이 없이 개운하고 편한 것. 자사는 이 시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멀리 가려면 먼저 가까운 데서부터 출발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먼저 낮은 곳을 거친다는 것을 설명했다. 먼저 가정에서부터라는 것이 유교 도덕의 근본이다.
제 16 장
이 장은《중용장구(中庸章句)》에 있어서는 첫장과 아울러 특히 유명한 장으로, 주자학으로서도 대단히 중요한 장이다. 왜냐하면, 이 장의 주석으로써 주자의 귀신에 관한 이론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귀신의 이론만큼 주자학의 어떤 특징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제16장의 본문을 죽 한번 읽기만 해도 귀신이 이른바 신명과 귀신-보통 귀(鬼)라는 것은 사람의 죽은 뒤의 영혼, 신(神)은 이른바 천신지기(天神地祇)-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되는데, 주자는 그보다도 송학(宋學)을 철두철미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아래에 먼저 주자의 주석을 충실하게 직역한 다음, 이어 그것을 해설해 나가기로 한다.
子曰 鬼神之爲德은 其盛矣乎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귀신의 덕됨이 그 성한저.”(제1절)
【解說】“귀신은 천지(天地)의 공용(功用)이요, 조화(造化)의 자취(迹)다.”라고 한 것은 정자의 말, “귀신은 두 기운의 양능(良能)이다.”라고 한 것은 장자(張子)의 말이다. 어리석은 의견에 의해 두 기운이란 견지에서 말하면, 귀(鬼)는 음(陰)의 영(靈)이요, 한 기운의 견지에서 말하면, 지극히 뻗는(伸) 것이 신(神)이고, 돌이켜 돌아오는 것이 귀다. 그러나 실제는 같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덕됨’이란 것은 이 경우 성정(性情)과 공효(功效)를 말한다.(以上이 朱子의 註.)
이 주자의 귀신론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운(氣)>에 대한 설의 개략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주자에 의하면, 세계는 기운에 의해 이룩된다. 존재는 모두 기운이 응집되고 결합된 것이다. 기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이것을 아톰, 즉 원자론적인, 미립자라고 생각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것을 가스 모양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학자들의 설명에 따라 가스 모양의 것으로 해 둔다. 이 가스 모양의 기운은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며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 운동은 어느 부분에서는 뚜렷하고 격렬하며, 어느 부분에서는 완만하다. 기운이 격렬한 운동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은 <움직임(動)>이라 불리고, 상대적으로 운동 정도가 작을 때, 그 상태를 <고요함(靜)>이라 부른다. 기운이 움직이는 상태에 있을 때, 혹은 기운의 움직이는 상태에 있는 부분, 그것이 <양(陽)>이며, 그것에 대해 고요한 상태에 있는 기운이 <음(陰)>이다. 음양을 보통 음양의 <두 기운(二氣)>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다만 한 기운(一氣) 외에 따로 음과 양이라는 두 기운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기운의 어느 부분, 어느 상태가 관점에 따라 음인 기운, 양인 기운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 사이에 아무런 차원의 틀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직역한 것처럼 주자가 이 장 주석에서 ‘두 기운을 가지고 말하면’ ‘한 기운을 가지고 말하면’하고 쓰고 있는 것은 결국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음과 양이라는 말을 써서 말하면’ ‘음과 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말하면’ 하는 것과 같다. 주자의 입장에서는 귀신이란 것은 결국 음양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기운은, 그것이 한 기운이면서 두 기운인, 즉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점에서도 벌써 단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오성(悟性)의 상식으로써는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정묘한 성격과 작용을 갖는, 즉 영(靈)적인 존재다.(靈的이란 것은 이와같이 본래는 물질적인 것의 屬性에 다를 것이 없다.) 음이 귀, 양이 신이라고 앞에 말한 것을 지금 좀더 충분한 말로 나타내면, <음의 영(靈)>, 즉 영적인 면을 강조해서 파악된 음이 곧 귀고, <양의 영>, 즉 영적인 면을 강조해서 파악된 양이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횡거의 이른바 <두 기운의 양능(良能)>이란 것은, 바로 그 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능(能)은 공능(功能), 능력, 작용을 말한다. 정자의 <천지의 공용(功用)>이라고 하는 것도, 천지란 결국음양의 별명에 다름이 없는 것이므로 역시 같은 뜻이다. 이 음양 두 기운의 입장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한 기운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되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주(存在界)는 ‘기운-그것은 끊임없이 운동 상태에 있는-의 바다’로서 어느 부분에서는 천천히, 어느 부분에서는 격렬하게 끊임없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하늘이 가는 것은 건하다.(天行健)’(《周易》乾卦)라는 것은, 우주가 끊임없는 운동에 놀여 있다는 것, 그 의미에서 적극성을 그 근본 성격으로 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이같이 기운은 끊임없는 운동에 놓여있다. 따라서 기운의 바다 즉 거기로 찾아오는- 그것을 뻗는다(伸)고 한다.-경우가 신(神)이고, 이른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정처없이 되돌아가는-뻗는다(伸)에 대해 굽힌다(屈)고 한다.-그 경우가 귀(鬼)인 것이다.(神은 伸과 같은 音, 鬼는 돌아간다는 歸와 같은 音.) 귀라고 하는 것도 신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한 기운의 어떤 상태, 어떤 부분을 굽혔다 폈다, 갔다 왔다(屈伸往來)하는 기능에서 파악한 말에 다를 것이 없다. ‘두 기운의 양능’이란 것은 굽혔다폈다, 왔다갔다 하는 것이 결국 ‘이치의 스스로 그런 것’으로 (어떤 작위적이고 의도적인)안배(安排)와 포치(布置)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양(良)이라고 하는 것이다.(《語類》) 즉 양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기운이 찾아올 때는 양(陽)의 범주에 속하여 신(神)이다. 기운이 되돌아갈 때는 음의 범주에 속하여 귀(鬼)다. 예를 들어 날로 말하면 오전은 신이고 오후는 귀며, 달로 말하면 초사흘 밤 이후는 신이고, 보름이 지난 다음 날부터는 귀다. 또 초목이 싹트기 시작한 때는 신이고, 늙고 쇠약한 것은 귀다. 또《주역》풍괘(豐卦)에 소식(消息)이란 말이 있고,《주역》에서는 중요한 개념인데, 그것도 소(消)는 귀, 식(息)은 신이다. 그 밖에 산 것은 신, 죽은 것은 귀, 혼(魂)은 신, 넋(魄)은 귀, 봄 여름은 신, 가을 겨울은 귀, 말하는 것은 신, 잠자코 있는 것은 귀 등, 모든 사물이 귀신 안 되는 것이 없다.’(《語類》) 천지, 즉 <기운(氣)의 바다>의 영구 운동을 목적론적으로 풀이하여 만물을 낳는(살게 하는) 과정이라고 볼 때, 기운이 그 운동 과정에 있어서, 자기 내부의 모든 곳에서 크고 작은 농밀화(濃密化), 응집을 낳는 그것이 곧 <만물(物)>로서 만물을 낳는 전 과정을<조화(造化)>라고 부른다면, 조화의 기능은 묘(妙)-묘는 영(靈)과 거의 같은 것으로 감각이나 오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훌륭함을 갖는 것-인데, 그 초감각적-이치(理)가 그러한 것처럼 원리적인 의미에서의 초감각적인 것이 아니고 사실적인 의미에서의 초감각적-인 조화의 묘를 우리에게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해 주는 것이 곧 귀신이다. 귀신이라고 하는 자취(迹), 즉 지나간 자국, 현상이 없다고 하면, 우리는 조화의 작용을 파악할 수 없다. 오는 것(神), 가는 것(鬼), 그러한 현상성(現象性)을 밖으로 하고는 조화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덕되다>라는 덕(德)은, 성정(性情)과 모습(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귀신의 성정.)과 공효(功效), 즉 작용과 효과(二氣의 良能, 天地의 功用이란 것이 그 作用이고, 천하 사람들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 效果.)이다. 이 성정과 공효를 합해서 덕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주 대체적으로는 음양의 별명이라고 해도 좋지만, 좀더 엄밀히는 양태(樣態)ㆍ작용ㆍ효과인 점을 꺼내 말할 때 특히 귀신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視之而弗見하며 聽之而弗聞이로되 體物而不可遺니라.
【解釋】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나, 만물에 몸하여 버려질 수가 없다.(제2절)
【解說】귀신에는 얼굴도 소리도 없다. 그러나 만물의 끝과 처음은 음과 양이 합쳤다 흩어졌다 하는 것 아닌 것이 없다. 즉 만물의 체(體)로서, 만물의 버려둘 수 있는 곳. 그 ‘만물에 체하여’라는 것은,《주역》에 이른바 ‘일에 간(幹)이 된다.’와 같다.(이상이 朱子 註.)
앞 절에서도 말했듯이 귀신은 초감각적인 것-그것은 반드시 귀신이 <형이상학>적 존재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이기는 하나, 만물, 즉 존재-감각으로 파악되는 사물을 주로 하여 생각하는 것이리라.-는 모두 음양 두 기운이 응집된 것에 의해 생겨나, 즉 존재를 개시하여 그것이 흩어지는 것에 의해 죽는다. 즉 존재를 끝마친다. 만물의 체(體와 用이라는 體는 아니다.)를 이루고 있는 것, 즉 만물의 뼈(骨子)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語類》) 귀신으로, 만물은 어떤 것이든 귀신(그것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부터 버려져 있을 수가 없다. 불가유(不可遺)라는 유(遺)는 유실(遺失)의 유(遺)로서 만물을 어느 하나라도 손을 대지 않고 내버려두는 일이 없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 몸이 된다는 뜻이다.《주역》에 ‘일에 간이 된다.’(乾卦文言), 사물의 근간, 즉 뿌리와 줄기가 된다고 하는 말이 그것에 해당한다. ‘만물에 몸하여 버려질 수 없다.’라는 것은, 결국 이 물건이 있으면 이 귀신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있기 때문에 이 물건이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즉 ‘귀신을 주(主)로 하고 물(物)을 빈(賓)으로 보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귀신이라는 것은 만물의 몸을 이루는, 말하자면, 만물의 속, 뼈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모든 존재에 진실이라고 하는 성격(리얼리티)을 주고 있는 것은, 결국 귀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제5절에 이 제16장 전체를 매듭지어 ‘참(誠)의 가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귀신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는 존재계가 바로 진실한 것으로 허망(虛妄)이 아니란 것을 뜻한다.
使天下之人으로 齊明盛服하야 以承祭祀하고 洋洋乎如在其上하며 如在其左右니라.
【解釋】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재명 성복(齊明盛服)하여, 그로써 제사를 받들게 하고, 양양히 그 위에 있는 것 같고 그 좌우에 있는 것 같다.(제3절)
【解說】재(齊)는 재(齋)로 재계(齋戒)한다는 뜻일 것이다. 주자는 주해에서 “재란 것은 가지런히 하는 것이다.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히 하여 그것을 가지런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결국 재계라는 것은 어수선한 마음을 단정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다듬는다는 의미가 되겠으나, 주자는 재계한다는 뜻으로도 직접 풀이하지 않고 있다. 명(明)은 이 경우 밝다는 뜻이 아니고 깨끗하다는 결(潔)의 뜻이다. 양양(洋洋)이란 것은 유동 충만(流動充滿)하다는 뜻이다.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받들게 하면, (귀신은) 이처럼 뚜렷하게 그 자신을 드러나게 한다. ‘만물에 몸하여 버려질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이것에 의해 실제로 증명된다. 공자가 “그 기운이 위로 발양(發揚)하여 소명(昭明) 훈호(焄蒿) 처창(悽愴)한 것은 이것이 백물(百物)의 정(精)이요, 신(神)의 나타남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다.(이상은 朱子의 註)
경문(經文)의 이 한 절이 특히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귀신에 대한 제사를 말한 것임은, 한 번 보아 명백하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해석을 하려 하더라도 그것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주자어류》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실려 있다. 물음. 이 귀신장(鬼神章)의 주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기운의 굴신왕래(屈伸往來)를 논하고 있으나, 다만 중간의 ‘양양히 그 위에 있는 것 같다 운운한 것’에 대해서만 ‘그 기운이 위로 발양하여……’라고 하는 《예기(禮記)》제의(祭義)편의 글귀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사람과 만물이 죽고 난 뒤의 귀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어서, 앞뒤의 글 뜻과 서로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주자의 대답은 여전히 죽음이란 것은 기운이 굽혀진 것이다.(제사에 의해) 감소(感召)에 성공하면 뻗는다, 제사할 때 이쪽에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엄숙하게 받들면 조상의 기운이 자손의 몸 위로 뻗어오는 것이다. 라고 운운할 뿐이다.
결국 이 한 대목은 귀신의 가장 귀신다운 측면, 즉 제사의 대상으로서의 측면을 들음으로써, 그것도 실은 기운의 굴신왕래에 다름이 없는 것, 결국 그 의미에서 귀신의 보편성을 실증(?)한 것으로 생각된다. ‘재명성복(齊明盛服)’의 재(齊)란 것은, 목욕재계의 재로서, 앞에 말한 대로 재계하는 것인데 주자는《예기(禮記)》제의(祭統)편의 ‘가지런하지 않은 것을 같게 하여 가지런함을 이룬다.’는 말을 인용하여 해석했다. 즉 똑같지 못한, 헝클어져 안정되지 못한 마음을 정리하여 완전히 정신통일을 하는 것이 본래의 뜻이라고 한다. 명(明)은 결(潔)이라고 했으니, 정신을 통일하고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성복(盛服)은 옷을 제대로 잘 차려 입는 것, 즉 정식의 예복차림을 하는 것이다.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한다.’고 하는 것은 가정문으로 ‘만일 천하 사람이……하게 되면’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만일 세상 사람이 누구든 재계목욕하고 예복으로 위의(威儀)를 갖춘 다음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되면, 조상의 귀신은 양양히 주위의 공간에 충만하고 유동하여, 마치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와 있는 것 같고, 또 마치 그 사람의 좌우에 와 있는 것 같아, 명명백백하게(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왕성한 존재를 나타내게 된다. 귀신이 ‘만물에 몸하여 버려질 수 없다.’ 즉 모든 존재의 신체와 골격이 되어 있어, 귀신이 몸이 되어 있지 않은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제사를 기다릴 것도 없이(이론적으로?)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제 이 제사라는 행위에 의해 실증되는 것이다.《예기(禮記)》제의(祭義)편에, 공자가 귀신을 설명하여 “(죽으면 뼈와 살은 흙에 돌아가지만) 그 기운은 위로 올라가 소명(昭明), 즉 밝게 빛나는 것이 된다. 훈호(焄蒿)하여 증기가 되어 올라가고, 사람을 처창(悽愴)하여 송연(悚然)하게 만든다. 이것은 백물(百物)의 정(精-靈)이며, 신의 나타남, 즉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틀림없이 귀신이 양양하여 밝고 빛나게 발현(發現)하는 것을 말한 것에 다를 것이 없다.
詩曰 神之格思를 不可度思어늘 矧可射思아.
【解釋】시에 말했다. ‘신이 이르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하물며 싫어할 수 있겠는가.’(제4절)
【解說】시는《시경》대아(大雅) 억(抑) 편에 있는 시다. 격(格)은 온다는 뜻, 신(矧)은 황(況)과 같이 하물며란 뜻이고, 역(射)은 싫어한다는 뜻, 사(思)는 여기서는 아무 뜻이 없는 어조사다. 싫어한다는 것은 귀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태만히 대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이상이 朱子의 註.)
시의 뜻은, (귀)신이 찾아오는 것은 탁(度), 즉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데 더구나 귀신을 싫어하여 등한히 대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뜻이다. 이 시를 인용한 것은 앞 절의 제사에 의해 귀신과 접할 수 있는, 즉 정신을 집중시킴으로 해서 존재의 몸인 귀신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예에 따라, 시에 의해 다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경건한 태도를 가지고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夫微之顯이니 誠之不可揜이 如此夫인저.
【解釋】대저 미(微)의 나타남이니, 성(誠)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 이같은 것이다.(제5절)
【解說】성(誠)은 진실무망(眞實無妄)의 뜻이다. 음과 양이 합치고 흩어지는 진실 아닌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의 발현을 덮어 가릴 수 없는 것이 이같은 것이다.(이상이 朱子의 註.)
<미(微)>와 <현(顯)>(微는 超感覺的, 顯은 可感覺的)이 서로 반대 개념인 것은 이미 첫장에서 말했다. 엄(揜)은 엄(掩)과 같은 글자로 가린다는 뜻, 즉 덮어 감추는 것을 말한다. 음양ㆍ귀신은 원래 초감각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상의 제사 때 발현하고,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는, 음양 두 기운의 갖가지 결합에 의해 감각할 수 있는 모양을 가진 물건이 형성될 때 발현한다.(그 반대, 즉 나타나 있는 것이 기운이 흩어짐으로 해서 미로 돌아가는 경우도 이것에 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들 우주적인 과정은 모두 진실되고 사실적인 것으로 결코 허망한 것은 아니다. 즉 진실무망인 것. 다시 말해 성(誠)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에서 <현>으로의 발현을 감추어 저지시킬 수는 결코 없다. 성(誠)-주자학에서는 성은 항상 <진실무망>이라고 정의를 내린다.-이란 것은 본래 그러한 의미로서, 그것은 유교에 있어서는 윤리적인 개념이기보다 때로는 오히려 존재적인 개념이었다. 하늘은‘모든 만물에 각각 무망(無妄-无妄)을 주었다.’(《주역》无妄卦) 만물의 진상(眞相)은 <무망>, 즉 망년되지 않은 것으로, 무망은 곧 성이요, ‘성은 하늘의 도다.’(제20장 제17절)
하늘이 만물을 화육하는 것이 낳고 또 낳아 다함이 없어, 각각 그 성명(性命)을 바르게 한다. 즉 개는 개의 성품을 가지는 그것이 무망이다. 결국 ‘하늘이 무엇을 말하리요, 사시(四時)가 행해지고 백물(百物)이 난다.’(《논어》陽貨)고 한 것이 성이다. 인간의 <성>은 이 하늘이 도에 합치되도록 하는 노력에서 생겨난다. 유교의 이상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연주의다.
이상으로 제16장의 해설을 끝마치게 되는데, 이 귀신 문제는 주자학의 이론에 커다란 모순을 가져오는 어려운 문제로, 주자는 끝내 그것에 명확한 해결을 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주자에 따르면, 기운이 모여드는 것을 <뻗는(伸)> 기능에서 파악한 것이 신(神)이고, <굽는(屈)> 작용면에서 파악한 기운이 귀(鬼)로, 모든 사물은 귀신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생기게 되는 것은, 물건이 부서져 없어지거나 해서, 기운이 흩어지고 말 때, 그 흩어져 가버린 기운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 거꾸로 말하면, 물건이 생겨나게 될 때, 또는 사람이 태어날 경우, 모여 와 응집하는 기운은 반드시 아주 새 기운이냐, 아니면 한 번 사용했던 기운이 다시 사용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만일 이미 굽혀진 기운이 다시 뻗어온다고 하면, 천지 사리에는 다만 많은 수의 똑같은 기운이 왔다갔다할 뿐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바로 불교의 윤회설(輪回說)로서 유교의 생성사상(生成思想)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흩어지면 곧 완전히 없어지고 마는 것이라면, 두고두고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기운이 와 이른다는 것은 해석이 되지 않는다. 주자의 기운에 대한 이론은 끝내 이 모순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세의 사상가들도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든가, 이 모순 때문에 주자학을 공격한 사례는 별로 듣지 못한다. 주자학이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 가장 좋은 약점이 될 이것이 별로 이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주자가 <기(氣)>에 대한 설을 이론화 하고 체계화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국 고래의 학문적ㆍ통속적인 통념(通念)을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크고, 또 제사라는 것도 생활에 밀착된, 그리고 압도적인 <큰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주자학에 의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 점에 대한 주자의 이론적인 불합리에 그다지 민감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16장 가운데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제12장의 비(費)와 은(隱)의 범주로 말하면 은이 되고, 만물에 몸하여 역력히 나타나는 것은 비가 된다. 이 16장을 중심으로 해서, 앞의 3장, 즉 제13, 제14, 제15장은 <비> 가운데서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크고 작은 범주도 제12장에 보인다.), 뒤의 제17, 제18, 제19의 세 장은 <비>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을 말하고 있고, 이 제16장은 비와 은, 큰 것과 작은 것을 합쳐서 말하고 있다.
제 17 장
이 장은 효도(孝)라는 극히 평범한, 그러나 항상 있는 행위-<용행지상(庸行之常)>이라고 주자는 표현하고 있다.-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그 극치에까지 추진시켜 간다. 이같이 하여 <도(道)의 용(用)>의 넓음, 즉 <비(費)>의 큼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때, 도의 용이 넓은 것은 그 배후에 그것의 <그런 까닭>인 <도의 체(體)>라고 하는 미(微)란 것이 존재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제18, 제19의 두 장도 같은 취지다.
子曰 舜은 其大孝也與신저 德爲聖人이시고 尊爲天子이시며 富有四海之內하사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순은 그 큰 효도이다. 덕은 성인이 되고, 높은 것은 천자가 되고, 부한 것은 사해 안을 두어, 종묘가 받고, 자손이 보존한다.”(제1절)
【解說】순은 큰 효도를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덕으로 말하면 그 자신 성인이요, 지위의 높은 것으로 말하면 천자이며, 부에 있어서는 사해의 안, 즉 천하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모와 조상은 종묘에서 제사를 받게 되고, 그 자손은 자손 된 명예를 계속 지니게 되었다. 대효야여(大孝也與)는 감탄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효도의 극치가 그 자신 천자의 높은 위치에서 부모를 영광되게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유교의 일반적인 통념이라고 해도 좋다. 맹자가 말한 “어버이를 받드는 지극함에는 천하로써 봉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천자의 아비가 된 것은 높음의 지극함이요, 천하로써 봉양하는 것은 봉양의 지극함이다.”(《맹자》萬章上)란 것이다.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자식이 출세해서 높은 벼슬을 얻게 되면, 그의 친아버지는 물론이고, 몇 대 전의 조상까지 벼슬과 칭호를 받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은 같은 생각에 바탕한 것이다.
이 문장 가운데서, 최후의 두 글귀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순이 자기 자손 대에 종묘를 두어 자손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 향(饗)은 음식을 대접하는 뜻도 되고 대접받는 뜻도 되는데, 특히 제사를 받는 귀신이 차린 음식을 먹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다. 제사 축문(祝文)에는 으레 끝에 상향(尙饗)이란 두 글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것은 바로 ‘잡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두 가지 해석이 되는 것은 결국 앞에 말한 대로 제사를 드린다는 뜻도 되고 제사를 받는다는 뜻도 될 수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근본문제에서 별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순 자신이 제사를 받는 것이 효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순이 제사를 받게 되면 반드시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제사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종묘가 제사를 받는다, 즉 종묘(에 모셔져 있는 아버지, 할아버지)가 천자인 순이 드리는 제사를 즐겨 받는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즉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이므로 물론 효도가 된다. 주자 자신이 어떤 해석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보통 순이 종묘에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자손이 보존한다.’의 자손은, 예를 들면《좌전(左傳)》애공(哀公) 6년조에 우사(虞思)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양공(襄公) 25년조에 호공(胡公)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다같이 순의 자손이라고 한다. 이 우사는 하(夏)나라 시대에 우(虞)라는 땅에 봉해지고, 호공은 주(周)나라 시대에 진(陳)이라는 나라에 봉해졌다고 한다. ‘자손이 보존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같이 자손이 순의 자손으로서 합당한 작위와 영토를 계속 지니고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故로 大德은 必得其位하고 必得其祿하며 必得其名하고 必得其壽하니라.
【解釋】그러므로 큰 덕은 반드시 그 위를 얻고, 반드시 그 녹을 얻고, 반드시 그 이름을 얻고, 반드시 그 수를 얻는다.(제2절)
【解說】그렇기 때문에 순과 같은 큰 덕을 가진 성인은, 반드시 그 덕에 해당하는 천자라는 지위를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그 덕에 해당하는 녹, 즉 부를 얻게 될 것이며, 그 덕에 해당하는 성인이라는 명성을 얻게 될 것이며, 그 덕에 해당하는 오랜 수명을 얻게 될 것이다. 순은 실제가 백열 살까지 살았다.《서경》순전(舜典)에 ‘순은 나서 서른에 불러 쓰이고, 다시 서른 해에 천자의 지위에 나아가고, 위에 있은 지 쉰 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 것을 계산하면 백열 살이 된다. 이 한 절은 이른바 날로 행하는 떳떳함(庸行之常)이 그 극치에 있어서 가져오게 되는 것을 지적한 것일 것이다.
故로 天地生物은 必因其材而篤焉이라. 故로 栽者培之하고 傾者覆之니라.
【解釋】그러므로 하늘이 물건을 낳는 것이, 반드시 그 재(材)에 따라 두텁게 한다. 그러므로 심은 것을 북돋우고, 기우는 것을 엎는다.(제3절)
【解說】재(材)는, 질(質), 즉 소질(素質)을 말한다. 독(篤)은 후(厚), 즉 그쪽으로 더 힘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재(栽)는 심는 것, 즉 생명을 붙여주어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복(覆)은 엎어버린다는 뜻으로, 기운이 흩어져 뿔뿔이 돌아가는 결과로 넘어지고 마는 것을 말한다. 어느 것이나 하늘을 주어(主語)로 하여 타동사로 쓰고 있다. 큰 덕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성인이 되고 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하늘의 무사성(無私性), 즉 사사로움이 없는 성격이란 것에 바탕해서 논하는 것이다. 하늘은 만물을 낳는(만물을 나게 하는) 것을 그 본래의 성격으로 하고 있지만, 그 경우 이 만물을 낳는다고 하는 기능이 무차별 평등한 성격이 아닌 것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물 각자의 소재(素材), 소질, 그것을 인정한 위에, 각자의 소질에 따라 두터운 배려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심어져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에는, 기운도 또 그리로 모여와서 생명을 붙여 성장하게 한다. 또 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시들어 넘어져가고 있는 것은, 기운도 거기에 붙어있을 수가 없어 흩어져 돌아가게 되므로 말라죽게 된다. 하늘은 그와 같이 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하늘의 공평무사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는 것도 역시 <그 재(材)에 인해 두텁게 하는> 것에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방향이 반대로 되어있을 뿐인 것이다. 어느 주석에 의하면, 예를 들어 같은 비가 올 경우라도, 뿌리가 든든히 박혀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북돋우는 작용을 하게 되고, 뿌리가 기울어져 있는 것은 이것을 넘어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북돋우는 것도 애정에 의해서가 아니고, 넘어지게 하는 것도 미운 생각 때문은 아닌 것이다. 다만 <이치의 필연>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中庸大典》) 또 순이 큰 덕에 의해 천명을 받은 것은, 착한 행실로 인해 복을 받는 것(즉 인간계의 윤리 과정에 의한 것)인데, 하늘이 만물을 낳고, 심어 북돋우고, 기울여 넘어지게(즉 기운의 往來集散) 하는 예를《중용이》들고 나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 하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서 주자는, “다만 이것은 한 이치일 뿐, 이것 또한 물(物)에 있어서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치 스스로 이같이 되는 것뿐 운운”하고 대답했다.(《어류》)
여기서 약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은, 하늘이 만물을 낳는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 하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의 <재(材)>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자면 하늘의 통제 밖의 것으로서 전제하고 있는 것 같은 점이다. 만물을 낳는다고 하는 이상, 이 하늘이 만일 신격의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그 <재>도 반드시 하늘의 창조와 통제아래 놓여져 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금지를 범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나오는 것은 다시 그 다음 단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이 만물을 낳는다고 하면서 바로 뒤이어 그 재에 인-인(因)이란 것은 혁(革)의 반대 개념으로, 어떤 사물을 먼저 승인하고 나서 하는…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뜻.-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어서 아주 납득하기 어려운 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의 의지(意志), <천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너무 신격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물론 천지에 마음이 없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주역》복괘(復卦)에는 ‘복(復)은 그 하늘과 땅의 마음을 본다.’라는 분명한 글이 있다. 만일 하늘과 땅에 마음이 없다면 소에서 말이 나오고, 복숭아나무에 오얏꽃이 피는 사태가 마구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 천지에는 마음이 있다.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는다”(程子) 그 뜻은 결국 한 시각의 정체도 없이 기운이 움직여 흘러 다니며, 오로지 온갖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있다는 그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사시가 행해지고 백물이 생겨나는 (《논어》) 것은 “천지는 마음이 없이 화(化)를 이룬다.”(같은 程子의 말, 聖人은 마음이 있어서 함(爲)이 없고와 對가 된다.)로, 하늘과 땅에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으나, 앞에 말한 부분과 반드시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천지의 마음이란 것은<마음 없는 마음>에 귀착하게 하는 것이다. ‘천지의 마음도 영험(靈驗)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그 점 사람의 마음과 같다.) 그러나 인간들처럼 이렇게 생각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다.’(以上《語類》) 천지가 성현을 낳는 것도 그저 우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천지가 어떻게, 어디 한 번 성현을 낳아볼까 하고 말을 하겠는가. 말하자면 어느 시기가 오면 기수(氣數)가 꼭 서로 일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현을 낳게 된다. 태어나고 보면, 마치 하늘에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語類》)
詩曰 嘉樂君子의 憲憲令德이여 宜民宜人이라. 受祿于天이라. 保佑命之하시고 自天申之하시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가락(嘉樂)한 군자의 헌헌(憲憲-顯顯)한 영덕(令德)이, 백성을 좋게 하고, 사람을 좋게 하는지라, 녹을 하늘에서 받으니, 보우(保佑)하여 명하는 것이 하늘로부터 거듭한다.’고 했다.(제4절)
【解說】시는《시경》대아(大雅) 가락(假樂) 편이다. 시경의 가(假)는 이 《중용》에 따라 가(嘉)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헌헌(憲憲)은《시경》에는 현현(顯顯)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시경》에 따라 고치는 것이 옳다. 공자는 이 시를 인용하여, 순이 큰 덕을 갖은 것은 하늘의 뜻에 의한 것이다. 즉 심어진 것을 북돋우게 되는 분명한 증거이며, 이치의 필연(必然)인 것을 말한다. 아름답고 즐거운 군자는, 밝게 빛나는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다. 그같은 군자는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에게 마땅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 아마 사(士) 계급 이상의 사람들에게 마땅하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녹(祿-位ㆍ祿ㆍ名ㆍ壽를 합한 것)을 받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늘은 그를 보호하고 도와 천명을 주고(천자가 되게 하고) 다시 또 그것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여 지속적으로 그 사람에게 천명을 주고 있다. 신(申)은 거듭하는 것이다. 한편 <의민의인(宜民宜人)>에 대해 주자의《시집전(詩集傳)》에는 ‘백성이란 서민(庶民)이다. 사람이란 벼슬(位)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여 백성과 사람을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고전(古典)에 있어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타당하다. 민(民)은 명(冥), 즉 어두운 것이다. 인(人)은 인(仁), 즉 어진 것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훈고(訓詁)도 그 점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故로 大德者는 必受命이니라.
