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경전 유교 경전 도교 경전

경덕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전등록 번역, 불경, 불교경전, 선문답, 화두 (9)

일이삼선생 2023. 6. 30. 09:45
반응형


경덕전등록 제29권






찬讚ㆍ송頌ㆍ게偈ㆍ시詩

지공誌公 화상의 대승찬大乘讚 10수首
지공誌公 화상의 십이시송十二時頌 12수
지공誌公 화상의 십사과송十四科頌 
귀종歸宗 지진至眞 선사의 송頌 1수
향엄香嚴 습등襲燈 대사의 송 19수
균주筠州 동산洞山 화상의 송 1수
담주潭州 용아龍牙 화상의 송 18수
현사玄沙 종일宗一 대사의 송 3수
초경招慶 진각眞覺 대사의 송 2수
장주漳州 나한羅漢 화상의 명도송明道頌 1수
남악南嶽 반주도량般舟道場 경勁 화상의 각지송覺地頌 1수
영주郢州 임계臨溪 화상의 입도천심송入道淺深頌 5수
대법안大法眼 선사의 송 14수
당唐 백거이白居易의 팔점게八漸偈 8수
동안同安 찰察 선사의 현담玄談 10수
운정산雲頂山의 승僧 덕부德敷의 시 10수
승윤僧潤의 시 3수


양梁 보지寶誌 화상의 대승찬大乘讚 10수首 9수밖에 전하지 않는다.


  1
거룩한 도는 항상 눈앞에 있지만
눈앞에 있다 해도 보기는 어렵네.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하면
소리와 빛깔과 언어를 없애지 말라.
언어 그대로가 곧 대도大道이니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네.
번뇌는 본래 비고 고요한 것이지만
허망한 생각들이 서로서로 얽히네.
일체는 메아리 같고 그림자 같으니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줄 모르겠노라.
있는 마음으로 모습 취하는 것을 실답다 하면
성품을 보아서 요달치 못할 줄 분명히 알라.
업을 지어 부처를 구하려 하지만
업은 생사의 커다란 조짐이니
생사의 업이 항상 몸을 따르면서
캄캄한 지옥에서도 깨닫지 못하네.
깨닫는 이치는 본래 차별이 없거늘
깨달은 뒤에 누가 늦고 누가 빠르랴.
법계의 양量은 허공과 같거늘
중생의 지혜는 마음이 스스로 작네.
다만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열반의 법식(法食:밥)이 항상 배부르리라.

  2
허망한 몸이 거울 앞에서 그림자를 비추니
그림자와 허망한 몸이 다르지 않네.
그림자는 없애고 몸만 남겨 두려고 하면
몸의 근본이 똑같이 허망함을 모르는 것일세.
몸의 근본과 그림자가 다르지 않으니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앨 수 없네.
하나만을 남기고 하나를 버리려 하면
영원히 진리와는 어긋나는 것인데
더구나 거룩함을 좋아하고 범속함을 싫어하면
생사의 바다 속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리라.
번뇌는 마음으로 인해 있기 때문이니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디에 있으랴.
수고롭게 분별로 모습을 취하지 않으면
자연히 잠깐 사이에 도를 얻으리라.
꿈꿀 때 꿈에서는 조작하지만
깬 뒤의 깬 경계는 도무지 없어라.
깨었을 때와 꿈속을 뒤집어 생각한다면
뒤바뀐 두 소견이 다르지 않아라.
미혹을 고치고 깨달음을 취하여 이익을 구하면
장사하는 무리와 무엇이 다르랴.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없어져 항상 적멸하면
자연히 진여眞如에 계합하리라.
부처와 중생이 다르다고 한다면
까마득히 부처와는 성글어지고
부처와 중생이 둘 아니라 하면
자연히 구경究竟이라서 남음 없으리.

  3
법성은 본래 항상 적멸하여
활짝 트여서 한계가 없건만
마음을 써서 취하거나 버리는 사이에
저 두 경계의 소용돌이에 빠지네.
얼굴빛을 가다듬어 선정에 들고
경계를 거두고 마음을 안정시켜 각관覺觀하나
기관機關으로 된 나무 사람의 수행이거늘
어느 때에 저 언덕에 이를 수 있으랴.
모든 법은 본래 공하여 집착이 없고
경계는 뜬구름같이 모였다 흩어지니
본 성품이 원래 공한 줄 홀연히 깨달으면
흡사 열병에 땀을 낸 것처럼 후련하리라.
지혜 없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하지 말고
그대의 색신色身을 때려서 별처럼 흩어라.

  4
그대들 중생들에게 바른 도를 말하노니
있지 않음[非有]이 곧 없지 않음[非無]일세.
있지 않음과 없지 않음은 둘이 아니거늘
어찌 있음[有]을 대하여 허망[虛]을 말할 필요가 있으랴.
있다 없다 함은 허망한 마음으로 세운 이름이니
하나를 타파하면 다른 하나도 존재치는 못하리.
두 이름은 그대들의 망정[情] 때문에 생겼으니
망정 없음이 곧 근본 진여이다.
만일 정情을 간직한 채 부처를 찾으려 하면
그물을 산에 쳐서 고기를 잡으려는 것이니
헛되이 힘을 써도 이익이 없거늘
얼마나 부질없는 수고를 했던가.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한다면
정말로 나귀를 타고 나귀 찾는 것과 같으니
온갖 것을 미워하지도 애착하지도 않아야
그 번뇌 모두가 없어지리라.
번뇌가 없어지면 모름지기 몸도 없어지니
몸이 없어지면 부처도 없고 원인도 없네.
부처도 원인도 얻을 수 없으면
자연히 법도 없고 사람도 없네.

  5
대도는 행行을 말미암아 얻는 것 아니니
수행을 말하는 것은 범부를 위한 방편일세.
이치를 깨닫고 돌이켜 행을 살피면
비로소 헛수고를 한 줄 알리라.
원통圓通의 큰 이치를 깨닫지 못했거든
반드시 말과 행이 서로 맞게 해야 한다.
저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말 것이니
빛을 돌이켜 근원에 돌아가면 전혀 없다.
뉘라서 이 말을 알아들으랴.
그대에게 자기를 향해 구하라 하나니
스스로가 지난날의 허물을 발견하여
5욕欲의 사마귀를 없애 버려라.
해탈하면 소요하고 자재하여서
방향에 따라 풍류를 헐값으로 팔리니
누가 살 마음을 낸 사람인가.
그도 또한 나처럼 근심이 없으리라.

  6
불법의 견해든 외도의 견해든 모두 나쁘고
불도佛道도 마도魔道도 모두 틀렸네.
이 두 가지 큰 파순에게 걸리면
문득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나니
생사의 근본을 깨달으면 본체가 공하거늘
부처나 악마가 어디에 붙으랴.
오직 망정의 분별에 의하여
앞몸과 뒷몸이 외롭고 얇아지니
6도道를 윤회하면서 쉬지 못하고
지은 업은 끝끝내 없애질 못하네.
그 까닭에 생사에 헤매는데
모두가 멋대로 잔꾀를 내기 때문일세.
몸은 본래 허무하여 실답지 않으니
근본에 들어가면 뉘라서 따지고 분별하랴.
있고 없음을 나 스스로가 능히 할 뿐이며
수고롭게 허망한 마음으로 헤아리지 못하네.
중생의 몸은 허공과 같거늘
번뇌가 어디에 붙으랴.
오직 온갖 일을 희구함이 없다면
번뇌는 자연히 스러지리라.

  7
가소롭다 고물거리는 중생들
제각기 딴 소견 하나씩을 집착하네.
오직 화덕 곁에서 떡을 구할 뿐
근본에 돌아가서 밀가루를 볼 줄 모르네.
밀가루는 정正과 사邪의 근본이어서
사람에 의해 백 가지로 변하네.
필요한 바를 뜻에 맡겨 종횡하되
치우쳐 애욕에 빠지는 것은 빌리지 말라.
집착이 없으면 곧 해탈이요
구하는 것 있으면 다시 그물에 걸린다.
인자한 마음으로 일체에 평등하면
진여와 보리가 저절로 나타나며
만일에 나와 남이란 두 마음을 내면
마주 대하고도 부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

  8
세간에 허다히 많은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구하려고 하니
온갖 분분한 뜻을 널리 찾으며 다니지만
자기 몸 구제하기도 제대로 못하네.
오로지 남의 글만 찾아서 어지러이 지껄이며
지극한 이치가 묘하다고 스스로 칭하니
헛수고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다가
영겁토록 생사에 빠져 헤매리라.
혼탁한 애욕에 얽힌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청정한 지혜의 마음이 저절로 번거로워져서
진여와 법계의 총림이
도리어 가시밭이요 황무지가 되니
다만 가랑잎을 금이라고 집착할 뿐
금을 버리고 보배를 구할 줄 모르네.
그 까닭에 바른 생각을 잃고 미친 듯 달리며
애써서 겉모습을 유지하려 하고서
입으로는 경을 읽고 논을 외우나
마음은 언제나 바짝 말랐네.
하루아침에 마음이 본래 공한 줄 깨달으면
구족한 진여는 모자람이 없네.
성문은 마음 마음에 미혹을 끊으나
능히 끊으려는 마음이 도적이니
도적과 도적이 번갈아 서로 없애 버리니
어느 때에 근본을 요달하여 침묵을 말하랴.
입으로는 천 권의 경을 읽으나
본체 위에서 경전을 물으면 알지 못하고
불법의 원통圓通한 이치를 알지 못한 채
공연히 글줄과 먹 자국을 찾고 세네.
조용한 곳에서 두타행을 하는 이
다음 생의 공덕만을 희망하니
희망이 곧 성인 경지를 막는 것이니
큰 도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으랴.
비유컨대 꿈속에 강을 건너는데
사공이 강 건너로 건너다 주었으나
평상 위에 편히 잠든 것을 홀연히 깨닫고 나면
나룻배도 법칙도 모두 잃어버리네.
사공과 강 건너는 사람이
본래 서로가 모르는 사이듯이
중생은 미혹함에 결박되어서
삼계를 왕래하며 극히 피로하지만
생사가 꿈같음을 깨달으면
온갖 구하려던 마음이 저절로 쉬네.

  9
깨달아 아는 것이 곧 보리이니
근본을 요달하고 나면 단계가 없네.
탄식할 일이로다. 곱새 같은 범부여,
80살이 되어도 발굽을 빼지 못하고
일생을 수고만 하면서 헛되이 보내면서 
세월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향상의 일은 스승의 입만 바라보니
마치 어미를 잃은 아기와 같아서
도속道俗이 빽빽이 모여 앉아
종일토록 그의 죽은 말만 듣네.
자기의 몸이 무상함을 관찰하지 않고
심행心行의 탐욕이 호랑이와 늑대 같네.
애달프다, 2승은 좁고 열등하니
반드시 오장 육부를 항복시켜야 한다면서
술ㆍ고기ㆍ오신채를 먹지 않으며
다른 이가 먹는 것을 삿된 눈으로 본다.
또 미치광이 같은 삿된 수행의 무리는
기氣를 닦는다면서 소금[鹽]도 초醋도 먹지 않으나
만약 상승上乘의 지극히 참됨을 깨달으면
남녀를 분별할 필요가 없네.


보지寶誌 화상의 십이시송十二時頌 하루의 12시에 따라 운韻을 붙여 가면서 법문을 말한 것이다.


  첫 새벽의 인시寅時

미친 기틀의 안에 도인의 몸이 있건만
궁색한 고통으로 이미 한량없는 겁을 지내면서
항상 여의주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구나.
만약 사물에 집착하면 미혹의 나루터에 빠지니
다만 터럭만 있어도 벌써 티끌이다.
옛 시절의 형상 없는 면모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선지식을 구해 다니니 참되지 못하다.

  해돋이 묘시卯時

작용하는 곳에서 잔꾀를 부리지 말라.
설사 신령한 광명이 유와 무를 비추어도
뜻을 일으키면 벌써 악마의 홀림을 받았다.
공력을 들여서는 끝끝내 요달하지 못하니
밤낮으로 나와 남의 분별에 끌린다.
안배를 쓰지 않고 다만 그대로 따른다면
언제 마음 땅[心地]에 번뇌가 생기었던가.

  밥 먹을 때인 진시辰時

무명이 본래 석가의 몸이니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 줄 모르고
그토록 분주하게 고통만을 받는구나.
소리와 빛깔을 인정해서 친소親疎를 찾으면
오직 그 집안의 더럽혀진 사람일 뿐이요,
마음을 써서 불도를 구하려 하면
허공에 물어보아야 티끌을 벗어나리라.

  해가 불끈 솟은 사시巳時

요달하지 못한 사람은 가르쳐도 모르니
설사 조사의 말씀을 통달했더라도
마음 머리에 요달했다는 뜻을 두지 말라.
다만 현묘함을 지킬 뿐 문자를 없앤다면
여전히 인정하고 집착하는 것이라서 옳지 못하다.
잠시라도 스스로 긍정할 뿐 뒤쫓지 않으면
광겁에도 악마의 부림을 만나지 않으리라.

  한나절인 오시午時

4대大의 몸 안에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 있지만
아지랑이와 허공 꽃을 버리려 하지 않고
뜻을 지어서 수행하니 더욱 괴롭구나.
미혹했던 적이 없으니 깨달음을 찾지 말고
그대의 아침볕에 맡겨 몇 차례든 저물게 두어라.
형상 있는 몸 안에 형상 없는 몸이 있고
무명의 길 위에 무생無生의 길이 있다.
  해가 기우는 미시未時

심지心地에다 언제 요달했다는 뜻을 둔 적 있던가.
그 집안의 문자들에는 친하고 성글음이 없으니
공부를 일으켜서 적확한 뜻을 구하지 말라.
종횡縱橫에 맡겨서 꺼리거나 기피하지 않으면
영원히 인간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살지 않는다.
운용運用하되 빛깔과 소리를 여의지 않으니
여러 겁 동안 잠시라도 버린 적이 있던가.

  해가 저무는 신시申時

도를 배우려면 먼저 가난함을 싫어하지 말라.
형상 있음이란 본래 방편으로 쌓은 것이지만
형상 없음인들 어찌 참되다고 할 수 있으랴.
정결케 하려는 것이 도리어 정신을 피로하게 하니
어리석음을 잘못 알아 가까워졌다고 여기지 말라.
언하言下에 구하지 않아서 처소마저 없다면
잠깐이라도 출가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리라.

  해가 지는 유시酉時

허환虛幻의 음성은 영원할 수 없으니
선열(禪悅:도의 기쁨)의 진수도 먹지 않거늘
뉘라서 더구나 무명의 술을 마시랴.
버릴 수도 없고 지킬 물건도 없으니
거침없이 소요하나 있은 적이 없다네.
설사 그대가 고금 일을 많이 알아도
여전히 미쳐서 밖으로 달리는 짓이다.

  초저녁 술시戌時

미친 사람이 공력을 들여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네.
설사 한량없는 시간에 마음이 통한다 해도
여러 겁이 어찌 오늘과 다른 적이 있었던가.
헤아리려 망설이면서 중얼거리니
마음 머리를 더욱 칠흑같이 캄캄하게 한다.
밤낮으로 광채를 놓아 유와 무를 비추면
어리석은 사람은 바라밀波羅蜜이라 부른다네.

  인적이 멈추는 해시亥時

용맹정진이 게으름이 되나니
털끝만큼도 닦고 배우려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형상 없는 광명 속에서 항상 자유롭다.
석가를 초월하고 조사를 지나치니
마음에 가는 티끌이라도 있으면 장애를 이룬다.
확 트이고 일 없어서 단박에 청한淸閑하니
그 집안에는 스스로 통달한 사람의 사랑이 있다.



  한밤중 자시子時

마음이 무생無生에 머물면 그것이 곧 생사이니
생사가 어찌 유와 무에 속한 적이 있으랴.
사용할 때에는 문득 없는 문자[沒文字]를 쓰나니
조사의 말씀도 변두리 밖의 일이네.
일어날 때를 식별해도 또한 옳지 않으니
뜻을 지어 구하려 하나 실제로는 자취가 없어서
생사의 악마가 와도 마음대로 시험케 한다.

  닭이 우는 축시丑時

한 알 둥근 구슬의 빛이 이미 장구하여
안팎으로 접하지만 찾아보면 전혀 없네.
경계 위에 베풀 때에는 혼연한 대유大有라
머리도 볼 수 없고 또한 손도 없으니
세계가 무너질 때도 그것은 썩지 않는다.
요달하지 못한 사람이 한마디만 들었다 한들
지금까지 어느 누가 입을 달싹이나 했던가.

지공(誌公:寶誌) 화상의 십사과송十四科頌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님

중생은 수도할 줄 몰라서
문득 번뇌를 끊어 버리려 하지만
번뇌는 본래 공적한 것이거늘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하네.
일념의 마음이 곧 옳거늘
어찌 딴 곳에서 찾고 따지려 하는가.
큰 도는 그저 눈앞에 있거늘
미혹하고 뒤바뀐 사람은 알지 못한다.
불성佛性은 천진하고 자연스러워서
인연도 없고 닦아 지을 것도 없다.
3독毒이 허망한 거짓임을 모르고
떴다 잠겼다 하는 생사를 집착하네.
옛날 미혹했을 때에는 늦었다 했는데
오늘 비로소 깨달으니 일찍도 아니네.

  가지고 범함이 둘이 아님

장부는 운용함에 걸림이 없어
계율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네.
가지고 범함이 본래 스스로 무생無生이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그의 속박을 받는다.
지혜로운 이는 하는 일 모두가 공하지만
성문聲聞은 부딪치는 일마다 막힌다.
대사는 육안肉眼으로도 원만히 통하지만
2승은 천안天眼을 얻어도 가림이 있다.
공空 속에서 유와 무를 허망하게 집착하면서
색色과 마음이 걸림 없음을 알지 못한다.
보살은 속인과 함께 세상에 살아도
청정하여 세상에 물든 적이 없으며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탐내거니와
지혜로운 이는 생사의 실제實際를 안다.
법성法性은 공하여 말이 없고
연기緣起에는 도대체 인자人子가 없다. 
백 살이라도 지혜가 없으면 어린아이요,
어린아이라도 지혜가 있으면 백 살이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다.
어찌 밖을 향해 보배를 구하랴.
몸 밭[身田]에 스스로 밝은 구슬 있는 것을.
바른 길과 삿된 길이 둘이 아니니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임을 요달해 알라.
미혹과 깨달음이 본래 차별이 없고
열반과 생사는 한결같은 것이니
궁극에서는 반연이 공적하니
오직 뜻과 상념의 청허淸虛만을 구하라.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면  
깜짝 사이에 저절로 무여無餘에 든다.


  사事와 이理가 둘이 아님 

심왕(心王:마음)은 자재하고 홀연하니 
법성은 본래 열 가지 얽힘이 없다.
온갖 것 불사佛事 아님이 없으니
어찌 생각을 거두어 좌선할 필요가 있으랴.
망상이 본래 공적한 것이니
반연을 끊으려 할 필요가 없다.
지혜로운 이가 마음에 얻을 것이 없으면
자연히 시끄러움도 다툼도 없어진다.
무위無爲의 큰 도를 알지 못하면
언제 깊고 현묘한 이치 증득하랴.
부처와 중생은 한 종류이니
중생이 그대로 세존이다.
범부는 허망하게 분별을 내어
없는 가운데 있다고 집착하여 어지럽게 설친다.
탐욕과 성냄이 공적한 줄 요달하면
어딘들 참다운 문門이 아니겠는가.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둘이 아님

성문은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구하니
마치 밀가루를 버리고 떡을 찾는 것과 같다.
떡은 원래 밀가루에서 생겼는데
사람의 손에 따라 백 가지로 변했다.
번뇌가 그대로 보리이니
마음이 없으면 경계도 없다.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으니
탐ㆍ진ㆍ치가 아지랑이나 그림자 같다.
지혜로운 이는 부처를 구할 마음 없거늘
어리석은 이는 삿됨과 바름에 집착한다.
수고롭게 일생을 헛되이 보내다가
여래의 묘한 정수리를 보지 못한다.
음욕의 성품이 공한 줄 요달하면
확탕로탄(鑊湯鑪炭:뜨거운 지옥)이 저절로 식는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님

나 스스로가 몸과 마음이 쾌락하니
홀연히 선도 없고 악도 없구나.
법신法身이 자재하여 방위가 없으니
눈에 닿는 것마다 정각正覺 아님이 없다.
6진塵이 본래 공적하거늘
범부는 허망하게 집착을 낸다.
열반과 생사가 평등하거늘
사해에서 누가 후厚하고 박薄하랴.
무위無爲의 대도大道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마음으로 헤아릴 필요가 없다.
보살은 거짓을 흩고 영통靈通하여서
하는 일 언제나 묘각妙覺을 머금지만
성문聲聞이 법에 집착해 좌선을 하니
누에가 실을 토해서 스스로를 결박하듯 하네.
법성은 본래 둥글고 밝으니
병이 나으면 어찌 약에 집착하랴.
모든 법이 평등함을 요달해 알면
홀연히 맑고 비어서 쾌락하리라.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님

법성은 본래 푸르고 누름이 없거늘
중생들이 공연히 문장文章을 지었네.
나를 두고서 그에게 지관止觀을 말하니
자기의 뜻은 요동하여 미쳐 날뛰네.
원통圓通의 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언제나 참되고 항상함을 회통하리오.
자기의 병도 능히 고치지 못하면서 
남에게 약방문을 가르쳐 주니 
겉으로 보기에는 착한 것 같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이리와 같네.
어리석은 사람은 지옥을 겁내는데
지혜로운 이는 천당과 다르지 않네.
경계를 대하여 마음이 항상 일어나지 않으면
발끝을 두는 곳마다 도량이리라.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건만
중생이 스스로 한계를 긋는다.
만일에 3독毒을 없애고자 한다면
아득하여 재앙을 여의지 못한다.
지혜로운 이는 마음이 부처인 줄 아나
어리석은 이는 극락에 가기를 좋아한다.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님

세간의 모든 법이 허깨비 같고
생사는 흡사 번개와 같다.
법신은 자재하고 원통圓通해서
산하를 출입하는 데 간격이 없다.
뒤바뀐 망상이 본래 공하고
반야는 미혹도 어지러움도 없다.
3독이 본래 스스로 해탈인데
어찌 생각을 거두어 선관禪觀을 하랴.
다만 어리석은 이가 요달하지 못해서
저 계율을 쫓아서 판결하려 한다.
적멸寂滅의 진여眞如를 알지 못하니
언제 저 언덕에 오르겠는가.
지혜로운 이는 끊을 만한 악惡도 없어서
운용運用이 마음을 따라 합쳤다 흩었다 한다.
법성은 본래 공적하여서 
생사의 얽매임을 받지 않으니
만일 번뇌를 끊어 버리려고 하면
이것이 무명無明의 어리석은 이라 한다.
번뇌煩惱가 그대로 보리菩提이거늘
어찌 따로 선禪의 관법을 구하랴.
실제實際에는 부처도 없고 악마도 없으며
심체心體에는 형상도 없고 단락도 없다.

  끊음과 없앰이 둘이 아님

장부는 당당하게 운용하여
자재롭게 소요함이 걸림이 없다.
온갖 것이 능히 해치지 못하니 
견고하기가 마치 금강金剛과 같구나.
양변과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홀연해서 끊어짐도 항상함도 아니다.
5욕欲과 탐ㆍ진ㆍ치가 부처요,
지옥이 천당과 다르지 않다.
바보는 허망하게 분별을 내어
미친 듯이 생사에 헤매거니와
지혜로운 이는 색色의 걸림 없음을 알고
성문은 초조하고 애타지 않음이 없네.
법성은 본래 티나 가림이 없거늘
중생이 허망하게 푸르고 누름을 집착한다.
여래께서 미혹과 우매함을 인도하기 위하여
지옥과 천당을 말씀하시기도 했네.
하지만 미륵彌勒이 몸 안에 스스로 있거늘
어찌 다른 곳이라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진여眞如의 불상을 내버리고 있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뒤바뀐 미치광이일세.
성문은 마음속에서 요달하지 못하여
오직 말이나 문장만을 뒤쫓지만
말이나 문장은 원래 참된 도가 아니어서
더욱더 투쟁과 완고함만 더하나니
마음속에 숨은 독한 뱀들이
쏘기만 하면 문득 사람을 상하네.
글 속에서 뜻을 취할 줄 모르니
언제나 참되고 항상함을 회통하겠는가.
죽어서 무간지옥에 들어가면
신식神識은 끝없는 고통을 받으리라.

