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광반야경 제11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48. 불화합품(不和合品)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즐거이 듣고 즐거이 받고자 하는데 법사 된 자가 신체가 지극히 피곤하여 설법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마군[魔]의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법사가 신체가 안은(安隱)하여 설법할 때에 법을 받는 자가 여타의 인연에 집착하여 제멋대로 파하여 해산한다면, 마땅히 마군의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수보리여, 경을 받는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사경하고자 할 때에 법사 된 자가 지극한 자리에 있고자 하면 이것은 마군의 일이다. 법사 된 자가 침구․음식․병으로 쇠약했을 때의 의약․입을 수 있는 옷을 공양 받고자 하는데, 경을 받는 사람이 욕심이 없고 족함을 알아 고요하게 베풀어 줄 마음이 없다면 곧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 된 사람이 욕심이 없고 족함을 알아 계를 지키고 탐하지 아니하며, 뜻은 항상 정진하여 즐거이 선정에 있는데, 경을 받는 사람은 족함을 모르고 싫어하여 공양을 탐하여 구한다면 둘이서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 된 사람이 적정처(寂靜處)에 고요하게 안주하여 12법(法)을 행하는데, 법을 받는 사람은 편안하게 앉아 있지 못하며, 또 12법의 일도 받들어 행하지 못하거나, 혹은 수보리여, 경을 받는 사람은 12법을 수지하여 홀로 고요하게 안주하는데, 법사 된 자가 길이 이 뜻이 없으면 둘이 화합하지 못하여 배우고 쓰지 못하니, 이것의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경을 받는 사람은 정진을 하고 믿음이 있어 여법하게 계를 받들며 반야바라밀을 즐겨하는데, 법사 된 자가 흔히 율(律)을 범하여 계를 지키지 못하거나 혹은 수보리여, 법사 된 자가 정진하여 믿고 즐거이 율을 받들고 금계(禁戒)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데, 경을 받는 사람은 흔히 계를 범하고 율을 어기면 둘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 된 자가 탐하여 구하는 것이 없고, 기쁘게 보시하기를 좋아하며, 뜻과 원이 넓고 넓은데, 경을 받는 사람은 많이 구하여 그 탐욕과 아낌과 애석함이 있어 뜻에 걸림이 있고 뜻이 협소하면 둘이서 화합하지 못한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법을 받는 사람은 다시 욕심이 없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탐하는 것이 없으며 뜻과 원이 걸림이 없는데, 법사 된 자가 반대로 다시 탐심을 구하여 지족(止足)함이 없고 뜻[志意]이 협소하다면 둘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경을 받는 사람이 공양하고자 하여 법사 된 자에게 있는 것을 구족하게 주고자 하는데, 법사 된 자가 즐거이 받지 아니하고 반야바라밀을 수지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거나 혹은 수보리여, 법사 된 자가 의복과 소유한 것을 공양하고자 하는데 경을 받는 사람이 다시 청렴 정결하게 수절하여 이양(利養)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다시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 된 자는 경의 도리를 밝히며 용감한 변재와 지혜가 맹렬한데, 경을 받는 자가 어둡게 막혀 있고 둔하고 둔하여 뜻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수보리여, 경을 받는 사람은 뜻이 밝고 통달하며 지혜와 변재가 섬세하게 깨달음이 있는데, 법사 된 자가 탐하고 암둔하여 통달하지 못하였다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 된 자는 12부경(部經)을 설명하고 차례로 해설하는 데 모자람이 없는데, 경을 받는 사람이 차례를 알지 못하고 역순(逆順)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수보리여, 만약 경을 받는 자는 차례를 명백하게 해설하고 12부경을 해설하며 역순의 일을 아는데, 법사가 된 자가 다시 요달하지 못하면 뜻이 화합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가 된 자는 6바라밀을 구족했는데 경을 받는 사람은 구족하지 못하였거나 혹은 법을 받는 자는 6바라밀을 구족했는데 법사가 된 자가 다시 구족하지 못하였다면 둘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가 된 자가 6도(度)를 구족했으며 겸하여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가 있는데, 경을 받는 사람은 이미 6사(事)가 없고 다시 구화구사라가 없으면 둘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가 된 자가 다린니(陀鄰尼)를 얻었는데 경법을 받는 자가 얻지 못했거나 혹은 법을 받는 자가 다린니를 얻었는데 법사가 된 자가 얻지 못했다면 둘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경을 받는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서사하여 경권(經卷)을 만들고자 하는데 법사 된 자가 가까이 주려고 아니하거나 법사 된 자가 경을 주려고 하는데 법을 받는 사람이 서사하려고 아니한다면 또한 화합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법사 된 자는 5음(陰)에 덮여 보는 것이 얽혀 싸고 있는데 경을 받는 사람이 다시 뜻에 덮여 있음이 없으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경을 받는 자가 5음의 미혹에 덮여 있는데 법사 된 자가 음에 덮인 것이 이미 다했으면 둘이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이 반야바라밀을 서사할 때에 혹 어떤 사람이 와서 ‘3악취(惡趣)는 고통이 지극하다’고 그 사람에게 말을 하면서 ‘내가 그대[卿]로 하여금 고통 받는 일을 여의게 할 것이니 아뇩다라삼야삼보(阿耨多羅三耶三菩)를 배워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만약 반야바라밀을 쓰고 설할 때에 반대로 어떤 사람이 와서 천상 욕계천의 쾌락을 칭찬하면서 ‘오욕을 제멋대로 하고 음식과 의복, 기악(伎樂)이 저절로 있으며, 색계천은 모두 선(禪)으로써 즐거움을 삼고 밥을 삼는다. 무색천에서는 고요함[寂]으로써 밥을 삼고 즐거움을 삼는다. 사왕천으로부터 사상(思想)이 없는 곳, 사상이 없는 혜천(慧天)에 이르기까지, 삼계는 비록 이 즐거움이 있으나 또한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공한 것이며, 아(我)가 없는 것이다. 모두 응당 멸진하면 오래도록 그 위(位)에 설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나한ㆍ벽지불의 법을 받는 것만 같지 못하며, 삼계에서 생사를 받는 즐거움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면, 이것이 보살의 마군의 일이다. 법사 된 자는 홀로 있는 곳에서 고요한 뜻을 얻고자 하는데 그 경법을 받는 자는 흔히 장차 대중 속으로 가서 요란한 것을 좋아하거나, 혹은 법사 된 자는 뜻이 대중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경을 받는 자가 다시 홀로 고요한 것을 좋아한다면 또한 함께 화합한 것이 아니니, 마땅히 마군의 일인 줄 깨달아야 한다.
만약 법사 된 자의 뜻은 많은 대중을 좋아하며 제자를 기르는 것인데 법을 받는 사람은 이 무리와 같지 아니하여 홀로 그러함을 얻고자 하거나, 혹은 만약 법을 받는 자는 많은 무리를 좋아하는데 법사는 고요한 것을 좋아한다면 또한 화합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법사는 자기를 존중하고 공경함을 얻고자 하는데 경을 받는 자는 교만한 뜻으로 공경함이 없거나, 혹은 만약 법사는 하고자 함이 없어 그때에 기꺼이 공경함을 따르고자 않는데 법을 받는 자는 공경하게 행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또한 화합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만약 법사는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 뜻으로 받아 취하고자 하는데 경을 받는 사람은 길이 마음에 화합할 뜻이 없으면,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만약 경을 받는 자가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 생각에 반야바라밀을 굴려 따르고자 하면서 이 중에서 마음속으로 재산을 얻을 이익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만약 법사는 목숨이 위급하고 곡식이 귀한 곳에 이르고자 하는데 경을 받는 자가 즐겨하지도 아니하고 따르지도 아니한다면 또한 함께 화합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법사는 풍성한 즐거움으로 곡식이 천한 곳에 이르고자 하며, 그 경을 받는 자도 모두 즐거이 따르고자 하는데 법사가 중도에서 다시 어려움을 만나게 되니 파순의 무리가 다만 공양만을 탐하여 나의 취할 것만 따르고자 한다면 전에 이르고자 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얻을 수 있겠는가? 그 경을 받는 자가 그 발견(發遣)한 상(相)을 보고 점점 돌려보내려는 마음을 일으켰다면, 이것은 마군의 일이다.
법사가 경을 받는 자에게 말하되, ‘내가 길을 가다가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를 지나갈 때, 그곳에 도적과 야인(野人)과 수렵사가 있으며, 또 숱한 호랑이․이리․독사․능구렁이 등 독충이 있다면 네가 나를 따라서 이 고통을 참아 받겠느냐?’라고 한다. 그러나 법을 받는 자가 이 뜻을 듣고 기뻐하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는다면 이것은 걸림이 있는 것이며, 이 경을 수학하고 써서 이름을 얻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법사가 일찍이 몇 군데를 가고자 가르쳤다. 그 법을 받는 자가 그곳에 나아가고자 따랐는데, 중도에서 법사가 경을 받는 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 잠깐 들를 곳이 있는데, 그대는 아직도 가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을 받는 자가 근심에 싸여 따라가려 하지 않고, 듣지도 아니하고 반야바라밀을 수지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마군의 일이 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저 마왕 파순은 마음에 항상 계책을 생각하여 사문이 되어 스님의 옷을 입고 항상 문란하게 무너뜨리고자 하여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자에게 쓰고 외우지 못하게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파순이 무슨 까닭으로 항상 사문이 되어 스님의 옷을 입고 무너뜨리고자 하며 반야바라밀을 수학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파순이 스님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반야바라밀을 수학하는 자를 무너뜨려 떨어지게 하고자 하여 다시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생각하건대, 내 경 중의 교법은 이러하니 자네가 생각하는 경 중의 일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라고 한다. 수보리여, 수기를 받지 못한 자는 이 말을 들으면 곧 여우같은 의심이 생겨 곧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아니하고 수학하지도 아니한다. 이것이 보살의 마군의 일이 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파순이 다시 비구의 형상을 지어서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자에게 말하기를 ‘선남자․선여인아, 반야바라밀을 배우고 외우고 수지하려면 진제(眞際)를 증득해야 하고 수다원과 아라한․벽지불도를 얻어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다. 곧 다시 반야바라밀을 서사하거나 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수보리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할 때에 흔히 마군의 일이 일어나서 단절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마땅히 마군의 일인 줄 깨달아야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마군의 일인 줄 깨달아 멀리 마군의 일을 여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일은 단지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곧 수호하는 것이며, 멀리 마군의 일을 여의는 것이다. 보살은 항상 마땅히 아라한․벽지불을 멀리 여의어야 하며, 경법을 응당 행함으로써 멀리 여의어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파순이 보살 앞에서 내외공과 유무공․37품을 설해서 3탈문(脫門)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아라한[羅漢]의 도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파순이 다시 여래의 금색 광명의 몸으로 화작하여 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모든 보살에게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살운야(薩云若)를 소모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군의 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파순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지어서 모든 비구 대중을 따르게 하여 선남자․선여인이 있는 곳에 이르면 이 선남자․선여인이 생각을 일으키기를, ‘미래세에 내가 몸을 얻게 되면 모든 제자들 가운데에서 설법하는 것이 또한 오늘과 같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는 자는 살운야가 곧 줄어드는 것이다. 파순이 다시 무량한 수의 백천 보살을 지어 6바라밀을 행하는 자가 되어 이 선남자․선여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다시 이 중에서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생각을 일으키는 자는 곧 살운야가 감소할 것이다. 이것이 마군의 일이다.
무슨 까닭으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5음이 없으며, 나아가 저 도(道)에도 또한 소유가 없는 것인가? 5음이 없으며 도가 없다는 것은 또한 불법과 제자들도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다 공하여 소유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선남자․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 만약 외우고 독송하면 흔히 인연을 일으킨다. 비유하면 염부제(閻浮提)에 대장자(大長者)가 있는데 집에 금은․진주․유리 등 묘한 진보(珍寶)가 있으면, 미워하고 질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외우고 수지하면 미워하고 질투하는 자가 많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많은 마군의 일이 있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자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어리석고 지혜가 적은 이가 마군의 부림을 당해서 한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을 끊어 버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무리는 법을 무너뜨리는 사람이며, 마침내는 뜻을 다시 묘법 중에 두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가 말한 것과 같다. 이 어리석은 자가 마군의 부림을 당해서 오로지 파괴를 행하니, 이러한 무리는 법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새로 배우고 이제 막 법을 듣는 까닭이며 공덕을 짓지 못했고 선의 근본이 많지 않기 때문이며, 참선지식[眞知識]과 지내지 못했기 때문이며, 과거의 모든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께 공양을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반야바라밀을 쓰고 외우며 독송하며 설법하고 수행하고 지킬 때에 어려움이 없으며 마군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6바라밀을 구족한 것이며 살운야에 이른 것도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사경하고 외운다면 곧 다섯 바라밀과 일체 살운야를 구족한 것이다. 이것이 불사(佛事)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내외공과 유무공․37품․부처님의 18법 및 10종력(種力)을 구족했으며 살운야를 구족한 자가 있다면, 이것이 또한 불사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시방 현재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도 또한 불사에 의지한다. 이와 같이 선남자․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시방의 현재에 아유월치(阿惟越致)에 있는 보살마하살이 또한 다시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옹호할 것이며, 또한 권장하여 도울 것이다.”
49. 대명품(大明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어머니가 하나하나 아들을 낳아, 하나에서 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되자 저 모든 아들들이 각각 구원할 치료약을 구하고자 하니 춥고 더운 곳, 마르고 습한 곳을 가려 마땅한 곳에 나아가서 길러 준 어머니를 안온하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리를 길러 해와 달을 보게 했는데, 내가 효도하고 봉양하지 못하면 길이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항상 불안(佛眼)으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를 보고 계신다. 왜냐하면 깊은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대명(大明)이 되기 때문이다. 시방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또한 불안으로써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를 보신다. 왜냐하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을 내며 살운야혜(薩云若慧)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를 보고 계신다. 모든 여래의 다섯 바라밀도 또한 이 중에서 생겨나며, 내외공과 유무공․37품이 모두 이 중에서 생겨나며, 10력․18법․살운야도 또한 이 중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수다원에서 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도․삼야삼불도가 모두 반야바라밀 중에서 생기는 것이며, 과거․미래․현재의 여러 부처님도 다 깊은 반야바라밀 중에서 생긴 것이며, 이로부터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阿惟三佛)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써서 수지하며 수학한다면, 모든 부처님은 항상 불안(佛眼)으로써 이 무리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볼 것이며, 모든 부처님은 항상 옹호하여 움직이지 않게 할 것이다.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는 데 조금도 감해지지 않게 할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설법하신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은 이 보살의 어머니이며 세간의 큰 밝음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어찌하여 이 보살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며, 무엇이 세간의 대명(大明)이 되는 것이며, 어떻게 여러 부처님을 출생하는 것이며, 무엇이 세간에 밝음을 시현(示現)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10력과 18법을 생기게 하며, 살운야를 생기게 하며, 여래께서 이 모든 법이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시현하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여래는 반야바라밀에서 출생한 것이다. 세간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5음을 말한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깊은 반야바라밀이 5음을 시현하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또한 생기는 것이 아니며, 5음을 시현하되 또한 멸하는 것이 아니다. 5음을 시현하되 또한 집착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끊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더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감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버리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과거․미래․현재도 아니다.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이며, 또한 성패(成敗)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또한 유위(有爲)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무위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또한 생하는 바가 없는 것을 시현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무소유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또한 진실한 모든 법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성패를 시현하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이것이 반야바라밀이 세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또한 일체 중생이 뜻으로 행하는 것을 아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은 중생의 처소를 알지 못하며, 또한 모든 음(陰)의 6정(情)의 처소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곳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깊은 반야바라밀이 세간을 시현하는 것이다.
깊은 반야바라밀은 또한 5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시현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뜻인가? 깊은 반야바라밀은 또한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마땅히 5음을 볼 수 있겠는가? 나아가 살운야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여, 중생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욕계․형계(形界)․무형계가 이것이다. 넓은 세상과 시방 중생의 어지러운 뜻과 정의(定意)를 여래께서 다 알고 계신다. 다시 일체의 무량한 수의 일을 알고 계신다. 수보리여, 어떻게 여래께서 그 많은 무량한 일을 아시겠느냐? 그것은 법을 쓰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뜻이 있고, 어지러운 뜻이 없는 것도 여래께서 다 아신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어떤 법으로 중생의 어지러운 뜻과 정의(定意)를 아시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법도 오히려 볼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중생에게 있는 어지러움과 정함[定]을 볼 수 있겠느냐? 이런 까닭에 아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중생의 뜻에 어지러움이 있고 정함이 있음을 아신다. 무엇이 아는 것인가? 무상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며, 벗어났기 때문에 아는 것이며, 고요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며, 다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어지러움이 있고 정함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는 중생에게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도 모두 아신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유함과 뜻을 아는 것이니,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유와 생각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땅히 있음을 보겠는가? 이런 까닭에여래는 다 아시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다시 중생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뜻이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아신다. 왜냐하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다는 뜻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 뜻은 또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 개의 뜻은 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는 다 아시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인해서 중생의 뜻을 다 아시며 광대(廣大)하다는 것도 다 아신다.”
“어떻게 모두 아시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여래는 광대함이 없는 중생의 뜻과 협소함이 없는 중생의 뜻과 더함이 없는 중생의 뜻과 줄어듦이 없는 중생의 뜻과 옴이 없는 중생의 뜻과 보냄이 없는 중생의 뜻을 모두 아신다. 왜냐하면 뜻은 진퇴(進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다 아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인해서 중생이 큰 뜻이 있음을 다 아신다. 왜냐하면 중생의 뜻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머묾도 없고 변함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아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로써 중생의 뜻이 한계가 없음을 다 아신다.”
“어떻게 아시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또한 중생의 뜻은 더함이 있고 줄어듦이 있고 머물고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중생의 뜻은 근거지가 없으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아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인해서 중생의 뜻은 볼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신다.”
“어떻게 다 아시는 것입니까?”
“중생의 뜻은 그 뜻이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소유가 없으므로 다 아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인해서 중생의 뜻은 볼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신다.”
“어떻게 다 아시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여래는 5안(眼)으로써 중생의 뜻에 상대[對]가 있는 것을 다 보신다. 이런 까닭으로 아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로 인해서 중생의 굽히고 폄[屈申]과 쥐고 펴는 것[卷舒]을 다 아신다.”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중생의 뜻에 굽히고 폄과 쥐고 펴 보이는 것은 모두 5음의 굴[窟]에서 생기니, 5음은 알지 못하고 다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나와 세상이 있는 것을 안다. 다만 이 일만 알고 그 나머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5음은 또한 다시 내쉬고 들이쉬는 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와 세상이 있다는 것만 알고 그 나머지는 알지 못한다. 몸이 곧 명(命)이며, 명이 곧 이 몸이다. 이 몸은 명이 아니며, 이 명(命)은 몸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인해서 굽히고 폄과 쥐고 펴는 것을 다 아신다. 수보리여, 부처님은 5음을 아신다.”
“어떻게 아시는 것입니까?”
“5음이 여실함을 알며, 여여(如如)함을 알며, 지음이 없이 여실함을 알며 모양이 없되 여여함을 알며, 나아감이 없이 여여함을 알며, 희론이 없이 여여함을 알며, 아(我)가 없어 여여함을 알며, 의지함이 없어 여여함을 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여래는 중생이 여여하다는 것이며, 굽히고 폄과 나가고 들어옴에 5음이 여여한 것이다. 5음이 여여한 것은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6바라밀이 여여한 것이다. 6바라밀이 여여한 것은 37품이 여여한 것이며, 37품이 여여한 것은 18공이 여여한 것이며, 18공이 여여한 것은 8유무선(惟無禪)․9차제선(次第禪)이 여여한 것이며, 8유무․9차제선이 여여한 것은 부처님의 10력이 여여한 것이며, 10력이 여여한 것은 4무애혜(無礙慧)․4등심(等心)․4무소외(無所畏)․대자대비한 부처님의 18법이 여여한 것이다. 18법이 여여한 것은 곧 살운야가 여여한 것이다. 살운야가 여여한 것은 일체의 선법과 악법, 도법과 속법(俗法),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이 여여한 것이다. 이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은 곧 과거․미래․현재가 여여한 것이며, 과거․미래․현재가 여여한 것은 곧 유위․무위법이 여여한 것이다. 유위․무위법이 여여한 것은 곧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이 여여한 것이다. 아라한이 여여한 것은 벽지불이 여여한 것이며, 벽지불이 여여한 것은 곧 아뇩다라삼야삼보가 여여한 것이며, 삼보(三菩)가 여여한 것은 도가 여여한 것이다. 도가 여여한 것은 여래가 여여한 것이며, 여래가 여여한다는 것은 곧 일여(一如)한 것이니, 또한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분별할 수도 없으며, 또한 다함도 없다. 또한 둘도 없으며, 다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이것이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이다.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인해서 모두 다 모든 법의 여여함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여래의 어머니이며, 곧 이 세간의 큰 광명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을 다 아는 것이다.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여여해서 능히 그렇지 않게 하는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여여하고 모든 것이 그러함을 다 안다. 이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 세존을 여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이 이와 같아서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매우 깊고 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여함을 인하여 분출되어 나오며 도로써 교화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과 같은 깊고 깊은 법을 누가 마땅히 알겠습니까? 오직 아유월치 보살마하살과 번뇌가 다한 아라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다함이 없이 여여한 것은 이 무엇이든지 다함이 없이 여여한 것이다. 즉 모든 법이 다함이 없이 여여한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때에 모든 법이 여여함을 설할 것이다.”
50. 문상품(問相品)
그때에 삼천대천찰토의 모든 욕계 천자(天子)와 색계 천자가 온갖 이름 있는 꽃과 이름 있는 향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 위에 뿌리고 예를 올리고 서서 각각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깊습니다. 어떤 것이 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입니까?”
부처님께서 모든 천자에게 말씀하셨다.l
“깊은 반야바라밀은 공한 것이 곧 이 상(相)이므로 모양도 없고 원하는 모양도 없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상이므로 생멸의 모양이 없는 것이다. 집착도 없고 단상(斷相)도 없으며, 소유(所有)가 없는 공한 모양이다. 의지할 바가 없는 상이며 허공과 같은 모양이다. 모든 천자여, 반야바라밀은 깊고 깊은 것이 이와 같다.
여래는 세속을 위하므로 또한 도를 이루려고도 아니하며 멸하여 다하려고도 않으신다. 모든 천자여, 이 상(相)이라 하는 것은 모든 천(天)․용․귀신․세간의 인민이 만들 수도 없으며 기를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천․용과 귀신 및 세간의 사람은 또한 이 상(相)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모양은 모양이지 상(相)을 기르지는 못하는 것이다. 상과 상은 서로 알지 못한다. 상은 또한 상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한다. 상이 없는 것은 또한 상을 알지 못하며, 상과 상이 없음, 이 둘 모두 공하다. 이룰 자도 없으며, 능히 답할 자도 없으며 능히 아는 자도 없는 것이다. 모든 천자여, 이 모양이라 하는 것은 5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6바라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내외공과 유무공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또한 살운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천자여, 이 상(相)이라 하는 것은 또한 사람도 아니며, 또한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또한 번뇌도 아니며, 또한 번뇌가 아닌 것도 아니다. 또한 도(道)도 아니며 또한 속(俗)도 아니다. 또한 유위도 아니며, 또한 무위도 아니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모든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허공은 어떤 모양이며, 어떤 것이 모든 천자입니까?’ 하고 물었다면, 이 사람이 질문한 것은 같은 질문이 되는 것이냐?”
모든 천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같은 질문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모양이 없으며 짓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욕계의 천자와 모든 색계의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불(佛)이 있고 불이 없는 상(相)의 체성(體性)은 항상 머물기 때문이다. 여래는 여실하게 상의 성품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모든 천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 깨달으신 상은 매우 깊습니다. 여래의 아뇩다라삼야삼보의 걸림이 없는 지혜는 상(相)에 머무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에 모인 것이 기이하옵니다. 세존이시여, 깊은 반야바라밀은 이 모든 부처님 여래․무소착․등정각이 갈무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을 갖고 있으며, 이 소장하고 있는 중에서 행을 짓는 것이므로 모든 법상에 이르는 것이며 5음상(陰相)에 이르는 것이며 살운야상(薩云若相)에 이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색이란 것은 형체[形]의 모양이며, 바뀐다[更]는 것은 깨달음의 모양이다. 수(受)라는 것은 상(想)의 모양이며, 선악은 행의 모양이다. 아는 것도 식(識)의 모양이다. 여래는 받는 상(相)이 없으므로 정각을 깨달은 것이다. 애석해 하는 것이 없는 것은 단(檀:보시)바라밀의 상이며, 부패함이 없는 것은 시(尸:지계)바라밀의 상이며, 분함을 일으키지 않는 뜻은 찬(羼:인욕)바라밀의 모양이며, 굴복하지 않는 것은 유체(惟逮:정진)바라밀의 모양이며, 여러 일이 모여진 것은 선(禪)바라밀의 모양이다. 들으면 곧 깨닫고 곧 아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다.
이와 같이 모든 천자야, 받을 바의 상(相)이 없으므로 여래는 정각을 깨달은 것이다. 4선(禪)․4등(等)․4공정(空定)은 성냄이 없는 상이다. 여래는 이 상을 쓰지 않았으므로 정각을 깨달은 것이며, 삼계에서 나옴을 얻었으니 이것이 37품의 상이다. 여래는 이 상을 쓰지 않았으므로 정각을 얻은 것이다. 고(苦)의 모양은 원력과 해탈문이 없는 것이 이것이며, 고요한 모양은 곧 공한 것이 이것이며, 깨끗한 모양은 곧 상이 없는 것이 이것이다. 여래는 이 상을 쓰지 않았으므로 정각을 얻으신 것이다. 고요한 모양은 일어남이 없는 것이 이것이며, 함께하는 모양이 없는 것이 18법이다. 여래는 이 상을 쓰지 않았으므로 정각을 깨달은 것이다. 모양을 나타낸 것이 곧 살운야이다. 여래는 이 상을 쓰지 않았으므로 정각을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천자야, 여래는 모든 법상을 쓰지 않았으므로 정각의 법을 얻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래를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이 모든 부처님 여래․무소착․등정각의 어머니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 여래로서 세간의 큰 광명이며, 여래는 이 법을 의지하여 지을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여래는 이 반야바라밀을 존경하고 예로써 섬기는 것이다.”
“무슨 뜻으로 모든 부처님 여래가 모두 반야바라밀 중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며, 어떻게 여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은 여래에 지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가 어떻게 은혜를 알며 어떻게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아는 것인가? 여래는 법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받아 지님으로써 법을 탈 수 있기 때문에 예를 지어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 은혜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가 법을 깨달은 것은 또한 지음이 없기 때문이며, 짓는 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래는 이 법을 모두 깨달았으므로 지음이 없는 것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다툼이 없는 법이 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가 은혜와 은혜에 보답함을 아는 것은 반야바라밀로 인해서이며, 그러므로 지을 것이 없는 법에서 법을 깨달아 얻은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였으므로 모든 선법(善法)에 이르렀으되 다다른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며, 세간의 대광명이 되어 인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아는 바가 없으며 보는 바가 없으며 출생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부처님의 어머니이며, 어떻게 여래를 출생하며 어떻게 세간의 대광명이 되어 인도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일체 모든 법은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다. 어찌하여 앎이 없고 보는 것이 없는가? 일체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다. 소유가 없고 견고한 것이 없으며 생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은 출생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모든 법은 아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아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는 것인가? 모든 법은 들어갈 곳이 없으며, 집착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어머니로서 세간을 인도하는 것이다. 5음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인도하는 것이며,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볼 수 없으므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로서 세간을 인도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5음은 보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세간을 인도하는 것입니까?”
“5음은 인연으로써 식(識)을 일으키지 아니하므로 5음은 보지 못하는 것이며, 살운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살운야를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여래의 어머니로서 세간을 인도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이 어떻게 여래의 어머니로서 세간을 인도하는 것이냐?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공을 시현(示現)하는 것이다. 무엇이 세간의 공을 보이는 것이며, 5음의 공과 12쇠(衰)․18성(性)을 보이는 것이며, 세간의 10악(惡)의 법을 나타내는 것이냐? 치(癡)에서 애(愛)가 있어 12인연으로 우리의 아(我)의 근본을 보이는 것이다. 62견(見)에서 세간의 공을 나타내며, 4선(禪)과 4등(等)과 4공정(空定)에서 세간의 공을 나타내며 37품과 6바라밀․내공․외공 및 유무공에서 세간의 공을 나타내며, 유위․무위의 성(性)과 10종력․부처님의 18법에서 세간의 공을 나타내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공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로서 세간의 광명이 되어 인도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는 공으로써 세간에 나타나며 공으로써 세간을 생각하며, 세간의 공을 아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로서 세간을 인도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여래를 시현하는 것이며 세간의 공을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공을 보이는 것인가? 5음이 공한 것과 12쇠가 공한 것과 18성이 공한 것을 보이며, 살운야가 공한 것을 나타낸다.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과 어머니로서 세간을 인도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여래는 세간의 불가사의한 것을 시현하는 것이다. 5음이 불가사의한 것을 시현하며, 나아가 살운야가 세간에서 불가사의한 것을 보이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깊은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세간의 고요함을 시현하는 것이다. 어떻게 고요함을 시현하는 것인가? 5음이 고요함을 시현하는 것이며, 살운야가 고요함을 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세간의 고요함을 시현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세간이 항상 공함을 시현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이는 것인가? 5음에서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세간에서 항상 공을 시현한다.
다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세간의 소유가 공함을 시현하는 것이다. 어떻게 공을 보이는 것인가? 5음에서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소유가 공함을 보이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소유․무소유가 공한 것을 시현하며, 5음에서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소유․무소유가 공한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세간의 멸(滅)을 시현하는 것이다. 어떻게 멸(滅)을 시현하는 것인가? 5음에서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멸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런 뜻으로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어머니가 되어 세간을 인도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세간에 금세(今世)와 후세의 상(相)이 없음을 시현한다. 왜냐하면 이 법은 금세와 후세의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대사(大事)가 일어나는 것이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며,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한계가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더불어 같은 것이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큰 일이 되는 것이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수보리여,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 일체 중생을 구호(救護)하므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불가사의한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까?”
“모든 불사(佛事)가 자연히 살운야이며 불가사의하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한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이 몸을 받으면 식(識)이 있다. 불사 및 자연히 일체 지혜에 이르기까지 능히 헤아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한계가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불사는 한계가 없다. 여래의 일도 또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가 여래와 더불어 같음이 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 위에서 나올 것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여래․무소착․등정각의 한계가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불사(佛事)는 여래의 일이며, 자연스런 일이며, 살운야는 불가사의하며 헤아릴 수 없으며, 한계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으며 이와 같다. 수보리여, 이 불사는 자연스런 일이며 여래의 일은 살운야의 일이며, 불가사의하며, 한계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5음에서부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불가사의하여 한계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모든 법의 법은 뜻을 찾아도 생각으로써는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은 불가사의하며 또한 한계를 헤아릴 수 없으며, 나아가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불가사의한 것이다.”
수보리가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5음은 불가사의하여 더불어 같이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불가사의하여 이와 같을 자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은 한계를 지을 수 없으며,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무슨 뜻으로 5음과 살운야가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에서부터 살운야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같이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 뜻이 어떠한 것이냐? 불가사의하고 한계가 없는 중에 참으로 5음과 도를 얻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법은 불가사의하여 한계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여래의 법은 불가사의하여 더불어 같이할 자가 없는 것이다. 한계를 얻을 수 없으며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이 불가사의한 것이다. 설한 것이 또한 불가사의하며 허공이 불가사의하며, 또한 더불어 이와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의 법은 세간의 사람과 모든 천(天)과 아수륜(阿須倫)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여래의 설법은 불가사의하며, 헤아릴 수 없으며 한계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더불어 같음이 없는 품을 설할 때에 5백 비구와 2천 비구니가 누진(漏盡)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6만 우바새와 2만 우바이가 티끌을 멀리하고 허물을 여의어서 법안이 생겼다. 2천 보살은 생하는 것이 없는 법인(法忍)을 얻어서 모두 마땅히 현겁(賢劫) 중에서 성불할 것이다.
51. 대사흥품(大事興品)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깊어 대사(大事)가 일어나는 것이며, 불가사의한 것을 헤아릴 수가 없으며, 더불어 같이할 것도 없어 한계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더불어 같이 할 일이 일어남이 없다. 무슨 뜻인가? 수보리여, 5바라밀은 동등하여 이 중에서 이루는 것이며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상응한다. 내공․외공 및 유무공도 동등하여 반야바라밀 중에서 출생하는 것이며, 37품과 10력과 18법이 함께 이 중에서 나와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상응하며, 불지(佛地)와 살운야도 함께 이 중에서 나와 반야바라밀과 같이 상응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모든 소국(小國)에 일이 있으면 각각 스스로 판단을 이루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륜성왕은 또한 근심하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소국의 왕은 소박하게 이미 성왕(聖王)의 교령(敎令)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다시 근심이 없는 것이다. 모든 제자법과 벽지불법, 모든 보살법 및 불법 등이 모두 반야바라밀에서 나온다. 반야바라밀은 그 일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큰 일을 일으키는 것이다. 동등한 일이 더불어 일어남이 있지 아니하며, 5음을 받지 아니하며, 5음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응하되 받지 아니하며 들어가지 아니한다.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그러하다. 수다원도에서 아라한도․벽지불도에 이르는 것도 또한 받지 아니하며 들어가지 아니한다. 나아가 아뇩다라삼야삼보도 받지 아니하며 들어가지 아니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5음을 받지 아니하며 그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야삼보도 받지 아니하고 그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뜻이 어떠하냐? 참으로 5음은 들어갈 곳이 있으며 받을 곳이 있음을 보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보지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나아가 아뇩다라삼야삼보도 또한 받지 아니하며 그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또한 5음에 받음이 있고 들어감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삼야삼불도 받음이 있고 들어감이 있음을 보지 못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여, 나도 또한 5음을 보지 못하며, 5음을 수지하지 아니한다. 나아가 삼야삼보도 또한 보지 못하여 수지하지도 아니하며, 들어가는 곳도 보지 못한다.
수보리여, 나는 저 불지(佛地)도 또한 보지 못하며, 살운야도 또한 보지 못한다. 여래의 일도 또한 받지 아니하며, 수지하지도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여,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땅히 5음을 받지 아니하며, 또한 마땅히 5음에 들어가지도 아니한다. 불사(佛事)와 살운야의 일과 여래의 일도 또한 수지하지도 아니하며 들어가지도 아니한다.”
모든 욕계의 천자와 모든 색계의 천자가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습니다. 불가사의하며 깊고 깊어 미묘하므로 지혜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깊은 반야바라밀은 세존이시여, 모두 과거의 부처님 때에 지은 공덕과 선의 근본으로 이른 것이며, 참선지식을 얻어서 이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가령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중생이 모두 3존을 믿어서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을 얻었으며, 모든 성현의 처소에서 지혜가 있고, 도덕이 있음을 얻었다 해도 이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 중에서 생각하고 칭(稱)한 하루 중의 즐거움만 같지 못합니다. 그 덕(德)이 그 위를 넘습니다. 왜냐하면 수다원에서 위로 벽지불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믿는 것은 무생법인(無生法忍)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자야, 저 선남자․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 중에서 사경하여 수지하고 외우는 것을 하루 동안 행한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속히 니원(泥洹:열반)을 얻어서 아라한․벽지불도보다 뛰어난 공덕을 지은 것이다. 혹은 1겁이 지나도록 여러 경을 받들어 섬겼다 해도 반야바라밀을 여의었으면 살운야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 중에서는 널리 삼승을 설하여서 모든 아라한․벽지불에게 각각 그 믿음을 얻게 하여 응할 바를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마하살도 또한 이 중에서 아뇩다라삼야삼불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색계 천자와 욕계 천자가 동시에 찬탄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마하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하옵니다. 이 중에서 믿는 즐거움이 나오게 하옵니다. 모든 성문으로 하여금 각각 응하는 바를 얻게 하며, 수다원․사다함․아나함․벽지불도를 이루게 하며, 또한 모든 보살마하살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루게 합니다.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또한 더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멸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색계 천자와 욕계 천자가 각각 머리를 땅에 대고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부처님을 세 번 돌고 갔는데 멀지 아니한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지 않았으니 각각 천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곧 이해한다면 어느 곳에서 와서 이 세간에 태어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곧 알아서 싫어하지 아니하며, 또한 여우처럼 의심하지 아니하며, 또한 걸림이 없으며, 뜻은 항상 즐거이 듣는 것을 생각하면 마침내 멀리 여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행하고 일어나고 앉고 누울 때 항상 법사의 뜻을 따른다면 멀리 여의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갓 태어난 송아지가 생각이 그 어머니를 멀리 떠나지 아니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입으로 외우며 즐거이 지켜 행하여 그 중의 뜻을 알며, 생각은 또한 잠깐 사이에도 법사를 멀리 여의고자 하지 않으면, 이 선남자․선여인은 본래 인도(人道)에서 온 것이며, 금생에 이 세간에서 다시 사람이 됨을 얻은 것이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전생에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사경하고 외웠으며, 이 중의 일을 수행했으며, 꽃과 향․비단 일산[繪蓋]․당번으로 공양했으며, 이 공덕으로 인도 중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곧 알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공덕을 지어 선의 근본이 구족되어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다면 다시 저곳으로부터 이 세간에 와서 출생하여 다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 쓰고 외우며 즐거이 믿어 수행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타방에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기 때문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생에 이 세간에서 다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 들으면 곧 알게 되어 믿으며 즐거이 지켜 행하게 될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이 보살마하살은 도솔천상에서 또한 공덕과 선의 근본을 구족하게 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미륵보살 처소에서 이 깊은 경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생에 이 세간에 와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 들으면 곧 알아서 믿으며 즐거이 수행하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여우처럼 의심만 하고 싫어하는 뜻이 있다면 이 사람은 전생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이 중에서 지혜를 묻지 않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금생에 와서 비록 이 세간에 태어났으나 6바라밀을 들으면 뜻은 계속 여우같이 의심만 하고 믿지도 아니하고 받지도 아니하며 또한 즐거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이 사람은 본래 내공과 외공 및 유무공을 들어도 또한 이 중의 일을 묻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이제 계속하여 믿지 아니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은 전생에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들었어도 믿지 아니하고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이 중의 일을 묻지 아니했다. 이런 까닭에 금생에 와서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놀라 괴이하게 여기고 여우같이 의심만 하여 믿지 아니하고 즐거워하지 아니한다.
다시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듣고 당일에서 닷새에 이르도록 항상 이 중의 일을 묻는다면, 이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마침내 질문하는 것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이 보살은 다만 듣고 그 중의 일을 질문하였으나 행(行)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혹 어떤 때에는 반야바라밀을 듣고자 하고 어떤 때에는 듣지 않으려 하였다면, 뜻이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혹시 이 중에서 여러 인연을 일으켰으나 비유하면 가벼운 옷과 같아서 바람을 따라 동서로 나부끼는 것과 같다. 이 보살은 배움에 나아간 것이 오래되지 못하여 참선지식을 얻지 못한 것이며, 과거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지 못한 것이며, 공덕을 지어 선의 근본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런 것이며, 부지런히 배우고 외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6바라밀을 얻지 못해 그런 것이며, 내외공과 유무공을 얻지 못하여 그런 것이며, 6통(通)과 37품, 살운야를 배우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새로 배우는 이[新學]들은 적게 저 법을 즐겨하고 반야바라밀을 수학하고 외우며 써서 수지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그 일을 익혀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으로서 보살도를 행하려는 자가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사경하고 외우며 수행하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살운야에도 또한 배우고 가까이하려고 생각하지 아니한다면, 이러한 무리는 혹은 2지(地)에 떨어지게 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선남자․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고 사경하고 수학하며 가까이하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 사람은 곧 2지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마땅히 나한․벽지불도의 지(地)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52. 비유품(譬喩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대해 가운데서 배가 갑자기 파괴되었을 때에 그 배에 있는 사람이 판목(板木)을 취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죽은 사람을 취하여 끌어안았다면 저 사람은 마침내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함께 같이 빠지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용한 것이 각각 의지할 것을 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만약 판목의 돛대를 취하였다면 빠르게 건너가서 몸의 안온함을 얻었을 것이다. 사용한 것이 의지할 것을 취했으므로 스스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으로서 보살도를 행하려는 자가 믿음에서 즐거움이 적어 비록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었으나 외우는 것을 수지하지 않고 친근하게 의지하지 않고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익히지 않았으며, 나아가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또한 가까이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중도에 걸림이 있는 것이며, 살운야에 이르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마땅히 나한․벽지불을 취하는 것을 증득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보살도를 행하려면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즐거이 믿어야 한다. 능히 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 생각이 있어야 하며, 아는 것이 있어야 하며, 베푸는 것이 있어야 하며, 행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쓰고 수학하며 가까이하여 외워야 한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지해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중간에 장애가 있어 나한․벽지불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능히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할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아직 불에 굽지 않은 병을 가지고 물을 취하면 오래지 않아 이것은 물러져 부서지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숙되지 않은 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으로서 보살도를 행하려는 자가 비록 믿는 즐거움이 있고, 생각이 있고, 베푸는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고, 친근함이 있고 행이 있으나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또한 6바라밀을 수지하지 못하였으며, 구화구사라가 없었으며, 또 내공․외공 및 유무공을 수지하지 못했으며, 5통(通)․37품을 수지하지 못했으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또한 친근하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중도에 방해와 장애가 있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어떠한 것을 중도에 방해와 장애가 된 것이라 하며,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진 것이라 하는가?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잘 구워 성숙된 병을 가지고 만약 냇물과 우물에 나아가거나 만약 산비탈 연못에 나아가서 물을 취하였다면 이 사람이 얻은 물은 돌아와서도 안온하여 잃지 않을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잘 구운 병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보살도를 행하려면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지극히 즐거이 믿는 것이 있어야 되며, 베풂이 있어야 하며, 생각하여 아는 것이 있어야 하며, 행이 있어야 하며, 지혜가 있어야 하며, 6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수지하여 살운야를 친근히 해야 한다. 그리하면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는 데 마침내 걸림이 없을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큰 바다를 가는데 처음으로 배를 만들면서 크고 견고하게 만들지 않고 탄탄하게 만들지도 않고서 곧 재화(財貨)를 가져다 배에 싣고 나아가려면 이 배는 머지않아 중도에서 부서질 것이며 재물은 흩어져 각각 어느 한 곳에 있을 것이며 상인에게 팔려고 해도 방편이 없어 가진 물건도 잃고 그 많은 보배를 잃을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보살도를 행하려고 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비록 믿는 즐거움이 있고 믿어서 베푸는 것이 있고 생각하여 아는 것이 있다 해도 저 공덕에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조금 얻었으며 또한 쓰고 암송하고 수학하지 아니하고 6바라밀에서 또한 배우지 아니하고 또한 살운야의 일을 친근히 하지 않아서 구화구사라가 없다면 이 사람은 중도에 방해와 장애가 있어 큰 보배를 잃어버릴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큰 보배라는 것은 살운야이며 중도에서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질 것이다.
비유하건대 지혜 있는 사람이 먼저 그 배를 잘 다스려서 견고하고 탄탄하게 만들고서 물건을 가져다 그 안에 싣고 이르고자 하는 곳에 갔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게 되어 그 진보(珍寶)를 편안하게 얻어 잃는 것이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배를 사용함에 견고하고 강한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있어 보살도를 행하는데 크게 믿는 즐거움이 있고 보시가 있으며 염(念)이 있고 해(解)가 있고 행(行)이 있어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곧 배우며 쓰고 암송하고 수행하며 6바라밀에서 모든 공덕이 있으며 살운야의 뜻에 항상 친근히 한다면 이로써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며, 마침내 걸림이 없을 것이며, 나한․벽지불도에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나이가 120살이 되어 병이 있는데, 풍이 들거나 오한(惡寒)과 신열(身熱)이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서 멈추거나 걸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이 사람은 이미 늙었기 때문이다. 바로 병이 없다고 해도 일어나서 멈추거나 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병이 있어 근력이 소진했는데 어찌 다시 걸어서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를 수 있겠느냐?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보살도를 행할 때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비록 믿는 즐거움이 있고 베풂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염(念)이 있고 능(能)이 있고 행함이 있으나 6바라밀의 공덕이 적으며 또한 살운야의 일을 가까이하지 않고 구화구사라도 없으면 이 사람은 중도에 방애가 있을 것이며,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질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깊은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앞의 노공(老公)이 병에 차도가 있어 건강한 두 사람이 각각 한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팔을 붙들면서 노인에게 ‘뜻을 편안하게 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마땅히 공(公)을 모시고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게 할 것이며 끝내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참으로 이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곳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보살도를 행할 때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믿는 즐거움이 있고 능함이 있고 베풂이 있고 행하는 것이 있고 지혜가 있는 데 이르며, 6바라밀의 모든 공덕이 있으며 살운야의 뜻에 항상 친근하며 구화구사라가 있으면 이 보살은 마침내 걸림이 없으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감당할 만하며 그리고 동전(動轉)하여 성문․벽지불도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때에 세존께서 수보리를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해서 이제 여래의 이 일을 물은 것이로다. 만약 어떤 보살이 나라는 아상[吾我意想]이 있어 6바라밀을 받들어 행하였다고 생각하며 ‘나는 6바라밀을 행하였다’라고 한다면 이미 곧 공고(貢高:잘난 체하는 것)한 보살이니, 이와 같이 행하는 자는 끝내 6바라밀을 얻을 수 없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또한 피안을 알지 못하고 또한 차안(此岸)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6바라밀도 지니지 못한 것이다. 살운야도 갖지 못한 것이며, 중도에서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살운야에서 출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어떤 것이 보살의 구화구사라가 없는 것인가? 이 선남자․선여인이 보살도를 행하는데 구화구사라를 쓰지 않고 6바라밀을 행하며, 6바라밀에서 모두 나라는 아상(我想)이 있어 ‘나는 행한 것이 있다’고 하면 6바라밀을 행하였으나 스스로 공고한 것이다. 왜냐하면 6바라밀 중에는 처음부터 이 생각과 분별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있는 자는 항상 차안(此岸)에 머문다. 다만 차안만 알고 피안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 6바라밀을 지닌 것이 아니다. 또한 살운야를 지닌 것이 아니므로 중도에서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지며, 또한 살운야에서 출생하지도 못한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보살이 구화구사라를 지니지 못하면 곧 나한․벽지불에 떨어지는 것이다. 수보리여, 어떻게 해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구화구사라를 가지는 것이며,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지지 않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있느냐?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려면 나에게 나라는 생각이 없어야 하며, 6바라밀에서 공고하지 않아야 한다. 무슨 뜻인가? 6바라밀 중에는 또한 이 생각도 없으며 또한 아만도 없어야 한다. 보살은 차안도 알며, 피안도 아는 자이므로 6바라밀을 지니는 것이며, 구화구사라를 갖는 것이며, 살운야가 출생하는 것이며, 아라한․벽지불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행하면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6바라밀을 소지하며 구화구사라를 갖는 것이며, 살운야의 보호를 소지하는 것이다.”
방광반야경 제12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53. 수진지식품(隨眞知識品)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새로 배우는 보살이 어떻게 6바라밀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새로 배우는 보살로서 6바라밀을 배우려 하는 자는 마땅히 참선지식을 따라서 항상 받들어 섬겨야 한다. 또다시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해설하는 자를 따르고 친근히 해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해설하는 자가 있으면 항상 마땅히 이 사람을 불러서 권하고 도와야 한다. 이제 6바라밀을 배워서 마땅히 지키고 받들어 행해야 하며, 마땅히 수지해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어야 한다. 아뇩다라삼야삼보 중에서 5음(陰)을 비평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 중에서 6바라밀을 비평하지 말아야 하며, 내외공과 유무공을 비평하지 말아야 하며,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비평하지 말아야 하며, 살운야(薩云若)를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뜻이 그러한가? 5음을 비판하지 아니하면 곧 살운야를 깨달은 것이며, 6바라밀을 비판하지 아니하면, 살운야를 얻은 것이다. 내외공과 유무공․37품․부처님의 18법을 비판하지 아니하면, 곧 살운야를 얻은 것이다. 마땅히 선남자라 말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며 5음 중에서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야, 이 5음은 집착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6바라밀에 집착해도 안 된다. 선남자야, 6바라밀은 또한 집착할 것이 아니다. 내공․외공 및 유무공․37품․부처님의 18법 나아가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집착해도 안 되며 또한 집착한다는 것이 있어도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살운야에는 또한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에 집착을 일으켜도 안 되며, 또한 보살승(菩薩乘)에 집착을 일으켜도 안 되며,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에도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야, 이 아뇩다라삼야삼보는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모든 법의 모양은 다 공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심한 고통을 공하여 무상한 법이라 말하려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켜야 하며, 아유삼불(阿惟三佛)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이 고통이 심한데 공은 무상(無相)한 법이라 말하려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켜야 하며 아유삼불을 얻어야 한다. 수보리여, 세간을 위하기 때문이다. 세간을 애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며, 세간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며, 세간의 일체 중생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중생을 위하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며, 세간을 위해서 돌아가며, 세간을 위해서 보호를 지으며, 세간을 위해서 등불의 밝음을 짓는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이다. 세간을 위하여 장수가 되며, 세간을 위하여 인도하며, 세간을 위해서 버리며, 세간을 위해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이다.
수보리여, 무엇이 보살은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인가? 5도(道)를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고 중생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두려움이 없는 피안에 안주하여 열반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간을 위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보살이 세간을 안온하게 하고자 하는 것인가?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이 고뇌와 근심, 슬픔이 있으면 모두 다 제도하여 고통이 없는 언덕, 마음이 편한 열반에 머물게 한다. 이런 까닭에 보살은 세간을 위하여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어떤 것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구원을 짓는 것인가? 이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모든 중생에게 생사가 있으므로 고통을 받으면 세간 중생을 구원하여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법으로써 교화하며, 차례로 삼승으로 해탈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세간을 위하여 구원을 짓는 것이다.
수보리여, 무엇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보호하는 것인가? 세간 중생에게 생사의 법이 있으므로 보호하여 생기지 않게 하며, 중생에게 모두 노병사(老病死)의 법이 있으므로 보호하여 늙지 않게 하고 병들지 않게 하며 죽지 않게 한다. 슬퍼하고 근심하는 자가 있으면 보호하여 무여열반에 이르게 한다. 이런 까닭에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켜 세간을 보호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어떤 것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버리는 것인가? 이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을 때에 세간을 위하여 모든 법이 무애(無礙)함을 설법한다. 이런 까닭에 보살은 세간을 위하여 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등불을 밝히는 것인가? 보살마하살은 삼계의 어둠 속에서 모든 중생을 빼내어 열반에 서게 한다. 이러므로 보살은 세간을 위해서 등불을 밝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장수가 되는 것인가? 이 보살은 아유삼불을 얻을 때에 세간을 위하여 설한다. 색(色)은 아소(我所)가 아니며, 이것은 색도 아니다. 통(痛)․상(想)․행(行)․식(識)도 또한 아소가 아니며, 이것은 식도 아니다. 나아가 살운야는 아소도 아니며, 이것은 살운야도 아니다. 수보리여, 색은 내가 아니듯이 이것은 색도 아니다. 색이 내가 아닌 것과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5음은 아소가 아니며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법을 깨달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색은 분별하는 바가 없으며,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분별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이 5음을 말하지도 않으며, 또한 이 살운야를 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5음은 분별하는 것이 없으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또한 분별할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5음을 말하지 아니하며, 또한 이 살운야도 말하지 아니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또한 대(大)가 되며, 고통에서 항상 이 법을 행하는 것이며, 싫어함도 없고 게으름도 없는 것이다. 보살이 ‘나는 또한 마땅히 깨달았다’고 하며, ‘또한 마땅히 청정한 법을 수지했다’고 하면 배우지 아니했음을 보이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런 까닭에 보살은 세간을 위하여 아소(我所)가 아니라는 것을 설한다. 수보리여, 무엇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수중(水中)의 작은 육지가 된다고 하는 것인가? 비유하건대,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는데 흐르는 물을 끊고 지역을 단절하면 물은 어느 곳에 정지한다. 이것을 수중의 작은 육지라 말한다. 사람에게 유익함이 있고 미래․과거에서 5음을 끊는다. 미래․과거의 살운야도 또한 끊는다. 이와 같이 단절하는 자는 모든 법도 또한 끊는다. 모든 법을 단절한 자는 미래․과거도 또한 끊는다. 이와 같이 끊는 자는 이것이 청정이 되며, 이것이 결정이 되며, 이것이 진실이 되며, 이것이 공이 되는 것이다. 애정은 다하여 의지함이 없으며, 나머지도 없으며, 티끌도 없다. 이것이 열반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을 때에 곧 분류(分流)하는 것이 청정법으로 화하고, 진제법(眞諦法)으로 화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보살은 세간을 위하여 수중의 작은 육지가 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무엇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장래를 인도하는 것이냐?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을 때에 세간의 중생을 위하여 5음법은 생하는 것이 아니며, 멸하는 것이 아니며, 집착도 아니며, 단절되는 것도 아니라고 설한다. 이 설법을 할 때에 수다원에서 아라한․벽지불법에 이르기까지 이 무리를 위하여 5음은 생하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한다. 이 법을 가지고 가르쳐 세간에 유포(流布)한다. 수보리여, 이 보살이 아유삼불을 얻을 때에 이 설법을 하는 것이 세간을 위하여 장래를 인도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어떤 것이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냐?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을 때에 5음을 설해도 공에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살운야를 설해도 공에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5음이 공한 것은 나아갈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나아가지도 아니하며, 또한 나아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슨 뜻인가? 5음과 공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이 설법을 하는 자는 중생을 위하여 살운야가 공한 것임을 설한다.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되 나아갈 바도 없다. 수보리여, 이런 까닭에 보살은 세간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수보리여, 무슨 뜻인가? 모든 법에 지나가는 것은 공과 같아서 한 번 나아가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한다. 무슨 뜻인가? 공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이르러도 또한 모양이 없으며, 또한 원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상(相)과 원(願)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모양도 원하는 것은 또한 오는 것이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이 이르는 것도 또한 이르는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함이 있는 것도 아니며, 생도 없으며 또한 멸도 없는 것이다. 또한 집착도 없으며, 또한 단(斷)이 있는 것도 아니다. 꿈과 같고 환(幻)과 같으며 메아리와 같으며 그림자와 같으며 화(化)와 같고 불꽃과 같다.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 번 가면 또한 다시 오지 아니한다. 무슨 뜻인가? 화(化)는 가는 것도 없으며 또한 오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모든 법은 가서 이르되 변제(邊際)가 있지 않으며, 또한 다시 오지도 않는다. 모든 법도 또한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아(我)도 없으며 명(命)도 없으며 수(壽)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중생도 오히려 소유가 없거늘 하물며 마땅히 가고 오는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여, 모든 법이 머무는 곳에 항상함이 있고, 모든 법이 머무는 곳에 즐거움이 있고, 모든 법이 머무는 곳에 청정함이 있으며, 모든 법이 머무는 곳에 아(我)가 있으며, 모든 법은 무상하여 고(苦)이며, 청정도 없으며, 아(我)도 없는 것이다. 모든 법에 머무는 것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며 몸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모든 법에 머무는 것은 또한 여여하게 머무는 것이며 법성과 같이 머무는 것이다. 진제와 같이 머무는 것이며 널리 머무는 것과 같으며, 불가사의한 성(性)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며, 움직여 이주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머무는 것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무슨 뜻인가? 모든 법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에 머문다는 것은 5음과 같은 것이다. 무슨 뜻인가? 5음도 오히려 볼 수 없거늘 하물며 가고 옴이 있겠는가? 모든 법에 머문다는 것은 6바라밀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머무는 것은 돌아옴이 없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6바라밀도 오히려 볼 수 없거늘 하물며 가고 옴이 있겠는가? 모든 법에 머무는 것은 내외공 및 유무공과 같으며, 37품에 머무는 것과 같으며, 18법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 18법은 또한 가는 것도 없으며, 또한 오는 것도 없다. 모든 법에 머무는 것은 성문․벽지불도에 머무는 것과 같으며, 아뇩다라삼야삼보에 머무는 것과 같으며, 또한 가고 옴도 없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아뇩다라삼야삼보는 가고 옴도 없으며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과거의 부처님 처소에서 공덕을 지어 무앙수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으며, 오래도록 참선지식을 얻은 자이다. 이 무리의 사람이 능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떤 상(相)이 있어 깊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보살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은 자라면, 곧 그 상(相)인 것이다. 수보리여, 능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자는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상(像)이 이미 끊어진 것이다.”
54. 해심품(解深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로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자는 어느 곳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로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자는 마땅히 살운야에 나아가게 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살운야에 나아가면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입니다. 살운야에 나아간 자는 곧 일체 중생을 위하여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려면 단서(端緖)가 없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려면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없어야 하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자는 5음을 생각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자는 나[吾我]라든가 중생도 생각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자는 6바라밀을 생각하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자는 내공․외공 및 유무공․37품․부처님의 18법도 생각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자는 수다원에서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가 말한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자는 5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나아가 살운야도 생각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수보리여, 6바라밀은 아유월치(阿惟越致) 보살마하살이 응당 보호한다.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6바라밀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며, 또한 살운야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타인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며 여타의 도를 믿지 아니하며, 또한 요점 짓는 것을 가지지 아니한다. 이유월치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섞이지 않아야 한다.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아유월치 보살마하살은 처음부터 6바라밀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함을 들을 때에 또한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싫어함도 없어야 한다. 마침내 전환하지 아니하고 항상 생각하고 들어야 한다. 듣기를 마치고는 수지하고 암송하며 수행하여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응해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전생에 이미 일찍이 반야바라밀 중의 일을 들었으며 또한 외우고 수지하여 이 중의 일을 행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떨지도 않아서 영원히 오래도록 해온 것이며, 항상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 설함을 들으면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공포에 떨지도 아니하며 또한 움직여 돌아오지도 아니합니다. 어떻게 해야 두 배나 행하며 다시 이익을 더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살운야에 응하는 것이다.”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살운야에 응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하며 모양도 없으며 원하는 것도 없는 데 응하여 의지하는 것이 깊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응하는 것이다. 깊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것은 허공에 의지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생하는 것이 없는 데 의지하는 것과 같으며 멸하는 바 없는 데 의지하는 것과 같으며, 집착에 의지해도 안 되고 단(斷)에 의지해도 안 된다. 여(如)에 의지하는 것과 같으며 법성에 의지해야 하며 부사의(不思議)한 것에 의지해야 하며 평등하여 여(如)를 지음이 없는 데 의지해야 하며 꿈에 의지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것은 허공에 의지하는 것과 같으며 꿈에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5음에 의지하지 아니하며 살운야에 의지하여 행을 지어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5음에 의지해도 안 되며 또한 살운야에 의지해도 안 된다. 5음과 살운야는 또한 짓는 자가 있지 아니하다. 또한 짓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오는 것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으며 또한 정지하는 것도 없으며 의지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나오는 곳도 없으며 또한 들어갈 곳도 없는 것이다. 또한 수(數)도 없으며 또한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수도 없고 한계가 없다는 것은 또한 능히 깨달음에 이를 것도 없는 것이다. 색(色)에서 식(識)에 이르기까지 깨달을 것이 없으며, 또한 6바라밀에서 깨달을 것이 없으며 또한 살운야혜(薩云若慧)에서 깨달을 것도 아니다. 무슨 뜻인가? 5음이 여여하며 살운야가 여여하다. 5음과 살운야는 여여한 것이 함께 평등하여 다름이 없으며, 18법이 여여한 것이며 살운야가 여여한 것이다. 또한 평등하여 다름이 있지 아니하며 하나로서 평등하여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다.