【解釋】그러므로 큰 덕인 사람은 반드시 명을 받는다.(제5절)
【解說】첫머리의 <공자가 말씀하셨다.>가 어디까지 미치느냐 하는 것은, 각 장 모두 반드시 명백하지 않다.《어류》《혹문》등을 참조해 보아도, 주자 역시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원칙으로 <공자가 말씀하셨다.>로 시작된 말을《시경》의 인용으로 끝맺는 예는 엣 글에 많이 있으므로, 이 장에서도 앞 절까지 <공자가 말씀하셨다.>의 내용이고, 이 절은 그것에 대한 자사의 말인 것으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중용》에서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명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명령을 받아 천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순이 그 전형적인 예다. 다만 여기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공자다. 공자에게 큰 덕이 있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마침내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지 못했다. 그 모순은 어떻게 해서 풀 수 있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대답은, 결국 그것이 <이치의 떳떳함>이 아니고, <기수(氣數)>의 변(變)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 안의 현상에 대해 단순히 이치라는 언제나 떳떳한 범주만이 아니고, 여기 또 하나의 <수(數)> 혹은 <기수>라고 하는 변이(變異-不定?)의 범주도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이치로서는 당연히 그래야만 될 것도, 천지의 수(數)-우리말로 운수(運數)-라고 하는 앞에서는 그 필연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치와 수와의 충돌, 충돌이라기보다 그 양쪽으로부터의 경쟁에 의한 일종의 벡터(크기와 방향을 가진 속도와 힘 따위), 그것이 아마 세(勢)-사론(史論)에서 흔히 쓰이는 개념-라고 하는 것이리라. 어느 학자의 설에 따르면, 공자의 덕은 순과 같은데, 지위도 녹도 이름도 순과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순의 경우, 덕에 대해 그 응(應-對應物)이 반드시 따르게 된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었고, 공자의 경우, 덕에 대해 그 응이 따르지 않은 것은 이치가 <떳떳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 성인이 나타난다는 것은, <천지의 큰 운수>에 관련된 것이다. 복희(伏羲)에서 요순까지는, 마침 천지 기운이 <장성(長盛)>한 시기였다. 요순은 청명(淸明)한 기운을 받았다. 그래서 성인이 되었다.그 위에 다시 높고 두터운 기운까지도 얻었다. 그래서 수를 얻었다. 그런데 주나라가 쇠약해져서 춘추시대가 되자, 아무리 큰 천지라 하더라도 <기수>는 벌써 미약해 갔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도 역시 청명한 기운을 얻어 뿌리는 제대로 잘 박혀 곧게 심어져 있기는 했지만, 불행하게도 마침 기수가 쇠해져 가는 시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북돋우고 길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자의 지위를 얻을 수도 없었고, 수도 또 73세라는 중간밖에 얻지 못했다. 그것은 이치가 그 떳떳함을 얻지 못한 것이다.(《中庸大全》)
제 18 장
이 장도 이른바 <비하고 은한 것> 가운데 <비>의 방면을 말한다. 즉 주나라 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주공(周公)의 3대에 걸친 사적을 말하고, 군자의 도의 용(用)의 넓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子曰 無憂者는 其惟文王乎인저 以王季爲父하시고 以武王爲子하시니 父作之하고 子述之하시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근심이 없는 것은 그 오직 문왕이었다. 왕계로써 아버지로 하고, 무왕으로써 아들로 했다. 아버지가 작(作)하니, 아들이 술(述)했다.”(제1절)
【解說】먼저 제1절은 문왕에 관한 일을 말한다.《시경》무성(武成)편에 무왕의 말이라 하여 “태왕(太王)에 이르러 비로소 왕적(王迹)을 터잡았다. 왕계(王季)가 그 왕가(王家)에 힘썼다.”고 했다. 즉 문왕의 아버지 왕계는, 문왕의 할아버지인 태왕(古公亶父)이 왕자로서의 사업의 기초를 쌓은 것을 계승하여, 그 왕업을 주나라 왕실의 사업으로 하는데 힘썼다는 것이다. 또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은나라 왕조의 마지막 천자인 폭군 주(紂)를 무력혁명에 의해 넘어뜨리고 사실상의 천자가 되어 새로 주나라 왕조를 세운, 사실상의 주나라 왕조의 시조(始祖)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같이 문왕은 작자(作者)로서의 아버지와 술자(述者)로서의 아들을 가진 점에서, 저 순(舜)처럼 고수(瞽膄)라는 미련한 사람을 아버지로 하고, 상(象)과 같은 악한 사람을 아우로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참으로 행복한 걱정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작(作)한다> <술(述)한다>고 한 것은 우리말로는 다같이 <짓는다>라고 새기는데 이 작과 술은 뜻에 차이가 있다. <작> 쪽은 ‘작하는 사람을 성인이라 말한다.’로, 작이란 것은 성인의 속성(屬性)이며, <술> 쪽은 ‘술하는 사람을 밝다고 말한다.’로, 성인에 다음가는 밝은 사람의 속성으로 되어있다.(《예기》樂記) 술은 창작해서 짓는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을 계승해서 저술하는 것이다. 공자는 “술하고 작하지 않는다.”(《논어》述而)고 자신의 태도를 밝힌 일이 있다. 역시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이다. 술은 가장 전형적인 경우로는 효자의 덕이다. 즉 조상의 사업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술이다. 작은, 그것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로서는, 제도와 예악을 새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 최고의 참다운 모습인 성인이 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 왕계가 왕가에 힘썼다는 것은, 즉 왕업을 자기 가족의 사업으로서 건설하는데 노력했다는 것은, 이때는 아직 반드시 제도를 새로 만든다기보다는 아마 어진 일을 쌓고 쌓은 것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어찌됐든 아버지가 작자가 되고 아들이 이를 계승한 술자가 되어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복임에 틀림이 없다. 한편, 여기 있는 ‘아버지가 작하고 아들이 술했다.’는 아버지가 왕계이고, 아들이 무왕임이 일단 명백하지만, 그 아버지란 말 속에는, 예를 들면 태왕과 같은 할아버지와 다시 그보다 앞선 조상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아들이란 것은 문왕에 대한 무왕뿐이 아니고, 태왕ㆍ왕계에 대해서는 문왕이라고 하는 이중 관계까지도 뜻하고 있는 것이리라.
武王은 纘大王 王季 文王之緖하사 壹戎衣而有天下하시되 身不失天下之顯名하사 尊爲天子시고 富有四海之內하사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解釋】무왕이 태왕ㆍ왕계ㆍ문왕의 끝을 이어 한번 융의(戎衣)로 천하를 두게 되니, 몸은 천하의 현명을 잃지 않고, 높은 것은 천자가 되고, 부는 사해의 안을 두어, 종묘가 향(饗)하고 자손이 보존했다.
【解說】이 절은 무왕에 대해 말한다. 무왕도 성인으로 불릴 정도의 인물이었던 만큼, 아들이 술한다는 말대로, 태왕→왕계→문왕이라는 계통의 실마리를 계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찬(纘)은 잇는다는 뜻이다. 서(緖)는 실끝 실마리, 혹은 끝이라고 새기는데, 물론 여기서는 업적과 사업이 궁극적으로는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시경》노송(魯頌) 비궁(閟宮)에, ‘후직(后稷)의 손자는 참으로 태왕이다. 기(岐) 남쪽(陽)에 살며, 참으로 처음으로 상(商)나라를 무찔렀다. 문왕ㆍ무왕에 이르러, 태왕의 끝을 이어 하늘의 끝을 이루기를, 목야(牧野)에서 했다.’고 말하고 있다. 태왕이 기산(岐山) 남쪽에 살았다는 것은, 곧 주나라 땅에 살고 있었음을 말한다. 태왕이 이 주나라 땅으로 옮겨와 산 그때부터 벌써 상나라, 즉 은나라를 넘어뜨리고, 그에 대신할 운명이 사실상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그 천명을 궁극에까지 전개 실현한 것이,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깨뜨린 목야의 싸움에서였다는 것이다. 무왕은 한 번 융의(戎衣), 즉 갑옷과 투구로써 무장을 갖추고 행동으로 옮기자, 마침내 천하를 내 것으로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한 번 융의로써 천하가 크게 정(定)했다.’고 하는 말이《시경》무성편에 있다. 이같이 군사행동에 의해 천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지만, 무왕은 그래도 어디까지나 성인으로, 성인이라고 하는 천하에 빛나는 훌륭한 이름, 즉 현명(顯名)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다음부터 ‘높이기로는 천자가 되고 자손이 보존했다.’까지는, 앞 장의 순의 경우와 같은 글귀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다만 순의 경우에는 ‘덕은 성인이었다.’고 한데 대해, 이 무왕의 경우는 ‘몸은 천하의 현명을 잃지 않았다.’고 표현이 달라져 있는 것은, 순과 무왕과는 역시 그 사이에 서로 다른 점이 있음을 뜻한다. 그 점은《논어》팔일(八佾)편에, 순의 음악인 소(韶)와, 무왕의 음악인 무(武) 둘을 비교하여, “소는 진선진미(盡善盡美)한데, 무는 진미일 뿐 진선은 못된다.”고 공자가 말한 것과, 또《맹자》진심상(盡心上)에 “요순은 성품으로 하고, 탕무는 몸으로 했다.”고 맹자가 말한 것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武王이 末受命이시니 周公, 成文武之德하사 追王大王王季하시고 上祀先公以天子之禮하시니라. 斯禮也이 達乎諸侯 大夫及士庶人하니 父爲大夫요 子爲士면 葬以大夫요 祭以士하며 父爲士요 子爲大夫면 葬以士요 祭以大夫하니라. 期之喪은 達乎大夫하고 三年之喪은 達乎天子하니 父母之喪은 無貴賤一也니라.
【解釋】무왕이 끝에 명을 받으니, 주공이 문ㆍ무의 덕을 이루어 태왕ㆍ왕계를 추왕(追王)하고 위로 선공을 천자의 예로써 제사했다. 이 예가 제후와 대부와 및 사ㆍ서인에까지 달하니, 아비가 대부가 되고, 자식이 사가 되면, 장사는 대부로써 하고, 제사는 사로써 하며, 아비가 사가 되고, 자식이 대부가 되면, 장사는 사로써 하고, 제사는 대부로써 한다. 1년 상은 대부에까지 미치고, 3년 상은 귀천이 없이 한가지다.(제3절)
【解說】최후로 이 절은 주공의 일을 말한다. 이 장 제1절에 ‘아비는 작하고 자식은 술한다.’고 하여, 무왕을 <술자>의 열(列)에 넣은 점으로 보아, 아우인 주공도 술자에 넣어서 좋을지 모르지만, 유교의 교의(敎義)로서는, 예부터 주공은 <작자인 성인>의 전형적인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주의해 둘 필요가 있다. 성인의 두 가지 형(型)을 인정하고, 하나는 작자인 성인, 즉 예악과 제도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의 성인, 또 하나는 인륜의 지극함, 즉 도덕적인 완벽자로서의 성인이라고 한다면, 앞에 말한 성인의 전형적인 것이 주공이고, 뒤에 말한 성인의 전형적인 것이 공자가 되는 것이 유교의 상식이다.
그런데 무왕은 천명을 받았다. 즉 천자가 되어 마침내 주나라 왕조를 열었다. ‘끝에’라는 것은 늙은 뒤를 말한다. 문왕이 97세로 죽었고, 그 뒤를 이은 무왕은 즉위한 지 7년에 93세로 죽었으므로, 그가 명을 받은 것은 86세 때가 된다. 무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성왕(成王)은 어렸다.(《서경》金縢편의 鄭氏 주에 의하면 10세) 그래서 무왕의 아우인 주공이 섭정을 했다. 그리하여 태왕서부터 내려오는 주나라 조상들의 사업 전통을 집대성해서, 여기에 주나라 왕조의 예악과 제도를 제작했다. 재위기간이 너무도 짧아 그것을 미처 이룩할 수 없었던 무왕을 대신해서 제작한 것이다. 주공은 그 예악의 근본으로서 먼저 조상을 높였다. 즉 고공단부(古公亶父)를 태왕(太王)이라 하고, 공계(公季)를 왕계(王季)라고 한 것처럼,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왕호를 추증했다. 그것은 문왕ㆍ무왕의 효심(孝心)을 미루어 왕업의 출발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효도의 덕을 완성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또 그 이전의, 고공단부의 아버지 조감(租紺-別名은 公叔祖類)에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 주나라 왕조의 맨 첫 시조인 후직(後稷)까지를 천자의 예로 제사지냈다. 그것도 역시 이번은 태왕ㆍ왕계의 효심을 미루어,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 시조(始祖)인 후직에까지 미친 것이다. 주공은 이와같이 장례를 지낼 때는 죽은 사람의 벼슬과 녹에 의해서 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제사를 지내는 생존자(대개의 경우는 아들)의 벼슬과 녹에 의한다는 예법을 지정하고, 그것을 단순히 주나라 왕실뿐이 아니고, 널리 천하 일반, 즉 제후, 대부, 사(士), 서인 전체에 미루어 미칠 수 있는 보편적인 예법으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왕과 왕계를 제사지낼 경우는, 이미 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천자를 제사지내는 것과 같은 예로써 지낸 것은 명백하지만, ‘선공(先公) 제사하기를 천자의 예로써 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그것은《주례(周禮)》에 ‘선왕을 제사할 때는 곤면(袞冕)을 입고, 선공을 제사할 때는 폐면(鷩冕)을 입는다.’(春官司服)고 한 그 폐면이란 것은 제후가 입는 예복이므로, 결국 선공을 제사지낼 경우에는 여전히 제후를 제사하는 예로써 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아버지인 제후를 아들인 제후가 제사지내는 예가 아니고 아버지인 제후를 아들인 천자가 제사지내는 예라는 의미에서 ‘천자의 예로써 한다.’고 한 것에 불과하다.
한편 천자, 제후, 대부, 사, 서인이라고 하는 계급의 사란 것은, 귀족계급의 가장 아랫계급이고, 대부란 것은, 사(士) 백 명 혹은 천명의 장(長)인 계급이다. 제사가 아닌 상복을 입는 상, 즉 조부모와 백숙부모 등에 대한 상과, 그 아래의 9개월 입는 대공(大功)과, 5개월 입는 소공(小功), 3개월 입는 시마(媤麻) 등 상은, 서인부터 대부까지의 계급이 다 이를 입도록 규정했다. 즉 제후 이상에는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대부의 경우는 <강(降)한다>, 즉 기간을 짧게 한다. 1년 상은 대부에 미친다고 한 것은, 대부는 1년 상까지는 사ㆍ서인과 같이 입고 대공서부터는 기간을 짧게 한다는 뜻이다. 다만 부모의 3년상 만은 서인은 물론이요 천자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입는 것으로 했다. 왜냐하면 부모의 상은 인간으로서 가장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천자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서인 같은 낮은 사람에게나 천자 같은 높은 사람에게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같은 예가 정해진 것은, 주공이 부모에 대한 자신의 지극한 정을 남에게까지 미치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 19 장
이 장도 앞 장에 계속해서 군자의 도가 비(費)인 까닭을 말한다. 도가 비인 것을 말하는 일련(一連)의 장 중에서도 제17장, 제18장 및 이 제19장은 특히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子曰 武王 周公은 其達孝矣乎신저.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무왕과 주공은 그 달효인저.”(제1절)
【解說】달효(達孝)의 달(達)은《맹자》의 달존(達尊)의 달과 마찬가지로 통(通)의 뜻이다.《맹자》公孫丑下) 즉 무왕과 주공의 효도는, 천하를 통한 효도, 다시 말해서 온 천하 사람들이 똑같이 효도라고 인정하는 효도인 것이다.
이 절에 대한 주자의 주석은 위와 같은데, 그 경우 주자는, “달(達)은 통(通)이다.”라고 말한 바로 아래에 “윗장을 이어받아 무왕과 주공의 효도를 말했다.”는 말을 넣어두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이것을 풀이하여 윗장, 즉 제18장 제3절에 보이는 3개의 달(達)이란 글자를 이어받는 것이라 하고, 달효(達孝)라는 것은 단순히 자기 가족에 있어서만이 아니고, 다시 나아가 온 천하 전체에 걸쳐, 즉 천하의 모든 곳에서 당연히 실천되어야 효도라는 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천자가 되고 부(富)는 사해를 차지하고서의 효도가 모든 사람에 타당할 까닭이 없는 것이므로, 이같은 해석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결국 누구나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효도라고 하는 것과,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효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夫孝者는 善繼人之志하며 善述人之事者也니라.
【解釋】대저 효도란 것은, 사람의 뜻을 잘 잇고, 사람의 일을 잘 술하는 것이다.(제2절)
【解說】앞 장에서, 태왕ㆍ왕계ㆍ문왕이 왕자로서의 사업의 실마리를 연 것을 이어받아 무왕이 천하를 차지하기에 이른 것, 또 주공이 그의 조상의 격을 뒷날 추숭(追崇)함으로써 문왕 무왕의 덕을 완성한 것을 말한 것은, 곧 그 뜻을 잇고 일을 술(述)한 사실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의 일을 술한다는 <술>이 앞장의 <작ㆍ술>을 대로서 들고 있는 그 술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잇는다>와 거의 같은 뜻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 장에서는 무왕ㆍ주공, 특히 주공이 제작한 제사의 예로서, 천하의 위 아래를 통해 행해야 할 것을 주제로 하여 논한다. 하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자는, 왕실의 경우를 예로써 설명하는 일이 많지만.
春秋, 修其祖廟하고 陳其宗器하며 設其裳衣하고 薦其時食하니라.
【解釋】봄 가을에 그 조상의 사당을 닦고, 그 종기(宗器)를 벌이고, 그 상의(裳衣)를 베풀고, 그 시식을 올린다.(제3절)
【解說】봄 가을이란 것은, 봄 가을 두 차례의 제사를 말한다. 물론 조상의 제사는 봄 가을만이 아니고,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네 철에 각각 행하는 것으로, 천자의 종묘의 제사는, 봄 제사를 사(祠), 여름 것을 약(禴), 가을 것을 상(嘗), 겨울 것을 증(烝)이라고 한다고《주례(周禮)》춘관(春官) 태종백(太宗伯)에 보인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봄 가을을 대표적으로 든 것이다. 봄 가을에 조상 사당을 손질하고, 종기(宗器), 즉 조상 대대의 사당(宗廟)에 간직해 놓은 중기(重器-중요한 집안의 보물)를 각각 적당한 곳에 진열하고, 또 조상이 쓰던 의복들을 시동(尸童)에게 입히고, 또 철따라 나는 음식들을 차려 놓는다.
조상 사당에 대해서는,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 사는 1묘, 서인은 사당이 없다고 하는 것(《예기》王制)이 보통 설인데, 정현은 천자 5묘란 설을 주장하고 있어 경학(經學)에서 유명한 문제로 되어 있다. 주자의 주는 보통 7묘설에 따라, 천자 7, 제후 5, 대부 3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이 ‘적사(適士) 2, 관사(官師) 1’로 되어 있는 것은,《예기》의 주에, 적사는 제후의 상사(上士)를 말하는 것으로, 천자의 경우라면 상사, 중사, 하사가 그와 같은 열이 되는데, 이들 사의 경우는 2묘이고, 관사라는 것은 각 관(官)의 우두머리로 있는 사람으로 제후의 중사와 하사를 말하는데, 그 경우는 1묘라고 하는 것이다. 또 왕제편에 의하면, 천자의 7묘라는 것은 태조의 사당과 3소(昭) 3목(穆), 제후의 5묘라는 것은 태조의 사당과 2소 2목, 대부의 3묘란 것은 태조의 사당과 1소 1목이고, 또 제법편의 기록에 의하면, 적사 2묘는 아버지의 사당과 할아버지의 사당, 관사 1묘란 것은 아버지의 사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 천자, 제후, 대부의 예에 따라 적사 2묘는 태조의 사당과 아버지의 사당이고, 관사 1묘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사당으로 풀이해야 될 것이다.(昭穆에 대해서는 다음 절 해설로 미룬다.) 주자가 어째서 대부 3묘 아래를 “사 1묘, 서인무묘”로 하지 않고 이같이 얼른 보아 잘 맞지 않는 설을 택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보통 설로는 서인에게는 사당이란 것이 따로 없고, 아버지 혹은 조상의 제사는 모두 침(寢-큰 방)에서 지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주자 어류》“오늘날 사와 서인의 집에서 아버지ㆍ할아버지ㆍ증조할아버지 3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에 위배되는 것인가.” 하고 물은데 대해 “3대를 제사지내고는 있지만 사당이 없으니까, 참월(僭越)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한 것이 있다.
종기(宗器)라는 것은,《서경》顧命편의 성왕(成王)이 죽는 장면에, 적도(赤刀), 대훈(大訓), 천구(天球), 하도(河圖) 등을 진열한 것이 보이는데, 그러한 것들을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 적도는 붉은 장식이 달린 보검, 대훈이란 것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글과 천자의 칙어, 천구라는 것은 하늘색의 옥(玉), 하도는 복희씨 때 용마의 등에 실려 황하에서 나타난 신비한 도표(圖表-현재《주역》에 洛書와 함께 실려 있다). 그 어느 것이나 주나라 왕실의 보물이었을 것이다. 상의는 조상들이 쓰던 의복, 상은 치마(옛날에는 남자도 치마를 입었다.), 의는 웃옷인데, 제사 때면 그것들을 시동(尸 즉 尸童)에게 입혀 조상의 기운이 거기로 타고 오르게 했던 것이다. 제사 때 어린아이를 신주가 있는 곳에 앉혀두고 영혼이 아이의 몸에 옮겨 붙도록 했는데 그 아이를 시(尸), 즉 시동(尸童)이라고 했다. 시식(時食)이란 곳은 사철의 음식, 즉 사철을 따라 그때그때 나는 음식.《주례》천관(天官) 총재(冢宰) 포인(庖人)조에, ‘봄에는 고돈(羔豚)을 쓰고 고향(膏香)을 선(膳)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봄이 되면 어린 양과 새끼돼지가 풀을 먹고 살이 찌기 때문에 그것을 감으로 하고, 냄새 좋은 기름, 즉 쇠기름에 볶아 요리를 만드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곧 시식이다. 이렇게 예에 맞는 법으로 제사를 지내면 조상의 영혼이 시동의 몸으로 내려와 이 차린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천(薦)은 음식을 올린다는 뜻이다.
宗廟之禮는 所以序昭穆也요 序爵은 所以辨貴賤也요 序事는 所以辨賢也요 旅酬下爲上은 所以逮賤也요 燕毛는 所以序齒也니라.
【解釋】종묘의 예는, 그로써 소목(昭穆)을 차례 하는 것이요, 작(爵)을 차례 하는 것은, 그로써 귀천을 구별하는 것이요, 일을 차례하는 것은, 그로써 어진 것을 분간하는 것이요, 여수(旅酬)에 아래가 위를 위하는 것은, 그로써 천한 데 미치는 것이요, 연모(燕毛)는 그로써 나이를 차례 하는 것이다.
【解說】종묘라는 것은 앞 장에 말한 조상의 사당, 즉 조묘(祖廟)다. 종(宗)은 중국 특유의 대가족을 종족(宗族)이라고 하는 그 종이다. 서(序)는 차례, 즉 질서를 정하고 순서를 정하는 것. 종묘의 구조는, 먼저 정면 맞은편에 태묘(太廟), 즉 태조(太祖)의 사당이 있고, 그 앞쪽으로 태묘에서 남쪽을 향해 왼쪽이 소(昭), 오른쪽이 목(穆)이 되는 순서로 조상의 사당이 두 줄로 죽 서게 된다. 소는 밝다는 뜻이고 목은 어둡다는 뜻이다. 이 종묘의 소목의 배열(配列)은 세대의 구분과도 통하는 것이어서, 할아버지(및 같은 항렬), 아버지(및 같은 항렬), 아들(및 같은 항렬), 손자(및 같은 항렬)는, 각각 예를 들면, 할아버지가 소이면 아버지는 목이 되고, 아들은 다시 소가 되며, 손자는 또 목이 된다. 즉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줄로 죽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이나 외국 사람들에게는 그 뜻이 그다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옛날 중국에서는(우리나라도 그랬지만) 그만한 전통적인 이유가 있어서였다. 예를 들면 죽은 아버지의 제사를 지낼 때면, 그 시동이 되는 것은 아들이 아닌 손자(혹은 같은 항렬)라야만 했는데 이것은 살아 있을 때도 이른바 ‘군자는 손자를 안고 자식을 안지 않는다.’하여 아비가 자식을 너무 가까이 하는 것을 예의에 벗어난 행동으로 알고 있는 데서 온 것이다. 즉 소목 관계는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네 철에 행해지는 태묘에서의 제사 때에는 소에 해당되는 각 사당의 목주(木主-位牌, 이것을 群昭라고 한다.)와, 목에 해당되는 각 사당의 목주(이것을 群穆이라 한다.)가 전부 태묘로 모여지고, 자손들도 전부 모여, 각각 소목 순서에 의해 두 패로 나눠지게 된다. 이같이 하여 올바른 질서가 다시 확인되고 유지되어가는 것이다.(《예기》祭統 참조) 즉 종묘의 제사란 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것만이 아니고, 살아있는 가족 (大家族) 전체의 질서와 단결과 친화를 항상 유지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작(爵)이란 것은 공후(公侯)ㆍ경대부(卿大夫)와 같은 계급적 칭호를 말한다. 종묘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의 작위 서열을 중하게 여기는 것은, 같은 가족 안이라고는 하지만 귀천의 관계를 어디까지고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으로서 들고 있는 것 가운데 공후라는 것은, 이른바 제후들의 다섯 등급인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을 처음 둘로서 대표한 것이겠지만, 경ㆍ대부라고 하는 것은 제후들 나라 안에 있는 작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직무에 의한 계급의 이름이다.
일을 차례한다는 <일>이란 것은, 가장 전형적으로는 군사(軍事)와 제사를 가리키는 것인데, 여기서는 제사의 경우로, 종축유사(宗祝有司)의 직사(職事)라고 했다. 즉 종(宗)이란 것은《주례》에 보이는 종백(宗伯)이니 종인(宗人)이니 하는 제사 담당관, 축(祝)은 대축(大祝) 소축(小祝)하는 축문 담당관, 유사(有司)라는 것은 그 밖의 여러 가지 부서를 맡은 사람을 총괄해서 하는 말인데, 이같은 제사에 필요한 부서를 맡은 사람들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종묘의 제사에 있어서 이러한 <일>들에 순서를 정하고 체계를 세우는 것은, 일을 분담시켜 종이니 축이니 하는 유사들의 일을 많은 사람들이 현명하거나 현명하지 못한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종묘의 제사에는 같은 종족들만이 아니고 외부의 손님들도 참가하게 된다. 여수(旅酬)의 여(旅)는 무리(衆), 즉 모든 사람을 말하고, 수(酬)는 도음(導飮). 도음이란 것은 손님에게 술을 권하는 것, 즉 술마시는 것을 지도하는 것이다. 이 <여수>라는 의식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먼저 주인 쪽의 선도(先導)에서 시작해서, 손님과 손님을 따라온 사람들, 접대를 하는 주인 쪽의 사람들이 모두 각각 술잔을 윗사람에게 올리고, 그런 다음 함께 술잔을 나누는 의식이다. 우리말에 이른바 음복(飮福)이란 것이 바로 이 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해 술잔을 먼저 올리는 것이 규칙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해서 제사에 참가한 전부에게 그 직무(술을 권하는 것도 제사에 있어서 중요한 직무다.)를 고루 나눠 하게 하는 것은, 종묘에 있어서는 제사의 일을 맡는 것이 자랑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다 직무를 분담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제사에 대한 경건한 정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는 것이다.
마침내 제사가 끝나고, 빈객들이 다 물러간 다음, 의식으로서의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닌 술자리, 즉 잔치가 시작된다. 그때는 머리털 빛깔에 의해, 즉 흰머리, 반백, 검은 머리의 순서로 앉는 자리를 정하기 때문에 연모(燕毛)라고 한다. 연(燕)은 잔치의 뜻이고, 모(毛)는 머리털이란 뜻이다. 물론 이것은 머리털 빛깔이 반드시 나이와 일치하지 않는 것인 만큼, 결국 머리털이란 말은 나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술자리를 베풀고 나이에 따라 좌석을 정하는 것은, 나이에 따른 장유의 구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한 방법이다.
踐其位하야 行其禮하고 奏其樂하며 敬其所尊하고 愛其所親하며 事死如事生하고 事亡如事存이 孝之至也니라.
