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일기耽羅日記
○ 신축(辛丑, 1841)년 3월 10일
3월 10일 출발하여 당월 15일 정오에 하동읍河東邑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은 집과 320리 떨어진 곳이다. 비로소 바다 어귀에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곳이 보였다. 섬진강[蟾江]을 건너고, 작은 고개를 넘어서니, 전라도 광양현光陽縣의 경계가 나왔다. 그 사이에 눈을 뜨고 구경할 만한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다만 강양江陽의 함벽루涵碧樓와 진양晉陽의 촉석루矗石樓만은 볼 만하였다. 그곳에 말을 세우고 잠시 오르니, 가슴이 탁 트이며 상쾌하였다. 이윽고 판상의 시를 차운하여 2수를 지었는데, 잃어버렸다. 하동河東에서 북쪽으로 30리 거리에 화개루[花開]와 악양루[岳陽]가 있었는데, 명승지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구례로부터 가는 길이었다면, 가면서 차례로 관람할 만하였다. 그런데 그 길로 돌아가면 100리나 가까이 될 정도여서, 갈 길은 멀고 기한은 촉박하여,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으니, 한탄스러웠다. 이번 행로에 도촌道村의 이성오李成五와 읍내邑內의 이창운李昌運이 동행하였는데, 이동 중에 생기는 모든 일들을 그 두 사람이 도맡아 해주어서, 나는 그저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 18일
강진읍康津邑에 도착하였으니, 하동과의 거리는 280리이다. 순천順天 이전에 큰 산봉우리가 많았기 때문에, 오르고 내리느라 매우 힘이 들었다. 순천을 지난 후에는 비로소 평탄한 길이 펼쳐졌다. 길의 남쪽으로 바다를 끼고 걸어갔는데, 바다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기도 하였다. 산세가 모두 우뚝 솟아 험준하여서 바다와 서로 웅대함을 다투는 듯하였다. 장흥읍長興邑에 있는 좌우의 산에는 큰 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여러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큰 냇물이 그 아래로 흘렀는데, 대체로 들녘은 넓었고 토양은 비옥하여서, 벼농사에 적합하였으며, 해산물도 풍족하였다. 대나무는 무성하여서 땔나무로 쓸 정도로 우거져 있었다. 길을 따라서 큰 마을이 많았는데, 민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살림살이가 영남嶺南보다 나아 보였다. 점인店人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수영水營의 환곡還穀이 매우 큰 폐단이 되어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들고 있다.”고 하였다. 이동 중에 올라가서 구경할 만한 정자가 한 곳도 없는데다가, 하루에 100리나 가까이 달려와서, 명승지를 찾아갈 겨를이 없었다. 강진康津에 도착하여 고을의 향리[邑吏]를 불러서 사신의 행차[使行]에 대해 물었더니, ‘비록 먼저 들려온 소식에 날마다 지대支待하라고 하였으나, 노문路文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듣건대, 제주 목사[濟牧]가 교체될 때에 함께 모이는 장소를 정하는데, 영암靈岩ㆍ해남海南ㆍ강진康津 세 고을이 돌아가면서 거행한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영암에서 담당할 차례라고 한다. 강진의 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석제원石梯院은 서울에서 오는 큰 길목에 있어서, 소식을 접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 19일
석제원을 나와서, 북쪽으로 영암과 30리 떨어진 곳에서 척질戚姪 박성빈朴聖賓이 찾아와 만났다. 마침내 주막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였다. 영암에서 지대支待하기로 한 제주 사람 향리가 나의 행차 소식을 듣고서는, 배리陪吏 한 명을 정하여 보내왔다. 이에 사신의 행차가 13일에 서울을 출발하였다는 기별을 들을 수 있었는데, 노문路文이 지체되는 것은 정말 의문스럽다. 이곳에서 머물면서 나흘을 기다렸다.
○ 23일
비로소 노문路文을 보았다. 당일에 영암에서 점심을 지어 먹었다. 강진의 숙소에 있을 때, 나는 그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이 너무 싫어서, 대둔사大芚寺를 향해 길을 나섰다. 막 출발하였는데 바람이 불어서, 잠시 주점에서 쉬었다가, 해남海南의 대로大路로 나아갔다. 오후에 비가 쏟아질 듯 퍼부었다. 원래는 백련동白蓮洞의 윤씨尹氏 종택宗宅을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그곳에 채 이르기도 전에 물에 빠진 듯 흠뻑 젖은 꼴이 되어서, 급히 대둔사를 찾아 들어갔다. 옷을 벗고서 불에 말리니, 날이 이미 저녁이 되었다. 또한 들으니 “노문路文을 가져온 마두馬頭가 다시 와서, 내일 대둔사에서 점심을 차릴 것[午站]이다.”라고 하였다. 고을의 향리가 매우 분주하게 모여들어서, 사찰의 경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사신의 행로[程站]가 갑자기 바뀌었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생각건대, 반드시 나의 행차 소식을 듣고서 내가 머무는 곳에 따라오고자 했을 것이다. 선방禪房이 깊고 고요하여서 밤새도록 편안히 잘 수 있었다.
○ 24일
아침에 백동栢洞에 거주하는 윤씨尹氏 성을 가진 벗이 찾아왔다. 그는 고산孤山 윤보산의 7대손이다. 비록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여행 중에라도 만나볼 수 있어서 기분이 유쾌하였다. 식사 후에 윤씨 성을 가진 벗과 함께 여러 사찰을 두루 구경하였다. 대둔사에는 물이나 돌의 기이하고 뛰어난 경치는 별달리 없었다. 바닷가 가까이 10여 리는 언덕과 벼랑으로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고,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였다. 승료僧寮 10여 방이 있었으며, 불전佛殿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요산照耀山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다.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영당影堂이 있었는데, 받들어 모시는 것이 마치 밀양密陽의 표충사[表忠]와 같았다. 그리고 정묘조正廟朝의 어제御製 「영정기影幀記」 친필이 있었는데, 감실을 열어서 받들어 살펴보았더니, 아름다운 글씨[雲章]와 보배로운 종이[寶牋]가 이 산천을 훤히 밝히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불우佛宇의 측면에는 이른바 침계루枕溪樓가 있었는데, 누각 아래로는 바위 사이로 계곡물이 흘러 나왔다. 방과 대청은 모두 계곡물의 바위 위에 걸쳐져 있었다. 그래서 누각에 앉아 있으면, 앉은 자리 아래로 맑은 시냇물이 바위 사이로 격하게 흘렀으니, 또한 기이한 감상이라 할 만하였다. 족형族兄 서욱瑞旭 씨와 숙질族姪 선숙善叔이 모두 와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에, 사신의 서찰[使書]이 갑자기 강진의 숙소에 도착하였는데, “서암瑞巖에서 점심을 지어 먹고 길이 멀고 구불구불하여서 곧바로 고달도古達島로 향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장차 길을 나서려고 하는데, 남해의 향리 가운데 음식을 대접하려고 하는 자가 와서 인사를 올렸다. 나에게 주물상晝物床을 바쳤는데, 나는 극렬히 사양하여 물리쳤다. 수리首吏가 간곡하게 한번 맛볼 것을 청하였으나, 나는 “너희들이 먹거라.”라고 하였다. 곧바로 고달도에 도착하였더니, 사신의 행렬이 계속하여 도착하였다. 족친族親과 인당姻黨, 그리고 문하의 친밀한 사람들이 해월루海月樓 위에 모여 앉았다. 그 누각은 해안의 낭떠러지에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항구에서 바닷물의 조수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삼면이 평평한 호수처럼 물결이 잔잔하였고, 모여 있는 배들의 돛대가 마치 화살촉과 같았다. 여러 산들이 푸른 숲을 이루고 있었으니, 풍광이 아름다워 해문海門의 뛰어난 경치라고 할 만하였다. 이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묵었다.
○ 26일 <주석>복일卜日</주석>
배에 올랐다. 백동栢洞의 벗인 윤종석尹鍾奭이 찾아왔다. 배에 오르는 날에 실제 배가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전례대로 길일을 택하고서, 우선 배에 탔다가 다시 내려서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후가 되어서 식사 후에 목사가 위의威儀를 갖춰놓고, 타루柁樓에 나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그의 뒤를 좇아 나오니, 큰 배가 물 위에 있었다. 나는 작은 배에 타서 큰 배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배는 모두 3척이었는데, 상선上船은 갑판 위에 타루柁樓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간에는 3칸의 방이 있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만하였다. 그밖에는 모두 이교청吏校廳이었는데, 부엌과 측간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타루의 양 옆에는 각각 기치旗幟를 세워놓았다. 선장은 아래 관인[下官人]들을 모두 나열시키고, 좌우의 협선夾船 중에 하나에는 북과 피리를 싣고 다른 하나에는 뇌령牢令을 싣고서, 포를 쏘아 서로 응하였다. 이 날의 하늘은 쾌청하였고 기후는 화창하였으며, 잔잔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우리 집안의 3인과 서원瑞源은 죽 벌려 마주보고 앉아서 토론을 하였고, 비장稗將과 여러 관원들은 모두 그 뒤로 줄지어 있었다. 막냇동생[季令 : 李源祚]이 먼저 운을 내었고, 각기 1수의 시를 지었다. 앉은 자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섬들이 보였는데,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하였다. 혹 가깝기도 하였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혹 높았다가도 낮아졌으니, 진실로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다. 오시午時에 거달도에서 지공支供하여 준비해온 음식[饌品]들을 배에 실어 놓았는데, 그것을 가져와 대접하였다. 각기 도수가 높은 술에 얼근하게 취하였다.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취하도록 마셨다. 석양이 질 무렵에 다시 배에서 내려 해월루로 돌아왔다.
○ 27일
종일토록 비가 내렸다. 아문(衙門 : 官衙)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형제가 운을 내어서, 함께 몇 수의 율시를 읊었다.
○ 29일
나루터를 관장하는 향리[津吏]가 소안도素安島로 옮겨갈 것을 와서 아뢰었는데, 그곳은 이곳으로부터 수로로 70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대개 큰 바다의 경우에는 순풍을 얻지 못하면 돛을 펼 수가 없다. 소안도[素島]로 가는 길은 모두 항구라서, 비록 대략 바람의 기운이 있어도, 잘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후풍관(候風館 : 바람을 관측하는 곳)이 소안도에 있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배에 갔다. 아침에 배에서 밥을 지어먹었다. 타루柁樓에 나와서 앉아 있기도 하였고, 혹은 배 안의 방에 들어가 있기도 하였다. 배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없었는데, 다만 해안의 여러 봉우리들이 잠깐 보였다 잠깐 사라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이 확확 바뀔 뿐이었다. 밝은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자, 주변 풍광이 영롱하게 드러났다. 좌우로 완도筦島와 노아도蘆兒島가 있었는데, 소나무와 삼나무가 많았고, 민가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바다 위에 사람들이 한바탕 모두 모여들었고, 저 멀리 한라산이 구름 저편에 있는 것이 보였다. 봉우리의 꼭대기에는 아직까지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비단 한필이 펼쳐져 있는 듯하였다. 일행이 모두 안심하고 있었지만, 심 비장沈稗將만은 홀로 소상[塑]처럼 꿈쩍 않고 앉아 있었는데, 얼굴빛이 점차 노랗게 변하여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시가 끝나고 오시가 시작될 무렵[巳末午初 : 오전 11시쯤]에 곧바로 소안도에 도착하였다. 이교吏校들이 매우 분주하고 시끄러웠기 때문에, 조용하고 구석진 곳을 택하여 편안히 머물렀다. 관인들이 차례로 찾아와서 안부를 물었으니, 참으로 걱정스러울 만한 일이었다.
○ 윤월閏月 초1일[1841년 03월 01일]
약간의 바람과 보슬비가 내려서 그대로 머물렀다. 밤 3경(밤 11시~1시)에 한참 단잠을 자고 있었을 때 선원이 와서 배에 오르라고 알렸다. 나는 급히 일어나서 행장을 정리하고 챙겨서 사신 행차의 관소館所로 갔는데, 이미 나팔을 세 번 불고[三吹] 나서 출발을 하려고 하였다. 어두운 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매우 많은 짐짝과 짐 보따리들이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꽉 막혀 있었다. 횃불들이 빽빽하게 들어섰으며, 주둔하고 있는 군졸[屯卒]들이 구름처럼 모여 일제히 나루터[津頭]에 모였다. 작은 배에 올라타서 몇 리쯤을 가서 큰 배에 옮겨 탔다. 새벽닭이 이미 세 번 울었다고 한다. 북풍이 힘차게 불기 시작하자, 깃대가 와자작 하고 부러졌다. 배에는 세 칸의 방이 있었는데, 한 칸은 계령季令이 머물렀고, 나와 서원과 사질舍侄이 한 방을 썼으며, 남은 한 칸은 여러 비장들이 머물렀다. 등을 밝혀 벌려두고서 의이죽薏苡粥을 먹었다. 북과 나발[鼓角] 그리고 군령軍令의 절차가 모두 질서정연하여서 허둥대지 않았다. 포성砲聲이 한 번 울리자, 세 척의 배가 일시에 돛을 올렸으며, 노졸櫓卒 100여 명의 함성은 땅을 뒤흔들었다. 별안간에 혼미하더니 정신을 잃어서 서로 몸을 베고 드러누웠다. 전후좌우에서 천 명의 병사와 만 마리 말의 소리와 같은 굉음만이 들렸으며, 세찬 파도와 치솟는 물결은 타루의 위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앉은 자리는 마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하였다. 둘레가 몇 아름이 되는 큰 돛대가 마치 꺾여서 부러질 듯하였다. 선졸船卒 외에는 모두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어떠한 사람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조용하였다. 구토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단지 현기증이 좀 날 뿐이었지만, 일어나서 앉거나 설 수는 없었다. 조금만 가라앉아도 매우 위태로워 보여서, 정신이 점차 혼미해지고 어지러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대포 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일어나니, 그때서야 관리들이 모두 와서 어떤 상태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차 배를 정박하려고 하였는데, 사질舍姪만이 홀로 나가서, 타루 위에서 보고 와서 말하길 “성곽에 사람들이 모두 보이는 듯한데, 지로선(指路船 : 뱃길을 인도하는 배)이 방금 나왔다.”고 하였다. 3척의 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란히 일어나서 모시고 섰고, 어느새 배는 이미 정박해 있었다. 선장이 알려주기를 “사시巳時 쯤에는 고시古詩에서 ‘천리의 강릉江陵 길을 하루에 돌아왔네.’라는 시가 있는데, 오늘 우리는 천 리나 먼 탐라耽羅를 4시진을 다 채우지 못한 짧은 시간에 온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위험했음을 알 만하였다. 좌우에서 부축하고 잡아주어 배에서 내려 하처下處로 갔으니, 그곳은 바로 이른바 별도別刀라는 곳이었다. 화북진의 진장鎭將 처소에는 객사客舍가 있었다. 계령季令은 정청正廳으로 갔고, 나는 북헌北軒으로 갔다. 탐라의 위의威儀는 자못 성대하였고, 망양정望洋亭의 풍물風物은 웅장하였지만, 모두들 감상할 여가가 없이 곧바로 의건을 벗고서 방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차를 마시고 오찬을 먹는 것들이 모두 귀찮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기생들이 앞 다투어 미음을 입에 넣어주니, 잠시 후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일어나 앉았는데, 머리가 산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교吏校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들어와 인사를 하였으나, 그들을 맞이하여 응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본주本州의 판관判官도 또한 와서 정성을 극진히 보여, 간신히 맞이하여 대접하였다. 화북진은 제주성[州城]에서 불과 10리 밖에 떨어져 있질 않아서 그 날에 임지에 당도했어야 했는데, 나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여서 그대로 머물러 묵었다.