  참과 속됨이 둘이 아님

법사의 설법이 지극히 좋지만
마음속에는 번뇌를 여의지 못했다.
입으로 문자를 말해서 남을 교화하나
더욱더 그의 생로병사를 더할 뿐이다.
참과 허망함이 원래 둘이 아니거늘
범부는 허망을 버리고 도를 찾는다.
사부대중이 구름같이 모여 법을 듣는데
높은 자리에 앉아서 호호浩浩함을 논의한다.
남쪽 자리와 북쪽 자리가 서로 다투니
사부대중이 잘한다고 칭찬을 한다.
입으로 감로甘露와 같은 말을 하기는 하나
마음 속 언제나 바짝 말라 있다.
자기에겐 본래부터 한 푼도 없는데
밤낮으로 남의 보물만 세고 있으니
흡사 어리석은 바보가
순금을 버리고 풀 더미를 짊어지는 것 같네.
마음속의 3독을 버리지 않으면서
언제나 도를 얻으려 하는가.

  해탈과 속박이 둘이 아님

율사律師는 계율을 지켜서 스스로 속박하니
스스로 속박하면 남도 속박하게 된다.
겉으로 위의를 보여서 고요한 듯하나
마음속은 흡사 커다란 파도와 같다.
생사의 나룻배를 타지 않으면
어떻게 애욕의 강을 건너랴.
참된 종지의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니
삿된 소견의 말만 더욱 많아진다.
두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 나서
우바리優波利에게 가서 물으니
우바리는 율법대로 죄를 말하여
그 비구를 더 더욱 괴롭혔다.
그러나 방장方丈의 큰 거사인
유마힐維摩詰이 와서 꾸짖을 때에
우바리는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유마힐의 설법은 잘못이 없으니
그는 계戒의 성품이 허공 같아서
안팎의 사바세계에 있지 않다 했네.
생멸을 없애라는 권고를 수긍치 않으면
홀연히 깨달아 석가와 같으리라.

  경계와 비춤이 둘이 아님

선사는 무명을 여의었음을 체득했거니
번뇌가 어디서 일어나랴.
지옥과 천당은 한 모습이요,
열반과 생사는 빈이름뿐이다.
탐ㆍ진ㆍ치를 끊을 것도 없고
또한 이룰 만한 불도佛道도 없다.
중생과 부처는 평등하니
자연히 거룩한 지혜가 성성惺惺해서
여섯 티끌에 물들지 않고
구절마다 홀로 무생無生에 계합한다.
정각正覺의 일념을 현묘하게 알면
3세가 탄연坦然해서 모두가 평등하리.
법法도 아니고 율律도 아니고 스스로 제어하면
홀연히 원만한 성취에 진실로 들어가리라.
네 구절을 끊고 백 가지 부정을 여의면
허공과 같아서 지음도 없고 의지함도 없으리라.

  운용運用이 걸림 없음

나는 이제 도도滔滔하게 자재하여
왕공과 재상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금강과 같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에 마음은 항상하여 바뀌지 않네.
법보法寶는 수미산에 견주고
지혜가 강과 바다보다 넓다.
8풍風에 끌리지 않고
정진과 게으름도 없다.
성품에 맡겨 떴다 잠겼다 엎어지는 듯
막힘없이 자유롭게 천하를 종횡한다.
시퍼런 칼날이 목을 노려도
나는 스스로 안락하여 까딱도 않네.

  미혹과 깨달음이 둘이 아님

미혹할 때에는 공空을 색色으로 여기고
깨달을 때에는 색을 공으로 여긴다.
미혹과 깨달음은 본래 차별이 없고
색과 공은 구경에서는 동일하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쪽 북쪽을 따지나
지혜로운 사람은 동서 없음을 안다.
여래의 묘한 이치를 찾고자 하는가.
항상 한 생각[一念] 속에 있다.
아지랑이가 본래 물이 아니거늘
목마른 노루는 미친 듯이 갈구하네.
자기의 몸이 거짓되어 진실치 않거늘
허공을 가지고 다시 허공을 찾고자 하네.
세상 사람들의 미혹은 너무 심하여
개가 우레 소리에 컹컹 짖는 듯하다.

귀종歸宗 지진至眞 선사 지상智常의 게송 1수首

귀종歸宗에는 사事도 이理도 끊겼나니
해가 바로 정오正午에 합한 것 같다.
자재로움은 마치 사자와 같아서
어떤 물건과도 어우르지 않는다네.
홀로 네 산[四山]의 정수리를 걷고
세 갈래의 큰 길을 마음껏 거닌다.
하품을 하면 나는 새도 떨어지고
기지개를 펴면 뭇 짐승이 놀란다.
기관을 세우니 화살이 쉽게 미치고
그림자가 없어지니 손으로 덮기 어렵다.
시설하고 벌림이 공교한 기술자 같고
재단하는 것이 마치 잣대로 한 것 같네.
교묘하게 만 가지 이름을 새기지만
귀종은 마치 흙과도 같다.
말하고 잠잠함에 소리가 끊겼고
종지가 오묘하니 정情을 두기 어렵다.
눈알을 버렸는데 벙어리가 되었고
귀를 얻었는데 소경을 면치 못한다.
한 화살로 세 관문을 타파했으나
분명하구나, 화살 뒤의 길은.
딱하구나, 대장부들이여.
하늘보다 앞선 것이 마음의 조종이 된다네.[체자體字의 함函에 든 󰡔열반경󰡕 27권에는 “진사자왕眞師子王 새벽에 동굴을 나와 얼굴을 찡그리고 하품을 한다”고 하였다.]

향엄香嚴 습등襲燈 대사 지한智閑의 게송 19수首

  수지授指 어떤 물건을 가리켜서 알린다.


옛사람의 뼈에 영험함이 많으니
어진 자손이 비밀히 간직해 두었다.
이 한 문門이 효도를 이루는데
사람들 알지 못하니 허탕을 치지 말라.
뜻을 견고히 하여 여우같은 의심을 버려서
안정을 얻으면 위태롭지 않으리라.
향하면 멀어지고 구하면 여의고
취하면 급하고 잃으면 더디다.
계교가 없어서 깨달아 앎을 잊고 
탁하게 흐르는 식識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이라서
한 찰나에 변이變異에 통하나니
울퉁불퉁한 산석山石의 불기운이
깊은 속에서 일어나 봉우리까지 태우고
막힘이 없으니 바다 밑까지 사른다.
법의 그물은 성글고 신령한 불꽃은 섬세하니
6월에 누워서 옷을 벗어버린 것 같네.
가릴 수도 없고 가장할 수도 없으니
도를 아는 사람은 조사의 뜻을 외친다.
우리 스승의 종지는 예로부터 비밀하니
오직 그 사람이라야 잘 간직해 둔다.
법의 재물 구족하고 부끄러움도 갖추어
헛되이 베풀지 않으나 쓰는 곳은 분명하다.
누군가가 물으면 꾸짖는 일이 없어도
다시 와서 물으면 쌀이 귀하다고 말한다.

  마지막 말씀

한 말씀이 있어 규구規矩가 온전하니
사유思惟를 쉬어도 스스로 허락하지 않네.
길에서 도를 요달한 사람을 만나면
눈썹을 깜박이면서 온 곳을 살핀다.
밟아도 밟히지 않아 의심이 많으니
도리어 벗을 대동함을 사유하여 살펴라.
일생에 참구해 배운 일을 이루지 못하면
전단나무 한 아름을 은근히 안게 되네.


  현묘함을 드러냄ㆍ최대부崔大夫에게 주다

통달한 사람은 숨고 드러남이 많아서 
형상과 행동이 일정하게 드러나지 않네.
말 아래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비밀히 몰래 보호하고 지녀서
얼굴의 움직임으로도 옛 길을 드날리고 
밝고 묘해서 이내 바야흐로 아니
사물에 감응하여 시설할 뿐이니
함부로 부사의不思議라고 말하지는 말라.

  도량道場에 통달함ㆍ성음城陰 행자行者에게 주다

이치가 심오하여 생각과 요량이 끊기고
뿌리를 찾으니 오솔길이 아득하다.
이로 인하여 막히고 트임을 알아야
저 봉강封疆을 받지 않으리라.
사람의 삶이란 모름지기 특별나서
앉으나 일어서나 향기로움을 느끼니
청정한 여래의 아들이
편안히 도량에 앉았다.

  설판관薛判官에게 줌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나 
한 불꽃, 한 불꽃의 불이라도
물을 마시는 이는 취하고 
불을 쪼이는 이는 늙는다.
마시지 않고 쪼이지도 않으며
더구나 편안히 눕지도 않는다.
활과 화살을 꺾어 버리고
모래톱을 걷어차 쓰러뜨린다.
누군가가 이를 알고자 하면
먼저 갈고리를 버려라.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어라.
내가 누구냐고.
빨리 이르라, 빨리 이르라.

  임유현臨濡縣의 행자에게 주다

장부여, 딱하여라.
오래도록 티끌에 묻혔구나.
내가 오늘로 인해 
산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눈썹을 깜짝여 내게 보이니, 
이 까닭에 나는 눈을 떴다.
노승의 솜씨는 
글을 쓰면 서기가 서리고
말 아래 뜻이 있어서 
확실히 새장[樊籠]을 벗어난다.

  종지를 드러냄

생각은 원대하고 신령스런 거동은 오묘하며
정묘하고 텅 비어서 행리는 통해 있다.
보고 들음에는 그림자와 상像을 여의고
비밀한 경지에서는 옛사람의 자취를 이야기한다.
뜻을 얻으니 티끌 속의 묘함이고
기틀에 맞추어 도의 모습을 드러낸다.
광채를 감추고 경계하여 깨달으니
기꺼이 참 종지를 요달했다 하리.

  3구句 뒤의 뜻

글자로 적거나 말하는 것은 거짓이 많으니
거짓 속에서는 있음과 없음을 대동하네.
그러나 글자 이전을 회통해서
뜻 속의 구슬을 던져 버려라.

  정랑중鄭郎中의 물음에 답한다ㆍ2수

말 속에 자취를 묻고
소리 이전에 얼굴을 드러낸다.
당장에 묘하게 회통하면
옛사람과 똑같은 풍류요,
메아리가 따르듯이 근기에 맞추면
나와 남의 종지가 따로 없다.
이무기를 소리쳐 일으키어
크게 분발시켜 용이 되게 한다.
말 속에 근골筋骨이 묻히고
음성은 도의 얼굴을 물들인다.
당장에 묘하게 회통하기만 하면
손뼉을 치면서 병신 용을 내쫓는다.

  도를 이야기하다

분명하고 분명해서 대동한 것 없고
홀로 운용하니 무엇에 의존하리오.
길에서 도를 요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말이나 침묵으로 대꾸하지 말라.

  현기玄機라는 학인에게 주다

묘한 종지는 재빠른 것이어서
말로 설명하려면 벌써 늦는다.
잠시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신령한 기틀을 미혹한다.
눈썹을 치켜서 물음을 대신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빙그레 웃으니
이 무슨 경계이던가.
도가 같은 이라야 알 수 있다.


  분명한 도

생각 생각이 자취가 있는 듯하나
분명하고 분명하여 처소를 알 수 없다.
종지를 어떻게 가르치느냐 물으면
서서히 몰래 고개를 돌린다.

  현묘한 종지

가도 가도 푯말이 없고
와도 와도 이렇게 온다.
누군가가 묻는다 하여도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한다.

  등주鄧州의 행자에게 주다

숲 아래서 몸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니
마음의 구슬을 반연하여 대동하지 않네.
입을 열어도 할 말이 없고
붓끝으로도 쓸 수가 없다.
누군가가 향엄香嚴의 종지를 묻거든
산에서 산다고 말하지 말라.

  세 차례 뛴 뒤에

삼문(三門:절의 정문) 앞에서 합장하니
양쪽 복도 밑에서 도를 행하고
중앙의 뜰에서 춤을 추고
뒷문 밖에서 고개를 흔든다.

  상근기上根機

딱하여라, 틀리지 말라.
단박에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네.
빈 곳에서 말을 하니
용이 한바탕 놀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여 부르니
이름도 모양도 묘하게 끊었다.
높고 높은 수도자의 무리여,
헤쳐서 드러낼 만한 것도 없다.

  법신이란 소견을 깨뜨리다

위로 향하여서는 부모가 없고
아래로 향해서는 남녀가 없다.
홀로 스스로 하나의 몸이니
반드시 요달해 버려야 한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것을 들으면
사람마다 앞을 다투어 와서 취하는데
그에게 대하는 한 구절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언어가 없다.


  외다리[獨脚]

새끼도 쪼고 어미도 쪼아서
새끼가 깨달으매 껍질이 없네.
어미도 새끼도 모두 없어지면
인연에 응해도 틀리지 않네.
도가 같은 사람끼리 주고받아도
묘하게도 외다리라 부른다네.

동산洞山 화상 양개良价의 게송 1수

  무심無心이 도에 계합한다

도는 무심히 사람에 합하고
사람은 무심히 도에 합한다.
이 속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하나는 늙는데 하나는 늙지 않는다.

용아龍牙 화상 거둔居遁의 게송 18수

용아산龍牙山 속의 용 한 마리
형상은 세간의 빛깔이 아니다.
세상에서 용을 그리는 사람
교묘히 교묘히 그려도 그리지 못한다.
오직 용을 아는 사람이라야
한 번 보고서 문득 마음이 쉬네.
오직 문 앞의 나무만을 염念하나니
능히 새들을 날고 깃들이게 하네.
오는 자는 무심히 부르고
몸을 솟구쳐도 돌아갈 것을 사모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나무와 같으면
도道와는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무심無心이 되면 문득 정情을 말해도
여섯 문이 모두 쉬어서 형태를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인연이 있는 것은 나의 벗이 아니고
작용 없는 두 눈썹이 도리어 형제다.

깨달아 마치면 되돌아 깨닫지 못한 사람과 같으니
이기고 지는 데 무심하면 스스로 정신이 편하다.
예로부터 큰 스님들은 빈도貧道라 자칭했는데
이 문호로 향하는 이가 몇 사람이나 되던가.

도를 배우려면 먼저 깨달음을 말미암아야 하나니
마치 일찍이 빠른 배에다 표를 새긴 것 같네.
비록 빈 땅에다 묵은 집[舊閣]을 지으나
한 차례 기울기 시작해야 비로소 쉰다네.

마음이 공한 것이 도가 공한 것만 못하니
도와 마음의 공함은 형상이 하나이다.
현묘함을 배우는데 도가 공한 선비가 아니면
일생 동안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스승을 따라 조종祖宗의 법을 배웠는데
부질없는 허공 꽃이 사람을 얽어매는 벌[蜂]과도 같네.
스님이 참되면 구름 밖에 살 필요가 없으니
깨달은 뒤에야 색色 그대로 공한 줄 알리라.

도를 배우면서 까닭 없이 용 그리기를 배웠는데
원래부터 붓 놀리는 법을 전혀 몰랐네.
하루아침 진짜 용을 체득한 뒤에는
예전에 들인 공이 헛일임을 알았네.

성불하는 이는 적은데 염불하는 이는 많으니
염불하기를 오래 하면 도리어 마魔가 된다.
그대는 지금 당장에 부처가 되고자 하는가.
무념無念이 된 사람은 계교가 많지 않다네.

꿈속에서 어찌 꿈이 허망한 줄 알랴.
꿈을 깨어야 꿈이 없는 것임을 안다.
미혹할 때는 마치 꿈속의 일과 같고
깨달은 뒤에는 잠에서 깬 것과 같다.

도를 배우되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한가하면
없는 가운데 길이 있어 인간을 숨기네.
그대가 아무리 천 권의 경론을 외워도
기틀에 임해서는 한마디도 하기 어렵네.

보살과 성문이 공을 다하지 못하여
인간과 하늘을 왕래하면서 진종眞宗을 찾으나
어찌 부처님처럼 의심 없는 분으로서
단정히 앉아 무심한 것과 같을 수 있으랴.

금생에 쉬지 못하면 언제나 쉬려나
쉬는 것은 금생임을 다 함께 알아야 한다.
마음이 쉬는 것은 다만 망상이 없는 것이니
망상을 제하고 마음이 쉬면 그것이 바로 쉬는 때이다.

미혹한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서 벙어리들을 권장하니
흙에다 진흙을 보태서 한 겹을 더한다.
깨달은 사람도 뜻이 있는 것이 미혹한 뜻과 같으나
다만 미혹함 속에서도 미혹을 만나지 않을 뿐일세.

사람이 도道를 배우려면 탐하지 말라.
만사에 무심해야만 도와 합친다.
무심하여야 비로소 무심의 도를 체득하니
무심을 체득하면 도 역시 쉰다.

이마의 백호상에서 흰 광채를 내는 몸이라 해도
사事를 보는 것이 어찌 이理를 보는 것처럼 친하랴.
사事가 있음은 오직 이理의 있음을 인하니
이理가 방편을 써서 인천人天을 교화한다.
하루아침에 크게 깨달아서 모두 없어지면
바야흐로 일 없는 사람이라 불리리라.

인정이 두터우면 도의 정情이 미약하지만
도가 인정을 쓰는 줄 세상이 어찌 알겠는가.
공연히 인정만 있고 도의 작용이 없으면
인정이 능히 얼마나 지탱하리오.

소를 찾으려면 자취를 찾아야 되고
도를 배우려면 무심을 찾아라.
자취가 있으면 소 또한 있을 것이요,
무심이 되면 도를 찾기 쉽다.

현사玄沙 사비師備 종일宗一 대사의 게송 3수

현사玄沙가 거니는 샛길은 특별하니
요즘 사람들은 모름지기 알아야 된다.
한 겨울에도 양기陽氣가 무성하고
6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말[語]은 있어도 혀와는 관계치 않고
말[言]은 없어도 언사는 아주 필요하다.
나의 가장 마지막 구절은
세상을 벗어나지만 아는 이 없다.

기이하여라, 영특한 한 늙은이
어찌하여 단박에 말을 많이 하나.
바람이 일으켜 공후箜篌를 당기면
미혹한 아이들은 앞을 다투어 모인다.
설사 총체적으로 옳지 않다 해도 
청개구리는 입을 크게 벌리는데
입을 열거나 열지 않거나
끝내 영특한 늙은이를 범하는 것이니
이 속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남극성이 진짜 북두칠성이다.

만 리의 신령한 광명이 정수리 뒤의 모습인데
정수리가 없어졌을 때에는 어디서 바라겠는가.
일은 이미 이루어졌는데 뜻은 아직 쉬지 못했으니
이것은 원래부터 부딪치는 곳마다 두루했다.
지혜로운 이는 듣자마자 용맹하게 취하나니
잠깐 기다리려 하다가 갈 길을 잃지 말라.

초경招慶 성등省僜 진각眞覺 대사의 게송 2수

  좌선에 집착한 수좌에게 보임

큰 도는 분명하여 한 점 티끌도 끊겼거늘
어찌 오래 앉았어야만 비로소 친하겠는가.
인연을 따라 시비가 없음을 안다면
시끄러운 곳에 있은들 어찌 새로움과 옛것 있으랴.
호탕하여 지둔支遁과 가지런해지려고 하나
소요한들 어찌 혜휴慧休와 이웃했다 하랴.
개울가에 거닐든 시끄러운 곳에 거닐든
가히 저녁노을 속의 신선[物外人]이라 하리라.

  좌선하는 방편을 보임

네 가지 거동에서 앉는 것이 먼저이니
몸과 마음이 가라앉아 차츰 평탄해진다.
홀연히 인연을 만나 흐린 경계를 따라도
지속시키지 말아야 함이 그대의 천명[天年]이다.
닦아 지님은 그저 공功을 들이는 길을 말한 것이니
진리에 이르렀다면 어찌 저쪽에 있다고 논하랴.
언제 어느 때나 항상 관장하고 대동하면
인연이 맞을 때 활연히 현지玄旨를 통하리라.

장주漳州 나한羅漢 계침桂琛 화상의 도를 밝힌 게송 1수

지극한 도는 깊고 넓어서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말로써 나타내면 가리키는 것 아니니
뉘라서 그렇다고 말을 하겠는가.
부딪치는 곳마다 모두가 그이거늘
어찌 참과 허망을 깨우치랴.
참과 허망을 설정해 변설해도
거울 속에 나타난 것과 같다.
있음과 없음이 비록 드러나도
존재하는 곳마다 손상이 없으니
손상도 없고 존재도 없으면
무엇에 구애되고 무엇에 막히랴.
공력을 빌려서 이루는 것 아니니
법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법이 그렇건 그렇지 않건
모두가 입술과 치아가 되니
만일 이것으로써 진술한다면
종지宗旨를 묻어 버리게 된다.
종지는 뜻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고
보거나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보고 들음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마치 물속의 달과 같으니
여기에서 밝히지 못하면
도리어 군더더기 법을 이룬다.
한 법이라도 형체가 있으면
그대의 눈동자를 가리나니
눈동자가 밝지 못하면
세계가 울퉁불퉁해진다.
우리 종풍은 기특한 것이어서
볕바른 곳에 훤하게 드러났다.
부처와 중생이 
모두 은혜를 입었으니
고개를 숙이는 데 있지 않고
사량思量으로도 얻기 어렵다.
얼굴을 쥐어박아 깨뜨리니
건곤도 뒤덮어 버린다.
재빨리 알아들으면
감관과 경계를 벗어나려니와
그렇지 못하고 밝히지 못한다면
지금껏 헛소리를 했다.