【解釋】그 위를 밟아, 그 예를 행하고, 그 음악을 아뢰며, 그 높이 할 바를 공경하고, 그 친히 할 바를 사랑하며, 죽음을 섬기기를 삶을 섬김같이 하고, 없음을 섬기기를 있음을 섬김같이 하는 것이, 효도의 지극함이다.(제5절)
【解說】그(其)라는 것은, 모두 선왕(先王)-그것은 훨씬 옛날의 임금이 아니고 방금 죽은 부왕이라도 상관없다.-을 가리킨다. 그 위를 밟는다는 것은 선왕이 일찍이 조상들을 위해 종묘의 제사를 행할 때 몸소 계시던 그 위치, 그 위치를 지금 자신의 발로 밟고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이 되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 예를 행한다는 것은, 그같은 때에 일찍이 선왕이 집행한 것과 똑같은 예를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이 음악도 같은 음악을 연주하고-이상은 왕실은 물론 그 밖의 사람들 집에서도 대대로 당연히 그래야만 되는 것이다.-선왕이 존경하던 그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똑같이 존경하고, 선왕이 가까이 하고 사랑하던 그 아들ㆍ손자ㆍ신하들을 똑같이 가까이하고 사랑한다.
<죽음(사(死)>이란 것은 금방 죽고 났을 때를 말하고 <없음(亡)>이란 것은 장사를 지내고 난 뒤를 말한다. 즉 <돌아가고 없다.(反亡)>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비로소 죽고 이미 없다는 실감이 솟는 것.(《예기》檀弓下)의 그 없음(亡)이다. 즉 선왕이 죽어서 아직 장사하지 않았을 때에는, 마치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섬긴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효도의 극치인 것이다.
이 한 절은 종묘의 제사를 말한 제3, 제4의 두 절을 끝맺는 것으로 <뜻을 잇고> <일을 펴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위를 밟고, 예를 행하고, 음악을 아뢰고 하는 것은 <일을 펴는> 것이고 다른 것은 <뜻을 잇는> 것이다.
郊社之禮는 所以事上帝也요 宗廟之禮는 所以祀乎其先也니라. 明乎郊社之禮와 禘嘗之義면 治國은 其如示諸掌乎인저.
【解釋】교사(郊社)의 예는 그로써 상제를 섬기는 것이요, 종묘의 예는 그로써 그 조상을 제사하는 것이다. 교사의 예와 체상(禘嘗)의 뜻에 밝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것이 손바닥을 보는 것 같다.(제6절)
【解說】교(郊)란 것은 하늘에 지내는 제사, 사(社)는 땅에 지내는 제사다. ‘그로써 상제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는 ‘상제와 후토(后土)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할 것을 후토 쪽은 생략한 것이다. 하늘의 신이 상제이고, 땅의 신이 후토인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토의 후(后)는 제(帝)와 마찬가지로 역시 임금이란 뜻이다. 교의 제사와 사의 제사는(冬至에는 하늘에 제사하고, 夏至에는 땅에 제사한다.) 천자의 특권이며 동시에 또 의무였는데, 1911년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북경(北京)에 있는 천단(天壇)이니 지단(地壇)이니 하는 곳에서 엄숙히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종묘의 제사가(이것은 반드시 천자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그 조상(先)을 제사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천자가 종묘에 지내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네 철 제사 중, 가을에 지내는 제사를 상(嘗)이라고 하는데, 이 <상>으로써 사철 제사를 대표해서 말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체>란 것은, 천자가 지내는 종묘의 큰 제사로서 사철 지내는 제사와는 달리 5년에 한 번 특별히 지내는 큰 제사다. 이 제사는 물론 태묘에서 모든 조상을 제사지내는 것인데, 목적으로 하는 것은 태조의 선조(태조가 나온 곳)와 태조를 제사하는 것으로, 주나라 왕실의 경우로 말하면 후직이 태조가 되고, 곡(嚳)이 태조가 나온 곳이었던 것 같다.
만일 누군가가 이 교사의 제사와, 5년마다 지내는 체의 제사와, 사철 지내는 종묘의 제사에 대한 참뜻을 충분히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같은 사람에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같은 것은, 마치 나라를 다스리는 일들이 자기 손바닥 위에 놓고 들여다보는 거나 마찬가지로 환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사의 예, 체상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둘을 대(對)로 든 호문(互文)으로, ‘교사의 예에 관한 참뜻, 체상의 예에 관한 참뜻’이라고 한 말이다. 예란 것은 반드시 참다운 뜻을 머금고 있는 것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시(示)는 시(視)와 같이 쓰인 것이다.
이 대목은《논어》팔일(八佾)편에 어느 사람이 체(褅)에 대한 설을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알지 못한다. 그 설을 아는 사람의 천하에 대한 것은 이것을 보는 것 같다.”하고 그 손바닥을 가리켰다고 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제 20 장
이 장도 전체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순(제17장)ㆍ문왕(제18장)ㆍ무왕ㆍ주공(제18, 제19장)이라고 하는 도통(道統)의 선 위에 공자를 두고, 이를 모든 성인이 전승한 것(道)이 그 내용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 공자의 도라고 하는 것도 그 본질적인 점을 논하게 되면, 순ㆍ문왕ㆍ무왕ㆍ주공이 행한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즉 이 장은 비(費)와 은(隱)을 포괄하고, 소(小)와 대(大)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결국 제12장의 내용을 완결 지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장은 성(誠)-성이야 말로 이《중용》의 중심이다.-에 대한 정면적인 논술을 시작한(제17절) 점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제20장은,《공자가어(孔子家語)》제17 애공문정(哀公文政)편에 거의 그대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공자가어》가 뒷사람에 의해 거짓 만들어진 책이란 것은 오늘날 정설로 되어 있지만, 주자가 이를 의심한 형적은 뚜렷하지가 않다.
哀公이 問政하니
【解釋】애공이 정치를 물었다.(제1절)
【解說】애공은 공자 당시의 노(魯)나라 임금으로, 이름은 장(蔣)이다. 기원전 494년, 공자의 나이 59세 때 즉위했다. 공자는 그 몇 해 전부터 69세까지 노나라를 떠나 있었으므로, 이 문답은 공자의 나이 69세 이후, 74세로 죽을 때까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이리라.
子曰 文武之政이 布在方策하니 其人存則其政擧하고 其人亡則其政息이니이다.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문무의 정치는 펴 방책(方策)에 있다. 그 사람이 있으면 곧 그 정치가 행해지고, 그 사람이 없으면 곧 그 정치도 쉰다.”(제2절)
【解說】여기서부터 제6절까지가 한데 붙은 것이다. 정치의 근본은 사람에게, 결국 수신(修身)에 있고, 수신은 인에 입각(立脚)해 있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바탕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공자가 말씀하셨다.’는 멀리 장 끝에까지 미친다.
문무의 정치라는 문무는, 문무 양도(文武兩道)라고 할 때의 그 문무가 아니고, 성인 천자인 문왕과 무왕을 말한다. 방책(方策)의 방(方)은 목판(木板)을 뜻하고, 책(策)은 죽간(竹簡)을 말한다. 즉 종이가 나오기 이전의 종이 구실을 하던 것으로 결국 문헌(文獻), 즉 기록이란 뜻이다.
애공이 정치란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그 근본적인 의의를 물은데 대해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문왕과 무왕의 어진 정치란 것이 문헌에 제대로 실려 있어 누구나 이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누구라도 연구하고 배우기만 하면, 그대로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정치는 결국 사람의 문제다. 즉 훌륭한 사람이 임금이 되고 또 신하가 되어 있어야만 정치도 훌륭하게 행해진다. 그러한 인물이 없어지면 그러한 정치도 따라 없어지게 된다. 아무리 문헌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주자의 주는 “이 임금이 있고, 이 신하가 있으면, 곧 이 정치가 있다.”고 했다.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서야 다스리는 법(法)은 있다고 하는 것(《荀子》君道)이 유교의 정신이다.
人道는 敏政하고 地道는 敏樹하니 夫政也者는 蒲盧也니라.
【解釋】사람의 도는 정사에 민첩하고, 땅의 도는 심는데 민첩하다. 정사란 것은 포로(蒲盧)다.(제3절)
【解說】민(敏)은 민첩(敏捷), 즉 빨리 척척 해내는 것. 포로(蒲盧)는 정현의 주에서는 ‘과라(蜾)다. 토봉(土蜂)을 말한다. 뽕나무 벌레(螟蛉) 새끼를 가져다가 그것을 변화시켜 자기 자식으로 만든다. 운운.’하고 있는데 주자는 포위(蒲葦)라고 하는 심괄(沈括)의 설을 따랐다. 정현이 말한 과라라는 것은 우리말의 <나나니벌>을 말한다. 심괄이란 사람은 북송(北宋) 중엽의 학자요 정치가였는데, 특히 중국 자연과학사에 있어서 거물로 알려져 있다.《몽계필담(夢溪筆談)》은 그의 유명한 저서다. 주자는 심괄에 대해서는 상당히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어서 저술에 있어서나, 이야기에 있어서나 자주 그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포위라는 것은 보통 부들(蒲)과 갈대(葦) 둘로 풀이되고 있는데, 두 가지가 아닌 한 가지 풀일지도 모른다. 아주 잘 살고 잘 자라는 풀이라고 한다. 훌륭한 사람이 있어 훌륭한 정치를 할 경우, 마치 땅에 나무나 풀을 심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수월하게 목적이 이루어진다. 풀과 나무를 무럭무럭 빨리 자라나게 하는 것이 땅의 도인 것처럼, 정치를 빨리 제대로 진행시키는 것이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의 도라고 말하고, 다시 그 쉬운 것을 강조해, 정치를 <포로>에 비유했다.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사가 행해지는 것이 아주 쉬운 것은 마치 땅에 포로를 심으면 쉽게 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故로 爲政在人하니, 取人以身이오 修身以道요 修道以人이니라.
【解釋】그러므로 정사를 하는 것은 사람에 있나니, 사람을 취하는 것은 몸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하고, 도를 닦는 것은 인(仁)으로써 한다.(제4절)
【解說】이 한 절은 ‘사람의 도는 정사에 민첩하다.’고 한 것을 이어받아 말하는 것이다. 이 한 절의 ‘정사를 하는 것은 삶에 있다.’가《공자가어》쪽에서는 ‘정사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데 있다.’로 되어 있어서, 뜻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다. 정치를 행하는 데는 사람, 즉 어진 신하를 발견해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어진 신하를 채용하는 데는 ‘몸으로써 한다.’ 이 몸이란 것은 임금의 몸을 가리킨다. 즉 임금이 훌륭하게 몸을 닦아야만 신하도 어진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을 닦으려면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도에 의해 닦아야 한다. 또 도를 닦으려면 인(仁)에 의해 해야 한다. 도에 의해 몸을 닦을 경우, 그 도는 달도(達道)다. 제1장의 ‘화(和)란 것은 천하의 달도.’라고 한 달도, 또 바로 뒤의 제7절에 있는 ‘천하의 달도가 다섯이다.’라고 한 달도, 즉 인간에 내재한 도덕성의 표출된 현상(禮에 대한 用, 未發이 아닌 已發)인 인륜(人倫)의 도를 말한다. 몸을 닦는다는 것은 단순한 명상이나 반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군신ㆍ부자ㆍ부부ㆍ형제ㆍ붕우라고 하는 인륜 관계에 있어서 변함없이 존재하는 바른 행동, 그것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만 몸은 닦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를 닦는 데는 무엇으로 닦느냐 하면, 그것은 벌써 가장 궁극적인 것, 즉 인을 가지고 닦는 것이다.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오상(五常)은, 하늘로부터 명령된 이른바 성(性)의 내용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데, 이 다섯 개의 덕을 다시 집약하면 인(仁) 하나로 되고 만다. 인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그것이 사람에 있어서는 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람이 나서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인에 의해서다.《주역》에 ‘원(元)은 천지와 사시(四時), 즉 자연의 덕(德)인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의 맨 처음 것, 그것을 다른 말로써 바꿔 말하면 인(仁)이 되는 것이다. 원ㆍ형ㆍ이ㆍ정이 각각 원의 원, 원의 형, 원의 이, 원의 정이듯이 인ㆍ의ㆍ예ㆍ지ㆍ신도, 인의 인, 인의 의, 인의 예, 인의 지, 인의 신이라고 하는 것이 진상(眞相)이다. 결국 임금이 정치를 하기 위한 요건은 사람을 얻는 것에 있고, 사람을 취하기 위한 원칙은 내 몸을 닦는 것에 있다. 궁극에 가서 내 몸을 인하게 하는(仁에 입각하여 人倫의 道를 완전히 실천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여기에 곧 훌륭한 임금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따라서 어진 신하도 얻게 되고, 정치에 있어서 실현되지 않는 점은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仁者는 人也니 親親爲大하고 義者는 宜也니 尊賢爲大하니라.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은 禮所生也니라.
【解釋】인이란 것은 사람이니, 친을 친하는 것이 큰 것이 된다. 의란 것은 마땅한 것이니, 현을 높이는 것이 큰 것이 된다. 친을 친하는 쇄(殺)와 현을 높이는 등(等)이, 예가 생기는 곳이다.(제5절)
【解說】‘인은 사람이다.’라는 것이, 앞 절의 ‘도를 닦는 것은 인(仁)으로써 한다.’고 한 것을 이어받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 즉 추상적인 체(體)로서의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인(仁)이라고 하는 <삶의 이치(性,體)>를 자기 안에 내재해 두고 있는 당연의 귀결로서 측달자애(惻怛慈愛)라고 하는 정(情-用)을 가지고 있는 인간, 그러한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용적(用的)인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개념적으로서가 아니고 체험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즉시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우물에 빠지게 된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심정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맹자의 유명한 논지와, 그 논지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보면 알 수 있다.(《맹자》公孫丑上) 주자는 그러한 구체적인 사례에 밀착해서 인을 설명하는 외에, 또 예를 들면, 마치 술을 빚을 때 그것이 익어 가기 시작하면 더운 기운을 띠게 되는데, 그것이 곧 인이라든가, 봄의 따뜻한 기운, 생육하는 기운과 같은 것이 인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주자는 인에 대해 ‘마음의 덕, 사랑의 이치’라고 하는 유명한 정의를 내리고, 인이 곧 사랑이라고 하는 옛날 학설에 극력 반대했다. 인은 성(性)이요 체(體)로서, 그 대응물로서의 측달자애(惻隱)가 정(情)이요 용(用)인 것과는 엄밀히 구별해야 한다고 하는, 이른바 체용 준별(體用峻別)의 엄격한 태도는 주자의 현저한 특징이긴 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앞에 말한 대로 극히 구체적으로 인을 생각하게 하는 것도, 여전히 주자의 일면의 특징이었다. ‘인은 사람이다.’, 즉 ‘인(仁)은 인(人)이다.’라고 하는 음이 같다고 하는데서 오는 전통적인 정의에 대해, 이같이 ‘사람이란 사람의 몸(身)을 가리켜 말한다. 이 삶의 이치를(生理)를 갖추면 자연히 측달 자애의 뜻이 있다. 깊이 체미(體味)하면 볼 수 있다.’고 하는 주석을 하고 있는 것은 역시 주목할 만한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묵자적(墨子的)인 무차등의 겸애(兼愛)를 부자연한 이지주의라 하여, 자기 학설의 대극(對極)으로 의식하면서, 사랑에는 차등이 있다고 하는 친친주의(親親主義)를 주장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의는 마땅한 것이다.’라고 한 의(宜)는, 사물의 도리를 분별하여 각각 마땅한 곳에 있게 하는 것, 즉 온갖 사물이 각각 저마다 특수하게 갖게 되어 있는 타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仁)이 구별부정적(區別否定的)인 원리인 것에 대해, 의(義)는 구별정립적(區別定立的)인 원리다. 최후의 예는, 인과 의의 둘을 절문(節文)하는 것이다. 즉 인의라고 하는 원리적인 것에 마치 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것처럼 마디를 붙이고, 문, 즉 무늬를 있게 하는 그것이 예라는 것이다.《논어》학이(學而)편에 유명한 주자의 주인 ‘예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요, 인사(人事)의 의칙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단순한 인의가 아니고, 그것이 마디를 붙이고 무늬를 놓아 나타나는, 그것이 예인 것이다.
결국 이 한절을 죽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정치의 근본은 인을 가지고 몸을 닦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대표적으로 말한 것으로,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적어도 인ㆍ의ㆍ예 세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이란 것은, 사람(신체적이고 情的인 인간)이란 것에 다를 것이 없으므로, 사람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친(親-父母, 兄弟,親戚)을 친한다는 것이 최초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자기 아버지에 대하는 것과 남의 아버지에 대하는 것, 형의 아들에 대하는 것과 이웃사람의 아들에 대하는 것에 사랑의 차등이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 인정의 자연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의란 것은 구별적 타당성이란 것이므로 단순한 친애 감정이 아니고, 지적인 인식, 즉 어진 사람을 어진 사람으로서 인식하여 그것을 존경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양(陽)이 있으면 그 반면으로 반드시 음(陰)이 있지 않으면 안되듯이, 육친을 친하는 친화(親和)가 있으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서 육친의 감정에 빠지지 말고 널리 어진 사람을 어진 사람으로 인정하여 존경하는 구분과 같은 차별주의란 것이 없어서는 안된다. 친친이라고 할 때도 물론 차별의 원리는 자연 작용하게 된다. 그것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후하게 하고, 먼 사람일수록 박하게 하는 체감성(遞減性), 즉 쇄(殺-減殺)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같이 인이 첫걸음이요, 또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인 친친 가운데도 자연 차별성은 존재한다.
한편 의의 원리에 바탕한 것 중 가장 가깝고 가장 큰 항목인 존현(尊賢), 그것이 무차등인 것은 당연하다. 어진 사람 가운데서도, 혹은 스승이 될 사람, 혹은 단순히 친구로 해야 할 사람 등 차등이 자연 발견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인과 의를 절문하는 것으로서의 예를 성립시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예는 유교에 있어서 인과 함께 최고의 항목이었다.
이 친친존현이란 것은, 유교의, 혹은 중국의 정치사상에 있어서는 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예를 들면 혈통에 의한 왕조의 존속 원리가, 말하자면 <친친>주의에 서 있는 데 대해, 그것을 사적(私的)인 것이라 하여 강하게 공적인 입장을 주장한다면, <존현>주의적인 이른바 선양(禪讓)의 형식이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천자의 상속이 친친의 원리에 바탕하고 있는 데 대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조정에 있어서의 재상은 어디까지나 존현의 원리를 유지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특히 이 한 절은, 말하자면 인이라고 하는 동(同)의 원리와, 의라고 하는 별(別)의 원리의 종합으로서의 예의 발생을 간결하게 말한 것으로서, 유교의 문헌 중에서도 극히 중요한 부분이다.
故로 君子는 不可以不修身이라 思修身이면 不可以不事親이오 思事親이면 不可以不知人이오 思知人이면 不可以不知天이니라.
【解釋】그러므로 군자는 몸을 닦지 않을 수 없나니, 몸을 닦으려 생각하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어버이를 섬기려 생각하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을 알려고 생각하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제6절)
【解說】제4절에 있듯이 ‘정사를 하는 것은 사람에 있나니, 사람을 취하는 것은 몸으로써 한다.’ 즉 정치의 근본인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임금 자신의 몸을 닦는 것이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군자로서는 무엇보다 먼저 몸을 닦는데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몸을 닦는 데는 도로써 하고, 도를 닦는 데는 인으로써 한다.’고 했으므로(제4절), 몸을 닦기 위해서는 어버이를 섬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논어》에도 ‘효제(孝悌)는 인(仁)을 하는 근본이다.’(學而)라고 했듯이, 인을 실천하는 최초의 단계는 어버이를 섬기는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인에 의해 도를 닦고 도에 의해 인을 닦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에 다름없다. 그런데 어버이를 섬기는 <인>의 도를 완벽하게 행하려고 하면, 이미 말한 대로 그 필연적인 보완으로서 존현의 의(義)란 것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존현이라는 의의 원리를 매개로 한다는 것은, 단순한 직접적 혈연적인 동(同)의 원리에서 나와 반성적인 별(別)의 원리에 서는 것, 즉 널리 사람을 아는 것을 뜻한다. 사람(人)이란 말은, 일반 사람과 남이란 뜻을 함께 갖는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알려고 생각하면, 하늘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이른바 친친(親親)의 쇄(殺)니, 존현(尊賢)의 등(等)이니 하는 것은, 결국 모두 하늘의 이치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 즉 이상적인 자연상태, 혹은 자연적인 이상상태라는 것을 뭔가 평등주의적인, 또는 무체제적인(체제로부터 자유로운 것)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노장(老莊), 즉 도가의 무책임한 도피주의의 유혹에 몸을 맡기는 것에 불과하다. 이 세계는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있어야만 되게끔 그렇게 체제가 지어져 있는 것이다. 하늘은 왜 높고 땅은 어째서 낮은가. 그것은 하늘은 지위가 높고, 땅은 지위가 낮기 때문이다. 하늘이 땅보다 낮다든가, 하늘과 땅이 똑같은 높이로 있다는 것은, 사실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도리로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주만물, 삼라만상 모두가 이같은 도리를 실현하고 있지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같은 도리가 훌륭한 조화의 미를 가지고 즉 절문(節文)을 가진 예적(禮的)으로 실현되어 있다고 하는, 그곳에야말로 유교적인 세계관의 근본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세계관에 서게 되면, 노골적인 자기주의(楊朱의 爲我主義)와 함께, 무차별의 평등한 사랑의 주장(墨翟의 兼愛主義)이 부정되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天下之達道五에 所以行之者三이라. 曰 君臣也와 父子也와 夫婦也와 昆弟也와 朋友之交也 五者는 天下之達道也요 知人勇三者는 天下之達德也니 所以行之者는 一也니라.
【解釋】천하의 달도가 다섯인데, 가지고 행하는 것은 셋이다. 말하여, 군신이니, 부자니, 부부니, 곤제니, 붕우의 사귐이니 하는 다섯은 천하의 달도이고, 지와 인과 용 셋은 천하의 달덕이다. 가지고 행하는 것은 하나다.(제7절)
【解說】여기서 또 다소 이야기가 바뀐다. 제2절에서 제6절까지는, 정치의 근본이 몸을 닦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몸을 닦는 것은 인(仁)-물론 인이라고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의가 따르는 것을 언급한 것이데, 이 절에서부터 제10절까지에서는, 그 몸을 닦는다는 것을 내용적으로 전개한다. 몸을 닦는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반성이나 정좌 명상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달도라는 것은, 제19장에 달효(達孝)가 있는 것과 같은 식의 말로서, 천하 고금(天下古今)이 함께 말미암는 도(道)인 것으로, 이미 첫장에 ‘화(和)란 것은 천하 달도다.’라고 한 그대로다. 시간적으로는 고금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공간적으로는 천하 어느 장소에서나, 사람인 이상 누구라도 그곳을 지나가는(가지 않으면 안되는) 길, 그것이 달도다. 즉 누구나가 다 지나가는 공통의 길이 달도인 것이다.《서경》순전(舜典)에 오전(五典)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이미 그것이겠지만, 거기서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 내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대학》전 3장에 있는 다섯 가지 지(止), 즉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나라 사람과 사귐에는 신(信)에 그친다.’고 한 다섯 가지와,《맹자》가 말한 ‘부자는 친(親)이 있고, 군신은 의(義)가 있고… 붕우는 신이 있다.’고 한 이른바 오륜(五倫)이 그것이다.
그런데, 다섯 가지 달도-일반적인 말로 하면 오륜의 도-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 덕이다. 이 다섯 가지 달도를 인식하는 그것이 지(知)고, 다섯 가지 달도를 몸으로 체득하여 그것을 실행하는 그것이 인(仁)이고, 이 다섯 가지 달도의 인식과 실천을 확고부동하게 밀고 나가는 그것이 용(勇)이다. 이 지와 인과 용을 달덕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 고금을 통해 다같이 얻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가 다 평등하게 몸에 얻어 지니고 있는(있지 않으면 안되는) 이치인 것이다. 덕은 득(得)이다. 이(理)와 성(性)이 내재해 있음으로 해서, 혹은 그것이 계속 실천되고 있음으로 해서, 몸과 마음에 얻어져 있는 어떤 힘을 말한다. 이치 그것이 덕은 아니지만, 이치에 바탕한 몸과 마음의 능력이 덕인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후천적인 수득(修得)에 의하는 것만은 아니다.
몸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도를 실천하는 것이 되는데, 도의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형식은 다섯이 있다. 또 이 다섯 가지 도(《맹자》에 말한 이른바 오륜(五倫)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 즉 세 가지 달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달덕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 존재해 있는데, 그것이 곧 <성(誠)>이란 것이다. ‘가지고 행하는 것은 하나다.’라고 한 그 하나가 곧 성이다. 달덕은 모든 사람 누구나가 다 얻지 않으면 안되는, 얻을 수가 있는, 본질적으로는 이미 얻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조금이라도 성이 아니게 되면 인욕이 사이에 끼어 들어와서, 덕은 벌써 참다운 뜻에서의 덕이 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오해가 있어서는 안된다. 성과 세 가지 달덕과의 관계는, 정자의 말에 의하면 “성이란 것은 결국 이 세 가지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세 가지 이외에 따로 또 하나, 성이라고 하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은 다음 제17절에서 자세히 논하게 될 것이다.
或生而知之하며 或學而知之하며 或困而知之하나 及其知之一也니라. 或安而行之하며 或利而行之하며 或勉强而行之하나 及其成功一也니라.
【解釋】혹은 나면서 알고, 혹은 배워서 알고, 혹은 괴롭게 아나 그 아는 것에 미쳐서는 하나다. 혹 편안해서 행하고, 혹 이로워서 행하고, 혹 힘써서 행하나, 그 공을 이롭게 미쳐서는 하나다.(제8절)
【解說】이이 절도 다섯 가지 달도에 관한 논지의 계속으로, 달도의 인식과 실천의 종류가 논해지고 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되풀이되고 있는데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목적어는 이 겨우 달도다. 원래 한문에서 지(之)란 글자는, 명사나 형용사인 글자를 동사로 만들 때 쓰이는 글자로서 자동사가 되는 경우와 타동사가 되는 경우가 있겠으나, 대개는 타동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며, 특히 여기서는 그 의미가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면서부터 다섯 가지 달도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 즉 날 때부터 완전히 도덕적인 사람, 그러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곧 성인을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다섯 가지 도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학문을 함으로써 그것을 인식하게 된다. 끝으로 괴로워하며 안다는 것은 날 때부터 기품(소질)도 총명하지가 못하고, 학문을 해도 좀체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나, 분발해서 마음의 고통을 겪어가며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전진을 계속하여 간신히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궁극의 도달점에 대해서 말한다면 결국 같은 도덕적 인식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행(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 하는 사람, 즉 아무런 의지적인 긴장 없이, 말하자면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다섯 가지 달도를 실천하는 사람(聖人)도 있고, 이로워서 행하는 사람, 즉 다섯 가지 달도를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이란 것을 알고 나서 비로소 실천하는 그런 사람도 있다. 또 날 때부터 아무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하는 것도 아니나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자각을 갖고, 노력과 반성을 거듭하여 갖은 고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실천이 가능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 세 가지 실천 사이에 단계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과정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실천을 완성한 지점에서 말하면, 어느 것이나 다 다섯 가지 달도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지와 형의 세 단계-생지(生知)ㆍ학지(學知)ㆍ곤지(困知) 및 안행(安行)ㆍ이행(利行)ㆍ면행(勉行)-를 지ㆍ인ㆍ용에 붙여 말한다면 첫째, 횡적인 구분이란 점에서 말하면, 지행의 지(知)는 지(知)이고, 지행의 행(行)은 인(仁)이다. 그리고 자와 행이결국은 궁극 단계에 있어서 똑같다고 하는, 그러한 사태에까지 밀고 나가는 그것이 용(勇)인 것이다. 둘째로 관점을 바꾸어, 단계적 등급이란 점에서 나누어 말하면, 생지와 안행은 지(知)에, 학지와 이행은 인(仁)에, 곤지와 면행은 용(勇)에 속하게 된다. 이 경우, 지ㆍ인ㆍ용 세 달덕은 용→인→지와 같은 형태로 단계가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부터 착하다. 그 점, 성인을 비롯해서 무릇 사람인 이상 완전히 같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본질의 형태에서의 인간으로, 현실에 있어서의 인간은 기품이란 점에서 갖가지 차별을 갖는다. 그러므로 도를 듣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아주 이른 시기에 벌써 도를 얻어 들은 사람도 있거니와, 간신히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얻어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도를 행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힘 안들이고 편안히 수월하게 행하는 사람, 겨우 어떻게 하여 행하게 되는 사람 등의 차별이 생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에 있어서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힘써 쉬지 않게 되면 언젠가는 똑같은 궁극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생지 안행, 학지 이행, 곤지 면행의 세 가지를 각각 인ㆍ지ㆍ용에 배당하는 설도 상당히 유력했던 모양인데, 주자는 과감히 이를 배격하여 지ㆍ인ㆍ용에 배당했다. 즉 지를 인보다 앞에 둔 것이다. 그 근거로서는 순(舜)을 지(知)로 한 제6장의 규정이 인용되고 있다. 결국 여기에 서술되고 있는 것은 주자학의 표어로 되어 있는 ‘성인은 배워서 이르게 된다.’는 설에 다름없는 것이다. “학문이란 것은 그로써 성인에 이르는 길이다.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성인이란 것은 생지(生知)로서 배워서 이를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학문의 타락이 비롯된 것이다.”(《近思錄》에 있는 정자의 말.)
子曰 好學은 近乎知하고 力行은 近乎仁하고 知恥는 近乎勇이니라.