55. 탄심품(歎深品)
이때에 모든 욕계 천자와 색계 천자가 하늘의 훌륭한 꽃을 부처님 위에 뿌리고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서 머리로 예를 올리고 손을 모으며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고 요달하기 어렵습니다. 불가사의하여 지혜 있는 자가 알 바이며 일체 세간이 믿을 만한 것이며,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의 도의 지름길입니다. 여기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룬 자는 모두 반야바라밀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가르침이 되는데, 하나의 가르침이란 것은 5음이 곧 살운연(薩云然)이고 살운연이 곧 5음입니다. 살운연은 여여(如如)하며 5음도 여여합니다. 살운연과 5음은 하나같이 여여해서 둘이 아닙니다. 불(佛)이 여여한 것과 살운연이 여여한 것 또한 둘이 있지 아니합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욕계와 색계의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모든 천자가 말한 것과 같다. 5음이 곧 살운연이며, 살운연이 곧 5음이다. 불(佛)이 곧 살운연이며, 살운연이 곧 불이니, 하나같이 여여하여 둘이 있지 아니하다. 이런 까닭에 모든 천자야, 여래는 평탄하며 하는 것이 없어 설법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 법은 깊고 깊어 청정하며 알기 어렵고 요달하기 어려우며 특별히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래의 도는 과거․미래․현재의 깨달음에 이를 것이 없다. 저 법에는 둘이 없다는 것, 이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천자야, 허공이 매우 깊고 미묘한 것과 같이 이 법도 또한 이와 같다. 저 법이 매우 깊어 미묘하기에 이 법이 깊고 미묘한 것이다. 법성은 불가사의한 성(性)이며, 진제(眞際)는 바닥이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집착도 없고 끊음도 없고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매우 깊고 미묘하므로 깨달음에 이를 것도 없다. 깨달음에 이를 것이 없다는 것은 매우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미묘한 것이다.
모든 천자야, 모든 법이 매우 깊고 미묘하기에 중생상․아상(我相)․인상(人相)․수명도 또한 다시 매우 깊고 미묘하다. 5음이 깊고 미묘하며 6바라밀이 깊고 미묘하며 내외공과 유무공 및 37품․부처님의 18법․살운야(薩云若)에 이르기까지 매우 깊고 미묘하다. 이 매우 깊고 미묘함을 쓰므로 모든 천자야, 반야바라밀법은 매우 깊고 미묘한 것이다.”
모든 욕계와 색계의 천자가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은 세간에서 특별히 믿을 만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설하는 자는 또한 5음을 받지 않으며 또한 받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나아가 18법도 또한 받을 것이 없으며, 또한 받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설하는 자는 수다원에서 나아가 살운연(薩云然)에 이르기까지 또한 수지하지도 않으며 또한 받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세간에서 가지는 것은 모두 수지합니다. 어떤 것이 수지하는 것입니까? 5음은 아소(我所)이며 나는 5음의 처소입니다. 18법은 나의 처소이며, 나는 18법의 처소입니다. 수다원(須陀洹)에서 살운연에 이르기까지 그러해서 모두 나의 처소입니다. 나는 살운연의 처소이며, 이것이 세간에서 수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천자가 말한 것과 같다. 이 법은 또한 5음을 수지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살운연을 수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천자야, 5음을 수지하여 행함이 있는 자, 살운연을 수지하여 행하는 자는 모두 6바라밀 행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며, 또한 살운연을 행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은 모든 법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따릅니다. 어떤 것이 법을 따르는 것입니까? 이 법은 6바라밀을 따르는 것이며, 이 법은 내외공 및 유무공을 따르는 것이며, 37품과 살운연에 이르기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법은 모든 법에 걸림이 없습니다. 무엇이 걸림이 없는 것입니까? 5음에 걸리지 아니하며, 살운연에 이르기까지도 걸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법이 걸림 없는 상(相)입니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머무는 것은 법성과 같으며, 진제와 같으며, 부사의성(不思議性)과 같으며,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반야바라밀법은 또한 생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멸하는 것도 아니니, 5음을 쓰되 생하는 것이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또한 생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법은 자취도 없으니, 5음의 자취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살운야의 자취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모든 욕계 천자와 색계 천자가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존자 수보리는 모든 제자 중에서 부처님의 진실한 제자입니다. 왜냐하면 설한 것이 오직 얽힘이 없는 공한 법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수보리가 모든 욕계와 색계의 천자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든 제자 중에 내가 진실한 제자라 말하는데 무엇을 진실한 제자라고 하는 것인가?”
모든 천자가 수보리에게 대답했다.
“부처님은 여여로부터 생겼으니, 간 것도 아니며 온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도 여여하여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생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여여함은 곧 일체 법의 여여함입니다. 모든 법이 여여하듯이 부처님이 여여합니다. 여여함은 또한 다시 여여함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생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여여하게 머물 듯이, 수보리의 여여함도 이와 같이 머뭅니다. 부처님의 여여함이 지음도 없고 함도 없으며 또한 소유도 없듯이, 수보리의 여여함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부처님의 여여함이 걸림이 없듯이, 모든 법의 여여함도 또한 걸리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여여하듯이, 모든 법도 여여한 것입니다. 하나같이 여여해서 둘이 없으며 또한 짓는 자도 없습니다. 지음 없음의 여여함은 항상 그러해서 그렇지 않음의 않음도 없습니다. 여여함이 그러함으로부터 그러하지 않는 때가 없어 항상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존자 수보리가 여래로부터 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여여한 것이 또한 무너지는 것도 아니듯이, 수보리가 여여한 것도 또한 무너지는 바가 없으며, 또한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여여한 것은 또한 볼 수도 없으며 파괴되는 것도 아니듯이, 수보리가 여여한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부처님이 여여한 것은 또한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이며 또한 타(他)가 없는 여여이듯이, 존자 수보리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는 참으로 부처님으로부터 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여여함이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듯이, 모든 법이 여여한 것도 또한 과거․미래․현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미래․현재가 여여한 것은 또한 부처님이 여여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여여하다는 것은 또한 과거․미래․현재가 여여하고 동등하여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5음이 여여한 것이나 여래의 여여도 또한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我)와 수명상․중생상이 여여한 것이나 저 부처님의 여여함도 또한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6바라밀이 여여한 것이나 내외공이 여여한 것 및 유무공이 여여한 것, 37품이 여여한 것 나아가 살운연이 여여한 것이 저 부처님이 여여한 것과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무엇이 여여한 것입니까? 수보리가 여여한 것은 보살도 깨달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래의 명호를 얻는 것도 이것입니다.”
이 여품(如品)을 설할 때에 삼천대천찰토의 땅이 여섯 가지 반대로 진동[六反震動]하였다. 동쪽이 솟으면 서쪽이 가라앉고 서쪽이 솟으면 동쪽이 가라앉고, 남쪽이 솟으면 북쪽이 가라앉고 북쪽이 솟으면 남쪽이 가라앉고, 사면이 모두 솟으면 곧 중앙이 가라앉으며, 마침 중앙이 솟으면 사면이 모두 가라앉았다. 이것이 여섯 가지 반대로 진동하는 것이다.
이때에 삼천대천찰토의 모든 욕계 천자와 색계 천자가 하늘의 꽃과 훌륭한 향과 전단향으로써 부처님과 수보리의 위에 뿌렸다. 그리고 동시에 찬탄하여 말했다.
“세존이시여, 매우 기이하고 특이하옵니다. 존자 수보리는 여래의 여여함에서 태어난 진실한 불제자이옵니다.”
이때에 수보리가 다시 모든 천자를 위하여 말했다.
“모든 천자여, 수보리는 또한 5음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또한 5음이 여여함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며, 또한 5음의 여여함을 여의고 생한 것도 아니다. 또한 살운연의 여여함에서 생한 것도 아니며, 또한 살운연의 여여함을 여의고 생한 것도 아니다. 또한 유위․무위의 여여함에서 생한 것도 아니며, 또한 유위․무위를 여읜 여여함에서 생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집착하여 즐겨할 것도 없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여함과 그러한 법이 도에 머무는 법은 매우 깊고 깊습니다. 5음도 오히려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5음이 여여한 것이겠습니까? 나아가 살운연도 오히려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살운연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사리불이여, 여여함은 매우 깊어 5음 및 살운연도 오히려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살운연의 여여함이겠느냐? 사리불이여, 여여함은 매우 깊어 설함이 여여함이 그러하다.”
이때에 2백 비구승이 번뇌가 다하고 의식이 해탈하게 되었으며, 5백 비구니는 티끌을 멀리하고 허물을 여의어 법안(法眼)이 생겼다. 5천 보살과 하늘 및 사람이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을 얻었으며, 60보살이 번뇌가 다하여 의식이 해탈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 60보살은 이미 5백 부처님을 공양하였으며 6바라밀을 다 행하였으나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를 지니지는 못하였다. 여러 5바라밀을 배웠으나 반야바라밀을 여의었다. 구화구사라는 쓰지 못하고 보시를 행하고 지계를 행하며, 인욕을 행하고 정진을 행하며 선(禪)을 행한다. 여러 상(相)을 행하였으나 일정한 보살의 도는 얻지 못하였으며, 곧 수다원과 아라한․벽지불도를 얻었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비록 공과 무상과 무원의 도를 얻었으나, 반야바라밀을 여의고 구화구사라를 수지하지 못하였으면 곧 진제는 증득했으나 제자승(弟子乘)을 얻은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공과 무상과 무원의 법을 얻었으나 구화구사라를 여읜 것이며, 진제를 증득했으나 곧 제자승을 얻은 것입니까? 무엇이 함께 공․무상․무원의 법을 얻은 것이며, 구화구사라를 얻은 것이며,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유(有)에서 살운연의 뜻을 여의고 공과 무상과 무원의 법을 생각하며, 구화구사라와 함께하지 못한 자는 곧 제자승이 된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공․무상․무원의 법을 얻고 살운연에 응하여 구화구사라를 여의지 아니한 자이니,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은 것이다. 사리불이여, 비유하건대 큰 새의 신장이 백 유순․2백 유순․3백 유순인데 두 날개가 없다면 도리천상에 날아가고자 하고 아래로 염부제에 이르려고 하며, 이미 내려오는 도중에 다시 도리천상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사리불이여, 이 새는 참으로 뜻과 같이 두루 돌아서 가고 오겠느냐?”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이 새가 땅으로 와서 몸에 고통을 없게 하고자 한다면 참으로 고통이 없겠느냐?”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고통이 없음을 얻지 못하며 혹은 답답하고 혹은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몸은 강대한데 날개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바로 이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이 지나도록 상(相)으로 5바라밀을 행하고 비록 큰 도를 얻고 큰 뜻을 일으켰으며, 무량한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으나 반야바라밀을 여의고 구화구사라가 없는 자이니, 곧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진 것이다. 무슨 뜻인가? 구화구사라를 여의고 살운야를 여의고, 반야바라밀을 여의고 5바라밀을 행해서 곧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진 것이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비록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 처소에서 공덕을 지었으나 모두 상(相)에 집착하여 계성(戒性)․인욕․정진․일심․지혜를 지은 것이다. 이것은 여래의 계성과 삼매지혜(三昧智慧)와 해탈견(解脫見)과 해탈혜(解脫慧)를 깨닫지 못한 것이며, 또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이다. 다만 멀리 공과 무상과 무원의 법만을 듣고, 다만 상(相)으로 소리만 들으며, 상으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하고자 하며, 상(相)을 지어 속으로 말하기를, ‘이것이 보살이 머무는 곳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머무는 곳이 되며, 이것이 성문․벽지불이 머무는 곳이 된다’고 한다.
사리불이여, 보살로서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여읜 자가 이 공덕을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면 이것이 상(相)이 된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뜻을 일으키고 살운연을 생각하여 6바라밀을 여의지 아니하며, 구화구사라를 여의지 아니하며, 과거․미래․현재의 제불의 계성(戒性)과 삼매지혜․해탈견․해탈혜성을 여의지 아니하고,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공과 무상과 무원에 또한 상을 내지 않으면 사리불이여, 보살은 나한․벽지불도에는 떨어지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슨 뜻인가? 이 보살마하살은 뜻은 일으켜 오므로 상을 쓰지 않고 6바라밀을 행한다.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의 계성과 삼매지혜․해탈견․해탈혜성에서 상을 쓰지 아니했으며, 모두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였다. 사리불이여, 상을 쓰지 않고 6바라밀을 행하였으며, 상을 쓰지 않고 살운연을 행한 것이다. 이것이 곧 보살의 구화구사라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여래께 들은 바와 같이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여의지 않으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뜻을 일으킨 이후로 처음부터 법에 깨달을 것이 있음을 보지 아니했으며, 또한 미래에 깨달을 것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며, 또한 이미 깨달은 것도 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5음에서 살운연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와 같습니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도를 행하려는 자가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여의었다면, 이 무리는 아뇩다라삼야삼보에 곧 여우처럼 의심함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6바라밀을 행하였으나 모두 그 중에 상이 있으며, 이 상 때문에 여우처럼 의심함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에 머무르되 또한 상도 없으며 의지할 것도 없어야 합니다. 5바라밀을 행하는 것에서부터 살운연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이 또한 상도 없고 의지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때에 모든 욕계 천자와 색계 천자가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하는 것은 얻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된 자는 모두 마땅히 모든 법이 얻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모든 천자야, 매우 어렵다. 나는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었으나 또한 이룬 바가 없으며, 얻은 것도 없다. 또한 법에는 어떤 이룰 것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천자야, 모든 법은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제 부처님께 들은 것과 같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하는 것은 매우 얻기 어렵습니다. 저의 뜻과 같아서 쾌활하옵니다.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공하여 깨달음에 이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한 법에서는 모든 법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깨닫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법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여함을 따라서 법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5바라밀을 배워 살운연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합니다. 이 법은 모두 공하여 또한 볼 수 없으며,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쾌활하게 보살은 깨달아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5음은 5음 스스로 공하며, 살운연혜(薩云然慧)의 일은 스스로 공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는 알기 어렵고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허공 또한 ‘나는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려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또한 ‘나는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리라’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모든 법이 허공과 같음을 알면 이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룹니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이 허공과 같음을 알면 유쾌하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하여도 마침내 움직여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여, 매우 쾌락하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을 이루기 어렵다고 합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뜻에 어떠합니까? 5음이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움직여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아닙니다.”
“나아가 여여한 것에 이르기까지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움직여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뜻에 어떠합니까? 참으로 5음을 여의면 돌이킬 수 있는 다른 것이 있습니까? 참으로 살운연을 여의었으면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뜻에 어떠합니까? 5음이 여여한데 돌이킬 수 있습니까? 살운연이 여여한데 돌이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참으로 5음이 여여함을 여의고 살운연이 여여함을 여의고 돌이킴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뜻에 어떠합니까? 여여한 법성은 법이며 도법에 머뭅니다. 진제(眞諦)는 불가사의한 성품입니다. 아뇩다라삼야삼보에 돌이킴이 있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없습니다.”
“참으로 여여함에 여읨이 있으며, 나아가 불가사의한 성품에 돌아옴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이러한 뜻은 없습니다. 이 법은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법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돌아옴이 있겠습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존자 수보리가 말한 법인(法忍)과 같습니다.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움직여 돌아옴이 없는 것입니다. 여래가 수기한 보살의 삼승행에는 모두 처소가 없습니다. 저 수보리가 설한 것은 일승입니다.”
분욕만타니자(分耨曼陀尼子)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수보리께서 일보살승(一菩薩乘)을 설하고자 하셨습니다. 마땅히 수보리께 묻겠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살을 위하여 일승의 행을 설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여 말했다.
“그대들은 여여함 중에서 삼승을 설하겠습니까? 나한승․벽지불승․보살불승을 설하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아닙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이 뜻이 어떠합니까? 여여함 중에 참으로 삼승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있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참으로 여여함 중에 1사(事)․2사(事)․3사(事)가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없습니다.”
“참으로 여여함 중에 일보살을 보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이 법을 무위․무소유법이라고 이름합니다. 어떻게 이 중에서 삼승․나한․벽지불․삼야삼불을 찾고자 합니까?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이 여여함 중에서 모든 법을 출생합니다. 이를 듣고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싫어하지도 아니하며 돌아오지도 아니합니다.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수보리를 찬탄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네가 설한 것은 모두 불사(佛事)이다. 보살은 이 모든 법이 모두 여여함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듣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으며 싫어하지도 않고 돌아가지도 아니한다. 이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어떤 도에서 나온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도에서 출생한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중생에 대해 뜻을 평등하게 하고, 대자비로 널리 생각하되 치우침[偏黨]이 없어야 한다. 마땅히 중생을 위하여 경영을 잘하여 호념(護念)하고 안온하게 말하며, 말은 화순(和順)하여 이 중에서 상(傷)하게 함이 없어야 한다. 중생을 보되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고 몸과 같으며 자식과 같이 해야 한다. 자비를 권하여 생명을 해치지 않게 해야 한다. 항상 중생에게 권하여 10선(善)을 행하게 해야 한다. 사람이 바른 것을 행하고 사견을 여의면 그 환희를 대신하여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면 마땅히 이렇게 머물러야 한다. 스스로 4제(諦)․4선(禪)․4등(等)을 행하고 4공정(空定)을 행해야 한다. 사람에게 권하여 행하게 하고 사람이 행하는 것을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6바라밀을 행하고 항상 방편으로 사람을 가르쳐 6바라밀을 행하게 하고, 행하는 자를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내외공과 유무공․37품을 행해야 한다. 스스로 8유무(惟無)․부처님의 10종력․대자대비를 행하며, 스스로 역순(逆順)의 12인연을 행해야 한다. 사람에게 권하여 역순을 행하게 하고 행하는 자를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성문․벽지불의 지혜를 행한다. 사람에게 권하여 진제를 증득하지 못하였으면 행하게 하고, 행하는 자를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보살위에 오르며 사람들을 가르쳐 나아가게 해야 한다. 스스로 신통을 행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 중생을 교화하고 그에게도 권하여 배우게 하고, 배우는 자를 보면 그 기쁨을 대신한다. 스스로 습서(習緖)를 멸하고 그에게도 권하여 멸하게 한다. 스스로 수명을 성취하여 스스로 법에 머묾을 받고, 그에게 권하여 법에 머물게 하고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그 환희를 모두 대신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려는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며,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배우며 이와 같이 머무는 자는 5음에 걸림이 있지 아니하다. 나아가 법에 머묾에도 걸림이 없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진제를 배워서 5음을 받지 않으며,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받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음을 받지 아니하면 5음이 아니며, 살운연을 받지 아니하면 살운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머무는 품을 설할 때에 2천의 보살이 무소종생법인을 얻었다.
56. 아유월치품(阿惟越致品)
이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가 마땅히 어느 모양의 상(像)으로 아유월치를 알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범인지(凡人地) 및 제자지(弟子地)․벽지불지(辟支佛地) 나아가 여래지(如來地)에서 알 수 있다. 모두 하나 같아서 분별하지 않는다. 하나이지 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여여함과 평등하여 하나에 들어가므로 분별이 아니다. 이 여여함을 들으면 이미 바로 지나서 여우 같은 의심이 없다. 여여함에는 잃을 것이 없고 설한 바에는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 또한 타인의 장점이나 단점을 보지 아니한다. 이러한 모양이 아유월치의 보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다시 어떤 상의 모양으로 아유월치의 보살을 알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또한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또한 상(相)이 없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에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또한 상도 없다면 무슨 법으로부터 전환(轉還)하여 오는 것이며, 그리고 아유월치의 보살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에서 전환하는 것이며, 이것이 아유월치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6바라밀에서 전환하며, 내공․외공 및 유무공․37품․부처님의 18법에서 전환하며, 성문․벽지불지 및 아뇩다라삼야삼보지에서 전환하여 온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아유월치의 보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5음은 형상이 없으며 도(道) 또한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보살은 5음에서 전환하며 저 도에서도 전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5음과 도는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또한 외도 및 사문․바라문이 하는 것과 아는 것, 그리고 소견을 보지 않으며, 또한 모든 외도가(外道家)의 사견(邪見)과 직견(直見)을 보지도 않으며, 또한 여우처럼 의심하지도 않는다. 또한 외도․사문․바라문의 계(戒)를 비평하지 않으며, 또한 모든 사견에 떨어짐을 교활하게 희롱하지 않으며, 향과 꽃․비단 일산․당번(幢幡)을 가지고 모든 천신을 받들지 아니하며, 또한 타인으로 하여금 사견을 받들게 하지 아니한다. 이런 모양으로 그 상(相)과 행이 구족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아유월치의 보살임을 알 수 있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 아니하며, 여덟 가지의 지극한 고통을 받는 곳에 태어나지 아니하며, 여인의 몸을 받지 아니한다. 이런 모양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는 항상 10선(善)을 행하고 훼범하지 아니한다. 항상 꿈속에서도 10선을 지키고 행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쳐 행하게 하고, 타인이 행하는 것을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이러한 모양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중생을 위함으로써 6바라밀을 행한다. 스스로 12부경을 배우고 항상 서원을 지어 ‘이 12부경을 수지하고 부지런히 중생에게 권하여 중생의 서원을 채워 줄 것이며, 이 공덕을 가지면 모두 중생에게 베풀어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모양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깊은 경(經) 가운데에서 또한 여우처럼 의심하지 아니하며 평상(平相)하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아유월치 보살이 깊은 경법 중에서 여우처럼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또한 법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며, 또한 5음을 보지 아니하며, 또한 도(道)도 보지 않거늘, 평상(平相)함이 있겠으며 여우처럼 의심하는 것이 있겠느냐? 이런 모양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신(身)․구(口)․의(意)에서 항상 자비와 유연함을 행하며, 신․구․의 업으로 항상 중생에게 보시한다. 이런 모양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다섯 가지의 덮는 일을 함께하지 아니한다. 처음부터 은애(恩愛)하는 뜻에서 사모하는 정이 없다. 이러한 상(相)으로 구족하니 아유월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앉고 일어나며, 행보(行步)하고 눕고 깨어남에 침착하여 졸폭하지 아니하다. 이러한 상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정결하여 스스로 기뻐하니 티끌과 때가 없다. 의복과 눕는 침대가 또한 다시 정결하며, 질병이 적다. 범인의 몸에는 8만 가지의 벌레가 있어 항상 사람에게 침식하는데 아유월치 보살은 다시 이 벌레가 없다. 왜냐하면 이 보살의 공덕은 세간․모든 천(天)․귀신․아수륜(阿須倫)의 위에 있어 넘어설 수 있으며, 모든 선의 근본을 지어서 저 공덕 가운데 점점 더하여 가니 신․구․의가 정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이 보살의 신․구․의가 정결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선근 공덕을 따라서 신․구․의가 정결하고, 더러운 것과 허물이 제거된다. 공덕은 점점 증익하고 더러움과 허물은 소멸된다. 이것이 신․구․의가 깨끗한 것이며 3사(事)가 정결하므로 성문․벽지불보다 낫다.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이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이양(利養)을 탐하지 아니하며, 의복을 탐하지 않는다. 열두 가지 사문의 법을 구족하며, 질투가 없는 뜻을 행하며 또한 어리석어서 이익을 탐하는 뜻이 없다. 평등하지 못한 뜻이 없으며, 게으름의 뜻이 없으며 악계(惡戒)의 뜻이 없다. 이러한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이다. 수보리여, 아유월치의 뜻은 항상 안온하다. 또한 뜻은 항상 깊어 한 뜻[一意]으로 들어간다. 법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되 반야바라밀과 함께 평등한 뜻으로 세속의 일도 받들어 행한다. 모두 반야바라밀과 함께 구족하니, 법성에 들어가지 아니함이 있는 자도 모두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마왕 파순(波旬)이 화작하여 크고 작은 지옥을 만들고 하나하나의 지옥 중에서 무수한 억천의 보살에게 모든 고통을 받게 한다. 파순은 이 보살에게 지시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고통을 받는 사람은 다 과거에 부처님 처소에서 수기를 받은 자이며, 모두 아유월치 보살이다. 그런데 이제 모두 이 속에 떨어져 모든 고통을 받고 있다. 이제 그대들이 만약 아유월치의 수기를 받은 자라면 부처님이 그대들에게 지옥의 수기를 준 것이다. 그대들은 보살의 수기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대들은 보살도를 버리고 하늘에 태어나, 다시는 이 지옥에서 부지런히 고통을 받지 않는 것만 못하다.’
수보리여, 만약 이 보살의 뜻이 혼란하지 않다면 마침내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때에 마왕 파순이 다시 스님의 모습을 하고 그의 의복을 입고서 보살 처소에 이르러 말한다.
“그대들은 전에 6바라밀을 받았을 것이며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구한 자이다. 모든 법을 행한 것을 이제 속히 후회하고 뉘우치는 자는 해탈을 얻을 것이다. 너희는 전에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했을 것이다.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법이 다함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서 지은 선근 공덕과 권하여 도운 것이 있어 환희하는 복을 대신하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했을 것이다. 너희가 속히 이 뜻을 버리고 일찍이 뉘우치며, 만약 버리고 뉘우친다면 나는 곧 마땅히 너희에게 부처님이 설한 경의 깊은 법요(法要)와 여래가 가르친 것을 말하리라. 너희가 들은 것은 모두 불경(佛經)이 아니며 여래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이도인(異道人)이 지어 모은 것이다.”
만약 보살이 이 뜻을 얻고 혼란하여 여우처럼 의심하면 이 보살은 여래의 수기를 받은 것이 아니며, 이 보살은 올바른 선정[正定]으로 정확하게 아유월치에 머문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보살이 의심하지 않고 혼란하지 아니하고 전향할 뜻이 없고, 받는 것이 없으며 그 일을 믿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활용하지 않고 6바라밀을 행하면 곧 스스로 구족해서 속히 살운연혜의 도에 이르게 되며, 스스로 돌아가 타인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한다.
비유하건대, 번뇌가 다한 아라한과 같아서 스스로 법을 보는 것을 면대(面對)하고 여타의 가르침은 믿지 아니한다면 마군이 마침내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며, 아라한․벽지불도 마침내 전향시키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아라한․벽지불도 움직여 전향시키지 못하며, 아유월치보살도 전향시키지 못할 것이며, 전환하지 않은 이 보살은 반드시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를 것이며, 바로 아유월치에 머물 것이다. 여래․무소착․등정각도 오히려 믿지 않거늘 하물며 아라한․벽지불 및 마왕 파순의 모든 이학(異學)의 말을 믿겠느냐? 왜냐하면 처음부터 어떤 법도 마땅히 믿을 것이 있다고 보지 아니하며, 또한 5음의 진여도 믿을 것이 있다고 보지 아니하며, 또한 도의 진여도 믿을 것이 있다고 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 모양으로 그 상(相)과 행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마군이 다시 화작(化作)하여 비구의 옷을 입고 그의 형상을 지어 보살 앞에 이르러 보살에게 말한다.
‘선남자야, 그대들이 행한 것은 모두 세속의 일일 뿐, 살운연의 행이 아니다.’
마군이 다시 말한다.
‘내가 마땅히 그대들의 근심과 고통의 근본을 끊어줄 것이다.’
그리고 문득 보살을 위하여 상도법(像道法)의 가르침을 설하면서, 곧 이것이 세상사의 상도(像道)의 가르침이라 한다. 지계의 견해를 보이고 4선(禪)과 4공정(空定)을 설하면서 말한다.
‘선남자야, 이것이 정도(正道)에 돌아가는 것이다. 이로부터 수다원도를 얻을 것이며, 나한․벽지불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생사의 근심과 고통의 근본을 끊을 것이며, 이것을 사용하면 근심과 고통 받는 것이 배움이 되지 않겠느냐?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욕계천에 태어날 것이며 색계천에 태어날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를 듣고 곧 크게 기뻐하며, 혼란하지 아니하고, 전향하지 아니하고, 여우처럼 의심하지 아니하고 속으로 다시 생각하여 말한다.
‘이제 이 비구가 상법(像法)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하여 설법하니 나의 이익이 적지 아니하다. 무슨 까닭인가? 상법이 설한 것은 수다원을 취하여 증득하지 못하고, 나한․벽지불도에 이르는 것도 또한 증득하지 못할 것이며 아뇩다라삼야삼보도 또한 증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이 비구의 은혜를 받은 것이니, 내가 응당 깨달아 알아야 할 일을 이제 나를 위하여 설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알아서 마땅히 삼승의 일을 두루 알게 되었다.’
이때에 마왕 파순이 보살이 기뻐함을 알고 보살에게 말한다.
‘선남자야,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부처님께 의복과 음식과 침대와 의약을 공양드려서 얻은 것이 보살임을 알지어다. 다시는 이 과거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부처님을 따르지 말고 5바라밀을 수행해야 한다. 저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 들은 것과 묻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이다. 5바라밀과 37품․대자대비로 모든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하고,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보살의 응하는 것과 같이 하면 여기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며, 그 가르침에 머물고 이와 같이 행하는 자는 살운연에 이르게 된다. 모든 과거의 보살들이 이와 같은 행을 지었으며, 이에 여기에서도 그러한 공덕을 지었으나 오히려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이 배운 이래로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문득 마땅히 어떻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겠느냐?’
만약 보살이 이 뜻을 듣고 다른 것이 없고,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도 아니하며, 두 배나 다시 환희하여 말한다.
‘이 무리의 비구는 거듭하여 나를 이익되게 하며 나에게 수다원을 얻게 하고 살운연에 이르게 한다.’
이때에 마왕 파순이 이 보살의 뜻이 움직이지 아니했음을 알고 다시 큰 비구 대중[大比丘衆]으로 화작하여 보살에게 나타나 말한다.
‘이 무리의 비구는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해서 뜻을 일으켜 부처를 구했으나 능히 부처가 되지 못하고 이제 모두 나한을 취했다. 이와 같은 사람들도 이룰 수가 없었거늘 하물며 그대들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 보살이 되겠느냐?’
이것이 마군의 일임을 깨달아 아는 자는 나한․벽지불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만약 어떤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하여 일체 지혜에 이르러 움직여 전향하지 않는다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부처님이 설하신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보살이 모두 받들어 수지하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의지 않으면 살운연에 이른다. 마침내 조금도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이렇게 생각하고 마군의 일임을 깨달아 아는 자는 마침내 조금도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감해지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이러한 상으로 구족한 모양을 행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느 곳에서 전향해야 하며, 그리고 전환하지 않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상(陰相)에서 전환해야 하며, 12쇠상(衰相)에서 전환해야 하며, 18성상(性相)에서 전환해야 하며, 음노치상(婬怒癡相)에서 전환해야 하며, 견상(見相)에서 전환해야 하며, 37품상에서 전환해야 하며, 성문․벽지불의 상에서 전환해야 하며, 불상(佛相)에서 전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유월치의 보살은 상(像)의 모양과 법상에서의 보살위도 공하기 때문이다. 법은 생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소유함이 없다. 이미 소유함이 없으면 또한 지을 것도 없다. 또한 짓지 아니하면 또한 생하지도 아니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보살로서 이 법인을 얻은 자는 곧 아유월치 보살마하살이다. 수보리여, 이러한 상으로 구족한 모양을 행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마하살임을 알아야 한다.”
방광반야경 제13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57. 견고품(堅固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마왕 파순(波旬)이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살운야라는 것은 허공과 같은 것이다. 유무의 일이 다 공하다. 이 법과 형상도 또한 공하다. 저 공무(空無)의 법은 처음부터 얻을 수가 없다. 이미 과거에도 공무의 법은 얻을 수 없었으며, 미래에도 또한 얻을 수 없다. 유무의 상(相)은 다 공하다. 이처럼 공한데 네가 부지런히 수고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는가? 이것은 다 마군의 일이며 삼야삼불이 설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현자는 마땅히 마군의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들이 이 뜻을 짓는다면 그대들은 장차 긴 밤 동안 악취(惡趣) 중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선여인이 만약 이 말을 들으면 곧 마땅히 이것이 마군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 마군이 나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무너뜨리고자 하여 일체 제법의 유무의 일이 비록 공과 같아 일체 중생이 볼 수 없으며 능히 알지 못한다 하나, 나는 마땅히 유무의 공으로써 사홍서원[僧那僧涅]을 맹서하며 살운야에 이르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할 것이며 해탈을 얻게 할 것이다. 마땅히 중생에게 수다원도를 얻게 하며 아라한․벽지불도를 얻게 하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게 할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뜻을 일으킨 이후로 마땅히 그 뜻을 견고히 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전환하지 않아야 한다. 여타의 일은 믿지 않고 뜻을 견고히 하면서 곧 6바라밀을 행하면 문득 보살위(菩薩位)에 오른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움직여 전환하지 않는 것이 아유월치(阿惟越致)입니까, 전환하는 것이 아유월치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움직여 전환하지 않는 것도 아유월치이며, 움직이는 것도 또한 아유월치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일은 어째서 그러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벽지불에서 움직여 전환하는 것이 바로 아유월치이며, 아라한․벽지불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보살은 곧 움직인 것이다. 수보리여,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이다. 이와 같은 상이 있으면 저 마왕 파순도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지 못하도록 무너뜨리지 못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4선(禪)을 얻고자 하면 곧 얻을 수 있으며, 멸탈선(滅脫禪)을 얻고자 하면 또한 얻을 수 있다. 37품의 선(禪)과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선을 모두 얻을 수 있다. 5신통을 얻고자 하면 모두 얻을 수 있다. 비록 모든 선(禪)을 받았으나 선의 증득을 취하지 아니하며, 성문․벽지불의 증득을 취하지 아니한다. 응하는 바를 스스로 취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항상 도를 생각하고 도를 여의지 아니한다. 형색을 탐하지 아니하고 신상(身相)을 탐하지 아니하며, 소굴(巢窟)을 탐하지 아니하며, 6바라밀을 탐하지 아니하며, 4등(等)을 탐하지 아니하며 또한 4공정(空定)을 탐하지 아니한다. 신통을 탐하지 아니하며, 10력과 18법도 탐하지 아니하며, 불국(佛國)을 탐하지 아니하며, 또한 중생을 교수(敎授)하는 것도 탐하지 아니하며,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도 탐하지 아니하며, 선근 공덕도 탐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공에는 법도 없으며 공무(空無)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상(無相)의 법을 탐할 것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유무의 사상(事相)이 다 공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이미 보살의 생각을 구족하고 있다. 4사(事)를 구족했으며 행보(行步)하는 것, 앉는 것, 일어나고 눕고 깨어나고 나오는 곳에 편안하고 자세히 하여 마침내 갑작스럽지 아니하며, 뜻을 쓰는 데 망령되지 아니한다. 수보리여,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이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중생을 위하므로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로써 현재 살고 있는 오욕 중에서 모든 빈궁한 자에게 의복과 음식을 보시하여 사람의 바램을 따라서 공급해 주고자 한다. 스스로 6바라밀을 행하고 저에게도 권하여 6도(度)를 행하게 한다. 항상 6도의 공덕을 찬탄하게 하며, 행하는 자를 보면 그 기쁨을 대신한다. 아유월치 보살이 기거하는 곳은 염부제의 진보(珍寶)가 가득하니, 중생과 삼천대천국토에 진보를 보시한다. 중생에게 보시해도 처음부터 탐하고 아끼는 마음이 없으며 음욕의 뜻이 없다. 항상 평등한 법을 행하고 말이 겸손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수보리여,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이다.
다시 수보리여, 화이라원 열차(和夷羅洹閱叉)가 항상 저의 뒤를 따라 보호하며 열차(閱叉) 등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항상 마땅히 이 보살을 보호할 것이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데 이르게 할 것이며 뜻을 혼란하지 않게 할 것이며, 마침내 멀리 여의지 않게 할 것이다.’
다시 5성(性)의 화이(和夷) 열차가 있어 또한 다시 아유월치 보살마하살을 모시어 수호할 것이며, 나머지의 소신(小神)과 인신(人神)이 아닌 것으로 하여금 그 편의를 얻을 수 없게 한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신근(信根)․지근(志根)․정진근․삼매근․지혜근과 모든 근이 구족되어 사람 중에서 용맹하여 약하거나 두려워함이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용맹한 것이며, 어떤 것이 겁약하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도의 뜻이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용맹한 것이며, 무서워 떠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은 도의 생각이 항상 구족되어 주술과 부서(符書)를 배우지 않으며 푸닥거리[蠱道]를 하지 아니한다. 의사가 되어 모든 약을 조제[合和]하지 아니하며, 신선․외도․복상(卜相)을 배우지 아니하며, 다른 남자와 여인의 뜻을 안다. 왜냐하면 보살은 저 공에 법상도 없으며 이 일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相)도 없으며 항상 청정을 원한다.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마땅히 아유월치 보살의 모습으로 행하는 상을 설하리니, 자세히 듣고 진실하게 받을지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도를 행하는 것을 여의지 아니하고 5음에 순응하며 모든 성품에 순응하며 모든 쇠(衰)에 순응한다. 왜냐하면 5음이 공하므로 성(性)이 쇠(衰)하는 것도 또한 공하기 때문이다. 행하는 것이 국사(國事)를 거역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공법에 머물면 또한 법에는 더하거나 줄어듦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도사(盜事)를 거역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공에 머물면 공법 중에는 또한 법을 가지고 오는 자도 있지 아니하며 또한 가지고 가는 자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병사(兵事)도 거역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공성(空性)에 머물면 공법 중에는 또한 법에 많음이 있고 적음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싸우는 일도 거역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공법에 머물면 또한 법에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이 항상 순하다. 왜냐하면 제법공의 진여에 머물면 또한 유상(有常)과 무상(無常)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아유월치는 성곽(城郭)의 일을 설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허공에 머무는 공은 또한 모이는 것도 보지 아니하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한 취락의 일도 보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본제(本際)에 머물면 얻을 것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며 잃을 것이 있음도 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일도 설하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 가지 세속의 일도 설하지 아니한다. 다만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살운연의 일을 여의지 아니한다. 단(檀:보시)바라밀을 행하여 탐심과 질투가 없으며, 시(尸:지계)바라밀을 행하여 악한 계를 범하지 아니하며, 찬(羼:인욕)바라밀을 행하여 성내지 아니하며, 유체(惟逮:정진)바라밀을 행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며, 선(禪)바라밀 행하여 어지러운 뜻이 없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어리석음이 없다. 모든 법의 공을 행하여 모든 법의 주인이 되며 비법(非法)의 주인은 되지 아니한다. 법성을 행하여 무너지지 않는 법을 찬탄하는 자는 모든 여래와 연각(緣覺)․제자 및 모든 보살과 모든 새로운 대도(大道)의 뜻을 일으킨 자와 족성(族姓) 남녀와 함께 친우가 된다. 항상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 보기를 원하며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님 보기를 원한다. 부처님을 보는 바를 따라서 피안에 왕생하기를 원한다. 문득 왕생을 얻었으면 주야로 뜻이 항상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아유월치 보살은 욕계에 들어감을 수순하여 10선(善)을 받들어 행하여서 시방의 부처님 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제1선(禪)을 넘어 제4선에 이르며 4선에서 무형선(無形禪)에 이르면 곧 시방의 부처님 앞에 태어난다. 수보리여,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내공에 머무는 자이며, 37품에 머무는 자이며 3탈문(脫門)에 머무는 자이다. 마침내 내가 아유월치라고 말하지 아니하며, 또한 나는 아유월치가 아니라고도 말하지 아니한다. 스스로 그 지위에 머물되 마침내 의심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처음부터 법에는 움직여 전환하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수다원은 스스로 그 도에 머무는 것과 같으니, 또한 괴이하게 의심할 것이 아니다. 아유월치도 또한 비유하면 이와 같은 것이다. 스스로 그 지위에 머물며 중생을 교화하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한다. 마군의 일이 마침 일어나면 즉시에 깨달아 알아서 마군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사(魔事)를 파괴해야 한다. 비유하면, 아주 어리석은 사람의 뜻은 거역하는 악을 품고 죽음에 이르러도 옮기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아유월치 보살이 스스로 그 지위에 머무는 것도 또한 비유하면 이와 같은 것이다. 모든 하늘과 사람, 모든 귀신과 용․아수륜과 모든 마왕 파순도 능히 이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세간․모든 천․용․귀신 등 일체의 위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 지위에서 5통을 구족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한다. 하나의 불국토에서 하나의 불국에 이르며 모든 부처님 처소에 모든 선근 공덕을 심었으며 여러 부처님께 물어 모든 가르침을 받았으니, 머무는 곳에 마군의 일이 있으면 곧 깨달아 안다. 구화구사라로 마군의 일에 처해 본제(本際)에 집착하여 있어도 스스로 그 지위에서 또한 의심하여 싫어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진제에는 여우처럼 의심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제는 또한 하나도 아니고 또한 둘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하며, 나한․벽지불지도 지나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 공은 법상(法相)도 없으며, 또한 생하는 것도 볼 수 없으며 또한 멸도 보지 못하며 또한 단(斷)도 볼 수 없으며 집착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내가 마땅히 아유삼불을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또한 내가 아유삼불을 얻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상은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스스로 결핍이 없는 지(地)에 머물며 다시 나머지 일을 희망하지도 아니한다. 능히 이 지를 무너뜨릴 자도 없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아유월치 보살이 소유한 지혜는 타인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마왕 파순이 부처님 모습으로 화작하여 보살 처소에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라한을 취하려 와도 그대들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를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또한 무소종생법인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이 그대에게 수기를 주지 않을 것이며, 그대들은 또한 이 일이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행도 없으며 또한 이 상(相)도 없으며, 또한 이 모양으로서 수기를 받을 수 없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를 듣고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으며 생각에 둘이 없어야 한다. 이 보살은 마땅히 스스로 자신이 이미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의 수기를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스스로 자신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를 받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저 마왕 파순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보살의 처소에 와서 곧 마군의 일로써 보살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를 준다. 이 보살은 곧 혹은 마군일 수 있거나 혹은 마군의 부리는 바가 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을 하고 왔으나 부처님은 아니며, 다만 나로 하여금 나한․벽지불에 떨어지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마왕 파순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보살의 처소에 와서 보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행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 아니다. 또한 제자가 설한 것도 아니며 다만 마군의 일일 뿐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곧 다시 마군일 뿐이며, 혹은 마군의 부리는 바가 되며, 이는 부처님이 아니며, 나를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에서 무너뜨리고자 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뜻을 마침내 전향하지 않는다. 이 보살이 뜻을 전향하지 않는 것은 과거에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기 때문이며, 아유월치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면 아유월치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마땅히 아유월치의 상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모든 법을 호지(護持)하려고 하므로 신명을 아끼지 아니한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구화구사라로써 이렇게 능히 법을 보호하고 신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곧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 법을 보호한 것이 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신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법을 보호한다는 것은 어떤 법을 호지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공법(空法)을 설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꾸짖고 비방하는 말을 한다.
‘이것은 법도 아니며, 또한 율행(律行)도 아니며 또한 높은 가르침도 아니다.’
수보리여, 이 법을 위하는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정법을 호지하는 것이다. 보살은 마땅히 ‘미래에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설할 것이며, 나는 또한 이 수(數) 중에서 수기를 받을 것이며, 이 법은 또한 다시 나의 법이다. 이 법 때문에 신명을 아끼지 아니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 법을 위하므로 신명을 아끼지 아니한다.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면, 이것이 아유월치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아유월치는 깊은 법을 설함을 들으면 또한 여우처럼 의심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도 아니한다. 모든 부처님이 설한 것은 다 능히 수지하여 마침내 잊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다린니(陀隣陀)를 얻었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떤 다린니를 얻어야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의 법을 능히 수지해서 잊지 아니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다린니를 듣고 수지하는 등으로써 곧 능히 모든 불경과 법을 수지하고 잊지 않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설한 것은 성문이 설한 것이 아니며, 또한 천․용․귀신이 설한 것이 아니며, 또한 아수륜․진타라(眞陀羅)․마휴륵(摩休勒)이 설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소유는 음성의 이름이다. 보살이 이것을 듣고 처음부터 놀라는 뜻이 없고 여우처럼 의심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양의 상과 행을 구족하니, 이것이 아유월치의 보살마하살이다.”
58. 심심품(甚深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유월치 보살은 큰 공덕을 구족하였으므로 구족한 공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아유월치는 큰 공덕이 있어 그 구족한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걸림이 없고 한계가 없는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나한․벽지불이 능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유월치는 이 지혜에 머물며 곧 신통을 받으니, 또한 모든 천․세간의 인민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 동안 아유월치 보살마하살의 공덕과, 상과 행의 모양이 구족한 것과, 심오한 지혜에 들어가 머문 것과, 6바라밀을 행하고 37품과 살운연을 구족한 것을 찬탄하여 설한다 해도 사람들에게 아유월치 보살마하살의 공덕을 알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수보리여, 네가 이에 능히 아유월치의 심오한 곳을 질문하여 깊고 깊은 공과 무상과 무원을 설하였다. 소유가 없음을 설하였으며 생멸이 없음을 설하였으며, 모든 음욕의 때[婬垢]와 열반의 청정함을 설하였다. 진여를 설했으며 고요한 진제의 법성을 설하였으니, 이 모든 깊은 법이 다 열반의 상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설하신 것은 다만 이 깊고 깊은 열반이지 모든 법의 가르침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깊고 깊은 것은 또한 모든 법의 가르침이다. 수보리여, 5음은 깊은 것이며, 6쇠(衰)도 대단히 깊은 것이며, 나아가 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다시 깊고 깊은 것이다. 수보리여, 5음이 어떻게 깊고 깊은 것이냐? 5음이 여여하기에 깊고 깊음 또한 도(道)의 여여함과 같다. 이러므로 5음은 심히 깊고 도 또한 심히 깊은 것이다. 어떤 것이 여여한 것인가? 무릇 여(如)라 하는 것은 5음도 아니며, 또한 5음을 여읜 것도 아니다. 여는 또한 도(道)도 아니며, 또한 도를 여읜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유월치 보살마하살은 매우 기이하고 특이하옵니다. 매우 깊고 미묘한 것이 이미 그러하옵니다. 5음을 없애고 열반에 처하며, 도(道)나 속(俗) 같은 소유법과 지음이나 지음 없음, 유루․무루를 이미 모두 없애고 열반에 처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심묘한 법에 응하거나 혹은 염(念)하거나 혹은 수지하여 머무는 바를 스스로 생각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배우는 것도 또한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가르침대로 모두 구족한 것이며, 이 구족한 생각을 가졌으므로 한량없는 선근 공덕을 받아서 무량한 겁 동안 생사의 난을 버리게 된다. 그런데 하물며 뜻에서 지키고 행하여 반야바라밀과 도에 상응함에 이르는 자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비유하건대 저 선비가 정이 많고 방일(放逸)하여 저 단정한 여인과 약속을 정했는데 그 여인이 일이 있어 그 시간에 가지 못하였다. 도착하지 못한 사이에, 뜻에 어떠하냐?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생각이 일어났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생각이 심히 많고 많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받들어 행하는 것도 그 중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하루의 생각을 염(念)하는 데 두어 전향하지 아니한 자는 약간의 겁 동안 생사의 허물을 물리친 것과 같다.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하루에 받은 선근 공덕은 저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 동안 보시만 행한 것보다 더 뛰어나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3존께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 동안 보시했다면, 이 뜻이 어떠하냐? 그 사람이 심은 복은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고 많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한 것만 같지 못하나니, 하루 동안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응하여 행한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보살이 이 승(乘)을 인(因)으로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수명 동안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수다원의 공덕을 지었으며, 나한․벽지불의 공덕을 지었으며, 삼야삼불에 이르는 선근 공덕을 지었다면 이 뜻이 어떠하냐? 그 사람의 공덕은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행한 것만 같지 못하여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은 이미 나한․벽지불지를 넘어섰기 때문이며, 보살위(菩薩位)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의 수명이 길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하였다면, 그 사람의 공덕은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루 동안 6바라밀을 행한 것만 같지 못하나니, 그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란 보살마하살의 어머니이며,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의 수명 동안 행하고 법보시를 행했다면, 뜻에 어떠하냐? 그 사람의 공덕은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가르침대로 하루 동안 행한 것만 같지 못하니, 법보시한 그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아니했다는 것은 곧 살운연을 여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수명 동안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37품과 공과 무상과 무원을 행하였다면, 그 사람의 공덕은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그 중의 가르침으로 하루 동안 반야바라밀 중의 가르침과 같이 하며 37품과 18법을 행한 것만 같지 못하나니,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살운연에서 돌이킴을 보지 아니했기 때문이며, 반야바라밀을 여읜 자는 곧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런 까닭에 보살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의 수명 동안 6바라밀을 행하여 소유하고 있는 재물과 음식을 보시하고, 법 보시와 모든 삼매의 일로써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게 하였다면, 그 사람의 공덕은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그 중의 가르침으로 보시를 하며 법보시와 모든 삼매의 일로써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게 한 것만 같지 못하나니, 그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은 모든 공덕 중에서 가장 제일이기 때문이며, 반야바라밀을 여읜 생각은 염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고자 하면 마땅히 지혜에서 잘 구해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의 수명 동안 6바라밀을 행하여 과거에 권하여 마땅히 구하였으며 현재에는 여러 부처님과 스님께 공덕을 지어 그 환희를 대신하며, 이 환희를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지어 갖는다면 그 공덕이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이 하루 동안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상응한 것만 같지 못하다. 이 공덕을 가졌으면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지혜에서 잘 구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과 같이 보살은 지은 바가 없이 하는 것이 가장 제일입니다. 만약 지은 것이 없고 하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정견을 얻으며, 수다원 및 나한․벽지불․살운연에 이르며, 아유삼불을 이룹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어느 곳에도 지을 것이 없는 것이다. 수다원을 얻고 살운연에 이르며 아유삼불을 이루고,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보시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짓는 것이 있으면 또한 이 보시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염하여 말하되, ‘보시는 공한 것이며 또한 소유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내외공 및 유무공을 잘 배우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 공에 머무는 것을 마치면 모든 짓는 것을 관하며, 짓는 것이 공인 것을 관하여 마치면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으면 수(數)도 없고 한계도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복과 공덕을 받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수가 없고 한계가 없으며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이 다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승기(阿僧祇)는 수가 없는 것이 된다. 수신(數身)이 있음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수신이 없음도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마땅히 미래․과거․현재에 한계를 지을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으며 불가사의한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5음을 부리는 것도 헤아릴 수 없으며 수도 없으며 한계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원인으로 5음은 헤아릴 수 없으며 수가 없으며 한계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은 공하여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어찌 그러합니까? 세존이시여, 다만 5음은 공한데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부터 모든 법이 공함을 설하지 않았느냐?”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공함을 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공이란 것은 이것을 하되 다함이 없는 것이며, 수가 없는 것이며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공은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으며 또한 평상(平相)한 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의 의해(義解)는 또한 약간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가 말한 것과 다른 것이 없다. 모든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도 약간도 얻을 수 없다. 이 법은 공하며 무상․무원하며 소유도 없으며 생하는 바도 없다. 이것이 멸(滅)이며, 이것이 니원(泥洹)이다. 이것이 여래이며, 다함이 없는 것이 니원에 이른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일찍이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기이하고 특이하옵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얻을 바가 없는 법을 제가 들었습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법은 얻을 수 없으므로 공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뜻을 얻을 수 없는데 증감(增減)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더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6바라밀도 또한 더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37품도 더하거나 줄어들지 아니하며, 8유무선(惟無禪)․4무애혜(無礙慧)․4등(等)․부처님의 18법 및 10종력(種力)․4무소외(無所畏)도 또한 더함도 없고 또한 줄어듦도 없습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이 6바라밀에서 4무소외에 이르기까지 만약 더함이 있거나 줄어듦이 있었다면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얻을 수 없는 법은 또한 더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만약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반야바라밀을 염하며 만약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익혔다면, 또한 내가 6바라밀을 더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6바라밀을 줄어들게 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이름이 있으므로 6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이 생각을 가지고 이 뜻 일으키는 것을 가지고 이 선근 공덕을 가지면 아뇩다라삼야삼보가 여여한 것을 베풀어서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이 아뇩다라삼야삼보가 모든 법과 같이 여여한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무엇이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이며 아뇩다라삼야삼보가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이 여여한 것은 열반이 여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더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러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는 것이며, 배로 다시 정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법에 더하거나 줄어듦이 있음을 보지 아니한다. 이러므로 법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더하거나 줄어듦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러므로 6바라밀은 또한 더하거나 줄어들지 아니하고 네 가지 걸림이 없는 데 이르는 것이며 또한 더하거나 줄어들지 아니한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더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뜻을 지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려면 처음의 뜻으로써 이루는 것입니까, 나중의 뜻으로써 이루는 것입니까? 전의(前意)․후의(後意)가 각각 함께하지 않는데 어떻게 선근 공덕의 모임을 얻으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겠습니까? 세존이시여, 함께하는 것도 아니며 같은 뜻도 아닌데 어떻게 공덕을 이루며, 이루지도 아니하고 모이지도 않았는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비유하여 설하리니, 지혜 있는 이들은 비유로써 안다. 네 뜻이 어떠하냐? 비유하건대 등불의 심지가 있는데 처음 태울 때, 처음 쓸 때도 태워서 밝음을 얻으며 후에 쓸 때도 태워서 얻는 것이다. 심지를 태울 때, 처음 쓸 때도 태워서 밝았으며 후에 쓸 때도 태워서 밝히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불꽃은 처음 쓸 때에 태워서 얻는 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불꽃은 태우는 인연을 여읜 것도 아니며, 또한 불꽃은 태운 후에 얻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후에 불꽃의 인연을 여읜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여, 보살도 또한 처음 뜻으로써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처음 뜻의 인연을 여읜 것도 아니다. 또한 후의 뜻으로써 얻는 것도 아니다. 또한 후의 뜻의 인연을 여의고서 얻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10주지(住地)에 이르기까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10주지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선 지지(智地)에서 지(地)를 관해 보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8배(輩)는 관지(觀地)․박지(薄地)․이음지(離婬地)․이판지(已辦地)․벽지불지(辟支佛地)․보살지(菩薩地)․아뇩다라삼야삼보지․불지(佛地)인데, 불지를 구족하면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보살은 그러므로 10지(地)를 배워야 한다. 또한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처음 뜻을 일으킨 것을 여의고 얻는 것도 아니다. 또한 후의 뜻으로 얻는 것도 아니며, 또한 후의 뜻을 여의고 얻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12인연이 일어나는 것도 대단히 깊습니다. 처음에 뜻을 일으켜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처음 뜻을 일으킨 인연을 여읜 것도 아닙니다. 또한 후의 뜻을 써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후의 뜻을 여의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여, 네 뜻에는 어떠하냐? 뜻이 이미 멸하였는데 다시 소생할 수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이미 멸하였으므로 다시 소생할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뜻이 이미 생겨났으면 이는 법이 멸한 것이냐?”
“세존이시여, 이는 실로 법이 멸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법이 멸했다면 멸했다는 것인가?”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수보리여, 이 뜻이 어떠하냐? 바로 그렇게 머무는 것이냐?”
“세존이시여, 머무는 것이 여여한 머묾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여여한 머묾이라면 진제(眞際)에 머물면 마땅히 머무는 것이 여여한 것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무슨 뜻이 그러하냐? 여(如)라는 것은 대단히 깊은 것이냐?”
“세존이시여, 대단히 깊고 깊습니다.”
“수보리여, 여라는 것은 이 뜻이 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는 뜻은 아닙니다.”
“수보리여, 뜻은 여(如)를 여읜 것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여는 여를 서로 볼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와 여는 서로 볼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행하는 자는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행하는 자는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이와 같이 지어 행하면 어떤 법을 행하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행하는 자는 행하는 바가 없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약간도 행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무릇 여(如)라는 것은 또한 약간도 없으며 또한 약간의 행을 지을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무엇을 행하는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행하되 필경에는 둘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행한다면 필경에는 약간의 행이 있는 것인데, 상(相)이 있어 행하는 것이냐?”
“있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상(無相)은 상념(想念)이 있는 것이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상념이 있는 것이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유상과 무상의 생각을 짓지 말아야 하며,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부처님의 10종력과 18법을 갖추지 않아야 하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않아야 합니다. 보살의 구화구사라는 모든 법에 생각하는 바도 없으며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일체 모든 법의 상이 모두 공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한 법에 머물러 중생을 위하므로 3삼매(三昧)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 삼매를 가지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의 3삼매는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삼매에 머무는 것은 공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에 상응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은 공에 집착하며 상(相)과 원(願)에 집착한다.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편안한 곳에 인도하고자 공․무상․무원의 법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보살은 이 3사(事)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59. 몽중행품(夢中行品)
이때에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꿈속에서 세 가지 일인 공․무상․무원 삼매를 행하면, 꿈속에서 행하는 이것은 참으로 반야바라밀에 이익됨이 있습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만약 대낮에 반야바라밀에 유익했다면 밤에 꿈속에서도 또한 마땅히 유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낮과 밤의 꿈속의 일이 같아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만약 반야바라밀이 있는 자라면 꿈속에서 곧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염할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만약 보살이 꿈속에서 지은 것이 있다면 참으로 이루고 받는 바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법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룰 것도 없으며 받을 바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 처음부터 법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룰 것이 있거나 받는 것이 있어도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것인데, 만약 꿈을 깨고 나면 참으로 얻을 바가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만약 꿈속에서 살해했다면, 내가 이것을 죽였으므로 유쾌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깨고 나면 꿈속에서 지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모두 인연입니다. 인연이 없었다면 마침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일에는 인연이 있으며, 인연이 있으면 생각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일은 보고 듣는 데서 생깁니다. 문득 깨달은 뜻이 있으면 곧 집착을 끊습니다. 듣지도 아니하며 보지도 아니하면 연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이 인연으로 일이 일어나며 생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무엇이 생각하는 것이며 짓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 고요한 것[寂]이다. 무엇을 지으면 인연이 있고 일어남이 있으면 이루고 받을 것이 있는가?”
수보리가 아뢰었다.
“생각이 일어나면 곧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인연이 있으면 곧 일이 있는 것이며, 일이 있으면 곧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만약 보살이 꿈속에서 6바라밀을 행하여 이 공덕을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으려고 생각하면, 이는 베풀어 짓는 바가 됩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이제 미륵보살마하살이 세존에게 수기를 받고 여기에 계시니 질문하겠습니다. 미륵께선 마땅히 그 질문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미륵보살에게 말했다.
“제가 질문을 했더니 수보리가 미륵보살께서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인자(仁者)께서 마땅히 저희들을 위해 해설해 주소서.”
이때에 미륵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내가 마땅히 명(名)과 색(色), 그리고 통(痛)․상(想)․행(行)․식(識)으로써 대답하기를 원합니까? 마땅히 어떤 일로 해설하기를 원합니까? 마땅히 색이 공한 것을 가르쳐 보내겠습니까? 마땅히 통․상․행․식이 공한 것을 가르쳐 보내겠습니까? 색이 공한 것도 능히 없다고 가르쳐 보내겠으며, 통․상․행․식은 공하여 또한 가르쳐 보낼 것도 없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법에 능히 가르치어 알게 하는 법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수기를 받을 것도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받을 것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수기를 받을 곳도 없는 것입니다. 이 법은 모두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인자께서 설하신 것은 증득할 수 있습니까?”
미륵이 답하여 말했다.