○ 초2일
식사 후에 길을 나서서 고을 관아에 들어갔다. 계령季令이 감영의 관아[貳衙]에 들어가 인신을 인수인계[交龜] 받았다. 관덕정觀德亭에 앉아서 인사를 받고는, 나는 곧바로 영위營衛에 들어갔다. 대체로 화북禾北으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의물(儀物 : 의장에 쓰이는 물품)들을 애초에 시설해 놓아야 한다. 그런데 비록 경상도 관찰사[嶺臬]나 평안도 관찰사[箕臬]라 하더라도, 모두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10리에 이르는 길에 어깨가 부딪히고 발뒤꿈치가 닿을 정도로 연이어 늘어선 사람들은 모두 관인官人과 장교將校였다. 대부분 과거에 급제한 사람[出身人]으로, 여러 해 동안 벼슬살이를 하여 명월 만호明月萬戶에 올랐다가 경직京職으로 옮겨간 자들이었다. 다만 영문營門에 재원이 고갈되었는지, 온갖 일들에 있어서 거짓을 행하는 폐단이 있었고, 군의 깃발들은 모두 오래되고 낡아서 색이 다 빠져 있었다. 친아병親牙兵으로 뽑혀서 대령하고 있는 자들은 거의 다 털옷[毛衣]을 입고 있으나, 극문戟門에서 장기간 번을 서고 있는 나졸들은 대부분 흑의黑衣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곧 앞뒤로 이곳에 부임한 관리들의 문제이니,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영리營吏들은 모두 홍의紅衣를 입고 있었고, 향품관[鄕品]은 조복朝服을 착용하고 있었다. 분 바르고 단장을 한 기생들의 경우에는, 여러 비장들이 모두 말하길 “서북西北의 여러 감영에 비해 미모가 뒤처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을에 거주하는 가구는 대략 수천 호戶에 이르렀는데, 모두 수수하고 간소하며 화려함이 없어서, 마치 궁핍한 촌락이나 구석진 마을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술이나 음식을 파는 가게는 없었고 물건을 파는 상점도 없었으니, 모두들 몹시 힘들게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지인知印과 기생들의 경우에는, 비번일 때 모두 양죽凉竹을 이용한 대나무 공예를 업으로 삼았다. 모든 경내에는 논[水田]은 없으나, 그나마 땅을 개간하여 잡곡을 심어서, 살림살이는 자못 풍요로웠다. 대미大米 외에는 모두 제주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을 먹는다. 포布와 마麻는 거칠고 질이 떨어졌는데, 이곳에서 그것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관용官用은 미속米粟과 흰 무명[白木]에 불과하였다. 과실果實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열매가 거의 없었고, 귤과 유자도 또한 매우 귀하였다. 관가官家에서 길러내는 농원 외에 일반 민가에서는 전혀 없고, 있다고 해도 매우 드물었다. 만약 제철이 아닐 때는 아무리 높은 가격을 주어도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임지에 도착한 후에 판관判官이 당유자唐柚子 10개를 보내주었는데, 그 크기가 영남의 이른바 모과[木瓜]와 같았다. 황금색을 띤 것이 매우 사랑스러웠다. 제주 토산물에 대한 먼 육지의 소문들은 모두 헛되이 전해진 말이었다. 주패珠貝가 귀한 것은 육지와 다름이 없었다. 약재의 경우는, 두서너 가지의 희귀한 약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교역을 통해 가져와서 사용한다. 인삼은 애초에 명목名目조차 알지 못하였다. 사슴은 있었으나 녹용은 약효가 없고, 가죽은 또한 값이 비쌌다.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은 전복[鰒蛤]과 상어[▼(魚+霜)魚]뿐이고, 산에서 나는 목재는 유자나무와 비자나무의 목판뿐이다. 그 외에 간혹 육지에도 없는 것이 조금 있더라도 이곳에서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영문營門의 관사인 정헌政軒은 연희각延曦閣이라 하는데, 위에는 망경루望京樓가 있었다. 그 간살의 넓이[間架]가 연희각보다 컸으며, 높이도 더 높았다. 정헌의 남쪽에는 귤림정橘林亭이 있었다. 망경루를 내 침소로 정해주었다. 정헌의 북쪽에는 대해大海가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파도가 용솟음치는 모습들이 앉아서도 보였고, 책상을 마주보고 있는 것은 바로 한라산이었다. 모든 봉우리가 마치 그림 같아서, 날개옷[羽衣]을 입은 신선이 학을 타고서 흰 구름 사이로 왕래하듯 황홀하였다.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할 수는 없었다. 정헌의 동쪽에는 수백 그루의 귤나무 숲이 있어서 무성한 산림의 흥취가 있었다. 날마다 판관과 여러 비장들이 함께 구름과 달의 풍모를 품평하니, 적적함과 근심을 녹여 날려버릴 수 있었는데, 다만 앞서 정청政廳에 임하면 이목이 매우 번잡스러웠다. 관리들은 모두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번갈아 인사를 올렸는데, 못난 선비[拙士]인 나 같은 이가 즐길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또한 이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한라산漢挐山은 세 고을에 걸쳐 있었는데, 은하수[雲漢]에 걸릴[挐] 만하게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우리의 꼭대기는 평평하고 둥글어서, 원삼圓山이라고도 한다. 제주에서 남쪽으로 20리에는 5월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 정상에는 백록담白鹿潭이 있는데,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펴지면, 바람과 천둥이 문득 이른다고 한다. 천기가 청명하면 중국[寧波]이나 일본[琉球] 등의 여러 나라도 보일 듯하다. 춘분과 추분에는 노인성老人星이 보이는데, 빛살[光芒]이 아침에 비치는 햇살과 같다. 산의 북쪽은 바로 제주濟州이고, 한라산의 남쪽에는 두 고을이 있다. 제주에서 동쪽으로 선의旋義까지가 80리요, 동쪽으로 대정大靜까지는 90리이며, 합하면 478리이다. 제주 민가의 호수는 9,188호이고, 두 고을도 또한 각각 1,000여 호에 이른다. 제주도에는 목사牧使 1명을 두었으며, 3읍邑ㆍ9진鎭을 다스리는 병마판관兵馬判官 1명과 현감縣監 2명 외에, 심약審藥ㆍ검율檢律ㆍ한학漢學ㆍ왜학倭學 각각 1명은 서울로부터 차견해 온다. 명월 만호明月萬戶 1명은 해당 감영에서 자벽自辟으로 개청하여 실직實職으로 삼는데, 임기가 만료되면, 경직京職으로 벼슬자리를 옮겨서 차례차례 다른 관직으로 전임시킨다. 그리고 두 고을의 수령[邑倅 : 邑宰]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차출한다. 화북禾北ㆍ조천朝天ㆍ별도別刀ㆍ애월涯月 4진鎭은 제주濟州 지역에 포함되고, 수산水山ㆍ서귀西歸 2진은 선의㫌義 지역에, 차귀遮歸ㆍ모슬摹瑟 2진은 대정大靜 지역에 포함된다. 각 진에는 조방장助防將을 두어 합이 8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상영上營에서 각 고을 장교의 우두머리[首校] 중에 오래 근무한 사람을 뽑아서 보내는데, 모두 그 임기는 24개월이다. 한라산의 전후좌우에 목장牧場 10곳을 설치하고, 또한 산장山場과 모동장毛洞場이 있는데, 그곳에서 모두 말과 소를 키운다. 그리고 감목관監牧官 1명을 두어서 그곳을 맡아서 관리하게 한다. 바다에도 또한 가파도加波島ㆍ형제도兄弟島ㆍ마라도摩羅島ㆍ죽도竹島ㆍ우도牛島ㆍ호도虎島ㆍ비양도飛揚島ㆍ청상삼도靑山三島ㆍ지귀도知歸島ㆍ조도鳥島ㆍ대화탈도大化脫島ㆍ소화탈도小化脫島 등 여러 섬들이 있다. 이곳에서는 화살대[箭竹]를 생산하거나, 혹은 말과 소를 키운다. 이 지역의 둘레를 모두 합하면 400여 리에 이른다. 고을의 주거는 최북단에 있는데, 바다를 등지고 산을 향해 있다. 산의 형태는 비록 높게 솟아 있으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빼어나게 맑고 아름다워서, 험하거나 흉하게 삐쭉 올라온 모양새로 보이진 않는다. 사면의 성곽은 모두 산등성이 위에 설치되어서 그렇게 높지 않다. 동쪽으로는 사라봉紗羅峰에 연대烟臺가 있는데, 푸르른 모습이 마치 그림과 같다. 이곳에 오르면 화북禾北과 조천朝天 두 나루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 모두 역력하게 보여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를 살피고 감시하는 곳[望船所]으로 삼았으니, 그 객사客舍를 영주관瀛州館이라고 한다. 옆에는 대일관大一觀이 있는데, 이곳에는 열성조列聖朝의 윤음綸音과 어제御題 어필御筆을 받들어 안치해 놓았고, 유사有司를 두어 그것을 받들어 지키게 하였다. 홍화각弘化閣은 절제사節制使의 정당政堂이었는데, 연희각延曦閣 뒤에 세웠다가, 지금은 폐하여 영리청營吏廳으로 사용하고 있다. 관덕정觀德亭은 포정사布政司 옆에 있고, 운주당運籌堂 동성東城 안에 있는데, 그곳은 바로 장대將臺로서 병사들을 살펴보는 곳이다. 연무정演武亭은 동문東門의 밖에 있는데, 활쏘기를 시험하는 곳이다. 판관判官의 집무실[衙舍]은 찰미헌察眉軒이라 하고, 막부幕府는 공제당共濟堂이라 하며, 동문東門은 연상루延祥樓라 하고, 남문南門은 정원루定遠樓라 하며, 서문西門은 진서루鎭西樓라 한다. 학교는 서문西門 밖 2리쯤 거리에 있다. 귤림서원橘林書院은 남성南城 안에 있는데, 김 충암(金沖菴 : 金淨)ㆍ송 규암(宋圭菴 : 宋麟壽)ㆍ김 청음(金淸陰 : 金尙憲)ㆍ정 동계(鄭桐溪 : 鄭蘊)ㆍ송 우암(宋尤菴 : 宋時烈)이 봉안되어 있으며, 숙묘肅廟 임술壬戌, 1682의 사액서원[賜額院]이다. 옆에는 향현사鄕賢祠가 있는데, 평정동平靖公 이약동李約東ㆍ만오晩悟 이회李禬ㆍ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ㆍ노봉蘆峰 김정金▼(亻+政) 네 공公이 봉안되어 있다. 목사牧使가 학문을 일으키고 풍속을 바로잡은 덕행을 기리기 위해 한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린다. 참봉參奉 김진용金晉鎔은 본토인인데, 경학에 밝고 그 행실이 청결하여서, 순조純祖 신묘辛卯, 1831에 추가하여 배향하였다고 한다. 삼성사三姓祠는 동성東城 안에 있는데, 이곳은 바로 고高ㆍ양梁ㆍ부夫 성씨의 시조묘始祖廟이다. 이곳에 성주星主 고후高厚ㆍ왕자王子 고청高淸ㆍ도내徒內 고계高季를 배향하는데, 또한 사액賜額하였다. 삼천서당三泉書堂은 동성 안에 있다. 좌학당左學堂은 제주의 동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인 세화촌細花村에 있으며, 우학당右學堂은 주서主西에서 60리 떨어진 명월리明月里에 있다. 남학당南學堂은 제주의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오등촌吾等村에 있으며, 서학당西學堂은 제주의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상가촌上加村에 있다. 거접居接하는 생도의 경우에는, 주州와 현縣의 수재들을 선발하여서 국비를 지원하여 공부를 시켰다. 귤림橘林 20인, 삼성사三姓祠 10인, 삼천三泉 15인, 좌우의 학당에 각각 15인, 남서의 학당에 각각 7인, 서의㫌義와 대정大靜에서 각각 18인, 총계 100여 명이다. 섬 중의 풍속이 근검하고 인색하다. 노숙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기 때문에 옷은 대부분 개가죽을 사용해 입으며,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기에 등나무 덩굴로 관을 만들어 쓴다. 길이 험하여 넘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물을 길러서 머리에 이고 갈 줄을 모르고, 모두들 광주리에 그릇을 가득 담아서 그것을 등에 짊어지고 옮긴다. 여자들은 많고 남자들은 적어서, 부역에 대한 부담이 많기 때문에 아들 낳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 띠풀[茅]을 엮어서 집을 짓고, 돌을 모아서 담을 만들며, 밭머리에는 봉분을 세우는데, 봉분에는 반드시 돌로 담을 쌓아놓는다. 내륙 지방과 통하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하고 그리 살기 좋은 곳이 못된다. 그러나 국가의 유원柔遠 정책으로 인해 도움과 위로를 받는 해택을 누린다. 방물方物과 공상貢上 외에는 이곳 백성들을 어지럽히거나 힘들게 할 만한 일은 조금도 없다. 전세田稅의 10분의 1을 걷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주本州에 저축한다. 보통 감영 본관本官 소속의 군관軍官ㆍ이서吏胥 이하부터 각항各項에 속해 있는 사역使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정한 급료[常料]가 있다. 군관의 경우에는, 내부에 각 관청에 딸린 행수行首가 있고, 외부에 9진鎭의 방장防將이 있는데, 모두 녹봉을 받는다. 그러므로 무예武藝 출신의 벼슬아치들은, 경직京職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모두 해당 감영에서 일을 맡아보길 원한다. 유생儒生의 경우에는, 국비를 지원 받다가 섬 밖으로 나가서 경시京試를 치르러 가는 자들은 모두 초료草料를 받는다. 국가에서 우대해 주는 정도가 다른 지역과 확연하게 구별이 되니, 이 지역의 사람들이 고향 땅에 편안히 머물면서 자리를 잡고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임금님의 은택이 아님이 없다. 그들도 또한 각기 삼가고 경외하며 대대로 법식을 지켜서, 횡령이나 체납으로 국고를 축내는 관리도 없고 법을 어기는 장교도 없는 것이, 내륙의 여러 주현州縣과 같으니, 가상하다. 만약 이곳에 부임하여 다스리게 하는 자로 하여금 한 10년 동안 오래도록 맡겨서, 청렴하고 욕심 없는 마음으로 아전과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구휼하며, 엄격한 군법과 적절한 평가를 통해 군병軍兵을 조련操鍊하면, 하나의 큰 중진重鎭을 이룰 만하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잘 활용해야 하는데,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물러나면서, 이곳을 마치 잠시 머무는 여관과 같이 보아서, 곳곳의 창고는 텅 비어 재정이 고갈되고 각 진鎭은 소모되고 흩어져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로다.