【解釋】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제9절)
【解說】경문에 있는 자왈(子曰)이란 두 글자는 연문(衍文)이다. 즉 필요하지 않은 것이 어떤 이유로 인해 잘못 끼어들게 된 것이다. 여기의 경우, 그 잘못 끼어들게 된 이유는, 원래《공자가어》의 애공 문정(公問政)편에서는, ‘그 공을 이룸에 미쳐서는 하나다.’라고 한 다음에, 애공의 말로서 “선생의 말은 아름답고 지극하다. 그러나 과인은 실로 고루하여, 가지고 이루기에는 부족하다.”고 한 한 대목이 있고, 그 다음에 ‘공자 말씀하시기를’ 하고 시작하여 이 ‘호학근호지(好學近乎知…)’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공자왈(子曰)이란 글자가 들어 있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애공의 말이 약해져 있는 여기의 경우는 자연 이 세 글자 혹은 두 글자도 빼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 자사가《공자 가어》에 있는 원문을 줄여《중용》에 넣을 때 미리 이 두 글자를 깎아 없애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 둔 것이리라. 주자는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이 한 절은, 비록 세 달덕이라고는 아직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덕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말한다. 지라고 말하면 곧 궁극적인 지, 인이라고 말하면 곧 궁극적인 인, 용이라고 말하면 곧 궁극적인 용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최대한을 찾는 그런 주의는, 사실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인 지상(至上)의 것이 아니더라도, 지에 가깝고, 인에 가깝고, 용에 가까운 것, 그런 것들로부터 먼저 시작해 들어가서, 다섯 가지 달도의 실천, 즉 몸을 닦는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앞 절에 있는 생지ㆍ학지ㆍ곤지의 세 지가 지ㆍ인ㆍ용의 범주에서 말하면 지가 되고, 안행ㆍ이행ㆍ면행의 세 행이 인인 것에 대해서 말하면, 이 절의 지에 가깝고, 인에 가깝고, 용에 가까운 삼근(三近)은 용에 배당할 수가 있다. 가깝다고 하는 것을, 학문을 좋아하면 무지를 극복하여 무한으로 지에 가까워지게 되고, 노력하는 행위를 하면 현상을 극복하여 무한으로 인에 가까워지게 되며, 부끄러움을 알면 그 부끄러움을 씻어내려고 하여 지금은 용이 아니더라도 무한으로 용에 가까워지게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세 가지가 다 발분 노력하는 뜻이 되어, 용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또 제8절과 아울러, 생지ㆍ안행ㆍ호학은 지, 학지ㆍ이행ㆍ역행은 인, 곤지ㆍ면행ㆍ지치는 용이라는 식으로 짝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대림(呂大臨)은 말하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옳다 하여 구하지 않는다. 즉 자기 만족에 의해 분발하지 않는다.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사람, 즉 이기주의자는 인욕에 몸을 내맡겨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나자(懦者), 즉 유약한 사람은 남의 아랫자리에 있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여 거기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에 대응시켜 말한다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곧장 지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저 어리석은 사람의 미몽을 깨뜨리는 힘을 갖고 있고, 힘써 행하는 것이 곧장 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인욕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사사로움을 잊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 그 자체는 아니지만 나약한 사람을 떨쳐 일어나게 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했다.
知斯三者, 則知所以修身이오 知所以修身 則知所以治人이오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니라.
【解釋】이 셋을 알면 곧 가지고 몸을 닦는 것을 알게 되나니, 가지고 몸을 닦는 것을 알게 되면, 곧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알게 되고,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알게 되면, 곧 가지고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알게 된다.(제10절)
【解說】이 셋이란 것은, 앞 절의 세 가지 가까운 것, 즉 제에 가깝고, 인에 가깝고, 용에 가까운 세 가지를 가리킨다. 지인용의 세 달덕 그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에 다음가는 가까운 것, 즉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내 몸을 어떻게 닦아야 할지 그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내 몸을 닦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다스려야만 된다는 것을 자연 일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이 경우 자기 이외의 사람을 널리 가리키고 있다. 즉 나 아닌 남을 말한다. 이렇게 나 아닌 나 이외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그 방법을 알게 되면, 그것을 미루어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까지도 자연 알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제2절부터 제6절까지와, 제7절부터 제10절까지를 묶게 된다. 즉 몸을 닦는 데 도로써 한다고 하는 <수신(修身)>의 뜻을 다 펴고 나서, 다음 절의 <구경(九經)>으로 옮겨가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이 언저리가《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은 새삼 지적할 것까지도 없을 것이다.
凡爲天下國家有九經이라. 曰 修身也와 尊賢也와 親親也와 敬大臣也와 體羣臣也와 子庶民也와 來百工也와 柔遠人也와 懷諸侯也니라.
【解釋】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 아홉 경이 있다. 말하면 몸을 닦는 것과, 어진이를 높이는 것과, 친을 친하는 것과, 대신을 공경하는 것과, 군신을 몸하는 것과, 서민을 자식으로 하는 것과, 백공을 오게 하는 것과,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는 것과, 제후를 그립게 하는 것이다.(제11절)
【解說】여기서부터 아래로 제14절까지가 한 덩어리로, 구경, 즉 정치에 있어서 아홉 가지 떳떳한 도리가 이야기 되고 있다.
위(爲)는 다스린다는 뜻이다. 구경(九經)의 경(經)은 떳떳함(常)이다. 떳떳함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즉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어떠한 경우라도 변하지 않는 중요한 원칙이 아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 내 몸을 다스리는 것,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 친을 친하는 것, 이 셋은 이미 앞에 나와 있었다. 대신을 공경할 것, 뭇 신하들을 몸할 것(몸한다는 것은 내 몸을 그 입장에 두고 생각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모든 백성을 자식으로 하는 것(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모든 백성을 사랑하는 것.), 백성을 오게 하는 것(온갖 手工業者를 불러들이는 것.)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할 것, 즉 규구(葵丘)의 모임(기원전 651년)에 있었던 제후들의 맹약(盟約)에 빈려(賓旅-손님과 나그네)를 잊지 말라고 한 대목이 있듯이(《맹자》告子下) 멀리서 찾아온 사람에게 따뜻한 배려를 해 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후에 제후들을 기쁘게 굴복토록 할 것, 이상이 이른바 아홉 가지 떳떳한 것에 다름이 없다.
여대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경이라고 하는 것은 백세(百世)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천하와 국가의 근본은 내 몸에 있는 것이므로, 몸을 닦는 것이 아홉 가지 떳떳한 것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그 경우, 반드시 스승에게 친하고 벗을 본보기로 해야만 몸을 닦는 길에 진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이 오게 된다. 도의 진전에 따라 맨 처음에 오는 것은 집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친을 친하는 것이 온다. 집에서 조정(정부)에 미친다. 그래서 다음에는 대신을 공경하고 뭇 신하들을 몸하는 것이 온다. 조정에서 나라에 미친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모든 백성을 자식으로 하고 백공을 오게 하는 것이 온다. 나라-예를 들면 노(魯)라든가 제(齊)라든가 진(晋)이라든가 하는 나라-에서 천하에 미친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고, 제후를 정답게 하는 것이 온다. 이것이 아홉 가지 떳떳한 것, 즉 구경의 순서인 것이다. 뭇 신하 보기를 내 팔다리처럼 하고, 백성을 보기를 마치 내 친자식처럼 한다. 이것이 신하를 보고 백성을 보는 것의 구별이다.”
뭇 신하 보기를 내 팔다리처럼 한다는 것은 다음 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더해서 말해두고 싶은 것은, 사체(四體), 즉 팔다리를 가지고 비유되는 것이, 신하가 아니고 백성인 유명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정명도의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인(仁)에 대한 설이다.
修身則道立하고 尊賢則不惑하고 親親則諸父 昆弟不怨하고 敬大臣則不眩하고 體羣臣則士之報禮重하고 子庶民則百姓勸하고 來百工則財用足하고 柔遠人則四方歸之하고 懷諸侯則天下畏之니라.
【解釋】몸을 닦으면 곧 도가 서고, 어진 이를 높이면 곧 의혹하지 않고, 친을 친하면 곧 제부(諸父)와 곤제(昆弟)가 원망하지 않고, 대신을 공경하면 곧 어둡지 않고, 뭇 신하를 몸하면 곧 선비(士)의 갚는 예가 무겁고, 뭇 백성을 자식으로 하면 곧 백성이 권하고, 백공을 오게 하면 곧 재용이 족하고,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면 사방이 돌아오고, 제후를 정답게 하면 곧 천하가 두려워한다.(제12절)
【解說】이 대목은 아홉 가지 떳떳함의 효과를 말하는 것이다. 몸을 닦으면 도가 선다고 하는 것은, 도가 완성되어 인민들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서경》홍범(洪範)편에 이른바 ‘임금(皇)이 그 극(極)을 세운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극이란 궁극적인 표준과 법칙, 사면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표준으로 우러러보는 것을 말한다. 어진 이를 높이면 자연 도리에 밝아진다. 도리에 대해 의혹을 느끼는 일이 없다. 친, 즉 친족들을 친하게 하면, 한 집안의 그 누구도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일족의 평화가 친밀히 찾아오게 된다. 제부(諸父)라는 것은 여러 아버지란 뜻인데,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즉 아버지의 형제뻘 되는 백부 숙부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곤제라는 것은 형제와 같은 말인데, 이것 역시 꼭 친형제가 아니더라도 항렬이 같은 손윗사람과 아랫사람에 대한 총칭일 것이다. 대신을 공경하면 어둡지 않다는 것은, 일에 망설이지 않는 것. 임금이 대신을 공경하면 신임이 오로지 대신에게 가 있기 때문에 작은 신하들은 그 사이에 파고들어 농간을 부릴 수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태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거나 망설이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뭇 신하를 몸하면 선비의 갚는 예가 무겁다고 하는 것은, 신하란 같은 선비가 조정에서 일할 경우 신하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신하가 곧 선비라고 해도 좋은 것인데, 그 신하인 선비들이 임금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는 예가 무겁게 된다는 것이다. 뭇 백성, 즉 서민을 자식으로 하면 곧 백성이 권한다는 것은, 권은 서로 권하여 힘쓰는 것, 즉 착한 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 백성은 백가지 성(姓)이란 뜻이니까 한 사람도 빼지 않은 모든 사람이란 뜻이니 서민이 곧 백성이다. 우리말의 백성(民)도 이 백 가지 성이란 뜻의 백성이 그대로 우리말로 된 것이다. 백공을 오게 하면 재용이 족하다는 것은, 많은 수공업자들을 불러들이게 되면, 즉 그들이 자진해서 찾아오게끔 되는 정책을 실시하면,《맹자》에 말했듯이, ‘공(功)을 통하고 일을 바꾸어’, 즉 각자의 하는 일과 만든 물건들을 서로 교환해서, 농업과 상업이 서로 뒷받침하게 된다. 그러므로 재용, 즉 재물과 일용 물품들이 넉넉하게 되는 것이다.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면, 즉 멀리서 찾아오는 빈객들과 나그네들, 장사꾼과 같은 사람도 그 속에 포함되겠지만, 그들에게 각각 정당한 대우를 해 주게 되면, 온 천하의 나그네들은 모두 기뻐서 그 나라로 오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맹자》梁惠王上) 즉 사방의 마음이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제후를 품으면 천하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제후가 모두 기꺼이 굴복하게 되면 천자의 덕이 미치는 범위와 위엄이 미치는 범위가 참으로 넓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천하가 그같은 천자를 두려워하여 우러러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천하란 것은 아마 중국 이외의 오랑캐들을 전부 포함해서 한 말일 것이다.
齊明盛服하야 非禮不動은 所以修身也니라. 去讒遠色하며 賤貨而貴德은 所以勸賢也니라. 尊其位하고 重其祿하며 同其好惡는 所以勸親親也니라. 官盛任使는 所以勸大臣也니라. 忠信重祿은 所以勸士也니라. 時使薄歛은 所以勸百姓也니라. 日省月試하야 旣稟稱事는 所以勸百工也니라. 送往迎來하며 嘉善而矜不能은 所以柔遠人也니라. 繼絶世하고 擧廢國하며 治亂持危하고 朝聘以時하며 厚往而薄來는 所以懷諸侯也니라.
【解釋】재명 성복으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로써 몸을 닦는 것이요, 참소를 물리치고 색(色)을 멀리하여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로써 어진 이를 권하는 것이요, 그 위를 높게 하고, 그 녹을 무겁게 하고,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같이 하는 것은, 그로써 친을 친하는 것을 권하는 것이요, 벼슬을 성(盛)하게 하여 맡겨 시키는 것은, 그로써 대신을 권하는 것이요, 충신으로 녹을 무겁게 하는 것은, 그로써 선비를 권하는 것이요, 때로 부리고 거두는 것을 엷게 하는 것은, 그로써 백성을 권하는 것이요,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하여, 희름(旣稟-餼廩)이 일에 맞는 것은, 그로써 백공을 권하는 것이요, 가는 것을 보내고 오는 것을 맞으며, 선(善)을 아름답게 여기고 능하지 못한 것을 가엾이 여기는 것은, 그로써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요,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없어진 나라를 일으키고,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위태한 것을 붙들어주며, 조빙을 때로써 하여, 가는 것을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은, 그로써 제후를 정답게 하는 것이다.(제13절)
【解說】이 한 절은 구경을 내용적으로 논하는 것이다.
1. 재명성복(齊名盛服)은 이미 제16장 제3절에 보이고 있는 말로서, 재명은 정신, 즉 안(內)을 통일하는 것, 성복은 밖에 정식으로 예복차림을 하는 것. 예가 아닌 것은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논어》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顔淵)고 하여, ‘나를 이겨 예로 돌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항목으로 나와 있다. 즉 안과 밖을 함께 다같이 수양하여, 움직임에 있어서나 가만히 있음에 있어서나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해서 예를 실천하려고 하는 그곳에 몸을 닦는 근본 뜻이 있는 것이다.
2. 참소, 즉 남을 모함하는 말을 믿게 되면, 어진 사람에 대한 신임이 전일(傳一)할 수 없게 되고, 여자에게 빠지거나, 재물, 즉 물질적인 것을 존중하거나 하면,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그만큼 옅어지게 된다. 즉 착한 사람을 모함하는 소인들을 쫓아버리고, 여색을 멀리하며, 물질적인 부를 경멸하고, 오로지 덕만을 존중하는 이것이 어진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어진 사람을 소중히 알면, 어진 사람들은 자연 어진 일에 힘쓰게 되는 것이다.
3. 같은 친족 가운데 있어서는, 그 구성원들의 벼슬이 높아질 수 있도록, 그 봉급이 많아질 수 있도록 배려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기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친족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일치할 수 있게끔 하는 그것이 친족의 융화를 권하는 길이 된다. 흔히 말하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의 친척 위주의 공공연한 제창인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렇게 하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사랑에 차등이 없다.’는 대원칙에 의해 가족 도덕(가족은 외면적인 면에서나 내면적인 면에서나 종족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을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 나머지, 이러한 규정이 자연 나타나게 된 것이리라.
4. 벼슬을 성하게 하여 맡겨 시킨다는 것은, 대신이란 것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소한 일은 자기가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대신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 밑에는 많은 관원들을 배치시켜, 일을 맡기고 심부름을 시키고 하는 데 사람이 부족한 일이 없게끔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우대를 해 주어야만 대신들은 자기 맡은바 사명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대신이, 혹은 일반적으로 신하가, 도를 가지고 섬긴다(혹은 義를 가지고 섬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규정이다. ‘대신이란 것은 도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다가, 될 수 없으면 그만둔다.’(《논어》先進)고 하는데, 될 수 없으면 그만둔다는 것은, 도가 올바로 관철되지 않으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유교의 교리로서는 부자는 천합(天合), 즉 나면서부터 서로 합해지게 되어 있고, 군신은 의합(義合), 즉 의리에 의해 합쳐지게 되는 것이다.《예기》曲禮편에, ‘남의 신하된 예는 나타나게 간하지 않으며,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곧 떠난다.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곧 울부짖으며 따른다.’고 한 대목은 이 점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또《맹자》萬章下에도 같은 내용의 말이 있다.)《춘추 공양전(春秋公羊傳)》장공(莊公) 24년에 자기 나라를 도망쳐 나온 조(曹)나라 대부 조기(曹羈)를 어질다고 한 이유에 대해, ‘세 번 간해도 듣지 않는지라 드디어 떠났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로써 임금과 신하의 의를 얻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그 점 주자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자 자신의 경우도 <군신지도(君臣之道)>에 있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대부분<의합(義合)>이란 말에 의해, 또 대개의 경우 임금과 신하를 쌍무적(雙務的)인 것으로 하고 있어서, 신하로부터 임금에 대한 일방적인 헌신 같은 것을 말한 것은 거의 없다. 물론 몸을 깨끗이 갖기 위해 당초부터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갖지 않거나, 혹은 자기 기분대로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람의 큰 인륜을 어지럽히는’(《논어》微子) 것으로 용납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군신 관계(쉽게 말해서 官僚體系)에 들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를 행하기’ 위한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옛날 조정에서의 예는(신하만 서고 임금은 앉아있는 것이 아니고) 임금도 신하도 다같이 서있었다. 한나라 시대도 그러했다. 어째서 뒷세상에 이 예가 없어지고 만 것일까.” “삼대(三代)의 임금은 대신을 대할 때 대개는 섰다. 수레를 타고 있을 때도 섰다. 한나라 초기에도 역시 그러했다. 의전관(儀典官)이 ‘천자께선 승상(丞相)을 위해 서십시오!’ 하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은 알 수 있다. 뒷 세상은 임금은 너무 높고, 신하는 너무 낮다.”(《朱子語類》)
5. 이쪽에서 충신, 즉 정성을 다해 봉급을 후하게 해 주면, 선비는 집안 살림이 넉넉해져서 부모에 대한 봉양과 자녀에 대한 양육에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걱정이 없게 되어, 자기 임무에 마음을 오로지할 수 있게 된다. 정성을 다해 대우하는 것은, 그것은 내 몸을 그들의 입장에 놓고 보아, 그들이 윗사람에 바라는 것이 어떤 점인가를 인식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이 해야만 선비를 격려할 수가 있다. “임금이 신하를 보는 것이 수족 같으면, 신하가 임금을 보는 것은 복심(腹心)같다…. 임금이 신하를 보는 것이 토개(土芥) 같으면, 신하가 임금을 보는 것은 원수 같다.”(《맹자》離婁下)
6. 사람은 누구나 편안한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없고, 부(富)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부역노동 같은 것에 백성들을 부리는 것은 백성들의 생업, 특히 농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적당한 시기를 정해 부리도록 하고, 또 세금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걷도록 노력하면, 그것은 백성들을 격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7. 매일매일 그들의 일하는 것을 살펴보고, 매달 이를 시험하여, 그 일에 맞는 봉급을 주게 되면, 그것이 모든 수공업자들을 격려하는 올바른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일정한 규격을 지키지 않고 과도하게 기교에만 골똘해 있는 사람은 물러나게 되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부지런하게 일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희름의 희(旣)는 희(餼)에 해당하는 글자이고 늠(稟)과 통하는 글자로, 희름은 곧 봉급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매월 주는 현물 급여를 말한다. 그것이 일에 맞는다는 것은《주례(周禮)》하관(夏官) 고인직(藁人職)에 있는 ‘그 궁노(弓弩)를 시험하여 그로써 그 식(食)을 올리고 내린다.’가 그 예다.
8. 가는 사람에게는 절(節), 즉 여권 같은 것을 주어 기분좋게 보내주고 찾아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충분한 공급품을 제공하여 이를 환영하여, 그 능력에 따라 일을 맡겨주고, 그들의 좋은 점을 올바로 평가해 주고,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동정을 표해주면, 그것은 먼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되어, 천하의 나그네들은 모두 그 나라로 통하는 길로 가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선(善)을 아름답게 여기고, 능하지 못한 것을 가엾이 여긴다.’는 말은《논어》자장(子張)편에도 나와 있다.
9. 뒤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가계(家系)가 끊어지게 된 나라에는 뒤 이을 사람을 세워 가계를 계속하도록 해주고, 또 이미 망해버린 나라까지도 다시 한 번 영토를 주어 새로 나라를 세워준다. 어지러운 나라는 이를 도와 잘 다스려지게끔 해주고, 위기에 부닥쳐 있는 나라는, 이를 잘 지도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조빙(朝聘)을 때로써 한다는 조는 곧 조회로, 제후가 천자가 있는 서울로 와서 천자를 직접 뵙는 것을 말하고, 빙이란 것은 제후가 대신을 보내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왕제(王制)편의 규정에 따르면 ‘제후는 천자에 대해 해마다 한 차례 소빙(小聘)을 하고, 3년에 한 차례 대빙(大聘)을 하며, 5년에 한번 조회를 한다.’고 되어 있다. 가는 것을 후하게 한다는 것은, 간다는 것은 조빙을 위해 이쪽으로 온 제후나 제후의 대신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 때 마음이 흡족하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예물을 하사하는 것이고, 오는 것을 박하게 한다는 것은, 조빙을 위해 찾아올 때 바치는 조공물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후들을 기쁘게 굴복토록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다.
이상 아홉 가지 떳떳함은 그 내용은 각각 같지 않지만, 그러나 총괄적으로 보면, 결국 몸을 닦고 어진 사람을 높이고 친족을 친하게 하는 네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을 공경한다.’ ‘뭇 신하를 몸한다.’는 것은 ‘어진 사람을 높이는 차등’에서 미루어 간 것인데 대해, ‘뭇 백성을 자식으로 한다.’ ‘백공을 오게 한다.’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한다.’ ‘제후를 정답게 한다.’는 것은, ‘친을 친하는 쇄(殺)’에서 미루어 갔다.(주자가 이렇게 말하는 그 밑바닥에는 확실히 가족주의적인 천하관, 국가관이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앞에 말한 군신관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국 어진 사람을 높이고 친을 친하는 것도 또, 몸을 닦는 데서 미루어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凡爲天下國家에 有九經이나 所以行之者는 一也니라.
【解釋】무릇 천하국가를 다스리는데 아홉 가지 떳떳함이 있으나 그로써 행하는 것은 하나다.(제14절)
【解說】행하는 것은 하나라고 한 하나는 성(誠)이다.(제7절 참조) 제17절에 이르러 정면으로 제기되는 <성>에 관한 말이, 이 언저리에 벌써 나타나 있는 것이다. 아홉 가지 경은 결국, 몸을 닦고, 어진 이를 높이고, 친을 친하는 셋으로 돌아가고, 그 셋은 다시 몸을 닦는 것에 돌아가며, 궁극에 가서는 오직 성 하나에 돌아간다. 만일 조금이라도 성실하지 못한다면 아홉 가지 경은 즉시 아무 내용이 없는 단순한 문자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성이야말로 구경의 참된 것에 다름없다.
구경에 대한 절은 이상(11절에서 14절까지)으로 끝난다.
凡事 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니라.
言前定則不跲하고 事前定則不困하고 行前定則不疚하고 道前定則不窮하니라.
【解釋】무릇 일이 미리 하면 곧 서고, 미리 하지 않으면 곧 폐한다. 말이 앞에 정해지면 곧 넘어지지 않고, 일이 앞에 정해지면 괴롭지 않고, 행하는 것이 앞에 정해지면 병되지 않고, 도가 앞에 정해지면 곧 궁하지 않다.(제15절)
【解說】‘무릇 일이란…’ 하고 말한 것은, 개괄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다섯 가지 달도(達道)와 세 가지 달덕(達德)과 아홉 가지 경(經)을 총괄해서 말한다. 미리 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즉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무릇 일은 미리하면 된다.’는 것은 다섯 달도, 세 달덕, 아홉 경, 그 어느 한 가지를 가지고 보더라도, 미리 성(誠)이 서 있는, 성에 의해 먼저 입장이 확정돼 있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일로서 확립되어 그대로 나타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을 경우에는 일은 못쓰게 된다. 즉 제대로 나타날 수가 없게 된다. 예를 들면, ‘대신을 공경하는’ 것도 ‘백공을 오게 하는’ 것도, 성에 의해 미리 그 지반이 확실히 서 있지 못하면, 대신을 공경한다는 것도 백공을 오게 한다는 것도, 현실로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래에 되풀이되고 있는 ‘앞에 정해진다.’는 말은, <미리>라는 말과 같은 말로 곧 먼저 성에 서 있는 것이다. 말에 대해서 말하면, 먼저 진실에 서 있은 다음 말을 하게 되면, 말에 내용이 있어 갈팡질팡 걸려 넘어지는 일은 없다. 아무런 내용도 없는 말을 함부로 토해서 실패를 가져오는 일이 없다. 일에 대해서 말하면, 먼저 진실 위에 서고, 그런 다음 일에 착수하게 되면, 말에 내용이 있게 되어 벽에 부딪치는 일이 없다. 행동에 대해서 말하면, 먼저 진실 위에 서고 그런 다음 행동을 하게 되면 행동에는 떳떳함이 있어, 즉 처음과 끝이 일관성이 있어서, 도중에 고민하는 일이 없게 된다. 이상은 결국 총괄해서 말하면 도라는 것이 되겠는데, 도에 대해서 말하면, 먼저 진실 위에 선 다음 도를 실천해 나가면, 도에는, 도에는 본바탕이란 것이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일은 없다. 즉 천변만화(千變萬化)해서 다하는 일이 없는 묘용(妙用)을 발휘한다. 이 <도>는 말과 일과 행동의 셋을 안에 포함하고 있는 도, 이 셋이 공통된 도일 것이다.
그래서 먼저 성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다음에 논한다.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獲乎上, 有道하니 不信乎朋友면 不獲乎上矣리라. 信乎朋友有道하니 不順乎親이면 不信乎朋友矣리라. 順乎親 有道하니 反諸身不誠이면 不順乎親矣리라. 誠身 有道하니 不明乎善이면 不誠乎信矣리라.
【解釋】아랫자리에 있어서 위에 얻지 못하면, 백성을 얻어 다스릴 수 없다. 위에 얻는 것이 도가 있으니, 벗에게 믿어지지 않으면, 위에 얻지 못한다. 벗에게 믿어지는 것이 도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면, 벗에게 믿어지지 못한다. 어버이에 순하는 것이 도가 있으니, 몸에 돌이켜 정성되지 못하면, 어버이에 순하지 못한다. 몸을 정성되게 하는 데 도가 있으니, 선(善)에 밝지 못하면 몸에 정성되지 못한다.(제16절)
【解說】이 절, 앞의 절의 <미리 하는> 것의 필요를, 직접 백성들과 접촉하는 관리의 입장에서 논하게 된다.
백성을 잘 다스려 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의 경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신임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래도 자기 지위를 안정시킬 수가 없고, 따라서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가 없다. 높은 철학적ㆍ정치적 이상주의가 뭔가 맥이 빠진 듯한 실용주의와 한데 섞여 있는 것은, 유교의 경전에서 자주 보게 되는 점이다. 위에 있는 사람의 신임을 얻는 데는 도, 즉 방법이 있다. 그것은 친구들에게 신임을 받는 일이다. 먼저 같이 일하는 친구와 상종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윗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친구의 신임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조건이 된다. 부모를 섬기며 부모의 뜻을 좋게 만들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일도 없다. 그러면 부모에게 순종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성, 즉 진실이면 된다. ‘몸에 돌이켜 진실하지 못하면’, 즉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아,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의 발동인 말과 행동, 그런 것들이 성(眞實無妄)이라는 상태에 아직 달하지 않고 있으면, 그 경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도 될 수 없는 일이다.
유교에서 최고의 덕으로 하고 있는 효도도, 진실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참다운 효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몸에 돌이킨다는<몸(身)>은, 유교의 사상을 말하는 문헌의 특유한 말로서, 사실상으로는 그것이 마음에 돌이켜 구하는 일일지라도 감각적으로 몸으로 표현된다. ‘만물이 내게 갖춰져 있다. 몸에 돌이켜 진실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맹자》盡心上) 도덕의 원리는 선과 악의 구별이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 같고, 좋은 색을 좋아하는 것같이’《대학》傳 제6장 제1절)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 입장이기 때문이다. ‘정성되지 않다는 것은, 진실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를 섬길 경우에, 진실된 효도의 마음이 없으면 안되는 것인데, 그저 겉으로만 빌어 온 물건처럼 효도를 하게 될 뿐으로 속으로는 효도하는 마음이 없는, 그것이 진실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몸을 정성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은 선을 분명히 라는 것, 즉 선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즉《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다. 격물치지의 방법에 의해 사람의 마음과 천명(天命)의 본연의 모습을 통찰하여 지선이 있는 곳을 파악할 수가 없으면 안된다. 설령 선을 좋아한다 해도 좋은 색을 좋아하는 것같이는 될 수 없고, 악을 싫어한다 해도,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은 될 수없다.
아무리 노력하여 그 몸을 정성되게 하려 해도, 정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 절에 ‘선을 택하여 굳게 잡는다.’고 한, 그 ‘선을 택한다.’는 것은, 이 절의 선에 밝은 것으로, 결국 격물치지에 다를 것이 없다. 바른 인식만이 성(誠)의 기초인 것이다.
이 절과 다음 절의 첫 두 구절은,《맹자》에 거의 똑같은 글이 보이고 있다.(《맹자》離婁上) 주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맹자의 그것은 자사에게서 물려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誠者는 天地道也요 誠之者는 人之道也라.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니라.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니라.
【解釋】정성은 하늘의 도요, 정성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 정성이란 것은, 힘쓰지 않고도 맞고, 생각지 않아도 얻어져 종용히 도에 맞는 것이니, 성인이요,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선을 택하여 굳게 잡는 것이다.(제17절)
【解說】《중용》의 제2 주제인 <성(誠)>이 여기서부터 논해지게 된다.