남악南嶽 유경惟勁 선사가 깨달음의 경지[覺地]를 읊은        게송 1수

  각지覺地의 이름이 같고 다름을 간단히 밝힌다

일어났다가 다시 처음으로 끝나면서 번갈아 생기는데
성해(性海:성품 바다)를 처음 건립하매 명호를 더하네.
묘각妙覺은 또한 성각性覺의 밝음에 의거하여
체(體:본체)와 각(覺:묘각)이 모두 밝고 묘함을 머금으니
명각明覺과 묘각이 나란히 쌍으로 행한다.
묘함의 자각과 자각의 묘함이 원래 본체를 밝히는 것이고
전체적으로 무루無漏를 이루니 하나의 참 정기[眞精]이다.
밝음의 자각과 자각의 밝음도 밝음이 요달한 바이나
혹은 요달한 모습으로 인해 원래의 밝음[元明]을 잃기도 한다.
명각과 묘각은 체각(體覺:본체의 깨달음)을 조종으로 하는데
체각과 성각性覺은 둘 다 똑같이 밝음이다.
담각(湛覺:담담한 깨달음)은 둥글어서 늘고 줆이 없으니
이 속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노라.
처음과 마지막을 깨닫지 못하면 요달해 마친 것이 아니고
미혹과 깨달음을 듣지 못하고야 어찌 또렷또렷하다 하랴.
이것을 심지心地라거나 여래장如來藏이라 칭하는데
또한 깨달아 비춤도 없고 아울러 무생無生이다.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진여의 바다가
담연히 항상 머무는 것을 이름하여 무명無名이라 한다네.
허공은 노을의 티가 생기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늘
어찌 미진微塵에서 나는 유루有漏의 소리를 들으랴.
허공도 거품도 깨달음의 바다를 여의지 않았으니
움직이고 고요함이 원래 하나의 참된 밝음이다.
각명覺明의 본체가 이러해서 신령한 불꽃을 머금었으나
각명은 불꽃을 쫓다가 이지러지기도 하고 차기도 한다.
어긋나서 돌아오지 못하면 이름하여 무각無覺이라 하고
회통해서 근본에 복귀하면 시각始覺이 생긴다.
본각本覺의 말미암음은 시각으로 인해 생기고
정각正覺도 되돌아 의거해서 각명覺明에 합친다.
그 두 가지를 말미암아 서로 차이를 이루는 것이니
마침내 혼연시켜서 아뢰야阿賴耶라 부른다.
모두가 더러움과 깨끗함의 쌍갈래 길을 갖추었는데
각명이 머금는 곳에서는 다른 길이 싹튼다.
성품에서 무생無生의 부동지不動智가 일어나
본각의 당체를 여의지 않아도 본래 원만히 이루고
성품에서 전각轉覺 전상이라고도 하니 마음의 일부이다.
이 일어나면 뒤집혀 상대[所]가 생겨서
드디어 유루有漏로 하여금 미혹의 어둠에 빠져들게 한다.
무명은 애욕으로 인해 점점 불어나서
명색名色의 근본이 차츰 생기고
7식이 구르는 곳에 둥근 거울이 가려지고
5ㆍ6식이 생길 때 각명覺明이 가려지고
촉觸과 수受와 유有와 취取는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고
생ㆍ노ㆍ병ㆍ사는 잇달아 변해간다.
업식業識이 끝이 없어 괴로움의 바다에 빠지고
그지없이 흐름을 따르다가 이리저리 나부낀다.
대성大聖께서 자비심을 일으켜 구제하니
한 음성을 쓰는 곳에 세 가지 음성이 나온다.
지혜의 몸[智身]은 원래 법신으로부터 일어나고
다니는 몸[行身]은 또한 지혜의 몸에 의해 생긴다.
지혜의 몸과 다니는 몸이 원융해서 둘이 아니니
되돌아 하나의 본체로 돌아가 본래 평등하다.
만유萬有는 가지런히 참 해인海印을 머금었고
한마음은 두루 나타나서 총체적으로 원명圓明하다.
맑은 광명이 활활 타오르니 어디에 의지하랴.
허공의 성품은 탁 트여서 멈추는 바가 없다.
곳곳에서 생生을 보여도 무생無生의 모습이고
곳곳에서 멸도를 보이나 멸도하는 형상이 없다.
구슬과 거울에 단박에 인印해서 가고 옴이 없고
뜬구름이 모였다 흩어짐은 항상한 것 아니다.
떴다 잠겼다가 참[眞]에 맡긴 것이 물속의 달과 같으니
인연에 응함이 메아리 같아서 중생들을 교화한다.
중생의 성지性地에는 원래 물들음 없으나
다만 들뜬 허망이 진정眞精을 가린다네.
5음이 허공의 모임이란 것을 요달하지 못하니
어찌 4대가 건달바의 성임을 알겠는가.
아만我慢의 어리석은 산 드높이 솟았고
무명의 욕심 바다 끝없이 출렁인다.
매양 전타라旃陀羅같이 교활한 벗을 따르다가
항상 사나운 짐승을 쫓아 슬픈 울음을 운다.
자성自性이 구르는 식識이 뒤집혀 허깨비가 되니
자기 마음의 허깨비 경계에 자기 마음이 놀란다.
이 허깨비의 성품이 아지랑이 같은 줄 요달하면
허공 꽃과 같은 식識의 물결은 다시 원만해진다.
허공에서 뜬구름이 흩어짐을 홀연히 깨달으면
허공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비로소 깨달으리.
예나 이제나 담연湛然해서 항상 환하니
고금이나 범성凡聖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영주郢州 임계臨谿 경탈敬脫 화상의 도에 드는 깊고         얕음을 읊은 게송[入道淺深頌] 5수

맨 기둥[露柱]이 소리소리 부르니
잔나비는 새끼줄에 결박된다.
중ㆍ하의 근기는 까닭을 모르나
상근기라야 바야흐로 알 수 있다.

맨 기둥이 소리 내어 부르지 않으니
잔나비를 결박한 밧줄이 끊긴다.
상근기의 무리는 깔깔 웃는데
중간 무리는 본 듯 만 듯

잔나비와 맨 기둥으로
동서로 오락가락 면하지 못하나
마음껏 태평가太平歌를 부르고
공연히 불조佛祖를 초월했다 한다.

내가 종사라고 자랑하는 이들을 보건대
말하든 침묵하든 현묘한 구절이라 하지만
본래의 근원을 잘 알지도 못하고
교묘히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옛 일을 편다.

소실少室 달마가 있던 토굴이다.
과 마갈摩竭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곳이다.
에서
대代를 바꾸어 드날리셨다.
내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누가 장래의 주인이 되겠는가.


대법안大法眼 선사 문익文益의 게송 14수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다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고 
만법은 오직 식識일 뿐인데
마음뿐이고 식일 뿐이라면 
눈으로 소리를 듣고 귀로 빛깔을 보겠지만
빛깔은 귀에 이르지 않고
소리가 어찌 눈에 닿으랴.
눈에는 빛깔이요, 귀에는 소리라야
만 가지 법이 가려내서 이루어지지만
만 가지 법이 인연이 아니라면
어찌 허깨비 같은 줄로 관찰하랴.
산하와 대지에서 
어느 것이 견고하고 어느 것이 변하는가.

  화엄 6상相의 이치

화엄 6상의 이치는
같음 속에 또한 다름이 있고
다름이 같음에서 다르다면
완전히 부처님들의 뜻은 아니다.
부처님들의 뜻은 총總이자 별別이니
어찌 같고 다름이 있으랴.
남자의 몸속에서 선정에 들 때에
여자의 몸속에다 뜻을 남기지 않는다.
뜻을 남기지 않고 명자名字를 끊으니
삼라만상이 밝고 밝아서 이理도 사事도 없다.

  수보리須菩提를 본다

수보리의 모습이 고풍스럽고 기특하니
공한 법을 말하나 법은 여의지 않네.
믿음이 미치지 않자 또 의심을 하고
믿음을 얻으니 다시 어디를 갈 것인가.
지팡이에 기대서서 동서를 둘러본다.

  거리의 북소리

북소리 둥둥 울려서
큰 공력을 운전하니
조정에 가득한 사람
도로에 통해 있네.
도로에 통했어도
어디로 가겠는가.
통달한 사람은 보배 땅[寶地]에 
올랐다고 말하지 않네.

  사모하는 도道를 버리라고 보이다

동당東堂에서 계수나무를 꺾지 않고
남화南華에서는 신선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불타의 절을 찾아와
가사를 입고 좌선을 배우네.
선禪이 앉는다고 된다면
비상非想인들 어찌 치우침이겠는가.[여러 겁을 지나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참선하는 자에게 고하나니
모름지기 도道 속의 현묘함을 깨달아라.
무엇이 도 속의 현묘함인가.
참된 규구規矩가 스스로 완연하다.

  󰡔금강경󰡕에서 남에게 경시당하는 장章[설명하여 말하기         를, 경經을 가진 자는 불지佛地를 증득한 것이다.]

보검寶劍을 잃지 않았으니
빈 배에다 표시를 새기지 말라.
잃지도 않고 새기지도 않으면
그런 자라야 얻은 것일세.
의지하고 기다리면 감당하지 못하니
홀로 그러해야 곧 법칙일세.
허공을 날아간 새의 자취를
있다 없다 하면 더욱 어긋나네.

  스님이 빛깔을 따르는 마니주에 대해 묻다

마니주는 빛깔을 따르지 않고
빛깔 속에는 마니주가 없네.
마니주와 온갖 빛깔은
합쳐지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네.

  우두암牛頭庵

나라의 도성 남쪽에 있는 조사祖師의 암자
암자의 옛터는 구름에 싸이고 바람이 부네.
짐승도 길들여졌고 정숙한 사람들이 참배하니
홀연히 내 마음은 끝내 감당치 못하는구나.

  건달바성乾闥婆城

건달바성은 법마다 다 그러하니
법이 그렇든 아니든 명상名相은 참된 궤칙일세.
해는 따뜻하고 달은 서늘한데 바다는 깊고 산은 솟았으니
건달바성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네.

  경전을 읽는 스님을 보고

요즘 사람이 옛날의 가르침을 보지만
마음속의 시끄러움은 면하지 못하네.
마음속의 시끄러움을 면하고 싶다면
다만 옛 가르침을 보아야 함을 알아라.


  어떤 스님에게 “아는가?” 했더니, “모른다”고 대답하기에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이
그대와 대면하고 있으나
그래도 대면한다고 말하면
진실은 알지 못하는 걸세.

  뜰의 잣나무와 화분의 연꽃

한 떨기 함초롬한 연꽃과
두 그루 푸르고 가는 잣나무
늘 승가僧家의 뜰을 향해서
어찌하여 수고롭게 높은 격格을 묻는가.

  정월에 우연히 보이다

정월의 봄은 순조로운 시절이니
정情이 있든 없든 모두 기쁨을 머금었네.
그대여, 누구의 힘인지 알고 싶은가.
다시 누구에게 묻고 누구로 하여금 결정케 하랴.

  종릉鍾陵의 광光 승정僧正에게 주다

서산西山은 우뚝하여 푸르게 솟았고
장수漳水는 맑고 맑아 투명한 빛깔이네.
마주하여 분명히 나타나거늘 
무슨 극칙이 있으랴.
백거이白居易의 팔점게八漸偈[서문을 겸함]

당나라 정원貞元 19년 가을의 8월 응공凝公이라는 대사가 동도東都 성선사聖善寺의 발탑원鉢塔院에서 입적했는데, 그 다음해 봄 2월에 동쪽에서 온 나그네 백거이白居易가 팔점게八漸偈를 지어서 게송마다 여섯 구절, 구절마다 네 글자로 찬탄하였다.
처음에 나 백거이는 대사에게 마음의 요체를 물었는데, 대사는 나에게 말을 내려 주셨으니 관觀․각覺․정定․혜慧․명明․통通․제濟․사捨이다.
이것이 귀로 들어와 마음을 관통했으니, 오호라, 지금 대사의 보신報身은 천화했으나 대사의 여덟 마디는 천화하지 않았다.
지극하구나, 여덟 마디여! 진실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관觀하는 점문漸門이다. 그래서 관觀에서 사捨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찬탄하되 한 마디를 넓혀서 하나의 게송으로 만들어 팔점게라고 했으니, 대사의 마음의 가르침을 발휘하고 나 백거이가 감히 실추시킬 수 없음을 밝히고자 함이다.
그리고는 법당에 올라가 제단에 절하고 꿇어앉아서 게송을 읊은 뒤에 곡을 하고 떠나갔다. 다음은 게송이다.

  관觀

마음속의 눈으로
마음 밖의 모습을 관찰하니
어디로부터 있는 것이며
어디에서 없어지는가.
관찰하고 또 관찰하면
참과 허망을 가려낸다.

  각覺

오직 진眞만이 항상 있지만
허망에게 가려지고 말았네.
참과 허망을 진실로 가려내면
깨달음이 그 안에서 생겨나니
허망한 있음을 여의지 않고서도
참된 공[眞空]을 얻는다네.

  정定

진眞이 멸하지 않으면
허망은 일어나지 않나니
6근根의 근원이
고요한 물처럼 담연하면
이것이 선정이어서
생사를 해탈하게 된다.

  혜慧

선정에만 전일專一하면
선정에 오히려 속박되지만
지혜로써 구제한다면
지혜는 막힘이 없다.
구슬을 소반에 놓은 것 같으니
소반은 선정이고 구슬은 지혜이다.

  명明

선정과 지혜가 마주 합하여
합한 뒤에야 밝아지나니
그리하여 저 만물을 비추면
만물은 제 모습을 숨기지 못한다.
마치 크게 둥근 거울이
정情 없이 사물에 응하는 것 같다.

  통通

지혜가 이르니 곧 밝고
밝으면 어둡지 않으며
밝음이 지극하면 이내 통하고
통하면 걸림이 없다.
걸림 없다 함은 무엇인가.
변화가 자유로운 것이다.

  제濟

신통의 힘은 일정치 않아
생각[念]에 감응하여 변화하지만
변화의 모습은 있는 것 아니어서
구함을 따라 볼 뿐이다.
이것이 대자비이니
하나로써 만萬을 구제한다.

  사捨

뭇 고통을 다 구제하고는
대자비도 또한 버린다.
괴로움이 참이 아니라면
자비인들 어찌 거짓 아니랴.
그러므로 중생은
진실로 제도할 것이 없다.

동안同安 찰察 선사의 십현담十玄談[서문을 겸함]

무릇 현담玄談과 묘구妙句는 3승乘을 벗어난다. 그러나 서로 섞여서 얽히지 않고 또 홀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근본에 맞춰서 쓰면 마치 수정 같은 하늘에 빛나는 달과 같고, 그림자를 굴려서 기틀을 없애면 마치 밝은 구슬이 바다에 숨겨진 것과 같다. 또 배우는 무리가 등급이 있다고는 하나 오묘한 이치의 무궁함을 통달하고 일삼는 자는 드물고 근원을 미迷한 무리들은 많다. 삼라만상의 사물 하나하나에 밝고, 혹은 이理와 사事에 쌍으로 즉하지만 명언名言이 모두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근히 달을 가리키는 것이니 단견端見에 착오를 일으키지 말라. 물을 뚫는 바늘에 미혹하지 말지니, 가히 주먹을 여는 보배를 부촉하노라. 사리事理를 밝히는 짧은 말로써 서를 줄인다.[경공卿公의 사원事苑에 말하기를 “총림叢林에서 행해지고 있는 십현담은 모두가 서문이 없다. 우낭愚曩의 유노부游盧阜에 있는 동안 선사의 영당影堂에서 그 서문을 얻었다”고 하였다. 지금 기록한다.]

  심인心印

그대에게 묻나니 심인이 어떤 모습이기에
심인을 뉘라서 감히 전해 줄 수 있으랴.
여러 겁을 지내도 평탄해서 다른 빛깔 없으니 
심인이라 불러도 벌써 헛말이 된다.
모름지기 본래 스스로 신령하고 빈 성품은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 연꽃 같음을 알아야 한다.
무심無心을 일러서 도라 하지 말지니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

  조의祖意

조사의 뜻은 공空인 듯하나 공은 아니니
신령한 기틀이 어찌 유와 무의 공력에 떨어지랴.
3현賢은 아직 이 종지를 밝히지도 못했거늘
10성聖인들 어찌 이 종지를 통달할 수 있으랴.
그물을 벗어난 황금 잉어는 여전히 물에 걸리고
길머리를 돌린 돌말[石馬]이라야 사롱沙籠을 벗어난다.
서쪽에서 오신 뜻을 은근히 말해 주나니
서쪽에서 와서 동쪽에 미쳤다고[及] 묻지 말라.

  현기玄機

기나긴 공겁空劫에도 능히 거두지 못하거늘
티끌의 기틀에 어찌 얽매임을 받으랴.
묘한 당체는 본래 처소處所가 없거늘
통틀어 몸인데 어찌 다시 자취의 말미암음이 있으랴.
신령스런 한 구절이 뭇 형상을 초월하여
3승의 경지를 벗어나니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
저편의 여러 성인 밖으로 두 손을 뿌리쳐 
길머리를 돌리면 불 속의 소가 되리라.

  진이塵異 티끌 속의 다른 경지를 말한다.


흐린 것은 스스로 흐리고 맑은 것은 맑으니
보리와 번뇌는 모두가 공하고 평등해서
감정할 사람이 없는데 누가 변벽(卞璧:변화의 구슬)을 말하랴.
내가 말하나니, 여의주는 도처에서 번쩍인다.
만법이 없어질 때에 온전한 바탕이 나타나고
3승이 나누어질 때에 거짓 이름을 붙인다.
대장부라면 하늘을 찌를 기상이 있어서
여래가 가는 곳이라도 가지 말아야 한다.

  가르침을 펴다

3승의 차례대로 금언金言을 연설하니
3세의 부처님들도 함께 선포하셨네.
처음에 유有와 공空을 말함에 사람들 모두가 집착하더니
나중에 공과 유를 부정할 때에 모두가 반연하더라.
용궁에 가득한 장경은 의원의 처방과 같은 뜻이나
학수鶴樹 부처님의 열반처이다.
에 끝까지 말해도 진리를 다하지 못했네.
참되고 맑은 세계 속의 잠깐 한 생각이
염부제에서는 벌써 8천 년이 지났다.

  달본達本

도중에서 공왕(空王:공의 진리)을 섬기지 말고
지팡이를 재촉하여 본래의 고향에 도달해야 한다.
구름과 물이 막혔을 때 그대는 머물지 말고
설산의 깊고 깊은 곳을 나는 잊지 않으리.
돌이켜 생각하건대 옥 같던 내 얼굴이 
이제는 귀밑머리가 서리 같음을 탄식하네.
손을 뿌리치고 집에 다다르니 아무도 모르는데
더구나 한 물건도 존당尊堂에 바칠 것 없네.

  환원還源

근본과 근원에 돌아간다 해도 일이 어긋나니
본래부터 머묾이 없으니 집이라 이름할 수 없네.
만년 솔[松]의 길에는 눈이 깊이 쌓였고
한 줄기 높은 봉우리에는 구름이 더욱 드리웠네.
손님과 주인이 침묵할 때는 순전히 허망함이요
군왕과 신하의 뜻이 맞으면 바름 가운데의 삿됨이다.
환향곡還鄕曲의 노래를 어떻게 부르랴.
명월당明月堂 앞에 마른나무 꽃이다.

  회기迴機

열반의 성안도 오히려 위태로우니
길에서 만나도 기약을 정할 수 없네.
방편으로 때 묻은 옷을 걸친 것이 부처라 한다면
진귀한 치장을 하고 나면 다시 무엇이라 이름하랴.
나무 사람이 밤중에 신을 신고 가는데 
돌 여자가 새벽에 모자를 쓰고 오네.
만고萬古에 푸른 못에 공계空界의 달을
두세 번 건져봐야 비로소 안단 말인가.

  전위轉位 지위를 바꾼다는 뜻이다.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외양간으로 들어가도
우담발화가 불 속에서 피어난다네.
번뇌의 바다에서는 비와 이슬이 되고
무명의 산마루에서는 구름과 우레가 되네.
확탕로탄鑊湯爐炭 나쁜 지옥을 불어서 없애고
검수도산劍樹刀山 험한 길을 소리 질러 무찌른다.
금 고리의 현관玄關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딴 종류(짐승)로 다니면서 윤회輪廻에 뛰어든다.

  일색一色

고목과 바위 앞에 갈림길이 많아서
행인들이 여기 와선 모두가 망설이네.
해오라기 눈에 섰지만 같은 빛깔이 아니요
밝은 달에 갈대꽃이라도 비슷하지 않다.
요달하고 요달하고 요달할 때[了了了時]에 요달한 바가 없으니
현묘하고 현묘하고 현묘한 곳[玄玄玄處]도 꾸짖어 버려라.
은근히 그대 위해 현묘함 가운데의 곡조를 부르나니
허공 가운데의 달빛을 만질 수 있겠는가.

운정산雲頂山의 승僧 덕부德敷의 10수

  말하고 침묵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한가로이 앉아서 명연冥然하니 성인도 알지 못하고
설사 말한다 해도 그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돌사람이 널빤지를 들고 구름 속에서 치니
나무 계집[木女]은 피리를 물고 물 밑에서 분다.
만일 듣지 못했다면 그는 밝히지 못한 것이요,
그 메아리를 찾고자 하면 그는 또한 의심하리라.
그대 만일 합창하려면 그대로 합창할지언정
곡보曲譜와 악기는 아예 묻지 말라.

  조사의 뜻과 교리는 매우 다르다

조사의 뜻은 아득히 한 구절을 전하는데
경전에서는 널리 펴서 3승을 인용하네. 
정명淨名의 거꾸로 선 봉우리에는 우레가 우짖는데
추자鶖子의 외로운 못에 달그림자가 맑다.
저자에서 생선을 팔다가 갈 길을 잊는가 하면
바위 옆에서 범에게 몸을 던져 왕생을 기대하는데
비록 같은 본체에서 벌어진 방편임을 알지만
마치 한여름 대낮의 외로운 등불 같네.

  학문은 비록 묘하지만

마음을 모아 도를 배우려는 이 티끌처럼 많으나
조계의 바른 뜻 아는 사람 몇이나 되나
만약 범부와 성인에 걸림 없게 할 수 있다면
문득 벽돌과 기왓장에 감응해도 참다운 수행이다.
별안간 일념의 삿된 마음을 일으키면
이미 여러 생의 방일한 원인을 지었네.
조사께서 친히 지시해 주시지 않았던들
기틀에 임하여 입을 열어도 끝내 진술하지 못했으리.

  질문이 와도 다만 대답하지 못하고

대답하는 구절이 분명하다고 자랑 말지니
구절과 말에 집착하면 그대를 그르친다.
다만 문수에 합하면 문득 도道이지만
저 거사의 까마득히 소리 없음에는 미치지 못한다.
주인을 만났거든 문을 두드릴 필요 없고
길을 알았거든 이정표의 이름을 버려라.
만일 말을 의심치 않고 다 알아 버리면
묵묵히 한 세상을 지낸들 어떠하리오.

  지적指的할 수 없다

남북에도 살지 않고 동서에도 살지 않거늘
상하와 허공엔들 견줄 수 있으랴.
조그마한 털끝을 나타내도 넓다 하더니
하늘 위까지 변화했어도 낮다고 트집을 하네.
사해四海를 단박에 말려서 붉은 티끌 일으키고
3도塗의 나쁜 업을 모두 없앤다 해도
이런 온갖 것은 모두가 무너지는 것이니
다시 앞으로 나아가 조계의 뜻을 물어라.

  스스로의 외고집을 즐긴다

외고집이 풍류는 못되지만
송문松門을 나서지 않기 몇십 년일세.
합장하고는 때때로 부처님께 문안하는 것도 게으른데 
허리를 굽혀서 왕후를 뵙는 것을 어찌 달가워하랴.
번개 같고 꿈결 같은 세상 견고하지도 영원하지도 못하니
애욕의 불 속의 중생들도 머지않아 쉬겠지만
스스로의 5온蘊이 본래 영각靈覺의 성품인데
잠시도 마음 머리에 걸어 두지를 못하네.

  문답을 할 때에는 일어나고 쓰러짐을 알라

문답을 할 때에는 일어나고 쓰러짐을 알아야 하니
용두사미龍頭蛇尾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왕이 칼을 빼는 것은 왕의 뜻에 달린 것과 같고
거울이 경대에 걸려서 사용할 사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눈을 깜박이면 들쑥날쑥 천 리나 아득하고
고개 숙여 생각하면 만 겹의 여울이 있다.
누구나 여기에서 깊은 소견 다투면
어찌 앞길에서 들여우가 될 뿐이겠는가.

  말과 행동이 맞아야 한다

말을 할 때에는 행하기가 쉽지 않으니
마치 해와 달의 두 가지 광명과 같다.
어찌 밤낮으로 정진한다고 되랴.
탐ㆍ진ㆍ치와 게으름에서 생긴 것도 아니다.
보살들도 설명해 미치지 못하거늘
성문들이 어떻게 논평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지위 없이 오래 한가롭게 앉았노라면
용신龍神들이 찾아와서 받들 줄을 뉘라 알리오.

  일구자一句子

한 구절이 현묘하여 다할 수 없으나
표연히 회통해 마치면 그가 어찌하리오.
세상일에 관계없이 일 없음[無事]을 이루니
조사다 교리다 함은 심마心魔이자 불마佛魔이다.
가난한 아들의 비유에서 이 길을 밝혔고
구슬을 바치는 게송 속에 벌리고 펼쳤다.
공문空門에 있는 길은 평탄하고 넓지만
간절히 부르건만 아무도 걸으려 하지 않네.

  고금古今의 대의大意

고금에 불자拂子로써 동쪽과 남쪽을 가리키나
대의는 그윽하고 미세해서 쉽사리 참구하려 않네.
손가락을 튀기고 머리를 끄덕임은 원래 하나요
눈동자를 굴리고 손뼉을 치는 것 본래 셋이 아니다.
도오道吾가 홀笏을 들고 춤춘 것, 같은 사람끼리 알고
석공石鞏이 활을 당긴 것, 작자作者라야 안다.
이 이치를 스승이 인가해서 주지 않았다면
어떤 견처見處로 현담玄談을 말하고자 하는가.


승僧 윤潤의 시詩 3수

  󰡔보림전寶林傳󰡕을 읽다가

조사의 달, 선禪의 바람이 보림寶林에 모이니
2천여 년의 도道를 찾을 만하다.
아무리 서쪽 나라와 동쪽 나라를 나누어도
인간 마음이 부처 마음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가섭이 최초로 받아서 전해감이 성대하고
혜능이 마지막이니 얻어서 옴이 깊었다.
이 글을 보고 단박에 깨달아서 범부를 초월하고는
저들이 언제나 고금에 미혹되었음을 걱정하네.