“비록 나도 이렇게 설하였으나 또한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사리불이 속으로 ‘미륵보살은 변재가 깊어 6바라밀 중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로 가르치어 알게 하되, 의지하는 바가 없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진정 이 법에 나한을 증득함을 보느냐?”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에는 증득할 것이 있음을 보지 못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이 법에서 수기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법에서 마땅히 수기를 받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은 자라면, 보살은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의심이 있지 않아야 한다. 내가 마땅히 아유삼불을 얻었다 해도 또한 의심하여 얻지 못하였다고 해도 안 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주리고 목마르며, 옷으로 몸을 덮지 못하고, 고독하고 빈궁하며, 액난으로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는 중생이 있음을 본다면 마땅히 큰 애원(哀願)을 일으키되, ‘내가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을 때 나의 경계에서는 이러한 곤고(困苦)한 무리가 없게 하리라. 나의 불토(佛土)에는 의복과 음식이 갖추어져 있음이 마치 사천왕에서 위로 도리천 제6천왕에 이르기까지처럼 음식과 의복이 자연히 있게 하리라’ 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곧 단바라밀을 구족한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자비한 뜻이 없어 뭇 생명을 잔혹하게 죽이고 사견(邪見)과 의망(疑網)으로 10악(惡)을 범한 자를 보며, 단명하고 병이 많은 자를 보며, 조금 추하게 생겨 안색이 없는 자와 형상에 장애가 있어 열극(劣極)하고 하천한 자를 보면 대비(大悲)의 뜻을 일으키되, ‘나는 시바라밀을 받들어 행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경계 안에는 이런 무리가 없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계를 구족하면 오래지 않아 속히 아유삼불을 얻을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찬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성내는 뜻이 있어 지팡이․칼․창․기와․돌을 던져서 서로 살상하는 중생을 보면 대원(大願)을 일으키되, ‘내가 마땅히 인욕을 행하여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경내에는 모든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을 없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 중에는 일체 중생이 모두 같이 자비한 뜻과 화합한 마음[志]으로 서로 보게 하여,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으며 형 같고, 아우 같이 서로 향하되 해가 없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인욕을 구족하면 오래지 않아 속히 아유삼불을 얻을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유체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중생이 삼승법에서 게으른 모양을 일으키어 정진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시 대원(大願)을 일으키되, ‘내가 마땅히 스스로 힘써 정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여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 중에 있는 중생은 삼승법에 정진하여 각각 해탈을 얻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정진을 구족하면 오래지 않아 속히 아유삼불을 얻을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선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중생이 5개(蓋)의 일, 즉 첫째 음욕과 질투[婬嫉], 둘째 성냄[瞋恚], 셋째 수면[睡臥], 넷재 조롱[調戲], 다섯째 의심[疑網]을 행하여 4선(禪)을 여의고 4공정(空定)을 여읜 것을 본다면 대원의 뜻을 일으키되, ‘내가 항상 마땅히 선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 중에 있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어지러운 뜻이 없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선을 구족하면 오래지 않아 속히 아유삼불을 얻을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약 중생이 악을 범했거나, 속인이나 수도자나 정견을 여읜 자, 도가 없는 일을 행한 자, 응보가 없다고 말하는 자, 문득 단멸을 말하는 자, 중생이 있다고 말하는 자를 보면, 대원을 일으키어 말하되, ‘내가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 중에는 이러한 무리의 사견의 일들을 없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접근할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약 중생이 3제(際), 즉 첫째 직견제(直見際), 둘째 사견제(邪見際), 셋째 또한 사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정견(正見)에 있는 것도 아닌 제(際)에 있음을 본다면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 중의 사람에게는 사견을 보지 않게 하며, 사견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약 지옥․아귀․축생․뼈가 없는 동물을 본다면 마땅히 대자비를 일으키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 중에는 3악도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대지나 산릉(山陵)․도랑․가시덤불․초목 등 청정하지 못한 더러운 것을 보면 넓은 원을 일으켜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는 모두 평평하여 손바닥과 같게 할 것이다. 나의 국토의 사람에게는 모든 더러운 것을 보지 않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약 대지에 금의 보배가 있지 아니하고 다만 순 흙으로 되었음을 보면 뜻을 발원하여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토지를 하제(下際) 이상은 순 황금으로 땅이 되게 할 것이다’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약 중생이 애착하는 것을 보면 원을 일으켜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내 국토에 있는 사람에게는 애착하는 것이 없게 하리라’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약 4성(姓)의 찰리(刹利)와 범지(梵志)․전가(田家)․공사(工師)․장리(長吏)․장수(將帥)를 보면 뜻을 일으키어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는 4성이 없고 순수하게 하나의 성만 있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약 중생에게 상․중․하가 있음을 보면 다시 원을 일으켜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내 국토의 일체 중생에게 상․중․하가 있는 우열을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중생에게 갖가지 색(色)이 있음을 보면 뜻을 일으켜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내 국토의 사람에게는 약간의 색도 없게 할 것이다. 모두 다 단정하여 제일의 색을 얻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나라의 주인을 보면 뜻을 발원하여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는 왕자의 이름이 없게 할 것이다. 다만 여래․무소착․등정각으로 법왕을 삼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5취(趣)의 행을 보면 뜻을 발원하여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5취의 행이 없게 할 것이며, 평등하게 37품으로써 행을 하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4가지 생(生), 즉 난생(卵生)․습생(濕生)․태생(胎生)․화생(化生)을 보면 뜻을 발원하여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는 3생(生) 등이 없고 하나의 화생(化生)만 있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중생이 5통(通)이 없으며 광명이 없음을 보면 다시 발원하여 말하되,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서는 모두 5통을 얻게 하며 모두 광명이 있게 하여 멀리까지 비치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중생에게 대소변[大小便利]이 있음을 보면 뜻을 발원하여 말하되,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나라 사람에게는 천신(天身)과 같게 하여 다시 대소변에 대한 근심이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대원을 일으켜 말하되,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는 하루․한 달․일 년․십 년이라는 이런 숫자[數]를 모두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중생이 단명한 것을 보면 대원을 일으켜 말하되,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의 사람에게는 수명을 지극히 길게 하여 한정된 수가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곧 6바라밀을 구족하면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룰 것이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중생에게 상(相)이 없음을 본다면 대원을 일으켜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6바라밀을 행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 있는 사람에게 널리 32가지 대인(大人)의 상을 구족하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만약 중생에게 선의 근본이 없음을 보면 ‘내가 아유삼불을 이룰 때에 나의 국토에 있는 사람에게 선의 근본을 구족하게 할 것이며, 여래․무소착․등정각과 같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는 6도(度)를 구족하여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리라. 나의 국토에는 3구(垢:貪․瞋․癡)와 4병(病) 작병(作病)․임명(任病)․지병(止病)․멸병(滅病)을 말한다.
을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말하되,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속히 이루리라. 그리하여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국토에는 2도(道) 무애도(無礙道)․해탈도(解脫道)를 말한다. 신역(新譯)에서는 무간도(無間道)․해탈도라고도 한다.
의 이름이 없게 할 것이며, 널리 평등하게 살운연에 이르게 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아유삼불을 이루리라. 그리하여 나의 국토에서는 항한(項佷)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땅히 ‘나는 아직 아유삼불을 이루지 못했으니, 먼저 마땅히 나의 수명 광명과 비구승의 수를 알아야 한다. 그런 후에 아유삼불을 이룰 것이다. 나의 연수(年壽)와 겁 수, 비구 수의 일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내가 부처가 될 때에 나의 일국(一國)은 크기가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불국토가 되게 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족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 마땅히 이렇게 원(願)을 세워야 한다.
‘생사의 도(道)는 길고, 중생도 매우 많다. 허공이 가없으니 중생의 성품도 변제(邊際)가 없으며, 이 중에는 또한 생(生)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열반도 없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6바라밀을 구족하여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60. 항가조품(恒加調品)
이때에 좌중에 한 여인이 있었으니, 이름이 항가조(恒加調)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단정히 하고 부처님께 예를 올려 장궤(長跪)하고 합장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마땅히 6바라밀을 봉행하여 불국을 섭취(攝取)할 것입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의 일과 같습니다.”
이 여인이 부처님을 찬탄하여 마치고, 금은화(金銀花)와 수륙화(水陸花)와 몸에 지녔던 영락과 금색의 관을 부처님께 뿌리니, 머리 위에서 네 개의 보배 기둥으로 교차되면서 노대(露臺)로 화하여 이루어졌다. 그 장엄한 일은 청정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이 여인이 아뢰었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에게 베풀 것이며 함께 모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겠습니다.”
이때에 세존께서 이 여인의 뜻을 아시고 문득 미소를 지으시니, 모든 부처님의 법과 같이 약간의 광명 색(色)이 입 안에서 나와 두루 시방의 한량없는 불찰을 비추고 몸을 세 번 돌고 나서 정수리로 다시 들어갔다.
이때에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단정히 하고 장궤(長跪)하고 합장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무슨 인연으로 미소 지으십니까? 원하옵건대 미소 지으신 뜻을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가조 제자가 미래의 세상에 마땅히 성불하리니, 명호는 금화(金華) 여래․무소착․등정각이라 할 것이다. 여인의 몸을 끝내고 남자의 형상을 받을 것이며, 후에는 마땅히 묘락불국(妙樂佛國)에 태어나 그 나라에서 범행(梵行)을 닦을 것이다. 이 보살마하살은 태어나는 나라마다 항상 금화라는 명호를 얻을 것이며, 찰토(刹土)에서 그 수명을 다하고 널리 모든 나라에 유력(遊歷)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불국에서 하나의 불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아난아,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하나를 관(觀)함에서 하나를 관함에 이르며, 나면서부터 필경에 이르도록 발이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금화보살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아유삼불을 이루기까지 일찍이 부처를 보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이때에 아난이 속으로 생각하되, ‘이 금화보살이 후에 성불할 때 모든 회상의 보살은 이 부처님 회상이 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의 생각을 아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마땅히 알지어다. 저 때의 보살 회상은 이 부처님 회상이다. 저 비구승은 대단히 많아 헤아릴 수 없으니, 천수․만수․억수도 아니고 한량이 없다. 아난아, 이 금화보살이 여래․무소착․등정각을 이룰 때에 그 국토에 있는 일체 악과 선하지 못한 모든 일은 다 없어질 것이다. 앞에서 설한 반야바라밀과 같아서 국토를 청정히 하고 묘하게 하는 것이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제자는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 이 공덕의 근본을 심어서 온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제자는 이에 제화갈라(提惒竭羅) 여래․무소착․등정각에게서 처음 도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다시 금화(金花)를 제화갈라 부처님께 뿌리고 저 부처님께 뿌릴 때에 뜻도 또한 발원하여 말하되, ‘이 공덕을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섯 가지 꽃을 제화갈라(提惒竭羅)부처님 위에 뿌려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자, 그때에 저 부처님께서 나의 공덕이 구족함을 아시고 곧 나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를 주셨듯이, 이 금화보살은 이때에 나의 수기 받는 것을 보고 곧 발원하여 말하되 ‘나도 또한 마땅히 수기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보살이 수기를 받은 것이다. 아난아, 이 금화보살은 이에 제화갈라 처소에서 처음 뜻을 발원하였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여인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렇다. 이 제자는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였다.”
방광반야경 제14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61. 문상행원품(問相行願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떻게 공(空)삼매와 무상(無相)삼매․무원(無願)삼매를 행해야 하며, 마땅히 어떻게 들어가며,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어떻게 37품을 행하며, 마땅히 어떻게 염(念)해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5음(陰)이 공함을 관해야 한다. 나아가 욕계․색계․무색계에 이르기까지 공함을 관해야 한다. 마땅히 이 관의 뜻을 지어 모든 법에는 볼 바가 없음에 어지럽지 않아야 한다. 무소견(無所見)에 나아가 모든 법에서 증득하는 것도 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한 법을 잘 배웠기 때문이다. 증득했어도 또한 단절해서는 안 된다. 모든 법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의 증득할 바에서 증득도 보지 않고 또한 이 법을 보지 않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보살이 공한 법에서 증득을 취할 것이 아니며, 무엇이 공에 머물러 다시 증득을 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공이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것임을 관하고서도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마땅히 증득을 받았다 해도 또한 증득한 것이 아니다.’ 보살의 법은 응하는 바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다. 증득함으로써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행으로써 기약해야 한다. 보살은 또한 뜻을 정(定)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느 곳에 뜻을 매어서는 안 된다. 37품에서 조금도 줄어드는 것이 아니며, 또한 누진(漏盡)을 증득함을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깊고 묘한 법을 구족했으며 이미 37품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했음을 알아서 말한다면 이것을 행할 때에는 증득한 때가 아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 관을 지어야 한다. 이제 바로 5바라밀을 행할 때라고 말하면, 증득한 때가 아니다. 이제 바로 37품을 행할 때라고 하면 증득한 때가 아니다. 이제 바로 삼삼매를 행할 때라고 하면 10종력(種力)․4등(等)․대자대비를 행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살운야(薩云若)를 행한 때라고 하면 수다원․나한․벽지불도를 증득한 때가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3삼매의 인(因)으로써 공․무상․무원 삼매를 행하고, 37품의 인으로써 근(根)․역(力)․각의법(覺意法)을 행했어도 또한 취하여 증득한 것이 아니다. 37품을 인으로 하여 행을 지은 것이지, 성문 증득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저 선비가 단정하고 용건(勇健)하며, 병법(兵法)에 용맹하고 견고하게 갑옷과 장창을 가지고 있어 모두 구족하며 육십사를 알아서 모든 방술[術]에 밝다면 많은 사람이 경애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보는 대중이 존경하고 모시기를 배로 하고 다시 기뻐할 것이다. 만약 다른 일이 있어 마땅히 어느 곳에 이르게 되었다면 길을 지나는데 위급한 난과 위험한 곳이 많으며, 원한 가진 자도 있을 것이다. 저 원한을 가진 자도 또한 다시 용맹하여 군종(群從)을 거느리니 부모와 어른 어린이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때 용맹한 자가 부모를 안온하게 하고 모든 군종에게 위로하여 말하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방술이 있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마땅히 이 모든 위급한 난을 벗어나게 하였다. 이미 이 난을 벗어나게 하고 원수인 적에게 항복받아서 해를 당함이 없어 부모와 군종을 안온한 데 이르게 하였다면 환희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남자가 용건하고 용맹했으며, 모든 방술을 구족하고 있되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4등(等)의 뜻인 자(慈)․비(悲)․희(喜)․호(護)로써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6도(度)를 구족한다. 누진(漏盡)을 얻지 못했으나, 살운야의 대경로(大徑路)를 열어서 공․무상․무원에 머문다. 또한 공․무상․무원을 행하지 않고 증득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구족하여 나한․벽지불지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비유하면 뭇 새들이 공중을 나는데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또한 허공에도 머물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공과 무상과 무원 삼매를 행했으나 취하여 증득한 것이 아니다. 나한․벽지불지를 제도하여 모두 마땅히 부처님의 10종력․4무소외(無所畏) 및 18법과 살운연혜(薩云然慧)를 구족하였으나 마침내 취하여 증득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한 선비가 씩씩하고 용감하며 많은 힘이 있었다. 화살을 잘 쏘는 기술이 있어 허공을 바라보고 쏜 후에 조금 있다가 뒤의 화살을 앞의 화살에 쏘니 화살마다 서로 기둥이 되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떨어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곧 뒤의 화살을 쏘지 않으니, 곧 땅에 떨어졌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를 지녀야 한다. 모든 공덕을 심어 일체의 온갖 선의 근본을 구족하되, 한 가지 일이라도 구족하지 못하면 중도에서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루어야 공덕을 구족하여 이와 같이 진제(眞際)에서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상에서 말한 모든 법을 구족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고(苦)가 심하고 어려움이 많은 것을 배운다면 이것을 배우는 자는 진제를 배우는 것입니까, 여여한 것을 배우는 것입니까, 법성을 배우는 것입니까, 본래 공함을 배우는 것입니까, 스스로 공한 것을 배우는 것입니까, 삼해탈을 배우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은 중도에서 싫어함이 있지 않은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크고도 매우 기이하며 특이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보살은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으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만약 중생을 버리지 않으려는 뜻이 있으면 마땅히 단서(端緖)가 없는 법에서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3해탈문을 출생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구화구사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은 반드시 살운야혜(薩云若慧)를 이루려 하지, 끝내 중도에서 전제를 취하여 증득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법처가 깊은 것을 관조하여 알아야 하는데, 내공과 외공 및 유무공․37품․3해탈문이다. 마땅히 이 생각을 하되, 일체 중생은 긴 밤 내내 항상 아상(我想)과 인상(人想)이 있으며, 수명상(壽命想)이 있으며 견지상(見知想)이 있어 생각하고 행하는 것 모두 이 생각을 의지한다. 이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널리 중생이 이런 생각이 있음을 보고 중생을 위하여 이 생각을 없애게 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도록 법을 설하며, 공․무상․무원 삼매를 행한다. 비록 이 행을 지으나 끝내 중도에서 나한․벽지불은 증득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 보살에게 원이 있기 때문이며,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도에서 증득을 취하지 않으며, 4선(禪)을 잃지 않고 4등(等)과 4공정(空定)을 잃지 않으며, 37품의 법과 3탈문(脫門)․4무소외․4무애혜를 잃지 않으며, 10력 및 18법을 잃지 않는다. 곧 모든 소유의 법을 구족하여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잃지 않는다. 모든 보살은 구화구사라를 호지한 자로 공덕을 구족하고 선법이 갈수록 늘어난다. 모든 근(根)이 통리(通利)하여 나한․벽지불의 근보다 뛰어나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항상 중생이 4전도(顚倒), 즉 상(常)이 있다는 생각, 정(淨)이 있다는 생각, 낙(樂)이 있다는 생각, 아(我)가 있다는 생각을 하므로 ‘마땅히 이 무리를 위하여 나는 응당 도를 행하여 아유삼불을 이룰 때에 무상(無常)․부정(不淨)․무락(無樂)․무아(無我)를 설하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뜻으로 행하여 구족하면 이것이 구화구사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모두 마땅히 10력과 4무소외․대비․4등․37품․무원삼매를 구족할 것이다. 그런 후에 마땅히 불(佛)의 삼매에 앉아서 진제를 취하여 증득할 것이다. 보살은 이런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한다.
‘일체 중생은 항상 집착하여 의지한다. 나의 아(我)에 집착하며 수명에 집착하며 5음(陰)에 집착하며, 6쇠(衰)에 집착하며, 18법에 집착하며, 4선(禪)에 집착하며, 4공정에 집착하며, 4등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내가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룰 때 마땅히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집착에 의지하는 병을 없게 하리라.’
이러한 뜻을 가지고 행하면 이것이 구화구사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10력과 4무소외․4무애혜․무원삼매를 구족하지 못했으면, 마침내 중도에서 취하여 증득한 것이 아니다. 모든 원을 구족하고서야 증득을 취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속으로 다시 생각하여 말하되, ‘중생은 긴 밤 내내 항상 생각에 집착해서 행한다. 혹은 남녀나 유색·무색 상(想)을 생각한다. 나는 마땅히 부지런히 행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때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각하고 집착하는 병[想着病]을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구족하면 구화구사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10력을 구족하지 못했으며, 4무소외․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하지 못했으면 마침내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모든 공덕을 이루어서 무상(無相)삼매를 구족해야 증득을 취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려면 내공․외공 및 유무공․37품․18법을 구족하게 행해야 하며, 삼계와 함께 행해서는 안 된다. 수보리여, 보살은 37품을 행하며, 37품을 행하고 나면 마땅히 ‘보살이 어떻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으려 하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공을 증득으로 여기지 않으며, 진제를 깨달음으로써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도를 얻지 않으며, 또한 무상· 무원을 증득하지 않으며, 또한 멸을 증득하지 않는다. 지을 바를 증득하지 않으며, 또한 생하는 것을 증득하지 않으며, 또한 무소유를 증득하지 아니한다. 그러면서 반야바라밀을 염해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이 모든 보살에게 물어 만약 공을 설함을 들으면, 마땅히 공을 생각해야 하며, 만약 무상과 무원을 들으면 마땅히 무상과 무원을 생각해야 하며, 만약 지을 바가 없음을 들으면 마땅히 지을 것이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생할 것이 없는 것과 무소유를 들으면, 마땅히 생할 것도 없고, 소유할 것도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마땅히 공과 37품을 행하여야 한다. 무상을 행하지 않고 무원을 행하지 않으며, 지을 바 없는 것을 행하지 않으며, 또한 생할 바 없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수보리여, 이 보살은 수기를 받지 못할 것이며,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지 못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유월치 보살은 또한 이 생각을 짓지 않고, 또한 이 행을 짓지 않으며, 또한 이 설(說)을 짓지 않고, 또한 이 상(想)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아유월치의 보살의 일을 행하고, 다만 이 일을 생각하고 행하며, 다만 이 일을 설하며 생각해야 한다.
수보리여, 이 보살은 이미 모든 지(地)를 지나왔으므로 아유월치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유월치지를 경과했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은 아유월치를 얻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을 듣되 만약 지은 것과 행한 일을 듣지 않은 것과 같이 하면 아유월치 보살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도를 행하나 아유월치를 행하는 자는 적습니다. 왜냐하면 아유월치혜지(阿惟越致慧地) 수기를 받은 보살은 적기 때문입니다. 아유월치 보살의 수기를 받은 자는 이미 위의 모든 생각 집착과 구족하지 않은 일을 멀리 여의었습니다.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이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
62. 아유월치상품(阿惟越致相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꿈속에서도 나한․벽지불지를 가까이하지 아니하며, 또한 삼계를 가까이하지 아니하며, 또한 삼계를 무너뜨리지 아니하며, 또한 모든 법 보는 뜻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꿈과 같고 메아리 같고, 환(幻)과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화(化)와 같음을 보므로 증득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 보살마하살이 아유월치의 상(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꿈속에서 부처님을 보는데 약간 백천의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네 무리의 대중에 둘러싸여 법을 설하신다.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들으면 곧 그 속의 뜻을 안다. 하는 것이 항상 법을 여의지 아니하며, 설한 것이 법칙을 잃지 아니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꿈속에 부처님을 보는데 여래께서 허공에 뜨니, 몸에 32상과 80종호가 있으며, 신통으로 변화하고 비구승을 위하여 설법하고 변화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불토에 나아가서 보시를 하고 불사를 했다. 수보리여,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꿈속에서 만약 군현에 병사가 일어나 죽이며, 만약 화재를 보며, 만약 호랑이․이리․사자․독충과 모든 두려워하는 일과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함을 보며, 만약 기아(飢餓)를 보며, 만약 부모․형제․친한 벗․선지식을 잃음을 본다면, 꿈속에서 보기를 마치고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도 않는다. 꿈을 깨고 나서 문득 생각하여 말하기를, ‘삼계에 있는 것이 모두 꿈과 같은 것이다. 나는 마땅히 정진을 하여 아유삼불을 이룰 것이며, 마땅히 삼계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할 것이다’라고 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의 모든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룸을 알겠느냐? 수보리여, 보살이 만약 지옥과 아귀와 금수(禽獸)의 3악취(惡趣) 중에서 모든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마땅히 발원하기를, ‘나는 마땅히 아유삼불을 이룰 때에 나의 국토 중에는 3악취가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꿈속에서의 것과 일체 모든 법이 한 법도 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꿈속에 지옥에서 불이 타고 끓으며, 굽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생각하며 말하기를 ‘내가 꿈에서 형상과 그 재변(災變)을 보았다’라고 한다. 만약 꿈에서 스스로 아유월치상을 보면 문득 이렇게 맹세하여 말한다.
‘내가 본 것 같은 지옥 중의 불은 곧 마땅히 멸하게 할 것이다.’
만약 불이 소멸되고 끓는 것이 차갑게 된다면 이 보살은 수기를 받았으므로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이다. 만약 불이 타서 한 집에서 한 집에 이르고 한 마을[里]에서 한 마을에 이르고,. 혹은 한 집은 태우고 한 집은 태우지 않기도 하며, 혹은 한 마을은 태우고, 한 마을은 태우지 않기도 한다면, 그 중에서 불에 타게 된 것은 불에 탄 집의 사람들에 의해 법이 끊어진 결과로 모두가 법을 끊은 나머지 재앙임을 알아야 한다. 이로부터 법을 끊은 나머지 재앙이 다 끝나면 죄가 멸하고 복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나는 마땅히 아유월치의 상과 행하는 모양을 설하겠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귀신에게 잡혔다면, 이 보살이 문득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 여래․무소착․등정각이 살펴서 수기를 내게 준 것은 지은 바 원과 행이 청정하며 더러움이 없었기 때문이니, 응당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아야 하며, 또한 나한․벽지불의 생각도 없어야 하니, 마땅히 아유삼불을 이룰 것이며, 또한 이룬 것도 아니며 이루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가령 모든 시방의 현재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깨닫지 아니한 것이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응당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을 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귀신은 마땅히 물러갈 것이다. 만약 이 귀신이 가지 않으면 이 보살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그 기별(記莂)을 받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이 보살이 경을 설해 마치자 귀신이 곧 가게 되면 이 보살은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의 기별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이러한 상과 행을 구족하면 이것이 아유월치의 상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는데 구화구사라를 여의며, 37품과 3해탈문을 행하지 못하며, 보살위(菩薩位)에 이르지 못하며, 보살의 삼매처를 얻지 못하며, 또한 과거에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기별을 받지 못하면 이 보살이 이 남자와 여인에게 가서 다시 말을 하되, ‘나는 기별을 받아서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위한 자이다’라고 하면 이 귀신은 마땅히 갈 것이다. 귀신이 가지 않으면 이 보살은 경법을 설하는 것을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이때에 마왕 파순이 그곳에 가서 생각하며 말하되, ‘나는 마땅히 귀신을 가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순의 위신(威神)이 이 귀신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때에 저 파순이 문득 귀신을 물러가게 한다면 이 보살은 파순이 귀신을 물러가게 한 줄은 알지 못하고, 귀신이 자신 때문에 물러갔다고 기뻐하면서 말하고, 곧 스스로 아만만 높아져 다른 사람을 경멸한다. 타인에게 말하되, ‘나는 이미 과거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기별을 받은 것이다.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기별을 받지 못한 것이다’ 하고 공고(貢高)함으로써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까닭에 살운연(薩云然)을 여의는 것이니, 여래․무소착․등정각의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다. 이 공고함 때문에 구화구사라를 잃은 것이다. 문득 2지(地)의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져서 지극한 정성으로 서원을 세웠으므로 곧 마군의 일을 일으킨 것이다. 멀리 진정한 선지식을 여의고 마군의 그물망에 떨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6바라밀을 행하지 아니했으며, 구화구사라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 보살은 스스로 마군의 일을 지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지 못하고,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했으며, 보살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마군의 일 때문이니 파순이 다시 보살 처소에 와서 다른 의복을 입고 보살에게 말하되, ‘선남자야, 여래께서 이미 그대에게 수기를 주셨으니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대의 부모의 이름은 아무개이며, 그대의 형과 동생과 누이와 여동생의 이름은 아무개이며, 그대의 친구와 선지식과 친족의 이름은 아무개이다. 그대의 7세(世) 부모의 명자는 아무개이며, 그대는 어떤 나라ㆍ어떤 현(縣)ㆍ어떤 촌락에서 태어났다. 보살의 행동이 화순(和順)한 것을 보니, 그대는 전생에 또한 유연(柔軟)하였다’고 한다. 만약 재치와 명랑함이 있음을 보거나, 만약 사문의 12법(法)을 행함을 보고, 만약 말을 절도 있게 하는 것을 보면 파순이 모양을 따라서 보살에게 말하되, ‘그대는 전생에 모두 이런 행이 있었다. 그대는 전생에 또한 이 12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저 보살은 마군이 선세(先世)의 일을 말함을 듣고, 다시 스스로 이 행을 지어서 다시 공고(貢高)함이 배로 높아져 동학(同學)을 업신여긴다. 마군이 거듭 말을 하되, ‘과거에 여래께서 이미 그대에게 수기를 주셨다. 그대가 지은 공덕은 다시 전환하지 않는다’고 한다. 파순은 혹은 비구의 형상을 하고, 혹은 부모, 혹은 가라월(迦羅越[:거사)의 형상을 하고 와서 말을 하되, ‘그대는 반드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모든 아유월치의 상과 행이 구족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유월치의 상과 행을 설하였으나, 저 보살이 이러한 상을 얻은 것이 아니라면 이 보살은 마군의 부리는 바가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명예를 들으면 스스로 공고해져서 동학(同學)의 형상을 업신여기며, 타인을 비웃으면서 다시 기억에 두지 않을 것이니, 공고함 때문이다. 이것은 마군의 일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마군의 인연에서 마땅히 마군의 일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군의 일이 여여함을 알지 못하고, 5음이 여여함을 알지 못하여, 저 보살은 마군의 일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전에 비구가 그 기별을 설함을 듣고, 이제 다시 기별하는 명자(名字)를 듣고는 속으로 환희하여 스스로 문득 생각하여 말하되, ‘이 상을 증득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결정코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이다’고 한다. 그리고는 더욱 공고해져 타인을 업신여겨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이 보살은 아유월치의 상이 없는 것이다. 곧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멀리 여의어서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지혜를 잃은 것이며, 참선지식을 멀리 여의고 악한 선지식을 얻은 것이다. 이 보살은 마침내 2도지(道地)를 성취하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먼 후에 다시 모든 생사의 고통을 받는다면 지극히 오래도록 받을 것이다. 이에 마땅히 다시 참선지식을 얻으며 반야바라밀을 듣게 된다면 이와 같이 본래 명자를 받는 데 집착한 것을 후회한다. 이렇게 후회함으로써 이에 나한․벽지불을 얻은 것이다. 비유하건대, 비구가 네 가지 금하는 일을 범하고 현세에 4도(道)를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저 보살은 그 죄가 네 가지 금한 일보다 무겁다. 명자를 받고 공고함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 죄의 일은 그만두고, 이런 공고함을 범하고 명자를 받고, 거짓 호칭을 받은 그 죄는 5역죄(逆罪)보다도 허물이 크다. 수보리여, 만약 명자가 있어 생각에 집착함을 받는 자는 위급할 때 마땅히 마군의 보호를 받아 조그마한 인연을 깨닫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파순이 다시 보살의 처소에 가서 멀리 여읜 것을 찬탄하고 그 공덕을 말하되, ‘그대가 행하는 바는 부처님이 칭찬한 바이니 바르고 마땅함이 이와 같다’라고 한다. 수보리여, 내가 설한 것은 보살이 멀리 여읜 그러한 법이 아니다. 만약 산 속 나무 아래 사람이 없는 곳에서 고요하게 있다고 해서 반드시 멀리 여읜 법은 아닌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다르게 멀리 여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성문․벽지불이라는 생각에서 고요하게 멀리 여의는 것이며, 산 속 나무 아래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에서 고요하게 멀리 여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이 크게 멀리 여의는 법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마땅히 밤낮으로 행해야 한다. 이것이 보살이 고요하게 멀리 여의는 것이다. 만약 인간 사이에 있으면서 나의 고요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비록 성(城) 곁에 있어도 산택(山澤)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만약 마군의 가르침을 받아서 곧 멀리 여의기를 그쳐 버린다면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져서 반야바라밀에 응하지 못하며, 살운연의 일을 구족하지 못한다. 이 생각을 행하는 자는 청정한 법이 아니며 나한․벽지불의 뜻이 섞인다. 다시 반대의 형상으로 인간에서 청정한 행을 하는 자를 비웃고 업신여긴다. 인간에서 행하는 자는 또한 나한․벽지불의 뜻에 섞이지는 아니하나 반대로 다시 업신여긴다. 또한 다시 선유무삼매(禪惟無三昧)를 얻은 자를 업신여기며, 신통을 얻은 자를 업신여긴다. 보살이 구화구사라가 없다면 한없는 백 유순 밖에 있어 억천만 년 동안 기는 짐승과 나는 새가 이르지 못하며, 귀신과 도적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서 비록 오래 있더라도 보살의 멀리 여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이익될 것이 없다. 파순의 가르침을 받아서 멀리 여의는 것을 행하는 자는 나의 멀리 여의는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멀리 여의는 법을 구족하지 못한다. 또한 다시 멀리 여의는 법 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멀리 여읜 법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이 멀리 여의는 법에서 멀어지면, 그때에 마왕 파순이 허공에서 찬탄하여 말하되,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야, 이것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멀리 여의는 법이다. 네가 멀리 여의는 법을 행하였으므로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면 보살은 저 망령되이 멀리 여의는 것을 찬탄하는 말을 듣고서 곧 환희하여 잘난 체하고 참으로 멀리 여읜 자를 업신여긴다. 반대로 비방하는 말을 하니 습관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깨끗하지 못한 것이며, 혼란한 것이며, 뜻이 어지러운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것을 반대로 청정이라 말한다. 응당 공경해야 할 자는 더욱 공경하지 아니하고 공경하게 대응해야 할 자를 다시 업신여긴다. 무슨 뜻인가? 나는 모든 천(天)과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 보고 권하고 도와주고 공경하기 때문이다. 내가 행하는 것은 참으로 행하는 것이다. 네가 성벽 곁에 살고 있을 때에 누군가 와서 너를 공경하고 찬탄할 것이다. 이 사람은 성 곁에 살고 있으며 보살도를 구하는 선남자․선여인에게 가서 기세 높게 말하되, ‘모든 천(天)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득도할 일이 가깝다고 하였다’ 한다.
수보리여, 기세 높은 보살 무리는 전타라(栴陀羅)[전타라는 진(晋)나라 말로 살인을 주로 하는 옥졸이라고 한다]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무리의 사람이 보살 중에 있으면 아주 큰 혼란한 병이 된다. 이것은 법상(法像)을 의지한 보살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천상과 사람 중에 큰 도적이다. 또한 다시 스님의 상(像)과 법 중에도 큰 도적이 되는 것이며, 다시 선남자․선여인 중에 큰 도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무리의 사람은 마땅히 함께 종사할 수 없으며, 또한 마땅히 앉고, 일어서고, 말을 하며 음식을 같이 먹고, 상견(相見)하지 말아야 한다. 이 무리의 사람은 기세가 높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보살이 살운연을 버리려고 하지 않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버리려고 하지 않고, 힘 있게 아유삼불을 구하고자 하며 일체 중생을 구원하려 한다면 마땅히 이런 무리의 사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마땅히 같이 종사하지 말고,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 같이 왕래하지도 말고 항상 마땅히 싫어하는 뜻이 있어야 한다. 세간에서 마땅히 삼계의 낙을 받지 않아야 한다. 항상 마땅히 자애(慈愛)한 마음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해야 한다. 마땅히 전도된 생각이 있는 이런 무리에게 대비의 뜻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되, ‘나로 하여금 세세생생에 이런 비법(非法)의 일이 없게 하소서’라고 해야 한다. 만약 이 뜻이 있으면 속히 멸해야 한다. 수보리여, 이 무리의 보살은 스스로 신통을 일으킴을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이 지성으로 일에 힘써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참선지식과 같이 종사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이 참선지식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세존이 이 보살의 참선지식이며, 모든 보살마하살이 또한 이 보살의 참선지식이다. 모든 제자와 대중이 또한 참선지식이다. 이것이 보살의 참선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참선지식은 항상 보살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해설하며 그 일을 분별한다. 6바라밀과 37품․부처님의 18법․진제 법성과 같은 것이 보살의 참선지식이다. 6바라밀은 세다라(世多羅)이고, 6바라밀은 도(道)이며, 6바라밀은 대명(大明)이고, 6바라밀은 큰 횃불이다. 6바라밀은 큰 지혜의 광명이고, 6바라밀은 보호하는 것이며, 6바라밀은 돌아가는 것이고, 6바라밀은 아버지이며, 어머니이다. 6바라밀은 37품이며, 6바라밀은 살운연이다. 6바라밀은 사람의 모든 습관을 제거한다. 무슨 뜻인가? 수보리여, 37품은 과거․미래․현재 시방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며,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모두 37품 중에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여,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면,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 마땅히 4사(事)로써 이익을 주어 중생을 섭수해야 하니, 첫째는 보시[施]요, 둘째는 애어[愛]요, 셋째는 이익[利]이요, 넷째는 동사[同]의 뜻이다. 이 4은(恩)의 일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나는 이 뜻을 관하므로 이 일을 설하는 것이다. 37품, 즉 이것은 보살마하살의 부모이며, 곧 집[舍]이다. 이것은 보호이며, 이것은 등불의 밝음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타인의 가르침을 따라 머물면 안 된다.
일체 중생의 여우처럼 의심하는 것을 끊고자 하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보살의 행을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보살은 응하는 것을 마땅히 배워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의 상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허공과 같은 상이다. 또한 상도 아니며, 또한 상을 짓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진정으로 인연이 있어 반야바라밀의 상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상(相)으로 모든 법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의 상을 알고자 하면 모든 법의 상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공적(空寂)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의 상은 곧 모든 법의 상이니, 공적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고요하고 모든 법이 공하다면 어떻게 모든 법에 집착도 있고 끊음도 있음을 알겠습니까?”
“공이 고요한 것은 또한 끊는 것도 아니며, 또한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공적(空寂)에는 법이 없으며, 공적에는 또한 아유삼불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저희가 어떻게 마땅히 이 뜻을 알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은 긴 밤 내내 나에 집착해서 행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은 긴 밤 내내 나에 집착해서 행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나[吾]라는 아(我)가 공적함을 알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중생이 나라는 아(我) 때문에 오래도록 생사에 있는 것을 아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이 나라는 아(我)에 집착하므로 오래도록 세간에서 다시 고통을 받는 것이며, 곧 집착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나도 없으며 아도 없으며, 받을 것도 없다. 또한 오래 세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오래도록 부지런히 고를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집착도 아니며, 문득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5음에서 행하지 않으며, 또한 37품에서 행하지 않으며, 또한 4무애혜에서 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할 법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법을 마땅히 행할 것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복종시킬 자가 없으며, 아라한과 벽지불도 미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머물 곳에 이르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살운연을 행하는 보살이 머무는 곳은 능히 이를 자가 없는 것이며, 보살이 이와 같이 하면 속히 살운연에 접근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뜻에는 어떠하냐? 염부제 중생이 모두 인도(人道)를 얻었으며 다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위하였는데,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수명이 다하도록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이 공양한 복을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위하여 보시했다면 이 선남자․선여인의 그 복은 참으로 많은 것이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가지고 사람을 가르쳐서 구족하게 그 중의 지혜를 해설해 주어 뜻이 살운연의 생각을 멀리 여의지 않고 응하게 함만 못하다. 나아가 삼천대천국토의 중생이 모두 사람이 되었는데,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모두 가르쳐서 10선지(善地)를 행하게 하고, 4선과 4등 및 4공정을 세우며, 또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아뇩다라삼야삼보를 세우며, 이 공덕을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위해서 베푼다면 이 선남자․선여인의 공덕은 참으로 많으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가지고 타인에게 선시(宣示)하여 구족하게 그 중의 지혜를 해설해 주어 뜻이 살운연의 생각을 멀리 여의지 않게 하여 현성(賢聖)의 모습으로 출생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래․무소착․등정각을 제외하고 오직 응당 이 보살마하살만이 있기 때문이며,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데 대자비를 행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중생이 사지(死地)에 나아감을 보면 곧 대비를 일으켜야 한다. 이를 행함으로써 곧 크게 보호함을 얻지만 곧 크게 기뻐하며 4등(等)을 구족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의 큰 지혜의 광명이 된다. 큰 지혜의 밝음이라는 것은 6바라밀의 이 광명이다. 이 선남자․선여인이 비록 도는 얻지 못했으나, 일체 중생을 위하여 구원했으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므로 의복․음식․침대․의약과 일체의 진보(珍寶)를 공양받는다. 반드시 중생이 믿고 보시하는 복에 보답하면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리석고 망령되게 사람의 보시를 받지 않고자 하며, 중생이 가는 지름길을 제시해 주고자 하며, 소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며, 감옥에 있는 사람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일체 중생의 눈이 되고자 하면, 몸으로 행하는 것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에 응해야 하며, 어떤 말을 해도 또한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뜻에 응해야 한다. 반야바라밀에 응하게 되면 그 밖의 다른 뜻은 또한 그 편의를 얻을 수 없다. 마땅히 방편을 지어서 주야로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며 단절이 없게 해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선비가 마니보(摩尼寶)를 얻었는데, 그것을 얻은 후 뛸 듯이 기뻐하다가 다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보배를 잃고는 크게 슬퍼하여 이 마니보 생각을 앉으나 서나 잊지 못하고 잠깐도 여의지 못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되, ‘내가 어떻게 이 큰 보배를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살운연의 생각을 여의는 것을 또한 저 사람이 큰 진보를 잃은 것과 같이 하여 앉으나 서나 잠깐 사이에도 잊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일체의 모든 생각이 정지하는 곳이 없는 것입니까? 모두 공하고 모두 고요한 것인데 어떻게 보살이 살운연이 생각을 여의지 않는 것입니까? 또한 여의는 것을 좇거나 생각을 좇지 않는 가운데 보살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살운연을 좇지 않는 가운데 보살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은 스스로 멀리 여읜다는 것을 안다면, 법성이 항상 머무르며, 도법과 진제가 상주한다. 부처님께서 지은 것도 아니며 또한 나한․벽지불이 지은 것도 아니다. 보살이 이것을 이미 알았다면 마침내 다시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공적하기 때문이다. 또한 더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감해지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반야바라밀이 스스로 공적하다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같이 아유삼불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또한 반야바라밀과 함께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증익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감해지는 것도 아니다. 진제도 또한 더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감해지는 것도 아니다. 법성은 또한 더하는 것도 아니며, 감해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또한 하나도 아니며, 또한 둘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이를 듣고 떨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으며,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이 보살은 이미 아유월치에 머문 것이며,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이 공한 것임을 생각하며, 반야바라밀이 무소유임을 생각하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을 행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공은 공을 행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5음이 반야바라밀을 행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6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을 행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나아가 4무애혜에 이르기까지 반야바라밀을 행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5음의 공이 여여한 것과 여법한 법의 법성과 4무애혜가 공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법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이 법이 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뜻에는 어떠하냐? 참으로 법에 반야바라밀을 행할 것이 있다고 보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반야바라밀이 보살이 행할 것이 있다고 보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너의 뜻에는 어떠하냐? 네가 보지 못하는 법을 얻을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수 없는 법에 생멸이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의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과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보살이 여래의 4무소외와 4무애혜를 쓰는 것을 배우고 계승하며 이 법을 익혀 행한다면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지혜와 살운연의 지혜와 마하연(摩訶衍)의 지혜를 여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무소종생법인을 얻으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어 마침내 조금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생하는 것이 없는 모든 법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를 받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생하는 법 중에서 모든 보살이 수기를 받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또한 생함이 없는 법에서 보살이 수기를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생할 것이 있는 법에서 보살이 수기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모든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를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법에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수기를 받을 것이 있음을 보았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또한 법에 수기를 줄 것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또한 마땅히 얻을 것이라는 것도 보지 못했으며, 또한 이미 얻었다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도 모든 법에서는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보살은 또한 아유삼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내가 마땅히 아유삼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모든 법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도 또한 분별할 것이 없는 것이다.”
63. 석제환인품(釋提桓因品)
이때에 석제환인(釋提桓因)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깨닫기 어렵고 요달하기 어려우며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 불가사의합니다. 본래 청정하므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쓰고 지녀 배우는 자는 이미 구족했으니 큰 공덕으로부터 올 것입니다. 생각에 집착한 뜻은 다시 생기지 않으며,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는 것도 또한 생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은 것이다. 구익(拘翼)아, 반야바라밀을 행함은 적은 공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구익아, 염부제에 가득 찬 중생이 모두 10선․4등(等)․4선(禪)․4공정(空定)을 행한다 해도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쓰고 외우며 받아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머물며,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며 그 밖의 다른 생각은 듣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 복은 백 배․천 배․억만 배나 되며, 비유로써 비할 수가 없다.”
이때 다른 비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구익아,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지켜 행하고 받들어 가지고 다시 타인을 가르쳐 전하여 준다면, 그 공덕은 저 염부제 중생이 지은 것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석제환인이 이 비구에게 말했다.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에서 뜻을 한 번 발한 것이 염부제에서 10선․4선․4등․5통(通)을 지은 것보다 위에 있어 뛰어난 것이다. 하물며 봉행하고 쓰고 외우며, 그 중의 가르침과 같이 한 자는 모두 모든 하늘과 아수륜(阿須倫)과 세간 사람보다 위에 있다. 이 보살은 홀로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에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보다도 위에 있다. 이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보살에 이르러 5바라밀을 행한다.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가 없는 자의 위에 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머물면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보다 위에 있게 되며,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이 모두 능히 미치지 못한다.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머무는 자는 살운연의 종지(種地)에 머무는 것이 끊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여래의 명호를 여의지 아니하고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침내 도량을 잃지 아니한다. 보살마하살이 행하는 것도 이와 같다. 중생이 장류(長流)에 침몰하면 건져내 주고자 한다.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보살의 배울 바를 배우는 것이다. 성문․벽지불의 배움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모든 사천왕이 마땅히 이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 말한다.
‘선남자․선여인이 부지런히 배우고 속히 배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이 도량에 앉을 때에 과거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으로 네 발우를 소지하면 이제 세간에서 마땅히 오래지 않아 받들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석제환인이 또한 다시 미래에 이 선남자․선여인을 권하고 도울 것이다. 수염(須焰) 천자가 장차 모든 염(焰) 천자를 거느리고 올 것이며, 도솔 천자가 모든 도솔 천자를 거느리고 올 것이며, 모든 니마라천(尼摩羅天)이 올 것이며, 바라니밀천(波羅尼蜜天)이 또한 모두 내려올 것이다. 나아가 수타회(首陀會)의 모든 하늘이 다 내려올 것이며,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의 처소에 이를 것이다. 시방 현재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 모두 항상 이 선남자․선여인을 생각할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함으로 모든 세간에 있는 위난(危難)과 심하게 고통 받는 일이 끝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가 현세에서 공덕을 받는 것이다. 일체 세간에 모두 네 가지 병이 있다. 한 가지 일에라도 움직이는 자는 몸 가운데의 모든 근(根)이 고통을 받지 않음이 없다. 이러한 고통을 받는 까닭에 뜻이 곧 번뇌를 받게 된다. 이 모든 병의 번뇌가 이 보살의 몸에는 다시 붙지 않는다.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했기 때문이니, 이것이 현세의 공덕의 보(報)이다.”
이때 아난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석제환인이 스스로 변재(辯才)를 가지고 불사를 설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석제환인이 아난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아난에게 말했다.
“내가 설한 것은 모두 불사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석제환인이 설한 것은 모두 불사의 인연이다. 만약 보살이 학습하여 반야바라밀을 염할 때에 삼천대천국토 중의 마군이 모두 여우같이 의심을 내기를, ‘지금 이 보살은 마땅히 진제를 지어 증득한 것인가? 성문․벽지불도를 취한 것인가?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루었는가?’라고 한다.
아난아,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았을 때에 마군이 다시 크게 근심하는 마음의 독을 내어서 이때에 마군은 다시 큰 바람을 일으킨다. 이 보살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여 어려움에서 게으름의 뜻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이다. 보살로 하여금 살운연의 생각 중에서 하나의 어지러운 뜻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마군이 모든 보살의 생각을 요란하게 합니까, 요란하지 못하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요란하게 하기도 하고 요란하지 않게 하기도 한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요란한 것은 누구이며, 요란하지 않은 것은 누구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근본에서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 생각 중에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면 파순이 곧 가서 요란하게 한다. 만약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함을 들을 때에 마음속으로 여우처럼 의심하여 말하되,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면 이 때문에 파순이 가서 요란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아난아, 만약 보살이 참선지식을 멀리 여의면 곧 반야바라밀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 못한다. 그 일을 알지 못하여 뜻에 곧 즐거워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파순이 다시 가서 요란하게 한다.
다시 아난아,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어서 반대로 비법(非法)을 가지면 이런 까닭에 마군이 그 편의(便宜)를 얻게 된다.
다시 아난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잃어서 다시 비법을 찬탄하면 곧 마군이 환희하여 생각하여 말하기를, ‘그에게 비법의 일을 설하리라. 마땅히 약간의 도반 무리가 있게 되었으니, 응당 나의 원을 채우리라’고 한다.
다시 그 밖의 사람을 물리치고 2지(地)의 나한․벽지불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다시 아난아,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설함을 들을 때에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깊어서 할 수 없다. 너무 깊다’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군이 곧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이미 이 자의 편의를 얻었구나’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만약 보살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잘난 체하며, ‘나는 능히 6바라밀을 행하는데 너는 행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보살은 마군의 부림을 입을 것이다. 아난아, 이때에 마왕 파순이 크게 뛸 듯이 기뻐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보살이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며, 자신의 종성(種姓)에 의지하며, 자신의 선에 의지하며, 자신의 지식에 의지하여 곧 공고(貢高)하여 타인을 하천하게 본다. 또한 아유월치의 상의 행하는 모양이 없고 오로지 스스로 공고하여 타인을 업신여기며, 곧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는 또한 보살의 종성(種姓) 중에서 나타날 수 없으며 너는 마하연 중에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때에 파순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금 나의 경계에 있는 궁전이 공하지 않겠구나. 3악취(惡趣)를 증익하며, 나의 종성이 줄어들지 않겠구나’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군이 항상 이 보살을 엿보고 있다가 비법의 일을 설하려고 하며, 많은 사람에게 모두 비법을 듣게 한다. 또한 마땅히 사견(邪見)만 증익하게 하고 허물만 더하게 한다. 전도(顚倒)를 지어서 법에서 전도된 일을 행하게 하며, 신(身)․구(口)․의(意)를 그르치게 하여 삿된 복에 탐착하게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3악취가 증익되는 것이다. 마군의 권속과 궁전이 더욱 많아지게 된다. 그러면 이때에 파순이 두 배로 뛸 듯이 기뻐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시 아난아, 만약 보살도를 행하는 자가 성문도가(聲聞道家)와 함께 싸우면 마군이 이때에 생각하기를, ‘이 선남자는 살운연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큰 지혜에 접근하지 못한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투쟁과 원망과 성내는 것은 살운연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3악의 업이다.
다시 아난아, 보살과 보살이 스스로 아직도 서로 싸우면 파순은 생각하기를, ‘둘은 멀리 부처님을 여의고 살운연을 잃었다. 그러므로 이 두 보살은 함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선남자가 지은 것은 3악업이지 살운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아난아, 기별을 받지 못한 자가 기별을 얻은 보살과 함께 싸우면 악의를 일으킨다. 그 뜻이 일어난 다소의 수(數)에 따라서 약간의 겁(劫) 동안 물리친다. 비록 싸우는 뜻을 일으켰으나 예전대로 살운연을 버리지 아니하면 마땅히 겁수(劫數)의 약간의 경로(徑路)를 물리친 후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에 마땅히 다시 이와 같은 겁수에 그 중간에서 참으로 제(除)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삼승 설법으로 그의 뜻을 따라 다소의 수(數)를 일으키리라. 각각 그 일이 다해도 중간에 줄어들어 제하여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과 보살이 서로 싸우며, 만약 성내며, 만약 욕하고 한(恨)을 품어 뉘우치지 아니한다면 나는 제(除)할 것을 설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다음 겁수에 부지런히 승나(僧那:사홍서원)를 행하게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이루게 할 것이다. 보살이 싸우고 성을 낸 것을 스스로 후회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이익은 얻기 어려운데, 나는 이제 마땅히 일체를 굽히리라. 금세 후세에 마땅히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화해하게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떻게 악성(惡聲)을 더하여 사람을 성나게 할 것이며, 사람의 악을 생각하겠는가? 나는 마침내 감히 다시 이 일을 짓지 않을 것이며, 마땅히 귀먹은 것과 같이 하여 스스로 허물을 제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어서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할 것이다. 어떻게 성냄을 일으켜 스스로 빠질 수 있겠는가? 응당 한(恨)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마땅히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때에 보살이 마침 이러한 뜻을 일으키면 마왕 파순이 능히 그 편의를 얻지 못할 것이다.
다시 아난아, 보살을 행하는 자는 마땅히 성문가(聲聞家)에서 함께 거처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같이 거주하게 된다면 마땅히 같이 싸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땅히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응당 이런 무리와 성냄을 일으켜 같이 싸우지 않으리라. 나는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성취하여 모든 고통과 위난을 제도할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과 보살이 스스로 함께 머무는 그 법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과 보살이 함께 머무는 법은 서로 볼 때에 마땅히 세존과 함께 거주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진실한 도반이니, 같이 한 배[船]를 탄 것이다. 저도 배우고 나도 배우니 이것이 동학(同學)이다. 같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살운연에 이를 것이다. 만약 저 보살의 뜻이 혼란하여 살운연을 따르지 않으면 나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저 보살의 뜻이 정해져 살운연을 여의지 아니한다면 나는 또한 이와 같이 응하리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운다면 함께 배우는 것이다.”
64. 문등학품(問等學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동등한 것으로 응당 배워야 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공․외공이 이 보살마하살과 동등한 것이다. 5음(陰)은 스스로 공하고 도(道)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스스로 공한 것이다. 수보리여, 이 공이 이 보살마하살과 동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과 같으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5음을 녹이는 것[消]을 배우면 살운연을 배우는 것이며, 5음에 물들지 아니하면 살운연을 배우는 것이며, 5음을 멸하는 것을 배우면 살운연을 배우는 것이며, 5음이 생하지 아니하면 살운연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아가 4무애(無礙)를 배우면 살운연을 배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이 5음을 녹이는 것을 배우면 살운연을 배운 것이다. 나아가 생하는 것이 없음을 배우면 살운연을 배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너의 뜻에는 어떠하냐? 5음의 소유가 여여하며, 나아가 도가 여여하며, 세존이 여여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여여하면 참으로 멸진하여 멸할 때가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배우는 것이 여여하며, 살운연을 배우는 것이다. 여여는 또한 다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또한 멸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배우면 여여한 것을 배우는 것이며, 살운연을 배우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6바라밀을 배우는 것이다. 37품을 배우는 것이며, 부처님의 18법을 배우는 것이며 살운연을 배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모든 배우는 것을 제도하였으므로 제일의 배움이라 대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배우면 모든 하늘과 마군이 무너뜨려 파괴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배우면 속히 아유월치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와 같이 배우면 세존의 업(業)을 익히는 것이며, 여래를 익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배우면 중생의 길잡이[導師]가 되며, 이와 같이 배우면 불토를 청정하게 하며, 대자대비를 배우며, 중생교화를 배우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3합12법륜(三合十二法輪)을 배워서 굴리며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한다. 이와 같이 배우면 부처님의 종자를 끊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이와 같이 배우면 감로 법문을 여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이와 같이 배우면 무위법을 보이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수보리여, 하열한 사람은 능히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배우면 일체 중생의 생사의 뿌리를 뽑을 것이며,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3악취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며, 변지(邊地)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전타라가(栴陀羅家)에 태어나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다시 귀머거리와 장님과 벙어리와 절름발이가 되지 아니할 것이며,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모든 근이 구족하여 끝내 모자라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을 것이며, 음성이 추하지 않으며, 10악을 범하지 아니하며, 마침내 삿된 것을 배우지 아니한다. 스스로의 생활이 없거나 반대가 되지 아니하여 다시 악한 자와 함께 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장수천에 태어나지 아니하니 구화구사라를 쓰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구화구사라이며, 반야바라밀이 설한 구화구사라이며, 4선(禪)․4등(等) 및 4공정(空定)이 선계(禪計)를 따르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일체 제법을 청정히 하는 힘이 되며, 청정한 나한․벽지불의 힘이 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성품은 모두 스스로 청정한 것인데, 무엇이 보살이 모든 법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은 것이다. 보살은 이미 성품의 근본을 청정하게 했다.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싫어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는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이며, 이 법은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이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단바라밀을 행하여 살운연에 이른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10력을 배우는 것이며, 두려움이 없는 힘을 배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중생이 하는 모습을 벗어나 나타나는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땅에서 나오는 금․은과 특이한 보물은 적은 수의 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사람은 적은 수이다. 흔히 성문․벽지불의 뜻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적은 수의 사람만이 능히 차가월라복(遮迦越羅福)을 행하며, 조[粟]를 지어 흩어 버리는 소왕(小王)을 행하는 자는 많다. 적은 수의 중생이 능히 살운연에 들어가고 많은 사람이 나한․벽지불도에 들어간다.
수보리여, 많은 사람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구하나 성취를 얻은 자는 적고 적으며 나한․벽지불지에 머무는 자는 많다.
수보리여,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많으나,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아유월치지에 이르는 자는 또한 적고 적을 뿐이다. 이 때문에 수보리여, 만약 견고하게 아유월치지에 머물고자 한다면 마땅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에 질투하는 뜻을 내지 아니하며, 계를 범하는 뜻을 내지 아니하며, 성내는 뜻을 내지 아니하며, 어지러운 뜻을 내지 아니하며, 게으른 뜻을 내지 아니하며, 어리석은 뜻을 내지 아니하며, 3독의 뜻을 내지 아니하며, 의심의 뜻을 내지 아니하며, 5음의 뜻을 내지 아니하며, 나아가서는 도의 뜻도 내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이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법에 생할 것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생이 없는 법은 또한 얻을 바가 없으며 또한 일어날 것이 없다. 이때문에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 가지면 모든 바라밀을 다 갖게 된다. 왜냐하면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에 모든 바라밀이 모두 다 따라서 좇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나는 나라는 사람에 집착하여 모두 다 62견(見)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모든 바라밀이 모두 다 따라서 좇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죽으려 할 때에 풍(風)이 먼저 명(命)에서 떠나가면 모든 근이 따라서 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바라밀이 모두 다 그 속으로 들어가므로 보살이 모든 바라밀의 모습에서 벗어나 나오고자 하면 마땅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운 자는 배우는 사람 중에 최상의 가장 존귀한 이가 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삼천대천찰토에 있는 중생이 참으로 많으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한 염부제에 있는 중생도 오히려 많은데 하물며 이에 삼천대천찰토에 있는 중생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중생을 모두 도에 들어가게 하여 다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게 해야 한다. 만약 보살이 하나하나 입는 의복과 음식을 여러 곳에 공양하기를 마땅히 그 수명이 다하도록 하였다면 그 복이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매우 많고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선여인이 뜻으로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마하살의 큰 이익이므로 보살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중생의 위에 있고자 하면 일체 중생은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며, 의지할 곳도 없는 것이다. 돌아갈 곳을 받고자 하며, 의지할 곳을 짓고자 하며, 눈 먼 이를 위하여 등불이 되어 인도하고자 하며, 부처 되기를 구하고자 하며, 부처님의 경계를 얻고자 하며, 부처님이 되어 노닐고자 하며, 불사자(佛師子)의 음향이 되고자 하며, 부처님의 북과 종을 치고자 하며, 방대한 음성을 갖고자 하며, 부처님의 회상에서 불법의 뜻을 강설하고자 하면, 많은 사람이 여우같이 의심하는 것을 끊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얻고자 하면 마땅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삼계에 있는 모든 선(善)의 복덕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어찌 다시 나한․벽지불의 복덕을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나한․벽지불의 복덕은 얻으나 다만 그 중에서 증(證)을 짓지는 않는다. 지혜로써 나한․벽지불의 혜를 관찰하면 그보다 뛰어남을 얻으나 그 중에서 스스로 보살위에 머물지 않는다. 보살이 이와 같이 지어서 배우면 살운연에서 멀지 않으니,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모든 하늘․아수륜의 복우(福祐)가 되며, 이와 같이 행하는 자는 모든 나한․벽지불보다 뛰어나며, 속히 살운연에 가까워질 것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오래지 않아 반야바라밀을 행할 것이며,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아니할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것은 줄어드는 법이 아니며, 살운연에서 멀지 아니하여 속히 삼승혜(三乘慧)에 가까워질 것임을 알아야 한다.
보살이 만약 다시 반대로 생각을 지어 말하되 ‘피차(彼此)의 반야바라밀은 곧 살운연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시 피차의 깊은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알지 못하며 또한 반야바라밀을 보지 못한다. 또한 반야바라밀을 알지 못하는 것은 누구며, 또한 알지 못하는 이가 반야바라밀 중에서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인가? 만약 다시 이 생각을 하되, 반야바라밀은 또한 피(彼)도 아니며, 또한 차(此)도 아니며, 또한 그 속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법성은 상주하며 여여하여 진제와 같다. 부처가 있건 부처가 없건 간에 법성은 상주한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이다.”
방광반야경 제15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65. 친근품(親近品)
이때 석제환인이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보살은 6바라밀 나아가 부처님의 18법을 행하는 자로서 오히려 중생보다 위에 나서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 자이겠는가? 만약 발심하여 살운연을 염원하는 자는 수명을 얻은 사람 중에서 가장 선한 이로움을 얻을 것이다. 하물며 발심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는 자이겠는가?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킨 자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키지 못한 자들이 마땅히 가까이해야 한다.’
석제환인이 하늘의 만다라화(曼陀羅花)를 부처님 위에 뿌리고 나서 발원하였다.
‘만약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킨 자가 있다면 법의 원(願)을 구족하게 할 것이고 살운연의 원을 구족하게 할 것이며, 자연법의 원을 구족하게 할 것이고 무루법의 원을 구족하게 하리라.’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발원한 뜻과 같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킨 자를 결코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며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대승으로서 끝내 나한․벽지불승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더욱더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정진할 것을 발원합니다. 삼계 중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는 자를 보면 이들을 모두 구제하여 보호할 것이며, 이와 같이 구족하게 할 것입니다.
보살이 마음속으로, ‘나는 이미 제도되었으니 마땅히 제도되지 못한 자를 제도해야 한다. 나는 이미 안온함을 얻었으니 마땅히 남은 자들도 안온케 해야 한다. 나는 이미 열반을 얻었으니 마땅히 남은 자를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도록 발원합니다.”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처음 발심한 보살[初發意菩薩]의 공덕을 환희하여 지닌다면 그 복덕이 얼마나 됩니까? 오랫동안 발심한 보살[久發意菩薩]의 공덕을 환희하여 지닌다면 그 복덕은 얼마나 됩니까? 아유월치(阿惟越致) 보살의 공덕을 환희하여 지닌다면 그 복덕은 얼마나 됩니까? 또한 일생보처에 이른 보살의 공덕을 환희하여 지닌다면 그 복덕은 얼마나 됩니까?”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구익아, 이 사천하는 오히려 근(斤)과 양(兩)으로 무게를 달아 알 수 있지만, 그 공덕을 환희하여 지니는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삼천대천찰토는 또한 헤아려 알 수 있지만 그 공덕의 환희를 지니는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구익아, 삼천대천찰토 가운데 바닷물을 취하여 그 바닷물을 하나의 머리카락을 백 등분한 것을 가지고 바닷물에 적셔 몇 개의 물방울인지 헤아릴 수 있어도 그 공덕을 환희하여 지니는[이 사이에 35자가 중복되어 있으나 단본(丹本)에 준거하여 제외했다] 그 복덕은 헤아려서 알 수 없는 것이다.