이 한 절은 물론, 앞 절의 ‘몸을 정성되게 한다.’를 이어받고 있는 것으로,《중용》전체를 통해서도 첫장과 아울러 아마 가장 유명한 부분에 속한다. 처음 두 구절이《맹자》에도 보이고 있는 것은 앞 절의 해설에서 말한 그대로다. 성은 이미 몇 번이나 언급한 것처럼 진실 무망(眞實無妄), 보다 간단히는 실(實)이라고 정의된다. 참으로 실상된 것과, 무망, 즉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같은 한 가지 사태를 안팎에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한 가지란 것은, <천리(天理)의 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천리의 본연적인 모습, 그것은 진실로 그런 것이며, 거꾸로 말하면 망됨이 없이 그런 것, 즉 아무렇게나가 아닌 그런 것이다. 대체로 ‘하나이면 순(純)하고 둘이면 잡(雜)된다. 순하면 성(誠)이고 잡되면 망(妄)이다.’라고 한다면 우주 사이에는 기운이 충만해 있고, 거기에서 행해지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낮과 밤, 어둠과 밝음의 순환 운동은 천만년을 지나도 끝내 한순간의 오류도 없고, 천하의 모든 것, 크고 작고, 굵고 가늘고, 동물과 식물, 나는 새와 헤엄치는 고기, 모두가 그 성명(性命)의 바름을 가지고, 즉 소는 참으로 소 같고, 개는 참으로 개 같듯이 날 때부터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 사실이야말로 천리(天理)가 진실이고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압도적인 분명한 증거로서 보여주고 있다. 사람도 성명의 바름을 얻어 태어나 살고 있다. 즉 다름아닌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어디까지나 진실무망한 천리의 실현이지만, 다만 육체와 마음을 형성하고 있는 기운이 중정 순수(中正純粹)한 것이 모자라고 치우침(過ㆍ不足)이 있기 때문에, 감각의 편향(偏向)이 발생하여 그것이 천리를 방해한다. 이리하여 사욕(私欲)이란 것의 개재(介在)에 의해 참된 것(實)에 틈이 벌어지고 빈 곳이 생겨 허망(虛妄)이 찾아든다. 이로부터 모든 것이 거짓되어,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 구조가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욕심이 발생한 뒤의 인간에 있어서는 벌써 참다운 뜻에서의 정성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없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정성되게 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가 된다. 성지(誠之)의 지(之)는 정성이란 명사를 동사로 읽기위해 붙인 것이다. 아직 진실무망이 되지 못하고 진실무망인 것을 바란다. 여기에 천리의 본연에 대해, 인사(人事)의 당연이 생겨난다. 하늘의 도, 즉 하늘이 가는 길에 대해 사람의 도, 즉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은 당위적(當爲的)이다. 물론 사람 가운데도 성인은 다르다. 성인은 맑고 중정한 기운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천리가 기운에 의해 방해되는 일은 없다. 성인은 혼연히 천리 그것으로 진실무망이며, 인욕이라고 하는 사사로운 것과는 일체 인연이 없다. 성인에 있어서의 인(仁)은 겉과 안이 다 인으로 털끝만한 불인(不仁)도 없고, 성인의 의(義)는 겉과 안이 모두 의로서 털끝만한 불의도 없다. 면강(勉强), 즉 노력을 기다리지 않고 중용을 얻고, 사색을 기다릴 것 없이 진리(善 혹은 至善)를 파악하고 있다. ‘동용주선(動容周旋)이 예(禮)에 맞는’(《맹자》盡心下), 여유 있고 자연스런 행동이 그대로 도 그것에 꼭 들어맞는, 그것이 바로 성인이다. 성인의 도는 하늘의 도다. 그러나 성인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 있어서는, 인욕의 사사로움이 방해하기 때문에 덕은 반드시 진실 될 수가 없고, 생각지 않고 얻어지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선을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힘쓰지 않아도 맞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굳게 잡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몸을 정성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성되게 하는 사람의 도란 것은, 이러한 것에 다를 것이 없다. 앞에 나온 유형(類型)을 쓴다면, 생각지 않고 얻는 것은 생지(生知)에 해당되고, 힘쓰지 않고 맞는 것은 안행(安行)에 해당되고, 선을 택하는 것은 학지(學知)이고, 굳게 잡는 것은 이행(利行)에 해당된다.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辨之하며 篤行之니라.
【解釋】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조심하여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독실히 행한다.(제18절)
【解說】이 다섯 가지는 정성되게 하는 사람의 도가 지니는 세목(細目)이다. 정성이라고 말하면 오로지 정신수양에 관한 항목으로 ‘군자가 천하에 있어서는 한 가지 이치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한 가지 일도 능치 못한 것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중용 혹문》)고 하는 것과 같이 학문이란 다른 영역(領域)의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나, 그것은 꼭 그렇지는 않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이 네 가지는 선을 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지ㆍ인ㆍ용으로 말하면 지(知)에 속한다. 앞에 나온 유형으로 말하면 학지(學知)다. 마지막에 행하는 하나만은 굳게 잡기 위한 것으로 지ㆍ인ㆍ용으로 말하면 인(仁)에 해당되고 이행(利行)이다. (勇과 勉行에 해당되는 것은 다음 제19절.)널리 천지 만물의 일과 이치,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세밀하고 자세하게 의심을 일으켜 질문하고, 신중히 사색한다. 조심하여 생각한다고 하고, 깊이 생각한다고 쓰여 있지 않은 것은, 지나치게 사색하는 것은 불충분한, 즉 미치지 못하게 사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른 사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색한 결과에 대해서는 밝고 뚜렷한 분별로 대하고, 그런 다음 비로소 독실하게 실천한다.
배우는 것과 묻는 것은 밖에서 얻고, 생각과 분별은 안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거기에서 둘이 행동으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유교에서, 특히 주자학에서 학이니 학문이니 하는 것은 배우고ㆍ묻고ㆍ생각하고ㆍ분별하고ㆍ행하는 다섯 가지를 전부 합쳐 말하는 것으로, 그저 단순히 최초의 한 항목이나 혹은 두 항목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만 폐해도 배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공자 가어》에는 ‘널리 배우고…’ 서부터 이 장 마지막의 <유필강(柔必强)>까지가 없다. 그것은《가어》쪽이 불완전한 것인지, 혹은 자사가《중용》쪽에서 더해 넣은 것인지,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자는 말하고 있다. 오늘에 와서는《가어》란 위(魏)나라 왕숙(王肅, 461~501)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론이 학계의 정론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면 주자는《공자 가어》란 책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有弗學이언정 學之면 弗能 弗措也니라. 有弗問이언정 問之면 弗知 弗措也니라. 有弗思이언정 思之면 弗得弗措也니라. 有弗辨이언정 辨之면 弗明 弗措也니라. 有弗行이언정 行之면 弗篤 弗措也니라. 人一能之면 己百之하며 人十能之면 己千之니라.
【解釋】배우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배우면 능치 않고는 놓지 않는다. 생각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지 않고는 놓지 않는다. 행하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히 않고는 놓지 않는다. 사람이 한 번으로 능하면, 나는 백 번으로 능하고, 사람이 열 번으로 능하면, 나는 천 번으로 능한다.(제19절)
【解說】군자가 학문-물론 다섯 가지를 합친 전부-을 하는 것은, 일단 시작한 이상은 기어코 완성할 것을 기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다 못 배운 점이 있으면, 충분히 배워서 능할 때까지 쉬지 않는다. 물어서 혹시 모자란 점이 있으면, 또 묻고 물어 완전히 알 때까지 중지하지 않는다. 아직 사색하여 얻지 못한 점이 있으면, 사색을 계속하여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쉬지 않는다. 아직 완전히 분별해 밝히지 못한 점이 있으면, 그것이 명백해질 때까지 쉬지 않는다. 아직 실행이 잘 되지 않는 점이 있으면, 그것이 완전히 독실하게, 즉 천성적인 것처럼 될 때까지 실천을 위해 계속 노력하며 쉬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이 한 번 정도의 노력으로 해낼 수 있으면, 나는 그것을 백배나 되는 노력으로 기어이 해내고야 만다. 남이 열 번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면, 나는 천 번을 해서라도 아끼지 않고 기어이 해내고 만다. 결국 이것은 곤지(困知) 면행(勉行)으로, 지ㆍ인ㆍ용의 세 달덕으로 말하면 용에 해당된다.
果能此道矣면 雖愚, 必明하며 雖柔, 必强이니라.
【解釋】과연 이 도를 능히 하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게 되고, 비록 유해도 반드시 강해진다.(제20절)
【解說】이 도는, 제17절에 말한 ‘정성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라고 한 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전개시키면 배우고ㆍ묻고ㆍ생각하고ㆍ분별하고ㆍ행하는 다섯 가지, 또 사람이 한 번 하면, 나는 백 번 하는 그것을 가리킨 것이 된다. 만일 그것을 해내기만 하면 어리석은 사람도 선을 택한 효과로써 사리에 밝은 사람이 될 것이며, 유약한 사람도 굳게 잡는 효과로써 반드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강(强)에 대해서는 주자는 주석을 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 제10장의 ‘군자는 화하여 흐르지 않고,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다. 운운.’한 그 강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여대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그것에 의해 기질을 변화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덕이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사람도 밝음으로 나아갈 수 있고, 유한 사람도 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길 수가 없으면 비록 학문에 뜻이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밝아질 수가 없고, 유한 사람은 능히 일어서지를 못한다. 대개 모든 사람에 있어서 똑같이 선해서 악이 없는 것은 성품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것이다. 혹은 어둡고 혹은 밝고 혹은 강하고 혹은 약한 것처럼, 받은 것이 같지 못한 것은 재주다.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다.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변화시켜 같은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임에 다름없다. 대체로 아름답지 못한 기질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시키려 하면, 그 노력을 사람들보다 백배로 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할 수는 없다. 조금 하다가 금방 그만두어버리는 것이 일쑤인 일관성 없는 학문하는 방법으로 그 아름답지 못한 기질을 변화시키려 하다가 그것이 불가능하면, 기질은 학문으로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너무도 쉽게 스스로 버리고 자신을 체념하고 있는 것이어서, 심히 어질지 못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대학》전 제6장에서도 <성>을 논하고 있는 것을 말해 둔다.
제 21 장
이 장은 앞 장에 인용된 공자의 <하늘의 도> <사람의 도>에 대한 설을 이어받아, 자사가 말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부터 아래로 제32장까지, 12장은 모두 자사 자신의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되풀이해 밝히고 있는 것은, 결국 이 제21장의 내용에 불과하다.
自誠明을 謂之性이오 自明誠을 謂之敎니라. 誠則明矣요 明則誠矣니라.
【解釋】진실로부터 밝은 것을 성품이라 이르고, 밝음으로부터 진실된 것을 가르침이라 이르나니, 진실되면 곧 밝고, 밝으면 곧 진실되다.
【解說】이미 말한 것처럼, 성(誠)이란 것은 결국 진실(實)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제1차적으로 이 진실이란 덕이 있고, 거기서부터 말하자면 제2차적으로 밝음이 성립되어 있는, 즉 진실이란 근본적인 덕 위에 밝음, 즉 지적인 판단, 인식 작용이 성립되어 있는 그것이 <성품>의 입장인 것이다. 먼저 밝음(知的判斷, 認識作用)이란 것이 제1차적인 것으로 있고, 그 위에 말하자면 제2차적으로 진실이 성립돼 있는, 즉 먼저 선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런 뒤에 그 선을 진실되게 하는, 진실무망하게 실현시키려 하는, 이것은 <가르침>의 입장인 것이다. 앞의 것, 즉 성품의 경우는 진실을 간직하고 있는, 따라서 진실에서 밝음이 자연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성인의 덕인 입장, 결국 하늘의 도의 입장인 데 대해서, 뒤의 것은 가르침을 통해 들어가는 어진 사람의 배움의 입장, 결국 사람의 도의 입장에 불과하다. 즉 도덕적 인식을 전제로 하여, 그 위에 서서 진실되게 해 가는 입장(앎에서 실천으로 옮기는)에 불과하다.
진실되게 되면, 말하자면 정의(定義)로부터의 귀결로서 밝아지지 않는 것이 없는 지적 판단, 인식 작용은 필연적으로 수반되게 된다. 또 거꾸로 밝음도, 하기는 진실에 대해 말하면 2차적인 것이긴 하지만, 본래 그것은 지선을 밝히는 것을 그 성격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의해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학문에 의해 성인에 이르러야만 할 <배우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 밝음이야말로 가장 긴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성품이라 이른다.’, ‘가르침이라 이른다.’는, 첫장의 성품ㆍ도ㆍ가르침이라고 한 그 성품과 가르침과는 약간 틀리는 말이다. 성품이란 것은《맹자》진심상(盡心上)에 ‘요순(堯舜)은 성품으로 한다.’고 한 그 성품의 뜻이고, 가르침은 배우는 것, 혹은 채우는(充) 것이라고《주자 어류》에서는 말하고 있다. 성품으로 한다는 것은, 본래적인 것만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도와 완전히 하나인, 도 그것임을 말한다.(《어류》)
제 22 장
이 장은 앞 장에서 말한 진실로부터 밝아지는 것, 즉 하늘의 도에 대해 논한다. 진실되게 하는 사람의 도에 대해서, 단적(端的)으로 진실된 것으로서의 하늘의 도다.
唯天下至誠이라야 爲能盡其性이라.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이오.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오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解釋】오직 천하의 지성만이 능히 그 성품을 다하는 것이 된다. 능히 그 성품을 다하면 곧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하고,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하면 곧 능히 만물의 성품을 다하고, 능히 만물의 성품을 다하면 곧 그로써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그로써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곧 그로써 하늘과 땅과 함께 셋이 될 수 있다.
【解說】천하의 지성은, 천하의 지성인 사람, 즉 성인을 말한다. 성인의 덕이 진실된 것은 천하에 그에서 더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지(至), 즉 지극이란 형용사를 붙인 것이다. ‘그 성품을 다한다.’는 것은 덕이 어디까지나 참된, 즉 인욕의 사사로움에 의해 분열되어 있지 않은 것이므로, 하늘이 내게 명한 성품을 돌이켜 살피고 이를 실천하여, 크게나, 작게나, 정밀하게나, 거칠게나, 털끝만큼도 다하지 못한 점이 없게끔 한다.
다하지 못한 점이 없도록 한다는 것은 실상 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노력한다는 뜻이 되는데, 성인은 몸 전체가 완전히 진실한 도리이기 때문에, 노력해서 성품을 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성인은 말하자면 자연히 필연적으로 성품을 다하는 것이다. 능히 다한다고 하는 것은 노력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그 사실이 오직 성인에 있어서만 가능한 것을 말한다.
능히 자기 성품을 다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성품도 다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성품을 다할 수 있는 정도면 모든 사물의 성품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다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더 이상 더할 것 없이 명백하게 인식하고 파악하여, 가장 타당하게 처리하고 대처하는 것, 결국 성품을 바르게 충분히 발휘하는 것인데, 내 성품, 남의 성품, 사물의 성품을 연속적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은, 성품은 나와 남과 사물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완전히 평등하고 동일한 것으로 다만 성품이 그 속에 부여되어 들어 있는 형기(刑氣-氣禀, 氣質)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나와 남과 사물의 성품을 다하게 되면, 다음에 어떠한 사태가 일어나게 되는가. 그같은 사람은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고 하는 사태가 생기는 것이다.(첫장 제5절 참조) 성인이 천지의 화육을 돕는다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조화 생육하는 그 기능을 돕는 것을 말한다.《어류》에 다음과 같은 한 대목이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돕는다는 것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한가운데 있어서, 천지와 이치를 같이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늘과 사람이하는 일에는 각각 부담이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하늘에는 도리어 안되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하늘은 만물을 낳을 수는 있지만,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물은 만물을 적실 수는 있지만, 그것을 고루 뿌려 적시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불은 물건을 잘 태우지만, 밥을 짓는 일은 아무래도 사람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또 정치가로서의 세상 처리도 사람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들은 무두 찬조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
또 한 대목에 말한다.
“성인이 천지의 화육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세상일로서 꼭 좋도록 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을 성인으로 하여금 적당히 좋도록 해주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가 잘나지 못한 자식이었기 때문에 요가 천하를 남남인 순(舜)에게 물려주고 만 것이라든가. 홍수가 범람했기 때문에 순이 우(禹)를 찾아내어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해 준 것이라든가, 걸(桀)과 주(紂)가 포학하기 때문에 탕(湯)과 무왕(武王)이 일어나 그들을 무찌른 것 등이 그 에다.”
이같이 천지의 화육을 도와, 즉, ‘하늘과 땅이 제 자리에 있고 만물이 자라나는’(제1장 제5절) 것으로 되어, 이제 사람(聖人)이 하늘과 땅과 셋으로 된다. 위에 있는 하늘, 밑에 있는 땅과 함께 하는 것으로써 세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장은, 단적으로 진실된 것 진실로부터 밝아지게 되는 하늘의 도를 하늘이 곧 성인이란 점에서 성인의 도로서 설명한 것에 다를 것이 없다. 한편 ‘천하의 지성… 천지의 화육’이라는 표현은 아래 제32장 제1절에도 있는데, 거기에 ‘돕는다’로 되어 있지 않고, ‘안다’로 되어 있다. ‘하늘과 땅과 셋으로 된다.’고 하는 표현은 원래 유교의 고전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예기(禮記)》에서만도 성인, 혹은 천자, 혹은 삼왕 등이 그같이 불리고 있다.
제 23 장
앞 장이 하늘의 도를 말한 것을 이어받아, 이 장은 ‘진실되게 하는’ 사람의 도를 말한다.
其次는 致曲이라.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하니라. 唯天下至誠爲能化니라.
【解釋】그 다음은 곡(曲)을 이룬다. 곡하면 능히 성이 있나니, 성하면 곧 얼굴하고, 얼굴하면 곧 드러나고, 드러나면 곧 밝고, 밝으면 곧 움직이고, 움직이면 곧 변하고, 변하면 곧 화하나니. 오직 천하의 지성만이 능히 화를 한다.
【解說】그 다음이라고 한 것은, 앞 장에서 말한 지성인 성인에 대해서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즉 대현(大賢)이하, 진실이 아직 지극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곡(曲)은 일편(一偏)이라고 했다. 즉 완전한 것은 아니고 한쪽에 치우친 것, 예를 들면 효(孝)가 됐든 제(悌)가 됐든, 인(仁)이든 의(義)든 간에 전체로서가 아니고 그 일부분인 하나하나의 현상, 그것을 이룬다는 것은, 미루어 극치에까지 도달하게 하는, 예를 들어 효도에 대해 말하면, 현재 자기에게 직접 어버이가 되는 부모-어머니가 계모인 경우라도-에게 효도를 다하고, 이리하여 먼저 부분적인 효도를 실현하고, 다음에 다시 그것을 본으로 삼아 아버지의 형제에 대한 효도에까지 미루어 다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사람에 있어서 성품은 누구에 있어서나 같지만, 형기(形氣)는 각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오직 성인만이 능히 그 성품을 전체로서 다할 힘이 있지만, 형기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그 이하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각 개인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실마리를 내비치고 있는 선, 그것을 하나하나 미루어 다하는, 즉 실천적으로 점점 깊이 나가 각각 그 극치에 도달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다. 곡이 하나하나 모두 이뤄지게 되면 덕이 진실한 것이 되어간다. 효도는 참다운 효도, 인(仁)은 참다운 인 등으로 되어 진실이 생겨난다. 진실이 존재하면 그것은 반드시 모양으로 나타나게 된다. 안에 축적된 진실이 반드시 밖에 나타난다. 밖에 나타나면 점점 더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밝게 빛나게 된다. 진실이 그 정로까지 왕성한 것이 되면 사람과 만물을 움직인다. 즉 감동시키는 힘을 갖는다. 그렇게 되면, 사람과 만물을 변하게 하여 마침내는 화하게 만든다. 화(化)는 변하는 것의 극치로 상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완전히 변해서 본래 그런 것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 치곡(致曲)에서 변화-사소한 작은 선의 실천에서 진실에 도달하고, 진실의 효과로써 다른 사람을 근본적으로 선으로 변화시키는 것-는 형기에 의해 그 활동을 구속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완전히 잃어버려지지 않는 성품, 절로 그만두려 해도 그만두어지지 않는 자기실현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이와 같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한 채 변화시키는 묘한 기능은 이른바 천하의 지성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이 궁극적인 단계에 이르러서는, 벌써 성인과 다른 것은 없다. 그 곡을 이룸에 미쳐서는 하나인 것이다.
《맹자》에 이른바 사단(四端)을 확충(擴充)하는 것(公孫丑上)은 결국 이 장의 치곡(致曲)과 같은 것이다.
제 24 장
다시 하늘의 도를 논한다. 하늘의 도라고 해도 하늘이 곧 성인이란 면에서 보는 하늘의 도다.
至誠之道는 可以前知니라 國家將興엔 必有禎祥하며 國家將亡엔 必有妖孼하야 見乎蓍龜하며 動乎四體라. 禍福將至엔 善必先知之하며 不善必先知之니라. 故로 至誠은 如神이니라.
【解釋】지성의 도는 그로써 먼저 알 수 있나니, 국가가 장차 일어나려 하면, 반드시 정상(禎祥)이 있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요얼(妖孼)이 있어, 시귀(蓍龜)에 나타나며 사체(四體)에 움직여, 화와 복이 장차 이르려 하면, 선을 반드시 먼저 알며, 불선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성은 신과 같다.
【解說】지성에서는 그 당연한 일로서, 사전에 아는 것, 미리 아는 것이 가능하다. 지성의 도를 앞서 아는 것이 아니고, 지성의 도가 앞서 아는 것이다. 국가-여기서는 나라와 집이 아니고, 단순히 나라라는 뜻이다. 당시의 실정으로 말하면 노(魯)니 제(齊)니 하는 나라-가 번창하게 일어나려 할 때에는 반드시 경사스런 징조가 나타나게 되고, 국가가 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불길한 징조가 있다. 정상(禎祥)이란 것은 복의 징조이고, 요얼(妖孼)이란 것은 화의 징조다. 이같이 국가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때는, 사전에 징조가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지성의 사람, 즉 성인은 그것을 당장 알아차림으로써 큰 일을 미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복이나 화란 것은 시초점(蓍占-蓍草나 혹은 莁竹으로 하는 주역점(周易占)과 거북점(龜卜-거북 껍질을 불에 구워서 하는 점)에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또 손에 잡고 있는 옥홀(玉笏)의 위치가 너무 높아 몸을 뒤로 젖히거나, 그것을 받아 잡는데 너무 낮아 허리를 굽히거나 하는 자세에서, 쌍방의 죽음을 예언한 옛날 이야기(《左傳》定公 15년)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몸의 동작에 나타나는 것이다. 진실이 아직 불충분한 사람에 있어서는, 그같은 징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겠지만, 지성의 사람(聖人)은 그것을 파악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화나 복이 찾아올 경우, 복이 되는 선과 화가 되는 불선을 미리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정상과 요얼, 시초점과 거북점이 보여주는 길흉, 몸의 사소한 움직임, 그같은 것은 모두 이치가 모두 실마리로서 나타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지성의 사람인 성인에게는 사사로움이나 거짓이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마음에 보는 감각이 허명(虛明)해서, 그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어 그것이 어떻게 진행하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성은 불가사의한 기능을 갖게 되는 것으로, 그 기능은 귀신과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주자는 단순히 ‘신(神)이란 귀신을 말한다.’고 주석하고 있을 뿐인데, 이 귀신은 아마 합리적으로 해석되는 그것이기보다는-물론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이른바 귀신, 즉 ‘밝은 곳에는 예악(禮樂)이 있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다.’(《예기》樂記)고 한 그 귀신일 것이다.
제 25 장
다시 사람의 도를 논한다.
誠者는 自成也요 而道는 自道也니라.
【解釋】성이란 것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고, 도란 것은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제1절)
【解說】<성>은 만물이 자연히 성취되어 있는, 그렇게 되어 있는 원리, 거꾸로 말하면, 만물은 인간이 일부러 만들려고 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그것에 대해 <도> 쪽은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행해야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풀과 나무에 많은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있는 것은, 스스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사람에게 귀와 눈과 코와 입과 손과 발이 있는 것은 스스로 되어 있는, 자연히 이뤄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귀와 눈과 손발 등등은 우리가 그 기능을 발휘시켜야만 비로소 귀니 눈이니 손과 발이니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語類》) 자도(自道)를 스스로 행한다고 새긴 것은 결국 도(道)란 것은 당연히 거쳐야만 될 올바른 길이란 뜻이므로 그 길은 자기가 그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 스스로 행한다고 하는 행(行)은 결국 걸어간다는 뜻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자의 주석을 그대로 번역하면 “성(誠)이란 것은 물(物)이 그로써 스스로 이룩된 것이요, 도(道)란 것은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성은 마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근본이요, 도는 이치로써 말한 것이니 용(用)이다.”란 것이 되는데, 이 주석이 꼭 적당하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주자의 해석은 이 장의 경우 도가 이치라는 점에서 말한 것인데 대해, 성은 마음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물이 스스로 이뤄져 있다고 하는 물이란 말에 <일>과 <물건>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이 경우는 일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옳으므로, 초목의 예는 적당치 않은 것이 된다. “성을 스스로 이룬다는 것은, 지성으로 부모를 섬기면 자식이 되고, 지성으로 임금을 섬기면 신하가 되는 것과 같은 것.”(程伊川) 그러나 주자 자신이 정이천의 이같은 해석을 잊고 위와 같은 예를 들고 있는 것으로, <성>이란 개념의 본래 성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誠者는 物之終始니 不誠이면 無物이라. 是故로 君子는 誠之爲貴니라.
【解釋】성은 물의 끝과 처음이니, 성하지 못하면 물이 없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성을 귀한 것으로 삼는다.(제2절)
【解說】이 한 절은, 결국 앞 절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물건>의 처음을 영(零) 센티미터라 하고 그 끝을 15센티미터라고 하면, 15센티미터 길이의 물건이 있게 된다. 혹은 <물>을 <일>이라고 풀이하여 그 일이 영 초(秒)에서 시작하여 15초에 끝났다고 하면, 곧 15초간 지속된 일이 있게 된다. 그 물건과 일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15센티미터 분의 성과 15초 분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첫 글귀의 뜻이다. 안자(顔子)는 ‘석 달 인(仁)에 어기지 않았다.’(《논어》雍也)고 하면, 석 달의 처음이 성의 처음이고, 석 달의 끝이 서의 끝으로, 석 달 뒤에는 성에 간단(間斷)이 없을 수 없었다. ‘한 자의 성이 있으면 곧 한 자의 물건이 있고, 한 치의 성이 있으면 곧 한 치의 물건이 있다.’(《語類》성은 물의 골격이다. 성하지 못하면 물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반대 방향에서 말한 것이다. 천하 만물은 모두가 다 참된 이치(實理-誠)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이치를 얻은 다음에 비로소 이러저러한 물(物-事)은 존재한다. 얻은 이치가 다해버리면 물도 또 다해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참되지 못한 것이 있으면(사람의 욕심으로 틈이 생기고 거기에 거짓이 끼어들어 있으면), 즉 조금이라도 성이 아니면 아무리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이란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만일 성, 즉 참되지 못하면,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대학》) 귀와 눈이라는 물건이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며, 보고 듣는 일이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또 체(褅)는 이미 관(灌)하고 난 뒤부터는 보기를 원치 않는다.’(《논어》八佾)고 하는 것도, 술을 들어붓는 관이란 절차가 끝난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쪽에 정성된 뜻이 보여지지 않게 되므로, 설령 예법에 맞는 진퇴의 동작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벌써 그것은 제사로 불릴 수 있는 일과 물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참되지 못한 것을 없애는데 성공만 하면, 일은 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며, 내게 있는 <도>도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즉 도는 스스로 행해지는 것이다.
한편《주자어류》에 ‘성은 물의 끝과 처음’이란 것과 ‘성하지 못하면 물이 없다.’는 것을 마주 비교해서, 앞의 것은 이치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고, 뒤의 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설명 방법이다. 그러나 이 장 전체로서는 결국 성도 확실히 사람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주자의 본래 입장이다.
誠者는 非自成己而已也요 所以成物也니라. 成己는 仁也요 成物은 知也로 性之德也니 合外內之道也니라. 故로 時措之宜也니라.
【解釋】성이란 것은 스스로 나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로써 물을 이루는 것이다. 나를 이루는 것은 인이요, 물을 이루는 것은 지다. 성품의 덕이라, 밖과 안을 합치는 길이다. 그러므로 때로 두어 마땅한 것이다.(제3절)
【解說】첫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성은 스스로 이루는, 즉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고 완성하는 것이긴 하나, 단순히 자기를 형성하고 완성하는 것만이 아니고, 동시에 또 다른 것도 이룬다. 즉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서 형성하고 완성시킨다.
<물>이라는 것은 자기와 대립해 있는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꼭 나와 대립된 남이란 뜻만은 아니고, 나 이외의 모든 사람과 일과 물건 모두를 합쳐 가리키고 있는 것이리라. 즉 스스로 나 자신을 이룬 이상, 당연히 그것을 물에도 미치게 되어, 물에도 도가 행해지게끔 될 것이다. 성이 아니면 물이 없다고 하는 것을 나와 남의 대립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이루는 것은 인이요, 물을 이루는 것은 지다.’라고 하는 것은, 성의 작용과 효과를 한 것이지만, 뭔가 지와 인이 서로 교대되는 것 같은 느낌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논어》에,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을 지(知)에 해당시키고,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인(仁)에 해당시키는 상식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현의 말이란 것은 결코 좁게 한 가지 뜻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논어》에,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을 지(知)에 해당시키고,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인(仁)에 해당시키는 상식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현의 말이란 것은 결코 좁게 한 가지 뜻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논어》에도 ‘나를 이겨 예(禮)에 돌아가는 것을 인이라 한다.’(顔淵)고 하는 것은 자신의 경우를 인이라고 한 것이며, ‘지(知)는 만물에 두루 하고 도(道)는 천하를 건진다.’(《주역》繫辭傳)고 한 것은 다른 것에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지로 되어있지 않은가. 물론 나를 이루는 것은, 물을 이루는 것의 기초라는 점을 <체>와 <용>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나를 이루는 것이 <체>, 물을 이루는 것이 <용>에 해당되는 것은 명백하다. 인과 지를 체와 용에 해당시키면, 인이 체가 되고 지가 용이 되는 것도 명백하다. 유교의 근본 원리는 인(仁)이며, 성품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인ㆍ의ㆍ예ㆍ지ㆍ신 오상도 결국 인(仁)의 인(仁), 인의 의, 인의 예, 인의 지, 인의 신에 다를 것이 없으므로 인은 체요, 지는 용이다. 그것들은 어느 것이나 내 성품에 본래부터 있는 덕이다. 상식으로 말하면, 나를 이루는 것은 안이고, 물을 이루는 것은 밖이며, 인은 밖으로 향하는 성질을 가지고, 지는 안으로 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분명히 나를 이루는 것이 안이고, 물을 이루는 것이 지라고 해 두었다. 어느 쪽이 밖이고 어느 쪽이 안이냐 하는 구별은 <성>에 있어서는 애당초 없는 것이다. 성이 밖과 안을 합하는 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순서로서는 먼저 나를 이룬 다음 물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논리적인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형성과 완성이 다른 것의 형성과 완성인 것처럼, 안의 확립이 동시에 밖의 확립이기도 한, 그런 것이 성이다. 성이 이미 내게 얻어지게 되면, 적당한 때를 얻어 일에 실시되어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성현의 행동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은 곳을 바꾸어 그렇게 되는 것으로, 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똑같이 타당한 것이다.(《맹자》離婁下참조)
송학(宋學)의 근본 정신을 나타내는 말의 하나, 장횡거의 ‘안팎을 합하고 물과 나를 평(平)하게 한다.’는 것이, 이 합내외지도(合內外之道)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불교처럼 <안>만을 닦고, 천하국가라고 하는<밖>을 바라보는 시각(視角)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애당초 학문이란 이름에 해당되지 않는 단순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 26 장
하늘의 도에 관한 셋째 번 논의이다.