  어느 수행자에게 주다

한마디가 참되고 공하여 세간을 벗어났거늘
불쌍하다, 미혹한 이 개미같이 도는구나.
금생이 삼선천락三禪天樂에 앉은 것보다 나으니
좋은 구절을 길게 읊으면 만사가 그만이다.
가을 달 둥글어지니 구경하다 밤새웠고
들판의 구름 흩어지니 어느 산에 떨어졌나.
끝끝내 스스로 요달해야 비로소 요달하는 것이니
저 경전을 집착하지 말고 조사의 관문을 두드려라.



  어느 선객에게 주다

허망을 요달하여 참에 돌아가면 만 가지 생각이 공하니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범부와 성인은 그 본체가 통해서 같다.
미혹할 땐 모두가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같고
깨달으면 누구나 조롱에서 나온 학과 같다.
조각달 그림자는 천 갈래 강에 비쳤고
외로운 소나무 소리 4시時의 바람결에 맡겼네.
곧바로 심지心地에 마음이 은밀히 계합할지언정
공연히 수고롭게 꿈속을 헤매지 말라.



경덕전등록 제30권






명銘ㆍ기記ㆍ잠箴ㆍ가歌

부傅 대사大士의 심왕명心王銘
3조 승찬僧璨 대사의 신심명信心銘
우두산牛頭山 초조初祖 법융法融 선사의 심명心銘
이름을 잃은 스님의 식심명息心銘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약변대승입도사행略辨大乘入道四行[제자 담림    曇琳이 서문을 쓰다.]
하택荷澤 대사의 현종기顯宗記
남악南嶽 석두石頭 대사의 참동계參同契
오대산五臺山 진국鎭國 대사 징관澄觀이 황태자皇太子 문심요問心    要에 답함
항주杭州 오운五雲 화상의 좌선잠坐禪箴
영가永嘉 진각眞覺 대사의 증도가證道歌
등등騰騰 화상의 요원가了元歌
남악南嶽 나찬懶瓚 화상의 가歌
석두石頭 화상의 초암가草庵歌
도오道吾 화상의 낙도가樂道歌
일발가一鉢歌[다른 기록에 의하면 배도杯渡 선사가 썼다고 한다.]
낙보樂普 화상의 부구가浮漚歌
소계蘇谿 화상의 목호가牧護歌
법등法燈 선사의 고경가古鏡歌 3수
담주潭州 용회龍會 도심道尋의 변참삼매가遍參三昧歌
단하丹霞 화상의 완주음翫珠吟 2수
관남關南 장로의 획주음獲珠吟
향엄香嚴 화상의 여각음勵覺吟ㆍ귀적음歸寂吟 2수
소산韶山 화상의 심주가心珠歌


명銘ㆍ기記ㆍ잠箴ㆍ가歌

부傳 대사大士의 심왕명心王銘 마음 바탕을 노래한 것이다.


마음인 공왕空王을 관찰하건대
현묘해서 측정하기 어렵구나.
형태도 없고 모습도 없건만
커다란 신통력을 가졌네.
천 가지 재앙을 소멸시키고
만 가지 공덕을 성취하는데
본체의 성품은 공하지만
능히 법칙을 시설한다.
보기에는 형상이 없지만
부르면 소리는 있으니
큰 법장(法將:장수)이 되어서
마음의 계법으로 경을 전하네.
물속의 짠맛과
색깔 속의 아교가
분명히 있기는 하나
그 형태는 볼 수 없나니
심왕心王도 그러하여서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네.
눈과 입 등으로 출입하면서
사물에 감응하고 정세에 따르니
자유롭고 걸림이 없어서
하는 일 모두가 이루어진다.
본래의 식심識心을 요달하면
식심으로 부처를 보나니
이 마음이 부처요
부처가 이 마음일세.
생각 생각이 부처의 마음이니
부처의 마음이 부처를 생각하네.
빨리 성취하기를 바라거든
계율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단속하라.
계율이 깨끗하고 마음이 깨끗하면
마음이 곧 부처이다.
이 심왕을 떠나서는 
다시 딴 부처는 없나니
부처가 되기를 바란다면
한 물건에도 물들지 말라.
마음의 성품은 공하지만
탐ㆍ진ㆍ치의 체體는 실다우니
이 법문에 바로 들어와서
단정히 앉아서 부처가 되면
저 언덕에 이르러서
바라밀을 얻게 된다.
도를 흠모하는 참 도사는
스스로의 마음을 스스로 관찰하여
부처가 안에 있음을 알고서
밖을 향해 찾지 않는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요
부처 그대로가 마음이니
마음이 밝으면 부처를 알아채고
밝혀서 요달하면 마음을 알아챈다.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아니요
부처를 떠나서는 마음이 아니니
부처가 아니면 측정하지 못하고
맡김을 감당하지도 못한다.
공에 막히고 고요함에 걸리면
여기에서 표류하고 가라앉지만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여기에 마음을 안주하지 않는다.
마음을 밝힌 대사는
이 현묘한 소리를 깨달아서
몸과 마음의 성품의 묘함을
쓰면서도 다시 바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여,
마음을 놓아서 자재하라.
심왕이라고도 말하지 말지니
공하여 체성體性이 없기에
능히 색신色身을 사용해서
사邪도 짓고 정正도 짓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숨었다 드러났다 일정하지 않네.
마음의 성품이 공을 여의면
능히 범부도 되고 성인도 되니
그러므로 간절히 권하나니
스스로 잘 지키어 간직하라.
찰나라도 조작造作을 하면
다시 떠다니게 되고
청정한 마음의 지혜는
세상의 황금과 같다.
반야의 법 창고[法藏]는
모두가 몸과 마음에 있으니
무위법의 보배는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이 근본 마음을 요달했으니
인연이 있어 만나는 이는
과거나 미래, 현재도 없다.

3조祖 승찬僧璨 대사의 신심명信心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하는 짓이 탈이니라.
미워하고 좋아하는 생각만 없으면
훤하게 트여서 명백하리라.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 땅 사이로 막히나니
현전現前에서 얻고 싶다면
순종함과 거스름을 간직하지 말라.
어기고 순종함이 서로 다투는 것이
바로 마음의 병이니
현묘한 취지를 알지 못하면
공연히 고요함만을 생각한다.
원만함이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거늘
취했다 버렸다 하기 때문에
여여如如하지 못하게 된다.
유有의 인연을 쫓지도 말고
공의 인식에도 머물지 말라.
한 가지 평탄한 생각을 가지면
사그라지면서 저절로 다하리라.
움직임을 멈추게 해서 멈춤에 돌아가면
멈춤은 더욱더 움직이게 되니
오직 양변兩邊에만 막혀 있으면
어찌 한 가지임을 알리오.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양쪽에서 공功을 잃나니
유를 버리려면 유에 빠지고
공을 따르려면 공을 등진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상응相應하지 않나니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
뿌리에 돌아가면 종지를 얻고
비춤[照]을 따르면 종지를 잃나니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추면
앞의 공보다 훨씬 나으니라.
앞의 공이 전변轉變하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소견을 말미암으니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소견을 쉬어야 한다.
두 가지 소견에 머물지 않거든
삼가고 뒤쫓아 찾지 말라.
까딱이라도 옳고 그름이 있으면
어지러이 마음을 잃으리라.
둘이란 하나를 말미암아 있으니
하나도 또한 지키지 말라.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가지 법이 허물이 없으니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생겨나지 않으면 마음도 아니다.
주체[能]는 객체[境] 소所라고도 한다.
를 따라 사라지고
객체는 주체를 따라 없어지나니
객체는 주체를 말미암아 객체이고
주체는 객체를 말미암아 주체이다.
이 두 단락을 알고자 하는가.
원래가 하나의 공이니
하나의 공이 양쪽과 똑같아서
만상萬象을 가지런히 머금는다.
정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않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으랴.
대도大道는 본체가 너그러워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작은 소견들이 의심을 일으켜서
더욱 급하거나 더욱 더디게 군다.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서
반드시 삿된 길에 들고
놓으면 스스로 그러해서
본체는 가고 머묾이 없나니
성품에 맡겨 도에 합하면
소요하면서 번뇌를 끊으리라.
생각[念]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고
혼침昏沈하면 좋지 않으니
정신을 괴롭힘이 좋지 않거늘
어찌하여 친하고 성글게 굴리오.
1승乘을 취하고자 하거든
6진塵을 싫어하지 말 것이며
6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正覺과 같아지니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니와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결박된다.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허망하게도 스스로 애착하니
마음을 갖고서 마음을 쓰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랴.
미혹이 생기면 고요함이 흩어지고
깨달으면 좋고 나쁨이 없나니
온갖 것의 두 치우친 끝을
진실로 잘 요량해 보아야 한다.
꿈 같고 허깨비 같고 허공 꽃 같은 것을
어찌하여 수고롭게 잡으려 하는가.
얻고 잃음,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눈에 졸음이 없으면
온갖 꿈은 저절로 없어지고
마음에 차이가 없으면
만법은 일여一如하리니
일여의 본체는 현묘하여서
우뚝하여 반연을 잊었다.
만법을 가지런하게 관찰하면
모두가 자연으로 복귀하니
그 까닭이 있는 것 아니어서
바야흐로 견줄 수가 없다.
멈춤이 움직임이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움직임이 멈춤이면서도 멈춤이 없나니
두 가지는 이미 이뤄지지 않는 것이니
하나인들 어찌 있으리오.
구경究竟의 궁극窮極은
궤칙을 간직하지 않나니
마음이 평등에 계합되면
모든 작위가 함께 쉬어지고 
여우같은 의심이 말끔히 청정해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고 곧아지며
일체를 남겨두지 않으면
기억할 만한 것도 없다.
비고 밝아서 스스로 비추는 것은
마음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생각으로 헤아리지 못할 곳이며
의식의 정情으로도 헤아리기 어렵다.
진여의 법계이매
타他도 없고 자自도 없으니
재빨리 상응하기를 바라거든
오직 둘 아님을 말하라.
둘 아니면 모두 똑같아서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이
모두가 이 종지로 들어왔다.
종지란 늦고 빠름이 아니니
일념이 만년이요
존재함도 존재하지 않음도 없어서
시방세계가 눈앞이다.
지극히 작으면 큰 것과 같으니
경계가 모두 없어지고
지극히 크면 작은 것과 같으니
변두리도 겉도 보이지 않는다.
있음은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만일 이렇게 되지 않았거든
반드시 꼭 지킬 필요가 없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어찌 끝내지 못할까 근심하랴.
신심은 둘 아님이요
둘 아님이 신심이니
언어의 길이 끊겨서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아니다.

우두산牛頭山의 초조初祖 법융法融 선사의 심명心銘

심성心性은 나지 않거늘
어찌 알아보겠는가.
본래부터 한 법도 없거늘
누가 닦아 익힘을 논하랴.
가고 옴이 까닭 없으니
뒤쫓아도 보이지 않고
일체가 작위가 없으면
밝고 고요함이 저절로 나타난다.
전제前際는 허공과 같거늘
아는 곳에서 종지를 미혹하고
분명히 경계를 비추거늘
비춤을 따르다가 캄캄해진다.
한마음에 막힘이 있으면
모든 법이 통하지 않으니
가고 옴이 스스로 그렇거늘
어찌 추궁할 필요가 있으랴.
생겨나도 생겨나는 모습이 없어서
생겨남과 비춤은 하나로 똑같다.
마음이 깨끗하고 싶다면
무심으로 공功을 지어라.
종횡으로 비춤이 없는 것
그것이 가장 미묘하니라.
법을 알아도 아는 것이 없나니
아는 것 없어야 요체를 아는 것이다.
마음을 가지고 고요함을 지키면
여전히 병을 여의지 못한 것이니
나고 죽는다는 생각조차 잊어야
그것이 바로 본래의 성품이다.
지극한 이치는 언전言詮이 없어서
속박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지만
신령스럽게 통하면서 사물에 응하여
항상 눈앞에 존재한다.
눈앞에 물건이 없으면
물건 없음이 완연하니
지혜로써 살필 필요도 없이
본체 스스로 비고 현묘하다.
생각이 일고 생각이 멸함에
앞과 뒤의 차별이 없나니
뒷생각이 생겨나지 않으면
앞생각은 저절로 끊어진다.
3세에 아무런 물건도 없고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나니
중생도 무심無心이지만
무심에 의거해서 나온다.
범부와 성인을 분별하면
번뇌가 더욱 성해지나니
계교하면 항상함을 어기고
참을 구하면 올바름을 등진다.
대치對治가 쌍으로 없어지면
담연湛然하여 밝고 맑으니
교묘한 수단을 행할 것 없이
어린이의 행실을 지켜라.
또렷또렷하게 요달해 안다면
소견의 그물이 더욱 얽히고
적적하여 보는 바가 없으면
어두운 방에서 옮기지 못한다.
또렷또렷하여 허망함이 없으면
적적하고 밝고 청량해서
만상이 항상 참되고
삼라森羅가 한 모습이리라.
가고 오고 서고 앉음에
온갖 것에 집착하지 말라.
결정코 방위가 없나니
누가 나가고 누가 들어가랴.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더딤도 없고 빠름도 없으면
밝고 고요함이 스스로 그러해서
말로는 미치지 못한다.
마음은 딴 마음이 없어서
탐욕과 음심을 끊을 수 없지만
성품이 공하면 저절로 여의어서
성품에 맡기어 떴다 잠겼다 한다.
맑지도 흐리지도 않고
깊지도 얕지도 않으니
본래부터 있어도 옛날이 아니고
존재를 보아도 지금이 아니다.
존재를 보아도 머묾이 없으면
존재를 보는 것이 근본 마음이니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바로 지금이다.
보리菩提는 본래부터 있으니
지켜야 할 필요가 없고
번뇌는 본래 없으니
없앨 필요가 없다.
신령한 앎이 스스로 비추면
만법은 진여에 돌아가니
돌아갈 바 없고 받을 것 없으면
관법도 끊고 지킴[守]도 잊는다.
네 공덕[四德]이 생겨나는 것 아니고
3신身이 본래 있는 것이니
여섯 감관이 경계를 대하여도
분별하는 것은 식識이 아니다.
한마음에 허망이 없으면
만 가지 인연이 고르고 곧아지니
마음과 성품은 본래 가지런한 것이어서
함께 살면서도 서로 이끄는 것 아니다.
무생無生으로 사물에 순응하면
처소에 따라 그윽하게 깃든다.
깨달음은 깨닫지 못함을 말미암고
깨달음에 즉하면 깨달음 없는 것이니
얻고 잃는 두 쪽에서
누가 좋고 나쁨을 말하랴.
온갖 유위의 법은 
본래 조작이 없으니
마음이 마음 아닌 줄 알면
병도 없고 약도 없나니
미혹했을 때에는 사事를 버리다가
깨달으면 다르지 않게 여긴다.
본래 취할 것이 없거늘
이젠들 어찌 버릴 필요가 있으랴.
이른바 마魔가 일어나서
빈 형상이 갖추어졌다고 하지만
범부의 망정을 없애지 말고
오직 뜻을 쉬게만 하라.
뜻에는 마음의 멸함이 없고
마음에는 행行의 끊김이 없으니
공을 증득할 필요도 없이
자연히 밝게 사무치리라.
생사를 멸하여 다하면
그윽한 마음으로 이理에 들어가고
눈을 떠서 모습을 보면
마음이 경계를 따라 일어난다.
마음의 처소에는 경계가 없고
경계의 처소에는 마음이 없으니
마음을 갖고서 경계를 없애려 하면
서로 서로가 침노할 뿐이다.
마음이 적멸하면 경계도 여여如如하여서
버리지도 않고 구속받지도 않는다.
경계는 마음을 따라 멸하고
마음은 경계를 따라 없으니
두 곳에서 생겨나지 않으면
고요하고 비고 밝아진다.
보리는 그림자같이 나타나고
마음의 물은 항상 맑으며
덕의 성품은 어리석은 듯하여
친하고 성김을 세우지 않는다.
칭찬과 훼방에도 요동치 않고
사는 곳도 가리지 않아서
모든 반연을 단박에 쉬면
온갖 것이 기억에 들지 않나니
긴긴 해가 밤과 같고
긴긴 밤이 낮과 같다.
겉으로는 시끄러운 것 같으나
안으로는 비고 곧아서
경계를 대하여 요동치 않으면
힘이 있는 큰 사람[大人]이다.
사람이 없으면 보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으면 항상 나타나서
온갖 것을 통달하여
두루하지 않은 적이 없다.
생각할수록 더욱 어두워져서
정신을 어지럽게 하니
마음을 써서 움직임을 그치려고 하면
그치려고 할수록 더욱 분주해진다.
만법은 대상[所]이 없어서
오직 한 문門 뿐이라서
들어가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으며
고요함도 아니고 시끄러움도 아니다.
성문이나 연각의 지혜로는
능히 논할 수가 없나니
진실로 한 물건도 없어서
묘한 지혜만이 홀로 존재한다.
근본의 경지[本際]는 텅 비어서
마음으로 궁구할 바 아니니
바른 깨달음은 깨달음이 없고
참된 공은 공이 아니다.
3세의 부처님들이
모두 이 종宗에 의거했으니
이 종지에서는 터럭 끝에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를 포용하였다.
일체를 돌아보지 말지니
안주한 마음은 처소가 없고
처소가 없으면 마음이 안주해서
비고 밝음이 저절로 드러난다.
고요하고 고요하면 생겨나지 않아서
거침없이 자유자재하고
하는 일에 걸림이 없으면
가고 머묾에 모두가 평등하리라.
지혜의 태양은 적적寂寂하고
선정의 광명은 밝고 밝아서
무상無相의 동산을 비추고
열반의 성城을 밝힌다.
온갖 반연을 다 잊으면
정신과 기질이 안정되나니
법좌法座를 일어나지 않고도
텅 빈 방에서 편안히 잠들리라.
도를 즐기면서 담연하여
진실에 걸림 없이 노닐면
함도 없고 얻음도 없어서
없음에 의거해 저절로 나오리라.
4등等과 6도度가
똑같이 1승乘의 길이나
마음이 생겨나지 않으면
법에는 차별이 없으리라.
생겨나면서 생겨남이 없는 줄 알면
현전하여서 항상 머무나니
지혜로운 이라야 비로소 알지
말로써 깨달을 바가 아니다.

식심명息心銘[지은 스님의 이름을 모름]

법계에 여의보如意寶로 된 사람이 있는데, 오래도록 그 몸을 봉함해 두고 가슴에는 ‘옛날의 마음을 가다듬던 사람’이라 새겼으니, 경계할 일이다.
많이 생각하지 말고 많이 알지 말라. 많이 알면 일이 많으니 뜻을 쉬는 것만 못하고, 생각이 많으면 잃는 것이 많으니 하나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생각이 많으면 뜻[志]이 흩어지고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어지럽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번뇌가 생기고 뜻이 흩어지면 도에 방해가 된다. 무슨 방해가 되랴 하지 말라. 그 괴로움이 더욱 길어지리라. 무엇이 두려우랴 하지 말라. 그 화가 더욱 끓어오른다. 물방울도 멈추지 않으면 사해四海가 가득 차고, 작은 티끌도 털지 않으면 오악五嶽이 이루어진다.
끝을 막는 것은 근본에 있으니, 비록 작더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대의 일곱 구멍을 막고 그대의 여섯 감정을 막아서 빛깔에도 드러내지 말고 소리에도 듣지 말라. 소리를 듣는 이는 귀머거리요, 빛깔을 보는 이는 소경이니, 문장 하나, 기예 하나가 공중에 작은 각다귀요, 기량 하나, 능력 하나가 대낮의 등불이다.
재능과 기예가 있는 재사가 도리어 어리석은 무리이니, 본래의 순박함을 버리고 넘치는 화려함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의식의 말은 분주하기 쉽고 마음의 말은 붙들기 어려우니, 정신이 이토록 피로하면 몸은 따라서 망가지기 마련이다. 삿된 행은 끝내 미혹하고, 도를 닦는다 함은 영원히 진흙구덩이에 빠진다.
재주 있음을 귀히 여기지 말지니, 날마다 어리석음을 더한다. 서투름을 뽐내거나 공교함을 자랑하면 그의 덕은 넓지 못하고, 명성은 두터운데 행실이 얄팍하면 그 높은 지위가 속히 무너지고, 안으로 교만한 생각을 품으면 밖으로 원한과 미움을 불러들인다.
혹 입으로 지껄이거나 글로 써서 남의 칭찬을 받는다 하여도 몹시 추잡한 일이니, 범부들은 길하다 하나 성인은 허물로 여긴다. 감상하는 것은 잠깐이지만 슬프고 괴롭기는 긴 시간이다. 그림자와 자취를 두려워하여 빨리 뛰면 뛸수록 빨리 따라오지만, 나무 밑에 단정히 앉으면 자취도 그림자도 저절로 사라진다.
나는[生] 것을 싫어하고 늙는 것을 근심하면서 생각을 따르고 조작을 따르니, 마음의 상념이 멸하면 생사도 길이 끊어지고, 나지 않고 죽지 않으면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다. 한 가닥의 길이 비고 고요하여 만물이 가지런하고 평등하니,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하며, 무엇이 욕되고 무엇이 영화로우며, 무엇이 낫고 무엇이 못나며,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가벼우랴. 맑은 하늘은 더할 수 없이 맑고, 밝은 해는 더 밝을 수 없이 밝으니, 드높은 봉우리 위에 안정시킴이 저 금성金城과 같다. 삼가 현명한 여러분에게 주나니, 이 도는 이롭고 정숙하다.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약변대승입도사행略辨大乘入道四行[제        자 담림曇琳이 서문을 쓰다.]