○ 동월(同月 : 3월) 13일
오늘은 바로 정시庭試를 치르는 날이다. 나의 아들[家兒]이 과장科場에 가서 애쓰고 고달파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찌나 싱숭생숭하던지. 지난 이틀 동안 맹풍이 불고 이슬비가 내리면서 바다 위 하늘이 우중충하고 흐리니, 조급하고 우울한 마음을 더욱더 금할 길이 없었다. 과거 당일에는 내리던 빗줄기가 잠깐 꺾였다. 목사牧使가 객지에서 보내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망경루望京樓에 기생과 풍악 그리고 여러 놀이와 기예를 크게 벌였는데, 처음에는 헌반도獻蟠桃와 만리단萬里丹의 여러 기예로 시작하여, 끝에서는 검무劍舞로 마무리를 지어, 하루 종일 질탕跌蕩하게 놀았다. 우리 형제와 판관判官이 마주앉았고, 사질舍侄은 여러 비장들과 함께 그 뒤에 자리하여 앉았다. 가무歌舞와 술잔치[杯盤]는 비록 가난한 선비[寒士]가 즐길 바는 아니지만, 또한 마음을 풀고 달래기에는 흡족하였다. 이 날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또 비가 그치지 않고 연이어 내렸다. 아들이 과거를 보러 갈 것을 생각하니, 더욱 걱정되어 마음이 괴로웠다. 이때에 봄꽃들도 점차 시들어 가는데, 비바람이 몰아쳐 나갈 수가 없어서, 흥이 완전히 깨졌다. 대일관大一觀의 유사有司인 양관梁觀은 바로 향인鄕人 중에 매우 뛰어난 인물인데, 수차례 찾아와 주어서 포쇄曝曬하는 날에 서로 만나기로 약조하였다.
○ 24일
고지기[庫直]가 와서 문을 열겠다고 고하였다. 내가 걸어가서 그것을 보니, 객사客舍 동쪽 모퉁이의 정원에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봉안해 놓았던 보궤寶樻 2좌坐를 꺼내어서 차례로 권축을 펼쳐 놓았다. 열성 어제 어필列聖御製御筆 책 각 1권을 삼가 살펴보았다. 병풍의 글씨 16장은 바로 효종대왕孝宗大王 을해(乙亥, 1635)에 능원대군(綾原大君, 1598~1656)이 목사牧使 안치범安致範에게 내려 보낸 것이다. 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선묘조宣廟朝의 어서御書와 열성 어제列聖御製를 간행한 지 이미 오래이다. 깊이 보관하여서 만대萬代에 걸쳐 널리 전해지게 할 계책을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귀진貴鎭은 멀리 바다 중에 있어서 세상일의 완급緩急에서 벗어나 있으며, 또한 병화兵火가 미치는 곳도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 각 1건씩을 보내니, 반드시 특별하게 관아에서 보관하여 영원하게 널리 전해지게 할 계책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그 후에 또한 영묘 어필英廟御筆 1책을 내려 보낸 것이 있으며, 열성조列聖朝에서 본도本島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칭찬하고 깨우쳐주는 윤음綸音의 본래 원고[本草]까지 합하여 4축軸이 있다. 그리고 정묘조正廟朝 때 특별히 어사御史를 파견할 때의 책론策論ㆍ부송賦頌 어제 서본御製書本, 그리고 숙묘肅廟 인산(因山 : 國葬) 때 본도本島에 거주하는 백성 33인이 자발적으로 식량을 챙겨서 부역을 치르러 가서 내전內殿으로부터 친서親書로 특별히 하사하여 보내준 식물 단자食物單子 1축을, 차례로 열어서 열람하였다. 마치 주나라 묘당[周廟]의 완염琬琰이나 노나라 서전[魯序]의 번여璠璵가 멀리 떨어진 바다 밖의 외지고 머나먼 지역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았다. 용이 날고 뱀이 꿈틀대는 듯한 기세와 은하수가 하늘을 돌며 환하게 비추는 듯한 광채는, 곧바로 한잠漢岑의 천 길[丈] 층층 절벽이나 대해大海의 만 리 푸른 물결과 자웅을 겨루어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게 하고 숙연하게 하여서, 곧바로 포궁抱弓과 장리藏履의 슬픈 생각이 들었다. 잠시 동안[半餉] 받들어 감상하고, 예전 그대로 잘 보관해 두었다. 드디어 소동小童과 함께 관아 뒤의 오솔길을 따라서 북성北城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멀리 북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멀고 먼 고향의 산이 아득하여서, 자미(子美 : 杜甫)가 촉관蜀關에서 달 아래 걷던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웅얼웅얼 작은 소리로 읊으면서, 공신정拱辰亭 위에 올랐다. 멀찍이 해녀[潛女]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보느라고,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동성東城의 대로大路를 따라 돌아왔다.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계속해서 비가 와서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였다. 우울한 마음이 들어 마치 새장 안에 갇힌 새 신세와 같았다. 차려주는 음식들은 비록 풍족하지만 가슴이 막히어 답답증이 생겼으며, 이곳의 생활은 비록 적응하였으나 더욱 쇠하여서 무기력감을 느꼈다.
○ 27일
날씨가 매우 좋았다. 계령季令이 등영구登瀛邱에 가서 구경하고자 하여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 판관判官과 연막蓮幕의 여러 아전들이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남문을 나와서 수십 리를 이동하였는데, 길을 따라 보이는 것은 온통 돌밭[石田]과 메마른 자갈땅이었다. 보리농사가 거의 흉년이라, 가난한 시골 마을은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으며,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 보였다. 다만 방목하여 기르는 말과 소들만이 이따금씩 들판에 있었다. 등영구는 제주성[州城]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곳은 한라산의 북쪽 기슭에 물이 모여드는 곳이다. 두 개의 계곡물이 합류하였고, 두 벼랑이 서로 마주 대하여 우뚝 솟아 있었다. 평탄한 길을 따라 이동하다가, 겨우 말에서 내려 문득 언덕에 자리하니, 갑자기 산허리가 툭 끓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래로 깊은 못을 내려다보니, 수많은 바위와 돌무더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굽이굽이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는데, 물이 흐르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하인이 앞에서 안내하며 오솔길 하나를 가리켰다. 드디어 옷을 짓밟고 나무를 움켜잡으며 깎아지른 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 내려서니 쌓여 있는 바위들 중간에 서너 명이 마주보고 앉을 만한 곳이 있었다. 양쪽의 언덕은 모두 나무와 풀이 무성하여 수풀을 이루고 있었고, 이름난 꽃들이 사이사이에 섞여서 울긋불긋 서로 비추었다. 꽃은 철쭉꽃[躑躅]이었는데, 수풀의 나무들은 모두 그 이름을 모르는 것이었고 세상에 보기 드문 것들이었다. 노래하는 기생[歌娥]과 광대[伶人]에게 몇 곡조의 노래를 부르게 한 후에, 자리를 옮겨 이른바 석문石門이라고 하는 곳에 들어갔다. 양쪽 기슭이 서로 이어져서 맞닿아 있는 곳에 바위구멍[石竇]이 입을 딱 벌리고 성문처럼 서 있는데, 그 높이가 장군 깃발[大旆]을 세워놓은 것과 같았고, 그 넓이는 100여 명의 사람을 수용할 만하였다. 그 가운데는 평탄하여서 연석筵席을 벌려놓을 만하였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의 경우는, 비가 온 뒤에는 큰물이 흘러 넘쳐서, 흩어져 나온 물방울이 이 가운데로부터 터져 나오고, 비가 물러가서 잦아들면 석문石門 밖 수십 보步 쯤부터 구불구불 흐르다가 곧바로 하류로 쏟아져 흐른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자리를 나누어 앉아서, 관현管絃 악기를 번갈아 가며 연주하였다. 빈 골짜기가 음악소리로 가득 차니, 그 음향이 더욱 맑고 빼어났다. 노래하는 기생[歌妓]과 춤추는 기생[舞娥]들이 깊은 산골짜기의 들쭉날쭉한 돌밭에서 날아가듯 가볍게 춤을 추었다. 무희들의 진홍색 치마와 붉은 뺨이 숲속의 꽃들 사이에서 서로 비추니, 극히 기이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다만, 서로 어울려 시를 주고받으며 읊을 만한 시인과 풍류객들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주변에 자리한 사람들은 그저 여색을 평가하기만 할 뿐, 산수의 뛰어난 자연 경치에서 오는 흥취를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었다. 본관(本官 : 判官)이 꽃으로 만든 떡[花餻]을 내왔는데, 모든 음식들이 매우 사치스러운 것이었으며, 감영에서 장만한 음식[營饌]도 또한 내왔다. 점심 요기[午療]를 마친 후에, 석문石門 밖 시냇가의 높은 바위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검무劍舞를 보고, 흥이 다할 때쯤 돌아왔다. 그저 말[馬]이 가는 대로 이동하였는데, 길을 따라오는 자들은 기생들[妓輩]과 하인들[隸卒]이었다. 모두들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서,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서 갔다. 전후좌우가 밝게 빛나서 마치 구름 비단[雲錦]과 같았다. 10리에 이르는 긴 들판이 온통 이름난 꽃들이었다. 순식간에 그 광경이 최고의 절경을 이루었다.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아서, 삼성혈三姓穴을 두루 살펴보았다. 고高ㆍ양梁ㆍ부夫 세 신인神人이 이곳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세 구멍이 삼각형을 이루며 대치하고 있었는데, 서로 그 거리가 불과 몇 걸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큰 소나무 수백 그루가 마치 울타리를 쳐놓은 듯 빙 둘러싸고 있었다. 지세地勢는 사면에 둘러싸여 있어서 온 경내에서 제일 신령스럽고 기이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신인이 그 영험함을 드러내기에 마땅한 장소였다. 드디어 동문東門의 대로大路로 돌아왔다.