故로 至誠은 無息이라.
【解釋】그러므로 지성은 쉬는 일이 없다.(제1절)
【解說】‘그러므로’라고 한 것은 여기서도 가볍게 더해진 말일 것이다. 결국 앞에 몇 장에 있는 성에 관한 논지를 모두 이어받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리라. 되풀이해 말하지만 성이란 것은 <진실 무망>으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실(實)>이다. 거꾸로 말하면 허가(虛假)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허가 없이 스스로 그런 것이면, 쉬는 일이 없고, 간단(間斷), 즉 중단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도 아니고 작위도 아니기 때문으로, 만일 작위라고 하면 아무리 안배(安排)를 해도, 설령 하느님이 안배를 한다 해도, 반드시 쉬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날이 가면 달이 오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는, 천지의 지성에 한 시간의 간단도 없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이란 것은 공간적인 간극의 의미이기 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또 여기에 말하는 지성 무식(至誠無息)도 천지의 성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성인의 지성을 말하는 것이 된다. 다만 성인이 곧 천지라고 하는 관계 하에서는, 일반인에서와 같은 의도적인 노력이라고 하는 계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점에서, 사람의 도가 아니고 하늘의 도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不息則久하고 久則徵하고
【解釋】쉬지 않으면 곧 오래고, 오래면 곧 징(徵)한다.(제2절)
【解說】성인에 있어서 지성이 쉬는 일 없이 한 순간의 중절(中絶)도 없이 지성으로 계속되면, ‘오래라고 하는 안(中)에 있어서 떳떳한 것’, 내면적으로 떳떳한 것, 즉 항구 불변하는 덕성(德性)이 형성된다.
《어류》의 말에 따르면 골격이 있는 곳에 진실의 항상 그런 상태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와 같이 내면적으로 항구 불변하게 되면, ‘징(徵)이라고 하는 밖에 징험이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단 하루나 이틀의 공부로 어떻게 징험이 있을 것인가,’
徵則悠遠하고 悠遠則博厚하고 博厚則高明하니라.
【解釋】징이 있으면 곧 유원하고, 유원하면 곧 박후하고, 박후하면 곧 고명한다.(제3절)
【解說】오래면 곧 징험한다. 간단없는 지성이 성인의 내부에 항상 그런 상태를 형성하면, 그것은 반드시 밖에도 그 징험을 나타내게 된다. 정현의 주에 ‘지성의 덕이 사방으로 나타난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징험은 먼저 <유원>이란 것이다. 유원이란 것은 미래에 걸쳐 끝이 없다는 뜻이다. 유원하게 되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넓어지고 두터워지게 될 것이다. 둘째 번의 징험은 넓고 두터운 박후가 되는 것이다. 박후가 되어, 그것이 뿜어 나오게 되면 높고 크고 밝고 빛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셋째 번의 징험은 높고 밝은 고명이 된다. 예를 들면 건축물 같은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대규모의 건축물을 짓는 데는 먼저 기초를 넓고 두텁게 해야만 비로소 높고 큰 것을 지을 수 있다. 또 고명하다는 명(明)에 대해서 말하면, 대개 만물의 정기가 아래에 축적된 것이 깊고 두터우면 깊고 두터울수록 밖으로 발산하는 것도 밝고 빛나는 것이다.(《語類》)불식(不息) 이하를 불식→오램→징험→유원→박후→고명이라 하여 이를 덕에 나아가는 차례로 보려는 사람이 있으나 옳지 않다. 덕이란 지성이라는 한 말에 한꺼번에 다 포괄돼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절과 앞 절의 곧(則)이란 글자는 우리가 이해하는 데 있어 논리적인 순서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곧(則)을 새기지 않고, <하면>이라는 토씨로 읽고 마는 사람도 있다. 우리말에 <그런 즉>하는 말은 바로 연즉(然則)이란 한자를 위만 새기고 아래는 그대로 한자음으로 읽은 데서 생긴 말로서, <그러면> 하는 말과 똑같은 뜻이다.
博厚는 所以載物也요 高明은 所以覆物也요 悠久는 所以成物也니라.
【解釋】박후는 그로써 물을 싣는 것이요, 고명은 그로써 물을 덮는 것이요, 유구는 그로써 물을 이루는 것이다.(제4절)
【解說】성인의 안(內)인 지성이 밖으로 번져 나오게 한 징험, 그것을 앞 절에서는 유원, 박후, 고명으로 열거했으나, 여기에서는 박후, 고명 유구로 되어 있다. 즉 유구가 곧 유원인데 다만 유구의 경우는 안팎을 아울러 표현(다음 節 참조)한 말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본래는 유원이 맨 처음으로, 거기에서 박후와 고명이 이끌려 나오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또 거꾸로 박후와 고명에 의해 유원이 유구로 높여지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인의 모습의 하나로서 박후는, 마치 넓고 두터운 땅이 그러하듯, 만물을 자기 위에 싣기 위한 성격에 불과하다. 또 고명은 광명에 가득 차 높은 곳에 있는 저 하늘이 만물을 자기 아래 덮고 있듯이 만물을 덮어 보호하기 위한 성격에 불과하다. 지성은 이와 같이 만물을 싣고, 만물을 덮고, 최후로 만물을 이룬다. 만물을 이루는 것은 지성이다. 성인의 지성의 우구란 면이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힘을 합친 것으로서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다.
결국 이 절이 말하는 것은, 성인의 용(用)이 천지의 용과 똑같다고 하는 것이다. 즉 성인은 만물을 자기 위에 얹어 싣고, 또 만물을 자기 인을 가지고 덮어, 유구한 미래에 걸쳐 만물을 각각 완성시켜 가는 것이다.
博厚는 配地하고 高明은 配天하고 悠久는 無疆이니라.
【解釋】박후는 땅에 짝하고, 고명은 하늘에 짝하고, 유구는 끝이 없다.(제5절)
【解說】‘땅에 짝한다. 하늘에 짝한다.’의 짝하는 것은 합한다는 뜻이다. 제31장 제4절의 ‘하늘에 짝한다’고 한 그 배(配)의 뜻과 같다. 성인의 덕의 모습인 박후라는 면은, 박후라는 것을 본질로 하는 땅과 합치하고, 혹은 닮아 있다. 고명이란 면은 고명이란 것을 그 본질적인 모습으로 하는 하늘과 합치하고, 혹은 닮아 있다. 그리고 유구라는 면은 단순한 하늘, 단순한 땅이 아닌 하늘과 땅의 끝이 없는 무한성-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과 합치하고 혹은 닮아 있다.
앞 절에서는 성인의 <용>과 천지의 <용>의 동일성을 말했는데, 이 절은 성인의 <체>가 천지의 <체>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을 말했다.《어류》에 의하면, 이 장에서 성인과 천지와의 동일성을 말한 부분이 너무도 넓고 크고 깊고 멀어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그저 망연할 뿐으로, 정말 큰 바다를 바라보는 탄식을 금할 수 없다고 어느 제자가 탄식을 했다. 주자는 답해 말하기를, “그래서는 안된다. 자신은 도저히 그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해서 되겠는가. 다만 이치의 뜻을 분석하여 명백히 파악한 다음, 한 걸음 한 걸음 찾아갈 뿐이다.”라고 했다.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의기가 넘쳐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如此者는 不見而章하며 不動而變하며 無爲而成하니라.
【解釋】이와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며, 움직이지 않고 변하며, 하는 것 없이 이룬다.(제6절)
【解說】‘이와 같은 것은’ 하고 말하는 것은, ‘성인이 그 체와 용의 양면에 걸쳐 이처럼 천지와 합치되고 닦아 있다면’ 하고 말하여 박후ㆍ고명ㆍ유구ㆍ재물(載物)ㆍ부물(覆物)ㆍ성물이라고 하는 두 계열 외에 또 하나 성인의 모습의 계열을 든다. 그리고 이것 또한 천지에 짝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보이지 않고 드러난다고 하는 장(章)은 문장의 장, 즉 무늬로, 지성인 존재는 자기가 스스로 갖추고 무늬(文)를 의도적으로 자랑해 보이는 일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그 무늬는 제 스스로 감출 길이 없어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땅이 산천초목과 나는 새, 달리는 짐승과 같은 훌륭한 무늬를 아무런 의도도 없이 자연 그대로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지성인 것에는 정적(靜的)인 무늬만이 아니고, 동적인 무늬도 갖추고 있다. 그것은 하늘이 의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해와 달이 시시각각으로 그 위치를 변동시켜마지 않고, 별도 시간을 따라 그 위치를 변화해 가는 것과 같다.
지성인 것이 마지막으로 작위의 의도 없이 만물을 이룬다고 하는 그러한 작용을 갖는 것은 단순한 하늘이나 단순한 땅만에 짝한다기 보다는, 그 결합으로서의 천지에 짝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천지의 끝없음과 같은 것이다.
이상 경문에는 그런 글자가 없지만 합치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天地之道는 可一言而盡也니라. 其爲物은 不貳니 則其生物은 不測이니라.
【解釋】천지의 도는 한 말로 다할 수 있으니, 그 물건 됨이 둘이 아닌지라, 곧 그 물건을 낳음을 헤아리지 못한다.(제7절)
【解說】앞 절까지는 성인의 지성된 모습을 하늘과 땅에 짝지어 왔는데, 이 절부터는 다시 하늘과 땅 그 자체에 의해 지성이 쉬는 일이 없는 작용을 밝히려 한다.
천지의 도를 한 말(한 글자)로 다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천지의 도란 것은 성(誠) 한 글자에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물건 됨이 둘이 아니란 것은 천지라고 하는 물건의 참모습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이다. <둘(二)>과 <잡(雜)>이 <망(妄)>에 대응하는 데 대해, <하나(一)>와 <순(純)>이 <성(誠)>에 대응하고 <불식(不息)>에 대응하는 것은, 주자의 《중용》해석에 있어서 공리(公理)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이고 진실이면 쉬는 일이 없다. 간단없이 만물을 만물되게 한다. 즉 만물을 계속 낳고, 혹은 계속 이룬다. 만물을 계속 낳는데 그것을 측량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렇게 왕성하게 낳느냐 하는 것은 추측할 도리가 없다. 성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그처럼 위대한 것이다.(물건 됨이 둘이 아니라는 물건과, 물건을 낳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물건은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天地之道는 博也 厚也 高也 明也 悠也 久也니라.
【解釋】천지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유하고, 오래다(제8절)
【解說】천지의 도는 진실된 하나로 둘이 아니기 때문에, 즉 성일불이(誠一不二)이기 때문에, 여기에 열거(列擧)한 것 같은 각종 덕(第3, 第4節)을 극도에까지 발휘하여, 다음부터 말하는 것과 같은 만물을 낳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今夫天은 斯昭昭之多나 及其無窮也하얀 日月星辰이 繫焉이며 萬物이 覆焉하니라. 今夫地는 一撮土之多나 及其廣厚하얀 載華嶽而不重하며 振河海而不洩하며 萬物載焉이라. 今夫山은 一卷石之多나 及其廣大하얀 草木이 生之하며 禽獸가 居之하며 寶藏이 興焉이니라. 今夫水는 一勺之多나 及其不測하얀 黿鼉蛟龍魚鼈이 生焉하며 貨財가 殖焉이니라.
【解釋】지금 저 하늘은 곧 소소(昭昭)함의 많음이나, 그 다함이 없는 데 미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매여 있고, 만물이 덮여있다. 지금 저 땅은 한 줌 흙의 많음이나, 그 넓고 두터움에 미쳐서는, 화악(華嶽)을 실어도 무겁지 않고, 하수와 바다를 거두어도 새지 않고, 만물이 실려 있다. 지금 저 산은 한 덩어리 돌의 많음이나, 그 넓고 큰 데 미쳐서는, 풀과 나무가 나고, 새와 짐승이 살며, 보물의 감춘 것이 일어난다. 지금 저 물은 한 작(勺) 물의 많음이나, 그 헤아리지 못함에 미쳐서는, 원ㆍ타ㆍ교ㆍ용ㆍ어ㆍ별이 나며, 화재(貨財)가 불어난다.(제9절)
【解說】도대체 저 하늘이란 것은, 결국 소소(昭昭)한 것, 즉 겨우 반짝반짝하는 밝은 기운이 많이 모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한없이 많이 모여 있는 단계에서는, 거기에 해와 달과 별들이 매달려 각각 제자리를 차지하고, 아래 있는 모든 만물들을 덮어 보호한다. 소소라는 것은 이 경우 경경(耿耿)과 같은 뜻으로 반짝거리는 밝음의 작은 부분을 말한다. 붓대롱 속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밝은 부분의 극히 작음을 뜻하고, 밝은 정도가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또 저 땅의 경우,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모이고 쌓여 넓고 두터워졌을 때에는 저 화산(華山)을 위에 실어도 무거워서 내려앉는 일이 없고, 하수와 바다를 품안에 넣고 있어도, 다 받아들이지 못해 물이 넘쳐 새는 일이 없으며, 모든 만물을 남김없이 싣고 있다. 화악이란 것은 곧 화산을 말하는 것으로 오악(五嶽)의 하나다. 즉 동ㆍ서ㆍ남ㆍ북ㆍ중(中) 다섯 개의 큰 산 가운데 중앙에 있는 화산을 말한다.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동쪽에 해당된다. 다만 이 화악을 화ㆍ악의 각각 다른 산으로 보는 설도 있다. 진(振)은 거둬들인다(收)는 뜻. 하수(河)는 황하(黃河)를 말한다.
또 저 산이란 것은 작은 돌이 많이 모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권석(卷石)의 권(卷)을 주자는 구(區)라고 주석을 했는데, 작은 덩어리란 뜻이다. 그 작은 돌덩어리들이 모이고 모여 넓고 커지게 되었을 때는 그 위에 풀과 나무가 나고, 새와 짐승이 살고, 그 속에 많은 보물들이 나온다. 보장(寶藏)은 땅에 든 보물이란 뜻으로, 금이니 은이니 옥이니 하는 광석들을 말하며, 일어난다는 것은 발굴된다는 뜻보다도 그 속에 들어있다는 뜻이 더 강하다.
또 저 물은 단 한 작(勺-1合의 10분의 1)의 물이 많이 모여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여 있게 되면, 큰 자라(黿), 악어(鼉), 교룡(蛟), 용(龍), 고기, 자라 등이 그 속에서 생겨나게 되고, 귀한 물건들이 불어나게 된다. 화재(貨財)가 불어난다는 것은 진주, 산호 등을 비롯한 귀한 자원들이 무진장 생겨나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 하늘, 땅, 산, 바다의 네 가지 사례는, 모두 천지 자연이란 것이 둘이 아니고 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즉 한결같이 간단없이 지성으로 계속되기 때문에, 왕성하고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거기서 모든 것이 생겨나게끔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늘과 땅과 산과 바다가 사실상 이런 식으로 조금씩 거듭 쌓임으로써 커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 독자들은 말에 지나치게 구애되어 그 뜻하는 바를 잘못 파악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문제를 하늘과 땅에서 옮겨다가 이 장을 풀이하여 ‘소소를 쌓아 무궁에 이른다는 것은 사람이 양심을 확충해 가서 마침내는 천지와 덕을 합하기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 여대림의 설은 그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역시 정확하지는 못하다. 이 장의 <지성무식(至誠無識)-박후(博厚)ㆍ고명(高明)>은 성인이 오랜 동안 천하를 도에 의해 화성(化成)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정현이 말한 ‘지성의 덕이 사방으로 나타나는’ 것, 즉 인품과 영향력(氣象功效)을 말한 것으로, 성인의 덕도 쌓고 쌓은 뒤에야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 끝에 (다음 節) 문왕(文王)을 노래한 시를 인용해서 증명을 삼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점차적으로 누적하는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여대림의 설대로 하면, 먼저 쉬는 일이 없고, 그런 다음 성에 도달하여 다음 절에 있는 <오목불이(於穆不已)>를 거치고, 그런 뒤에 비로소 하늘 도에 <순(純)>하게 된다. 그래서는《중용》의 본 뜻에 맞지 않는다.(《혹문)》
詩云 維天之命은 於穆不已라 하니 蓋曰天之所以爲天也니라. 於乎不顯가 文王之德之純이여 하니 蓋曰 文王之所以爲文也요 純亦不已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하늘의 명이, 아아 목(穆)하여 마지않는다.’ 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그로써 하늘된 것을 말한 것이요, ‘아아 드러나지 않겠는가, 문왕의 덕의 순함이여.’ 하였으니, 대개 문왕이 그로써 문(文)된 것을 말한 것이니, 순도 또한 마지않는다.(제10절)
【解說】《시경》주송(周頌)유천지명(維天之命)이란 편에 있는 글귀다. 유(維)는 별 뜻이 없다. 오(於)는 오호(於乎)와 같은, 감탄사, 목(穆)은 깊고 멀다는 뜻. 이 시는 문왕을 제사할 때 부르는 노래로, 그 전반이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것이다. “천명, 즉 천도는 깊고 멀어서 쉬는 일이 없다. 순일하여 섞임이 없는 문왕의 덕이 아아, 드러나지 않고 끝날 리가 있겠는가.” 하고 말했는데, 자사는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어, 앞의 반인 천명, 즉 천도가 깊고 멀고 또 쉬는 일이 없이 끊임없이 계속 작용하고 있다고 한 두 글귀에 대해서는 하늘의 하늘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풀이하고, 순일해서 섞인 것이 전혀 없는 저 문왕의 덕이 어떻게 빛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두 글귀에 대해서는 문왕의 문왕다운 점은 순일하여 쉬는 일이 없는 곳에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결국 이 네 글귀는 하늘 도의 근본 성격은 쉬지 않는 것, 한 시각의 끊임도 없이 계속 작용하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 또 사실에 있어서는 천도에 다를 것이 없는 성인 문왕이 문왕된 도의 근본 성격도 순일하고 또 쉬지 않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한 것이다.
정자는 말하기를, “하늘의 도(天道)는 쉬지 않는 것이다. 문왕이 하늘의 도에 순일(純一)했던 것도 역시 쉬지 않았던 것이다. 순일하면 둘이 없고 섞임이 없다. 쉬지 않으면 앞과 뒤의 구별을 정하는 간단(間斷)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이리하여 이 장도 시를 인용해서 첫머리의 <지성무식(至誠無息)>을 매듭지었다.
한편 맨 끝의 <순역불이(純亦不已)>를 <문왕지덕지순(文王之德之純)>이라고 한 <순>에 대한 해설로 보고 여기서 새겨 둔 것처럼 ‘이 순이란 것도 역시 쉬지 않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생각되는데, 주자는 꼭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한편 <불이(不已)>가 주자에게 있어서 이미 <이치(理)>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론적 술어(術語)로 쓰이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밖에 또 주자 이후, 특히 명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자주 쓰이고 있는 <생생불이(生生不已)> 또는 단순히 <불용이(不容已)라고 하는 것과 쓰이는 것은, 그 어원으로서는 (《시경》에서라기보다는)《중용》의 이 부분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제 27 장
사람의 도에 관한 셋째 번 논의이다.
大哉라 聖人之道여
【解釋】크도다 성인의 도여.(제1절)
【解說】이 ‘크도다’라는 말은 다음 절을 합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洋洋乎 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
【解釋】양양히 만물을 발육하여, 높이 하늘에 다했도다.(제2절)
【解說】준(峻)은 높고 큰 것이다. 이 한 절은 도가 극도로 큰 것, 즉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극치를 말한다. 성인의 도는 만물을 발육(첫장 제5절)하게 하면서 양양히 흘러 움직여, 높이 하늘 끝까지 꽉 차있다. 여기에 발육한다고 하는 것은 봄은 낳고, 여름은 기르고, 가을은 거두고, 겨울은 간직하는 전 과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優優大哉라 禮儀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
【解釋】우우히 크도다. 예의가 삼백이요, 위의가 3천이로다.(제3절)
【解說】우우는 넉넉해서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우우하여 크도다.’ 하는 것은 앞절의 ‘양양히’라는 것과 같은 표현 방법으로, 결국 성인의 도를 찬미한 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절 전체의 뜻으로서는 앞 절과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앞 절이 도의 지극히 큰 면을 말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절은 도의 지극히 작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의라는 것은 경례(經禮), 위의라는 것은 곡례(曲禮)를 말한다. 즉 예의라는 것은 예의 중대한 것, 예의 큰 줄거리이고, 위의라는 것은 예를 행하는 데 있어서의 세밀한 부분을 말한다. 단순히 높고 먼 것으로만 벗어나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 유교가 얼마나 착실한가를 설명할 경우, 송나라 이후로 이 <예의 3백, 위의 3천> 혹은 <경례 3백, 곡례 3천>이란 말이 항상 인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특히 위의 3천, 즉 세밀한 예법의 수가 3천이나 된다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 이 이상 분할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작은 것 속에 도가 들어있다는 것, 즉 도의 극히 작은 면을 들고, 그것에 의해 도의 우우한 위대함을 말한 것이다. 만물을 발육하여 천지에 충만해 있는 점에 있어서나, 굵게 나누어 3백이요 가늘게 나누어 3천이나 되는 세밀한 예법의 하나하나에까지 꽉 차 있는 점에 있어서나 함께 볼 수 있는 도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있다.
待其人而後行하니라.
【解釋】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해진다.(제4절)
【解說】지극히 큰 것에도 지극히 작은 것에도 나타나게 되는 도의 위대함. 그러나 그 도는 결국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 뒤에 비로소 행해지게 되고 실현하게 된다. 즉 지성의 사람인 성인이 출발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사가 든다.’(제20장)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는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주역》) 우주적인 의미에서의 도도, 사람의 사소한 일에 있어서의 도도, 그 깊은 뜻에 있어서는 성인의 출현에 의해서만 참으로 실현된다.
故로 曰 苟不至德이면 至道不凝焉이라
【解釋】그러므로 말하기를, “진실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는 엉기지 않는다.”고 했다.(제5절)
【解說】지덕(至德), 즉 지극한 덕이라고 한 것은, 앞의 절에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해진다.’고 한 그 사람을 가리킨다. 즉 지성의 사람인 성인을 말하는 것이다. 지도(至道), 즉 지극한 도란 것은, 곧 크게는 높이 하늘에 이르고, 작게는 3백ㆍ3천의 하나하나 속에 실현될 수 있는 도를 말한다. 이 같은 지극한 도는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에 의하지 않고는 엉기지 않는다. 응(凝)은 모이고(聚) 이루는(成) 것, 즉 도가 모여들고 엉켜들어 도로서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도는 마치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는 지극한 덕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기다려 비로소 도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옛말이거나 속담일지도 모른다.
故로 君子는 尊德性而道問學이니 致廣大而盡精微하며 極高明而道中庸하며 溫故而知新하며 敦厚以崇禮니라.
【解釋】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問學)에 말미암으며, 광대를 이루고 정미를 다하며, 고명을 다하고 중용에 말미암으며,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며, 두터움을 도탑게 하여 그로써 예를 높인다.(제6절)
【解說】‘그러므로’라고 하는 것은 도를 도탑게 하기 위해서는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 즉 성인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다음에는 성인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이 절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한 군자의 도가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덕성을 높인다.’의 존(尊)은 공경하여 받든다는 뜻, 덕성이란 것은 자기가 하늘로부터 받은 바른 이치를 말한다. <도문학(道問學)>의 도(道)는 말미암는다(由)는 뜻이다. 문학은 묻고 배우는 것, 즉 학문을 말한다.
‘덕성을 높이고 문학에 말미암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즉 나면서부터 몸에 갖추고 있는 이치인 성품에 대해 존경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경건히 간직해 나가면서, 한쪽으로는 묻고 배우고 하는 것에서 오는 도덕적인 수양에 대해서, 오히려 대조적이고 객관적이고 격물치지적(格物致知的)인 학문, 그것에 의지하려 하는 것이다.
‘광대를 이루고 정미를 다한다.’는 것은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맞추어 풀이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쉽다. 즉 사람과 만물과의 온갖 다양성(多樣性)도 그것이 본래적인 이치에 있어서 하나인 것을 절대로 방해하지 않는다. 즉 어떤 것에 있어서나 평등하고 동일한 이치, 만 사람 만 가지 사물에 공통된 광대한 이치, 그것을 이루고 완전히 발휘하는 것과, 각각 모든 사람 모든 사물에 있어서 다른 분에 있어서의 이치, 즉 잘게 세분되고 응축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정미(精微)한 이치, 그것을 어디까지나 정밀하게 분석해서 남김이 없게 한다. 앞의 것이 광대한 이치를 전적으로 체현(體現)하려 하는 도덕적 입장이라면, 뒤의 것은 역시 그것과도 일단 서로 다른 영역인 지적(知的)인 학문의 범주 속에 속하게 될 것이다.
‘고명을 다하여 중용에 말미암는다.’는 것도 거의 위에 말한 둘과 같은 취지로 풀이된다. 고명을 다한다는 것은 만물을 높이 초월하여 사물의 방해를 받지 않는 덕성이 빛나는 경지, 그같은 경지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중용에 말미암는다는 것은 일을 행하는 데 있어 지나침과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세밀하게 중용의 법칙에 따르는 것, 즉 학문적인 음미(吟味)에 속하는 것이다.《어류》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고명을 다할 뿐으로 중용에 말미암지 않는 전형적인 것은 이른바 불교와 도교의 학문이다. 우리 유학(儒學)이 포주(庖廚)를 멀리할 때, 불교와 도교는 높은 것을 좋아한 나머지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금하기에 이르고, 유학이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말고 화식(貨殖)을 일삼지 말라고 말할 뿐인데 반해, 그들은 고명을 찾는 나머지 마침내는 인륜을 끊고(夫婦라는 사람의 정당한 모습에서 벗어나 독신주의에 빠진다.), 내 것을 할애(割愛)하여 남에게 준다(布施? 자신을 베어 남에게 베푼다.)고 하는 데까지 가 있다. 육자정(陸子靜-子靜은 陸象山의 字)도 천성은 참으로 고명하나, 아무래도 중용에 말미암으려 하지 않는다.”와 마찬가지로, ‘옛것을 익혀 새 것을 안다.’는 것도 앞의 것이 덕성을 높이는 방향, 뒤의 것이 학문에 말미암는 방향이다. 온(溫)이란 것은, 한 번 끓인 음식을 다시 한 번 따뜻하게 하는 것 즉 한 번 배운 것을 가끔 익히는 것을 뜻한다. 이것만으로 말하면 온고(溫故), 즉 옛것을 익히는 것은 오히려 <도문학>의 범주에 속할 것 같지만, 새 것을 아는 것과 비교할 때는 <존덕성>의 뜻이 강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온고는 힘을 들이지 않는 방향이고, 지신(知新)은 그 조예가 더욱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온고지신>이란 말은《論語》爲政편에도 나와 있다.
‘두터움을 도탑게 하여 그로써 예를 높인다.’도 마찬가지다. 두터움을 도탑게 한다는 것은 중후한 인품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즉 더욱 중후하게 한다는 것이므로 물론 덕성을 높이는 방향이며, 예를 높인다는 것은 예라고 하는 이상 이른바 3백ㆍ3천의 세목이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묻고 배우고 하는 것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덕성을 높인다는 것은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여 (맹자가 말하는 存心) 도와 이치의 극히 큰 방향의 체현(體現)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문학에 말미암는다는 것은 치지(致知)에 의해 도와 이치의 극히 작은 방향, 즉 구체적인 탐구의 방향을 목표로 한다. 이 두 방향은 덕을 닦고 도를 엉기게 하는 것에 대한 두개의 기본적인 범주의 계열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자기의 도덕성을 그늘지게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致廣大), 사사로운 욕심을 가지고 자기의 도덕성을 방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極高明),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 도덕성을 기른다.(溫故), 이미 능히 할 수 있는 그 도덕 능력을 도탑게 한다.(敦厚)-이것들은 모두 존엄성, 즉 마음을 두는 쪽의 계열이다.
이치를 분석함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오류도 있게 하지 않는다(盡精微),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것의 오류를 허락지 않는다(道中庸), 이치의 뜻에 있어서는 날로 날로 새로운 지식을 쌓고 또 쌓는다(知新), 예의 세목(節文)에 대해서 말하면 날로 날로 삼가야만 할 지식을 더해간다(崇禮)-이것들은 모두 도문학, 즉 치지 쪽의 계열에 속한다.
결국 여기에 말하고 있는 것은, 유교적인 의미에서의 학(存德性ㆍ存心과 道問學ㆍ致知와의 統一로서의 學), 즉 덕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보여 준 것인데, 존심에 의하지 않으면 치지를 할 수 없고, 치지에 의하지 않으면 존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다섯 구는 그러한 의미에서 상호의존의 계열적 대응을 훌륭하게 보이고 있다. 개론으로서는 이처럼 자세한 것은 없으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해 이 부분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육상산( 및 王陽明)의 사상과 주자의 사상의 대립이 곧 존덕성과 도문학의 대립(즉 육상산은 존덕성이 주라고 하고, 주자는 도문학이 주라고 하는 대립)이라고 불리어 온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깃거리다. 또 현대 철학자인 풍우란(馮友蘭)이 그의《신원도(新原道)》라는 저서 가운데서 중국 철학의 전개를 <극고명(極高明)>과 <도중용(道中庸)>의 항쟁과 교체의 역사라고 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다.