법사는 서역西域 남천축국南天竺國의 큰 바라문 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재주가 뛰어나서 듣는 것은 모두 깨달았는데, 마하연摩訶衍의 도에다 뜻을 두었으므로 속세를 버리고 입산하여 성인의 종자를 이었다. 그윽한 마음이 비고 고요해서 세상일을 환히 비추었으며, 안팎을 모두 밝혀서 덕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변두리에서는 바른 교법이 벌써 쇠퇴하는 것을 슬프게 여긴 탓에 마침내 멀리 산과 바다를 건너서 중국을 교화하니, 마음을 잊은 선비는 모두가 믿고서 귀의하였지만 소견을 간직한 무리는 비방을 일삼았다.
이때에 도육道育과 혜가慧可 두 사문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나이는 어리나 기상이 높았다. 다행이 법사를 만나 몇 해를 섬기면서 정성껏 묻고 배워서 법사의 가르침을 잘 받드니, 법사는 그의 정성을 기특히 여겨 참된 길로 인도해 주었다. 바른 길이라 함은 이렇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렇게 행을 일으키고, 이렇게 사물에 순응하고, 이렇게 방편을 쓰라는 것이니, 이는 대승의 마음 안정시키는 법으로서 착오가 없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안정시킨다 함은 벽관壁觀이요, 이렇게 행을 일으킨다 함은 네 가지 행이요, 이렇게 사물에 순응한다 함은 비방을 막는 것이요, 이렇게 방편을 쓴다 함은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대략을 서술한 것이다.
도에 들어가는 길이 많으나 요약해서 말하건대 두 가지에 지나지 않나니, 하나는 이치로 들어감[理入]이요, 하나는 행으로 들어가는[行入] 것이다.
이치로 들어간다 함은 교리에 의거해 종지를 깨닫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똑같이 참 성품이지만 번뇌 망상에 덮여서 드러나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믿고서 만일 허망함을 버리고 참됨에 돌아가서 응연凝然히 머물러 벽관壁觀을 하면 나도 없고 너도 없어 범부와 성인이 평등하다. 여기에 굳건히 머물러 옮기지 않으면 다시는 글이나 교리에 따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치와 그윽이 부합해서 분별이 없고 고요하여 함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이치로 들어간다’고 한다.
행으로 들어간다 함은 네 가지 행을 말하나니, 그 밖의 행은 모두가 여기에 포함된다. 무엇이 네 가지 행인가? 첫째는 빚을 갚는 행이요, 둘째는 인연을 따르는 행이요, 셋째는 구하는 바가 없는 행이요, 넷째는 법에 맞는 행이다.
무엇을 빚 갚는 행이라 하는가? 도를 닦아 행하는 사람이 만약 괴로움을 당하면 마땅히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셀 수 없이 많은 옛날부터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따라 온갖 유有를 다니면서 많은 원수를 맺고 무수한 생명을 죽였다. 비록 지금은 아무 범한 일이 없지만, 이는 나의 전생 나쁜 업의 과보로 받은 것이지, 하늘이나 인간이 능히 보고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는 마음으로 달게 받아 아무런 원망도 말자.’
경에 말하기를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치 않나니, 무슨 까닭인가? 알아서 달관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마음을 낼 때에 이치와 상응하여서 원망을 받아도 도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빚을 갚는 행이라 한다.
둘째, 인연을 따르는 행이라 함은 중생은 내[我]가 없어서 모두가 반연과 업에 의해 굴려지니,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것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겼는데, 만일 훌륭한 과보와 명예로운 일을 얻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나의 전생 인연이 감응한 것이다. 지금 바야흐로 얻었으나 인연이 다하면 도리어 없어질 터인데 어찌 기뻐하랴.’
얻고 잃음은 인연에 따를 뿐 마음은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어서 기쁨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도에 순응하는 까닭에 인연에 따르는 행이라 한다.
셋째, 구하는 바 없는 행이라 함은 세상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혹하여서 곳곳에서 탐내고 집착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구한다’고 한다. 지혜로운 이는 참됨을 깨달아 이치로 세속의 반反을 거느리고, 마음을 안주하여 함이 없어서 형상은 운運에 따라 구른다. 만유萬有가 이렇게 공하여 원하고 즐기는 바가 없으니, 공덕과 어두움이 항상 서로 따르면서 삼계에 오래 사니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몸이 있으면 모두가 괴롭거늘 어떻게 편안하랴. 이런 처지를 요달해서 온갖 유有를 버리므로 상념이 쉬고 구함이 없다. 경에 말하기를 “구함이 있으면 괴롭고, 구함이 없어야 즐겁다” 하였으니, 구함이 없어야 참다운 도행道行임을 분명히 알겠다. 그러므로 구하는 바 없는 행이라고 말한다.
넷째, 법에 맞는 행이다. 성품이 청정한 이치를 가리켜서 법이라 하는데, 이 이치는 온갖 모습이 공해서 물듦도 집착도 없고, 이쪽도 저쪽도 없다. 경에 말하기를 “법에는 중생이 없나니 중생의 때를 여의기 때문이요, 법에는 내가 있지 않나니 나라는 때를 여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지혜로운 이가 이 이치를 능히 믿고 이해한다면 마땅히 법에 맞추어 행해야 한다. 법의 본체는 인색함이 없으니, 몸으로나 재물로 보시를 행하면 인색한 마음이 없어지고, 3공空을 요달하면 기대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오직 더러움을 없애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칭하면서도 형상을 취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의 행[自行]으로서 능히 남도 이롭게 하고 능히 보리의 길을 장엄하기도 한다. 보시의 법이 이미 이렇다면 나머지 다섯 바라밀도 이러하나니, 망상을 없애기 위해 여섯 바라밀을 수행하나 행하는 바 없으면, 이것이 법에 맞는 행이다.

하택荷澤 대사 현종기顯宗記

무념無念이 조종이요, 무작(無作:작위 없음)이 근본이며, 진공眞空이 본체요, 묘유妙有가 작용이다.
진여라 함은 무념이니 상념으로 능히 알 수 없고, 실상은 생멸이 없으니 어찌 색심色心으로 능히 볼 수 있으랴. 무념의 염念은 곧 진여를 염하는 것이요, 무생無生이면서 나는 것은 곧 실상을 내는 것이다. 머무름 없으면서 머무니 항상 열반에 머무르고, 행이 없으면서 행하니 바로 저 언덕으로 초탈한다.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움직임의 작용이 다함이 없고, 생각 생각에 구함이 없으니 본래의 무념을 구한다. 보리는 얻음이 없으나 5안眼을 맑혀야 3신身을 요달하고, 반야는 앎이 없으나 6통通을 운용해서 4지智을 넓힌다.
이로 인하여 선정에 즉하면서 선정이 없고, 지혜에 즉하면서 지혜가 없고, 행에 즉하면서 행이 없음을 안다. 성품은 허공과 동등하고 본체는 법계와 똑같으니, 6바라밀이 이로 인하여 원만해지고 도품道品이 이로 인하여 이지러짐이 없어지나니, 이 까닭에 나와 법의 본체가 공하고, 유와 무가 겸하여 없어졌음을 알겠다.
마음은 본래 작위가 없고 도는 항상 무념이니, 염念도 없고 생각도 없으며, 구함도 없고 얻음도 없으며,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본체는 3명明을 깨달았고, 마음은 8해탈을 통하니, 공덕은 10력을 이루고, 부귀로는 7진珍이 구족하다.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서 1승의 이치를 얻으니, 묘한 가운데의 묘함이 바로 묘한 법신이요, 하늘 가운데의 하늘이 바로 금강의 지혜이다.
담연湛然하고 항상 고요하고 감응하여 작용하는 데 방위가 없으니, 작용하되 항상 공하고 공하면서도 항상 작용한다. 작용하나 있지 않으니, 그것이 진공眞空이요, 공하나 없지 않으니, 그것이 묘유妙有를 이룬다. 묘유는 곧 마하반야摩訶般若이고, 진공은 곧 청정열반淸淨涅槃이다. 반야는 열반의 원인이요, 열반은 반야의 결과이니, 반야는 봄이 없으면서도 능히 열반을 보고, 열반은 생김이 없으면서도 능히 반야를 낸다.
반야와 열반은 이름은 다르나 본체는 같으니, 뜻을 따라 이름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법은 일정한 모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열반은 능히 반야를 내나니, 이를 이름하여 참 부처님의 법신이라 하고, 반야는 능히 열반을 건립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래의 지견知見이라 한다. 안다 함은 마음이 공적함을 아는 것이요, 본다 함은 성품이 나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알고 보는 것이 분명하여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그 까닭에 움직이고 고요함에 항상 묘하고 이理와 사事가 모두 여여如如하다. 여여하면 곳곳에서 통달하고, 통달하면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다.
여섯 감관이 물들지 않음은 선정과 지혜의 공력이요, 여섯 식識이 나지 않음은 여여의 힘이다. 마음이 여여하면 경계가 물러가고, 경계가 사라지면 마음이 공하다. 마음과 경계가 쌍으로 없어져서 본체와 활용이 다르지 않으면, 진여의 성품이 청정하고 지혜의 비춤이 끝이 없나니, 마치 물에 천 개의 달이 나뉘는 것처럼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나 항상 공적하니, 공함은 곧 모습이 없는 것이요, 적적함은 곧 생멸이 없는 것이다. 선과 악의 구속을 받지 않고, 고요함과 어지러움의 포섭도 받지 않으며,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고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없음은 능히 없음이 아니고, 있음은 능히 있음이 아니니,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누움에 마음을 요동하지 않으면 어느 때나 얻을 바 없음을 얻나니, 3세의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 이렇다.
보살께서 자비를 일으키시어 차례차례 전해 주시니, 세존께서 입멸하신 뒤에 인도에서 28조들이 모두가 머무름 없는 마음을 전하시고 똑같이 여래의 지견을 말씀하시다가 달마에 이르러 이 땅에서 초조가 되셨다. 다시 다음 다음으로 전하여 지금껏 끊이지 않았는데, 전하신 바 비밀한 교법은 반드시 사람을 얻는 데 의존함이 마치 왕의 동곳 구슬을 헛되이 전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장엄으로 행실과 견해가 상응해야 비로소 능히 건립한다.
옷은 법의 신표이고 법은 옷의 종지이니, 오직 옷과 법을 전했다고 가리킬 뿐 다시 다른 법이 없다. 안으로 심인心印을 전하여 본심에 계합하고, 겉으로 가사를 전하여 종지를 표시하니, 옷이 아니면 법을 전하지 못하고, 법이 아니면 옷을 받지 못한다. 옷은 법을 표시하는 옷이요, 법은 무생의 법이니, 무생이면 곧 허망함도 없어서 바로 공적한 마음이다. 공적을 알아야 법신을 요달하고, 법신을 요달해야 참다운 해탈이다.

남악南嶽 석두石頭 화상의 참동계參同契 같이 공부에 참가하자는 취지.


인도의 큰 선인의 마음을
동서에서 비밀히 서로 부합하니
사람의 근기에는 둔하고 영리함 있으나
도에는 남북의 조사가 없다.
신령한 근원은 맑고 맑으나
곁가지가 암암리에 흘러 들어가니
사事에 집착하면 원래 미혹한 것이요
이理에 계합하여도 또한 깨달음은 아니다.
문門마다 일체의 경계이니
회호廻互하면서도 회호하지 않으니
돌이켜서 다시 서로 엇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위에 의거해 머문다.
색色은 본래 물질의 형상과 다르고
소리는 원래 즐거움이나 괴로움과 다르다.
상ㆍ중의 말에 가만히 부합하면
명명明明하게 맑고 흐린 구절이다.
4대大의 성품이 저절로 회복됨이
마치 자식이 어미를 만난 것 같으니
불은 뜨겁고 바람은 흔들리며
땅은 견고하고 물은 축축하며
눈에는 빛깔이고 귀에는 음성이며
코에는 냄새이고 혀에는 맛이다.
그러나 낱낱의 법에 의거하여
뿌리에 근거해 잎이 퍼지니
근본과 끝은 조종에 돌아가야 한다고
높은 이든 낮은 이든 그렇게 말한다.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 있다 해도
어두움으로써 만났다 여기지 말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다 해도
밝음으로써 만났다 여기지 말라.
밝음과 어두움이 각기 서로 대함은
마치 앞뒤의 걸음걸이와 같다.
만물은 스스로 공덕이 있으니
당면하여 작용과 처소를 말하라.
사事는 궤와 뚜껑이 맞는 것 같고
이理는 활과 화살이 버티는 것 같으니
말을 듣고는 바로 종지를 알지언정
스스로로 법규를 세우지는 말라.
눈에 닿는데도 도를 알지 못하면
발을 옮긴들 어찌 길을 알랴.
진보進步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니
미혹하면 산하가 굳게 막힌다.
삼가 현묘함을 배우는 이에게 말하노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오대산五臺山 진국鎭國 대사 징관澄觀이 황태자문심요        皇太子問心要에 답함

지극한 도는 그 마음에 근본을 두고
마음의 법은 머무름 없음이 근본이다.
머무름 없는 마음의 본체는
신령스런 앎으로 어둡지 않고
성품과 형상이 고요하며
공덕과 작용을 포함하고
안팎을 두루 포섭하며
능히 깊고 능히 넓기도 하고
있음도 아니고 공함도 아니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다.
구해도 얻을 수 없고
버려도 여의지 못하나니
현량現量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것.
에 미혹하면 분주히 괴롭고
참 성품을 깨달으면
비고 밝아서 확 트인다.
비록 마음이 부처라고는 하나
증득한 이라야 비로소 안다.
그러나 증득함도 있고 앎도 있으면
지혜의 태양이 유有의 땅에 빠지고
비춤도 없고 깨달음도 없으면
어두운 구름이 공의 문에서 걷힌다.
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앞과 뒤의 경계[際]가 끊어지고
비추는 본체가 홀로 우뚝하면
사물과 내가 모두 여여하다.
곧장 마음의 근원에 나아가면
앎도 없고 얻음도 없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면
대對함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
그러나 미혹과 깨달음이 엇갈려 의지하고
참과 허망함이 마주 상대하니
참을 구하려고 허망함을 없애면
마치 그림자를 버리려고 애쓰는 것과 같고
허망함이 곧 참임을 체득하면
그늘에 처해서 그림자가 없어지는 듯하다.
만약 무심하여 비춤을 잊으면
만 가지 사념이 모두 사라지고
만약 운運에 맡겨 고요히 알면
뭇 행이 모두 일어난다.
매인 곳 없어서 가고 머무는 데 맡기며
조용히 비추어서 그 근원을 깨닫는다.
말하든 침묵하든 현묘함을 잃지 않고
움직이든 고요하든 법계를 여의지 않는다.
지止를 말하면 앎과 고요함을 쌍으로 없애고
관觀을 논하면 고요함과 앎을 쌍으로 비추니
증득을 말하려면 남에게 보일 수 없으나
이理를 설하려면 증득이 아니면 요달하지 못하네.
그러므로 고요함을 깨달으면 고요함이 없고
참된 앎은 앎이 없나니
앎과 고요함이 둘 아닌 한마음으로
공空과 유有가 쌍으로 융화한 중도中道에 계합하면
머무름도 집착도 없으니
거두지도 말고 포섭하지도 말라.
옳고 그름이 둘 다 없어지고
능能과 소所가 쌍으로 끊겨서
끊겼다는 것마저 고요하면 반야가 현전하니
반야는 마음 밖에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지혜의 성품은 본래 구족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의 고요함은 스스로 나타날 수 없으며
반드시 반야의 공력에 의해야 되나니
반야와 지혜 성품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서로를 이루어 주고
근본 지혜와 처음 닦음은 실로 두 바탕[體]이 없으니
쌍으로 없애서 올바로 들어가면
묘한 각성[妙覺]이 뚜렷이 밝고
시작과 마지막을 두루 융합하면
원인과 결과가 서로 사무친다.
마음과 마음이 부처를 이루나니
한마음도 부처의 마음 아닌 것이 없고
곳곳에서 도를 이루나니
한 티끌도 불국토 아닌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참과 허망함, 사물과 내가
하나를 들어도 전체가 거두어지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혼연히 일체가 된다.
그러기에 미혹하면 사람이 법을 따르므로
법마다 만 가지 차별 있고 사람도 같지 않고
깨달으면 법이 사람을 따르므로
사람마다 하나의 지혜로서 만 가지 경계를 융합한다.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겼으니
무엇이 결과이고 무엇이 원인이겠는가.
본체는 본래 적료寂寥하거니 
어느 것이 같고 어느 것이 다르랴.
오직 생각을 잊어 텅 비어 밝거나
소식(消息:잡념을 쉬는 것)하여 깊고 원융하면
마치 물을 투과한 달과 같아서
허망하나 볼 수 있고
무심히 상象을 비추면
비추면서도 항상 공하다.

항주抗州 오운五雲 화상의 좌선잠坐禪箴

앉는다[坐] 함은 몸을 구속함이 아니요,
참선[禪]이라 함은 경계와 교섭하지 않는다.
구속하면 반드시 피로하고
교섭하면 고요하지 않다.
교섭하지도 않고 구속치도 않으면
참 광명이 휘영청 밝으니
여섯 문門이 가지런히 응하고
만 가지 행이 똑같이 펼쳐진다.
애석하다, 처음 배우는 무리는
현묘함을 요달하지 못하여
혼침昏沈과 도거(掉擧:들뜸)에 빠지고
능能과 소所를 오락가락하니
공교한 방편이 아니면
어떻게 대치對治를 하겠는가.
채찍질과 억누르는 것으로
혼침과 산란을 조절하나
생각을 쉬고 반연을 잊으면
마치 죽은 사람 같게 되나니
알맞게 열고 닫아서
벽관壁觀에만 전일하지 말고[달마 대사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신 이외에 초심자들의 수행하는 비결을 보이시기 위해 4문門과 4행行을 말씀하시니, 하나만이 전일한 것이 아니다.]
망상이 들끓거든
안나발나安那鉢那 흐름을 세는 관법.
를 닦아라.[흩어짐이나 망상이 성하거든 마땅히 수식관(數息觀:아나바나)으로 바꾸어 관찰하라.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을 엇갈리면 안 된다.] 
흐름을 따라 검각(劍閣:지명)에 이르러
목아木鵝 물의 깊이를 재는 기구.
에 걸리지 않으면
화재에 물을 얻은 것 같고
병에 의원을 얻은 것 같으리니
병을 고치면 의원을 물리치고
불이 꺼지면 물을 버린다.
한 생각[一念]이 청정하면
본체가 고요하여 항상 신령하니
신령스럽다 고요하다 하거나
신령스럽지도 고요하지도 않다 하면
시비가 번갈아 일어나서
허물이 끝이 없으리니
앞의 것 멸하면 뒤의 것 일어남이
마치 걸음 걷는 것과 같다.
모르면 걱정이거니와
알면 허물이 없나니
해는 밤을 등지기 때문이지만
거울이야 어찌 뒤를 비추랴.
그러나 이 법은 그렇지 않아서
원만히 밝아서 투명하게 통했으니
비추되 반연하지 않고
고요하되 누가 지키겠는가.
만상이 뜬 거품이요
허공이 번개 빛이니
마魔의 궁전을 무찔러 버리고
부처님 궁전도 쳐서 엎는다.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소경이 눈을 뜨니
법계와 티끌세계가
가지런히 단박에 나타난다.
호탕하게 저자를 쏘다니면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니
방편을 다 밝히면
금선金仙이라 부른다.
내가 비록 억지로 말했으나
성인의 말씀에 꼭 맞으니
성인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꼭 거듭 말해야 된다면
움직이지도 않고 선禪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
또 온갖 삼매를 배우면
움직임이지 좌선은 아니고,
마음이 경계를 따라 흐르니
어찌 선정이라 이름하겠는가 하니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역대의 조사께서
오직 이 한마음을 전하셨을 뿐이다.
조사의 광명이 멀고도 컸으니
내 자손들이 잘 간직하라.
애오라지 말없는 종지를 서술하여
좌선잠坐禪箴이라 말하노라.