○ 4월 초1일[1841년/04월/01일]
내가 이아貳衙에 청하기를 “이제 여름이 시작되어서, 날은 따뜻해지고 바람은 온화합니다. 전날에 몇 군데 다닌 한 것은 유람의 시작[鴻濛]도 하기 전에 속하는 것입니다. 유자후柳子厚의 고모담고사鈷鉧潭故事를 따라 유람하는 것을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아貳衙가 대답하길 “그렇게 하시지요. 먼 길을 떠날 때는 반드시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을 오를 때는 반드시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용연龍淵이 서문西門 밖 수 리쯤에 있으니, 어찌 그곳을 먼저 가서 구경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흔쾌히 그를 따랐고, 아울러 정의서丁儀瑞를 함께 만났다. 세 사람이 나란히 말을 타고 성을 나와서, 이른바 용연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바닷가의 언덕 아래에 있었다. 쌓여 있는 돌들은 움푹 파여 있었는데 흩어져서 퍼져 있는 모습이 마치 용의 비늘[龍鱗]과 같았고, 기이한 바위가 우뚝 서 있었는데 구불구불한 모습이 마치 용의 머리[龍頭]와 같았다. 바닷물이 왔다 갔다 하며 돌의 표면을 침식시켜서 만들어진 구멍들이 교묘하게 뚫려 있었다. 하늘과 물이 서로 비춰서 기이한 광채가 절벽에 영롱하게 빛났다. 높은 언덕 너머는 평평하고 넓었으며, 풀빛은 푸릇푸릇 선명하였다. 그 언덕 위에 서로 둘러앉아서 여러 기생들이 부르는 곡조를 들으며, 해녀들이 오르락내리락 물질하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내가 의서儀瑞에게 말하길 “등영구는 비록 좋았지만, 종일토록 석굴 안에 있으려니,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이 답답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눈앞의 시야가 탁 트여서 가슴이 확 뚫리듯 시원합니다. 나는 힘껏 올라 용연에서 제일 높은 곳에 한번 발을 디뎌서, 날개 돋친 신선이 되어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소.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의서儀瑞가 답하길 “삼가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옷을 풀어놓고 신발을 벗고는 용두龍頭에 오르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러다가 죽을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목숨을 버리지 않고서 어찌 신선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용두에는 한 주먹만 한 돌들이 튀어나와 울퉁불퉁 수십 길[丈]이나 되었으며, 위에는 뾰족하고 아래는 험하였다. 그런데 한 가닥 가파른 돌비탈길이 있어서, 한번 힘써 기어오를 만하였다. 드디어 발을 아주 살짝살짝 내디뎌서 층층이 깎인 벼랑을 부여잡으며 올랐다. 먼저 제일 높은 곳에 오르니, 몇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먼저 양 손을 밑으로 내려 의서를 잡고서 힘을 써 위로 당겨 올리고, 각각 어린 기녀 두 명을 잡아 올려주었다. 기녀들은 무서워 벌벌 떨어서 차마 일어서지를 못하였다. 판관은 아래 언덕에 있었는데, 내가 멀리서 말하길 “나는 이미 허공에 떠 있는 신선이 된 듯하오. 세속의 때에 물든 사람들을 보니, 참으로 우습기만 하구려.”라고 하였다. 여러 기생들이 모두 언덕에 올라 죽 늘어서서, 큰소리로 일제히 노래를 부르며 나의 호기로운 흥취를 도왔다. 앉아서 화탈도火脫島와 추자도楸子島 등 여러 섬들을 보니, 바다의 수면 위로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이, 마치 10리里의 모래사장 위에 서너 마리의 물오리[鳧雁]가 있는 모습과 같았다. 흥이 다한 후에 내려왔다. 점심 요기[午療]를 마친 후에, 배를 타고 암석 아래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구경하려고 하였는데, 계령季令이 또한 북성北城 밖으로 나가서 그물질을 하여 고기를 잡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판관이 기필코 그 모임에 합류하고자 하여서, 펴놓았던 자리를 거두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계령은 이미 모임을 파하고 성으로 돌아간 뒤여서, 도리어 몹시 무료해졌다. 잠시 해변에 앉아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구경하였다가, 다시 성의 북쪽 작은 길을 따라서 연무정鍊武亭으로 갔다. 무사武士 10여 명이 한창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게 피하여 연무정으로 들어가 활쏘기를 구경하였는데, 잠시 뒤에 이아貳衙에서 다시 술과 떡을 보내주었다. 해가 저물어갔다. 동문東門에 들어가서 잠시 공신정拱辰亭에 올랐다가, 산기슭의 물을 마시고 돌아왔다.
○ 초6일
날씨가 찌는 듯한 더위로 답답하였다. 나는 며칠 밤 동안 병을 앓은 나머지 병상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곧바로 일어나 이아貳衙와 중청中廳에 연락을 취하였다. 재촉하여 마부[僕夫]를 불러오게 하여서, 말을 타고 나갔다. 황 종黃從과 정 우丁友가 함께 길을 나섰는데, 나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묻기에, 나는 말채찍을 들어서 사라紗羅의 최고봉을 곧바로 가리켜 말하길 “저 곳을 올라가서 해가 지는 광경[落照]을 보리라.”라고 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말하길 “연로한 몸으로 저곳에 오르는 것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하여서, 내가 답하길 “한번 두고 보시게나.”라고 하였다. 나는 날 듯이 가볍게 걸어서 가니, 양쪽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었다. 드디어 동문東門을 나와서 연무정鍊武亭에 오르니, 판관判官이 먼저 나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깔고 나란히 앉아서, 그곳에 오르려면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과 나팔[鼓角]의 떠들썩한 연주 소리가 들리더니, 하인들이 넘어질 듯 갈팡질팡하였다. 계령季令도 또한 흥겨워하며 밖으로 나와서, 서로 함께하며 혹은 수레를 타고 혹은 지팡이를 짚고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산을 올랐다. 그 산은 제주성[州城] 주변 전체에서 제일 높은 곳이었다. 서쪽으로는 성안을 내려다보면 관사官舍와 민가들이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볼 정도로 역력했으며, 남쪽으로는 10리에 이르는 넓은 들에 보리가 물결치듯 누렇게 익어 있었다. 대해大海를 앞에 두고 바라보니, 구름과 파도가 넘실넘실 아득하였으며, 화북禾北 이남으로는 또한 새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장막을 치고 자리를 깔고는, 풍악을 울리고 술잔을 기울이는 흥취는 도리어 평지보다 더 나았다. 산의 북쪽 길은 비록 매우 높고 가팔랐으나, 구불구불 험한 돌길을 걸어야 하는 수고는 없었다. 그래서 일행이 함께 걸어서 내려왔다. 해안가에 이르러서 풀을 헤치고 앉았다. 관현管絃 악기의 나지막한 소리는 탁 트이고 드넓은 장소에서는 어울리지 못하였으나, 징을 치고 나팔을 부는 소리는 자못 웅장하였다. 막차幕次를 돌아보니,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하였다. 다시 힘을 써서 올라가니, 석양[西日]이 장차 지려고 하였다. 노을에 물든 상서로운 구름[霱雲]이 대해大海 위에 희미하게 깔리고, 울긋불긋한 석양의 빛기둥은 하늘까지 이르러서, 과연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 이서의 무리[吏輩]가 모두들 말하길 “만약 조각구름이 없으면, 해가 떨어져 바다로 들어갈 때 정말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는데, 오늘은 그걸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다시 훗날을 기약하며 구경을 마치고 돌아왔다.
○ 초8일
정규 휴가[式暇]라서 문밖을 나서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수교首校가 오랜 전통 행사[古事]를 폐할 수 없다고 동헌東軒에 아뢰었다. 동헌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나와서, 운주당運籌堂에 도착했다. 나는 뒤를 따라 갔는데, 운주당은 제주성 동남쪽 모퉁이의 제일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 전체를 굽어보니, 장대에 달아놓은 등불[燈竿]이 듬성등성하기도 하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기도 하였으며,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넓고 넓은 바다에 돛대가 떠 있는 듯하였다. 병교兵校가 큰 소리로 외치니, 대포를 쏘려고 횃불을 들었는데, 먼저 장군전將軍箭을 발사하였다. 화살의 두께는 3악握 정도이고, 길이는 1파把쯤이며, 무게는 수십 근斤이다. 화포의 경우는, 그 모양이 지뢰地雷 괘의 형상인데, 그것에 사용되는 화약은 30냥兩이다. 산골짜기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겁이 났다. 이어서 신기전神機箭을 발사하니, 공중으로 높이 날아갔고, 화전火箭도 쏘았다. 그때 한 줄기 유성流星이 반짝 빛나며 지나가서, 순간 멋진 광경을 이루었다. 그제야 성안 가득히 등불을 일제히 걸어놓은 모습이 보였는데, 밝게 빛나는 모습이 마치 밝은 대낮과 같았다. 흐르듯 움직이는 불빛이 넓고 넓은 망망대해에 은은하게 비치니, 그 또한 기이한 경치였다. 혹은 기생의 풍악소리를 들었다가, 혹은 광대들의 놀이를 구경하였다. 난로회煖爐會를 만들어 밤새도록 즐기기를 기약하였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이슬비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하여서, 모임을 파하고 관아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일행이 모두 나갔었는데, 연죽然竹 혼자만 병에 걸려 따라오지를 못하였으니, 매우 안타깝다.
○ 13일
집 소식[家信]을 접하였다. 수개월 동안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던 차에, 양가 어머니들이 모두 무탈하시고, 집 아이도 또한 아무 일 없이 잘 돌아왔다고 하니, 그 걱정되고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다만, 포곡匏谷에 유 진사柳進士가 숙환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지극히 가깝게 지내온 사이라서 참담하고 비통할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고 총명한데 미처 중수中壽도 얻지 못하였다. 우리들은 그저 벗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뿐이니[蕙嘆], 그 슬픔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리고 보리농사[麥事]가 흉년이 들 것이라 판단되어 소금 값[鹽價]이 너무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 16일
연무정演武亭에서 문무文武 관원의 백일장[白場]을 열었다.
○ 17일
망경루望京樓에서 호중呼中하였다.
○ 18일
접생接生을 선발하기 위해 면접시험[面試]을 보았다. 3일 동안 시문을 짓는 것[文墨]을 보는 유희는, 도리어 산수에 올라가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보다 나았다. 세 읍邑의 수령들과 한 고을의 진신搢紳들이 모두 와서 모여 자리에 참석하여 앉았다. 풍악[笙歌]이 신나고 흥겹게 울렸으며 술잔을 돌려서 술을 대접하였으니, 마음이 몹시 흐뭇하였다. 대개 이 읍邑에서 무술[武技]의 경우,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어서, 이를 연습하는 것이 유행이라 무사武士로 모인 자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3개의 무술 기예 중에서 2개 이상을 합격한 자 40명을 취하였다. 문장의 일[文事]에 있어서는, 비록 매우 보잘 것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 그나마 뛰어난 자들을 선발하였다. 또한 과거 시험 선발에 적합한 자들이 있어서, 시詩ㆍ부賦 각 15명씩을 취하였고, 고풍古風에서 40명을 취하였다. 함께 호중呼中한 접생接生이 되면, 사학四學에서 국비를 지원하는데, 합이 60명이 된다. 누각에 오른 뒤에 사다리를 치우고[登樓去梯], 한 명씩 직접 얼굴을 보면서 시험하고, 사학四學에 나누어 보낸다고 한다.
<제목>탐라일기耽羅日記 하下</제목>
○ 1841년 04월 일 미상
나는 성오成五와 함께 길에서 만나 동행하여서, 이곳에 들어와 함께 거처하였다. 고단하고 적적한 지[形影相隨]가 여러 달이 되니, 4월 보름께부터 성오가 짐을 챙겨 돌아가려고 하였다. 비록 몹시 슬프고 서운하였으나, 만류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집에 보낼 편지도 썼고 행장도 꾸렸으니, 4월 17일경에는 포구로 내려갈 것이다.
○ 1841년 4월 16일
새벽닭이 운 뒤에 공마선貢馬船 7척이 조천포朝天浦에서 출항하였다. 배가 바다 한복판에 미치지 못하였을 때 갑자기 큰바람을 만나서, 7척의 배가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와 정박하였다. 그 중 1척은 앞바다에서 물에 잠겼고, 또 다른 1척은 다른 곳에 표류하였다. 보고 들은 내용들이 너무도 놀랍고 참혹하였다.
○ 19일
3일 후에 정탐선偵探船이 처음 출항하였다. 표류된 1척은 아직 생사를 알 수 없으나, 나머지 1척은 전해들은 말대로 침몰한 것이 확실하였다. 며칠 뒤에 포구에 범목帆木이 떠내려 왔다. 전례대로 차사원差使員과 해당 진장鎭將이 의논하여 판단해 말하기를 “이번 변고를 당한 이후로 성오가 돌아가는 일이 더욱 염려가 된다. 열흘 남짓 참고 지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 1841년 4월 25일
어느덧 25일이 되었다. 어두운 구름이 문득 개더니 바람이 잠잠해졌다. 그래서 나는 성오와 함께 화북禾北에서 길을 떠나, 환풍정換風亭에서 함께 묵었다. 선척船隻과 수행 하인을 정돈하고 나서, 바람이 순조롭기를 기다린 뒤에 출발할 계획이었다. 나는 일단 들어와 있다가, 다음날 다시 나가보려 하였다. 해질 무렵, 도선색都船色이 갑자기 들어와 배가 이미 떠났다고 아뢰었다. 너무나 깜작 놀라서 밤새도록 단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 1841년 4월 26일
새벽에 일어나 망경루望京樓에 기대어 북쪽 창을 통해 멀리 바라보았다. 배는 아직 바다 한복판에 둥실둥실 떠 있고, 바람이 잠잠해져서 빨리 가지는 못하였다. 이별의 슬픔에 망연자실하여 마치 술에 취한 듯, 마치 정신을 잃은 듯하였다. 언제쯤 무사히 건넜다는 기별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집에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는 인편은 내달 그믐쯤에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이른바 하늘 끝과 땅의 끝[天涯地角]이라 할 만하니, 어떻게 7∼8개월을 참아낼 수 있겠는가. 26일 일포(日脯 : 오후 4시쯤) 후에 순풍이 불어 공마선 9척이 일제히 출항하였다. 26일 밤에는 반드시 이진梨津에 도착할 것이라며, 관리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였다.