구익아, 아승기(阿僧祇) 불국토에 있는 허공의 경계는 한 섬[斛:열 말]․한 말․한 되의 용기로써 허공을 헤아려서 오히려 그 양을 알 수 있지만 그 공덕을 환희하여 지니는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처음 발심한 보살의 공덕을 환희하여 지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군이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공덕의 환희를 지니지 못한 자는 마군의 부하들로서 마군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공덕을 환희하고 발심하여 지닌다면 이것은 마군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여러 욕망을 버리지 않고 3존(尊)을 공경하는 것도 한 가지 모양[一相]이 아니며 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보살의 공덕에 환희하는 뜻을 지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익아, 이러한 환희하는 뜻을 일으킨 자는 불국토에 이를 것이며, 모든 부처님을 공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들이 처음 발심한 보살이 지은 공덕을 환희하여 지니기 때문이다. 처음 발심한 보살에서 10주(住)의 아유안(阿惟顔:一生補處) 보살에 이르기까지 보살이 지은 공덕 모두를 환희하여 지니기 때문이다. 이 공덕을 지니면 빠르게 아뇩다라삼야삼보에 다가가 아유삼불(阿惟三佛)을 이루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모두 마땅히 득도(得度)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구익아, 이 선남자․선여인이 처음 발심하였다면 마땅히 보살의 공덕을 환희하여 지니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해야 하지만 뜻으로써 구하는 것도 아니고 뜻을 떠나 구하는 것도 아니다. 아유월치(阿惟越致) 보살과 일생보처 보살의 공덕을 환희하여 지니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뜻으로써 구하는 것도 아니고 뜻을 떠나 구하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이 뜻은 허깨비[幻]와 같습니다. 어떻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네가 이 뜻을 허깨비와 같이 보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허깨비와 같이 보지도 않고 그 뜻이 허깨비와 같지 않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법이 아니라면 이 뜻을 볼 수 있느냐? 허깨비와 같이 보지 않는다면 이 뜻을 떠나지 않아 이 법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법을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무엇을 일으켜 있다거나 없다고 하겠습니까? 법은 항상 스스로 공적하여 있음으로도 얻을 수 없고 없음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법이 항상 공적하다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있는 바가 없는 것은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시여, 일체 모든 법은 또한 얻을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6바라밀은 항상 공적하며, 나아가 불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항상 공적할 것입니다. 법은 마땅히 지금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무유법(無有法)에도 따르지 않으며 장차 있다고 하는 것에도 따르지 않습니다. 반야바라밀은 항상 공적하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아뇩다라삼야삼보는 항상 공적한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과 삼야삼보(三耶三菩)는 공적한 것인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살운연(薩云然)은 공적하며, 아뇩다라삼야삼보도 또한 공적한 것이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과 살운연이 공적한 것이 아니라면 반야바라밀도 아니며, 또한 살운연도 아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과 살운연은 공적한 것이다. 또한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반야바라밀을 떠나 아유삼불을 얻는 것도 아니다.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면 끝내 아유삼불도 얻지 못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행하는 것은 매우 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의 행은 매우 깊은 고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고행을 하지만 법 가운데서 중도를 취하며 깨닫지 않으면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진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라면 보살은 고행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는 것도 볼 수가 없고,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깨닫는 것도 볼 수가 없으며, 법을 마땅히 취하여 깨닫는 것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다 얻을 수가 없는데, 어떠한 뜻, 어떠한 법, 어떠한 반야바라밀이 있어서 마땅히 취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보살의 행은 얻는 바가 없는 행입니다. 얻는 바가 없는 법 가운데서 모든 법의 무한한 한계의 일에 이르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이러한 사실을 설한 것을 듣고 물러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으며 또한 게으름 피우지도 않는다면 이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를 볼 수 없으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자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한․벽지불지는 나와 거리가 멀고 살운연은 나와 거리가 가깝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허공이 가깝다거나 멀다고 생각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또한 ‘나한․벽지불지는 나와 거리가 멀고 살운연은 나와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도 또한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환인(幻人)이 ‘환사[師]는 나와 거리가 가깝고 관중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환인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빛으로 생긴 그림자가 ‘내가 인(因)한 바의 것은 나와 거리가 가깝고 다른 것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집착이 없기 때문에 등정각 또한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비유하면 부처님께서 분별[念]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여래께서 화작해 낸 자는 ‘나한․벽지불지는 나와 거리가 멀고 부처님께서는 나와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화작하신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비유하면 여래께서 화작해 낸 자는 또한 ‘나한․벽지불지는 나와 거리가 멀고 불도는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화작한 것 또한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 또한 ‘나한․벽지불지는 나와 거리가 멀고 부처님께서는 나와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화작해 낸 것 또한 분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야바라밀의 일 또한 이와 같이 지어서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존자 사리불이 장로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단지 반야바라밀만 분별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6바라밀 또한 분별이 없으며, 5음․5정(情)도 또한 분별이 없고, 안(眼)․색(色)․6입(入) 또한 분별이 없으며, 4선․4등․4공정․37품 나아가 3탈문․부처님의 10종력․18법․4무소외․4무애혜․살운연 또한 분별이 없습니다. 나아가 도(道) 또한 분별이 없으며, 유위성(有爲性) 또한 분별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만약 모든 법이 분별이 없다면 무엇을 따라 5취(趣)가 있으며, 어떻게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부처님 세존이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모든 중생은 4전도(顚倒)에 의해서 4전도를 일으키고 일을 만들어냅니다. 신(身)․구(口)․의(意)의 업을 행함으로써 그 상(像)을 받으며 의혹이 따르기 때문에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이 있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어떻게 수다원 나아가 삼야삼불이 있겠습니까?”
“수다원도(須陀洹道) 또한 분별이 없으며, 나아가 삼야삼불도(三耶三佛道) 또한 분별이 없고, 모든 과거와 미래의 무소착․등정각과 현재 시방의 모든 부처님도 분별이 다하여 멸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리불이여, 일체 모든 법이 다 분별이 없는 것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의 진실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마땅히 분별 없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곧 분별 없는 법을 깨닫습니다.”
66. 뇌고품(牢固品)
이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견고함이 없음[不牢固]을 행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이와 같고 이와 같습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견고함이 없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견고함이 없으며, 나아가 살운연도 또한 견고함이 없고 또한 견고하지 않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견고함이 없는 것을 행하는 것인데 어떻게 얻을 수가 있으며, 나아가 살운연 또한 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견고함이 있겠습니까?”
많은 색계와 욕계의 천자들이 생각하였다.
‘모든 선남자․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마땅히 예경해야 한다. 이미 반야바라밀을 행하지만 중도를 취하여 깨닫지 않으면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마땅히 예경해야 하는 까닭은 평등한 법에서 깨달음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모든 천자들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평등한 법에서 나한․벽지불의 깨달음을 취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기이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중생을 위하여 원을 세우지만 어떤 사람도 중생을 구제하여 해탈하게 하고자 함을 볼 수가 없다. 이것이 기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발심하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한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허공을 구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허공과 중생은 모두 공적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중생 또한 공하고 허공 또한 공한 것이다. 허공이 견고함이 없는 것과 같이 중생 또한 견고함이 없다.
모든 천자들이여, 중생이 견고함이 없기 때문에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매우 기특한 것이다.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는 것은 허공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는 것 또한 볼 수가 없다. 중생도 공적하며 서원을 세우는 것 또한 공적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게으르지 않으며 어려워하지도 않고 겁내지 않으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5음이 공적하기 때문에 중생 또한 공적한 것이다. 어떻게 5음이 공적하기 때문에 중생 또한 공적한 것인가? 5음이 공적하기 때문에 6바라밀이 공적하고 5음․6쇠(衰)가 공적하기 때문에 내외공과 유무공 또한 공적한 것이다. 5음․6쇠가 공적하기 때문에 18성이 또한 공적한 것이다. 5음이 공적하기 때문에 37품․4선․4등․4공정․4무애혜 또한 공적한 것이다. 5음이 공적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10종력․4무소외․대자대비․18법․살운연 또한 공적한 것이다.
보살이 이 모든 법이 모두 공적함을 듣고 생각에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으면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두려워하지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가?”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보살은 이 무소유로써 적정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거나 게으른 것 또한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두려워하는 것 또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듣고도 다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모든 하늘의 범천과 제석이 다 예경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하늘의 제석과 범천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예경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수타회천과 모든 천들이 모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예경할 것이다.
수보리여, 현재 시방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 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생각하신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5바라밀을 구족할 것이고, 살운야도 구족할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생각하신다면 이 보살은 오래지 않아 불도를 성취할 것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한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마군이 되고, 그 하나하나의 마군이 거느린 부하들도 한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다. 가령 이와 같이 생겨난 마군과 마군이 거느린 부하들이 함께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끝내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마군이 중간에 보살을 무너뜨릴 수 없는 두 가지 일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모든 법이 다 공함을 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마군이 무너뜨릴 수 없는 두 가지 일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짓는 것이 말한 바와 같은 것이고, 두 번째는 항상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천신들이 와서 권유하고 도우며 위로하면서 말한다.
‘선남자여, 이제 오래지 않아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행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행하는 자로서 귀앙(歸仰)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귀의할 곳을 줄 것이고, 의지처가 없는 자는 보호해 줄 것이고, 덮개가 없는 자에게는 집을 줄 것입니다. 어두운 자에게 큰 밝음을 줄 것이고 맹인을 위하여 눈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과 비구승 대중이 모두 함께 그 이름을 불러 칭찬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내가 설법할 때에 보조(寶造)보살과 식만(識挽)보살을 칭찬하고 찬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설법할 때에 묘락불국토[妙樂佛國] 중의 모든 보살이 범행(梵行)을 닦는다면 칭찬하며 기릴 것이다. 나는 또한 항상 저 모든 바른 보살을 칭찬하고 기릴 것이다. 또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기쁜 얼굴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찬탄하실 것이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 불도를 구족하여 행하고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살운연을 이룬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또한 다시 기쁜 얼굴로 칭찬하고 기릴 것이다. 왜냐하면 불업(佛業)에 따라서 행하는 보살이 적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 기쁜 얼굴로 모든 보살을 칭찬하고 기리는 것은 물러나는 자를 칭찬하는 것입니까, 물러나지 않는 자를 찬탄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아유월치를 행하는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또한 기별(記莂)을 받지 못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위하여 설법하실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찬탄하실 것이다. 만약 묘락불국토에서 배우는 보살이 있다면 부처님께서는 또한 그들을 찬탄하실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기쁜 얼굴로 찬탄하실 것이다. 또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모든 법이 공함을 알지만 무소종생(無所從生)은 얻지 못하였다. 모든 법이 청정함을 알지만 무소종생은 얻지 못하였다. 모든 법이 무소유(無所有)이며 견고함이 없음을 알지만 무소종생은 얻지 못하였다. 이런 보살들을 모든 부처님께서는 기쁜 얼굴로 그 이름을 칭찬하고 찬탄하신다. 이런 보살마하살은 나한․벽지불지를 멸할 것이며,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의 경지에서 기별을 받을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환희하여 칭찬하고 찬탄하실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아유월치지에 머물러 살운연에 이를 것이다.
또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을 들을 때에 또한 여우처럼 의심하지 않고, 물러나지도 않으며 게으르지도 않아야 한다.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 보살은 마땅히 다시 묘락불국토에 이를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을 듣고 묘락불국토에 있는 저 모든 바른 보살은 이 사이에 선남자․선여인이 또한 다시 환희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 사람은 일찍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였기 때문에 내생에서도 또한 마땅히 다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아유월치지에 머물 것이다.
수보리여,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의 음성은 이익되는 것이 많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의 음성은 이익되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가르친 바와 같이 행하는 자는 살운연에 머물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여함[如]을 여의지 않고 가르침에 머문다면 여여함을 여의지 않은 것이 곧 무소유가 됩니다. 어떻게 살운연에 머물 수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해탈하여 여여한 것은 얻을 바가 없는 법인데 누가 여여함에 머무는 것입니까? 누가 여여함 가운데 머물러서 누가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까? 누가 여여함에 머물러서 누가 법을 설하는 것입니까? 여여함은 오히려 볼 수가 없는데 누가 여여함에 머물러서 누가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까?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여여함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여여함에 머문다는 것은 생멸이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가 마땅히 이 가운데 머물러서 아유삼불을 이룰 것이며, 누가 법을 설하겠는가? 이 모두가 소유가 없는 것이다.”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습니다.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매우 얻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여함에 머물지도 않고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도 없으며 법을 설하는 것도 없어서 비록 무소견(無所見)이고 무소유이지만 이를 듣고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구익아, 그대가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매우 기이하고 매우 특이한 것이다. 저 깊은 법 가운데서 또한 여우같이 의심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기쁨을 쫓아가는 것도 없다. 모든 법은 모두 공한 것인데 누가 여우같이 의심을 할 것이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뜻이 있겠느냐?”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존자가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공(空)의 일을 설하신 것이 걸림이 없으십니다. 비유하면 하늘을 바라보고 화살을 쏘아 화살이 가는 데 걸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수보리께서 말씀하신 것도 또한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67. 촉루품(囑累品)
이에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설한 것이 참으로 수순(隨順)하는 것이 되며 법에 응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와 같다. 구익아, 네가 질문한 것은 일의 모습을 따른 것으로 잘못이 없다.”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존자 수보리가 말한 것은 매우 기이한 것입니다. 설한 것이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을 여의지 않은 것입니다. 37품을 여의지 않았으며, 도를 여의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구익아, 장로 수보리가 항상 공을 행하고 6바라밀을 행하는 것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행하는 자가 있겠는가? 37품도 또한 있는 것이 아닌 데 하물며 행하는 자가 있겠는가? 선유무삼매(禪惟無三昧)와 삼매월(三昧越)도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 4무소외․4무애혜․4등․대자대비․10력과 부처님의 18법 또한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행하는 자가 있겠는가? 도(道) 또한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얻고자 하는 자가 있겠는가? 살운연 또한 그러하며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행하는 자가 있겠는가? 여래께서도 오히려 있는 것이 아닌데 누가 마땅히 여래가 되겠는가? 무소종생 또한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그것을 얻어 깨닫고자 하는 자가 있겠는가? 상(相) 또한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몸이 있어 받는 것이 있겠는가? 32상의 모든 좋은 것도 또한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80종호를 얻고자 하는 자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구익아, 수보리는 일체 모든 법이 공적함을 행하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무소유를 행하며, 공을 행하며, 무상(無相)을 행하며, 무원(無願)을 행하기 때문이다. 구익아, 이것이 수보리의 행이다. 수보리가 행한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수보리의 행은 백 배․천 배 거억만 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나한․벽지불에 비교해 볼 때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행이 가장 높고 존귀하기 때문이다. 모든 여래를 제외하고는 이보다 나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 위에 나서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성문․벽지불 위에 나서서 보살지에 머물러 불법을 구족하고 살운연에 이르러 곧 여래를 얻기 때문이다.
이때 좌중에 있던 모든 도리천이 문타라화(文陀羅花)를 부처님 위에 뿌렸다. 이때 6천 비구가 의복을 정돈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부처님 앞에 장궤(長跪)하였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써 문타라화를 각각 가득 움켜쥐고 부처님 위에 뿌리고 나서 모두 동시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마땅히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신 묘행(妙行)을 받들 것입니다. 모든 나한․벽지불은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의 뜻을 아시고 곧 미소를 지으셨다. 모든 부처님의 상법(常法)과 같은 오색광명이 입으로부터 나와 시방을 두루 비추고 돌아와서 몸을 세 번 돌고는 이마로 들어갔다.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정돈하고 먼저 오른쪽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미소지으신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 뜻을 듣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6천 비구는 미래세에 겁(劫)의 이름이 다루파니(多樓波尼)라고 하는 저 겁 가운데서 모두 마땅히 성불할 것이다. 명호는 산화(散花)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이라 하리라. 이 모든 여래의 국토는 모두 같으며, 비구승의 수(數) 또한 각각 같고 그 부처님의 수명 또한 같다. 그 수명은 천 세(歲)로서 부처가 되었을 때는 각각 온 세상에 오색의 꽃이 비처럼 내릴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비구가 여기서 수명을 마치면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마땅히 출가하여 도를 닦아 오래오래 함께할 것이다. 그런 후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또 아난아, 보살마하살이 가장 묘한 행을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보살이 여래가 되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아난아,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라면 이 사람은 인도(人道) 가운데서 왔거나 혹은 도술천상(兜術天上)에서 온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인도 가운데서 널리 반야바라밀을 들었고 또한 도술천상에서 널리 반야바라밀을 들어서 본래 그 가운데서 지혜를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써서 지니고 닦아서 암송하고 다시 이 사람 저 사람을 가르쳐서 보살도를 행하게 하려면 그러한 가운데 일을 설해야 한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지니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과 같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은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지으신 선의 근본 공덕을 따라서 온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성문․벽지불의 법 가운데서 공덕을 지은 것이 아니다. 또한 성문을 따라서 이 반야바라밀을 들은 것이 아니다.
아난아,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독송하며 수지하여 능히 그 바른 뜻을 해설하여 널리 사람에게 베풀어 가르쳐 준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을 친견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아난아,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을 들을 때에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욱더 기뻐한다면, 이 사람은 과거 부처님을 따라 행한 결과이며 선지식을 얻어서 이룬 결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과거 부처님을 따라 선의 근본을 지은 이래 끝내 삼승의 일을 잃지 않을 것이다. 정진하는 뜻으로써 6바라밀 나아가 살운연을 행할 것이다. 또한 마땅히 그 일을 장엄하고 부지런히 힘쓸 것이다. 오랫동안 견고하게 6바라밀을 행하여 살운연에 이르러 나한․벽지불지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아난아, 반야바라밀을 너에게 부촉[囑累]한다. 아난아, 내가 설한 모든 법에서 반야바라밀을 제외하고는 모두 잊거나 잃어버려도 큰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네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지녀서 만약 한 구절이라도 잊거나 잃어버린다면 너의 잘못은 매우 클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너에게 부촉한다. 마땅히 잘 지니고 받아서 외우고 염(念)해야 한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수지하고 외우며 지켜 행한다면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도를 수지하는 것이 된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름 있는 꽃과 향, 그리고 비단 일산과 당번으로써 나를 공양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공양해야 한다. 그 반야바라밀을 공양하는 것은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을 들을 때에 이 가운데 공경의 뜻을 일으키면 곧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된다.
아난아, 네가 만약 자비로써 나를 공경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자비로써 공경해야 한다. 만약 이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는 또한 마땅히 공경하고 삼가 한 구절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난아, 반야바라밀을 지닐 것을 너에게 부촉한다. 이제 삼계 가운데서 나를 존경하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 또한 존경해야 한다. 내가 부촉하는 뜻은 크게 남음이 있지만 나는 지금 너에게 반야바라밀을 지닐 것을 부촉한다. 그러므로 아난아, 마땅히 모든 천․용․귀신과 세간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널리 들어서 알게 해야 한다. 모든 여래의 삼보와 과거․미래․현재의 불도를 버리지 않고자 한다면 삼가 반야바라밀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곧 내가 설하는 법이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수지하여 외우고 독송하며 염(念)하여 지켜 행하면서 다시 돌이켜 사람들을 가르쳐서 그 가운데 뜻을 펴고 분별하여 해설한다면 이 사람은 빠르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이며, 오래지 않아 살운연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난아, 모든 부처님 여래의 도는 모두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께서도 모두 반야바라밀로부터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얻고자 하면 마땅히 6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아난아, 6바라밀은 보살의 어머니로서 모든 보살을 낳기 때문이다. 모든 6바라밀을 배우는 자는 모두 마땅히 이 가운데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6바라밀을 지닐 것을 더욱더 너에게 부촉한다. 6바라밀은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의 법장(法藏)이다. 6바라밀은 다함이 없는 법장으로서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려서 중생을 교화하신 것이다. 모두 6바라밀을 장(藏)으로 삼은 것이다.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께서는 모두 6바라밀 가운데서 배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 것이다.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불제자도 모두 6바라밀을 배워 반열반을 얻었다. 미래에 반열반을 얻을 자도 또한 마땅히 6바라밀을 배울 것이다.
아난아, 네가 만약 삼천대천찰토 가운데서 제자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가르침으로써 모두가 아라한을 이룬다고 해도 그 가르침은 나의 제자로서의 가르침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반야바라밀의 한 구절과 같은 법을 보살에게 가르쳐 배우게 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제자로서의 가르침인 것이다.
아난아, 내가 설한 것을 따라서 삼천대천찰토에 가득 찬 사람들을 모두 나한행을 얻게 하는 것보다 6바라밀을 행하는 공덕이 오히려 많겠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한행을 얻게 하는 공덕은 나의 제자가 하루 동안 반야바라밀을 여러 보살에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하루 동안 할 수 없다면 한낮 동안[日中]만이라도 되고, 한낮 동안까지 할 수 없다면 밥 먹을 때만이라도 된다. 밥 먹을 때만이라도 할 수 없다면 손가락을 튀기는 동안만이라도 가르치면 그 복덕은 나한행을 얻는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의 덕은 모든 나한․벽지불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스스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며, 또한 모든 중생을 다시 권하고 도와 편안케 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아난아, 6바라밀과 37품을 행하여 살운연에 이르면 공덕이 커져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 끝내 중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 반야바라밀을 설하실 때에 네 무리의 제자와 모든 천․용․아수륜(阿須倫)․건답화(揵畓和)․견타라(甄陀羅)․마후륵(摩睺勒)이 있었다.
이때 부처님께서 이 대중 가운데서 신족변화를 나타내셨는데 회중의 대중들은 모두 이것을 볼 수 있었다. 아촉여래(阿閦如來)께서 저 대중에 둘러싸여서 설법을 하셨는데 그 회중은 비유하면 큰 바다와 같았다.
‘모든 이 나한은 번뇌[漏]를 이미 다하여 다시 번뇌[塵垢]가 없고, 모두 자재의 뜻을 얻어서 이미 해탈을 얻었으며, 이미 능히 혜해탈(慧解脫)을 얻어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고 모든 일을 이미 갖추었으니, 비유하면 큰 용과 같다. 응하는 바에 이미 나아가 습(習)의 실마리가 이미 다하여 등해탈(等解脫)을 얻고 모든 원(願)을 이미 이루었다. 그 회중의 나한의 덕은 모두 이와 같다. 모든 보살마하살의 수는 셀 수 없으며, 그 덕은 높고 높아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하시고 부처님께서는 신족을 거두시니 갑자기 사라지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이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은 대함[對]이 없는 것이며, 법과 법은 동등함도 없는 것이다. 법과 법은 모습을 볼 수 없으며, 법과 법은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모든 대중이 아촉여래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불국토 또한 눈으로 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 또한 이와 같이 대함이 없는 것이다. 법과 법은 모습을 알 수 없으며,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난아, 법은 또한 알 수 없으며 볼 수 없다. 모든 법은 지은 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공하여 잡을 수 없으며, 모든 법은 불가사의하며, 모든 법은 분별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환사(幻士)가 깨달은 것이 없는 것처럼 불필요한 것을 써서 견고함이 없는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고 모든 법에 들어감이 없는 것이다.
아난아,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운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이다. 모든 바라밀에 나아가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배운 자는 가장 존귀하며 가장 높으며 모든 변재 위에 나선다. 덮개 없는 것의 덮개가 되어 세간을 덮을 것이고, 돌아갈 곳이 없는 자를 돌아가게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배움으로써 능히 오른손으로 삼천대천찰토를 들어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깨닫고 알고 생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께서 배워 걸림 없는 모든 지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은 모든 배움 가운데 가장 존귀하며 가장 높은 것으로서 모든 변재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의 모습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허공의 변제(邊際)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그 모습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난아, 나는 처음부터 반야바라밀의 한계를 설하지 않았다. 신체도 수량이 있고 구절도 헤아릴 수 있으며 뜻풀이도 헤아릴 수 있지만 반야바라밀은 한계가 없는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한량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다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없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공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가 없는 것이다.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배워 이루신 것이며 반야바라밀은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반야바라밀은 다할 수 없는 것이고, 다한 자도 없으며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능히 반야바라밀을 다하였다’고 한다면 허공을 다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난아, 6바라밀은 다할 수도 없으며,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하는 자도 없으며, 나아가 살운연 또한 다할 수 없고, 다하는 자도 없으며, 다함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법도 또한 생함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생하는 것이 없는데 무슨 다함이 있겠느냐?”
그때 세존께서 광장설상(廣長舌相)으로써 얼굴을 덮으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반야바라밀을 가지고 네 무리 가운데서 널리 펴고 설하며 널리 분별하여 해설하고 널리 그 일을 연설하여 분명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널리 모든 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삼승을 배우는 자도 모두 마땅히 이 가운데서 그 응하는 바를 따라 배워 이룬 것이다.
아난아,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의 장(藏)이다. 일체의 모든 글자가 모두 이 가운데로 들어간다.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다라니의 문이다. 모든 보살이 다라니를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모든 보살이 다라니를 얻으면 모두 모든 법의 변재를 얻을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과거․미래․현재 부처님 법의 처소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중생들에게 말하기를, ‘그 반야바라밀을 수지하고 외우고 배우는 자는 곧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의 도를 얻는 것이다’라고 한다.
아난아, 내가 지금 너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의 행을 말하였다. 네가 반야바라밀을 지니면 곧 일체 모든 법을 얻을 것이다.”
68. 무진품(無盡品)
이때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도는 크고 매우 깊은 것이다. 나는 차라리 세존께 여쭈는 게 낫겠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어떻게 다할 수 없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마땅히 어떻게 반야바라밀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이 다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6바라밀이 다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하며, 나아가 살운연 또한 다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반야바라밀에 들어가야 한다.
또 수보리여, 어리석음이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지은 행(行)이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식(識)이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명색(名色)이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6쇠(衰)가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각(覺)이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애(愛)가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유(有)가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생(生)이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노(老)․병(病)․사(死)․우(憂)․비(悲)․근(勤)․고(苦)가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반야바라밀 가운데 들어가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12연기를 이와 같이 관한다면 어리석음을 버리게 될 것이고, 모든 법에 들어감이 없음을 따르게 될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12연기법을 관한다면 곧 앉을 도량을 얻을 것이며, 이렇게 관하면 곧 살운연을 얻을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이 허공이 다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서 6바라밀을 행하고 12연기를 관한다면 끝내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고 곧 삼야삼불지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여, 모든 선남자․선여인이 보살도를 행하지만 물러나게 되는 것은 모두 반야바라밀을 염(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12연기가 허공과 같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구화구사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아뇩다라삼야삼불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또 수보리여, 모든 보살이 물러나지 않는 것은 모든 구화구사라로써 반야바라밀 가운데 들어가기 때문이다. 허공이 다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서 이렇게 반야바라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지어 12연기를 관하면 인연 없이 생하는 법을 보지 않으며, 항상하여 생하고 멸하지 않는 법도 보지 않는다. 짝하지 않음이 없는 법도 보지 않으며, 또한 나와 남과 수명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또한 지견(知見)이 있음을 보지 않고, 또한 무상(無常)도 보지 않으며, 무아(無我)도 보지 않는다. 또한 깨끗함도 보지 않으며, 깨끗하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지어서 12연기를 관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그때에는 5음에 항상함이 있다거나 무상함이 있다거나 괴로움이 있다거나 즐거움이 있다거나 아(我)가 있다거나 아가 없다거나 깨끗함이 있다거나 깨끗함이 없다거나 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나아가 살운연도 보지 않는다. 또한 법에도 항상함이 있다거나 항상함이 없다거나 괴로움이 있다거나 즐거움이 있다거나 아가 있다거나 아가 없다거나 깨끗함이 있다거나 깨끗함이 없다거나 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가지고서 반야바라밀을 볼 수 있는 법이 있음도 보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도(道)에서 또한 가져서 도를 볼 수 있는 법이 있음도 보지 않는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모든 법에 의지하는 것이 없게 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의지하는 것이 없을 때에는 마왕 파순은 근심하여 즐거워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사람이 처음 부모를 잃은 슬픔과 같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단지 이 세간에 있는 마군만 근심하는 것입니까? 삼천대천찰토 가운데 마군도 또한 근심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천대천찰토 가운데 마군 모두가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각각 있는 그곳에서 스스로 편안할 수 없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할 때는 모든 천신과 마군들은 편안함을 얻을 수가 없다.
수보리여,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불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운다면 곧 모든 바라밀을 구족하게 될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6바라밀을 구족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되, 살운연을 위하는 생각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69. 육도상섭품(六度相攝品)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이 어떻게 단(壇)바라밀을 행하여 시(尸)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하여 살운연을 구하고자 하면 신(身)․구(口)․의(意)를 항상 3사(事)로써 청정하게 하여 중생에게 보시해야 한다. 이것을 보살의 보시바라밀이 시바라밀을 섭취(攝取)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이 어떻게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찬(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할 때에 받는 자가 거역하고 욕하며 꾸짖고 업신여겨 거친 말을 그에게 하더라도 또한 성을 내어 분하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찬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유체(惟逮)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할 때에 받는 자가 욕하거나 업신여겨도 보살은 보시하고자 하는 뜻을 더 한층 가져서 애석해 함이 없어야 하며,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항상 보시하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항상 뜻을 열어 보시하지만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 사람이 와서 찾는 것이 있으면 이와 같이 주어야 한다. 항상 받을 자를 찾으면서 멀고 가까움을 묻지 않아야 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의 보시바라밀이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선(禪)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할 때에 살운연을 구해야 한다. 그 뜻이 어지럽지 않고 나한․벽지불도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보살의 보시바라밀이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할 때는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보시한 것은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다. 비록 보시를 했으나 중생이 증가함이 있거나 감소됨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또한 나의 물건을 얻은 자도 보지 않으며 얻지 못한 자도 보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하여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시바라밀에 머물면서 5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신․구․의의 계를 가져야 한다. 계로써 나한․벽지불지를 비난하지 않고 스스로 계에 머물러서 중생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다. 불여취(不與取)를 범하지도 않으며 범행(梵行)을 범하지도 않고 10계를 범하지도 않는다. 계에 머물러 보시하되 사람이 지닌 계에 따라서 보시하며, 모두 중생과 함께 찬제바라밀을 일으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계를 행할 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몸을 마디마디 해부하여 자를지라도 그 마음에 또한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성내거나 원한을 일으키지 않고 더욱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이 와서 나를 마디마디 해부했지만 큰 이익을 얻은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이 계에 머물면서 찬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계를 행하여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계를 행할 때에 신․구․의가 게으르지 않고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생사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을 끌어올려 감로(甘露)의 땅에 서게 해야 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이 계에 머물면서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계를 행하여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계를 행하여 제1선(禪)에서 제4선에 이르기까지 나한․벽지불지를 의지하지 않고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선에 머물러서 마땅히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이 계에 머물면서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계를 행하여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계를 행할 때는 주지(住止)할 곳이 있는 법을 보지 않고 무(無)로써 있는 법을 보지도 않으며 여여함[如]을 넘어서는 법을 보지도 않는다. 반야바라밀의 구화구사라로써 나한․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이 시바라밀에 머물면서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찬바라밀을 행하여 단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여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일체 중생들이 그를 꾸짖어 욕하며, 업신여기고, 몸을 마디마디 해부하더라도 보살이 인욕지[忍地]에 머물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비록 사람들이 내가 항상 보시한 것을 받지 않더라도 잠시라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들과 함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켜야 한다. 비록 이 원을 지었으나 2처(處)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라고 한다.
어떤 것이 2처인가? 원하는 생각이 없으며, 짓는 모습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인욕바라밀에 머물면서 단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인욕바라밀에 머물면서 지계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여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앉을 때까지 먼저 10악을 범하지 않는다. 살생에서 사견(邪見)에 이르기까지 10사(事)를 범하지 않고 10선(善)을 봉행하며, 그 뜻이 나한․벽지불지를 염(念)하는 생각이 없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함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을 원하며, 또한 삼승에 대해서 그 뜻이 평등하여 집착함이 없다. 이것을 보살이 인욕바라밀에 머물면서 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면서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면서 정진의 뜻을 일으켜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백천 유순, 혹은 백천 국토, 혹은 수없는 국토를 가는데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지계를 지키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는 마땅히 가르쳐서 가지게 할 것이다. 그 응하는 바를 따라서 삼승법으로써 그들을 구제하여 해탈케 해야 한다’라고 한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함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행해야 한다. 이것을 보살이 인욕바라밀에 머물면서 정진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여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인욕바라밀을 행하여 제1선에서 4선(禪)에 이르기까지 선한 뜻을 일으킨다. 이 선한 뜻을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데, 생각하는뜻이 선(禪)이 없는 것과 같이 하며, 또한 선을 행하는 자도 없는 것과 같이 한다. 이것을 보살이 인욕바라밀에 머물면서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여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여 초발심에서 도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이 공적함을 관하며, 모든 법이 청정함을 관하며, 모든 법이 다함을 관해야 한다. 청정한 법으로써 증득하여 도량에 앉아 살운연에 이르고 나서 곧 법륜을 굴린다. 이것을 보살이 인욕바라밀에 머물면서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섭취한 것은 취하지 않은 것과 같고, 버리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어떻게 유체바라밀을 행하여 단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정진하여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신․구․의를 행하여 밥 먹는 순간에도 게으르지 않는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나는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정진바라밀을 얻지도 않을 것이고 머물러 이루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백천 유순을 지나서 한 불국토에서 다른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백천 국토를 지나가는 것은 모든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 사람이라도 구제받지 못한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삼승법으로써 그를 해탈하게 한다. 또한 구제받은 사람은 볼 수도 없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불보살도를 행할 수 없다면 마땅히 벽지불의 일로써 그를 가르쳐야 한다. 만약 벽지불의 일도 행할 수 없는 자라면 마땅히 10선의 일로써 그를 가르쳐야 한다. 나아가 한 사람이라도 얻게 하여 도에 들어가서 이 법을 잘 가지도록 한다. 이와 같이 중생에게 보시하고 나서 다시 보시한 것을 구족함으로써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들과 더불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함께하고 나한․벽지불지[二地]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정진바라밀에 머물면서 단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정진하여 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정진하여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앉을 때까지 스스로 10선(善)을 받들고 사람에게 권하여 행하게 한다. 10선 행함을 보면 그 기쁨을 대신하며, 계(戒) 가운데 머물러서 삼계(三界)의 즐거움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나한․벽지불지를 원하지 않는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더불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함께한다. 또한 세 가지 생각이 없어 과거․미래․현재에 지은 것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정진에 머물면서 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정진하여 찬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정진하여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이를 때에 만약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이 와서 보살을 마디마디 해부하여 취하더라도 보살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누가 나를 베는가? 나를 빼앗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한다.
그리고 다만 생각하기를, ‘나는 큰 이익을 얻었다. 나는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이 몸을 받은 것이다. 지금 중생이 스스로 와서 가져가는구나’라고 한다.
무릇 법을 따르는 자는 마땅히 더욱 기뻐하며 분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들과 더불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함께하고 나한․벽지불지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정진에 머물면서 찬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정진하여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정진하여 제1선에서 4선에 이를 때 4등(等)과 4무형선(無形禪) 또한 끊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곳에서 다만 중생을 구제코자 하여 6도(度)의 법으로써 중생을 해탈케 한다. 한 불국토에서 다른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처님을 찾아뵙고 예경드리며 공양하여 모든 선의 근본을 심는다. 이것을 보살이 정진에 머물면서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정진하여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정진할 때 5바라밀을 보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모습으로써 보지도 않고, 일로써 보지도 않는다. 37품도 보지 않으며, 나아가 살운연 또한 보지 않는다. 모든 법도 보지 않고 또한 일[事]로써 보지도 않으며, 모습[相]으로써 보지도 않는다. 법으로 소굴(巢窟)을 짓지 않으며, 말한 바와 같이 행하는 것 또한 둘이 없다. 이것을 보살이 정진에 머물면서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선바라밀을 행하여 단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4선․4등․4무형선을 행할 때 산란한 생각이 없다. 모든 선(禪)에 머물면서 항상 두 가지 보시를 행한다.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스스로 행하는 것이 두 가지 보시이다. 다시 사람에게 권하여 두 가지 보시를 행하도록 도우며, 항상 두 가지 보시의 덕을 찬탄한다. 다른 사람이 두 가지 보시를 하는 것을 보면 항상 찬탄하여 그 환희를 대신한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더불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함께하지만, 2지(地)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선(禪)바라밀에 머물면서 단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선을 행하여 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선을 행할 때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뜻을 내지 않는다. 남을 해치는 뜻도 내지 않는다. 다만 살운연을 행하는 뜻만을 낸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더불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함께하지만, 2지(地)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선바라밀에 머물면서 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선을 행하여 찬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선(禪)을 행할 때 색(色)을 거품 덩어리와 같이 관하고, 아픔[痛]을 물거품과 같이 관하며, 상(想)을 아지랑이와 같이 관하고, 짓는 행(行)은 파초와 같이 관하고, 식(識)을 허깨비와 같이 관한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서 5음에 견고함이 없음을 알고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서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 나를 베어 찢는 자는 누구인가, 색은 누구인가, 아픔은 누구인가, 상(想)은 누구인가, 행(行)은 누구인가, 식(識)은 누구인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서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를 욕하여 꾸짖고 거친 말을 하여 업신여길지라도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데 누가 욕을 하겠는가?’
이것을 보살이 선에 머물면서 찬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선을 행하여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4선(禪)으로써 선에 나아가며 선에 나아간 덕으로 곧 무량한 변화를 얻는다. 천이(天耳)가 열려 두 가지 소리를 들으며, 뜻으로써 중생의 생각을 알며 스스로 무수한 생사의 일을 안다. 천안(天眼)으로써 중생이 선악을 행함에 따라 얻는 과보를 본다. 5신통에 머물면서 한 불국토에서 다른 불국토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예경드리고 공양하며, 모든 선의 근본을 심고 불국토를 청정히 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더불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함께하지만, 2지(地)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선에 머물면서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선바라밀에 머물면서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선을 행할 때 5음과 6바라밀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또한 37품이 있음을 보지 않고 살운연 또한 있음을 보지 않는다. 유위․무위성 또한 소유가 없으며 짓는 것이 없는 것이다. 비록 짓는 것도 없지만 생하고 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간에 법성은 항상 여여하기 때문에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살운연을 생각하고 살운연에 따라서 행한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이 선바라밀을 행하여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단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 내공에서 내공이 있음을 보지 않고 외공에서 외공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스스로 내외공에서 내외공이 있음을 보지 않고 공공(空空)․대공(大空)․제일최공(第一最空)․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불유공(不有空)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또한 지경공(至竟空)․무저공(無底空)․행공(行空)․성공(性空)․일체제법자공(一切諸法自空)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이 이 14공(空)에 머물고 나면 5음이 공한 것을 보지 않으며, 공하지 않아서 알 수 없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37품이 공한 것을 보지 않으며, 공하지 않아서 알 수 없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나아가 도(道)에서도 또한 공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공하지 않아서 알 수 없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유위․무위성이 공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공하지 않아서 알 수 없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보시를 해야 한다.
사람들과 천상 가운데 보시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공한 것으로 본다. 받는 자와 주는 자가 모두 공하다. 탐하고 질투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편안함을 줄 수 없는 것임을 관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조금도 분별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앉을 때까지 탐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서 또한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 탐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탐하고 질투하는 뜻이 없다. 보살마하살이 존중해야 할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면서 보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2지(地)의 뜻으로는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한․벽지불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2지를 구하는 뜻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앉을 때까지 항상 10선(善)에 머문다. 다시 사람에게 권하여 나아가게 해서 10선을 행하게 한다. 다른 사람이 행하는 것을 보면 또한 찬탄하여 그 기쁨을 대신한다. 이 계(戒)의 뜻을 가지고 모든 법을 비난하지 않는다. 2지 또한 비난하지 않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이겠는가?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면서 시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찬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곧 인욕을 따르는 마음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모든 법은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생사도 없으며, 욕하는 자도 없다. 또한 베는 자도 없으며, 찢는 자도 없으며, 때리고 치는 자도 없으며, 얽어매는 자도 없다’라고 한다.
초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앉을 때 일체 중생이 찾아와서 보살을 때리거나 칼로 베어 절단할지라도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슬프다. 모든 법의 법을 어느 곳을 욕할 것이며, 어느 곳을 때릴 것이며, 어느 곳을 찢을 것인가?’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면서 찬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여 6바라밀을 안립하게 하고, 37품을 세우게 하며, 삼승의 법을 세우게 하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세우게 한다. 중생을 안립하지만 유위법과 무위법을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한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면서 유체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여래삼매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이지삼매(二地三昧)와 보살삼매를 모두 능히 행한다. 8유무선(惟無禪)․9차제선(次第禪)에서 역과 순으로 행하여 삼매를 마치면 이 삼매에서 일어나 곧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에 들어간다.”
“어떤 것이 사자분신삼매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4선과 무형선과 해탈선과 9차제선을 모두 가지고 능히 역과 순으로 모든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자분신삼매에서 일어나면 곧 만법사[단본(丹本)에는 거암(佉闇)으로 되어 있다]삼매(滿法闍三昧)에 들어가서 모든 법이 평등함을 깨닫는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면서 선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방광반야경 제16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70. 구화품(漚惒品)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발심하고 나서 이와 같이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를 행하여 구족하는 데는 얼마나 되는 시간이 걸렸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이 발심하고 나서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겁이 걸린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능히 구화구사라를 행한 보살마하살은 몇 분의 부처님을 공양하여 섬긴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이미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부처님을 공양하여 섬기고 나서 구화구사라를 얻게 된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은 어떤 공덕을 지어서 구화구사라를 구족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지은 공덕은 항상 여섯 가지 바라밀을 구족한 것이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바라밀의 저 6덕(德)을 구족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구화구사라를 행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매우 기이하고 매우 특이합니다. 이 보살이 지은 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능히 구화구사라를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매우 기특할 만한 일이어서 구화구사라를 구족한 것이다. 비유하면 해와 달이 궁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네 곳을 이익되게 하는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다. 두루 다섯 바라밀 가운데 들어가서 많은 것을 이익되게 한다.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인하여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떠나면 다섯 바라밀의 이름을 얻지 못한다.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그 7보(寶)가 없다면 전륜성왕의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떠나면 이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남편이 없는 부인을 범하기 쉬운 것과 같다. 다섯 바라밀도 반야바라밀을 떠나면 마군과 마천(魔天)이 희롱하기가 쉬운 것이다. 다섯 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을 떠나지 않으면 마군과 마천은 이것을 희롱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용맹한 장군이 다섯 가지 병기를 구족하여 항상 그 나라에 있기 때문에 이웃 나라의 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섯 바라밀도 반야바라밀을 떠나지 않으면 모든 마군․마천․전타라인(栴陀羅人)[전타라는 진(晋)나라 말로는 옥졸(獄卒)이니, 살인을 담당하는 자이다], 고집세고 거친 사람, 저돌적인 사람, 보살을 사칭하는 사람과 같은 이런 무리들이 그 편의를 얻지 못한다.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세간을 다스릴 때 모든 좁쌀을 나누어 줌으로써 소국의 왕들이 그 교령을 감히 어김없이 모두 따르는 것과 같다. 다섯 바라밀로부터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곧 살운야(薩云若)에 이른다.
비유하면 많은 시냇물이 흘러 갠지스강으로 들어가고 나서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이 다섯 바라밀을 섭취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비유하면 사람의 오른손이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으며, 다섯 바라밀은 사람의 왼손이 오른손을 돕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큰 갠지스강으로 흘러온 모든 시냇물들이 큰 바다로 들어가 합해져서 한 맛이 되는 것과 같다. 다섯 바라밀도 반야바라밀과 함께 살운야에 들어가 합해져서 하나의 법이 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네 종류의 병사를 거느리고 성왕으로 나설 때 자금륜(紫金輪)을 굴려 항상 앞에서 인도하는데, 성왕의 뜻이 7보를 얻고자 할 때는 자금륜이 곧 머물고, 성왕이 7보를 얻으면 마침내 보시하고, 그 일을 마치면 자금륜은 이에 가지만, 뭇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기에 부족할 때는 자금륜이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도 다섯 바라밀을 인도하여 살운야에 이르게 되면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7보를 가지고 있는데, 금륜(金輪)․주병신(主兵臣)․주장신(主藏臣)인 3보가 항상 앞에서 인도하는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도 항상 다섯 바라밀을 인도하여 살운야에 이르게 한다. 반야바라밀에 머물지만 다섯 바라밀이 항상 나를 따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檀:보시)바라밀․시(尸:지계)바라밀․찬(羼:인욕)바라밀․유체(惟逮:정진)바라밀․선(禪)바라밀 또한 나는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따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 공하여 능히 지을 수도 없고 능히 할 수도 없어서 불 태울 때 아지랑이와 같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법이 공한 것인데 어떻게 보살이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보살은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삼계의 중생은 모두 4전도(顚倒)에 집착하고 있다. 마땅히 구화구사라로써 제도하여 해탈케 해야 한다. 나는 마땅히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여섯 바라밀을 행할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짓는다는 생각도 버리고 안팎에 있는 것을 보시하며 보시할 때에 생각한다.
‘나는 하나도 보시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소유한 제물과 몸은 마땅히 무너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관하면 곧 단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악한 계를 듣지 않는다.
‘나는 또한 10악(惡)의 일을 범하지 않을 것이고, 마땅히 나한․벽지불지[二地]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관하면, 곧 시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뜻이 항상 성을 내어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이 찬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기까지 끝내 게으르고 태만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이 유체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기까지 끝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이 선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지혜의 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보살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닦아 행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반야바라밀이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다섯 바라밀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모든 바라밀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비록 차별이 없다고는 하지만 5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따라서 이름을 얻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인하기 때문에 5바라밀은 각각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수미산 주변의 여러 종류의 색깔이 수미산에 이르면 모두 수미산과 같은 색이 되어 차별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다섯 바라밀도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이름을 얻고 살운연(薩云然)에 들어가며 반야바라밀에 합해짐으로써 차별이 없어진다. 또한 반야바라밀에 들어감으로써 이름도 없어진다. 단(檀)이라는 이름도 없고 시․찬․유체․선이라는 이름도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바라밀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별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차별이 없는데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5바라밀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며 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차별이 없지만 세속은 생사(生死)가 있기 때문에 6바라밀이 세속에 보시하기 위하여 있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생은 일어나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태어나고 죽는 것도 아님을 알지 못한다. 중생과 모든 법은 변제(邊際)가 없고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5바라밀 가운데 가장 존귀한 것이다. 비유하면 염부제의 많은 여인 가운데 옥녀보(玉女寶)가 가장 제일인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바라밀 가운데 최상이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누구의 위신력으로써 반야바라밀을 5바라밀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선의 공덕[善功德]의 법을 지님으로써 처하는 곳이 없이 살운야에 머무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법을 취하는 것이 있거나 버리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을 취하는 것도 없으며, 버리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가질 것도 없으며, 버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어떤 법을 가지지 않고 어떤 법을 버리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5음을 취하지 않고 5음을 버리지 않는다. 37품 나아가 불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5음을 취하는 것이 아니며, 불도를 취하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을 생각[念]하지 않고 불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취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일이 어떻게 그러합니까? 5음을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 불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공덕을 늘릴 수 있겠습니까? 공덕을 늘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바라밀을 구족하겠습니까? 모든 바라밀을 구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운야에 이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5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운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공덕이 늘어나서 살운연을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5음을 생각하지 않고 불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불도를 얻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5음을 생각하지 않고, 불도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각하기 때문에 곧 욕계․색계․무색계에 집착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곧 집착하는 것이 없음[無所著]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가까이하는 것도 없으며 집착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이와 같이 머무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짓고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5음에 머물지 않으며 살운야에도 머물지 않는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머물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들어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에 머무는 것이 있다거나 들어가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들어가는 것이 없어야 하며 마땅히 머무는 것도 없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행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에 머무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나는 반야바라밀을 생각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곧 반야바라밀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멀리 떠난다면 곧 5바라밀을 멀리 떠나는 것이고, 살운야를 멀리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들어가는 것이 없으며, 또한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형상으로써는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안다고 하면 이미 집착에 떨어진 것이며, 반야바라밀의 집착에 떨어지면 곧 모든 법의 집착에 떨어지는 것이다.
보살이 다시 생각하기를 ‘반야바라밀이 5바라밀을 수지하고 아울러 살운야를 수지하게 한다’고 하면 다시 집착에 떨어져서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없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없다.
보살이 다시 생각하기를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아뇩다라삼야삼보의 기별을 받는다’고 하면 이미 다시 집착에 떨어진 것이고, 반야바라밀의 집착에 떨어지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수 없다.
보살이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다섯 바라밀을 행하고 대자비를 행한다’고 하면 다시 집착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 집착에 떨어지면 5바라밀을 이룰 수 없고 대자비를 이룰 수 없다.
보살이 다시 생각하기를 ‘모든 여래께서는 모든 법을 받는 것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이 자연히 깨달음을 얻어 이것을 가지고 중생을 가르치신다’고 하면 다시 집착에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모든 법을 깨닫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에 머물지 않는다. 하물며 법을 깨닫는 자가 있겠느냐? 이것은 옳지 않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이 마땅히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잘못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한다.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다. 있는 바가 없는 법 가운데 취하는 것도 없으며, 깨닫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이 행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만약 있는 바가 없는 법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곧 반야바라밀을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들어가는 것이 없으며, 들어가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을 떠나지 않고, 단바라밀이 단바라밀을 떠나지 않고, 나아가 살운야가 살운야를 떠나지 않는다면 떠나지 않는데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며, 나아가 살운야에 들어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5음에 들어가지도 않으며 5음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또한 5음이 아닌 것도 아니며, 나아가 살운야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또한 5음에 항상함이 있다거나 항상함이 없다거나 괴로움이 있다거나 즐거움이 있다거나 아(我)가 있다거나 아가 없다거나 공함이 있다거나 적정함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나아가 살운야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항상함이 있음․항상함이 없음․괴로움․즐거움․아(我)․공함[空]․적정[寂], 이러한 법은 형상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형상이 없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며 살운야를 행한다.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나설 때, 네 종류의 병사가 모두 따르는 것과 같다. 5바라밀도 모두 반야바라밀을 따라서 살운야에 이르러 머무는 것이다.
비유하면 훌륭한 마부가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몰 때, 먼저 수레가 지나간 길을 잃지 않는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도 5바라밀을 이끌어서 살운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어떤 것이 보살의 도이며, 어떤 것이 보살의 도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문․벽지불의 도는 보살의 도가 아니며, 살운야가 보살의 도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을 위하여 큰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다, 이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말한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은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위하여 일으킨 것이다. 비록 찬탄하여 일을 행하지만 5음을 받지도 않으며, 2지(地)를 받지도 않는다. 반야바라밀은 중생의 마부로서 중생을 이끌어 살운야에 이르게 하며, 2지를 이끌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을 생하는 것도 없으며, 멸하는 것도 없다. 법성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반야바라밀이 모든 법을 생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법을 멸하는 것도 아니라면 보살이 어떻게 6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살운야를 인(因)하기 때문에 6바라밀을 생각하는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더불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함께한다. 보살이 이 공덕을 가지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한다면 곧 6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을 구족하고 자비를 행하는 것을 구족하여 살운야를 이룰 것이다. 보살이 6바라밀을 떠난다면 곧 살운연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6바라밀을 배우고 모든 선의 공덕을 구족하여 살운야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6바라밀을 익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한다. 5음은 익히는 것[習]도 아니며, 익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살운야도 이와 같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6바라밀을 익혀야 한다.
또 수보리여, 보살은 5음에 머무는 것을 익히지 않는다. 나아가 살운야에도 머무는 것을 익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5음과 살운야는 머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고자 하면 마땅히 머무는 것이 없음을 익혀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달콤한 과일을 얻고자 곧 과일 나무를 심어 깊이 뿌리를 묻고 기르며 때에 따라 물을 주고 윤택하게 하면, 싹이 나오고 곧 가지가 나오며 잎이 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 먹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6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6바라밀로써 중생을 거두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이 삼계에서 가장 뛰어나고자 하고,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자 하고, 도량에 앉고자 하고, 법륜을 굴리고자 한다면, 마땅히 6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까?”
바라밀로써 중생을 거두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이 삼계에서 가장 뛰어나고자 하고,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자 하고, 도량에 앉고자 하고, 법륜을 굴리고자 한다면, 마땅이 6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마땅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마땅히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 가운데서 자재하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의 얼굴이다. 비유하면 큰 바다가 만천사류(萬川四流)의 얼굴이 되는 것과 같다. 모든 살운야를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6바라밀을 배워야 하고 마땅히 살운야를 배워야 한다.
비유하면, 활을 잘 쏘는 사람이 활과 화살을 잡으면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마군과 마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 그를 생각하신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보살을 생각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각하는 것에 6바라밀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에 살운야가 있지 않기 때문에 생각한다. 이와 같이 머무는 자는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하신다.
또 수보리여, 또한 5음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며, 나아가 살운야로써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배우는 것이 매우 많지만 배우는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이 많이 있지만 또한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마땅히 배워야 할 법이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설하신 법이 많고 적건 간에 보살은 모두 받아서 행해야 합니다.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면 6바라밀의 일이 많고 적건 간에 마땅히 모두 받아서 행해야 하고 굳게 지녀 항상 관하고 생각하여 뜻이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살은 6바라밀 모두를 마땅히 다 배워야 합니다. 모든 법이 많고 적건 간에 다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법이 많고 적건 간에 다하여 마땅히 모든 법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은 여여한 것이고 살운야도 여여한 것이다. 5음과 살운연이 여여한 것임을 알면 곧 많고 적은 모든 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5음이 여여한 것이고 살운야가 여여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생함이 없다는 것․멸함이 없다는 것․감소함과 상주하여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제(眞際)를 관하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진제를 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제는 제(際)가 아니다. 보살은 제가 아닌 것을 배워 모든 법의 많고 적음을 아는 것이다. 법성을 앎으로써 모든 법의 많고 적음을 아는 것이다. 색성․법성이 단절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법의 많고 적음을 아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법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짝하는 것도 아니며 짝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법이 짝하는 것도 아니며 짝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은 합하는 것도 아니며,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유위성․무위성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합할 수도 없고 합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있는 것은 모두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지어서 모든 법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초발심으로부터 10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서 헤아린 뒤라면 모든 법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살이 근기가 뛰어난 자라야 이 법에 들어갈 수 있다. 근기가 둔한 자는 들어갈 수 없고, 근기가 중간인 자도 들어갈 수 없고, 근기가 많고 적음에 있는 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법에 들어가 배우고자 하는 자가 게으르고 태만한 자라면 들어갈 수 없고 바라는 것이 있는 자도 들어갈 수 없다. 정진하는 자․힘써 알고자 하는 자․아유월치(阿惟越致)에서 살운야에 이른 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은 6바라밀의 가르침을 받아서 곧 살운야에 들어간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마군이 일을 일으켜도 능히 깨달을 것이고 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화구사라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이와 같이 생각하여 들어간다면 시방의 현재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살을 생각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나오시기 때문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한다.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법에 이르셨다. 나도 마땅히 법에 이를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마땅히 이와 같이 익혀야 한다. 이와 같이 익히는 자는 빠르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살운야를 생각하는 것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을 모두 가르쳐서 6바라밀을 다하여 행하도록 하고 수다원․나한․벽지불을 얻게 한다고 해도 이것은 보살이 손가락을 튀기는 동안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5바라밀․수다원․나한․벽지불도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 가운데서 나오셨다. 한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중생을 모두 가르쳐서 보시바라밀에서 성문․벽지불에 이르게 한다고 하더라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여 살운야를 따라서 하루 동안 나아가 백 일․백 겁에 이르기까지 생각하여 행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께서 모두 이 가운데서 나오셔서 보시바라밀․나한․벽지불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과 같이 머문다면 여래께서 이 보살을 아유월치 보살이라고 생각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이미 6바라밀을 행하였으며, 이미 구화구사라에 이른 것이며, 이미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여 섬긴 것이며, 이미 참선지식[眞知識]을 얻은 것이며, 이미 18공을 구족한 것이며, 이미 4무애혜를 이룬 것이며, 이미 6통을 얻은 것이며, 이미 어린아이의 청정한 행과 같이 머물러 모든 원(願)을 만족하게 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을 떠난 것이 아니며, 모든 선한 공덕을 떠난 것이 아니며 모든 불국토를 떠난 것이 아니며, 변재를 잃지 않아서 이미 총지를 얻은 것이며, 모든 근을 구족하여 기별(記莂)을 성취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삼계에서 8난이 있는 모든 곳을 영원히 끊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세속의 일에 잘 들어갈 줄을 안다. 글자가 없는 뜻에 잘 들어간다. 또한 말을 잘하고 침묵을 잘하고 여러 말을 잘하고 한 마디 말도 잘 한다. 또한 남자를 잘 가르치고 여자를 잘 가르친다. 또한 5음을 잘 알고, 열반을 잘 알고, 법의 모습을 잘 알고, 유위․무위성을 잘 알고, 법이 있고 없음을 잘 알고, 자기의 성품과 남의 성품을 잘 알고, 법이 합하고 흩어짐을 잘 알고, 법이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음을 잘 알고, 법이 여여한 것임을 잘 알고, 법이 청정한 법임을 잘 알고, 법이 연(緣)함이 있음과 연함이 없음을 잘 안다. 또한 5음을 잘 알고, 6쇠를 잘 알고, 18성을 잘 알고, 4제(諦)를 잘 알고, 12연기를 잘 안다. 또한 선(禪)을 잘 알고, 4선을 잘 알고 4무형선을 잘 안다. 또한 6바라밀을 잘 알고, 37품을 잘 알고, 살운야를 잘 알고, 유위․무위성을 잘 안다. 또한 몸[身]을 잘 알며, 또한 몸이 없음을 잘 안다. 또한 5음을 생각하는 것을 잘 알고 나아가 살운야를 생각하는 것을 잘 안다. 5음이 스스로 공한 것을 잘 알고 나아가 도(道)에서도 도가 공함을 잘 알며, 도를 믿는 것이 공함을 잘 알고 도를 믿지 않는 것도 공한 것임을 잘 안다.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잘 알아서 고정하여 머물지 않고 변함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음욕․성냄․어리석음을 잘 알고, 음욕․성냄․어리석음이 없음도 잘 안다. 또한 정견을 잘 알고 정견이 아닌 것도 잘 알고 사견도 잘 알고 사견이 아닌 것도 잘 알며, 모든 견(見)을 잘 안다. 명(名)․색(色)을 잘 알고 짓는 것을 잘 알고 존중할 일을 잘 안다. 또한 모습[相]을 잘 알아서 괴로움을 잘 알고, 괴로움의 모임을 잘 알고, 괴로움을 다함을 잘 알고, 괴로움을 멸하는 도를 잘 안다. 또한 지옥을 잘 알고, 아귀를 잘 알고, 축생을 잘 알아서 3악취를 잘 알고, 사람을 잘 알고, 인간 세계[人趣]를 잘 알고, 천상 세계[天趣]를 잘 안다. 또한 성문․벽지불을 잘 알고, 성문․벽지불도를 잘 알고, 살운연을 잘 알고 살운야의 도를 잘 안다. 또한 힘을 잘 알고, 구족력(具足力)을 잘 알고, 갑자기 일어난 것을 잘 알고, 미세한 것을 잘 알고,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대지(大智)를 잘 알고, 무애저지(無涯底智)를 잘 안다. 또한 과거․미래․현재 삼세의 지혜를 잘 알고, 방편을 잘 알아서 중생을 잘 살피고 뜻[義]을 잘 알고, 이해를 잘 하고, 3악취[惡處]를 잘 끊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을 생각하여 반야바라밀의 덕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생각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들어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이 항상함도 있고 항상함도 없고, 견고함도 있고 견고함도 없고 진실함도 있고 진실함도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에 들어감은 마땅히 공관(空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모든 있는 것은 있는 바가 없다고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마땅히 오래도록 여여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초발심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도량에 앉을 때까지 마땅히 이러한 행을 하여야 한다. 마땅히 이런 생각을 하여야 하며, 마땅히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할 때 마땅히 한 뜻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항상 한 뜻으로 반야바라밀을 지극히 생각하여야 하고, 다른 의중이 그 틈을 얻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이와 같이 들어가야 하고,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살운연의 생각을 떠나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생각해야 한다. 마땅히 뜻하는 법과 같이 뜻을 따르고 떠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의 행을 수지하고 반야바라밀의 생각을 수지하고 반야바라밀에 들어감을 수지한다면 살운연에 이르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수지한다면 살운연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생각을 하고 또한 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수지한다면 살운연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생각을 하지 않고 또한 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한다면 살운연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마땅히 무엇으로써 살운연을 얻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여(如如)한 것이다.”