영가永嘉 진각眞覺 대사의 증도가證道歌 도를 증득한 노래.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배움을 끊고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지도 않고 참을 구하지도 않는다.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공한 몸이 곧 법신이다.
법신을 깨닫고 나면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기 성품은 천진불天眞佛이라
5음陰의 뜬구름은 공연히 오락가락하고
3독毒의 거품은 헛되이 떴다 잠겼다 한다.
실상을 증득하면 사람도 법도 없으니
찰나에 아비阿鼻지옥의 업을 녹인다.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스스로 발설拔舌지옥에서 티끌 같은 겁을 지내리.
여래선如來禪을 단박에 깨달아 요달하니
육도만행六度萬行이 본체 안에서 원만하다.
꿈속에는 분명히 여섯 길이 있더니
깬 뒤에는 공하여 대천세계도 없다.
죄와 복도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으니
적멸한 성품 안에서 묻고 찾지 말라.
아직까지는 먼지 속의 거울을 닦지 못했으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버렸네.
누가 무념無念이며, 누가 무생無生이랴.
진실로 무생이라면 나지 않는 것도 없으니
기관機關인 나무 사람을 불러서 물을지니
부처를 구하고 공을 베푼들 언제 이루어지랴.
4대大를 놓아 버려서 거둬 잡지 말고
적멸의 성품 안에서 마음껏 먹고 마셔라.
모든 행行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그것이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이다.
결정된 말씀이여, 참된 수레[眞乘]를 표시하지만
누군가는 긍정치 않고 정情에 맡겨 따진다.
곧장 뿌리를 끊어야 부처에게 인가를 받으니
잎을 들고 가지를 찾는 짓은 나는 하지 않는다.
마니 구슬을 사람들이 모르니
여래장如來藏 안에서 직접 거두어진다.
여섯 가지 신통은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한 개의 둥근 광명은 빛깔이면서도 빛깔이 아니다.
5안眼을 맑게 해서 5력力을 얻는 것은
오직 증득해야 알 뿐이지 측량하기 어렵다.
거울 속의 그림자는 보기 쉬우나
물속의 달을 어찌 잡을 수 있으랴.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걸으니
깨달은 이는 함께 열반의 길을 노닌다.
옛 신神을 조절하니 맑은 바람이 스스로 높지만
모양은 여위고 뼈가 드러나서 돌아보는 이 없다.
궁색한 스님이여, 입으로는 가난하다 하나
실제에는 몸이 가난할 뿐 도는 가난하지 않네.
가난하면 몸에다 항상 베옷을 걸치지만
도道는 마음에다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를 간직한다.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여, 써도 다함이 없으니
사물을 이롭게 하고 기틀에 감응하되 끝내 인색하지 않다.
3신身과 4지智가 본체 안에서 원만하고
8해탈과 6신통이 심지心地에 찍히었다. 
상등의 선비는 하나를 해결하면 일체를 요달하나
중ㆍ하등의 선비는 많이 들어도 다분히 믿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가슴 속에서 때 묻은 옷을 벗을지언정 
뉘라서 밖을 향해 정진함을 자랑하랴.
마음대로 비방하고 멋대로 시비하라.
불을 들어 하늘을 태우니 스스로 피곤할 뿐이다.
내가 듣기에는 흡사 감로를 마시는 것 같아서
녹고 융화해서 단박에 부사의不思議에 들어간다.
나쁜 말을 관觀하는 것이 공덕이니
그것이 곧 나에게는 선지식이다.
비방하는 소리에 친하고 미운 생각 안 내면
무생의 자비와 인욕의 힘을 어찌하여 표시하랴.
종지[宗]도 통하고 설법[說]도 통하니
선정과 지혜가 원만히 밝아서 공에 막히지 않는다.
나 혼자만이 이제 통달해 마친 것이 아니라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부처님들의 본체는 모두 같았다.
사자후師子吼의 두려움 없는 말씀을
모든 짐승이 들으면 다 뇌수腦髓가 찢어지니
큰 코끼리는 분주히 설치다가 위의를 잃지만
천룡天龍은 조용히 들으면서 기쁨을 낸다.
강과 바다를 거닐고 산천을 건너서
스승을 찾고 도를 배워 참선을 했지만
조계曹谿의 바른 길을 깨달은 뒤로는
생사에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에 본체는 편안하다.
비록 칼날을 만나도 항상 태연하고
독약을 만났을지라도 역시 한가하다.
우리 스승께서 연등불然燈佛을 뵈옵고서
여러 겁을 지나면서 인욕선인忍辱仙人 되셨네.
몇 차례나 나고, 몇 차례나 죽었던가.
생사가 유유悠悠하여 그칠 적이 없었네. 
스스로 무생법을 단박에 깨달아 마치고 나니
욕되고 영화로움에 무슨 근심이나 기쁨이 있으랴.
깊은 산에 들어가 조용한 절에 사니
우뚝하고 깊은 골의 낙락장송 밑이다.
한가히 노닐며 조용히 앉았으니 야승野僧의 집안이요
고요하여 안거安居하니 진실로 쇄락하다.
깨달으면 곧 마치는 것이라서 공력을 들이지 않으니
온갖 유위의 법과는 동일하지 않다.
모습에 머무른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지만
오히려 하늘을 향하여 활을 쏘는 것과 같으니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떨어져서
내생에 여의치 못한 과보를 받나니
어찌 무위의 실상문實相門에서 
단번에 곧바로 여래지如來地에 초월해 들어감만 하랴.
근본을 얻기만 하면 지말枝末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맑은 유리가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다.
이미 이 여의주를 능히 이해했다면
나와 남을 이롭게 함이 끝내 다하지 않는다.
강 위에 달 비치고 솔바람 부니
긴 밤의 맑은 하늘에 무엇을 하겠는가.
부처 성품의 계율 구슬[戒珠]은 심지心地의 도장[印]이요
안개ㆍ이슬ㆍ구름ㆍ노을은 체體 위의 옷이니라.
용을 항복시킨 발우[鉢]와 범의 싸움을 말린 주장자[錫]여,
두 개의 금 고리가 또렷또렷 울린다. 
표시를 하려고 허사로 지니는 것 아니니
여래의 보배 창고와 친근한 자취이니라.
참됨을 구하지도 않고 허망함을 끊지도 않나니
두 법이 공하여 모습이 없는 줄 요달해 안다.
모습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않음도 없으니
이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라
마음 거울이 밝아서 걸림 없이 비추니
탁 트이고 밝게 사무쳐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한다.
삼라만상이 그림자로 나타나는 가운데
한 알의 둥근 광명이 안팎이 아니다.
활달하게 공하다고 인과를 배척하면
황막하게 넓기만 해서 재앙을 부르는데
유有를 버리고 공空에 집착하면 병도 마찬가지니
마치 익사를 피하려다가 불에 빠지는 것과 같다.
허망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학인은 요달하지 못해서 수행을 쓰니
진실로 도적을 잘못 알아 아들로 여긴다.
법의 재물을 잃고 공덕을 멸함은
이 마음의 의식意識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마음을 요달해 버리면
단박에 무생無生의 지견력智見力에 들어간다네.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般若의 칼끝이요 금강金剛의 불꽃이다.
외도의 마음만을 능히 무찌를 뿐 아니라
일찍이 천마天魔의 간담도 서늘케 했다.
법의 우레를 울리고 법의 북을 쳐서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를 뿌린다.
용과 코끼리가 밟아 나가니 은택이 끝이 없어
3승乘과 5성性이 모두가 깨닫는다네.
설산의 비니초肥膩草에는 잡됨이 없어
순수히 제호醍醐를 내니 나 항상 수용한다.
한 성품이 온갖 성품에 원만히 통하고
한 법이 온갖 법을 두루 포함한다.
하나의 달이 온갖 물에 두루 나타나니
온갖 물속의 달은 하나의 달에 포섭되네.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가고
나의 성품이 되돌아 다시 여래에 합한다.
한 지위에 온갖 지위가 구족하니
빛깔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行業도 아니다.
손가락 튀기는 사이에 8만 법문이 원만히 이루어지고
찰나에 3아승기겁을 다 멸한다.
온갖 수數와 구절은 수와 구절이 아니니
나의 영각靈覺과 무슨 교섭이 있으랴.
훼방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으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도다.
당처當處를 여의지 않고 항상 담연하지만
찾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알라.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다만 이럴 뿐이네.
침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침묵하니
큰 보시의 문이 열려서 막힘이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종지를 아는가 물으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옳기도 했다 그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르니
역행逆行과 순행順行을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네.
내 일찍이 여러 겁을 수행했는지라
등한시해서 속이거나 미혹하지는 않는다.
법의 깃대를 건립하고 종지를 세우니
밝고 밝은 부처님의 칙령, 바로 조계이니
제일 먼저 가섭이 법의 등불을 전해서
28대까지 인도에서 기록하였다.
법이 동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오니
보리달마가 초조初祖이시고
6대代에 옷을 전한 일 천하에 들렸고
나중에 도 얻은 이도 헤아릴 수 없네.
참을 세우지 않고 망妄은 본래 공하니
있음과 없음을 모두 버려서 공 아닌 공이다.
20가지 공空의 문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한 성품의 여래와 본체가 스스로 같다.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의 티끌과 같다.
티끌이 다 제거되면 광명이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이 쌍으로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이다.
슬프다, 말법末法인 나쁜 세상이여.
중생은 복이 얇아서 조복하기 어렵다.
성인과는 멀어지고 삿된 소견 깊어지며
마魔는 강하고 법은 약해서 원망과 해침이 많다.
그러다 여래의 돈교頓敎 법문을 들었지만
기왓장 부수듯이 멸하지 못함이 한이로다.
지음은 마음에 있지만 재앙은 몸에 있으니
남을 원망하지도 말고 더욱이 탓하지도 말라.
무간지옥의 업을 초래하고 싶지 않다면
여래의 올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라.
전단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며
울창하고 깊은 곳에는 사자가 산다.
고요한 숲을 한가로이 홀로 노닐면
나는 새, 길짐승이 모두 멀어진다.
사자 새끼를 뭇 짐승이 뒤따르니
세 살이면 능히 크게 포효를 한다.
만일 들여우가 법왕의 뒤를 쫓는다면
백 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을 여는 것이다.
원돈교圓頓敎는 인정이 없으니
의심을 풀지 못했거든 곧바로 씨름해라.
산승山僧이 아상과 인상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이가 단상斷常의 구덩이에 빠질까 걱정이다.
글러도 그르지 않고 옳아도 옳지 않으니
털끝만큼 어긋나면 천 리를 잃는다.
옳으면 용녀龍女가 단박에 성불하고
그르면 선성善星이 산 채로 지옥 간다.
나도 일찍이 학문을 쌓았었고
또한 소疏도 더듬고 경론도 보았는데
이름과 형상의 분별을 쉬는 것 알지 못하면
바다에서 모래를 세는 것이라 스스로 피곤할 뿐이네.
여래께서도 모질게 꾸짖으셨으니
남의 보배를 세어서 무슨 이익 있으랴.
예전부터 헛디뎌서 허망한 행이란 것을 깨달으니
여러 해를 공연히 풍진의 나그네가 되었네.
종자의 성품이 삿되고 지견이 잘못 되어서
여래의 원돈圓頓한 제도를 통달하지 못하네.
2승乘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외도外道는 총명하나 지혜가 없다.
어리석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여
빈주먹인 손가락 위에서 실답다는 견해를 내지만
손가락을 달이라 여겨서 헛수고를 하니
감관과 대상의 법 속에서 헛되이 날조한다.
한 법도 보지 않는 것이 곧 여래이니
바야흐로 그 이름을 관자재觀自在라고 한다.
요달하면 업의 장애가 본래 공하고
요달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빚을 갚는다.
주림 끝에 국왕의 밥을 만났으나 먹지 못하니
병들어 의원을 만난들 고칠 수 있으랴.
욕망에서 선禪을 행함은 지견知見의 힘이니
불 속에 핀 연꽃이라 끝내 파괴되지 않나니
용시勇施가 중죄를 범한 뒤 무생법無生法을 깨달아
일찍이 성불한 일이 아직껏 전한다.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어리석은 완피달頑皮靼[다多와 달達의 반절이다.] 소 목에 난 멍에 자국.
 같은 이를 깊이 탄식하니
중한 죄를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고
여래께서 여신 비결은 보지 못하네.
어떤 두 비구가 음행과 살생을 범했는데
우파리優波離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을 더했으나
유마 대사가 단박에 의심을 풀어 주니
밝은 태양 아래 눈과 서리가 녹는 듯하네.
부사의한 해탈의 힘은
묘한 작용 항하의 모래같이 많아 다함이 없으니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사양해서 수고롭게 하랴.
만 냥의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
뼈와 몸을 부수어도 갚을 수 없으니
한 구절이 훤해야 백억百億을 초월한다.
법 가운데 왕이여, 가장 거룩하시니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여래를 똑같이 함께 깨쳤네.
내 이제 이 여의주를 알았나니
믿어 받드는 이는 모두가 상응하리라.
요달하고 요달해서 보면 한 물건도 없으며
사람도 없거니와 부처도 없다.
삼천대천세계는 바다의 거품이요
온갖 성현은 번갯불과 같다네.
설사 무쇠 바퀴가 정수리 위를 돌아도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고 밝아서 끝내 잃지 않으리.
해가 차가워지고 달이 뜨거워질지라도
온갖 마군들은 참 말씀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코끼리의 수레가 요란스레 길을 가는데
당랑(螗蜋:말똥구리)이 가로막는 것을 누가 보았겠나.
큰 코끼리는 토끼의 길에서 노닐지 않고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는다.
대롱으로 보면서 창창한 하늘을 비방하지 말라.
아직 요달치 못했다면 내 이제 그대에게 가르쳐 주노라.

등등騰騰 화상의 요원가了元歌 근원을 깨닫는 노래.


도를 닦아도 도는 닦을 만한 것 없고
법을 물으나 법은 물을 만한 것 없다.
미혹한 사람은 색色과 공空을 요달하지 못하지만
깨달은 이에게는 본래 순종함과 거스름이 없다.
8만 4천 가지의 법문이라 해도
지극한 이치는 마음을 여의지 않았다.
자기의 집안과 성곽을 알려 할지언정
부질없이 딴 고을을 쏘다니지 말라.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을 필요도 없고
변재와 총명도 쓸모없다.
달력의 크고 작음도 모르고
해에 윤달이 있고 없음도 관계치 않네.
번뇌 그대로가 보리이니
맑은 꽃이 진흙에서 난다.
누가 와서 어떤 것인가 물으면
능히 그와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
새벽에는 죽을 먹어 주림을 달래고
낮에는 다시 한 술 떠먹는다.
오늘은 운運에 맡겨 등등騰騰하고
내일도 등등하게 운運에 맡긴다.
마음속으로는 요달하고 요달해서 다 알지만 
겉으로는 거짓 어리석은 체한다.

남악南嶽 나찬懶瓚 화상의 노래

우뚝하게 일 없이 있노라니
바꿔칠 일 있으랴.
아무 일도 없거늘
무엇 하러 한바탕 떠들랴.
곧은 마음에는 산란散亂이 없으니
딴 일을 끊으려 하지 말라.
과거는 벌써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헤아리지 말라.
우뚝하게 일 없이 앉았으니
뉘라서 부른 적이나 있던가.
밖을 향해 공부를 하는 이
모두가 어리석은 무리이다.
한 알의 양식도 모으지 않았지만
밥을 만나면 먹을 줄은 안다.
세간에 일 많은 사람들은
뒤쫓지만 전혀 미치지 못한다.
나는 하늘에 태어나기도 좋아하지 않고
복전福田도 사랑하지 않나니
시장하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잘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어리석고 둔한 것이 아니라
본체가 원래 그러하다네.
갈려면 가고
멈추려면 멈추니
몸에는 해진 누더기 한 벌이요,
발에는 어머니가 준 버선 한 켤레다.
말이 많고 또 이야기가 많으나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그르치니
중생을 제도코자 하면
허물이 없고 또 스스로를 제도하라.
부질없이 참 부처를 구하지 말지니
참 부처는 볼 수가 없다.
묘한 성품과 영대靈臺가
어찌 훈습과 수련을 받은 적이 있으랴.
마음은 일 없는 마음이요,
얼굴은 어머니가 낳은 얼굴이니
겁의 돌[劫石]은 옮길 수 있을지언정
그 가운데서 개변改變이 없다.
일 없음은 본래 일이 없는 것이니
어찌 문자를 읽는 것이 필요하랴.
인상과 아상의 뿌리를 없애면
그 가운데 뜻과 그윽이 계합한다.
갖가지 뼈아픈 힘을 들이나
숲 밑에서 조는 것만 못하니
우뚝 고개를 들어 해가 높이 떴거든
밥을 얻어다 깡그리 퍼먹는다.
공력을 들이면
더욱 어리석어지나니
취하면 얻지 못하고
취하지 않으면 저절로 통한다.
나에게 한 말이 있는데
생각을 끊고 반연을 잊었으니
교묘히 말해도 되지 않고
오직 마음만으로 전한다.
다시 한 말이 있으니
곧장 일러 주는 것만 못하다.
가늘기는 털끝과 같고
크기는 방위나 처소가 없으며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서
아무런 손질[機杼]을 빌리지 않는다.
세상일은 유유悠悠하여서
산등성이만 못하니
푸른 솔이 해를 가리고
푸른 시냇물은 길이 흐른다.
산 위의 구름으로 천막을 삼고
밤의 달로 갈고리를 삼는다.
머루 다래 덩굴 밑에 앉고
돌베개를 베고 눕는다.
천자를 뵙지도 않거늘
어찌 왕후를 부러워하랴.
생사에 걱정이 없으니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
물속의 달이 형상이 없듯이
나는 항상 다만 편안하다.
만 가지 법이 모두 그러하여
본래 스스로 무생無生이다.
우뚝하게 일 없이 앉았으니
봄이 오니 풀은 저절로 푸르구나.

석두石頭 화상의 초암가草庵歌

내가 엮은 토굴[草庵]에는 보배가 없지만
먹고 나니 한가하고 잠을 자니 즐겁다.
새로 지었을 때는 띠가 새롭더니
부서진 뒤에도 띠를 갖다 덮는다.
토굴에 사는 사람 항상 있으니
중간에도 안팎에도 속하지 않네.
세상사람 머무는 곳 나는 머물지 않고
세상사람 사랑하는 곳 나는 사랑하지 않네.
토굴은 작으나 법계를 머금으니
방장의 노인이나 체득해 이해하리.
상승上乘의 보살은 의심 없이 믿지만
중․하근기가 들으면 반드시 의심한다.
토굴이 무너질까, 무너지지 않을까 묻지만
무너지건 말건 원래의 주인은 항상 있네.
남북에도 있지 않고 동서에도 있지 않으니
기반이 견고함을 최고로 여기네.
푸른 솔 밑이요 밝은 창 안이니
옥의 대궐과 단청한 누각으로는 견줄 수 없어라.
누더기를 머리까지 덮어쓰면 만사가 쉬니
이때 산승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네.
이 토굴에 살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뉘라서 가게를 차려서 팔려고 도모하는가.
빛을 돌이켜 반조返照하면 문득 돌아오지만
확 트인 신령한 근기는 등지거나 향함이 없다.
조사를 만나면 친히 가르쳐 주나니
띠를 엮어 토굴 짓기를 게을리 말라.
백 년 동안 버려두어도 걸림이 없고
손을 털고 떠나간들 죄가 안 되네.
천 가지 말과 만 가지 해석은
다만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어둡게 하지 말라는 것이니
토굴 속의 죽지 않는 사람을 알고자 한다면
어찌 지금의 이 가죽 주머니를 떠나서 있으랴.

도오道吾 화상의 낙도가樂道歌

도를 즐기는 산승山僧이
제멋대로 하는 성향이 많아서
하늘이 돌고 땅이 굴러도 그대로 따른다.
외딴 봉우리에 한가히 누웠으니 벗이 없고
무생곡無生曲 한 가락을 혼자서 부른다.
무생가여, 세상 밖의 즐거움이니
요새 사람 어울리지 못함이 우습구나.
정情을 펼치고 도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니
장가張哥이건 이가李哥이건 몽땅 잊는다.
대장부는 모름지기 기개가 있어야 되나니
인정에 따르지 않으면 걸림이 없다.
그대는 순종함이 보리라 하나
나는 원래부터 저절로 등진다고 여기네.
언제는 공손하고 언제는 어리석으니
나의 길이 아닌데 어찌 알쏘냐.
일생一生을 특별히 요달해서 항상 임운任運하니
들 나그네 돌아갈 고향조차 없구나.
오늘의 산승 이대로가 옳으니
원래의 산승이란 것 다시 어떤 것이겠는가.
조사의 기틀을 탐구하는 공왕의 자손[空王子]이여,
본체는 뜬구름 같아서 기댈 구석이 없다.
예로부터 언제나 누더기 한 벌을 입고
추위와 더위를 얼마나 지냈던고.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
북을 쳐서 신神을 즐겁게 하고 절을 하기도 한다.
분명한 한 가닥은 은하수와 구름인데
청산과 녹수는 서로 비슷하지 않다.
천성 그대로여서 매만질 수 없으니
상투를 짜건 무늬를 놓건 걸림 없어라.
혹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마음을 발휘하고
혹은 만나는 사람을 몽둥이로 친다.
자비의 은애恩愛는 얽매임에 빠지고
몽둥이찜질은 그대에게 은애를 끊어 준다.
달빛에 길을 가는 나그네들이여,
은정恩情이 남았거든 내가 고쳐 주리라.

배도杯渡 선사의 일발가一鉢歌 스님의 생애를 노래.


알랄랄遏喇喇하고 요괄괄鬧聒聒 발우를 어르는 소리인가 한다.
한데
모두가 유유悠悠하여 매달佅㒓을 지었구나.
굶주릴 때 소금 먹으면 갈증이 더하듯
일생을 헛되이 보내면서 분주히 군다.
끝끝내 시작과 끝을 모르니
죽은 송장으로 버려지면 어디서 해탈하랴.
그대에게 권하나니, 힘써서 해탈을 구하라.
부질없는 일은 마침내 매듭을 이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빨리 끌지언정
죽을 때를 당하여 보살을 부르지 말라.
대장부의 이야기는 시원스러워야 하나니
어리석은 사람을 배우지 말고 털어내 버려라.
쫓다가 묶이는 가운데 물리침을 배우고
또한 거친 밥에 부드럽게 친화하는 것도 배워라.
머리도 깎고 칡으로 엮은 옷 입으며
범부의 생활을 배우기도 한다.
곧은 말로 그대에게 말해도 요달하지 못하니
다시 긴 노래인 일발가一鉢歌를 부른다.
일발가여,
많음 가운데 하나이고, 하나 가운데 많음이니
야인野人이 이 일발가를 노래하는 것을 비웃지 말지니
한 발우를 들고 사바세계를 살았었다.
푸른 하늘 적적할 때 처음 달이 솟으니
이때에 그림자 공하여 만상을 머금네.
몇 곳에서 허망하게 살면서 시비를 부렸던가.
한 근원이 청정하여 왕래가 없는 것을.
다시는 마음으로 물거품을 짓지 말라.
백 개의 털구멍에 피가 나니 누가 시킨 일인가.
진여의 경지에 조용히 앉아서
정수리 위에 까치가 둥지를 짓게 하는 것만 못하네.
만대의 금륜성왕金輪聖王의 자식도
오직 이 진여의 영각靈覺일 뿐이다.
보리수 밑에서 중생을 제도하시고
중생을 다 제도하니 생사生死치 않는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음이 참 장부이니
형상 없고 모습 없어 대비로자나일세.
번뇌가 다 사라지면 진여가 존재하니
한 알의 둥글고 밝은 무가주無價珠여라.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이 
참으로 보고 듣는 것이다.
본래부터 한 구절의 말도 없는데
오늘 천千 마디를 억지로 한다.
억지로 하는 말을 삼가 자세히 들어라.
사람마다 다 진여의 성품은 가지고 있으나
마치 광석 속의 황금과 같아서
단련하면 할수록 금체金體가 청정해진다.
진眞이 곧 망妄이요 망이 곧 진이니
진과 망을 제하면 다시 사람도 없다.
참 마음으로 부질없이 번뇌를 내지 말라.
의식은 때에 따라 색신色身을 보양하면 된다.
좋아해도 집착이요 약해도 집착이니
온갖 일에 무심하여 집착하지 말라.
싫을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으니
두 쪽이 평평해서 평등한 도이다.
거칠어도 먹고 고와도 먹어서
범부들이 모습 위에서 보는 것을 배우지 말라.
거친 것도 없고 고운 것도 없으니
위의 향적香積세계에는 뿌리도 꼭지도 없네.
앉아서도 다니고[行] 다니면서도 앉으니
생사의 나무 밑에서 보리의 열매이고
앉는 것도 없고 다니는 것도 없으니
무생無生인데 어찌하여 무생을 찾는가.
나도 되고 죽어도 되니
곳곳마다 미래의 미륵을 본다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니
3세의 여래가 모두 그러하시다.
여의면 집착하고 집착하면 여의니
허깨비의 문[幻化門] 안에는 실다운 뜻이 없다.
여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으니
어디서 다시 병을 없애는 약을 구하랴.
말할 때 침묵하고 침묵할 때 말하니
말과 침묵함이 종횡으로 처소가 없구나.
말하지도 않고 침묵하지도 않으니
동서를 남북이라고 부르지 말라.
성냄이 기뻐함이요 기뻐함이 성냄이니
나 스스로 마魔를 꺾어 법륜法輪을 굴린다.
성냄도 없고 기뻐함도 없으니
물이 파도를 여의지 않으니 파도가 곧 물이네.
인색함이 보시布施요 보시가 인색함이니
안팎과 중간을 여의지 않았으며
인색함도 없고 보시도 없으니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하여 잡을 수 없다.
괴로울 때 즐거움이고 즐거울 때 괴로움이니
그렇게만 수행하면 문호門戶가 끊긴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니
본래부터 자유로워 속박이 없다.
더러움이 깨끗함이요 깨끗함이 더러움이니
두 변邊은 필경 앞뒤가 없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니
대천세계가 동일한 진여의 성품이다.
약이 병이요 병이 약이니
끝끝내 두 일은 버려야 된다.
약도 없고 병도 없으니
그것이 바로 진여의 영각성靈覺性이다.
부처가 마魔로 되고 마가 부처 되니
거울 속의 그림자요 물 위의 파도로다.
마도 없고 부처도 없으니
본래부터 3세에 한 물건도 없다.
범부가 성인이요 성인이 범부이니
그림 속의 아교이고 바닷물의 짠맛일세.
범부도 없고 성현도 없으니
만행萬行을 총체적으로 지녀도 한 가지 행도 없다.
참 가운데 거짓이요 거짓 가운데 참이니
스스로 범부가 허망한 번뇌를 일으킬 뿐이다.
참도 없고 거짓도 없으니
만약 부르지 않는다면 누가 대꾸하랴.
본래부터 성도 없고 이름도 없으니
다만 이렇게 등등騰騰하게 발길 따라 걷는다.
때로는 저잣거리 푸줏간을 들르니
한 떨기 붉은 연꽃이 불 속에서 피어나고
때로는 지팡이 끌고 서울 거리를 거니니
이 몸은 뜬구름인 듯 정한 자리 없구나.
허깨비[幻化]는 원래부터 더부살이 같으니
그 집안의 닿는 곳은 다시 맑고 비어 있다.
만약 계행을 찾으려 하면
3독毒의 종기가 언제나 나을 건가.
만약 참선을 찾는다면
나는 멋대로 실컷 잠만 자겠네.
딱하구나, 전도된 것은 아니니
세간의 출세간이고 하늘 가운데 하늘이니
사람들은 이 속의 뜻을 모른다.
남쪽 쳤는데 북쪽이 움직이니
만약 법을 찾는다면
계족산雞足山의 가섭에게 물어라.
대사大士는 옷을 가지고 그 속에 있지만
본래부터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만약 경을 찾는다면
법성의 참 근원은 들을 수 없으며
만약 계율을 찾는다면
궁핍한 아들이 뛰쳐나가게 할 필요가 없네.
만약 수행을 찾는다면
8만 개의 부도浮圖를 어디서 구하랴.
단풍잎으로 우는 아기를 달랠 줄은 알지만
검은 구름이 해를 가리는 줄은 깨닫지 못하네.
차제次第가 없는 미친 소리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사라(篩羅:북의 일종)는 거칢 속의 섬세함으로 차츰 들어가나
이 거칢 가운데는 섬세함도 없으니
그것이 원만하고 밝은 진실한 말씀[眞實諦]이다.
진실한 말씀이란 본래 참된 것 아니니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객진客塵이다.
티끌 속에서 진실을 이해한다면
그는 당당히 세상을 벗어난 사람일세.
세상을 벗어난 사람이여, 조작하지 말라.
홀로 다니고 홀로 거닐건만 두려움이 없다네.
남[生]도 없고 죽음도 없고 열반도 없으니
본래부터 생사와는 관계하지 않는다.
시비是非도 없고 동정動靜도 없으니
부질없이 몸을 이끌고 공空의 우물로 들지 말라.
선악善惡도 없고 거래去來도 없으며
또한 명경明鏡이 걸린 높은 경대도 없다.
산승의 견해는 다만 이럴 뿐이니
믿지 못하겠거든 남을 쫓아 겁의 재난을 지어라.

낙보樂普 화상의 부구가浮漚歌

흐린 날 빗방울이 뜰에 고이니
물 위에 넘실넘실 거품이 인다.
앞의 것 꺼지면 뒤의 것이 생기어
앞뒤가 상속하여 끊임이 없다.
본래는 빗방울의 물로 인해 거품이 생기나
바람이 세차게 불면 거품은 다시 물이 되네.
거품과 물의 성품 같은 줄 모르면
겉모양의 변함에 따라 다르다고 여기네.
겉은 반짝이고 안은 비었는데
안팎이 영롱玲瓏하여 보배구슬 같구나.
맑은 물결에 있을 땐 있는 듯하더니
움직이기 시작하니 없는 듯하구나.
있음과 없음과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밝히기 어려우니
모습 없는 가운데 모습의 형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거품이 물에서 나온 줄은 알지만
물이 거품에서 나오는 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거품을 내 몸에다 견주어 보니
5온蘊을 거짓으로 꾸민 허수아비일세.
5온이 공하고 거품이 진실하지 않은 줄 요달하면
비로소 본래의 참됨을 분명히 보리라.

소계蘇溪 화상[즉 오설산五洩山의 작은 스님을 말한다.]         의 목호가牧護歌 마음자리를 잘 간직하는 노래.