○ 27일
조천포에서 배를 띄웠다. 관할 차사원差使員과 수교首校 여러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쳤다고 앞 다투어 칭찬하였다. 오시午時부터 검은 구름이 사방을 가득 둘러쌌다. 음산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강한 바람이 휘몰아쳐 불더니, 밤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든 지 오래지 않아, 사납고 거친 바람이 갑자기 몰아쳤다. 산이 흔들리고 나무가 뽑힐 듯한 기세였다. 또 빗줄기가 쏟아붓듯 세차게 내렸으며, 물동이가 엎어지고 바다가 뒤집히는 소리가 났다. 세찬 빗발은 사방의 창문을 때리고 부수었으며, 빗방울이 튀어서 이부자리까지 밀고 들어왔다. 성 전체의 집 기와가 모두 날아갔고, 시끄러운 소리가 마을 곳곳에 진동하였다. 나와 황 종黃從은 함께 윗방과 아랫방에 거처하였는데, 둘 다 놀라서 일어났다. 물 들어오는 구멍을 막고 이부자리를 옮기려 하였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며, 앉을 만한 곳도 찾지 못하였다. 그때의 망연자실한 상황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두 공부(杜工部 : 杜甫)의 ‘추우지탄秋雨之嘆’과 육방옹(陸放翁 : 陸游)의 ‘강성지사江聲之思’란 표현도 오히려 오늘 밤 광경에 견주어 부족할 정도였다. 수수濉水의 한나라 병사와 공산公山의 진나라 병사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드디어 바다 밖 바람과 기상이 바뀌어 완전히 딴 세상이 되었다.
○ 28일
아침에 일어나서 살펴보니, 기와 조각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고, 집은 뒤흔들려 기울었으며, 뜰 앞에 큰 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꺾여 있었다. 참담하고 걱정스러운 모습과 분위기였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겁에 질려 난리를 겪고 나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선貢船은 아무 걱정 없이 육지로 나갔을 것이나, 저 성오成五의 돌아갈 일을 생각하니 더욱더 아득하고 심란했다.
○ 1841년 6월
6월에 들어선 이후로 음산하고 어두운 기운이 사라지고 하늘이 밝아졌으며, 더위 또한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낮에는 주로 형, 아우들과 함께 망경루望京樓 위에서 지냈다. 동생이 부임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나서, 읍의 일도 많이 정돈되었다. 또 농사철이 되어 백성들의 송사도 점점 줄어들어서, 막냇동생[季令 : 李源祚]도 한가한 때가 많아졌다. 만약 좋은 벗과 이름난 산수가 있어서 유람을 할 만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고상한 시를 읊조리고 투호놀이[雅歌投壺]를 할 것이다. 그리고 제 정로祭征虜와 같은 이는 단지 술이나 마시며 산을 유람했을 것이고, 반맹양潘孟陽과 같은 이는 제주성[州城]의 전후 20리 안에 다시 볼 만한 곳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한라산의 백록담 유람은 이미 그 시기가 지났다. 만일 억지로 강행하여 모험을 한다면 무더위 속에서 여행하게 될 것이 뻔할 것이어서, 일단 가을로 미루었다. 긴 여름날 종일토록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까? 나는 나가고 들어오는 데 구애가 없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홀로 예방의 비장[禮裨]과 함께 용연龍淵에 가서, 종일토록 기녀의 노래를 듣고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예방의 비장은 큰 병을 앓은 이후에 바람을 쐬어 기분 전환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후에도 몇 일간 중청中廳의 세 사람과 양학兩學, 검률檢律의 모든 사람들을 전부 거느리고 서문西門 밖의 송단松壇으로 나가서, 여러 기녀들에게는 몸을 씻고 물놀이를 하게 하였으며, 혹은 동성東城의 한쪽 구석으로도 함께 갔다. 용린병龍鱗屛이나 호반병虎班屛과 같은 산지山池와 수구水口의 물가, 그밖에 금산錦山의 소나무 그늘, 가락천[嘉樂]의 기이한 바위 등, 두루 찾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 찾아가 절경을 몇 차례나 빙 둘러보고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두는 항상 요염하고 아름다운 미색들과 조화를 이루었으니, 그 즐김은 조금이라도 억지로 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온 첨지僉知 김덕조金德祖는 비록 이들 중에 촌사람이긴 하나, 자못 지식이 있고 고사古事에 대한 얘기를 잘하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적적한 기분을 달래고 시름을 없앨 수 있었으니, 밤에는 나가서 유숙하고 낮에는 함께 지내어서, 다행이었다.
○ 1841년 6월 초6일
드디어 성오가 무사히 육지로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되돌아가는 배[順歸船]를 얻어 타고, 소로小路로 나아가서 갔다고 한다.
○ 1841년 6월 11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날씨가 아주 좋았다. 드디어 이李ㆍ정丁 두 막빈幕賓 그리고 김 첨지(金僉知 : 金德祖)와 함께 도근천道近川에서 천렵[獵魚]을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계령季令도 함께 가기로 하였다. 서둘러 밥을 먹고, 서성西城 밖으로 나갔다. 수행하는 자들은 매우 단출하였고, 따르는 기녀도 또한 3인에 불과하였다. 길을 떠나 몇 리 못 가서 바다에 검은 안개가 갑자기 불어나더니, 물이 불어났다. 산천에서 그물질을 하고 나니, 잠깐사이에 윗옷과 아래옷이 홀딱 젖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서 곧 맑게 개였다. 장막을 설치하고 자리를 깔고서, 버드나무 둑[柳堤] 위에 모여 앉았다. 잡은 고기로 회를 치기도 하고 굽기도 하였다. 무더위와 먼지 속에서 물속의 온갖 수초는 바람에 일렁이고, 둑 위의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는 짙게 그늘을 드리웠다. 홑옷차림이란 것도 모른 채, 썰렁하여 잠시 체기가 있었지만 곧 상쾌해졌다. 석양이 산에 걸리고 나서야 말에 의지하여 관아로 돌아왔다. 목관牧官이 병이 나서 함께하지 못한 것이 매우 측은하였다. 오는 길에 이아貳衙에 들러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귤과 유자 품평[橘柚題品]
본 섬은 귤을 생산하는 고장이라고 일컬어진다. 집집마다 귤과 유자가 있고, 곳곳마다 뛰어난 말[驊騮]이 있다. 고려조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지금은 목장과 과수원을 합하여 40여 곳에 이른다. 그런데 그 과수원의 태반이 나무가 마르고 상하여, 사가私家에서는 장차 절종絶種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생산되는 것이 점차 줄어드는 것뿐만 아니라, 징세의 폐단도 있다고 하니, 통탄하고 통탄할 일이다.
유감乳柑 : 크기는 호남과 영남 지방의 조홍시早紅柿와 비슷하다. 그 색깔은 푸른색이고 윤기가 돈다. 껍질은 얇고 씨는 작으며, 맛은 달고 시원하며 깔끔하다. 향은 은은하고 신맛이 있다.
감자柑子 : 큰 것은 오리 알만 하고, 작은 것은 계란만 하다. 색은 짙은 황색이고 껍질이 얇다. 씨는 대개 한 개이나 많게는 예닐곱 개에 이른다. 맛은 단맛과 신맛이 서로 적절하게 조화롭다.
대귤大橘 : 크기는 유자柚子와 비슷하다. 색은 황색이며, 껍질은 두껍고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수분이 많으며 씨가 작다. 시원하고 상쾌한 맛이 있고, 향이 신선하다. 탐라에는 원래 이 귤이 없었는데, 숙종조[肅廟朝]에 부연사赴燕使가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을 이 섬 안에 들여와 종자를 얻었다.
당금귤唐金橘 : 크기는 유감乳柑과 같다. 색은 황금색이다. 껍질이 매우 얇아 조금만 부딪쳐도 곧바로 뭉개진다. 씨는 크기는 매우 작고, 그 개수도 적다.
동정귤洞庭橘 : 크기는 위와 같다. 껍질이 얇고 씨가 작은 것도 또한 위와 같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은 색깔이 옅은 황색이면서 조금 푸른색을 띤다는 것이다. 단맛이 적고 신맛이 강하다.
소귤小橘 : 크기가 오리 알만하다. 색은 자줏빛과 황금색을 띠는데, 만약 바람과 서리를 맞고 한겨울이 되면 점차 붉어져서 붉은 가죽[朱皮]처럼 변한다. 껍질은 두껍지도 얇지도 않으며, 과육에 달라붙어 있지 않다. 맛은 단맛만 나고 수분은 많지 않다.
당유자唐柚子 : 열매는 매우 월등하게 큰데, 그 중에서도 큰 것은 한 되[升]쯤이나 된다. 색은 짙은 황색이며, 껍질은 두껍고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씨는 작고 납작하며, 맛은 신맛이 매우 강하다. 여러 일반적인 귤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음주 후에 목이 마를 때, 한두 개를 먹으면 상쾌해지는 효과가 있다. 몇 자[尺] 정도 땅을 파서 묻고, 그 위에 대나무 잎을 수북하게 덮어 보관하면, 오뉴월 한 여름 무더위에도 썩지 않는다. 그리고 콩이나 팥 자루 속에 넣어두어도 또한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요긴하게 쓰여, 다른 귤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유자柚子 : 가장 먼저 익어서 9월에 공물로 바친다.
금귤金橘 : 또한 빨리 익는 품종이라, 9월의 순망(旬望 : 10~15일)에 이미 황색으로 무르익는다. 만약 열매를 따내지 않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법이 없어서, 1년이 지나도 그대로 달려 있기도 한다. 색은 당금귤[唐金]과 같고, 맛은 매우 시다.
산귤山橘 : 크기는 감자柑子만 하기도 하고 당금귤만 하기도 하다. 껍질부분에 돌기가 많이 있는 것이 있고 돌기가 없는 것도 있어,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돌기가 많은 것이 맛이 더 좋다. 그 껍질을 벗겨 말리면 진피陳皮가 되는데, 진피는 이 귤을 제일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혹 여러 진귀한 과실[珍果]의 수확이 혹 많지 않아서 그 원래 정해진 수확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이것으로 대신 진상한다.
청귤靑橘 : 크기는 산귤만 하다. 색은 푸른색이고, 맛은 완전히 시다. 그 껍질을 벗겨 말리면 청피靑皮가 된다.
지탱枳橘 : 크기는 당유자[唐柚] 다음으로 크다. 모양도 당유자와 비슷하나, 그 껍질이 심하게 울퉁불퉁하지는 않다. 이듬해 2~3월에 이르러 열매가 무르익고, 맛은 당유자보다 낫다. 다만 관부官府와 섬사람들이 이미 8월에 따서 말려 지각枳角을 만들기 때문에 그 맛을 아는 사람이 없다.
등자귤橙子橘 : 크기는 산귤과 같다. 색은 푸른색인데, 익으면 혹 붉은 반점이 생기기도 하며 과육에도 들어가 나타난다. 맛은 시고 수분이 많다. 또한 껍질을 벗겨 진피陳皮를 만든다.
석금귤石金橘 : 크기가 큰 것이 금귤의 작은 것과 같고, 작은 것은 밤톨만 하다. 껍질이 얇고 씨가 크다.
별귤別橘 : 크기가 큰 계란만 하고, 색은 옅은 황색이다. 열매의 윗부분은 넓고 아랫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져, 그 모양이 단지[壺]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 같다.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절종되었다.
위에서 모두 열다섯 품종을 설명하였다.
○ 1841년 6월 일 미상
6월 초순이 지나 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극심하게 내려, 비를 뿌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낮에는 푹푹 쪄서 괴롭고, 밤에는 습기에 몸이 상하였다. 망경루望京樓는 섬 안에서 제일가는 누대樓臺인데, 높고 탁 트여 있으며 넓고 훤하여 서울에도 이와 견줄 것이 없다. 그런데 망경루의 숙소는 너무 더워서 마치 작은 오두막집 같다.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힌 근심이 있어, 오로지 마음대로 돌아다닐 생각만 들었다. 비가 와서 문밖출입을 못한 것이 벌써 수십여 일이다.
○ 7월 초5일
잠깐 하늘이 맑아졌고, 심한 더위도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연죽 노인然竹老人과 함께 수행하는 하인을 단출하게 하기로 약속하고, 서늘한 아침을 틈타 서성西城을 나왔다. 기녀 4명이 뒤를 따랐다. 20리 떨어진 도근천道近川에 이르러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깐 쉬었다. 다시 애월涯月의 대로大路로 나가서, 20리쯤 가다가 남쪽으로 구불구불한 길로 가서 하가락리下加樂里로 들어섰다. 난후영장攔後領將 안세권安世權의 집이 이 마을에 있었는데, 그가 길가에 나와서 인사를 하였다. 드디어 마을 북쪽 수십 보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연못[蓮池]을 발견하였는데, 못의 넓이가 몇 경頃 남짓 하였고, 못 가득 연꽃이 피어 있었다. 지금이 한창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시기인데, 지난 달 비바람에 손상되어, 남아 있는 것이 백여 줄기에 불과하였다. 연잎 사이에서 은은하게 살포시 드러난 연꽃은 마치 온 세상이 다 탁한 가운데 한두 군자만이 홀로 세속의 더러움[塵埃] 중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는 타향에서의 진기한 풍경이었지만, 앉아서 쉴 만한 시원한 그늘도 없었고, 강하게 내리 쬐는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마음껏 감상하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와야 했다. 점심 요기[午療] 후에 급히 말을 달려 성으로 들어갔는데, 날은 이미 저물었다. 길을 따라 가며 농사 상황을 보니, 풍년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서문 밖에는 논[水田]에 모를 심어 놓은 곳이 많았는데, 모두 두 번째 김매기를 한 곳이다.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다행이다.