“어떤 것이 여여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제와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이 진제와 같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성(法性)과 같으며, 중생성(衆生性)과 같으며 수성(壽性)과 같으며, 명성(命性)과 같은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법성과 같으며, 중생성과 같으며, 수성과 같으며 명성과 같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我)․수(壽)․명(命)․중생의 성품을 얻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수․명․중생의 성품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중생을 중생이라 이름하겠느냐?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름이 있으면 반야바라밀에 들어갈 수 없다. 이름이 있으면 모든 법에 들어갈 수 없고 살운연에 이를 수 없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6바라밀은 이름할 수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6바라밀과 모든 법은 모두 이름할 수 없으며, 유위․무위의 법과 삼승의 법 또한 이름할 수 없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이름할 수도 없으며, 이름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름이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5취(趣)의 생사와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삼야삼불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중생을 이름할 곳[名處]을 볼 수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생처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5취(趣)와 삼승의 법이 있겠느냐?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모든 법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이름할 처소가 없음을 마땅히 배워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5음을 배우지 않고, 나아가 살운야도 배우지 않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5음을 배워야 하고, 또한 살운야도 배워야 한다. 비록 배우지만 처소가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배우지만 처소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과 살운연 또한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음을 배우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렸다.
“어떤 것이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음을 배우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짓는 것은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배우는 것이다.”
“어떤 것이 마땅히 짓는 것은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배우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습이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스스로 관하는 것과 같이 법을 관하는 것이다. 이것이 짓는 것은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배우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있는 바가 없는 모습[無所有相]을 스스로 관하는 것입니까?”
“5음을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고, 6정(情)을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고, 내외(內外)를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고, 유무(有無)를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고, 선(禪)을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고, 멸탈선(滅脫禪)을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고, 37품을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고, 도를 공하다고 관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마땅히 스스로 모습[相]과 법(法)을 공하다고 관해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5음이 공하고, 나아가 도 또한 공한 것이라면 보살은 마땅히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이룸[成]이 없는 행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이룸이 없는 행을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얻을 수가 없다. 보살 또한 얻을 수 없고 행 또한 얻을 수 없다. 또한 행하는 자도 없고 마땅히 행하는 것도 없고 이미 행한 자도 없다. 이것은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반야바라밀의 이룸이 없는 행이다. 왜냐하면 모든 희론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이와 같이 이룸이 없는 행을 하는 것이라면 처음 발심한 자는 마땅히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발심할 때부터 마땅히 의지하는 법이 없어야 한다. 6바라밀을 배워서 행하지만 모두 마땅히 의지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나아가 살운연도 마땅히 생각하지만 의지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어떤 것이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가 의지하는 것이고, 한 가지가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이고 어떤 것이 한 가지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안(眼)과 색(色)을 두 가지라 하고, 6입(入)과 염법(念法)을 두 가지라하고 도와 부처님을 두 가지라 한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의지함이 있는 가운데서 의지함이 없는 것이며, 의지함이 없는 가운데서 의지함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지함이 있는 가운데서 의지함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의지함이 없는 가운데서 의지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의지함과 의지함이 없음은 하나같이 평등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의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의지하는 데서 의지함이 없이 평등하다면 이것을 의지함이 없다고 한다.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운다면 이것을 의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의지하여 행하는 것도 아니고 의지하지 않고 행하는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모든 경지를 구족하여 살운연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의지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모든 경지를 구족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의지하는 것이 아니며, 도(道) 또한 의지하는 것이 없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또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볼 수 없고 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도를 행하는 자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법을 분별하여 이것은 5음, 이것은 도라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5음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며, 도를 의지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씀드렸다.
“만약 보살이 5음을 의지하지도 않고 도를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6바라밀을 구족하여 보살위(菩薩位)를 넘어서는 것입니까? 어떻게 불국토를 청정히 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며, 어떻게 살운연에 이르는 것입니까? 어떻게 법륜을 굴리며, 어떻게 마땅히 불사를 짓는 것입니까? 어떻게 중생의 생사를 해탈시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또한 5음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또한 도를 위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렸다.
“누가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는 바가 없음에 나아가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짓는 것이 없고 반야바라밀도 짓는 것이 없고 이루는 것도 없다. 도 또한 짓는 것이 없고 이루는 것도 없다. 보살 또한 짓는 것이 없고 이루는 것도 없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반야바라밀은 마땅히 짓는 것도 없으며, 마땅히 이룬 것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짓는 것도 없으며, 이룬 것도 없다면 또한 삼승의 처소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짓는 것도 없으며 이룬 것도 없는 법처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에 5음에 들어가서 5음에 의지하여 스스로 높이고 도를 의지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자가 ‘나는 마땅히 도를 얻어 중생을 해탈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부처님께서도 5안(眼)으로써도 오히려 5음과 도를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눈도 없는 어리석은 범부가 5음에 들어가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5안으로써 중생을 얻을 수도 없고, 구제한 것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며, 어떻게 중생을 삼제(三際)에 처하게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아유삼불(阿惟三佛)을 얻은 것을 볼 수 없다. 나는 중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볼 수도 없다. 삼제 또한 얻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몸이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을 다만 경계할 뿐이다. 설한 가르침이 세속으로서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최고 제일의(第一義)의 무언(無言)의 가르침은 아닌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최고의 제일요의(第一要義)에 머물지 않으면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4전도(顚倒)에서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일요의에서도 얻을 수 없고 4전도에서도 얻을 수 없다면 장차 세존께서도 없을 것이고, 정각에 이르지도 못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께서는 정각에 이르지만 유위성(有爲性)에도 머물지 않고 무위성에도 머물지 않는다. 비유하면 여래께서 화작(化作)한 여래가 머무는 것이 없이 오고 가며 머물고 앉고, 또한 6바라밀․선(禪)․4등․4무형선․5통․37품․3탈문(脫門)․내외공․유무공․8해탈․9차제선․10력․4무소외․부처님의 18법을 행하고, 또한 법륜을 굴리며, 또한 이 화불(化佛)이 다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화작하여 그들에게 ‘구제하는 것도 있고, 중생도 있고, 삼제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다.
“이 화불이 교화한 삼제와 중생이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모든 법을 화작한 것과 같아서 해탈하는 것이 없는 것임을 아신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하며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모든 법이 화작한 것과 같다면, 여래께서 화신(化身)한 것과 여래의 몸이 어떻게 다르며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다. 왜냐하면 여래 또한 짓는 것이 있고 화작한 것 또한 짓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씀드렸다.
“여래께서 계시지 않더라도 화작한 것이 홀로 능히 짓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능히 짓는 것이 있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에 수선두(須扇頭)[수선두란 진나라 말로는 극정여래(極淨如來)라 한다]라고 이름하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는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반열반을 나타내시고 화불을 지으셨는데, 화불이 1겁을 머물면서 불사를 행하고 1겁이 지난 후에 보살행을 하는 자에게 기별을 주고 다시 반열반에 들었으나 사람들은 모두 반열반했다고 부르고 화작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화작한 것은 또한 생하는 것도 없으며, 열반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마땅히 모든 법이 화작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화작한 것이 지은 것과 여래께서 지으신 것이 차별이 없다면 지은 공덕 또한 어떻게 다하여 보시하는 은덕이 되는 것입니까? 만약 화불을 공양하고, 여래를 공양한다면 그 공양하는 자는 반열반에 이르며 그 복덕이 다할 수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께서는 모든 천신과 사람을 위하여 복전을 짓는다. 화불 여래 또한 모든 자들의 복전이 되는 것으로서 다름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와 화불 여래를 공양하여 지은 공덕은 그렇다 치고, 만약 어떤 사람이 자비의 뜻으로 항상 염불(念佛)한다면 그 복덕은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이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자비의 뜻으로 지은 복덕은 그렇다 치고, 만약 어떤 사람이 단지 한 웅큼의 꽃을 허공에 뿌리고 잠시 동안 염불한다면 그 복덕 또한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이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꽃을 뿌려서 지은 복덕은 그렇다 치고, 어떤 사람이 단지 나무불을 외운다면 그 공덕의 복덕 또한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이르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께서 베푸시는 복덕은 매우 크고 넓은 것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이 다 평등하여 화불(化佛)과 불(佛)이 차별이 없는 것이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모든 법의 법 또한 마땅히 멸하는 것도 아니며, 버리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법 또한 마땅히 차별이 없는 것이며, 나아가 모든 법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마땅히 차별이 없다면 여래께서는 어떻게 이것은 색이고 이것은 통(痛:受)이고, 이것은 상(想)이고, 이것은 행이고, 이것은 식(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것은 내법(內法)이고, 이것은 외법이고,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고, 이것은 번뇌[漏]이고, 이것은 번뇌가 아니고, 이것은 도이고, 이것은 속(俗)이고, 이것은 생(生)이고, 이것은 사(死)이고, 이것은 유위법이고, 이것은 무위법이라고 설하시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장차 분별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다만 이름으로써 중생에게 헤아려 보이고서 알게 할 뿐이지 분별하는 것은 없다.”
“세존이시여, 이 명호(名號)가 없는 법을 어떻게 이름[名]과 모습[相]으로써 중생을 가르쳐서 알게 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행하는 것 또한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고, 들어감도 없다. 행하는 것은 괴로움도 없고, 모습도 없고, 들어감이 없다. 모든 부처님과 제자 또한 모습에 들어가지 않는다. 만약 이름이 이름에 들어감이 있다면 모습도 마땅히 모습에 들어갈 것이고, 공도 마땅히 공에 들어갈 것이고, 무상(無相)도 마땅히 무상에 들어갈 것이고, 무원(無願)도 마땅히 무원에 들어갈 것이고, 진제도 마땅히 진제에 들어갈 것이고, 법성도 마땅히 법성에 들어갈 것이고, 무위법도 마땅히 무위법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법은 다만 문자로써일 뿐 문자 또한 문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이름과 모습으로써 머물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만 마땅히 이름과 모습 가운데 들어가지 않는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유위법이 단지 이름과 모습으로써 머문다면,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도의 뜻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하여 여러 가지 힘든 괴로움을 받으며, 6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하여 선과 무형선을 행하는 것이며, 4등과 37품을 행하는 것입니까? 3탈문으로 대자비를 구족하는 이 모두는 누구를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름과 모습으로써 모습을 헤아리기 때문에 모든 유위 또한 이름과 모습으로써는 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보살도를 행하여 살운야에 이르며, 법륜을 굴리며, 삼승법으로써 중생을 해탈시키는 것이다. 이 이름과 모습 또한 생하고 멸함이 없으며 머무는 바와 같이 다름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살운연을 설하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가 설한 것은 살운연과 살운연의 일이며, 도혜(道慧)의 일을 설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어떤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살운야는 모든 성문․벽지불의 일이다. 도혜의 일[道慧事]은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이다. 살운야의 일은 모든 여래의 일이다.”
다시 말씀드렸다.
“어떤 것이 살운야로서 성문․벽지불의 일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내외법(內外法)을 나한․벽지불은 다 안다. 비록 내외법을 알지만 여러 도의 일[衆道事]에는 머물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보살의 도혜(道慧)의 일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일체의 모든 도를 마땅히 모두 설하고, 모두 아는 것이다. 또한 삼승도를 마땅히 구족하여 알고 마땅히 3도(道)의 일을 짓는 것이고, 진제(眞際)의 깨달음도 받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렸다.
“보살은 어떻게 불사(佛事)를 구족하지만 진제를 깨닫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사를 아직 구족하지 못했고 중생을 아직 교화하지 못했다면 마땅히 진제의 깨달음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씀드렸다.
“보살은 마땅히 도에 머무는 가운데 진제의 깨달음을 받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어떻게 도가 없는 데서는 가능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세존이시여, 도와 도 아닌 데서는 가능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도(道)도 아니고, 도가 아닌 것도 아닌 데서는 가능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네가 본래 도에 머물러 모든 번뇌[漏]를 다하였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도가 아닌 데서 모든 번뇌를 다하였느냐?”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도와 도가 아닌 것으로써 모든 번뇌를 다하였느냐?”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도와 도가 아닌 것과 도가 아닌 것도 아닌 것으로써 모든 번뇌를 다하였느냐?”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머무는 바가 없이 모든 번뇌를 멸할 것입니다. 비록 모든 번뇌를 멸하였으나, 머무는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도 또한 이와 같다. 비록 진제를 깨닫지만 머무는 것이 없는 것이다. 비록 살운야․살운야의 일을 말하나 또한 하나의 일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하나의 일이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적정(寂淨)한 것이 이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말한 것과 소유하고 있는 형모(形貌)의 상(像)은 일어나고 멸하는 것임을 부처님께서는 다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살운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살운야와 살운야의 일과 도혜(道慧)의 일인 이 세 구(句)가 습의 실마리[習緖]를 없애는 데 차별이 있습니까? 습의 실마리가 다함이 있고 남음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습의 실마리가 다하는 데는 차별이 없다. 다만 부처님만이 모든 습의 실마리를 다할 뿐이며, 성문은 습의 실마리를 모두 다하지는 못한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습의 실마리를 다하지 않고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세존이시여, 열반은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세존이시여, 만약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모든 습의 실마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습(習)은 습의 실마리가 아니다. 비록 음욕․성냄․어리석음이 있지만 범부의 몸이 짓는 것이며, 이것이 줄어들지 않고 습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습의 실마리가 없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도 또한 있는 바가 없으며, 열반도 있는 바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이것은 수다원이고, 이것은 아라한이고, 이것은 벽지불이고, 이것은 삼야삼불이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무위(無爲)로 인하여 이름을 두어, 이것은 수다원이고 이것은 아라한이고, 이것은 벽지불이고, 이것은 삼야삼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무위로부터 이름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단지 언설로써 이것을 말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최고의 제일의(第一義)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제일요(第一要) 가운데서는 여러 행하는 것도 없으며 여러 보시하는 것도 없다. 애착을 끊기 위하여 후제(後際)를 세우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상(法相)은 각각 스스로 공하여 진제(眞際)를 알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후제가 있음을 알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모든 법상은 공하여 진제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후제가 있겠느냐? 모든 법상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는 이들을 위하여 전제와 후제를 설한 것일 뿐 모든 법상은 전제와 후제가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모든 법상이 공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법을 공으로써 행하기 때문에 모든 법에 들어가는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내법에도 들어가지 않고 외법에도 들어가지 않고, 유위․무위법에도 들어가지 않고, 삼승법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다시 물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이라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으로 반야바라밀이라 말씀하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제일의를 얻어 모든 법을 제도하고, 최고의 제일의로써 삼승의 도를 제도한다.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도 모두 반야바라밀을 타고서 피안에 이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의 번뇌[塵]를 초월하여 견고함과 중요한 뜻을 얻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진제․법성․여여함이 모두 반야바라밀 가운데 들어간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이 모든 법에서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볼 수 있다거나 볼 수 없다거나 걸림이 있다거나 걸림이 없다는 것도 이 모든 법에서 합해지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은 형상이 없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상대[對]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가지 모양[一相]으로서 곧 모양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과 모든 변재를 생하기 때문이다. 모든 천신․세간의 마군․원수․다른 도를 구하는 자[異學]․성문․벽지불 이 모든 것들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마군․원수와 모든 2지(地)는 모두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뜻 가운데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또 수보리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뜻 가운데서 무상(無常)의 뜻과 고(苦)․집(集)의 뜻을 알고, 멸(滅)․도(道)의 뜻을 알고, 소멸의 뜻을 알고, 일어나지 않는 뜻을 알고, 법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하나를 보고, 두루 뜻을 알고 스스로 뜻을 알고 타인의 뜻을 알아야 하고, 말한 대로 행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에서 마땅히 이러한 뜻을 알아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뜻과 뜻 아닌 것으로써 얻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에서 마땅히 모든 뜻을 익힐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의 깊은 뜻은 반야바라밀을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보살은 음욕․성냄․어리석음에서는 뜻이 감소하기 때문에 마땅히 사견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 또한 62견도 행하지 않는다. 그것이 뜻이 없음을 아는 것 또한 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욕․성냄․어리석음은 법에서와 같이 증가하는 것도 없고 감소하는 것도 없으며, 모든 사견의 뜻 또한 마찬가지로 증가하는 것도 없고 감소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5음이 더하는 것이 있고 더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 또한 마땅히 행하지 않는다. 나아가 도(道)도 더하는 것이 있고 더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 또한 마땅히 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때에 더하는 것이 있고 더하는 것이 없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간에 모든 법은 담연(湛然)하기 때문에 더하는 것도 없으며, 감소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더함이 있고 더함이 없음을 버려야 한다. 마땅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반야바라밀은 더하는 것도 없으며 덜어지는 것도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유위법은 항상 한가하여 짓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 또한 더하는 것도 없으며, 덜어지는 것도 없다.”
“세존이시여, 모든 유위의 뜻은 모든 부처님과 불제자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유위법은 모두 모든 부처님과 불제자이다. 그것은 더하지 않음으로써, 또한 감소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지음[作]이 일어남도 아니며, 짓지 않음이 일어남도 아닌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 또한 이와 같이 더함이 일어남도 아니며 감소함이 일어남도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유위 아닌 것을 따르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배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보살은 유위 아닌 것을 따라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인데 그것은 두 가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한 법[一法]이 한 법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세존이시여, 한 법이 아니라면 두 가지 법[二法]을 따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한 법을 따르는 것도 아니며, 두 가지 법을 따르는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바가 없는 것에 이르는 것 또한 얻지 않기 때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71. 종수품(種樹品)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중생이 없는 것이지만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위하여 고통을 마다 않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합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공중에 나무를 심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살운야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중생을 위하여 살운야에 이르고자 하면, 중생을 위하는 생각으로써 그들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해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나무를 심고자 할 때, 나무의 뿌리․줄기․가지․잎․꽃․열매를 알지 못하지만, 그 묘목을 심고 때에 따라 물을 주고 길러서 점점 줄기․가지․잎․꽃․과실이 갖추어져서, 그것을 취하여 사용함으로써 과실을 얻고 먹을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보살은 일체 중생으로써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이다. 차례로 6바라밀을 행하고 살운야에 이르며, 가지․줄기․잎․꽃․열매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잎으로써 3악취를 제도하고 꽃이 있음으로써 곧 4성(性)과 존자와 모든 4천(天)과 나아가 무사상무사상혜천(無思想無思想慧天)이 있는 것이다. 또한 열매는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어 살운연에 이르게 됨으로써 곧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과․벽지불도가 있게 하는 것과 같다. 보살이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다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과(果)인 것이다. 이 과처(果處)로써 중생이 삼승에서 비록 아유삼불을 이루게 하지만 중생처를 볼 수도 없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도 따를 수 없으며, 아유삼불을 이룰 수 있는 처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은 또한 여래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오고 감이 있기 때문에 곧 3악취를 끊고 8난처를 모두 끊고 모든 빈궁하고 하천한 곳을 모두 끊고, 삼계처를 모두 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이 보살은 여래와 같아서 다름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이 만약 싫어하여 게으르고 태만하다면 끝내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도에 이르지 못하며, 세간에도 또한 성문․벽지불이 없을 것이며 3악취와 삼계에서 끊을 때가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여래와 같으며 네가 말한 것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여함으로써 여래가 있음을 알고, 벽지불이 있음을 알고, 여러 현성(賢聖)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여여함으로써 5음이 있음을 알고, 유위․무위성(無爲性)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모든 여여함 또한 여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여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 여여함을 배워서 살운야에 이른 것이며, 이 가운데서 왔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는 것이다. 여여함과 평등하기 때문에 이 보살을 곧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여여함을 배워야 한다. 반야바라밀의 여여함을 배우고 나면 마땅히 일체 모든 법의 여여함을 배워야 한다. 모든 법의 여여함을 배우고 나면 마땅히 모든 법을 구족하는 여여함을 배워야 한다. 모든 법을 구족하는 여여함을 배우고 나면 모든 여여함에 이르러 자재를 얻으며, 여여한 자재에 이르고 나면 모든 법근(法根)이 선해지고, 모든 법근이 선해지고 나면 곧 중생이 취(趣)를 따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취를 알고 나면 곧 혜원(慧願)을 구족한다. 혜원을 구족하고 나면 곧 삼세의 혜[三世慧]를 청정하게 한다. 삼세의 혜를 청정하게 하고 나서 곧 보살도를 행한다. 보살도를 행하고 나서 곧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나서 곧 불국토를 청정하게 한다.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나서 곧 살운야에 이른다. 살운야에 이르고 나서 곧 법륜을 굴린다. 법륜을 굴리고 나서 중생을 삼승법에 안립시킨다. 중생을 안립시키고 나서 무여열반인 반열반에 들게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스스로 모든 선(善)의 덕과 타인의 덕을 관하여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켜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천과 아수륜(阿須倫)과 세간 사람들 모두는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예경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모든 천과 세간 사람들은 모두 마땅히 보살을 예경해야 한다.”
“세존이시여, 처음 발심한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면 얼마나 많은 복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삼천대천찰토 가운데 있는 중생을 가르쳐서 모두 나한․벽지불도에 서게 하였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복을 얻음이 참으로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킨 것만 못하다. 보살의 그 복은 배(倍)나 많으며 백 배․천 배․거억만(巨億萬) 배나 많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찰토 가운데 있는 중생을 가르쳐서 힐지(黠地)․신지(信地)․팔지(八地)․견지(見地)․박지(薄地)․정지(淨地)․이판자(已辦地)․벽지불지에 서게 하였다 해도 그 복은 뜻을 일으킨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게 한 것만 못한 것이다. 보살의 그 복은 매우 많으며 백 배․천 배․거억만 배나 많다.
수보리여, 삼천대천찰토 가운데 있는 중생이 모두 처음 발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복은 정정위(正定位)에 들어간 보살의 공덕만 못한 것이다. 정정위 보살의 공덕이 백천억만 배나 위에 있는 것이다.
또한 삼천대천찰토에 가득 차게 보살을 성취하게 하였다 해도 그 복은 여래의 복에 비하면 백천억만 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새로 발심한 보살은 마땅히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살운야를 생각해야 한다.”
“세존이시여, 살운야는 어떤 것을 힘써야 하며, 어떤 것을 존귀한 모습이나 형상으로 여깁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살운야는 있는 바가 없으며, 생각[想]도 없으며, 생각이 없는 것도 없다. 또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다만 살운야만 있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5음․내외공․유무공․4선․4등․4무형선․37품․3삼매․8유무(惟無)․9차제선․10종력․4무소외․대자대비․4무애혜․부처님의 18법․6신통과 모든 유위․무위성 또한 있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살운야는 스스로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있는 바가 없는 것이 공이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있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짓는 것이 없으면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의 있는 것과 있는 바가 없는 것 모두가 공한 것이다.
또 수보리여, 모든 법은 공하여 모양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다. 모든 법은 여여하며, 모든 법은 진제와 같으며, 모든 법은 법성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의 있는 바는 모두 있는 바가 없는 것으로서 모두 공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의 있는 바는 모두 있는 바가 없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 처음 발심한 보살의 구화구사라로써 6바라밀을 행하고 4선․4등․4무형선을 행하며, 37품을 행하며, 내외공과 유무공을 행하며, 18법을 행하며, 살운야를 행하여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공한 법에서 짓는 것이 있다면, 곧 이것이 구화구사라이다. 보살은 능히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불국토와 중생의 있는 바는 모두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안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불도를 위하여 인연을 짓는 것이다. 나아가 살운야 또한 불도를 위하여 인연을 짓는 것이다. 보살은 도의 일[道事]이 있는 바도 모두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안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도량을 위하여 인연을 짓는 것이다. 나아가 부처님의 10력․4무소외․4무애혜․4등․부처님의 18법은 살운야혜를 위하여 도의 일을 구족하는 것이다. 한 때 한 뜻이면서 지혜로써 한 때에 합함으로써 곧 살운야에 이르게 된다. 이때에 지은 모든 습의 실마리가 다 멸하고 좇아 생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불안(佛眼)을 가지고 삼천대천찰토를 관찰하되 오히려 있는 바가 없는 것을 보지 않는데, 하물며 있는 바를 보겠느냐?
수보리여, 이와 같이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법에서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며 또한 있는 바가 없는 것도 보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구화구사라이다. 오히려 있는 바가 없는 것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있는 것을 볼 수 있겠느냐?
또한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는 보시가 있는 바도 알지 못하며, 받는 자가 있는 바도 알지 못하며, 도의 뜻[道意]이 있는 바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살운야가 있지 않는 바도 알지 못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마땅히 깨달음에 이를 것과 이미 깨달음에 이른 것이 있는 바가 없음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는 것으로서 부처님께서 지으신 것도 아니며, 제자 벽지불이 지은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짓는 것이 없으며 모든 짓는 것을 떠났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없는 법으로써 법을 떠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비록 법을 말하지만 법을 떠난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법이 법상(法相)을 떠났다면 어떻게 법을 알며 법을 떠나겠습니까? 모든 법의 있는 바는 있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있는 바가 없는 법은 있는 바가 없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있는 법[有法]은 있는 법을 알 수 없고, 있는 법은 있는 바가 없는 법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있는 바가 없는 법은 있는 법을 알 수 없습니다. 보살은 아는 것이 없는 법에서 어떻게 있는 법․있는 바가 없는 법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세간의 일을 익히기 때문에 있는 바가 있는 것․있는 바가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제일의 최고 요의[第一最要義]는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간의 일과 최고의 요의는 다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름이 없다. 세간의 일도 여여하며, 최고의 요의도 여여하다. 중생은 이 여여한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간의 일에 있는 바가 있는 것과 있는 바가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수보리여, 중생은 5음에 모습이 있는 것이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분별을 지어 설법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있는 바가 없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72. 보살행품(菩薩行品)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행하는 보살행은 어떤 일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행이란 도[道]의 행이다. 그러므로 보살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행은 어느 곳에서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에서 공을 행하고 내외법․6바라밀에서 공을 행하고 내외공과 유무공에서 공을 행하고, 4선에서 공을 행하고 4무형선에서 공을 행하고, 4등에서 공을 행하고, 37품에서 공을 행하고, 3삼매에서 공을 행하고, 부처님의 10력에서 공을 행하고, 4무소외에서 공을 행하고, 4무애(無礙)에서 공을 행하고, 18법에서 공을 행하고, 불국토를 청정히 하는 것을 행하고 중생교화를 행하고, 문자에 들어가서 공을 행하고, 문자에 들어가지 않고서 공을 행하고, 다린니(陀鄰尼)에서 공을 행하고, 유위․무위성에서 공을 행한다. 행을 짓지만 도가 둘이 되도록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도의 행이며,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의 공의 행[空行]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부처님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를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한다. 또 수보리여, 법을 자세히 살피는 데 이르며 법을 깨닫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말하며, 법을 자세히 살피는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또 수보리여, 모든 법을 진실로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한 법을 깨닫고 여여함을 깨닫고 법을 깨달았지만 단지 문자로써 이름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깨달은 뜻은 그 뜻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여여함과 그 하나는 머물러 변이(變易)가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수보리여, 단지 이름과 모습으로써 부처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 여래의 도이기 때문에 깨달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다 함께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도를 행함이 6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살운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어떤 선(善)을 이루는 것이며, 어떤 공덕을 늘리는 것입니까? 생(生)도 있고, 멸도 있으며, 집착도 있고, 단멸도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도를 행하고 6바라밀을 행하여 살운야에 이르는 것은 모든 법에서 이루는 것도 없으며, 무너뜨리는 것도 없으며, 늘리는 것도 없으며, 멸하는 것도 없으며, 집착하는 것도 없으며, 끊는 것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도를 행할 때는 모든 법에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법을 이루지도 않으며, 무너뜨리지도 않으며, 늘리거나 줄이지도 않는다. 또한 생하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니며,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지도 않는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모든 법에 떨어지는 것도 없으며 관하는 것도 없다면, 어떻게 6바라밀을 수지(受持)하여 스스로 모습[相]에서 공을 행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4선을 행하며, 어떻게 4등․4공정을 행하며, 어떻게 37품과 3탈문을 행하며 어떻게 10종력과 부처님의 18법을 행하며, 어떻게 대자대비를 행하며, 어떻게 보살의 10주를 행하며, 어떻게 2지(地)를 넘어가며, 어떻게 보살위를 넘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살은 두 가지 일로써가 아니기 때문에 6바라밀을 행할 수 있으며 또한 두 가지 일로써가 아니기 때문에 살운야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두 가지 일로써가 아니기 때문에 6바라밀을 행할 수 있으며 일체종지를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초발심에서 후발심에 이르며, 어떻게 공덕을 늘릴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일로써 행하는 자가 있다면, 이들은 공덕이 늘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일을 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초발심에서 후발심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일로써가 아니기 때문에 공덕을 늘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과 인간들은 보살을 2지(地)에 떨어뜨려 무너뜨릴 수 없으며, 그 나머지 악한 무리들도 보살이 6바라밀과 살운야를 행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공덕을 위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덕으로써가 아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고, 또한 공덕이 없는 것으로써가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보살은 마땅히 모든 부처님을 공양해야 하며, 마땅히 모든 선한 공덕을 구족해야 하며, 마땅히 참된 선지식을 얻어야 한다. 그리하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어떻게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며, 공덕을 구족하며 참된 선지식을 얻으며, 이에 살운야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처음 발심할 때부터 항상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다.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12부경(部經)을 항상 마땅히 수지한다. 굳게 수지하고 생각함으로써 곧 다린니를 얻고 모든 걸림이 없음을 일으킨다. 걸림이 없는 것을 일으키고 나면 태어나는 곳에서 살운야에 이르며, 알고 지니고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을 끝내 잃지 않는다. 또한 악취와 여덟 곳의 한가하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지 않으며, 곧 청정한 뜻을 받고 청정한 뜻을 얻고 나서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한다. 이 공덕으로써 끝내 참된 선지식을 떠나지 않으며, 끝내 모든 부처님․보살․참된 사람․부처님을 찬탄하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마땅히 모든 부처님을 공양해야 하고, 마땅히 모든 법을 구족해야 하고 모든 공덕을 받아들이고 마땅히 참된 선지식을 따라야 한다.”
73. 당득진지식품(當得眞知識品)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지 않고 모든 공덕을 구족하지 않고 참된 선지식을 만나지 않아도 능히 살운야에 이르지 못함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여래를 공양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공덕을 구족하지 않음이 없으며, 참선지식을 얻지 않음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비록 모든 공덕을 짓고 비록 참된 선지식을 얻었다 해도 오히려 살운야에 이르지 못하는데, 하물며 부처님을 공양하지 않고 공덕을 짓지 않고, 참된 선지식을 얻지 않고 살운야에 이르고자 해서야 되겠느냐? 이 일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부처님을 공양해야 한다. 마땅히 공덕을 지어야 하며, 마땅히 참된 선지식을 얻어야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무엇 때문에 마땅히 부처님을 공양하며, 모든 공덕을 지으며, 참된 선지식을 얻어서 이에 살운야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화구사라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을 따라서 구화구사라의 일을 듣지 않음으로써 공덕을 구족하지 못하고 참된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마땅히 어떤 구화구사라를 구족해야 마땅히 살운야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처음 발심했을 때부터 살운야의 뜻을 가지고 단(檀)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삼승에 보시하고, 사람과 사람 아닌 자들에게 보시하여 모두 살운야의 생각을 구족해야 한다. 또한 보시했다는 생각도 없어야 하며, 받는 자라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 또한 단바라밀을 행했다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있는 것이 없으며 생하는 것도 없으며 멸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전환(轉還)이 없음을 관찰하여 보며, 모든 법의 모습을 모두 제도하지만 모든 법이 짓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러한 구화구사라를 구족함으로써 곧 모든 공덕이 늘어나는 것이다. 공덕이 늘어나고 나서 곧 단바라밀을 행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히 한다. 또한 스스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 단지 중생을 이익되게 할 뿐 지은 바는 그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 단바라밀을 행하지만 단지 모든 중생을 해탈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방광반야경 제17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74. 교화중생품(敎化衆生品)
“다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살운연(薩云然)의 생각으로써 처음 뜻을 일으킬 때부터 살운야(薩云若:살운연)의 생각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시(尸)바라밀의 뜻을 행하여 처음부터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그에 휘감겨도 안 된다. 모든 것이 도에 들어가지 않고 일을 만드는 것이다. 질투․악계(惡戒)․성내는 뜻․게으른 것․어지러운 뜻․어리석은 것․한을 갖는 것은 스스로 나라는 아(我)에 집착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지(地)의 뜻은 모두 다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상(法相)이 다 공한 줄 알며, 모든 법이 다 소유가 없으며 이룰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모두 전환이 없음을 관하여 보고 모든 법상을 알아서 모든 세상의 일을 제도해야 한다. 무위(無爲)에 처하여 구화구사라를 구족하여 공덕을 증익해야 한다. 시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토를 청정히 해야 한다. 또한 세상에서 시바라밀의 과보를 받지 않고 반야바라밀에 이른다. 다만 일체를 교화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해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4선․4등․4무형선을 행하려면, 비록 모든 선을 행하나 선복(禪福)은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화구사라로써 모든 선상(禪相)이 다 공한 것을 알며, 또한 전환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구화구사라를 행해야 한다. 관(觀)을 행하고 청정을 행하여도 수다원에 나가지 않으며, 수다원과를 취하지 않고 아라한에 이르러도 또한 그 과보를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법상이 공한 줄 알고 법은 전환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37품을 행하여 2지(地)를 초월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생함이 없는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8유무선(惟無禪)과 9차제(次第)를 행해야 한다. 또한 수다원도를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법상이 다 공한 줄을 알기 때문이며, 전환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부처님의 10력의 업[佛十力業]과 4무소외와 4무애혜․부처님의 18법과 대자대비를 행하여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 그런 다음 살운야에 나아간다. 보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그 지혜가 심히 광대하고서야 깊은 법을 행하는 것인데 어째서 그 과보를 받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보살은 소유처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전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소유처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전환하지도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소유가 없는 곳에서는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는다. 5음의 소유에서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으며, 6바라밀의 소유에서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으며, 모든 선(禪)․4등(等)의 소유에서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으며, 37품의 소유에서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으며, 3탈문의 소유에서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으며, 대자대비의 소유에서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는다. 그리고 10력․18법의 소유에서 움직이거나 전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소유가 다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무소유에서 소유를 깨달음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소유를 가지고 소유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무소유를 가지고 무소유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장차 이를 곳도 없으며 깨달을 곳도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깨달음에 이르름이 있으나 이 4구(句)를 쓰지 않는다.”
“세존이시여, 이 깨달음에 이르름은 마땅히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깨달음에 이르름은 소유도 아니며 또한 소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에 이르름은 희언(戱言)도 아니며, 또한 희언이 아닌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의 희언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에 상(常)과 무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살의 희언이며, 5음은 고․낙이라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다. 5음은 나의 것[我所]이며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다. 5음이 청정하며 청정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며, 5음을 분별하여 안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며, 4제(諦)를 안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다. 4선․4등․4무형선․37품․총(總) 3탈문․8유무(惟無)․9차제선(次第禪)을 생각하는 것이 보살의 희언이며, 내가 수다원도를 얻어서 아라한․벽지불도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다. 내가 보살의 10주를 구족했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다. 내가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했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며, 내가 10력․4무소외․4무애혜․부처님의 18법을 구족했다고 하여도 보살의 희언이다. 내가 살운야에 이르렀다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다. 내가 모든 습의 실마리[習緖]를 다했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희언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5음에 상(常)과 무상이 있다는 것 또한 희론이 아니며 또한 희론이 아닌 것도 아니며, 또한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상(常)과 무상이 있다는 것 또한 희론이 아니며, 또한 희론이 아닌 것도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유에서는 또한 소유가 희론이 아니며, 무소유에서 또한 무소유가 희언이 아니며, 소유․무소유 중에 또한 희론도 아니며, 희론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5음과 살운야는 희언이 아닌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희론을 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어떤 것이 5음은 희론이 아니며, 나아가 살운야도 희론이 아닌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5음은 무소유이며 살운야도 또한 무소유이다. 모든 것이 소유가 없다고 하는 것은 다 희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5음과 살운야는 다 희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이와 같이 하여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보살위(菩薩位)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있는 바를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보살위를 얻을 수 있습니까? 2지(地)를 쓰는 것입니까, 불도(佛道)를 쓰는 것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보살위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2도(道)를 쓰지 않으며, 또한 불도를 쓰지 않는다. 두루 모든 도를 배워서 보살위에 오른다. 제8현성(賢聖)에서 두루 모든 도를 배워서 비록 지(地)에 있으나 과보의 증득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이 모든 도를 다 행하여 보살위를 얻었으나 아직 살운야에 이르지 못했으며, 금강삼매를 얻지 못하였다. 공덕을 얻을 때에 살운야에 이르는 것을 구족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두루 모든 도를 배워서 위(位)에 오르면 보살이 다시 제8지(地)에서 수다원도를 취하는 것입니까? 사다함지에서 사다함도를 얻는 것입니까? 아나함지에서 아나함도를 얻는 것입니까? 아라한지에서 아라한도를 얻는 것입니까? 벽지불지에서 벽지불도를 얻는 것입니까? 불지에서 불도를 얻는 것입니까? 이 모든 도가 각각 스스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이 두루 모든 도를 배워서 보살위에 오르는 것입니까? 만약 보살이 이 8지(地)에서 8도(道)를 받는다고 하면, 이것은 마침내 그런 것이 아니며, 보살위에서 곧 살운연에 이르는 것 또한 그러하지 않은 것입니까? 만약 보살이 성문․벽지불도를 얻으면 살운연에 이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제가 어떻게 보살이 두루 모든 도에 들어가서 보살위에 오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8지에서 수다원과 나한․벽지불도를 얻어서 살운야에 이르지 않는다. 수보리여,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킬 때부터 항상 6바라밀을 행하며, 지혜로써 8지를 본다. 어떤 것이 8지인가? 정지(淨地)․성지(性地)․사현성팔지(四賢聖八地)․관지(觀地)․박지(薄地)․무구지(無垢地)․이판지(已辦地)․벽지불지이다. 지혜로써 관하면 8지를 초월하며, 도혜(道慧)로써 관하면 보살위를 초월한다. 이 위를 초월하면 살운야혜(薩云若慧)로써 모든 습의 실마리를 버리게 된다.
수보리여, 제8지는 보살의 인(忍)이며, 수다원․사다함․아나함의 지혜로써 습의 실마리를 제거한다. 또한 이것이 나한의 혜로 관하는 것이며, 또한 보살․벽지불의 혜이며, 보살의 인(忍)이다. 성문․벽지불도를 구족하면 도혜로써 보살위에 오르며, 살운야혜로써 모든 습의 실마리를 제거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두루 모든 도를 구족해야 한다. 그러면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阿惟三佛)을 이루며, 아유삼불을 이루면 중생을 위하여 도지(道地)를 행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설법하신 삼승과 성문․벽지불도와 불도는 어떤 것이 도혜(道慧)의 도가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모든 도를 일으켜 모든 도를 청정히 해야 한다. 두루 중생을 관하며, 상(相)과 모상(貌像)을 다 깨닫고 다 알아야 한다. 이미 두루 알았으면 마땅히 일체 분류(分流)를 가르쳐서 널리 교화해야 한다. 두루 음성을 채집하여 큰 소리를 얻어서 두루 삼천대천찰토에 메아리가 서로 응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두루 모든 도를 구족해야 한다. 도혜(道慧)는 중생의 뜻을 다 아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지옥을 알아야 하며, 다시 지옥의 취(趣)도 알아야 한다. 또한 중생의 죄의 과보도 알아야 하며, 마땅히 지옥의 인연과 죄를 짓는 과보도 끊어야 한다. 아귀와 축생도 또한 알아야 하며, 아귀와 축생의 인연과 인과응보를 짓는 것도 다 끊어야 한다. 마땅히 진타라(眞陀羅)와 마후륵(摩睺勒)과 모든 용과 열차(閱叉)를 알아야 한다. 마땅히 사람의 인연과 인도(人道)의 과보를 알아야 하며, 또한 사천왕으로부터 위로 삼십삼천에 이르는 하늘[天]을 알아야 한다. 천인(天人)의 인연과 천인의 과보도 알아야 한다. 마땅히 37품법과 3탈문법(脫門法)을 알아야 한다. 또한 10력을 알아야 하며, 4선․4등․4공정과 대자대비와 부처님의 18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다 알았으면, 모든 중생을 삼승의 도에 세워야 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도혜를 구족한 것이다. 보살이 이것을 배웠으면 모든 중생이 원하는 뜻을 알아야 한다. 이미 나의 원이 설법에 응한 것과 같음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단절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널리 중생의 근(根)과 생사의 취(趣)를 알기 때문이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보살은 응당 법을 행해야 한다. 37품을 행해야 하며, 2지(地)를 행해야 한다. 반야바라밀 중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과 37품과 도법(道法)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법은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한 가지 모양[一相]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모양이란 곧 모양이 없는 것[無相]인데 어떻게 도(道)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 법은 또한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한 가지 모양이란 형상도 없습니다. 한 가지 모양이란 곧 모양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허공과 같아서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이르는 바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이 공한 법은 이르는 것도 없으며 나아갈 바도 없는 것이다. 중생은 법상(法相)이 소유가 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37품과 모든 법에 이르기까지 이를 곳과 판단할 것이 있음을 설하셨다. 비록 그러하나 수보리여, 5음이 있는 것과 6바라밀과 내공․외공에서 유무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37품․4선․4등과 4공정과 4무애혜와 4무소외와 부처님의 10력과 18불공법과 대자대비와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저 현성(賢聖)의 법률은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상대가 없으니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세속 인연으로써 이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니 제일의 최고의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두루 모든 도를 배워 지혜로써 세속의 습관을 따라서 관해야 한다. 법에는 응용해야 할 것과 응용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것이 보살이 응용해야 할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이 응용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나한․벽지불도는 지혜로 배우는 것을 관함에 있어 응용할 바가 아니다. 살운야혜로써 마땅히 모든 법을 응용해야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현성(賢聖)의 법률에서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현성의 법률을 말씀하셨습니다. 현성의 법률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성문․벽지불과 보살마하살과 여래․무소착․등정각도 또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더불어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여우처럼 의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여우처럼 의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계행에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욕계․색계․무색계에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밝지 못한 지혜와 완강함과 사나움에도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흉포한 것에도 합하는 것이 아니며,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4선․4등․4공정․37품․대자대비와 유위․무위성에도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없으니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이며, 무색(無色)이 무색과 함께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볼 수 없는 것은 볼 수 없는 것과 함께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없는 것은 상대가 없는 것과 함께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상(一相)은 일상과 함께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무상(無相)은 무상과 함께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이것을 현성의 법률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형상이 없는 것은 볼 수 없으며, 상대가 없어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인 것은 보살의 무상의 제도[度]이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 배워야 하며, 이와 같이 배웠으면 마땅히 모든 법은 상(相)이 없음을 증득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색․성․향․미․촉을 배우지 않고 법상(法相)을 아는 것입니까? 지․수․화․풍· 공(空)·식(識)의 상(相)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6바라밀의 상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유․무가 공한 상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4선과 4등 및 4공정과 37품과 3탈문의 상과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부처님의 18법과 대자대비와 4제의 상과 현성의 상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12인연의 상의 역순(逆順) 경계를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유위․무위성의 상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이 모든 법의 무상(無相)에서 또한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짓는 바의 상[所作相] 또한 배우지 않고, 보살은 마땅히 어떻게 2지를 지나서 보살위에 오르는 것입니까? 보살위에 오르면 어떻게 살운야에 나아가며, 살운야에 이르면 어떻게 법륜을 굴리며, 법륜을 굴렸으면 어떻게 삼승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법에 상(相)이 있다고 하면 보살은 마땅히 모든 법상을 배워야 한다. 모든 법은 형상이 없어서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상대가 없으니 일상(一相)이며, 일상(一相)은 곧 무상(無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또한 상을 배우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무상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이와 같이 짓는 것인지 여쭙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앞에 상(相)이 있으면 뒤에 곧 상이 있다. 전에도 법에 상이 없으므로 후에도 또한 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또한 상을 배우지 않으며, 또한 무상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있든 부처님이 없든 일상(一相)의 성품은 상주하여 여여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상(相)도 아니며, 상이 없는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염(念)해야 하겠습니까? 보살이 만약 반야바라밀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2지를 초월하지 못하며, 2지를 초월하지 못하면 보살위를 초월하지 못하며, 능히 보살위를 지나가지 못하면 무소종생법인을 얻지 못하며, 무소종생법인을 얻지 못하면 보살의 신통을 얻지 못하며, 신통을 얻지 못하면 불토를 청정히 하여 중생을 교화하지 못하며, 살운야에 이르지 못하며, 살운야에 이르지 못하면 법륜을 굴리지 못하며, 법륜을 굴리지 못하면 중생을 삼승법에서 안립(安立)하지 못하며, 또한 중생을 3복지(福地)에 안립하지 못하니, 첫째는 시(施)이며, 둘째는 계(戒)이며, 셋째는 모든 선법(善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모든 법은 또한 무상(無相)도 아니며, 또한 일상(一相)도 아니다. 무상(無相)의 법인데 법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이란 보살의 생각이 아니다. 보살의 생각 없음[無念]이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생각 없음이 반야바라밀의 상(相)이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에서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상이다.”
“어떤 것이 모든 법에서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6정(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색․성․향․미․세활(細滑)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정(不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4선․4등과 4공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3존(尊)을 생각하지 않으며, 3복(福)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멸진(滅盡)을 생각하지 않으며, 안반수의(安般守意:호흡)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무상상(無常相)․고상(苦相)․비아상(非我相)을 생각하지 않으며, 4전도(顚倒)․12인연을 생각하지 않으며, 나라는 아상과 수명상과 지견상(知見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3탈문을 생각하지 않으며, 37품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8유무․9차제선을 생각하지 않으며 4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10혜(慧)를 생각하지 않으며, 6바라밀을 생각하지 않으며, 내외공과 유무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10력을 생각하지 않으며 4무소외․4무애혜․부처님의 18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대자대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수다원과 나한․벽지불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살운야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며, 모든 습의 실마리를 끊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5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모든 습의 실마리를 끊어서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5음이 무소유인 것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상(相)이 있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이 있는 바를 생각하지 않으며, 도가 없는 처소가 있는 바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이 있다면 반야바라밀의 생각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상이 있는 것은 6바라밀이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탐(貪)이 있는 것은 또한 6바라밀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모든 있음[有]에의 집착이라 이름한다. 얽매여서 집착하면 제도되어 해탈함이 없다.
수보리여, 유(有)에 집착하면 37도품의 생각이 없으며, 또한 3탈문의 생각이 없으며, 또한 살운야의 생각이 없다. 있는 것에 얽매여서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유(有)가 되며, 어떤 것이 유가 없는 것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둘이 있으면 유가 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둘이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상이 둘이 되며, 12쇠상(衰相)이 둘이 되며, 불상(佛相)이 있으면 둘이 되며, 도상(道相)과 유위․무위상이 있으면 둘이 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일체의 상 나아가 상이 없는 것이 다 둘이 된다. 둘이 있는 데 나아가면 곧 있게 되며, 있으면 곧 세간 중생이 있으니, 생로병사와 슬픔과 괴로움을 여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둘이 있다는 것은 6바라밀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이르는 것도 없는 것이며,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인데, 하물며 5음과 살운야를 버리는 것이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생각함이 없는데 어떻게 수다원을 얻으며, 나한․벽지불도에 이를 것이며, 어떻게 모든 습의 실마리를 여읨을 얻겠느냐?”
75. 무견요품(無堅要品)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상(相)이 있으면 인(忍)을 따르지 못하며,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상이 없다면 마땅히 인을 따를 수 있습니까? 성문 8지(地)에 이르겠습니까? 벽지불지에 이르겠습니까? 마땅히 보살지에 이르겠습니까? 제도하여 해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능히 도의 생각을 얻겠습니까? 능히 나한․벽지불에 대한 습의 실마리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보살로 하여금 보살위에 오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보살위에 오르면 살운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살운야를 얻으면 모든 습의 실마리를 멸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뜻이 없고 뜻을 생하지 않으면 이 법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인데, 살운야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상이 없으면 인(忍)을 따르는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모든 습의 실마리를 제거할 수도 없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은 상(相)을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5음에 상이 있는 것입니까? 또한 살운야에 상이 있는 것입니까?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상이 있으며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상이 없는 것입니까? 6쇠(衰)가 있고 6쇠가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가까움이 있고 가까움이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깨달음이 있고 깨달음을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애(愛)가 있고 애가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수(受)가 있고 수가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유(有)가 있고 유가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생(生)이 있고 생이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사(死)가 있고 사가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슬픔과 고통이 있고 슬픔과 고통이 다한 상이 있는 것입니까?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이 다한 상이 있습니까? 4제(諦)가 있고 4제가 다한 상이 있습니까? 살운야가 있고 살운야가 다한 상이 있습니까? 습의 실마리가 있고 습의 실마리가 다한 상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은 상(相)이 있는 것도 아니며, 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인(忍)을 따르면 곧 상이 없는 것이다. 이 보살이 상이 없으면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유상(有相)이 있지 않으면 무상도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과보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상이 있으면 이 보살의 도이며, 상이 없으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법의 소유가 다 소유가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소유가 없다면 어떻게 무소유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법에서 자재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본래 보살이 되기 위하여 6바라밀을 행하였으며, 제1선(禪)에서 제4선에 이르기까지 선의 성품을 관하여 아만 높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선을 의지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선을 음미하지도 않았다. 4선의 일이 적정하여 희망하는 바가 없었다. 이미 선에서 편안히 만족하였으며 곧 신통에 처하게 되었다. 천안으로 사무치게 보고 천이(天耳)로 사무치게 들었다. 타인의 숙명(宿命)이 오게 된 이유를 알며, 스스로의 숙명도 알아 곧 비행(飛行)도 하였다. 비록 그러했으나 신통으로써 아만을 높이지 않았으며, 6통을 음미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았으며 분별하는 것도 없었다.
수보리여, 나는 일합상(一合相)의 지혜에 응해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 것이다. 곧 4제(諦)를 깨달아서 여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하여 중생을 삼승에 처하게 하였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어떻게 무소유 중에서 4선을 일으키며, 6통이 무소유이며 중생이 무소유인데 여래는 어떻게 중생을 삼승에 안립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나머지 모든 비법(非法)의 일에 소유와 무소유가 있었다면 나는 보살이었을 때에 유무 중에서 4선(禪)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또한 소유가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소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보살도를 행할 때에 4선을 행하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신통 가운데 마땅히 소유와 무소유가 있었다면 나는 마침내 신통 가운데에서 소유와 무소유를 깨달아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신통에서 소유가 무소유인 줄을 알았으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의 소유가 무소유이며 선(禪)의 5통(通)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다면 보살이 어떻게 무소유법 중에서 일찍이 알지 못한 것을 능히 알며 일찍이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게 되며 이 중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이미 과거에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약간의 불보살을 공양하였으며,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소유가 없는 중에는 부처님이 있는 것도 아니며, 벽지불이 있는 것도 아니며, 무소유 중에는 나한도 있지 않으며, 무소유 중에는 여러 현성도 있지 않으며, 무소유 중에서는 모발(毛髮)이 있는 것을 허락함도 없다는 것을 들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소유가 없는 중에는 또한 수다원이 있지 않으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다 소유가 없다. 모든 법은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혹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었거나 내가 혹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했거나, 가령 내가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었다면 모든 행상(行相)과 중생이 있는 것을 나는 마땅히 무상(無相)한 지(地)에서 세울 것이다.’
수보리여, 모든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면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곧 익힌 적이 없는 것을 익히고 배운 적이 없는 것과 받은 적이 없는 것을 곧 배우고 받는다. 모든 과거의 부처님 처소에서 배우되 먼저 6바라밀을 배우고 사람에게 권하여 6바라밀을 행하게 한다. 사람이 행하는 것을 보면 그 기쁨을 대신한다. 보시를 하면 탐하는 허물이 없으므로 곧 큰 부를 얻는다. 보시를 했으므로 곧 계(戒)를 지키며, 곧 천상과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는다. 보시를 했으므로 곧 삼매를 얻는다.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며, 인욕․정진․선을 했기 때문에 곧 지혜품(智慧品)과 해탈품을 얻어서 해탈혜품을 보게 된다. 이 모든 품과 6바라밀을 지녀 2지(地)를 지녀서 보살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위에 올랐으면, 곧 불토를 청정히 하며 중생의 교화해야 하며, 살운야에 나아가서 법륜을 굴리며, 삼승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먼저 보시바라밀을 일으켜야 한다. 다음으로 모든 혜를 얻는데, 이것 또한 얻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實)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킨 이래로 스스로 계를 지키고 사람에게 권하여 계를 지키게 해야 한다. 타인이 계를 지키는 것을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계를 지킴으로써 천상과 사람에게서 부호(富豪)를 얻는다. 가난한 자에게는 재물로 보시한다. 다시 계삼매로 지혜․해탈견․해탈혜를 세워야 한다. 5품(品)의 덕으로 2지를 나와서 보살위에 올라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해야 한다. 곧 일찍이 알지 못한 것과 배우지 못한 것과 익히지 못한 것에 이르면 모두 배우고 알고 익힌다. 왜냐하면 익히고자 하는 것도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인욕을 행하고 타인에게 권하여 행하게 해야 한다. 타인이 인욕을 행하는 것을 보면 그 기쁨을 대신한다. 중생을 배부르고 만족하게 해주되 재물로써 안립한다. 혹은 5품의 덕으로써 2지를 지나서 보살위에 오른다. 왜냐하면 보시한 것에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스스로 정진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잘 정진하게 해야 한다. 타인이 정진하는 것을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다시 재물을 중생에게 공급하여 만족하게 해준다. 지계․인욕․5품의 덕으로 2지를 나와서 보살위에 오르게 된다.
왜냐하면 보시한 것에 또한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4선․4등․4무형정(無形定)을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행하게 한다. 타인이 행하는 것을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선(禪)에 머물러 보시하기에 궁핍하면 지혜․해탈견해를 가르쳐서 2지를 나와 보살위에 오르게 한다.
왜냐하면 소유한다는 것은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처음 발심한 이후부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재물로써 중생에게 만족하게 공급해 주고 계삼매․지혜․해탈견혜를 세움으로써 스스로 6도(度)를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행하게 한다. 타인이 행하는 것을 보면 그 기쁨을 대신한다. 구화구사라로써 2지를 지나 보살위에 오르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다.
왜냐하면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로부터 본래 배우지 않은 것과 본래 알지 못한 것과 본래 응하지 못한 것을 얻어 모두 배우고 모두 알고 모두 응할 바를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배우지 못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처음 발심한 이후부터 항상 살운야를 생각하여 모든 유무의 일을 알아야 한다. 곧 3존의 행을 생각하며, 항상 천행(天行)과 계념(戒念)과 시념(施念)을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염불인가? 염불은 색․통․상․행․식으로써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5음은 견요(堅要)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견요가 없는 것은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부처의 생각[佛念]이란 무념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무소착․등정각은 마땅히 32상과 80종호로써 생각하지 않는다. 마땅히 금색광명으로써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형상은 견요가 없기 때문이다. 견요가 없음은 무소유이다. 염불은 무념이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무소착․등정각은 마땅히 계성(戒性)과 지혜품과 삼매품과 해탈품과 견해탈품이 아니다. 마땅히 5품으로써 여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견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견고함이 없는 것은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염불이란 무념으로 해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를 생각하는 것은 10력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4무소외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4등․대자대비․부처님의 18법․4무애혜의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견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견실하지 않은 것은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염불이란 무념으로 해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여래를 생각하는 것은 12인연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견요가 없기 때문이다. 견요가 없는 것은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염불이란 무념으로 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부처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차례로 배우고 아직 응하지 못하는 것을 익힐 줄 알고 구족하여 모두 따라야 한다. 모든 도에 이르는 것도 응당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37품과 3삼매를 구족해야 한다. 곧 살운야혜를 구족하며 곧 소유와 무소유에 응하여 견고요(堅固要)를 깨달아야 하며, 곧 소유와 무소유처를 얻어야 한다.
수보리여, 어떤 것이 법념(法念)인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마땅히 선악법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마땅히 수기를 받는 것과 수기를 받지 못함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마땅히 속법(俗法)과 도법(道法)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유루(有漏)․무루법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현법(賢法)․우법(愚法)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삼계법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유위․무위성법(無爲性法)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견요가 없으며 견요가 없는 것은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법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법념(法念)을 배워서 소유와 무소유에 응하면 곧 살운야에 이르며, 곧 소유와 무소유처에 이른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념을 생각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어떻게 승가를 생각해야 하는가?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항상 승가를 생각하되, 무념으로 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승가를 생각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어떻게 계를 생각해야 하는가?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처음 뜻을 일으킨 이후부터 계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며, 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계를 잘 섭수하여 마땅히 유무를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응하는 바에 따르게 되며, 곧 살운야에 이르며, 유․무의 처소가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어떻게 보시를 생각해야 하는가? 소유와 무소유에 응당 베풀어야 한다. 재물로 보시해 주고 법으로써 보시하되, 그 가운데 어지러운 뜻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또한 베푼 것과 베풂이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비록 몸과 목숨과 뼈마디를 가지고 보시했어도 그 가운데 또한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견고한 요점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견요가 없는 것은 곧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항상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룸에 이르기까지 보시를 생각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어떻게 하늘을 생각해야 하는가?
모든 수다원은 사천상(四天上)에 태어나서 6천(天)에 이른다. 하늘에 태어나는 모든 것은 견요가 없는 것이다. 견요가 없다는 것은 무소유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따라 살운야를 이루는 데 이르러야 한다.
수보리여, 모든 아나함이 색천(色天)과 무색천에 태어나는 것도 또한 견요가 없는 것이다. 견요가 없다는 것은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따라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데 이르러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항상 6념(念)를 생각하여 그 응하는 바를 따라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따라야 할 것과 익혀야 할 것을 배워서 모든 공덕을 이루어야 한다. 마땅히 내외공과 유무공을 배워야 한다. 마땅히 37품과 대자대비를 배워야 하며, 보살도행을 배워야 한다. 모두 유무의 필요에 이르러도 오히려 머리털만큼의 상도 없는데, 하물며 살운야의 상이겠느냐?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차례를 따라 응하여 얻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소유한 것이 모두 없다면 5음․6쇠(衰) 또한 없으며, 모든 성품이 없으며, 37품이 없으며, 살운야혜가 또한 없으며, 또한 불(佛)이 없으며, 법이 없으며, 비구승이 없으며, 또한 도가 없으며, 과보도 없으며, 집착과 단절도 없으며, 또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없어 모든 법이 또한 다 소유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소유한 것이 무소유라면 얻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얻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모든 법이 소유한 것이 다 무소유인데 어찌 5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법에 여우 같은 의심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미래의 세상에 삼승도의 가(家)를 위한 것입니다. 모든 법이 소유한 것이 무소유라고 말한다면, 집착하는 자는 누구이며, 끊는 자는 누구입니까?”
“집착과 단절의 일을 알지 못하면 계를 폐하고 계를 헐어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니, 이와 같이 계행을 파한 자는 각각 3악처(惡處)에 나아갈 것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감히 여우처럼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미래의 세상을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여래께 여쭈었습니다.”