납자衲子의 마음 보호하고 기르는 법을 들어라.
운運에 맡겨 소요하며 머무름이 없으니
한 벌의 누더기와 물병과 발우이면
문득 그대로 한 평생의 살림살이다.
지극한 이치를 찾아서 두루 다니되
춥고 더러움과 괴로움을 싫어하지 않는다.
일찍부터 사해四海를 돌아다녔기에
산․물․바람ㆍ구름이 뱃속에 가득하다.
안으로는 계율의 정밀하고 엄격함을 배제하고
위의를 갖춘 행보行步를 배우지도 않는다.
3승乘은 내가 무능하다 비웃지만
나는 3승의 부질없는 짓을 비웃는다.
지혜로운 이가 방편으로 단계를 세웠으나
큰 도는 본래 미혹과 깨달음이 없다.
통달한 이는 닦아 다스릴 필요가 없나니
능히 말하고 능히 이야기하는 데에도 있지 않다.
베옷을 걸치고 눈으로 하늘을 쳐다볼 뿐
설사 왕과 제후가 와도 돌아보지 않는다.
도인의 본체가 본래 이러하니
부처가 가는 곳을 앎이 아니로다.
태어나는 것은 마치 옷 입는 것 같고
죽는 것 또한 옷을 벗는 것 같다.
태어나도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니
8풍風 풍風은 기쁨, 슬픔 따위의 감정을 말한다.
이 어찌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하랴.
겉모양은 흡사 바보 같은데
뱃속은 비상하여 기상이 높다.
살림은 아무리 한 푼 없어도
군왕을 상대하여 부귀를 겨룬다.
어리석은 사람은 손을 휘저으며 미워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리라.
꼭두각시 끌어당겨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몽땅 속에 든 주인의 짓임을 누가 알리오.
한마디로 여러분께 알리나니
그림 속의 떡을 타파하고 돌아가게나.

법등法燈 선사 태흠泰欽의 고경가古鏡歌 3수

  1수
모두가 고경古鏡을 본 적이 없다 하나
여러분께 한 차례 보여 주리라.
눈앞에는 한 티끌도 목도하지 못하건만 
맑디맑은 차가운 빛은 한 조각 엉키었네.
한 조각 엉키었음이여, 앞뒤가 없으니
못생긴 아씨는 화장하면서 투덜대나
귀부인은 고개를 돌려서 자주 감탄하네.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근심하랴.
곱든 추하든 원래 그것일 뿐이니
그것뿐이라 함이여, 더욱 어리둥절하니
연야演若는 새벽에 보다가 놀라 달아났는데
자세히 헤아려 보면 까닭이 있구나.
내가 미치광이에게 물었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소리 슬퍼하네.
목이 메어 거룩한 법 연설하지 못하나
그의 머리와 그림자는 유유悠悠하기만 하다.
유유함이여,
그대는 얼마 동안이나 그 속에 있었던가.
미혹의 구름이 걷히면
걸음걸음에 손을 잡고 높은 대臺에 오른다.

  2수
뉘라서 말했던가, 고경古鏡에는 양태樣態가 없다고
고금에 출입한 이가 어느 문호門戶를 통했으랴.
문호여, 
그대가 살펴도 보이지 않을 때가
그대를 위하여 활짝 드러난 것이다.
활짝 드러남이여,
그대의 일생과 더불어 끝내 보호하라.
뜻이 통하는 이가 물으러 왔더라도
만나는 사람에게 경솔히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얼굴 비추는 데만 맡기고
두려운 생각은 낼 필요가 없으니
그날의 연야다演若多를 보라.
아직까지도 잘못 되고 있다.
당장 그림자의 분명함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그 당시에 한 번 돌아보는 것과 같으리.
한 번 돌아보는 것과 같음이여,
괴롭고, 괴롭고, 괴롭도다.

  3수
고경古鏡이 정명精明하고 맑으니
맑은 빛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를 두루 비춘다.
곳곳에서 이름과 글자를 쓰니
나 밖에 다시 누구의 집이겠는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들도
거울 위에 가느다란 티끌이니
티와 티끌이 다해 아무것도 없으면
이것이 진짜 불 속의 연꽃일세.
연꽃은 천 송이 만 송이인데
송이마다 또렷한 석가부처님일세.
누가 구시나俱尸那에서 열반에 드셨다 하며
누가 갈대 싹이 무릎을 꿰뚫었다 하는가.
믿지 않고 거울 속을 살핀다면
염소 수레, 사슴 수레, 소 수레니라.
당시 사람들은 고경을 알지 못하여
모두가 본래부터 청정했다 하나니
다만 청정이 가짜[假]임을 살펴서
형용形容이 바르지 않음을 비추어 얻어라.
둥글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니
가는 티끌이라도 있으면 모두 병이다.
그대에게 부숴 버리는 것만 못하다고 권하니
거울이 없어지고 티가 사라지면 빛날 것이며
비야리성毘耶離城 유마 거사가 살던 고을의 이름.
에서 입을 다문 것도 보아서
원만히 통하여 남음 없음도 알게 되리라.

담주潭州 용회龍會 도심道尋의 변참삼매가遍參三昧歌 여러 삼매를 두루 배우는 노래.


하늘 끝, 바다 모퉁이에서 선지식을 뵈옵고
나에게 온전히 끄는 힘을 베풀어 달라고 했더니
스승은 꾸짖으며 나를 내쫓는 바람에
자신을 환히 깨쳐 이로부터 쉬었네.
제방에서 드리운 곧은 방편을 보니
선재동자 얻은 자리 숨기기 어렵더라.
방망이와 할 소리에 그윽하고 기특함을 드러내니
풀어놓았다 뺏었다 하면서 특별함을 살피노라.
조주趙州의 관문과 설산의 등성이여,
축합봉築廅峰 앞에서 허虛와 실實을 증험한다.
증험에 의해 신령함을 써서 1만 기틀을 열고
조사의 칼날을 휘둘러 세 영역에 들리니
펼치고 거둬들임이 거듭 거듭되는 것을 뉘라서 알랴.
식識의 뜻을 드러내어 부질없이 뽐내지 말라.
납자가 눈썹을 찡그리고 푸른 눈을 부릅뜨면
황하가 곤륜산 꼭대기로 거슬러 흐른다.
위산潙山의 검은 암소를 도오道吾가 외쳤고
마조馬祖는 서슴없이 원상圓相을 드러냈네.
물그릇을 들고 바늘을 던져 뒷사람의 본을 이루고
거울을 잡고 깃발을 지녀서 예전의 종사를 살핀다.
광릉廣陵의 노래를 누가 이어서 부르는가.
이으려면 음률音律로는 곡조를 못 맞춘다.
돌사람이 성을 내어 채찍을 흔드니
나무말이 달리면서 범천梵天에 오른다.
여수麗水의 황금과 남전藍田의 옥이여,
축융봉祝融峰은 뾰족하고 소상의 물결은 구비 친다.
보름달 맑은 개울 솔바람 소리에
구름이 용을 따라 피어오르니 좋은 경치로구나.

단하丹霞 화상의 완주음翫珠吟 2수

  1수
반야의 신령한 구슬 묘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법성의 바다 속에서 직접 인정해 얻어야 한다.
숨었다 드러났다 항상 5온蘊 속을 노닐면서
안팎의 광명은 큰 신력神力이로다.
이 구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니
밤낮으로 광명은 모든 것을 비추네.
찾으려면 한 물건도 없고 또한 자취도 없지만
앉거나 서노라면 서로 따르면서 항상 요요了了하다.
황제黃帝가 일찍이 적수赤手에 갔을 때
들으려고 해도 구하려고 해도 모두 이루지 못했는데
망상罔象은 마음이 없어서 도리어 구슬을 얻었으니
능히 본다거나 능히 듣는다는 것 모두가 거짓일세.
우리 스승 방편으로 마니 구슬 가리키니
구슬 찾는 사람이 수없이 봄의 물에 빠졌네.
제각기 기왓장을 보배라고 여겼지만
지혜로운 이는 편안하게 얻었네.
삼라만상 모두가 광명 속에 나타나니
체용體用이 여여如如하여 구르면서 아니 구르네.
만 가지 기틀이 마음 가운데 꺼져 버리고
어느 때에나 공교로운 방편을 부린다.
여섯 도적을 태우고 뭇 마魔를 태우며
능히 아만我慢의 산을 꺾고 애욕의 바다를 말린다.
용녀龍女는 영산靈山에서 직접 부처님께 바쳤는데
궁핍한 자식은 품에 품고 얼마나 헤매었나.
성품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음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성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어서 고금을 초월한다.
전체全體가 밝을 때에 밝음을 얻지 못하니
방편으로 구슬의 노래를 지어 보노라.
  2수
옷 속의 보배를 알아채면
무명無明의 취기는 저절로 깬다.
백 조각 뼈는 흩어지지만
한 물건은 영구히 신령하다.
경계는 전혀 체體가 아님을 알지니
신령한 구슬은 일정한 형상이 없다.
깨달으면 3신불身佛이지만
미혹하면 만 권의 경을 의심한다.
마음에 존재하면 마음이 헤아릴 수 있으나
귀를 지나는 것은 귀로도 들을 수 없다.
망상罔象은 천지天地보다 앞섰고
현묘한 샘은 깊고 깊은 데서 난다.
본래의 강함은 단련에 의하지 않고
원래 맑은 것은 맑히지 말라.
소반 위에 아침 해를 놓아서 굴리는 듯
영롱함이 새벽 별을 비추는 듯
상서로운 광명이 흘러서 멸하지 않고
진기眞氣는 닿기만 하면 다시 난다.
밝게 비추면 공동崆峒이 고요하고
벌리고 싸면 법계가 밝다.
범부를 무찔러도 공은 멸하지 못하고
성현을 초월해도 과果는 차지 않네.
용녀가 마음으로 직접 바쳤고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자기 입으로 바쳤네.
거위를 보호하니 사람도 도리어 살았거늘
참새의 뜻은 여전히 가볍구나.
말할 줄 아는 것은 혀와 상관하지 않고
능히 말하는 것은 소리가 아니다.
끝이 없으니 더욱 드넓고
살피[際]가 없으니 허공같이 평등하다.
교법을 연설하는 것 말하기 위함이 아니고
명성이 나도 명성을 인정하지 말라.
양쪽에 모두 서지도 말고
중도中道에도 다니지 말라.
달을 보았거든 손가락을 그만 살피고
집에 돌아왔거든 길을 묻지 말라.
마음을 알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어떤 부처를 다시 이룰 것 있으랴.

관남關男 장로의 획주음獲珠吟 구슬을 간직하는 노래.


삼계는 허깨비 같고
6도道는 꿈속과 같다.
성현이 세상에 나심은 번개 같고
국토는 마치 물 위의 거품과 같네.
무상하게 생멸하면서 나날이 변천하니
오직 마하반야摩訶般若만이 견고하여서
마치 금강처럼 뚫을 수가 없다네.
부드럽기는 솜[兜羅]이요 크기는 허공과 같고
작기는 티끌보다 더해서 볼 수가 없다.
감싸서 모으려 해도 모아지지 않고
없애려고 흩어도 흩어지지 않네.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눈을 부릅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네.
노래하고 또 노래하다가
반석 위에서 깔깔 웃어대고
웃고 또 웃다가
푸른 소나무 그늘에서 큰 소리를 지른다.
스스로 이 마음 구슬을 얻은 뒤로는
제석帝釋도 전륜왕轉輪王도 부럽지 않다.
나 혼자서 하는 짓이 아니라
예로부터 성인들은 이런 곡조였다네.
좌선도 하지 않고 수도도 하지 않으니
운運에 맡겨 소요하면서 이럴 뿐이네.
다만 만 가지 법을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있다면
무시이래로 어찌 나고 죽음이 있었으랴.

향엄香嚴 화상 지한智閑의 시 2수

여각음勵覺吟 깨닫기를 권장하는 노래.


입에 가득한 말, 말할 곳 없어라.
분명히 사람들에게 말해도 결택하지 못하네.
급히 서두르고 이를 악물라.
죽음[無常]이 닥쳐오면 구할 길 없다.
낮에는 이야기를 하고
밤에는 이를 악물고
옛 송곳을 뾰족하게 갈아서 덩그렇게 두었네.
이치가 다한 각성을
나 스스로가 보호해 가지니
금생의 일은 끝내 말하지 않네.
현학玄學에서는 옛 노인의 말씀을 구하지만
선학禪學에서는 모름지기 궁구하여 
마음의 그림자를 끊어야 한다.

귀적음 증동주歸寂吟贈同住 적멸에 돌아가는 노래.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에게 준다.


같이 사는 도인이 70여 명인데
모두가 집을 떠나 산에 살기를 좋아하니
몸은 찬 나무와 같고 마음은 싹도 끊겼으며
당나라 말도 하지 않고 범서梵書도 그만두네.
마음의 기약이 다한 곳에서 몸은 없어지더라도
여래의 제자인 사문의 자세로다.
깊은 신심으로 서로 존경하여 발우의 탑 이루어서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여래의 몸은 이미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음식을 받지 않지만, 여러 성문聲聞들을 위해 앞에서 소치는 여인 두 명에게서 우유죽을 받았다고 설하였다.” 
그래서 󰡔본행경本行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살이 도수(道樹:보리수)에 가려 하자, 그때 천인天人이 선생신왕善生神王의 두 딸에게 고하였다. 하나는 난타難陀로서 한역하면 희喜이고, 다른 하나는 바라婆羅로서 한역하면 창昌이다.
‘너희들이 최초로 음식을 보시할 수 있다.’
그러자 두 딸은 우유로 죽을 끓였는데, 그 솥 위에서는 갖가지 상서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이윽고 그릇에 담아 바치니, 보살은 먹고 나서 그 그릇을 니련하尼連河 속에다 던졌다. 천제석天帝釋이 그릇을 거두어 천상으로 돌아가서 탑을 세워 안치하고는 공양하였다. 이 때문에 그 이름을 발탑鉢塔이라 하는데, 천상의 네 가지 탑 중의 하나이다. 네 가지 탑은 첫째 발탑(髮塔:머리카락 탑), 둘째 전탑(箭塔:화살 탑), 셋째 발탑(鉢塔:발우 탑), 넷째 아탑(牙塔:치아 탑)이다. 인간에게도 네 가지 탑이 있으니, 첫째는 여래가 태어난 곳의 탑이고, 둘째는 여래가 성도成道한 곳의 탑이고, 셋째는 여래가 법륜을 굴린 곳의 탑이고, 넷째는 여래가 열반한 곳의 탑이다.”]
우뚝하게 청산靑山의 손바닥에다 얹어 두었다.
도 배우는 이를 보건대 허망하지 않아서
껍질인 몸 벗어남이 매우 고상하구나.
애초부터 오늘 아침 일을 말하지 않고
어둠 속에 머리를 묻고 몰래 현묘함을 펼쳤네.
자취를 남기지 않아서 인간과 다르니
깊고 묘한 신령스런 광명은 밝음으로 배불렀다.

소산韶山 화상의 심주가心珠歌

산승山僧이 스스로 공문空門을 통달한 지 오래니
마음 구슬 단련하는 일이 이미 끝났다.
구슬이 영롱하여 주인과 손님을 나누고
간혹 소리를 내는 것은 사자후 같다.
사자후여, 비상한 뜻이니
모두가 불성의 진여 이치를 밝혔네.
때로는 간혹 스스로 사유해 보면
활연한 큰 뜻에 마음이 기쁘다.
경을 짓기도 하고 논도 저술하며
점법漸法을 말하기도 하고 돈법頓法도 말한다.
부처님 쪽에 있으면 신통을 일으키고
범부 쪽에 있으면 인색한 마음이 되네.
이 마음의 구슬은 물속의 달과 같으니
땅 끝이든 하늘가이든 차이가 없다.
오직 미혹했기 때문에 어긋남이 있으니
그 까닭에 여래께서 다양하게 말씀하셨네.
지옥의 길과 아귀의 길과 같은
여섯 길을 윤회하면서 잠시도 머물지 못하니
이는 부처님의 자비가 없기 때문이 아니요
염왕閻王이 조작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들에게 권하노니 깊이 체득할지니
마음 구슬 잘 보아서 놓치지 말라.
5온의 몸이 온전할 때에 모른다면
백 마디 뼈가 흩어진 뒤에는 어디서 찾으랴.


위부魏府 화엄華嚴 장로의 시중示衆 이 부분은, 신수대장경에는 맨 뒤에 있으나 내용상 이 자리에 넣는 것이 합당하므로 이곳으로 옮겨 번역하였다.


불법은 일상 생활하는 곳에 있으니,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고 차 마시고 밥 먹는 데와 이야기하고 묻고 대답하는 데 있다. 짓는 일과 하는 일에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 역시 옳지 못하니, 알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바로 지금 걸림 없이 자재한 진인眞人이지만, 알지 못했다면 칼을 쓰고 족쇄를 찬 죄인이다. 왜 그러한가? 불법은 멀리 티끌같이 많은 겁이 막힌 것이 아니라, 그대의 한 생각 속에서 볼 수 있고 그대의 눈썹과 콧구멍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알지 못했다면 장대를 이어서 달을 따려는 것 같으니, 존재하는 곳에서 절대로 생각에 잠기지 말고 말로 표현해서도 안 된다.
그대는 하루 12시 가운데 누구의 은력恩力을 받아서 사는가? 만일 안다면 그대는 기뻐할 경지가 있으리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항상 적적寂寂하고 항상 역력歷歷하니, 모든 부처를 구하여 찾지 못하고 중생은 소식이 끊겼다” 하였다. 그대는 알겠는가?
온갖 법은 본래 무정하고 모든 부처는 본래 스스로 신령스러우니, 혼연히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알겠는가?
모르겠다면 닿는 곳마다 막혀서 몸이 빠진 곳도 모른 채 허둥지둥한다. 오랜 겁을 단지 물건을 연모하고 경계에 집착하며, 빛깔을 실답다고 인정하고, 은애恩愛를 버리지 못하며, 어리석게 재물에 홀려서 나와 남을 다툰다.
한 무더기의 의기意氣가 조금이라도 감정에 어기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강함과 약함을 따지면서 “나는 남에게 속지 않는다”, “나는 대장부다”, “나는 처자를 양육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대는 어찌하여 업장의 바다 속과 죄악의 구덩이 안에서 고기 먹기를 아귀가 시체를 뜯는 것같이 하고, 술 마시기를 주린 개가 물 마시듯이 하며, 여색을 좋아하기를 주린 파리가 피를 빠는 것같이 하는가? 알겠는가?
이 몸이 큰 재화의 근본임을 모르고 방자하게 무명에 끌려서 어리석게 의기를 북돋다가 오래지 않아 무너지면서 허망하게 났다 죽었다 하고 헛되이 1천 겁을 지내도록 들락날락 하는데, 어째서 금강의 견고한 몸이 영원히 살면서 멸하지 않는 도는 알아채지 못하는가?
세상에 있으면서 머리를 흔들흔들, 입을 오물오물, 눈을 껌벅껌벅 하다가 무상한 죽음의 귀신이 닥쳐와 머리맡에 나타나면, 설사 마음을 써서 재물을 연모하고 경계를 흠모하는 것처럼 당장에 달려가서 염라대왕을 뵙더라도 한마디도 못한다. 무쇠화로ㆍ숯불ㆍ불매ㆍ구리 기둥ㆍ칼산 등이 모두 희롱하지만, 이런 때에 크게 뉘우쳐도 면하기 어렵다.
그대들은 지금 병이 나기 전부터 몸을 보살피는데, 어찌하여 하루 종일 털끝만한 선행이라도 구해서 노자 돈을 삼으려 하지 않는가? 허깨비 같은 몸을 무엇에 의거해 실답다고 여기는가? 부처님들이 과거에 경을 남기고 논을 저술하신 온갖 선한 법은 모두가 그대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업장을 참회하고, 이익을 자라게 하며, 선지식을 구하고, 해탈 법문을 보여 주며, 무명의 성품 속에서 진실한 주인공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겁의 세월 속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기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은 몸의 근본 성품이 부처님과 동시同時라 본래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가?
일대사一大事가 그대들의 오줌 그릇과 똥 무더기에서 광채가 찬란하고 옥처럼 둥글고 아름다운데 믿어지는가? 만일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대 멋대로 죄악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들어 영원히 헤매리라. 그러나 그대가 빛을 돌이켜 되돌아 비춘다면, 한 찰나에 심념心念이 쉬고 평시에 가졌던 번뇌의 어리석음이 단박에 소멸하면서 모든 반연과 경계가 감로와 제호의 안락국토安樂國土로 변하리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만법은 마음으로부터 생기고, 만법은 마음으로부터 멸하나니, 모두가 그대의 마음을 말미암는다”고 하셨으니, 선과 악도 그대의 마음을 말미암고, 지옥과 천당도 그대의 마음을 말미암는다.
지금에라도 부처님의 지혜와 상응해서 합하면 그것이 부처이다. 다시는 속이는 것이 없다. 당장에 받들고 믿어서 의심치 않으면, 마음이 곧 정각이다. 하필 3아승기겁을 지내야 되겠는가.
금생의 이 몸은 만나기가 너무나 어려운데, ‘나는 범부요’ 하면서 스스로를 퇴보시키지 말라.
천 권의 경전과 만 권의 논서가 오직 중생들이 미혹해서 본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들은 잠시 동안이나마 평소에 물건을 탐내는 마음으로 경전에 쓰인 의리義理를 살펴보라. 오직 말하기를 “중생이 온갖 경계에 끌리는 것은 애욕에 집착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스님이 입이 쓰도록 말하는 것이 참으로 간절하였는데, 그대들은 믿어지는가? 그대들은 수긍이 가는가? 평상시에 추위와 더위에 집착하다가 조금이라도 감정에 어긋나면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날의 일상에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니, 당장 가다듬어 마음을 취해야 되겠는가, 몸을 취해야 되겠는가?
백 년이 화살 같고, 부귀가 꿈과 같다. 은정恩情도 오래가지 못하고, 백 년도 며칠이 안 된다. 머리가 희어지면 병이 오는 것이요, 병은 업의 빚이 온 것이요, 업의 빚은 죽음이 오는 것이요, 죽음은 지옥이 오는 것이니, 그대들은 입을 열어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평생에 길한 일만 했고, 오직 본분에 의거해서 나쁜 일은 안 했다. 나는 죄가 없으니, 내가 태어날 좋은 곳이 있으리라” 하지 말라.
나는 오늘 아침에 그대가 존재함을 믿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그대들의 평등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들은 이 말을 알겠는가? 불법에 의존하지 않는 온갖 법은 모두가 삿된 법과 외도의 견해이다.
또 남을 구제한다든가 나를 구제한다고 말하지 말라. 색色을 탐내고 재물을 사랑하며, 생선을 먹고 고기를 씹으며, 거짓말과 비단 말을 일삼으니, 날마다 이런 짓을 해서 죄업이 매우 깊다. 그대들은 또 입을 벌려 말하기를 “나는 재물을 버려서 탑과 법당을 짓고, 공양을 베풀고 경을 읽었으니 영원한 공덕이 되리라”고 하지 말라. 이런 것으로 진실을 삼으면 의탁할 수 없으니, 대중 속의 노스님께서도 그대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대들은 알겠는가?
그대들에게는 천 가지 만 가지 무명의 죄업이 있으니, 부처님도 그대를 어쩔 수 없다. 모름지기 그대 스스로가 힘을 써서 앞길을 스스로 판단하라.
만일 그대가 온갖 유위의 공덕을 짓는다면 이는 업을 지을 뿐이며, 거짓된 복만 늘려서 청정한 지견을 내지 못하리라.
이 중도 비록 그렇게 공양을 받고는 있지만, 밤낮으로 불안하니 옳지 않음이 있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알겠는가? 그대 마음대로 제방 노숙老宿에게 가서 말해서 나를 비웃게 하라. 그러나 나를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들이 시주에게 돈 얻은 곳을 따져 본다면, 아마도 그대들은 사람들에게 두루 윤택을 주지 못하고 가난과 고통을 구제하지 못한 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요달했다면 끝까지 먹는 것을 그만두고, 끝까지 집착하는 것을 그만두고, 일찍 수행하는 것을 그만두고, 이 몸을 제도하기를 그만두고, 뉘우치는 마음도 그만두어라. 뉘우치는 마음도 그만두는 것을 잘 생각하라. 진중(珍重:안녕).