○ 초8일
밤에 잠을 자러 들어가려고 할 때 갑자기 6월에 진상품을 싣고 갔던 압령사押領使의 소식이 들렸다. 지난달 그믐 경에 배를 띄워 육지로 나간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또 화북禾北 진장鎭將의 첩보牒報도 있었는데, “이 배가 소안도[素安]에 도착하고 나서 갑자기 광풍狂風이 요동쳐 손을 쓸 새도 없이 키[柁]가 부서지고 배가 뒤집혔다. 배 안에 있던 30여 명이 뒤집어진 배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조각을 끌어안기도 하고, 잠수하여 살 길을 찾으려고 하였는데, 잠시 후 마침 오가던 고기잡이배가 그곳에 이르렀다. 어부가 맨몸으로 물에 빠진 이들을 잡아당겨 배위에 올렸지만, 구조되지 못한 육지인 3명과 토착인 5명은 배에 실린 물건들과 함께 영원히 물속에 잠겼다. 공公ㆍ사私의 짐짝[卜物]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막중한 방물方物과 시급한 장계狀啓도 못쓰게 되었으니, 매우 두렵고 떨릴 뿐이다. 인명을 앗아간 이런 변고가 다시 생겼으니, 어찌 이 참혹함과 흉악함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또 한 배에 실린 물건의 값은 대략 수만금數萬金이었다.”라고 하였다. 전해진 한 통의 비보에 애달피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육지인 가운데 안의安義에 거주하는 박치욱朴致旭이라는 자는,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섬에 들어왔을 때 자유子猷의 집에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온 인연으로, 형편에 따라 일을 봐주고 보호해 주었다. 그는 본전 600냥兩으로, 물건을 흥정하여 이윤을 남겼는데, 삼베를 가지고 와 팔아서 갓양태[凉臺]를 사 가지고 나가니, 그 이익이 거의 천 꿰미[千緡]가 넘었다. 떠날 때 그의 표정에 화색이 만연하였고, 군관 전령軍官傳令도 대동하고 갔다. 그런데 지금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람들이 더욱 기가 막혀 하였다. 삶과 죽음이 나뉘어 영원히 갈라졌으니, 저 집안의 일이 참혹하고 참혹하다. 이 지방 대림촌大林村에 사는 고명복高明卜 편에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고, 청려장(靑藜杖 : 명아주 지팡이) 15개도 함께 보냈었다. 그런데 명복의 아우도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 인편에 듣자하니, “집을 떠난 심부름꾼이 와서 소안도에 머물렀다. 물품을 호송하고 돌아오는 배가 있었지만, 배는 작고 사람이 많아서 그들이 같이 배에 올라타지를 못하였다. 나중에 기다렸다가 큰 배를 타고 들어올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조선槽船은 바로 옛날 뗏목[筏葦]이다. 편목片木 10여 주株를 이용하여 잇닿아 못을 박아 뗏목으로 만든 것이다. 뱃전도 없고 후미도 없으며, 위로 한 층을 지어서 조금 높게 만든다. 몇 사람이 나무판자 위에 앉을 수 있고, 한 사람이 노를 젓게 되어 있으니, 이곳 사람들이 고기를 잡는 데 이용하는 도구이다. 대개 이 섬은 수심이 깊어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포구와 해안가는 모두 암초가 험하여 어량魚梁을 설치할 수 없고, 큰 그물을 펼칠 수도 없다. 해녀[潛女]가 미역과 전복을 채취하는 것 외에 어지간한 어선 조업은 모두 낚시를 던져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조선槽船을 활용하여 조업을 하였으니, 바다 입구마다 집집마다 이를 가지고 있다. 바람이 순조로운 때에는 조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나가서, 바닷가 언저리에 둥둥 떠 있었고, 심지어 바다 한 가운데까지 나갔으며, 혹은 사서도斜鼠島나 추자도楸子島 등의 섬에까지 가기도 하였다. 인명이 무수히 상하였으나, 생계가 매여 있어서 위험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혹 풍랑이 일어나는 때를 만나면, 나무뗏목은 거의 물속으로 침몰하다시피 가라앉아서 어부가 마치 오리나 기러기처럼 물속을 들락날락 하였다. 보고 있자니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이와 같으나, 얻는 것은 매우 적었다. 하루 밤낮동안 바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여도, 더러 빈손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으며, 생선 몇 마리라도 잡으면 큰 수확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이 땅의 생선과 게가 몹시 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몇 십 년 전에 한 흉악한 놈이 이 조선槽船에 올라탔다가, 바람에 떠밀려 세 번이나 중국의 남경南京으로 들어갔다. 저쪽에서 넘겨주는 물품의 이익을 탐하여 이쪽에서 금하는 경계를 넘었으니, 해당 감영에서 죄를 밝혀 상부에 보고하고, 죄인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아 여러 사람에게 경계하였다.
○ 18일
이날은 전하[大殿]의 탄신일이다. 나라 안이 편안하고 조용하며[寧謐], 농사는 풍년이었다. 섬지방의 몽매한 풍속도 경사를 펼치는 절차를 알아서, 이교吏校들이 전례대로 동헌東軒에 아뢰어서, 허락하였다. 드디어 망경루望京樓 위에 자리를 깔고, 막빈幕賓들이 나란히 줄지었다. 여러 음악이 차례로 연주되니, 태평성대[昭代]의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역에서 장관壯觀을 맞았으나, 다만 뜻을 나누며 같이 어울릴 벗들이 없어 한스러울 뿐이었다. 옛사람이 이른바 종일토록 예의를 다하면서 속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과연 나보다 앞서 경험하여 터득한 말이다.
○ 1841년 7월 19일
집을 떠난 종이 마침내 돌아와서, 아들의 편지를 볼 수 있었다. 여러 달 동안 괴로운 생각을 하던 차에 대체로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소소한 근심과 걱정은 줄어들었지만, 집을 향한 애틋한 마음과 괴로움은 더 많아졌다. 어느 날 다시 그 다음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비의 말을 들으니, “15일에 안도安島에서 배를 띄웠으나, 풍랑을 만나 배가 표류하였다. 그렇게 바다 한 가운데서 이틀 밤낮을 떠돌다가, 간신히 해남海南 청산도靑山島에 배를 댈 수 있었다. 거기서 하루를 묵고 18일 첫 닭이 울 때, 순조로운 바람을 만나 배를 움직였다. 당일 술해시(戌亥時 : 저녁 9시쯤)에 드디어 화북禾北에 배를 대었다. 함께 온 군물軍物 무역선貿易船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바닷길이 위험하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게 어찌 육지와 쉽게 통할 수 있겠는가? 우리 동방의 옛 도읍은, 단군왕검의 구도九都와 같은 경우 매우 오래되었고, 물론 평양平壤ㆍ송경松京ㆍ계림鷄林 등도 모두 수 천년된 옛 도읍터이다. 비록 종거鍾簴는 옮겨졌으나 시가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여러 번의 병화兵火를 거치면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었다. 다만 이 탐라[乇羅]의 통치는 삼성三姓이 나라를 세운 이후로 신라ㆍ고려ㆍ본조本朝를 차례로 거치면서 몇 천백 년이 지났으나, 우물과 성첩은 고치지 않았고 거리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또 옛 칠성도七星圖로 천년의 옛 성姓이 아직 남아 있음을 징험할 수 있다. 고려시대 때 목자牧子와 김통정金通精이 잠시 이 땅을 훔쳐 장난질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본조에 들어선 이후로 백성들은 임진왜란과 같은 큰 변란이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왜선倭船 수십 척이 몰래 바다를 엿보다가 침범하려 들면, 곧 바람이 요동쳐서 배가 부서졌고, 거의 다 침몰하였다. 병기兵器가 떠다니는 것을 무수히 건져내니, 지금까지도 군기고軍器庫 안에 그 이름을 알지 못하고 그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물건들이 많이 있으며, 보검寶劍은 다 환출換出되었다고 한다. 대저 이곳의 사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은 높고 암초는 사나워 천애의 요새가 된다. 적벽赤壁의 화공술火攻術로 공격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관문을 막고 있으면 만 명을 당해낼 수 있으니, 무슨 수로 성문을 열겠는가? 읍치邑治의 뛰어난 지형을 보면, 한라산의 안쪽 산기슭이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모양으로 감싸고, 북쪽으로 10여 리를 쭉 뻗어서 해변에 이르러 낮아지면서 무덤[邱隴]과 같은 모양을 한다. 다만 양쪽 면은 아주 긴밀하게 감싸서 둥글게 안았고, 점차 안으로 둘러싸서 성벽을 크게 이루었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두 하천이 산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데, 산과 물이 모두 바다를 만나 그쳤다. 땅은 매우 협소하여서 성내의 둘레가 1리 정도에 불과하다. 백성들이 매우 빽빽하게 거주하여서, 집과 집 사이가 붙어 있다. 동쪽에는 사라봉紗羅峰이 있고, 서쪽에는 도돌봉道突峰이 있는데, 민간에서는 암산과 수산이라고 부르는데, 두 산이 서로 수구水口를 지키고 서 있는 것[羅星]이라고 한다. 성 밖의 동쪽과 서쪽 40리 내에는 모두 겹겹이 층층이 긴밀하게 둘러싸고 있다. 속인의 눈으로 그것을 보아도 그곳이 매우 좋은 곳에 터를 잡은 대지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흙과 돌은 모두 흑색에 울퉁불퉁하며, 물과 샘은 누런 흙탕물이어서, 뛰어난 경관이 하나도 없다. 다만 동성東城 내에 가락천嘉樂川 한 구역이 조금 볼 만한 것이 있다. 하천은 남쪽 교외로부터 북쪽으로 흘러서 성으로 들어오는데, 남수각南水閣이 그 초입의 경계가 된다. 서쪽에는 청풍대淸風臺와 귤림원橘林院이 있고, 동쪽에는 삼성사三姓祠가 있다. 조금 아래로 수십 걸음을 내려가면 평지가 나오는데, 그곳에 판서정判書井이 있다. 김중암金沖菴이 귀양하여 머물 때에 파놓은 것인데, 후에 사람들이 돌 벽돌을 쌓아서 보호하고,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를 해놓았다. 또 남쪽으로 수십 걸음 정도에는 조천석朝天石이 있는데,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서 있어서, 마치 황하강의 돌기둥[砥柱]과 같았다. 이어서 바로 가락교嘉樂橋가 있는데, 이는 바로 동문東門의 대로大路이다. 다리의 동쪽에는 큰 돌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늙은 나무들이 매우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그것을 바라보면, 장엄하고 엄숙하여 크고 깊으며 그윽한 상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호반병虎班屛과 용린병龍鱗屛이다. 그 아래에는 삼천서당三泉書堂이 있고, 위에는 공진정拱辰亭이 있는데, 모두 바윗돌의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성내의 제일 명승지이다. 호반병과 용린병 아래에는 산제천(山際泉 : 산 끝 샘물)이 있는데, 샘물이 달고 물이 시원하다. 가락천嘉樂川이 이곳에 이르러 모여서 못을 이루는데, 이곳에서 은구어銀口魚를 기른다. 물줄기가 몇 걸음[武]쯤 성을 뚫고 나가는데, 그곳에 북수각北水閣을 지어놓았다. 물이 성 밖으로 나가면, 이미 바다 조수와 서로 통하게 되는데, 구불구불 은산銀山 기슭을 돌아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간다.
○ 1841년 8월 초1일
가을의 절기가 다가오니, 바닷가 하늘은 말끔하여 끝없이 펼쳐졌다. 서리 내리는 계절에도 기러기는 돌아왔지만, 고향에서 오는 편지는 받기가 어려웠다. 조롱에 갇힌 새가 오랫동안 묶여 있듯이, 나그네의 회포가 무료하기만 하였다. 양쪽 겨드랑이에 너풀너풀 바람이 일게 하고 싶으나, 연이어 기일을 만나서, 재계하고 머물러 조용히 지냈다.
○ 1841년 8월 8일
황 종黃從ㆍ영암靈巖의 최 생崔生과 함께 산방산[山房] 유람을 떠나기로 약속한 날이 바로 이날이다. 먹구름이 아직 다 걷히지 않아서, 중청의 여러 관원들이 모두 ‘날씨가 좋지 않으니 결단코 길을 떠나는 것은 어렵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만류를 억지로 떨쳐내고 일어나, 새벽밥을 먹고 출발하였다. 출발하고 몇 리도 못 가서 약간 빗방울이 떨어졌으나, 오래지 않아 맑게 개었다. 빨리 말을 달려 40리 떨어진 이왕원二旺院에 도착하여 점심 요기를 하였다. 길을 따라 갔는데,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험한 돌길과 척박한 논밭뿐이었다. 오후에는 이왕원에서 곧장 만 겹으로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대여섯 곳의 목장이 있다고 하였는데, 목책大柵을 쳐서 산야에 넓게 둘러져 있었다. 큰 목책의 외에도 소소한 채소밭 울타리[樊圃]가 있어, 허가를 받은 백성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고, 관에서는 세금을 거두었다. 숲속에는 혹 평탄하고 널찍한 곳이 있으면, 말들은 무리를 지어 풀을 뜯어먹었다. 또한 그 중에 혹 생마生馬도 있었는데, 온갖 나무가 가득한 숲속에서 서로 이리저리 날뛰니,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면 산에 사는 괴상한 짐승 같았다. 곧은길에는 나무를 종횡으로 엮어 표시하여 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왕래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열고 스스로 닫으며 다녔다. 거리가 30~40리에 이르렀는데, 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모두 무성한 수풀이었다. 오래 묵은 나무들이 화살촉처럼 서 있었고 등나무와 칡덩굴이 얼기설기 이어져 얽혀 있었다. 거의 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었으며, 처음 보는 나무들이었다. 제주 토박이에게 물어보았는데, 그의 말이 거의 왜가리가 내지르는 소리[鴂舌]와 같아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해가 거의 기울어가니, 온갖 새들이 서로 어울려 지저귀었는데, 또한 어떻게 생겨먹은 동물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깊숙한 숲의 우거진 초목들 밖으로 바다 빛이 은은하면서도 희미하게 보여서, 참으로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과 같았다. 말을 달려 대정大靜의 아사衙舍에 들어가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수령[主倅]이 이미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를 맞이하려고 청소를 하고[掃榻]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을 부르고 음식을 마련해 놓았으나, 나는 오랜 시간 말을 타고서 거의 백 리를 달려오느라, 나른하고 기운이 없었고 모든 뼈마디가 쑤시도록 아팠다. 곧바로 의건衣巾을 벗고서 베개에 기대어 잠을 잤다.