是故로 居上不驕하며 爲下不倍하니라. 國有道엔 其言足以興이오 國無道엔 其黙足以容이니라. 詩曰 其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라 하니. 其此之謂與인저.
【解釋】이런 까닭에 위에 있어서 교만하지 않으며, 아래가 되어 배반하지 않으며, 나라에 도가 있으면, 그 말이 족히 그로써 일어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그 잠잠함이 족히 그로써 용납된다. 시에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 통하여, 그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했으니 그것이 이를 말함일 것이다.(제7절)
【解說】이리하여 군자는 위에 있어도, 즉 임금으로서 위에 있어도 결코 백성들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취하는 일이 없고, 또 임금에 대해 신하가 되었을 때도 절대로 임금에게 배반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배(倍)는 배반한다는 뜻이다. 즉 교만을 부리거나 배반을 하거나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다만 앞에 말한 <존덕성ㆍ극고명…> <도문학ㆍ도중용…>, 즉 존심과 치지에 힘쓸 뿐이다. 그 결과 나라에 도가 있어 나라가 올바로 다스려지고 있을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른 말을 해서 점점 자기 위치를 높여가게 된다. 그러나 만일 나라가 도가 없어 정치가 어지러워져 있을 때는 몸을 그 나라에 두고 살 수 있게끔 침묵을 지킨다.《시경》대아(大雅) 증민(烝民)편에, 이치에 밝고 앞일을 내다보아 자기 몸을 무사히 보존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두고 한 말이 틀림없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라에 도가 없으면…’ 하는 말들이 옛 글에 자주 나오는 말이란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또 보신책이란 의미에서의 ‘명철보신(明哲保身)’이란 말도 여기에서 널리 쓰이게 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제 28 장
앞 장의 ‘아래가 되어 배반하지 않는다.’를 이어받은 사람의 도에 관한 넷째 번 논의이다.
子曰 愚而好自用하며 賤而好自專하니라. 生乎今之世하야 反古之道면 如此者는 烖及其身者也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쓰기를 좋아하고, 천하면서 스스로 오로지 하기를 좋아하면, 지금 세상에 태어나 옛 도에 돌아가려 하면, 이같은 사람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치는 사람이다.”(제1절)
【解說】먼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의논을 시작한다. 어리석은 주제에 자기 생각을 그대로 밀고나가려 하거나 신분이 낮으면서 제 생각대로 하기를 좋아하거나, 오늘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먼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그 위치를 모르고 시대를 모르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그 자신 화를 입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공자의 말이다. 재(烖)는 재(災)의 엣날 글자라고 한다.
여기에 어리석은 사람ㆍ천한 사람의 자용(自用)ㆍ자전(自傳)과 함께 복고주의(復古主義)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비난의 방법이 재앙이 그의 몸에 미치게 된다는 형태로 되어 있는 점과 아울러 주목할 만한 일이다.
유교의 본래적인 지향(志向)이 일종의 복고주의(따라서 이상주의)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현재의 권력을 시인하고, 설령 복고주의라 하더라도 그 테두리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도 또한 두드러진 사실로서, 이 뒤의 경향을 전부 법가적(法家的)인 경향이라고 보는 것은 올바른 견해가 못 된다.
非天子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解釋】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고, 제도를 만들지 못하고, 글을 상고하지 못한다.(제2절)
【解說】공자의 말은 이상으로 끝나고, 공자의 말을 바탕으로 하여 자사의 논의가 시작된다. 오직 천자만이 예를 새로 만들어내고 없애고 고치고 하는 것을 의논하여 결정할 수가 있고, 제도를 새로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문자를 연구 제정하여 이를 널리 쓰게 할 수 있다. 이같은 일은 천자 이외의 사람에게는 그 권한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今天下, 車同軌하며 書同文하며 行同倫이니라.
【解釋】지금 천하가 수레는 궤(軌)를 같이 하고. 서(書)는 문(文)을 같이하고, 행(行)은 윤(倫)을 같이 한다.(제3절)
【解說】‘지금’이라는 것은, 자사가 살고 있던 시대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레는 궤를 같이한다.’의 궤는, 바퀴자국의 치수, 즉 수레 양쪽 바퀴가 길바닥을 누르고 지나간 자국의 너비를 말한다. 자사가 살고 있는 지금, 수레바퀴의 자국 너비는 온 천하가 다 공통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 서는 문을 같이한다고 하는 문은 앞 절에서 말한 불고문(不考文)의 문과 같은 뜻으로 모양이나 획수 등을 주로 하여 본 글자인데, 그것이 천하 어디나 똑같이 되어 있다. 즉 글씨체가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행, 즉 행하는 것은 윤을 같이한다.’는 윤은 질서와 순서의 뜻으로, 어른과 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등의 순서와 석차의 체계, 모든 사람의 사회적 관계에 의한 예절과 규정 같은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 질서와 규정 같은 것이 천하 어디를 가나 다 공통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예(禮)가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수레와 글씨와 행동의 세 가지가 동일하다는 것은, 천하가 통일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부분의 기록에 따라,《중용》이란 책이 성립된 것은 진(秦)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뒤일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역시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수레가 똑같은 바퀴를 쓰고 글자가 통일되고 예법이 일정하게 된 때가, 전국의 할거를 통일한 진시황 시대였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사 당시로서도 이런 말을 쓸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혹문》에 이르기를, 자사의 시대는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고 예악을 맡고 있는 관청도 혼란해져서, 제도라고 하는 것이 천하에 행해지지 않게 된 지 벌써 오래된 때였다. 그런데 궤를 같이하고 문을 같이했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는 질문을 두고 다음과 같이 대답해 말한다.
“이 때 주나라 왕실이 쇠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천하 공통의 주인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제후들도 천자의 자리를 넘보려는 생각을 속에 품고 있었지만, 서로 상대를 압도할 만한 힘은 아직 없던 시대였다. 조금 지난 시대로 내려와 이른바 전국 육웅(六雄) 시대에도 새로 왕조를 세우고 모든 것을 뜯어고쳐 천하를 통일하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주나라 수레의 바퀴 너비나 글자를 변혁하는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한편《혹문》에는 또 수레의 바퀴 너비나 문자의 통일이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재가 있다.
“옛날 천하를 차지하는 사람, 즉 천자로서 한 왕조를 개시한 사람은 반드시 책력과 복장 빛깔과 기(旗)표시 같은 것을 고쳐, 천하의 이목과 심지(心志)를 일신하게 되어 있었다. 하(夏)와 은(殷), 은과 주(周) 사이에도 그같이 소중히 하는 것들을 달리하여 서로 답습하지 않았던 것이데, 문헌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 그대로다. 궤란 것이 수레의 바퀴 자국이란 것은 이미 말했거니와, 수레는 주나라에서는 중앙정부의 동관(冬官)이 만드는 방법을 발표하여, 수레(輿)의 너비는 6척 6촌으로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땅에 찍힌 바퀴자국, 즉 두 수레바퀴 사이의 너비는 지방의 원근을 묻지 않고 일정했다. 만일 치수가 이 규정에 맞지 않았을 경우 관리가 그것을 적발할 뿐만 아니라, 실지로 길을 갈 경우에도 이미 나 있는 바퀴자국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마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옛말에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들어, 문을 나가 바퀴자국에 맞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다음에 문이란 것은 글자의 점과 획과 모양을 말한다.《주례》에 의하면, 정부 관청의 하나인 지관(地官)의 사도(司徒)는 백성들에게 도예(道藝)를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글씨를 가르치는 것이 들어있다. 글자와 글씨체란 것도 역시 나라의 관청이 관장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밖에 길은《주례》의 춘관(春官)의 외사(外史)는 ‘서명(書名, 글씨 쓰는 법)을 사방에 전달하는 것을 맡는다고.’고 하고 있다. 이같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 말기에 천하가 아무리 분열되어 있었다 해도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러 비로소 수레는 6척을 규정으로 하고, 서(書), 즉 문자는 소전(小篆)과 예서(隸書)를 표준 서체로 하게 되어, 주나라 제도가 비로소 고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사 때에 그것들은 아직 일정해서 고쳐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즉 주자는 진나라 시황제의 통일이란 것과는 상관없이 수레는 궤를 같이 하고, 서는 문을 같이 한다는 사태가 주나라 일대(戰國時代도 물론 포함된다.)를 통해 존속해 있었다고 보는데, 역시 그 주장이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雖有其位나 苟無其德이면 不敢作禮樂焉이니라. 雖有其德이나 苟無其位면 亦不敢作禮樂焉이니라.
【解釋】비록 그 지위가 있어도 진실로 그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갖지 못하고, 비록 그 덕이 있어도 진실로 그 지위가 없으면 또한 감히 예악을 갖지 못한다.(제4절)
【解說】이 대목에 대한 정현의 주에 ‘예악을 짓는 사람은 반드시 성인으로서 천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한 것을 주자는 그대로 인용해 쓰고 있다. 즉 천자만이 예를 의논하고 제도를 세울 수 있지만, 천자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천자의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예악을 새로 고쳐 지을 만한 덕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즉 성인의 덕이 없을 경우에는 예악을 제정하는 것은 보류하는 것이다. 만일 감히 제작을 한다면,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또 아무리 성인의 덕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 있어서 천자의 지위에 있지 않을 경우는 역시 예악의 제작을 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일을 한다면, 천하면서 스스로 오로지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불리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앞의 경우는 잠시 그만두기로 하고, 뒤의 경우, 즉 덕이 있고 지위가 없는 전형적인 예가 공자인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른바 금문파(今文派), 고문파(古文派) 등의 논쟁도 있고 해서, 유학사상 중대한 문제가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언급을 보류한다. 아무튼 이러한 규정과 같은 것은, 중국에 있어서 천자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실마리가 된다.
子曰 吾說夏禮나 杞不足徵也니라 吾學殷禮러니 有宋存焉이라. 吾學周禮하야 今用之니 吾從周니라.
【解釋】공자가 말씀하셨다. “내가 하나라의 예를 말하나, 기나라가 족히 징(徵)하지 못하고, 내가 은나라 예를 배우며 송나라가 둔 것이 있으나, 내가 주나라 예를 배우니, 지금 쓰는지라,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제5절)
【解說】다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장을 끝맺는다. 이 공자의 말이, 글자와 글귀에 약간의 다른 것은 있으나,《논어》팔일(八佾)편에 그대로 나와 있다. 하ㆍ은ㆍ주(夏ㆍ殷ㆍ周) 3대의 예를 공자는 배워서 대체로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하나라 예를 논하려 하면, 하나라의 뒤를 이어오고 있는 기나라에 그것을 논증할 만한 충분한 자료는 보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것을 가할 수는 없다. 또 자신은 은나라 예도 배우고 있으며, 그를 위해 은나라 뒤를 이은 송나라가 은나라 예를 배우기 위한 충분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가 쓰지 않는 예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예는 아닌 것이다. 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날 길로 되돌아가려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주나라 예를 연구해 보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주나라 예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자는 성인이면서도 천자의 지위에 있지는 못했기 때문에, 자기 이상을 담은 예악은 제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주나라 예악에 따르는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나는 주나라에 따르겠다.’고 한 마지막 글귀도, 아마 같은《논어》팔일편에 있는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두 대를 참고로 하여, 욱욱(郁郁)히 문채(文彩)로운지라,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리라.
공자가 과연 주나라에 따랐는지, 자기의 이상을 담은 새로운 제도를 어떤 의미에 있어서나 제작하지 않았는지, 그것은 의논의 여지가 있다. 금문학파(今文學派-公羊學派)에 따르면, 공자는 제작을 했다고 한다. 다만 천자가 아닌 그의 제작은 사실상의 제작이 아니고, 말하자면 종이 위의 제작이었다. 공자는 그 새로운 이상적 제도를《춘추(春秋)》라고 하는 경전 속에 역사 기술 형식을 빌어 써 넣어 두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공양학파의 사상은 청나라 말기 19세기 초엽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해서, 단순한 경학상(經學上)의 학설에서 강유위(康有爲)ㆍ양계초(梁啓超) 등의 정치 개혁운동(戊戌變法)으로 발전해 나가고, 그것이 이윽고 중화민국 혁명(革命)으로까지 변천해 가게 된 것이다.
제 29 장
제27장의 ‘위에 있어서 교만하지 않는다.’를 이어받은, 사람의 도에 관한 다섯째 번 논의이다. 이 논지는 앞 장에 연관돼서 전개된다.
王天下 有三重焉이니 其寡過矣乎인저.
【解釋】천하에 왕하는 데에 세 가지 중한 것이 있으니. 그 허물이 적으리라.(제1절)
【解說】세 가지 중대한 일이란 것은, 여대림에 의하면, 예를 의논하는 것, 제도를 만드는 것, 글을 상고하는 것(제28장 제2절)의 셋이다. 그것들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천자뿐으로, 천자가 그것들을 참되게 실시하게 되면, 나라마다-노나라라든가 제나라라든가 하는-정치하는 방법이 다른 일도 없게 되고, 집마다 습속(習俗)이 각각 다른 일도 없게 되므로, 그 당연한 결과로서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적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과오가 적은 주체(主體)가 천자냐 아니냐 하는 데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주자는 분명히 그 주체를 천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한편 허물이 적다는 것은, 여기서는 소극적인 것이지만,《논어》憲問에 위(衛)나라의 어진 대신인 거백옥(蘧伯玉)이 ‘허물이 적기를 힘쓰고 있다.’는 것을 크게 다루고 있는 것과 같이, 어느 경우 도덕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종류의 적극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면 거백옥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너무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에서 어진 사람의 정도에까지 도달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허물(過)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罪)는 아니다. 군자의 허물은 해와 달이 먹히는 것과 같은 (《논어》子張) 것으로, 그것이 공개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리고 솔직히 재빨리 고쳐지게 되면, 단순한 복구라고 하는 이상의 도덕적 진보를 뜻한다.
上焉者는 雖善無徵이니 無徵不信이오 不信民弗從이니라. 下焉者는 雖善不尊이니 不尊不信이오 不信民弗從이니라.
【解釋】위인 것은 비록 착해도 증거가 없나니, 증거가 없는지라 믿지 않고, 믿지 않는지라 백성이 좇지 않는다. 아래인 것은 비록 착해도 높지 않나니, 높지 않은지라 믿지 아니하고, 믿지 않은지라, 백성이 좇지 않는다.(제2절)
【解說】위인 것이란, 시왕(時王) 이전, 즉 당시의 왕조(王朝)인 주나라 이전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하나라와 은나라 왕조의 예(제도, 문자)는 설령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확실한 증거 자료가 없어 이를 밝혀낼 도리가 없다.(제28장 제5절) 증거가 없으면 아무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처럼 믿을 수 없는 예에 따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래인 것이란, 위에 말한 위인 것과는 대(對)가 되지 않는 결점은 있지만, 주자에 따르면 이것은 시간적인 표현이 아니고 위치적인 표현이 된다. 즉 성인으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덕은 성인인데도 천자의 지위에 오를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을 천저나 혹은 임금으로 받들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자 같은 사람에 다를 것이 없다. 공자는 예에 잘 통해 있기는 했지만, 즉 공자가 구상하고 있는 예는 훌륭한 것이긴 했지만, 그러나 지위가 높지 못했기 때문에 역시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했고, 믿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즉 공자가 예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정치로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절은 이른바 삼중(三重-議禮ㆍ制度ㆍ考文)을 중심 주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위인 것과 아래인 것은 앞의 것의 시간적인 위가 되고 뒤의 것은 위치적으로 아래라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하다는 점에서, 아래인 것을 왕자(王者)에 대한 패자(覇者)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주자는, 패자는 그 착할 것을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비록 착해도>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그 설을 배척하고 있다.(《혹문》)
故로 君子之道는 本諸身하야 徵諸庶民하며 考諸三王而不繆하며 建諸天地而不悖하며 質諸鬼神而無疑하며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이니라.
【解釋】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몸에 근본하여 서민에 징험하고, 삼왕에 상고하여 틀리지 않고, 천지에 세워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 물어 의심이 없고, 백세에 그로써 성인을 기다려도 망설이지 않다(제3절)
【解說】<자의 도>라고 했을 때의 군자는 이 경우 천하에 왕이 된 사람, 즉 천자를 말하는 것이며, 도는 의례ㆍ제도ㆍ고문과 같은 일은 내 몸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이 그만한 덕을 간직하고, 그 덕을 바탕으로 그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되며,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가 않는가를 끊임없이 살펴 확인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다음 다시 삼왕, 즉 하ㆍ은ㆍ주 3대의 성인 천자들이 행한 의례ㆍ제도ㆍ고문에 대한 것을 참고로 하며, 자기의 그것이 틀리지 않는가를 검토한다.(繆 謬) 또 ‘천지에 세워 어긋나지 않다.’의 천지는, 물론 형기(形氣)의 하늘(物理的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적으로 <도>를 뜻하는 것인데, 의례ㆍ제도ㆍ고문의 세 가지를 세워 이 도와 서로 대조해 보고, 도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검토한다. 또 그것을 귀신, 즉 조화의 발자취에 맞추어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는가를 살펴본다. 즉 천지가 만물을 낳는 작용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다시 백세(1세는 30년) 뒤에 나타나게 될 성인, 그 성인의 출현을 기다려 그의 비판을 받게 될 경우, 당황하거나, 망설이는 일이 없겠는가를 반성해본다. 즉 맹자가 말한 것처럼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내 말을 바꾸지 않는다.”(《맹자》勝文公下)고 할 수 있을지를 검토한다. 그 결과 틀리지도 않고, 어긋나지도 않고, 의심도 없고, 망설여지지도 않는 것이 천자의 의례ㆍ제도ㆍ고문에는 필요한 것이다.
質諸鬼神而無疑는 知天也요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知人也니라.
【解釋】귀신에 물어서 의심이 없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요, 백세에 그로써 성인을 기다려 망설이지 않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제4절)
【解說】이 ‘하늘을 안다.’ ‘사람을 안다.’ 하는 것은, 자잘한 사실들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이치를 아는 것이다. 즉 천자가 자기가 하고 있는 제작 활동을 자연의 조화 작용과 비교 대조하여 검토하는 것에 의해 하늘을 안다. 즉 자연계의 이법(理法)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 후세에 나타나게 될 완벽한 비판자 앞에 서서 망설이지 않을 수 있다면, 맹자가 말한 것과 같이 “먼저 성인과 뒤 성인은 그 법이 하나.”(《맹자》離婁下)이기 때문에, 인간계의 바뀌지 않는 이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귀신과 성인만을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3왕과 천지도 들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是故로 君子는 動而世爲天下道이니 行而世爲天下法하며 言而世爲天下則이니라. 遠之則有望이오 近之則不厭이니라.
【解釋】이런 까닭에 군자는,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의 도가 되고, 말하면 대대로 천하의 규칙이 되어, 멀리하면 곧 바램이 있고, 가까이 하면 곧 싫지 않다.(제5절)
【解說】이 군자도 물론 성인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즉 천자를 가리키고 있다. ‘움직이면’이란 것은 말과 행동을 합해서 말하는 것인데, 그의 말과 그 행동은 어떤 세상에서도 천하의 도, 즉 법과 규칙이 되는 것이다. 그 행위는 어떤 세상에서고 지켜야 할 법도가 되는 것이며 그 말은 언제까지고 표준을 삼아야 할 준칙(準則)이 되는 것이다. 이 군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이 군자의 덕이 넓게 미치고 있어서 이 군자를 사모하게 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군자의 하는 일이 떳떳하기 때문에 싫은 느낌을 갖는 일이 없다.
詩曰 在彼無惡하며 在此無射이라. 庶幾夙夜하야 以永終譽라. 君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저기에 있어 미움이 없고 여기에 있어 싫음이 없는지라, 거의 숙야(夙夜)하여, 그로써 길이 자랑을 마치리라.’ 했다. 군자가 이같지 않고서 일찍 천하에 자랑이 있는 사람은 있지 않았다.(제6절)
【解說】《시경》주송(周頌) 진로(振鷺)에 있는 시다. ‘저기에 있어’라는 것은 앞 절에 있는 ‘멀리하면’에 해당하고, ‘여기에 있어’라는 것은, ‘가까이 하면’에 해당한다. 역(射)은 싫다는 뜻으로《시경》에는 역(斁)으로 되어있다. 숙야(夙夜)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를 말한다. 멀리 있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싫증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 몸을 두어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그 명예를 끝까지 지녀 나가게 된다는 것이 시의 뜻이다. 군자, 즉 천자로서 이같이 하지 않고서 일찍 명예를 천하에 얻은 사람은 없다. 일찍부터 천하에 명예를 얻어 온 천자는 이같이 하여-즉 몸에 바탕하고, 서민에 징험하고, 삼왕에 상고하고, 천자에 세우고, 귀신에 묻고, 성인을 기다리는 여섯 가지 일의 실천에 의해-그렇게 안 된 사람은 없는 것이다.
제 30 장
하늘의 도에 관한 넷째 번 논의이다.
中尼는 祖述堯舜하시고 憲章文武하시며, 上律天時하시고 下襲水土하시니라.
【解釋】중니는 요순을 조술하고, 문무를 헌장하여, 위로 천시를 본받고, 아래로 수토를 따랐다.(제1절)
【解說】중니는 물론 공자다. 공자가 ‘요와 순을 조술하고 문왕과 무왕을 헌장했다.’는 말에서 조술이란 그 도를 멀리 종(宗)으로 하는 것, 헌장이란 가까이 그 법을 지키는 것이다. 헌장이란 두 글자를 각각 한자씩 따로 주석을 하면, 헌은 법으로 삼는 것이며 장은 밝게 하는 것(孔頴達의《禮記正義》)으로 함이 좋을 것이다. 멀리 옛날 요순의 도를 내가 받들어 도로서 연구하여 따르고, 또 가까운 시대의-공자와의 사이에는 육칠백년의 거리가 있지만-문왕ㆍ무왕의 법을 지키는 데 힘썼다. 그것은 또 위로는 천시, 즉 사철이 극히 규칙적으로 교대해 가는 자연적인 시간의 운행을 본받고(時란 것은 원래가 四時, 즉 春夏秋冬을 말한다.), 아래로는 수토, 즉 산수와 풍토가 역시 일정불변의 이치와 법칙에 지배되고 있는 것을 따른 것이 된다. 즉 공자의 도는 요순과 문무의 제작을 이어받은 것인 동시에, 자연적인 세계의 법칙성에 입각해서 그것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조술한다. 헌장한다, 본받는다, 따른다고 한 것은 어느 것이나 안과 밖을 겸하고 근본의 끝을 겸하여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팎을 겸하고 본말(本末)을 겸했다고 하는 것을, 천시를 본받은 경우의 예로 말하면, 때가 아니면 먹지 않고(《논어》鄕黨), 신뢰풍열(迅雷風烈)에는 반드시 변하며(《논어》鄕黨), 수토에 따른 경우의 예로 말하면, 노나라에 있을 때는 봉액(逢掖)의 옷을 입고, 송나라에 있을 때는 장보(章甫)의 갓을 쓴(《예기》儒行), 것 등은 모두 일(事)로서, 일은 밖이요 끝이다. 원래 일에 대해서 말하면,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머무를 만하면 머무르고, 오랠 만하면 오래고, 빨리할 만하면 빨리하며(《맹자》), 수토에 따른 경우로 말하면, 용(用)ㆍ사(舍)ㆍ행(行)ㆍ장(藏) 모든 경우에 따라 편안한(《논어》述而) 것 등이 행(行), 즉 안과 근본이 된다. 조술과 헌장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한다.
辟如天地之無不持載하며 無不覆幬하니라. 辟如四時之錯行하며 如日月之代明하니라.
【解釋】비유하면 하늘과 땅이 가지고 싣지 않은 것이 없고, 덮어 싸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고, 비유하면 네 철이 번갈아 행해짐 같고, 해와 달이 번갈아 밝는 것과 같다.(제2절)
【解說】앞 절을 받아 중니, 즉 공자의 덕을 찬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해서 말하면, 천자에 있어서 땅이 그 어떤 것이라도 다 자기 위에 실어 유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하늘이 그 어떤 것이라도 덮어 싸지 않는 것이 없듯이, 또 하늘의 사시, 즉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차례로 번갈아가며 규칙 바르게 운행하듯이, 또 해와 달이 밤낮으로 번갈아 법칙적으로 빛나고 있듯이 그렇게 광대무변하고도 한 점의 작위(作爲)도 없이 진실무망인 것, 그것이 성인 공자의 덕에 다름없다. 이와 같이 공자의 도가 요순과 문왕, 무왕을 계승하여 천지자연의 도 그대로인 것을 말했다. 다음 절에서는 천지자연의 도를 논한다.
萬物育而不相害하며 道行而不相悖니라. 小德川流요 大德敦化니 此天地之所以爲大也니라.
【解釋】만물이 아울러 자라도 서로 해하지 않고, 도가 함께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지라, 작은 덕은 내로 흐르고 큰 덕은 화(化)를 두텁게 하나니, 이것이 하늘과 땅이 그로써 크게 되는 것이다.(제3절)
【解說】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있는 그 사이를 만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크고 작고, 아름답고 추하고, 천차만별의 것들이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 서로 방해를 하거나 방해를 당하거나 하지 않는다. 도에는 실로 여러 가지 도가 있는데, 사철과 해와 달은 각각 돌아가고 빛나고 하며 활동을 계속하면서 서로 조금도 모순되는 일이 없다. 어째서 서로 해가 되고 서로 어긋나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작은 덕(德)이 냇물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에, 즉 전체의 부분인 작은 덕이 일제히 활동을 전개하여, 한 순간의 끊임도 없기 때문이다. 또 거꾸로, 만물이 함께 살고 함께 행해지는 이유는 천변만화의 특수(特殊)한 것(小德)의 근본인 큰 덕이 화(化)를 도탑게 하기 때문에, 즉 조화의 덕을 더욱 독실히 해 가기 때문이다.
첫장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면, <대덕돈화(大德敦化)>는 <중(中)>이요 <대본(大本)>이며, <소덕천류(小德川流)>는 <화(和)>요 <달도(達道)>다. 천류(川流), 즉 내로 흐른다는 것은 모든 냇물이 뚜렷한 줄기를 유지하면서 쉬는 일 없이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화를 도탑게 한다는 것은 근원인 천지의 큰 덕이 성대하기 때문에, 만물을 낳고 또 낳아 다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으로 말하면, 하늘이 높고 땅이 낮아 만물이 천태만상(《周易》에 있는 말)인 것이 소덕천류이고, 목(穆)하여 쉬지 않는(제26장) 것이 대덕돈화이며, 성인으로 말하면, 만물 하나하나에 대한 것이 소덕천류이고, 순(純)도 쉬지 않는 것이 대덕돈화다.
결국 이 절은 천지의 도가 근원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성대해서 포용적(包容的)인 것을 말하면, 앞 절의 비유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유교, 특히 송학은 엄숙하고 퍽 통제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있지만, 그 근본적인 직관(直觀)은 생각 밖으로 이처럼 명랑하고 자유방임적인 것이다. 이 3절에 ‘하늘과 땅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한다.’ ‘생생(生生), 이것을 역(易)이라 한다.’(《周易》) 등과, ‘만물이 같지 않은 것이 만물의 실정이다.’ ‘성품은 착하다.’(《맹자》) 등의 말을 덧붙이게 되면, 유교 혹은 주자학의 세계관이 일종의 예정조화설(豫定調和設)이라고 불리게 되는 의미가 상당히 뚜렷하게 이해될 것이다.
《어류》에는 말한다.
“옛부터 지금까지 오직 이 한 가지 도리(小德川流, 大德敦化) 뿐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아, 만물이 저마다 달리하여 예제(禮制)가 행해진다. 흘러 쉬지 않고, 다같이 화(化-生)하여 악(樂)이 일어난다.’(《예기》樂記) 성인이 많은 문장(文章)과 제도와 예악을 짓는 것도, 결국은 오직 이 한 가지 도리에 의해 한 것이다.”
이같은 직관이 송학의 그 엄숙주의, 엄격주의와 어떻게 결부되는지 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덕천류란 말은 퍽 좋은 말인 것 같다.
제 31 장
앞 장을 이어받아, 이른바 <소덕천류(小德川流)>를 말한다. 또 다음 장이 <지성(至誠)을 주제로 하는 데 대해, 이 장은 <지성(至聖)을 주제로 한다. 지성(至誠)과 지성(至聖)은 안팎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성인의 덕이 밖에 드러나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장의 지성(至聖)이다.
결국 이 장은 하늘의 도에 관한 다섯째 번 논의이다.
唯天下至聖이어야 爲能聰明睿知로 足以有臨也니라. 寬裕溫柔로 足以有容也요 發强剛毅로 足以有執也요 齊莊中正으로 足以有敬也요 文理密察로 足以有別也니라.
【解釋】오직 천하의 지성(至聖)만이, 능히 총명과 예지가 족히 그로써 다다름이 있고, 관유와 온유가 족히 그로써 용납함이 있고, 발강과 강의가 족히 그로써 잡음이 있고, 재장과 중정이 족히 그로써 공경함이 있고, 문리와 밀찰이 족이 그로써 분별함이 있게 된다.(제1절)
【解說】총명과 예지는 성인의 생지(生知)인 자질을 형용하는 말로서,《주역》계사전에도 보이는 말인데, 총(聰)이란 것은 청각이 뛰어난 것, 명(明)이란 것은 시각이 뛰어나 있는 것, 예(睿)란 것은 사색이 깊은 것, 지(知)란 것은 지식이 완벽한 것을 말한다. 천하에서 최고로 성스러운 사람만이 감각적 지각적으로, 그리고 사색과 지식에 있어서도 완벽하기 때문에, 일반 인민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으로서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지배자의 위치에 설 수가 있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너그럽고 여유가 있으며 따뜻하고 부드러워 사람을 포용하는 힘이 있고(이것은 仁의 德에 해당한다.) 분발하는 힘이 강하고 굳세어 착한 일을 굳게 잡을 수 있다.(義) 재장(齊莊)의 재(齊)는 재계한다는 재(齋)로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 장(莊)은 해(諧)의 반대로서 진지한 것, 즉 진지하고 중정해서 경(敬)에 대한 능력이 있다.(禮) 사물의 문채와 도리를 정밀하고 명백하게 관찰하는 점에 있어서는 뛰어난 판별 능력을 갖는다.(智) 신(信)에 대한 것만이 빠져 있는 것은 신이 오상(五常) 안에서도 특수하다는 것을 앞에서 말해 두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지(智)와 총명예지의 지(知)는 서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정도에 있어서는 현저한 차가 있다. 전자가 화로 속의 불 혹은 일반적인 불이라면, 후자는 천자까지도 비추는 불이다. 한편 ‘총명과 예지는 족히 그로써 다다름이 있다.’고 한 다다름(臨)을, 주자의 주석에 ‘위에 있어서 아래에 다다른다.’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곧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풀이해 두었는데 지나친 말이 될지도 모른다.