76. 무의상품(無倚相品)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소유가 다 무소유라면 보살은 어떤 것을 보아 중생을 위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소유에서 다 무소유를 쓰기 때문에 능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의지하고 집착함이 있으면 해탈을 얻기 어렵다. 상(相)에 의지함이 있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으며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상에 의지함이 없으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깨달았으면 이것은 곧 의지함이 없는 것이다. 차별의 법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지함이 없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곧 일체 법성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의지함이 없으면 깨달음에 이를 것도 없으며 아뇩다라삼야삼보도 있는 것이 아닌데, 무슨 인연으로 보살은 제1주(住)에서 10주에 이르는 것입니까? 무슨 인연으로 무소종생법인을 얻는 것이며, 어떤 인연으로 5통과 6바라밀의 덕이 있는 것이며, 모든 법의 덕을 받는 것이며, 불국토를 섭취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며, 일체가 반열반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지함이 없는 것은 5통의 과보와 동등한 것이며, 10주(住)와 평등한 것이며, 6바라밀과 동등한 것이며,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반열반에 이르는 것이며 공양이 단절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의지함이 없는 것과 5통과 6바라밀은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차별이 없음을 말하면 차별이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세 가지 일엔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보시에 의지해도 안 되며, 자기에게 의지해도 안 되며, 받을 것에 의지해도 안 된다. 반야바라밀에 이르러도 또한 의지함이 없어야 하며, 신통을 행하여도 또한 의지함이 없어야 하며, 37품을 행해도 또한 의지함이 없어야 하며, 3삼매를 행해도 또한 의지함이 없어야 하며,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히 해도 또한 의지함이 없어야 하며, 모든 불법을 깨달았어도 또한 의지함이 없어야 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의지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모든 마군과 마군의 하늘이 무너뜨리지 못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떻게 한 뜻으로 6바라밀을 수지해야 하며, 4선․4등․대자대비와 4공정․4무애혜․4무소외․37품․총 3탈문․부처님의 10종력과 부처님의 18법을 수지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80종호를 수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보시․지계․인욕․정진과 모든 선정의 일을 함은 모두 반야바라밀로써 행한다. 그리고 3탈문과 4등과 대자대비와 37품에 이르기까지 함과 생각함이 다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3삼매와 부처님의 10종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부처님의 18법과 80종호가 다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한 뜻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떻게 6바라밀에서 80종호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수지해야 합니까?”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6바라밀을 행하되 처음부터 두 가지 상이 없어야 하며, 80종호에 이르기까지 또한 두 가지 상이 없어야 한다.”
“세존이시여, 6바라밀에서 80종호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두 가지 상을 갖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두 다 총지(總持)와 모든 바라밀과 37품을 구족하여 보시를 행해야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번뇌가 없는 생각으로 단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무루(無漏)에서 이렇게 생각을 한다.
‘나는 누구이며, 보시할 것은 어떤 물건이며, 받는 자는 누구인가?’
이 세 가지 일에서 상(相)이 없는 생각을 수지해야 한다. 이때에는 또한 뜻과 베푸는 것과 받는 자를 보지 않아야 한다. 18법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상이 없어야 하며, 또한 6바라밀도 보지 않아야 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80종호에 이르기까지도 상이 없어야 하며, 보는 것이 없어야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상(無相)과 무소작법(無所作法)으로써 어떻게 6바라밀을 구족하며, 어떻게 37품을 구족하며 어떻게 3공(空)과 10종력을 구족하며, 어떻게 4무소외와 18법을 구족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상이 없는 보시로써 중생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야 한다. 혹은 피부 근육과 처자와 나라 전역의 진기한 보배를 찾으면 소유하고 있는 재물과 곡식을 모두 사람에게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보시를 할 때에 혹은 어떤 사람이 와서 보살에게 ‘이 상(相)이 없는 보시를 누가 한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이어서 보시가 단절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보시를 가지고 중생과 함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뤄야 한다. 또한 상을 생각함도 없어야 하며, 또한 보시한다는 생각도 없어야 하며, 또한 보시한 물건에 대한 생각도 없어야 하며, 또한 받는 자에 대한 생각도 없어야 한다.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도 보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는 것 일체가 모두 다 공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누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하면 곧 참으로 행하는 것이다. 곧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며, 이것이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37품과 3탈문을 구족하는 것이며, 이것이 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면 보시한 과보를 받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제6천왕이 무엇을 하고자 하면 단지 생각만 해도 곧 이르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이 다만 뜻으로 생각만 해도 모든 법을 다 구족함에 이른다. 보시한 덕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면 모든 천(天)과 사람이 충만하게 배부를 것이다. 구화구사라로써 단바라밀을 행하고 중생을 삼승법에 안립시키면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단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떻게 시바라밀을 구족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현성이 무루(無漏) 도법의 계(戒)를 알아 허물지도 않고 어지럽히지도 않으며 현성의 계를 받든다. 모든 법에 대해 비평하지 않고, 또한 5음을 비평하지도 않으며, 또한 32상을 비평하지도 않으며, 또한 4성(性)을 비평하지도 않으며, 또한 사천왕에서 삼십삼천에 이르기까지 비평하지 않으며, 수다원에서 나한․벽지불에 이르기까지 비평하지 않으며, 또한 전륜성왕도 비평하지 않아야 한다. 공덕을 짓는 것은 다만 중생과 더불어 살운야를 함께하고자 함이다. 상도 아니며, 의지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둘을 써서도 안 된다. 다만 세상 일을 위하는 것이지, 가장 요의(要義)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계를 구족하여 구화구사라를 써서 4선(禪)을 일으킨다. 탐하지 않으면 천안(天眼)을 받는다. 천안으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관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룸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천안을 여의지 않는다. 천이(天耳)가 청정하면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경법을 다 들어서 들은 바를 잃지 않는다. 스스로 변재를 얻게 되어 모든 부처님의 뜻을 다 안다. 모든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곧 일체 중생을 요익하게 한다. 숙명(宿命)을 아는 지혜를 가져서 모든 하는 일에서 근본행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루법으로써 중생을 삼승에 서게 하며, 중생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주어야 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상이 없이 시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어떻게 인욕을 구족해야 하는가?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만약 중생이 와서 칼과 몽둥이로 보살을 찌르고 쳐도 보살은 끝내 뜻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며 마땅히 두 가지 인(忍)을 일으켜야 하니, 하나는 인욕이요, 둘은 무소종생법인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칼로 찌르고 나에게 몽둥이를 가하는 자는 누구이며, 받는 자는 누구인가?’
이렇게 마땅히 법상을 관해야 한다. 법상을 관하는 것도 있는 바가 없으며 관할 바도 없다. 관할 것이 없으면 곧 무소종생법인을 얻게 된다. 두 가지 인에 머물면 곧 4선과 4등과 4공정을 얻게 된다. 곧 37품과 3탈문을 구족하며, 곧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를 구족하게 된다. 보살이 이미 이 법에 머물게 되면 곧 신통을 얻고 이 2지가 능히 미칠 바가 아니다. 신통을 구족하면 곧 6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천안의 지혜로 시방의 부처님을 보며,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생각을 잊지 않는다.
다시 천이(天耳)의 지혜로 시방 부처님이 설하신 교법을 듣고 모든 부처님을 다 알게 된다. 모든 부처님이 생각하는 것에 모두 다시 이르고 중생의 뜻을 알아 여여하게 설법에 응하게 된다. 스스로 아는 숙명의 지혜로 중생의 공덕을 알아서 모든 선의 근본의 공덕을 가지고 부지런히 중생에게 권한다.
누진(漏盡)의 지혜로써 중생을 삼승에 서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를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토를 청정히 해야 한다. 살운야의 혜를 구족하고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면 법륜을 굴려야 한다.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찬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유체(惟逮)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인가?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몸과 뜻으로 정진하여 4선을 구족해야 한다. 4선을 일으키면 곧 수없는 신통을 얻어서 변화하여 오고 갈 수 있어 일월(日月)을 만질 수 있다. 이 정진을 가지고 두루 시방의 수없는 찰토에 이르러서 일체의 소유한 공양드릴 도구로 모든 부처님을 공양드려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면 모든 천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경한다. 보살은 반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신족(神足)으로써 시방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의 법언(法言)을 들으며, 들은 법문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어서 마침내 청정한 불국토를 잊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여 살운야를 구족한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유체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무루도법(無漏道法)으로 의정진(意精進)을 구족해야 한다. 입으로 악을 말하지 않으며 몸으로 악을 행하지 않으며 뜻으로 악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고락과 유상(有常)․무상을 비판하지 않으며, 유아(有我)․무아를 비판하지 않으며, 유위(有爲)․무위를 비판하지 않으며, 삼계를 비판하지 않으며, 4선과 4공정․4등․3탈문․37품을 비판하지 않으며, 18법에 이르기까지 또한 비판할 것이 없다. 또한 성문․벽지불을 비판하지 않으며, 성문․벽지불도를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보살을 비판하지 않으며, 보살지(菩薩地)를 비판하지 않으며, 5취(趣)를 비판하지 않으며, 또한 하늘이며 사람이고 축생이며 이 지옥이고 아귀인 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수다원도이며 나한도며 벽지불도를 분별하지 않는다. 또한 보살도를 분별하지 않으며, 살운야를 분별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법과 모든 도를 비평하지 않으며, 또한 분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중요한 것이 없으며, 비판할 것이 없으며, 또한 분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의정진(意精進)을 구족하면 곧 일체의 마군과 원수인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하고 나고서도 중생을 보지 않는다. 정진을 구족하고 나면 또한 정진을 보지 않는다. 불법을 구족하면, 또한 불법을 보지 않는다.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 또한 보는 것도 아니며, 얻는 것도 아니다. 정진을 구족하면 또한 곧 모든 선법을 받는다. 또한 이 선법에서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두루 모든 나라를 유람하며 중생을 구제하여 이롭게 한다. 변화를 짓는 것에 스스로 자의대로 하여 걸림이 없다. 혹은 비 오는 것과 같이 모든 꽃을 뿌리며, 혹은 모든 향을 흩기도 하고, 혹은 기악(伎樂)과 북을 두드리고 거문고를 치고 노래하는 일들을 하고, 혹은 진동하는 일을 하고, 혹은 광명을 쓰기도 한다. 혹은 국토의 7보(寶)를 써서 시현하기도 하며, 혹은 바둑도 한다. 혹은 물과 불을 나타내어 도를 따라서 들어가기도 한다. 모두 다 인연이 되어 10선(善)을 행하게 한다. 혹은 보시와 지계로써 섭취하며 혹은 신체를 마디마디 해부하여 주기도 하며, 처자와 국토를 주기도 한다. 혹은 자신이 중생의 뜻을 따름으로써 섭취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구화구사라의 상이 없어야 유체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상이 없는 법에 머물러 선(禪)을 행하여야 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여래삼매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나머지 삼매를 다 마땅히 구족해야 한다. 4선을 구족하고 4등과 4공정을 구족하여 모두 마땅히 역순(逆順)으로 8유무와 9차제선을 행하고,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 삼매와 뇌광삼매(雷光三昧)와 금강삼매(金剛三昧)와 직치삼매(直治三昧)를 행한다. 이 선바라밀에 머물면 곧 37품을 얻어서 삼매에 머물면 도혜(道慧)를 구족하게 되고 모든 삼매문이 다 와서 여기로 들어간다. 도혜를 구족하면 10주지(住地)를 구족한 행을 지어서 살운야에 이르면 마침내 중도에서 증득을 취하지 않고 삼매 가운데 머물고 모든 불찰을 유람하면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며,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덕의 근본을 심어서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모든 4역(域)을 두루 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한다. 널리 중생을 6바라밀에 세우며, 혹은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에 서게 하여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그 원을 채우게 한다. 그러므로 선바라밀은 모든 다라니문을 총지(總持)하고, 곧 4무애혜를 얻어서 신통을 받게 되면 마침내 여인의 포태(胞胎)에 들어가지 않는다. 색욕(色欲)을 받지 않으니 태어남도 태어나지 않음도 없다. 태어난다 하더라도 생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법(幻法)을 잘 관하여 소유한 것이 환(幻)과 같음을 알기 때문이다. 중생을 구제하려면 곧 중생의 상이 없음을 얻어야 한다. 이 얻을 바 없는 법으로써 중생을 얻을 것 없는 법에 서게 해야 한다. 세속의 수(數)를 쓰고 최상의 중요한 것을 쓰지 않는다. 선바라밀로써 두루 모든 선(禪)과 해탈선에 들어가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지 못하면 마침내 선바라밀을 버리지 않는다. 도의 혜를 행하여 살운야에 들어가면 곧 모든 습의 실마리가 다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며, 마땅히 다시 여타의 사람도 구원하는 것이다. 타인을 구원하고 나면 모든 하늘과 사람과 아수륜을 위하여 복전을 짓는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것이 무상삼매(無相三昧)를 구족하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상이 없는 법에서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을 구족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법에 실로 이룰 것이 있다고 보지 않아야 하며, 또한 5음이 실로 이뤄진 것이라 보지 않아야 하며, 또한 5음이 생겨나는 것이라 보지 않아야 하며, 또한 5음이 생하여 오는 곳을 보지 않아야 하며, 수다원의 도도 또한 생하는 것이라 보지 않아야 한다. 또한 오고 가는 것도 보지 않아야 한다. 허공이므로 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수다원과 누진법(漏盡法)도 보지 않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법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알면 곧 내외와 유무공(有無空)을 알아 모든 법에 들어갈 곳이 없는 것이다. 또한 5음에 들어가지도 않으며, 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들어갈 곳이 없어야 한다. 무소유로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곧 보살도를 구족하게 된다.
무엇을 보살도라 하는 것인가? 6바라밀이 이것이며, 37품과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부처님의 18법과 32상과 80종호가 소유가 없음에서 불도를 이루었다. 6바라밀을 구족하면 37품과 5신통을 구족하여 중생의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6도(度) 중에서 탐심과 질투가 있는 자는 단바라밀로써 섭수해야 한다. 악한 계가 있는 자는 도계(道戒)로써 섭수한다. 성냄이 있는 자는 인욕으로써 섭수한다. 게으름이 있는 자는 정진으로써 권해야 한다. 어지러운 뜻이 있는 자는 선(禪)으로써 구제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써 섭수한다.
해탈품과 해탈견품에 이르면 모두 섭수하는 것이다. 성문도에 뜻이 있는 자는 그 근본에 응하는 것을 따라 주며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벽지불도를 쓰고자 하면 그 근본을 따라서 섭수한다. 대승인 자는 불도로써 섭수한다. 이와 같은 방편으로써 곧 무량한 수의 변화를 지어서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모든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그 국토를 좋게 변화하며 중생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게 한다. 하나의 불국토에서 하나의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하고자 하는 것을 국토에서 취하여 그 소원을 따른다.
비유하건대 제6천(天)의 사람이 의식과 기악(伎樂)을 소유하고자 하면 뜻에 따라 곧 이른다. 보살이 6바라밀로써 보살도를 행하면 뜻을 따라 소원하는 것이 다 구족되어 살운야에 이른다. 5음은 받을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법의 도법과 속법, 선법과 악법을 모두 구족하되 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 후에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룰 때에 국토에 소유된 것을 뜻에 따라서 곧 얻게 된다. 가지고 오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지고 가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제6천의 천상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소지할 것도 없으며, 또한 의지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소유가 없는 상(相)을 써야 한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77. 무유상품(無有相品)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파괴함이 없는 법과 상이 없는 법과 소유가 없는 법 중에서 능히 6바라밀의 생각을 구족합니까? 어떻게 형상이 없는 법에서 차별을 알아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며, 어떻게 상이 없는 법에서 일상(一相)으로 정각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 5음은 환(幻)과 같으며, 메아리 같으며, 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으며, 화(化)와 같다. 이 5음을 가지고 6바라밀을 행하되 5음은 무상하여 환(幻)과 같고 메아리 같으며, 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다.
왜냐하면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법은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소유가 없다는 것은 일상(一相)이다. 일상은 곧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단바라밀은 상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시와 보시하는 주체와 받는 자가 다 상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곧 보시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이 단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면 마침내 6바라밀에서 전환(轉還)하지 않는다. 곧 6바라밀 중에서 4선․4등․4공정을 구족하며, 37품을 모두 구족한다. 내외공과 유무공(有無空)을 구족하며 곧 3탈문을 구족하며, 8유무와 9차제선을 구족하며, 5통을 구족한다. 모든 다라니문을 구족하며, 4무애혜와 4무소외와 10종력을 구족하며, 부처님의 18법을 다 구족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현성의 무루법에 머물면 곧 비행하여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며, 그 편안한 바를 따라서 중생을 구제한다. 혹은 보시로써 중생을 섭취하며, 혹은 계율로, 혹은 인욕으로, 혹은 정진으로써 중생을 섭취한다. 혹은 선정으로, 혹은 지혜로써 중생을 섭취한다. 그 선한 바를 따라서 가르쳐 준다. 중생을 위하여 생사의 법을 받되 함께 돌아가지 않으며, 또한 생사의 고통을 받지도 않는다. 중생을 위하여 천상과 사람 중에 복을 심으며, 중생을 섭취하고자 한다. 모든 법이 상이 없음을 알고 곧 수다원도의 법을 배우나, 또한 그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나한․벽지불도의 법을 배워도 또한 그 속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마땅히 이미 살운야혜에 이르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나한․벽지불이 아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모든 법은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6바라밀은 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모든 불법도 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5음은 꿈과 같고, 환과 같으며,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으며, 화(化)와 같다.
시바라밀을 행하려면 5음은 꿈과 같고 환화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곧 무상(無相)으로써 시바라밀을 구족해야 한다. 계를 지키되 범하지도 말고 헐지도 않아야 한다. 계를 잘 지켜서 범하지도 말고 헐지도 말아야 하며, 잘 지켜서 어지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지혜로 현성의 업(業)을 익혀 두루 모든 계를 호지하되 법의(法義)로써 한다. 신․구․의를 경계하면 모든 계를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계로 4성(性)과 차가월왕(遮迦越王)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나는 이 계를 지켰으므로 마땅히 4천(天)과 제6천상(天上)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이 계를 지켜서 수다원도를 얻었으며 나한․벽지불도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일상(一相)은 상이 없기 때문이다. 상이 없는 법은 마침내 상이 없는 법에 이르지 않는다. 상이 있는 법은 또한 상이 있는 법에 이르지 않는다. 상이 있는 법은 또한 상이 없는 법에 이르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상이 없는 법으로써 지계바라밀을 구족하여 보살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미 보살위에 오르면 곧 무소종생법인을 깨달아서 곧 도혜(道慧)를 행하여 신통을 구족하여 모든 다라니문에 머물게 된다. 곧 4무애혜를 얻어서 하나의 불국에서 하나의 불국에 유람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를 공양한다. 중생을 섭취하여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5취(趣)의 세상에 출생하되, 생사에 집착하지 않는 행을 한다.
비유하건대, 미차가월왕(彌遮迦越王)이 앉고 일어나고 가고 옴에 아는 자가 없어서 중생을 양육하되, 신하를 우러러보지도 않으며 인민(人民)을 번거롭게 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수연두(須延頭)[수연두란 진(晋)나라 말로 매우 깨끗하다는 말이다]여래가 법륜을 굴리되, 삼승에서 보살을 가르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게 함이 있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곧 열반한 후 1겁 동안 부처로 화하여 중생을 교수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시바라밀을 구족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법이 곧 따른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5음은 환과 같고 꿈과 같으며, 메아리와 같다. 상이 없는 법으로 찬바라밀을 구족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두 가지 인의 일로써 찬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만약 어떤 중생이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때리고 치며, 칼로 베고 찌른다 해도 보살이 찬바라밀을 구족하고자 하면 어지러운 뜻을 일으키지 않고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누구를 꾸짖을 것이며, 무엇이 베는 것이 있겠으며, 누가 때리는 것이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모든 법은 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하면 곧 찬바라밀을 구족한다. 이 인욕을 구족하게 되면 곧 무소종생법인을 얻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소종생법인은 멸(滅)이 되는 것입니까, 지혜가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욕에서 머리털끝만한 악한 뜻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이 지혜로써 무소종생법인을 얻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성문․벽지불의 무소종생법인과 보살마하살의 무소종생법인은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다원지(須陀洹智)가 멸(滅)에 이르고 나한․벽지불지가 멸에 이르는 것이 보살마하살의 인욕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성문․벽지불과의 차별이다. 보살마하살이 이 인욕이 있으면 2지 이상에서 나올 수 있으며, 무소종생법인에 머무는 것이다. 보살도를 행하면 곧 도혜(道慧)를 구족하여 37품을 여의지 않고, 3탈문을 여의지 않으며, 신통을 여의지 않는다.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히 하여 살운야에 이르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상이 없는 법으로 찬바라밀을 구족해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5음에 머물면 환과 같고, 꿈과 같으며, 메아리 같고 아지랑이와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無相)한 법에서 몸과 뜻으로 정진을 행하면 곧 신통을 갖추게 된다. 모든 부처님 찰토에 유람하면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다. 몸으로 정진에 힘써 중생을 가르치어 중생을 삼승에서 세운다.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상이 없는 법으로 유체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의정진(意精進)은 뜻으로 정진하는 것으로 성현의 무루법(無漏法)에서 모든 선의 근본법인 37품법을 구족하는 것이다. 3탈문을 구족하는 것이며, 4선․4등․4공정을 구족하는 것이며, 10력과 4무소외와 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 중에서 배우고 나면 마땅히 살운야혜를 구족하며, 모든 습의 실마리를 녹여서 상(相)을 이루는 것을 구족한다. 광명삼매가 널리 두루 비치게 되면 12법륜을 굴려 삼천대천찰토로 하여금 여섯으로 진동하게 한다. 광명으로써 두루 삼천대천찰토를 비추며 능히 음성을 내면 삼천대천찰토에 두루한다. 모든 중생이 음성을 듣는다면 반드시 삼승의 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정진을 하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넉넉하게 이익을 주는 것이 이와 같이 크고 큰 것이다. 보살이 정진에 머무르면 모든 불법을 다 구족하여 살운야혜에 이르게 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5음은 꿈과 같고 환과 같다. 선바라밀을 구족하면 4선과 4등과 4무형선(無形禪)과 3탈문과 전광삼매(電光三昧)와 금강삼매와 진선삼매(眞善三昧)를 행한다. 불삼매(佛三昧)를 제외하고 모든 나머지 무량한 수의 삼매의 뜻에 두루 이른다. 또한 모든 삼매를 음미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과보를 받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삼매의 상(相)과 법이 공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유한 것은 다 소유가 없는 것이며, 무상(無相)은 음미할 것도 아니며, 모양도 없는 것이다. 무소유(無所有)는 음미할 것도 아니며, 소유가 없는 것이다. 음미할 것이 아니므로 선(禪)을 따라 생하는 것이 아니며 형상은 형상이 없는 데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형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삼매를 보지 않으며, 또한 삼매의 상도 보지 않으며, 또한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곧 무상삼매(無相三昧)를 구족하면 이 삼매를 가지고 2지에서 나올 수 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어떤 선(禪)바라밀로 나한․벽지불도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선(禪)으로써 내외공과 유무공을 배운다. 공한 법에서는 머무는 곳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성문․벽지불법과 살운야의 법이 다 공한 것이다. 이 공함으로 보살위(菩薩位)에 오른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위이며, 어떤 것이 보살위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지하여 집착함이 있으면 모두 보살위가 아니다.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는 것이 보살위인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12쇠(衰)는 보살이 의지하는 것이며, 살운야 또한 보살이 의지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위(位)라는 것은 도무지 모든 법을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명자(名字)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의지할 것이 다하여 없는 것이 보살위이다.
왜냐하면 5음이 소유하고 있는 일과 살운야가 소유하고 있는 일은 행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설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받는 보살위인 것이다. 보살이 이상의 위(位)로 곧 모든 삼매를 구족하는 것이니, 선(禪)을 따라서 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하는 것을 따라서 지을 것이 있겠느냐? 이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환법(幻法)으로써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것이다. 중생을 보아서도 안 되며, 또한 환을 보아서도 안 된다. 얻을 것이 없는 법 중에서 불토를 섭취하여 중생을 교수(敎授)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선바라밀을 구족하고 의지함이 없는 법륜을 전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법이 환과 같고 꿈과 같은 줄을 알아야 하며, 모든 법은 메아리 같고 화(化)와 같으며 빛과 그림자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모든 법이 환과 같고 불꽃과 같음을 아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꿈과 같은 행으로 사람에게 보여서도 안 되며, 메아리로 보지 않아야 하며, 메아리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여서도 안 된다. 또한 빛과 그림자․환․화(化)․뜨거울 때의 불꽃으로 보아서도 안 되며, 또한 이것을 가지고 사람에게 보여서도 안 된다.
무슨 뜻인가? 모든 범부나 어리석은 자는 꿈과 같고 환과 같은 모든 법에 집착하여 전도(顚倒)되어 있다. 모든 나한․벽지불과 모든 보살과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은 몽환법(夢幻法)에서 있음을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지고 사람에게 보일 수 있음도 보지 않는다. 모든 법에 소유가 있는 것은 다 소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룰 것도 없으며 또한 소유가 없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침내 상을 탐함이 없어야 한다. 또한 상을 성취함이 없어야 하며, 또한 상을 생함이 없어야 한다. 이 일이 그렇지 않은가?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또한 법에 생할 것이 있는 것과 이룰 것이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또한 5음을 생하지 않으며 또한 삼계를 생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선을 생하지 않으며, 또한 해탈선을 행하지 않는다. 또한 37품을 생하지 않으며, 또한 3탈문을 생하지 않으며, 또한 6바라밀을 생하지 않는다. 마땅히 제1지(地)를 구족하며 10주(住)에 이르러도 그 가운데에서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중에서 욕심의 뜻을 내겠는가? 비록 반야바라밀을 행하나 또한 반야바라밀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중에는 모든 법을 다 본다. 다 와서 반야바라밀에 들어간다 해도 또한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과 반야바라밀은 하나이며 둘이 아니고, 또한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여하게 가르치고 법성(法性)과 같이 가르치며, 진제(眞際)와 같이 가르친다. 이것이 모든 법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가령 모든 법이 차별이 없으며, 흩어지는 것이 없다면 어째서 선악의 가르침이 있다고 말하며, 유루(有漏)․무루의 가르침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도법과 속법과 유위(有爲)․무위의 법으로 가르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뜻이 어떠하냐? 모든 법의 법은 참으로 선악과 유루․무루가 있는 것이며, 도(道)이거나, 속(俗)이거나, 유위법과 무위법이 있는 것이냐? 참으로 수다원과 나한․벽지불법이 있는 것을 보느냐? 참으로 불도가 있다고 보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보지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까닭에 수보리여, 모든 법은 차별이 없으며, 상이 없으며, 생하는 것이 없으며, 소유가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나는 본래 보살이었을 때에 처음부터 모든 법에 중요함[要]이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았으며, 또한 5음을 보지 않았다. 또한 유위․무위도 보지 않았으며, 수다원에서 불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보지 않았으며, 또한 얻은 바가 없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고자 하면 처음 뜻을 발함에서부터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룸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소유(所有)에서 소유가 없는 것을 잘해야 한다.
보살이 소유가 없는 것을 잘하는 것은 곧 능히 도혜를 구족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불국토를 섭취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게 하며, 모든 중생에게 내려오되, 삼계를 보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지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소유에 응해야 한다.”
방광반야경 제18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78. 주이공품(住二空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이 법이 꿈과 같으며, 메아리 같으며, 환(幻)과 같고 화(化)와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으며,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이 모든 법이 다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 만든 곳이 있는 것입니까? 도(道)라 하고, 속(俗)이라 하고, 이것은 무위(無爲)이며 이것은 유위이고, 유루(有漏)․무루라 말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이것은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이라 말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을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는 들은 것이 적어 꿈과 같고 환과 같은 법에 의지하며 본다. 신(身)․구(口)․의(意)를 인하여 짓는 것은 법이 아니며, 선한 일도 아니다. 혹 선한 일을 행하여도 선악의 과보에 이르게 된다. 죄와 복을 삼계에서 받는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2공(空)에 머물러야 한다. 유무(有無)와 근본과 끝이 공하여 필경에는 공에 이른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5음(陰)․12쇠(衰)가 있음을 설하나 공한 것이며, 18성(性)이 공하다. 이 법은 꿈과 같고 메아리 같으며, 환과 같고 화와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은 것이다. 이 중에는 5음도 없고 모든 쇠(衰)도 없으며, 모든 성(性)도 없으며, 꿈도 없고 메아리도 없으며, 환(幻)도 없고 화(化)도 없으며, 불꽃과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 또한 견(見)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다 형상이 없어 소유한 것이 다 소유가 없으며, 5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5음이 있음을 보나 12쇠는 없는 것이다. 너희들이 모든 쇠(衰)가 있음을 보나, 18성은 없는 것이다. 너희들이 모든 성(性)이 있다고 보나, 인연이 전도된 까닭에 곧 모든 법이 행을 따라 받는 것이 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소유가 없는 법에 형상이 있다고 하느냐?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보살이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로써 모든 탐심과 질투가 있는 중생에게 보시를 가르쳐서 큰 부(富)를 얻게 하며, 이 중에서 벗어나와 계를 지키게 한다. 계(戒)를 지킨 인연으로 천상에 태어남을 얻게 된다. 계에서 벗어나 선삼매(禪三昧)에 머물게 한다. 선(禪)의 인연으로써 범천에 태어남을 얻는다. 4선과 4공정을 구족한 인연으로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선(禪)과 무수한 방편으로써 열반에 서게 된다. 다시 37품과 3탈문을 쓰고 8해탈과 9차제선과 10종력과 4무소외와 4등을 쓰며, 권하여 18법을 얻게 한다. 이 상(像)이 없는 법을 소지하여 삼승을 세움이 보살도를 설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기이하고 특별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것이 공하여 법을 짓는 처소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법과 악법이며, 이것은 도법과 속법이고, 이것은 누법(漏法)이고 무루법이며,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이며 이것은 무위법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다. 수보리여, 매우 기이하고 특별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것은 공하여 없는 법이나, 짓는 것의 처소가 되기도 한다.
수보리여, 너희들은 보살이 행하는 것이 매우 기이하여 아라한․벽지불이 이르지 못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보살마하살에게 예를 올려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까, 모든 아라한․벽지불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듣고자 한다면 잘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마땅히 해설하리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6바라밀과 내외공과 37품과 4무애혜와 5신통에 머물러야 한다. 두루 시방에 이르러서 모든 중생을 관하고, 보시로써 섭취할 자는 곧 보시로써 섭취한다.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한마음의 지혜로 그 응하는 것을 따라서 6바라밀로써 섭취한다. 4선과 4공정을 써서 해탈시킬 자는 선(禪)을 쓰는 인연으로 섭취한다. 혹은 자(慈)․비(悲)․희(喜)·호(護)를 써서 보호하여 도를 얻게 할 자는 이 4등으로써 포섭한다. 혹은 37품으로써 도를 얻게 할 자는 근력(根力)과 각의(覺意)로써 섭취한다. 만약 3탈문으로써 도를 얻게 할 자는 모두 섭취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시로써 중생을 섭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사람이 구하는 것을 따라 해야 한다. 만약 입을 옷과 음식과 질병을 위한 의약과 코끼리와 말과 타는 수레와 금․은의 진귀한 보배를 구하면 사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모두 다 보시해 준다. 보시함은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과 수다원에 이르기까지, 아래로는 범부와 나는 새와 꿈틀거리는 벌레와 모든 3악취에 이르기까지 그 뜻에 알맞게 평등하게 해주어서 차별이 없어야 한다. 약간이라도 차별의 뜻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약간이라도 차별의 뜻이 없으므로 그 뜻이 평등한 것이다. 약간의 차별도 없는 것은 곧 차별이 없는 살운야혜(薩云若慧)를 얻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만약 와서 구하는 자를 보고서는 ‘내가 보시함은 마땅히 부처님의 삼야삼불의 복우(福祐)를 주어서 축생에 태어나지 않게 하리라’고 생각하여 말한다면, 보살의 법이 아니다.
보살이 도의 뜻을 일으키려면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보시를 했으므로 마땅히 4성(姓)의 집에 태어날 것이며, 모든 보시를 하고 나서 중생을 섭취하게 되면 모두 다 무여열반[無餘泥洹]에 이르게 하여 열반에 들게 하리라.’
보살은 중생을 친족으로 여기고 보시를 하되 약간의 차별도 없어야 한다.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준 것과 이와 같이 주지 않은 것에 뜻에 맞게 중생에게 보시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뜻에 걸림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중생을 위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발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분별의 뜻이 있으면 곧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과 모든 연각과 모든 진인(眞人)에 큰 과실이 있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모든 천과 사람과 모든 아수라에 정(情)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구호하고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 보살의 법이니, 스스로 마땅히 중생을 구원하고 섭수해야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만약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것이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 보살의 몸을 마디마디 해부하여 취하고자 해도 보살은 마땅히 줄 것과 주지 않을 것을 의심하여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보살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형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 몸으로써 일체를 요익하게 할 것이다. 나는 중생을 위하여 이 몸의 형상을 받았으니, 이제 와서 취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마땅히 뜻을 일으켜 말한다.
‘보시하는 자는 누구며, 받는 자는 누구며, 보시하는 물건은 어떤 것인가? 이 모든 법은 실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항상 공하기 때문이다. 공은 또한 줄 것도 없으며, 또한 뺏을 것도 없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 배워야 한다. 이른바 내공과 외공 및 유무공(有無空)에 머물러 이 가운데에서 보시하면 곧 단(檀)바라밀을 구족한다. 단을 구족하고 나면 내외법을 끊지 않는다. ‘이 베는 자는 누구며, 끊는 자는 이 누구이냐’라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천안(天眼)으로써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찰토를 보시니 모든 보살마하살이 지옥에 들어가자 지옥이 곧 차게[冷] 된다. 세 가지 일로써 변화하여 지옥 가운데의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니, 첫째는 신족(身足)이요, 둘째는 그 사용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요, 셋째는 4등(等)의 법이다. 신족으로써 불을 없애고 뜻을 따라서 4등법을 설하니, 지옥 가운데의 중생이 보살에게 귀앙(歸仰)하여 애경(愛敬)하면, 곧 고통을 여읜다. 다음으로 삼승의 가르침을 설하여 모두 다 고통에서 해탈하게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내가 불안(佛眼)으로써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찰토를 보니, 모든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되 교만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을 애호(愛好)하여 증오하지 않는다. 환희하고 성내는 것이 없어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설법을 모두 수지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게 되면, 마침내 뜻을 잃지 않는다.
수보리여, 부처님이 불안으로써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찰토를 보니, 모든 보살들이 중생을 위하여 신체의 뼈 마디마디를 베고 끊어서 분리하여 사방에 흩어 모든 나는 새와 걸어다니는 짐승들이 와서 보살의 가죽과 살을 먹게 하는 것은 모두 다 자비한 뜻이 있는 것이다. 보살은 자비한 뜻 때문에 축생을 여의게 하고 곧 사람이 되게 한다. 가서 모든 부처님을 친견하고 경법을 들으면 그 들은 바를 따라서 곧 행한다. 그러면 삼승의 법으로써 제도하여 해탈하게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면 많은 곳이 넉넉하고 이로우니, 이와 같이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을 얻게 한다.
다시 수보리여, 내가 불안으로써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찰토를 보니, 모든 보살들이 아귀 가운데 들어가자 모든 아귀들이 보살을 보고 곧 자비로운 뜻을 내어 보살을 공경한다. 공경한 까닭에 모든 고통을 여의고, 이 공덕으로 인하여 마침내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열반을 얻게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자비를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열반을 얻게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모든 보살을 보니, 사천왕과 제6천에 이르러 저 모든 하늘을 위해서 널리 설법을 하는데, 삼승을 가르쳐서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여 열반을 얻게 한다. 모든 하늘 대중이 오락에 집착하면 보살이 때에 응하여 궁전이 모두 다 환해지게 하고 이들을 위하여 설법하여 말을 한다.
‘모든 인자(仁者)야, 일체 소유한 것은 모두 다 무상(無常)하고 고귀한 것도 없으며, 비천한 것도 없는데 누가 항상 안락한 것인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불안으로써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관해 보니, 모든 범천(梵天)을 찬탄하는 자에게 보살이 곧 이를 위하여 설법하여 말한다.
‘모든 인자야, 어떻게 이 공하고 없는 법에서 뜻을 내는 것을 보겠으며, 이 법은 공하고 무상하며, 견(見)이 없는데 마멸법(磨滅法)이 되겠느냐? 여기에서 본다는 뜻을 내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이미 대자비에 머물면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해야 한다. 이것이 보살의 매우 기이하고 특이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수보리여,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찰토에 있는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일로써 중생을 요익하게 해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은혜로 보시하는 것[惠施}이요, 둘째는 어진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仁愛]이요, 셋째는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것[利人]이요, 넷째는 뜻을 같게하는 것[等義]이다. 이것이 네 가지 은혜이다. 보살마하살은 두 가지 일로 보시하여 중생을 섭취하니, 첫째는 재물이요, 둘째는 법시이다. 어떤 것이 재물로 보시하여 중생을 섭취하는 것인가? 보살이 금․은․벽옥(璧玉)과 진기하고 특이한 보배로 하는 것이며, 음식과 의복과 향(香)과 꽃과 병으로 쇠약했을 때에 의약으로 삼는 것과 눕는 침대 등의 도구로써 하는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노비와 코끼리와 말과 타는 수레로써 모든 중생이 하고자 하는 뜻을 따라 해주며 사람들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 모든 이가 오면 보시해 주고, 모두 다 가르쳐서 스스로 3존에 귀의하게 한다. 혹은 5계를 주고, 혹은 10선을 가르치며, 혹은 8재계[八齋]를 가르친다. 혹은 가르쳐서 4선과 4등과 4공정을 행하게 하고, 혹은 권하고 도와서 불(佛)을 염하고, 법(法)을 염하며, 비구승을 생각하고, 하늘을 염하며, 보시를 생각하게 한다. 모든 전도를 행하는 자에게 수순을 행하도록 가르치며, 모든 진실하지 못한 자에게 가르쳐서 진실을 행하게 한다. 권하고 도와서 37도품과 3해탈문과 8유무(惟無)와 9차제선과 부처님의 10종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대자대비를 행하게 한다. 중생에게 권하여 부처님의 18법과 80종호를 행하게 하며, 사람에게 권하고 도와서 삼승법을 가르쳐서 배우게 한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구화구사라를 써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재물로 보시하여 중생을 섭취하는 것이며, 위없고 두려움이 없는 땅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기특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인가? 법보시로써 중생을 섭취하는 것이다. 보시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도시(道施)요, 둘째는 속시(俗施)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법시인가? 세속에서 설하는 것과 보시를 행하는 것은 이른바 청정한 것이 아니다. 4선과 4등과 4무형정(無形定)과 나머지 범부가 행하는 선법을 얻으면 이것을 세속의 법시라고 이름한다. 세속의 법시를 지으면 곧 중생을 가르쳐서 세속을 여의게 한다. 구화구사라로써 도법과 현성의 과보를 안립한다. 어떤 것이 현성의 도법이며 현성의 과보인가? 현성법은 이른바 37품과 3탈문을 말한다. 현성의 과보는 수다원에서 아라한․벽지불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현성의 도법은 수다원이 소유하고 있는 지혜를 아는 것이다. 아라한․벽지불의 지혜와 37도품의 지혜를 아는 것이며, 부처님이 소유하고 있는 10력의 지혜와 대자대비의 지혜와 나머지 도법․속법과 유루․무루와 유위․무위의 법의 지혜와 살운야혜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현성의 법이다. 어떤 것이 보살․현성의 과보인가? 모든 습의 실마리[習緖]가 다한 것이 현성의 과보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은 다시 살운야에 이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여, 보살은 살운야에 이르러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와 같다면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과 여래는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차별이 있다. 어떤 것이 차별인가? 보살이 살운야에 이르는 것을 곧 여래라 이름한다. 왜냐하면 보살의 뜻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여래의 뜻 또한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어두움에 머물되 모든 법을 밝히는 것이 보살이다. 세속의 법시를 인하여 도법의 보시를 잇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중생을 세속의 보시에서 끊어야 하며, 구화구사라로써 살운야에 안주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보살이 도법으로 보시하는 것인가? 범인(凡人)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37품과 3탈문과 8유무와 9차제선과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부처님의 18법과 32대사(大士)의 상(相)과 80종호와 모든 다린니문이 도법으로 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속법이 아니다. 이것이 보살의 매우 기특하고 일찍이 없었던 법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생을 섭취하기 위해 6바라밀을 가지는 것이다. 보시․지계․인욕․정진․일심·지혜로써 평화로운 얼굴과 기쁜 기색으로 중생을 섭취한다. 왜냐하면 6바라밀은 모든 선한 법의 수(數)를 모두 다 섭지(攝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보살이 사람을 이익되게 하여 중생을 섭취하는 것인가? 항상 6바라밀로써 중생을 섭지하며, 네 가지 일로 일체를 이익되게 하니, 첫째는 은혜로 베푸는 것이요, 둘째는 어진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요, 셋째는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요, 넷째는 뜻을 같게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 일이며, 보살은 이 네 가지 일을 써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반야바라밀로써 새로이 배우는 보살을 가르쳐 마땅히 말을 하되, ‘선남자야, 이 문자의 수(數)를 받는 것은 마땅히 한 자[一字]에서 잘해야 하며, 한 자에서 42자에 이르는 것이다. 한 자는 다 모든 문자의 뜻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문자의 뜻은 다 42자에 들어간다. 42자의 뜻은 다 한 자에 들어가니, 이것이 하나의 뜻이 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42자를 잘해야 한다. 여래․무소착․등정각은 모든 법을 잘하며, 모든 문자를 잘한다. 중생을 교화하고 나서 여래의 설법은 문자를 여의지 않는다. 모든 법은 또한 문자를 여의지 않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은 법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6바라밀을 행하며, 4선․4등․4공정을 행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37품을 행하며, 18공을 행하며,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을 행하며, 어떻게 8유무와 9차제선을 행하는 것이며, 어떻게 10력과 4무소외와 부처님의 18법을 행하는 것이며, 어떻게 32상과 80종호를 행하며, 어떻게 6신통을 행하여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는 것입니까?
또한 중생은 보지 못하며, 또한 그 처소도 얻지 못하며, 식(識)도 또한 얻지 못하며, 6바라밀 또한 얻지 못하며, 80종호도 얻지 못하며, 또한 처소를 얻을 수 없으며,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니며, 80종호가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보살이 어떻게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합니까?”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장차 보살도 없으며 단서(端緖)의 일도 없는데, 중생에게 권하여 4전도(顚倒)를 여의게 하고 4제(諦)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까?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보살은 오히려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37품의 일을 행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중생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내외가 공하며 유무가 공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5음이 공하고, 성(性)이 공하며, 쇠(衰)가 공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4제(諦)와 12인연이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라는 아(我)가 공하며, 지견(知見)이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며, 4선이 공하며, 4등이 공하며, 4공정 또한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37품이 공하며, 3탈문이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8유무가 공하며 9차제선이 공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18법이 공하며, 10종력이 공하며, 4무소외가 공하며, 4무애혜가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2지가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며, 보살이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며, 불찰토가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며, 도(道)가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모든 법이 다 공한 것임을 깨달아 알아야 하며, 일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해야 한다. 이미 법을 설하였으면 이 공에서 전환(轉還)이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법은 취할 것도 없으며 버릴 것도 없으며, 또한 걸림도 없다. 진제(眞諦)의 설법은 허식(虛飾)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여래가 화작하여 무량한 수의 사람을 혹은 6바라밀에 안립하고, 혹은 4선․4등에 안립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네 뜻에는 어떠하냐? 이 화(化)로 만들어 낸 사람이 참으로 얻을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화(化)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교화한 중생 또한 다시 이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능한 바를 따라서 설법을 하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전도를 여의게 한 것이다. 또한 묶는 것도 아니며, 또한 푸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5음은 묶는 것도 없으며, 또한 푸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5음에 묶는 것이 있고 푸는 것이 있다면 5음이 아니다. 5음은 항상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이다. 유위․무위법도 또한 항상 스스로 청정한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는 것도 처음부터 중생을 보지 않으니, 모든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머무를 곳이 없는 데 머무르며, 5음은 공하므로 처소가 없으며, 유위․무위도 또한 머무를 곳이 없다.
왜냐하면 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무를 곳이 없는 것은 소유가 없으며, 또한 소유가 없는 곳에는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소유가 있는 것도 또한 소유가 있는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없는 것은 머무를 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법을 분별하는 것이 다 공한 것임을 밝혀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지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과 모든 성현에 허물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 세존과 모든 성현이 다 이 법을 깨달아서 중생을 교화했기 때문이다. 이 법을 얻으면 전환함이 없다. 왜냐하면 법성․진제와 진여는 전환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형모(形貌)를 전환할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진제 법성은 여여하여 전환하지 않는 것이라 하셨는데 5음과 여여한 진제 법성은 다름이 있는 것입니까? 유위․무위와 도와 유루․무루에 다시 다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여, 5음과 여여한 진제 법성과 유위․무위와 도는 같아서 다름이 없다.”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가령 5음과 여여함[如]에서부터 유위․무위에 이르기까지 같아서 다름이 없다면 어째서 선악의 과보가 있으며 5도(道)에 생사가 있는 것입니까? 어째서 삼승의 법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생이 세제(世諦)를 익히므로 곧 도의 명호가 있게 된다. 제일 최요의(最要義)가 되는 것은 분수(分數)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법은 항상 고요하여 분별할 것도 없으며, 또한 설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5음은 또한 생멸이 없으며 또한 집착과 끊음도 없는 것이다. 근본이 공하고 지말이 공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세제(世諦)를 익히므로 곧 도의 이름이 있다고 하면 일체 범부가 다 이 도(道)이며, 이 삼승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범부의 습제(習諦:집제)와 도제(道諦)를 다 알아야 한다. 만약 이것을 알면 마땅히 이 도를 안다. 만약 범부를 알지 못하면 또한 도처(道處)도 없으며, 또한 도의 과보도 없다.”
다시 여쭈었다.
“어떻게 범부가 마땅히 도의 과보를 얻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성현은 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곧 도의 과보가 있는 것이다.”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도의 생각 때문에 도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여, 생각 때문에 곧 도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생각을 여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중생을 위하여 곧 도에 처한다. 도는 또한 부분도 아니며, 또한 유위․무위도 없으며, 또한 분별도 없는 것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도가 있는 곳에 분별이 없다면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습의 실마리를 끊어서 수다원 얻는 것을 설하십니까?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져서 사다함을 얻으며, 아래로 욕계에서 5습(習)을 멸하여 아나함을 얻으며 위로 무형계에서 5습을 멸하여 아라한을 얻는 것입니까? 눈으로 보는 형색이 모두 다 이와 같이 다한 법은 벽지불을 얻으며, 일체의 습의 실마리가 다하면 곧 삼야삼불을 얻습니까? 이와 같이 어떻게 마땅히 이 일을 알겠습니까? 만약 도에 분수(分數)가 없다면 어떻게 각각 그 도를 얻어 수행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다원도에서부터 삼야삼불은 유위인가, 무위인가?”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유위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위의 법에 분계(分界)가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분계가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뜻에는 어떠한가? 선남자․선여인이 일시에 유위․무위법을 얻으며, 일상(一相)을 얻는 것이냐? 이때에 참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 이 유위인가, 이 무위인가?”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되 분계가 없어야 한다. 내외공과 유무공을 쓰기 때문이다. 보살은 안으로 자기에게도 들어갈 곳이 없으며, 일체의 사람을 가르쳤어도 또한 들어갈 곳이 없어야 한다. 또한 6바라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선(禪)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평등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또한 37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살운야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은 생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여래가 화작하여 만든 화인(化人)과 같아서 화인이 보시하는 것은 또한 과보를 얻지 못한다.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6바라밀에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유루․무루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또한 도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또한 속(俗)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또한 유위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무위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머무를 곳이 없는 데 나아간다. 모든 법의 상(相)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79. 초월법상품(超越法相品)
이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법의 법상(法相)에서 초월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화(化)로 된 사람과 같아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없으며, 또한 5음의 행도 없으며, 또한 내외의 일도 없으며 걸릴 곳도 없다. 또한 도의 일도 없으며, 또한 속(俗)의 일과 유루․무루와 유위․무위도 없다. 또한 도의 일도 없으며 또한 과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모든 법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화(化)한 것이 어떻게 도의 생각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도를 생각하는 것은 끊는 것도 없으며, 집착도 없으며, 또한 5취(趣)에서 나타나지도 않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 뜻이 어떠하냐? 여래가 화(化)로 만든 것이 참으로 형상이 있으며, 가고 옴이 있으며, 집착과 끊음이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화(化)로 만든 것은 가고 옴도 없고 집착과 끊임도 없으며 5취(趣)에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것이 모든 법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5음은 다 환(幻)과 같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모든 법이 화(化)와 같다면 세존이시여, 화라는 것은 또한 색이 있는 것도 아니며, 통(痛)이 있는 것도 아니며, 상(想)도 없으며, 행도 없으며 식(識)도 없으며 집착도 없으며, 절단도 없으며, 5취에서 해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살마하살이 어떤 기특한 일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내가 본래 보살이었을 때에 참으로 5취 중에서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한 것을 보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설법하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계에 중생이 있는 것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5취가 있으며, 제도할 것이 있겠는가? 보살은 모든 법이 환과 같고 화와 같음을 관하여 알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이 환과 같고 화와 같은 것임을 관하여 안다면 어째서 6바라밀과 4선과 4등과 4공정을 행하며, 어째서 37품을 행하는 것이며, 그리고 불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이 스스로 모든 법이 환과 같고 화와 같음을 안다면, 보살은 마침내 아승기겁 동안 겸양하여 보살도의 고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중생은 스스로 환과 같고 화와 같음을 알지 못하므로 보살이 겸손하여 6바라밀의 고행을 하여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모든 법이 꿈과 같고 환과 같고 화와 같고 메아리 같고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다면, 어느 곳에 중생이 있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발제(拔濟)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생은 다만 함께 명자수(名字數)에 얽매여 있으며, 단서가 없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명자상(名字相)에서 발제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명자상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름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며 가호(假號)를 일컫는 것이다. 가호는 5음(陰)이며, 가명(假名)은 사람이 되고 남자가 되고 여인이 되는 것이다. 가명이 5취(趣)와 유위․무위법이며, 가명이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삼야삼불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나라는 아(我)는 법과 도(道)를 조작하는데, 다만 명자수의 법이 되기 때문이다. 범부와 모든 어리석은 사람은 유위법에 집착하여 얽매여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구화구사라를 써서 중생을 가르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것은 이름이니, 다만 상(相)에서 일어난 것이며, 단지 상으로써 어머니의 포태에서 출생한 것이다. 있는 것은 단서가 없으며, 소유한 것은 소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지혜 있는 자는 공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구화구사라로써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상(相)인가? 수보리여, 범부와 어리석은 자는 두 가지 상에 집착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형상(形相)이요, 둘째는 형상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형상인가? 모든 것에 좋은 형상이 있고 나쁜 형상이 있고 미세한 형상이 있으니, 이 닳아 없어지는 법 중에서 상(相)을 일으키는 것이 니 이를 형상이라 이름한다. 무엇이 형상이 없는 것인가? 모든 형상이 없는 법 중에서 상이 일어나고 허물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를 형상이 없는 것이라 이름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구화구사라를 쓰는 것은 형상이 없는 곳에서 모든 중생을 출생하고 상이 없는 곳에서 둘이 아닌 데 들어가는 것을 세우는 것이다. 무엇이 둘인가? 이 상이 있는 것과 상이 없는 것이 둘이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상 중에서 모든 중생을 내는 것이며, 상이 없는 것에서 건립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다만 명상(名相)만 있는 것이라면 보살이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모든 선법에 어째서 차별이 있으며, 그리고 다시 타인에게 권하는 것도 선법에서 차별이 있게 하는 것입니까? 모든 곳에서 선법을 구족하여 삼승에서 중생을 건립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5음의 이름을 생각하고 5음의 상을 계교(計校)하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선법(善法)에는 차별이 없으며 또한 타인으로 하여금 차별이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무상(無相)으로 5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무상으로 4선을 구족하며, 4등을 구족하며 4공정을 구족해야 한다. 무상으로써 37품을 구족하며 무상으로 내외공과 유무공을 구족하며 무상으로 8유무와 9차제선을 구족하며, 부처님의 10종력을 구족하며, 무상으로 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해야 한다. 보살은 스스로 이 선법을 구족해야 하며, 타인에게도 권하여 무상으로써 모든 선법을 구족하게 해야 한다.
수보리여, 만약 모든 법에 털끝만큼이라도 상이 있다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해도 마침내 공․무상․무원의 법에 이르지 못한다. 중생의 원하는 바를 따라서 건립하지 못하며, 공․무상․무원의 법과 번뇌가 다한 법을 얻지 못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상이 없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일체를 넉넉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공하고 모양이 없으며 생각이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법에 분수(分數)를 짓는 것입니까? 이것은 유루이며 이것은 무루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능히 이를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며, 이것은 성문법이며 이것은 벽지불법이며 이것은 보살법이며 이것은 불법이라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뜻인가? 상이 없는 것과 성문․벽지불법과 보살법과 불법에 다른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문․벽지불법과 보살불법에는 모두 상이 없는 것이 아니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다 상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로서 모든 법에서 무상을 지어 배우면 곧 능히 선의 근본의 공덕을 증익(增益)한다. 곧 6바라밀과 4선과 4등과 4공정과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증익하는 것이다.
보살은 나머지를 배우지 않고 다만 공하고 상이 없으며, 원(願)이 없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모든 보살법이 다 와서 3탈문(脫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3탈문은 스스로 공한 것이다. 보살은 공하고 상이 없으며 원이 없는 것을 배워야 한다. 5음을 배워야 하며, 12쇠(衰)를 배워야 하며, 18성(性)을 배워야 하며, 4제(諦)를 배워야 하며, 12연기를 배워야 하며, 내외공과 유무공을 배워야 하며, 6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37품을 배워야 하며,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부처님의 18법을 배워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어떻게 5음을 배우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색상(色相)을 알아야 한다. 색(色)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알아야 하며, 색이 여여한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색상을 아는 것인가? 색은 견고한 것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거품이 모인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이 색의 본말을 아는 것인가? 색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이것이 색의 본말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색이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인가? 여여한 것은 또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또한 끊는 것도 아니고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알아야 이것이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변이(變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여여하다고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름하여 색이 여여함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통(痛)의 생멸을 아는 것이며, 통이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이며, 통이 물거품과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이며, 상(想)이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이며, 상이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아서 필경에는 물이 없는 데 이르는 것을 아는 것인가?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오는 것도 아니다. 통이 여여한 것과 상(想)이 여여한 것은 같은 것이다. 상이 또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행(行)이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인가? 비유하건대 파초의 잎과 같아서 잎을 분해하면 견고한 것이 없다. 무엇이 행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아는 것인가? 행은 또한 가고 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행이 이와 같음을 알면 여여한 것을 아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이 식(識)을 관하는 것인가? 비유하건대 환사(幻師)가 네 종류의 병사를 화작하는 것과 같아서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다. 식을 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이 식이 여여한 것을 관하는 것인가? 식이 여여한 것을 관하면 이것이 식이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눈의 성질을 관하여 아는 것인가? 눈의 소유가 공하면 안색(顔色)이 공한 것이며, 안식(眼識)이 공한 것이다. 그리고 의식(意識)의 소유가 공한 것이다.
무엇이 12쇠(衰)를 관하여 아는 것인가? 내외법이 여여함을 아는 것이며, 내외법의 소유가 공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고제(苦諦)를 관하여 아는 것인가? 고(苦)를 알며, 제(諦)를 아는 것이며, 또한 유아(有我)․무아를 아는 것이냐? 제(諦)와 습(習)이 공하므로 모든 제를 아는 것이다.
무엇이 4제(諦)가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인가? 여여하게 4제를 아는 것이 4제가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12연기가 여여한 것을 관하여 아는 것인가? 12연기는 생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12연기가 여여한 것을 아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가령 각각 모든 법이 이와 같음을 분별로 아는 것입니까? 곧 법성과 색신을 분별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다른 법이 법성을 여의었다면 이 색신과 법성은 곧 차별이 있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수보리여, 여래와 여래의 제자는 법에서 법성을 여읜 것도 보지 않으며 법성에 차별이 있는 것도 보지 않는다. 비록 보지 않고 처하지도 않으나 법은 둘이 있는 것이 아니며, 법성을 여읜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 법성을 배워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법성을 배우는 것은 배우는 것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법성을 배우는 것은 일체의 법을 다 배우는 것이다. 일체의 법은 다 이 법성이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째서 모든 법이 다 이 법성이며, 모든 유위법이 다 법성이 되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은 법성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가령 모든 법이 다 이 법성이라면 보살이 무엇 때문에 6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4선과 4등과 4공정을 행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37도품과 3탈문과 8유무와 9차제선과 10력과 4무소외를 행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부처님의 18법을 배우며, 6통(通)과 32상을 배우며, 80종호를 성취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까?
어째서 4성가(姓家)의 집에 출생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까?
어째서 사천상(四天上)에서 태어나는 것을 배우며, 제4천(天)에서 삼십삼천에 이르는 것입니까?
어째서 처음 뜻을 일으킴에서부터 제10지(地)에 이르는 것입니까?
어째서 삼승을 배워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다린니문을 배우고 변재를 배우는 것입니까?
어째서 보살도를 배우며 모든 법이 여여함을 배우며, 일체의 일을 아는 것이며, 법성에는 조금도 분수(分數)가 있지 않은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장차 보살의 행이 없으며 일이 전도되는 것입니까?
법성은 또한 5음도 아니며, 법성은 또한 5음을 여읜 것도 아닙니다. 법성은 곧 5음이며, 5음은 곧 법성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여, 네가 말한 것과 같다. 법성은 곧 5음이며 5음은 곧 법성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만약 법에서 법성을 여읜 것을 보면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지 못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법의 성(性)이 곧 이 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법이 곧 이 법성인 줄을 알아야 한다. 이름이 없는 법은 이름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5음에서 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명호(名號)와 법수(法數)와 문자로써 설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환사가 하나의 거울을 가지고 약간의 여러 가지 상(像)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말[馬]이나 코끼리나, 여관이나 욕지(浴地)와 같은 것인데, 이 중에서 약간의 여러 가지 자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모직으로 된 카페트와 모직으로 된 방석과 선을 두른 장만(帳幔:휘장)과 향과 꽃과 기악(伎樂)과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나타낸다. 이름이 있는 기악으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 다시 6바라밀을 나타내어 이 중에서 4대성(大姓)을 나타내며, 수미산이 있고 삼십삼천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 중에서 모든 성문․벽지불을 나타낸다. 모든 새로 뜻을 일으킨 보살이 6바라밀 행하는 것을 나타내며, 다시 10주(住)의 일생보처 보살을 나타내기도 한다. 모든 보살이 5통에 유희함을 나타내며, 불국토를 청정히 하여 중생교화하는 것을 나타내며, 삼매와 삼마제(三摩提)를 행하여 스스로 오락(娛樂)함을 나타낸다. 다시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대자대비를 행하는 것을 나타내며, 부처님의 신상(身相)이 구족함을 나타낸다. 이 중에 어떤 어리석은 선비가 칭찬하여 이렇게 말한다.
‘쾌활하다. 이 사람이 지은 것이 심히 기특하다. 음식으로 약간 억만의 사람을 다 기쁘게 하는구나. 약간의 여러 가지 상(像)과 세존의 상호를 나타내는구나.’
이 중에 혹 어떤 아는 자가 곧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환사가 짓는 것이 이와 같이 공한 것이다. 있는 바가 없는 법이며, 단서가 없는 법을 쓰는 것인데,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하고 단서가 있게 하는구나.’