○ (8월 9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하늘이 깨끗하고 공기가 맑았다. 나도 또한 정신이 맑고 상쾌했다. 밥을 재촉하여서 먹고 길을 나섰는데, 먼저 천제연天帝淵으로 갔다. 수령도 또한 뒤를 따랐다. 천제연은 색달교塞達橋 아래 중문원中文院 옆에 있는데, 이곳은 순행巡行 중에 말을 점검하는 곳[點馬所]이다. 현縣과의 거리는 35리 떨어져 있다. 색달천塞達川은 한라산 남쪽 기슭으로부터 와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들이 모여들어 합쳐져 이루어진 큰 하천[大川]이다. 그 물이 색달교 아래로 흐르다가 깎아지른 듯한 돌벽[石壁] 아래로 뚝 떨어져서, 절로 신선이 머물 법한 경치[洞府]를 이룬다. 위아래의 두 폭포의 높이는 대여섯 길[丈]이나 되고, 흰 바위들이 삐쭉삐쭉 솟아올라 있었다. 세차게 흐르는 물에서 물방울을 내뿜어냈는데, 마치 무지개[虹霓]가 흩어져 날리는 물방울에 거꾸로 걸려 있는 듯하였다. 혹은 바위틈[石罅]으로 흘러나와서 샘[泉]을 이루거나 소[潭]를 이루어서, 형형색색의 다양한 경치를 자아냈다. 양쪽 언덕은 모두 무성한 수풀과 빼어난 대숲이었다. 그곳에는 기이한 새들이 위아래로 날아다니며 울어댔는데, 거센 여울과 성난 폭포수에서 나오는 소리와 주거니 받거니 어우러져서, 마치 거문고ㆍ비파ㆍ생황ㆍ퉁소의 연주 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드디어 옷을 챙겨 입고 신발을 신고서, 깎아지른 듯 험한 바위를 밟고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내려가서 계곡물에 자리한 바위 위에 앉았다. 속세의 때에 물든 몸뚱이를 단박에 잊어버리고, 신선의 기운이 뼈 속까지 스며든 것을 절로 깨달았다. 한 어부가 못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한가롭고 고상해 보였다. 바다가 지척이었으나 바다 빛은 보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상의 신선 세계[仙府]였다. 잠깐의 그윽한 흥취가 아직 한창이었는데, 일행들이 돌아갈 것을 매우 다급히 재촉하여서, 다시 원사院舍로 들어갔다. 마주앉아서 오찬午饌을 먹고 왔던 길로 다시 갔다. 길을 나서서 20리 떨어진 감산다리[紺山橋]에 도착하여 잠깐 쉬었다. 감산紺山과 창천蒼泉 두 마을은 양반들이 대대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땅이 평평하고 넓어서 사방이 탁 트여 있으며 산천山川이 맑고 빼어났다. 감천紺川 일대는 구불구불 기이한 바위와 작은 폭포가 있었으며, 산천의 큰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어서, 또한 꾀나 볼 만하였다. 마을의 살림살이는 부유하고 풍족해 보였으며, 뜨락과 울타리는 반듯하여서, 육지의 향촌 거주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니, “한 마을에 대부분 양반이 거주한다. 섬 전체가 대체로 교양이 없고 무식한 것에 비해, 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유의儒衣와 유관儒冠의 의식을 조금은 안다. 일찍이 오래 전에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이 이 마을에 2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서당을 창립하고 마을의 수재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였다. 이에 풍속이 크게 변화하여 오히려 예양禮讓의 기풍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길을 나서서 10여 리쯤 지나 비로소 왔던 길을 벗어났다. 다시 오솔길[側逕]을 따라가서 또 10여 리를 지나 이른바 산방굴山房窟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말에서 내려 바라보니, 석벽石壁이 우뚝 솟아 천 길 높이로 서 있었고, 그 중간에 입을 벌리고 있는 듯 큰 구멍이 하나 있었다. 본현本縣의 아전과 하인 그리고 기생들이 먼저 와서 석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이 마치 천상에 있는 듯하였다. 평지로부터 굴까지는 몇 후㢿의 거리쯤에 있었는데, 산허리는 매우 높고 가팔라서 마치 그 모습이 벽과 같았다. 몇 명의 하인으로 하여금 좌우로 팔짱을 껴서 잡아주게 하고, 한 하인에게는 뒤에서 등을 밀게 하였다. 열 걸음에 아홉 번 넘어질 정도로 갖은 고생을 하며 기어가다시피 올라갔다. 숨이 차올라서 죽을 것 같았는데, 한 하인이 나를 등에 업고 올라가 주었다. 자리를 펴놓은 곳에 도착하여서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잠시 후에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두루 보니, 대문과 방문이 3중으로 되어 있는 구조를 갖추어서, 절로 석실石室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실내가 매우 넓고 훤하였다. 허리를 굽혀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니, 끝이 없이 아득하여 시야가 닿는 곳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중국 남경南京에서 두 방울의 액체가 날아와서 이 굴에 떨어져 내려왔다고 하는데, 밤낮으로 끊임없이 떨어져서, 비가 오거나 가물어도 더하거나 줄지 않았다. 그 물을 나무통[木槽]에 담아서 맛을 보니 매우 산뜻하고 시원했다. 굴 안의 위쪽에는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작은 금불상 1구를 안치해 놓았다. 두충나무 한 그루가 제3문 안에 있었는데, 위로 곧바로 자랄 수가 없어서 밖으로 향하여 구부러져 누운 채 자라서, 굴의 입구를 반쯤 막고 있었다. 굴의 문 밖으로는, 바다 빛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 듯 높이가 한 길쯤 되는 바윗돌이 또한 석굴의 문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굴 내부에는 높은 벽면의 돌 틈 사이로 철쭉[躑躅] 몇 뿌리가 거꾸로 매달려 자랐는데, 가지와 잎이 아래로 드리우고 있어서, 바람이 불어오면 산들산들 흔들렸다. 또한 굴의 남쪽에는 암문暗門이라는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난 구멍의 길이가 50여 척尺에 이른다. 그 북쪽에는 또한 큰 구멍[大穴]이 있는데, 그 깊이를 다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또한 불상 2구가 바위 사이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와 관련된 옛이야기를 말해주길 “옛날에 사냥꾼[虞人]이 한라산에 올라가서 사냥을 하였는데, 활을 쏘다가 활집으로 옥황상제의 배를 쳤고, 이에 화가 난 옥황상제가 한라산의 봉우리를 잘라서 이곳에 던졌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서 그저 웃으며 믿지 않았는데, 나중에 고사古事를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었다. 청음淸陰 김 상공金相公의 시에 “누가 한라산을 잘라서 바다 옆에 꽂아놨나[誰折挐峰揷海傍], 세상에 퍼진 기이한 전설 또한 황당하구나[流傳異說亦荒唐]. 설령 상제의 배가 아무리 크다 한들[果然天腹雖空大], 어찌 사냥꾼의 경망함을 그냥 두리오[那許虞人乃爾狂].”라는 구절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대개 영묘하고 경이로운 자취는 평범한 것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김자상金自祥의 「산방기山房記」에 “돌기와가 저절로 덮어서 쌓인 눈이 새지 못하고, 돌자리가 저절로 깔리어 들불이 태우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잘 형용한 말이라 하겠다. 수령[主倅]이 와서 난로회煖爐會를 베풀어 주었다. 파한 후에 서로 부축하고 이끌어서 동쪽 가의 한 갈래 길로 나아갔다. 연대烟臺를 지나서 해변에 이르니, 이른바 용두龍頭라는 곳이 있었다. 산방산의 남쪽 기슭에서 한 줄기 맥이 곧바로 바닷가로 달려 들어가듯 뻗어서 그 머리 부분을 치켜들고 있기 때문에 용두라고 이름한 것이다. 양쪽 옆에 바윗돌들이 꿰매어놓은 듯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고, 바람과 파도가 찧고 부딪힐 때마다 은은하게 울리는 소리가 마치 벼락과 같았다. 중간에 두 군데 쪼개져서 움푹 파인 곳이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잘라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틈 사이가 그렇게 넓지 않아서 한 번 뛰어서 건널 수 있는 넓이였다. 제일 높은 곳에는 편편한 바윗돌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는데, 마치 구슬을 꿰어놓은 듯하였고, 펼쳐져 있는 모습은 전서 글씨[篆籕]와 같았으며, 흩어져 있는 모습은 무지개[虹霓]와 같았다. 곳곳마다 자리하고 앉을 만하여서, 마치 방안을 잘 꾸며놓은 모습과 같았다. 오랜 세월 파도에 부딪히며 부드럽게 깎긴 모습과 앙상하게 죽어 있는 느릅나무도 또한 하나의 기이한 경관이었다. 어느새 해가 이미 저물려고 하여서, 말을 타고 빨리 달려 본현本縣에 이르러 다시 묵었다. 늙은 아전[老吏]을 불러서 노인성老人星은 어느 때 어느 방향에서 보이느냐고 물었다. 답하여 말하길 “오늘 비록 잠시 나타나지만, 돌다가 곧바로 사라집니다.”라고 하였다. 새벽녘 잠이 들어 정신없이 자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와서 별이 보인다고 알렸다. 급히 일어나 바깥뜰[外庭]로 나가서 바라보니, 병정방(丙丁方 : 정남방)에 있었다. 그때 이미 날이 밝으려고 하여서 뭇 별들이 모두 흩어져 사라지고, 한 개의 샛별[明星 : 金星]만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특별히 컸고 그 빛이 매우 붉고 환하게 빛났다. 막 삼성[參]과 묘성[昴] 사이로 떠오르려고 하였는데, 만약 그 별이 한밤중에 뜨게 된다면, 별이 발산하는 빛살이 반드시 더욱 밝을 것이며, 그 아름다운 광채는 반드시 더욱 영롱할 것이다. 때는 묘방의 초입[卯初]이 되어 바다 위로 해가 막 떠오르고 있어서, 별빛과 햇빛이 서로 발산하며 갑자기 본래 빛을 잃었으니, 매우 안타까울 뿐이었다. 식사 후에 다시 수령[主倅]과 함께 남문南門을 나와서 이른바 송악산松岳山이라는 곳을 방문하였다. 현縣과는 15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제주도[瀛洲] 내의 산들은 모두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지고 험하고 거친 데 반해, 이 산만은 홀로 서쪽으로부터 나와서 바다에 이르러 그쳐서, 다섯 봉우리가 서로 마주 대하여 있고, 흙의 빛깔은 황자색이며, 연초록 풀들이 평평하게 깔려 있었다. 꿈틀대듯 구불구불하여 수려한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옅은 화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대하는 듯하였다. 동남쪽의 한 귀퉁이는 평탄하여서 마치 제단[壇墠]과 같았는데,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한 곳이었다. 그 아래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천 자[尺]나 되었고, 겹겹이 쌓인 돌들은 물고기의 비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수만 수천 개의 돌 틈과 구멍에는 파도가 와서 부딪혔다. 만약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고요해질 때면, 잔잔한 파도가 와서 부딪힐 때마다 오음五音이 번갈아 울려 퍼지며, 만약 언덕 위에서 북과 나팔을 시끄럽게 연주하면 큰 거북[穹龜]과 긴 물고기[長魚]가 펄쩍펄쩍 뛰면서 솟아오른다고 한다. 서로 함께 풀밭[草茵]에 둘러앉아 억지로 술을 마셔서 얼굴이 발그레해지도록 취하였다. 언덕 아래에 있는 가파도加波島를 바라보니, 사람 소리가 마치 서로 통할 것 같이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주변 20리는 평평하고 넓어서 마치 손바닥처럼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 외에 또한 마라도摩羅島가 있었는데, 협소하였으며 높이 솟아 험준해 보였고, 또한 사면이 석벽石壁으로 되어 있었다. 가파도에는 나라에서 기르는 소[國牛] 수백 마리가 있고, 마라도에는 단지 귤과 유자[橘柚]만 생산한다고 한다. 잠깐 동안 서쪽 봉우리 위로 올라가니, 모슬진摹瑟鎭이 그 아래에 있었다. 평평한 들과 넓은 벌판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끝이 없어서, 시야가 탁 트여 훤한 것이 바다에 있지 않고 들판에 있는 것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경관이었다. 걸어서 서쪽 봉우리로부터 북쪽 비탈을 따라서 내려와서, 다시 대정大靜의 관아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후에 길을 나서서 명월진明月鎭으로 향했는데, 40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명월진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말 위에서 보니, 해가 장차 저물려고 하였다. 바다 위의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어서 앞에 펼쳐진 광경이 반짝반짝 눈부셨다. 바다로 들어갈 때 해[日輪]의 크기가 하늘 위에 있을 때보다 백배보다 클 뿐만이 아니어서, 그것을 보고 있자니 신비로웠다. 해가 반쯤 바다로 들어가고 반쯤은 하늘에 걸려 있다가, 금방 높았다가 갑자기 낮아지며 혹은 나왔다가 들어가기도 하여서, 참으로 장관이었다. 객사客舍로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명월진 안에 있는 석사碩士 양관梁觀의 집에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놓아서 가서 모였다. 본진本鎭의 만호萬戶 홍석우洪錫佑는 비록 무과[靺韋] 출신이었지만, 문묵文墨에 약간의 조예가 있어서 몇 시간 동안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다.