한림학사翰林學士 공부시랑工部侍郞 증贈 예부상서         禮部尙書 문공文公 양억楊億이 비서감袐書監에 임명         되어 여주汝州를 다스리던 어느 날 내한(內翰:한            림)인 이유李維에게 글을 보내 그가 법을 전해 받         은 시말始末을 밝혔으니, 다음과 같다.

병부(病夫:나)가 일찍이 어리석은 몸으로서 돌보아 주심을 받아 미리 남종南宗의 종지를 물었는데, 오랫동안 높으신 거동을 모시면서 앉고 섬에 질문하고 오가면서 탐구함으로써 마음의 조예가 약간 생겼습니다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끄러움도 모른 채 남의 좌석 끝에나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고故 안공安公 대사가 매양 자상한 가르침을 일러 주셨건만, 쌍림雙林에서 그림자를 멸하고 신발 한 짝이 인도로 돌아간 뒤부터 마음속이 허전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니, 그 해에 심한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하기까지 하였다가 약간 뜸할 적에야 다시 방위를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또 운문雲門 양공諒公 대사가 나를 찾아와 주었는데 양공의 뜻도 안공과 궤도가 같았으니, 그들은 모두 여산廬山의 귀종歸宗과 운거雲居에서 온 이로서 모두가 법안의 후손이었습니다.
작년에 잠시 고을을 지키러 왔다가 마침 광혜廣慧 선백禪伯을 만났는데, 그는 남원南院 염念의 법을 이었고 남원념은 풍혈風穴의 법을 이었고, 풍혈은 선남원先南院의 법을 이었고, 남원은 흥화興化의 법을 이었고, 흥화는 임제臨際의 법을 이었고, 임제는 황벽黃檗의 법을 이었고, 황벽은 백장百丈 해海의 법을 이었고, 백장은 마조馬祖의 법을 이었고, 마조는 양讓 화상 밑에서 나왔고, 양 화상은 조계(6조)의 맏제자이십니다.
관청 일이 간소하고 사생활에 여가가 많으므로 오시는 것을 앉아서 맞기도 하고 수레를 몰아 뒤를 따르기도 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청해 물으니, 막혔던 의심이 단박에 풀리면서 반년이 지난 뒤에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잊었던 것을 갑자기 기억한 것 같고,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아서 평소에 가슴에 막혔던 것이 툭 트이면서 저절로 떨어지고, 여러 겁에 밝히지 못했던 일이 훤하게 눈앞에 펼쳐지니, 진실로 결택하는 데 분명하고 응접하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이에 거듭 생각하건대 선덕들도 거의가 여러 곳에 참문했었으니, 설봉雪峰은 아홉 차례 동산洞山에 올랐고, 세 차례 투자산投子山에 오른 끝에 덕산德山의 법을 이었고, 임제臨際는 대우大愚에게 법을 얻었으나 끝내 황벽黃蘗의 대를 이었고, 운암雲巖은 대체로 도오道吾의 교훈을 받았으나 약산藥山의 제자가 되었고, 단하丹霞는 마조馬祖에게 인가를 직접 받았건만 석두石頭의 후손이 되었으니, 이런 예가 예전에도 많이 있어서 이치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병든 내가 이제 이어받는 인연도 실제로는 광혜廣慧에 속하건만 이끌어 주신 시초는 오봉鼇峰에서 나왔으니 기쁘고 다행한 일이로소이다.

시랑侍郞이 광혜廣慧 화상에게 이렇게 물었다.
“평소에 듣건대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갖 죄업은 모두가 재물에서 생긴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재물을 멀리하라고 하셨는데, 남섬부주의 중생은 재물로써 생명을 삼고 국가도 재물로써 사람을 모으고 경전에도 재물과 법의 두 가지 보시를 말씀하셨거늘 어째서 사람들에게 재물을 멀리하라 하십니까?”
광혜가 이렇게 대답했다.
“깃대 꼭대기에 무쇠 용두龍頭이니라.”
“해단마자(海壇馬子)의 크기가 당나귀만 합니까?”
“초楚 땅의 닭은 단산丹山의 봉鳳이 아니다.”
“부처님이 멸도하신 지 2천 년에 비구들은 부끄러움이 없어졌군요.”
동문同門의 스님이 표징表澄에게 이렇게 물었다.
“듣건대 누가 말하기를 ‘하늘 위에도 미륵이 없고, 땅 위에도 미륵이 없다’고 하는데, 미륵은 어디에 있습니까?”
표징이 이렇게 대답했다.
“손 위의 나무[手上木]이다.”
“죄가 돌아가는 곳이 있겠군요.”
“잘못을 아는 이가 드물다.”
“주장자를 맞아야 하겠군요.”
이에 표징이 할을 하니, 시랑이 말했다.
“놓치면 안 됩니다.”
시랑이 이李 부마附馬에게 물었다.
“석가모니께서 6년을 고행하셔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부마가 대답했다.
“멜대[擔]가 부러지고야 짐이 무거운 줄 안다.”
“한 소경이 여러 소경을 이끌 때는 어떠합니까?”
“소경이니라.”
“환하군요.”
부마가 그만두었다.
동광제(同光帝:장종)가 흥화興化 화상에게 묻되 “짐이 중원中原의 보배를 얻었는데 아무도 값을 치지 못하는구료” 하였다. 이에 흥화가 대답하되 “폐하의 보배를 보여 주십시오” 하니, 황제가 손으로 복건(幞巾:머리에 쓰는 수건)의 끈을 풀었다. 이에 흥화가 말하되 “군왕의 보배를 누가 감히 값을 따지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현각玄覺이 이를 두고 말하되 “흥화의 안목이 어디에 있었을까? 만일 긍정치 않는다면 허물이 어디에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에 시랑이 말했다.
“흥화가 그렇게 다만 대꾸한 것이 장종莊宗을 긍정한 것인가, 긍정치 않은 것인가 판단해 보라.”
스님들이 도를 이야기하는데, 시랑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도는 사람을 여의지 않으니, 사람이 능히 도를 편다. 대체로 참선하여 도를 배우는 이는 하루 종일 항상 돌이켜 살펴야 한다. 보지 못했는가? 남전南泉이 말하기를 ‘30년 동안 한 마리의 검은 암소[水牯牛]를 지켜보다가 남의 밭에 침입하면 곧 고삐를 끌어 돌이켰더니, 이제는 맨땅의 흰 소로 변해서 풀어 놓아두어도 달아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러분들은 오래오래 정신을 바짝 차려라. 선도禪道를 말할 때에는 비추고 살피는 도리가 있다가 나물을 다듬거나 일을 할 때에는 없어진다고 말하지 말라. 마치 닭이 알을 품는 것 같으니, 만일 알을 떠나서 일어나면 따뜻한 기운이 식어서 병아리가 되지 못한다. 지금의 삼라만상에서 여섯 감관을 번거로이 움직이다가 돌이켜 살피는 일을 잊으면, 문득 몸과 목숨을 잃으리니 작은 일이 아니다.
이제 이 인연의 생生을 받고서 생사에 얽매임은 대체로 티끌 수효같이 많은 겁으로부터 생멸하는 마음에 순응하였고, 또 그 유전流轉에 따라 지금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여, 말해 보라. 만일 일찍이 잃었던들 어찌 오늘에 이를 수가 있었으랴. 맨땅의 흰 소를 알고자 하는가? 시험 삼아 콧구멍을 잡아서 끌어 보라.”
시랑이 또 말했다.
“현사玄沙 화상이 말하기를 ‘대당국大唐國 안에서 종문宗門의 법을 아무도 들추어 제창한 이가 없다’고 하였는데, 누군가가 들추어 제창했다면 온 누리의 사람이 모두 성명性命을 잃었을 것이다. 이는 구멍 없는 무쇠 방망이 같아서 일시에 칼날이 무디고 혀가 굳어지리라. 말해 보라. 이게 무슨 도리인가? 지금 주인과 손님을 임시로 설정해서 두 조각 입술을 움직이고, 손가락을 곧추 세우고 불자拂子를 번쩍 들지만, 모두가 뒤바뀐 지견을 이루어 그대의 미친 뜻에 따르면서 그대로 하여금 묻고 이야기하는 곳이 있게 할 뿐이다.
만일 눈 밝은 사람 앞에서라면 어찌 그런 식으로 드러낼 수 있으랴. 예컨대 노조魯祖 화상은 스님이 오는 것을 보자 얼른 벽을 향해 돌아앉았는데, 장경長慶이 말하기를 ‘그 따위로 사람을 제접하다가는 당나귀 해[驢年]나 되어야 한 사람 얻을지 모른다. 나는 노조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노장이라 하노라’ 하였다. 이렇거늘 눈 밝은 사람이 어찌 긍정하겠는가.
이제 어쩔 수 없어서 그대들 여러 사람에게 뒤바뀐 지견을 보여주나니, 마치 수건을 매듭지어서 말을 만들고 눈을 비비어 허공의 꽃을 보는 것과 같다.
상조(上祖: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지견을 열고, 부처의 지견을 보이고, 부처의 지견을 깨닫고, 부처의 지견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셨으니, 그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위광威光을 무색케 했던가. 말해 보라. 여러분의 분수 위에서 무엇이 부족한가.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내가 이렇게라도 알려 주지 않거나 들려주지 않았다면 그대들은 어디서 만나 보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은혜를 아는 이는 적다’고 하였으니, 말해 보라. 어떤 사람의 은혜를 받았던가. 이에 대해 밝히지 못하겠거든 돌기둥[露柱]에게 물어보라.”
시랑이 또 말했다.
“이 일은 퍽 어려우니, 석가모니께서도 21일 동안 생각한 끝에 열반에 들려고 하다가 제석帝釋 범왕梵王의 정성스런 세 차례의 청을 받아 마지못해 허락했다. 처음 녹원鹿苑에서부터 마지막 구시라성俱尸羅城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크게 불사를 일으키시니 5승乘 12분교分敎를 병에서 물을 따르듯 하였다. 그러던 마지막에 영산회상에서 눈으로 가섭을 보시면서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있는데 마하대가섭에게 부촉하노라’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49년 동안 한마디도 말한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게 무슨 도리인가?
만일 여러분의 분상分上에서 말한다면 한 글자의 첫 획도 붙일 수 없나니, 여러분에게 기특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특한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벌써 맞지 않는다. 나는 말하기를 ‘석가는 패전의 장수요, 가섭은 몸과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하나니, 그대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옛사람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열반과 생사는 모두가 잠꼬대요, 부처와 중생은 나란히 군소리라 하였으니, 바로 이렇게 알아들을지언정 밖을 향해 달리면서 구하지 말라. 만일 이것을 밝히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이 헛수고를 적지 않게 하였다고 감히 말하겠노라.”
시랑이 다시 󰡔조론肇論󰡕의 말씀인 “만물을 회통하여 자기를 삼는 이는 오직 성인뿐이다”라고 한 구절을 들어 말했다.
“지금 눈앞에 산하대지와 나무와 숲이 올망졸망한데, 이들은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말하면 저 갖가지 물건이 제각기 같지 않으며, 다르다고 말하면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물을 회통하여 자기로 삼는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교리에서도 말하기를 ‘한 사람이 참 마음을 발해서 근원에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일시에 녹아버린다’고 했고, 어떤 고덕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마음을 알아채면 대지에 한 치의 흙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게 무슨 도리인가? 당장에 시방세계가 온통 그대의 외짝 눈이요, 여러 부처님과 천인天人, 중생들이 모두 그대의 위광威光을 받아 건립된 것임을 확실히 믿어야 바야흐로 체득한다.”
시랑이 임종하기 하루 전에 손수 게송을 써서 집사람에게 주면서 다음 날 이李 부마附馬에게 전하라 했는데, 그 게송은 다음과 같다.

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거품이 꺼지는 것
두 법이 본래부터 가지런하니
참으로 돌아갈 곳을 알고자 하는가.
조주趙州 동원東院의 서쪽일세.
漚生與漚滅  二法本來齊
欲識眞歸處  趙州東院西

이부마가 게송을 받고는 태산묘泰山廟에 가서 지전紙錢을 샀다. 즉 재齋를 지냈다는 말이다.
이상은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제18권에서 나왔다.

연우延祐 3년 병진년丙辰年에 사명四明 필추苾芻 희위希渭가 의발衣鉢을 팔아서 한 힘을 보태어 장인에게 명을 내려 여산廬山 온암穩菴 구본舊本에 의지해서 도량 선유암禪幽菴에서 간행했다. 훌륭한 이익을 모아서 위로는 4은恩에 보답하며 아래로는 3유有를 돕고, 법계의 유정有情이 똑같이 원종지圓種智를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발跋






이 󰡔경덕전등록󰡕은 원래 호주湖州 철관음원鐵觀音院의 스님 공진拱辰이 지은 것이다.
책이 다 되자 그것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위에 보이려고 하는데, 도중에 어떤 한 스님을 만나 동행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에게 보였더니, 그날 저녁에 그 스님이 짊어지고 달아났다.
그래도 서울에 가니, 도원道原이라는 스님이 이미 바치고서 상을 탄 뒤였다. 이 사실은 마치 곽상郭象이 향수向秀의 장자주莊子註를 훔친 것과 같다.
이에 공진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불조佛祖의 도를 밝히려는 것인데 일은 이미 시행되었다. 이름이야 누구에게 있건 한가지이다. 내가 어찌 명예를 위하겠는가” 하고는 다시는 입을 떼지 않았으니, 공진의 마음 쓰임새가 이와 같았다. 이 일은 우리 공자孔子의 누군가가 활을 잊으면 누군가가 얻는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니, 주고받는 절차에 사사로움이 용납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양문공楊文公이 법안(法眼:바른 안목)을 갖추어 교정하였기에 이 책이 더욱 믿을 만한 것이요, 저 󰡔속등록續燈錄󰡕이 스님들을 보내어 사실을 수집하는 동안 돈을 받고 이름을 실어 주어서 진실을 어지럽힌 일과는 다르다.
혹 어떤 이는 의심하기를 “불조佛祖의 전법게傳法偈는 번역해 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여름 벌레가 봄과 가을을 모르는것과 같은 말이다. 불조가 아무리 전함이 없이 전했다 하나 전해 주는 인연이야 어찌 몰라야 된단 말인가.
또 달마는 정변지正遍知를 갖춘 분이어서 서역과 중화中華의 말을 모두 환히 깨쳤다. 그의 문답을 보더라도 어디 번역해서 전한 티가 있던가. 이는 마치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교리 밖에 따로 전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의혹하기를, 󰡔능가경棱伽經󰡕은 송宋나라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이지 달마가 비로소 갖고 온 것이 아니라 하는 것과 같으니, 이 어찌 딱한 일이 아니랴.
복주福州 대중사大中寺의 지장知藏으로 있는 스님이 전란이 있은 뒤에 서적이 없어져서 도법의 존속이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주를 걷어 이 책을 다시 펴서 승속의 열람에 편의를 제공하고는 나를 찾아와 서문을 써 달라고 하기에 책 뒤에다 이렇게 적는다.

소흥紹興 임자(壬子, 1232) 첫 겨울 달 10일에 장락長樂 정앙鄭昻이 쓴다.







소疏
[천동天童 굉지宏智 화상 지음]





도추道樞 속의 빈 이치는 내[我]가 없는데도 이름과 형상을 취하고, 신령스런 기틀이 안에서 발한 지혜는 내가 없는데도 변화와 신통을 포괄한다. 일념에 깊이 본원本源을 사무치니, 여섯 이치[六義]가 모두 신령스런 작용을 이루고, 호흡을 낼 때에 콧속이 시원하니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두리번거리는 사이와 손가락을 튀기는 틈에 확연해지는 것이 우레 소리에 벌레가 입을 떼는[破] 것 같고, 찬란함이 안개가 표범 같은 채색을 이루는 것 같다. 제방 납자들의 전기는 으뜸가는 장부의 지음이니, 달마는 오실 때에 문자를 세우지 않았으나 위음威音부처님 이후로는 전해 받는 절차가 필요했다.
병부가 병부에 합하니 법규와 법규가 들어맞고,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니 말과 침묵이 모두 통달한다. 등불과 등불이 불꽃을 이으니, 끊임없이 세상을 비추는 광명을 나누고, 잎과 잎이 번성하니 신령스런 종자가 마르지 않게 하는 봄빛을 이어 간다. 조사의 계보를 이어 가니 누구의 종풍을 계승했는가? 면면히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며, 분명히 집안을 일으키는 자손들이다.
강하고 부드러움은 법도로 삼을 만하니, 이글이글하여 백 번 달군 쇠가 무색하고, 물리치고 구박해도 떠나지 않으니, 간절함이 박옥璞玉을 세 차례 바친 이에게 견줄까. 기약하기 어렵구나, 못을 파서 달을 건지는 것이요, 계합하기 어렵구나, 겨자씨를 던져서 바늘 끝에 맞히기다.
칼집을 나와서는 광채를 뿜고, 가르침의 길에 들어서서는 그릇을 이루며, 스스로 수용하게 되어서는 서로 증명을 구한다.
맘마 빠빠[哆哆啝啝:아기의 중얼거림]를 부르는 무리는 혀끝에 털이 돋게 내버려 두어라. 뾰족뾰족한(똑똑함) 무리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게 한다. 주먹을 쓰기 두렵구나, 그 용맹이여. 문득 와서 범의 수염을 잡아끌고, 방망이로 위세를 부려서 놀라게 하고, 뱀의 희롱하는 수단을 지켜본다.
모습[相]이 원만과 결함으로 나뉘니 감응하여 작용하는 것이 합당하고, 바르고 치우친 지위를 열거하니 기틀에 따라 법도에 맞는다. 
털끝만큼 어긋남에 천지의 차가 생기고, 싸라기만큼이라도 청정치 못하면 파리 떼가 끓는다. 보지도 듣지도 않고서 마군을 항복시키니 원래 예사 무리가 아니요, 혼자서 부르고 스스로 대답하면서 주인이 되니 또랑또랑하다 하리라. 멜대[匾擔]에는 온갖 일을 꿰어 달고, 포대 속에는 갖가지 물건을 넣는다. 
길고 짧음은 나에게 달렸으니, 보공寶公의 지팡이 끝에 칼이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누구를 말미암음인가. 만회萬回의 품안에 든 꽃북[花鼓]이다. 스님들은 버들가지를 들고서 일어나고 대사는 판때기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니, 봉鳳을 잡고 자라를 낚는 일 본분의 공부요, 조개와 굴을 따는 짓 평생에 즐거운 일이다.
벽돌을 갈아 사람을 제접하는 묘리와 송곳 끝을 세워 대꾸하는 방법은 번개같이 말아내는 기틀의 바퀴요, 바람이 달리는 문답이다. 풀밭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구절과 깃대를 흔들어 풀단을 비치게 한 공功은 줄탁啐啄이 동시同時라 마음의 눈이 서로 비춘다. 
운運에 맡겨 등등하니 허물이 없고, 평탄한 생각으로 거침없으니 걸림이 없다. 출가해서 행각行脚한 인연과 앉아서 죽고 서서 해탈한 시절을 서책에 기록하니, 옛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 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신령스런 계합의 경지에 나아가려면 행여 말로써 구하지 말라. 입과 귀만으로 퍼뜨리다가는 몸과 마음의 장애를 이룰까 걱정이다.
비구 사감思鑑이 이 일을 오래 생각한 것은 조사의 등불 전함을 법인法印으로 삼고자 한 것이니, 눈으로 볼 때에는 푸르고 흰빛을 분명히 가려야 되지만 입을 열어서는 암컷 수컷을 따지지 말고, 쓸모없는 이야기 구덩이에서 스스로가 속박되지 말라. 담판한擔版漢은 남의 비웃음을 꺼리지 않는다. 동행인에게 이를 주어 같이 인연을 맺고자 한다.


경덕전등록 후서後序
[좌조左朝 봉대부奉大夫 충充 우문전右文殿 수찬修撰 
권발견權發遣 태주台州 군주사軍州事 유비劉棐 지음]




󰡔전등록󰡕이 출판된 지는 오래되었으나,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그 판본이 타버려서 심종(心宗:禪法)을 흠모하는 이는 그 책이 없는 것을 섭섭하게 여겼다.
이에 스님 사감思鑒은 무주婺州 사람으로서 짚신을 끌고 도를 찾기를 30년 동안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열반의 묘한 마음을 깨닫게 하고 싶어서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청정 시주를 널리 모아 다시 그 판을 새기니, 승속이 찬탄하여 힘을 합쳐 완성했다.
혹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어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다. 시조인 석가여래 이후로 어느 한 조사도 잠잠히 계합하여 스스로 깨닫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 때문에 달마는 곧장 마음을 가리키면서 문자를 세우지 않았고,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했을 뿐이다. 비록 2조가 눈 위에서 팔을 끊었으나 한마디도 일러 주지 않았고, 오직 그의 잘못된 지견만을 막아 주었을 뿐이다. 2조는 이로 인해 바른 지견을 얻어 활짝 깨달았으니, 2조도 달마의 말에 의해 깨달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증득한 것이다.
또 백장百丈이 자리를 걷은 것, 설봉雪峰이 털 공을 굴린 것, 노조魯祖가 벽을 향해 앉은 것, 석공石鞏이 수레를 끈 것, 도오道吾가 춤을 춘 것, 조과鳥窠가 털을 분 것, 구지俱胝가 손가락을 세운 것이니, 고덕들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인 것이 퍽 많은 까닭은 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도 그렇거늘 하물며 문자이겠는가? 마음의 종지는 당면해서 스스로가 참구해야지 조사의 말씀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마음의 법이 형상이 없다고는 하나 온갖 곳에 두루하니, 푸른 대는 진여이고 노란 꽃은 반야요, 개구리 소리는 기틀을 발하고 거문고 소리는 마음을 전한다. 나아가 담과 기왓장까지도 설법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영운靈雲은 복사꽃을 보고 도를 깨달았고, 현사玄沙는 “제비 소리가 실상實相을 깊이 말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온 누리가 모두 깨달음의 문이니, 어느 것이 도가 아니랴. 하물며 마음의 종지를 밝힌 문자들이겠는가. 하물며 마음의 종지를 밝히는 문자를 실은 것이겠는가.
만일 이 두 가지가 다르다면 마음의 종지에 과연 아무 관계가 없겠는가. 천복고薦福古는 어째서 󰡔운문록雲門錄󰡕을 보다가 깨달았으며, 황룡심黃龍心은 어찌하여 다복多福의 어록을 읽다가 깨달았을까? 대체로 언어의 형상이 고요하고, 문자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그대로 도이니라. 만일 언구와 문자에 의하여 성품과 모습의 공적함을 본다면 이는 바로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 책의 퍼짐이 마음 바탕을 밝히는 일에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기노라.
또 사감思鑒이 화주貨主를 할 때에 태주台州의 영해읍寧海邑 사람 주周씨가 이렇게 찬탄하였다.
“나의 땅에 큰 배나무가 있는데 3대를 묵었다. 요즘 우리 식구들이 제각기 꿈을 꾸었는데, 그 나무 위에 큰 집이 즐비하고, 그 안에 무수한 스님이 왕래하는 것을 보고 매양 의심했다. 이제 보니, 이 책을 새길 징조임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그 나무를 희사하여 판목으로 쓰게 하였다. 또 사감을 집으로 불러 공사를 진행케 했는데, 다 새기고 나니 주씨의 꿈에 스님 여섯이 와서 다 새긴 것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이에 주씨가 사감에게 묻기를 “그게 어떤 스님일까요?” 하니, 사감이 말하기를 “그는 6대까지 의발을 전하시던 여섯 조사께서 특별히 와서 이 불사를 증명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아! 이 책은 일대사一大事를 위해 쓰일 것이라서 마땅히 이런 감응하는 상서로움이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준 것이리라.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다 덧붙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작은 인연이 아님을 알게 해서 그 신심을 더욱 견고히 하게 하노라.

소흥紹興 4년(1224) 상원(上元:정월 보름)에 등자암等慈菴에 사는 선남자, 수양睢陽 유비劉棐 중침仲忱은 서序한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