상(相)은 형상이 없는데 형상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법에서 법성을 여의는 것을 보지 않고 구화구사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해야 한다. 또한 중생을 보지 않아야 하며, 또한 그 처소도 보지 않고 6바라밀을 행하며 사람에게 권하여 6바라밀을 익히게 하고, 행하는 자를 보면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10선(善)을 행하고 사람에게도 권하여 행하게 한다. 10선을 행하는 자를 보면 찬탄하고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5계(戒)를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지키게 한다. 계를 지키는 자를 보면 찬탄하고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8재계[齋]를 지키고 타인에게 권하여 가지게 한다. 지키는 자를 보면 찬탄하고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4선과 4등과 4공정을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행하게 한다. 행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 찬탄하고 그 환희를 대신한다. 스스로 37품과 3탈문과 4무소외와 부처님의 10력과 부처님의 18법을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행하게 한다. 행하는 자를 보면 찬탄하고 그 환희를 대신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법성은 전과 후, 그리고 중간에 더하고 감손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위하여 겸양하여 보살의 행을 고행하는 것이다. 만약 법성이 전후와 중간에 차이가 있었다면 보살은 마침내 구화구사라를 써서 널리 법성을 펴 중생을 가르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80. 신본제품(信本際品)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가령 처음부터 중생과 그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살이 어째서 반야바라밀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진제(眞際)를 믿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되 진제와 중생제(衆生際)가 차이가 있다면 보살은 마침내 반야바라밀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진제와 중생제는 평등하여 차이가 없다. 보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반야바라밀을 생각하여 행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진제를 분류하고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진제에서 중생을 건립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진제에서 중생을 건립하는 것이라면 곧 진제를 진제에서 건립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제를 진제에서 건립한다면 다 소유가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소유가 없는 것을 가지고 소유가 없는 곳에서 건립하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이와 같다면 보살이 어째서 진제에서 중생을 건립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진제는 진제에서 건립할 수 없는 것이며, 소유는 소유에서 건립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소유가 없는 것은 무소유에서 건립할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써 진제에서 중생을 건립해야 한다. 진제와 중생제는 일제(一際)로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의 구화구사라이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진제에서 중생을 건립하는 것이며, 그리고 분류도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 단(檀:보시)에서 중생을 건립해야 한다. 이미 건립하였으면 단의 본말이 공한 것임을 설해야 한다. 보시한 것과 보시한 자와 받는 자가 다 공하여 받는 과보도 또한 공하다. 선남자를 가르치되, ‘약간의 상(相)도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해야 한다. 네가 보시한 것과 받는 자가 과보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평등하여 하나같이 공한 것이며 모두 다 진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선남자를 가르쳐서 말하되, ‘네가 만약 보시한 것과 받는 자와 과보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즉 감로시(甘露施)이며, 곧 감로과(甘露果)에 이르는 것이다. 베푼 것으로써 색(色)을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야 한다. 선남자를 가르쳐서 말하되 ‘보시한 것으로 통(痛)을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보시한 것으로 상(想)․행(行)․식(識)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보시한 것과 보시한 자와 받는 자가 다 공하여 받는 과보도 또한 공하기 때문이다. 보시에 구할 것이 있으면 공으로써 해야 한다. 모든 보시한 것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있는 것은 근본에서 필경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써 시(尸:지계)에서 중생을 건립해야 한다. 선남자를 가르쳐서 말하되, ‘10악을 행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이 모든 악법은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스스로 자세히 사유해 보라. 이 10악은 본래 소유가 없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를 구족하여 중생을 가르쳐야 한다. 곧 단(檀)과 시(尸)로 중생을 가르쳐야 한다. 단과 시의 과보도 모두 다 스스로 공하여 소유가 없다. 또한 그 중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문득 적정에 이르게 되면 곧 지혜를 내어서 모든 어리석고 어두운 것을 끊고 고뇌를 여의게 되는 것이다. 세속의 수(數)를 쓰는 반열반은 최고 제일의[最第一義]가 아니다. 왜냐하면 공(空) 가운데서 반열반을 찾는 것은 공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마침내 반열반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반은 또한 스스로 필경에 이르러도 공한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중생이 의지(意志)가 혼란하여 투쟁과 원망과 분한 것을 안정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곧 가르쳐서 인욕을 하게 하고, 인욕을 익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사람을 가르쳐서 말하되, ‘너희가 들어가 빠질 곳은 모두 공이며 소유가 없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말하되 ‘내가 공하다면 나를 가리고 폭행하는 것이 누구며, 공할 것인데 가리고 푹행하는 뜻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 것인가?’라고 해야 한다. 공은 공하지 않은 때가 없다. 이 공은 또한 여래와 보살과 아라한․벽지불이 지은 것도 아니다. 또한 모든 삼십삼천과 용(龍)과 아수륜(阿須倫)과 귀신과 견타라(甄陀羅)와 마후륵(摩睺勒)이 짓는 것도 아니다. 공은 자연히 공하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공한 법을 건립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공에 들어가게 해야 한다. 비록 인과응보가 있으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여읜 것이 아니다. 비록 중생에게 권하여 구도에 나아가게 하나, 다만 이 세속의 수이고 최고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무슨 뜻인가? 공성(空性)은 또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아니며, 또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당래 보처에 깨달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진제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이 중에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또한 중생은 얻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처(處)를 보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고요한 것이 모든 법과 같기 때문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중생 중에 게으름이 있는 자를 보고는 구화구사라로 곧 권하고 도와서 몸과 뜻으로 정진을 행하여 공무(空無)한 법에 나아가게 해야 한다. 모든 법은 게으름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게으름이 있음을 보아서도 안 된다. 공무한 법은 마침내 공에서 퇴전하는 것도 따르지 않는다. 선법에서 게으름의 뜻도 내지 말아야 하며, 신의(身意)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6바라밀과 4선과 4등과 4공정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37품법과 3탈문과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공성(空性)의 법으로써 중생에게 권하여 나아가 공행(空行)에 머물게 해야 한다. 비록 공행에 머물러도 두 가지 일을 쓰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성은 하나이지 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이 아닌 법은 들어갈 곳이 없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공성의 법을 가지고 중생을 가르쳐 정진을 하게 하고 가르쳐 주면서 말하되, ‘선남자야, 마땅히 보시․지계․인욕․정진․선․지혜에서 정진을 잘하여 뜻을 따라 능히 해야 한다. 37품에서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 선남자야, 이 법은 두 생각을 일으키지도 말아야 하며, 또한 두 생각을 여의어도 안 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법성은 공하며 공성(空性)의 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둘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둘이 아닌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구화구사라로써 보살의 행을 익히는 것이다. 중생을 가르쳐서 불국토를 청정히 한다. 다음으로 중생을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에서 건립한다. 나아가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중생을 건립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써 중생을 복으로 이롭게 해주고 권하여 도와주며 말하되, ‘마땅히 선(禪)을 일심으로 생각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삼매상(三昧想)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성은 다 공하기 때문이다. 공무(空無)한 법 중에는 또한 어지러운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일심(一心)이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이 삼매에 머무르면 신․구․의로 짓는 일이 6바라밀과 37품과 8유무와 9차제선과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대자대비와 부처님의 18법과 80종호와 같으며, 성문․벽지불도와 보살도와 불도와 같으며, 성문과(聲聞果)와 벽지불과와 같으며 살운야와 같으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과 같으며, 이 공을 행하는 자는 곧 모든 선법의 일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써 중생을 복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처음 뜻을 일으킨 이래로 항상 중생을 위하여 많은 복과 이익을 짓지 않을 때가 없었다. 하나의 불국토에서 하나의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처님 세존을 공양하고 예로써 섬긴다.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받은 법을 가르쳐서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게 하여 마침내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항상 모든 총지를 얻어서 신․구․의로 행하며 항상 구족하여 조금도 결핍됨이 없다. 살운야를 잘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살운야를 쓰면 곧 모든 도와 성문․벽지불도와 신통에서 보살은 모든 곳에 응하여 도를 행하여 마침내 폐하여 버리지 않는다. 신통으로 중생을 구호하는 데 서서 5취(趣)의 생사를 두루 돌아도 신통에서 털끝만큼도 줄어들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공성(空性)에 머물러 중생을 도와 이롭게 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를 써서 공성에 머물러 중생을 도와 이롭게 해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중생에게 권하며 가르쳐서 말하되, ‘모든 인자여, 신․구․의를 청정히 하여 감로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감로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마침내 성(性)이 공한 법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성(空性)의 법은 또한 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법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중생에게 이와 같이 지어서 들어가게 하며, 이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 일찍이 정진하지 않은 때가 없어 스스로 10선을 행하며, 타인에게 권하여 행하게 한다. 스스로 5계와 8재계와 4선과 4등과 4공정을 행하고 타인에게 권하여 행하게 한다. 스스로 37도품법과 10력과 18법을 행하고 타인에게 권하여 행하게 한다. 스스로 80종호를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행하게 한다. 스스로 수다원도의 혜(慧)를 배우고 다시 타인에게도 스스로 아라한법 중에서 지혜를 취한다. 또한 타인을 가르쳐서 아라한․벽지불법을 배우게 하며, 스스로 안에서 하고자 하는 바가 없어서 스스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타인을 가르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배우게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보살행을 익히려면 구화구사라로써 처음부터 게으를 때가 없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가령 모든 법성이 본래 공하다면 중생 또한 얻을 것이 없으며, 정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비법(非法)을 보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살이 살운야혜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고 그와 같다. 네가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모든 법성은 다 공하다. 공한 법 중에는 또한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정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모든 법성이 공하지 않다면 보살은 공한 법 중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성을 설법하여 5음의 성품이 공함을 설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5음의 성품이 공함을 설한다. 18성(性)이 공하고 12연기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며, 4선과 4등과 4공정을 설하며, 37품의 성품이 공함을 설하며, 3탈문을 설한다. 8유무와 9차제선이 공함을 설하며, 4무애혜와 4무소외가 공함을 설한다. 18성이 공함을 설하며, 부처님의 18법과 대자대비와 80종호가 공함을 설한다.
그러므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며, 성문․벽지불도를 설하는 것이며, 살운야를 설하는 것이며, 모든 근본 습(習)의 허물이 다함을 설하는 것이다. 이 공성으로써 설법을 하는 것이다.
만약 내공과 외공 및 유무공의 성품이 공하지 않다면 보살은 마침내 공성으로써 설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공과 외공 및 유무공의 성품이 공하지 않다면 무너지는 공인 것이다. 공은 무너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위에 있는 존귀한 것도 아니다.
무슨 뜻인가? 공은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처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법에 항상 머무르되 더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일어나거나 멸함이 없으며, 집착함이 없으며 끊는 것도 없는 것이다. 보살이 이 법에 머물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또한 법은 이를 곳이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며, 또한 이를 곳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이를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법에 항상 머무르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법성이 다 공함을 보아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마침내 전환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법에 걸림이 있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어느 곳에 여우같이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아뇩다라삼야삼보는 성품이 공하여 중생이 있지 않다. 또한 중생의 처소도 보지 않는다. 또한 나라는 아와 수명과 지견(知見)의 일을 보지 않는다. 또한 5음을 보지 않으며, 80종호도 또한 보는 것이 없어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화불(化佛)이 비구․비구니와 우바새․우바이로 화작하여 나술겁(那術劫)에 이르도록 설법을 단절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화인(化人)이 삼승법에서 참으로 얻을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뜻인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또한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곳에 중생이 보살이 되기 위하여 성문․벽지불에 들어갈 자가 있겠는가? 다만 여러 것에 집착하여 전도에 떨어지는 것은 순(順)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도된 것은 전도된 것이 아니다. 전도와 모든 염처(念處)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중생도 없으며, 또한 나라는 아도 없으며, 또한 수명도 없으며, 또한 지견의 일도 없는 것이다. 또한 5음도 없으며, 또한 도(道)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공성(空性)이라고 한다.
보살이 이 중에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전도된 것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이 있는 것을 제도해야 한다. 유색(有色)과 색상(色相)이 없는 것을 제도하며, 유루의 법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해야 한다. 세속의 수로써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는 무루법은 최고 제일의 뜻이 아니다.
어떤 것이 무루인가? 37품이 이것이다. 또한 소유도 아니며 또한 생하는 것도 없다. 또한 행(行)을 쓰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이것을 공성이라 하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 세존의 도라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도는 중생도 없으며, 아상․인상․수명상도 없으며, 지견상도 없으며 5음도 없으며, 또한 32상․80종호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여래의 도인 것이다. 또한 보살도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공성이므로 근본에서 끝과 중간에 이르기까지 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항상 하나같이 공한 것이다.
보살이 공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은 중생은 중생상이 있으므로 살운야를 건립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도혜(道慧)를 행하여 도혜의 일로써 곧 모든 도에 들어가며, 또한 삼승도에 들어간다. 보살이 모든 도에 들어가는 것을 구족하면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 곧 유위(有爲) 중에 머물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어 불업(佛業)과 모든 공성을 끊지 않는다. 공성에 머무는 자는 이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부처님의 도업과 생사의 처(處)와 모든 속법에 공성(空性)을 여의지 않으며, 모든 보살이 다 마땅히 모든 부처님이 익힌 공성을 행하는 데 들어간다. 비록 살운야에서 공성을 행하나 타락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매우 기이하고 특이하옵니다. 공의 일을 행하는데 공을 분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공을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까?”
“색(色)이 다르고, 깨달음이 다르고, 상(想)이 다르고, 행(行)이 다르고, 식(識)이 다르고, 공이 다른 것을 말하지 않으며, 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공성은 곧 도며, 도는 곧 공성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공성이 다르고 5음이 다르다면 보살은 마침내 살운야에 이르러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성과 5음은 평등하여 다른 것이 있지 않다. 보살은 모든 법성이 다 공한 것을 알기 때문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공성의 법은 또한 무너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위에 있는 존귀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미혹되어 이렇게 말한다.
‘5음은 나의 것이며, 나는 5음의 것이다.’
곧 5음에 들어가서 나라는 아(我)의 일을 행한다. 다시 내외의 형편에 들어가서 5음을 내게 되면 곧 생로병사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게 되며, 5취 중에 떨어져서 해탈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공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익혀서 5음을 분별하지 않는다. 5음을 분별하지 말고, 5음은 공한 것이니, 공하지 않은 것으로 관하지 말며 나아가 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공이니 공하지 않은 것으로 관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5음이 공하여 5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고 도(道)가 공하여 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공을 분별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또한 내외공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5음이 공한 까닭에 5음을 드러내지 않고 또한 도가 공한 까닭에 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은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이다, 공이 아니라고 분별하지 않으며, 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다시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모든 법이 분별할 것도 아니며, 무너질 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저 도에 둘이 있었다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둘을 행하는 것은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도는 둘이 없으며, 또한 둘이 아니다. 보살이 도를 배우려면 둘에 들어가는 것을 짓지 않아야 한다. 보살은 곧 도며, 도는 곧 보살이다. 또한 색(色)․통(痛)․상(想)․행(行)․식(識)도 아니며, 도를 행하는 것도 아니다. 도는 또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마땅히 5음을 행하면, 너는 마땅히 도를 행한다. 보살이 도를 행하되 또한 취할 것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행하는 도는 또한 취할 것이 없으며, 또한 놓을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지어서 행해야 하는 것이며, 어느 곳에서 도를 행해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뜻은 어떠하냐? 여래께서 지은 화(化)는 어느 곳에서 행하느냐? 취할 것이 있고 놓을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취할 것도 없으며 놓을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이 꿈속에서 한 것이 취할 것이 있으며 놓을 것이 있겠느냐?”
대답하여 말했다.
“아닙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잠을 자지 않는데 어떻게 꿈을 꾸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보살이 행하는 것도 또한 취할 것도 없으며 또한 놓을 것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의 뜻은 또한 5음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도에는 취할 것과 놓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살이 10주지(住地)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 6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37품과 4선과 4등과 4공정과 8유무와 9차제선을 행하지 않고 10력과 4무소외와 32상․80종호를 행하지 않고 5통을 행하지 않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살운야에 이르지 않는다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10지(地)를 행하는 것을 구족하지 못하고, 6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하고, 4선과 4등과 4공정과 8유무선과 9차제선과 37품을 구족하지 못하고, 나아가 80종호를 구족하지 못하면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구족하지 못하면 살운야에 이르지 못한다. 5음이 공한 상도 멸해야 한다. 도가 공한 성품도 멸해야 한다. 이 성품이 이미 멸하여 멸성(滅性)에 머무르게 되면 법에 감손과 이익을 짓지 않는다. 또한 생하는 것도 없으며, 멸하는 것도 없다. 또한 집착과 끊는 것도 없으며, 깨달음에 이르지도 않는다.
수보리여, 세속의 법을 가르쳐서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다면 5음과 도는 세속의 수이므로 최고 제일의 요의가 아니다. 보살이 처음 발심한 이래로 비록 도의 뜻을 행하나 또한 중생은 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멸도 아니다. 도는 또한 보살을 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멸도 아니다.
수보리여, 이 뜻이 어떠하냐? 너희들이 5음이 멸할 때에 무량삼매를 얻으며 수다원을 얻으며, 또한 아라한일 때에 참으로 뜻을 보느냐, 참으로 도과(道果)를 보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지 못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제자들이 어떻게 말[言]이 있으며, 나아가서 얻을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단지 세속의 수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다시 세속의 수이기 때문에 말에는 5음이 있으며, 말에는 보살이 있으며 말에는 살운야가 있는 것이다. 보살은 도에 얻을 것이 없다. 법은 감손과 이익이 없다. 법성은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법성도 모든 법성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10주지(住地)를 얻으며, 6바라밀과 37품과 3탈문과 부처님의 18법을 얻겠느냐? 마땅히 얻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행하는 것이며, 아유삼불을 얻어서 중생을 도와 이롭게 해주는 것이다.”
방광반야경 제19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81. 무형품(無形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과 37품과 부처님의 10종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부처님의 18법에서 18공을 행하되 보살도를 구족하지 못하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려면 구화구사라로써 단(檀)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또한 보시할 물건도 보지 않아야 하며, 자기도 보지 않아야 하며, 받는 자도 보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 법을 여의지 않아야 하며, 이 법을 보지도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행한다면 곧 보살도를 비추어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행해야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깨닫게 된다. 보살은 단바라밀을 행하되, 보시할 물건도 보지 않으며, 자기도 보지 않으며, 받는 자도 보지 않는다. 5바라밀 나아가 부처님의 18법을 행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익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를 써야 한다. 또한 5음을 익히는 것도 아니며, 익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5음은 형상이 없으니 익히는 것이 아니며, 익히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6바라밀도 또한 익히는 것도 아니며, 익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6바라밀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18법도 익히는 것도 아니며 익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18법은 공하여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소유가 없으며 또한 형상도 없으며 볼 수 없으며, 또한 익히는 것도 익히지 않는 것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반야바라밀 중에 들어가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지 못한다. 구화구사라를 써서 구화구사라를 여의지 않아야 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법에 소유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도 또한 취할 것이 없어야 한다. 6바라밀도 또한 소유가 없으며, 5음도 또한 소유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18법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인데 마땅히 무엇을 취하겠느냐? 그러므로 보살도 또한 취할 것이 없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반야바라밀도 또한 호지(護持)할 것이 아니다. 나아가 부처님의 18법도 또한 호지할 것이 아니다. 이 반야바라밀도 곧 호지할 것이 아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배우면 배우는 것 또한 보지 않는데, 하물며 반야바라밀이겠느냐? 하물며 보살이겠느냐? 하물며 불법과 성문․벽지불법이겠느냐? 하물며 범부법이겠느냐? 사리불이여, 모든 법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소유가 없는데 어느 곳에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 있을 것이며, 어느 곳에 성문․벽지불법이 있으며, 어느 곳에 삼야삼불법이 있겠느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삼승과 범부법도 볼 수 없는데 누가 마땅히 말로 설법을 하겠습니까.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은 이 삼승법에서 형상이 없는 법인데, 어떤 인연으로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은 삼승법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이 5음에 들어가면 형상이 있고 처소가 있으면 실상이 있는 것이냐?”
사리불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곧 전도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이 불도에 들어가면 형상이 있고 처소가 있으며 실상이 있는 것이냐?”
사리불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행하되 모든 법에 형상이 없는 것을 보면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발하게 된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의 구화구사라이며, 모든 법에 형상이 없음을 보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발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형상이 있는 모든 법에 장애를 짓는 것을 보지 않아야 하며, 장애가 있다고 마땅히 싫어할 것도 보지 않아야 하며, 또한 게으름이 있는 것도 보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형상이 있는 것도 없으며 수명이 있는 것도 없다. 있는 것은 다 소유가 없다. 모든 법의 성상(性相)은 공하다. 중생은 몽매하고 어두워서 5음(陰) 12쇠(衰)에 들어가나, 보살은 모든 법의 소유가 다 소유가 없음을 보아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자립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환사(幻師)와 같아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되 탐심과 질투가 있는 자를 위하여 보시의 복을 설하며, 악행이 있는 자를 위하여 지계의 복을 설한다. 성냄과 분함이 있는 자를 위하여 인욕의 복을 설하며, 게으름이 있는 자를 취하여 정진의 복을 설하며, 마음이 어지러운 자를 위하여 일심(一心)의 복을 설한다. 어리석은 자를 위하여 지혜의 복을 설하여 중생을 6바라밀에서 건립한다. 현성의 위[上]에 있는 존귀한 법을 굴려서 설하여 삼승의 도를 얻게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보살은 공하여 중생이 없다고 말하는데 6바라밀의 일을 설하여 삼승의 도를 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법에 얻는 것이 없어야 한다. 무슨 뜻인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중생을 보지 않아야 하며, 또한 그 처소도 보지 않아야 한다. 보살마하살은 단지 도수(道數)를 써서 중생을 위하여 진제와 속제, 두 가지 진리를 설법하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두 가지 진리를 쓰지 않으므로 중생과 그 처소를 얻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다만 구화구사라를 써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해야 한다. 중생이 현재 하는 것도 오히려 스스로 보지 않는데 하물며 도를 얻음이 있겠느냐? 이미 얻었으면 바로 마땅히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법해야 하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천상천하의 대사(大士)입니다. 저 법 중에서 또한 한 글자도 보지 않으며, 약간도 보지 않으며, 또한 차별도 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비교적 중요한 서원을 세우는 것도 또한 삼계에 나타내지 않으며, 또한 유위․무위의 성품에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삼계 중생을 제도한다 해도 또한 중생을 보지도 않으며, 중생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은 또한 얽어매는 것도 아니며 해탈도 아니며, 집착하지 않으며,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5취(趣)가 각각 다르되, 또한 합(合)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무너지는 것을 보지 않으며, 또한 청정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더러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물며 마땅히 5도(道)의 취를 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사리불이여, 네가 말한 것과 같다. 가령 본래 중생이 있는데, 없게 하는 것이라 하면 보살과 부처님은 곧 허물이 있게 된다. 가령 본래 5도(道)의 생사에 나아가는 것이 없는데 있게 한다면 또한 여래와 보살의 허물이 있게 된다. 부처가 있든 없든 생사의 법은 상주하여 여여한 것이다. 그와 같이 상주하는 것이 여여하므로 이 가운데에는 또한 중생도 없으며 또한 나라는 아(我:我想)도 없으며 또한 수명(壽命)도 없으며 또한 지견(知見)의 일도 없다. 그런데 하물며 응당 5취가 있겠느냐? 이 법은 또한 단서(端緖)도 없다. 그런데 하물며 5취의 생사가 있어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겠느냐?
사리불이여, 보살이 과거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법상이 공함을 들었으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또한 내가 법에서 얻은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중생을 전도된 곳에 들어가게 한다면 능히 제도하여 해탈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크게 중요한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이 중요한 서원을 세우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마침내 전환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마땅히 아유삼불(阿惟三佛)을 이루어 법우(法祐)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여 전도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환사가 수천억만 사람을 화작(化作)하는 것과 같다.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으로 약간의 화인(化人)을 다 식사하게 하여 배부르게 하고 다시 크게 환희하여 ‘내가 오늘 지은 복은 광대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사리불이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참으로 포만을 얻게 한 것이냐?
사리불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처음 뜻을 발한 이후로 6바라밀과 4선과 4등과 4공정을 행하며, 37품법을 행한다. 18공과 3탈문과 8유무와 9차제선을 행하며, 부처님의 10종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를 행하여 부처님의 18법에 이른다. 보살도를 구족하여 불토를 청정하게 함으로써 중생을 가르친다. 그리고 법을 얻어 내려와서 교화한 것을 보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도이며, 중생을 가르치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처음 뜻을 일으킨 이후로 6바라밀을 행하며, 나아가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가르쳐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 보시하고 사람에게 보시하라고 가르쳐서 말하되 ‘선남자야, 마땅히 보시를 익혀야 큰 부(富)를 얻을 수 있으며 생사의 고통을 여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베푼 것에 집착하지도 말고 베푼 자와 그 받은 자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 세 가지 법은 성품이 공하다. 공한 법은 또한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받지 않는 것도 아니며, 성품이 공한 것은 받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또한 보시할 물건도 보지 않으며, 또한 자기 스스로를 보지 않으며, 또한 받을 자를 보지도 않는다. 단바라밀은 이와 같이 제도했다는 것에 의지함이 없어야 한다. 이 세 가지 보는 바 없는 법을 가지고 삼승에서 중생을 건립해야 한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가르쳐 스스로 보시를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고 도와 보시를 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시하는 것을 보면 찬탄하며 그 환희를 대신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보시를 하면 4대성가(大姓家)에 태어남을 얻으며, 차가월라(遮迦越羅)를 얻게 되면 곧 네 가지 일로 중생을 섭취하니, 첫째는 혜시(惠施)요, 둘째는 인애(仁愛)요, 셋째는 이인(利人)이요, 넷째는 동의(同義)이다. 이것이 네 가지 일이다. 이 네 가지 은혜로 보시하여 시(尸)바라밀과 선바라밀에서 중생을 건립하는 것이다. 4선․4등․4공정을 건립하며 37품과 3탈문을 건립하며, 권하고 도와서 삼승도를 구하게 해야 한다. 사람을 가르치되 ‘선남자야,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중생이 전도된 법에 얽매이지 않게 해야 한다. 마땅히 스스로 전도에서 해탈해야 하며, 다시 사람에게도 가르쳐 주어서 이 얽매임을 여의게 해야 한다. 마땅히 스스로 복우(福祐)의 이로움도 받으며, 또한 마땅히 여러 중생도 도와서 이롭게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단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이것을 행하는 자는 처음 뜻을 일으킨 이후로 악취에 떨어지지 않으며, 있는 곳마다 늘 차가월라의 복을 얻는다. 그 보시하는 바를 따라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성왕(聖王)을 구하여 찾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성왕은 생각하여 말하되 ‘내가 전륜성왕이 되기를 구한 까닭은 다만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며, 구하는 자에게는 ‘내가 소유한 것을 다 네가 소유하게 하리라. 갖고 있는 복우도 다 중생을 위하여 보시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항상 대자비를 가지고 중생을 요익하게 해야 하며, 또한 중생을 보지 않아야 한다. 다만 속수(俗數)를 썼을 뿐이므로 중생이라는 이름과 명호의 일이 있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피부와 살[肌肉]도 오히려 아끼지 않는데 하물며 외물(外物)이겠느냐? 다만 중생의 생사를 제도하여 해탈케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외사(外事)인가? 6바라밀이 이것이다. 나아가 18법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받들어 행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단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에게 보시를 권하여 계를 지키게 하되 ‘네가 계를 지키면 나는 너에게 결핍함이 없게 하리라. 네가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마땅히 풍족하게 줄 것이다. 사람은 다만 재물을 쓰고자 하므로 오로지 계를 범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네가 계를 지키면 나는 너의 탐심을 끊을 것이다. 계를 쓰는 인연과 삼승의 법으로써 제도하여 고통에서 해탈하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단바라밀에 머물러 만약 중생이 성을 내고 분함을 내어 다투는 것을 보면 보살은 물어 말하되, ‘선남자야, 너희는 무슨 일로 다투는 것이냐? 너희가 만약 금은 보물을 나에게서 얻고자 한다면 취해 가라. 그리고 함께 싸우지 말라’고 한다. 보살은 보시에서 중생을 건립하여 찬(羼)바라밀을 행하게 한다. 중생에게 말하되, ‘너희는 함께 공(空)에서 싸우는구나. 실다움이 없으며 다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에서 싸우지 말라. 서로 도적같이 해를 입히니 원결(怨結)을 맺는 것이다. 공무(空無)의 일을 써서 3악업(惡業)에 떨어지지 말아라. 원망과 분노를 일으키면 오히려 다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부처님 세상을 만나겠느냐?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우며, 부처님 세상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 세상을 버려서 끝없이 죄에 떨어지지 말라’고 한다.
보살은 인욕을 행하고 타인에게도 권하여 인욕을 행하게 한다. 인욕을 행하는 것을 보면 찬탄하고 기뻐한다. 중생을 건립하여 찬바라밀을 행하게 하고 삼승법으로써 제도하여 해탈하게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보시에 머물러 중생에게 권하여 세워서 찬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어떤 것이 보살이 단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에게 권하여 유체(惟逮)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중생이 게으른 것을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게으른가?’ 하고 묻는다. 그러면 중생이 ‘인(因)하는 바가 없으므로 게으름을 피웁니다’라고 대답한다.
보살이 단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에게 말하되, ‘선남자야, 어떤 결핍됨이 있다면 나는 마땅히 너희에게 줄 것이다. 너는 마땅히 정진하여라. 나는 보시․지계․인욕으로써 너에게 인연을 짓게 해 주리라’고 한다. 중생이 이를 들으면 곧 신(身)․구(口)․의(意)로써 정진을 행하여 곧 모든 선법을 구족한다. 곧 현성의 무루(無漏)의 뜻을 얻으면 그 선법을 따라서 삼승법으로써 해탈을 얻게 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보시에 머무는 것이며 중생에게 권하여 도와서 유체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어떤 것이 보살이 단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을 건립하여 선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까?”
“보살이 중생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선법(禪法)을 배우지 않느냐’고 말하면, 중생이 ‘우리들은 인연이 없어 선을 배우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살이 ‘나는 마땅히 너와 함께 인연을 지어서 너로 하여금 생각을 끊게 하리라’ 하고 대답한다. 보살은 곧 중생과 같이 생각이 없는 인연을 지어서 그 생각을 끊도록 한다. 그러면 곧 4선(禪)과 4등념(等念)과 37품을 얻게 되며, 삼승법으로써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여 아뇩다라삼야삼불에 이르게 해도 도(道)의 일에서는 털끝만큼도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보시에 머무는 것이며 중생에게 권하여 세워서 선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어떤 것이 보살이 단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에게 권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까?”
“보살이 중생에게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을 염하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중생이 ‘인연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보살이 다시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모실 것이다. 너희들이 보시․지계․인욕․정진으로 선(禪)을 행하면, 너희들로 하여금 이 일을 구족하게 하리라’ 하고 말한다.
보살이 이런 생각을 한다.
‘참으로 다시 법이 있어 사람을 얻을 수 있는가? 중생과 나라는 아(我)와 수명(壽命)과 모든 삼계에는 들어갈 수 있는가? 6바라밀과 37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수다원․아라한․벽지불과 불(佛)에 들어갈 수 있는가?’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모든 법에 얻을 것이 있는 것과 들어갈 것이 있는 것과 얻을 곳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들어갈 곳이 없음을 얻으면 법에 생이 있고 멸이 있으며, 집착이 있고 끊음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별하지도 않는다. 또한 이것은 하늘이며, 이는 사람이며, 이것은 3악취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은 계(戒)이며, 계가 없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은 수다원․사다함․아나함이며, 이것이 아라한․벽지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이 여래․무소착․등정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보시에 머무는 것이며 중생에게 권하여 세워 반야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보살이 6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에게 권하여 세워 37품을 행하게 하는 것인가? 보살은 방편으로 중생을 섭취한다.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현성팔품도(賢聖八品道)를 행하게 한다. 이것을 받으면 곧 생사에서 해탈하게 된다.
수보리여, 이것이 현성의 법으로 중생을 섭취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방편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이렇게 말한다.
‘모든 현인은 나에게 긴 밤 동안[長夜] 보시하게 하여 이제 그 복을 받았다. 나에게 있는 것은 다 모든 현성이 소유한 것이다. 금․은․7보․의복․재물․곡식을 얻고자 하면 나는 그들을 마땅히 풍족하게 해 주리라. 이것들을 소유하게 하여 오랜 세월 동안 안온하게 해 줄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6바라밀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아울러 여러 사람에게 권하여 6도(度)에 머물게 해야 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중생을 건립하여 37품과 부처님의 10종력 및 18법을 행하게 해야 한다. 마땅히 다시 일체 중생에게 삼승의 도와 무루의 법을 가르쳐야 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마땅히 이와 같이 중생을 교화하여 3악취와 생사의 고난을 제도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시(尸)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여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계를 범하는 곳에 머물고 있다. 마땅히 너희를 위하여 청정한 계의 인연을 지으리라.’
그리고는 곧 보시를 행하여 그 방편을 따라 유인하여 나아가게 한다.
중생에게 권하여 널리 10선(善)을 행하게 하고, 이 10선을 가지면 허물이 없는 곳에 머물게 될 것이다. 현성의 계를 범하지 않아야 하며, 삼승으로 모든 고통 얻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시바라밀이 머리가 되는 것은 단바라밀에서 설한 것과 같다. 나머지 네 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다.”
82. 건립품(建立品)
이때에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보살마하살은 어떤 도에 머물러 두려움이 없는 견고한 서원을 세워야 하는가?’
부처님이 이때에 수보리의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곧 말씀하셨다.
“6바라밀이 보살마하살의 도이다. 수보리여, 37품과 18공과 8유무(惟無)와 9차제선과 10력과 부처님의 18법, 이 모든 법이 보살도이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보살은 참으로 어떤 법도 배우지 않는 것이냐? 만약 모든 법을 다 배우지 않는다면 일체 지혜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다 공한 것인데 어찌하여 보살이 모든 법을 배우는 것입니까? 또한 소유가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생각해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도이며, 속(俗)이며, 유루․무루이며, 이것이 유위(有爲)이며, 이것이 무위입니까?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며, 성문과 벽지불의 법입니까?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모든 법은 실로 공하다. 가령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보살은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하므로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깨달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이것을 짓는지 묻고 싶지 않느냐? 가령 모든 법이 공하다면 보살은 어찌하여 ‘이것은 도법이며, 이것은 속법이다’라는 생각을 하는가.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중생이 모든 법이 다 공한 것을 안다면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중생이 모든 법이 다 공한 것을 알지 못하므로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깨닫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법을 위하여 처소를 지으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보살의 도를 행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관하여 말해야 한다.
‘모든 법은 다만 공으로만 얻을 수 없으며, 모두 마땅히 유행(遊行)하여야 한다.’
모든 법의 소유를 관하여 보면 들어갈 곳이 없다. 또한 6바라밀에 들어가지 않으며, 37품에 들어가지 않으며, 삼승법에 들어가지 않는다. 모든 법이 소유한 것이 각각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공은 또한 공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공은 오히려 얻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공에 들어가겠느냐? 그러므로 보살은 모든 법에 들어감이 없다. 법을 배우는 데 머물되, 중생이 단서가 없는 일을 짓는 것을 관하고 보살은 ‘중생이 비록 단서가 없는 일을 짓는다 해도 용이하게 제도할 것이다. 구화구사라를 써서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제도하여 해탈케 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생에게 ‘보시를 행하면 풍족한 재물을 얻을 수 잇다. 또한 재물에 대해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재물은 견고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중생을 지계․인욕․정진․일심의 지혜에서 건립하는 것이 모두 다 이와 같다. 비록 삼승에 머물더라도 또한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견고함이 없다. 보살은 이렇게 권하여 도울 뿐이다. 비록 보살도를 행하나 또한 견고함이 없다. 보살은 이렇게 권하여 도울 뿐이다. 비록 보살도를 행하나 또한 들어갈 곳이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은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들어갈 곳이 없다. 보살의 도는 머무는 바가 없다. 6바라밀을 행하되 또한 머묾이 없으며, 4선을 행하되 또한 머묾이 없다. 선(禪)은 각기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것 또한 공하다. 선의 일도 또한 공하니, 4등․4공정․8유무․9차제선에도 또한 머무는 바가 없다. 성문법을 증득하되 또한 그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머물지 않는 것입니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두 가지 일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 일입니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도는 머무는 곳이 없다. 또한 저 도에는 능히 머무는 것이 없다. 또한 환희하여 말하지 않는다. 내가 마땅히 수다원을 얻었다 하나, 그 가운데 머물지 않으며, 내가 마땅히 아라한․벽지불을 얻었다 하나 또한 그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나는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러 깨달아야 한다. 나는 뜻을 일으킨 이래 여기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나머지 도를 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이 항상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있어야 한다.
보살이 뜻을 일으킨 이후로 10주(住)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머지 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아뇩다라삼야삼보에 뜻을 두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신(身)․구(口)․의(意)로 단지 도에 뜻을 둔다. 보살은 저 도에 머물되 인연을 내지 않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생하는 것이 없는 데 나아가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보살이 도의 뜻을 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모든 법은 생하는 것이 없다. 모든 있는 것에 지을 것이 없다는 것은 곧 모든 법은 생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계시든 부처님이 계시지 않든 간에 법성(法性)은 항상 머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있고 없고 간에 법성은 항상 머문다. 중생은 법성이 항상 머무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도의 인연을 내어서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도(道)의 뜻을 냄으로써 도를 얻는 것입니까?”
“아니다.”
“도의 뜻을 내지 않으면 얻는 것입니까?”
“아니다.”
“또한 불생불멸에서 얻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인연으로 도(道)를 얻는 것입니까?”
“도(道)를 말하자면 또한 득도[度]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득도하지 않음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도는 곧 득도이며, 득도는 곧 도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만약 도(道)가 곧 득도이며 득도가 곧 도라면 보살은 이미 도에 이르러 이미 득도했는데, 어찌하여 여래의 32상과 80종호와 10종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4등과 4공정과 부처님의 18법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부처님이 도에 이른 것이냐?”
수보리가 대답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곧 도이며 도는 곧 부처님입니다.”
“수보리여,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느냐? 보살은 도에 이른 것이다. 보살은 6바라밀을 구족하고 37품을 구족한다.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4선․4등을 구족함으로써 18법을 구족한다. 금강삼매에서 일상(一相)의 지혜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음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차제(次第)를 씀으로써 이름하여 여래라 하는 것이며, 모든 법에서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불토를 청정하게 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처음 발심한 이후로 항상 신․구․의를 청정히 하고 아울러 나머지 사람을 교화하여 신․구․의를 청정하게 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몸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며, 입으로 악을 말하는 것이며, 뜻으로 악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신․구․의로 10악(惡)을 범하는 것이다. 질투로 계를 범하고 성냄으로 뜻을 어지럽게 하며, 게으름으로 지혜를 혐오하면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뜻으로 악을 생각하는 것이다. 계를 청정히 하지 못하면 이것이 또한 악이 되며 37품을 여의고 3탈문을 여의면 이것이 또한 악이 된다. 수다원도를 가까이하며 벽지불에 이르면 이것 또한 악이 되니, 이것이 보살의 악행이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5음(陰)․12쇠(衰)의 상을 가지면 또한 악이 된다. 남자와 여인의 상이 있으며, 삼계의 상이 있으며, 선악의 상이 있으며, 유위․무위의 상이 있으면 이것이 보살의 신․구․의의 악이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여러 악을 버리고 나서 스스로 6바라밀을 행한다. 또한 사람에게 권하여 나아가게 하고 6바라밀을 행하게 한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과 함께 불국을 구하여 청정하게 한다. 스스로 삼천대천국토에 있는 7보를 가지고 3존(尊)께 시주하고 서원을 세워 ‘나의 국토에 있는 7보를 다 드리겠습니다’고 말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기악(伎樂)을 가지고 부처님 세존을 즐겁게 해드리고 정사(精舍)와 강당(講堂)을 드린다.
다시 서원하여 말하기를 ‘나의 불국에서는 항상 하늘의 음악이 들려 오게 하리라’라고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삼천대천찰토에 있는 여러 향으로 3존께 보시하고, 다시 서원하여 말하기를 ‘나의 불토에는 항상 하늘의 향이 있게 하리라’고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백 가지 맛의 음식을 가지고 여래 및 제자 대중을 공양하며, 다시 서원을 세워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이룰 때 모든 제자들은 자연의 백 가지 맛의 밥을 먹으리라’고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몸에 바르는 향으로써 부처님과 대중에게 보시하며, 다시 서원을 세워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이룰 때 나의 국토에 있는 사람의 신체에 부드러운 향으로 청결하게 하여 모두 천신(天身)과 같게 하리라’고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다섯 가지 즐거움과 착한 서원을 부처님과 대중에게 보시하며 다시 서원을 세워 말하길 ‘내가 부처를 이룰 때에 나의 국토에 있는 일체 중생이 마음으로 원하는 바에 따라 다섯 가지의 즐거움과 착한 서원을 얻게 하리라’고 한다.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다시 서원을 세워 말하기를 ‘스스로 4선과 4등과 4공정(空淨)을 행하고 중생에게 권하고 도와서 4선과 4등과 4공정을 행하게 하리라’고 한다.
스스로 37품을 행하고 다시 중생에게 권하여 널리 행하게 하고 다시 서원을 세워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이룰 때 나의 국토에 있는 중생이 모두 다 4선과 4공정과 37품을 여의지 않게 하리라’고 한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이 불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보살은 도를 행하며 모든 원을 만족하게 한다. 모든 원을 구족하지 못하면 끝내 행을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모든 선법을 구족하고 또한 다시 중생에게도 착한 원을 만족하게 한다. 이와 같이 도우며 가르침을 행하면 몸으로 많은 복과 공덕의 상을 얻게 된다. 모든 가르침을 받는 자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보살은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청정함인가? 3취처(趣處:지옥․아귀․축생)가 없으며, 사견(邪見)이 없으며,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으며, 2지(地)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무상(無常)․무아(無我)․고(苦)․공(空)이 없는 것이다. 가업(家業)도 없으며, 나라는 아(我)도 없는 것이다. 사변처(伺便處)가 없으며, 과보의 처소가 없는 것이다. 다만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외의 음성을 듣되 바람과 같이 지나가야 한다. 음성이 나온 것도 모든 법의 상(相)과 같다. 부처님이 있고 없고 간에 모든 법은 항상 공하다. 공한 것은 상이 없으며, 상이 없는 것은 원(願)이 없다. 음성을 내어 가르치는 것도 이와 같다. 주야로 눕고 깨어나며, 앉고 행함에 항상 이 음성을 들으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다. 그 찰토에서 이와 같이 10력을 지닌 모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한다. 일체 중생이 불명호를 들으면 반드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이때에 여래께서 널리 설법하시는 것을 들으면 정법(正法)이니 비법(非法)이니 하여 여우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모든 불법은 비법이 아니며, 모두 정법이기 때문이다. 덕이 없는 모든 사람은 또한 부처님과 제자 대중에게 선의 근본을 심지 않았으며, 또한 참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곧 나라는 아견(我見)을 짓는 것이다. 나라는 아(我)가 있으면 곧 62견(見)에 들어간다. 모든 견에 들어가면 곧 변제(邊際)에 머문다. 변제에 머물면 곧 항상함이 있는 데 집착한다. 항상함에 집착하면 곧 이 모든 것에 집착한다. 평등하지 못한 곳에서 등각(等覺)의 생각이 있는 것이다. 평등각에서는 또한 깨닫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법을 말하면 법이 아니며, 비법을 말하면 곧 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법을 비방하면 곧 사람 몸은 무너지고 악취에 떨어져 지옥에 떨어진다. 보살과 모든 부처님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면 그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나니, 제도되어 벗어난 뒤에는 미래에 마땅히 삼승법을 세워서 다시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이 불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불토를 청정하게 했으면 일체 중생도 또한 옳은 법도 없으며, 또한 그른 법[非法]도 없으며, 유루․무루․유위․무위가 없으며 반드시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게 된다.”
83. 필경품(畢竟品)
이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필경(畢竟:究竟)을 이룹니까? 필경을 이룰 수는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필경을 이루기도 하고 필경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세존이시여, 필경은 어떤 승(乘)에서 이뤄집니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이승(二乘)에서는 필경을 이루지 못하며, 불승(佛乘)에서 필경을 이룬다.”
“세존이시여, 불승에서 필경을 이룬다면 처음 뜻을 일으킨 보살입니까? 10주(住) 보살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처음 뜻을 일으킨 보살도 또한 필경을 이룰 수 있으며, 아유월치(阿惟越致) 보살도 또한 필경을 이룰 수 있다. 10주 보살도 또한 필경을 이룰 수 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필경을 이룬 보살은 악취에 나아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4쌍(雙)과 8배(輩)가 벽지불에 이르면 악취에 태어나는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처음 뜻을 일으켜 6바라밀을 행하면 악은 곧 멸하나니, 만약 악취에 태어난다면 이 일은 그럴 리가 없다. 또한 장수천에 태어나지 않으며, 변지(邊地)와 불법이 없는 곳에 태어나지 않으며, 사견(邪見)을 가진 집에 태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곳에 태어난다면 이것 역시 그럴 리가 없으니, 끝내 도견(道見)이 없는 집에 태어나지 않는다.
수보리여, 새로 배우는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키면 마침내 다시 10악의 일을 범하지 않는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한 법[一法]에서 곧 구족할 수 있습니까? 악을 따르면 어떠합니까? 세존이시여, 스스로 지나온 숙명을 말하되, ‘혹 사슴 가운데 떨어졌으며, 원숭이 가운데 떨어졌으며, 말과 코끼리 가운데에 떨어져 역시 괴로움을 만났다’고 한다면 이 일은 어찌 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악행을 행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악취에 태어난다. 중생에 대한 방편을 따라서 그 몸을 받나니, 중생을 복우(福祐)로 이롭게 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성문․벽지불이 참으로 구화구사라가 있어 축생 중에 들어가서 중생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고자 하나 이는 도리어 방해가 되니 그런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대자대비로 계속하여 여여하게 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들 모든 성문에게 참으로 이것이 있느냐?
이런 까닭에 보살은 큰 자비를 구족했기에 구화구사라로 축생 가운데 들어가서 중생을 구호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떤 선의 근본의 공덕으로 법에 머물러야 하며, 이러한 무리는 뜻에 따라 형상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공덕은 법에서 모두 마땅히 구족하여 성취해야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룬다. 처음 발심한 이래 도량에 앉음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법도 구족하지 않음이 없으면 아유삼불(阿惟三佛)을 이룬다. 보살은 뜻을 일으켰으면 마땅히 배워 모든 선의 공덕을 구족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배우면 마땅히 살운야(薩云若)에 이르러 모든 습의 실마리가 다 없어진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모든 선법을 구족하면 현성의 무루법을 다 얻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악취에 태어나서 축생도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었다.
“여래는 이 현성의 무루법을 이루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는 스스로 축생의 상(像)으로 화작하여 불사를 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축생의 상으로 화작하여 불사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다. 여래가 축생이 되면 축생의 고통을 받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현성의 무루법을 받았으므로, 좋은 방편으로 형상을 변화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아라한으로 변화하여 아라한의 일을 한다면 중생을 기쁘게 할 수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미 현성의 무루법을 받아 구족하면 중생의 뜻을 따라서 그 형상을 받는다. 중생을 위하여 복전을 지어 내어도 또한 그 형상의 고통은 받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환사(幻師)가 혹 코끼리와 말을 나타내어 약간의 변화를 나타낸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것이 코끼리냐? 이것이 말이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코끼리와 말이 아닙니다.”
“보살도 이와 같이 구화구사라로써 중생을 도와서 이롭게 하기 위해 중생의 부류를 따라 들어가서 교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많은 고통의 번뇌를 받지 않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큰 방편을 잘 쓰는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른바 보살이 현성의 무루의 지혜를 구족하였다면 곳곳마다 그 습속과 형모(形貌)를 따르는 법으로 중생을 안립하여 본래 세존과 같이 하는 것입니까? 보살은 어떤 선법(善法)에 머물러야 하며, 이에 선권방편(善權方便)을 짓되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주하면 이 구화구사라를 지을 수 있다. 이 방편을 가지고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중생을 위하여 선의 근본을 짓되 함께 돌아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가까움이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며, 또한 법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소유가 다 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은 오염된 공이 아니다. 공은 또한 사람을 더럽히지 않으며, 사람 또한 공을 더럽히지 않는다. 공도 또한 공한 것이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얻을 것이 없는 것이 공이다. 보살이 얻을 것이 없는 공에 머물면 아유삼불을 이룬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다만 반야바라밀에 머물면 다시 나머지 법에는 머물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참으로 반야바라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스스로 반야바라밀을 공하여 있는 것이 없다고 설하셨습니다. 어떻게 모든 법이 반야바라밀 중에 들어가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공은 또한 들어갈 곳도 없으며, 또한 들어가지 않을 곳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어떻게 모든 법은 모든 법에 들어가지 아니하여 공한 것이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진실로 공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한 것이라 하면 모든 법은 또한 공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떻게 공에 머물러 신통한 지혜를 구족하겠습니까? 신통한 지혜로써 동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찰토를 지나서 모든 여래를 보며, 많은 선의 근본을 심어서 법의 가르침을 듣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모든 부처님이 다 공한 것을 보아야 한다. 다만 명호로써 그곳에 시현했을 뿐이다. 모든 명호의 처(處)를 빌려온 것이니, 다 공한 것이다. 만약 모든 찰토의 모든 부처님이 공한 것이 아니라면, 공은 한편에 치우침이 있는 것이다. 공은 한편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법은 다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를 써서 신통을 구족해야 한다. 그러면 천안(天眼)․천이(天耳)․신족(神足), 그리고 다른 사람의 뜻을 자재하게 아는 신통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생사의 일을 자재하게 아는 신통을 얻어야 한다. 보살이 신통을 얻지 못하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보살마하살의 도이다. 마땅히 이렇게 하여 도를 구해야 한다. 도를 쓰는 천안으로 자재하게 모든 선한 법을 보아야 하고, 아울러 나머지 다른 사람이 선한 법에 머무는 것을 보아야 한다. 또한 선법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모든 법이 다 공하기 때문이다. 공은 들어갈 곳도 없으며, 또한 공은 들어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공은 즐거움도 없으며 공은 또한 즐거워할 바도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천안을 얻어서 모든 법이 공한 것을 보아야 한다.
만약 이 법이 없다면 또한 불사를 해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중생의 처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얻을 것이 없는 것에 응함으로써 곧 신통을 얻는다. 응하는 바를 따라 지으면 곧 지을 수 있다. 보살은 천안으로 모든 시방을 보고 모든 찰토에 날아가서 중생을 위하여 도와서 이롭게 하나니, 6도(度)나 37품이나 모든 선유무(禪惟無)․4공정이나 성문․벽지불법이나 보살법이나 삼야삼불법으로써 탐심과 질투가 있는 자를 위하여 보시의 덕을 설하고, 빈고(貧苦)의 법을 설한다. 가난한 것은 세간의 고통이다. 오히려 스스로의 몸도 요익되게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진 자는 마땅히 은혜를 베풀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스스로 안온하게 하고 다시 나머지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서로서로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3악취를 여읠 수 없다. 악을 범하는 자를 위하여 계법을 설하여 이렇게 말한다.
‘악을 지으면 몸이 괴롭고 스스로 악에 빠지는데 어떻게 여유 있고 편안할 수 있겠느냐? 악을 범한 과보는 3고(苦)를 여의지 못한다. 너희들이 스스로 3악취에 떨어지는데 어떻게 다른 이를 빼낼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인자는 마땅히 뜻을 방자하게 하지 말아야 하나니, 악취에 떨어져 후에 스스로 몸을 태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성내는 마음을 내어서 서로 도적같이 해(害)하는 것을 보면 법을 설하되, ‘너희들은 다투지 말고 성내는 마음으로 3악취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게으른 자를 위해서는 정진하는 법을 설하며, 뜻이 어지러운 자를 위해서는 선정의 일을 설해야 한다. 악한 지혜를 가진 자를 위해서는 지혜의 법을 설하며, 음란한 자를 위하여 애욕의 부정(不淨)함을 설해야 한다. 사견이 있는 자에게는 바른 도를 지시하여 삼승에 머물게 한다.
법을 설하되, ‘모든 인자여, 들어갈 곳은 다 소유가 없으며 공하여 없는 법이다. 또한 들어가지 못하며 공은 들어갈 곳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또한 신통에 머물러 중생을 위하여 선의 근본을 지어야 한다. 보살이 신통에 머물지 못하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할 수 없다.
비유하건대 모든 새가 날개가 없으면 높이 날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신통에 머물지 못하면 또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신통을 배워야 한다. 이미 신통을 얻었으면 곧 일체 중생을 도와서 이롭게 해야 한다. 천안으로써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보며, 중생을 다 보되 그 뜻을 다 알아야 한다. 고하(高下)를 따라 응하여 법을 설하되, 혹은 6바라밀을 설하거나 열반법을 설한다. 보살은 천이로 하나하나의 음성을 들으며, 또 동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부처님이 설하신 교법을 듣는다. 널리 중생을 위하여 들은 것과 같이 설하여 뜻을 따라 설하되, 혹은 6도를 설하거나 혹은 열반을 설한다. 청정한 뜻으로 중생의 생각을 알며, 본말이 생긴 바와 다른 이의 일을 자재하게 안다. 기억하여 아는 신통한 지혜로 과거의 모든 부처님 여래와 제자의 명호를 모두 다 안다. 또 중생이 행한 숙명을 알아서 설법을 하되 혹은 6도를 설하거나 혹은 열반을 설한다. 다시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찰토에 날아가서 모든 부처님이 심어 놓은 선의 근본을 보되, 다시 본토의 청정하고 번뇌가 다한 혜(慧)에 돌아온다. 다시 이 혜로써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되, 혹은 6도를 설하거나 혹은 열반을 설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신통을 알아야 한다. 청정한 신통을 얻으면 하고자 하는 뜻대로 그 형상을 변화하되, 삼계의 고락(苦樂)에 오염되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부처님이 사람으로 화하여 계신 곳에는 고락이 없는 것을 갖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신통에 유희(遊戱)하여 불찰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 신통을 구족하지 못하면 청정한 불국토를 교화할 수 없다. 보살이 불국을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지 못하면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한다. 보살이 지절(支節)을 구족하지 못하면 곧 도가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지절을 구족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곳의 선법이 보살의 지절이다.”
“어떤 것이 선법이며, 보살의 지절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뜻을 발한 이후로 단바라밀 중에서 모든 선법을 행하는 것이다. 보시를 깨닫지 못하면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중에서 이런 생각을 내어 이것을 주는 것이 가(可)한 것인가, 주는 것이 불가한가 하는 분별과 생각이 다 공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바라밀을 구족하여 지니면 스스로 제도하여 피안에 이르고 다시 타인을 제도한다. 중생을 생사에서 제도하여 해탈하게 한다. 이것이 보살의 아뇩다라삼야삼보며 선법이며, 지절이다. 과거․미래․현재의 보살도 이로부터 득도한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한다. 6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다. 4선․4등․4공정․37품․18제공(諸空)․8유무․9차제선․다린니문․4무애혜․부처님의 18법 등의 이 모든 선법은 보살도의 경로이다. 이것을 구족하고 나면 곧 살운야(薩云若)에 이르며, 살운연(薩云然)에 이르면 곧 법륜을 굴린다.”
84. 분별품(分別品)[단본(丹本)에는 분별사제품(分別四諦品)으 로 되어 있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이 법이 보살의 법이라면 불법은 또한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이 법으로 구족하면 곧 살운야혜(薩云若慧)에 이르며 모든 습(習)의 실마리가 다해진다. 보살마하살은 곧 이 보살법을 모두 깨달아 안다. 불법은 일상(一相)의 지혜로 일체의 지혜에 응하여 정각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불법과 보살법의 차이이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도를 향해 이미 도를 증득한 이 두 무리는 현성이다. 보살은 양쪽 중간에 머문다. 부처님은 과거 여래․무소착․등정각으로써 차별된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공하여 없는 법에 무슨 차별이 있으며, 약간의 품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지옥이고, 아귀이며, 축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인도(人道)며, 이것은 천도(天道)며, 이것은 8수(數)이며, 이것은 벽지불이며, 이것은 보살이며, 이것은 불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도에는 소유가 없으며, 행 또한 소유가 없습니다. 만약 행에 소유가 없다면 죄와 복의 과보 또한 소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여, 네가 말한 것과 같이 공하여 없는 법은 또한 행이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다.
수보리여, 공하여 없는 법을 알지 못하면 혹 선악의 행을 지어서 유루․무루가 있게 되며 행의 소치로 말미암아 곧 3악취에 있게 된다. 선행을 지으면 곧 천도․인도에 있게 되어 삼계 가운데 있음을 끊지 못한다. 보살은 6바라밀 나아가 부처님의 18법을 행하고 보살법을 행하면 또한 허물이 없게 되다. 이것이 보살이 지절을 구족하는 것이다. 금강삼매로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이며, 중생을 위하여 후덕함을 짓는 것이다. 그 후덕한 것은 마침내 부패하지 않고 5도(道)를 내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유삼불을 이룰 때에 5도의 생사를 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다시 물었다.
“여래는 선악법을 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세존께서는 선법도 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세존께서는 또한 선도 보지 않으며, 악도 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이 네 구절이 그렇지 않다면 어느 곳에 천도와 인도․3악도가 있는 것입니까? 어느 곳에 성문․벽지불도가 있는 것입니까? 어느 곳에 보살처가 있으며, 불도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었다.
“중생이 모든 법상이 공한 것을 아느냐? 중생이 모든 법상이 공한 것을 안다면 보살은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중생을 제도하여 악취를 여의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생은 모든 법상이 공한 것을 알지 못하므로 5도를 여읠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법상이 공한 것을 들었으므로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킨다. 범부가 들어갈 바의 법과 여래에 다시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법으로 짓는 것은 각각 스스로 얻는 것을 알지 못한다. 중생에 중생상이 없으며 5음에 5음상이 없어야 한다. 무위에서 유위상을 지으며, 스스로 무소유에서 전도된 생각을 짓는다. 신․구․의로 짓는 것이 전도되었으므로 곧 5취에 떨어져서 해탈을 얻지 못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모든 선법을 가지고 안으로 반야바라밀을 다 행하고 보살의 행으로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이다. 4제법을 가지고 분별하여 널리 펴고 중생으로 하여금 익히게 한다. 모든 선한 법인 37품과 4제(諦)는 곧 3존이 있으며 그 중생에게 3존의 인연이 있으면 해탈을 얻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고통을 여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을 득도시키려면 4제를 쓰며 4제의 지혜를 써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4제로 득도하게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4제의 지혜로 득도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4제를 설하여 등각을 얻게 하는 것이 제도하여 해탈하게 할 뿐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4제의 등(等)입니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고도 없으며, 고혜(苦慧)도 없으며, 습(習)도 없으며 습혜(習慧)도 없다. 진(盡)도 없으며, 진혜(盡慧)도 없다. 또한 도(道)도 없으며 도혜(道慧)도 없다. 4제가 여여한 것이 그러하며, 또한 법성의 법은 변이(變異)하는 것이 아니다. 진제법의 일은 부처님이 있고 없고 간에 항상 머물러 여여하기 때문이다. 이 법은 모든 법에서 잊는 것도 아니며, 잃는 것도 아니므로 터럭만큼도 줄어듦이 없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4제를 행하여 4제의 지혜에 이르러야 한다. 또한 마땅히 깨달음을 지어야 한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떻게 4제를 행하여 4제를 깨닫는 것이며, 깨달음을 따라 수행하면 또한 2지(地)에 떨어지지 않고 보살위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법의 요체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견(見)을 얻었다 해도 또한 소유한 것이 아니다. 소유하지 않으면 모든 법이 다 공한 것을 본다. 4제에 있든 4제에 있지 않든 다 공하여 소유함이 없다. 이와 같이 보면 곧 보살위에 올라 종성(種性)에 머문다. 종성에 머물고 나면 위로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2지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종성에 머물면 곧 4선과 4등 및 4공정을 일으켜 멸진정(滅盡定)에 머문다. 모든 법을 보아 알고 4제의 지혜를 알면 고의 습을 내지 않고 도의 인연을 다한다. 단지 도의 뜻을 일으키고 모든 법이 여여한 것을 관하여 본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어떻게 해야 모든 법이 여여하게 응하는 것을 관하여 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공한 것이다.”
“무엇이 공입니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스스로 신상(身相)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여 관하면 모든 법이 공한 것을 본다. 법이 있음을 보지 않으면 도를 깨달음에 이른다. 도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며, 아라한․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보살이 만들어 행하는 것도 아니다. 일체 중생은 이 일을 살피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구화구사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다.”