○ 1841년 8월 11일
아침에 일어나 서성西城에 올라서 들판의 경치와 쌍천雙川을 구경하였다. 식사 후에 길을 떠나서 제주성[州城]과 70리 떨어진 애월진涯月鎭에서 잠시 쉬었다. 도근천道近川의 대변 행수待變行首 신숙申淑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날이 저물고 나서야 성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계령季令이 한라산 유람을 떠났는데,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하룻밤은 죽성촌竹城村에서 묵었고, 또 하룻밤은 영실瀛室 계곡에서 묵었다고 한다. 사질舍侄과 중청中廳의 3인도 모두 따라갔는데, 얼굴빛이 어두워 좋지 않았으며, 걸음걸이는 쩔뚝거렸다. 사람마다 각기 중병을 앓고 있는 듯하고, 먼 곳에 가서 부역을 하고 온 것과 같아서, 매우 우습기도 하면서도 안스러웠다. 보름을 전후하여 장마와 폭풍이 연일 계속되어서, 농작물[穀苗]이 피해를 입었다. 바닷가 일대에 농사가 약간 좋았던 곳[稍稔處]의 경우, 소금물과 풍해로 인하여 태반이 말라죽거나 쓰러졌으며, 산전山田의 경우는, 미처 이삭이 패기도 전에 전부 꼿꼿이 서서 죽었다. 주州의 경계는 본시 풍년이 드는 곳[登稔]인데, 겨우 흉년을 면하는 정도[免殺 : 免凶]가 되었다. 이외에 두 읍은 점차 곡식이 없는 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비록 관리의 책임[官責]은 없지만, 불행히도 몸소 이를 당하여서 백성의 근심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매우 속상하고 측은하였다.
○ (8월 23일)
한라산의 서쪽은 바다를 따라서 위로 수백 리里를 이미 두루 다니며 구경하였는데, 동쪽의 여러 명승지도 또한 대체로 볼 만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23일에 황 종黃從과 함께 말 한 마리와 두 동복僮僕을 이끌고서 조용히 동문東門 밖을 나섰다. 산장로山場路로 나아가서, 고닛모루(果園峴 : 제주시 건입동)와 거로마을[巨里 : 화북2동]과 당남송곶이[唐南松串:조천읍 와흘 남쪽 지역]을 차례로 지나서, 35리 떨어진 지계원地界院에서 점심을 먹었다. 70리 떨어진 정의현㫌義縣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의 이름은 비록 공로孔路였지만, 만 그루의 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등나무 덩굴이 얼기설기 이어져 있었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음침하여서, 하늘과 해가 보이지 않았다. 혹은 큰 나무가 바람에 쓰러져 길을 막고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숲을 뚫고 지나갔다. 30~40리쯤 궷드르[怪坪 : 조천읍 와흘리]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들녘의 경치가 보였으며, 길도 또한 평탄했다. 망덕고개[望德峙]에 올라가서, 한쪽 구석을 내려다보니, 외딴 성[孤城]의 인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군데군데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문城門은 구멍이 난 듯 뚫려 있었고 거리와 골목길은 스산할 정도로 고요하였다. 몇몇 아전들이 길 좌측에 엎드렸고, 우리를 향청鄕廳으로 안내하여서 그곳을 임시 숙소로 삼았다. 그때 수령[主倅] 신상흠愼尙欽은 다리를 세우는 곳의 경계에 분쟁이 생겨서, 위반한 일을 적발하기 위해 나가서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전들이 주안상을 내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마치 사성使星을 대접하는 모양새와 같았다. 향소鄕所의 이교吏校들이 모두 와서 인사하였는데, 도리어 괴로운 지경이 되었다. 식사를 한 후에 잠시 있다가 예방禮房 이 동지李同知와 수령이 같이 와서 함께 다 모였다. 기생을 부르고 음식을 차려놓고는, 3경更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 24일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재촉하여 먹고서, 네 사람이 동행하여 정방폭포[正方瀑]를 향하여 떠났다. 길을 따라 가며 농사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았다. 작물은 기장[稷]이나 메밀[木麥]이었고, 모두 완전한 흉작[全歉]이라고 판단되었으니, 그 상황이 몹시 참담하였다. 백성들이 나를 감영의 손님[營客]으로 알고서, 서로 모여들어 모두들 호소하여 말하길 “살고 죽는 것이 모두 사주使主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비록 좋은 말로 그들을 위로하였지만, 그들이 나에게 호소한 것들은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의㫌義의 동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 의귀마을[衣歸村 :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은 바로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의 직계 자손[胄孫]의 집이다. 김만일은 바로 그리 오래지 않은 옛사람[中古人]이다. 서로 전하길, 산간에서 수말[雄馬]을 얻어서, 몇 년간 기르고 보살폈다. 어느 날 고삐를 풀어주니, 나가서 산 속에 있던 암말[雌馬] 수십여 필을 데리고 왔다. 해마다 낳고 기르기를 반복하여 그 수가 일일이 헤아릴 없이 많아졌다[谷量]. 드디어 조정에 말 천 필을 헌납하니, 지금 산장의 말들은 바로 그 혈통의 말들이다. 김만일은 그 지위가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고, 그 자손들에게는 대대로 감목관監牧官의 벼슬을 주어서, 제주도의 손꼽히는 집안[閥族]이 되었다. 나는 그 집을 차례로 들어가 보았으나, 주인은 마침 모두 출타 중이었다. 다만 빈 집만이 있었는데, 집은 자못 넓고 높았다. 그 집터를 보니, 사방이 빽빽하고 촘촘하게 높은 나무들이 빙 둘러 감싸고 있었는데, 그 연수가 수백 년은 되는 아름드리 재목들이었다. 비록 살펴볼 만한 문서나 서책의 자취는 없었지만, 자못 고택에서 풍기는 법도가 느껴졌다. 안채에서 잔술[酒盞]을 내와서 대접하였으니, 매우 가상하였다. 다시 길을 나서서 10리 떨어진 위미촌爲美村에서 점심을 먹었다[午站]. 예방禮房은 과수원에 위반한 일을 적발하기 위해 우리와 헤어져 다른 길로 나아가 길을 떠났고, 나는 길을 나서서 순로巡路를 따라서 차례로 효돈孝敦과 홍로洪爐 두 마을 지났는데, 이곳들은 정의㫌義의 두 이름난 터[名基]였다. 한라산 남쪽에 있고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四塞] 바람을 통해 생기를 간직하여서[藏風], 겨울날에도 춥지 않고 꽃을 피우는 시기가 자주 있다고 한다.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정방폭포에 도착하였다. 폭포는 해안에 있었는데, 그 높이가 10여 길[丈]이나 되었다. 폭포의 아래위 몇 리里의 양쪽 언덕배기는 모두 석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었다. 혹은 구멍이 나기도 하고 혹은 움푹 파이기도 한 것이, 마치 방[房室]과 같기도 하고 계단[階級]과 같기도 하여서, 형형색색形形色色하고 기기괴괴奇奇怪怪하였다. 그 아래에는 바다의 큰 파도가 부딪혀 와서, 그 소리가 ‘댕댕댕’ 종소리처럼 울렸다. 위에는 오랜 나무가 촘촘히 숲을 이루어 언덕에 우거져서 그윽하고 울창하였다. 굽은 나무는 아래로 드리워 자랐고, 곧은 나무는 위로 치솟아 자라나 있었다. 언덕배기 위의 평원은 몇 이랑의 넓은 땅에 걸쳐 부드러운 풀이 돗자리[茵]처럼 펼쳐져 있어서, 자리를 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내가 고을 수령[本倅]에게 말하길 “이 지방의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은 한 언덕의 자연경치[烟霞]에 알록달록 단장한 듯하고, 경실鯨室과 교궁蛟宮은 만경창파의 큰 바다[滄溟]를 굽어보는 듯하여서, 경계가 확 트여 시원하면서도 겸하여 고요하고 한적한 면모가 있다. 만약 이것을 육지의 누대 앞에 옮겨놓으면, 그 뛰어난 경치가 어찌 관동팔경關東八景에 모자람이 있겠는가. 그 어찌 바다 건너 한쪽에 치우쳐 있는 궁벽한 곳에 한 사람의 간섭도 없는 몇 칸의 빈 땅도 또한 행과 불행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때 이미 날이 저물었다. 수령이 떡[甘糕]과 술과 안주를 간단히 차려서, 뛰어난 경치를 즐기는 도구[濟勝之具]로 삼았다. 이윽고 말을 타고 달려가 서귀진西歸鎭의 진장鎭將 객사客舍에 들어가 묵었다.
○ 25일
새벽에 일출 모습을 보았다. 큰 바다가 온통 붉은 비단 장막[紅錦帳]이 되었고, 해는 이미 검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위로는 하늘이, 아래로는 바다가,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완전하게 구별되어서 하나의 기이한 경관을 더하였다. 식사 전에 드디어 천지연天地淵에 갔는데, 그곳은 서귀진에서 몇 마장馬場 거리에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은 다섯 굽이나 꺾이고 굽었고, 양쪽으로 폭포수를 이루었다. 산은 휘돌아 감싸고 길은 이리저리 굽어 있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 경치가 바뀌었다. 폭포 아래의 맑은 연못에는 나무 그림자가 너울너울 비치고, 붉게 떠오르는 해에서 빛을 내뿜어 절벽에 기이하게 아른거리니, 대개 대정大靜의 중문폭포[中文瀑 : 천지연폭포]와 서로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행색이 누추하여 마음껏 돌아다니며 감상을 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진소鎭所로 돌아갔다. 식사를 마친 후에 다시 정의㫌義로 향하여 위미촌爲美村에서 점심을 먹었다[午站]. 날이 저물어 관아에 도착하여 묵었다. 이번에 길을 나설 때에는 진쉬鎭倅의 아들이 따라갔는데, 그는 14살로, 영특하였으며 문장을 일찍 성취하였다. 운韻을 주어 절구絶句 1수를 청하고, 내가 화답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26일
다음날 출발해서 20리 떨어진 수산진秀山鎭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5리가량 더 가서, 말에서 내려 길가에 앉았다.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니 성산(城山 : 성산일출봉)과 우도牛島가 보였다. 성산은 바다 가운데 높이 솟아올라 있었는데, 사면은 석벽으로 이루어져 깎아지른 듯 천 길[丈]이나 높게 서 있었다. 길짐승과 날짐승이라 할지라도 오르기 힘든데, 오직 북쪽으로 난 한 갈래 길이 육지와 연결되어 서로 통해 있었다. 상층부의 석벽에는 쇠못[鐵釘]으로 절벽을 깎아 돌계단 길을 만들어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오르고자 하는 자는 모두 옷과 신을 벗어놓고, 배를 벽에 딱 붙이고 자벌레[尺蟲] 모양을 한 연후에야 비로소 오를 수 있다. 사신使臣의 행차 때, 순로巡路 중에 이곳을 오르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백성의 힘을 동원하여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놓아야 했기에, 정의㫌義의 고질적인 큰 폐단이 된다. 산의 꼭대기에는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토양이 비옥하여서, 사방 몇 리나 떨어진 백성들도 와서 그 꼭대기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지으니, 그 땅의 귀함을 알 만하다. 성산의 해돋이는 탐라 10경의 하나이다. 만약 수산진秀山鎭에서 묵고 닭이 처음 울 때 나와서 그곳에 오르면, 참으로 장관이리라. 그러나 나처럼 근력筋力이 노쇠한 사람이 어찌 이것을 감당하겠는가. 우도는 성산 위쪽, 종다리[鍾橋] 아래쪽에 있는데, 섬의 모양이 마치 누운 소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민간에선 ‘묘혈墓穴’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데, 아직까지 그 이유는 알아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국마國馬 300여 필을 방목하는 목장은 평평하고 넓으며 흙이 두텁다. 그리고 물풀이 무성한데다 우툴두툴한 돌들도 없다. 그래서 우도의 말들은 살찌고 몸집이 몹시 커서 섬 전체에서 제일로 손꼽힌다. 그러나 한 번 우도를 벗어나면 나쁜 길에 익숙하지 않아 죽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날 병방兵房 심막沈幕이 말을 점고하는 일[點馬事]로 섬에 들어가게 되어서, 서로 볼 길이 없어졌으니, 몹시 서글펐다. 정의㫌義 수리首吏가 와서 인사하고, 길에서 점심 요기 거리를 내왔다. 떡과 밥을 모두 대그릇에 담아 와서, 둥글게 앉아 아주 점잖은 행색으로 요기를 했다. 대개 벼슬 없는 선비의 본색本色은 관에서 제공하는 물자[官供]가 편치 않은데, 각 고을 수령들이 모두 각 참站마다 음식과 물품을 대어주길 마치 순행巡行의 예처럼 하니, 폐를 끼치는 것이 적지 않았다. 일정을 바쁘고 급히 한 것은 전부 이러한 이유 때문인데, 도리어 이것이 흠이 되는 일이 되었다. 저녁 무렵 별방진別防鎭에 들어가 묵었다.
○ 27일
새벽에 출발해서 40리 떨어진 김녕金寧에서 점심을 먹었다[午站]. 김녕굴金寧窟도 또한 유명하였으나, 몹시 지치고 괴로워 기운을 차릴 수가 없는지라, 후일을 기약하고 출발했다. 20리 떨어진 조천관朝天館에서 조금 쉬고, 바삐 말을 달려 관아로 돌아왔는데,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 이번 여행으로 또한 5일에 걸쳐 대략 수백 리를 두루 돌아보았다.
○ 1841년/09월/07일
아침 식전에 갑자기 사위 이서오李敍五의 편지를 받아보고, 이미 도평포에 와서 정박하였고 잠시 후에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듣기로, 하루 전날에 소안素安으로부터 배를 타고 출발하여 6일 저물녘에 화북禾北 포구에 거의 도착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바람이 몰아쳐 배가 심하게 흔들려서 배를 돌려 서쪽 큰 바다로 나갔다가, 간신히 도평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그쳐서 질책하였으나, 지극히 가까운 사람이 천리 밖의 먼 바다[蓬海]를 건너와서 서로 만나니, 그 기쁨과 위로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겸하여 집 아이의 편지를 보니, 대개 평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걱정덩어리가 조금은 풀렸다. 이계춘李啓春이 사위와 동행하여 들어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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