《어류》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처음 이 다다른다는 글자의 말을 잘 알 수 없었으나 뒤에 잘 생각해보니,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만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 사람에 다다른다고 할 경우, 열 사람 몫만큼 뛰어나 있어야만 그럴 수 있다. 천하에 다다른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溥博淵泉하야 而時出之니라.
【解釋】부박하고 연천하여, 때로 나온다.(제2절)
【解說】부박이란 것은, 부(溥)는 주편(周偏), 즉 두루 골고루란 뜻이고, 박(博)은 광활, 즉 넓다는 뜻이다. 연천(淵泉)은 못(淵)처럼 고요하여 깊고 샘(泉)처럼 근원이 있는 것, 즉 괴어 있는 물이 아니고 자기의 밑바닥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 ‘때로 나온다.’에서 나온다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성인에 있어서는 앞 절에서 말한 총명예지(聖), 관유온유(仁), 발강강의(義), 재장중정(禮), 문리밀찰(智)의 다섯 가지 덕이 널리 두루 깊이 근원이 넘쳐 나오듯 안에 충실하여, 적당한 시기에 밖으로 내뿜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溥博은 如天하고 淵泉은 如淵이라. 見而民莫不敬하고 言而民莫不信하며 行而民莫不說이니라.
【解釋】부박은 하늘과 같고 연천은 못과 같다. 나타나면 백성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면 백성이 믿지 않음이 없고, 행하면 백성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제3절)
【解說】성인의 덕이 안에 충실해 있는 모습을 부박과 연천이란 두 글귀로 비유했는데, 그 부박한 것, 널리 널리 모두 뻗어 있는 것은 저 허공과 같고, 고요히 깊이 그리고 자기 밑바닥에서부터 솟아나고 있는 것은 저 못과 같다. 이처럼 안에 있는 덕의 충실함이 그 극치에 달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도 타당성을 잃지 않는다. 즉 그 덕이 밖으로 번져 나오면 백성들은 존경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그 말이 나오면 백성들은 믿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면 백성들은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是以聲名이 洋溢乎中國하야 施及蠻貊하니라. 舟車所至와 人力所通과 天之所覆와 地之所載와 日月所照와 霜露所隊의 凡有血氣者는 莫不尊親하리니 故로 曰配天이니라.
【解釋】이로써 성명이 중국에 양일(洋溢)하여, 뻗어 만맥에 미쳐, 수레와 배가 이르는 곳, 해와 달이 비추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 무릇 혈기를 가진 것은 존친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짝한다고 한다.(제4절)
【解說】그러므로 성인의 명성은 중국에 가득 차고 다시 넘쳐흘러, 멀리 만맥에까지 뻗어 미치게 된다. 이(施)는 뻗어 미친다는 뜻이다. 만맥이라는 맥(貊)은 맥(貉)으로 쓰며, 만이 남쪽의 미개민족을 말하는 데 대해 동북방의 미개민족을 말한다. 물론 여기서는 전체 이민족을 이 두 글자로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천하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한복판에 중국이 있고 그 주위에 미개민족이 있어 이를 전부 합쳐 천하라고 하는 것이므로, 결국 성인의 이름이 온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배나 수레가 다니게 되는 모든 지역, 인간의 육체적 힘으로 다닐 수 있는 한의 장소, 하늘이 덮고 있고 땅이 싣고 있는 곳, 해와 달이 비추고 있고 서리와 이슬이 내리고 있는 곳, 즉 어느 곳 어느 곳을 뺄 것 없이 혈기를 가지고 있는 것, 즉 살아있는 모든 것-주로 의식되고 있는 것은 사람이겠지만-으로서 그같은 성인을 존경하고 친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을 가리켜 하늘에 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짝한다는 배천(配天)이란 말은 제26장 제5절에도 ‘박후는 땅에 짝하고, 고명은 하늘에 짝한다.’는 글귀가 보이는데, 여기 있는 배천은 그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여기서는, 하늘이 땅에 대한 하늘의 뜻이 아니고, 하늘과 땅을 합친 천지의 뜻으로서, 성인의 덕이 미치는 광대함은 마치 하늘 같다고 일반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제 32 장
제 30장에서 ‘소덕은 천류하고 대덕은 돈화한다.’고 한 것 가운데, 소덕천류는 앞 장에서 말했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대덕돈화를 말한다. 하늘의 도에 관한 여섯째 번 논의이다. 앞 장에서는 지성(至聖)의 덕을 말한 데 대해, 이 장에서는 지성(至誠)의 도를 말하고 있는데, 지성(至誠)의 도는 지성(至聖)이 아니면 알 수가 없고, 지성(至聖)의 덕은 지성(至誠)이 아니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성(誠)과 성(聖)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고 안팎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중용》에 있어서의 성인과 하늘의 도의 구명은 이 장에서 그 극치에 달한다.
唯天下至誠이어야 爲能經綸天下之大經하며 立天下之大本하며 知天地之化育이니 夫焉有所倚리오.
【解釋】오직 천하의 지성만이 천하의 큰 경을 경륜하고,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며, 천지의 화육을 알게 되나니, 어찌 의지하는 바가 있으리오.(제1절)
【解說】‘경륜이라는 경(經)과 윤(綸)은, 원래 다같이 명주실을 다루는 데 관한 말이다. 경은 실 다발을 똑같이 줄 바르게 가르는 것을 말하고, 윤은 같은 종류의 실을 펼쳐 같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뜻이 변해 사물을 질서 있게 정리하여 어떤 목적을 위해 올바로 다루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즉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경륜이란 말로 된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지성인 사람-그것은 성인에 다를 것이 없지만-만이 능히 천하의 큰 경을 경륜한다. 큰 경이라는 것은, 이에 따라 떳떳함(常)을 말하는 것으로 크게 떳떳한 것이란 다섯 개 항목의 인륜, 즉 부자유친ㆍ군신유의ㆍ부부유별ㆍ장유유서ㆍ붕우유신의 오륜을 말하는 것이다. 지성의 사람만이 천하 최대의 표준이 되는 오륜의 도를 참다운 의미에서 연구하고 실천할 수 있다. 성인의 덕은 극도로 진실되고 거짓이 없기 때문에, 인륜에 있어서 각각 그 당위(當爲)의 내용을 완전히 실천하고, 그 하나하나가 천하 후세의 법칙이 될 수 있다. 경륜한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성인 사람은 또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울 수 있다. 큰 근본이란 제1장의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라고 한 그 큰 근본이다 즉 발하지 않은 중(中), 즉 완전한 본질로서의 성(性)을 가리킨다.(그것에 대해서 말하면 大經, 經綸은 達道ㆍ和에 屬한다.) 완전한 본질로서의 성품은 천리(天理) 그것으로서, 인욕(人欲)의 거짓된 것은 털끝만치도 섞여있지 않다. 그리고 천차만별의 도라는 것이 모두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운다는 것은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천변만화가 거기로부터 나오게 되는 큰 근본을 세운다는 뜻이다.
천지의 화육을 안다고 하는 것은, 제22장의 화육, 혹은 첫장의 위육(位育, 天地位焉, 萬物育焉의 位와 育을 합친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물론 단순히 듣고 보고 아는, 즉 감각적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거짓없는 진실의 극치가 화육작용과 서로 소리없이 합치되는 말없는 가운데 부합하고 일치되는 것, 즉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으로 아는 것에 다를 것이 없다.
이상 세 가지는 모두 거짓없는 지성이 절로 이루는 효용과 기능에 다름없다. 결코 다른 어떤 물건(外物)에 의거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학문하는 사람이면, 아무래도 성(誠) 이외의 무엇인가에 의거해서, 그것을 뼈대로 해나가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말하자면 사소한 결함마저 없는 참다운 이치 그것이기 때문에, 천지의 화육을 알고 발(發)하지 않은 중을 세워 오륜의 도를 실천하는 것마저도 그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마음속에서 당당히 흘러나온 것일 뿐이다.
肫肫其仁이며 淵淵其淵이며 浩浩其天이니라.
【解釋】준준(肫肫)한 것은 그 인(仁)이며, 연연한 것은 그 못이며, 호호한 것은 그 하늘이다.(제2절)
【解說】준준은 이 이상 더 없는 마음의 독실한 것의 형용, 연연은 앞에서 말했듯이 고요하고 깊은 것의 형용, 호호는 넓고 큰 것의 형용이다. 지성의 사람ㆍ성인에 있어서는 그 인(仁)이 준준해서 독실함을 다한다는 것은 오륜의 도를 경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륜의 도를 행하는 것은, 한 말로 말하면 인(仁)에 다를 것이 없다. 성인에 있어서 영영한 것이 그 못이라고 한 것은 큰 근본을 세운다는 점에 대해 말한 것이며, 호호한 것은 그 하늘이라고 한 것은 화육을 아는 점에 대해 말한 것인데, 다만 같은 말을 앞 장에서는 ‘부박은 하늘과 같고, 연천은 못과 같고’라 말하여 ‘같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데 대해, 이 장에서는 노골적으로 <그 못> <그 하늘>이라고 쓰고, ‘못과 같다, 하늘과 같다.’라고 하지 않은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벌써 같다고 하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어서, 지성의 사람이 못 그것이며 하늘 그것이란 것을 나타내고 있다. 장머리에서 장 전체의 뜻을 말한 가운데, 성인ㆍ천도는 이 장에 이르러 그 정점(頂點)에 달했다고 말한 뜻이 지금에야 보다 명백하리라. ‘천지의 기상을 닮아야 한다.’는 말은 정자 이래 송학의 표어로 되어 있는데, 그 정자는 “천지의 화(化)를 체(體-體得ㆍ體現)한다고 해서는 <체(體)란 글자만 가욋것이 된다. 천지의 화 그것인 것이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면 其孰能知之리오.
【解釋】진실로 참으로 총명과 성지로 하늘 덕을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알겠는가.(제3절)
【解說】이 대목에 대한 주로서, 정현이 “오직 성인만이 능히 성인을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들면, 이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고(固)는 참으로(實)라는 뜻이다. 총명성지(聰明聖知)는 앞 장의 총명예지와 같은 뜻이고, 천덕에 달한다는 것은 하늘 덕에 따라 미친다는 뜻이다. 능히 안다는 것은, 제1, 제2절의 전체, 특히 제2절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제 33 장
드디어 마지막 장이다.
앞 장에서 성인과 하늘 도의 극치를 논하여, 말하자면 위로 올라가는 최고 정상을 일단 끝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그것을 매듭짓는 이 장에서는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되돌아가, <상달(上達)>을 위해서는 먼저 <하학(下學)>을 해야 된다는 것, 학문은 명리(名利)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 할 것(모두《논어》에 있는 말),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의 <신독(愼獨)>과 같은 것에서부터 새로 출발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점차로 미루어나가, 마침내는 ‘군자가 독공(篤恭)함으로써 천하가 평해진다.’고 하는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기에까지 이르는 차례를 요약해서 말하고, 다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無聲無臭)> 곳에서 절정에 달하는 중용의 도의 눈부신 진전을 찬미하고 감탄한다. ‘저 제1장이 하늘이 명한 성품에서부터 논하여, 하늘과 땅이 자리하고 만물이 자라는 것에로,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말해간 데 대해, 지금 이 마지막 장은 밖에서 안으로 한 단계 한 단계 거두어들어가, 안의 극치인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곳에까지 <약(約)>해 간다. 이 마지막 장과 제1장은, 이같이 서로 안팎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語類》) 결국 이 장은《중용》전체의 정수를 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정성껏 되풀이해 사람들을 깨우쳐주려고 하는 이 깊고 간절한 것에 대해, 학문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해 연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詩曰 衣錦尙絅이라 하니 惡其文之著也니라. 故로 君子之道는 闇然而日章하고 小人之道는 的然而日亡하니라. 君子之道는 淡而不厭하고 簡而文하며 溫而理하니라. 知遠之近하고 知風之自하며 知微之顯이면 可與入德矣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비단을 입고 경(絅)을 더한다.’ 하니, 그 문(文)이 드러남을 싫어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암연(闇然)하여 날로 드러나게 되고, 소인의 도는 적연(的然)하여 날로 없어져 가나니, 군자의 도는 담(淡)하고 싫지 않으며, 간(簡)하고 문(文)하며, 온(溫)하고 이(理)하니, 먼 것의 가까움을 알고, 바람의 불어옴을 알고, 미(微)의 현(顯)임을 알면, 함께 덕에 들어갈 수 있다.(제1절)
【解說】제31장과 제32장에서 <지성(至聖)>과 <지성(至誠)>에 대해 논하였기 때문에, 중용의 도는 이미 그 가장 궁극적인 것이 설명되었다. 그래서 자사는 학문하는 사람이 공연히 높고 먼 궁극의 경지에만 마음을 써서 착실한 하학(下學)의 공부를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마지막 장인 이 장에서 다시 하학에 있어서의 마음가짐이란 것을 논하고, 이윽고 그것을 가장 궁극적인 경지로 끌고 올라간다.
시는《시경》위풍(威風)석인(碩人)편과 鄭風봉(丰)편에 있는 시다. 그런데《시경》에는 <의금경의(衣錦絅衣)>라고 되어 있다. 경(褧)은 여기에 있는 상경(尙絅)의 경(絅)과 같은 의미의 말로 엷은 겉옷을 말한다. 상(尙)은 더한다(加), 얹어 입는다는 뜻이다. 즉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다시 그 위에 겉옷-다만 엷고 어느 정도 안이 비치는-같은 것을 입는 것이다. 그것은 그 화려한 무늬가 번쩍번쩍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옛날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한다.’(《논어》憲問) 그렇기 때문에 이같이 마음을 쓴 것이다.《논어》에서 ‘옛날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하고 지금 배우는 사람은 남을 위해 한다.’고 한 대목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것을 내 몸에 체득하기 위해 하는 전연 비공리적인 학문하는 방법과, 남에게 알리기 위해 하는 학문하는 방법의 대립으로 풀이하고, 그것을 학문의 두 가지 유형(類型)으로 하여 모든 경우에 적용한 것은 주자학의 특징이었다. 이리하여 군자의 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엷은 겉옷을 위에 입는 만큼 암연(闇然), 즉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밑에는 비단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 화려한 무늬는 잠시 하루도 없어지는 일이 없다. 아니 날이면 날마다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소인의 도는 적연(的然), 즉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하루하루 색이 바래져 갈 뿐인 것이다. 군자의 도는 아주 담박하며, 담박(淡泊)하면 싫어지는 것이지만 싫어지는 일이 없고, 간단하고 단조로운 것 같지만 실은 거기에 문채가 있고, 온후해서 사소한 것들을 초월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조리가 서 있다. 이같이 담박하고 간단하고 온후한 것은, 마치 겉에 엷은 겉옷을 얹어 입은 것과 같다. 싫지 않은 위에 문채가 있고, 그리고 조리가 서 있는 것은, 그 안쪽에 아름다운 비단이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 안에 거친 베옷을 입고 위에도 베옷을 껴입었다면, 안팎이 모두 문채가 없는 어둠과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소인은 이와 반대로 밖으로 드러나 있을 뿐 그것을 뒷받침해서 계속 이을 참, 즉 내용이란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얼른 보기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그 뚜렷한 것은 나날이 없어져 갈 뿐인 것이다. 먼 것이 가까운 것임을 안다는 것은 먼 곳에 나타나고 있는 일은 사실은 가까운 곳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밖에 나타나 있는 것은 그 원인이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주자학의 해설에 따르면, 바람이란 것은 몸에서 나와 백성에게 더해지는 것, 즉 내 몸에서 나와 인민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근본은 마음에 있다고 한다.《어류》에 바람이라고 한 것은《맹자》에서 이른바 <백이지풍(伯夷之風)>이라는 그 바람(風)이라고 한 것과 아마 같은 뜻일 것이다. 미(微)의 현(顯)임을 안다는 것은, 현(顯)의 미(微)한 것이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쉬울 것으로 생각되는데, 안에 있는 것이 모양을 가지고 밖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주자학의 용어체계(用語體系)에 있어서 미와 현은, 유형적으로 말하면 미는 초감각적 형이상학적 영역이고, 현은 감각적 형이하학적 영역이라고 하는, 뚜렷이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여기서는 거기까지의 대조는 없을지도 모른다. ‘먼 것이 가까운 것임을 안다는 것은, 저에게 있는 옳고 그른 것은 내게 있는 얻고 잃는 것에서부터 온다는 것, 즉 자기를 자기 이외의 것과 대립시켜서 말한 것이고,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내 몸의 얻고 잃는 것은 안에 있는 마음의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에서 온다는 것이며, 미의 현임을 안다는 것은 순전히 마음에 집중시켜 논하는 것이다.’ ‘오로지 수렴(收斂)하라.’고 하는 이 장의 명제는 <자(自)ㆍ타(他)→내(內)ㆍ외(外)→내(內)라고 하는 이 도식(圖式)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語類》아무튼 나를 위하는 마음을 품고, 다시 이 세 가지를 알면, 삼가야 할 대상을 알게 되어 덕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는《시경》을 인용하여 신독(愼獨)을 말한다.
詩云 潛雖伏矣나 亦孔之昭라. 故로 君子는 內省不疚하야 無惡於志니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唯人之所不見乎인저.
【解釋】시에 말하기를, ‘잠기어 비록 엎드렸으나, 또한 심히 밝다.’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안으로 돌아보아 병됨이 없어, 뜻에 싫음이 없나니, 군자를 미칠 수 없는 것은, 그 오직 사람의 보지 않는 것이다.(제2절)
【解說】시는《시경》소아(小雅)정월(正月)편이다. 잠기어 있다는 것은, 못의 고기가 저로서는 깊이 숨어 엎드려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환히 들여다보이고 있다고 한 시의 글귀를 인용하여, ‘숨은 것보다 나타나는 것이 없고, 미(微)한 것보다 드러나는 것은 없다.’(제1장제3절)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은 진리가 있기 때문에, 군자는 자기 마음속에 돌이켜보아 가책되는 일이 없게끔 마음을 갖는다. 또 뜻에 싫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운 점이 없는 것으로 그같이 마음을 쓴다. 그같이 자기 혼자를 조심해야만 참다운 군자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 참다운 군자를 도저히 따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 즉 자기 혼자를 조심하는 그 점에 있는 것이다. 혼자(獨)라는 것이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제1장 제3절에 대한 주자의 주다.
詩云 相在爾室함에 尙不愧于屋漏라. 故로 君子는 不動而敬하며 不言而信하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네가 방에 있는 것을 보니,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지 않아서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서 미덥다.(제3절)
【解說】이 절은, 앞 절이 신독(愼獨)을 말한 데 대해, 계신공구(戒愼恐懼)를 말한다. 시는《시경》대아(大雅)억(抑) 편이다. 네가 방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재실(爾在室)이라고 쓰지 않고 재이실(在爾室)이라고 쓴 것은 문법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시경》과 같은 옛날 문장에는 문법과 어긋나는 것이 종종 있다. 원시에는 이 앞에, ‘네가 군자를 벗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너의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잘못을 범하지나 않나 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글귀가 놓여 있다. 네가 방에 있을 때를 보아도, 너는 그때 옥루에 부끄럽지 않은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한다. 옥루란 것은 방 서북쪽으로, 방안에서도 가장 어둠침침한 곳이다. 즉 옥루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그 보지 않는 바를 경계하여 조심하고, 그 듣지 않는 바를 겁내고 두려워하는’(제1장 제2절) 것의 비유다. 그같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한 때만의 일이어서는 안 되고, 언제 어느 때나 그같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동작이 있은 뒤에 비로소 조심을 한다든가, 어떤 말을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말과 행동이 있고 없는 것을 묻지 말고 언제나 조심(敬)하고 진실되지(信)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위해서 하는 실천은 더욱 더 정밀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아래로 세 절에서 그 효과, 즉 가장 가까운 하학(下學)과 나를 위해 하는 홀로를 조심하는 데 힘쓰는 것에서부터 오는 효과를 말하는 것이다.
詩曰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 是故로 君子는 不賞而民勸하며 不怒而民威於鈇鉞이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나아가 이르러 말이 없고, 때로 다투는 일이 있지 않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상주지 않아도 백성이 힘쓰고, 성내지 않아도 백성이 부월(鈇鉞)보다 무서워한다.(제4절)
【解說】시는《시경》상송(商頌) 열조(烈祖) 편이다. 은(殷)나라 조정에서 그 열조(烈祖-功烈이 있는 祖上), 즉 탕(湯)임금을 제사지낼 때, 종묘에서 하는 노래. 주(奏)는 나아간다.(進)는 뜻, 격(假)은 격(格)으로 이른다(至)는 뜻. 제사지내는 곳에 나아가 빌어, 제사 받는 신(神)을 감격(感格)시키는, 즉 제신(祭神)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제단으로 내려오게 할 때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절로 화하게 된다. 즉 그 때는 누구 한 사람 앞을 다투는 일도 없고, 숙연히 한결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래로 배우고, 나를 위하고, 혼자를 조심하는 것의 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착실히 학문에 힘쓰는 군자(君子)는, 그가 상을 주어 권장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자기 본분에 충실하고자 힘쓰게 되고, 성을 내어 엄벌에 처하는 그런 일이 없어도 백성들은 그 군자가 뜻하고 있는 것을 사형을 집행하는 데 쓰는 부월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다. 부월의 부(鈇)는 여물을 써는 작도이고, 월(鉞)은 도끼를 말한다.《예기》왕제(王制) 편에 ‘제후는 (천자로부터) 부월을 받은 다음 죽인다.’라고 있듯이, 결국 사형을 집행할 때 쓰이는 도구다. 이 절은 성인의 지성인 덕의 효과 중에 집과 나라에 미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詩曰 不顯惟德을 百辟其刑之라. 是故로 君子는 篤恭而天下平이니라.
【解釋】시에 말하기를, ‘나타나지 않는 덕을 백벽(百辟)이 본받는다.’ 했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독공하여 천하가 평하게 된다.(제5절)
【解說】시는《시경》주송(周頌) 열문(烈文)편에 있는 것으로, 주나라 종묘의 제사를 돕는 제후들을 노래하고 있다. 불현(不顯)은 제26장 제10절의 해설을 참조하라고 주자는 말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말한다. 여기에 인용된 것은 유심현원(幽深玄遠)을 뜻한다. 이 절도 역시 앞 절을 이어받아 성인의 덕의 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천자에 있어서 유현하고 심원한, 밖에 나타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덕이 있으면, 백벽(百辟-辟은 임금의 뜻으로, 곧 諸侯를 말한다.)도 반드시 그것을 본받게 된다. 즉 성인의 덕이 안으로 깊으면 깊을수록, 그 효과의 범위도 밖으로 더욱 멀리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독공이란 독(篤)은 두텁다는 듯으로 곧 공경을 두텁게 하는 것, 결국 공경을 밖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不顯) 것을 말한다. 나타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오로지 내면적인 경(敬)의 수양에 힘쓰는 것이다. 군자가 독공해서 천하가 평하다는 것은, 성인의 극치에 달한 덕의 심원미묘함이 자연적인 감응으로써 천하태평을 가져오게 하는 것으로, 중용의 효능의 극치를 이룬다.
‘군자가 독공하여 천하가 평하다.’고 하는 말은 유교적인 정치 이상을 나타내는 말로서 늘 인용된다. 유교에는 예악(禮樂)에 관한 교설(敎說)의 체계란 면과, 덕(德)에 관한 교설의 체계란 면의 두 면이 있는데, 당(唐)나라 이전에는 앞의 면이 강하고(따라서 聖人도<作者로서의 聖>인 周公이 典型이었다.), 송(宋)나라 이후 주자학ㆍ양명학에서는 뒤의 면이 압도적인 것이라는(聖人은 天理에 純全해서 人欲이 섞이지 않은 人格이라 하여 孔子가 그 典型이었다.)것은 오늘날 중국 철학사의 상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뒤의 것의 정치 이상이 바로 이것이다.《맹자》에 이른바 ‘사람 사람이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하여 천하가 평해진다.’(《맹자》離婁上)와 또 ‘군자가 지키는 것은 그 몸을 닦으면 천하가 평하게 된다.’(《맹자》盡心下)고 한 것도 다 같은 취지로서, 유교의 덕치주의-그것은 결코 천자만의 덕치는 아니다.-라는 것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물론 지금의 경우, 군자라는 것이 천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자의 주는 그것을 곧 성인이란 말로 바꾸고 만 것으로, 위에 든(《맹자》의 말과 별로 큰 거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독공이기만 하면 형정(刑政)을 쓸 필요도 없고, 예악을 쓸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요즘 사람들의 말은, 비단을 입고 겉옷을 더하는 것을 문(文)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옳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일찍이 예악과 형정을 쓰지 않은 일이 없다. 다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덕이란 것을 중하게 보고, 형정에만 오로지 의지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어류》에는 말하고 있다. 유교는 궁극에 가서는 이와 같이 어떤 종류의 애매함이 아무래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애매함을 가장 포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개념, 그것이 가장 넓은 뜻에 있어서 예라고 하는 것이 아닐는지.
한편 이 절에서 아무래도 덧붙여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불현(不顯)>에 대해서다. 주자의 주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불현은 설명이 26장에 보인다.’라고 하여, 제26장 제10절의 <불현>과 같이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기불현(豈不顯)>의 뜻으로, 즉 ‘나타나지 않을소냐’로 새겨 읽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읽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주자의 주에는 ‘설명이 26장에 보인다.’고 한 바로 뒤에 ‘여기에는 빌어 이끌어 그로써 유심현원의 뜻을 삼는다.’고 했고《어류》에도 ‘유심현원은 형용할 수가 없다.’고 하여, 유심현원이라고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드러난 것이 될 수는 없고, 그리고 주자의 주에는 아래로 계속,<불현>은 단순히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런 뒤에 곧 <불현>의 지극함이 될 뿐이다.’ 등)《주자어류》에 ‘불현유덕(不顯維德)은 시경에서는 기불현(豈不顯)의 뜻이었는데, 지금 이 시를 빌어다가 문득 참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째선가.’ 하는 질문이 있는 것만 보아도 여기서는 ‘드러나지 않을소냐’로 새겨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된다. 주자는 이 질문에 대해 “이것은 유심현원의 뜻이다. 이것은 <불현>중의 현이다. 이 장은 <의금상경> <암연일장>에서 시작해서 한 계단 한 계단 보다 치밀한 곳으로 수렴해 가서, 최후에 성(聖)스러워 엿보아 알 수 없는 곳,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지극함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결국 이것은 나타나지 않는 나타남, 다시 말해서 <불현>과 <현>의 중간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새겨두었다.
詩云 予懷明德하노니 不大聲以色이라. 子曰 聲色之於以化民엔 末也라. 詩曰 德輶如毛라 하니 毛猶有倫이니라. 上天之載는 無聲無臭라 하니 至矣로다.
【解釋】시에 말하기를, ‘나는 밝은 덕의 소리와 빛을 크게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하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소리와 빛이 그로써 백성을 화하는 데에 끝이라.”하셨다. 시에 말하기를, ‘덕의 가벼움이 털 같다.’ 하니, 털은 오히려 비유가 있거니와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것이라야 지극하다.(제6절)
【解說】시는《시경》대아(大雅) 황의(皇矣) 편이다. 시의 이 부분은 상제(上帝)가 문왕(文王)에게 이르는 말로서 여기 나(予)라는 것은 제 자신을 말한다. 상제는 문왕의 밝은 덕을 항상 마음에 생각하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그것은 문왕의 밝은 덕이 소리와 빛을 크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빛나는 덕을 소리로도 얼굴빛으로도 나타내지 않고, 그저 안으로만 밝히는 일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가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시를 먼저 인용하고, 다시 공자의 말로써 이 시를 해석하고 있다.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있어, 소리와 빛이란 것은 결국 근본적인 것이 못된다. 다만 외면적인 것, 말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는 소리와 빛을 크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을 뿐, 소리와 빛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 소리와 빛이란 것은 남아있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소리와 빛이라고 하는 형이하학적인 것이, 나타나지 않는 덕의 정묘함을 형용하기에 불충분한 것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대아(大雅) 증민(蒸民)의 시에서 ‘덕의 가벼움이 털과 같다.’고 한 구절을 끌어왔다. 이것이라면 과연 저 형이상학적인 덕을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털이라고 한 이상 그것이 아무리 가볍고 묘한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형이하학적 세계에 속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무게를 가지고 있다. 다른 무게를 가진 어떤 것과 무게를 비교할 수가 있다. 이리하여 최후로 대아(大雅) 문왕(文王)의 시에 있는 ‘상천의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을 인용-이 경우 시운(詩云) 시왈(詩曰)하는 말은 없지만-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지 않는 것의 극치를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소리와 냄새라는 것은 기운만 있고 얼굴이 없는 것으로, 물건 중에는 가장 미묘한 존재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 소리와 냄새마저 없다고 하는 것이므로, 이같은 글귀에 의해서만 비로소 나타나지 않는 독공의 묘를 형용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덕 이외에 따로 이 소리와 빛ㆍ털ㆍ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세 단계의 덕이 있어서, 이 세 단계를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궁극의 덕에 달한다는 뜻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털과 같다는 비유 등에서, 주자에 있어서 양적인 세계와 질적인 세계,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이 무언가 연속적으로, 질적인 것은 양적인 것의 극히 작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리고 그런 생각이 때로는 정당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나), 지금의 경우는 그 점의 혼동을 미리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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