85. 유무품(有無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모든 법이 있는 바가 있는 바가 아니며,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며, 또한 아라한․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보살이 만든 것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모든 도에 분수(分數)와 선악의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3악취와 인도(人道)가 있으며, 사천왕에서부터 위로 장수천에 이르기까지 높낮음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또 이것을 만들었으며 이것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며, 악을 행하면 3악취에 들어가며, 선을 행하면 인도에 태어나며, 혹은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도를 행하여 수다원을 얻으며 아라한․벽지불을 얻는 데 이르는 것이며, 이 행을 지어서 보살법을 얻는 것이며, 이 삼야삼보를 얻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법은 있는 것이 아니며, 만든 것도 없으며, 행함도 없으며, 성문․벽지불의 행도 없으며, 보살행도 없으며, 또한 삼야삼불의 행도 없으며, 또한 살운야에 이르러서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는 것도 없다면, 이 일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만든 것도 없으며 또한 행하여 얻는 것도 없다. 범부는 우매하고 어두워서 현성의 법을 알 수 없다. 또한 소유와 무소유의 법을 알지 못한다. 네 가지 전도된 견(見)에 속아 약간의 행을 지어 약간의 과보를 받은, 곧 5취의 생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유가 없는 법은 또한 행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받을 것도 아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수다원에서부터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에서 도에 이르기까지 다 소유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소유가 없는데 소유가 없는 법에 이를 수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수보리여, 소유가 없는 도와 일체 모든 법은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형상이 없어 볼 수 없으며, 또한 상대[對]가 없어 일상(一相)이다. 일상은 바로 무상(無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 중생에 들어가야 하며, 전도에 들어가며, 5음의 항상함과 무상한 생각에 들어감을 보아야 한다. 고(苦)는 이른바 즐거운 생각, 내가 있고 없다는 생각,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이 있어 유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살은 구화구사라를 써서 중생으로 하여금 유위를 여의게 해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이 5취를 여읜 곳에 들어갔다면 무슨 인연으로 걸림이 있으며, 참으로 진실로 필요함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있는 것도 아니며, 나머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행이 있는 것이 모발(毛髮)과 같은 것이다. 다만 중생이 네 가지 전도에 집착해 있어 5취가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을지어다. 이 일로써 내가 이제 설법하여 너로 하여금 알게 할 것이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꿈속에서 5락(樂)을 보고 스스로 즐거워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있는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꿈이 오히려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오락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모든 법의 유위․무위와 유루․무루가 참으로 꿈과 같지 않은 것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일체 모든 법이 다 꿈과 같습니다. 모든 법은 꿈과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꿈속에서 보는 사람에게 참으로 5취가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꿈속에서 사람이 참으로 도의 생각이 있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일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있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형상이 없는 법은 지어 내는 곳이 없으며, 집착하거나 끊어진 법은 또한 처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그러한 것이냐? 수보리여, 거울에서 상(像)을 보는 것이 참으로 행이 있으며, 참으로 5취의 생사의 과보가 있는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거울 가운데의 상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부가 미혹하여 스스로 있는 것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거울 가운데의 상은 또한 5취도 없으며, 짓는 것도 없으며, 행하는 것도 없습니다.”
“수보리여, 거울 속의 상에 도의 생각이 있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상이 없는 법은 조작할 것이 없으며, 또한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없으며, 처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산골짜기에서 메아리가 나왔다면 이 메아리에 참으로 행이 있으며 짓는 것도 있으며, 5취를 만드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아닙니다. 형상이 없는 법은 행도 없으며 만드는 것도 없으며, 5취를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메아리에 참으로 도의 생각이 있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있지 않습니다. 있는 것이 없는 법은 조작할 것이 없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도 없으며, 처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비유하건대 뜨거울 때의 불꽃처럼 강물에는 강물의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성곽에는 성곽의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정원을 보는 것에는 정원을 보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 불꽃이 참으로 지을 것이 있으며, 5취가 있는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불꽃에는 소유가 없습니다. 다만 미혹하고 어리석은 범부의 눈으로 보니, 모양이 있을 뿐입니다.”
“수보리여, 이 불꽃에 참으로 도의 생각이 있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없습니다. 형상이 없는 법은 지을 것이 없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도 없으며 또한 처소도 없습니다.”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환사가 코끼리와 말을 화작하는 것처럼 혹은 사람들을 만들어 약간의 종류를 나타낸다면, 이 화작하여 만들어진 사람이 참으로 행이 있으며 5취가 있는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환(幻)은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화작하여 만들어진 사람에게 참으로 도의 생각이 있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있지 않습니다. 형상이 없는 법은 조립(造立)할 것도 없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도 없으며, 처소도 없습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화작한 것에 참으로 행하고 지은 것이 있으며 5취가 있는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화(化)는 소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화에 도의 생각이 있으며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아닙니다. 형상이 없는 법은 도의 생각이 없으며, 또한 집착하거나 끊을 것도 없으며, 또한 처소도 없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 모든 법에 참으로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느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아닙니다.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령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없다면, 이것이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없는 것이다. 중생이 다만 나라는 아(我)에 머물기에 곧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자세히 진리[諦]를 살펴보면 집착할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다. 중생이 보는 바가 제를 살피지 못하므로 곧 집착하거나 끊을 것이 있는 것이다.”
방광반야경 제20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86. 제법등품(諸法等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 제(諦)를 살펴보면 집착할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으며, 제를 살피지 않아도 또한 집착할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으며, 있는 바와 있는 바가 없는 것도 집착할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으며, 진제를 살피고 진제를 살피지 않는 것도 함께 집착할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다면, 이 일은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끊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이 없고 간에 여여하여 그와 같이 법성(法性)과 진제법(眞際法)의 일이 처음부터 변이가 없으며, 항상 여여함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단(斷)이라 한다. 다만 세속의 명호를 씀으로써 말이 있고 가르침이 있을 뿐이다. 세속의 음성에 비록 말과 가르침이 있으나 다 소유가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모든 법이 꿈과 같고 메아리 같으며, 거울 속의 모양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으며, 환(幻)과 같고 화(化)와 같다면, 보살이 어떻게 공하고 없는 법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키고, ‘나는 마땅히 6바라밀을 구족하고, 신통을 구족하고, 지혜를 구족하여 4선과 4등과 4공정과 37품과 3탈문을 구족하리라’고 하며, ‘8유무와 9차제선을 구족하리라’ 하는 것입니까? ‘마땅히 10력과 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하리라’고 말하며, ‘32상과 80종호를 구족하리라’고 말하며, ‘다린니문(陀隣尼門)을 구족하리라’고 말하며, 어떻게 ‘내가 마땅히 광명을 지어서 널리 어두운 곳을 비추리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중생의 뜻을 알아 법을 설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네가 질문한 것과 같이 환과 같고 화와 같으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가령 모든 법이 꿈과 같고 환과 같다면, 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꿈은 환화(幻化)이므로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이 아닌 법은 6바라밀을 행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18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행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꿈에서 화하는 것은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한다. 이 법은 모두 유위의 상(相)이 있는 법이다. 유위의 상이 있는 법은 또한 살운야(薩云若)를 얻지 못한다. 이 법은 또한 도이며, 열반이다. 이 법을 쓰면 생하는 것이 없으며 상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보살이 처음 발심한 이후로 모든 선법을 익혀서 6바라밀에서부터 18법까지를 익힌다. 이 법이 꿈과 같고 화와 같음을 알아도 6바라밀과 18법을 구족하지 못하면 중생을 교화하지 못한다. 보살은 모든 선법을 익히되, 모든 법이 꿈과 같고 화와 같음을 관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관하며, 살운야를 관한다. 중생을 관하는 것도 또한 꿈과 같고 화와 같은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이 중에서 형상[形]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환화법(幻化法)에서도 형상을 받지 않는다.
마땅히 살운야에 이르렀다고 말하려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취하는 것이 없어야 하며, 18법에서도 또한 취함이 없어야 한다. 보살은 모든 법에 취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므로 아뇩다라삼야삼보에 나아간다.
모든 법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취할 것도 없으며, 가질 수도 없다. 취할 것이 없는 법이므로 얻을 것이 있다. 또한 이 법은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일으킨다. 뜻을 일으킨 이래로 6바라밀을 행한다. 다만 일체를 위하는 것이지 자신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키는 것은 다만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중생의 생각이 있으므로 보지 못하며, 견상(見想)이 있으면 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전도된 중생을 빼내며, 감로지에서 모든 습상(習想)을 끊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구화구사라로써 모든 법에 들어갈 곳이 없어야 하며, 중생을 들어갈 것이 없는 데 건립해야 한다. 다만 세속의 수(數)를 쓰는 것이지,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깨달은 법은 세속의 수를 쓴 것인데 제일의가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여래는 세속의 수로 깨달음을 얻었으나 또한 어떤 법에도 얻을 것은 없다. 만약 내가 도를 얻었다고 말을 한다면 이것은 크게 부끄러운 것이다. 만약 둘이 있다면 또한 이르는 것도 없으며 깨달은 것도 없다.”
“다시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가령 둘이 있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둘에서도 아니며 하나에서도 아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또한 하나에서도 아니며 둘에서도 아니다. 하나에서도 아니고 둘에서도 아니면 곧 깨달음에 이른다.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하면 희론이 되며, 곧 공고(貢高)함이 된다. 등각(等覺)은 희론도 없으며 또한 공고함도 없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있는 것이 모두 소유가 없다면 어떻게 이 등정각(等正覺)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유(有)는 유가 아니며, 무(無)는 무가 아니다. 또한 언설(言說)이 아니다. 이것이 곧 등각(等覺)이다. 등각의 법은 또한 언설이 없으며, 또한 법은 등각을 설하는 것이 있지 않다. 등각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등각에서 멀어져 간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을 깨닫는 것을 멀리 여의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등정각은 많은 성현, 성문․벽지불․보살 및 부처님의 처소가 아니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모든 법에서 자재함을 얻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범부의 등각과 성문․벽지불 및 여래가 다 함께 하나의 평등한 각[一等覺]이다. 하나의 평등한 각은 또한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범부도 없으며 삼야삼불도 없다. 여래는 또한 약간도 없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평등한 각[等覺] 가운데 분수(分數)가 없는 것이라면 범부와 성문, 벽지불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범부에서부터 삼야삼불까지에는 아무 차별도 있지 않다.”
“가령 범부에서부터 삼야삼불까지에 차별이 없다면 무슨 이유로 3존(尊)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불보․법보․비구승보․등각(等覺)이 다른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제가 세존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삼보와 등각에 다름이 있지 않습니다. 삼보와 등각은 합하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一相)은 상이 없으므로 상(相)이 없는 법이 됩니다. 수(數)를 짓고 처(處)를 지으면 곧 근(近)이 있고 처(處)가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무소착․등정각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때에 모든 법을 위하여 처(處)를 짓는다. 곧 3악취가 있는 것을 알며, 인도(人道)가 있음을 알며, 삼십삼천이 있는 것을 안다. 곧 37품을 알며 나아가 내외공(內外空)과 소유․무소유공을 알고, 18법이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이것이 여래와 대사(大士)의 특별한 차이다. 등각법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을 위하여 처(處)를 세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처럼 등각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까? 범부․성문․벽지불은 등정각에서 또한 움직이지 않습니까? 불법․범부법․성문법․벽지불법 및 여래법은 한 법[一法]입니까? 그리고 무형법(無形法)․색법(色法)․통상법(痛想法)․행법(行法)․식법(識法)은 다른 것입니까? 안법(眼法)․이법(耳法)․비법(鼻法)․설법(舌法)․신법(身法)․의법(意法)에 다름이 있습니까? 지․수․화․풍․식․공 법에 다름이 있습니까? 음욕․성냄․어리석음에 다름이 있는 것입니까? 62견(見)에 다름이 있습니까? 4선․4등과 4공정 법에 다름이 있습니까? 37품법과 3탈문법과 내외공과 소유․무소유공법과 8유무․9차제정과 4무소외와 4무애혜와 10력과 부처님의 18법과 유위․무위법 등 이 모든 법이 다 이름이 있는데, 어찌하여 처소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만약 보살이 이곳에 머물지 않으면 모든 법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보살은 마침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보살은 모든 10처(處)에 노닐어 보살위(菩薩位)에 오르게 된다. 곧 2지(地)를 지나며 이미 2지를 지났으면 신통을 구족한다. 모든 신통에서 5바라밀을 구족하면 모든 부처님 찰토에 노닐며,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여 섬겨서 많은 선의 근본을 심는다. 이 공덕을 가지고 중생을 교화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질문한 것은 여래 및 범부법과 2지법(地法)이다. 어찌하여 이런 질문을 하였느냐? 네 생각은 어떠하냐? 5음이 공한 법과 여래의 법이 다른 것이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공함이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에서 상(相)이 없는 법을 볼 수 있느냐? 5음상(陰相)과 불상(佛相)을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법의 법은 또한 있지 않다. 범부는 또한 범부를 여의지 않으며, 또한 여래법도 아니며, 여래법을 여읜 것도 아니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은 유위법입니까, 무위법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위를 여의지 않았으므로 유위법을 얻는 것이며, 또한 유위법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무위법을 얻는 것이다. 수보리여, 유위법․무위법은 한 법[一法]이지 둘이 아니다.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형상이 없으니 일상(一相)도 볼 수 없다. 일상이란 무상이다. 세속의 수인 까닭에 지은 것이 있는 것이며, 최고의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다. 최고의 제일의는 신․구․의로 짓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구․의를 여읜 것도 아니다. 제일의를 얻으면 모든 법이 평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의는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또한 최고의 제일의를 얻지 못했으면 보살의 일을 행해야 한다.”
87. 제법묘화품(諸法妙化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령 모든 법이 동등하여 공하다면 모든 법은 지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최고 제일의를 얻지 못했는데 보살의 일을 행해야 하며, 중생을 위하여 네 가지 은혜를 짓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공은 또한 지을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지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 중생이 공을 안다면 여래와 부처의 경계가 없을 것이다. 공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나라는 아(我)에 4대상(大相)이 있는 것을 제도하며, 모든 5음에 지견상(知見相)이 있는 것을 제도하며, 모든 12쇠상(衰相)을 제도하며, 모든 유위상을 제도하면서도 유위계(有爲界)를 건립하지 않는다. 이 유위가 아닌 성품은 공하다.”
“어떤 것이 공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상(相)은 공하다. 환사(幻師)가 공에서 사람을 화작으로 만들어 내면 환화(幻化)도 아니며 공도 아니다. 합하는 것도 아니며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공은 공한 것이다. 공은 공한 것이므로 화인(化人)을 분별하지 않는다. 함께 공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5음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공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5음이 공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속의 법은 환(幻)과 같은데 도법(道法) 또한 환과 같은 것입니까? 가령 도법이 환이라 한다면 37품에서부터 부처님의 18법과 삼승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환과 같으며 삼승을 행하는 것도 또한 환과 같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이 모든 법이 화(化)인데, 누가 화(化)를 지었겠느냐? 성문․벽지불이 화작한 것이냐? 보살과 불이 화작한 것이냐? 이 모든 습(習)의 실마리가 화작한 것이냐? 이 행(行)이 화작한 것이냐?”
대답하여 아뢰었다.
“화작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화(化)와 같은 것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에서 아라한․벽지불에 이르면 소멸하는 것이며 불(佛)에 이르면 모든 습의 실마리가 멸하는 것이며, 또한 다시 화와 같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생함이 있는 것은 멸하는 것이다. 모두 다 화와 같은 것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법이 화와 같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어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곧 화가 아니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것이 멸하지 않는 것이며, 화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열반은 화(化)가 아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항상 공은 동전(動轉)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셨으며, 쌍법(雙法)이 있는 것도 아니며,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반도 또한 화와 같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일체는 다 공하다. 또한 성문․벽지불이 짓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보살과 불이 짓는 것도 아니다. 공을 살피면 이것이 열반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 공은 과거의 사람이 행하는 것입니까? 마땅히 어떻게 들어가며, 어떻게 배우며, 어떻게 설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다만 과거세만 있고 미래세는 없는 것이냐?”
88. 살타파륜품(薩陀波倫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살타파륜(薩陀波倫)보살처럼 해야 한다. 지금 있는 뇌음(雷音) 여래․무소착․등정각은 부처님 처소에서 항상 청정한 범행을 닦아서 얻은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살타파륜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구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살타파륜보살은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양을 바라지 않았다. 항상 고요한 곳에 있었는데 허공에서 소리가 들렸다.
‘선남자야, 피곤함과 싫어하는 것과 잠자는 것, 눕는 것 등에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음식을 생각하지 말고, 낮과 밤을 생각하지 말라. 춥고 더운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내외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좌우를 돌아보지 말고, 행할 때에는 마땅히 이 뜻을 지어야 하며, 마땅히 행하지 않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몸은 5음(陰)에서 상(相)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무슨 뜻인가? 상(相)을 일으키면 곧 불법에 장애가 있게 된다. 장애가 있는 것은 곧 생사의 고통에 있게 된다. 생사의 고통이 있으면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한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공중에서 소리를 내어 대답하여 말했다.
‘저는 마땅히 이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중생을 위하여 큰 밝음을 지어서 널리 불법을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하옵니다.’
이 말을 하고 나니, 곧 공중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착하고 착하구나. 선남자야, 공과 무상과 무원의 법을 듣고자 하는구나. 반야바라밀을 찾아 구하려면 마땅히 상념(相念)을 여의어야 한다. 명견(命見)을 여의어야 하고, 인견(人見)을 여의어야 하며, 악지식(惡知識)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선지식(善知識)과 같이 종사해야 한다. 마땅히 참선지식을 공양해야 한다. 마땅히 너를 위하여 공과 무상과 무원의 법을 설하리라. 마땅히 불생불멸의 법을 설할 것이다. 마땅히 사람에게 권하여 도와서 살운야를 구하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면 오래지 않아 반야바라밀을 들을 것이다. 혹은 경(經) 중에서 들을 것이며, 혹은 보살마하살의 입에서 들을 것이다. 선남자가 따라서 좇으면 반야바라밀의 처(處)를 들을 것이다. 마땅히 그 사람을 보면 세다라(世多羅)같이 해야 한다. 너는 법사에게서 마땅히 수행을 반복하며 은혜를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의 처를 따라서 들으면 곧 참선지식이다. 경을 들었으면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어서 다시 동전(動轉)하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으로부터 멀지 않을 것이며,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날 것이며, 항상 마땅히 한가하지 않은 여덟 곳을 멀리 여읠 것이며, 마땅히 즐거운 여덟 곳을 얻을 것이다. 이 덕행을 가지고 마땅히 법사를 존경할 것이며, 존경하기를 세존과 같이 할 것이다.>
세속을 희망하는 뜻을 짓지 말아야 하며, 법사를 법상(法想)과 공경의 생각을 일으켜서 희망하여 바라본다면 마땅히 마군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마군 파순이 혹 다섯 가지 즐거움을 가지고 오거나, 혹은 부드러운 색(色)․성(聲)․향(香)․미(味)를 가지고 와서 법사를 받들어도 법사는 구화구사라로 중생을 제도하고자 받는다. 네가 만약 이를 보면 더럽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다만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하였지만 법사가 행하는 것과 같이 할 것이다.>
보살이 이미 구화구사라에 이르면 걸릴 것이 없다. 비유하건대 금강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으며 번뇌를 받지도 않는다. 마땅히 하나같이 법을 고르게 행하고 법사를 관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어떤 것이 하나 같이 법을 고르게 행하는 것인가. 이른바 모든 법은 집착할 것도 없으며 끊을 것도 없다. 모든 법은 다 공하여 아(我)도 없고, 인(人)도 수명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환화(幻化)와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법사와 도사(導師)가 이와 같이 멀지 않아 반야바라밀을 얻을 것이다. 선남자야, 마땅히 마군의 일도 보호해야 한다. 선남자야, 만약 법사의 처소에 이르면 법사를 보지 않아야 하며, 걸림이 있는 마음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법으로써 법사를 공경해야 한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서 동쪽으로 향하였다. 동쪽으로 가면서 오래되지 않아 마음속으로 ‘전에 내가 마땅히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구나. 어느 곳에 가서 마땅히 누구로부터 들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고는 크게 울다가 울음을 그치고 생각했다.
‘내가 이제 여기에서 다시 음식도 먹지 않을 것이며, 다시 동전(動轉)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에서 7일에 이르기까지 반야바라밀을 듣지 않으면 마침내 일어나지 않으리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장자(長子)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자 부모가 슬퍼하여 애통해 하고, 단지 그 자식 생각만 하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이때 살타파륜도 한결같이 다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만 생각했다. 이와 같이 울 때 앞에 문득 32상과 80종호를 갖춘 여래의 상이 있었는데, 그 부처님이 찬탄하여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야, 과거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 보살행을 할 때에 반야바라밀을 찾는 것 또한 이와 같았다. 이런 용맹을 가지고 나아가면서 뜻은 동쪽으로 향하라. 2만 리를 가면 향씨(香氏)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성곽은 7보로 일곱 겹 둘러져 있으며 성을 둘러싼 연못의 물은 열 겹으로 싸안으면서 두루두루 흐르고, 7보의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성을 둘러싼 7보로 된 못이 있다. 그 성의 가로 세로의 길이는 480리이며, 그 나라는 풍요롭고 즐거우며 국민들이 아주 많다. 소유하고 있는 복식은 진기한 보배로 만들었으며 기이하고 묘하다. 그 성에는 5백의 난간이 있고 시가지의 길목에는 집들이 가지런히 나열해 있는데, 가지가지 보배와 금과 은을 섞어 발랐으며 비단으로 된 덮개와 당번(幢幡)을 높이 달았다. 비유하건대 천금(天錦)의 성 위에 누대와 누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성 위의 작은 단장은 모두 7보로 만들었으며, 성 위에는 보배나무가 나열되어 있어 기이하고 보기 좋았다. 다시 염부단금(閻浮檀金)으로 교차되어 덮여 있으며, 7보의 방울 풍경이 그 누각에 달려 있어 바람이 불 때에는 그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온화하고 아름다운 그 소리는 하늘의 음악과 같다. 그곳에 있는 중생이 그 풍경소리를 들으면 스스로 즐거워한다. 성을 둘러싼 연못의 물은 차고 따뜻한 것이 적당하게 맞고 항상 가득 차 있으며 줄어들지 않는다. 그 연못의 물에는 7보로 된 배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배를 타고 연못에서 유유히 노닌다. 그 사람들의 숙명(宿命)에 복과 공덕이 있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연못의 물에는 파담화(波曇花)․분타리화(分陀利花)․구문라화(拘文羅花)․우발리화(優鉢利花)가 있고 다시 여러 가지의 꽃과 갖가지 다른 색깔들이 수천백 종류나 있다. 삼천대천국토에 있는 묘한 꽃이 여기저기에 없는 것이 없다.
그 성을 따라 돌면서 각각 5백의 집이 있는데, 또한 7보로 아름답게 지어져 있으며 보기 좋게 장엄되어 있다. 집집마다 5백의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20리이다. 또한 7보로 된 잡색묘화가 있고 그 꽃이 큰 것이 수레에 씌우는 덮개[車蓋]와 같다. 그 꽃은 오색이며 청․황․적․백․홍이 각각 분명하며, 그 연못에는 새․원앙․기러기․공작․두루미 등 다른 종류의 기이한 새들이 수천백 종류나 된다. 그 성의 집들이 소유하고 있는 보물은 또한 주인도 없으며 또한 지키는 자도 없다. 그 나라의 사람들이 예전에 심은 복이 이른 것이니, 항상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긴 밤 동안[長夜] 이 복을 받는 것이다.
선남자야, 그곳에 보살이 있는데, 이름이 법상(法上)이다. 그 나라의 중앙에는 궁전과 집들이 있는데 너비와 길이가 40리이다. 다 7보로써 궁전을 지었으며, 담장은 일곱 겹으로 둘러 있고 소유하고 있는 난간은 7보의 나무로 되어 있다. 정원의 관욕지(觀浴池) 또한 일곱 겹으로 되어 있고, 그 누각에는 난간이 있고 궁전의 문합이 있는데 모두 다 7보로써 무늬를 조각하고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 법상의 궁전 안에는 네 개의 집이 있는데, 첫째 이름은 상락(常樂)이요, 둘째 이름은 제우(除憂)요, 셋째 이름은 잡화(雜花)요, 넷째 이름은 잡향(雜香)이다. 집집마다 여덟 개의 연못이 있으니, 첫째 이름은 현(賢)이요, 둘째 이름은 현묘(賢妙)요, 셋째 이름은 일락(日樂)이요, 넷째이름은 묘락(妙樂)이요, 다섯째 이름은 길상(吉祥)이요, 여섯째 이름은 길상(吉上)이요, 일곱째 이름은 왈제(曰除)요, 여덟째 이름은 불환(不還)이다. 그 연못의 네 주변에는 가장자리마다 각각 하나의 보배가 있으니, 금․은․유리(琉璃)․수정이다. 순전히 자마(紫磨)금으로 땅을 덮었으며, 금으로 된 그물[羅網]로 덮여 있다. 연못마다 금으로 된 계단식 다리가 있고, 갖가지 잡색의 자거와 마노와 많은 보배로 섞여 이루어졌다. 양변의 계단은 다시 자금(紫金)으로 되어 있고 파초수(芭蕉樹)가 있으며, 그 꽃과 잎은 부드러워 바람에 따라서 나부낀다. 그 연못에는 온갖 잡화가 위와 같이 있다. 연못가를 따라서 또 꽃과 나무가 있으며, 바람이 불면 모든 꽃이 연못의 물 위에 떨어지니 뿌리가 있어 생하는 것 같다. 그 연못의 물의 향기는 하늘의 전단향과 같으며, 법상의 궁중에는 6만 8천의 부인과 채녀(婇女)가 둘러싸고 있어 오락하며 즐기고 있다. 향씨(香氏) 성중의 남녀가 다 모여 와서 그 연못과 집에서 항상 즐거워하며 함께 서로 오락하며 즐긴다.’
그 변화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법상보살과 그 권속은 함께 서로 오락하고 지내며 3시(時)로 설법을 하리라. 향씨 성중의 여러 사람들이 법상보살을 위하여 법좌(法座)를 시설하되 성의 중앙에 금은․수정과 유리로 자리를 만들며, 가늘고 부드러운 겁파육(劫波育)으로 방석을 만들어 하늘의 잡향을 그 방석에 붙인다. 그 법좌의 높이는 10리이고 마땅히 그 자리의 앞에는 모든 남녀가 주옥을 갖거나 드리우고 있다. 또 이름 있는 꽃을 흩뿌리며 모든 명향(名香)을 사른다. 법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법상보살은 그 법좌 위에 앉아서 반야바라밀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한다.’
그 변화한 부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향씨국의 사람이 법상보살을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는 모습이 이와 같다. 약간의 백천의 모든 하늘이 모여 와서 반야바라밀을 들었다. 이 중에는 쓰는 자도 있고 이 중에는 외우는 자도 있으며, 이 중에는 입으로 받는 자도 있고, 이 중에는 염하는 자도 있고, 고요히 염불하고 행하는 자도 있다. 그 나라에 있는 중생은 모두 아유월치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어 다시는 움직여 되돌아오지[動還] 않는다.
선남자야, 너는 동쪽으로 가서 법상보살 처소에 도착하여 반야바라밀을 들으라. 이 법상보살은 너의 전세(前世)의 참선지식이었다. 항상 너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권하고 도우리라. 법상보살은 본래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 또한 너와 같았다. 이제 가라. 선남자야, 주야로 생각을 끊지 말아라. 오래지 않아 반야바라밀을 들을 것이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이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제가 언제 마땅히 법사를 보겠으며 반야바라밀을 듣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자 다른 생각은 없고 다만 ‘내가 어느 때에 마땅히 선량한 스승을 만나 나의 독화살을 뽑아서 그 곳을 낫게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살타파륜 또한 다시 다른 생각이 없었다. 다만 법사를 보고자 했으며 반야바라밀을 듣고자 하였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을 듣고 나서는 모든 의지하고 집착했던 것이 멸했다.
이때에 살타파륜보살이 곧 모든 법의 걸림이 없는 지혜를 보아서 무량삼매문을 얻었다. 그 삼매의 이름은 제법의 소유를 보는 삼매이다. 모든 법에서 얻을 것이 없는 삼매며, 모든 지혜가 없는 것을 항복시키는 삼매며, 차별이 없는 모든 법을 얻는 삼매며, 변이가 없는 모든 법을 얻는 삼매며, 모든 법이 소유가 없으며 모일 것이 없는 모든 법을 얻는 삼매며, 모든 어둠을 멸하는 삼매며, 모든 법에 차제(次第)와 다름이 없는 삼매며, 모든 법에 소견이 없는 삼매며, 꽃을 흩는 삼매이다. 이와 같이 비할 데 없는 무량한 여러 삼매문을 얻었다. 이 삼매에 머물고 나니, 시방의 무앙수 부처님을 보게 되었으며, 반야바라밀로써 모든 보살을 위해서 설법을 하였다.
이때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다 찬탄하여 말하였다.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야, 우리들이 본래 보살로 있을 때에 반야바라밀을 찾았는데, 이 삼매에 머물러 얻는 것이 이와 같았고, 이 삼매를 얻고 나서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는 것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았으니, 곧 구화구사라를 성취하여 아유월치의 법에 서게 되었다.
우리들이 이 삼매를 얻을 때에 삼매를 행하거나 삼매를 여읜 어떤 법도 보지 않았고 또한 도를 행하는 것도 보지 않았으며, 아유삼불에 이르는 것도 보지 않았다. 반야바라밀은 공고(貢高)함이 없다.
선남자야, 우리들은 공고하지 않음에 머물렀으므로 금색(金色) 몸의 32상과 한량이 없는 광명을 얻은 것이다. 부사의한 지혜와 최무상각삼매(最無上覺三昧)의 불지(佛智)를 얻었으며, 모든 공덕을 구족했다. 모든 부처님 처소는 양(量)이 평등한 것도 아니며, 다 설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성문․벽지불이겠느냐?
그러므로 선남자야, 이 법 중에서 배로 마땅히 존경을 더해야 한다. 선남자야, 뜻을 가지고 나아가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 것 또한 어려움이 없다. 선남자야, 세존을 보는 것처럼 참선지식에 대해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보살이 참선지식을 얻으면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는다.’
이때에 살타파륜보살이 모든 부처님께 아뢰었다.
‘우리들이 항상 존경해야 하는 참선지식은 누구입니까?’
모든 부처님이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법상보살은 세세생생에 항상 아뇩다라삼야삼보로써 너희들을 가르쳤다. 법상보살은 항상 반야바라밀로써 구화구사라를 구족한다. 이가 곧 네가 존경해야 할 스승이며, 참선지식이다.
그대들 선남자야, 법상보살을 취하여 머리에 이고 겁에서 겁에 이르고 만약 백 겁에 이르며, 삼천대천찰토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공양을 드린다 해도 오히려 잠깐 동안의 은혜에도 보답하지 못한다. 이것을 듣고 법을 존경하는 그 복은 보답하기 어렵다. 너로 하여금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얻게 하여 이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이다.’
이것을 설해 마치고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삼매에서 일어나 사방을 향하여 돌아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모든 여래는 어느 곳으로부터 온 것이며, 어느 곳으로 가셨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실망하고 탄식하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법상보살은 항상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행하여 모든 총지(摠持) 다린니문을 얻고 모든 법에서 자재함을 얻었으니, 이미 과거에 부처님 처소에서 공덕을 지은 것이다. 나의 참 스승이니 나는 마땅히 법상보살에게 이 모든 여래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어느 곳으로 가는가를 물으리라.’
그리하여 살타파륜보살은 생각했다.
‘법상보살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나아가 겸손하게 성심껏 존경하리라. 지금 나는 또 가난하여 진기한 보배와 향과 꽃과 특별한 높게 받드는 도구가 있지 않다. 반야바라밀로써 법상보살을 공양하려 한다면 빈손으로 법상의 처소에 가지 못한다. 나한테는 공경함은 있는데 가진 것이 없으니, 몸을 팔아서 반야바라밀과 스승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전후 이래로 몸을 무너뜨린 것이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멸하지 않았다. 또한 전후에 무너진 몸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자리잡고는 다시 모든 고통에서 또한 법을 위하지도 않았고 또한 법사를 위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5음․6쇠만 탐욕하였다.’
이때에 보살이 한 성(城)의 길목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말했다.
‘나를 팔고자 하는데 누가 나를 사겠습니까?’
이때에 마군 파순이 생각했다.
‘이제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 때문에 스스로 그 몸을 팔아 법상보살을 공양함으로써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듣고자 한다. 보살이 어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지 않겠는가? 듣고 나면 반드시 공경하며 머리 숙임을 받을 것이다. 내가 무너뜨리지 않으면 수없는 백천 보살과 모든 중생을 가르쳐 나의 경계를 뛰어넘을 것이다. 이제 나는 가서 무너뜨리리라.’
파순을 곧 온 나라의 남녀로 하여금 그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몸을 팔고자 하나 팔리지 않자 슬픔에 젖어 울며 말했다.
‘나는 몹시 마음이 아프다. 몸을 팔아 스승께 공양하고자 하나 팔리지 않는구나.’
이때에 석제환인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얻기 위해 법상보살께 공양하고자 하는구나. 내가 이제 가서 그 사람을 시험해 보리라. 법 때문에 진실로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맞이하는지.’
이때에 석제환인이 어린 범지(梵志)로 화작하여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 살타파륜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어찌하여 즐거워하지 않고 슬픔에 젖어 울고 있습니까?’
대답하여 말했다.
‘젊은이여, 나는 법을 위하여 나의 몸을 팔아서 존경하는 법사를 공양하고자 하는데, 오랫동안 팔리지 않고 나에게 묻는 자도 없어 이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박덕하여 재물과 보배로 스승님께 공양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때 젊은이가 보살에게 말했다.
‘나는 사람은 쓰지 않고 지금 사당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사람의 피와 사람의 골수와 심장을 얻고자 합니다. 그것을 나에게 줄 수 있다면 당신에게 유익한 보배를 드릴 것입니다.’
이때에 보살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나는 좋은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젊은이여, 내 심장과 골수와 피를 팔겠습니다. 내가 재보를 얻으면 법사님께 공양드릴 것입니다. 내가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얻게 된다면 참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다시 물었다.
‘당신께서는 골수와 피와 심장을 얼마쯤 파실 수 있습니까?’
보살이 대답했다.
‘젊은이가 뜻하는 대로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살타파륜이 곧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팔을 찌르니 피가 나오므로 그것을 주었다. 다시 골(骨)을 깨뜨려 골수를 꺼냈다.
이때 성 안에 한 장자의 딸이 있었는데 마군의 행을 초월했으며 마군에게 굴하지 않았다. 장자의 딸이 누대에 올라 보살이 이와 같이 스스로에게 형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이제 바로 내려가서 그 뜻을 물어보리라’ 하고 즉시 내려와서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 물었다.
‘남자여, 어찌하여 이와 같이 혹독하게 스스로 베어서 피를 쓰고자 하고 다시 골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입니까?’
살타파륜이 장자의 딸에게 말했다.
‘젊은이에게 팔아서 재보(財寶)를 얻어 법사님을 공양하여, 존귀한 경(經)인 반야바라밀을 듣고자 함입니다.’
이때 장자의 딸이 보살에게 말했다.
‘법사에게 공양하면 마땅히 어떤 기특한 공덕을 얻습니까?’
보살이 대답했다.
‘법사는 마땅히 나에게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가르칠 것이고, 나에게 보살이 행한 법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마땅히 곧 배워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널리 교량을 만들고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룰 것입니다. 나의 몸은 마땅히 32상과 80종호의 위없는 빛을 얻을 것이며, 4등(等)의 뜻과 4무소외와 부처님의 10종력과 18법을 얻을 것이며, 6신통과 부사의한 정계(淨戒)에 이를 것입니다. 부처를 이루고 나면 걸림이 없는 지혜를 얻고 마땅히 위없는 보배를 얻어서 모든 가난을 제거할 것입니다.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얻을 것입니다.’
이때에 장자의 딸이 이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보살에게 말했다.
‘착하고 착한 현자시여, 매우 기이하고 특이하옵니다. 이미 그와 같이 미묘한 법을 설하셨습니다.’
거듭 말했다.
‘현자시여, 이 한 법[一法]으로써 마땅히 수없는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법을 구할 것입니다. 이 법은 깊고 깊어 미묘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얻고자 하면 스스로 의심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유리․마니․잡보(雜寶)․진주․금․은․호박(琥珀)․전단(栴檀)․명향(名香)․비단 번기[繒幡]․꽃 일산[花蓋]을 얻고자 하면 얻고자 하는 대로 이제 마땅히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가지고 가서 존경하는 법사님께 공양하십시오. 그렇게 몸을 베고 헐지 마십시오. 이제 저도 또한 그곳에 가고자 하니, 당신을 따라가서 함께 선의 근본을 심을 것입니다. 당신이 설한 것에 따라서 저도 모든 것을 얻고자 합니다.’
이때에 석제환인이 즉시 어린 범지의 모습을 없애고 다시 석제환인의 몸으로 돌아와 살타파륜보살 앞에 머물러 찬탄하여 말했다.
‘착하고 착한 선남자여, 그대는 굳센 의지를 가졌다. 과거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도 보살도를 행하여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구하여 아유삼불을 이룬 것이 또한 현자와 같았다. 오늘 나는 사람의 심장과 골수와 피를 쓰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를 시험해 보고자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어떤 소원을 얻고자 하는가?’
살타파륜이 대답했다.
‘저는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원(願)을 주십시오.’
석제환인이 대답했다.
‘선남자야,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이며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 밖의 소원으로 얼마간의 복을 나에게서 구하라.’
보살이 대답하여 말했다.
‘큰 원이 당신의 경계가 아니라면 제 몸에 흉이 없게 해 주십시오. 당신으로부터 이러한 복을 갖고자 합니다.’
이 말을 마치자 살타파륜의 몸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석제환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이때에 장자의 딸이 보살에게 말했다.
‘저를 따라 같이 돌아가 나의 부모를 만나 보십시다. 아울러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따르겠습니다. 공양드릴 도구를 당신에게 드리겠으며, 저는 또한 좌우로 시종(侍從)하여 법상보살의 처소에 이르겠습니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장자의 딸을 따라서 그의 집으로 가서 문 밖에 머물렀다.
장자의 딸이 들어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지금 저에게 금은과 진귀한 보배와 유리․마니․명향․전단․화개․당기․번기와 잡색의 여러 다른 옷과 공양드릴 도구를 주십시오. 모든 기이한 것과 5백의 시녀를 주십시오. 법을 얻고자 살타파륜보살을 따라서 향씨국 법상보살의 처소로 갈 것입니다. 존귀한 경(經)과 부처님께서 지니신 모든 법을 들어서 저는 마땅히 득도하여 중생을 해탈하게 하겠습니다.’
부모가 딸에게 물어 말했다.
‘살타파륜이 누구냐?’
딸이 거듭 말하였다.
‘이 사람은 지금 문 밖에 있습니다. 견고한 서원을 일으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하고자 하며, 중생을 위하여 다함이 없는 고통을 구원해 주고자 합니다. 큰 묘법이 있는데 이름은 반야바라밀이며, 이것은 모든 보살이 응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이 선남자는 다만 법을 위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 몸을 팔아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자기의 몸을 베어 대사(大師) 법상보살에게 공양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지극한 정성은 제석천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저는 이 광경[變]을 보고 곧 가서 <어떤 기특한 일이 있기에 지독하게 스스로 베고 찌르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곧 저에게 <젊은이에게 몸을 팔아서 재물을 얻어 나의 법사님께 공양드리려고 한다. 나는 마땅히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를 얻어서 마땅히 법륜을 굴려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뻤습니다. 누가 이 법을 듣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곧 진기한 보배와 공양할 도구를 드리기로 하고 좌우에서 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소유하고 있는 진기한 보배와 모든 시녀를 주셔야 합니다.’
부모가 딸에게 말했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면 이 사람은 매우 기특하고 정진을 잘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신명을 아끼지 않고 부사의한 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면 이 선남자는 반드시 위없는 법을 갖추어 중생을 안온하게 하여 대서원인 사홍서원을 건립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너의 이 소원을 어길 수 있겠느냐. 가지고 가서 법상보살께 공양드리고자 한다면 네 뜻과 원을 따를 것이며, 나는 너를 대신하여 기뻐할 것이다. 나 자신은 늙어서 행할 수 없게 되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진기한 보물을 가지고 가라. 나는 마침내 일체의 원(願)을 끊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이 5백의 수레를 취하여 7보로 가득 채우고 5백의 시녀를 자신에 버금가게 장엄하게 꾸몄다. 여러 가지 꽃과 잡색의 보배 옷을 위와 같이 가득 실었다. 자신의 수레 이외에 살타파륜에게도 따로 무겁게 한 수레를 실게 하였다. 5백 여인에 둘러싸여 같이 서로 좇으며 동쪽으로 점점 나아가니 멀리 향씨 성곽이 보이는데, 7보가 현황(玄黃)하고 진기한 온갖 미묘한 것이 일찍이 위에서 설한 것과 같은 것이 없었다.
다시 멀리 그 성의 중앙을 보니, 법상보살이 수백천만의 대중에 싸여 설법하고 있었다. 멀리 이것을 보고 매우 크게 환희하여 그 몸이 안온한 것이 비유하면 비구가 제4선(禪)을 얻은 것과 같았다.
또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제 수레 위에 실은 것을 즉시에 내려 놓지 말고 걸어 들어가 보아야겠다.’
곧 장자의 딸과 5백 여인에게 둘러싸여 앞으로 가서 성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7보로 된 누각이 있는데, 붉은 전단으로 장식되어 있고 진주가 서로서로 드러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누각의 네 귀퉁이에는 네 가지 보배가 풍성하고 영롱하며 마니주가 낮과 밤으로 항상 밝게 빛나고 있었다. 보배 향로에는 항상 명향(名香)을 사루어 낮과 밤으로 향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누각 중앙에는 칠보탑이 있고, 또 네 가지 색의 보배로 만든 함(函)이 있었으며 자마금(紫磨金)으로 엷게 반야바라밀이라 씌어진 경이 함 속에 있었다. 또 7보로 짠 천으로 만든 번기[幡]가 서로 교차하여 섰는데, 형형색색의 것들이 바람을 따라 수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살타파륜과 5백 여인이 이 7보가 교차로 매달린 누각을 보고 석제환인과 모든 천자를 보니 하늘의 만다라화와 하늘의 갖가지 색의 전단․명향을 가지고 있었다. 가루로 찧은 향은 그 미세한 것이 흙과 같았으며, 허공에서 공양하여 그 누각 위에 뿌려지고, 또 하늘의 음악이 울려나오며 공양하였다.
이때에 살파파륜이 멀리서 석제환인에게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 누각 위에 꽃을 뿌려서 공양을 하십니까?’
이에 석제환인이 살타파륜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그대 선남자야, 알지 못하겠느냐?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을 출생하는 것이니, 일체 보살은 마땅히 이것을 배워야 한다. 마땅히 모든 바라밀의 공덕을 이루어서 모든 불법을 구족하여 살운야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양하는 것이다.’
살타파륜이 이것을 듣고 배로 기뻐하며 다시 석제환인에게 물었다.
‘반야바라밀은 어느 곳에 있는 것입니까?’
석제환인이 대답했다.
‘누각의 중앙에 칠보함 속에 있다. 법상보살이 7보인(寶印)으로 그것을 찍었다. 그대들과 나는 망령되게 볼 수 없다.’
이때에 살타파륜과 장자의 딸과 5백 여인이 각각 모든 훌륭한 꽃과 전단향과 여러 가지 보배와 유리와 마니를 취하여 반야바라밀을 공양하였다. 특별히 일분(一分)을 남겨 두었다가 이것을 가지고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법상보살에게 이르러 다시 법을 위하여 법상대사께 공양하였다. 법상보살 앞에 모든 꽃을 뿌리고 칠보대를 화작하여 허공에 안치하였다. 흩어진 훌륭한 꽃이 모두 법상보살 앞에 비오듯이 떨어졌다. 흩어진 잡색의 보배로운 옷이 그 누대 위에 있었으며, 변화한 천인(天人)이 손에 하늘의 번기를 가지고 드리우고 있었다.
살타파륜과 5백 여인은 이 변화를 보고 각각 이렇게 생각했다.
‘이는 법상보살마하살이 화작한 것으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하물며 마땅히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이룸이겠느냐?’
이때에 장자의 딸과 5백 여인이 법상보살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모두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뜻을 일으키고 동시에 찬탄하여 말했다.
‘이 공덕을 가지고 법의 이익을 얻은 것 또한 마땅히 이와 같다. 우리로 하여금 반야바라밀의 공양을 얻게 한 것이다. 법상보살과 같이 우리는 널리 반야바라밀을 선포하여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또한 법상보살과 같이 우리는 반야바라밀 얻기를 원하며 구화구사라를 성취하여 변화해서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를 것이다. 마땅히 법상대사처럼 모든 법에 자재함을 얻을 것이다.’
이때에 살타파륜과 장자의 딸과 5백 여인이 공양을 마치고 앞에 나아가 머리를 땅에 대고 법상보살에게 예를 드리고 나서 한편에 서 있었다. 공경하는 뜻으로 손을 모으고 법상보살에게 말하였다.
‘제가 옛날에 적정한 곳에 있을 때에 공중에서 들려오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선남자야, 여기에서 동쪽으로 가면 반야바라밀을 듣게 될 것이다.>
저는 즉시 동쪽으로 가는 도중에 생각하되 <나는 마땅히 누구로부터 반야바라밀을 들을 것인가?> 하고 슬픔에 젖어 울면서 묵묵히 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7일 동안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만 어느 때 반야바라밀을 얻게 될 것인가만 생각하였습니다.
이때에 곧 어떤 변화한 부처님께서 제 앞에 머물러 저에게 <선남자야, 이 정진과 용맹한 뜻을 가지고 여기에서 동쪽으로 2만 리를 가면 향씨라는 나라에 법상보살이 있다. 항상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계시니 너는 가면 이것을 들을 수 있으며, 너의 참 스승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변화한 부처님으로부터 이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곧 동쪽으로 가서 멀리서 대사를 보고 마음속으로 뛸 듯이 기뻐하였으며 안온하였으니, 비유하건대 비구가 제4선(禪)를 얻은 것과 같았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함으로써 곧 무량삼매를 얻었는데, 곧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보고 저를 찬탄하여 <착하고 착한 자여, 네가 얻은 삼매는 모두 반야바라밀에서 생겨난 것이다. 내가 과거에 보살이었을 때 반야바라밀을 찾을 때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찬탄하고는 문득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삼매를 깨닫고 스스로 생각하되 <모든 부처님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인가> 하고 다시 크게 슬픔에 젖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법상대사는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로써 모든 법에서 자재함을 얻었다. 나는 마땅히 가서 대사에게 물을 것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어느 곳으로부터 오며 어느 곳으로 가는지.>
오늘 대사께서 저를 위하여 해설하여 주소서. 이 모든 여래가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가는지. 원하옵건대 알고자 하옵니다. 저희가 듣고 나면 항상 모든 부처님을 보아서 세존을 여의지 않겠습니다.’
89. 법상품(法上品)
이에 법상보살마하살이 살타파륜보살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선남자야, 모든 여래는 항상 동요하지 않는다. 또한 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는다. 여래는 여여하여 일어나고 멸하는 바가 없다. 일어나지 않는 것은 또한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는다. 생하지 않는 것이 여래다. 선남자야, 진제(眞諦)는 오는 때를 알지 못하며 또한 가는 때도 알지 못한다. 진제는 곧 여래다. 허공은 또한 오는 것도 없으며 또한 가는 것도 없다. 공은 곧 여래다. 진제는 또한 오는 때를 알지 못하며, 가는 때도 알지 못한다. 진제는 곧 여래다. 무위(無爲)는 곧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무위는 곧 여래다. 멸하여 다한 것은 또한 오는 것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다. 멸하여 다한 것은 곧 여래다. 선남자야, 여래는 이 법을 여의지 않는다. 이 모든 법이 곧 여래의 진여다. 선남자야, 진여는 하나이지 둘이 있지 않다. 또한 셋도 아니며 약간의 수(數)도 아니다. 이 법은 공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성하여 뜨거울 때의 열(熱)은 맹렬한 불꽃과 같다. 어리석은 범부는 좇아가서 그것을 일러 물이라고 하고는 쉬지 않고 좇아가 마땅히 물을 얻으려 한다. 현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사람이 좇아간 물은 어느 곳에서 온 것인가? 동해․서해․남해․북해의 어느 바다에서 온 것인가?’
살타파륜보살이 대답하여 말했다.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은 열은 물이 아닌데 어떻게 바다에서 가고 오는 것이 있겠습니까?’
법상이 다시 말했다.
‘선남자야, 저 범부는 뜨거워서 갈증이 나므로 물 생각을 일으킨 것이다. 좇아가고 좇아가나 피로하기만 하고 마침내 물을 얻지 못하리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생각을 일으킨다. 이른바 모든 여래에게 왕래함이 있는 것은 또한 범부가 그와 같이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색신(色身)으로써 여래를 관하지 말라. 여래는 법성이다. 법성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여래는 또한 이와 같이 오는 것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다.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환사가 화작(化作)한 코끼리와 말과 타는 수레와 같다. 이른바 이것을 환(幻)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가고 옴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 어리석은 범부다. 이른바 모든 여래에게 오고 감이 있다는 것 역시 범부다. 왜냐하면 법성은 오는 것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는 것이다.’
살타파륜이 법상에게 말했다.
‘몽환(夢幻)과 같은 소견(所見)은 다 공하여 실상이 없으며 모두 있는 바가 없습니다.’
법상이 대답하여 말했다.
‘선남자야,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는 모든 법은 또한 꿈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몽환(夢幻)과 같은 법에 실상이 있겠느냐? 여래를 알지 못하면 다만 여래의 이름과 색신에 들어갈 뿐이다. 곧 여래가 오고 간다는 상을 지으면 이 무리는 모두 지혜가 없는 범부이다. 이러한 범부의 무리는 생사의 길에서 마땅히 반수(反數)가 있어 반야바라밀을 여의어 크게 멀어진다. 모든 불법에서도 또한 멀어지고 모든 몽환법에서 모든 법이 몽환과 같은 것을 알면 여래를 아는 것이며, 모든 법에서 내왕이 있는 상을 구하지 않고, 또한 모든 여래에 생이 있고 멸이 있음을 구하지 않는다. 여래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님을 안다면, 오래지 않아 아뇩다라삼야삼보에 가까워진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무리의 사람에게는 마땅히 나라 사람들이 음식을 베풀어서 세간의 복전을 삼는다.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큰 바다에 있는 유명한 보배는 시방 국토에서 온 것도 아니다. 사람의 복 때문에 바다는 이 보배를 생하되, 연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연이 있으므로 이 보배를 생하는 것이다. 멸할 때에도 또한 다시 시방에 이르지 않는다. 인연에서 일어나고 인연으로 멸하는 것이다. 또한 시방으로부터 옴이 있고 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모든 불신(佛身)이 인연을 행하면 곧 합을 얻어 이루어지고 본래 행이 이르게 된 것 또한 가는 것을 행하여 시방에 이르는 것을 쓰지 않는다. 만약 행이 없다면 인연이 합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만약 인연이 없다면 또한 몸이 있지도 않다.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거문고와 같아서 인연이 있음으로써 현(絃)이 있고 주(柱)가 있고 사람이 두드려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소리가 끊어질 때는 또한 오고 감이 없고 이 소리가 나올 때에도 또한 오는 곳이 없으며, 멸할 때에도 또한 이르는 곳이 없다. 부처님의 몸을 알고자 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무량한 덕이 있는 것도 하나의 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인연이 있어 함께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연을 여의고는 가고 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도 또한 가고 옴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일체의 법이 이와 같아서 또한 생하고 멸하는 것이 없다. 네가 이것을 알면 반드시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를 것이다. 반드시 구경에는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에 이를 것이다.’
이때에 석제환인이 하늘의 만다라화를 살타파륜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법상보살에게 공양드리고 마땅히 나의 복을 받으라. 일체 중생이 그대[仁者]의 은혜를 입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기 때문이다. 그대는 최상의 선비이니 세간에 흔치 않아 매우 만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중생을 위하여 수고롭게 노력했기 때문에 한량이 없는 겁에는 도무지 수고롭지 않으리라.’
이때에 살타파륜이 석제환인의 만다라화를 받아서 법상보살에게 뿌리고 나서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로 몸을 바쳐 대사님을 받들고 마땅한 바를 공급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모으고 한쪽에 머물렀다.
이때에 장자의 딸과 5백 시녀도 살타파륜보살에게 말했다.
‘몸으로 대사(大師)님을 받들고 마땅한 바를 공급하기를 원하옵니다. 이러한 공덕을 지니면 지금 대사님처럼 법의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항상 대사님과 같이 모든 부처님 세존을 공양하겠습니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장자의 딸과 5백의 시녀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따른다 하니, 나는 마땅히 그대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모든 여인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명을 다하여 스승을 받들되 감히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살타파륜이 법상보살에게 말했다.
‘제 몸을 바치겠사오며 5백 여인과 5백 수레 등 일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대사께 드리겠사오니 저희들을 애민히 여기시어 받아 주소서.’
이때에 석제환인이 찬탄하여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보살의 뜻을 일으킨 자는 마땅히 소유하고 있는 것을 현자(賢者)와 같이 해야 하리라. 보살이 이와 같이 베풀면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승을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면 속히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얻게 될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께서도 모두 다 이와 같이 하셨다. 뜻을 버리고 보시하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얻어서 아유삼불을 이룬다.’
이때에 법상보살이 곧 살타파륜과 장자의 딸과 5백 시녀를 받았으며 5백 승의 수레와 소유하고 있는 진귀한 보배를 다 받았다. 그리고 살타파륜에게 그 공덕을 이루게 하고자 하여 비록 받았으나 살타파륜보살에게 도로 주어 가지고 가게 하였다. 이때에 해가 이미 어두워지자, 법상보살은 높은 자리에서 일어나 궁중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살타파륜이 이러한 생각을 했다.
‘나는 법을 위하여 온 것이므로 마땅히 앉고 눕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두 가지 일로써 대사로부터 반드시 나올 것이니, 첫째는 경행(經行)이요, 둘째는 주립(住立)이다.’
이때에 법상보살이 궁중에 들어가 정좌하고서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로써 무량한 수의 모든 삼매를 행하니, 그것이 7년에 이르렀다. 살타파륜도 또한 7년 동안 앉지도 않고 눕지도 않았으며, 항상 경행하고 주립하였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모든 탐욕의 맛을 없앴다. 다만 법상보살이 어느 때에 나타나서 마땅히 나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해 줄 것인가 하는 그것만을 생각했다.
7년 후에 살타파륜이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마땅히 법사님을 위하여 높은 자리를 장엄하겠다. 여러 가지 훌륭한 꽃과 모든 훌륭한 향(香)을 사루어서 법사를 모실 것이다. 그러면 마땅히 대중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실 것이다.’
그리고는 살타파륜과 5백 여인이 각각 자리를 폈는데, 훌륭한 끈으로 장식되고 부드러우며 곱게 짠 몸에 입은 옷을 자리 위에 폈다. 살타파륜이 곧 물을 찾아가서 땅에 뿌리려 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이것은 마군 파순이 물을 숨겨서 보이지 않게 한 것이었다. 보살을 무너뜨려서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살타파륜은 마음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몸을 찔러 피를 내어 땅에 뿌리는 데 쓸 것이다. 땅에 있는 먼지가 법사님께 날아갈까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무너져버린 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전후 이래로 무앙수 겁 동안 헤아릴 수 없이 이 신체를 버렸던 것은 처음에 이 위없는 법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살타파륜보살이 곧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몸을 찔러 피를 내어서 땅에 부렸다. 5백 여인도 또한 각각 이와 같이 했다. 이때에 파순도 그 편의를 얻지 못하였다.
이때에 석제환인이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살타파륜보살과 5백 여인은 매우 기특하다. 덕을 구하여 이와 같이 하였으니 신명을 아끼지 않고 법사를 공경한 것이다. 마군 파순도 무너뜨리고자 하였으나 그 편의를 얻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견고한 사홍서원을 세워 신명을 아끼지 않고 아뇩다라삼야삼보에서 중생의 무한한 고통을 제도하고자 하는구나.’
이때에 석제환인이 찬탄하여 말했다.
‘착하고 착한 자여, 현자의 정진은 불가사의하여 위없는 서원을 세웠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본래 행할 때 이와 같이 정진하였다.’
살타파륜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제 법사를 위하여 자리를 펴는 것이 끝났으니 어느 곳에서 훌륭한 꽃을 얻어서 법사가 출현하실 때에 그 위에 뿌릴 것인가?’
이때에 제석이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 천상의 만다라화 천석(千石)을 보살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법사를 공양하고 땅에 뿌려라. 바로 그 꽃을 취하여 땅에 나눠 뿌리고 그 중의 일부분은 남겨 두었다가 7년 후에 법상보살이 궁중에 출현하실 때에 높은 자리에 나아가 참예하여라.’
살타파륜과 5백 여인도 즉시에 하늘 꽃을 가지고 법상보살에게 이리저리 흩고는 머리를 조아려 예를 드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법상보살이 살타파륜보살에게 말했다.
‘그대 선남자야, 자세히 듣고 자세히 받아서 잘 생각할지어다.’
이에 살타파륜보살이 가르침을 받아서 들었다.
‘모든 법은 평등하여 금강과 같으며, 동등한 모든 법은 고요하다. 모든 법은 평등하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도 평등하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또한 금강과 같은 것이다. 모든 법은 의지할 것도 없으며 모든 법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일미(一味)이므로 반야바라밀 또한 의지할 것이 없다. 모든 법은 일미이며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생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은 멸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법은 공과 같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생하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허공과 같은 것이다. 5음은 밑[底]도 없으며 끝도 없다. 모든 법은 밑이 없으며 4대(大)도 밑이 없으므로 반야바라밀 또한 밑이 없다. 공은 끝이 있지 않으며, 큰 바다도 끝이 없다. 모든 법은 끝이 없으므로 반야바라밀 또한 끝이 없다.
비유하건대 수미산이 여러 가지 장엄하고 보기 좋은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 또한 다시 이와 같다. 모든 법은 파괴될 것이 없다. 모든 법은 볼 수 없다. 모든 법은 받을 것이 없으며, 모든 법은 있는 것이 없다. 모든 법은 불가사의하므로 반야바라밀 또한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얻을 수 없으며, 받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없으며, 불가사의한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때에 살타파륜보살이 곧 앉은 자리에서 모든 법이 평등한 삼매를 얻었다. 모든 법이 고요한 삼매를 얻었으며, 움직이지 않는 삼매를 얻었으며, 의지할 것이 없는 삼매를 얻었으며 두려움이 없는 삼매․일미(一味)삼매․남[生]이 없는 삼매․멸이 없는 삼매․허공삼매․5음에 밑이 없는 삼매와 모든 법이 밑이 없는 삼매와 4대가 끝이 없는 삼매와 허공성삼매(虛空性三昧)와 바다 같은 삼매와 수미산 같은 삼매와 금강삼매와 파괴될 것이 없는 삼매와 얻을 것이 없는 삼매와 받을 것이 없는 삼매와 소유가 없는 삼매와 불가사의한 삼매 등, 이와 같은 6만 삼매문을 얻었다.”
90. 촉루품(囑累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때에 살타파륜보살이 6만 삼매문을 얻고 나서 곧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대천국토를 보니 모든 여래․무소착․등정각이 비구승과 대중에게 둘러싸여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너희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과 같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도 또한 나의 석가문(釋迦文)의 자(字)와 같다.
살타파륜보살이 다문을 구족하니 그 지혜가 바다와 같았다. 모든 부처님이 출생하는 곳을 여의지 않고 부처님 전에 있었다. 꿈속에 있을지라도 부처님을 여읜 적이 없었다. 모든 어려움을 이미 끊고 이미 자재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마하살을 구화구사라에 이르게 함을 알아야 한다. 보살이 6바라밀을 배우고자 하거나 모든 불경계의 살운야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땅히 받아 수지하고 외우고, 독송해야 한다. 널리 사람을 위하여 그 속의 일을 해설해 주어야 한다. 또한 마땅히 소유하고 있는 훌륭한 꽃과 훌륭한 향과 비단으로 된 화개(華蓋)로 공양하고 약간의 방편으로 마땅히 공양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이 모든 부처님이 존경드릴 바이며, 높은 도를 거느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너는 여래를 존중하며 애경(愛敬)하겠느냐?”
아난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애경하는 것을 여래께서는 스스로 아십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진실로 여래를 애경하는구나. 아난아, 네가 전후(前後)로 나를 시봉한 이래로 너의 신․구․의는 항상 선하고 자애로웠다. 이제 나는 늙었다. 제자가 응당 공양해야 할 자가 끝났다고 너는 여기겠지만,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로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공경하고 받들어 섬겨야 한다. 세존이 그리하여 하나에서 셋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누누이 부촉하되, 은근하면서도 정중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끊어지지 않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만약 반야바라밀이 끊어진다면 일체 중생이 영원히 어둠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반야바라밀이 세상에서 단절되지 않는다면 모든 부처님 여래도 또한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반야바라밀이 단절되면 모든 부처님 여래도 또한 마땅히 단절될 것이다. 아난아, 반야바라밀이 세상에 머물면 여래가 항상 법을 설하니,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회상(會上)을 여의지 않고 설법을 여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반야바라밀을 쓰고 외우며 염하고 수행하여 그 뜻을 해설하고 경권(經卷)을 공양하고, 다시 타인을 가르쳐서 쓰고 외우며 널리 해설을 하게 하면, 이 사람은 항상 부처님과 함께하여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설하실 때에 미륵보살과 장로 수보리와 존자 사리불과 대목건련과 분욕문타니자(分耨文陀尼子)와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와 마하가전연과 현자 아난 등, 일체 모인 자들과 모든 천과 아수륜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나서 모두 크게 환희하여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예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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